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내며 - 이택광

낡은 것이 사라졌는데, 새것이 출현하지 않는 상황이야말로 위기 자체이다.  7


인류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해왔다는 마르크스의 말은 ‘문제의 발견’이야말로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정확한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대답인 것이다.  7


자본주의가 끝난 뒤에 올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만, 지금 여기에서 노력할 수 있는 것은 공산주의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국 사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주장은 너무 이상론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자본주의를 고쳐서 쓰면 인간적인 자본주의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니까 밀이다.  8



1부 임박한 파국, 어떻게 맞설 것인가 - 하얏트 호텔 2012. 6. 25.


일부 좌파들처럼 은행가들이 얼마나 탐욕스럽고 부패했는지 불평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은 항상 탐욕스럽고 부패했기 때문이죠. 문제는 왜 금융자본이 오늘날의 이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는가 하는 겁니다.  20


중국이나 싱가포르를 민주적이라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는 극도로 역동적이고 생산적이며 동시에 파괴적이지만, 더 이상 민주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 비록 우리가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에 있다하더라도 근본적으로 경제 등등은 기술관료들이 모든 결정을 내리고 있는데, 이 상황은 위험천만하죠. ..

저는 서유럽과 미국 등을 포함하여 전 지구적으로 실업의 양상이 마르크스가 ‘노동예비군’(reserve army of labour)이라고 지칭한 그룹(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상대적으로 줄어들며, 잉여 노동인구는 이른바 노동 예지군으로 전락해 생산과정에서 추방당한다고 마르크스는 설명한다_편집자)의 형성과 깊은 연관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점점 더 급진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고 봅니다.

첫째, 산업의 광대한 현대화와 디지털화는 전형적으로 비 고용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영구적으로 비고용의 상태에 있게 만들었습니다.  21-22


또 다른 면으로, 하나의 국가 전체를 서계공동체(world community)에서 배제하는 일도 있습니다. 미국이 콩고를 불량 국가(rogue country)로 지목하여 무역을 규제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 이런 국가들은 내란으로 엄청난 혼란 속에 있으며,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에 단지 허술하게만 묶여져 있을 뿐입니다. 하나의 국가 전체가 실직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육받은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 교육받은 학생들은 동시에 엄청난 불만을 품고 있죠. ... 유럽공동체에서도 흥미롭게 벌어지고 있는 현상으로서, 자본주의의 세 번째 특징입니다.  23


노동문제에서도 이것은 매우 복잡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슬로베니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으로 안타까운 현상을 봅시다. 그들에게는 단체행동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감히 파업을 하지 못합니다. 일자리를 잃어서는 안 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용감하게 파업을 단행하는 유일한 그룹은 변호사나 의사처럼 특권을 가진 샐러리 부르주아들입니다. 그들은 파업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잇습니다. 하지만 다른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파업을 하지는 않습니다. 자신들의 특권을 위해 파업을 하죠. 글자 그대로 부르주아인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파업을 하지만 프롤레타리아이기엔 너무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습니다.  24-25


좌파의 위기...  오늘날 자본주의는 우리가 더 이상 단순한 소비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인도주의자가 되어 소말리아의 굶주린 아이들을 도와주라는 식으로 호소합니다. 소비를 잘하면 인도주의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원리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공적으로 잘 작동되고 있습니다.  27


신자유주의란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이말은 무슨 말인가? 오늘날의 미국을 보면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대통령 - 레이건과 부시 - 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무슨 일을 했는지 보십시오. 이들은 정확히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와는 정반대의 일을 했습니다. 레이건은 가장 원시적인 케인지언(keynesian) 방식으로 수출 지향의 방어적 무역을 내세웠습니다. 미국은 더욱더 강력한 나라가 되었죠. 알다시피 신자유주의는 실천 가능한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가장 중요하다고 할 경제 영역에서 신자유주의는 국가에 반대하면서 국가를 강화했습니다. 교육이나 기타 공공 영역은 민영화하면서 경제 영역은 국가 주도로 바꾸었습니다. 일보노가 중국 또한 마찬가지로 모든 경제 영역이 국가에 의해 신중하게 기획되었습니다. 미국은 강대국이 되면 될수록 신자유주의로 인해 국가의 영향력이 감소되고 기업화되었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전혀 반대였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가장 성공적인 공식은 국가에 의해 매우 치밀하게 계획된다는 것이빈다. 일본도 마찬가지이고 싱가포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싱가포르 국가만큼 치밀한 계획에 의해 집행되는 나라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28-29


좌파는 자본주의를 비판해왔지만, 위기가 닥치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좌파도 해결책을 제시할 수가 없었지요. 최근 대안으로 떠오른 최저소득제(기본소득제) 도입 문제도 자본주의를 지속시킨다는 관점에서 이루어진다면 근본적인 대안일 수 없습니다. 

좌파의 위기는 여기에 있습니다. 좌파도 주도해온 모든 비판적 운동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 그들이 요구한 것은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것들이었습니다.  29


자본주의를 종식시키는 것인가? 규제를 강화하는 것인가? 서로 다른 논의의 장들을 하나로 합치는 것인가? 의회민주주의 국가를 고수하는 것인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구체적인 제안을 할 수가 없습니다.  30-31


오늘날 좌파는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좌파가 된다는 것은, 매우 단순합니다. 비판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32


파국을 인정하면서, 과거의 사안에서 해결책을 가져와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을 피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문제에 공동체주의를 다시 도입해서 대처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코뮌정신 같은 것에 희망을 거는 것 말입니다. 과거에 대한 어떤 노스탤지어도 거부해야 합니다. 

오늘날 좌파는 어려운 문제에 대해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좌파는 훨씬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합니다. 사물이 예상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자각해야 합니다. .. 반동이 아니라 보수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반동은 멍청할 뿐입니다. .. 보수는 해결책을 내놓지는 못해도 난국을 정확하게 인지합니다.  33


홍세화 : <The Idea of Communism>에 실은 글 ‘How to begin from the beginning’(2009. 6. 23)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대의 프롤레타리아는 세 집단으로 분열돼 있다. 하나는 육체 노동자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지닌 지식 노동자들이고, 또 하나는 지식 노동자들과 배제된 자들에 대한 포퓰리스트적 증오를 보이는 노동자들이며, 마지막은 이러한 사회 전체에 적대적인 배제된 자들이다.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외침은 이제 유례없이 어려운 과제가 되어 있다. 이러한 현대 자본주의의 조건 아래서는 노동계급의 이 세 부분이 단결하기만 하면 이것으로 곧 승리다.” 말하자면 이들 세 그룹의 노동자들이 서로 단결하긴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인데, 과연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렸을까요? 그리고 이런 조건에서 좌파의 전망을 재구성한다면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요?  36


저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의 공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 연대하자고 도덕적 호소를 한다? 결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특정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위해 오랫동안 헌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

여기서 저는 염세적인 측면을 고수하고자 합니다. 저는 더 이상 단순한 마르크스주의적 논리를 믿지 않습니다. 위기가 고조되어 사람들이 가난한 상태로 전락ㅎ하게 되면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공감하게 된다는 식으로 쉽게 생각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훈을 언어야 합니다. 지난 위기가 우리에게 준 슬픈 교훈이 이것입니다. 연대감보다는 상대적 부를 통한 분리가 더 강했다는 것이죠. 사회적 약자나 외국인이 손쉬운 배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럽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주민들이 손쉬운 희생양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하층계급들이 이런 외국인에 대한 폭력에 훨씬 잘 동원됩니다, 오히려 부르주아가 관용의 자세를 갖고 있기 일쑤입니다.  38-39


직접 민주주의나 자기 조식화 같은 새로운 정치모델들이 있지만 제대로 작동할 거라 보기 어렵습니다. ..

거리의 민주주의가 문제라기보다, 어떻게 부ㅐ를 없애고 강력한 금융자본을 규제할 것인지 따위의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

많은 좌파들은 오만한 경향이 있습니다, 멍청한 대중이 자기 이익만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번한 대중은 훨씬 개방적이고, 대안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40-41


모든 운동은 다수가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10%만 운동에 참여합니다. 언제나 소수가 중심입니다. 소수에 대해 다수가 공감하는 거죠. .. 이러게 소수이긴 하지만 사회적인 조직화가 필요합니다. ...

수백만이 광장에 모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뒤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변화를 어떻게 느끼는지 그것이 핵심이죠. 이 지점에서 좌파의 고민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조직해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는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사람들의 견해나 일상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43


오늘날 정치의 기술이라는 것은 비록 우리가 체제 자체를 바꿀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현재의 체제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체제란 것은 획일적으로 똑같을 수 없습니다.  44-45


유럽은 유럽의 전통에서 나오고, 남미는 남미의 모색 속에서 나오고, 한국은 한국의 토양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를 위해 다분히 우리는 실용주의적인 입장을 취해야할 것입니다. 그리스가 훌륭한 교훈이 될 수 있겠죠. 위기의 순간에는 아무리 작은 당일라고 할지라도 갑자기 폭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보더라도 우리는 실용주의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배우는 것이 실용주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진정으로 ‘흥미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46




2부 지금, 여기,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 - 경희대 평화의 전당 2012. 6. 27.


1930년대 말 할리우드 코미디 영화에 나온 유머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지요. 주인공이 카페에 가서 크림 없는 커피를 주문합니다. 웨이터는 “죄송합니다만 크림이 다 떨어지고 우유만 있습니다. 크림 없는 커피는 없고 우유 없는 커피만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웃음)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없는 것, 즉 부정이 바로 그 정체성의 일부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변증법의 기본적 메시지의 일부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는 것, 물리적으로 봤을 때 우유 없는 커피는 크림 없는 커피와 같이 그냥 커피일 뿐인데, 그러나 둘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이 없는 커피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56


오늘날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면 직설적인 거짓말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사실이다 혹은 아니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함축적으로 거짓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함축적인 의미를 주면서 정반대의 의미를 전달하는 식이죠. 커피의 예가 적절할 것 같습니다. 우유가 없는 커피를 말하지만 결국은 크림 없는 커피를 준다는 것이빈다. 따라서 함축적 의미에 주목해야 합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그 메시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57


이렇게 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

헤겔의 담론에서는 이것을 총체성(Totality)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실재하는 것의 총체성, 그리고 실재하지 않는 것의 총체성 등등이 포함됩니다. 실제 변증법적 분석을 해보면 핵심은 특정 사건을 조화로운 총체성에 넣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말고 총체적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특정 개념 속에 다양한 부정과 실패를 포함시켜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의 자본주의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자본주의 총체성으로 바라보려면 '이것이 이상적으로 좋은 시스템이다'라고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만을 언급할 것이 아니라 다른 측면까지 포함하여 총체적으로 보아야 하고 또 무엇보다 자본주의가 실패하는 지점도 살펴봐야 합니다. 나아가 국내외적으로도 총체적으로 바라봐야 하지요.  58


이쯤에서 변증법적인 분석을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자본주의 혹은 공산주의에 관한 읿ㄴ적으로 보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에도 각 체제들의 실패 사례들, 또는 의도치 않았던 개념의 부산물드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변증법에서는 이런 실패들이 단지 운이 없어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의 개념 안에 포함된느 것들입니다. 이러한 실수들, 대립의 과정과 끔찍한 파생물들 역시도 그러한 보편적인 개념에 포함된느 것들이란 거지요.  60


우리는 왜 이와같은 협상을 명확하게 예측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지배하는 헤게모니 이데올로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61


자본주의에서 탐욕이 큰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지만, 우리가 자본주의에 대해서 반대한다고 이야기할 때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탓하고 탐욕과 부패로 원인을 돌리는 것은 중요한 분석을 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분석은 시스템 자체에 관한 분석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논의는 시스템 자체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분석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62


유럽에는 산타클로스가 있습니다. 빨간 옷을 입고 어린아이들에게 선물을 갖다 주는 존재, 완벽한 구조 아닙니까? 어른들에게 "산타클로스를 믿으세요?"라고 물어보면 "내가 바보냐?"라며 비웃겠죠. 그럼에도 오른들은 선물을 삽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를 믿니?"라고 물으면 "저도 바보가 아녜요. 부모님이 실망할까 봐 믿는 척하는 거예요."라고 답합니다. 이러한 신념이 하나의 사회적인 연결고리로 작동하지만 실제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믿어야 하는 이 대상이 상상의 존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68


19세기 중반에 독일인 인류학자와 탐험대가 기니에 있는 한 부족을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춤'을 추는 부족으로 아려져 있습니다. 인류학자는 춤을 보고 싶다고 요청했고, 하룻밤을 보내고 난 그 다음날 부족은 그 춤을 보여줬습니다. 인류학자는 상당히 만족스러워하며 원시 부족의 춤에 대한 보고서를 썼습니다. '이 춤은 죽음에 대한 춤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몇 년 후 또 다른 탐험대가 그 부족을 방문해서 예전에 만났던 인류학자와의 만남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두 번째 탐험대는 그 부족의 언어를 미리 배우고 갔기 때문에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부족은 첫 번째 탐험대가 자신들에게 무너가를 요구했고 자신들도 그들이 무엇을 원한느지 간파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족에게서 죽음의 춤을 보기를 원한 것으로 이해하고는 그들에게 최대한 친절을 베풀기 위해 죽음을 형상화하는 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원시적인 고유성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70


'전통의 약', '고유의 약'과 같은 것들을 파는 상점들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아마 한국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뉴질랜드에는 토착민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뉴욕에서 가서 패션이 어떤지를 살펴보고 돌아와서는 토착민들의 의상을 그에 맞게 바꾼다고 합니다. 여기서의 역설이 무엇이냐면, 우리들이 고유성 또는 진품이라는 것에 너무 집착을 함으로서 오히려 그 고유성을 훼손한다는 것입니다.  71


여러분이 탄산음료 캔과 신문지 재활용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이런 행동의 80% 정도는 미신적인 신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의 근본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는 거죠. 쓰레기 분리수거가 지구 환경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산에서부터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지요. 어쨌든 이러한 기이한 현상을 여러분, 깨닫고 있습니까?  74


스타벅스의 출발점은 소비자들에게 어떤 죄책감 같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스타벅스는 사회적으로 굉장히 의식 있는 회사라는 광고를 합니다. '여러분이 카푸치노를 한 잔 마실 때마다 2%씩 소말리아 아동에게 전달되고 열대우립 보존에 사용됩니다'라는 식의 자본주의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광고를 합니다. 소비 뒤의 가격을 상품 속에 포함시키는 것이죠. '너무 소비해서 죄책감을 느끼는가? 괜찮다. 조금만 더 소비하면 죄책감을 해소할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식의 신념과 그것이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현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기를 이해하려면, 그리고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려면, 지금까지의 모든 예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74-75


이데올로기가 반드시 커다란 신념이나 교육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우리의 지적공간의 구조를 뜻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가능케 하는가', 또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가'라고 생각하는 구조적인 틀이 이데올로기입니다.  79


기성세대는 여러분이 사고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 전문가와 지식은은 다릅니다.

전문가는 남들이 규정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문제 해결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 지식인이란 것은 전문가를 넘어선 것입니다. 단순히 남이 규정한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문제 자체에 대한 하나의 법칙을 규명하고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정립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인들은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고 사람들로 하여금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도록 하는 사람들입니다.  88


시스템에 많은 도전을 가함으로서 자유로운 사고를 창출해야 합니다. '이론 공부만 하는데 어떻게 시간과 돈을 투자할 수 있을까? 아프리카 아이들은 굶어 죽고 있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조작입니다. 사고의 흐름을 막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현 상황은 절박하겠지만 바로 그런 상황이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한걸음 물러서서 사고를 해야 합니다.  89




3 청중과의 대화 - 경희대 평화의 전당 2012. 6. 27.


라캉적인 입장.. 원하는 것(want)과 욕망하는 것(desire)을 구분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이 두 가지를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여러분도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입장을 견지한다면 이해할 것입니다. 저는 '사랆들이 공산주의를 욕망하지 않는다'라고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욕망하지만 원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열망하지만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정신분석학의 가장 기초인데요. 우리는 때로 무엇인가를 욕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에 가까워 졌을 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가장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차라리 그것을 얻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욕망하지만 원하지는 않는 것이죠.  95

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라는 단어는 20세기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바보 같은 용어를 계속 사용하는 이유가 뭘까요? 새로운 이름을 붙일 수도 있을 텐데요. 여기에 대한 이유를 네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공산주의는 '공동(common)'의 문제를 건드린다는 점에서 우리가 계속 공산주의라고 지칭하는 것입니다. 세계 자본주의 속에서 잘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지요. 주 번째로는, 공산주의라는 명칭은 쉽게 회복할 수 없는 명칭입니다. 예를 들어 자유라든가 사회주의 등과 같은 다른 용어를 사용하면 결국에는 지금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잠식돼버릴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공산주의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어느 곳에서나 있어 왔습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농노의 반란이나 평등주의 등은 고대에서부터 있어 왔는데 이러한 전토엥 입각해서 우리가 계속 공산주의라고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냉소적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정치적인 프로젝트, 즉 기획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잇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10월 혁명을 예로 들어볼까요? 모든 위대한 것을 꿈꾸며 시작되었지만, 악몽으로 끝이 났지요. 또 스탈린주의, 북녘에 있는 여러분의 동포들, 이러한 모든 것이 어쩌면 파시즘보다도 더 끔찍한 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급진적 운동을 원한다면 항상 그 위험을 알리는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불과 장난을 치는 것이라면 굉장히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겠지요. 저는 지나치게 희망적이거나 믿음이 가지 않는 '공산주의'라는 용어가 좋습니다. 이 용어는 언제나 저에게 '이것이 정말 가능한 것인가? 의도치 않은 새로운 대재앙을 낳게 되지 않을까?'하고 되물을 것입니다.  96-97





4부 일하는 사람들의 공동선을 위한 소명(Possibility of Common Good) - 건국대학교 새천년기념관 2012. 6. 28.


진실은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는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며 싸워야 합니다.  120


'물신적 분열(Fetishist Split)' '저는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정말 그걸 믿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분열은 우리가 보고 아는 바를 거부하도록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실체적 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런 태도도 있습니다. '나는 이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설사 효과가 없을지라도 나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요...' 여하튼 뭔가를 함으로써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일종의 미신인 것입니다. '나는 신문지나 콜라 캔을 잘 재활용하고 있을까?' 이런것들은 그저 쉬운 탈출구일 뿐입니다. 이 방법으로는 마음은 편해지지만 본질적인 문제를 직시하지 않게 되지요.  121


인도의 인류학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tty)를 인용하고 싶습니다. 그는 '우리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인간은 그 압도적 숫자와 화석연료의 연소와 다른 관련 활동 덕택에 지구상의 지질학적 매개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라고 부르는데, 이는 인류 자체가 지질학적 요소가 되는 시대지요. 인류가 단지 당장의 환겨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지구 생명 활동과 생명 순환의 양시겡 직접 영햐을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처음 중국을 방문했을 때 들은 얘기였는데, 정부가 싼샤댐을 건설하기로 결정했을 때 많은 지질학자들이 경고했었다고 하더군요. 댐으로 형성된 거대한 인공호수가 지진을 일으킨 지하 단층 바로 위에 있게 도니다는 것이 그 이유였지요. 이 거대한 인공호수는 강력한 지진의 가능성을 크게 높였습니다. 그리고 기억하시는 것처럼, 정확하게 이것이 수년 전의 쓰촨대지진을 유발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 좋은 징조겠지만, 중국 정부조차도 수십만 명이 사망한 거대한 쓰촨대지진이 우리 인간의 활동에 의해 부분적으로라도 촉발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이처럼 인류가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지질학적 요소가 되었다는 주장인 '인류세'의 또 다른 측면은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상상하기 두려운 일이지만 현재 정부, 위원회 등 권력자들에 의해 '지오 엔지니어링'(지구공학, Geo Engineering)이라는 것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이 가설은 지구온난화를 막기에는 화석연료 규제 등 원칙적 방법으로는 이미 늦었다는 것입니다. 훨씬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그들은 이미 거대한 계획을 논의 중입니다. 예를 들어 수백만 톤의 물이나 바닷물 등으로 된 미세입자를 방사해 이것으로 태양광선을 막는다는 것 등입니다. 이렇게 대기의 조성에 직접 간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상상해보십시오. 지구공학을 통해 인공적으로 바꿨을 때 따라올 부수적인 피해, 의도치 않은 부작용에 대해 그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124-125


생태학의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아는 것이나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데에 있습니다. 자연은 여전히 아름답고 범접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131


인류에게는 다시 일종의 공산주의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어째서 공산주의(코뮤니즘) 재실현이 오늘날 그렇게 상상하기 힘든 것입니까? 지난 세기에 공산주의의 꿈은 비참하게 실패하여 경제적, 미놎ㄱ-정치적, 마지막으로 중요하게 생태적으로도 재앙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꿈을 꾸게 만들었던 문제는 현재도 진행 중이며, 시장과 국가를 넘어선 새로운 형태의 집단 활동이 재창출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불가능과 가능한 것은 이상한 방식으로 분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등위 관계를 넘어서고, 전능한 불멸이 불간으함을 현명하게 받아들이고, 급격한  사회 변화를 위한 공간을 열어, 모든 형태의 근본주의적인 운명론을 어떻게든 피해야 한느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환에는 고매한 윤리가 필요치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장 자크 루소가 말한 '자기애(amour-de-soi)',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진정한 이기주의'를 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기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치 않다. 다른 이들이 져야 한다.' 미국의 작가인 고어 비달(Gore Vidal)의 이 말은 진정한 자기애와 목표 성취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에 대한 장애물을 파괴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형태의 왜곡된 형태의 타인 대비 자아선호인 자기 편에(amour-propre)를 구분한 루소의 논지와 잘 들어맞습니다. 악마적인 인간은 따라서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가 아닙니다. 진정한 이기주의자는 스스로의 선을 챙기느라 너무 바빠 다른 이들에게 불행을 야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악인의 가장 주된 악덕은 바로 그가 자신보다 다른 이들의 생각에 더 정신이 팔려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의 향락적 이기주의 사회에서는 진정한 가치가 상실되었다'고 말하는 비평가들은 완전히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기적 자기애의 진정한 반대는 이타주의나 공동선에 관한 관심이나 나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질투와 원한입니다. 니체와 프로이트가 공유했던 것은 평등으로서의 정의가 질투에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그걸 누리는 '타자'에 대한 질투입니다. 정의의 요구에 숨겨진 것은 따라서 '타자'의 과도한 향유를 줄여 모두가 주이상스(jouissance, 언어화된 쾌락이나 사회적으로 용인된 쾌락 등 우리가 경험하는 불충분한 쾌락의 너머에 있는, 우리를 만족시키고 채우는 그 이상의 어떤 것_편집자)에 대한 접근이 동등해지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의 결과는 물론 금욕주의입니다. 동등한 주이상스를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대신 금지(prohibition)를 동등하게 누리도록 강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대한 것으로 알려진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이러한 금욕주의는 그 반대의 형태를 띱니다. 일반화된 초자아의 강제명령(injunction), 혹은 "즐겨라!"라는 명령의 형태를 띠는 것입니다. 나르시시스트적 '자아실현'과 조깅, 건강식 등의 온전한 금욕과 극기를 조합하는 여피족을 보십시오. 어쩌면 이것이 니체가 '최후의 인가(Last Man)'의 개념을 말할 때 마음에 두고 잇어썬 것인지도 모릅니다. 비록 여피의 쾌락적 금욕주의라는 외양에 숨은 그(최후의 인간)의 윤곽을 진정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오늘에 와서이지만 말입니다.  139-141


지금 우리는 비판적으로 사유해야 합니다.  145




5부 청중과의 대화 - 건국대 새천년기념관 2012.06.028.


저는 순진한 마르크스주의나 휴머니즘에 대한 낙관주의를 펴지 않습니다. .. 제 유일한 역설은,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주 열심히 노력해야만 하는, 정말로 스스로에게 좋은 것을 추구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149


저는 상당한 비관론자입니다. 다만 저는 위험한 상황이 어쩌면 늘 희망적인 상황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린 상황인 것이죠. 어쩌면 더 좋지 않은 상황으로 흘러갈 수도 있고, 조금 나아질 수도 있습니다. 미래는 열려있습니다. 제말은, 진정한 유토피아는 우리가 이것저것 조금씩 고통 받으며 지금처럼 항구적으로 나아간다면 맞이하게 될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150


저는 공산주의를 찬양하지 않습니다.  152


혁명의 폭력은 당신이 의미하는 혁명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

내가 지지하는 폭력은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대화와 사회활동을 중단시키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인민들이 한 것은 수도의 중심 광장을 점거하고 나라 전체를 마비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 이제는 협상할 때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인 무바라크가 말했지요. "당신들의 요구를 들었으니 이제 대화를 하자." 거기에 인민들은 "아니, 토론은 없다. 당신이 떠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내게는 이것이 벤야민이 말한 신성한(신적)폭력입니다. 진짜 폭력은 무바라크의 사람들이 행했고, 인민으 그것은 명확하게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려는 폭력이었습니다. '혼란은 이제 충분하다,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죠. 이것이 제 관점이빈다.

사람들은 제가 "간디가 히틀러보다 더 폭력적이었다"고 하니까 미쳤다고 여겼죠. 히틀러가 수백만 명을 죽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정작 두려워했던 것은 사회구조를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자본주의의 도입을 막기 위해 수백만을 죽였지요. 지나치게 단순화된 마르크스주의식 표현이긴 하지만요. 간디가 인도에서 원했던 것을 히틀러는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간디는 영국 정부가 그곳에서 기능하는 것을 중단시키려 했습니다. 히틀러가 원했던 것은 독일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수백만 명을 죽일 준비가 되어 있었지요. 이것이 저의 폭력관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폭력이 있는지, 어떤 형태의 폭력인지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요지는, 사람들이 폭력을 이야기할 때 어디서 폭력을 보느냐는 점입니다.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우리는 오직 일상생활이 방해받는 지점에서만 폭력을 봅니다. 혼란이 생기고 혁명이 일어나면 "맙소사, 폭력이다!"라고 하지만, 단지 우리가 익숙해졌거나 무시하는데 익숙해진 상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폭력들은 어떤가요? 예컨대 콩고공화국에서 리비아나 이집트 등을 모두 포함한 것보다 매주 더 많은 폭력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저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은 알고 있지요. 확인해 보세요. 1990년대 중반 <타임>지는 지난 10년 동안 콩고에서 400만 명 이상이 자연적이지 않은 이유로 사망한 사건을 커버스토리로 다뤘습니다. 당시 저는 뉴욕에서 열린 어떤 토론회에서 <타임>지의 편집장을 만났습니다. 그는 방향이 클 거라고 예상했는데 겨우 독자 한두 명이 편지를 보낸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무척 놀랐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의 관시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저는 폭력을 지지하지 않지만, 어떤 반항적인 자들이 사람 한두 명을 죽이며 "끔찍하다, 야만적이다!"하면서, 지금 현재 많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이런 일들에 무관심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이런! 우리가 단지 모든 것을 일상적으로 움직여가기 위해 얼마나 엄청난 양의 폭력이 필요한지 인지하고 있습니까? 내게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명확하게 하기 위해 부연하자면, 저는 아랍이나 기타 근본주의자들의 테러를 끔찍하다고 여깁니다.저는 아랍이나 팔레스타인이 고통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테러를 좀 해도 된다거나 반유대주의적인 생각들을 용인해도 된다는 멍청한 좌파가 아닙니다. 안 됩니다. 저는 절대로 이런 것을 요인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이 폭력을 보라는 것입니다. 특히 보이지 않는 폭력들을 말입니다.

짐바브웨를 예로 들까요. 짐바브웨가 공포에 휩싸이게 된게 언제부터입니까? 저는 무가베(1970년대 소수 백인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쳐 독립을 일궈낸 투사로, 1987년부터 총리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이 되면서 현재까지 계속 집권해온 아프리카의 최장수 집권자이다. 2000년 토지 재분배 계획을 강제하면서 백인 농장주가 소유한 토지를 몰수, 백인 주미노가 서방 국가와 마찰을 빚어왔다. 경제난과 국제 사회와의 불화가 계속되면서 무가베는 서방 언론들로부터 아프리카의 민족주의 지도자라는 평판보다는 장기 독재자란 칭호가 따라붙었으며 국내 반정 세력의 불만도 증폭되기 시작했다)를 전적으로 반대합니다만, 그의 집권당이 백인 농부들을 몰아내기 시작할 때부터입니다. 하지만 짐바브웨에는 이미 그전부터 흑인 그룹들 간에 극심한 테러가 있었습니다. 1980년대 말 무가베가 정권을 잡은 직후, 그는 도시 전체에 해당하는 인구인 반대파 1만 명을 죽였습니다. 서구 사회는 여기에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100~200명 정도의 백인 농장주들을 - 심지어 죽인 것도 아니고 - 몰아내기 시작하자 큰 반향이 있었지요. 그런 행위에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폭력을 보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153-156


더욱 의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처럼 '이건 심각하고, 이건 이렇게 가야 하고...' 운운하는 사람만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지루하고 과학적인 책들이 허풍을 더 떨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안착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아무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161


당신이 가진 유일한 것은 당신 자신의 정신입니다. 여기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162


지름길은 없습니다. 이것이 철학의 좋은 점입니다. 무엇이 좋고 아닌지를 말해줄 사람을 구할 방법은 없습니다. 당시은 길을 모릅니다. 당신은 혼자입니다.  162




7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 대한문 쌍용자동차 희생자 합동분향소 2012. 6. 29.


사람들은 보통 "우리는 너무 이기주의자이다"라고 비판하곤 합니다. 남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너무 많이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틀렸습니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면, 그런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사 운영자들을 살펴보면, 이들이 결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많이 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지요. 이들은 하루에 15시간 이상 일하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건강한 이기주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엄청난 관념들을 빌려올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정말 우리 자신을 위해, 또는 아이들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할 것인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결코 이기주의적인 체계가 아닙니다.  178-179


제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나르시시즘에 빠지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계발은 오늘날 우리 문화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해서 더 나은 개인으로 발전하라는 것인데, 이런 자기계발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문명의 특징적 일부이기도 합니다. 이론적으로 훨씬 복잡한 부장이긴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자기를 돌보는 것, 예를 들어 내가 어떻게 나메엑 보일지 신경 쓴느 것이라드가, 매일 조깅을 하면서 체력을 단련한다든가 등등, 이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강제된 모델을 따르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자기계발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멋있게 보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불교가 너 자신을 버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일정하게 동의합니다. 너 자신에 대해 잊어버리라는 것은 사회에서 만들어진 자기 자신을 버리라는 것이니까.  179-180


연대와 관련해서는, 당신을 위해 너무 많이 희생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주의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진정한 연대라는 것은 남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연대라는 것은 당신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그 하나가 되는 연결된 감정에서 가능한 것이죠. 오늘날 미디어가 말하는 연대라는 것은 돈을 기부하라거나, 아프리카에 있는 굶주리는 아이들을 도와달라는 식의 사이비 연대입니다. 이런 사이비 연대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다만 우리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우안을 줄 뿐이죠. 이것이 바로 스타벅스 커피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커피 한 잔을 사면 그 이윤의 1%가 소말리아에 있는 배고픈 아이들에게 간다는 식으로 광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180


먼저, 자살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다양한 종류의 자살이 있을 수 있겠죠. 하나의 자살이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절망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자살하는 경우가 있을 텐데, 이런 경우는 자신의 환경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기에 절망적인 상태에서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깨우는 메시지를 포함한 자살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전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분신한느 자살이 여기에 해당하죠. 또한 남에게 죄책감을 주기 위해 자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자살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해서 자신의 즐거움을 취한다는 점에서 위선적입니다.  181-182


어떤 이가 나무를 깎아서 무엇인가 만드는 일에 열중하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가 자신이 하는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누가 그것으 ㄹ과소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꿈을 추구하고 그것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좋은 이기주의이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좋은 사회 입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없어 고통받는 사회라면 정말 끔찍 할 것입니다. 

좋은 이기주의는 나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을 하는 것이지 남이 하라고 하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182-183


예술가는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입니다. 그 예술작품은 직접적인 행복감을 부여하죠.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술적 퍼포먼스는 기적과 같은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을 사는 이들에게 당신의 작품은 '오 세상에, 이런 것이 있었다니!'라는 자각을 환기시킵니다. 이런 방식으로 예술은 '깨어남'을 선사하죠.  184


고전주의적인 관점에서 어떤 작품이 훨씬 낫다거나, 더 나은 작품을 소유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예술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예술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물론 내가 테러리즘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을 독점하고 있는 갤러리들을 불태우버리는 것입니다.  185


사람들이 선택의 동기를 가지 못할 때 자살하는 것이라는 말은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마치 엄청난 선택의 기회가 있는 사회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 우리는 코카콜라나 펩시콜라 중에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형태의 선택만이 허락된느 사회인 것입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선택의 기회는 널려 있지만, 근본적인 선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삶을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인지에 대한 선택 같은 것을 할 수가 없어요. 무수한 선택의 기회는 사실 우리가 정말 중요한 것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고 있는 허위입니다.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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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어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과의 대비를 통해 당시 영국의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현실을 고발하고자 했다. ..

우리는 지금 여기, 자본주의라는 사회체제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도 정작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 알지 못한다. 16


농민들의 처지에서도 좋은 점이 있었다. 봉건제 사회에서는 농민들이 마음대로 영지를 이탈할 수 없는 것처럼 지주, 즉 영주계급도 마음대로 농민들을 자기 땅에서 내쫓을 수 없었다. 심지어 토지가 매매되거나 상속되더라도 그 땅에서 경작하는 농민은 그대로였다. 토지의 소유자가 바뀐다는 것은 단지 지대를 받을 권리를 가진 사람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농민에게는 누가 영주가 되든 상관없이 그 땅에서 농사지을 권리가 관습적으로 보장되었다. 농민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 아들과 손자에까지 이 권리는 이어졌다. 18


양모 가격의 폭등은 이 모든 안정적이던 기존 질서를 뒤흔들어놓았다. 농민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고 그 대가로 지대를 받는 것보다 그 땅에 양을 키워 양모를 판매하는 것이 훨씬 더 큰 이익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주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농민들을 강제로 추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농민들이 수 세대 동안 관습적으로 보장받던 권리를 모두 부정했다. 19


인클로저란 토지의 경계에 울타리를 친다는 뜻으로,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울타리치기 운동’이라고 하겠다. 인클로저 운동은 여러 번에 걸쳐 나타났는데, 그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은 양을 키우기 위해 일어난 16세기의 목양 인클로저와 대규모 농업 경영을 위한 18세기의 농업 인클로저였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비판한 것은 바로 양을 키우기 위한 울타리치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당시의 영국 사회이다. 20


르네상스 운동은 크게 아트 르네상스(Art Renaissance)와 휴머니즘 르네상스로 구분하는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문학과 미술 분야에서 활발하게 일어난 것이 아트 르네상스이다. 문학에서는 <데카메론>을 쓴 보카치오가, 미술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등이 아트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다. ..

아트 르네상스가 인간의 감정과 육체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다면, 휴머니즘 르네상스를 주도한 휴머니스트들은 인간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고자 했다. ‘인문학’이라는 용어도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휴머니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의 사상가가 바로 모어와 에라스뮈스이다. 접근하는 방식과 수단이 서로 달랐을 뿐 아트 르네상스와 휴머니즘 르네상스의 공통된 관심은 바로 ‘인간’이었다. 42


<사랑과 사치의 자본주의>에서 좀바르트는 자본주의가 농촌이 아니라 도시에서, 농업이 아니라 상업에서, 건전하고 성실한 생산 활동이 아니라 사치와 향락에 빠진 소비 생활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47


우리가 아는 중세는 절제와 검약을 미덕으로 하는 경건한 신앙심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 좀바르트는 이러한 변화가 바로 십자군 전쟁에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

<사랑과 사치의 자본주의>에서 십자군전쟁이 유럽 사회에 미친 영향을 남녀 관계의 변화의 측면에서 해석하고, 그것이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사회체제가 출현하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설명햇다. 십자군 전쟁은 유럽인들의 가치관과 윤리적인 태도를 크게 변화시켰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사랑’이었다. 48

십자군전쟁을 계기로 유럽인들은 사랑을 정신이 아니라 육체의 문제로, 거결함이 아니라 쾌락의 추구로 ‘세속화’했다.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인간의 벌거벗은 육체를 그렸다. 인간 본연의 정신을 탐구하고자 했던 르네상스는 다른 한편 인간 본연의 육체에 대한 탐구이기도 했다. 50


좀바르트는 자본주의의 기원을 사치와 전쟁에서 찾았다. 52


십자군 전쟁은 유럽 사회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다. 당시 유럽은 이탈리아의 몇몇 도시들을 제외하면 외부 세계와 교류가 거의 없는 폐쇄적인 사회엿따. 십자군 전쟁은 그런 유럽인들이 처음 경험하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슬람 세계(동방 세계)는 유럽(서방 세계)보다 훨씬 수준 높은 문화와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53


또 하나는 상업의 발달이었다. .. 십자군전쟁을 통해 유럽인들은 동방 사회에 있던 금은 등의 귀금속과 값비싼 재화들을 약탈함으로써 부를 축적했다. 군수물자를 수송하고 약탈한 전리품을 유럽으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여러 곳에 상업상의 거점을 건설하고 교통망을 정비해야 했다. 또 원정 비용을 지불하고 군수물자와 전리품들을 거래하기 위해 화폐의 사용이 늘어났다. 이 모든 요인이 유럽의 상업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54-55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

푹스는 르네상스를 인간의 육체 특히 벌거벗은 여체에 대한 탐닉의 시대로 보았다. 르네상스뿐만 아니라 실은 자본주의 문화, 부르주아 문화란 처음부터 퇴폐와 욕정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56


십자군전쟁 이후 유럽의 여러 도시들은 지중해 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했다. 그 가운데 가장 치열하게 경쟁을 벌인 도시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피렌체였다. ..

유럽 상인들의 가장 큰 고민은 십자군 전쟁 이후에도 그들이 장악한 상권이 여전히 지중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중해 너머의 여러 왕국들은 이슬람 상인들의 상권이었다. 63


유럽 상인들은 직접 동양의 여러 왕국과 무역할 수 있는 항로를 찾아 나섰다. 64


애점 스미스의 <국부론>은 너무나 유명한 핀 공장 이야기로 시작한다. 아무리 솜씨 좋은 장인이라도 혼자서 하루에 10개의 핀을 겨우 만들었는데, 철사를 늘이고 자르고 갈고 핀 대가리를 붙이고 두드리는 공정들을 나누어 일했더니 전혀 숙련되지 않은 10명의 노동자가 하루에 4800개의 핀을 만들더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그 이전에 있었던 다른 경제체제들과 구분하는 주요한 차이 가눙ㄴ데 하나는 바로 엄청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생산력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수많은 공장에서 엄청난 양의 상품들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온다. 그 많은 상품들을 도대체 어떻게 유통하고 누가 소비하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물론 140녀 년 전 이제 겨우 산업혁명에 접어들던 시대의 영국과 현대 사회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기준에서 보자면 대량샌상의 시대와 처음 마주친 영국인들의 충격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더 엄청났을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자본주의의 이 엄청난 생산력이 어디서 오는가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규명한 최초의 인물이다. 물론 매일 4800개의 핀이 공장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광경을 목격한 사람은 스미스 혼자만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은 직접 핀을 만들었고 사업가들은 그 핀들이 자신에게 줄 이익을 계산했다. 하지만 누구도 자신이 목격하고 직접 참여한 그 장면의 의미를 애덤 스미스만큼 잘 이해하지는 못했다. 우리가 스미스를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98-99


<에밀>은 흔히 교육에 관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 루소는 여러 쪽에 걸쳐 분업과 교환에 대해 이야기한다. 분업에 대한 애덤 스미스의 접근은 당연히 경제학적이다. 반면에 루소의 접근법은 사회학적이고 교육학적이다. 106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인간을 이기적 존재라고 말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알지만, 그가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을 동정심, 즉 ‘공감(sympathy)’의 존재라고 말한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116


<인구론>은 누구나 인정할 만한 두 가지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첫째, 식량은 인간의 생존에 필요하다. 둘때, 이성 사이의 정욕은 필연적이고앞으로 현재의 상태가 대체로 지속될 것이다. 맬서스는 이러한 두 가지 전제 위에서, 인구는 자연의 제한 법칙을 따르지 않을 경우 1, 2, 4, 8, 16, ... 과 같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의 생산능력은 1, 2, 3, 4, 5, ...와 같이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200년이 지나면 이 차이는 256대 9가 되며, 300년이 지나면 4096대 13이 된다. 따라서 어떤 방법으로든 인구의 증가르 억제하지 않으면 인류는 치명적인 파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맬서스는 두 가지 대책을 제시했는데, ‘예방적 억제(preventive checks)’와 ‘적극적 억제(positive checks)’가 바로 그것이다. 예방적 억제는 가족을 부양하는 데 따르는 곤란을 걱정해 결혼을 하지 않거나 간통으로 욕정을 해결하는 것, 그리고 낙태와 영아 살해 등을 말한다. 적극적 억제는 사후적으로 어린이의 영양실조, 극도의 빈곤, 전쟁과 기근, 그리고 전염병 등의 방법으로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것을 말한다. 126-129


다윈은 다양한 종들이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한다는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의 원리를 <인구론>에서 착안했다. 왜 어떤 종은 살아남고 어떤 종은 도태해 멸종하는가? 자연에 적응하는 종은 생존하며, 그렇지 못한 종은 도태한다는 것이다. 138


위대한 고전들과 마찬가지로 <인구론>은 오늘도 우리에게 새로운 성찰의 화두를 던져준다. 인구와 식량의 관계를 성장과 자원 또는 성장과 환경으로 바꿔서 생각해보면 맬서스의 경고는 지금도 유효하다. ..

성장은 자원을 사용하고 환경을 파괴한다. 물론 자연은 스스로 자원을 재생산하고 환경을 복구하는 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자원과 환경의 회복은 산술급수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성장을 위한 남용과 파괴는 기하급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157


현대 자본주의의 거대 기술은 오직 양적 성장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원 낭비적일 수밖에 없다. 거대 기술은 더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게 해주지만 사람들을 더 행복하고 풍요롭게 해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기술체계는 인간의 실질적인 욕구에 맞게 재편되어야 하며, 이는 또한 인간의 실제 크기에 맞추는 일이기도 하다. 158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한 위대한 발견으로 역사적 유물론과 잉여가치론 두 가지를 꼽았다.

역사적 유물론은 인류의 역사와 사회 발전의 원리를 규명한 마르크스 사상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적 기초이다. 그러나 정작 마르크스는 역사적 유물론에 관한 책을 쓴 적이 없다. 하기야 마르크스는 그의 철학적 기초인 변증법적 유물론에 관한 책을 쓴 적도 없다. 다만 자신의 모든 저술에서 변증법적 유문론의 방밥을 일관되게 사용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는 자신의 모든 저작에서 역사적 유물론을 적용했다. 가령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 인류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는 말은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한마디로 요약해준다.

그렇다면 역사적 유물론을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장 적절한 교과서는 무엇일까? 바로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다. 172-174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엥겔스는 계급이 없던 원시 공산주의 사회에서 계급 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원시 공동체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생산수단과 노동 생산물을 모두가 공동으로 소유했다는 사실이다. 즉 생사눌을 공동으로 생산할 뿐만 아니라 공동으로 소비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 소유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사회화된 현상이 아니라 생산력이 지극히 낮아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인간 생존의 조건이었다. 다시 말해 이 시기에는 생산력이 아주 낮아서 잉여 생산물이 없었기 때문에, 공동체 내의 일부 성원이 생산물을 독점한다는 것은 다른 성원의 생존 기회를 박탈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생산물을 독점하는 것도, 그것에 기초한 계급의 분화도, 사적 소유도 아직 출현할 수 없었다. 계급 사회가 출현하는 것은 아직 먼 미래의 사건이었다. 이 시기를 원시 공산주의 사회라고 부르는 것도 이때문이다.

사유재산과 국가는 물론 가족까지도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 계급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엥겔스의 설명은, 역사적 유물론을 처음 만나는 독자들에게는 조금 낯설 수도 있다 그러나 계급 사회이전의 공동체에서는 내 것이라는 관념이 없었기 때문에 내 가족이라는 관념도 없었다. 내 아내, 내 남편, 내 아이, 내 가족이라는 생각도 실은 사적 소유의 발전과 함께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176


사적 소유가 처음 출현했을 때 이는 탐욕, 축적, 지배가 아니라 권리였다는 사실이다. 177


분노한 노동자들은 기계에 모래를 붓거나 부속품을 망가뜨려 작업을 방해했다. ..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 ..

러다이트 운동은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이 일으킨 최초의 집단 저항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

러다이트 운동에 나선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라는 체제에 대해 거의 무지했다는 데 있다.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자본가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계의 자본가적인 사용이다 기계가 노동자들을 위해 사용된다면 노동시간이 줄고 노동의 강도는 낮춰질 것이다. 179


영국에서 노동조합 운동이 합법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1824년에 ‘단결금지법’(799년 제정)이 철폐되면서부터이다. 전국적인 노동조합 조직은 1830년대 들어 나타나게 되는데, 1834년 로버트 오언의 지도 아래 결성된 ‘전국노동조합대연합(Grand National Consolidated Trades Union)’은 조합원 수가 50만 명을 넘었다. 그 당시 전국노조의 요구사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10시간 노동제’였다. 181


잉여가치론은 바로 자본주의가 노동계급을 어떻게 착취하는가 하는 가장 근원적인 비밀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이론이다. 183-184


애넘 스미스는 재화의 가치가 노동에서 나온다고 말했지만, 또한 재화의 가치가 노동자의 임금과 자본가의 이윤과 지주의 지대를 합산한 것이라는 말도 했다. 스미스의 가장 훌륭한 계승자답게 리카도는 임금과 지대와 이윤이 각각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매우 치밀하게 분석했다. 노동자가 임금을 가져가듯 자본가가 이윤을 가져가는 것도 정당하다는 뜻이다. 재화의 가치가 오직 노동에 의해서만 생산된다면, 도대체 자본가의 이윤이나 지주의 지대는 어디에서 나올까?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를 자본가가 이윤으로 가져간다면 그것이 어떻게 정당한 분배일까? 184-187

스미스와 리카도라는 두 위대한 경제학자가 자기 이론의 근본적인 모순을 전혀 또는 거의 자각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자본주의가 모든 계급의 이익, 즉 자본가는 물론 노동자의 이익에도 절대적으로 부합하는 사회체제라는 신념을 너무 깊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87


마르크스는 리카도와 마찬가지로 모든 재화의 가치는 노동에 의해 생산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는 노동자 자신이 임금의 형태로 가져가는 필요가치와 자본가가 가져가는 잉여가치로 나뉜다. 이 잉여가치는 다시 자본의 여러 분파와 지주들에게 산업이윤과 상업이윤 및 기대로 분배된다. 말하자면 이윤은 하나의 허상이며, 그 본질은 잉여가치인 것이다. 잉여가치 역시 노동자가 생산한 것이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그것이 마치 노동의 산물이 아니라 자본의 기여에 대한 정당한 보수인 것처럼 기만하기 위해 잉여가치가 아니라 이윤의 형태로 취득하는 것이다.

피룡가치와 잉여가치가 각각 어떻게 분배되는가는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결정된다. 기본적으로 필요가치는 노동자가 사용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상품의 양이 결정한다. 그러나 현실의 착취율, 즉 필요 노동에 대한 잉여노동의 비율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계급추쟁이다. 계급투쟁이라는 말을 대단히 과격하고 무시무시한 무엇인 양 들을 필요는 없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인류의 역산느 모두 계급 투쟁의 역사"라고 말할 때의 그 계급투쟁은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의 10월 혁명처럼 노동자계급이 총을 들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일상의 생활과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와 자본가는 언제나 더 많은 몫을 가져가기 위해 대립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을 얼마로 결정할 것인가, 통상 임금에 무엇을 포함시킬 것인가가 바로 현실의 계급투쟁이라는 뜻이다.  187-191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우리 후손들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1930)이라는 글에서 100년 뒤에는 자본축적의 증진과 기술의 진보로 주 15시간만 일하면 누구나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196


노동은 인류에게 내린 그 어떤 저주보다 더 끔찍한 저주가 되고 말았다. 기술은 진보하고 사회는 더 발전하는데 노동자들은 왜 더 많이 일하면서도 왜 더 빈곤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이 노동자들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이윤과 축적을 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노동이 노동자들의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이 되고, 그 생산물이 노동자들 자신의 풍요를 위해 사용되지 못하는 한 그것은 저주일 수밖에 없다.

장시간 노동은 노동자들의 육체를 쇠진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들의 정서도 타락시킨다. 시민으로서 또 인간으로서 자신을 성찰할 여유를 노동자들에게서 빼앗아버리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긴 노동시간은 오히려 생산성을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그 시대의 몇몇 기업가들조차도 인정했다. 물론 그것이 시민으로서의 양심에서 나온 이야기인지 단지 생산성을 올려 더 많은 수익을 얻고자 한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설령 후자일지라도 자본가가 더 많은 이윤을 목적으로 한다는 사실 자체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이윤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생명력을 고갈시키는 자들에 비하면 그들은 충분히 양심적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물질적으로 적당히 풍족하면서 시민으로서 자신을 성찰할 여유를 가지기 위해서는 과연 몇 시간의 노동이 적당할까? 라파르그는 하루에 3시간의 노동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197-198


소외(Entfremdung)라는 개념은 얼핏 매우 현학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경제학 -철학수고>에서 마르크스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마르크스가 본 소외는 자본주의 사회의 고유하고도 본질적인 현상이다. 근대 시민사회의 이러한 인간소외는 정치적 자기소외, 경제적 자기소외, 종교적 자기소외로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특히 경제적 자기소외가 사유재산과 자유경쟁이라는 근대 자본주의의 두 가지 제약 조건 때문에 나타난다고 보았다. 자본주의라는 이 체제하에 살며넛 노동자들은 먼저 생산수단의 소유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생산 과정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발현하고 실현할 수 있는 기회로부터 소외되고, 자신이 노동한 결과물임에도 그 생산물의 소유로부터도 소외된다.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유적 존재라는 인간의 본질로부터도 소외되고 만다는 것이다. 

경제적 계급적 소외의 첫째 유형은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이다. 간단히 말해 노동자가 생산한 물건이 그것을 창조한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고 타인, 즉 자본가의 소유물이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노동자 궁핍화론'이 등장하는데,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노동자가 부를 더 많이 생산할수록 노동자는 그만큼 더 가난해진다는 말이다.

계급적 소외의 두 번째 유형은 노동으로부터의 소외이다. 노동자는 예전의 독립 생산자처럼 생산 활동에 자주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그의 지배와 통제 아래에서 노동하므로 본질적으로는 강제 노동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되면 노동은 인간 본래의 생명 활동이 아니라 다만 먹고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그 자체가 고통이라고 마르크스는 보았던 것이다.

셋째는 유적 본질로부터의 소외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유(類 무리류)적 존재라고 불렀느넫, 여기서 유적이란 인간이 홀로 존재하고 홀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유적 존재로서 생활할 때에만 인간은 자신의 참모습, 즉 유적 본질을 지킬 수 있다. 그러나 계급 사회에서 노동자는 노동 대상과 노동 생산물로부터 소외됨으로써 자신의 유적 본질을 박탈당한다. 

마지막으로 소외의 최후 형태인 인간의 인간으로부터의 소외이다. 인간이 자신이 유적 본질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은, 본래 인간답게 공동생활을 해야 할 인간이 비인간적으로 서로 대립하고 배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민사회에서는 유산자와 무산자 모두가 인간적 본질에서 소외당하고 있지만, 노동자는 이러한 소외에 괴로워하며 상실한 인간적 본질을 회복하려 한다. 반면 자본가는 이 인간소외 위에 안주해 퇴폐의 길을 걷는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네 유형의 소외는 결코 개별적으로 열거된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계급적 인간소외에 대한 인식이 의미하는 것은 자본과 노동의 분리, 즉 계급적 대립이 자본주의적 인간소외의 근본 원인이며, 동시에 이러한 인간 소외에 의해 계급 대립 그 자체가 유지되고 재생산된다는 사실이다. 본질을 상실한 소외된 인간은 불구화되고 파편화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202-205


현대 경영학은 프레더릭 윈즐로 테일러(Fredrick Winslow Taylor, 1856~1915)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가 제안한 과학적 노동 관리는 애덤 스미스가 이야기한 분업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것이다. 공장의 작업반장이었던 그는 초시계로 노동자들의 손동작, 발걸음, 그리고 심지어는 호흡까지 일일이 측정하고 계산해 가장 효율적인 작업 동작을 고안해내었다. 

테일러는 오늘날 테일러주의라고 불리는 자신의 과학적 노동 관리가 노동자드르이 생산성을 높이고 더 많은 임금을 받게 해줄 것이므로 당연히 노동자들이 환영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다. 모든 작업장에서 테일러주의는 노동자들의 격렬한 저항과 맞닥뜨렸다. 노동자들이 저항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물론 고용이 줄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심오한 면에서 나동자들이 테일러주의를 거부한 이유는, 그것이 노동자들의 인격과 자아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206-208


테일러의 과학적 노동 관리에 대해 노동자들은 감독자들이 정한 작업 방식대로 획일적으로 일하기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숙련과 경험에 의존한 작업 방식을 고수했다. 그러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테일러주의를 거부할 수 없도록 할 방법을 고안햇다. 바로 컨베이어 벨트이다. 컨베이어 벨트는 노동자들에게 정해진 작업 방식과 주어진 작업량을 강요했다. 영화 <모던 타임스(1936)>에서 찰리 채플린이 연기한 것처럼, 컨베이어 벨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정해진 작업 방식과 속도를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노동 과정을 통제하는 것은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라 컨베이어 벨트이다. 사람이 기계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사람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저항하지 못한다. 공장의 문 밖에는 해고와 실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테일러주의와 컨베이어 벨트의 결합은 흔히 '포드주의(Fordism)'이라고 불린다. 포드자동차의 생산 공장에서 가장 먼저 시도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성년 남자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일당 2달러를 넘지 않았다. 그런데 자동차왕으로 불린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는 컨베이어 벨트의 도입과 함께 5달러의 임금을 주었다. 이 때문에 포드는 다른 자본가들로부터 심지어 사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높은 임금을 받는 대신 노동자들은 단지 작업장에서 더 고된 노동을 해야 했을 뿐 아니라, 술과 도박을 끊고 저녁식사는 반드시 가족과 함께 먹는 것은 물론 일요일에는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 했다. 포드는 노동 과정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생활과 그들의 인격조차도 통제하고자 했다. 히틀러가 포드에게 철십자훈장을 수여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211-213


포드는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다. 포드는 히틀러에게 막대한 정치자금을 기부했고, 히틀러는 "미국의 파시즘 지도자"에게 가장 영예로운 철십자훈장을 수여했다.  214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더욱 발전하면 할수록 노동자계급은 더 빈곤해진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바로 자본가들이 생산수단 즉, 자본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인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는 <진보와 빈곤:부의 증진에 따른 산업 불황과 빈곤 증가의원인에 대한 조사>(1879)라는 책에서 같은 질문에 조금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조지는 사회가 진보할수록 대중이 더욱 빈곤해지는 이유는 바로 지주들이 토지를 독점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생산력의 향상과 더불어 지대가 더 큰 비율로 상승하므로 임금은 더 낮게 유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18-220


헨리 조지가 내놓은 것은 토지의 몰수가 아니라 토지단일세이다. 굳이 토지를 몰수하지 않더라도 토지에서 나오는 지대를 정부가 세금으로 전부 환수한다면 똑같은 효과를 얻을 있기 때문이다.  222


미국의 북부와 남부는 독립 당시부터 구조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북부에서는 비교적 공업이 발달하고 있었으나, 남부는 영국에 면화를 수출하고 값싼 공산품을 수입했다. 따라서 남부의 농업자본가들에게는 자유무역이 유리했다. 반면에 북부의 산업자본은 영국과의 경재을 피하기 위해 보호무역을 주장했다. 남북전쟁이 일어난 이유에는 이러한 무역체제의 차이도 크게 작용했다. 어찌 보면 남북전쟁이야말로 북부의 산업자본이 마음껏 성장하도록 해준 가장 주용한 계기이기도 했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 미국은 빠르게 농업 사회에서 공업 사회로 변화했다. 원래 미국은 영국의 요매넹 비유되는 독립자영 농민들을 토대로해서 건설된 사회이다. 산업화는 이러한 자영 농민들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려버렸다. 특히 남북전쟁 뒤 서부 개척이 진행되고 철도 붐이 일어나면서, 돈과 건력을 앞세운 철도회사들은 농민들의 토지를 폭력적으로 매수했다. 정부도 철도회사에 이익을 안겨주기 위해 농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수용해서 철도회사에 싼값에 불하했다. 밴더빌트나 카네기 같은 강도귀족(robber baron)들이 그토록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도 남북전쟁과 철도 붐 덕분이었다. 이른바 강도귀족들의 '황금시대'가 열린것이다. 그러나 마크 트웨인이 볼 때 그것은 번쩍거리기만 할 뿐 허위에 가득 찬 '도금시대'에 불과했다. 

