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았을 때 종교, 그러니까 관념론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던사람들이 지배층, 곧 보수적인 사람들이었다면, 유물론적 관점을 기반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진보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36


유물론자들은 항상 물질세계 및 현실세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가는지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유행을 선도할 것이고, 관념론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관념이라는 틀에다가 현실을 끼워 맞춰서 세상을 바라볼 테니 유행에 뒤처지고 낡은 것을 고수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겠군요.  38


개인의 읫기이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보는 견해를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합니다. 반면 플라톤의 이데아나 기독교의 신처럼 초개인적이고 초감각적인 정신적 실재를 가정하여 모든 것의 근원으로 삼는 견해를 '객관적 관념론'이라고 하고요.  40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세상을 고정불변의 것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어떤 변하지 않는 틀을 설정하고, 그것에 맞춰 세상을 파악하는 것이지요.  49


변증법적 세계관은 세상을 고정불변의 것이 아닌,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50


헤겔이 변증법을 연구하면서 쓴 '모순'


'모순'이 변화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사실.

어떤 현상에서 모순과 갈등의 구조를 파악해내는 것이 중요.

그래야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변화와 발전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있을 테니까.  55



양적 변화가 특정 정도를 넘어서면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

'양질 전화의 법칙'은 모순에 따른 변화와 발전이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는지를 보여주는 법칙입니다. 모순에 따른 변화 발전은 아무렇게나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양적 변화가 계속 축적되다가 임계점에 다다르면 질적 변화가 일어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이야기입니다.  73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디고 느리게 보이며, 연속해서 일어납니다. 반면에 질적 변화는 상대적으로 변화가 급격하고 불연속적으로 일어납니다.  77


부정변증법. '변증법적 부정'이란 사물이나 현상의 발전 과정에서 낡은 것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낡은 것이 새로운 것의 의해서 '부정'되는 것.  80

새로운 것이라는 게, 기존의 낡은 것과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없는 생판 다른 것은 아닙니다.  81


사물이나 현상이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낮은 단계로부터 높은 단계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발전한다는 의미입니다.  83


연속된 부정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증법적으로 변화 발전, 곧 진보하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서 부정이라는 단어를 되풀이 쓴 것이지요.  84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진리란 인간이 절대로 파악할 수 없는 피안(彼岸 저 피, 언덕 안)의 세계에 존재한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상대적 진리란 절대적 진리의 일부 측면이락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론과 실천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우리는 절대적 진리를 조금씩 더 알게 되는 것이지요.  123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132



사회의 구성원이 함께 공유하게 되는 의식을 '사회적 의식'이라고 합니다. 사회 구성원의 상당수가 '사회적 의식'을 공유하게 되는 까닭은 그들이 놓인 환경이 같기 때문입니다.  135


'존재'가 원인이고 '의식'이 결과인 이상, 역사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려면 '의식'의 배후에 작용하는 '존재' 양식을 파악하는 것이 주요한 과제가 됩니다.  144


설명을 듣지 않으면 서로 이해하지 못할 만큼, 인간은 다양한 존재 양식에서 살고 있고요. 고온 건조한 기후와 물이 부족한 토양에 산다는 것이 티베트 사람들에게는 '존재'양식입니다. 이러한 존재 양식이 그들에게 조장이라는 풍습, 그러니까 새에게 인간의 시신을 내어주자는 '의식'을 형성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멕시코의 마야인들이 옥수수 신을 최고신으로 섬긴 이유는 그들의 주식이 옥수수이기 때문입니다.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마야인들의 '존재'양식은, 옥수수 신이 최고신이라는 '의식'을 낳았습니다.  145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든지, 바람이 많이 분다든지, 주변에 강이 흘러서 토지가 비옥하다든지, 비가 많이 온다든지, 주변에 철광석이 많다든지, 아무튼 우리 의식에 영향을 끼칠 만한 존재 양식의 요소들은 참으로 많고도 다양합니다.  146


역사 유물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양한 변수들 가운데 역사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요인을 찾아내서, 거기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역사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요소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입니다.  148-149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 이러한 생산 활동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는지 설명하는 개념들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변형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생산력'이라고 합니다.  150


생산력 = 노동력 + 생산수단


노동하는 능력이 바로 '노동력'입니다.

필요한 원료와 시설이 '생산수단'입니다.


생산수단 = 노동대상 + 노동수당


기계는 노동수단이고 원료는 노동대상.  151-152


생산관계란, 인간 사회에서 생산 활동이 이루어질 때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를 말합니다.  152


생산관계를 가르는 기준은 생산수단을 누가 소유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154


한 사회의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통틀어서 그 사회의 '생산양식'이라고 합니다. 


생산양식 = 생산력 + 생산관계  157


변화의 결정적인 원인은 새로운 생산력과 낡은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이었고요.  160


생산력이 발전하면 낡은 생산관계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161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함께 통일되어 존재하면서 생산양식을 형성합니다. 이렇게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한 사회에 생산양식의 구성요소로서 함께 존재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그 사이에서 모순이 생겨납니다.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  162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로 바뀌는 시기를 우리는 역사에서 '혁명'이라고 부르지요.  163


지금 전 세계에 물자는 넘치고 있어요.

'공황'이 일어나는 순간 그 넘쳐나는 상품들이 팔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171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私的 사사로울 사, 과녁 적) 성격 사이의 모순'에서, '생산의 사회적 성격'은 생산력과 관련이 있고 '소유의 사적 성격'은 생산과계와 관련이 있는데요. 

생산이 사회적 성격을 띈다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 활동이 이미 개인의 차원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죠. 곧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강해진 것입니다.

소유 형태는 거의 완전히 개인적인 형태, 곧 사적 소유가 주를 이룹니다.  172-173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변화 발전을 거쳐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생산력의 사회적 성격이 생산관계의 사회적 성격과 맞아떨어져서 공황이라는 파괴적 현상이 없어지고, 자본가가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착취하는 일도 없어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182



'토대(base)'와 '상부구조(superstructure)'


어떤 사회의 '토대'란 그 사회의 생간관계 총체를 말합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나 봉건적 생산 관계등을 떠올리면 됩니다.  189


상부구조란 것은, 앞서 얘기한 그 사회의 '토대'위에 서 있는 정치적, 도덕적, 예술적, 종교적, 철학적 견해 및 그에 상응하는 기관이나 조직 등을 말합니다.  190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라는 경제적 '토대'가 수많은 '상부구조'들을 낳고 있어요. 농노처럼 토지와 신분제에 얽매이지 앟은 자유로운 노동자들이 필요했던 자본가들은 개인의 신체적 자유를 보장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생산수단을 자본가 개인의 소유로 단단히 보장하기 위해서 사유재산 보호를 보장하는 법률이 생겼고요. 이런 법들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라는 경제적 '토대'에 기반을 둔 상부구조인 것이죠.  191


제가 어느 책에선가 읽은 재미있는 예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던 서양 사람들이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을 찾아가서 지능 검사를 했다고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부족 사람들 각각에게 검사 용지를 하나씩 나눠주면서 각자 개별적을 답안을 작성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원주민들은 문제지를 놓고 다 함께 모여서 토론을 하지 뭡니까. 서양 사람은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가가, 각자가 따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그랬더니 권주민들은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고 합니다.

'문제가 있으면 함께 의논해서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왜 자꾸 각자가 따로 해결하라고 하는지 모르겠군요.'

이 원주민들에게는 문제를 각자가 따로 해결한다는 상황 자체가 전혀 생소할 뿐더러 이해도 되지 않앗습니다. 이 원주민 부족으로 대표될 수 있는 '원시공동체 사회'에서는 부족의 구성원들이 함께 도와가면서 생활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생존' 자체가 위험해집니다. 수렵이나 채집 활동을 통해 먹을거리를 마련하고 아이들을 돌보며 맹수나 다른 부족과 싸워가며 '생존'하려면 함께 똘똘 뭉쳐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공동체 생활을 잘해야 '생존'할 가능성이 높은 게임의 법칙이 있는 곳이 원시공동체 사회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는 '생존' 자체가 '함께 도와가면서 사는' 삶이 될 수밖에 없죠. 그런 원시공동체 사회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와 같은 '이기심'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얻은 지시고가 정보를 빨리 구성원들과 공유하고, 자신이 구한 먹을거리도 함게 나눠 먹는 것이 상식입니다. '이기심'은 그 사회에서는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195-196


자본주의 '게임의 법칙'. 더럽고 아니꼽더라도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장이나 토지, 원료, 기계 등 이른바 '생산수단'이 자본가들의 손에 있기 때문이지요. 노동자는 노동력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도안 필요한 모든 것을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히 '이기심'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197


자본주의 사회 -> 모든 것이 상품으로 된 사회.  200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우리가 살아온 과거를 알아야 우리의 혀재를 판단할 수 있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죠.  204


새로운 토대가 낡은 상부 구조를 바꾸기도 하지만, 반대로 낡은 상부구조가 적극적으로 새로운 토대를 거부할 수도 있다.  207



계급이란 것을 들여다보면, 생산수단을 소유한 지배계급과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피지배계급 간에는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착취가 존재하는 사회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싱이 있습니다. 바로 빈부 격차지요.  

구조적으로 착취가 일어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빼앗는 사람은 늘 빼앗고, 빼앗기는 사람은 늘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214


전 세계에서 수많은 농민이 봉건 지주에 맞서 봉기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동학농민운동도 그렇고, <삼국지>에 나오는 황건적의 난도 같은 맥락입니다.  221


계급 투쟁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사회를 변혁하는 근본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계급투쟁이라고 하면 사회에 혼란을 조성하는 것으로만 새악하지요. 하지만 착취계급에 대한 피착취계급의 투쟁은 항상 새로운 사회를 여는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습니다.

근대 자본주의 혁명이었던 프랑스 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수많은 농민이 봉건적 질서를 해체하는 데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223


지배계급은 불안정한 상황을 억누르고 지배 체제를 계속 유지해야만 자신들의 부를 지킬 수 있겠지요. 화가 난 노예들을 억누르지 못한다면 노예주들은 권력을 잃고 말 테니 말이에요.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국가'입니다. 마르크스는 국가를,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기 위한 기구, 지배계급의 권력기구로 보았습니다.

지배계급은 생산수단을 독점적으로 소유합니다. 그러한 경제적인 권력으 가지고 잇기 때문에 피지배계급을 예속시킬 수 있죠. 하지만 그 사이에는 계급투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항상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의 저항을 억누르고 계속 복종시키기 위해 조직된 힘이 필요합니다. 군대나 경찰, 법원, 감옥같이 조직된 폭력기구가 필요하다는 말이죠. 이러한 국가의 폭력은 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그래서 군대와 경찰은 폭력을 합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지만, 사회의 나머지 성원들이 행사하는 폭력은 불법 행위가 됩니다. 이런 폭력기구들의 조직을 통해서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을 정치적을 지배합니다. 생산수단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면서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국가기구를 통해 폭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면서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발생은 계급 사회의 발생과 맞물려 있습니다. 국가라는 것이 계급 억압 기구이기 때문에 계급의 존재 자체가 국가라는 기구가 존재하기 이한 전제 조건인 셈이죠.  225-226


우리는 국가가 사회의 전체 세력을 중립적으로 대변한다고 생각하도록 배워왔습니다.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한 법률이 제정되고, 그 법에 따라 국가가 운영된다고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227


혁명은 지배계급의 교체를 의미하기 때문에 많은 변화가 뒤따릅니다.  237


진짜 민주주의가 실현되려면 민중이 국가주권과 생산수단을 틀어쥐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 그 사회의 주인이 될 수 있다.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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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근대(Modern times) 철학

- 정신적 변혁

근대 철학이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정확한 날짜와 그 시작의 출발점을 제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중세와 근대의 뚜렷한 구분은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카르트(1596~1650)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초는 스콜라철학을 비판한 이탈리아 인문주의와 유럽의 르네상스 철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근대적 사유의 출현은 17세기 초에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15, 16세기의 아주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사건이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에 의한 인쇄술의 발명(1450년경), 터키의 콘스탄티노플 정복(1453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1492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1517년), 마젤란으 최초의 세계 일주(1519~1522년: 이 사건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입증했다), 중세의 초국가적인 정치 통일체에서 벗어나 유럽이 국민 국가를 형성한 것 등이다.

요켠대 근대으 근본 사상, 즉 근대 정신의 특징은 진보 사상이다. 무엇을 향한 진보인가? 근대가 진행되는 동안 두 개의 동인(動因)이 점차 인식이 가능하게 드러나고, 이 두 요소는 다양하게 서로 섞이거나 분리되기도 하며, 또 서로를 비판하기도 한다. 인간성의 완성으로서의 도덕적 진보와 자연에 대한 지배로서의 과학, 기술적인 진보가 바로 이 두 요소이다. 근대의 인간은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자신의 활동성에 힘입어 자신의 책임하에 새로운 정신적 집을 구축하고자 도전한다. 근대의 인간은 새롭게 발견되 무한한 현세에서 새로운 방향 설정의 토대가 마련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의 정신적인 표식(질서 있고 유한하며 조망 가능한 우주와의 조화)과 중세의 정신적인 표식(초월적인 구원)은 새롭게 해석되며, 창조적인 방식으로 다시 수용된다.

중세에는 지식의 대상이 인간이 아닌 인간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책-성경과 그에 상응하는 책들-이었다. 몇몇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 자연이 탐구된 것이 아니라 권위를 가진 텍스트들이 탐구의 대상이 되어 해석되었다. 주석들과 주석에 대한 주석들이 씌어졌다. 스콜라철학에서 지식은 대학에서 의무적으로 읽어야 했던 그런 텍스트 독해가 바탕이 되었다. 논란이 되는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나 공인된 다른 텍스트들보다 훌륭한 해석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었다. 

이렇게 책의 권위에 대한 맹신과 단절하고 새롭게 실험적인 방식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갈릴레오 갈리레이였다. 그는 1632년에 종교 재판을 초래한 위대한 저서인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어느 날 베네치아에 있는 아주 유명한 의사의 집에 들렀다. 매우 박식하고 숙련된 그 해부학자의 손에서 어떻게 시체가 해부되는지를 보기 위해 연구자 혹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그 집에 들락거렸다. 이날은 신경의 근원과 그 철발점을 탐구하고 있었다. 사실 이 문제는 갈레노스(고대 그리스의 명의)를 따르는 의사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 사이에서 펼쳐진 유명한 논쟁거리였다. 그 의사는 신경의 주줄기가 뇌에서 출발하여 목을 거쳐 척추로 뻗어 있고, 몸 전체로 가지를 치고 있으며, 또 아주 가느다란 줄기만이 심장으로 뻗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 자리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로 알려진 한 신사가 있었다. 그 해부학자는 이 신사 때문에 이례적으로 그 모든 해부 과정을 아주 세밀하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신경의 근원이 심장이 아니라 뇌라는 사실을 이제는 확신할 수 있는지 물었다. 이 신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아주 명백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신경의 근원지가 심장이라고 분명하게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가 없었다면, 당신이 옳다는 것을 일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갈릴레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무시했다. 순수하게 근대의 자연과학을 양적이며, 측정 가능한 운동 관계로 규정한 그는 "자연과학에서는 추론이 참되고 필연적이어야 하며 1,000명의 데모스테네스와 1,000명의 아리스토텔레스도 사실과는 다르게 거짓된 것을 참된 것으로 만들 수 없다"고 했다, 갈릴레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은 가능한 자연 경험 전체를 이미 포함하고 있다'는 중세적인 확신에 따라 행동했다면, 이전 것보다 성능이 좋은 망원경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 망원경으로 어떤 책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목성은 행성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 행성들은 목성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1553년에 르네상스의 철학자 마리우스 니촐리우스는 스콜라철학의 경직된 자연과학 개념들에 대항하여 '스승의 말에 서약하는 의무'에서 벗어나, 온갖 종류의 '교조적 제사장들'과 '남의 의견만을 추종하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노예근성의 천민들'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도살장'에 끌려가지 않는 그런 참된 철학을 추구하겠다고 공언했다.

니촐리우스는 진리의 보편 원리들 중 하나는, 해당 대상의 진리와 그 본성이 요청하듯이 "모든 사물에 대해 사유하고 판단함에 있어서 자유롭고 선입관을 갖지 않는 것이다. 이는 참다운 철학을 위해 힘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든 철학적 분파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누구나 어떤 사태의 진리를 판단함에 있어서 그 판단 결과가 자신에게 긍정적으로 현상하건 부정적으로 현상하건 간에 그것을 최종적으로 자유롭게, 제약 없이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그가 어떤 명성에, 그것도 아주 유명한 사람의 가르침에 근거한 명성에 얽매이거나 제약될 경우, 그런 자유로운 판단이 방해받을 것이다. 중요한 사태에 대해 판단하고 입장 정리를 할 때, 권위나 이미 주어진 견해에 의지하기보다 합리적인 논증에 의지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일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진리 추구에 있어서나 숨겨진 연관성을 추적해 가는 데 있어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과거나 현대의 다른 어떤 저자들보다 자신의 오감, 지성, 사유, 기억, 사물 들과의 직접적인 교류와 경험 등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그가 죽은 해에 출간된 저서에서 고대로부터 내려온 중세의 세계상을 무너뜨렸다. 지구는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지구는 다른 행성들과 같이 하나의 행성에 불과하다.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돈다. 지구는 구형이며,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물리학과 프톨레마이오스적인 체계의 권위로 거의 2,000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지구 중심적인 세계상은 태양 중심적인 세계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코페르티쿠스적인 전황은 '세계의 무한성과 무한한 태양계들의 존재'라는 지오르다노 부르노의 세계상에 의해 다시 한번 첨예화된다. 이 무한한 세계에서는 지구나 태양이 중심일 수 없다. 이 세계는 도처에 세계의 중심이 잇으면서 동시에 그 중심이 어디에도 없다 이제 세계는 지금까지 신에게만 부여되었던 '무한성'이라는 속성을 갖게 된다. 열린 우주라는 관념은 고대와 중세의 폐쇄된 세계상을 완전히 파괴시켰다. 부르노는 이런 엄청난 도발 행위로 인해 1600년 로마에서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결국 산 채로 화형당해 정신의 자유를 위해 순교했다.


- 르네상스 철학에서 계몽으로

이탈리아 인문주의는 1350~1460년 사이에 중세 스콜라철학에 맞서기 시작했다. 영원한 진리를 주장하는 형이상학, 즉 존재의 보편적 구조에 대한 학성을 거부하며, 구전되거나 문자로 전승된 인간의 생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관심사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인문주의자들은 언어의 기능과 변화에 대해 통찰함으로써 인간이 역사적 존재임을 보이기 위해 고대의 텍스트에 다시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의 방법은 대상 혹은 존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서부터 출발했다(로렌초 발라). 박식하기보다는 더 훌륜하게 되는 것이 인문주의의 목표이다(페트라르카).

