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사람들이 역사를 궁금해하는 까닭은 현재를 더 잘 알고 싶어서다. 과거를 살펴 현재와 비교하고 현재를 추적하는 것은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려는 노력이다. .. 역사를 공부하는 궁극적 목적은 결국 미래를 바꾸려면 현재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려는 데 있다.  9
구체적 조건에 조응하거나 반발하는 인간의 의식적 활동을 배제하는 역사 서술은 사실상 역사를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역사 서술은 읽지 않아도 내용을 알 수 있다. 그런 역사 서술에는 그저 변치 않는 인간 본성과 유전자적 본능만이 있을 뿐이고, 역사의 구체적 맥락들이 변화를 설명하는 데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10
오늘의 세계에 강한 불만을 느끼는 이들은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11
미국과 소련의 경재잉 세계를 각자의 세력권으로 분할하는 과정(위로부터 부과된 조건)에서 치러진 전쟁을 거치며 수백만 명이 죽었다. 한반도의 남과 북에 서로 증오하며 적대하는 체제가 수립됐다. 전쟁 없이 분단된 독일과 달리, 한반도에서는 냉전 질서가 끝났는데도 분단 체제가 유지되는 배경이다.
국토의 90%가 전쟁의 화염 속에 들어가면서 전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망도 함께 파괴됐다. 한국 자본주의가 낡은 속박에 얽매이지 않고 발전할 토대를 전쟁 통에 마련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전에만 해도 통치 정당성이 결핍돼 태어나자마자 위기에 빠진 신생국가 대한민국은 전쟁 수행을 위해 또는 그것을 명분으로 자원과인력과 통치권을 집중시키는 과정에서 영토와 국민에 대한 진정한주권(통치 권력을 확립했다. 좌파와 노동운동은 궤멸됐다.
그렇게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한 대한민국은 노동계급의 자주적 활동에 적대적인 권위주의 국가로 성장했다. 한·미·일 삼각무역과 장시간·저임금 노동을 기초로 해서 시장경제적이고 수출지향적인 국가자본주의 노선을 걸은 한국은 마침내 경제 발전자립)을 이뤘다.
한국 지배자들은 냉전이 끝난 뒤에도 세계적 패권 국가인 미국중심의 질서 안에서 번영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다고 봤다.사실 중국조차도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 중심의 세계화 질서에편입해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그러나 역동적인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변화·발전이 이런 국가간 관계들도 비틀고 있다. 세계적 세력균형의 변화는 한국의 정치와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13-14
돌아보며느 역대 한국 정부는 거의 모두 역사를 정치에 활용했다. 역사 해석을 독저하려 한 권위주의 정권들은 물론이고, 민주화 이후의 정부들도 역사 재평가를 지지율을 만회하고 정적을 공격하고 자신을 방어할 우회로로 삼았다.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독립운동 · 민주화운동 재평가 시도와 과거사 진상 규명, 이명박 정부의 건국절 제정 논란과 금성 역사교과서 탄압,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기원설 설파 등.
민주당 정부들이 정부 차원의 행사와 지원을 통해 형성해 온 서사는 민주주의자들이 민주공화국을 설계하고 이끌어 경제 번영에 성공한 스토리다. 이 서사에서 한국 국가의 뿌리는 1948년이 아니라 1919년이다. 친민주당 진영은 3·1운동을 혁명이라고 부른다. 부르주아(자본주의적) 혁명이었던 프랑스대혁명이 연상된다. 이것은 3·1운동의 여러 산물 중 하나인 상해임시정부를 대한민국 국가의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시도다. 민주당 계보의 위인들이 서구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서사의 주인공처럼 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다.
우파에 대한 반감은 큰데 제대로 된 대안적 해석이 없으므로, 친민주당적 역사 해석은 진보 진영에서도 많이 차용된다. 그러나 친민주당 진영은 역사적으로 봐도 반제국주의적 민중봉기인 3.1운동의 정통을 계승하는 세력이 전혀 아니다.  15-16


2장 한국전쟁, 제국주의 경쟁이 낳은 비극

미국은 단지 북한을 상대하기 위해 북한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특히 중국)과의 경쟁에서 자신의 우위를 지키는 것이 주된 고려 사항이다. 즉,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남북 관계나 북미 관계에 한정해서 바라보면 안 되고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경쟁이라는 더 큰 틀에서 바라봐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도 남북 사이의 충돌이라는 좁은 시야가 아니라 더 큰 맥락에서 봐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제국주의 경쟁의 주된 대립 구도였던 미국과 소련 사이의 경쟁 말이다.  73

미국은 한국전쟁 동안 무자비한 폭격을 가했다. 그 결과 북한 지역은 “달 표면처럼” 변했다고 할만큼 파괴됐고 대량 학살이라 불릴 일이 벌어졌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태평양전쟁 구역 전체에 투하된 폭탄의 총량이 50만 3000톤 이상의 네이팜탄(광범위한 지역을 불태울 목적으로 사용된다. 네이팜탄에 들어간 물질은 인체나 목재에 닿으면 떨어지지 앟고 계속해서 불탄다)이 더해져야 한다. ..
예컨대 1950년 11월 8일 B-29 폭격기 70대가 신의주에 네이팜탄 550톤을 투하했다. 도시가 지도에서 지워졌다고 표현할 만큼 잿더미가 됐다. 550톤으로 한 도시를 지도에서 지워버릴 정도였다면 3만 2000톤이면 얼마나 파괴적이었을까? ..
북한의 주요 도시 22곳 중 18곳은 최소한 50% 파괴됐다. 1953년 5월에는 식량 생산에 타격을 가하고 기아를 유발하기 위해서 댐. 여러 개가 파괴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74-75

미국은 한국전쟁을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주장해 왔다. 한국의 지뱆들도 마찬가지다.  76

한국전쟁 연구자 브루스 커밍스가 잘 지적했듯이, 누구도 미국 내전에서 남부군이 섬터 요새에 먼저 총을 쐈다는 사실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체로는 그 전쟁이 노예제도와 인종차별 정책을 둘러싼 전쟁이었다는 점에 관심을 둔다. ..
‘누가 먽저 총을 쏘았는가’에 초점을 맞추면 전쟁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취할 수 없다. ..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전쟁 발발 이전에 형성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쟁, 제국주의 국가가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상황, 노동계급 운도엥 대한 공격 등 정치적 맥락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76-77

한국전쟁도 제대로 이해하려면 미국과 소련 두 제국주의 사이의 경쟁이라는 맥락을 봐야한다. ..
소련은 제2차세계대전을 거치며 중부, 동부 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해서 유라시아 대륙의 최강대국으로 부상했다.(2차세계대전 종전 후 소련은 폴란드, 불가링, 체코스로바키아, 루마니아, 헝가리, 동독을 위성국가로 삼으며 세력권을 확장했다) 미국은 소련의 세력 확장을 자신이 관리하는 국제 질서에 대한 주된 위협으로 여겼다. 미국과 소련 두 제국주의의 경쟁은 점점 가열돼, 1947년 3월 트루먼트린의 발표로, 이미 형성되고 있던 냉전이 공식화했다. 미국은 소련 세력권과 접한 서유럽과 일본이 무너지면 소련이 정치적 팽창의 기회를 얻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서유럽에서는 마셜플랜(유럽부흥계획)을, 일본에서는 '역코스' 정책을 추진했다.
미국이 일본에서 시행한 코스 정책은 패전 전 일본의 지배계급과 국가 관료들의 권력을 유지케 하는 정책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의 미군정은 전범을 처벌하고 전쟁을 후원했던 독과점 기업들을 해체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뒤집는다는 의미에서 '역코스인 것이다. 그 일환으로 전범인 일왕도 처벌받지 않았다. 소련도 동유럽 나라들을 위성국으로 삼으며 세력권을 구축해 나갔다.
제국주의 경쟁이 두 진영으로 예리하게 나뉘어 다투는 냉전이라는 형태로 바뀌면서 어떤 면에서는 경쟁이 더 격렬했다. 날카로운 이데올로기 경쟁도 수반했기 때문이다.
냉전에서 각 진영을 대표한 미국과 소련은 각자의 점령지역에서 자신의 이익에 복무하며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탑재한 체제를 만들려고 애썼다. 한반도의 남과 북 국가는 그렇게 탄생했다. 남과 북의 충돌은 이런 세계적 쟁투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미국과 소련은 유럽 등지에서 각자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충돌했고, 특히 독일 '베를린 봉쇄'라고 불린 충돌에서는 핵무기의 동원도 심각하게 고려됐다. 이런 경쟁적 쟁투들이 실제 열전으로 벌어진 것이 바로 한국전쟁이다.  78-79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미국이 한반도의 남쪽을 점령해서 친일 지주 세력을 지지하고 그에 반대하는 세력을 탄압하면서 많은 충돌과 학살이 벌어졌고, 그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모순이 증폭했다.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는 진정한 독립과 해방을 원하는 아래로부터의 열망이 분출했다. 노동자들의 공장자주관리운동이나 각 지역 인민위원회들의 등장이 그 사례다. 미군정은 이런 대중운동과 조직을 파괴하려고 온 힘을 기울였다.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항쟁에 대한 폭력적 진압이 대표적 사례다. 1948년 2월부터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10만 명 이상이 학살됐다. 제주4.3 항쟁에 대한 잔인한 진압이 이 기간에 벌어진 일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등장한 남쪽 정부는 진정한 해방과 독립을 원하는 대중의 열망에 적대적이었을 뿐아닐 소련이 점령해 북쪽에 수립한 정부에도 적대적이었다.
커밍스는 북쪽에서는 남쪽과 달리 항일 세력이 권력을 잡앗고 토지개혁도 이뤘다고 봤다. 그리고 남쪽에서 벌어진 지주와 농민, 친일 세력과 항일 세력의 대립과 투쟁(커밍스는 이를 “작은 전쟁”이라고 불렀다)이 남북 사이의 전쟁(“큰 전쟁”)으로 확대됐다고 봤다. 그래서 한국전쟁은 내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미국이 개입하면서 전쟁을 더욱 끔찍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커밍스의 주장은 명백히 장점이 있다. 한국전쟁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 낸 정의로운 전쟁이었다는 미국과 남한 지배자들의 주장에 대한 분명한 반박이기 때문이다.  81-82

커밍스는 김일성이 소련의 계획하에 북한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스탈린과 면담한 후에 북한에 들어왔고 소련군의 적극적 협력을 받으면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1945년 10월 이승만이 미군정 사령관 하지가 옆에 앉아 있는 가운데 남한 대중에게 소개된 것처럼 김일성은 소련 관려들이 뒤에 서 있는 가운데 북한 대중에게 항일 영웅으로 소개됐다. 이렇게 소련군의 후원 속에 수립된 북한 정부는 대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데서 남한과 다를 바가 없었다.  82-83

소련은 돼 김일성을 잡고 있던 목줄을 먼저 놓았을까? ..
스탈린의 전후 아시아 전략에서 중국과 관련된 것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몽골을 중국으로부터 분맇해 소련의 안전을 보장하는 완충지대로 삼는 것이었다. 다른 ㅎ나는 태평양으로의 진출 거점과 부동항(바다가 얼지 않는 항구) 확보를 위해 중국 동북 지역에 대한 옛 러시아 제국의 권익을 모두 회복하는 것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중국 동북 지역의 이권을 포기해야 했다. 스탈린은 옛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고 싶어 했다. 스탈린은 태평양전쟁에 참전하면서 1945년 8월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와 ‘중소 우호 동맹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소련은 국공내전에 개입하지 않고 중국 국민당과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그대가로 소련은 다롄항에서 소련의 우월적 이권을 보장받았고, 뤼순 해군기지 조차권을 회복했으며, 만주 철도. 공동 경영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의 의사와 달리 중국혁명이 성공하면서, 소련은 마오쩌둥이 집권한 중국과 새로 조약을 맺어야 했다(‘중소 우호 동맹 상호 원조 조약’). 이 새 조약에 따라 소련은 태평양으로 진출할 연결로인 만주의 창춘철도와 부동항인 뤼순항과 다롄항을 중국에 조기 반환하기로 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에 긴장이 조성되면 중국은 소련 군대가 뤼순과 다롄에 계속 주둔하기를 요철할 것이고, 새 조약에는 “전쟁 혹은 위기 국면이 발생하면, 소련 군대는 창춘철도를 사용할 수 있다”고 돼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중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유지할 방법이기도 했다.  84-85

반면, 마오쩌둥은 중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최대한 차단하면서도 소련에게 될수록 많은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얻어 내고 싶어 했다. 중국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복구하고 대만을 정복하기 위해 소련의 공군 지원을 상당히 중시했다. 그러면 미국과는 적대 관계(직접 충돌을 포함해)가 되겠지만, 당시 중국의 처지에서는 냉전이 본격화하는 와중에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불가피해 보였다.  86

김일성과 이승만은 세계적 차원의 제국주의 경쟁이라는 큰 장기판에서 하나의 말에 지나지 않았다.  86

한국전쟁의 전개 과정을 간략히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전쟁 초기(1950년 6월 말에서 7월)에는 북한군이 밀고 내려와 8월에는 낙동강 부근에서 참호전 양상을 보였다.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며 미군이 압록강 부근까지 밀고 올라갔지만 10월 25일 중국군의 참전으로 다시 전선이 내려와 38선 부근에서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 상태가 2년을 더 지속하다가 1953년 7월 정전에 이르렀다.  87

미국 공군의 제공권 장악으로 북한군의 전진이 상당히 더뎌졌다. 개전한 지 두 달도 안 지난 시점인 8월 15일 이전에 북한군 내부에서는 병사들의 도주와 명령없는 퇴각이 벌어지고 있었다. 9월 1일이 되면, 미군이 주도한 유엔군의 규모가 북한군 병력(9만 8000명)의 두 배에 이르게 됐다. 그러니까, 인천 상륙 작전 이전에 이미 전세는 어느 정도 뒤집혀 있던 것이다.  87

미군은 흰 옷을 입은 민간인 무리를 겨냥해 무차별적 기총소사를 가하곤 했다. 노근리 학살 등 민간인 학살이 그 과정에서 벌어졌다. 민간인 학살이 보편적 현상이었다고 할 정도로 미군은 민간인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했다.  88

중국은 미국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면 산업 중심지의 하나이고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한 중국 동북 지역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중국군은 10월 25일 미군과 첫 교전을 벌였고 11월 1일에는 중국군으로 위장한 소련 공군이 처음으로 압록강 상공 교전에 참가했다. 이때부터 한국전쟁의 주된 양상은 미국군(과 유엔군) 대 중국군(과 소련군)의 대결이었다.
소련군 참전이 아주 작은 규모였던 것은 아니다. 1950년 11월 1일부터 1951년 12월 6일까지 소련군은 전투기와 대공포로 미군 비행기 569대를 파괴했다. 1951년 10월 한 달간미국 공군은 소련군 미그-15 전투기의 출현을 2573회 목격했고 소련 준투기와 2166회 교전했다. 소련군의 공격으로 미국 공군의 주력 폭격기 B-29 5대가 상실되고 8대가 손상돼, 미군은 소련군의 공격을 피해 야간 공습을 벌여야 했다. ..
양쪽 모두 적을 완전히 제압해 한반도를 통일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전쟁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서로 조금일도 우월한 입장에서 전쟁을 끝내길 바랐기 때문에 전쟁은 지속됐다.  88-89

한국 전쟁의 결과 한반도 인구의 10분의 1이 희생됐고 1000만 명이 가족과 헤어졌고 500만 명이 난민이 됐다.  89-90

해방 직후 강력했던 좌파와 노동자 운동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붕괴됐다.  92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은 미군들이 피난을 시켜 준다며 충청북도 영동읍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들을 부산 방면으로 끌고 가다가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4일간 노근리 철로변과 굴다리에서 무참하게 살해한 사건이다.
7월 25일 해질 무렵, 한 패의 미군이 들이닥쳐 “대구, 부산 방면으로 피난을 시켜주겠다“면서 마을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집합시켰다. 남아 있으려는 사람들까지 강제로 모이게 했다. 약 500명이 미군의 인솔로 국도를 걸어서 남쪽으로 향했다 남쪽으로 향하던 피난민은 26일 정오경 미군의 명령을 받고 영동읍 노근리 도로변의 경부선 철로로 올라갔다. 미군은 피난민의 몸과 짐을 검사한 다음 그들이 무장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도 미군 비행기를 무전으로 불러 기총소사를 해댔다. 이것이 1차 학살이다. 살아남은 피난민이 경부선 철로 밑과 터널 밑으로 들어가자 2차, 3차 학살이 벌어졌다. ..
충북 영춘 곡계골, 경남 마산 곡안리, 경남 사천 조장리, 황해남도 신천리 등지에서도 미군의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98

북한 징역의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북한이 제시한 자료를 보면, 북한군이 유연군에 밀려 퇴각하던 1950년 10월 17일, 신천 지역을 점령한 미군은 50여 일간 신천군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 5383명을 학살했다. 황해남도 은률군에서 1만 3000여 명, 평안북도 정주군 창도에서 580명의 섬 주민 모두를 학살했다. 평양에서 1만 5000명, 황해남도 안악군에서 1만 9072명 등 미군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99

1945년 9월 미군이 처음 한반도 땅에 발을 디딘 그 순간부터 한국 노동자, 민중을 위해 한 좋은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국은 계속 독재 정권들을 후원했고, 남한 노동자, 민중은 그 밑에서 쥐어짜이고 짓눌려 살아야 했다. 분단 고착화에 항의한 제주 4.3항쟁은 미국의 후원하에 야만적으로 진압됐다. 미국은 1980년 광주항쟁을 진압하러 가는 한국군 이동을 승인했고, 부산에 항공모함을 배치해 학살을 엄호했다. 주한미군이 상시 주둔하면서 주한미군 범죄도 심각했다…
이처럼 한미동맹은 미국 제국주의와 한구구 자본주의, 그리고 이 체제에서 혜택을 얻는 미국과 한국의 권력자들을 위해 필요했고, 지금도 그렇다.  105-106

Posted by WN1
,




서문 - 위험한 현대사
모든 역사는 ‘주관적 기록’이다. 역사는 과거를 ‘실제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방송뉴스와 신문보도가 현재를 ‘실재 그러한 그대로’ 전해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가들이 일하는 방식도 언론인과 다르지 않다. 역사가도 각자 나름의 개성과 취향이 있고 서로 다른 욕망과 감정에 끌리며 저마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과거의 사실 가운데 자신이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을 선택해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한다. 사실의 선택과 선택한 사실의 해석, 역사 서술의 핵심인 두 가지가 모두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역사를 둘러싼 다툼이 생기는 것이다.

현대사를 이야기하는 데는 위험이 따른다. 다수 대중의 판단과 정서에 어긋나게 말하면 험악한 구설에 휘말린다.

없는 것을 지어내거나 사실을 왜곡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들을 선택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로 묶어 해석할 권리는 만인에게 주어져 있다.

역사를 정직하게 대면하려면 당위(當爲, 마땅히 해야하거나 되어야 할 것)로 현실을 재단하려는 집착을 버려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훌륭한 이상국가 또는 그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외국에 견주어 우리의 현대사를 본다. 더 훌륭한 대상을 보고 배우려는 자세는 바람직하다. 하지만 남과 비교하는 데 너무 집착하면 우리 역사의 어둡고 수치스러운 장면만 주로 보이기 때문에 자칫 ‘자학적 역사 인식’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 반면 어떤 사람들은 우리 역사가 반드시 훌륭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현대사의 밝고 자랑스러운 장면만을 보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너무 집착하면 객관적인 사실을 부정하고 명백한 불의까지도 합리화하는 ‘자아도취적 역사인식’에 빠질 수 있다.


프롤로그 : 프티부르주아 리버럴의 역사체험

흐름 속에 있는 것은 사건만이 아니다. 역사가 자신도 그 속에 있다. 어떤 역사책을 집어들 때, 책 표지에 있는 저자의 이름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출간 일자나 집필 일자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것이 때로 훨씬 많은 것을 누설한다. - 에드워드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책을 읽을 때는 글쓴이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살피는 게 좋다.

*이 책에서 인용하는 인구통계는 모두 국가통계포털(kosis.kr)에서 가져온 통계철의 데이터.

내가 이 책에서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감정과 느낌이다.

역사는 주관적인 기록이다. 누가 쓴 어떤 역사도 과거를 ‘원래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들의 지속적 상호작용이다.

