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강요된 권위와 언론 자유(베트남전쟁을 중심으로)


우화
옷을 입지 않은 임금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한 소년의 우화는 그 소년의 순진함이나 용기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진실은 반드시 진실대로 밝혀지게 마련이라는 인간생활의 진리를말하려는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이 우화의 해석은 대체로 그 우화를 구성하는 일련의 인과적 요인들이 엮어내는 '과정'에 대해서는 깊게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그 보이지 않는 비단옷이라는 것을 팔러 온 형제 상인은 어째서 그토록 맹랑한 술책이 먹혀들어갈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임금에게 있지도 않은 옷을 입혀놓고아름답다고 한 임금 측근자들의 이해관계는 어디를 향해 있던 것일까. 임금이란 으레 아첨배에 속게 마련인 것일까. 그리고 옷을걸치지 않고도 입었다고 우기는 '통치자의 진리와 권위'는 임금의것인가 측근 아첨배의 것인가. 이와 같은 '허구와 허위'는 통치자들의 속성이어야 하는가. 허위가 진리의 가면을 쓰고 나타날 수있는 그 사회의 제도와 풍토는 어떤 것일까. 그 많은 백성들 가운데 임금의 알몸뚱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도 많았을 텐데모두들 입을 다물고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또는 못 했을까.
가장 어리석은 소년에 의해 온 사회의 허위가 벗겨지기까지 그임금과 재상들과 어른들과 학자들과 백성들은 타락과 자기부정속에서 산 셈이다. 마침내 한 어린이가 나타나서 보다 현명한 어른들을 타락에서 구하기는 했지만, 그동안 이 왕국을 지배한 타락과 비인간화와 비굴과 자기모독, 그리고 지적 암흑상태가 결과한인간파괴와 사회적 해독은 무엇으로 측량할 것인가.
인간해방과 사상의 자유의 역사는 어차피 독선에 대해 회의疑)가, 권위에 대해 이성(理性)이 승리를 거두는 긴 투쟁의 되풀이임이 틀림없다. 우화도 그렇고 현실도 그렇고 역사는 한 단계의투쟁이 끝나면 으레 '임금은 알몸이다' 라고 폭로한 소년의 용기에열중한 나머지, 힘없는 소년에게 그런 엄청난 임무를 떠맡기게 된그 사회의 실태에 대해서는 눈이 미치질 않는다. 문제시해야 할중요한 것은 그 영광(또는 해결)까지의 과정에 얼마나 많은 인간적 타락과 사회적 암흑과 지적 후퇴가 강요되었느냐 하는 사실을인식하는 일이겠다. 17-18


오늘의 사실을 오늘에 규명하지 않고 먼 훗날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바화나 읽을거리의 자료로 생각하는 한, 통치계급의 횡포는 계속되고 대중은 암흑을 더듬는 상태를 지속할 수밖에 없다. 27

베트남전쟁 비밀문서 .. 첫 줄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국가정책 수립 과정에 참여한 행정부 관료기구 속의 지성인들이 베트남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제각기 성격배우로서 파트를 연출한다. 정부가 민주적 성격을 띠는 한 원칙적으로 지성인과 관료 사이에 모순이나 대립 개념은 서 있지 않다. 그러나 형식은 어떻든 본질적으로 비민주적이고 소수 이익의 위탁자 역할을 하거나 부패한 정권을 돕는 지식인은 반지성적이고 따라서 반국민(민중)적일 수밖에 없다.
미국 정부를 일단 민주적으로 보고 또 직업군인, 관료를 제외하면 월트 로스토, 로버트 맥나마라, 조지 볼, 다니엘 엘스버그의 4인으로 특색 있는 주역이 두드러진다.
국가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인 월트 로스토는 전(全) 문서를 통해서 미국의 국가이념을 반공과 군사적 대국주의(大國主義, 국제 관계에서 큰 나라가 자국의 힘을 바탕으로 약소국을 억누르는 태도) 및 대국에고이즘에 입각한 팍스 아메리카나로 믿는 광신적 지식인의 면모를 여실히 나타낸다. 27-28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는 인간의 최고의 자질, 즉 이성과 의지와 가치관과 희생심마저도 전자계산기로 산출할 수 있다고 믿는 현대의 과학, 기계만능주의적 지식인을 대표한다. 29

진실을 외면하면서 눈앞의 체면만을 고집하는 군부장성들과 많은 민간 엘리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조지 볼은 자세를 끝내 굽히지 않았다. 30

다니엘 엘스버그는 햄릿적인 과정을 밟아 하나의 진리를 실천한 독특한 지성인이다. 그의 행동에 대해 우익적 여론과 군부에서는 비난과 인신공격, 중상이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진실과 이성이 작용하지 않는 매머드화한 관료기구 속에서 자기의 임무와 정부의 정책이 부정이며 불의임을 깨달았을 때 진정한 국가이익을 위해 진실을 밝힌 용기는 고민하는 지성인의 최고의 자세인 듯하다. 30

진실을 따지고 보면 국가이익이나 국가안보라는 것은 즉각적인 피해가 예상되는 군 이동이나 작전계획 등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실이 진실대로 밝혀짐으로써 가장 잘 보호될 수 있다.
해롤드 라스키가 “권력자란 자기의 부정과 과오를 은폐할 수만 있다면 그 목적을 위해서는 언제나 국민의 자유를 부정하려 한다. 그리고 권력자에 의한 이 자유의 부정이 성공할 때마다 다음 번에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그만큼 쉬워진다.”(<현대국가에서의 자유>) 라고 말한 것은 통치 세력의 논리를 정확히 표현한 것이다. 33-34

