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의 글 - 지젝에게 물어본 정신분석학의 행방


오늘날 지젝을 최고의 인기 논객으로 만든 것이 다름아닌 그의 정신분석학적, 철학적 '고상함'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6




지젝은 철학을 끊임없이 오락거리로 만든다. .. 

영국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1943~)은 지젝을 "지난 수십 년 동안 유럽에 출현한 사람 중 가장 놀라운 명민함으로 정신분석학, 혹은 문화 이론을 해설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

그는 끊임없이 놀라서 묻는다. 왜 모든 것이 이와 같은가? ..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것은 그와 같다' , '법은 법이다'등)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 순간, 우리가 현실로 대면하고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묻는 순간, "철학은 시작된다."  21-22


지젝은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놀란다. 그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관찰의 향락에 빠질 수 있게, 일반적인 경우라면 반드시 느꼈을 죄의식 없이 향락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마치 '물론 나는 화장실이나 사도마조히즘, 그리고 발기에 관한 이 모든 이야기가 지극히 외설적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모든 삶의 측면들을 이론화해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지젝은 죄의식 속에서 향락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보통 사람들의 자기 책망을 덜어주어, 좀 더 즐겁게 그의 책을 읽을 수 있게 만든다.  24


부정어법은 '어떤 것을 언급하지 않겠다고 말함으로써 바로 그것을 말하는 장치'다. .. 부정어법은 담화 내부의 구멍을 그러낸다. 어떤 것을 언급하지 않겠다고 말함으로써 바로 그것의 윤곽을 드러내는 것이다.  24-25


지젝은 하나의 의미체계를 다른 의미체계로 번역한다. 가령 라캉의 체계는 헤겔의 체계로, 마르크스의 체계는 라캉의 체계로, 할리우드의 체계는 지젝의 체계로 번역된다. 지젝 스스로 조김스럽게 지적하듯이, 이런 번역은 항상 완전한 대응은 아니지만 만만치 않은 설명적 통찰을 가져다준다. 지젝은 '만약 이전의 방법으로는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다른 각도에서는 이해된다면 그 각도에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다.  27


지젝의 책을 주의 깊게 읽은 독자라면, 그가 매번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그러니 그의 책을 읽을 때 각 논의의 세부 사항까지 전부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조만간 일련의 등가성들 속에서 더 생산적인 각도로 이전의 논의를 이해시켜주는 '이것은~가 아닌가?'의 순간에 직면할 테니까. .. 

아르헨티나의 철학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가 지젝의 첫 번째 영어 저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The Sublime of Ideology)>에 대해 평가한 것처럼.  28


지젝의 지적 여정은 그가 속한 공식 문화와 거리를 두거나 이질적인 특징을 보여왔다.  36


지젝의 이론은 객관적 체계 속의 일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주체적이었다. .. 지젝이 비판 이론에 미친 주된 영향 중 하나가 이 주체의 개념을 정교하게 다듬은 것이다. 지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묻지 않고 넘어간 '주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파고들었다. ...

이 주체가 바로 민주주의의 주체이다. 민주주의는 개별 국민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37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반휴머니즘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람들에 맞춰 만들어진'게 아니라 아무런 감정도 없는, 오직 형식적인 추상에 의해 만들어졌다. 민주주의라는 개념 안에는, 어떤 구체적인 인간적 내용으로 채워지거나 공동체적 결속의 진정성에 내어줄 자리가 없다. 민주주의는 추상적 개인들의 형식적 결합일 뿐이다.'

민주주의는 개별적 인간의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종교, 재산, 식사 예절, 수면 습관 따위에 무관심하다. 민주주의가 취급하는 것은 이 모든 개별적인 특질들이 제거되었을 대 남는 것, 지젝이 '주체'란 용어로 지시한, 모든 시민들이 평등하게 똑같이 고유하는 측면이다.  38


그가 사상가로서 가지만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게 그가 속해 있던 체계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비판철학에 대한 지젝의 가장 중요한 공헌 중 하나인 주체 이론에 초점을 맞춘다.  39




각 분야마다 그에게 주된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는데, 철학에서는 게오르그 헤겔, 정치학에서는 칼 마르크스, 정신분석학에서는 자크 라캉이다.  43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1)은 무수한 주석가들이 지적하듯이, 서구 관념론의 전통에서 정점에 도달한 독일 철학자이다. 관념론이란 세계를 사물들의 연쇄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물에 대한 관념들로 세계를 설명하는 철학체계이다.  43-45


일반적으로 헤겔의 변증법의 세 단계로 되어 있다고 한다. 먼저 어떤 테제(定立 정할정 설입)나 관념이 있고, 다음에는 안티테제(反定立 되돌릴반 정할정 설입)나 관념의 구체적 한정이 그에 대립된다. 마지막으로, 이 둘은 어떤 종합이나 더 포괄적인 관념으로 통합된다. 가령 '모든 영화는 훌륭하다.'는 테제를 주장한다고 할 때, 그 다음엔 그에 대한 안티테제로 '<타이타닉>은 실제로 나쁜 영화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둘의 종합은 '대다수의 영화는 훌륭하다.'가 될 것이다. 이 종합은 새로운 테제가 될 수 있고, 이 과정은 완전한 진실(총체성. 이 경우에는 '오직 몇몇 영화만이 훌륭하다.'는)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될 수 있다.

이것이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관습적인 생각으로, 이에 따르면 서로 다른 관점들은 언제나 더 큰 진리로 화해할 수 있다. .. 지젝이 읽은 헤겔의 변증법은 어떤 화해나 종합적 관점이 아닌, 헤겔 자신이 말한 '모순은 모든 동일성의 내적 조건'이라는 인식을 생산한다.  45-46


테제가 '모든 영화는 훌륭하다.'이고 안티테제가 '<타이타닉>은 실제로 나쁜 영화이다.'라면, 지젝의 종합은 '모든 영화가 훌륭한 것은 <타이타닉>이 실제로 나쁜 영화이기 때문이다.'가 된다. 이것은 일견 사리에 맞지 않거나 모순으로 들린다. 하지만 이 주장의 진실은 바로 이 모순 속에 있다. 만약 나쁜 영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영화가 좋은지 알지 못할 것이다. 서로 비교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영화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쁜 영화가 적어도 하나는 존재해야 한다. 이 경우 <타이타닉>은 문자 그대로 '규칙을 입증하는 예외'이다.  46


모순어법이란 '메마른 비' '차가운 열' '물리적 지성'처럼 모순적인 어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47



마르크스는 사회가 조직되는 방법을 예리하게 비판했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 혹은 자유시장경제 체제는, 다수에 대한 야비한 억압과 지배를 통해 소수가 광대한 부를 축적하도록 허용하는 불평등으로 인해 분열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47


자기 자신을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선언하는 지젝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이 갖는 가치와 진실을 확신하며, 더 나은 방법으로 사회를 조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다. ..

'이론적 실천(praxis)'이라고 불리는 이런 종류의 사유는, 단순히 경험을 반영하거나 범주화하는 게 아니라 경험을 바꾸려는 시도이다.  49


지젝은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인상적인 공헌을 남긴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개인들이 사회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정의한다.  51



라캉은 거치면서 정신분석학은 이 협소한 영역을 넘어 정치학, 철학, 문학, 과학, 종교 등 모든 인간 존재의 활동 영역으로 그 분석적 야망을 확대시켰다. 이 오만한 기획을 위해 라캉이 마련한 초석은, 모든 정신 작용을 분류할 수 있는 세 가지 '질서(Order)' 즉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이다.

일차적으로 상상계는 자아(ego)가 탄생하고 인식된느 과정을 가리킨다. 보통 '거울 단계(mirror stage)'로 불리는 이 과정은, 태어난지 6개월 정도부터 시작된다. 라캉이 지적하듯, 인간은 7세 무렵까지는 자신의 신체적 움직임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미숙한 상태이다.  53-54


* 라캉의 세 질서,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 라캉의 세 질서를 쉽게 설명하면, '개인의 심리행위에 작용하여 그들의 삶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주는 힘의 장(場 마당장)'으로 풀 수 있다. 상상적인 것, 상징적인 것, 실재적인 것, 이 세 형용사형은 특정한 질서를 지칭하는 명사로도 사용된느데, 그 경우 해당 질서와 관련된 특정한 사물이나 경험을 가리킨다. 

또한 '질서'라는 표현이 암시하듯, 이 세 질서는 심적 경험을 분류하는 체계의 일부일 뿐 아니라, 그 경험을 유사윤리적 기준 속에서 등급화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라칸의 저작을 보면 '상상적인' 것은 부정적인 의미로, '상징적인' 것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재계야말로 가장 으뜸가는 것으로, 이 질서를 언급할 때 라캉의 어조에는 거의 존경과 숭배가 묻어난다.  53


상상계는 넓은 의미에서 영원한 자기 찾기를 가리킨다. 그것은 자기 통일의 신화를 수립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본(寫本 베낄사 근본본)과 유사물의 사례를 융합시키는 과정이다. 그래서 상상계는 라캉과 지젝에게 항상 경멸의 시선으로 받는 세계이다. 우리에게는 안됐지만, 라캉은 현대사회를 정점에 도달한 상상계로 본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강박되어 자신과 자신의 창조물을 세계 위에 둔다고 보기 때문이다.

상징계는 언어에서부터 법에 이르는 모든 사회적 체계들을 포함하는 가장 광범위한 세계이다. 상징계는 우리가 보통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의 긍정적인 부분을 구성한다. 상징계는 사회의 비인격적 틀로서, 거기서 우리는 다른 인간 존재들과 함께 특정한 공동체 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령 대다수의 사람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상징계에 등록된다. 이미 이름이 정해지고, 가족이나 사회경제적 집단, 젠더, 인종 등에 소속되기 때문이다.  54-55


실재계는 알 수 없는 삶의 영역을 가리킨다. ..

우리는 결코 직접적으로 세계를 알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실재계는 언어에 의해 포획되기 이전의 세계이다.  59


상징계는 실재계에 대해 작용한다. 라캉이 말했듯, 상징계는 실재계를 절단한다. 그것은 무수하게 다른 방법으로 실재를 분절한다. 그래서 실재를 인식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어떤 것이 상징화에 적용되지 않는 순간을 주목하는 것이다. 앞에서 든 예에서 우리는 인간 존재가 사람과 동물, 유인원, 포유동물, 동물 등으로 상징화되는 모든 사례들을 열거함으로써 그 존재 중 일부는 실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어떤 것을 명명하거나 분류할 때 우리는 상징계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 전에는 실재계 속에 있다.  60


실재는 상징계가 작동하여 분절된 단위로 조각 내기 이전의 충만한 사물의 상태라는 점에서, 상징계에 앞서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실재는 상징계가 이런 분절 과정을 완수하고 남은 잔여물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실재는 상징계 이후에 발생한다.  61


실재와 상징계의 관계에서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만약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에이즈가 CIA의 음모라는 것, 모든 인간 존재는 원숭이와 같은 부류하는 것, 새싹이 식물 세계의 가장 멋진 생산물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인간 존재나 주체가 아닌 단지 상징적 질서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자동기계나 로봇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탈물질화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결정하고 선택하고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우리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63


지젝은 '실재의 철학자'라고도 불린다. .. 우리의 생활과 직접 연관된 '실재적'인 주제를 다룬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얘기한 라캉적 의미의 '실재'를 확장하고 자기화햇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염두에 둘 점은, 지젝은 거의 언제나 상징계와의 관계 속에서 실재를 다룬다는 점이다.  65


이론가들은 상징계와 상상계의 관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지젝은 실재와 상징계 사이의 적대성에 관심을 돌림으로써 성차적(性差的 성품성 어긋날차 과녁적), 이데올로기적, 윤리적, 탈근대적 형상들 속의 주체를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었다.  66




코기토(cogito)에 대한 생각은 원래 기독교 교회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e, 354~430)가 제기하였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코기토는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가 창안한 것이다.  71


'코기토'라는 단어의 의미는 데카르트가 말한 "철학의 제1원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cogito ergo sum)'이다.  73


탈구조주의자에게 코기토는 중심화된 주체 혹은 '개인(individual)'의 토대로, 그들은 코기토를 철학의 방탕아로 여긴다. 개인은 말 그대로 분리 불가능하다.  74


코기토의 '나'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  74-75


지젝에게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현실적 개인의 '나'가 아니라, 부정성의 텅 빈 지점이다. 이 텅 빈 장소는 '아무것도 아닌'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반대편, 모든 규정된 것들의 부정성이다. 지젝은 바로 여기ㅣ, 아무런 내용물도 없는 텅 빈 장소에 주체를 위치시킨다. 즉, 주체는 공백이다.  82-83


* '사라지는 매개자'는 말 그대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 사이의 이행을 매개하고 곧 사라지는 개념이다.  83


주체는 지제그이 용어로, 자연과 문화 상태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 '사라진느 매개자'이다...

코기토에서 정점에 도달한 '자기로의 철회'가, 자연과 문화의 간극을 잇는 사라지는 매개자로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상징적 질서라는 형식으로 실재를 대체하기에 앞서 그 실재를 '제거'해야 한다. 지젝은 이 사라지는 매개자를 광기로 이행하는 것으로 읽으며, 이렇게 해서(사라지는 매개자인) 주체를 광기로 파악한다.  84

우리 자신을 언어나 그 외 상징적 질서에 종속시키는 과정을 지젝은 '주체화'라 부른다.  92


'자기'는 주체의 공백을 메우는 것으로서 주체는 변하지 않지만 '자기'는 끊임없이 갱신된다.  94


우리는 소위 관용적인 서구 사회에서 이를 목격할 수 있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향락의 이미지와 쾌락에 대한 몰두를 보면, 이젠 더 이상 성적 쾌락이 금지되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지젝의 말처럼, 성적 희열은 이미 공식 이데올로기의 지위를 차지했다. 더 나아가 이제는 섹스를 즐기라고 강요받는다. 이 뻔뻔함, "즐겨라!"는 이 명령은 초자아의 귀환을 표시한다.  109


지젝이 지적하듯, 향락이 강제적이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즐겁지 않다.  109


탈 근대의 자유는 문법적 트리 없는 언어활동의 자유와 유사하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해석 규칙이나 구범도 없다. 따라서 대타자의 붕괴가 이를 보상하기 위해 무수히 작은 타자들, 혹은 부분적인 대타자들을 발생시킨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지젝은 그 증거를 과학기술의 성과에거 비롯된 윤리적 딜레마들을 해결하기 위해 자꾸 전문가 위원회를 찾는 경향에서 찾는다.

이런 위원회의 증가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징적 금기들의 부재를 시사한다. 이런 상징적 금기들의 부재 때문에, 각종 윤리위원회들은 사이버 스페이스, 유전자생물학, 의학 등에 관한 규제 원칙들을 창안해야 한다. 윤리위원회들은 태아에 대한 유전자 조작을 얼마나 허용해야 하는지, 생명 연장 기계에 의존하는 이들이 실질적으로 살아 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인터넷 상에서 하는 섹스에 어떤 문제점이 잇는지 답한다. 이런 윤리적 난제들에 대한 해명 책임을 이들 위원회에 떠넘김으로써, 개별 주체들은 본래 자기들 몫이었던 해명의 자유가 주는 부담을 털어버린다.  114


지젝이 보기에 탈근대적 정치 담론은 자유주의-자본주의의 지평 안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그 지평 내의 서로 다른 부분들, 가령 어떻게 의료 서비스에 필요한 자금을 모을지, 그중에서 세금의 비중은 얼마큼 할지 등에 대해서는 주장을 펴지만, 자본주의 자체는 결코 진지하게 문제 삼지 않는다.  122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탈이데오로기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냉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지배된 세계를 살고 있다. 

지젝은 냉소주의적 태도를 "그들은 자신의 행위 속에서 자식이 환영을 달고 있음을 잘 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렇게 한다"로 요약한다. ..

지젝은 우리가 어떤 이데올로기의 허위를 비난할 수 있는 진리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이데올리기 속에 던져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 방식이 현실과 이데올로기를 대립시키는 이원체계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젝은 삼원체계, 혹은 삼항 구조에 입각하여 이데올로기를 분석한다.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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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철학은 다르게 느끼는 것이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며 결국 다르게 사는 것이다.  9


경험이 내게는 철학이다.  11



1장 철학은 지옥에서 하는 것이다. 


철학은 인간 안에 자기 극복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모든 것을 잃은 지옥에서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음을, 아니 모든 것을 잃었기에 오히려 인간이 가진 참된 것이 드러난다는 걸 철학은 말해준다. 깨달음은 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천국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극복의 가능성도 필요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국에는 철학이 없고 신은 철학자가 아니다. 철학은 지옥에서 도망치지 않고 또 거기서 낙담하지 않고, 지옥을 생존조건으로 삼아 거기서도 좋은 삶을 꾸리려는 자의 것이다.  20


스님을 뵐 기회가 있어 꿈 이야기를 했다. "저는 관음보살이 부러워 죽겠는데 지장보살께 잡혀서 한 대 맞았습니다." 그랬더니 스님이 빙긋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관음보살은 오늘날로 따지면 재벌 회장 같은 분입니다. 정말로 가진 게 많지요. 그것을 모두 나눠줍니다. 그 이름만 부르면 누구에게나 줍니다. 그런데 지장보살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줄 게 없지요. 그런데 지장보살은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 곁에 있어 줍니다."

그때는 '그렇구나'하는 정도였는데, 오늘은 문득 '있어준다'는 그 말이 한없이 큰 선물처럼 다가온다. 지장보살, 그는 부처 없는 시대에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한다는 보살로, 모두가 성불할 때까지, 다시 말해 지옥이 텅텅 빌 때까지 자신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묘한 역설이다. 서원대로라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늦게 성불할 존재이다. 하지만 그런 서원을 세운 걸 보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빨리 성불한 존재임이 틀림없다. 어떻든 지옥에 단 한 사람도 남겨두지 않고 성불할 때까지 곁에 있겠다는 그 무지막지한 서원 때문에 '업보가 정해져 있다'거나 '해탈 불가능한 존재가 있다'거나 하는 말들은 모두 힘을 잃어버렸다.  24


'있어줌' 이 말에서는 '있음'과 '줌'. 다시 말해 '존재'와 '선물'이 일치한다.  25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초조함이다. 초조함은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게한다. 초조한 자는 문제의 진행을 충분히 지켜볼 수 없기에 어떤 대체물을 문제의 해결책으로 간주하려고 한다. 성급한 해결을 원하는 조바심이 해결책이 아닌 어떤 것을 해결책으로 보이게 맘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사태의 종결은 불가능해진다.  28-29


카프카는 <죄, 고통, 희망 그리고 진실한 길에 관한 성찰>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른 모든 죄를 낳는 인간의 주된 죄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초조함과 무관심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났고 무관심 때문에 거기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주된 죄가 단 한 가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초조함일 것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추방되었고 초조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아마도 그의 문학은 이 초조함을 몰아내려는 치열한 탐구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철학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지름길을 믿지 않는 것이다. 

삶을 다시 씹어보는 것, 말 그대로 반추하는 것이다. 지름길이 아니라 에움길로 걷는 것, 눈을 감고 달리지 않고 충분히 주변을 살펴보는 것, 맹목이 아니라 통찰,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한마디로 초조해하지 않는 것이다.

여담 삼아 말하자면, 고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저질렀던 죄의 정체도 초조함이었다.  29-30


길 위의 존재로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곤란이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길이 갑자기 나뉘어 어느길로 가야 할지 모르게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길이 막다른 곳에 이르러 더는 나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길을 모르거나 길이 없다고 느껴질 때, 내가 떠올리는 글이 하나 있다. 바로 중국 작가 루쉰이 쓴 어느 편지이다.  31


루쉰이 그의 연인 쉬광핑에 보낸 편지. 엄밀히 말하자면 연인에게 보낸 것은 아니고, 이 편지로부터 그들의 연애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루쉰은 1923년 가을에서 1925년 봄까지 북경여자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했는데, 그의 소설사 수업을 듣던 학생 중의 하나가 쉬광핑이었다. 당시 쉬광핑은 군벌과 결탁해서 학교를 수구적으로 읶르어가던 총장에게 맞서 싸우던 학생들의 대표였다. 

쉬광핑은 당시 교육계의 타락, 그리고 졸업 후 안정된 지위에 연연해서 쉽게 타협하는 학생들의 처신에 울분을 토하며, 평소 누구보다 강직하다고 믿었던 선생 루쉰에게 긴 편지를 썼다. 게다가 모호한 답변은 사양이라며 선생을 꽤나 곤혹스럽게 했다.  32


(루쉰은) 사실은 자기 역시 쓰디쓴 현실을 위로해줄 '설탕'같은 것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백지 답안지를 내는 수밖에 없겠다"고 고백한다. 

'별수 없다'는 답변을 한 뒤 루쉰은 "이제부터는 그럭저럭 세상을 살아가는 나만의 철학에 대해 말하려고 하니 참고"하라고 적었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우리가 쉽게 부딪히는 나노간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 하나는 갈림길, 즉 기로에 서는 겁니다. 갈림길 앞에서 묵적(묵자) 선생은 슬피 울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라면 결코 울며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우선 갈림길 입구에 앉아 잠시 쉬거나 한잠 자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연후에 내가 갈 길을 정하여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길을 가는 도중 자비로운 이를 만나면 그의 음식으로 허기를 채울지언정 결코 그에게 길을 묻지는 않겠습니다. 그 역시 앞길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호랑이를 만난다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호랑이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호랑이가 꼼짝 않고 서서 가지 않으면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을 겁니다. 나무에 허리띠로 몸을 묶어서 설령 그대로 죽는다 해도 호랑이가 내 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나무가 없다면? 그러면 별수 없지요. 호랑이에게 통째로 삼켜진다 한들 어쩌겠어요.

두 번째 난관은 '막다른 길'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완적(위나라 시인)은 통곡을 하며 돌아섰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막다른 길 또한 갈림길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헤쳐 나가야지요. 온통 가시덤불로 뒤덮여 도저히 갈 수 없으 ㄹ정도로 험난한 길은 아직 본 적이 없으니까요. 나는 이 세상에 본디 막다른 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게다가 운 좋게도 이제껏 그런 난관은 아직 겪어보지 못했던 것 같군요." 참고로 내가 인용한 문장은 <루쉰의 편지>.  33-34


사실 루쉰은 쉬광핑에게 한마디를 더 건넸다. 쉬광핑에게 그는 '무작정 앞서는 용사들'일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참호 안에서 때로는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며 노래도 부르고 카드놀이도 하다가" "불시에 총성이 울리면 어넺 그랫냐는 듯 즉각 적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그런 '참호전'이라는 것도 있다고 했다.  35


조금 여유를 갖고 다만 포기하지 않는 것.  36


중국 남송 시대의 선사인 대혜스님은 시끄러운 곳으 ㄹ떠나 고요한 곳에서 공부하려는 이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세간의 번뇌는 활활 타는 불과 같으니, 그 불길이 어느 때 멈추겠습니까. 시끄러운 곳에서 바로 공부하는 일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40


공부하는 이들은 시끄러운 곳을 피해 조용한 곳을 찾지만, 아마도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은 시끄러운 곳에서 고요를 얻는 것에 있을 것이다. 세사오가 거리 두기를 할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거리 두기를 해야 하며, 세상에서 벗어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공부일 것이다.  41




2장 배움 이전에 배움이 일어난다  45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이하 <논고>). 책의 서문에서 그는 철학적 문제들이란,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이 책이 담은 메시지는 다음의 짧은 문장들로 다 표현할 수 있다고 했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52


'비판'을 이해하기 위해 개략적으로 <논고>의 주장을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통상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펼친 주장을 '논리적 그림이론(theory of logical portrayal)'이라고 부른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란 사물들이 아니라 사실들(사태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제가 아니다'). 예컨대 사과라는 사물 자체는 없으며, 세상에는 '빨간 사과' '둥근 사과' '깨진 사과'같은 게 존재한다. 즉 '이 사과는 빨갛다' '이 사과는 둥글다'는 사실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 속에 존재하는 연결('사과'와 '빨강' 연결)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 명제이다. 언어와 사물은 전혀 닮지 않았지만('빨갛다'는 말은 전혀 빨갛지 않다), 사물로서의 '사과'와 '빨강'이 연결되듯 '사과'라는 말과 '빨강'이라는 말도 연결된다. 그러니까 명제('이 사과는 빨갛다)란 현실에 존재하는 '빨간 사과'를 언어로 그린 그림 같은 것이다. 반대로 '노래하는 사과'라는 표현에서 '노래'와 '사과'는 말로서는 연결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연결(입 없는 사과와 입으로 부르는 노래는 불가능한 연결이다)이므로 애당초 명제가 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명제들을 다 모으면 세계에 대한 우리 자신의 명료한 생각, 즉 사고(thought)가 된다고 했다.

연주자가 기호로 표시된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것처럼, 혹은 반대로 연주된 곡을 작곡자가 다시 악보로옮겨놓는 것처럼, 우리의 언어는 세상의 일을 논리적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그 자체로는 소리 나지 않는 악보가 멜로디로 전환될 수 있고, 소리인 멜로디가 그 자체로는 기호에 불과한 악보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표현이긴 하지만 둘 사이에 무언가 공통된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52-53


"우리가 하나의 명제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명제가 참일 때 무엇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사용을 명료하게 해주는 활동이라고 했다.

그는 문제를 해결했으므로 불필요한 사다리를 걷어차듯 철학계를 떠났다. 그런데 케임브리지대학교에 다니더 ㄴ프랭크 램지라는 청년이 문제를 제기했다. 

램지와 편지를 몇 차례 교환했다. 그러는 중에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 중대한 오류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54


결국, 비트겐슈타인은 다시 철학계로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점은 모두가 찬탄했던 그 아름다운 건축물을 부수는 데 있어서 그가 아무런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문제에 대한 자신의 접근법을 통째로 바꾸어 버렸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말하는 '또 하나의 비트겐슈타인', 전기의 입장과는 사실상 정반대 편에서 전기만큼이나 위대한 철학적 입장을 개진한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탄생했다.  55


비트겐슈타인의 일기에는 <논고>의 요류를 지적햇던 갬지에 관한 짦은 메모가 있다. 

"훌륭한 반대는 전진하는 것을 돕지만, 피상적인 반대는 비록 그것이 타당한 것일지라도 사람을 지치게 한다. 램지의 반대 의견은 이런 종류의 것이다. 피상적인 반대는 문제를 그것의 생명이 있는 뿌리부터 파악하지 못하고, 너무 바깥쪽에 있어서, 비록 그 문제가 틀렸더라도 아무것도 고칠 수 없다. 훌륭한 반대는 문제 해결을 향해 나아가게 하지만 피상적인 반대는 일단 극복된 후에는 한쪽으로 치워버릴 수 있다. 마치 나무가 계속 자라기 위해 줄기의 마디에서 구부러지는 것처럼 말이다."  57



데카르트는 진리를 얻기 위해 우리에게는 '모루'와 같은 '사전준비'가 반드시 필요하므로 그것을 얻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준비 없이 곧바로 진리를 얻는 일에 착수해서는 안된다고.

그에 대해 스피노자는 진리를 얻기 위한 사전 준비는 없다고 말한다. 준비는 그 '준비를 위한 준비'의 문제를 계속 제기할 것이고, 마치 공부를 한다면서 연필만 깎고 있는 학생처럼, 인식은 지연되고 결국에는 회의주의자들처럼 우리에게는 인식할 수 없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62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자면 앎을 생산하기 위한 선행조건 같은 것은 없다. 방법이란 공부의 선행물이 아니라 공부의 결과물이다.  63


내가 가진 것이 자가로가 나뭇가지뿐이어서 아직 공부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공부를 늦추는 핑계일 수는 있어도 공부에 대한 참다운 인식은 아니다. 공부는 언제든 할 수 있고, 당연한 말이지만, 바로 시작함으로써만 시작되는 것이다. 공부란 자신이 가진 미약한 것에서 시작해서 계속해서 앎을 생산하고 더 나아가는 것이지, 어떤 방법을 알아내서 단번에 도달하게 되는 게 아니다. 진리에 이르는 방법은 따로 없고 진리가 가는 길이 진리의 방법이다. 그리고 공부란 그 길을 스스로 내면서 나아가는 일이다.  64


중요한 것은 배움의 과정 중에 스스이 어디쯤에서 어떻게 개입하는가이다.  68


바보는 다만 '욕구가 멈추어버린 자들', '의지가 꺾인 자들'이다. 

'바보'는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겸손한 살마이 아니라, 현실적 차별을 그대로 인정하고 심리적으로 수긍하기 위해 자기 능력을 부인하고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이다.  69


생애의 모든 순간에 잘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또한 생애의 모든 순간에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할 것이다.  71


칸트는 규모라든가 화려함 같은 것에 속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내가 말하는 사건은 처음에는 작아 보였는데 대단한 것이었다든가, 대단한 것처럼 보였는데 실제로 별 볼 일 없는 것이었다든가 하는 그런 사건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사건, 우리에게 인류의 개선과 미래의 역사에 대해 말해주는 사건은 어찌 보면 너무 조용하게 일어난다. 

칸트는 구경꾼들,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의 맘속에서 일어난 일에 주목한다. "거대한 정치적 변동의 드라마가 일어나는 동안에 그것을 지켜본 사람드르이 태도", 진짜 혁명은 거기서 일어난다.

이해당사자도 아닌 사람들이 어떤 불이익조차 감수하고 나서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아니 행도엥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맘속에서 어떤 변화를 겪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내 일이 아니지만 그것을 지켜보며 맘속에 공감이 일어날 때,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인류'를 느끼는 것이다.  74



리영희 선생은 70-80년대 대학을 다닌 많은 이에게 '사상의 은사'라고 불렸고, 검찰 공안부에게는 '의식화의 주범'으로 통했다. 그랬던 그가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과 관련해서 재판정에 서야 했던 적이 있었다. 사건의 주동자들이 그의 책을 읽고 촉발되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선생 자신은 그들의 행도엥 동의하지 않는다고 햇다. 그러니 선생이 동의하지 않는 일이 성생에게 감화를 받아 일어난 셈이다. 

이때 나는 리영희 선생이 사상의 은사로서(혹은 '의식화의 주범'으로서) 한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앗다. 그가 사사으이 은사, 즉 '생각의 스승'이었다면 그것은 자신과 '동일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 아닐까.  80


장애(disability)란, 어떤 본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육이든, 취업이든, 사랑이든, 생활하면서 겪게 되는 어떤 불가능(disability)의 체험이며, 그때 자신에게 생겨나는 '무능'과 '포기'의 정서이다. 어떤 불가능성의 체험, 그리고 그와 함께 일어나는 자기 무능과 자기 포기의 정서를 겪을 때 어떤 사람은 장애인이 된다. 그리고 불가능의 체험과 포기의 정서가 커질수록 그는 중증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불가능의 체험과 포기의 정서를 사실상 방치해왔다.  81




3장 사소한 것은 사소하지 않다


철학자 디오게네스 

"세상의 모든 것은 신의 소유물이다. 그런데 철학자(지혜로운 자)가 된다는 것은 신의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친구들끼리는 물건을 서로 나워 쓰지 않던가. 그러므로 철학자는 모든 것을 소유한거나 다름없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지혜롭다는 것은 만물과 사귀는 것(만물을 대하는 법을 아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그 자신이 만물인 신과 사귀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신의 친구가 되는 만큼, 다시 말해 내가 만물과 사귀는 만큼, 그만틈이 내 것이고 내 세계이다. 따라서 '만물이 이미 내 것'이라는 말은 극한의 소유가 아니라 소유의 불필요나 불가능을 가리킨다. 

'만물을 소유했다'는 디오게네스의 말이 일종의 '관계 맺음'에 대한 것이라면, 근대 사적소유권의 핵심은 '관계 처분'에 있다. 

만약 처분할 수 없다면 내 소유물이란 기껏해야 내 향유의 한계를 나타낼 뿐이다.  96


카를 마르크스가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했던 경고였다. 그가 사적 소유에 반대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우리를 너무나 둔감하고 일면적인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오직 '가졌다(haben)'는 감각 하나만 남고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관조하고 지각하고 바라고 활동하고 사랑하는 것" 다시 말해 모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감각들이 다 소외될 수 있다는 것이다.  97


내가 무엇을 어떻게 먹고 있는지,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슨 책을 읽고 무슨 음악을 듣는지, 어디가 아픈지, 위생은 어떤지, 기후는 어떤지, 이것들은 우리 삶에 정말 중요한 것들이다. 내 일상을 돌아볼 때 그 일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내 삶에 큰 중요성을 갖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떠받드는 어떤 것 때문에 그것들을 소홀히 한다. 추상적인 인류 평화보다 내가 요즘 듣는 음악이 내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철학이란, 그것들으 다루고 가꾸는 법이라고 할 수 있다.  101-102


니체는 '모든 것의 가치전환'이라는 표현을 종종 썼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이 반대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는 지혜로운 자는 저렴한 비용으로도 잘 살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102


당장 굶어 죽게 생겼는데 금욕하라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내가 고대 금욕주의 를 끌어들인 것은 욕망을 줄이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다른 삶을 욕망하라는 것이었다. 현재의 삶에서 더 많은 것을 욕망하는 것 못지않게, 현재와는 다른 삶을 욕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117


"대답은 이미 다 했소.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이 순간이고, 당신이 할 일이란 바로 저 사람을 보살피는 것이고,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저 사람이요."

톨스토이가 쓴 단편 <세 가지 질문>의 내용.

나는 이 이야기를 함석헌의 글 <이제 여기서 이대로>에서 읽었다. 

무엇을 하든, 모든 때는 똑같이 소중하다. 우리 삶에 '각별한 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각별한 때'는 우리가 모든 순간을 소중히 생각할 때 찾아온다.  119


"정말 믿는 사람에게는 '때가 장차 오지만, 지금도 그때'라는 말이 옳습니다."

'장차의 그때'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나는 아직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 그런 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미래를 준비하는 무척 겸손한 사람일 수 있고, 제 허물을 돌아볼 줄 아는 양심의 인간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겸손과 양심이 종종 행동을 늦추는 핑계, 어떤 소심함을 감추는 위장막이 될 수도 있다. 

양심의 가책은 사람을 창백하게 만든다.  120


함석헌은 이렇게 말했다. "잘못을 좀 잊읍시다. 양심이 둔해져서가 아니라, 날카로우면서도 잊는 겁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말인가. 그런 망각이야말로 건강의 징표이다.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이 있으면 가급적 그때에, 그날에, 그달에, 그해에 결산을 보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자꾸 되돌아보지 않기 위해 과감하게 꺾쇠를 쳐버려라.  121




4장 함부로 모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 제2권의 서문에서 "대 작업의 동기는 아주 간단했다... 그토록 끈질기게 작업에 몰두했던 나의 수고는 단지 호기심, 그렇다. 일종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그런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허용해주는 그런 호기심 말이다. 지식의 습득만을 보장해주고 인식 주체로 하여금 길을 잃고 방황하도록 도와주지 않는 그런 지식욕이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우리 인생에는 '성찰과 관찰을 계속하기 위해서 자기가 현재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으며, 자기가 지금 보고 있는 것과 다르게 지각할 수도 있다'는 의문이 반드시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렇다면 철학(철학적 행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걸 정당화시키는 게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를 알아내려는 노력, 바로 그것이 아닐까."  

교양을 쌓는 호기심이 아니라 '나를 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호기심,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길을 잃고 방황하도록 도와주는' 그런 지식욕.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지, 우리가 어디까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비판적 사유, 푸코는 그것을 철학이라 불렀다.  133


칸트가 '계몽'의 비밀을 지능이 아닌 '용기'에서 찾았듯이, 삶에서 무언가를 배우고자 한다면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것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무릎을 꿇는짓을 해서는 안 된다.  

쉽게 굴복한다는 것은 스스로 따져볼 능력과 의지가 없는 것이니 그에게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 바탕이 없는 것과 같다.  149


(그때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 단어는 진실한 언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네. 바로 그러하기에 우리는 절대로 무릎을 꿇고 굴복하지 않는다네.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네. 그것은 우리보다 먼저 죽은 이들이 우리에게 진실한 언어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들은 세상에서 생명력을 가지지 못하도록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을 내리기 때문이라네."

사령부는 커피를 마실 것인지, 계속 '굴복하다'에 적절한 단어를 진실한 언어에서 찾을 것인지를 이 땅 치아파스의 전통에 따라 표졀에 부친다. 만장일치로 커피를 마시기로 한다. 누구도 굴복하지 않는다.

 - 마르코스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

내가 이 이야기를 정성껏 필사해두고 적어둔 한마디는 이것이었다. '얼마나 위대한 무지인가. 굴복을 모른다는 것. 이 부족에게는 굴복이 없고 커피가 있다.'  152


아무런 저항도 없는 세계. 그것은 모든 권력자가 꿈꾸는 유토피아일 것이다.  153


정신분석에서 저항하지 않는 환자란 말하지 않는 환자와 같다. 그렇게 되면 분석가는 편안하게 자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다.

프로이트.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정신분석학은 남의 말을 들음으로써만 배울 수 있습니다."  154


'저항 없는 세상'을 꿈꾸고 '독백'만을 일삼는 사람들이 무엇을 놓치며, 스스로 어떤 한계에 갇히는지, 그래서 어떤 위험에 빠지게 되는지를 생각 해야 한다. 시끄럽다고 귀를 닫으면, 당연한 말이지만, 이해할 수도 없게 된다. 저항의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편하고 좋겠지만, 그것은 무지의 위험 속에서 누리는 안락이다. 그리고 그 위험은 누구보다도 그 안락을 누리는 자를 향하게 되어 있다. 한마디로 저항을 소중히 생각하고, 저항의 언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155-156




5장 우리는 자본주의 수용소에 살고 있다  159


사회적 약자들은 어떤 상황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기보다 권력을 가진 자의 눈으로 보려고 한다. 어차피 상황은 권력자가 그것을 어ㄸ허게 해석하느냐에 달렸기 때문이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이를 '해석 노동(interpretive labor)'이라고 불렀다(<역순의 혁명>)  160-161


커피 전문점의 아르바이트생은 고객과의 다툼이 생겼을 때 이 다툼이 점장에게 어떻게 비칠지 상상하며, 교실에서 어떤 문제가 터졌을 때 학생들은 그것이 교사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상상한다. 집안이 가부장적이라면 엄마는 오늘 일어난 일을 저녁에 돌아온 아빠가 어떻게 생각할지 온종일 고민할 것이다. 이처럼 타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노동은 그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 준다.  162


제품을 생산할 때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을 높이 치면서, 인간관계를 생산할 때, 즉 사람이 사람을 생산할 때는 낮은 지위의 사람이 상상력을 발휘하게끔 구조적으로 강제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평등한 사회의 특징이다.  


상급자가 하급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점장이 종업원의 마음을 헤아리고, 교사가 학생의 마음을 헤아리고, 부모가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다시 말해 권력자가 인간관계에서 해석학적 노동을 수행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164



고전적 자유주의 이념과 달리 신자유주의 정부는 매우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 시장에 대한 개입은 최소화하지만, 시장을 위한 개입은 매우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이다.  181




6장 야만인이 우리를 구한다  197


당신의 놀람과 나의 놀람

2010년 11월 10일, 런던의 트라팔가(Trafalgar) 광장에 5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뛰쳐나와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당국은 물론이고 주최 측도 예측할 수 없었던, 심지어 지난 수십 년간 영국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규모의 시위였다. 광장에 나온 학생들은 곳곳으로 행진해서 몇몇 건물을 점거하기도 했다. 운동가들은 집권 보수당의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플래카드를 펼치기도 했다. 그중에는 휠체어를 탄 젊은이도 있었다. 

시위가 특별한 지도부도 없이 이곳저곳으로 번져나가자 당국은 시위를 무책임한 '난동'으로 몰아갔다. 경찰은 강경 진압에 나섰고 토끼몰이하듯 시위대를 몰아서 9시간 넘게 길거리에 가두어 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학생들은 한 달 내내 대학 강의실을 비롯한 곳곳을 점거했고 블로그, 트윗, 페이스북을 하며 서로의 분노와 아이디어를 엮어갔다. 12월 9일, 등록금 인상과 관련된 의회 표결이 이루어진 날에 시위는 절정에 달했다. 경찰은 삼엄한 경계를 폈지만 수많은 학생이 의회 광장에 모여들었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 매킨타이어(Jody Mcintyre)도 그 광장에 있었다. 조디는 11월 10일 보수당 건물 옥상에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12월 9일 시위대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때가 되면 나오는 그런 '전쟁 반대' 시위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시위라고는 참석해본 적도 없는 열네다섯 살 정도 돼 보이는 그런 살마들도 많았어요. 이 젊은이들의 마음에는 아무런 장벽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모두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려고, 그 목소리가 들리게 하려고 나온겁니다."

조디는 휠체어를 굴리며 동생과 함께 광장에 섰다가 점차 시위대 앞쪽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공격했다. 조디의 표현을 빌리면, 많은 살마들이 '소나기처럼 퍼붓는' 경찰의 곤봉에 두들겨 맞았다. 그리고 네 명의 경관이 조디의 어깨를 잡더니 휠체어에서 길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는 끌고 갔다. 동생과 친구들 역시 구타당하면서 다른 쪽으로 끌려갔다. 얼마간의 폭행이 이어진 후 경찰들은 그들을 놔둔 채 사라졌고 동생과 동료들을 만난 조디는 놀랍게도 다시 의회 광장으로 나아갔다. 거기에는 폭동진압 경찰이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 그들을 뚫고 나가던 조디는 폭동징압 경찰과 기마 경찰 사이에 자신과 동생이 서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앞서 자신을 끌어내리고 폭행을 했던 경관 중 한 명이 그를 보고는 다시 다가왔다. 경찰은 휠체어를 기울여 그를 바닥으로 내리꽂더니 다시 인도까지 끌고 갔다. 그 순간, 그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경찰에 소리를 지르며 항의 했다.

