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현대사가로의 여정

자유로운 독서토론 모임처럼 효율적인 지식축적방법은 없다. 특히 권위 있으면서도 개방적인 중심축이 있을 때는 그런 모임은 아름답게 효율적으로 굴러가게 마련이다. 18

현대사의 많은 난제들을 풀어낼 수 있는 시각을 갖지 못한 자는 사상을 구성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45


여순민중항쟁은 1948년 10월 19일 밤부터 시작하여 10월 27일, 그러니까 8일만에 여수시가 불타면서 일단 진압되었으나, 여수 제14연대 군인들을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이 지리산 등지로 피신하여 저항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공비”니 “빨갱이”이 “빨치산”이니 “반란군”이니 하는 말로 불렀다. 따라서 지ㅣ리산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단지 큰 산 아래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80살 생일기념으로 지리산입산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6년 6개월 동안(정확하게는 1948. 10. 19. ~ 1955. 4. 1. 총 6년 5개월 13일) 쌩피를 보고 살아야만 했다. 낮에는 토벌군의 총에 죽고 밤에는 산사람의 위협에 시달리고 …… 106


제3장 해방정국의 이해


역사는 이중주로 읽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해방을 기뻐한 사람이 더 많았을까? 좆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았을까? 민중 대다수는 물론 기뻐했다 그러나 민중을 지배하고 살았던 지배계급 중에는 해방을 기뻐한 사람보다 해방을 저주한 사람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상기해야 한다. .. 해방을 저주한 사람들! 해방을 슬퍼한 사람들! 해방 때문에 좆됐다고, 패가망신했다고 통곡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역사가 진정 이 민족의 역사였고, 해방 후 오늘까지 진행되어온 불행한 역사를 야기시킨 주체세력이었다. 114

해방의 아이러니 .. 첫째는 "해방(Emancipation)"이 우리 민족에게 "독립(Independence)"을 선물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는 해방 그 자체가 불행하게도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량에 의하여 독자적으로 수행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
셋째로, 해방은 갑작스러운 "권력의 공백"을 초래하였고, 이 공백을 메워가는 세력들의 새로운 전쟁을 야기시켰다.
넷째로, 해방은 이념적인 주체가 확실치 않았기 때문에, 우리 민족에게 이념의 갈등과 혼란을 선물했다. 114-115

여운형을 알아야, "인민위원회"가 이해된다. 나의 친구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추구하면서 결론적으로 이런 말을 했다 : "한국전쟁의 기원은 결국 미군정의 인민위원회의 탄압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126

일제 강점기의 문헌에 거의 "빨갱이"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김득중이라는 사학자(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가 <빨갱이의 찬생 - 여순사건과 반공국가의 형성>이라는 사건의 추이를 상세히 보고한 좋은 책을 썼는데, 책제목이 말하고 있는 것은 결국 "빨갱이"라는 말 자체가 여순민중항쟁을 계기로 국민의 심상에 공포스럽고 저주스러운 그 무엇으로 박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지만 매우 중요한 인식론적 과제상황을 토축시킨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상당부분의 보캐블러리(vocabulary)(어휘, 용어)가 이미 국가 권력에 의하여 왜곡된 형태로 의미부여가 된 그인식체계 속에서 활용되고 있고, 그것이 마치 보편주의적 정론인 것처럼 과거사의 인식을 도배질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개념의 오염, 그리고 그 오염의 확산, 그것은 진정코 우리가 역사인식에 있어서 매우 조심해야 할 과제상황이다. 128

"개념의 오염"이라고 부르는 인식론적 편견에 관한 것이다. "빨갱이"라는 말처럼, "인민(人民)"이라는 말만 붙게 되면 우리는 "좌빨"이니 "좌익"이니 "공산주의자"니 하는 터무니없는 망념, 온갖 부정적인 의미규정을 부여하게 된다. 그러나 해방 후 공간에서 "인민(因民)"이라는 말은 전혀 그러한 색조를 가진 말이 아니었다. "인민"은 조선시대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장 흔한 일상적 개념에 불과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대한민국 헌법의 원조, 1919년 4월 11일에 제정)에도 제3조는 이렇게 되어 있다. :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급(及)빈부의 계급이 무(無)하고 일체 평등임." "인민"이라는 말이 계속 쓰였다. 130

"인민위원회"는 이념적 색깔을 가진 특별한 조직체가 아니라 자생적인 그래스루츠의 "보통사람위원회"였을 뿐이다. 이 인민위원회를 빨갱이들로 규정하 것은 "한민당"의 수구꼴통들이었다. 131

이승만은 누구인가?
젊은 날의 그는 외모가 멋이 있었고 영어를 잘했다. 이승만이 외교활동노선의 명분을 견지하면서도 실제적으로 독립운동이나 여하한 진실한 투쟁과 무관한 인간이 된 것은, 일차적으로 상해임시정부 인간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아니, 상해임정뿐이 아니었다. 3.1독립만세의거 이후에 사방에서 성립한 임시정부들이 모두 이승만을 국무총리, 국방총리, 집정관총재 등의 이름으로 추대하엿던 것이다. 이에 재빠르게 이승만은 미국 워싱턴D.C.에서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의 사무실으 열고, 남이 믿거나 말거나, "대한공화국"의 "대통령"이라는 이름을 마구사용한다. 영어로는 "Dr. Syngman Rhee, The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라고 했는데. 사실 그때 ㅇ모든 임시정부에는 대통령제가 없었고, 정부는 어디까지나 임시정부였으아 이미 "임시"라는 말을 떼어버리고 "대한공화국의 대통령"이라는 칭호로서 세계 국가원수들과 파리강화회담의 장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을 발송했다.(시카고 한인교포들이 만들어 유포시킨 홍보용 컬러우편엽서에는 그의 한성감옥 죄수사진과 박사학위 수여모를 쓴 두 개의 사진을 걸어놓고 그 사이에 간단한 이력을 써놓았다 : 1894년 투옥됨, 1904년 석방됨, 1905년 미국에 옴, 1909년 하바드에서 석사 받음, 1910년 프린스턴에서 박사 받음, 1919년 대통령에 당선됨(Elected President). 틀린 것은 없다 하겠으나 이승만의 교활성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 유물이라 할 것이다.) 133-134