무력의 논리밖에 모르는 군인들이 국가기능의 종합적 서열을 무시하고 군사의 상위에 서는 정치정책에 도전할 때 국가는 그 이성을 상실하게 마련이다. 일본의 예는 우리에게 가장 실감나는 비극이다. 36

국민을 납득시킬 수 없는 베트남전쟁의 장기화는 미국 사회를 병들게 햇다. 장기화가 문제가 아니다. 그 전쟁 자체가 미국의 숭고한 건국정신과 정의를 사랑하는 미국의 국가이념과 상용될 수 없다는 것이 미국 국민 자신들에 의해서 인정되었다.
그런데 이토록 미국인의 정신과 사회를 병들게 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현실주의자’들이다. 37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국민은 정부의 기만적 선전과 사과(史觀)의 미숙 때문에, 정부가 꾸며나가는 기정사실화를 그대로 역사로 시인하는 편이었다. 그 결과는 현실주의의 파탄으로 나타났다. 제임스 레스턴은 “정책수립의 전 과정을 통해서 정책의 윤리성을 생각하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했다. 통킹 만에서 월맹 어뢰정이 불법으로 미국 순양함을 공격했다는 조작으로 의회로부터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탈취하는데 성공한 정부와 군부는 의회 결의와 흥분으로 도착된 미국인의 감정을 ‘현실’로 하여 다음은 대규모 폭격을 ‘현실화’한다. 이 현실이라는 것이 역대 행정부와 군부에 의한 조작과 허구의 ‘연속의 단면’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의회 결의에 반대한 상원의원은 100명의 의원 가운데 모스와 구루닝 두 사람 뿐이었다. 풀브라이트 같은 의원조차 ‘현실적 대응책’이니 할 수 없다고 찬설표를 던졌다. 37-38

군부 같은 것이 국민을 구렁텅이로 끌고 가는 수법이 이 현실주의다. 오늘의 현실을 수정하지 않으면 내일의 현실이 우리를 구속할 것이라는 지성인들의 사관만이 이런 불행을 예방할 수 있다. 미국의 지성인들은 역사의 ‘현실’을 수락할 뿐 역사에 ‘작용’하려 하지 않았다. 38

풀브라이트, 한스 모겐소 등 소수의 지성인은 매카시즘의 ‘빨갱이 잡이’(witch hunting)의 시련에 굴복하지 않은 진정 용기 있는 지성인이고 애국자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성인은 50년대와 60년대 초에 이 파괴적인 사상통제의 압력으로 공직을 떠났거나 침묵을 선택했다. 39

‘빨갱이 잡이’가 절정에 달했을 때 미국 법조계에서 가장 존경받던 라네트 핸드 판사는 “시민이 그 이웃을 적이나 간첩이라는 생각으로 살피도록 명령받는 사회는 이미 분해의 과정을 걷고 있다”고 미국 국민이 영원히 기억하는 날카로운 경고를 했다. 39

한 소년이 왕의 알몸을 폭로할 때까지 오랫동안 온 지식인과 백성들이 입을 열지 못하고, 사회는 공포와 타락과 암흑 속에 침체해야 했던 그 엄청난 인간적, 사회적 소모가 있었다는 사실을 거듭 중요시해야 할 것이다. 남의 나라의 불행한 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국가나 국민에게는 영원히 한 살마의 소년도 나타나지 않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41

미국은 창조력을 가진 대국가이면서도 자기 제도와 이념의 자유로운 창조적 발전을 목표로 하지 않고 세계의 작은 국가와 인민의 솟아오르는 목표와 염원과 해결을 까부수는 데 전력을 동원했던 것이다. ..
미국의 예에서 우리는 부정적인 가치관이나 태도에서는 건설적인 것은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 비창조적인 사고방식이 극단에 이르면 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주위에 온갖 명분의 높은 장벽을 쌓고,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시민은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때로는 생물학적으로 배제해버리는 공포사회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바로 부정하려는 제도나 사고방식에 자기가 변질해버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수단으로서 구체적으로 죄목 규정도 하지 않은 귀걸이 코걸이식의, 집권자의 뜻대로 자유자재로 해석될 수 있는 금지법률이 잇달아 제정돼야 하고, 모든 교육은 그 목적을 위해서만 알맞게 개편돼야 한다. 널리 생각할 줄 모르는 인간 또는 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이런 식의 교육처럼 자기기만적인 것은 없다. 43


진실 또는 진리에 반대하는 힘 또는 세력은 대중이 진리를 배우도록 훈련, 교육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가르치는 대로 믿을 것을 강요하고, 가르치는 것은 흑백뿐이다. ..
“오늘날 교육(직접, 간접)이라는 것은 문자를 통해서 기만당하는 것을 가르치는 기술이라고 정의해도 결코 부당한 말은 아니다. 이와 같은 기만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현재로는 사회의 지배자들이다”라고 갈파한 서양의 유명한 석학의 말은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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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I (1945~56)


냉전용어의 관용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섹의 모든 정치적, 사회과학적 사상을 흑과 백, 천사와 악마, 죽일놈과 살릴 놈, 악과 선의 이치적(二値的) 가치관으로만 판단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것ㅊ처럼 지성을 마비시키고 격변하는 세계에서 자기의 생존을 위태롭게 만든 요소도 드물다. 369-370

