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사람들이 역사를 궁금해하는 까닭은 현재를 더 잘 알고 싶어서다. 과거를 살펴 현재와 비교하고 현재를 추적하는 것은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려는 노력이다. .. 역사를 공부하는 궁극적 목적은 결국 미래를 바꾸려면 현재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려는 데 있다.  9
구체적 조건에 조응하거나 반발하는 인간의 의식적 활동을 배제하는 역사 서술은 사실상 역사를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역사 서술은 읽지 않아도 내용을 알 수 있다. 그런 역사 서술에는 그저 변치 않는 인간 본성과 유전자적 본능만이 있을 뿐이고, 역사의 구체적 맥락들이 변화를 설명하는 데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10
오늘의 세계에 강한 불만을 느끼는 이들은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11
미국과 소련의 경재잉 세계를 각자의 세력권으로 분할하는 과정(위로부터 부과된 조건)에서 치러진 전쟁을 거치며 수백만 명이 죽었다. 한반도의 남과 북에 서로 증오하며 적대하는 체제가 수립됐다. 전쟁 없이 분단된 독일과 달리, 한반도에서는 냉전 질서가 끝났는데도 분단 체제가 유지되는 배경이다.
국토의 90%가 전쟁의 화염 속에 들어가면서 전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망도 함께 파괴됐다. 한국 자본주의가 낡은 속박에 얽매이지 않고 발전할 토대를 전쟁 통에 마련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전에만 해도 통치 정당성이 결핍돼 태어나자마자 위기에 빠진 신생국가 대한민국은 전쟁 수행을 위해 또는 그것을 명분으로 자원과인력과 통치권을 집중시키는 과정에서 영토와 국민에 대한 진정한주권(통치 권력을 확립했다. 좌파와 노동운동은 궤멸됐다.
그렇게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한 대한민국은 노동계급의 자주적 활동에 적대적인 권위주의 국가로 성장했다. 한·미·일 삼각무역과 장시간·저임금 노동을 기초로 해서 시장경제적이고 수출지향적인 국가자본주의 노선을 걸은 한국은 마침내 경제 발전자립)을 이뤘다.
한국 지배자들은 냉전이 끝난 뒤에도 세계적 패권 국가인 미국중심의 질서 안에서 번영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다고 봤다.사실 중국조차도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 중심의 세계화 질서에편입해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그러나 역동적인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변화·발전이 이런 국가간 관계들도 비틀고 있다. 세계적 세력균형의 변화는 한국의 정치와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13-14
돌아보며느 역대 한국 정부는 거의 모두 역사를 정치에 활용했다. 역사 해석을 독저하려 한 권위주의 정권들은 물론이고, 민주화 이후의 정부들도 역사 재평가를 지지율을 만회하고 정적을 공격하고 자신을 방어할 우회로로 삼았다.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독립운동 · 민주화운동 재평가 시도와 과거사 진상 규명, 이명박 정부의 건국절 제정 논란과 금성 역사교과서 탄압,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기원설 설파 등.
민주당 정부들이 정부 차원의 행사와 지원을 통해 형성해 온 서사는 민주주의자들이 민주공화국을 설계하고 이끌어 경제 번영에 성공한 스토리다. 이 서사에서 한국 국가의 뿌리는 1948년이 아니라 1919년이다. 친민주당 진영은 3·1운동을 혁명이라고 부른다. 부르주아(자본주의적) 혁명이었던 프랑스대혁명이 연상된다. 이것은 3·1운동의 여러 산물 중 하나인 상해임시정부를 대한민국 국가의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시도다. 민주당 계보의 위인들이 서구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서사의 주인공처럼 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다.
우파에 대한 반감은 큰데 제대로 된 대안적 해석이 없으므로, 친민주당적 역사 해석은 진보 진영에서도 많이 차용된다. 그러나 친민주당 진영은 역사적으로 봐도 반제국주의적 민중봉기인 3.1운동의 정통을 계승하는 세력이 전혀 아니다.  15-16


2장 한국전쟁, 제국주의 경쟁이 낳은 비극

미국은 단지 북한을 상대하기 위해 북한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특히 중국)과의 경쟁에서 자신의 우위를 지키는 것이 주된 고려 사항이다. 즉,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남북 관계나 북미 관계에 한정해서 바라보면 안 되고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경쟁이라는 더 큰 틀에서 바라봐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도 남북 사이의 충돌이라는 좁은 시야가 아니라 더 큰 맥락에서 봐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제국주의 경쟁의 주된 대립 구도였던 미국과 소련 사이의 경쟁 말이다.  73