“당신, 가치관이 문제가 있어. 인생 잘못 사는 거야!” 이런 말을 듣고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다. 그런데 같은 말을 해도 역사를 가지고 하면 부담이 덜하다. “당신, 역사를 잘못 아는 거야!” 이것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에 대한 인식과 견해를 비판하는게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한 비난일 수 있다.



제1장 역사의 지층을 가로지르다 : 1959년과 2014년의 대한민국


우리를 압살하고 지나가는 근대화와 자본의 맹목적이고 무서운 속도를 일시 정지시키고 ‘이것이 과연 인간다운 것인가’ 물었던 것, 그것이 1980년에서 내가 가져온 작은 불꽃이다. 나는 이 불꽃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그러나 아주 작은 것들 하나하나를 비추어 보려 한다. 1980년대 내내 나는 얼마간 비관주의자였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나는 고통스러운 자기응시를 통해 작지만 단단한 희망을 말하고 싶다. “30년에 300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는 나의 고통스러운 자기응시에 붙여진 이름이다. - 김진경 <30년에 300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


우리 역사에서 모든 청년에게 ‘제대로 된 일자리’가 주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승만 정부는 ‘북진통일’, ‘멸공통일’을 외쳤지만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않았으며 헌법이 명시한 민주주의를 실현하지도 않았다. 국민을 빈곤에서 구해내는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다. 국부(國父)를 자처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무능하고 이기적인 ‘폭력가장’이었을 뿐이다. 국민의 삶은 불안하고 비참했다.

당시 정부는 국민을 보호할 최소한의 능력도 없었다.

무엇이 역사의 지층을 가로지른 것 같은 대한민국의 변화를 일으켰는가. 흔히들 위대한 국민의 힘이나 지도자의 뛰어난 리더십을 거론한다. 하지만 우리가 남달리 위대한 국민이라는 증거는 없다. 정말 위대한 국민이라면 지난날 나라를 빼앗기지도, 동족상잔의 내전을 벌이지도, 남의 원조를 받으며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권력자들이 특별히 대단했다고 주장할 근거 역시 희박하다. 이승만에서 박근혜까지 저마다 좋아하는 대통령과 싫어하는 대통령이 있겠지만, 누구도 ‘위대한 지도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자신의 과제라고 믿은 일들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하려 했을 뿐이다.

1959년 국민의 가장 강력한 욕망은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 북한의 위협과 사회 내부의 혼란에서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문제였다. 사람들은 이 욕망을 충족할 수 있게 해주기만 한다면 어떤 사람이나 집단에게도 복종할 뜻이 있었다. 4.19에서 5.16까지 1년을 제외하면, 국민들은 정부 수립 이후 1987년까지 40년 동안 권력에 굴종하며 살았다. 이승만 정부는 ‘멸공통일’을,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는 그와 더불어 ‘경제발전’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힘으로 대중을 억눌렀다. 격렬하게 저항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자유과 인권, 민주주의에 대한 억압을 기꺼이 받아들이거나 어쩔 수없이 굴복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에 근접해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자원을 어느 정도 확보한 다음에야 대중은 분명한 태도로 자유와 민주주의, 사회정의와 인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그렇게 해서 일어났다.

제헌국회는 계급제도를 부정하는 민주공화제 헌법을 채택했지만 우리 국민은 그때까지 민주공화국이 무엇인지 듣지도 배우지도 겪지도 못했다. 큰 틀에서 볼 때 제헌헌법은 유럽과 미국의 헌법을 복사한 것이었다. .. 민주광화국은 사유재산제도와 법치주의의 토대 위에서 개인의 인권과 자유, 창의성과 경쟁을 북돋우는 체제이며, 정부와 의회 지도자를 선출하고 입법 사법 행정 권력을 분산해 서로 견제하게 함으로써 국가가 시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분권적 정치 시스템이다.
민주주의는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삼는다.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 한 욕망을 표출하고 추구할 자유를 무제한 인정한다. ..제도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배적 사고방식의 산물이지만, 외부에서 어떤 제도가 ‘이식’(移植)되는 경우에는 거꾸로 제도가 그에 맞는 사고방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는 권력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제2장 4.19와 5.16 : 난민촌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


사고하는 역사가는 엄밀하게 말하면 과거의 문제를 풀고 잇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긴급하게 해결을 요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리의 역사성에 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책임감 있게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의 역사를 회피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해야만 하는 긴장관계를 견뎌 내야만 한다. - 한스 위르겐 괴르츠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프랑스 정치가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805~1859)이 한 말로 알려져 있다.

토크빌이 전적으로 옳다. ‘국민의 수준’에는 훌륭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능력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분단을 막으려고 38선을 넘나들며 협상을 벌이는 동안 이승만 박사는 차근차근 분단국가의 권력을 장악할 준비를 했다.

정치인 이승만은 한반도에 지구촌 냉전체제의 모델하우스를 세웠다. 제주4.3사건을 비롯해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일어났지만, 1948년 5월 10일 한반도의 북위 38도 이남지역에서는 유엔 감독 아래 국회의원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승만은 제헌의회 의장이 되었다. 제헌의회는 대한민국 헌법을 채택했고 7월 20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1948년 8월 25일 우리의 국회의원 총선과 비슷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유권자 대부분이 투표했고 단독후보에 대한 찬성률도 거의 100%였다. 최고인민회의는 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했으며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했다.

포병 소위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삼팔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민족의 분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

역사에는 가정이 필요 없다고 하지만, 때로 가정은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공산화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통일국가로 가는 결과 북한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고 남한에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길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분단을 거부한 민족주의자는 전자를 선택했지만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은 차라리 후자가 낫다고 판단했다. 그 대표자가 바로 이승만 박사였다.

이승만 대통령 .. 그는 민주공화국이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은 너무 많이 했다. 국가의 정통성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 국가의 정통성은 특정한 이념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 국가의 정통성은 내부에서 형성된다. 내세우는 이념이 무엇이든 국민이, 민중이, 인민이, 또는 대중이 그 나라의 국민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국가의 결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복종할 때,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무질서에 대항해 공동체를 지키려고 헌신하려는 태도를 보일 때, 그 국가는 정통성 있는 국가가 되며 자연스럽게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다.
식민지에서 풀려나 만든 신생국가는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정통성을 가질 수 있다. 첫째는 역사적 대의명분이다. 신생 대한민국의 긴급과제는 일제 잔재를 청산해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우는 일이었다. .. 둘째는 경제적 효율성이다. 민중을 빈곤에서 해방하고 물질적 삶을 개선해야 국민이 최소한의 기대를 품고 국가에 복종 협력하게 된다. 셋째는 민주적 정당성이다. 헌법에 따라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고 주권재민 또는 인민주권의 원리를 실현해 정치적 정당성을 지닌 정부를 세워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과 집권세력은 오로지 권력의 단맛을 누리는 데만 몰두했을 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정치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손을 잡았다.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했다가 광복 후 ‘친미’, ‘반공’의 깃발을 들고 살아남은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일본군 장교는 국군 장교가 되었으며 조선총독부를 위해 일했던 특고형사는 경찰 간부가 되었다. 판사, 검사, 공무워, 교사, 지식인, 경제인도 모두 독립국가의 지배층이 되어 예전보다 더 큰소리치며 살게 되었다.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와 특별경찰, 특별검찰, 특별재판소를 설치했다.

반민특위는 일단 6682명을 조사해 559명을 특별검찰에 송치했다. 특별검찰이 그중 일부를 기소하자 특별재판소가 재판을 열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가 헌법의 삼권분립 정신을 해친다면서 반민특위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 절정은 1949년 1월 반민특위가 노덕술을 체포한 사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을 즉각 석방하고 반민특위 관계자를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그에게 노덕술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해 악랄하게 고문했던 일제 특고형사가 아니라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공산당을 때려잡는 대한민국의 경찰관이었다. 노덕술이 국회보다 더 중요했다. 이때 살아남은 노덕술은 후일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고문해 반국가 인사 또는 간첩으로 조작하는 고문수사와 노하우를 대한민국 경찰과 정보기관에 전수했다. 1985년 민주화운동 청년연합 김근태 의장을 참혹하게 고문한 이근안과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 씨를 죽인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형사들은 모두 노덕술의 후예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반민특위 해체와 정부요인 암살 음모를 꾸몄다가 실패하자 반민특위법 제정과 특위활동에 앞정선 젊은 국회의원들을 간첩으로 몰아 구속했다. 소위 ‘국회프락치 사건’이다.

경찰이 특별조사위원과 특별검찰관의 집을 수색하고 사무국과 재판부의 서류를 탈취했다. 겁을 먹고 굴복하는 국회의원이 늘어났다. 결국 국회는 공소시효를 단축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일을 할 수 없게 된 김상덕 반민특위 조사위원장과 특별조사위원 전원, 일부 특별검찰관과 특별재판관들이 사표를 냈다. 국회는 친일파 비호세력을 주축으로 새로운 특위를 구성했다. 반민특위는 이렇게 막을 내렸고, 국회는 1951년 반민법을 폐지했다. 처벌받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이 민족사적 정통성을 결여한 채 출발한 이유와 과정을 엄정하게 평가하고 철학적으로 소화하는 것뿐이다.



미완의 혁명 4.19

국가가 민중에게 지속적인 승인과 복종을 요구하려면 잘살게 해주어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발전계획을 세워 생산력을 높이고 국민의 생활을 개선하는 정책을 거부했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주권재민’의 원리와 합법적 절차에 따라 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정부는 헌법과 법률에 의거해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다수 국민들이 원할 때는 평화적 합법적으로 정부를 교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럴 때 국가는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을 짓밟고 국회와 법률을 무시했으면 부정선거를 일삼았다.

민족사적 정통성도 없고, 경제적 효율성도 없으며, 민주적 정당성마저 없는 정부가 들어선 나라는 정통성있는 국가일 수 없다. 결국 국민들이 저항권을 행사하기로 결심했다. .. 그것이 4.19혁명이었다.

혁명의 첫 징후가 나타난 곳은 대구였다. 1960년 2월 28일 일요일에 수성천변에서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 연설회가 열렸다. 그런데 대구의 국공립고등학교에 등교령이 내렸다. 영화 관람이나 토끼 사냥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일요일 등교령의 목적은 학생들이 장면 후보 연설회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대구상고 등 시내 거의 모든 고등학교 학생들이 교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독재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함성을 내지르면서 대구 중심가를 달렸다. 이것이 대구 시민들이 자랑하는 ‘2.28학생의거’다.

4.19혁명의 불길을 피워 올린 것은 고등학생들이었다. 대학생들은 수많은 중고등학생이 체포되고 맞고 다치고 죽은 다음에야 집단으로 투쟁에 참여했다.

4워 19일 아침 이승만 대통령 과저 경무대ㅐ와 서대문 이기붕이 집 앞에 중학생과 초등학생을 포함해 수만 명이 시민이 모였다. 시위대는 대통령 면담과 김주열 사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경무대 정문을 밀고 들어가려 했다. 서대문 이기붕 집의 상황도 비슷했다. 경찰이 총을 쐈다. 두 곳에서 21명이 죽고 172명이 총상을 입었다. 이렇게 되자 시위는 단순한 부정선거 규탄을 넘어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정치혁명으로 치달았다. 오후 3시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시민들은 경찰 총기를 빼앗아 곳곳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날이 저물자 서울 시내에 계엄군이 진입했다. 그런데 계엄사령관 송요찬 장군이 군의 선제발포를 공개적으로 금지했다. 이승만 정권을 지켜줄 의사가 없다는 뜻을 밝힌 셈이다. 시민들은 두 팔을 벌려 계엄군을 환영했고 탱크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었다.

4월 25일에는 대학교수들이 거리로 나왔다.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하야를 권고했다. 법무장관 권승려르 외무부장관 허정도 하야를 요청했다. 4월 26일 오후, 마침내 대통령 담화가 나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1960년 4월 29일 국회는 만장일치로 내각책임제 개헌을 결의했다. 4.19혁명 와중에 직을 사임한 장면 부통령 대신 수석 국무위원이었던 허정 외무부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국회는 내각제 개헌안을 처리하고 총선을 실시해 새로운 양원제 국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대통령에는 윤보선 총리에는 장면을 선출해 제2공화국을 출범시켰다.

4.19는 미완(未完)의 혁명이었다. 부정선거 규탄으로 시작해 민중의 힘으로 독재자를 축출하고 새 정부를 세웠다는 점에서는 분명 성공한 정치혁명이었지만 그 혁명을 완성할 능력과 의지를 가진 주체가 없었기에 혁명의 정치적 결과는 기존 정치세력 민주당의 집권으로 귀착되었다.



성공한 쿠데타 5.16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이 3,500여 명의 무장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서울에 들어와 정부청사와 언론기과 등 주요 시설을 점령했다. 대통령과 정부, 국회 등 모든 국가기관의 헌법적 권한과 기능을 폭력으로 정지시키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반공, 한미동맹, 사회적 부패와 정치적 구악(舊惡) 일소 등을 열거한 혁명공약의 핵심은 두 가지 였다. 국가 자립경제 재건에 총력을 기울여 기아선상에 방황하는 민생고를 해결함으로써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4항), 혁명의 과업을 이루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학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6항)는 것이다.
‘민생고 해결’을 내세운 것은 아마도 박정희 소장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병영복귀’ 약속은 의도적인 거짓말이었다. .. 혁명에 성공하려면 적을 최소화하고 대중의 신뢰를 얻을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래서 마치 순수한 애국심에서 거사한 것처럼 보이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박정희 소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꾼 다음 장도영 장군을 밀어내고 스스로 의장이 되었으며 군부의 반대파를 차례차례 제거했다.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정보공장정치를 할 태세를 갖추고 국회에서 자신을 보위할 민주공화당을 창당한 다음 헌법을 바꾸어 의워낸각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중심제를 도입했다. 그런 다음 병영으로 복귀한다는 혁명공약 제6조를 폐기하고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제5대 대통령이 되었다. .. 그는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윤보선을 꺾고 재선했다.

헌법의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폐지하고 1971년 금권, 관권을 동원한 부정선거로 제7대 대통령이 되었다. 1972년 10월에는 또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시대 왕보다 더 강한 권력을 수중에 넣은 다음 대통령 긴급조치를 아홉 번이나 발동해 야당과 비판세력을 목 졸랐으며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납치해 죽이려 했다. 자신의 추종자들만 체육관에 모아놓고 혼자 출마해 100% 찬성으로 제8대와 제9대 대통령이 되었다.
5.16은 단순히 제2공화국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4.19가 만든 모든 것을 파괴해버렸다.

혁명인지 쿠데타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쿠데타는 혁명과 달리 민중의 동의와 지지와 참여가 없이 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다. 군대를 동원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군사쿠데타다. ..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운영을 잘해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도 5.16이 군사쿠데타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제3장 경제발전의 빛과 그늘 : 절대빈곤, 고도성장, 양극화


‘여가가 없는 시민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는 아무 의미가 없다. 90% 사람들은 항상 일만 하고 여가가 없는 반면 10% 사람들은 늘 놀면서 전혀 또는 거의 일하지 않는다면 자유란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 ..’ - 버나드 쇼, <쇼에게 세상을 묻다>


박정희 정부는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토대를 구축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지배한 것은 기회균등과 공정경쟁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이었다. 이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대한민국은 박정희 정부 이래 개발독재와 재벌 중심의 자본 축적, 수출주도형 산업화의 길을 걸었다.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낡은 경제 구조를 혁신하지 못했으며, IMF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과거와는 양상이 다른 정글법칙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한국 경제는 1970년대에 ‘이륙(離陸, take-off)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저 사실일 뿐이다. 그 사실을 곧바로 특정한 가치판단과 규범적 평가로 바꿀 수는 없다. “산업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독재를 해야 했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동시에 이룰 수 없다.”, “독재를 해서 경제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민주화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산업ㅎ호하를 함께 추진해볼 기회를 자기 손으로 봉쇄했다.

나는 인간 박정희가 아무 ‘주의자’도 아니었다고 본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반공주의, 군국주의, 자유주의, 그 어떤 이념도 그를 온전하게 사로잡지는 못했다. 생애 전체를 볼 때 그가 일관성 있게 추구한 것은 권력 하나뿐이었다.

박정희 시대 한국 경제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자본주의 선진국과 제국주의 일본,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을 절반씩 닮은 체제였다. 다시 말해서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기본질서에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를 결합한 혼합형 경제체제였던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경제체제도 그와 비슷하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가동하는 데 필요한 최초의 자본을 형성하는 것을 ‘자보의 원시적 축적’이라고 했다. 영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선진국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 과제를 해결했다. 첫째는 봉건적 특권을 자본화하는 것이었다. 유럽의 귖족들은 중세 이래 농민들이 가지고 있던 경작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함으로써 토지에 대한 봉건적 특권을 자본주의적 소유권으로 전환했다. ..
둘째는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수탈이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등 모든 산업국이 군사력으로 다른 전통사회를 정복해 부와 노동력과 자원을 약탈함으로써 자본을 축적했다. 소련과 중국은 다른 방식으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이루었다. 그들은 봉건적 특권을 사유재산이 아닌 국가자본으로 전환했다.

대한민국은 서유럽 국가와 달랐으며 사회주의 국가도 아니었다. 자본화할 수 있는 중세적 특권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다른 나라를 수탈할 능력도 없었으며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동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실정에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했으며 자본을 해회에서 차입하고 기업으로 하여금 폭리를 취하게 함으로써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이룬 것이다. 최초 해외자본 차입의 줓체는 정부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업의 해외 차입을 조금씩 열어주었다. 정부는 독점기업들이 시장지배력을 이용해 폭리를 얻도록 했으며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소비자와 노동자를 착취함으로써 기업들은 짧은 기간에 막대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정부는 한일국교 정상화와 베트남전쟁 파병 등을 계기로 일보노가 미국 자본을 들여와 중화학공업 건설작업에 시동을 걸었고 제3차 5개년 계획 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얻었다.


예나 지금이나 성매매는 엄연한 불법이다. 하지만 정부는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소위 ‘기생관광’을 공공연하게 허용했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로 일본인 관광객이 급증했다. 1973년 외국인 관광객 68만 명 중 80%가 일본인이었는데, 그 대부분이 기생관광을 즐기러 온 일본의 하위 소득계층 남자들이었다. ‘외화벌이’를 한다면 안 될 일이 없었다. 종로 10곳을 비롯해 서울에만 14곳, 부산에 7곳, 경주에 4곳, 제주도에 2곳의 관광요정이 있었다. 가장 규모가 컸던 삼청각과 대원각에는 ‘관광기생’ 수가 800명이나 되었다. 여행사와 관광요정, 호텔이 삼각 동맹을 맺은 이 국제적 성매매상업은 1973년 한 해에만 2억 달러의 관광수입을 안겨준 것으로 추정된다.

박정희 정부는 <공산당 선언>에서 “현대 국가는 부르주아지의 일상사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한 마르크스의 견해가 최소한 진실의 일면을 포착한 것임을 증명해 보였다.


한국 경제는 시장경제체제가 아니었다. 시장의 원리에 따르면 자본은 저절로 수익성 높은 투자 프로젝트를 가진 산업과 기업으로 흘러간다. 그런데 산업화 이전의 대한민국에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시장과 금융시자이 존재하지 않는다. 외국이나 한국 은행에서 돈을 빌려 만든 투자재원을 정부가 기업에 직접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정부의 실체는 박정희 대통령과 특근 참모들이었다. 아무리 수익성 있는 투자 프로젝트를 가진 사람이라도 정부에 줄을 대지 못하면 자금을 받을 수 없었다. 특혜가 있는 곳에는 정경유착과 부패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재벌체제가 탄생했다.
대통령과 참모들의 신임을 받은 기업인들은 물가인상률보다 훨씬 낮은 이자를 내는 정책자금을 받았다. 각종 특혜와 행정편의를 제공받으면서 국내시장의 독과점 공급자가 되어 소비자인 국민을 착취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여러 산업 분야에 진출해 거대한 기업집단을 형성했다. 삼성그룹 이병철, 현대그룹 정주영, 선경그룹 최종현 등 거대 기업집단을 만든 재벌 창업자들은 그런 일에 빼어난 능력을 발휘한 사람들이었다. 정부는 재벌 대기업이 수출을 해서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도록 자금과 세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재벌 총수들은 대통ㄹㅇ과 권력실세들에게 ‘통치자금’ 명목의 뇌물을 넉넉하게 바쳤다.