베트남 사태는 크게 나누어 4단계의 정세발전을 거쳐 현재에이르렀다.
①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화(1863.5) 부터 제2차 세계대전종전까지 근 100년에 걸친 베트남 인민의 식민지민족 항불(抗佛) 해방투쟁.
② 전(全)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 (1945.9)부터 전후 베트남민족해방 항불전쟁의 승리를 고한 인도차이나 휴전협정 성립(1954.7) 까지의 투쟁.
③ 남베트남공화국 수립 (1955.10)과, 그것으로 베트남의 통일을 위한 제네바협정의 총선거 실시 협약이 사실상 일방적으로 폐지되고 베트남의 반영구적 분단이 고정된 사태.
④ 그 이후 남베트남(越南)에 내란이 일어나고 미국과 북베트남(越盟)이 개입함으로써 미국과의 전쟁으로 변모, 확대된 현상태.
이중 ③의 단계는 기간은 짧지만 그 후 베트남 사태의 발전에가장 중대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정치적 사실 때문에 역사적 의의가 크다. 373


프랑스는 사실 유럽전쟁이 끝남과 때를 같이하여 1945년 3월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합친 인도차이나 불령 식민지 5개 지역을 연방화해, 연방의 실권을 1명의 총독에게 주고, 형식상의 원주민 자문회의를 설치해 인도차이나를 재지배하는 정책을 선포했다. 민족해방과 독립을 요구하고 있던 인도차이나의 민족주의자들은 일제히 이를 반대했다.
1946년 2월, 16도선 이북에 진주했던 중국 군대가 철수하자 프랑스총독부는 프랑스 군대를 앞세우고 북부지역으로 들어갔다.베트남민주공화국은 프랑스군의 진주를 반대하지 않는 대신, 프랑스 정부는 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프랑스의 일원으로서 정부 · 군대 · 재정 ·외교의 모든 분야에서 독립적인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② 안남(중부)과 교지지나(支那, 남부)를 병합해서 단일 통일국가로 할 것인지의 여부는 국민투표로 결정하기로 하고③ 프랑스 군대는 5년간에 걸쳐 베트남 군대로 교체되며 ④ 그 이상의 세부문제는 앞으로 계속 협상해서 해결한다는 협정에 동의했다(1946.3.6, 협정).
그러나 프랑스는 이 협정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20일 후에남부에 '교지지나공화국' 임시정부라는 것을 수립했다고 발표했다. 379

프랑스는 베트남을 재지배하기 위해 중국 군대의 북부 철수를중국 내 프랑스의 이권을 포기한다는 것과 교환조건으로 장개석정부를 유화했다. 그 조건이란 ① 중국 내 프랑스 치외법권의 포기 ② 프랑스 자본으로 건설한 하이퐁에서 곤명(昆明)까지의 철도에 대한 중국 권리 인정 ③ 중국의 하이퐁 항 및 그 주변지대의 출입권 승인이다. 베트남을 희생으로 하는 강대국 이익 위주의 해결형식은 이때 이미 시작되었다. 380

나치 독일에 의해 일패도지(一敗塗地)되어 사실상 전후의 강대국 대열에서 탈락해버린 프랑스는 ‘위대한 프랑스’의 영광을 위해서도 식민시장을 버릴 수 없다는 결심이었다. 380-381

12월 19일 베트남 정부에 베트남 군대의 자발적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들이댔다. .. 3일 후 프랑스 공군은 하노이, 하이퐁 등 대도시에 대한 전면폭격을 감행하는 동시에 육군은 하노이 시를 점령ㅎ고 베트남 군대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하노이 시 폭격으로 죽은 베트남인만도 단 두 시간에 6,000명을 헤아렸다. ..
베트남 인민과 제국주의 프랑스군 40만은 이로부터 1954년 5월 7일, 디엔 비엔 푸 결전에서 프랑스군이 항복하기까지 실로 7년반의 혈투를 전개한 것이다. 그것은 베트남뿐 아니라 인도차이나 전역에 걸친 전쟁이었다.
미·영·불 등의 공식문서들은 이 처절한 전쟁을 '내란'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베트남전쟁을 식민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는 성격 규정과 식민지 인민의 입장에서 보는 민족해방전쟁의 성격규정을 단적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내란'이란 합법적 통치권력에 대한 민중의 정권전복 반란의 뜻을 띤 정치적 용어다. 종전 이후에도 프랑스를 베트남의 합법적 통치의 주체로 간주하는 것은 1946년 3월 6일 협정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 독립을 승인한 사실을 백지화하는 견해다.
식민주의자의 가장 큰 배신은 인도차이나전쟁을 종결지은 제네바 휴전협정 (1954.7.21, 조인)에서 합의한, 2년 후 즉 1956년 7월에 베트남 독립 ·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조약의무를 프랑스가 포기한 것이다. 프랑스는 제네바 휴전협정에 의해 휴전선 이남지역에서 휴전과 관련된 군사적·행정적 업무를 담당하고 총선거 실시를 위한 협의를 하며, 1956년 7월에는 전 지역을 통틀어 총선거를 실시하는 일방(一方)주체로서의 의무(최종선언 제7항)를 서약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합의된 선거날짜를 3개월 앞두고 프랑스 군대를 철수해버렸다. 그러고는 휴전협정을 이행할 조인 당사자인 주베트남 프랑스군 최고사령부를 해체함으로써 휴전협정의 이행은 물론 총선거 실시의 책임도 기피해버렸다.
이것은 식민주의자의 네 번째 그리고 가장 중대한 베트남 인민에 대한 배신으로 지탄받게 되었다. 그 후 오늘에 이르는 베트남 사태 발전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총선실시 합의의 유산을 꼽는데 미국 정부를 제외하고는 대개의 전문가와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돼 있다. 381-382

