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해당되는 글 535건

  1. 2016.06.27 무진기행 - 김승옥 문학동네 2004 04810
  2. 2016.06.23 처음처럼(신영복의 언약) - 신영복 돌베개 2016 03810
  3. 2016.06.21 채식주의자 - 한강 창비 2007 03810
  4. 2016.06.16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민음사 1998 04800 1
  5. 2016.06.13 떠나지 않으면 안될것 같아서 - 이애경 북라이프 2015 03810
  6. 2016.05.05 질문하는 공부법 하브루타 - 전성수 양동일 라이온북스 2014 13590
  7. 2016.04.28 호밀밭의 파수꾼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민음사 2004 04840
  8. 2016.04.21 이방인 - 알베르 카뮈 새움 2015 03860
  9. 2016.04.14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한길사 (and 펭귄클래식) 2011 94160
  10. 2016.04.07 마키아벨리 어록 - 시오노 나나미 한길사 2010 03100
  11. 2016.03.28 한 장의 사진미학 - 진동선 위즈덤하우스 2008 03660
  12. 2016.03.24 소설처럼 - 다니엘 페나크 문학과 지성사 2004 04860
  13. 2016.03.21 칼 같은 글쓰기 - 아니 에르노 문학동네 2005 03860
  14. 2016.03.17 영혼의 미술관(예술은 우리를 어떻게 치유하는가) - 알랭 드 보통, 존 암스트롱 문학동네 2013 03600 1
  15. 2016.03.14 놀이터 생각 - 귄터 벨치히 소나무 2015 03610
  16. 2016.03.10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살아보기 - 김남희 웅진지식하우스 2015 03810
  17. 2016.03.07 여행자의 책 - 폴 서루 책읽는수요일 2015 03840 1
  18. 2016.02.29 파리의 생활 좌파들 - 목수정 생각정원 2015 03300
  19. 2016.02.25 하류지향 - 우치다 타츠루 민들레 2014 03370
  20. 2016.02.22 니체(건강한 삶을 위한 긍정의 철학을 기획하다) - 백승영 한길사 2011 04100
  21. 2016.02.18 소소하게, 여행중독 - 문상건 더블:엔 2016 13980
  22. 2016.02.15 좋은 유럽인 니체 - 데이비드 F. 크렐, 도널드 L. 베이츠 글항아리 2014 03100
  23. 2016.02.11 전락 - 필립 로스 문학동네 2014 03840
  24. 2016.02.08 이젠, 함께 읽기다 - 신기수 김민영 윤석윤 조현행 북바이북 2014 03800
  25. 2016.02.04 에브리맨 - 필립 로스 문학동네 2009 03840
  26. 2016.02.01 뉴욕 3부작 - 폴 오스터 열린책들 2009 03840
  27. 2016.01.28 한국탈핵 - 김익중 한티재 2013 03300
  28. 2016.01.25 승려와 수수께끼 - 랜디 코미사 이콘 2013 03320 1
  29. 2016.01.21 결혼 면허 - 조두진 예담 2013 03810
  30. 2016.01.18 학교의 슬픔 - 다니엘 페낙 문학동네 2014 03860


작가의 말 - 나와 소설 쓰기


소설이 완성되는 것은 ... 독자가 읽고 난 이후 독자 나름대로 그 소설이 느껴지고 해석되어지는 순간이다.  10




무진기행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은 안개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 계집녀 귀신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159


내가 나이가 좀 든 무진에 간 것은 몇 차례 되지 않았지만 그 몇 차례 되지 않은 무진행이 그러나 그때마다 내게는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거나 하여튼 무언가 새출발이 필요할 때였었다.  162


무진이라고 하면 그것에의 연상은 아무래도 어둡던 나의 청년이었다.  163


여자는 잠간 내 팔을 잡았다가 얼른 놓았다. 나는 갑자기 흥분되었다.  179


그는 무진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아니, 나는 다시 고쳐 생각하기로 햇다. 어떤 사람을 잘 안다는 것 - 잘 아는 체한다는 것이 그 어 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 불행한 일이다. 우리가 비난할 수 있고 적어도 평가하려고 드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에 한하는 것이기 때무닝다.  184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서투르다는 것은, 그것이 무슨 일이든지 설령 도둑질이라고 할지라도 서투르다는 것은 보기에 딱하고 보는 사람을 신경질나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미끈하게 일을 처리해버린다는건 우선 우리를 안심시켜준다.  185


"그 여자에게 편지를 보내어 호소를 하는데 그 여자가 모두 내게 보여주거든. 박군은 내게 연애편지를 쓰는 셈이지." 나는 그 여자를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싹 가셨다. 그러나 잠시 후엔 그 여자를 어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되살아났다.  186


사실 나는 몇 시간 전에 조가 얘기했듯이 '빽이 좋고 돈 많은 과부'를 만난 것을, 반드시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188


아침의 백사장을 거니는 산보에서 느끼는 시간의 지루함과 낮잠에서 깨어나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닦으며 느끼는 허전함과 깊은 밤에 악몽으로부터 깨어나는 쿵쿵 소리를 내며 급하게 뛰고 있는 심장을 한 손으로 누르며 밤바다의 그 애처로운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의 안타까움, 그런 것들이 굴 껍데기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는 나의 생활을 나는 '쓸쓸하다'라는, 지금 생각하면 허깨비 같은 단어 하나로 대신시켰던 것이다.  188-189


누군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주었다. 그 여자는 처녀는 아니었다.  190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194





싸게 사들이기 


수위영감처럼 습관 속에서 사는 것도 그렇지만 바람둥이 손처럼 충동 속에서 사는 것도 둘 다 비싸게 친다. 혁명적으로 살아야 한다. 습관도 아니고 단순한 충동도 아니게.  202






서울의 달빛 0章


사람들이 결국 바라는 건 필요 이상의 음식, 필요 이상의 교미, 섹스의 가수요(假需要 거짓가 구할수 중요할요). 부잣집 며느리 여름철에 연탄 사모으듯, 남의 아내건 남의 아내가 될 여자건 닥치는 대로 붙는다. 남의 사랑을 위한 빈자리를 남겨두지 않는다. 물처럼, 공기처럼, 여력만 있으면 빈자리를 메우려 든다. 인간은 자연인가? 메우고 썩힌다. 썩은 사타구니에서 쏟아지는 썩은 감정, 자리를 찾지 못한 자들의 증오. 평화가 만든 여유. 여유가 만든 가수요. 가수요가 만든 부패. 부패가 만드는 증오. 부패는 이미 시작되었으며 남은 일은 증오의 누적, 그리하여 전쟁. 전쟁은 필연적이다. 전쟁으로 모두 빼앗기고 다시 시작. 인간은 행복할 자격이 있는가? 그게 아녜요. 형편이 나아져서가 아녜요. 아내가 말한다. 그럼 뭐야. 그렇군, 형편이 더 나빠져서군. 돈 때문이니까.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건 돈이니까. 아녜요. 슬픔 때문예요. 종말에 대한 슬픔이 섹스를 만든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슬픔이 우리들의 섹스를 만들어요. 사람들은 슬퍼하고 있어요. 당신이 바라고 있는 그 전쟁 때문예요. 정부에서도 신문에서도 전쟁에 대비하라고 야단들이잖아요? 내가 얘기하는 건 그런 전쟁이 아냐. 전쟁은 다 마찬가지예요. 전쟁이 나면 이번엔 아무 데도 도망갈 데가 없다는 걸 어린애까지도 알고 있어요. 지난번 전쟁보다 더 끔찍하리라는 것도 모두 알고 있어요.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도 정치권력도 아녜요. 종말에 대한 불안이에요. 적개심을 돋운다고 하지만 그건 전쟁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죠. 집은 불타고 자기는 죽고 아이들은 고아원으로 간다는 것쯤 누구나 알고 있어요. 슬픔이 적개심을 휩싸서 녹여버려요.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건 적개심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적들에게도 불탈 집이 있고 고아원으로 갈 아이들이 있어서 우리처럼 슬퍼하고 있는지 하는 사실에 대해서뿐이죠. 그렇지만 그런 희망이 얼마나 허망한 결과로 나타나는지는 정부에서 설명 안 해줘도 누구나 알고 있어요. 그래요.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슬픔예요. 그 슬픔은 특히 남자들을 사로잡고 있어요. 그 슬픔이 남자들의 윤리를 허물어뜨려요. 윤리란 미래적인 거죠. 우리에겐 미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허물어진 남자들이 여자를 지배하고 있구요. 그래서 모두 슬픈 거예요.  383-384


탐욕적인 청춘, 이기적인 중년, 발기되는 노년들이 물처럼 공기처럼 빈자리를 메우려 드는 세계.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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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글 - 수 많은 '처음'

수많은 처음이란 결국 끊임없는 성찰(省察 살필성 살필찰)이 나일 수 없습니다.  12







  







우리는 새로운 꿈을 설계하기 전에 먼저 모든 종류의 꿈에서 깨어 나야 합니다. 

꿈보다 깸이 먼저입니다.

꿈은 꾸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서, 누구한테서 꾸어올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꿈과 동시에 갚을 준비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깸은 여럿이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집단적 몽유(夢遊 꿈몽 놀유)는 집단적 각성(覺醒 깨달을각 술깰성)에 의해서만 깨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6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 다할진 착할선 다할진 아름다울미)라 합니다. 목표가 바르지 않고 그 과정이 바를 수가 없으며, 반대로 그 과정이 바르지 않고 그 목표가 바르지 못합니다. 목표와 과정은 하나입니다.  31


바둑에서는 집이 크면 이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는 집이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한다고 합니다. 사람의 크기를 측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사람과 집의 크기를 비교하는 까닭은 짐작이 갑니다. 비슷해야 하는 것은 사람과 집의 크기만이 아닙니다. 사람과 그 사람이 앉아 있는 의자의 크기도 비슷해야 합니다. 의상도 마찬가지입니다.  42


진정한 대환느 애정으로 포용하는 것입니다.  44


높은 곳에서 일할 때의 어려움은 무엇보다도 글씨가 바른지 비뚤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물어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46


우공이산(愚公移山) - 어리석은 사람의 우직함이 세상을 바꾸어 갑니다.  53


모든 시내가 바다를 배운다는 것은 모든 시내가 바다를 향하여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는 뜻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백천학해(百川學海 일백백 내천 배울학 바다해)  55


오늘 저녁의 일몰(日沒)에서 내일 아침의 일출(日出)을 읽는 마음이 지성(知性)입니다.  63


옛사람들에게는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말라는 경구가 있었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거울에 비치는 겉 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경어인(鏡於人 거울경 어조사어 사람인), 모름지기 사람들 속에 자신을 세우고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추어 보기를 가르치는 경구입니다. 무감어수(無鑑於수 없을무 거울감 어조사어 물수)  76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

<주역> 사상의 핵심입니다. 궁극에 이르면 변화하고, 변화하면 열리게 되며, 여려 있으면 오래간다는 뜻입니다. 양적 축적은 결국 질적 변화를 가져오며, 질적 변화가 막힌 상황을 열어 줍니다. 그리고 열려 있을 때만이 그 생명이 지속됩니다. 부단한 혁신이 교훈입니다.  80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역>의 지산겸(地山謙 땅지 뫼산 겸손할겸) 괘는 땅속에 산(山)이 있는 형상입니다. 땅속에 산이 있다니 자연현상과는 모순인 듯합니다. 해설에는 "땅속에 산이 있으니 겸손하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많은 데를 덜어 적은 데에 더하고 사물을 알맞게 하고 고르게 베푼다."고 합니다. 우뚝 솟은 산을 땅속에 숨기고 있어서 겸손하다고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산을 덜어서 낮은 곳을 메워 평지로 만드는 것을 뜻하는지도 모릅니다. "겸손은 높이 있을 때에 빛나고, 낮은 곳에 처할 때에도 사람들이 함부로 넘지 못 한다." 그러기에 겸손은 "군자의 완성"이다. 가히 최고의 헌사라 하겠습니다.  82


물건을 갖고 있는 손은 손이 아닙니다. 더구나 일손은 아닙니다. 갖고 있는 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손이 자유로워집니다. 빈손이 일손입니다. 그리고 돕는 손입니다.  98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 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116


속도는 가속으로 가속은 질주로 이어집니다. 자동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1m의 코스모스 길은 한 개의 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이 가을을 남김없이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꽃길이 됩니다.  119


무념무상은 정신의 피로를 회복하는 빈공간입니다. 잠이 육체의 피로를 회복하는 이완의 정점인 것과 같습니다. 이 비움과 이완이야말로 '생각하는 공간'입니다. 

생각은 답습의 단절이고 기존(旣存 이미기 있을존)의 해체이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우리들의 조작가능성 바깥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만나는 세계를 서둘러 개념화하고 분석하기전에 당혹감 그 자체에 충실해야 합니다. 빈공간을 만들어 그 속에 무심히 앉아 있는 것 그것이 생각의 정점입니다.  120


물은 빈 곳을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 결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차곡차곡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영과후진(盈科後進 찰영 과정과 뒤후 나아갈진))  124


천 개의 손에는 천 개의 눈이 박혀 있었습니다. 천수천안(千手千眼 일천천 손수 일천천 눈안)이었습니다. 그냥 맨손이 아니라 눈이 달린 손이었습니다. 눈이 달린 손은 맹목(盲目 소경맹 눈목)이 아닙니다. 생각이 있는 손입니다. 마음이 있는 손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능력이 있는 사람이 수많은 손을 가진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마음이 있는 손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128


"색은 마음이 보는 것. 세상에는 흰 색과 검은 색 밖에 없는 것이야. 선 아니면 악일 뿐이야."

"흑백은 아예 색이 아니야. 색을 본다는 것은 우산을 먼저 보고 비를 나중에 보는 어리석음이야. 색은 흑백을 풍부하게 사는 데 써야 하는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홀리고 어지럽게 할 뿐이야. '진리'는 간 데 없고 '진리들'만 난무하게 되는 것이야."

그렇습니다. 사람의 눈동자는 95%가 흑백을 인식하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고 색을 인식하는 부분은 불과 5%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134


사랑은 사전(事前 일사 앞전)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사후(事後 일사 뒤후)에 경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경작되지 이전이라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그 이후라면 새삼스레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은 불모의 땅에서도 사랑을 경작한다는 사실입니다.  138


풍요보다 궁핍이 기쁨보다는 아픔이 우리를 삶의 진상에 마주세웁니다. 그리고 삶의 진상은 다시 삼엄한 대립물이 되어 우리 자신을 냉정하게 대면하게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냉정한 인식은 비정한 것이기는 하지만 빈약한 추수(秋收 가을추 거둘수)에도 아랑곳없이 스스로를 간추려보게 하는 용기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아픈 기억을 잊는 것은 지혜입니다. 아픈 기억을 대면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144


중요한 것은 '나아가면서 길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여기'서부터 길을 만들기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나마도 동시대의 평범한 사람들과 더불어 만들어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148


실패가 있는 미완(未完 아닐미 완전할완)이 삶의 참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삶은 반성이며 가능성이며 항상 새로운 시작입니다.  153


'성을 쌓는자 망하고 길을 떠나는 자 흥하리라' 유목주의의 금언입니다.

창조는 변방에서 이루어집니다. 중심주는 지키는 것에 급급할 뿐입니다. 변방이 창조공간입니다.

그러나 변방이 창조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중심부에 대한 컴플랙스가 없어야 합니다.

컴플랙스가 청산되지 않은 변방은 중심부보다 더욱 완고한 교조(敎條 가르칠교 곁가지조)의 아성이 될 뿐입니다.  156


고행이 공부가 되기도 하고, 방황과 고뇌가 성찰과 각성이 되기도 합니다. 공부 아닌 것이 없고 공부하지 않는 생명은 없습니다. 달팽이도 공부합니다. 지난여름 폭풍 속에서 세찬 비바람 견디며 열심히 세계를 인식하고 자신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공부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 형식입니다.  170


아메리카 인디언은 말을 멈추고 달려온 길을 되돌아봅니다. 영혼이 따라오기를 기다립니다. 

공부는 영혼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노인 목수가 그리는 집 그림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리는 순서가 판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반대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을 맨 나중에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189


우리가 훌륭한 사상을 갖기가 어렵다고 하는 까닭은 그 사상 자체가 무슨 난해한 내용이나 복잡한 체계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상이란 그것이 내용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 실현된 것만큼의 사상만이 자기 것이며 그 나머지는 아무리 강론하고 공감하더라도 결코 자기 것이 아닙니다.  203


각 방마다 사정이 비슷하다면 아마 한 방에 두 개 또는 세 개씩, 그러니까 20~30개 정도의 수도꼭지가 있었으 ㄹ것으로 계산됩니다. 20~30개의 수도꼭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물은 부족하고 세면장의 아우성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동 전체 인원이 150명이니까 수도꼭지가 150개 있으면 해결될 것 같았습니다. 비상용으로 한 개씩 더 가져야 한다면 300개, 300개가 있으면 물 문제는 해결될 것 같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이것은 교도소의 수도꼭지 얘기가 아닙니다. 수도꼭지가 만약 상품으로 거래된다면 여섯 개 대신에 300개를 만들어 팔 수 있는 구조가 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해지는 물질적인 낭비를 풍자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생산하는 상품이 수도꼭지 하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수많은 상품이 마치 수도꼭지와 같은 형태로 생산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207



"없이 사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사정을 구구절절 다 얘기하면서 살아요? 그냥 욕먹으면서 사는 거지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대개 먹물들은 자기의 사정을 자상하게 설명하고 변명까지 합니다. 못 배운 사람들은 변명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짧은 것이라 하더라도 자기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사람이 아예 없습니다. 그냥 단념하고 욕먹으면서 살 각오를 합니다. 나는 그의 그러한 태도가 바로 춘풍추상이라는 고고한 선비들의 윤리의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정은 잘 알지 못합니다. 반면에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세심한 사정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불가피했던 수많은 이유들에 대해서 소상하게 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추상같이 엄격하고 자기에게는 춘풍처럼 관대합니다. '대인충푼 지기추상'이란 금언은 바로 이와 같은 자기중심적 관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211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합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233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공존의 철학이 화(和 화할화)입니다. 반대로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동화하려는 패권의 논리가 동(同 한가지동)입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 화할화 말이을이 아닐부 한가지동)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237


세상 사람들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246


미셀 푸코가 지적하듯이, 자유로운 영혼이 근대사회를 구성하는 감옥, 군대, 병원, 학교, 공장의 모든 시스템을 통과하면 반듯하고 조그마한, 계량화되고 규격화된 주체가 됩니다. 지금은 포섭 기제가 굉장합니다. 옛날에는 물리적 강제로 사람들을 규제했지만 지금은 그런 규제가 없습니다. 대단히 자유롭습니다. 감성 자체를 포획해 버립니다.  259


자유롭고 올바른 생각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가 갇혀 있는 문맥(文脈 글월문 맥맥)을 벗어나야 합니다. 문맥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당대의 문맥을 깨닫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중세 사람들은 중세 쳔년 동안 마녀 문맥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우리 시대의 문맥을 깨달아야 합니다. 탈문맥(脫文脈 벗을탈 글월문 맥맥)과 탈주(脫走 벗을탈 달릴주), 이것은 어느 시대에도 진리입니다.  260


공부는 망치로 합니다. 갇혀 있는 생각의 틀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262


공부의 옛글자는 사람이 도구를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일이 공부입니다.

공부란 삶을 통하여 터득하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리고 세계와 인간의 변화입니다.

공부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의 존재형식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존재형식은 부단한 변화입니다.  263


생각하면 여행만 여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 하루하루가 여행이라고 생각힙니다.

소통과 변화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 형식입니다.

부단히 만나고, 

부단히 소통하고,

부단히 변화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가슴에서 다시 발까지의 여행이 우리의 삶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만 못하고,

마음 좋은 사람이 발 좋은 사람만 못합니다.  264


책은 반드시 세 번 읽어야 합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모든 필자는 당대의 사회역사적 토대에 

발딛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를 읽어야 합니다.

독자 자신을 읽어야하는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서는 새로운 탄생입니다.

필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탈주(脫走 벗을탈 달리주)입니다.

진정한 독서는 삼독입니다.  266


책상은 그것을 위한 디딤돌일 뿐입니다. 모든 시대의 책상은 당대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장치입니다. 책상 위에 올라서는 것은 '독립'입니다.-죽은시인의사회  285


우리는 누군가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스승으로 살아갑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삶의 연쇄(連鎖 연결할연 쇠사슬쇄) 속에서 자신을 깨닫게 됩니다.  287


소혹성에서 온 어린왕자는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관계맺음이 없이 길들이는 것이나 불평등한 관계로 길들여지는 것은 본질에 있어서 억압입니다. 관계맺음의 진정한 의미는 공유입니다. 한 개의 나무의자를 나누어 앉는 것이며, 같은 창문에서 바라보는 것이며, 같은 언덕에 오르는 동반입니다.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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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9


"자. 어서 아, 해라. 먹어."

...

"얼른 먹어라. 팔 아프다..."

...

"저, 안 먹어요."

...

"보고 있으려니 내 가슴이 터진다. 이 애비 말이 말 같지 않아? 먹으라면 먹어!"

...

"저는, 고기 안 먹어요."

...

"먹어라. 애비 말 듣고 먹거.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다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

...

"아버자,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순간, 장인의 억센 손바닥이 허공을 갈랐다. 아내가 뺨을 감싸쥐었다.

"아버지!" 

처형이 외치며 장인의 팔을 잡았다. 장인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입술을 실룩거리고 있었다.

...

"정서방, 영호, 둘이 이쪽으로 와라."

...

"두 사람이 영혜 팔을 잡아라."

"예?"

"한번만 먹기 시작하면 다시 먹을 거다. 세상천지에, 요즘 고기 안 먹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

처남은 소리쳐 만류했으나, 얼결에 아내를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으음...음!"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아내의 입술에 장인은 탕수육을 짓이겼다. 억센 손가락으로 두 입술을 열었으나, 악물린 이빨을 어쩌지 못했다.

마침내 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장인이 한번 더 아내의 뺨을 때렸다.

"아버지!"

처형이 달려들어 장인의 허리를 안았으나, 아내의 입이 벌어진 순간 장인은 탕수육을 쑤셔넣었다. 처남이 그 서슬에 팔의 힘을 빼자, 으르렁거리며 아내가 탕수육을 뱉어냈다. 짐승같은 비명이 그녀의 입에서 터졌다.

".. 비켜!"

...이를 악문 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하나씩 응시하다가, 아내는 칼을 치켜들었다.

...

아내의 손목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다.  47-51





몽고반점


지나치게 담담해, 대체 얼마나 지독한 것들이 삭혀지거나 앙금으로 가라앉고 난 뒤의 표면인가, 하는 두려움마저 느끼게 하는 시선이었다.  93


아이를 통해 연결되느 군더더기없는, 일종의 동업자의 관계가 이즈음 아내와 그의 관계였다.  99


놀라울 만큼 호기심이 없었고, 그 덕분에 어느 상황에서도 평정을 지틸 수 있는 것 같았다.  105





나무불꽃


오래전 그녀는 영혜와 함께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아홉살이었던 영혜는 말했다. 우리, 그냥 돌아가지 말자.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어싿.

그게 무슨 소리야. 금방 어두워질 텐데. 어서 길을 찾아야지. 

시간이 훌쩍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영호야 맞은 만큼 동네 아이들을 패주고 다니는 녀석이었으니 괴로움이 덜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은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을 끓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 만은 조심스러워 했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191-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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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생활에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아침 식사 십 분, 점심과 저녁 시간 오 분이 유일한 삶의 목적인 것이다.  23


아무리 진리라고 하더라도 알아먹어야 진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30


배가 따뜻한 놈들이 한데서 떠는 사람의 심정을 무슨 수로 이해하겠는가?  31


이 지역에서는 눈보라가 치면 작업이 중지될 뿐만 아니라, 막사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다...

물론, 눈보라가 친다고 해서 죄수들에게 무슨 이익이 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막사의 문이 잠기고, 석탄도 떨어지게 마련이다. 막사 안에 있더 ㄴ따뜻한 공기도 틈으로 들어오는 냉기 때문에 금세 냉랭해지고 만다. 곡분의 보급도 중단되는 바람에 빵이 부족해지고, 식당에서 주는 부식도 떨어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눈보라로 인해 작업이 준단되는 날에는 사흘이 되었던 일주일이 되었건 이날을 휴일로 계산해서, 일요일에도 작업장으로 내몰기 일쑤다.

그래도 죄수들은 여전히 이 눈보라를 고대하고 기다리고 있다.  64


주저앉으려는 개한테는 채찍이 최고라는 말이 있다.  74


법률이란 것은 도무지 믿을 것이 못 된다....

'자네한테 내린 이십오 년의 형기를 자꾸 세려고 하지 마! 이십오 년을 살지 어떨지는 아무도 몰라. 확실한 건 내가 꼬박 팔 년을 살았다는 것뿐이야!'

발 밑만 보고 걸어다니란 말이지. 그러면, 어떻게 이곳엘 들어왔는지, 어떻게 이곳을 나갈 것인지 하는 생각을 할 시간이 없을 테니 말이야.  82


슈호프는 어릴 적에 말에게 귀리를 먹이고는 했다. 그때만해도 슈호프 자신이 이런 몇 숟가락의 귀리죽에 어쩔 줄 모르고 행복에 겨워하게 되리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91


국그릇에 담긴 국물을 쭉 들이켠다. 따뜻한 국물이 목을 타고 뱃속으로 들어가자, 오장육부가 요동을 치며 반긴다.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바로 이 한순간을 위해ㅓ 죄수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슈호프는 모든 불평불만을 잊어버린다. 기나긴 형기에 대해서나, 기나긴 하루의 작업에 대해서나, 이번 주 일요일을 다시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나, 아무 불평이 없는 것이다. 그래, 한 번 견뎌보자. 하느님이 언젠가는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테지!  175


키가 큰 노인인 유-81호. ...

슈호프는 이 노인에 대해 이렇게 들은 적이 있다.

그가 수용소에 얼마나 있었는지는 아예 셀 수도 없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단 한번도 특사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십 년간의 형기가 끝나면, 또다시 십 년을 첨가하고는 했다는 것이다.

