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언(名言)이나 격언(格言), 잠언(箴言)은 어떤 교훈이나 가르침을 주는 말 또는 학문 등의 핵심을 간략하게 외우고 말하기 쉽게 그 내용을 간결하고 짧은 문장으로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 속담과도 비슷한 말이며 보통 속담은 일반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 나와 그 작자가 분명하지 않은 것을 가리키고 명언은 저명한 사람의 발언 또는 문장이나, 작자는 불명하나 널리 알려진 고전에서 유래한 것을 가리킨다.


아포리즘에 대한 정의 (모리와 함께  화요일)

 

Aphorism: An aphorism is a short witty sentence which expresses a general truth or comment.

아포리즘은 일반적인 사실이나 의견에 대한 짧은 재치있는 문장을 말한다

- 출처: Collins Cobuild Advanced Learner’s English Dictionary


아포리즘깊은 진리를 간결하며 압축된 형식으로 표현한 짧은  (금언격언잠언경구 )

- 출처민중서림 엣센스 국어사전

 

아포리즘이란 위의 사전적 정의와 같이 짧은 형식으로  금언을 말합니다

아포리즘이란 단어를 처음 접하게  책은

바로 모리와 함께  화요일인데요 (Tuesday with Morrie)

노교수와 제자사이의 대화에서

노교수의 아포리즘을 제자가 경청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모리의 대표적인 아포리즘을 보기로 할까요?

 

Accept what you are able to do and what you are not able to do.

Accept the past as past, without denying it or discarding it.

Learn to forgive yourself and to forgive others.

Don’t assume that’s its too late to get involved.

 

너가 할수 있는 것들과 할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여라

과거는 과거로써 받아들이되 그것을 부정하거나 버리려 하지 말아라

너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남을 용서하라

무엇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었다고 단정하지 말아라

- 출처: Tuesday with Morrie

 

위의 아포리즘을 사랑에 대해 제가 재해석 하자면 이렇습니다

 

사랑에 대해서 너가   있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받아들여라

남을 사랑할 수는 있지만남이 너를 사랑하게  수는 없다

지나간 사랑은 과거로써 받아들이되

그것을 애써 지우려하지말고버리려 하지 말아라

과거는 과거로써 아름다울 뿐이지다만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의 끝에는 당신 그리고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자신의 과오를 돌아보고 나를 용서하고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남을 용서하라

 

사랑이 끝났다고 다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라

네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때다

지금 행동하라





“내가 누구인지 밝혀두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사실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을 수 있다…. 나는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이다. 나는 성인이 되느니 차라리 사티로스이고 싶다.”

 

그는 책의 서문을 그렇게 썼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제자로 규정했다. 그리고 반인반수의 사티로스(Satyros)가 되기를 원했다. 사티로스는 얼굴은 사람이지만 몸은 염소이며, 머리에 작은 뿔이 난 디오니소스의 시종이다. 주신을 모시는 시종답게 술과 여자를 좋아하며, 과장된 표현과 몸짓으로 우스꽝스러움을 자아내는 급이 뚝 떨어지는 잡신이다.




디오니소스의 제자이며 디오니소스의 시종을 희망한 이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그리고 이 책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제목과 서문도 파격이지만, 본문은 한 술 더 뜬다. 이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네 개의 질문을 던지고 차례로 응답한다.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   

 

세상에! 21세기 오늘을 살아가는 깜찍한 소녀들도 “난 너무 예뻐요”를 노래할 때는 살짝 부끄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콧수염을 기른 근엄한 얼굴의 19세기 철학자가 정색을 하고 “난 왜 이렇게 현명한가”라니!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니체는 도발적으로 글을 썼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글을 물고기를 낚기 위한 낚싯바늘로 표현하기도 했다. 독자를 유혹하기 위한 글이라는 것이다. 요즈음 인터넷 용어로 말하면, 그는 ‘낚시질’의 원조인 셈이다. 그의 낚시질은 다양하다. 예를 들어 그는 [선악의 저편]에서 “진리가 여성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떠한가”는 질문을 던지고, [도덕의 계보]에서는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고 단정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우상의 황혼]에는 ‘망치를 들고 철학 하는 법’이라는 부제를 달았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모두를 위한 책이면서 그 누구도 위한 것이 아닌 책’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개인적으로 니체는 공손한 사람이었다는 게 니체 전기 작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그러나 글로 보는 니체는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거만하고, 무례하며, 위악적이다. 그는 굳이 그 점을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과장한다. 그는 왜 존경 받는 성인이 되기보다 지탄 받는 사티로스가 되기를 희망했을까?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교과서적인 정답을 안다.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도전을 한 무신론자이며, 객관적 진리를 향한 형이상학적 전통에 반기를 든 반형이상학자이고, 보편적 도덕 가치를 정초하는 시도 자체가 무망하다고 본 비도덕주의자다. 그러한 도발적 주장 때문에 니체 철학은 한편으로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비합리적인 철학의 전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 용감한 철학으로 상반되는 평가를 받아왔다.