이탈리아 인문주의에 의해 처음 시작된 르네상스 철학은 통일적인 모습을 띠지 않았다. 이 철학은 전 유럽으로 전파되어 종교 개혁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형이상학에 다시 문호를 개방한 르네상스('고대의 부활'이라는 의미) 철학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전체 유산과 로마의 철학을 되살린다. 거의 1,000년이 지난 후 플라톤의 아카데미가 다시 부활하였다(1440년 플로렌츠에 생겨나 플라톤 저작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함). 인간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우주의 위계질서에서 인간은 동물과 신 사이의 어떤 중간 지점에 자리한다. 인간 존엄의 핵심은 자유이다. 인간에게 이러한 자유가 보장될 때, 예술적인 창조 행위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가고, 규정하며, 확고한 입지를 세워 나갈 수 있다. 행위가 존재를 규정한다(피코 델라 미란돌라).

16세기의 르네상스 철학은 다양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자연철학 : 주술, 연금술, 점성술과 같은 상징적 지식은 자연의 완성을 돕는다(파르셀수스 폰 호헨하임). 자연신비 : 자연은 질적인 특서들로 가득 차 있다. 즉 자연은 신의 징표로서, 수학적으로 측정되고 양화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이해의 방식으로만 판독 될 수 있는 '근원적인 정령들'로 가득 차 있다(야콥 뵈메). 회의주의 : 고대의 회의주의 전통에서 유래하는 자유로운 비판 정신이 나타난다(몽테뉴). 법철학 : 근대적인 자연법(인간의 본성에서 따르는 법)과 국제법의 토대가 마련되었다.(유고 그로티우스).

이와 병행하여 스콜라철학의 중세적 전통도 스페인에서 계승되었다(프란시스코 수아레즈).

세계 전체는 점차 인식하는 주체가 조종할 수 있는 객체로 되며, 인간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대상으로 파악된다. 진보적인 세계 인식과 세계 개발의 올바른 방법이 모색되었다. 갈릴레이는 자연을 측정할 수 있는 수학적인 프로그램을 이용함으로써 영향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혁명을 이뤄 낸다. "측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측정하고, 측정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측정할 수 있게 하라" 갈릴레이는 이미 바로크 시대에 17, 18세기의 역학적인 사유와 철학을 위한 기초를 세웠다. 

두 개의 인식 방식, 합리론과 경험론은 17세기와 18세가 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합리론은 이성에, 경험론은 경험에 바탕을 둔다. 진리의 모델을 수학에서 취하는 합리론자들은 감각적 지각과는 무관하게, 이성이 독자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순수하게 개념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경험적 사실에서 출발하는 경험주의자들은 이 사실들이 감각적 지각을 통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현실성이 없거나 인식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어, 합리론자인 데카르트에 따르면 신(神) 관념과 같은 본유 관념들이 존재한다. 본유 관념에 기초한 순수한 합리적 인식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경험론자인 로크에게 있어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그에게 있어서 영혼은 우연적인 경험에 의해서 비로소 채워지는 백지(tabula reas)이며, 본유 관념이란 잘못도니 가정에 불과하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볼프 등은 이성의 보편적 지배라는 사상을 대변하는 합리주의의 위대한 형이상학적 체계의 대표자이다. 데카르트는 인식의 수학적 확실성을 원한다. 엄격한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진 그에 따르면, 순수하게 정신적인 사유의 세계와 순수하게 물질적인 외부 세계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 영혼이 없는 물질세계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거대한 기계 장치이다. 따라서 이 물질 세계는 정확하게 계산될 수 있고 지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동물은 영혼이 없는 유용한 기계이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범신론(자연 전체를 신의 형태로 간주하는 이론)을 합리주의적으로 기술할 때 유클리드의 기하학에 따른다. 그는 정의와 공리에서 출발하여 증명 방식에 따라 모든 명제들을 연역한다. 라이프니츠의 목표는 철학에 있어서 일종의 대수학을, 즉 모든 질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에도 타당한 보편 수학을 찾는 것이었다. 독일의 가장 영향력 있는 계몽주의 철학자인 볼프는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형이상학을 체계화한다. 이성과 덕 그리고 행복은 인간 세상에서 확대되어야 한다.

경험론의 대표자이자 부분적으로 반형이상학적인 입장을 취하는 철학자로는 베이컨, 로크, 버클리, 흄 등을 들 수 있다. 베이컨은 모든 학문들을 방법론적으로, 포괄적으로 개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편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로크는 경험 개념을 탐구한다. 그의 으뜸가는 경험주의적인 명제는 다음과 같다. "감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오성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버클리에게는 경험만 존재한다. 그는 경험 외부에 있는 물질세계의 존재나, 경험과 무관한 물질세계의 존재를 무의미한 중복으로 거부한다. 회의주의자 은 일상 경험의 기본 구조, 즉 인과율의 근본 구조가 불확실한 믿음이나 사변적 해석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사건들의 시간적 전후 관계만 지각할 수 있을 뿐, 그 원인을 지각할 수 없다. 우리는 관찰된 시간적 전후 관계를 따져 곧바로 그 이유를 추론하는 잘못을 범한다. 인과율을 경험에 의해서 더 이상 검증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사태에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17세기, 특히 18세기는 계몽주의시기이다. 계몽주의는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에서 1789년 프랑스대혁명에 이르는 기간이며, 또 바로크시대에서 로코코시대로의 발전기이다. 18세기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합리주의적 사유 양식과 경험주의 적인 사유 양식으로 특징지어지는 계몽주의에 어느 정도 동참하고 있다. 물론 비판적인 거리를 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시대에 세상의 표정은 밝다. 이성은 세상을 밝혀 준다. 태양은 밤을 정복한다(모차르트의 '마술 피리'). 칸트는 다음과 같은 모토를 들고 나온다. "네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몽이란 인간이 자신의 과오로 인한 미성숙 상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국가와 교회의 권위와 제도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커지고, 권력 분립과 소수자의 권리가 요청된다(로크, 몽테스키외). 볼테르는 "파렴치를 없애라!"는 구호와 함께 교회의 폐지를 외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성 종교(이신론)는 정중하게 신을 세계 밖으로 내몰아 홀로 머물러 있게 한다. 이 시기에는 보편적인 국민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계몽주의 시대는 자연에 대한 인식과 지배를 통한 인류의 진보라는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과학을 통한 해방!'은 프랑스 백과사전파(디드로)의 모토이다. 스스로를 자연의 지배자이자 소유자로 삼는 낙관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진보 사상은 도덕적 진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레싱은 자신의 저서<인류의 교육>에서 계몽이 주도하는 시대가 왔으며, 계시 진리(신약과 구약) 대신에 생동적인 이성 진리가 자리 잡는 시대가 왔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런 시대에 인간은 "선한 것을 행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의적인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경제 발전을 주도하는 부르주아 계급에서는 유용성(보상)의 관점이 팽배해졌으며, 돈이 아주 중요한 가치를 지니기 시작한다.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며, 실용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대중 철학이 관심을 끌게 되었다.

계몽의 최고봉에 위치한 칸트의 윤리학은 인간의 존엄을 강조한다. 윤리적 행위에는 "스스로에게 부여한 법 이외에는 어떤 다른 법에도 복종하지 않는 이성적 존재의 존엄이라는 이념이 바탕이 된다" 유용성을 중시하는 관점에서는 인간의 존엄이 도외시된다. 인간의 존엄은 어떤 것에도 유용하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엄은 도구화될 수 없으며,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히려 목적 그 자체이다. 즉, 인간의 존엄은 다른 어떤 높은 목적에 의해 상대화되거나, 배제될 수 없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로서 존엄을 지킬 의무가 있다. 이는 인간이 존엄성을 가지고 잇기 때문이라기보다 인간에게 존엄성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단순히 수단이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해서는 안 되고, 언제나 목적으로 존중해야 한다.

칸트는 수학과 자연과학에 방향을 맞춘 자신의 인식 이론에서 영혼, 전체로서의 세계, 신(예를 들어 신의 존재 증명) 등에 관한 초경험적인 지식을 다루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의 종언을 고한다. 이제 이러한 형이상학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형이상학의 대상들은 인식의 한계를 초월한다. 이제 남은 것은 언제나 단편적일 수밖에 없는 경험 과학적인 탐구이고, 자신의 무지에 대한 겸손한 인식이며, 철학적인 세분화이다.


- 독일 관념론의 시기

19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독일철학은 전성기를 구가한다. 문학과 철학은 상호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양자 사이에 엄격한 구분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는 개인의 운명을 통해 철학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중요한 철학서로 읽힐 수 있다. 마찬가지로 헤겔의 <정신현상학>도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수준 높은 문학 작품이다. 신인문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 그리고 독일 관념론은 대개의 경우 문학과 철학에서 동시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다양한 발전 단계를 거쳤다.

신인문주의는 세 번째 인문주의로서 고대 연구에 몰두한다(인문주의의역사는 고대의 인문주의, 르네상스 인문주의, 신인문주의로 구분될 수 있다). 신인문주의의 목표는 이상적인 인간성을 장려하는 것이다. 신인문주의의 개척자인 빙켈만은 이성을 강조하는 합리주의적 계몽의 비판가로서 그리스의 조형 예술에서 아름다운 인간의 영원한 이상을 이끌어 낸다. 모든 열정은 억제되고, 육체와 정신의 완전한 조화가 현실에서 실현된다("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성"). 헤르더는 역사를 인간성이 진보해 가는 과정으로 생각한다. 문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성을 갖도록 하는 교육"이다. 훔볼트 역시 인간의 세계 연관성을 본다. 그는 전문화된 교육 대신 인문주의적인 교양을 강조한다. 또한 그는 계산적인 오성적 인간 대신 윤리적이고 감성적인 인간을 강조한다.

독일 고전주의에서 괴테와 실러는 장차 실현될 자유롭고 아름다운 인간성에 관한 진보적 이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고귀하다 인간이여, 

 자비심 많고 선하게 도리지니!

 이것만이 

 인간을 구별한다네,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모든 존재들과." (괴테)

실현 가능한 인간성의 이상에는 자연성과 정신성도 포함된다. 실러는 경향성과 의무가 통일되어 있는 도덕성의 이상을 대변한다(칸트는 경향성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실러와 다르다). 감성적인 것이란 감각적이고 정신적인 힘들을 조화롭게 형성하는 것이다. "감각적인 인간을 합리적으로 만들기 위해 우선 감각적인 인간을 감성적으로 만드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감성적이라는 말은 '이상적인(관념적인)' '고전적인'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내 자신을 내가 현존하고 있듯이 형성함" 이라는 괴테의 교양 이념은 인간의 완서을 추구하는 창조적 행위를 강조한다.

"인간은 주변 여건을 가능한 한 많이 규정하고, 주변 여건에 의해 가능한 한 적게 규정될 때 최대의 공적을 쌓을 수 있다. 전체 세계는 건툭 기사 앞에 놓인 거대한 석재처럼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건축 기사는 우연으로 주어진 이 자연물을 가지고 아주 경제적이고 합목적적으로, 의연하게 자신의 정신에서 나오는 원형상을 만들어 나간다. 우리 밖에 있는 모든 것은 구성 요소일 뿐이며,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만들어져야 하는 것을 만들 수 있게 하는 창조적인 힘은 우리 내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이 힘은 우리의 외부, 혹은 내부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을 만들어 낼 때까지 우리를 쉬게 하지 않고 끊임없이 활동하게 한다."

낭만주의에서 나타나는 철학적, 종교적인 감정 세계와 영혼의 심연에 대한 낭만주의의 탐구는 실플라톤주의와 뵈메의 신비주의 그리고 경건주의와 유사하다. 예술은 고전주의가 추구했던 완성과 조화를 목표로 하지 않고, 오히려 전체 세계를 낭만화하는 과제, 즉 전체 세계를 무한자의 표현이자 의미로 파악하고, 알려진 것에 알려지지 않은 것의 위엄을 부여하는 끝없는 과제를 떠맡고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무한자에 대한 의미와 기호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나는 무한한 세계의 가슴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이 순간에는 세계의 영혼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세계의 모든 힘들과 그 무한한 삶을 마치 나의 삶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는 이 순간에는 나의 육체입니다."

우주는 생동적인 전체이며, 영원한 생성이고, 무한한 영혼이다. 노발리스는 시적인 상상력을 통해 보다 고차원적인 현실을 펼친다. 동경 어린 사랑을 하는 시인에게서는 자연의 가장 내적인 정신이 축제를 펼치며 춤을 춘다. 이에 반해 합리주의적인 자연 탐구자의 손에서 "다정다감한 자연은 생명력을 잃고, 경령만 일으키는 찌꺼기만 남긴다." "내가 바위에 말을 걸면 그 바위는 독특한 너(Du)가 되지 않겠는가?

독일 관념론은 형이상학에 대한 칸트의 거부를 극복하고자 하며, 전체 철학사와 자기 시대의 과학적 지식을 모두 다루며 신인문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 등이 함께 만들어 놓은 지평안에서 근대의 가장 위대한 최후의 체계를 만든다. 가장 위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철학적 개념성과 개념화된 대상성의 완벽한 체계로 완성되어야 한다.  칸트로부터 시작된 독일 관념론의 대표자는 피히테, 셸링, 헤겔이다

피히테는 다음과 같이 결심한다. "나는 자연이 아니라 내 자신의 작품이고자 한다." 노예적 본성(자연)을 지닌 사람은 사물들과 기존의 질서로 이루어진 세계, 즉 유물론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자유로운 사람은 어떤 창조적 정신을 세계의 토대로 간주하는 관념론(이상주의)을 선택하며 비합리적으로 휘둘리는 현상을 자신의 행위를 통해 극복하고자 한다. 활동적이고 자유로우며 자기 자신과 동일한 자아로부터 철학은 출발해야 한다. 자유를 향한 사유 안에서 자신을 규정해야 한다.

셸링은 조기 저서에서 정신과 물질적 자연은 근원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예술을 탐구한다. 예술은 철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정신과 자연의 동일성의 원리를 직관적으로 보여 준다. 예술은 철학을 돕는다. 예술을 통해 자연을 보는 새로운 시각이 가능해진다. "자연은 볼 수 있는 정신이고, 정신은 볼 수 없는 자연이다."

셸링은 후기에 이르러 피히테처럼 순수하게 이성을 수단으로하여 철학적인 자기 정당화와 철학적인 세계 연관성을 추구하려 함으로써 점차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근대적 이성의 전능성 요청이 힘을 잃는 데 기여한다.

헤겔은 '우주의 이성적인 상'을 제시한다. 세계에는 아직 의식되지는 않지만 활동하고 있는 이성이 있다. 이성은 스스로를 인식하는 데 온 힘을 다하며 절대적인 지식을 추구한다. "하늘과 땅 위에서 영원히 발생하는 모든 것, 즉 신의 삶과 시간적으로 행해진 모든 것이 추구하는 것은 정신이 스스로를 인식해 자신을 대상화하고, 자신을 발견해 독자성을 띠며 자신과 통합하는 것이다."

1830년대에 이르러 독일 관념론은 붕괴된다. 베토벤(1827), 헤겔(1831), 괴테(1932) 등이 사망한 해는 독일 관념론이 종말을 고한 해이기도 하다. 괴테는 1825년에 새로운 것이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슬픈 기분으로 과거를 회고한다.

"누구도 스스로를 더 이상 알지 못한다. 누구도 자신의 활동 분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누구도 자신이 가공한 질료를 파악하지 못한다. 이제 더 이상 순수한 단순성이라는 말을 꺼낼 수 없다. 천박한 언행이 범람한다. 젊은이들은 너무 수비게 흥분하며,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든다. 세상 사람들이 경탄하며 추구하는 것은 부와 빠름이다. 철도, 빠른 우편 제도, 증기선, 그리고 의사소통의 모든 가능한 수단들이 바로 교양인드이 원하는 것이며, 이것들은 서로 경쟁함으로써 결국 평범한 수준에 머물고 만다. [...] 우리들은, 아마도 우리들 중의 소수는 그렇게 빨리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대의 마지막 사람들이 될 것이다."




4. 현대(Century) 철학

- 전통과의 단절

19세기와 20세기에는 철학의 세속화 과정이 일어난다. 산업 혁명과 더불어 독일에서는 약 1830년부터 헤겔의 죽음(1831)과 시기적으로 동일하게 사유의 급진적인 현세화가 시작되었다. 세계에 대한 분명하고 총체적인 해석을 제시하고자 한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요구는 점차 의문시되고, 결국 완전히 포기된다. 과학은 철학의 권위로부터 해방되었고, 기술의 성공으로 승리를 더 견고히 했다. 거대한 철학 체계의 시대는 지나갔다.

새로운 과학적인 이론들이 세계상과 인간상에 신기원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진화론과 정신 분석학은 사유를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프로이트(1856~1939)이후 인간의 자기도취적 자기애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과학적인 연구에 의해 세 가지 거대한 모욕을 당해야했다. "나르시스적 자기애가 경험한 첫 번째 모욕은 우리의 지구가 만물의 중심이 아니라 그 크기를 상상할 수 없는 우주의 미미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과학이 이미 이와 비슷한 주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선 이러한 사실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름과 연관되어 있다. 두 번째 모욕은 생물학적인 연구에 의해 인간의 창조적 특권이 무화되고, 인간의 동물적 기원과 본성이 제거 불가능하다고 선언되었을 때이다. 이러한 가치 전도는 우리 시대에 다윈(1823~1913), 월리스와 같은 선구자들의 영향으로 동시대인들의 격렬한 반발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인간의 위대함의 추구는 오늘날의 심리학적인 연구를 통해서 세 번째, 가장 견디기 힘든 모욕을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아는 결코 자기 집의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적인 삶에서 무의식적으로 지나간 정보들에 의존해 있음을 오늘날의 심리학적인 연구를 통해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의 세계 대전, 관청에서 계획되어 공장 일처럼 수행된 대량 학살, 원자폭탄 투하 등은 20세기 진보에 대한 낙관을 중단시켰다. 게다가 20세기 후반부터 환경 위기에 대한 불안이 점점 고조되었다. 20세기의 거대 범죄를 통해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방향설정인 인간의 불가침적 존엄성이 상대화되거나 구속력을 상실하게 되면, 과학과 기술이 야만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경우 모든 기술적인 개선은 그 도덕적 결과가 어떠하든 진보로 간주된다. 윤리적으로 맹목적인 진보 사상의 관점에서 아우슈비츠의 한 사령관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말한다. "트레블린카 수용소보다 더 개선된 수용소가 구축되엇다. 트레블린카 수용소의 10개의 가스실이 200명만을 수용할 수 잇는데 우리는 한 번에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가스실을 지었다."

