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내용'에 해당되는 글 34건

  1. 2010.09.08 아부그라이브(이라크전 포로 학대)
  2. 2010.09.08 스탠포드 감옥 실험 2
  3. 2010.09.08 아우슈비츠 2
  4. 2010.09.04 하인리히 법칙


심문받는 이라크포로
심한 구타와 고문으로 사망한 이라크 병사
속옷을 머리에 쓰고 고문받는 이라크 병사
얼굴에 팬트릴 덮고 고문받는다
항문에 유탄발사기의 탄두를 넣게하고 있는 모습
심문
고문실의 유혈
고문에 지쳐 쓰러져 있는 이라크병사
전기고문 당하는 이라크 병사의 모습


자신의 동료를 잃고 애도하는 미군 모습

이러한 화를 포로고문으로 돌린것이 아니라...
미군의 포로 고문 지침에 있었다는 것에 더욱 경악을 금치 못한다..
포로 학대를 하던 미군들도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영화 '엑스페리먼트'에서나 스탠포드 감옥실험 에서 처럼 상황과 인간의 물화가 이러한 참상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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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내용과는 좀 다른 이라크 전의 참상 입니다...비위약하시거나 임산부, 노약자는 그리고 18세 미만은 보지 말아 주십시오....플리즈!!




다시경고 드립니다.잔인한 사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노약자 임신부 청소년은 보지 마세요 

 

 

 

 

미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죽은 이라크인의 모습을 담은 사진입니다.내용이 잔인해서 칼라사진을 흑백으로 처리해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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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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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포드 감옥 실험

        
        
        
“1971년 세계 심리학계를 뒤흔든 스캔들 ‘스탠퍼드 실험’이 독일에서 영화화되어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스탠퍼드 심리학과 필립 짐바도 교수가 주도했던 이 실험은 대학생 20명을 연구소에 설치한 가상 형무소에 수용, 열악한 환경에 던져진 인간의 심성 변화를 관찰한 것이다.        
        
        
그러나 실험 대상자들의 폭력이 난무하면서 실험은 조기 중단되고 말았다.영화의 무대는 쾰른의 가상 감옥, 일방적인 폭력에 맞설 의지를 잃어버린 인간의 무력감과,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잡으면 약자를 학대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내부의 악마성을 재차 확인하는 공포와 경악은 어떤 호러영화보다 더하다(씨네 21, No. 295)"        
        
        
        
        
얼마 전 한 영화 주간지를 보다 저의 시선을 붙잡았던 기사 한 토막입니다.        
        
        
‘스텐포드 실험’. 정확히는 ‘스탠퍼드 감옥 실험(Stanford prison experiment)'이라 불린 이 실험은 ‘인간의 휴머니티가 악(惡, devil)을 이길 수 있는가, 아니면 악이 인간의 휴머니티를 이길 것인가?’ 라는 주제로 1971년에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과에서 시행된 실험입니다.        
        
        
과거 정신과적인 병력이나 범죄 경험이 없었던,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24명의 지원자를 대상으로, 감옥 상황을 연출한 실험실내에서 절반은 죄수, 절반은 교도관의 역할을 하게 한 후 이들의 행동을 2주 동안 관찰하고자 했던 실험입니다. 그러나, 실험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도관 역할을 맡은 참가자들이 매우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태도로 죄수들을 학대하기 시작했고, 이들로부터 반복적인 구타와 감금을 당한 죄수 역할의 참가자들은 심한 혼란감과 불안, 우울감에 휩싸여 제대로 기능을 못하는 수준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실험은 6일만에 중단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실험 직후 이러한 결과가 학계에 보고되자 미국 사회는 심한 충격과 혼란을 겪었으며, 연구자와 실험실에 대한 관심이 뜨겁게 고조되었습니다. 당시 실험을 이끌었던 스탠포드 대학의 Zimbardo 교수는 여러 TV 프로그램과 라디오 프로그램에 초대되었고, 출판계에서는 이를 소재로 한 소설들이 제작되었으며 심지어’스탠포드 감옥 실험(SPE)‘이라는 이름의 락밴드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이 실험이 세간에 뜨거운 화제를 불러일으키게 된 데는, 실험이 보여준 충격적인 결과외에도, 이것이 인간 본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인간은 선한가, 악한가‘-을 과감하게 던지고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했던 실험이라는 데 있었습니다. 실험 결과에서 보였던 극단적인 폭력성과 집단성은 인간의 본성, 휴머니티가 실재하는가에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했고, 어느 누구도 심지어 도덕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조차도 그가 놓여진 사회적 상황과 주어진 역할에 따라 너무도 쉽게 악마로 돌변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악마성에 철저하게 지배당하는 사람들은 헤어날 수 없는 무기력감과 무가치감에 사로잡힌 채 아무런 대항이나 저항조차도 일으킬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하튼 이렇게 말많고 탈 많았던 그 실험이 영화화된다고 하는군요. 기실, 영화화에 대한 움직임은 예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제야 실현되는가 봅니다. 아마, 인간과 세상,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새로운 비젼을 기대하게 했던 21세기가 밝았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지 않는 폭력성과 광기적인 집단성에 대한 회의가 다시금 이 영화를 기획하게 했나 봅니다.        
        
        
        
“ 나는 내가 나의 정체성을 잃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클레이라고 불렀던 사람, 그리고 이곳에 오는 것을 결정하고 자발적으로 이곳에 걸어들어 온 그 사람이 누구인지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감옥(실험실)에 있으면서, 이것이 단지 실험이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들었다. 이곳은 정부에서 운영하는 대신 심리학자들이 운영하는 바로 감옥 그 자체라고 여겨졌다. 감옥에 있으면서, 나는 그 모든 결정을 했던 바로 그 사람, 이전에 나라고 생각했던 그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여겨졌고 그곳에 있던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 곳에서 나올 때, 나는 그저 416번, 바로 숫자 그 자체였을 뿐이었다 ”        
        
        
        
실험에 참여했던 한 참가자(그는 죄수 번호 416번으로 불리었던 피험자였습니다)가 실험이 끝난 후 고백한 내용입니다. 과연 한 인간을 이토록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시킨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우리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 정말 악마가 될 수도 있는 걸까요?        
        
        
        
        
        
        
        
스탠포드 감옥 실험 (1)        
        
        
        
        
지난 주말, 한 스포츠신문 뉴스란에 어떤 여자의 사진이 12장이나 올라있었습니다. 제목은 ‘12번의 감옥행 변천사’ 아마 이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왼쪽 상단, 10대 후반쯤 되는 앳된 소녀의 모습이 12번의 감옥행동안 퀭한 눈동자에 부스스한 얼굴, 한 줌의 마약을 삼킨 듯한 몽롱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네요 한 가정의 축복 속에 소중한 생명으로 세상빛을 보았을 그녀인데, 어느새 이렇게 변해가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녀를 이렇게 만들어간 원인이 무엇인지, 이러한 변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는지, 다시 범죄에 손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직업 교육이나 기타 프로그램은 없었는지 등등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명문 스탠포드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였던 Zimbardo 교수도 이와 비슷한 의문을 이미 30 여 년 전부터 시작한 모양입니다. 특히 그는 교도소라는 사회적 격리 장치가 범죄자들의 재활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지, 그러한 환경이 인간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심을 갖고 그 유명한 ‘스탠포드 감옥 실험’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지난 칼럼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번부터 2회 동안은, 이 실험의 전반적인 계획과 여러 실험 절차들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실험의 시작        
        
        
1971년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과의 Zimbardo 교수는 ‘교도소의 생활이 인간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광고를 지역 신문지에 내고 지원자를 모았습니다. 광고 후 70여명의 지원자가 연락을 해왔고, 이후 간단한 정신과적 면접과 성격 검사를 실시해서 심리적인 문제가 있거나 병력이 있는 사람은 제외시켰습니다.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 이전에 범죄나 마약과 관련한 전과가 있는 사람들도 제외시켰죠. 이런 심사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24명의 실험 참가자가 결정되었고, 실험에 참가하는 대가로 하루에 15불 정도의 금액을 받기로 했습니다.        
        
        
        
우선, 선발된 24명에 대한 기본 프로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이 실험 참가자로 선발될 때 앞서 말씀드린 검사나 면접외에도, 참가자들간 이질성을 최소화하고 가능한한 일반인, 보통 사람들을 대표할 수 있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적인 수준이나 지능, 건강 조건도 비교적 사회적으로 가장 많은 퍼센티지를 차지하는 계층으로 구성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동질적인 구성원들을 두 집단으로 나눈 후 한 집단은 교도관의 역할을, 다른 한 집단은 죄수의 역할을 맡기려고 했습니다. 결국, 죄수냐 혹은 교도관이냐 하는 집단의 분류는 임의적인 것이었지, 결코 두 집단간의 유의미한 차이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점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실험이 진행될수록 이 두 집단은 정말로 놀라운 모습으로 다르게 변화해간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차차 말씀드리죠.        
        
        
        
Zimbardo 교수는 교도소 환경과 가장 유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실제로 이전에 장기 복역수로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적이 있는 사람을 섭외해 필요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과 건물의 한 쪽 복도 끝을 막아, 감옥 셋트를 만들었습니다. 실험이 시작되면 복도는 죄수(실제 죄수가 아닌 죄수 역할을 하기로 한 참가자들)가 거닐거나 식사, 운동들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됩니다. 그리고 화장실은 죄수들이 수감되는 방에서 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야만 하는 구조로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참가자들은 이곳이 진짜 감옥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서 눈을 가린 채 이곳으로 데려오게 되죠. 그래서 그곳이 스탠포드 대학내 임시로 만든 감옥이라는 생각을 못하게 한 것이죠. 그리고 이 복도는 빛이 들어오는 창문이나 시계를 놓지 못하게 해서, 여기가 어딘지,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소품들도 모두 감옥과 동일하게 만들었습니다. 3개가 있던 감방의 반대쪽에는 매우 작아 혼자만 들어갈 수 있는 어둡고 작은 공간을 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실험장소인 교도소가 다 만들어진 후에, 참가자들은 이미 협조가 요청된 경찰의 인도로 실험실로 옮겨지게 됩니다. 물론 죄수역을 맡은 참가자들에게는 실험실이 급조된 교도소가 아닌 아닌 스탠포드 주립 교도소라는 안내를 하고, 이를 위해 눈을 가린 채 데리고 옵니다.        
        
        
        
        
        
심리적 장치 (1) - 살충제 그리고 유니폼        
        
        
죄수들이 처음으로 눈을 뜨고 주변을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감옥으로 안내되어진 후였고 이들을 맞는 사람들은 교도관(교도관 역할을 하기로 했던 참가자들)들이었습니다. 죄수들은 교도소로 인도되자마자 마치 실제인 것처럼 체계적으로 조사되었고 신체 검사를 위해 옷을 모두 벗고 나체인 채로 교도관 앞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일반 죄수들에게 하는 것처럼 이나 기타 해충을 잡기 위한 살충제(잘 아시죠? DDT같은 그런 약)가 온몸에 뿌려집니다.        
        
        
        
이 과정은 죄수들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모멸감을 많이 느끼게 하는 행위로,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고 마치 해로운 무엇인양 온 몸에 살충제를 뒤집어 써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이 아닐 수 없지요. 사실 이 과정은 혹시나 있을지 모를 해충을 없애기 위해서라는 현실적인 목적이외에 죄수들을 다루기 쉽도록 만들 수 있는 효과적인 통제 수단이기도 합니다. 즉, 죄수들은 일반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멸스런 대우를 반복해서 받게됨으로써 스스로를 매우 지위가 낮고 무기력하며, 점차 그런 대우를 받아도 싼 가치없는 인간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럴수록 이들을 통제하고 가혹하게 대하는 교도관들은 전지 전능의 힘을 가진, 그리고 자신들에게 그렇게 대해도 되는 권한을 가진 인물로 인식되게 됩니다.        
        
        
        
결국, 죄수들은 교도관의 권위에 복종하고 따르게 되며,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처우에도 그대로 따르게 됩니다. 반항할 힘을 잃게 되는 거죠. 인간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것은 무력이나 다른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닌 바로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터득한 후 고안된 장치입니다. 이러한 심리적 장치는 사실 교도소에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일제 시대때 일본인들이 식민지였던 우리 나라를 통치하는 주요 수단으로 사용했던 정책이 바로 이것이었고, 새로 전학 온 아이에 대한 텃새 역시 결국엔,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온전히 굴복시키고 복종시키고자 했던 보이지 않는 심리적 장치라고 할 수 있죠.        
        
        
        
        
        
죄수들을 복종시키게 하는 또 하나의 장치는 이들을 모두 똑같은 외양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똑같은 머리 모양과 똑같은 옷, 그리고 이름대신 번호로 불려지게 하는 것이죠. 이 실험에서도 그러한 유니폼을 입었는데 모양은 마치 임신복처럼 밑이 트인 원피스 형이었습니다. 모두가 이 옷을 입게 했고, 속옷은 입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는 똑같은 모양의 모자를 쓰게 했으며, 신발은 슬리퍼로 통일해서 신도록 했습니다.        
        
        
        
        
        
왜 유니폼인가?        
        
        
우리는 종종 모두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생활하는 집단을 보게 됩니다. 대기업이나 군대, 학교등이 대표적이죠. 그리고 여기에서처럼 교도소도 똑같은 유니폼, 죄수복을 입게 합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우선, 이들의 개별성을 없애기 위함이겠죠. 그리고 워낙 많은 수의 사람들을 관리해야 하니까, 다른 집단과 구분되게 그 집단만의 유일한 외양을 갖게 해서 보다 통제가 쉽도록 만드는 이유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외에도 유니폼은 우리의 심리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죠. 대기업이나 군대, 학교, 그리고 교도소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모두 철저히 위계 질서가 유지되는 사회라는 것이죠. 회사는 부하직원과 상사, 그리고 군대는 당연하고 학교는 학생과 교사, 그리고 교도소는 죄수와 교도관 그런 식의 절대적인 위계가 존재하는 사회라는 점입니다. 절대적인 위계, 권위와 그에 대한 복종이 갖추어져야만 굴러갈 수 있는 조직이라는 점이죠. 그럼 권위와 유니폼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유니폼이란 한 마디로 개인에 대한 개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개별성이 최소화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여러 심리학 실험에서 이 주제에 대해 연구를 진행했었습니다. 연구 결과, 개별성을 갖지 못한 사람은 여럿이 아닌 혼자서 공적 장소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거나 주장하는 경향이 매우 적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다시 말해, 개별성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특히 권위자들이죠) 앞에 나서서 자신을 표현하거나 주장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지니게 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결국, 권위자의 지시나 명령에 대해 아무런 저항이나 주장을 하지 않고 그대로 따르게 될 확률도 높다는 거죠. 유니폼은 결국 복종을 이끌어내는 또다른 심리적 장치이며, 약자의 입장에 서게 하는 심리적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실험 얘기로 돌아와서, 다른 일반 감옥에서는 잘 하지 않는 장치로 이들의 발에 족쇄를 채워놓았습니다. 이는 환경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인식을 끊임없이 들게 하기 위해서 마련한 장치였죠. 아침에 일어나도 여전히 족쇄가 발목에 채워져 있다면, 아! 시계가 없으니 아침인지도 모르겠죠. 그렇다면 정말 참가자들은 ‘여전히 나는 감옥에 있고 이 곳에서 달아날 수 없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겠죠.        
        