미국은 한국전쟁 동안 무자비한 폭격을 가했다. 그 결과 북한 지역은 “달 표면처럼” 변했다고 할만큼 파괴됐고 대량 학살이라 불릴 일이 벌어졌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태평양전쟁 구역 전체에 투하된 폭탄의 총량이 50만 3000톤 이상의 네이팜탄(광범위한 지역을 불태울 목적으로 사용된다. 네이팜탄에 들어간 물질은 인체나 목재에 닿으면 떨어지지 앟고 계속해서 불탄다)이 더해져야 한다. ..
예컨대 1950년 11월 8일 B-29 폭격기 70대가 신의주에 네이팜탄 550톤을 투하했다. 도시가 지도에서 지워졌다고 표현할 만큼 잿더미가 됐다. 550톤으로 한 도시를 지도에서 지워버릴 정도였다면 3만 2000톤이면 얼마나 파괴적이었을까? ..
북한의 주요 도시 22곳 중 18곳은 최소한 50% 파괴됐다. 1953년 5월에는 식량 생산에 타격을 가하고 기아를 유발하기 위해서 댐. 여러 개가 파괴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74-75

미국은 한국전쟁을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주장해 왔다. 한국의 지뱆들도 마찬가지다.  76

한국전쟁 연구자 브루스 커밍스가 잘 지적했듯이, 누구도 미국 내전에서 남부군이 섬터 요새에 먼저 총을 쐈다는 사실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체로는 그 전쟁이 노예제도와 인종차별 정책을 둘러싼 전쟁이었다는 점에 관심을 둔다. ..
‘누가 먽저 총을 쏘았는가’에 초점을 맞추면 전쟁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취할 수 없다. ..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전쟁 발발 이전에 형성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쟁, 제국주의 국가가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상황, 노동계급 운도엥 대한 공격 등 정치적 맥락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76-77

한국전쟁도 제대로 이해하려면 미국과 소련 두 제국주의 사이의 경쟁이라는 맥락을 봐야한다. ..
소련은 제2차세계대전을 거치며 중부, 동부 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해서 유라시아 대륙의 최강대국으로 부상했다.(2차세계대전 종전 후 소련은 폴란드, 불가링, 체코스로바키아, 루마니아, 헝가리, 동독을 위성국가로 삼으며 세력권을 확장했다) 미국은 소련의 세력 확장을 자신이 관리하는 국제 질서에 대한 주된 위협으로 여겼다. 미국과 소련 두 제국주의의 경쟁은 점점 가열돼, 1947년 3월 트루먼트린의 발표로, 이미 형성되고 있던 냉전이 공식화했다. 미국은 소련 세력권과 접한 서유럽과 일본이 무너지면 소련이 정치적 팽창의 기회를 얻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서유럽에서는 마셜플랜(유럽부흥계획)을, 일본에서는 '역코스' 정책을 추진했다.
미국이 일본에서 시행한 코스 정책은 패전 전 일본의 지배계급과 국가 관료들의 권력을 유지케 하는 정책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의 미군정은 전범을 처벌하고 전쟁을 후원했던 독과점 기업들을 해체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뒤집는다는 의미에서 '역코스인 것이다. 그 일환으로 전범인 일왕도 처벌받지 않았다. 소련도 동유럽 나라들을 위성국으로 삼으며 세력권을 구축해 나갔다.
제국주의 경쟁이 두 진영으로 예리하게 나뉘어 다투는 냉전이라는 형태로 바뀌면서 어떤 면에서는 경쟁이 더 격렬했다. 날카로운 이데올로기 경쟁도 수반했기 때문이다.
냉전에서 각 진영을 대표한 미국과 소련은 각자의 점령지역에서 자신의 이익에 복무하며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탑재한 체제를 만들려고 애썼다. 한반도의 남과 북 국가는 그렇게 탄생했다. 남과 북의 충돌은 이런 세계적 쟁투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미국과 소련은 유럽 등지에서 각자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충돌했고, 특히 독일 '베를린 봉쇄'라고 불린 충돌에서는 핵무기의 동원도 심각하게 고려됐다. 이런 경쟁적 쟁투들이 실제 열전으로 벌어진 것이 바로 한국전쟁이다.  78-79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미국이 한반도의 남쪽을 점령해서 친일 지주 세력을 지지하고 그에 반대하는 세력을 탄압하면서 많은 충돌과 학살이 벌어졌고, 그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모순이 증폭했다.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는 진정한 독립과 해방을 원하는 아래로부터의 열망이 분출했다. 노동자들의 공장자주관리운동이나 각 지역 인민위원회들의 등장이 그 사례다. 미군정은 이런 대중운동과 조직을 파괴하려고 온 힘을 기울였다.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항쟁에 대한 폭력적 진압이 대표적 사례다. 1948년 2월부터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10만 명 이상이 학살됐다. 제주4.3 항쟁에 대한 잔인한 진압이 이 기간에 벌어진 일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등장한 남쪽 정부는 진정한 해방과 독립을 원하는 대중의 열망에 적대적이었을 뿐아닐 소련이 점령해 북쪽에 수립한 정부에도 적대적이었다.
커밍스는 북쪽에서는 남쪽과 달리 항일 세력이 권력을 잡앗고 토지개혁도 이뤘다고 봤다. 그리고 남쪽에서 벌어진 지주와 농민, 친일 세력과 항일 세력의 대립과 투쟁(커밍스는 이를 “작은 전쟁”이라고 불렀다)이 남북 사이의 전쟁(“큰 전쟁”)으로 확대됐다고 봤다. 그래서 한국전쟁은 내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미국이 개입하면서 전쟁을 더욱 끔찍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커밍스의 주장은 명백히 장점이 있다. 한국전쟁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 낸 정의로운 전쟁이었다는 미국과 남한 지배자들의 주장에 대한 분명한 반박이기 때문이다.  81-82