20, 21세기의 철학은 조망이 불가능할 정도로 입장이 다원화되었다. 고대, 중세, 근대의 사유에는 어떤 연결점들이 있었으며, 그때그때 선호되는 수학, 물리학, 사회학, 생물학, 등이 철학의 모범으로 선호되었다. 넓은 철학적 스펙트럼은 새로운 방법들과 높은 수준의 비판적 반성들, 그리고 세련되고 분화된 이론들을 포함하고 있다. 사실적인 대화이든 가상적인 대화이든 간에 대화 속에서 논증적인 상호 이해를 불가치하게 수용하는 '철학'이라는 개념은 또 다른 의미도 추가하고 있다. '철학' 개념은 온갖 형태의 정치적인 세계관으로부터 광고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한 극단적인 예로, 1980년대에 어떤 자동차 회사는 자동차의 액세서리를 파는 광고를 '철학은 팝니다'로 내보낸 바 있다.


- 19세기 철학

쇼펜하우어(1788~1860)는 정신적인 전복, 곧 형이상학적인 가치 전도를 수행한 철학자이다. 그는 의지를 인식에서 분리시킴으로써 세계가 '의지의 전능한 힘에 의해 움직인다'고 설명하며 '철학의 토대 변화'를 시도한다. 인간과 세계의 가장 내밀한 존재는 비이성적인 무엇, 곧 어두운 충동, 맹목적인 의지이다. 경험적으로 고찰해 볼 때, 인간은 신의 창조물이 아니고, 쇼펜하우어가 추정하는 것처럼 침팬지로부터 유래한다. 세계의 근본 특성은 고통, 부정성, 무의미이다. 보편적으로 의지에 지배받는 것은-특히 성(性)이 그렇다-예술, 연민, 체념 등을 통해서 벗어날 수 있다.

실증주의는 모든 사변이 극복되었다고 생각하며 자연과학적인 사실들을 종합하는 데만 자신의임무를 국한하였다. 출발점은 '실증적인 것'인데, 이것은 실제로 주어진 것, 경험적으로 증명 가능한 것을 가리킨다. 인간의 정신적인 발전은 세 단계, 즉 신학-형이상학-실증주의적인 단계로 진행한다.(콩트, 1798~1857)

영국의 공리주의는 어떤 유용한 것이 최대 다수의 행복을 촉진시키는 한, 이 유용한 것 속에서 인륜적 삶의 계산 가능한 토대를 본다. 행위의 목적은 '더 큰 행복'이다. 낙관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모든 중요한 인간 고통의 원인들은 인간의 노력과 수고에 의해 현저히, 심지어 거의 전적으로 제거될 수 있다,"(밀, 1806~1873)

유물론은 물질적인 것, 즉 정신과 마주하고 있는 자연이 보다 더 근원적이라고 주장한다. 유물론은 '종교 대신에 과학'을, '신에 대한 봉사 대신에 인간에 대한 봉사'를, '인간의 행복을 위한 노력'을 요구한다.(L. 뷔히너, 1824~1899)

사적 유물론은 프롤레타리아 역시 자본가와 동등한 정도로(물론 그 쓰임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자본의 산물, 즉 자본의 '부속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 이유는 이들 둘 다 불변하는 자연법칙처럼 진행하고 있는 경제적인 법칙성에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정신적으로도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이제 현실의 해석 대신 현실의 변혁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마르크스. 1818~1883)

미국의 실용주의는 사물에 고유한 존재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한다. 현사오가 실재의 구별은 '세계와 인간에 유익을 가져오는 서술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 서술인가'의 구별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론은 도구가 도니다."(제임스, 1842~1910) 영원성에서 미래로 관심이 옮겨 져야 하고, 안정적인 확실성에서 대한 추구는 환상과 개방적인 대안에 대한 요구로 바뀌어야 한다. 따라서 정치적인 관점에서 민주주의는 소유로서가 아니라 과제로서 이해된다.(듀이, 1859~1952)

정신과학의 토대는 생(生)철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정신과학의 과제는 생을 형이상학적인 설정 없이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 출발점은 일방적이고 냉정한 이성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 자신의 정신적인 '대상화'도 포함하는 훼손되지 않은 '온전한 생'이다. 그 목표는 인간의 정신적이고 역사적이며 개별적인 세계에 걸맞는 이해의 기술, 즉 과학적 해석학이다. 자연과학은 자연을 설명하고, 정신과학은 의미 연관을 이해한다. "인간이 활동하는 가운데 자신을 각인시킨 모든 것이 정신과학의 대상이 된다."(딜타이, 1833~1911)

19세기의 후반, 철학사에 이미 등장한 입장들을 새롭게 이해하는 철학 운동들이 나타난다. 그 한 예가 1870년과 1920년 사이에 유물론과 싸우면서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의 인식론적인 해명을 시도하는 신칸트학파이다. 그들의 표어는 다음과 같다. "따라서 칸트로 되돌아가야 한다."(립만, 1840~1912), "칸트로의 복귀는 진실로 진보를 존중하는 것이다. 과학과 철학을 서로에게 도움이 되도록 연결하는 실타래가 다시 연결되었다."(릴, 1844~1924), "칸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를 넘어서는 것이다."(빈델반트, 1848~1915) 두 번째 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세 철학을 혁신한 신토마스주의(신스콜라학파)이다. 교황 레오 13세의 교서 "아에테르니 파트리스(Aeterni Patris)"는 1879년 성토마스의 철학을 카톨릭 교회의 기준으로 발표한다.

니체(1844~1900)의 저서는 서양 형이상학 비판과 도덕 비판의 한 정점을 보여 준다. 그는 형이상학을 있는 그대로의 생을 완성하지 못한 이들의 무능력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본다. "모든 지하 세계(Hinterwelten, 생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들, 예컨대 도덕, 종교와 같은 것들을 니체는 '지하세계' '배후의 세계'등으로 말한다-역자 주)를 창조한 것은 고통과 무능력이었다." 니체는 자신의 현재를 형이상학이 붕괴하는 시기로 진단한다. 최고의 가치였던 것이 평가 절하되었고, 목표는 없으며 신은 죽었다. 무(無)가 신의 자리에 들어선다. '허무주의의 도래'가 앞으로 200년 동안의 역사이다. "코페르니쿠스 이후로 인간은 왜곡된 길로 들어서 있는 것 같다. 인간은 점점 더 빠르게 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그런데 어디로? 무로?" 모든 것은 생명력 넘치는 '미래 인간' '초인' '신과 무를 이겨 낸 사람'에게 달려 있다.


- 20, 21세기의 철학

현상학은 20세기 초반 '세계관 철학'에 대항해서 철학을 엄격한 '순수 현사들에 관한 학문'으로 근거 삼으려 했다. 현상학은 '사태 그 차제로'라는 준칙에 따라 의식 내용의 객관적 본질을 절대적이고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직관하고, 편견 없이 정확하고 완전하게 기술하기 위해 방법론을 발전시킨다.(후설, 1859~1938) 현상학은 현상(Phaenomen)과 본질(Noumenon)간의 전통적인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한다. 현상들 배후에는 형이상학적으로 초감각적인 것들, 즉 초월적인 제2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현상학의 현상들 배후에는 이 현상과 본질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 숨어 있다. 그리고 현상은 처음에 대부분이 이미 주어져 있는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상학을 필요로 한다. 감춰져 있음이 '현상'의 대립 개념이다."(하이데거, 1889~1976)

존재 사유. 딜타이와 후설을 이어 받고 있는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재발견하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는 '존재하고 있음'이라는 말로 우리가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존재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새롭게 제기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의식, 자아, 주체 등으로 말하지 않고 '현존재'로 말한다. 인간적인 현존재는 자기의 고유한 존재와 관계를 맺는 특징이 있으며, 이를 통해 자기 존재는 '실존'으로 규정된다. 초기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1927)에서 존재에 관한 질문을 현존재로부터 제기한다. 이 때문에 현존재와 그 구조 분석이 전면에 등장한다. 현존재는 '세계 안의 존재'이고,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이며, 세계와 관계 맺는 '이해하는 현존재'이다.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 안에서 이 존재에 대해 이해하면서 관계를 맺는 존재자이다." 현존재는 시간 관련성 때문에 '염려'로 특징 지워진다. 후기 하이데거는 우리 시대를 진단하면서 원자 시대라는 말을 한다. 인간은 지배하고 계산하고 싶어 하는 사유 속에 모든 것을 예속시킨다. 현대 기술은 세계 지배를 이루려는 이러한 권력 의지의 승리이다. 기술은 존재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존재가 모든 역사를 가느하게 하는 근거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인간은 이러한 존재 망각을 이야기하는 경우에만 비로소 그는 존재를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존중하게 되고 스스로 근본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 따라서 존재 물음은 사유라는 '세계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답하는 가운데 땅에서 나오는 것과 이 땅의 인간 현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 결정된다." 이 질문에는 우리를 마법에 걸린 것처럼 만드는 계산적 사유의 광기와는 다른 사유가 자리한다. 그 대안적 사유는 '의식하는 사유'이다. 이 대안은 더 이상 자의적으로 도출될 수 없다. "여전히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실존철학은 키르케고르(1813~1855)뿐만 아니라 후설과 아이데거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았는데, 더 이상 단순히 사유된 철학에 만족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것은 현실에 낯선 체계 대신 인격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유를, 철학의 현존재 대신 철학적 현존재를 요구한다. 문제는 야스퍼스(1883~1969)의 말처럼, 인간이 자신의 '한계 상황(죽음, 불운, 범죄)' 속에서 타자와의 의사소통을 통해 자기 자신이 되며, 초월적 존재에 이르는 자신만의 고유한 실존적인 도정을 위해 결단한다는 것이다. "실존으로서 우리는 신(초월자)과 관계하며, 이러한 사실은 사물을 암호와 상징으로 만드는 언어를 통해 가능하다." 이와 달라 사르트르는 인간의 완전한 자유에서 출발한다. "나는 무한한 가능성이다." 개별자는 자신을 구상하는 대로 그렇게 존재한다. "인간은 자신이 특정한 목적으로 스스로를 만든 것, 바로 그것이다." 드라마 <악마와 사랑스러운 신>에서 신을 부정하는 실존주의자로 바뀐 괴츠는 신을 찾아다니며 "신은 존재하지 ... 않는다"고 말한다. "이 땅 바깥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인간을 벗어나 있을 가능성은 없다. 거대하고 성스러운 것은 끝났다. 자만심도 끝이다. 인간만이 현존할 뿐이다."

철학적 인간학. 셸러(1874~1928)는 개별 과학의 연구 결과를 활용해 우주에서의 인간의 '특별한 지위'에 대해 여러 분야를 망라하여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무한히 세계 개방적으로 처신할 수 있는 미지수 X 이다." 예를 들면, 겔렌(1904~1976)에게 인간은 동물과 비교해 볼 때 본능이 완전히 발전하지 않은 '결핍의 존재'이다.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인위적인 자연, 즉 문화를 건설한다. 지속적인 사회 제도들이 부족한 본능의 필수적인 보완으로 역할을 한다. 겔렌은 "민족의 제도가 파괴되면 인간에게는 아주 근본적인 불안정, 변종 그리고 혼란이 발생할 것이다"고 했다.

20세기는 언어철학의 세기이다. 언어를 사유의 중심 대상으로 끌어올린 것은 정신과학만이 아니다. 언어 분석철학 역시 '언어적 전환'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언어) 분석철학은 19세기의 실증주의 논쟁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자연과학뿐 아니라 논리학, 수학에 경도되어 있다. 다수의 옹호자들을 가지고 있는 이 철학 운동은 형대철학의 한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 운동은 일종의 언어 비판으로 시작했다.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개념들 간의 관계에서 불가피하게 주자 오류들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이 운동은 "이 오류들을 발견함으로써 인간 정신에 대한 언어의 지배를 깨뜨리고자 한다."(프레게, 1848~1925) 철학의 모든 영역에서 나오는 문제들은 언어 분석이라는 방식으로 해결된다고 한다. 어떤 조건하에서 진술들이 학문적으로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가 제기된다. 초기 카르납(1891~1970)에게 있어서 어떤 명제 안에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무의미한 단어들(절대자, 존재자의 존재, 무)이 들어 있지 않을 때, 또한 그 명제가 문법이나 구문적으로 올바르게 만들어져 있을 때 그 명제는 의미가 있다.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분석철학의 대표자로 간주된다.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논리철학 논고>(192!)에서 철학적인 문제들에 대한 질문이 "우리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그는 의미 있는 언어가 가능하기 위해 만족되어야만 하는 조건들이 무엇인지 묻는다. "철학의 올바른 방법은 원래 말해질 수 있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 즉 자연과학적인 명제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 따라서 철학과 관계가 없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이 형이상학적인 것을 말하고자 할 때 그의 명제들 속에 있는 특정한 기호에는 그가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유고로 출판된 그의 저서<철학적 탐구>(1953)에서 이상적으로 구성된 세계를 모사하는 단위 언어라는 사상을 포기하고, 일상 언어(ordinary language)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단어의 의미는 이 단어의 일상적이고 다양한 사용과 분리될 수 없다. 언어 사용은 언어 공동체 삶의 형식 중 하나이고, 항상 구체적인 행위와의 연관 속에 서 있다. 일상 언어는 단일성, 곧 통일된 세계 기투(企投)로서가 아니라 서로 교차하는 무수히 많은 '언어 놀이'의 다수성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언어 놀이'라는 핵심 개념은 언어를 언어이면서 활동으로 파악한다. 예를 들면 명령하는 것,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 연극 놀이하는 것, 부탁하는 것, 감사하는 것 등이 언어 놀이다. 한 단어의 의미는 더 이상 <논리철학 논고>에서 처럼 대상의 모사로 이해되지 않고, 놀이의 경우처럼 실용적으로 특정한 행위 맥락에서 그때그때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특정한 언어적 행위 맥락에서 이해된다. "언어에서 한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의 사용이다." 언어는 일상적인 '삶의 형식들'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단지 그것들과의 연관, 즉 문맥 속에서만 명시적인 의미를 가진다. 형이상학적으로 보편적인, 맥락을 초월한 이론은 배제된다. "삶의 강물 속에서만 언어는 그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단어들을 그 형이상학적인 사용으로부터 다시금 일상적인 사용으로 되돌린다." 또한 언어 비판은 치료적인 과제를 가진다. "철삭은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오성을 마법에 빠뜨리는 것에 대항하는 투쟁이다" "철학의 결과는 오성이 언어의 한계로 돌진하는 경우 가지게 되는, 어떤 단순한 무의미함과 종양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 분석철학의 가장 활발한 옹호자는 콰인(1908~2000)이다. "감각 자료로부터 필요 이상으로 멀리 떨아지려 하지 말라."

비판적 합리주의. 포퍼(1902~1994)는 모든 종류의 교조주의를 배제하고자 하는 과학 이론을 주장한다.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은 잠정적인 이론이며, 비판을 통해서만 개선된다. 이론은 결코 증명될 수 없지만 사실을 통해 반박될 수 있다. 궁극적인 이론, 예를 들면 역사 법칙 이론은 상상에 의해 산출된 지식이다. 역사는 예측할 수 없는 개방된 과정이다. '거짓도니 예언자', 즉 역사철학의 역사주의자들은 미시에 빠져 있다. "역사주의자는 역사의 사실들을 고르고 정렬하는 자가 바로 우리임을 보지 못한다. 그는 반대로 '역사 그 자체' 혹은 '인류의 역사'가 그 내재적인 법칙을 통해 우리, 우리의 문제, 우리의 미래,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의 관점까지도 규정한다고 믿는다." 잘못된 근본주의적인 역사 이론과 사회 이론에 근거해 있는 혁명적인 세계 개선이 거부되며, 개별 문제들에 대한 겸손한 개혁, 즉 항상 수정 가능한 '불완전함의 기술'이 권유된다. 따라서 서구 민주주의는 이미 실현된 자유로운 인간 공동체이지만 여전히 단계적으로 개선될 여지가 있다.

현재 영향력이 막강한 비판 이론(프랑크푸르트학파)은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여러 운동 중 하나이다. 대표적인 두 사상가 호르크하이머(1895~1973)와 아도르노(1903~1969)는 '합리적인 사회' '노예적인 관계로부터의 인간 해방'이라는 그들의 근원적인 목표에 점차 회의적이고 체념적인 태도를 보인다. 유럽의 문명 과정은 그들에게 깊은 양면성과 자기 파괴성을 보여 준다. 그들의 공동 저서이기도 한 이러한 '계몽의 변증법'의 뿌리는 인간의 이성과 이에 근거하는 실천에 있다. 동일화, 계측화, 유용성으로 환원되는 특정한 형태의 이성은 역사적으로 형성되었고, 수천 년 동안 인간의 본성뿐 아니라 자연에 대한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인간은 자신이 힘을 행사하는 대상으로 소외됨으로써 자신의 힘을 증가시킨다." 과학, 기술, 후기 자본주의, 문화 산업 등을 통해 강화도니 이러한 이성의 파괴성은 20세기에 야만으로 변화한다. "완전히 계몽도니 지구는 의기양양한 파멸의 조짐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계몽은 자기 자신을 의식해야만 한다." 철학은 "이성의 자기비판"이 되어야 한다. 

구조주의(신구조주의)는 많은 과학적, 철학적인 분파를 가지고 있다. 구조화된 질서로서의 언어는 구조주의(신구조주의)의 중심 연구 대상이다. 구조적인 분석은 근원적으로 언어학(소쉬르, 1857~1913)에서 뿐만 아니라 민속하겡서도 시도된다. "다양한 현실을 드러내 주는 질서의 형성과 기능 방식이 어떤 구조적인 요소들로 구성되었는지 정확히 알 때에만 우리는 바로 그 질서의 형성과 기능 방식을 파악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나는 출발한다."(레비스트로스, 1908) 구조주의자들에 따르면 비가시적이고 비의식적인,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 구조들, 즉 객관적인 법칙성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프랑스의 몇몇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1960년대 후반에 프로이트의 '무의식' 또는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를 동기로 삼아, 자율적인 주체인 인간을 내쫓는 권력의 선구조들을 탐구한다. "모든 인간적 인식, 모든 인간적 실존, 모든 인간적 삶, 그리고 아마도 인간의 생물학적인 유전 역시 구조들 속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 즉 서술 가능한 관계들에 예속되어 있는 요수들의 형식적인 전체 속에 얽혀 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나느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주체가 아니며, 또한 주체이면서 객체가 아니다. 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구조들의 집합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구조들에 대해 인간은 사유하고 기술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그것의 주체, 그것의 지배적인 의식은 아니다."(푸코, 1926~1984) 인간은 익명적인 규칙들의 산물이다. 그는 더 이상 중심에 서 있지 않다. 주체는 '탈중심화'된다. '인간과의 결별'(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에 비유한) '인간의 죽음'은 신구조주의에서 전통적인 형이상학, 역사, 주체, 의미의 표상 등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낳았다. "인간은 해변의 모래에 그린 얼굴처럼 사라졌다.