상해에서 이승만의 여러 가지 행태를 분석하고 분개한 단재 신채호의 일갈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이는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 이놈은 아직 우리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 단재는 이승만의 외교노선이 아무런 진실성이 없는 방편주의에 불과한 장난임을 깨닫고 임정 자체를 포기하고 북경으로 고고하게 떠나가고 만다. 이승만은 실제로 독립이 아닌 “위임통치”를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134-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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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이승만을 “평생을 자유와 해방을 위해 싸운 조선인”이라 소개했고, 또 “위대한 조선의 지도자”라고 명명했다. 하지의 찬사를 받으며 무대에 오른 70살의 노인이 바로 이승만이었다.
“이번에 내가 매국에서 온 것은 한 시민으로, 한 평민으로 온 것입니다. 나는 한 평민의 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정부의 책임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며, 높은 지위와 권세있는 자리보다는 자유를 나는 더 사랑합니다. ..”
진실로 이승만은 “거룩한 사기꾼(a holy impostor)”이다. 전혀 자기 마음에 없는 이야기를 방편에 따라 마구 뇌까리는 데 아무런 죄의식이 없다. 150-151

권력의 자리를 전혀 탐내지 않겠다고 공언의 첫 성을 발한 이승만처럼 권좌를 탐하여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인 자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 151


여운형은 해방 1년 전부터 건국동맹을 만들고 해방의 그날 건준을 만들었다. .. 통 크기로 유명하고 호쾌한 성품의 몽양은 미군이 이 땅의 주권자로서 입성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미군정이 시작되기 전에 그들을 맞이하는 민족주체가 정부형태(a gonernment form)로 있어야만 하겠다고 생각하여, 미군 도착 이틀 전인 1945년 9월 6일 서울 경기여고 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소집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해체하고 그것을 모태 삼아 “조선인민공화국”(빨갱이공화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조선사람공화국의 한문표기일 뿐이다)을 선포한다. 154-155

자생적으로 발전한 전국의 인민위원회는 “건준”과 연계되어 있었고, 여운형이라는 인물의 애국심, 사상적 포용성, 사심 없는 헌신, 기민한 대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따라서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일시에 전국의 인민위원회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지방정부조직으로 승격되고, 보다 조직적으로 세련화된다. 바로 이 시점이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의 출발점이다. 155

건준을 인공으로 바꾼 것은 민족주체적 시각, 애국주의적,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매우 정당한 행동이다. 그러나 정치역학이나 현실적 프래그머티즘의 득실로 논하자면 그것은 몽양의 큰 실수였다. “준비위원회(Preparation Committee)”는 미군정 하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지만,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은 살아남을 수 없다.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할 수 없다. 156

미군정은 10월 10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정부로서 부정하고 불법단체로 규정해버렸다. .. 여운형의 영향력이 갑자기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존재감마저 하락한다. 해방정국에서 하락의 끝은 “죽음”이다. 승만 리는 정적에 대한 처리방법으로 “죽음”이 가장 완벽한 묘방이라는 것을 터득해 가고 있었다. 여운형의 혜화동로타리 피습은 12번째 테러였다. 여운형은 12번째의 테러를 피하지 못했다. 1947년 8월 3일, 여운형의 영결식에는 60만 명의 추모인파가 몰렸다. 광복 이후 최다인파였다. 157

여운형의 몰락은 궁극적으로 4.3, 여순과 관련되는데 그 인과관계를 우리는 명료히 알아야만 한다. 조선인민공화국의 불법화는 결국 그 지방조직이 되어버린 “인민위원회”의 불법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민위원회는 본시 자생적인 민중의 요구가 결집된 것이고, 운영도 민주적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그것이 하루아침에 불법단체가 된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려운 일이 뿐아니라, 해방의 기쁨에 도취되어 새로운 나라의 건설에 희망을 품었던 지방의 민중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좌절이었다. 더군 한 나라 이북에서는 인민위원회가 격려되고 발전되어 갔을 뿐 아니라, 1946년 2월에는 최고권력기관으로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결성되어 모든 지방 인민위원회가 힘차게 사회개혁을 주도해 나가고 있는 그 정황과 비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57-158

백범과 몽양이 합칠 수 없었던 가장 단순한 이유는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의 모습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요즘의 언어로 말하면 백범은 우편향이었고, 몽양은 좌편향이었다. 백범은 별다른 이론이 없이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라는 외형을 동경하였고, 몽양은 평등한 인민(사람)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이념이나 사회주의이념이나 다양한 종교적 신념을 포섭하는 보다 열린 생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도 확고한 정치철학이론의 체계를 구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백범은 실제로 요즈음 말로 하면 “우익꼴통”에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우리가 그를 “국부(國父)”로서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평생을 조선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하자 없이 헌신했기 때문이고, 연세대 총장 안세희의 사촌 형인 안두희에 의하여 암살될 때까지 오로지 남한과 북한의 분열, 즉 단독정부수립의 저지를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민족주의적 행동가로서의 그의 위상에는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맹목적인 “우파성향”은 “신탁통치”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가짜뉴스쇼”를 국민들이 받아들이게 만들고, 우리 역사의 진로를 혼탁하게 만든 죄업을 낳았다. 164