미국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크 트웨인이 친구이자 작가인 찰스워너와 함께 쓴 <도금시대:우리 시대의 이야기(1873)> 는 토지의 수용과 그를 둘러싼 협잡, 부정부패 등 미국 사회의 추악하고 부끄러운 이면을 고발한 작품이다. 책의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존 왕(King John, 1595)>에 나오는 "금에 도금칠을 하거나 백합에 색칠을 하는 것은 낭비이고 어리석은 짓일뿐이다"라는 대사에서 따왔다고 한다.  226-228



조금 과장된 말이기는 하지만 봉건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는 1000년 동안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만큼 봉건제도가 안정되고 변화가 거의 없는 사회구조였다는 뜻이다. 자본주의는 그와 정반대이다. 자본주의는 흔히 달리는 자전거로 비유되는데, 페달을 밟지 않으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쓰러진다는 뜻이다. 그만큼 자본주의에서 변화는 거의 본질적이고 숙명적인 것이다.  233


고전이 위대한 이유, 우리가 고전을 읽고 또 읽는 이유는 그 책들과 저자들이 당시의 시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혜도 주기 때문이다.  234


독점자본주의의 구조와 특징을 처음 본격적으로 분석한 책은 바로 오스트리아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루돌프 힐퍼딩(Rudolf Hilferding, 1877~1941)의 <금융자본론(1910)>이다. <금융자본론>이 '<자본> 이후의 <자본>'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마르크스의 이론과 분석 방법을 따르면서 마르크스 이후의 자본주의를 분석했기 때문이다.  236


독점자본주의 이전에도 자본주의는 경제적 권력이 소수의 자본가들에게 집중된 사회였다. 그러나 독점자본주의 시대의 출현은 이제 자본가들 가운데서도 더욱 극소수의 독점자본가들이 그러한 경제적 권력을 배타적으로 장악하고, 노동자를 비롯한 생산 계급은 물론 다른 자본가들까지도 지배하고 통제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행과 산업과 정부의 권력자들은 금융과두제(金融寡頭制:금융과두제는 소수의 서대한 금융자본이 한 나라의 경제와 정치를 지배하는 제도를 말한다. 레닌은 이것을 제국주의 단계에서 나타나는자본주의의 징후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를 형성해 오직 자신들 안에서만 권력을 공유하고 배분했다.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틀어 그 어떤 사회에서도 권력이 이처럼 소수의 집단에게 독점된 적은 없었다.  238


<금융자본론>이 '<자본>이후의 <자본>'이라면 <제국주의>는 '<금융자본론>이후의 <금융자본론>'인 셈이다. 

이 책에서 레닌은 금융자본이 결국 제국주의로 귀결된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이지만, 부패하고 사멸해가는 자본주의리므로 자본주의의 최후 단계이기도 하다고 보앗다.  240


레닌은 제국주의의 다섯 가지 지표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산업과 은해에서 독점체 출현. 둘째, 산업 독점과 은행 독점의 결합과 금융과두제의 출현. 셋째, 자본수출. 넷째, 국제적 독점체에 의한 세계의 경제적 분할. 다섯째,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세계의 정치적 분할. 첫째와 둘째 지표가 바로 힐퍼딩이 <금융자본론>에서 분석한 내용이라면, 이어지는 세 가지 지표는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자본주의가 왜 제국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가를 설명해준다. 마지막 두 가지는 바로 제국주의란 무엇인가를 설명해준다.  240-242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아래엣부터 자본가로 성장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졌다. 특히 독점자본의 시대에는 주식회사 형태의 기업 결합이 일반화되고 기업 경영에 대한 금융자본의 배타적 지배가 확산되면서 평범한 중산층이 기업가나 경영자로 상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중소 자영업자들, 비교적 높은 소득을 받는 전문직 종사자들, 은퇴한 관리자 등과 같이 약간의 저축이 있지만 직접 자본가가 될 만큼의 자금은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직접 기업을 설립하거나 운영하는 대신 자신의 저축을 안정적으로 투자해 이자를  받는 거이었다. 루돌프 힐퍼딩은 이들을 '금리생활자(rentier)'라고 불렀다.  248


마르크스는 자본의 축적이 진행될수록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저하한다고 지적했다. 반면에 자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기 때문에 이자율은 안정적이거나 도리어 상승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금리생활자들에게 만족할 만한 이자를 지급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다른 부분에서 더 많이 착취해야 한다. 이 때문에 힐퍼딩과 동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은 금리생활자를 자본주의의 가장 퇴폐적이고 기생적인 현상이라고 비난했다.  249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th, 1908~2006)는 흔히 베블런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베블런 이후의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제도의 진화를 분석하고자 했다. 그의 주요 저작 가운데 하나인 <풍요한 사회(1958)>가 <유한계급론>의 속편이라면, 다른 저작 <새로운 산업사회(1967)>는 <영리기업의 이론>의 속편이라고 할 만하다. 어쩌면 갤브레이스 자신은 그것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의 속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272


아무튼 <풍요한 사회>에서 갤브레이스는 인간의 욕구를 생활에 꼭 필요한 절대적인 욕구와 그 이외의 상대적 욕구로 구분했다. 우리가 경제활동을 하는 본래의 목적은 절대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기업은 이윤을 더 얻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욕구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기업들은 광고를 통해 더 많이 원하고 더 많이 소비하도록 부추긴다. 마치 내가 그 상품을 원해서 소비하는 것 같지만 실은 나의 욕구가 기업들의 광고에 의존하고 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갤브레이스는 이를 '의존 효과(dependency effect)'라고 불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계급들도 마치 유한계급들처럼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새로 나온 상품들을 경쟁적으로 소비한다. 얼핏 보면 이런 대중 소비사회는 과거 어느 사회보다 더 풍요로워 보인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이제 노동자들은 생산 과정에서만 자본의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소비와 생활에서조차 그들의 이윤을 늘려주기 위해 복종하고 봉사하는 것이다.  274


카를 멩거의 제자이자 신자유주의의 사성적 원조로 불리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루트비히 에들러 폰 미제스(1881~1973)는 언젠가 케인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매우 훌륭한 경제학자이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오류를 저질렀다"고. 그 한 가지 치명적인 오류란 바로 정부의 시장 개입을 용인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것이다. 근대 경제학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시장의 자기조정 능력이다. 물론 시장이 언제나 균형 상태이지는 않다. 일시적으로 시장이 불균형 상태일 수 있다는 점은 모든 경제학자가 인정한다. 다만 주류 경제학은 시장은 언제든 그러한 불균형을 스스로 조정해 균형 상태로 돌아갈 능력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조금 극단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시장의 이러한 자기조정 능력에 대한 신뢰와 신념이 없다면 우리가 아는 경제학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거이다. 

케인스가 주류 경제학자들을 당혹하게 만든 것은 그의 호사스러운 취미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경제학의 근본적인 신념에 대한 비판이었다.  290




자본주의 다음에는 어떤 사회가 올까? 마르크스와 그 지지자들은 자본주의가 내부의 모순 때문에 붕괴되고 사회주의가 그 뒤를 이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301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른 이유와 논리에서 자본주의의 미래는 사회주의라고 주장한 경제학자가 잇다. 바로 조지프 슘페터이다. 슘페터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1942)>에서 자본주의의 미래는 사회주의라고 주장했다. 슘페터는 평생 단 한 순간도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적이 없다. 그런 슘페터가 자본주의의 미래는 사회주의라고 주장했으니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의 이론에서 참으로 심오한 측면은, 자본주의가 실패했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성공했기 때문에 사회주의로 발전하리라는 것이다.  302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소유의 문제로 파악했지만 슘페터는 관리의 문제로 파악했다. 가령 마르크스가 보기에는 기업의 형태가 주식회사로 바뀌더라도 생산수단을 여전히 소수가 독점하고 잇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이다. 반면에 슘페터는 누가 주식을 가지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누가 기업을 경영하고 관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기업이 사회적으로 관리되며, 결국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슘페터는 또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것은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도 지지하기에, 더욱 빠르고 순조롭게 진행된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자본가와 노동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 농민, 상인, 자영업자 같은 중간계급도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발달해 기업이 거대해지고 기업의 활동 영역이 확대될수록, 중간계급의 지위는 하락해가고 그들의 역할도 축소된다. 따라서 이런 중간계급들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자본가는 무산계급의 혁명에 의해 타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요구에 따라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동의하게 된다. 자본주의는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눈부신 성공 때문에 사회주의로 이행한다는 주장이다.  305


슘페터의 저서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은 역시 <경제발전의 이론(1912)>일 것이다. 슘페터는 경제체제의 운동 양식을 순환과 발전의 두 가지로 분류했다. 슘페터는 순환을 일정한 정태 체계 내에서 동일한 양상으로 반복된느 경제 행위의 총체로, 다소의 변화가 있더라도 결코 일정한 체계를 벗어나지 않는 연속적인 변화로 파악했다. 이에 비해 발전이란 순환을 제약하는 여건을 다소 바꿈으로써 나타나는 변화로, 이는 연속적인 경제변동이라기보다는 경제체제 자체의 비약적 변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슘페터는 경제의 내적 요인에서 나타나는 비연속적인 기술 혁신이 이러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했다. 즉 기업가가 창조적이고 영웅적인 기술 혁신을 수행함으로써 경제는 정태 균형에서 순환의 과정을 벗어나 동테적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다.  308-309


슘페터는 기업가의 혁신(innovation)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주도한다고 생각했다. 혁신이란 창조적으로 파괴하는 과정이다.  309


혁신의 구체적인 내용을 슘페터는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의했다. 첫째, 새로운 상품의 발명. 둘째, 새로운 생산 방식의 발명. 셋째, 새로운 원료의 개발. 넷째, 새로운 시장의 개발. 다섯째, 새로운 시장 구조로의 전환이다.

슘페터의 혁신 개념은 다분히 지나치게 광범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석연치 않은 점도 있다 가령 헨리 포드가 컨베이어 벨트를 도입한 것은 새로운 생산 방식을 발명한 혁신의 두 번째 유형에 해당한다. 포드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가 자본주의의 생산 방식에 중요한 혁신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제국주의 국가들이 새로운 식민지 시장을 발견한 것은 과연 네 번째 유형의 혁신인가? 그렇다면 독점자본이 경쟁 기업들을 도태시키고 시장을 지배하는 것도 다섯 번째 유형의 혁신인가? 아무래도 슘페터의 사회주의는 지나치게 관용적이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기업이 투자를 많이 하도록 기업에 유인을 더 많이 제공하고 기업에 유리한 경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꼭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기업가 정신이 없는 사업가들은 결코 혁신할 수 없다. 그저 기업가들을 모방할 뿐이다. 모방하고자 해도 모방할 기업가 정신이 없다는 것이 지금 우리 경제가 처한 막다른 길은 아닐까?  31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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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THREE 일과 삶

 

10 우리는 시간과 투쟁한다.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전보다 더 오래 살고 있으면서도,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졌기 때문에 시간은 더 없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247

 

아이들에게 기다림을 가르치는 것은 양육에서 중요한 부분인 동시에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은 조직 시간이 자주 자기 시간이나 상호작용 시간보다 우선시되는 세계에서 꼭 필요한 기술이다. 25

 

우리 문화에서 시간은 돈이다... 일을 더 빨리 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시간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비행기, 자동차 컴퓨터는 빠르지만, 우리는 그것들과 더불어 점점 더 많은 곳을 가고 더 많은 일을 한다. 우리가 더 빨리 일할수록 우리의 시간은 더 빨리 새로운 일로 채워진다. 우리가 더 빨리 움직일수록 우리는 더 적은 시간을 갖게 된다. 사람들이 속도에 집중할수록 서로에 대한 인내심은 점점 줄어든다. 또한 빠르게 돌아가는 삶은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사람들은 자유시간이 전혀 없다고 불평한다. 253-254

 

앨빈 토플러가 <미래 충격>에서 지적했듯이, 사회 변화가 빠른 시기에는 문화 전체가 일시적인 공황을 경험할 수 있다. 254

 

시간의 속도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의 수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더 많은 시간 동안 일할 뿐만 아니라 더 많이 이동해야 하고, 가야 할 곳도 더 많다. , 더 많은 것을 사야 하고,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즐겁게 해줄 오락활동들도 더 많이 있다. 우리가 정해진 시간에 더 많은 활동들을 끼워 맞추려고 노력할수록, 시간은 더 빨리 가는 듯하다. 오늘날 우리는 시간이 더 없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에 더 시간이 없는 것처럼 느끼는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255

 

사람들이 시간에 맞춰 일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뤄진 현상이 아니다. 과거 고용주들은 사람들을 시간에 맞춰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분투했다... 숙련된 장인들은 늦게 일어나 더 늦게 일을 시작했다. .. 17세기 초까지 영국의 노동자 계급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산업화 이전의 삶은 대학생들의 생활과 약간 유사했다. 불규칙적인 식사와 수면이 과음과 파티, 그리고 잠샘 작업과 어우러져 있었다. ..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산업화 이전 사람들의 시간에 대한 태도는 우스꽝스럽고 유치해 보인다. 우리는 이미 조직 시간의 요구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 산업화 이전의 노동자는 게으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시간을 돈으로 여기지 않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돈보다 여가가 더 가치있는 것이었다. 255-256

 

17세기와 18세기 유럽의 남성 및 여성 근로자들은 매주의 첫날에는 일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스스로 정한 그 휴일을 () 월요일이라고 불렀다. 남성들은 술을 마시고, 길모퉁이를 서성거리고, 싸우고, 투견이나 투계 선술집에서 내기 게임을 하며 월요일은 보냈다. 일요일은 가족을 위한 날이고, 월요일은 친구를 위한 날이었던 것이다. 여성들도 술을 마셨지만 대개는 집안일을 하면서 월요일을 보냈다. 성 월요일의 흔적은 1970년대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서 헤일리는 베스트셀러 소설 <자동차>에서,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월요일에 만들어진 차를 결코 사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주말이 끝난 후, 근로자들은 병가를 내서나 피곤한 상태로 출근하기 때문에 월요일에 만들어진 차들은 다른 날 만들어진 차들보다 덜 믿음직한 성능 기록을 가지고 있는 편이라는 것이다. 256

 

고용주들은 사람들에게 규칙적으로 일을 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낮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일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1900년대 초, 헨리 포드는 전혀 다른 방식을 택했다. 노동규율을 강화하기 위해 낮은 임금을 이용하는 대신 오히려 보수를 높여주고 주당 근무 시간도 줄여주었다. 그는 사람들을 착실한 근로자로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탐욕스런 소비자로 만드는 것, 즉 충분한 임금과 쇼핑하기에 충분한 시감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가지 모두 기업에 이득이 되었다. 257

 

테일러화(과학적 관리법의 창시자인 테일러의 이론에 따라 모든 업무를 단편화하고, 개별 작업자의 동작을 규정, 감시함으로써 시간과 동작의 낭비를 줄여 일의 생산성을 높이려는 것.). 260

 

아마도 현대의 일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점은 자신이 생산한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시간에 대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점일 것이다. 263

 

시간에 맞춰 일하는 것에 저항했던 산업화 이전의 우리 조상들과, 시간과 과업에 의해 구조화된 일을 하는 현재 사람들의 상태는 일과 시간에 대해 세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첫째 아마도 과업 지향적인 일이 시간 지향적인 일보다 더 자연스럽고 만족스러운 듯하다. 둘째, 아마도 우리들 대다수는 짧은 시간 동안 열심히 일하고 긴 자유시간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셋째, 그러나 우리 문화에 존재하는 시간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고려한다면, 일정한 노동 시간이 정해지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다. 264

 

근무시간 자유선택제는 고용인들에게 자신의 노동시간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264

 

근무시간 자유선택제는 어떤 면에서 20세기의 가장 급진적인 경영 혁신이다. .. 지난 백년 동안, 대부분의 경영 혁신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일에 끼워맞추도록 돕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다... 근무시간 자유선택제는 바닷속의 좁쌀 한 알(滄海一粟, 창해일속)’에 불과하지만, 개인이 자기 삶을 중심으로 일을 조절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황에 맞게 일을 조정하도록 하는 또 다른 방법은 시간제 근무이다. 시간제 근무는 최근 나쁜 평판을 얻어왔으며,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 많은 고용주들은 전일제 고용인들을 해고한 다음 그들의 자리를 더 값싸고 쉽게 내보낼 수 있는 시간제 고용인들로 메우고 있다. 둘째, 시간제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회보장 혜택을 받고 있지 않으며, 임금 수준도 낮고 승진 가능성도 없는 직업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시간제 근무를 선호한다. 265

 

우리들 대부분은 업무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266

 

일이 우리 삶에서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할수록 모든 활동은 점점 더 일처럼 느껴진다. 시계와 일정표는 우리의 사회생활로부터 자연스러움을 빼앗아간다. 이제 사람들이 친구의 집을 예고 없이 방문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 되고 있다. .. 현재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거나,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하고 있지 않은 일은 아마도 잠자는 일일 것이다. 신경 생리학자인 스탠리 코랜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첨단 기술인 시계가 지배하는 생활방식 덕분에우리는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보다 연간 500시간의 수면을 덜 취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269

 

최근에는 컴퓨터, 이메일, 팩스, 휴대전화, 호출기 등이 우리를 일터의 벽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제 일부 사람들은 침대에서 잠옷을 입고 일하거나 해변에서 수영복을 입고 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

근로자들이 직장 내의 책상에서 떠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술은 일하는 시간의 범위를 넓히거나 그 시간의 양을 증가시키는 데도 이용된다. 270

 

장소에서의 융통성은 근무시간에도 융통성을 부여한다. ..

신기술은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었지만, 그것은 잠재적으로 우리를 하루 24시간, 1365일 내내 고용인으로 만든다. 271

 

시간은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것을 팔고, 사용하고, 사고, 투자하고, 아끼고, 죽인다. 274

 

샘 킨은 자신의 책 <열망>에서 .. 일이 사람들을 지배하면 사람들은 무력해지고, 성적 구별이 사라지며, 시장 원칙만이 추종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일직이 알베르 카뮈가 말했듯이, 일이 없으면 삶 전체가 타락한다.”그러나 자유시간이 없어도 삶은 타락할 수 있다. 275

 

 

11 여가와 소비주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가가 인간의 행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믿었다. ..

그리스어로 여가라는 단어는 스콜레(skole)’이며, 라틴어로는 오티움(otium)’이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모두, 일을 뜻하는 단어는 여가를 뜻하는 단어의 부정형이다. ‘이라는 뜻의 아스콜리아(ascholia)’네고티움(negotium)’은 둘다 여가가 아닌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스페인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뜻하는 스페인어네고시오(negosio)’여가각 아닌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어, 라틴어, 스페인어 모두 여가가 마치 생활의 중심인 것처럼 일을 여가와 관련시켜 비유한다. 영어단어 레저(lisure)는 라틴어의 리케레(licere)로부터 파생되었는데, 그것은 허락되다라는 의미이다. 영어에서는 마치 일이 생활의 기준인 듯 여가를 일에 빗대서 표현하고 있다. , 우리가 일을 멈추도록 허락되었을때가 여가라는 것이다. 276-277

 

사업가들은 일요일을 우울하고 지루한 날로 만들려는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그렇게 하면 일을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여가가 너무나 보람차고 즐겁다면 사람들은 일터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279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고용주들은 토요일 휴가를 주는 것에 반대했다. 그들은 고용인들이 말썽만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280

 

TV를 더 보고 싶다는 이유로 일하러 가기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 사람들은 나뭇조각으로 카누를 만들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가한 시간을 원하지만, 단지 TV를 더 많이 보기 위해 여가시간을 원하지는 않는다(비록 한가한 시간에 그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TV를 보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282

 

마르크스는 인간에게 본성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다. 283-284

 

한때 여가는 아마추어를 위한 시간으로 여겨졌다. 아마추어라는 단어는 라틴어 아마토르(amator)’, 애호가라는 단어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아마추어를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애호하는 사람또는 어떤 것에 대해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아마추어는 돈이나 명성 같은 외적인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재미있고 본질적으로 보람을 주기 때문에 취미를 개발한다. 285

 

1970, 경제학자 스테판 린다는 <곤경에 처한 유한계급>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부유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자유시간더 많은 소비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대부분 더 많은 소비를 선택한다고 주장했다. 286

 

돈을 쓰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돈을 벌기 위한 시간, 쇼핑할 시간, 그리고 유람용 모터보트나 패키지 투어 등 돈으로 구매한 물건들을 사용할 시간이 필요하다. ...

소비는 일하고자 하는 욕구가 약할 때조차 일을 해야 할 필요를 창출한다.. 287

 

십대(teenager)들조차 자신의 여가를 소비와 교환한다. 과거의 십대들은 가족을 돕거나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 자신이 원하는 사치품을 사기 위해 일하는 중산층 십대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국인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젊은이들에게 을 장려했다. 그들은 젊은이들이 일을 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규율을 발전시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287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는 것은 십대의 학업을 방해할 뿐 아니라 호기심 많고, 상상력 풍부하고, 호전적이어야 할 시기에 적응된 온화함(adjusted blandness)”을 심어줄 수 있다는 그린버거와 스타인버그의 주장이다. 288

 

여가와 소비재를 교환하는 십대들은 그들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일과 소비의 패턴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을 잃는다. 만약 그들이 물건을 사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자유시간을 포기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여가를 가질 수 없다. 그들은 어떤 활동들이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좋은지 발견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은 (부모를 비롯하여 다른 권위 있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일이다. 말썽을 일으킬 위험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시장이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닌, 자기 방식대로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289

 

우리는 미국인들이 점차 타인 지향적으로 변해가고 있다1950년대 데이비드 리스먼의 주장을 논의한 바 있다. 타인 지향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원할 뿐 아니라 시장의 물질적 동기와 고용주가 제공하는 심리적 유인에 의해 움직인다. 리스먼의 말은 옳았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택권을 제공하는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지만, 아마도 그로 인해 우리의 행동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안에 불어넣은 욕구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쇼어는 소비가 대개 지위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290

 

주디스 윌리엄슨은 <열정의 소비>에서, 시장이 우리의 열정을 소비하고, 그것이 더는 기존의 사회 질서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무장해제시킨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

돈은 당신이 돈을 번 방법을 포함하여 많은 것을 숨겨준다... 우리는 고객으로서 권력을 가지고 있다. 시장에서는 현금이나 수표, 혹은 신용카드를 갖고 있기만 하면, 당신이 누구든 상관하지 않는다. 292

 

'여가'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본질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가행위를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단지 그 행위 자체를 즐긴다. 293

 

만약 당신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주변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지 않다면, 일과 소비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여가를 즐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 여가는 돈이 들지 않는다. 친구나 가족과 어울리는 것, 소설책을 읽거나 단지 공상에 잠기는 것만으로도 여가를 즐길 수 있다. 여가는 우리에게 소중하고 할 만한 가치가 있는 활동을 하는 시간이다. 여가는 자유로운 시간 이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장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이다. 여가가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릴 것이다. 여가가 없다면 우리는 삶을 이해하는 것이 한층 더 어려울지 모른다. 295

 

 

12 의미 있는 일, 그리고 행복한 삶

 

"의미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어떤 이들에게 의미 있는 일은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일을 뜻한다. 다른 이들은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원한다. 의미 있는 일의 본지로가 그에 대한 욕구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철학적 질문의 모태가 되는 질문에 직면해야만 한다. ,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296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한다. 300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 자체가 정신 질환의 징후라고 생각했다. 마리 보나파르트에게 보낸 편지엣 그는 이렇게 썼다. "누군가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묻는 순간, 그는 이미 병에 걸린 것이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 왜 나는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가?"처럼 부정적인 방식으로 제기되면 우울한것이 사실이다. ..

심리치료자이자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인 빅터 E.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중심으로 치료 방법을 개발했다. '의미치료(logotherapy : 이 이름은 '의미'리는 뜻의 그리스어인 '로고스'로부터 파생되었다)'는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 원동력이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 프랭클은 삶의 의미는 변화하는 것이고 사람마다 다른 것이지만, 사람들은 선행을 하고, 가치를 경험하고, 마지막으로 고난을 통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300-301

 

<나의 고백>이라는 글에서 레오 톨스토이는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기 시작한다. 톨스토이는 모든 인류가 삶의 의미를 알고 있지만, 자기 자신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303

 

놀랍게도,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관심을 기울인 현대 철학자는 거의 없다. 또한 관심을 기울였더라도, 그들의 대답은 어쩔 수 없이 신학자나 심리학자들의 대답만큼 구체적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질문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곤 한다. E. D. 클림케는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영역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눈다. 첫 번째 질문은 우주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존재 이유와 그 목적에 관한 것이다. 가장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세 번째 질문이다. 나는 왜, 어떤 목적으로 존재하는가? 만약 목적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그것을 발견할 것인가? 목적이 없다면 내 삶은 어떤 의미나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일부 철학자들은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 자체가 하나의 대답만을 암시한다는 이유로 그 질문을 해체시킨다. 다른 이들은 그러한 질문에는 대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무의미한 질문으로 여긴다. 305-306

 

철학자 L.J. 러셀이 지적하듯이, 만약 삶의 의미가 오직 그 결과에 의거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결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모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내일 잼을 만들어라, 어제 잼을 만들어라. 그러나 오늘은 잼을 만들지 말아라.", "당신은 자녀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당신의 자녀들도 그들의 자녀를 위해 마찬가지로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잼을 먹지는 못한다." 의미 있는 삶이란 현재를 위한 삶과 미래를 위한 삶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러셀을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들은 삶의 의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이라고 좋아한다. 그러나 러셀은 삶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오늘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307

 

도덕성이 반드시 당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다른 모든 이들의 가치 있는 삶을 살 권리를 존중한다면, 이론상으로 우리는 모두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 행복으로 가득한 삶은 의미 있는 삶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행복한 삶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행복하기'위해 해복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 즉 삶의 목표이다. 어리스토텔레스는 실용적인 지혜, 탁월함, 즐거움이라는 세 가지가 행복한 삶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세상에 대해 배우는 것은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학구적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수준에서의 학습, 재능이나 기술을 발전시키는 일이 삶의 보람된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세스는 탁월함에 대해서도 도덕적이고 지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우리는 두 가지 설명을 모두 종합하여,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다. 309-310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 또한 행복의 중요한 요소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무 즐거움이나 행복의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오직 고귀하고 도덕적인 즐거움만이 참다운 행복으로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행복은 오직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행복은 활동적인 사람에게만 온다. 이러한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가생활은 게으른 생활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활동적인 삶이다. 인간은 어떤 일을 '' 때 가장 행복하다. 누군가를 감옥의 텅 빈 독방에 가두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최악의 고문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죄수에게서 자유뿐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행위와 상호작용까지 박탈하는 것이다. 포로 수용소의 생존자들은 종종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활동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미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삶 전체에 대한 평가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삶의 행복한 부분의 총합 이상이다. 당신이 항상 행복할 필요는 없다. 행복한 삶은 고통과 슬픔까지도 포함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급자족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결핍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는 행복이란 게 반드시 살아가면서 원하는 걸 얻는 데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때때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원하는 것을 얻어도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과 의미는 모두 도덕성과 관련되어 있다. 행복하고 싶다면 당신은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며, 도덕적으로 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원해야 한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행복에 대한 보편적인 요구와 우리 문화에 널리 퍼져있는 불행은 일을 지향하는 문화의 산물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는 오직 일을 통해서만 행복을 얻는다. 그것은 극도의 피로와 회복이 반복되는 과정이다. 310-311

 

심리학자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행복 연구는, '일이 행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만들어낸다'는 아렌트의 견해를 지지하는 듯하다...

칙센트미하이는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 동안에는 약 절반 가량의 시간 동안 몰입을 경험하고, 여가시간에는 18% 정도만 몰입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일에 몰입할 때 창조적이고, 강하고, 활동적이며, 집중적이고, 동기화된 느낌을 더 많이 갖는다는 의미였다. 311

 

칙센트미하이의 연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통찰은, 현재 우리의 문화에서 사람들은 일터가 아닌 곳엣 이러한 행복한 순간을 제공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312-313

 

자본주의는 삶의 수단을 제공할 뿐 삶의 목적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315

 

20세기 내내 고용주들이 조직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이것을 손에 넣어 이용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중 맨 처음에 등장한' 과학적 관리법'은 육체를 손에 넣으려고 시도했고, 다음으로 출연한 '인간관계론'은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으며, 이제 몇몇 컨설턴트들은 '영혼'을 건드리려 하고 있다. 317

 

'직장에서의 영성'은 대중 심리학과, 일시적으로 유행했던 경영학 이론이 항상 해왔던 일을 반복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 그것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듦으로써, 애초에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만들었던 권력과 갈등, 자율성에 관한 심각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대신 그거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이다. 318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제공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의미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320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처럼, 의미 있는 일은 주관적인 특성과 객관적인 특성을 모두 지닌다. .. 일의 사회적 의미와 도덕적 가치는 문화와 개인에 따라, 그리고 시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세상을 '인식'할 뿐 아니라,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창조'해주지 않는다. 320

 

개인이나 조직이 의미를 창출하려고 시도할 수는 있지만, 만약 그러한 의미가 교묘한 속임수로 만들어낸 환상이라면 그것은 냉소주의만을 가져올 뿐이다. 앞서 우리는 따로따로 일하는 사람들을 ""이라고 불렀던 회사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어떤 것의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그 의미까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한 상황 혹은 실재를 파악해야만 한다. .. 모든 고용인들은 존엄과 존중을 가지고 처우받아야 한다(너무나 많은 근로자들이 수년간 자신들이 '성인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해왔다)...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이라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삶에 참여하는 방식에 대해 약간 다른 주장을 했다. 그는 결정하고 생각하는 능력이 결여된 노예라도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워지면 이러한 능력을 되찾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일부 사람들은 노예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대신해서 생각하고 결정해주는 것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한다. 321

 

의미 있는 일은 우리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정의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그것을 보면 알게 된다. 종교직과 같은 일부 직업들은 본질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직업들보차도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이 의미를 발견할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의미 있는 일이 항상 편안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고통이나 고된 일 혹은 스트레스를 수반한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여전히 좌절하거나 지쳐서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은 대체로 개인의 삶에 활기를 북돋워준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경험과 우리가 논의한 숭고한 여가의 개념은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322-323

 

모든 사람이 의미 있는 일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존중받기'를 워하며, 어느 정도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고 싶어할 뿐이다. 결국 선의는 심리적으로 계획되기보다는 존중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번성하는 경향이 있다. 323

 

 

 

에필로그 - '''삶의 질'을 향상시켰는가?

 

이 책은 저주로부터 소명으로, 그리고 그 이상의 것으로 변화한 일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다...

일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첫째, 일은 더 나아졌는가? 그리고 "더 낫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분명 임금 노동자는 노예보다는 낫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을 노예와 농노, 계약제 하인, 그리고 초기 산업 노동자들보다는 육체적으로 덜 고되고 덜 지저분하고 덜 위험하다. 그러나 "더 낫다"는 것은 또한 고용주와 고용인들 간의 도덕적 관계를 포함해야만 한다. 직장 내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공정성이 존재하는가? 개인들은 '더 나은' 처우를 받고 있는가? 혹은 일이 우리의 삶을 향상시켰는가? 이 역시 "더 낫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달려 있다. 일이 삶의 물질적 조건들을 향상시켰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삶의 질'을 향상시켰는가? 우리의 직업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324-325

 

나는 현대의 경영자들이 올바른 직장을 '만들기'보다는 개인으로 하여금 기분 좋게 '느끼도록'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을 비판해왔다. .. 현대의 경영 기법이 낳은 또 다른 결과는 일이 점차 우리 삶의 보다 큰 부분을 차지하도록 일의 사회적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

오늘날의 고용주들은 자신들이 많은 것을 고용인들에게 약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특히 주주들에게 그토록 많은 것을 약속해야 할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들은 교묘한 속임수로는 신뢰와 헌신을 얻어낼 수 없음을 알고 있다. 325

 

고용주들은 자기 책임을 회피하고 고용인들에 대한 의무 없이 그저 권한만 유지하려 든다. 글나 근로자들은 자신의 실수뿐 아니라 경영자 및 경제의 실수와 "불운"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더욱 나쁜 것은 그들이 그것을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질책한다는 것이다. 326

 

고용불안정은 실업률이 낮을 때보다 새로운 삶의 방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326

 

정직한 직장은, '약속을 지키는 최상의 방법은 자신이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하는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328

 

과거의 사회계약이 사라졌다면 새로운 사회계약은 어떤 것일까? 조직은 직업 안정성을 약속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정보의 공유를 약속할 수는 있다. .. 경영자들은 조직의 모든 정보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용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될 정보는 가능한 한 많이 고용인들과 공유해야 한다. .. '정직한 직장'이란 고통스러운 진실을 이야기해줌으로써 그들이 그것에 대비할 수 있게 해주는 조직을 의미한다. 결국 그것이 "근로자들을 성인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329

 

상호존중은 단기적인 헌신관계를 만들어내는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서로에게 존중을 표하고 존중을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진실이 항상 듣기 좋은 것만은 아니며, 우리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항상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을 '신뢰'한다...

존중, 신뢰, 정직은 양 방향으로 작동한다...

'진실'은 그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울 것이다. 분명 대부분의 고용인들과 학생들은 평균 이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향상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준다면 그들은 진짜로 평균 이상이 될 기회를 얻는 것이다. 330

 

전통적인 노동윤리 아래서 개인의 고결함은 그가 어디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일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일하는지에 달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경영이론가와 고용주 들은 '일을 잘하는 고용인일수록 자기 삶을 희생한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한다. 331

 

 

내가 현대인의 일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한 가지 이유는 단지 직장 내의 불의, 경영 술수, 혹은 경제적 불안정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적인 큰 그림을 살펴보았을 때, 나는 삶 자체가 더 편해져야 할 시대에 이르러서도 유급고용이 살을 지배하는 것을 보고 당혹감을 느꼈다. 우리들 대다수는 어디서 어떻게 살지, 어느 곳에서 일하고 어떤 물건을 구입할지에 대해 전례 없이 많은 선택권을 가진 놀라운 시대, 후기 산업사회에 살고 있다. 기계들은 우리의 노예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기본적인 필수품을 상대적으로 쉽게 얻을 수 있다. 지금은 삶이 온갖 종류의 보람 있는 활동들로 가득 차야 할 시기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오랜 근무시간뿐 아니라 채무에 시달리고 있으며, 스트레스와 외로움, 그리고 가정해체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왜 그런가?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항상 더 많은 것을 워하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331-332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우리는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 , 생활 속에서 선택의 방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학예(liberal arts)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332

 

보다 광범위한 질문은 "우리는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삶을 원하는지 알고 있고, 그것을 위해 무언가를 기꺼이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그것을 위해 현재 포기하고 있는 것만큼의 가치를 갖는가?"이다. ..

일이 지배하는 삶 역시, 그것이 의식적인 선택이고 개인을 행복하게 만든다면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삶을 일에 꿰어맞추는 대신 일을 삶에 통합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333

 

 

 

 

역자 후기 - '일과 삶', 그 본질에 대한 고찰

 

일 혹은 일의 부재는 우리 삶에 너무나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정작 지금껏 우리가 하는 ''에 대해, 그리고 '일과 삶의 관계'에 대해 통찰해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335

 

현대사회에서 일은 자아실현의 수단이자, 개인의 존재를 의미 있게 만드는 도구로 그럴듯하게 포장된다. 일은 우리의 모든 것이며, 우리는 일을 잃음으로써 그에 수반되는 모든 것을 - 심지어 가정까지도 - 잃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올바르고 바람직한 현상인가? 일은 본래부터 모든 희생을 감내하면서 지켜야 하는 무엇이었나? 일은 종류에 상관없이 무조건 개인에게 성취감과 만족을 주는가?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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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일의 의미, 삶의 의미를 찾아서

 

우리가 가진 모든 연장들이 우리의 명령에 의해서든, 스스로 필요성을 인식해서든, 알아서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라... 베틀의 북이 혼자서 앞뒤로 움직이고, 연주자가 저절로 움직이는 리라를 연주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면 공장주들은 더 이상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노예의 주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쉬지 않고 일하는 로봇들에 의해 자동화된 공장을 보며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다수는 그렇지 않다. 이 시대를 기쁨으로 맞이하는 대신, 우리는 전보다 더 필사적으로 일(work)에 매달린다. 우리 사회는 일을 지향하는 사회이다. .. 우리는 일을 축복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일을 없애려고 하는 모순적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8

 

이 책은 우리 삶에서 일과 직장이 갖는 의미에 관한 책이다. 8

 

일은 우리의 지위뿐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까지도 결정한다.

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시장이나 고용주의 손에 맡겨두는 결과를 가져온다. 괜찮은 삶을 사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 이상의 것(something more)’을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용주들은 자기개발이나 자아실현 같은 다양하고도 추상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방법을 찾는다. 9-10

 

오늘날의 일은 대부분 우리 사생활의 일부를 포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과거의 노동자들이 단지 과로했을 뿐이라면, 오늘날의 많은 노동자들은 과로할 뿐 아니라 과도한 통제를 받고 있다. 14

 

 

 

PART ONE 일의 의미와 역사

 

1 왜 일하는가?

 

잠시 동안 일하지 않는 생활을 상상하기는 쉽지만, 평생을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어떤 사람들에게 왜 일하는가?”라는 질문은 우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한 선택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합니다.” 이것이 대다수 사람들이 유급노동을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종류의 일을 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19

 

윌리엄 줄리어스 윌슨은 그의 저서 <일이 사라졌을 때>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일자리가 부족하면 사람들은 단지 빈곤으로 고통을 겪을 뿐 아니라 공식적인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소소감을 상실한다. 더는 일이 그들의 생활을 규제하는 규칙적인 힘으로 작동하기를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윌슨에 따르면,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일은 규율, 소속감, 규칙성, 자기 효능감 같은 다양한 심리적 사회적 욕구를 만족시킨다. 그러나 과연 일이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가? 왜 실직자들은 여가를 통해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가? 20-21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직자들이 여가를 갖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또 다른 통찰을 제시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평화나 적당한 미덕, 교육이 없이는 여가도 가질 수가 없다. “비즈니스에는 용기와 인내가 요구되며, 여가를 위해서는 철학이 요구된다. 절제와 정의는 두 가지 모두에 필요하지마 특히 평화와 여가의 시기에 더욱 요구된다. 절제와 정의는 두 가지 모두에 필요하지만, 특히 평화와 여가의 시기에 더욱 요구된다. 왜냐하면 전쟁은 사람들을 공정하고 절제하도록 만드는 반면, 평화와 함께 찾아오는 상당한 재산과 여가는 사람들을 오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2

 

두려움, 물질적 필요, 책임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여가를 통해 스스로를 계발하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여가를 위한 교육을 통해 스스로에게 유익한 학습과 활동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활동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들이 읽기, 쓰기, 미술, 신체적 훈련, 음악 같은 과목들을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교양인 학계(liberal arts)’의 기초가 된다. 로마의 키케로도 학예가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교육에서, 삶의 필수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진리와 그 자체로 추구할 가치가 있는 지식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론적으로 볼때 교양은 일하는 방법이 아닌, 여가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

여가는 단순한 자유시간이상이다. 그것은 일에 대한 욕구와 필요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이며, 특정한 일으르 하기 위한 기회이다. 직업을 이맇었거나 직업을 가질 수없는 사람들은 결코 일에서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일할자유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선택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23

 

인간의 가장 흥미롭고 독특한 점은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난 에도 스스로 일하기를 선택한다는 점이다. 24

 

일을 통해 소득을 얻는다는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직업을 갖는 것이 우리 문화에서 그토록 바람직한 이유는 명백하다. 일은 우리에게 유용하기 때문이다. 일은 규율과 정체성, 가치를 제공한다. 일은 우리의 시간을 조직하고 우리의 삶에 리듬을 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이 우리에게 매일매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 준다는 점이다. 교육과 소득, 평화와 안전이 주어진다 해도, 유급노동이 일의 중심이 되는 문화에서 자발적으로 일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매일매일을 만족감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활동으로 채울 수 있을까? 우리들 대다수는 그것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일을 통해 만족과 행복을 얻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일은 우리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준다. 그러나 인간이 일 자체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많은 학자들을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장 자크 루소는 게으름이야말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생산활동의 필요성은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부지런한 습관은 일이 가져다주는 산물이며, 우리가 일을 통해 얻는 실용적인 교육이 무언가를 해야 할 필요성과 바쁜 습관을 만들어낸다고 저술하고 있다. 요컨대 우리는 타고난 기질 때문이 아니라, 훈련과 도덕적 조건화로 인해 일할 필요성을 느낀다는 것이다. 25-26

 

일의 의미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일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27

 

개미와 같은 이런 유형의 사람은 은퇴를 위해 저축하며, 남은 20년 동안 이전의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바라면서, 삶의 45년 내지 50년 동안 어느 정도의 즐거움을 저당잡힌다. 32

 

개미는 미래를 위해 살지만, 막상 미래가 왔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항상 아는 것은 아니다. 33

 

개미와 달리 베짱이는 현재를 위해 살고 미래를 희생한다. 그의 놀이는 아무데에도 이르지 못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노는 삶에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 있는 삶인가? 꿀벌은 개미처럼 일하면서도 베짱이처럼 자신이 우추구하는 것을 즐긴다. 꿀벌은 다른 사람들이 고맙게 여기는, 훌륭하고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데서 기쁨을 얻고 의미를 찾는다. 꿀벌은 유용하고 보상을 주는 일을 상징한다(물론 실제 꿀벌의 삶은 이야기 속의 꿀벌의 삶과는 전혀 다르다). 개미는 일하는 삶, 안전한 삶의 표본인 반면, 베짱이는 놀이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경솔한 삶을 대표한다. 그렇다고 해서, 베짱이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34-35

 

버나드 수츠 <베짱이의 놀이, , 유토피아>.. 수츠의 주장에 따르면, 당신은 다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에만 일하면서 놀 수가 있다. 첫째, 당신은 일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둘째, 당신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

이솝 우화의 꿀벌은 개미처럼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개미와 달리 꿀벌은 꿀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즐기거나, 꿀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즐기거나, 여전히 꿀 만들기를 즐긴다. .. 몇몇 생산적인 활동은 필요성은 없으나 만족을 준다. 36

 

매미의 노래처럼, 놀이를 하는 유일한 목적은 즐거움이다. 이솝 우화 속의 베짱이는 무책임해서 굶어 죽지만, 매미는 배고픈 예술가로 그려진다. 매미는 음악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굶어 죽는 것이다. 두 개의 우화는 서로 다른 메시지를 전달한다. 예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반면 일보다 노래를 더 좋아해서 죽는 것은 어리석다. 우리들 대다수에게 더욱 적절한 질문은 만약 당신이 개미처럼 산다면, 즉 나이 들어 쇠약해질 때까지 일해서 돈을 저축한다며, 그것은 의미 있는 인생인가?”이다.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주어진 시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37

 

일은 일 이외의 삶을 잠식한다. 일 이외의 삶은 일하는 삶보다 더 많은 것을 제공한다. 44

 

 

2 일이란 무엇인가?

 

일의 의미를 탐색하기 위한 좋은 출발점은 일(work), 노동(labor), 수고(toil), 업무(job)와 같은 단어들의 뜻을 살펴는 것이다. 우리가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정의하는 방식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어휘 사용이 시간이 지남따라 그 단어의 집합적인 이용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46-47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거나, 어떤 것의 이름을 바꾸는 행위는 잠재적으로 강력한 행위이다. 당신이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은 그것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48

 

일에 붙는 직함이나 사람들이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용어들은 직장에 대한 개념도를 형성한다. 고용주가 조직문화를 바꾸고자 할 때, 그들은 자주 재명명 방법을 사용한다. 49

 

필요성’.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 그것을 반드시 해야 하거나,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51

 

모든 문화에서 일에 대한 태도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태국어에서는 을 뜻하는 단어와 파티를 뜻하는 단어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

태국 사람들은 일이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며, ‘일 자체는 좋은 것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도 태국인들은 결코 게으르지 않다. 그들의 문화는 재미를 뜻하는 사눅(sanuk)’에 큰 가치를 둔다. 모든 활동은 사눅(재미있는)’마이 사눅(mai sanuk:재미없는)’로 구분된다. 사눅은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근심없는 즐거움을 뜻한다. 일이건 놀이이건 상관없이 어떤 활동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속성이 바로 사눅이다. 가령 태국의 어느 마을주민에게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단조로운 업무가 주어진다면, 그는 그 업무를 팽개치고 가버릴 것이다. 그것은 사눅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그 사람은 여러 날 동안 쉬지 않고 마을이 사원을 짓는 일을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일에서는 사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태국에 처음 공장을 지었을 때, 그들은 사눅의 중요성을 발견했다. 사실 초기에는 태국인들이 그다지 열심히 일하지 않았으며, 특히 아침마다 차려 자세로 서서 사가(社歌)를 부르는 의식을 싫어했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관습을 버리고 공장에서 음악을 틀어주기 시작했드며, 더 많은 휴식시간을 주고 작업중에 할 수 있는 놀이도 가르쳐주었다. 태국인들의 의식 속에서 일이 사눅이 되자 생산성이 증가 했다. 일과 놀이에 대한 태국인들의 태도는 같다. , 작업 파티는 생일 파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53

 

(work)은 너무나 다양한 것을 의미한다. 정말이지 대단한 단어이다. 우리는 일(work)하고일터(work)간다.’일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하는것이며, 우리가 만들어내는것이다. 미술 건축 음악 문학 작품(work)’도 있다. 우리는 의사, 회계사, 자동차 수리공이나 카펫 판매원의 솜씨(work)에 감탄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공간이나 나뭇조각, 빵 반죽, 고장난 자물쇠 등을 가지고도 일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의 해답을 내거나(work someone over), 운동을 하거나(work out), 좋은 일을 하거나(do good works), 누군가를 때려주거나(work someone over), 흥분하거나(get worked up), 자칫하면, 심지어 일벌레(workaholics)까지 될 수 있다.

이라는 단어는 동사이자 명사이며, 활동이자 활동의 산물이기도 하다. 55

 

노동(labour)’이라는 단어는 14세기 영어에서 최초로 등장했다. ..

동사노서의 노동(labor)은 행위만을 나타낼 뿐 행위의 대상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지만, 우리는 그가 딸기를 만들었다:고 말하지 안흔다. 비록 그의 행위가 딸기를 따는 이주 노동자보다는 훨씬 더 딸기를 만든 것에 가깝더라도 말이다. 화가가 그림 그리는 행위를 통해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노동하는 사람들은 대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는 육체적인 일을 하지만 직접 그것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56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노동,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필요한 물건을 다루는 일을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하는 하인의 일과 같다고 생각했다. 노동과 일은 두 가지 요인에 의해 구분된다. 첫째, 노동은 일에 비해 육체적 노려고과 더 크게 관련된다. 둘째, 노동자와 노동 대상의 관계는 일하는 사람과 그 대상과의 관계와 다르다. ..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노동자의 첫번째 정의는 봉사행위로서, 혹은 생계를 위해 육체적인 노동을 행하는 살마인 반면 일하는 사람의 첫 번째 정의는 만들거나 창조하거나 생산하거나 고안해내는 사람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노동이라는 단어가 로 격하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이 한 개인에 의해, 그리고 개인을 위해 행해지는 것인 반면 노동이라는 단어는 무언가를 만들거나 행하는 데 대한 개인의 기여를 암시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용어라고 말했다. ‘은 노동의 산물을 나타내는 명사이지만 노동은 일하는 사람들을 나타내는 명사이다. ‘노동은 육체적인 일을 하는 살마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반면, ‘은 다양한 행위나 그러한 행위의 대상을 가리킨다. 우리는 일조합이 아닌, ‘노동조합을 결성한다. 대부분의 조직에서 일은 협동적이며 상호 의존적인 사람들의 집단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터라는 말 대신 일터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집합적이고 육체적인 일보다는 개인적이고 비육체적인 일을 강조하는 것이다. 57

 

노동이나 수고같은 단어어비해 업무(job)’라는 단어는 상당히 유쾌하게 들린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명사 ‘job’덩어리(gob)’라는 단어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려준다. .. 17세기까지.. ‘업무란 영구적인 고용이 아니라, 일시적인 일을 의뢰받거나 잠시 고용되는 것을 가리켰다. 60

 

업무라는 단어는 대개 명사로 사용되는 반면 일하다라는 동사의 형태와 그들의 일에서와 같은 명사의 형태가 거의 비슷하게 사용된다. .. ‘업무의 또 다른 차이는 일은 보수를 받는 것과, 받지 않고 행하는 활동까지 가리키는 반면, ‘업무는 보수나 소득을 얻는 일에만 구체적으로 관련된다는 것이다. 61

 

업무라는 단어는 보수를 받기 위해 하는 도구적인 활동을 나타낸다. 그것은 일, 노동, 수고, 고역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업무의 정의는 일하는 살마과 그 산출물 간의 연관성을 암시하지 않는다. .. 일의 양에 대해서 ..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이 보수를 받기 위해 하는 한정된 양의 활동이라는 점이다. 62

 

 

3 일의 역사

 

살기 위해 일한다는 우리의 인식은 어떻게 해서 일하기 위해 산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을까? 64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일은 저주였다. ... 기원전 4세기의 역사가인 크세노폰은 사람들이 생의 좋은 것들을 누리는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 일이라고 기록했다. 만약 일이 신들의 저주라면, 그것은 정복당한 적이거나 포로가 된 외국인, 혹은 노예의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저주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편이 가장 낫다. 노예는 부유한 고대 그리스인들을 일에서 해방시켰다. 그리스인들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활동을 노예의 일로 여겼다. 노예제도는 인간의 지위를 강등시켰을 뿐 아니라 일의 사회적 도덕적 가치까지도 격하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이란 가능하면 노예들에게 떠맡겨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이득을 얻기 위해 하는 일은 그 자체로 저주가 되리 수 있다고 믿었다. 재산(땅과 노예들)을 소유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야말로 그가 생각한 인간적인 삶의 기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집 안에서 사용할 물건을 만드는 일과 상업적 이득을 위한 일을 구분했다. 그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기 위해 집에서 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인간의 필요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도 유한하다고 말했다. ..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소매업이나 금전적인 이득을 위한 일은 인간의 욕망(want)을 위해 실행되는 것이므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욕망은 인간의 필요(need)와 달리 무한한것이다. .. 돈을 벌거나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는 것 자체에만 열중할 뿐 잘 사는데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 어떤 것을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여가 활동의 정의이다. 게다가 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는데, 그들이 원하는 것과 그것을 얻기 위한 일은 결코 중단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65-66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개인의 생각과 견해가 그의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 평범한 거리의 그리스인은 유용한 상품을 개발하는 것에 대해 이러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을 것 같지 않다. 물론 우리는 그들이 정말로 그랬을지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평범한 살맘들은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을 하기 전에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원전 여러 동양 문화에서도 물질적인 세계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세계보다 덧없고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들이 을 경멸한 것은 아니다. 67

 

정신적 수양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이었다. 일의 과정은 결과보다 더 중요했다. 부처에게는 바닥을 쓸고 닦고 연료를 모으는 것 같은 가장 비천한 일조차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었다. 68

 

종교나 문화에 따라 일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혹은 중립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문화 내에서도, 서로 다른 종류의 일은 상이한 영적 도덕적 사회적 가치를 지닐 것이다. 모든 사회에는특정 유형의 일에 대한 고유한 편견이 존재한다. 68

 

고대 그리스인들은 다른 살맘들에 대한 봉사와 일반적인 육체노동에 대해 강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봉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시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치학>에서 그는 장인과 노동자들은 공동체의 하인들, “꼭 필요한사람들이기 때문에 시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장인이 시민이 될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로는 그들 대다수가 노예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조각의 황금기에 이 책을 저술했지만 조각가들이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조각은 격렬한 육체노동을 포함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조각을 노예 예술(servile art)’로 여겼다. 고대 그리스에서 육체노동자들은 시민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몇몇 훌륭한 조각가들은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반면 그림을 그리는 일은 육체적인 노력을 덜 필요로 했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람이 행하는 학예(學藝)로 간주되었다. 학예는 깨끗하고 지적인 일일 뿐 아니라, 자유로운 사람의 일을 암시했다. ..