슈호프는 오늘 처음으로 그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수용소 내으 죄수들이 모두 새우등처럼 허리를 굽히고 있는 반면에, 이 노인은 유독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다. 의자에 앉은 모습을 보니, 의자에 뭘 기대고 앉은 것처럼 꼿꼿하게 앉아 있다. 머리카락은 이미 모두 빠져서 이발할 필요도 없어진 지 오래다. 수용소에서 하도 잘 먹은 탓에 머리가 모두 빠진 모양이다. 그는 식당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듯, 슈호프 머리 너머 어느 곳인가 먼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끝이 다 닳은 나무 수저로 건더기도 없는 국물을 단정한 모습으로 먹는다. 다른 죄수들처럼 국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먹는 것이 아니라, 수저를 높이 들고 먹는다. 이는 아래위로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뼈처럼 굳은 잇몸으로 딱딱한 빵을 먹고 있다. 얼굴에는 생기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 그래도 어딘가 당당한 빛이 있다. 산에서 캐낸 바위처럼 단단하고 거무스름하다. 쩍쩍 갈라진 거무스름한 손은 그가 걸어온 수십 년의 감옥살이를 통해, 한번도 가벼운 노동이나 사무직 같은 것을 얻어 일한 적이 없이, 생고생만 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하지만 그는 전혀 굴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다. 어떤 타협도 하려 들지 않는다. 삼백 그램의 빵만 하더라도, 다른 죄수들처럼 더러운 식탁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지 앟고, 깨끗한 천을 밑에 깔고 그 위에 내려놓는다.  177-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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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가두면 공기가 되어버리니까. 

 난 바람이고 싶어.

 그래서 그냥 통과하게 높아두는 거야.

 가두지 않고."



어른이 된다는건, 몸만 뻣뻣하게 굳는것이 아니라 생각이 흘러가는 길까지 굳어지게 되는것.

중요한건 끝까지 유연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마음도, 생각도, 몸도...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

여행지에서 일어난 일들

여행지에서 향유하는 순간들

여행이 가져다주는 깨달음으로 

우리의 일상은 넉넉해진다.

때론 여행지에서 평소 시도하지 못했던 일들을

스스럼없이 해보기도 하며 

그 과정에서 또다른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래서 떠나면 떠날수록 내가 누구인지

더 잘 알게 되고 

길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삶이란 완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를 채워주고 잘 서 있을 수 있도록 서로 지탱해주는 것이다. 내가 힘이 있을 때는 누군가에게 나의 어깨를 빌려주고 내가 힘들때는 누군가에게 기대하고 의지하는 것. 어떠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이런 지혜를 얻기 위해 여행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말할때 우리는 길을 떠난다고 한다. 

'길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길에게' 떠나는 것이 아니라 

'길을' 떠난다고 말한다.

여행은 새로운 길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던 길을 내려놓거나 지금 가고 있던 그 길을 떠나 

잠시 안녕,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게 익숙한 그 길과

다시 돌아왔을대 변한건 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익숙한 길을 걷다 멈출 줄 아는 용기

익숙한 것들을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

그것이 여행이 길을 떠난 자에게 주는 선물이다.



사람의 마음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는 것일까.

나는 그 흘러가는 시간의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여행에는 흔적이 남는다. 

잠시 머문곳이든 매일 아침 지나던 길이든 '안녕'하고 눈 인사를 나눴던 사람이든 스쳐간 것들은 그렇게 기억되고 또 추억이 된다.



내가 가는 모든 길이, 선명하게 보여야 안심할 수 있다는 새악도 어쩌면 욕심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길이 더 평화롭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여행하는 방법은 또 달라질 것이다.

삶을 대하는 방법이 달라지듯 떠나는 방법도 달라지고

또 머무는 방법도 달라지겠지.

이렇게 변화할 수 있어서 그렇게 변하는 나를 보게 해주어서 참 고맙다.

여행이라는 친구에게.


내가 하는 일

내가 가는 곳

내가 먹는 것

내가 만나는 사람은 거의 정해져 있다.

그것을 깰 수 있는 건 

여행뿐이다.



여행은 애인처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

남루해진 마음이 쉬고 싶을 때나 삶이 푸석거리고 재미없을때 언제나 달뜬 마음으로 꿈꾸게 되는 것. 자랑하고 싶으면서도 나만의 것으로 남겨 두고 싶은 것.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시간을 보내든 그 자체로만으로도 충분한 것.

아무리 시간을 많이 보내고 머물렀던 곳을 또 지나간다해도 언제나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것.

여행은 애인처럼 친구들은 부러워하지만 엄마 아빠에게는 왠지 미안한 것.



여행은 스스로 써내려가는 옴니버스 영화의 시나리오 일지도 모른다. 

큰 세트는 일단 정해져 있고, 그 공간을 어떻게 꾸밀것인지는 나에게 달려 있다.

혼자 독백하듯 모놀로그 스타일로 이야기를 전개할 것인지, 각각의 등장인물을 적절히 넣어 흥미있는 에피소드로 풀어갈 것인지는 순전히 글을 쓰는 나의 몫이다. 길을 물어보는 짦은 에피소드에 한 명을 등장시키더라도 이야기를 풍성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면 여행이 즐거워 진다.  



'잠시 내 손에 머물다 가는 것들을 잘 놓을 줄 안다면 내가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면 인생을 여행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울 것 같다.' -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인생은 머무르지 않고 흐르는 것.

세월이 흐르듯, 삶이 흘러가듯, 시간도 흐르고 인연도 흐르는 것.

내가 할 일은 애써 잡으려고 발버둥치는게 아니라 그것들이 내게 잠시 머무는 동안 아끼고 사랑해주는 것이다.

함께 흘러갈 수 있도록 기대하며 같이 있는 동안 즐거워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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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왜?"라고 묻고 생각하게 하는 교육, 그것이 하브루타다.



추천사 


생각하며 말하는 하브루타가 자녀를 최고로 만든다 - 류태영(농촌, 청소년미래재단 이사장)


유대인 아버지들은 퇴근을 하면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집안일도 많이 한다. 대신 가정에서 아버지의 자리는 확고하며 가족 모두가 아버지의 권위를 존중한다... 

유대인 교육의 일차 교사는 아버지다...

탈무드는 "아들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사람은 시내산에서 직접 받은 것처럼 실감나게 가르쳐야 한다. 자손에게 그것을 그대로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가정은 인체의 '배꼽'..

유대인 부모들이 일찍부터 대화를 통한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는 창의성을 기르기 위해서이다. 대화를 나눔으로써 자유로운 사고를 하게 만들고, 그런 유연성이 창의적인 능력과 논리성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6-7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 - 김성묵(누란노 아버지학교 대표)


삶으로 가르친 것만이 남는 법이다.  8




프롤로그


가장 큰 힘은 가정에 있다.  14


하브루타란 '짝을 지어 질문하고 대화하고 토론하고 논쟁하는것'을 말한다.  17




유대인은 자녀의 교육을 무엇보다 우선한다. 

자녀를 교육시키는 일이 하나님에 대한 부모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28


부지런히 가르친다는 것은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31


적극적인 의미로는 자녀와 함께 있을 기회를 만들어 가르치라는 뜻이다..

'가르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샤난'의 어원적 으미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날카롭게 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반복하다'이다. ..

전통적인 교육 방법을 철저히 지켜오고 있는 정통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학교를 '예시바'라고 부른다. '예시바'는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서 말로 서로를 가르치는 전통적인 교육 기관이다.

" 이 말씀을 강론하라."에서 강론하라의 원어는 '디베르'이다. 이것은 '그것들에 관해 말하라, 이야기를 나누라'는 뜻이다. 이 동사는 규격을 갖춘 분위기에서의 강론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 속에서 나누는 대화를 의미한다.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종의 무의도적 교육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에서 '강론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디베르'는 어원적으로 일상적인 삶 속에서 나누는 대화를 의미한다.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에서 '강론'을 그대로 풀면 '가르치고 토론하라'는 것이다. 영어로는 'talk about'이다. 말 그대로 이야기를 나누라는 것이다.  32-33


유대인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우리와 매우 다르다. 가정이나 사회생활에서 남녀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 아버지는 직장에서 일을 마치면 바로 퇴근해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 또 가정에서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에는 독서를 하면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게 한다.  .. 

한국인의 경우, 아이 스스로 생각하거나 결정하지 않고 오로지 부모의 지시에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단시간에 빠른 학습효과를 거두지만 스스로 사고하지 않고 공부하기 때문에 창의성이 부족하고 남의 지시 없이는 공부하지 못한다. 또한 스스로 답을 찾지 않고 누군가가 자신의 질문에 대해 설명해주기를 바란다.  35


유대인 아버지는 안식일에 아이들과 식탁에 앉아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필요한 경우 한 명씩 따로 불러 대화를 나눈다.  36


탈무드는 '무엇'을 사고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를 가르친다.  38


비판적인 사고력이 있으면 정보를 능숙하게 파악하고 그 정보가 어느 정도 중요한지를 알 수 있게 되어 정보의 진정한 가치를 평가할 수 있게 된다.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은 새로운 발견과 진보를 이뤄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힘은 토론을 통해서 가장 잘 기를 수 있다. 토론에 필요한 자료를 준비하면서 어마어마한 정보의 양에 압도될 수 있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읽는 기술이 필요하다. 

무엇을 읽을 때 이 정보가 믿을만한 것인지, 토론 주제에 적절한 것인지 등 많은 판단을 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보를 골라내는 안목이 길러진다. 정보가 옳고 그른지를 구분하는 능력은 비판적인 듣기도 가능하게 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어떻게 반박을 해야 하는지, 논리적인 허점은 무엇인지를 파악하면서 듣게 되기 때문이다.  40


유대인 아버지들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언어를 자식에게 가르친다. 자신은 히브리어를 못하고, 토라나 탈무드를 히브리어로 못 읽으면서 아들은 유대인 학교나 회당에 보내어 히브리어를 배우게 하지 않는다.  43


유대인 아버지의 이중 언어 교육 방법은 우리 조상들이 자녀에게 한자를 가르쳤던 방법과 일치한다. 우선, 우리 조상들도 기본적으로 시험을 보기 위해 한자를 배운 것이 아니라 성현의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기 위해 글을 배웠다. 둘째, 아버지 본인이 한자를 알고 자녀에게 가르쳤지 본인은 못 하면서 다른 교육자들에게 의존하지 않았다. 셋째, 유교경전이라는 하나의 일관된 주제로 교육했지 이것저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천자문을 떼고, 소학이나 명심보감을 공부하고, 사서삼경으로 들어갔다. 주제는 충효를 기본으로 하는 유교적인 삶의 원리였고 경전의 수준이 올라가면서 사고와 이해의 폭이 깊어졌다. 넷째, 아이라고 쉬운 것만 가르치지 않고 쉬운 글자만 가르치지 않았다. 원문을 그대로 가르치며 이해가 어려운 부분은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44-45


그들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교육법은 '왜?'라는 질문이 끊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49


부모에게 가장 끔찍한 복수는 부모를 직접 살해하는 존속살해일 것이다. 그런데 전체 살인사건 중 존속살해 비율은 6.3%로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미국이 2% 정도이고 영국이 1% 정도로 영국의 6배, 미국의 3배가 넘는다.  52


복수를 당하는 것과 일방적인 피해를 당하는 것의 차이는 원인을 제공했느냐 아니냐의 차이이다. 부모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피해를 당하는 것이지 복수를 당하는 것이 아니다. 복수를 당하는 메커니즘에는 무의식이 있다.  53


한 개의 뇌세포는 수천 개의 다른 뇌세포와 연결되는데 뇌세포가 서로 연결되는 이 과정은 외부 자극에 반응하면서 진행된다. 이를 '신경 가소성'이라고 한다. 뇌세포간의 연결은 외부 자극에 따라 변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초기 3년 동안 뇌에 저장되는 것이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우리 마음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런 무의식은 그 사람의 성격이 된다....

아이의 뇌는 일정한 단계를 거쳐 일정한 과정에 따라 발달한다. 그 발달 과정을 뛰어넘거나 거스르는 것은 뇌에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54


관심을 가지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에 조금만 도와주면 아이는 쉽게 그것들을 성취한다... 성취감과 자신감을 갖게 된 아이의 뇌에는 긍정적 정서가 무의식으로 형성된다. ..

부모와 자녀의 사이가 좋지 않으면 결코 공부를 잘할 수 없다.  55


지금 한국 부모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자녀와 자신을 구분하는 것이다.  56


부모는 자녀에게 다양한 정보를 주고 선택에 도움을 주는 여러 가지 길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최종 결정은 자녀가 해야 한다. 대부분의 아버지는 자신의 회사에 성적이 좋은 자보다 성격이 좋은 사람이 들어오기를 바란다. 그런데 자녀에 대해서는 성적을 높이는 데 초점을 둘 뿐 성격 좋은 사람으로 키우지 않는다. 이런 이율 배반을 바로 보는 것, 그것이 자녀 교육의 출발이다.  57


정신과 의사들이 정신장애를 가져오는 부모의 양육 태도로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낮은 돌봄'과 과잉보호'다. 낮은 돌봄은 사랑을 주지 않는 것이고 과잉보호는 사랑을 넘치게 주는 것이다...

자녀는 사라오가 더불어 돌봄을 원한다. 구체적으로 안아주고, 보살펴주고 위로해주고, 보호해주기를 바란다.  58


과잉보호가 적고 돌봄이 많은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과잉보호만 있고 돌봄이 적은 것이 가장 나쁜 영향을 미친다. 또한 과잉보호보다는 돌봄의 부족이 그 자녀의 병리에 더 나쁜 영향을 미친다. 돌봄의 부족이란 곧 무관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59


자녀를 다른 사람이나 기관에게 맡기는 모든 것이 낮은 돌봄이다.  60


의무감이 아닌 진심으로 이렇게 아버지가 가정에서 환대받는 가정은 극히 드물다.  61


시간이 없고 자녀와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잘 모르는 아버지들이 가장 쉽게 선택하는 것이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 방법이다. 아이가 사달라고하는 장난감을 사주고, 아이가 가고 싶어 하는 놀이공원에 데리고 간다. 하지만 그것은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통할지 모르지만 그 이후로는 거의 말조차 통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63


부모는 반드시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64


중요한 것은 시간의 양이 아니라 질이다.  66


자녀와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랑과 관심을 기울이고 함께 교감을 나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67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공부하고, 자녀는 자녀대로 공부하면서 거의 전문가 수준의 논쟁이 된다.  73


최고의 육아는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에 있다. 아이는 부모와의 시간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안목과 구조를 익힌다. 특히 아버지의 시선을 통해 사회를 읽는다...

아이에 대해 잘 알아야 대화와 토론이 가능하다. 아이에 대해서 모르면 대화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76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기보다는 시행착오를 통해 점점 나아지겠다는 태도가 중요하다. 어떤 한 방법을 배워서 실천할 것이 아니라 아이의 변화를 계속 살피고 알아가면서 그에 맞추어 변해가야 한다.  77


우리가 볼 때 분명히 체벌을 해야 할 상황에서도 유대인 아버지는 소리를 높이지 않고 아이와 대화를 나눈다.  78


아버지가 되었지만 아버지 역할을 배운 적이 없고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제대로 된 양육을 받아 본 일이 없어 저절로 겉돈다.  81


게임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86


인간은 장기간에 걸쳐서 보호받고 양육된다. 그 덕에 아이들은 기본적인 운동 능력을 점진적으로 익힐 수 있고, 나중에 독립해서 부딪히게 될 많은 난관과 해결책을 미리 탐색할 수 있다.  87


아이는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가 어렵다.  89


아이가 직접 체험하고 생각하고 행동한 것만 아이 것이 된다.  92


아이와 집에 있을 때 아이의 사고력을 자극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아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함께 즐기면 된다.  93


먼저 몸으로 가까워진 후 진심이 자녀에게 전달되어야 마음이 열린다. 관계성만 회복하면 그 다음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있다.  95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하고 사소한 갈등이 있어도 대화로 풀어온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갈등 자체에 대해서 그다지 겁먹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수정할 수 있는 사회성 좋은 어른이 된다.  97


공룡이라는 단어는 못써도 공룡을 그리고 설명할 수 있게 키운다... 

체험, 협동, 토론을 통해 교육한다. 직접 하게 하고, 함께하게 하고, 의논하면서 하게 한다.  99


아이가 자라면 자기가 하는 짓이 잘못된 것인 줄 스스로 안다.  102


유대인의 경우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예시바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예시바에서 토라와 탈무드를 가지고 하루 15시간씩 공부하고 그중 10시간 이상을 하브루타로 공부한다.  104


책을 많이 읽는다고 언어의 의미를 파악해낼 수 있는 힘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언어의 의미를 가지고 따져보면서 깊이 있게 공부해야 가능하다.  105


책 읽기는 사랑하는 부모의 품이나 무픔에 안겨 있는 상태에서 시작한다. 부모의 품에서 보호받고 사랑받으면서 이야기를 듣는 일은 아이들에게 독서가 사랑과 연관되어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책을 읽어주는 것은 아이에게 일찍 문자를 깨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일찍부터 '듣기' 자극을 주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마이엘린에 있다. 마이엘린은 신경세포 축색돌기를 둘러싸고 있는 지방질의 백색 피막이다. 전선이 플라스틱 피복에 둘러싸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이엘린은 신경 세포를 둘러싸서 뉴런을 통해 전달되는 전기신호가 누출되거나 흩어지지 않게 보호한다. 뇌의 각 신경세포는 성장 단계에 따라 영역별로 마이엘린화를 거치고 이 과정을 통해 기능이 발달하는데, 일반적으로 마이엘린화 되었다는 것은 그 부분이 잘 발달했다는 의미이다.

책 읽기는 다양한 정보원, 특히 시각 영역과 청각, 언어 및 개념 영역을 연결하고 통합할 수 있는 뇌의 능력에 의존한다. 이러한 통합은 각 부위와 그 연합 영역의 성숙도, 이 부위들을 연결하고 통합시키는 속도에 의존한다. 그러한 영역의 성숙도, 이 부위들을 열결하고 통합시키는 속도에 의존한다. 그러한 속도는 다시 뉴런 축색의 마이엘린화에 따라 달라진다. 축색 주위를 감싼 마이엘린이 많을수록 뉴런이 전기신호를 빨리 전달할 수 있다.

마이엘린의 성장은 각 부위마다 약간씩 다른 발달 순서로 진행된다. 예를 들어 청각신경은 임신 6개월째 마이엘린화 되고, 시신경은 생후 6개월이 되어야 마이엘린화 된다. 사람은 다섯 살이 되기 전 감각 및 운동 부위가 모두 마이엘린화 되고 독립적으로 기능하게 된다. 각회와 같이 시각 언어 및 청각 정보를 빠른 속도로 통합시키는 주요 뇌 부위들은 다섯 살이 지나도 완전히 마이엘린화 되지 않는다.

청각 신경이 가장 먼저 마이엘린화 되고 글을 깨우치는 부분은 훨씬 뒤에 천천히 발달한다는 것은 아이에게 '듣기' 자극이 가장 효과적이며 자연스럽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태교에서 태담이 중요하며 유대인의 베갯머리 교육이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107-108


부모가 책을 읽어준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스토리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이 무엇을 하려는지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어디인지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 포함된다. 또 아이는 부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상하거나 궁금한 것들을 질문한다.  109


책을 읽거나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 내용을 가지고 질문하고 대화하는 것이다.  110


즐겁게 공감하면서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눈다. 아이에게 책을 읽는 주도권을 준다...

미국 명문고인 제퍼슨고등학교는 SAT시험 1위를 하는 학교다. 그 비법은 무엇일까? 바로 OR(Outside Reading)프로그램이다. 매일 읽은 책에 대한 작문을 꾸준히 하며 자신이 직접 정리하는 것이다. 독서를 한 후 자신의 여려 가지 생각을 작문하는 것은 모든 과목의 기반이 될 수 있다...

학생들은 평소 주야장천 책만 읽는다. 수업 때는 말만 한다.  111


토론과 논쟁은 어떤 객관적인 사실에 대해서도 질문하게 만든다. 당연한 것까지도 뒤집어 생각하게 한다. 상대방의 의견과는 다른 나만의 견해를 가져야 토론이 가능하다. 일반적인 상식을 가지고는 토론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래서 하브루타는 나만의 생각, 새로운 생각, 남과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든다.  117


질문이 좋아야 토론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질문이 좋아야 생각을 날카롭게 할 수 있다.  118


119



탈무드 논쟁의 원리를 참고해 하브루타에 적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원리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 하브루타는 질문이 핵심이다. 아이에게 지시나 요구, 설명을 하기보다는 질문을 많이 한다...

유대인 부모들은 학교에 다녀온 아이들에게 다른 것을 묻는다. "오늘 선생님에게 무슨 질문을 했니?"..

유대인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때 "선생님께 질문을 많이 해라."라고 말한다. 즉, 많이 떠들고 오라는 것이다.


둘, 틀린 답을 말해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고 다시 질문으로 답한다...유대인 학교 교실은 항상 시끄럽다.


셋, 하브루타를 하기 전에 충분히 내용에 대해 알게 한다.

유대인들이 토론 수업이 가능한 이유는 공부할 내용을 집에서 충분히 공부해오기 때문이다.


넷, 아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게 한다.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도록 이끈다. 그들은 수많은 대화와 토론을 통해 자신이 잘하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고 그것을 스스로 지향한다.  123


다섯, 하브루타는 사고력 신장이 목적이다. 뭔가를 외우고 알게 하는 것보다 뇌를 자극해 사고력을 높여 안목과 통찰력, 비판적 사고력을 길러주는 것이 목적이다.

하브루타의 가장 큰 목적은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데 있다...

교육에서 어떤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많은 정보를 머리에 넣고 있다고 뛰어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고 방법이며, 사고력이고, 상상력이고, 창조력이다.


여섯, 질문하고 대화할 때는 집중해서 눈을 보고, 그 어떤 대답도 막지 않고 수용 한다.

유대인들은 토론하는 동안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또 나의 의견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서로의 견해가 어떤 것이 다르고 어떤 것은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과정에 더 중요성을 둔다. 그러는 중에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를 배우고 결론이 나지 않거나 둘이 해결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는 랍비나 교사의 도움을 받는다. 우리는 이기고 설득시키기 위해 논쟁하지만 유대인들은 나를 발전시키고 성숙하기 위해 논쟁한다.


일곱, 대답에서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칭찬한다.

칭찬은 구체성을 띄어야 효과가 있다. 아이들은 진심이 담기지 않은 칭찬이나 거짓된 사과를 얼마든지 눈치챌 수 있다. 진실한 것에 기초한 칭찬이어야 한다...

칭찬의 가장 중요한 법칙은 성격과 인격에 대해 칭찬하지 말고 꼭 아이의 노력과 노력을 통해 얻어진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칭찬하는 것이다. 아이는 구체적으로 칭찬을 받으면 그것을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덟, 남과 다르게 생각하도록 격려한다.

정답은 정해진 옳은 답을 말하고, 해답은 풀어낸 답을 말한다. 정답은 대부분 하나이고 해답은 각자가 풀어낸 답으로 다양한다...

다양한 해답, 나만의 해답, 서로 다른 해답을 요구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아홉, 모르는 것은 책을 다시 보거나 인터넷을 검색하는 등 스스로 찾아보게 한다.

아이가 질문을 하면 질문으로 답해서 아이가 깊은 생각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이가 몰라서 질문하는 경우도 있지만 부모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거나 같이 놀고 싶은 경우도 있다. 그 시간은 충분히 아이의 눈높이에서 즐겁게 놀아주어야 한다.


열, 많은 내용을 하브루타 하기보다는 하나의 내용을 깊이 있고 길게 하브루타 하는 것이 좋다.

책을 많이 읽고 지식을 쌓는 것보다 책을 깊이 읽고 사고하는 것을 강조한다. 

하브루타는 진도가 아니라 심도이다. 깊이 있는 노의를 하기 위해서는 매우 다양한 질문들을 한 문장 한 문장에서 뽑아낼 줄 알아야 한다. 그런 훈련 없이 하브루타 학습이 성공할 수 없다. 잡담만 하다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열하나, 다소 어려운 내용도 쉬운 용어로 질문해 생각하게 하는 것이 좋다.

유대인은 부모든 교사든 답을 잘 가르쳐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이 몰라서가 아니라 그 기회를 통해 학생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다. 그 과정에 함께 참여해 안내자 역할을 하는 것이 자신들의 본분이라고 생각한다.


열둘, 모든 일상 속에서 하브루타를 하되 시간을 정해서 정기적으로 한다.


열셋, 집에서 하는 경우 잠들기 전이 하브루타를 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다. 

자녀들을 재우기 직전의 시간은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이 시간은 부모가 자녀를 침대에 누이고, 잠들 때까지 함께 있어주는 시간이다. 가족에게 투자하는 시간이고,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시간이다.


열넷, 나이가 어리더라도 쟁점을 만들어 토론과 논쟁으로 끌고 가는 것이 뇌를 계발하는 방법이다.

짝을 지어 질문하고 대화, 토론, 논쟁하는 하브루타의 가장 수준 높은 단계는 '논쟁'이다. 논쟁은 쟁점을 두고 반대되는 두 입장이 다투는 것을 말한다... 흔히 요즘은 논쟁과 토론이란 용어를 쓰지 않고 디베이트(debate)란 용어를 직접 쓰기도 한다.

디베이트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논제에 대해 격식을 갖춰 논의하는 것'을 의미하며 일정한 형식을 전제한다. .. 찬성과 반대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해서 참가자들이 둘로 나뉘어 정해진 순서와 시간에 맞추어 토론한다.


열다섯, 꼭 가르쳐야 하는 원칙이나 가치관은 대화를 통해 분명하게 인지하게 한다.  121-130



자녀 경제교육에 있어 쓰는 법부터 가르친다.