" (푸코) 데리다의 언어 비판(1930~2005) 역시 새로운 시도를 옹호한다. 글자에 대한 구어, 즉 로고스의 전통적인우위가 역전된다. '로고스 중심주의'를 '해체(Dekonstruktion)'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언어, 문자, 진리가 새롭게 사유된다. 또한 철학적, 문헌학적 실험의 '놀이'에서 텍스트들은 병렬적으로 놓이며(철학, 과학, 문학 작품 등 모든 텍스트가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 없이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는 뜻- 역자 주),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어떤 확고한 의미도 부여받지 못했던 그런 다른 방식의 '글 일기'를 실험한다. "우리가 듣게 될 죽음의 종소리는 의미와 뜻과 지시체의 종말을 알린다(데리다, Derrida)." 텍스트들은 난공불락이다. "나는 내가 말하지 않는 것을 대략적으로 만들고, 내가 만든 것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데리다, Derrida)

포스트모던의 철학적인 특성은 니체와 하이데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신구조주의와도 연결되어 있다. 포스트모던은 정치적인 압제와 테러에 연결되는 형이상학, 즉 역사적인 총체적 해석과 비전으로부터 결별한다. 포스트모던은 이성의 거대한 통일적인 진보의 프로그램, 인간성의 추상적인 해방과 행복, 진보에 낙관적인 계몽의 유혹, 혹은 구원을 약속하는 마르크스 주의의 유혹 등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포스트모던'이란 메타 차원의 설명에 더 이상 어떤 믿음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리요타르, 1924~1998) 포스트모던의 근본 태도는 다원주의인데, 이 다원주의에서 이질성, 논쟁, 차이, 심미적 경험 등의 의미가 산출된다고 한다. "우리는 전체와 일자에 대한 열망, 개념과 감성의 화해에 대한 열망, 투명하고 소통 가능한 경험에 대한 열망을 위해 비싼 대가를 지불했다. ... 이에 대한 대답은 전체(총체성)에 대한 전쟁이다. 우리는 묘사할 수 없는 것을 위해 증언하고, 논쟁을 활성화시킨다."(리요타르) 이성은 퇴각하고, 무장 해제되어 '허약한 사유'(바티모, 1935~)로, 폭력 없이 숙고하는 사유로 바뀐다. 놀이적이고 비구속적인 것은 '작은 이야기들'로의 입구를 발견한다. 누락, 이탈, 역설뿐만 아니라 작은 무의미와 큰 기지, 그리고 조롱도 이 범주에 속한다.

새로운 해석학. 가다머(1900~2002)는 딜타이와 하이데거에 의지하여 이해 이론을 발전시킨다. "이해는 인간적인 삶 자체의 근원적인 존재 특성이다." 언어성은 인간의 세계 경험의 특징이다. 왜냐하면 세계의 현존은 언어적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언어 속에서 세계가 묘사된다." 그런데 언어의본성은 가장 어두운 것에 속한다. "철학적 해석학의 최고 원칙은 내 생각에 따르면, (그리고 그 때문에 그것이 해석학적 철학인데), 우리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가다머)

새로운 비판 이론. 하버마스(1929~)는 이전의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보여 준 비판 이론의 부정적이고 탈출구 없는 역사철학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탈형이상학적 사유에 기대어 '근대의 기획'을 동시대의 공격과 상대주의로부터 변호한다. "내 말은 근대와 그 기획 자체가 상실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근대의 기획이 가져왔던 혼란, 과장된 지양의 프로그램의 오류로부터 배운다는 것이다." 계몽의 이념은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이성의 척도, 확신을 주는 보편적인 담론은 새로운 문맥이 형성되었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 "인권은 그 올바른 해석을 위한 문화들 사이의 지속적인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견을 가진 이들이 자신이 겪은 것과 그들이 억압적인 정부에 대해 요구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언어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뿐 아니라 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과 열악한 삶의 상황으로부터의 인간 해방은 아직 그 힘을 상실하지 않았다."(하버마스).

신실용주의. 로티(1931~)는 미국의 실용주의적이고 분석적인 전통을 유럽의 해석학적인 전통과 연결시킨다. 그는 듀이,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등과 관련이 있지만, 또한 세계 문학의 위대한 소설들과도 관계한다. 이러한 소설에서 그는 다른 인간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라는 세련된 감정을 기대하낟. 실용주의에 대한 그의 새로운 해석은 덜 무자비하고, 연대가 더 많은 개선 가능한 민주주의 사회를 위해 실천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감수성 있는 태도를 추구한다. 인식과 지식이 아니라 교육과 대화가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탈형이상학적인 사유가 여기서 성찰된다. "형성되고 있는 철학은 객관적인 진리를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가동시키고자 한다."(로티)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이 시대의 사상에서 잊을 수 없는 인물에 속한다. 그녀의 삶에는 20세기의 가장 어두웠던 현실이 짓누르고 있다. 그녀는 전체주의 시대에 독일계 유대인으로 태어나 1941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극단적 악의 문제를 다루면서 정치적이고 사회비판적인 참여 사상가로 활동한다. 1951년 3월 4일, 그녀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용기를 보여 준 자신의 친구 야스퍼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극단적인 악이 실제로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잉여적으로 만드는 현상과 관련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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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중국과 더불어 동양의 역사와 사상 및 문화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낟. 그렇기 때문에 동양, 특히 서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는 인도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3000년경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고대 이집트나 아시리아 그리고 바빌로니아의 문명과 거의 동시대에 발전된 문명으로 볼 수 있다.  49



베다 시대

아리아인은 원래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 남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살다가 대략 세 갈래로 민족의 이동을 시작했다. 그 중 일부는 유럽으로 이동하여 유럽 아리아인이, 그리고 일부는 페르시아 지방으로 들어가 페르시아 아리아인이 되었으며 나머지는 인도로 들어와 인도 아리아인이 되었다.


베다 시대에 이르면 사회적으로 다양한 도시 국가들이 형성되고 사상적으로 종래의 브라흐마니즘을 넘어 <우파니샤드>와 같은 정통 사상이 그리고 슈라마니즘이라하는 비정통 사상이 함께 나타났다.


베다 문화는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의 종교와 철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61


<리그베다>는 신들에 대한 찬가의 모음으로 신이 제사장에 등장하도록 청하는 승려들이 부르는 노래이다.

<사마베다>는 <리그베다>에서 뽑아낸 노래 가운데 일정한 선율로 노래를 부르는 승려들의 노래모음이다. 

<야주르베다>는 희생제 의식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 업무를 담당하는 승려들에게 필요한 부분이다.

<아타르바베다>는 주문과 마법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 

<브라흐마나스>는 다양한 희생제 및 제사의식에 필요한 방법과 규칙을

<아라냐카>는 진리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색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모든 인도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우파니샤드>는 <아라냐카>의 철학적 사상을 더욱 발전시키는 한편 인간의 궁극적 목적인 해탈과 깨달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64-65


전기 베다 시대가 아리아인의 인도 침입을 통한 이주 및 초기 정착 시기라고 한다면 후기 베다 시대(기원전 1000~기원전 600년)는 인도에서의 영역 확장을 통한 아리아인의 본격적인 정착 시기이다.  85


결혼 역시 오직 같은 카스트 안에서만 가능하며 남자보다도 여자의 경우 자신보다 낮은 계급과 결혼하면 모든 사회적 지위와 권리를 박탈당할 뿐만 아니라 그 집단에서 추방되었다. 반대로 남자의 경우에는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여자와 결혼할 수 있었다.  92



엄격한 결혼의 제한은 맨 처음 아리아인과 비아리아인 간의 혼혈을 방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혼혈 현상이 심화되면서 카스트 제도는 더욱 복잡하고 다양한 직업에 의한 세습 및 신분 제도로 변질되었다.


인생의 시기를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각각의 시기에 인간들이 행해야 할 의무를 결정했다.

아슈마라라고 불리는 이러한 시기 구분은 인생의 시기를 대략 100년으로 간주하여 각각 25년식의 네 단계로 나누었다.

첫 번째 25년의 시기는 스승 밑에서 베다 및 삶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는 학습기이다. 이 시기에는 스승과 함께 생활하면서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 전반에 대한 지식과 제식 그리고 사회인으로서의 의무 등을 배운다.

학습기를 무사히 마친 학생은

두 번째 단계로 이제 집으로 돌아가 결혼을 하고 자신의 가정을 꾸려 나가는 가정생활기로 들어간다. 이 단계에서는 결혼을 통한 자손의 출생과 같은 개인적인 임무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자신이 행해야 할 여러 가지 공공의 의무도 함께 수행한다.

그리하여 대략 50세 정도가 되어 자식들도 무사히 출가시키고 또한 사회적인 의무도 어느 정도 완수하고 나면 

세 번째 단계인 은둔기에 들어간다. 은둔기는 부인과 함께 숲속으로 은퇴하여 사회적인 모든 의무를 벗어나 높은 진리를 추구하는 일종의 종교적 수행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은둔기를 넘어서면 남은 인생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혹은 자신이 깨달은 진리와 함께 홀로 방랑의 길을 떠돌아다니는 유랑기에 접어든다. 유랑기에는 말 그대로 철저하게 무소유의 자유를 누리면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그 상태대로 영혼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시기가 되면 성스러운 어머니의 강, 갠지스로 가서 이 생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한 뒤 그녀의 품에 안긴 체 다음 생을 위한 긴 휴식에 들어가거나 깨달음을 얻어 고통스런 세계로의 방랑을 멈춘 채 영원한 행복에 안주한다.  93-94


처음 두 단계에서는 주로 세속적인 요소를, 나머지 두 단계는 탈세속적이고 정신적인 면을 갖는다. 생의 네 가지 덕목이 된다.

물질적인 재물을 의미하는 아르타(Artha), 성적 욕망을 포함한 사랑을 뜻하는 카마(Kama), 도덕 윤리적 법칙과 규칙을 의미하는 다르마(Dharma), 최상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 또는 해탈을 의미하는 모크샤(Moksa)로 이루어진다. 

이 가운데 아르타, 카마, 다르마는 생의 네 단계 가운데 주로 전반부의 두 시기에 행해지는 부분이며 모크샤는 후반부의 시기에 지켜야 할 일종의 의무이다.  94


후기 베다 시대에는 급변하는 사회적 변화만큼 종교나 철학과 같은 사상 분야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 사상의 많은 부분이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된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99


전체적으로 후기 베다 시대의 전반기에는 제식주의가 형성되었고 후반기에는 <우파니샤드>의 철학적인 사색이 태동함으로써 오늘날의 힌두이즘을 낳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후기 베다 시대의 인도 사회는 부족국가의 틀을 벗어나 통일된 왕조를 형성하기 시작한 일종의 격동기이다.  102



비베다시대

기원전 6세기 전후의 시기.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부분의 중요한 철학, 종교적 운동이 나타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그리스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를 거쳐 소크라테스로 이어지는 철학적 사색이, 페르시아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그리고 중국에서는 유가의 시조인 공자와 도가 사상의 노자가 등장했다.


전통에 대한 비판과 거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종교가 바로 불교와 자이나교이다. 실제로 인도의 사상이 보다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사색의 틀을 갖추게 된 것도 불교와 자이나교의 영향이다.

인도의 철학과 사상의 근간인 <우파니샤드> 역시 이 시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겻으로 브라흐만 자체의 자기 반성적 요소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107


아지비카 학파는 반브라흐마니즘을 주장. 모든 존재의 행위는 인간 스스로 혹은 절대자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보았다.

차르바카 학파는 가치론적인 면에서는 모든 존재가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한 어떠한 경우에도 미래란 불가능하며 오직 현재, 지금 이 순간만 사실로 존재할 뿐이기 때문에 도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도덕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현실의 감각적 쾌락만이 인간 삶의 최고 목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10


자이나교는 마하비라라고 불리는 한 위대한 인물의 깨달음에서 비롯된 종교이다.  117

자이나교는 생명 있는 존재를 해치지 말 것, 거짓말을 하지말 것,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지 말 것, 사유재산을 소유하지 말것, 금욕을 지킬 것 등 다섯 가지 기본적인 계율을 가르쳤다.

불살생 또는 불상해의 계율을 가장 강조했다. 

후에 자이나교는 오직 흰색 옷만 입는 백의파와 어떠한 옷도 걸치지 않는 나의행파로 나뉜다.  119


자이나교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를 자아(Jiva)보다 낮은 위치에 두었다.

자신이 전생에 쌓은 업에 의하여 현생의 삶이 결정되기 때문에 누구든 전생에 쌓은 카르마를 보다 빨리 해소하고 현생에서 더 이상 카르마를 쌓지 않는다면 모두 다 해찰이 가능하다고 마하비라는 주장했다. 그는 또한 제사의식이나 희생제와 같은 행위는 절대로 해탈에 도움을 줄 수 없으며 오직 올바른 지식과 올바른 행위ㅏ 그리고 올바른 믿음만이 진정한 깨달음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121


고타마 싯다르타극 기원전 6세기경 지금의 네팔 지역에 있던 조그만 왕국(일종의 공화국) 카필라바스투의 왕자로 태어났다.  122

35살에 보리수 아래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드이어 붓다(깨달은 자)가 된 고타마는 베나레스 근처의 사르나트(녹야원)에서 처음 설법.

쿠시나가르에서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붓다의 가르침은 아소카 왕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아 인도 전역(

붓다의 입멸 후 200여 년이 지난 뒤)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퍼져나가 오늘날의 세계종교로까지 성장했다.  125


붓다의 사색은 기본적으로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모든 인간들이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과 그에대한 구체적인 해결에 관심을 집중했다. 사성제(四聖諦), 삼법인(三法印), 연기설(緣起設)등으로 일컬어지는 붓다의 근본 사상은 바로이러한 토대 위에서 형성되었다. 

그렇다면 고통과 괴로움은 왜 발생하는가?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 때문이라고 말한다.  126


붓다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자기가 아닌 다른 존재에 의지하거나 그의 도움을 받으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팔정도라는 8가지 올바른 실행방법.

인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올바로 볼(正見)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올바로 생각(正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가지를 토대로 올바른 말(正言)과 행위(正行, 正業)를 함으로써 올바른 생활(正命)을 영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올바른 노력(正精進)과 올바른 마음가짐(正念) 그리고 올바른 정신집중(正定)이 필수적이다.  127


개혁적인 성향의 브라흐만 사제들은 그간의 폐단을 직시하고는 문제점을 개혁하기 시작했다. 

<우파니샤드>는 종래의 제식 주의를 비판 혹은 수정하면서 한편으로는 슈라마니즘으로 대변되는 비정통 사사의 요소를 접합시킨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 결과 <우파니샤드>는 브라흐만과 아트만의 합일이라는 인도만의 독특한 사상을 낳았다.  130-131


이와는 달리 불교는 종래의 지방어를 통한 가르침을 포기하는 대신 지성인들의 표준어인 산스크리어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기원후 1세기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대승불교 운동은 붓다를 깨달은 사람에서 점차 신격화하는 형태를 취함으로 절대신에 의존하는 브라흐마니즘과 유사한 종교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과 상인 계급의 재정적 도움으로 매우 크게 성장했다. 그럼으로 승려들 각자는 일반인을 위한 대중적 노력보다 붓다가 거부했던 형이상학적인 논의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이비 시작했다.  131


불교의 전통에 의하면 아소카가 전적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힘이 아닌 법에 의한 통치를 펴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다름아닌 칼링가 전투였다.  150

전 인도를 그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는 만족감에 그는 만명에 웃음을 가득 띄운 채 자신이 이룩한 위대한 과업을 다시 한 번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적들의 시체가 널브러진 싸움판 속을 유유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별안간 그의 가슴에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회의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피를 쏟으며 신음하고, 찢겨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바라보면서 아소카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채 몸을 숙였다. 

"보라! 이처럼 죽어 나자빠진 수많은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이렇게 자신들의 목숨을 바쳤을까? 정의, 진리, 법, 과연 어느 것이 그들의 목숨을 이렇게 내던질 수 있게 만들었을까? 그래, 적어도 군인들은 자신들의 의무 때문에 이렇게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치자. 하지만 여기 그들보다 더 많은 브라흐만 사제와 불교 승려들을 포함한 수행자들 그리고 일반인들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분노한 병사들의 눈먼 칼과 창끝에 아무런 이유 없이 목숨을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그렇게 이름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은 전쟁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거나 알 필요조차 없다. 그들의 눈에 비친 전쟁은 위정자들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한 가지 방편일 뿐이다. 자신들이 벌인 전쟁에 대해 위정자들은 겉으로는 정의와 법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소수 권력가들의 끝없는 욕심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은 일상 생활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쟁의 와중에도 오직 생존만이 목적이며 그것을 위해 평생을 몸부림칠 뿐이다."  152


비무에 다음과 같은 심정을 토로했다.

"... 칼링가를 정복하면서 나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브라흐만 사제들, 슈라만 수행자들 그리고 스승의 말에 복종하면서 올바르게 행동하고 가족과 친구와 친지들 그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대하던 민간인들까지 이유없이 죽거나 부상당해 고통받는 모습을 바라보던 나의 가슴에는 정말 온통 후외와 슬픔밖에 남지 않았다... 앞으로 나는 오직 진리에 맞는 법만을 실천하고 가르칠 것이다..."

이후 불교에 귀의한 아소카는 참다운 법과 정의에 의한 정치를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스스로 불교도가 된 아소카는 그럼에도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함께 인정하면서 타종교에 대한 배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53-154


아소카 왕이 불교를 국교로 채택한 이면에는 브라흐만 사제 계급으로부터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이루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강력한 무기와 군대를 바탕으로 한 힘의 정치가 아니라 참다운 사랑과 자비에 근거한 아소카의 정치는 이전의 인도 역사뿐만 아니라 이후의 역사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예라고 할 수 있다.  155


카니슈카 왕은 쿠샨 왕조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그의 치제 기간 중에 쿠샨 왕국은 가장 크게 번성했다.  162

쿠샨 왕조는 비록 인도에서 북부 지역의 지배에 그쳤음에도 인도의 역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65


찬드라굽타 1세는 장자가 아니라 가장 유능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에 따라 왕위를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사무드라 굽타(340~380년)이다.