한국 경제의 성장은 생산기술 향상을 동반했다. 노동자를 생산에 투입하려면 기술교육을 해야 한다. 봉제, 섬유, 합판, 식품, 전자조립 등 산업화 초기의 단순 제조업 분야에서는 기업이 스스로문제를 해결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도 채 마치지 못한 어린 노동자들을 ‘시다’로 채용해 급여를 적게 주고 일을 시켰다.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책자를 껴안은 채 분신했던 청계천 옷 공장이나 지금은 가산디지털단지로 변모한 구로공단 봉제공장들이다 그랬다. 하지만 금속, 전자, 전기, 자동차, 조선, 철강 등 부가가치가 높은 제조업과 중화학공업 분야에서는 더 높은 수준의 지식과 기술을 지닌 노동자가 필요했다.
정부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지원하는 한편 전국 각지에 직업훈련원을 만들었다. 고등학교를 마친 청년들이 여기서 2년 정도 교도소 수용자들보다 적은 급식예산으로 제공하는 밥을 먹고 군대와 비슷한 집단생활을 하며 기술교육을 받은 다음 울산과 창원 등의 대공장에 집단적으로 투입되었다. 이 직업훈련원들은 오늘날 평생교육을 담당하는 폴리텍대학이 되어 있다. 대학과 전문대학들은 새로운 산업과 관련된 학과를 신설했다. 정부는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국가연구소를 만들고 민간기업도 연구소를 만들도록 독려했다. 한국의 산업화는 전쟁과 비슷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채택한 북한이 혁명이념을 주입해 ‘천리마운동’과 ‘새벽별 보기운동’에 노동자를 동원하던 그 기간에 자본주의 계획경제를 선택한 대한민국에서는 더 나은 물질적 삶을 바라는 욕망과 자본가들의 이윤추구 욕망이 노동자들을 ‘만리마운동’과 ‘별도 보지 않고 밤새 일하기 운동’으로 몰아넣었다. 노동자들은 잠을 쫓기 위해 ‘타이밍’이라는 이름의 알약을 먹으면서 철야작업을 했고 공장 관들은 옷핀으로 팔을 찔러 피로에 지쳐 조는 여성 노동자를 깨웠다.
이것은 자본의 원시적 축적과 생산능력의 확대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 정부는 극단적인 수출장려와 수입억제 정책을 채택하고 ‘애국적 소비’를 권하는 대규모 캠페인을 전개했다.

소비재 수입을 사실상 금지한 대한민국에서 시장을 독식한 재벌 대깅업들은 마음껏 독점시윤을 얻었다.

무역정책과 산업정책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19세기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애국지사였던 프리드리히 리스트(Friedrich List, 1789~1846)의 충실한 제자였다고 할 수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풍미했던 19세기 중반, 리스트를 자신이 독일인이기 때문에 자유무역론을 거부한다고 말했다. 그는 산업기반이 약한 독일이 자유무역을 하면 경제적으로 영국의 패권 아래 편이뵈어 별 볼일 없는 산업을 가진 2등 국가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래서 먼저 높은 무역장벽을 치고 자국의 산업을 육성한 다음, 충분한 실력을 갖추었을 때 국내시자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스트를 독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 공산품에 높은 관세를 매겨야 한다고 제안했으며, 그런 목적으로 부과하는 관세에 ‘보육관세(保育關稅, Erziehungszoll)라는 멋진 이름을 붙였다. 대한민국의 무역정책은 뒤늦게 산업화를 시작한 나라에는 보호무역주의자 리스트의 전략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리스트의 이론을 212세기 버전으로 감상하고 싶은 독자들은 보호무역주의와 국가산업 정책을 옹호하는 장하준 교수의 책들을 보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국 경제는 19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세계사에서 보기 힘든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성장 속도에서 한국을 추월한 나라는 중국뿐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것을 이루기 위해 18년 동안 철권통치를 했다. .. 그래서 그는 교육과 언론을 통제하고 여론을 조작함으로써 국민을 세뇌하려고 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는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를 불러들인다.


부당한 권력 행사를 비판하고 싸우는 사람도 있지만 더 많은 사람이 그에 적응하거나 편승해 자기의 이익을 도모한다.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남들이 그렇게하기 때문에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한다. 그것이 산업화시대 대한민국의 현실이었으며 그런 현실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건설사가 중동 국가를 비롯한 외국에서 지은 건물과 교량이 무너진 일은 없었다. 그런데 나라 안에서 지은 것은 종종 무너졌다. 여러 원인이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부정부패였다. 우리나라 재벌그룹은 대부분 건설사를 계열사로 보유하고 있다. 없으면 만들었고, 만들지 못하면 인수합병이라도 했다. 그 목적이 불법 비자금 조성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 모두가 재벌 탓은 아니겠지만, 부패문화의 진원지가 재벌과 정치권력의 유착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재벌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으며, 어쩌면 우리의 미래마저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 재벌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헌법 위에 군림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국가 권력을 통한 정치적 민주적 개입과 통제뿐이다. 나는 이것이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라고 본다.


전두환의 ‘제5공화국’은 모든 면에서 유신체제의 불필요한 연장이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승리와 더불어 국내 경제환경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자들이 노조활동 자유 보장과 임금,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7~8월 대투쟁을 일으켰다.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12.12와 5.18의 주동자였던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36% 득표율로 당선하긴 했지만, 1988년 4월 국회의원 총선에서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가 출현해 민주화는 더욱 진전되었다.

1990년대 중반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민간소비와 기업의 설비투자가 활발했다. .. 냉전시대에 구축한 ‘자본주의적 계획경제’를 ‘개방적 시장경제’로 전환하기 위해 정부는 외국환 거래와 민간기업의 해외 금융채무 취득 등을 비롯한 금융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외환위기의 원인은 기체결함과 조종밈숙 둘 다 였다. 김영삼 정부는 국내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와 민간기업의 자본수입 규제를 대폭 완화하면 한국은행의 통화관리 능력이 크게 위착된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재벌그룹의 연쇄부도로 금융기업들은 막대한 부실채권을 떠안게 되었다. 금융기업의 재무 건전성이 악화되자 한국 경제 전체의 신뢰가 하락했다. 외국 금융기업들이 단기채 채무상환기간 연장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 당시 맹위를 떨치던 국제투기자본이 한국 경제를 멋잇감으로 지목하고 원호와 원화표시 자산을 투매했다.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 공급이 끊기가 기업과 금융기관들은 해외결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 1997년 11월 21일, 한국 경제는 기초가 튼튼해서 외호나위기는 없을 것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던 정부는 국제투자기금(IMF)에 자금지원을 요청했고 11월 29일 IMF는 구제금융을 제공한다고 발표했다. .. 캉드쉬 총재는 협약을 충실하게 이행하겠다는 서약서에 김대중, 이회장, 이인제 등 유력 대통령 후보들의 서명을 받았다. IMF 의 ‘경제신탁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IMF가 추구한 목표는 명확했다. 박정희 정부 이래 남아 있던 중앙통제식 계획경제 요소를 완전히 없애고 미국식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을 이식하는 한편 IMF의 구제금융 자금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일본의 금융기관이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에 제공한 대출금과 이자를 완벽하게 회수하는 것이었다.

수익성 낮은 부실 기업을 정리하기 위해 금리를 대폭 높이고 정부의 재정지출을 축소했다.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라는 명분으로 노동자를 대량 해고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 모든 것은 IMF가 중남미와 동남아시아 등 구제금융을 받은 모든 나라에 내린 표준처방이었다.

이름난 재벌그룹들이 부도를 맞거나 대규모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구조조정은 대량해고와 같은 말이었다. 정부는 철도, 통신, 전력 등 국가기간산업의 공기업을 민영화 또는 사유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정부는 IMF의 긴축재정 요구에 굴복해 사회간접자본을 해외투기자본에 개방했다. 엉터리 교통량 예측을 토대로 사업을 발주하고 높은 수익률을 보장한 민자 고속도로 외국투기자본의 먹이가 되었다. 부실 생명보험사 네 곳이 알리안츠생명, 삼성생명, 대한생명, 교보생명으로 넘어갔다. 부실금융기관과 부실기업을 회생시키기 위해 막대한 규모의 공적 자금을 투입한 탓에 국가채무가 급증했다. 그런 혼란과 고통을 겪은 끝에 대한민국은 2001년 구제금융 전액을 상환함으로써 IMF경제신탁통치를 마감했다.
한국 경제의 기체결함은 ‘죽기에는 너무 큰(too big todie) 재벌이 국민경제의 중심이라는 것이었다. 삼성, 현대, LG, 대우, SK 같은 대형 재벌그룹이 망하면 수많은 협력업체와 자금을. 대출한 금융 기관이 망하고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는 실업자가 된다. 재벌 총수들이 회사를 잘못 운영해 망할 위기에 빠져도 국민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정부가 회사를 살려주어야 한다. 재벌 입장에서는 위험한 투자를 해서 돈을 벌면 자기 것이 되고 방만한 경영을 해서 문제가 생기면 국가와 국민에게 짐을 떠넘길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이익을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는 행동을 경제학 전문용어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라고 한다.

외환위기의 두 번째 원인은 정부의 환율고나리 실패였다. .. 환율은 세 가지 요인으로 인해 변화한다. 첫째, 장기적으로 환율은 물가인상률에 좌우된다. 물가인상률이 높으면 그 나라 화폐는 값이 떨어진다. 1980~1990년대 한국의 물가인상률은 미국, 유럽, 일본보다 높았다. 장기적으로 달러 환율은 오르는 게 정상이었다. 둘째, 단기적으로 환율은 경상수지에 좌우된다. 지속적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보는 나라의 환폐는 가치가 떨어진다. 그렇게 해서 수입가격은 오르고 수출가격이 떨어져야 경상수지 적자가 해소된다. 199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는 지속적으로 경상주시 적자를 기록했다. 그런데도 1997년 여름까지 몇 년 간 달러 환율이 점진적으로 하락했다. .. 이렇게 된 것은 환율변동의 초단기 요인인 자본수지가 흑자였기 때문이다. .. 서울 외환시장의 달러 공급이 늘어났기 때문에 환율이 낮게 유지된 것이다.

신 자유주의에 입각한 IMF의 표준 처방전은 심한 부작용을 야기했다. ..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이름 아래 기업이 노동자를 사실상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게 허용하는 정리해고제를 도입했고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연봉제와 성과급 제도를 확산시켰다. 노동조합은 야과되었고 실질임금이 하락했으며 고용불안은 높아졌다.

구제금융을 상환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던 제도들이 시자유주의로 표현되는 국제 경제환겨으이 변화와 맞물리면서 사회경제적 양극화라는 사회악을 키웠다.

기업이 정리해고를 사실상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고, 파견과 사내하청 등 간접고용이 널리 퍼진 결과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이 되었고 임금노동자 내부의 임금격차는 크게 확대되었다.

IMF 경제위기에서 탈출하고 새로운 발전전략을 찾기 위해 정부는 두 갈래로 노력했다. 첫째는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대세를 형성한 세계 경제환경을 받아들이면서 기회균등과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경제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해 복지 정책 또는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민주정부 10년 동안 둘 모두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소득불평등 또는 소득불균등을 측정하는 지표로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 지니계수와 소득 5분위 배율이다. 지니계수는 모든 국민이 완전하게 균등한 소득을 얻으면 0이 되며 한 사람이 모든 소득을 독점하면 1이 된다. 지니계수가 0.3미만이면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0.4를 넘어가면 사회적 불안이 야기될 가능성이 높다. 소득 5분위 배율은 최고 소득계층 20%의 평균소득을 최저 소득계층 20%의 평균소득으로 나눈 값이다. 소득격차가 커질수록 소득 5분위 배율은 높아진다.

예컨대 지니계수는 여러 종류가 있다. 전국 모든 가구를 대상으로 한 것이 있고 2인 이상 도시근로자 가구만을 대상으로 한 것도 있다. 시장소득 지니계수가 있는가 하면 납부한 세금을 제외하고 국가보조금을 더해 산출한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도 있다.



통계청이 전국 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 소득분배지표를 발표한 것은 2006년이 처음이었다. 2006년도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전국가구 0.330, 2인 이상 비농가 0.312, 2인 이상 도시가구 0.305였다.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는 각각 0.306, 0.291, 0.285였다. 가처분소득 지니계수와 시장소득 지니계수의 격차가 0.02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은 조세와 복지제도를 통한 국가의 재분배기능이 매우 약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2006년 시장소득 5분위배율은 전국가구 6.65, 2인 이상 비농가 5.74, 2인 이상 도시가구 5.39였다. 가처분소득 5분위 배율은 각각 5.38, 4.83, 4.62였다. 시장소득 5분위 배율과 가처분소득 5분위 배율의 격차 역시 그리 크지 않았다. 전국가구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2008년과 2009년 0.314로 최고점을 찍었고 2012년에는 0.307로 조금 하락했다. 전국가구 시장소득 5분위 배율은 계속 상승해 2011년 7.86으로 최고점을 찍었고 2012년에는 7.51로 조금 하락했다. 전국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모든 소득분배지표가 2006년 이후 지속적 악화 추세를 보인 것이다. 조사방법이 달라지면 지니계수도 달라진다. 통계청과 금융감독원, 한국은행이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산출한 2012년 전국가구 지니계수는 0.357로 예전 방법으로 조사한 0.307보다 훨씬 높았다.**
**『한겨레」, 2013년 11월 20일자 보도. 기존의 지니계수는 도시와 농촌을 섞은 1만2,000 표본가구를 대상으로 하며 재투자와 저축 등 유보분을 제외한다. 새로운 지니계수는 2만 가구를 표본으로 가구의 유보분을 포함한 • 기준으로 산출한 것이다 재투자와 저축 등 유보분이 많은 고소득층의 소득이 더 높게 잡히기 때문에 새로운 방식으로 통계를 산출하면 지니계수와 소득 5분위 배율 등 모든 분배지표에서 소득격차가 더 크게 벌어진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부자감세다. 이명박 대통령은 법인세와 소득세율을 인하함으로써 재임 중 누적효과가 100조 원에 육박하는 감세를 했고 혜택은 대부분 대기업 주식 소유자와 고소득층의 몫이었다. 자영업자와 임금근로자 절반이 소득세 면세점보다 낮은 소득을 얻기 때문에 직접세 감세는 중간소득 이하 계층의 국민들에게는 단 한 푼의 혜택도 주지 않는다. 대기업의 투자와 부유층의 소비를 유도한다는 목적을 내세웠지만 감세의 투자촉진 효과는 별로 없었다. 둘째는 부동산 거래 규제완화로 단기적 경기부양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동산 가격은 오히려 하락했다. 부동산 투기 시대의 거품이 덜걷힌 상황에서는 규제완화로 부동산 경기를 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셋째는 4대강 사업이다. 초대형 토목공사를 벌려 경기를 부양하려 했지만 환경을 파괴하고 국가의 돈을 건설회사 금고로 이전시켰을 뿐 고용증대와 경기진작 효과는 거의없었다. 넷째는 수출을 증진하기 위해 환율을 인위적으로 올린 정책이다. 이 정책은 미국의 리먼 브러더스 파산사태와 맞물려 환율폭등을 일으킴으로써 달러로 표시한 1인당 국민소득의 대폭 하락을 불렀다. 양극화의 원인이었던 경제력 집중과 오남용,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확산, 낙수효과 감소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는 부자감세 정책을 철회하지 않았다.박근혜 정부가 처음 편성한 2014년도 정부 예산안에는 기초노령연금 수급액을 두 배로 올리는 것 이외에 복지지출을 크게 확대하는 정책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철도 민영화 정지작업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수서발 KTX 자회사를 설립했고 비영리 의료법인이 영리 자회사를 세울 수 있게 하는 의료법 개정을 추진했다. 공공부문의 사유화 또는 시장화 정책을 강행한 것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입법과 정책은 전무했고 재벌 경제력집중의 폐해를 시정하는 경제민주화 공약도 완전히 실종되었다.
2014년 들어서는 규제를 ‘암 덩어리’, ‘쳐부숴야 할 원수’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규제철폐 작업을 시작했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2012년 이명박 후보와의 후보경선 때 내세웠던 ‘줄푸세' 공약, 다시 말해서 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서 4대강 사업하나를 빼면 곧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이 된다. 소득분배의 개선과 양극화 해소에 관한 한 특별한 기대를 할 수 있는 근거는 찾을수가 없다.




제4장 한국형 민주화 :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한 민주주의 정치혁명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한 전제정치에서 폭력 행사는 정당하다. 그런데 그 목적은 오직 폭력을 쓰지 않고도 개혁을 할 수 있는 민주정치를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민주 헌법과 민주주의적 방법을 파괴하려는 안팎의 공격에 대항하는 폭력 행사 역시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시민의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민주주의의 요체는 무엇인가. 첫째, 주권재민(主權在民)이다. 권력의 정당성 또는 정통성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다수 국민의 동의를 받지 않고 성립된 권력은 인정할 수 없다. 둘째는 국가권력의 제한과 분산, 상호견제다. 민주주의는 국가권력의 오남용을 막기 위해 입법권과 사법권, 행정권을 분리하고 선출 공직자의 임기를 제한하며 권력기관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게 한다. 셋째는 법치주의다. 시민의 자유와 권리는 오로지 법률로만 제한할 수 있으며, 정부는 헌법이 부여한 권한의 범위 내에서 법률에 따라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



20세기의 대표적 자유주의 철학자 칼 포퍼(Karl R. Popper, 190~1994)의 정치이론을 활용할 수 있다. 포퍼는 어떤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인지 전제정치 체제인지 가리는 기준을 하나로 정리했다. 다수 국민이 마음을 먹었을 때 정권을 평화적으로 교체할 수 있으면 그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다. 그게 불가능한 나라는 독재국가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하는 법률과 제도가 아예 없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 제도가 있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서 평화적 정권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면 그 역시 민주주의가 아니다.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I> 민음사 2006, 209쪽)

1959년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할 수 있는 제도는 있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좋은 헌법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집권세력 또는 통치자가 헌법과ㅏ 민주주의 기본원리를 존중해야 하며 시민들이 자기의 권리를 제대로 알고 행사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최선의 인물이 권력을 장ㅇ악해 최대의 선을 실현하도록 하는 제도가 아니다.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악을 마음껏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민주주의는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악을 최소화함으로써 사회를 지속적으로 개량해나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전제정치를 타도하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유일한 방법은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궐기해 경찰과 군대, 사법기관과 정보기관을 동원한 권력집단의 폭력을 힘으로 제압해야 정치혁명을 할 수 있다.

전국적, 동시다발적, 연속적 도시봉기를 일으키려면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데 테러는 이에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들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였다.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대의를 알리고 대중의 관심과 각성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테러와 암살이 아니라 분신과 투신을 선택한 투쟁방식은 세계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로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한 최초의 사례는 3.1운동이다. .. 두 번째 사례는 4.19혁명이다. .. 세 번째 사례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가 엮은 <한국민주화운동사 1, 2, 3>를 권한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한 경험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래서 과거와는 성격이 다른 도전에도 예전에 성공했던 방식으로 응전하는 경향이 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어울리는 새로운 전략과 행동양식이 등장하는 무척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모든 권력은 집중과 확대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진보든 보수든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감시와 견제가 느슨해지면 누구나 권력을 오남용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 집권세력의 반민주적 행태는 대통령과 여당 정치인들의 교만과 성숙하지 않은 시민의식을 반영한다.


1965년 2월 한일 양국 정부 회담 실무자들이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했고 양국 외무부장관은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과 네 건의 협정문에 정식 서명했다. [한일기본조약]은 한일강제병합조약을 포함해 대한제국와 일본제국이 체결한 모든 조약과 협정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일본이 대한민국 정부를 유엔결의 제195호에 따른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바탕 외에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했다. 일부 약탈 문화재 반환을 합의한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연안 기점 12해리 수역이 배타적 관할권을 인정한 [어업협정], 해방 이전 일본 거주 대한민국 국민과 가족의 영주허가를 규정한 [재일교포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무상 3억 달러와 장기저리 차관 2억 달러로 양국 국민간의 청구권 문제를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확인한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었다. 바로 이 협정을 근거로 오늘날까지 일본 정부는 징용, 징병, 정신대,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들ㅇ의 개별적 청구권이 모두 소멸되었다고 주장해왔다. (<실록 박정희와 한일회담 : 5.16에서 조인까지> 이도성 편저 한송 1995, 32~34쪽)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결국 그렇게 끝이 났다. 무려 1,000여 명이 넘게 체포되고 350여명이 내란죄와 소요죄로 구속당하면서 박정희 정부와 2년 넘게 투쟁을 벌였던 청년들은 ‘6.3세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당시 학생 운동 리더로 명성이 높았거나 정계, 학계, 언론계에서 활약을 펼친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중태, 손학규, 이재오, 김덕룡, 현승일, 이명박, 정대철, 이부영, 서청원, 박관용, 하순봉, 김경재 등이 있다. 그런데 그때 거리시위에 참여했던 20대 청년들이 지금은 70대 고령층이 되어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철옹성처럼 지키고 있다.