프랑스가 식민통치하의 호치민 세력을 끝까지 거부한 것이나 현재 미국이 북베트남과의 전쟁에 개입하게 된 하나의 중요한 동기는, 민족주의자는 베트남의 독립과 양립할 수 있으나 공산주의자는 베트남의 주권, 독립을 국제공산주의에 예속시킨다는 견해를 토대로 하고 있다. 383

외세에 대한 투쟁 과정에서는 전부가 민족주의자라는 데 더 큰 중요성이 있다. 그러기에 차이점은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인가, 아니면 자본부의적 민족주의자인가다. 이것은 베트남의 경우도 그렇지만, 모든 전전(戰前)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자본주의였다는 역사적 사실로 말미암아 같은 민족주의자이면서 자본주의와 이해관계가 밀착해 있는 세력은 민족해방운동에서 소극적이었고,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는 반식민지투쟁에서 적극적이었다는 차이를 낳게 한다. 384

바오 다이 황제가 전형적인 경우이겠다. 1945년 3월 일본군이 베트남 전역의 군사적 점령을 완료하자, 일본은 안남왕국의 과거 프랑스 식민지하의 명목상의 황제에 대해서 북부와 남부를 합친 통일왕국의 독립선언을 요구했다. 이것은 백인 제국, 식민주의 세력을 추방하려는 황색인 제국, 식민주의의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바오 다이는 이에 응했다. 그것이 백인 프랑스 제국, 식민주의의 괴뢰에서 다만 일본 황색인 제국, 식민주의의 괴뢰로 탈바꿈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나 명백한 사실이었다. 형식상으로는 이것이 프랑스 식민지가 된 후 최초의 베트남 통일, 독립이다.
그 후 베트남 인민과 영토의 완전한 통일, 독립을 요구한 베트민(베트남민주광화국)을 말살하기 위해 협정을 폐기하고 식민지 전쟁을 개시한 프랑스는 홍콩에 '망명' 중이던 바오 다이를 다시 불러들여 1949년 6월, 프랑스연방 내의 베트남왕국 원수로 추대했다. 이 프랑스연방 내의 베트남왕국이란 베트남의 중부와 남부를 끝까지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꾸며낸 흉계였다. 그것은 베트남의 일부에 독립의 허울을 씌우는 정치극이었다.
벵상 오리올 프랑스 대통령과 바오 다이 '황제' 사이에 체결된 이 협정은 '엘리제협정' 이라고 불린다. 엘리제협정은 바오 다이 황제의 베트남에 대한 독립을 인정하되 "국방과 외교권은 프랑스 정부가 장악하고, 프랑스 군대는 베트남에 기지를 영원히 보유하며 그 통행권은 무제한으로 보장되며, 재정 및 기타 국정의 주요부문에서 프랑스 정부의 자문과 지도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낯익은 정치극이다(엘리제협정과 같은 것이 프랑스와 라오스 및 캄보디아 사이에도 거의 동시에 체결되었다). 384-385

민주주의냐 아니냐의 기준은 그 국가사회의 정치적 권리뿐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권리와 기회가 민중, 인민, 시민 또는 국민(명칭이야 어떻든)에게 얼마나 균등하게 배분되고 보장되어 있느냐에 따라 평가되어야 할 문제다. 386-387


바오 다이 정권에 완전히 실망한 미국은 고 딘 디엠을 새로운 ‘위대한 민족주의자’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가 소수 지배층의 정치, 경제, 권력 독점과 베트남 사회의 원리가 되어버린 부패를 도려내고 진정 민중(국민)의 지지를 받는 국가를 만들 것으로 기대했다. 389

존슨 미국 대통령이 부통령 당시 ‘동양의 처질’이라 불렀고 케네디를 비롯한 미국의 친베트남파 거물급 인사들이 ‘베트남의 이승만’으로 불러온 이 ‘위대한 민족주의자’는 결국 민족주의나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입증하고 군부쿠데타에 의해 1963년 11월 2일 살해되고 만다. 392


1947년 트루만 대통령의 이른바 ‘트루만 독트린’의 제기로 시작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선언한 미국은 모든 식민지해방 민족투쟁도 공산주의로 간주하게 되었다. 407

1950년 10월 10일, 최초의 미국 군사 사절단이 사이공에 도착했다. 이때까지, 즉 1950년에서 54년까지 4년 동안 미국은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전쟁 지우너으로 22억 8,500만 달러를 제공했다(D.F. Fleming, The cold War and Its Origin).
이때 미국의 인도차이나전 개입을 반대한 존 F. 케네디 상원의원은 “인민의 공공엲ㄴ 동정과 지지를 받고 있는 이 전쟁에는 아무리 미구그이 군사력을 투입해도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고 나는 솔직히 생각한다.”고 말했다. 409


