인도를 일컬어 흔히 '천의 얼굴'이라고 한다. 당신이 알고 있는 인도는 그토록 두텁고, 그토록 복잡한 인도의 한 조각일 뿐이다. 

인도의 특성, 다원성이 적용 되지 않는 단 하나의 영역이 있으니 바로 '느림'이다.  10


'느리다', '빠르다'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인도인에 대한 '느림'과 '게으름'은 누구의 기준인가?  11


자기의 안경으로만 인도를 본 영국은 인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12


인도인에게 시간은 직선이 아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은 반복되고 다시 돌아오며, 시간은 시작도 끝도 없는 순환고리이다.  13


어쩌면 시간은 직선으로 날아가는 화살이 아니라 나를 떠났다가 다시 내게로 날아오는 부메랑인지도 모른다. 

20세기 최대의 이데올로기인 발전은 환경 파괴라는 부메랑으로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다.  14


알고 보면 위생이니 뭐니 하는것도 목적은 향상시키지 않고 수단만을 강조하는 서양의 산물이 아닌가?  15


볼일이 끝나고 나서는 가까운 강이나 개울로 간다. 진흙으로 몸의 더러워진 부분을 문질러 닦고 물로 헹군다. 두세 차례 반복. 그런 다음 왼손부터 시작하여 손과 발을 진흙으로 여러번 씻는다 다시 다른 흙으로 이 과정을 반복한다. 도시에서는 진흙이 아닌 비누를 쓴다. 자, 이래도 비위생적인가?  19


인도인은 '음식은 먼저 눈으로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 다음에 입과 혀로 맛을 느낀다.'  20


인도인은 발을 천시한다. 가장 천한 발을 다른 사람의 머리에 대거나 신발로 머리를 때리는 것은 그들에게는 최대의 모욕이다.  23


발에는 절대 금 장신구를 하지 않는다. 허리 아래에는 은으로 된 장신구만 착용한다.  24


반대로 머리는 신체 중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다. 남자들은 쇠똥이나 재, 또는 빨간 가루를 이마에 찍어 카스트를 표시하기도 하고, 시바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수평선을, 비슈누 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수직선을 그어 소속된 종파를 광고한다.  24


머리와 발의 차이가 하늘과 땅인 만큼 브라만과 수드라의 차이도 엄청난 것이다.  25


강가의 상류 하리드와르와 리시케시, 중류인 바라나시, 그 끝인 벵골만까지 나는 강가를 열번도 더 보았다. 

강가는 눈 덮인 히말라야를 출발하여 하리드와르와 칸푸르를 지나 알라하바드로 흘러든다. 그곳에서 진흙탕물인 강가는 델리와 아그라를 지나온 그보다 맑은 야무나 강과 합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이미 사라진 사라스와티 강과도 손을 잡는다. 세 강이 만나는 알라하바드는 힌두들의 순례지이다.  39-40


시바 신은 무려 8천 4백만 가지의 다양한 체위를 고안했는데, 숭배자들에게 알려진 건 겨우 8만 4천 가지! 이러니 시바는 다산의 신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다.  56


'카주라호'와 '시바 링감' 그리고 '카마수트라'의 인도. 위성방송이 안방에다 공개적으로 섹스를 팔고, 콘돔이(가장 유명한 콘돔 제품은 당연하게도 '카마수트라'라는 상표를 달고 있다) 무차별 광고를 해대는 곳. 매춘부가 수백만 명이고 에이즈 환자가 3,000,000명이 넘는 나라. 이렇듯 성이 넘치는 에로스의 천국으로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명상과 금욕이라는 또 다른 얼굴을 갖고 있다.  58


브라만 성자와 요가수행자의 공동 목표는 자웅동체이다.  59


옛날 인도에 비폭력을 뿌리내리게 한 인물이 바로 유명한 정복자 아쇼카 황제.  63

'보이지 않는 사랑'은 아름답지만 '보이지 않는 폭력'은 끔찍하다.  66


인도인의 계산을 보자. 먹은 음식은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와 골수가 되었다가 30일이 지나면 정액으로 바뀐다. 40방울의 피가 한 방울의 정액이 되는데, 한 번의 사정으로 14그램 정도의 정액이 소요된다. 이는 27킬로그램의 음식이 만든 에너지와 같다. 한 번의 성관계는 24시간의 정신노동이나 72시간의 육체노동과 동일하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69


해방 후, 인도에서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지방은 벵골, 케랄라. 트리푸라 3개 주이다.

