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어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과의 대비를 통해 당시 영국의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현실을 고발하고자 했다. ..

우리는 지금 여기, 자본주의라는 사회체제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도 정작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 알지 못한다. 16


농민들의 처지에서도 좋은 점이 있었다. 봉건제 사회에서는 농민들이 마음대로 영지를 이탈할 수 없는 것처럼 지주, 즉 영주계급도 마음대로 농민들을 자기 땅에서 내쫓을 수 없었다. 심지어 토지가 매매되거나 상속되더라도 그 땅에서 경작하는 농민은 그대로였다. 토지의 소유자가 바뀐다는 것은 단지 지대를 받을 권리를 가진 사람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농민에게는 누가 영주가 되든 상관없이 그 땅에서 농사지을 권리가 관습적으로 보장되었다. 농민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 아들과 손자에까지 이 권리는 이어졌다. 18


양모 가격의 폭등은 이 모든 안정적이던 기존 질서를 뒤흔들어놓았다. 농민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고 그 대가로 지대를 받는 것보다 그 땅에 양을 키워 양모를 판매하는 것이 훨씬 더 큰 이익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주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농민들을 강제로 추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농민들이 수 세대 동안 관습적으로 보장받던 권리를 모두 부정했다. 19


인클로저란 토지의 경계에 울타리를 친다는 뜻으로,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울타리치기 운동’이라고 하겠다. 인클로저 운동은 여러 번에 걸쳐 나타났는데, 그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은 양을 키우기 위해 일어난 16세기의 목양 인클로저와 대규모 농업 경영을 위한 18세기의 농업 인클로저였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비판한 것은 바로 양을 키우기 위한 울타리치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당시의 영국 사회이다. 20


르네상스 운동은 크게 아트 르네상스(Art Renaissance)와 휴머니즘 르네상스로 구분하는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문학과 미술 분야에서 활발하게 일어난 것이 아트 르네상스이다. 문학에서는 <데카메론>을 쓴 보카치오가, 미술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등이 아트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다. ..

아트 르네상스가 인간의 감정과 육체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다면, 휴머니즘 르네상스를 주도한 휴머니스트들은 인간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고자 했다. ‘인문학’이라는 용어도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휴머니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의 사상가가 바로 모어와 에라스뮈스이다. 접근하는 방식과 수단이 서로 달랐을 뿐 아트 르네상스와 휴머니즘 르네상스의 공통된 관심은 바로 ‘인간’이었다. 42


<사랑과 사치의 자본주의>에서 좀바르트는 자본주의가 농촌이 아니라 도시에서, 농업이 아니라 상업에서, 건전하고 성실한 생산 활동이 아니라 사치와 향락에 빠진 소비 생활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47


우리가 아는 중세는 절제와 검약을 미덕으로 하는 경건한 신앙심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 좀바르트는 이러한 변화가 바로 십자군 전쟁에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

<사랑과 사치의 자본주의>에서 십자군전쟁이 유럽 사회에 미친 영향을 남녀 관계의 변화의 측면에서 해석하고, 그것이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사회체제가 출현하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설명햇다. 십자군 전쟁은 유럽인들의 가치관과 윤리적인 태도를 크게 변화시켰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사랑’이었다. 48

십자군전쟁을 계기로 유럽인들은 사랑을 정신이 아니라 육체의 문제로, 거결함이 아니라 쾌락의 추구로 ‘세속화’했다.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인간의 벌거벗은 육체를 그렸다. 인간 본연의 정신을 탐구하고자 했던 르네상스는 다른 한편 인간 본연의 육체에 대한 탐구이기도 했다. 50


좀바르트는 자본주의의 기원을 사치와 전쟁에서 찾았다. 52


십자군 전쟁은 유럽 사회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다. 당시 유럽은 이탈리아의 몇몇 도시들을 제외하면 외부 세계와 교류가 거의 없는 폐쇄적인 사회엿따. 십자군 전쟁은 그런 유럽인들이 처음 경험하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슬람 세계(동방 세계)는 유럽(서방 세계)보다 훨씬 수준 높은 문화와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53


또 하나는 상업의 발달이었다. .. 십자군전쟁을 통해 유럽인들은 동방 사회에 있던 금은 등의 귀금속과 값비싼 재화들을 약탈함으로써 부를 축적했다. 군수물자를 수송하고 약탈한 전리품을 유럽으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여러 곳에 상업상의 거점을 건설하고 교통망을 정비해야 했다. 또 원정 비용을 지불하고 군수물자와 전리품들을 거래하기 위해 화폐의 사용이 늘어났다. 이 모든 요인이 유럽의 상업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54-55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

푹스는 르네상스를 인간의 육체 특히 벌거벗은 여체에 대한 탐닉의 시대로 보았다. 르네상스뿐만 아니라 실은 자본주의 문화, 부르주아 문화란 처음부터 퇴폐와 욕정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56


십자군전쟁 이후 유럽의 여러 도시들은 지중해 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했다. 그 가운데 가장 치열하게 경쟁을 벌인 도시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피렌체였다. ..

