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강요된 권위와 언론 자유(베트남전쟁을 중심으로)


우화
옷을 입지 않은 임금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한 소년의 우화는 그 소년의 순진함이나 용기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진실은 반드시 진실대로 밝혀지게 마련이라는 인간생활의 진리를말하려는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이 우화의 해석은 대체로 그 우화를 구성하는 일련의 인과적 요인들이 엮어내는 '과정'에 대해서는 깊게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그 보이지 않는 비단옷이라는 것을 팔러 온 형제 상인은 어째서 그토록 맹랑한 술책이 먹혀들어갈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임금에게 있지도 않은 옷을 입혀놓고아름답다고 한 임금 측근자들의 이해관계는 어디를 향해 있던 것일까. 임금이란 으레 아첨배에 속게 마련인 것일까. 그리고 옷을걸치지 않고도 입었다고 우기는 '통치자의 진리와 권위'는 임금의것인가 측근 아첨배의 것인가. 이와 같은 '허구와 허위'는 통치자들의 속성이어야 하는가. 허위가 진리의 가면을 쓰고 나타날 수있는 그 사회의 제도와 풍토는 어떤 것일까. 그 많은 백성들 가운데 임금의 알몸뚱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도 많았을 텐데모두들 입을 다물고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또는 못 했을까.
가장 어리석은 소년에 의해 온 사회의 허위가 벗겨지기까지 그임금과 재상들과 어른들과 학자들과 백성들은 타락과 자기부정속에서 산 셈이다. 마침내 한 어린이가 나타나서 보다 현명한 어른들을 타락에서 구하기는 했지만, 그동안 이 왕국을 지배한 타락과 비인간화와 비굴과 자기모독, 그리고 지적 암흑상태가 결과한인간파괴와 사회적 해독은 무엇으로 측량할 것인가.
인간해방과 사상의 자유의 역사는 어차피 독선에 대해 회의疑)가, 권위에 대해 이성(理性)이 승리를 거두는 긴 투쟁의 되풀이임이 틀림없다. 우화도 그렇고 현실도 그렇고 역사는 한 단계의투쟁이 끝나면 으레 '임금은 알몸이다' 라고 폭로한 소년의 용기에열중한 나머지, 힘없는 소년에게 그런 엄청난 임무를 떠맡기게 된그 사회의 실태에 대해서는 눈이 미치질 않는다. 문제시해야 할중요한 것은 그 영광(또는 해결)까지의 과정에 얼마나 많은 인간적 타락과 사회적 암흑과 지적 후퇴가 강요되었느냐 하는 사실을인식하는 일이겠다. 17-18


오늘의 사실을 오늘에 규명하지 않고 먼 훗날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바화나 읽을거리의 자료로 생각하는 한, 통치계급의 횡포는 계속되고 대중은 암흑을 더듬는 상태를 지속할 수밖에 없다. 27

베트남전쟁 비밀문서 .. 첫 줄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국가정책 수립 과정에 참여한 행정부 관료기구 속의 지성인들이 베트남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제각기 성격배우로서 파트를 연출한다. 정부가 민주적 성격을 띠는 한 원칙적으로 지성인과 관료 사이에 모순이나 대립 개념은 서 있지 않다. 그러나 형식은 어떻든 본질적으로 비민주적이고 소수 이익의 위탁자 역할을 하거나 부패한 정권을 돕는 지식인은 반지성적이고 따라서 반국민(민중)적일 수밖에 없다.
미국 정부를 일단 민주적으로 보고 또 직업군인, 관료를 제외하면 월트 로스토, 로버트 맥나마라, 조지 볼, 다니엘 엘스버그의 4인으로 특색 있는 주역이 두드러진다.
국가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인 월트 로스토는 전(全) 문서를 통해서 미국의 국가이념을 반공과 군사적 대국주의(大國主義, 국제 관계에서 큰 나라가 자국의 힘을 바탕으로 약소국을 억누르는 태도) 및 대국에고이즘에 입각한 팍스 아메리카나로 믿는 광신적 지식인의 면모를 여실히 나타낸다. 27-28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는 인간의 최고의 자질, 즉 이성과 의지와 가치관과 희생심마저도 전자계산기로 산출할 수 있다고 믿는 현대의 과학, 기계만능주의적 지식인을 대표한다. 29

진실을 외면하면서 눈앞의 체면만을 고집하는 군부장성들과 많은 민간 엘리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조지 볼은 자세를 끝내 굽히지 않았다. 30

다니엘 엘스버그는 햄릿적인 과정을 밟아 하나의 진리를 실천한 독특한 지성인이다. 그의 행동에 대해 우익적 여론과 군부에서는 비난과 인신공격, 중상이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진실과 이성이 작용하지 않는 매머드화한 관료기구 속에서 자기의 임무와 정부의 정책이 부정이며 불의임을 깨달았을 때 진정한 국가이익을 위해 진실을 밝힌 용기는 고민하는 지성인의 최고의 자세인 듯하다. 30

진실을 따지고 보면 국가이익이나 국가안보라는 것은 즉각적인 피해가 예상되는 군 이동이나 작전계획 등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실이 진실대로 밝혀짐으로써 가장 잘 보호될 수 있다.
해롤드 라스키가 “권력자란 자기의 부정과 과오를 은폐할 수만 있다면 그 목적을 위해서는 언제나 국민의 자유를 부정하려 한다. 그리고 권력자에 의한 이 자유의 부정이 성공할 때마다 다음 번에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그만큼 쉬워진다.”(<현대국가에서의 자유>) 라고 말한 것은 통치 세력의 논리를 정확히 표현한 것이다. 33-34

무력의 논리밖에 모르는 군인들이 국가기능의 종합적 서열을 무시하고 군사의 상위에 서는 정치정책에 도전할 때 국가는 그 이성을 상실하게 마련이다. 일본의 예는 우리에게 가장 실감나는 비극이다. 36

국민을 납득시킬 수 없는 베트남전쟁의 장기화는 미국 사회를 병들게 햇다. 장기화가 문제가 아니다. 그 전쟁 자체가 미국의 숭고한 건국정신과 정의를 사랑하는 미국의 국가이념과 상용될 수 없다는 것이 미국 국민 자신들에 의해서 인정되었다.
그런데 이토록 미국인의 정신과 사회를 병들게 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현실주의자’들이다. 37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국민은 정부의 기만적 선전과 사과(史觀)의 미숙 때문에, 정부가 꾸며나가는 기정사실화를 그대로 역사로 시인하는 편이었다. 그 결과는 현실주의의 파탄으로 나타났다. 제임스 레스턴은 “정책수립의 전 과정을 통해서 정책의 윤리성을 생각하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했다. 통킹 만에서 월맹 어뢰정이 불법으로 미국 순양함을 공격했다는 조작으로 의회로부터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탈취하는데 성공한 정부와 군부는 의회 결의와 흥분으로 도착된 미국인의 감정을 ‘현실’로 하여 다음은 대규모 폭격을 ‘현실화’한다. 이 현실이라는 것이 역대 행정부와 군부에 의한 조작과 허구의 ‘연속의 단면’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의회 결의에 반대한 상원의원은 100명의 의원 가운데 모스와 구루닝 두 사람 뿐이었다. 풀브라이트 같은 의원조차 ‘현실적 대응책’이니 할 수 없다고 찬설표를 던졌다. 37-38

군부 같은 것이 국민을 구렁텅이로 끌고 가는 수법이 이 현실주의다. 오늘의 현실을 수정하지 않으면 내일의 현실이 우리를 구속할 것이라는 지성인들의 사관만이 이런 불행을 예방할 수 있다. 미국의 지성인들은 역사의 ‘현실’을 수락할 뿐 역사에 ‘작용’하려 하지 않았다. 38

풀브라이트, 한스 모겐소 등 소수의 지성인은 매카시즘의 ‘빨갱이 잡이’(witch hunting)의 시련에 굴복하지 않은 진정 용기 있는 지성인이고 애국자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성인은 50년대와 60년대 초에 이 파괴적인 사상통제의 압력으로 공직을 떠났거나 침묵을 선택했다. 39

‘빨갱이 잡이’가 절정에 달했을 때 미국 법조계에서 가장 존경받던 라네트 핸드 판사는 “시민이 그 이웃을 적이나 간첩이라는 생각으로 살피도록 명령받는 사회는 이미 분해의 과정을 걷고 있다”고 미국 국민이 영원히 기억하는 날카로운 경고를 했다. 39

한 소년이 왕의 알몸을 폭로할 때까지 오랫동안 온 지식인과 백성들이 입을 열지 못하고, 사회는 공포와 타락과 암흑 속에 침체해야 했던 그 엄청난 인간적, 사회적 소모가 있었다는 사실을 거듭 중요시해야 할 것이다. 남의 나라의 불행한 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국가나 국민에게는 영원히 한 살마의 소년도 나타나지 않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41

미국은 창조력을 가진 대국가이면서도 자기 제도와 이념의 자유로운 창조적 발전을 목표로 하지 않고 세계의 작은 국가와 인민의 솟아오르는 목표와 염원과 해결을 까부수는 데 전력을 동원했던 것이다. ..
미국의 예에서 우리는 부정적인 가치관이나 태도에서는 건설적인 것은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 비창조적인 사고방식이 극단에 이르면 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주위에 온갖 명분의 높은 장벽을 쌓고,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시민은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때로는 생물학적으로 배제해버리는 공포사회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바로 부정하려는 제도나 사고방식에 자기가 변질해버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수단으로서 구체적으로 죄목 규정도 하지 않은 귀걸이 코걸이식의, 집권자의 뜻대로 자유자재로 해석될 수 있는 금지법률이 잇달아 제정돼야 하고, 모든 교육은 그 목적을 위해서만 알맞게 개편돼야 한다. 널리 생각할 줄 모르는 인간 또는 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이런 식의 교육처럼 자기기만적인 것은 없다. 43


진실 또는 진리에 반대하는 힘 또는 세력은 대중이 진리를 배우도록 훈련, 교육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가르치는 대로 믿을 것을 강요하고, 가르치는 것은 흑백뿐이다. ..
“오늘날 교육(직접, 간접)이라는 것은 문자를 통해서 기만당하는 것을 가르치는 기술이라고 정의해도 결코 부당한 말은 아니다. 이와 같은 기만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현재로는 사회의 지배자들이다”라고 갈파한 서양의 유명한 석학의 말은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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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I (1945~56)