누군가 이일을 찍어 인터넷에 올렸고, 이는 영국 사회의 큰 논쟁 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놀랐던 것은 경찰의 폭력도, 거기에 대한 대중의 반응도 아니었다. 나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조디의 답변이었다. "그 사건에서 살마들이 정말로 물어야 했던 것은 왜 그 경관이 나를 휠체어에서 끌어냈는가가 아니라, 왜 사람들이 그것에 그렇게 놀랐느냐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정말로 내가 당한 일이, (그날 벌어졌던)바닥에 누워있던 열다섯 살 소녀의 배를 걷어차는 것보다, 아니면 학생들의 머리를 난타해서 응급실로 보내는 것보다, 그러니까 하마터면 뇌출혈로 죽을 뻔했던 그들의 경우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습니까?"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그날 경찰이 보인 행동은 그렇게 놀라운 게 아닙니다. 정부를 지키는 게 그들의 일이죠. 11월 30일에 우리가 본 학생 시위에서는 수천 명의 학생이 경찰의 허가도 받지않고 런던 중심부를 관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폭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지요. 그런 시위보다 이 정부에 더 위협적인 일은 없습니다. 그런 시위가 이 정부에 직접적 위협이 되었고 결국 그들은 거기에 대처하기 위해 경찰을 보낸 것뿐이죠."

참 쿨한 답변이었다. '그는 진짜 장애인이 아닐지 모른다'거나 '왜 하필 위험한 곳에 갔느냐'는 식의 보수 언론의 공격에도 조디는 마찬가지로 쿨하게 답했다. 요컨대 그는 해당 언론들이 경찰과 다를 바 없는 집권세력의 수호자들이기에, 그들에게 자신을 정당하게 다루라고 요청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경찰과 언론을 상대로 법정 싸움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는 경찰과 언론의 폭력이 그다지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는 듯 대했다. 오히려 인터뷰할 때마다 그는 인터뷰어에게 묻곤 했다. "왜 당신은 내가 당한 일에 그렇게 놀랍니까? 왜 영국의 대중은 이런 사건에 놀라는 거죠? 내게 일어난 일보다 더 놀라운 것은 내 일에 놀라는 바로 당신들입니다."

조디의 맘속을 알 수는 없지만, 이번 일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를 문제 삼는다면 두 측면이 있을 것 같다. 첫째, 어떤 점에서 보면 장애인의 삶에서 폭력은 특별하지 않다(특히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 당신이 장애인을 휠체어에서 밀쳐낸 폭력을 보고 경악했다면 당신은 그동안 장애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폭력에 대해 이 정도의 감수성을 가졌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장애인들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더 끔찍한 폭력들에 대해 엄청나게 분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당신이 보여준 분노는 어제까지 당신이 보여준 침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한다. 

둘째, 장애인의 일을 '특별히' 안타까워해 주는 사람들의 분노는 장애인이 제기하는 문제가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일반의 문제라는 걸 가려버린다. 장애인에게 행사된 폭력은 장애인에게만 해당 하는 특수폭력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행사되는 일반적 폭력의 일단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조디는 "길바닥에 끌려간 내 일에는 그렇게 크게 분노하면서, 머리가 깨져서 응급실에 가는 학생들에게 언론은 왜 주목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의 싸움은 장애인만의 특별한 이익과 관심을 요구하는 싸움이 아니라 사회 일반의 해방을 위한 싸움이다. 

조디에게는 아마도 이 두 번째 측면이 중요했던 것 같다. 그가 어느 기자에게 털어놓았듯이 그에게도 "휠체어에서 끌려나간 것은 아주 굴욕적인" 일이었다. 그것은 잔인한 폭력이다. 하지만 그는 엄연한 운동가였다. 어쩌다 시위 현장에서 재수 없게 폭력을 당한 사람이 아니라 거기에 정면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팔레스타인에 갔을 때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이스라엘 병사들이 밤마다 마을을 공격했어요. 실탄을 쏘면서요. 그에 비하면 런던의 경관이 저지른 행동은 내게 겁을 줄 수 있는게 못 됩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열여덟의 낭이에 남미에 갔다고 한다. 체 게바라의 삶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거기서 3개우러을 머문 뒤 전운이 감도는 팔레스타인에 들어갔고, 운동을 벌인 사람이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놀라는 거죠?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시위에서 경찰이 하는 역할을 몰랐던 것처럼, 인생 내내 잠들어 있었던 것처럼 보여요." 사람들은 '장애인' 조디를 걱정하고 '장애인'에 대한 경찰의 폭력을 비난했지만, 사실 그는 전체 대중의 일반적 이해를 위해 나선 투사이다. 그는 다양한 의제들에 개입하면서 여러 시위에 참여해왔다. 그의 블로그 <휠체어 위의 삶(life on Wheels)>의 부제는 한때 "혁명을 향해 걷는 한 사람의 여정(One man's journey on the path to revolution)"이었다.(지금은 "권력은 거기 맞서 요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느다(Power concedes nothing without demand)"는 말이 부제로 적혀 있다)

가장 선두에서 가장 보편적인 요구를 담아 투쟁하는 사람에게 연민을 보이는 것은 일종의 모욕이다. 지금 그는 싸우고 있다. '장애인'에게 어떻게 그런 폭력을 쓰느냐고 경찰을 향해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조디가 의아해하느 ㄴ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조디는 그들에게 놀라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 것 같다. 시위대라 대중의 삶을 파탄 낸 집권 세력과 싸우는 게 이상한 건지, 아니면 그 집권 세력이 보낸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는 게 이상한 건지, 둘 사이에 충돌이 발생한 게 이상한 건지. 아니면, 정말 그것이 아니면, 시위 중인 한 운동가가, 사회의 변혁을 원하는 한 명의 투사가 휠체어를 타고 있는 게 이상한 건지.  197-202




에필로그

세상에 말들은 부족하지 않다. 누군가는 패스트푸드처럼 빨리 사라지는 말들의 운명을 걱정한다고 하지만, 우리 삶을 가꾸는 데 필요한 좋은 말들은, 인류의 역사가 부지런히 생산해온 위대한 인물들 덕분에, 여전히 정신의 계주를 이어오고 있다. 내가 걱정하는 말의 운명은 다른 것이다. 언어학자의 관심과 철학자의 관심이 여기서 나뉘는 걸까. 말들의 수량과 수명보다 내게 더 중요해 보이는 것은 '말들의 방황'이다. 한마디로 '겉도는 말'의 문제다  247


때로는 무릎을 치게 하고 때로는 가슴에 와 닿아 어딘가에 적어두기까지 한 그 '좋은 말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 안에 잠시 머물기도 했던 것 같기는 한데, 지금은 그것들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

왜 그 '좋은 말씀'들은 순간의 짜릿함만을 안기는 탄산음료처럼 그냥 그때뿐인 걸까?

아마도 우리가 그 좋은 말들을 위장으로 직접 소화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그 말들을 진지하게 믿지 않았다.

구경만 했을 뿐, 그것들을 진지하게 체험하지 않았다.  248


우리는 무소유 정신을 갈파한 어느 스님의 책을 백만 권 넘게 사지만 정작 무소유를 실천하지는 않는다. 

앎은 어떻게 해서 우리의 피가 되는가? 앎은 언제 우리의 삶을 구원하는가?  249


체험해야 한다.

'깨우침' 일반이 그렇다. 과거에 내가 저지른 일을 그대로 떠올리지만, 그것을 달리 느끼고 달리 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뭔가를 깨우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옳은 말은 그저 옳은 말일 뿐이다. 그것이 내 것이 되려면 내 안에서 다시 체험되어야 한다. 내가 내 식으로 체험하지 않는 말이란 한낱 떠다니는 정보에 불과하다.  251


누군가에게 좋은 말을 들었다면 최소한 한 번은 내 목소리로 그것을 다시 들어야 한다.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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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독일어: Karl Heinrich Marx1818년 5월 5일~1883년 3월 14일)는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라인란트 출신의공산주의 혁명가역사학자경제학자철학자사회학자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이다. 1847년 공산주의자동맹을 창설했다. 1847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공동집필해 이듬해 2월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과 1867년 초판이 출간된 《자본론》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았다. 맑스, 막스, 칼 마르크스 등으로 표기하기도 하나, 외래어 표기법에 준하는 표기는 “카를 마르크스”이다.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라인란트의 유서 깊은 로마 가톨릭 도시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수대에 걸친 유대교 랍비의 후예였다. 그 가문의 성은 원래는 모르데카이(Mordechai)였으나 마르쿠스(Markus)로 고쳤고 다시 마르크스(Marx)로 바꾸었다. 아버지 하인리히(Heinrich)는 유대인이 관직을 갖는 것을 금하는 차별 법령을 피하기 위해 1817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기독교인이었다. 아버지가 기독교로 개종한 또다른 이유는 그 자신이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마르크스는 개방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카를 마르크스의 저서 중 집필의 궤적을 알 수 있는 최초의 글은 고등학교 시절 쓴 세 편의 소논문이다. 그 중 세 번째 것인 《어느 젊은이의 직업 선택에 관한 고찰》은 그의 인생이 어떤 방향을 취하게 될 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마르크스는 직업 선택을 앞둔 젊은이라면 의무, 자기희생, 인류의 안녕, 완성에 대한 숙고에 입각해야 하며, 이런 종류의 관심이 서로 상반된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류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자신의 미래와 관련된 일련의 불안들과 연결시켰다. 마르크스는 열 일곱 살 때부터 이상적인 결정과 인간 생활의 실제적인 결정들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한다고 보았다.[1]

트리어의 고등학교를 나온 뒤 1835년 10월 본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하였다. 아들이 자신처럼 변호사가 되기를 바란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고, 점점 법학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아들의 변화를 보면서 아버지는 아들이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그에 맞는 ‘사회적 지위’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을 걱정했으며, 결국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본 대학교에서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전학했다.[2] 그러나 베를린에서도 그는 역사와 철학에 몰두하였다.

베를린에서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에게서 미학적, 철학적 혁명의 방안을 찾고자 하는 브루노 바우어 등의 헤겔좌파, 혹은 청년헤겔학파와 교제하였는데 당시 그의 동료들은 박학다식함과 논리로 토론을 주도하는 청년 마르크스의 똑똑함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당시 독일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철학은 단연 헤겔의 것이었다. 헤겔은 역사와 사회의 발전은 절대정신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며 그 과정은 변증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절대정신의 대변자이자, 실현도구라고 보았으며, 그 보편국가가 프로이센이라고 얘기함으로써 프로이센에 철학적 존재 이유를 제공했다.

이러한 헤겔에 대해 청년헤겔학파로부터 비판이 가해졌다. 그들은 헤겔 사상의 기본적인 틀을 수용하면서도 절대정신을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라고 파악했다. 아울러 프로이센을 보편국가라고 주장한 헤겔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의 사상을 좌파적으로 해석했다. 이것이 반체제적 혁명의 씨앗이 된다고 여긴 프로이센 정부에 인해 청년헤겔주의자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 가해진다. 마르크스의 활동도 이에 영향을 받아 계속 제약되었다.

결국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1841년에 청년 마르크스는 예나 대학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점〉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청년헤겔학파,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1836년 《기독교의 본질》을 비롯한 기독교 비판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되었다. 후에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전도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정리, 헤겔철학에 과학적 요소를 부여하고자 했다.


박사학위 과정을 마친 후 고향으로 돌아온 마르크스는 청년좌파들과 반체제적 언론인 라인신문을 창간하고 편집장을 맡아 언론활동에 투신했다. 이 시기에 사고의 전환점, 특히 철학에서 변화를 맞이한다. 당시 독일 철학은 대단히 관념적이며 추상적이었는데, 철학적 이슈에서 사회경제적, 좀 더 나아가자면 '정치경제적인' 이슈로 방향을 전환한다. 라인 지방 농부들을 취재하던 도중 경제와 관련된 주제의 기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1843년에 《라인신문》은 폐간되었는데, 당시 마르크스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프로이센에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편집장직을 사임합니다.'라는 광고문구와 프로메테우스(마르크스)가 독수리(프로이센)에게 괴롭힘당하는 그림으로 저항했다.

1843년에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을 발표하는데 청년헤겔학파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나, 거기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 생존에서 물질적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유물론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


독일에서 급진좌파운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마르크스는 프랑스 파리 시로 이주한다. 본격적으로 프랑스 사회주의자의 혁명적 집단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되었는데, 마르크스의 정치사상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의인동맹(義人同盟, 독일어: Bund der Gerechten)이라는 비밀결사단체에 가입하는데, 행동주의적, 급진적, 혁명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비밀결사체였다. 이 단체를 공산주의자 연맹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쓴 것이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이다. 마르크스 사상의 특징적 일부가 이 당시 저술에 나타난다. 독일의 관념철학에서 벗어나 역사유물론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844년에 쓴 《유태인 문제에 관해서》에서 그는 유태인들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사적으로 해방된 것이지 인간으로서 해방된 것은 아니다, 사적 소유와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필요하다, 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해서》는 독일의 신흥 부르주아들의 취약성을 지적하면서 프롤레타리아만이 역사적 과업을 지탱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파리수고(유고)'로 알려진 《경제학과 철학에 관한 수고》에서는 역사유물론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역할과 생산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소외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의 소외론은 인간 해방을 갈구하는 휴머니스트로서의 마르크스를 강조하는 학자들의 주장 근거가 되고 있다. 실제 마르크스는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에서 소외된다고 《소외론》초판에서 주장했다. 이 해에 그는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난다. 파리 시절의 마르크스는 정열적으로 활동했으나, 급진적 인물이 체류하는 것을 기피한 프랑스 정부에 의해 추방되었고,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죽을 때까지 영국에서 지내게 된다.


1846년에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발표한다. 600여 페이지의 방대한 저작인 이 책은 엥겔스와 공저로 되어 있으나, 사실상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가득 차있다. 이 저작에서 마르크스는 청년헤겔주의자와 결별을 선언하고 있으며 그들과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저작은 마르크스의 사상 발전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역사유물론에 대하여 최초로 체계적으로 서술했으며,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자본주의 자체가 잉태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1848년 2월,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의인동맹의 선언문으로서 발표된 것이다. 당시 이 조직은 블랑키와의 차별을 선언하면서 비밀결사에서 공개조직으로 탈바꿈하려하고 있었다. 혁명적 이들에 의한 소수의 급진적 음모와 비밀결사를 선호하던 블랑키파와 그 주도권 장악을 놓고 치열한 논쟁과 암투가 있었고, 결국 마르크스파가 다수가 되어 공산주의자동맹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들이 이런 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1848년 2월 혁명 덕분이었다. 혁명적 낙관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공개적인 단체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공산당 선언 속에는 새로운 이론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과거 마르크스가 그의 저작물에서 이야기한 자본주의의 필연적 몰락과 프롤레타리아 승리의 확언을 선언문에 맞게 단순명료하게 재구성한 것이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마르크스의 초기 사상에서 보이는 휴머니즘적 철학적 고뇌는 상당히 감소하고 정치경제학적 내용의 비중이 커지게 된다. 이에 대해 알튀세르는 인식론적 단절을 보여준다고 언급했다.

1850년에는 《프랑스에서 계급투쟁》, 1852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를 차례로 발표하는데, 계급 투쟁이 정치적 차원에서 어떻게 복잡하게 전개될 수 있는가에 대해 서술한 것이었다. 이 저작들은 경제적 시각이 아닌 정치적 시각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1850년대는 혁명을 즉,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시련의 시기였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 시대의 흐름이 거꾸로 흐르는 수구반동적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1840년대 경제 공황을 겪고 있던 유럽 경제는 1850년대에 들어와 호황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여기에서 채굴된 이 유럽으로 들어왔고, 교통수단의 속도가 사람이나 의 힘을 이용할 때보다 빠른 증기 엔진이 운송수단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 현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급진파들의 분열이 생겨나게 되었다. 즉각적 혁명을 주장하는 이들과 혁명의 절정기는 이미 지나갔다는 분파로 분열된 것이다. 후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이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대영박물관에서 영국의 정치경제학을 완전히 습득하여 마르크스 자신의 정치경제학이 성숙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자본론》 집필을 구상해나가는 속에서 초고(Grundrisse)가 발견되었다.

이 초고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지적 발전과정과 사적 유물론의 기본적 원칙을 정리해 놓고 있다. 마르크스의 초기사상에서는 비판적인 철학적(critical philosophy) 경향성이 나타나고 있다. 변증법을 통해 현실을 부정하며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1846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운동과 메커니즘, 구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860년대에 나온 《자본론》에 그러한 연구가 결집되어 나타난다. 이것이 역사까지 확대되어 형성된 사상이 역사유물론이다. 역사유물론은 마르크스 사상의 독특한 핵심이다.


마르크스는 명석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이 있으나 자기 주장이 강하고 독선적인 면이 있었다고 한다. 과 사교생활을 좋아해 모든 친구들과 불화를 일으켜가며 논쟁을 벌이기 일쑤였고, 술집이 운집된 골목에서 술집을 모두 돌아다니다가 밤을 새우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3] 그랬기에 마르크스를 존경하는 사람은 많았어도 친우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엥겔스가 “그의 반대자는 많았어도 개인적인 적은 없었다”고 했듯이 그렇게 냉정하지는 않았고, 맑스가 논쟁에서 고집이 센 모습을 보였던 것도 모난 성격을 가져서가 아니라, 당시 유럽 지식인들사이에서 난립하던 이상적 사회주의들을 비판함으로써 과학적 사회주의로 귀결하기 위함이었다는 평가가 있다.[4] 그 근거로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그가 살던 시대에 난립하던 사회주의 조류들인 보수적 사회주의, 부르주아 사회주의, 추상적인 사회주의등을 풍자와 논박으로 비판한다.

맑스는 성격이 따뜻해서 자신도 어렵게 살았지만 손님을 박대하는 법이 없었고, 어린이들을 좋아해서 딸 엘레노어에게 부자들이 목수의 아들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해 주면서도, “예수가 어린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5]

외적으로는 부르주아지를 비난하면서도 사적으로는 부인과 아이들이 부르주아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안간힘을 썼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세상에 알려진 ‘그의 가난’은 절대적 가난이 아니라, 부유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상대적 가난’이라는 얘기다. [3]

그가 호색한으로 애인이 많았을 뿐 아니라, 아내 예니 베스트팔렌이 데리고 온 하녀 헬렌 다무스와의 관계로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은 유명하다. 이에 대해 평생의 동지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보호하기 위해 “마르크스 아이가 아니라 내 아이다.”라고까지 선언하지만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프레데릭’이라는 이름이 붙은 아이는 후에 외과의가 되지만 프레데릭이 ‘위대한 예언자’의 아들이라는 별칭은 떨어지지 않았다. [6]

또한 마르크스는 주말이면 가족들과 산책을 하고 부인의 임종을 지킬만큼 처자식에게는 자상한 가장이었지만 부모와 형제자매에게는 경원시했다 한다. 실제로 가난에 시달릴 때 유산을 염두에 두고 아픈 어머니와 갈등을 빚기도 했었다. 그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어차피 병도 들고 살만큼 산 우리 어머니가 죽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맑스는 아버지 하인리히의 사진을 관에 묻히는 순간까지 소지하고 있었고, 맑스가 부모와 형제자매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다기보다는 맑스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이 맑스를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는 평가가 있다. 그 근거로 맑스의 모친은 자본론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 자본이나 만들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릴 때 죽은 아이들이 많고, 오직 일리노어와 로라, 제니 막스 세 딸만 성년으로 자랐다. 하지만, 일리노어는 1898년에 43살의 나이로자살하고 로라는 1911년에 66세의 나이로 자살한다. 제니는 1883년 심장병으로 39세에 목숨을 잃었다.

그 외에도 프레데릭의 증손녀인 힐다 마르크스와 인터뷰한 러시아 기사에 따르면 사생아인 프레데릭의 손자는 나치 게슈타포로 활동하다가 러시아 전선에서 전사했다.


흔히 맑스하면 유대교와 기독교사이에서의 방황과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 때문에 보수적인 종교인들로부터 반(反)종교적 인물로 잘못 인식되고 있지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은 종교가 현실의 사회경제적 모순으로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현실도피적 경향을 나타내도록 기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종교는 민중들이 내세에만 관심을 갖게 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자본의 억압과 착취를 사회비판과 계급투쟁으로 극복하지 못하게 하는 '인민의 아편'이었던 것이다. 또한 맑스는 종교를 가리켜 민중의 환상적 행복이라고 했는데, 이 또한 종교를 반대하는 말이 아니라 종교의 현실도피적 경향을 비판한 말이다. 실제로 민중들은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회적 억압과 착취를 계급투쟁으로 극복할 방법이 없을때는 하늘나라극락메시아미륵 같은 종교적 환상을 만들어낸다. 즉, 마르크스는 종교의 현실도피적 경향을 비판한 것이지 종교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인본주의 존중

실제로 맑스는 딸 엘리노어가 교회에서 두려움의 감정을 갖자 "부자들이 목수의 아들을 죽인 것"을 말해주면서도 "목수의 아들이 어린이들을 사랑하였으므로 기독교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야."라고 말했다.기독교가 가진 자들, 권력있는 자들과 결탁하여 예수를 죽이는 것에 대해 비판했지만, 기독교의 인본주의적 가치를 존중했다는 뜻이다. 현대 맑스주의도 기독교를 인본주의라는 공동가치를 화두로 대화해오고 있다. [5]


사회혁명

마르크스주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논쟁을 통과했다. 러시아혁명을 성공시킴으로써 비로소 마르크스주의는 정통으로 확립된다. 그러나 스탈린 집권 후 마르크스주의는 왜곡되고 이에 반발해 본래의 마르크스로 회귀하려는 새로운 세력이 유럽에서 부상한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과 아도르노 등이 주도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이 두각을 나타냈다. 이는 68혁명의 사상적 좌표가 되기도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시련은 사상의 종주국 소련에서 발생했다. 고르바초프가 등장하여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면서 자본주의 진영과 대결이 아닌 타협을 모색하던 중, 걷잡을 수 없는 수렁으로 추락한 것이다. 끝내 소련은 해체되고 마르크스주의도 매우 극적인 종언을 고하는 듯했다. 어느날 갑자기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정치이념이 형체도 없이 현실 정치에서 사라졌다.

마르크스주의의 재평가

그러나 애초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극단의 모순을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탄생한 이상, 자본주의와 운명을 달리 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주의 영향력은 특히 학문적으로, 여전히 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치밀한 분석력과 통찰력은 현대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대 사회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는 필수다.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해명과 자본주의 세계화와 계층화에 대한 정확한 비판은 탁월하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전 지구로 확장되면서 부자와 빈자,부국과 빈국의 차이는 더욱 커지고 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인간소외, 물신숭배, 생산과 소비의 과잉, 공황의 문제 등도 지금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려면 싫든 좋든 마르크스를 탐구하고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사회과학자라면 마르크스에 신세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듯, 마르크스에게는 독보적인 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2005년BBC방송은 전문가들에게 설문조사를 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있는 사상가를 뽑았다. 단연 1위는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주의가 비록 현실에서 다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자본주의를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비판했고 여러 대안을 세울 수있게 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유주의 정치철학자인 이사야 벌린은 "일부 결론상의 오류가 있었지만 마르크스 사상이 갖는 중요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면서 "그의 사상은 역사,사회를 바라볼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인간의 인식을 높여주며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고 강조했다.




마르크스주의(Marxism)

마르크스주의(Marxism)은 독일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칼 마르크스(Karl Marx)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공동으로 작업하여 완성되어진 학문이다. 이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이론 및 정치이론이다. 당시 만연했던 사회주의 이론인 '프랑스 사회주의'와 프루동의 사회주의 이론같은 이상적인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을 처음으로 시작하고 탄생된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와 저술한 '자본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에서도 사회주의 체제를 실현시킬 수 있는 자신감을 여러 사회주의자들에게 주므로써 '현실 사회주의' 즉, 현대의 공산주의인 의미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초적인 학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의 기초적인 철학개념은 변증법, 유물론, 잉여가치론, 노동가치설이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으로 인해 나타나는 모순, 불의를 자본을 부정하므로써 없애겠다는 철학적 의미가 담긴 현실적인 사회주의이며 여태껏 있어왔던 이상적 사회주의이자 무정부주의적인 사회주의와 반대로 노동자로 이루어진 정부를 두어야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기독교-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체계중 하나인 '유물론'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동작업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완벽한 사회주의적 유물론으로 재탄생하였다. 이렇게 유물론을 기본 철학개념으로 가지고 있던 마르크스주의는 본래 유물론의 모든 물질은 '생각'을 가지고있고 그러한 물질들은 다른 물질들에 의한 정신으로 인해 또 다르게 탄생되었다는 철학개념에 의해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뜻을 부정하게 되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자체에서는 이러한 창조신에 대한 것을 부정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되어져 왔고 만약에 양립되어져 나온 학문이 있어도 그것은 사회주의에 속하지않은 종파사상에 불과하다고 판단되어졌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인간성의 완전한 해방을 목표로 했다. 이러한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의 겉뿌리였던 사회주의와 그 사회주의안에 포함되었던 공산주의에서도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계급해방은 당시 고위직에 속한 종교인에 대한 반감이었으므로 역시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와 연계해서 볼 때 종교는 이 학문적 사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사라져야할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를 필두로하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현재 보수적인 종교인들에 의해 배제되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 즉, 모순이 드러나게 되자 진보적인 종교인들은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의 양립을 주장하기도하며 마르크스주의에서 나타나는 변증법에 의한 사회구조적 모순과 불의를 없앤다는 의미는 성서의 구원과 같은 개념으로 보아 한층 발전된 진보적인 개신교를 만들겠다는 목사들도 이러한 양립을 주장한다. 물론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부족한 면이있다.

 

 - 경제개념 -

 사실 마르크스주의를 절대적인 정치사상으로 내건 국가들은 경제체제에 관해서 혼합경제체제도 아니고 시장경제체제도 아닌 계획경제체제만을 선호하게 되어있으며 그것은 곧 사회주의체제를 말하며 쉽게말해 공산주의의 경제개념이다. 하지만 오늘날 여러 학문들이 오고가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적 개념은 자본주의의 경제적 개념의 모순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으며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는 절대적인 정치사상으로는 쓰지않는다. 오로지 이 마르크스주의는 보조적인 위치에 놓여져있다.

 

 하지만 역시 자본주의식 경제체제로만 가게되면 역시 모순이 생기고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문제점이 나타나므로 선진국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좌파계열 쉽게 말해 사회적 진보계열들의 아이콘과 같은 학문으로 여기고있다.

 

 - 정치, 사회개념 -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노동자가 없으면 국가가 있을 수도 없으며 자본가도 없으며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노동자를 거느리고 있고 그들을 사용하고 있으므로써 모든게 돌아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노동자가 없으면 역시 돌아갈 수 없는 물레방아와 같다고 주장하며 자본가들을 취약한 인간체의 개념으로 여기고있다. 이러한 개념이 있는 마르크스주의는 후에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이 만든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또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제를 주장하며 그 정치적인 방법을 뒷받침해준 학문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정치, 사회계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는 마르크스주의는 자본가들에 의해 미움을 받아도 충분한 사상이기는 하다.

 

 -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

 위에 설명했듯이 마르크스주의를 절대적 정치사상으로 내걸고 국가를 이끌게 된다면 경제체제는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의 경제체제가 된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공산주의식 경제체제를 지향한다. 하지만 이러한 틀을 없앤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의 등소평은 사회주의 체제이면서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식인 시장경제체제를 최초로 구현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중국은 결국 주된 사상이었던 마르크스주의 즉 사회주의 체제를 하므로써 생기는 장점의 주된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상태가 되버렸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다시말해 주된 정치사상보다는 일부를 자본주의의 모순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되어져야 하거나 보조적인 정치사상이 되어야 적당할 것이다.

 

 - 마르크스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 -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다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목표와는 다르게 '절대적인 사회주의체제의 공산주의 정권'을 목표로 하며 더 나아가 그것을 실현시키는 수단까지 서술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의하면 계급해방, 사회주의 실현은 모두 '폭력적 혁명'으로 실현해야하며 이것을 부정하는 자칭 사회주의의 사상들은 사회주의계열이 아닌 종파사상에 불과하다는 것임을 주장하고있다. 또한 '민주주의'라는 표현보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중요시하며 어떠한 사상이든 그에 관한 폭력을 부정하는 민주주의에서와는 상반되게 사상을 위해서라면 폭력의 허용을 주장하고있다. 따라서 학술적인 면만 서술한 '마르크스주의'와는 달리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이러한 사회주의 정권을 구축하는 모든 수단방법을 일러주고있다.

 

 - 대한민국에서의 마르크스주의 -

 대한민국에서는 마르크스주의는 공산주의와 같은 뜻으로 여긴다. 사실 틀린말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의 정치, 사회, 철학, 경제를 모두 모아놓은 학문이자 사상이고 공산주의는 그중에 경제와 정치의 혼합을 빼온 사상이다. 그렇지만 현재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경제체제인 '계획경제체제'를 주된 경제체제로 사용하게 된다면 역시 국가의 경제상태가 위태롭게 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실패성이 짙은 공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뜻으로 여기기 보다는 사회주의적 정치, 사회, 철학, 경제를 모두 혼합한 마르크스주의와 별개로 두는게 좋다. 또한 공산주의에서 주장하는 계획경제체제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증시거품이 많아지고 시장의 자유가 심하여 규제가 필요할 때에는 계획경제체제에 속하는 경제이념을 실행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러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경제체제를 100%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사회주의 체제이자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되었던 북한 즉,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DPROK)에 의해 침략을 받았던 나라이고 그들과 벌인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고 수차례 그들의 도발이 이어졌으므로 역시 대한민국에서는 공산주의 즉 포괄적인 개념으로 말해 '마르크스주의'는 적대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필자는 이글을 쓰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제 북한은 정치, 사회적 또 철학적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라고 보기 어려우며 계급해방을 주장하는 이러한 마르크스주의가 집필된 서적들은 향후 북한에서 반정부 단체를 낳게 할 우려가 있어 분서(焚書)된지 오래이다. 또한 북한의 헌법에 존재하는 공식이념은 '주체사상'이며 "주체사상의 행동강령으로 지목한다."는 '김일성주의'가 되며 곧 북한의 체제는 '김일성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서로 상호작용하며 공생해야한다. 자본주의는 현재 공산권 국가를 제외한 주된 정치, 경제적 체제로 채택되었지만 그로인해 생기는 자본으로 인한 사회모순, 불의는 마르크스주의로 보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자본주의 계열 사상들의 공통점은 자본가가 없으면 국고는 빈다는 것이고 모든 사회주의 계열 사상들의 공통점은 노동자가 없으면 자본가들도 없다는 것이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서로의 차이점을 이해하고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공생할 수 있다면 그 때 비로소 건전한 정치,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복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일단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이라는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는 탐욕스러운 부르주아들에게 핍박받는 프롤레타리아들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며, 프롤레타리아들을 위한 나라, 프롤레타리아들을 위한 새로운 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자본주의에서처럼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윤이 불공평하게 돌아가지 않도록, "함께 일하고 공평하게 나누자!" 하는 사상이 담겨 있다는 얘깁니다. 쉽게 말해서 자본주의에서 8:2로 나눈다면, 5:5로 나누어 서로에게 이득이 되도록 하는 나라를 만들자는 얘기죠.

 하지만, 공산주의 국가에서 누군가가 복지의 혜택을 받는다면?
얘기는 달라지는 것이죠. 누군가는 열심히 일을 해야만 하는데, 누군가는 복지의 혜택을 받는다? 이렇게 되면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공산주의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마르크스는 복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회민주주의는 복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주의를 민주적 의회 정치로 정착시키려는 사상입니다.

 즉... 사회주의 계열 내에서 보수적인 사회주의는 사회민주주의, 진보적인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폭력과 혁명으로서 진정한 사회주의를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사회민주주의는 자유주의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의원 제도를 통하여 사회주의를 온건적으로 이끌어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상에서 볼 수 있는 단어인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자유와 평등을 중요시합니다.
즉, 공산주의가 결과의 평등을 중요시한다면 사회민주주의는 기회의 평등을 중요시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자본주의와 비슷한 점이 없지않아 있습니다.)

 사회민주주의가 기회의 평등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에서는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복지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신 마르크스 주의


마르크스주의는 경제관계(생산자-노동자)인 하부구조에 권력관계(지배자-피지배자)인 상부구조가 
귀속되어 있어서 하부구조에 따라 상부구조가 바뀐다는 경제(하부구조)결정론의 입장이구요. 
이에 반해 신마르크스주의는 경제결정론이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대응하는, 
즉 경제에만 관련되어 결정된다는 점을 비판하는 겁니다. 경제관계에 100%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하부구조에 상부구조가 종속되는 것을 모순된 사회구조로 보고 상부구조에 상대적인 자율성이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상부구조들(국가, 교육, 언론, 군대, 경찰 등)이 자율성을 지니고 
이데올로기 주입으로 기존 질서를 정당화한다는 것입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마르크스주의(Neo-Marxism)는 이탈리아의 그람시헝가리의 루카치 등이 1920년대에 주장한 마르크스주의의 분파 사상이다. 1960년대의 신좌익 사상에 영향을 주었으며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 등 막스 호르크하이머를 중심으로 한 아도르노·마르쿠제에 의해 1930년대에 계승된 신좌익 사상이다.

초기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20세기 초반까지 최초의 논리적 사회주의 사상이란 이유로 그 명성을 얻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사회의 하부 구조인 경제 부분만을 언급하는 것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에 확실한 사회·정치 이론이 없다는 한계에 봉착했다. 이에, 상부 구조인 사회·정치 이론을 정립화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인 안토니오 그람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비인간적인 문화와 인간 소외를 중점으로 문제를 다뤄 신마르크스주의 사상의 토대를 마련했다. 신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비판하면서 인간 소외에 대해 주된 문제 제기를 하고, 휴머니즘을 중시하는 특징이 있다.


교육학용어사전

신마르크스주의

[ 新 — 主義 , neo-Marxism ]

모든 사회적 현상을 생산양식과 생산관계로 설명하려는 경제결정론적인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사고에 한정하지 않고인간의 주체적 인식과 해방적 의식을 강조하는 경향의 마르크스주의적 노선.

흔히 정통 마르크스주의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소련 공산주의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항하여 싸운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였다.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한편으로는 계급투쟁이론을 특징적으로 부각시키고 교조적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워 독재체제를 이끌어 온 소련 공산주의의 왜곡된 이론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적 자본주의의 체제에서 경험하는 인간소외를 극복하고 해방적 의식을 실현하려는 데 주된 관심을 바쳐 왔다.

그러나 「신마르크스주의」는 하나의 독특한 사상적 노선이라기보다는 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다원적 노선의 공통된 경향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신마르크스주의자들로는 루카치(G. Lucacs), 샤프(A. Shaff) 등과 같이 동구권의 학자들도 다소 있지만 대개가 공산국가가 아닌 지역의 학자들이다. 알뛰세(L. Althusser), 보울즈(S. Bowles), 진티스(H. Gintis) 등의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블로흐(E. Bloch) 등의 신비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번스타인(E. Bernstein) 등의 경험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싸르뜨르(J. Sartre) 등의 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메를로-뽕띠(M. Merleau-Ponty), 프레이리(P. Freire) 등의 현상학적 마르크스주의,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 아도르노(T. W. Adorno), 마르쿠제(H. Marcuse), 프롬(E. Fromm), 하버마스(J. Habermas) 등의 비판이론적 마르크스주의, 그 외에인본주의로 일컬어지는 여러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있다.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은 주로 인본주의, 소외이론, 관료주의 비판, 자본주의적 산업사회의 비판, 혁명에 있어서의 지식인의 역할 등에 이론적 관심을 두고 있다. 교육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주로 자본주의적 사회체제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기능, 억압적 문화의 구조, 소외의 개념, 실증주의의 도구적 합리성 등의 분석, 그리고 해방적 이성의 실현을 위한 문제 등에 관심이 주어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마르크스주의 [新 — 主義, neo-Marxism] (교육학용어사전, 1995.6.29, 하우동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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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근대(Modern times) 철학

- 정신적 변혁

근대 철학이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정확한 날짜와 그 시작의 출발점을 제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중세와 근대의 뚜렷한 구분은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카르트(1596~1650)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초는 스콜라철학을 비판한 이탈리아 인문주의와 유럽의 르네상스 철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근대적 사유의 출현은 17세기 초에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15, 16세기의 아주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사건이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에 의한 인쇄술의 발명(1450년경), 터키의 콘스탄티노플 정복(1453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1492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1517년), 마젤란으 최초의 세계 일주(1519~1522년: 이 사건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입증했다), 중세의 초국가적인 정치 통일체에서 벗어나 유럽이 국민 국가를 형성한 것 등이다.

요켠대 근대으 근본 사상, 즉 근대 정신의 특징은 진보 사상이다. 무엇을 향한 진보인가? 근대가 진행되는 동안 두 개의 동인(動因)이 점차 인식이 가능하게 드러나고, 이 두 요소는 다양하게 서로 섞이거나 분리되기도 하며, 또 서로를 비판하기도 한다. 인간성의 완성으로서의 도덕적 진보와 자연에 대한 지배로서의 과학, 기술적인 진보가 바로 이 두 요소이다. 근대의 인간은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자신의 활동성에 힘입어 자신의 책임하에 새로운 정신적 집을 구축하고자 도전한다. 근대의 인간은 새롭게 발견되 무한한 현세에서 새로운 방향 설정의 토대가 마련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의 정신적인 표식(질서 있고 유한하며 조망 가능한 우주와의 조화)과 중세의 정신적인 표식(초월적인 구원)은 새롭게 해석되며, 창조적인 방식으로 다시 수용된다.

중세에는 지식의 대상이 인간이 아닌 인간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책-성경과 그에 상응하는 책들-이었다. 몇몇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 자연이 탐구된 것이 아니라 권위를 가진 텍스트들이 탐구의 대상이 되어 해석되었다. 주석들과 주석에 대한 주석들이 씌어졌다. 스콜라철학에서 지식은 대학에서 의무적으로 읽어야 했던 그런 텍스트 독해가 바탕이 되었다. 논란이 되는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나 공인된 다른 텍스트들보다 훌륭한 해석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었다. 

이렇게 책의 권위에 대한 맹신과 단절하고 새롭게 실험적인 방식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갈릴레오 갈리레이였다. 그는 1632년에 종교 재판을 초래한 위대한 저서인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어느 날 베네치아에 있는 아주 유명한 의사의 집에 들렀다. 매우 박식하고 숙련된 그 해부학자의 손에서 어떻게 시체가 해부되는지를 보기 위해 연구자 혹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그 집에 들락거렸다. 이날은 신경의 근원과 그 철발점을 탐구하고 있었다. 사실 이 문제는 갈레노스(고대 그리스의 명의)를 따르는 의사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 사이에서 펼쳐진 유명한 논쟁거리였다. 그 의사는 신경의 주줄기가 뇌에서 출발하여 목을 거쳐 척추로 뻗어 있고, 몸 전체로 가지를 치고 있으며, 또 아주 가느다란 줄기만이 심장으로 뻗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 자리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로 알려진 한 신사가 있었다. 그 해부학자는 이 신사 때문에 이례적으로 그 모든 해부 과정을 아주 세밀하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신경의 근원이 심장이 아니라 뇌라는 사실을 이제는 확신할 수 있는지 물었다. 이 신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아주 명백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신경의 근원지가 심장이라고 분명하게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가 없었다면, 당신이 옳다는 것을 일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갈릴레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무시했다. 순수하게 근대의 자연과학을 양적이며, 측정 가능한 운동 관계로 규정한 그는 "자연과학에서는 추론이 참되고 필연적이어야 하며 1,000명의 데모스테네스와 1,000명의 아리스토텔레스도 사실과는 다르게 거짓된 것을 참된 것으로 만들 수 없다"고 했다, 갈릴레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은 가능한 자연 경험 전체를 이미 포함하고 있다'는 중세적인 확신에 따라 행동했다면, 이전 것보다 성능이 좋은 망원경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 망원경으로 어떤 책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목성은 행성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 행성들은 목성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1553년에 르네상스의 철학자 마리우스 니촐리우스는 스콜라철학의 경직된 자연과학 개념들에 대항하여 '스승의 말에 서약하는 의무'에서 벗어나, 온갖 종류의 '교조적 제사장들'과 '남의 의견만을 추종하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노예근성의 천민들'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도살장'에 끌려가지 않는 그런 참된 철학을 추구하겠다고 공언했다.

니촐리우스는 진리의 보편 원리들 중 하나는, 해당 대상의 진리와 그 본성이 요청하듯이 "모든 사물에 대해 사유하고 판단함에 있어서 자유롭고 선입관을 갖지 않는 것이다. 이는 참다운 철학을 위해 힘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든 철학적 분파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누구나 어떤 사태의 진리를 판단함에 있어서 그 판단 결과가 자신에게 긍정적으로 현상하건 부정적으로 현상하건 간에 그것을 최종적으로 자유롭게, 제약 없이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그가 어떤 명성에, 그것도 아주 유명한 사람의 가르침에 근거한 명성에 얽매이거나 제약될 경우, 그런 자유로운 판단이 방해받을 것이다. 중요한 사태에 대해 판단하고 입장 정리를 할 때, 권위나 이미 주어진 견해에 의지하기보다 합리적인 논증에 의지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일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진리 추구에 있어서나 숨겨진 연관성을 추적해 가는 데 있어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과거나 현대의 다른 어떤 저자들보다 자신의 오감, 지성, 사유, 기억, 사물 들과의 직접적인 교류와 경험 등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그가 죽은 해에 출간된 저서에서 고대로부터 내려온 중세의 세계상을 무너뜨렸다. 지구는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지구는 다른 행성들과 같이 하나의 행성에 불과하다.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돈다. 지구는 구형이며,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물리학과 프톨레마이오스적인 체계의 권위로 거의 2,000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지구 중심적인 세계상은 태양 중심적인 세계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코페르티쿠스적인 전황은 '세계의 무한성과 무한한 태양계들의 존재'라는 지오르다노 부르노의 세계상에 의해 다시 한번 첨예화된다. 이 무한한 세계에서는 지구나 태양이 중심일 수 없다. 이 세계는 도처에 세계의 중심이 잇으면서 동시에 그 중심이 어디에도 없다 이제 세계는 지금까지 신에게만 부여되었던 '무한성'이라는 속성을 갖게 된다. 열린 우주라는 관념은 고대와 중세의 폐쇄된 세계상을 완전히 파괴시켰다. 부르노는 이런 엄청난 도발 행위로 인해 1600년 로마에서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결국 산 채로 화형당해 정신의 자유를 위해 순교했다.