유럽 상인들의 가장 큰 고민은 십자군 전쟁 이후에도 그들이 장악한 상권이 여전히 지중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중해 너머의 여러 왕국들은 이슬람 상인들의 상권이었다. 63


유럽 상인들은 직접 동양의 여러 왕국과 무역할 수 있는 항로를 찾아 나섰다. 64


애점 스미스의 <국부론>은 너무나 유명한 핀 공장 이야기로 시작한다. 아무리 솜씨 좋은 장인이라도 혼자서 하루에 10개의 핀을 겨우 만들었는데, 철사를 늘이고 자르고 갈고 핀 대가리를 붙이고 두드리는 공정들을 나누어 일했더니 전혀 숙련되지 않은 10명의 노동자가 하루에 4800개의 핀을 만들더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그 이전에 있었던 다른 경제체제들과 구분하는 주요한 차이 가눙ㄴ데 하나는 바로 엄청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생산력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수많은 공장에서 엄청난 양의 상품들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온다. 그 많은 상품들을 도대체 어떻게 유통하고 누가 소비하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물론 140녀 년 전 이제 겨우 산업혁명에 접어들던 시대의 영국과 현대 사회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기준에서 보자면 대량샌상의 시대와 처음 마주친 영국인들의 충격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더 엄청났을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자본주의의 이 엄청난 생산력이 어디서 오는가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규명한 최초의 인물이다. 물론 매일 4800개의 핀이 공장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광경을 목격한 사람은 스미스 혼자만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은 직접 핀을 만들었고 사업가들은 그 핀들이 자신에게 줄 이익을 계산했다. 하지만 누구도 자신이 목격하고 직접 참여한 그 장면의 의미를 애덤 스미스만큼 잘 이해하지는 못했다. 우리가 스미스를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98-99


<에밀>은 흔히 교육에 관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 루소는 여러 쪽에 걸쳐 분업과 교환에 대해 이야기한다. 분업에 대한 애덤 스미스의 접근은 당연히 경제학적이다. 반면에 루소의 접근법은 사회학적이고 교육학적이다. 106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인간을 이기적 존재라고 말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알지만, 그가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을 동정심, 즉 ‘공감(sympathy)’의 존재라고 말한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116


<인구론>은 누구나 인정할 만한 두 가지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첫째, 식량은 인간의 생존에 필요하다. 둘때, 이성 사이의 정욕은 필연적이고앞으로 현재의 상태가 대체로 지속될 것이다. 맬서스는 이러한 두 가지 전제 위에서, 인구는 자연의 제한 법칙을 따르지 않을 경우 1, 2, 4, 8, 16, ... 과 같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의 생산능력은 1, 2, 3, 4, 5, ...와 같이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200년이 지나면 이 차이는 256대 9가 되며, 300년이 지나면 4096대 13이 된다. 따라서 어떤 방법으로든 인구의 증가르 억제하지 않으면 인류는 치명적인 파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맬서스는 두 가지 대책을 제시했는데, ‘예방적 억제(preventive checks)’와 ‘적극적 억제(positive checks)’가 바로 그것이다. 예방적 억제는 가족을 부양하는 데 따르는 곤란을 걱정해 결혼을 하지 않거나 간통으로 욕정을 해결하는 것, 그리고 낙태와 영아 살해 등을 말한다. 적극적 억제는 사후적으로 어린이의 영양실조, 극도의 빈곤, 전쟁과 기근, 그리고 전염병 등의 방법으로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것을 말한다. 126-129


다윈은 다양한 종들이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한다는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의 원리를 <인구론>에서 착안했다. 왜 어떤 종은 살아남고 어떤 종은 도태해 멸종하는가? 자연에 적응하는 종은 생존하며, 그렇지 못한 종은 도태한다는 것이다. 138


위대한 고전들과 마찬가지로 <인구론>은 오늘도 우리에게 새로운 성찰의 화두를 던져준다. 인구와 식량의 관계를 성장과 자원 또는 성장과 환경으로 바꿔서 생각해보면 맬서스의 경고는 지금도 유효하다. ..