냉전용어의 관용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섹의 모든 정치적, 사회과학적 사상을 흑과 백, 천사와 악마, 죽일놈과 살릴 놈, 악과 선의 이치적(二値的) 가치관으로만 판단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것ㅊ처럼 지성을 마비시키고 격변하는 세계에서 자기의 생존을 위태롭게 만든 요소도 드물다. 369-370

베트남 사태는 크게 나누어 4단계의 정세발전을 거쳐 현재에이르렀다.
①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화(1863.5) 부터 제2차 세계대전종전까지 근 100년에 걸친 베트남 인민의 식민지민족 항불(抗佛) 해방투쟁.
② 전(全)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 (1945.9)부터 전후 베트남민족해방 항불전쟁의 승리를 고한 인도차이나 휴전협정 성립(1954.7) 까지의 투쟁.
③ 남베트남공화국 수립 (1955.10)과, 그것으로 베트남의 통일을 위한 제네바협정의 총선거 실시 협약이 사실상 일방적으로 폐지되고 베트남의 반영구적 분단이 고정된 사태.
④ 그 이후 남베트남(越南)에 내란이 일어나고 미국과 북베트남(越盟)이 개입함으로써 미국과의 전쟁으로 변모, 확대된 현상태.
이중 ③의 단계는 기간은 짧지만 그 후 베트남 사태의 발전에가장 중대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정치적 사실 때문에 역사적 의의가 크다. 373


프랑스는 사실 유럽전쟁이 끝남과 때를 같이하여 1945년 3월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합친 인도차이나 불령 식민지 5개 지역을 연방화해, 연방의 실권을 1명의 총독에게 주고, 형식상의 원주민 자문회의를 설치해 인도차이나를 재지배하는 정책을 선포했다. 민족해방과 독립을 요구하고 있던 인도차이나의 민족주의자들은 일제히 이를 반대했다.
1946년 2월, 16도선 이북에 진주했던 중국 군대가 철수하자 프랑스총독부는 프랑스 군대를 앞세우고 북부지역으로 들어갔다.베트남민주공화국은 프랑스군의 진주를 반대하지 않는 대신, 프랑스 정부는 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프랑스의 일원으로서 정부 · 군대 · 재정 ·외교의 모든 분야에서 독립적인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② 안남(중부)과 교지지나(支那, 남부)를 병합해서 단일 통일국가로 할 것인지의 여부는 국민투표로 결정하기로 하고③ 프랑스 군대는 5년간에 걸쳐 베트남 군대로 교체되며 ④ 그 이상의 세부문제는 앞으로 계속 협상해서 해결한다는 협정에 동의했다(1946.3.6, 협정).
그러나 프랑스는 이 협정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20일 후에남부에 '교지지나공화국' 임시정부라는 것을 수립했다고 발표했다. 379

프랑스는 베트남을 재지배하기 위해 중국 군대의 북부 철수를중국 내 프랑스의 이권을 포기한다는 것과 교환조건으로 장개석정부를 유화했다. 그 조건이란 ① 중국 내 프랑스 치외법권의 포기 ② 프랑스 자본으로 건설한 하이퐁에서 곤명(昆明)까지의 철도에 대한 중국 권리 인정 ③ 중국의 하이퐁 항 및 그 주변지대의 출입권 승인이다. 베트남을 희생으로 하는 강대국 이익 위주의 해결형식은 이때 이미 시작되었다. 380

나치 독일에 의해 일패도지(一敗塗地)되어 사실상 전후의 강대국 대열에서 탈락해버린 프랑스는 ‘위대한 프랑스’의 영광을 위해서도 식민시장을 버릴 수 없다는 결심이었다. 380-381

12월 19일 베트남 정부에 베트남 군대의 자발적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들이댔다. .. 3일 후 프랑스 공군은 하노이, 하이퐁 등 대도시에 대한 전면폭격을 감행하는 동시에 육군은 하노이 시를 점령ㅎ고 베트남 군대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하노이 시 폭격으로 죽은 베트남인만도 단 두 시간에 6,000명을 헤아렸다. ..
베트남 인민과 제국주의 프랑스군 40만은 이로부터 1954년 5월 7일, 디엔 비엔 푸 결전에서 프랑스군이 항복하기까지 실로 7년반의 혈투를 전개한 것이다. 그것은 베트남뿐 아니라 인도차이나 전역에 걸친 전쟁이었다.
미·영·불 등의 공식문서들은 이 처절한 전쟁을 '내란'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베트남전쟁을 식민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는 성격 규정과 식민지 인민의 입장에서 보는 민족해방전쟁의 성격규정을 단적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내란'이란 합법적 통치권력에 대한 민중의 정권전복 반란의 뜻을 띤 정치적 용어다. 종전 이후에도 프랑스를 베트남의 합법적 통치의 주체로 간주하는 것은 1946년 3월 6일 협정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 독립을 승인한 사실을 백지화하는 견해다.
식민주의자의 가장 큰 배신은 인도차이나전쟁을 종결지은 제네바 휴전협정 (1954.7.21, 조인)에서 합의한, 2년 후 즉 1956년 7월에 베트남 독립 ·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조약의무를 프랑스가 포기한 것이다. 프랑스는 제네바 휴전협정에 의해 휴전선 이남지역에서 휴전과 관련된 군사적·행정적 업무를 담당하고 총선거 실시를 위한 협의를 하며, 1956년 7월에는 전 지역을 통틀어 총선거를 실시하는 일방(一方)주체로서의 의무(최종선언 제7항)를 서약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합의된 선거날짜를 3개월 앞두고 프랑스 군대를 철수해버렸다. 그러고는 휴전협정을 이행할 조인 당사자인 주베트남 프랑스군 최고사령부를 해체함으로써 휴전협정의 이행은 물론 총선거 실시의 책임도 기피해버렸다.
이것은 식민주의자의 네 번째 그리고 가장 중대한 베트남 인민에 대한 배신으로 지탄받게 되었다. 그 후 오늘에 이르는 베트남 사태 발전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총선실시 합의의 유산을 꼽는데 미국 정부를 제외하고는 대개의 전문가와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돼 있다. 381-382

프랑스가 식민통치하의 호치민 세력을 끝까지 거부한 것이나 현재 미국이 북베트남과의 전쟁에 개입하게 된 하나의 중요한 동기는, 민족주의자는 베트남의 독립과 양립할 수 있으나 공산주의자는 베트남의 주권, 독립을 국제공산주의에 예속시킨다는 견해를 토대로 하고 있다. 383

외세에 대한 투쟁 과정에서는 전부가 민족주의자라는 데 더 큰 중요성이 있다. 그러기에 차이점은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인가, 아니면 자본부의적 민족주의자인가다. 이것은 베트남의 경우도 그렇지만, 모든 전전(戰前)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자본주의였다는 역사적 사실로 말미암아 같은 민족주의자이면서 자본주의와 이해관계가 밀착해 있는 세력은 민족해방운동에서 소극적이었고,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는 반식민지투쟁에서 적극적이었다는 차이를 낳게 한다. 384

바오 다이 황제가 전형적인 경우이겠다. 1945년 3월 일본군이 베트남 전역의 군사적 점령을 완료하자, 일본은 안남왕국의 과거 프랑스 식민지하의 명목상의 황제에 대해서 북부와 남부를 합친 통일왕국의 독립선언을 요구했다. 이것은 백인 제국, 식민주의 세력을 추방하려는 황색인 제국, 식민주의의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바오 다이는 이에 응했다. 그것이 백인 프랑스 제국, 식민주의의 괴뢰에서 다만 일본 황색인 제국, 식민주의의 괴뢰로 탈바꿈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나 명백한 사실이었다. 형식상으로는 이것이 프랑스 식민지가 된 후 최초의 베트남 통일, 독립이다.
그 후 베트남 인민과 영토의 완전한 통일, 독립을 요구한 베트민(베트남민주광화국)을 말살하기 위해 협정을 폐기하고 식민지 전쟁을 개시한 프랑스는 홍콩에 '망명' 중이던 바오 다이를 다시 불러들여 1949년 6월, 프랑스연방 내의 베트남왕국 원수로 추대했다. 이 프랑스연방 내의 베트남왕국이란 베트남의 중부와 남부를 끝까지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꾸며낸 흉계였다. 그것은 베트남의 일부에 독립의 허울을 씌우는 정치극이었다.
벵상 오리올 프랑스 대통령과 바오 다이 '황제' 사이에 체결된 이 협정은 '엘리제협정' 이라고 불린다. 엘리제협정은 바오 다이 황제의 베트남에 대한 독립을 인정하되 "국방과 외교권은 프랑스 정부가 장악하고, 프랑스 군대는 베트남에 기지를 영원히 보유하며 그 통행권은 무제한으로 보장되며, 재정 및 기타 국정의 주요부문에서 프랑스 정부의 자문과 지도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낯익은 정치극이다(엘리제협정과 같은 것이 프랑스와 라오스 및 캄보디아 사이에도 거의 동시에 체결되었다). 384-385

민주주의냐 아니냐의 기준은 그 국가사회의 정치적 권리뿐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권리와 기회가 민중, 인민, 시민 또는 국민(명칭이야 어떻든)에게 얼마나 균등하게 배분되고 보장되어 있느냐에 따라 평가되어야 할 문제다. 386-387


바오 다이 정권에 완전히 실망한 미국은 고 딘 디엠을 새로운 ‘위대한 민족주의자’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가 소수 지배층의 정치, 경제, 권력 독점과 베트남 사회의 원리가 되어버린 부패를 도려내고 진정 민중(국민)의 지지를 받는 국가를 만들 것으로 기대했다. 389

존슨 미국 대통령이 부통령 당시 ‘동양의 처질’이라 불렀고 케네디를 비롯한 미국의 친베트남파 거물급 인사들이 ‘베트남의 이승만’으로 불러온 이 ‘위대한 민족주의자’는 결국 민족주의나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입증하고 군부쿠데타에 의해 1963년 11월 2일 살해되고 만다. 392


1947년 트루만 대통령의 이른바 ‘트루만 독트린’의 제기로 시작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선언한 미국은 모든 식민지해방 민족투쟁도 공산주의로 간주하게 되었다. 407

1950년 10월 10일, 최초의 미국 군사 사절단이 사이공에 도착했다. 이때까지, 즉 1950년에서 54년까지 4년 동안 미국은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전쟁 지우너으로 22억 8,500만 달러를 제공했다(D.F. Fleming, The cold War and Its Origin).
이때 미국의 인도차이나전 개입을 반대한 존 F. 케네디 상원의원은 “인민의 공공엲ㄴ 동정과 지지를 받고 있는 이 전쟁에는 아무리 미구그이 군사력을 투입해도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고 나는 솔직히 생각한다.”고 말했다. 409