- 르네상스 철학에서 계몽으로

이탈리아 인문주의는 1350~1460년 사이에 중세 스콜라철학에 맞서기 시작했다. 영원한 진리를 주장하는 형이상학, 즉 존재의 보편적 구조에 대한 학성을 거부하며, 구전되거나 문자로 전승된 인간의 생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관심사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인문주의자들은 언어의 기능과 변화에 대해 통찰함으로써 인간이 역사적 존재임을 보이기 위해 고대의 텍스트에 다시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의 방법은 대상 혹은 존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서부터 출발했다(로렌초 발라). 박식하기보다는 더 훌륜하게 되는 것이 인문주의의 목표이다(페트라르카).

이탈리아 인문주의에 의해 처음 시작된 르네상스 철학은 통일적인 모습을 띠지 않았다. 이 철학은 전 유럽으로 전파되어 종교 개혁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형이상학에 다시 문호를 개방한 르네상스('고대의 부활'이라는 의미) 철학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전체 유산과 로마의 철학을 되살린다. 거의 1,000년이 지난 후 플라톤의 아카데미가 다시 부활하였다(1440년 플로렌츠에 생겨나 플라톤 저작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함). 인간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우주의 위계질서에서 인간은 동물과 신 사이의 어떤 중간 지점에 자리한다. 인간 존엄의 핵심은 자유이다. 인간에게 이러한 자유가 보장될 때, 예술적인 창조 행위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가고, 규정하며, 확고한 입지를 세워 나갈 수 있다. 행위가 존재를 규정한다(피코 델라 미란돌라).

16세기의 르네상스 철학은 다양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자연철학 : 주술, 연금술, 점성술과 같은 상징적 지식은 자연의 완성을 돕는다(파르셀수스 폰 호헨하임). 자연신비 : 자연은 질적인 특서들로 가득 차 있다. 즉 자연은 신의 징표로서, 수학적으로 측정되고 양화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이해의 방식으로만 판독 될 수 있는 '근원적인 정령들'로 가득 차 있다(야콥 뵈메). 회의주의 : 고대의 회의주의 전통에서 유래하는 자유로운 비판 정신이 나타난다(몽테뉴). 법철학 : 근대적인 자연법(인간의 본성에서 따르는 법)과 국제법의 토대가 마련되었다.(유고 그로티우스).

이와 병행하여 스콜라철학의 중세적 전통도 스페인에서 계승되었다(프란시스코 수아레즈).

세계 전체는 점차 인식하는 주체가 조종할 수 있는 객체로 되며, 인간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대상으로 파악된다. 진보적인 세계 인식과 세계 개발의 올바른 방법이 모색되었다. 갈릴레이는 자연을 측정할 수 있는 수학적인 프로그램을 이용함으로써 영향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혁명을 이뤄 낸다. "측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측정하고, 측정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측정할 수 있게 하라" 갈릴레이는 이미 바로크 시대에 17, 18세기의 역학적인 사유와 철학을 위한 기초를 세웠다. 

두 개의 인식 방식, 합리론과 경험론은 17세기와 18세가 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합리론은 이성에, 경험론은 경험에 바탕을 둔다. 진리의 모델을 수학에서 취하는 합리론자들은 감각적 지각과는 무관하게, 이성이 독자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순수하게 개념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경험적 사실에서 출발하는 경험주의자들은 이 사실들이 감각적 지각을 통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현실성이 없거나 인식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어, 합리론자인 데카르트에 따르면 신(神) 관념과 같은 본유 관념들이 존재한다. 본유 관념에 기초한 순수한 합리적 인식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경험론자인 로크에게 있어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그에게 있어서 영혼은 우연적인 경험에 의해서 비로소 채워지는 백지(tabula reas)이며, 본유 관념이란 잘못도니 가정에 불과하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볼프 등은 이성의 보편적 지배라는 사상을 대변하는 합리주의의 위대한 형이상학적 체계의 대표자이다. 데카르트는 인식의 수학적 확실성을 원한다. 엄격한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진 그에 따르면, 순수하게 정신적인 사유의 세계와 순수하게 물질적인 외부 세계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 영혼이 없는 물질세계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거대한 기계 장치이다. 따라서 이 물질 세계는 정확하게 계산될 수 있고 지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동물은 영혼이 없는 유용한 기계이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범신론(자연 전체를 신의 형태로 간주하는 이론)을 합리주의적으로 기술할 때 유클리드의 기하학에 따른다. 그는 정의와 공리에서 출발하여 증명 방식에 따라 모든 명제들을 연역한다. 라이프니츠의 목표는 철학에 있어서 일종의 대수학을, 즉 모든 질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에도 타당한 보편 수학을 찾는 것이었다. 독일의 가장 영향력 있는 계몽주의 철학자인 볼프는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형이상학을 체계화한다. 이성과 덕 그리고 행복은 인간 세상에서 확대되어야 한다.

경험론의 대표자이자 부분적으로 반형이상학적인 입장을 취하는 철학자로는 베이컨, 로크, 버클리, 흄 등을 들 수 있다. 베이컨은 모든 학문들을 방법론적으로, 포괄적으로 개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편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로크는 경험 개념을 탐구한다. 그의 으뜸가는 경험주의적인 명제는 다음과 같다. "감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오성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버클리에게는 경험만 존재한다. 그는 경험 외부에 있는 물질세계의 존재나, 경험과 무관한 물질세계의 존재를 무의미한 중복으로 거부한다. 회의주의자 은 일상 경험의 기본 구조, 즉 인과율의 근본 구조가 불확실한 믿음이나 사변적 해석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사건들의 시간적 전후 관계만 지각할 수 있을 뿐, 그 원인을 지각할 수 없다. 우리는 관찰된 시간적 전후 관계를 따져 곧바로 그 이유를 추론하는 잘못을 범한다. 인과율을 경험에 의해서 더 이상 검증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사태에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17세기, 특히 18세기는 계몽주의시기이다. 계몽주의는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에서 1789년 프랑스대혁명에 이르는 기간이며, 또 바로크시대에서 로코코시대로의 발전기이다. 18세기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합리주의적 사유 양식과 경험주의 적인 사유 양식으로 특징지어지는 계몽주의에 어느 정도 동참하고 있다. 물론 비판적인 거리를 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시대에 세상의 표정은 밝다. 이성은 세상을 밝혀 준다. 태양은 밤을 정복한다(모차르트의 '마술 피리'). 칸트는 다음과 같은 모토를 들고 나온다. "네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몽이란 인간이 자신의 과오로 인한 미성숙 상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국가와 교회의 권위와 제도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커지고, 권력 분립과 소수자의 권리가 요청된다(로크, 몽테스키외). 볼테르는 "파렴치를 없애라!"는 구호와 함께 교회의 폐지를 외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성 종교(이신론)는 정중하게 신을 세계 밖으로 내몰아 홀로 머물러 있게 한다. 이 시기에는 보편적인 국민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계몽주의 시대는 자연에 대한 인식과 지배를 통한 인류의 진보라는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과학을 통한 해방!'은 프랑스 백과사전파(디드로)의 모토이다. 스스로를 자연의 지배자이자 소유자로 삼는 낙관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진보 사상은 도덕적 진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레싱은 자신의 저서<인류의 교육>에서 계몽이 주도하는 시대가 왔으며, 계시 진리(신약과 구약) 대신에 생동적인 이성 진리가 자리 잡는 시대가 왔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런 시대에 인간은 "선한 것을 행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의적인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경제 발전을 주도하는 부르주아 계급에서는 유용성(보상)의 관점이 팽배해졌으며, 돈이 아주 중요한 가치를 지니기 시작한다.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며, 실용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대중 철학이 관심을 끌게 되었다.

계몽의 최고봉에 위치한 칸트의 윤리학은 인간의 존엄을 강조한다. 윤리적 행위에는 "스스로에게 부여한 법 이외에는 어떤 다른 법에도 복종하지 않는 이성적 존재의 존엄이라는 이념이 바탕이 된다" 유용성을 중시하는 관점에서는 인간의 존엄이 도외시된다. 인간의 존엄은 어떤 것에도 유용하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엄은 도구화될 수 없으며,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히려 목적 그 자체이다. 즉, 인간의 존엄은 다른 어떤 높은 목적에 의해 상대화되거나, 배제될 수 없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로서 존엄을 지킬 의무가 있다. 이는 인간이 존엄성을 가지고 잇기 때문이라기보다 인간에게 존엄성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단순히 수단이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해서는 안 되고, 언제나 목적으로 존중해야 한다.

칸트는 수학과 자연과학에 방향을 맞춘 자신의 인식 이론에서 영혼, 전체로서의 세계, 신(예를 들어 신의 존재 증명) 등에 관한 초경험적인 지식을 다루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의 종언을 고한다. 이제 이러한 형이상학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형이상학의 대상들은 인식의 한계를 초월한다. 이제 남은 것은 언제나 단편적일 수밖에 없는 경험 과학적인 탐구이고, 자신의 무지에 대한 겸손한 인식이며, 철학적인 세분화이다.


- 독일 관념론의 시기

19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독일철학은 전성기를 구가한다. 문학과 철학은 상호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양자 사이에 엄격한 구분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는 개인의 운명을 통해 철학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중요한 철학서로 읽힐 수 있다. 마찬가지로 헤겔의 <정신현상학>도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수준 높은 문학 작품이다. 신인문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 그리고 독일 관념론은 대개의 경우 문학과 철학에서 동시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다양한 발전 단계를 거쳤다.

신인문주의는 세 번째 인문주의로서 고대 연구에 몰두한다(인문주의의역사는 고대의 인문주의, 르네상스 인문주의, 신인문주의로 구분될 수 있다). 신인문주의의 목표는 이상적인 인간성을 장려하는 것이다. 신인문주의의 개척자인 빙켈만은 이성을 강조하는 합리주의적 계몽의 비판가로서 그리스의 조형 예술에서 아름다운 인간의 영원한 이상을 이끌어 낸다. 모든 열정은 억제되고, 육체와 정신의 완전한 조화가 현실에서 실현된다("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성"). 헤르더는 역사를 인간성이 진보해 가는 과정으로 생각한다. 문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성을 갖도록 하는 교육"이다. 훔볼트 역시 인간의 세계 연관성을 본다. 그는 전문화된 교육 대신 인문주의적인 교양을 강조한다. 또한 그는 계산적인 오성적 인간 대신 윤리적이고 감성적인 인간을 강조한다.

독일 고전주의에서 괴테와 실러는 장차 실현될 자유롭고 아름다운 인간성에 관한 진보적 이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고귀하다 인간이여, 

 자비심 많고 선하게 도리지니!

 이것만이 

 인간을 구별한다네,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모든 존재들과." (괴테)

실현 가능한 인간성의 이상에는 자연성과 정신성도 포함된다. 실러는 경향성과 의무가 통일되어 있는 도덕성의 이상을 대변한다(칸트는 경향성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실러와 다르다). 감성적인 것이란 감각적이고 정신적인 힘들을 조화롭게 형성하는 것이다. "감각적인 인간을 합리적으로 만들기 위해 우선 감각적인 인간을 감성적으로 만드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감성적이라는 말은 '이상적인(관념적인)' '고전적인'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내 자신을 내가 현존하고 있듯이 형성함" 이라는 괴테의 교양 이념은 인간의 완서을 추구하는 창조적 행위를 강조한다.

"인간은 주변 여건을 가능한 한 많이 규정하고, 주변 여건에 의해 가능한 한 적게 규정될 때 최대의 공적을 쌓을 수 있다. 전체 세계는 건툭 기사 앞에 놓인 거대한 석재처럼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건축 기사는 우연으로 주어진 이 자연물을 가지고 아주 경제적이고 합목적적으로, 의연하게 자신의 정신에서 나오는 원형상을 만들어 나간다. 우리 밖에 있는 모든 것은 구성 요소일 뿐이며,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만들어져야 하는 것을 만들 수 있게 하는 창조적인 힘은 우리 내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이 힘은 우리의 외부, 혹은 내부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을 만들어 낼 때까지 우리를 쉬게 하지 않고 끊임없이 활동하게 한다."

낭만주의에서 나타나는 철학적, 종교적인 감정 세계와 영혼의 심연에 대한 낭만주의의 탐구는 실플라톤주의와 뵈메의 신비주의 그리고 경건주의와 유사하다. 예술은 고전주의가 추구했던 완성과 조화를 목표로 하지 않고, 오히려 전체 세계를 낭만화하는 과제, 즉 전체 세계를 무한자의 표현이자 의미로 파악하고, 알려진 것에 알려지지 않은 것의 위엄을 부여하는 끝없는 과제를 떠맡고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무한자에 대한 의미와 기호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나는 무한한 세계의 가슴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이 순간에는 세계의 영혼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세계의 모든 힘들과 그 무한한 삶을 마치 나의 삶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는 이 순간에는 나의 육체입니다."

우주는 생동적인 전체이며, 영원한 생성이고, 무한한 영혼이다. 노발리스는 시적인 상상력을 통해 보다 고차원적인 현실을 펼친다. 동경 어린 사랑을 하는 시인에게서는 자연의 가장 내적인 정신이 축제를 펼치며 춤을 춘다. 이에 반해 합리주의적인 자연 탐구자의 손에서 "다정다감한 자연은 생명력을 잃고, 경령만 일으키는 찌꺼기만 남긴다." "내가 바위에 말을 걸면 그 바위는 독특한 너(Du)가 되지 않겠는가?

독일 관념론은 형이상학에 대한 칸트의 거부를 극복하고자 하며, 전체 철학사와 자기 시대의 과학적 지식을 모두 다루며 신인문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 등이 함께 만들어 놓은 지평안에서 근대의 가장 위대한 최후의 체계를 만든다. 가장 위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철학적 개념성과 개념화된 대상성의 완벽한 체계로 완성되어야 한다.  칸트로부터 시작된 독일 관념론의 대표자는 피히테, 셸링, 헤겔이다

피히테는 다음과 같이 결심한다. "나는 자연이 아니라 내 자신의 작품이고자 한다." 노예적 본성(자연)을 지닌 사람은 사물들과 기존의 질서로 이루어진 세계, 즉 유물론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자유로운 사람은 어떤 창조적 정신을 세계의 토대로 간주하는 관념론(이상주의)을 선택하며 비합리적으로 휘둘리는 현상을 자신의 행위를 통해 극복하고자 한다. 활동적이고 자유로우며 자기 자신과 동일한 자아로부터 철학은 출발해야 한다. 자유를 향한 사유 안에서 자신을 규정해야 한다.

셸링은 조기 저서에서 정신과 물질적 자연은 근원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예술을 탐구한다. 예술은 철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정신과 자연의 동일성의 원리를 직관적으로 보여 준다. 예술은 철학을 돕는다. 예술을 통해 자연을 보는 새로운 시각이 가능해진다. "자연은 볼 수 있는 정신이고, 정신은 볼 수 없는 자연이다."

셸링은 후기에 이르러 피히테처럼 순수하게 이성을 수단으로하여 철학적인 자기 정당화와 철학적인 세계 연관성을 추구하려 함으로써 점차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근대적 이성의 전능성 요청이 힘을 잃는 데 기여한다.

헤겔은 '우주의 이성적인 상'을 제시한다. 세계에는 아직 의식되지는 않지만 활동하고 있는 이성이 있다. 이성은 스스로를 인식하는 데 온 힘을 다하며 절대적인 지식을 추구한다. "하늘과 땅 위에서 영원히 발생하는 모든 것, 즉 신의 삶과 시간적으로 행해진 모든 것이 추구하는 것은 정신이 스스로를 인식해 자신을 대상화하고, 자신을 발견해 독자성을 띠며 자신과 통합하는 것이다."

1830년대에 이르러 독일 관념론은 붕괴된다. 베토벤(1827), 헤겔(1831), 괴테(1932) 등이 사망한 해는 독일 관념론이 종말을 고한 해이기도 하다. 괴테는 1825년에 새로운 것이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슬픈 기분으로 과거를 회고한다.

"누구도 스스로를 더 이상 알지 못한다. 누구도 자신의 활동 분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누구도 자신이 가공한 질료를 파악하지 못한다. 이제 더 이상 순수한 단순성이라는 말을 꺼낼 수 없다. 천박한 언행이 범람한다. 젊은이들은 너무 수비게 흥분하며,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든다. 세상 사람들이 경탄하며 추구하는 것은 부와 빠름이다. 철도, 빠른 우편 제도, 증기선, 그리고 의사소통의 모든 가능한 수단들이 바로 교양인드이 원하는 것이며, 이것들은 서로 경쟁함으로써 결국 평범한 수준에 머물고 만다. [...] 우리들은, 아마도 우리들 중의 소수는 그렇게 빨리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대의 마지막 사람들이 될 것이다."




4. 현대(Century) 철학

- 전통과의 단절

19세기와 20세기에는 철학의 세속화 과정이 일어난다. 산업 혁명과 더불어 독일에서는 약 1830년부터 헤겔의 죽음(1831)과 시기적으로 동일하게 사유의 급진적인 현세화가 시작되었다. 세계에 대한 분명하고 총체적인 해석을 제시하고자 한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요구는 점차 의문시되고, 결국 완전히 포기된다. 과학은 철학의 권위로부터 해방되었고, 기술의 성공으로 승리를 더 견고히 했다. 거대한 철학 체계의 시대는 지나갔다.

새로운 과학적인 이론들이 세계상과 인간상에 신기원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진화론과 정신 분석학은 사유를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프로이트(1856~1939)이후 인간의 자기도취적 자기애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과학적인 연구에 의해 세 가지 거대한 모욕을 당해야했다. "나르시스적 자기애가 경험한 첫 번째 모욕은 우리의 지구가 만물의 중심이 아니라 그 크기를 상상할 수 없는 우주의 미미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과학이 이미 이와 비슷한 주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선 이러한 사실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름과 연관되어 있다. 두 번째 모욕은 생물학적인 연구에 의해 인간의 창조적 특권이 무화되고, 인간의 동물적 기원과 본성이 제거 불가능하다고 선언되었을 때이다. 이러한 가치 전도는 우리 시대에 다윈(1823~1913), 월리스와 같은 선구자들의 영향으로 동시대인들의 격렬한 반발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인간의 위대함의 추구는 오늘날의 심리학적인 연구를 통해서 세 번째, 가장 견디기 힘든 모욕을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아는 결코 자기 집의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적인 삶에서 무의식적으로 지나간 정보들에 의존해 있음을 오늘날의 심리학적인 연구를 통해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의 세계 대전, 관청에서 계획되어 공장 일처럼 수행된 대량 학살, 원자폭탄 투하 등은 20세기 진보에 대한 낙관을 중단시켰다. 게다가 20세기 후반부터 환경 위기에 대한 불안이 점점 고조되었다. 20세기의 거대 범죄를 통해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방향설정인 인간의 불가침적 존엄성이 상대화되거나 구속력을 상실하게 되면, 과학과 기술이 야만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경우 모든 기술적인 개선은 그 도덕적 결과가 어떠하든 진보로 간주된다. 윤리적으로 맹목적인 진보 사상의 관점에서 아우슈비츠의 한 사령관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말한다. "트레블린카 수용소보다 더 개선된 수용소가 구축되엇다. 트레블린카 수용소의 10개의 가스실이 200명만을 수용할 수 잇는데 우리는 한 번에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가스실을 지었다."

20, 21세기의 철학은 조망이 불가능할 정도로 입장이 다원화되었다. 고대, 중세, 근대의 사유에는 어떤 연결점들이 있었으며, 그때그때 선호되는 수학, 물리학, 사회학, 생물학, 등이 철학의 모범으로 선호되었다. 넓은 철학적 스펙트럼은 새로운 방법들과 높은 수준의 비판적 반성들, 그리고 세련되고 분화된 이론들을 포함하고 있다. 사실적인 대화이든 가상적인 대화이든 간에 대화 속에서 논증적인 상호 이해를 불가치하게 수용하는 '철학'이라는 개념은 또 다른 의미도 추가하고 있다. '철학' 개념은 온갖 형태의 정치적인 세계관으로부터 광고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한 극단적인 예로, 1980년대에 어떤 자동차 회사는 자동차의 액세서리를 파는 광고를 '철학은 팝니다'로 내보낸 바 있다.


- 19세기 철학

쇼펜하우어(1788~1860)는 정신적인 전복, 곧 형이상학적인 가치 전도를 수행한 철학자이다. 그는 의지를 인식에서 분리시킴으로써 세계가 '의지의 전능한 힘에 의해 움직인다'고 설명하며 '철학의 토대 변화'를 시도한다. 인간과 세계의 가장 내밀한 존재는 비이성적인 무엇, 곧 어두운 충동, 맹목적인 의지이다. 경험적으로 고찰해 볼 때, 인간은 신의 창조물이 아니고, 쇼펜하우어가 추정하는 것처럼 침팬지로부터 유래한다. 세계의 근본 특성은 고통, 부정성, 무의미이다. 보편적으로 의지에 지배받는 것은-특히 성(性)이 그렇다-예술, 연민, 체념 등을 통해서 벗어날 수 있다.

실증주의는 모든 사변이 극복되었다고 생각하며 자연과학적인 사실들을 종합하는 데만 자신의임무를 국한하였다. 출발점은 '실증적인 것'인데, 이것은 실제로 주어진 것, 경험적으로 증명 가능한 것을 가리킨다. 인간의 정신적인 발전은 세 단계, 즉 신학-형이상학-실증주의적인 단계로 진행한다.(콩트, 1798~1857)

영국의 공리주의는 어떤 유용한 것이 최대 다수의 행복을 촉진시키는 한, 이 유용한 것 속에서 인륜적 삶의 계산 가능한 토대를 본다. 행위의 목적은 '더 큰 행복'이다. 낙관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모든 중요한 인간 고통의 원인들은 인간의 노력과 수고에 의해 현저히, 심지어 거의 전적으로 제거될 수 있다,"(밀, 1806~1873)

유물론은 물질적인 것, 즉 정신과 마주하고 있는 자연이 보다 더 근원적이라고 주장한다. 유물론은 '종교 대신에 과학'을, '신에 대한 봉사 대신에 인간에 대한 봉사'를, '인간의 행복을 위한 노력'을 요구한다.(L. 뷔히너, 1824~1899)

사적 유물론은 프롤레타리아 역시 자본가와 동등한 정도로(물론 그 쓰임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자본의 산물, 즉 자본의 '부속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 이유는 이들 둘 다 불변하는 자연법칙처럼 진행하고 있는 경제적인 법칙성에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정신적으로도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이제 현실의 해석 대신 현실의 변혁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마르크스. 1818~1883)

미국의 실용주의는 사물에 고유한 존재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한다. 현사오가 실재의 구별은 '세계와 인간에 유익을 가져오는 서술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 서술인가'의 구별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론은 도구가 도니다."(제임스, 1842~1910) 영원성에서 미래로 관심이 옮겨 져야 하고, 안정적인 확실성에서 대한 추구는 환상과 개방적인 대안에 대한 요구로 바뀌어야 한다. 따라서 정치적인 관점에서 민주주의는 소유로서가 아니라 과제로서 이해된다.(듀이, 1859~1952)

정신과학의 토대는 생(生)철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정신과학의 과제는 생을 형이상학적인 설정 없이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 출발점은 일방적이고 냉정한 이성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 자신의 정신적인 '대상화'도 포함하는 훼손되지 않은 '온전한 생'이다. 그 목표는 인간의 정신적이고 역사적이며 개별적인 세계에 걸맞는 이해의 기술, 즉 과학적 해석학이다. 자연과학은 자연을 설명하고, 정신과학은 의미 연관을 이해한다. "인간이 활동하는 가운데 자신을 각인시킨 모든 것이 정신과학의 대상이 된다."(딜타이, 1833~1911)

19세기의 후반, 철학사에 이미 등장한 입장들을 새롭게 이해하는 철학 운동들이 나타난다. 그 한 예가 1870년과 1920년 사이에 유물론과 싸우면서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의 인식론적인 해명을 시도하는 신칸트학파이다. 그들의 표어는 다음과 같다. "따라서 칸트로 되돌아가야 한다."(립만, 1840~1912), "칸트로의 복귀는 진실로 진보를 존중하는 것이다. 과학과 철학을 서로에게 도움이 되도록 연결하는 실타래가 다시 연결되었다."(릴, 1844~1924), "칸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를 넘어서는 것이다."(빈델반트, 1848~1915) 두 번째 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세 철학을 혁신한 신토마스주의(신스콜라학파)이다. 교황 레오 13세의 교서 "아에테르니 파트리스(Aeterni Patris)"는 1879년 성토마스의 철학을 카톨릭 교회의 기준으로 발표한다.

니체(1844~1900)의 저서는 서양 형이상학 비판과 도덕 비판의 한 정점을 보여 준다. 그는 형이상학을 있는 그대로의 생을 완성하지 못한 이들의 무능력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본다. "모든 지하 세계(Hinterwelten, 생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들, 예컨대 도덕, 종교와 같은 것들을 니체는 '지하세계' '배후의 세계'등으로 말한다-역자 주)를 창조한 것은 고통과 무능력이었다." 니체는 자신의 현재를 형이상학이 붕괴하는 시기로 진단한다. 최고의 가치였던 것이 평가 절하되었고, 목표는 없으며 신은 죽었다. 무(無)가 신의 자리에 들어선다. '허무주의의 도래'가 앞으로 200년 동안의 역사이다. "코페르니쿠스 이후로 인간은 왜곡된 길로 들어서 있는 것 같다. 인간은 점점 더 빠르게 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그런데 어디로? 무로?" 모든 것은 생명력 넘치는 '미래 인간' '초인' '신과 무를 이겨 낸 사람'에게 달려 있다.


- 20, 21세기의 철학

현상학은 20세기 초반 '세계관 철학'에 대항해서 철학을 엄격한 '순수 현사들에 관한 학문'으로 근거 삼으려 했다. 현상학은 '사태 그 차제로'라는 준칙에 따라 의식 내용의 객관적 본질을 절대적이고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직관하고, 편견 없이 정확하고 완전하게 기술하기 위해 방법론을 발전시킨다.(후설, 1859~1938) 현상학은 현상(Phaenomen)과 본질(Noumenon)간의 전통적인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한다. 현상들 배후에는 형이상학적으로 초감각적인 것들, 즉 초월적인 제2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현상학의 현상들 배후에는 이 현상과 본질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 숨어 있다. 그리고 현상은 처음에 대부분이 이미 주어져 있는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상학을 필요로 한다. 감춰져 있음이 '현상'의 대립 개념이다."(하이데거, 1889~1976)

존재 사유. 딜타이와 후설을 이어 받고 있는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재발견하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는 '존재하고 있음'이라는 말로 우리가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존재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새롭게 제기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의식, 자아, 주체 등으로 말하지 않고 '현존재'로 말한다. 인간적인 현존재는 자기의 고유한 존재와 관계를 맺는 특징이 있으며, 이를 통해 자기 존재는 '실존'으로 규정된다. 초기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1927)에서 존재에 관한 질문을 현존재로부터 제기한다. 이 때문에 현존재와 그 구조 분석이 전면에 등장한다. 현존재는 '세계 안의 존재'이고,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이며, 세계와 관계 맺는 '이해하는 현존재'이다.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 안에서 이 존재에 대해 이해하면서 관계를 맺는 존재자이다." 현존재는 시간 관련성 때문에 '염려'로 특징 지워진다. 후기 하이데거는 우리 시대를 진단하면서 원자 시대라는 말을 한다. 인간은 지배하고 계산하고 싶어 하는 사유 속에 모든 것을 예속시킨다. 현대 기술은 세계 지배를 이루려는 이러한 권력 의지의 승리이다. 기술은 존재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존재가 모든 역사를 가느하게 하는 근거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인간은 이러한 존재 망각을 이야기하는 경우에만 비로소 그는 존재를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존중하게 되고 스스로 근본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 따라서 존재 물음은 사유라는 '세계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답하는 가운데 땅에서 나오는 것과 이 땅의 인간 현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 결정된다." 이 질문에는 우리를 마법에 걸린 것처럼 만드는 계산적 사유의 광기와는 다른 사유가 자리한다. 그 대안적 사유는 '의식하는 사유'이다. 이 대안은 더 이상 자의적으로 도출될 수 없다. "여전히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실존철학은 키르케고르(1813~1855)뿐만 아니라 후설과 아이데거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았는데, 더 이상 단순히 사유된 철학에 만족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것은 현실에 낯선 체계 대신 인격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유를, 철학의 현존재 대신 철학적 현존재를 요구한다. 문제는 야스퍼스(1883~1969)의 말처럼, 인간이 자신의 '한계 상황(죽음, 불운, 범죄)' 속에서 타자와의 의사소통을 통해 자기 자신이 되며, 초월적 존재에 이르는 자신만의 고유한 실존적인 도정을 위해 결단한다는 것이다. "실존으로서 우리는 신(초월자)과 관계하며, 이러한 사실은 사물을 암호와 상징으로 만드는 언어를 통해 가능하다." 이와 달라 사르트르는 인간의 완전한 자유에서 출발한다. "나는 무한한 가능성이다." 개별자는 자신을 구상하는 대로 그렇게 존재한다. "인간은 자신이 특정한 목적으로 스스로를 만든 것, 바로 그것이다." 드라마 <악마와 사랑스러운 신>에서 신을 부정하는 실존주의자로 바뀐 괴츠는 신을 찾아다니며 "신은 존재하지 ... 않는다"고 말한다. "이 땅 바깥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인간을 벗어나 있을 가능성은 없다. 거대하고 성스러운 것은 끝났다. 자만심도 끝이다. 인간만이 현존할 뿐이다."

철학적 인간학. 셸러(1874~1928)는 개별 과학의 연구 결과를 활용해 우주에서의 인간의 '특별한 지위'에 대해 여러 분야를 망라하여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무한히 세계 개방적으로 처신할 수 있는 미지수 X 이다." 예를 들면, 겔렌(1904~1976)에게 인간은 동물과 비교해 볼 때 본능이 완전히 발전하지 않은 '결핍의 존재'이다.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인위적인 자연, 즉 문화를 건설한다. 지속적인 사회 제도들이 부족한 본능의 필수적인 보완으로 역할을 한다. 겔렌은 "민족의 제도가 파괴되면 인간에게는 아주 근본적인 불안정, 변종 그리고 혼란이 발생할 것이다"고 했다.

20세기는 언어철학의 세기이다. 언어를 사유의 중심 대상으로 끌어올린 것은 정신과학만이 아니다. 언어 분석철학 역시 '언어적 전환'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언어) 분석철학은 19세기의 실증주의 논쟁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자연과학뿐 아니라 논리학, 수학에 경도되어 있다. 다수의 옹호자들을 가지고 있는 이 철학 운동은 형대철학의 한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 운동은 일종의 언어 비판으로 시작했다.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개념들 간의 관계에서 불가피하게 주자 오류들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이 운동은 "이 오류들을 발견함으로써 인간 정신에 대한 언어의 지배를 깨뜨리고자 한다."(프레게, 1848~1925) 철학의 모든 영역에서 나오는 문제들은 언어 분석이라는 방식으로 해결된다고 한다. 어떤 조건하에서 진술들이 학문적으로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가 제기된다. 초기 카르납(1891~1970)에게 있어서 어떤 명제 안에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무의미한 단어들(절대자, 존재자의 존재, 무)이 들어 있지 않을 때, 또한 그 명제가 문법이나 구문적으로 올바르게 만들어져 있을 때 그 명제는 의미가 있다.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분석철학의 대표자로 간주된다.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논리철학 논고>(192!)에서 철학적인 문제들에 대한 질문이 "우리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그는 의미 있는 언어가 가능하기 위해 만족되어야만 하는 조건들이 무엇인지 묻는다. "철학의 올바른 방법은 원래 말해질 수 있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 즉 자연과학적인 명제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 따라서 철학과 관계가 없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이 형이상학적인 것을 말하고자 할 때 그의 명제들 속에 있는 특정한 기호에는 그가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유고로 출판된 그의 저서<철학적 탐구>(1953)에서 이상적으로 구성된 세계를 모사하는 단위 언어라는 사상을 포기하고, 일상 언어(ordinary language)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단어의 의미는 이 단어의 일상적이고 다양한 사용과 분리될 수 없다. 언어 사용은 언어 공동체 삶의 형식 중 하나이고, 항상 구체적인 행위와의 연관 속에 서 있다. 일상 언어는 단일성, 곧 통일된 세계 기투(企投)로서가 아니라 서로 교차하는 무수히 많은 '언어 놀이'의 다수성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언어 놀이'라는 핵심 개념은 언어를 언어이면서 활동으로 파악한다. 예를 들면 명령하는 것,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 연극 놀이하는 것, 부탁하는 것, 감사하는 것 등이 언어 놀이다. 한 단어의 의미는 더 이상 <논리철학 논고>에서 처럼 대상의 모사로 이해되지 않고, 놀이의 경우처럼 실용적으로 특정한 행위 맥락에서 그때그때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특정한 언어적 행위 맥락에서 이해된다. "언어에서 한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의 사용이다." 언어는 일상적인 '삶의 형식들'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단지 그것들과의 연관, 즉 문맥 속에서만 명시적인 의미를 가진다. 형이상학적으로 보편적인, 맥락을 초월한 이론은 배제된다. "삶의 강물 속에서만 언어는 그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단어들을 그 형이상학적인 사용으로부터 다시금 일상적인 사용으로 되돌린다." 또한 언어 비판은 치료적인 과제를 가진다. "철삭은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오성을 마법에 빠뜨리는 것에 대항하는 투쟁이다" "철학의 결과는 오성이 언어의 한계로 돌진하는 경우 가지게 되는, 어떤 단순한 무의미함과 종양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 분석철학의 가장 활발한 옹호자는 콰인(1908~2000)이다. "감각 자료로부터 필요 이상으로 멀리 떨아지려 하지 말라."

비판적 합리주의. 포퍼(1902~1994)는 모든 종류의 교조주의를 배제하고자 하는 과학 이론을 주장한다.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은 잠정적인 이론이며, 비판을 통해서만 개선된다. 이론은 결코 증명될 수 없지만 사실을 통해 반박될 수 있다. 궁극적인 이론, 예를 들면 역사 법칙 이론은 상상에 의해 산출된 지식이다. 역사는 예측할 수 없는 개방된 과정이다. '거짓도니 예언자', 즉 역사철학의 역사주의자들은 미시에 빠져 있다. "역사주의자는 역사의 사실들을 고르고 정렬하는 자가 바로 우리임을 보지 못한다. 그는 반대로 '역사 그 자체' 혹은 '인류의 역사'가 그 내재적인 법칙을 통해 우리, 우리의 문제, 우리의 미래,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의 관점까지도 규정한다고 믿는다." 잘못된 근본주의적인 역사 이론과 사회 이론에 근거해 있는 혁명적인 세계 개선이 거부되며, 개별 문제들에 대한 겸손한 개혁, 즉 항상 수정 가능한 '불완전함의 기술'이 권유된다. 따라서 서구 민주주의는 이미 실현된 자유로운 인간 공동체이지만 여전히 단계적으로 개선될 여지가 있다.

현재 영향력이 막강한 비판 이론(프랑크푸르트학파)은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여러 운동 중 하나이다. 대표적인 두 사상가 호르크하이머(1895~1973)와 아도르노(1903~1969)는 '합리적인 사회' '노예적인 관계로부터의 인간 해방'이라는 그들의 근원적인 목표에 점차 회의적이고 체념적인 태도를 보인다. 유럽의 문명 과정은 그들에게 깊은 양면성과 자기 파괴성을 보여 준다. 그들의 공동 저서이기도 한 이러한 '계몽의 변증법'의 뿌리는 인간의 이성과 이에 근거하는 실천에 있다. 동일화, 계측화, 유용성으로 환원되는 특정한 형태의 이성은 역사적으로 형성되었고, 수천 년 동안 인간의 본성뿐 아니라 자연에 대한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인간은 자신이 힘을 행사하는 대상으로 소외됨으로써 자신의 힘을 증가시킨다." 과학, 기술, 후기 자본주의, 문화 산업 등을 통해 강화도니 이러한 이성의 파괴성은 20세기에 야만으로 변화한다. "완전히 계몽도니 지구는 의기양양한 파멸의 조짐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계몽은 자기 자신을 의식해야만 한다." 철학은 "이성의 자기비판"이 되어야 한다. 

구조주의(신구조주의)는 많은 과학적, 철학적인 분파를 가지고 있다. 구조화된 질서로서의 언어는 구조주의(신구조주의)의 중심 연구 대상이다. 구조적인 분석은 근원적으로 언어학(소쉬르, 1857~1913)에서 뿐만 아니라 민속하겡서도 시도된다. "다양한 현실을 드러내 주는 질서의 형성과 기능 방식이 어떤 구조적인 요소들로 구성되었는지 정확히 알 때에만 우리는 바로 그 질서의 형성과 기능 방식을 파악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나는 출발한다."(레비스트로스, 1908) 구조주의자들에 따르면 비가시적이고 비의식적인,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 구조들, 즉 객관적인 법칙성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프랑스의 몇몇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1960년대 후반에 프로이트의 '무의식' 또는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를 동기로 삼아, 자율적인 주체인 인간을 내쫓는 권력의 선구조들을 탐구한다. "모든 인간적 인식, 모든 인간적 실존, 모든 인간적 삶, 그리고 아마도 인간의 생물학적인 유전 역시 구조들 속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 즉 서술 가능한 관계들에 예속되어 있는 요수들의 형식적인 전체 속에 얽혀 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나느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주체가 아니며, 또한 주체이면서 객체가 아니다. 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구조들의 집합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구조들에 대해 인간은 사유하고 기술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그것의 주체, 그것의 지배적인 의식은 아니다."(푸코, 1926~1984) 인간은 익명적인 규칙들의 산물이다. 그는 더 이상 중심에 서 있지 않다. 주체는 '탈중심화'된다. '인간과의 결별'(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에 비유한) '인간의 죽음'은 신구조주의에서 전통적인 형이상학, 역사, 주체, 의미의 표상 등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낳았다. "인간은 해변의 모래에 그린 얼굴처럼 사라졌다.

" (푸코) 데리다의 언어 비판(1930~2005) 역시 새로운 시도를 옹호한다. 글자에 대한 구어, 즉 로고스의 전통적인우위가 역전된다. '로고스 중심주의'를 '해체(Dekonstruktion)'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언어, 문자, 진리가 새롭게 사유된다. 또한 철학적, 문헌학적 실험의 '놀이'에서 텍스트들은 병렬적으로 놓이며(철학, 과학, 문학 작품 등 모든 텍스트가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 없이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는 뜻- 역자 주),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어떤 확고한 의미도 부여받지 못했던 그런 다른 방식의 '글 일기'를 실험한다. "우리가 듣게 될 죽음의 종소리는 의미와 뜻과 지시체의 종말을 알린다(데리다, Derrida)." 텍스트들은 난공불락이다. "나는 내가 말하지 않는 것을 대략적으로 만들고, 내가 만든 것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데리다, Derrida)

포스트모던의 철학적인 특성은 니체와 하이데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신구조주의와도 연결되어 있다. 포스트모던은 정치적인 압제와 테러에 연결되는 형이상학, 즉 역사적인 총체적 해석과 비전으로부터 결별한다. 포스트모던은 이성의 거대한 통일적인 진보의 프로그램, 인간성의 추상적인 해방과 행복, 진보에 낙관적인 계몽의 유혹, 혹은 구원을 약속하는 마르크스 주의의 유혹 등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포스트모던'이란 메타 차원의 설명에 더 이상 어떤 믿음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리요타르, 1924~1998) 포스트모던의 근본 태도는 다원주의인데, 이 다원주의에서 이질성, 논쟁, 차이, 심미적 경험 등의 의미가 산출된다고 한다. "우리는 전체와 일자에 대한 열망, 개념과 감성의 화해에 대한 열망, 투명하고 소통 가능한 경험에 대한 열망을 위해 비싼 대가를 지불했다. ... 이에 대한 대답은 전체(총체성)에 대한 전쟁이다. 우리는 묘사할 수 없는 것을 위해 증언하고, 논쟁을 활성화시킨다."(리요타르) 이성은 퇴각하고, 무장 해제되어 '허약한 사유'(바티모, 1935~)로, 폭력 없이 숙고하는 사유로 바뀐다. 놀이적이고 비구속적인 것은 '작은 이야기들'로의 입구를 발견한다. 누락, 이탈, 역설뿐만 아니라 작은 무의미와 큰 기지, 그리고 조롱도 이 범주에 속한다.

새로운 해석학. 가다머(1900~2002)는 딜타이와 하이데거에 의지하여 이해 이론을 발전시킨다. "이해는 인간적인 삶 자체의 근원적인 존재 특성이다." 언어성은 인간의 세계 경험의 특징이다. 왜냐하면 세계의 현존은 언어적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언어 속에서 세계가 묘사된다." 그런데 언어의본성은 가장 어두운 것에 속한다. "철학적 해석학의 최고 원칙은 내 생각에 따르면, (그리고 그 때문에 그것이 해석학적 철학인데), 우리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가다머)

새로운 비판 이론. 하버마스(1929~)는 이전의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보여 준 비판 이론의 부정적이고 탈출구 없는 역사철학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탈형이상학적 사유에 기대어 '근대의 기획'을 동시대의 공격과 상대주의로부터 변호한다. "내 말은 근대와 그 기획 자체가 상실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근대의 기획이 가져왔던 혼란, 과장된 지양의 프로그램의 오류로부터 배운다는 것이다." 계몽의 이념은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이성의 척도, 확신을 주는 보편적인 담론은 새로운 문맥이 형성되었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 "인권은 그 올바른 해석을 위한 문화들 사이의 지속적인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견을 가진 이들이 자신이 겪은 것과 그들이 억압적인 정부에 대해 요구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언어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뿐 아니라 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과 열악한 삶의 상황으로부터의 인간 해방은 아직 그 힘을 상실하지 않았다."(하버마스).

신실용주의. 로티(1931~)는 미국의 실용주의적이고 분석적인 전통을 유럽의 해석학적인 전통과 연결시킨다. 그는 듀이,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등과 관련이 있지만, 또한 세계 문학의 위대한 소설들과도 관계한다. 이러한 소설에서 그는 다른 인간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라는 세련된 감정을 기대하낟. 실용주의에 대한 그의 새로운 해석은 덜 무자비하고, 연대가 더 많은 개선 가능한 민주주의 사회를 위해 실천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감수성 있는 태도를 추구한다. 인식과 지식이 아니라 교육과 대화가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탈형이상학적인 사유가 여기서 성찰된다. "형성되고 있는 철학은 객관적인 진리를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가동시키고자 한다."(로티)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이 시대의 사상에서 잊을 수 없는 인물에 속한다. 그녀의 삶에는 20세기의 가장 어두웠던 현실이 짓누르고 있다. 그녀는 전체주의 시대에 독일계 유대인으로 태어나 1941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극단적 악의 문제를 다루면서 정치적이고 사회비판적인 참여 사상가로 활동한다. 1951년 3월 4일, 그녀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용기를 보여 준 자신의 친구 야스퍼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극단적인 악이 실제로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잉여적으로 만드는 현상과 관련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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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입문서로 출간된 책이어서 시대별 분류를 하여 대표적인 철학자들 50여명을 소개한다. 

