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의 길을 막는 사마귀 - 베트남 인민과 함께 우는 언론인

리영희 : 소위 베트남전쟁이라는 것은, 그 원인과 역사적인 배경이 굉장히 복잡하비다. 한국인들이 그 전모를 이해하기란 참 어려워요. .. 불란서와 베트남 인민의 전쟁이었던 1946년부터 54년까지의 ‘제1차 베트남전쟁;이 종결되면서 제네바 휴전협정이 체결돼요. 그 뒤에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해서 확대된 전쟁이 말하자면 ’제2차 베트남전쟁‘이라고 할 수 있지요. 54년 휴전협정은 북위 17도를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남북베트남으로 잠정적 행정 관할구역을 정한 뒤에, 2년 후인 1956년에 남북 베트남을 통틀어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한다. 이것이 1954년 정전협정합의의 핵심이었어요. 그런데 휴전성립 1년이 지난 1955년에 미국이 총선실시를 거부한 것이 제2차 베트남전쟁의 결정적인 원인이에요. ..
베트남 인민들이 30년 동안 불란서 식민제국과의 피어린 투쟁 결과로 획득한 통일의 기대가 미국의 이 정책으로 수포로 돌아갔지. 독립과 통일에 대한 베트남 인민들의 염원을 짓밟은 미국은 베트남민족과 국토의 영구한 분단을 획책하여 1955년 10월에 미국이 오랫동안 꼭두각시로 키워왓던 고 딘 디엠이라는 가톨릭주교를 사이공에 데려다가 남베트남 국가와 정부의 수립을 선언케 했어. .. 미국의 약소국 지배 술책이었어. ..
미국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였는데, 남북베트남 내부 정세와 남북 베트남의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에 관한 여론조사를 미국정부의 각 기관으로 하여금 실시하게 했어요. 미국인이나 아이젠하워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온거요. 여론 조사 결과가, 1956년 그 시점에서 남북 베트남을 통튼 총선을 실시하면 베트남 인민의 83%가 호지명에게 투표할 것이라는 여론이었어. ..
그래서 미국정부는 제네바 휴전협정의 공약인 남북통일 총선 실시를 폐기하기로 결심해요. .. 이 새로운 사태에 직면해서 북베트남 인민은 물론, 남베트남의 대중들까지도 미국의 괴뢰정권인 고 딘 디엠 사이공정권 소위 ’자유베트남 정부‘에 대한 전면적 투쟁을 개시하게 돼, 인민대주으이 지지를 전혀 못 받는 사이공정권이 위기에 처하자, 미국은 본격적인 군사개입을 시작해서 베트남 인민과 미국과의 전면전, 즉 ’제2차 베트남 전쟁‘이 10년 동안 계속되는 거예요.  341-343

리영희 : 한국 국민들만이 미국의 전쟁주의자들에게 속아넘어간 것이 아니에요. 미국 국민들도 그렇고, 전 세계가 미국의 엄청난 기만, 사기, 허위, 날조, 또는 과장된 선전에 속았던 거예요. .. 베트남전쟁에 대한 미국 정부의 베트남전쟁에 관련된 허위 사실들을 들러낸 유명한 ’미국 상원외교위원회의 베트남 전쟁 공청회 의사록‘이에요.
베트남전쟁의 전체 과정을 통해서 미국 군부와 정부와 정보 당국자들이 미국 국민에게 제시하고 전 세계에 주장했던 베트남전쟁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 거의 완전하게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한 유명한 ’펜타곤 페이퍼‘(베트남전쟁에 관한 미국 정책기관의 최고 극비문서 모음집)입니다. ..
1964년 8월 2일에 일어난 소위 ’통킹만 사건‘… 월맹 수도인 하노이의 외항인 통킹만에서 미국 해군 구축함 매덕스호와 터너 조이호가 공해상에서 어느날 순찰을 하고 있는데, 월맹 어뢰정이 야밤에 그 공해상에서 그 구축함에게 어뢰 공격을 가했다는 거요. .. 이것을 구실로 삼앙서 미국 군부와 전쟁주의 세력은 의회 상하 양원에서 월맹에 대한 ’대통령의 무제한의 전쟁수행권한’(Presidential War Power Act)을 부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어. 이 권한을 거머쥔 전쟁주의 세력과 미국 군부가 월맹에 대한 소위 북폭이라는 무제한의 전면폭격 전쟁을 개시함으로써 남베트남에서만 진행되던 미국의 전쟁을 북베트남까지 확대하는 거야.
소위 월맹 어뢰정의 미국 구축함 공격이라는 것은, 그 시건 1개월 전부터 미국 해군과 최고 전쟁기획 당국에서 만들어낸 완전한 가공의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지. .. 1972년에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에 의해 폭로되어 전 세계에 보도된 이 ‘펜타곤 페이어’에 낱낱이 기록돼 있어요. ..
다니엘 엘스버그라는 젊은 학자인데, 그는 열두 사람의 동료와 함께 맥나마라 구구방장관의 지휘로 미국의 베트남사태, 전쟁개입의 역사를 서류로 정리하는 임무를 맡았어. 그 작업을 하는 동안 미국이 베튼ㅁ전쟁 과정에서 발표한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 날조, 확대, 축소, 조작된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돼요. 엘스버그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지금까지 수많은 전쟁에서 젊은이의 목숨을 볼모로, 오로지 미국 소수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각종 거짓말을 종합해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는 이 문서를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에 복사를 해서 누설합니다.
타임스의 첫날 보도가 나니까 미국정부가 즉시 보도금지 가처분 신청을 해서 일단 보도 정지됐어. 신문이 이의를 제기해서 1, 2심을 거쳐 끝내 대법원은 “국가의 위신과 이해관계와 국민의 생명이 더 심각하게 위험에 처해질수록 그 전쟁의 진실을 국민이 더 잘 알아야 한다”고 판결했어요. .. ‘국민의 알 권리’를 보호한 판결로 전세계의 박수를 받았고 다방면에 걸친 교훈을 남겼어요.  343-346