권력형 부정부패 사건에 대해 국민들은 그때가 지금보다 더 예민했던 것 같다.


1960년대 후반 유럽과 미국은 베트남전 반대와 사회문화 개혁요구가 뒤범벅된 청년세대의 ‘68혁명’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반공주의라는 이념의 벽에 갇혀 있었다. 1968년 1.21사태와 북한의 미국 푸에블로 호 납치사건, 울진 삼척 무장 공비사건이 일어나자 반공, 반북 정서가 하늘을 찔렀고 전국에서 관제 규탄대회가 벌어졌다. 7월 20일 중앙정보주는 ‘통일혁명당 사건’을 발표하고 158명을 체포해 96명을 기소했다. 이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병영국가’ 북한에 맞서기 위해 대한미국 역시 ‘병영국가’로 개조하기로 결심한 듯 보인다. 병영의 기본은 인원 점검이다. 정부는 국민 전체를 조직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주민등록제도를 도입했다. 향토예비군을 만들어 군복무를 마친 남자 250만 명을 정기적으로 병영에 소환했고 대학입시에 반공도덕을 포함시켰다. 초중고 학생과 교사에게 반공교육을 실시했으며 전국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군사교육을 받도록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초부터 3선 개헌 작업에 착수했다. 기술적으로는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고 규정한 헌법조항의 ‘1차’를 ‘2차’로 고치는 간단한 작업이었다. .. 신민당과 재야인사들이 반대투쟁에 나섰고 사태는 한일협정 반대투쟁이나 6.8부정선거 규탄투쟁과 마찬가지로 대학생 교내집회, 거리시우, 중고등학생 가세, 휴교령 발동으로 이어졌다.

일부 대학생들이 전기와 수돗물 공급이 끊기 학교 도서관을 점거해 장기농성을 벌였다. 학생들은 시 낭송, 노래 부르기, 마당극과 연극 공연을 하면서 농성대오를 유지했는데, 이 새로운 투쟁 방식이 세월을 거치면서 시민문화행사와 춧불문화제로 발전했다. 공화당은 1969년 9월 9일 새벽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이 아닌 별관에서 개헌안과 국민투표법을 날치기 의결했다.

‘40대 기수’ 김대중 후보는 미,일,중,소 4대국의 한반도 평화보장론, 3단계 통일론, 자립경제와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대중경제론으로 의제를 선점했으며 향토예비군과 학생 군사 교육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책 선거를 보여주었다.

김대중 후보는 득표율 8%, 90만 표 차이로 졌다. 공무원을 동원한 관권선거와 금품 살포, 군 부재자 부정투표, 야당 참관인 매수와 부정 투개표 등 만만치 않은 부정선거를 한 사실을 고려하면 사실상 김대중 후보가 이긴 선거라고 할 수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을 하면 선거제도를 없애 총통이 될 것이라고 한 김대중 후보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박정희 정부는 거칠 것 없는 독재의 길을 갔다. 무엇보다도 언론에 대한 겸열과 언론인에 대한 탄압을 대폭 강화했다.

검찰이 공안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린 현직 판사들에 대해 수뢰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판사들의 잡단사표 제출과 법관 독립선언이 이어졌다. 하지만 판사들은 결국 중앙정보부 통제 아래 들어갔고 헌법의 3권 분립 조항은 효력을 잃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 책동 강화’를 이유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안보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서 날치기 처맇해 대총령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노동 3권 등 헌법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게 했다. 1972년 유신쿠데타 예행연습을 한 것이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두 번의 극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첫번째는 7월 4일 남북한 당국이 동시에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이다. ..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입각해 통일을 추진하기로 한 이 성명이 나오자 국민들은 20년에 걸친 군사적, 이념적 대결이 끝나고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에 들떴다. 두 번째 사건은 그로부터 석 달 후에 일어났다. 10월 17일 밤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특별선언을 발표했ㄷ. 그는 남북대화와 통일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려면 냉전시대에 만든 헌법을 고쳐 새로운 정치체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화문에 탱크를 세우고 정부기관과 언론사 등 민간 주요 시설에 군을 퉁입했다.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했으며 헌법 효력을 정지시키고 비상국무회의가 국회 기능을 대신하게 했다.

닷새가 지난 11월 21일 계엄령하에서 국민 투표를 실시했다. 토론이나 찬반운동은 완전하게 봉쇄한 가운데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91.9%가 투표했고 91.5%가 찬성했다ㅏ. .. 절반의 반혁명이었던 5.16과 달리, 10월 유신은 평화적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완벽하게 차단한 완성형 반혁명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반쪽 민주주의 국가에서 완전한 독재국가로 전락했다.

유신헌법의 핵심은 몇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국민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뽑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대통령을 뽑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야당 성향 인사의 출마를 막고 지지자들만 대의원이 되게 함으로써 영구집권의 꿈을 이루었다. 둘째,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하고 국회의원을 한 선거구에서 둘씩 뽑도록 선거법을 고쳤다. 여당의원과 대통령이 임명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합치면 의원 정수의 3분의 2가 되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국정감사권마저 폐지함으로써 국회를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법률을 통과시키는 ‘통법부’로 전락하게 했다. 셋째,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과 헌법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부여했다. 대통령이 무제한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유신헌법 초안을 만든인물은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파견 근무를 했던 김기춘 검사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그는 공무원과 공공기관장들을 모아놓고 화끈한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한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켰다.* 다시 20여 년이 지난 2013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어 국정운영을 전횡함으로써‘기춘 대원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1992년 12월 11일,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은 부산에 있는 '초원복집'에서 김영환 부산시장, 박일용 부산경찰청장, 김대규 부산 기무부대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우명수 부산교육감, 정경식 부산지검장 등 공무원들을 상대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민간에서 지역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말했다.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 진영에서 이대화를 도청·폭로해 큰 파문이 일었지만 위기감을 느낀 부산·경남 유권자들은 김영삼 후보에게 몰표를 던졌다. 이 사건은 국가기관의 불법 선거개입, 지역감정 조장, 유권자들의 비이성적 투표행태 등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며, 2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현재까지 우리 국민은 그 후진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학교든 사회든, 오로지 복종할 자유만 있었다. 유신 이후 1979년 19월의 ‘부마항쟁’까지 7년 동안, 대중적인 반정부투쟁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로지 야단, 재야인사, 지식인, 대학생들이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지키려고 저항했다가 구속되고 박해받은 사건들이 있었을 뿐이다. .. 중앙정보부는 ‘예방적 목적’에 입각한 조직사건을 연달아 터뜨렸다. 국민 대중의 불만이 팽배해도 뇌관을 제거하면 화약고가 폭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1973년 8월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다.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을 죽이지 못하고 자택 근처에 내려주었다. ..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시작된 교내시위가 경북대를 비롯한 다른 대학으로 번져나갔다. 그러자 중앙정보부는 10우러 25일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 11월 들어 대학생들의 동맹휴학과 교내시위가 전국 대학ㅇ으로 번졌으며 경기고, 대광고, 광주일고 등 고등학교까지 확산되었다.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 결의대회를 열었고 재야인사들의 시국 선언도 줄을 이었다. .. 박정희 대통령은 마침내 유신헌법이 부여한 비상대권을 휘둘렀다. 1974년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한 것이다. .. 1974년 3월 개학과 동시에 여러 대학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민청학련(민주청년학생연맹)이라는 이름을 기재한 유인물이 뿌려졌다. 4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민청학련이라는 반국가단체’를 뿌리 뽑기 위한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75년 2월 석방된 김지하 시인은 [동아일보]에 연재한 옥중수기 <고행1974>에서 하재완과 이수병 등 인혁당 사건 구속자들에게 들은 중앙정보부의 잔혹한 고문과 허위조작 실상을 폭로했다. 이 수기는 김지하 시인의 재구속,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기자 대량해고 사태로 이어졌다. 정부의 압력을 받은 기업들이 광고를 취소해 [동아일보] 광고 지면이 백지로 나왔다. 그러자 시민들이 돈을 보내 [동아일보]를 격려하는 광고를 실었다.

민청학련 사건은 반정부투쟁을 뿌리 뽑으려고 한 정부의 의도와 달리 민주화운동을 대중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1974년 12월 25일 민주화세력은 ‘민주회복국민회의’를 창립했다. .. 저명한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이 중심이었다. 김영삼 씨를 총재로 선출한 신민당은 적극적인 개헌투쟁에 나섰다. 박정희 대통령이 곧바로 역공을 취했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의 신임을 묻기 위해 국민투표를 하겠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 야당이 거부의사를 밝혔지만 1975년 2월 13일 국민투표를 밀어붙였다. 투표율 79.8%에 찬성률 73.1%가 나왔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재판장 민복기)은 서도원, 김용원, 이수병,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하재완, 도예종 등 대학생이 아닌 인혁당 관련 피고인 여덟 명의 항소를 기각해 사형을 확정했고, 다음 날 새벽 정부는 그들을 지체없이 사형해버렸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국제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 민청학련과 인혁당 관련자들은 민주화 이후 열린 재심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재심 판결을 하면서 사법부의 잘못을 사과했고 국가가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1975년 봄 베트남에 사회주의 통일정부가 들어섰다ㅏ. 5월 13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해 유언비어 날조 유포, 헌법에 대한 부정, 반대, 왜곡, 비방, 헌법개정 청원 선전, 선동, 긴급조치에 대한 비방을 모두 처벌대상으로 규정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살지 않으면 누구든 범죄자가 될 수 있었다. 1979년 10월까지 4년 반 동안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은 1,400여 명이었고, 그중 1,000여 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민주화 이후 헌법재판소는 1호부터 9호까지 모든 긴급조치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부마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였다. 부마항쟁의 충격은 집권세력의 내분을 부추겨 유신체제를 무너뜨렸다. 1979년 10월 26일 밤, 서울 궁정동 안전가옥 만찬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쏜 것이다. 김재규 부장의 군법회의 진술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했으니까 총살됐지 내가 발포 명령을 하는데 누가 날 총살 하겠느냐.”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나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에서 200만 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가 문제냐”고 맞장구쳤다. 김재규는 ‘각하;와 ‘자유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10.26은 민주혁명이며, 5.16이 정당하다면 10.26도 정당하다고 주장했던 그는 1980년 5월 24일 교수대에 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생물학적 생명을 빼앗은 것은 총탄이었지만 정치적 생명을 앗아간것은 그 자신이 이룬 성공이었다. 그는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대중의 욕망을 무제한 분출시키고 그 탁류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했다. 그런데 산업화의 성공으로 절대빈곤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대중은 다른 욕망에 끌리기 시작했다. 자유, 정의, 민주주의, 인간적 존엄성을 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욕망을 존중하지 않자 많은 국민이 마음으로 그를 버렸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은 그와 같은 민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10.26사건을 그렇게 이해한다.



인류 역사는 숱한 반란, 봉기, 내전, 혁명,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사태의 원인과 계기, 전개과정과 결과는 저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같은 게 있었다.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을 덮친 것이 혼돈이었다는 사실이다. 무리를 지어 폭력으로 부딪치는 격동의 순간에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동기와 지향에 따라 제각기 활동한다. 모두에게 익숙한 일상의 소통방식이 무너진 상황에서는 냉철한 논리와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충동이 행동을 지배한다. 어디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누구도 전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끝나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역사가들이 사태의 전모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해석한다. 그때에야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 대한민국현대사도 예외가 아니다. 제주 4.3사건, 6.25전쟁, 4.19혁명, 5.16쿠데타, 5.18광주민중항쟁, 6.10민주항쟁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들이 본 것은 혼돈이었다.



5월 18일 오전부터 전남대 앞에서 학생과 계엄군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계엄군이 학교 밖으로 나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것을 본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하면서 도시 전체가 궐기했다. 여기까지는 부마항쟁과 같았다. 그런데 광주 시민들은 부산·마산 시민들보다 더 절박했고 더 용감했다. 공수부대는 시내곳곳에서 대검을 장착한 소총과 '충정봉’(忠淸棒)이라는 박달나무 몽둥이로 마구잡이 폭력을 휘둘렀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자시위는 더 확산되었다. 계엄사는 더 많은 특전사 병력을 광주로 보냈다.
비무장 시위가 무장투쟁으로 번진 것은 계엄군이 발포를 했기때문이다.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정문 앞에 진 치고 있던제11공수여단 병력이 갑자기 흘러나온 애국가 연주에 맞추어 일제히 M16소총과 M60기관총을 공중으로 발포했다. 그래도 시위대가 흩어지지 않자 곧바로 사람을 향해 총을 쏘았다. 전일빌딩,상무관, 수협 전남지부 건물 옥상에서는 저격수들이 조준사격을가했다. 그것은 명령에 따른 조직적·계획적 집단발포였다. 5월19일과 20일에도 제11공수여단과 제3공수여단 병력이 권총과M16을 발포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그것은 산발적·돌발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도청 앞 발포는 달랐다. 거리는 순식간에피바다로 변했다.
분개한 시민들은 광주 시내뿐만 아니라 나주, 화순, 장성, 영광,담양 등 인근지역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카빈소총과M1소총을 확보했고 화순탄광의 다이너마이트를 반입했다. 시민들이 먼저 총을 쏘았기 때문에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했다는 신군부의 주장은 거짓이었다. 군의 모든 기록 가운데 최초로 등장하는무기탈취 사례는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상 일지」에5월 21일 오후 1시 35분 전남 화순파출소 무기 피탈' 사건이었다.* 특전사가 전남도청 앞에서 발포를 할 때에는 시민들에게 총이 없었다. 시민들이 무장항쟁을 시작하자 경찰관들이 사복으로 갈아입고 광주를 빠져나갔고 특전사 병력은 외곽으로 이동해 광주의 교통과 통신을 차단했다. 그들은 인근 도시로 가는 국도에서광주를 빠져나가는 민간차량을 저격하고 주둔지 인근의 민가에총을 쏘았다.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해 많은 시민이 죽었다. 다른도시에서는 대중투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신군부는 모든화력을 광주에 집중했다. 특전사 3개 여단 3,500명, 보병 20사단 5,000명,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소속 병력 1만 2,000명 등 무려 2만이 넘는 병력을 광주시 일원에 투입한 것이다.
도청을 점령한 시민군은 부대를 편성하고 치안질서를 유지했으며 시민들은 그들에게 음식과 물을 제공했다. 시민자치에 들어간 광주 시내는 평온했으며 범죄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병원에는 헌혈 신청자들이 줄을 섰고 도청 공무원들이 다시 출근했다. 지역사회 원로들이 수습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광주 상무대에 있던 전남북 계엄분소를 방문했다. 그러나 계엄사는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광주항쟁에 대한 소식은 닷새째인 5월 22일에 가서야 석간 『동아일보』가 처음으로 보도했다. 그 닷새 동안 광주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으며 국민들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신군부는 광주 시민을 폭도로 규정했고 계엄군은 광주시를 포위했다. 5월 27일 새벽 계엄사는 6,000여 명의 병력을 투입해 광주를 탈환하는 ‘상무충정작전'을 전개했다. 도청을 중심으로 최후의 항전을 준비한 시민군은 카빈총과 M1소총을 든 157명뿐이었다.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윤상원 씨를 비롯한 열세 명을 사살하고 100여 명을 체포했다. 또 다른 거점이었던 광주공원과 전일빌딩도 손쉽게 점령했다. 그들은 도청 앞 상무관에 있던 광주 희생자들의 시신 129구를 덤프트럭에 싣고 가서 망월동 산비탈에 묻었다. 5·18유족회의 집계에 따르면 항쟁 당시 사망자는 166명, 행방불명 65명이었다. 부상 후 사망자는 400명이 넘는다. 군경 사망자는 27명이었는데 군인들끼리 벌인 오인전투 사망자가 많았다. 계엄사는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무려 2,500명이 넘는 시민과 대학생을 체포해 600명 이상을 검찰에 송치했다. 정동년, 배용주, 박남서는 군법회의와 대법원 최종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홍남순, 정상용, 허규정, 윤석루 등 일곱 명은 무기징역, 김상윤, 김성용, 명노근, 전옥주, 윤강옥 등 열한 명은 징역 20년에서 10년, 152명은 징역 10년에서 5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모두 풀려났다.
광주민중항쟁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가능성과 당시 민주화운동의 현주소를 명료하게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전제정치를 타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속적·동시다발적·전국적 도시봉기라는 것, 그리고 아직 대한민국 국민은 그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참혹한 패배로 막을 내린 광주민중항쟁은 많은 국민의 가슴에 깊은 죄책감을 남겼다. 신군부가 광주에서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를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역 시민들이 계엄군의 폭력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87년 6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어느 지역도 고립되지 않는 전국적 도시봉기를 정밀하게 기획하고 준비했다. 광주 시민들만 홀로 고립의 아픔을 겪게만든 1980년 5월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6월 민주항쟁은 사실상 광주민중항쟁의 전국적 확대판이었다.

신군부는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을 내쫓았다. 그는 유신헌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대통령이 되었지만 퇴진 요구를 받자 군소리 없이 물러났다. 전두환은 곧바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소집해 100퍼센트 찬성으로 제11대 대통령이 되었다. 모든 신문·방송이 그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특집보도와 특집기사를 내보냈다정부는 지체 없이 헌법개정안을 만들었다. 1980년 9월 29일 공고한 '제5공화국' 헌법안은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제로 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이름을 대통령 선거인단으로 바꾸었다. 대통령이국회의원 3분의 1을 임명하는 제도를 없애는 대신 비례대표를 의원 정수의 3분의 1로 하고 제1당에 비례의석 3분의 2를 배분하는 괴상한 제도를 도입했다. 10월 22일 실시한 국민투표에 95.5퍼센트의 유권자가 투표했고 91.6퍼센트가 찬성했다. 유신헌법국민투표 때와 비슷한 결과였다. 국민들이 다시 한 번 폭력의 공포에 굴복한 것이다.


1987년이 되자 국민의정치적 관심은 헌법 개정 여부에 집중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의임기가 1년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헌법을 바꾸지 않으면 또 5,000명의 선거인단이 차기 대통령을 뽑게되고, 그렇게 되면 정권교체도 민주화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민주화세력은 민주화를 위한 최소 요구이자 절대적 조건인 대통령직선제 회복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1월 14일, 어찌 보면 필연적이고 달리 보면 우발적인 사건이 터졌고 이 운명적인 사건이 대한민국의 진로를 바꾸었다. 서울대학교 언어확과 3학년 박종철 씨가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 것이다. <중앙일보>가 대학생 사망 사실을 최초 보도했고 <동아일보>가 더 많은 사실을 취재해 더 크게 보도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수사관이 범죄사실을 추궁하면서 주먹으로 책상을 ‘탁’ 치자 박종철 군이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 초기 <동아일보> 기자들의 활약은 역사적으로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 <동아일보>는 시신에 피멍자국이 있었다는 부검 관련 소식에 이어 쇼크로 인한 심장마비가 아니라 물고문으로 인한 사망이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의사의 검안소견서를 보도했다. 그때의 <동아일보>는 오늘의 <동아일보>와 전혀 다른 신문이었다. 비난 여론이 끓어오르자 검찰이 경찰관 두 사람을 구속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유감을 표명하고 치안본부장과 내무부장관을 경질했다.

2월 7일 서울 명동성당을 비롯해 전국에서 열린 추도대회가 거리시위로 번졌을 때 5.18 이후 처음으로 일반 시민들이 반정부시위에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4월 13일에 전두환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한 그는 개헌을 하지 않을 것이며 계속 개헌을 주장하면서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을 엄단하겠다고 말했다. ..
호헌선언은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뿌린 행위였다. .. 바로 그날부터 국민적인 ‘호헌철폐투쟁’이 불붙었다.

