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 출발
정보는 사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이고, 지식은 뒤죽박죽 섞인 사실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지혜는 뒤얽힌 사실들을 풀어내어 이해하고, 결정적으로 그 사실들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 지식은 안다. 지혜는 이해한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종류의 차이이지 정도의 차이가 아니다. ..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다. 지혜는 실천하는 것이다. 6-7

철학은 새로운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도와주고, 바로 거기에 큰 가치가 있다. 11

우리에겐 느 ㄹ지혜가 필요하지만 삶의 단계마다 필요한 지혜가 다르다. 열다섯 살에게 중요한 ‘어떻게’ 질문과 서른다섯 살, 또는 일흔다섯 살에게 중요한 질문은 같지 않다. 철학은 각 단계에 반드시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14


1부 새벽

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오는 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망각이었다. 그는 온전한 삶을 살라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독촉했다. 31-32

마르쿠스는 스스로에게 생각을 그만두고 행동에 나서라고 누차 촉구한다. 32



2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감정도 열차처럼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주기적으로 한바탕 찾아오는 나의 우울은 난데없이 나타난 것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멈춰 서서 그 근원을 잘 살펴보면 숨은 원인을 찾게된다. 나의 슬픔은 바로 앞의 생각이나 감정에 원인이 있고, 이 생각이나 감정은 그 이전의 것에, 그 이전의 것은 1982년에 어머니가 한 말에 원인이 있다. 생각이 그렇듯이 감정도 결코 느닷없이 나타나지 않는다. 열차처럼 앞에서 감정을 끌어당기는 힘이 늘 존재한다. 41-42

사람들은 질문을 물어봅니다. 가끔은 질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질문과 씨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경험하지는 않습니다. 43

소크라테스에게 가장 최악위 무지는 지식의 가면을 쓴 무지였다. 48-49

우리는 종종 궁금해하는 것과 호기심을 같은 것으로 여긴다. 물론 두 가지 다 무관심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 방식은 서로가 다르다. 궁금해하는 것은 호기심과 달리 본인과 매우 밀접하게 엮여 있다. 우리는 냉철한 호기심을 가질 수 있다. 냉철하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하지만 냉철하게 궁금해할 순 없다. 호기심은 가만히 있질 못하고 늘 눈앞에 나타나는 다른 반짝이는 대상을 쫓아가겠다며 위협한다. 궁금해하는 마음은 그렇지 않다. 그 마음은 오래도록 머문다. 호기심이 한 손에 음료를 들고 안락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발을 올려둔 것이 바로 궁금해하는 마음이다. 궁금해하는 마음은 절대로 반짝이는 대상을 쫓지 않는다. 절대로 고양이를 죽이지 않는다.
궁금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좋은 식산 좋은 섹스처럼 절대 서두를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소크라테스도 절대로 대화를 재촉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상대가 점점 지치고 분노할 때초자 인내심을 갖고 대화에 임했다. 55-56

좋은 철학은 느린 철학이다. 57

멈춤은 텅 빈 것이 아니라 잠시 유예된 상황이다. 생각의 씨앗이다. 모든 멈춤은 인식의 가능성, 그리고 궁금해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57

문제를 경험하기 전에 해결하는 것은 식재료를 구매하기 전에 요리를 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너무 자주 우리는 가장 빠른 해결책, 또는 가장 편리한 즐거움에 손을 뻗는다. 63

내 견해가 어떻게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다른 모든 교활한 지배자처럼 나의 의견 역시 내가 자기들을 불러들였ㄷ고 믿게 한다. 정말 내가 그랬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생각이 말도 없이 나타나서 멋대로 내 옷을 걸쳐 입은 걸까? ..
깊이 있는 질문은 느리고 더 깊이 침잠한다. 68

철학은 말뿐이야. 질문만 끝없이 늘어놓고 대답은 없어. 언젠 떠나기만 하고 도착하지는 않는 기차야. ..
철학도 분명 도착지에 관심이 있지만, 여행을 서두르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그저 똑똑한 대답이 아닌 ‘마음의 대답’에 도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69