성장은 자원을 사용하고 환경을 파괴한다. 물론 자연은 스스로 자원을 재생산하고 환경을 복구하는 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자원과 환경의 회복은 산술급수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성장을 위한 남용과 파괴는 기하급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157


현대 자본주의의 거대 기술은 오직 양적 성장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원 낭비적일 수밖에 없다. 거대 기술은 더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게 해주지만 사람들을 더 행복하고 풍요롭게 해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기술체계는 인간의 실질적인 욕구에 맞게 재편되어야 하며, 이는 또한 인간의 실제 크기에 맞추는 일이기도 하다. 158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한 위대한 발견으로 역사적 유물론과 잉여가치론 두 가지를 꼽았다.

역사적 유물론은 인류의 역사와 사회 발전의 원리를 규명한 마르크스 사상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적 기초이다. 그러나 정작 마르크스는 역사적 유물론에 관한 책을 쓴 적이 없다. 하기야 마르크스는 그의 철학적 기초인 변증법적 유물론에 관한 책을 쓴 적도 없다. 다만 자신의 모든 저술에서 변증법적 유문론의 방밥을 일관되게 사용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는 자신의 모든 저작에서 역사적 유물론을 적용했다. 가령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 인류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는 말은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한마디로 요약해준다.

그렇다면 역사적 유물론을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장 적절한 교과서는 무엇일까? 바로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다. 172-174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엥겔스는 계급이 없던 원시 공산주의 사회에서 계급 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원시 공동체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생산수단과 노동 생산물을 모두가 공동으로 소유했다는 사실이다. 즉 생사눌을 공동으로 생산할 뿐만 아니라 공동으로 소비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 소유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사회화된 현상이 아니라 생산력이 지극히 낮아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인간 생존의 조건이었다. 다시 말해 이 시기에는 생산력이 아주 낮아서 잉여 생산물이 없었기 때문에, 공동체 내의 일부 성원이 생산물을 독점한다는 것은 다른 성원의 생존 기회를 박탈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생산물을 독점하는 것도, 그것에 기초한 계급의 분화도, 사적 소유도 아직 출현할 수 없었다. 계급 사회가 출현하는 것은 아직 먼 미래의 사건이었다. 이 시기를 원시 공산주의 사회라고 부르는 것도 이때문이다.

사유재산과 국가는 물론 가족까지도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 계급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엥겔스의 설명은, 역사적 유물론을 처음 만나는 독자들에게는 조금 낯설 수도 있다 그러나 계급 사회이전의 공동체에서는 내 것이라는 관념이 없었기 때문에 내 가족이라는 관념도 없었다. 내 아내, 내 남편, 내 아이, 내 가족이라는 생각도 실은 사적 소유의 발전과 함께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176


사적 소유가 처음 출현했을 때 이는 탐욕, 축적, 지배가 아니라 권리였다는 사실이다. 177


분노한 노동자들은 기계에 모래를 붓거나 부속품을 망가뜨려 작업을 방해했다. ..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 ..

러다이트 운동은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이 일으킨 최초의 집단 저항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

러다이트 운동에 나선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라는 체제에 대해 거의 무지했다는 데 있다.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자본가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계의 자본가적인 사용이다 기계가 노동자들을 위해 사용된다면 노동시간이 줄고 노동의 강도는 낮춰질 것이다. 179


영국에서 노동조합 운동이 합법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1824년에 ‘단결금지법’(799년 제정)이 철폐되면서부터이다. 전국적인 노동조합 조직은 1830년대 들어 나타나게 되는데, 1834년 로버트 오언의 지도 아래 결성된 ‘전국노동조합대연합(Grand National Consolidated Trades Union)’은 조합원 수가 50만 명을 넘었다. 그 당시 전국노조의 요구사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10시간 노동제’였다. 181


잉여가치론은 바로 자본주의가 노동계급을 어떻게 착취하는가 하는 가장 근원적인 비밀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이론이다. 183-184


애넘 스미스는 재화의 가치가 노동에서 나온다고 말했지만, 또한 재화의 가치가 노동자의 임금과 자본가의 이윤과 지주의 지대를 합산한 것이라는 말도 했다. 스미스의 가장 훌륭한 계승자답게 리카도는 임금과 지대와 이윤이 각각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매우 치밀하게 분석했다. 노동자가 임금을 가져가듯 자본가가 이윤을 가져가는 것도 정당하다는 뜻이다. 재화의 가치가 오직 노동에 의해서만 생산된다면, 도대체 자본가의 이윤이나 지주의 지대는 어디에서 나올까?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를 자본가가 이윤으로 가져간다면 그것이 어떻게 정당한 분배일까? 184-187