테레사 수녀가 '수고하고 짐진 자'를 보살피는 곳이 바로 벵골 지방이다.  79


영국의 통치가 온건하지도 않고 결코 '은혜'와 '축복'이 아니었다는 점은 얼마든지 예증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기근이다. 영국이 인도에 오기 전에는 대기근에 관한 기록이 한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이 발을 디딘 이후 기근은 종종 찾아왔고, 1943년 벵골 지방에서는 2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 인도의 부가 해외로 유출된 게 주요 원인이었다. 1930년에 영국이 해외에 투자한 자본의 4분의 1은 인도에 투입되었다. 물론 인도에서 근무한 영국 관리들의 봉급과 연금 지급은 처움부터 식민지 인도의 몫이었다. 영국은 참깨를 쥐어짜듯 인도를 쥐어짜 이득을 챙겼던 것이다.

영국이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이해 세운 계획도시 뉴델리에 있는 '인도의 문'에는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위해 싸우다 숨진 8만여 명 인도 청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뿐인가. 2차 세계대전 기간에도 인도군은 지배국 영국을 돕기 위해 '치와 땀'을 흘렸다. 인도군은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20여만 명이었으나 전쟁이 끝난 1945년에는 그 열 배인 220여만 명으로 불어났다. 전쟁기간 동안 소요된 영국의 국방비 역시 절반은 인도가 떠맡았다.

이 열불나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인도가 영국을 '미워 미워 미워'하지 않는 이유는 영국 통치의 긍정적인 영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엄청난 인구를 익르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인도는 영국에 모종의 빚을 졌다고 간주하고 있다. 영국이 도입시킨 의회제도, 철도제도, 교육제도를 인도는 고맙게 생각하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산업발전의 기반을 다진 것에도 좋은 점수를 준다. 각종 제도와 정책을 도입한 식민 정부의 목적이 순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결과적으로 인도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영어와 반영운동이 인도를 통합시켰다는 점도 빠뜨리지 않는다.  83-84


인도인은 대개가 종교에 깊이 중독된 중증 환자들이지만, 그 대다수는 브라만의 베다나 우파니샤드를 모르거니와 고상한 힌두 철학에도 깜깜이다.

대신 인도 사람들은 자기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대상을 경애하고 숭배한다.  103


구루 나낙(1469~1539)이 세운 시크교는 힌두교와 이슬람의 장점을 따서 만든 종교로서 유일신을 믿고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다. 힌두처럼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지만 카스트를 거부하고 갠지스를 순례하지도 않는다. 모두 같은 성을 갖는 것도 카스트의 구분이 없다는 뜻이다.(1500만명이 넘는 그들의 성씨는 모두 '싱', 결혼한 여자는 미세스 싱이 아니라 모두 '카우르'가 된다) 시크는 근면하기 때문에 거지가 없다.

펀자브 지방은 시크의 분리주의 운동이 있었다. 

인도에 갔다가 마약에 돈 떨어지고 담배꽁초까지 떨어지면 시크사원(구루드하라)을 찾아가라. 관용과 사랑을 실천하는 시크 사원에서는 거저 먹여주고 재워주니.  113


시크 못지 않게 돈 버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있다. 배화교도(조로아스터교도)의 후예들이다.  114


고아지방은 포루투갈인과 인도 여인 사이에서 난 혼혈이 많아 이국적이다. 이곳 여인들은 사리보다 스커트를 많이 입고 생활 방식도 다른 지방과 달리 자유롭다.  115


힌두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은 무슬림이엇다. 인도를 통치한 무슬림 지배자들은 자기드로가 구분하여 인도(옛 이름은 힌드)에 사는,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몽땅 힌두라고 불렀다. 전체 인구 - 무슬림 = 힌두였다. 그 뒤를 이어 인도를 지배한 영국도 무슬림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그들 이외의 인구를 힌두로 뭉뚱그렸다. 

힌두교는 종교의 창시자나 예언자가 없음은 물론 자신을 힌두라고 생각하는 살마에게 '하라. 하지 말라'는 정확한 가이드라인을 주지도 않는다. 힌두교에서 성서로 여기는 베다나 푸라나를 읽는 힌두는, 아니 그 이름이라도 아는 사람은 5%밖에 안된다. 일정한 예배의 형식도 없는 자유 그 자체이다.  120


이질적이고 잡다한 생활방식을 모두 인정하는 힌두교는 기원전 1500~500년경에 성ㄹ힙되었다. 중심 사상은 베다의 전통을 따르는 브라만 중심의 브라만교이지만, 여기에 북부 인도에 존재하던 다양한 민간신앙이 결합되어 대중을 이끄는 독자적인 종교 이념으로 발전했고, 세월이 가면서 전 인도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즉 힌두교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브라만교의 독선에 반기를 든 인도의 프로테스탄트, 불교와 자이나교를 수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랫동안 한 지방에서 동거를 해온 이방의 종교인 이슬람교까지도 포용한다. 