좋은 질문은 그렇다. 사람을 단단히 붙잡고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좋은 질문은 문제의 프레임을 다시 짜서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좋은 질문은 문제의 해답을 찾게 할 뿐만 아니라 해답을 찾는 행위 그 자체를 재평가하게 만든다. 좋은 질문은 똑똑한 대답을 끌어내기도 하지만 침묵을 끌어내기도 한다. 71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는 내가 문학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들어 있다. ..
‘이제 나는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잠시 멈추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성공은 어떤 모습이지? 솔직히 말하면 아직 이 질문의 답을 찾지 못했고, 어쩌면 영원히 못 찾을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안경의 도수를 다시 맞추었고, 이제 앞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72-73



3 루소처럼 걷는 법


철학자이자 황제인 마르쿠스가 대답을 해준다. ‘상상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역경을 만나면 자기 연민이나 절망에 빠지지 말고 그저 다시 시작하라.’ 이런 식으로 바라보면 삶은 더 이상 실패한 서사나 망쳐버린 결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진실이 아니다. 결말 같은 건 없다. 무한한 시작의 사슬만이 있을 뿐. 99



4 소로처럼 보는 법


소로가 동양으로 눈을 돌린 이유는 평범했다. 인생의 위기, 1837년이었다. 소로는 당시 관습이었던 체벌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콩코드 학교의 교사직에서 막 해고된 참이었다. 무일푼에 갈곳도 없었다. 그때 우연히 책 한 권을 만났다. 1000페이지에 달하는, 무려 “영국령 인도에 관한 역사적 기술적 해설”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소로는 묵묵히 책을 읽어내며 보석을 캐냈다. 책 속에 잇는 생경하고도 친숙한 아이디어들이 천천히 소로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소로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어느 정도는, 아주 가끔이지만, 나 또한 요가 수행자다.”
내 생각에 소로는 요가 수행자보다는 산야시(sannyasi)에 더 가깝다. 힌두교 전통에서 산야시는 가족으로서의 의무를 내던진 사람으로, 모든 재화를 포기하고 오로지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 숲에 틀어박힌다. 113-114

<월든>의 영웅이자 미국 설화의 사랑받는 아이콘, 환경주의의 주창자, 문학의 거성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개자식이었다. 소로를 아는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너새니얼 호손은 소로에게 “무쇠로 만든 부지깽이처럼 뻣뻣한 완고함”이 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호손만큼 친절하지 않았다. 소설가 헨리 제임스와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아버지인 헨리 제임스 시니어는 “소로는 평생 내가 만난 그 누구보다도 유치하고 개념 없고 뻔뻔한 이기주의자"라고 했다.
소로가 받는 혹독한 비난은 주로 위선에 관한 것이다. 소로는 숲속에서 홀로 자족하는 척하면서 몰래 엄마 집에 들러 파이를 먹고 빨래를 맡겼다.
그건 사실이다. 소로는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만큼 월든에 고립되어 살지 않았다. 엄마의 요리를 먹으려고, 또한 우체국과 카페에 들르려고 종종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마을로 향했다. 그렇다면 《월든》은 사기인가? 미국 전역의 중학교 3학년생은 그동안 기만당한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로는 사회와의 끈을 전부 끊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 <월든>은 숲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 관한 책이 아니다. <월든>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 관한 책이다. 115-116

가끔 우리는 의미를 너무 빨리 창출한다. .. 물건과 사람을 너무 빨리 정의 내리면 그것들의 유일무이함을 보지 못할 위험이 있다. 소로는 그러한 경향을 경계했다. “보편 법칙을 너무 성급하게 끌어내지 말 것.” 소로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특수한 사례를 더 명확하게 들여다 볼 것.” 눈앞에 보이는 것을 바로 규정하지 않고 기다리면 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120

소로는 말한다. “어떤 대상을 이해하는 것을 멈출 때에야 나는 비로소 그 대상을 보기 시작한다.” ..
소크라테스처럼 소로도 철저하게 의식적인 무지를 중요하게 여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유용한 무지를 전파하는 모임”을 만들겠다고 했다. 128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고 싶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본질적인 실상에 직면하고 싶어서, 그것들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죽음을 맞이 했을 때 내가 제대로 살지 않았음을 깨닫고 싶지 않아서였다.” 132

관점을 바꾸면 어떻게 보느냐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도 바뀐다. “제대로 된 관점에서 보면 모든 폭풍과 그 안에 든 모든 빗방울이 무지개다.” 133

매일 틀에 박힌 것만 보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소로는 자신의 관점을 바꾸었다. 133

