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입문서로 출간된 책이어서 시대별 분류를 하여 대표적인 철학자들 50여명을 소개한다. 

개관과 철학자들의 핵심 내용에 대해 소개하고 있으나, 개관들만 옮긴다.

내용에서 발췌하려 하다가 그것보다는 개관들 전체 내용을 통해 정리해 보는것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옮긴다.


철학의 구라들 (下) 보러가기 


1. 고대(Ancient times) 철학

-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철학보다 먼저 세계를 근본적으로 해명하고자 한 것은 신화(이 말은 어원적으로 '말' '이야기' '알림'등의 뜻을 가진다)였다. 예를들어, 호머 시대의 창조 신화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태초에 만무르이 여신인 에우리노메가 있었다. 이 여신은 벗은 채로 카오스에서 걸어 나왔다. 하지만 이 여신은 발을 디디고 설 수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 여신은 바다를 하늘로부터 분리시키고 파도 위에서 홀로 춤을 췄다." 에우리노메는 큰 뱀인 오피온과 짝을 이뤘다. "그런 다음 에우리노메는 비둘기의 형상을 취하고서 파도 위에 내려앉아 자신의 시대를 위해 '세계를 품은 알'을 낳았다. 오피온은 여신의 분부에 따라 이 알이 부화하도록 알 주변을 일곱 번 돌았다. 이 알로부터 현존하는 모든 것이 생겨났다. 태양, 달, 행성, 별 들이 생겼고 산, 강, 나무, 풀, 동물 들이 있는 지구가 생겨났다."

기원전 6세기 초, 소아시아의 해변에 있는 그리스의 식민 도시에서는 세계를 신비적이고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몇몇 사상가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독자적으로 사유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등장하기 150년 전에 개념적으로 분석하는 철학의 길을 걸었으며, 신화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들은 참다운 세계와 가살의 세계를 구분할 줄 알았다. 세계와 그 해석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통찰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철학과 신화는 서로 섞이면서 독자성을 띠기 시작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자연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자연의 통일성을 확신한 그들은 근원을 추구햇으며, 다양한 현상의 원인이 되는 하나(一者)를 추구했다. 그들은 세계를 가장 근본적으로 지탱해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노력했다. 밀레토스의 탈레스와 같은 최초의 사상가들은 근원 질료에 대해, 남이탈리아의 피타고라스와 같은 사상가들은 근원 형식에 대해, 에베소 출신의 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은 사상가들은 보편 법칙에 대해, 그리고 아테네의 아낙사고라스 같은 사상가들은 질료적인 원소와 질서를 만들어 내는 근원적 힘에 대해 질문했다. 압데라 툴신의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론으로 유명하다. 그는 소크라테스와 동시대 사람이었다.


- 고전철학

'지혜의 교사들'인 소피스트들은 기원전 5시기에 그리스 고전철학으로 접어드는 과도기에 주로 활동했다. 그들의 주제는 인간이었다. 그들은 고대 도시 국가에서의 공동생활을 둘러싼 문제를 생각했으며, 인간적인 인식 행위의 타당성을 검토햇다. 그들의 수업은 다면적인 교양과 뛰어난 대화술,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둔 인간이라는 계몽된 새로운 이상에 맞춰져 있었다. 필요하다면 그들은 반대 입장도 수용할 수 있는 대화술을 통해 모든 인식을 상대화했다(아테네의 프로타고라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 시대와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시기에 철학의 중심지가 된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철학적 사유는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에 절정에 달한다. 그들은 선(善)의 문제를 다양하게 사유했고, 선은 결국 진(眞)과 미(美)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소크라테스는 선한(좋은) 삶이라는 이상을 위해 살고 죽었다. 선을 아는 자가 선하게 행동한다고 확신한 소크라테스는 동시대 시민들을 대화로 끌어들여 집요하게 질문 공세를 펼치며 깊이 있게 생각하도록 자극했다. 개인은 자신 안에 있는 보편적인 선을 인식해 행위의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나눈 대화의 목적은 덕의 보편적인 본질을 해명하고 규정하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윤리적인 보편 개념을 정의하기 위해 고심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플라톤 철학의 기본 방향을 보여 준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보편 개념 속에서 무시간적인 근원 형상들을 본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물들은 이 근원형상들의 불완전한 모사에 불과하다. 이 근원 형상이 곧 이데아(idea)이다.현재의 언어 용법과는 달리, 이데아란 결코 주관적인 관념을 의미하지 않고 지속적이고 영원한 존재를 의미한다. 감각 기관에 의해 지각되는 물질적인 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물질세계 저편에 제2의 비물질적인 세계가 존재한다. 이는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이데아의 세계이다. 이데아들 중의 최고의 이데아, 즉 선의 이데아를 순수하게 정신적으로 살펴본 철학자만이 국가의 질서를 절대적인 이데아의 질서와 조화시킬 수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범위를 넓히고 체계화했다. 그는 논리학의 아버지, 범주론의 창시자, 그리고 방법적으로 엄격한 경험 과학 연구의 개척자로 불린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의 이데아는 개별적 사물들 저편에 분리된 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개별 사물들에 내재한다. 모든 사물은 완전한 자기 운동을 하며, 자신의 이데아(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형상(form)'이라 부른다)에 이미 존재한 자신의 소질을 현실화시키고자 한다. 모든 것은 자기 안에서 자신의 목적과 본분과 발전의 계기를 갖는다. 나중에 괴테는 이데아를 "생동적으로 발전해 가는 각인된 형상"이라고 말한다. 세계에는 완전성을 향한, 중용을 햔한, 선을 향한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만물을 움직이는' 신을 향한 점진적인 운동이 있다. 