        
        
        
        
심리적 장치 (2) - 교도관의 유니폼과 선글래스        
        
        
한편, 교도관 역할을 맡았던 참가자들도 교도관으로 변하기 위한 절차를 밟았는데, 이들도 모두 동일한 복장을 합니다. 카키색의 상하의에 목에는 호루라기를 메고 있고 경찰봉을 들게끔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교도관의 상징처럼 아주 까만 선글레스를 쓰게 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유니폼은 앞서 죄수들과는 다소 다른 심리적 장치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즉, 죄수들이 속옷도 입지 않은 채 밑이 트인 엉성해보이는 복장을 하고 있는데 반해, 교도관들은 공격을 가할 수 있는 복장, 그리고 권위를 표현하는 경찰 뺏지 등을 차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도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유니폼으로 인한 몰개성화가 이루어지지만 이는 오히려 약자라기 보다는 강자, 권위자로서의 몰개성화를 일어나게 하는 장치가 됩니다. 즉, 그 옷을 입음으로써 약자의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권위로 대변되는 일련의 파워를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죄수들을 무시하거나 가해하는 행동을 하더라도 바로 이 복장 때문에 아무런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들이 착용한 선글래스는 그런 권위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상징물입니다.        
        
        
        
진한 선글래스의 특징은 바로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다는 차단성입니다. 이는 교도관들만이 쓰게 되어 있죠. 즉 죄수들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관찰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교도관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여지게 됩니다. 정보의 사각지대가 바로 교도관의 시선이라, 죄수들은 늘 긴장할 수 밖에 없지요. 별거 아닌 것 같은 이 작은 장치가 사실은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니 놀랍죠? 이것이 바로 심리적 장치의 효과입니다.        
        
        
        
교도관으로 참여한 참가자들은 교도관의 역할에 대해 사전 지식이 전무한 상태였고, 연구에서도 이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법적으로 타당한 선에서, 그리고 죄수들을 존경하는 선에서 감옥의 규칙을 만들 수 있다고 얘기만을 들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서서히 교도소 안의 규칙을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셋팅을 만들고 교도관과 죄수들의 역할 설정을 하면서 교도소의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실험 이틀째의 날을 맞게 되는데, 그날 밤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교도소, 정확히는 실험실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스탠포드 감옥 실험 (2)        
        
        
        
        
지난 칼럼에서 스탠포드 대학내에 어떻게 감옥 시설이 마련되었는지, 그리고 죄수와 교도관이라는 신분을 만들어내는 여러 심리적 장치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번 칼럼은 스탠포드 심리학 실험의 마지막 이야기로, 실험 이튿날부터 조기 중단된 6일까지의 숨가쁜 상황이 전개됩니다.        
        
        
        
        
        
실험 이틀째        
        
        
이날 아침 예상치 못한 죄수들의 집단 행동이 발생했습니다. 아침이 밝자 죄수들은 모자를 벗어버리고, 죄수복에 달려 있던 숫자를 잡아뜯는가 하면 감방 안에서 문을 향해 침대로 바리케이드를 친 채 방어 태세를 갖추기도 했습니다. 또한 교도관들에게 욕설과 비난을 하고조롱하기까지 했죠. 첫날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지나갔던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행동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여기는 감옥이 아닌 실험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이 폭동에 대한 교도관들의 행동이었습니다.        
        
        
        
앞서 여러 번 강조했던 점이 있죠? 실험에 참가하기 전 이들은 교도관이나 죄수나 모두 지극히 평범한,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0대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감옥이니 교도관이니 하는 것에 대해 전혀 사전 지식이 없던 이들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수와 교도관이라는 구분은 그저 임의적인 구분에 불과한 것들이었죠. 그런데, 둘째 날 죄수 역의 참가자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교도관 역할의 참가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사태를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실험 전에는 단 한번도 교도소에 다녀오거나 교도관을 만난 적도 없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물리적인 진압        
        
        
교도관들은 일단 소화기를 가져와 죄수들을 향해 뿌려대기 시작했습니다. 순간적으로 피부의 온도를 낮추는 하얀 분말의 소화액이 발포되자 죄수들은 문에서 떨어져 밀려날 수 밖에 없었고, 교도관들은 이틈을 타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죄수들을 진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도관들은 죄수들의 옷을 모두 벗기고, 감방 안에 있던 생필품들, 침대와 담요 등을 모두 밖으로 끄집어 낸 후 알몸인 상태로 죄수들을 감방 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폭동을 주도했던 죄수들을 모아 독방에 집어넣었죠. 죄수들에게 가하는 체벌로는, 한 명씩 불러내어 push-up을 시키고 나머지 죄수들을 모두 벽을 바라보고 서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push- up 정도는 체육 시간에도 하는 거고 건강 삼아 혼자서도 곧잘 하는 거라, 이게 체벌일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 당시에 연구자들도 그러한 생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곧 연구자들은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악을 금치 못했죠.        
        
        
        
체벌일까 싶었던 바로 그 push-up, 한 사람이 이를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벽을 향해 서 있어야만 하는 바로 이러한 체벌이, 실제 교도소, 그것도 그 악명 높았던 나찌의 수용소에서 존재했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한끝의 차이도 보이지 않고 스탠포드 감옥에서의 체벌과 나찌 수용소에서의 체벌이 똑같은 모양새를 띠고 있었습니다. 차이라면, 나찌의 수용소에서는 우리가 전쟁 전범이라고 하는, 극악무도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독일군 장교들이 유태인에게 그러한 체벌을 가했던 데 반해, 스탠포드 감옥(대학)에서는 이틀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평범하고 순진했던 청년들이 똑같은 청년들에게 체벌을 가하고 있다는 점뿐이었죠. 놀라웠던 점은 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교도관의 임무나 전반적인 업무 스케쥴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싶었던 참가자들은 어느새 기존 교도소에서 행해지는 교도관의 업무 스케쥴을 정확히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자발적으로 3명의 교도관들이 나서서 야간에 당직을 서기로 했고, 3교대로 9명의 교도관들이 번갈아 가며 한시도 놓치지 않고 죄수들을 감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너무도 지능적인 심리적 진압 방법까지 동원하면서 말이죠.        
        
        
        
        
        
심리적 진압        
        
        
우선,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어떤 집단이 있다고 하죠. 이들이 힘을 뭉치면 위협이 될 수 있을 만큼의 머릿수를 가진 집단이라고 가정할 때, 우리가 그 집단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첫째, 상대 집단을 제압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지니는 것입니다. 사람수로, 강한 무기로 상대 집단의 힘을 제압하는 것이죠. 그런데, 인원도 그리 많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무기도 신통치 않다면, 과연 어떤 방법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까요?        
        
        
        
맞습니다. 생각하신 그대로, 바로 심리적 전술입니다. 앞에 칼럼에서 교도관의 선글래스 얘기를 한 적이 있죠? 그 작은 장치 하나가 죄수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주요 수단이라고. 인간의 심리를 제압하는 것이 바로 인간을 제압하는 방법입니다. 스탠포드 감옥내의 교도관들도 바로 이런 심리적 장치가 죄수들을 통제하기 위한 주요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도의 심리적 장치를 마련하게 됩니다.        
        
        
        
우선, 기존 세 개의 감방 중에서 하나를 일종의 특실 개념으로 개조했습니다. 이 방에서는 옷도 입을 수 있고 침대도 사용할 수 있으며 이도 닦을 수 있게 했습니다. 또한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 방에는 폭동에 가담한 정도가 가장 적은 세명의 죄수들이 들어오게 해서 그곳에서 생활하게 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한 감방에, 벌거벗겨진 채 식사도 제공받지 못하는 상황, 물론 세수를 하거나 이를 닦을 수도 없는 상황에 있게 했죠. 이미 이것만으로도, 폭동에 가담하는가에 대해 심한 갈등을 갖게 합니다. 아마도 다음 폭동에는 주도적으로 나설 수 없겠죠. 그러나 심리적 장치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를 반나절, 교도관들은 소위 모범수였던 세 명을 상황이 제일 나쁜 감방에 넣고, 폭동을 일으켰던 문제 죄수들을 제일 좋은 특실에 넣었습니다.        
        
        
        
자, 여기서 문제입니다. 교도관들은 왜 이런 조치를 취했을까요. 앞서, 폭동에 가담한 정도가 가장 약한 사람들이 좋은 감방에 들어갔을 때는 일종의 보상처럼 해석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즉, 교도관들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하지 않을수록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잠시 후 상황은 뒤바뀌어서, 폭동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좋은 감방으로 들어가고 소위 모범수였던 사람들은 다시 험한 감방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아니, 교도관에게 잘 해도 험한 감방으로 들어가야 하고, 못해도 들어가야 하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일까요. 해답은....바로 혼란입니다. 즉, 방금 여러분들이 가졌던 그 의문점처럼 죄수들 역시 앞일을 예측하지 못한 채 혼란에 빠진 거죠. 앞으로의 일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여기에는 중요한 심리적 과정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 여기에서 교도관들이 죄수들에게 박탈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우선은 옷입니다. 그리고 음식, 그리고 잠자리입니다. 즉 의식주, 인간의 생존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이를 얻고 얻지 못함이 갖는 의미는 상당하다고 할 수 있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이해 관계가 높은 것이라고 볼 수 있죠. 두 번째로 폭동에 가담한 정도가 낮은 사람들이 좋은 환경으로 갔다가, 다시 나쁜 환경으로 옮겨지게 된 상황의 변화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좋은 환경은 일종의 긍정적인 보상입니다. 보상이란 단순히 말하자면, 그 보상을 제공하는 사람에게 뭔가 이쁜 짓, 다시 말해 그 사람의 맘에 드는 행동을 했을 때 받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도관들이 제공하는 좋은 환경에 폭동에 가담한 정도가 적은 사람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얼마 지나지 않아 폭동을 주도한 사람들을 그곳으로 보냈을까요.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이라면, 그러한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맞습니다. ‘뭔가 내가 모르지만, 교도관과 저들 사이에 은밀한 거래나 그 무언가가 있을거야’.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어느 모로 보나, 나보다 못한 것 같고, 실력도 없어보이는 데 승진은 일순위인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쉽게 이런 생각합니다. ‘뭔가 다른 쪽으로 손을 썼겠지. 치사하긴’이라고. 바로, 폭동을 주도했던 죄수들에 대해 나머지 죄수들은 일종의 불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을 더 이상은 믿지 못하죠. 교도관들이 노린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즉, 집단 안에 이들이 한데 뭉칠 수 없도록 만드는 불신을 싹트게 한 것이죠. 결국, 교도관들의 전략에 의해 폭동을 주도했던 일부 죄수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머지 죄수들을 배반하고 편한 환경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신념을 나머지 죄수들은 갖게 됩니다. 앞서, 의식주와 같이 이해 관계가 높은 대상이 결과와 관련된다면 이러한 불신은 더욱더 공고하게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심리적 장치, 바로 폭동을 주도했던 죄수들에게 가해진 심리적 장치입니다. 물론 이들도 앞서 설명에서처럼 다른 죄수들로부터 불신의 대상이 되버리고 고립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들만이 겪게되는 무서운 심리적 장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측 불가능성이라는 것이죠. 흔히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가져오게 될 결과를 예측하고, 대비합니다. 우리가 15분 후에 도착할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나, 직장 상사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을 때 돌아올 수 있는 반응을 예상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예측입니다. 이런 예측이 불가능하다면, 사람들은 큰 혼란을 겪고, 초조, 불안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불안증이라고 얘기하는 정신과적 증상의 가장 큰 심리적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런 예측 불가능성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모르니 늘 불안하고 초조한 것이죠. 폭동을 주도했던 죄수들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심한 처벌이 올 것을 기대합니다. 실제로, 감옥에서 초반에는 그런 처벌이 가해졌죠. 처벌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예측했던 것이기에 불안은 그다지 높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곧 편한 감방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옷이 주어지고 침대에서 자고, 분명 몸은 편해집니다. 그러나 이들이 진정 심리적인 안정을 얻었을까요.        
        
        
        
아닙니다. 사람이 가장 불안할 때는 자신의 기대에서 벗어난 상황에 접했을 때입니다. 이들은 왜 자신들이 그러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지도 예측할 수 없게 되죠. 그렇게 되면, 결국 이들은 불안하고 초조하고 도저히 안정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계속 그 생각에 매달리면서 모든 심적 에너지를 써버리게 되죠. 결국 그들은 이제 폭동을 일으킬 만한 에너지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진압의 결과        
        
        
폭동과 그에 대한 진압을 계기로 교도소의 상황은 급변하게 됩니다. 죄수들은 그들 사이에 팽배해진 불신으로,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분열되는 양상을 보이는 반면, 교도관들은 몰라볼 정도로 강한 결속력을 가지게 됩니다. 교도관들은 죄수들이 실제로 문제가 많으며, 반드시 다스려져야 하는 망나니처럼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탄압을 보다 강화하기 시작했죠. 심지어 죄수들이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막아, 허락을 받아야지만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감방안에 양동이를 하나 주고 거기에 대소변을 보게 했죠. 그러나 곧 감방은 오줌 냄새와 변냄새로 가득차게 되고, 2일만에 환경은 최악으로 치달아 가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실험이 시작된 지 36시간만에 죄수 역의 참가자는 정신과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심한 정서 장애 및 혼란스런 사고와 감정을 경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울거나 웃고, 분노감에 차서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하는 등 문제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 사람의 처우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를 면담했지만, 좀처럼 가라앉지 못한 채 다른 죄수들에게 “아무도 여길 떠날 수 없어. 이걸 멈출 수는 없다구”라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정말 미쳐가는 것 같았죠. 결국, 연구자들은 실험 중간에 그를 풀어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풀어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나간 후 감옥 안에는 묘한 루머가 돌기 시작했죠. 그가 풀려난 것이 아닌 탈주였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다른 죄수들도 탈주를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이 얘기는 교도관들에게도 그리고 연구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연구자들의 돌연변이        
        
        
연구자들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전략 회의를 가지고, 죄수들의 안전을 위해 이들을 살필 장치를 하고 탈옥을 막을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해냈습니다. 또한 그러한 루머가 돌던 방안에 정보를 미리 알려줄 수 있는 밀고자를 두기로 결정하고 이를 시행하기도 했죠. 이전에 비해 더 많은 교도관을 두고 죄수들을 감시하고 이들을 함께 묶고, 머리에 자루를 씌어 두기도 했죠. 그리고 어떻게든 탈주가 일어나지 않도록 감시하고 보안책을 강구하는 데 더 열심이었습니다. 자, 이 연구자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실험 중에 연구자의 동기 하나가 실험실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돌변한 상황을 놀래서 바라보고는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뭘 실험하고 있는 거지?”라고요. 그 순간 연구자들은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며 정말이지 크게 놀라게 됩니다. 즉, 그 며칠 사이에, 연구자들은 어느새 연구자, 심리학자가 아니라 또 다른 교도관, 감독자의 역할을 하면서 죄수들을 감시하고 있었던 거죠. 연구자들조차도 당시에 다른 교도관들처럼 죄수들이 반드시 도망을 칠 것이며 해를 끼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들이 인식을 하기도 전에 말이죠. 실험에 대해 Zimbardo 교수의 얘기를 빌면, 당시 실험에 참여하지 않은 동료가 실험 과정을 지켜보며, “도대체 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도덕적으로 어떻게 이런 실험을 계속 진행하느냐?”라고 항의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리고 그 자신도 실험의 도덕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미 연구자들도 더 이상 연구자의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관찰자의 위치가 아닌 거대한 심리적 장치안으로 빨려들어와 있었던 셈이죠. 마치 교도관이나 죄수들처럼.        
        