“무엇이든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 143



5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그의 저서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전부 제시되어 있다. .. 20대 때 완성한 이 작품을, 쇼펜하우어는 “한 가지 생각의 산물”이라고 칭했다. 153

책만 열면 바로 해답이 있는데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쇼펜하우어는 대답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생각해서 해답을 내놓는 것이 100배는 더 가치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 함께 머무르지 않고 너무 자주 책 앞으로 달려간다고 말했다. “책은 자기생각이 고갈되었을 때만 읽어야 한다.”
‘읽다’를 ‘클릭하다’로 바꾸면 현재 우리가 겪는 고충이 된다. 우리는 데어터를 정보로 착각하고,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착각한다. ..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썼다. “정보는 그저 통찰로 향하는 수단일 뿐이며 정보 그 자체에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이런 과도한 양의 데어터(사실상 소음)는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이며, 통찰의 가능성을 없앤다. 소음에 정신이 팔린 사람은 음악을 듣지 못한다. 179





2부 정오

6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삶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마라. 만약 그 성취가 네 이웃에게 알려진다면 그 때문에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명령에 언짢아하는 추종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이들에겐 감출 것이 하나도 없었다. 194

에피쿠로스는 경험론자였다. 그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 오로지 우리의 감각만을 통해 세상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194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주요 원칙은 “네 가지 치료법”이라는 뜻의 테트라파르마코스(tetrapharmakos)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약처럼 철학도 일정 간격을 두고 처방된 양을 섭취해야 한다. 약처럼 철학에도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어지러움, 방향 감각 상실, 그리고 때때로 조증 삽화까지. 194-195

진정해. 에피쿠로스가 말한다. 그리고 즐기라고. 그는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끝”인 쾌락을 옹호했다. 그리고 도발적으로 덧붙였다. “만약 내게서 맛의 쾌락을 빼앗는다면, 성적 쾌락을 빼앗는다면, 듣는 쾌락을 빼앗는다면, 아름다운 형태를 보았을 때 느끼는 달콤한 감정을 빼앗는다면, 선을 어떻세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196

“나는 명예가 있는 자와 헛되이 그들을 찬양하는 자에게 침을 뱉는다.” 쾌락은 우리가 그 자체로서 욕망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 밖의 모든 것, 심지어 철학까지도, 쾌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한 수단이다. ..
어린아이는 무엇에 반응하는가? 쾌락과 고통이다. ..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 쾌락을 규정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를 만족으로 이끄는 것은 어떤 것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불안의 부재다.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한다. 에피쿠로스는 향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평정(平靜)주의자’ 였다. 197

현재 우리는 쾌락의 황금시대를 살고 있다. 클릭 한 번이면 우리를 애태우는 수많은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고급 요리, 메모리폼 매트리스, 변태 같은 섹스, 다양한 종류의 기기들, 에피쿠로스라면 이 모든 것이 다 우리를 유인하는 가짜 쾌락이라고 말할 것이다. 201-202

에피쿠로스와 부처의 가르침은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 두 사람 다 욕망을 고통의 근원으로 보았다. 두 사람 다 평정을 수행의 궁극적 목표로 보앗다. 두 사람 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에피쿠로스에겐 정원이, 부처에겐 수행공동체인 승가가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숫자 4를 좋아했던 것 같다. 부처에겐 사성제(四聖諦)가, 에피쿠로스에겐 네 가지 치료법이 있었다. 205



7 시몬 베유처럼 관심을 기울이는 법


관심에 대해 깊이 고민한 이 철학자는 자신에게 관심이 쏟아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보고 싶어 했으나 보이는 것은 원치 않았다. 기차를 타거나 공장에서 일을 할 때 자신의 목표는 익명성,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가서 사라지는 것”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221

관심은 중요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더, 관심은 우리의 삶을 형성한다.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지금 당장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인 것만이 우리 앞에 존재한다. ..
관심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어디에 관심을 기울이기로 결정했느냐, 더 중요하게는 어떻게 관심을 기울이느냐가 곧 그 사람을 보여준다. 222

가장 강렬하고 너그러운 형태의 관심에는 다른 이름이 있다. 바로 사랑이다. 관심은 사랑이다. 사랑은 관심이다.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이다. “불행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시네게 관심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베유는 말한다. 보답에 대한 기대 없이 타인에게 온전한 관심을 쏟을 때에만 우리는 이 “가장 희소하고 순수한 형태의 너그러움”을 베풀게 된다. 227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일 수 있는 능력은 매우 희귀하고 갖기 어려운 능력이다. 그건 거의 기적에 갂바다. 아니, 그것이 바로 기적이다.” 228