육체노동에 대한 편견은 르네상스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그림이 학예와 노예 예술의 중간쯤에 위치한다고 생각한 반면 조각은 여전히 노예 예술이었다. 69

 

생업이 목수였던 그리스도는 직업이란 무의미한 것이라고 설교했다. ...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질서와 정당한 보상, 수양을 위한 일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그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규칙적으로 살라고 충고한다. “여러분 가운데는 무절제하게 살면서 일을 하지는 않고 만들기만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하는데, 다른 이들의 빵을 먹음으로써 그들에게 짐이 되지 말라.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 여기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있다. 첫째, 일은 생활 리듬의 일부이며 사람들을 시끄러운 문제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둘째, 개미에 관하 이솝 우화에서처럼 일하지 않는 자가 먹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71

 

교회는 을 세 가지 정도로 구분했다. 그것은 삶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 다른 이들을 위한 일, 개인적인 이득이나 물질적 이득을 얻기 위한 일이다. 72

 

우리가 태만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기력이라는 뜻의 아시디아(acedia)’를 대략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태만을 게으름이나 일하기 싫어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시디어의 본뜻이 아니다. 태만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게으름에 대한 비난이 아니며, 일의 가치에 대한 긍정도 아니다. 태만은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73

 

단순한 노동에 불과했던 이 두러지게 긍정되기 시작한 것은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이다. .. 529년 성 베네딕트는 몬테 카시노의 꼭대기에 수도원을 지었다. ...

성 베네딕트 이전의 수도사들은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힘들고 고통슬운 노동을 해야 했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육체적인 일에 보다 긍정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규정집의 주제는 오라 에 라보라(ora et labora)’,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이다. 베네딕트는 수도사들에게 신에 대한 헌신의 한 방버브으로서 무슨 일을 하든 착월함을 추구하라고 장려했다. “무엇보다, 어떤 일을 시작하든지 그것을 완전하게 해주십사 하고 신에게 진심으로 기도하라.” 74

 

성 베네딕트에게 일은 직업이나 소명(calling)이 아니라, 일종의 눈에 보이는기도였다. .. 베네딕트 교단은 유럽 전역에 걸쳐 퍼져나갔으며, 중세의 마으로과 도시를 발전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베네딕트회 수도사들은 중세 초기의 가장 능숙한 농부이자, 장인이자 기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노동을 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수도사들 중 가장 낮은 지위로 간주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일 자체를 가치 있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일과 신앙심 사이에 일련의 관계가 있음을 발견햇다 베네딕트 수도회의 전통에서 비롯된 노동윤리는 기독교인의 영적 미덕을 수공업을 비롯한 다른 직업에 까지 확대시켰다. 75

 

12세기에 이르러, 그 사람의 직업과 동일시한 성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베이커(빵 굽는 사람), 카펜터(목수), 대처(이엉장이), 스미스(대장장이), 위버(베 짜는 사람), 골드스미스(금 세공인), (요리사). 77

 

개인 및 집단의 정체성이 직업에 따라 새로이 형성되자 교회의 정책도 자신들의 일에 대해 보다 존중해 달라는, 조합과 중산층의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교회는 기꺼이 실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한 예로, 교회는 이 무렵 증가하는 중산층을 위한 중간 단계의 집으로서 연옥을 만들어냈다. 연옥은 중산층에게 천국과 지옥, 힘 있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존재하는 그들만의 진정한 영적 지위를 부여하였다. 연옥의 개념은 15세기 이전까지는 별로 유행하지 않았다. 15세기에 이르자 비록 비참하기는 해도 훌륭한 자금조달 장치(gimmick)인 연옥이 소곡(小曲)을 통해 찬미되었다. “금고에 동전 소리가 울리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솟아오른다.” 78

 

일에 관해 말할 때 우리가 가장 애용하는 묘사, 창조로서의 일은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했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으며 인간은 음악과 미술을 비롯한 아름다운 거슬의 창조자이다. .. “예견하다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프로메테우스.. 고대인들에게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를 고된 노동으로 몰아넣은 사기꾼이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 인류가 운명을 붙잡을 수 있도록 허락한 영웅이 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신의 섭리를 막연히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기 시작하면서, 일이 지니는 가치도 커졌다. 14세기의 피렌체는 우리에게 세계를 만들어내고 자연의 형태를 바꾸는 창조자로서의 인간, 즉 호모 파베르(homo faber)의 이미지를 선사했다. .. 만약 종교가 중세의 아편이었다면 창조성과 미는 르네상스 시대의 각성제였다.

르네상스 시대는 고유한 노동윤리를 가지고 있었다. .. 자신의 돈으로 무엇인가를 도모하되 구두쇠처럼 돈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부자가 되어도 상관이 없었다. ..

육체와 정신을 룬련시켜야 한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믿음에, 르네상스는 손을 훈련시키는 것을 더했다. 81-82

 

15세기 인문주의자 로렌조 발라는 중세의 전통과 교황이 누리는 현세의 권력을 공격했다. 진정한 선의 본질에 대한 그의 저서 <쾌락에 대하여>에서 발라는 쾌락과 덕을 재정의함으로써 쾌락과 아름다움을 가득 찬 삶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소박함과 자기 절제를 명하는 스토아 학파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다. .. 그는 덕()쾌락으로 환원될 수 있는 요소(calculus pleasure)”라고 주장했다. 쾌락은 짐승 같은 충동이 아니라 이성과 통찰의 원리이며, 덕은 재능이자 인내하는 능력이었다. 82-83

 

1516년에 저술된 모어의 <유토피아>는 공리주의 원칙에 입각한 공산주의 사회를 이상향으로 그리고 있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는 청소나 도살, 사냥과 같이 시민들이 비천하고 창피스럽게 여기는 일은 모두 범죄자와 노예들이 도맡아 했다. 따라서 시민들은 보다 흥미로운 일에 종사할 수 있으며, 하루에 여섯 시간만 일해도 된다. ..

1602년에 쓰여진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는 공동체 생활과 과학적인 사회 질서를 강조했다. 캄파넬라의 이상향에서는 모든 사회 계층이 평등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그곳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캄판넬라는 가장 고귀한 사람들은 한 가지 이상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

일이 인간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일을 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르네상스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고 성취를 이룬 사람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고 자신의 일을 조절할 수 있는 사라이다. 따라서 전형적이 르네상스인은 오늘날의 인간관과는 급격한 대조를 이룬다. 83

 

16세기부터 18세기 사이에는 노동자의 자살을 금지하는 법이 확산되었다. 이는 당시 사회가 더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했고 그만큼 노동자 가치가 증가한 반면 노동자들의 절망 역시 더 커지고 있음으로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지표이다. 84


루터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게으른 거지와 부랑자들을 꾸짖었다. 그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집이 없는 이유는 그들이 일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었다.(바로 이 시점부터 오늘날까지, 몇몇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러한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다른 주요 종교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 관점에서 크게 이탈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코란에서는 거지들을 세상의 자연스런 질서의 일부라고 생각했으며 자선은 도덕적 영적 의무라고 생각했다. 85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 자체를 위한 일이라는 개념과 휴식과 쾌락에 대한 혐오는 칼뱅과 루터로부터 비롯된 거이다. 이것은 노동윤리라고 불리는 것의 수많은 형태 중 하나에 불과하다. 85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일과 모든 노동자들을 똑같이 존중하도록 가르쳤다는 점이다. .. 루터와 칼뱅의 노동윤리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람들을 구속해온 믿음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선하고, 일하지 않거나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이다. 86

 

종교 개혁가들은 모든 일을 베루프(Beruf, 시간을 차지하는 이르 직업이라는 의미의 독일어), 소명으로 정의했다. 소명은 일의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에 대한 태도를 일컫는다. ... 모든 일이 신의 명령이라는 생각은, 일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불쾌하며 보수가 적더라도 누구나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보증해주었다. .. 프로테스탄트의 소명 개념은 일에 영적인 차원을 부여했다. 그것은 결코 일이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 ‘소명이라는 개념은 이제 우리의 일상 언어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현재는 종교적인 직업을 일컫는 데 주로 사용되고 있다. 대신에 소명이라는 말은 천직(vocation)’이라는 말로 세속화되었다. 우리는 때로 소명천직을 번갈아 사용하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창가 있다. 당신의 소명은 신이 결정하지만 천직은 당신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다. 87

 

우리는 지금까지 종교가 일의 도덕적 가치를 형성해온 과정을 살펴보앗다. 고대인들은 일을 강제적인 것이자 저주로 보았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일에 단순한 위엄(simple dignity)’을 부여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일에 매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신교도들은 일을 의미와 정체성, 구원의 징표를 찾는 과정으로 만들었다. 단순한 노동을 넘어선 일, 즉 소명으로서의 일 개념은 일의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특징을 강조했다. 일은 일종의 기도가 되었다. 일은 삶의 수단을 넘어 삶의 목저이 되어싸다. 일은 저주에서 소명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이르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수많은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88

 

 

4 일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

 

우리가 물려받은 노동윤리는 단일한 개념이 아니라 세 가지 개념이 융합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첫 번째 개념은 공정함과 사회적 책임의 원칙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부양할 의무를 갖는다. .. 두 번째 요소는 우리의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한다는 것. 세 번째는, 루터와 칼뱅의 독특한 견해로 일 자체가 도덕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지니며, 모든 사람은 살면서 어떤 종류의 일을 하도록 신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일은 그것이 아무리 비천해도, 또한 보수가 얼마든 간에 좋은것이다. .. 공정함, 개인의 탁월성, 개인의 선함이라는 이 세 가지 기본 개념으로부터 일은 고역아니라 의미 있는 것이라는, 일에 대한 낭만적 개념이 생겨났다. 그리고 우리는 일을 통해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89-90

 

18세기, 벤자민 프랭클린은 프로테스탄트의 관점과 계몽주의의 이상을 조합하여 새로운 노동윤리를 만들어냈다. 그는 사람들이 인도적인 방법으로 부를 사용하여 사회를 돕기 위해서는 우선은 부를 얻으려고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는 종교적 의무가 아닌,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일을 강조했다. 92

 

막스 베버는 프랭클린이 노동윤리로부터 윤리학을 이끄르어냈다고 생각했다. 프랭클린의 노동윤리가 낳은 윤리학은 두 가지 도덕적 개념에 기반하였다. 첫 번째는 공리주의이다. .. 두 번째 도덕적 개념은, ‘유용성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는 것이다. 92-93

 

프랭클린은 자서전에서 성공을 위해 필요한 열한 가지 미덕을 열거하는데 절제 침묵, 규율, 결단, 성실, 중용, 청결, 평정, 순결, 겸손이 그것이다. 그는 현세에서의 금욕주의를 설교했지만 또한 돈이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그 목적은 바로 생을 즐길 수 있는 자유였다. 93

 

1836년부터 1900년 사이에 모든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맥거피가 엮은 <간추린 어린이 독본> 시리즈를 읽었다. 이 시리즈는 칼뱅의 신학을 강조했으며 고된 노동과 근면, 검약의 윤리를 찬양했다. 94

 

메인 주 출신의 목사이자 교육자인 자콥 애벗은 1832롤로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들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 내에 자리잡은 프로테스탄트의 노동윤리를 명확히 표명했다. 예를 들어 <일하는 롤로>에서 롤로의 아버지는 그에게 한 시간 동안 못을 분류하라고 했다. 롤로는 그 일이 매우 지루하다고 불평했고,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한 가지 일에 꾸준히, 끈이 있게 몰두하는 능력을 가져야 해. 어린 소년들은 일이 놀이처럼 재미있을 거라는 잘못된 기대를 하더구나.” 롤로의 아버지에 따르면, 진정한 남자는 일이 노력과 자제력을 요구하며, 고되고 지루한 것임을 안다.

1950년대 중반, 산업화가 시작될 무렵부터 아이들의 동화는 바뀌기 시작했다. ..

1800년대 중반에 등장한 싸구려 소설은 올리버 옵틱을 비롯한 수많은 아동문학가들로 하여금 이야기의 색채를 바꾸게 만들었다. 지나치게 교훈적인 이야기들은 본격적인 모험소설만큼 잘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옵틱은 범죄나 잃어버린 친척, 인디언 전쟁 등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 이들의 모험은 단지 주인고으이 도덕적 개선이라는 진짜 이야기이 배경이 뿐이라며 독자들을 설득한 것이다. 옵틱의 새로운 영웅들을 여전히 도덕적 모범이 되었지만, 그들의 규범은 부지런히 일하는 것에서 용감한 행동으로, ‘개인적인 절제에서 추진력으로 변화했다. 95

 

일에 대한 교훈이 가득한 아동용 동화들은 미국 남부에서는 제대로 뿌리내린 적이 없었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땅과 노예를 소유하고 싶어했고, 그들은 돈보다 혈통을 더 중시했다. 97

 

경제 전문 기자(business jounalists)의 수가 증가하면서 많은 이들이 사업가들을 추켜세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스코틀랜드 이민자인 버티 찰스 포브스는 덕 잇는 사업가에 대한 찬양을 영구적인 예술의 형태로 표현했는데, 그것은 일과 미덕, 부는 행복과 사회적 이이긍로 이어진다는 프랭클린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1916<포브스>지를 창간하면서 그는 이 간행물이 사업과 인생 전반에 더 많은 인간애, 기쁨, 만족을 줄것이라고 설명했다. 98

 

위대한 사업가의 신화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기가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그저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99

 

예일 대학교 출신의 콘웰은 1888년 필라델피아에 템플 대학교를 설립한 침례교 전도사였다. 그는 오늘날 사람들이 동기부여자(motivational speaker)”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 콘웰 목사는 도덕적 충고와 사업상의 건전한 충고를 혼합했다. 그는, 돈을 버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내어 그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

18세기와 19세기의 노동윤리 옹호자들은 강한 도덕성이야말로 부에 이르는 열쇠라고 설교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데일 카네기가 1936년에 쓴 <카네기 인간 관계론>에 나타나듯이 개인의 성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도덕성이 아니라 심리학이 성공에 이르는 열쇠가 된 것이다. 99-100

 

성공에 대해 이야기하는 19세기의 많은 작가들과 설교자들, 심지어 몇몇 정치가들은 상업을 칭송하고 정치를 비방했다. 제임스 A. 가필드는 대통령이 되기 전인 1869, 워싱턴 전문대학의 졸업반 학생들에게 고전 학문을 가르치는 대학은 젊은이들의 직업 생활 준비에 완전히실패했다고 이야기했다. 100

 

19세기 미국을 방문한 유럽인들은 미국인의 에너지와 근면성에 아연실색했다. 특히 그들은 유한계급이 없다는 것에 대해 놀아워했다. 빈의 이민자인 프란시스 그룬트는 미국에서 상업이 주된 쾌락과 즐거움의 원천이라는 데 주목했다.

활동적인 직업은 그들 행복의 주요 원천이자 그들 국가를 위대하게 만드는 근원이다. .. 그들은 돌체 파르 니엔테(dilce far niente : 게으름의 달콤함)’대신, ‘게으름의 공포만을 알고 있다. 상업이야말로 미국인의 정수이다. .. 모든 인간 행복의 원천으로서 그것을 추구한다. .. ’. 101

 

과거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과 스스로를 동일시했고, 심지어 자기 이름까지 일에 맞추어 지었다. 반면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는 일과 정체성에 대한 두 가지 새로운 견해를 내세웟다. 일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를 발견하거나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1

 

산업화 이후부터는 이리에 대한 두 가지 유형의 견해가 존재했다. 첫 번째 견해는 계몽주의적인 것, 즉 과학과 지식이 진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산업화 이전에 일은 거칠고도 육체적으로 고된 노역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 두 번째 견해는 장 자크 루소와 같은 비평가들이 말한 것으로, 일이 일종의 은총받은 상태로부터 타락했다는 것이다. ‘은총으로서의 일이란, 자율적인 장인이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여 유용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어내고,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농부가 자신의 풍성한 녹색 들판에 씨를 뿌리고 수확하면서 조용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18세기의 저작에서, 루소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임금을 받기 위해 일하는 산업 사회의 몇몇 문제점을 예견했다. 루소는 인류가 타인의 노동으로부터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부터 일의 황금기는 끝났다고 믿었다. ..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일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창조성과 일하고자 하는 욕구를 잃었다. .. <에밀>에서 루소는 최상의 삶의 방식으로서 장인의 기능을 강조했다. 그의 낭만적 이상은 농부처럼 일하고 철학자처럼 사고하는 인간으로, 말에 편지를 박는 동안 진리와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는 목가적인 르네상스인이었다. 102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유재산과 자본주의 생산체제는 일로부터 얻는 창조적이고 사회적인 보상과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을 사용하는 기쁨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켰다.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일과 동일시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여겼는데, 특히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한 선택권을 거의 갖지 못하고 매우 세부노화된 일을 할 때 그러했다. .. 마르크스는 루소를 흉내내어 이러한 세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가 오른 한 가지 일을 하고 내일은 다른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 세상, 사냥꾼이다. 어부, 소 치는 사람이나 비평가가 되지 않고도, 마음먹은 대로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고기를 잡으며 저녁에는 소를 사육하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비평을 할수 있는 세상이다.’ 103

 

중요한 점은 이러한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한 가지 직업의 정체성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일과 정체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를 극단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림 그리는 사람만 있을 뿐 화가는 없을 것이다. 103

 

마르크스의 이상적인 세계에는 단 한 사람의 전문가도 없는 것일까? 병을 고치는 사람만 있을 뿐 의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마르크스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만약 당신이 청소부로 고용되어 있는 동시에 교회 집단의 우두머리이자 조각가라면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을 그저 청소부로만 여기기를 원하겠는가?... 마르크스는 사람들의 살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일이 유급고용 이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04

 

윌리엄 모리스는 당대의 르네상스인이자, 도이시대인들의 묘사에 따르면 일벌레였다. 그는 설계자, 장인, 시인, 번역가로서 탁월성을 발휘했다. 1884년 모리스는 사회주의 연맹을 창설하고 자본주의 노동체제와 생산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모르스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을 공유했지만, 동시에 일 자체의 심미적 가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한 편지에서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나는 왜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살 수 없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네.... 정말이지 나는 행복하게 일한다네. 그런 나의 시간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운명지워진 것, 칭찬받거나 보상받지 못하는 단조로운 고역일 뿐인 것과 비교하면, 부끄러움을 느낀다네.’

산업화된 영국의 짙은 매연과 보기 흉한 건물을 보며 경악한 모리스는 작업장에 아름다운 정원을 꾸밀 것을 제안했다. 그는 또한 대량생산된 상품들의 흉한 모습을 조롱했다. 그는 기계가 노동을 절약해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생각하는 손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 자체가 주는 심미적 가치는 유용성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물건들을 만들어내는 데서 오는 만족감에서도 비롯된다고 믿었다. 104-105

 

일의 의미에 대한 모리스의 흥미로운 통찰 가운데 하나는 가치 있는 일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모리스는 일이 삶의 빛이 될 수도, 혹은 삶의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첫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있는 반면 두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모리스에 따르면, 사람들로 하여금 일을 원하도록 하고 그 일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희망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가치 있는 일은 휴식의 즐거움에 대한 희망, 일을 통해 만든 것을 사용함으로써 느끼게 되리 즐거움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일상적인 창조의 기능에서 느끼는 즐거움에 대한 희망을 수반한다.” 105

 

가치 있는 일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희망이 잠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일뿐 그 실현 가능성 여부는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주관적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만든 물건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리스의 논점은 만약 그들이 그럴 수 있다면 그들은 그것을 사용하거나 소유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낄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사람들은 다양한 창조적 기술을 이용하여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할지에 대해 제각기 다른 희망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분한 여가와 고품질의 유용한 산물, 기술을 연마할 기회를 제공해주는 직업을 갖고 싶어하리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일은 객관적이다. 106

 

인간이 실제로 하는 에는 두 가지 이상적인 유형이 있다. ‘장인의 일혹은 손을 이용해서 하는 일과, ‘전문가의 일혹은 정신을 가지고 하는 일이 그것이다. 106

 

전문가( professional)’ 라는 단어는 원래 성직에 들어가는 사람이 공식적인 선서를 하는데 사용된 공언하다(profess)’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107

 

중세의 유일한 전문직은 대개 학자이자 법률가이자 의사였던 성직자들이었다. 전문직의 근저에는 세 가지 기준이 존재했다(이러한 기준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첫 번째, 모든 전문직은 공식적인 기술교육과 그러한 훈련을 확인시켜주는 일정한 제도적 인증 과정을 요구했다. .. 두 번째 기준은 전문직에서 사용하기 위한 기술을 발전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 세 번째로, 전문가는 그 전문직이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게 이용되도록 보장하는 일종의 제도적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윤리적 행위를 보증할 수 있는 조직화가 이뤄져야 한다. 미국의 변호사협회나 의사협회의 목적이 그러한 것이다. ..

사회학자 탈콧 파슨스는 “”기업인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에 상관없이 사리사욕만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반며느 전문가는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이타적으로 봉사한다.” 이것은 그가 50년 전에 쓴 글이다. ...

이상적으로 생각하자면 전문가들은 일에 대한 보수를 받지 않아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문가는 업무를 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비용을 보조받는것이기 때문이다. 108

 

대중이 전문가들의 비윤리적 행위에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여전히 전문가들이 사회에 대해 공식적 서약을 맺는다고 암묵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109

 

일에 대한 우리의 열정은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가 되고 싶은 것, 혹은 얻고 싶은 것에 달려 있다. 일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모리스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일을 원하려면 먼저 미래에 대한 어느 정도의 희망 혹은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노예와 농노들, 그리고 지독하게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힘 없는 사람들에게 노동윤리는 결코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111

 

 




PART TWO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바로가기



PART THREE 일과 삶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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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판 서문 

1930년 이후 나는 소련이 진정한 사회주의라고 부를 만한 쪽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지배자들이 어떤 권력층보다도 더 확고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계급 사회로 변모하는 분명한 조짐을 보았다.  12




(메이저) 나는 오래 살았고, 우리에 혼자 있을 때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 지구상에 살아 있는 어떤 동물 못지않게 삶의 본질을 이해한다고 말해도 좋을 듯싶습니다.  20


자, 동지 여러분, 우리 생활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21


인간을 정복할 때에도 그들의 악습을 배워서는 안 됩니다. 어떤 동물도 집에서 살거나 침대에서 자거나 옷을 입거나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돈을 만지거나 장사를 해서는 안 됩니다.  25


스노볼과 나폴레옹이 가장 탁월했다. 나폴레옹은 덩치가 크고 꽤 사납게 생긴, 이 농장에서 유일한 버크셔종 수퇘지로 말수는 적지만 하고 싶은 것은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라는 평판을 얻고 있었다. 스노볼은 나폴레옹보다 활발하고 언변도 더 뛰어나고 더 창의적이지만 속은 덜 깊다는 평을 들었다. 

스퀼러라는 덩치가 작고 살이 찐 돼지. 그의 볼은 둥글둥글하고 눈은 번쩍거리고 움직임은 민첩하고 목소리는 날카ㅇ로웠다. 그리고 언변이 뛰어나고 어려운 문제를 토론할 때면 꼬리를 흔들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버릇이 있었는데, 아무튼 그것은 꽤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다른 동물은든 스퀼러가 검은색을 흰색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도 가졌다고 이야기했다.  30-31



커다란 창고의 한쪽 벽.. [7계명]

1. 두 발로 걷는 자는 누구나 적이다.

2. 네 발로 걷거나 날개가 있는 자는 누구나 친구다.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4.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5.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40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생충 같은 인간이 없어지자 각자가 먹을 음식은 더 많아졌다.  43


다른 동물들은 투표할 줄은 알았지만 스스로 결의안을 내놓을 생각은 엄두도 못 냈다.  46


나폴레옹은 스노볼이 조직한 위원회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어린 동물들의 교육이 이미 다 자란 동물들의 교육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49


나폴레옹에 따르면 동물드이 총기를 구입해 사용법을 익혀 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총기를 구입해 사용법을 익혀 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스노볼의 주장은 보다 많은 비둘기들을 보내 다른 농장의 동물들에게 반란을 선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66


사실 그들(다른 동물들)은 나폴레옹의 말을 들으면 그것이 옳은 것 같고 스노볼의 말을 들을 때면 또 그것이 옳은 것 같았다.  66


나폴레옹은 개들을 데리고 메이저가 일전에 연설했던 높은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는 일요일 아침마다 열리는 회의를 이제부터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그런 회의는 시간만 낭비하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농장의 운영에 관한 모든 문제는 자기가 의장직을 맡고 있는, 돼지들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69


스퀼러는 농장을 돌아다니며 동물들을 안심시켜 주었다. 그는 동물들에게 인간들과 거래해서는 안 된다느니, 돈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느니 하는 그런 결의안은 통과된 적이 전혀 없고, 심지어 제안조차 한 적리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것은 순전히 공상이며 어쩌면 맨 처음 스노볼의 입에서 나온 거짓말이 퍼진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80


돼지들은 갑자기 농장 본채로 이사해 거기서 거주하게 되었다.  82


(스퀼러) 동지들, 여러분은 우리 돼지들이 요즘 본채의 침대에서 잔다는 말을 들었지요? 그렇게 하면 안 됩니까? 그렇게 하지 말라는 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침대는 그저 잠을 자는 장소에 불과합니다..  83


클로버의 눈에는 눈물이 그득했다. 만약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수년 전에 인간을 전복시키기 위해 일을 벌였을 때 목표한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런 공포와 학살의 장면은 메이저 영감이 처음 그들에게 반란을 선동했던 그날 밤 꿈꾸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이 미래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은 동물들이 배고픔과 매질로부터 해방되고, 모든 동물들이 평등하고,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메이저가 연설하던 그날 밤 자신의 앞발로 새끼 오리들을 감싸 주었듯 강자가 약자를 보호해 주는 동물들의 사회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는 이 농장에 충성을 다하고 열심히 일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고 나폴레옹의 지도를 받아들일 겁니다. 그러나 그녀와 다른 동물들은 그 때문에 희망을 갖고 열심히 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풍차를 건설하고 존스의 총탄에 과감히 맞선 것은 결코 그런 것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비록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말솜씨는 부족했지만 아무튼 그녀의 생각은 그러했다. 

마침내 그녀는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노래가 대신할 수 있다는 듯 '영국의 짐승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101-102


세 번째 노래를 막 끝냈을 때 스퀼러가 두 마리의 개를 대동하고 무언가 중대 발표라도 할 것처럼 동물들에게 다가왔다. 그는 나폴레옹 동지의 특별 지시에 따라 '영국의 짐승들'이 금지되었다고 발표했다. 지금부터 이 노래는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동물들은 깜짝 놀랐다.

[왜 금지되었죠?] 뮤리엘이 소리쳐 물었다.

[동지, 이 노래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소.] 스퀼러가 딱딱하게 말했다. ['영국의 짐슬들'은 반란의 노래였소. 그러나 반란은 이제 끝났소. 오늘 오후의 반역자 처형이 마지막 행동이었소. 우리는 농장 안팎의 적들을 모두 패배시켰소. '영국의 짐승들'에서 우리는 미래의 좋은 사회에 대한 동경을 표현했소. 그러나 그 사회는 이미 성취되었소. 분명이 이 노래는 이제 어떤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소.]

비록 겁에 질려 있었지만 몇몇 동물들은 항의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로 그 순간 양들이 여느 때처럼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고 외쳐 댔다. 이 외침 소리는 몇 분 동안 계속되었고 결국 토론은 시작도 못하고 끝나 버렸다.  102-103


며칠 후 처형 사건이 몰고 온 공포가 누그러져 갈 때, 일부 동물들은 7계명 중 여섯 번째 계명인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를 기억하거나 혹은 기억한다고 생각했다...

클로버는 뮤리엘을 데려갔다. 뮤리엘은 그녀에게 그 계명을 읽어 주었다. 거기에는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이유 없이 죽여서는 안 된다'라고 씌어 있었다.  105


그해 내내 동물들은 지난해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했다. 농장의 일상적인 일을 다 하면서 전보다 두 배나 더 두껍게 풍차의 벽을 쌓고 예정된 날짜에 풍차 건설을 끝낸다는 것은 엄청난 노동이었다. 존스 시대보다 더 오랫동안 일하고 먹는 것도 더 나아진 게 없다는 생각이 들때도 있었다. 일요일 아침이면 스퀼러가 기다란 종이 두 마리를 앞발로 들고 각 식량 생산량이 200퍼센트, 300퍼센트, 혹은 경우에 따라 500퍼센트 증가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통계 수치를 발표했다. 동물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반란 전의 생활상이 어땠는지 뚜렷이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06


스퀼러는 연설할 때면 나폴레옹의 지혜, 특히 다른 농장에서 무지와 노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불행한 동물들에 대한 그의 사랑 등을 생각하며 눈물을 줄줄 흘리기도 했다.  107


나폴레옹 동지가 이 세상에서 취하는 마지막 조치로서 엄한 포고령을 내렸다고 했다. 그것은 술을 마시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121-122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두 개의 단어가 들어 있었다. 실제로 벽에 적힌 계명은 이랬다. '어떤 동물도 술을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된다.'  123


돼지들과 개들의 배급량은 그대로 둔 채 다른 동물들의 배급량은 다시 한 번 줄어들었다. 스퀼러는 식량 배급을 지나치게 평등하게 만드는 것은 동물주의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쨋든 그는 겉으로 보기엔 어떨지 모르지만 실제로 식량이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다른 동물들에게 어렵지 않게 증명해 보였다. 물론 당분간은 배급량을 재조정할 필요(스퀼러는 한 번도 '감소'라는 말을 하지 않고 항상 '재조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가 있지만 존스 시대와 비교하면 사정이 훨씬 나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125


고달픈 일들을 수없이 감내해야 했지만, 그래도 현재의 삶이 과거보다 훨씬 더 품위 있다는 사실이 그 고달픔을 덜어 주었다.  128


양들은 자진 시위에 가장 열성적이었는데, 간혹 누군가가 이 행사는 시간 낭비이고 추위에 떨며 오래 서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불만을 터뜨리기라도 하면(몇몇 동물들은 돼지와 개가 주위에 없을 때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양들이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라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입을 확실히 다물게 했다. 그러나 대체로 동물들은 이 축하 행사를 즐겼다. 어쨌거나 그들은 자기들이 농장의 진정한 주인이고 따라서 하는 일도 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며 스스로 위로했다. 그리하여 노래와 행진, 스퀼러의 통계 수치, 우렁찬 총포 소리, 젊은 수탉의 울음소리, 펄럭이는 깃발 등으로 동물들은 배고픔을 잠시나마 잊어버릴 수 있었다.  129


까마귀 모세..[동지들, 저기 위쪽에.] 그는 커다란 부리로 하늘을 가리키며 엄숙하게 말하곤 햇다. [저기 위쪽, 검은 구름 저 너머에 '얼음사탕 산'이 있어. 우리 같은 불쌍한 동물들이 일하지 않고 영원히 편히 쉴 수 있는 행복한 나라가 있단 말이야!]...

그들이 생각하기에 현재 자신들의 삶은 배고프고 고달팠다. 그런데 여기 아닌 다른 어딘가에 현재보다 더 나은 세계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해서 과연 잘못되고 옳지 못한 것일까?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모세에 대한 돼지들의 태도였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얼음사탕 산에 대한 그의 이야기가 모두 거짓말이라고 경멸조로 말하면서도 그에게 일을 시키지도 않고 매일 맥주 한 홉씩 제공하면서 농자에 살도록 허용했다.  130-131


여러 해가 흘렀다. 계절들이 여러 번 왔다 가고, 짧은 동물들의 생애는 어느덧 빠르게 흘러갔다. 클로버, 벤저민, 까마귀 모세, 그리고 상당수의 돼지들을 제외하고는 반란 전의 옛 시절을 기억하는 동물은 하나도 없었다.  140


이제 농장에는 초창기에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식구가 많이 늘어나 있었다. 많은 동물들이 새로 태어났으며 그들에게 반란은 단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희미한 전통에 불과했다.  141


벤저민 영감만이 긴 자기 생애의 모든 일들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금 농장의 사정은 옛날보다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좋아질 수도 나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며, 배고픔과 고난과 실망은 삶의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물들은 희망을 절대 버리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이 동물 농장의 일원이라는 영예와 특권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이 농장은 영국 땅 전체에서 동물들이 경영하는 유일한 곳이었다.  143-144


비록 그들의 삶은 고달프고 또 그들의 희망이 모두 성취된 것은 아니지만, 동물들은 자신들이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다고 느꼈다. 그들이 굶주린다면 그것은 독재자 인간들을 먹여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열심히 일을 했다면 그것은 적어도 자신들을 위해 그렇게 했다. 그들 중 누구도 두 다리로 걷지 않았다. 어떤 동물도 커다란 동물을 '주인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모든 동물들은 평등했다.  144-145


클로버가 입을 열었다. [난 시력이 나빠. 하긴 젊었을 때도 저기 씌어 있는 것을 읽을 수 없었어. 하지만 저 벽은 달라 보여. 7계명이 그대로 있어, 벤저민?]

벤저민은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는 자신의 규칙을 이번만은 깨뜨리기로 하고 벽에 쓰인 것을 큰 소리로 읽어 주었다. 거기엔 7계명은 온데간데없고 단 하나의 계명만 남아 있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147


나폴레옹이 파이프를 물고 농장 정원을 산책하는 모습이 눈에 띄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랬다. 이상하지 않았다. 돼지들이 존스 씨의 옷자엥서 옷을 꺼내 입어도, 나폴레옹이 검은색 코트에 반바지 사냥복을 입고 가죽 각반을 차고 나타나도, 또 그의 총애를 받는 암퇘지가 존스 부인이 일요일이면 업던 물결무늬 비단 옷을 입고 나타나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148


폭스우드 농장의 필킹턴 씨가 한 손에 맥주잔을 들고 일어섰다. 그는 일동에게 건배를 청할 생각인데 그에 앞서 꼭 할 말이 있다고 말했다...

동물 농장의 하층 동물들이 이 나라의 어떤 동물들보다 일은 더 많이 하면서도 식량은 더 적게 배급받는 이런 정책은 당연하다.  149-150


[만약 여러분에게 다루어야 할 하층 동물들이 있다면 우리 인간들에게도 다루어야 할 하층 계급이 있습니다!] 이 재치 있는 말을 듣고 좌중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필킹턴 씨는 그가 동물 농장에서 관찰한 대로 돼지들이 동물들에게 식량 배급은 적게 하면서도 일은 오랫동안 시키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동물들이 대체로 없다는 사실에 대해 돼지들에게 다시 한 번 찬사를 보냈다.  151


어느 쪽이 인간이고 어느 쪽이 돼지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154




에세이 - 작가와 리바이어던(1948년 3월에 써서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는 문학잡지 <정치와 문학> 여름호에 실림)


우리는 자신이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참된 문학 기준들이 적용된다고 가장하고 있을 뿐이다.  157


내가 알고 있는 한, 어느 누구도 자신들을 [부르주아]로 간주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이며, 반파시스트이며, 반제국주의자이며, 인종 차별을 경멸하고, 인종 편견에 분노를 터뜨린다.  159


실제로 노동자들은 자기가 착취당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사회주의 쪽으로 많이 넘어갔지만, 엄밀하게 말해 그들 또한 찾취자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제는 어느 모로 보나 노동자 계급의 생활수준이 향상은 말할 것도 없고 현상 유지도 어려운 지겨엥 이르렀다. 부자들을 몰아낸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일반 대중은 소비를 더 적게 하든가 생산을 더 많이 해야 한다.  162-163


정통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항상 풀리지 않는 모순을 물려받는 것이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든다면, 신중한 사람들은 모두 산업주의와 그 생산품에 불쾌감을 갖지만, 빈곤의 극복과 노동 계급의 해방을 위해서는 산업화의 축소보다는 오히려 그것의 확대가 필요하다고 인식한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어떤 일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일종의 강제 없이는 결코 행해지지 않는다. 또 강력한 군사력 없이는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외에도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이 모든 경우에, 우리가 공식적인 이데올로기에 개인적으로 충성하지 않아야만 이끌어 낼 수 있는 명백한 결론이 있다. 일반적인 반응은 그 질문을 우리 마음의 한쪽 구석으로 몰아넣고 답을 유보한 채 모순적인 슬로건만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163-164


내키진 않지만 할 일을 한다는 의지가 있다고 해서 그 일에 동반되는 신념까지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한 작가가 정치에 참여할 때, 그는 한 시민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참여해야지 작가로서 참여해서는 안 된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신이 속한 정당을 위해서는 절대로 글을 써서는 안 된다.  165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이므로 기꺼이 참전할 수 있지만, 당연히 전쟁 선전문 쓰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 작가가 정직하다면, 자신의 글과 정치 활동이 상호 모숨될 때도 있다. 분명 이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경우들이 있다. 그럴 때면 자신의 충돌을 왜곡시키지 말고 침묵을 지키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166


정치란 것이 얼마나 더럽고 비열한 사업인지를 알고 있지만..  166-167


우리는 정치에서 두 개의 약 가운데 어떤 것이 덜 악한 것인지에 대해 결정할 뿐이며 그 이상의 것은 결코 할 수 없다.  167




작품해설 - 정치적 글쓰기와 동물 소설

1917년 러시아에서 차르 체제를 무너뜨린 노동자들의 혁명이 스탈린 등장 이후 애초의 혁명 정신은 사라지고 전체주의적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줄곧 주시해 왔다.


<동물 농장>에 등장하는 사건들과 동물들은 모두 알레고리 수사법의 특성상 고도의 비유적 수법으로 암시되어 있다.  176


이 소설은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부터 1943년 테헤란 회담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러시아 역사에 걸친 정치 문제를 다루고 있다.  176-177




돼지들 - 거대한 러시아의 관료제를 무너뜨리고 혁명을 이끈 볼셰비키 지식인들을 가리킨다.


나폴레옹 - 러시아 혁명기의 스탈린을 가리킨다. 그는 계급 없는 평등 사회를 지향했던 메이저 영감의 혁명적 이상주의를 저버리고 1인 독재자로 군림한다.


스노볼 - 트로츠키(1905년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한 공산주의 혁명가. 스탈린과 극도로 대립하다 결국 1927년 당에서 축출되고 1929년에 소련에서 추방당했다)를 가리킨다. 트로츠키처럼 스노볼은 뛰어난 연설가이며 혁명에 대한 지적 열망을 가진 인물이다. 혁명적 이상주의를 실천하고자 자신을 희생시키는 인물로 묘사되지만 나폴레옹에게 쫓겨나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한다. 진정한 혁명가의 표본이다.


메이저 영감 - 혁명의 기본적 이론과 이상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를 가리킨다.


스퀼러 - 그는 새로운 사회의 성장과 더불어 발전하면서 그 사회 안에서 높은 지위를 획득하는 인물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회에 존재하는 정치 선전 기구의 거대한 선전 활동을 반영한다.


복서 - 러시아 혁명기의 '프롤레타리아트'를 대표한다. 복서는 모든 사회 체제의 성공에 꼭 필요한 정직하고 열성적인 무지한 일반 노동자를 대변한다. 그 같은 노동자는 독재나 전체주의 정권하에서 필연적으로 착취당하는 존재이다.


벤저민 -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성실함이나 능력을 의심하는 냉소주의자이자 또 많은 사실적 이론의 진실을 의심하는 회의론자를 대변한다. 다른 동물들처럼 그 역시 읽는 법을 배우지만 그 기술을 유용한 목적에 이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마 작가는 힘 있는 지식인도 신념이나 이상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을 그를 통해 보여 주려 한 것 같다. 


클로버 - 동물 농장의 모성적 동물이다. 복서의 단순한 선과 힘의 특질을 보완한다. 어떤 다른 동물보다도 동정과 친절함을 많이 보여 주는 동물로, 끝까지 살아남으며 억압받는 동물들을 위한 안락하모가 힘의 원천이 된다.


몰리 - 몰리는 성격이 변덕스러운 보조적 역할을 하는 동물로 엘리트 계급을 대변한다. 그녀는 이 소설의 중간쯤에서 사라진다. 어떤 면에서 그녀는 인간과 같은 방법으로 다른 동물들을 착취한다. 클로버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개들 - 다른 동물들에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러시아의 비밀경찰을 가리킨다. 


양들 - 개들과 더불어 나폴레옹의 권력 장악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종의 선전대이다. 양들은 대중을 대변하며 대중들이 어떻게 조종될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 


모세 - 까마귀 모세는 어떤 면에서 피지배자보다는 지배자와 손을 잡는 동물로 교회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오웰의 견해를 보여 준다.


뮤리엘 - 염소 뮤리엘은 메이저 영감의 회합에 참가한 똑똑한 동물들 중 하나이다. 그녀는 읽는 법을 배우지만, 읽은 것에 대한 올바른 판단은 내리지 못한다. 그녀는 적혀 있는 모든 것은 사실이라고 믿으며 7계명이 돼지들에 의해 바뀌었을 때도 결코 질문을 하지 않는다.


존스 -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를 가리킨다. 


필킹턴 - 폭스우드 농장을 경영하는 인간. 영국의 처칠을 가리킨다.


프레더릭 - 핀치필드 농장을 경영하는 인간. 독일의 히틀러를 가리킨다.


매너 농장 - 니콜라이 2세 치하의 러시아를 가리킨다.


동물들의 반란 -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발생한 '10월 혁명'을 가리킨다.


외양간 전투 - 10월 혁명 이후 일어난 내란. 이 전투에서 존스와 함께한 일당은 볼셰비키를 몰아내려고 했던 외국 세력들이다. 


풍차 전투 - 1941년 독일의 러시아 침공을 가리킨다.


암탉들의 반란 - 1921년 1만 5,000여 명의 수병과 시민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서쪽 핀란드 만에 위치한 크론슈타트의 해군 기지에서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궐기한 사건을 나타낸다.


풍차 건설 - 1928년 급속한 산업화와 농장의 집단화를 요구하며 시작된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나타낸다.


동물들의 거짓 자백과 처형 - 1936년부터 1938년 사이에 있었던 '스탈린 대숙청'을 가리킨다.


돼지들과 인간들의 파티 장면 - 제2차 대전 기간인 1943년 11월 28일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이란의 테헤란에 모여 회의를 한 [테헤란 회담]을 가리킨다.  177-183


오웰 <동물 농장>에서 혁명의 이상적 사상은 과연 실천 가능한 철학인가를 인간의 권력 욕구와 결부시켜 그 물으모가 해답을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다.    183


혁명 초기부터 이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공평한 사회가 이루어지지 않고 돼지들을 중심으로 한 특정 엘리트 사회로 변질되기 시작.

작가는 권력 쟁취를 위해 비밀리에 개들을 키우는 나폴레옹의 경우를 포함해 엘리트 집단으로 성장하기 위한 돼지들의 의도적 행위를 혁명적 이상에 대한 가장 큰 위험 요소로 꼽았다. 돼지들의 권력 욕구와 그에 따른 필연적인 타락.  184


동물들은 스퀼러의 조직적인 거짓말, 양들의 대중 선동 등과 같은 언어의 왜곡으로 인해 과거에 대한 진실을 완전히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그들에겐 과거는 없고 오로지 현재만 있을 뿐이다.  185


동물 농장에서 전개되는 반란 이후의 상황은 마르크스가 사회주의에 대해 생각했던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되지 못하고 위로부터의 혁명이 되고 만다. 혁명의 기본 문제는 과거의 독재자들이 행사했던 억압적 권력이 아닌 공정한 권력을 이상과 어떻게 결합시키느냐 하는 것이지만, 동물 농자의 경우에는 나폴레옹을 위시한 돼지들의 권력 욕구로 인해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다.  185-186


구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돼지들이 인간화되는 서글픈 장면은 '실천 철학'으로서의 '마르크스적 이상'에서 출발한 러시아 혁명이 스탈린이라는 한 개인의 전제 정치로 전락해 버린 러시아의 정치 상황을 포함한 당대의 정치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환멸감을 극명히 보여 준다...

오웰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독재자 스탈린의 등극으로 애초의 이상과는 다르게 전체주의적 상황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자신의 사회주의적 전망이 점점 절망적으로 흐럴간 것이지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적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 자체를 반대한 것은 결코 아니다.  186-187


<동물 농장>에서 오웰은 '이상'이 아무리 바람직하더라도 자연적 본능인 '권력에 대한 욕망'때문에 계급 없는 사회는 불가능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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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이 쓰인 1848년, 당시의 세계 자본주의의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영향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해면하고 있다.  9


박종철출판사에서 1998년에 출간된 <공산주의 선언>을 바탕으로.(출판사와 번역자는 다르지만 전문을 참고하길 원하면 클릭)


어떤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사람의 전체적인 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사람의 생애만 알아서는 안 되며, 그 사람이 어떤 시대 속에서 살아갔는지를 알아야 한다.

사회적 객곽적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  19


철학자들은 작가 한 짓을 제3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바라보는 짓을 자주 한다.  21


마르크스는 <공산단 선언>을 쓰면서 결코 시간을 초월한 성스러운 문서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바로 첫 구절은... 이것이 사라질 수 있는 상품이라는 것, 후손을 염두에 두지 않고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구체적 순간에 쓴 것임을 강조한다.

<공산당 선언>은 역사를 전사(前史)와 미래사로 나누엇다는 점에서 역사철학적인 의의가 있다. 또한 그것은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작동 원리와 그것에 연관된 정치적 사태들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현대의 글로벌 자본주의의 맹아를 검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정치경제학적 의미가 두드러진다. 더 나아가 <공산당선언>은 근대의 모더니티가 가진 파편적, 허무적 측면들을 관조함으로써 현대 문화의 여러 측면을 이해하는 기초를 제공한다는 문화이론적 의의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39-40


혁명의 과정에서 마르크스가 보여준 태도는 선동가가 아니었다. 그는 혁명을 위해 노동자를 준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론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40


나는 그를 '진정한 근대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근대인은 어떤 사람을 지칭할까.

'계몽', 독일어로는 Aufklarung('아우프클래롱'이라 읽는다), 영어로는 Enlightement다. 또 하나는 '주관성' 또는 '주체성(Subjectivity)'이다. 이 둘은 매우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계몽은 말 그대로 'Enlightement' 즉 '빛을 비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Aufklarung'은 '명확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서양 사람들은 근대를 이런 시대로 규정한 것이다. 빛을 비추거나 명확하게 했다는 것은 뭔가 어두운 게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게 뭘까? 그건 바로 중세시대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암흑의 중세, 밝은 근대라는 식의 이분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계몽과 주관성에 대립되는 것은 이처럼 중세시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시인인 단테가 쓴 <신곡>을 예로 들어보자. 르네상스하면 세계사 시간에 '인간의 재발견' 이라고 배웠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면 인간을 재발견하면 신은 완전히 부정해도 되는 것일까?

아니다. <신곡>은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으로 구성된다. <신곡>은 로마 최고의 시인이라 일컬어지는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지옥과 연옥을 여행하다가 베아트리체(단테의 애인었다고 한다)의 인도를 받아 천국에 이르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이 작품이 쓰인 시기가 1300년대라고는 하나 이 서사시 안에는 신이 전면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서양 사람에게 신을 빼놓고 뭔가를 하라는 말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서구화되었다고는 해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전통의 유습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이제는 제사지내지 마세요'라고 말하면 어떻겠는가. 싸대기 맞는다. 이 점을 생각해보면 신을 부인하고 계몽을 내세운 것은 엄청난 단절이다.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신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 이성의 힘으로만 세계를 파악하겟다는 태도다. 어른이 된다는 소리다. 그래서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칸트는 미성년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답한 것이다. 더 이상 신의 피조물로서 신의 은혜를 입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가 세계의 중심이 되어 어른이 되어 살아가고 자신의 의지, 이성에 따라 세계를 파악하고 개조해나가겠다고 자신의 의지, 이성에 따라 세계를 파악하고 개조해나가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것이 서양 근대사상의 혁명적 면모다. 인간이 주체적인 존재라는 바로 이 전통 위에 칼 마르크스가 서 있다.

서양 근대인들은 인간의 힘으로 세계를 구축하자는 사람들이엇다. 이들은 왕의 권력을 신이 준 것이라고 하는 왕권신수설을 부정하고 프랑스혁명과 같은 정치적 혁명을 통해 인간 중심의 사회를 으룩하려 하였다. 이들은 인간의 힘에 의해 파악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른바 근대의 교양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부르주아로 불리는 근대의 시민인데 고전적 의미에서의 우파, 즉 오늘날의 의미에서 자유주의자다. 즉, 근대의 지식인이라 하면 일단 누구나 다 우파 수준의 교양을 갖춘 셈이다. 그들은 낡아빠진 편견에서 벗어나 있다. 그 사람들은 지연이니 혈연이니 하는 것들에는 신경 안 쓴다. 그렇게 오랫동안 믿어오던 신도 끊어버린 사람인데 뭘 못 끊겠나. 그냥 인간 중심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 능력을 향상시키고 세상을 인간의 힘으로 고쳐나가겠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48-50


마르크스 사상의 배경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계몽주의와 교양이고 마르크스 자체를 볼때 반드시 기억해두어야 할 키워드는 이성, 역사, 노동이다.  52


나는 내가 감성적인 상태에 빠져 있엉도 내가 감성적인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의 정신 안에서는 이성이 감성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은 다 이런 상태다. 그래서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53


인간의 주체적 이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되, 사태의 기원과 전개를 꼼꼼하게 바라보는 것이 마르크스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태도였다. 

우리들도 이 방법을 많이 사용한다. 가령 어떤 사람을 만났다고 해보자. 그때 우리는 그 사람을 지금 이 순간의 모습만 가지고 판단하지 않는다. 어디서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왔고, 그런 과거를 통해서 지금은 어떤 모습이 되었는지를 보고 판단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력서를 통해서 사람을 판단한다. 이것도 일종의 역사적 방법이다. 물론 우리는 그 과정에서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나랑 같은 고향이네, 같은 학교 나왔제, 심지어는 성씨가 같네 하면서 호감을 갖는 경우가 많다. 이런 편견만 벗어던진다면 우리도 제대로 된 역사적 방법을 날마다 훈련할 수 있을 것이다.  54


이성과 역사, 이 둘을 묶으면 역사적 이성주의다. 마르크스는 이성과 역사적 방법론, 이 두 가지 도구로 인류의 역사를 바라본다... 

마르크스는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기반에 놓인 것을 인간의 활동(human activity)으로 파악했다...

역사를 인간 활동의 기록이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신이역사의 주인이 될 수 없으므로, 당연히 인간의 활동이 인류의 역사를 만든 핵심적인 요소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이다.  55


마르크스가 보기에 인간 활동의 구체적인 내용은 뭘까? 그건 바로 노동(Arbeit)이다. 이것 독일어다. '아르바이트'라고 읽는다.

물질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활동이 역사를 움직이는 핵심적인 요인이라 생각했다.

'이성' '역사적 방법' '물질적 활동 중심'이라고 하는 마르크스 사사으이 주요한 세 요소를 묶어 한마디로 역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이라고 할 수 있다.  56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일수록 아주 철저하게 유물론을 실천하고 있다. 뭐든지 물질의 관점에서, 간단히 말해서 돈 중심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돈 벌고 성공하는 거 아닌가. 돈 못 모으는 사람들은 어떤가. 마음약해서 여기저기 좋은 일만 하다가 거덜 나지 않는가. 역사적 유물론이 골수까지 파고든 사람들, 사실 알고 보면 자본가들이다. <공산당선언>을 읽다보면 중세를 깨뜨리고 근대를 열어젖힌 부르주아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들이 바로 자본가들이다. 마르크스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58-59


마르크스의 사상 전개과정을 크게 둘로 나누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철학(특히 역사와 노동으로서의 인간 본성에 대한)에 관한 연구 시기 : 대표적 저서로는 파리시대의 <경제학-철학 초고>가 있다. 이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순수한 의미의 철학적 연구를 정치경제학과 결합시킨 것이다.

2) 1852년부터의 정치경제학 시기 : 자본주의 사회를 어떻게 뒤엎을 것인가에 관한 책이 아니라 자본의 해부학(Anatomy)이라 할 수 있는 <자본>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저서다.  62


데이비드 하비가 쓴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에는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을 쓴 1848년을 전후한 시기의 파리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67


<선언>이 나왔을 때에는, 우리는 그것을 사회주의 선언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1847년에는 사회주의 는 부르주아 운동을 의미했고, 공산주의는 노동자 운동을 의미했다.  75


'전 세계 앞에 공공연하게 표명하여'

1848년이라고 하는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공산주의자임을 공공연히 선언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공산주의자들은 비밀결사의 형태로 활동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공공연하게 활동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77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제1장의 이 첫 문장인 <선언>을 관통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다.  79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에서 그는 유물사관이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장 담대히 거짓을 일부러 들고 나온 것"이며 "거기서는 역사의 근본을 아무 목적 없는 우연한 물질에 돌린다. 그러고는 모든 정신적인 가치 관념을 유치한 시대의 공상, 명상에서 나온 곳으노 돌리려 한다."

그런데 이 주장은 유물사관을 무척이나 심하게 오해한 것이다....

유물사관에서 말하는 물질이 뭐겠는가. 그건 바로 경제적인 의미의 물질이다. '황금만능주의', '물질 중심주의' 할때의 물질이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돈 가지고 매사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물질 중심 사고방식이다. 그러니까 유물사관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돈 가지고 매사를 판단하려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크게 오해한 것은 아니다.  84-85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개인은 주관적으로는 어느 정도 관계들을 초월하고 있다 해도 사회적으로는 역시 관계들의 산물"이라고 썼다. 유물사관이란 것은 바로 이런 물질적 관계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따져보자는 것이다. 그러니 불온한 것이 아니다....

'계급'은 그러한 물질적 관계 속에서 사람들을 파악할 때, 비슷한 관계에 놓인 사람들을 묶어서 부르는 것이라 해두자.

첫 번재 문장 아래에 보면 엥겔스가 붙인 각주가 있다. 1888년에 영어판을 내면서 붙인 것이다.

'부르주아지란 현대 자본가 계급, 즉 사회적 생산수단의 소유자이자 임금 노동의 고용자들을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트란 자기 자신의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 않아서 살기 위해 부득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현대 임금 노동자 계급을 의미한다.'  86-87


'계급'.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물질적 관계를 기준으로 나눈 다음, 각 부류의 사람들을 묶어서 가리킬 때 쓰는 말일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물질적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을 기준으로 사람을 나누는 게 뭐가 잘못된 것인가 말이다. 그러니 계급이라는 말은 나쁜 말이 아니다.  87


첫 번째 문장은..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물질적 관계를 기준으로 나뉜 집단끼리 서로 대립하고 싸워온 역사다.  88


부르주아(bourgeois)라는 말이 생겨나서 쓰이게 된 과정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본래 부르주아란 말은 변호사, 법률가, 의사 등 농노도 귀족도 아닌 제3신분의 전문직 종사자들을 뜻했다.

이 용어들이 처음 쓰일 때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속에서의 특정한 계급, 즉 현대 자본가 계급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91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을 설명하기 위해 이전에 등장했던 지배 계급과 그것의 몰락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자유민과 노예, 파트레스와 플래비스, 남작과 농노, 쭌프트 회원과 직인, 요컨대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끊임없는 대립 속에서 맞섰으며... 그러한 투쟁은 빈번히 사회 전체의 혁명적 개조나 투쟁하는 계급들의 공통의 몰락으로 끝났다.'

과거에는 지배 계급을 가리키는 말이 위에서 인용한 마르크스의 설명처럼 이것저것 많았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를 물질적 관계라는 기준에서 보면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눌 수가 있다. 부르주아지는 처음부터 현대 사회의 지배 계급이 아니었고, 그 자리에 올라서기까지 아주 오랫동안 노력하였다.  93


'봉건사회가 몰락하면서 생겨난 현대 부르주아 사회는 계급 대립을 폐지하지 않앗다. 부르주아 사회는 다만 새로운 계급들, 억압의 새로운 조건들, 투쟁의 새로운 모습들로 낡은 것들을 바꿔놓았을 뿐이다.'