총선거 실시가 예정된 1956년이 지나면서 남베트남에서는 심각한 내란이 일어났다. 어느 한 시기를 기준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1957년경부터 전구구 지방에서 정부에 대한 폭동과 테러 형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베트콩으로 불리는 민족해방전선의 출발이다. 411

20년에 걸친 남베트남 사회의 혹심한 정치, 경제, 사회의 부패에 곁들인 이 정치적 탄압이 반란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데는 온건한 중간적 견해를 가진 논자들이 일치한다. 그 대표적인 것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고 딘 디엠은 이미 1956년 1월 탄압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1월 11일 디엠은 강제집단수용소 설치령을 내려 그와 정부에 반대하는 자에 대해 거의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 혹독함에 놀란 미국 정부는 마침내 66년 5월 사이공 주재의 미국 정부 대표기관으로 하여금 베트남 사회에서는 처음부터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즉 초기의 ㅣ반정부세력은 공산주의자이기보다는 정치, 종교적 소수파들이라는 사실을 사실대로 발표하게 했다. 413



베트남 전쟁II(1956~72)


미국의 전면적인 지지와 뒷받침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오히려 바로 그 때문에, 고 딘 디엠 정권의 독재, 폭정, 부패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상태가 되었고, 그로 인해서남베트남의 민중은 앉아서 죽기보다는 총을 들지 않을 수 없는 상태로 몰렸다. 여기에 베트남의 역사적 배경이 작용한 것이다.
미국 정부 지도자들에 의해서 ‘베트남의 이승만’이라고 평가받은 남베트남의 통치자 고 딘 디엠은 바로 그 이름대로 이승만과 같은 운명을 밟았다. 이승만보다 더 철저했던 탓에 더 철저하게 나라를 망치고 더 처참한 죽음을 당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416-417

디엠 정권은 디엠이 대통ㅇ령에 취임하기 훨씬 전인 제네바협정 체결 직후 194년 7월 부터 57년 6월 사이에 전국의 반정부적 세력 및 개인에 대한 조직적 테러를 단행했다. 이 조직적 테러의 주대상은 제네바협정에 의해 남부 잔류를 희망하여 무기를 반환하고 농업으로 돌아간 농민이었다. 418

독재, 탄압통치가 있는 곳에 인민의 반항이 싹트기 시작했다. 1959년 총선거에서 민중의 이반(離反)을 분명히 깨달은 디엠 정권은 민간인도 특별군법회의에서 재판할 수 있는 법령 59-10 ‘치안유지법’을 제정했다. 이 법령과 군사재판은 그때부터 모든 반정부적 행동을 ‘베트콩’이라는 이름으로 무차별적으로 탄압하는 도구가 되었다. 419

‘한국전쟁 이후부터 비공산주의적 남베트남이라는 고정목표를 설정한 미국에게 남베트남은 온갖 두통거리가 되었다. 처음 우리(미국) 지도자들은 프랑스가 베트남인에게 독립을 주지 않고서는 베트민을 이길 기회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남베트남인에게 독립을 허용하면 프랑스는 그곳에 남지 않을 것이며 전쟁도 계속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말하자면 프랑스와 더불어서도 전쟁에 이길 수 없고 프랑스 없이도 전쟁에 이길 수 없는 꼴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디엠에게 정권을 쥐어준것이다. 그런데 우리 지도자들은 얼마 안 가서 디엠이 절망적일 정도로 인민의 지지를 상실하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장래의 정치적 안정을 대표하는 것이 디엠뿐이라는 생각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또 우리는 디엠이 없어도 싸움을 계속할 수 없고, 디엠과 손잡고는 싸움을 이길 수 없게 되었다. 얼마뒤에는 우리 지도자들은 미국의 전면적인 지원 없이는 남베트남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과 북베트남인들의 노력은 우리의방해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과를 거두고 있는 듯 보인다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또 한 번 베트남에서의 싸움은 미국의 뒷받침 없이도 이기지 못하지만 미국이 관여해서도 이기지 못한다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이와 같은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을 잘 알면서도,우리 지도자들은 베트남에 대한 간섭을 고집했다. 우리 정부의 역대 지도자 집단은 제각기 앞서의 정부가 실패한 것을 자기들은 성공으로 전환시킬 수 있거나, 적어도 실패를 예방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역대 정권(미국)은 앞의 정권 밑에서 그 무효성이 입증된 온갖 이론과 논리를 토대로 잇따라 실패 속으로 뛰어들었다’(Brookings Institution 소속 Dr. Leslie H.Gelb, Hearings before the Committee on Foreign Relations, United States Senate on Causes, Origin, and Lessons of the Vietnam War, 1972.5, p.2).
(앞으로 편의상 1966년 1~2월에 있은 미국 상원외교위원회 베트남전쟁에 관한 청문회 의사록을 ‘제1회 청문회 의사록’ 1972년 5월에 있은 같은 목적의 청문회 의사록을 ‘제2회 청문회 의사록’으로 약기한다. 이 글의 모든 근거와 자료는 서방세계, 특히 미국 정부 자신의 각종 대소 공시눈서 약 30종을 토대로 했음을 밝혀둔다.) 419-421

50년대는 미국의 ‘간섭의 시대’였다. 422

베트남에서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군사적으로 승리한다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전쟁의 위험성은 엄청나게 커질 것이다. 반대로 공산침약이 베트남에서 실패한다면 다른 지역에서도 남의 나라를 침략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될 것이며 평화가 깃들 가능성은 즐가할 것이다(닉슨, 베트남에 고나해 전 국민에게 한 연설, 1972. 4. 26.) 423-424

선거 때마다 도미노 이론은 미국의 베트남정책의 지도이념으로 등장했다. 중국의 장개석 패망으로 공화당에 정권을 뺏긴 민주당은 선거 때마다 강경론적 우파의 표와 군부 및 경제계의 지지를 얻기 위해 도미노 이론을 원용했다. 424

‘자유세계’의 안전이라는 명분은 도미노 이론에 이의를 제기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도미노 이론은 마술적 힘을 발휘했다.
고 딘 디엠 정권하의 남베트남이 자유국가냐 하는 문제, 선거로 선출됐다는 그 정부가 실시하는 선거가 자유, 민주주의적이냐 하는 문제, 남베트남의 문제가 기본적으로 정치적 성격이냐 군사적이냐 하는 문제, 소수의 폭정과 소수에 의한 착취제도가 강요되고 있는 사회에서 민중의 반항의 권리는 없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미국 지도자들에게는 고려의 대상 가운데 들지 않았다. 425

착실히 정치·경제·사회의 토대를 구축한 북베트남 정부는 통일총선거가 거부된 뒤인 1958년 3월과 12월 사이에 남부의 고딘디엠 정권에 대해 ① 남북의 병력삭감 ② 남북 간 경제무역을 위한 협상 ③ 군사예산의 상호감축 ④ 군사기지의 확장 및 신설 금지⑤ 남북 간 정상관계 수립을 위한 협상을 거듭 제의했다. 그러나 그 모든 제의는 남베트남 정권에 의해서 그때마다 거부당했다. 427

1955~57년의 경제회복 3개년 계획이 순조로이 진행되자, 북베트남 정권은 1958~60년의 경제, 문화발전 3개년 계획으로 경제, 사회, 문화면의 안정과 발전을 계속했다. 이 발전은 1965년 미국의 본격적이고 지속적인 북폭으로 다시 잿더미가 되기까지 착실하게 추진되었다. 428

해방전선이 북쪽에서 남파된 침투세력이냐 아니냐가 미국 내에서 논의되고 있던 그 당시, 주월미국경제협조처(USOM)의 책임 관리인 밴(John Paul Vann)은 다음과 같은 보고를 제출했다. 밴은 또한 이른바 ‘평정계획’의 미국인 수석고문관이었다.
‘남페트남 정부는 정치적으로 민중의 지지를 못 받고 있다. 남베트남 정부는 지방농민과 도시의 하층민중에 대해 착취 지향적이며, 실질적으로 베트남 인민의 정부가 아니라 프랑스 식민기구의 후신이다. 사회혁명은 거의가 민족해방전선의 이름 아래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은 인정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제2회 청문회 의사록, 81쪽) 435

‘남베트남 정부’의 구성을 살펴본다면, 어째서 그것이 정치적으로 오늘에 이르러서조차 민족해방전선과 겨룰 수 없는가의 이유를 알 수 있다. .. 정부 지도자들은 모두가 자기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억압하는 프랑스 식민국과 베트남 인민의 전쟁에서 식민국 프랑스를 위해 싸운 자들이다. 남베트남 정부란 부(富)한 자와 부패한 자를 위한 정권이다. 그것을 위해서 누가 목숨 바쳐 싸우려 하겠는가(노엄 촘스키 교수, 제2청문회 의사록, 81쪽). 436

1964년 8월 4일 오후11시 36분(와싱톤 시간), 세계는 다음과 같은 미국 대통령의 엄숙한 발표문을 들었다.
‘북베트남의 통킹 만 밖 공해상을 순찰중이던 미국 구축함 매독스 호는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의 공격을 받았다. 매독스 호는 항공모함 타이 콘테로가 호에 지원을 요청, 함재(艦載) 전투기의 긴급지원을 얻어 이에 반격을 가했다.
8월 4일, 같은 통킹 만에서 미국 구축함 매독스와 터너 조이, 두 함은 다시 북베트남 어뢰함의 공격을 받고 이에 응수, 어뢰정 3척을 격침했다.
8월 5일, 미국 공군은 연 64회 출격, 북베트남 어뢰정 기지, 석유 저장소 등 4개소를 공격하고 어뢰정 및 그밖의 함정 25척을 격침 또는 격파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이 사실을 밝힌 존슨 대통령은 “이것은 한정된 그리고 적절한 보복공격”이며 “아직도 우리는 전쟁확대를 바라지 않고 있다”고 말을 끝맺었다. 439-440