신탁통치와 관련하여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찬탁 반탁의 문제가 우리ㄴ라 이념적 갈등의 알파 포인트가 되었으며, 좌우라는 의시경태의 원형이 되었다는 데 있다. 찬탁이 곧 좌익을 의미했고, 반탁이 곧 우익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서 좌익 우익이 우리나라에서는 사상신념구조에 대한 상이점으로 생격난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신탁통치를 둘러싼 의견대립의 문제로써 형성된 관념이었다는 것이다. 166

166


“신탁(信託)”이란 문자 그대로는 “믿고 맡긴다”는 뜻이다.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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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삼상회의가 계속되고 있던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는 제1면 제목을 이와 같이 뽑았다.
“소련은 신탁통치주장
소련의 구실은 삼팔선분할점령
미국은 즉시독립주장”
이것은 이 자체만으로 분석해도 엄중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이 헤드라인은 마치 문제의 핵심이 “신탁통치안”이며, 이 신탁통치안의 실내용은38선 중심의 분할점령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문제의핵심인 남·북이단 "하나의” “임시조선민주정부"를 설립한다는 테제를완전히 빼버린 것이다. 그리고 마치 신탁통치안을 놓고 미국과 소련이대립하고 있는 인상을 주고있는 것이다. 소련이 신탁통치안을 제시했고,미국은 그러한 신탁통치안을 반대했으며 그 대신 "즉시독립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소에게 조선의 "즉시독립"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있는 카드가 아니었다. 삼상회의에서 얘기된 적도 없는 내용이었다. 완벽한오보였다. 아니 “오보”라기보다는 의도된 대중선동이었다.
“신탁통치안”은 오히려 미국이 제시한 것이다. 소련은 본시 조선에 대하여 "직접통치"라는 발상을 근원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토지개혁이나 계급혁명을 통한 사회주의적 유대감을 더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따위 신탁통치라는 발상에 관심이 없었다. 소련은 신탁에 관한 미국의 제안에 대해 신탁이 빨리 종결될수록 좋으며, 최장 5년을 넘어서는아니 된다는 한도를 제시했다. 그러니까 『동아일보』의 보도는 외신의 오보에 의거했다고는 하나(외신 그 자체가 불확실한 것으로 판정되었다) 실상을완전히 반대로 전환시켜 국민들에게 반소 · 반공의 분위기를 조성하려는의도에서 선동적으로 1면에 등장시킨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동아일보가 한민당의 기관지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171-172

인공의 성립 때문에 평소에 함께 할 수 없었던 모든 우파세력들이 광범위하게 연합하여 최대규모의 연합보수우익정당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민주당, 즉 한민당이었다. .. 한민당의 창당목표 그자체가 “조선인민공화국의 타도”였다.
그런데 한민당은 겉으로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지주와 친일파세력이 그 근본기층세력이었기 때문에 민중들로부터 지지기반이 거의 전무했다. 발기인들이 모여 장구 치고 성대한 척 한들 그것은 민초 위를 스치를 구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이 고육지책으로 내건 또 하나의 행동 강령이 “중경임시정부의 적통성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한민당은 이로써 민족주의진영의 적통성을 부여받으려 했던 것이다. 본시 우파라는 것은 민족주의와 결합하여야만 그 존재성을 보장 받는다. 현재 대한민국의 우파들은 민족주의조차 없다.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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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제주 4.3




폭력은 국가폭력보다 더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고 처절한 것은 없다. 인간은 모여 살면서 결국 국가를 만들었고 국가에 일단 소속된 국민들은 끊임없이 국가의 폭력화의위험성에 시달린다. 결국 민주(Democracy)라는 것도 알고 보면 얼마나 국민들이 효율적으로 국가폭력을 방지할 수 있느냐에 관한 것이다. 복지라는 것은 코스메틱이고 더 본질적인 국가의 속성은 폭력이다. 이 폭력의 다양한 형태를 우리는 제주도라는 무대 위에서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201

제주사람들은 일제강점기로부터 “키미가요마루”라 부르지 않고 “군대환”이라고 불렀다 한다.
군대환은 그야말로 제주도 사람들에 새로운 코스모스(cosmos)를 선사한 레바이아탄(Leviathan, 거대한 것)이었다. 205

군대환의 정원은 36명이었는데, 항시 정원의 2배 가까이 탔다고 한다. 그리고 매달 2번 항해했으니 상당한 인구가 이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6

일본은 이미 19세기 말엽 “자유민권운동”이 발발하여 민주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각종의 민권의식이 조직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제주도민은 오오사카 지역에서 살면서 이러한 선진문명의 훈도를 받았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 정국에 있어서 가장 선진적 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가장 단합된 조직적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역사적 지정학적 조건을 갖춘 민중이 바로 제주민중이었다는 것이다ㅏ. 그런데 이쪽 대륙에서는 제주도를 외딴 섬으로, 문화의식이 낮은 곳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제주도는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도 유족하며, 교육적으로도 선진문물을 흡수하여 깨어 있었고, 국제적 감각이 있는 문화를 유지했다. 209