유대인의 돈 쓰는 법은 다름 아닌 자선활동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193


자녀에게 경제교육을 할 때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불로소득을 없애는 일이다.  196


물건 값을깎는 방법은 첫째로 가게 주인에게 그 물건을 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둘째로 물건의 힘집을 발견하고 값을 제안하는 것이다. 셋째로 발품을 팔아 다른 가게와 가격 비교를 통해 물건을 깎는 것이다.  198


"너의 생각은 어떠니?(마따 호셰프, What do you think about it?)"  228


그들은 "수줍어하는 사람은 배울 수 없다."라고 말한다.  239


공부를 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지 진도를 나가는 것이 아니다.  240


자녀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애착의 형성이다. 애착을 형성하려면 반드시 부모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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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이야기를 펜시 고등학교를 떠나던 그날부터 시작하고 싶다.  10


잊어버리고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 난 학교에서 쫓겨났다.  13


인생은 운동 경기와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규칙에 따라서 시합을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교장선생님은 아주 좋게 대해주셨어요.  18


이번이 네번째로 옮긴 학교였으니까요..

그때 난 열여섯 살이었고. 지금은 열일곱 살  19


난 무식했지만, 책은 정말 많이 읽었다.  31


정말로 나를 황홀하게 만드는 책은, 그 책을 다 읽었을 때 작가와 친한 친구가 되어 언제라도 전화를 걸어, 자기가 받은 느낌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32


난 겨우 열 세 살이었을 때, 차고의 유리를 전부 다 깨부수는 바람에 정신 분석 상담을 받기도 했었다. 그 일로 어른들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정말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그 애가 죽던 날 밤 차고로 숨어들어, 유리창을 전부 주먹으로 깨부쉈으니까.  58


난 겁이 많은 편이었으니까 말이다. 겁이 많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이 그랬다.  122


도둑맞은 장갑을 생각하다 내가 겁쟁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니, 점점 더 절망스럽게 느껴졌다.  124


그게 문제였던 것이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는 것 말이다.  125


나한테는 큰 문제가 있었다. 한번 끌어안아 본 여자는 모두 똑똑하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그 두 가지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도 지금도 그럴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144


지나치게 무언가를 잘한다면, 자신이 조심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에게 더 이상은 잘한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170


전쟁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나보고 전쟁터에 나가라고 한다면 정말 견디기 힘들 것만 같았다.  187


[정말이야? 넌 그래도 좋은 거야? 중국인인데도 말이야?]

[당연하지]

[어째서? 왜 그런지 알고 싶어. 정말 궁금해.]

[단지 서양철학보다는 동양철학이 좀더 깊이가 있다고나 할까. 굳이 대답하자면 말이지.]  195


좋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죽었다고 좋아하던 것까지 그만들 수는 없는 거 아니야? 더군다나 우리가 알고 있는 살아 있는 어떤 사람보다도 천 배나 좋은 사람이라면 더욱 말이야.  228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알고 싶어?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 말해 줄까? 만약 내가 그놈의 선택이라는 걸 할 수 있다면 말이야.]

[뭔데? 말 좀 곱게 하라니까.]

[너 '호밀밭을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는다면'이라는 노래 알지? 내가 되고 싶은 건...]

[그 노래는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와 만난다면'이야] 피비가 말했다. [그건 시야. 로버트 번스가 쓴 거잖아.]

[로버트 번스의 시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

그렇지만 피비가 옳았다. [호밀 밭을 걸어오는 누군가와 만난다면]이 맞다. 사실 난 그 시를 잘 모르고 있었다.

[내가 '잡는다면'으로 잘못 알고 있었나 봐.] 나는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229-230


[사람이 타락할 때는 본인이 느끼지도 못할 수도 있고, 자신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거야. 끝도 없이 계속해서 타락하게 되는 거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환경이 줄 수 없는 어떤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네가 그런 경우에 속하는 거지.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찾을 수 없다고 그냥 생각해 버리는거야. 그러고는 단념하지. 실제로 찾으려는 노력도 해보지 않고, 그냥 단념해 버리는 거야.]  247-248


빌헬름 스테켈이라는 정신분석 학자가 쓴 글이다..]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248


[교육받고 학식이 높은 사람만이 세상에 가치있는 공헌을 한다는 건 아니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교육을 받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 재능과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면, 불행히도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그냥 재능 있고, 창조력이 있는 사람보다는 훨씬 가치 있는 기록을 남기기 쉽다는 거지. 불행히도 이런 사람들은 많지 않아. 이들은 보다 분명하게 의견을 이야기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끝까지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 거기에 가장 중요한 건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학식이 없는 사상가들보다 겸손하다는 걸 들 수 있어.]  250


학교 교육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크기를 알게 해주고, 거기에 맞게 이용하게 해주는 거야.  251


사실 난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다.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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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마리가 나를 보러 와서는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그런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듯이, 그건 아무 의미도 없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답했다. "그런데 왜 나랑 결혼을 하죠?"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원한다면 우리가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제안한 사람은 그녀였고 나는 그러자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거라고, 그러자 그녀는 결혼은 진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그녀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그녀가 말했다. 자기는 단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나와 얽힌 또 다른 여자가 프러포즈를 해온다 해도 받아들일 것인지를 알고 싶다고. 나는 "물론"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혼잣말로 자신이 날 사랑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그점에 대해서는 나로서도 전혀 알 수 없었다. 또다시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에 그녀는 내가 특이하다고, 아마 그 때문에 내가 싫어질 거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덧붙일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내 팔을 잡고 웃으며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65-66


늙어 간다는 것은 치유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69


나 자신이 완전히 텅 빈 느낌이 들었고...  71


나는 엄마를 무척 사랑했지만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거다. 모든 정상적인 사람들은 많이든 적게든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소원한다.  93


사람이 죽는 이상, 어떻게와 언제냐는 중요하지 않다.  155


때때로 우리는 자기가 확신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했다.  157


".. 당신도 한번쯤은 다른 삶을 원했었다는 걸" 나는 물론 그랬다고 답했으나, 그것은 부자가 된다든가 헤엄을 매우 빨리 칠 수 있다든가, 아니면 좀 더 잘생긴 입을 가지게 되기를 원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162


아주 오랜만에 다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그녀가 왜 말년에 "약혼자"를 갖게 되었는지, 왜 그녀가 새로운 시작을 시도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거기에서도, 삶이 점차 희미해져 가는 그곳 양로원에서도, 저녁은 쓸쓸한 휴식 같은 것이었다. 죽음에 인접해서야, 엄마는 해방감을 느끼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됐다고 느꼈음에 틀림없었다. 누구도, 그 누구도 그녀의 죽음에 울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마치 이 거대한 분노가 내게서 악을 쫓아내고, 희망을 비워 낸 것처럼, 처음으로 신호와 별들로 가득한 그 밤 앞에서, 나는 세계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스스로를 열었다. 이 세계가 나와 너무도 닮았다는 것을, 마침내 한 형제라는 것을 실감했기에, 나는 행복했고,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위하여, 내가 혼자임이 덜 느껴질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유일한 소원은 나의 사형 집행에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16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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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초인철학 - 강대석(전 대구효성여대 교수)

니체의 아버지는 개신교 목사였으며 니체의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도 다 같이 목사였다.  13


아폴로는 가상, 조형, 절제, 겸손, 이성 등을 상징하는 신이고 디오니소스는 정열, 도취, 오만, 불손, 반항 등을 상징하는 술의 신...

니체는 한 시대의 정신문화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주도할 때에 발전하고 아폴로적인 것이 주도할 때에 쇠퇴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니체의 모든 철학은 이 원리를 조명하는 데 집중되었다.  14


니체 철학이 지니는 일곱 가지 특징

1 반주지주의 - 주지주의란 삶의 가치를 지식에 두는 철학사조이다. 주지주의는 '지=덕=행복'.

니체에 의하면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 철학은 제자들을 망쳤을 뿐만 아니라 2000년에 걸쳐 내려오는 서구 허무주의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2 반도덕주의 - 니체는 도덕을 '군주도덕'과 '노예도덕'으로 구분한다. 군주는 고귀하고 힘센 인간 혹은 집단을 대표하는 자로서, 이러한 강자들은 항상 스스로와 합치되는 것을 '좋은 것'으로 보고 그들보다 약하고 못한 사람들의 도덕을 '나쁜 것'으로 보았다.

선이란 군주도덕에서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강인하고 고귀함을 나타내는 특성이다. 이에 반하여 허역, 비겁, 공포, 아부, 저속, 위선 등은 약한 자의 덕이다.  

약자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약자들은 군주도덕을 노예도덕으로 바꾸어 버렸다.

종래의 노예도덕을 다시 군주도덕으로 복귀시키려는 도덕혁명가였다. 


3 반기독교주의 - 모든 종교는 결국 허무주의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니체의 결론이다.


4 반염세주의

쇼펜하우어에서는 세계의 본질이 맹목적 의지이고 그러한 의지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비극이다. 삶은 결코 살 만한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본능적인 욕망을 억누르는 금욕을 통해 해탈의 길을 찾아야 한다.

니체는.. 삶의 비참함에서 도피하려는 쇼펜하우어의 허무주의가 소극적 허무주의라면 삶의 무가치성을 부정하고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스스로의 철학은 적극적인 허무주의이다. 니체는 철저하게 현세의 삶을 긍정하려 한다.


5 반여성주의 - 약자의 천한 도덕인 복수심에 불타 있는 여자들은 이기적이고 폭군적이며 교묘하고 잔꾀를 발휘하여 강한 남자를 유혹하므로 여성적인것이 우세할 때 인류는 점차 허무주의에 빠져 퇴폐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강인한 의지를 가진 남자들은 여성들을 무자비하게 다루어 부엌일이나 시키면서 남자에게 봉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니체의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6 반민주주의 - 니체는 보통사람을 '어중이떠중이'라 부르며 모멸했다. 인류는 강인한 지배자에 의하여 초인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니체는 '평등'이라는 말을 '동정'이라는 말과 함께 너무 싫어했다.

니체으 이상은 귀족주의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해야 한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은 많은 부분 니체 철학을 답습하고 있다.


7 반사회주의 - 시민민주주의가 정치적 평등을 목표로 했다면 사회주의는 여기에 경제적 평등까지 덧붙이려 한다.  15-22


니체는 이 작품을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이 자신을 덮쳤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며 ㄴ계시받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에게도 차라투스트라를 읽는 대신 체험하라고 권한다.  23


이 책이 제시하는 핵심사상은 무엇인가?

권력의지(힘에의의지), 초인(위버멘쉬), 영겁회귀라는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이상은 니체가 망치를 들고 종래의 가치를 모조리 파괴한 후에 내세우는 긍정적인 것들이다.  25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  39


나는 자기 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신을 징벌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는 자기 신의 분노 때문에 파멸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

나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모든 것이 자기 안에 들어올 정도로 영혼이 넘쳐나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렇게 하여 모든 사물은 그가 몰락하게 하는 것이다.  44


인간은 춤추는 별을 탄생시킬 수 있기 위해 자신의 내부에 혼돈(Chaos)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45


세 단계의 변화

잘 견디는 정신은 가장 무거운 것들을 모두 짊어진다. 짐을 지고 사막으로 서둘러 가는 낙타처럼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간다. 

그러나 가장 외로운 이 사막에서 두 번째의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정신은 사자가 되고, 사자는 자유를 획득하려 하며, 자신의 사막에서 주인이 되려 한다.

정신은 최후의 주인, 최후의 신에 대적하려 하며, 승리를 위해 거대한 용(독창적인 개인을 집어삼키려는 도덕을 상징한다)과 싸우려 한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이나 신으로 부르려 하지 않는 그 거대한 용이란 무엇인가? 거대한 용의 이름은 "너는 해야 한다"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겠다"라고 말한다.

"너는 해야만 한다"는 황금빛을 내면서 정신의 길을 막고 있다. 그것은 비늘 달린 하나의 짐승이며 그 비늘 하나하나에서 "너는 해야만 한다!" 가 황금빛으로 반짝거린다.

천년 묵은 가치가 그 비늘들 위에서 반짝거리고, 모든 용 중에서 가장 힘센 용이 이렇게 말한다. "만물의 모든 가치, 그것이 내 몸에서 빛난다."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고, 창조된 모든 가치는 바로 나다. 진실로 '나는 하겠다'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용은 그렇게 말한다.

나의 형제들이여, 무엇을 위해 정신 속에 사자가 필요하겠는가? 왜 체념과 경외심으로 가득 찬 짐 싣는 짐승으로 만족하지 않는 것인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것, 그것은 사자도 아직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를 창출해내는 것, 그것은 사자의 힘이 할 수 있다.

자유를 창조하고 의무 앞에서도 신성한 부정을 말하는 것, 그것을 위해 형제들이여, 사자가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가치에 대한 권리를 획득하는 것, 그것은 잘 견디고 경외심으로 가득 찬 정신에게 가장 두려운 획득이다. 

이 정신은 일찍이 '너는 해야 한다'를 자신의 가장 신성한 것으로서 사랑했다. 그러나 이제 이 정신은 가장 신성한 것 속에서도 환상과 자의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자기가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를 약탈한다. 그러한 약탈을 위하여 사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말해보라. 형제들이여, 사자도 할 수 없는 무엇을 어린아이가 할 수 있겠는가? 어째서 약탈하는 사자가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며 망각이다. 새로운 시작이며 유희이다.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고 하나의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의 유희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잃어버린 자는 자신의 세계를 얻는다.  58-59


잠을 잘 자기 위해 깨어 있어라. 그리고 실제로 삶이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내가 무의미를 택할 수밖에 없다면, 잠은 내가 선택할 만한 가장 가치 있는 무의미가 될 것이다.

이제야 분명히 알겠다. 일찍이 사람들이 덕의 스승을 구할 때 그들이 제일 먼저 구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은 좋은 잠과 그것을 위한 마취제와도 같은 덕을 구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찬양받는 강단의 현자들에게는 지혜란 꿈 없는 잠이었다. 그들은 삶의 더 깊은 의미를 알지 못했다.  63


육체와 대지를 경멸하고, 천상적인 것들과 구원의 핏방울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병들어 죽어가는 자들이었다...

허루를 만들어내고 신에 매달리는 자들 가운데는 항상 병든 사람들이 많았다.  66


형제들이여, 오히려 건강한 육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그것이 더 정직하고 더 순수한 목소리이다.  67


인간은 극복되어야만 할 그 무엇이다. 그 때문에 그대는 그대의 덕을 사랑해야만 한다. 그대는 그 덕으로 인하여 파멸하게 도리 것이기 때문이다.  72


쓰인 모든 것들 가운데에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곧 정신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타인의 피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한가한 독서가들을 증오한다.  76


산과 산 사이에서 가장 가까운 길은 봉우리에서 봉우리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그대는 긴 다리를 갖고 있어야 한다. 잠언은 산봉우리여야 한다. 그리고 잠언을 들으려면 키가 크고 몸집이 거대해야 한다. 희박하고 맑은 공기, 가까이 있는 위험, 즐거운 악의로 가득찬 정신, 이들은 서로 잘 어울린다...

지혜는 우리가 용기 있고 태연하고 조소하고 난폭하게 굴기를 원한다. 지혜는 여자로서 항상 투사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77


진실로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은 인생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광기가 들어 있다. 그러나 광기에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이성이 들어 있는 것이다...

내가 신을 믿게 된다면 춤출 줄 아는 신만을 믿으리라.

그리고 내가 나의 악마를 보았을 때 나는 그가 신중하고 철저하고 심오하고 엄숙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무거운 정신이었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낙하하고 만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웃음이다. 자, 무거운 정신을 죽이도록 하자!

나는 걷는 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나는 달렸다. 나는 나는 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나는 움직이기 위해 누군가에 의해서 밀쳐지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나는 가볍고, 이제 나는 날고 있다. 이제 나는 내 자신을 내려다 본다. 이제 어떤 신이 나를 통해 춤을 추고 있다.  78


차라투스트라는 젊은이가 앉아 있는 옆의 나무를 붙잡고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나무를 내 손으로 흔들려 해도 나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바람은 이 나무를 괴롭히고, 이 나무를 그것이 원하는 쪽으로 굽어지게 한다. 우리를 가장 심하게 구부러뜨리고 괴롭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

인간도 나무와 다를 것이 없다. 

높고 밝은 곳으로 올라가려 하면 할수록 뿌리는 더욱더 강하게 땅 속으로, 밑으로, 어둠 속으로, 심연 속으로, 악 속으로 뻗어가는 것이다."..

"많은 영혼은 우리가 먼저 창조하지 않는 한 결코 벗겨지지 않는 것이다."  79


정신의 자유를 얻은 자라고 할지라도 자신을 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내부에는 아직도 많은 감옥과 부패물들이 남아 있다. 그들의 눈이 한층 더 맑아져야만 한다...

그대를 악의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들도 그대가 고귀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고귀한 자는 모든 사람드에게 방해물이 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고귀한 자는 새로운 것을, 새로운 덕을 창조하려 한다.  81


국가란 모든 냉혹한 괴물 중에서 가장 냉혹한 괴물이다. 그것은 냉혹하게 거짓말도 한다. 다음 같은 거짓말이 그 입으로부터 새어나온다. "나 곧 국가가 민족이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민족을 창조하고 민족의 머리 위에 믿음과 사랑을 걸어놓은 것은 창조자들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삶에 봉사했다.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덫을 설치해 놓고 그것을 국가라 부른 것은 파괴자들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머리 위에 한 자루의 칼과 백 가지의 욕망을 걸어놓았다. ..

국가는 선과 악에 대한 모든 언어를 동원하여 거짓말을 한다. 국가각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며,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훔친 것이다. 

국각의 모든 것이 가짜이다. 물어뜯기를 잘하는 국가는 훔쳐낸 이빨로 물어뜯는다. 국가의 내장까지도 가짜이다. ..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자들이 태어났다. 이 잉여인간들을 위해 국가가 만들어진 것이다. 

보라, 국가가 어떻게 그들을, 어중이 떠중이들을 유인하는가를! 국가가 어떻게 그들을 삼키고, 씹고 또 씹는가를!

"지상에서 나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나는 모든 것을 정리하는 신의 손가락이다"-이 괴물은 이렇게 외친다. 그러면 긴 귀를 가진 자나 눈이 어두운 자만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이 아니다!

아, 그대 위대한 영혼들이여, 그대들의 귀에도 국가는 음침한 거짓말을 속삭인다! 아, 국가는 자신을 아끼지 않는 풍요로운 마음들을 쉽게 알아낸다!

그렇다. 그대 낡은 신을 이겨낸 자들이여, 국가는 그대들의 마음까지도 알아낸다! 그대들은 전쟁에 지쳤고 지친 나머지 이제 새로운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이 새로운 우상은 영웅과 영예로운 자들을 주위에 거느리고 싶어한다! 이 냉혹한 괴물은 양심의 햇빛을 쬐고 싶은 것이다!

그대들이 이 새로운 우상인 국가를 숭배하기만 한다면 국가는 그대들에게 모든 것을 주려 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국가는 그대들의 빛나는 덕과 자랑스러운 눈빛을 매수하는 것이다.

국가는 그대들을 이용하려 어중이떠중이들을 유혹하려 한다! 그렇다. 여기서 지옥의 요술이 고안되었으니 그것은 신성한 명예로 장식되어 방울소리를 내는 죽음의 말(馬 말마)과 같다!

그렇다, 여기서 삶으로 찬미되는 만인을 위한 죽음이 고안되었으니. 그것은 진실로 모든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봉사인 것이다!

선한 자나 악한 자 모두가 독을 마시게 되는 곳을 나는 국가라 부른다. 선한 자나 악한 자 모두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곳을 나는 국가라 부른다. 모든 사람의 만성적인 자살이 '삶'이라고 불리는 곳을 나는 국가라 부른다!

보라, 이 잉여인간들을~ 그들은 발명가들의 작품과 현자들의 보물을 훔쳐낸다. 그들은 자기들의 도둑질을 교양이라 부른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병이 되고 재앙이 된다!

보라, 이 잉여인간들을! 그들은 항상 병들어 있고, 자기들의 담즙을 토해내며, 그것을 신문이라 부른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삼켜버리지만 소화하지 못한다.

보라, 이 잉여인간들을! 그들은 부를 손에 넣지만 그로 인해 더욱더 가난해진다. 그들은 권력을 원하며, 무엇보다도 권력의 지렛대인 많은 돈을 원한다. 이 무능한 자들은!

보라, 기어 올라가는 이 약삭빠른 원숭이들을!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기어오르며 싸우다 진흙과 심연 속으로 떨어져버린다.

그들 모두가 왕좌에 오르려 한다. 마치 행복이 왕좌 위에 앉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은 그들의 광기이다. 그러나 대부분 왕좌 위에는 진흙이 있고 또한 와좌는 진흙 위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미치광이들이며, 기어오르는 원숭이들이며, 열병환자들이다. 그들의 우상인 저 냉혹한 괴물은 악취를 풍기며 우상숭배자들 또한 모두 악취를 풍긴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저들의 입과 욕망이 풍기는 악취 속에서 질식 하기를 원하는가? 차라리 창문을 깨고 바깥 공기 속으로 뒤어나가라!

악취를 피하라! 잉여인간들의 우상숭배를 멀리하라!

악취를 피하라! 사람을 제물로 만드는 독기를 벗어나라!

위대한 영혼들을 위해 아직도 대지는 열려 있다. 홀로 있는 자들과 둘이서 있는 자들을 위해 아직도 많은 빈자리가 남아 있고, 그 주위로 고요한 바다 냄새가 불어온다.

위대한 영혼들을 위해 아직도 자유로운 삶이 열려 있다. 진실로 적게 소유한 자는 그만큼 소유하는 것도 적다. 적당한 가난이여, 찬미받을지어다!

국가가 끝나는 곳, 그곳에서 비로소 잉여인간들이 아닌 인간이 시작된다. 그곳에서 비로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의 노래가, 독특하고 대치 될 수 없는 가락이 시작된다.

국가가 끝나는 곳, 형제들이여, 그곳을 보라! 그대들에게는 보이지 않는가, 무지개와 초인(위버멘쉬)으로 나아가는 다리가?  88-91


고독이 끝나는 곳, 그곳에서 시장이 시작된다. 그리고 시장이 시작되는 곳에서 위대한 배우들의 소으모가 독파리들의 윙윙거림이 시작된다.  91


만일 그대가 친구를 갖고자 한다면 그대 또한 그 친구를 위해 싸울 각오를 해야 한다. 싸우기 위해서는 적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친구 속에 들어 있는 적까지도 존경해야 한다. 그대는 몸을 던지지 않고서도 그대의 친구에게 접근할 수 있는가?  98


그대는 그대의 친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그가 잠들어 있는 것을 살펴본 적이 있는가? 친구의 얼굴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면이 고르지 못한 불완전한 거울에 비친 그대 자신의 모습이다.

그대는 그대의 친구가 잠들어 있는 것을 살펴본 적이 있는가? 친구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어 놀라지 않았는가? 오, 친구여.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친구는 추측과 침묵의 대가여야 한다. 그대는 모든 것을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대는 그대의 친구가 깨어 있을 때 하는 일을 그대의 꿈을 통해 알아내야 한다. 

그대의 동정은 추측이어야 한다. 그대의 친구가 동정을 원하는지 아닌지를 우선 알아보기 위해서. 어쩌면 그가 사랑하는 것을 그대의 맑은 눈과 영원한 눈초리일지도 모른다.

친구에 대한 동정은 단단한 껍질 속에 숨겨져 있어야 한다. 그것을 깨뜨리려다 이빨 한 대쯤 부러져야 한다. 그렇게 하면 동정은 비로소 달콤한 맛이 날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친구에 대하여 맑은 공기이며 고독이며 빵이며 약인가? 자기 자신의 쇠사슬은 풀지 못하면서 친구에게는 구제자인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대는 노예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대는 폭군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친구를 가질 ㅅ 없다.

여자 내부에는 너무나 오랫동안 노예와 폭군이 숨어 있었다. 그 때문에 여자는 우정을 맺을 수 없는 것이다. 여자는 사랑만 알고 있을 뿐이다.

여자의 사랑 속에는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한 불의와 무분별이 들어 있다. 심지어 여자의 지적인 사랑 속에도 빛과 함께 갑작스러운 공격과 번개와 밤이 들어 있다. 아직도 여자는 우정을 맺을 능력이 없다. 여자들은 여전히 고양이요, 새이다. 아니면 고작해야 암소이다.

아직도 여자는 우정을 맺을 능력이 없다. 그러나 말해보라, 그대 남자들이여, 그대들 가운데 누가 우정을 맺을 능력을 갖고 있는가?

오, 그대 남자들이여. 그대들의 영혼은 얼마나 가난하고 초라한가! 그대들이 그대들의 친구에게 주는 것만큼 나는 나의 적에게까지도 주려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때문에 내가 더 가난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동료의식이라는 게 있다. 그러나 우정이 있기를!  99-100


차라투스트라는 지상에서 선과 악보다 더 강한 임을 발견하지 못했다. 

평가하지 않는 민족은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민족이 스스로 보존하려면, 이웃 민족이 평가하는 것과 똑같이 평가해서는 안 된다. 

어떤 민족에게는 선으로 간주되는 많은 것들이 다른 민족에게는 조소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어떤 곳에서는 악이라고 불리는 많은 것들이 다른 곳에서는 화려한 영예로 장식되어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100


사랑하는 자는 경멸하기 때문에 창조하려 한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경멸한 적이 없는 자가 사랑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형제여. 사랑과 함께, 창조와 함께 그대의 고독으로 가라. 그러면 정의가 절름거리며 그대의 뒤를 따라갈 것이다.

형제여, 눈물과 함께 그대의 고독으로 가라.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기를 원하며 그리하여 멸망해가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  109


여자에게는 남자가 하나의 수단이며, 그 목적은 언제나 아기이다. 그런데 남자에게는 여자가 무엇인가?

진정한 남자는 두 가지를 원한다. 위험과 유희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남자는 가장 위험한 장난감으로서 여자를 원한다.

남자는 전쟁을 위해 훈련을 받아야 하며, 여자는 전사의 휴식을 위해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어리석은 짓이다.

전사는 지나치게 달콤한 과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사는 여자를 좋아한다. 아무리 달콤한 여자라 할지라도 씁쓸하기 때문이다.  110


그대는 자식을 원해도 될 사람인가?  ..