베유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진 않다고 말한다. 짧은 질문 한마디가 마음을 녹이고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지금 무슨 일을 겪고 계신가요?” 베유는 이 질문이 강력한 힘을 지닌 이유가 고통 받는 사람을 “집합체의 한 단위, 또는 ‘불행하다’라는 딱지가 붙은 사회 범주의 한 표본으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그저 어느 날 고통이 특별한 흔적을 남겼을 뿐인 한 명의 인간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228-229

관심은 집중이 아니다. 집중은 강제할 수 있다. 얘들아, 잘 좀 들어! 하지만 관심은 강제할 수 없다. 집중할 때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해보라. ..
집중은 수축한다. 관심은 확장한다. 집중은 사람을 피로하게 한다. 관심은 피로를 회복시켜준다. 집중은 생각을 한곳에 모으는 것이다. 관심은 생각을 유보하는 것이다. 베유는 이렇게 쓰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생각은 텅 빈 채로 기다려야 하고 그 무엇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저 자신의 생각에 침투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이 문장에 그리 당혹스럽지 않다면, 베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문제는 수동성의 결여에서 생겨난다.”라고 선언한다. 233

관심은 우리가 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동의하는 것이다. 헬스보다는 요가에 더 가깝다 베유는 이를 “소극적인 노력”이라고 불렀다. 베유는 진정한 관심이란 일종의 기다림과 같다고 믿었다. 베유에게 이 두 가지는 사실상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가장 귀중한 선물을 얻는 것은 그것을 찾아 나설 때가 아니라 그것을 기다릴 때다.” 관심의 반대말은 산만함이 아니라 조급함이다. 234

우리가 종종 너무 서둘러 판단을 내리듯이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는 데도 너무 성급하다. 어떤 대상이나 생각에 너무 빨리 혹하고, 그 대가를 치른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아름다움이나 친절한 행동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베유는 알지 못하는 상태,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최대한 오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234-235

지적 조급함은 물에 빠진 사람이 칼이라도 붙잡으려 하는 것처럼 나쁜 아이디어라도 붙잡으려고 한다. 베유는 우리의 모든 실수가 “생각이 아이디어를 너무 성급하게 붙잡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며, 이렇게 일찍 차단되면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238



8 간디처럼 싸우는 법


간디는 폭력을 혐오했지만 그가 폭력보다 더 싫어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비겁함이다. 둘 사이에서 골라야 한다면 간디는 폭력을 선택했다. “비겁한 사람은 남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간디의 진정한 목표는 인도의 잃어버린 남성적 힘을, 인도만의 방식으로 되찾는 것이었다. 간디는 그렇게 하면 자유가 자연히 따라오리라 믿었다. 275

간디는 새로운 형태의 비폭력 저항에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사티아그라하. 사티아(satya)는 산스크리트어로 '진실'이라는뜻이고, 아그라하(agraha)는 '결의' 또는 '단호히 하다'라는 뜻이다. 진리의 힘('영혼의 힘'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이다. 이것이 바로 간디가 품고 있던 것이었다. 여기에는 수동적이거나 물렁한 면이 전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능동적인 힘이다. 사티아그라히, 즉 비폭력 저항가는 무장한 병사보다도 더 능동적이며,더 용감하다. 간디는 방아쇠를 당기는 데에는 그 어떤 위대한 용기도, 지능도 필요치 않다고 말했다. 오직 진정으로 용감한 사람만이 인간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자발적으로 고통을 겪는다. 간디의 병사들은 다른 병사들처럼 대의명분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했다. 하지만 다른 병사들과는 달리 대의명분을 위해 다른 사람을 기꺼이 죽이려 하지는 않았다.
“혁명을 하다 보면 이런 일도 생깁니다." 레닌은 자신의 집단학살 명령을 변호하며 이렇게 말했다. 간디의 혁명은 그렇지 않았다. 간디는 피비린내 나는 수단을 이용해 인도의 독립을 쟁취하느니 계속 영국의 속박을 받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간디는 "구덩이 안으로 내려가지 않고 구덩이를 팔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다. 다른 이를 잔인하게 대하는 사람은 곧 스스로를 잔인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혁명이 결국 실패로 끝나는 것이다. 수단과 목적을 혼동한 사람은 스스로를 집어삼킨다. 간디가 보기에 목적은 절대로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했다. 수단이 곧 목적이었다. “불순한 수단은 불순한 결과를 낳는다. 정확히 뿌린 대로 거두게 되는 법이다." 유독한 땅에서 장미나무를 키울 수 없듯이, 피 묻은 땅에서는 평화로운 국가를 세울 수 없다. 284-285