부르주아가 중세에 있던 것을 바꾸어놓은 것은 세 가지다. 낡은 것들을 새로운 계급, 억압의 새로운 조건, 투쟁의 새로운 모습들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이를 설명하자면 봉건사회에도 계급 대립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르주아는 그것을 바꾸었다. 지배하는 방식과 조건 등을 바꾸었다는 말이다. "부르주아지의 시대는 계급 대립을 단순화했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물질적 생산관계만을 가지고 계급을 분류하는 것이 부르주아의 방식이다.

그런 분류 기준에 반대하고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돈 이외의 것을 진정한 인간의 가치라고 추구하며 사는 살마들의 인생은 얼마나 피곤한가.  94


마르크스는 "중세의 농노로부터 최초 도시의 성외(城外) 시민이 생겨났고, 이 성외 시민 층으로부터 부르주아지의 최초의 요소들이 발전하였다"고 써두었다. 다시 말해서 중세의 농노 중에서 경제적 이윤에 눈뜬 사람들이 성외 시민이 되었고, 이들이 오랫동안 고생해서 부르주아가 되었다는 것이다.  95


아메리카의 발견, 콜럼버스에 의한 아메리카의 발견이 1492년의 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딱 백 년 전이다.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한 시기가 1488년이다. 이것이 아프리카의 회항에 해당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 일은 흔히 세계사에서 '지리상의 대 발견'이라 불린다.  96


자본주의는 애초부터 전 세계적인 시장을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자본주의는 초반부터 글로벌 경제였던 것이다.  97


돈이 유럽에 흘러 들어가면서 유럽에서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봉건 사회의 잔재가 무너진다. 그 잔재들이 뭔가.

<선언>에서는 그것을 "봉건적 쭌프트적 공업 경영방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새로운 시장이 생겨남에 따라 이 방식이 증대하는 수요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되자 매뉴팩처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쭌프트 다음이 매뉴팩터다. 그러면 그 다음은 뭘까. <선언>의 구절을 보자.

'시장은 줄곧 성장했고 수요는 줄곧 증가했다. 매뉴팩처로도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앗다. 그때 증기와 기계 장치가 공업 생산에 혁명을 일으켰다. 매뉴팩처의 자리에 현대 대공업이 들어섰고, 공업 중간 신분의 자리에 공업 백만장자들, 공업 군대 전체의 우두머리들, 현대 부르주아들이 들어섰다.'  98-99


이제 부르주아지는 현대 세계의 당당한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대공업이 발전하면서 본격적인 의미의 세계 시장이 열린다. <선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 시장은 상업, 해운, 육운에서 헤아릴 수 없는 발전을 이룩했다. 이러한 발전이 다시 공업의 신장에 영향을 미쳤으며, 부르주아지는 공업, 상업, 해운, 철도 등이 신장되는 것과 같은 정도로 발전햇고, 자신들의 자본을 증식시켰으며, 중세로부터 내려오던 모든 계급들을 뒷전으로 밀어냈다.'

몇 페이지 더 읽으면 나오지만 주르주아는 중세의 계급들을 뒷전으로 밀어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계급들을 자신의 발 아래 부리게 된다.  99-100


공업 경영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자본(Money), 생산수단(Means of production), 노동력(LP:Labor Power)이다.  104


마르크스는 이윤의 원천을 '노동력'이라 말한 것이다. 자본의 순환 고리에 뭔가가 외부에서 들어가는데, 그것이 인간의 본질인 노동으로부터 나오는 노동력이고, 바로 이 노동력이 이윤을 만들어내는 원천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취직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된 사람들이 있어야 공장이 돌아간다고 했다. 이걸 달리 만하면 공장에 투여할 노동력이 잇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건이 16세기와 18세기에 영국에서 일어난 인클로저 운동이다. 지주가 땅을 12개 부분으로 나눈 다음 소작인 12명을 부려서 일을 한다고 치고, 소작인은 각자의 땅에서 농사를 지어 반은 지주에게 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갖는다고 하자. 자기 땅은 아니지만 소작인과 생산수단인 땅은 긴밀하게 붙어 있다. 게다가 농사 짓기는 굉장한 숙련을 요구하는 일이므로 섣불리 소작인을 잘라낼 수도 없다. 그런데 만약 이 땅에서 지주가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고 양을 키우겟다고 하면 소작인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울타리만 쳐서 양을 키우면 된다. 이렇게 인클로저(enclosure. '울타리치기'라는 뜻이다)를 통해 소작인들은 생산수단으로부터 떨어져 자유롭게 되었다. 무지하게 자유로워진 거다. '자유로운'이라는 첫 번째 뜻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다. 그들은 자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다. 말이 자유지 가진 게 몸뚱어리밖에 없다는 뜻이다. 영러 free from이 '~이 없는'이라는 뜻 아닌가.  105-107


'자유로운 계약 노동자'라는 말의 뜻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생산수단을 가지고 잇지 않다는 점, 즉 '~이 없다'는 점에서 자유롭고, 자신의 뜻에 따라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이것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아니다. 자기의 잠재적 능력을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는 아닌 것이다. 

현대의 공업사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생겨났다. ..

자유로운 계약 노동자는 반드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취직해서 월급 받으면서 일하는 사람은 다 여기에 속한다. 

화이트칼라니 블루칼라니 하는 구별은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말도 안되는 것이라는 사실만 분명히 알아두자.  108


'부르주아지의 이러한 각각의 발전 단계들에는 그에 걸맞는 정치적 진보가 수반되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중요한 통찰 중 하나는 경제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이 동시에 맞물려 돈다는 것을 발견한 점이다.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이라는 학문 분야가 있는데, 이게 이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는 맞물려 돌아간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111


'부르주아지는 봉건 영주들의 지배 아래서는 피억압자 신분이었고, 꼬뮌에서는 무장한 자치연합체였으며, 어떤 곳에서는 독립적인 도시 공화국이었고, 다른 곳에서는 군주국의 납세 의무를 지닌 제3신분이었으며, 그 다음에 매뉴팩처 시기에는 신분제 군주국이나 절대 군주국에서 귀족에 대한 평행추였으며, 대군주국 일반의 주요한 토대였다가 마침내 대공업과 세계 시장이 갖추어진 이래로는 현대 대의제 국가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쟁취하였다. 현대의 국가 권력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최종적인 결과는 현대 대의제 국가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쟁취한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의 일을 처리해주는 위원회인 것이다.

꼬뮌(commune)은 본래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도시 시민들이 자신들의 봉건영주로부터 자치권을 사들이거나 강찰한 뒤에 자신들이 이룩한 도시 공동체를 부르던 명칭이다. 꼬뮌과 관련해서는 1870년대 파리 꼬뮌(노동자들이 봉기한 혁명 정부)을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1871년 3월, 독일군이 파리를 포위한 가운데 일어난 19세기 최대의 노종자 계급 혁명이다.  112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코뮌을 평하여 "그것은 본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정부였다. 그것은 착취 계급에 저항한 생산 계급의 투쟁의 결과이며,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을 이룩할 수 있는 새로 발견된 정치 형태였다"고 말했다. 엥겔스 또한 "꼬뮌은 전 유럽의 노동자들에게 사회 혁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열쇠를 준 것"이라고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한 바 있다.  113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지배권을 얻은 곳에서, 모든 봉건적, 가부장제적, 목가적 관계들을 파괴하였다.'

'파괴'라고 한 단어의 독일어 의미는 '절멸시키다'라는 뜻이다. 완전히 파괴하고 땅에 묻어서 흔적조차 없애버리는 것이다. 완전히 거덜 내는 것이다. 이게 첫 번째 업적이다.

오랫동안 세계를 지배해온 것을 없앴으니 당연히 혁명적인 업적인 거다. 그런 것을 없앤 다음, 그 자리에 세워놓은 것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노골적인 이해관계, 냉혹한 현금 계산이다. 이것 역시 부르주아 계급의 업적이다.  115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인간애가 어떤니, 인간관계가 돈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삭막하다느니 하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르주아의 혁명적 업적인데 그걸 불만이라고 하면 부르주아의 업적이 불만이라는 말이고, 그러면 다연히 빨갱이로 몰리지 않겠는가.  117


'부르주아지는 이제까지 존경받았던, 사람들이 경외하며 바라보앗던 모든 직업에서 그 신성한 후광을 벗겨 버렸다. 부르주아지는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 등을 자신들의 유급 임금 노동자로 바꾸어놓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 자신의 진본성이 없어진다. 생명도 복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복제하여 돈을 벌려고 든다. 

부르주아 계급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뭐든 돈 되는 방향으로 바뀌어간다. 오래갈 만한 것이 있을 수 없다. 끊임없이 부수고 새로 지어야 그것으로부터 이윤이 생겨난다.  117-118


모든 것이 돈으로써 측정되므로 존귀한 것이 남아나질 않는다. 

현대 사회의 문화를 논하 ㄹ때 문화만 따로 떼어내서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반드시 경제적 구조부터 이야기해 들어가야 한다.  119


글로벌이니 세계화니 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있어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바탕으로 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요즘 들어서는 그 경향이 더 강해졌을 뿐이다. 

또 하나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 '혁신'이라는 말이다. 

이것 역시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계속해서 자본의 순환 고리를 돌려야 하니까. 그것도 빨리 돌려야 이윤이 빨리 나오니까 혁신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123


'부르주아지는 생산도구들에, 따라서 생산관계뜰에, 따라서 사회관계들 전체에 끊임없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혁명은 때려 엎는다는 의미강 아니다. 계속되는 혁신과 변화를 가리킨다. 그 혁신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일어난다. 먼저 생산도구들을 바꾼다. 공장에 자동화 시스템이 도입되었다면 이건 생산도구가 바뀐 것이다. 그에 따라 그 도구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이 바뀐다. 사람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조직도 변한다. 이건 생산관계가 바뀌는 것이다. 생산관계가 바뀌면 사회관계 전반이 바뀌게 된다.  124


혁신을 하는 궁극적인 이뉴는 '이윤창출'에 있다. 회사에서 아무리 사원들 건강이 최고다. 가족 같은 회사 분위기 만든다. 직원 재교육과 복지를 강화한다고 떠들어대도 그건 궁극적으로 회사의 이윤창출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회사가 성장하지 않는다면, 매출과 영업이익이 올라가지 않는다면 당장 교육과 복지 부문부터 줄인다. 이걸 보면 그런 시책의 근본 목적이 무엇인지 금방 알수 있다.

성장을 하려면 혁신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혁신을 자주 하다 보면 결국에는 사람을 잘라내는 일이 생겨난다.  125


노동의 생산성이 올라가야만 이윤이 증가하니까. 노동 생산성 향상을 위해 기술 혁신을 햇는데 어느 시점에 오면 살아 있는 노동자를 쫓아내게 된다.  127


'물질적 생산에서 그렇듯 정신적 생산에서도 마찬가지다. 개별 국민들의 정신적 창작물은 공동 재산이 된다. 국민적 일면성과 제한성은 더욱더 불가능하게 되고, 많은 국민적, 지방적 문학들로부터 하나의 세계 문학이 형성된다.'

전 세계적인 차원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가 이제 문화도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지배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의 세계 문학은 획일화된 문화를 뜻한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물질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자본주의 세계에서 정신적인 면도 가지고 잇는 문화가 형성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할리우드 영화가 무역협정과 연골되어 협상된다. 4년마다 한 번씩 사람들이 열광하는 월드컵 축구대회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과 마찬가지 방식을 통해서 그러한 열광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도 1970년대 중반부터다. 이게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의 문화 현실인 것이다.  128-129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인터넷과 매스미디어다. 콘텐츠 산업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산업은 바로 이러한 네트워크가 있었기에 생겨날 수 있었다.

IT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정년은 보통 30대 중반이다. 빠른 속도로 빨아먹다가 더 빨아먹을 게 없으니까 내다버리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생산도구들의 급속한 개선과 한없이 편리해진 교통을 통해 모든 국민들을, 가장 미개한 국민들까지도 문명 속으로 잡아당긴다.'

이걸 읽고서 마르크스가 오늘날의 상황을 예언하듯이 봤다고 생각하면 과잉해석이다. 그딴 식으로 생각하는 건 마르크스를 우상화하는 것이다. 무슨 '빠'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마르크스 당시에 교통이 발전했으면 얼마나 했겠는가. 다만 그 사람이 글로벌한 차원에서 움직이는 자본주의 체제를 보고 이런 판단을 했구나 하는 정도로 보면 된다.  130-131


'부르주아지는 농촌을 도시의 지배 아래 복속시켰다. 부르주아지는 거대한 도시들을 창조했고, 도시 인구의 수를 농촌 인구에 비해 크게 증가시켰으며, 그리하여 인구 중 현저히 많은 부분을 우매한 농촌 생활에서 떼 내었다.'

자본주의 체제는 기본적으로 도시문명이다.

도시에서는 뭐든 자기 혼자 힘으로 자급자족할 수가 없다. 음식을 먹으려 해도 슈퍼에 가서 공산품을 사다 먹어야 한다.  131


자기 관리를 하려면 생활을 단순하게 만들어야 한다.  136


'부르주아지는 백 년도 채 안 되는 자신들의 계급지배 기간 동안, 과거의 모든 세대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고, 더 거대한 생산력들을 창조하였다. 자연력들의 정복, 기계 장치, 공업과 농경에 대한 화학의 응용, 기선 항해, 철도 전신, 전 대륙의 개간, 하천의 운화화, 땅 및에서 솟아난 듯한 인구 전체, 이와 같은 생산력들이 사회적 노동의 무릎 위에서 졸고 있었다는 것을 이전의 어느 세기가 알아챘을까.'

현대의 대공업이라는, 노동 분업과 효율성을 갖춘 체계 속에서는 사람들이 더 이상 각자 알아서 노동을 해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여럿이 모여서 일해야 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노동이 잉여 가치의 원천이 된다. 자본주의가 이룩한 거대한 생산력들은 사회적 노동을 통해서만 구현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137


'우리는 이리하여 다음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르주아지가 양성된 기초였던 생산수단드로가 교류수단들은 봉건사회 안에서 태어났다... 한마디로 봉건적 소유관계들은 이미 발전한 생산력들에 더 이상 걸맞지 않게 되었다... 그것들의 자리에 자유 경쟁이 들어섰으니, 그에 걸맞는 사회적, 정치적 기구와 함께, 부르주아 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지배와 함께 들어섰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를 극복하기 위해 느닷없이 새로운 것을 외부로부터 가져와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봉건사회 안에 봉건사회를 극복해 낸 자본주의의 씨앗이 들어 있었고 그것이 싹터서 자본주의의 발전이 가능했듯이, 자본주의 사회안에 자본주의를 극복할 씨앗이 들어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 씨앗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 씨앗을 발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자본주의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자본>이라는 책을 썼다. <자본>은 자본주의를 뒤엎자는 주장을 담은 책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밝힌 책이다. 뒤집어는 건 밝힌 다음의 일이라는 것이다.  138-139


'우리 눈앞에 이와 비슷한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사회 안에서 시작된 어떤 운동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 운동은, 부르주아가 봉건사회를 무너뜨렸듯이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 사회를 무너뜨리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부르주아의 힘은 놀라운 것이었다. 마법사와 마찬가지였다. 글ㄴ데 이제 그 마법사는 "지하 세계의 힘에 더 이상 군림할 수 없게 된 마법사"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해놓고 보니 감당할 수 없는 힘이었던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첫 번째 힘은 "생산력들의 반란"이다. 생산력의 반란으로 봉건제가 폭발하고 그것으로부터 부르주아 사회가 나왔다면, 부르주아 사회 역시 생산력의 반란 때문에 위기에 놓인 것이다. 이렇게 생산력이 반란을 일으키면 부르주아 사회의 소유관계는 물론이고, 그 소유관계를 규율하는 여러 가지 법적 장치와 같은 사회관계가 폭발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생산력까지도 태반이 벌멸되고 하나의 "사회적 전염병"이 돌발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과잉 생산"이라는 전염병이다.

'사회는 갑자기 순간적인 야만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기아와 전면적인 섬멸전은 사회에 대한 모든 생활수단들의 보급을 차단해버린 것처럼 보인다. 공업과 상업은 절멸된 듯이 보인다. 왜 그런가? 사회가 너무 많은 문명, 어무 많은 생활수단, 너무 많은 공업, 너무 많은 상업 따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장들, 좀 이상하다. 많으면 좋은 거 아닌가. 

문제는 그렇게 많은 것이 아무나 나눠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윤을 남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니 그냥 막 내다팔 수가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창고에 재로고 쌓여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발전하면서 생산성 향상을 위해 자동화를 도입한다. 그러면 노동력이 남게 된다. 그걸 해결하려고 구조조정이란 걸 한다. 말이 그럴싸해 구조조정이지 사실은 사람 자르는 일이다.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그냥 남는다. 노동려깅 너무 많이 남아돌게 된다. '과잉'이 자본주의 위기의 근본적인 요인이다.  141-142


'부르주아지는 무엇을 통해 이 공황들을 극복하는가? 한편으로는 대량의 생산력들을 부득이 절멸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들을 획득하고 옛 시장을 더욱 철저히 착취함으로써.'

마르크스는 두 가지 방안을 발견했다. 첫째가 대량의 생산력들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냥 마구 내다버리는 것이다. 사람도 없애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이다. 전쟁 무기를 한번 생각해보라. 평소에 그게 어디 쓸모가 있는가. 미국에 전쟁 무기가 엄청나게 생산되어 쌓여 있다. 그거 만드느라 돈 엄청 들어갔다. 소비를 해야 또 만들 것 아닌가. 아예 안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공장의 대규모 장치들은 어떻게 할 것이며, 고용되어 일하는 수많은 인력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아예 전쟁을 일으켜서 '미개한' 이라크 사람들 죽이는 게 더 쉬운 것이다. '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 더 그럴싸할 테고, 이게 자본주의 국가가 전쟁을 일으키는 근본벅인 이유 중의 하나다. 바로 "절멸"시키는 것이다. 깡그리 없애버리는 것이다.  143


시장 확대는 전쟁을 일으킬 만한 형편이 안 되면 나오는 방안이라 생각해도 좋다. 애초부터 자본주의는 세계 시장을 무대로 성장해왔다. 더 이상 개발할 만한 시장이 없는 것 같아도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그래서 온 세상을 '문명' 국가로 편입시켜야 한다.

그것도 안 되면 기왕에 개발한 시장을 더 철저히 뜯어먹는다. 별로 쓸데없어 보이는 물건까지 만들어 그게 '생활필수품'이라고 광고하면서 팔아치우는 것이다. 이러다 안 되면 자기들끼리 싸운다. 식민지 쟁찰전을 벌이는 것이다. 이렇게 전 세계를 상대로 물건 팔아먹을 시장을 찾아 나서는 것이 제국주의다. 제국주의 국가들끼리 시장 쟁탈전을 벌이다가 급기야는 거대 전쟁까지 이른 것이 제1, 2차 세계대전이다.  144


자본주의의 위기극복전략 예를 다른 사례를 통해 더 살펴보자. 이거 중요하다. 잘 알아두어야 한다. 그래야 세계 시장 진출이니, 국제 자유무역이니 하는 말들이 가진 달콤한 유혹의 뒷면에 놓인 쓰라린 경제논리를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야 강대국의 정치적 발언이 사실은 경제적 이익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야 강대국의 경제관련 발언이 사실은 군사력 행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대장 아래서 굴러 간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가장 커다란 환상 중의 하나가 그 체제는 자유경쟁이며, 그에 따라 공정한 기호를 보장하는 효율적 체제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게 현실에서는 정말 그대로 작동할까. 예를 들어보자. A, B, C. 이렇게 세 명의 부르주아가 잇다고 하자. 세 명 모두 두루마리 휴지를 생산한다. 생산한 휴지의 품질이 똑같다 치자. 누가 만든 물건을 살 것인가? 일단 싼 거 살 것이다. 브랜드 이미지가 넣ㄹ리 알려진 물건을 살 수도 있다. 그러면 이들 세 사람이 언제나 공정하게 경쟁하며 그에 따라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넓혀줄까.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결국 시장 독점으로 간다.  144-145


시장의 공급을 지배한다는 것은 가격을 지배한다는 것이요. 이윤을 자기 맘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자본가든 독점 공급을 목표로 한다. 그래야 이윤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146


실업자가 늘어났다는 것은 아주 많은 수의 대중이 가난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건은 넘쳐나는데 가난한 대중은 물건 살 돈이 없다. 

현대의 국가 안에는 다양한 세력들이 공존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는 부르주아와 깊은 관계 속에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반항하는 기미가 보이고 국가를 원망하는 분위기가 고조되면 얼른 나서서 적당한 선에서 당근을 국가를 원망하는 분위기가 고조되면 얼른 나서서 적당한 선에서 당근을 주어 무마하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는 국가 권력이 부르주아 계급의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하로 했던 것이다.  149


'부르주아지, 다시 말해 자본이 발전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프롤레타리아트, 즉 현대 노동자 계급은 발전하는데, 그들은 일자리를 찾는 한에서만 살 수 있고, 자신들의 노동이 자본을 증식시키는 한에서만 일자리를 찾게 된다.'

노동자 계급이 발전한다는 말을 오해하지 말자. 그냥 생겨난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이니 대학마다 취직률을 높이기 위해 기업에서 요구할 만한 인재를 키운다고 난리법석 떠는 거 아닌가. 대학이 학문탐구의 공간이 아니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이것이다.  152


'자신을 조각내어 판매해야만 하는 이 노동자들은 다른 모든 판매품들처럼 하나의 상품이며, 따라서 똑같이 경쟁의 모든 부침(浮沈)들, 시장의 모든 변동들에 내맡겨져 있다.'  

노동자의 특정한 능력을 판다는 뜻이다. 이것을 '노동력'이라 한다. 판매되고 있으니 노동력은 상품(commodity)이 된다.

이것뿐이 아니다. "기계 장치의 확산과 분업" 때문에 노동자는 "가장 간단하고, 가장 단조롭고,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손동작만 요구받는 단순한 기계 부속품이 된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것은 자본가를 위해서이며 게다가 그것은 개별 노동자의 불구화를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노동을 지배하는 자본을 위해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사회적 생산력을 높이는 일은 결국 자본가를 위한 것이다. 기술적 역동성에 의해 새로운 생산 설비가 도입되면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졌다고들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것이 자본의 입장에서는 진보로 보일지 언정 노동의 입장에서는 "문명화되고 세련된 착취 수단"인 것이다. 농업을 보면 이것이 더욱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지금의 농촌은 기계화된 농업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얼핏보면 기계화가 농업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한 듯하다. 그러나 기계화된 농업이 도입되면서 더 이상 많은 농업 노동자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따라서 많은 농업 노동자가 도시로 갔다. 토지를 비옥하게 하기 위해 수많은 화학비료가 살포된다. 그로 인해 농업 노동은 "토지의 비옥함의 지속 가능한 원천을 파괴"하는 공업적 노동이 된다. 자연의 대 순환의 톱니바퀴를 빼는 공업은 지속 불가능한 산업이다.  154-155


'이 전제 정치는 영리가 그 목적이라고 공공연하게 선포하면 할수록, 더욱 더 좀스럽고 증오스럽고 잔인한 것으로 된다.'

노동자 계급의 성별 차이, 연령 차이는 무의미하다. 노동자는 "기껏해야 연령과 성별에 따라 서로 다른 비용이 드는 노동 도구"일 뿐이다. 인간 취급을 받는 게 아니다. 그냥 도구다. 숙련된 노동자들도 별 볼일 없다. "새로운 생산방식들에 의해 무가치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웬만하면 아무나 충원할 수 있다. 

지식기반 경제라고 해서 극소수의 엘리트만 신경 써서 뽑고 나머지는 죄다 계약직으로 충원한다. 쉽게 충원하고 쉽게 자를 수가 있다. 

'이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계급의 주민들로부터 충원된다.'  156


'이제까지의 소중간 신분들, 즉 소공업가들, 소상인들과 소금리 생활자들, 수공업자들과 농민들 등의 이 모든 계급들이 프롤레타리아트로 추락하는데...'

마르크스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계급의 양극화 현상이다.  157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기를 쓰고 조직화하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들의 계급으로의, 또 따라서 정당으로의 이 조직화는 노동자 자신들 사이의 경쟁 때문에 매번 다시 파괴된다."

마르크스가 <선언>을 쓸 당시의 정당은 오늘날의 정당과 다르다. 구체적인 당 조직을 말하는 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 자신을 프롤레타리아트임을 자각하고, 그에 따라 일정한 정도로 정치적 조직화를 이루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자기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속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를 분명히 아는 것이다. 즉, 조직화는 일정한 현태를 띤 조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급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직화도 매번 다시 파괴된다.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계급을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음이 주된 이유다.

자신을 프롤레타리아인데도 그걸 모르는 사람은 뜻밖에도 많다. 회사에서 가장 얄미운 사람이 누군가. 사장도 아니면서 사장 마인드 가진 팀장, 사장보다 더 사장스러운 사람. 회사에는 사장과 사장 아닌 사람밖에 없는데 사장도 아니면서 회사 입장에서 생각해보자고 하는 사람들이다. 자기의 객관적 위치를 알지 못할 뿐더러 남이 그 위치를 알려줘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답이 없다. 그냥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부르주아는 이런 사람들을 적절히 활용한다.  162-163


'부르주아지는 처음에는 귀족과 대항하는 투쟁 속에 있다가. 이후에는 부르주아지 자체 가운데 공업의 진보와 모순되는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부분들과 대항하는 투쟁 속에 있으며, 항상적으로는 모든 해외의 부르주아지와 대항하는 투쟁 속에 있다.'

처음에는 중세의 귀족들과 투쟁하여 그들의 속박을 벗어던졌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되려 할 때 그것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분쇄하였다. 이렇게 하여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사회가 만들어지자 이번에는 해외의 부르주아지와 대립관계에 놓인다. 이럴 때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호소하고 그들의 도움을 청하며, 그리하여 그들을 정치 운동에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정치 운동"이라는 람은 정치적 공간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그러면 프롤레타리아트의 도움을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이 될까. 바로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가 본질적으로는 계급관계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숨기고 한 민족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164-165


<선언>에 따르면 "중간신분들, 즉 소공업자, 소상인, 수공업자, 농민 등 이들 모두는 중간신분으로서의 자기의 존재가 몰락하지 ㅇ낳도록 부르주아지와 싸운다." 마르크스가 <선언>을 쓸 당시에는 예상하기 힘들었겠지만, 이 중간신분들이 나중에는 독일의 나치즘이나 이탈리아 파시즘에 적극 가담한다. 자기 입지가 위태로워짐에 따라 배타적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파시스트들의 핵심적 서포터들이 된다. 파시즘은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에서 생겨난다. 그러면서 경제적 불안에 떠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약속한다. 파시즘은 자본주의 체제를 보존하면서도 배타적 민족주의에 호소하여 그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모든 이들이 자신들의 계급을 잊고 '민족'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평등하게 살 날을 기대한다.

파시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이들이 또 있다. 바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이다.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단어다. 이 말을 엥겔스는 <선언> 영어판에서 "위험한 계급", "사회적 찌꺼기"로 번역했다. 그리고 1852년 이후 마르크스 저작에서 룸펨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말이 나오면 완전 쓰레기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선언>에서도 이미 경멸당하고 있다. "낡은 사회의 최하층의 이 수동적 부패물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때때로 운동에 끌려드는 일도 있는데, 생활상의 처지 전체로 볼 때 반동적 음모에 매수되는 것에 더 마음이 끌린다"는 것이다.

반동적 음모는 부르주아가 꾸미는 것이다. 자기네 편드는 지식인들이 이 음모에 동원된다. 이를테면 이건희가 대학에 명예철학박사 학위 받으러 왔다가 봉변당한 일로 자기 학교 애들 삼성에 취업 안 되면 어쩌나 걱정해서 사과하는 족속들, 말만 지식인인 자들이 이에 해당한다.  166-167


자본주의의 발전이 절정에 이르면 계급의 양극화가 진행되고 프롤레타리아는 알거지 상태로 전락하기 직전이 된다.

'프롤레타리아는 무소유이다.' 

무소유라는 말에서 법정 스님의 책을 떠올리지 마라. 그런 고상한 뜻이 아니고 진짜로 '가진게 없다'는 뜻이다.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그의 관계는 부르주아적 가족관계와의 공통점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

프롤레타리아 맞벌이 부부와 부르주아 맞벌이 부부가 같은 상황일 리 없다. 프롤레타리아 맞벌이 부부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뭐 있겠나. 육아 문제가 그 중 하나다. 돈이 있어야 해결된다. 애들 방에 두고 밖에서 문잠갔다가 사고 나는 일은 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자식을 방에 가둬놓고 집을 비우고 싶은 부모가 세사에 어디 있겠는가. 생존을 위해 맞벅이를 해야 하고 놀이방에 자식을 맡길 여유조차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결국 사회적 소유관계, 평드의 문제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곳간에서 인심 나듯이 기본적으로 갖출 건 갖춘 상태에서 윤리 도덕도 생겨나게 마련이다.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윤리학적 명령이 호소력을 잃은 까닭이 이 때문이다.  167-168


'노동자들에게는 조국이 없다.'

마르크스는 국적을 없애려 한 것이 아니다. 자본과 노동은 무국적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은 이미 국적이 없다.  169


자본주의와 맞서 싸워야 한다고 할때.. <선언>을 읽는 동안에는 왜 맞서 싸워야 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과연 어떤 세상을 만들자고 하는지만 알아보기로 하자.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지배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지배는 사람답게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는 일과 같은 의미다.  171


'공산주의를 남김없이 설명하는 것은 소유 일반의 철폐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의 철폐이다.'

공산주의는 소유라는 것 자체를 아예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가진 물건을 죄다 내놓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시계를 차고 다녀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고유한 소유방식, 자본주의 사회의 이윤 획득방식을 철폐한다는 뜻이다. 달리 말해서 생산수단을 사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생산력을 획득"한다고 하는 게 이 말이다.  173


얻어지는 이윤을 몇몇 사람이 독식하는 일은 원천적으로 부당한 것이다. 그러니 거기서 얻어지는 이윤이 가능하면 사회적 노동에 가담한 사람 전체에게 나누어질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정의로운 것이고 공정한 것이다.

'이제까지의 모든 운동들은 소수의 운동들이었거나 소수의 이해관계에 따른 운동들이었다.'

"이해관계"는 손해와 이익이라는 뜻이 아니라 '관점'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이제까지의 모든 운동"이 엥겔스의 영어판에는 "이전의 모든 역사적 운동들"로 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운동들'로 이해하면 된다. 그에 이어지는 구절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엄청난 다수의 이해관계에 따른 엄청난 다수의 자립적 운동이다" <선언>에 나오는 이 구절을 프롤레타리아의 수가 많다. 적다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유심히 보면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엄청난 다수의 이해관계에 따른" 운동이다. 이 점이 중요다하.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엄청난 다수의 관점을 따라간다는 것, 즉 다수의 이익, 다수의 관점을 대변하는 운동이라는 뜻이다.  174


'지금 사회의 최하증인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적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계층들의 상부 구조물 전체를 공중으로 날려버리지 않고서는 몸을 일으킬 수도 없고, 똑바로 설 수도 없다.'

"공적 사회"는 정치적 사회, 법적 장치와 제도적 장치를 형성하는 모든 영역을 의미한다. '공중에 날려버린다'는 흔적도 없이 찢어없앤다는 뜻이다. 이는 사회적 생산물 위에 제도적 법적 장치까지 없애야 프롤레타리아트가 똑바로 설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은 한 나라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적인 프롤레타리아 연대 투쟁으로 이어져야 한다.  175


부르주아지를 전복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바꾼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해야 지배의 기초를 세울 수 있고 그런 다음 다수의 대중으로부터 그 지배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지도가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이미 부르주아의 지배는 물론이고 지도까지 확립된 상태에 있다. 이걸 바꾸는 일이 수월하겠는가. 애써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177




내용들을 정리해보면...

2페이지 첫 문장은 유물론적 역사 이해를 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역사를 물질적 생산활동, 물질화된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활동으로 파악하고 이를 다시 물질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계급 대립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라 인류의 역사를 보려면 계급투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3페이지부터 부르주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이야기한다. 부르주아 성립의 물질적 토대는 세계 시장이었다. 즉, 자본주의는 출발점부터 글로벌했다는 것이다.

4페이지는 봉건사회 안의 혁명적 요소를 언급하고 자본의 원초적 축적을 말한다. 그리고 시장이 성정하고 대공업이 발전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부르주아지는 중세로부터 내려온 모든 계급들을 뒷전으로 몰아내고 사회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5페이지에서 6페이지까지는 부르주아의 발전 단계에 걸맞는 정치적 진보가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 결과 부르주아의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로서의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또한 부르주아지는 사회의 모든 관계를 냉혹한 이해관계로 바꾸어 놓았다. 그럼으로써 이제 본격적인 자본주의 사회가 세워진 것이다.

7페이지는 부르주아 사회가 세워진 후 세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말한다. 부르주아는 끊임없는 해외 원정에 나서고, 끊임없이 혁명을 일으킨다.

8페이지에서는 끊임없는 혁명과 해외 원정을 통해 부르주아지가 전세계에 걸쳐 세계 시장을 형성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각 지역의 고유한 문화 등 모든 것이 획일적, 자본주의적 문화로 바뀐다. 좋은 점도 있다. 외국 가서 음식이 입에 안 맞으면 맥도날드 가면 되니까. 이 와중에 농촌 생활도 다 없어지고 만다.

9페이지부터 10페이지까지는 자본주의가 진행됨에 따라 사회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세부적으로 언급한다.

11페이지에서는 부르주아 사회가 이런 업적을 거우었음에도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힌다. 그 문제점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이 공황이다. 이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는 항상 위태롭고 불안하다.

마지막으로 12페이지부터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안들이 제시된다. 부르주아지는 공간상으로는 새로운 시장을 확보하려 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이미 확보된 시장에서 더 많은 착취를 행하게 된다. 또한 현대의 대공업 시대에 필연적으로 생겨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들의 삶의 실상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무엇인지가 여기서부터 길게 이야기된다. 부르주아를 때려잡아 잘 살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가진 총제적인 불합리한 점을 걷어내고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도 존중 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진행되어야 하고, 이는 계급투쟁과 정치투쟁을 거치면서 다수의 이해관계에 의거해서 지배권을 세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의 전 영역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관철해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79-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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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길은 내가 만들어야 한다


제자백가 시대의 종합적 텍스트가 세 권 있는데 <관자> <순자> <여씨춘추>라는 책이에요...

<여씨춘추>도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한 편, 한 편씩 논문을 써서 모은 거예요. 편집만 여불위가 한 거고요. <브리태니커>같은 완벽한 백과사전이죠. <순자>는 유학이 입장에서 정리한 제자백가 백과사전이고, <관자>는 관중의 입장에서 정리한 춘추전국시대의 백과사전이에요.  324


춘추전국시대를 이해하려면 <논어>니 <장자<니 이런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자> <순자> <여씨춘추>, 거기다 <한비자>까지 추가해서 네 권 정도를 먼저 읽어야 해요.  325


<순자>에는 성악설만 있는 게 아니에요. 성악설과 성선설의 대조를 만든 것은 후대의 유학자들이에요. 순자에게서 성악(性惡)이라 함은 자연성, 생물성이에요. 어린아이 같은 터프함. 성악에서 악(惡)이라는 말은 윤리적 합의르 띠는 게 아니라 거칠다는 뜻이에요. 도자기가 안 된 진흙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어야 한다. 즉 학습해야 한다는 거죠. 예법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거예요. 순자가 생각하는 악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거예요. 우린 거칠다는 거죠. 극기복례, 즉 우리의 성은 악 하지만 인위적 노력으로 선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에 비해 맹자는 많이 협소해요. 그래서 우리의 허영에 불과한데도 선이라는 말은 더럽게 좋아해요. 악하면서.(웃음) 나는 바꿀 데가 많다고 자각하는 것이 맞는데, 다 선하대요, 선하기는. 성선설과 성악설은 정치철학 테마예요. 성악설대로라면 우리 인간은 거칠잖아요. 진흙이 제 혼자 그릇이 되진 않는다고요. 선생이나 사회의 규범이 필요하죠. 그래서 정치권력을 정당화해요. 반면 성선설대로라면 인간은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스스로 수양할 수 있어요. 그래서 기득권 세력이 등장하면서 맹자를 복원시키는 거예요. 국가권력이 제후를 간섭하지 마라. 군주가 신하를 간섭하지 말라는 거죠.  328-329


<맹자>는 지식인 자율의 담론이에요. 군주권 중심이 아니라. 유학의 비극은 순자가 죽고 맹자가 뜬 데 있어요. 여기에는 주자(朱子)의 공이 크죠. <순자>를 빼버리고 <논어> <맹자> <대학> <중용>으로 사서를 묶어 '공맹(孔孟)'을 만들어버렸으니. 순자로서는 안타깝죠. 당시 최강이었는데. 그래서 사상가는 뒤에 가봐야 알아요. 뒤에 빛을 내주는 사람이 없으면 사상가는 죽어요.  330


춘추전국시대를 겪은 동양 담론들은 '지금 흥한다고 계속 흔하냐, 지금은 흥해서 사람이 많지만 곧 훅 갈 수도 있다. 그러니 마음을 얻어놔야 한다'고 논리를 전개하는 거예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만든 담론이죠. 애초에 전쟁에서부터 사유를 시작한 것이 동양 담론의 비극이에요.  354


노자의 이름이 노담(老聃)인데요. <장자> 내편에서 노담을 비판해요. 노담이 완성된 인간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다는 구절이 나와요. <장자> 맨 뒤에 <천하(天下)>편이 나오는데, 장자의 후학들이 제자백가 역사를 쓴 거예요. 그걸 보면 노자와 장자는 학풍이 달라요. 장자 후학들도 장자가 노자를 이었다고 보지 않아요. 장자는 국가주의에 반대한다니까요.  357


유가와 묵가 말고는 학파적 자의식이 없었어요. 나머지는 다 개별 사상가들이라고 보면 돼요. 후대에 도서관 분류했다너 사람, 한나라 때 사마천 같은 사람들이 그들을 학파로 묶어서 분류한 거죠.  358


<장자> 내편이 장자 본인이 쓴 쪽에 가깝고, 외편은 후학들이 썼다고 해요.  359


우리한테 시급한 과제는 자유로운 개인이에요... 

가끔 그런 경우도 많이 봐요. 민족주의가 가진 조폭성, 페미니즘이 가진 조폭성, 피해받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가진 조폭성. 용서될 수 있는 조폭성이지만 그 조폭성이 또 다른 공격성을 낳으니까 문제죠. 용서는 돼요. 이해는 되지만 더 약한 사람을 공격할 때는 큰 문제죠. 우리 민족주의가 제3세계 노동자들을 수탈하는 것 보세요. 엄청나다고요. 일본 놈들한테 그렇게 당해놓고서.  367




chapter 7 철학, 한국 사회를 보다


공동체 생활의 원리는 사랑이에요. 아껴주고 도와주는 거예요.  373


우리 사회에 치명적인 텍스트가 <고타 강령 비판>이에요. 저는 인문사회 쪽 사람들이 이걸 제대로 안 읽는 게 참 웃겨요. 왜 안 읽는 줄 아세요? 마르크스가 자기들 입장을 바로 공격하니까요. 좌우지간 분배 얘기하는 놈들은 다 개소리를 하는 거라는 내용이거든요. <고타 강령 비판>은 엥겔스가 'xx' 처릴르 많이 해요. 마르크스가 욕을 너무 많이 써서.(웃음) 엄청 흥분해서 썼거든요. 자본을 극복할 수 있는 '코뮤니즘'의 이념을 기껏 만들어놨더니 어정쩡하게 타협하는 수정주의자들이 자기 이름 팔면서 나오니까 화가 난 거죠.  376


인단 남의 일엔 간섭하면 안 돼요. 어떤 사람이 해를 당하거나 그럴 때에나 간섭할 수 있는 거예요. 나에게만 간섭 안 하면 되다느 게 아니에요. 타인에게 근본적인 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면 우리 이웃이 뭘 하든 건드리면 안 돼요. 반면 누가 나나 우리 이웃을 건드렸을 때는 개입해야 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선이 있어요. 그 선을 지킬 수 있는 여지, 우리 사회엔 그런 게 없는 것 같아요. 

최인훈이 <광장>에서 광장과 밀실 얘기를 하잖아요. 사람에겐 밀실도 있고 광장도 있어야 해요. 광장이 없으면 사람은 파괴되고, 밀실이 없어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면 분열돼서 죽어요. 신상 털기의 핵심은 너무 밀실로 들어간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까지 공적 영역이냐 아니냐, 광장의 일이냐 밀실의 일이냐 하는 균형 감각에 대한 문제거든요. 한 사람의 밀실까지 너무 육박해 들어가는 건 곧 그사람을 파괴하는 거라는 의식을 가져야 해요.  387


제3자들에 대한 애정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391


벤야민은 진보가 없다고 해요.. 피라미드는 파라오가 만든 게 아니라 노예들이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피라미드 안에 노예가 잠들어 있지는 않잖아요. 마찬가지로 타워팰리스를 만든 노동자도 거기서 잠자지 않고요. 거대한 건축물이 있는 곳에 억압이 있어요. 노예도, 노동자도 자기가 원하는 건물을 짓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문제는 이 양상이 좀 달라 보이게 하는 착시 효과가 있다는 거예요. 사실은 진보한 게 아닌데 진보한 것처럼 보이는 거죠. 이런 차이예요. 옛날에는 채찍으로 때려서 일을 시켰어요. 노예의 지상 목표는 도망가는 거예요. 그런데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자발적 노예로 만들어요. 사람들이 제 발로 와서 이을 하겠다고 해요. 자본이 없으면 못 살게끔 조건을 만든 거예요.  400


벤야민의 지적은 인문학 하는 사람뿐 아니라 모두가 명심해야 해요. 채찍으로 안 때린다고 좋아진 게 아니라고요. 더 비참해진 거예요. 옛날에는 탈출했잖아요. 노예들은 자살 안 해요. 탈출의 기회가 있잖아요. 그런데 자발적 복종은 자살과 한 끗 차이라고요.

자발적 복종은 이미 형식적으로는 자살과 마찬가지예요. 자기 부정의 형태죠. '자발'이라고 하면 자기가 주인이어야 하는데, 그 귀결이 '복종'이에요. 그게 자살이잖아요. 이 사회에 살면서 사람들이 조직 탓도 안하고 자본주의 탓도 안 해요. 자기가 버려졌다고 자살해요. 자기는 노예이고 싶은데 버려졌다고. 그래서 면접장에서 노예로 간택받잖아요. 제눈에는 그렇게 보이는데, 이런 얘기 하면 사람들이 싫어해요.(웃음) 

어느 정도 소유가 늘어났다고 해서 진보했다고 믿는 거죠.(지승호)

그렇게 착각한다고요. 사람들은 허영이 있어서 '자발'에만 방점을 찍고 우리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라고 해요. 하지만 귀결은 '복종'이거든요. 사람들에게 이걸 이해시키기가 힘들어요. 자기의 불행을 덮고 안 보려고 해요. 안타깝죠.  401-402


사회민주주의는 분배를 하겠다는 건데, 분배를 하려면 자기가 소유를 하고 있어야 하잖아요. 결국 소유 형식이 유지되는 거예요. 사회민주주의에서는 분배자와 피분배자의 위계가 생겨요. 분배하는 사람이 필요해지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마르크스를 들먹이지만 정작 마르크스는 좌우지간 소유 관계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분배 얘기하는 놈들은 다 사기끈들이라고 하거든요. 마르크스는 일체의 소유 관계를 없애자는 거예요. 마르크스가 원한 건 코뮤니즘,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 개인들의 자유로운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예요. 일체의 소유 형식을 없애자고 얘기했을 때는 국유까지도 포함한 거예요. 마르크스는 사회민주주의가 지배를 영속화하는 제도라고 봐요. 그러니까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말은 '내가 박근혜나 이명박보다 윤리적으로 분배를 잘한다'라는 거예요.  402


지금은 긴 안목으로 봐야 하는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406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느낌이 주는 강한 현재성이 있어야 해요. 현재를 잡아야 해요. 현재를 잡아야 인간을 잡아요. 미래를 염려하면 사랑하기 힘들어요. 내 아이 하나 사랑하기도 힘들어요. 미래를 염려해서 생명보험, 상조보험에 가입하는 것보다 지금 아이랑 낚시를 가는 게 나아요. 살아 있을 때 재밌게 살아야죠. 권력은 그걸 못 하게 만드는 거예요. 

결혼이 왜 문제냐면, 두 사람이 미래만 보는 거예요. 내 집 마련, 육아, 자녀 교육 등등. 둘아서 연애할 때는 그런 게 없잖아요. 미래를 걱정하게 되면 커플 관계는 붕괴되는 거예요. 사랑의 공식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인데, 결혼의 공식은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예요.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사람은 내일 가도 또 내일이 있고, 또 내일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사람은 오늘만 있고, 내일 가도 또 오늘만 있어요. 그러니까 매번 관계를 맺을 수 있어요. 극단적인 원리지만, 사랑의 원리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거예요. 결혼이나 소유, 경쟁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 체제에 포획된 사람들은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고 하죠.  408


<철학vs철학>에필로그에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고 한다. 그리하여 도더고가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라며 신채호 선생의 <낭객의 신년만필>을 인용하셨는데요.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의 대한민국 이런 식으로.(지승호)

애정 결핍이에요. 원리주의자는 애정 결핍에서 나오는 거예요.  411-412


"인문정신을 회족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스피노자와 동학의 가르침을 다시 음미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성찰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비록 실패의 가능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것이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인문정신의 핵심이다"라고 하셨는데요.(지승호)

둘 다 기독교 비판이에요.

그 뿌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건가요?(지승호)

내재주의거든요. 스피노자는 범신론자인데, 범신론의 범(汎 넘칠 범)이 '모든'이란 뜻이에요. 모두가 신이라는 주의가 범신론인데, 그러면 나도 신이란 말이에요. 동학도 죽은 사람들한테 제사 지내지 말고 나를 향해서 제사를 지내자고 하잖아요. 향아설위(向我設位)라는 게 '나를 향해서 위패를 만들어라'라는 말이거든요. 동학 자체가 서학, 즉 기독교를 비판하려고 만든 것이기도 하고요.

제가 스피노자랑 동학을 얘기한 것은 조금만 힘들면 절하고, 자기가 해결해야 하는데 조금만 힘들면 엄마한테 가서 도와달라고 하는 것을 하지말자는 거예요. 이게 미성숙이거든요. 미성숙을 극복하려면 엄마라는 존재, 신이라는 존재가 없어져야 하는 거고요. 그런 면에서 동학이랑 스피노자는 비슷해요.

동양은 내재주의 전통이 있어요. 기독교인들은 내가 예수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유학에서는 내가 성인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성인이 되는 것을 배우잔항요. 불교는 다 부처가 되자는 거고요. 그 전통이 있기 때문에 동양 사유 전통만 잘 짜깁기하면 동학 경전이 만들어지는 거죠. 동학은 독창적이라기보다 기독교에 대립해 내재주의 전통을 강화한 거예요. 동학, 동아시아의 학문이다. 우린 이걸로 갈테니 서학은 나가라. 이런 게 동학이에요. 이처럼 동학에는 나에 대한 주인의식이 있으니까 일제에 대항한 거예요. 동학농민전쟁이 그래서 일어난 거죠. 굽실거리는 정신이거나 어디 가대는 정신이었다면 그런 게 안 일어났을 거예요. 동학의 혁명성은 거기서 나오는 거죠.  416-417


"매춘부가 사랑을 통해서 맨춘부로서 수명을 다한다는 사실, 벤야민은 왜 이사실에 주목했을까요? 그것은 자본주의가 사랑을 아무리 자본의 논리로 포섭하려고 할지라도, 사랑은 자본의 한계를 돌파할 어떤 힘이 있음을 알아본 것입니다"라고도 쓰셨는데요.(지승호)

벤야민은 파리에서 축제 때 벌어지는 여학생들의 매매춘을 본거예요. 그리고 직업적인 매춘부들이 생겼을 때 매춘부가 사랑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본 거에요. 어떻게 되냐면, 돈을 안 받아요. '돈 주면 안돼'그러면서 울어요. 그러면 매춘을 못 하는 거죠. 그럴 때 매춘부로서 수명을 다한다는 거에요. 벤야민은 그런 것들의 흔적을 찾아요. 마르크스의 테마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거예요. 진정으로 좋은 사회는 사랑은 사랑으로만 바뀌고, 신뢰는 신뢰노만 바뀌고, 우정은 우정으로만 바뀌는 거예요. 그런데 자본주의가 들어오면 돈이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친구도 돈 좀 있으면 만나고 실직하면 안 만나요.

마르크스는 그게 인간관계를 왜곡시킨다고 얘기해요. <경제학-철학수고>에 나와요. 젊은 마르크스의 그 정신을 알아야 해요.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게, 신뢰하지 못하게, 우정을 나누지 못하게 하는 제도이기 때문이에요. 마르크스도 쉬워요.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 그거예요.(웃음) 자본이 어쩌고, 잉여가치가 어쩌고 하면서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것도 결국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인 거예요. 목적을 알아야 해요. 그걸 모르니까 혁명을 한 다음에도 관료주의 체제가 나오고 독재가 나오는 거예요. 자본은 없앴는데 공산당이 너무 강해서 사랑을 못 하게 해요.(웃음)  421-423


지금은 사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하기가 더 어려워진 상황이 된 것 같은데요.(지승호)

애들을 약하게 만들어서 그래요. 사랑하는 법을 어렸을 때부터 길러주지도 않았고요. 미숙하면 사랑 못해요. 그러면 자본에 포섭이 돼요. 자본을 이길 정도로 강해져야 해요. 인간이 더 중요하잖아요. 돈이 있어서 뭐해요? 그렇게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초등학생 때문버 남녀가 막 사랑해야 해요. 그래서 강해져야 돼요. 그런데 경쟁하잖아요. 게임만 하고, 그래서 약해지는 거예요. 애들이 사랑을 많이 해야 해요. 실연도 당하고, 그래야 강해지는 거예요.  424


사랑을 제대로 받아봐야 사랑할 줄도 알 텐데요.(지승호)

부모가 어린애라서 그래요. 우리 아이를 죽이는 것은 상태 안 좋은 미숙한 어머니와 정권과 자본의 결탁이라고 보면 돼요.(웃음) 카이스트 학생들도 부모나 교수는 무시하고 연애에 몰두하면 자살 안 할 수 있어요. 성적이 떨어졌어도 애인이 '난 오빠가 카이스트 다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요' 그러면 그거 하나만으로도 안 죽는 거예요.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어요. 개를 키워도 돼요.(웃음) 사랑하면 안 죽어요. 갈 데가 없을 때 죽는 거예요. 

애들이 사랑할 줄을 모르니까 성적이 떨어지면 여자도 자기를 싫어할 거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해요. 공부도 하고, 음악도 듣고, 산도 가고, 영화도 보고 그러면서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엄마가 성적으로만 사랑받게 만들어놓았으니 성적 떨어지니까 존재감이 없어지는 거에요. 저는 고등학교 2학년짜리들이 카이스트 들어가는 것도 반대에요. 애들을 경쟁시키고 전문화시켜 천재로 만들어서 죽여버려요. 기형적으로 자라게 하는 거라고요.  424-425


지금 우리 사회에는 진보가 없어요. 진보는 사랑이에요. 자기 기득권을 보는 게 아니에요.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까지 봐야 하는 거예요. 한 번 더 고민해야 해요. 이 법이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 고민을 담아내야 진보가 되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는 진보가 없는 거죠. 자기 기득권이 먼저면 진보가 아니라니까요.

자기 것만 챙기는 진보가 어디 있어요? 타인을 사랑하는 쪽으로 얼마만큼 나가느냐에 따라서 진보를 얘기할 수 있어요. 자기 이녀모가 자기 방법과 자기 생각 쪽으로 보수화되는 거예요.  431


억압된 것의 회귀가 정신 분석학의 테마잖아요.  434

정신분석학의 근본 테마는 사회나 가족이 억압적이지 않으면 히스테리 같은 게 안 나타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프로이트의 제자인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는 가정의 억압은 국가의 억압이 축소된 형태라고 얘기해요. 부모가 사회적 가치로 아이를 교육시키니까요. 라이히는 러시아 혁명을 쫓아다녀요. 프로이트가 아끼는 제자 중에 우파적인 사람이 융(Carl Jung)인데, 저는 융을 싫어하거든요. 원형 무의식이라고 해서 우리가 이미 원형적으로 억압돼 있어서 총알이 장전된 상태라고 보는 사람인데요. 이건 완전히 성악설이죠. 사회의 억압 체제는 항상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거라고요. 라이히는 사회혁명이 일어나야 억압이 없어진다고 봐요. 독재자를 제거해야 하고, 자본주의가 문제 있다고 생각하니까 러시아혁명 같은 걸 막 쫓아다니는 거예요.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하리히의 책은 정신분석학의 진짜 중요한 책이에요. 그 책은 좀 많이 읽어봐야 해요.   435




chapter 8 자본주의에 맞서라


일단 철학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소유의 논리인데, 진리라는 것도 소유의 관념이에요. 내가 진리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죠.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것만 봐도 권력은 소유에서 오는 거예요. 아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권력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소유의 논리고, 학점이나 스펙이라는 것도 사실상 소유의 등기부등본이죠. 

행복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요. 하나는 소유하면 할수록 얻는 행복이에요. 다른 하나는 거꾸로 내 것이 줄어드는데도 느끼는 행복이고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돈을 준다든가 음식을 사준다든가, 아니면 밤새도록 병구완을 하면서 내가 가진 에너지를 주는 거죠. 이렇게 내가 소유한 것을 버림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요. 이것이 우리가 고민해봐야 할 공동체 원리거든요. 논리적으로 따져도 후자의 행복이 덧없지 않은 거예요.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서도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를 인용했잖아요. '사랑은 사랑으로만 바뀌어야 하고, 우정은 우정으로만 바뀌어야 한다' 그게 마르크스가 꿈꾸는 사회거든요. 그런데 거기 돈이 개입되면 관계가 왜곡되는 거예요. 가난한 친구는 뭔가 훔칠 것만 같아 개입되면 관계가 왜곡되는 거예요. 가난한 친구는 뭔가 훔칠 것만 같아 보이고, 부유한 친구는 신뢰와 우정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거죠. 마르크스가 젊었을 때 그런 세태를 본 거예요. 사랑은 사랑으로만 바뀌어야 하는데 중간에 돈이라는 것이 매개가 되는 거죠.

