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전환시대의 논리>의 속편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8

진실을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 오랫동안 주입되고, 키워지고, 굳어진 신념체계와 가치관이 자신의 내부에서 무너져가는 괴로움의 고백이었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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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35년 전쟁의 총평가

베트남 사태는 그 긴 과정과 종결 형식에서 많은 ‘교훈’을 준다. 그러나 그 교훈을 올라르게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식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 평가와 판단의 토대가 되는 베트남 사태에 관한 편견과 선입관의 배제다. .. 베트남 사태에 관한 보도가 너무도 많앗다는 사실과 너무도 일방적으로 각색되어 전달되었다는 두 사실은 오히려 우리의 판단을 어렵게 한다. ..
둘째, 평가와 판단의 입장이다. 기본적으로 베트남 국민의 역사와 현실적 입장과 이해가 판단의 입장을 결정하는 조건이어야 할 것이다. .. 한국전쟁의 정전(停戰) 방식이나 전쟁 해결 및 한반도 정세에 대한 최종적 판단자는 우리 자신이어야 하는 것과 같다. ..
셋째는, 베트남전쟁의 현대적 성격을 규정하는 노력이다. 그 본질적 성격의 규정이 가능하면, 그 토대 위에서 전쟁의 전체 과정, 각 국면, 그 종합적 종결의 형태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세가 바로 세워질 수 있다.  238-239

제네바협정은 프랑스와 베트남 인민의 ‘적대행위’(전쟁)를 끝맺는 단순한 휴전 절차적 성격이었다.  241

휴전협정의 골격으로 내세운 쌍방의 기본적 해결안을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

사이공 정부 입장
① 북베트남과의 대등한 직접 협상
② 비무장지대의 복원, 남베트남의 영토보유, 남베트남의 불간섭.
③ 북베트남군과 파괴분자(민족해방전선을 가리킴-필자)의북베트남으로의 철수 및 효과적 국제감시.
④ 북베트남군의 철수 후, 그리고 무력활동이 저하한 연후에, 미국과 동맹국 군대의 남베트남 철수.
⑤ 평화 회복 후 남북 베트남 재통일을 위한 남북 베트남의 협의.
(1968.9.4, 사이공 정부가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낸 정치해결에 관한 입장)

민족해방전선의 입장
① 조국독립 · 민주평화·번영 및 궁극적 평화적 통일의 신성한 권리.
② 미국 침략전쟁의 정지, 모든 미국 군대와 그 위성국가 군대의 철수, 군사기지의 철거.
③ 외부 간섭 없는 남베트남 인민 자신에 의한 민족·민주연합정권의 수립과 자유선거를 통한 해결.
④ 외부 간섭 없이 평화적 수단에 의한 남베트남의 협의와 협정을 토대로 한 단계적 재통일의 실현.
⑤ 남베트남이 여하한 군사동맹에도 가입하지 않는다는 보장.(1968.11.3,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회의 남베트남의 정치해결에 관한 성명」)  249-250

베트남 전쟁은 압도적으로 강대한 군사력과 보잘것없이 약한 인간집단의 싸움이었다. 세계 제1의 군사, 경제, 과학의 총력을 동원한 국까와 그 지원하에 세계 제4위의 군사력을 가진 현지 집단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패배를 당한 전쟁의 최초의 예로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것이다.  263

‘역대의 남베트남 정권은 그 어느 것이건 자발적인 민중의 가치를 못 받고 대중적 정치 토대가 없는 권력이었다. 사이공 정권은 과거에는 프랑스 식민지체제의 계승자였다. 미국의 개입 이후에는 시급히 필욯ㄴ 사회개력은 모두 민족해방전선이 실시했고, 베트남 사회에서 그 사회개혁은 정당ㅎ화될 수 있는 것들이다. 소위 ‘베트남 정부(govermeent og Vietnam)’는 민족해방전선과 도저히 정치적으로 경쟁할 수 없는 성격이었다. 이 사실은 사이공 정부 지도자들 자신이 자인하고 있다.
티우, 키, 키엠 등 남베트남군 최고의 사령관급은 모조리 자기 민족, 국가의 해방, 독립에 반대해서 식민지국가 프랑스 군대의 장교로 싸운 사람이다(노엄 촘스키 교수 증언, ‘베트남 사태의원인, 과정, 교훈에 관한 청문회’ 의사록 p82).’  264-265

사이공 정권과 미국이 남베트남에서 ‘공산주의’라고 단정한 민족해방전선에게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장기적으로 농민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베트남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의 속성은 바로 그 반대 방향을 치달은 것 같다.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그런대로 베트남 인민의 전통을 존중했다. 프랑스에 비해서 미국은 베트남 민족의 전통을 무시했다. 프랑스는 미국보다 가난했다. 미국의 경쟁력이 프랑스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강대할수록 그 물량적 중압과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눌려 베트남 사회의 고유 윤리는 붕괴해버렸다. 미국인은 동양인 특히 그들의 문화와 이질적인 베트남의 불교적 생활양식, 가치관을 멸시했다. 베트남의 불교도에게는 독재, 탄압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미국이 베트남의 파괴자로 비친 것이다(트리 쾅 僧, War, Crimes and the American Conscience, Erwin Knoll엮음. p133~134).’  277-278