개관과 철학자들의 핵심 내용에 대해 소개하고 있으나, 개관들만 옮긴다.

내용에서 발췌하려 하다가 그것보다는 개관들 전체 내용을 통해 정리해 보는것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옮긴다.


철학의 구라들 (下) 보러가기 


1. 고대(Ancient times) 철학

-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철학보다 먼저 세계를 근본적으로 해명하고자 한 것은 신화(이 말은 어원적으로 '말' '이야기' '알림'등의 뜻을 가진다)였다. 예를들어, 호머 시대의 창조 신화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태초에 만무르이 여신인 에우리노메가 있었다. 이 여신은 벗은 채로 카오스에서 걸어 나왔다. 하지만 이 여신은 발을 디디고 설 수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 여신은 바다를 하늘로부터 분리시키고 파도 위에서 홀로 춤을 췄다." 에우리노메는 큰 뱀인 오피온과 짝을 이뤘다. "그런 다음 에우리노메는 비둘기의 형상을 취하고서 파도 위에 내려앉아 자신의 시대를 위해 '세계를 품은 알'을 낳았다. 오피온은 여신의 분부에 따라 이 알이 부화하도록 알 주변을 일곱 번 돌았다. 이 알로부터 현존하는 모든 것이 생겨났다. 태양, 달, 행성, 별 들이 생겼고 산, 강, 나무, 풀, 동물 들이 있는 지구가 생겨났다."

기원전 6세기 초, 소아시아의 해변에 있는 그리스의 식민 도시에서는 세계를 신비적이고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몇몇 사상가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독자적으로 사유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등장하기 150년 전에 개념적으로 분석하는 철학의 길을 걸었으며, 신화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들은 참다운 세계와 가살의 세계를 구분할 줄 알았다. 세계와 그 해석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통찰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철학과 신화는 서로 섞이면서 독자성을 띠기 시작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자연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자연의 통일성을 확신한 그들은 근원을 추구햇으며, 다양한 현상의 원인이 되는 하나(一者)를 추구했다. 그들은 세계를 가장 근본적으로 지탱해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노력했다. 밀레토스의 탈레스와 같은 최초의 사상가들은 근원 질료에 대해, 남이탈리아의 피타고라스와 같은 사상가들은 근원 형식에 대해, 에베소 출신의 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은 사상가들은 보편 법칙에 대해, 그리고 아테네의 아낙사고라스 같은 사상가들은 질료적인 원소와 질서를 만들어 내는 근원적 힘에 대해 질문했다. 압데라 툴신의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론으로 유명하다. 그는 소크라테스와 동시대 사람이었다.


- 고전철학

'지혜의 교사들'인 소피스트들은 기원전 5시기에 그리스 고전철학으로 접어드는 과도기에 주로 활동했다. 그들의 주제는 인간이었다. 그들은 고대 도시 국가에서의 공동생활을 둘러싼 문제를 생각했으며, 인간적인 인식 행위의 타당성을 검토햇다. 그들의 수업은 다면적인 교양과 뛰어난 대화술,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둔 인간이라는 계몽된 새로운 이상에 맞춰져 있었다. 필요하다면 그들은 반대 입장도 수용할 수 있는 대화술을 통해 모든 인식을 상대화했다(아테네의 프로타고라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 시대와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시기에 철학의 중심지가 된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철학적 사유는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에 절정에 달한다. 그들은 선(善)의 문제를 다양하게 사유했고, 선은 결국 진(眞)과 미(美)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소크라테스는 선한(좋은) 삶이라는 이상을 위해 살고 죽었다. 선을 아는 자가 선하게 행동한다고 확신한 소크라테스는 동시대 시민들을 대화로 끌어들여 집요하게 질문 공세를 펼치며 깊이 있게 생각하도록 자극했다. 개인은 자신 안에 있는 보편적인 선을 인식해 행위의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나눈 대화의 목적은 덕의 보편적인 본질을 해명하고 규정하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윤리적인 보편 개념을 정의하기 위해 고심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플라톤 철학의 기본 방향을 보여 준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보편 개념 속에서 무시간적인 근원 형상들을 본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물들은 이 근원형상들의 불완전한 모사에 불과하다. 이 근원 형상이 곧 이데아(idea)이다.현재의 언어 용법과는 달리, 이데아란 결코 주관적인 관념을 의미하지 않고 지속적이고 영원한 존재를 의미한다. 감각 기관에 의해 지각되는 물질적인 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물질세계 저편에 제2의 비물질적인 세계가 존재한다. 이는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이데아의 세계이다. 이데아들 중의 최고의 이데아, 즉 선의 이데아를 순수하게 정신적으로 살펴본 철학자만이 국가의 질서를 절대적인 이데아의 질서와 조화시킬 수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범위를 넓히고 체계화했다. 그는 논리학의 아버지, 범주론의 창시자, 그리고 방법적으로 엄격한 경험 과학 연구의 개척자로 불린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의 이데아는 개별적 사물들 저편에 분리된 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개별 사물들에 내재한다. 모든 사물은 완전한 자기 운동을 하며, 자신의 이데아(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형상(form)'이라 부른다)에 이미 존재한 자신의 소질을 현실화시키고자 한다. 모든 것은 자기 안에서 자신의 목적과 본분과 발전의 계기를 갖는다. 나중에 괴테는 이데아를 "생동적으로 발전해 가는 각인된 형상"이라고 말한다. 세계에는 완전성을 향한, 중용을 햔한, 선을 향한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만물을 움직이는' 신을 향한 점진적인 운동이 있다. 


- 헬레니즘 철학과 로마 철학

그리스의 도시 국가는 인도까지 뻗어 간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 제국에 편입됨으로써 기원전 4세기에 정치적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고전기 이후의 그리스 문화인 헬레니즘 시대에 동양과 서양은 서로 긴밀하게 만난다. 문화 중심지가 바뀌어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매우 전문적인 경험적 연구가 행해졌다. 철학에서는 주로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들이 논의되었다. 행복하기 위해 개인으로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피쿠로스주의자, 스토아주의자, 회의주의자 들은 새로운 역사적인 도전과 개인의 방향 및 힘의 상실에 대해 상이한 방식으로 대답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사회에서 벗어나 철학을 하며, 현실을 아주 유쾌하게 받아들인다. 스토아주의자들은 덕스럽고 평정을 잃지 않은 삶과 운명의 장난에 흔들리지 않는 삶 속에서 행복을 발견한다(키티온의 제논), 회의주의자들은 대립적인 철학적 입장들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안이라는 행복을 이끌어 낸다(피론), 세 학파의 창립자인 에피쿠로스와 제논 그리고 피론은 모두 아테네에서 활동했다.

로마는 기원전 2세기부터 그리스를 정치적으로 지배했다. 키케로는 기원전 1세기에 로마인들에게 그리스철학을 소개하며, 자신의 글을 통해 라틴어로 된 철학 언어를 심어 놓았다. '휴마니타스(Humanitas)'(인간성)라는 용어는 철학의 지혜를 정치 현실에서 적용할 수 있는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간을 가리키는 말로, 이상적인 조어의 예라 할 수 있다. 수사학과 철학은 하나로 합쳐졌다. 말을 잘하고 덕이 있으며 다면적으로 교육받은 사람은 이러한 언어와 이성의 통일을 이론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적인 삶에서도 실현했다(로마의 퀸틸리안).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는 시기에는 다양한 종류의 철학적 입장들이 혼재했다. 인도로부터 동양 철학이 흘러들어 왔고, 유대교와 기독교의 영향도 있었다. 근원에 대한 물음이 다시 되살아났다. 세계 종말론이 생겨나고, 죄악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염원이 절실해졌다. 이로부터 교조적인 진리곤을 가진 철학(종교)적, 신비적 구원론이 등장했다(바빌론의 마니교).

3세기에 신플라톤주의가 이집트의 플로티노스를 필두로 생겨난다. 그는 마지막 주자로 그리스어로 된 위대한 철학 체계를 세웠고, 고대 후기의 구원에 대한 욕구를 비기독교적인 내용으로 표현했다. 세계의 모든 사물은 빛으로 가득 찬, 신적인 일자가 빛을 발해 생겨난 것이다. 세계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절대자의 완전성이 넘쳐 흐른 것이다. 이 철학의 목표는 악의 원리로 파악된 물질, 즉 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물질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일자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고대 기독료 철학의 중심은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계시라는 역사적 사건이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신앙이 '이교도적인' 철학자들에 대항하여 철학적인 수단으로 방어될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 방어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였다. 4세기말에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된다. 

476년에 게르만 족 출신의 용병 대장 오도아커는 서로마 제구그이 마지막 황제를 폐위시켰다. 서로마 제국은 몰락했다. 하지만 비잔틴의 동로마 제국은 천 년 이상 더 존속해 고대 그리스의 문화유산을 보존했다.  




2. 중세(medieval times) 철학 

- 기독교적인 토대

중세 철학은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으로 나눌 수 있다. 중세 철학은 대략 5세기경에 시작하여 15세기까지 이어지며 서로마 제국이 몰락한 476년부터 아메리카가 발견된 1492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대략 천 년에 걸친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시대에 이어 천 년 동안의 중세 시대가 이어진다. '중세(Mittelalter)'(두 시기의 중간 시대, 과도기)라는 개념은 이해를 돕기 위한 보조 개념일 뿐이다. 역사는 계속 진행되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한 시대를 특징짓는 관련 요소들에 대한 기준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중간'에 있는 것 역시 다르게 규정될 수 있다. 초기 기독교 교부들이 펼친 고대의 초기 기독교 사상이 중세 철학의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주제의 관점에서 볼 때 중세 철학은 이미 2세기경에 시작된 셈이다.

기독교에서는 신앙이 철학의 바탕을 이룬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확신들이 바탕이 되고 있다. (1)세상은 무에서 창조되었다. (2)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한일서 4장 8절), (3)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할 것이다.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 전능한 신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포괄하는 세계를 무에서 창조해 이 세계를 존재하게 했다. 이는 초자연적인 진리이며, 신이 인간에게 직접 전달(계시)했다. '무에서 창조하였다'는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세계는 시초가 없다'는 고대 철학적 세계관과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한다. 이제는 신이 의지 작용에 의해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신은 건축가처럼 이미 주어져 있는 혼돈스런 원질료를 질서 정연한 우주로 만드는 것(플라톤의 학설)이 아니라, 창조자이자 생산자로서 물질을 존재하게 하는 자이다. 만물이 존재하는 것은 만물을 창조한 유일신이 전제될 때 가능하며, 신은 피조물인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한다. 

(2)신약 성경은 특히 '신의 사랑'을 보여 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그리스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자족적인 신이 불완전한 피조물에게 다가오고 심지어 자비심에서 세상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 치욕스러운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타자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으면서 자신 이외의 것들을 움직이는 신적인 존재를 전제했고, 신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일방적으로 사랑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는 기독교적인 사유와 다르다. 인간을 위해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바탕이 되면서 인간과 신, 그리고 인간들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에는 사랑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7-40)

(3)세계는 시작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약속된 신의 왕국이 도래하는 종말도 있다. 그리스철학은 세계의 진행 과정을 자연의 이치에 따라 언제나 반복하는 원환 운동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반해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은 천지창조에서부터 출발해서 중심인 그리스도 그리고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단선적으로 진행된다고 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 철학이 표방하는 '허황된 원환 운동'을 무신론적인 '코미디'로 분명하게 거부한다. 서양의 연대인 기원전(B.C.=Before Christ, 그리스도 오기전)과 기원후(A.D.=Anno Domini, 주님의 해)는 신이 시간 속으로 들어 왔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관찰 가능한 모든 사건은 신과의 관련 속에서만 해석되어야 하고, 모든 경험적 지식은 형이상학에 종속되어야 한다. 역사는 의미 충만한 구원사이지, 그리스도와 무관한 사건들이 무작위로 펼쳐지는 무대가 아니다. 인간은 시작과 끝이 계시되었기 때문에 세계사를 신의 눈으로 조망할 수 있으며, 세계사의 흐름은 의미 있고 목적 지향적으로 전개된다. 

간단하게 말해서 고대의 정신적인 이상은 조화(Einklang)이다. 이러한 조화는 우주 질서와 일치되는 현세의 행복한 삶을 의미한다. 중세의 정신적인 이상은 구원이다. 구원은 신만을 바라보는 가운데 사후에 얻어지는 내세의 지고한 복을 의미한다. 


- 교부 신학

교부 신학(Patristik)은 2~7세기에 이르는 교부들의 가르침이다. 라틴 계열의 서방에서뿐 아니라 그리스 계열의 동방에서도 교부들의 중심적인 문제는 계시의 내용을 해명하고 그것을 지키며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저서는 아주 미약하지만 철학적인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기독교는 그들에게 참다운 철학이자 계시로 받아들여졌다.

교부들은 고대 철학에 대해 처음에는 거부하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는 등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박해와 문학적인 공격을 받게 되자 기독교 신앙을 합리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기술(변증론)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철학적인 개념과 사유 방식이 접목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전기 이후의 그리스 문화인 헬레니즘이 기독교화 되었으며, 동시에 기독교도 헬레니즘화 되었다.

예를 들어, 2세기의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철학에 개방적이었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그리스도의 예언자이자 순교자로 보았으며, 플라톤과 헤라클레이토스를 그리스도인으로 불렀다. 이에 반해 터틀리아누스는 아테네와 예루살렘을 전혀 관련이 없는 별개의 사안으로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가 철학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면서 철학적 논증을 도입하기도 한 것은 스토아 철학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철학적인 소양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3세기에 기독교에 대한 최초의 포괄적인 교리서를 저술했다. 그에게 있어서 신적인 계시는 인간을 현혹시키는 철학에 종지부를 찍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와 사도들의 전통적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만이 진리이다."

교부 신학은 고대 말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활동에 힘입어 4세기와 5세기에 절정에 도달했다. 그는 (신)플라톤적인 색채를 띤 기독교 사상의 개척자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순수한 이성 그 자체는 너무 유약해서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 인간은 성경과 교회의 권위를 필요로 한다. 신앙이 우선이고 통찰은 그 다음이다. 인간의 가장 내적인 본질은 지성이 아니라 의지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능동적인 사랑 속에서 드러나는 의지는 신을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그의 <신국론>은 "유약한 기독교 신은 410년에 서고트인들이 로마를 정복할 때 속수무책이었다"는 이교도들의 비난에 대항해서 수행된 기독교에 대한 가장 위대한 최후의 변론이다. 

계시냐, 철학이냐의 다툼은 부분적으로는 수백 년에 걸친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4세기에 펼쳐진 그러한 논재으이 예는 신인(神人)론이다. 그리스도가 어떻게 가장 완전한 신이면서 동시에 가장 완전한 인간일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에 따르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동일한 속성이 동일한 관계에서 자신에 속하면서 동시에 속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문제는 기독론(그리스도의 인격성에 대한 교리)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논의되었다.


- 스콜라철학

켄터베리의 안셀무스는 11세기에 "신앙은 이성적이고자 한다"고 말했다. 스콜라철학은 신앙과 지식, 이 두 가지를 모두 원한다. 스콜라철학의 목표는 포괄적이고 빈틈없는 체계, 즉 신앙의 진리와 이성의 진리 모두를 통일하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철학은 계시된 진리를 더 이성적으로 만들어야 하고, 그 진리의 연관성을 더 명료하게 드러내야 하며, 이성의 관점에서 제기된 발론을 해소해야 한다. 

교부 철학자들은 개인별로 활동하면서 각자의 저서를 통해 영향력을 얻었다. 반면 스콜라철학자들은 주로 성당이나 수도원 부설 학교, 나중에는 대학을 통해 활동했다. 스콜라철학 시기는 학교의 시대(Schola는 school을 의미한다)이며, 뛰어난 교사들의 시대이다.

초기 스콜라철학의 시기(800~1200년경)에는 안셀무스처럼 신의 존재를 성서의 도움 없이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 증명하고자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시의 논리학이 차용되었다. 11~12세기경에 살았던 아벨라르두스 같은 사람들에 의해 진술과 반론의 형태를 띤 스콜라적인 논쟁 방식이 발전되었다. 11세기에 세상에 대한 멸시가 나타났으며(페트루스 다미아누스, "육체는 구린내 나는 덩어리이다"), 12세기에는 자연철학적인 이론들, 언어철학 및 역사철학적 사변들(샤르트르 사원 학교), 종교적 진리의 신비적 체험(끌레르보의 베르나르) 등이 나타났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신플라톤주의가 여전히 아주 폭 넓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약 1300년까지에 이어졌던 스콜라철학의 절정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비롯한 여러 저서들이 아랍인들의 해석이 가미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의 대명사로 통했고, 고대 사상이 점점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십자군 원정을 통해 아랍철학과 유대철학이 충돌함으로써 세상을 보는 눈도 확대되었다. 최초의 대학들인 볼로냐대학(1158), 파리대학(1170), 옥스퍼드대학(1200년경)등이 설입되었다. 옥스퍼드대학은 자연과학 연구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로저 베이컨), 프란체스코파와 도미니크파와 같이 새로운 수도회가 생기면서 서로 경재의 양상을 보였으며, 신비주의자들은 신과의 직접적인 합치를 추구했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3세기에 기독교의 전통(아우구스티누스)과 고대 사상(플라톤, 신플라톤주의, 그리고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위대한 종합이 이뤄졌는데 보다벤투라, 알버트 경,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그 주역을 담당했다. 이러한 종합은 '통합(summa)'(전체, 총합)이라고 불린다.

스콜라철학의 체계를 세운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그는 신앙과 지식 그리고 계시의 진리와 자연적 이성의 진리,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했다. 참다운 철학은 언제나 올바르게 이해된 신앙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신이 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이성이 인간에게서 차지하는 위치와 같다."

스콜라철학에서는 수백 년동안 계속 반복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있다. 그것은 '인간, 선과 같은 보편 개념은 어떤 가치를 찾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른바 보편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보편 개념은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관념에만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보편 논쟁에는 극단적인 두 입장이 있었는데, 하나는 (개념)실재(realism, 이 용어는 외부 세계의 실재성을 문제 삼는 근대의 인식론적인 '실재론'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이고, 다른 하나는 (개념)유명론(nominalism)이다. 실재론의 중세적인 입장은 인간의 사유와는 무관하게 보편 개념의 실재성을 주장한다. 즉, 개별적인 사물들이 창조되기 전에 그 사물의 원형에 대한 신의 생각이 먼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유명론은 보편 개념에 어떠한 독자적인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 개념들은 단지 이름(nomina)일 뿐이며 정신적으로 부풀려 생각한 결과일 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편 논쟁에서 중계자의 위치에 선다. 그는 보편자의 존재를 3단계로 구분한다. (1)보편 개념은 신의 정신 속에 내재하는 창조적인 사상으로서 사물들에 앞서 존재한다(ante res). (2)보편 개념은 형태를 만들고 현실화시키는 형상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텔레케이아) 창조된 사물들 속에 존재한다(in rebus). (3)보편 개념은 추상으로서, 다시 말해 인간의 사유속에서 존재하며 사물들 이후에 존재한다(post res).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 계열의 대표자인 하인리히 겐트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지성의 지배를 너무 많이 강조한다고 비판했다. 이에 반해 그에게서는 의지가 주인이고 지성은 시종이었다. "주인이 길을 잃지 않도록 시종이 밤에 등불을 주인 앞에 들고서 주인을 인도해 가듯이" 지성은 의지를 인도한다.

대략 1500년까지의 후기 스콜라철학 시기에 이서에 대한 스콜라철학의 신뢰는 점차 사라졌다 신앙과 지식의 통일 불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점차 퍼져 갔다. 이성은 교회의 가르침을 증명할 수 없으며, 믿음은 이 가르침을 순종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신에 대한 사변적인 인식 대신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이 나타난다. 완고하고 복고적인 입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신비주의가 영향력을 얻기 시작했다(토마스 캠펜), 전통적인 형이상학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후기 스콜라철학에서 가장 중요하고 비판적인 역할을 한 대표자는 14세기에 보편 논쟁을 첨예화시킨 위리엄 오컴이다. 그에 의하면 개별적인 사물들만이 존재하며, 보편 개념은 사유할 때 사용되는 기호일 뿐이며, 일종의 언어적 허구일 뿐이다. 근대의 문턱에서, 심지어 이미 근대의 문턱을 넘어선 시기인 15세기에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자각을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각색하여 사용한다. 그에 의하면 신은 인식될 수 없다. 신은 은폐되어 있다. "나는 신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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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외로운 존재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외롭고 혼자 있어도 외롭다. 그래서 사람들은 게임, 무협지, 만화, 드라마, 페이스북에 빠지거나 심지어 마약을 찾기도 하는 것 같다. '철학'은 외로운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유수현)  6


새로운 해석은 언제나 처음에는 이단이 된다.  9


고전을 읽는 것은 늘 어렵다. 기존의 시각을 도그마처럼 따르면, 오히려 쉬워진다. 고전은 어렵게 읽어야 한다. 또 인문 고전 독법에는 따로 왕도가 없다. 늘 새로운 해석을 찾아 읽는 게 최선이다.  10


보원이덕(報怨以德) - 원한을 갚되 은혜로 하라.

<노자> 63장 입니다. 거기보면 "위무위(爲無爲)" 즉 무위를 행하고, "사무사(事無事)", 즉 일삼음이 없음을 일삼아라. 그리고 "보원이덕(報怨以德)", 원한을 갚되 은혜로 하라. 이렇게 나옵니다.  24


공자가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은혜를 갚겠는가?" 먼저 당신이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는 무엇으로 어떻게 갚겠는가? 당연히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는 은혜를 갚는 것이 맞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원수를 은혜로 갚는다면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는 무엇으로 갚느냐는 거죠. 공자의 답은 이렇습니다. "곧음"으로 원한을 갚고 은혜로 은혜를 갚아야 한다." 아주 단순한 말이지만, 이런 방식이라면 제가 충분히 따라서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아요.  25


<한시외전(韓詩外傳)>이란 책에는 공자의 제자 수제자 세 사람이 등장. "당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이 있고 당신에게 잘 대해 주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당신들은 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대하겠느냐?" 하니까.

자로(子路, 기원전 543~480년경-말보다주먹, 반란에 연루되 갓끈을 다시묶고 앉은채로 죽어감)는 "남이 나를 잘 대해 주면 나도 잘 대해 줄 것이고, 남이 나를 잘 대해 주지 않으면 나도 잘 대해 주지 않을 것이다."  26


자공(子貢, 기원전 520~456년경-현실수완이 뛰어나 공자학단의 재정 문제 실질해결자)은 "남이 나를 잘 대해 주면 나도 잘 대해 줄 것이고, 남이 나를 잘 대해 주지 앟으면 나는 그와 함께 상황에 따라서 잘해 줄 만하면 잘해 주고 잘해 줄 만하지 못하면 나도 잘해 주지 못한다."

안회(顔回, 기원전 521년경~?)는 "남이 나를 잘 대해 주면 나도 잘 대해 줄 것이고, 남이 나를 잘 대해 주지 않아도 나는 잘 대해 줄 것이다."

이 말은 일단 해석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 말은,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살겠느냐를 묻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논어> 의 어떤 구절이 나온다로 할 때에, 그 말의 객관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의미를 당신은 어떤 삶의 원리로 받아들여서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겠는가를 포함한 물음들입니다.  27


공자는 이 세 사람의 대답을 듣고서 어떻게 말했을까요?

"자로의 주장은 야만인들의 주장이다. 자공의 말은 친구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말이고, 안회의 말은 가족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말이다."

이 가운데 객관적인 해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동일한 두 눈이 분명이 힜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그 일들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눈의 깊이가 다를 뿐이죠. 


보원이덕, 원한을 갚되 은혜로 하라. 공자의 말씀은, 측별히 그렇게 하는 거는 불가능하다. 쉽지 않으니, 직(直곧을직), 다시말해 내 마음이 원하는 바대로 가라. 그런 뜻입니다. 즉 정직하다는 말은 '자기의 마음이 명령'하는 대로 , '자기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서 행하라는 뜻입니다.  29


'보원이덕' 이말에 대해서 하상공은 이렇게 처방을 제시합니다. "재앙이 생겨나기 전에 미리 싹수부터 끊어 놓는다." 이 말은 조금 더 쉽게 풀면 이런 뜻입니다. "평소, 천하에 두루 행할 만한 도를 닦고 백성들을 위해서 선을 행하라. 그러나 너에게 반역하는자, 황제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일을 행하였거나 행하려는 자. 그런 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천하의 안녕을 위해서 재앙이 생겨나기 전에 미리 끊어버려라."  34-35


유학자 왕필은 보원이덕에 관해 "작은 원한의 경우에는 보복하고 말 것이 없다. 그러나 큰 원한의 경우에는 천하 모든 사람들이 죽이고 싶어하므로 모두 똑같이 생각하는바, 그것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덕이다."

작은 원한이라고 하는 것은 '사적'인 원한이라고 할 수 있어요.  36


작은 원한(小怨)의 경우 사적인 것이므로, 공적인 일을 처리할 때 개입시킬 여지가 없는 거다. 그런 거 하지 말라는 겁니다.  37


왕필의 해석은... 철저하게 유가의 정신이지 '노자'의 사상에서 나올 수 있는 논리가 아닙니다.  38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고전 속에 원하는 진리가 있어서 그것을 우리가 해석하거나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가치, 그 가치를 고전에 새겨 넣는 작업, 그것이 바로 고전을 읽는 방법일 것 같습니다.  46



루소의 자유개념이 칸트의 자유 개념으로 발전하고 더 나아가서 헤겔과 마르크스의 자유 개념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52


니체는 "우리의 살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술작품을 만드는 태도로 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죠. 이게 바로 푸코가 말한 실존의 미학이고, 이게 루소가 몸소 보여준 자유의 정신을 이해하기 위한 첫 출발점입니다.  63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유와 반대가 되는 단어, 즉 '지배'와의 대조부터 출발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델1은 '지배를 간섭으로 해석할 것인가?'에 관해서입니다. 이때, 자유는 '선택'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지상)주의 모델입니다. 모델2는 '지배를 강제로 해석할 것인가?'입니다. 이때, 자유는 '자율'이 되죠. 자유는 도덕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을 하게 되어 자율적인 인간드링 서로의 인권을 존중하는 모델입니다. 모델3은 '지배를 예속으로 해석할 것인가?'입니다. 이때, 자유는 '해방'이 될 것입니다. 이 모델은 자유가 단순히 개인적인 추상적 차원이 아니라 좋은 사회를 통해 실현될 가치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65


자유주의라는 단어. '리버테어리언(libertarian)'같은 단어들은 '진보적'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는 단어였어요. 지금은 자유지상주의자로 알고 있는데요. 원래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최초로 썼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자유라는 단어의 원초적이 ㄴ의미는 바로 무정부주의죠. 모든 지배를 거부하는 것이비니다. 지배 없는 삶, 이게 무정부주의자들의 꿈입니다. 자유주의의 두 가지 의미도 이로부터 출발합니다.

첫 번째, 조지 부시 미국 전 대통령과 MB를 대표로 하는 주유주의가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그 주제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애덤스므스류 혹은 신자유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개인을 '이기적'이라고 합니다.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는 심지어 유전자까지도 이기적(selfish gene)이라고 했지요. 개인의 '이기심'이 사회를 구성해 나가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들은 협력이나 이타심마저도 어떻게 이기심으로 환원해서 설명할지를 많이 고민합니다. 또, 게임이론을 가지고 정교하게 수리적으로 분석해서 겉보기에는 이타적이고 협조적인 행위들이 어떻게 이기심으로부터 출발하는지를 보여주려고 무지 애를 씁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시장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로 등장한 겁니다. 이게 극단적인 보수적 자유주의죠. 

그런데, 자유주의를 도덕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루소를 이어받은 칸트와 롤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개인을 이기적 존재나 욕망의 존재가 아니라, 선의지가 있는 '도덕적 개인'으로 봅니다.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한데, 도덕적 개인이라고 해서 남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도 인간이기 때문에 나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그의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그런 태도입니다. 이게 자유주의의 도덕화이고, 이것이 오늘날 복지자유주의 곧 복지국가의 모델이 됩니다.

자. '이기적 개인'을 근대 용어로 말하면, 바로 부르주아지입니다. 부르주아지는 오늘날 (사적인) 시민계급이라고 얘기하는데 현대의 자본가로 발전하게 됩니다. 여기서 잘 구분하셔야 할 것은, 부르주아지를 의미하는 '사적인 시민'과 루소가 말하는 '공적인 시민' 입니다.  65-67



'인륜'은 독일어에서는 원래 'Sitte'에서 유래하는데, 관습이나 습관을 뜻합니다.

법을 안 지키면 처벌을 받지만, 관습을 안 지킨다고 해서 감옥에 가거나 하진 않아요. 그냥 비난을 받을 뿐이죠. 어쨌든 공동체는 각기 그 나름대로 관습이 있고, 그 속에서 사는 나는 나도 모르게 그 관습이 몸에 배어서 따라가게 되지요.  122


상호의존... 내가 상대방의 인질이 되면, 자기중심적, 이기적 태도를 바꾸는 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북한도 남한의 인질이 되어야 하지요. '상호 인질'이 되는 것이지요.  133


우리말로 '성(性)'이라고 번역되는 말은 섹스(sex), 젠더(gender), 섹슈얼리티(sexuality), 이렇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섹스와 젠더, 많이 들어보셨죠? 섹스는 생물학적인 성입니다. 젠더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길러진 성이죠. 그래서, '여성답다' , '여성스럽다' , '여자가 재수 없게...' 할 때의 성이 젠더이고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저 여자(sex)는 남자(gender)같애"나 "저 남자는 여자 같애."라고 말할 때, 앞의 여자(혹은 남자)는 섹스, 즉 생물학적 성이죠. 젠더는, '여자 같아' , '여성성' , 

여자로 길러짐' , '여자로 길러짐', 이런 얘기고요. 역시 "저 여자는 남자 같애"라고 할 때에, 뒤에 나오는 남자의 의미는 젠더로 사용된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섹스나 젠더 이외에 섹슈얼리티(성을 사회적으로 논의하기 위해서 대두. 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의 필요성. 성적 욕망이나 정서, 판타지, 성적 매력, 성 정체성 등을 의미하고, 신체적 영역을 넘어서 정서, 심리, 무의식 차우너의 심층적 의미구조들로 성의 범위를 확대시킨다.)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한국어로 성(性), 성성(性性)이라고 번역하는 이 말에 담겨 있는 의미는 굉장히 커요. 우리가 성관계라고 하는 것을 섹스가 아니라 섹슈얼리티라는 새로운 용어로 부르기로 한 이유가 있어요. 해부학적인 성, 생물학적인 성을 일컫는 개념인 섹스를 성관계의 의미로 사용하게 되면 성기 삽입이라는 점에만 초점을 두어서 이야기하게 되죠. 그래서 성행위, 성관계 등을 사회적인 문제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적인 문제로만 남겨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섹슈얼리티라는 개념을 창출하게 된 데에는 성적 욕망이나, 성적인 정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환상, 성적 매력, 성 정체성, 의미 등등, 이런 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굉장히 큰 의미로 사용해야 된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성기 삽입 차원의 성관계에만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고, 어떤 친밀한 행위들, 어떤 친밀한 정서까지도 우리는 포괄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차원이죠.  143-144


차별이 '다르기 때문에...'라면, 차이는 '다르지만...'을 전제한다.  150


평등, 공평함이란 단지 동일한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특수성, 차이, 경험, 맥락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화장실과 남자화장실이 ㄸ고같이 세 개여서, 차별이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개별적인 특성, 경험, 다양성 등을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차이가 아닌 차별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151


음양의 특성... 음양에 대한 초기의 생각은 주나라 때 생겨났는데요. 이 때에는 햇볕의 있고 없음에 따른 단순한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이었습니다.

춘추 시대의 음양 개념의 특징은 음양이 독립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춘추 시대에는 음(陰), 양(陽), 풍(風), 우(雨), 회(晦), 명(明) 등의 여섯 가지 기 개념으로 셜명되었습니다. 풍은 바람이고요, 우는 비, 회는 어두움, 명은 밝음입니다. 하지만 이 여섯개의 기운 중에 풍, 우, 회, 명은 음양의 개념으로 포섭이 되었습니다. 풍은 바람이니까 건조함이죠? 건조함은 어디에 배속될까요? 양이겠지요. 비는 음에, 어두움은 음에, 밝음은 양에 배속이 되겠지요?

이렇게 되니 음양 두 기만으로도 다른 네 개의 기를 설명할 수 있으므로 음양을 제외한 네 개의 기는 점차 사라지고 음양 두 기만 남게 되었습니다.  154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이 과연 명쾌하게 설명 가능할까요? 오히려 애매함, 모호함을 통해서 더 잘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요?  165


<계몽의 변증법>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왜 인간은 진정 인간적 상태로 진입하지 못하고 새로운 야만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177

이에 대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계몽의 방향을 잘못 설정했다는 것입니다. 걔몽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 얘기하겠지만, 동일성 사유에 기초한 계몽을 부정하는 것이고, 자기 유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자기의 체계에 꿰맞추는 자기 유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지요. 타자를 부정하는 자기 유지는 역설적으로 자기 유지에 실패할 운명에 처한다는 거죠. 체계의 틀을 맞추느라 놓쳐버린 자신의 본능, 감성, 개성, 인간성 등을 잃게 된다는 거예요.  179



시푸 : 사부님, 아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대사부 : 시푸, 그냥 소식이 있을 뿐일세, 좋고 나쁜 것이란 없어.

....

대사부 : 이 나무를 보게, 내가 원하지 않아도 복숭아씨는 복숭아 나무가 돼.

시푸 : 하지만 복숭아로는 타이렁을 물리칠 수는 없어요.

대사부 : 가능할지도 몰라, 자네가 포를 이끌어주고 믿어만 준다면.

시푸 : 도와주세요, 사부님.

대사부 : 아니야, 그냥 믿는 수밖에. 약속해줘, 시푸. 그 아이를 믿겠다고...     <쿵푸팬더> 중에서  249


(시푸가 용의 전사로 포를 받아들이고 훈련시키기 시작하면서)

시푸 : 쿵푸는 수련할 때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필요한데 너는 꽝이야. 그런데 그건 내 잘못이었어. 너를 5인방과 같은 방법으로 가르치려고 했으니까.                        <쿵푸팬더>중에서  258


적어도 자신의 옳음이 다른 사람에게도 옳음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했죠.  259


수영을 시작할 때 물에 뜨기 어려운 것처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거나 관계를 맺기 어려운 것은 그 이전의 익숙함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몸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인 것이죠. 여기서 필요한 것은 과거의 경험이나 지식이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266


(용의 전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의기소침해 있는 포에게)

대사부 : 국수냐 쿵푸냐? 너는 과거와 미래에 대해 너무 집착하고 있구나. 이런 말이 있어. 어제는 역사고 내일은 아무도 모르지, 그러나 오늘은 선물이지. 그 선물을 소중하게 다루렴.    <쿵푸팬더> 중에서  267


나의 경험과 생각의 한계를 인식하고, 나를 둘러싼 것들을 하나씩 비워나가는 과정을 통하여 세상 속의 내가 아닌 진정한 나에 이르게 되고, 이를 통해 나는 세상의 길, 세상의 결을 따라 '노닐 듯'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나도 타인에게, 타인도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으며,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소요유(逍遙遊 거닐소 멀요 놀유)' 입니다.  270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의 생각과 가치를 비판하고 그것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자유롭고자 하는 장자의 철학.  271


Kritik'(비판)과 'Krisis'(위기)의 어원이 똑같더군요. 'Krise'에서 나온 말이랍니다.

철학과 철학함은 차이가 있습니다. 사상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철학이며 그 사상의 힘을 현실의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사고하는 것은 철학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77


마키아벨리즘이 일반적으로 이해되듯이 기만과 위선을 의미한다면, 마키아벨리는 마키아벨리주의자기 아니었습니다.

"책의 운명은 그 독자들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웃지 않고, 슬퍼하지도 저주하지도 않고, 오직 이해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오직 그를 '이해하기'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281


그는 '현실 정치학'을 만들어낸 최초의 사람이라고 평가받는데요.

마키아벨리는 현실주의 정치사상을 주장하지요. 즉 <군주론>은 정치적 현실에 대한 기술의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저작은 사실판단이지 도적, 윤리가 개입하는 가치판단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봅니다.  286


당시 이탈리아는 다섯 개 국가로 분열돼 있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고민했던 것, 그가 꿈꾸었던 것은 국가의 통일이었죠. 그래서 책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이 군대예요. 마키아벨리가 제일 싫어하는 군대는 외국 군대입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인민의 군대를 주장합니다.  287


마키아벨리는 소위 중세적 위계질서를 깨려고 합니다.  288



'던바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회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원 수는 150여명이며, 강도 높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핵심 친구 관계는 12명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죠.  319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자신의 생명이 말하는 욕망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자기 밖의 것들에 눈을 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왜 내 삶은 공허하지' , '왜 나는 열심히 사는데 안 되지'라고 자꾸만 자신을 닦달합니다.  322


'네가 트루먼을 아느냐? 뭐가 옳은지 안다고 생각하나? 나는 트루먼에게 특별한 삶(normal life)을 살 기회를 줬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역겨운(sick) 곳이야. 시헤이븐(seahaven)은 천국이지. 트루먼은 언제나 떠날 수 있지만 그러려고 하지 않았어. 마음만 먹으면 진실을 알 수 있는데, 시도하지도 않았지. 자네가 괴로운 건 트루먼이 그런 세상에 익숙하기 때문이야.'  <트루먼 쇼> 중에서  363


진실을 향해 나간다는 것은 대단히 큰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366


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는 나라는 세금이 높다고 하지요. 수입의 50% 이상을 세금으로 낸다고 하잖아요. '네가 번 돈은 다 네 것이 아니다. 반 이상 내놔'하면서 이런저런 정책을 펼치는데 쓰겠죠. 개인의 수입을 사회로 완원시키는 것인데, 이런 것도 사회주의입니다. 사실 내 것이 온전히 내 것인 것은 아닙니다. 내가 수입을 많이 올려 부자가 되었다고 했을 때, 그건 내가 누군가와 관계를 맺었지 때문이고,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혔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금을 많이 내게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데 있습니다. 그리고 걷은 세금이 투명하고도 적절하게 잘 쓰이고 있다고 믿으면 세금 저항이 크지 않겠죠. 믿지 못하겠으면 어떻게든 세금을 안 내려고 할 거고요.  386


저는 얼마 전에 한 학술 발표회에서 우리나라를 아류제국주의 국가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제국주의 국가의 대외 정책에 합류하면서 또 그들의 요구를 잘 들어주면서, 현실에 안주하는 피지배 계급을 양산하는 거죠.  388


강자는 현실에 안주하려 하고 약자는 현실을 변화시키려 합니다. 따라서 미래는 약자에게 있습니다. 위로가 되나요?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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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로마 제국의 제16대 황제(121년 4월 26일 - 180년 3월 17일)이다. ‘철인황제(哲人皇帝)’로 불리며, 5현제 중 한 사람이다. 중국의 역사서 《후한서》에 기술된 ‘대진국왕(大秦國王) 안돈(安敦)’이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끝으로 로마 제국의 전성기는 끝났으며,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하였다.

생애

121년 4월 26일, 로마에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도미티아 루킬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3살 때 아버지가 죽자 3번이 집정관을 연임한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베루스에게 입양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질이 특출하였던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눈에 띄었다. 136년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의 후계자로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를 공표하였고, 같은 해 마르쿠스는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의 딸 케이오니아 아파비아와 약혼하여 일약 로마 정계 전면에 부상하였다.

그러나 138년 콤모두스가 죽자 하드리아누스는 마르쿠스의 고모부인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를 양아들로 맞아들여 새로운 후계자로 삼았는데, 나중에 그는 제위에 올라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마르쿠스를 자신의 양아들로 입적하였다. 이때 마르쿠스의 이름은 마르쿠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로 바뀌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나중에 마르쿠스의 약혼을 파기시켜 자신의 딸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와 약혼시켜 결혼시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와의 공동 통치를 한 뒤에 단독 황제가 되었다. 게르만족의 침입이나 시리아 속주에 있어서의 파르티아의 침공 등 수많은 전쟁에 슬기롭게 대처하였다. 지금까지의 5현제의 관습을 타파하고 친아들인 콤모두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하여 5현제 시대는 끝나게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서기 180년 3월에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다뉴브 강의 진중인 시르미움 근처에서 병에 걸려 급사하였다. 그의 시신은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되었으며,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하였다.

한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사색과 철학에 관한 내용을 토대로 쓴 《명상록》이라 불리는 에세이를 남겼다. 그는 정신적 스승이었던 에픽테토스세네카와 함께 스토아 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금욕과 절제를 주장하였으며 수많은 명언을 남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하였다. 전쟁터에서 틈틈이 쓴 그의 <자성록> 12편은 로마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인 책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언제나 인정이 많고 자비로워 백성을 널리 사랑하였으나 정책상 크리스트 교도를 억눌렀다. 그의 유명한 저서인 <명상록>에는 철학인으로서의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로마 제국 16대 황제
재위 기간 공동 황제:161년 3월 7일 - 169년
단독 황제:169년 - 180년 3월 17일
타고난 이름 136년 이전-카틸리우스 세베루스
136년 이후-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황제 이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전임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
공동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
후임 황제 콤모두스


















로마 제국 16대 황제/161년 3월 7일 - 169년/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로마 제국 16대 황제/161년 3월 7일 - 169년/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이 기마상은 고대 세계에서 살아 남은 몇 안 되는 조각 작품 중 하나다. 기독교도들은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대부분의 로마 기마상을 파괴했지만, 이 작품은 최초의 기독교도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의 조각상으로 오인하고 내버려두었다. 이 조각상은 2세기부터 로마 시내에 세워져 있었으나 1980년 공해를 피해 실내로 옮겨졌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로마 제국의 제16대 황제(121년 4월 26일 -180년 3월 17일)이다. ‘철인황제(哲人皇帝)’로 불리며, 5현제 중 한 사람이다. 중국의 역사서 《후한서》에 기술된 ‘대진국왕(大秦國王) 안돈(安敦)’이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끝으로 로마 제국의 전성기는 끝났으며,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하였다.