- 헬레니즘 철학과 로마 철학

그리스의 도시 국가는 인도까지 뻗어 간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 제국에 편입됨으로써 기원전 4세기에 정치적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고전기 이후의 그리스 문화인 헬레니즘 시대에 동양과 서양은 서로 긴밀하게 만난다. 문화 중심지가 바뀌어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매우 전문적인 경험적 연구가 행해졌다. 철학에서는 주로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들이 논의되었다. 행복하기 위해 개인으로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피쿠로스주의자, 스토아주의자, 회의주의자 들은 새로운 역사적인 도전과 개인의 방향 및 힘의 상실에 대해 상이한 방식으로 대답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사회에서 벗어나 철학을 하며, 현실을 아주 유쾌하게 받아들인다. 스토아주의자들은 덕스럽고 평정을 잃지 않은 삶과 운명의 장난에 흔들리지 않는 삶 속에서 행복을 발견한다(키티온의 제논), 회의주의자들은 대립적인 철학적 입장들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안이라는 행복을 이끌어 낸다(피론), 세 학파의 창립자인 에피쿠로스와 제논 그리고 피론은 모두 아테네에서 활동했다.

로마는 기원전 2세기부터 그리스를 정치적으로 지배했다. 키케로는 기원전 1세기에 로마인들에게 그리스철학을 소개하며, 자신의 글을 통해 라틴어로 된 철학 언어를 심어 놓았다. '휴마니타스(Humanitas)'(인간성)라는 용어는 철학의 지혜를 정치 현실에서 적용할 수 있는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간을 가리키는 말로, 이상적인 조어의 예라 할 수 있다. 수사학과 철학은 하나로 합쳐졌다. 말을 잘하고 덕이 있으며 다면적으로 교육받은 사람은 이러한 언어와 이성의 통일을 이론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적인 삶에서도 실현했다(로마의 퀸틸리안).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는 시기에는 다양한 종류의 철학적 입장들이 혼재했다. 인도로부터 동양 철학이 흘러들어 왔고, 유대교와 기독교의 영향도 있었다. 근원에 대한 물음이 다시 되살아났다. 세계 종말론이 생겨나고, 죄악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염원이 절실해졌다. 이로부터 교조적인 진리곤을 가진 철학(종교)적, 신비적 구원론이 등장했다(바빌론의 마니교).

3세기에 신플라톤주의가 이집트의 플로티노스를 필두로 생겨난다. 그는 마지막 주자로 그리스어로 된 위대한 철학 체계를 세웠고, 고대 후기의 구원에 대한 욕구를 비기독교적인 내용으로 표현했다. 세계의 모든 사물은 빛으로 가득 찬, 신적인 일자가 빛을 발해 생겨난 것이다. 세계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절대자의 완전성이 넘쳐 흐른 것이다. 이 철학의 목표는 악의 원리로 파악된 물질, 즉 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물질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일자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고대 기독료 철학의 중심은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계시라는 역사적 사건이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신앙이 '이교도적인' 철학자들에 대항하여 철학적인 수단으로 방어될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 방어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였다. 4세기말에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된다. 