리영희 : 미국과 한국정부나 국민들이 소위 ‘자유민주주의 반공국가‘라며 어떤 동질감으로 군대를 파견했던 사이공정권의 모든 분야의 지배세력과 개인들은, 100년에 걸쳤던 불란서 식민지 시기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지배 아래에 있던 4년동안, 그리고 그 후 미국의 반식민지가 된 시기에, 거의 예외없이 불란서 식민당국과 일본 식민당국에 빌붙었던, 한국식으로 말하면 ’친일파 반민족행위자‘들이었어. ..
이와는 반대로 .. ‘민족해방전선’(FLN)군과 호지명 휘하 베트공 세력의 중추 지휘부인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회 31명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과거에 항불, 항일 그리고 물론 현재의 항미 독립투사였어! 그 인적 구성을 보면, 정통적인 독립운동가들이 있는가 하면, 대학교수, 여성운동가, 간호사,각급학교 교사등 지난날의 민족해방투사들뿐이에요. 그들 31명의 경력을 보면 한 사람도 식민지시대에 형무소를 가지 앟은 사람이 없어!  349-350

임헌영 : 이라크전재잉 석유를 탐낸 것이라면 베트남전쟁의 경우는 뭘 봤겠습니까?
리영희 : 아시아에 또 하나의 ‘반공군사 저초기지’를 만들려는 것이지. 남한과 꼭 같은 성격과 기능이지. 1948년부터 미국은 중공과 소련, 동유럽 사회주의권을 섬멸하는 계획으로 유럽에서는 북대서양동맹기구(NATO)를, 이슬람 국가들을 포함시킨 아랍세계에는 중부방위조약기구(CENTO)를,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는 소련과 북한, 중공을 조이기 위한 동남아방위조약기구(SEATO)라는 것을 구축했어. 그러면서 남한과 일본을 거쳐 알래스카까지 연결하는 아시아 ’대(對)공산 군사 포위망‘을 구축하는데, 그때 동아시아의 ㅇ약한 고리가 베트남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베트남을 놓치면 버마(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가 공산권으로 넘어간다는 논리였어요.  351