무엇보다도 먼저 그대는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바로 세워야 한다.  115


어떤 남자는 진리를 찾으려 영웅처럼 떠났으나, 결국 치장된 보잘것 없는 거짓을 손에 넣었다. 그는 그것을 자기의 결혼이라고 부른다.  116


언젠가 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을 넘어 사랑해야 한다! 그러므로 먼저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그러기 위해 그대들은 사랑의 쓴 잔을 마셔야 했다.  117


진실로 나누어 주는 사랑은 이처럼 모든 가치의 강탈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탐욕이 있다. 그것은 너무나 가난한 탐욕, 굶주려 있기 때문에 항상 훔치려 하는 탐욕, 병든 자들의 탐욕, 병든 탐욕이다. 

이 탐욕은 모든 빛나는 것들을 도둑의 눈으로 바라본다. 이 탐욕은 먹을 것을 풍부하게 갖고 있는 자를 굶주림의 탐욕으로 헤아리고, 나누어주는 자들의 식탁 주위를 항상 어슬렁거린다.

이러한 탐욕은 질병과 눈에 보이지 않는 퇴화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 도둑 같은 탐욕은 육체가 병들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23


나는 그대드에게 나를 버리고 자신을 찾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대들이 모두 나를 부인했을 때, 비로소 나는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127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꿰뚫어보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완전히 이해된 것은 아니다.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침묵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141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는 덕을 갖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리고 적어도 자기는 '선'과 '악'에 정통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 모든 거짓말쟁이와 바보들에게 "도대체 그대들이 덕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대들의 덕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대들로 하여금 바보와 거짓말쟁이들에게서 배운 낡은 말에 싫증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온 것이다.  149


그대들은 미지근한 자들이다. 그러나 모든 깊은 인식은 차갑게 흐르는 것이다. 정신의 가장 깊은 샘물은 얼음처럼 차다. 그것은 뜨거운 손과 열정의 행동가에게 청량제이다.  161


영원히 변치 않는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176


선과 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하는 자는 진실로 먼저 파괴자가 되어야하며 가치를 깨뜨려야 한다.  177


한 가지만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으며 그 밖의 것들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는 인간들 - 하나의 커다란 눈, 하나의 커다란 입, 하나의 커다란 배 혹은 하나의 커다란 그 무엇에 불과한 인간들 - 나는 그들을 거꾸로 된 불구자라고 부른다.  206


순종을 가르치는 이 교사들! ..

나는 무신론자인 차라투스트라이다. 무신론자인 나는 묻는다. "나보다 더 신을 믿지 않는 자는 누구인가? 그의 가르침을 기꺼이 받겠다."

나는 무신론자인 차라투스트라이다. 나는 나와 동등한 자를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자신에게 자신의 의지를 부여하며 모든 순종을 거부하는 자들은 모두 나와 동등하다. 

나는 무신론자인 차라투스트라이다. 나는 어떤 우연도 모두 나의 솥에 넣어서 삶는다. 그리하여 우연이 그 속에서 잘 삶아졌을 때, 비로소 나는 그것을 나의 음식으로서 환영한다.

실로 많은 우연이 나에게 주인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나의 의지는 우연에게 더 높은 주인처럼 말했다. 그러자 우연은 애원하며 무릎을 꿇고 말했다. 

내게서 머물 곳을 찾고 사랑을 얻고자 애원하면서 "보라, 오 차라투스트라여. 친구만이 친구에게 찾아오는 것을!" 하고 아부하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그러나 아무도 내 말을 알아들을 귀를 갖고 있지 않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불어오는 바람에게 이렇게 외치련다.

그대 소인들이여! 그대들은 점점 더 왜소해질 것이다. 그대들은 부서져 사라질 것이다. 그대 안일한 자들이여! 그대들은 곧 멸망할 것이다.

- 그대들의 왜소한 덕으로 인해, 그대들의 온갖 체념으로 인해, 그대들의 온갖 바보 같은 복종으로 인해!

너무나 관대하고 너무나 연약하다. 이것이 그대들의 대지 모습이다! 그러나 한 그루의 나무가 크게 자라기 위해 그 나무는 단단한 바위 속에 강한 뿌리를 내려야 한다!

하찮은 것이라 하여 그대들이 제쳐놓은 것까지도 인류의 미래라는 옷감으로 짜이며, 그대들의 허루(Nichts)까지도 하나의 거미줄이고, 미래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한 마리의 거미인 것이다.

그대들 왜소한 덕을 가진 자들이여, 그대들이 무엇인가 받을 때, 마치 훔치는 것과 흡사한 모습이다. 그러나 악한 사이에서조차도 명예심이라는 것이 있어 이렇게 말한다. "강탈할 수 없을 경우에만 훔쳐내야 한다."

"기다리면 주어진다." - 이것 또한 순종이 가르치는 것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대 안일한 자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말한다. 빼앗는 일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더욱더 많은 것을 빼앗길 것이다!

아, 그대들이 어중간한 의욕을 다 버리고, 행동할 때나 나태할 때나 항상 단호해지기를!

아, 그대들이 다음과 같은 나의 말을 이해하기를! "항상 그대들이 의욕하는 것을 행하라. 그러나 먼저 의욕할 수 있는 자가 되어라!"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항상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나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라.

큰 사랑으로써 사랑하고 큰 경멸로써 사랑하라!" 신을 믿지 않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248-249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창조자 이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창조자란 인간의 목표를 창조하고 대지에 그 의미와 그 미래를 부여하는 자이다. 이 사람이 비로소 선과 악이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것이다.  282


자기 자신에게 명령하지 못하는 자는 복종해야 한다.  285


고귀한 영혼을 지닌 자들은 무엇이든 공짜로 소유하기를 원치 않는다. 특히 삶을.

천민의 근성을 가진 자는 공짜로 살고자 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삶을 선물로 부여받은 우리는 그에 대해 가장 잘 보답하기 위해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를 항상 생각한다.

"삶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을 우리는 삶을 위해 지켜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다.

우리는 즐거움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곳에서 즐기려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 즐기려 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즐거움과 순결은 가장 부끄러움을 잘 타는 것들이다. 이 둘은 추구의대상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소유해야 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죄아 고통이어야 한다.  286


진실해지는 것,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는 드물다! 그리고 진실할 수 있는 자들도 아직 그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선한 자들이 가장 진실해 질 수 없는 자들이다. 

오, 이 선한 자들! 선한 자들은 결코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한 선은 정신에 대해 일종의 병인 것이다.

이러한 선한 자들은 양보하고 복종한다. 그들의 가슴은 흉내 내고, 그들은 마음으로 부터 복종한다. 그러나 복종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법이다!

하나의 진리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선한 자들이 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함께 모여야 한다. 오, 형제들이여. 그대들 또한 이러한 진리에 어울릴 정도로 악한가?

대담한 시도, 오랜 불신, 잔혹한 부정, 혐오, 살아 있는 것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 - 이러한 것들이 함께 모이기란 얼마나 드문 일인가! 그러나 진리는 그러한 씨앗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이제까지 모든 인싱은 양심의 가책과 더불어 성장해왔다! 부숴버려랴, 그대 인식하는 자들이여. 부숴버려라. 낡은 가치표를!  287


선과 악이라고 불리는 낡은 망상이 있다. 지금까지 이 망상의 수레바퀴는 예언자들과 점서악들 주위를 돌았다.

일찍이 사람들은 예언자들과 점성가들을 믿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모든 것은 운명이다. 그대는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해야 한다!"라고 믿었다...

별들과 미래에 관해서는 이제까지 인식이 아니라 망상만 존재해왔다! 그러므로 선악에 관해서도 이제까지 인식이 아니라 망상만 존재해왔다!  288-289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일찍이 사람들은 이런 말들을 신성하게 생각해왔다. 사람들은 이러한 말들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고, 신발을 벗었다. ..

부숴버려라 부숴버려라, 낡은 가치표를!  289


나는 그대들을 새로운 귀족으로 임명하고 그 길을 제시한다. 그대들은 미래를 잉태하는 자, 미래를 가꾸는 자, 미래의 씨를 뿌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대들이 어디서 왔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가고 있느냐가 앞으로 그대들의 명예가 되게 하라!  290-291


오, 형제들이여. 잘 먹고 잘 마시는 것, 그것은 실로 헛된 일이 아니다! 부숴버려라 부숴버려라, 결코 즐거워할 줄 모르는 자들의 가치표를!  292


가장 훌륭한 자에서도 구역질 나는 그 무엇이 있다. 그리하여 가장 훌륭한 자들까지도 극복되어야 할 존재인 것이다!  293


부숴버려라, 형제들이여. 이 새로운 가치표를 부숴버려라!.. 예속을 권장하는 설교이기 때문이다!  294


그대들은 오직 창조하기 위해 배워야 한다!  295


그대들의 결혼이 나쁜 결합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대들은 너무 빨리 결합한다. 그 때문에 결혼의 파탄이 뒤따르는 것이다...

"나는 결혼을 파괴했어요. 그러나 그보다 먼저 결혼이 나를 파괴했어요!"

잘못 결합된 부부는 최악의 복수심으로 가득 찬 자가 된다는 것을 나는 항상 보아왔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 사랑하도록 노력하자! 아니면 우리의 언약은 실수가 아니었을까?" ..

"..항상 둘이 함께 지낸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니!"  301


"선이란 무엇이며 의로움이란 무엇인지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 아직도 그것을 찾고 있는 자들에게 화 있으라!"라고 말하며 마음속으로 그렇게 느끼고 있는 자들에게!

악인들이 어떠한 해악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선한 자들이 저지르는 해악이야말로 가장 해로운 것이다!  302-303


선한 자들은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다. 그들은 항상 종말의 시작인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가치표에 새로운 가치들을 써넣는 자를 십자가에 못박고, 자기 자신들을 위해 미래를 희생한다. 그들은 전 인류의 미래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303


모든 것이 선한 자들에 의해 뒤틀리고 철저하게 왜곡되어왔다.  304






서문 - 레지널드 홀리데일


니체는 '진리'라는 게 발견될 수 있기나 헌 것인지, 또는 오류는 인류에게 부득이한 것은 아닌지 하는 문제를 더 당당하게 직시하고 더 절박하게 논의한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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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느가 하는 문제느 ㄴ매우 거리가 멀다. 그렇기에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만 논하고, 실제 인간이 사는 양상을 직시하지 않는 자는 현재 가진 것을 보전하는 것은 고사하고, 모든 것을 상실하여 파멸로 향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무슨 일이든지 선(善 착할선)을 행하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 자는 나쁜 인간들 속에서도 파멸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몸을 보전하고자 하는 군주(지도자)는 나쁜 자가 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더욱이 그것을 필요에 따라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기술도 터득해야 한다. - 군주론  27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신의에 어긋나는 행위도 해야 하는 경우가 있고, 자비심을 버려야 할 때도 있다. 인간성을 한쪽에 밀쳐놓고, 깊은 신앙심도 부득이 잊어야 하는 경우가 많은 법이다.

그러므로 군주에게는 운명의 풍향과 사태의 변화에 따라 그에 적합한 대응 방법이 요구되는 것이다. - 군주론  34


구대 로마인은 분쟁에 대처할 때 현명한 군주라면 누구나 해야 할 행동을 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눈앞의 분쟁 해결에만 도움이 되는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장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대책도 잊지 않았던 것이다. 로마인은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 그것이 아직도 싹에 지나지 않을 때 따버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장래에 일어날 수 있는 분쟁도 싹일 때 잘라버리면 대책이 용이해진다. 치료도 효력을 보려면 '늦기 전에'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군주론  43


새 질서를 확립하려는 자가 자기 힘으로 하려는가, 아니면 남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는가로 나뉠 수밖에 없다

남의 도움을 기대하는 경우는 실행 과정에서 반드시 장해가 생겨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된다.

반대로 자기 힘으로 하려는 자는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타고 넘어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무장한 예언자는 승리할 수 있고, 준비 없는 자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군주론  45


교묘한 사용법이라는 것은 자기의 처지를 지키기 위해 한 번은 사용하되 그후에는 그것을 깨끗이 그만두고,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돌리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서툰 사용법이란 처음에는 잔혹함을 조금씩 드러내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만두기는 커녕 차츰 더 잔혹의 정도를 불려나가는 방법이다. 

전자는 성공하고, 후자는 파멸을 피할 수 없다. - 군주론  50


군주는 '짜다'는 평판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악덕'은 자기 금고를 바닥내는 일이없고, 그렇다고 약탈자가 되지도 않으며, 또한 통치를 계속해나가는 데 필요한 '악덕'이기 때문이다. - 군주론  56


그러나 만일 누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카이사르가 대범했기 때문에 제국을 획득할 수 있지 않았느냐고. 또 그뿐 아니라 대범함으로써 성공한 사람이 많지 않느냐고.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이미 획득한 자인가, 아니면 획득하고 있는 자인가에 따라 차이가 생기는 것이라고,

이에 획득한 자의 경우, 대범하면 해를 부른다. 

그러나 획득하고 있는 중이라면 대범하다고 생각하게 할 필요가 있다. 카이사르의 경우는 제국을 획득하고 있었던 중에 속한다. 그러나 그도 그후에 계속 살아 있었고, 획득한 후에도 그전과 다름없이 계속 대범했다면 제국을 파괴했을 것이 틀림없다. - 군주론  57


잔혹하더라도 서툴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 군주론  58


증오는 국민의 소유물에 손을 댔을 때 생기는 것이므로, 그것을 하지 않으면 피하기는 쉽다. 동서고금에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 물건과 명예만 빼앗기지 않으면 의외로 불만 없이 살아가는 법이다. 

경멸은 군주가 변덕스럽고 경박하며 여성적이고 소심하며 결단력이 없을 때 국민의 마음속에 싹튼다...

군주 된 자는 자기가 하는 일이 위대하고 용감하며, 진지하고 확고한 의지에 입각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군주론  62


군주는, 새로 군주가 된 자는 특히 그 지위를 획득할 때 적으로 보이던 자가 원래 자기 편이었던 자보다 유용할 때가 많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적으로 간주되던 자들은 그런 평판을 지우고 싶은 생각으로 군주를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원래 한 편으로 여겨지던 자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유용한 점으로 말한다면, 왕왕 전부터 한 편이었던 자보다 지난날 적이었던 자가 더 유익한 경우가 적지 않다. - 군주론  64


인간의 두뇌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외워두면 좋다. 

첫째 두뇌는 자기 힘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

둘째 두뇌는 남이 이해한 것을 감별할 수 있는 것.

셋째 것은 자기 힘으로 이해도 못하고, 남이 이해한 것을 감별도 못하는 것.

첫째 두뇌가 가장 좋고, 둘째 것이 그 뒤에 오며, 제3의 것은 '뇌'를 무능의 '능(能 능할능)'자로 바꾸어놓아도 무방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첫재 두뇌의 수가 제일 적은 것이 현실이므로, 측근을 잘 고르느냐의 여부는 사람 위에 서는 자로서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 군주론  71-72


군주된 자는 언제나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바랄 때여야 하고, 조언자가 바랄 때에 해서는 안 된다. ..

동시에 군주는 도량이 큰 질문자여야 하며, 남의 의견에 참을성 있게 귀를 기울여주는 인물이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조언자들이 마음속에 있는 의견을 다 털어놓지 않으면, 불쾌한 태도를 보일 필요도 있다...

총명한 군주이기에 조언자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 군주론  75


군주된 자가 위대한 일을 하고 싶으면, 사람을 농락하는 수법, 곧 권모술수를 배울 필요가 있다. 그런 수법을 습득해야 할 필요성은 군주국뿐만 아니라 공화국의 경우에 더욱 커진다. - 정략론  84


고대 로마의 공화제에서는 다른 공화국에 비해 자국의 공로자에 대해 보답하는 것을 잊지 않는 평이었지만, 군의 지휘관이 실책을 했을 경우에도 특히 온정어린 처우를 해주었다.

지휘관이 저지른 죄가 고의에 의한 거이라도 인간적으로 다루어서 처벌했고 무지에 의한 것일 때도 처벌은 고사하고 상까지 주었다.

로마인들은 이 같은 방법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일군의 지휘관쯤 되면 임무에 전념하 수 있는 정신 상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어렵기 이를 데 없는 군 지휘의 사업을 맡은 자가 그 밖의 잡다한 걱정으로 마음이 편치 않아서야 아무리 유능한 지휘관이라도 빛나는 전과를 올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앋. - 정략론  92


지도자 없는 군중은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나 다름없다. - 정략론  96


사려 깊은 무장은 부하 장병들을 부득불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몰아넣는다. 

동시에 적에 대해서는 부득불 싸워야 하는 상태에 될 수 있는 대로 몰아넣지 않는 계책을 강구한다.

옛 장군들은 인간의 의욕이라는 것이 필요에 쫓겨야 비로소 충분히 발휘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폐쇄할 수 있는 통로도 적을 위해 일부러 열어놓기도 하고, 아군의 퇴로가 될 만한 길을 폐쇄시키곤 했다. - 정략론  102


뛰어난 지휘관이라면 다음과 같은 것을 실행해야 한다. 

첫째, 적이 상상도 못할 새로운 작전을 생각해낼 것.

둘째, 적장이 생각해낼 법한 작전을 간파하고, 그것이 무위로 끝나도록 대비할 것. - 정략론  103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은 자는 그것이 큰 사업일수록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와 자기가 그 속에서 일해야하는 상황을 숙지하여 스스로를 그것에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시대와 상황에 합치시키기를 게을리하거나 타고난 성격 탓으로 아무리 해도 그런 일에 서툰 사람은 평생을 불행 속에 보내야 하며 완수하고자 한 일도 이룩하지 못하고 끝나게 마련이다.

이와는 반대로, 상황을 철저히 알고 시대의 흐름을 탈 수 있는 사람은 바라는 일도 달성할 수 있다. - 정략론  109


시대의 흐름을 깨닫고 그에 맞게 탈피할 능력을 가진 인물이 극히 드문 것도 사실이다. 그 까닭은 다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사람은 타고난 성격에 어긋나는 일을 좀처럼하지 못한다는 것. 

둘째는, 그때까지의 방법으로 내내 잘해온 사람에게 지금부터는 그것과 다른 방법이 적합하다고 납득시킨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

그리하여 시대는 자꾸만 변하는데, 인간의 방식은 여전하다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 정략론  112


군주는 민중이 무슨 과오를 범하더라도 불평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민중이 저지른 과오는 통치자 쪽의 태만에서 나온 것이거나 아니면 통치자가 저지른 것을 그들이 답습한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리비우스는 말하고 있다.

"대중은 언제나 정치하는 자를 모방한다."

로렌초 데 메디치도 같은 의견이었던 모양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군주가 하는 일을 대중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시선은 언제나 통치자를 향하기 때문이다." - 정략론  122


종교나 국가를 오래 유지하고 싶으면, 몇 번이고 본래 모습으로 복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개혁이 요구되는 것인데, 자연스럽게 제도가 개혁되면 가장 이상적이다.

또한 어떤 계기로 개혁의 필요에 눈을 떠서 그것에 손을 대는 경우도 그것은 오래 간다. 다시 말해 분명한 것은 아무런 손도 쓰지 않고 방치해두는 나라는 단명으로 끝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개혁의 필요성은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인데,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익한 까닭은 어떤 형태든 공동체인 이상 초창기에는 반드시 무언가 우수한 점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장점이 있었기에 오늘의 융성을 이룰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세월은 당초에 있었던 장점도 마멸시켜버리게 마련이다. 마멸되는 대로 방치해두면 마지막에는 죽음에 이른다. - 정략론  135


고대에는 어째서 질서가 유지되었고, 현대 (16세기)에는 어째서 무질서가 지배하는가.

그 이유를 해명하라면 이 또한 간단하다. 모든 것은, 옛날에는 자유인이었던 것이 지금은 노예생활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자유로이 살 수 있는 나라에서는 사회 전체가 번영을 누린다는 것이 역사가 보여주는 진실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결혼을 피하는 경향도 없었고, 재산이 감소될 우려 없이 자손을 늘릴 수 있어서 인구가 불어났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고, 재능만 있으면 지도자계급에 속할 수도 있다고 믿었기에 자식이 태어나는 것을 기뻐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식들의 양육에도 힘을 쏟을 수 있었다. 이런 나라에서는 모든 분야에서 부(富 부자주)의 증대가 계속된다. 사람들이 부를 늘리면 늘릴수록 그것을 향유하는 기쁨도 늘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자유경쟁의 원리가 지배한다. 사적인 이익과 공적인 이익이 모두 지극히 자연스러운 형태로 추구된다. 결과는 양쪽의 번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 정략론  139


중상이 활개를 치는 것은 고발이라는 형식이 별로 사용되지 않는 경우이거나, 아니면 그 공동체 안에 고발을 받아들일 체제가 마련되지 않은 경우이다.

그러므로 시민에게 아무 두려움 없이 고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체제를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 동시에 중상하는 자는 엄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 정략론  143-144


민중은 선정(善政 착할선 정사정)만 베풀어주면 특별히 자유 같은 것을 바라거나 구하지도 않는다. - 정략론  145


로마의 예가 말해주듯 청빈이 부유보다 훨씬 더 공동체의 이익이 되는 것의 예를 들자면 한이 없을 정도이다. 청빈을 존중하는 기풍이 국가와 도시와 모든 인간 공동체에 영예를 준 데 반해, 부를 추구한 폭주는 그것들의 쇠퇴를 도왔을 뿐이다. - 정략론  150


시민 사이에 평등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는 공화재가 성립될 수 없고, 평등이 존재하는 나라에서는 군주제가 성립될 수 없다. - 피렌체공화국의 앞날에 대한 메디치가의 질문에 대하여  152


욕망이 이름을 만드는 것이지, 이름이 욕망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 정략론  154


자유로운 투표로 주어진 권력이라도 공화제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 보장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권력의 적용 범위를 명확히 하고 그것을 항상 관리할 수 있는 제도를 정비해둘 것.

둘째, 권력은 반드시 일정 기간에 한해서 주어질 것. - 정략론  158-159


민중의 찬동을 얻는 데는 어떤 방법이 쉽고 어떤 방법이 어려운지 여기서 생각해보고 싶다. 쉬운 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이다. 

곧 그들에게 이렇게 하면 '덕'을 보고, 저렇게 하면 손해를 본다고 구체적으로 설득하느 것이다.

또는 이렇게 하면 용감해보이지만, 다른 방법으로는 겁쟁이이고 비열해 보일 것이라고 일러주는 것이다.

설령 배후에 어떤 곤란이 기다리고 있건, 또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건 간에 표면상으로 훌륭해 보이는 일이면 민중을 설득하기란 어렵지 않다. 

반대로 아무리 유익한 정책이라도 표면상 손해를 볼것 같다든지 겉보기에 신통하지 않을 때는 민중의 찬동을 얻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 정략론  167


민중은 무리를 지으면 대담한 행동으로 나오고 개인일 때는 겁쟁이가 된다. - 정략론  169


민중만큼 경박하고 일관성이 없는 존재도 드물다는 것은 리비우스의 평가인데, 다른 많은 역사가들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정말이지 역사상 그들의 행동을 보면, 민중은 누군가를 사형시켜놓고는 바로 후회하며 눈물을 흘리는 경우와 줄곧 만나게 된다.

이에 대해 리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가 죽고 그가 가져다 준 위협이 사라지자마자 민중은 회한에 잠겨 눈물을 흘리며 그를 그리워했다."

또 히에론의 조카 히에로니무스가 죽은 뒤 시라쿠사에서 일어난 사건에 언급하여 다음과 같이 쓰기도 했다.

"비굴한 노예가 아니면 오만한 주인, 이것이 민중의 본질이다." - 정략론  172


약체 국가는 언젠 우유부단하다. 그리고 결단을 꾸물거리면, 이 또한 언제나 해롭다. 이에 대해서는 내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결단력 없는 살마들이 아무리 진지하게 협의해봐야 거기서 나오는 결론은 언제나 모호하므로, 그 결론은 언제나 별로 소용이 없다. 

그리고 우유부단 못지않게 장시간의 토의 끝에 나오는 너무 늦은 결론 역시 해롭기는 마찬가지이다. - 정략론  179


약체의 공화국에 나타나는 가장 나쁜 경향은 무슨 일에나 우유부단하다는 것이다...

우유부단한 공화국은 밖에서 압력이라도 받지 않는 한 좋은 방책을 수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라가 약하다는 데에 조금이라도 불안을 느끼면 그것을 결행할 기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 정략론  180


어려운 시대에는 참된 역량을 갖춘 인물이 활약하지만, 태평스런 세상에서는 풍족한 재물을 가진 자나 문벌의 뒷받침을 받는 자가 제세상을 누리게 된다. 출중한 큰 인물은 국가가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시대에는 냉대를 받기 일쑤이다. 왜냐하면 그의 역량이면 당연히 주어져야 할 지위와 명성을 사람들의 시기심이 빼앗아버리기 때문이다. - 정략론  186


출중한 인물은 운이 좋거나 나쁘거나 항상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운명이 변전해도 그들은 의연한 정신을 지속하므로 남의 눈에는 운명도 그들에게는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

교육이 올바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에는 운에 끌려다니기 쉬운 성격이 된다. 반대로 그것이 올바로 이루어져 있으면 역경에도 동하지 않는 인간이 된다.

왜냐하면 교육은 인간 사회를 알도록 가르쳐주는 것이므로, 그 변전이 얼마나 심한가를 이해할 수 있게되고, 교육 여하에 관계없이 동하지 않는 성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정략론  206-207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준비에 전념할 필요가 있다.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준비를 시작해서는 이미 늦다. 행운이 미소짓기 전에 준비를 갖추어놓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만 게을리하지 않고 해두면, 좋은 기회가 찾아오자마자 즉각 움켜잡을 수 있다. 좋은 기회는 당장 붙잡지 않으면 달아나게 마련이다. - 전략론  209


인간이란 어려움이 조금이라도 예상되는 사업에는 언제나 반대한다. - 군주론  243


어떤 인물을 평가할 때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은 그가 어떤 사람들과 사귀고 있는지 보는 것이다. 

친하게 사귀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되기 때문이다. - 정략론  252


정말로 서글픈 현실이지만, 인간은 권력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이 서툴기만 하여 그것으로 점점 더 남이 참기 어려운 존재가 된다. - 피렌체사  256


중간 정도의 승리로 만족하는 자는 언제나 승자로 있게 될 것이다. 