해방 후 갑자기 외부에서 6만 명의 인구가 제주도로 유입되었는데, 일본에서 이미 조직적인 조합운동을 해본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을 “좌익”이라는 이름으로만 부를 수는 없다. 군정의 정보요원으로 근무했던 그랜트 미드(grant Meade)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제주도인민위원회는 모든 면에서 제주도에서의 유일한 당이었고 유일한 정부였다.”
..
미드는 또 이런 말을 했다. “양자간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화합이나 타협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지역의 공적인 평화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인민위원회의 모든 요구를 받아ㅏ들이거나, 강력하게 그들을 거부하고 모든 래디칼 분자들을 분쇄시키는 방법밖에는 없다. 중간의 어설픈 길은 없다.” 210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제주시 북국민학교에서 열렸다. 이날 제주 북국민학교에는 제주읍 애월면 조천면에서 주민 3만 명이 모임.. 새나라, 새세상, 새질서를 꿈꾸었던 사람들, 환희와 희망 속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에게 들이닥친 미군정이라는 전혀 이질적인 외재적 통치체계는 그들에게 절망감만 안겨주었던 것이다. 211

오후2시에 관덕정 뒤편에 위치한 북국민학교에서는 식이 끝나자 가두 시위로 연결되었다. 시위대가 관덕정 서쪽으로 빠져나갈 즈음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어 다치는 사태가 발생했다. ..
다친 어린애에게 사과하는 제스쳐라도 하기는 커녕, 몰려드는 사람들을 짓밟을 듯이 말 위에서 거만하게 거동하는 꼬라지를 본 민중은 성이났다. 흥분한 관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자 관덕정 광장 앞에 있던 제주경찰서 망루에서 미군정경찰(당시는 대한민국 수립 전이다)이 관중들을 향해 총을 쏜것이다. 212

순식간에 민간인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당했다. 이들 가운데는 15세 국민학생과 젖먹이 아이를 가슴에 안은 채 피살된 여인도 있었는데, 더욱 가슴 아픈 사실은 죽은 이들이 모두 등에 총을 맞았다는 사실읻. 항의하는 군중이 아니라 도망가는 군중을 향해 등뒤에서 고의적인 “살인”을 한 것이다. 213

조선경비대 제 9연대는 제주도의 독자적인 연대로서 도로 승격된 후 3개월여 만에 대정면 모슬포에 창설된다(1946년 11월 16일) 214

어떠한 흑막이 내재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3.1절발포야말로 6명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한라산금족령이 해제되기까지(1954. 9.21.) 7년 7개월 동안, 인류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제노사이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을 넘는 3만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그 참혹한 드라마의 효종(曉鐘, 새벽에 치는 종)이요 조종(弔鐘, 애도의 종)이었다. 215

사람을 죽이는 사태에 이르렀는데도 공권력이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시위주동자를 검거하는 일에 주력하자. 제주도는 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발로 총파업에 돌입한다. .. 도청, 관공서는 물론, 은행, 회사, 학교, 운수업체(제주도는 철도가 없었다), 통신기관 등 도내 156개 단체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현직 경찰관까지 파업에 동참했다.
당시 우리나라사람으로서 경찰의 총대빵이었던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이, 1947년 3월 14일 제주도에 온다. ..
경찰통수권자로서 친일파경찰을 대거 다시 기용하는 것을 애국의 길로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이승만, 장택상과 더불어 극우반공주의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그는 일제강점기 경찰을 프로잽(pro-jap, 친일)이 아닌 프로잡(pro-job, 전문가집단)이라고 찬양했다. 그리고 그는 철저하게 미군정의 권익을 보호하는 주구 노릇을 기쁘게 했다. 220-221

조병옥은 총파업을 경기도 응원경찰 99명을 새롭게 동원하여 강경히 대응, 분쇄해 나간다. 그리고 3월 19일 담화문을 발표하고 경찰의 발포는 “정당방위”였다고 항변하고, 북조선과의 통모로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쌩거짓말로 포장하면서, 제줃도를 “빨갱이섬”으로 규정한다. .. 조병옥은 제주도민은 이미 70%가 좌익정당에 동저적이거나 가입되어 있다고 선전하면서, 제주도는 “좌익의 본거지”라고 규정했다. 222

당시 도지사 박경훈은 모든 사태의 책임을 지겠다며 항의성 사직서를 제출한다. 222

미군정청 안재홍 민정장관은 박경훈을 해임시키고, 아주 극우파의 또라이 같은 인물 유해진을 후임으로 부임시킨다. 유해진의 부임과 더불어 제주도에 부임한 거대한 새로운 세력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세칭 서청, 서북청년단(본명은 서북청년회이지만 깡패단체 같은 악랄한 성격의 것이라 조선의 민중은 서북청년단이라 불렀지 서북청년회라 부르지 않았다)이라는 것이다. 223


1946년 초부터 최고의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은 사회주의개혁의 맹렬한 드라이브에 열을 올렸고, 이러한 개혁드라이브는 남한의 민중이 억압과 부조리와 억울함과 기아에 시달리는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북한민중의 열렬한 환영과 지지를 받았다. 제일 먼저 그는 토지개혁에 착수했다. 해방이 되자마자, 자체적으로 조직된 인민위원회는 소작제의 비율을 3.7제로 바꾸었다. 이것만 해도 농민들에게는 더없는 축복이었다. 김일성은 1946년 3월 5일, "북조선토지개혁에 관한 법령" 17개조를 발표했다: “토지는 밭갈이 하는 농민에게!" 조준이나 정도전이 꿈꾸었던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이상, 그들 신진유생들이 끝내 이루지 못했던 그 꿈을 공산당과 인민위원회의 힘으로 단숨에 해결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1 가호 당 평균 15마지기의 땅이 골고루 배분되었다. 그리고 5 정보(50마지기 정도) 이상의 땅을 지닌 자는 부농으로 간주되며, 부농은 땅을 뺏기는 것은 물론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후 꼭 타지로 이주되어야만 했다. 종교단체, 교회나 절, 모두 5정보 이상의 토지는 다 몰수되었다. 대지주들을 타지로 이주시키는 것은 소작농들과의 분쟁을 피하기 위한 당연한 시책이었다.
노동법이 새로 제정되고 8시간노동제가 확립되는가하면, 임신여성은 해산 전 35일, 해산 후 42일간의 휴가가 보장되었다. 남녀평등법이 제정되어, 첩, 성차별, 매춘, 유아살해가 엄금되었다. 친일파, 일본인기업 등 중요산업시설이 조직적으로 국유화되어 남한에서 보여지는 적산가옥 거저 처먹기 식의 혼란은 없었다. 문맹퇴치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국가예산 17%가 교육비에 투입되었다. 불과 1년 만에 1,110개의 6년제 인민학교가 새로 세워졌으며, 1946년에는 2,482개의 인민학교에서 118만 3천 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46년에 이미 중앙당교, 평양학원(군 사관학교에 해당), 김일성종합대학(1946. 10. 1.개교), 만경대혁명학원(지도자 양성기관)등이 창립되었다. 226-227