간디는 절대로 비폭력을 하나의 전략으로, “마음대로 걸쳤다 벗었다 하는 옷”으로 여기지 않았다. 비폭력은 하나의 원칙이며, 중력의 법칙처럼 침범할 수 없는 법칙이다. 287

1959년, 마틴 루서 킹 주니어는 인도에서 간디의 가족을 포함한 간디의 추종자들을 만났다. 킹은 이 여행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고, 몇 년 후 흑인 인권운동에서 비폭력 저항의 “단호한 사랑”을 활용했다. 비폭력은 1980년대의 필리핀, 1990년대 초의 동유럽처럼 다른 곳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약 300건의 비폭력 운동을 종합적으로 살핀 연구에서 연구원 에리카 테노웨스와 마리아 슈테판은 이 전략이 절반 이상의 사례에서 효과를 나타냈음을 발견했다(또한 비폭력 전략은 이들이 연구한 사례의 4분의 1에서 부분적 성공을 거두었다). 287-288

간디는 폭력을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상대편을 친구로 바꿀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대부분의 폭력은 부도덕ㅎㄴ 충동이 아닌 상상력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폭력적인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힘들게 노력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주먹을 날리거나 총에 손을 뻗는다. 너무나도 빤한 반응이다. 290

간디가 말한 깨끗한 생각은 “베일을 쓴 폭력”에서 자유로운 사고를 의미했다. 어떤 사람 앞에서 평화롭게 행동하더라도 그 밑에 폭력적인 생각이 깔려 있으면 그것은 깨끗한 게 아니다. 간디는 추종자들이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창피한 줄 알라”고 소리치는 것을 금지한 적이 있다. 오늘날 자기가 싫어하는 정치인의 식사를 방해하는 사람들을 간디는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시위자들은 신체적으로는 그 누구도 해치지 않을지 몰라도 사실은 그저 “비폭력의 가면을 쓰고 있을 뿐”이다. 292

자기 원칙을 타협하는 것은 곧 굴복하는 것, “모두 주고 하나도 얻지 못하는 것”이라고, 간디는 말했다. 더 나은, 더 창의적인 해결책은 양측이 자신이 원하는 줄도 몰랐던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295





3부 황혼

11 니체처럼 후회하지 않는 법


“모든 진실은 구불구불하다.” 니체가 말했다. 모든 삶도 맟찬가지다. 우리는 모든 것이 지난 후에야 과거를 돌이켜보며 서사를 매끄럽게 다듬고 패턴과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지그재그다. 여백도 있다. 과거의 자신을 막 모습을 드러낸 미래의 자신과 갈라주는 텍스트 사이의 빈 공간. 이 여백은 무언가가 누락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백은 무언의 과도기이며, 우리 삶의 흐름이 방향을 바꾸는 지점이다. 372

니체는 읽기 즐거우면서 동시에 읽기 버겁다. 니체가 읽기 즐거운 것은 문자으이 명료함과 상쾌한 단순함이 쇼펜하우어에 맞먹기 때문이다. ..
니체는 철학이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장난기 넘치고, 통렳게 웃기다. 니체는 모든 진실에는 최소한 한 번의 웃음이 따라와야 한다고 말했다. ..
니체가 읽기 버거운 것은 소크라테스처럼 니체도 확고한 신념에 의문을 품으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375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는 법 …… 다르게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376

어떤 철학자는 충격을 준다. 많은 철학자는 논증을 한다. 일부 철학자는 영감을 준다. 오직 니체만이 춤을 춘다. 니체에게 패기와 아모르파티, 즉 운명애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었다. “나는 춤추는 법을 아는 신만을 믿을 것이다.” 니체는 말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미친 것처럼 열렬히, 일말의 자의식도 느끼지 않고 춤을 춘다. 377