반대로 압승하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 자는 흔히 함정에 빠지게 된다. - 피렌체사  257


누구나 되도록이면 쉽게 일을 처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같은 일이라도 쉽게 실현할 수 있는 사람과 무척 고생을 하지 않으면 실현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도 사실이다.

그 원인은 미리 되어 있는 준비를, 찾아온 기회에 투입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판별하는 판단력에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나 전력투구를 한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이때 판단력의 좋고 나쁨이 그 사람의 인생이 순조롭게 나아가는냐, 아니면 매우 고생에 찬 것이 되느냐의 갈림길이 된다고 생각한다. - 전략론  260


군 지휘관으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상상력이라고 대답하겠다. 

하기야 이 자질의 중요성은 군 지휘관에만 한한 것이 아니다. 어떤 직업이나 상상력 없이 그 길에서 대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전략론  261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에서 말한, "무엇을 한 후에 후회하는 편이,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한마디 말일세. - 편지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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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사진미학>은 사진 저편의 숨은 이야기를 말하는 책이다.  4


찍는 것과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 찍기는 쉬지만 표현하기는 어렵다.  5




한 장의 사진을 보다


전면을 통해서 초상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초상사진의 전면성(前面性 앞전 낱면 성품성). 이것을 우리는 파사드(facade)라고 부른다.

파사드는 건축에서 쓰이는 말로 건축의 중심, 퍼스펙티브의 중심을 의미한다.  13


사진에서 파사드라는 말은 전면을 통해서 대상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특별한 초상사진일 경우에만 쓴다... 

정면은 물리적인 방향을, 전면은 심리적인 형상을 의미한다. 또 정면이 모델과 카메라 앵그로가의 관계라면, 전면은 모델과 관객의 시선과의 관계이다.  14


사진가가 단순히 카메라를 향해 정면으로 설 것을 요구했다면 정면성의 사진이 되기 쉽다. 그러나 사진가가 인물의 전면에서 무언가를 읽고 찍었다면 전면성의 사진이 된다. 기념사진의 경우도 단순히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정면성의 사진이 되지만 인물들 개개의 특징이 드러나도록 찍었다면 전면성의 사진이 되는 것이다.  15-16


"자신을 찍어 보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찍을 수 있지?"  21


사진의 주요 형식에는 구성과 조형이 이싿. 이 두가지 요소는 비슷하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먼저 구성(composition)은 화면 안 즉, 프레임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각적 형식이다. 이에 비해 조형(modeling)은 화면 밖, 즉 카메라 밖에서 이루어지는 시각적 형식이다. 그러므로 구성과 조형의 가장 큰 차이는 촬영 이전이냐 이후이냐이다.  25


조형의 기초가 되고, 해체의 근간이 되는 해석이란 무엇일까? .. 페르낭 레제는 "스스로의 조형적 아름다움 속에서 피사체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레제가 '스스로'를 강조하는 개인적이고 자율적인 조형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사진에 대입하면 진정한 사진의 형식은 주어진 구성에서 벗어나는 것, "자신에게 적합한 시점을 획득하는 것"이 된다. 고정불변의 규칙들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형식이라는 말이다.  27-28


영화감독 마야 데렌은 구축의 형식과 해체의 형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구축의 형식은 사물을 조망하는 도구(카메라의 프레임)에서 파생되고, 해체의 형식은 조망된 이미지가 개인적인 경험과 관계된 철학과 정서 속에서 일체화된다."  28


에로티시즘은 정신적 관능이 육체를 통해서 발현될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34


* 예술누드 - 미학은 안으로 정신과 영혼을, 그리고 밖으로 미의 형식과 표현을 다루는 철학이다... 미학이 예술누드에 부여한 품격과 숭고함은 무엇보다 정신의 관능이다.  35


사진의 깊이는 보는 자의 호흡에 의해 결정된다. 깊은 화면은 긴 호흡에서 나오고, 얕은 화면은 짧은 호흡에서 만들어진다.  49


세상이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고, 기계적인 눈이 인간의 눈을 침범하지 않았을 때, 그리고 고층빌딩이 인간의 시선을 가로막지 않았을 때 우리는 언제나 롱 테이크, 롱 디스턴스의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지평선 저 너머로 사라져 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었고, 저 멀리로 점점 작아져 가는 인간의 형상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망원렌즈와 줌렌즈, 그리고 하늘로 치솟는 고층건물에게 그것들을 빼앗겨버렸다. 주변보다는 중심이 강조되고, 상황보다는 대상이 강조되는 사진들이 우리 주변에 확산되면서 우리는 깊은 숨쉬기, 길은 거리감을 박탈당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얕은 숨쉬기, 얕은 거리감에 그저 질식당했던 것이다.  52


사진의 형상은 결국 초덤을 어디에 두느냐 혹은 어떻게 선책하느냐에 달려 있다. 눈과 달리 중요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지 않을 수도 있으며, 부분을 의도적으로 흐리게 할 수도 있고, 또 전체를 선명히 할 수도 있다.  56


초점이 맞았기에 형상이 존재하고, 형상이 있기에 시선을 받는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물을 본다는 것은 거리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거리가 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초점이 존재한다는 말이며, 또 초점이 있어야 형상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형상은 곧 시선을 유도하는 '보는' 행위이자 사물이 드러나는 '보이는' 양태이다. 형상과 시선에 의해 사물은 존재성을 가지게 되며, 결국 인간의 감정을 이끌게 된다.  57


초점 안에 있으면 인포커스(in focus)라고 하고, 초점 밖에 있으면 아웃포커스(out of focus)라고 한다.  62


보인다고 해서 모두 읽히는 것이 아니듯이, 보아야 할 것이 적어질수록 때론 말해지는 것도 있는 법이다.  64


사진은 참의 리얼리티를 잃지 않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디지털은 새로운 표현을 확장해야 한다.  76


사진은 기억의 이미지가 아니라 존재의 이미지이다. 이미지의 기억은 잔상이고 파편이다.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변할 수 있지만 존재의 이미지는 변하지 않는다. 또한 일시적 기억을 위한 이미지는 늘 밖으로 시간을 토하고 지우지만, 존재의 이미지는 언제나 시간을 삼키면서 시간 속에 산다. 사진은 영속적인 시간의 이미지이다. ..

사진과 디지털의 만남은 서로 약한 부분, 강한 부분을 보태고 나누는 데 의의가 있다. 사진은 바로 그것, 사물 그 자체를 지시하는 존재의 이미지이다. 디지털 프로세싱은 보다 쉽고 편리하게, 또 효과적으로 삶의 리얼리티를 발현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77





한 장의 사진을 읽다


우리는 순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고 말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으며, 한순간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고도 한다. 결국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다는 것일까. 정지된 역사 속에서 실존했다는 증거인가. 과거에 있었던 무언가를 확증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부재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 대한 경의인가. 아마도 이 모든 것이리라.  91-92


'가까이 더 가까이 감동되어 셔터를 누르면 어둠이 가득한 자궁 속에서 정자와 난자가 만나 한 생명을 잉태하듯이 한순간의 빛과 만나 필름에 그 피사체의 감동이 잉태되는 것이다. 잉태된 생명이 10개월의 임신 기간을 거쳐 태어나듯이, 한 장의 사진도 필름에 잠상이 맺혀 현상되기까지의 현상 시간을 거쳐 마침내 태어난다.' - 최광호 <나는 사진이다> 중에서  95


안도현 시인의 <사진첩>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추억이란 존재의 뿌리이다..."  100


타인의 사진을 본다는 것은 사진을 찍은 작가의 본래 의도를 분석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이다.  110


* 가다머 해석학 - 가다머는 사진의 수준, 내용, 의미, 가치는 사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알려고 노력하는 그림자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했다.  113


정치적 풍경(political landscape)이란 .. 언뜻 보았을 때 자연풍경, 현실풍경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강한 정치적 동기, 정치적 의도를 내재한 인공적 혹은 가공적인 풍경이라는 것이다.  122


정치적 풍경의 특징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주 아름답거나 어떤 면에서는 달콤한 풍경사진일 경우가 많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사진 속의 '기둥' 자체는 정치를 상징하지 않기 때문에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은 정치적인 것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사진이 정치적인 풍경사진이라고 알아차리기 어렵다. 즉 정치적 업적을 상징하는 흰 기둥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가둬짐으로써 상징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대한민국 곳곳이 공사 중이고 건설 중이다. 다리, 건물, 도로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오늘날 대부분의 공공 건축물, 건축 구조물은 정치적 상징성을 띠는 정치적 풍경이다. 마찬가지로 사진 속에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는 기둥이지만 정치적 동기에 의해 세워지고, 또 드러나지 않지만 정치적 목적으로 건설되고 있다는 사실을 장대한 구조물, 어둠 속엣 명명하는 교각이 말하고 있다.  123-124


* 사진의 정치성 - 사진의 권력은 대중들의 절대적 믿음에서 생겨났다. 발명 순간부터 사람들은 '사진은 거짓말하지 않느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말보다 사진을 믿었기에 이를 역이용한 정치적 사진들이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기생해 왔다. 독재정권을 위한 조작된 홍보용 사진,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날조된 사진, 실재 이상으로 과장되게 연출한 선전용 사진. 지금도 정치 집단 혹은 행정 집단이 실적주의, 성과주의, 여론 고취를 위해 이런 사진들을 부단히 활용한다. 이와는 반대로 다른 맥락의 정치적 사진이 있다. 완전히 다른 입장에서 정치적 소재들을 활용하여 사회를 비판, 고발, 폭로하는 사진이다.  125


* 프레임 - 프레임에는 물리적인 프레임과 심리적인 프레임이 있다. 물리적인 프레임은 구성, 구도를 위한 파인더, 이미지 틀, 액자의 특이다. 대개 표현을 위한 물리적인 틀이다. 가장 오래된 프레임은 바늘구멍(pinhole, 원형)이다. 암상자(camera obscura) 소에서 세사을 보면 동그랗다. 이런 구형의 프레임이 점차 정사각형, 직사각형 모습으로 변해 갔다. 반면에 심리적인 프레임은 의미의 프레임이다. 보이지 않는 인식의 그릇과 같다. 물리적 프레임 못지 않게 중요한 프레임이다. 콘셉트와 의도는 심리적 프레임이다. 사진의 힘은 프레임에서 나온다.  131


들뢰즈는 추상에 대한 새로운 사유 방식을 요구하면서, 추상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진정한 추상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고, 또 그래야만 추상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으며, 진정한 추상을 창조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추상이 "구상적이지 않다, 서술적이지 않다, 자연적이지 않다, 문학적이지 않다"라는 말에 반대하며, 추상은 구상의 반대도, 구상과의 단절도 아닌, 구상의 혼성과 중첩일 뿐이라는 논리를 편다. 실제로 카메라를 통해서 추상을 표현할 때는 들뢰즈의 말처럼 추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요구된다. 추상을 구체적인 형상을 지운 것, 혹은 구체적인 내용을 걷어낸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진정한 추상을 만나기도, 형상화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진정한 추상사진은 추상회화처럼 조형의 기교가 아니다. 형상이 부재하거나 결여된 것은 더욱 아니다. 추상사진은 들뢰즈가 추상론에서 말했듯이 구체적인 형상에 대한 '아니오'가 아니라. 구체적인 형상에 끊임없이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를 반복해 가는 것이다.  133-134


들뢰즈는 "에너지가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사물)는 근본적으로 추상이다. 그들은 무(無 없을무) 구속적이고, 탈(脫 벗을탈) 중심적이다. 그것은 개연성 없이 우연히, 형식 없이 작동하는 순수한 자율성이다."  134-135


* 들뢰즈의 추상론 - 한마디로 형태의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관념적, 인식론적 추상이다.  137





한 장의 사진을 느끼다


사진을 알게 되면 처음엔 누구나 사지능로 세상을 보게 된다. 그것은 일찍이 보지 못한 세상,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다...

사진을 알기 전에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감상할 수 있었는데, 사진을 알고부터는 오로지 사진적으로만 세상을 보려고 한다. 

이미지의 노예, 사진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153


피사체가 스스로 말하는 사진이다. 이런 사진은 이미지의 노예에서, 사진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진정 사무로가 순수한 대화가 이루어졌을 때 가능하다.  155


사물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그것을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운 것이다. 이런 것이 사진의 참 의미가 아닌가 한다. 무언의 사물과 말한다는 것, 그러니까 말없는 사물들에 다가서고, 귀 기울이고, 그리고 사진을 통해 인식의 통로를 여는 것, 이것이 사진의 또 다른 아름다움이자 매력이다. 물론 아무나 할 수 없다. 오로지순수한 눈과 마음을 지닌 작가만이 할 수 있다.  156


* 기억회로 - 사진은 기억을 재생시킬 뿐, 사건 그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기록보다 우선하는 것이 '알아봄'이다.  


풍경이 사진가에게 한 장만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만큼 긴 호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풍겨을 여러 장 똑같이 찍었다는 말은 풍경과 호흡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186


풍경은 아무나 다가가서 찍을 수 있는 대상이지만 풍경과 함께 호흡하지 못하거나 그 속으로 풍덩 빠져들지 못하면 그 풍경 사진은 단순 복제에 불과하다.  187


* 힐링 포토 - 치유에 활용되는 사진은 대개 고요한 풍경사진, 그 가운데서도 흑백사진이다... 흑백사진이 좋다는 것은 현실의 색을 제거해서 요란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189


소쉬르라는 언어학자가 평생을 두고 고민했던 것은 언어의 자의성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언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언어의 진정성을 규정짓기가 매우 어려웠다는 말이다. 각기 다른 삶을 경험하고, 처해 있는 상황도 다르기 때문에 같은 말도 저마다 다르게 표기하고 해석해 버림으로써 의미의 혼란, 해석의 실종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판단이 사람들의 인식의 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각각이 경험한 삶의 리얼리티가 다르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람드이 현실을 인식하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삶의 차이가 현실을 인식하는 차이로 나타나고, 현실을 인식하는 차이가 세상을 해석하는 차이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맨 먼저 알게 된다. 그 점에서 우리가 쓰는 언어란 삶의 리얼리티라고 말할 수 있고 그 리얼리티의 차이가 곧바로 사진의 차이, 감상의 차이, 해석의 차이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진을 보는 관객이 저마다의 리얼리티에 따라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 과정에서 다행히 작가와 관객이 같은 리얼리티를 공유하고 있으면 좋은 느낌, 좋은 사진이 되고, 다른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으면 느낌 없는 사진, 별 감흥이 없는 사진이 된다. 시각언어인 사진이 우리 앞에 놓였을 때 모든 사진이 다 좋을 수 없고, 또 반대로 다 나쁠 수는 없다. 그 모든 좋고 나쁨의 선택은 관객의 리얼리티에 따라 자의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교육은 다양한 리얼리티를 경험하게 하는 매개체이다. 학습을 통해서 작품과 관객 간에 존재하는 리얼리티의 차이를 극복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리얼리티의 중재는 우리의 일상에서 상당히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다. 때론 음악이, 때론 설명이, 때론 주변 상황이 리얼리티의 차이를 극복하게 만든다. 처음 보았을 때 느낌이 없었던 사진이 오래 보면 좋아지는 것은 반복해서 보는 동안 그 사진과 친숙해지기 때문이다. 또 어느 순간 급작스럽게 좋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사진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주변 환경이 리얼리티를 중재해 주었기 때문이다.  191-192


"사람들 속에 같은 사람으로 살면서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도 나를 모른다."(강상훈) 작가가 카탈로그에 썼듯이 우리는 서로 몰랐던 것이다. 서로의 리얼리티가 달라 그의 사진이 내게 감동을 주지 못했던 것이고, 감흥이 없었기에 사진보다는 글이나 한번 읽어 보자고 한쪽으로 치워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리얼리티를 공유하는 순간 이 사진은 내 마음에 와 닿았고, 새삼스레 진정한 리얼리티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193


진광불휘(眞光不輝 참진 빛광 아닐불 빛날휘), 참된 빛은 빛나지 아니한다. 통도사 주지이셨던 성파 큰스님은 순수의 뜻을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197


사진의 모드는 삶의 모드가 만들어 낸 형상이다.  210


작가는 자기 삶의 모드에 반하는 사진의 모드를 가져서는 안 된다.  211


* 치열함 - 작가(作家 지을작 집가)란 자기 집을 지슨 사람, 자기 집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213


* 뒷모습 - 삶에서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진실일 경우가 있다. '뒷모습이 진실이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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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을 때, 우리는 얼마나 훌륭한 교사였던가!  23


아이들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소소한 오락거리들만을 탓할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학교의 탓이 크다. 일관성 없는 독서 지도, 시대착오적인 교과 과정, 교사들의 자질 부족, 시설의 낙후성, 도서관의 부족.

턱없이 부족한 문화부 예산!..  35


우리들의 대화는 이러했다. 그것은 세태의 어둠을 밝혀줄 언어의 영원한 승리이자,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는 금과옥조와도 같은 침묵이었다. 늘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온갖 정보에 귀를 기울이는 만큼, 우리는 결코 이 시대에 기만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전 세계가 우리의 말에 담겨 있으며, 온 세상이 우리의 침묵으로 밝혀진다. 우리는 현명하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현명함을 열렬히 사랑한다.

그런데 대화를 마치고 나서도 어렴풋이 남아 있는 이 우울함은 무슨 까닭일까? 손님들이 가고 집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건만 한밤중까지 이어지는 이 침묵은? 단지 설거지 걱정 때문일까? 게다가... 저녁 모임을 마치고 수십 킬로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우리의 친구들에게도 똑같은 침묵이 이어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흠뻑 취해 있던 그 현명함의 열기는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신호등 앞에 멈춰 서 있는 차 속의 부부는 아무런 말이 없다. 그 침묵은 마치 간밤의 취기가 서서히 가시는 떨떠름한 뒷맛처럼, 혹은 마취가 풀려날 때의 감각처럼, 의식이 깨어나면서 조금씩 제 자신으로 돌아오는 바로 그 느낌 같다.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한 대화 속에 진정한 우리는 없었음을 어렴풋이 느끼는 고통스런 자각인 것이다. 우리는 거기 없어싿. 거기엔 우리를 제외한 모든 것이 다 있었으며, 논지 또한 확고했으나 - 게다가 그 논지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주장한 바가 전적으로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 우리는 거기 없었다. 의심할 나위 없이 현명함이라는 자기 최면을 부단히 연마하느라 또 하루 저녁을 탕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서서히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속마음은 조금 전 식탁에 둘러앉아 하던 이야기들과는 너무도 딴판이었다. 핏발을 세워가며 독서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은 제 방에 틀어박혀 책이라곤 한 줄도 읽지 않는 아이의 언저리만 맴돌고 있었다. 아이로 하여금 책읽기를 싫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불가피한 시대적 요인들을 이것저것 늘어놓으면서도, 여전히 우리와 아이를 갈라놓는 책이라는 장벽을 넘지 못해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줄곧 책에 관해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오로지 아이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36-37


갖은 노력을 다했다. 시대를 규탄하고, 텔레비전을 고발하면서... 필경 또 텔레비전 끄는 것도 잊은 채.

너무도 '비주얼'한 20세기라는 시대 탓인가? 그렇다면 19세기는 너무 묘사적이라고 할 참인가? 또 18세기는 너무 합리적이고, 17세기는 너무 고전적이라고? 16세기는 너무 르네상스적이고, 푸슈킨은 너무 러시아적이고 소포클레스는 너무 한물 갔다고? 마치 사람과 책의 관계가 소원해지기까지 수 세기가 필요했다는 소리 같다...

일단 지적 항해의 첫발을 내딛고 나면, 아무일도 없었던 듯 예전처럼 돌아올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억제된 즐거움일지라도, 모든 독서에는 의당 읽기의 즐거움이 자리한다.  51-52


아이가 고작 몇 개의 단어에 흥미를 보인다고 하여 마치 당장 온갖 책을 섭렵할 수 있게 된 듯 착각에 빠졌던 것은 아닐까? 걸음마를 익히고 말을 배우듯, 책 읽는 습관도 때가 되면 저절로 익히리라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56


아이가 맨 먼저 배우는 것은 책읽기가 아니라, 책 읽는 시늉일 뿐이다.  57


아이에게는 저마다 책읽기를 체득해나가는 자신만의 리듬이 있다. 때론 그 리듬에 엄청난 가속이 붙기도 하고, 느닷없이 퇴보하기도 한다. 아이가 책을 읽고 싶어 안달을 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포식 뒤의 식곤증처럼 오랜 휴지기가 이어지기도 한다.  60-61


'교육자'를 자처하지만, 실은 우리는 아이에게 성마르게 빚 독촉을 해대는 '고리대금업자'와 다를 바가 없다. 말하자면 얄팍한 '지식'을 밑천 삼아, 서푼어치의 '지식'을 꿔주고 이자를 요구하는 격이다. 되돌려주어야만 한다. 아무런 조건없이, 될수록 빨리! 그렇지 않으면 누구보다 바로 우리 자신부터 의심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61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좋아하는 마음'에 뭔가 손상을 입었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적절한 표현인 듯하다.  62


어른들은 읽기를 익히게 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강구하는데에만 열을 올린다. 그럴듯한 공부방을 꾸며주고, 독서 카드를 만들고, 출판사를 무색케 할 만큼 온갖 전집류로 도배를 한다. 참 딱한 노릇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도 까맣게 잊고 있으니 말이다. 요는 아이에게 배움에 대한 갈망을 갖게 하는 일이다. 우선 아이에게 배우고 싶다는 열망을 심어준 다음 책상을 마련해주어도 줄 일이다. 그제서야 어른들이 동원하는 온갖 방법이 제구실을 할 것이다. 

당장의 흥미, 이것만이 아이를 가장 확실하고 지속적으로 이끌어갈 유일한 동인이다.  66-67


'조급하게 얻으려고 서두르지 않는 것이 곧 가장 확실하고 빠르게 얻는 길이다.' 루소  67


아이는 누구나 훌륭한 독자가 될 자질을 타고난다. 그리고 주위의 어른들이 몇 가지 지침만 잊지 않는다면 아이는 언제까지고 훌륭한 독자가 될 것이다. 우선은 어른들이 자신의 능력만을 내세우려 들기보다는, 아이에게 열정을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무조건 암기와 복습만을 강요할 게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아이의 열의를 북돋워주어야 할 것이다. 모퉁이에 서서 아이가 도착하기만 기다릴 게 아니라, 아이와 함께 노력하는 자세를 가져볼 일이다. 어떻게든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들기보다는, 기꺼이 아이에게 저녁 시간을 내어주어야 한다. 미래를 담보로 아이에게 으름장을 놓기보다는 아이의 현재가 한껏 펼쳐질 수 있도록 마음 써야 한다. 한때틑 아이의 더없는 즐거움이었던 일이 결코 마지못해 하는 고역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자면 아이가 그 즐거움을 맘껏 누릴 수 있도록 기다리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적어도 아이 스스로가 그 즐거움을 의무로 사목자 할 때까지는 말이다.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의무란 모든 교양이나 문화 수업이 그렇듯 무상성을 전제로 한다. 그렇게 해서 어른들 자신도 그 무상의 즐거움에 다시금 새롭게 잠겨볼 일이다.  69-70




"여러분 스스로 경험에서 우러난 예증을 드시오"  94


다들 한결같은 의견이라는 건 어쨌든 맥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101


학교는 능력과 기능만을 필요로 한다. 

삶은 다른 곳에 있다.  102


요즘의 우리들은 책을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설파한다. 때로는 주석자, 해석가, 분석가, 비평가, 전기 작가, 해설자를 두루 자처하여 이루 다 할 수 없는 극진한 찬사로 작품의 위대함을 증언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작품들은 말이 없다. 워낙 우리의 역량이 차고 넘치다 보니, 어느샌가 우리의 말이 책 속의 말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124




책읽기의 즐거움이란 결코 멀리 있지 않았다. 다만 읽어도 모를까 봐 지레 겁을 먹었던 그 말 못할 두려움으로 인해 줄곧 사춘기 아이들의 기억 저편에 묻혀 있었을 뿐이다.

아이들은 이를테면 소설이란 무엇보다 하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소설은 '소설처럼' 읽혀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소설 읽기란 무엇보다 이야기를 원하는 우리의 갈구를 채우는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151


책을 읽어주는 선생님의 목소리 덕분에 다시 '글'과 친숙해지고,..

소설이 주는 진정한 즐거움은 작가와 나 사이에 형성된느 그 역설적인 친밀감을 발견하는 데 있다.  155


혼자만의 책읽기에 친숙해지려면, 읽어봤자 이해할 수 없으리란 강박증 말고도 또 다른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즉 시간에 대한 공포감 말이다.  156


책 읽을 시간이 고민이라면 그만큼 책을 읽을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책 읽을 시간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생활은 독서를 가로막는 끝없는 장애물이다.  159


책 읽는 시간은 언제나 훔친 시간이다..

굳이 말하자면,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의무의 시간들에서이다.  160


프랑스에서는 '읽다'를 속된 말로 '꼼짝없이 매였다'고 한다.  162


아이들이 자연스레 책읽기에 길들게 하려면 단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즉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163


일단 책과 가까워지면 그때부터 아이들은 스스로 길을 찾아나설 것이다.  164





무엇을 어떻게 읽든... - 침해할 수 없는 독자의 권리


1 책을 읽지 않을 권리


2 건너뛰며 읽을 권리


3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좋은 책들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좋은 책들이 책장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동안 나이를 먹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그 책들을 읽어도 좋을 만큼 충분히 성숙했다고 여겨질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새로이 시도를 한다.  205


4 책을 다시 읽을 권리

다시 읽는다는 건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따르지 않는 무상의 행위일 뿐이다. 우리는 그저 반복하여 읽는 즐거움, 다시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리려고, 친밀감을 새삼 확인하려고 다시 읽는다.  207


5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감상과 선전성을 적당히 버무려 장사를 하려 드는 유의 문학이 존재한다. 나는 이를 '산업 문학'이라 부르려 한다. 말하자면 세간의 화제로부터 온갖 소재를 그러모아 시류에 편승하는 세태 소설을 만들어내는 문학이다...