스미스와 리카도라는 두 위대한 경제학자가 자기 이론의 근본적인 모순을 전혀 또는 거의 자각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자본주의가 모든 계급의 이익, 즉 자본가는 물론 노동자의 이익에도 절대적으로 부합하는 사회체제라는 신념을 너무 깊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87


마르크스는 리카도와 마찬가지로 모든 재화의 가치는 노동에 의해 생산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는 노동자 자신이 임금의 형태로 가져가는 필요가치와 자본가가 가져가는 잉여가치로 나뉜다. 이 잉여가치는 다시 자본의 여러 분파와 지주들에게 산업이윤과 상업이윤 및 기대로 분배된다. 말하자면 이윤은 하나의 허상이며, 그 본질은 잉여가치인 것이다. 잉여가치 역시 노동자가 생산한 것이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그것이 마치 노동의 산물이 아니라 자본의 기여에 대한 정당한 보수인 것처럼 기만하기 위해 잉여가치가 아니라 이윤의 형태로 취득하는 것이다.

피룡가치와 잉여가치가 각각 어떻게 분배되는가는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결정된다. 기본적으로 필요가치는 노동자가 사용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상품의 양이 결정한다. 그러나 현실의 착취율, 즉 필요 노동에 대한 잉여노동의 비율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계급추쟁이다. 계급투쟁이라는 말을 대단히 과격하고 무시무시한 무엇인 양 들을 필요는 없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인류의 역산느 모두 계급 투쟁의 역사"라고 말할 때의 그 계급투쟁은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의 10월 혁명처럼 노동자계급이 총을 들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일상의 생활과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와 자본가는 언제나 더 많은 몫을 가져가기 위해 대립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을 얼마로 결정할 것인가, 통상 임금에 무엇을 포함시킬 것인가가 바로 현실의 계급투쟁이라는 뜻이다.  187-191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우리 후손들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1930)이라는 글에서 100년 뒤에는 자본축적의 증진과 기술의 진보로 주 15시간만 일하면 누구나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196


노동은 인류에게 내린 그 어떤 저주보다 더 끔찍한 저주가 되고 말았다. 기술은 진보하고 사회는 더 발전하는데 노동자들은 왜 더 많이 일하면서도 왜 더 빈곤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이 노동자들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이윤과 축적을 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노동이 노동자들의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이 되고, 그 생산물이 노동자들 자신의 풍요를 위해 사용되지 못하는 한 그것은 저주일 수밖에 없다.

장시간 노동은 노동자들의 육체를 쇠진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들의 정서도 타락시킨다. 시민으로서 또 인간으로서 자신을 성찰할 여유를 노동자들에게서 빼앗아버리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긴 노동시간은 오히려 생산성을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그 시대의 몇몇 기업가들조차도 인정했다. 물론 그것이 시민으로서의 양심에서 나온 이야기인지 단지 생산성을 올려 더 많은 수익을 얻고자 한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설령 후자일지라도 자본가가 더 많은 이윤을 목적으로 한다는 사실 자체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이윤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생명력을 고갈시키는 자들에 비하면 그들은 충분히 양심적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물질적으로 적당히 풍족하면서 시민으로서 자신을 성찰할 여유를 가지기 위해서는 과연 몇 시간의 노동이 적당할까? 라파르그는 하루에 3시간의 노동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197-198


소외(Entfremdung)라는 개념은 얼핏 매우 현학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경제학 -철학수고>에서 마르크스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마르크스가 본 소외는 자본주의 사회의 고유하고도 본질적인 현상이다. 근대 시민사회의 이러한 인간소외는 정치적 자기소외, 경제적 자기소외, 종교적 자기소외로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특히 경제적 자기소외가 사유재산과 자유경쟁이라는 근대 자본주의의 두 가지 제약 조건 때문에 나타난다고 보았다. 자본주의라는 이 체제하에 살며넛 노동자들은 먼저 생산수단의 소유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생산 과정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발현하고 실현할 수 있는 기회로부터 소외되고, 자신이 노동한 결과물임에도 그 생산물의 소유로부터도 소외된다.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유적 존재라는 인간의 본질로부터도 소외되고 만다는 것이다. 

경제적 계급적 소외의 첫째 유형은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이다. 간단히 말해 노동자가 생산한 물건이 그것을 창조한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고 타인, 즉 자본가의 소유물이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노동자 궁핍화론'이 등장하는데,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노동자가 부를 더 많이 생산할수록 노동자는 그만큼 더 가난해진다는 말이다.