소유물이 아니라 타인을 사랑해야 공동체의 기초를 다질 수 있어요. 우리가 잃어버린 것 중의 하나가 사랑의 흔적이에요. 그런 사랑의 흔적이 아주 사적인 연애로 응축해 있다는 것을 고민해봐야 해요. 옛날에는 사랑이 굉장히 넓었거든요. 내 가족이나 내 애인의 경계를 넘어갔다고요. <다중(Multitude)>이라는 책에서 네그리는 '왜 우정과 사랑이라는 것이 이렇게 협소하게 부르주아 남녀 관계 속에 국한됐을까?'라고 물어요. 네그리가 꿈꾸는 '다중'은 곧 사랑의 공동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가진 소유물을 더 아끼기 때문에 사랑을 못 해요. 집요한 이기주의죠. 그래서 공동체가 와해돼요. 사적 소유가 강화된 사회에서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는 어찌 보면 다 헛소리예요. 사적 소유가 있으면 공동체는 와해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은 자살률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면 아이가 자살하지 는 않아요. 우리는 노숙자도 많고, 하루에 마흔 명도 넘게 자살하잖아요. 우리 사회가 공동체가 아니라는 거죠. 공동체라는 관념은 있지만 그게 '상상의 공동체' 같은 거라서 실질적으로는 공동체가 아닌 거예요. 오늘의 자살자 43명에서는 빠졌지만 내일의 43명에는 들어갈 수도 있어요. 그렇다 보니 그 안에 안 들어가려고 더 소유를 해야 돼요. 이게 악순환인 거예요. 그래서 갈 데까지 계속 가보는 거예요. 갈 데까지 가보다가 뼈저리게 느껴야 알 수 있는 거죠. 아니, 역사를 보면 뼈저리게 느껴도 모르는 것 같아요. 공황이 일어나도 자본주의가 붕괴되지 않잖아요. 현실을 리얼하고 속직하게 느끼기에는 관념이 너무 비대해요. 각인된 소유의 관념으로 강하게 무장돼 있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소유의 논리는 공동체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거예요.  448-450


제가 농담 삼아 얘기하곤 하는데, 냉장고가 악의 축이에요. 냉장고가 없으면 자본주의 거의 붕괴될걸요? 옛날에는 원주민들이 고기를 잡으면 나눠줬어요. 안 먹고 가지고 있어봤자 어차피 썩으니까요. 대한민국 모든 가정의 냉장고에 있는 음식만으로도 단언컨대 아프리카 나라 열 개를 살려요.(웃음) 그런데 냉장고에 넣어놓고 썩힌다고요. 저장에 대한 욕구죠. 냉장고가 확장된 것이 은행 잔고예요. 썩지 않게 하는 것. 화폐는 안 썩잖아요. 안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거죠.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여러 체제와 전산 시스템이 우리의 소유를 저장해준다고요. 소유 형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자본주의 문명의 특징이죠. 우리에겐 소유욕이 있어요. 배고픈 데도 자기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비범한 거예요. 성숙한 거죠. 자본주의는 미성숙한 야만적 상태 내에 인간을 국한시키는 거예요. 자본주의는 따로 안 배워도 돼요. 그냥 적응이 돼요. 인류가 만든 체제 중에서 자본주의가 인간이 가진 동물적 본성, 사랑과 무관한 소우의 본성에 가장 근접한 체제예요. 어떻게 보면 인류에게 아주 치명적인 거죠.

소유라는 것은 사랑의 형식이 아니에요. 소유의 형식의 제일 반대편에 있는 것이 사랑의 형식이에요. 저 여자를 내가 갖겠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내가 저 여자한테 뭘 주겠다. 저 남자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것이 사랑이에요.  450-451


인류학 책을 왜 많이 봐야 하냐면,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무 오래 살다 보니까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몰라요. '소유 형식이 문제야'라고 하면 '안 그런 게 어디 있어?'라고 반문해요. 그런데 인류학 책을 보면 지금 우리 문명의 흐름과는 다른 사회들을 발견할 수 있어요. 지금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소유 형식이 필연적이거나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거죠.  452


"우리는 순진무구함과 폭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폭력은 숙명이다"라는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휴머니즘과 폭력>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셨잖아요.(지승호)

최소 폭력을 얘기하는 거죠. 우리는 유한자니까 뭔가를 먹어야 하고 뭔가를 해쳐야 하잖아요. 빵도 먹고 배추도 먹어야 하잖아요. 단지 어떻게 하면 그걸 최소화할 수 있으냐 하는 문제일 따름인 거죠. 그러니까 오만하지 말자는 거예요. 인간은 순진무구함을 선택할 수 없어요. 그렇다고 과대한 폭력을 선택하면 안 돼요. 최소한의 폭력, 이게 중요해요. 균형 감각이 중요한 거고요. 적정하게, 최소 폭력의 지혜가 필요한 거죠.  458-459


괴물과 싸우다 보면 괴물이 된다고,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폭력의 선을 잡기가 어렵잖아요.(지승호)

그게 니체가 한 말이잖아요. '괴물과 싸울 때 조심해라. 너도 괴물이 된다.'  459


요즘 흉악 범죄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매스컴은 근본적인 해결책에는 관심이 없고 선정적인 보도만 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지승호)

한 개인의 범죄로 구조의 문제를 덮어버리는 거죠. 아이를 경쟁시키고, 성을 상품화하고 소비하는 이런 문제들을 덮는 희생양 하나를 만든 것이거든요. 몸에 암이 있어서 겉으로 고름이 조금 나온 건데, 그걸 짜면서 더 가보자는 거죠.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에요. 한 명 또 죽이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편하니까. '우리 사회는 문제없다. 한 놈이 미친 거였어' 이렇게 보자는 거죠. '우리 구조는 깨끗해, 살 만해' 그러면서 또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런 문제가 일어나면 우리 사회를 까뒤집어봐야 하는데, 막상 구조적인 것을 드러내는 글을 쓰면 곧바로 십자포화를 맞아요. '그러면 연쇄살인범이 죄가 없다는 거냐?' 이렇게 나와요. 우리 사회는 그런 담론을 쓸 수 없는 만큼 남루하다고요. 제 말은 두 가지 차원을 같이 보자는 거예요. 일회적인 사건에서 누가 잘못했는지도 봐야 하지만, 그런 희생양을 낳는 구조도 함께 봐야죠.

그런데 이렇게 쓰면 여성 단체에서 뭐라고 하겠어요? 여성 단체도 희생양을 찾으니까 '미친놈들이다' 이러면 편하죠. '미친놈들이 자꾸 여성을 성적으로 희롱한다'라고 하면 편한 거죠. 그러니 끝내 이 자본이란 체제와 맞짱을 못 뜨지. 그게 여성 단체의 보수성이에요.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남성 우월성을 알아야 한다고요. 여성이 상품화되는 건데.  462-463


"발달한 대중매체는 대중매체 속의 이미지들을 현실 세계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서 일종의 찾기 효과가 생긴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나 자연재난이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우리가 전쟁이나 재난을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만든 전쟁 영화나 재난 영화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는데요. 무인폭격기 이런 것이 현실을 게임같이 만들어버리는 거잖아요.(지승호)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 가상현실, 전쟁 영화가 너무 리얼한 거예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진짜 실감 나잖아요. 그건 가상이고 과장된 건데, 그걸 현실로 받아들이고 현실의 전쟁을 보면 사람들이 피해를 못 느껴요. 굉장히 심각한 거죠.  463


하이퍼리얼리티, 과다한 현실성, 이게 언론 매체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힘이자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만드는 기제예요. 하이퍼리얼리티가 우리를 지배하면 사랑에도 문제가 생겨요. 왜 쟤랑 키스할 때는 그 영화에서 봤던 느낌이 안 나고 입 냄새만 나느냐는 거죠. 장미도 안 쏟아지고, 종소리도 안 들리고.(웃음)  465


무언가에 몰입하느라 서로를 못 보게 하는 것,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가 그걸 얘기하는 거죠...

드보르의 얘기는 무언가를 멍하니 쳐다보느라 서로를 보지 않는 것, 지도자를 보느라 서로를 보지 않는 것이 나쁘다는 거예요. 또 드보르가 중요한 얘기를 하는데, 자본의 구조와 정치의 구조와 권력의 구조가 같다는 거예요.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은 사람은 이 책이 자본주의 비판이라고 하는데, 사실 하이라이트는 러시아 공산주의 비판이에요. '프롤레타리아 당은 프롤레타리아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스펙터클일 뿐이다'라는 거예요. 

케네디(Jhon F. Kennedy)도 공격하죠. 미국에서 최초로 스펙터클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 케네디거든요. 정책은 허접했지만, 잘생기고 멋있는 대통령은 케네디가 처음이었죠. TV가 등장하면서 케네디가 이긴 거거든요. 상대편은 연설을 못 했지만 정책은 좋았어요.  468-469


<스펙타클의 사회>를 경제 비판, 자본주의 비판으로만 읽으면 협소해져요. 오히려 이 책의 매력은 프랑스 68혁명 때, 소련을 진리라고 생각했던 그때, 소련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한 최초의 책이었다는 데 있어요.

드보르는 영화감독이었어요. 자유로운 예술가, 아방가르드 예술가였죠. 나중에 권총으로 자살하는데, 자기가 스펙터클이 되어버려서 자기를 죽여버린 거예요. ..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어보면 뒤에 나오는 들뢰즈나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같은 사람들이 모두 드보르의 통찰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걸 알 수 있거든요. 실제로 68혁명 때는 중고등학생, 대학생들이 보드리야르도 들뢰즈도 데리다(Jacques Derrida)도 아니고 드보르와 그의 친구 바네겜(Raoul Vaneigem)의 글을 벽면에다 옮겨 썼다고요. 드보르는 공산당의 실체를 폭로한 거예요. 당이 지금 스펙터클, 구경거리로 전락했다고 사람들을 구경꾼으로 만들고 지배권은 자기들이 갖는다고.  471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책을 꼽는다면 현 시점에서는 <스펙타클의 사회>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책은 200개가 넘는 테제로 구성돼 있는데, 툭툭 던지는 식이라 독해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번역했던 분도 드보르를 감당 못 한거 같아요. 다행히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사이트에 불어 원본이나 영역본이 있으니까 그걸 참조해가며 보면 돼요.  472


자본주의와 정치를 붕괴시키는 것은 사실 쉬워요.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처럼 사람들 눈을 멀게 하면 돼요. 그러면 투표도 하기 힘들고, 서로 더듬으면서 살아야 해요. 프라다도 의미가 없고 TV도 못 봐요. 그러면 자본주의는 붕괴돼요. 알량한 시각 문화만 없으면 자본주의는 무너진다고요.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있을 때 눈 감고 있잖아요. 애인 품에 안겼을 때 눈 감고 있고, 키스할 때 눈 감고 있어요. 이런 것이 사실 소중한 세계예요. 촉각의 세계죠. 시각이 아닌 세계에 대한 갈망이 20세기 이후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문학 작품 속에 많이 나와요. 소설가들은 본능적으로 아는 거예요. 시각이 거리 둠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초콜릿 복근을 만든다든가 가슴 수술을 한다든가 지랄을 하지만, 그런 건 옆에 앉는 순간 아무 의미도 없어요. 안타까워요. 사람들이 시각에 집중하느라 다른 감각을 죽이고 있어요.  474


시각의 세계가 곧 자본의 세계이기도 한 거죠.

시각의 세계는 정치의 세계예요. 왜냐하면 보는 자는 우월하고 보이는 자는 열등하거든요.  475


모든 걸 한 방에 해결하는 것이 사랑의 방법이에요. 사랑의 방법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이냐가 모든 진보적인 사람들. 인문학자가 고민해야 할 문제인 거고요. 네그리가 얘기하는 '다중'이 기쁨의 연대인데, 스피노자저 ㄱ의미에서 대상을 가진 기쁨의 감정이 사랑이거든요. 그러니까 다중은 곧 사랑의 공동체예요.  476


자본주의는 우리를 콩가루처럼 쪼개려 해요. 단결해서 같이 쓰지 못하게 해요. 자본주의는 공동체를 싫어한다고요. 개성, 개성 하는데, 소비의 자유를 개성이라고 하는 것일 뿐이죠. 지금 광고에서 떠드는 개성이란 건 다양하게 고를 자유에 불과한 거예요. 사지선다형 식의 자유일 뿐이죠.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고르는 게 무슨 자유예요? 자본은 이렇게 인간을 파편화시키고, 개인과 개인을 덜어뜨려놓을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내면을 산산이 쪼개놓을 수 있어요.  478


이 시대에 필요한 인문정신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지승호)

자본주의에 대해서 많이 숙고해야 돼요. 자본주의를 우회하면 안 돼요. 그게 우리 삶에 고통과 고민을 안겨주는 근본적인 원인이니까요. 산 사태가 나는 것에 대한 직감 능력을 가져야 하는데, 우리는 도토리에 정신이 팔려서 산사태가 나는지도 모르잖아요. 체제가 너무 기만적이에요. 장밋빛 꿈을 계속 미래로 연결시키죠. 자꾸 저축하고 보험 들고 미래를 꿈꾸게 함으로써 현재의 세계를 영위하지 못하게 해요. 미래를 염려하게 하는 사회죠.

권력이든 뭐든 누가 잘해줄 때는 날 잡아먹으려고 그러는 거라는 걸.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걸 잘 알아야 해요. 국가는 수탈과 재분재 기관이에요. 세금은 자발적으로 내는 게 아니라 수탈하는 거지만, 수탈하고 나서 여러 가지 사업에 쓰잖아요. 재분배를 하는 것도 다시 수탈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국가기구의 핵심이에요. 사람들이 재분배를 은총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지도자 만나서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자기가 세금 낸 건 잊어버려요. 그런 것들에 대해 잘 모르니까, 깨알같이 도토리만 보고 있으니까 인문학자나 사회학자 같은 사람들이 지적을 해줘야 해요. '산사태가 일어납니다. 산이 무너질 것 같아요. 다람쥐 여러분.'(웃음)

우선 사람들이 위축되지 말고 당당해져야 해요. 인문학 저자들이나 시인처럼 당당함을 갖춘 사람들이 모일 때 구조의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누가 구조를 바꿔서 우리한테 준다는 것은 그 사람이 다른 식으로 바꿔서 줄 수도 있다는 거예요. 굉장히 위험한 거죠. 

현명한 군주는 좋아하고 나쁜 군주는 싫어하는데, 우리한테 중요한 것은 군주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거든요. 그런 이해에까지 이르러야 해요. 한비자도 국가권력 얘기하면서 이런 얘기를 한다고요. '거리의 필부라면 한 사람이라도 죽일 수가 있겠느냐? 군주의 자리에 있으니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런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가 없어야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좋은 군주, 성군에 빠지지 말고 군주라는 형식 자체의 위험성을 읽어야 해요. 노빠니 뭐니, 특정인을 지지하고 그 사람을 메시아로 추앙하는 분위기가 지속되면 민주주의는 요원해져요.

요새 티체 얘기를 많이 하는데,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런 얘길 하거든요. '너희가 알 수 있는 것, 알아야만 되는 것을 감당할 만한 용기가 너희에게 있는가?' 사실 제대로만 보면 구조적인 문제가 보이거든요. 그런데 구조적인 문제를 보면 엄두가 안 나는 거예요. 비겁하니까. 어떻게 못 할 것 같으니까. 그래서 시각을 협소하게 가지려 해요. 민주주의 덕목 중 하나가 자유인데 자유가 가능하려면 용기가 있어야만 해요. 자기 삶에 굉장히 당당해야 해요. 자본가한테 쫄아 있고 권력자한테 쫄아 있으니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거예요. 데모하지 말라고 하면 데모 안 하고, 진짜 데모크라시(Democracy)는 데모의 정치예요. 직접민주주의가 별건가요? 민주주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이에요. 그런데 지금의 정치는 과두정치예요. 민주주의가 아니에요. 다들 알 텐데도 그걸 안 보려고 해요. 협소한 시각으로만 봐요. 투표할 때만 보고. 그리고 정치인들이 표 달라고 구걸할 때만 보고는 '내가 주인인가 보다'하죠.

쫄지 말고 당당해져야 해요. 그래야 자기 상처라든가 비겁함, 남루함에도 직면할 수 있어요.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굽실거리다가 죽지 말고 고개 뻣뻣하게 들고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책에 사인해줄 때도 이렇게 써요. "항상 당당하세요!"  480-482


우리 인간이 잊지 말아야 할 기본 덕목은 나에게 애정을 준 사람에게 나도 애정을 워야 한다는 거예요. 반대로 나한테 칼을 찌른 사람은 20년이 지나도 공소시효가 없어야 해요... 약자가 어떻게 강자를 용서해요? 받아들이는 거거든요. 용서는 강자들만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강했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착한 척해요. 그러니까 매번 당하지, 사람들이 독해지면 독재도 함부로 못해요. 도갲했다가는 삼대가 힘들다. 애들이 복수한다. 이러면 감히 어떻게 독재를 하겠어요?...

그런데 너무들 착해. 양 떼들 같아요. 그래서 니체가 민주주의가 되면 사람들이 양 떼가 된다고 비판한 거예요. 그렇다고 영웅주의로 가자는게 아니라 개개인이 굉장히 강해야 한다.  482


미워해야 할 사람을 제대로 미워하지 못하면 사랑해야 할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요. 동전의 양면이거든요. 혼자 생각해서 다 용서하고 그러면 안 돼요. 자기는 의식적으로, 순간적으로 용서했다고 생각하는데 화병이 남아요. 그러면 사람이 위축되고 활력이 없어지고 피해 의식이 생겨요. 나중에 그런 상황이 되면 미리 피하고, 겁이 많아지고 소심해지고. 김어준의 표현을 빌리자면 '쪼는'게 되는 거죠.

용서는 '죽일 가치가 없다. 복수할 가치조차 없네' 이럴 때 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 화해하고 잘 지내자' 이런 건 아니고요.  483


자살의 종류도 다양해요. 대개 살아 있는 것이 힘들어서 죽느데, 그건 문제가 있어요. 자의식이 너무 강한 거예요.

자살은 스스로에 대한 폭력이에요. 왜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느냐면 내가 패배자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스스로 패배자인 나를 단죄하는 거예요. 자신에 대한 처형 행위죠. 내가 어떤 사람을 때리거나 죽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부정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패배자고 못난 모습이기 때문에 나를 제거하는 거예요. 

경쟁 사회에서는 경쟁을 내면화해요. 나 스스로가 이 경쟁에, 게임에 뛰어든 거예요. 그런데 내가 졌으니까 끝나 거예요. 누구 탓이 아닌 거죠. 이런 논리로 자살을 하는 거거든요. 애초에 경쟁 판에 안 뛰어들고 '왜 너희가 경쟁 판을 만들어?' 하는 사람은 안 죽어요. 경쟁 판에 뛰어든 아이들, 1등 하는 아이들이 죽는 거예요. 경쟁 판에 뛰어든 것을 긍정한 아이들이거든요. 그런데 뒤에서 10ㄷㅇ 하는 아이들은 꼴찌 했다고 안 죽어요. 그 아이들은 대개 경쟁을 안 받아들여요. 심지어 자기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했다는 등 오만 가지 핑계를 만들어놓죠.(웃음)

애초부터 가난했는데 자살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부자이거나 권력자였다가 몰락했을 경우 내가 진짜 패배자가 된 거예요. 그 경쟁의 게임을 받아들인 거고, 내가 1등 한 모습을 내 자의식으로 받아들인 거예요. '난 1등이야' 그런데 꼴찌가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더 이상 나는 존재하지 않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경쟁을 내면화한 사람들만 자살한다니까요. 자살하는 사람들을 분석해보면 나올 거예요. 아마도 좋은 대학 나왔을 거예요.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카이스트 아이들의 자살이 이해가 안 되는거죠. 잡초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경쟁을 안 받아들인다고요. 사회불만 세력들은 안 죽어요. 그런데 체제의 수혜자였던 아이들, 경쟁을 받아들였던 아이들이 많이 죽죠. 사실은 체제가 살인을 하는 거예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들뢰즈의 자살은 좀 다른 면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들뢰즈가 자살했다니까 생성의 철학자와 삶의 철학자가 자살했다고 의아해해요. 경험의 부재죠. 식물인간처럼 누워서 죽은 상태로 있는데 뭘 할 수 있겠어요? 그걸 이해 못 하는 거죠. 심지어 들뢰즈 연구자란 사람들도 그래요.  485-486


모든 인생론은 가짜예요.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느냐의 문제로 화두를 던지잖아요. 세계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화두가 아니라. 자기계발서의 핵심은 나만 바뀌면 된다는 거예요. 세계는 한 번도 안 바뀌어요. 인생론과 자기계발서를 믿는 사람들은 나중에 자살을 해요.  488


자기 계발은 자기를 서서히 죽여가는 거네요.(지승호)

서서히 죽이다가 자기계발에 실패하면 죽어요.(웃음) 그런 것들이 우리 사회의 특징인데 오래됐죠.  489




chapter 9 음악이 필요한 시간


항상 편집자들에게 강조하는 게 이런 거예요. 책이 많이 안 나가도 된다. 최소 10년 이상 나가는 책을 쓰는 게 중요한 거다.  494


인문학 책은 자기계발서나 스티브 잡스 책과는 달라요. 사람들이 읽었을 때 표면적이고 너무 쉬운 것. 그게 대중적 글이 아니에요. 

중요한 건 독자가 자기 이야기처럼 받아들이게끔 글을 쓸 수 있느냐예요. 그게 인문학에서의 대중성이죠. 독자들과 우리 이웃이 어떤 심리 상태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요.  496


대중적 글쓰기를 하려면 동시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계속 업데이트해야 해요.  497


얻어걸려서 한두 마디 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유기적 연결이 되는지가 문제예요.  507


자기 스스로 당당하게 살고자 해서 생긴 고통의 폭이 큰 사람이 선생이에요.  513


인문학 하는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지승호)

요즘엔 사람들이 너무 조바심쳐요. 흥행하려고 하고. 그러지 말아야죠. 길게 가야지. 인문학은 농사짓는 것과 같아요. 천천히, 천천히 가야해요. 사람들이 안 듣는다고 폐강하면 안 된다고요. 한 명이었던 수강자가 두 명이 되도록 늘려 나가야죠. 상상마당 아카데미 처음 시작할 때에는 6, 7명이 강의를 들었어요. 다른 선생들은 사람 수 적어서 쪽팔리다고 초기에 다 그만뒀는데 저는 계속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친구들을 데려와서 나중에는 수강생을 제한했어요. 30명밖에 못 들어오니까. 그 당시에 수강생 수가 적다고 투덜거리던 사람들은 아직도 수강행 수가 적어요. 애정의 문제예요.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사람들이 강신주를 모르니 막 들이대는 거예요. 그 사람들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아주 많이 배웠어요. 무엇을 쓰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배운 거예요. 사람들이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알게 된 거죠. 전에도 얘기했지만, 제가 상상마당을 그만둔 건 제 얘기가 메아리 되어 돌어온다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사랑한다면 흉내 내선 안 되거든요. 자기 얘길 해줘야죠. 저는 다른 사람 경험을 느낄 준비와 연습이 되어 있는데, 그걸 잘 안 해줘요.  518


철학이든 음악이든 결국 자기 것을 만들어내야 일가를 이룰 수 있다는 거네요.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존중받을 수 있다는 거고요.(지승호)

'나는 나다' 이것에서 뿜어져 나와야 해요.

그러면 인문학적 기초가 있어야 한다는 건데요.(지승호)

인문학적 기초에다 살아 있는 경험이 더해져야죠.  526


중요한 건 정신성이에요. 누군가를 진짜 사랑하면 방법을 찾아내죠. 방법을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에요. 방법 가지고 사랑하는 것을 우리는 바람둥이라고 하잖아요. 저 사람을 진짜 사랑하면 아껴주는 방법을 찾아요. 그래서 정신성이 중요한 거거든요. 흉내 낸다는 것과 표현하는 것은 다른 거니까요...

표현할 정신성이 있다면 기술적인 것, 기법은 다 찾아서 하게 돼 있어요. 기법부터 배운다고 해서 없던 정신성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나니까 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것들, 나의 시선, 이것을 얼마나 긍정하고 표현해낼 수 있는가는 사활을 건 문제예요.

이건 예술가나 저자뿐 아니라 각 개인도 마찬가지예요. 그럴 때 자기를 사랑하게 되고 건강해지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흉내 내면 자신을 부정하게 되잖아요.  527


겁 많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면 안 해본 것은 무서운 것이고, 무서운 것은 나쁘고 저주스러운 것이라고 여긴다는 거예요. 제가 "번지점프 무섭죠?" 하고 물어보면 무섭대요. 해봤냐고 물어보면 안 해봤대요. 갇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그냥 하라고, 하면 된다고, 번지점프를 연속으로 다섯 번 하라고, 다섯 번 했는데 무서우면 그때는 진짜로 무서운 거라고 얘기해줘요. 고소공포증이라는 건 다 뻥이거든요. 산에 올라가면 고소공포증이 있대요. 그냥 무섭다고 하면 되지, 고소공포증은 무슨 고소공포증이에요? 그냥 무서운 거예요. 나 무섭다. 비겁하다. 용기 없다. 그러면 되잖아요. 고소공포증 하면 뭔가 본질적인 게 있는 것 같잖아요.  528


초고 작업을 어떻게 하느냐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쭉 정리해두셨다가 집중적으로 쓰신다고 하셨는데요. 시놉시스 같은 것을 만들어두고 작업하시나요?(지승호)

큰 틀이 있죠. 제가 단행본을 열입곱 권 썼잖아요. 이제는 어떤 걸 강의해도 이게 책이 될지 안 될지를 알아요. 이건 분량이 어느 정도 나올지도 가늠이 되고요. 발악을 하고 중언부언해도 책이 안 나오는 것이 있고, 이건 양이 넘쳐서 세 권은 되겠다는 것도 있고. 그래서 강의안을 쓸때도 이건 일회성인지, 아니면 다른 강의와 연결이 되는 건지 그런 감이 있죠.

저는 강연과 집필을 분리하면 안 돼요. 강연과 집필이 같이 가야 되는 사람이에요. 강연 따로, 집필 따로 그렇게 분리 못 해요. 저는 한 가지 일을 하는 거예요. 겉으로 볼 때는 두 가지 일을 하는 것 같으니까 '언제 강연을 하고 언제 책을 쓰세요?'하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어떤 상황에서든 발언하거나 생각하는 것들을 전체 구조 속에서 연결지어야 해요. 그래야 나중에 그것들이 쌓여서 책이라든가 하나의 정리된 결과물로 나올 수 있어요. 그러니 막 던지지 말고, 뭔 하는지 알고 해야 돼요. 이 발언이 책의 어느 꼭지에 들어갈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서 해야죠. 만약 제게 그런 감각이 없었으면 그렇게 많이 강연 다니면서 책으로 먹고 살 수 없었을 거예요. 지금의 책이 좀 팔려서 강연을 안 해도 어껴서 살면 살 수 있거든요. 가끔 들어오는 인세로. 옛날에는 그게 힘들었죠. 그래서 제가 원하는 작업이 아니라, 예컨대 학술진흥재단 같은 데서 선정해서 국가가 돈 주는 일들, 그런 일들을 의무적으로 해야 했거든요.

벤야민이 그렇게 글을 쓰고 살았어요. 그래서 벤야민을 보면 동질감이 느껴져요. 글들이 짧고 어떤 글들은 왜 이걸 가지고 썼을까 싶기도 한데, 잡지에서 써달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죠. 하지만 거기에도 벤야민의 정신이 담겨 있어요. 벤야민은 그걸 쓸 때도 전체 구조 속에서 어떻게 엮일까를 고려하면서 썼거든요. 단행본 말고 벤야민이 여러 잡지에 기고한 것들을 모아 전집을 ㅁㄴ들어도 일관적이에요. 점묘와 같지만 전체적으로 벤야민다운 그림이 그려지는.

저도 그러고 있지 않나 싶어요. 단행본 뿐 아니라 잡지에 쓴 칼럼, 신문에 쓴 칼럼, 짧은 글들이 하나의 전체를 그려 나가는 거예요. 그런 활동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이걸 정리해서 하나의 작은 우주로 만들어야겠다 싶을 때 집필을 하는 거고요.

머릿속에 있는 것을 조합해서 끄집어내시는 거네요.(지승호)

처음에는 힘들어요. 자료를 모으는 데 집을 지어본 적이 없으니 재료가 모자라기도 하고 남기도 해요. 예컨대 목차를 구성해보니까 경제 문제만 너무 많아요. 그러면 책 균형이 안 맞잔하요. 그런 것처럼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모아야 될 것과나중에 책으로 묶일 것이 최적화되죠. 열일곱 권째 쓰니까 지금은 최적화가 된 거예요. 천재적이어서 그런 게 절대 아니고 열일곱 권의 시행착오가 있었던 거예요. 이제는 대충 길다가 보면 눈에 띄는 거죠. '이건 문으로 쓰면 되겠네'(웃음)

그런 감각은 누구한테 배우는 게 아니에요. 해봐야 해요. 이것저것 모아서 만들다가 너무 ㅁ낳이 모았다. 이건 모자라네. 그러면 돌아다녀야겠죠. 힘드맂만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해요. 적어도 단행본 세 권은 써봐야 그 감이 생겨요. 한 권 쓰고는 '나 안 돼' 이러지 말고 열심히 하면 한 권 정도는 다 쓸 수 있어요. 그러고는 그때 다 절망하죠. 잔뜩 지쳐서, 거기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돼요. 그래서 첫 책 내는 사람들을 항상 격려해줘요. 다섯 권 정도 내고 나면 여섯 번째 책에서는 좋아진다고. 구성도 좋아지고 책 자체가 아름다워진다고 마치 자신이 좋아하는 인문학 책이나 고전을 봤을 때 누껴지던 품격이 생겨요. 균형미도 잡히고.  540-542


실존적인 자기 자신의 세계가 있느냐, 무언가에 대해서 울리모가동요가 있느냐. 이게 중요해요. 저자에게서 그게 사라지면 그 저자는 끝나는 거예요. 시인이 시를 못 쓰는 이유는 그 울림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시 나부랭이는 쓸 수 있지만 이미 시가 아니죠. 감정을 담아서 표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날조하는 거죠. 영화를 보고 울면서 평론을 쓰면 글이 좋잖아요. 그보다 더 센것은 자기가 직접 사랑해보고 힘들어서 쓴 글이고...

울림이 없으면 글을 못 써요.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없고, 사람들이 잘 못됐는데도 안타깝지도 않고, 어떤 현상에 대한 분노도 없고, 노을을 봐도 아무 느낌이 없고.. 이렇게 일체의 감정이 고갈되면 글을 못 써요.  543


책 읽는 것은 다 우연이에요. 서점에서 대충 얻어걸려서 읽거나 누가 선물해줘서 읽거나, 그게 묘미죠. 결정돼 있지 않아요.  547


인생은 만나고 마주치며 지내는 시간이 반, 그리고 그것을 추억하는 시간이 반이에요. 그래서 만나고 마주치고 기쁘고 슬프고 하는 시간들이 나중에 그럴 기력도 없을 때 추억의 대상이 되고 힘이 돼요. 그래서 1년 이든 2년이든 사랑은 진하게 해야 하는 거예요. 나머지 시간 동안 그것만 기억할 수 있어도 살아갈 힘이 된다고요. 기생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젊었을 때 3년을 연애했대요. 그런데 기생은 결혼을 못 하잖아요. 그 후 50년이 넘도록 그 남자랑 사랑했던 추억을 가지고 산 거예요. 벚꽃이 열흘 반짝 피어도, 나머지 기간은 볼품없는 시커먼 나무로 있어도 그 기억 때문에 나머지 시간을 견디는 거잖아요. 겨우 열흘 남짓한 그 시간 때문에 벚나무라고 불리는 거예요.  549




chapter 10 인간을 위하여


"라캉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당신이 소망하는 것인가?' 지금 내가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과거 타자가 욕망했던 것, 혹은 금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불일치를 극복했을 때, 우리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사랑이 아니었으며, 혹은 우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사랑이었다는 때늦은 후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셨는데요. 진실로 내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지승호)

해야 할 까 말아야 할까 망설이게 되는 지점들이 있어요. 검열이 들어오는 거거든요. 그러면 해야 돼요. 기준은 그거예요. 그래야 검열을 넘어설 수 있어요. 일종의 모험이죠. 일종의 모험 같은 것들이 자기를 깨어나게 하는 거니까.  565


인간은 독립을 빨리 못해요. 기지도 못하고 이도 늦게 나니까. 부모 곁에서 부모 말을 들어야 하니까 부모의 문화가 전다로디는 거예요. 인간한테 역사와 문화가 가능한 것은 우리가 과거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인데, 과거에 의존한다는 건 곧 부모한테 의존한다는 얘기예요. 결과적으로 기존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하는 거예요. 어머니가 좋아하는 게 김치면 김치를 먹어야 하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것이 1등이면 1등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 가치를 받아들이면 내가 욕망하는 거지만 사실은 어머니가 욕망하는 거죠. 내가 김치찌개를 먹고 싶어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가 김치찌개를 먹기를 원했던 어머니의 바람이 실현되는 거예요.

사람이 재미있는 게, 나를 사랑해줬으면 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자기의 욕망이 달라져요. 내가 좋아하는 남자 친구가 클래식을 좋아하면 클래식을 듣게 된다고요.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내가 안 맞춰주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클래식을 정말 좋아한다면 그 사람의 세계에 다가가기 위해서 클래식 티켓도 선물해주고 같이 공연장도 가는 거예요. 그런데 공연장 가서 내가 아무것도 못 느끼면 꼬받 두 시간을 견뎌야 해요. 거기 가서 졸면 돈 내고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거든요. 그러니까 미리 브람스를 계속 들으면서 연습하고 공연장에 간다고요. 그러면 훨씬 좋으니까. 그러면서 클래식이 들리기 시작하는 거고, 그 남자랑 헤어지더라도 나는 브람스를 좋아할 수 있는거죠.

그런데 성숙해진 다음에 사랑할 때, 이성이든 존경하는 사람이든 내가 독립되어 있는 상태에서 사랑할 때는 달라요. 내 욕망을 내가 선택하는거니까.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선택한 거니까요. 스피노자가 얘기했듯이 사랑의 기준은 나한테 기쁨을 주는 것인데, 여기서 기쁨이란 그 사람을 만나서 내 삶의 의지가 확장되는 거예요. 가능성이 더욱 열리는 거예요. 저 인간을 만났더니 좁아져. 그러면 사랑 안 해요. 그 사람을 만나서 삶을 더 누릴 수 있다는 느낌, 확장된다는 느낌이 중요하거든요. 

라캉의 핵심 테마가 우리가 욕망하는 것의 타자성인데, 문제는 그 타자가 내가 선택한 타자냐, 아니면 부모처럼 내가 절대적으로 그 타자에게 던져져서 적응하는 것이냐 하는 거예요. 인생에 있어서 딱 한 번의 혁명이 필요한데, 그게 어른이 되는 거예요. 부모의 가치관을 철저하게 버리는 이 과정은 굉장히 힘들어요. 한번 어른이 되면 어른인 거예요. 자기 욕망을 갖추는 것이 어른이 되기 위한 기본이에요. 핵심은 내가 타자를 선택한다는 거죠. 생존하기 위해서라는 동물적 의미에서 어머니의 욕망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있어야 내 삶이 더 확장된다는 의미에서 적극적으로 타자의 욕망을 선택하는 거죠. 그럴 때 어른이 되는 거예요.

기존의 내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부모나 사회의 욕망을 극복하는 방법은 이런 거예요. 할까 말까 주저하게 되는 행동들이 있어요. 그렇다면 그건 하고 싶다는 거거든요. 그럴 때 해야 돼요.(웃음) 100%예요. 사실 그게 만만치가 않아요. 사실 조금만 잘못돼도 '하지 말걸'이렇게 돈다고요. 그래도 그걸 한 번 내질러보고 직접 겪어보는 거죠. 그게 나쁠 수도 있어요. 그때는 그걸 자기 탓으로 돌리면 되는 거예요. 대개 번지점프 싫어하고 고소공포증 얘기하는 친구들 보면 한 번도 번지점프를안 해본 애들이에요. 하지만 번지점프를 열 번은 해봐야 자기가 그것을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열 번을 했다가 번지점프에 환장하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러면 나중에는 패러글라이딩도 하고 헬기에서 뛰어내리기도 한다고요.

예전에 위악(爲惡)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잇어요.(<위악이란 비범한 의지>, <채널 예스>)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억지로 해보라는 건데, 그건 제 얘기가 아니라 이상이 한 얘기예요. <날개>의 앞부분을 보면 이상이 위악의 의지를 가져보라고 해요. 19세기 문학이 도스토옙스키에 갇혔잖아요. 도스토옙스키를 벗어나려면 위악을 저지르는 우아함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貪食)하는 아이러니를 실철해"봐야 한다는 이상의 표현, 그게 핵심적인 거예요. 자기로 서겠다는 것, 도스토옙스키를 벗어나보겠다는 것, <날개>를 위악적으로 쓰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선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기존 가치관에 따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악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행해보는 거예요. 바로 그 악이라는 요소 속에 나에게 맞는 욕망이 있어요. 그런 애들 있잖아요. 무모하게 모험하고, 젊었을 때 도서관에 갇혀 있지 않고 막 들이대는, 일단 해보는 거예요. 해보고 결정하는 거죠. 해보고 나서 '이거 더럽게 나쁘다, 하지 말자'라고 판단하는 건 온전히 내 판단인 거예요. 하지만 하지 말라고 머릿속에서 검열해서 영원히 하지 않는 것은 내 판단이 아닌 거죠. 그걸 겪어내야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악 중에서 '이건 악이 아니라 선이구나'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의 고유성을 찾게 되고 어른이 되는 거거든요. 힘들어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고, 니체 얘기가 맞아요. '너희가 알 수 있는 것. 알아야만 되는 것을 감당할 용기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위악이 우리의 탈출구예요. 악이라고 금지하는 걸 행해보려는 우아함, 사람들이 진짜로 못 먹겠다고 하는 것을 몇 번 반복해서 먹어보는 거예요. 예를 들면 삼합. 전라도 음식이잖아요. 그거 처음 먹을 때 진짜 힘들었거든요. 선배가 먹기 진짜 힘들 거라고, 속이 터질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딱 열 점마 ㄴ먹어보래요. 그래서 꾸역꾸역 다 먹었는데도 싫더라고요. 그런데 일주일 정도 후에 다시 삼합을 먹었는데 그때는 입에서 그냥 굴러다녀요.(웃음) 전에는 몰랐던 거죠. 그런 혐오감 같은 것들을 한 번 넘어가 보는 것, 그게 위악이에요.

이상의 제스처를 좀 배워야 해요.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먹어보고, 무서운 번지점프지만 웃으면서 뛰어내려보고, 불쾌하고 싫은 건데 한 번 해보기도 하고. 위악으로 시도했던 것들이 다 좋아진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걸 자기화한다는 차원인 거예요. 반반이에요. '야, 이거 너무 좋다.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할 수도 있고요. '역시 어머니 말씀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는다더니' 이럴 수도 있어요. 그래도 어쨋거나 내가 검증해본 거잖아요.  566-569


여행 많이 다니고, 만힝 부딪치고, 우리가 봤을 때 '왜 저런 걸 하지'싶은 사람들이 가진 건강함이 있어요. 왜냐하면 그만큼 자기를 찾은 거니까요. 거기에서 오는 여유들이 느껴지죠...

내 삶은 하나인데 너무 많은 가치관이 혼재해 있으니까 복잡하다고요. 복잡한 사람은 행동을 못 해요. 단순해야죠. 어쩌면 행동이 빨리 나오는 편이 나아요. 생각은 항상 뒤에 가도록 해야 해요.  570


위대한 문인들 보면 기인이 많잖아요. 기이한 행동을 많이 하는데. 그게 다 발악이에요. 위악의 행동을 하니 기인으로 보이는 거예요. 겁 안 내고 위악적인 행동, 기괴한 행동을 해요. 문인이라고 하면 사라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니까 회사원이면 엄두도 못 낼 짓들을 하는 거죠. 세종대왕 동상에 올라가서 소변을 본다거나. 경찰에 잡혀가서는 자기가 세종보다 높다고 우기고 나중에 보니 시인이야. 그러면 풀어줘요.(웃음) 인문학은 고유명사라고 했잖아요. 나 자신을 찾으려는 사람들. 

발악을 하는 거예요. 악이라는 것들을 다 해보는 거고요. 자기를 찾으려는 모험이라고 할 수 있죠.

내가 판단했을 때 이건 해서는 안 돼, 이런 느낌이 드는 것들을 많이 해 봐야 해요. 누굴 사랑하면 안 될 것 같아, 이 판단 속에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악인 것 같다 싶으면 확 질러버리는 거예요.(웃음) 진짜 악일 수도 있어요. 그러면 나중에 처절하게 배우는 거죠. 그렇게 인격적인 동일성을 갖춰야 돼요.  571


맨 얼굴로 사는 게 가장 이상적인 사회예요. 그런데 우리는 권력자 앞에서 자기 감정을 토로하지 못하잖아요. 억압 사회예요. 감정을 토로하지 못하는 게 억압의 척도예요.

페르소나를 써야 할 때, 광대 얼굴을 해야 할 때와 내 감정을 토로해야 할 때가에 있는데, 이걸 구분할 수 있으면 그나마 건강하게 사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꿈꾸는 사회는 감정을 토로하는 사회예요. '에이, 저게 뭔데' 하고 대통령한테 지랄해도 사람들이 웃을 수 있는 것, 이게 건강한 사회거든요. 가면을 벗어야 하는데 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가면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커플들, 부부들 보면 알아요. 저 인간들은 둘 다 평생 무장하고 사는구나. 

중요한 것은 페르소나를 약자가 쓴다는 거예요. 가부장제 사회면 여자가 더 많이 써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쓰는 건데. 그런 게 너무 강해지면 보호가 아니라 페르소나에 갇혀버려요.

사랑의 위대함은 페르소나를 벗게 해요. 정직함을 요구하니까요. 그래서 사랑하면 벗게 돼요. 벗었다가 상처도 많이 받게 되죠.  574-575


인문, 사회 과학을 읽은 남자애들이 여자를 잘 유혹해요. 말로 잘 구워삶아요. 조심해야 돼요.  577


'사랑의 경험이 중요한 것은 사랑을 하면 감정에 정직해지기 때문이에요. 제가 아는 사람은 친해지고 사랑하면 진짜 냉정하게 얘기하는데요. 눈에 약간 무당기가 있어요. 친한 사람한테 그 눈빛이 나와요. 진짜 투사 하듯이 얘기를 하고, 눈으로 압박해 들어오면 정직할 수밖에 없어요. 매력적인 사람이죠. 저도 강한 사람이고 정직한 사람이니까 그 사람이랑 눈에 부딪치면 정말 재밌어요. 대개는 농담 삼아 얘기하는데 가끔 삶에 대해 얘기할 때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제가 맨얼굴을 던지면 그 사람도 맨얼굴이 되고, 농담 따먹기를 하면 그렇게 해줘요. 편하죠. 거꾸로 되면 안 되죠. 내가 맨얼굴 하고 있는데 상대는 가면 쓰고 있고, 내가 가면 썼는데 상대는 맨얼굴 하고 있고, 그러면 안 되죠.

서로 맨얼굴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세밀한 얘기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좋은 거죠. 행복하고.  581-582


현실에 대한 집중도가 중요해요. 그런 사람만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집중할 테니까. 한곳에 신경을 써서 에너지를 너무 많이 낭비하면 다른 쪽에다 에너지를 못 쓰잖아요.  582


사랑은 내려놓는 거예요.  583


"무릇 동심(童心)이란 진실한 마음이다. 만약 동심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진실한 마음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린아이는 사람의 처음 모습이고, 동심은 사람의 처음 마음이다. 처음 마음이 어찌 없어질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렇지만 동심은 왜 갑자기 없어지는 것일까? 처음에는 견문(見聞)이 귀와 눈으로부터 들어와 우리 내면의 주인이 되면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자라나서는 도리(道理)가 견문으로부터 들어와 우리 내면의 주인이 되면서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이러기를 지속하다 보면, 도리와 견문이 나날이 많아지고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이 나날이 넓어진다. 이에 아름다운 명성이 좋은 줄 알고 명성을 드날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또 좋지 않은 평판이 추한 줄 알고 그것을 가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분서(焚書)>의 <동심설(童心說)>에 나오는 구절을 책에 인용하셨는데요. 도심이란 어떤 건가요?(지승호)

동심은 가면 벗은 얼굴이에요. 맨얼굴이에요.

동심을 간직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웃음) (지승호)

그게 아니라 저는 인문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파괴력이 있는지 보여주는 거예요. 저도 옛날에는 비겁했거든요. 진짜 비겁했어요.

"좋지 않은 평판이 추한 줄 알고 그것을 가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라고 했는데, 보통 사람들이 뭐 하나 발각되면 그걸 가리려고 또 거짓말을 하고, 그러다가 망가지잖아요.(지승호)

저 같은 경우는, 예컨대 누가 제가 모르는 시집을 가지고 와서 저한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봐요. 시에 대해서 책을 썼으니까 안다고 생각하고 얘기하는 거죠. 그러면 저는 '안 읽어봤는데요' 혹은 '몰라요. 저는 읽고 싶은 시만 읽어요. 그 시집은 재밌어요?' 이런 식으로 얘기해요. 처음에 바로바로 다 정리해요. 쓸데없이 가리려고 하면 안 돼요.

인문학자가 되면서 제가 배운 건 사람 만날 때 가급적이면 그렇게 정직하게 만나야 한다는 거예요. 인문학은 화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정직하려는 데 도움이 되는 거예요. 김수영도 사상보다 백배나 중요한 것이 정직함이라고 햇어요. 정직한 사람만이 뭐든지 배우니까. 정직하다는 것은 맨얼굴이고, 동심이고, 감정을 드러내는 거니까 그만큼 상처도 많이 받아요. 내 맨얼굴을 저 인간이 못 받아들이네. 이런 것도 빨리 알고요. 그러면 그 인간이랑 안 만나면 돼요. 계속 나보고 가면을 쓰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어요. 그런 인간들은 안 만나야죠.

가면을 벗어야 상대방을 알아요. 가면을 한 번만 벗으면 돼요. 세상이 홍해처럼 가라져요. 내 맨얼굴을 인정해주는 사람과 아닌 사람들. 그런데 가면을 써도 이 가면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나뉘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가면을 벗으면 가면 쓴 모습이나마 좋아해주던 사람마저 없어질 것 같다고 두려워해요. 그런데 안 그래요. 새롭게 재편되는 것일 따름이에요. 그러니까 맨얼굴을 인정하는 사람과 부정하는 사람으로 양분하는 편이 나아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렇게 살아야 해요. 가면을 썼을 때도 내 가면을 싫어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가면을 벗으면 내 가면을 싫어하던 사람이 나를 좋아해줄 수도 있다는 것은 모르고, 좋아했던 사라밍 없어지리라는 생각만 해요. 그래서 무서워하는 거예요. 패를 다 까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랑 있는 편이 낫죠. 그게 더 건강한 거니까.

가면의 역할은 일대일의 관계를 못 하게 하는 거예요. 가면은 대개 사회적 가치가 있는 거잖아요. 이런 얼굴을 해줘야 상대방이 좋아한다든가. 이렇게 흉내를 내줘야 상대방이 좋아한다든가 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고 연기니까 배역이 정해져 있고 시나리오가 정해져 있잖아요. 그러니까 가면은 일대일의 관계를 막는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가면을 쓰게 되면 일대일 관계가 안 되는 거예요. 가면이라는 존재 자체에 사회적 가치가 들어와 있는 거니까요. 돈 있는 척, 유식한 척, 허점이 없는 척, 지금까지 만난 남자만 해도 열 명인데도 '남자가 뭐예요?' 이러는 거.(웃음)

누구를 사랑하려거나 누구한테 사랑받으려면 가면을 벗어야 해요.  584-587


일단 제가 기본적으로 할 말이 많아요. 글을 쓴다는 것은 가지치기예요.  588


바라건대 정직하게, 더럽게 힘들었으면 좋겠어요. 힘든 게 사랑이라고요. 편한 것은 사랑이 아니고.  589


사랑에 대해 강의할 때 사람들이 물어요. '선생님은 행복해요?' 그럼 저는 이렇게 대답하죠. '불행에서 온 통찰이다. 그게 더 리얼하지 않냐? 행복하면 사랑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다. 행복을 성찰한다는 것은 행복에서 멀어져 있다는 거다. 김수영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자유를 깨달았듯이 우리는 그런 식으로 알게 되는 거다.'

보통 자기들이 압받당하면 비겁하게 '선생님은 행복해요?'라고 물어보거든요. 제가 화날 때는 이렇게 얘기해요. '그러면 내가 불행하다면 너희들은 내가 한 얘기를 안 지킬 거냐? 옳은 것은 옳은 거다. 선생이 못 했다고 해서 옳은 것이 그런 게 되지는 않는다. 철학이 필요한 것은 옳은 것은 옳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옳은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판단은 각자가 해라. 그런 얘기면 지키지 말고, 옳은 얘기라면 그렇게 살면 된다.' 그리고 '옳게 사는 것은 상당히 힘든 것'이라고 덧붙이죠.

그런데 옳은 것을 관철시키려고 살 때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아요. 

연어가 언제 제일 행복하냐면 더 이상 헤엄칠 힘이 없어서 마지막에 손을 놓을 때예요. '아, 이제는 버티지 않아도 된다' 제대로 산 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안식으로 여겨요. 제대로 못 산 인간들이 생명 연장을 꿈꾸죠. 왜냐하면 옳게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인문학은 사랑과 자유예요. 그래서 반체제적이고, 김수영이 얘기했던 것처럼 불온한 거죠.

자유로운 사람나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얻어요.  590-591




에필로그 -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다웠다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력의 상태를 말한다.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이란 지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지성을 사용할 결단력과 용기를 내지 못하기 때문에 미성숙에 머무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과감히 알려고 하라! 그대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 칸트  593


위대한 잡품을 남겼던 작가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다른 누구도 흉내내지 않고 자기만의 목소리를 자기만의 스타일로 남겼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루라도 빨리 회복해야 할 인문정신입니다. 이렇게 인문정신을 회복하는 순간, 우리는 정치가나 자본가, 혹은 멘토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무력감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인문정신을 제대로 갖춘 사람은 우리에게 항상 물어봅니다. 스스로 주인으로 사유하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은 용기가 있는가? 당신은 주인으로서의 삶을 감당할 힘이 있는가?  595


강연 말미에 저는 항상 반복해서 이야기하곤 합니다. "여러분! 저를 선생이나 멘토로 기억하지 말고, 강신주라는 평범한 한 사람으로 기억해주세요. 그냥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하는 어떤 남자가 있었다고 기억해주세요." 저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을 저는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선생님과 학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강신주와 여러분 각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선생님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가라고 가르치지 않으니, 저는 선생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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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문(마르크스-엥겔스) -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공산당선언 (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

 

- K. marx, F. Engels

 

하나의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A spectre is haunting Europe)--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교황과 짜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의 첩보경찰 등 구유럽의 모든 열강은 이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다.

집권당으로부터 공산당이라는 비난을 받아보지 않은 반대당이 있는가? 또한 그 공산주의라는 비난의 낙인을 오히려 자기의 반동적 적들에게, 뿐만 아니라 보다 진보적인 다른 반대당에게 되돌려지지 않는 반대당이 있는가?

이 사실로부터 두 가지 점이 도출된다.

1. 모든 유럽의 열강은 이미 공산주의를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했다.

2. 지금은 공산주의자들이 당 자체의 선언을 통하여 전세계에 대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견해, 목적, 경향성을 발표하고 공산주의의 유령이라는 그 옛날이야기에 대처할 수 있는 가장 알맞는 시기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여러 국적을 가진 공산주의자들은 런던에 모여 다음과 같은 선언을 초안하고 이를 영어, 불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플랑드르어, 덴마크어로 출판하게 된 것이다.

 

 

I.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장인과 직인, 한 마디로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항상 서로 대립하면서 때로는 숨겨진, 때로는 공공연한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각각의 싸움은 그때마다 대대적인 사회의 혁명적 재편 또는 경쟁하는 계급들의 공동파멸로 끝났다.

이전의 역사적 시대에서는 거의 모든 곳에서 사회가 다양한 질서, 잡다한 사회적 서열의 등급으로 복잡하게 배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대 로마에는 귀족, 기사, 평민, 노예가 있었고, 중세에는 봉건영주, 가신(家臣), 길드장인, 직인, 도제, 농노가 있었다. 이들 계급의 거의 대부분은 또 부수적인 등급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봉건사회의 폐허로부터 싹튼 현대 부르주아사회는 계급적대를 없애지 못했다. 단지 낡은 것들 대신 새로운 계급, 새로운 억압의 조건, 새로운 투쟁형태들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 부르주아지의 시대는 명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계급적대를 단순화시킨 것이다. 전체 사회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양대 적대적 진영으로, 서로 직면하고 있는 양대 계급으로 점점 더 분열되어 가고 있다.

중세 농노로부터 초기 도시의 시민이 생겨났으며, 이 시민으로부터 부르주아지의 최초 분자들이 발전해 나왔다.

아메리카의 발견, 케이프 항로의 발견은 떠오르는 부르주아지를 위한 신선한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동인도와 중국의 시장, 아메리카의 식민지화, 식민지와의 무역, 교환수단의 상품의 전반적인 증가는 상업과 해운업 및 공업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충격을 가하였으며, 또 그럼으로써 비틀거리는 봉건사회내의 혁명적 요소에게는 급속한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폐쇄적 길드가 산업생산을 독점하고 있던 봉건적 산업체계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시장이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를 대신한 것이 곧 매뉴팩처 체계였다. 길드장인은 매뉴팩처 중간계급에 의해 밀려났으며, 서로 다른 자치적 길드들 간의 분업은 사라지고 각 공장 내에서의 분업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시장은 꾸준히 성장했으며, 수요 또한 계속 상승하고 있었다. 그래서 매뉴팩처조차도 이제 불충분한 것이 되었다. 또한 증기와 기계가 산업생산을 혁명적으로 발전시켰다. 매뉴팩처의 위치는 거대한 현대산업으로 대체되고 산업 중간계급의 위치는 산업 백만장자, 전체 산업부대의 지휘관, 현대 부르주아지가 차지하게 되었다.

현대산업은 아메리카의 발견으로 길이 트인 세계시장을 확립했다. 세계시장은 상업, 해운업, 육상교통의 엄청난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발전은 거꾸로 산업의 확장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즉 공업, 상업, 해운업, 철도가 확장되는 것과 똑같은 비율로 부르주아지는 발전했으며 자신의 자본을 증가시켰고, 중세시대로부터 이어 내려온 모든 계급을 뒷전으로 밀어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현대 부르주아지 자체가 긴 발전과정의 산물이며, 생산양식과 교환양식에서의 일련의 혁명이 낳은 산물임을 알 수 있다.