        
        
실험 5일째로 접어들면서 일부 교도관이 죄수들을 성적으로 학대하기 시작했고, 교묘한 방식으로 이들을 고문하고 체벌하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죄수들은 극도의 공포와 불안감에 시달리게 되고, 급기야 그들의 부모들이 찾아와 이들을 빼내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겠다는 포고를 하기도 했다는군요. 심한 정신과적 증상을 보이는 죄수들이 속출하기 시작하는 등 상태가 악화 일로를 걷게 되자, 결국 실험은 6일만에 중단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실험의 결과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학계에 보고되면서 큰 충격을 일으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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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포드 감옥실험(Stanford Prison Experiment)'이라는 것입니다.

 

이 실험은 1971년 미국에서 '필립 짐바르도'라는 스탠포드 대학교수가 주도한 실험이었습니다. (구인광고를 통해서 실험차가자를 모집한것은 사실입니다. 실제 미국 심리학 실험의 참가자는 구인광고를 통하여 모집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을 드러내게 만든 실험으로 '밀 그램'이 1963년도에 실시한 '전기충격실험'과 함께 유명한 실험입니다. 실험은 예상했던것과 너무 다르게 흘러가게 되어 6일만에 중지하게 됩니다. 자세한 실험 내용은 밑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실험의 시작>>


1971년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과의 Zimbardo 교수는 ‘교도소의 생활이 인간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신문지에 내고 지원자를 모았습광고를 지역 니다. 광고 후 70여명의 지원자가 연락을 해왔고, 이후 간단한 정신과적 면접과 성격 검사를 실시해서 심리적인 문제가 있거나 병력이 있는 사람은 제외시켰습니다.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 이전에 범죄나 마약과 관련한 전과가 있는 사람들도 제외시켰죠. 이런 심사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24명의 실험 참가자가 결정되었고, 실험에 참가하는 대가로 하루에 15불 정도의 금액을 받기로 했습니다.

우선, 선발된 24명에 대한 기본 프로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이 실험 참가자로 선발될 때 앞서 말씀드린 검사나 면접외에도, 참가자들간 이질성을 최소화하고 가능한한 일반인, 보통 사람들을 대표할 수 있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적인 수준이나 지능, 건강 조건도 비교적 사회적으로 가장 많은 퍼센티지를 차지하는 계층으로 구성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동질적인 구성원들을 두 집단으로 나눈 후 한 집단은 교도관의 역할을, 다른 한 집단은 죄수의 역할을 맡기려고 했습니다. 결국, 죄수냐 혹은 교도관이냐 하는 집단의 분류는 임의적인 것이었지, 결코 두 집단간의 유의미한 차이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점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실험이 진행될수록 이 두 집단은 정말로 놀라운 모습으로 다르게 변화해간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차차 말씀드리죠.

Zimbardo 교수는 교도소 환경과 가장 유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실제로 이전에 장기 복역수로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적이 있는 사람을 섭외해 필요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과 건물의 한 쪽 복도 끝을 막아, 감옥 셋트를 만들었습니다. 실험이 시작되면 복도는 죄수(실제 죄수가 아닌 죄수 역할을 하기로 한 참가자들)가 거닐거나 식사, 운동들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됩니다. 그리고 화장실은 죄수들이 수감되는 방에서 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야만 하는 구조로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참가자들은 이곳이 진짜 감옥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서 눈을 가린 채 이곳으로 데려오게 되죠. 그래서 그곳이 스탠포드 대학내 임시로 만든 감옥이라는 생각을 못하게 한 것이죠. 그리고 이 복도는 빛이 들어오는 창문이나 시계를 놓지 못하게 해서, 여기가 어딘지,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소품들도 모두 감옥과 동일하게 만들었습니다. 3개가 있던 감방의 반대쪽에는 매우 작아 혼자만 들어갈 수 있는 어둡고 작은 공간을 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실험장소인 교도소가 다 만들어진 후에, 참가자들은 이미 협조가 요청된 경찰의 인도로 실험실로 옮겨지게 됩니다. 물론 죄수역을 맡은 참가자들에게는 실험실이 급조된 교도소가 아닌 아닌 스탠포드 주립 교도소라는 안내를 하고, 이를 위해 눈을 가린 채 데리고 옵니다.

교도관으로 참여한 참가자들은 교도관의 역할에 대해 사전 지식이 전무한 상태였고, 연구에서도 이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법적으로 타당한 선에서, 그리고 죄수들을 존경하는 선에서 감옥의 규칙을 만들 수 있다고 얘기만을 들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서서히 교도소 안의 규칙을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셋팅을 만들고 교도관과 죄수들의 역할 설정을 하면서 교도소의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실험 이틀째의 날을 맞게 되는데, 그날 밤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교도소, 정확히는 실험실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이날 아침 예상치 못한 죄수들의 집단 행동이 발생했습니다. 아침이 밝자 죄수들은 모자를 벗어버리고, 죄수복에 달려 있던 숫자를 잡아뜯는가 하면 감방 안에서 문을 향해 침대로 바리케이드를 친 채 방어 태세를 갖추기도 했습니다. 또한 교도관들에게 욕설과 비난을 하고조롱하기까지 했죠. 첫날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지나갔던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행동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여기는 감옥이 아닌 실험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이 폭동에 대한 교도관들의 행동이었습니다.

앞서 여러 번 강조했던 점이 있죠? 실험에 참가하기 전 이들은 교도관이나 죄수나 모두 지극히 평범한,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0대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감옥이니 교도관이니 하는 것에 대해 전혀 사전 지식이 없던 이들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수와 교도관이라는 구분은 그저 임의적인 구분에 불과한 것들이었죠. 그런데, 둘째 날 죄수 역의 참가자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교도관 역할의 참가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사태를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실험 전에는 단 한번도 교도소에 다녀오거나 교도관을 만난 적도 없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교도관들은 일단 소화기를 가져와 죄수들을 향해 뿌려대기 시작했습니다. 순간적으로 피부의 온도를 낮추는 하얀 분말의 소화액이 발포되자 죄수들은 문에서 떨어져 밀려날 수 밖에 없었고, 교도관들은 이틈을 타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죄수들을 진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도관들은 죄수들의 옷을 모두 벗기고, 감방 안에 있던 생필품들, 침대와 담요 등을 모두 밖으로 끄집어 낸 후 알몸인 상태로 죄수들을 감방 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폭동을 주도했던 죄수들을 모아 독방에 집어넣었죠. 죄수들에게 가하는 체벌로는, 한 명씩 불러내어 push-up을 시키고 나머지 죄수들을 모두 벽을 바라보고 서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push- up 정도는 체육 시간에도 하는 거고 건강 삼아 혼자서도 곧잘 하는 거라, 이게 체벌일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 당시에 연구자들도 그러한 생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곧 연구자들은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악을 금치 못했죠.



체벌일까 싶었던 바로 그 push-up, 한 사람이 이를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벽을 향해 서 있어야만 하는 바로 이러한 체벌이, 실제 교도소, 그것도 그 악명 높았던 나찌의 수용소에서 존재했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한끝의 차이도 보이지 않고 스탠포드 감옥에서의 체벌과 나찌 수용소에서의 체벌이 똑같은 모양새를 띠고 있었습니다. 차이라면, 나찌의 수용소에서는 우리가 전쟁 전범이라고 하는, 극악무도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독일군 장교들이 유태인에게 그러한 체벌을 가했던 데 반해, 스탠포드 감옥(대학)에서는 이틀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평범하고 순진했던 청년들이 똑같은 청년들에게 체벌을 가하고 있다는 점뿐이었죠. 놀라웠던 점은 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교도관의 임무나 전반적인 업무 스케쥴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싶었던 참가자들은 어느새 기존 교도소에서 행해지는 교도관의 업무 스케쥴을 정확히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자발적으로 3명의 교도관들이 나서서 야간에 당직을 서기로 했고, 3교대로 9명의 교도관들이 번갈아 가며 한시도 놓치지 않고 죄수들을 감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너무도 지능적인 심리적 진압 방법까지 동원하면서 말이죠.



폭동과 그에 대한 진압을 계기로 교도소의 상황은 급변하게 됩니다. 죄수들은 그들 사이에 팽배해진 불신으로,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분열되는 양상을 보이는 반면, 교도관들은 몰라볼 정도로 강한 결속력을 가지게 됩니다. 교도관들은 죄수들이 실제로 문제가 많으며, 반드시 다스려져야 하는 망나니처럼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탄압을 보다 강화하기 시작했죠. 심지어 죄수들이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막아, 허락을 받아야지만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감방안에 양동이를 하나 주고 거기에 대소변을 보게 했죠. 그러나 곧 감방은 오줌 냄새와 변냄새로 가득차게 되고, 2일만에 환경은 최악으로 치달아 가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실험이 시작된 지 36시간만에 죄수 역의 참가자는 정신과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심한 정서 장애 및 혼란스런 사고와 감정을 경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울거나 웃고, 분노감에 차서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하는 등 문제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 사람의 처우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를 면담했지만, 좀처럼 가라앉지 못한 채 다른 죄수들에게 “아무도 여길 떠날 수 없어. 이걸 멈출 수는 없다구”라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정말 미쳐가는 것 같았죠. 결국, 연구자들은 실험 중간에 그를 풀어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풀어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나간 후 감옥 안에는 묘한 루머가 돌기 시작했죠. 그가 풀려난 것이 아닌 탈주였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다른 죄수들도 탈주를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이 얘기는 교도관들에게도 그리고 연구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연구자들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전략 회의를 가지고, 죄수들의 안전을 위해 이들을 살필 장치를 하고 탈옥을 막을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해냈습니다. 또한 그러한 루머가 돌던 방안에 정보를 미리 알려줄 수 있는 밀고자를 두기로 결정하고 이를 시행하기도 했죠. 이전에 비해 더 많은 교도관을 두고 죄수들을 감시하고 이들을 함께 묶고, 머리에 자루를 씌어 두기도 했죠. 그리고 어떻게든 탈주가 일어나지 않도록 감시하고 보안책을 강구하는 데 더 열심이었습니다. 자, 이 연구자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실험 중에 연구자의 동기 하나가 실험실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돌변한 상황을 놀래서 바라보고는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뭘 실험하고 있는 거지?”라고요. 그 순간 연구자들은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며 정말이지 크게 놀라게 됩니다. 즉, 그 며칠 사이에, 연구자들은 어느새 연구자, 심리학자가 아니라 또 다른 교도관, 감독자의 역할을 하면서 죄수들을 감시하고 있었던 거죠. 연구자들조차도 당시에 다른 교도관들처럼 죄수들이 반드시 도망을 칠 것이며 해를 끼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들이 인식을 하기도 전에 말이죠. 실험에 대해 Zimbardo 교수의 얘기를 빌면, 당시 실험에 참여하지 않은 동료가 실험 과정을 지켜보며, “도대체 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도덕적으로 어떻게 이런 실험을 계속 진행하느냐?”라고 항의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리고 그 자신도 실험의 도덕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미 연구자들도 더 이상 연구자의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관찰자의 위치가 아닌 거대한 심리적 장치안으로 빨려들어와 있었던 셈이죠. 마치 교도관이나 죄수들처럼.

실험 5일째로 접어들면서 일부 교도관이 죄수들을 성적으로 학대하기 시작했고, 교묘한 방식으로 이들을 고문하고 체벌하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죄수들은 극도의 공포와 불안감에 시달리게 되고, 급기야 그들의 부모들이 찾아와 이들을 빼내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겠다는 포고를 하기도 했다는군요. 심한 정신과적 증상을 보이는 죄수들이 속출하기 시작하는 등 상태가 악화 일로를 걷게 되자, 결국 실험은 6일만에 중단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실험의 결과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학계에 보고되면서 큰 충격을 일으키게 됩니다.
실험이 일으킨 가장 큰 파장은 진정한 휴머니즘이란 없다는 것, 누구나 상황에 의해서 악인이 될 수도 선인이 될 수도 있다는 뼈아픈 인식을 가져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는 대학 때, 처음 이 실험에 대한 얘기를 듣고, 학자 혹은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인권이 제대로 보호되지 않는 실험 상황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현실과 관련지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현재 교도소라고 하는 사회적 격리 장치가 죄수들의 인권을 보호하거나 그들의 재활과 갱생을 위한 긍정적인 장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교도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은 죄수들을 통제하기 위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환멸스럽고 고통스러운 조치로, 그곳에서 진정 갱생과 재활이 이루어 질 수 있을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일 겁니다.




"나는 최근(출감한지 37개월)에야 교도소 독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감옥 안에서 난 늘 침묵해야 했다. 옆 감방 사람에게 속삭이기라도 할라치면 곧 교도관의 곤봉과 매가 등과 어깨로 쏟아지곤 했다. 그리고 내 몸에 이나 다른 벌레들이 있다고 벌거벗긴 채 뿌려지는 살충제. 그리고 맨 바닥에서 이불도 침대도 없이 알몸으로 자야했고 맨 손으로 화장실 변기를 닦아야 했던 시간들. 나는 도둑이 반드시 처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도둑이라도 절도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감옥 안에서 결코 재활이나 갱생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출감할 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건 유일하게 나를 때린 사람, 나를 마치 개처럼 취급한 그 사람을 죽일 생각이었다. 나는 내가 그런 잔혹함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정상적인 도덕성을 되찾았다는 것에 감사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너무나 잔혹했다.“


- 미국에서 실제 교도소 생활을 했던 어느 죄수의 고백

 

 

 

 

Milgram의 전기충격실험 斷想

2005/10/06 10:22

1960년대 예일대학의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 교수는 "징벌에 의한 학습효과"를 측정하는 실험에 참여할 사람들을 모집했습니다. 실험 방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선 자원한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에게는 선생님의 역할을, 다른 그룹에게는 학생의 역할을 맡깁니다.
그리고 나서, 선생 역할 1명과, 학생 역할 1명씩 짝을 짓도록 한 다음,
학생역할 분담자들을 가죽끈으로 의자에 묶고 그들의 양쪽 손목에 전기충격장치를 연결했습니다. 그 후 학생 역할 분담자에게는 암기해야 할 단어들이, 선생 역할 분담자에게는 테스트할 문제들이 주어졌지요. 선생들에게
"학생들을 테스트한 후 만약 틀릴 경우 한 번에 15볼트씩의 약한 전기충격을 가하도록" 지시한 후, 계속 틀릴 때마다 전압을 15볼트씩 올려가도록지시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징벌(전기충격)에 따른 학습효과(암기력의향상)를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말이지요.

그러나, 이 실험의 주된 목적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선생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전압을 높여 가는 과정에서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를 연구하고자 함이바로 그 숨겨진 목적이었습니다. 선생 그룹으로 선정된 사람들에게는비밀로 했지만, 사실 학생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자원자들이 아니라 모두실험 팀의 일원이었고, 전기충격도 시늉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완전한 사기였던 셈이지요. 과연 선생 역할 분담자들이 인간에게 치명적일 수있는 450볼트에 이를 때까지 전압을 높여 가는지를 관찰하는 것이 이 연구의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선생역할의 맡은 사람의 옆에는 실험 주관자(권위자의 역할)가 앉아서 "걱정 말고 계속 전압을 높여라. 책임은 내가 진다"고 격려 내지는 압력을 행사하도록 했습니다.