니체는 영원한 지옥이라는 기독교 개념을 들며 “어떤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부서지고 변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옥은 실재하지 않을 수 있지만 지옥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의 행동 동기가 된다. 영원회귀를 증명하지 않아도 마치 진짜인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는 것이다. 380

영원회귀는 사고실험이다. ..
영원회귀는 .. 전부냐 전무냐, 둘 중 하나다. 인생이 하나의 패키지다. 당신의 삶은 정확히 똑같이 반복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하나도 없다.” 편집은 불가능하다. 모든 결함과 지루한 대화가 그대로 들어 있는 이 삶을 다시 살아야만 한다. 감독판이다. 니체는 이 시나리오가 당신을 당황시키고 부끄럽게 하리란 걸 안다. 당신이 몇 개 장면은 삭제하고, 다른 장면을 집어넣고, 컴퓨터로 몇 가지 더 바꾸고, 몸매 좋은 대ㅐ역배우를 써서 삶을 수정하고 싶어 하리란 걸 안다. 381

니체는 말했다. “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법을 앞으로 더욱더 배우고 싶다. 그렇게 나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 될 것이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사랑하지 말라고, 바로 그 고통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사랑하라고, 니체는 말한다. 385



12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매가 난파 됐을 때 난 정말 좋은 항해를 했어.” 이 말은 훗날 스토아학파의 핵심 주제가 된다. 바로 고난을 통해 강해지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 로마의 정치가이자 스토아 철학자였던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바람에 수없이 시달리지 않은 나무는 땅에 튼튼하게 뿌리박히지 못한다. 바람에 흔들려야 땅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고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 고난은 덕을 함양할 수 있는 기회다.” 400-401

스토아학파는 유리잔에 물이 반이나 차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에게 유리잔이 있다는 사실을 기적으로 여긴다. .. 애초에 유리잔을 가져본 적 없는 삶을 상상한다. 친구의 부서진 유리잔과 그때 자신이 줄 수 있는 위로를 상상한다. ..
라이트 주립대학의 철학 교수ㅜ이자 스토아철학을 실천하는 윌리엄 어빈이 말한다. “스토아철학을 실천하면 작은 기쁨을 더 섬세하게 느끼게 된다. 우리는 뜬금없이 우리가 우리라서, 우리가 우연히 살게 된 이 우주 안에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을 살고 있어서 기쁨을 느낀다.” 402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몸이 아픈데도 행복하고, 위험에 처했는데도 행복하고, 죽어가고 있는데도 행복하고, 나쁜 평판을 듣는데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내게 보여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내게 데려오라! 신들의 이름으로, 그렇다면 나는 스토아 철학자를 보게 될 것이다!” 404-405

에픽테토스는 기원후 55년에 오늘날 터키 지역에서 노예로 태어났다. 로마 황제의 고문이었던 에픽테토스의 주인은 그를 때렸다. 에픽테토스는 태연하게 고통을 참았다. 406

에픽테토스는 소크라테스를 존경했고, 많은 면에서 그를 모방했다. 소크라테스처럼 에픽테토스도 작은 오두막에 매트리스 한 장만 놓고 간소하게 살았다. 소크라테스처럼 에픽테토스도 형이상학에는 관심이 없었다. 에픽테토스의 철학은 철저하게 실용적이었다. 소크라테스처럼 에픽테토스도 무지를 진정한 지혜로 향하는 길에 반드시 필요한 단계로 여겼다. 철학은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의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에픽테토스는 말했다.
삶의 많은 것들이 우리의 통제 바깥에 있지만,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지배할 수 있다. 바로 우리의 생각과 충동, 욕망, 혐오감, 즉 우리의 정신적 감정적 삶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헤라클레스의 기운과 슈퍼히어로의 파워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내면세계만을 제어할 수 있다. 내면세계를 지배하라, 그러면 “천하무적”이 될 것이라고, 스토아철학은 말한다. 407-408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스스로를 바꾸는 것이 훨씬 쉽다. 408

스토아철학은 이렇게 말한다. “해야 할 일을 하라. 그리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게 두라.” 408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 ..
스토아학파는 우리의 감정이 이성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믿지만 그 사고에는 결함이 있다고 본다. 사고방식을 바꿈으로써 자신의 느낌도 바꿀 수 있다. 스토아철학의 목표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느끼는 것이다. 409