존슨은 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북베트남의 “어뢰정에 의한 도발·불법공격"을 제기하고, 미국의 북폭은 유엔 헌장 제51조의 '집단자위권'에 의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정부는 또 “북폭은 엄격히 제한된 것" 임을 세계에 약속했다.
남베트남 사태는 이제 '남'자를 빼고 '베트남' 사태로 불리게 된 것이다.
존슨은 때를 잃지 않고 즉시 (7월) 의회에 대한 전쟁정책의 법적 뒷받침을 요청했다. 미국 상·하 양원은 “대통령이 침략저지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소위 '전쟁권 부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뒤에 미국 의회의 권위와 기능을 거의 박탈해버리게 되는 이 의결은 압도적인 지지로 채택되었다(하원 416 대 0, 상원 88 대 2). "선전포고 없는 전쟁은 시작된 것이다"(카첸바트 국무차관 의회 증언).
그것이 미국의 주요신문들에 공표됨으로써 비로소 뒤늦게나마 베트남전쟁에 관한 미국 전쟁·전략 및 음모와 조작의 전모를 세계에 폭로한 소위 미국 국방성 비밀문서' (The Pentagon Papers)에 의하면 통킹 만 사건은 다음과 같은 진상을 숨기고 있다.
미국 군부는 통킹 만 사건을 1964년 2월, 즉 실제로 단행하기에 앞서 7개월 전부터 북폭을 정당화할 수 있는 모든 세밀한 상황조작을 추진했다. 고딘디엠 정권의 내부적 몰락 직후인 이 시기. 미국 정부는 민족해방전선과 민중의 반란이 그 세력을 증대함에 따라, 남베트남에서의 반란 진압작전을 보완하는 수단으로서, 그리고 가능하면 약체의 남베트남 정권의 사기를 높여주는 한 방법으로서 북베트남을 공격할 필요가 있다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미국 정부는 북베트남과 남부 반란세력의 무전연락을 방수한 결과, 소위 베트콩에 지령을 내리고 있는 것은 북베트남이라고 확신한 듯하다. 그러나 당시의 미국 중앙정보국(CIA) 종합보고서는 "남베트남의 공산주의 세력의 힘의 원천은 남베트남 자체 내에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적 성격(미국적 사고방식에 의하면)을 띤 민족해방전선의 사회혁명 목적과 목표는 1950년대의 항불독립전쟁 시기에 민족주의자들이 내건 목표와 일치할 정도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미루어 미국 정부의 일부에서는 남베트남 사태는 어디까지나 남베트남 내부문제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남베트남 사태가 남베트남 역대정권의 무능 부패로 걷잡을 수 없게 되자, 미국 정부와 군부 내에는 이것을 북베트남과 관련시켜 해결을 강요해보려는 이론이 강력한 동조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 중심인물이 군인이 아닌 민간인 학자라는 것은 베트남전쟁이 증거하는 하나의 아이러니다. 441-443


‘국방성 비밀문서’에 의하면 ‘북베트남에 대한 정교하고 은밀한 군사 작전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계획은 1964년 2월 1일, ‘34 알파 작전계획’이한 암호명으로 개시되었다. 이것이 사실은 미국과 남베트남군에 의한 최초의 (1954년 제네바협장 이후의 작전으로서는) 군사개입이다.
'34 알파 작전'은 ① U-2 정찰기에 의한 북베트남 공역(空域) 침입 및 정찰 강행 ② 북베트남 내부 정보수집을 위한 심리작전, 특수요원(스파이)의 투하 ③ 정보수집을 위한 북베트남인의 납치와 유괴 ④ 북베트남 오지 중요시설 파괴를 위한 파괴반 투입 ⑤철도·교량 파괴를 위한 해상으로부터의 남베트남 군부대의 기습공격 ⑥ 소형 고속정에 의한 북베트남 연안시설의 포격 ……등으로 되어 있다(국방성 비밀문서).
북베트남 정부는 이에 해당하는 시기에 북베트남 영토 내에서이루어지는 이와 같은 종류의 도발 및 공격을 비난하는 발표를 했다. 그러나 당시 이 발표는 미국 정부, 남베트남, MACV, 남베트남 군사령부 들에 의해서 '허위조작 비난'이라고 묵살되어왔다.
이 '은밀작전'은 미국 대통령 명에 의해 맥나마라 국방장관 책임하에, 연합참모부에 설치된 '반란진압· 특수활동 담당 특별보좌관실'이 지휘했다. 맥나마라 장관은 이 특별보좌관실의 초대실장인 클라크 소장, 그리고 1964년 2월에 교체 임명된 안지스 공군소장으로부터 그 공격작전의 실시결과에 대해서 정기적으로 보고받고 있었다. 연합참모부도 정기적으로 작전평가를 대통령에게 제출하고 있었다.
북베트남에 대한 은밀작전의 제2 병행작전은 라오스에 대한 공중작전이었다. 444-445

통킹 만의 구축함대에 의한 무력시위는 이상의 두 측면에서의 비밀작전에 대한 제3의 기둥으로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통킹 만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7월 30일 심야, 주(駐)남베트남 미국 주둔군 사령관 웨스트 모얼랜드 대장 지휘하에 있는 남베트남 해군 기습부대가 멀리 통킹 만까지 침투해(미국 구축함대에서 출발), 총킹 만 내 북베트남령의 두 개의 섬(홍메 와 홍게)에 대해 기습상륙 작전을 감행했다. 북베트남 정부는 이 기습 공격, 상륙작전 사실을 발표하고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미국과 남베트남 측은 역시 조작이라고 응수했다.
이 사건이 있은 지 3일 후인 8월 2일 밤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이 미국 구축함을 통킹 만상에서 공격하게 된 것은 이상과 같은 사실 위에서였다. 446

북폭은 1965년 6월 전략폭격기 B-52의 참가로, 남·북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는 미국 군부의 결의를 행동화했다.문명을 석기시대화하는 작업은 1965년 5월과 12월, 68년 10월,지상전투와 국제정세, 휴전협상의 진전 과정 등에 따라 일시적으로 중지되기도 했다. 그러나 닉슨이 재선되고 중·소와의 화해 · 접근 정책이 다분히 주효한 1972년 4월과 5월 이후 마침내 10여 년동안 논의되어온 북베트남에 대한 해안 기뢰봉쇄와 무제한 폭격이 실시됨으로써 간헐적인 중지의 효과는 일시에 상쇄되었다. 460

미국의 지상병력이 1967년 11월, 마침내 한국전쟁 당시의 미군 최고 수준인 47만 2,800을 넘어 54만 9,000에 달하자, 전쟁은 베트남의 국경을 넘어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확대됐다. 전쟁은 진정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이 되었다. 통킹 만 사건 직후, 미국의 강력한 요청으로 한국·필리핀·호주·뉴질랜드가 병력을 파견하고, 1970년 캄보디아정변으로 미국의 뒷받침을 받은 우파권력과 좌파세력이 민족상잔을 전개하게 되면서부터 인도차이나 대륙은 국경없는 하나의 전장으로 화했다.
미국의 압도적인 물량과 과학무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물질적 위력이 강해질수록 인도차이나 민족의 민족해방세력은 강대해지기만 했다. 인도차이나 전역에 대한 비치사성 각종 독가스와 식물 고사용의 화학무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됨으로써, 인도차이나전은 처음으로 생태학적 대량파괴의 문제를 인류에게 제기했다. 해방전선 측을 돕는 소련과 중공은 서로 대립관계에도 불구하고 베트남공화국을 통한 현대무기 원조의 필요성으로 미국과의 전쟁일보전 상태로까지 깊이 관련되었다. 쌍방 전쟁 방법의 잔인성은 세계의 양심과 국제여론을 자극하여 미국에게 날로 불리한 국제적 조건으로 굳어져갔다. 미국 내의 국론분열과 반전세력은 내부에서 국가적 일체성을 파괴하는 작용을 해, 미국은 마침내 닉슨의로 하여금 1970년, “미국의 국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선언과 함께 20년에 걸쳤던 정치·군사 간섭정책에서 물러나기 시작하게 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으로 무장한 거인은 만신창이가 되어 일개 후진 약소민족과 협정을 맺고 1973년 2월 27년 만에 이 파란 많은 땅에서 물러서기를 약속했다. 460-461

미국 정부 공식문서도 이를 입증한 바 있다
미국의 베트남 개입의 목적 (1)
① 반침략의 보호자로서 명성을 지킨다.
② 동남아시아에서의 도미노 효과를 저지하기 위해.
③ 남베트남을 '붉은' 손에서 지키기 위해 (국가안전보장회의의결 「동남아 행동각서」, 1964년 11월 29일, 국방성 비밀문서 자료 제27).
미국의 베트남전쟁 목적(2)
70퍼센트: 미국의 굴욕적인 패배를 저지하기 위해.
20퍼센트: 남베트남(및 이웃 여러 나라)의 영토를 중공의 손에서 지키기 위해.
10퍼센트: 남베트남의 국민에게 보다 나은, 자유스러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그리고 수락 불가능한 폐해가 남지 않도록 하면서 위기에서빠져나간다.
그러나 만일 미군의 철수를 요청받을 경우에는 그대로 남아있기는 어렵지만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벗을 돕는 것이 아니다" (맥노튼 국방차관보가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보낸 남베트남을 위한 행동계획」, 1965.3.24).
목적도 변했거니와 미국의 체면유지가 70퍼센트, 베트남 국민을 위한 것은 10퍼센트로 그 순위도 변했다.
베트남전쟁에 군대를 파견해서 미국을 도운 몇몇 국가의 정부지도자들도 미국 정부 지도자들의 이론과 근거를 그대로 원용했다. 한 예로 김성은(金) 국방장관은 한국군 전투사단 파견 결의를 국회에서 요구하는 제안설명에서 '도미노 이론'을 한국까지연장 확대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베트남이라는 친구가 모진 병에 걸려서 아무리 약을 쓰고 세상 의사란 의사는 다 모여서 처방을 다 써보아도 뾰족한 수가나오지 않고 병세가 악화되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은 그렇다고 해서 내버려두면 죽을 것이 뻔한데, 베트남이 죽으면 귀신이 되어 미국이나 자유방을 물고 늘어질 테니 그것을어떻게 하든지 죽이지 않고 고쳐보려고 하는 데 난점이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베트남에 파병한다고 하는 것이 죽어가는 환자가 호전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보내지 않고는 우방이 죽기 때문에 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한국일보』,'주월한국군' 특집 제18, 국회의사록 인용, 1971.7.27)
그런데 미국 정부는 그보다 앞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6. 정세해결의 가능성
a. (생략)
b. (생략)
c. 만일 최악의 경우에 이르러 남베트남이 붕괴하든가, 그 행동에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어 남베트남을 버리기로 결정할 경우, 이때에는 “우수한 의사가 최선의 치료와 노력을 다했는데도 환자는 죽고 말았다"는 인상을 대외적으로 주도록 노력한다(맥노튼 국방차관보 작성, 남베트남에서의 행동계획」최종각서, 국방 비밀문서 자료 제19, 1964.9.3).
미국의 베트남전쟁의 목적은 동맹국가들의 생각은 어떻든 이렇게 이미 전쟁 초기부터 딴 곳에 있었다. 베트남전쟁은 이런 목적으로 시작되어 이런 기만으로 끝난 이런 성격의 전쟁이다. •『창작과비평』, 1973년 여름호 467-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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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의 가치는 방대한 역사기록이나 최초의 정사라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거의 공백상태가 되어 버린 중국 고대사를 복원하는데 중요한 계단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선진(先秦) 학술의 윤곽을 밝히는 데도 필수 도서로 취급되고 있다. 
한편 객관적인 서술이 생명인 역사서에서 진실을 왜곡하지 앟으면서도 진한 감정을 투영시킨 문학적 서술.
현실의 부정부채를 과감히 비판하고 정의와 의리를 찬송하는 내용으로 가득 찬 역사서는 사마천 이후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외에도 사마천은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되새기며 인류의 보편적 과제인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탐구했다. 따라서 우리는 <사기>를 읽으며 인생의 의미, 처세의 태도, 인간간계 등에 대해 깊이 사색하게 된다.
단 한 권의 책이 문학, 사학, 철학을 포괄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 속에서 강자의 부당한 핍박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고 그와 동시에 약자에 대한 인류애적 동정심을 진하게 표현했다는 점은 경이롭다. 
사마천의 사기가 2,000여 년 전의 중국 역사책이지만, 인류 전체의 고전(古典)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책의 머리말에 있는 표현이다.