정해진 틀에 자 맞추어져 덩달아 우리들까지도 그 틀에 가두고자 하는, 오로지 '즐기기 위해 만드어진' 일회용 문학이다.  209


6 보바리즘을 누릴 권리 - 책을 통해서 전염되는 병

'보바리즘'이란 뭉뚱그려 얘기하자면 '오로지 감각만의 절대적이고 즉각적인 충족감'에 다름 아니다. 즉 상상이 극에 달해 온 신경이 떨려오고 심장이 달아오르며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출되는 가운데 주인공의 세계에 완전 동화되어, 어처구니없게도 대뇌마저 (잠시나마) 일상과 소설의 세계를 혼동하기에 이르는...

독자라면 누구나 처음 한동안은 빠져들기 마련인.

더없이 감미로운 경험인 것이다.  212


자기 나름대로 독서의 한 단계를 거치고 있는 아이에게 억지로 다른 책을 쥐어준다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 겪었던 성장기로 부인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며, 이는 결국 아이와 우리 사이에 깊은 단절을 가져올 뿐이다.  213


보바리즘은 세상 누구나가 공유할 수 있는 지극히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다른 사람의 보바리즘만을 맹렬히 몰아 세운다. 청소년들의 형편없는 독서 수준을 개탄하면서도, 정작 우리 자신은 텔레지번에 자주 나오는 인기 작가를 맹종하다가 유행히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작가에 대해서 핏발을 세우기가 일쑤다.  214


7 아무 데서나 읽을 권리


8 군데군데 골라 읽을 권리


9 소리내어 읽을 권리


10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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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척점, 더 정확히 말해 정반대의 극(極 다할극)은 자주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과 우리네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때, 우리와 유사한 것보다는 다른 것을 선호하는 것이다. 체념한 채 타인의 모습에 비친 자기 자신의 반영 외에는 아무것도 찾지 않고, 타인과 나를 동일시하면서만 살고 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의 공통된 세계를 이해할 때 더 많은 것을 배우는 것은, 벼랑 끝에서 포기 직전까지 어렵사리 자신의 연구를 밀고 갈 때보다 남들이 벌인 탐구를 관찰할 때가 아니던가. 독서가 우리에게 자양분을 제공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이다. 독서는 고통을 주는 굴곡 많은 글쓰기 과정에서 우리를 구해주고, 계속 나아갈 힘을 실어준다. - 프레데리크 이브 자네(FYJ)  5-6


AE : 내겐 두 가지 형태의 글쓰기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미리 계획된 텍스트들이 있고, 여기에는 [밖에서 쓰는 일기]와 [외적인 삶]도 포함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 병행하여 오래전부터 행해온 잡다한 형태의 일기 쓰기가 있는데, 1982년 이래로 나는 내면일기와는 별도로 '글쓰기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글을 쓰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문제와 의혹을 담는 일기로, 난 이것을 생략된 문장과 약자로, 이를테면 흘려쓰고 있습니다. 내 머릿속엣 이 두 형태의 글쓰기 방식은 조금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문학과 삶, 총체와 미완 사이의 대립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용과 수동성의 대립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요.  31


AE :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와 <탐닉>, 이렇게 단 두 권의 내면일기만을 출판했어요. 이 일기들은 모두 십 년 전에 씌어졌고, 실제로 그 기간에 살았던 삶은 이미 각각 <어떤 여자>와 <단순한 열정>이라는 자전적 이야기의 대상이 되었지요. 이 두 가지 상황- 십년이라는 유예기간과 그 기간에 상응하는 책의 존재 -가운데, 후자가 일기를 출판하도록 부추긴 좀 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유예기간도 중요하겠죠. 그 세월이 내가 나의 일기를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볼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요.  50


AE : 내 작업방식은 주로 기억에 근거합니다. 글을 쓰는 동안, 기억은 끊임없이 재구성해야 할 요소들을 환기시킵니다.... 나는 '보고' '듣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어요. 그런데 내게 그것은 '다시 보기'이며 '다시 듣기'를 의미합니다.  53


FYJ : 당신은 다른 형태의 글쓰기를 추구함으로써 상당히 멀리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이젠 당신이 소설이라는 형태로 되돌아가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해 보입니다. 20세기에 소설 형식이 극한까지 가버린 이 시점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당신도 소설이라는 형태의 퇴락을 인정하는지요? 

AE : '소설'과 관련지어, 항상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하는 건가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이상 나의 지평 위에 있지 않습니다. ...

문학 교과서에서나 대학 입학 자격시험이나 중등교사 자격 시험의 문학 시험문제에서는 마치 '소설'이 하나의 본질인양, '예를 들면서' 소설에 관해 논술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책에 관해 빈번하게 벌어지는 대담에서 '소설'이라는 단어는 점점 더 확장된 의미를 지니면서 확산되고 있습니다. 거의 히스테릭한 태도로 '허구'를 옹호하는 자들도 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결국 품질인증표라고 할 수 있는 장르는 아무런 중요성도 지니지 않습니다. 모두 그것을 잘 알고 있어요. 강렬한 감동을 주고, 생각이나 꿈 혹은 욕망을 열어주고, 때로는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책들이 있을 뿐입니다. 루소의 <고백록>,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브르통의 <나자>, 카프카의 <소송>,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이 애초에 인증표를 달고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지만, 설사 그랬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상실해버린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72-74

AE : 내가 나라는 개인의 암흑지대에 마침 별 관심이 없어서인지, 정신분석은 나와는 언제나 무관했습니다. 점처럼 고립된 몇몇 발견들이 내게 뭘 해줄 수 있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것들로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글쓰기에서 그것들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느냐는 말이죠. 독자들 가운데, 글을 쓰는 것 특히 자전적 글쓰기를 행하는 것이 정신 분석을 실천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다는 믿음을 표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내가 보기에 그것은 어떤 허망한 욕심이나 오해인 것 같아요. 자신의 문제로부터 전적으로 혼자서 스스로 해방될 수 있으리라는 착각, 그리고 그와 동시에 타인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열망, 즉 어떤 심리적-상징적 복권에 당첨되었으면 좋겠다는 욕심, 뭐 그런 것 말이죠. 그건 오해예요. 글쓰기가 깊숙이 감춰진 무엇을 다시 찾으러 나서는 것이며 정신분석의 치료과정과 유사한 것이라고 믿는 거니까요. 나는 글을 씀으로써 내 모든 지식뿐 아니라 교양, 기억 등이 모두 연루된 어떤 작업을 통해, 외양을 넘어서는 나 자신을 세상에 투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작업은 하나의 텍스트로, 따라서 타인들에게로 귀착되지요. 그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냐 하는 것은 내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작업'과는 완전히 반대됩니다. 내가 어떤 것에서 치유되어야 한다면, 내게 그 치유는 오직 언어에 대한 작업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달하는 작업, 즉 하나의 텍스트를 타인에게 증여하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타인이 그것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상관없습니다.

물론 정신분석이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넓히는데 기여한 내용-그것은 정말 엄청나지요-에 관해서나, 문학에 접근할 때 그것을 사용하는 것에 관해서는 어떤 형태로도 비난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신분석은 때때로 경찰처럼 구는 구석이 좀 있지요. 무슨 일이 있엉도 자가의 심리적 구성 요소들을 낱낱이 적발해내고야 말리라는 의지를 품고, 텍스트의 고백을 마치 피고인의 진술인 양 몰아가잖아요. 그러고는 이 모든 게 바로 이것 때문이고, 난 이걸 다 알고 있지! 하는 식이에요. 이땐 실망스러워요. ...

이따금 나는 아도르노처럼 생각한답니다. 그는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정신분석이 개인 실존의 고통스러운 비밀들을 의례적인 진부함으로 만들어버린다고 말한 바 있지요.  78-80


AE : 대게 글쓰기 과정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어느 순간, 어떤 충동이 일어나 몇 페이지를 쓰도록 나 자신을 부추깁니다. 하지만 난 그 글에 아무런 목적도 부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페이지들이 어떤 특정 텍스트의 도입부로 예정되어 있지는 않죠. 그 다음엔 멈춰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그 조각을 한동안 보류시켜 둡니다. 그러는 사이 계획은 좀 더 선명해지면서, 말하자면 그 조각에 악착같이 매달리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 조각은 그 계획 속에서 결정적 요소로 부각되기에 이릅니다. 이런식의 설명이 좀 추상적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내 책들이 각각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과정을 떠올릴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각 텍스트에 대한 구상(난 이것을 욕망이라고 말하겠어요)속에는 그러니까 각 텍스트에 대한 욕망 속에는 어쨌든 매번 차이점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183


FYJ : 글쓰기 작업의 구체적인 정황을 요약해보지요. 당신은 문단과 문장의 삭제와 덧쓰기, 첨가와 제거를 통해 일을 진행합니다. 어쨌든 덧쓰고 지우는 작업이 유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당신의 모든 텍스트에 적용되는 항구적 필요성에 부응한다면, 그 작업의 성격에 어떤 유형의 관념을 부여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첨가합니까?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그 작업을 합니까? 당신은 버전마다 '원고지 철'을 바꾸는 작가들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작업을 하는것 같은데요...

AE : 내 원고들은 마치 패치워크 같아요. 갈수록 더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원고가 씌어진 종이 위에는 단어들 위나 행간 혹은 여백에 각기 다른 색의 사인펜이나 검은 연필로 덧쓴 자국들로 온통 뒤범벅된 몇 개의 문단이 씌어 있어요. 그 문단들의 자리는 아직 결정되지 않아서, 그것드로가 연관지어 참조해야 할 페이지 번확 표기되어 있지요. 예를 들어 10번 종이에는 10-2, 10-3 혹은 10-4 같은 식으로 종이들이 와서 붙을 수 있어요. 하지만 아직 그 이상의 것을 시도해본 적은 없어요. 그리고 아주 최근에는 포스트잇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잘 떨어지기 때문에 크게 신뢰하는 편은 아닙니다. 난 모든 것을 간직하고 싶거든요. 어느 날은 마음에 들지 않던 것이 그 이튿날에는 다시 좋게 느껴질 때도 있기 때문이죠.

이 모든 것은 계획, 즉 계획을 구성하는 데 내가 몰입했을때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이죠. 한편으로는 아주 천천히 나아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언제든 일상적 삶에서 내게 다가오는 것들을 끊임없이 첨가하고 끌어들이는 식이죠. 삭제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반대로 마지막 단계에서 컴퓨터로 텍스트를 정리할 때는 많은 부분을 삭제합니다. 칠 년 전가지는 타자기를 사용했는데, 그때는 아무래도 정정하거나 수정하는 빈도에 한계가 있었죠. 텍스트가 인쇄되었을 때, 내 원고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종종 내가 이러저러한 것을 왜 지웠는지 스스로 물어본답니다. 그런데 그걸 설명할 수가 없어요. 수사본 연구가들이라면 과연 설명할 수 있을지 나로서는 의심스럽습니다. 텍스트를 매만지는 최종 단계에서, 나는 일종의 필연성에 따라 작업합니다. 하지만 일단 책이 완성되고 출판되면 그 필연성은 상실되고 말지요. 텍스트는 그 총체 속에서 하나의 자율적 생명체처럼 고려되어야 합니다. 텍스트는 내가 글을 쓰는 동안에는 나와 한몸이지만, 결국 내 밖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제거된 어떤 부분들에 대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것입니다.  190-192


FYJ : 글을 쓴다는 것은 당신에게, 프루스트가 말했던 것처럼, "체험된 유일한 삶"이 되는 것입니까?

AE : 프루스트는 "진정한 삶, 마침내 '발견되고 해명된' 삶. 따라서 실제로 체험된 유일하게 진정한 삶. 그것은 문학이다"라고 명시했습니다. 난 "발견되고 해명된 삶"이라는 이 말을 강조하고 싶어요. 내 느낌에 이 말이 핵심인 것 같아요. 혹 글쓰기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다면, 난 이렇게 말하겠어요. 말, 여행, 광경 등, 그 어떤 수단으로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을 글로 쓰면서 발견하는 것. 숙고 또한 홀로는 그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글쓰기 이전에는 현장에 없던 것을 발견하는 것, 바로 거기에 글쓰기의 희열이 있습니다. 글쓰기가 무엇을 다가오게 하고 도래하게 하는지는 결코 미리 알 수 없어요. 그러니 글쓰기에는 공포 또한 도사리고 있는 것이지요.  200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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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의 만남은 항상 기대한 바대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명성이 자자한 미술관이나 전시회에 찾아갔을 때 우리는 왜 예상했던 변화의 경험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의아해하면서 실망하고, 더 나아가 어리둥절함과 무능하다는 느낌을 품은 채 문을 나서기도 한다. 그럴 땐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탓하고, 문제의 뿌리는 분명 이해 부족이나 감성적 수용 능력의 부족에 있다고 자책하게 된다.

이 책은 문제의 뿌리가 일차적으로 개인에게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주류 예술계가 예술을 가르치고, 팔고, 보여주는 방식에 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은 예술이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위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명확히 거부하고, 그럼으로써 예술의 높은 지위를 신비한 영역에 남겨두고 그와 동시에 공격에 취약하게 만든다. ... 

우리는 예술이 어떤 유의 도구인지 .. 명확히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4


예술에도 자연이 원래 우리에게 부여한 한계 너머로 우리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힘이 있다. 

이 책은 (디자인, 건축, 공예를 포함한) 예술이 관람자를 인도하고, 독려하고, 위로하여 보다 나은 존재 형태가 되도록 이끌 수 있는 치유 매개라고 제언한다.  5






방법론 


예술은 왜 우리에게 중요한가? 

예술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을 성취할 수 있다. 즉, 사랑하는 대상이 떠난 후에도 계속 그 대상을 붙잡아둘 수 있다.  8


르노의 그림에서 여자가 마음에 담고 싶어하는 것은 단지 곧 떠날 연인의 전체적인 형상이 아니다. 그녀는 더 복잡하고 파악하기 어려운 어떤 것, 즉 그의 개성과 본질을 원한다.  8-10


만일 세상이 좀더 따뜻한 곳이라면, 우리는 예쁜 예술작품에 이렇게까지 감동하지 않을 테고, 그런 작품이 그리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16


어른과 놀고 있는 아이와, 아이와 놀고 있는 어른의 차이를 생각해보라. 아이의 기쁨은 천진난만하며, 그런 기쁨은 사랑스럽다. 그러나 어른의 기쁨은 삶의 고난을 회상하는 선에 머물고, 그래서 가슴이 아프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때로는 울게 한다... 만일 인생이 고되지 ㅇ낳다고 느낀다면, 아름다움은 현재와 같은 호소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20


우리는 이상적 이미지를 일반적인 현실의 잘못된 묘사로 간주하지 않고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삶이 우리의 욕망에 얼마나 박한지 잘 알기 때문에, 부분적이지만 아름다운 광경은 우리에게 한층 소중할 수 있다.  22


많은 경우, 슬픈 일들이 더 슬퍼지는 건 우리가 혼자 슬픔을 견디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26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예바르게 행동하길 바라지만, 압력을 받으면 옆길로 샌다. 우리는 더 훌륭해지길 바라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동기를 잃어버린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 자신의 인격을 가장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라고 격려하는 예술작품을 통해 우리는 막대한 혜택을 누릴 수 있다.  37


예술은 이미 충분하다고 섣불리 추정해서는 안 되는 균형과 선함을 시의적절하게, 본능적으로 깨닫게 해줌으로써 우리의 시간을, 삶을 구원한다.  42


어떤 것이 이것일 수도 저것일 수도 있는 순간에 붙잡혀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곧 이해할 듯하면서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알쏭달쏭한 순간이 중요한 까닭은 성찰이 우리의 기대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찰의 과정을 포기한다. 우리는 사랑, 정의 또는 성공의 개인적 의미를 대부분 결정하지 못한 채 다른 것으로 넘어간다. ..

예술은 자기 인식을 누적시켜, 타인에게 그 결실을 전달하는 훌륭한 수단이다. 자신의 경험을 타인과 공유하는 일은 어렵기로 악명이 높다. 그럴 때 말은 서툴게만 느껴진다.  47


예술에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그런 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타인과 소통하게 해주는 이 능력이 있기 때문에, 대체로 우리는 주변에 어떤 예술작품을 둘 것인가에 신경을 많이 쓴다... 우리는 마냥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중요한 뭔가를 드러내보이길 원한다. 즉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성격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48


예술에 대한 방어적 태도를 극복하는 중요한 첫 단계는 특정한 상황에서 느끼는 이상한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53


방어적 태도를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그렇지 못한 현실에 날카롭게 주목하고, 어떤 것들에 강한 부정적 견해를 품게 되는 것이 매우 정상적이라는 것을 너그럽게 깨닫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예술작품들을 창조한 사람들의 외견상 이질적인 사고방식을 보다 편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다...

방어적인 태도를 해소하는 세번째 단계는, 처음에는 아무리 미약하고 보잘것없더라도 예술가와 자신의 사고방식에서 연결점을 찾는 것이다. 그들의 작품은 아주 괴상해 보일 수 있지만, 그들의 야망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충분히 탐색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측면이 있을 수 있다.  54-56


적절한 자극이 있다면 우리는 작품을 창조한 사람의 사고방식과 우리 자신의 가치관 및 경험이 아주 잠깐이라도 설핏 겹치는 지점을 찾아낼 수 있다.  56


우리의 주된 결점,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는 원인 중 하나는 우리 주위에 늘 있는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 있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의 가치를 보지 못해 고생하고, 매혹적인 것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종종 엉뚱한 갈망을 품는다.

문제의 한 원인은 상화에 익숙해지는 우리의 능력, 즉 우리가 습관화라는 기술의 달인이라는 데 있다. 습관이란 인간적 기능의 전 분야에 걸쳐 행동을 기계적으로 만다는 메커니즘이다. 습관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준다...

그러나 습관은 꼭 그만큼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쉽다.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덜 중요한 것들을 삭제하는게 아니라,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안겨줄 수 있는 요소들을 삭제하고 만다.

예술은 습관에 반대하고, 우리가 경탄하거나 사랑하는 것에 갖다 대는 누금을 재 조정하도록 유도해 그 소중한 것을 더 정확히 평가할 수 있게 우리를 되돌려놓는다.  59


이미 그것들을 물리도록 확실히 봤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예술은 우리가 놓치기 쉬운 모든 것을 전면에 내놓음으로써 바로 그 선입견에 당당히 맞선다.  60


이미지는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큰 원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에게 해독제를 건네주어 면목을 세우기도 한다. 이는 우리 삶의 조건인 따분함과 무미건조함을 메스껍게 만드는 동시에 그 조건과 지적인 화해를 이끌어내는 예술의 힘 덕분이다.  62


예술이 심리적 취약점을 폭놃게 보완할 수 있는 도구. 그 취약점들을 요약해보자.

1. 우리는 중요한 무언가를 잊어버린다. 중요하지만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경험을 좀처럼 붙들고 있지 못한다. 

2. 우리는 희망을 쉽게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삶의 나쁜 면들에 과민하게 반응한다. 어떤 것을 향해 계속 나아갈 합리적 이유를 깨닫지 못해 정당한 성공 기회를 놓쳐버린다.

3. 우리는 수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평범한 일인지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이 없기 때문에 고립감과 피해의식에 쉽사리 이끌린다. 우리는 곤경의 의미를 잘못 판단하는 탓에 너무 쉽게 당황한다. 우리는 외롭다. 하지만 이것은 얘기 나눌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나의 고통을 충분히 깊이 있게, 정직하게, 인내심 있게 이해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꾸준하지 못한 인간관계, 질투, 이루지 못한 꿈으로 인해 겪는 고통을 보여주려 해도 그 방식때문에 자칫 상대방이 경멸감과 모욕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고통을 겪고, 이 고통에는 존엄이 결여되어 있다고 느낀다.

4. 우리는 균형감이 없는데다 자신의 가장 좋은 면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단 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다수의 자아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보다 나은 자아가 있음을 안다. 우리는 우리의 보다 나은 자아를, 대개는 우연히 그리고 너무 늦은 때에 만난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큰 꿈과 관련해 의지의 박약에 시달린다. 행동하는 법을 모르진 않는다. 다만, 충분히 설득력 있는 형태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최고의 통찰에 따라 행동하지 못할 뿐이다.

5. 우리는 어렵게 깨닫는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수수께끼이며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타인에게 설명하거나, 내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로 사랑받는 일에 대단해 서툴다. 

6.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줄 수 있는 많은 경험, 사람, 장소, 시기를 거부한다. 이는 그런 것들이 잘못된 포장에 싸인 채 다가오고 그래서 그것과 연결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상적이고 편파적인 판단의 먹이가 된다. 우리는 너무나도 수동적으로, 모든 것이 '낯설다'고 생각한다.

7. 우리는 친숙함 때문에 둔감해져 있으며, 화려함을 부각시키는 상업 지배 세계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사는 게 단조롭다며 불만족에 빠진다. 삶은 다른 곳에 있다는 고민이 우리를 끊임없이 갉아먹는다.  64


(위의) 일곱 가지 심리적 취약점과 예술을 연관시킬 때 예술은 도구로서의 목적과 가치를 지니게 되고, 우리에게 일곱 개의 보조수단을 제공한다.

1. 나쁜 기억의 교정책 : 예술은 경험의 결실을 기억하고 재생할 수 있게 해준다. 예술은 소중한 것과 우리가 찾은 최고의 통찰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메커니즘이며, 그것들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예술에 우리의 집단적 성취를 안전하게 예치한다.

2. 희망의 조달자 : 예술은 즐겁고 유쾌한 것들을 시야게 붙잡아둔다. 예술은 우리가 너무 수비게 절망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3. 슬픔을 존엄화하는 원천 : 예술은 삶에서 슬픔이 차지하는 정당한 위치를 깨우쳐주고, 우리는 그로 인해 곤경 앞엣 덜 당황한다. 곤견을 고귀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4. 균형추 : 예술은 우리가 가진 좋은 자질들의 핵심을 특히 명료하게 암호화해 다양한 형태의 매개로 우리 앞에 내놓고, 그럼으로써 우리 본성의 균형을 회복시켜 준다. 예술은 우리에게 허락된 최고의 가능성으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5. 자기 이해로 이끄는 길잡이 : 예술은 나 자신에게 매우 중요하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인간의 많은 부분은 언어로 쉽게 표현할 수 없다. 우리는 아트 오브제를 집어들고 혼란스럽지만 강한 어조로 말할 수 있다. "이게 나야."

6. 경험을 확장시키는 길잡이 : 예술작품에는 타인의 경험이 대단히 정교하게 축적되어 있으며, 잘 다듬어지고 훌륭하게 조직된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예술은 우리에게 다른 문화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가장 웅변적인 예들을 제공하고, 그에 따라 예술작품과의 교유는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대한 이해력을 넓혀준다. 많은 예술이 처음에는 단지 '남의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순간 우리 자신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생각과 태도가 그 안에 잠겨 있음을 발견한다. 보다 나은 존재로 발돋움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이미 손닿는 거리에 와 있는 것은 아니다.

7. 감각을 깨우는 도구 : 예술은 우리의 껍질을 벗겨내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버릇없이, 습관적으로 경시하는 태도를 바로잡아준다. 우리는 감수성을 회복하고, 옛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본다. 예술은 색다르고 화려한 것만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가정하는 오류를 막아준다.  65





사랑


유명한 격률에서, 17세기 프랑스의 도덕주의자 라 로슈푸코는 "사랑 같은 게 있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들은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 강조한 바 있다. 이 격률은 사람들의 노예근성과 남을 모방하는 경향을 비웃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이 아닌 맥락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 한 실제적 현상에 우리의 관심을 돌린다. 우리는 우리의 광범한 감정들 중 어떤 것을 진지하게 여기고 어떤 것을 무시해야 하는지 결정할 때 개별적이 아니라 사회적이 된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단서에 이끌려 어떤 감정은 특히 중요하게 간주하고, 또 어떤 감정은 억누르거나 경시하는 것이다. ..

만일 인간의 감성을 인도하는 것이 문명사회를 창조하는 과정의 중요한 부분임을 인정한다면, 문화는 정치와 더불어 그 주요한 메커니즘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실제로 우리가 듣는 음악, 우리가 보는 영화, 우리가 거주하는 건물, 그리고 벽에 걸린 그림, 조각, 사진은 섬세한 길잡이이자 교육자 역할을 한다.

거의 2세기가 지난 후 오스카 와일드는 당대의 가장 인기 있는 화가를 언급하며, 라 로슈푸코의 사랑에 대한 통찰을 미술에 적용해 명언을 만들어냈다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까지 런던엔 안개가 없었다." 와일드의 말은 사람들이 영국의 수도를 관통하며 흐르는 물 위에 떠다니는 짙은 수증기를 보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의 정확한 요점은 화가가 풍부한 재능을 통해 안개의 지위를 끌어올리기 전까지 사람들은 안개를 봐도 흥미나 짜릿함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에는 우리의 감각을 일깨우는 힘이 있다.  100-102  


예술의 사명을 정의하자면 그 임무들 중 하나는 우리에게 좋은 연인이 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강의 연인이자 하늘의 연인, 고속도로의 연인이자 돌의 연인이 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사람의 연인이 된다.  102-103


사랑할 줄 아는 건 감탄하는 것과 다르다. 감탄에는 왕성한 상상력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능력이 필요치 않다. 문제는 두 사람이 삶을 공유하려 할 때 고개를 든다. 집, 자녀, 사업 및 가계 운영을, 처음에 멀리서 봤을 땐 감탄스러웠던 사람과 공유해야 한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저절 툭 튀어나오는 법이 거의 없고, 연습을 안하면 좀처럼 도움이 안 되는 자질이 필요하다. 상대방 말에 예바르게 귀기울이는 능력, 인내심, 호기심, 회복력, 관능, 이성 같은 것 말이다.

예술은 그런 자질들로 인돟는 유능한 길잡이다.  107


인내는 스릴과 거리가 멀다. 사실 인내는 흥분하지 않고 지내고, 욕구 충족을 미루고, 지루함과 무덤덤함을 견디는 능력이다...

명백하지만 소홀히 다뤄지는 진리를.. 좋은 것들도 평범한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진리를, 우리는 이 진리를 온전히 내면화할 수 없다. 습관처럼 완전히 몸에 밸 때까지, 매일매일 이 따분한 사실을 재인식해야 한다.  110


레오나르도는 호기심이 충만한 위인이었다.

호기심은 모름을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다. ..