다시 5월이 오자 전국 62개 대학에서 광주항쟁 추모집회가 열렸고 명동성당에서는 ‘광주민중항쟁 제7주기 미사’가 열렸다. 그런데 이곳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핵폭탄급 진실을 폭로했다. 이미 구속된 경찰관 두 사람 이외에도 박종철씨를 죽인 범인이 더 있다는 것이었다. 김승훈 신부는 고문살인범 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사, 이정오 경장이 현직에 그대로 근무하고 있고 치안본부의 전석린 경무관과 유정방 경정이 사건을 조작했으며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사건은폐와 번인조작에 개입했다고 폭로했다. 사흘이 지난 후 검찰은 고문경관이 셋 더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동아일보>는 김성기 법무부장관과 서동권 검찰총장이 범인 축소, 은폐 사실을 석 달 동안이나 알면서 감추었다고 보도했다. 정부는 임시국무회의를 열어 내각 총사퇴를 결정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대규모 개각을 단행했다. 검찰은 공안수사의 대부로 통하던 치안본부의 박처원 치안감을 구속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6월 민주항쟁 후에 구속되었다.
그러나 분노의 불길은 잦아들지 않았다.


6월 18일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에서 더 큰 민심이 파도가 밀어닥쳤다. 전국 16개 도시에서 150만 명이 참여한 이날 시위의 하이라이트는 서울이 아니라 30만 명이 시위를 벌인 부산이었다. 부산 시민들은 거리에서 교대로 잠을 자면서 밤샘시위를 벌였다.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세 번째 파도는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이었다.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80만 명이 거리시위에 나왔다. 맨손으로 시위를 한 6.10대회와 달리 시민들은 도처에서 투석전을 벌였으며 대학생들이 던지는 화염병에도 큰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전국 거의 모든 도시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를 10만여 명의 경찰력으로 진압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8개 항으로 이루어진 시국수습 특별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소위 ‘6.29선언’이다. 대통령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과 정치범 석방, 국민 기본권과 언론 자유 보장, 지방자치제 실시와 교육자율과, 자유로운 정당활동 보장 등을 담은 이 선언으로 전국적 도시봉기는 막을 내렸다.

7월 5일 이한열 씨가 끝내 숨을 거두었다. 7월 9일 서울역 관장에서 100만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영결식이 열렸다. 이 행사는 6월 민주항쟁의 에필로그였다. 영결식이 끝나고 경찰이 해산을 종용하면서 페퍼포그와 최루탄을 쏘자 100만 시민은 조용히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헌법을 고치고 선거를 하면 정권을 바꾸고 민주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그들의 희망은 다섯 달 뒤에 물거품이 되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1987년 이후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 하지만 아직 성숙하지는 않았다.

민주적 제도가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에 맞는 생각을 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성숙한 민주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민주주의는 제도와 행태, 의식의 복합물이다. 물론 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장기적으로 보면 모든 제도가 의식과 행태의 산물이지만, 단기적으로는 특정한 제도가 그에 맞는 의식과 행태를 북돋우기 때문이다.

1987년 체제는 현행 헌법과 선거제도를 만든 정치 지도가 ‘1노 3김’의 동상이몽(同床異夢)과 이해타산이 만든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 5년만 하고 나가는 데 합의했다. .. 확실하게 하기 위해 헌법 제128조 2항에 임기를 늘리거나 중임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을 할 경우 개정 조항은 현직 대통령에게 적용하지 않는다는 안정장치까지 넣어두었다.

우리 헌법은 국민의 저항권을 인정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명시했다. 제10조부터 37조까지 신체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노동 3권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비롯한 시민의 기본권을 명확하게 보장했다.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국회와 사법부의 권한을 대폭 확대해 권력의 분산과 상호견제를 강화했다.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부활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높였으며 헌법재판소를 설치했다. 최저임금제를 명시하고 성장, 안정, 적정한 소득분재, 독과점 폐해 방지, 경제민주화를 위해 국가가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었다. 시각에 따라 비판할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헌법은 민주주의 선지국의 헌법에 견주어 크게 손색이 없는 훌륭한 헌법이 되었다. 나는 이것이 바로 헌법에 투영된 6월 민주항쟁의 성과라고 본다.

1987년 10월 27일의 헌법 개정 국민투표에 78%의 유권자가 투표했고 93%가 찬성했다.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유효표의 36.6%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다. .. 엄청난 희생을 츠르면서 민주화를 이루어놓고서는 결국 12.12군사반란과 광주학살, 제5공화국 강권통치와 권력형 부정부패의 제2인자를 대통령으로 뽑았으니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민주화운동의 전위였던 재야와 학생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농민운동, 각계각층 지식인운동에 변화를 요구했다. 그들은 정치, 민중운동, 시민운동으로 갈라져 점차 1987년 체제에 통합되었다.


누가 하는 어떤 것이든, 민주주의와 관련한 헌법의 규정을 실현하려는 활동은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대통령에 대해서든, 정치에 대해서든, 통일문제에 대해서든, 혁명에 대해서든, 그 무엇에 대해서든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 헌법이 우리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정부가, 또는 압도적 다수의 국민이 옳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위한 것이 아니다. 대다수 국민이 터무니없다고 판단하는 견해까지도 제한없이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 비록 진리가 아닌 견해라 할지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그것을 제약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헌법의 정신이며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다. 노태우 정부는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에 대한 대학생과 시민들의 의사표현을 탄압했다.

김영삼 정부는 노동법을 날치기했다. 1996년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 소속 의원 154명이 야당에 회의 개최 사실도 통보하지 않은 채 버스를 대절해 국회 본회의장에 몰래 들어가 파견근무제, 정리해고제, 파트타임근로제와 변형시간근로제 등 노동자의 지위에 엄청난 악영향을 주는 조항이 담긴 노동관계법을 의결했다.

한 달 가까이 이어진 노동법 날치기 무효화 투쟁 분위기는 마치 6월 민주항쟁 전야 같았다. 개정 노동법의 내용도 문제가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정부가 국회법의 의결 절차를 지키지 않았고 헌법이 보장한 노동 3권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이 날치기 행위에 대해 사과했고 국회는 임시국회를 열어 노동법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


1997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룸으로써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성숙해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공안통치를 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어 정부와 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부당하게 억압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견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김대중 대통령이 정리해고제를 도입하는 등 노동법을 개정함으로써 노동자의 지위를 현저히 약화시켰다. .. 대규모 파업이나 시민사회의 연대투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구제금융을 제공한 IMF가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리해고제 도입을 강요했다. 둘째, 김대중 대통령은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노동계와 합의하려고 노력했으며 고용을 유지하는 기업을 지원하는 등 정리해고의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국민들이 벼랑 끝에 몰려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심정에 공감하면서도 정부를 심하게 비난하지 않은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권력의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

2004년 봄의 탄핵규탄 촛불집회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시민들이 현직 대통령의 편이 되어 자발적으로 전국적, 동시다발적, 연속적 집회시위를 벌인 적은 그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탄핵규탄 촛불집회의 투쟁대상은 야당이었다. 임기가 넉 달밖에 남지 않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국민이 뽑은 임기 5년 대통령의 직무를 겨우 1년 만에 정지시킨 사건에 대해 국민들은 분개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객관적으로 보아 미국산 쇠고기로 인한 광우병 발병 확률은 매우 낮았다. 문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을 완화하는 결정을 내린 과정이었다. 아무 예고도 하지 않고 최소한의 공론화 과정도 없이, 국민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대통령과 정부가 그런 결정을 한 것이다. .. 물대포와 최루액을 동원한 경찰의 진압과 ‘명박산성’이라고 불린 경찰차벽에도 굴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거짓 사과 말고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지만, 촛불집회는 자발적으로 행동하면서 수평적으로 연대할줄 아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출현을 예고했다.

2013년 시민들은 다시 촛불을 들었다. 이번에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 국정원과 기무사,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이 불법 개입한 것을 규탄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집회였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국미사를 열었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은 이명박 대통령이 국가기관을 정치적으로 사유화해서 같은 당의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키기 이해 국민을 상대로 온라인 심리전을 벌인 조직범죄였다.




제5장 사회문화의 급진적 변화 : 단색의 병영에서 다양성의 광장으로


인간이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것이 유익하듯이, 삶의 실험도 다양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한, 각자의 개성을 다양하게 꽃피울 수 있어야 한다. 각자의 고유한 개성이 아니라 전통이나 관습에 따라 행동하게 되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자 개인과 사회 발전의 불가결한 요소인 개별성을 잃게 된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반공 난민촌’이었던 대한민국은 사회 전체가 ‘병영’과 비슷했던 산업화시대를 통과해 각자의 개성과 문화적 다양성이 발현되는 민주화시대의 ‘광장’으로 바뀌었다. 지난 55년 동안 대한민국이 겪은 사회문화적 변화는 그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반도국가가 아니라 삼면이 바라로 막히고 북쪽은 철조망으로 차단된 섬나라다.

돈이 많고 자손이 귀하면 당연히 사람을 귀하게 여기게 된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수록 사람들은 부, 명예, 지위, 쾌락의 추구를 넘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욕망에 더 끌리게 된다. 자신의 존엄을 깨달은 사람이 타인의 존엄성도 존중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귀하게 여기는 곳에서는 다양한 개성을 존중한다. 출산율 저하 현상은 대한민국이 다양성의 광장으로 진화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 것이다.

난민촌을 병영으로 개조한 수단은 군사쿠데타와 공안통치, 독재와 같은 폭력이었다. 그러나 폭력만 가지고 나라를 병영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그 병영은 적어도 난민촌보다는 살기가 나았다. 국가를 병영처럼 만들려면 국민들의 기본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어야 한다.

병영에는 군기가 있어야 한다. 국민들이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조국 근대화라는 국가 목표를 개인적 인생 목표와 일치시키도록 ‘건전한 가치관’을 심어주고 사상과 이념을 통일해야 한다.

우리 정부가 출산율을 억제한 것은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1인당 국민소득을 신속하게 높이기 위해서였다. .. 1961년 장면 정부가 세운 최초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 목표가 바로 ‘빈곤의 악순환을 타파’라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선택한 방법은 일단 외국에서 차입한 자본을 지렛대 삼아 산업을 육성하고, 기업이 돈을 벌어 국적자본을 축적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숙련된 기술을 가진 노동력을 자본과 결합해야 했다. 숙련된 노동자를 얻으려면 교육과 훈련을 시켜야 한다.


밥을 먹게 해주고 겁을 주어 국민을 복종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장기간 권력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국민이 스스로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다. 그렇게 하려면 교육과 미디어를 장악해 대중을 세뇌함으로써 사상을 통일하고 가치관을 통제해야 한다. 국가의 목표와 자기 인생의 목표를 일치시킨 사람은 겁을 주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협력하고 복종한다. 이일을 누구보다 잘해낸 것이 바로 북한이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교육과 언론을 장악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똑같은 시도를 했다. 그러나 겨우 절번쯤, 그것도 잠시만 성공했을 뿐이다.

국민을 학살하고 집권한 전두환 정부는 콤플렉스 때문인지 국민을 즐겁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 전두환 정부는 스포츠, 스크린, 섹스를 부추기는 3S정책을 썼다. 정부가 참혹한 인권유린과 공안통치를 저지르는 동안 <애마부인> 시리즈를 위시한 에로영화 개봉이 봇물을 이루었다. 1980년 컬러 방송을 시작한 텔레비전에는 쇼 프로와 드라마가 넘쳐났고 2년 뒤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1983년 박종환 감독의 청소년 축구 대표팀이 멕시코 세계대회에서 4강에 진출해 국민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야간통금을 해제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표면적 계기는 서울올림픽이었다. 우리나라는 1981년 88올림픽 유치권을 획득했다. 뒤이어 86아시안게임 유치권도 따냈다. .. 정부는 대한민국이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임을 과시하려고 1982년 1월 5일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통금을 해제했다.

병영의 기본은 피아(彼我) 구분이다. 그래서 정부는 온 국민이 주민등록증을 만들게 했다. .. 최초의 주민등록제도는 1942년 조선총독북 도입했다. 일본 호적법에 바탕을 둔 ‘조선기류령’을 제정해 징용과 징병 등 식민지 수탈을 효율화했다. 1962년 국가 재건최고회의가 제정한 ‘주민등록법’의 목적도 일제의 기류령과 거의 같았다. 현행 주민등록증과 주민등록번호가 생긴 것은 1968년 가을이었다.

시행 초기 주민등록번호는 열두 자리였지만 1975년부터 생년월일 여섯 자리+숫자 일곱 자리로 변경되었다. 뒷자리 첫 번째는 성별(남자1, 여자2)을 구분한다. 그다음 다섯 자리는 출생신고를 한 동사무소의 고유번호와 그 동사무소에서 그날 한 출생신고 순서를 나타낸다. 마지막 숫자는 기술적인 오류 검증에 필요해서 붙인 번호다. 재외동포는 뒷자리가 다 0으로 통일된다. 남자는 1000000(혹은 3000000), 여자는 2000000(혹은 4000000)이다.

주민등록번호 덕분에 국가는 편리하게 국민을 관리할 수 있다. .. 우리는 평생 이 번호를 벗어나지 못한다. 주민등록번호만 보면 그 사람의 나이와 출생지, 성별을 바로 알 수 있다.

지구촌 문명국가들 가운데 우리와 같은 주민등록제도를 가진 나라는 거의 없다. 주민등록번호는 대한민국의 진화과정에 병영국가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화석이라 할 수 있다.


병영국까의 최대 피해자는 노동자였다.

보수 성향의 한국노총 말고는 자주적인 연맹을 만들 수 없게 한 것이다. 한국노총은 해방 직후 사회주의 노선읭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에 대항하기 위해 하향식으로 급조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을 모태로 한 조직이다. 오랜 세월 관변 또는 어용노조 역할을 했으며 1960년 한국노총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 그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한국노총은 정부와 손잡고 자주적인 노동조합을 탄압했고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선언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으며 1987년 노동자투쟁 때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 선거 때는 편의에 따라 여당과도 연합했고 야당과도 연합했다.
자주적인 노동조합연합체는 광장의 시대가 열린 후에야 비로소 탄생했다. 1995년 11월에 출범한 민주노총이 그것이다. .. 민주노총은 1997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 이후 10여 년 동안 조직적,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민주노동당의 국회 진줄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만성적인 정파갈등과 대기업 노동조합의 자기중심적 행태 등으로 대중의 신망이 크게 하락했으며 2008년 이후에는 정부의 노골적이고 일상적인 탄압에 직면했다.


1970년대 이후 노동운동, 노학연대와 천년지식인들의 노동현장 투신, 노동운동의 정치적 진출, 민주노총의 탄생은 모두 전태일의 분신에서 시작되었다.


김대중 정부는 ‘생산적 복지’라는 구호를 내걸고 복지국가로 가는 첫걸음을 떼었다 사회보험이 작동하지 않는 사각지대에 햇빛을 비추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전동휠체어를 지원해 고방에 유폐되어 살던 중증장애인들을 사회로 불러냈다. 시민운동가와 자원봉사자들이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돌보던 공부방을 국가정책으로 품어 지역 아동센터로 발전시켰다.
노무현 정부는 그 연장선에서 노인장기요양보험을 새로 도입해 5대 사회보험체제를 완성했고 보육에 대한 대규모 국가 재정지원을 시작했다. 중증장애인 활동보조인 제도를 도입하고 장애수당을 크게 인상했으며 자활사업을 키우고 시설아동과 가정위탁아동에게 아이들과 국가가 함께 저축하는 예금계좌를 만들어주었다. .. 이 모든 것은 이명박 정부를 거쳐 박근혜 정부까지, 예산 부족으로 진통을 겪으면서도 큰 틀에서는 흔들리지 않고 성장해왔다.



제6장 남북관계 70년 : 거짓 혁명과 거짓 공포의 적대적 공존

역사에 대한 지식은
어떤 유형의 정부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으며
또한 어떤 유형의 정부가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가에 대해서도
실마리를 제공한다. - 버넌 보그다너, <역사, 시민이 묻고 역사가가 답하고 저널리스트가 논하다> 리처드 에번스

Posted by WN1
,



2판 서문(1995)
사람이 살면서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겠지만 궂은일들이 남기는 상처는 시간낭비와 함께 정신적 육체적인 손상까지 입힌다. 사람에 대한 실망과 사람에 대한 회의, 그러나 그것마저 삶의 피할 수 없는 내용으로 받아들이며 소설의 자양으로 소화하려고 애썼다. 인간의 역사 위에 분명 훌륭한 사람들은 존재했었고, 소설은 어찌할 수 없이 인간 긍정의 작업이니까.  6

최근 사오 년 동안에 터무니없이 범람하고 남용되는 단어가 ‘문화’와 ‘철학’이다. 그 두 단어는 아무 말에나 붙어 복합면ㅇ사를 이루면서 허위성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모호성을 가중시켜 혼란을 일으키게 한다. .. 그런 모호한 치장을 즐기는 사회심리는 무엇일까.  7


1 일출 없는 새벽

“나 대물림굿 하는 것 봤소.”
“야아?”
자신은 너무 놀라 얼결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바로 눈앞에 정하섭의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이 있었고, 그 눈이 불이라도 붙은 듯한 뜨거움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길을 받아낼 수가 없어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왜 무당이 됐소?”
“……”
“엄니가 시켜서 그랬소?”
“……”
“되고 싶어서 그랬소?”
“……”
눈물을 참느라고 목에 메었다. 정하섭은 또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자신은 눈물을 넘기고 또 넘기며 ‘니같이 이뿐 애가 워째무당딸이 됐는지 몰르겄다’ 했던 어린 날의 정하섭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답답하게 그러고 있지 말고 왜 무당이 됐는지 대답 좀 해보시오.”
정하섭이야말로 정말 답답한 말을 묻고 있었다. 그럼 나더러 어찌하란 말인가 …… 자신은 입술을 깨물며 대답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것이 지 운명이구만요.”
“운명 …… 운명 …… 운명 ……”
정하섭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바람에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은 새로운 눈물로 젖고 있었다.
“소화ㅏ가 무당딸만 아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하섭은 그런 말과 함께 자신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빼려 했지만 빠지지 않았다. 자신이 또 한 가지 놀란 것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은 이름만 가졌지 그건 좀체로 누가 불러주지 않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그저 ‘무당딸’이었을 뿐이다.  29-30

그가 첫 수음을 했던 중학 3학년 때, 죄의식과 부끄러움과 전신 마디마디가 시리도록 저릿거리며 퍼지는 어지러운 자극의 쾌감에 신음하며 보았던 두 여자. 하나는 책방집 딸 정님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소화였다.  32

“임무수행 중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소. 술과 여자요. 그건 둘 다 독이오. 술은 감정을 해이하게 만드는 독이고, 여자는 의지를 약화시키는 독이오. 철저히 경계하라. 단, 냉철한 당원의 이성으로 판단했을 때 사업에 절대이익을 줄 수 있는 여자까지 포함시키는 건 아니오. 그 판단기준은 당원의 이성에 맡기겠소.”
서울에서 세뇌교육을 받을 때 임철수라는 중간간부가 전혀 감정이 섞이지 않은 낮고도 일정한 음향의 목소리로 한 말이었다.  36

“버마 전선에서 꼬박 나흘을 자지도 먹지도 못하면서 싸웠네. 모두 지쳐 쓰러져 있는데 소대장이 한다는 소리가, 지금 밥을 먹겠느냐 여자를 갖겠느냐, 하고 묻는 것이야. 그런데 다 여자를 갖겠다고 했네. 그게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인간의 기묘한 심리네. 인간이란 그렇게 복잡미묘한 것인데 어찌……” 김범우 선생의 말이었다.  37



2 가슴으로 이어진 물 줄기

그려, 다 이 못난 애비 죄여. 이 애비 원망을 속 풀릴 때꺼정 혀. 근디, 불쌍헌 내 새끼야, 니 팔자는 애비를 원망헌다고 풀리는 것이 아녀. 피 타고남스로 매듭매듭맺힌 한(恨)인디, 고걸 워째야 쓸끄나, 한은 맺히기만 혔지 풀리는 것이 아닝께 한인 법인디, 고건 풀라고 발싸심허먼 헐수록 헝클어진 실꾸리맨치로 얽히고 설키다가 종당에는 지 명(命)꺼정 끊어묵는 법인디……(판석 영감, 하대치 아버지)  42