부르주아지의 각 발전단계에는 그에 상응하는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진보가 뒤따랐다. 봉건귀족의 지배하에서는 피억압계급으로, 중세 코뮨에서는 무장자치단체--어느 곳에서는 자립적 도시공화국(이탈리아와 독일), 또 어느 곳에서는 군주의 과세대상인 것제3신분겄(프랑스)--로 있던 부르주아지는 이후 메뉴팩처 시기에는 귀족에 대한 대항세력으로서, 사실상 일반적으로는 대군주들의 초석으로서 반(半)봉건군주 또는 절대군주에 봉사했으며, 현대산업과 세계시장이 확립되면서부터는 마침내 스스로의 힘으로 현대의 대의제국가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현대국가의 집행기구는 단지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동사를 관리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부르주아지는 매우 혁명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지배를 확립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든 봉건적, 가부장적, 전원적 관계를 종식시켜 왔다. 부르주아지는 인간을 것타고난 상하관계겄에 묶어 놓는 잡다한 봉건적 끈을 가차없이 끊어버렸으며, 그 외의 모든 인간의 관계를 적나라한 이기심, 냉혹한 것현금지불관계겄로만 만들어 놓았다. 또한, 가장 신성한 종교적 정열의 환희, 기사도적 열정의 환희, 세속적 감상주의의 환희를 자기중심적 타산이라는 얼음같이 차디찬 물 속에 빠뜨려버렸다. 또, 개인의 존엄성을 교환가치로 용해시켜 버렸으며, 결코 무효화될 수 없이 공인된 무수한 자유 대신 저 자유무역이라는 단 하나의 파렴치한 자유를 세워 놓았다. 한 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정치적 환상으로 가려진 착취를 적나라하고 후안무치하고 노골적이고 야수 같은 착취로 대체한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지금까지 존경과 경건한 경외심으로 받들어졌던 모든 직업으로부터 그 후광을 걷어냈다.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과학자를 자신이 보수를 주는 임금노동자로 전환시켜 버린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가족으로부터 그 감정의 장막을 찢어내고 가족관계를 단순한 돈의 관계로 만들었다.

부르주아지는 복고주의자들이 그토록 경애해마지 않는 중세시대의 야수같은 힘의 과시가 어떻게 하여 가장 게으른 나태로써 훌륭히 보완되는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가 과연 무엇을 낳을 수 있는가를 처음으로 보여준 예였다. 부르주아지는 이집트 피라밋이나 로마의 수도(水道), 고딕 성당을 훨씬 능가하는 기적을 이룩했다. 이전의 모든 민족대이동이나 십자군 따위의 견주지도 못할 원정들을 감행한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끊임없이 생산도구를 혁명적으로 개조하고, 그럼으로써 생산관계를 개조하며, 또 그와 더불어 사회관계 전체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 반면, 이전의 모든 산업 계급들에게는 낡은 생산양식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자신의 1차 존재조건이었다. 끊임없는 생산의 혁명적 발전, 모든 사회적 조건들의 부단한 교란, 항구적인 불안과 동요는 부르주아 시대의 이전의 모든 시대를 구분 짓는 특징이다. 모든 고정되고 꽁꽁 얼어붙은 관계들, 이와 더불어 고색창연한 편견과 견해들은 사라지고, 새로이 형성된 모든 것들은 골격을 갖추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딱딱한 것은 모두 녹아 사라지고, 거룩한 것은 모두 더럽혀지며, 마침내 인간은 냉정을 되찾고 자신의 실제 생활조건, 자신과 인류의 관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생산물을 팔 수 있는 시장을 끊임없이 확장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으로 인해 지구상의 모든 구석구석을 누벼야 한다. 부르주아지는 가는 곳마다 둥지 틀고 자리잡고 연고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세계시장의 착취를 통하여 각 나라의 생산과 소비에 범세계적인 성격을 부여해왔다. 복고주의자들에게는 매우 유감이겠으나 부르주아지는 산업의 발 밑으로부터 산업이 딛고 서 있는 일국적 기반을 빼앗아냈다. 기존에 확립된 모든 일국적 산업들은 이미 파괴되었거나 나날이 파괴되어 가고 있다. 모든 문명민족들이 생사를 걸고 도입하려 하는 새로운 산업, 이제 더 이상 토착 원료자원을 가공하지 않고 가장 먼데서 온 원료자원을 가공하면서도 그 생산물은 국내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구석에서 소비되는 새로운 산업이 그 낡은 산업들을 몰아내고 있다. 그 나라의 생산물로 충족되던 낡은 욕구 대신에, 먼 나라 먼 토양의 생산물로 충족될 수 있는 새로운 욕구가 생겨난다. 낡은 지역적, 민족적, 단절과 자급자족 대신 모든 방면에서의 상호교류 민족들간의 보편적 상호의존이 나타난다. 이는 물질적 생산뿐 아니라 정신적 생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개별 민족의 지적 창조물은 공동의 재산이 된다. 민족적 편향성과 편협성은 점차 불가능해지며, 수많은 민족적, 지역적 문학들로부터 하나의 세계문학이 생겨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생산도구가 급속히 향상되고 교통수단이 엄청나게 개선됨으로써, 가장 미개한 민족을 포함하여 모든 민족을 문명화시킨다. 상품의 저렴한 가격은 모든 만리장성을 무너뜨리고 외국인에 대한 미개인의 매우 고집스런 증오를 굴복시키는 대포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에게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채택할 것이냐 죽을 것이냐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며, 가지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도입할 것 즉, 부르주아 자체가 될 것을 강요한다. 한 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기자신의 모습 그대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시골을 도시의 지배에 복속시켰다. 부르주아지는 거대도시들을 만들었고, 농촌에 비해 도시인구를 엄청나게 증가시켰으며, 이를 통해 상당 부분의 인구를 농촌생활의 백치상태로부터 구출해냈다 .또한 시골이 도시에 종속되도록 만든 것과 똑같이 미개국과 반미개국들이 문명국들에게, 농민의 나라가 부르주아의 나라에게, 동양이 서양에게 종속되도록 만들었다.

부르주아지는 인구, 생산수단, 재산의 분산된 상태를 점차 제거하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인구를 한데뭉치고, 생산수단을 집중시켰으며, 재산을 소수의 손에 집적시켰다. 이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로 정치적 집중이 이루어졌다. 개별적 이해관계와 법률, 정부, 조세제도를 갖고 있던 독립적 지역 또는 그것들과 대충 관련된 지역들은 하나의 정부, 하나의 법조문, 하나의 일국적 계급이해, 하나의 국경, 하나의 관세를 지닌 하나의 나라로 뭉치게 되었다.

부르주아지는 백년 남짓한 자신의 지배기간 동안 이전의 모든 세대들이 이루어낸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거대하고 엄청난 생산력을 창출했다.

인간에 대한 자연력의 복속, 기계, 공업과 농업에서의 화학의 응용, 기선, 철도, 전기통신, 경작을 위한 전 토지의 개간, 운하 건설, 땅에서 솟아난 듯한 거대한 인구--이전세기에 그러한 생산력이 사회적 노동의 품속에 잠자고 있으리라고 예감이나마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할 수 있다. 부르주아지가 딛고 서 있는 토대인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은 봉건사회속에서 생성된 것이다. 이들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이 특정한 발전단계에 이르자, 봉건사회가 생산하고 교환하는 조건, 농업과 제조업의 봉건적 조직, 한마디로 말해, 봉건적 소유관계는 이미 발전되어 있는 생산력과 더 이상 양립할 수 없게 되었으며 오히려 그만큼의 질곡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것들은 산산이 부서져야 했으며, 실제로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그 자리에는 자유경쟁이 대신 들어섰으며, 또 자유 경쟁에 맞는 사회적, 정치적 구조가 뒤따랐고, 부르주아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지배가 뒤따랐다.

지금 우리 눈앞에도 비슷한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 자신의 생산관계, 교환관계, 소유관계를 가지고 있는 현대 부르주아사회, 엄청난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을 출현시킨 이 사회는 자기가 주술로 불러낸 명부(冥府)세계의 힘을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하게 된 마법사와도 같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산업과 상업의 역사는 오직 현대적 생산조건에 대한, 또 부르주아지와 그 지배의 존재조건인 소유관계에 대한 현대적 생산력의 반란의 역사일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주기적으로 일어나면서 갈수록 더 한층 위협적으로 전체 부르주아사회의 존망을 시험대에 올려놓는 상업공황만을 언급해도 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공황에서는 기존 생산물뿐 아니라 이전에 창조된 생산력의 거의 대부분이 주기적으로 파괴된다. 또한 이전의 모든 시대에는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졌을 전염병, 즉 과잉 생산의 전염병이 번지게 된다. 사회는 갑자기 순간적인 야만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마치 기근이나 전면전의 황폐로 인해 모든 생존수단의 공급이 차단된 것처럼 된다. 산업과 상업은 파괴된 듯이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과도한 문명화, 과도한 생존수단, 과도한 산업, 과도한 상업 때문이다. 사회의 수중에 있는 생산력은 더 이상 부르주아적 소유조건을 더 한층 발전시키는 데로 향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생산력은 소유조건에 비해 너무 강력해져서 오히려 그것에 의해 질곡당하며, 질곡을 극복하자마자 생산력은 부르조아사회 전체를 무질서하게 만들고 부르주아적 소유의 존재를 위태롭게 만든다. 부르주아사회의 여러 조건은 생산력이 만들어낸 부를 포괄하기에는 너무 협소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부르주아지는 어떻게 이러한 공황을 극복하는가? 한편으로는 생산력의 대향 파괴를 강화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을 정복하고 기존의 시장을 더욱 철저하게 착취함으로써 극복한다. 달리 말해 그것은 보다 범위가 넓고 보다 파괴적인 공황을 위한 길을 닦으며, 공황을 예방하는 수단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봉건제를 무너뜨렸던 무기가 이제 부르주아지 자신을 겨냥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자신을 죽이는 무기를 주조했을 뿐 아니라 이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인 현대 노동계급, 곧 프롤레타리아들도 탄생시켰다.

부르주아지, 즉 자본이 발전하는 것과 똑같은 정도로 프롤레타리아트, 즉 현대 노동계급도 발전한다. 이들은 일거리가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으며, 그들의 노동이 자본을 증대시키는 한에서만 일거리를 찾을 수 있다. 이들 노동자는 다른 보통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을 조금씩 팔아야 하는 하나의 상품이며, 따라서 경쟁의 성패 여하에, 시장의 동요 여하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기계의 광범위한 활용과 분업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은 모든 개인적 성격을 잃었으며, 그 결과 노동자에 대한 매력도 사라졌다. 노동자는 이제 기계의 부속물이며,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가장 단순하고 가장 단조로우며 가장 쉽게 획득한 기술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의 생산비용은 거의 전적으로 그가 자신을 유지하고 종족을 번식시키는데 필요한 생존수단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상품의 가격, 곧 노동의 가격은 그 생산비용과 같다. 그러므로 노동에 대해 느끼는 반발심이 강할수록 임금은 감소한다. 그뿐 아니라 기계의 사용과 분업이 증가할수록, 노동시간이 연장되거나 주어진 시간 내에 강제된 노동량이 증대하거나 기계 속도가 빨라지거나 하는 등으로 인해 고통스런 짐 또한 증가한다.

현대산업은 가부장적 장인의 작은 작업장을 산업자본가의 거대한 공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공장으로 결집된 노동자대중은 군대식으로 편성된다. 그들은 산업군대의 사병(私兵)으로써 장교, 하사관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위계의 지휘하에 있다. 그들은 부르주아적 계급, 부르주아국가의 노예일 뿐 아니라, 날이 갈수록 시간이 갈수록 기계에 의해, 관리자에 의해, 무엇보다도 개별 부르주아적 공장주 자신에 의해 노예화되고 있다. 이러한 전횡은 영리가 그 목표이자 목적임을 노골적으로 선언하면 할수록 더 한층 인색해지고 증오스러워지고 쓰라린 것이 된다.

육체 노동에 필요한 기술과 발휘되는 힘이 줄어들수록, 바꿔 말해서 현대산업이 발전할수록 더 한층 남성의 노동은 여성의 노동으로 대체된다. 연령과 성별의 차이는 더 이상 노동계급에게 사회적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연령의 성별에 따라 사용하는 값이 다르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노동의 도구인 것이다.

지금까지 노동자에 대해 공장주의 착취가 끝나고 노동자가 임금을 현금으로 받게 되자마자 부르주아적의 기타 부분, 즉 집 주인, 상점 주인, 전당포 주인등이 노동자에게 달려든다.

도매상, 상업주, 일반적으로 은퇴한 상인들, 수공업자와 농민 등 중간계급의 하층은 점차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그들의 영세자본으로는 현대산업이 움직이는 규모를 감당할 수 없고, 대자본가와의 경쟁에서 뒤쳐지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생산방식으로 인해 그들의 전문화된 기술이 쓸모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계급의 인구로부터 충원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양한 발전단계를 거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생겨나자마자 부르주아지와의 투쟁도 시작된다. 처음에는 개별 노동자들이 싸움을 시작했으나 다음에는 한 공장의 근로자들이, 그 다음에는 한 직종, 한 지역의 직공들이 자신들을 직접 착취하는 개별 부르주아를 상대로 싸우게 된다. 그들은 부르주아적 생산조건에 대해서가 아니라 생산도구 자체에 대해서 공격을 가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노동과 경쟁하는 수입품을 쳐부수며, 기계를 산산조각내고, 공장을 불지르며, 사라져버린 중세시대 근로자의 지위를 무력으로 회복하고자 한다.

이 단계에서 노동자는 아직 전국에 흩어져 있고 자기들 간의 상호경쟁으로 분열되어 있는 지리멸렬한 대중에 머물러 있다. 설사 그들이 모여 보다 긴밀한 결합체를 이룬다 해도 그것은 아직 그들 자신이 연합한 결과가 아니라 부르주아지가 연합한 결과이다. 부르주아계급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프롤레타리아트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으며, 게다가 아직 당분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적의 적, 즉 절대군주제의 잔재인 지주, 비산업부르주아, 쁘띠부르주아지와 싸우는 것이다. 이리하여 전체 역사적 운동은 부르주아적 수중에 집중된다. 그렇게 얻어진 승리는 모두 부르주아지를 위한 승리인 것이다. 그러나 산업이 발전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숫자가 증가할 뿐 아니라 보다 큰 무리로 집중되어 힘이 더욱 성장하며, 그 힘을 더욱 자각하게 된다. 기계가 노동의 모든 차이들을 소멸시키고 거의 모든 곳에서 임금을 동일하게 낮은 수준으로 감축시키는 것과 비례하여 프롤레타리아트 대열 내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생활조건은 더욱 더 평준화된다. 부르주아들 간의 경쟁이 격화되고 그 결과 상업공황이 일어나면서 노동자의 임금은 갈수록 동요하게 된다. 기계가 급속히 발전하고 끊임없이 개선되면서 노동자의 생활은 갈수록 불안정해진다. 따라서 개별 근로자와 개별 부르주아 간의 충돌은 갈수록 두 계급간의 충돌이라는 성격을 띠게 된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에 반대하는 결사체(노동조합)를 결성하기 시작하며, 임금율을 높이기 위해 한데 뭉치고, 때때로 일어날 충돌에 미리 대비하기 위해 단체를 창건한다. 여기저기에서 싸움은 폭동으로 터지게 된다.

때때로 노동자는 승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다. 싸움의 실제적 결실은 직접적인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팽창하는 노동자들의 단결에 있다 .현대산업이 만들어낸 전달 수단으로 인해 여러 지역의 노동자들이 서로 접촉할 수 있게 됨으로써 단결은 한층 확대된다. 바로 이 접촉이야말로 같은 성격을 지니는 수많은 지역적 투쟁을 계급들간의 하나의 전국적 투쟁으로 집중시키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다. 중세 시대의 시민이 옹색한 도로를 가지고 수백 년의 기간을 거쳐 달성한 그 단결을 한 대 프롤레타리아는 철도에 힘입어 수 년간 이룩한다.

이렇게 프롤레타리아를 하나의 계급으로, 나아가 하나의 정당으로 조직하는 일은 노동자 자신들 간의 경쟁으로 인해 계속 저해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럴수록 항상 다시 솟아오르며, 강해지며, 굳어지며, 거세지고 있다. 그 조직은 부르조아지 자체의 분열을 이용하여 노동자의 특정한 이해에 대한 입법적 승인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영국에서는 10시간 노동법안이 통과되었다.

기존 사회의 계급들 간에 일어나는 모든 충돌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과정을 촉진시킨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항상적인 싸움속에 있음을 깨닫는다. 부르주아지는 처음에는 귀족과, 이후에는 부르주아지 가운데 산업의 진보에 대해 적대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게 된 일부분과, 그리고 외국의 부르주아지와는 항상, 싸움을 벌여왔다. 이 모든 싸움에서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호소하고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으며, 그리하여 그들을 정치무대로 끌어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결국 부르주아지는 스스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기자신의 정치교육과 일반교육의 요소들을 공급하게 된다. 달리 말해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신과 맞서 싸울 무기를 주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본 대로 지배계급의 모든 분파들은 산업의 진보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하거나, 적어도 자신의 존재조건을 위협당하게 된다. 이들 역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계몽과 진보의 새로운 요소를 공급한다.

마지막으로, 계급투쟁이 결정적인 순간에 다다르게될 때 지배계급 내부에서, 아니 사실상 기존 사회 전체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붕괴과정은 매우 격렬하고 강렬한 성격을 띠게 되므로 지배계급의 일부가 떨어져나와 미래를 자기 수중에 장악하고 있는 혁명적 계급의 편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찍이 귀족의 일부가 부르주아지 편으로 넘어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부르주아적 한 부분, 특히 역사적 운동 전반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으로 스스로를 끌어올린 부르주아적 사상가들의 부분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으로 넘어온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대립하고 있는 모든 계급들 가운데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진정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 다른 계급들은 현대산업이 전진함에 따라 몰락하며 결국 사라져가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현대 산업의 특수하고도 본질적인 산물이다.

중간계급 하층, 소규모 공장주, 상점주, 기능공, 농민 등 이들 모두는 중간계급의 각 부분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키지 않기 위해서 부르주아지에 맞서 싸운다. 그러므로 그들은 혁명적이 아니고 보수적이다. 게다가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후진시키려 하기 때문에 반동적이기도 하다. 간혹 그들이 혁명적인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로의 전락이 임박했음을 예감했을 경우에만 그러하다. 그때 그들은 자신의 현재 이익이 아닌 미래 이익을 수호하며, 자신의 입장을 버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낡은 사회의 최하층에서도 내팽개쳐진, 수동적으로 썩어가는 대중인 것위험한 계급겄, 사회적 쓰레기는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인해 곳곳에서 운동 속에 휩쓸릴 수 있으나, 그 생활조건 때문에 그들은 거의가 반동적 음모에 의해 매수되는 도구의 일부가 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조건들 가운데 낡은 사회의 조건들은 대부분 이미 사실상 곤궁에 처해있다. 프롤레타리아는 재산도 없고, 처자와의 관계도 이제 더 이상 부르주아적 가족관계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으며, 영국에서나 프랑스에서나 미국에서나 독일에서나 현대적 산업노동, 자본에 대한 현대적 종속으로 인해 그는 일체의 민족적 성격을 잃어버렸다. 그에게 법, 도덕, 종교 따위는 바로 그만큼의 부르조아적 편견과 똑같으며, 그 뒤에는 그만큼의 부르조아적 이익이 매복해 있을 뿐이다.

선행했던 모든 지배계급들은 사회의 대부분을 자신의 전유(專有)조건하에 종속시킴으로써 기존의 지위를 강화하고자 했다. 프롤레타리아는 자기자신의 이전의 전유양식을 폐지하지 않고서는, 또 그럼으로써 다른 모든 전유양식을 폐지하지 않고서는, 또 그럼으로써 다른 모든 전유양식까지 폐지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생산력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들은 획득하고 강화시킬 그 무엇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의 사명은 지금까지 개인재산을 보호하고 보장해 온 모든 것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전의 역사적 운동은 모두 소수의 운동이며 소수의 이익을 위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거대한 다수의 자의식적이고 자주적인 운동이며, 거대한 다수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우리 현 사회의 최하층인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적 사회의 모든 상위층들이 사라지지 않고서는 움직일 수도 일어설 수도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의 투쟁은 처음에, 내용에서는 아니더라도 형식에서는 일국적인 투쟁이다. 따라서 각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당연히 무엇보다 먼저 자국 부르조아지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일반적인 발전국면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기존 사회 내에서 벌어지는 어느 정도 은폐된 내전을 추적하여, 그 내전이 공개적인 혁명으로 터져나오고 부르조아지를 폭력적으로 타도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를 위한 토대를 놓는 지점에까지 이르렀다.

이미 보았듯이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형태는 억압계급과 피억압계급간의 적대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한 계급을 억압하려면 그 계급이 적어도 자신의 노예적 존재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일정한 조건이 보장되어야 한다. 농노제시대의 농노가 코뮨의 구성원으로 발전해 나갔듯이, 봉건적 절대주의의 멍에 속에 있던 쁘띠부르조아는 부르조아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 노동자는 산업의 진보에 따라 떠오르기는커녕 자기 계급이 존재조건 아래로 더욱 가라앉는다. 노동자는 빈민이 되며, 빈곤은 인구나 부의 증가보다 더 빨리 발전한다. 여기서, 부르조아지가 사회의 지배계급이 되거나 자신의 존재조건을 고압적인 법률로 사회에 강제하는 따위는 이제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즉, 부르조아지는 자신의 노예제 내에서 노예의 생존을 보장해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즉 노예가 자기를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노예를 먹여 살려야 하는 상황으로 노예를 빠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지배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사회는 이제 이 부르조아지 아래에서 살 수 없다. 달리 말해 부르조아지의 존재는 더 이상 사회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부르조아계급의 존재와 지배를 위한 본질적 조건은 자본의 형성과 증대이며, 자본의 조건은 임금노동이다. 임금노동은 오직 노동자들 간의 경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타의적이기는 하지만 부르조아지가 촉진시키는 산업의 진보는 경쟁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고립 대신 결사로 인한 혁명적 결합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현대산업의 발전은 부르조아지가 생산물을 생산하고 전유하는 바로 그 토대를 그 발 밑에서 무너뜨리는 셈이다. 결국 부르조아지가 생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무덤을 파는 자일뿐이다. 부르조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양자 모두 불가피한 것이다.

 



II.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자는 전체 프롤레타리아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공산주의자는 노동계급의 당들과 대립하는 별도의 당을 결성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지는 이해와 별도로 분리된 이해를 가지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자신만의 분파적 원칙을 세워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이 원칙에 뜯어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서만 다른 노동계급의 당들과 구별된다. (1) 각국 프롤레타리아의 일국적 투쟁에서, 일체의 국적으로부터 독립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 이해를 제기하고 전면에 내세운다. (2) 부르조아지에 반대하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거치는 다양한 발전단계에서, 언제 어디서나 그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는 한편으로 실천적인 면에서는 모든 나라 노동계급 당들 가운데 가장 선진적이고 결의에 찬 부분으로서 다른 모든 당들을 밀고 나아가며, 다른 한편으로 이론적인 면에서는 거대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비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행노선, 조건, 궁극적인 전반적 결과들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공산주의자의 당면 목적은 다른 모든 프롤레타리아 당들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시키고, 부르조아 지배를 타도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도록 하는데 있다.

공산주의자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지는 이해와 별도로 분리된 이해를 가지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자신만의 분파적 원칙을 세워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이 원칙에 뜯어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서만 다른 노동계급의 당들과 구별된다. (1) 각국 프롤레타리아의 일국적 투쟁에서, 일체의 국적으로부터 독립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이해를 제기하고 전면에 내세운다. (2) 부르조아지에 반대하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거치는 다양한 발전단계에서, 언제 어디서나 그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는 한편으로 실천적인 면에서는 모든 나라 노동계급 당들 가운데 가장 선진적이고 결의에 찬 부분으로서 이론적인 면에서는 거대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비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행노선, 조건, 궁극적인 전반적 결과들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공산주의자의 당면 목적은 다른 모든 프롤레타리아 당들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시키고, 부르조아 지배를 타도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도록 하는데 있다.

공산주의자의 이론적 명제들은 결코 이러저러한 자칭 보편적 개혁가가 발명 또는 발견한 사상이나 원칙들에 기초하지 않는다.

그 명제들은 단지 일반적인 견지에서 현존하는 계급투쟁으로부터, 바로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운동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실제적 관계들을 표현할 뿐이다. 현존하는 소유관계의 폐지는 결코 공산주의의 명백한 특질이 아니다.

과거의 모든 소유관계는 역사적 조건의 변화에 따른 역사적 변화에 항상 종속되어 왔다.

예를 들어 프랑스혁명은 부르조아적 소유의 편에서 봉건적 소유를 폐지했다.

공산주의의 명백한 특질은 소유 일반의 폐기가 아니라 부르조아적 소유의 폐지이다. 그런데 현대 부르조아적 사유재산은 게급적대에 기초한, 소수에 의한 다수의 착취에 기초한 생산물의 생산, 전유 체제의 최종적이고도 가장 완벽한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산주의자의 이론은 사유재산의 폐지라는 단 하나의 문구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공산주의자는 한 사람이 자기 노동의 결실로서 사적으로 얻은 재산, 이른바 모든 사적 자유, 행동, 자주성의 기반이라고 일컬어지는 재산에 대한 권리를 폐지하려 한다고 비난받아 왔다.

자기가, 자신의 힘으로, 애써 벌어들인 재산이라니!

그것은 부르조아 재산형태에 선행하는 소기능공이나 소농민의 재산을 뜻하는가? 그것이라면 폐지할 필요도 없다. 산업의 발전이 이미 상당히 파괴해 왔고 지금도 나날이 파괴하고 있으므로.

그렇다면 현대 부르조아적 사유재산을 뜻하는가?

그러나 임금노동을 착취하는 재산, 새로운 착취를 위한 임금노동이 새로운 공급을 창출하는 조건이 없이는 증가될 수 없는 재산이다. 현재의 소유형태는 자본과 임금노동의 적대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제 이러한 적대의 양 측면을 검토해 보자.

자본가가 된다는 것은 생산에서 순수히 사적인 지위뿐 아니라 사회적인 지위도 갖는다는 것이다. 자본은 집단적 산물이며, 오직 많은 구성원들의 공동 행동에 의해서만, 아니 궁극적으로는 전사회 구성원들의 공동행동에 의해서만 운동할 수 있다.

요컨대 자본은 사적인 힘이 아니라 사회적인 힘이다.

그러므로 자본이 공동재산, 전 사회 구성원의 소유로 바뀐다고 해서 개인적 소유가 사회적 소유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변화되는 것은 단지 소유의 사회적 성격뿐이다. 소유는 그 계급적 성격을 잃는다.

이제 임금노동을 보자.

임금노동의 평균가격은 최저임금, 즉 노동자를 노동자로서 겨우 생존하게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존수단의 양이다. 그러므로 임금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전유하는 것으로는 단지 그 생존의 연장과 재생산만을 충족시킬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결코 그러한 노동생산물의 사적 전유를 폐지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생활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것일 뿐, 다른 사람의 노동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잉여를 남기지 낳는다. 우리는 오로지 그러한 전유의 비참한 성격을 제거하고자 할뿐이다. 그러한 전유하에서 노동자는 단지 자본을 증대시키기 위해 살아가며, 지배 계급의 이익이 요구하는 한에서만 살아갈 것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부르조아사회에서 산 노동은 축적된 노동을 증가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반면 공산주의사회에서 축적된 노동은 노동자의 생존을 넓히고 풍요롭게 하며 촉진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르조아사회에서는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지만, 공산주의사회에서는 현재가 과거를 지배한다. 부르조아사회에서 자본은 독립적이고 개성을 갖는 반면, 살아 있는 사람은 종속적이고 개성을 갖지 못한다.

부르조아는 이러한 상태의 폐지를 개성과 자유의 폐지라고 말한다! 그것은 옳다. 그것은 바로 부르조아적 개성, 부르조아적 독립성, 부르조아적 자유의 폐지를 목표로 하는 것이므로.

현재의 부르조아적 생산조건하에서 자유라 할 때 그것은 자유거래, 자유매매를 뜻할 뿐이다.

그러나 매매가 사라진다면 자유매매 역시 사라진다. 자유매매에 관한 이야기, 그 밖의 자유 일반에 관한 우리 부르조아지의 것호언장담겄 따위는 모두,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다면 단지 중세시대 속박된 상인들의 제한된 매매와 대비에서만 그러할 뿐, 매매, 부르조아적 생산 조건, 그리고 부르조아지 자체에 대한 공산주의적 폐지와 대비될 때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당신은 우리가 사유재산을 폐지하려 하는데 대해 경악한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9./10의 인구에게 사유재산은 이미 제거되었다. 소수에게 사유재산이 있는 이유는 순전히 그 9/10의 수중에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사회의 광범한 대다수에게 일체의 재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그 존재의 필요조건으로 하는 재산형태를 제거하려 한다고 우리를 비난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당신은 우리가 당신의 재산을 제거하려한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다. 우리는 그것을 하려 한다.

노동이 더 이상 자본이나, 화폐, 지대로, 독점 가능한 사회적 힘으로 전화될 수 없게 되는 순간부터, 다시 말해 개인소유가 더 이상 부르조아적 소유로, 자본으로 전환될 수 없게 되는 그 순간부터 개성은 사라진다고 당신은 말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것개인겄이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부르조아적 소유자, 중간계급 소유자를 뜻하는 것임을 고백해야 한다. 사실 그런 개인은 깨끗이 일소되어야 한다.

공산주의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사회의 생산물을 전유할 힘을 박탈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전유를 통하여 다른 사람의 노동을 종속시키는 힘을 박탈할 뿐이다.

공산주의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사회의 생산물을 전유할 힘을 박탈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전유를 통하여 다른 사람의 노동을 종속시키는 힘을 박탈할 뿐이다.

사유재산이 폐지되면 모든 노동이 중단되고 곳곳에서 나태가 우리를 덮칠 것이라는 반대가 있어왔다.

그러나 그에 따른다면 이미 오래 전에 부르조아사회는 순전히 게으름으로 인해 파멸해 버려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하는 사회 구성원들은 아무것도 갖지 못하며,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은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반대는 모두 자본이 없다면 임금노도도 있을 수 없다는 동어반복의 또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물질적 생산물의 공산주의적 생산, 전유양식에 대해서 제기된 모든 반대는 똑같은 방식으로 정신적 생산물의 공산주의적 생산, 전유양식에 대해서도 제기되어 왔다. 부르조아지에게는, 계급적 소유의 소멸이 곧 생산 자체의 소명이듯이, 계급문화의 소명은 모든 문화의 소멸과 같다.

부르조아지가 잃고서 애통해하는 바로 그 문화란 실상 엄청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단지 하나의 가계로서 행동하기 위한 훈련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부르조아적 소유의 폐지를 주장하는 데 대해 당신이 자유, 문화, 법 따위 당신의 부르조아적 개념 기준을 적용하려 하는 한 당신은 우리와 말다툼할 필요가 없다. 당신의 법이란 것이 실상은 당신의 계급의지, 즉 당신 계급의 경제적 존재 조건에 의해 그 본질적 성격과 방향이 규정되는 의지가 법제화된 것에 지나지 않듯이, 당신의 바로 그 사상 역시 당신의 부르조아적 생산조건과 부르조아적 소유조건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현재 생산양식과 소유형태--생산의 진보 속에서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역사적 관계--로부터 나오는 사회적인 형태들이 자연과 이성의 영원한 법칙인 것처럼 여기는 이기적이고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당신에 선행했던 모든 지배계급들도 가지고 있었다. 고대적 소유에서 당신이 똑똑히 본 것, 봉건적 소유에서 당신이 인정한 것을 물론 당신은 당신 자신의 부르조아적 소유형태의 경우에는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가족의 폐지라니! 공산주의자의 이 파렴치한 주장에는 가장 급진적인 사람들까지도 분노하고 있다.

지금의 가족, 부르조아적 가족이 서 있는 토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이며 사적 이익이다. 따라서 이 가족이 완전히 발전한 형태는 단지 부르조아지에게만 존재할 뿐이다. 반면 이러한 상태가 진행되면 결국 프롤레타리아에게는 가족이 실제로 사라질 것이며, 공창(公娼)만이 남을 것이다.

당신은 우리가 부모에 의한 자식의 착취를 중지시키려 한다고 해서 비난하는가? 그것도 죄라면 우리는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가 가정교육을 사회교육으로 바꾸려는 것을 모든 관계 중에 가장 성스러운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이 말하는 교육이란 뭔가! 당신의 교육 역시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에 의해, 학교 등을 통한 사회의 직, 간접적 개입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적인 것이 아닌가? 공산주의자는 교육에 대한 성격을 바꾸고, 지배계급의 영향으로부터 교육을 구출하려 할뿐이다.

가족과 교육에 관한, 부모와 자식의 성스런 관계에 관한 부르조아적 말장난은 현대산업의 활동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적인 것이 아닌가? 공산주의자는 교육에 대한 사회의 개입을 발명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개입의 성격을 바꾸고, 지배계급의 영향으로부터 교육을 구출하려 할뿐이다.

가족과 교육에 관한, 부모와 자식의 성스런 관계 관한 부르조아적 말장난은 현대산업의 활동에 의해 프롤레타리아들 간의 모든 가족적 유대가 끊어질수록, 그리고 그들이 자식들이 단순한 상품이나 노동도구로 바뀌어갈수록 더욱 혐오스러워진다.

그렇지만 너희 공산주의자들은 여성공유제를 도입하려는 게 아니냐고 전체 부르조아지는 소리 맞춰 악을 쓴다.

부르조아는 자기아내를 단지 생산도구로만 본다. 그는 생산도구는 공동으로 이용되어야 한다고 들었으므로 자연히 모든 것을 공유한다는 운명이 여성에게도 닥치리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목적하는 바는 단순한 생산도구로서의 여성의 지위를 없애버리려는 데 있다는 것을 그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공산주의자들이 이른바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건설하려 한다는 여성공유제에 대해 우리의 부르조아가 실제로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정말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거의 기억할 수 없을 정도의 먼 옛날부터 존재해 온 것이므로.

우리의 부르조아는 공창은 물론 자기 휘하에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아내와 딸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만족하지 않고 다른 부르조아의 아내를 유혹하는데 커다란 쾌락을 느낀다.

부르조아의 결혼은 사실상 부인공유제이다. 그러므로 설령 공산주의자가 비난받는다 하더라도 그 비난은 위선적으로 은폐된 여성공유제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합법화된 여성공유제를 도입하려 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현 생산제도의 폐지와 더불어 이 제도에서 생겨난 여성공유제, 즉 공창과 사창이 모두 폐지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나아가, 공산주의자는 나라와 국적을 폐지하려 한다고 비난받는다.

노동자에게는 나라가 없다.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빼앗을 수는 없는 일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지배권을 획득해야 하므로, 해당 민족의 영도적 계급으로 떠올라야 하므로, 자신이 스스로 그 민족을 구성해야 하므로, 비록 부르조아적 의미는 아니지만 그 자체가 민족인 것이다.

민족들 간의 민족적 차이와 적대는 부르조아지의 발전, 상업의 자유, 세계시장, 생사양식과 그에 따른 생활조건에서의 제일성 등으로 인해 날이 갈수록 사라져가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는 그것들을 한층 더 빨리 사라지게 할 것이다. 선진문명국의 통일행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방을 위한 1차 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개인에 의한 개인의 착취가 종식되는 것과 비례하여 민족에 의한 민족의 착취도 종식될 것이다. 민족 내에서 계급간의 적대가 사라질수록 민족간의 증오 또한 사질 것이다.

종교, 철학의 견지에서 또는 일반적으로는 이데올로기적 견지에서 나오는 공산주의에 대한 비난은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도 없다.

인간의 관념, 견해, 생각, 한 마디로 인간의 의식이 그의 물질적 존재조건, 사회관계, 사회생활이 변함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그리 깊은 직관을 필요하는가?

사상의 역사는 바로 물질적 생산이 변화하는 정도에 따라 정신적 생산이 그 성격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시대의 지배적 사상은 항상 지배계급의 사상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사회를 변혁하는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곧 낡은사회 내에서 새로운 사회의 요소들이 창조된다는 사실, 낡은 사상의 해체는 항상 낡은 존재조건의 해체와 보조를 같이 한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고대세계가 마지막 진통을 겪고 있을 때 고대종교는 기독교에 의해 정복되었다. 또 기독교 사상이 18세기에 이르러 합리주의 사상에 굴복했을 때 봉건사회는 당시의 혁명적 부르조아지와 목숨을 걸고 싸웠다. 종교적 자유와 양심의 자유라는 사상은 단지 지식의 영역에서도 자유경쟁이 지배한다는 것을 표현할 뿐이었다.

흔히 이렇게들 말한다. 겁의심할 바 없이 종교적, 도덕적, 철학적, 법적 사상은 역사발전과정에서 변형되어 왔다. 그러나 종교, 도덕, 철학, 정치학, 법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항상 살아남았다.겂

겁그밖에도 자유, 정의 등 어떠한 상회에도 공통적인 영원한 진리들이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영원한 진리, 모든 종교나 도덕을 새로운 토대 위에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폐지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는 과거의 모든 역사적 경험과 모순적으로 움직인다.겂

이러한 비난은 어디로 귀결되는가? 모든 과거 사회의 역사는 계급적대, 각 시대마다 각기 다른 형태를 취했던 적대의 발전사였다.

그러나 그 형태야 어떠하든 과거 모든 시대에 공통적인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곧 사회의 어느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착취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다종다양하다 하더라도 과거 시대의 사회적 의식은, 계급적대가 모두 없어지지 않으면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일정한 공동형태 또는 일반관념의 범위 내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은 극히 당연한 것이다.

공산주의혁명은 전통적 소유관계와의 가장 근본적인 결별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혁명의 발전은 전통적 사상과의 가장 근본적인 결별을 포함한다.

하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부르조아적 반론에 대해서는 이쯤 해두자.

우리는 앞에서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것, 민주주의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임을 보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조아지에게서 점차로 일체의 자본을 빼앗고, 모든 생산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총생산력을 가능한 한 빨리 증대시키게 될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소유권과 부르조아적 생산조건에 대한 전제적(專制的) 침해를 통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경제적으로는 불충분하고 무리한 듯이 보이지만 발전해 가는 가운데 스스로를 뛰어넘어 낡은 사회질서에 대한 더 이상의 침해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조치, 생산양식을 전면적으로 혁명화하는 수단으로서 불가피한 조치가 없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은 물론 나라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선진적인 나라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매우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1. 토지소유를 폐지하고 모든 지대를 공공의 목적으로 활용한다.

2. 소득에 대해 높은 누진과세를 적용한다.

3. 모든 상속권을 폐지한다.

4. 모든 망명자와 반역자의 재산을 몰수한다.

5. 국가자본과 배타적 독점을 가진 국립은행을 통하여 신용을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한다.

6. 전달, 운송수단을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한다.

7. 국가소유의 공장과 생산도구를 증대한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공동의 계획에 따라 토질을 개선한다.

8. 모두가 똑같이 노동의 의무를 진다. 특히 농업을 위한 산업군을 편성한다.

9. 농업과 제조업을 결합한다. 인구를 전국적으로보다 균등하게 분배함으로써 도시와 농촌간의 차별을 점차 폐지한다.

10. 공립학교에서 모든 어린이를 위한 무상교육을 실시한다. 현존하는 어린이의 공장노동을 폐지한다. 교육과 산업적 생산을 결합한다, 등등.

발전과정에서 계급적 파별이 없어지고 모든 생산이 광범위한 전국적 단체의 손에 집적되면, 공권력은 정치적 성격을 읽게 된다. 이른바 정치권력이란 본래 단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는 조직된 힘일 뿐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조아지와의 싸움에서 상황의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계급으로서 조직하게 되면, 또 혁명을 통해 지배계급으로 자라나고, 그 자체로 낡은 생산조건을 무력으로 없애버리게되면, 그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들 생산조건과 더불어 계급적대와 계급 일반의 존재조건을 없애버리게 되면, 그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들 생산조건과 더불어 계급적대와 계급 일반의 존재조건을 없애버리게 될 것이며, 또 그럼으로써 한 계급으로서 가지는 자신의 지배권도 폐지하게 될 것이다.

계급과 계급적대의 낡은 부르조아사회 대신 우리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단체를 가지게 될 것이다.

 


III. 사회주의, 공산주의 문헌

 

1. 반동적 사회주의

 

A. 봉건적 사회주의

 

프랑스와 영국의 귀족들은 그들이 가진 역사적 지위로 인해 현대 부르조아사회를 반대하는 소책자를 쓰는 것을 소명으로 하게 되었다. 1830년 프랑스 7월혁명과 영국의 개혁운동에서 이들 귀족은 다시 한 번 혐오스런 벼락부자에게 굴복했다. 그로부터, 중대한 정치투쟁은 매우 명약관화한 일이 되었다. 이들에게는 문헌투쟁만이 가능했지만 문헌의 영역에서조차 복고시기의 낡은 외침은 불가능해져 버렸다.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귀족들은 겉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피착취 노동계급의 이익만을 쫓아 부르조아지를 고발해야 했다. 이와 같이 귀족은 그들의 새로운 주인을 풍자하는 노래를 부르고 주인의 귀에 다가올 재난의 대한 불길한 예언을 속삭임으로써 보복을 꾀했다.

이렇게 하여 봉건적 사회주의는 생겨났다. 반쯤은 비탄으로 반쯤은 풍자로, 또 반쯤은 과거의 메아리로 반쯤은 미래의 위협으로, 때로는 신랄하고 재치 있는 가시 돋친 비판을 통해 부르조아지에게 철두철미 충격을 가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현대 역사의 행진을 전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결과는 항상 우스꽝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귀족은 사람들을 자기 주위로 결집시키기 위하여 기치를 들고 프롤레타리아 자선함을 흔들어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과 어울릴 때마다 그들의 엉덩이에 봉건 문장(紋章)이 찍힌 것을 보고는 불경스럽게 큰 웃음을 터뜨리며 돌아섰다.

프랑스 정통주의자와 것영국청년단겄의 일파도 이러한 희극을 연출했다.

봉건주의자는 그들의 착취양식이 부르조아지의 착취양식과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그들 역시 이제는 낡아빠졌지만 전혀 다른 상황과 조건에서 착취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지배하에서는 현대 프롤레타리아트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면서도, 현대 부르조아지가 그들 자신의 사회형태에서 나온 필연적 후예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그들의 비판이 가진 반동적 성격을 거의 감추지 않기 때문에, 부르조아지에 대한 그들의 주된 비난은 부르조아 체제하에서 낡은 사회질서를 철저히 분쇄해 버릴 운명을 진 한 계급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까지 지적하고 있다.

그들이 부르조아지를 호되게 비판하는 이유는 부르조아지가 단지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었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정치적 실천에서 그들은 노동계급에 반대하는 모든 강압조치에 동참하며, 일상생활에서는 온갖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산업의 나무에서 떨어진 황금사과를 줍기 위해, 그리고 진리, 사랑, 명예를 양모, 사탕무우, 주정(酒精)과 맞바꾸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것이다.

목사가 영주와 손잡고 나아갔듯이 성직자 사회주의는 봉건적 사회주의와 손잡았다.

기독교적 금욕주의에 사회주의 색채를 가미하는 것만큼 쉬운 일도 없다. 기독교는 원래 사유재산, 결혼, 국가를 비난해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대신 박애와 빈곤, 독신과 신체적 금욕, 수도원 생활과 교회를 설교해 오지 않았던가? 기독교적 사회주의는 단지 성직자가 귀족의 불만에 대해 봉헌하는 성수(聖水)에 지나지 않는다.

 

B. 쁘띠부르조아 사회주의

 

부르조아지가 파멸시킨 계급, 현대 부르조아사회의 대기 속에서 그 존재조건이 취약해지고 사멸한 계급은 봉건귀족만이 아니다. 중세의 시민이나 소농경영자는 현대 부르조아지의 선구자였다. 산업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거의 발전하지 못한 나라들에서 이들 두계급은 떠오르는 부르조아지와 더불어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현대 문명이 충분히 발달한 나라들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 사이에서 동요하며 부르조아사회의 보완물로서 자신을 계속 쇄신하는 쁘띠부르조아의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이 계급의 개별 구성원들은 자유경쟁으로 인해 끊임없이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한다. 현대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그들은 현대 사회의 독립적 부분으로서는 완전히 사라지고 제조업, 농업, 상업에서의 관리자, 토지관리인, 상점주로 거의 바뀌는 순간까지 눈 앞에 두게된다.

농민이 인구의 절반을 훨씬 넘는 프랑스 같은 나라들에서는, 부르조아지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에 서는 저술가들은 당연히 부르조아체제를 비판하는 데서 농민과 쁘띠부르조아의 기준을 사용해야 했으며, 이들 매개적 계급의 입장에서 노동계급을 위해 곤봉을 들어야 했다. 이리하여 쁘띠부르조아 사회주의가 생겨났다.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에서도 이 학파의 지도자는 시스몽디였다.

이 사회주의 학파는 현대 생산조건의 모순을 매우 날카롭게 분석했으며, 경제학자들의 위선에 찬 변명을 낱낱이 폭로했다. 그리고 기계와 분업의 파멸적 결과, 소수에게로의 자본과 토지 집적, 과잉생산과 공황을 논쟁의 여지없이 입증했다. 또한 그들은 쁘띠부르조아와 농민의 불가피한 몰락, 프롤레타리아트의 고통, 생산의 무정부성, 방치할 수 없는 부의 불평등한 분배, 국가들간의 파멸적 산업전쟁, 낡은 도덕적 유대의 해체, 낡은 가족관계, 낡은 국적 등을 지적했다.

그러나 설사 그 긍정적인 목적에서 보더라도 이 사회주의 형태는 낡은 생산수단과 교환수단 및 이와 더불어 낡은 소유관계와 낡은 사회로 되돌아가고자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현대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에 의해 파괴되어 왔고 또 파괴될 수밖에 없는 낡은 소유관계의 틀 내에 현대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을 가두고자 한다. 양자 어느 경우이거나 반동적이며 공상적이다.

그 최후의 주장은 제조업에서의 법인길드, 농업에서의 가부장적 관계이다.

결국 완강한 역사적 사실이 자기기만의 도취상태를 흩어버렸을 때 이러한 형태의 사회주의는 우울증의 비참한 발작으로 끝나버렸다.

 

C. 독일 사회주의 또는 것진정한겄사회주의

 

* 여기서 진정한의 뜻은 말뿐임을 말함.

 

프랑스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문헌은 권력을 갖고있는 부르조아지의 억압하에서 생겨났으며 그 권력에 대항하는 투쟁의 표현이었다. 이 문헌들은 독일에서 부르조아지가 봉건 절대주의와의 경쟁을 막 시작했을 무렵 독일로 유입되었다.

독일 철학자, 자칭 철학자, 그리고 재담꾼들은 이 문헌들을 열심히 읽어댔지만 이 저작들이 프랑스에서 독일로 옮겨올 때 프랑스의 사회적 조건이 같이 옮겨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잊고 말았다. 독일의 사회적 조건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이들 프랑스 문헌은 직접적인 실천적 의의를 모두 일었으며 순수히 문헌적인 의미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18세기 독일 철학자에게 제 1차 프랑스 혁명에서 나온 요구들은 것실천이성겄 일반의 요구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혁명적인 프랑스 부르조아지의 의지의 발현 또한 그들의 눈에는 순수의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의지, 일반적으로는 진정한 인간의지의 법칙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독일 저술가의 저작은 오로지 그들의 고대철학적 양심에 새로운 프랑스 사상을 조화시키는 것, 아니 그보다는 그들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버리지 않으면서 프랑스 사상을 접목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접목은 외국어가 사용되는, 즉 번역되는 것과 똑같은 식으로 이루어져있다.

수도사들이 어떻게 고대 이단(異端)의 저작들이 쓰여 있는 원고 위에 가톨릭 성자들의 따분한 생애를 덧썼던가는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독일 저술가들은 세 속의 프랑스 문헌을 가지고 이러한 과정을 거꾸로 밟았다. 그들은 프랑스 원본 아래 자신들의 철학적 헛소리를 써넣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그들은 화폐의 경제적 기능에 대한 프랑스 비판서 아래에는 것인간의 소외겄를 써넣었고, 부르조아 국가에 대한 프랑스 비판서 아래에는 것추상적 보편자의 예위겄를 써넣는 식이었다.

프랑스의 역사비판서에 이러한 철학적 문구들을 삽입하는 것에 대해 그들은 것행동의 철학겄, 것진정한 사회주의겄, 것 독일의 사회주의 과학겄, 것사회주의의 철학적 토대겄 따위의 작위를 수여했다.

이리하여 프랑스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문헌은 완전히 알맹이가 빠져버렸다. 또한 독일인의 손에서 이미 그 문헌은 한 계급과 다른 계급의 투쟁을 표현하지 않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독일인은 것프랑스의 편향겄을 극복했다고 보았으며, 진정한 요구가 아니라 진리의 요구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이 아니라 인간본질의 이익을, 즉 아무 계급에도 속하지 않고 실체도 없으며 단지 철학적 환상의 모호한 영역에만 존재하는 인간 일반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이 독일 사회주의는 국민학교 숙제를 상당히 심각하고 근엄하게 받아들이며 그 빈약한 재고품을 협잡에 가득한 양태로 격찬하는 가운데 점차 그 현학적인 무지를 잃어갔다.

봉건귀족과 절대군주에 대항하는 독일인의 투쟁, 특히 프러시아 부르조아지의 투쟁, 달리 말하면 자유주의 운동은 더욱 격화되었다. 그로써 것진정한겄사회주의가 오랫동안 갈망해 오던 기회, 즉 정치적 운동을 사회주의적 요구와 대결시키며, 자유주의에 대해, 대의정부에 대해, 부르조아적 경쟁, 부르조아적 언론의 자유, 부르조아적 입법, 부르조아적 자유와 평등에 대해 전통적인 파문(破門)을 명하고, 대중에게 부르조아 운동으로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읽은 것은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설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독일 사회주의는 프랑스 비판의 단조로운 모방이면서도 프랑스 비판이, 바로 독일에서의 임박한 투쟁이 이루려는 목적인 부르조아사회의 경제적 존재조건과 이에 적합한 정치구조를 가진 현대 부르조아사회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은 때마침 잊어버렸다.

절대주의 정부 및 이에 딸린 목사, 교수, 지방 유지와 관리들에게 것진정한겄사회주의는 부르조아지의 협박에 대항하는 안성맞춤의 허수아비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 정부가 바로 그 당시에 독일 노동계급의 봉기에 대해 투약했던 채찍과 총탄이라는 쓰디쓴 약을 달래주는 달콤한 마무리였다.

이와 같이 것진정한겄사회주의는 정부를 위해 독일 부르조아지와 싸우는 무기로서 역할 하는 동시에, 반동적인 이익, 독일 속물들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독일에서, 16세기 의 유물이자 그때부터 계속 다양한 형태로 다시 나타나곤 했던 쁘띠부르조아계급은 현 상황의 현실적인 사회적 토대이다. 독일에서 이 계급의 존속은 곧 기존 상황의 존속을 뜻한다 .부르조아지의 산업적, 정치적 지배는 한편으로는 자본의 집적으로 인해,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으로 인해 쁘띠부르조아지에게 일정한 파멸의 위협을 가한다. 이들에게 것진정한겄 사회주의는 이 두 마리 새를 하나의 돌로 잡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그것은 전염병처럼 번졌다.

화려한 수사(修辭)의 꽃으로 수놓아지고 창백한 감상의 이슬에 함빡젖은 사색의 거미줄 같은 의상, 독일 사회주의자들이 것영원한 진리겄라는 말라빠진 그들의 육신을 감추기 위한 이 선험의 의상은 대중 속에서 그들의 상품 판매량을 놀랄 만큼 증대시키는데 기여했다.

또한 한편으로 독일 사회주의는 점점 더 쁘띠부르조아 속물의 허풍스런 대변인으로서의 자기 소명을 인식해 갔다. 독일 사회주의는 독일 민족을 모범 민족으로, 그리고 독일 속물들을 전형적인 인간으로 주장했다. 이 모범 인간이 가진 약간의 야비한 구석이라도 보이면 독일 사회주의는 그것을 실제 성격과는 정 반대로, 은폐되고 고상한 사회주의적 해석을 가했다. 또한 장황하리만치 공산주의의 것야수같은 파괴적겄 경향을 정면으로 반대했으며, 모든 계급투쟁에 대해 고상하고 공평한 경멸을 표했다. 몇 가지 극히 드문 예외를 제외한다면 지금(1847) 독일에서 돌아다니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출판물들은 모두 이러한 비열하고 무기력한 문헌의 범주에 속한다.

 

2. 보수적 사회주의 또는 부르조아 사회주의

 

부르조아지의 일부는 부르조아사회의 지속적 생존을 도모하기 위하여 사회적 불만요인을 개선하고자 한다.

이 부분에 속하는 이들로는 경제학자, 자선가, 인도주의자, 노동계급의 상태를 개선하려는 자, 자선의 조직자, 기타 온갖 종류의 하찮은 개혁가들이 있다. 나아가, 이러한 형태의 사회주의는 완전한 체계로 발전되어 왔다.

프루동의 겁빈곤의 철학겂을 이러한 형태로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타자맨 主: 맑스는 프루동의 겁빈곤의 철학겂을 혹독하게 비판한 겁철학의 빈곤겂이라는 저작을 남긴바 있다.)

사회주의적 부르조아는 현대 사회적 조건의 모든 장점을 원하지만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투쟁과 위험은 배제하고자 한다. 그들은 사회의 현 상태에서 그 혁명적이고 붕괴적인 요소를 뺀 것을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없는 부르조아지를 원한다. 부르조아지는 당연히 자신이 패권을 쥐고 있는 세계가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부르조아지 사회주의는 이 안락한 생각을 어느 정도 완전한 여러 체계들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부르조아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그러한 체계에 따를 것, 그리하여 사회적 신(新)예루살렘으로 곧장 행진할 것을 요구하지만, 사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기존 사회의 테두리 내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부르조아지에 대한 그들의 모든 증오에 찬 생각을 떨쳐버려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보다 실천적이지만 보다 덜 체계적인 이 사회주의의 또 다른 형태는 정치적 개혁이 아니라 물질적 존재조건, 경제 관계의 변화만이 노동계급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노동계급의 눈앞에서 일체의 혁명운동을 평가절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 존재조건의 변화라고 할 때, 이러한 사회주의 형태는 그것을 오직 혁명에 의해서만 있을 수 있는 부르조아 생산관계의 폐지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산관계의 지속적 유지에 기초한 행정개혁으로만, 따라서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고, 기껏해야 부르조아 정부의 비용을 줄이고 행정업무를 단순화하는 정도의 개혁으로만 이해할 뿐이다.

부르조아 사회주의는 단지 하나의 비유가 될 때, 오직 그때에만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있다.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자유무역,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보호관세,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감옥 개량, 이것이 부르조아 사회주의의 마지막 말이자 유일하게 진지한 말이다.