계급적 소외의 두 번째 유형은 노동으로부터의 소외이다. 노동자는 예전의 독립 생산자처럼 생산 활동에 자주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그의 지배와 통제 아래에서 노동하므로 본질적으로는 강제 노동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되면 노동은 인간 본래의 생명 활동이 아니라 다만 먹고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그 자체가 고통이라고 마르크스는 보았던 것이다.

셋째는 유적 본질로부터의 소외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유(類 무리류)적 존재라고 불렀느넫, 여기서 유적이란 인간이 홀로 존재하고 홀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유적 존재로서 생활할 때에만 인간은 자신의 참모습, 즉 유적 본질을 지킬 수 있다. 그러나 계급 사회에서 노동자는 노동 대상과 노동 생산물로부터 소외됨으로써 자신의 유적 본질을 박탈당한다. 

마지막으로 소외의 최후 형태인 인간의 인간으로부터의 소외이다. 인간이 자신이 유적 본질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은, 본래 인간답게 공동생활을 해야 할 인간이 비인간적으로 서로 대립하고 배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민사회에서는 유산자와 무산자 모두가 인간적 본질에서 소외당하고 있지만, 노동자는 이러한 소외에 괴로워하며 상실한 인간적 본질을 회복하려 한다. 반면 자본가는 이 인간소외 위에 안주해 퇴폐의 길을 걷는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네 유형의 소외는 결코 개별적으로 열거된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계급적 인간소외에 대한 인식이 의미하는 것은 자본과 노동의 분리, 즉 계급적 대립이 자본주의적 인간소외의 근본 원인이며, 동시에 이러한 인간 소외에 의해 계급 대립 그 자체가 유지되고 재생산된다는 사실이다. 본질을 상실한 소외된 인간은 불구화되고 파편화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202-205


현대 경영학은 프레더릭 윈즐로 테일러(Fredrick Winslow Taylor, 1856~1915)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가 제안한 과학적 노동 관리는 애덤 스미스가 이야기한 분업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것이다. 공장의 작업반장이었던 그는 초시계로 노동자들의 손동작, 발걸음, 그리고 심지어는 호흡까지 일일이 측정하고 계산해 가장 효율적인 작업 동작을 고안해내었다. 

테일러는 오늘날 테일러주의라고 불리는 자신의 과학적 노동 관리가 노동자드르이 생산성을 높이고 더 많은 임금을 받게 해줄 것이므로 당연히 노동자들이 환영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다. 모든 작업장에서 테일러주의는 노동자들의 격렬한 저항과 맞닥뜨렸다. 노동자들이 저항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물론 고용이 줄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심오한 면에서 나동자들이 테일러주의를 거부한 이유는, 그것이 노동자들의 인격과 자아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206-208


테일러의 과학적 노동 관리에 대해 노동자들은 감독자들이 정한 작업 방식대로 획일적으로 일하기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숙련과 경험에 의존한 작업 방식을 고수했다. 그러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테일러주의를 거부할 수 없도록 할 방법을 고안햇다. 바로 컨베이어 벨트이다. 컨베이어 벨트는 노동자들에게 정해진 작업 방식과 주어진 작업량을 강요했다. 영화 <모던 타임스(1936)>에서 찰리 채플린이 연기한 것처럼, 컨베이어 벨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정해진 작업 방식과 속도를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노동 과정을 통제하는 것은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라 컨베이어 벨트이다. 사람이 기계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사람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저항하지 못한다. 공장의 문 밖에는 해고와 실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테일러주의와 컨베이어 벨트의 결합은 흔히 '포드주의(Fordism)'이라고 불린다. 포드자동차의 생산 공장에서 가장 먼저 시도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성년 남자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일당 2달러를 넘지 않았다. 그런데 자동차왕으로 불린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는 컨베이어 벨트의 도입과 함께 5달러의 임금을 주었다. 이 때문에 포드는 다른 자본가들로부터 심지어 사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높은 임금을 받는 대신 노동자들은 단지 작업장에서 더 고된 노동을 해야 했을 뿐 아니라, 술과 도박을 끊고 저녁식사는 반드시 가족과 함께 먹는 것은 물론 일요일에는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 했다. 포드는 노동 과정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생활과 그들의 인격조차도 통제하고자 했다. 히틀러가 포드에게 철십자훈장을 수여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211-213