총선거 실시가 예정된 1956년이 지나면서 남베트남에서는 심각한 내란이 일어났다. 어느 한 시기를 기준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1957년경부터 전구구 지방에서 정부에 대한 폭동과 테러 형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베트콩으로 불리는 민족해방전선의 출발이다. 411

20년에 걸친 남베트남 사회의 혹심한 정치, 경제, 사회의 부패에 곁들인 이 정치적 탄압이 반란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데는 온건한 중간적 견해를 가진 논자들이 일치한다. 그 대표적인 것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고 딘 디엠은 이미 1956년 1월 탄압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1월 11일 디엠은 강제집단수용소 설치령을 내려 그와 정부에 반대하는 자에 대해 거의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 혹독함에 놀란 미국 정부는 마침내 66년 5월 사이공 주재의 미국 정부 대표기관으로 하여금 베트남 사회에서는 처음부터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즉 초기의 ㅣ반정부세력은 공산주의자이기보다는 정치, 종교적 소수파들이라는 사실을 사실대로 발표하게 했다. 413



베트남 전쟁II(1956~72)


미국의 전면적인 지지와 뒷받침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오히려 바로 그 때문에, 고 딘 디엠 정권의 독재, 폭정, 부패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상태가 되었고, 그로 인해서남베트남의 민중은 앉아서 죽기보다는 총을 들지 않을 수 없는 상태로 몰렸다. 여기에 베트남의 역사적 배경이 작용한 것이다.
미국 정부 지도자들에 의해서 ‘베트남의 이승만’이라고 평가받은 남베트남의 통치자 고 딘 디엠은 바로 그 이름대로 이승만과 같은 운명을 밟았다. 이승만보다 더 철저했던 탓에 더 철저하게 나라를 망치고 더 처참한 죽음을 당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416-417

디엠 정권은 디엠이 대통ㅇ령에 취임하기 훨씬 전인 제네바협정 체결 직후 194년 7월 부터 57년 6월 사이에 전국의 반정부적 세력 및 개인에 대한 조직적 테러를 단행했다. 이 조직적 테러의 주대상은 제네바협정에 의해 남부 잔류를 희망하여 무기를 반환하고 농업으로 돌아간 농민이었다. 418

독재, 탄압통치가 있는 곳에 인민의 반항이 싹트기 시작했다. 1959년 총선거에서 민중의 이반(離反)을 분명히 깨달은 디엠 정권은 민간인도 특별군법회의에서 재판할 수 있는 법령 59-10 ‘치안유지법’을 제정했다. 이 법령과 군사재판은 그때부터 모든 반정부적 행동을 ‘베트콩’이라는 이름으로 무차별적으로 탄압하는 도구가 되었다. 419

‘한국전쟁 이후부터 비공산주의적 남베트남이라는 고정목표를 설정한 미국에게 남베트남은 온갖 두통거리가 되었다. 처음 우리(미국) 지도자들은 프랑스가 베트남인에게 독립을 주지 않고서는 베트민을 이길 기회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남베트남인에게 독립을 허용하면 프랑스는 그곳에 남지 않을 것이며 전쟁도 계속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말하자면 프랑스와 더불어서도 전쟁에 이길 수 없고 프랑스 없이도 전쟁에 이길 수 없는 꼴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디엠에게 정권을 쥐어준것이다. 그런데 우리 지도자들은 얼마 안 가서 디엠이 절망적일 정도로 인민의 지지를 상실하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장래의 정치적 안정을 대표하는 것이 디엠뿐이라는 생각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또 우리는 디엠이 없어도 싸움을 계속할 수 없고, 디엠과 손잡고는 싸움을 이길 수 없게 되었다. 얼마뒤에는 우리 지도자들은 미국의 전면적인 지원 없이는 남베트남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과 북베트남인들의 노력은 우리의방해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과를 거두고 있는 듯 보인다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또 한 번 베트남에서의 싸움은 미국의 뒷받침 없이도 이기지 못하지만 미국이 관여해서도 이기지 못한다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이와 같은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을 잘 알면서도,우리 지도자들은 베트남에 대한 간섭을 고집했다. 우리 정부의 역대 지도자 집단은 제각기 앞서의 정부가 실패한 것을 자기들은 성공으로 전환시킬 수 있거나, 적어도 실패를 예방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역대 정권(미국)은 앞의 정권 밑에서 그 무효성이 입증된 온갖 이론과 논리를 토대로 잇따라 실패 속으로 뛰어들었다’(Brookings Institution 소속 Dr. Leslie H.Gelb, Hearings before the Committee on Foreign Relations, United States Senate on Causes, Origin, and Lessons of the Vietnam War, 1972.5, p.2).
(앞으로 편의상 1966년 1~2월에 있은 미국 상원외교위원회 베트남전쟁에 관한 청문회 의사록을 ‘제1회 청문회 의사록’ 1972년 5월에 있은 같은 목적의 청문회 의사록을 ‘제2회 청문회 의사록’으로 약기한다. 이 글의 모든 근거와 자료는 서방세계, 특히 미국 정부 자신의 각종 대소 공시눈서 약 30종을 토대로 했음을 밝혀둔다.) 419-421

50년대는 미국의 ‘간섭의 시대’였다. 422

베트남에서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군사적으로 승리한다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전쟁의 위험성은 엄청나게 커질 것이다. 반대로 공산침약이 베트남에서 실패한다면 다른 지역에서도 남의 나라를 침략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될 것이며 평화가 깃들 가능성은 즐가할 것이다(닉슨, 베트남에 고나해 전 국민에게 한 연설, 1972. 4. 26.) 423-424