리영희 : <과거를 돌아보며: 베트남전쟁의 비극과 교훈>(In Retrospect: The Tragedy and Lessons of Vietnam)이야. ..
맥나마라라는 인간은 무소불위하고 만능적 능력자로 정평이 났었어요. 그런 사람이 베트남전쟁에서 패망하고 20년 동안 자기반성을 한 결과를 이 책에 담았어. 특히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어째서 미국이 원시적 농업부족 집단과 같앗던 베트남 인민들에게 패배했냐 하는 14가지 항목의 자기비판을 열거한 장이 ‘제11장 베트남의 교훈’이에요. 이것을 요약해서 한 마디씩으로 줄이면 다음과 같아요.
1 전쟁 상대방의 성격과 능력에 대한 중대한 오판
2 소위 베트공과 월맹의 지도자와 세력에 대한 인식 부족
3 지나친 미국이익을 추구한 정책의 오류
4 미국이 지원한 '반공적' 사이공정권 지도자들의 반민중성
5 오랜 식민지 지배에 시달린 베트남 인민의 외세에 대한 반감과 해방 독립을 위한 강력한 의지에 대한 몰지각
6 베트남 민족의 역사·문화·종교·정치·생활 · 관습 등에 대한 무지
7 미국식 자본주의와 정치제도를 유일무이한 인류적 생존 양식으로 착각한 미국의 오만과 무지
8 현대적 무기와 군사력 등 물질적 전쟁수단에 대한 과신
9 무지하지만 자주독립의 민족적 미래에 대해서 '의식화된 인민의 원초적 역량'을 과소평가
10 세계 인민들과 국제적 협조 · 호응을 획득하는 데 실패한 고립된 전쟁
11 미국 국민에게조차 베트남전쟁의 의의와 필요성과 정당성을이해시킬 수 없었던 정책적 실패
12 미국정부와 군부, 각 분야의 지도자들의 전지전능을 과신
13 전쟁수행 예측이 빗나갔을 때에 정부 내 각 분야의 협동 능력의 상실과 정책적 혼동
14 미국 건국 이후 불패의 군사적 역사에 도취하여 그 밖의 모든 요소들을 무시했던 힘의 오만  352-354

리영희 : 해방 이후 반세기 동안을 오로지 미구그이 사고방식에 길들여져버린 한국인들은 진저응로 강력한 인간의 사상과 힘을 모르고 있어! 이것이 한국인들 모릿속에 긴 세월에 걸쳐서 주입된 미국식 사고방식의 해독이라고!  355

리영희 : 베트남전쟁에 반대해서 미국 역사상 최초로 반전운동이 일어났거든. 한 예로, 미국 전체 대학생의 25%가 베트남전쟁 소집장을 거부했어. 게다가 베트남전쟁 기간 중에 27만 명의 미국인 청년과 대학생들이 징집을 피해서 국내에 잠적했건 외국으로 일시 망명했어요. 이런 사실을 한국인들은 그 당시에 전혀 몰랐어. 그 27만 명 가운데 훗날의 빌클린턴 대통령이 들어 있었어. 그 중에 21만 명이 훗날 기소를 당했지. ..
기록에 의하면 베트남전쟁 기간에 무단 탈영, 도주한 병사가 자그마치 8만 4천 명이오. 베트남전쟁이 끝난 뒤에 그런 이유로 군법재판에 회부된 수만도 3만 4천 명이나 되고, 그밖의 여러 군법 위반 행위로 불명예 제대한 수가 9만 7천 명이나 돼. 이런 숫자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 군인, 청년, 학생들은 자기네 국가 위정자들의 범죄행위에 대해서 눈물겨울 만큼 투쟁했다고! 그것으로 말미암아서,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걸쳐 미국 국민의 전국적이고 대대적인 반전 평화운동이 전개됐어.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지구상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남한의 청년들이 돈벌이를 위해서 미국의 용병으로 파견되었을때에, 한국정부와 극우 반공주의 언론들은 마치 전 세계 국가와 민족들이 베트남전애에서 미국을 지원하는 줄로 착각했어. 미국의 압력에 못이겨 군대를 파견해, 그 따위의 범죄적인 전쟁에 협력한 나라는 남한 이외에 필리핀, 타일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세 나라밖에 없어요. 한국에서 상시 5만 명의 분투부대를 보낸 것과 달리, 이들 나라에서 보낸 병력은 포병, 공병, 병참 등, 천 명 내지는 최고 3천 명 정도였어요. 그밖의 ㄷ른 국가들은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파병을 거절했어. 영국은 혈연적으론 인종저긍로나 역사적으로 미국으이 전쟁협력자가 아닐 수 없는 처지인데도, 마지못해 ’유니온 잭‘(영국 국기)을 앞세운 의장대 6명 만을 파견했어. 600명도 6천 명도 아닌 단 6명이오! 사이공 공하아에서 외국 귀빈을 맞이하는 의장대요.  356-357