포드는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다. 포드는 히틀러에게 막대한 정치자금을 기부했고, 히틀러는 "미국의 파시즘 지도자"에게 가장 영예로운 철십자훈장을 수여했다.  214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더욱 발전하면 할수록 노동자계급은 더 빈곤해진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바로 자본가들이 생산수단 즉, 자본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인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는 <진보와 빈곤:부의 증진에 따른 산업 불황과 빈곤 증가의원인에 대한 조사>(1879)라는 책에서 같은 질문에 조금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조지는 사회가 진보할수록 대중이 더욱 빈곤해지는 이유는 바로 지주들이 토지를 독점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생산력의 향상과 더불어 지대가 더 큰 비율로 상승하므로 임금은 더 낮게 유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18-220


헨리 조지가 내놓은 것은 토지의 몰수가 아니라 토지단일세이다. 굳이 토지를 몰수하지 않더라도 토지에서 나오는 지대를 정부가 세금으로 전부 환수한다면 똑같은 효과를 얻을 있기 때문이다.  222


미국의 북부와 남부는 독립 당시부터 구조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북부에서는 비교적 공업이 발달하고 있었으나, 남부는 영국에 면화를 수출하고 값싼 공산품을 수입했다. 따라서 남부의 농업자본가들에게는 자유무역이 유리했다. 반면에 북부의 산업자본은 영국과의 경재을 피하기 위해 보호무역을 주장했다. 남북전쟁이 일어난 이유에는 이러한 무역체제의 차이도 크게 작용했다. 어찌 보면 남북전쟁이야말로 북부의 산업자본이 마음껏 성장하도록 해준 가장 주용한 계기이기도 했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 미국은 빠르게 농업 사회에서 공업 사회로 변화했다. 원래 미국은 영국의 요매넹 비유되는 독립자영 농민들을 토대로해서 건설된 사회이다. 산업화는 이러한 자영 농민들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려버렸다. 특히 남북전쟁 뒤 서부 개척이 진행되고 철도 붐이 일어나면서, 돈과 건력을 앞세운 철도회사들은 농민들의 토지를 폭력적으로 매수했다. 정부도 철도회사에 이익을 안겨주기 위해 농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수용해서 철도회사에 싼값에 불하했다. 밴더빌트나 카네기 같은 강도귀족(robber baron)들이 그토록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도 남북전쟁과 철도 붐 덕분이었다. 이른바 강도귀족들의 '황금시대'가 열린것이다. 그러나 마크 트웨인이 볼 때 그것은 번쩍거리기만 할 뿐 허위에 가득 찬 '도금시대'에 불과했다. 

미국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크 트웨인이 친구이자 작가인 찰스워너와 함께 쓴 <도금시대:우리 시대의 이야기(1873)> 는 토지의 수용과 그를 둘러싼 협잡, 부정부패 등 미국 사회의 추악하고 부끄러운 이면을 고발한 작품이다. 책의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존 왕(King John, 1595)>에 나오는 "금에 도금칠을 하거나 백합에 색칠을 하는 것은 낭비이고 어리석은 짓일뿐이다"라는 대사에서 따왔다고 한다.  226-228



조금 과장된 말이기는 하지만 봉건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는 1000년 동안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만큼 봉건제도가 안정되고 변화가 거의 없는 사회구조였다는 뜻이다. 자본주의는 그와 정반대이다. 자본주의는 흔히 달리는 자전거로 비유되는데, 페달을 밟지 않으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쓰러진다는 뜻이다. 그만큼 자본주의에서 변화는 거의 본질적이고 숙명적인 것이다.  233


고전이 위대한 이유, 우리가 고전을 읽고 또 읽는 이유는 그 책들과 저자들이 당시의 시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혜도 주기 때문이다.  234


독점자본주의의 구조와 특징을 처음 본격적으로 분석한 책은 바로 오스트리아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루돌프 힐퍼딩(Rudolf Hilferding, 1877~1941)의 <금융자본론(1910)>이다. <금융자본론>이 '<자본> 이후의 <자본>'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마르크스의 이론과 분석 방법을 따르면서 마르크스 이후의 자본주의를 분석했기 때문이다.  236


독점자본주의 이전에도 자본주의는 경제적 권력이 소수의 자본가들에게 집중된 사회였다. 그러나 독점자본주의 시대의 출현은 이제 자본가들 가운데서도 더욱 극소수의 독점자본가들이 그러한 경제적 권력을 배타적으로 장악하고, 노동자를 비롯한 생산 계급은 물론 다른 자본가들까지도 지배하고 통제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행과 산업과 정부의 권력자들은 금융과두제(金融寡頭制:금융과두제는 소수의 서대한 금융자본이 한 나라의 경제와 정치를 지배하는 제도를 말한다. 레닌은 이것을 제국주의 단계에서 나타나는자본주의의 징후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를 형성해 오직 자신들 안에서만 권력을 공유하고 배분했다.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틀어 그 어떤 사회에서도 권력이 이처럼 소수의 집단에게 독점된 적은 없었다.  238


<금융자본론>이 '<자본>이후의 <자본>'이라면 <제국주의>는 '<금융자본론>이후의 <금융자본론>'인 셈이다. 