실험이 시작되기 전 밀그램 교수는 150볼트 이상으로 전압을 높여야 할
상황이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거부하고, 실험 중단을 요구할 것
으로 추정했습니다. 누구라도 실험참여의 대가로 4불을 받으려고 사람을죽일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을 벌이지는 않을테니까요. 아마 잘해야 자원자들의 0.1퍼센트 정도가 450볼트에 이르도록 계속 전기충격을 가할 것이라는가정이 세워졌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의 야드 바셈 연구소에 머무는 동안 이 실험을 녹화한
테이프를 직접 시청한 일이 있습니다. 대체로 이런 식이었습니다. 처음
15볼트 정도의 전기충격을 가할 때, 선생 역할자는 벽 너머로 들리는
상대방 학생의 가벼운 비명 소리에 키들키들 웃기 시작합니다. 전압이
90볼트를 넘어 가면서는 약간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기 시작하지요. 옆을 쳐다보면서 "이거 계속해도 되는 겁니까?"라고 묻기도 합니다. 150볼트가넘어 가면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뀌면서, "나 이거 더 이상 못하겠어요"라고 말합니다. 벽 너머에서 학생 역할을 맡은 자원자(사실은 실험팀의 연기)가 "으악. 그만 해요. 나는 그만 두겠어요. 내보내 줘요!"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실험 주관자가 선생 역할 분담자에게 매우 차가운 목소리로 "괜찮아요. 실험의 일부일 뿐이에요. 계속해요. 계속하라고 했죠? 책임은 모두 내가 져요"라고 이야기하자, 선생 역할 분담자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계속 전압을 높여갔습니다. 사실 언제든지 "나는 못하겠어요"라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그만인데도 그렇게 하지를 못하는 겁니다. 나중에 300볼트가 넘어가면서부터는 그도 무감각해져서 그냥 계속 전압을 높여갔습니다. 중간 중간 "이래도 되는 거요?"라는 식의 의혹을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 빈도 수는 전압이 높아갈수록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실험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실험 참가자 중 무려 65퍼센트가450볼트까지 전압을 높인 것입니다.

나중에 밀그램 교수의 실험은 더욱 다양한 상황으로 확대됩니다. 예컨대  조금 덜 학술적인 분위기에서 실험을 했을 때 위 확률은 48퍼센트까지 떨어지고, 실험 주관자가 같은 방에 있지 않을 때는 21퍼센트까지 떨어집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실험 주관자 두 사람을 한꺼번에 선생 역할 분담자들의 방에 집어넣고 두 실험 주관자가 "전압을 더 올려도 되는지"에 대해 논쟁하는 상황을 설정하면, 선생 역할 분담자의 참여도가 10퍼센트까지 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학생역할을 맡은 실험 조교를 선생 역할의 실험대상과 한 방에 집어놓고 실험을 계속하도록 했을 때는 40퍼센트, 선생역할분담자가 학생역할분담자의 손목에 직접 전기충격기를 대도록 했을 때는(물론 실제로는 모두 학생 역할자의 연기) 30퍼센트까지 떨어졌습니다.

참고로 이 실험 이후 밀그램 교수는 실험 대상자들을 속이고 진행한 이 실험의 비윤리성으로 인해 대학에서 해직되었습니다.

스탠포드 대학의 심리학자인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는 이 실험에 대해 조금 다른 시각의 접근을 하기도 합니다. 즉, 여기서 실험 중간에 더이상 계속하지 못하겠다고 말한 사람들(일종의 의로운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 이후 어떻게 행동했는가에 주목한 것이지요. 예컨대 이런 말도 안되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실험 주관자를 비난하든지, 아니면 좀 더 상급자를 만나보겠다고 항의하는 것이당연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렇게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른바 의인들조차도 자리에 앉아서 "정 못하겠다면 이제 집으로 가도
좋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지요. 벽 너머에는
학생역할을 맡은 자원자가 여전히 고통받고 있을 게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실험을 중간에 거부한 사람조차도 실제로는 부당한 권위에 복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1971년 짐바르도 교수는 여기서 더 나아가, 모두 70명의 지원자 중 "성숙하고, 감정적으로 안정되었으며, 정상적이고, 지적 능력이 뛰어난 대학생" 24명을 선발해서 새로운 실험에 착수합니다. 이번에는 감옥의 상황을 설정하여 각각 "간수"와 "죄수" 역할을 맡도록 했지요. 이 실험은 끝내 결과를 산출하지 못했습니다. 왜냐고요? 6일만에 실험을 중단하기로 했기 때문이지요. 너무 끔찍한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해서 실험을 더 이상 계속했다가는 완전히 인간성이 파괴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던 것입니다.

즉, 간수 역할을 맡은 몇몇 남학생들은 죄수 역할의 학생들이 마치 인간이 아닌 저열한 동물인 것처럼 가혹하게 대하기 시작했고, 죄수역할을 맡은 몇몇은 외부적으로는 노예근성을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오직 탈출과 복수만을 꿈꾸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졌던 까닭입니다. 역할과 자아가 뒤섞이면서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거지요. 짐바르도 교수는 결론적으로 우리가 언제든지 나약한 죄수와 악랄한 간수 사이를 오갈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무서운 점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이런 실험들과 비슷한 상황을 기초로 "The Wave"라는 소설도 나오고, 영화도 만들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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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포드 감옥실험 BBC 1



스탠포드 감옥실험 BBC 2



스탠포드 감옥실험 BBC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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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포드 감옥 실험(영어: Standford prison experiment, SPE)이란 스탠포드 대학교의 필립 짐바르도 심리학 교수가 1971년에 한 심리학 실험이다. 70명의 지원자 중 대학생인 24명이 선발되어 죄수와 교도관역을 맡았으며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 건물 지하에 있는 가짜 감옥에서 살았다. 역할은 무작위로 정했다. 그들은 자기 역할에 예상보다 잘 적응했으며 교도관들은 귄위적으로 행동했고 심지어는 가혹 행위를 하기까지 했다. 2명의 교도관들은 실험 초기에 너무 화가 나서 중간에 나갔으며 모든 실험은 실험 시작 후 6일 만에 갑작스럽게 종료되었다. 실험의 진행상황과 결과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쟁의 여지가 남아있다. 모든 실험장면은 촬영되었으며 그 촬영물에 대해서 논쟁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그로부터 30년 후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 이라크 포로 학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짐바르도의 실험에 대한 관심이 환기되었다.


 


목표와 과정 


 


짐바르도의 팀은 수감자와 교도관 각각의 특징은 어려운 감옥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라는 생각을 시험해보기 위해 실험을 시작했다. 고용된 참가자들은 2주간 '감옥'에서 생활할 거라는 말을 들었다. 70명의 지원자 중에 짐바르도는 심리적으로 가장 안정돼 있으며 건강한 남자 24명을 선발했다. 24명은 모두 백인이었으며 중산층이었다.


'감옥'은 스탠포드 대학의 조던 홀의 지하실에 위치했다. 대학생인 실험 도우미들은 수감자였으며 짐바르도는 교도소장이었다. 짐바르도는 참가자들이 그가 원했던 방향 감각 상실(disorientation), 자아감 상실(depersonalisation), 몰개성화(Deindividualisation)와 같은 것을 촉진할 수 있도록 특별한 상황을 마련했다.


실험 참가자들 중 교도관역을 맡은 사람은 무기(나무 곤봉)과 셔츠와 바지가 카키색인 가짜 교도관 옷을 받았다. 눈을 마주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선글라스도 받았다.


수감자들은 그들이 끊임없이 불편하도록 크기가 맞지 않는 겉옷과 머리에는 스타킹을 씌웠다.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을 이름 대신에 옷에 박힌 그들의 고유 번호로 불렸다.


교도관을 맡은 참가자들은 실험 하루 전 날 그들이 수감자들을 육체적으로 상처입힐 수 없다는 모임을 가졌다.2003년에 나온 The Stanford Prison Study비디오에 의하면 짐바르도는 교도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당신은 수감자들에게 지루함을 느끼게 할 수 있으며 어느정도 공포감을 조성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 있으며 그 행동인즉 수감자들의 운명은 전적으로 우리와 시스템에 의해 조종되고 당신, 나, 그리고 수감자들은 어떠한 사생활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개성을 다양한 방법으로 없앱니다. 대개, 이러한 모든 것을 야기시키는 것은 무력함입니다. 즉 이 상황에서 우리는 모든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어떠한 힘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수감자를 맡은 참가자들은 수감자들처럼 행동해서 그들의 집에서 무장강도 '혐의'로 '체포' 되었다. Palo Alto 경찰서는 모든 수감자들에게 하는 행위(지문 채취, 범인 식별용 사진 찍기, 미란다 원칙 설명하기 등등)를 해서 짐바르도 교수를 도왔다. 그들은 감옥에서 이송되어서 실시간 감시를 당하고 그들이 새로운 일체성을 받는 가짜 감옥에 도착했다.



결과


 


실험은 눈깜짝할 새에 손을 벗어났다. 교도관들에게서 굴욕적인 대우와 가학적인 행위를 받은 수감자들은 괴로워했으며 그 행위들은 용인되어 왔다. 스트레스가 지속적으로 증가해서 결국 억제로 인한 반란을 초래했다. 실험이 끝날 때 까지 엄격하게 감정적인 혼란이 많이 일어났다.


별탈없이 흘렀던 첫날이 지나고 둘째날에 반란이 일어났다. 교도관들은 원래보다 더 봉사를 했으며 상관인 연구 직원들이 없이 소화기로 수감자들을 함께 공격해서 반란을 진압했다.


겨우 36시간이 흐른 후에 필립 짐바르도가 말하기로는 한 수감자가 "미♡ 짓"을 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8612는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소리 지르고 저주하고 격노하는 등 "미♡ 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매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에 대해 조금 시간이 걸렸고 우리들은 그를 풀어줘야만 했다.


실험에서 빠진 #8612번이 친구들을 데려와서 남은 수감자들을 내보낸다는 소문이 돌았다. 교도관들은 감옥을 철거하고 수감자들을 안전한 다른 장소로 옮겼다. 어떠한 시도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교도관들은 감옥을 짓느라 헛수고 했다는 것에 대해 화가 치솟았고 수감자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이 그들이 배운 방법 대로 죄수 번호를 반복해서 부르라고 강요했으며 그것이 자신들을 증명하는 새로운 것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강화시켰다. 교도관들은 머지않아 이 번호 세기를 수감자들을 괴롭히는 또 다른 방법으로 이용했으며 죄수 번호를 틀린 자에게는 평소보다 더욱 오래 기합을 주는 등의 신체적 고통을 주기도 했다. 급격히 위생상태가 악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이 생리적 현상을 못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이 그들의 변기통을 비울 수 없는 벌을 주기도 했다. 한편 매트리스는 이러한 엄격한 감옥에서는 보물이었으며 교도관들은 매트리스를 뺏어서 콘크리트 위에서 재우는 등의 벌을 주기도 했다. 몇몇 수감자들은 벌거벗은 채로 다니도록 강요받기도 했으며 남색(男色)을 흉내내는 등의 성적 모욕을 받기도 했다.


짐바르도는 그의 실험에 점점 몰두 했으며 적극적으로 이 감옥 실험에 참여했다. 4일 째, 몇몇 수감자들이 탈옥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짐바르도와 교도관들은 그들을 더욱 안전한 지역 경찰서로 보내려고 했지만 공무원들은 짐바르도의 실험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실험이 진행되면서 몇몇 교도관들은 폭력적으로 변했다. 실험자들은 교도관 중 3분의 1이 진짜로 잔학한(sadistic) 경향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실험이 일찍 끝났을 때 교도관들 대부분은 화를 냈다.


짐바르도는 참가자들이 그들의 역할에 완전히 흡수 되었다고 말하며 그들은 이것이 실험인데도 가석방을 위해서라면 벌금을 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의 가석방 신청이 전부 거부되었긴 했지만 실험에서 나간 실험 참가자는 아무도 없었다. 짐바르도는 모든 금전적 보상을 잃은 후에 그들이 실험에 참가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뿌리 깊숙이 감옥에 흡수가 되었으며 그들 스스로를 수감자라고 생각했으며 그들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들어온 수감자인 #416이 다른 수감자들에 대한 행태를 보고 걱정을 표했다. 교도관들은 이러한 반항에 응했다. 그가 단식 투쟁을 한다면서 소세지를 먹기를 거부 했을 때 교도관들은 그를 방에 가두었고 이것을 독방 감금이라고 말했다.[2] 교도관들은 다른 수감자들이 #416을 반대하기 위해 #416이 독방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수감자들의 담요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으며 물론 모두 거절했다.


짐바르도의 여자친구인(후에 결혼함.) 크리스티나 마슬락(Christina Maslach)이 이 실험에 초대 받았을 때 감옥의 엄청난 실상을 본 후에 당장 이 실험을 그만두라고 짐바르도에게 얘기했으며 짐바르도는 실험을 끝냈다. 짐바르도는 이 감옥에 대해 본 50명 이상의 사람 중에 도덕에 대한 질문을 던진것은 마슬락 혼자 였다고 말했다. 2주 동안 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스탠포드 감옥 실험은 불과 6일 만에 끝이 났다.


 


날짜 별 실험 정보


 


실험 첫째 날


 


실험은 실제 장기복역자의 조언을 통해 스탠퍼드 대학교 심리학부 건물 지하에 만들어진 모의 감옥에서 시행되었다. 죄수 역을 맡은 피험자들에게는 이 장소가 모의 감옥이 아닌 스탠퍼드 주립 교도소라고 거짓 안내되었다. 그리고 경찰의 협조를 통해 죄수 역의 피험자는 실제 상황처럼 체포당한 뒤 취조를 받은 후 모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교도관 역의 피험자들은 죄수 역의 피험자들을 취조한 뒤 옷을 모두 벗긴 채로 살충제를 뿌렸다. 그러고는 앞뒤로 번호가 적힌 원피스형의 죄수복을 입히고 오른쪽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 속옷 착용은 금지되었으며, 삭발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모자를 씌웠다. 죄수 역의 피험자들은 한 방에 3명씩 24시간 내내 지내면서 항상 이름 대신 번호로 불려졌다.


한편 교도관 역의 피험자들은 카키색의 유니폼을 입고, 경찰봉과 호루라기를 소지하였으며 표정을 감춤으로써 감정을 숨길 수 있도록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그들은 하루 여덟 시간씩 3교대로 근무했으며 근무가 끝나면 퇴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의 감옥 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법적 한도 내에서 자유롭게 규율을 세울 수 있었다. 실험 조교들은 그들이 우월해서가 아닌 단지 우연에 의해 교도관이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주지시켰다.


임의로 분류된 죄수 역할과 교도관 역할 사이에서는 말투나 감정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도관 역할의 피험자들은 명령조의 말투를 사용하는 반면 죄수 역할의 피험자들은 수동적인 어투가 나타났다. 교도관 역할의 피험자들은 법적으로 금지된 육체적 체벌 대신에 언어폭력으로써 죄수 역할의 피험자들을 모욕하였다. 교도관 역할의 피험자들은 죄수들의 작은 행동이나 말 하나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죄수 역할의 피험자들은 점점 더 수동적으로 변해갔다.


 


실험 둘째 날


 


새벽 2시 30분, 교도관 역의 피험자들은 죄수 역의 피험자들을 깨워 자신의 번호를 말하게 했다. 교도관 역의 피험자들은 이러한 행위가 자신들의 권위를 세울 수 있고, 죄수 역의 피험자들을 좀 더 통제하기 좋은 상태로 둘 수 있을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교도관 역의 피험자들과 죄수 역의 피험자들은 심각한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아침이 밝자, 죄수 역의 피험자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모자를 집어던지고 죄수복의 번호표를 떼려고 했으며, 침대로 바리케이트를 치거나 교도관 역의 피험자에게 언어폭력을 행사하였다. 이에 교도관 역의 피험자들은, 이전에 교도소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화기를 이용해 폭동을 진압하는 한편, 모든 죄수 역의 피험자들이 뒤돌아 있게 한 채 한 명의 피험자에게만 팔굽혀펴기를 시켰다. 놀랍게도 이러한 체벌 방법은 독일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것과 동일한 체벌이었다.