사마천의 사기는 이루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는 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책이며, 꼭 읽어보지는 않았더라도 이름을 여러번 들었을 책이다.
역사고전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책이면서, 저자의 표현처럼 문학 사학 철학을 두루 포괄하고 있는 책이기에 이 책은 누구나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운 책이기도 하다.

그런면에서 이 책은 <사기 중국을 읽는 첫 번째 코드>에서처럼 해설서로 읽어 나가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이다. 
책의 앞 부분은 <사기 중국을 읽는 첫 번째 코드>의 앞 부분의 설명과 중첩되기에 읽지 않아도 될 정도 였다. 엄밀히 말하면 이 책이 먼저 출간되었으니 <사기 중국을 읽는 첫 번째 코드>를 읽지 않아도 된다는 표현을 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틀려진다. 아무래도 뒤에 출간된 책이기에 해설이 추가되어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니 나처럼 출간순서에 역행하여 읽는 사람이라면 이 책 <사기 본기>의 앞 부분 해설은 읽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책은 본기를 다루면서 본기에서 우리가 부가적인 내용을 알게 되면 더 이해할 수 있는 해설을 '고전을  넘어선 고전 읽기'라는 코너로 첨부해 놓았다.
그렇기에 좀 딱딱할 수 있는 본기에 도움을 준다. 

간단하게 본기를 살피고자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으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것이란 생각이다.


본기 자체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른 저자의 본기를 더 읽을 계획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밑줄 긋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해설과 함께 이전에 읽었던 기억을 되새기며 재미있게 읽어 나갔다. 인상적인 사람들과 그들의 업적들을 되새기고 저자의 해설을 통해 이전에 알지 못했던 내용들을 몇 가지 얻어가면서 ...

<사기>라는 책을 읽어가면서 서로 다른 편역자들의 책을 통해 사마천이란 한 사람에 대해서 점점 가까워 져 감에 따라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물론 편역자들도 사마천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추측한 것이긴 하지만 설득적인 내용들도 있고 조금은 덜 설득적이지 않은 내용들도 있지만 ...
사마천은 애처로운 시절을 살아간 사람이다.

어쩌면 약간의 판단 착오를 일으켰을 수도 있고 눈치를 너무 본 것일 수도 있는 삶이다.
어쩌면 억울하여 더 잘보이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을 어필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사마천을 더 알아가면서 사기가 아닌 사마천이란 사람에 대해 더 연구해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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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에서 고전을 친근하게 접할 수 있도록 기획한 안내서이다. 'e시대의 절대사상'이라는 이름으로 고전 시리즈를 기획하여 출판한 책이다.
그렇기에 책은 읽기가 편하다. 
개인적으로 1부의 내용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저자가 사기를 접하게 된 계기로 시작하여 사기가 어떠한 도움을 주게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에 대해 그리고 사기 전체 130편의 형식에 대한 설명들이 쉽지 않은 사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특히나 사기의 형식을 설명하는 파트는 열전 70편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것 같다.
시대적인 배경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읽었기에 전후 문맥을 모두 비교해 보면서 읽은 몇개의 장 이외에는 연결이 잘 되지 못하였는데, 설명을 보면서 시대적인 구분과 열전의 종류들을 구분해 보면서 좀더 사기에 다가가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책을 선정했을 때 총 3부의 구성 중에 1부의 부분만을 보려 했다. 
사기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설명은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2부인 본문 발췌 부분도 읽고 싶어 졌다. 그리고 마지막 3부의 사마천 연보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사기를 읽으면서 좀 난해 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런 부분들에 대해 더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사기가 쉽지 않은 내용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고전이 고전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그 만한 이유가 있고, 깊이도 있다는 점을 알게해준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좀 더 독자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을 이다. 
쉽게 접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해설. 
그것이 1부에 있기에 분명 미숙한 나에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사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라면 해설서에 따라 여러 챕터를 나누어서 읽어본다면 덜 힘들게 읽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처음 사기를 접했을때의 생각이 난다. 무작정 덥벼들어 고행하듯이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그렇게라도 끝까지 읽어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중도에 덥어버렸다면 다시금 사기를 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는 한국인이므로 이제 우리 입장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몇 가지로 나누어 본다.
첫째, 현실적인 중국인의 코드를 읽을 수 있습니다.
둘째, 사마천의 <사기>는 중국 문화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셋째, 중국인의 통일 관념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33-43
(사실 이부분은 밑줄 긋는게 큰 의미가 없다 11페이지 전체를 읽어야 좋을것이라 생각든다)

'항우 휘하에서도 계포는 용맹으로써 이름을 날렸으니 장사이다. 그런데도 구차하게 노예가 되다니 무슨 망신인가. 그러나 계포는 자신의 실력을 믿었기에 그렇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태연했다. 언젠가는 실력을 발휘할 날이 있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 제국의 명장이 되었다. 생각이 있는 자는 함부로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찮은 인간들이 감상에 젖어 자살하곤 하는데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막다른 골목에 몰려 뭘 더 해보려고 해도 실력이 없기 때문이다.' 유심히 읽어보면 사마천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49

<사기>를 읽으면 실패한 인생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띕니다. 역사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데 <사기>에는 왜 이렇게 실패한 인생이 많을까요? 사마천은 세속덕인 성공과 실패에 착안하여 인물을 선별한 것이 아닙니다. 설령 실패했다 하더라도 실패한 인생으로부터 역사적 의미를 발굴하여 그들이 현실에서 당한 고난과 고통을 후세의 명예로 위로하고자 했습니다.  54


알고 보면 간단한 <사기>의 형식
본기(本紀)
우선 12편의 '본기(本紀)'를 설정하여 황제(黃帝)로부터 한무제까지 12명의 제왕을 기준으로 국가의 중대사를 연대별로 간명하게 정리했습니다. 편년체로 이루어진 공자의 <춘추>형식을 인물 위주로 개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기'는 무슨 뜻일까요? 본(本)은 근본, 기(紀)는 기(記)의 뜻으로 기록. 그러므로 본기는 '근본이 되는 기록'입니다. 따라서 '본기'에는 정책의 반포 및 개정, 관리의 임명과 파면, 정잰이나 자연 재해, 외교 등의 대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건은 국가의 흥망성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그와 관련된 결정권은 항상 항제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황제의 일대기를 연대순으로 서술하면서 연관된 국가 대사를 언급하면 가장 근본적인 기록이 되는 것입니다. 
본기는 시대순으로 배열된 것입니다. 
사기는 통사이고 '본기'는 기본적으로 편년체 형식이므로 중간에 연도가 비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기> 12본기에는 진본기, 항우본기, 여태후본기 도 있습니다. 물론 당시 천하의 권세가 항우와 여태후에게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126-127

표(表)와 서(書)
10개의 표(表)를 만들었습니다. 태사공자서에서 그는 '같은 시대인데도 연도 표기가 달라서 연대를 명료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10표를 짓는다.
예를들어 춘추전국시대 각 제후국들은 제각기 연도를 기록했기 때문에 상호 공유하는 사건의 흐름이나 인물의 행적등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 힘듭니다. 따라서 각 제후국의 연ㄷ를 통합하여 표로 만들어 주면 언제 무슨 대사건이 발생했는지 훑어만 보아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사마천이 표를 만든 이유는 기본적으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표의 역할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본기나 세가 혹은 열전 등과 상호 보완되도록 기획하였습니다.  130
8개의 서(書)를 마련하여 국가의 중요한 제도를 테마별로 정리하였습니다.  133

세가(世家)
세대 세(世), 집 가(家). 대대손손 이어지는 가문이란 뜻입니다.
북극성과 바퀴 축은 '12 본기'에 등장했던 황제 혹은 패왕을 말하며, 28개 별자리와 30개 바퀴살은 그 황제나 패왕을 보필했던 제후 왕, 혹은 공신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34

열전(列傳)
전형적인 인물을 통하여 시대상을 보여주는 참신한 역사 기술 형태입니다.
열(列)은 열거하다, 전(傳)은 전하다. 그러므로 '열거하여 전한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열거하여 누구에게 전한다는 것일까요? 의로운 사람, 탁월한 사람, 기회를 포착하여 대성한 사람들의 행적을 열거하여 후세에 전한다는 뜻입니다.

백이, 숙제, 노중련, 굴원과 같은 인물은 의로운 사라에 속합니다. 
관중, 범저, 여불위, 이사와 같은 인물은 기회를 포착하여 대성한 사람에 속합니다.
손자, 오자서, 소진, 장의, 인상여, 유경과 같은 인물은 물론 탁월한 인물에 속합니다. 
그렇지만 잔혹한 혹리(酷吏)나 곡학아세의 공손홍, 그리고 호모에 가까운 영행 집단, 조폭에 가까운 유협(遊俠)집단, 코미디언에 가까운 골계(滑稽)집단, 심지어 점쟁이 군상들은 과연 어디에 속할까요? 그러므로 '열전'의 인물은 윤리 도덕적 판단으로 선정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상을 반영하거나 역사적 의미를 기준으로 기록했던 것입니다. 