수천 년 동안 무엇이든 받아들여온 힌두교에는 헤브라이즘에서 볼 수 있는 '정통'이나 '이단'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존재하는 살마의 수만큼 신이 존재하고 그 수만큼 다양한 믿음을 인정하는 융통성이 바로 힌두교의 생명이요 진리이다.  121


다른 사람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와 달리 힌두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를 강조한다.

힌두는 구원이나 해탈도 나 스스로 이룬다고 생각한다.  122


카르마(業) - 카르마는 힌두 사회의 수많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개념이다.  125


윤회사상은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다르마)를 다하면 카르마가 좋아진다고 유혹한다. 의무를 다하는 불가촉민은 브라만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보다 나은 불가촉민으로 환생할 수 있다는 논리다.  126


알 수 없음과 두려움이 사람들에게 최선을 부추긴다. 더 열심히 살아서 아예 이 아리송한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탈이며 구원이다. 그리하여 힌두에게 해탈은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 열심히 사는 것이다.  127


예전보다도 많이 약화되었지만 카스트는 아직 살아 있다. 집에서, 거리에서, 사무실에서, 힌두 사원에서 여전히 그 힘을 행사한다. 카스트는 포루투갈어로 혈통을 의미하지만 인도인들은 색깔이라는 뜻의 '바르나'라고 부른다. 이 제도는 모든 인간이 불평등하다는 데서 출발한다.  132


'자티'는 오랜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카스트가 서로 갈리고 나뉘어 3~5천 개의 작은 집단으로 분류된 것으로 한층 세분화된 개념이다. 같은 카스트 안에서도 자티에 따라 다른 위상을 갖고 다른 규칙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 한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는것은 동일한 자티 안에서 이루어진다.

쉽게 설명하면, 북부지방의 브라만과 남부의 브라만은 동일한 계급이 아니다. 두 브라만 가의 갑순이와 갑돌이는 결혼을 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지역의 수드라 사이에는 같은 계층이라도 연대의식이 없다. 그뿐이 아니다. 한 마을에 사는 수드라 내부에도 상하 귀천의 구별이 있다. 대장장이, 옹기장아, 세탁부, 이발사는 자신과 브라만이 다르듯이 서로가 서로를 다르다고 여긴다. 심지어는 같은 청소부라도 거리를 청소하 자티와 '변소 쳐!'를 외치는 자티는 다르다.  133~134

소를 먹이는 집안의 경우는 소 먹이는 자티가 규정한 세밀한 규칙의 속박을 받고, 또 옷감을 짜는 집안의 직녀는 그 자티의 규정을 따르면서 신분에 맞는 제약과 대접을 받는다. 

계층이 낮을수록 부정하게 여겨지며, 금기사항도 적다. 똑같은 수드라 내부에서도 더러운 일에 종사하는 계층이 그렇지 않은 계층보다 위상이 낮다.  134


'언터처블(Untouchable)' 불가촉민(不可觸民), 접촉을 하면 부정을 타므로 접촉해서는 안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남부지방의 남부드리 브라만은 천민을 보기만 해도 부정 탄다고 생각한다.  137

따라서 그들은 몸에 방울을 달아 순수 브라만이 그 소리를 듣고 사전에 피하거나 눈을 감을 수 있게 한다.

우파니샤드를 보면 개나 돼지처럼 취급되는 '찬달라'라는 천민이 있다. 

2세기 불교도 자나카도 마을 밖에 격리되어 사는 천민집단을 언급했다.

마누 법전에도 동구 밖에서 따로 거주하며 햇빛이 있는 낮에는 마을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또 11세기의 알비루니도 마을밖에 살며 더루운 일에 종사하는 집단을 기록했다.

1990년대로 와도 인도의 불가촉민의 삶은 별 차이가 없다.  138

불가촉민은 마을 사람들과 우물이나 강물을 함께 쓰지 못한다. 가까운 마을의 우물을 두고 몇십 리씩 물을 길러 나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139

1991년의 인구 센서스를 보면 불가촉민은 1억 5천만 명으로 인도 총 인구의 약 17%이다.  141


마하트마 간디는 신에게서 버림받은 이들에게 '하리잔(신의 자식)'이라는 역설적인 이름을 지어주고 독립 세력을 이루고 떠나가는 이들을 힌두 세계로 끌어들였다.