교도관 역의 피험자들은 자발적으로 야간 당직을 짜고 죄수 역의 피험자들을 심리적으로 혼란에 빠지게 해 결속력을 약화시켰다. 그들은 폭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세 명을 가장 악조건의 방에 수감시키고 반대로 폭동에 거의 가담하지 않은 세 명을 좋은 조건의 방에 수감시켰다. 그리고 반나절 뒤, 서로의 방을 바꾸어 수감시켰다. 이렇게 함으로써 죄수 역의 피험자들에게 혼란을 주고, 폭동 가담자들과 교도관 역의 피험자들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심어주어 죄수 역의 피험자들간 결속력을 떨어뜨렸다. 이 또한 교도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또한 교도관 역의 피험자들은 죄수 역의 피험자들을 극도로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그들은 죄수 역의 피험자들이 허락 없이 화장실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야간에는 양동이에 대소변을 보도록 했다. 모의 감옥의 환경은 극도로 열악해져갔다.


이 와중에 8612번 죄수 역의 피험자가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그는 분노에 차서 울부짖기도 하고, 쓰고 있지도 않은 모자가 머리를 조여온다고 호소했다. 필립 짐바르도는 그를 면담하고 실험을 계속할 것을 권유하였다. 면담을 통해 진정된 태도를 보이는 듯했던 8612번 피험자는 그러나 감옥으로 돌아가서는 아무도 자신을 내보내주려 하지 않는다고 소리쳤고, 모의 감옥 내부는 더욱 더 혼란이 가중되었다. 결국 연구진들은 8612번 피험자의 실험 참가를 중지시키고 귀가조치시켰다. 그런데 그가 모의 감옥을 빠져나가자 모의 감옥 내부에는 다음날 8612번 피험자의 주도로 죄수 역의 피험자들을 석방시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은 피험자들 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에게도 알려졌다.


 


실험 셋째 날


 


실험 셋째 날은 피험자 가족들의 면회가 있는 날이었다. 피험자 가족 중 몇몇 부모는 자신의 아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아들을 실험에서 빼내려 했으나, "당신의 자녀가 이 정도 힘든 것도 참지 못하는 사람입니까"라는 짐바르도의 말에 포기하고 그냥 돌아갔다. 8612번 피험자의 침입도 없었다. 그러나 짐바르도는 실험 셋째 날의 과정을 동료 교수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가 실험의 목적을 상기하라는 동료 교수의 대답을 들었다.


짐바르도는 그동안 계속 고통을 호소하며 식사를 거부하던 819번 피험자를 면담하고, 그에게 실험을 중단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단순히 실험에 참가하는 것 뿐이고, 언제든지 중도에 실험을 그만둘 수 있었던 819번 피험자는 "다른 이들이 자신을 나쁜 죄수로 생각할 것이므로 중단하지 않겠다"라고 주장하였다. 짐바르도가 그에게 이것은 실험 상황이며 819번 피험자는 죄수가 아닌 평범한 일반인이라는 사실을 다시 주지시키고서야 819번 피험자는 실험을 중단하겠다고 말했다.


 


실험 넷째 날


 


가석방 신청이 실시되었다. 사실 이들은 돈을 내지 않아도 언제든지 중도에 실험을 포기하고 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험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죄수 역의 피험자들 다수는 돈을 내고서라도 감옥에서 나가겠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가석방이 무산되었고, 모의 감옥 내의 분위기는 더욱 더 악화되었다.


 


실험 다섯째 날


 


교도관 역의 피험자들이 죄수 역의 피험자들을 교묘한 방법으로 고문하고 성적 학대를 하는 것이 관찰되었다. 피험자의 부모들과 동료 교수들이 실험을 그만 둘 것을 요구하였고, 짐바르도 교수는 실험을 조기에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


 


실험 여섯째 날


 


피험자들에게 실험이 종료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하고 귀가조치시킴으로써 실험이 종료되었다.


 


결론


 


스탠포드 감옥 실험은 14일로 예정되었던 실험을 1971년 8월 20일에 6일 만에 끝났다. 이 실험의 결과는 사람들이 합법적인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제도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을 때 사람들의 민감성과 복종을 입증하는 데에 있어서 많은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이 실험은 인지부조화와 권력의 힘을 설명하기도 했다.


심리학에서 이 실험의 결과는 귀인 이론를 지지하기도 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 상황은 그들 각자의 개인적 성향보다는 참가자의 행동에 의해 야기되었다는 말이 된다.이것은 평범한 사람이 시험관의 명령에 의해 타인을 충분히 감전시킬 수 있는 전류를 내보내는 또다른 유명한 실험인 밀그램 실험과도 양립할 수 있다.


나중에 실험이 끝나고 나서 산 쿠엔틴 형무소와 아티카 형무소에서 끔찍한 반란이 일어났으며 짐바르도는 그가 실험에서 얻어낸 것을 미국 하원 사법부 위원회에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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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바르도 교수는 아부가리브 교도소의 만행을 보고는 '루시퍼 이펙트'라는 책을 내었다.


필립 짐바르도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
스탠퍼드 대학교 심리학과의 명예교수이며 예일 대학교, 뉴욕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2002년 미국 심리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과학 협회 대표 위원회(Council of Scientific Society President)의 회장과 스탠퍼드 테러리즘 심리학 센터의 소장을 맡고 있다. '깨진 유리창 이론'의 연구로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짐바르도 교수는 혁신적인 연구자이자 교육자이며 〈심리학의 발견(Discovering Psychology)〉이라는 TV 시리즈를 창안해 상을 받았다. 그는 또한 성인의 수줍음을 최초로 연구했으며 수줍음이라는 사회적으로 불리한 조건으로 고통받는 성인과 청소년을 위한 '수줍음 클리닉'을 개설했다. 그가 수행한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은 세계 곳곳에서 TV를 통해 방영되었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며, 많은 대학교와 고등학교의 필수 교재에 수록되어 있다.

2004년에 그는 이라크의 아부그라이브 포로 수용소에서 발생한 범죄행위로 기소된 미군 퇴역군인의 군법재판에서 전문가 증인으로 출석했다.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는 그의 웹사이트 www.prisonexp.org는 매년 수백만 건의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으며 6개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그의 연구 및 경력에 대한 정보는 www.zimbardo.com에서 얻을 수 있다. 


링크 아우슈비츠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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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생각/내용 2010. 9. 8. 00:59


아우슈비츠 수용소 (Auschwitz Concentration Camp)
살인악마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독일 총리로 권력을 잡을 당시(1933년)
수용소 정문. "노동이 자유를 만든다" 라고 씌여있다
버려진 시체들
산을 이룬 희생자들의 신발
가스실 내부
생체실험에 이용된 아이들
      아 !, 아우슈비츠! 이 한마디 외침 밖에 달리 무슨 말이 있을수 있으랴.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잔혹행위의 박물관이라 할 이 거대한 시설을 둘러보는 관광객들은 누구나 입을 굳게 다문다.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야만의 극치가 모두 엄연한 사실이었다고 이 수용소 시설과 유물과 사진들은 웅변하고 있다. 이 역사의 현장과, 전쟁범죄의 전형을 보여주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요즘 평화를 기원하는 사람들의 발길로 붐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아우슈비츠의 외국 관광객 가운데 피해국 이스라엘과 가해국 독일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이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는 피해자 나라와, 끝없이 과거사를 참회하는 가해자 나라가 모두 정책적으로 이 도시로의 수학여행을 권장하기 때문이다.
 수용소 의사 멩겔레 박사에 의해 인체실험을 받고있던 집시소녀들. 너무 여위어 성별구분도 어려울 정도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폴란드 남부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독일의 강제수용소이자 집단학살수용소. 나치 학살의 생생한 현장에 400만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가스실, 철벽, 군영, 고문실 등이 있다.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50㎞ 지점에 위치한 아우슈비츠는 문명을 배반한 야만의 극치이며 인류가 저지른 가장 잔혹한 행위의 흔적이다.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의 상징인 강제수용소로 잘 알려져 있는 아우슈비츠는 원래 인구 5만 명의 작은 공업도시로, 폴란드어로는 오슈비엥침 이라고 한다. 이 도시의 외곽에 있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수용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생지옥을 만나게 된다. 학살한 시체를 태웠던 소각로, 카펫을 짜기 위해 모아둔 희생자들의 머리카락, 유대인들을 실어 나른 철로, 고문실 등이 끔찍했던 광기의 역사를 전해 준다.4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의 현장.1940년 봄, 친위대 장관인 하인리히 힘러가 주동이 되어 가시철망과 고압전류가 흐르는 울타리, 기관총이 설치된 감시탑을 갖춘 공포의 강제수용소를 세웠다. 그 해 6월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고, 1941년 히틀러의 명령으로 대량살해시설로 확대되었으며, 1942년부터 대학살을 시작하였다. 열차로 실려온 사람들 중 쇠약한 사람이나 노인, 어린이들은 곧바로 공동샤워실로 위장한 가스실로 보내 살해되었다. 이처럼 가스, 총살, 고문, 질병, 굶주림, 심지어는 인체실험을 당하여 죽은 사람이 40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 중 3분의 2가 유대인이다. 희생자의 유품은 재활용품으로 사용했고, 장신구는 물론 금니까지 뽑아 금괴로 만들었으며, 머리카락을 모아 카펫을 짰다. 뼈는 갈아서 골분비료로까지 썼으니 사람의 몸뚱이 중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1945년 1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나치는 대량학살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막사를 불태우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 수용소 건물과 막사의 일부가 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7년 폴란드의회에서는 이를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희생자를 위로하는 거대한 국제위령비를 비르케나우에 세웠으며, 수용소 터에 박물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나치의 잔학 행위에 희생된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 유네스코는 1979년 아우슈비츠를 세계문화유산에 지정하였다.인구 5만명 남짓한 수용소 도시 오시비엔침 시가지를 약간 벗어난 수십만 평 들판에 자리 잡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겉으로는 아주 평화롭게 보인다. 고압전류가 흐르던 철조망만 아니라면, 아직 붉은 색이 고운 2층 벽돌 건물들은 전원적인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키 큰 포플러의 정연한 행렬과, 잘 가꾸어진 잔디와 꽃밭이 연출하는 겉모습이다. 그러나 줄 지어 늘어선 건물 안으로 한 발자국만 들어서면 관광객들은 고통스러운 정서의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수용소 지하감방 '질식의 방' 수감자들이 손톱으로 그린 벽화. 해골같은 모습은 자신들의 얼굴이다.  첫 건물에서는 끔찍하게 살해당한 유태인 시체를 태운 재그릇이 관광객을 맞아준다. 유럽 각지에서 강제로, 혹은 기만적인 수법으로 연행해 온 유태인 열차가 도착하면, 나치는 노동력이 없는 어린이와 노약자, 부녀자, 불구자 등을 따로 집합시켜 즉시 가스실로 데려갔다. 총살, 교수형, 강제노동, 질병, 굶주림, 고문, 인체실험 등으로 죽은 사람들을 합쳐 이 수용소에서 생목숨을 뺏긴 사람은 150만 명으로 추산된다.그렇게 죽은 시체들은 가스실에 딸린 소각시설로는 다 처리할 수가 없었다. 야외 소각장을 여럿 만들어야 했다. 
시체 소각로
      죽은 사람의 옷과 신발과 소지품들은 재활용품으로 쓰였고, 잘라낸 머리칼로는 카펫을 짰고 뼈는 갈아서 골분비료로 썼기 때문에 유태인은 죽어도 버릴 것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는 구역질을 참지 못해 밖으로 달려 나가는 관광객들도 있다. 휴먼 카펫의 원료인 머리털이 전시실을 가득 메운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볼 사람이 있을까.갈비뼈가 앙상한 가슴에 말라붙은 젖가슴을 부끄러워하는 여인과, 인체실험 대상인 집시 소녀들의 앙상한 전신 사진은 체중 35kg이 넘는 여성 재소자가 없었다는 안내자의 설명을 증명해 주었다. 한 여성 재소자가 먹을 것으로 유혹하는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고 빵 3개로 허기를 채웠다니 배고픔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인지를 말해준다. 가스실 바로 옆에 설치된 소각장. 독일에서 만들어 현지에서 조립한 시체소각로.  한꺼번에 900명을 살해하였던 가스실은 인간의 야수성을 웅변하는 증거다. 인근 제2, 제3, 제4수용소에는 그보다 더 큰 가스실이 있었다니 살인의 공업화, 살인기술의 과학화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가스실 옆에 있는 시체소각로는 아직도 가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탈주자, 탈주 방조자, 정치범 등을 처벌하던 지하 감방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최대의 모욕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아사의 방' 이란 곳은 음식공급을 끊어 굶겨 죽이는 곳이고, '질식의 방' 은 산소 결핍으로 서서히 죽게 하는 시설이다. 이 방에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사력을 다해 손톱으로 벽에 새긴 그림과 글씨들이 남아있다. 해골 같은 얼굴들은 아마도, 그 방에서 죽어가던 자신과 동료들 모습일 것이다.1982년 교황청이 성인 순교자로 추서한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가 순교한 곳이 바로 이 방이다. 폴란드 출신 사제였던 그는 탈주자 발생에 대한 징벌로 10명의 동료가 '아사의 방' 으로 가게 되자, 아내와 어린 자식 걱정으로 우는 젊은이를 대신해 그 방에 들어가기를 자청한 것이다. 면적이 54만평이나 되는 제2수용소 구내로 뻗은 철도 인입선. 유럽 각지에서 끌려온 유태인들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남자는 강제노역장, 노약자는 가스실로 끌려갔다.  200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임레 케르테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출신이라는 사실도 우연이 아니다. 유태계 헝가리인인 그는 열다섯 어린 나이에 이 죽음의 도시에 끌려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이다.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운명> 3부작에서 홀로코스트는 인간세상에서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규정하였다.그 예단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현대사에서 여러 차례 적중되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르완다와 코소보의 인종청소, 체첸과 중동지역 종족분쟁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아우슈비츠는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런 야만을 인류사회에서 영원히 뿌리 뽑아야 한다.
      글이 너무 장문이어서 읽기에 불편하셨으리라 생각 된다.그러나,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인종말살 사건이니 만큼기왕에 읽는 분들을 위하여 몇 군데 검색을 거쳐압축, 또 압축한 글임을 밝혀 두는 바이다.60 년대 후반의 '킬링필드' 사건처럼 사후에 씌어진 글이라 이론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편적이나마 여러 사진들을 살피며 사실성에 입각 편집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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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슈비츠 여성 인체실험 기구 발견


      아우슈비츠 수용소 인근에서 150개가 넘는 부인과 및 외과 시술기구가 무더기로 발견됐다고 아우슈비츠 박물관이 26일 밝혔다.

      이들 기구는 당시 여성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잔인한 인체실험을 했던 외과의사 카를 클라우베르크의 행적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분석된다.

      문제의 기구들은 폴란드 남부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 근처 한 주택에서 발견됐다.
      나치 학살의 생생한 현장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인근에서 150개가 넘는 부인과 및 외과 시술기구가 무더기로 발견됐다고 아우슈비츠 박물관이 26일(현지시각) 밝혔다.

      이들 기구는 당시 여성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잔인한 인체실험을 했던 외과의사 카를 클라우베르크의 행적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분석된다.

      문제의 기구들은 폴란드 남부 오시비엥침(독일어로는 아우슈비츠) 근처 한 주택에서 발견됐다.

      박물관 측은 "최근 몇년 사이 가장 눈에 띄는 발견 가운데 하나"라며 "모든 정황이 클라우베르크에 의해 기구들이 사용됐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나치의 SS 엘리트 친위대원이었던 클라우베르크는 여성의 집단 불임시술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여성 수용자 수백명이 그의 실험대상이 돼 생을 마쳐야 했다.