그것은 다시 다음의 한 문구로 요약된다. 부르조아는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부르조아이다.

 

3.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 공산주의

 

여기서 우리는 현대의 모든 대혁명마다 항상 프롤레타리아트의 요구를 소리높여 외쳐왔던 바뵈프 등의 저작과 같은 문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처음으로 직접 시도한 것은 봉건사회가 불과하고 있던 전반적 격동기였다. 하지만 당시 프롤레타리아트는 미발전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행방을 위한 경제적 조건--당시 아직 생성되지 않았으며, 임박한 부르조아 시대에 의해서만 생성될 수 있는 조건-도 없었기 때문에 그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 프롤레타리아트의 초기 운동들을 추종했던 혁명적 문헌들도 반동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들은 극히 조잡한 형태로 보편적 금욕주의와 사회평준화를 가르쳤다.

본래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계인 생시몽, 푸리에, 오웬 등의 체계는 앞서 말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 간의 투쟁이 발전되지 않은 초기 시기에 생겨난다(I절 부르조아지와 프롤레타리아를 보라).

이들 체계의 설립자들도 사실 지배적인 사회형태속에서 와해요소의 활동뿐 아니라 계급적대까지 보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직 유아기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떠한 역사적 창의성도, 어떠한 독자적 정치운동도 갖지 못한 계급의 모습으로 보인다.

계급적대의 발전은 항상 산업의 발전과 보조를 함께 하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는 경제상황은 아직 그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을 위한 물질적 조건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조건을 창출할 새로운 사회과학, 새로운 사회법칙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 행동은 그들의 사적인 창의적 행동으로 대체되고,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해방의 조건은 환상적 조건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점진적이고 자연발생적인 계급조직은 그 발명가들에 의해 특수하게 고안된 사회조직으로 바뀐다. 그들이 보기에 미래 역사는 결국 그들의 사회적 계획의 실천이자 그 실천적 실행일 뿐이다.

계획을 구성하는 데서 그들은 의식적으로 가장 고통 당하는 계급인 노동계급의 이익에 주된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란 오직 가장 고통 당하는 계급이라는 관점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계급투쟁과 그들 자신의 환경의 미발전된 상태로 인해 그러한 종류의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모든 계급적대를 초월해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들은 사회 모든 구성원들, 심지어 가장 형편이 좋은 사람들의 조건조차 개선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습관적으로 계급구분 없이 사회전체에게, 아니 우선적으로는 지배계급에게 호소한다. 하기야 일단 그들의 체계를 이해하고 난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가장 가능한 사회상태의 가장 가능한 계획임을 알지 못하겠는가?(타이핑맨 主 : 이 문장은 마르크스와 앵겔스의 풍자적 독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정치적 행동, 특히 혁명적 행동을 거부한다. 그들은 평화적인 수단으로 그들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며,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잘한 실험들이나 사례의 힘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복음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으려고 애쓴다.

그렇듯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매우 미발전된 상태에서 오직 자신의 입장에 대한 환상적인 생각마을 가지고 있을 무렵에 그려진 미래 사회의 상상화는 산회의 전반적 재건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본능적 기지개에 상당한다.

그러나 이 사회주의, 공산주의 출판물들은 또한 중요한 요소를 담고 있다. 그것들은 기존 사회의 모든 원칙을 공격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노동계급의 계몽을 위한 극히 중요한 자료들로 가득차 있다. 도시와 농촌간의 구별 폐지, 가족의 폐지, 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한 산업경영의 폐지, 임금제도의 폐지, 사회적 조화의 주창, 국가기능의 단순한 생산감독 기능으로의 전화등 거기서 제기되는 실천적 조치들은, 당시에 겨우 나타나고 있었으므로 이들 출판물에서는 초기적이고 불명확한 형태로만 인식되었던 계급적대의 소명을 지적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제안들은 순수히 공상적인 성격을 띤다.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중요성은 역사발전과 역관계를 취한다. 현대 계급투쟁이 발전되고 특정한 형태를 취해갈수록, 투쟁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는 이 환상적인 입장, 투쟁에 대한 이 환상적인 공격은 모든 실천적 가치와 모든 이론적 정당성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비록 이들 체계의 창시자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혁명적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진보적 역사발전에 반대하여 스승들의 원래 견해를 굳게 고수한다. 따라서 그들은 계급투쟁을 약화시키고 계급적대를 해소시키기 위해 철저하게 노력하는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사회적 이상향을 실험적으로 실현하는 것을 꿈꾸며, 고립된 것팔랑스떼르겄,것공동부락겄,것작은 이카리아겄--신예루살렘의 축소판--를 건설할 것을 꿈꾼다. 그들은 공중누각을 실현하기 위하여 부르조아의 자비와 지갑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점차로 그들은 앞서 서술한 반동적인 보수적 사회주의자들과는 단지 보다 체계적인 현학을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자기들 사회과학의 기적적인 효과에 대한 미신적인 광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만 다를 뿐 그들과 같은 범주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노동계급의 편에 선 모든 정치적 행동을 격렬히 반대한다. 그들이 보기에 그러한 행동은 새로운 복음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영국의 오웬주의자, 프랑스의 푸리에주의자들은 각각 차티스트와 개혁파를 반대한다.

 


IV. 기존의 여러 반대파에 관한 공산주의자에 입장

 

II절에서 이미 영국의 차티스트나 미국의 농업개혁가들과 같은 기존의 노동계급 당들에 관한 공산주의자의 관계는 명확히 밝혀졌다.

공산주의자는 당면 목표의 달성을 위해, 노동계급의 당면한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싸우는 동시에, 현재의 운동 속에서 이 운동의 미래를 보여주고 이에 관심을 기울인다. 프랑스에서 공산주의자는 보수적 부르조아지와 급진적 부르조아지에 대항하여 사회민주주의자와 동맹을 맺었지만, 대혁명으로부터 전통적으로 물려받은 문구나 환상적인 생각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권리는 남겨두고 있다.

스위스에서 공산주의자는 급진주의자를 지지하지만, 이 당의 일부는 프랑스적인 의미에서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자로, 일부는 급진적 부르조아라는 적대적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놓치지 않는다.

폴란드에서 공산주의자는 농업혁명을 민족해방의 첫째 선결조건으로 주장하며, 1846년 크라쿠프 봉기를 주도했던 당을 지지한다.

독일에서 공산주의자는 부르조아지가 절대군주, 봉건지주, 쁘띠뿌르조아지에 반대하여 혁명적으로 행동할 경우 이들과 함께 싸운다.

그러나, 부르조아지가 자신의 지배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도입하게 되는 사회, 정치적 조건을 독일 노동자들이 오히려 부르조아지에 대항하는 무기로써 곧바로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독일 반동계급의 몰락 이후 부르조아지에 대항하는 무기로써 곧바로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독일 반동계급의 몰락 이후 부르조아지에 반대하는 투쟁 자체가 즉시 시작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는 부르조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간의 적대관계에 가장 명확한 인식을 노동계급에 주입시키려 끊임없이 노력한다.

공산주의자는 독일에 주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왜냐하면 독일은 부르조아혁명의 전야에 있으며, 17세기 영국이나 18세기 프랑스에 비해 유럽문명의 보다 선진적인 조건과 보다 발전된 프롤레타리아트를 가지고 부르조아혁명은 곧이어 뒤따를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서곡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공산주의자는 모든 곳에서 기존의 사회, 정치적 질서를 반대하는 모든 혁명을 지지한다.

그 모든 혁명에서 공산주의자는 각국의 발전정도와 관계없이 소유문제를 핵심적인 문제로서 전면에 내세운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자는 어디서나 모든 나라 민주적 정당들의 통일과 합의를 위해 노력한다.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견해와 목적을 감추는 것을 경멸한다.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목적이 오직 기존의 모든 사회적 조건을 힘으로 타도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선포한다. 모든 지배계급을 공산주의혁명 앞에 떨게하라.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세상이다.(Let the ruling classes tremble at a Communistic revolution. The proletarians have nothing to lose but their chains. They have a world to win.)

 


전 세 계 노 동 자 여, 단 결 하 라 !

WORKING MEN OF ALL COUNTRIES, UNITE!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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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프랑스에서 최고의 책이라고 한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정치사건들도 참 많은데 외국의 정치까지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다.
내가 아는 사르코지는 해외토픽으로 종종 보았던 젊은 미모의 아내 또는 스캔들.. 이런것들 뿐이었다.

처음 책 제목을 듣고는 느낌이 좋지 않았으나 애써 인간적으로는 기대하지 않아도 본을 보인 내용들이 어느정도 이상은 나올꺼야라는 말도 안되는 기대를 하였다.
물론 내심 기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기대를 하고 싶은 제목도 아니었다.

한국보다는 7개월여 빨리 이루어지는 프랑스의 대선.. 7개월여 먼저 대통령직을 숳행하는 프랑스..
그런데 7개월 빠른 시간에 대한민국의 정권을 선행한 정권이었다는 점에 기가막혔다.
프랑스 국민들에 대해 괜히 정이 간다. 가재는 개편이고, 초록은 동색이라 했던가.. 그들의 고통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내용을 읽으면 읽을 수 록 왜 프랑스 대통령이 아니라 지금 한국의 대통령에 대한 내용을 읽는듯한 느낌이 들었을까..아~~ 애둘러 쓰려니 머리가 아프다.

읽을 수록 책에 짜증이 났다.
'왜 내가 이런걸 읽어야 하지?' , '굳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인데 뭐하러 번역하나' 번역자에 혼자서 짜증을 부려보기도 한다.
이런 부류의 책이야 당연히 관심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해서 나온것인데, 정작 읽는 사람들은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인것 같다.
책의 말미에도 나오지만 소수의 기득권은 진입장벽을 만들며, 대다수의 소시민들을 바쁘게 만들어 생각하지 못하게, 알지 못하게, 알아도 움직일 수 없는 무기력증을 증가시켜 놓는다. 그러니 알 수 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나 역시도 별 수 없는 사람중에 한 명일 수 밖에 없다.
저자는 부자들의 행태를 연구하는 학자이며 학계에서 꽤나 인정을 받고 있는 부부학자이다.
이들은 글을 쓰고 사례들을 연구 조사하면서 얼마나 무기력함을 느꼈을까.
마지막 챕터에서 전달하는 메시지를 위해 그들은 사례들을 싣고 내용들을 전해가면서 가슴을 쳤을 듯 하다.

책을 읽으면서 자본주의 자들에 의한 과두권력은 결코 사르코지주의가 아니라 그들만의 리그라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나게 한다.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의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는다. 사르코지는 어떻게 교묘하게 잡히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비굴하게 그들에게 굴복해야 한다. 그렇게 반면교사가 되어가야 한다. 물론 그러면 더 교묘하게 정권을 휘두를 존재가 나타나게 되지는 모르지만.  
책에서 우리는 멍청하고 비굴하며, 살아남기 위해 교활함만 발휘하는 한 정치인을 보는것이다. 


과연 민주주의가 정답인가?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그나마 제일 나은것이기에 따를 뿐이다. 다시말하면 모순투성이이지만 조금은 덜 하다는것일뿐.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고, 무엇을 따라야 하는지 생각해야만 하는 시점에 있다.

이 책에 관심을 가지지만 더러운 내용이라 읽기 싫다면 '시작하는 글'의 4장짜리 서문만 읽어도 다 읽은 것이라 생각이 든다.(그래도 조금 적다 싶으면 그전에 나오는 목수정 작가의 추천글에 모든 내용들이 요약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무엇을 할 것인가'만 읽으면 될 것이다. 저자는 무슨 의도로 이 내용을들 서술했는지 모든 내용이 집약되어 있다.
이런 문제에 뚜렷한 답이 있을 수 있겠는가.. 뚜렷하진 않아도 해볼만한 결론은 있다.
다만 소수의 기득권은 그런 해결책에 대한 방어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하고 있긴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해볼만할 수 있다.

표지에는 "반면교사 사르코지를 통해 MB를 본다" -파리에서 작가 목수정
"소통없는 정권이 민주주의에 드리우는 불안한 그림자" - 르몽드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서 다행일지 모른다.
한국에서 한국 작가를 통해 이런 책이 쓰여진다면 지금의 한국에서 책이 출간되었을때 어느정도의 여파가 일어날까..
당신의 상상에 맞긴다. (다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매우 암담하다.)
암담함을 이기려면 답은 결국은 뭉치는 것이다. 쉽지 않지만 여러곳에서 반복해서 듣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여 뭉쳐지지 않을까... 제발 그렇게 되기를 기대한다.




한국 독자들에게 드리는 추천의 글 - 목수정
"계급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현실이다. 그러나 이 전쟁을 주도하는 것은 내가 속한 부자 계급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쌍무에서 이기고 있다."  - 워런 버핏
계급투쟁은 언제나 크고 작은 폭으로 역사 속에서 진행 중이었다. 지금 벌어지는 계급 투쟁은 매우 노골적이며 전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12
사회 저소득계층의 저조한 투표율, 그리고 부자계층이 맹렬히 연대하는 높은 참여수준의 계급투표  15

시작하는 글
이 불확실한 투쟁에서는 상대의 수단과 방법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급선무이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그들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이 책은 그것을 이해하는 데 문을 약간 열어 줄 것이다.
그들은 그저 가장 힘 센 사람들일 뿐이다.  22
엘리트들의 음모에 맞서 이기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는 것이 첫 번째 투쟁목표이다. 그리고 좌절한 서민들을 상대로 단호한 심리전을 전개하는 사람들에게 비판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것도 투쟁이다.  24


19세기 정치가 프랑수아 기조가 외쳤던 그냥 '부자가 되자'는 메시지에 더 가까웠다.
부자들은 자기들 가운데서 더 유능한 자의 승리,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자신의 우수성을 결정적으로 입증한 사람의 승리를 축하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32

2007년 테파법(TEPA)이라는 이름의 '노동고용 및 구매력에 관한 법'이 이미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더 우대하고 있다.  34
"납세자에게 자기 수입의 절반 이상을 국가에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틀 일하고 그중 하루치를 국가에 바치라는 게 말이 되는가?" 대통령이 짐짓 순진한 체하면서 던지는 질문이다. 

사람들을 속이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대통령의 그럴 듯한 주장은 세 가지 논리로 반박할 수 있다.
첫째, 잡세 대상이 되는 수입 가운데 노동으로 번 수입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수입에서 많은 부분은 이익배당이나 재산 가치상승, 기타 유가증권, 공동투자 펀드 같은 동산과 토지, 건물 등의 부동산, 자본수입니다.
둘째, 조세상한제의 이름으로 혜택받는 것은 소득총액이 아니다.
셋째, 세금 계산 때 납세자의 사회비용 분담금을 조세 상한선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35-36

흥미롭게도 2007년 9월 30일, 2722 가구만이 조세상한선 실시전 세율로 납부한 세금을 환불해 달라는 신청을 함.
환불 요구 권리 있는 9만 3천 가구의 2.9%에 불과한 숫자이다.
한 세무전문가의 설명은 "조세 상한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조세 담다 관리 앞에 본인이 직접 나가서 모든 것을 솔직히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무 관리들은 무언가 숩ㅁ긴 것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게 되고, 그러면 당연히 신고내용을 철저히 검토하게 되기 때문이다."
"조세 상한 혜택을 신청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사회의 열등생들이다. 납세 관련 조항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정말 약삭빠른 사람은 그런 싱청을 하지 않는다."  38-39

참으로 수치스러운 사례 하나를 소개하면, 2009년 12월 이후 근로사고 희생자들에게 지급하는 보상금이 소득으로 간주되고, 그래서 과세 대상이 됐다. 거센 분노를 불러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이 파렴치한 제안은 채택됐다. 이 항목으로 과세될 세금 액수가 2억 3천만 유로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문제는 이러한 개혁이 국민의 이름으로 제안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니콜라 사르코지는 위임일인 2007년 5월 6일부터 "나는 국민들로부터 이런 변화를 추진하라는 권한을 위임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42

스스로 자신들을 필요불가결한 존재라고 믿고 있는 부자들은 곧잘 프랑스를 떠나겠다고 위협한다.  43
지배층은 항상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이익을 챙기는 쪽으로 계급 전쟁을 이끌어 간다.  44

2003년에는 감세할 수 있는 틈새의 수가 418개로 추산됐다. 그런데 2008년에는 이 숫자가 48개로 늘어났다.  46

권력이 집단을 형성해 서로 긴밀한 과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의 손에 모두 들어가 있는 것을 과두권력이라고 부른다.  58


니콜라 사르코지, 만약에 그가 2012년에 재선되지 못하면 권력 네트워크는 그의 진영이나 다른 진여에서 언제든지 그의 대타를 찾을 것이다.
우익이나 좌익 진영 모두 금융자본주의에 제일 유리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최고의 책임 있는 지위를 맡을 인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과제이다. 니콜로 사르코지도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 과두권력의 핵심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지도자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있다. 1980년대에 은행 국유화를 단행한 것이 사회주의자들이었지만, 얼마 후 은행을 다시 민영화한 것도 사회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67-68

이념전쟁에서 텔레비전은 가장 중요한 전략적 주제이다. 이 이미지 상자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조종하는 가공할 도구이기 때문이다.  92
"이제 위선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프랑스 텔레비전의 제1주주가 국가인데 왜 내가 그 사장을 임명해서는 안 되는지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니콜라 사르코지는 은연중에 '짐이 국가다'라고 말한 루이 14세처럼 행동했다.  97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이익을 받은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계에서 성장한 상류계급의 자녀들은 성년이 되어서도 같은 특혜를 기대하도록 성격이 형성된다.
권위에 대한 선망도 독서나 음악에 대한 선망처럼 만족과 쾌감을 주고, 더 내면적인 자기 자신의 성취감을 느끼게 하며 제2의 천성이 된다.  114

좌파 정치인 장-피에르 브라르는 "사르코지는 우리의 건망증을 이용한다. 그는 놀라운 성과를 약속하는 탁월한 계획들을 발표한다. 그러나 대단한 결과는 고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의 발표를 조금 기억하거나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결과가 실제로 어떻게 나타났는지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191

명문 귀족가족과 유서 깊은 부르주아지 가족은 예나 지금이나 코스모폴리탄주의 생활방식으로 살아 왔다.  204

긴축정책으로 가장 혹독하게 고생하는 것은 서민층과 중산층이다. 그러한 부채가 최고 부자들의 무책임한 투기로 빚어진 것일 때도 고통을 받는 것은 서민들이다.  205

자체가 목적이 된 돈은 사람들의 가치를 돈으로 측정한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자들은 부와 사회적 성공을 중시한다. 이것이 바로 사르코지주의이다.  210


결론-무엇을 할 것인가?
체계적 불평등. 분명히 지배계급은 힘을 규합해서 잘 조직화 된 세력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수가 적다.  212
우리의 목적은 권력을 잡고 있는 과두체제의 기능을 거부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를 몰아내는 것은 단순히 한 정치인을 교체하는 것에 그칠 수가 있다.  213

- 부자들의 이익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되찾자
대상을 한정한 지원조치가 사회정책을 대신한다.
예방 대신 치료하겠다는 것은 일종의 공공 자선행위로 국가의 잘못을 땜질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정으로 정책을 대체하는 것이다. 권리와 법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력관계의 산물이다.  215

시민들은 자신들의 권리, 즉 노동권 주거권, 교육권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218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시도해 보는 가운데 사회생활 내에서 자신의 위치에 관해서 생각해 보게 되고, 개인적인 생활로부터 좀 거리를 두고 자신이 포함되기도 하지만 배제되기도 하는 복잡한 관계 속에 들어가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시청과 기업 도서관은 경영진들의 네트워크에 관한 유익할 정보가 포함된 참고자료를 독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게 돼 있다.  219

끝으로 인터넷 사이트는 무궁무진한 정보의 원천이다.  220
경계심과 호기심을 갖는 태도, 그리고 이런 문서들을 검토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투쟁에 속한다.  221

-정치 무관심을 부추기는 현실
-무시당하는 서민들의 표심
(이 외에도 여러가지 안을 내 놓고 있다. 이 부분은 직접 읽어보는것이 좋을 것이다.)

해제 - 프랑스와 한국의 닮은꼴 대통령(장행훈, 언론인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파리의 한 잡지는 <부자들의 대통령>이 과장된 표현을 절제하면서도 사르코지의 정책과 사람 됨됨이를 생채해부 한 책으로서 지금까지 나온 사르코지 책 중에서 완결판이라고 높이 평가.
저자들은 학자의 양심에서 책을 통해 다시는 '부자 대통령'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242
이 책은 부자들의 대통령이 얼마나 민주주의에 역행하고 있는지, 소수 부자집단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단결하고 있는지를 고발하는 민주주의 교과서 역할을 하고 있다.  247


부자들의 대통령 십계명
1. 재벌오너들과 친구로 지내라
2. 세금으로 부자들을 보호하라
3. 누가 뭐래도 측근을 챙겨라
4. 공과 사를 구분하지 말라
5. 편법을 두려워하지 말라
6. 검찰을 권력의 하수인으로 만들어라
7. 언론을 장악하라
8. 토목공사로 승부하라
9. 부자동네에 투자하라
10. 이념은 상관말라 정권만 지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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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심리학 책이나 계발서로 오인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부제를 보면 더 이해가 잘 되는 것 같다.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문학자 네 사람과 철학자 네 사람의 직관과 이성, 혹은 문학과 철학으로 서로를 비추어가면서 이해를 시킨다. 
그러면서 저자의 철학적 견지와 그들의 견지의 조합과 조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가 시대를 살면서 피할 수 없는 유혹, 그로인해 생기는 욕망 책의 표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도시, 돈, 유행, 망상, 불안, 허영 도박, 매춘.. 이러한 욕망에 대한 보고서이다. 우리는 왜 그러한 욕망을 가지게 되었는지 왜 그렇게 유지하면서도 빠져 나오기 힘든것인지, 과연 우리가 가진 욕망에 자신의 욕망인지 아니면 타인의 욕망인지... 드에 대한 고민과 통찰을 가져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고 있다. 
라캉의 말처럼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
우리는 냉정하게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

얼마전 여러명의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다시금 마음 아픈 표현을 들었다.
"삶이 바빠 사회현상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것이 맞는건지 아닌지에대해 생각해볼 겨를이 없다. 그것은 삶이 바빠서가 아니라 세상의 달콤한 유혹과 바빠야 한다는 세뇌에 의한 것은 아닐까..

저자는 책에서 그러한 부면에 대해 문학과 철학을 결합하여 설명해 나가고 있다. 지금 우리가 당연시 하는 것들이 정말 당연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짐으로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의 다양성이 필요함을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생활들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과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자세로써 무엇이 있는지에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이 시대의 젊은 철학자인 저자는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인문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것으로 우리는 생각의 빌미를 가지고 그것을 확장해 나가는 시간이 된다면 정말 우리는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지 않을까...






머리말 - 자본주의적 삶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친숙하다는 거스 그것은 무엇인가에 길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친숙한 삶을 낯설게 성찰하는 일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의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집어등(集魚燈)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물고기(魚)를 모으는(集) 등불(燈)이란 뜻입니다.  5
자본주의의 집어등은 어선의 집어등보다 더 큰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를 끊임없는 노동의 현장으로 다시 내몰기 때문입니다.  6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 그는 우리 욕망의 대부분이 자신의 욕망이라기보다 타자의 욕망익라고 냉정하게 진단했던 것입니다.  7

프롤로그
우리 스스로 일상의 모습을 성찰하지 못하고 있다.  14
자본주의는 각자의 노동을 통해서 살아가고 유지되는 체계입니다. 
자본주의는 우리를 노동으로 계속 내몰기 위해 지속적으로 돈을 쓰도록 유혹하는 장치를 함께 고안했습니다. 끊임없이 화폐를 소비하게 하려면 유혹의 장치는 그만큼 강력할 수밖에 없겠지요.  19
자본주의의 진정한 목적은 또 다른 소비를 위해 다시 노동하게 하는 데 있지요.  21
자본주의적 삶은 너무나 친숙하고 평범해서 우리 삶이 얼마나 자본주의에 길들어 있고, 그로부터 상처 받는지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22

I. 무의식의 트라우마를 찾아서 - 이상 vs 짐멜
1. 돈, 내 것이 아닌 욕망의 분열
화페경제가 바꾼 우리 정신세계 

마르트스 이후 가장 철저하게 돈의 논리를 성찰햇던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1918).  35
그의 작품은 대부분 돈 유행 감각 장신구 등 대도시의 사소한 것들에 대한 에세이 풀의 글입니다.  37
짐멜이 "화폐경제는 개인과 소유 사이의 관계를 일종의 매개된 관계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이 둘 사이에 거리가 생기도록 만든다."라고 지적.  29
화폐경제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 이루어졌던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와해시키고, 오직 돈으로만 개인들이 서로 연결되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짐멜은 개인주의의 진정한 기원을 엿봅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인격적 관계가 단절된 이러한 물질적 조건에서만 개인주의의발로가 가능했다고 판단했지요.  43
화폐경제가 낳은 개인주의가 얼마만큼 우리 삶을 지배하는지 다음 사례.
나는 담배를 사러 편의점에 들릅니다. 편의점 점원은 아르바이트로 임시 취업한 나이든 아저씨였지요. 그런데 이 점원이 점잖은 말투로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면 해롭다고 충고합니다. 이때 나는 매우 불쾌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이 든 점원의 충고는 나를 하나의 인격으로, 혹은 자기보다 미성숙한 인격으로 대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지요. 만약 그가 삼촌이라면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이므로 충고를 받아도 그리 불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나이 든 점원과 나는 상품 판매자와 구매자라는 관계, 즉 비인격적 관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경우 우월한 것은 점원이 아니라 구매자인 나입니다. 나는 돈이라는 화폐를 가졌고 반면 그는 상품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달리 말해 나는 이곳에서 담배 사기를 그만두고 다른 편의점으로 갈 수 있는 '독립성'과 '자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 불리한 입장은 내가 아니라 나이 든 점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개인주의로 무장한 젊은 손님의 내면을, 마치 잔소리 많은 어머니처럼 간섭해 상처를 주었지요. 만일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면 결국 이 상점에 젊은 손님들은 발길을 끊겠지요. 그리고 그 나이 든 점원 역시 해고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불쌍한 점원은 왜 해고되었는지 끝내 모를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것을 알았다면, 다시 말해 돈이 가진 힘과 그것을 가능케 한 개인주의의 위력을 이해했다면, 그는 젊은 손님에게 어른스런 충고를 하지 않았겠지요. 화폐경제에서 중요한 사실은 누가 돈을 가지고, 누가 상품을 가지는자라는 문제일 뿐입니다.  45
내가 종교적 안식을 주리라!
과거의 초월 종교는 신이라는 초월자가 인간에게 닥친 무든 난제를 해결할 만능열쇠라고 선전했습니다. 하지만 초월 종교는 현실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관념적 해법만을 신도들에게 제안했을 뿐입니다. 대부분 초월 종교는 마음의평정을 되찾으라고 하지요.  47
현실적으로 돈을 사용해버리는 순간, 우리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해버립니다.  50
돈이라는 신의 지배에 빠진 현대인들을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짐멜은 과연 어떤 방법을 제안했을까요? 아쉽게도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자본주의를 일종의 세속종교로 규정했던 마르크스를 통해 궁금증을 해소할 실마리 하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서의 그대의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대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자신을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것이요 하나의 불행일 뿐이다.' 51-52
마르크스가 꿈꾼 인간의 삶은 "사랑을 사랑으로서만, 신뢰를 신뢰로서만 교환할 수 있는" 것이었다.  52
타자의 타자의 타자의 ..... 욕망
화폐 그 자체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적응된 우리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만 원짜리 식사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54
구두쇠는 축적한 화폐를 통해 실질적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오히려 관념적 행복에 빠지기를 더 좋아합니다. 그것은 구두쇠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가진 자만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경험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입니다. 유년 시절의 경제적 트라우마로부터 구두쇠는 돈이야말로 절대적 힘이 있음을 체득합니다. 돈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떠나는 순간, 그에게는 유년 시절에 각인된 경제적 트라우마, 즉 경제적 공포가 다시 찾아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행한 구두쇠와는 완전히 다른 합리적인 사람들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 또한 구두쇠와 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 학자 오사와 마사치는 '사랆들의 일상적 관념 속에서 화폐는 사회적 산물의 일정 부분에 대한 청구권을 표시하는 기호에 불과하고, 완전히 편의상의 물건일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 그럼에도 상품의 물신성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55
마르크스는 '화폐퇴장자는 얼빠진 자본가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자본가는 합리적인 화폐퇴장자이다.'  56
구두쇠는 신념이나 행동에서 일관되게 화폐를 물신숭배합니다 반면 평범한 우리는 신념으로는 화폐에 대한 물신숭배를 부정하지만, 행동으로는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화폐에 대한 물신숭배를 수행하지요. 이 점에서 보면 평범한 우리가 오히려 구두쇠보다 더 무지한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본인의 생각과 다르게 자신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59
모든 타자가 내가 가진 화폐를 욕망한다고 맹목적으로 믿기 때문에 나는 화폐를 욕망합니다. 오사와 마사치는 이것이 바로 화폐에 대한 물신숭배, 혹은 화폐의 물신성의 기원이라고 주장합니다.  60

2. 도시, 즐거운 지옥의 현기증
공간과 일상의 관계
공간은 단순히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 배경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공간에는 인간을 길들여서 그에 맞는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공간의 지배력은 거대한 자연적 공간과 공간을 분할하여 만든 건축물과 같은 인공적 공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공간이 지닌 지배력을 성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상의 '권태'가 지닌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77
짐멜은 "인간은 차이를 본질로 하는 존재이다. 즉 그의 의식은 그때그때의 인상이 선행하는 인상과 구분되는 차이에 의해 촉발된다." 만약 새로운 인상이 이전의 인상보다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인상에 대해 별로 의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행하는 인상과 뒤따르는 인상의 차이가 클때 발생합니다. 이 경우 우리는 새로운 인상을 강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겠지요. 물론 이 새로운 인상은 우리 삶에 '부담'으로 인식됩니다.  80
해외여행, 시골과 도시..
우리가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에 대해 일일이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시골이나 소도시 사람은 정서적인 반면 대도시 사람은 지적일 수박에 없다는 짐멜의 다음과 같은 견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분이나 정서적 관계에 더 의존하는 소도시적 삶에 비해 대도시의 정신적 삶이 어떻게 해서 지적 성격을 더 강하게 띠게 되는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소도시의 정서적 관계들이 정신의 더 무의식적인 층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단절되지 앟은 지속적인 습관화 과정을 통해서 가장 잘 발전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우리의 지성(intellect)은 우리 정신에서도 가장 투명하고 의식적인 상층에 자리를 잡고 있다. 지성은 우리의 내적인 힘들 중 가장 적응력이 탁원한 것이다. 자신 앞에 펼쳐진 다양한 현상들의 현저한 차이점들과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지성은 어떤 충격이나 내적인 동요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도시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의 리듬에 적응하기 위해서 훨씬 더 보수적인 사람들만이 외적 충격이나 내적인 동요를 겪게 된다. 물론 수펀 가지의 개별적 경우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전형적인 대도시인은 자신의 삶을 뿌리째 위협하는 외부 환경의 흐름이나 그 모순들을 방어할 수 있는 기관(=지성)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대도시인은 급변하는 외부 환경에 대해 심장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머리로 반응하게 된다.'  81-82
시골에서의 단조로운 삶의 환경과는 현격히 구별되는 이런 자극적이고 복잡한 도시의 사건들에 일일이 반응하면, 우리는 대도시에서 하루도 견딜 수 없습니다. 자신과 무관한 모든 일은 그저 냉담히 남의 일로 간주해야 합니다.  85
예외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날지라도 신속히 그 원인을 지적으로 파악하여 그 사건으로부터 받게 될 정서적 충격을 원천적으로 봉쇄해야만 합니다. 대도시에 적응한 도시인들이 짐멜의 표현처럼 "급변하는 외부 환경에 대해 심장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머리로 반응하게 된"셈입니다. 도시인들이 자신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전략이지요.  86
자유로움의 빛과 그림자
짐멜 '... 오늘날에도 대도시인은 소도시에 가면 적어도 비슷한 종류의 답답함(restriction)에도 대도시인은 소도시에 가면 적어도 비슷한 종류의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소속되어 살고 있는 집단의 크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그래서 타인들과의 관계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 잡단은 더욱더 쉽게 개인의 업적들, 생활양식 및 사고들을 감시하게 되며, 어떤 양적 질적 변종도 전체의 틀을 깨뜨리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87
도시인이 시골이란 공간 속에서 느끼는 '답답함'의 감정 이면에는 도시라는 공간이 만들어준 '자유'의 감정이 전제되어 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88
짐멜 '... 대도시의 우글거리는 군중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가장 잘 느끼게 마련이다. 이것은 자유의 이면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대도시만큼 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반드시 그의 정서적 안정으로 나타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가장 달 드러내주는 곳도 없기 때문이다.'  89
비록 거리에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더라도, 그것은 영화 속의 풍경처럼 나의 배후에 소리 없니 펼쳐져 있을 뿐입니다.
신경과민을 피하기 위한 이런 거리두기라는 도시인 특유의 삶의 태도가 바로 '자유'라는 감정의 중요한 기초가 됩니다.
서로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한, 다른 이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바로 도시의 암묵적 윤리라고 봅니다.
자유로움의 감정은 사람들을 원치 않는 고독에 빠지게 하기도 합니다.
가끔 도시인들은 가족을 통해서 자신드르이 고독을 치유하려고 합니다.  90
도시인들에게 가족이란, 도시의 삶 속에 관념으로 존재하는 시골과도 같은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골과 마찬가지로 가족도 자시의 속내를 모두 드러내는 인격적인 관계가 가능한 공간입니다. 그렇다면 도시생활과 가정 생활은 미묘한 긴장관계와 보완관계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짐멜, 질적 개인주의를 말하다
소극적 자유를 특징으로 하는 개인주의가 칸트를 대표로 하는 '양적 개인주의'의 입장이라면, 적그적 자유를 표방하는 개인주의는 니체를 대표로 하는 '질적 개인주의'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양적 개인주의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비록 수적으로는 구분되지만 동일한 인간성을 보편적으로 공유한 존재가 됩니다.
칸트의 정언명령(Kategorische Imperativ), 무조건적인 도덕명령이 가능했습니다.  94
니체에게 모든 개인은 타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단독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니체가 말한 '본성'이나 '본능'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진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마다 가진 고유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니체가 볼 때 이런 개인의 고유한 본성과 욕망르 부정한다는 것은, 개인의 삶 자체를 범죄적으로 매도하는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짐멜은 칸트나 니체의 사례를 언급하며 대도시가 인간에게 두 종류의 자유, 즉 두 종류의 개인주의를 가능하게 했다고 지적합니다.  96
짐멜의 논의를 역사적 순서로 정리하면, 산업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이전 그러나까 대도시가 형성되기 이전에 인간은 '공동체주의'에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산업 자본주의와 대도시가 점차 발달하자 사람들은 비로소 '양적 개인주의'에 입각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상호 불간섭으로 규정되는 소극적 의미의 자유가 도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소극적 의미의 자유라는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고, 이에 따라 서서히 자신만이 가진 단독성(singularity)을 깨닫게 됩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표현하려는 욕망이 이전시대보다 더욱 강해집니다. 짐멜은 이것이 바로 '질적 개인주의'의 기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가 명확하게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만의 특이성 혹은 질적 고유성을 표현하려는 욕망은 사실 도시적 삶이 가져다주는 고독을 극복하려는 데서 작동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97



II. 화려한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 - 보들레르 vs 벤야민
3. 유행, 돌고 도는 뫼비우스의 강박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보들레르는 19세기 파리를 상징하는 대표 시인입니다.
보들레르를 통해서 우리는 자본주의가 인간의 내면에 남긴 원형적 트라우마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114
보들레르에게 파리가 매춘부로 느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매춘부는 돈을 가지고 오는 손님이라면 그가 누구든 관계없이 자신의 치마를 걷어 올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보들레르에게 파리는 고혹적인 여인처럼 사랑스러운 곳입니다. 둘째, 파리라는 곳을 향유하려면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합쳐지면서 결국 보들레르에게 파리는 매춘부와 같은 존재로 묘사됩니다.  116
산업자본은 필요이상으로 상품들을 사들일 만큼 소비자들을 끊임없이 유혹해야만 합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새로운 상품'을 계속해서 시장에 내놓는 것입니다. '새로운 상품'이 아케이드에 들어오면, 기존 상품들은 '낡은 상품'이 되어버리고 결국 아케이드에서 추방되고 말지요. 바로 여기서 '유행(fashion)'이 가능해졌습니다.  119
벤야민, 미완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벤야민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찰을 인정한 철학자입니다.  124
저급한 수준의 마르므스주의는 문화와 같은 상부구조가 경제라는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합니다. 문화를 별도로 연구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셈입니다. 경제 운동이나 경제 관계를 알면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벤야민은 문화와 같은 상부구조가 나름대로 독자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비록 경제가 문화를 결정할 수도 있지만, 경제가 표현되는 문법과 문화가 표현되는 문법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고 본 것이지요.  125
19세가 자본주의의 수도 파리를 연구함으로써, 벤야민은 진정한 자본주의의 기워노가 역사를 복원하려 했습니다.  126
벤야민에 따르면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역사는 전혀 진보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억압하는 자들만이 진보를 주장해왔습니다. 이것은 당시 독일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벤야민의 경험과 성찰로부터 유래했습니다. 파시즘이 강하게 등장했을 때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했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파시즘의 경향에 대해 강ㄺ하게 저항했지만 그들의 저항은 도리어 무기력해지고 말았습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무기력함은 그들이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진보라는 이념을 신봉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에는 결국 해결된다고 보는 진보에 대한 맹신은 현재 우리가 당면한 억압적 상태, 즉 '비상 상태'를 도리어 은폐시켜버립니다.  129
백화점 혹은 욕망과 허영의 각축장
벤야민은 아케이드를 통해서 백화점이란 제도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그리고 그 제도가 어떤 방식으로 패션에 대한 욕망을 우리에게 각인시켰는지 보여줍니다.  130
팔레 우아얄(Palais-Royal)은 19세기 파리에 있던 아케이드들 가운데 한곳입니다. 초창기 아케이드에는 창녀들과 노숙자들이 더 많았지만, 부르주아 사회가 발달하자 경제적 부를 소비하는 실제 걔층으로서 부르주아 가정의 여성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이 때문에 창녀들과 노숙자들은 아케이드로부터 점점 추방당하지요. 
처음에는 민중적 요소도 지녔던 아케이드가 이제 부르주아 여성들의 과시욕의 전시장이 되면서, 서서히 백화점의 형태로 탈바꿈했습니다.  131
당시 파리 상점들은 눈부실 만큼 화려한 장식들로 매우 유명했습니다. 이것은 상품의 교환가치를 높이려는 미적 전략입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남자 종업원들이 대거 채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당시 파리에서의 소비 행위가 주로 부르주아 여성들이 주도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정찰제 판매와 정가 판매도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것은 아케이드가 스스로 고급 이미지로 포장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32
자신이 남보다 두드러진다는 의식은 명품 매장에 들어서는 여성을 보면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은 결국 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백화점은 고가의 상품을 사는 사람과 그것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공존하는 공간입니다. 그런 이유로 자본주의적 욕망을 휸련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주목받는다는 도취감, 그리고 주목받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겟다는의지가 암묵적으로 교차하는 공간이 바로 백화점입니다.  134
벤야민이 백화점을 종교적 도취에 바쳐딘 사원이라고 이야기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필요해서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유함과 허영을 과시하기 위해서 고가의 상품들을 구입합니다.  135
예링(Rudolf von Jhering 1818~1892)은 <법의 목적>에서 '오늘날의 의미에서 패션은 개인적인 동기가 아니라 사회적 동기를 갖고 있으며, 이를 올바로 인식하지 않고서는 패션의 본질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패션에는 어떤 사람이 상류사회에 속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외적인 기준이 포함되어 잇다. 이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 사람은 설령 ... 새롭게 유행하고 있는 패션이 아무리 싫더라도 그런 유행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136-137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기보다 오히려 탐욕스럽고 잔인할 뿐만 아니라 질투심으로 가득 찬 허영의 존재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많은 철학자가 인간이 평화스럽고 인자하며 합리적이기를 꿈꾸었습니다.  137
예링에 따르면 인간은 합리적이기는 커녕 오히려 "변화욕, 미적 감각, 겉치레를 좋아하는 것, 모방본능"을 특징으로 하는 존재입니다.  138
패션의 소멸은 중간계급이 삶의 주체로서 "자신의 존엄에 눈을 뜨고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을" 때나 가능한 일이겟지요. 그러나 예링은 상황이 그렇게 되도록 산업자본이 인간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습니다.  139
패션의 에로티시즘
벤야민은 에두라르트 푹스(Eduard Fuchs 1870~?) 인용 '예링의 패션론에 대한 푹스의 견해. "반복해서 말하는 부분이지만 패션이 빈번하게 변화하는 것은 계급적인 구별을 두고자 하는 관심에 의한 것이라고는 해도 그것은 몇 가지 이유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두 번째 이유로서는 이익률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매출을 향상시켜야 하는 사유재산제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을 들 수 있는데 이것도 ...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이 두 번째 이유를 예링은 완전히 무시했다. 세 번째 이유도 그는 간과했다. 즉 패션이 에로틱한 자극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신 유행하는옷을 입은 남자 혹은 여자의 에로틱한 자극이 그때까지와는 다른 형태로 떠오를 때 그런 목적은 보다 효과적을 달성될 수 있다.'
푹스에 딸면 패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햇다. 상류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해 걔급적인 구별을 두려는 욕망이 있기에 가능했다. 다음으로 패션은 계속 매출을 올려야만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패션은 인간에게 에로티시즘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140-141
옷은 분명 성교와 관련된 직접적인 성적욕구의 충족에는 도리어 방해가 되는 물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옷은 성적 욕망을 위한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지요. 성적 욕구의 단순한 충족을 뒤로 미루고 더욱 강한 욕망을 발산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옷이 이런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옷은 아예 성적 욕구, 즉 성적 결핍감을 전혀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패션과 관련된 산업자본이 우리에게 개입하는 결정적 대목입니다.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옷을 만든다면, 그것은 곧바로 매출로 이어지겠지요.  145
무기적 존재인 옷에서 사람들이 성적 어필을 느끼는 일종의 물신숭배 현상이야말로 벤야민이 보기에 패션이 유지되는 근본 조건이었습니다.  146
보들레르의 충족되지 않는 갈망
우리는 매혹적인 상품 앞에서 강력한 구매 욕구를 느낍니다. 그러나 막상 그것을 구매해서 소유하게 되면 예전의 그 강렬했던 욕망은 곧 사라져버립니다. 구매욕은 구매가 실제로 이루어지면 동시에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나를 흥분하게 하는 구매욕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실제로 구매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매혹적인 상품을 관음증적으로 주시하기만 하면 됩니다.  151
벤야민의 연구물을 보관했던 조르주 바타유, 그의 생각은 "금지된 것은 인간에게 강력한 욕망을 부여한다"는 통찰을 전제로 해서 전개됩니다. 
경제 사정으로 지금 당장 구매할 수 없는 상품이 더욱 강렬한 구매욕을 느끼게 하듯이 가질 수 없는 존재는 인간에게 도리어 강렬한 소유 열망을 심어주게 마련입니다. 이런 금지와 금기의 대상이 성적 대상에 적용될 때 우리가 품는 열망을 에로티시즘이라고 부릅니다.  154-155
이런 우리의 욕망 구조를 가장 잘 포착한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바로 산업자본주의의 시선이었습니다.  155

4. 도박과 매춘, 명멸하는 망상
보편적 도박장으로서의 사회
대부분 자신이 가진 가치, 예를 들어 학점 토익점수 대화술 미모 지식등을 팔아서 취업을 해야만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보편적 매춘의 시대라고 지적하기도 했지요.  167
신의 주사위, 우연성의 경이로움
이제 종교의 자유를 얻은 대신 자본주의 사회에 편입된 모든 인간은 돈이라는 새로운 신을 믿고 그것에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돈은 기독교의 신과는 다르게 매우 세속적입니다.  173
기독교의 신이 '초월적(transcendent)'이라고 정의된다면 자본주의의 신은 '내재적(immanent)이며 동시에 초월적'입니다.
기독교의 신은 내세에서 그 존재 여부를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는 반면 돈은 현세에서 가장 확실하게 그 전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돈은 더 강하게 우리를 지배합니다.  174
매춘에서 사랑을 꿈꾸다!
매춘부는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매춘부의 탄생이라는 문제 역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있습니다. 매춘부는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수중에 돈이 별로 없는 존재입니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매춘부나 노동자는 자신의 육체, 혹은 자신의 능력을 팔아야 합니다.  184
벤야민은 '파리의 많은 젊은 여성의 미덕에 위기가 닥치는 시기가, 연중 특정한 시기가 있다.... 새해 공현제(1월 6일), 성모와 관련된 축일이 다가오면 소녀들은 선물을 주거나 받고, 아름다운 꽃다발을 보내고 싶어 한다. 또 새로운 드레스나 유행하는 모자를 갖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금전적인 수단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 며칠간 매춘에 종사해서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특정한 시기나 특정한 축제일에 즈음하여 방탕한 행동이 증가하는 이유이다.'  184-185
주목할 점은 파리의 젊은 여성들이 몸을 팔아 번 그 돈이 어디로 흘러들어가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선물, 옷이나 모자 등을 만들어 파는 산업자본입니다.  186
과거 아케이드나 백화점이 여성들의 허영심을 증폭시키고 과소비를 부추겼듯이 당시의 산업자본은 기념일 드을 이용하여 파리의 젊은 소녀들이 몸을 팔도록 부축겼습니다.  187
매춘이란 결국 사랑이 자본주의에 지배될 때 파생되는 현상입니다. 우리 자시의 인격이 아니라 내가 가진 돈으로 사랑을 사는 행위이니까요. 매춘부는 그녀를 안고 잇는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가 가진 돈을 사라합니다. 
매춘부가 사랑을 통해서 매춘부로서 수명을 다한다는 사실. 벤야민은 왜 이 사실에 주목했을까요? 그것은 자본주의가 사랑을 아무리 자본의 논리로 포섭하려고 할지라도, 사랑은 자본의 한계를 돌파할 어떤 힘이 있음을 알아본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해피엔딩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이 자본을 영속적으로 압도하는 일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191
지금은 배우자의 조건 중 경제 능력이 가장 중요한 시대입니다. 나에게 돈을 많이 가져다주는 사람을 남편으로 사랑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표현은 그럴듯하지만 사실 이것이야말로 매춘의 논리에 가장 가깝습니다. 상대에게 자신을 허락하는 첫 번째 조건이 돈 문제라면 누구도 이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사랑이 찾아들면 더는 매춘 행위를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벤야민이 사랑과 매춘 사이의 비극, 그리고 이 사이에 개입되는 자본주의의 문제에 관심을 두었던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벤야민은 사랑이 자본주의와 결합되면 결국 매춘으로 변질된다는 점을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192-193



III. 매트릭스는 우리 내면에 있다 - 투르니에 vs 부르디외
5. 불안, 가난한 이웃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
로빈스 크루소와 타자의 발견
현대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차이'라는 개념을 철학적으로 가장 정교하게 사유했다는 데 있습니다. 들뢰즈 이전까지 서양철학에서 '차이'는 '동일성(identity)'이라는 개념과 짝으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동일성'의 지배를 받는 개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 동창을 우연히 길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전에 알던 모습과 '차이'가 나 보입니다. 외모도 이전과 다르게 몹시 호리호리해졌고, 생각도 무척 냉소적으로 변한 듯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그 친구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그 친구에게 변하지 않은 측면, 즉 동일성의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내가 알던 친구의 모습이 먼저 전제되어 있지 않는 한, 지금 변한 친구의 모습을 간파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동일성을 우위에 두는 사고의 한 가지 전형입니다. 만약 그 친구가 예전에 내가 알던 모습과 완전히 달라졌다면, 우리는 그 친구를 알아볼 수조차 없었겠지요.
그런데 들뢰즈는 이와 다르게 생각합니다. 동일성보다 차이가 먼저 라고 주장합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그 친구의 모습은 수많은 타자 그리고 수많은 사건과 마주치고 그로부터 영향을 주고받아 형성된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겟지요. 그런데 만약 그 친구가 당시에 자신이 마주쳤던 것과는 다른 타자 및 사건들을 조우했다면, 아마도 그는 무척이나 다른 모습이지 ㅇ낳았을까요. 그렇다면 오늘 우연히 길에서 만난 친구가 왜 이전과 모습이 달라 보일까요? 그것은 서로 보지 못한 사이에 그 친구가 수많은 차이를 겪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변형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동일성이란 다양한 타자 그리고 사건들과의 우발적 마주침으로 형성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동일성이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효과일 뿐입니다.  206
들뢰즈가 중시했던 차이라는 개념은 타자와의 마주침으로만 경험되는 것입니다.  207
무엇인가 모아둔다는 것은 곧 미래에 대한 염려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일종의 자본주의적 시간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수중에 있는 돈을 무도 사용해버린다면,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필요한 무엇인가를 구매할 수 없습니다. 어떤 상품으로든 교환 가능한 잠재적 돈을 모두 소비한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미래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자신의 손 안에 두기 위해 돈을 비축하려고 합니다. 비축해둔 돈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무한한 미래의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13
구조화된 구조이자 구조화하는 구조
부르디외는 <자본주의의 아비투스>에서 '미래에 대해 행위자가 가지는 행위의 성향은 특정한 물질적 존재 조건 하에서 만들어지며, 특정한 객관적 기회의 구조 -하나의 객관적인 미래- 라는 형태로 파악된다. 구조화된 구조(structures structurees)라고 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성향은 구조화하는 구조(structures structurantes)처럼 작동한다.'
'습관(Habit)'의 어원인 라틴어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부르디외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로서, 그는 아비투스를 '구조화된 구조이자 동시에 구조화하는 구조'라고 설명합니다. 행위자의 내면에 만들어진 습관적 구조로서의 아비투스가 '구조화된 구조'인 이유는 그의 말대로 그것이 '특정한 물질적 존재 조건'에서 형성되고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217
아비투스가 '구조화된 구조'일 뿐만 아니라 '구조화하는 구조'이기도 한 이유는 이것이 세계에 대한 행위자의 실천을 낳는 능동적 힘으로서도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두 종류의 아비투스가 있다. 
하나는 '미래가 있는 사람'의 아비투스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가 없는 사람'의 아비투스입니다. '미래가 잇는 사람'의 아비투스란 자본주의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이 가지는 아비투스입니다. 반대로 '미래가 없는 사람'의 아비투스는 전자본주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아비투스를 의미합니다.  219
부르디외에 따르면 전자본주의적 인간과 자본주의적 인간 사이의 결정적 차이점은 '미래'와 관련된 시간의식에 있습니다.  220
미래란 자본주의적 인간의 내면에서는 '가능성의 장'으로서 이해됩니다. 이에 반해 미래는 전자본주의적 인간의 경우에는 '잠재적으로 올 것'으로서 표상됩니다.
'가능성의 장'으로서 미래란 다양한 경우의 수들 가운데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잠재적으로 올 것'으로서의 미래는 이전에도 왔던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올 것입니다.  221
전자본조의적 인간 vs 자본주의적 인간
자본주의적 아비투스와 전자본주의적 아비투스가 서로 유사해 보이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바슐라르(Gaxton Bachelard 1884~1962)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자본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 사이에는 건널 수없는 인식론적 단절(rupture epistemologique)이 있는 샘입니다.  226
전자본주의적 아비투스의 특성을 파악하다 보면, 그와는 구별되는 우리 내면의 자본주의적 아비투스 또한 명료하게 부각시킬 수 있다.  227
농민들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증여의 논리로 사유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유는 결국 인간과 자연을 한 가족이나 혈족 혹은 공동체의 하나로 간주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증여란 기본적으로 가족이나 공동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230
마치 신과 같은 존재로 자연이 표상되기 때문에, 농민들의 노동은 강박적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농부들은 만약 자신들이 끊임없이 공물을 바치지 않는다면, 신이 어김없이 분노를 드러내리라고 믿습니다.
전자본주의 촌락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쉬지 않고 일합니다.
'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이란 구별이나 '수익성이 있는 노동'과 '수익성이 없는 노동'이란 구별도 부차적 차원으로 물러나게 된다.'  232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혹은 수익성 있는 노동과 그렇지 않은 노도으이 구별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중요한 것입니다. 
전자본주의 사회의 사람들에게 노동은 그 자체로서 수단이며 목적이기도 합니다. 단지 수익을 올리려는 목적으로 그드르이 노동이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 어떤 해에 수확량이 증가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부지런한 노동에 대한 자연의 선물, 혹은 자연이 내린 보답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자신의 재주와 능력으로 수익을 올린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았지요.  233
이런 이유로 과거 전통 공동체에서 가장 비난받았던 행위는 다름 아닌 무위도식이었습니다.  234
지금은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한 가지 대안으로, 동양의 전통 사유가 각광을 받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산업자본이 일으킨 환경 파괴의 대안으로 생태철학이 강조되는 것과 거의 동일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는 동양철학이나 생태철학이 기본적으로 전자본주의적 삶과 사유 형식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237
혁명의 최소조건
<세계의 비참>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들을 진단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그는 이 사회를 어떻게 극복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물론 부르디외는 성급하게 자신의 전마을 내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부분 사람드르이 환상, 즉 진보와 번영을 약속한다는 장밋빛 전망을 산산이 부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습니다.  238
부르디외는 "미래를 가능성으로서 가지지 않는 사람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미래를 계획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  239
그가 보기에 알제리 사람들이 혁명을 꿈꿀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가능성으로 가지지 않았기"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미래를 잠재성으로만 간주한 전자본주의적 아비투스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셈이지요.  241
전자본주의 시대의 알제리 농민들은 노동을 통해 자연을 겁탈하지만,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연의 복수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노동을 자연에 대한 능동적 조작이 아니라 주어진 의무를 수행하는 수동적 태도로 간주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노동은 자연이라는 신에게 바치는 공물이 의미가 됩니다. 결과적으로 농민들은 자연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노동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응시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자연이 자신들의 생명을 앗아갈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겠지요. 그런데 이러한 농민들의 태도와 매우 유사하게, 자본주의 사회에 속하는 실업자들 또한 실업과 실업의 문제가 항상 내재하는 자본주의 체계를 직시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혁명의 주체나 능동적 주체가 되기보다는 몽상으로 도피하거나 운명론적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농민들이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자연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만큼 경제적 여력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그럴 경우 그들은 자신의 노동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직시하겠지요. 마찬가지로 도시 실업자들의 경우에도 자본주의 체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만큼 최소한의 생계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이때 비로소 그들은 자신의 실업 문제와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를 직시할 여유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243
"미래의 현실주의적인 전망은 실제로 현재에 직면할 수단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접근 가능한 것이다." 라는 부르디외의 지적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를 영속적으로 유지하려는 기득권자들이 '현재에 직면할 수단'을 프롤레타리아로부터 박탈하려고 지속적으로 시도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244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병을 정확히 진단하고 직시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웃들을 보십시오. 아니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부모님을 한번 살펴보세요. 그들은 병원에 가기를 두려워합니다. 병이 있음을 짐작하지만 치료할 여윳돈이 없어서 걱정만 할 뿐입니다. 의사의 냉정한 진단은 그들에게 절망을 안겨주겠지요. 가족이 짊어질 부담이 그들에게는 더 큰 부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웃들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며 자신의 병을 키우지요. 마침내 말기 암과 같은 치명적 병으로 판명되고서야, 그들은 부르디외가 말했듯이 '자기포기'나 아니면 종교에서 치유를 구하는 '마술적 조급함'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우리 이웃들 가운데는 마치 말기 암을 선고받은 가난한 자들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들은 생계의 어려움이나 실직의 고통이라는 문제를 자본주의 체계와 관련해 정면으로 직시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취하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245
<자본주의의 아비투스>에서 '우리는 계급의식 속에서, 경제적 필연성의 압력이나 사회체계의 모든 객관적 결정에 반하여,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갖춘 주체의 성찰적 행위를 볼 수 있어야만 한다. 현재 상황에 대한 반란은 다으모가 같은 경우에만 합리적이고 명시적인 목적으로 지향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런 목적에 대한 합리적 의식의 구성을 위한 경제적 조건이 주어질 경우, 다시 말해 현재의 질서가 그 자체의 소멸 가능성을 포함하며 동시에 이 사실로 인해 그 질서의 소멸을 기도할 수 있는 행위자를 생산하는 경우에만 반란은 혁명으로 전환도리 수 있을 것이다.'  246
아비투스의 대결
어느 곳에 갔을 때 자신의 아비투스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아비투스가 그곳에서 별다른 문제없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아비투스를 의식했다면, 이것은 새로운 환경이 자신의 아비투스와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환원할 수 없는 외부, 혹은 타자를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254