'인도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릴 정도로 커다란 야망을 가지고 있던 사무드라굽타는 계속되는 전쟁에서 연승 행진을 거듭했다.

포로로 잡은 왕들 가운데 그의 위세에 굴복하여 기꺼이 충성을 맹세하는 자들에게는 영토를 합병하는 대신 조공을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172

인도 전역에 걸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사무드라굽타였지만 직접적인 통치는 주로 갠지스 강 유역과 힌두스탄 평야에 한정되었다. 그 이유는 아직 왕조의 기초가 확고하지 못하여 거대한 영토를 직접 다스리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173


사무드라굽타는 직접 정복하지 않은 지역의 여러 왕국들과도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등 주변 국가와 평화적인 외교 정책을 펴나갔다.  174


찬드라굽타 2세는 데바굽타(신의 굽타), 데바라자(신의 왕), 데바스리(신성한 존재)라고 불리는 한편 스스로는 위대한 통치자를 상징하느 비크라마디티야(무예와 용맹의 태양)라고 불렀다. 그는 부왕과 마찬가지로 유능하고 뛰어난 통치자인 동시에 용감한 정복자였다. 그는 결혼을 통한 평화적인 방법과 군사력 두 가지를 모두 활용하여 부왕으로부터 물려받은 광활한 영토를 더욱 넓히는 데 힘썼다.  175

찬드라굽타 2세 때 굽타 왕조는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177


굽타 왕조 시대는 인도 역사상 황금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엄격한 왕정 제도가 확립되었고 중앙과 지방의 행정 조직도 상당히 유기적으로 체계화되어 있었다. 정치적 안정은 상업의 발전과 더불어 문학, 예술, 종교, 건축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굽타 왕조의 지배력이 직접적을 영향을 미친 곳은 북인도 지역에 한정되었다.   183-184


굽타 왕조는 인도 사회에 몇 가지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첫째는 굽타 왕조 시대에 브라흐마니즘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힌두이즘의 형태로 부활되었고, 둘째는 이민족의 유입이 보다 활발했으며, 셋째는 무역과 상업의 발달로 인해 전체적인 경제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 세 가지 요인은 부와 재력을 바탕으로 한 상인 계급의 지위를 신장시켰으며 인도 문화의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187


굽타 왕조에서는 종래의 베다 중심의 브라흐마니즘을 보다 세속적인 종교의 형태로 변화시키면서 오늘날의 힌두이즘이라고 하는 인도 고유의 종교, 철학 사상을 발전시켰다. 힌두이즘에서는 우주의 창조주로서 브라흐마, 우주의 유지자인 비슈누 그리고 파괴자인 시바의 세 신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 신들은 하나의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신의 세 가지 표현이라는 삼신일체 신앙을 갖는다. 

시대와 상황 그리고 그를 예배하는 사람들의 바람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그의 모습을 지상에 드러내는데 이것을 아바타라(화신)라고 말한다.  188


바가바타 종교는 <바가바드 기타>에 나타난 크리슈나의 가르침을 근거로 한다. 원래<바가바드 기타>는 <마하바라타>라는 인도의 대서사시 가운데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마하바라타>는 <라마야나>와 함께 인도의 2대 서사시로 그리스의 위대한 작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ㅔ이>에 버금가는 작풉은로 평가 받는다.  200


굽타 왕조 시대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만큼 문학과 예술 방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룬 시기였다.

산스크리트어가 국가적인 언어가 되고, 인도의 2대 서사시 <라마야나>와 <바가바드 기타>가 오늘날의 형태로 완성되기도 했다.  207


예술 방면에서도 화폐, 동굴 사원과 벽화, 테라코타와 바위에 새겨진 다양한 그림등이 대표적이며 특히 탑 , 수도원 등 건축물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211


인도에서의 철학과 종교의 목적은 해탈의 추구에 있다.  221


종교적인 부분으로는 삼신일체(트리무르티)라는 힌두교의 독특한 신관이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 즉 힌두교는 우주를 창조하는 브라흐마, 창조된 우주를 유지하고 관장하는 비슈누 그리고 파괴를 담당하는 시바, 삼신일체의 교리를 형성했다.

이 가운데 비슈누 신을 섬기는 바이슈나비즘은 주로 북인도 지방의 대중적인 종교가 되었으며 시바 신을 믿는 쉐이비즘은 남인도 지방에서 널리 성행했다.  223


인도 철학은 크게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정통 철학(아스티카)과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비정통 철학(나스티카)으로 구별된다. 이 가운데 정통철학은 다시 베다에 직접적으로 근거를 둔 미맘사와 베단타 철학 그리고 실제로 베다가 아닌 다른 독립된 근거를 가지고는 있지만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느 상키야, 요가, 느야야, 바이쉐쉬카 철학으로 나뉜다.

이에 반해 비정통철학은 불교와 자이나교 그리고 차르바카라는 유물론 계통의 철학으로 전체적으로 슈라마니즘의 전통을 잇고 있다. 슈라마니즘은 대체로 아리아인의 인도 침입 이전부터 존재했던 금욕주의 혹은 고행주의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상키야, 요가의 사상과도 연관을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정통의 육파철학이 체계화되고 브라흐마니즘이 새롭게 힌두이즘으로 변모하면서 힌두교와 불교의 논쟁도 이전보다 훨씬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224


남인도 지역은 적어도 마우리아 왕조의 통일국가 이전까지는, 북인도 지역이 아리아인 문화가 중심인데 비해 주로 드라비다인 계통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235


인도 무굴 제국은 우즈베크 공화국에서 태어난 바부르로부터 시작했다. 1483년 2월 우즈베크의 시르 강 상류 지역에 위치한 페르가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티무르의 5대 손이며 어머니는 칭기즈칸의 15대 손이었다.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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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에서 고전을 친근하게 접할 수 있도록 기획한 안내서이다. 'e시대의 절대사상'이라는 이름으로 고전 시리즈를 기획하여 출판한 책이다.
그렇기에 책은 읽기가 편하다. 
개인적으로 1부의 내용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저자가 사기를 접하게 된 계기로 시작하여 사기가 어떠한 도움을 주게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에 대해 그리고 사기 전체 130편의 형식에 대한 설명들이 쉽지 않은 사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특히나 사기의 형식을 설명하는 파트는 열전 70편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것 같다.
시대적인 배경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읽었기에 전후 문맥을 모두 비교해 보면서 읽은 몇개의 장 이외에는 연결이 잘 되지 못하였는데, 설명을 보면서 시대적인 구분과 열전의 종류들을 구분해 보면서 좀더 사기에 다가가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책을 선정했을 때 총 3부의 구성 중에 1부의 부분만을 보려 했다. 
사기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설명은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2부인 본문 발췌 부분도 읽고 싶어 졌다. 그리고 마지막 3부의 사마천 연보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사기를 읽으면서 좀 난해 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런 부분들에 대해 더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사기가 쉽지 않은 내용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고전이 고전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그 만한 이유가 있고, 깊이도 있다는 점을 알게해준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좀 더 독자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을 이다. 
쉽게 접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해설. 
그것이 1부에 있기에 분명 미숙한 나에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사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라면 해설서에 따라 여러 챕터를 나누어서 읽어본다면 덜 힘들게 읽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처음 사기를 접했을때의 생각이 난다. 무작정 덥벼들어 고행하듯이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그렇게라도 끝까지 읽어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중도에 덥어버렸다면 다시금 사기를 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는 한국인이므로 이제 우리 입장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몇 가지로 나누어 본다.
첫째, 현실적인 중국인의 코드를 읽을 수 있습니다.
둘째, 사마천의 <사기>는 중국 문화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셋째, 중국인의 통일 관념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33-43
(사실 이부분은 밑줄 긋는게 큰 의미가 없다 11페이지 전체를 읽어야 좋을것이라 생각든다)

'항우 휘하에서도 계포는 용맹으로써 이름을 날렸으니 장사이다. 그런데도 구차하게 노예가 되다니 무슨 망신인가. 그러나 계포는 자신의 실력을 믿었기에 그렇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태연했다. 언젠가는 실력을 발휘할 날이 있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 제국의 명장이 되었다. 생각이 있는 자는 함부로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찮은 인간들이 감상에 젖어 자살하곤 하는데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막다른 골목에 몰려 뭘 더 해보려고 해도 실력이 없기 때문이다.' 유심히 읽어보면 사마천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49

<사기>를 읽으면 실패한 인생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띕니다. 역사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데 <사기>에는 왜 이렇게 실패한 인생이 많을까요? 사마천은 세속덕인 성공과 실패에 착안하여 인물을 선별한 것이 아닙니다. 설령 실패했다 하더라도 실패한 인생으로부터 역사적 의미를 발굴하여 그들이 현실에서 당한 고난과 고통을 후세의 명예로 위로하고자 했습니다.  54


알고 보면 간단한 <사기>의 형식
본기(本紀)
우선 12편의 '본기(本紀)'를 설정하여 황제(黃帝)로부터 한무제까지 12명의 제왕을 기준으로 국가의 중대사를 연대별로 간명하게 정리했습니다. 편년체로 이루어진 공자의 <춘추>형식을 인물 위주로 개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기'는 무슨 뜻일까요? 본(本)은 근본, 기(紀)는 기(記)의 뜻으로 기록. 그러므로 본기는 '근본이 되는 기록'입니다. 따라서 '본기'에는 정책의 반포 및 개정, 관리의 임명과 파면, 정잰이나 자연 재해, 외교 등의 대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건은 국가의 흥망성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그와 관련된 결정권은 항상 항제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황제의 일대기를 연대순으로 서술하면서 연관된 국가 대사를 언급하면 가장 근본적인 기록이 되는 것입니다. 
본기는 시대순으로 배열된 것입니다. 
사기는 통사이고 '본기'는 기본적으로 편년체 형식이므로 중간에 연도가 비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기> 12본기에는 진본기, 항우본기, 여태후본기 도 있습니다. 물론 당시 천하의 권세가 항우와 여태후에게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126-127

표(表)와 서(書)
10개의 표(表)를 만들었습니다. 태사공자서에서 그는 '같은 시대인데도 연도 표기가 달라서 연대를 명료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10표를 짓는다.
예를들어 춘추전국시대 각 제후국들은 제각기 연도를 기록했기 때문에 상호 공유하는 사건의 흐름이나 인물의 행적등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 힘듭니다. 따라서 각 제후국의 연ㄷ를 통합하여 표로 만들어 주면 언제 무슨 대사건이 발생했는지 훑어만 보아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사마천이 표를 만든 이유는 기본적으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표의 역할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본기나 세가 혹은 열전 등과 상호 보완되도록 기획하였습니다.  130
8개의 서(書)를 마련하여 국가의 중요한 제도를 테마별로 정리하였습니다.  133

세가(世家)
세대 세(世), 집 가(家). 대대손손 이어지는 가문이란 뜻입니다.
북극성과 바퀴 축은 '12 본기'에 등장했던 황제 혹은 패왕을 말하며, 28개 별자리와 30개 바퀴살은 그 황제나 패왕을 보필했던 제후 왕, 혹은 공신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34

열전(列傳)
전형적인 인물을 통하여 시대상을 보여주는 참신한 역사 기술 형태입니다.
열(列)은 열거하다, 전(傳)은 전하다. 그러므로 '열거하여 전한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열거하여 누구에게 전한다는 것일까요? 의로운 사람, 탁월한 사람, 기회를 포착하여 대성한 사람들의 행적을 열거하여 후세에 전한다는 뜻입니다.

백이, 숙제, 노중련, 굴원과 같은 인물은 의로운 사라에 속합니다. 
관중, 범저, 여불위, 이사와 같은 인물은 기회를 포착하여 대성한 사람에 속합니다.
손자, 오자서, 소진, 장의, 인상여, 유경과 같은 인물은 물론 탁월한 인물에 속합니다. 
그렇지만 잔혹한 혹리(酷吏)나 곡학아세의 공손홍, 그리고 호모에 가까운 영행 집단, 조폭에 가까운 유협(遊俠)집단, 코미디언에 가까운 골계(滑稽)집단, 심지어 점쟁이 군상들은 과연 어디에 속할까요? 그러므로 '열전'의 인물은 윤리 도덕적 판단으로 선정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상을 반영하거나 역사적 의미를 기준으로 기록했던 것입니다. 

열전의 인물은 누구 하나라도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갖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이 점을 파악해야 <사기>를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열전'이 '본기'나 '세가'보다 훨씬 흥미로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열전'에 기록된 인물의 신분을 극히 다양합니다. '본기'에 기록된 제왕, '세가'에 기록된 후작들을 제외한 인물 중에 의롭거나 탁월하거나 대성한 사람들이 '열전'에 수록되엇ㅅ브니다.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인물들이 다양하게 활약했던 기록이므로 '본기'나 '세가'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흥미진진한 것입니다.  139-141

열전 70편의 배열 원칙, 시대순 밑 역사적 사회적 의미
연대를 기준으로 하되 인물의 성격이나 사회적 의미를 참고하여 배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연대 별로 7대 범주로 나누고 그 의미를 약술해 보기로 하지요.

1. 백이열전, 관안열전, 노자한비열전, 사마양저열전. 손자오기열전, 오자서열전, 중니제자열전(7편)
상고시대부터 춘추시대까지의 인물입니다. '백이열전'을 첫머리로 장식한 것은 심오한 뜻이 담겨 있지요. '열전'의 작성 기준과 의미를 담았으므로 요즘으로 말하면 책 첫머리의 '일러두기'라 봐도 무방합니다. 관중과 안영은 법가, 노자는 도가, 사마양저와 손자 그리고 오기는 병법가로서 춘추시대의 탁원한 인물들입니다. 오자서는 춘추시대의 명재상이며, 중니(공자)의 제자들은 춘추시대의 유가 학파들이죠.

2. 상군열전, 소진열전, 장의열전, 저리자감무열전, 양후열전, 백기왕전열전, 맹자순경열전, 맹상군열전, 평원군우경열전, 위공자열전, 춘신군열전, 범저채택열전, 악의열전, 염파인상여열전, 전단열전, 노중련추양열전, 굴원가생열전(17편)
전국시대 인물들입니다. 전국시대의 국제정세는 진(秦)나라가 주도했으므로 진나라 인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상군(=상앙)은 진나라가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수훈을 세웠고, 소진은 합종 전략, 장의는 연횡 전략을 각각 구사했던 바 모두 진나라가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저리자, 감무, 양후, 백기, 왕전 등은 모두 진나라의 명재상이거나 맹장ㄷㄹ로서 진시황제의 천하통일에 초석이 되었습니다. 나머지 인물들은 진나라를 제외한 함곡관 동편의 여섯 제후국 인물들입니다.
맹자와 순자(=순경)는 전국시대 유가 학파의 계승자 겸 집대성자였으며, 맹상군, 평원군, 위공자(=신릉군), 춘신군은 모두 진나라에 대항했던 각국의 귀공자들이었습니다. 범저와 채택은 객경(客卿)으로서 진나라 귀족 양후를 축출하고 대성했으므로 그 뒤에 수록했습니다. 악의는 연나라 명장이며, 염파와 인상여는 조나라 명장 및 명재상이었고, 전단은 제나라 명장으로 그 나라의 흥망성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걸출한 인물이었습니다. 노중련과 굴원은 의로운 인물이었는데, 노중련열전과 추양과 가생을 더불어 기록한 이유는 비슷한 계열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3. 여불위열전, 자객열전, 이사열전, 몽염열전(4편)
진시황제의 천하통일이 임박했던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의 격변과 관련되 인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상으로서 진시황제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여불위, 진시황제를 암살하려 했던 형가의 행적, 진시황제의 천하통일과 통일후 일련의 역사적 조치에 깊숙이 관여했던 이사, 진 제국의 건설 및 만리장성 축조와 관련되 몽염 등을 차례대로 기록하였습니다. 

4. 장이진여열전, 위표팽월열전, 경포열전, 회음후열전, 한신노관열전, 전담열전(6편)
진 제국이 무너지고 항우와 유방의 초한(楚漢)쟁패가 시작 되었습니다. 항우와 유방은 이미 '본기'에서 다루었으므로 이 시기에 활약했던 전국시대 각 제후구그이 후예를 중심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장이와 진여는 전국시대 조나라, 위표는 전국시대 위나라, 한신은 전국시대 한나라, 노관은 전국시대 연나라, 전담은 전국시대 제나라의 후예들로 각기 연고지이ㅔ서 활약하였습니다. 한편 팽월과 경포 그리고 회음후는 모두 유방을 도와 한 제국 건립에 공한한 비유씨(非劉氏) 제후 왕들이며 모두 반란죄로 처형되었습니다. 이상 6편의 열전을 초한쟁패의 혼란기에 활약했던 풍운아들입니다.
 
5. 번역등관열전, 장승상열전, 역생육가열전, 부근괴성열전, 유경숙손통열전, 꼐포난포열전(6편)
한고조 유방이 한 제국을 건립할 때 음양으로 수훈을 세웠던 공신들이며 한고조에 이어 여태후 시절까지 충성을 다하여 한 제국의 유지 및 발전에 공헌한 인물들입니다.

6. 원앙조착열전, 장석지풍당열전, 만서장숙열전, 전숙열전, 편작창공열전, 오왕비열전, 위기무안후열전(7편)
한 제국 효문제와 효경제 시절의 문신과 무장들을 다루었습니다. 

7. 한장유열전, 이장군열전, 흉노열전, 위장군표기열전, 평진후주보열전, / 남월열전, 동월열전, 조선열전, 서남이열전, 사마상여열전, 회남형산열전, / 순리열전, 급정열전, 유림열전, 혹리열전, / 대원열전, 유협열전, 영행열전, 일자열전, 귀책열전. / 화식열전(22편) 
한무제 시절의 다양한 인물을 기록하였습니다. 위 22편을 인물의 성격이나 행적으로 다시 세분하면 대략 5개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장유열전, 이장군열전, 흉노열전, 위장군표기열전, 평진후주보열전 등 5편은 북방 기마민족 흉노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남월열전, 동월열전, 조선열전, 서남이열전, 사마상여열전, 회남형산열전 등 6편은 흉노를 제외한 주변 이민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순리열전, 급정열전, 유림열전, 혹리열전 등 4편은 한무제 시기의 정치적 색채를 드러내는 인물을 다루고 있습니다. 대월열전, 유협열전, 영행열전, 골계열전, 일자열전, 귀책열전 등 6편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인물 중심으로 엮은 것입니다. 마지막 화식열전은 한무제 시기를 중점적으로 서술했지만 경제를 중심축으로 하여 사마천 시대까지의 중국경제 문제를 인물에 기대어 서술한 내용입니다.  142-146

열전의 표제 기준
열전의 표제는 일정한 기준을 적용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관직으로, 작위로, 봉읍지로, 호치으로, 성명으로, 성씨만으로, 시호로, 생(生)이나 자(子)는 '선생님'의 뜻으로 다양하게 적용했습니다. 
관직, 작위, 봉읍지, 시호 등으로 명명한 것은 일종의 예우며, 생(生)이나 자(子)로 불러주는 것도 일종의 존칭이라 하겠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사마천은 그대로 채용했을 것입니다.  147-148

열전의 종류 : 전전, 합전, 유전, 부전

전전(專傳) : 전적으로 한 명만을 기록
'전전'이란 오로지 한 명만을 전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오자서열전, 상군열전, 소진열전, 위공자열전, 전단열전, 여불위열전, 회음후열전, 한장유열전, 사마상여열전 등이 그러하지요.