잠깐! 여기서 짚어보자. 니체는 신을 믿지 않은 최초의 무신론자인가? 아니다. 역사의 시계를 멀리 돌릴 필요도 없다. 니체가 철학의 스승으로 삼았던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도 신을 믿지 않았다. 니체는 형이상학에 반기를 든 최초의 반 형이상학자인가? 아니다. 형이상학을 반대한 근대 철학자는 너

무 많아서 거론하기조차 힘들다. 대체로 근대 경험론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에 반대한다. (David Hume)은 형이상학 책은 불태워버리라고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또 물어보자. 니체는 도덕적 가치의 보편성을 의심한 최초의 인물인가? 아니다. 도덕적 회의주의의 흐름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 이후 도덕적 보편주의를 주장한 철학적 흐름만큼이나 뿌리가 깊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니체 철학은 뜨거운 감자가 되었는가?

 

그 비밀의 열쇠는 니체가 주장한 내용에서 찾지 말고 니체가 주장한 방식에서 찾아야 한다. 니체 철학은 아포리즘(aphorism)의 철학이다. 그가 쓴 글은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경구에서부터 하나의 주제에 대한 비교적 긴 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의 아포리즘이다. 아포리즘은 간결하지만 다의적이다. 쉽게 전달되지만 모호하다. 누구나 쉽게 니체를 읽지만, 니체 철학의 이해가 쉽지 않은 이유다. 그는 왜 이렇게 글을 썼을까? [차라

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피와 아포리즘으로 쓰는 사람은 읽혀지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산과 산 사이를 가장 빨리 가는 길은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긴 다리를 가져야만 한다. 아포리즘은 봉우리들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듣게 된 자들은 키가 크고 높이 솟은 자여야 한다”


단순히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기억되어야 하는 아포리즘은 천천히 음미해 가면서 읽어야 한다. 아포리즘은 사물과 직접적으로 관계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포리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물을 낯설게 제시한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지각 경계를 흔든다.












니체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신은 죽었다”는 말도 그렇다. 이 말은 관찰에서 나온 주장이 아니다. 신의 죽음은 ‘소식’의 형태로 전달된다. 그 소식을 전하는 자는 ‘광인’이다. 1인칭 시점으로 즐겨 글을 쓰는 니체가 이 대목에서는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광인을 등장시켜 그 소식을 전한다. 그런데 그게 묘하다. 광인은 이 소식을 기쁘게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광인은 시장 바닥에서 신을 찾다가 마침내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를 죽였다”고 외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절규한다. 그리고 또 말한다. “어떻게 우리는 모든 살해자 중에서 살해자인 우리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가?”라고. “세상에서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존재가 우리의 칼 아래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다”며, 이제 누가 우리를 위해 속죄를 해줄 수 있는가 묻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도 신의 죽음이라는 놀라운 소식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니체는 이 광인이 전하는 신의 죽음을 이렇게 맺는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날 광인은 몇몇 교회에 뛰어들어 신의 진혼곡(requiem aeternam deo)을 불렀다고 한다”.     

 

[즐거운 학문]에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 광인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인물로 바꾸어 무덤덤하게 한 마디 한다. “저 사람들은 아직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모양이지”.

 

니체는 신이 죽었다는 사건을 ‘근래의 최대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이 사건을 극화해서 전한다. 영어권 세계에 니체 철학을 소개한 카우프만(Walter Kaufmann)은 이 극화된 장면이 성가에서 차용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신의 죽음은 과학적 관찰이 아니고, 형이상학적 고찰도 아니며, 19세기 유럽문화에 대한 니체의 상황 진단이다. 이 극화를 통해서 니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주장처럼 신은 원래 없었으며 단지 인간의 속성이 외화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이 우화적 표현은 광인이 전하는 신의 죽음이라는 사건보다는 오히려 그 사건을 조롱하고 비웃은 당대 유럽 문화에 대한 고발에 초점을 맞춘다. 신의 죽음을 조롱하는 사람들은 신의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신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신의 죽음 이후에 또 하나의 신을 만들어 그것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신을 죽이고 난 후, 그 신이 남긴 흔적은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새로운 신을 만들어 죽은 신의 자리를 메웠다.      

 

그렇다면 새로운 신은 누구인가? 니체는 그것을 콕 짚어서 주장하지 않는다. 아포리즘을 통해서 기독교 신의 죽음과 새로운 신의 조짐을 경고했을 뿐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새로운 신을 과학으로 읽는다. 종교적 미신이 사라진 자리를 과학적 미신이 차지했다고 바라본다. 어떤 이는 새로운 신을 근대(modernity)로 읽는다. 종교적 신화는 죽었지만, 이성과 계몽을 축으로 하는 근대 신화가 새롭게 생겨났다고 본다.