476년에 게르만 족 출신의 용병 대장 오도아커는 서로마 제구그이 마지막 황제를 폐위시켰다. 서로마 제국은 몰락했다. 하지만 비잔틴의 동로마 제국은 천 년 이상 더 존속해 고대 그리스의 문화유산을 보존했다.  




2. 중세(medieval times) 철학 

- 기독교적인 토대

중세 철학은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으로 나눌 수 있다. 중세 철학은 대략 5세기경에 시작하여 15세기까지 이어지며 서로마 제국이 몰락한 476년부터 아메리카가 발견된 1492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대략 천 년에 걸친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시대에 이어 천 년 동안의 중세 시대가 이어진다. '중세(Mittelalter)'(두 시기의 중간 시대, 과도기)라는 개념은 이해를 돕기 위한 보조 개념일 뿐이다. 역사는 계속 진행되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한 시대를 특징짓는 관련 요소들에 대한 기준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중간'에 있는 것 역시 다르게 규정될 수 있다. 초기 기독교 교부들이 펼친 고대의 초기 기독교 사상이 중세 철학의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주제의 관점에서 볼 때 중세 철학은 이미 2세기경에 시작된 셈이다.

기독교에서는 신앙이 철학의 바탕을 이룬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확신들이 바탕이 되고 있다. (1)세상은 무에서 창조되었다. (2)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한일서 4장 8절), (3)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할 것이다.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 전능한 신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포괄하는 세계를 무에서 창조해 이 세계를 존재하게 했다. 이는 초자연적인 진리이며, 신이 인간에게 직접 전달(계시)했다. '무에서 창조하였다'는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세계는 시초가 없다'는 고대 철학적 세계관과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한다. 이제는 신이 의지 작용에 의해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신은 건축가처럼 이미 주어져 있는 혼돈스런 원질료를 질서 정연한 우주로 만드는 것(플라톤의 학설)이 아니라, 창조자이자 생산자로서 물질을 존재하게 하는 자이다. 만물이 존재하는 것은 만물을 창조한 유일신이 전제될 때 가능하며, 신은 피조물인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한다. 

(2)신약 성경은 특히 '신의 사랑'을 보여 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그리스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자족적인 신이 불완전한 피조물에게 다가오고 심지어 자비심에서 세상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 치욕스러운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타자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으면서 자신 이외의 것들을 움직이는 신적인 존재를 전제했고, 신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일방적으로 사랑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는 기독교적인 사유와 다르다. 인간을 위해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바탕이 되면서 인간과 신, 그리고 인간들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에는 사랑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7-40)

(3)세계는 시작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약속된 신의 왕국이 도래하는 종말도 있다. 그리스철학은 세계의 진행 과정을 자연의 이치에 따라 언제나 반복하는 원환 운동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반해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은 천지창조에서부터 출발해서 중심인 그리스도 그리고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단선적으로 진행된다고 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 철학이 표방하는 '허황된 원환 운동'을 무신론적인 '코미디'로 분명하게 거부한다. 서양의 연대인 기원전(B.C.=Before Christ, 그리스도 오기전)과 기원후(A.D.=Anno Domini, 주님의 해)는 신이 시간 속으로 들어 왔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관찰 가능한 모든 사건은 신과의 관련 속에서만 해석되어야 하고, 모든 경험적 지식은 형이상학에 종속되어야 한다. 역사는 의미 충만한 구원사이지, 그리스도와 무관한 사건들이 무작위로 펼쳐지는 무대가 아니다. 인간은 시작과 끝이 계시되었기 때문에 세계사를 신의 눈으로 조망할 수 있으며, 세계사의 흐름은 의미 있고 목적 지향적으로 전개된다. 

간단하게 말해서 고대의 정신적인 이상은 조화(Einklang)이다. 이러한 조화는 우주 질서와 일치되는 현세의 행복한 삶을 의미한다. 중세의 정신적인 이상은 구원이다. 구원은 신만을 바라보는 가운데 사후에 얻어지는 내세의 지고한 복을 의미한다. 