나라가 금하는 일을, 그것이 제아무리 옳고 바르다고 해도 나라와 맞서 이기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건 판석 영감이 칠십 평생을 통해서 겪어온 경험이었다. 동학란이 그러했고 일정 때의 독립운동이 그러했다.
“니넌 이름땜 허니라고 그리 드세게 사는갑다. 큰 대(大)에, 다스릴 치(治), 애시당초 가당찮은 이름이었제. 느그 할아부지의 택읎는 욕심이었는디, 고 이름을 그대로 붙인 나가 더 큰 잘못을 저질른 것이여……”  43-44

하대치의 아내 들몰댁.  44

“요것은 니 애비가 동학 따라 집 떠남스로 이 할애비헌테 냄긴겨. 나가 살아서 니 아들헌테 붙여줬어야 헐 이름인디, 앞자가 큰 대자, 뒷자가 다스릴 치자라고 혔다. 고것이 느그 애비가 생전에 품은 한스런 맴이었는디…..”(판석 영감의 할아버지의 생전 마지막 말)  49

나날의 생활이 아무리 고되어도 세월은 흘러가는 맛이 있어 살아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52

학식을 깨우친다는 것이 병이 되는 것일까.  54

아들놈은 저희들이 하는 일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것을 알지만, 하고 또 해야 된다고 했었다. 아버지도 그런 마음으로 동학에 가담한 것일까. 판석 영감은 확연히 잡히지 않는 그런 어릿거림 속에서도 결코 아들을 원망하거나 서운해하지는 않았다.  55

하대치가 오늘에 이른 것은 모두 염상진이 끼친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관계를 맺어온 것도 10년 세월이 넘어 있었다. 사범학교까지 나온 염상진은 하대치의 여백 많은 머릿속에다가 많은 모종으 ㄹ이식시켰다. 기질적으로 피의 농도가 짙고, 환경적으로 불만요인이 많고, 태생적으로 자학성이 강한 하대치는 그런 나무가 자랄 수 있는 최적의 기름진 토양이었는지 모른다.  58

마누라였다. 들몰은 마누라의 친정이었다. 그래서 순심이라는 이름이 분명히 있는데도 사람들은 마누라를 들몰댁이라 불렀다.  68

경찰들이 그렇게 허망하게 도망할 줄은 몰랐고, 경찰이 없는 세상에 지주며 유지라는 것들이 또 그렇게 맥을 못 쓸 줄을 몰랐었다.  71



3 민족의 발견

아버지(김사용)가 읍내에서 손꼽히는 지주 중의 한 사람인 것은 강아지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그건 인민이 정하는 기준이니까. 김범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인민이 정하는 기준, 그건 넘어설 수 없는 난해한 벽이었다.  77

김범우는 아버지가 염상진을 마치 자식 이름 부르듯 하는 것을 듣자 가슴이 먹먹해오는 감정의 굴절을 느꼈다. 아버지는 염상진이 타고난 낮은 신분의 피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의 총명함과 사리분명함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기 자식이 염상진과 호형호제하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 서로 다른 입장에서 마음의 진부(眞否)를 놓고 머뭇거리세 된 것이다.
“아무래도 아부님도 떠나셔야 헐 것 같습니다.”
“어허, 쓰잘디읎는 소리. 상진이 지를 못 믿겄으먼 이 애비도 피허라고 허드람서. 그 말이 무슨 뜻이냐. 상대방이 내보인 진심을 믿지 않는 것만치 큰 죄가 읎는 법이여. 그때부터 생사람 잡는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가그라, 싸게 떠나.”  78

김범우는 하나의 악마를 보고 있었다. ..
전혀 다른 두 모습의 문 서방, 그 어느 쪽이 진짜인가. 어떻게 한 사람이 그렇게 표변할 수 있는가. 그 어느 쪽이 진실인가.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이중적일 수 있을까. 그때 퍼뜩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있는 자들은 자기들만 사람인 줄 알지. 더러 그렇지 않은 우등생도 있지만 말야. 난 그 단순한 자만을 고맙게 생각하네. 거기에 우리가 설 자리가 있고, 그게 그들 스스로가 빠져들어갈 함정이니까.” 염상진의 말이었다. 그렇다, 인간은 복합적 사고와 다양한 감정의 줄기를 소유한 동물이다. 문 서방의 전혀 다른 두 모습은 그런 인간의 속성이 표출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두 가지 모습은 다 문 서방의 참모습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면서 외부의 영향과 상황에 따라 그것은 반응하는 것이다. 문 서방은 아버지에게는 선한 인간으로 반응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악한 인간으로 반응한 것뿐이다. 만약 아버지가 악한 지주였다면 문 서방은 여지없이 악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 서바으이 악은 악이 아니라 선인 것이었다. 88-89

그들이 무장투쟁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미군정의 무력탄압에 그 명백한 원인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행위를 ‘폭력’으로 간주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방어적 폭력’이었고 ‘상대적 폭력’이었다. 미군정은 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 부인, 친일파 핵심세력인 한민당의 옹호, 민족반역세력인 군 경찰 출신들의 재등용 비호, 공산당 활동 불법화, 청년단 구성과 백색테러 감행, 공산당원들의 무차별 체포와 조직 파괴공작,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폭력행위를 조직적이고 단계적으로 시행해 왔던 것이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남로당은 지하활동 속에서도 수난과 피해로 얼룩진 세월을 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차별한 폭력 앞에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방법, 그것은 또다른 폭력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제국주의적 지배술수에 말려든 것일 수 있었고, 군정이 더 가혹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타당성과 근거를 만들어 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쪽의 폭력이 상대의 폭력을 이기지 못할 때 그건 자멸의 길을 재촉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게 폭력의 생리이고 법칙이었다.  90

김범우는 그 ‘방어적 폭력’의 외로움과 한계성이 너무 답답할 뿐이었다.

“.. 나는 이제 OSS 첩보훈련원 톰슨이 아니라 조선인 김범우라는 사람인 것을 확실히 구분해 주기 바랍니다.”(김범우가 미군정 화이트 대위와 만나 대화중일부)  103

“사회주의 건설만이 그 길이야.”(염상진)
..
“좋아요, 어떤 주의를 따르든 그건 개인의 자유지요. 그러나, 그것이 곧 민족 전체를 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성급한 판단은 금물입니다. 미국이다, 소련이다, 민주주의다, 공산주의다, 자본주의다, 사회주의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그런 정치적 택일이 아닙니다. 그건 한 민족이 국가를 세운 다음에나 필요한 생활의 방편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민족의 발견입니다. 그 단합이 모든 것에 우선해야 해요.”(김범우)
..
“자네 말은 아주 그럴듯해 보여. 그러나 그건 부르주아적 환상이야.”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미국과 소련에 점령당한 상태에서 그들이 내세우는 이데올로긴가 이념인가 하는 것에 놀아나 민족이 서로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뜻인데, 그게 부르주아적 환상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요?”
“우리에게 해방은 곧 인민혁명이야. 해방은 곧 새 역사의 시작을 의미하고, 그 시작은 인민혁명을 통한 새 나라의 건설부터네. 그런데 자넨 시대역행적으로 케케묵은 민족이나 찾고 잇지 않느냔 말야.”
“그렇게 속단하지 마세요. 민족이라고 하니까 핏줄만을 중시해서 어중이떠중이 다 싸잡아서 말하는 민족인 줄 압니까? 현시점에서 친일반역세력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어요. 그런 부류들을 완전히 제거한 상태에서 절대다수의 민중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집단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굳이 ‘민족의 발견’이라고 했어요. 형은 그게 바로 인민혁명세력의 규합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건 아닙니다. 그 민족에는 일체의 정치성이 배제되어야 합니다. 아니, 더 확실하게 말해 그 민족 아래 모든 정치이념들은 단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국과 쏘련에 점령당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소련은 자기네들 이익추구를 위해 우리의 앞길을 방해하는 훼방꾼들일 뿐이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갈려 이념을 먼저 선택하면 우리 민족은 결국 분열밖에 할게 없다 그겁니다.”
..
“그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린가! 일정 때부터 쏘련만큼 우리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관심 쓰고 도와준 나라가 도대체 어디 있는가?”
“과연 그럴까요? 내가 두 가지 사실만 지적해 볼게요. 첫째는 신탁통치 결의고, 둘째는 미군정이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탁통치라는 건 미국이 혼자서 결정한 일입니까? 그건 엄연히 쏘련이 두 개의 제국주의국가와 나란히 앉아 작당하고 야합해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장소까지 모스크바에서. 우리나라를 먹이로 놓고, 제국주의자들과 서로 이익을 분배하고 있는 쏘련의 처사가 과연 옳은 것입니까? 그런 쏘련이 어찌 우리 편일 수 있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자네가 상상할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쏘련의 전략전술이야.”
“그래요? 철저한 그들의 대변자로군요. 그들의 입장에서 우리를 보지 말고, 우리의 입장에서 그들을 보려고 노력해 보세요. 그럼 그 모순과 허위가 보일 겁니다.”
..
“.. 둘째로 미군정이 인공을 부인했는데, 그게 미국이 현실적으로 힘을 쓰지 못해서 취한 처삽니까. 그건 곧 자기네 점령지구에서 공산주의를 부정한 것이고, 혁명을 부정한 것입니다. 이래도 미국이 힘을 못 쓰는 겁니까?”
..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행동통제를 받지 않는 포로로 특별취급을 받으며 수용소에서 내가 한 일이 뭔지 압니까? 미국과 쏘련의 세계전략에 관한 책들과 논평들을 읽는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얻어진 것은, 미국은 제국주의적 팽창주의고, 쏘련은 그에 못지않은 공산주의적 패권주의라는 사실입니다. 그 두 개의 어마어마하게 큰 발에 짓밟히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땅과 우리 민족입니다. ..”
“지름길을 두고 돌아갈 건 뭔가. 오늘 얘기로 자네가 사회주의를 버렸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확인했네. 자네 생각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허황한 것인가는 곧 알게 될 거네. ..”
염상진은 일어섰다. 김범우는 염상진을 올려다보았다. 염상진의 얼굴에는 노기가 서린 것 같았고, 김범우의 얼굴에는 쓸쓸함만이 머물러 있었다. ..
그의 머릿속에는 염상진과 함께 사회주의를 논했던 먼 기억이 가득 차 있었다. ..
“범우 자네 맘 내가 다 알어. 허나, 나는 자네하고는 피가 다르네.”  110-115



4 소화, 하얀 꽃이라는 이름의 무당

그녀는 미약한 한줄기 바람의 힘에 순종하여 떨어짐을 짓는 꽃잎처럼 요 위로 무너져내렸다.  120

“이 말은 자네(정하섭)가 제일 싫어하는 말일지 모르겠네만, 자넨 아마 광적인 사회주의자는 못 될 거야. 자네가 부잣집 아들로서 출신성분이 부적합하다는 말이 아냐. 부디 공부에 충실하고, 하나의 행동을 선택하기 전에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생각이 앞서야 하네. 지금은 진정 어려운 시대야. 자네 같은 젊은 피들한테는 말이야……”
작별인사를 하러 갔을 때 김범우 선생이 자신의 마음을 환희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눈길을 보내며 한 말이었다.  150

염상진 위원장은 .. “김범우 선생은 참 좋은 분이다. 마음이 바르고, 인정이 있고, 학식이 풍부하다. 그런데, 생각하는 것이 환상적인 게 흠이지. 좋게 말해서 꿈속에 사는 이상주의자야.”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정하섭은 인간 김범우와 염상진을 저울질해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저울눈금은 언제나 수평이었다. 비슷하게 큰 키에 염상진의 인물도 기울지 않았다. 염상진도 마음씀이 컸고, 치밀하고 침착했고, 아는 것이 많으면서도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었다. 그런데 표나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분위기였다. 김범우가 사색적이고 지성적이라면 염사진은 야성적이고 행동적이었다.  152-153

정하섭이 마른 볏단에 불붙듯 사회주의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염상진에 의해서였다. 좀더 순서를 잡아 말하자면, 염상진을 접하기 저넹 벌써 당의정을 빨듯 책방주인 문기수를 통해서 초벌구이는 되어 있었다.
정하섭은 책방집 딸 정님이에게 정신이 팔려 뻔질나게 책방을 드나들었고,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책을 사들고 나오고는 했다. 주인 문기수는 그 눈치를 어렵지 않게 챌 수가 있었다. 한다하는 부잣집 아들이 자기 딸을 좋아한다는 것이 문기수로서는 기분 괜찮은 일이었고, 족보로나 재력으로나 비교도 안 되는 처지였지만 그물에 제 발로 든 고기를 놓치기는 아깝다는 욕심이 동했고, 목적을 당성하자면 있는 집 자식의 장난기일지도 모르니까 정신부터 뜯어고치자 작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과 다른 친절을 보이고 관심을 쓰면서 서서히 사회주의의 분말을 딸년의 눈웃음에 버무려 먹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기수는 자기의 힘으로는 벅찬 단계에 이르자 사상적 연관을 맺고 있는 염상진에게 넘긴 것이다.  153

족보와 더불어 세습되는 혜택 속에서 평생을 편안하게 사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154-155



5 조계산 숯막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북조선의 힘은 막강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해방과 더불어 혁명의 붉은 깃발을 세웠고, 이듬해에 지주와 부르주아 계급 말살과 함께 토지개혁을 완료한 북조선의 조직화된 공산주의의 힘은 경이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미군정하에서 시작된 남조선은 어떠했는가. 친일파와 지주계급이 군정과 어울려 득세를 했고, 새 시대의 국민을 위해 실시한다는 토지개혁은 해방 3년이 지나도록 단행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건 오합지졸이 모인 힘의 비조직화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힘은 조직화될수록 강해지고, 그 힘은 공격을 감행할 때 더 강해지고, 그리고 승리를 쟁취했을 때 그 힘은 절정의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그건 힘의 법칙이고, 힘의 미학이었다.  163

힘은 힘 앞에서만 굴복한다.  163-164

염상진은 깊이를 더해가는 회의를 떠쳐내려고 괴로운 신음을 물었다.  164

안창민은 염상진의 사범학교 후배이기도 했다. 염상진에게 3년이, 김범우에게 1년이 아래인 안창민은 두 사람을 형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그들 셋은 사회주의 이념에 마음을 하나로 뭉친 때가 있었다.  169

안창민은 고읍들의 지주 안재윤의 하나뿐인 손자였다. 한말(韓末)까지 행정의 중심을 이루었던 낙안 고을에 대대로 뿌리를 내려온 안 씨 문중은 그 뼈대로나 재력으로나 넉넉히 큰기침할 만했다. .. 말년에 망나니 아들로 속을 썩일 대로 썩이다가 화병을 얻어 제명을 다 못 살고 죽었다. 그때 벌써 아들 안수규는 투전판을 들락거리고 주색에 빠져 재산의 반 이상을 날린 상태였다. 안재윤이 죽고 나자 가세는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졌다. 안서규는 방탕한 생활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마침내 전답 거의를 헐값에 팔아치워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것으로 안재윤의 집안은 겨우 논 30여 마지기를 가진 소지주로전락. .. 종적을 감춘 안서규는 3년이 미처 못 되어 남원에서 객사했다는 소식이 바람에 묻어 왔다. 안창민의 나이 열세 살 때였다.  171-172

염상진 .. “이눔아, 사람 한시상 사는 것이 똑 갱물 흐르디끼 허는겨. 큰 물줄기 따라감스로 지 몫아치 딱 잡고 앞만 보고 애써 살아가자먼 시나브로 풀리게 돼 있는겨. 무식헌 애비 말이라고 뒷등으로 듣지 말고 얼렁 맘 고쳐묵어. 이 애비야 암시랑 않다만 처자석 생각혀서 맘 고쳐묵고 선상질이나 열심히 허란 말이다. 이눔아, 선상님 지체먼 하늘에 별 딴 것이지 멀 더 바래는겨. 애비 말듣고 있는겨?” .. 그러나 길이 잘못 잡힌 큰 물줄기를 따라 흐르는 한 방울의 물이기를 거부하는 그의 마음은 아버지를 이해하는 마음보다 우선했다.  174

염상진의 아버지 염무칠이 지주 최씨네에서 꼴머슴살이를 벗어나 읍내의 숯가게에 취직한 것이 열여섯 살 때였다. 염무칠의 아버지는 낙안벌의 토호 최씨네의 가복이었다. 국법에 의해 노비제도가 폐지됨과 동시에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땡전 한 닢 없는 신세로 어디로 거주를 옮길 것이며, 이미 소작을 부치고 사는 작인들도 농지가 줄어들까 봐 급급하는 판에 소작인들 어디서 구할 것인가. 천생 소작을 얻게 되는 경우는, 주인이 그동안의 노고와 종리를 생각해서 소작 나가 있는 농토를 재조정해서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어느 만큼 마음을 쓰는 지주들은 다 그런 방법으로 거느렸던 가복들의 생활 대책을 세워주었다. 그런데 염뭋칠의 아버지는 불행하게도 그런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 .. 도리 없이 최씨네에 눌러앉아 문서 없는 가복 노릇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175-176

“날로 달로 개명혀 가는 시상이니께 농새만 짓고 한평생 살라고 허덜 말어. 이 애비가 산 시상허고 니가 살 시상허고는 생판 달블 것잉께.” 눈을 감기 전날 염뭋칠ㄹ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염무칠이 숯가게 배달원으로 취직을 한 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그 말을 좇아서였다.  176

본건사회의 세습제와 유교전통의 불문율인 장자(長子)제일주의 인습을 염무칠은 미련하도록 철저하게 지켰던 것이다. 두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염무칠은 장남과 차남의 위치를 엄격하게 구분했다. 모든 것이 장남 본위, 장남 우선이었다.  181

염무칠이 세상을 떠난 것은 큰아들이 사범학교를 졸업한 그 다음해였다. .. 사람들은 두 아들놈이 불쌍한 염 서방을 잡아먹은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큰 아들은 사범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나오고도 선생을 마다하고 농사일을 시작했고, 완전히 주먹패가 되어버린 작은 아들은 철교 아래 선창에서 칼부림을 해 일본 선원을 찔러죽이고 도망친 사건이 터진 것이다.  182

김범우의 아버지 김사용을 찾아가기로 했다.
염상진은 일본군국주의 정신을 주입하는 선생 노릇을 차마 할 수 없어 농사를 짓기로 결심했다는 요지의 말을 김사용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정연하게 해나갔다.
“저에게 농사지을 땅을 좀 빌려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농사를 짓고 있는 전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그런 땅을 얻고자 하면 다른 소작인들이 피해를 보게 됩니다. 개간을 해서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빌려주시가는 겁니다.”  183

“잔네의 그런 큰 결단 앞에 내 어찌 땅뙈기 내놓기를 주저허겄는가. 자네가 필요헌 만큼, 개간을 헐 수 있는 만큼 쓰도록 해줌세.” ..
“외레 내가 고마우네. 농담으로 묻는 말인디, 그래, 땅을 빌려 쓰면 사용료는 얼마를 어떤 방법으로 낼 심산인가?”
김사용이, 어디 보자, 하는 애정이 넘친 표정으로 염상진을 쓰다듬듯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어르신의 소작인이 되기는 싫습니다. 그러니 사용료 같은 것은 없이 일정 기간 동안 빌려 쓴 다음 반환하기로 하겠습니다. 반환받으실 때는 박토가 옥토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184-185

상진이가 두 학년이나 차이가 나는 번우와 가까이 지내게 된 것은 바로 ‘김범준’ 때문이었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그 사람, 그건 꼭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그런 형을 가진 범우가 너무나 부럽고, 범우와 가까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웠다.  188

염상진, 김범우 ..
그들은 러시아 혁명에 관한 책들을 거의 빼놓지 않고 탐독했던 것이고, 거기서 잃어버린 나라의 독립의 길을 찾으려고 했다. .. 사회주의 서적을 접하는 데 있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어찌 할 수 없는 인식의 차이가 내재해 있었다. 김범우는 지주의 아들로서 소작농들의 헐벗고 굶주리는 비참한 생활에 대하여 자책과 죄의식을 느끼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이상적 평등사회를 이룩하려면 필연적으로 봉건계급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인식의 기둥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염상진에게는 그런 자책과 죄의식의 과정은 아예 생략되었고, 이상세계의 빠른 실현을 위해 지주계급이나 경제적 지배세력을 타도할 수 있는 무산자들의 힘의 조직화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김범우가 인간생존의 양심을 밝히는 불씨를 얻었다고 한다면, 염상진은 인간생존의 방법을 뒤바꾸는 부기를 얻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3-194