커밍스는 김일성이 소련의 계획하에 북한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스탈린과 면담한 후에 북한에 들어왔고 소련군의 적극적 협력을 받으면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1945년 10월 이승만이 미군정 사령관 하지가 옆에 앉아 있는 가운데 남한 대중에게 소개된 것처럼 김일성은 소련 관려들이 뒤에 서 있는 가운데 북한 대중에게 항일 영웅으로 소개됐다. 이렇게 소련군의 후원 속에 수립된 북한 정부는 대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데서 남한과 다를 바가 없었다.  82-83

소련은 돼 김일성을 잡고 있던 목줄을 먼저 놓았을까? ..
스탈린의 전후 아시아 전략에서 중국과 관련된 것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몽골을 중국으로부터 분맇해 소련의 안전을 보장하는 완충지대로 삼는 것이었다. 다른 ㅎ나는 태평양으로의 진출 거점과 부동항(바다가 얼지 않는 항구) 확보를 위해 중국 동북 지역에 대한 옛 러시아 제국의 권익을 모두 회복하는 것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중국 동북 지역의 이권을 포기해야 했다. 스탈린은 옛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고 싶어 했다. 스탈린은 태평양전쟁에 참전하면서 1945년 8월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와 ‘중소 우호 동맹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소련은 국공내전에 개입하지 않고 중국 국민당과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그대가로 소련은 다롄항에서 소련의 우월적 이권을 보장받았고, 뤼순 해군기지 조차권을 회복했으며, 만주 철도. 공동 경영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의 의사와 달리 중국혁명이 성공하면서, 소련은 마오쩌둥이 집권한 중국과 새로 조약을 맺어야 했다(‘중소 우호 동맹 상호 원조 조약’). 이 새 조약에 따라 소련은 태평양으로 진출할 연결로인 만주의 창춘철도와 부동항인 뤼순항과 다롄항을 중국에 조기 반환하기로 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에 긴장이 조성되면 중국은 소련 군대가 뤼순과 다롄에 계속 주둔하기를 요철할 것이고, 새 조약에는 “전쟁 혹은 위기 국면이 발생하면, 소련 군대는 창춘철도를 사용할 수 있다”고 돼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중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유지할 방법이기도 했다.  84-85

반면, 마오쩌둥은 중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최대한 차단하면서도 소련에게 될수록 많은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얻어 내고 싶어 했다. 중국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복구하고 대만을 정복하기 위해 소련의 공군 지원을 상당히 중시했다. 그러면 미국과는 적대 관계(직접 충돌을 포함해)가 되겠지만, 당시 중국의 처지에서는 냉전이 본격화하는 와중에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불가피해 보였다.  86

김일성과 이승만은 세계적 차원의 제국주의 경쟁이라는 큰 장기판에서 하나의 말에 지나지 않았다.  86

한국전쟁의 전개 과정을 간략히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전쟁 초기(1950년 6월 말에서 7월)에는 북한군이 밀고 내려와 8월에는 낙동강 부근에서 참호전 양상을 보였다.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며 미군이 압록강 부근까지 밀고 올라갔지만 10월 25일 중국군의 참전으로 다시 전선이 내려와 38선 부근에서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 상태가 2년을 더 지속하다가 1953년 7월 정전에 이르렀다.  87