- 교부 신학

교부 신학(Patristik)은 2~7세기에 이르는 교부들의 가르침이다. 라틴 계열의 서방에서뿐 아니라 그리스 계열의 동방에서도 교부들의 중심적인 문제는 계시의 내용을 해명하고 그것을 지키며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저서는 아주 미약하지만 철학적인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기독교는 그들에게 참다운 철학이자 계시로 받아들여졌다.

교부들은 고대 철학에 대해 처음에는 거부하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는 등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박해와 문학적인 공격을 받게 되자 기독교 신앙을 합리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기술(변증론)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철학적인 개념과 사유 방식이 접목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전기 이후의 그리스 문화인 헬레니즘이 기독교화 되었으며, 동시에 기독교도 헬레니즘화 되었다.

예를 들어, 2세기의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철학에 개방적이었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그리스도의 예언자이자 순교자로 보았으며, 플라톤과 헤라클레이토스를 그리스도인으로 불렀다. 이에 반해 터틀리아누스는 아테네와 예루살렘을 전혀 관련이 없는 별개의 사안으로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가 철학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면서 철학적 논증을 도입하기도 한 것은 스토아 철학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철학적인 소양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3세기에 기독교에 대한 최초의 포괄적인 교리서를 저술했다. 그에게 있어서 신적인 계시는 인간을 현혹시키는 철학에 종지부를 찍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와 사도들의 전통적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만이 진리이다."

교부 신학은 고대 말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활동에 힘입어 4세기와 5세기에 절정에 도달했다. 그는 (신)플라톤적인 색채를 띤 기독교 사상의 개척자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순수한 이성 그 자체는 너무 유약해서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 인간은 성경과 교회의 권위를 필요로 한다. 신앙이 우선이고 통찰은 그 다음이다. 인간의 가장 내적인 본질은 지성이 아니라 의지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능동적인 사랑 속에서 드러나는 의지는 신을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그의 <신국론>은 "유약한 기독교 신은 410년에 서고트인들이 로마를 정복할 때 속수무책이었다"는 이교도들의 비난에 대항해서 수행된 기독교에 대한 가장 위대한 최후의 변론이다. 

계시냐, 철학이냐의 다툼은 부분적으로는 수백 년에 걸친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4세기에 펼쳐진 그러한 논재으이 예는 신인(神人)론이다. 그리스도가 어떻게 가장 완전한 신이면서 동시에 가장 완전한 인간일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에 따르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동일한 속성이 동일한 관계에서 자신에 속하면서 동시에 속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문제는 기독론(그리스도의 인격성에 대한 교리)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논의되었다.


- 스콜라철학

켄터베리의 안셀무스는 11세기에 "신앙은 이성적이고자 한다"고 말했다. 스콜라철학은 신앙과 지식, 이 두 가지를 모두 원한다. 스콜라철학의 목표는 포괄적이고 빈틈없는 체계, 즉 신앙의 진리와 이성의 진리 모두를 통일하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철학은 계시된 진리를 더 이성적으로 만들어야 하고, 그 진리의 연관성을 더 명료하게 드러내야 하며, 이성의 관점에서 제기된 발론을 해소해야 한다. 

교부 철학자들은 개인별로 활동하면서 각자의 저서를 통해 영향력을 얻었다. 반면 스콜라철학자들은 주로 성당이나 수도원 부설 학교, 나중에는 대학을 통해 활동했다. 스콜라철학 시기는 학교의 시대(Schola는 school을 의미한다)이며, 뛰어난 교사들의 시대이다.