열전의 인물은 누구 하나라도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갖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이 점을 파악해야 <사기>를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열전'이 '본기'나 '세가'보다 훨씬 흥미로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열전'에 기록된 인물의 신분을 극히 다양합니다. '본기'에 기록된 제왕, '세가'에 기록된 후작들을 제외한 인물 중에 의롭거나 탁월하거나 대성한 사람들이 '열전'에 수록되엇ㅅ브니다.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인물들이 다양하게 활약했던 기록이므로 '본기'나 '세가'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흥미진진한 것입니다.  139-141

열전 70편의 배열 원칙, 시대순 밑 역사적 사회적 의미
연대를 기준으로 하되 인물의 성격이나 사회적 의미를 참고하여 배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연대 별로 7대 범주로 나누고 그 의미를 약술해 보기로 하지요.

1. 백이열전, 관안열전, 노자한비열전, 사마양저열전. 손자오기열전, 오자서열전, 중니제자열전(7편)
상고시대부터 춘추시대까지의 인물입니다. '백이열전'을 첫머리로 장식한 것은 심오한 뜻이 담겨 있지요. '열전'의 작성 기준과 의미를 담았으므로 요즘으로 말하면 책 첫머리의 '일러두기'라 봐도 무방합니다. 관중과 안영은 법가, 노자는 도가, 사마양저와 손자 그리고 오기는 병법가로서 춘추시대의 탁원한 인물들입니다. 오자서는 춘추시대의 명재상이며, 중니(공자)의 제자들은 춘추시대의 유가 학파들이죠.

2. 상군열전, 소진열전, 장의열전, 저리자감무열전, 양후열전, 백기왕전열전, 맹자순경열전, 맹상군열전, 평원군우경열전, 위공자열전, 춘신군열전, 범저채택열전, 악의열전, 염파인상여열전, 전단열전, 노중련추양열전, 굴원가생열전(17편)
전국시대 인물들입니다. 전국시대의 국제정세는 진(秦)나라가 주도했으므로 진나라 인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상군(=상앙)은 진나라가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수훈을 세웠고, 소진은 합종 전략, 장의는 연횡 전략을 각각 구사했던 바 모두 진나라가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저리자, 감무, 양후, 백기, 왕전 등은 모두 진나라의 명재상이거나 맹장ㄷㄹ로서 진시황제의 천하통일에 초석이 되었습니다. 나머지 인물들은 진나라를 제외한 함곡관 동편의 여섯 제후국 인물들입니다.
맹자와 순자(=순경)는 전국시대 유가 학파의 계승자 겸 집대성자였으며, 맹상군, 평원군, 위공자(=신릉군), 춘신군은 모두 진나라에 대항했던 각국의 귀공자들이었습니다. 범저와 채택은 객경(客卿)으로서 진나라 귀족 양후를 축출하고 대성했으므로 그 뒤에 수록했습니다. 악의는 연나라 명장이며, 염파와 인상여는 조나라 명장 및 명재상이었고, 전단은 제나라 명장으로 그 나라의 흥망성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걸출한 인물이었습니다. 노중련과 굴원은 의로운 인물이었는데, 노중련열전과 추양과 가생을 더불어 기록한 이유는 비슷한 계열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3. 여불위열전, 자객열전, 이사열전, 몽염열전(4편)
진시황제의 천하통일이 임박했던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의 격변과 관련되 인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상으로서 진시황제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여불위, 진시황제를 암살하려 했던 형가의 행적, 진시황제의 천하통일과 통일후 일련의 역사적 조치에 깊숙이 관여했던 이사, 진 제국의 건설 및 만리장성 축조와 관련되 몽염 등을 차례대로 기록하였습니다. 

4. 장이진여열전, 위표팽월열전, 경포열전, 회음후열전, 한신노관열전, 전담열전(6편)
진 제국이 무너지고 항우와 유방의 초한(楚漢)쟁패가 시작 되었습니다. 항우와 유방은 이미 '본기'에서 다루었으므로 이 시기에 활약했던 전국시대 각 제후구그이 후예를 중심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장이와 진여는 전국시대 조나라, 위표는 전국시대 위나라, 한신은 전국시대 한나라, 노관은 전국시대 연나라, 전담은 전국시대 제나라의 후예들로 각기 연고지이ㅔ서 활약하였습니다. 한편 팽월과 경포 그리고 회음후는 모두 유방을 도와 한 제국 건립에 공한한 비유씨(非劉氏) 제후 왕들이며 모두 반란죄로 처형되었습니다. 이상 6편의 열전을 초한쟁패의 혼란기에 활약했던 풍운아들입니다.
 
5. 번역등관열전, 장승상열전, 역생육가열전, 부근괴성열전, 유경숙손통열전, 꼐포난포열전(6편)
한고조 유방이 한 제국을 건립할 때 음양으로 수훈을 세웠던 공신들이며 한고조에 이어 여태후 시절까지 충성을 다하여 한 제국의 유지 및 발전에 공헌한 인물들입니다.

6. 원앙조착열전, 장석지풍당열전, 만서장숙열전, 전숙열전, 편작창공열전, 오왕비열전, 위기무안후열전(7편)
한 제국 효문제와 효경제 시절의 문신과 무장들을 다루었습니다. 

7. 한장유열전, 이장군열전, 흉노열전, 위장군표기열전, 평진후주보열전, / 남월열전, 동월열전, 조선열전, 서남이열전, 사마상여열전, 회남형산열전, / 순리열전, 급정열전, 유림열전, 혹리열전, / 대원열전, 유협열전, 영행열전, 일자열전, 귀책열전. / 화식열전(22편) 
한무제 시절의 다양한 인물을 기록하였습니다. 위 22편을 인물의 성격이나 행적으로 다시 세분하면 대략 5개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장유열전, 이장군열전, 흉노열전, 위장군표기열전, 평진후주보열전 등 5편은 북방 기마민족 흉노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남월열전, 동월열전, 조선열전, 서남이열전, 사마상여열전, 회남형산열전 등 6편은 흉노를 제외한 주변 이민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순리열전, 급정열전, 유림열전, 혹리열전 등 4편은 한무제 시기의 정치적 색채를 드러내는 인물을 다루고 있습니다. 대월열전, 유협열전, 영행열전, 골계열전, 일자열전, 귀책열전 등 6편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인물 중심으로 엮은 것입니다. 마지막 화식열전은 한무제 시기를 중점적으로 서술했지만 경제를 중심축으로 하여 사마천 시대까지의 중국경제 문제를 인물에 기대어 서술한 내용입니다.  142-146

열전의 표제 기준
열전의 표제는 일정한 기준을 적용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관직으로, 작위로, 봉읍지로, 호치으로, 성명으로, 성씨만으로, 시호로, 생(生)이나 자(子)는 '선생님'의 뜻으로 다양하게 적용했습니다. 
관직, 작위, 봉읍지, 시호 등으로 명명한 것은 일종의 예우며, 생(生)이나 자(子)로 불러주는 것도 일종의 존칭이라 하겠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사마천은 그대로 채용했을 것입니다.  147-148

열전의 종류 : 전전, 합전, 유전, 부전

전전(專傳) : 전적으로 한 명만을 기록
'전전'이란 오로지 한 명만을 전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오자서열전, 상군열전, 소진열전, 위공자열전, 전단열전, 여불위열전, 회음후열전, 한장유열전, 사마상여열전 등이 그러하지요.