발견을 향한 그의 의지는 체계적이다. 그는 이해하길 원한다. 여기저기 흩어진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그에게 의미가 업삳. 그는 중요한 것을 알기 원했고, 단 한 장의 명료한 지면에 자신의 통찰을 담아냈다.


모든 연인 관계에는 상대방이 나를 올바르게 탐사하기보다는 오해하고 마음대로 상상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숨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겪는 어려움과 문제점을 아는 척하면서 엉뚱한 곳을 짚을 때 우리는 심란해진다. 상대방은 진실을 알려 하지 않고, 내가 겪는 상황의 정확한 본질을 세심히, 애정을 기울여 알려 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당신의 문제는..." 또는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이라 말할 때, 우리는 허탈감을 느낀다. 그 견해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단지 내 상황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겐 아주 잘 맞을 수 있다(그의 전 애인, 그의 까다로운 형제, 그의 아버지 등, 현재를 깊이 조사하지 않을 때 우리는 곧잘 과거의 이론을 현재에 투사한다). 레오나르도는 경험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 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바라보고, 세계의 진정한 다양성과 개체성을 존중하는 태도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가르쳐준다.  112


불운하고도 아주 이상한 일들이 발생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끝나진 않는다. 문제에 맞는 해결책은 어딘가에 있고, 예상치 못한 일은 적응하면 된다.  114


관능은 촉감과 움직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즐기는 것이다.  115


합리적이라는 건 정확한 설명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따라서 합리적인 사람은 쉽게 화내지 않고, 속단하지 않는다.  117


연인 관계에서 나타나는 대단히 우울한 양산은, 처음 알았을 땐 더없이 감사하다고 느꼈던 사람에게 너무나 빨리 익숙해진다는 사실이다...

예술가들이 익숙한 것을 다시 보는 방법을 관찰하면 본받을 점을 얻을 수 있다...

그는 단지 이미 존재했지만 사람들이 무시하던 매력을 드러냈다. ..

오래된 연인 관계에서 현재에 안주하는 습관을 깨고자 할 때 우리는 마네가 그의 채소에서 발휘했던 변형의 상상력을 우리의 연인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겹겹이 쌓인 습관과 타성 밑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면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124


여행은 장대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따르는 위험을 알아야 하고, 위험에 대처하는 능력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

어색한 질문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잘못 할고 있었는가? 당신은 그 문제를 어느 정도까지 예상했어야 하는가? 당신은 그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무엇을 했어야 하며, 다음범에는 어떻게 할 작정인가? 사랑을 위한 준비가 거친 바다로 나가기 위한 항행 준비보다 조금이라도 덜 가혹하리라고 예상해선 안 된다. ..

우리의 문화는 빙하의 바다를 항해할 때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대단히 솔직하면서도, 사랑에 관해서라면 더없이 감상적으로 변한다는 점에서 너무 편향적이다.  126


가치 있는 여행이 쉬우리라고는 기대하지 말라.  127





자연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경계에 위치한 이구아수 폭포 사진이나, 푸른 알프스 계곡에서 바라본 융프라우가 담긴 엽서를 생각해보라. 이런 이미지들은 보는 즉시 우리를 매혹시킨다. 그러나 왜 그것들이 우리에게 중요한지,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보라고 하면, 적당한 대답을 떠올리기가 의외로 어려울 수 있다. 그리고 자연과의 만남은 폐부를 찌르듯 아플 수 있다. 자연은 마음같아선 항상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싶지만 실제로는 거의 주목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130





 


자본주의를 개혁할 필요가 있다는 말에 많은 사람이 동의한다. 이 개혁의 본질을 가리키는 생생한 단서들을 미술의 영역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162


진짜 문제는 자신의 관심사를 모른다고 겸손하게 인정하지 않는 태도, 약점을 가리기 위해 뒤집어쓴 오만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술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믿을 만한 경험에 기초해 평가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생각하고 느끼기 위해 수고해 본 적이 없고, 다소 공황 상태에서 단지 현재 이럴 것이라고 상상하는 유행을 모방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169


어떤 것이 "굉장하다" "멋있다" "놀랍다"고 말할 때 우리는 자신의 긍정적인 반응을 드러내는 중이지, 설명을 하는 건 아니다. 비평은 눈에 보이는 장면 뒤로 들어가 진정한 이유를 찾는 과정이다.  170





정치


올바른 정치 미술은 사회의 맥박을 감지하고, 집단생활의 문제점을 이해하고, 그 문제들을 날카로운 지성으로 분석하고, 선택한 예술 매체에 최상의 기술과 혼을 담아 관람자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만일 이것이 목표라면, 우리는 정치 미술의 범주를 기꺼애 확장시켜야 한다. 우선 경제적 불평등에만 폐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을 타락시키는 개인 간의 수많은 사소한 행동에도 폐해는 존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유한 사회의 주된 문제 중 하나는 그 시민이 점점 더 공격적이고 조급해지는 것이라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 정치 미술의 한 임무는 평온함과 용서를 독려하는 데 있을지 모른다.  199-200


세련된 문화는 국가적 자부심을 엄중히 적대시했다. 그렇다고 해서 자부심이 사그라지진 않았고, 다만 길을 잃고 미성숙한 채로 남았다. 자신의 공동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픈 욕망은 본래 자연스럽고 좋은 충동이다. 예술가들은 이 욕망에 주목할 가치가 이싿. 예술의 임무가 반드시 또는 오로지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들을 비난하는 데 맞춰질 필요는 없다. 자부심을 느낄 줄 아는 우리의 능력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도 예술의 임무다. 물론 무가치하거나 어리석은 대상에 자부심을 느낄 때는('우리에겐 철광산이 많기 때문에 우린 위대하다' 또는 '우린 피부가 하얗기 때문에 위대하다') 위험하고 역겨워진다. 우리는 이 자연스러운 충동을 가장 지적이고 가치 있는 방향으로 흐르게 할 필요가 있다. 집단적 자부심이 중요한 것은 한 개인으로서는 자부심을 느낄 기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우리의 심리적 약점은, 본성적으로 다소 불가피하게 집단적인 어떤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무엇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는지 모른다는 데 있다.  204-205


자부심은 정체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 자부심을 느끼려면, 먼저 우리가 실제로 누구인지 보여주는 긍정적이고 현대적인 자아상을 지닐 필요가 있다. 항상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정체성은 국가의 현재적 실체보다 몇 세대쯤 뒤처지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208


예술은 목적지를 보여주는 그림이며,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가르쳐준다. 그러나 그곳에 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단서를 주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예술작품을 마법의 물체로 취급하고, 그것이 가슴속에 박힌 소외, 질병, 혼란, 어려움을 저절로 치유해줄 거라 믿는다.  231


예술의 혜택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예술을 언제 밀쳐두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 이 책 전체에서 우리는 예술의 혜택에 주목해왔다. 예술이 인간관계와 관련된 우리의 능력들을 어떻게 증진시키고, 돈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개선하고, 우리의 본래적 자아에 대처하며 우리의 꿈을 정치적으로 구현하는 노력에 어떻게 일조하는지 살폈다. 이것만으로도 기존 예술계가 지금까지 권유해온 예술에 대한 사고방식에서 성큼 벗어나는 첫걸음을 땐 셈이다.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 예술의 진정한 목적은 예술이 덜 필요하고 덜 예외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다. 그 세계에서는 오늘날 사람들이 미술관의 격리된 전시실에서 발견하고, 찬양하고,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가치들이 온 세상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을 것이다. 예술을 사랑한다면서도 사회가 언젠가는 예술때문에 야단법석 떨지 않게 될 거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예술에 대한 진정한 열망은 그 필요성을 줄이는 데 있어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술이 다루는 가치, 즉 아름다움, 의미의 깊이, 좋은 관계, 자연의 감상, 덧없는 인생에 대한 인식, 공감, 자비 등에 냉담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예술이 나타나는 이상들을 흡수한 뒤, 아무리 우아하고 의도적이어도 단지 상징적으로밖에 드러내지 못하는 가치들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궁극적 목표는 예술작품이 조금 덜 피룡해지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어야 한다.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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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자들에게

좋은 놀이터를 만드는 기준으로 다음의 6가지 언칙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놀고 싶은 분위기를 만들고, 기분이 좋아지며, 머물로 싶은 마음이 들게 할 것

둘째, 새로운 것을 발견할 가능성을 갖추고, 무엇보다 찾는 사람에게 완전히 개방할 것

셋째, 인식할 수 있고, 제어할 수 있고, 조종할 수 있느 ㄴ위험이 있을 것

넷째, 다양한 분위기, 관심, 욕구에 맞춰 다양한 가능성을 제공할 것

다섯째, 바람, 시선, 소음을 차단할 것

여섯째, 지나친 '특별' 금지를 하지 말 것  9




여기는 일하는 곳, 저기는 생활하는 곳, 쇼핑센터, 문화센터, 스포츠센터, 더 나아가 휴양 지역까지 정합니다. 하지만 그런 행위는 실상 어디서든 놀 수 있게 해주면 아이들이 저절로 사회에 적응하고 통합할 수 있게 되는 자생적인 구조를 파괴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 활동이 자연스럽게 통합된 생활 구조 안에서는 따로 놀이터가 필요 없지요.  15


자동차나 비행기 소음보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에 더욱 화를 냅니다. 그 이유는 아이들을 야단치면서 성취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17


이상적인 놀이터는 손대지 않은 야생이라는 것입니다.  18


재미없는 놀이는 일이고, 재미있는 일은 놀이입니다!  21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사회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 안에서 아이들은 놀이 공간이 없는 이방인일 뿐입니다.  22


어른들은 놀이를 주도하며 자신이 올바르다고 여기는 활동만 허용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이것은 결코 자유로운 놀이가 아닙니다.

어른이 아이와 함께 노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차라리 아이와 놀아준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23


















지금 우리 도시와 마을, 주거단지와 집에는 아이들이 스스로 생활환경을 꾸미거나 아이들에게 적합하게 만들 수 있는 여지가 사라졌습니다.  31


놀이터를 제도판 앞에 앉아 설계해서는 안 됩니다. 직접 현자에 찾아가서 체험하고 고안하고 구상해야 합니다.  47


아이들은 인공적인 조형을 가하지 않은 야생을 좋아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놀이터를 계획한다면 야생을 가능한 한 많이, 다듬고 계획된 조형물은 적은 놀이터를 만들어야 합니다.  49


어린이, 어린이 놀이 또는 어린이 장난감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좋은 장난감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이 크게 달라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어른들이 보기에 유치하고 지루한 장난감인데 아이들은 기분에 따라 좋아하고 내다 버린 장난감을 찾아내 가지고 놀기도 하니까요.  89


아이들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색깔을 가장 좋아합니다. 알록달록한 색은 주의를 끄는 특성이 있습니다. 어른들은 당연히 아이들이 알록달록한 색을 좋아할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요구에 적합한 놀이 기구에는 이런 주의를 끄는 특성이 필요 없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른들이 말하는 '재미있는' 놀이 기구들의 대부분은 아이들이 전혀 재미있어 하지 않습니다. 놀이의 질이 재미를 만드는 것이지, 색을 칠하고 그림을 그녀 넣는다고 재미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90-91


강철로 만든 동물, 집, 탈것들은 아이들이 보기에 그저 쇠로 만든 보기 싫은 구조물일 뿐입니다. 반면 통나무는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 동물이 되고 탈것이 됩니다. 하지만 어른들이 통나무를 미리 탈것이나 동물 모양으로 만들어 놓으면 아이다운 상상력으로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기회를 잃고 맙니다 이것은 놀이 공간을 더욱 악화시키는 폭력일 뿐입니다.  91


놀이의 기능은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놀이 과정뿐 아니라 거기서 생겨나는 사회적 만남, 재미와 즐거움, 상상력 자극, 사고력 향상, 호기심, 발견의 기쁨, 체험 욕구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150


놀이 기구에서는 아이가 평소 주위에 있는 물건으로는 할 수 없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놀이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151


우리 어른들 스스로도 잘 모르면서 아이들이 무엇이 아름다운지 잘 모른다고, 그래서 아이들의 미적 감각을 키워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학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우리는 미학을 아름다움과 같다고 취급합니다. 하지만 미학을 뜻하는 독일어는 본래 '인지' '느낌'을 뜻하는 그리스마ㄹ에서 비롯됐습니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인지감각을 자지고 있습니다. 감각은 학습할 필요가 없지요. 인지 과정을 간단히 기술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은 모두 우리 감각기관에 입력되어 뇌로 보내집니다. 거기에서 이미 있던 경험과 비교하고 해석하지요. 우리는 그것이 '있다고 아는(인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경험 도시기에 맞지 않는 것을 나쁘다고 인식합니다. 그러면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지만 생각의 다리를 놓아 다른 경험들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오해로 이어집니다. 잘 알려진 이중그림(두 얼굴과 화분)을 하나의 예로 들 수 있지요. 하지만 눈이 네 개인 얼굴처럼 경험으로 해석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보면 우리의 인지 시스템이 불안해집니다.

물론 갓 태어난 아이는 아무런 경험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기 뇌의 구조는 매일 새로운 것을 살갗으로 느끼고, 듣고, 보는 경험들로 채우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험과 인상을 자주 많이 가질수록 아이는 인식 구조를 더 잘, 더 빨리 발전시킵니다. 이렇게 인식 기관에 끊임없ㅇㅣ 인지를 입력하고 쌓아가는 활동을 우리는 학습이라고 부릅니다. 학습을 위해 아이에게는 어떤 요구도, 교사도 필요 없습니다. 자신이 만난 상황에서 스스로 배우니까요. 

놀이는 이런 학습의 자연스러운, 아이다운 형태입니다. 놀면서 아이는 인상과 경험을 모으고 쌓고 변형합니다. 사람의 내면에서는 학습을 포함해 많은 것이 쾌락에 의해 조종됩니다. 새로운 것을 할 수 있게 되면 쾌락을 느끼고 이것은 새로운 경혐과 새로운 인상을 느끼고 인지하는 행복감을 알게 해주지요. 그래서 아이는 어른이 무리하게 요구하거나 압박하지 않는 한 자발적으로 즐겁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압박한다면 쾌락은 짐이 되고 맙니다.

미적 감각을 전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그전에 이미 어떤 물건은 좋아하고 어떤 것은 거부하며 어떤 것에는 무관심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능적 미적 감각 같은 것이 있는 걸까요?

아이들이 거부하는 물건에서 시작해 볼까요. 아기는 아직 선입견이 없습니다. 손에 닿는 것은 모두 입으로 가져가 감각기능을 확장합니다. 어른이 지켜보지 않으면 아기는 뜨거운 것에 데고, 독성 물질에 중독되고, 잘못 삼켜 사레가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스스로 인지하지요. 이렇게 입력된 인상들이 쌓여 아이는 사물들을 알아보고 분류할 수 있게 됩니다. 아이가 처음 보는 물건을 거부한다면 나쁜 경험을 했던 물건과 혼동하거나 그 기억과 연관시키는 것입니다.

다음 질문으로 가볼까요. 어른들이 보기에 아주 중요하거나 정말 아름답고 가치가 있고 놀랍다고 느끼는 것에 아이들은 왜 무관심할까요?

우리의 감각기관에는 아주 많은 인상들이 홍수처럼 밀려든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수많은 인상들 가운데 어른들은 재미없어 보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어느 정도 자동적으로 걸러내고 극히 적은 부분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아이의 인지 구조는 아직 세밀하게 분화되지 않아 어름 만큼 빨리 사물들을 인식하고 해석하지 못합니다. 아이가 느끼기에 자신의 경험 세계 밖에 있는 것은 놀라움입니다.  265-268


우리 뇌 속에는 경험과 상관없이 어떤 행동방식에 영향을 끼치는 타고난 구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후 경험에 의해 각인되어 단단한 구조가 될 수도 있고 무시되고 억압될 수 있습니다. 이 기본 구조 가운데 하나는 다정함, 부비기, 살갗 만지기, 따뜻함, 부드러움, 신체적 접촉 등에 대한 욕구입니다. 이 욕구는 곰돌이, 귀엽고 폭신한 인형, 부드러운 쿠션 등 '살에 닿는 물건'을 좋아하는 것으로 발전하지요. 이런 욕구는 청소년기 경험에 의해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거나 다른 욕구와 중첩됩니다.

또 하나의 기본 구조는 후손에 대한 보호 욕구입니다. 이 구조는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뚜렷해지고 어른이 되면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배려와 부모의 책임감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성향은 이미 아동기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작고 약하고 보호가 필요한 사물과 동물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보호가 필요한 존재인지를 비례가 다른 모습을 통해 알아봅니다. 일반적인 어른들의 크기가 아니라 몸집 전체에 비해 신체 각 부분의 비율이 다르다는 점이 경정적입니다. 다시말해 몸에 비해 머리가 크거나, 아주 큰 눈, 작은 코, 작은 입, 짧은 팔다리, 간당히 말하면 갓난아기와 같은 비율인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욕구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기본 구조는 성별 확인입니다. 아이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미 '전형적인 여성적' 또는 '전형적인 남성적' 행동을 합니다. 성적 정체성의 확인은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자신이 원하는 성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형을 가지고 노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여자아이는 빵빵한 가슴과 긴 머리칼, 날씬한 다리를 가진 바비 인형을, 남자 아이는 근육직의 액션  인형과 마초 세계의 부속물인 도구, 무기 등을 가지고 놉니다. 

또 하나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기본 구조는 두려워하면서도 으스스한 것을 가지고 놀면서 단련하려는 욕구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잔인한 것, 눈에 거슬리는 것, 오싹한 것에 아주 강하게 이끌리는 취향을 보고 매우 의아해 합니다. 어른들이 끔찍해 하는 것에 아이들이 이처럼 매혹되는 데는 분명 이것들이 특이하고, 새롭고, 무엇이라고 특정할 수 없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괴물 캐릭터와 공포 만화, 영화, 책들이 요즘 시대의 특징만은 아닙니다. 옛날에도 가장 인기가 있던 것은 끔찍한 이야기가 나오는 동화책이었지요. 많은 놀이 가운데 어른들이 아이들 정서에 나쁘니까 하면 안 되고, 아이들이 멀리하는 게 상책이라고 여기는 놀이들의 바탕에는 으스스함의 짜릿한 매력이 깔려 있습니다.

영향을 크게 미치는 또 다른 기본 구조는 소속을 향한 욕구, 가족을 이루려는 소망입니다. 아이들은 주변 환경과 주위 사람들의 행동을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비판 없이 그대로 모바합니다. 금기시하고 금지하지만 발생하는 일이든, 사회가 허락하고 인정하는 일이든 똑같이 따라하고 흉내 냅니다.

더 자라서 유치원, 학교에 다니면서 친구를 사귀고 다른 집단에 속하게 되면 아이는 새로운 집단의 행동에서 정체성을 확인하려 합니다. 또 현재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집단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습니다. 집단 안에서 힘세고 인정받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구성원들은 집단 안에서 특권적 가치를 지니는 물건과 행동방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지요. 옷차림, 머리 염색, 귀걸이, 문신, 태도와 언어 표현 등은 그 집단의 특징이지만, 만약 집단이 없다면 부적절하고 번거롭다고 여길 것들입니다. 그런 특징 때문에 집단 구성원은 외부와 구별되고 다시 한 번 집단에 단단히 결속됩니다. 집단만이 그의 상징과 태도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집단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행동은 유행에 매우 민감해 상징물도 그만큼 빨리 바뀝니다. 우리 어른들이 그것을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집단의 고유한 상징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를테면 그라피티 같은 것을 너그럽게 봐줘야 합니다.

아이와 어른 사이에 종종 오해를 부르는 기본 구조는 상상의 세계에 푹빠져 사는 아이들의 특성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곧잘 다른 세계 속으로 옮겨갈 수 있고 자기 주변 세계를 쉽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는 통나무가 오토바이가 되고 녹슨 하수관 하나가 말이 되었다가 공룡이 되기도 하고 우주선도 되고 돛단배나 마녀도 됩니다.

이처럼 아이들이 상상력을 한껏 발휘해 놀ㅇ이를 하고 사물을 재해석하는 모습을 보고 어른들은 아이를 위한다며 자신의 해석대로 지레짐작해서 형상을 만들어줍니다. 오두막은 버섯 모양으로, 통나무는 트랙터나 용 모양으로, 벤치는 자동차 모양이 됩니다. 어른들이 만들어낸 그런 형상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어른들이 아이에게서 상상력을 맘껏 발휘해 변형할 자유를 빼앗는 행위입니다. 기분과 놀이에 따라 계속 새로운 것을 사물 속에 집어넣는 상상을 하는 것이야말로 아이의 특징이며 아이가 원하는 것인데 말이지요. 다른 한편 어른들이 미리 해석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통나무는 세부까지 꼼꼼하게 모방한 근사한 트랙터나 용이 아니라 그저 겉모양만 엉성하게 흉내낸 모양일 뿐입니다. 그것은 어른들이 아이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고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아이는 아직 추상적인 형태를 인식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스스로 나무토막을 오토바이로 여기고 세세한 부분까지 상상해 넣을 수는 있지만, 어른이 만든 바퀴 두 개가 달린 추상적인 나무 형상을 보고 오토바이라고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어떤 아이들에게 세부까지 잘 만든 싸구려 플라스틱 오토바이와 귀한 목재를 써서 약간 추상적인 형태로 멋지게 만든 비싼 장난감 오토바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거의 모두 싸구려 플라스틱 오토바이에 손이 갈 것입니다. 아이들은 추상적 형태가 아니라 세부에 관심을 보입니다. 물론 아이는 한동안 플라스틱 오토바이를 가지고 논 뒤에는 싫증을 내기 시작하고 오토바이에서 금세 로켓이나, 비행기, 배, 말 또는 다른 것으로 관심이 옮겨갈 것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이런 추상적인 형태로 아이들의 상상력을 키워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아이들을 조종하는 행위일 뿐이지요. 아이는 상상하는 데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비슷한 오해는 우리가 아이의 체격에 비해 지나치게 거대한 비율로 만들어진 물건을 줄 때도 일어납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어른을 위해 만든 환경 안에서 살지요. 이 거대한 세계 속에서 아이들은 많은 것을 견디고 살아야 하는 난쟁이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이 물건들이 모두 너무 크지요. 아이들에게는 난쟁이 세상이 더 좋을 겁니다.

우리 어른들도 어린 시절을 되짚어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너무 크지 않았나요? 거실도, 문도, 정원도, 벤치와 곰돌이 인형도 다 컸습니다. 곰 인형은 거의 어른만 했지요. 감상적 기분에 빠져 조카나 친구 아이에게 줄 선물을 고를 때 우리는 어렸을 때 곰돌이를 기억하며 커다란 곰 인형을 사곤 합니다. 하지만 이 선물을 받은 아이는 커다란 봉제 인형을 보고 무서워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가지고 놀기에는 너무 무겁고 다루기 힘든 것입니다. 어릴 때 가지고 놀았던 본래 곰돌이를 어른이 되어 다시 보게 되면 우리는 그것이 다른 곰돌이만큼 작다고 깨닫습니다. 그때는 우리 몸이 작아서 곰돌이가 크게 느껴졌던 것이죠. 아이들은 자신에게 맞는 비율을 더 좋아합니다. 또 작게 축소되어 한눈에 볼 수 있고 다룰 수 있는 환경을 좋아합니다.

아이와 어른이 종종 다르게 느끼는 조형적 특징은 색상입니다. 의심할 것도 없이 색은 시대 흐름에 따라 유행을 많이 타고 햇빛과 조명 그리고 개인의 기분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매우 주관적인 견해의 문제입니다. 아이의 지각 기관에 유입되는 주변의 인상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 보면, 호기심 많은 시기임에도 대부분의 사물과 인상에 무관심한 아이들의 태도가 이해되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특이한 것, 반짝이는 것, 자극적인 것, 날카로운 소리가 나는 것에나 주의를 기울이지요. 강렬한 색상, 대비되는 색상, 서로 반대되는 색상들은 아이들의 주목을 끄는 색입니다. 아이들의 행동이나 반응을 유도하는 색이지요. 아이들의 즉각적인 반응만 보고 이 색상들이 아이들에게 좋은지 나쁜지, 이런 환경에서 아이들이 오랫동안 기분 좋게 느낄지 그렇지 않을지 등의 물음에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반짝이지 않고 수수한 색상이 아이들에게 더 좋을 때가 많습니다. 아이들은 두 번, 세 번 보아야 그걸 깨닫습니다.

어른과 아이가 서로 다르게 느끼게 만드는 또 하나의 중요한인지 특징은 시간입니다.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일 년은 그가 살아온 인생의 5분의 1입니다. 아이에게 세계가 시작됐던 과거, 즉 아이가 태어난 시점까지 돌이켜 보면 아이들이 쓰는 '옛날에', '그때는'이라는 말이 우리 어른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시간 감각이 없지요. 모두 지금, 당장, 여기에서 하기를 원합니다. "그거 가진 지 30분밖에 안 됐잖아", "저녁때까지 기다려", "2킬로미터 더 가서... 해줄게" 등의 말을 아이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말은 아이에게 '영원'을 의미하지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고 시간을 계살한 수 없으며 아이는 칭얼대고 떼쓸 것입니다. 아이에게 맞는 디자인은 아이에게 맞는 거리와 아이의 능력과 의지로 견딜 수 있을 만큼 짧은 시간 간격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노인들은 과거에 살고, 장년층은 미래에 살지만, 아이들은 현재, 지금 여기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시간의 흐름이라는 문제에서도 우리가 아이들을 오해하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여섯 달 전에 아이들은 지금보다 작았고 이런저런 일들을 하지 못했습니다. 여섯 달 뒤에는 지금보다 더 자라 있을 것이고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린이라는 상태는 계속 변한다는 뜻입니다. 아이가 자람에 따라 지금 살고 있는 주변 세계는 점점 작게 느껴지고 아이의 세계는 점차 확장됩니다. 나이가 들면서 아이는 계속 더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할 수 있을 테니까요.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경험한 아이는 내일은 오늘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을 터득합니다. 세계를 발견할 때 아이는 언제나 한계에 부딪힙니다. 그러면서 어제의 한계를 오늘 뛰어넘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지요. 아이들은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너는 아직 안 돼", "너도 나중에 자라면 해도 돼"처럼 많은 한계가 하지 말라는 금지로 구속할 때 아이는 이런 금지사항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런 불복종은 아이 때의 특징입니다. 아이의 상태는 정체되지 않고 계속 흘러가는 과정의 한 단계일 뿐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자신의 세계와 다른 미적 기준을 적용해 아이들의 세계를 만들어 줍니다. 아이들이 노는 세계를 디자인하고 만들 계기가 생기면 마침내 디자인 감각을 맘껏 실현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아이들의 미학적 요구와는 거리가 먼 색다른 디자인을 구상하곤 합니다. 어린이를 위한다며 어른들이 보기에 재미있고 환상적이고 뛰어난 디자인, 교육적이라고 여기는 것 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미학을 고집합니다. 어른이 만든 디자인과 형상들이 아이들 마음에 드는지 그들의 욕구에 합당 한지를 별로 고려하지 않고 말이지요. 