생애 

121년 4월 26일, 로마에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도미티아 루킬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3살 때 아버지가 죽자 3번이 집정관을 연임한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베루스에게 입양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질이 특출하였던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눈에 띄었다. 136년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의 후계자로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를 공표하였고, 같은 해 마르쿠스는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의 딸 케이오니아 아파비아와 약혼하여 일약 로마 정계 전면에 부상하였다.

그러나 138년 콤모두스가 죽자 하드리아누스는 마르쿠스의 고모부인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를 양아들로 맞아들여 새로운 후계자로 삼았는데, 나중에 그는 제위에 올라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마르쿠스를 자신의 양아들로 입적하였다. 이때 마르쿠스의 이름은 마르쿠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로 바뀌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나중에 마르쿠스의 약혼을 파기시켜 자신의 딸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와 약혼시켜 결혼시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와의 공동 통치를 한 뒤에 단독 황제가 되었다.게르만족의 침입이나 시리아 속주에 있어서의 파르티아의 침공 등 수많은 전쟁에 슬기롭게 대처하였다. 지금까지의 5현제의 관습을 타파하고 친아들인 콤모두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하여 5현제 시대는 끝나게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서기 180년 3월에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다뉴브 강의 진중인 시르미움 근처에서 병에 걸려 급사하였다. 그의 시신은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되었으며,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하였다.

한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사색과 철학에 관한 내용을 토대로 쓴 《명상록》이라 불리는 에세이를 남겼다. 그는 정신적 스승이었던 에픽테토스세네카와 함께 스토아 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금욕과 절제를 주장하였으며 수많은 명언을 남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하였다. 전쟁터에서 틈틈이 쓴 그의 <자성록> 12편은 로마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인 책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언제나 인정이 많고 자비로워 백성을 널리 사랑하였으나 정책상 크리스트 교도를 억눌렀다. 그의 유명한 저서인 <명상록>에는 철학인으로서의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2001년 아카데미 5개 부문 수상작인 영화 ‘글래디에이터’ 끝부분에는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의 망나니 아들 콤모두스가 반란에 실패한 막시무스(러셀 크로)와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쇠사슬에 묶인 막시무스는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콤모두스에게 말한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죽음이 우리에게 미소 짓고 다가오면 미소로 답하라’고 말했지.” 그러자 콤모두스는 “그 친구도 죽을 때 웃었는지 궁금하군”이라며 ‘그 친구’와 막시무스를 비웃는다.

그러자 막시무스는 ‘그 친구’가 바로 콤모두스의 아버지라고 알려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막시무스는 미소로써 죽음을 맞는다. 막시무스야말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철학을 실천한 ‘진정한 아들’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물론 영화 속 막시무스는 가공의 인물이고 두 사람의 대화도 지어낸 이야기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음이 우리에게 미소 짓고 다가오면 미소로 답하라’는 취지의 말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180년 3월 17일 사망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철학자였다. 그는 죽음을 기뻐하라고 당부한다. 죽음을 자연의 한 과정으로 기다리는 것이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 맞는 태도라는 것이다.

“지나온 날을 헤아리지 말며, 그 짧음을 한탄하지 말라. 너를 여기 데려 온 것은 자연이다. 그러니 가라. 배우가 연출가의 명에 따라 무대를 떠나듯이. 아직 연극의 5막을 다 끝내지 못했다고 말하는가? 그러나 인생에서는 3막으로 극이 끝나는 수가 있다. 그것은 작가의 소관이지 네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 요컨대 인생의 종말이 언제 오건 평정을 잃지 말고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하라는 당부다.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는 다 같이 행복을 추구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 학파가 ‘쾌락’에서 행복을 기대한 것과 달리 스토아 학파는 ‘지혜’를 통해 행복을 추구했다. 그들은 감정을 억제하고 용기 있게 죽음을 맞이한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귀감으로 삼았다.

노예를 ‘살아 있는 도구’로 간주하던 고대 세계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평생 노예 출신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55~135)를 스승으로 흠모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에픽테토스에게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형제라는 만민평등사상을 배웠다. 스토아 철학이 로마법, 특히 만민법의 기초가 된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로마법은 그 후 유럽 각국에 영향을 미쳤고, 우리 법체계에도 그 영향이 지속되고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지혜’와 ‘만민평등의 휴머니즘’은 우리 시대에도 빛을 발한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A bust of Faustina the Younger, Marcus' wife (Lou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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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usoleum of Hadrian, where the children of Marcus and Faustina were bur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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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in of Vologases IV, king of Parthia, from 152/53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 

이른 아침,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는 오늘도 공연히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 은혜를 모르는 사람, 거만한 사람, 남을 속이거나 중상하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이러한 악덕(惡德)은 선악에 대한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선의 본질은 아름답고 악의 본질은 추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잘못 범하는 사람도 나와 같은 인간, 혈통을 같이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성(理性)과 신성(神性)의 일부를 나누어 갖는다는 뜻에서 동류지(同類者)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해를 입는 일은 거의 없다. 그것은 내 스스로 원하지 않는 한 아무도 나를 추악한 일에 빠져들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동류자들에게 화를 내거나 그들을 기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치 손발이나 눈시울이나 아래윗니처럼 서로 협력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 적대시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는 일이다. 

우주 만물은 줄곧 신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다. 우연히 발생하는 일도 자연의 원리에 따라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며, 모든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해 다스려지며 모두 이 섭리와 관련이 있다. 만물은 그 섭리에서 흘러나오고 우주 전체의 이익도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당신도 이 우주의 일부분이다. 그밖의 모든 것도 자연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본성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그 본성을 계속 간직하는 것은 선(善)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 신의 섭리인 자연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변화는 자연의 한 속성(屬性)이다. 따라서 우주의 모든 것은 부분적으로 변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도 변한다. 그런 원리를 이해하고 또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그에 따라 행동하라. 자연의 변화에서 만족을 찾으라. 그리하여 고뇌없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신들에게 감사하며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하라. 

당신은 지금까지 이 우주의 작은 부분으로서 존재하여 왔다. 그리고 언젠가는 당신을 태어나게 한 자연의 품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아니, 오히려 당신은 변화에 의해 생성(生成)의 원리 속으로 되돌아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천년이나 만년이라도 살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 지금도 죽음은 다가오고 있다. 살아 있는 동안, 아직 능력이 있을 때 선한 일을 하라. 

이웃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오직 자신이 해야 할 일에만 관심을 쏟고 그 일이 정당하고 신의 뜻에 합당한가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많은 시간과 수고를 절약할 수 있다. 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타락한 모습을 돌아봄이 없이 곧장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날아갈 뿐이다. 

사후에 명성을 남기려고 연연해하는 사람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역시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어떠한 명성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을 통해 전해지다가 결국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설사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죽지 않고 그들의 기억 역시 영원하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당신이 이미 죽은 후에 그들의 찬양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살아 있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뜻이 있겠는가? 고작해야 어떤 편의(便宜)가 제공될 뿐이다. 아무튼 당신이 후세 사람들의 평판에 신경을 소모하고 있다면 당신은 자연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현재를 잘못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든 아름다운 것은 결국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다. 그 자체에 본성이 있는 것이지 어떤 외부적 요소 때문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찬양이 아름다움이란 본질의 일부분이 될 수는 없다. 찬양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더 좋아지거나 더 나빠지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아름답다고 말하는 자연물, 예술 작품, 자연 현상 등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진정 아름다운 것은 그런 찬사가 필요하지 않다. 법칙이나 진리, 자비심, 겸손 등이 찬양을 받았다고 해서 더 미화되고 비난을 받았다고 해서 손상되는가? 또 금이나 상아, 자수정, 하프, 단도, 관목 등도 그러하단 말인가? 

만약, 죽은 후에도 영혼이 소멸되지 않고 남는다면 대기는 어떻게 태고적부터 이 수만은 영혼들을 수용해 왔을까? 그리고 육체가 썩지 않는다면 대지는 어떻게 아득한 옛날부터 그 속에 매장된 시체들을 처리할 수 있었을까?

수많은 시체들은 한동안 땅속에 머물러 있다가 이윽고 분해되어 다른 시체에 장소를 비워 주는데, 이처럼 영혼도 얼마 동안 대기 속에 머물러 있다가 변화하고 분해되어 우주의 창조적 원리에 따라 불과 같은 성질이 되었다가 이윽고 새로운 영혼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다. 아마도 영혼불멸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서 매장되는 시체의 숫자만큼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매일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어 그들의 육체에 묻히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된 동물들은 그들을 잡아먹은 동물들의 피와 공기와 물과 같은 성분으로 변하여 사라진다. 이처럼 자연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이용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과 형상 및 형상적인 것의 원인을 구분짓는 분석법으로써 알 수 있다.

철학자 테모크리토스는 '마음의 평정을 얻고 싶다면 많은 일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필요한 일만 하라. 사회적 동물로서의 이성이 요구하는 일만을 이성에 따라 행하라.' 이렇게 함으로써 반드시 해야 할 일만 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평정을 얻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휼륭하게 수행함으로써 오는 마음의 평정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거의가 불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것들을 제거한다면 우리는 더욱 많은 시간을 즐기게 되고 반면에 근심이나 불안이 줄어들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이 일은 꼭 필요한 것인가?' 라고 물어 보라. 또 우리는 불필요한 행동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사상까지도 깨끗이 버려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불필요한 행동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만류(萬有)로부터 주어진 자기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는 사람, 올바르게 행동하고 자신의 인자한 성품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런 선인의 생활이 당신에게도 적합한지 한번 시험해 보라.

당신은 저 여러 가지 일들을 본적이 있는가? 보았다면 이제는 사물의 다른쪽 면을 보라. 마음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도록 단순한 마음을 가져라. 누가 당신에게 피해를 주는가?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결과밖에 안 되니 상관하지 말라.

 

아우렐리우스/명상록Marcus Aurelius ; Ta eis heautond에서

이해와 감상

'명상록'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로마 황제의 입장을 떠나 한 사색하는 생활인, 그리고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 철학자로서 자신의 사상과 체험을 토대로 쓴 에세이로서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스스로 인생을 올바로 살기 위하여 경계한 것, 행한 일을 반성하고 스토아적 입장에서 스스로에게 충고한 것, 귀감이 될 만한 다른 사람의 글을 발췌한 것 등으로 그 내용이 구성되어있다.

 이 글은 그때그때 체험에서 우러나온 단상(斷想)들을 바쁜 틈틈이, 즉 전시(戰時)의 진중이나 청사를 돌보는 사이에 쓴 것이며, 어릴 때부터 익혀 온 수사학의 재능을 십분 발휘한 아름다운 문장이라 평가된다.

 편의상 전체를 12권으로 나누고 있지만 일정한 기간에 어떤 주제를 놓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그 논리적인 체계가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우렐리우스의 스토아 철학의 사상적 기반은 이 책에 일관된 흐름을 부여함으로 내용상으로는 하나의 체제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체계화된 사상일수록 그 사상의 내용에 우주론, 인간론, 그리고 정치 사회론 을 모두 담고 있어야 하며, 이 게 가지는 상호 모순됨이 없이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명상록'은 단편적인 철학적 수상(隨想)들을 모아놓은 것임에도 위의 세 가지 요소를 다 갖추고 있으며, 글을 읽어 내려감에 따라 각 구절마다 이에 그의 사상적 깊이를 새삼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우렐리우스의 사상은 그가 평생을 두고 연구하고 고민했던 스토아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간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인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그것을 지배하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신,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갖가지 삶의 국면을 굳건한 사상적 바탕 위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흔히 '명상록'은 스토아 철학의 진수를 설명한 것으로도 평가되고 있다. 에픽테토스의 '어록(語錄)과 함께 고대의 양서로 손꼽히고 있다.

 '명상록'은 어떤 초기 편집자에 의해 12권으로 분류되었는데, 첫째 권을 제외하고는 내용이 뒤 섞여 있어서 각 권의 내용을 만족할 만하게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그 대략의 요점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제1권은 자신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로 배우게 된 교훈이 겸손하게 언급되어 있다. 제2권은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제3권은 진정한 자유인 신에 대한 복종에 대해, 제4권은 기회의 부재에 대해, 제5권은 운명과 역할에 대해, 제6권은 내면적 삶의 절대적인 중요성에 대해, 제7권은 충동의 억제와 자기 만족의 추구에 대해, 제8권은 마음의 평정에 대해, 제9권은 자발적인 의지와 인간을 지배하는 운명에 대해, 제10권은 기인의 주변 환경과 그에 관한 성찰에 대해, 제11권은 이타주의(利他主義)에 대해, 제12권은 죽음에의 초월에 대해 씌어 있다.

 제1권에서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터득한 것이 아니고 조상, 부모, 스승, 신들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여기서 그의 겸손함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리고 자기가 처한 위기, 상황, 환경에 대해 만족하고 감사하는 생활자세를 엿볼 수 있다.

 제2권부터는 '명상록'의 본론이라 할 수 있는데,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않은 단편적인 글들이라 내용도 다소 중복되고, 또 축약된 말들이 있어서 어려운 곳도 있으나 앞에서 스토아 철학에 대한 개괄적인 해설을 읽었다면 아마 별 무리 없이 읽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먼저 자연, 즉 우주에 대한 견해부터 보기로 하자. 자연의 법칙인 운명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스토아 철학의 입장이듯이 아우렐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주 만물은 줄곧 신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다. 우연히 발생하는 일도 자연의 원리에 따라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며, 모든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해 다스려지고 사물과 관련이 있음을 명심하라. 당신도 이 우주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본성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그 본성을 계속 간직하는 것은 선(善)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명상록> 제2권 2장)    

  그리고 그는 인간이란 영원한 시간 속에서 순간적으로 살다 가는 덧 없는 존재라 하여, 각 권에서 명성이나 부(富) 등을 하찮은 것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죽은 후에 명성을 남기려고 연연해하는 사람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역시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어떠한 명성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을 통해 전해지다가 결국은 사라져버리고 만다…당신이 이미 죽은 후에 그들의 찬양은 무의미한 것이다.(<명상록> 제4권 19장)

  그는 또 죽음이란 것을 다른 사물로의 분해, 변화로 보았으며, 자연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해악이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명상록 의 전반적인 특징을 한마디로 지적한다면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어떠한 외부의 자극이나 압력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으며 평정을 누릴 수 있는 능력있는 존재라 하였다.

  지금 당신이 외부적인 어떤 것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면 당신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당신의 판단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명상록> 제8권 47장)

 참고 자료

 아우렐리우스와 스토아 철학

  스토아 철학에서는 자연(Dbysis)이라는 말이 잘 쓰인다. 보통 자연이라고 하면 산과 강과 대지와 짐승과 초목 등을 포함시켜서 생각하지만 소크라테스 이전의 헤라클레이토스(BC 전 535∼475)의 계통을 잇는 스토아 학파에서는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오고 나서 거리로 돌아가는 근원적인 것, 또는 능산적 자연 (能産的 自然)을 의미한다. 또한 좁은 의미에서는 인간의 자연이라든가 포도의 자연이라고 하는 경우처럼 사물의  

본성(本性)을 의미하기도 한다. 광의의 자연은 종교적으로 말하는 신과 같은 것으로 그것은 우주, 로고스, 운명과 동일한 개념이다.

  스토아 학파는-그리고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에서도-자연에 따는다는 마을 자주 하는데 이것은 신, 또는 우주의 질서에 따르고 또는 그것에 합치하는 것을 말한다. 자연에 따른다는 것은 협의로는 각각의 본성에 따르고 그것을 발휘하고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을 예로 든다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것, 곧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이성(理性)을 따르고 발휘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우주의 이성, 곧 광의의 자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므로 인간의 이성에 따르는 것은 우주의 이성에 따르고 자연의 본성에 따르는것이다. 자연이 대우주라면 인간은 그 일부분인 소우주이다. 이러한 스토아 사상이 코즈모폴리터니즘「세계주의」의 사상적 모태임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런데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다. 육체라는 점에서는 동물과 공통되고 영혼이라고 점에서는 동물과 공통되고 영혼이라는 점에서는 신과 공통된다. 스토아에는 영혼은 혈액에서 증발된 것이라고 하는 견해도 없지 않으나 대체로 우주의 로고스의 한 조각이 인간에게 깃든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이성이 깃들어 있는 이상 인간은 다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별, 계급, 피부색깔, 국적을 넘어선 동포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스토아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이 성립된다.

  그런데 이성이라고 한 마디로 말하지만 그 작용에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다. 칸트에 따르면 인식론적으로 이론이성(理論理性), 도덕적으로 실천이성으로 가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가끔 이성을 헤게모니콘(지도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종교적 윤리적 색채가 농후한 후기 스토아세서 본심 또는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온갖 욕망을 통제하고 지도하는 능력으로 스토아 철학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외계(外界)는 모두 결정되어 있어서 불변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숙명적인 필연이다. 따라서 스토아 학파에서는 필연을 필연으로 인정하고 운명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뿐 외계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외계는 우리의 의지 밖에 있어서 우리가 좌우할 수 없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 우리들의 생각뿐이다. 그러나 일단 철저하게 마음과 생각을 바꾸면 외계가 변한 것과 동일한 대전환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마음의 전환은 행복을 위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죽음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라고 생각한다. 혹은 원소에의 해체라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나 결국은 원래의 것으로 복귀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죽음은 조금도 무서운 것이 아니다. 곧 '무섭다고 하는 사념 자체가 두려운 것이다' '공상을 제거한다면 죽음은 자연의 작용이다' '해체를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죽음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을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이 무서운 것이다. 따라서 죽음을 자연의 필연적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전환이 필요하고 이러한 전환을 이루면 죽음은 고통스럽거나 무서운 갓이 아니라 평범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스토아 철학은 영혼의 불멸을 말하지 않는다. 영혼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원래의 원소로 해체된다고 한다.

 한편 스토아에서는 자살을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죽음을 자연의 필연적 과정으로 보는 스토아 철학으로서는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사는 것이 신의 명령이라면 죽는 것도 신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완수하고 육체적으로 남의 폐를 끼칠 만큼 노쇠했거나 병에 걸리면 이 세상에서 떠나가라는 신의 신호로 알고 자살해야 한다. 이 경우 제멋대로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닌 자살이야말로 우주의 질서, 신에 뜻에 합치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또한 아타테이아 또는 아타락시아라는 말을 스토아 철학에서는 쓰고 있는데, 전자는 부동심(不動心), 무정념(無情念)이라는 뜻이고 후자는 평정(平靜)이라는 뜻이다. 외계의 사물은 본래 우주의 질서에 따라 변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외물을 뒤쫓고 있는 한 대해의 조각배처럼 번롱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마음에 아무런 욕망도 갖지 않고 어떠한 일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마음에 평화는 교란되지 않는다. 이 마음의 평화가 바로 인간의 행복인 것이다.

 

참고 자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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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121∼180)는 121년 로마에서 집정관 아니우스베루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안토니우스 황제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정치가로서의 삶이 열리기 시작했는데, 세 차례나 집정관을 지내면서 정치에 관한 식견을 넓혀 양부 안토니우스 황제를 도왔다.

 그는 스토아 철학에 심취하여 나중에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 사상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명저인 명상록을 조금씩 쓰기 시작했다.

 161년 안토니우스 뒤를 이어 황제가 된 그는 일찍이 플라톤이 이상국가의 정치 형태로 제시했던 철인왕(哲人王)의 면모를 보여 왔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싸우거나, 아니면 전염병 퇴치와 타락된 도덕의 회복을 위해 애쓰면서 지냈다.

 그는 175년 반란을 일으켰던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가 자신의 부하에 의해 피살되었을 때, 오히려 자비로서 용서해줄 기회를 잃은 것을 슬퍼할 정도로 적군까지도 사랑하려는 박애주의적 일면도 지니고 있었다. 그간 재위 기간은 로마제국의 전성 시대로 일컬여지는 이른바 '5현제(賢帝) 시대'에 속하는데 96년부터 180년 사이인 이 무렵에는 정치적 안정, 경제적 번영, 영토의 확장이 어느 시대보다 월등하였으며 아우렐리우스 역시 이전 황제들의 선정(善政)을 유지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사색 혹은 명상의 황제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그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끊임없는 독서와 사색에 몰두하였기 때문이다. 그 사색의 기록이 바로 '명상록' 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살펴 보면 로마제국의 제16대 황제(재위 161~180)로 한자명으로는  안돈(安敦). 로마 출생. 5현제(賢帝)의 마지막 황제로, 후기 스토아파(派)의 철학자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양자가 된 후 140년 로마의 콘술(집정관)이 되었고, 145년 안토니누스의 딸(사촌누이)과 결혼, 161년 안토니누스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로 즉위하였다. 당시의 로마제국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어려운 시기여서 변방에는 외적의 침입이 잦았으며, 특히 도나우강(江) 쪽에서는 마르코만니족 및 쿠아디족이 자주 침입하여 그 방비에 힘썼다. 그 동안 페스트가 유행하여 제국은 피폐하고, 게르만족과의 전쟁에 시달리면서 발칸 북방의 시리아 및 이집트 등의 진영(陣營)에서 병을 얻어 도나우 강변의 진중에서 죽었다.

 유명한 《명상록(冥想錄)》은 이 진중에서 쓴 것으로 스토아적 철인의 정관(靜觀)과 황제의 격무라는 모순에 고민하는 인간의 애조(哀調)가 담겨 있다. 여기에서 그의 철학은 본질적으로는 반 세기 전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한층 내면적으로 침잠해 들어오는 철학을 이루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것은 불이며, 신적(神的)인 세계 영혼으로 관통되고 살려지게 되고 지배받고 있으며, 인간의 영혼도 세계 영혼의 한 유출물에 불과하여 죽으면 자연히 세계 영혼에 귀일하게 된다.

 물질적 ·육체적인 세계의 모든 것은 이 신적인 이성에 의하여 운명적 ·자연필연적으로, 그러면서도 신적 ·합법칙적으로 끊임없이 생멸변화(生滅變化)하고 있다. 따라서 개물(個物)·개인(個人)은 그 이름도 기억도 이 필연의 운동 속에서 소멸되고, 망각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자연필연의 이법(理法)을 확인하여 이를 신의 섭리라 믿고, 외적인 어느 것에도 마음을 괴롭히는 일이 없이 주어진 운명을 감수하며, 내적으로 자유롭고 명랑하고 조용하고 경건하게 그의 죽음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있어서는 철학자와 황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그가 죽은 후 로마제국은 쇠퇴하였다. 로마시에는 ‘마르코만니전쟁’을 부조(浮彫)한 기념주(記念柱)와 그의 기마상(騎馬像)이 있다.

스토아학파

키프로스의 제논이 스토아 포이킬레에 창설한 철학의 한 유파.

 BC 3세기부터 로마 제정(帝政) 말에 이르는 후기 고대(古代)를 대표한다. 키프로스섬 태생의 개조(開祖) 제논과 그 제자로서 적빈(赤貧)과 노동으로 이름 높던 소아시아의 아소스인(人) 클레안테스, 그 제자로서 스토아파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킬리키아의 항구 도시 솔로이(솔리)의 크리시포스, 스토아 학설을 로마 사람에게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로 만든 로도스섬의 파나이티오스, 종교적 경향이 강한 오론테스강 하반(河畔)의 아파메아인 포세이도니오스, 로마황제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 노예였던 에픽테토스,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 파의 주요 인물들이다.

 제논이 아테네의 광장에 있던 공회당 ‘채색주랑(彩色柱廊)’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 제자들을 ‘스토아파’(柱廊의 사람들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스토아파 철학은 이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고전기(古典期) 그리스를 대표하는 여러 나라의 좋은 가문 출신 사람들의 철학이 아니라, 변경(邊境) 사람이나 이국인의 철학이었으며, 그리스 문물이 좁은 도시국가의 틀을 넘어서 널리 지중해(地中海) 연안의 여러 지방에 미친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이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철학의 여러 파와 스토아파 사이의 대립은 격렬하였다.

 고전기까지의 철학의 여러 학설을 수용하여 일반화 ·통속화한 점에서 절충주의라는 비난을 받지만, 그 기반에는 고전 철학과는 아주 이질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 단지 로마시대 사람들의 저작을 제외하고는 스토아파의 저작은 오늘날 거의 전해지지 않아서 연구상 어려움이 있다.

 애지(愛知:철학)는 논리 부문과 윤리 부문, 자연 부문으로 나뉘나, 이들은 각각 독립된 분파가 아니라 서로 나누기 어렵게 결합되어 있어 하나의 지혜를 사랑하고 구하는 애지를 구성하는 3요소가 된다.

 지혜는 ‘신의 일과 사람의 일에 관한 지식’이라고 정의되지만, 이것은 사물에 관한 관조적(觀照的) 지식이 아니라, 인간생활에서의 모든 것을 올바르게 처리하기 위한 실천적 지식이다. 지혜의 이러한 실천적 성격에 스토아파의 특징이 있으며, 이 원리에 바탕을 두어 스토아철학은 고대철학원리의 주체적인 반성철학이 되었다.

 애지(愛知)는 이러한 지혜를 습득하기 위한 ‘삶의 기술(ars vivendi)’의 연습이며, 이러한 재주를 갖는 사람이 현자(賢者)인 것이다. 그리고 현자의 지혜란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인간은 자연에 의하여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자연의 충동’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칠 때 병으로서의 정념(情念)이 있다. 이 정념에 흔들리지 않고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데에 ‘활달한 삶의 흐름’이 있다. 스토아파의 현자의 이상은 바로 거기에 있다. 스토익이라고 불리는 비정한 금욕주의적 심정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자의 유덕한 삶이란 이성을 갖춘 유한한 개개의 자연물(인간)이 자연에 의하여 부여된 그대로의 자기의 ‘운명’을 알고, 운명대로 살아감으로써 본원(本源)인 자연과 일치하는 ‘동의(同意)’의 삶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 그 자체가 이성적 존재자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자기귀환(自己歸還)에의 활동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현자는 모든 자연물의 근원인 자연 그 자체로서의 신과 일치한 자이며 신과 같은 자, 바로 신 그것인 것이다.

 스토아 철학의 특징은, 이와 같은 자연존재에서의 개별성(個別性)과 전체성(全體性)의 두 계기의 강조와 양자의 긴장 관계에 있으며, 이것에 의하여 스토아 철학은 고대철학 원리의 집성인 동시에 다음 시대의 철학원리를 준비하는 것이 되었다. 언어연구 ·논리학 ·인식론에서도 구체성과 개별성을 중요시하는 스토아 철학은 전통철학에 없었던 새로운 요소를 많이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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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서의 기사 - 아우렐리우스


로마 5현제의 마지막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거대한 석상이 터키 남부의 고대 로마 유적지 사갈라소스에서 발굴됐다고 한다.

   

기나긴 로마역사를 통해 수많은 황제들이 있었고 또한 모두 이름들이 복잡한 관계로 웬만하면 다들 낯설게 느껴지는 존재들이지만 아우렐리우스 만은 웬지 우리에게 친근하게 느껴졌던 것은 바로 영화 '글라디에이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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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주인공 막시무스에게 황제자리를 물려주려다 아들 코모두스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그는 자애로운 황제였지만 졸지에 망나니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운의 인물로 기억된다.

 

실제로는 아우렐리우스는 전쟁을 지휘하다 도나우강 근처에서 병으로 객사했다고 한다. 아들이 있기는 있었지만 지 아비를 죽이고 황제자리를 차지할 만큼 패륜아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당시의 로마사회가 못난 아들에게 로마황제 자리가 계승되는 것을 용납치 않았었다.

 

5 명의 뛰어난 황제가 연속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대물림으로는 불가능하다. 전임황제가 뛰어난 후계자를 지정하여 그가 피붙이던 아니던 간에 황위를 계승하는 시스템이었던 것으로 안다. 물론 아우렐리우스 사후에는 그것도 깨지고 완전 난장판으로 접어들지만 말이다. (만약 진짜로 황제자리에 눈이 멀어 아우렐리우스를 살해하려 했던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들 코모두스가 아니라 당시 가장 잘나가는 총독이었다는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였을 것이다.)

 

영화 글라디에이터의 주인공 '막시무스' 도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다만 검의 달인에 카리스마 넘치는 장수가 아니라 스토아학파 철학자였을 뿐,

 

글라디에이터 버젼 아우렐리우스의 죽음에 관해서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시오노의 주장에 따르면 설령 아우렐리우스가 영화에 나오는 대로 장수 막시무스를 총애했다고 하더라도 막시무스의 '국가관' 때문에 황위자리 승계를 권유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영화를 보면 황제가 되라는 아우렐리우스의 권유에 막시무스는 자신은 이번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다며 제의를 거부한다.

 

당시 로마인들은 지도자가 되기 위한 자질로 가족보다 국가를 우선에 놓는 공복의식을 가장 중요히 여겼다고 한다. 더군다나 아우렐리우스 같이 공과 사를 분명히 하는 황제였다면 막시무스의 이 대답을 듣는 순간 자질부족으로 판단 '대권?후보리스트'에서 제외시켰을 거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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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rcus Aurelius

 

우리에게 아우렐리우스를 친근하게 만든 또 하나의 인물은 바로 이회창 씨다. 92년 대선에 김대중 후보에 맞서 출마했던 이씨는 TV토론에서 감명깊게 읽은 책이 뭐냐는 질문에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이라고 답한다. 김대중 씨가 김구선생의 백범일지 라고 답해 지극히 평범하고 서민적인 이미지를 연출한 것에 비해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당시 이회창 씨 보좌진들은 이씨의 그 답변 때문에 몹시 당황해 했다고 한다. 유권자 중 도대체 몇명이나 생전에 아우렐리우스 라는 이름이나 들어 보았을 것이며 설령 그의 명상록을 읽어보았다고 해도 이회창 씨의 지적인 면을 높이사기 보다는 그저 잘난척 하는 것으로 간주 거부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 명상록 답변 때문에 대략 백만표는 날아갔을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실제로 이씨는 선거에 졌다.

 

이회창 씨가 안읽은 책을 읽었다고 거짓말 하지는 않았겠지만 요즘 보여주고 있는 그의 작태를 볼 때 명상록을 제대로 읽은 것 같지는 않다. 만약 지하에 있는 아우렐리우스가 자신의 책을 감명깊게 읽었다는 사람이 저런 행동이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정말 어이없어 할 것이다.  

 

기독교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에서 고대 로마인들과 그들의 역사는 은근히 소외받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고대 로마제국의 유산은 현재 서구문명의 뿌리이자 주춧돌이다.

아우렐리우스의 석상 발굴소식을 계기로 로마사를 한번 관심있게 읽어본다면 유럽과 미국문명을 보다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을 뿐더러 덤으로 그들의 공세에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도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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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영혼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121∼180) 


노예에서 황제까지: 스토아 철학의 힘 
뒷골목 건달과 영웅의 차이는 힘에 있지 않다. 힘세고 싸움 잘하는 것으로 친다면 뒷골목 건달이 영웅호걸보다 더 뛰어날 수 있다. 그러나 건달은 건달 이상이 되지 못한다. 늙고 병들거나 더 주먹 센 사람이 나타나면 사정없이 비난받고 짓밟히는 불쌍한 존재가 되고 만다. 그러나 영웅은 힘을 잃어도 여전히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권위와 명예를 잃지 않는다. 
건달과 영웅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바로 명분과 도덕심에 있다. 건달은 결국 자신과 똘마니들만을 위해 살지만 영웅은 진정 "정의를 위해" 산다. 따라서 영웅이 힘없이 무너진다해도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하며 따르는 것이다. 로마는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帝國)의 역사만도 1,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나라였다. 로마가 단순히 힘만 센 국가였다면 이렇게 오랜 기간 이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치 힘만 센 뒷골목 건달처럼 말이다. 로마는 사람으로 친다면 '영웅호걸'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국가였다. 그렇다면 로마제국을 '영웅호걸'로 특징 지웠던 명분과 도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스토아(Stoa) 철학이다. 역사상 스토아 철학만큼 한 시대의 모든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던 이념은 드물다.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중에는 에픽테투스(Epictetus)같은 노예출신도 있고 세네카(Seneca)같은 정치인도 있으며 이 달에 살펴볼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21∼180)같은 황제도 있었다. 노예부터 황제까지 제국의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던 스토아 철학은 로마를 진정한 강자(强者)로 만든 숨은 힘이었던 것이다. 

"황금시대"에 태어난 꼬마 철학자 
이제 이야기를 이 달의 주인공 아우렐리우스에게로 돌려보자. 아우렐리우스는 121년,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태어났다. 당시 로마는 하드리아누스(Hadrianus) 황제 아래 최고의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구석구석 살피는 꼼꼼한 어머니 밑에서는 가정이 번창할 수밖에 없는 법, 하드리아누스는 제국 이곳저곳을 세심히 챙기느라 일평생을 '출장' 다녔던 황제로 유명하다. 황제가 출장을 마치고 오랜만에 로마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황제 로마 귀환 기념 주화"라는 희한한 화폐를 찍어냈을 정도로 말이다. 수도에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겠지만 치밀한 하드리아누스의 눈에 황제가 될 '재목'이 눈에 안 띄었을 리 없다. 그 재목은 바로 아우렐리우스였다. 
아우렐리우스의 집안은 할아버지가 최고 관직인 집정관을 3 번이나 지냈을 정도의 명문이었다. 다만, 할아버지만큼이나 유명했던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그는 외가에서 자라고 있었다. 전해오는 기록에 따르면 확실히 아우렐리우스는 황제가 사랑할 만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그는 밤늦게까지 공부에 몰두했고 타고난 건강체질은 아니었지만 달리기, 레슬링, 매사냥 등으로 신체를 단련하는 데도 열심이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는 어린이를 기특하게 여기지 않을 어른이 얼마나 있겠는가? 게다가 아우렐리우스는 철학적이기까지 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지나친 욕심과 쾌락추구는 결국 고통으로 연결된다고 보고, 어떠한 유혹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Apatheia)을 강조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스토아의 가르침에 따라 엄격하고 절제된 생활을 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이미 십대 무렵부터 깨달은 바 있어 따뜻한 침대를 버리고 항상 차가운 바닥에서 잠을 잤고, 최고의 오락거리였던 검투사 경기와 마차경기도 멀리했다고 한다. 
이런 '꼬마철학자' 아우렐리우스의 '금욕적인' 태도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마음에 꼭 드는 것이었다. 황제는 그를 무척이나 귀여워하여 '베르시무스(Versimus)'라는 별명으로 부르곤 했는데, 이 말을 우리 식으로 표현한다면 "정말 진국인 아이" 정도가 될 듯 싶다. 

황제가 될 때까지 
황제는 아우렐리우스를 교육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이 '꼬마 철학자'가 최고 수준의 교사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 그 결과 아우렐리우스를 가르쳤던 스승만도 열 일곱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어느 사회에나 사회 지도층이 되기 위한 "엘리트 코스"가 있는 법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이 엘리트 코스를 충실하게 밟아 나간다. 여덟 살 때 이미 제사장이 되었고 이후 재무관, 집정관, 호민관, 원로원 의원 등의 출세가도를 순조롭게 밟아 나간다. 실로 황제의 배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출세 속도였다. 
확실히 황제는 그를 후계자 감으로 생각했던 같다. 이 점은 젊어서 죽은 하드리아누스의 양아들이 남긴 딸과 그를 약혼시킨 점에 있어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 '꼬마 철학자'가 하드리아누스의 다음 황제가 되기에는 너무 나이가 어렸다. 꼭 이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이 현명한 황제는 후계자로 52세의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를 지명하고 그를 자신의 양아들로 받아들인다. 단, 안토니우스가 아우렐리우스를 다시 양자로 받아드리는 조건으로 말이다. 이로써 지금으로 보아서는 조금은 해괴한 '가족'이 생겨나게 되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나이차이는 열 살밖에 나지 않았고, 아버지는 새롭게 얻은 '아들'이 마음에 들어 할아버지가 맺어준 약혼을 깨버리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나 가족 구성은 '해외 토픽감'이었을지 몰라도, 이 가족을 구성한 할아버지의 선택은 '정치적으로' 정확하고 올바른 것이었다.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는 정말 훌륭하고 뛰어난 황제였다. 그가 다스리던 시대의 역사적 사실은 알려진 것이 많지 않은데, 그 이유는 이 시기의 로마가 너무도 안정되고 평화로워서 도무지 '기사화' 될 만한 사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를 사람들은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라고 불렀다. 이는 '경건한 안토니누스'라는 뜻이다. 그는 '경건'이 별명이 될 정도로 도덕적인 사람이었고 또한 이성적인 삶을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스토아의 가르침에도 충실한 사람이었다. 이런 성품은 '아들'을 가르치는 데도 그대로 나타났다. 
한 번은 아우렐리우스가 자신을 가르쳤던 가정 교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 울고 있었다. 이를 본 안토니누스는 다음과 같이 아들을 위로한다. 

"...현명한 이의 철학도 황제의 권력도 감정을 절제하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때가 있단다. 그럴 때에는 네가 사나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참을 수밖에 없지..."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세상일은 모두 우주적 이성(Logos)에 따라 결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해도 슬퍼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그렇게 되도록 결정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어난 어떤 일 때문에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것은 마음의 평온을 깨는 어리석은 일일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logos)을 발휘하여 우주적 이성(Logos)의 깊은 뜻을 깨달아 기쁨도 슬픔도 없는 마음의 평화, 즉 부동심(不動心:Apatheia)을 찾아야 한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가르침대로 평생을 살았다. 후에 자식을 잃은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자기자신을 타일렀다고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렇게 묻는다. 내 아이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하지만 그대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이겨낼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참으로 강하고 건전한 삶의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위기와 시련에 처해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로마인의 강인함은 바로 이러한 스토아의 이념에 있었다. 

흔들리는 팍스 로마나 
161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숨을 거둔다. 이로써 이제 마흔 살의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그가 물려받은 제국은 겉으로 보기에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그 자체였다. 전쟁도 없었고 경제도 번창했다. 그러나 겉모습만 그랬을 뿐 로마는 이미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빈부의 차이가 심하게 벌어졌고, 세금과 착취를 견디다 못한 중소 농민들이 토지를 버리고 수도 로마로 몰려드는 바람에 수많은 사회 문제를 낳고 있었다. 제국은 가진 자들의 횡포를 막지도 못하고 못 가진 자들의 생계를 안정시키지도 못한 채 속주에서 들어오는 수입을 이용한 '빵과 서커스'로 사회 불만을 겨우 잠재우고 있는 형편이었다. 아우렐리우스는 뛰어난 행정능력으로 위기의 로마를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이는 무너지려는 둑을 주먹으로 막는 것만큼이나 위태로운 것이었다. 
162년, 로마의 '전통적인 라이벌' 파르티아가 침략해 온다. 그러나 철학자 황제는 전쟁에도 능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쉽사리 파르티아를 격파했을 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확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승리와 정복은 예상치 못한 재앙을 가져왔다. 이 지방에서 유행하던 페스트가 제국으로까지 흘러 들어온 것이었다. 곳곳에서 역병이 돌았고 수많은 시민이 죽어갔다. 또 큰 홍수가 거듭하여 일어나기도 했다. 나아가 166년에는 게르만족이 제국의 방위선인 다뉴브 강을 돌파했고, 168년에는 사르마텐 족이, 169년에는 무어인이 국경을 넘보았다. 아우렐리우스는 이 모든 사태를 수습하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명상록}, 그리고.... 
그러나 아우렐리우스는 그 가운데서도 철학자였다. 그의 명작 {명상록}은 반란과 침략을 막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시절에 군대 막사나 전쟁터에서 쓰여진 것이다. 이 책에는 원래 "내 자신을 훈계함"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쓴 책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보내는 훈계였던 셈이다. 인간의 잔인성이 판을 치는 황량한 전쟁터에서도 아우렐리우스는 끊임없이 이성을 일깨우고 마음의 고요를 찾는 철학자의 면모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명상록} 곳곳에는 그의 인간적인 번민과 철학적 사색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세계는 우주에 비하면 미세한 점에 불과하고, 인간의 삶도 찰나일 뿐이다....인생은 투쟁이고 세계는 낯선 이를 위한 임시 수용소일 뿐이며, 죽음 뒤에 얻은 명성은 허무하다. 그런 우리에게 유일한 버팀목은 철학뿐이다. 철학은 우리 자신 속에 거룩한 정신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고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은 악이 아니라 우리의 운명일 뿐이라고 말해 준다....우주적 이성에 따라 일어나는 일은 결코 나쁜 일일 리 없다..." 

"인간은 서로를 위해서 존재한다." 
계속되는 전쟁과 자연재해로 로마의 재정상태는 점점 어려워져만 갔다. 아우렐리우스는 부족한 재원을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거나 침략을 통해 약탈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으로 한다면 '자선 바자회'라 할만한 것을 실시한다. 황제가 가지고 있던 보석부터 일상 생활에 쓰이는 가구까지 모두 거리에 내놓고 팔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는 위기에 부딪혔을 때 국가 지도자가 제일 먼저 앞장선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상징적인 행위였겠지만 로마시민을 감동시키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데는 크게 효과가 있었던 듯싶다. 이제 로마의 원로원은 그에게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선사한다. 
또한 아우렐리우스는 매우 관대한 사람이었다. 175년, 반란을 일으켰던 시리아의 총독 카시우스(A.Cassius)를 부하장교들이 죽였을 때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베어진 목을 직접 보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카시우스와 다른 이들 사이에 오간 반란에 관한 수많은 편지들을 읽어보지도 않고 모두 불태워 버렸다. 
사실 그의 관대함은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다.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은 '이성(logos)'를 가지고 있다. 이 이성은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우주적 이성(Logos)'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은 피부가 하얗건 거멓건, 라틴어를 쓰건 게르만어를 쓰건 간에 모두 존중해 주어야 할 소중한 존재이다. 내가 이성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으로서 존엄하다면 이성을 가지고 있는 상대방도 존엄하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로마가 내세우던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는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인간의 이성이 모두 '우주적 로고스'에 따른다면 다른 민족의 이성적 인간들이 만든 법도 로마법과 마찬가지로 존엄한 것이다. 그렇다면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본래 있는 것이 민족과 문화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이는 우리가 말하는 자연법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다른 민족의 합리적인 문화나 풍습도 우주적 로고스에 따르는 것으로 당연히 존중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정복이란 곧 약탈과 파괴를 의미했던 고대 문화 속에서도 로마만큼은 오히려 정복당한 민족을 나와 같은 이성을 가진 '동포'로 보고 보호하고 존중했다. 로마의 대 제국은 이러한 스토아 철학의 포옹과 관용 위에서 가능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제국의 이념에 너무도 충실한 사람이었다. 