이 책에서 레닌은 금융자본이 결국 제국주의로 귀결된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이지만, 부패하고 사멸해가는 자본주의리므로 자본주의의 최후 단계이기도 하다고 보앗다.  240


레닌은 제국주의의 다섯 가지 지표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산업과 은해에서 독점체 출현. 둘째, 산업 독점과 은행 독점의 결합과 금융과두제의 출현. 셋째, 자본수출. 넷째, 국제적 독점체에 의한 세계의 경제적 분할. 다섯째,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세계의 정치적 분할. 첫째와 둘째 지표가 바로 힐퍼딩이 <금융자본론>에서 분석한 내용이라면, 이어지는 세 가지 지표는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자본주의가 왜 제국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가를 설명해준다. 마지막 두 가지는 바로 제국주의란 무엇인가를 설명해준다.  240-242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아래엣부터 자본가로 성장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졌다. 특히 독점자본의 시대에는 주식회사 형태의 기업 결합이 일반화되고 기업 경영에 대한 금융자본의 배타적 지배가 확산되면서 평범한 중산층이 기업가나 경영자로 상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중소 자영업자들, 비교적 높은 소득을 받는 전문직 종사자들, 은퇴한 관리자 등과 같이 약간의 저축이 있지만 직접 자본가가 될 만큼의 자금은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직접 기업을 설립하거나 운영하는 대신 자신의 저축을 안정적으로 투자해 이자를  받는 거이었다. 루돌프 힐퍼딩은 이들을 '금리생활자(rentier)'라고 불렀다.  248


마르크스는 자본의 축적이 진행될수록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저하한다고 지적했다. 반면에 자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기 때문에 이자율은 안정적이거나 도리어 상승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금리생활자들에게 만족할 만한 이자를 지급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다른 부분에서 더 많이 착취해야 한다. 이 때문에 힐퍼딩과 동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은 금리생활자를 자본주의의 가장 퇴폐적이고 기생적인 현상이라고 비난했다.  249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th, 1908~2006)는 흔히 베블런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베블런 이후의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제도의 진화를 분석하고자 했다. 그의 주요 저작 가운데 하나인 <풍요한 사회(1958)>가 <유한계급론>의 속편이라면, 다른 저작 <새로운 산업사회(1967)>는 <영리기업의 이론>의 속편이라고 할 만하다. 어쩌면 갤브레이스 자신은 그것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의 속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272


아무튼 <풍요한 사회>에서 갤브레이스는 인간의 욕구를 생활에 꼭 필요한 절대적인 욕구와 그 이외의 상대적 욕구로 구분했다. 우리가 경제활동을 하는 본래의 목적은 절대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기업은 이윤을 더 얻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욕구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기업들은 광고를 통해 더 많이 원하고 더 많이 소비하도록 부추긴다. 마치 내가 그 상품을 원해서 소비하는 것 같지만 실은 나의 욕구가 기업들의 광고에 의존하고 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갤브레이스는 이를 '의존 효과(dependency effect)'라고 불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계급들도 마치 유한계급들처럼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새로 나온 상품들을 경쟁적으로 소비한다. 얼핏 보면 이런 대중 소비사회는 과거 어느 사회보다 더 풍요로워 보인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이제 노동자들은 생산 과정에서만 자본의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소비와 생활에서조차 그들의 이윤을 늘려주기 위해 복종하고 봉사하는 것이다.  274


카를 멩거의 제자이자 신자유주의의 사성적 원조로 불리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루트비히 에들러 폰 미제스(1881~1973)는 언젠가 케인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매우 훌륭한 경제학자이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오류를 저질렀다"고. 그 한 가지 치명적인 오류란 바로 정부의 시장 개입을 용인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것이다. 근대 경제학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시장의 자기조정 능력이다. 물론 시장이 언제나 균형 상태이지는 않다. 일시적으로 시장이 불균형 상태일 수 있다는 점은 모든 경제학자가 인정한다. 다만 주류 경제학은 시장은 언제든 그러한 불균형을 스스로 조정해 균형 상태로 돌아갈 능력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조금 극단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시장의 이러한 자기조정 능력에 대한 신뢰와 신념이 없다면 우리가 아는 경제학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거이다. 