선거 때마다 도미노 이론은 미국의 베트남정책의 지도이념으로 등장했다. 중국의 장개석 패망으로 공화당에 정권을 뺏긴 민주당은 선거 때마다 강경론적 우파의 표와 군부 및 경제계의 지지를 얻기 위해 도미노 이론을 원용했다. 424

‘자유세계’의 안전이라는 명분은 도미노 이론에 이의를 제기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도미노 이론은 마술적 힘을 발휘했다.
고 딘 디엠 정권하의 남베트남이 자유국가냐 하는 문제, 선거로 선출됐다는 그 정부가 실시하는 선거가 자유, 민주주의적이냐 하는 문제, 남베트남의 문제가 기본적으로 정치적 성격이냐 군사적이냐 하는 문제, 소수의 폭정과 소수에 의한 착취제도가 강요되고 있는 사회에서 민중의 반항의 권리는 없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미국 지도자들에게는 고려의 대상 가운데 들지 않았다. 425

착실히 정치·경제·사회의 토대를 구축한 북베트남 정부는 통일총선거가 거부된 뒤인 1958년 3월과 12월 사이에 남부의 고딘디엠 정권에 대해 ① 남북의 병력삭감 ② 남북 간 경제무역을 위한 협상 ③ 군사예산의 상호감축 ④ 군사기지의 확장 및 신설 금지⑤ 남북 간 정상관계 수립을 위한 협상을 거듭 제의했다. 그러나 그 모든 제의는 남베트남 정권에 의해서 그때마다 거부당했다. 427

1955~57년의 경제회복 3개년 계획이 순조로이 진행되자, 북베트남 정권은 1958~60년의 경제, 문화발전 3개년 계획으로 경제, 사회, 문화면의 안정과 발전을 계속했다. 이 발전은 1965년 미국의 본격적이고 지속적인 북폭으로 다시 잿더미가 되기까지 착실하게 추진되었다. 428

해방전선이 북쪽에서 남파된 침투세력이냐 아니냐가 미국 내에서 논의되고 있던 그 당시, 주월미국경제협조처(USOM)의 책임 관리인 밴(John Paul Vann)은 다음과 같은 보고를 제출했다. 밴은 또한 이른바 ‘평정계획’의 미국인 수석고문관이었다.
‘남페트남 정부는 정치적으로 민중의 지지를 못 받고 있다. 남베트남 정부는 지방농민과 도시의 하층민중에 대해 착취 지향적이며, 실질적으로 베트남 인민의 정부가 아니라 프랑스 식민기구의 후신이다. 사회혁명은 거의가 민족해방전선의 이름 아래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은 인정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제2회 청문회 의사록, 81쪽) 435

‘남베트남 정부’의 구성을 살펴본다면, 어째서 그것이 정치적으로 오늘에 이르러서조차 민족해방전선과 겨룰 수 없는가의 이유를 알 수 있다. .. 정부 지도자들은 모두가 자기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억압하는 프랑스 식민국과 베트남 인민의 전쟁에서 식민국 프랑스를 위해 싸운 자들이다. 남베트남 정부란 부(富)한 자와 부패한 자를 위한 정권이다. 그것을 위해서 누가 목숨 바쳐 싸우려 하겠는가(노엄 촘스키 교수, 제2청문회 의사록, 81쪽). 436

1964년 8월 4일 오후11시 36분(와싱톤 시간), 세계는 다음과 같은 미국 대통령의 엄숙한 발표문을 들었다.
‘북베트남의 통킹 만 밖 공해상을 순찰중이던 미국 구축함 매독스 호는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의 공격을 받았다. 매독스 호는 항공모함 타이 콘테로가 호에 지원을 요청, 함재(艦載) 전투기의 긴급지원을 얻어 이에 반격을 가했다.
8월 4일, 같은 통킹 만에서 미국 구축함 매독스와 터너 조이, 두 함은 다시 북베트남 어뢰함의 공격을 받고 이에 응수, 어뢰정 3척을 격침했다.
8월 5일, 미국 공군은 연 64회 출격, 북베트남 어뢰정 기지, 석유 저장소 등 4개소를 공격하고 어뢰정 및 그밖의 함정 25척을 격침 또는 격파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이 사실을 밝힌 존슨 대통령은 “이것은 한정된 그리고 적절한 보복공격”이며 “아직도 우리는 전쟁확대를 바라지 않고 있다”고 말을 끝맺었다. 439-440