아우렐리우스의 죽음, 그리고 제국의 몰락 
이제 아우렐리우스에게도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다. 항상 전쟁과 재앙에 시달리던 이 고단한 황제에게 180년, 다시금 도나우 강변이 시끄러워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는 게르만의 침략이 단순히 약탈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북쪽에서 접근하는 또 다른 민족의 공격에 밀려 제국으로까지 넘어오는 것임을 간파했다. 그래서 이들을 로마 국경 안에 정착시키고 질병으로 인구가 줄어든 제국의 새로운 노동력으로 삼으려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나아가 아우렐리우스는 도나우 방어선을 넘어서까지 새롭게 영토를 넓힘으로써 아예 제국이 다시는 게르만 문제로 골머리를 썩히지 않도록 하는 '최후의 전쟁'을 벌이려고 했다. 그러나 우주적 이성은 이러한 황제의 뜻을 받아드려 주지 않았다. 게르만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페스트로 쓰러지고 만다. 
죽음의 순간에도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철학자다운 담대함을 잃지 않았다. {명상록}에 나오는 한 구절은 그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이제 헤어지는 마당에 남은 사람들을 고약하게 대하지 말라...그대의 가족과도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지 말고 부드럽게 이별하라. 자연(우주적 이성)이 그들을 그대와 결합시켰듯이 이제 자연이 다시 그대를 그들과 떼어놓고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이다..." 

아우렐리우스의 죽음 후, 황제 자리는 철학자 아버지와는 다르게 야비하고 잔인한 성격의 아들 코모도스(Comodos)에게 넘어가게 된다.(큰 성공을 거두었던 영화 "글레디에이터(Gradiator)"는 이런 시대 배경을 소재로 한 것이다) 아우렐리우스에게는 원래 많은 자식들이 있었으나 모두 병으로 죽고 코모두스 만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현명한 아우렐리우스였다고 해도 이러한 '최악의 경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듯 싶다. 아들은 파탄에 이른 로마를 아버지만큼 기술적으로 통치하고 조절할 만한 능력이 없었고, 이후 로마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서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자연을 따르라." 
스토아철학은 원래 기원전 4세기 말, 그리스 철학자 제논(Zenon)에 의해 출발한 철학이다. 원래 스토아철학은 혼란한 사회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고 한 은자(隱者)의 철학이었다. 그러나 명상과 깨달음을 강조한 불교가 역사상 많은 국가에 있어서 통치이념이 되고 반성과 봉사를 강조한 기독교가 서양 중세를 지배한 이념이 되듯이 스토아철학도 개인의 깨달음을 넘어선 대제국의 통치이념으로 발전해 나갔다. 개인을 훌륭하게 만드는 철학은 사회도 훌륭하게 만들 수 있음을 역사가 증명해준 셈이다. 
아우렐리우스의 삶은 우리에게 철학적 반성을 통해 성숙한 개인은 또한 훌륭한 사회 지도자도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항상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자신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라. 이것이 수학 한 문제 더 풀고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는 것보다 더 여러분들을 훌륭한 사회 지도자로 만들어주는 길일 것이다. 아우렐리우스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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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집문당 교양선 12, 김병호 옮김, p 205
 이번 책 소개는 지금 거의 상영이 끝나려는 영화 "글래디에이터 Gladiator"로 시작하려 한다. 30 년 전 거의 동일한 내용의 영화가 "로마제국의 멸망"이라는 제목으로 제작되었었다. 물론 두 영화 모두 세 번째 소개한 책인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기본 줄거리로 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이 영화의 감동이나 가치, 그리고 웅장한 기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 편의 영화나 그림, 음악, 책에서 받는 감동은 개인적인 것이어서 남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단지 여기서는 다른 기록과 비교하여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창조력[?]을 발휘하였는지를 검토해 볼 뿐이다. 또한 영화의 스토리와 역사적인 사실을 혼동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시작되는 기원후 180 년 기번이 아래와 같이 말한 시대이다.
 "만일 세계사에서 인류가 가장 행복하고 또 번영했던 시기는 어느 시기였는가를 질문받는다면, 사람들은 아무런 주저 없이 아마 도미티아누수 황제의 사망(96 년)부터 코모두스 황제 즉위(180 년)까지의 시기를 들 것이다(네르바 황제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이르는 이른바 5 현제(賢帝) 시대이다). 이때는 광대한 로마제국의 전 영토가 덕과 지혜로써 지도된 절대권력 밑에 통치되고 있었다."[로마제국의 쇠망, 1 권, p 123]
 처음으로, 영화와 역사가의 견해가 다른 점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주제 중의 하나인 아우렐리우스 황제(121 - 180; 참고로 삼국지의 유비는 161 - 223 이다)와 코모두스의 관계이다. 기번은 코모두스를 망친 것은 아루렐리우스의 편애, 과중한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영화에서는 코모두스가 폭군이 되는 이유가 아버지 아우렐리우스의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이제 겨우 14 - 15 살밖에 되지 않은 그(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을 황제 권력의 거의 모든 분야에 관여시켰던 것이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가장 사랑을 받았던 아들이 원로원과 군의 환호속에서 즉위하였다. 그가 행복한 젊은이를 왕위에 오르게 했을 때 그 주위에는 단 한 사람의 배제해야 할 경쟁자도 없었거니와 벌줄 적대자도 없었다."[P 131]
 이 아들 코모두스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었다.
 또한 백과사전 브리태니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77년 마르쿠스는 16세의 아들 코모두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했다. 그들은 협력하여 도나우 강 전쟁을 다시 시작했다. 마르쿠스는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제국의 북쪽 국경선을 확장·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180년 마르쿠스가 아들 코모두스를 국정의 최고 조언자로 임명하고 난 직후 군대 사령부에서 숨을 거두었을 무렵 거의 결실을 맺고 있었다."
 영화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코모두스는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계속 전쟁을 하고 있었으며, 그를 완전한 후임자로 임명한 후에 아우렐리우스가 죽은 것이다.
 기번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부황인 마르쿠스의 사후까지 코모두스는 대병단의 지휘와 콰디족 및 마르코반족을 상대로 어려운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P 132]
 또한 기번은 영화의 주인공의 하나인 황제의 딸 루실라(Lucilla)에 대해서 영화와 전혀 다른 진술을 하고 있다.
 "183 년 어느날 밤, 코모두스가 자기의 숙소인 내전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어둠에 잠긴 콜로세움의 좁은 주랑(柱廊)을 막 벗어나고 있을 때, 잠복하고 있던 한 자객이 검을 빼어 들고 습격하였다. ...
 코모두스 황제의 누님이며 루키우스 벨루스의 미망인인 루실라가 제국의 서열 3 위의 지위에 있는 것이 미흡하여 참지 못한데다가 황후인 파우스티나에 대한 질투심까지 결부되어 이처럼 자객을 무장시켜 동생 [코모두스]의 생명을 노리게 했던 것이다. 아무리 그녀라 해도 이 무서운 음모에 대하여 현재의 남편이며, 유능한 원로원 의원이자 충성스러운 인물이기도 한 클로리우스 폼페이아누스[이 사람은 영화에 나오지 않으나 여기 언급되는 모든 인물 중 가장 오래 살아 남은 사람이다]에게 이 행동을 상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많은 그녀의 정부들 중에는 무모하기 그지없는 야심가들도 있었는데 이런 자들은 그녀의 바람기뿐만 아니라 보다 광기어린 집념에까지 기꺼이 봉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런 음모자들은 물론 엄벌을 받았다. 그리고 파렴치한 루실라도 처음에는 유형에 처해졌으나 뒤이어 사형을 받았다."[p 133]
 즉 루실라가 먼저 코모두스를 암살하려 하였으며, 영화와 달리 코모두스보다 먼저 죽었다.
 물론 코모두스가 좋은 황제였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 중 막시무스[Maximus]가 있다. 이 사람과 영화의 막시무스는 동일 인물이 아닐 수 있다.
 "이와 같은 폭정에 쓰러진 무고한 희생자 중에서도 가장 애처롭게 여겨지는 것은 퀸틸리아누스가의 형제들인 막시무스와 콘디아누스 두 사람이다. 이 두사람의 형제애는 그 이름이 오랫동안 망각되었다가 빛을 보게 되어, 후세에까지 향기로운 회상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 막대한 재산을 이어 받았는데도 두 사람에게는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생각 따위는 털끝만큼도 없었고, 이 형제가 협력해서 쓴 한 논문('농업론'이라 하는 것)이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지만, 일생동안 무엇을 해도 두 사람은 완전히 일심동체였다. 이들의 덕행을 존중하고 그들의 화목한 우애심을 기뻐한 두 안토니우스 황제[임주(任註); 아우렐리우스의 전임황제와 아우렐리우스]들은 한날 한시에 두 사람을 모두 집정관으로 임명하였었다. 그후 마르쿠스 황제는 다시 그리스 속주의 민정과 군사권을 이들 두 사람의 공동관리로 위임했는데, 여기서도 이들은 게르만인과의 전쟁에서 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동정심이 많았던' 코모두스 황제의 잔인성은 마지막 죽음에 있어서까지 이 두 사람을 '일심동체'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p 134]
 막시무스가 게르만과의 전쟁에서 대 승리를 거둔 것이 이 영화의 몇 안되는 진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는 코모두스에 의해 사형당했다.
 영화에서 막시무스의 자식과 부인이 십자가에서 화형을 당했다는 것은 사실이기 어렵다. 로마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것은 노예나 로마 시민이 아닌 경우에 한하였다. 그러므로 로마의 체제에서 아무리 폭군 코모두스라 하여도 장군의 아내와 어린 아들을 재판 없이 십자가형에 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지 친위대를 시켜 원로원 의원에게 자살을 명한 것은 역사책에 나온다. 로마인이 법 체계를 존중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 시민이라는 이유로 십자가형을 받지 않았다.
 코모두스가 결정적으로 로마 시민들의 인심을 잃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이다.
 "투기장의 우리에서 100 마리의 사자가 단번에 내몰려 나온 일도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손에서 던져진 100 자루의 투창은 그 사자 무리가 투기장 안을 날뛰며 돌아 다니는 사이에 단 한 자루의 빗나감도 없이 모두를 맞혀서 한 마리 남김없이 사체로 만들고 말았다. 거대한 덩치의 코끼리 몸뚱이도, 코뿔소의 가죽도 그가 던지는 창끝을 막아낼 수 없었다. ...
 그러나 하층계급의 일반민중들조차 이것을 너무 지나친 행위라하여 분노와 치욕감을 느낀 것은, 자기 황제가 하필이면 일개 검투사로 분장하고 등장해서 국법이나 습관도 천한 직업으로 낙인찍어 놓은 그런 직업인의 흉내를 마치 자랑스러운 듯이 연출했을 때였다.
 ... 황제는 투기사 역을 담당하여 실로 735 회나 싸웠다."[p 142]
 실제로 코모두스는 상당히 훌륭한 검투사였다. 영화의 막시무스가 앞에서 설명한 그 막시무스라면 코모두스에게 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30 년 전의 영화에서는 위의 사실을 위해 마지막의 황제의 싸움을 투창으로 하는 것으로 꾸몄다. 물론 그 영화에서도 코모두스가 죽지만 비겁한 승부는 아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악인을 더 비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세상에 날이 갈수록 비겁한 사람이 많아지기 때문일까?
 코모두스는 여러 사람들을 죽이더니 드디어는 자기 측근에게 죄를 씌워 죽이기 시작하였다. 코모두스의 죽음에 대해서 기번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윽고 그의 가족들조차 공포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운명도 끝장이 났다. 동료나 선임자의 죽음을 보고 깜짝 놀란 애첩(愛妾) 마르키아, 시종무관장 에클렉투스, 근위대 장관 레투스, 이 세 사람이 포악한 군주의 바보같은 변덕으로 혹은 갑작스런 국민의 분노로 언제 [자기들의] 머리위에 떨어질 지 모를 죽음의 운명을 저지하기로 결의하였다."[p 144]
 시종무관장과 근위대장과 더욱이 애첩까지 황제의 반대편에 가담했다는 것은 실제로 황제 주위 사람들이 모두 이반(離叛)한 것이다.
 "때는 마침 황제가 동물사냥으로 기진맥진하였을 때였다. 포도주 한 잔 권하는 기회를 마르키아가 이용하였다. [독약을 먹였다] 황제는 침실로 물러났으나 점차 독과 취기가 온몸에 퍼져서 신음하고 있을 때 갑자기 역기(力技)를 직업으로 하는 건장한 젊은이 한 사람이 침실로 들어와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않고 황제를 목졸라 죽이고 말았다. 시내는 물론 궁중에서도 황제가 죽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는 사이에 사체가 비밀리에 황궁으로부터 밖으로 운반되어 나왔다. 바로 이것이 현명한 군주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외아들 코모두스 황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온갖 권력을 휘둘렀고, 재위 13 년간에 몇 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의 생활을 폭력으로 억눌러 온 대상이던 이 폭군을 쓰러뜨리는 일은 이처럼 매우 간단했던 것이다.(디오-카시우스, '로마사' 제 73 권 22 절, 헤로디아누스, '로마사' 제 1 권, '황제열전' 제 7 권 제 17 절)[p 144]
 적어도 코모두스는 경기장에서 죽지 않았다.
 여하튼 코모두스는 자기 아버지에 비해 논의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들을 영화 제작자는 매우 좋아하는 것 같다.
 
 이제 명상록으로 돌아가자. 나는 여러분이 이 사람을 황제가 아니라 홀로 선 한 사람의, 고독한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이 고백록을 읽어주기를 바란다.
 기원 후 백년 경에는 두 사람의 대(大) 스토아 철학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노예로 에픽테토스이고, 또 한 사람은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다.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은 로마인의 위엄을 간직하고 견실한 생활을 이끌어 나가는 데 크게 힘이 되었다.
 백과사전 브리태니커에는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가 있다. "철인왕(哲人王)의 사상이 담겨 있는 〈명상록〉은 오랜 세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왔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에 관한 백과사전의 내용이 매우 많아 본문 다음에서 소개하였고, 여기서는 스토아 철학에 대한 간단한 내용만을 소개한다.
스토아 철학   Stoicism  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철학.
 모든 탐구의 목표는 평온한 마음과 확실한 도덕을 낳는 행동양식을 인간에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토아 철학의 특성과 영역
 초기 스토아 철학은 이전 철학과 달리 지식의 추구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헬레니즘 철학을 대표한 스토아 철학은 보편적이고 평온하며, 질서있는 존재와는 거리가 먼 생활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삶의 방편(ars vitae)을 내놓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보기에 영원한 우주질서와 불변적인 가치의 근원을 드러내는 일은 이성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은 곧 인간 존재가 따라야 할 모범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이성의 빛이란 세계 전체에 경이로운 질서를 부여하며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하여 질서있게 살아가는 기준이다. 스토아 도덕철학도 세계가 통일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도시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은 이 도시의 충성스런 시민으로서 덕과 올바른 행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 일에 적극적이어야 할 의무가 있다. 스토아 도덕철학은 도덕 가치, 의무, 정의, 굳센 정신 등과 같은 덕목에 중심을 두고 보편적인 우애와 신처럼 넓은 자비심을 강조함으로써 가장 호소력 있는 학설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스토아 학파는 처음 형성된 후 2세기까지 그 영향력이 가장 컸으며, 이후 사상의 발전에도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후기 로마 시대와 중세에 이르는 동안 스토아 도덕철학의 일부는 그리스도교·유대교·이슬람교 등이 인간과 자연, 국가와 사회, 법과 제재에 관한 이론을 형성하는 데 적용되었다. 현대에 와서도 스토아 철학의 개인중시 사상 및 갈등과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설은 실존주의와 비정통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다시 주목받았다.

책 내용
<1>
1. 나는 조부 베루스에게서 선량한 행실과 격정의 절제를 배웠다.
2. 아버지의 명성과 회상에서 겸손과 남성적인 기질을 배웠다.
3. 어머니에게서는 경건과 인덕(人德), 그리고 나쁜 행위뿐만 아니라 나쁜 생각도 버려야 할 것을 배웠으며, 부자들의 습성에서 멀리 떠나 소박하게 사는 방법을 배웠다.
[임성삼의 주(註); 이 것 이상의 배움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위의 배움은 우리 모두가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4. 증조부로부터는 공립 학교에서 공부하지 않고, 가정에서 훌륭한 스승을 모셔 배우되, 이런 일에는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함을 배웠다.
[임성삼의 주(註); 동양에서는 훌륭한 스승을 찾아가 배웠으나 서양에서는 집에 모셔서 배웠다. 결국 현재 문화가 깊은 나라들에서 말썽인 과외공부가 그 시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5. 나의 스승에게서는 경기장의 경주에서 청(靑), 백(白)의 어느 편을 들어서도 안되며, 또 검투사(劍鬪士)의 격투에서는 둥근 방패를 든 편을 들어서도 안 되고 모난 방패를 든 편을 들어서도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노역(勞役)을 견디고, 욕망을 줄이며, 자기 손으로 일을 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며 남의 비방에 귀를 귀울여서는 안된다는 것도 가르쳐 주셨다.
[임성삼의 주(註); 스승에게서는 불편부당(不偏不黨)하며, 참된 인간이 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6. '디오그네투스'에게서는 번거로운 일에 열중하지 말 것,
[임성삼의 주(註); 번거로운 일에 열중하면 더 중요한 일을 할 수 없다.]
주문(呪文)인 악귀를 쫓는 마술사나 요술가의 말을 믿지 말 것,
[임성삼의 주(註); 이것을 믿게 되면 자신의 이성을 믿지 않게 된다. 자기의 판단력이 없어지는 것이다.]

싸움을 시키기 위한 [독]수리 등속을 기르거나 이러한 일에 열중하지 말 것,
[임성삼의 주(註); 지금으로 말하면 사냥, 낚시 등의 취미생활을 말한다.]
언론의 자유를 용인하고 철학을 숭상할 것, 특히 우선 '바키우스'를 비롯하여 점차로 [여러 좋은 선생의 가르침을 받을 것] 등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 결과 어릴 적부터 대화하는 것을 배우고, 널판 침대와 가죽 옷, 그 밖의 그리스식 단련에 속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7. 루스티쿠스에게서는
[임성삼의 주(註); 앞으로 계속 이렇게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물론 그 당시에는 중요한 사람들이었겠으나 우리에게는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말한 내용이 더 중요하다.]
나 자신의 성격을 바로잡고 또한 수양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배운 것은 궤변의 시합이나 공리공론(空理空論)의 붓을 들거나, 번거로운 권고의 변설을 휘두르거나, 또는 많은 수양을 쌓은 것처럼 자기를 과시하거나, 허식적인 자선(慈善)행위를 하는 이러한 그릇된 길에 빠지지 말고, 또한 수사학이나 시와 노래나 화려한 문자를 배격하는 것 등이었다.
[임성삼의 주(註); 친구에게서 좋은 것을 배웠다.]
 또한 외출복의 정장을 한 채로 방안을 걸어다니거나 이와 유사한 일을 하지 말며,
[임성삼의 주(註); 예절은 집에서도 지켜야 한다. 집에서는 집의 옷을 입는 것도 중요한 예절이다.]
편지를 쓰되 "시누에사"라는 곳에서 어머니에게 써 보낸 것처럼 소박하게 쓸 것,
나를 모욕하고 또 무례한 짓을 하는 자들에 대하여 그들이 화해의 뜻을 표하면 곧 마음을 풀고 융화할 수 있는 기풍을 기를 것,
[임성삼의 주(註); 단지 무례한 자가 화해의 뜻을 표하기 전에 그들에게 내가 아첨으로 화해의 뜻을 전해서는 안된다.]
무릇 책은 정독하여 표면적인 이해에 만족하지 말 것,
[임성삼의 주(註); 이를 위해 나는 현재 거의 모든 책의 중요한 구절을 적어 여러분에게 보내고, 이런 주석을 붙이는 것이다.]
말이 많은 사람들에 대하여는 경솔하게 맞장구를 치지 말 것 등등을 가르쳐 주었다.  .....
8. 아폴로니우스에게서는
의지의 자유와
끝까지 목적을 관철하는 것을 배우고
또한 한동안이라도 이성(理性) 이외에는 아무 것도 의지하지 말며,
심한 고난을 당하거나 ...
오랫동안 질병으로 고생하더라도 언제나 태연자약(泰然自若)한 태도를 취할 것,
[임성삼의 주(註); 참 어려운 것을 배우셨다.]
그리고 용감무쌍한 동시에 매우 유순하며
자제(子弟)를 가르칠 때는 성급해서는 안 된다는 산 실례(實例)를 분명히 찾아볼 수 있었다.
또한 철학상의 여러 가지 큰 원리를 해설하는 것과 같은 자기의 경험 또는 숙련 등은 조그만 재능에 불과하다고 분명히 자각하고 있는 것을 그에게서 발견하였다.
 뿐더러 친구의 신세를 지면서도 결코 비굴해지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무관심하게 관과하지 않는 태도를 역시 그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
9. 세크스투스[플루타르크의 손자, 혹은 조카]에게서는
인자스러운 성격과 자부(慈父)의 미덕에 의해 가꾸어진 가정의 본보기와,
자연에 순응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또 허식이 없는 엄숙한 태도며,
친구들의 이득을 자상하게 고려하고,
무지한 사람들이나 분별없는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는 것 등을 배웠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나, 유쾌한 얼굴로 대하여, 자기를 융화시키는 재능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와의 교제는 어떠한 아부보다도 즐거웠으며,
그 때문에 그는 교제하는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실생활에 필요한 처세의 강령을 발견하는 동시에,
그것을 총명하고 조직적인 형식으로 질서를 세우는 재능도 갖고 있었다.
그는 분노는 물론이고 어떠한 감정도 절대로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모든 감정에 벗어나 있으면서도, 애정이 매우 깊었었다.
그는 떠들썩하게 과시하지 않고서도 칭찬의 의사를 표시할 수가 있었으며, 허식없는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10. 문법학자 알렉산더에게서는
남의 흠을 잡기를 삼가며,
천한 말이나 그릇된 문법이나, 이상한 발음으로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방하지 않고, 오히려 그 경우에 사용해야 할 올바른 표현을 교묘히 가르쳐 주되 직접 그 말로써가 아니라 다만 이에 대한 답변이나, 찬동의 표명이나 또는 질문과 같은 형식을 빌어서 시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11. 프론토우에게서는,
폭군이나 군주에게 어떤 질투와 위선이 존재하는가를 간파할 것과,
[임성삼의 주(註); 폭군과 군주를 동일하게 취급한 것을 인정하자.
어떤 기관이든지 기관장의 성격에는 동일한 면이 있다.]
우리 사이에서 귀족이라고 부르고 있는 자들에게는 대체로 자부(慈父)의 성격이 결핍되어 었음을 간파할 것을 배웠다.
[임성삼의 주(註); 프론토우는 나와 비슷한 성격의 사람이었을지 모르겠다.]
12. 플라톤학파의 알렉산더에게는
자기에게 여가가 없음을 남들에게 때때로, 그리고 부질없이 말하거나, 또는 그것을 편지로 써 보내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급한 일에 몰린 것을 구실로 삼고, 친한 사람들과의 교제에 필요한 의무를 게을리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도 배웠다.
13. 카테울스에게서는
어떤 친구가 자기의 결함을 발견한 경우에, 비록 그것이 무리한 억지라고 하더라도, 이를 모른 체 방임하지 말고, 그 사람을 본래의 성품으로 돌아가게 하도록 힘써야 함을 배웠다.
그리고 스승들에 대하여는 도미티우스와 아케노도투스의 고사(故事)를 본받아 언제나 옳은 말을 하고,
또 자기의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할 것을 배웠다.
14. 사랑하는 형제[역주(譯註); 저자는 형제가 없었으므로 사촌 정도였을 것이다] 세베루스에게서는
자기의 친족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며, 정의를 사랑할 것을 배우고, 또한 그에게서 트라세야, 헬베디우스, 카토, 디온, 브루터스 등에 대하여 배웠다.
[임성삼의 주(註); 자기의 친족을 사랑하는 것은 '중용'에서도 나오는 중요한 덕목이다.
나중에 나오는 여러사람은 과거 공화정의 인물들이다. 과거의 사람에 대해 배우는 것도 큰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만인을 위해 동일한 법칙이 존재한다는 정치적인 주장, 즉 평등의 권리와 언론상의 평등한 자유를 인정하고 통치하는 사상과 ,피치자(被治者)의 거의 모든 자유를 존중하는 왕자다운 통치의 관념을 배우게 되었다.
[임성삼의 주(註); 그 시대의 이 황제가 지금 민주사회의 대부분의 정치가보다 더 진보적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철학에 대한 자기의 입장은 종시 일관하여 변함이 없어야 하며, 선한 일을 행하고,
기꺼이 남에게 베풀며, 선량한 희망을 품고, 친구들에게서 스스로 사랑을 받고 있음을 믿을 것을 그에게서 배우게 되었다.
그는 자기를 배척하는 사람들에게도 자기의 진의를 감추지 않고 말한다.
그러므로 친구들은, 그의 의향을 억측할 필요가 없이 분면하게 알게 됨을, 나는 그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다.
15. 막시무스에게서는
[임성삼의 주(註); 그 당시 흔한 이름이었으나, 내가 앞에서 소개한 그 막시무스일 가능성이 있다.]
자제를 배우고,
또한 다른 일에 미혹되지 않으며 병들었거나 그밖에 모든 경우에 쾌활하고 상냥하며 무뚝뚝한 어느 덕성이나 적당히 조절하여, 불평을 하지 않고, 자기 일을 처리하는 것을 배웠다
 그는 언행이 일치하고, 그가 하는 일은 모두가 한결같이 악의에서 우러나는 일이 없었다. 그것은 아무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놀라는 얼굴을 하지 않았으며, 서두는 법이 없었다.
 그런가하면 무슨 일에나 방치하지 않았으며, 당황하지도 않았다.
 실망하거나 자기의 곤경을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일이 없었다.
[임성삼의 주(註); 사회생활에서 자기의 잘못을 웃음으로 얼버무리면 안된다. 그저 묵묵히 인정하는 것이 가장 나은 길이다.]
언제나 인자스러운 행동을 하였고, 남을 용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모든 허위에서 떠나 있었다.
 그는 연단(鍊鍛)을 받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정의에서 떠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아무도 그에게서 멸시를 당했다고 생각하거나, 자기를 그에 비해 뛰어난 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즐겁게 유머를 곧잘 하는 재능도 갖고 있었다.
[임성삼의 주(註); 적어도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나오는 주인공 막시무스와는 전혀 다른 성격이다.]
16. 나의 아버지[전왕(前王); 양부, 안토니우스 피우스]에게서는 온유한 기질과 사물에 대하여 충분히 생각하고 나서 굳은 결의를 한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었다.
[임성삼의 주(註); 바로 전(前) 로마 황제에 대한 언급이 이렇게 16 번째로 나중이라는 것을 생각하자. 이 분도 또한 로마의 5 현제(賢帝)의 한 분이었다. 아래의 사항을 보면 최고의 인간이었던 것 같다.]
 남들이 명예롭게 생각하는 일에 허영을 구하지 않고, 노고와 정진을 사랑하고, 대중의 이익을 위해 건의하는 사람들의 말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고, 각자의 공과 과에 따라 상과 벌을 주어 일을 불공평하게 처리하지 않는 그 견실(堅實)성, 민활한 행동과 사면(赦免)에 있어서 경험이 풍부한 임기응변(臨機應變)의 지려(智慮) - 그러한 것들을 나는 아버지에게서 보고 배웠다. ...
당신을 일반 시민과 조금도 다름없는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당신의 신하에 대해서도 함께 식사를 나누거나 출타할 때에 필요한 시종 등 모든 의무를 면제시켰다. ...
 아버지는 모든 중요한 일에 대하여 용의주도하고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어, 첫눈에 보이는 외관만으로 만족하여 탐구를 그만두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성격상 친구를 오래 사귀며, 곧 싫증을 내거나 또 애정을 마구 표시하는 일이 없고, 언제나 만족하고 쾌활한 얼굴을 하였다.
 또한 모든 사물을 훨씬 이전부터 내다보고, 사소한 일도 허실없이 미리 준비해 두고, 세속의 갈채나 아부를 재빨리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라의 통치에 필요한 일에 대하여는 언제나 주의를 기울이고, 국고금의 훌륭한 관리인이 되고자 애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당신에게 돌아오는 비난을 참을성 있게 견디곤 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왕으로 오랜 기간을 견딘 사람이 전 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유럽에서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5 황제 시대의 다섯 번째 황제가 네 번째 황제에 대하여. 그러나 그 훌륭한 황제들의 행동이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행동과 다른 점이 별로 없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아버지께서는 제신(諸神)에 대하여 결코 미신적인 일이 없었다.
[임성삼의 주(註); 이번 책 소개를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강조한 사항이다. 시오노나나미의 말대로 지도자는 어느 시대든 미신에서 자유롭다.]
 또한 선심을 써서 남의 환심을 사거나, 백성들에게 아부하여 민심을 우롱하는 일도 없었다. 모든 일에 근엄하고 견실하며, 결코 비열한 생각을 하거나 행위를 하는 일이 없었다.
[임성삼의 주(註); 이런 능력있는 사람들이 이렇게하여 "로마의 평화"를 마련한 것이다.]
 또한 신기한 기호(嗜好)에 빠지지도 않았다.
[임성삼의 주(註); 언제나 그 시대의 기호에 빠지는 사람이 국가의 수장(首長)이 되면 문제가 생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인 다음 황제 코모두스는 그 당시의 기호인 검투(劍鬪)에 빠져 매일 아침 곰이나 사자를 한 마리씩 죽였다. ]
 그리고 어느 모로나 생활을 즐겁게 하고 행운을 윤택하게 공급하는 것이라면, 자랑하지도 않고 천시하는 일도 없이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
 그를 가리켜 궤변가 또는 교양이 없는 경솔한 사람이나, 현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누구나 그를 보고 원만하고 완벽하며, 특히 아부를 떠나 모든 공사(公私)의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였다.
 또 아버지께서는 진실한 철학자들을 존경하는 한편, 단지 철학자인 체하는 인간에 대하여도 결코 비난하지 않고, 이들에게 쉽사리 속지도 않았다.
 좌담에도 뛰어나, 남에게 불쾌한 태도를 취하는 법이 없고, 좌석의 분위기를 즐겁게 조정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건강에 대하여 상당히 주의하였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삶에 집착하지도 않고, 육신의 외모에 마음을 쓰지도 않았으며, 또 전혀 무관심한 것도 아니었다. 이와 같이 조심하는 까닭에 내과의사의 진찰을 받고 약을 쓰거나, 외과의사의 필요를 별로 느끼지 않았다. ...
 그는 일부러 꾸미는 일이 없이, 국가의 제도와 법률을 지켜 나갔다. 또한 변화와 혼란을 좋아하지 않고, 같은 지위에 머물러 동일한 일을 보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두통이 일어난 후에도 곧 기분을 새롭게 하고, 원기 왕성하여 평소의 사무를 보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비밀이 적었다. 그것은 매우 드문 일이고, 단지 공적인 일에 관한 것뿐이었다.
[임성삼의 주(註);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다음 황제의 진술이니 믿을 수 있다.]
 그는 민중의 구경거리, 관공서의 건축, 국민에 대한 자신의 시여(施輿)물 등에 대하여는 신중하고 경제적이었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할 뿐, 굳이 개인의 행위로 손에 넣을 수 있는 허명(虛名)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정에 없는 시간에 목욕을 하는 법이 없었다. 호화로운 거실을 지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의 음식물과 옷감이나 색깔 또는 비복(婢僕)의 미모에 관심이 없었다. ...
 그에게서는 잔인성, 앙심, 난폭 또는 이른바 식은땀을 흘리게 하는 점은 전혀 없었다. 뿐더러 무슨 일이나 조사에 착수할 때에는 시간 여유가 많은 것처럼, 침착하고 순서를 따라 재빨리 계속적으로 진상을 캐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에 관한 기록, 즉, "많이 소유하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고, 소유하면 남용하게 마련인 재화를, 그는 소유하지 않고서도 견디고 소유하고도 적절히 즐길 수 있었다."는 말을 아버지에게 적용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17. 나는 선량한 조부, 선량한 양친, 선량한 자매, 선량한 교사, 선량한 교우(交友) 및 선량한 친족과 친구 등등, 거의 모든 선량한 것을 소유할 수 있는 데 대하여, 신들(諸神)에게 감사하고 있다.
[임성삼의 주(註); 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있지 않다.]
  또 하나 내가 신들에게 감사하고 싶은 것은, 이들 가운데서 어느 누구에게나 내가 해를 입히는 과오를 저지르지 않은 점이다.
[임성삼의 주(註); 그러나 황제의 능력이 없는 아들에게 권력을 주고 곧 죽음으로써 로마에 막대한 피해를 미쳤다. 그의 능력 범위 밖이었을까?]
 
 나는 본래 기회만 있었더라면, 이러한 과오를 범할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들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시험에 빠지는 우연의 기회는 한 번도 없었다.
...
 내가 통치자로서 혹은 아버지로서 모신 사람은, 내게서 모든 자만심을 제거해 주고, 적어도 남자로서 호위병이라든가, 호화로운 정장이라든가, 혹은 횃불, 석상(石像) 같은 허식을 필요로 하지 않고 궁정에서 생활하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와 같이 생활할 수 있어야만, 자기를 한 사인(私人)이나 다름이 없는 풍습에 젖게 하면서도, 천한 사상을 갖지 않고, 또 행동을 조심하면서 통치자로서의 알맞은 태도로 공익(公益)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임성삼의 주(註); 로마가 가장 융성한 이 때의 황제의 소박한 생활 모습을 증언해주고 있다.]
 또 다시 신들에 감사할 것은 나에게 준 한 사람의 형제[역주(譯註); 의형제 루키루스 베루스]가 그의 도의적인 성격상 언제나 나를 깨우쳐 주고, 그의 존경과 우애가 나를 기쁘게 하여 주며,
또한 내 자식들은 어리석지 않고, 육신적으로 불구자가 아니며,
[임성삼의 주(註); 하지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 아들 코모두스는 뛰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내가 수사학과 시, 그밖에 다른 학문과 예술에 능통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만일 내가 이런 일에 정진할 수 있었던들, 아마도 나는 거기에 철저히 얽매이게 되었을 것이다. .....
[임성삼의 주(註);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능통하지 못한 것도 복이다.]
 나는 아마도 이상적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터이지만, 앞으로는 자연에 순응하여 사는 것을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육신은 오랫동안 그러한 생활을 영위해 왔었다.
 내가 매우 유순하고, 애정이 깊고, 그리고 단순한 아내를 갖고 있는 것도,
[임성삼의 주(註); 역사적으로 이 황제의 아내이며 전 황제의 딸에 대하여는 여러 말이 있다. 위의 표현에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통설(通說)이다. 뒤에 백과사전에서는 위와 같은 개념이지만...]
내 자식들을 위해 많은 훌륭한 선생들을 초빙한 것도,
[임성삼의 주(註);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1 권의 130 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황제의] 도움을 요청 받고 모여든 학덕 높고 유식한 교육고문들은 소년 '코모두스'의 편협한 마음을 열어주어 점차 심화되어가는 악덕을 교정하여 곧 인수받을 제위에 합당한 인물이 되게 하고자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원래 교육의 힘이란, 처음부터 그런 교육이 거의 불필요할 정도로 본바탕 자체가 훌륭한 인간이라면 또 몰라도, 그렇지가 못한 사람이라면 대체로 거의 효과가 없는 것이 보통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 말이 옳은가? 잘 생각해보자. 역사에는 훌륭한 교육을 받은 인간성이 덜 된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우리 주위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자주 눈에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건실한 체하는 철학자의, 전혀 재미도 없는 강의 따위는 놀기 좋아하는 간신배의 한마다 속삭임에 의해 순식간에 잊혀져 버릴 것은 뻔한 일이었다."
 지성적인 황제와 유능한 학자들이 모든 힘을 다해 교육을 시켜도 인간적으로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 경우가 이 코모두스만은 아니다.]
 또 내가 철학에 취미를 갖게 되었을 때 궤변학파(詭辯學派)의 손에 떨어지지 않고 역사가와 삼단논법(三段論法)과 추리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혹은 천체 현상의 관측에 몰두하지 않게 된 것도, 신들의 도움을 받은 덕분이다.
 이러한 모든 일에는 신들과 운명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임성삼의 이야기; 명상록의 1 장을 거의 모두 옮겼다.
 이 장의 첫 부분은 이 황제가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배운 내용이다. 사람은 책에서 보다 주위의 다른 사람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우리도 우리 주위의 분들에게 어떤 좋은 점을 배웠는가를 명상(冥想)해 보는 것이 어떨까?
 상당히 많은 부분을 16 절의 전의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의 성격을 묘사하는 데 사용했다. 이상적인 사람이 어떤 성격을 가져야 하는가를 잘 알 수 있다.
 17 절 이후는 자기가 가진 것들에 대한 감사이다. 살면서 감사할 줄 모르면 좋은 사람일 수 없다.]
<2>
1. 아침에는 우선 이렇게 생각할 일이다. 즉 자기는 남의 일에 참견하는 자, 은혜를 모르는 자, 교만한 자, 사기꾼, 질투하는 자, 비사교적인 자와 만나게 될 것이라고.
[임성삼의 주(註); 이런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 로마 황제였다.]
 이 모든 일은 사물의 선악에 대한 무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선한 것이 아름답고, 악한 것이 추한 데 대하여, 그 본성을 통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악을 행하는 자의 성질도 나와 같은 인간으로, 비단 같은 혈통이나 종족에 속할뿐더러 동일한 신의 예지를 동등하게 나눠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나는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 손상되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추악한 것을 나에게 떠맡길 수 없고, 나는 자기의 동포들에게 화를 내거나 증오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2. 내가 어떠한 존재이건 간에, 단지 한 고깃덩이와 호흡과 지배적인 부분[정신]에 불과한 것이다.
 그대의 책을 버리라. 이제 그대 자신을 현혹시키지 말라. 그것은 허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한 사람의 늙은이다. 더 이상 [스스로를] 노예로 삼지 말라. 꼭두각시처럼 비사회적인 행동의 끄나풀에 조정되어서는 안된다.
 현재의 처지에 불만을 품어도 안 되고, 미래에서 물러나서도 안된다.
3. ... 우주는 많은 원소(元素)의 여러 가지 변화에 의해 유지되는 동시에 많은 원소가 복합된 여러 가지 사물의 변화에 의하여 유지된다. 그대는 이 원리로 만족하고, 이 원리를 언제나 그대의 견해로 삼으라.
[임성삼의 주(註); 현재의 화학과 별로 다른 개념이 아니다. 단지 화학의 원리를 정신에 끌어들여 철학으로 만들었다.]
 책에 대한 갈망을 버리라. 그것은 고민하는 일이 없이, 쾌활하게 성실하게, 그리고 충심으로 신들에게 감사하면서 죽기 위해서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 말 또한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5. 어떤 순간에도 한 로마인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원만하고 순박한 위엄을 지니는 동시에 사랑과 자유와 정의감을 갖고, 당면한 일을 처리하고, 다른 여러 가지 잡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도록 충실히 사고해야 한다.
[임성삼의 주(註); 정말 좋은 말이다.]
 만일 온갖 부주의와 이성의 명령에 대한 감정적인 반항과 모든 위선, 이기심,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불만을 버리고, 오직 이것이 마지막 일인 것처럼 실생활에서 하나하나 실천해 간다면, 그대는 스스로 안정을 얻게 될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실 생활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는 좋은 방법이다.]
 그대가 아는 바와 같이, 조용한 생활, 신들의 생활과 같은 삶을 보내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실로 근소한 것이다. 신들은 이러한 것을 행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그 밖의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임성삼의 주(註); 기독교의 개념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6. ... 각자의 생명은 충족되어 있다. 그런데 그대의 영혼이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행복을 남들의 영혼에 맡기고 있는 동안에 그대의 생명은 고갈된다.
8. 인간은 남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살피지 않기 때문에 불행하게 되는 경우는 좀처럼 없지만,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주목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에 빠진다.
10. ... 참으로 철학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도록 그[테오프라스토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즉 쾌락을 위하여 저지르는 비행은 고통으로 말미암아 저지른 비행보다 더욱 비난을 받아야 한다. ...
12. 만물은 얼마나 신속히 소멸하는 것인가. 육신은 우주 속으로 사라지고, 그 기억은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모든 현상은 무엇인가? 특히 쾌락으로 인간을 유혹하고, 또한 고통으로 인간을 두렵게 하며, 물거품 같은 명성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것들은 얼마나 무가치하고, 얼마나 비열하며, 얼마나 사멸하기 쉽고, 또 얼마나 말라 죽기 쉬운가 하는 것에 대하여는 예리한 지능만이 깨닫기 마련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 명상록에서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한 논리는 대단히 간단하다. 덧없다는 것이다. 허무의 관념으로 실 생활의 건전함을 내세우자는 논리가 '스토아' 철학의 원리인 것 같다.]
14. 인간은 설령 삼천 년을 살든, 또는 일만 년의 몇 배를 살든, 그래도 역시 모든 인간이 잃는 생활은, 현재 그들이 영위하고 있는 생활일 터이며, 또한 그 생활은 현재 그가 시시각각으로 잃고 있는 생명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리하여 가장 긴 생애나 가장 짧은 생애가 동일하게 된다. ...
[임성삼의 주(註); 이런 개념이 이 책의 끝까지 반복하여 나온다. 앞으로는 생략할 것이다.]
17. 인간의 생애는 하나의 점(點)으로, 물질은 유전(流轉) 속에 있고, 지각(知覺)은 우둔하고, 육체의 됨됨은 썩을 운명에 있으며 그리고 영혼은 선풍(旋風) 같고, 행운은 예측할 수 없으며, 명성은 비판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요컨대 육체에 속하는 것은 하나의 흐름이고, 심령에 속하는 것은 꿈결 같은 운무(雲霧)이며, 생활은 하나의 투쟁이고, 또한 나그네의 행로이며, 그리고 사후의 명예는 망각이다.
[임성삼의 주(註); 황제부터 온 로마 사람이 이러한 허무 속에 있을 때, 기독교가 그들에게 희망과 빛을 주었다. 이 시대에 로마에서는 맹렬하게 기독교가 전파되고 있었다.
  즉 스토아 철학은 로마 사람들의 마음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메마르고 허무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 메마른 마음에 기독교의 복음이 비와 같이 스며 들어갔다.]
 그렇다면 인간을 인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하나 철학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 능욕하거나 가해(加害)하지 말고, 쾌락을 초월하여, 목적이 없는 행동을 하지 말며, 또한 허위나 위선에 찬 행위를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행동 여하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모든 일과 모든 운명을 자기 자신이 태어난 원천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고 감수하며, 끝으로 죽음에 대하여는 모든 생물이 그 구성 분자로 환원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유쾌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
[임성삼의 주(註); 그러나 철학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은 유쾌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것 보다는 기독교의 영생(永生)을 택하게 된다. 그 길이 현세에서는 아주 힘든 순교의 길이라도...]
                           이상은 칼눈툼[다뉴브강 남쪽에 있는 판노니아의 한 고을, 야만족과의 싸움으로 이곳에서 3 년 동안 머물렀다고 함]에서 적었다.
<3>
1. 우리는 자기의 생명이 나날이 소모되고 감퇴되어 간다는 것을 염두에 둘 뿐만 아니라, 또 하나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즉 가령 어떤 사람이 장수를 한다고 해도 과연 그 분별력이 존속되어 사물을 충분히 분간할 수 있으며, 신과 인간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능력을 보유할 수 있을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
 