1946년 1년 동안에 약 48만 명이 남하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228

공산당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대체로 서북지역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제일 먼저 모이는 곳이 교회였다. 우리나라 해방 후 대형교회문화가 생겨나는 현상도 이러한 분단현실 속에서 잘 설명된다. 영락교회는 서북지역사람들의 집결지였다.(한경직 1903~2000 목사는 평안남도 평원사람이다. 월남하여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 후에 영락교회로 개명)
기실 서북청년단은 영락교회 청년조직으로부터 발전하였다. .. 공식적인 사무실은 한민당본부가 있었던 동아일보 사옥의 한 귀퉁이를 썼다. 서북청년단은 이승만, 김구, 한민당의 재정지원을 받았다. 김구가 서북청년단을 적극 지원한 것만 보아도 김구의 정치적 이념의 한계를 잘 말해주고 있다. ..
서북청년단의 특징은 반공정신의 맹렬성과 맹목성에 있다. 북한에서 당한 저주를 풀기 위해 “빨갱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무조건 폭력과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228-229

이승만은 이 서북청년단의 인력을 남한사회의 반공화를 위한 프론티어로 활용했다. 며칠간의 훈련만 받으면 곧바로 경찰과 군인의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겉으로 보면, 버젓한 군인이고 경찰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월급이 지급되질 않았다. 마음대로 약탈하고 겁탈하고 죽이고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다. 서북청년단에 관한 한, 아무런 룰이 없었다. 이 서북청년단의 아버지가 바로 조병옥이고, 장택상이었다. .. 이들은 대체로 반공의 투사들이었고, 열렬한 에수쟁이였고, 인간평등관을 거부하는 서북의 지주자제들이었다. 오늘날까지도 “기독교인=반공투사=반북반통일=우익승미”의 정서가 우리사회의 저류를 흐르고 있는 현실은, 소수정객의 탐욕에서 비롯된 그릇된 역사인식이 보정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1948년 4월 3일 전까지 제주도에는 서청경찰 760명이 투입되었고, 조선경비대 옷을 입은 서청 1,700명이 추가 투입된다. 이들의 만행은 너무도 끔찍했다. 47년 1년 동안에 2,500명의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검속되었고, 1948년 3월 6일 조천지서에서는 어린 조천중학생 김용철 군이, 14일에는 모슬포지서에서 청년 양은하가 고문치사 당하는 비극이 벌어진다. 230

결사항쟁이다! “탄압이면 항쟁이다!”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민위원회 비밀회의에서 무장투쟁이 12:7로 가결되었다. 공격은 경찰과 서청으로 한정되었고, 다가오는 남한만의 5.10단독선거반대는 봉기결행의 주요명분이 되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4.3민중항쟁은 시작되었다. 230-231

4.3은 남로당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4.3의 경찰서습격사던은 남로당에서 지시한 것도 아니고, 중앙당과 조직적인 연계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233

미군정은 4월 17일, 모슬포 주둔 국방 경비대 9연대에게 사태진압을 명령한다. 그러나 당시 9연대 연대장을 맡고 있던 김익렬(1921~1988)은 도덕성을 갖춘 정통적 군인이었고(경남하동 출신), 활달한 성격에, 불교도였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이념적 편견이 없었다. 친일잔존세력이었던 경찰에 비해 민족적인 성향이 강했던 제주9연대는 이 사건을 경찰 및 서청 같은 극우세력의 횡포로 인해 야기된 것으로 판단하여 “선선무 후토벌”의 원칙을 정하고,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이 결과 1948년 4월 28일(최근 발굴된 사료에 의하면 이들이 만난 것은 30일로 간주됨), 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연대 정보참모 이윤락 중위, 그리고 무장대측 군사총책 김달삼(1923~1950, 제주인. 본명 이승진. 오오사카 성봉중학교, 도쿄 중앙대학에서 수학. 이본 후쿠찌야마 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와 소위 임관.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등이 만나, “72시간 안의 전투중지, 무장해제와 하산이 이루어지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평화협상을 성사시켰다. 234