여전히 건재하는 높디높은 벽 앞에서 일부 불가촉민은 간디가 지어준 '하리잔'이라는 이름대신 자신을 '달리트(학대받는 자들)'라고 부른다.  142



마누 법전에는 이상적인 남편과 아내의 연령 차이가 16~18세라는 기록이 보인다.  169


힌두의 악습으로 오랫동안 지탄을 받아온 사티 제도, 즉 죽은 남편과 함께 살아 있는 아내를 불에 태우는 것도 실은 아내에 대한 남편의 두려움에서 나왔다고 한다.  170


사티는 본래 수많은 아내를 가진 시바 신의 '퍼스트 레이디'였다. 사티는 아버지가 남편에게 퉁명스럽게 대한 데 대한 항의의 표시로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173



1993년에 마무리된, 장장 8년에 걸친 인도 사회 조사에 따르면 인도 전역에 흩어져 있는 각 집단의 88%가 육식을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209


인도인들은 대개 모든 것을 인정하고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음식에 관한 한 타협이 없다. 그중 채식을 고집하는 힌두와 쇠고기를 먹는 무슬림의 심한 갈등이 단적인 예이다. 

힌두는 음식을 감염체로 간주한다.  211


인도에는 2천 개의 기차역이 전국에 흩어져 있다.222


영화를 보러 가면 인도가 보인다. 영화에 나오는 장면의 반대가 바로 인도의 현실이다.  235

인도의 영화는 사회적 가치를 주입하는 역할을 한다. 권선징악의 도덕이 그렇고 전통적인 여성상이 그렇다.  236


자와하르랄 네루

공화국과 세습제는 정치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두 얼굴의 공존이 가능했다. 1947년의 독립 후 50년 도안 네루 집안이 인도를 통치한 기간은 38년. 자와하르랄 네루는 1964년까지 무려 16년 9개월이나 장기집권했다. 

그의 딸 인디라 간디는 1966~77년과 1980~84년 두 차례 정권을 잡았고 인디라의 아들 라지브 간디는 어머니가 암살된 1884년에 사십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혜성처럼 등장. 5년간 총리를 지냈다.  241


비하르와 우타르 프라데시 같은 지방은 인구의 반이 빈공층이며 천만 뭄바이 시민의 절반이 슬럼에서 산다.  259

인도의 도시화는 아직 낮아서 인구의 25%가 인구 5천 명 이사으이 도시에 살고 있는 정도다. 그러나 그 도시 인구의 4분의 1이 슬럼에 거주하고 대도시는 그 비율이 훨씬 높다. 수도 델리의 인구 중 3분의 1은 오늘도 슬럼가에서 하루를 쓸어담는다.  269


인도인은 흰색을 선호한다.  262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검은 까마귀보다 백로를 아꼈던 우리처럼 사람은 보편적으로 검은색보다 흰색을 선호한다. 유럽에서도 흰색은 즐겁고 매력적인 성질을 상징하고 검은색은 그 반대로 대개 불길함과 죽음을 상징한다. 인도 신화에는 시바 신이 아내 파르바티의 검은 피부를 놀리자 그녀가 황금색 피부를 얻기 위해 금욕적인 수행을 하는 장면이 보인다. 여성의 흰 피부에 대한 동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동소이한 모양이다. 인도에서도 흰색은 순수와 정결을 뜻한다. 사라스와티 여신은 늘 흰 옷을 입고 흰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단정한 모습이다.  264


이기의 삶에서 이타의 삶으로....  296

인도를 구경하는 것은 동시에 여러 시대와 여러 문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312



후기 

'인도를 일주일 여행한 사람은 책을 한 권 쓰고 일곱 달을 머문 사람은 글을 한 편 쓰지만 인도에 7년 동안 거주한 사람은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역설적이지만, 알수록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다원적인 인도의 특성 때문이다.  314-315


천의 얼굴 인도는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분명하게 결론을 내리려 드는 20세기의 합리주의를 향해서 비웃음을 던진다. 사실 이 세상에 분명한 것이 어디 있는가? 한낱 내 기분도 아침과 저녁에 다르거늘.

한 길 사람 속도 알기 어려운데 수천 년의 역사와 10억의 인구가 빚어내는 다양한 사회의 집합체인 인도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건 만용을 넘어 무모함에 가깝다.  315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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