 우리는 서둘러야 한다. 그것은 비단 우리가 날로 죽음에 접근해 가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물의 개념에 대한 능력과 이해력이 먼저 쇠퇴되기 때문이다.
2. 만일 사람들이 우주에 생성된 사물에 동정과 깊은 통찰력을 갖는다면, 어느 의미에서나 쾌감을 주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맹수의 벌린 턱에서도 화가나 조각가의 작품에 못지않는 쾌감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또한 할머니나 할아버지에게서도 일종의 원숙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며, 또 젊은 남녀의 매력 있는 사랑스러움도 맑은 안목으로 바라볼 수가 있을 것이다.
3. 히포크라테스(BC 460 - 377 경)는 많은 병을 치료하고 나서, 자기가 병에 걸려 죽었다. 칼데이의 박사들은 많은 사람의 죽음을 예언하였으나, 이윽고 운명은 그들도 앗아갔다. 알렉산더, 폼페우스, 카이우스, 시저 등은 그렇게 번번이 대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전장에서는 몇 십만의 기병대나 보병대를 닥치는 대로 살육하였지만, 이윽고 그들 자신도 죽음을 당하였다.
4. ... 우리는 만일 어떤 사람이 갑자기 "지금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하고 물으면, 공명정대하게 곧 "이러저러한 일"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일만을 언제나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
[임성삼의 주(註); 동양에서는 "혼자 있을 때의 마음을 조심하라."는 말이 여러 책에 있다. 또한 율곡 선생님의 "격몽요결"에 이와 거의 완전히 같은 말이 있다.]
5. 무슨 일이든지 마지못해 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 또한 깊이 생각한 연후에 행하되, 마음에 혹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인위적인 허식으로 자기 사상을 장식하여서도 안 되며, 말이 많은 사람이 되거나 많은 일에 매여 너무 분주하여서도 안 된다.
 그리고 자기 자신 속에 깃들어 있는 신성(神聖)으로 하여금 자기의 수호신이 되게 하고, 남아답게 생각이 깊으며, 정치에 관여하고, 로마인으로서, 지배자로서, 자기의 직분을 지켜나갈 때에는 언제나 생명을 내던질 각오를 한 사람처럼 진퇴(進退)를 결정하고, 아무런 서약도, 어떤 사람의 증언도 필요없이 묵묵히 행동해야 한다.
[임성삼의 주(註); 로마인들은 이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또한 쾌활해야 한다. 외부에 원조를 구하지 말며 타인이 주는 평화를 바라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남아는 남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서야 한다.
[임성삼의 주(註); 그 당시 세계의 주인으로 자부하고 있던 로마인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6. 인간 생활에 있어서 그대가 만일 정의, 진리, 절제, 견인(堅忍)보다 더 선한 것을 발견한다면 ... 그대는 거기에 전심전력을 위탁하라. 그리고 그대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향락하도록 하라.
 나는 말하고자 한다. 그대는 다만 단순히, 그리고 자유롭게 최선의 것을 선택하라. 그리고 그것을 고수하라.
8. 세련되고 정화된 인간의 정신 속에는 썩은 것, 부정한 것, 꿰매어 붙인 상처 같은 것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또 언제 죽음의 손에 잡히더라도, 마치 연기를 끝마치기 전에 무대를 떠나는 배우에 대한 비난처럼 미완성의 생활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는 조금도 비굴한 데가 없고, 또한 허식도 없으며, 큰 집착도 느끼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사물을 등지는 일도 없고, 탓할 만한 일도 없으며, 피난처를 찾는 일도 없다.
[임성삼의 주(註); 이 황제가 이런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황제를 힘없고 병든 노인으로 묘사한 영화는 진실이 아니다. 그는 죽을 때 59 세밖에 안되었었다.]
10. ... 그리고 가장 길다는 사후의 명성도 역시 짧은 것으로 대대손손(代代孫孫) 그것을 전하는 것은 다만 가엾은 인간들이며, 그들 자신이 매우 신속히 죽어가고,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자들이므로 먼 옛날에 죽은 사람들에 대하여 알 리가 없다.
[임성삼의 주(註); 죽은 후의 명성에 대하여까지 정확히 분석하였다.
나의 집 사람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 중 이 줄 친 부분만은 틀렸다고 하였다. 지금 우리들은 그의 글을 읽으며 그의 마음을 알고 그와 함께 느끼고 있으니까.]
16. ... 자기의 가슴에 심어 놓은 신성(神聖)을 모독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인상에 의해 그것을 훼방하지 않으며,
신에 순종하고,
진리에 어긋나는 일은 일체 입밖에 내지 않으며,
[임성삼의 주(註); 논어에 나오는 비례물언(非禮勿言; 예절이 아닌 것은 말하지 않는다)]
또한 정의에 위배되는 것은 일체 행하지 않는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역시 논어의 비례물동(非禮勿動)]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이 단순하고 겸손하며, 분수에 어울리는 생활을 하고 있음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어느 누구에 대하여도 불평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자기가 한 평생 도달하려는 목적에 이르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4>
2. 어떤 행위를 하든지 거기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한다.
또한 기술상의 완전한 원리에 따라야 한다.
......
 명성에 대한 욕망이 아마도 그대를 괴롭힐 것이다. 보라, 모든 사물이 얼마나 신속히 망각되는가를.
10. 모든 사물은 정당한 이유에서 생긴다는 것을 명심하라. 만일 깊이 관찰하면, 그대는 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무엇을 하든지 선인(善人)이 될 것을, 다시 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선인이 될 것을 목표로 하고 행동해야 한다.
[임성삼의 주(註); '엄밀한 의미에서 선인'이 될 것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 착한 사람 비슷하게도 될 수 없다.
율곡 선생님의 "격몽요결"의 첫 귀절은 다음과 같다.
初學 先須立志 必以聖人自期              須(모름지기 수)    期(기약할 기)
처음 학문을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먼저 뜻을 정하기를
반드시 완전한 사람(성인 聖人)이 되기로 스스로를 기약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성인을 선인과 거의 같이 해석한다.]
12. 우리는 언제나 다음 두 가지 규칙을 활용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 하나는 지배와 입법을 맡은 자는 인류의 이득을 위해서만 명령을 내릴 것.
 또 하나는 만일 근처의 어느 사람이 그대의 미망을 제거해 주고 그대의 그릇된 견해를 씻어 준다면 아낌없이 의견을 변경할 것. 그러나 이 의견의 변경은 정의나 혹은 공공의 이익과 같은 어떤 확실한 이유에서 행해야 하며, 그것이 기분 좋게 보인다든가, 또는 명예를 가져온다는 이유에서 변경해서는 안된다.
17. 스스로 만 년 동안이나 살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죽음은 그대 위에 걸려 있다. 그대가 사는 기간은 그대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는 선량하라.
[임성삼의 주(註); 이것이 이 책의 기본 법칙이다. 이 논리에 대해 잘 생각해보자.]
18. 나의 이웃 사람이 말하고, 또 행하며, 혹은 생각하는 것을 알려고 애쓰지 말고, 오직 자기 자신이 하는 일을 올바르고 순결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참으로 많은 괴로움을 모면하게 될 것이다.
 아가톤(그리스의 비극작가. BC 447 - 400)이 말한 바와 같이, 남의 타락된 도덕에 눈을 돌리는 일 없이, 다만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20. 어느 의미에서나 아름다운 것은 모두 그 자체에 있어서 아름답다. ...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진리, 인애(仁愛), 겸손이 칭찬을 받아서 아름다운 것이 되었으며, 비난을 받으면 더러운 것이 된다는 말인가? 비취, 황금, 상아, 자수정 등이 칭찬을 받지 않으면 밉게 보이는가?
[임성삼의 주(註); 칭찬을 바라는 데에 대한 경고]
24.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은 언제나 "이것은 불필요한 일이 아닌가?"하고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인간은 불필요한 행위 뿐 아니라 불필요한 생각까지도 버려야 한다. 이렇게 하면 부질없는 행위를 하지 않게 된다.
28. 간악한 성격, 비겁한 성격, 완고한 성격, 짐승 같은 놈, 어린애 같은 사람, 동물적인 인간, 우둔한 자, 거짓이 많고 비천하고 기만적이고 포악한 자
[임성삼의 주(註); 이러한 온화한 분도 이런 사람들에 의해 수난을 받고 나면 이런 글을 남기게 된다.]
31. 그대가 배운 기술은, 비록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이를 존중하고 만족하라. 그리고 그대 자신을 폭군이나 노예로 삼지 말고, 온 몸과 정신으로 가진 것 일체를 신에게 맡긴 사람과 같이 여생을 보내도록 하라.
33. 전에 귀에 익었던 말도 지금은 낡아 버렸다. 마찬가지로 옛날에 유명했던 사람들의 이름도, 오늘날에 와서는 낡아 버렸다.
34. 자기 자신을 기꺼이 운명의 여신 크로토우에게 맡겨, 그녀가 그대의 실을 마음대로 짜도록 하라.
[임성삼의 주(註); 운명의 여신은 각 개인의 운명을 계속 실로 짜서 그 사람의 삶을 만들어 간다고 그리스 신화에 나와있다.]
35. 기억하는 것도, 기억되는 것도, 다 함께 단 하루뿐인 것이다.
48. 다음과 같은 것을 언제나 마음속에 새겨 두라. 얼마나 많은 의사들이 병자에게 자주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이윽고 자기 자신도 죽어갔는가를. 얼마나 많은 점쟁이들이 남의 죽음을 떠들썩하게 예언하면서, 자기도 덧없이 죽어갔으며, 또 얼마나 많은 철학자들이 죽음과 불멸에 대하여 끊임없이 해명하고 스스로 죽어갔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영웅들이 무수한 사람들을 살육한 연후에 자기도 죽어갔으며, 또 얼마나 많은 폭군들이 자기는 불멸의 화신이나 되는 것처럼 몸서리치는 횡포를 감행하여 생사의 권한을 한 손에 휘두른 연후에 죽어갔던가. 또 얼마나 많은 도시가 멸망했던가. ... 인생이 얼마나 덧없고 얼마나 무상한가. ... 자연에 순응하여 지나가고 ...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그대의 나그네 길을 끝맺도록 하라.
[임성삼의 주(註); 이 시기에 사람들이 착한 행동을 하게 하려면, 이런 빈약한 논리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로마에서 광범위하게 기독교가 퍼져나간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철학의 한계를 보는 것으로 여겨진다.]
49. 언제나 사나운 물결에 부딪치면서도 굳굳하게 서 있으며, 주위의 사나운 물결을 다스리는 곶(岬; 산허리 갑)처럼 있으라.
<5>
1. 아침에 일어나기 싫거든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좋다. - 즉 나는 한 인간으로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내가 존재하고, 또 그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파송된 일을 지금 하려고 한다면, 내가 어찌 그것에 불만을 느낄 수 있겠는가?
2. 성가시고 귀찮은 모든 잡념을 깨끗이 버리고, 마음을 안정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7. 아테네 사람들의 기도 - 비를, 비를, 오 제우스여, 아테네 사람들의 경작지와 들에 비를 내리소서
 우리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기도를 한다면, 이와 같이 단순하고 기품이 높은 양식으로 해야 할 것이다.
9. 정당한 원리에 따라서 모든 일을 하였는데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그대는 혐오하지 말고, 낙담하지 말며, 또한 불평을 하지 말라. 그 경우에는 다시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서 자기가 한 일이 거의가 인간의 본성과 일치하면 스스로 만족을 느끼고 그대에게로 돌아오는 것(철학)을 사랑하라. ...
11. 나는 지금 나의 영혼을 무엇에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자문(自問)하여야 한다. 그리고 다시 다음과 같이 자문하여야 한다.
 즉 지금 나의 지배성능이라고 말하는 영혼은 무엇을 파악하고 있는가?
[임성삼의 주(註); 앞으로 지배성능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게 된다.]
그리고 나는 누구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가? 어린이의 영혼인가? 허약한 여자의 영혼인가? 가축의 영혼인가? 폭군의 영혼인가? 혹은 들짐승의 영혼인가?
17. 불가능한 것을 구하는 것은 광기(狂氣)이다. 그리고 악한 자가 악을 저지르는 것은 당연하다.
20. 자기는 인류에게 선을 행하고, 그들의 결점을 참아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인간은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이다.
30. 신들에 대하여, 부모에 대하여, 자녀에 대하여, 스승에 대하여, 그리고 그대의 유년과 소년 시절을 돌보아 준 사람들 - 친구, 친척, 노비들에게 대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대는 어떻게 행동해 왔는가? 그대의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소행에 대하여 다음의 말이 합당한가를 생각해 보라.
 언행 중에서 그 어느것도 아직 사람을 해친 적이 없다.
<6>
1. 우주의 실체는 순종이며, 또한 유화(宥和; 용서할 유, 화할 화)이다.
3. 정밀하게 고찰하라. 어떤 사물에 대하여도 그 특수성과 가치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임성삼의 주(註); 이런 지성을 가진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6. 복수를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해자와) 같은 무리가 되지 않는 것이다.
18. 사람들은 실로 이상한 행동을 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동일한 시대에 살면서, 자기들과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좀처럼 칭찬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도리어 자기가 아직 보지도 못하였으며, 또한 결코 볼 수도 없는 후세의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는 것에 커다란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다.
24.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마부(馬夫)는 죽음으로 말미암아 동등하게 되었다.
[임성삼의 주(註); 이 말이 황제의 입에서 나온 것이 신기하다. 이 황제가 죽은 1800 년 후인 현대에도 상당한 수의 전 세계 관리들의 의식 수준은 이 황제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29. 육체가 아직 쇠퇴하지 않는 동안에 심령이 먼저 쇠퇴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임성삼의 주(註); 육체가 왕성한 20 대에 심령부터 쇠퇴하는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
30. 지나치게 황제의 세도를 부리거나, 그런 버릇이 붙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므로,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대는 자기 자신을 단순하게, 선량하게, 진실하게 꾸밈새가 없이, 정의의 벗, 신들의 숭배자가 되어 친절하고 애정이 깊고 모든 일에 정당하게 행동하도록 힘쓰라.
 그대는 철학이 그대의 인격을 완성시키려고 원한 그 상태에 언제나 있으라. 신들을 공경하고 사람들을 도와주어라. 인생은 짧다.
 이 지상의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열매는 경건한 마음씨와 사회적인 행위뿐이다. 모든 일을 안토니우스[먼저 황제]의 제자로서 행하라. 이성에 적합한 행위로 일관한 그의 절제, 모든 사물에 대한 그의 경건, 그의 침착, 그의 우아함, 허명(虛名)의 멸시, 사물을 이해하려는 노력... 등등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는 부당한 비난을 하는 사람들을 공박하지 않고, 어떻게 참았던가.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얼마나 태연자약하였던가. .....
47. 매우 가치있는 가르침의 하나는 그대의 생활을 진리와 정의 속에서 보내고, 거짓말쟁이나 의롭지 못한 자들에게도 너그럽게 대하라는 것이다.
48. 그대 자신을 즐겁게 하려면, 그대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미덕을 생각해 볼 일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의 눈부신 활동이나, 두 번째 사람의 겸손이나, 세 번째 사람의 관용이나, 또는 네 번째 사람의 그 밖의 미덕을 생각할 일이다. 미덕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 속에 나타나고, 그것이 될 수 있는 한 풍부하게 나타날 때만큼 우리를 즐겁게 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러한 실례를 우리 눈으로 언제나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49. 그대는 자기의 체중이 150 kg에 달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만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명에 있어서도 정한 연령 이상을 살지 못한다고 해서 불만스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51.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의 견해를 자기의 행복처럼 생각한다.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감각에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분별력을 지닌 사람은 자기 자신의 행위를 자기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53. 다른 사람이 말하는 일에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되도록 말하는 상대방의 마음속으로 파고 들도록 그대 자신을 길들게 하라.
[임성삼의 주(註); 황제의 가장 큰 자격이다.]
54. 벌집 전체에 이득이 되지 않는 것은, 개개의 벌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
[임성삼의 주(註); 로마제국의 황제로서의 좋은 말이다.]
<7>
1. 사악(邪惡)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그대가 자주 보아 온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할 가치 조차 없다.]
3. 쓸데없는 일거리, 무대 위의 광언, 양의 무리, 소와 말의 무리, 창술(槍術)의 연습, 강아지에게 던진 뼈다귀, 연못의 물고기에 던진 빵, 무거운 짐을 나르는 개미의 노동, 혼이 난 생쥐의 줄도망, 실에 조종되는 인형 ---
이러한 것들 속에서 즐거운 얼굴을 하고, 거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이 그대의 의무일 것이다.
6.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명성에 의해 칭찬을 받은 연후에 망각 속에 묻혀 버렸던가. 그리고 다른 사람의 명성을 찬양해 마지 않던 많은 사람들도 벌써 옛날에 죽은 것이다.
8. 미래의 일에 대하여 걱정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러한 일에 직면할 필요가 생긴다면, 현재 그대가 사용하고 있는 이성이 그대를 도와줄 터이므로.
12. 그대는 똑바로 서라, 그렇지 않으면 똑바로 세워지지 못할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 황제의 아들 코모두스는 결코 똑바로 섰다고 할 수 없다.]
15. 누가 무엇을 하든지, 그리고 무슨 말을 하든지, 나는 선량해야 한다. 마치 금이나 에머럴드, 또는 자색 옷은 언제나 "누가 무엇을 하거나, 또 무슨 말을 하거나, 나는 에머럴드이며, 내 본래의 빛을 지녀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24. 얼굴을 찌푸리는 것은 부자연한 일이다. 그것을 자주 되풀이하면 모든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나중에는 다시 명랑성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절멸되어 버린다.
27. 그대가 소유하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하여는, 그대가 소유하고 있는 것 만큼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대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하여는 최선의 것을 선택할 일이다.
29. 어떤 사람이 저지른 비행(非行)은, 그것이 행해진 곳에 그대로 내버려 두라.
[임성삼의 주(註); 여기 저기에 가서 말하지 말라.]
31. 인류를 사랑하라. 신에게 순종하라.
[임성삼의 주(註); 이런 개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지 모른다. 기독교의 중심 사상을 이미 가지고 있다.]
34. 모래의 더미가 그 전 모래의 더미 위에 덮이는 것처럼, 인생에 있어서도 전에 행한 일은 나중에 행한 일에 덮쳐진다는 사실을 잘 생각해 보라.
36. 안티스테네스에서 --- 선을 행하고 비난을 받는 것은 고귀한 일이다.
[임성삼의 주(註); 현대 사회의 장점은 많이 있다. 그러나 "고귀(高貴)"에 대한 개념을 잃은 것은 슬픈 일이다.]
37. 마음이 명하는 대로 여러 가지 얼굴 표정을 짓는다는 것은 천한 일이다.
그리고 뜻대로 자기를 통제하고 이끌지 못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39. 불멸의 신들과 우리 자신에게 기쁨을 줄지어다.
49. 사십 년동안 인생을 관조(觀照)한 것은 만 년 동안 인생을 관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대는 현재 이상의 것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57. 오직 그대에게 일어나는 일, 그리고 그대의 운명의 실에 짜여지고 있는 일만을 사랑하라. 그 이상 적합한 일이 있는가?
58. 오직 그대 자신을 섬기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선인이 되고자 다짐하라. 언제나 이를 염두에 두라.
62. 그대는 어떤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원하는가. 그들은 어떤 이해력을 갖고 있는가를 언제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대는 실수로 비행을 저지른 사람을 책망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들의 의견이나 정욕의 원천을 주시하면, 그들의 칭찬을 원치 않을 것이다.
64. 고통을 당할 적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즉 이것은 불명예가 아니다. 또 나의 지배적인 영지(靈智)를 나쁘게 하지도 않는다고.
[임성삼의 주(註); 이 황제도 고통을 받은 적이 많은 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말이 나올 수 없다.]
65.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갖고 있던 심정이 어떠하였는가를 연구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그가 사람들에 대하여 언제나 올바른 태도를 취했으며,
신들에 대하여 경건하였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인간의 사악함을 헛되니 고민하지 않고,
어떠한 사람의 무지에도 휘말려 들어가는 일이 없었으며,
우주에서 보내온 몫으로서 자기에게 닥친 일은 무엇이건 지체 없이 받아들여, 그것을 잘 견디어 나갔을 뿐만 아니라,
가엾은 육체의 여러 가지 정욕에 대하여는 동정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자기 이해력을 어둡게 하지 않았다는 것 등등,
이러한 일이 과연 어떠했던가를 탐구해야 한다.
67. 설령 세계가 그대를 마구 욕하고 꾸짖을지라도, 또한 야수가 그대의 수족을 물어서 갈갈이 찢더라도, 모든 강제에서 벗어나 극히 안정된 마음을 갖는 것은, 그대의 권한에 속한다.
 이러한 소동 속에서도 정신을 안정하게 하고, 주위의 모든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며, 또한 모든 대상을 자기의 의사대로 사용하는 것을 아무도 훼방할 수 없다.
72. 그대가 어떤 선한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이 이를 인정할 경우에, 여전히 바보와 같이, 어찌하여 이 두 가지 사실 이외에 제 삼의 것, 즉 선행을 하였다는 명성을 얻거나, 칭찬을 받기를 원하는가.
<8>
1. 그대가 그 여생을 그대의 본성이 원하는 대로 보내게 되면 그것에 만족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그대의 본성에 따라서 행하되 다른 어떠한 것에도 휩쓸려서는 안 된다. 삼단논법(三段論法)에도, 재물 속에도, 명성에도, 향락에도 ...
5. 그대는 자기 업무에 시선을 돌리고, 동시에 선인(善人)이 되는 것이 자기의 의무임을 기억하여,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것을 외면하지 말고 이를 행하며, 또 그대에게 가장 옳다고 생각되는 말을 하되 선의(善意)와 겸손과 성실로써 해야 한다.
8. 그대는 책을 읽을 여가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대는 오만을 억제할 여유는 갖고 있다. 그대는 쾌락과 고통을 초월할 여유를 갖고 있으며, 명예욕을 초월하고, 어리석은 배은망덕(背恩忘德)자를 괘씸하게 여기지 않을뿐더러, 그들에게 무관심할 수 있는 여유도 갖고 있다.
10. 쾌락은 선도 아니고, 유용한 것도 아니다.
22. 그대가 그토록 고민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 그대가 오늘보다 내일은 더욱 선량해지려고 하므로.
30. 원로원에서도 누구에게나 아는 체 말고 온당하게 이야기하라. 순박한 말을 하라.
33. 부귀나 영화는 교만에 흐르지 말고 받아들이라. 그리고 언제나 그것을 버릴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
36. 미래도 과거도 그대를 괴롭히지 않으며, 다만 현재만이 그대를 괴롭힌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50. 어떤 오이는 쓰다. 이것은 버리는 것이 좋다.
길 한복판에 나무더미가 놓여있다. - 이것은 피하여 지나가면 된다.
이것으로 족하다.
세상에 어찌하여 이런 것이 만들어졌는가? 하고 부질없는 생각을 첨부하지 말라
.
[임성삼의 주(註); 이것이 삶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51. 어떤 사람이 맑은 샘물가에 서서 샘물을 저주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샘물은 계속해서 맑게 치솟을 것이다.
 만일 그가 그 속에 흙덩이나 오물을 던져 넣더라도, 샘물은 곧 그것을 순화시켜 금방 깨끗해질 것이다.
61. 각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마음속으로 돌아가게 하라.
<9>
4. 악을 저지른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고약하게 만들므로, 자기에게 불의를 행하는 것이다.
12. 그대는 비참한 노예처럼 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동정을 받거나 칭찬을 받는 것 때문에 일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대의 정신을 오직 한 가지 일에 집중시켜, 사회적인 이성이 요구하는 대로 그대 자신을 움직이고, 또한 그대 자신을 억제하라.
17. 위로 던져 올린 돌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악이 아니다. 또한 던져 올린 것이 선이 아님은 물론이다.
20. 다른 사람이 저지른 악행을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은 그대의 의무이다.
42. 어떤 사람의 뻔뻔스러운 행위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할 때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이런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쓸어버릴 수 없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일을 원해서는 안된다."
[임성삼의 주(註); 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황제도 이 문제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던 모양이다.]
<10>
5. 그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영원한 태초부터 그대를 위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여러 가지 원인의 얽힘은, 영원한 태초부터 그대의 존재가 이에 부수되는 사건을 일으키는 그물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라플라스의 악마" 즉 기계론적 인과(因果)론이 이 시대부터 있었다.]
8. 무화과 구실을 하는 것이 무화과이며,
개의 구실을 하는 것이 개이고, 꿀벌 구실을 하는 것이 꿀벌이고,
인간의 구실을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
12. 만일 그대가 사물을 분명히 볼 수 있다면 뒤를 바라보지 말고 이 길을 줄곧 가도록 하라.
37. 누가 무엇을 하고 있건, 그것을 볼 적마다 되도록 "이 사람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일을 하고 있는가?"하고 생각해 보는 버릇을 가지라. 그러나 그대는 그대 자신이 그것을 실행하여 우선 체험해 보라.
<11>
18. 그대가 생존하고 있는 동안에 곧 인간다운 인간이 되도록 하라.
22. 시골 쥐와 도시의 쥐에 대하여, 그리고 도시의 쥐의 전전긍긍함과 두려움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
[임성삼의 주(註); 이 분도 이솝이야기의 참된 독자였다.]
24. 스파르타 사람들은 그들의 공개 구경거리를 보일 경우에, 외국 사람들에게는 천막의 그늘진 자리를 제공하고, 그들 자신은 아무 곳에나 앉았다.
25. 소크라테스는 페르디카스 궁정의 초대를 사절할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가장 나쁜 부덕(不德)으로 멸망되고 싶지 않습니다.
즉 나는 내가 갚을 길이 없는 은혜는 받고 싶지 않습니다."
30. 그대는 노예이다. ----- 언론의 자유가 그대에게 허용되어 있지 않으므로
[임성삼의 주(註); 황제에게는 언론의 자유가 없다. 거의 같은 이야기가 당태종의 "정관정요"에 나온다.]
36. 어떤 사람도 우리에게서 자유의지(自由意志)를 빼앗을 수는 없다.
[임성삼의 주(註); 논어에도 나온다. 큰 군대의 지휘자는 포로로 할 수 있으나, 필부에게서 뜻[의지]을 빼앗을 수는 없다.]
<12>
10. 인간에게는 큰 능력이 부여되어 있다.
즉, 인간은 신이 허용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으며, 신이 부여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
14. 등불은 꺼질 때까지 한결같이 빛나는가?
그리고 그대 속에 있는 진리, 정의, 근엄(謹嚴)은 그대가 죽기 전에 소멸하는 것일까?
20. 무엇보다 생각이 따르지 않는 일이나 목적이 없는 일을 하지 말라.

임성삼의 이야기;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주인공 막시무스의 "자식과 아내와 함께 농사짓고 살고 싶어하는 소망"이다. 앞에서 내가 이 영화의 여러 오류를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 막시무스의 소망은 실제로 위대한 로마를 만든 원동력이었다. 이 영화보다 280 년 전[기원 전 100 년]까지는 로마의 군대는 모두 자영(自營)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자기 농토를 지키고, 가족과 함께 농사짓기 위한 소망을 가진 병졸들은 침입자들에 대항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 결과 한니발, 피로스 등의 그 당시 능력있는 외국 장군들이 이탈리아 반도에 침입한 것을 물리쳤으며, 그 여세를 몰아 카르타고와 그리스를 점령하였다. 방어만으로는 계속되는 침입을 근절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는 전형적으로 용병을 사용하는 국가였다.
 그러나 일단 강해진 로마는 점령지에서 들어오는 값싼 농산물로 인해 자영 농민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그락쿠스 형제의 개혁]. 또한 광대한 국토를 지키기 위해 먼 곳까지 농민이 파병될 수 없었다. 그 결과 임금을 받는 직업군인이 군대의 주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 군인들도 일정기간 근무하면 변방에 자기의 땅을 분배받아 지주가 될 수 있었다.
 평화로운 삶에 대한 소망은 모든 사람의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정식 이름은 Caesar Marcus Aurelius Antoninus Augustus, 본명은 Marcus Annius Verus(~161).
121. 4. 26 로마~180. 3. 17 판노니아 빈도보나(지금의 빈) 또는 시르미움.
로마의 황제(161~180 재위).
 스토아 철학이 담긴 〈명상록〉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 서양에서 로마 제국의 황금시대를 상징해온 인물이다.
초기생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는 이미 로마의 콘술(집정관)을 연임하는 중이었고 프라이펙투스(장관)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것은 원로원에 들 수 있는 특권을 뜻하는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고모는 황제에 즉위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과 결혼했고 언젠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제위를 계승하기로 정해져 있었다. 그의 외할머니는 로마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집안의 상속녀였다. 이처럼 마르쿠스는 플라비아누스 황제(69~96)를 구심점으로 하여 사회·정치 권력이 집결되어 있던 새로운 로마 체제에서 가장 이름난 몇몇 집안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이 체제의 기풍은 그의 태도와 행동에 배어들었다. 로마 제국을 처음으로 지배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공화국 말기의 지배계급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지방사람을 경멸하고 거만하며 냉소적이고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도회지 로마인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로마 체제는 도시와 지방출신의 황제들이 고루 다스렸으며, 진지함과 훌륭한 일을 개발하고 경건과 신앙심을 더욱 진작시켰다.
 어린 마르쿠스가 장차 특출한 정치적 인물이 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황제에 즉위하게 되었는가는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다. 136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이때부터 L.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라 불림; 임성삼의 주 - 이 사람은 마르쿠스의 아들이 아니다.)가 제위를 계승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같은 해 어린 마르쿠스는 콤모두스의 딸 케이오니아 파비아와 약혼했다. 그러나 138년초 콤모두스가 죽고 그후 하드리아누스 황제마저 세상을 떠나자 파혼했다. 콤모두스가 죽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마르쿠스의 고모부였던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맞아들여 나중에 자신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도록 하고(나중에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됨; 마르쿠스의 전 황제), 대신에 안토니누스에게 콤모두스의 아들과 마르쿠스 두 젊은이를 양자로 삼으라고 명령했다. 이때 마르쿠스의 이름은 마르쿠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로 바뀌었다.
 이리하여 마르쿠스는 17세 이전에 공동 황제에 즉위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40세가 되어서야 황제에 즉위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속으로 콤모두스와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장차 황제가 될 한 젊은이 또는 두 젊은이 모두를 위한 '징검다리'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안토니누스 황제 아래에서 마르쿠스가 쌓은 오랜 기간의 예비황제 교육은 스승이었던 프론토와 주고받은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는 프론토가 당시 사회의 주요문인이었지만 수사(修辭)가 몸에 밴 음울한 현학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프론토가 편지에 나타난 것만큼 생기없는 인물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두 젊은이와 주고받은 편지 속에는 천재적인 감수성과 진솔한 교류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꾸준하고 진지하며 지적인 마르쿠스는 스승의 한결같은 고급 그리스어와 라틴어 낭독방식에 점차 싫증을 느꼈으며, 대신 한때 노예였으나 스토아 학파의 주요 도덕철학자인 신앙심 깊은 에픽테투스의 〈담론 Diatribai〉을 탐독했다. 이때부터 마르쿠스는 주로 철학에서 지적 흥미와 정신의 영양분을 구했다.
 한편 마르쿠스는 정력적인 황제 안토니누스 곁에서 통치술을 배웠으며 공직을 맡기도 했다. 마르쿠스는 140, 145, 161년에 콘술이 되었다. 145년 사촌이었던 황제의 딸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와 결혼했으며, 147년에는 공식상 황제직의 주요권력형태였던 '임페리움'(황제권)과 '트리부니카 포테스타스'(호민관의 권한)를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마르쿠스는 일종의 연하의 공동 황제가 되어 안토니누스와 긴밀한 협의를 통해 주요국정을 결정했다(그보다 10세 가량 어렸던 양동생도 적당한 시기에 주요공직을 맡았음). 161년 3월 7일 안토니누스가 사망하던 날 두 형제는 함께 콘술이 되었다.
로마 황제 시기
 마르쿠스가 황제에 즉위하는 과정은 순탄했다. 그는 이미 합법적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완전한 황제자리에 올랐다(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됨). 양동생도 마르쿠스의 강한 요청으로 공동 황제가 되었다(이때부터 그는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아우구스투스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받음). 루키우스 베루스가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다는 증거는 없다. 이렇게 하여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는 동등한 법률상 지위와 권력을 갖는 공동 황제가 탄생했다. 그러나 루키우스 베루스의 업적은 뛰어난 황제 마르쿠스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대부분의 재위 기간 동안 변방지역에서 전쟁을 치르고 큰 전염병, 도덕의 타락에 맞서 싸우는 등 중요한 국정은 철저히 마르쿠스가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마르쿠스는 국내정치에서 건설적으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고 독창적인 기풍을 세우느라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틈이 없었다. 그가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분야는 법률분야였던 듯하다. 수많은 법령을 공포하고 사법판결을 확정했으며 민사법의 비정상적이고 가혹한 조항을 제거하고 노예·과부·소수민족같이 국가의 혜택을 적게 받는 계층의 비율을 줄였으며 상속 분야에서 혈연을 인정한 것 등을 업적으로 들 수 있다. 그러나 마르쿠스의 개인적 공헌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법령 개선의 유형은 혁신적이기보다는 전통에 따른 것이었고, 법령은 단지 사회와 법구조를 세련되게 만들었을 뿐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아니었다.
 마르쿠스는 위대한 입법가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를 보호한 헌신적인 실천가였다. 더욱이 이러한 법률적 활동에는 특별히 스토아적인 요소는 없었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 보면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의 시대는 법과 사회의 관계가 이전보다 오히려 퇴보하기 시작한 때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통치기에는 형법에 따른 처벌에서 차별 적용을 받는 '호네스티오레'(honestiore:상류층)와 '휴밀리오레'(humiliore:하류층)라는 두 계급이 서로 구분되기 시작했거나 더욱 뚜렷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휴밀리오레는 형법에서도 언제나 가혹하게 처벌받았다.
 정치가로서 마르쿠스의 자격을 문제 삼는 논란은 아주 다양하게 제기되어왔다. 그중 한 예가 그리스도교도의 박해와 관련된 문제이다. 마르쿠스는 그리스도교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재위하는 동안 어떠한 조직적인 박해도 가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도의 법률상 지위는 트라야누스 황제나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도는 얼마든지 처벌될 수 있었지만 실제로 수배당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불안정한 그리스도교도의 지위는 제국의 안정기와 번성기에는 아무런 해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위기 시에 지역 주민은 그리스도교도를 고발하고 행정관은 중앙권력의 명령에 따라 법대로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 177년에 리옹에서 일어난 순교도 바로 이런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도가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의 재위기간 동안 그전보다 많은 피를 뿌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신은 결코 박해를 주도하지 않았다.
 161년 동방의 중심세력 파르티아가 시리아 지역을 침략했다. 162~166년의 전쟁은 명목상으로는 베루스가 지휘하여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함으로써 승리했지만 실은 황제 휘하의 유명한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이 결정적인 공을 세운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돌아온 군대가 퍼뜨린 전염병은 수년 동안 로마 제국 전역을 휩쓸었으며, 게르만족의 침입과 함께 제국의 안정기에 익숙했던 시민들의 도덕의식을 약화시켰다.
 167년 혹은 168년에 마르쿠스와 베루스는 도나우 강을 건너 게르만족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의 등 뒤에서 게르만 유목민족이 엄청난 기세로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아드리아 해의 요충지였던 아퀼레이아를 점령했다. 위급한 사태에 직면하자 제국의 군사적 취약함과 재정구조의 경직성이 드러났다. 군대를 재편성하기 위한 절망적인 조치들이 취해졌으며,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제국의 재산이 경매되었다. 마르쿠스와 베루스는 게르만족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169년 베루스는 질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도나우 강 국경선을 되찾기 위해 마르쿠스는 온 힘을 기울여 3년간 더 싸워야 했으며, 또다시 3년간 보헤미아 지방에서 싸운 끝에 잠시나마 도나우 강 건너 부족들을 평정할 수 있었다.
〈명상록〉
 마르쿠스가 골치 아픈 국정 수행기간 동안 추구한 사상과 비록 역사적으로 매우 값진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일상 정치사상을 좀더 자세히 알려면 〈명상록〉을 읽으면 된다. 그가 이 책을 쓰면서 어느 정도로 타인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명상록〉은 전쟁을 수행하고 통치하는 동안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단편적으로 기록한 책으로, 논증적인 글과 경구가 번갈아 나타난다. 어떤 면에서 이 글은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쓴 것으로 보인다. 〈
 <명상록〉은 로마인의 가장 내밀한 사상을 다 모아놓은 것이지만 놀랍게도 그리스어로 쓰여졌는데, 이는 당시에 여러 문화들이 통합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마르쿠스의 사상을 찬탄해왔지만,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지나친 까다로움과 히스테리가 뒤섞인 마르쿠스 사상의 병리학적 측면이 더 눈에 띈다. 마르쿠스는 항상 이룰 수 없는 행동목표를 추구하고 있었으며, 사색 속에서 그 자신을 포함한 인간 일반과 물질 세계가 덧없고 야만스럽고 보잘것없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세상을 믿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는 어떤 희망도, 심지어 영원한 명성에 대한 희망도 없이 의무와 직책에 얽매여 있었다. 평생 동안 병고에 시달렸으며 만성 위경련으로 고통받으면서 매일 많은 약을 복용했던 것 같다. 〈명상록〉의 책갈피 속에서 풍기는 종말론적 분위기는 약물중독자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더 확실하고 중요한 점은 마르쿠스의 불안이 다소 과장된 형태이긴 해도 그 시대의 풍조를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철인왕(哲人王)의 사상이 담겨 있는 〈명상록〉은 오랜 세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왔다. 그 사상은 마르쿠스 자신의 것이긴 하지만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스토아주의의 도덕철학이고, 에픽테투스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우주는 지성이 지배하는 하나의 통일체이며, 인간의 영혼은 신이 가진 지성의 일부이기 때문에 혼돈과 변화의 한가운데 홀로 내던져진다 하더라도 더럽혀지지 않고 순수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정확한 이해의 부족 탓이겠지만 마르쿠스 사상의 한두 측면은 스토아 철학을 벗어나 플라톤주의에 가까웠다. 플라톤주의는 당시 에피쿠로스주의를 제외한 모든 이단 철학을 다 끌어안아 신플라톤주의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종류의 영혼불멸의 위안을 받아들일 정도로 스토아주의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마르쿠스가 도나우 강을 가로지르는 국경지역을 평정하고 있는 바로 그때 이집트·스페인·영국 등은 반란과 침공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전에 베루스 아래에서 일했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은 175년에 이르러 로마 제국의 동방지역과 이집트까지 사실상 통치하게 되었다. 그해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은 마르쿠스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을 우연히 듣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마르쿠스는 북부 지역의 미정복 부족들과 평화조약을 맺고 아비디우스의 반란군을 진압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반란 장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부하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마르쿠스는 그 기회에 동방지역을 평정하고 시찰할 목적으로 로마를 떠났다. 그는 안티오크·알렉산드리아·아테네를 방문했으며, 아테네에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엘레우시스 제전을 참관했다. 그러나 이 비의적(秘儀的) 제전은 그의 철학관점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은 것 같다. 도나우 강 지역 원정에도 동반했던 황비 파우스티나는 이 여행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해서도 전 로마 시민은 극진한 경의를 표했으며, 마르쿠스도 〈명상록〉에서 사랑과 존경의 글을 그녀에게 바치고 있다. 어떤 고대 사료는 그녀가 정직하지 못하고 충성심이 없었다(즉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와 함께 모반을 꾀했다고)고 쓰고 있지만, 이러한 비난은 아무 설득력이 없다.
 177년 마르쿠스는 16세의 아들 콤모두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했다. 그들은 협력하여 도나우 강 전쟁을 다시 시작했다. 마르쿠스는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제국의 북쪽 국경선을 확장·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180년 마르쿠스가 아들 콤모두스를 국정의 최고 조언자로 임명하고 난 직후 군대 사령부에서 숨을 거두었을 무렵 거의 결실을 맺고 있었다.
평가
 마르쿠스가 단 하나 살아남은 아들을 후계자로 선택한 것은 비극적 역설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콤모두스는 뛰어나지 못한 황제임이 나중에 드러났다. 그러나 다음의 2가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첫째, 고대 사료를 보면 황제란 원로원의 지배계급을 만족시켰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에 따라 훌륭한 황제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황제가 되기도 한다.
둘째, 콤모두스가 북부지역의 전쟁을 서둘러 마무리한 것은 아버지처럼 고집스럽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팽창주의를 추구한 일보다 현명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들이 대를 이어 황제가 되도록 결정한 점을 들어 마르쿠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대개 마르쿠스가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유능한 '철학자'의 길을 걸은 뒤 다시 노골적으로 세습왕조를 고수하는 쪽으로 돌아섰다고 잘못 생각한다. 이것은 역사학적으로 지지받을 수 없는 주장이다. 사실상 마르쿠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마르쿠스가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삼지 않았다면 이것은 그에게 죽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는 정치가였다고 할 수도 있지만 도량이 아주 넓은 정치가는 결코 아니었으며 현자(賢者)도 물론 아니었다. 한마디로 그는 역사적으로 과대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이미 몰락의 징조가 숱하게 드러난 제국의 금빛 휘장 아래서 혼란스런 방식으로 대제국을 통치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 어떤 혹독한 평가일지라도 그의 고귀한 품성과 헌신성을 가리지는 못한다. 말하자면 그는 매우 꼼꼼하게 비용을 따지면서도 또한 서슴지 않고 그 비용을 치른 인물이었다.
부동심 : M. 아우렐리우스, 이영조 역, 풍림출판사, 1985
명상록 : M. 아우렐리우스, 강연호 역, 삼연사, 1981
자성록 : M. 아우렐리우스, 김병익 역, 범조사, 1979
Marcus Aurelius : Anthony Birley, Eyre & Spottiswoode, 1966
Roman Society from Nero to Marcus Aurelius : Sir Samuel Dill, Meridian Books, 1956
Marcus Aurelius:His Life and His World : Authur S. L. Farquharson, D. A. Rees(ed.), Basil Blackwell, 1951
Kaiser Marcus : Ulrich von Wilamowitz-Moellendorf, Weidmann, 1931
Der historische Wert der Vita Marci bei den Scriptores Historiae Augustae : J. Schwedemann, 1923
Marcus Aurelius, a Biography : Henry D. Sedgwick, Yale Univ. Press, 1921
Marc-Aurele et la fin du monde antique : Ernest Renan, Calmann-Levy, 1885
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오현제  五賢帝      Five Good Emperors
로마 제국의 최고 융성기를 주재했던 다섯 황제.
 네르바(96~98 재위), 트라야누스(98~117 재위), 하드리아누스(117~138 재위),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가 그들이다. 이들의 재위 계승은 혈통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네르바는 도미티아누스의 암살자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입양된 후계자들인데 선임자들과 아무 관계가 없거나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먼 친척관계 정도에 불과했다. 마지막의 두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흔히 안토니누스 일가라고 부르며 이 호칭은 때로 두 사람뿐만 아니라 공동황제 루키우스 베루스(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입양된 후계자)와 콤모두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까지 포함하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오현제 시대의 로마 제국은 북부 브리타니아에서 다키아까지, 아라비아와 메소포타미아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영토확장을 이룩했다. 제국은 굳건해졌고 방어태세가 완벽했으며 상당한 통일성을 지닌 속주 행정제도가 제국 전역을 포괄했다. 속국들이 하나하나 속주로 재편되었고 이탈리아의 행정제도도 많은 면에서 속주와 동일하게 편성되어갔다. 이 모든 과정과 더불어 제국의 백성들도 언어와 문화면에서 로마화했다. 오현제 시대는 내정이 안정되고 선정이 베풀어진 것으로 유명하지만 취약점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권력이 완전하게 황제의 수중에 집중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확립해 놓은 '이원집정제'는 1세기에 이미 비현실적인 것이 되었고 그 당시 형식은 남아 있었지만 실제로는 고의적으로 무시되었다. 그리하여 원로원은 더이상 통치도구가 아니라 황제 휘하의 귀족집단으로 전락했고 주로 선거에 의해 콰이스토르(재무관) 자격을 얻은 사람들이 아니라 황제에 의해 곧바로 귀족지위를 얻은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행정관들의 몫으로 남겨둔 제한된 행정분야는 더욱 협소해졌고 그들의 관할권은 점차 황제가 임명한 그리스 관리들의 수중에 넘어가는 추세를 보였다. 황제 휘하에 행정부서가 완전하게 조직되어 국가관료기구로 인정받게 된 것은 주로 하드리아누스의 작품이었다. 그는 장관직책을 자유민들 수중에서 빼앗아 에퀴테스(기사계급) 출신의 행정관들에게 맡겼다.
 이 모든 변화는 불가피할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이로운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친 권력집중으로 인한 폐해를 가져왔다. 이같은 폐해는 강력한 군주들이 중앙권력을 행사하는 동안 잘 드러나지 않기는 했지만 심지어는 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안토니누스 치세 때에도 제국 전체의 힘이 약해졌고 그에 상응해 제국정부 자체에 대한 압력이 갈수록 가중되는 조짐이 나타났다. 초기적인 몰락의 징후를 보인 현상들로는 특히 제국 중심지구의 갈수록 심해지는 인구감소, 끊임없는 재정난, 속주 지방행정의 부패성, 모든 계층이 이제는 갈수록 짐만 되어 가고 있는 지방행정관직을 맡기 꺼리는 것 등이 있었다. 180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고 난 이후 로마 제국은 급속하게 내전의 혼란에 빠져들어갔으며 193년 콤모두스가 암살되고 결국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승리를 거둘 때까지 내전이 계속되었다.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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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보는 눈

마음에 2010. 9. 10. 12:34
wn1 - 내일을 보는 눈이란 어떤것일까?
비전.. 꿈.. 환희를 위한 움직임...??
한 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지금까지 강국도 많았고 영토확장을 한 나라도 있었지만..거의 모든 나라들이 오래 가지를 못했다..
이유는 바로 '군대'와 '공무원'이 많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의 이유를 예로써 설명하였는데..
천년왕국하면 많은 사람들은 베네치아를 떠올리지 못한다..
이 나라는 도시국가 였지만.. 천년동안이나 강대한 나라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또한 그 나라는 정식 군대가 없었고 공무원들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슬람의 막강한 군대도 물리쳤다고 한다...
또한 그 영웅인 장군을 통치자로 국민들이 올리려 할때...그는 그러한 선례를 만들면 나라가 더 어지렵혀진다하여 야밤에 몰래 도망을 갔다고 한다.