합전(合傳) : 둘 이상을 대등하게 기록
'합전'이란 두 사람 이상을 대등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관안열전, 노자한비열전, 손자오기열전, 중니제자열전, 저리자감무열전, 백기왕전열전, 맹자순경열전, 평원군우경열전, 범저채택열전, 염파인상여열전, 노중련추양열전, 굴원가생열전, 정이진여열전, 위표팽월열전, 한신노관열전, 번역육가열전, 부근괴성열전, 유경숙손통열전, 계포난포열전, 원앙조착열전, 장석지풍당열전, 만석군장숙열전, 편작창공열전, 위기무안후열전, 위장군표기열전, 평진후주보열전, 회남형산열전, 급정열전 등이 그러하죠. 
표제부터 두 명 이상의 인물 성씨 혹은 성명을 나열했기 때문에 첫눈에 '합전'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합전'으로 처리했을까요? 
대략 다음 4가지 이유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합전의 4가지 이유
첫째, 학술적으로 연관된 인물.
노자한비열전, 손자오기열전, 중니제자열전, 맹자순경열전, 편작창공열전 등이 그러합니다. 한비자는 법가이나 그 원류는 도가의 노자입니다. 손무, 손빈, 오기는 모두 병법가입니다. 공자의 제잗르은 당연히 공자를 원조로 삼았습니다. 맹자와 순자는 전국시대 유가학파의 거벽입니다 편작과 창공은 명의들입니다. 이들의 학문은 서로 깊은 연관성이 있으므로 합쳐서 서술한 것이죠. 
비슷하거나 관련된 학술 인물을 합쳐서 서술하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노자한비열전처럼 원류로부터 영향까지 그 맥락을 살필 수도 있고, 중니제자열전처럼 해당학파 제자들의 활약상을 통하여 유가사상이 중국의 정치 및 사회이ㅔ서 주도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었던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업적이 비슷한 인물. 
관안열전, 백기왕전열전, 번역등관열전, 역생육가열전, 유경숙손통열전, 장석지풍당열전, 위장군표기열전 등이 그러합니다. 관중과 안영은 제나라 명신들로 진시황제의 천하 통일에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번쾌, 역상, 하후영, 관영 등은 전투로 유방을 보좌하여 한 제국 건립에 공한하였습니다. 역이기, 육가는 변사로서 정적을 설복하거나 정책을 제시항 한 제국의 건립 및 안정에 공헌하였습니다. 유경은 관중 땅에 도읍지를 정하는 문제 및 흉노와의 선린 정책을 건의하였고, 숙손통은 조정과 종묘의 예법을 마련한 점에서 모두 한 제국의 안정에 공헌하였습니다. 정석지와 풍당은 한문제에게 직언하며 공정한 법 집행과 사심 없는 행정으로 청명한 정치를 일구었고, 위청과 곽거병은 한무제의 친척으로 흉노와의 전투에서 수훈을 세웠습니다. 이렇듯 업적이 비슷한 인물을 합쳐서 기록하였습니다. 이렇게 처리하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업적이 비슷하므로 중복된 사건은 간명하게 처리하면서 편폭까지도 줄일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해당 시기에 어떤 인재와 어떤 정책이 주효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셋째, 삶이 비슷한 인물. 
범저채택열전, 염파인상여열전, 위표팽월열전 한신노관열전, 회남형산열전, 장이진여열전, 원앙조착열전, 위기무안후열전, 평진후주보열전 등이 그러합니다. 범저와 채택은 모두 변사로서 진나라에서 대성했다가 적절한 시기에 자리를 양보하고 산뜻하게 물러났습니다. 염파와 인상여는 서로 양보하고 협력하며 조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었습니다. 위표와 팽월은 초한상쟁 시절에 전국시대 위(魏)나라 지역을 근거지로 항우와 대항하여 한 제국의 건립에 간접적으로 공헌했습니다. 한왕 신과 노관은 흉노에 투항했고, 그 자손들은 다시 한 제국에 귀의하였습니다. 회남여왕 유장 및 회남왕 유안, 그리고 형산왕 유사는 모두 한고조 유방의 종친으로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였습니다. 장이와 진여는 전국시대 위(魏) 지역의 명사들이니데 문경지교에서 철천지원수가 되었습니다. 원앙과 조착은 질투와 알력으로, 위기후 두영과 무안후 전분은 외가 신분으로 암투를 벌이다 자멸하였습니다.. 공손홍과 주보언은 주변 이민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의견의 합치와 불일치로 암투를 벌이다 공멸하였습니다. 이들의 삶은 상호 긴밀하게 ㅇㄴ관되었거나 업무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공통점이 있죠.
삶이 비슷한 인물을 합전으로 처리하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기전체란인물 위주의 서술입니다. 그런데 사건을 서술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관련된 인물을 언급하게 됩니다. 중요한 인물일수록 같은 사건을 동일하게 되풀이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중복 서술은 불가피해집니다. 이런 경우 삶이 비슷한 인물을 합전으로 처리하면 관련된 사건이나유사한 사건의 경우 일괄 서술할 수 있으므로 사건의 전후맥락을 분명하게 전개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편폭 또한 크게 절약할 수 있습니다.
넷째, 성품이나 인생관이 비슷한 인물.
계포와 난포는 모두 협객으로 한때 노예로 전락했으며 의리와 신의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만석군 집안과 장숙은 모두 신중한 성격과 돈후한 인품으로 그 당시 군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급암과 정당시는 인품을 도야하며 청렴한 정치에 힘써 세인의존경을 받았습니다. 노중련과 추양은 평민으로서 세도가에게 당당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였습니다. 굴원과 가의는 능력과 인품을 고루 갖추었지만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울적하게 생을 마감했으며 두 사람 모두 사부(辭賦)의 대가였습니다.
성품이나 인생관이 비슷한 인물을 합전으로 처리하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해당 시기에 어떤 인재가 어느 분야에서 어떤 역할을 햇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복잡다단한 인물 군상이 간명하게 정리되므로 다연히 편폭도 깔끔하게 줄어듭니다.
이상으로 보건대, 두 사람 이상을 묶어 한 편으로 처리했던 기준은 학술적인 관계, 비슷한 업적, 비슷한 삶, 비슷한 성품이나 인생관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관안열전, 노자한비열전, 손자오기열전, 백기왕전열전, 노중련추양열전, 굴원가생열전, 편작창공열전 등에서 보다시피 수십 수백 년 떨어진 인물을 한 편으로 처리하기도 합니다. 여러 명을 한 편으로 처리하면서도 어떻게 흔적 없이 통합시켰는가 하는 문제는 역사를 보는 안목과 문학적 수양이 관건인데 이런 문제에 있어서 사마천의 혜안과 박력이 돋보입니다.

부전(附傳) : 덜 중요한 관련 인물을 덧붙여 첨부
'부전'이란 중심인물 밑에 덜 중요하나 인물을 첨부하여 서술하는 형식입니다. 따라서 등장인물들이 동등한 가치를 갖는 '합전'과는 구별됩니다. 역사에는 중요한 인물과 사건 이외에도 덜 중요한 인물이나 덜 중요한 사건이 있게 마련이죠. 덜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을 동일한 비중으로 모두 살리려다 보면 기전체와 같은 인물 위주의 역사 기술에서는 편폭이 폭증하여 전체적으로 잡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중요 인물의 행적을 집중적으로기록하면서 그와 관련된 인물을 가볍게 언급해주면 편폭이 간결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덜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도 경제적으로 안배할 수 있게 됩니다. '부전'은 기저체 형식에서 이렇듯 무척 경제적인 서술법이므로 비단 열전에만 국한되지 않고 본기, 세가, 서, 표에서도 적절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관안열전은 관중과 안영을 중심인물로 서술하면서 자연스럽게 포숙아와 월석보도첨부하여 기술하였습니다. 포석아와 월석보는 관안열전에 첨부되면서 그 인물과 행적이 후세에 전해진 셈입니다. 오자서열전의 신포서와 백공, 상군열전의 공숙좌와 조량, 맹상군열전의 풍환, 평원군우경열전의 모수와 이동, 위공자열전의 후영과 주해 그리고 모공과 설공, 춘신군열전의 이원과 주영, 범저채택열전의 수가와 위제, 염파인상여열전의 조사와 조괄 그리고 이목, 전단열전의 태사교녀와 왕촉, 여불위열전의 노애, 이사열전의 조고, 장이진여열전의 관고와 조우, 회음후열전의 괴통, 역생육가열전의 주건, 원앙조착열전의 등공, 평진후주보열전의 서락과 엄안 등등이 모두 관안열저노가 마찬가지로 관련된 인물을 덧붙여 서술해준 경우입니다.
'부전'에서 첨부하는 인물은 그저 관련된 인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 인무로가 비슷한 유형의 인물도 덧붙여 언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자손이나 친척을 더불어 언급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전(類傳) : 비슷한 직업이나 유형의 인물을 통합하여 기록
'유전'이란 비슷한 직업이나 유형의 인물을 모아 기록한 열전입니다. '유전'의 유(類)는 종류의 뜻으로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성어를 떠올리면 쉬비게 이해될 것입니다. 자객열전, 순리열전, 유림열전, 혹리열전, 유헙열전, 영행열전, 골계열전, 일자열전, 귀책열전, 화식열전 등 10편이 이에 해당됩니다. '유전'의 명칭만 봐도 특수한 계층이나 집단이 역사와 사회에 간과할 수 없는 존재로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전'의 설정은 전체 역사를 거시적으로 조감하고 섬세하게 분류하여 간명하게 통합해야 된다는 점에서 사마천의 예리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포인트입니다.
'유전'은 그저 비슷한 유형의 인물만을 모아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인물 집단이 역사와 사회에 하나의 계층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며 또한 정치와 관련되지 않은 집단은 하나도 없습니다.  148-158

사마천의 의도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기록한 것은 아니엇으나 결과적으로 인물 위주의 역사기록 형식 중에서 <사기>보다 완벽한 모습이 없었으므로 후세 사람들은 정사(正史)의 모델로 여거 대대로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삼국사기>와 <고러사>도 <사기>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170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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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책을 멀리하는 사람이면서 아직은 어린 나이라면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올해 20살이 되는 누군가가 무슨 책을 읽느냐 묻기에 사기를 읽는다고 하니, '흠 내가 아는 사기는 사기치는 건데..'하며 말꼬리를 늘렸다.
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사기>는 모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는 역사서이다.
워낙 유명하기에 사마천의 삶도 대부분 알고 있다. 궁형 즉, 거세되는 형벌을 당하면서까지 목숨을 부지하여 아버지인 사마담에게서 물려받은 역사서를 완성한다. 그것이 유명한 <사기>이다.  

몇 년만에 이 책을 다시금 읽는다.
책을 선정한 이유는 최근에 사기를 다시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계획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예전에 읽은 <사기>의 내용이 별로 기억나질 않고 그때와 지금 읽는 것은 차이를 가질 것이란 생각으로 그런 생각을 하였다. 이전에는 을유문화사의 사기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 번에 책을 선택한 건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가면서 미처 책 선정을 하지 않고 갔서 책을 둘러보다가 사기를 고른 것이다.
두꺼운 책들 사이에 얇은 책이 있다. 그것이 이 책이다. 물론 3권으로 엮여 있는 책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나는 얇은 사기라는 생각에 책을 선택한 것이다.
책이 잘 넘어간다. 들고 다니기에도 부담스럽지 않기에 골랐다. 3권을 모두 대출하고 예전에 읽은 을유문화사의 사기열전도 함께 대출하여 돌아왔다. 집에서 내가 이 책들을 모두 읽을것 같지는 않고 무엇을 할까 하고 다시 생각하다가 처음에 택한 얇은 사기를 선택하자하고 펼쳤다.
사기의 본기(12권) 열전(70권) 표(10권) 서(8권) 세가(30권) 을 모두 담았을리 없을 두께이기에 어떻게 서술되어 있는지 넘겨보는데, 본기 열전 세가를 딱히 구분하지 않고 서술함으로 편하게 접할 수 있게 만들어 진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 권마다 부록이나 설명들을 첨부하여 구성되어 있다.
3권을 모두 합하면 60권의 내용을 담고 있다. 

1권에서는 전체 사기의 대략적인 설명과 중국 역사의 큰 흐름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고 사기를 시작한다.
중국 역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앞서 소개되기에 <사기>를 좀 더 편하게 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삼황오제 부터 중국 최초의 국가인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서주, 춘추시대, 전국시대, 진나라, 한나라 까지 간단한 설명이지만 흐름을 보여줌으로 <사기>의 내용을 따라 가기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이어서 사기의 17가지의 내용이 나오고 책이 마친다.

읽은 소감으로는 쉽게 볼 수 있다는 느낌이 들어 마음에 든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야기의 진행을 따라 읽어가다보면 어느새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가볍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3권을 읽고나면 다시금 <사기>전편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렇다면 <사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읽기에 부담을 가지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곳곳에 <사기>로 시작된 고사성어들이 나오는데 2권의 부록에서 정리를 해두었기에 여기서 기록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이유없이 몇 가지만 적어본다.