합전(合傳) : 둘 이상을 대등하게 기록
'합전'이란 두 사람 이상을 대등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관안열전, 노자한비열전, 손자오기열전, 중니제자열전, 저리자감무열전, 백기왕전열전, 맹자순경열전, 평원군우경열전, 범저채택열전, 염파인상여열전, 노중련추양열전, 굴원가생열전, 정이진여열전, 위표팽월열전, 한신노관열전, 번역육가열전, 부근괴성열전, 유경숙손통열전, 계포난포열전, 원앙조착열전, 장석지풍당열전, 만석군장숙열전, 편작창공열전, 위기무안후열전, 위장군표기열전, 평진후주보열전, 회남형산열전, 급정열전 등이 그러하죠. 
표제부터 두 명 이상의 인물 성씨 혹은 성명을 나열했기 때문에 첫눈에 '합전'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합전'으로 처리했을까요? 
대략 다음 4가지 이유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합전의 4가지 이유
첫째, 학술적으로 연관된 인물.
노자한비열전, 손자오기열전, 중니제자열전, 맹자순경열전, 편작창공열전 등이 그러합니다. 한비자는 법가이나 그 원류는 도가의 노자입니다. 손무, 손빈, 오기는 모두 병법가입니다. 공자의 제잗르은 당연히 공자를 원조로 삼았습니다. 맹자와 순자는 전국시대 유가학파의 거벽입니다 편작과 창공은 명의들입니다. 이들의 학문은 서로 깊은 연관성이 있으므로 합쳐서 서술한 것이죠. 
비슷하거나 관련된 학술 인물을 합쳐서 서술하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노자한비열전처럼 원류로부터 영향까지 그 맥락을 살필 수도 있고, 중니제자열전처럼 해당학파 제자들의 활약상을 통하여 유가사상이 중국의 정치 및 사회이ㅔ서 주도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었던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업적이 비슷한 인물. 
관안열전, 백기왕전열전, 번역등관열전, 역생육가열전, 유경숙손통열전, 장석지풍당열전, 위장군표기열전 등이 그러합니다. 관중과 안영은 제나라 명신들로 진시황제의 천하 통일에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번쾌, 역상, 하후영, 관영 등은 전투로 유방을 보좌하여 한 제국 건립에 공한하였습니다. 역이기, 육가는 변사로서 정적을 설복하거나 정책을 제시항 한 제국의 건립 및 안정에 공헌하였습니다. 유경은 관중 땅에 도읍지를 정하는 문제 및 흉노와의 선린 정책을 건의하였고, 숙손통은 조정과 종묘의 예법을 마련한 점에서 모두 한 제국의 안정에 공헌하였습니다. 정석지와 풍당은 한문제에게 직언하며 공정한 법 집행과 사심 없는 행정으로 청명한 정치를 일구었고, 위청과 곽거병은 한무제의 친척으로 흉노와의 전투에서 수훈을 세웠습니다. 이렇듯 업적이 비슷한 인물을 합쳐서 기록하였습니다. 이렇게 처리하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업적이 비슷하므로 중복된 사건은 간명하게 처리하면서 편폭까지도 줄일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해당 시기에 어떤 인재와 어떤 정책이 주효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셋째, 삶이 비슷한 인물. 
범저채택열전, 염파인상여열전, 위표팽월열전 한신노관열전, 회남형산열전, 장이진여열전, 원앙조착열전, 위기무안후열전, 평진후주보열전 등이 그러합니다. 범저와 채택은 모두 변사로서 진나라에서 대성했다가 적절한 시기에 자리를 양보하고 산뜻하게 물러났습니다. 염파와 인상여는 서로 양보하고 협력하며 조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었습니다. 위표와 팽월은 초한상쟁 시절에 전국시대 위(魏)나라 지역을 근거지로 항우와 대항하여 한 제국의 건립에 간접적으로 공헌했습니다. 한왕 신과 노관은 흉노에 투항했고, 그 자손들은 다시 한 제국에 귀의하였습니다. 회남여왕 유장 및 회남왕 유안, 그리고 형산왕 유사는 모두 한고조 유방의 종친으로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였습니다. 장이와 진여는 전국시대 위(魏) 지역의 명사들이니데 문경지교에서 철천지원수가 되었습니다. 원앙과 조착은 질투와 알력으로, 위기후 두영과 무안후 전분은 외가 신분으로 암투를 벌이다 자멸하였습니다.. 공손홍과 주보언은 주변 이민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의견의 합치와 불일치로 암투를 벌이다 공멸하였습니다. 이들의 삶은 상호 긴밀하게 ㅇㄴ관되었거나 업무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공통점이 있죠.
삶이 비슷한 인물을 합전으로 처리하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기전체란인물 위주의 서술입니다. 그런데 사건을 서술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관련된 인물을 언급하게 됩니다. 중요한 인물일수록 같은 사건을 동일하게 되풀이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중복 서술은 불가피해집니다. 이런 경우 삶이 비슷한 인물을 합전으로 처리하면 관련된 사건이나유사한 사건의 경우 일괄 서술할 수 있으므로 사건의 전후맥락을 분명하게 전개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편폭 또한 크게 절약할 수 있습니다.
넷째, 성품이나 인생관이 비슷한 인물.
계포와 난포는 모두 협객으로 한때 노예로 전락했으며 의리와 신의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만석군 집안과 장숙은 모두 신중한 성격과 돈후한 인품으로 그 당시 군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급암과 정당시는 인품을 도야하며 청렴한 정치에 힘써 세인의존경을 받았습니다. 노중련과 추양은 평민으로서 세도가에게 당당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였습니다. 굴원과 가의는 능력과 인품을 고루 갖추었지만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울적하게 생을 마감했으며 두 사람 모두 사부(辭賦)의 대가였습니다.
성품이나 인생관이 비슷한 인물을 합전으로 처리하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해당 시기에 어떤 인재가 어느 분야에서 어떤 역할을 햇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복잡다단한 인물 군상이 간명하게 정리되므로 다연히 편폭도 깔끔하게 줄어듭니다.
이상으로 보건대, 두 사람 이상을 묶어 한 편으로 처리했던 기준은 학술적인 관계, 비슷한 업적, 비슷한 삶, 비슷한 성품이나 인생관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관안열전, 노자한비열전, 손자오기열전, 백기왕전열전, 노중련추양열전, 굴원가생열전, 편작창공열전 등에서 보다시피 수십 수백 년 떨어진 인물을 한 편으로 처리하기도 합니다. 여러 명을 한 편으로 처리하면서도 어떻게 흔적 없이 통합시켰는가 하는 문제는 역사를 보는 안목과 문학적 수양이 관건인데 이런 문제에 있어서 사마천의 혜안과 박력이 돋보입니다.

부전(附傳) : 덜 중요한 관련 인물을 덧붙여 첨부
'부전'이란 중심인물 밑에 덜 중요하나 인물을 첨부하여 서술하는 형식입니다. 따라서 등장인물들이 동등한 가치를 갖는 '합전'과는 구별됩니다. 역사에는 중요한 인물과 사건 이외에도 덜 중요한 인물이나 덜 중요한 사건이 있게 마련이죠. 덜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을 동일한 비중으로 모두 살리려다 보면 기전체와 같은 인물 위주의 역사 기술에서는 편폭이 폭증하여 전체적으로 잡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중요 인물의 행적을 집중적으로기록하면서 그와 관련된 인물을 가볍게 언급해주면 편폭이 간결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덜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도 경제적으로 안배할 수 있게 됩니다. '부전'은 기저체 형식에서 이렇듯 무척 경제적인 서술법이므로 비단 열전에만 국한되지 않고 본기, 세가, 서, 표에서도 적절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관안열전은 관중과 안영을 중심인물로 서술하면서 자연스럽게 포숙아와 월석보도첨부하여 기술하였습니다. 포석아와 월석보는 관안열전에 첨부되면서 그 인물과 행적이 후세에 전해진 셈입니다. 오자서열전의 신포서와 백공, 상군열전의 공숙좌와 조량, 맹상군열전의 풍환, 평원군우경열전의 모수와 이동, 위공자열전의 후영과 주해 그리고 모공과 설공, 춘신군열전의 이원과 주영, 범저채택열전의 수가와 위제, 염파인상여열전의 조사와 조괄 그리고 이목, 전단열전의 태사교녀와 왕촉, 여불위열전의 노애, 이사열전의 조고, 장이진여열전의 관고와 조우, 회음후열전의 괴통, 역생육가열전의 주건, 원앙조착열전의 등공, 평진후주보열전의 서락과 엄안 등등이 모두 관안열저노가 마찬가지로 관련된 인물을 덧붙여 서술해준 경우입니다.
'부전'에서 첨부하는 인물은 그저 관련된 인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 인무로가 비슷한 유형의 인물도 덧붙여 언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자손이나 친척을 더불어 언급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전(類傳) : 비슷한 직업이나 유형의 인물을 통합하여 기록
'유전'이란 비슷한 직업이나 유형의 인물을 모아 기록한 열전입니다. '유전'의 유(類)는 종류의 뜻으로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성어를 떠올리면 쉬비게 이해될 것입니다. 자객열전, 순리열전, 유림열전, 혹리열전, 유헙열전, 영행열전, 골계열전, 일자열전, 귀책열전, 화식열전 등 10편이 이에 해당됩니다. '유전'의 명칭만 봐도 특수한 계층이나 집단이 역사와 사회에 간과할 수 없는 존재로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전'의 설정은 전체 역사를 거시적으로 조감하고 섬세하게 분류하여 간명하게 통합해야 된다는 점에서 사마천의 예리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포인트입니다.
'유전'은 그저 비슷한 유형의 인물만을 모아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인물 집단이 역사와 사회에 하나의 계층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며 또한 정치와 관련되지 않은 집단은 하나도 없습니다.  148-158

사마천의 의도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기록한 것은 아니엇으나 결과적으로 인물 위주의 역사기록 형식 중에서 <사기>보다 완벽한 모습이 없었으므로 후세 사람들은 정사(正史)의 모델로 여거 대대로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삼국사기>와 <고러사>도 <사기>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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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책을 멀리하는 사람이면서 아직은 어린 나이라면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올해 20살이 되는 누군가가 무슨 책을 읽느냐 묻기에 사기를 읽는다고 하니, '흠 내가 아는 사기는 사기치는 건데..'하며 말꼬리를 늘렸다.
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사기>는 모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는 역사서이다.
워낙 유명하기에 사마천의 삶도 대부분 알고 있다. 궁형 즉, 거세되는 형벌을 당하면서까지 목숨을 부지하여 아버지인 사마담에게서 물려받은 역사서를 완성한다. 그것이 유명한 <사기>이다.  

몇 년만에 이 책을 다시금 읽는다.
책을 선정한 이유는 최근에 사기를 다시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계획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예전에 읽은 <사기>의 내용이 별로 기억나질 않고 그때와 지금 읽는 것은 차이를 가질 것이란 생각으로 그런 생각을 하였다. 이전에는 을유문화사의 사기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 번에 책을 선택한 건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가면서 미처 책 선정을 하지 않고 갔서 책을 둘러보다가 사기를 고른 것이다.
두꺼운 책들 사이에 얇은 책이 있다. 그것이 이 책이다. 물론 3권으로 엮여 있는 책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나는 얇은 사기라는 생각에 책을 선택한 것이다.
책이 잘 넘어간다. 들고 다니기에도 부담스럽지 않기에 골랐다. 3권을 모두 대출하고 예전에 읽은 을유문화사의 사기열전도 함께 대출하여 돌아왔다. 집에서 내가 이 책들을 모두 읽을것 같지는 않고 무엇을 할까 하고 다시 생각하다가 처음에 택한 얇은 사기를 선택하자하고 펼쳤다.
사기의 본기(12권) 열전(70권) 표(10권) 서(8권) 세가(30권) 을 모두 담았을리 없을 두께이기에 어떻게 서술되어 있는지 넘겨보는데, 본기 열전 세가를 딱히 구분하지 않고 서술함으로 편하게 접할 수 있게 만들어 진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 권마다 부록이나 설명들을 첨부하여 구성되어 있다.
3권을 모두 합하면 60권의 내용을 담고 있다. 

1권에서는 전체 사기의 대략적인 설명과 중국 역사의 큰 흐름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고 사기를 시작한다.
중국 역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앞서 소개되기에 <사기>를 좀 더 편하게 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삼황오제 부터 중국 최초의 국가인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서주, 춘추시대, 전국시대, 진나라, 한나라 까지 간단한 설명이지만 흐름을 보여줌으로 <사기>의 내용을 따라 가기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이어서 사기의 17가지의 내용이 나오고 책이 마친다.

읽은 소감으로는 쉽게 볼 수 있다는 느낌이 들어 마음에 든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야기의 진행을 따라 읽어가다보면 어느새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가볍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3권을 읽고나면 다시금 <사기>전편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렇다면 <사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읽기에 부담을 가지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곳곳에 <사기>로 시작된 고사성어들이 나오는데 2권의 부록에서 정리를 해두었기에 여기서 기록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이유없이 몇 가지만 적어본다.

탕은 '맑은 물을 바라보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백성들을 살펴보면 그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39

춘추시대는 제후들간의 각축이 치열했다. 하여도 그 근저에는 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제거한다는 봉건적 질서가 깔려 있던 시대였다. 즉 왕을 보호한다는 대의명분 아래 패권을 잡은 제후들도, 상대방을 멸망시키기 보다는 공존하면서 질서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국시대에는 명목상의 대의명분마저 사라지고 오직 먹느냐 먹히느냐의 사력을 다한 생존의 싸움만이 남게 되었다.  57

청나라의 학자 고염무는 그의 저서 <일지록(日知錄)>가운데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차이를 설명한다.
첫째, 춘추시대에는 예(禮)를 숭상하고 신(信)을 중히 여겼으나, 저눅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둘째, 춘추시대에는 주 왕실을 숭앙하였으나, 전국시대에는 그런 일이 없다.
셋째, 춘추시대에는 제사를 중시하고 빙향(聘享)을 중히 여겼으나, 전국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넷째, 춘추시대에는 가문을 존중하고 성(姓)과 씨족을 따졌으나, 전국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다섯째, 춘추시대에는 나라 사이의 교제에 연회가 있었으며 시를 읊을 만한 여유가 있었으나, 전국시대에는 그러한 여유가 완전히 사라졌다.
여섯째, 춘추시대에는 외교적 차원에서 부고책서(赴告策書, 신임장)가 있었으나, 전국시대에는 없어졌다.  58

고조는 서기전 195년에 사망하였다. 재위 기간은 천하통일 후 고작 8년이었다. 그러나 한 왕조는 전한 후한을 합하여 400여년에 걸쳐 중국을 지배하였다. 한나라가 중국 역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한 것이어서 한(漢)이라는 글자는 이후 중국을 대표하는 글자로 자리잡게 되었다. 지금도 중국의 문물을 말할 때 한문(漢文), 한족(漢族)등으로 표현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67


소진과 지백은 그 지혜가 출중(出衆)했지만 이익을 탐하는 데 마음이 빠져 있었기에 죽음을 당했소. 일이 매우 잘 되어갈 때 본연의 자세로 되돌아가 낮은 자리에 만족하거나 물러나 자중해야 하오.  241

슬기로운 사람도 천 가지 일을 생각하면 반드시 한 가지 실수가 나오고(천려일실 千慮一失), 어리석은 사람도 천 가지 일을 하다 보면 반드시 유익한 일을 하게 된다.  337

속담에도 '남의 수레를 얻어 탄 자는 그의 걱정을 제 몸에 실어야 하고, 남의 옷을 얻어 입은 자는 그의 근심을 함께 안아야 하며, 남의 음식을 얻어 먹은 자는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했소, 이익에 사로잡혀 의리를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오.  344

노자가 말한 '최고의 덕이란 언뜻 보아서 덕으로 보이지 않기에 더욱 덕이 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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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위한 학문인 인문학을 알아가는 것은 어쩌면 인간으로 태어나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인간과 인간이 어울려 살아가고 소통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인간이 인간은 이해하고 살아간다는것은 매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엄청난 발전의 속도 속에 그것에 허덕이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어쩌면 별 생각없이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이라고 하면 누구나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인문에서의 생각은 생활에서 무의식속에 이루어지는 단순한 선택에 의한 생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좀더 깊이있는 생각 공감하고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는 생각, 그것은 쉽게 이루어 지지 않으며, 그것이 가능해 지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인문학이 필요할 것이다.
흔히 말하는 '문사철' 문학과 역사와 철학..
인문의 틀이다. 세 가지에 대한 고루한 지식이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는 한 분야라도 고려해 보는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그 점에 대해 이 책은 잘 정리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인문학의 어려움을 기본적인 지식의 부족에서 시작하는데, 저자는 15개 테마의 기본지식을 고려하고 있다. 표현대로 하자만 '바탕지식'이다.
기본적인 틀을 알고 깊이 있게 가자는 주제로 15개의 바탕지식을 설명하고 있다.
인문학에 대한 전체적인 흐름을 보지 않은 나로서는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었다.
물론 체계적인 강의나 토론회가 아니라면 모든 테마를 두루 살피기는 그것도 개인적으로 살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바탕지식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관심있는 테마들을 하나씩 선정하여 알아가면서도 이웃테마들을 함께 생각해 보게 하는 면에서 도움이 많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이 세상 어느 지식 하나 인문학이 아닌 것이 없다. 어느 분야 하나 인간을 위하지 않은 지식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5