리영희 : 나는 베트남전쟁 끝에 하나의 확고한 의견을 갖게 됩니다. 미국 자본주의는 그 본성으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잔인무도할 수밖에 없다. 약소민족에 대한 전쟁 없이는 그 제국주의적 경제 · 정치 · 군사 · 과학기술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확신이에요. 베트남전쟁이 그 노골적인 본보기이지만, 이미 그때에는 라틴아메리카의 10여 개 약소국을 잇달아 군사적으로 침범 · 점령했고, 약소후진국들이 조금이라도 민주적 복지와 자립적 경제정의를 추구하려고 하면 그런 정권들은 미국이 뒷받침하는 반동적이며 미국에 예속된 군부로 하여금 쿠데타를 일으켜서 전복시켜 왔어요.
그 대표적인 예가 쿠바와 카스트로 정권타도 공격이고, 니카라과에서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부패 · 타락한 미국 예속정권을 혁명으로 쓰러뜨리고 참신한 민중적 정치혁신을 하려던 산디니스타 정권을 그런 방식으로 타도했어요(1979),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깨끗하고, 공정하고,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서 사회주의정권을 세운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 정권에 대해 미국은 역시 같은 음모적 수법으로 대통령을 사살하고 미국 예속 군부쿠데타를 조장하여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킵니다(1973). 아르헨티나 군부쿠데타(1976), 볼리비아(1980), 과테말라(1983), 아이티(1988), 파나마(1989), 콜롬비아(1989)등 열거하면 끝이없어. 이것이 민주주의, 정의, 자유를 내세우는 ‘미국이라는 나라’요.  361-362