      그는 1945년 1월 옛소련의 '붉은 군대'가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를 몰아내자 독일 베를린 근처의 라벤스브뤽 여성 수용소로 자리를 옮겨 실험을 계속했다.

      그해 6월 소련인들에게 체포돼 25년형을 받은 그는 1955년 서독으로 보내졌다. 이곳에서 수용소 생존자들에 의해 또다시 기소됐고, 2년 뒤 숨졌다.

      이번에 기구들이 발견된 주택은 2차 세계대전때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둘러싸여 완전히 폐쇄됐던 지역에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처음에는 폴란드 정치사범을 수용하기 위해 세워졌지만 유럽 유대인을 집단학살하는 장소가 됐다.

      1940~1945년 이곳 수용자들을 비롯해 폴란드인, 소련인 등 약 110만명이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미워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은(안내자설명)

          첫:어머니가 유방암으로 2년 고생후

          죽었다.유대인 담당의사에게 "우리 어머니를 잘 고쳐 주셔서 고맙다" 고


                      반어법적으로 의사에게 비꼬는 편지를 쓴다. 또 예술학교에 낙방한 것도 유대인 선생이 떨어

          뜨렸다고 한다

          둘:나라없이 떠도는 유대인들이 뛰어난 머리와 장사수완으로 대부분의 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근히


       그들을 미워하고 질투하던 사람들이 그들이 없어지면 자기들에게 이익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는 것


      2차대전 당시 유대인 박해및 학살의 진상

       

      첫째 - 1차대전직후까지 독일은 유대인에 대해 관대했다

      유태인 박해는 다른 유럽국가들이 심했으며 독일은 오히려 관대했다. 그래서 많은 유태인들이 2차대전 전에는 독일에 가장 많이 거주 했다. 그리고 독일계 유태인 금융제벌인 막스바르부르크는 히틀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걸로 유명하다.

       

      둘째 - 독일은 유태인들에 대해 차별을 별로 하지 않았다

      독일 유태인들은 다른 유럽국에 비해 출세나 사업을 하기 쉬웠고 이들은 학계, 법조계, 의학계, 금융계, 언론계등 독일사회 전분야를 장악할수 있었지만 유태인들은 독일사회와 화합하려 하지 않았고 나중에 독일 국민들의 반감을 사게 되는 원인이된다(1992년 LA폭동때 빈민폭도들이 자수성가한 한인교포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약탈한것과, 인도네시아 폭동때 짱골라교포들이 원주민들에게 당한것과 같은 이치이다)

       

      셋째 - 독일은 유태인의 독립국가 형성에 신경을 썼다

      1933~1941년 까지 독일은 유태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독일의 밀텐슈타인이 유대인이주를 하인리히 히믈러 SS사령관은 시온주의자의 대아랍 지하군사 조직인 '하가나'의 활동을 도왔다.), 1942년 요제프 괴밸스의 본격적인 유태인박해 주장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유태인 학살 보다는 그들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섬으로 보내 그들만의 국가를 형성시키고 나중에 독일의 우방으로 삶으려 했다.

       

      넷째 - 독일의 등뒤에 칼을 꽃은 유태인

      독일이 친영국 성향의 유태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려하자 당시 독일의 경제를 잡고 있던 유태인들은 독일을 굴복시키기위해 독일의 수출을 분쇄시키고 전세계적인 독일상품 불매운동을 벌인다. 그리고 이 활동을 신성한 전쟁이라고 하면서 세계 유태인경제 연합회 회장인 운터마이어가 앞장을 선다 뿐만아니라 전쟁중에 일부 유태인이 연합군과 결탁하여 연합군의 폭격을 유도하는 신호등을 장착하는 등의 밀정행위를 하자 히틀러는 모든 유태인을 소용소에 강금 시킨다.

      이쯤되면 유대인의 행위는 국가 반역죄에 해당되며 국가반역죄는 어느나라에서나 사형에 해당 된다.

       

      다섯째 - 그러나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만다

      시온의 칙훈서(유태인의 세계경영지침서)가 발견되어 알려지고, 공산당활동에 유태인들의 간접협조한 혐의와, 1936년 프랑스주체 독일 외교관을 암살하자 반유대감정으로 독일이 들끓기 시작했고 크리스탈학살 사건으로 유태인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더이상의 피해를 막기위해 유태인이 학살당하지 않도록 2만명의 유태인을 강제로 수용소에서 수용하게 된다.

      좀더 덧붙여서 말하자면 독일을 패하게 만든 세계 1차대전의 배후에는 바질 자하로프라는 유대인 전쟁무기상인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영국의 군수제벌인 빅커스사의 영업이사로써 친독적인 그리스 국왕을 추방하여 세계대전의 장기화를 획책했다고 한다.

      특히 독일의 군사기밀을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으로 빼돌린 사실 하나 만으로도 독일이 유대인을 증오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영국군이 사용한 수류탄은 독일의 기술로 만들어진 수류탄으로써 이 성능좋은 독일제 수류탄이 독일군을 죽이는 촌극까지 벌어지게 된다.

       

      여섯째 - 유태인 600만 학살은 조작 확대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발진티푸스와 장티푸스)

      실제로는 60만정도이며 그것도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과 전염병(더이상의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시체들을 소각하게 된다)으로 사망한 사람이 대다수이다 25(7.6평)평방미터 되는 곳에 7~800명을 집어넣고 독가스로 죽였다는데, 실제론 그런 계산이 안나옴니다, 그리고 관광객들에게 전시되는 아우슈비츠 가스실과 소각로는 194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스탈린의 소련군 또한 폴란드 유태인을 많이 죽였으며 나중에 이것마저 독일의 만행으로 뒤집어 쓰게 된다.

       

       

      유태인 홀로코스트,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내가 알기로 이 세상에서 유대인만큼 그들이 겪었다는 수모와 고난과 순교에 대해 우는 소리를 하는 족속도 없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들이야말로 유럽의 정치와 경제, 주식시장, 그리고 국가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실질적 군주들이란 사실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1919년에 유태인 희생자가 600만명?
      1차대전 직후 미국과 유럽에서는 그 진위를 떠나 이 전쟁에 대한 유태인 국제은행가들의 배후 음모설이 무성했다. 서구의 유태계 언론은 이러한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런 맥락에서 1919년 미국의 유태계 유력지 American Hebrew 에 실렸던 한 기사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눈길을 끈다:

       

      유태인 남자와 여자 600만 명 생필품의 부족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80만 명의 어린 아이들이 주린 배를 안고 울부짖고 있다. 이러한 비참한 운명은 이들이 신의 계명이나 인간의 법을 어겨서가 아니라 전쟁의 참상과 유태인의 피를 원하는 가혹한 인종차별주의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이와 같은 홀로코스트는...” (The Crucifixion of Jews Must Stop!, October 11, 1919)

       

      유태인 희생자 600만 명이라는 수치는 2차대전과 관련하여 또 다시 등장하게 된다. 뉴욕의 유태교 랍비 이스라엘 골드슈타인은 1942년 12월13일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당시까지 독일 점령지의 유태인 60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으며, 1943년 3월2일 뉴욕 메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열린 유태인들의 독일규탄집회에 대한 1943년 3월 2일자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랍비 헤르츠(Rabbi Hertz)는 히틀러 정권에 희생된 유태인의 수가 600만 명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2세기 로마 치하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던 바코크바 항쟁에 관해 탈무드(Gittin. 57b-58a)는 로마군이 베타르에서 40억명의 유태인을 학살했으며 1천6백만 명의 유태인 어린이들을 두루마리에 감아 불태워 죽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 40억 명의 유태인은 고사하고 1천6백만 명의 유태인 유아들이 지구상에 존재했는지 의문이다.

       

       

      Holocaust revisionism의 선구자 뽈 라시니에; 그 자신이 전쟁 중 독일 강제수용소 수감자였다.

       

       

      홀로코스트 (Holocaust)
       

      a. 美-英의 프로파간다

      - 이미 근거 없는 낭설로 밝혀진 유태인의 기름으로 만든 비누(Haaretz, Nazi Soap Stories Termed 'Invention', February 11, 2005)나 멩겔레 박사의 생체실험에 대한 얘기는 고사하더라도 2차대전 중 미국과 영국에서는 주요언론의 反독일 흑색선전이 난무했다. 한때 미국에서는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유태인들이 조직적으로 감전사(感電死) 당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들까지 가미된 기사가 유포되기도 했다. (이 기사에는 가스실에 대한 언급이 없다.) 1945년 2월 미국의 주요 일간지들은 아우슈비츠를 해방시킨 소련 병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독일군이 “일시에 수백 명을 전기 처형할 수 있는 특수 콘베어 벨트를 가동했고 시신들은 벨트에 의해 소각로에 옮겨져 몇 초 내에 화장된 뒤 그 재는 근처 양배추 밭의 비료로 쓰였다...”고 보도했다. (United Press dispatch from Moscow; Washington D.C. Daily News, February 2, 1945)

       

      - 당시 현직 미국 대법원 판사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연합국측 수석검사로 활약했던 Robert Jackson은 독일군이 일시에 2만 명의 유태인을 자취도 없이 “증발”시킬 수 있는 “새로 발명된” 기계를 아우슈비츠에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blue series, Vol. 16, June 21, 1946)

       

      b. 유태인 희생자 600만 명 (아우슈비츠 사망자 400만 명에 근거)

      - 1990년까지 폴란드 아우슈비츠 기념관에 있었던 추모석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40년에서 1945년까지 이곳에서 수감자 400만 명이 나치 살인마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舊추모석판

       

      그러나 교체된 새 추모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곳이 영원히 인류에 대한 절망의 울부짖음과 경종의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이 곳에서 나치스는 150만 명의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를 살해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끌려온 유태인들이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1940-1945.”

       

      새로 교체된 석판

       

      1991년 10월 20일자 벨기에 일간지 Le Soir 에 따르면, “국제 아우슈비츠 보존위원회는 1990년 11월 400만 명의 희생자를 명시했던 아우슈비츠의 추모석판을 “150만 이상의 희생자”로 표기되어 있는 새 석판과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 1989년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역사가 예후다 바우어(Yehuda Bauer) 교수는 이제까지 아무 이의 없이 수용되어 왔던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희생자 400만 명設이 의도적인 허구임을 인정할 때가 왔다고 밝혔다. 1990년 7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기념관은 이스라엘의 야드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과 공동으로 유태인과 비유태인을 도합해 약 100만 명이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두 기관은 이들 가운데 몇 명이 의도적으로 처형되었으며, 몇 명이 다른 원인으로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Y. Bauer, Fighting the Distortions, Jerusalem Post - Israel, September 22, 1989)

       

      - 1998년 9월 8일자 워싱턴포스트는 아우슈비츠에서 400만 명의 유태인이 독가스로 살해되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라는 월터 라이히(Walter Reich) 前워싱턴 홀로코스트 박물관장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라이히는 보다 사실에 가까운 숫자는 110만에서 150만일 것이라고 밝혔다.

       

      Former Sorbonne literature professor Robert Faurisson: "The alleged Hitlerite gas chambers and the alleged genocide of the Jews constitute one and the same historical lie, which has made possible a gigantic financial-political swindle, the principal beneficiaries of which are the State of Israel and international Zionism, and whose principal victims are the German people and the entire Palestinian people."

       

      - 유명한 홀로코스트 역사가 제랄드 라이트링어(Gerald Reitlinger)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유태인의 숫자를 약 70만으로 추정했다. 좀더 근래에 들어서, 프랑스 홀로코스트 역사가 장-끌로드 프레삭(Jean-Claude Pressac)은 아우슈비츠의 총사망자 80만 가운데 63만 명을 유태계로 추정했다. (G. Reitlinger, The Final Solution, 1971; J. C. Pressac, Le Crematoires d'Auschwitz: La Machinerie du meurtre de mass, 1993)

       

      - 1990년 5월 31일 프랑스의 보수성향 시사지 National Hebdo 는 아우슈비츠 사망자 수(비유태인 포함)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어떻게 수정되어 왔는가를 보도했다:

       

      “8백만(프랑스 전범조사국) - 5백만(르몽드, 1978년 4월20일자) - 4백만(1990년까지의 아우슈비츠 기념관 추모비) - 3백만(아우슈비츠 소장 Rudolf Hoess의 자백) - 160만 (예후다 바우어 교수) - 125만(Raul Hilberg 교수) - 85만(제럴드 라이트링어, The Final Solution) - 7만5천(소련 국립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아우슈비츠 관련문서들).”

       

      (Source: National Journal, 2003)

      Date

      Official sources of information

      Figures

      31.12.1945 French Investigation Panel on Nazi-War-Crimes

      8.000.000

      19.08.1998 Chief Rabbi from Poland (Süddeutsche Zeitung)

      6.000.000

      20.04.1978 Le Monde (French daily paper)

      5.000.000

      23.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5.000.000

      20.04.1989 Eugen Kogon, Der SS-Staat (famous book of a holocaust survivor, page 176)

      4.500.000

      31.12.1952 Der Neue Herder (Enzyclop., Germany) 7th edition (p. 214)

      4.500.000

      01.10.1946 IMT-doc-ument 008-USSR (Nuremberg Military Tribunal)

      4.000.000

      02.05.1997 USA-Today (daily paper USA)

      4.000.000

      24.11.1989 Chief Prosecutor, Mr. Majorowsky, Wuppertal, Germany (indictment 12 Js 1037/89)

      4.000.000

      26.07.1990 Allgem. Jüdische Wo.Ztg. (Jewish weekly, Bonn)

      4.000.000

      08.10.1993 ZDF-Nachrichten (German TV, ZDF-News Magazine)

      4.000.000

      25.01.1995 Wetzlarer Neue Zeitung (German daily paper)

      4.000.000

      01.10.1946 IMT-doc-ument 3868-PS (Nuremberg Military Tribunal)

      3.000.000

      01.01.1995 Damals (official monthly magazine on history, sponsored by the Bonn government)

      3.000.000

      18.07.1990 The Peninsula Times (daily paper, S.Francisco, USA)

      2.000.000

      25.07.1990 Hamburger Abendblatt (daily paper Germany)

      2.000.000

      27.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quoting Chancellor H. Kohl. Minimum of 2 million)

      2.000.000

      02.05.1997 USA-Today (daily paper USA)

      1.500.000

      11.06.1992 Allgem. Jüdische Wo.Ztg (Jewish weekly, Bonn)

      1.500.000

      08.10.1993 ZDF-Nachrichten (German TV, ZDF-News Magazine)

      1.500.000

      23.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1.500.000

      03.05.2000 Die Welt (German daily paper)

      1.500.000

      01.09.1989 Le Monde (French daily paper)

      1.433.000

      02.02.1995 BUNTE Illustrierte (German weekly magazine)

      1.400.000

      22.01.1995 Welt am Sonntag (German daily, Sunday edition)

      1.200.000

      27.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1.100.000

      27.01.1995 IfZ (Institut for Contemporary History, München, a government institution)

      1.000.000

      03.05.2000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reputed German daily)

      1.000.000

      31.12.1989 Pressac, Auschwitz, Technique ... (official report on Auschwitz, commissioned by the Jewish Beate Klarsfeld Foundation)

      928.000

      27.09.1993 Die Welt (German daily paper)

      800.000

      22.01.1995 Welt am Sonntag (German daily, Sunday edition)

      750.000

      01.05.1994 Focus (German weekly magazine)

      700.000

      23.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700.000

      31.12.1994 Pressac, Die Krematorien ... (2nd official report on Auschwitz, commissioned by the Jewish Beate Klarsfeld Foundation)