5월 5일, 미군정 수뇌부가 참석한 가운데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미 군정장관인 딘(William Frishe Dean, 1899~1981)소장(군정장관은 하지 총독 다음의 제2인자. 아놀드, 러치에 이어 제3대 군정장관. 1947. 10. 30.~1948.8. 15. 까지 근무. 6.25전쟁 때 대전 부근에서 부하들과 같이 싸우다가 북한군에게 포로가 되고 전쟁 내내 평양 부근 감옥에 머물렀다. 1953년 9월 4일 판문점에서 귀환)이 소집한 것인데,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군정 하의 경찰수장이며 미국의 앞잡이 노릇에 열심이던 조병옥, 당시 미군정청 내 한국인 최고끗발이었던 민정장관 안재홍(1891~1965), 당시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1889~1959, 광복군 지대장 출신. 만주군관학교 출신들과는 계보가 다르다), 제주도 경찰국장 최천(1900~1967, 통영사람), 도지사 유해진, 그리고 김익렬 연대장, 그리고 딘 장군 전속통역관, 모두 9명이 참석했다. 김익렬은 이 자리에서 딘 소장을 설득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자리는 이미 평화협정을 묵살시키고 대대적인 무력진압을 강행하기로 결의한 사람들의 자리였다. 235-236

김익렬은 이후에도 한국전쟁에서 많은 군공을 세웠다. 제1.2군단장, 국방대학 원장을 역임하고 1969년 1월 중장으로 예편하였ㄷ. 김익렬 중령은 다음날(5월 6일)로 9연대장 자리에서 전격 해임된다. 후임으로 박진경(1920~1948)중령이라는 문제아가 뒤를 잇는다. 그의 취임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237

박진경이 국방경비대 사령부의 인사부에서 일하다가 9연대장으로 임명된 이유는 일제시대 일본군으로서 제주도에 복뭄한 경험이 있어 섬의 지형과 산악요새에 관해 많은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
박진경은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강력한 “초토화진압작전”을 수행하였는데 중산간 마을을 누비고 다니면서 마구잡이식으로 주민을 잡아들였다. 5월 27일까지 포로의 수비는 3,126명에 달했고 6월 중순에는 6,000여 명에 달했다. 박 중령의 무자비한 토벌작전을 말해주는 손선호(후술)하사의 진술이 있다. “박 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공격은 전 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선무작전에 비해 대원들의 불만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그릇된 결과로 다음과 같은 사태가 빚어졌다. 우리가 화북이란 부락을 갔을 때 15세 가량 되는 아이가 그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도 무조건 사살해야 했다.”
불과 27일 만에 초토화진압작전의 성공적 추진을 인정받은 박진경은 1948년 6월 1일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한다(딘이 직접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1948년 6월 17일, 박진경의 대령승진 축하연이 요정 옥성정에서 차려졌고, 미군장교와 11연대(박 중령 부임 후 9연대는 11연대로 개편된다. 제주도 향토 연대의 성격을 해체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참모들이 동석하였다. 박진경은 6월 18일 새벽 1시에 귀가하여 부대숙소에서 잠이 들었다. 새벽 3시 15분 단 한 방의 M1 소총 총성이 울렸다.
박진경의 도민학살을 견디다 못해 그의 암살을 기획한 것은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였다. 238-239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군정장관인 딘 장군의 총애를 받던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사람들로써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해서는 공감을 가질 줄로 안다.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 때문에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이하 모든 사람들도 저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세상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239-240

문상길의 나이 불과 22세였다. 총살형집행장이 낭독되고 마지막 유연의 기회가 주어진다.
“스물두 살의 나이를 마지막으로 나 문상길은 저세상으로 떠나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하에 한국민족을 학살하는 한국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이제 여러부노가 헤어져 떠나갈 사람의 마지맘ㄱ 바람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240

손선호는 이와 같이 진술했다.
“박 대령을 암살하고 도망갈 기회도 있었으나, 30만 도민을 위한 일이므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 하나의 생명이 30만 도민을 위한 것이며 3천만 민족을 위한 것인만큼 달게 처벌을 받겠다.”
손선호의 나이는 당시 20세였다. 241

4.3 바로 한 달 후 이승만의 꿈인 단선(단독선거)의 실현, 즉 5.10제헌국회의원선거가 이루어진다. 241

제주도민은 이 선거를 보이콧해버렸다. 2개의 선거구가 근원적으로 투표율미달로 무효처리 된 것이다. .. 이승만이 택한 길은 “민중학살”이었다. 대규모 학살을 통하여 국민에게 국가권력의 가증스러운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242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런데 박진경 대령은 이승만에 의하여 준장으로 추서되었고, 박진경의 장례식은 대한민국육군장 제1호로 기록되었다. 242




제5장 여순민중항쟁



1개의 연대는 3개의 대대로 구성되고, 1개의 대대는 4개의 중대로, 1개의 중대는 4개의 소대로, 1개의 소대는 4개의 분대로 구성되었다. 14연대는 3개대대, 12개 중대, 48개 소대와 192개 분대로 구성되었다. 당시 1개 분대의 병력은 12명이었다. 248

여순민중항쟁 당시 1개 중대 병력은 순천에 파견되어 있었으며, 보성에 터널경비로 5중대(중대장 박윤민)의 일부 병력도 파견되어 있었다. 그리고 제주도로 출항하는 수송준비로 300명 정도의 병력이 여수신항에서 연대장 지휘 아래 있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부대에 남아 있었던 14연대의 병력은 1,700~2,000명 정도였다. 249

내가 어렸을 때 “여순반란”이라고 들은 것은,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의 군인들이 지창수 상사등의 빨갱이 선동으로 반란을 일으켜 양민을 학살한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대학교 때 현대사에 대한 의식이 생기면서, 그것은 반란이 아니고, 제주에서 서청과 경찰이 양민을 학살하는데 힘이 모자라 여수에 있는 군대까지 동원하여 제주도로 가라고 국가에서 명령하니까 지창수 등 14연대의 의식 잇는 군인들이 그 명령에 불복하고 일어나서 시가전을 감행하다가 결국 쫓기어 지리산으로 들엉가게 된 사건 정도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는 여순반란이 아니고, “여순항명사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요즈음에나 와서, 독립운동사 공부를 마치고 해방정국을 치밀하게 공부하면서 그것은 “항명”이 아니라 반드시 “민중항쟁”으로서 인식되고 명명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역사는 사건의 객관적 기술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어떠한 해프닝이 “사건”이 되려면 반드시 그 사건이 역사적 의미(historical significance)를 갖는 것으로서 해석되어야 한다. 249-250