존슨은 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북베트남의 “어뢰정에 의한 도발·불법공격"을 제기하고, 미국의 북폭은 유엔 헌장 제51조의 '집단자위권'에 의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정부는 또 “북폭은 엄격히 제한된 것" 임을 세계에 약속했다.
남베트남 사태는 이제 '남'자를 빼고 '베트남' 사태로 불리게 된 것이다.
존슨은 때를 잃지 않고 즉시 (7월) 의회에 대한 전쟁정책의 법적 뒷받침을 요청했다. 미국 상·하 양원은 “대통령이 침략저지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소위 '전쟁권 부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뒤에 미국 의회의 권위와 기능을 거의 박탈해버리게 되는 이 의결은 압도적인 지지로 채택되었다(하원 416 대 0, 상원 88 대 2). "선전포고 없는 전쟁은 시작된 것이다"(카첸바트 국무차관 의회 증언).
그것이 미국의 주요신문들에 공표됨으로써 비로소 뒤늦게나마 베트남전쟁에 관한 미국 전쟁·전략 및 음모와 조작의 전모를 세계에 폭로한 소위 미국 국방성 비밀문서' (The Pentagon Papers)에 의하면 통킹 만 사건은 다음과 같은 진상을 숨기고 있다.
미국 군부는 통킹 만 사건을 1964년 2월, 즉 실제로 단행하기에 앞서 7개월 전부터 북폭을 정당화할 수 있는 모든 세밀한 상황조작을 추진했다. 고딘디엠 정권의 내부적 몰락 직후인 이 시기. 미국 정부는 민족해방전선과 민중의 반란이 그 세력을 증대함에 따라, 남베트남에서의 반란 진압작전을 보완하는 수단으로서, 그리고 가능하면 약체의 남베트남 정권의 사기를 높여주는 한 방법으로서 북베트남을 공격할 필요가 있다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미국 정부는 북베트남과 남부 반란세력의 무전연락을 방수한 결과, 소위 베트콩에 지령을 내리고 있는 것은 북베트남이라고 확신한 듯하다. 그러나 당시의 미국 중앙정보국(CIA) 종합보고서는 "남베트남의 공산주의 세력의 힘의 원천은 남베트남 자체 내에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적 성격(미국적 사고방식에 의하면)을 띤 민족해방전선의 사회혁명 목적과 목표는 1950년대의 항불독립전쟁 시기에 민족주의자들이 내건 목표와 일치할 정도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미루어 미국 정부의 일부에서는 남베트남 사태는 어디까지나 남베트남 내부문제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남베트남 사태가 남베트남 역대정권의 무능 부패로 걷잡을 수 없게 되자, 미국 정부와 군부 내에는 이것을 북베트남과 관련시켜 해결을 강요해보려는 이론이 강력한 동조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 중심인물이 군인이 아닌 민간인 학자라는 것은 베트남전쟁이 증거하는 하나의 아이러니다. 441-443


‘국방성 비밀문서’에 의하면 ‘북베트남에 대한 정교하고 은밀한 군사 작전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계획은 1964년 2월 1일, ‘34 알파 작전계획’이한 암호명으로 개시되었다. 이것이 사실은 미국과 남베트남군에 의한 최초의 (1954년 제네바협장 이후의 작전으로서는) 군사개입이다.
'34 알파 작전'은 ① U-2 정찰기에 의한 북베트남 공역(空域) 침입 및 정찰 강행 ② 북베트남 내부 정보수집을 위한 심리작전, 특수요원(스파이)의 투하 ③ 정보수집을 위한 북베트남인의 납치와 유괴 ④ 북베트남 오지 중요시설 파괴를 위한 파괴반 투입 ⑤철도·교량 파괴를 위한 해상으로부터의 남베트남 군부대의 기습공격 ⑥ 소형 고속정에 의한 북베트남 연안시설의 포격 ……등으로 되어 있다(국방성 비밀문서).
북베트남 정부는 이에 해당하는 시기에 북베트남 영토 내에서이루어지는 이와 같은 종류의 도발 및 공격을 비난하는 발표를 했다. 그러나 당시 이 발표는 미국 정부, 남베트남, MACV, 남베트남 군사령부 들에 의해서 '허위조작 비난'이라고 묵살되어왔다.
이 '은밀작전'은 미국 대통령 명에 의해 맥나마라 국방장관 책임하에, 연합참모부에 설치된 '반란진압· 특수활동 담당 특별보좌관실'이 지휘했다. 맥나마라 장관은 이 특별보좌관실의 초대실장인 클라크 소장, 그리고 1964년 2월에 교체 임명된 안지스 공군소장으로부터 그 공격작전의 실시결과에 대해서 정기적으로 보고받고 있었다. 연합참모부도 정기적으로 작전평가를 대통령에게 제출하고 있었다.
북베트남에 대한 은밀작전의 제2 병행작전은 라오스에 대한 공중작전이었다. 444-445

통킹 만의 구축함대에 의한 무력시위는 이상의 두 측면에서의 비밀작전에 대한 제3의 기둥으로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통킹 만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7월 30일 심야, 주(駐)남베트남 미국 주둔군 사령관 웨스트 모얼랜드 대장 지휘하에 있는 남베트남 해군 기습부대가 멀리 통킹 만까지 침투해(미국 구축함대에서 출발), 총킹 만 내 북베트남령의 두 개의 섬(홍메 와 홍게)에 대해 기습상륙 작전을 감행했다. 북베트남 정부는 이 기습 공격, 상륙작전 사실을 발표하고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미국과 남베트남 측은 역시 조작이라고 응수했다.
이 사건이 있은 지 3일 후인 8월 2일 밤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이 미국 구축함을 통킹 만상에서 공격하게 된 것은 이상과 같은 사실 위에서였다. 446

북폭은 1965년 6월 전략폭격기 B-52의 참가로, 남·북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는 미국 군부의 결의를 행동화했다.문명을 석기시대화하는 작업은 1965년 5월과 12월, 68년 10월,지상전투와 국제정세, 휴전협상의 진전 과정 등에 따라 일시적으로 중지되기도 했다. 그러나 닉슨이 재선되고 중·소와의 화해 · 접근 정책이 다분히 주효한 1972년 4월과 5월 이후 마침내 10여 년동안 논의되어온 북베트남에 대한 해안 기뢰봉쇄와 무제한 폭격이 실시됨으로써 간헐적인 중지의 효과는 일시에 상쇄되었다. 460