염상진이 김범우를 동지일 수 없다고 판단 내린 것은 범우가 하병에서 돌아온 다음부터였다. 김범우도 똑같은 시기에 염상진의 극렬적 좌경을 체념해 버렸다. 염상진은 한때 김범우를 완전한 적으로 속단할 뻔했다. 김범우가 교직에 몸담으면서 좌익학생조직을 와해시키는 행동을 시작해서였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태워올리고 있는 불길에 찬물을 끼얹는 결정적 행위였다. 그건 재고의 여지가 없는 정면도전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의 깃발 아래 감상적인 옛우정이란 한갓 두엄더미 옆에 구르는 똥덩어리 같은 것이었다. 염상진이 김범우를 혁명의 적으로 단정하려 할 즈음에 김범우의 실체가 드러났다. 백범 김구식의 민족주의 통일노선을 김범우는 실현시키고자 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범우는 경찰서고 군정청이고 드나들며 좌익계 학생들을 석방시키기에 바쁘고, 한편으로는 좌익 학생들을 설득시키느라고 진땀을 빼는 것이었다.  194-195

그가 지향하는 바나 행동하는 것은 그 나름으로 일관성과 순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의 동지도 아니었고 적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의 동지도 아니고 적도 아니었다. ‘민족’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었지만 그건 또다른 ‘주의’는 될 수 없었다.  195

읍내를 점령하기 전날 밤 굳이 김범우를 찾아가 피신하라고 일렀던 것도 그의 ‘민족 발견’을 위한 행위 때문이었다. ..
미리 피신시키는 것이 우정 때문이 아니라는 말을 김범우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했지만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김사용 어른을 인민재판의 단상에 세웠던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먼저, 지주인 그분을 보호하는 데 떳떳한 명분을 세우고자 함이었고, 다음은, 다른 지주들을 처단하는 데 확실한 기준을 세우고자 함이었다.  196-197



6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

김범우는 깊이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느리게 뿜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또 염상진이 생각났다. 김범우는 그의 생각을 떼쳐내려고 했다. 6일째 꼼짝없이 갇혀 지내는 동안 신물이 나도록 그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끝까지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투철한 의식의 사회주의자가 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그토록 성급한 공산주의자로 변할 줄은 몰랐었다. 그의 지성은 어디고 증발했기에 인민재판을 주도할 수 있었으며, 공개처형을 감행할 수 있었을까. 죄지은 자의 죽음은 마땅하다 하더라도 그 즉흥적인 방법과 감정적 행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202

이념의 현수막을 내건 정치적 전쟁은 바야흐로 그 수레바퀴를 본격적으로 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어느 쪽에서나 민족은 내세워졌으나, 정작 수레바퀴 아래 깔려야 하는 건 민족이었다.  203

벌교와 낙안에 걸쳐 뼈대나 재산을 자랑할 수 있는 집안들은 꽤나 있었지만 그 자식들이 독립운동에 몸 바치고 있는 경우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경사났다고 벌이는 잔치는 법관시험에 합격했다거나 은행원이 되었다거나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204

벌교는 한마디로 일인(日人)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벌교는 낙안 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던 갯가 빈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전라남도 내륙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시킨 것이었다.  205

“문 서방, 문 서방은 문 서방 이름으로 된 땅을 갖고 싶지요?”
“하먼이라, 살아생전에 안 되먼 저승에 가서라도 풀고 잡은 소원인디요.”
“그럴 테지요. 만약 그 소원이 풀려 열 마지기쯤 논이 생겨 농사를 지었는데 그 쌀을 몽땅 빼앗긴다면 어떻게 되겠소?”
“워따 워따, 그럴라면 염병헌다고 농새를 지어라?”
문 서방은 눈까지 부릅뜨며 소리쳤다.
“그렇지요, 농사지을 필요가 없지요. 그럼, 쌀을 그냥 빼앗긴 것이 아니라 다 나라에 내놓고 매달 배급을 타다 먹으면 어떻겠소?”
‘미쳤간디요? 지가 진 농새 죽이 끓든 밥이 끓든 지 손으로 간수허는 맛에 살제 무신 초친맛이라고 배급을 타다 묵어라, 닌장맞을. 동냥아치도 아니겄고, 고런 농새도 안 지어라.”
“그런 농사도 안 짓겠다면, 그럼 이런 것은 어떻겠소? 그 누구의 명의도 아닌 수백 마지기 논에 공동으로 동네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정해진 양을 배급 타먹는 것 말이요.”
“어허, 갈수록 태산이시웨. 아, 니 것도 내 것도 아닌 논에 그눔에 농새 아조 자알 되야묵겄소. 지 농새 짓대끼 쎄 빠지게 일헐 놈 하나또 읎을 것잉께 가실허고 나먼 쭉징이만 수불헐 농새 지나마나 아니겄소?”
“문 서방, 염상진이가 논을 분배한다는 것이 바로 그 방법이오.”
..
“.. 고것도 말이라고 헌당가? 그려서다 항꾼에 잘살게 된다고 떠들어쌓는감구만. 근디 고건 공염불이여. 시상 사는 이치를 몰라서 허는 소리제, 내 텃밭 배추가 쥔네 밭 배추보다 속살이 더 여물게 차는 이치가 먼지도 몰르고.”  209-210

농지개혁에 대비해서 지주들은 자기네 농토를 가난한 친척들 앞으로 명의변경을 해서 은폐시키거나, 타인에게 매도하거나 하는 일들을 벌이고 있었다. ..
“참말로 순사가 들었다 허먼 몽딩이찜질당헐 소리제만 서방님 앞이니께 허는 소린디, 사람덜이 워째서 공산당 허는지 아시요? 나라에서는 농지개혁헌다고 말대포만 펑펑 쏴질렀지 차일피일 밀치기만 허지, 지주는 지주대로 고런 짓거리덜 해대제, 가난허고 무식헌 것덜이 워디 믿고 의지헐 디 읎는 판에 빨갱이 시상 되먼 지주다 쳐읎애고 그 전답 노놔준다는디 공산당 안 헐 사람이 워디 있겄능가요. 못헐 말로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덜이 빨갱이 맹근당께요!”  212

지난 4월 19일 김구가 김규식과 함께 남북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있는 열성을 다 바쳤었다. 제발 서로가 정치적 욕심을 앞세우지도 말고, 강대국이 내세우는 이념에 얹혀 춤추는 꼭두각시 노릇도 하지 말고, 나라 잃어버리고 산 36년의 굴욕과 슬픔을 먼저 생각하며 민족이 똘똘 뭉쳐 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222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약소민족들의 자존이나 독립을 철저하게 우롱하고 기만하며 강대국들의 상호 이익 보호를 위한 연극적 대사였듯 연합국이라는 존재들이 해방된 한반도를 위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깊이 회의하게 만들었다. 민족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공동의 살을 방어하고 옹호하는 집단이어야 한다는 구체적 개념으로 바뀌어 있었다. .. 해방된 땅의 정치적 혼돈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백범 김구가 바로 자신과 똑같은 주장을 내세우고 있었다. 아, 백범! 김범우는 그 옛날부터 지녀왔던 그분에 대한 신뢰감 위에 감동의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후로 김범우는 백범에게 모든 기대를 걸게 되었다. 그분이 2월 10일에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다하는 성명으로 발표한 <3천만 동포에 읍고함>이란 글은 민족의 현실과 장래를 진정으로 염려하고 사랑하는 피가 통하는 진실의 기록이었다. ‘마음속에 삼팔선이 무너지고야 땅위에 삼팔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내가 불초하나 일생을 독립 운동에 희생하였다. 나의 연령이 이제 칠심 유 삼인바, 나에게 남은 것은 금일 금일 하는 여생이 있을 뿐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재화를 탐내며 명예를 탐낼 것이랴! 더구나 외국 군정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랴!’ 하는 대목에서 그분의 인간적 진실을 보았고,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하는 대목에서도 지도자로서의 외로움을 보았다. 그러나, 김범우가 소망했던 남북협상은, 5월 10일 남한에서 유엔 한국위원단 감시하에 첫 번째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고, 5월 14일 북한에서는 남한에 대한 송전을 중단함으로써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남한에서는 8우러 15일에 대한민국 수립을 선포했고, 북한에서는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하게 되었다. 그로써 김범우의 소망은 그야말로 환상이나 망상이 되고 말았다. 40여 년 만에 가까스로 찾은 선택의 기회를 그처럼 망가뜨려버리는 현실 앞에서 그는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그의 망막 속에서 백범의 초상은 하얗게 표백되고 말았다. 그는 교단에서도 그저 지식을 전달하는 기계로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했고, 그 죄책감으로 학교를 떠나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몇 번인가 되풀이했던 것이다.  223-224

자기 나름대로 억울하게 죽은 자가 남긴 피는 단순한 액체가 아니라 저주하는 영혼인 것이다. 염상진은 코웃음치며 이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
경찰서뿐만이 아니라 읍사무소고 세무서고 우체국이고 다 불 질렀다 한들 어떠랴. 인명을 어떤 객관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그리 성급하게 살상하지 말고 그런 것들이나 다 태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
핏자국이 나타날 때마다 김범우의 흔들리는 의식 속에서 염상진은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가 소화다리를 다 건넜을 때는, 한 개의 작은 점으로 변해있던 염상진은 그의 의식 밖으로 사라져 갔다.  226

김범우는 염상구의 뒷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찝쩝 입맛을 다시고는 발을 떼어놓았다. 그는 염상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것도 그의 가슴을 덮는 우울이었다. 무슨 견원지간이라고 염상구는 또 형 염상진과 반대 입장에 서 있게 됐을까……. 230

염상구는 작년 9월에 결성된 대동청년단의 열성단원으로 좌익 지하조직을 파내는 데 적잖은 공을 세웠을 것이다. 그건 형 염상진이와 맞서 싸우는 일이었고, 그래서 염상구는 그 일에 더 신바람이 났을지도 모른다.  232

손승호 .. 그는 작년 6월까지만 해도 좌익에 발을 넣고 있었다. 그런데 우익의 탄압에 맞선 좌익 테러가 속출하면서부터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고, 국제공산주의라는 것이 결국은 지역을 불문한 세력확장의 도구고 사용되는 허구성을 발견하고는 사상적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를 버렸을 뿐 그 반대개념의 사상을 취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사상적 ‘전향’을 한 것이 아니라 사상의 공백상태에 있었다. 그가 괴로워한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주의든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그 사상의 실현을 위해서 인간을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 점이었다. 인간을 위한 주의가 아니라 어떤 주의를 위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 변질을 그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설득과 이해의 균형이 없이 폭력을 수단으로 하는 그 어떤 주의나 사상보다는 차라리 원시상태가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손승호의 생각은 김범우의 생각과도 거리가 있었다. 김범우가 관심하는 ‘민족’이라는 자리에 손승호는 ‘인간’을 놓고 있는 셈이었다.  238-239

“아까 자네가 오기 직전에 무슨 말 했는지 아는가? 손승호 그 사람이 자네 형한테 붙들려 죽을 뻔했던 이야기를 하던 참이야. 자네 형은 다시 전향하라고 했고, 끝까지 말을 안 들으니까 총까지 들이대더라는 거야.”
“그 말을 워처케 믿냐니께요.”
염상구는 교활하게 느껴지는 웃음을 입가에 바르고 있었다. 형의 이야기에 조금도 감정변화를 보이지 않는 차가움이었다.
“이 사람아, 그런 식으로 의심하자면 나는 어떻게 믿나?”
김범우는 두려운 벽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집단화된 의식의 단면이었던 것이다.  240-241



7 그리고 청년단

다 식어빠진 고구마 위에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그 투명하고도 섬세한 무늬의 날개를 늘어뜨리고 앉아 있었다. 싸리나무의 명주실보다 가는 끝가지에 살폿 앉아 네 개의 투명하게 붉은 날개를 비스듬히 치켜세우고 허공에 미세한 율동이 파문을 일구던 여름의 생명력을 고추잠자리는 이미 잃고 있었다. 10월이 저물어가는 찬기운 서린 대기 속에서 고추잠자리는 한 생애를 살아낸 고단한 육신을 싸늘하게 식은 고구마 위에 부려놓고 있었다. 여자가 파리를 쫓듯 손부채를 부쳤지만 고추잠자리는 날아갈 줄을 몰랐다. 손바람에 늘어뜨린 날개가 둔하게 흔들렸을 뿐이다. “무신 놈에 잠자리가……” 여자가 중얼거리며 마디 굵은 손가락으로 고추잠자리를 잡아 무심하게 허공으로 던져버렸다. 허공에 떠오른 고추잠자리는 본능적인 날갯짓을 했지만 몸은 비상을 하지 못하고 아래로 아래로만 떨어져내렸다. 푸른 음향이 맑게 흐를 것 같은 10월의 깊은 하늘만이 한 마리 고추잠자리의 임종을 침묵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253

철교 아래 선창에서 일본 선원을 찔러죽이고 도망쳤던 염상구가 읍내에 다시 나타난 것은 해방과 함께였다. 그는 이미 쫓김을 당하는 살인자가 아니었다. 일본놈을 용감하게 처치한 당당한 독립투사로 변해 있었다. 그가 물건 훔쳐내다가 들켜 살인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254

염상구의 가슴을 뿌듯하게 했던 것은 읍내 치안대의 장악에 있었다. 그것은 해방과 동시에 여운형(呂運亨)이 발족시킨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벌교지부에 소속되기를 바라며 자생적으로 생겨난 조직이었다. .. 염상구로서는 여운형이고 건준(建準)(미군정이 시작되면서 해체됨)이고 알 바 아니었고, 지부에 소속이 안 되어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목전에 펼쳐져 있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만이 중요한 현실이었다. 지안대의 실권자로서 염상구가 제일 먼저 내세운 것이 자신의 이력 변조였다.  257

이유야 어찌 되었건 40년에 이르는 일제의 지배를 받는 동안 벌교읍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근동에서도 일인을 살해한 것으로는 염상구가 유일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258

그는 치안대가 해산되자 전국청년단체총동맹의 지부 실권자가 되었고, 1947년에 이르러서는 정치 발판을 굳힌 이승만이 결성한 대동청년단의 지부 실권직인 감찰부장 자리에 앉았다. 그의 이러한 권력지향성은 어찌할 수 없이 형 염상진과 대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258-259

아버지의 구박과 편애, 형의 자만과 무시 속에서 그나마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다독거림이 있어서였다. 어머니가 아무도 몰래 건네주던 콩누룽지를 받아들고 뒷산 팽나무 아래서 얼마나 목메어 울었던가. 콩누룽지 한 덩어리가 고마워서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형만이 아니라 자신도 사랑하고 있다는, 어머니의 정이 고마워 목이 메었던 것이다.  259

염상구가 형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 것은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공산당의 모든 조직이 지하로 잠적하면서부터였다. 염상구로서는 공산당이나 사회주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를 아예 느끼지 않았다. 그건 적이었다. 경찰에서 그렇게 단정했으니까 적이었고, 형이 가담해 있으니까 더욱 적이었다.  260

“머시냐, 아무리 무당딸이라도 이름은 있을 것인디, 이름이 머시요?”
“소화구만요.”
“소화? 소화? 밥 묵고 소화시킨다는 소화는 아닐 것이고, 무신 뜻이요?”
“흰 꽃이라는 뜻인디요.”
“흰 꽃? 허어, 참말로 누가 진 이름인지 생김허고 딱 맞아떨어지는 기맥힌 이름이시.”
얼결에 말을 해놓고 염상구는 그만 스스로 민망해졌다. ..
염상구는 서둘러 돌아섰다. 그러나 되돌아서 멀어져가는 소화라는 무당딸의 뒷모습을 음탕한 눈길로 지켜보고 서 있었다. 저, 저 살랑살랑 흔드는 방댕이 잠 보소. 무당춤 폴짝폴짝 얼싸얼싸 잘 춰대는 아랫심 씬 것 보먼 저년 니노지가 아매 낯짝 이쁘게 생긴 거맨치로 쫄깃쫄깃허고 옴죽옴죽헌 것이 꼭 겨울꼬막 맛일 거이다. 헌디, 신 내린 무당 잘못 건디렸다가는 급살을 맞등가 빙신이 된다니께 말이여. 화아, 저것 한번 조지고 급살을 맞을 수도 읎고, 운 좋아 급살을 면해야 빙신이 되는 건디, 와따메 참마로 사람 환장허겄네잉.  269-270

한 팔로 그녀의 목을 감으며 몸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등을 더듬어내리고, 허리에 잠시 머무른 손은 둔부를 지나 허벅지까지 내려갔다. 그는 애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을 기억해 두고 싶은 욕구가 성욕에 앞서 있었다. 그의 손은 다시 그녀의 어깨로 올라왔다. 그녀를 끌어안았다. 꼭꼭 끌어안으면서,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자 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그건, 내가 가고 있는 길이 과연 옳은 길인가, 하는 평소의 자문(自問)이었다.  286

정하섭은 돌아섰다. 그리고 뒷산 쪽을 향하여 날쌔게 뛰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은 이내 어둠에 묻혔고, 눈을 부릅뜨다시피 한 소화의 시야에서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소화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의 가슴에서는 실타래가 풀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끝은 정하섭에게 묶여 있었다. 아무리 험한 길을 아무리 멀리 가도 끊어지지도 동이 나지도 않을 실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가슴에서 끝도 한도 없이 만들어지는 인연의 실이었던 것이다.  289-290



8 이념 이전의 인간

재판소의 이 판사. .. 일제치하에서 고등고시라는 것을 거쳐 판검사가 된 거의 모든 인간들이 그렇듯 그도 철저한 일제의 주구 노릇을 감행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친일한 거의 모든 인간들이 그러했듯 그도 아무런 속죄의 표현도 없이 군정과 함께 다시 그 뻔뻔스러운 얼굴을 들고 판사 노릇을 해먹고 있었다. 더 한심스러운 것은 지난 5월에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서 애국을 부르짖은 것이었다. 일제치하에서 자신이 소작인의 권익옹호를 위해 분투한 것이 얼마며, 피해 받는 동포의 인권옹호를 위해 헌신한 것이 얼마인지 아느냐고 목청을 돋우었다. 그건 친일지주 계급들이 자위책으로 한민당을 결성하여 신속하게 미군정을 등에 업었고, 그것도 불안하여 민중의 지지를 쉽게 받을 수 있는 인물로 이승만을 골라 당수에 앉히고자 했고, 민족개념이나 통일조국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이 집권욕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이승만은 굴러들어온 떡을 마다할 리가 없었고, 그리하여 그 힘이 전국적인 정치세력으로 확장되면서 그드르이 정치형태는 시궁창보다 더 더럽게 변해갔고, 마침내 이 판사 같은 인물이 애국자로 둔갑해 국회의원에 출마할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293-294

처남 신석주와 좌익과 …… 그건 아무래도 걸맞지 않았다. 좌익을 하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만큼 체질적인 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주의’나 ‘사상’이라는 말이 붙어 있는 한 그건 이미 ‘감상’이나 ‘환상’이 아닌 것이다. 그 어떤 주의나 사상이든 그 최종목표는 실천에 있었다. 첫째가 의식의 실천인 것이며, 둘째가 행동의 실천인 것이다. 특히 사회주의라는 것은 그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처남은 그런 조건에 전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298

“노상에서 이리 서 있지 말고 어디 다방에라도 좀 들어갑시다. 이렇게 얼굴 대하게 된 것마도 천행 아닙니까.”
선우진이 김범우의 팔을 끌었다. 그의 예사로운 것 같은 말이 김범우의 가슴에 찡한 파문을 일구었다. 그는 1946년 상반기에 황해도에서 월남한 사람이었다. 토지개혁 실시로 지주였던 그의 집안은 파탄을 맞아야 했고, 그는 삼팔선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토지는 말할 것도 없고 값나가는 살림살이까지 몰수를 당하는 바람에 대학졸업장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어 졸업앨범 하나만을 달랑 가지고 내려온 그의 일화는 선생들의 우스갯감이 되고는 했다. 감정 같아서는 다른 월남민들처럼 경찰에 투신해서 남한에 박힌 빨갱이들을 잡아내는 족족 쏴죽이고 싶다고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데 그는 총구멍만 보면 사지가 오그라붙는 것 같아 경찰에 투신을 못하고 졸업앨범을 졸업장 대신 내밀어 선생이 된 것이다. 토지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는 총구멍에 어지간히 혼쭐이 난 모양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그의 공산당에 대한 증오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봉건적 사회체제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극복되어야 하고, 친일반민족세력을 냉정하고 엄정하게 처벌해서 민족단위의 국가를 만든 다음 모든 일에 앞서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은 농민이 8할을 점하고 있는 현실에서 농지개혁은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김범우와는 논리적 대화가 성립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타향살이의 외로움 탓인지 김범우에게 계속적인 호감을 표시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300-301