탕은 '맑은 물을 바라보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백성들을 살펴보면 그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39

춘추시대는 제후들간의 각축이 치열했다. 하여도 그 근저에는 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제거한다는 봉건적 질서가 깔려 있던 시대였다. 즉 왕을 보호한다는 대의명분 아래 패권을 잡은 제후들도, 상대방을 멸망시키기 보다는 공존하면서 질서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국시대에는 명목상의 대의명분마저 사라지고 오직 먹느냐 먹히느냐의 사력을 다한 생존의 싸움만이 남게 되었다.  57

청나라의 학자 고염무는 그의 저서 <일지록(日知錄)>가운데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차이를 설명한다.
첫째, 춘추시대에는 예(禮)를 숭상하고 신(信)을 중히 여겼으나, 저눅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둘째, 춘추시대에는 주 왕실을 숭앙하였으나, 전국시대에는 그런 일이 없다.
셋째, 춘추시대에는 제사를 중시하고 빙향(聘享)을 중히 여겼으나, 전국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넷째, 춘추시대에는 가문을 존중하고 성(姓)과 씨족을 따졌으나, 전국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다섯째, 춘추시대에는 나라 사이의 교제에 연회가 있었으며 시를 읊을 만한 여유가 있었으나, 전국시대에는 그러한 여유가 완전히 사라졌다.
여섯째, 춘추시대에는 외교적 차원에서 부고책서(赴告策書, 신임장)가 있었으나, 전국시대에는 없어졌다.  58

고조는 서기전 195년에 사망하였다. 재위 기간은 천하통일 후 고작 8년이었다. 그러나 한 왕조는 전한 후한을 합하여 400여년에 걸쳐 중국을 지배하였다. 한나라가 중국 역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한 것이어서 한(漢)이라는 글자는 이후 중국을 대표하는 글자로 자리잡게 되었다. 지금도 중국의 문물을 말할 때 한문(漢文), 한족(漢族)등으로 표현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67


소진과 지백은 그 지혜가 출중(出衆)했지만 이익을 탐하는 데 마음이 빠져 있었기에 죽음을 당했소. 일이 매우 잘 되어갈 때 본연의 자세로 되돌아가 낮은 자리에 만족하거나 물러나 자중해야 하오.  241

슬기로운 사람도 천 가지 일을 생각하면 반드시 한 가지 실수가 나오고(천려일실 千慮一失), 어리석은 사람도 천 가지 일을 하다 보면 반드시 유익한 일을 하게 된다.  337

속담에도 '남의 수레를 얻어 탄 자는 그의 걱정을 제 몸에 실어야 하고, 남의 옷을 얻어 입은 자는 그의 근심을 함께 안아야 하며, 남의 음식을 얻어 먹은 자는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했소, 이익에 사로잡혀 의리를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오.  344

노자가 말한 '최고의 덕이란 언뜻 보아서 덕으로 보이지 않기에 더욱 덕이 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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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답을 책에서 구하다'라는 부제의 이 책은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리고 차례를 보면서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몇 개의 내용을 후다닥 읽어보면서 재미를 느꼈다.
이제까지 저자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책의 뒤에 유명한 소설가 조정래씨와 공지영씨의 짧은 글이 담겨있다.
유명한 사람인가보다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책을 집게 되기도 한다.

이유야 어떻든 이 책은 즐겁게 읽었다.
우선은 저자의 다방면의 책읽기가 고스란히 담긴 가운데 쉽게도 읽히지만 생각할꺼리들을 많이 담고 있으며 주제들의 연결이 잘 되어있어 도움도 되었다.

저자의 분야별 독서가 담겨 있는 것이 가장 부러웠다. 부러우면 지는거라는데.. 이런 부러움은 지더라도 가지는게 좋지 않을까...!!

개인적인 경험으로 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분야만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좋아하는 분야 외에는 관심도 없었고, 그러니 근처에 가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글을 읽다가 보면 어느시점부터 다른 분야의 제목들과 내용들이 눈에 들어온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추천이나 인용한 부분들을 통해 눈에 들어오는데, 그렇게 되면서 관심을 갖게 된다. 분명한 것은 그 전에도 이러한 추천들이 있었지만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다는 것이다.
이것은 수 차례의 반복을 통하고, 관심분야의 내용들에 통찰력을 가져갈때쯤 보이는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조금의 영역 확장은 이후로 지속적으로 번져 나가게 되면서 영역으로의 확장을 이루어 낸다.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 책의 저자는 매우 대단할 수 밖에 없다.
그의 관심분야가 나처럼 하나로 시작하든 두 세 가지이상으로 시작하든 정말 많은 분야의 독서를 이루어 냈기에 부럽다.
그 영역으로의 확장은 물론 누구나 처음부터 할 수 있다. 나역시도 그렇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는것이 문제고 누구나 처음 접하는 것은 생소하고 딱딱하고 지루하다. 특히나 책으로 접한다면 더욱 그럴것이다.
그렇기에 쉽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내심과 내것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와 지그시 바라봐 주는 여유라고 표현할까..^^

그런 다양한 분야의 독서가 저자의 내용 구성에 어우러져서 다양한 관점에서 내용의 연결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재밌었다.
태극기의 디자인 내용이나 그녀의 문신 역사의 물줄기 라이벌 순순한 호기심 아버지 술잔..등 내용들의 연결은 나에게 즐거움과 다양한 분야의 합일점을 찾는 통찰력에 자극을 주었다.

또 다른 한 가지 생각은 
사람들이 책을 고를때를 생각해 보면 책의 제목을 보면서 흥미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서점에서 사람들을 보면 지나면서 책의 제목들을 보고 관심을 느끼면 저자를 보고 책을 주루룩 훑어보게 되는 것을 많이 본다.
그렇게 좋은 책을 만나는 즐거움은 나역시도 종종하기도 한다.
또는 매체들을 통해 추천 신간들을 참고하여 서점에서 찾아내서 훑어보는 것이다. 
또는 서점의 입구에서 늘 볼 수 있는 베스트셀러 목록들을 통해 책을 찾아 읽어 보는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들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차피 읽는 책 좋은 책을 읽고 싶어 한다. 하지만 좋은 책을 찾는것은 늘 숙제이기도 하다.
책을 읽다가 보면 저자들이 인용한 책이나 소개하는 책들이 있다.
관심을 느끼는 책들은 따로 기록을 해 둔다. 
그리고 정말 관심가는 책 한 두 권은 보고 싶어지는 책이 있다.
그렇게 책들을 기록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소개하거나 인용하는 책이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는 책이라면 그리고 그 사람들이 책을 쓰는 사람이라면 분명 좋은 책일 확률이 크지 않겠는가...
물론 단편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렇게 책을 고르는 것은 좋은 책을 만날 확률을 높이는 방법 중에 하나라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기록들을 하면서 반복되이 언급되는 책은 관심 분야가 아니라도 읽어보는데, 이렇게도 분야의 확장을 이루어 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체크해본 도서들..

체 게바라 평전
허균, 최후의 19일
공산당선언
타이쿤 - 신화가 된 기업가들
디아스포라 기행
군중심리
스키너의 심리상자열기
알자지라
유교, 아시아의 힘
천만불짜리 아이디어
나의 아빠 닥터 푸르니에
목수아버지
마릴린먼로 My story
세상을 유혹한 여자 마릴린 먼로
쾌락의 옹호
행복의 역사
지구를 살리는 7가지 불가사의한 물건
나이들어가는 것의 아름다움
유혹의 심리학
사기
플루타크 영웅전
영웅 격정사
이것이 인간인가
아름다운 응급실
유혹, 아름답고 잔혹한 본능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마리 앙투아 네트
독살의 세계사
로마 황제의 발견
비잔티움 연대기
컬쳐코드

꽤 되는 양의 도서들 중에 이미 읽은 책도 있고 읽지 않은 채도 있으며, 몇 번 읽은 책도 있다.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책들이고, 이 책들을 통해 영역의 확장을 이루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모두 읽을지 아닐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반복되는 책이 있다면 결국은 읽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 책과의 인연또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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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저자는 자신의 청춘시절의 책들을 다시 읽어보면서 추억과 새로움을 발견해 나가고 있었다.

이 책은 서평을 한 책이긴 하나... 오로지 주관적인 관점에서의 서평이다.
또한 그의 지식을 정리해 보면서 단편적인  지식을 유기적으로 결합도 하고 배경지식을 적어나가면서 자신의 가치관의 형성과 옛시절의 그리움도 적어 나가고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앞 부분에서와 뒷 부분에서의 느낌을 달리하면서 읽어 내려 갔다.





이 책에 언급되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벌>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코머스 맬서스의 <인구론>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대위의 딸>
맹자의 <맹자>
최인훈의 <광장>
사마천의 <사기>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찰스 다윈의 <종의기원>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14권의 책과 내용중에 나오는 몇 권을 책들...
나는 이 책들 중에 처음들어보는 책도 있었고, 읽어보고 싶은 책 그리고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책도 있었다.

우선 읽어보고 싶은 책으로는 <죄와벌>, <전환시대의 논리>, <맹자>, <사기>, <역사란 무엇인가?>이며, 이 중에 <전환시대의 논리>와 <역사란 무엇인가?>는 처음 읽는 책이다.

저자는 내용중에 여러번 표현한 것이, 청춘에 읽었을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다시 읽었을 때는 새롭게 보이고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다고 하였다.

사람이 학습을 할때, 가장 좋은 방법은 반복이다.
공부가 진짜 자신의 공부가 되게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반복학습이다.
'학습'에 대해서는 습작이긴 하나 따로 정의 내려놓은 바 있다. 물론 그 내용이 창조해낸 것이라기 보다는 나의 경험과 고전에서 이미 알리고 있는 바를 결합하여 정리한 것이긴 하다.
결국 배우고, 익히는 것에 반복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보태면 그것으로 공부의 목적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책 읽기에 그것을 적용하였고, 그것으로 부터 나오는 자신의 생각을 청춘들에게 적어나갔다.
책의 표지를 넘기면 머리말 전에 '이제 갓 세상에 나가 길을 찾는 딸에게'라는 문구가 있다.
그렇다. 자신의 딸을 위한 아버지의 입장에서 글을 써 내려 가고자 했다.
그렇다고 하여도 객관적으로 길을 알려 줄 수 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청춘들에게 아니 방황을 해야만 하는 젊은 청춘들에게 학자로써, 인생의 선배로써, 부모된 심정으로써 ... 여러가지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신을 책과 자신의 소감과 자신의 가치관을 설파해 놓은 면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읽으려 하는 책 중에 다시금 읽게 될 책들은 나에게 그런 가치관을 다시금 형성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 기대한다.
지금도 젊은 시절이긴 하지만 멋모르고 활자만 읽었을 고전들을 다시 읽으며 그 때보다는 더 많은 것을 나에게 남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인생을 더욱 부유하게 해 줄 책들을 알아가며 나를 성장시키는 책들과 함께 내 청춘의 독서는 언젠가 다시금 세상에 꽃 피우기를 열망하기 도 한다.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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