임헌영 : 조선일보사에 계시면서 '북괴'를 '북한’ 으로 표기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리영희 : 그랬지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냥 모두 당연한 듯 사용하던 것이 '북괴' 라는 단어였는데, 1967년에 내가 '북한'으로 고쳐 쓰기 시작했지. 그후 다른 신문들이 따르게 되었어요. 한 10년 후에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따르게 됐고, 나는 여러 정보로, 북한이 결코 소련이나 중공의 괴뢰가 아니라고 믿을 만한 많은 증거를 갖고 있었어요. 오히려 1960년대에 중공에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북한과 중공 사이에 대립적인 관계가 형성되거든요. 소련이 제일 미워하는 국가도 북한이었어요. 한국사람들은 북한이 처음부터 중공이나 소련의 괴뢰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고, 또 그러기를 바라는 심정이었어. 남한 극우 · 반공주의의 선전이나 미국의 선전공작이 그랬으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것과는 정반대였다구. 방금 말한 것처럼 공산세계의 패권자인 소련이 그 당시에 제일 미워했던 정권과 당과 국가가 미국이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다는 것을 한국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이해를 못했던 것이오.
북한의 당과 군대와 정부, 그리고 지도자들이 중공이나 소련의 괴뢰가 아니라 그 두 강대국과 당당히 맞서는, 극히 자주적 존재였다는 것은 소위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으로 전 세계에 너무나도 분명하게 밝혀졌었어.
푸에블로호 피랍사건(1968. 1. 23)은, 북한의 중요 해군항인 원산항에 바짝 붙어서 정찰중인 미국 전자첩보함을 영해를 침범했다는 이유로 북한이 나포한 사건이지요. 미국이 두 척밖에 갖고 있지 않았던 전자통신 인터셉트 기능을 탑재한 세계 최첨단 첩보함 중 하나인 푸에블로호를 북한 해안선 부근에 상시적으로 배치해, 북한의 군사적 정보를 빼내려 하고 있었어요. 함장은 부커라는 소령이었어. 부커 이하 36명의 최고 전파스파이 기술요원들이 배와 함께 다끌려갔어요. 북한군은 이때에 몇 차례에 걸쳐서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 안으로 침범했다고 경고했어요. 그런 사태가 계속될 때에는 나포하겠다고. 미국은 그때 푸에블로호가 영해를 침범하지 않았고 공해상에 있었다며 항의했지.
당시의 국제해양법에 따르면, 영해를 최저기저선(간조시에 드러나는 육지의 선)을 기준으로 설정했어요. 이것이 영해에 대한 첫 번째 원칙인데, 미국 같은 강대국들은 최저기저선에서부터 6마일까지를 영해라고 주장한 반면, 북한 등 제3세계의 약소국들은 전부 최저기저선에서부터 12 마일까지를 영해라고 주장했지. 그런데 두 번째원칙이 뭐냐 하면, 그 안에 섬이 있을 때에는 그 섬에서부터 다시계산해야 된다는 것이오. 원산만 앞바다의 경우, 만의 입구 남북으로 웅도(熊島), 려도(麗島), 신도(薪島), 모도(茅島) 등의 작은 섬들이있는데, 이게 영해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 섬에서부터 다시 바깥으로 영해를 그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영해에 대한 두 번째 원칙인데, 미국은 이 두 번째 원칙은 무시하고, 푸에블로호가 원산만의 최저기저선에서부터 6마일 선 밖 공해에 있었다고 주장한 거지.그러나 섬들을 연결한 선을 기준으로 영해를 계산하지 않고, 설사 미국측의 주장대로 6마일을 기준으로 한다고 해도, 푸에블로호는 영해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오. 미국의 주장을 따르더라도 푸에블로호가 북한 육지에 얼마나 가까이 바짝 붙어 있었는가를 알 수있지. 어떤 적성국이 미국 허드슨만이나 어떤 중요해군기지 항구에 그런 영해이론으로 들어와서 군사작전통신을 도청한다면, 미국은아마 경고도 없이 격침시켰을지도 모르지, 선전포고감이지. 이런경위로 북한 해군이 몇 번의 '영해침입경고' 끝에 푸에블로호를 원산항으로 나포한 사건이 일어났지. 이에 미국이 북한이 공해에 있던 미국의 군함을 불법으로 나포해갔다'며 석방 압력을 가했어. 핵항공모함 두 척을 포함해서, 합계 25척의 군함으로 구성된 제77기동함대를 원산만 앞바다에 배치시킨 겁니다. 전쟁 직전의 위기사태가 조성됐어요.
미국이 푸에블로호를 구출하기 위해서 시도해보지 않은 방법이없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은 소련과 '밀월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은 막강한 제77기동함대를 원산 앞바다에 배치시켜놓고 군사적 위협을 가하는 한편, 소련정부로 하여금 북한에 압력을 가해 푸에블로호를 반환하고 선원을 석방토록 하라고 한 거예요. 미국은 북한을 소련의 '꼭두각시' '괴뢰' 국가 정도로 보고,'대소련'의 압력이라면 한마디로 굴복할 것으로 기대했던 거야. 만약 상황을 거꾸로 설정해서, 남한의 인천 앞바다에 들어온 소련 ‘푸에블로호'를 남한이 나포했을 때, 소련이 미국정부에 남한정부에력을 넣어 선원을 석방토록 했다고 상정해봅시다. 남한정부나 군이감히 워싱턴의 명령에 거역할 수 있었겠는가! 이 비유를 생각해 보면, 북한과 소련 사이의 관계와 남한과 미국과의 관계에 차이가 어떻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미국은 소련뿐만 아니라, 미국과 우호관계에 있던 공산국가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과 루마니아의 체아우셰스쿠 대통령을 평양까지 가게 해서 김일성을 설득했어. 티토는 “미국이 정말 북한에대한 전쟁을 할 결심이다. 원자탄을 사용할 용의가 돼 있는 것으로본다. 그러니 약한 북한으로서는 미국의 요구를 듣는 것이 안전할것이다”라고 설득했어. 이러한 미국의 직·간접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10개월 동안 북한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어. "영해를 침범했으니까 침범 사실을 시인하라. 시인만 하면 석방하겠다"고 했지. 결국10개월 동안의 온갖 전쟁 위협과 외교적 수단으로도 뜻을 이루지못한 미국이 소련을 통해 북한 영해를 침범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문서에 서명을 하고야 36명이 석방되어 휴전선을 넘었어요.  367-370

리영희 : 공자의 <논어>에 [정언(正言)>편이 있어. 제자가 공자에게 “정치의 요체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데 대해, 공자는 “사물의 이름(명칭 또는 명분)을 정확하게 쓰는 것이다”라고 답했어요. 다시 말하면, 검은 것은 희다고 할 것이 아니라 검다고 해야 하고, 악은 선이 아니라 악이라고 칭해야 하고, … 잉처럼 모든 형태나 관곈 성격이나 형상의 본질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실체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인간 상호간의 생존에서 혼란을 예방할 수 있고, 또한 그 사고의 주체인 개인의 의식과 행위에 괴리가 생기지 않는 것이에요. ..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제반 속성을 진실되고 정확하게 표현해야만 인식하는 주체의 사고가 정ㅎ확할 수 가 있다는 교훈이지요.  374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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