네덜란드의 저명한 외과의사인 아르츠(Harold Arts) 붜의 남북 베트남 방문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1972년 8월 북베트남 방문과 73년 초의 남베트남 방문 기간중 의료 관계 사업과 지방을 조사한 결과 남베트남 정부는 국민의 의료복지에 대해서 북베트남 정부보다 훨씬 성의도 관심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북베트남에서는 인구 7,000명에 유자격 의사 1인꼴인데, 남베트남에서는 인구 5만 명에 1인꼴이다. 그나마 돈입 없는 사람은 혜택조차 받기 어렵다. 남베트남에서는 전쟁 그 자체로 인한 희생자 수보다 사이공 정부와 미국 정부의 민중의료 복지에 대한 무관심 탓으로 인해 생기는 환자 쪽이 더 많다는, 남베트남 근무 6년 경력의 미국 정부 파견 의사의 결론에 동의한다.’  282



베트남 정전협정의 음미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조인된 베트남전쟁 정전협정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기본적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 첫째는, 협정의 내용 검토와 소위 ‘성패’의 평가는, 기본적으로는 베트남 인민의 입장과 이해의 토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 모든 발표와 보도와 견해가 미국의 그것으로 편향해 있는 우리나라에서 이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
둘째의 인식은, 이 협정으로 끝맺은 전쟁이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 베트남전쟁은 본질적으로 식민지 민족의 해방, 독립투쟁이라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이 기본적 사실의 인식을 거부하거나 고의적으로 왜곡해서 반공 이데올로기에 뜯어맞춘 결과가 베트남 민족 자체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국제전쟁으로 만들어버린 비극화의 원인이다. 이 인식의 결여는 우리에게 가장 위험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에 관해서도 정확한 판단을 그르치게 한 주요한 원인임을 늘 다짐해야 한다.
셋째의 인식은, 베트남전쟁의 역사적 파악이다. .. 이 협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30년전쟁’이라고 하는 베트남 인민과 외세와의 관계와 그 성격을 인식의 바탕에 깔아야 한다.
베트남 인민은 제2차 대전이 끝나자 식민지 재정복을 위해서 되돌아온 프랑스의 40만 대군과 만10년간의 민족해방 독립전쟁을 계속해 승리했다. 이것이 1954년의 제네바정전협정으로 끝맺어지는 독립전쟁이다.
식민지 민족의 염원을 이해하지 못한 미국은 베트남 인민의 승리를 원치 않고 50년 1월에 이미 프랑스 베트남군에 대한 군사지원을 시작했다. 이유는 베트남 인민(당시는 북도 남도 없었다)의 해방 · 독립운동 지도자가 호치민이라는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제네바협정 체결 이전에 미국이 프랑스에 제공한 군사·경제원조는 30억 달러에 달했다. 뿐만 아니라 반공 이데올로기밖에 없던 덜레스 미국무장관이 이끄는 미국 정부는 프랑스가 베트남 인민과 정전을 맺는 것을 방해했다. 하지만 이에 실패한 미국은 제네바협정의 수락을 거부하고, 협정 조인 2년 후인 1956년 7월로 규정한 남북 베트남 총선거 실시를 유산시켰다. 제네바협정은 전쟁행위를 끝내기 위한 방법으로서'일시적인 군사분계선을 설치했다. 이 17도선을 항구적인 국경선으로 베트남의 분할을 고정화하는 데 미국은 큰 역할을 했다.
베트남 인민의 대불(佛) 식민지전 승리의 결과로 획득한 통일총선거가 미국과 그 후견을 받은 고딘 디엠 정권에 의해서 거부되고 국토 분할이 항구화함으로써 세 가지 사태가 생겨났다. 첫째는, 통일이 거부된 베트남인의 미국에 대한 증오감이 조성되고, 둘째, 미국에 의해서 반공만을 명분으로 하는 정권이 세워지고, 셋째, 탄압·부패와 봉건적 사회제도에 항거하는 민중반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미국 군부는 이 단계에서, 1965년 2월 5일 통킹만 사건이라는 것을 조작해 소극적 개입에서 전면적 군사개입을 개시했다. 남베트남의 모든 문제가 북베트남의 침략에 의한 것이라는 선전과 함께 통킹만 사건과 미국 군사개입 이후의 베트남전쟁 8년사의 진상은 1971년 봄에 이르러 세계에 폭로된 이름바 ‘미국 국방성 베트남전쟁 관계 비밀문서’가 밝혀준 그대로다.  284-287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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