고전 연구자 A. A. 롱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보통 아무 이유 없이 화가 나거나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나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내 것이어야 할 성취를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낀다.” 우리 생각과 해애동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듯 우리 감정에 대한 책임도 우리에게 있다. 감정은 우리가 내리는 판단의 결과이며, 이 판단은 틀린 경우가 많다. 우리가 잘못 이해했거나 갈피를 못 잡는다는 뜻이 아니다. 스토아학파는 그런 판단이 말 그대로 실제 경험과 다르다고 말한다. 410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한 장면에서 피터 오툴이 연기한 로렌스는 엄지와 검지로 태연하게 성냥불을 끈다.
동료 장굑 똑같이 하려다 고통에 소리를 지른다. “아야, 이거 엄청 뜨거운데요.” 동료가 말한다.
“물론 뜨겁지.” 로렌스가 대답한다.
“어떻게 한 거예요?”
로렌스가 말한다. “비결은 뜨겁다는 데 마음을 쓰지 않는 거야.”
로렌스의 대답은 스토아철학을 잘 보여준다. 당연히 로렌스는 고통을 느꼈지만 그 고통은 날것의 감각, 반사적 반응에 그쳤다. 이 반응은 본격적인 감정으로 발달하지 않았다. 로렌스는 말 그대로 고통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몸이 경험한 것을 마음이 경험하고 증폭시키도록 두지 않았다. 412

에픽테토스는 조언한다. 만약 공중목욕탕에 간다면 “그곳에는 물을 튀기는 사람들, 거칠게 떠미는 사람들, 욕을 하는 사람들,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몸이 물에 젖는다고, 누가 물건을 훔쳤다고 놀라선 안 된다. 416

스토아 진료실에서 놔주는 또 다른 백신은 프리메디타치오 말로룸(premeditatio malorum), 즉 ‘최악의 상황에 대한 예상’이다. 417



13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프랑스의 자랑스러운 지식인인 보부아르는 ‘잘 늙어갈 수 있는 열 가지 방법’같은 목록은 절대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자랑스러운 사람도 아니고 프랑스인도 아닌 나에게는 그런 거리낌이 없다.
1. 과거를 받아들일 것
2. 친구를 사귈 것
3. 타인의 생각을 신경 쓰지 말 것
4. 호기심을 잃지 말 것
5. 프로젝트를 추구할 것
6. 습관의 시인이 될 것
7. 아무것도 하지 말 것
8. 보조리를 받아들일 것
9. 건설적으로 물러날 것
10.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넘겨줄 것



14 몽테뉴처럼 죽는 법


내가 여행에서 만난 철학자들은 전부 내게 말을 건다. 481

죽음은 우리 모두를 철학자로 만든다. ..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죽음은 두려워할 일인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지? 죽음은 진정한 철학을 가리는 테스트다. ..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 모든 지혜와 이론의 핵심은 결국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 482

크세주(Que sais-je). ‘나는무엇을 아는가?’ 486

몽테뉴는 죽음을, 자기 자신의 죽음을 온전히 직면하지 않고선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없다고 말한다. “죽음에서 낯선 느낌을 제거하고, 죽음을 알고, 죽음에 익숙해지자. 다른 무엇도 죽음만큼 자주 생각하지 말자. 매 순간 죽음의 모든 양상을 상상하자. 말에서 떨어질 때, 건물 타일이 떨어질 때, 아주 살짝 바늘에 찔릴 때, 즉시 이렇게 생각하자. 지금 내가 죽는다면?” 489

“죽음은 우리가 타고난 조건이다. 우리의 일부다. 죽음에서 도망치는 건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 쪽으로 방향을 재설정해야 한다. 죽음은 우리 밖에 있는 ‘무엇’이 아니며 우리는 죽음의 희생자가 아니다. 493

죽음의 해결책은 더 긴 삶이 아니다. 절망의 해결책이 희망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죽음과 절망 모두 같은 약을 필요로 한다. 수용이다. 보부아르처럼 몽테뉴도 결국 받아들였다. 마지못한 수용이 아니라 완전하고 관대한 수용이었다. 죽음에 대한 수용이기도 했지만 삶에 대한 수용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수용이기도 했다. 자신의 긍정적 성격에 대한 수용이자(“자신을 실제보다 낮추어 말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어리석은 짓이다”) 자신의 결점에 대한 수용이었다. 497






“춤이 끝나면 이렇게 말할 것. 아니, 외칠것. 다 카포! 처음부터 다시 한번.” 523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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