 

니체는 신이 남긴 유산을 완전히 털어버리기를 원한다. 신의 흔적을 지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이 죽었다는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또 다시 아포리즘을 동원한다. 그 아포리즘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때로는 차라투스트라라는 초인을 통해서, 때로는 디오니소스라는 그리스 주신을 통해서, 때로는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라는 한때 그가 숭상했던 인물에 대한 혹독한 실명 비판을 통해서 그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 아포리즘이 궁극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과 예술의 장에서 주로 논의되던 니체를 철학의 장으로 이동한 20세기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그것을 니힐리즘(nihilism)으로 읽는다. 니체는 그의 초기 작품 [비극의 탄생]에서 세계의 근저는 그가 스승으로 삼은 디오니소스적인 심연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 심연을 덮기 위한 인간의 처절한 노력이 영원한 세계를 만들어냈다. 플라톤이 세운 이데아의 왕국은 그런 영원한 세계를 지향한 것이며, 기독교가 만들어낸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니체는 기독교를 플라톤 철학을 대중화한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세계는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나 플라톤 철학이 말하는 이데아는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감내하지 못하는 인간이 자기 보존을 위해 만든 조건일 따름이다. 삶의 자기 보존을 위해 만든 것을 니체는 ‘가치’라고 부른다. 따라서 모든 가치는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곧 ‘니힐’(nihil)이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의 역사는 디오니소스적 심연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들이 의미를 부여하는 니힐리즘의 역사다.


이런 틀에서 보면 기독교는 니힐리즘이고, 플라톤 이후 지금까지 서양 형이상학도 니힐리즘이며, 도덕의 보편 가치를 주장하는 도덕주의자도 니힐리즘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적 세계와 형이상학적 세계, 그리고 도덕적 세계를 최초로 부정한 철학자도 아닌 니체가 왜 그렇게 위험한 철학자로 취급되었는가 하는 단서를 하나 움켜잡는다. 니체는 지금까지 인류가 세운 모든 가치 체계가 니힐리즘이라는 점을 통찰한 철학자다.

 

니힐리즘은 지금까지 인류가 세운 고귀한 가치를 집어 던진다. 그래서 니체는 고귀한 성인이 되기 보다는 차라리 저속한 사티로스가 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풍자(satire)는 그 어원이 바로 사티로스에서 온 말이다. 니체는 우리가 듣기 싫어하는 독한 말을 내뱉기 위해 사티로스를 희망한 것은 아닐까?

 

지난 세기 후반기에 니체 읽기, 또는 니체 식으로 세상 읽기는 하나의 사조로 퍼져나갔다. 그 불을 지핀 것은 프랑스어권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다원화된 세계를 해석하는 틀로 니체의 아포리즘을 이용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단 하나의 니체 철학이 있다는 점에 반대한다. 니체 철학은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푸코는 니체 철학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고 니체 철학이 우리 삶에 어떤 효용성을 줄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니체 철학이 본질적으로 복수주의(pluralisme)라는 점에 동의하지만, 니체를 니힐리즘이라는 틀 안에 가두지 않고 창조적인 생성의 철학자로 적극 해석한다. 생성과 다원성, 그리고 얼핏 보기에 무질서하고 엉뚱해 보이는 우연성이 니체가 제시한 아포리즘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하고 무례한 질문을 던진 니체를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로 니체만큼이나 오만했고, 니체처럼 음울했던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를 떠올린다.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히브리스(hybris)라는 위험한 단어는 모든 헤라클레이토스주의자의 시금석이다. 바로 거기서 그가 자신의 스승을 이해했는지 또는 오해했는지 드러내 보일 수 있다”.

 

히브리스는 무례하고 거만함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술 마시고 방자한 행동을 하는 것도 히브리스 범주에 들어간다. 타인을 모욕하고 수치심을 주는 행위, 자신을 과시하면서 잘난 체 하는 행동도 모두 히브리스다. 그리스인들은 히브리스를 잘 다스리는 데서 미덕이 나오고, 히브리스가 날뛰는 데서 악덕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비극은 히브리스가 날뛰는 데서 오는 불행을 소재로 한다. 그러나 니체 철학에 따르면, 히브리스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발현이기도 하다. 그것은 삶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나오는 것이다.



결국 니체가 꿈꾸는 미래의 철학이 성공하는가 실패하는가 하는 여부는 히브리스가 가진 이중성을 이해하는 데 달려있는 셈이다. 물론 니체와 니체주의자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반면 니체에 반대하는 이들은 니체 철학 자체가 히브리스이며 니체의 철학적 사유가 정지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러셀이 니체 철학을 일종의 낭만주의적 흐름으로 보는 이유다. 어원적으로 보면, 니체 철학이 크게 의존하는 아포리즘이라는 말에는 이미 경계를 확정 짓는 지평선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여러분은 니체의 기획이 히브리스의 위험성을 뛰어넘는 생각의 새 지평으로 보는가, 아니면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철학적 히브리스라고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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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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