미국의 지상병력이 1967년 11월, 마침내 한국전쟁 당시의 미군 최고 수준인 47만 2,800을 넘어 54만 9,000에 달하자, 전쟁은 베트남의 국경을 넘어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확대됐다. 전쟁은 진정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이 되었다. 통킹 만 사건 직후, 미국의 강력한 요청으로 한국·필리핀·호주·뉴질랜드가 병력을 파견하고, 1970년 캄보디아정변으로 미국의 뒷받침을 받은 우파권력과 좌파세력이 민족상잔을 전개하게 되면서부터 인도차이나 대륙은 국경없는 하나의 전장으로 화했다.
미국의 압도적인 물량과 과학무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물질적 위력이 강해질수록 인도차이나 민족의 민족해방세력은 강대해지기만 했다. 인도차이나 전역에 대한 비치사성 각종 독가스와 식물 고사용의 화학무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됨으로써, 인도차이나전은 처음으로 생태학적 대량파괴의 문제를 인류에게 제기했다. 해방전선 측을 돕는 소련과 중공은 서로 대립관계에도 불구하고 베트남공화국을 통한 현대무기 원조의 필요성으로 미국과의 전쟁일보전 상태로까지 깊이 관련되었다. 쌍방 전쟁 방법의 잔인성은 세계의 양심과 국제여론을 자극하여 미국에게 날로 불리한 국제적 조건으로 굳어져갔다. 미국 내의 국론분열과 반전세력은 내부에서 국가적 일체성을 파괴하는 작용을 해, 미국은 마침내 닉슨의로 하여금 1970년, “미국의 국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선언과 함께 20년에 걸쳤던 정치·군사 간섭정책에서 물러나기 시작하게 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으로 무장한 거인은 만신창이가 되어 일개 후진 약소민족과 협정을 맺고 1973년 2월 27년 만에 이 파란 많은 땅에서 물러서기를 약속했다. 460-461

미국 정부 공식문서도 이를 입증한 바 있다
미국의 베트남 개입의 목적 (1)
① 반침략의 보호자로서 명성을 지킨다.
② 동남아시아에서의 도미노 효과를 저지하기 위해.
③ 남베트남을 '붉은' 손에서 지키기 위해 (국가안전보장회의의결 「동남아 행동각서」, 1964년 11월 29일, 국방성 비밀문서 자료 제27).
미국의 베트남전쟁 목적(2)
70퍼센트: 미국의 굴욕적인 패배를 저지하기 위해.
20퍼센트: 남베트남(및 이웃 여러 나라)의 영토를 중공의 손에서 지키기 위해.
10퍼센트: 남베트남의 국민에게 보다 나은, 자유스러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그리고 수락 불가능한 폐해가 남지 않도록 하면서 위기에서빠져나간다.
그러나 만일 미군의 철수를 요청받을 경우에는 그대로 남아있기는 어렵지만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벗을 돕는 것이 아니다" (맥노튼 국방차관보가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보낸 남베트남을 위한 행동계획」, 1965.3.24).
목적도 변했거니와 미국의 체면유지가 70퍼센트, 베트남 국민을 위한 것은 10퍼센트로 그 순위도 변했다.
베트남전쟁에 군대를 파견해서 미국을 도운 몇몇 국가의 정부지도자들도 미국 정부 지도자들의 이론과 근거를 그대로 원용했다. 한 예로 김성은(金) 국방장관은 한국군 전투사단 파견 결의를 국회에서 요구하는 제안설명에서 '도미노 이론'을 한국까지연장 확대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베트남이라는 친구가 모진 병에 걸려서 아무리 약을 쓰고 세상 의사란 의사는 다 모여서 처방을 다 써보아도 뾰족한 수가나오지 않고 병세가 악화되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은 그렇다고 해서 내버려두면 죽을 것이 뻔한데, 베트남이 죽으면 귀신이 되어 미국이나 자유방을 물고 늘어질 테니 그것을어떻게 하든지 죽이지 않고 고쳐보려고 하는 데 난점이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베트남에 파병한다고 하는 것이 죽어가는 환자가 호전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보내지 않고는 우방이 죽기 때문에 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한국일보』,'주월한국군' 특집 제18, 국회의사록 인용, 1971.7.27)
그런데 미국 정부는 그보다 앞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6. 정세해결의 가능성
a. (생략)
b. (생략)
c. 만일 최악의 경우에 이르러 남베트남이 붕괴하든가, 그 행동에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어 남베트남을 버리기로 결정할 경우, 이때에는 “우수한 의사가 최선의 치료와 노력을 다했는데도 환자는 죽고 말았다"는 인상을 대외적으로 주도록 노력한다(맥노튼 국방차관보 작성, 남베트남에서의 행동계획」최종각서, 국방 비밀문서 자료 제19, 1964.9.3).
미국의 베트남전쟁의 목적은 동맹국가들의 생각은 어떻든 이렇게 이미 전쟁 초기부터 딴 곳에 있었다. 베트남전쟁은 이런 목적으로 시작되어 이런 기만으로 끝난 이런 성격의 전쟁이다. •『창작과비평』, 1973년 여름호 467-469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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