초기 스콜라철학의 시기(800~1200년경)에는 안셀무스처럼 신의 존재를 성서의 도움 없이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 증명하고자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시의 논리학이 차용되었다. 11~12세기경에 살았던 아벨라르두스 같은 사람들에 의해 진술과 반론의 형태를 띤 스콜라적인 논쟁 방식이 발전되었다. 11세기에 세상에 대한 멸시가 나타났으며(페트루스 다미아누스, "육체는 구린내 나는 덩어리이다"), 12세기에는 자연철학적인 이론들, 언어철학 및 역사철학적 사변들(샤르트르 사원 학교), 종교적 진리의 신비적 체험(끌레르보의 베르나르) 등이 나타났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신플라톤주의가 여전히 아주 폭 넓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약 1300년까지에 이어졌던 스콜라철학의 절정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비롯한 여러 저서들이 아랍인들의 해석이 가미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의 대명사로 통했고, 고대 사상이 점점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십자군 원정을 통해 아랍철학과 유대철학이 충돌함으로써 세상을 보는 눈도 확대되었다. 최초의 대학들인 볼로냐대학(1158), 파리대학(1170), 옥스퍼드대학(1200년경)등이 설입되었다. 옥스퍼드대학은 자연과학 연구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로저 베이컨), 프란체스코파와 도미니크파와 같이 새로운 수도회가 생기면서 서로 경재의 양상을 보였으며, 신비주의자들은 신과의 직접적인 합치를 추구했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3세기에 기독교의 전통(아우구스티누스)과 고대 사상(플라톤, 신플라톤주의, 그리고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위대한 종합이 이뤄졌는데 보다벤투라, 알버트 경,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그 주역을 담당했다. 이러한 종합은 '통합(summa)'(전체, 총합)이라고 불린다.

스콜라철학의 체계를 세운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그는 신앙과 지식 그리고 계시의 진리와 자연적 이성의 진리,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했다. 참다운 철학은 언제나 올바르게 이해된 신앙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신이 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이성이 인간에게서 차지하는 위치와 같다."

스콜라철학에서는 수백 년동안 계속 반복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있다. 그것은 '인간, 선과 같은 보편 개념은 어떤 가치를 찾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른바 보편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보편 개념은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관념에만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보편 논쟁에는 극단적인 두 입장이 있었는데, 하나는 (개념)실재(realism, 이 용어는 외부 세계의 실재성을 문제 삼는 근대의 인식론적인 '실재론'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이고, 다른 하나는 (개념)유명론(nominalism)이다. 실재론의 중세적인 입장은 인간의 사유와는 무관하게 보편 개념의 실재성을 주장한다. 즉, 개별적인 사물들이 창조되기 전에 그 사물의 원형에 대한 신의 생각이 먼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유명론은 보편 개념에 어떠한 독자적인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 개념들은 단지 이름(nomina)일 뿐이며 정신적으로 부풀려 생각한 결과일 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편 논쟁에서 중계자의 위치에 선다. 그는 보편자의 존재를 3단계로 구분한다. (1)보편 개념은 신의 정신 속에 내재하는 창조적인 사상으로서 사물들에 앞서 존재한다(ante res). (2)보편 개념은 형태를 만들고 현실화시키는 형상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텔레케이아) 창조된 사물들 속에 존재한다(in rebus). (3)보편 개념은 추상으로서, 다시 말해 인간의 사유속에서 존재하며 사물들 이후에 존재한다(post res).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 계열의 대표자인 하인리히 겐트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지성의 지배를 너무 많이 강조한다고 비판했다. 이에 반해 그에게서는 의지가 주인이고 지성은 시종이었다. "주인이 길을 잃지 않도록 시종이 밤에 등불을 주인 앞에 들고서 주인을 인도해 가듯이" 지성은 의지를 인도한다.

대략 1500년까지의 후기 스콜라철학 시기에 이서에 대한 스콜라철학의 신뢰는 점차 사라졌다 신앙과 지식의 통일 불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점차 퍼져 갔다. 이성은 교회의 가르침을 증명할 수 없으며, 믿음은 이 가르침을 순종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신에 대한 사변적인 인식 대신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이 나타난다. 완고하고 복고적인 입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신비주의가 영향력을 얻기 시작했다(토마스 캠펜), 전통적인 형이상학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후기 스콜라철학에서 가장 중요하고 비판적인 역할을 한 대표자는 14세기에 보편 논쟁을 첨예화시킨 위리엄 오컴이다. 그에 의하면 개별적인 사물들만이 존재하며, 보편 개념은 사유할 때 사용되는 기호일 뿐이며, 일종의 언어적 허구일 뿐이다. 근대의 문턱에서, 심지어 이미 근대의 문턱을 넘어선 시기인 15세기에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자각을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각색하여 사용한다. 그에 의하면 신은 인식될 수 없다. 신은 은폐되어 있다. "나는 신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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