6. 허영, 내면 깊숙한 소외의 논리
판단력 비판 vs 판단에 대한 사회적 비판
칸트는 매우 규칙적으로 자기 삶의 규율을 준수했던 인물로 이미 당시에도 유명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대목에서 칸트의 유명한 정언명령, 즉 무조건적 도덕명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는 너 자신의 인격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266
내가 타인을 목적으로 대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타인도 나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자유를 가진 존재로 대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이것이 자본주의하에서 가능할까요?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최종 목적이고 인간은 언제든 수단으로 전락하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인간을 최고의 목적으로 간주한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붕괴되겠지요.  267
연구자들은 칸트의 철학적 위대함을 그가 진(眞), 선(善), 미(美) 세 영역을 구별했다는 데서 찾았습니다. 칸트로부터 우리는 동일한 대상이라도 최소한 세 가지 영역으로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점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산 백운대에 올라가서 서울이라는 메트로폴리탄을 내려다보면, 두터운 스모그 층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해가 질 무렵 서울은 휘황한 보라색 아우라를 띤 도시가 됩니다. 그런데 만약 '이론적 관심'을 두고 바라본다면, 스모그가 보라색을 띠는 이유를 대기에 섞인 오염물질 그리고 석양의 태양광선의 파장이 가진 특징 등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요. 이것이 바로 진리(眞)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보라색의 스모그를 진리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실천적 관심' 혹은 '윤리적 관심'을 통해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경우 우리는 사리사욕을 위해서 매연을 배출하는 인간의 비윤리성을 탓하지요. 이것이 바로 윤리(善)의 영역입니다. 한편 '이론적 관심'이나 '실천적 관심'을 포함한 일체의 관심을 배제하고, 다시 말해 시종일관 '무관심'으로 보라색 스모그를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보라색으로 뒤덮인 서울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겠지요. 이것이 아름다움(美)의 영역입니다.  269
분별력이 있는 사람, 혹은 배운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칸트에 따르면 동일한 대상이나 사건을 필요에 따라 이론적 관심으로, 실천적 관심으로, 혹은 무관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270
취향, 분별하기와 구별짓기
칸트의 미학, 혹은 상류계급의 미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무관심하게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가겠지요.  276
가라타니 고진은 영화나 소설을 미적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은 문화적 학습 덕분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무관심'하게 보는 능력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학습되어야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78
<이솝우화>에는 포도를 먹고 싶었던 여우 이야기가 나옵니다. 포도가 손에 닿지 않자, 여우는 그 자리르 떠나며 말합니다. "흥! 저 포도는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 어떤 것을 가지고 싶지만 가질 수 없을 때 인간은 그것의 가치를 폄하함으로써 자신을 위로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신포도 이야기는 이런 인간의 특징을 잘 보여주지요.  282
허영의 뿌리
<구별짓기>에서 부르디외는 경제적 자본 이외에 최소한 다음과 같은 세 종류의 자본을 더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첫째가 문화자본(capital culturel)입니다. 이것은 문화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미적 감각 그리고 사람들이 소장한 작품들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학력자본(capital scolaire)입니다. 이것은 명문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장을 따거나 국가고시와 같은 시험제도를 통과해 얻는 자격 혹은 지위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사회관계자본(capital de relation social)입니다. 이것은 문화자본과 학력자본을 얻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인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르디외가 주목하는 세 가지 자본들은 모두 경제적 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세 가지 자본들은 지속적인 시간과 여유가 있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세 가지 자본들은 하류계층에서 상류계층으로 직접 진입하려는 벼락부자들을 막는 방어막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84-285
경제적 자본은 상류사회와 비교해볼 때 결코 뒤지지 않았지만, 신흥 부자들은 상류사회가 가지는 아비투스, 특히 미적 취향을 함께 공유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자식 교육에 열을 올리게 되고, 자식들을 명문 대학에 보낼 수만 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재력을 투입합니다. 
그렇다면 하류계급의 사람들이나 벼락부자들이 왜 상류사회에 편입되려고 할까요? 그것은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허영(vanity)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인간은 본성이 선하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들조차 인간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등장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286
독재자도 훌륭한 통치자라는 칭찬을 듣고 싶어하고, 바람을 피우는 사람도 지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도둑도 정직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행복을 느끼겠지요. 이것이 바로 사람의 허영입니다. 허영(虛榮)이란 한자는 '비어 있다'라는 의미의 '허(虛)'라는 글자와 '꽃이 화려하게 핀다'는 의미의 '영(榮)'이란 글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내실은 비어 있지만 겉은 매우 화려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찬양하고 칭찬해주는 특성을 자신들의 본성이라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영혼의 특성이라고 믿어버립니다.  287
인간은 자신이나 남들이 부정하고 싫어하는 특성들을 단지 우연적인 것 혹은 외적인 것으로 애써 폄하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288
허영심이란 모든 인간이 가진 것입니다. 따라서 '성적=칭찬'의 도식만을 강요한 사회 구조에 여학생 개인보다 더 큰 책임이 있음을 우리는 통감해야 할 것입니다.  289
산업자본주의는 상류계급의 구별짓기의 욕망 혹은 허영의 논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전자본주의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 시대가 신분사회엿다는 점입니다. 신분에 따라 옷도 다르게 입고 집도 다르게 지었습니다. 물론 미적 감상을 포함한 여가 생활도 확연히 구분되었겠지요. 이미 사회 곳곳에서 신분에 따른 확연한 구별이 이루어졌기에 사람들이 소비를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드러낼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본 주의 사회가 도래하면서 상황은 이전과 달라집니다. 이제는 주어진 선천적 신분이 아니라 경제적 자본을 확보해야 존경받을 수 있는 사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경제적 자본이 있다는것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행위가 별도로 필요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틈을 파고들면서 산업자본주의는 화려한 소비사회를 만듭니다. 경제적 자본을 확보한 부르주아 계급은 소비라는 과시 행위로 자신들이 남보다 훨씬 많은 돈이 있음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지요.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지금 우리 사회의 상류계급이 미적으로 선호하는 모든 아이콘은 사실 19세기 산업자본을 상품화한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292
타자의 힘, 혹은 인간의 진정한 빛
노동의 세계, 즉 자본주의 세계에서 미래란 가장 중요한 시간이자 동시에 가장 불명확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월급이 제대로 나오면 여러분은 무한한 교환 가능성으로서의 화폐를 얻겠지요. 동시에 회사가 부도나서 월급을 받을 수 없는 가능성도 병존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걱정에 시달리며 여러분의 의식은 항상 불안한 미래를 향해 있고, 현재는 미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괴로운 순간쯤으로 억누릅니다.  300
자본주의와 기독교는 미래의 좋은 삶, 장밋빛 삶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고된 노동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각자의 삶을 경건하게 검열할 것을 요구합니다. 자본주의나 기독교가 제공하는 달콤한 미끼를 덥석 무는 순간, 우리의 현재와 삶은 깊은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현재의 순간이란 있을 수 없게 되지요.
자신의 삶이 초월적 목적이 아니라 내재적 목적이 있다는 것, 삶은 놀이의 주체이지 결코 노동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 나아가 오직 현재만이 긍정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삶의 철학자 니체라면 놀이의 아비투스를 획득한 로빈슨을 초인, 즉 위버멘쉬라고 불렀을 테지요.
'보라, 나는 너희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위버멘쉬가 이 대지의 뜻이다. 너희들의 의지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라.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 되어야 한다고! 형제들이여, 맹세코 이 대지에 충실하라.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설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그런 자들은 스스로가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독을 타 사람들에게 화를 입히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생명을 경멸하는 자들이요, 소멸해가는 자들이며, 이미 독에 중독된 자들인바, 이 대지는 그런 자들에게 지쳐 있다.'
니체는 현재라는 시간 그리고 내재적 삶을 부정하는 모든 초월주의를 허무주의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말한 초인은 바로 이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데 성공한 인간입니다.  303-304
그것은 자기 삶 자체를 수단이자 나아가 목적 그 자체로 보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그는 모든 초월적 가치나 목적에 현혹되지 않는 삶, 그 자체로 긍정적인 삶을 되찾습니다.  304



IV. 건강한 노동을 선물하기 - 유하 vs 보드리야르
7. 쇼퍼홀릭과 워커홀릭, 금단의 무기력 너머 
바람부는 압구정동의 불빛
1980년대는 산업자봅눚의가 우리에게 발전과 번영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점을 서서히 깨닫게 된 시대입니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첨예한 갈등이 표면화되었고, 그것이 곧바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하는 지성계의 화두가 되었으니까요. 당시의 지성계가 극복해야 할 화두는 다음의 두 가지 문제 였습니다. 그 한 가지는 민주주의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던 당시 전두환 군부독재의 철권통치였다면, 다른 한 가지는 노동자와 도시 빈민 그리고 농민들의 척박한 삶을 초래한 자본주의의 모순이라는 문제였습니다. 물론 대학생들은 이 두가지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고, 그러한 고민은 시위의 형식으로 표출되었습니다.  311-312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청각의 시대는 지나고 화려한 영상을 자랑하는 시각의 시대가 열립니다. 이것은 매혹적인 소비문화에 물들게 하여 비판적 감각을 무디게 하려는 정부의 정책과도 맞물렸습니다. 
1980년대 대학생들은 낮에는 정치와 경제 문제로 격렬한 시위에 참여했고, 밤에는 화려한 시각 문화의 세계에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지성계는 사회참여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부르디외가 이야기 했듯이 취업 걱정이 전혀 없었던 당시의 대학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312
당시의 대학생들은 상당히 사변적이고 이념 지향적이기도 했습니다.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몽환적인 유흥문화, 네온사인, 백화점 그리고 칼라 텔레비전의 시각적 화려함과 현란함 등이 자신의 주머니를 열도록 고안된 못된 장치들이라는 사실을 그들도 모리로는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각적 말초신경은 냉철한 머리와는 반대로 그 화려한 욕망의 집어등을 은밀히 더듬고 있었지요.
바로 이때 소비문화에 대해 매우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본 한 명의 시인이 바로 유하입니다.  313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오징어]
오징어들은 화려한 불빝, 즉 어선의 집어등이 뿜어내는 '찬란한 빛'에 포획되어 죽어갑니다. 유하는 우리의 신세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314
유하는 소비문화의 폐단을 모조리 산업자본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았습니다. 산업자본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가장 잘 파악하고, 그것을 집요하게 이용했을 뿐입니다.  320
낡은 것은 폐기하고 새로운 것을 소비하라
자본주의 역사에 대해..
서양에서는 절대왕조와 함께 발전햇던 상업자본의 황금기가 있었지요. 17세기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이끌었던 대항해의 시대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18세기말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산업자본주의의 힘이 상업자본주의 시대에 막을 고하게 됩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이 이윤을 획득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상업자본은 공간의 차이, 다시 말해서 가격의 차이가 나는 서로 다른 두 공간에서 이윤을 획득합니다. 가령 동해에 위치한 강릉에서는 오징어 가격이 서울보다 쌉니다. 만약 강릉에서 오징어 가격이 1000원이라면, 서울에서는 오징어가 가격 2000원에 팔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인은 강릉에서 오징어를 1000원에 사서, 서울에서는 2000원에 팝니다. 결국 그에게는 1000원의 이윤이 남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상업자본이 항상 각양 각종의 신기한 특산물이 나는곳, 다시말해 가격 차이가 나는 곳을 찾아서 멀리 나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17세기와 18세기 초까지 영국과 네덜란드가 경쟁적으로 동인도 회사를 세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도를 포함한 아시아에는 유럽에 없는 진귀한 특산물들, 다시 말해서 엄청난 가격 차이를 보이는 상품들이 많았습니다. 
반면 산업자본은 상업자본과는 다르게 시간의 차이를 이용해서 이윤을 남깁니다. 예를 들어 MP3를 만드는 산업자본은 계속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여 기존 제품들이 유행에 뒤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소비자들에게 기존 제품을 버리고 계속 새로운 제품을 사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존에 구입한 제품과 새로운 제품 사이에는 시간 차이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공간의 차이처럼 시간의 차이가 원래부터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행위, 다시 말해 새로운 유행을 만드는 산업자본의 행위 자체가 시간 차이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327-328
유행은 소비자들이 아니라 산업자본에 의해 우선적으로 창출되는 것입니다.
산업자본이 창출하는 유행은 대중매체의 발달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대중매체는 대가로 제공되는 산업자본의 광고료를 통해서 유지됩니다.  328
구독률, 시청류르 그리고 조회 수가 높을수록 대중매체는 산업자본으로 부터 광고비를 더 많이 받아낼 수 있다.
보드리야르는 "객관적 기능의 영역 안에서 사물들은 교환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이런 명시적 의미의 영역 밖에서 어떤 사물이라도 무제약적인 방식으로 대체 가능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객관적 기능의 영역이란 구체적 사용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사람들의 이동을 편하게 하는 객관적 기능이 있으며, 아파트는 사람들의 주거를 편하게 해주는 객관적 기능이 있습니다. 객관적 기능의 영역에서 자동차는 아파트를 대신할 수 없겠지요. 
반면 객관적 기능의 영역을 넘어서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329
현재 산업자본은 광고를 통해서 우리가 가진 '낡은'것을 폐기하고 '새로운'것을 구매하도록 유혹합니다.
광고에서 소개되는 새로운 세탁기에는 보드리야르가 이야기한 에로틱함, 새로움, 행복함이란 '기호가치'가 강하게 부여된 것입니다.  331
여러분 집 안이 사용하지 않는 상품들로 가득 차 있다면, 이것은 이미 산업자본주의가 열어놓은 소비사회의 유혹에 포획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타인으로부터 주목과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과 허영 같은 감정이 있기에 산업자본의 기호가치가 작동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소비사회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통찰이 중요한 이유도 그가 인간에게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려는 욕망 혹은 허영이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333
금욕은 어떻게 사치가 되었나
근대사회란 산업자본 주의에 입각해 새롭게 구성된 사회, 그러니까 18세기의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으로 시작되어 19세기에 거의 완전한 모습을 갖춘 사회를 말합니다.  334
좀바르트는 '어떤 시대라도 사치가 일단 존재하면, 사치를 더욱 증대시키는 그 밖의 동기들 역시 활기를 띠게 된다. 즉 명예욕, 화려함을 좋아하는 것, 뽐내기, 권력욕, 한마디로 말해서 남보다 뛰어나려고 하는 충동이 중요한 동기로서 등장한다.... 그렇지만 사치가 개인적이며 물질주의적인 사치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감각적인 향락이 확기를 띠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에로티시즘이 생활양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우리가 논의하는 시대에 적용해보자. 거대한 사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다. 즉 부(富)도 있고, 사랑의 생활도 자유로운 상태였고, 다른 집단을 압도하려고 하는 몇몇 집단의 시도도 있었으며, 또한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19세기 이전에는 전적으로 향락의 중심지였던 대도시에서의 생활도 있었다.'  340-341
좀바르트에게 사치란 특정 시대만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본성에 가까운 것으로 사유되었습니다.
좀바르트는 사치가 인간이 가진 허영이라는 욕망, 즉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으려는 욕망에서 기원한다고 보았습니다. 스스로를 화려하게 꾸밈으로써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구별하려는 욕망에서 사치가 발생했다고 본 것입니다.
좀바르트는 <사치과 자본주의>에서 '부(富)가 축적되고 성생활이 자연스럽게 또 자유스럽게 혹은 대담하게 표현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사치도 함께 유행한다.'  341
소비, 자본주의 생산성의 비밀
소비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과 개성을 자유롭게 분출하고, 그래서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다는 일종의 환각을 갖습니다. 그렇지만 보드리야르는 냉정하게 지적합니다. 우리가 가진 '욕구와 그 (욕구의) 충족은 오늘날에는 다른 생산력(노동력 등)과 마찬가지로 강요되고 합리화된 생산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349
산업자본주의에서 자유란 분명 소비의 자유입니다. 돈이 부족하거나 아예 돈이 없을 경우 우리가 부자유의 느낌, 심지어는 심각한 우울증을 느끼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자신을 타인과 구별해줄 수 있다고 믿는 상품들을 구매하지 못할 때 우리는 우울증을 겪습니다.
돈이 없으면 우울하고, 돈이 있으면 명랑해진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산업자본이 우리의 욕망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는 분명한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자유와 부자유의 느낌을 자신만의 고유한 느낌이라고 믿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자신이 산업자본에 길들어 그런 자유 혹은 부자유의 느낌을 가진다는 사실을 또한 망각하기 쉽습니다.  350
수족관에 갇힌 낙지의 삶
노동자가 동시에 소비자라는 너무도 자명한 사실,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물건을 자신의 임금 가치보다 훨씬 더 비싸게 소비한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멈추지 않고 작동하는 핵심 비밀이자 신비입니다.  362
자본가로부터 주어지는 임금은 더 큰 자본의 형태로 다시 회수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제공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본가가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주는 이유는 노동자들의 윤택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노동자가 다시금 소비자가 되어서 자본가의 상품을 구매해주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결코 잉여가치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잉여가치를 남기기 위해서라도 자본주의는 반드시 이러한 메커니즘을 거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63

8. 교환, 대가 없는 나눔의 마법
문명의 빛 반대편에 서려는 시인의 의지
만약 돈이 없다면, 우리가 소망하는 자유로운 욕망의 실현은 불가능해질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사회에 사는 셈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우리 삶은 분열될 수밖에 없습니다. 상품과의 관계에서는 주인으로서 자유를 만끽하지만, 그 이면의 돈과의 관계에서는 무기력한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가니까요.  367
사랑이란 아무런 대가 없이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감정을 말합니다. 이 때문에 사랑이란 감정은 자본주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소망스러운 감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자본주의는 늘 인간의 무한한 진보와 변영을 약속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곧바로 정면에서 거부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인간의 노쇠함과 그에 이어지는 필연적 죽음입니다.  375
'공산당 선언'에서 '생산의 거울'까지
베버 역시 생산중심주의에 입각해서 사유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바르트나 보드리야르는 산업자본의 잉여가치가 오직 유통과정에서만, 다시 말해 한때 노동자였던 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하는 경우에만 획득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베버와 달리 이들 후자의 견해는 소비중심주의라고 부릅니다. 보드리야르가 생산중심주의를 비판했던 이유도, 노동자가 동시에 소비자라는 자본조의 현실을 보지 못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377
보드리야르는 아직까지도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생산중심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오래된 사유의 관행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378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다면 그 누구도 마르크스의 사유를 피해갈 수 없지요. 그렇지만 보드리야르는 마르크스를 배신하려고 합니다. 그는 마르크스 역시 생산중심주의라는 거울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았습니다.  379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는 어떠한 억압이라도 감당해야 했지만, 유통과정에서 노동자는 곧 소비자로 바뀝니다. 소비자라느 ㄴ위치에 있을 때에만, 노동자는 산업자본에 대해 나름대로 자율성을 얻지요.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유통과정, 혹은 소비의 영역을 중시했던 것입니다.
소비 영역은 소비자가 노동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산업자본의 음모, 나아가 소비자의 허영을 부추겨 소비를 촉진하려는 산업자본의 전략이 관철되는 매우 중요한 공간입니다. 소비 영역에서 전개되는 이 같은 산업자본의 음모와 전략을 폭로하는 것, 바로 이것이 보드리야르의 평생 숙원 사업이었습니다. 그 일환으로 그는 사물이 가진 서로 다른 네 가지 차원의 논리를 해명합니다.  381
'기호와 차이의 논리라고 할 수 있는 소비의 논리를, 그 논리에 얽혀 있는 여러 가지 다른 논리로부터 구별해낼 필요가 있다. 네 가지 논리가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①사용가치(use value)라는 기능적 논리, ②교환가치(exchange value)라는 경제적 논리, ③상징적 교환(symbolic exchange)의 논리, ④가치(value)/기호(sign)의 논리. 첫 번째는 실제적인 작용의 논리이다. 두 번째는 등가(equivalence)의 논리이다. 세 번째는 애매성(ambivalence)의 논리이다. 네 번째는 차이의 논리이다. 또한 유용성의 논리, 거래의 논리, 증여의 논리, 신분의 논리. 물건은 이 가운데 어느 하나에 입각하여 정돈됨에 따라 각각 '도구' , '상품' , '상징' 또는 '기호'의 지위를 취하게 된다. 그런데 마지막 것만이 소비라는 측수한 영역을 규정짓는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가 하나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다이아몬드는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도구'일 수도 있고, '상품'일 수도 있고, '상징'일 수도 잇고, 아니면 '기호'일 수도 있습니다. 먼저 '도구'의 측면에서 바라본 다이아몬드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이 경우 다이아몬드는 가장 견도한 광물이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자르거나 부술 때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 도구로서의 다이아몬드는 '사용하기'라는 기능적 논리를 따르게 됩니다. 하지만 아름답기만 할 뿐 무엇인가르 자를 때 사용하기가 불편하다면 이것은 결국 사용가치가 별로 없는 다이아몬드에 불과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드리야르는 '사용가치의 기능적 논리'를 '실제적 작용의 논리' 혹은 '유용성의 논리'라고 설명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다이아몬드는 '상품'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다이아몬드는 1억 원으로 구매하거나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이 됩니다. 이때 상품으로서의 다이아몬드는 '교환가치'라는 경제적 논리를 따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 한 개는 자동차 5ㄷ개가 컴퓨터 100대와 바꿀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이아몬드 한개의 교환가치는 자동차의 5배, 혹은 컴퓨터의 100배라고 할 수 있겠지요. 화폐는 바로 이런 다이아몬드의 교환가치를 가장 편리하게 수량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이아몬드 한 개의 교환가치는 현재 1억 원으로 매겨진 것입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가 너무 많이 채굴되거나 혹은 소비자의 구매가 별로 없다면, 다이아몬드의 교환가치는 1억 원 아래로 다시 떨어지겠지요. 이 때문에 보드리야르는 '교환가치라는 경제적 논리'를 '등가의 논리'나 '거래의 논리'에 딸느 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세 번째로 다이아몬드는 '상징'의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는 사랑하는 딸의 결혼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상품으로서의 다이아몬드를 살 수 있는 1억 원으로 다른 것을 살 수도 있겠지요. 혹은 1억 원 상당의 다른 상품과 다이아몬드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물로서의 교환은 앞서 말한 등가 교환과는 다릅니다. 내가 다이아몬드 하나를 선물받았다고 하더라도, 나느 ㄴ상대방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선물로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징적 교환'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선물로서의 다이아몬드는 '양면성의 논리'나 '증여의 논리'를 따른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애매성으로 번역된 'ambivalence'라는 단어는 가치가 애매하다는 뜻입니다. 기존 등가교환에서 본다면, 다이아몬드 한 개와 장미꽃 한 송이 사이의 교환이란 매우 애매하겠지요.
마지막으로 다이아몬드는 '기호'의 측면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보드리야르가 <소비의 사회>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한 것도 바로 이 네 번째 측면입니다. 다이아몬드는 상류계층에 속하므로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을 나타내는 기호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다이아몬드는 보드리야르가 말했듯이 '신분의 논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기호'의 측면이 앞서 말한 '상품'의 측면과 그 의미가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교환가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다시 말해 구입한 상품이 고가일수록 그것은 구매자의 더 높은 사회적 위상과 신분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상류계급은 고가의 제품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구매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는 고가의 제품을 아무나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과시하려는 허영심으로부터 나온 결과입니다.  382-384
   도구 상품  상징 기호 
 가치 사용가치 교환가치 상징가치 기호가치 
 작동 논리 작용성  등가성  애매성  차이성 
 적용 영역 유용성의 차원  거래의 차원  증여의 차원  신분의 차원 

생산중심주의에서 살펴본다면,, 인간의 노동력을 중여주거나 아니면 확장 시켜준다는 측면에서 보면 첫 번째 '도구'로서의 사물이란 개념은 샌상중심주의에 잘 부합됩니다. 또 '상품'으로서의 사물도 당연히 생산에 도움이 됩니다. 높은 교환가치에 상품이 팔리면, 그만큼 산업자본은 생산력을 좀 더 확장할 수 있는 자본력을 갖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기호'로서의 사물도 생산중심주의에 잘 부합됩니다. 인간이 가진 허영심과 욕망을 증폭시켜서 당장 필요하지 않은 상품이라ㅗ 고가에 사들이게 한다면, 산업자본은 막대한 잉여 가치를 남길 수 있겠지요.
보드리야르는 생산의 거울을 깨고자 했던 철학자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도구', '상품', '기호'라는 세 가지 사물의 측면을 부정ㅎ적으로 생각했으리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측면들은 모두 생산 중심주의와 직접 관련 있기 때문ㅇ입니다. 이제 그에게는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한 가지 관점만 남은 셈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물이 가진 '상징'으로서의 측면입니다. 어떤 대가도 없이 어떤 교환도 기대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증여의 논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385
보드리야르는 '상징'으로서 사물이 가진 측면이 사물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산업자본주의의 마수로부터 구원해줄 유일한 희망이라고 보았습니다.  386
불가능한 교환을 꿈꾸며!
모스(Marcel Mauss 1872~1950)가 1925년 발표한 <증여론(Essai sur le don)>.
모스의 연구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가 부의 축적을 제일의 목적으로 간주하는 사회인데 반해, 증여의 사회에서는 부의 축적이 아니라 오히려 부의 지출이나 베풀기를 가장 중요한 덕목 혹은 가치로 믿는 사회였습니다. 모스는 증여의 사회에서 무엇인가를 증여하는 사람이 지출이나 베풀기를 통해 얻는 것, 즉 증여가 대가로 얻는 것은 위신이나 명예라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증여는 결국 이 사회에서 위신이나 명예와 대등하게 교환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타유가 강조한 것은 증여의 핵심이 교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증여 자체가 함축하는 과잉 및 그로부터 이어지는 손실이란 논리엿습니다.  396
보드리야르는 뇌물은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사용가치나 교환가치, 혹은 기호가치로 드러납니다. 그렇지만 선물에는 사용가치, 교환가치 그리고 기호가치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사랑이나 애정의 표시,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는 가치, 즉 '상징적(교환)가치'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398
<암호>에서 말년의 보드리야르는 자신이 바타유의 충실한 제자였음을 시인합니다. 바타유는 생산중심주의가 종국에는 파국을 낳을 것이라고 지적했지요. 하지만 그는 유리가 '불유쾌한 파멸'보다는 '유쾌한 파멸' 즉 선물의 놀리를 선택할 가능성을 강조했습니다. 
산업자본주의의 집어등에 걸려 있는 우리에게는 바타유와 보드리야르의 이야기가 언뜻 보아서는 이해되기 어려운 주장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단적으로 말해 하나의 고유한 선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산업자본은 생산력의 증가, 다시 말해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서 심지어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일종의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 역시 어떤 면에서는 산업자본이 설치해놓은 집어등에 사로잡혀 스스로 교환 가능한 존재라고 받아들이며 체념합니다.  403
자전거로 달리는 영원회귀의 길
교환에서 우리가 잊기 쉬운 것은 장미와 와인에 교환될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교환을 하면, 장미가 가진 고유성과 와인이 가진 고유성을 부정해야만 합니다. 만약 부정하지 않는다면 교환이 이루어질 수 없겠지요. 무엇이든 서로 교환되려면 그것이 가진 생생한 질들을 추상해야 합니다. 이 점을 가장 잘 부여준 것이 바로 '돈' 입니다. 장미는 1만 5000원의 가치가 있고, 와인도 1만 5000원의 가치가 있으므로 서로 바꿔도 된다는 논리를 가능케 한 것이 돈입니다.
그런데 만약 교환만을 염두에 둔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향유할 수가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오직 교환 가치의 측면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이지요.  404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니체의 영원회귀가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실천적 명령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에 따르면 니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네가 무엇을 의지하든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지하는 그런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하라."
니체는 미래의 목적을 위해 현재의 삶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기독교를 허무주의라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니체는 이 순간의 삶과 현재의 절대적인 것으로 긍정할 필요를 느낍니다. 이 대목에서 영원회귀라는 니체의 주장이 출현했습니다. 바로 지금 그리고 이곳의 삶, 그리고 이 속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선택은 영원히 반복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논리에 따라 만약 현재 사니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면, 이 행복하지 않은 삶이 어떤 주기를 가지고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 순간 현재의 삶 속에서 자신의 선택과 행위가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심사숙고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411
니체가 제안한 영원회귀의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세속적 형태의 염세주의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 또한 심각한 타격을 받습니다. 자본주의 논리를 신봉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현재의 고된 노동을 참고 견디면 언젠가 그 대가로 큰돈을 벌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오로지 돈을 목적으로 삼아 자신의 삶을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버리지요.  412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사실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것은 현재 우리 삶이 다른 어떤 시간의 삶으로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들뢰즈, 그러니까 니체 자신이 말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413
유하와 보드리야르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두 사람은 자본주의에 의해 포획된 우리 삶이 얼마나 우울하고 초라해졌는지 잘 보여줍니다.
부르디외는 자본주의적 아비투스와는 분명 다르지만 전자본주의적 아비투스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어떠한 힘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414
우리는 후손들이 자본주의로부터 상처받지 않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사회를 꿈꾸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후손들을 위한 앞 세대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겠지요. 물론 그런 사회가 가능해진다면, 미래에 도래할 인간들은 매 순간 펼쳐지는 자신들의 삶을 단순한 수단으로 생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그 자체로 향유되는 영원한 현재가 되겠지요.  415

에필로그
자본주의 사회는 피상적으로 보면 이전 사회보다 더 자유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보장하는 자유란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닙니다. 자본주의에서 자유는 돈을 가진 자의 자유, 소비의 자유에 불과할 뿐입니다. 소비의 자유란 결국 돈에 대한 복종의 이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비의 자유를 위새서 돈의 노예가 된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한 번 되돌아보세요. 수중에 돈이 없을 때 얼마나 갑갑하고 부자유스럽다고 느끼는지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향유하는 자유가 돈이 있을 때만 가능한 그런 성격의 것이라면, 그것은 돈의 자유이지 우리 삶의 자유일 수는 없습니다.  423
자본주의로부터 자신의 자유를 회복하려면 여기에서 다룬 인문학자 여덟 명의 사유 또한 곰곰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날개옷과 같은 역할을 해줄 것입니다. 그들의 사유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자본주의에 길들어왔으며, 또한 진정한 자유를 얼마나 오랫동안 잃고 살아왔는지 자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424
"선생님, 그렇다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선생님 말씀대로 취업은 자본주의에 포획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느 ㄴ취업을 해서는 안 되는 건가요? 취업을 하지 않고 우리는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나요?"
이것은 무척 심각하고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 좋은 성적, 좋은 영어 점수. 지금까지 그들의 삶은 모두 자본주의가 내세운 기준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에 입각한 이 같은 삶의 원칙을 직접 심어준 것은 바로 그들의 부모입니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다른 동물들보다 인간은 훨씬 더 사랑과 관심을 받으려고 합니다.
독립하기 전까지 인간은 주위의 절대적 보살핌에 의존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유아 시절에 필요한 사랑과 관심은 단순한 허영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생존과 결부된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아 시절부터 인간은 자신을 돌보는 사람, 이 가운데 특히 어머니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노력합니다. 좋은 성적을 받아올 때 어머니가 기뻐한다면, 아이들은 가능한 한 성적을 올리려고 애쓸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공부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지속적인 애정과 관심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우리의 욕망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인 셈입니다.  425
정신분석학은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욕망이란 단지 부모의 욕망이 내면화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이 점에서 보면 젊은 학생들이 자본주의 논리에 의구심과 회의를 품을 수 있다는 점은 무척 소중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회의는 그들이 이제 부모의 절대적 영향으로부터 구성된 욕망이 아닌 자신만의 욕망을 꿈꾼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취업을 하지 않고 우리는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나요?" 라는 그들의 질문 이면에는 생황의 절박함과 불안감이 숨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426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품은 상처의 심각함을 뼈저리게 자각하면, 우리 실천도 그만큼 치열하고 집요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이 책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이상적인 대안이나 구체적인 해법들을 제안하기보다, 우선 자본주의에 의해 상처받은 삶을 묘사하려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구보다 예민하게 상처를 감지한 문학가들 그리고 누구보다 치밀하게 상처를 해부한 사상가들의 시건을 빌린 것도 이 때문이지요.
상처를 상처로서 제대로 느낄 수 있을 때, 상처를 치유하려는 우리의 의지와 노력 또한 새롭게 싹틀 수 있을 겁니다. 간정히 소망해 봅니다. 더이상 상처가 깊어지기 전에,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들이 치료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떠안기전에, 치유의 노력이 곧 시작될 수 있기를 말입니다.  43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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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나온 결론으로 제시된 '공동체'에 대해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러한 공동체는 결국 공동체의 규범과 규율이 필요하게 된다.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 양산의 계기가 될 수 있기에 해결책이라 보기 어렵다. 시도는 좋으나 이것이 '동물농장'이 되지 않는다고 보장 할 수 없다.
미시적으로 볼 때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큰 문제 양산이 될 것이다.
어쩌면 유지하기 위해 '멋진신세계'로 변형되어야 할지도 모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손쉬운 대답은 종교에 의지하는것으로 가게 될지 모른다. 책에서 말하는것 처럼 이것 역시 대안이 되기에는 힘들다.
인간은 절대적 불변이 있다. 바로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 하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답이 존재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은 확실하다.
어렵다. 어렵고도 답이 없다. 그렇기에 변화의 과정들을 겪으면서 우리는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끝없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 무기력하게 하긴 하지만, 지금 보다 더 나은 시대를 만들기 위해 변화를 하고, 그것이 병이 될 때 아니 병이되려할 때 또 다른 대안의 변화가 이루어져 나가는 것만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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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허만과 나는『여론의 조작 Manufacturing Consent』이라는 언론 관계 책자를 공저했는데, 이 책에서 "프로파간다 모델Propaganda Model"이라는 자명한 이치를 설명했습니다. 이 모델을 적용해보면, 언론 기관은 그들의 이익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업으로서 오랫동안 존속하지 못할 거니까. 그래서 프로파간다 모델이 언론의 형태를 분석하는 유익한 도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뭐 그리 심오한 도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론의 조작』에서 우리는 두 개의 모델(① 언론이 마땅히 기능해야 하는 방식, ② 언론이 실제로 기능하는 방식)을 대비시켰습니다. ①의 모델은 전통적인 것입니다. 이것은『뉴욕 타임스』가 최근에 자사 발행의 『북 리뷰』에서 "정부를 견제하는 제퍼슨식 언론의 역할"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국민들의 알 권리를 보호하고, 정치 과정에서 일반 대중이 의미 있는 통제를 가하도록 돕기 위하여, 까다롭고, 고집 세고, 어디에서나 출현하는 언론, 그리하여 당국의 권력자들을 괴롭히는 그런 언론이 바로 ①의 모델입니다. 바로 이것이 미국 내의 표준적인 언론 모델이고 언론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은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②의 모델은 언론이 실제 행동하는 방식으로서, 국내의 경제를 장악하고 나아가 정부까지 상당 부분 통제하고 있는 특혜 그룹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아젠다를 보호하고 확충하는 세계관을 대변하는 언론입니다. ②의 모델에 따르면, 언론은 기사를 선정하는 방식, 관심사를 분배하는 방식, 문제의 틀을 정하는 방식, 정보를 여과하는 방식, 분석기사를 집중하는 방식, 그 밖의 다양한 테크닉을 통하여 그들의 사회적 목적에 봉사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언론이 어느 때든 국가 정책에 일방적으로 동의만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부 권력의 장악은 우리 사회 내의 다양한 엘리트 그룹들 내에서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제계의 어떤 부분이 어떤 특정 기간에 정부를 장악했다는 사실은,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정치 스펙트럼의 한 부분이 그런 힘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엘리트들끼리도 전략적 의견 불일치가 때때로 생겨날 수 있습니다. "프로파간다 모델"은 이렇게 예측합니다. 언론에는 정치 스펙트럼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가 반영된다. 따라서 언론에 의해서 포섭되지 않는 정치 스펙트럼은 없다.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고요? 물론 이것은 거대하면서도 복잡한 주제입니다. 우선 네 개의 기본적 관찰 사항을 얘기하고 그 다음에 좀더 자세히 들어가 보기로 합시다. 첫 번째 사항은 프로파간다 모델이 엘리트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사실 서방의 엘리트 민주 사상가들 사이에는 그런 전통이 강하게 이어져 왔습니다. 이 사상가들은 언론과 지식인 계급이 프로파간다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른바 "대중의 정신the public mind"을 통제함으로써 일반 대중을 주변화해야 한다고 보았던 겁니다. 이 사상은 300년 동안 영미 민주사상의 핵심 주제였고 현재까지도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사상의 근원을 소급해 보면 서구의 최초 민중민주 혁명이었던 1640년대의 영국 내전(1642~1648년 동안 영국의 정권 장악을 놓고 왕당파와 의회파가 벌인 무력 충돌)까지 올라갑니다.

 

당시의 영국 내전에는 두 파의 엘리트가 참여했습니다. 한 파는 의회의 편을 든 지주 계층과 신흥 상인 계층이었고, 다른 한 파는 전통적인 엘리트 그룹인 왕당파였습니다. 이 두 파는 엘리트 갈등의 맥락에서 발달한 대중들의 움직임을 우려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모든 권위-주종 관계, 국가 당국자의 권위 등-에 도전하는 민중운동이 생겨났던 겁니다. 그 당시 인쇄기가 막 발명되었기 때문에 과격한 책들이 많이 출판되었습니다. 영국 내전의 양쪽 엘리트들은 일반 대중이 갑자기 통제 불능의 상태로 빠져드는 것을 굉장히 우려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반 대중은 너무 호기심이 많고 너무 거만하여 민간 통치에 승복하려는 겸손한 마음이 조금도 없다." 이처럼 왕당파와 의회파는 일반 민중을 힘으로 찍어누르는 능력을 상실해갔고 뭔가 대책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취한 첫 번째 조치는 힘으로 찍어누르는 능력을 다시 도입하는 것이었고 그리하여 당분간 철권통치하는 절대국가가 들어섰습니다. 그런 다음에 왕정이 다시 도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왕정은 모든 것을 회복시키지는 못했고 정권을 완전 장악하지도 못했습니다. 민중 운동이 치열하게 투쟁했던 목표들이 상당수 영국의 정치적 민주주의에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이후 민중운동은 기존의 권력을 어느 정도 해체하는 데 성공해 왔습니다. 그러자 서방의 엘리트들 사이에는 이런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무력으로 국민을 통제할 힘이 점점 사라져간다면, 대안으로 국민의 생각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나가야 하겠다. 이러한 인식은 미국으로 건너와서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20세기에 들어와 미국 사상에는 이런 주요한 흐름이 형성되었습니다. 그것은 정치학자, 언론인, 홍보 전문가 등 권력가 밀착된 사람들의 주요 사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 사상은 국가가 힘으로 국민을 강제할 능력이 없으니까, 엘리트가 앞장서서 공공의 마음을 통제하는 효과적인 프로파간다를 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미국 언론계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의 생각입니다. 그는 일반 대중을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무리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리프먼은 이 대중들 사이에 "합의의 조성manufacture of consent"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말했는데 더 쉽게 말하자면 여론조작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무력으로 안 되니까 계산된 "합의의 조성"으로 통제를 계속해나가자는 것이었지요.

 

1920년대 당시 홍보산업의 주요 교범은 아예 제목이『프로파간다』였습니다(그 당시 사람들은 좀더 정직했었지요). 이 교범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대중의 습관과 의견을 의식적이고도 조직적으로 조종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민주 체제의 핵심 특징이다. 그 책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니지만 대강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이어 교범은 이렇게 말합니다. "소수 지식인들intelligent minorities"의 임무는 대중의 습관과 의견을 이런 식으로 조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으뜸 원칙인 겁니다. 다시 말해 힘으로 사람들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면 세뇌indoctrination가 가장 좋은 방식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프로파간다 모델의 첫 번째 사항입니다. 이것은 엘리트들의 지적 전통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아온 사상입니다.

 

두 번째 사항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프로파간다 모델은 일종의 사전 개연성prior plausibility을 갖고 있습니다. 언론의 구조를 살펴보면 대기업 언론사들은 미국 사회처럼 기업이 지배하는 사회의 프로파간다 기능에 복무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사항은 일반 대중이 프로파간다 모델의 기본 특징에 동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것과는 다르게, 여론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일반 대중들은 언론이 권력에 너무 순종적이고 복종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론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이미지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것이지만 아무튼 일반 대중은 언론을 그렇게 보고 있는 겁니다.

 

(중략)

 

자, 다시 세 가지 초기 관찰 사항으로 돌아갑시다. 네 번째 관찰 사항은 프로파간다 모델의 경험적 타당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사태의 핵심이지요. 프로파간다 모델이 기술하는 사항은 정확한가? 다시 말해 언론은 "전통적 제퍼슨 식 역할(민중의 등불)"을 수행하고 있는가, 아니면 "프로파간다 모델"을 착실히 이행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흡족하게 대답하기 위해서는 조사를 많이 해야 하고 관련 자료를 광범위하게 섭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주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 방법의 윤곽만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여론의 조작』에서 프로파간다 모델을 검사한 첫 번째 방식은 그 모델을 가장 엄격한 테스트에 회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반대파들에게 그들이 검사받을 대상을 직접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비판가들이 언제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자기 주장에 유리한 사례만을 뽑았군." 그래서 반대파들에게 검사 대상을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스펙트럼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언론의 반정부적 자세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사례들, 그들이 그들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뽑아낸 사례들-가령 베트남 전쟁, 워터게이트, 기타 등등-을 검사 대상으로 삼아서 그들이 프로파간다 모델을 따르는지 아닌지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맨 먼저 이런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우리는 반대파에게 검사 대상을 선택하도록 시켰고 그래서 우리가 엉뚱한 사례를 집어들어 우리의 주장을 증명하려 한다는 시비를 사전에 차단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검사한 결과, 여전히 프로파간다 모델이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행한 또 다른 조사 방식은 언론에 실린 의견들의 범위를 문서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류 언론에서 표현 가능한 생각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살펴보려는 거였지요. 우리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면밀히 살폈습니다. 우리는 서로 유사하여 짝을 이루는 듯한 사례를 언론이 어떻게 다루는지 조사했습니다. 물론 역사는 조사연구자들 좋으라고 통제 가능한 실험 사항들을 일부러 제공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서로 비슷해 보이는 역사적 사건들이 많습니다. 언론이 그 두 사건을 어떻게 다루는지 비교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우리는 적성국가들이 저지르는 잔학행위와 비슷한 규모로 미국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언론이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적성국과 우방국의 선거 결과나 자유의 문제를 어떻게 보도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 밖에도 우리가 조사한 토픽들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우리는 생각해낼 수 있는 여러 방법론적 관점들로부터 많은 사례들을 연구했습니다. 우리의 연구는 프로파간다 모델을 확인해주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주장을 확인해주는 다른 사람들의 책자나 논문들도 수천 건에 달합니다. 그래서 나는 프로파간다 모델이 사회과학에서 가장 잘 입증된 명제의 하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알기로 이 명제에 반대하는 의논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류 문화는 이런 사실("언론은 프로파간다 모델을 따른다")에 대하여 오불관언("나하고는 관계없음")의 자세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가 사회과학 분야에서 아주 확실하게 정립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류 문화는 그들과 무관한 것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자연과학 수준에서 증명해도 주류 기관들은 여전히 배척할 겁니다. 왜 이렇게 배척하는가 하면 프로파간다 모델이 옳은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모델은 아무리 잘 증명되어도 엘리트 문화 내에서는 이해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말이지요, 이 모델이 밝혀내는 바가 아주 효율적이고 유익한 이데올로기적 제도를 뒤흔들기 때문이지요. 그런 제도에 역기능을 하니까 배제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촘스키, 세상의 물음데 답하다 1」中 프로파간다 모델의 시험 50-57p, -

*1989년 4월 15-16일, 메사추세츠 주 로우에서 열린 주말 공개 토론회를 바탕으로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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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간다의 힘에 대해서 

행인과 일월산(이하 존칭 생략), 두분의 대화를 오늘 비로소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 저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는 대화입니다. 특히 일월산에게 구체적 해법에 대해서 추궁하는 것은 '일월산이 제대로 임자 만났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디 두분이서 서로 내용을 채워가는 좋은 대화를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행인의 마지막 글 [프로파간다가 세상을 변혁하나?]를 읽고 문득 드리고 싶은 말이 두가지 정도가 있어서 글을 씁니다. 그 두가지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식권력, 2) 구체성의 정체...이런 두가지입니다. 

1) 지식권력 없이는 변혁은 불가능하다
먼저 행인의 질문 [프로파간다가 세상을 변혁하나?]에 대해서 저는 아주 명확한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프로파간다와 그렇지 못한 프로파간다가 있다"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프로파간다>...이것은 모든 정치투쟁의 필수요소입니다. 저는 이것을 군사력과 맞먹는 또는 더한층 질기고 지속적인 권력으로 규정합니다. 저는 이것을 <지식권력>이라고 부릅니다. 토마스쿤의 패러다임이나 맑시즘 계열의 이데올로기 또는 주체화 양식 또는 담론권력 등등, 뭐라고 불러도 저에겐 동일한 하나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들입니다(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은 원래 물질과학에 대한 것이지만 저는 그것을 계급담론의 인식투쟁에도 적용가능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프로파간다>입니다. 그것은 기본의 지배이데올로기가 훈육시키고 세뇌시킨 <주체화의 양식>을 거부하게 하고, 새로운 또다른 대안적인 주체화로 시민들을 이끌어 들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것이 바로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패러다임이다'라는 프로파간다>가 등장했따는 사실 자체가 어딘가 기존 주체화양식이 자기모순에 봉착했음을 보여줍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기존 지식권력의 주체화양식의 모순을 헤집고 들어간다는 게 맞겠습니다. 예를 들면, 상식-원칙-합리를 표방한 '진보개혁 신주류'가 <국익, 국가이성, 민족평화, 국민통합>이라는 명분으로 <전쟁반대 파병찬성>같은 자가당착을 저지른다거나, 평화와 휴머니즘 교육으로 철저하게 강조해 왔던 그간의 미국교육계가 이번 자국 정부의 전쟁광기와 학살로 곤욕스러워 하는 것이라든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평등을 떠들던 구 사회주의 사회가 실제로는 퇴화된 국가노예제가 되어버리는 것 등이 그런 예입니다. 

이처럼 한 사회의 기본적인 생활관계가 질곡을 드러내면, 지배적인 지식권력의 주체화양식의 자기모순과 균열을 치고 들어가면서 새로운 대안을 내세우는 가지각색의 지식권력'들'이 출현합니다. 그리고 현실세계에서 정치세력들의 군웅할거처럼 지식권력들 역시 자신들의 부족적 진리와 진영 멘탈리티를 '선험화하고 보편화하려는' 투쟁에 돌입합니다. 지식권력이 되고자 하는 이런 다양한 시도들 가운데 오직 극소수만이 유능하고 실력있으며 세력있는 부족원들을 규합해 냅니다. 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그러한 대안적인 지식권력들이었습니다. 지식권력으로의 정립을 위한 여러가지 선전선동 및 의식화과정 자체가 새로운 주체화양식의 작동이지만, 그 실내용은 그리 고상한 것이 아닙니다.

지배적 지식권력에 세뇌되고 훈육된 대부분의 노예들-쁘띠들의 지적 수준은 대단히 빈약합니다. 왜냐면 부르조아는 결코 이들이 피착취 대상물질에 적당히 머물 정도로만 교육시키지, 진짜 부르조아 지식권력의 핵심인 반동적 유물론-이기적 실용주의를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부르조아들은 이들 쁘띠들을 <바른생활>하는 도덕적 관념론자들로 사육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 더욱 도움이 되는 것을 정확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권력투쟁들은 태반이 이미지-상징조작의 심리전에 심혈을 기울이게 됩니다. 쁘띠들은 정확하게 리얼리티를 보지 못하며, 이미지-상징으로 조작된 <사연들의 세계> 속에서 흥청망청대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행인이 잘 이해했으면 합니다. 프로파간다의 대상층의 특징 말입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인식심리 상의 특징을 지닙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이미 쓴 글들 '불공정'이란 키워드로 내용검색바랍니다)

1) 인식할당을 불공정하게 합니다
2) 좌파상식에 대한 전이해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3) 잇슈들의 신분차별에 젖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프로파간다>가 되려면 지배적 지식권력의 주체화 양식 하에서 철저하게 쁘띠들의 골수에 새겨진 이 3가지 인식심리를 돌파해야 합니다. 어떻게?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두번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2) 구체성의 정체
행인이 일월산에게 집요하게 요구하는 '구체적 해법'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구체적 해법의 난점이 나타납니다. 말 그대로 구체적 해법이기 위해서는 전문성이 반드시 갖추어져야 합니다. 여기서의 전문성은 교수나 자격증 소지자가 아니라, <해당 문제의 해결을 마련키 위해 철두철미하게 전념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한 인간이 모든 분야에 전문적일 수 없다>는 난점과 충돌합니다. 왜 이게 <프로파간다>에 큰 장애가 되느냐하면 이렇습니다.

<구체적 해법을 제시못하면 주디질 고마해라>가 행인의 주장이라면 그것은 <전문적이지 않다면 해법을 제시할 수 없다>가 됩니다. 구체적 해법이 전문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해당 문제의 전문성을 갖춘 자들만이 주디질할 수 있고, 나머지는 걍~ 관련 사연들이나 읊조려라고 한다면, 이것 속에는 <거대서사는 무용하다>,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프로파간다는 무용하다>라는 이론적 허무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저는 이미 아나키와 오늘 이야기를 나눈 바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이론적 허무주의에 대해서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나무에 대한 집중과 함께 숲을 보는 통찰력 또한 필요합니다. 길을 가는 자들이 지도나 나침반없이 어떻게 여행을 하겠습니까? <전문성에 대한 강조>가 <거대서사에 대한 일방적 부정>으로 이어진다면 이런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불필요한 적대관계가 빚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그간 상대적으로 빈약한 구체적 해법의 절대부족이라는 작금의 문제를 무시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구체적 해법>이 할 수 없는 역할, 즉 전략적 지도map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반적 추상적 거대서사> 역시 지식권력 형성에 중요합니다. 특히 지식권력은 쁘띠들 가운데서 선진적인 의식층들의 이탈로부터 형성됩니다. 이들 선진적인 의식층들의 특징은 <새로운 통찰과 안목의 요청>입니다. 이것이 이미지-상징조작에 세뇌된 대부분의 하수 쁘띠들과 다른 선진적인 의식층들의 특징입니다.

게다가 띠리한 이들 하수 쁘띠들은 <구체적 해법> 그자체에도 별반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면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인식할당의 불공정, 좌파상식 전이해 결여, 잇슈의 신분차별>에 푹 젖어서 살기 때문에 백날 설득해 보았자 이해를 못합니다. 헛수고 입니다. 오히려 이들 쁘띠 하수들에게 유효한 지식권력 프로파간다 방식은 행인이 말한 <구체적 해법의 실천 사업-제도화>입니다. 이 미묘한 차이가 이해됩니까? <구체적 해법의 프로파간다>는 무용지물이며, 오로지 <구체적 해법의 사업-제도화>만이 하수 쁘띠들에게 먹힌다는 점입니다.

즉, 인터넷 상에서의 담론교환행위 자체가 일정 이상의 쁘띠 선진층들 이상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구체적 해법>의 토론과 축적이 사실상 넷 좌파의 지식권력에 별반 관심도 관련도 없는 하수 쁘띠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것이라는 묘한 어긋남이 있습니다. 지들을 위해 애를 쓰는 자들에게 정작 일반 쁘띠 하수들은 무관심하게 대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배적 지식권력의 주체화에 세뇌된 쁘띠들의 오늘 현실입니다. 이렇습니다. <구체적 해법의 축적>은 대단히 소중합니다. 저는 그렇기에 <불온이스크라>가 일상에 숨겨진 정치의 발견이자, 초국적 금융자본 단계의 노동계급형성을 위한 새로운 거대서사의 제조창이자 그것이 다성적이고 다양한 미시적 구체적인 해법들의 집적소이길 기대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관계의 정치>를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좌파적 모든 대안의 철학은 <관계가 건강해지면 (그 관계의 총체인) 개인도 건강해진다>이지 그 반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자칫 <구체적 해법과 전문성 강조>가 근시안적인 축소로 인해서 누락시키기 쉬운 <관계의 정치>를 <일반적 추상적 거대서사>가 튼실하게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이해 되시지요? 자본주의는 고립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고립조차도) 관계의 그물망입니다. (생산의 사회적 성격) 그러므로 자칫 <구체적 해법>은 자기가 다루는 분야의 사안에만 집중한 나머지, 해당 사안이 전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같은 관계의 걉과 폭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좌파의 정치가 <관계의 정치>라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구체적 해법>과 <관계의 전략적 통찰>, 이 양자가 둘 다 소중합니다. 특히나 변모된 초국적 금융자본의 공세 속에서 <새로운> 패러다임과 전략들 그리고 해법들의 조속한 성장과 축적이 절실합니다. 두분 사이의 좋은 대화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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