250




동일한 사건사태가 반란으로도, 항명으로도, 민중의거로도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해석의 차이는 인식의 차이이며, 그 인식의 변화를 가능케 하려면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시각의 변화는 근인(近姻)과 동시에 모든 원인(遠因)을 밝혀야만 달성케 되는 것이다. 250-251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포괄적으로 역사를 이해하게 되면 완벽하게 단절된 우연이라는 것은 성립하기 어렵다. 255

사실 내가 이 원고를 쓰게 된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여순민중항쟁을 널리 알려서 “여순민중항쟁특별법”을 국회에 통과시킴으로써 여순민중항쟁으로 당한 사람들을 신원해주기 위한 것이다. .. 이 책은 사상이 아니라 운동이다. 이 책은 역사서술이 아니라 우리의식에 던져지는 방할이다. 가치를 추구하는 자라면 이 책을 읽은 후 얻는 깨달음을 만세 만민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272

4.3과 여순을 연결 짓는 최초의 고리는 바로 김익렬 중령이다. 9연대 연대자ㅏㅇ인 그가 민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의 멱살을 잡고 항의한 그 다음날, 5월 6일자로 제주 제9연대장에서 해임된다. 김익렬 중령은 군인으로서 매우 당당한 경력의 보유자이고 유능한 지도자였기 때문에 군에서 축출되지는 않았다. 대신 전출되었는데, 전출된 곳이 바로 여수 제14연대였다. 273

박진경의 암살사건은 전국에 배치되어 있는 군대의 분위기를 엄청 변화시켰다. 박진경의 암살로 군대 내에 “빨갱이들”이 엄청 포진되어 있다는 근거 없는 선입견이 이승만 이하 지배층의 조선경비대인식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내쫓는 것은 보통 전문용어로 “숙군(肅軍)”이라 부른다. 275

박진경 암살사건은 전군 차원의 사상검열(screening)을 불러일으켰고, 숙군작업에 합법성과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신임 국방장관에 취임한 철기 이범석(1900~1972, 독립운동가이며 대한광복군의 대표적 인물이지만 해방 후 그의 행적은 이승만과 미군정의 철저한 앞잡이로서 우파적 만행을 끊임없이 저질렀다)은 이승만의 신임을 얻기 위해 강력하고도 조직적인 숙군을 전개한다. 279

군대가 경찰을 습격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1948년 8월 15일대한민국(제1공화국)이 수립되기 이전까지는 "국군"이라는 것이 없었다. 미군정 하에서는 아직 나라가 성립되기 이전이었으므로 명목상 "국군Republic of Korea Armed Forces" 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군이 창설한 것이 “남조선국방경비대”였는데 미소공위에서 소련이 "국방"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고 항의하는 바람에 “국방"을 빼고 “조선경비대”로 했던 것이다.
북한도 “보안대”라는 말을 썼고, 군간부양성기관도 그냥 “평양학원”(사관학교에 해당)이라 불렀던 것이다(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 창설).“조선경비대”는 영어로 “Korean Constabulary Reserve”라 했는데, 그 뜻을 짚어 번역하자면 “조선경찰예비대”라는 뜻이다. “Constabulary”라는말자체가 "경찰체제 내에 속한" 의 뜻이다.
그러니까 조선경비대는 경찰의 입장에서는 경찰명령계통 내에 속하는 일종의 예비대이며 항구적인 조직체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조선경비대에 속한 사람들도 확고한 군인비젼을 갖기에는 자신들이 너무도 어정쩡한 조직에 속해 있다는 자괴감, 불안감이 있었다. 그리고 경찰 입장에서는 조선경비대원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찰예비대라는 경찰체계 내의 하급기관일 뿐이었으며, 사상적으로 불순하고 향토적 색채를 띠는 오합지졸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정치범, 일반범죄자, 깡패, 실업자들의 입대도 허락되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경찰에 비해 무기지급, 보급, 복장, 계급장, 급식문제에 있어서 열악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군대에 들어간 사람 중에는 새롭게 탄생하는 국가의 보위를 책임지는 군인으로서 프라이드를 지니고 입대한 이상주의자들이 많았으며, 이들의 입장에서는 과거"일제의 주구"였던 자들이 자신들보다 높은 대우를 받고 있으면서 자신들을 멸시하는 경찰이야말로 증오와 경멸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경찰은 지나가는 군인을 불러 자기들 구두를 닦게 하는가 하면, 말 안 들으면 조인트를 까고 하는 말도 안되는 모욕적인 언행을 공공연히 자행했다. 지금 우리 감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당시에는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은 조선경비대를 빨갱이소굴이라 비난하였고, 조선경비대는 경찰을 일본놈 앞잡이 하던 친일파 꼴통 새끼들로 규정했다. 경찰은 미군정에 조선경비대를 비방하는 보고서를 끊임없이 제출하고 있었다.
미군정 하에서 경찰복장은 미군복장과 같게 하고 무기도 미제 M1소총으로 무자앟게 하였으나 국방경비대는 일본군복을 입히고 무기는 일제 38식이나 99식 소총으로 무장하였다. 계급장도 경찰계급장을 뒤집어서 사용하게 하였다고 한다. 281-283