“.. 선우 선생이 사회주의 사상을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것이나, 그들이 자본주의 사상을 적대시하는 것이나 결국 확일주의이기는 마찬 가지니까요. 내가 놀라는 건 그들이 총살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봐요, 주의를 앞세워 서로가 서로를 원수 삼아야 하는 이 땅의 비극이 무엇을 위하는 것인지 말이오.”  303

“.. 선우 선생이 그냥 평범한 직업인이 아니고 ‘선생’인 한 그건 좀 곤란한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선생은 더 말할 것 없이 학생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은 최소한 객관적 판단을 견지하면서, 정치적 견해도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런데 선우 선생은 너무나 한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교육자 입장에서, 그리고 객관적 판단력을 가진 지식인 입장엥서 서청을 보아야 하고, 이번 사태도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서청의 행위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비난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제주도에서 4.3 사건이 발생한 금년부텁니다. 반공을 앞세운 그들의 잔혹행위가 사회적 말썽을 일으킨 것은 그들이 확실한 공산주의자만을 처단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에 대한 개인적 감정에 휩쓸려 무고한 양민들까지 무분별하게 살상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다 아는 그런 잘못을 저지른 서청을 선우 선생이 무조건 지지하고 두둔한다면 학생들이 선우 선생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건 선우 선생의 사상 문제 이전에 인격 자체를 불신당하는 계기가 될 겁니다.”  304-305

“..선우 선생은 역사 앞에서 최소한이나마 냉정을 회복한 다음,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월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가를, 왜 그들이 경찰, 군인이 되고 또 서청 같은 단체를 조직했는가를, 그리고 왜 그들에 대해서 사회의 일반적 인식이 나쁜가를 따져볼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모두 너무 자명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를 선우 선생이 찾아내지 못하면 선우 선생은 계속 불행할 겁니다. 내가 끝으로 한다미만 하겠습니다. 해방이 되고, 그게 공산주의 체제가 아니었더라도 선우 선생은 지금과 똑같은 형편에 처했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지주계급의 몰락, 그것은 올바른 역사의 흐름입니다. 친일반역세력의 척격, 그것 또한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입니다. 선생으로서 그 사실을 납득해야만 합니다.”
“그건 바로 공산주의자들의 주장 그대로요. 김 선생, 도대체 당신 정체는 뭐요!”
선우진이 느닷없이 소리 지르는 바람에 김범우는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가 그만 성냥을 도로 놓았다.
“알겠소, 그만 일어납시다. 난 아직 바쁜 일이 남아 있소.”
김범우는 체념적인 얼굴로 담뱃갑을 챙겨들었다. 선우진은 의혹스러운 눈으로 김범우를 쳐다보며 무겁게 따라 일어섰다.  306

“셰익스피어는 역시 인도하도고 안 바꿀 만큼 위대한 모양이네, 자네의 시간 때움을. 해줄 수 있으니 말야. 그 잡품이 어던 것이었나.”
김범우는 친근한 웃음을 띠어 보였다.
“햄릿을 그냥 뒤적이던 중이네.” 손승호는 무언가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라도 있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그런 자신의 태도가 상대방에게 어떻게 보일지 또 신경에 거실리기라도 한 듯, “셰익스피어가 위대한지는 몰라도 그런 비유법을 쓴 영국인들은 한심한 종자들이야. 그 과장의 정도야 아무래도 상관할 게 없지만, 비유의 대상을 한 나라로 잡았다는 건 용서할 수가 없는 일이야. 셰익스피어가 제아무리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한들 어찌 인도보다 더 위대할 수 있느냔 말야. 인도라는 거대한 땅덩어리는 차치하고라도 거기엔 4억을 헤아리는 인간들이 엄영히 생존하고 있어. 그 생명들의 존엄성보다 셰익스피어가 더 위대하다니, 그따위 발상법을 가진 영국인들은 일본놈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식민주의자들이야. 물론 어떠 ㄴ유식한 자가 무심코 쓴 비유법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무심코’ 만족을 느낀 것이고, 자기네 민족의 우월감을 과시하는 한 방법으로 계익스피어를 세계호ㅘ시키면서 또 그 비유를 ‘무심코’ 써먹은 거야. 셰익스피어가 분명 봉건 왕조시대의 작가지만 자기의 작가정신이 그처럼 수없이 많은 인간들의 존엄성을 짓밟는 것으로 비유되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을 거야. 오히려 그 반대였겠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아예 그런 좋은 작품들을 써내지 못했을 테니까. 셰익스피어는 후대를 잘못 둔 셈이지.”  
손승호는 경멸적인 웃음을 입가에 물고 있었다.
김범우는 놀라운 눈으로 손승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그야말로 무심코 던진, 그 예사가 된 한마리를 붙들고 그처럼 긴 이야기를 하는 데 놀랐고, 자신으로서는 및치지 못했던 그 논리추출의 예리한 시각과 논리개진의 완벽한 방법에 놀랐다. 손승오희 그런 논리는 그가 왜 좌익의 테러화와 함께 사상적 전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건 문학적 인도주의를 사고의 바탕으로 마련하고 있는 손승호의 필연적 귀결인지도 몰랐다.  318-320

어떤 사실의 모순이나 왜곡에 대해서 아무리 논리적 비판을 가하고 이론적 규명을 한다 한들 현실적으로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없을 때 허망감에 빠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었다. 그 논리가 명징하면 할수록, 그 이론이 명확하면 할수록 그 정도는 심해질 터였다.  320

“.. 그 누가 감히 그 현실적 삶을 거부하거나 기피할 수 있겠는가. 역사 비판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겠나. 다 지나가버린 세월, 아무리 열 올리며 비판한다고 해봤자 이미 그르쳐진 일이 바로잡힐 리가 있겠나. 그런데도 그게 계속이거든. 왜 그러겠는가. 인간은 현실을 살 수밖에 없는 동물이고, 그 과거적 삶 속에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비워주는 거울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나. 자네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소릴 나야말로 부질없이 지껄여대고 있구먼.”
김범우는 담배를 빼들었다.
“사람 참, 별소릴……”
손승호는 김범우 앞으로 통성냥을 밀어놓으며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이고 있었다.  321

“자네도 알겠지만, 핵심 좌익들은 벌써 다 도망을 쳐버렸네. 물론 붙들려온 사람들 중에는 및처 피하지 못한 자들도 있긴 있을 것이고, 세포들도 끼여 있겠지. 그런 것을 가려내는 거야 경찰의 업무니까 말할 바 못 되고, 그 과정에서 피해자 가족 등의 감정이 개입돼 무고한 사람들이 다칠 염려가 있네. 그 피해를 최소한 막아보자는 거네.”  322

“범우, 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고, 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네. 허나, 자네가 그런 제안을 했으니 내 생각을 마하려네. .. 자네나 나나 염상진 선배가 애초에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던 것은 오늘 같은 날을 위해서는 아니잖은가. 그런데 해방이 되면서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것도 변질되기 시작했네. 금년에 남북 양쪽에서 서로 다른 주의를 앞세워 서로 다른 이름의 나라를 세우면서 우리 모두는 인간적으로 민족적으로 우리 스스로를 살해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죄를 저질렀네. 그리고 나타난 현상이 뭐였나. 서로의 사상을 정치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해 인간을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 극렬적 충돌이었네. 그런 야만적 행위가 또 어디 있겠나. 난 완전히 환멸하고 절망했네. .. 범우 자네의 뜻을 이해하면서도 행동적 동의를 할 수 없는 것은, 그런 경직된 상황 속에서 자네와 같은 뜻이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고, 자칫 잘못하다간 그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실수를 범할 것이기 때문이네. 날 비겁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네. 난 모든 것에 선행해 인간이고 싶네. 난 그걸 지키기 위해서 사회주의를 버렸고, 총을 들이댄 염상진의 위협에도 굽히지 않았네. 자네의 뜻이 바로 순수한 인간적인 것임을 아네만 현실은 그걸 순수하게 받아들여주지 않을 것이네. 자네가 좌익학생들을 위해 분투했던  때와는 상황이 너무나 다르네. 협조를 할 수 없어 미안하네.”  323-324

그는 인간의 인간다운 삶의 길을 위하여 사회주의를 택했었다. 그런데 결국 그가 만난 것은 인간부재의 현실일 뿐이었다.(손승호)  328

김범우는 그 어스름 속을 걸어가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손승호의 말이 새로울 것은 없었다. 주의가 정치적 대결자으이 무기로 변한 것도, 그 속에서 한 인간의 힘이 얼마나 미약한가 하는 것도, 터무니없는 오해를 야기시킬 위험성도, 김범우는 이미 생각했던 바였다. 그러나 김범우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엇던 것은 주의가 정치 폭력화햇다는 점이었다. 미군정이 공산당 활동의 불법화 조치를 취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폭력대결은 정부수립을 기점으로 남쪽에서 공산주의라는 것은 절대 용납이 안 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북쪽에서의 자본주의라는 것은 절대 용납불가가 된 것이다. 그 결과의 표현이 바로 이번 사건이었다. 염상진이 겨우 5일 동안에 100명 이상의 인명 살상을 자행할 줄 상상이나 했던가. 그건 염상진이라는 개인의 뜻이 아니라 정치 폭력화한 주의의 충돌이었던 것이다. 염상진은 이미 주의를 지배하는 이성적 인간이 아니라 주의의 정치적 실현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변신한 것이었다. 정치라는 것만큼 본질을 전도하는 것도 없을 것이고, 염상진은 그 전도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100명쯤은 의당 죽일 수 있는 타당성을 마련했을 것이다. 그러나 염상진이 그러했다면, 그 상대적인 힘은 두 배 이상의 가격을 할 권리르 얻게 되는 것이다. 정치 폭력의 역학이라는 것은 별것이 아닌 것이다. 일본 교사들이 조선인 학생들에게 즐겨 써먹었던 ‘서로 따귀 갈기기’의 처벌법이 갖는 가해성과 마찬가지였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점점더 상대방을 세게 갈길 수밖에 없는 가해성, 그때 내가 때리고 있는 것이 내 친구라는 사실은 이미 망각해 버린다. 상대는 오직 나를 아프게 하는 적일 뿐이고, 내가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공격성만 가속화하는 것이다. 김범우는 그 정치적 가해성은 외면하고 있었다. 그건 비탈길을 굴러내리기 시작한 수레바퀴의 불가항력적인 힘이었기 때문이다. 김범우의 관심은 그 수레바퀴 아래 멋모르고 깔려 압사해야 하는 민중들의 억울에만 쏠려 있었던 것이다.  328-330

사람의 운명이란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354



9 문딩이 가시내, 팔자도 참 험허게 변했다

“문딩이 가시내, 팔자도 참 험허게 변했다.”
점례는 멀어져가는 옛 친구 순심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360

방죽 위에는 관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관들의 수효만큼 여러 음색이 곡성이 뒤엉키고 있었다. 들몰댁은 숨을 헐떡이며 질린 눈으로 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소스라쳐 놀라 돌아섰다. 들목댁은 방죽의 비탈을 구르듯이 내려갔다. 갈숲은 흰 꽃술을 달고 무성했다. 들몰댁은 갈숲을 휘젖기 시작했다.
..
“저 여자 왜 저러는겨?”
“보면 모르남? 뻔허제.”
“몰라서가 아니라 갈밭에는 인자 시체가 하나또 읎다는 말이시.”
“냅두소. 말해 줘도 소양읎을 것잉께. 지 눈으로 읎다는 것을 확인헐 때꺼정 저러고 댕겨야 허네.”
방죽 위에서 두 남자가 들몰댁을 내려다보며 하는 말이었다.  378-379

들몰댁은 경찰서를 찾아갔다. .. 그녀는 북국민학교를 찾아갔다. 거기서도 마찬가지로 그녀를 떠밀어냈다. .. 다시 방죽을 향해 걸었다. .. 갈숲을 헤치자 헤치다 들몰댁이 방죽의 비탈에 지쳐 쓰러졌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했다. .. 고구마 두 개씩으로 점심을 때운 새끼들이 배가 고파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거였다. ..
들몰댁이 동구에 들어선 것은 어둑어둑해서였다. 그녀는 비척거리며 고샅을 돌았다.
“엄니이!”
소리치며 뛰어오는 것은 길남이었다. ..
“엄니, 워디 갔다 인자 와. 할아부지가 오셨는디.”
“머시여?”
..
“참말이여? 은제여?”
그녀는 목멘 소리로 외쳤다.
“아까 점심때 지내서.”
“워메, 내년이 넋 빠진 년이다, 넋 빠진 년.”
..
들몰댁은 다급함 속에서도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시아버지는 아랫목에 반듯이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
들몰댁은 서둘러 보리쌀을 안치고 불을 지피면서야 맘 놓고 눈물을 흘렸다. 380-382

며칠 만에 되찾은 잠자리였다. 들몰댁은 이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처음 그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을 때는 꿈인가 했다. 그러나 두번째 그 소리를 듣고 들몰댁은 번쩍 잠이 깼다.
“이봐, 문 열어, 문!”  382

어둠 속에서 남자가 아이들에게 소리치며 들몰댁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들몰댁은 끄는 대로 끌려 마루로 나왔고, 토방으로 굴러떨어졌다. 눈에서 불꽃이 번쩍 하며 가슴이 컥 막혔다.
“경찰에서 풀려났다고 너희들 죄가 다 끝난 줄 알았다감 천만의 말씀이야. 우리가 누군 줄 알어? 하대치, 바로 그 악질 빨갱이새끼한테 아버지를 잃은 사람들이다. 지금부턴 우리가 내리는 벌을 받아야 된다 그런 말씀ㅇ야. 알아들어?”
마당에 버티고 섰던 다섯 개의 그림자가 몽둥이를 치켜들며 일제히 몰려왔다. 들몰댁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려박았다. 몽둥이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들몰댁은 이빨을 뿌득뿌득 갈다가 결국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애들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를 아슴푸레하게 들으며 끝내 까무러치고 말았다.
들몰댁이 깨어났을 때는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엄니, 엄니, 항아부지가 죽었어.”
..
“아부님, 아부님……”
들몰댁은 넋 나간 얼굴로 시아버지를 흔들었다.
“집집마다 댕김서 우리 할아부지, 엄니 잠 살려도라고 사정사정 했는디도 아무도 안 왔어.”
길남이가 울음을 추스르며 말했고, 비로소 들몰댁은 ‘아부님’을 섧게 부르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384-385

그들의 보복행위는 벌써 사흘 밤째 감행된 것이었다. 처형을 당한 집들을 제외한 나머지 집들이 보복대상이었다. 그 정보는 쉽게 그들의 손에 들어왔다. 윤태주가 청년단장 아들 현오봉을 앞세워 염상구를 만났던 것이다.
“죽이지는 않겄다 그 말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염상구가 다짐하듯이 물었다. ..
“그렇구만요.”
윤태주가 분명하게 대답했다.
“고것덜이 이뻐서가 아니고 다 쓸 디가 있어서 그냥 내보낸 것잉께 만약 죽으먼 느그덜이 당혀. 그 약속만 지킨다먼 나가 도와줄껴.”
염상구는 독기 서린 찬 웃음을 입가에 물었다.
“저어…… 염상진은 감찰부장님 형님 아니십니까.”
“근디?”
..
“그 집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
“요것 잠 보드라고 대학상 양반, 워째 하나는 알고 둘은 몰르는가 그래.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고런 말씸이시. 알아들으시겄능가?”
..
“나 바쁜게 그만들 가보드락. 죽이지만 말고.”
염상구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염상진의 집부터 시작해서 오늘 밤 하대치의 집까지, 사흘 밤 동안 일곱 집을 쓸었다. 밤마다 일을 마치고는 윤태주의 집에 모여 밤참을 먹고 다음날 일을 계획하고는 했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그들의 젊은 핏속에는 쾌락적인 승리감과 함께 보복감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395-396




10 암약(暗躍)

“.. 투쟁은 무기로만 하는 게 아닌 것 또한 사실이오. 무기에 앞서 정신력, 여건, 환경 등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투쟁결과는 나타나게 되어 있소. 그 좋은 예가 바로 제주도에서 전개되고 있는 투쟁이오. 그들은 골비된 섬인데도 불구하고 벌써 7개월째 투쟁을 계속하고 있소. 양키들이 발악적으로 비행기며 군함을 동원해 최신무기를 사용하고, 서청이고 군,경을 그렇게 토입해 무자비한 학살을 감행해도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 말이오. ..”(염상진과 안창민의 대화중 염상민)  434

사람들은 스스로 한 덩어리가 되어 해방의 기쁨을 나누었던 힘으 ㄹ그냥 사장ㅇ시키지 않고 새 세상 만들기오아 새 나라 만들기의 힘으로 바꾼 것이었다. .. 민중들은 압제 속에 살면서 이미 그런 준비를 해왔음을 깨달아야 했다.
사람들의 그런 자발성에 따라 건준지부와 치안대가 탄생했다. 그리고 건준지부는 곧 인민위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인민위워노히의 여러 기구에 친일반역자들이 얼씬도 하지 못한 것은 더 말할 껏도 없었다. 5만을 헤아리는 읍민들 중에 9할이 농민이고, 그 농민들 중에서 8할이 넘게 소작인인 그들이 인민위원회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는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했다. 신속한 토지문제의 해결이었다. 그 요구와 공산주이 혁명과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맞아떨어졌다. 해방된 땅의 전체 분위기는 똑같았고, 그건 곧 혁명으로 치달아가는 길이었다. 인민은 곧 혁명 이데올로기의 거대한 연료로서 불꽃이 당겨지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삼팔선 이남을 미군들이 점령했고, 그들은 군정을 선포하면서 마침내 10월 10일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하고 나섰다. 그때부터 인민들의 욕구는 깨져나가기 시작했고, 공산당은 피나는 투쟁 속에서 세력의 약화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440-441

강동식은 하대치와 함께 그 투쟁경력이 화려한, 염상진 휘하조직의 중추이며 골수분자였다. 그는 벌교 토박이로 회정리에서만 대대로 살아온 소작인 집안 자식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하대치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중도의 간척논 소작인이었다. 그런데 그가 소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논에서 발을 찔렸는데 그것이 덧나기 시작해서 반년이 넘게 고생고생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5학년에서 학교를 그만두고 농사일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꿈을 버릴 수가 없어서 혼자 힘으로 나머지 소학교 과정의 공부를 마쳤다. 하대치보다 두 살이 많은 그는 하대치와 같은 시기에 염상진과 인연을 맺었다. 그래서 징용을 끌려갔다왔고, 바로 사회주의에 빠져들었다.  444

하대치가 뜨거운 기질이라면 그는 끈질긴 기질이었다.  445

배성오는 칠동리에서 부자 축에 드는 과수원집 아들이었다. 그는 순천농업학교 출신이었다. 순천농업은 순천에 있는 학교들 중에서 좌익세가 제일 강한 학교였다. 공부가 별로 마음에 없었던 그는 운동에 열중하는 한편으로 좌익에 기울어졌다. 타고난 뼈대가 굵은 그는 유도에 남다른 솜씨를 보이면서 좌익학생세력의 중심부에서 움직였다. .. 그는 정하섭의 소학교 1년 후배였다. 그리고 같은 좌익활동을 할 뿐 아니라 염상진의 영향 아래 있었다. .. 정하섭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배성오는 정하섭을 적대시하고 있었다. 책방집 딸 문정님 때문이었다. 그는 문정님에게 눈독을 들인 채 기회만 엿보며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는데 정하섭과 그 여자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나돌게 되었다. 정하섭을 기운으로 해치울 수도 없는 일이었고, 그의 피해의식은 적대감으로 바뀌어갔다.  446-447

Posted by WN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