케인스가 주류 경제학자들을 당혹하게 만든 것은 그의 호사스러운 취미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경제학의 근본적인 신념에 대한 비판이었다.  290




자본주의 다음에는 어떤 사회가 올까? 마르크스와 그 지지자들은 자본주의가 내부의 모순 때문에 붕괴되고 사회주의가 그 뒤를 이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301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른 이유와 논리에서 자본주의의 미래는 사회주의라고 주장한 경제학자가 잇다. 바로 조지프 슘페터이다. 슘페터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1942)>에서 자본주의의 미래는 사회주의라고 주장했다. 슘페터는 평생 단 한 순간도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적이 없다. 그런 슘페터가 자본주의의 미래는 사회주의라고 주장했으니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의 이론에서 참으로 심오한 측면은, 자본주의가 실패했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성공했기 때문에 사회주의로 발전하리라는 것이다.  302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소유의 문제로 파악했지만 슘페터는 관리의 문제로 파악했다. 가령 마르크스가 보기에는 기업의 형태가 주식회사로 바뀌더라도 생산수단을 여전히 소수가 독점하고 잇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이다. 반면에 슘페터는 누가 주식을 가지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누가 기업을 경영하고 관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기업이 사회적으로 관리되며, 결국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슘페터는 또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것은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도 지지하기에, 더욱 빠르고 순조롭게 진행된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자본가와 노동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 농민, 상인, 자영업자 같은 중간계급도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발달해 기업이 거대해지고 기업의 활동 영역이 확대될수록, 중간계급의 지위는 하락해가고 그들의 역할도 축소된다. 따라서 이런 중간계급들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자본가는 무산계급의 혁명에 의해 타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요구에 따라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동의하게 된다. 자본주의는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눈부신 성공 때문에 사회주의로 이행한다는 주장이다.  305


슘페터의 저서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은 역시 <경제발전의 이론(1912)>일 것이다. 슘페터는 경제체제의 운동 양식을 순환과 발전의 두 가지로 분류했다. 슘페터는 순환을 일정한 정태 체계 내에서 동일한 양상으로 반복된느 경제 행위의 총체로, 다소의 변화가 있더라도 결코 일정한 체계를 벗어나지 않는 연속적인 변화로 파악했다. 이에 비해 발전이란 순환을 제약하는 여건을 다소 바꿈으로써 나타나는 변화로, 이는 연속적인 경제변동이라기보다는 경제체제 자체의 비약적 변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슘페터는 경제의 내적 요인에서 나타나는 비연속적인 기술 혁신이 이러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했다. 즉 기업가가 창조적이고 영웅적인 기술 혁신을 수행함으로써 경제는 정태 균형에서 순환의 과정을 벗어나 동테적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다.  308-309


슘페터는 기업가의 혁신(innovation)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주도한다고 생각했다. 혁신이란 창조적으로 파괴하는 과정이다.  309


혁신의 구체적인 내용을 슘페터는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의했다. 첫째, 새로운 상품의 발명. 둘째, 새로운 생산 방식의 발명. 셋째, 새로운 원료의 개발. 넷째, 새로운 시장의 개발. 다섯째, 새로운 시장 구조로의 전환이다.

슘페터의 혁신 개념은 다분히 지나치게 광범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석연치 않은 점도 있다 가령 헨리 포드가 컨베이어 벨트를 도입한 것은 새로운 생산 방식을 발명한 혁신의 두 번째 유형에 해당한다. 포드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가 자본주의의 생산 방식에 중요한 혁신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제국주의 국가들이 새로운 식민지 시장을 발견한 것은 과연 네 번째 유형의 혁신인가? 그렇다면 독점자본이 경쟁 기업들을 도태시키고 시장을 지배하는 것도 다섯 번째 유형의 혁신인가? 아무래도 슘페터의 사회주의는 지나치게 관용적이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기업이 투자를 많이 하도록 기업에 유인을 더 많이 제공하고 기업에 유리한 경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꼭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기업가 정신이 없는 사업가들은 결코 혁신할 수 없다. 그저 기업가들을 모방할 뿐이다. 모방하고자 해도 모방할 기업가 정신이 없다는 것이 지금 우리 경제가 처한 막다른 길은 아닐까?  310-312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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