      470.000

      08.01.1948 Welt im Film (British news reel, nbr. 137)

      300.000

      06.01.1990 Frankfurter Rundschau (German daily paper)

      74.000

      31.05.1994 Hoffmann, Stalins Vernichtungskrieg (Book on Stalin's war by a renowned German historian, p.302 f.)

      74.000

      17.08.1994 Intern. Red Cross Arolsen - Department of holocaust investigations (Ref. nbr.: 10824)

      66.206

       

      호주 출신 revisionist Dr. Frederick Toben

       

      c. 사망원인


      - 전후 연합군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수용소들의 운영과 관련된 수만 건의 독일 문서들을 획득했으나 이 가운데 독일 수뇌부가 독가스로 유태인을 대량학살하려 했음을 입증하는 문서는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유태계 역사가들은 독일이 연합군이 진주하기 전 관련문서들을 소각했거나, 혹은 독일이 모종의 암호 문서를 통해 대량학살을 조직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연합군이 확보한 독일 문서들 가운데 유태인에 대한 인종말살 계획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문건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역사가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사실 유태인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압수된 독일 측 문서들은 독일과 폴란드에 설치되었던 강제수용소들이 사람을 죽이기 위한 시설이 아니라 유태인과 전쟁포로들을 동원한 강제노동시설이었음을 보여준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의 Arthur Butz 교수에 의하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다른 수용수로의 배치를 기다리는 수감자들을 수용했던 일종의 강제노동인력 집결지였다. 아우슈비츠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온 이유는 노역이 불가능한 노약자나 병자가 주로 이곳에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탈출시도를 비롯한 수용소규칙 위반자들에 대한 처형사례를 제외하고 사망자 대다수의 사망원인은 비위생적 환경으로 인한 전염병(특히 발진티푸스)의 창궐과 영양실조 및 기아였다. (Arthur Butz, The Hoax of the Twentieth Century, 1976)

       

       

      - 유태계인 프린스턴대의 Arno Mayer 교수는 1942년 ‘반제회의’에서 도출되었다는 소위 ‘최종해법(Final Solution)'에 대한 그의 저서에서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사망자들 가운데 수용소 당국에 의해 처형된 숫자보다 각종 질병이나 기아에 의한 사망자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고 밝히고 있다. (Arno Mayer, Why Did the Heavens Not Darken?: The 'Final Solution' in History, 1989)

       

      - 전쟁 중반기부터 많은 강제수용소들에서 창궐하기 시작한 발진티푸스를 억제하기 위해 독일 당국은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의도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독일이 유태인을 조직적으로 말살하려했다는 혐의에 반박하기 위해 피고측의 증거물로 제출된 문서들에서도 드러난다. 한 예로 1942년 12월 28일 친위대 산하의 수용소 관리행정국이 아우슈비츠를 포함한 각 수용시설들에 하달한 공문은, “Heinrich Himmler 친위대 총감의 지상명령”이라는 전제 하에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 숫자의 절대적 감소를 위해 수감자들의 건강 및 영양상태와 작업환경을 개선하는데 총력을 기울일 것”과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여 상부에 제출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Nuremberg doc-ument PS-2171, Annex 2. NC & A red series, Vol. 4, pp. 833-834)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d. 독가스 사용설


      -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을 대량 살상하기 위한 독가스실이 가동되었다는 設은 독가스실이나 처형장면을 직접 목격한 적은 없다는 유태인 前수감자들의 증언에 의존한다. 이는 전쟁 중 독일이 탄환 절약을 위해 독가스로 유태인을 대량학살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연합군은 선전활동의 일환으로 강제수용소들에서 - 딱히 유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 수감자들이 독가스로 집단 처형되고 있다는 요지의 폴란드어와 독일어로 작성된 전단을 자주 살포했다. 또한 같은 내용은 연합군이 운영하는 단파 라디오를 통해 주기적으로 전 유럽에 방송되었다.

       

      아우슈비츠의 한 작업실

       

      - Marika Frank라는 한 유태인 여성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 수감되었을 때는 하루당 최소 2만5천명의 유태인들이 독가스로 처형-화장되고 있었다는 1944년 7월 이었다. 1945년 2월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그곳에 수감되어 있었던 그녀는 아우슈비츠에 머무는 동안 가스실에 대해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으며 그곳에서 유태인들이 독가스로 살해되었다는 얘기는 전쟁이 끝난 뒤에 들었다고 술회했다. (Sylvia Rothschild, Voices from the Holocaust, 1981)

       

      - 33년간 듀퐁社에서 화공학자로 근무했던 William B. Lindsey 박사는 1985년 캐나다의 법정에서 독가스로 그 만한 인명을 살상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technically impossible") 얘기라고 증언했다. 이 분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와 마이다넥에 전시되어 있는 가스실을 현지 조사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했다는 방법으로는 지클론-B로 사람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일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The Globe and Mail - Toronto, February 12, 1985)

       

      *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주요 수용소들에는 실제로 이들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들 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가스실이 존재했다. 이들의 목적은 발진티푸스를 옮기는 이를 죽이기 위해 수용소 운영진을 포함, 수감자들의 의복과, 침구 등을 소독하는 것이었다. DDT가 등장하기 전까지 지클론-B는 세계적으로 널리 쓰였던 대표적인 살균소독제였다.

       

      프레드 루처

       

      - Fred A. Leuchter는 사형수를 처형하기 위한 가스실 제작 전문가로 미주리 주(州)교도소의 가스 사형집행실을 도안하고 제작했던 보스턴 출신의 공학자이다. 1988년 2월 아우슈비츠와 마이다넥 “가스실”에 대한 현장조사를 단행한 그는 법정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단정했다, “현존하는 가스실 및 관련시설들이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 시설들에는 적절한 봉인장치와 환기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만약 이 시설들이 독가스로 인명을 살상하는데 사용되었다면 독일인을 포함, 그 시설 밖에 있는 사람들도 안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The Leuchter Report: An Engineering Report on the Alleged Execution Gas Chambers at Auschwitz, Birkenau and Majdanek, 1988)

       

      이반 라게스

       

      - 1944년 내내 매일같이 독가스로 살해된 수만 구의 시신들이 화장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의문은 남아있다. 캐나다 캘거리에서 대형화장터를 운영하는 Ivan Lagace는 1988년 4월 독일계 홀로코스트 연구가 Ernst Zundel 소송 심리에서 그와 같은 일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증언했다. 이에 덧붙여 그는 하루당 1만에서 최고는 2만구에 이르는 시신들이 화장되었다는 주장은 "한 마디로 비상식적(preposterous)”이며 “현실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beyond the realm of reality)”이라고 증언했다. (Canadian Jewish News - Toronto, April 14, 1988)

       

      수감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미공개 사진)

       

      e. 국제적십자협회(International Red Cross) 보고서

       

      “국제적십자협회 보고서가 지니는 가장 큰 의미는 전쟁의 말기를 향해 의심의 여지없이 이들 수용소에서 대량 발생한 사망자들의 진정한 사망원인을 규명해주고 있다는데서 찾아 볼 수 있다. 보고서의 일부를 발췌하면;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이후 독일의 수송체계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특히 전쟁의 마지막 몇 개월 동안 수용소들은 거의 식량을 보급받지 못했고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사자(餓死者)의 숫자는 급증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독일정부는 1945년 2월 1일 이와 같은 사실을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에 통보해 왔습니다... 1945년 3월, 적십자협회 회장은 독일 친위대의 칼텐브루너 장군과 만나 문제를 논의했고 양자의 합의 하에 ICRC는 구호품을 수용소 수감자들에게 직접 전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ICRC 대리인을 수용소들에 상주시키게 되었습니다...’

       

      Ernst Kaltenbrunner, 1946년 처형; 마지막 유언, "독일에게 행운을!"

       

      수용소들에 대한 식량보급이 중단된 원인으로 독일 교통수송망에 대한 연합군의 공습을 지목한 적십자는 수용소 수감자들의 안위를 위해 1944년 3월 15일, ‘연합군의 야만적인 폭격’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4년 10월 2일 ICRC는 수송체계의 붕괴로 인해 전 독일국민이 대규모 기아사태에 직면해 있다는 우려를 독일 외무성에 전달했다. 영양실조와 기아, 이에 더해 의약품이 극도로 희귀했던 전쟁말기, 발진티푸스를 비롯한 각종 전염병이 만연했다는 사실은 해방된 수용소들에서 연합군 병사들이 발견한 많은 시체들에 대해 설명해준다. (실제로 독일 전역에 흩어져 있었던 강제수용소들은 인근 도시들에서 발생한 폭격, 질병, 기아로 인한 독일인 사망자들의 시신을 처리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따라서 연합군이 발견한 시체더미에는 적지 않은 수의 독일인 시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 중 적십자위원으로 일했던 스위스 태생의 Maurice Rossel 박사는 Serge Lanzmann과의 1993년 인터뷰에서 아우슈비츠를 예고 없이 시찰한 그는 그곳에서 가스실이나 굴뚝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으며 시체를 태우는 냄새도 접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Theresienstadt 수용소에 그가 목격한 것은 좋은 옷을 입은 부유한 유태인들이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뿐이었다.” (Richard E. Harwood, Did Six Million Really Die?, 1988)

       

      *1984년 소련이 최초로 공개한 아우슈비츠 관련 문서들을 토대로 작성된 국제적십자협회의 해당년도 12월 31일자 감사보고서에는 독일이 전쟁기간(1939-1945) 동안 운영했던 모든 강제수용소들에서 발생한 총 사망자수(모든 국적과 사망원인 포함)가 282,077명으로 나타나 있다. 아우슈비츠 사망자 수는 53,633 명이다.

       

       

       

       

      f. 2차대전 前後 세계 유태인 인구

       

       World Almanac, 1929 - 15,630,000 (p.727)

       

       World Almanac, 1933 - 15,316,359 (p.419)

       

       World Almanac, 1936 - 15,753,633 (p.748)

       

       미국유태인위원회(AJC, Bureau of the Synagogue Council), 1939 - 15,600,000

       

       World Almanac, 1940 - 15,319,359 (p.129)

       

       World Almanac, 1941 - 15,748,091 (p.510)

       

       World Almanac, 1947 - 15,690,000 (p.748)

       

       미국 이민귀화국 (INS), 1950 - 15,713,638 (Appendix VII, 'Statistics on Religious Affiliation'; Report to U.S. Senate Judiciary Committee, 1950)

       

      Jews In Europe - 1938:
      8,039,608 - 1948: 9,372,668

       

       

       

      2000년, 유태계인 미국의 노먼 핑클슈타인(Norman G. Finkelstein)교수는 유태인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모든 논란을 이렇게 요약했다:

       

      “히틀러의 유태인 대학살과 관련된 책들의 대부분은 사료(史料)로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실로 홀로코스트 연구는 뻔한 거짓말 아니면 넌센스로 채워져 있다... 홀로코스트 업계가 매일같이 만들어 내는 얘기들의 비상식적 본질을 감안할 때, 신기한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별 의심 없이 그런 얘기들을 믿는다는 사실이다.” (The Holocaust Industry, 2000)

       

       

      Anne Frank
      그녀가 쓴 일기로 인해 안네 프랑크는 아마도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유태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수 많은 다른 유태인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안네와 그녀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1944년 9월, 15세의 나이로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에서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프랑크는 몇 주 뒤 Bergen-Belsen 수용소로 옮겨졌고 이 곳에서 1945년 3월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아우슈비츠에 남아 있던 중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오토 프랑크는 수용소 병원에 입원 중 병상에서 아우슈비츠에 진주한 소련군을 맞았다. 그는 1980년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아우슈비츠 병원

      - 아우슈비츠 수용자인 유대인을 치료해주는 의사 -

       

      아우슈비츠의 간호원들

       

      만약 독일의 국가정책이 유태인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었다면 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가족사가 비극임은 분명하나 그들의 이야기는 독일이 의도적으로 유태인을 말살하려 했다는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전쟁 전 유태인에 대한 독일정부의 주안정책은 국외이민이었고 전쟁발발 직후에는 게토에, 그리고 1943년 이후로는 강제수용소에 수용하는 것이었을 뿐 유태인의 인종적 말살을 노린 genocide가 아니었다.

       

      미국 revisionist Michael Hoffman과 Canada의 Ernst Zundel

       

      관련 링크:

       

       http://www.zundelsite.org/

                   

       http://www.revisionist.com

       

       http://www.ihr.org

       

       http://www.adelaideinstitute.org/

       

       

       

      Abraham Foxman.  ADL National Director
      "The Holocaust is something different. It is a singular event. It is not simply one example of genocide but a near successful attempt on the life of God's chosen children and thus, on God Himself. It is an event that is the antithesis of Creation as recorded in the Bible; and like its direct opposite, which is relived weekly with the Sabbath and yearly with Torah, it must be remembered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ADL bulletin - ADL on the Frontline, January 1994)

       

      *"The Talmudic epigraph of Stephen Spielberg's Schindler's List, "'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 The observant knew that the traditional version, the one taught in all Orthodox yeshivot (religious schools), speaks of 'whoever saves the life of Israel.'" (Peter Novick, The Holocaust in American Life, 1999)

       

      에밀리 & 오스카 쉰들러

       

      "What did I think? I'll tell you. Scheisskopf (sXhead). But I was the idiot for falling in love with him. I am never going to cry; there is no sense in it. Schindler changed women like he changed suits. Once, we were well-off, but then we lost everything and he abandoned me and I have not recovered... There never was a 'Schindler's List'. It was drawn up by a man called Goldman. This man took money to put a name on that list - no money, no place on the list. I was told this by a Dr. Schwartz, in Vienna; he had paid in diamonds to save his wife... Hah! Neither of us was a hero... Oskar was always complex; he was playing both extremes, always, even at the end with Nazis against the Jews." - Emily Schindler, wife of Oskar Schindler, Drudge Report, June 1, 1999

       

       

      Steven Spielberg
      "Flanked by Holocaust survivors, Los Angeles teens and many of the film's stars, including Ralph Fiennes, Ben Kingsley, Embeth Davidtz and Caroline Goodall, Spielberg said he hoped "Schindler's List" would prove to Holocaust deniers that the murder of 6 million Jews did occur and that it would help educate children to prevent history from repeating itself... "There are Holocaust deniers who are so stuck in their hatred for Jews that neither 'Schindler's List' nor the Shoah Foundation will be able to convince them that 6 million murders actually occurred, but still we must try to convince them," Spielberg said... Survivor Helen Jonas-Rosenzweig told the director, "Schindler saved us, but you gave us our second life." Spielberg said that in the decade since the release of "Schindler's List," the world has become a "very sad place again," which shows that people "don't really learn that much from history, and they need to." (Spielberg: Won't comment on 'Passion',
      www.CNN.com, March 4, 2004)

       

       

      The Black Book of Communism - LE LIVRE NOIR DU COMMUNISME
      "An 800-page compendium of the crimes of Communist regimes worldwide, recorded and analyzed in ghastly detail by a team of scholars. The facts and figures, some of them well known, other newly confirmed in hitherto inaccessible archives, are irrefutable. The myth of the well intentioned founders - the good czar Lenin betrayed by his evil heirs - has been laid to rest for good. No one will any longer be able to claim ignorance or uncertainty about the criminal nature of Communism, and those who had begun to forget will be forced to remember anew." (from the dust jacket of English edition, 1997)

       

      Moshe Leshem.  former Israeli ambassador to U.N.
      "This was a movement staffed in its upper echelons by Jewish Communists and yet the world is comparatively silent about the holocaust and war crimes this thoroughly kosher system inflicted and the identity of the persons who were its architects. Auschwitz is on the tip of every tongue but who has heard of Kolyma, Magadan, the Solovetsky islands and the other infernal Soviet centers of human destruction in eastern Siberia? Who has seen films and books about the millions of human beings worked, frozen and starved to death in the construction of the White Sea-Baltic Canal, over which stood a triumphant, colossal statue of the Jewish communist mass murderer Genrikh Yagoda? The Jewish-communist epoch of mass murder has disappeared into history in one of the great vanishing acts of all time. Only practiced deceivers, with all the sleight of hand of the most accomplished stage magicians, could pull off such a coup against the rest of humanity. To trick mankind into focusing nearly all expiatory sentiment, monuments and commemoration on Jewish victims and brand the Mark of Cain - the very words war crime and holocaust itself - on Germany and upon Germans alone as their proprietary trademark, must be regarded as one of the most masterful achievements of psychological warfare in the annals of illusion... Israelis and American Jews fully agree that the memory of the Holocaust is an indispensable weapon - one that must be used relentlessly against their common enemy... Jewish organizations and individuals thus labor continuously to remind the world of it. In America, the perpetuation of the Holocaust memory is now a $100-million-a-year enterprise, part of which is government-funded." (Balaam's Curse: How Israel Lost Its Way, and How It Can Find It Again, 1989)

       

      유태인 공산주의자들의 만행

      1918년부터 1953년까지 유태인이 장악한 소련은 3천만에서 5천만으로 추정되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발틱3국, 폴란드, 헝가리 국민들을 학살했다.