서양인을 만난다면 그들 문화를 형성해온 두 기둥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즉, 그리스 로마 신화, 그리스 철학과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14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는 <새로운 미래가 온다>에서 21세기에 요구되는 중요한 능력으로 'High Concept'(창의성)과 'High Touch'(좋은 인간관계를 설정하는 능력)을 들고 있다. 
로버트 라이시는 <부유한 노예>에서 다니엘 핑크의 두 인간형을 'Geek'(엉뚱한 사람, 기발한 사람)와 'Shrinks'(사람들의 마음속을 꿰뚫는 사람, 인간을 잘 이해하는 사람)로 표현한다.  15
수학여행의 기원은 18세기 영국 귀족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 영국의 귀족들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가정교사를 붙여 교육에 힘썼고, 소년기를 벗어나면 유럽 대륙으로 수학여행을 보냈다. 기간은 3년으로 프랑스, 독일과 같은 국가들을 돌며 여러 가지 경험과 함께 문물을 배웠다. 이때 꼭 빠지지 않는 것이 지성인들과의 만남이었다.  18

모든 게임의 시초는 전쟁의 역사로부터 비롯된다.  33
사마천은 '대게 서민들은 상대방의 부가 자기 것의 10배가 되면 이를 헐뜯고, 100배가 되면 이를 모서워하여 꺼리며, 1,000배가 되면 그의 심부름을 기꺼이 하고, 10,000배가 되면 그의 노복이 된다. 이것이 만물의 이치다.'라고 말한다.  52

신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한다.  59
동양삼국에 고사성어가 있다면(표의문자), 서양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있다.(표음문자)  65
동양의 고사성어가 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면, 서양의 신화는 인간과 신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69

성경에서는 조직경영의 중요 원칙 중 하나인 'Span of Control(통제범위의 원칙)' 즉 한 사람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사람 수에는 한계가 있다는 원칙이다.  79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 중 가장 중요한 개념은 다름 아닌 연기(緣起)다. 연기의 의미는 나와 다른 이들이 모두 연결되어 우리 모두는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의미이고, 나아가서는 나와 우주가 하나라는 의미다. 하나는 같은 입장을 의미한다.  158

1997년 영국은 18년 만에 노동당 정권으로 토니 즐레어 총리는 정치 스승인 앤서니 기든스의 주장을 반영해 18년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던 제 2의 길인 신자유주의에 부분적인 수정을 가한다.
규제를 없애 사회 구석구석까지 경쟁체계를 도입해 생산성을 높이고 경제 활력을 높이는 것도 좋지만, 빈곤계층에 대한 안전판을 마련하는 것 역시 사회의 안정과 안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한 것이다. 
신 자유주의에서 약간 방향을 튼 새로운 정책은, 자기 상승의 기회를 확보할 수 있는 교육과 인간적 삶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의료과 같은 부문은 시장에 맡기지 않고 정부가 직접 복지정책으로 관여하는 것이었다.
제1의 길인 복지개념, 제2의 길인 신자유주의에 이어, 제3의 길로 부르는 이 길은 신자유주의와 같은 명확한 개념이 없다.  225
현실적으로 힘을 가진 미국과 같은 나라가 생각을 바꿈으로써 신 자유주의는 방향을 틀 수도 있다. 아니면 신자유주의의 문제점들이 극단적으로 노출되어 호되게 당하고 난 뒤 할 수 없이 방향을 틀 수도 있다.  226
IMF는 2차 대전 직후에 설립된 국제기구인 만큼 당시 국제사회의 패권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국가에 대한 긴급금융과 같은 주요 사안은 85% 이상의 의결을 필요로 하는데, 미국이 바로 절묘하게도 17%의 결정권을 쥐고 있다.  234

16세기 태어나 처음으로 사회계약을 주장한 홉스(1588~1679년)가 개인의 생명보호를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내세웠다면, 로크(1632~1704년)는 한 걸음 더 나가 사회계약의 중심을 재산권보호에 두었다.  243
사회계약이 장자크 루소(1712~1778년)로 넘어가면서 한 단계 더 발전하여 이제부터는 '자유'가 중심 사상을 이룬다.  244

일본의 역사는 나라를 다스리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국가 형태이전(BC1만년~ AD3세기)
2 천황통치시대(4세기~1192년)
3 막부시대(1192~1868년)
4 메이지 유신 이후(1868~현재)    259
전쟁은 기본적으로는 전력 싸움이다. 그리고 그 전력의 바탕은 다름 아닌 지식욕과 학습이다.  273

우리나라 역사는 크게 7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삼국시대 이전( ~BC18년)
2. 삼국시대(BC18~676년)
3. 남북조시대(676~936년)
4. 고려시대(936~1392년)
5. 조선시대(1382~1910년)
6. 국권피탈기(1910~1945년)
7. 대한민국(1945~현재)

중국의 역사는 삼황5제의 전설시대와 하 은 주 진 네 왕조시대를 거쳐 
1. 한(BC207~AD220년)
2. 위진남북조(220~581년)
3. 수(581~618년)
4. 당(618~907년)
5. 오대십국시대(907~960년)
6. 북 남송시대(960~1279년)
7. 원(1279~1368년)
8. 명(1368~1644년)
9. 청(1644~1911년)
10. 중화민주 및 중화인민공화국(1911~현재)

일본의 역사는 청황통치시대를 지나 막부시대를 맞이하는데, 막부는 
1. 가라쿠마 막부(1192~1333년)
2. 무로마치 막부(1338~1467년)
3. 전국시대(1467~1573년)
4. 아즈치,모모야마시대(1573~1603년)
5. 에도시대(1603~1868년)     306

성업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항상 3대 또는 최소 2대가 걸린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장수왕 두 왕의 재위기간 100년(391~491년)
백제는 동성왕, 무령왕, 성왕 3대 재위기간 75년(479~554년)
신라는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3대 76년(500~576년)에 걸쳐.  320
재주복주(載舟覆舟)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어엎기도 한다'  324


의미를 따지고 전례를 찾고 논리를 동원하고 큰 방향을 모색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일에는 인문학이 적격이다.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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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일 년이 가도록 책 한 권 읽지 않는 사람들도 많지만. 제대로 독서를 해보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꽤 많습니다.  
책의 마지막 장까지 도달하는 것, 꼼꼼하게 읽으면서 씹고 또 씹어 단물을 빼 내는 것, 작가의 생각을 쫓아가려고 욕심을 내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때나 아무데서나 마음대로 읽고 싶은 것을 읽으면 됩니다.
책을 사랑한다면 마음이 끌리는 대로 읽으면 됩니다.  6
책을 읽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보다 유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책을 통해 알게 되는 것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자신에 대한 이해일 겁니다.  6


<사막별 여행자> '삶이 우리에게 선물한 아름다움을 향해 열려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17
<못난이 만두 이야기> '당신의 배려와 인간적인 여백은 사람들 가슴속에 기억됩니다.  19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누군가와의 짧은 첫 만남 뒤에는 충분히 생각할 여유와 인내를 갖지 못하는 -좀더 관대해지지 못하는 -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28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 '불행을 모르면 행복도 모른다.'  37
말에 베이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무관심의 대상이 되거나 철저히 거절당하는 것입니다  41
<나이 드는 것의 미덕> '얼마나 오래 사느냐와 얼마나 인생을 즐기느냐는 다르다.'  47
<Be Happy!:행복을 부르는 주문> '가만히 있어서는 즐거움이 찾아지지 않는다면 적극적으로 창조하십시오.' 50
<생각노트> ' 남의 성공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타인의 성공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이 나이가 되어서야 알것 같다. 젊은 시절에는 언제나 초조했고, 타인의 성공을 도저히 기뻐할 수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럴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54
wn1 - 타인의 성공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행복하지 않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나에게 여유가 조금 없을 뿐입니다. ...
<긍정적인 말의 힘> '당신의 말에는 어떤 향기기 납니까?'  59
<정호승의 위안: 산문이 있는 풍경>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고 빠름은 부지런함이 아니다. 느림은 여유요 안식이요 성찰이요 평화이며, 빠름은 불안이자 위기이며 오만이자 이기이며 무한 경쟁이다.'  63
<인생에 관한 17일간의 성찰> '휴식은 게으름과는 다르다.'  63
성공이라는 목표를 정해서 달려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성공이 무엇을 위한 성공인지를 먼저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야 성공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79
<페퍼민트:나를 위한 향기로운 위로> '저를 도와주실 수 없어요. 저의 문제는 내려야 할 역을 이미 오래전에 지나쳤다는 거예요. 기차 안이 너무 따뜻해서 도저히 내릴 수가 없었어요.'  81
<상상하여? 창조하라!> '직'의 사람은 소유충동에 매몰되어 있지만 '업'의 사람은 창조충동에 몰두한다. 생각하지 말고 상상하라!  86
<치유의 글쓰기> '타인으로부터 긍정의 말이 나오길 기다릴 필요 없이 스스로를 긍정하면 되지 않는가?'  88
문학이나 철학에 이르면 아예 진저리를 치는 세상에서 모든 것이 가벼워지고 희화화되는 마당.  93
<타짜> '미래는 우리를 위해 오지 않아. 다만 우리가 미래를 행햐 기는 것일 뿐.'  101
우리는 오직 나의 일밖에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일과 세상 모든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 합니다.  105
세상 속으로 끌어낸 것이 경청이었다면 세상을 알게 하고, 세상과 대화를 하게 한 것은 책이었습니다. 경청과 책은 세상과 통하게 하는 길입니다.  147
<한정록(閑情錄)>에서 허균은 책을 읽는 즐거움이 3가지 있다고 한다.
첫째 즐거움은 '맑은 날 반에 고요히 앉아 등불을 밝히고 차를 달이면 온 세상은 죽은 듯 고요하고 이따금 멀리서 종소리 들려온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정경 속에서 책을 펴 들고 피로를 잊는다.'
둘째 즐거움은 '비바람이 길을 막으면 문을 닫고 방을 깨끗이 청소한다. 사람의 출입은 끊어지고 서책은 앞에 가득히 쌓여 있다. 아무 책이나 내키는 대로 뽑아 든다. 시냇물 소리 졸졸 들려오고 처마 밑 고드름에 벼루를 씻는다. 이처럼 그윽한 고요가 둘째 즐거움이다.'
셋째 즐거움은 '낙엽이 진 숲에 한 해는 저물고 싸락눈이 내리거나 눈이 깊이 쌓였다. 마른 나뭇가지를 바람이 흔들려 지나가면 겨울새는 들녘에서 우짖는다. 방 안에 난로를 끼고 앉아 있으면 차 향기 또한 그윽하다. 이럴 대 시집을 펼쳐 들면 정다운 친구를 대하는 것 같다. 이런 정경이 셋재 즐거움이다.'  149
<책 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 '고전을 젖줄로 삼지 않고서는 더 이상 정신적 성장과 성숙이 어렵겠다는 느낌... 쏟아져 나오는 새 책들에 신물이 나고 반복되는 주제를 새롭게 포장해 내놓은 듯한 느낌이 들대 고전을 읽어야 한다.'  150
<종이위의 기적, 쓰면 이루어진다> '큰 승리는 넘어질 때마다 일어나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다.'  154
<더 이상 우울한 월요일은 없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아름다운 마무리> '사람은 책을 읽어야 생각이 기어진다. 좋은 책을 읽고 있으면 내 영혼에 불이 켜진다. 읽는 책을 통해서 사람이 달라진다.'  175
<책, 세상을 탐하다> '좋은 책이란 새로운 생각과 자극을 주는 것이니, 읽어야 할 책은 늘 우리를 유혹한다.'  176
<손녀딸 릴리에게 주는 편지> '우리는 나이 들수록 의문을 품지 않고, 질문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절대적이고 당연한 가치들만 존재하는 곳에서 능동적이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179
미래의 자기 모습을 알고자 함은 현재의 자기 모습이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183
'불경에 이런 말이 있더라고, 미래를 알고자 하는가? 그럼 현재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모습을 돌아봐라. 과거를 알고자 하는가? 그럼 현재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그 모습을 돌아봐라."  185
<성공을 부르는 웃음, 유머> '인간은 서로의 좋은 감정을 교환하며 살아가야 한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잘 맞출 수 있는 사람이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  196
<인생 수업>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사는것을 의미합니다.'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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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자유주의는 최소한의 국가 개입을 제외한 모든 개입에 반대하는 것을 주된 사상으로 주장한다....결론 자체보다 추론이 훨씬 더 중요하다. 
훔볼트의 [국가행위의 한계]에서 국가는 '인간을 국가의 자의적인 목적에 봉사하는 도구로 삼으면서 인간 개인의 목적은  간과하는' 경향이 있으며, 인간은 그 본질상 자유롭고 탐색적이며 자기 완성을 추구하는 조재이기 때문에 결국 국가는 대단히 반인간적인 제도라는 결론이 나온다.  10
만약 어떤 사람이 기계적인 방식으로 행동한다면, 즉 자기의 관심과 에너지와 힘으로 일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외부의 요구나 지시에 반응할 뿐이라면, '우리는 그 사람이 하는 일은 존경할지 모르나 그 사람의 인격은 경멸한다.'  13
훔볼트는 만약 자유가 자유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재 자체까지도 생각할 수 없도록 사회의 토대를 파괴한다면 사회생활에 대한 국가 개입은 정당하다는 데 동의한다.  19
고립된 인간은 속박 당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  20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무능력은 도덕적·지적 힘의 결핍에서만 생겨날 수 있다.  42


신자유주의는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를 정의해 주는 패러다임이다. 정확하게는, 상대적으로 소수인 이익집단이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가능한 한 많은 분야에서 사회르 ㄹ지배하도록 허용한 정책과 조치를 가리킨다.  97
신자유주의는 기업의 힘이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경격적인 시대를 대표하는 이념이다.  99
신자유주의는 시장 경제를 반대하는 세력을 억누르면서, 단순한 경제시스템을 넘어 정치와 문화까지 지배하는 시스템으로 자리잡고 있다.  
정부의 역할은 민간의 재산을 보호하는 것에 국한되어야 하고, 정치적 간섭은 최소화해야 한다. 그것이 최선의 정부다.  100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들어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즁요하면서도 필연적인 부산물 즉, 탈정치화된 국민들의 무관심과 냉소를 낳게 된다.  101
신자유주의 선거의 선택과 토론의 질은 여러 면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라기보다는 일당독재이던 공산주의 국가에 더욱 비슷하다.  102
신자유주의는 시민이 아니라 소비자를 만들어내며, 공동체가 아니라 쇼핑센터를 만들어낼 뿐이다. 그 결과로, 기가 꺾이고 사회적인 무력감을 호소하며 뿔뿔이 흩어진 개인만이 존재하는 원자사회가 남게 된다.  103
수많은 사람들에게 민주주의가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절대적인 초석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런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는 투쟁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104
촘스키는 자유시장이라는 신화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지식인이기도 하다.
시장은 결코 공정한 경쟁터가 아니다. 막강한 시장 지배력을 지닌 거대기업이 대부분의 경제를 지배한다.  105
신자유주의 이념에 도취된 기업도 정부만큼이나 위선적이다.  106


인간의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야말로 촘스키 정치사상의 뿌리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이러한 낙관주의에서 출발해 인간의 자유와 창조성, 다양성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는 정치형태를 모색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이다.  114

촘스키 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누구나 타고난 정치사상가이며, 주류 정치권과 대기업 집단, 매스미디와 교육을 장악한 인텔리 전문가들의 선전공세를 벗어나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면 세상은 바뀔 수 있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나은 정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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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서문
표현의 자유가 완벽하게 보전 될 때 민주주의(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가)의 완성을 기대할 수 있다는 노학자의 열정이 그의 모든 글에서 느껴진다.  4
촘스키는 미국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글을 읽으면서 '미국은 범죄국가'라는 깨달음을 얻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촘스키적 분석 방법을 우리 현실에 대입해 볼 수 있어야 한다.  6

프롤로그
그는 도사(導師)도 아니고 철인(哲人)도 아니며 정치 투사도 아니다. 우리에게 생각의 방향을 인도해주는 지식인이다. 
그가 전하는 중요한 교훈의 하나는 기존의 생각을 곧이 곧대로 믿지 말고, 말을 앞세우는 사람들을 절대 믿지 말라는 것이다.  11
어떤 것도 확실하고 당연한 것이라고 믿지 말라는 것이다. 확인하고 심사숙고 하라는 것이다.
"누구라도 내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다면, 정치계와 사회집단이 우리에게 감추고 있는 것을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만의 생각만이 필요합니다."
노암 촘스키의 책들은 미국의 정치 상황을 명쾌하고 정밀하게 분석하기도 하지만, 서구 민주주의에서의 언론과 지식인의 역할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2
누군가에게 생각을 표현할 권리를 인정한다고 그것이 곧 그의 생각에 공감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말했다.  16

지식인의 역할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수천 년전부터 그랬지만, 지식인의 역할은 민중을 소극적이고 순종적이며 무지한 존재, 결국 프로그램된 존재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22
사회가 자유로워 질수록 무력을 사용하기가 어렵습니다.  25
나는 다시 한번 강조해두고 싶습니다. 사회가 민주화될 때, 달리 말해서 국민을 강제로 통제하고 소외시키기 힘들 때 엘리트 집단이 선전이란 방법을 동원합니다.  28
선생님은 '지식인'을 어떤 사람이라 정의 하십니까?  마음가짐으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문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지지하게 고민하고 나름대로 이해하고 통찰해 보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합니다. 
저명한 지식인이 곧 진정한 지식인이라 말할 수 는 없습니다. '테크노크라트 지식인'이라 부를 수 있는 사회에 분란의 씨앗을 뿌리는 무책임한 지식인도 있기 때문.  31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37

나는 포리송 사건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말했을 뿐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표현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는 생각만을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46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신자유주의 라는 이름 아래 시민의 권한을 개인 기업에 양도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입니다.  59
정교하게 꾸며진 전략의 결실이 바로 여론 조작입니다.  67
개똥철학 즉 사람드이 '순간적으로 유행하는 소지배와 같은 천박한 것'에 집착하는 인생관을 노동자들에게 심어주면서 장시간 노동을 기꺼이 수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타인에 대한 연민, 타인과으 연대 등과 같은 위험한 생각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요컨대, 인간의 가치를 완전히 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68
교육제도가 선별 작업을 합니다. 교육제도가 순종과 복종을 조장합니다. 이런 제도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배제됩니다.  71

자본주의는 없다.
순수한 시장경제의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87
사람은 현지 국민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할 수 없지만, 유기적 존재인 기업은 그런 권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89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90
우리는 시장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장기적 결과가 무시되어 정책 결정에 실질적인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대중의 각성과 경계 이외에 현 사회의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은 없습니다.  96

보이지 않는 세력이 경제를 지배한다.
회계상의 이동이 존재하는 이유는 부자나라들이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대기업이 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국민의 몫을 훔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입니다. 국가의 역할이 바로 그것입니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국가의 역할 입니다.  111
미국을 대표하는 제약기업 중 두 회사, 릴리와 스미스클라인이 주의사항을 제대로 기재하지 안은 약품들을 유통시켜 8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이유로 기소당했습니다. 이때 두 회사는 80명을 죽인 대가로 겨우 8만 달러의 벌금을 물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길거리에서 80명을 죽였다면 곧바로 사형실로 직행했을 것입니다.  113
법이 존재하고 사법권이 운영되지만, 권력자에게는 커다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115
여론의 압력이 더해질 때는 어떤 일이라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117
여론이 잠에서 깨어나 압력을 가하면 모든 것이 별할수 있습니다.  119
무엇보다 국민이 깨어나야 합니다. 민중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121