283



미군정의 가장 큰 문제는 앞서 지적한 바대로 미국인들의 순전한 무지에 있었다. 그 무지가 야기한 최대의 실책은 경제정책에 있었다. 미군정이 경제만 안정시켰다 할지라도 해방 후 정국에서 보여지는 그러한 혼란은 없었을 것이다. 건준은 해방의 날로부터 이미 식량문제가 해방정국을 이끌어나가는 데 가장 긴요한 과제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3개월간의 식량을 확보할 것을 조선총독부에 요청하고, 산하에 양정부(糧政部)와 식량대책위원회를 두어 식량의 수집과 운송, 분배, 모리배 감시에 주력했다. 이러한 활동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식량이 시장에 유출되거나 모리배가 사재기를 하는 현상이 없었다. 미군정은 사회주의자들의 통제정책에 반발하고 건준의 식량관리계획을 부정했다. 건준에게 식량운영권을 넘길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곡을 자유시장에 내맡겨 버리는데 그것은 결국 쌀의 매점매석, 그리고 과대소비로 이어지면서 쌀값 폭등을 야기시켰다. 그러자 미군정은 도시민에 대한 식량배급을 명분으로 1946년 1월 25일 "미곡수집령"을 공포하고 식량공출을 단행하는데, 결국 미곡 자유시장을 포기하고 과거 일제 강점기의 공출보다 더 잔인한 강제수거를 단행했다. 미군정의 배급정책은 농촌에까지 적용되었는데, 그 결과 곡물섭취량은 오히려 식민지시대보다도 못한 처지가 되었다. 힘없는 농민은 쌀을 시장가격의 5분의 1에 불과한, 실제 생산비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강탈당했다. 그리고 쌀을 사기 위해서는 수집가격의 5배나 높은 가격에 사야 했다. 할당량을 못 채우면 투옥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경무부 수사국장 최능진이 1946년 말 한·미회의the Korean-American Conference에서 한 말은 당시 상황을 리얼하게 전해준다:
“나는 농촌을 돌아보았는데 그들로부터 여름에 경찰들이 공출할당량이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농가로 찾아가 농민들에게 쌀을 내놓으라고 강요한다는 말을 들었다. 쌀을 내놓지 못하면 경찰은 그들에게 수갑을 채워 경찰서로 데려가 음식도 주지 않고 하루종일 가두어둔다고 한다.”(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p.206).
한국경찰과 공무원은 미군의 권세 하에서 “탈취대"라고 불리는 쌀 수집반을 구성하였다.
이 미군정의 미곡수집령이야말로 1946년 전국적인 10월봉기의 주요 원인이었으며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의 가장 근원적인 요인이다. 이것은 남로당의 정치적 공작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남로당은 그러한 대중동원조직체계나 지지기반을 갖지 못했다. 그것은 몇몇 지식인들이나 지식인 반열에 들고 싶어하는 허영끼 있는 인간들의 픽션에 불과했다. 민중에게 절실한 것은 오직 "쌀"이지 공산이념이 아니었다. 293-294

297

“토벌”이라는 것은 “진압”보다도 더 심각한 단계의 작전이다. 제주인민을 토벌하기 위하여 출동하라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거부”는 “항명”이 아니다. .. “출동거부”는 “항명”일 수가 없다. “항명”은 그 명이 “정당한 명령”일 때만이 성립하는 것이다. 298

반란이 되기 위해서는 주도세력이 정부요직에 있거나 대병력의 동원이 가능한 군사지휘자들을 포섭하고 있어야 한다. 반란은 물리적인 힘이 있어야 하며, 오랜 기간의 철저한 계획 하에 진행되어야 하며, ㅈㅇ기항전의 계책도 있어야 한다. 여수 14연대의 항거는 부당한 명령에 대한 거부일 뿐이며, 사회사적, 정치사적으로 보더라도, 그것은 가벼운 “소요”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든지 정상적 궤도로 컴백될 수 있고, 다스려질 수 있는 요소였다. 이것을 댁모 국민학살극으로 확대시킨 것은 오로지 국가 폭력의 업이었다. 여순민중항쟁은 14연대 사람들의 합리적 판단에 여순 지역 인민 전체가 호응한 결과의 산물일 뿐이다. 302

이승만의 명령 : 어린아이들까지 다 죽여라!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며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팔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위해야 될 것” 303

여순민중항쟁으로 이승만은 강고한 우익체제를 구축했다. 예비검속, 연좌제를 실시했고, 보도연맹을 창설했다(30만 이상을 죽임). 군대로부터 완벽히 좌익세력을 청산하는 숙군사업을 완성했으며, 반민특위활동에 밀린 친일경찰까지도 대거 군대로 들어갔다. 향토연대의 특성은 해체되었으며, 여순민중항쟁으로 손실된 병력공백에 우익청년단체 사람들이 대거 입대하였다. 군대가 체제수호의 수단적 기구로 변모하여 부패하였다(박정희는 이러한 군대의 부패를 청산하는 정풍운동의 리더로서 결국 쿠데타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대학에는 학도호국단이 창설되었고, 주한미군철수가 6개월 정도 연기되었고, 국가보안법이 통과되었다. 경찰병력이 확대되면서 서북청년단원들을 대거 정규경찰화 시켰다. 그리고 국민의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고 감시체계를 강화하는 유숙계제도를 만들었다. 이러한 모든 변화를 구축하는 계기가 바로 여순민중항쟁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민중항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공권력에 대한 공포감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불신감만 키웠다.
우리는 너무 몰랐다. 우리는 너무 조용했다. 30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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