       

      라트비아 1941년

       

      




      1983년 5월말 어느날 폴란드 크라코프市 공항 입국장 앞, 흰머리의 60대 노인이 터질 듯 붉은 색의 장미 39송이를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라? 진짜 실라야?”

      세련된 옷차림의 50대 후반 여인이 그에게 달려와 안겼다. 두 사람은 헤어진 지 39년만에 만났다. 이 남자 유라세크 빌레키의 손에 들린 장미의 개수는 그들이 헤어져있던 년수 만큼이었다.

      1944년 7월 21일 23살 청년이던 폴란드인 빌레키는 나치 친위대 장교 복장을 한 채 유태인 죄수복 차림의 19살 처녀 실라 시불스카를 데리고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을 막 통과하고 있었다.

      유태인 수만명이 학살당한 아우슈비츠에서 유라세크는 나치군복생산 공장 인부로 일하고 있었다. 폴란드 태생 유태인 실라는 가족과 함께 끌려와 하루하루 죽음의 문턱을 넘기고 있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실라가 끌려온 첫째 날이었다. 수용소 입구에서 유라세크가 막 잡혀온 유태인무리중에서 실라를 발견한 것이다. 두 사람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실라의 가족은 그날 바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며 나치가 끌고간 ‘샤워실’에서 가스 샤워를 맞고 숨졌다.

      실라는 유라세크가 일하던 공장에 배치돼 일하게 됐다. 유라세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실라를 살리기 위해 탈출계획을 짰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친위대 장교복을 훔쳐 입고 실라를 죄수처럼 끌고 수용소 정문을 걸어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탈출은 성공했다. 9일을 걸어 크라코프의 유라세크 부모집을 찾아갔다. 실라는 안전한 이웃집 농장 지하창고에 숨겨졌다. 둘은 약속했다, “전쟁이 끝나면 꼭 만나 결혼하자”고.

      유라세크는 바르샤바로 가서 레지스탕스가 됐다. 1945년 여름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점령하며 2차대전은 끝났다. 바로 그날 유라세크는 크라코프로 달려갔다. 하지만 실라는 없었다.

      불과 한달전 이 도시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자 실라는 유라세크를 찾아 헤맸다.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고 여긴 실라는 그가 오지 않자 죽었다고 여겼다. 절망한 실라는 생존 유태인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다.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실라는 유라세크를 죽었다고 여겼고, 유라세크는 그녀의 행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1982년 실라가 처음으로 폴란드를 찾았다. 묵었던 호텔에서 누군가에게 오래된 사랑 이야기를 했다. 듣고 있던 사람이 “그 스토리 나도 아는데”라고 했다. 유라세크는 매년 바르샤바에서 크라코프로 찾아와 실라를 수소문했던 것이다.

      1년뒤 공항에서 만난 두 사람의 눈은 뜨여지지가 않았다. 흐르는 눈물이 전혀 멈춰지지가 않았다.

      실라가 말했다, “우리 서로 이혼하고 같이 삽시다”. 유라세크가 말했다, “당신만을 사랑해. 그렇지만 아무 것도 몰랐던 자식과 손자들을 버릴 수는 없어”.

      실라는 “우린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며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2002년 뉴욕에서 노환으로 숨졌다.

      AP통신은 두 사람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탈출한 지 정확히 66년이 되는 21일 “유라세크 빌레키와 실라 시불라스카의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가 이스라엘 야드바셈재단에 의해 공개됐다”고 보도했다.



      사진=AP통신

      통신과의 인터뷰에 나선 유라세크의 손에는 젊은 남녀의 흑백사진이 들려 있었다. 바로 20대 초반의 자신과 10대 후반의 실라였다.

      “우리는 서로 운명이었습니다. 그때가 다시 돌아온다면 똑같이 그녀를 사랑하고 함께 탈출했을 겁니다”

      유라세크 빌레키의 목소리는 89세 노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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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에서는
1931년 미국의 보험회사 관리감독자였던 H. W. 하인리히가 그의 저서 <산업재해예방(Industrial Accident Prevention, A Scientific Approach)>에서 소개한, 오늘날 산업재해 예방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이론으로 받아드려지고 있는 법칙을 말한다. 그는 수천 건의 보험 고객상담을 통해 자료 분석 결과를 소개하면서 '사고는 예측하지 못하는 한 순간에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여러 번 경고성 징후를 보낸다.'고 주장하며 이를 1 : 29 : 300의 법칙으로 정립했다. 통계적으로 볼 때 심각한 안전 사고가 1건 일어나려면 그 전에 동일한 원인으로 경미한 사고가 29건, 위험에 노출되는 경험이 300건 정도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징후들을 제대로 파악해서 대비책을 철저히 세우면 대형 사고를 막을 수 있다는 논리이기도 하다.
그의 주장은 2000년 개봉된 영화 <데스티네이션>을 통해 일반인들에까지 알려졌으며, 최근에는 산업재해뿐만 아니라 그 적용분야가 확대되어 개인은 물론 사회적 실패나 사고 원인을 분석하는 등 사회ㆍ경제 전반적인 현상을 분석ㆍ설명하는 데 널리 활용되고 있다



-------------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보통 1:29:300 이라고도 불리며 안전관리에서는 거의 바이블 수준으로

인정받는 학설입니다. 

이것은 미국의 (보험)통계학자 하인리히가

330건의 사고를 분석하면 1건의 대형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이미 29건의 위험한 사고가 있었고, 그리고 큰 사고로는 이어지지 않았으나

큰 사고가 날 뻔했던 300건의 경미사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소한 사고가 많이 발생한다는 것은 대형사고가 날 수 있다는
경보라고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을 무관심하게 처리하면 결국 

큰 사고를 예방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고는 큰 사고 작은 사고가 있고 작은 사고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결국 사고는 운이 좋아 작은 사고로 그쳤지만 어떤 사고든

대형사고로 연결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사고에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고 제품의 A/S에도 해당이 됩니다.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도요다 자동차의 리콜 문제가 그렇고,

어떤 전자제품도 그랬고 과자에도 그랬습니다.

 

이런 것을 잘못 관리하면 회사가 망하는 수도 있습니다.

일본의 어느 우유회사는 백년이 넘는 전통을 가졌다고 했지만

소비자의 불만을 무시하다 도산되다시피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교훈을 잘 아는 민간기업들은 옛날과는 다르게

정말 적극적으로 시정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쥐머리 같은 이물질이 있다는 소비자 신고를 받은 기업은

아예 해당제품의 생산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26일 우리의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 한 방에 침몰했고

46명의 고귀한 우리장병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리고 사건 발생한지 2달이 되는 지금까지 국론이 분열되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북한의 잘못을 이야기 하는데,

그게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을 하인리히 법칙에 대입하면

그 동안 분명 사소하게 넘긴 우리들의 잘못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노사분규가 많은 회사의 제품을 잘 사지 않는다든지,

경영자가 부도덕한 회사의 제품을 기피하지 않는가요? 

그렇지만 정부에서 하는 일이 그럴리가? 하는 의문을 가질수도 있겠습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고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고

분명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사고라는 것은 작은 문제가 쌓이고 쌓여

가장 취약한 부분부터 터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악순환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좋은 일은 연속으로 생기는데, 이것을 선순환이라고 하는데,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방향을 바꾸려면 문제를 알아야 합니다. 


 

--------------------




----------------


[하인리히법칙 = 1:29:300의 법칙] 


실패를 예고하는 300번의 징후 ?


1920년대에 미국의 여행보험회사에 다니고 있던

 

허버트 하인리히는

 

이 회사의 엔지니어링 및 손실 통제 부서에 근무하면서

 

업무 성격상 많은 사고 통계를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실제 발생한 7만 5,000건의 사고를

 

정밀 분석하여

 

1931년에 『산업재해 예방』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하인리히는 이 책에서 재해에 의한 피해 정도를 분석해

 

큰 재해와 작은 재해

 

그리고 사소한 사고의 발생 비율이 어떠한지를 숫자상으로

 

명확히 밝혀냈는데,

 

그 비율이 바로 1 대 29 대 300이었다.

 


하인리히는 산업재해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큰 재해가 한 번 발생한다면

 

그 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작은 재해가 29번 있었고,

 

또 운 좋게 재해는 피했지만 같은 원인으로 부상을 당할 뻔한 사건이

 

무려 300번이나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법칙에 따르면 산업재해는

 

어떤 우연한 사건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그러할 개연성이 있었던 경미한 사고가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 자명해진다.

 


 

주먹구구 방식이 아니라 과학적 통계에 근거하여 도출된

 

하인리히 법칙은

 

어떤 상황이든 간에 큰 재해는 항상 사소한 것들을 방치할 때

 

발생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원래 하인리히 법칙은 산업재해에 적용되어 발표되었던 것이었으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사고나 재난, 실패와

 

관련된 법칙으로 확장되어 해석되고 있다.



이 법칙은, 결정적 실패를 피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나타나는

 

실패의 징후들을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페덱스의 1:10:100의 법칙]

 


서비스 부문에서 페덱스(세계적인 물류기업)에는

 

1:10:100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불량이 생길 경우 즉각적으로 고치는 데에는 1의 원가가 들지만,

 

책임소재나 문책 등의 이유로 이를 숨기고

 

그대로 기업의 문을 나서면 10의 원가가 들며,

 

이것이 고객 손에 들어가 클레임으로 되면,

 

100의 원가가 든다는 법칙이다. 



-------------


하인리히 법칙

제비가 낮게 날면 곧 비가 온다. 어린 시절에 어른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었다. 제비가 낮게 나는 것은 먹이인 잠자리가 낮게 날기 때문이다. 잠자리가 낮게 나는 것은 공중에 습기가 많아 날개가 젖기 때문이다. 잠자리가 낮게 나는 것은 공중에 습기가 많아 날개가 젖기 때문이다. 잠자리는 잘 보이지 않지만 제비가 낮게 나는 것은 쉽게 목격할 수 있기 때문에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세상 모든 것은 징후를 앞세우며 다가온다. 그리고는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다.

 

2008년 5월 12일 중국 쓰촨성에서 일어났던 대형지진의 경우를 보자. 지진이 올 때는 어느 순간 불쑥 오지 않는다. 징후들을 앞세우고 초기 미진까지 앞세우면서 일어난다. 당시 쓰촨성에서 일어난 지진은 강도 7.8로 이는 30년 만의 대지진이었다. 쓰촨성 지진 역시 발생하기 전에 여러 징조들이 나타났다. 보름 전 후베이 은스시에 있는 관인탕 저수지에서는 8만 톤가량의 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오전 7시경 고요하던 저수지의 물이 갑자기 소용돌이치더니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이는 저수지 바닥이 갈라지면서 일어나는 전형적인 지진 징후들 중 하나이다. 진앙지 인근에서는 우물물의 수위가 갑자기 높아졌으며 지진 발생 며칠 전에는 강물의 온도가 뜨거워지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는 지층에 변화가 생기면서 나타나는 지진의 징조들이다. 또 지진 발생 10여일 전에 지진운(地震雲)이 발생하는가 하면 지진 발생 사흘 전에는 이상 징후를 느낀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가 집단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지진운이란 지층 속에 있던 뜨거운 김이 갈라진 틈으로 흘러나와 형성되는 구름을 말한다. 이것을 보고 주민들은 지진의 징조라면 당국에 대책을 요구했으나 당국에서는 이틀 연속 비가 내리고 수온이 상승했기 때문에 두꺼비들이 산란과 부화를 위해 이동하는 것이라며 주민들을 안심시켰다. 올림픽을 앞두고 대외 이미지를 의식해서 이를 무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곧 대대적인 지진으로 이어졌다.

 

사회적인 현상들도 마찬가지이다. 교통사고가 잦은 곳에는 머지않아 대형사고가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면 맞다. 몇 가지 잠재적인 중후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우연처럼 겹쳐질 때, 큰 사건으로 이어진다. 한 번의 대형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여러 번의 작은 사고가 지나가고 잠재적인 사고는 더 많이 지나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처음 통계적인 법칙으로 정립한 사람은 하버드 윌리엄 하인리히였다. 미 해군장교출신의 하인리히는 보험회사에서 보험 감독관으로 산업재해 일을 하고 있었다. 크고 작은 각종 산업재해를 보며 그 사고들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 거라는 느낌을 받게 되면서 본격적이 연구에 착수했다. 그는 보험회사에 접수된 5만 건의 사건, 사고에 대한 자료를 분석하여 이들의 통계적인 상관관계를 밝혀냈다.

그에 의하면 한 번의 대형사고 이를테면 산업재해로 사망사고가 발생했다면 그 이전에 동일한 원인으로 부상이 29건 발생했으며 부상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사고가 날 뻔한 경우가 300건 정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1929년에 발표된 이 논문은 하인리히 법칙으로 명명되었다. 이를 사회적인 사건, 사고에 적용하자면 강력 범죄사건 하나가 발생했다면 동일 수법의 경범죄가 29회, 범죄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범죄의 시도가 300건 정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우리나라 교통 관련 연구원에서 발표한 자료도 이와 근사한 수치를 보이고 있다. 교통사고로 사망자가 발생하는 장소에서는 그 이전에 35-40회 정도의 가벼운 사고가 있었고 300여 건 정도의 교통법규 위반 사례가 적발되더라는 것이다. 하인리히는 또 사고로 인한 재해비용에 대해서도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가설을 내놓았다. 하나의 사고로 인해 재해가 발생할 경우 그 비용은 직접비용이 하나라면 간접비용은 넷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재해비용 전체를 계산하려면 직접적인 손해비용에다 곱하기 5를 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손해보다는 보이지 않는 간접적인 손실이 더 크다는 얘기다.

 

그 후 하인리히 법칙은 타이와 피어슨에 의해 훨씬 더 정교하게 분석되었다. 그들이 영국 보험회사의 사건, 사고 100만 건을 분석하여 발표한 결과를 보면 사망사고 1건 뒤에는 중경상 3건, 응급처치 50건, 물손사고 80건, 사고가 날 뻔한 사례가 400건으로 집계되었다. 이 법칙들은 자연 현상이나 사회현상 모두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으로 어떤 사회적인 큰 사건이 일어날 때도 특정 사건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암시하는 작은 사건들이 잇따라 지나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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