미국 공군의 제공권 장악으로 북한군의 전진이 상당히 더뎌졌다. 개전한 지 두 달도 안 지난 시점인 8월 15일 이전에 북한군 내부에서는 병사들의 도주와 명령없는 퇴각이 벌어지고 있었다. 9월 1일이 되면, 미군이 주도한 유엔군의 규모가 북한군 병력(9만 8000명)의 두 배에 이르게 됐다. 그러니까, 인천 상륙 작전 이전에 이미 전세는 어느 정도 뒤집혀 있던 것이다.  87

미군은 흰 옷을 입은 민간인 무리를 겨냥해 무차별적 기총소사를 가하곤 했다. 노근리 학살 등 민간인 학살이 그 과정에서 벌어졌다. 민간인 학살이 보편적 현상이었다고 할 정도로 미군은 민간인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했다.  88

중국은 미국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면 산업 중심지의 하나이고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한 중국 동북 지역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중국군은 10월 25일 미군과 첫 교전을 벌였고 11월 1일에는 중국군으로 위장한 소련 공군이 처음으로 압록강 상공 교전에 참가했다. 이때부터 한국전쟁의 주된 양상은 미국군(과 유엔군) 대 중국군(과 소련군)의 대결이었다.
소련군 참전이 아주 작은 규모였던 것은 아니다. 1950년 11월 1일부터 1951년 12월 6일까지 소련군은 전투기와 대공포로 미군 비행기 569대를 파괴했다. 1951년 10월 한 달간미국 공군은 소련군 미그-15 전투기의 출현을 2573회 목격했고 소련 준투기와 2166회 교전했다. 소련군의 공격으로 미국 공군의 주력 폭격기 B-29 5대가 상실되고 8대가 손상돼, 미군은 소련군의 공격을 피해 야간 공습을 벌여야 했다. ..
양쪽 모두 적을 완전히 제압해 한반도를 통일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전쟁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서로 조금일도 우월한 입장에서 전쟁을 끝내길 바랐기 때문에 전쟁은 지속됐다.  88-89

한국 전쟁의 결과 한반도 인구의 10분의 1이 희생됐고 1000만 명이 가족과 헤어졌고 500만 명이 난민이 됐다.  89-90

해방 직후 강력했던 좌파와 노동자 운동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붕괴됐다.  92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은 미군들이 피난을 시켜 준다며 충청북도 영동읍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들을 부산 방면으로 끌고 가다가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4일간 노근리 철로변과 굴다리에서 무참하게 살해한 사건이다.
7월 25일 해질 무렵, 한 패의 미군이 들이닥쳐 “대구, 부산 방면으로 피난을 시켜주겠다“면서 마을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집합시켰다. 남아 있으려는 사람들까지 강제로 모이게 했다. 약 500명이 미군의 인솔로 국도를 걸어서 남쪽으로 향했다 남쪽으로 향하던 피난민은 26일 정오경 미군의 명령을 받고 영동읍 노근리 도로변의 경부선 철로로 올라갔다. 미군은 피난민의 몸과 짐을 검사한 다음 그들이 무장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도 미군 비행기를 무전으로 불러 기총소사를 해댔다. 이것이 1차 학살이다. 살아남은 피난민이 경부선 철로 밑과 터널 밑으로 들어가자 2차, 3차 학살이 벌어졌다. ..
충북 영춘 곡계골, 경남 마산 곡안리, 경남 사천 조장리, 황해남도 신천리 등지에서도 미군의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98

북한 징역의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북한이 제시한 자료를 보면, 북한군이 유연군에 밀려 퇴각하던 1950년 10월 17일, 신천 지역을 점령한 미군은 50여 일간 신천군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 5383명을 학살했다. 황해남도 은률군에서 1만 3000여 명, 평안북도 정주군 창도에서 580명의 섬 주민 모두를 학살했다. 평양에서 1만 5000명, 황해남도 안악군에서 1만 9072명 등 미군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99

1945년 9월 미군이 처음 한반도 땅에 발을 디딘 그 순간부터 한국 노동자, 민중을 위해 한 좋은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국은 계속 독재 정권들을 후원했고, 남한 노동자, 민중은 그 밑에서 쥐어짜이고 짓눌려 살아야 했다. 분단 고착화에 항의한 제주 4.3항쟁은 미국의 후원하에 야만적으로 진압됐다. 미국은 1980년 광주항쟁을 진압하러 가는 한국군 이동을 승인했고, 부산에 항공모함을 배치해 학살을 엄호했다. 주한미군이 상시 주둔하면서 주한미군 범죄도 심각했다…
이처럼 한미동맹은 미국 제국주의와 한구구 자본주의, 그리고 이 체제에서 혜택을 얻는 미국과 한국의 권력자들을 위해 필요했고, 지금도 그렇다.  105-106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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