그런데 왜 ,,, 이나라는 군대와 공무원이 없이 이렇게도 오랜기간 왕국을 영위할 수 있었을까...?  이야기를 듣는 내내 이런 생각을 하여 답을 해보았는데..
교수의 설명이 나와 거의 비슷하였다..

바로 공무원과 군인은 창의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질서를 가장한 혼란을 빠뜨리는 근원이라는 것이다.
베네치아를 통치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의 사유를 통해 더 나은 방법들이 현상에 대한 답만이 아니라 근윈적인 답들을 도출해 내었기 때문에 좋은 나라도 운영되었다고 한다..

우리에게 내일을 보는 눈....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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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생각/인물 2010. 8. 26. 18:40



 백과사전에서 말하는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Σωκράτης, 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 5월 7일)는 고대 그리스철학자이다. 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일생을 철학의 제 문제에 관한 토론으로 일관한 서양 철학의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흔히 4대성인으로 불린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기원전 399년에 고소되어 사형을 당했다.


생애

[편집] 소크라테스 문제

역사상의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적 관점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상당한 논쟁거리이다. 이 문제를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적인 글을 쓴 적이 없다. 소크라테스 자신과 생애, 철학에 대한 지식은 그의 제자들과 당대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플라톤의 기록이며, 그 밖에도 크세노폰,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파네스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런 저작들은 정확한 사실이 아닌 철학 또는 극적인 글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 소크라테스를 알기는 어렵다. 당대 고대 그리스에서 투퀴디데스(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나 철학자들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다)를 제외하고는, 소크라테스 시대를 사실에 입각해서 서술하는 사례가 없다. 이런 결과,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언급한 사료들은 역사적으로 정확성을 내세울 까닭이 없었으며, 때론 당파적이기까지도 하였다.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처형한 사람들은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가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업적에 대하여 정확하고 일관성있는 역사를 쓰기 위해 당대 인물들이 쓴 여러 사료들을 일치시켜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반드시 사실적이지는 않으며 다만 일관성을 갖추었을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에 대해 가장 믿을 만하고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일부 저작에서 플라톤은 자신이 저작속에서 구현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실제 소크라테스의 언행보다 더욱 미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저작이나 유물을 통해서 소크라테스가 단지 플라톤이 날조한 인물은 아님이 드러난다.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은 플라톤의 저작에 나오는 일반적인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 유용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조각가인 소프로니코스를 아버지로, 해산술을 업으로 하던 파이나레테를 어머니로 하여 아테네의 서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따라 조각을 하면서 다른 청년들처럼 기하학·철학·천문학 등을 배웠고, 중장보병에 편입되어 세 번이나 전투에 참가하였다. 기원전 406년, 500명 공회의 일원이 되어 1년간 정치에 참여한 일이 있고, 40세 이후에는 교육자로 청년들의 교화에 힘썼다.

그는 자연 철학을 배웠으나, 그 기계론적 세계관에 불만을 품었다. 그때는 아테네의 몰락기였으므로 보수적·귀족적인 정신과 진보적·개인주의적·비판적 정신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였다. 그도 이러한 경향을 지니게 되었으나 당시의 소피스트들처럼 궤변으로 진리를 상대적·주관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진리를 찾아서 이상주의적, 목적론적인 철학을 수립하려고 하였다.[1]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의·절제·용기·경건 등을 가르쳐 많은 청년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으나, 공포정치 시대의 참주였던 크리티아스 등의 출현이 그의 영향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어 '청년을 부패시키고 국가의 여러 신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명으로 고소되고, 배심원들의 투표 결과 40표로 이 애국자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는 도주할 수도 있었으나 그의 투철한 준법 정신에 의해서 "악법도 법이다"라고 하며, 태연히 독배를 들어 마시면서 자신이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을 빚졌다며 자신 대신 갚아 달라고 친구에게 당부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 그의 신전에서 치료받은 사람은 닭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고 한다.)

[편집] 사상

아무런 저서도 남긴 바 없는 소크라테스의 확실한 사상을 알기는 어려우나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 라이르티우스, 크세노폰, 특히 플라톤의 저서 등에 언급된 것을 보면 그는 델피의 신탁인 "만인 중에 소크라테스가 제일 현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스스로의 무지를 자처하던 소크라테스는 신의 신탁이 사실인가 확인 하기 위해 의아심을 품고 여러 현명한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말을 확실히 알고 언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방법으로 제논의 변증법을 활용하여 논변을 진행시키는 사이에 잘못된 판단의 모순을 깨우치고 다시금 옳은 판단으로 유도시켰는데, 이것이 유명한 산파술이다. 그는 합리주의자였으나, 때로는 초경험적인 내심의 소리, 즉 다이몬의 소리를 경청하고, 때로는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였다.

그가 다룬 문제는 종래의 철학이 대상으로 한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었으며 '정신의 배려'를 사명으로 삼았다. 덕은 인간에 내재한다고 믿고 사람들에게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온갖 계층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고 용기나 정의 등에 관한 윤리상의 개념을 설교하고 다녔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해 사약을 마시게 되었다. 그의 탁월한 지적·도덕적 성격에 의해 비단 철학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인류 최대의 교사'로 불리고 있다.

[편집] 변론과 크리톤

'악법도 법이다'(라틴어: Dura lex, sed lex)라는 말이 회자되지만, 소크라테스가 직접 이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변론'에서 법정이 철학을 포기한다면 석방해주겠다는 제안을 하더라도 자신이 철학을 하는 이유는 하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 외에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법 이상의 철학적 원칙과 신념에 기초하여 의사결정을 했던 몇가지 사례들이 있다. 반면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독배를 내린 법률에 대해 자신이 국외 추방을 제의하지 않음으로써 소극적으로 동의한 절차적 정당성을 뒤늦게 훼손할 수 없다고 친구인 크리톤에게 밝힌다. 그러나 '크리톤'은 소크라테스가 평소의 냉정한 변증법적·이성적 논법을 구사하지 않고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모습으로 크리톤을 설득하고 있어서 전적으로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변론'과 '크리톤'의 이런 모순적인 모습 중 '크리톤'에 실린 모습이 과장되어 '변론'에 담긴 법령 불복종자로서의 모습을 누르고 지금까지 이어져왔으며 소크라테스의 일관된 삶과 철학에 비추어불 때 이런 말 자체가 결코 성립할 수없는 것이다. 진정한 철학자는 진리조차도 회의하고 가짜로 드러나는 순간 바로 폐기시키는 엄중함이 있는데, 기껏해야 인위적인 실정법을 무조건 옹호할 수없는 것이다.철학과 법의 기본 성격조차 모르는 무지의 소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어이없게도 독재치하에서 정치에 악용되는 방편으로 원전에 대한 확인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 말을 계속 악용하여 왔다. [2]

[편집] 미(美)

소크라테스는 미학적인 범주를 최소한 셋으로 나누었다. 그 세 범주는 부분의 조립을 통해 자연을 표현하는 '이상적인 미', 시선을 통해 영혼을 표현하는 '정신적인 미', 그리고 '유용한(혹은 기능적인) 미'이다.[3]

[편집] 영향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 전해져 메가라 학파, 퀴니코스 학파, 키레네 학파 등을 이루고, 특히 수제자인 플라톤의 관념주의로서 피어나, 그 후의 서양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4]

그는 일생을 통해 자신이 직접 책을 쓴 일이 없고 또한 문학적 흥미도 지닌 바 없으나 그가 철학의 방법으로 취한 대화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걸작 대화집을 낳게 했고, 그의 독창적 개성과 비극적인 죽음은 전기문학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소크라테스만큼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철학자도 없습니다. 그는 무척 뭇생긴 사람이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천하의 악처러 알려진 그의 아내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 만큼이나 유명한데 실제로 그녀가 그토록 지독한 악처였는지는 불확실합니다. 그는 많은 질문을 통해 스승들을 곤라하게 만들었고 마침내는 아테네 청년들의 스승이 되어 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는어떠한 저서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플라톤을 비롯한 제자들의 글에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그에 대해 알수 있을뿐입니다.그는 아테네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자신의 삶을 마감하엿는데 그가 태어날당시의 아테네는 에게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는 소피스트의 시대를 살았고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전하여 국력이 기울며 몰락하기 시작하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소피스트들에 반대하여 인간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일이었습니다. 소피스트들은 분명 철학의 관심을 인간으로 돌려 놓는 공헌을 했습니다.그러나 그들은 지나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를 설파함으로써 사회의 가치관을 무너 뜨렸고 정신적인 혼란을 던져 주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정신적 혼란기에 나타난 아테네의 스승입니다.

소크라테스는 텔포이 신탁을 계기로 자신이 길을 찾습니다. 어느날 카에로폰이라는 사람이 델포이 신에게 아테네에서 제일 현명한 사람은 소크라텟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신이 거짓말을 할리는 없다고 생각하고자신이 현명한 사람인 이유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한가지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무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소크라테스 자신은 스스로 아는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 때만 무엇을 알수있습니다.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스스로 아는것이 무지를 전제한 후 대화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잘못된 주장에 맞닥뜨렸을대 그 잘못된 주장을 직접 비판하는것이 아니라 상대방이동의할 많안 다른 의견을 제시하며 대화를 이끌어 갑니다.대화 상대자는 소크라테스의 의견에 동의해 나가는 와중에 스스로 자신의 원래 주장을 부정하게 되거나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대화 상대자의 입장에서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것입니다. 그의질문은 집요합니다.그는 피상적인지식이나 독단적인 관념을거부하기 때문에 항상 정확한 대답을 요구합니다.

예를 들어 경건한것과불경한 것에 대해 에우티프론과 토론할때 소크라테스는 경건한 행동몇 가지가 아닌 모든 경건한 행동을 경건하게 하는 경건성 그자체가 무엇인지 말할것을 요구합니다. 마침내 에우티프론이 모든 신이 사랑하는것이 경건이고 싫어하는것이 불경이라고 대답하자 소크라테스는 '신들이 어떤 행동이 경건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들이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경건한 행동이되는 것인지'를 그에게 되묻습니다. 에우티프론은 피상적인 대답만을 반복하고 소크라테스는그 말을 듣고 더욱 구체적으로 되묻습니다. 에우티프론은 결국 그 자리를 떠나고맙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대화 방법은 그 자체로 인간 이성에 대한 믿으믈 표현합니다.그는 보편적인 진리의 존재를 부인할 수없으며 계속되는 대화를 통하여 진리의 길로 접어들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진리에 대한, 나아가 인간의 능력에 대한 회의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인간은 대화를 통하여 자신으 무지를 깨닫고 모든 사람이 공유할수있는 진리를 발견할수있다고 소크라테스는 믿었던 것입니다.



★ 악처가 철학자 남편을 만든다?


세계 4대 성인중의 한 사람인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행패가 대단히 심해서 악처라고 세상에 이름이 높았었다.

어느 날 그녀는 책을 읽고 있는 소크라테스에게 심한 욕설을
한참 동안이나 퍼붓다가 물이 가득 찬 물통을 들고 들어와
"이 못난 영감쟁이야...물벼락이나 한번 맞아봐라.." 하면서
소크라테스의 머리 위에다 물을 쏟아 부었다.


그제야 소크라테스는 책에서 눈을 떼며 털털한 웃음으로
심술궂은 아내와 맞싸우지 않고 유머로써 웃어 넘겼다. 이때 제자들이
몰려와서 남자는 꼭 결혼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결혼은 반드시 해야지. 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나쁜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테니까... 훌륭한 수부는 바다에서
사나운 파도와 싸워보아야 하는 것이고, 또 훌륭한 기수는 성질이 사나운 말을
택하는 법이니,   사나운 말을 잘 달래가며 탈수 있는 기수라면  다른 어떤
말 이라도 다 잘 탈수 있듯이 나 역시 성질 나쁜 아내를 잘 달랠 수 있다면
다른 어떤 사람이라도 훌륭하게 상대할 수가 있을 것 아니겠나 ? "



그는 왜 토론을 하는가?

서양철학자 중에서 아마도 일반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은 소크라테스일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전문가에게 가장 적게 알려진 서양철학자가 바로 소크라테스이다! 심지어 버트런드 러셀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지, 조금 알고 있는지 조차도 확실하지 않다고 말한다.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기원전 469년에 아테네에서 출생하여 기원전 399년에 죽은 소크라테스는 생전에 어떤 글도 남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대해서 주로 그의 제자 플라톤과 크세노폰, 그리고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남긴 글을 통해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 모습과 생각은 서로 다를 뿐더러, 플라톤의 여러 대화편에서도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연구자들은 무엇이 진짜 소크라테스의 모습인지에 대하여 지금도 논란을 벌이고 있다. 이것을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의 문제(Socrates Problem)’라고 부른다. 플라톤은 상상력이 뛰어난 문학가였으며, 크세노폰은 군인,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는 패러디 전문가였다. 이들 모두가 ‘정품’이 아닌 ‘짝퉁’ 소크라테스를 만들 소질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문제’로 인해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다는 식의 과민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의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확실하게 알려진 그의 삶에 이미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소크라테스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여러 주제에 대한 그의 생각, 한 마디로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이다. 그러나 이런 논란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 철학자가 자신의 글을 남겨도 일어나는 문제다. 그가 남긴 글의 해석이냐, 아니면 그 글의 해석의 해석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삶을 통해 철학사에 남긴, 아니 인류를 위해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은 무엇일까?


고대 그리스의 도자기에 그려진 토론하는 그리스인들의 모습.
소크라테스는 광장에 나가 격의없는 토론을 즐겼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하기’ 정확히 말해 독백이 아닌 대화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철학자의 이미지는 골방에서 혼자 사색에 잠기거나,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우주의 진리를 글에 담는 모습이기 쉽다. 누가 칸트나 헤겔의 철학이 ‘100분 토론의 결과’라고 주장하겠는가? 놀랍게도 서양철학의 아버지 격으로 숭상되는 소크라테스는 이런 고독한 철학자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가 가장 좋아했고 죽기 직전까지 했던 것은 토론, 즉 어떤 주제에 대하여 논쟁적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테네 토론의 광장 아고라에 나가서 어느 누구와도 격의 없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즐겼다. 플라톤의 대화편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의 나이 불문, 재산 불문하며 대화를 즐겼다고 말한다. 나아가 아테네의 법이 이 즐거움을 금지시키면 자신은 법을 지키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심지어 그는 ‘스스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독배를 마시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옥리에게 뇌물을 주고 도망가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도 토론을 했다. 이것이 플라톤의 대화편 [크리톤]의 내용이다. 소크라테스와 동년배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크리톤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는 아테네의 법을 어기고 도망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아무도 토론 마니아 소크라테스를 말릴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소크라테스와 크리톤과의 대화내용을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로 줄여 표현했지만, 이것은 매우 잘못된 해석이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말을 했다는 증거도 없고, 아테네의 법을 그는 악법이라고 부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젊은이를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언도를 받아 죽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아테네 시민과 토론을 벌여 많은 적을 만든 것이 화근이 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고, 재판 중에도 자극적 토론을 벌여 사형언도를 받았고, 재판이 끝난 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토론을 벌인 후 “죽는 것이 옳다”는 결론에 따라 행동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토론은 공기와 물 같은 것이었다.

 

 

 

 

영국 경찰이 발견하고 미법무부가 번역하여 공개한 [알 카에다 훈련교범]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가 대결하고자 하는 신앙심 없는 정권은 소크라테스적 토론도, 플라톤적 이상도 아리스토텔레스적 외교도 모른다. 이들은 총알의 대화, 암살, 폭격, 파괴라는 이상, 그리고 대포와 기관총의 외교만을 알 뿐이다.” 알 카에다가 ‘소크라테스적 토론’이 무엇인지 이해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소크라테스로부터 토론을 분리시킬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왜 토론을 하고자 했을까? 물론 그가 남과 이야기하기를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히 옳은 대답이다. 그러나 대답의 전부는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다른 철학자들이 갖고 있지 않는, 설사 갖고 있다 하더라도 남에게 공개하기 꺼리는 경험을 자랑스럽게 공개하였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받은 ‘델피의 신탁’이다. ‘신탁(神託)’이란 신이 사람을 통해 신의 뜻을 나타내거나 인간의 질문에 답하는 것, 즉 계시 혹은 점과 같은 것이다. 언젠가 소크라테스는 친구와 함께 신탁을 받은 적이 있다. 이때 신탁의 내용은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는 없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적인 토론은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게 하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신탁을 믿어 왔던 소크라테스도 이번 경우에는 신탁의 내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현명하다고 일컬어지는 아테네의 정치가, 문학가, 장인들을 찾아다녔다. 과연 이들은 현명한가? 놀랍게도 이들 모두 스스로 현명하다고 자부하였지만, 대화의 결과는 정반대였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어느 누구도 현명하지 않았다. 아테네의 젊은이들은 이런 대화를 재미있게 구경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따라했다. 왜냐하면 ‘현명하다는 사람의 무식이 폭로되는 토론’은 실로 재미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토론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민 중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고, 이것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이처럼 토론을 즐긴 이유는 단순히 상대방의 무식이나 현명하지 못함을 폭로하는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에게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즉 철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덕(virtue)을 밝히고 실행하는 것이었다. 덕의 실행은 재산이나 직위 그리고 명예보다도 중요하며 심지어 죽음도 방해할 수 없는 인간 영혼의 본질이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를 경멸한 이유는 무엇보다 영혼을 계발하는 철학을 돈과 결부시켰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단 한 번도 돈을 받고 대화를 한 적이 없음을 그의 가난이 증명한다고 [변명]에서 말하고 있다. 다른 한편 소크라테스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선이 무엇이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파하였다. 선이 무엇인지 안다면 결코 악행을 저지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지행합일이란 단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현자 찾기 프로젝트’가 실패하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많은 믿음들은 그 옳고 그름이 확인되지 않은 것이 태반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역설적으로 델피의 신탁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소크라테스에게 대화는 재미만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름을 밝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물론 그에게는 이처럼 옳고 그름을 밝히는 토론이 가장 재미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가 스스로 글을 쓰지 않은 이유도 짐작이 간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토론을 ‘산파술’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산파는 직접 아이를 낳지 않지만 낳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다. 다른 한편 아이를 낳지 않아본 여인은 낳는 것을 도와줄 수 없기에 산파가 될 수도 없다.

 

그리스 자연철학으로부터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관심을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라는 인간사회의 규범으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정의, 덕, 선과 같은 규범적 개념은 사회의 복잡한 관계망에서 쉽게 파악되기 어렵다. 어떤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부정적일 수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에 부합하는 사물의 측면만을 보기 일쑤다. 이때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으로 알려진 부정적 논증(elenchus)이 힘을 발휘한다. 그것은 상대방의 주장이 일단 옳다고 가정하고, 상대방도 동의하는 다른 지식이나 명제들을 원래의 주장과 결합하여 모순을 끌어내는 귀류법(reductio ad absurdum)을 의미한다. 즉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기본적으로 ‘부정의 논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정의 논법을 통해서도 논파되지 않는 주장, 그것이 옳은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적 토론은 논쟁 기술보다는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 모두에게 훨씬 더 중요한 태도를 요구한다. 그것은 ‘권력이 옳고 그름을 정한다’는 믿음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이런 믿음을 옳다고 말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믿음에 순종하고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아테네 시민에게 신이 보낸 등애(gadfly)라고 표현했다. 등애가 쏘면 황소도 펄쩍 뛴다. 바꿔 말해 소크라테스는 당시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있던 아테네의 큰 문제, 즉 집단적 오류를 등애처럼 날카롭게 쏘아댔다. 그 결과가 소크라테스의 재판이었다. 이처럼 권력과 잘못된 믿음과의 결합은 민주주의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정치체제에서도 있을 수 있으며, 소크라테스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현대는 정보의 공유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쉽고 빠르다. 이를 통해 옳건 그르건 집단화된 믿음이 순식간에 형성될 수 있다. 소크라테스적 토론이 더욱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소크라테스적 토론을 현대 사회에 도입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누명을 쓰고 독배를 마시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까지도 토론을 벌였다.




진리와 이데아의 빛

쪽빛 바다가 한 눈에 가득 들어온다. 지중해 세계에서 빛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빛은 모든 은폐된 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스 사람들은 은폐된 것이 드러나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빛이 있어야 사물을 볼 수 있다. 플라톤 철학의 핵심 개념인 이데아도 그 어원은 본다는 것이다. 이데아의 빛이 비칠 때 세계는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다고 그는 믿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었을 때 그는 스물 여덟의 청년이었다. 그때 그는 심한 혼돈과 현기증을 느꼈다고 한 편지에서 기록했다. 그리고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인식의 근원은 철학”이며, “참된 철학을 열심히 연구하기까지에는 인류는 고민에서 풀려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플라톤 철학의 시작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서 출발한 셈이다. 그래서 플라톤 철학을 이야기할 때는 보통 소크라테스 철학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시작부터 우리는 난감한 사실에 봉착한다.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의 철학은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제자가 그대로 반복했다는 뜻이 아니다.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 철학이 동일한 소스에 담겨있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소크라테스 철학을 플라톤이 쓴 기록을 통해서 읽는다. 플라톤의 [대화편]이라고 부르는 35편의 책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철학에서는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역사적 인물로서의 소크라테스이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인가 하는 점이 항상 문제가 된다. 그것을 철학사가들은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따져보면 이러한 사례는 어찌 소크라테스뿐일까? 공자의 가르침을 기록한 [논어]도 그렇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기록한 불교 경전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공자와 석가모니 역시 자신들이 직접 책을 쓰지 않았다.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옮겨 적었을 따름이다.


소크라테스의 조각상 앞에서 불멸에 대한 사색에 잠긴 플라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동일체를 이룬다.

 

시대를 더 내려오면 신약성경과 코란도 그렇다. 예수도, 무함마드도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기독교와 이슬람 경전을 직접 기록하지는 않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 국한해서 보더라도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도 대부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고대 철인들의 말씀을 기록한 많은 책에서는 그것이 진짜냐 가짜냐를 따지는 위서 논란이 심심하면 터져 나온다. 그들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해석학적 문제도 뜨거운 감자가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대 철인의 말씀을 기록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 크게 부각되는 법은 거의 없다. 예외가 있다. 바로 플라톤이다. 그는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모아서 집대성한 단순 기록자로 취급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대화편은 플라톤이 30대에서 70대까지 쓴 책들이다. 스타일은 거의 비슷하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변호한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제외하면 모두 대화체 형식이다. 플라톤이 쓴 일련의 책들을 대화편이라고 통칭해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통점이 또 있다. 한 편을 제외하면 모든 대화편에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거의 대부분이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주도하는 주인공이다. 이렇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대화편을 통해서 하나의 철학적 동일체가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 철학을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잠깐! 플라톤의 대화편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초기 대화편에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와 후기 대화편에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에 미묘한 차이가 드러난다. 그래서 고대 철학사를 연구하는 사가들은 플라톤이 젊었을 때 쓴 초기 대화편에서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철학을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반면, 원숙한 나이에 쓴 플라톤의 후기 대화편에서는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서 플라톤 자신의 철학을 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처음에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철학의 손 노릇을 했지만, 나중에는 소크라테스가 플라톤 철학의 입 노릇을 했다는 이야기다. 서두가 좀 길어졌지만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가지치기 작업이기도 하다. 앞에서 우리는 ‘역사적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를 구분하는 난제를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불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대화체 형식의 책을 썼는가 하는 점을 ‘플라톤의 퍼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거리의 철학자였다. 그는 아테네 거리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대화를 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조용한 사색의 장에서 토론과 대화의 장으로 옮긴 인물이다. 그는 대화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때로는 아테네 시민들이 즐겨 찾는 아고라 광장에서, 때로는 푸른 지중해가 한 눈에 보이는 아테네 근처의 바닷가에서, 때로는 지인들과 밤늦게 술잔을 기울이면서 토론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식 철학을 문자로 생중계한 플라톤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토론 철학이 가진 강점과 약점이 동시에 드러난다. 대화편은 마치 한 편의 희곡을 보는 듯한 재미가 있다. 대화의 내용뿐만 아니라 토론을 하는 그때 그곳의 분위기까지 그대로 잡힌다. 마치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일어나는 일이 마치 우리 눈 앞에서 펼쳐지는 듯하다. 그러나 때로는 대화편이 철학 책으로서는 체계적이지 못하고, 때로는 아무런 결론 없이 대화를 마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당연하다. 대화편은 어떤 특정한 주제를 체계적으로 전개하는 논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철학의 역사에서 대화편과 같이 고전적 지위에 우뚝 오른 다른 철학서적,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35권의 대화편은 과제나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지도 않고, 다양한 여러 주제들이 하나의 책에 뒤섞여 함께 논의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왜 이렇게 거리에서 철학을 했을까? 그리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아테네 거리 철학을 왜 문자로 생중계했을까? 그 단서는 대화편 중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나온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참된 지식은 글이나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대화를 통해서만 전달된다고 역설한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그림으로 기록할 때 그 그림은 죽어있듯이, 살아 있는 말을 문자로 쓸 때 문자로 기록된 말은 죽어있다고 말한다. 문자로 된 말은 질문을 던지지도 질문을 받지도 못한다. 그렇다. 플라톤이 대화 형식으로 글을 쓴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봐야 한다.

 

아테네 아카데미에 있는 플라톤 조각상.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라는 말처럼 플라톤은 서양철학의 기본을 완성했다.


서양 철학의 역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라는 말이 있다. 20세기 전반에 영국 캠브리지대와 미국 하버드대에서 철학을 가르친 화이트헤드가 만년에 한 강연에서 한 이야기다. 많은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지만, 플라톤 철학의 요체를 이처럼 적절하게 설명한 말도 드물다. 나는 화이트헤드의 이 말을 플라톤 철학의 체계가 뛰어나다는 칭송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뛰어난 것은 그의 답안에 있지 않고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서 끝없이 던지는 질문 방식에 있다. 서양 철학이 플라톤 철학의 각주가 된 이유는 그의 철학 체계보다는 그가 쓴 철학적 발제에 있다.  지금까지 이 글을 세심하게 읽은 독자라면 이런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좋은 질문을 던진 사람은 플라톤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아닌가?

 

맞다. 굳이 저작권 개념으로 따진다면, 문자 중계한 플라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 발언자인 소크라테스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왜 플라톤이 서양 철학의 전통을 기본 포맷한 철학자로 인정받는가? 이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소크라테스로 돌아가야 한다. 좀 지겹겠지만 할 수 없다. 철학적 동일체를 이룬 스승과 제자의 몸통을 분리하는 수술이 아닌가?

 

 

 

 

소크라테스 철학의 요체는 대화법 또는 산파술로 요약되는 질문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답을 내놓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아는 게 없다. 그래서 그는 대화 상대자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가실 정도로 끝없는 질문을 던진다. 주로 상대방 이야기의 논리의 허점을 파고 든다. 상대방은 자신의 주장이 모순에 빠졌음을 깨닫고 우물쭈물한다. 큰 당혹감과 혼돈에 빠져든다. 상대방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주시한다. 옳은 답을 듣기 위해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답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대화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종료된다. 해결되지 못하고 끝난 문제 – 이것을 철학 용어로는 아포리아(aporia)라고 부른다. 그 어원은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다는 뜻이다. 출구가 막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길도 진리의 길이 아니고, 저 길도 우리를 진리로 이끌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우리와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주의 원리를 규명하는 작업은 잠시 숨을 고른다고 하더라도 매일매일 우리가 숨 가쁘게 살아야 하는 인간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도대체 어떤 기준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가?

 

소크라테스 시대의 아테네로 돌아가자. 고대 그리스 문명의 중심이었던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에서는 이미 철학의 관심이 피시스(자연세계)에서 노모스(인간세계)로 옮겨가고 있었다. 노모스의 세계에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철학의 화두로 떠올랐다. 소피스트라고 불리는 일군의 철학자들이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관심도 다르지 않았다. 그 점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재판 법정에서 한 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지하의 일이나 천상의 일을 탐구했다고 고소장에 씌어있지만 자신은 자연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자연에 대해서 간단하게라도 언급한 사실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말해달라고도 주문한다. 그렇다고 자연철학자를 경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도 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는 도대체 어떤 점에서 다른가? 철학사에서는 그 양자의 차이를 보편주의와 상대주의의 격돌로 정리한다. 소피스트는 인간사회의 규범은 상대적이라고 이야기한 반면, 소크라테스는 보편적인 규범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보편적 진리를 수호한 순교자로 소크라테스를 자리 매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가? 나는 소크라테스를 보편 철학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답안을 내놓기보다는 상대 답안의 논리적 허점을 등에처럼 성가시게 물고 늘어져 철학적 대화를 아포리아 상태로 몰고 간 소크라테스 철학이 어떻게 보편주의로 연결될 수 있는가 하는 논리적 연결고리만큼은 분명히 설명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가르친 철학의 정신이 아닌가? 만약 그 연결고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소크라테스 대화법(엘렌쿠스)은 보편적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보편주의가 아니라 그러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회의주의, 또는 진리는 때와 장소 그리고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상대주의와 더 가깝게 된다.

 

바로 이 대목에서 플라톤 철학의 핵심인 이데아 이론이 빛을 발한다. 플라톤 철학이 스승의 몸통에서 분리되는 대목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포리아가 출구가 막힌 종착점이 아니라 새 탐구의 출발점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집요하게 질문을 던져서 대화를 막장에까지 다다르게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노린 것이 아닐까?

 

스승이 즐겨 사용한 엘렌쿠스로서의 철학은 제자의 이데아 철학의 뒷받침을 얻어 출구에서 탈출한다. 아니, 이 말이 소크라테스에게 큰 모욕이 된다면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을 통해서야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제대로 독해할 수 있다. 앞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제관계에서 처음에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손 노릇을 했지만, 점차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입 노릇을 한다고 지적했다. 그 분기점이 바로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 개념이 등장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또 그 때를 기점으로 토론이 아포리아에서 벗어난다. 아포리아가 해결불능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탐구의 시작이 되는 셈이다. 이 점을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철학은 아포리아의 놀라움에서 시작한다.” 철학적 사유는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철학은 항상 상식적인 사고를 요청하지만 아무도 그 상식에 이의를 달지 않을 때 철학적 사유는 멈춘다.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의 막다른 길에서 이데아의 빛을 향한 플라톤의 사상이 시작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지금으로부터 2400여 년 전에 죽은 소크라테스는 그의 삶과 죽음, 용모에서 언행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우리에게 던져 주었다.  

  기원전 469년.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태어났다. 그리고 70년 후, 시민 500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들 중 280명의 유죄 결정에 의해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 500명의 배심원들은 나이가 예순셋 이상인 노인과,  집에서 무료한 시간을 견디기 싫증난 사람들에게는 꽤 잡잘한 액수인 배심원 수당 3오블 -당시 그리스 화폐단위-을 받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소크라테스는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낸 철학자이다. 심하게 못 생긴 얼굴에, 오래 된 누더기옷. 악처로 이름 높은 아내 크산티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인용과,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언 아닌 유언.

  아내 크산티페를 두고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그런 여자와 결혼한 이유를 물으면 " 말[마]을 훈련시키는 사람은 거친 말을 다룰 줄 알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식으로 대답하였다.

  그의 죽음에 관한 그림은 쟈크루이 다비드, 샤를 알퐁스 뒤프레누아, 푸셍, 켕틴, 페이론 등 많은 화가들이 앞다투어 그려냈다고 한다. 동양에 공자가 있다면, 서양엔 소크라테스를 말한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직접 쓴 저서는 없다.  

  그런 그가 떠난지 2400여 년. 왜 그의 죽음을 생각하는가. 그는 이땅에 필로(philo,사랑 )과 소피아(sophia,지혜)를 전파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였기에 이땅의 최소한의 규칙을 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악법도 법이다" 라며 독미나리 잔을 받아들였다. 법은 이 사회, 이 세상 사람들을 잘 살게 하려고 만든 가장 작은 규칙이므로.

  소크라테스가 인용하였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곰곰 되씹어 본다. 이 말은 현대에 와서 다른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에 의해 "우리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부정하여야 한다"라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우리는 이 두 철인의 말을 모두 되새겨야 할 것이다. 부단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부족한 우리 자신을 더욱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도 작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10%의 희망을 가지고 90%의 불가능을 이겨낸 사람들도 있고, 90%의 사람들을 위한답시고 소외된 10% 의 가녀린 외침을 무시했다가 낭패를 당한 자도 있었다. 이에 대하여 일찌기 성경에서는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위하여---"라는 말을 하였다.

  시대의 투철한 시인정신을 지닌 김수영 시인은 "모래야 나는 얼마나 작으냐"라고 반어법적으로 노래하였다.

  소수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 주는 사회를 기대하며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을 다시 중얼거려본다.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백발의 노인. 무리의 중앙에 사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군중에게 설파하고있다.

" 모든 것은 자신이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 " 자! 예를 들어볼까요?

여기에 큰돌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돌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요? 이돌에 대한 사람들의 느낌이 모두 다를 것입니다. " 어떤이는 석상을 만들려할 것이고, 어떤이는 주춧돌을, 또 어떤이는 징검다리로, 마당의 의자로 ... 이처럼 사람들은 같은 사물일지라도 자신의 입장과 느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드립니다. 하지만 각 개인의 느낌이 바로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지배합니다. 이러한 느낌은 진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제 각기 진리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견해대로 행동방향을 결정합니다. 이말은 곧 모두에게 한결같이 적용되는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 진리는 개인의 잣대를 통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연설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고, 그사람은 자신이 가르칠 제자들을 모집중에 있었다.

- 그때 군중을 비집고 들어와 맨 앞쪽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노인이 일어서서 나옴.

군중이 외친다, " 소크라테스 잖아! " 제자(학생)들을 모집하는 강사는 그를 천적으로

인식하는데, 강사는 적지아니 당황한 기색이다.

" 존경하는 강사 선생, 이 무지한 늙은이가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소? " 강사는 마지못해 " 좋습니다. " 라고 말한다. " 선생, 저것이 무엇입니까? " 강사가 답한다. " 돌입니다." 소크라테스 "여러분 중에 저것이 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은 나오십시요.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 선생, 저것으로 만약 제우스 신상을 만들어 놓는다면 선생은 그것을 신이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돌이라고 하겠습니까? "

강사 " 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돌이라고,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 소크라테스 " 그래요? 그러면 하나 더 물어봅시다."  " 저 돌로 만든 제우스 신상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저돌은 더 이상 돌이 아닙니까? "

 

강사, 얼굴이 더 붉어지며 머뭇거린다.  " 강사선생, 저것으로 무엇을 만들든 저것은 언제까지나 돌입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저돌을 신으로 생각한다해도 저돌은 여전히 돌일 뿐입니다. " " 따라서 사람의 생각에 따라 사물이 달라진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 사물은 사람의 생각과 관계없이 사물자체의 고유한 성질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만약 저들이 사람의 생각에 따라, 개, 말도 되고 - 사람의 느낌에 따라 변할 수 있다면 개나 말도 사람의 느낌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

강사는 뒷걸음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더 이상 강사를 몰아칠 생각이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군중들을 향해 몸을 돌리는 사이, 강사는 군중들 속을 빠져나간다. 

 

소크라테스, " 돌로 무엇을 만들든 여전히 그것이 돌이듯, 진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느낌에 관계없이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 " 이 변하지 않는 진리에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군중속의 한 젊은이, 묻는다. " 선생님, 그러면 도대체 그 변하지 않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 소크라테스 " 진리를 묻는 그대는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청년, " 저 말입니까? " " 저는 귀족이고, 남자이며 젊고, 영리합니다. 진리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사실 지금 생각해 보니, 저는 제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아는게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린다. " 웃지 마십시요!" " 이 청년은 지금 아주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 "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는게 있는데 " " 그것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 " 진리를 알기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닳아야 합니다."

" 인간은 모든 동물중 유일하게 자기속에 들어있는 진리를 알아 낼 수 있는 힘을 가졌습니다., 그 일의 시작이 바로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함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자기 뿐 아니라 모든 사람 속에 똑같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보편적인 진리에 따라 행동하면 여러분은 가치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곤 소크라테스는 "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을 남기곤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러면 " 나는 누구인가? "  네델란드의 시인, 극작가, 철학가 - 존 쉘라(1759 - 1801)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합니다.

" 누구나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자신이 매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요구하는 가격은 타인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서 위대하고도 또 미약하게도 된다. "

즉, 우리 모두는 환경이나 운명의 꼭두각시로 창조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고 친구를 선택하고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고 우리의 할 일을 결정하는 힘과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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