이제는 거대 기업이 권력의 중심이다. 
20세기 초 미국의 연방최고법원이 기업에 인간과 똑같은 권리를 보장해 줌으로 기업이 법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125
그후로 기업은 눈에 띄지 않게 조금식 그 권리를 확대시켜 나갔다.  126
각 정부는 모든 협상을 비밀리에 진행합니다. 국민이 반대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27
기업계는 이제 국가 정책까지도 당당하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권력자에게는 국가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지배하고 비용과 위험을 국민에게 분산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130
문제는 세계화 입니다. 세계화는 결코 자연스런 현상이 아닙니다. 분명한 목표점을 지향해서 정치적으로 고안된 현상입니다.  133
시장이 인위적으로 조작된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요컨대 세계화는 미국식 모델을 전 지구에 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화의 목표이고 결론입니다.  135
세계화 자체는 상당히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세계화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통찰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세계화는 민간 기업과 국가가 쌍둥이처럼 밀착해서 주도하고 있습니다. 135
경제 규모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국민이 직접 소유한 부의 크기입니다.  136
1991년 부터 1998년까지 상위 0.5%는 더 부자가 되었습니다. 상위 10%에 속한 국민도 요령껏 재미를 보았지만, 다음 10%에 속한 국민 중 80~90%는 수입과 자산이 1998년까지 실질가치에서 떨어지는 아픔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몰론 그 아래 단계의 국민은 더 가난해졌습니다.  137
국민이 지배계급의 독선을 그대로 수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흐름을 거꾸로 뒤집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이런 흐름을 인식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조직화된 힘으로 그 문제를 주도 면밀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143

현실의 민주주의는 가짜다.
미국에 널리 알려진 이론으로 거의 공식화된 이론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국민이 당사자가 아니라 방관자에 머무는 체제'입니다.  149
군부가 이처럼 특별 대우를 받는 이유는? 사회가 자유로워질수록 지배계급이 공포심을 조장하고 선전에 열을 올리기 때문입니다.  155
정부는 야만적인 무력의 사용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도 국민의 정신 통제까지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더욱 교묘한 방법이 사용됩니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미국과 영국에서 홍보산업이 월등히 발전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는 겁니다.  157
기업의 입장에서 이상적인 세계는
첫째, 텔레지전입니다. 이것은 각 가정마다 잇어서 다른 사람들 심지어 가족과도 단절시키는 최고의 무기입니다.
둘째, 엘리트 계급이 우려하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158
정치계를 주름잡는 엘리트 집단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159
한 사람의 이름이 붙여진 것은 무조건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문제의 학설에 접근하는 순간부터 대단한 내용이 있을 것이란 선입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한 개인을 신격화하면, 그것은 조직화된 종교에 입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163
기존 생각에 변화가 있을 때 혁명이 일어납니다.  164
모든 형태의 지배구조를 찾아내서 정당성을 입증하도록 촉구해야 합니다. 
정당성을 입증할 수 없는 지배구조는 부당한 것입니다.  165
내란의 성격을 면밀하게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정치체제와 내란의 관계를 일반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167
때때로 국민은 세상사를 완벽하게 꿰뚫어보고 있지만 혁명세력으로 발전하지는 않습니다.
언론은 민간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일 뿐입니다.  168
대중이 혁명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69
적잖은 고통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행동하고 싶다면 주변의 소리에 귀를 막아야 합니다. 이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것을 자유롭게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런 곤경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조직화되는 것입니다.  171

언론과 지식인은 '조작된 동의'의 배달부다.
인터넷은 거대한 시장입니다. 대기업은 인터넷을 마케팅 수단으로 적극 홀용하려 합니다. 인간의 소외를 더욱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말입니다. 결국 대중이 이런 음모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인터넷의 미래가 달라질 것입니다.  181 
미국의 공영 텔레비전은 지나칠 정도로 편협한 시각을 보입니다.  185
권력층은 비난하지 않는다. 이거이 그들의 원칙입니다. 가난한 흑인은 암살해도 상관없지만 권력을 움켜쥔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191
정보(Information)는 적잘한 말이 아닙니다. 대개의 경우 정보라 표현되는 것은 '왜곡된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198
비판정신이 실종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속도 경쟁 때문이 아닙니다. 깊이가 없는 커뮤니케이션 탓입니다.  199
내 생각에, 현재으 인식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속도가 아닙니다. 깊이의 상실입니다. 피상적 수준에 머물고 있는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기억을 지워 없애려고 고안된 것입니다.  201

나는 미국이 지난 세월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잘 알고 있다.
자유를 소중히 생각하는 나라라면 언론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보장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이 자유를 얼마나 열망하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비밀로 감추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문서가 공개되어야 합니다.  220

에필로그 
양식(良識)만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평등과 자유를 추구한다고 믿을 만한 몇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폭력을 일삼는 친위대원이 될 수도 있고 성인군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환경, 그리고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230


촘스키는 모든 '주의(-ism)'와 이중 잣대를 거부한다.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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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의 마지막 챕터를 하인리히(H. W. Heinrich)의 1:29:300법칙으로 시작한다. 한 번의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면 이미 그 전에 유사한 29번의 경미한 사고가 있게 마련이고, 그 주변에 또다시 300번 이상의 징휴가 나타난 바 있다는 내용이다.
일본 도쿄 대학의 히타무라 요타로 교수 또한 " 한 번의 대실패, 대형사고, 멸망으로 이르는 길은 300번의 징후를 담고 있다." 고 말한바 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징후를 읽지 못한다고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로마 제국의 역사로 이어진다.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로마제국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또한 당시 흥륭과 쇠망의 기로에 서 있던 대영제국에 역사의 교훈과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서였다. 

먼저 사건은 국면을 만든다. 새로운 국면은 무수히 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 가운데 하나의 어떤 돌발적인 요소가 아니라 사건의 제곱, 혹은 사건의 돌연변이 속에서 새롭
게 타나난다. 
구조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국면들이 모여 새로운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미처 예기치 못한 국면의 돌발적 요소들이 돌출하여 한 켜 한 켜 쌓여 있던 지층들을 한 순간에 뒤엎으면서 새로운 구조를 형서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장기지속으로서의 역사이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 지지 않았다. 2차례의 포에니 전쟁으로 아프리카 전쟁으로 긴시간동안의 흐름에 의해 완성이 되었다. 그렇지만 외부가 잠잠해지면 내부가 시끄러워지는것.
민중파와 귀족파가 이념 대결을 시작하고, 스파르타쿠스를 주축으로 한 7만 노예읜 반란으로 혼란을 겪으며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 장군이 난을 제압하여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의 제1차 삼두정치가 기원전 60년에 시작이 된다. 
그러나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를 거쳐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를 거치면서 암살과 배신 그리고 횡포와 전쟁들로 시간이 흐른다.
그러다가 로마의 최전성기, 팍스로마나 시대가 시작되는데, 네르바를 시작으로 '5현제 시대'가 시작된다.
네르바(96~98년)는 2년 밖에 집권하지 못했으나 재정을 안정시켰고, 친위대의 전횡을 막는 업적을 세웠다.
트라야누스(98~117년)는 수도공사와 신항구 건설, 4대가도 정비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펼친다. 트라야누스 광장도 이때 완성하였다. 또한 정복사업으로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지를 정ㅂ고해 속주로 만들고 인도양까지 세를 넓혔다. 북쪽으로는 잉글랜드,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 서쪽으로는 대서양 연안,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제국의 판도를 만들었다.
하드리아누스(117~138년)는 관료조직정비 법률체계정리 국가 관리업무에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수시로 제국 전역을 순시하며 로마의 판도를 다졌고, 현재까지 전해지는 로마의 걸작들 대다수가 이때 만들어졌다.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년)는 황재가 되자 마자 자신의 전 재산을 국고에 헌납하고 법전 정비를 완료해 '팍스 로마나(Pax Rmana)'의 실현 근거를 마련했다 사실상의 로마 최고 전성기를 바로 이때였다. 
아우렐리우스(161~180년)는 스토아 철학의 신봉자로 철처한 금욕과 극기로 수도자적 삶을 산 황제이다. <명상록>은 스토아 철학의 정수이자 고대 로마 최고의 도덕독본이었다.

하지만 이후의 역사 다음황제 콤모두스는 국정보다는 빵과 서커스(검투)로 민중을 병들게 하였고, 페르티낙스 시대 부터는 명망의 길을 단계로 밟아 나갔다.
저자는 개략적인 왕들의 일들을 나열하는데, 이것들로 인해 로마는 점점 쇠퇴해가고 분열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반란과 침입들이 일어나고 결국은 로마가 나뉘고 서로마는 476년에 동로마는 15세기에 멸망하게 된다.

저자는 로마 제국은 인과론적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무게 때문에 내려앉은 것이라 표현한다.
흥륭의 극점과 쇠망의 개시는 공교롭게도 겹친다. 흘륭의 절정에 도달할 때, 동시에 쇠망의 징조도 마나탄다. 흥륭의 이유가 쇠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로마를 번영시킨 사건과 사건이, 그리고 로마를 흥하게 한 국면과 국면의 누적이, 장기지속의 과정 속에서 결국 로마라는 거대한 구조물을 내려 앉혔다는 역설적인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라면서 로마에 대해 많이 접할 기회가 있다. 학교에서 뿐아니라 책이나 영화, 그리고TV에서도 접한다. 유행이되고 있는 미드(미국드라마)에서도 로마에 대한 내용을 많이 다루고 있다. 롬이나 스파프타쿠스나...등등

이 책에서는 역사라는 주제로 로마의 흥륭과 쇠망의 과정을 통해서 서론에서 언급한것처럼 여러 연결고리들이 맞추어 지면서 흥하게 되고, 그로인해 여러고리들이 생겨나면서 쇠망의 길을 걷게 됨을 알리고 있다.

이처럼 우리역시 마찬가지로 그러한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흥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들을 한다. 하지만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이 놓치기에 이책의 내용은 생각을 자극해 주기에 좋은 책이라 생각된다.



...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를 읽고 많은 생각을 할 수있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정리를 해봄으로 다시금 좀더 깊이있게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생각들을 모두 글로 적지는 않았지만..
읽는 시간은 4시간정도 걸린것 같은데, 다시 글로 적어보는데는 10시간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그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물론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기에 다른것들을 희생시키기는 했지만...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다.

지금의 생각으로는 이 책으로 확장의 시간을 가져나갈 생각이다..
물론 모두 하기에는 시간이 꽤나 많이 필요할 것이기에 다 할것이란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확장하여 내것으로 만드는 시간은 분명히 가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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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강건성세(康健盛世)는 강희제(康熙帝, 1661~1722), 옹정제(雍正帝, 1772~1735), 건륭제(乾隆帝, 1735~1795)로 이어지는 청나라의 3대 133년간의 세를 칭하는 말이다. 
청나라 제4대 황제인 강희제가 국가의 토대를 마련했다면, 제5대 황제 옹정제는 건전한 기풍을 확립했고, 제6대 황제 건륭제는 선대의 정신을 계승해 강건성세를 완성시켰다.

오늘날 중국의 지도부가 벤치마킹하려는 인물이 바로 강희제이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는 강희제는 61년간이나 황휘를 지겼으며 청나라의 실질적인 창업주이기도 하다.
강희제 리더십의 원천은 무엇보다 이재를 중히 여기는 마음이었다. 
"천리마는 어느 시대, 어디에는 있었지만 천리마를 구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진 백락(伯樂 - 춘추시대 종자 좋은 말을 고를 때 귀신겉은 눈썰리믈 발휘했던 인물)은 언제나 드물다."
즉 인재는 어디에나 있지만 그를 알아보는 눈을 가진 이는 드물다 또한 알아본다 해도 그 인재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면 마음을 얻어야 한다.

강희제는 학구열이 높은 황제였다.
유학자들로부터 서양인 신부에게서도 배우는 등 학문의 분야를 가리지 않았고, 문화활동에 까지 관여하였다. 
그는 주자학과 수학, 자연과학 등에도 정통한 호학인이었다.

강희제는 대단한 호기심의 소유자 였다.
탐구를 즐기고 천문학, 지도제작, 광학, 의학, 대수학 등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러시아와의 네르친스크 조약 때 예수회 선교사들을 먼저 협상 테이블에 앉히며 이들에 대한 신임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는 한 손에는 서양 고전과 외국어를 무기로 든 탁월한 계몽군주였다.(개방적인 학구열을 지닌 인물)

그는 집무에 시달리면서도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대만을 점령했으며 러시아 군대를 패퇴시켜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고 티베트를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즉 강희제는 문무를 겸비한 군주였다.
강희제는 날마다 오늘이 끝일지 모른다는 각오로 살았다.

강희제는 가장 부유한 나라를 일구었으나 근검론을 쓰면서 근검절약하는 군주였다.
"모든 비용은 백성들의 피땀으로 얻어진 것이니 주인된 황제로서 절제하고 절제함은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또한 그는 "한 사람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지, 천하가 한 사람을 받드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함으로 '이름병'에 걸리지 앟고 물욕이나 명예욕을 탐하지 않았다.

신기미(愼機微) :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잡념들을 제거하고 자신을 단속한다
덕승재(德勝才) : 덕이 재주를 이긴다.(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은 덕이지 재주가 아니다.)
"천하의 위험을 구하는 자만이 천하를 편안하게 할 수 있고, 천하의 근심을 해결하는 자만이 천하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며, 천하의 화를 구제할 수 있는 사람만이 천하의 복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강희제의 통치 철학이다.

그는 고별 상유에서 "나는 천하를 보살피는 데 내 마음을 다 쏟아 부었노라"고 고백하였다.
강희제는 좋은 리더(good leader)를 넘어선 위대한 리더(great leader)였다.


옹정제 또한 끊임없이 학습하는 리더였다.
"인재를 찾는 것이 제왕의 제일가는 고충"이라 말하며 인재 확보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현장의 소리에 귀를 여는 황제였다. 그는 찾아오지 말고 황제게게 주접(奏摺)을 쓰라 명하고, 매일 밤잠을 설쳐가며 각지의 주접을 읽고 주비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부국강병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인기 없는 정책도 과감히 밀고 나가는 실천 의지로 충만한 군주이자 '실행하는 리더'였다.(주관을 가진 실천형 리더)
또한 그는 늑대 사냥을 통해 늑대 무리의 속성을 간파하고 이를 통치에 활용하기도 하였다.(이론보다는 경험에서 배우는 것이 클 수 있다.)


건륭제는 강희제 때부터 축적된 재정을 바탕으로, 안정되고 문화적으로도 원숙한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했다.
그는 지식과 경험이 풍부했을 뿐 아니라, 문무를 겸비하고 지혜와 용맹을 갖췄으며, 성격도 자유로운 편이라 18세기 지식혁명을 이끈 문화군주였다.
그는 아버지인 옹정제처럼 인재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고 보았다.
그는 역사서를 즐겨 읽고, 선대 황제를 깊이 연구하였다.
거안사위(居安思危) : 편안할 때 오히려 위태로움을 생각하라.
그는 또한 60년간 다스린 뒤 조부의 재위 기간을 고려해 자진 퇴위하고 태상황제가 되었다.

저자는 마지막에 '이제 필요한 것은 적절히 섞이는 것이다. 또 그 섞임이 자극이 되어야 한다. 낯선 것을 만들어 기존의 것에 머물거나 안주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라고 챕터를 맺는다.

강희, 옹정, 건륭이 남긴 삼제(三題)
강희, 옹정, 건륭이 오늘날 리더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하지만 최소한 다음 삼제(三題)만큼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신기미(愼機微)하여 국궁진력(鞠躬盡力)하라." - 마음속에 잡념들을 제거하고 스스로를 단속하면서 몸을 굽혀 온힘을 다하라.
"위군난(爲君難)이니 견인불발(堅忍不拔)하라." - 군주가 되는 일은 지극히 어려우니 굳게 참고 견디어 흔들리지 말라.
"대공지정(大公至正)하여 협화만방(協和萬邦)하라!" - 공평하고 지극히 바른 가운데 온 세상을 평화롭게 하라.




우리네 역사를 돌아보아도 자극이 발전을 주었다.
자극을 단절하였을 때 나라나 기업이나 개인이나 정체라도 되면 좋았을테지만, 퇴보하게 되었다.
우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도움을 베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한 도움은 결코 안락함이나 편안함이 아니다. 
자신을 힘들게 하고 자극이 되기 위한 것들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편안한 것을 찾고 안락함을 찾는다. 특히나 한국은 더욱 그러한 상황을 요한다.
윗세대들과 지금 세대들은 발전의 차이가 극명한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윗세대는 발전하는 시대를 살면서 안정적인것들의 최고라고 인식하고 있으나, 현재의 상태는 안정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지식의 시대가 아니다. 그렇다고 정보의 시대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이미 밀레니엄 때나 했던 이야기들이다. 과거 100년동안 발전한 속도보다 지금의 5년 아니 3년의 발전의 속도가 더 빠르다.
지금의 많은 정보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그것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수 있어야 하는 '문화창조 상상의 시대'이다.

우리는 지나온 지혜는 받아들이되, 현재의 상태에서 잘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통찰의 힘을 발휘하는 길이기도 하다.

지금은 자극의 시대이다 라고 표현하는 것도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가야 하며, 그렇게 할때 부드러운 시각을 가지고 행동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그들의 공통점 중에 하나는 끊임없이 학습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는 그리 많은 양이 없었음에도 그들은 학습의지를 나타냈다.
지금은 월간지 까지 합해서 하루에 나오는 책이 100여권이 된다고 한다.
일년이면 36500권이 된다. 
무수히 많은 양의 정보와 지식들이 쏟아지늗데, 그것을 선별하고 전략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은 그것마저 학습에 의해 축적해 나갈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무엇을 하든 자신을 자극해 나갈 때 자신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이며, 이러한 생각과 행동들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이지 않을까 한다.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경영의 핵심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강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재'이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라는 말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것보다도 우선해야 할 것이 리더라면 인재의 마음을 얻을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거은 우선 리더의 마음가짐과 덕일 것이다.
능력, 열정 지략 관대.... 여러가지 요소들이 인재의 마음을 살 수 있느냐부터 고려한다면 리더는 그를 제대로 돌아보는 관점을 가질 수 있으며, 그에더해 강한 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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