어린이용 공간, 방, 가구, 놀이 기구를 구상하고 만드는 일은 우리 어른이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아이들은 자기 욕구의 대상을 스스로 만들 수 없고 만들어서도 안 되지요. 다시 말해 언제나 결정하는 사람은 어른입니다. 

어린이 공간, 가구, 놀이 기구를 장려/억압/무시하는 것은 어떤 문화가 아이들과 그들의 욕구에 대응ㅇ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과도하게 조성한 어린이 공간은 아이들의 이해력에 맞지 않습니다. 단지 어른들 위주로 만들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일 뿐입니다. 

어린이게게 맞는 공간은 아이들에게 조형의 자유를 허용하고, 바꾸고, 장식할 여지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른에게는 종종 파괴, 낙서 또는 유치한 것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얼니이에게 맞는 세계는 어린이 고유의 미학을 지닙니다.

내일이면 아이들은 오늘과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예뻐하던 모습과 다르게 빨리 변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독립하고자 할 때 아이들은 어른에게서, 어른의 보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에게 반항할 것이고 충격을 줄 것이고 의도적으로 우리와 다르게 사물을 대하고 일을 처리할 것입니다. 마침내 아이들은 자신의 세계와 자신의 미학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그것이 본래 아이다운 모습입니다.  269-278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든 모든 것을 가지고 놉니다. 그래서 놀이터가 따로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이 언제 어디서든 모든 것을 가지고 놀 수 없다고 생각해서 어린이 놀이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논다는 행위는 "개인이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응을 도모하는 활동"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놀이는 온갖 가능성을 시험해 보고, 경계에 다가가고, 경험을 하고 배우는 일입니다.  279


좋은 놀이터란?

1. 놀고 싶은 분위기를 만들고, 기분이 좋아지며,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야 한다.

2. 새로운 것을 발견할 가능성을 갖추어야 하고, 찾는 사람에게 완전히 개방하는 것이 우선이다.

3. 인식하 수 있고, 제어할 수 있고, 조정할 수 있는 위험을 허용해야 한다.

4. 다양한 분위기, 관심, 욕구에 맞춰 다양한 가능성을 제공해야 한다.

5. 바람, 시선, 소음을 막는 시설을 갖춰야 한다.

6. 지나친 '특별' 금지를 하지 말아야 한다.


나쁜 놀이터란?

1. 훈련장 같은 놀이터

2. 조경 장식이 많은 놀이터

3. 휴식 공간으로만 이용되는 놀이터

4. 단 하나의 사용 집단을 위한 중앙 집중적이며 단조로운 형태의 놀이터

5. 비좁은 공간, 너무 적은 선택 가능성, 단조로움, 안전하지 못하고, 너무 삭막한 놀이터

6. 지나치게 안전하고, 지나치게 막혀 있고, 지나치게 규제가 많은 놀이터  280-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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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거대한 물음표였고, 나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질문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4


겨울만 되면 따뜻한 곳으로 '피한'을 떠나고 싶었다. 치안이 좋아서 혼자라도 안심하고 지낼 수 있고, 감수성을 자극할 만한 자연이나 전통이 남아 있는 곳이었으면 했다. 사철 꽅이 피는 곳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산책도 하면서 한껏 게을러지고 싶었다. 딱히 만날 사람도 없고, 꼭 사고 싶은 물건도 없고, 꼭 봐야만 하는 것도 없는 곳, 덜 쓰고, 덜 가지고, 덜 만남으로써 느긋해지고 싶었다. 여행이 주는 긴장감은 덜고, 일상이 주는 지루함은 벗어나 여행과 일상 사이에 머무를 수는 없는 걸까.  5


마치 현지인이라도 된 듯 슬렁슬렁 돌아다녔다. 매일 산책을 했고, 책도 많이 읽었고, 제법 글을 쓰기도 했다. 만날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적다 보니 나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8


여행과 일상의 중간지대에 머물며 덜 쓰고 덜 갖되 더 충만한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

자기만의 속도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좇아 떠나는 여해으, 공부하고 준비해서 떠나지만 가이드북에 의지하지 않는 여행, 여행 안에 여백을 두는 여행, 무엇보다 여행지의 삶과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여행..  9




발리


온갖 조건을 따지다 보니 여행을 시작도 하기 전에 피곤해졌다.  20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은 익숙했던 상대를 재발견하게 만든다. 내 안에 단단하게 굳어있던 상대에 대한 이미지를 녹여준다.  29


발리에서는 자식이 태어나면 이름 짓는라 고민할 필요가 없다. 태어난 순서에 따라 이름이 정해져 있으니까. 먼저 남자 이름 앞에는 I를, 여자 이름 앞에는 Ni를 붙인다. 첫째는 발리어로 와얀 혹은 뿌뚜, 둘째는 마데 혹은 까덱, 셋째는 뇨만 혹은 꼬망, 넷째는 끄뜻이 된다. 다섯 번째 후는 어떻게 하느냐고? 그때는 이름 뒤에 발릭(되돌아간다는 뜻)만 붙여 다시 돌아가면 된다. 마데 발릭, 뇨만 발릭 이런 식으로, 사실 이 뒤에 진짜 개인 이름이 하나씩 더 있는데, 이상하게도 다들 저렇게 부르고 소개를 한다.  36-37


돌아가면 입지도 못할 옷을 굳이 사 입는 이유는 뭘까. 현지인 혹은 다른 여행자들과 섞이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조금 더 과감하게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단지 편안해 보여서 일수도 있다. 어쨌든 여행지에서 옷은 나를 좀 더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수단이 되어준다.  52


여행이 우리가 품은 질문에 답을 주진 않지만 어딘가로 나아갈 수 있도록 등을 떠밀어주긴 하지. 일단 나아가면 결국 답도 찾을 수 있으리라. 아니, 평생 답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의 의미는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던져진 질문과 마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74


놀이와 노동이 분리되지 않은 삶..  97


남이 만들어놓은 것을 소비만 하는 삶에서 잠시 벗어나 스스로 창조하는 기쁨을 온전히 누린다. 

내 손으로 만든 무언가를 들고 ..

인간이 정서적으로나 지적으로 충분히 성장하기 위해서는 손을 쓰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헨리 소로가 그랬다. 소박한 삶의 기본 원치기 가운데 하나는 불필요한 것들을 소비하기 위해 돈을 버는 대신, 꼭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조금 버는 대신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 쓰는 일상을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핸드메이드 라이프를 산다는 것은 시간의 주인으로 사는 일의 은유 같기도 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온전히 몰입해본 사람은 안다. 그때 흘러가는 시간의 속도가 얼마나 다른지를.  98


마사지는 자신의 좋은 기운을 상대에게 나눠주는 행위라는 것.  103


자연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들일수록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세탁기, 청소기, 전기밥솥 등등 시간을 벌어주는 온갖 기계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늘 부족하기만 하다. 

생각해보면 시간이란 얼마나 다양한 속도를 가지고 잇는 것인지!  112


발리인들은 보기보다 영리하고 강인하다. 며칠 전 이브의 남동생이 이런 말을 했다. "너희 한국인들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면 여행 가는 데 쓰지? 우리는 돈만 생기면 종교의식에 다 써. 그래서 어떤 외국인들은 우리를 비웃지. 하지만 이런 걸 하지 않으면 외국인들이 발리에 오겠어? 발리가 다른 나라와 똑같아지면 누가 여기에 오려고 하겠어?"

외국인이 무엇 때문에 발리를 사랑하는지 이곳 사람들은 잘 안다. 그래서 대대로 지켜온 무화를 외국인에게 비싸게 팔아먹는다. 이들은 우붓 중심가에 들어오려던 맥도널드 매장을 막아낸 경험도 있다. 발리에 개발 바람이 불던 1970년대, 발리 사람들이 정부에 요구했다. 야자 나무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도록, 모든 건물은 전통 가옥의 구조를 따르도록 법을 만들어달라고. '5층 이하'라거나 '지상 20미터' 따위가 아닌 '야자나무보다 낮게'라니. 거기 깃든 시적인 마음과 유연함이 사랑스럽다. 그래서 발리에는 3층 이상의 건물이 거의 없어 어디서나 논과 야자나무가 보이고 숲과 계곡이 몸을 드러낸다.

개발과 성장을 추구하다 전통적인 가치를 잃어버린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발리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플란플란'하게 흘러가는 삶의 속도 속에서 지킬 것은 지키는 의연함이 엿보이니. 한마디로 발리는 자연을 파괴하며 돈에 영혼을 판 그런 흔한 휴양지가 아니다. 농지 정리라며 계단식 논을 싹 밀어버리고, 주택 현대화라며 초가집을 죄다 없애고, 무조건 개발만을 외치며 살아온 나라에서 온 나는 발리 사람들이 부럽기만 한다.  113-116





스리랑카


낯선 나라를 여행하다 우리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장면과 마주친다. 내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내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런 순간에 단정적으로 평가하고 불평하는 것은 쉽지만 왜, 어째서라는 질문을 던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감수해야 지금 여기에서 유럽에는 없고 스리랑카에만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좋은 여행자의 기본은 질문하는 능력과 겸허한 태도라는 사실도.  154


그날의 기분에 따라 차와 찻잔을 골라 물을 끓이고, 찻잎을 넣고, 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시간. 그 아무것도 아닌 일에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이 나는 좋다. 그렇게 차를 우리다 보면 내가 세상의 속도와는 상관없이 살고 있다는 기분까지 든다.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차우리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162


폐허에 관한 근사한 글을 쓴 영국의 자각 제프 다이어는 이렇게 말했다. "무언가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은 그냥 바라보는 것,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뿐이었다."  222





치앙마이


내 몸에 마지막 도시의 바람 냄새가 남아 있고  253


일상처럼 여행에도 지루한 순간, 쓸쓸한 순간이 찾아온다. 그런 순간에 책은 나를 구원한다. ..

생각해보면 여행과 책은 서로 닮아 있다. 질문을 던짐으로써 일상과 그 일상을 둘러싼 세계에 균열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그렇게 가장 온순한 방법으로 자신이 쌓아온 세계를 부수고 더 넓은 세계를 열어 준다는 점에서.  254





라오스


'좋은 여행이란 무엇일까.' '나는 좋은 여행자인가.' 이런 질문에 천착해왔지만 내가 좋은 여행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375-377


한 도시도 생명을 가진 유기체와 같다. 생겨나고, 번성하고, 쇠락하기도 한다. 나는 변해가는 어떤 장소의 짧은 순간을 함께할 뿐이다. 여행지가 보여주는 찰나의 얼굴. 그 얼굴이 때로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민낯이라 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처럼 그렇게 바라보고 싶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까지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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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는 말했다. "고독이 두려우면 결혼하지 마라."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고독이 두려우면 여행하지 마라."  9


이야기꾼의 의도는 언제나 듣는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에 사로 잡히도록 하는 것이며, 그의 눈을 반짝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햄릿>의 서두에서, 햄릿의 아버지 유령이 한 말은 여행 작가의 이런 의도를 이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가볍디가벼운 한마디로 네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젊은 피를 얼게 하며, 

네 두 눈을 궤도 이탈한 별처럼 만들고,

땋아서 묶어놓은 머리채를 풀어놓고,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세울 수 있으리라.'  10-11


여행의 기쁨, 그리고 그것에 대한 글들이 이 모음집의 주제이다. 무론 여행의 고통도 일부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기억 속의 고통은 서정적인 향수를 자아내기도 한다.  12


일단 움직여야하고 또 어디로 갈지를 알아야 한다. - D. H. 로렌스 <바다와 사르디니아>  16


관점은 여행을 떠나야 비로소 변화한다. 길이 아주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하게, 변명의 여지도 없이 아주 단호하게 방향을 틀거나 급경사로 바뀔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 모든 것들을 보게 된다. - 제임스 볼드윈 <산 위에 가서 말하라>


오랫동안 떠난 당신은 다른 사람으로 돌아온다. 당신은 결코 갔던 길을 되돌아오지 않는다. - <아프리카 방랑>  17


여행은 마음의 상태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이국적인 곳에 있는지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여행은 거의 전적으로 내적인 경험이다. - <신선한 공기의 마니아>  18


여행이 무엇이든 그것은 꿈꾸고 기억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낯선 풍경 속에 앉아 있으면, 그동안 무시무시하게 여겨졌던 온갖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다. 때로는 낯선 침대에서 악몽을 꾸기도 하고, 수년 동안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 사건들을 머릿속에 다시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음 때문에, 혹은 재스민의 강렬한 향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다시 잊는 것인지도 모른다. - <신선한 공기의 마니아>


인생의 다른 경험들도 그렇듯이, 여행에서도 한 번으로 족할 때가 많다. - 헤라클레스의 원주>


여행을 하다 보면 나를 붙잡으려 하고 부모처럼 굴면서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떠날 수 있는 것은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 <바다에 면한 왕국>  19


모든 여행은 순환적이다.. 장대한 여행이란 영감을 얻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 뿐이다.- <유라시아 횡단 기행>


내가 방금 도착한 장소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것, 바로 이 감정 때문에 나는 여행을 하고 싶어 한다. 이것은 내가 어디론가 떠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다. - <헤라클레스의 원주>  20


여행에는 삶을 바꿔놓는 마술적 가능성이 있다. 어떤 장소에 홀딱 빠져 그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동방의 별로 가는 유령 기차>


행복은 바람직한 것이지만 여행자에겐 진부한 주제일 뿐이다. - <아프리카 방랑>  21


여행 중에 발명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기쁨]이라는 시에서 아름답게 표현한 견해와도 같다. 우리가 세상과 마주할 때 "모든 것은 처음으로 생겨난다." "여성을 끌어안는 남자는 모두가 아담이며" "어둠 속에서 성냠을 켜는 사람은 모두가 불을 발명하고 있다"라고 한 것처럼, 스핑크스를 처음으로 보는 사람은 모두가 그것을 새롭게 보고 있다. "사막에서 나는 방금 조각된 젊은 스핑크스를 보았다... 모든 것은 처음으로, 그러나 영원히 생겨난다." - <아프리카 방랑>


여행은 살면서 경험하느 가장 슬픈 기쁨 중 하나이다. - 슈타엘 부인 <코린느 혹은 이탈리아>  22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크든 작든 두 힘 사이의 갈등이 존재한다. 하나는 은밀한 자유에 대한 갈망이고 다른 하나는 넓은 장소로 나아가려는 충동이다. 하나는 내향성, 다시 말해 왕성한 사고와 환상의 내면세계로 향한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외향성, 다시 말해 사람들과 구체적인 가치들이 존재하는 바깥 세계로 향한 관심이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러시아 문학 강의>  23


최상의 여행은 혼자 하는 여행이다. 보고 조사하고 평가하기 위해 여행자는 홀로여야 하고 또 홀가분해야 한다. 여행자에게 타인은 방해가 될 수 있다. 타인은 자신의 두서없는 인상들을 여행자에게 밀어 넣기 때문이다. 말동무가 될 만한 사람들은 여행자의 견해에 방해가 될 것이다. 반면에 지루한 사람들은 "이것 봐, 비가 내리네" 또는 "여기 나무가 굉장히 많은데" 같은 허튼소리로 침묵을 망치고 주의를 흩뜨릴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으면 사물을 분명히 보고 똑바로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다소 진부하더라도 자신의 감정에 비추어 특별하고 흥미로운 비전을 포착하기 위한 고독의 투명함이다. - <낡은 파타고니아 특급>  23-24


최고의 여해을 위해서는 단절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 있는 곳에 집중하라. 집에 돌아갈 채비를 하지 마라. 어떤 일거리도 떠맡지 마라. 연락 두절의 상태로 있어라. 떨어져 있어라.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당신과 어떻게 접촉할 수 있는지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당신이 지금 있는 곳만을 생각하라. 이것이 여행의 이론이다. - <동방의 별로 가는 유령 기차>  24


여행에서 주용한 것은 홀로 도착하는 것, 유령처럼, 해 질 녘 낯선 지방에, 불이 훤한 중심지 대신에 뒷문으로, 대도시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나무가 울창한 시골에, 주민들이 이방인을 본 적이 별로 없지만 친절히 맞이해주는 곳에, 그러나 주민들이 방문객을 다리 달린 돈으로 보지 않는 곳에 도착하는 것이다. - <동방의 별로 가는 유령 기차>  25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은 날에는 체중이 10킬로그램 이상은 줄어든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틀 연속 말을 하지 않은 날에는 내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빠졌다. 침묵은 나를 투명인간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익명으로 남는 것은, 그런 상태로 흥미로운 장소를 여행하는 것은 떨쳐버릴 수 없는 유혹이다. 그것은 중독된다. - <바다에 면한 왕국>  26


여행자의 또 다른 자만은 자신이 본 것을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지나간 길로 풍경을 대체하고 자신이 겪은 사건만을 중요하다 여긴다. 이 점에서 여행자는 착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착각이 전혀 없다면 여행자는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것이다. - <바다에 면한 왕국>  28


여행이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것이다. - <동바의 별로 가는 유령 기차>  29


큰 도시들은 내게 도착지처럼 보인다. 여행자를 벽으로 둘러싸며 멈추게 하는 곳, 거대한 건물들이 여행자에게 "이제 도착했습니다"라고 속삭이는 종점의 의미 외에 아무것도 없는 곳처럼 보인다. - <헤라클레스의 원주>  30


내게 최고의 여행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침범을 포함하고 있다. 위험은 여행자에게 도전이자 초대이다. 모험을 파는 것은 여행 산업의 한 주제가 되었으며, 여행은 전리품이 되었다. - <신선한 공기의 마니아>  31


모든 장소는, 그곳이 어디든 무엇이든 상관없이 방문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방문객이 뜸하고 사람들이 여전히 전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장소가 내게는 가장 가치 있어 보였다. 왜냐하면 이런 곳은 가장 응집된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곳은 해독 가능했고, 거의 언제나 나를 고양시키는 것처럼 느껴졌다. - <헤라클레스의 원주>  32


소설을 쓰는 것과 가장 비슷한 일은 낯선 풍경 속을 여행하는 것이다. - <바다 괴물들을 지닌 일출>  35


보통 여행자들은 대담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의 죄스러운 비밀은 여행이 지상에서 시간을 보내는 가장 게으른 방법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여행은 뼛속까지 게으른 일이며, 교묘하고 빈둥거리는 회피이다.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을 침범하면서 우리의 뚜렷한 부재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방랑하는 식객으로서 아주 불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 <동방의 별로 가는 유령 기차>  36-37


여행자는 낭만적인 관음증 환자 주에서도 가장 탐욕스러운 사람이다. 그리고 여행자의 인격 속 꼭꼭 숨겨진 부분에는 허영과 건방짐, 거의 병적이라고 할 수 있는 허언증이 있다. 여행자의 최악의 악몽이 비밀경찰이나 주술사, 말라리아가 아니라, 다른 여행자와 만나는 일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호기심도 있다. 심지어 가장 소심한 환상가들도 때때로 그들의 환상을 수행하는 만족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때때로 신속히 떠나야만 한다. 무단침입은 어떤 이들에게는 즐거움이다. 게으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목적 없는 기쁨이야말로 순수한 기쁨이다." - <동방의 별로 가는 유령 기차>  37


여행은 편견, 완고함, 편협함에 치명타를 날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여행이 몹시 필요하다. 인간과 사물에 대한 광범위하고 건전하며 누그러운 견해를 일생 동안 지구의 한 작은 구석에서 무기력하게 지내는 것으로는 얻을 수 없다. - 마크 트웨인 <마크 트웨인 여행기>  38


여행자는 사람들의 누넹 그 본연의 모습으로 비쳐야만 한다. 하느님의 천국에 살 가치가 있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종교 없이도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는 닳아빠진 셔츠를 입었지만 순수한 인간의 심장을 가졌으며 오래 고통받는 사람이다. 비록 길이 해악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세계의 끝까지 여행할지도 모른다. - C. M. 다우티 <아라비아 사막에서의 여행>  39


여행기와 소설의 차이는 눈에 보이는 것을 기록하는 것과 상상으로 아는 것을 발견하는 것의 차이이다. - <유라시아 횡단 기행>


인간적인 어떤 것이 기록될 때, 훌륭한 여행기가 탄생한다. - <지구의 끝으로>  41


나는 개가 걷는 속도로 여행했을 때 내가 최고의 여행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가드너 맥케이 <지도 없는 여정>  43


모든 진정한 연애가 그 나라 말을 거의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지만, 매혹적인 어둠으로 더 깊이 끄는 외국으로의 여행처럼 느껴진다면, 모든 외국 여행도 연애가 될 수 있다. 거기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이며 누구와 사랑에 빠졌는지를 골똘히 생각한다.. 모든 훌륭한 여행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옮겨져 공포와 경이의 한가운데에 놓이는 것이다. - 피코 아이어 <우리는 왜 여행하는가>  46


그는 자신을 관광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여행자였다. 그는 그 차이가 부분적으로는 시간의 차이라고 설명하곤 했다. 관광객이 일반적으로 몇 주 후나 몇 달 후에 집으로 서둘러서 되돌아가는 반면, 여행자는 한 장소나 그다음 장소에 똑같이 속해 있다. 여행자는 몇 년에 걸쳐 지구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 폴 볼스 <셸터링 스카이>


관광객은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모르고, 여행자는 자신이 어디로 갈지를 모른다. - <오세아니아의 행복한 섬들>


관광은 진짜 게으른 사람을 즐겁게 하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관광은 고대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엿듣는 학문과 매우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 <유라시아 횡단 기행>  47


여행은 휴가가 아니며, 대개는 휴식의 정반대이다. - <낡은 파타고니아 특급>  48


사치는 관찰의 적이며, 당신이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는다는 좋은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비용이 많이 드는 탐닉이다. 사치는 우리를 망치고 어린애 취급하며 우리가 세계를 아는 것을 막는다. 이것이 사치의 목적이다. 또한 이것은 호화 유람선들이나 값비싼 호텔들이 마치 다른 별에서 온 것 같은 어리석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이유이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부자들은 결코 경청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비싼 생활비에 대해 끊임없이 투덜댄다. 실제로 부자들은 대개 자신이 가난하다고 불평했다. - <동방의 별로 가는 유령 기차>  48-49


관광은 정적인 사회에서 가장 활발하게 추구되며, 대개 기동력 있는 부자들이 기동력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저지르는 분별없고 서툰 방문이다. - 낡은 파타고니아 특급>


사람이 큰돈을 벌고 나면 좋지 않은 청취자가 되고, 참을성 없는 관광객이 된다. - <헤라클레스의 원주>  49


도보로 아프리카의 국경을 넘은 일이 없는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간 적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도의 공항은 단지 신뢰를 얻기 위한 속임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나라의 가장자리에 있는 먼 국경은 이 나라의 중심을 이루는 현실이다. - <아프리카 방랑>  52


기차를 타고 가는 여정은 여행이다. 그 밖의 탈것들, 특히 비행기를 타고 가는 과정은 그저 이동일 뿐이다. 여행은 비행기가 착륙할 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 <유라시아 횡단 기행>  54


기차만큼 자세한 관찰을 유발하는 운송 수단은 없을 것이다. 비행기 여해에 대한 문학은 존재하지 않으며 버스 여행에 대한 문학도 그리 많지 않다.

기차는 누구든 그 안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자고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글을 쓸 수도 있기 때문에 효율적이다. 지나치는 풍경과 기차 자체가 깊은 인상을 남긴다. 비행기 여행은 늘 똑같지만 기차 여행은 언제나 새롭다.  66


여행에서 해 질녘 기차에 올라 춥고 떠들썩한 도시에서 침대칸 문을 닫고는, 아침에 새로운 위도에 도착하리라는 것을 예감하는 것보다 멋진 일은 없는 것 같다. - <낡은 파타고니아 특급>


재즈의 반은 철도 음악이며, 기차의 운동과 소음은 재즈의 리듬을 갖고 있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재즈의 시대는 또한 철도의 시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음악가들은 기차로 여행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여행을 하지 않았고, 약동하는 템포, 덜컹거리는 소시, 쓸쓸한 휘파람 소리가 노래들 속으로 들어왔다. 노선이 지나가는 철도 주변의 소도시들도 노래들 속으로 들어왔다. - <낡은 파타고니아 특급>  67-68


기차는 운송 수단이 아니라 그 지방의 일부이며 일종의 장소이다. - <중국 기행>


기차는 최소한의 위험으로 최대한의 기회를 제공한다. - <유라시아 횡단 기행>  70


즐거움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 글 중에서 아마도 여행기나 항해기보다 즐겁거나 유익한 것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듯이 그 글이 즐거움과 인류에 대한 정보라는 양 측면을 목적으로 쓰였다면 말이다. 거기에다가 여행자들의 대화가 열렬히 추구된다면, 전반적으로 더 교훈적이고 재미있어질 것이므로, 그들의 책은 훨씬 더 유쾌한 동반자가 될 것이다. - 헨리 필딩 <리스본 항해기> 


인간의 관습과 풍속이 모든 곳에서 똑같다면, 언덕과 계곡과 강이 다르다고 해도, 여행만큼 따분한 일은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지구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다양한 시점들은 여행자에게 그의 노동에 걸맞은 만족을 거의 주지 못할 것이다. - 헨리 필딩 <리스본 항해기> 85


내가 여행 생활을 하면서 내내 존경해온 여행가는 작가 더블라 머피이다. ..

그녀는 결혼한 적이 없었지만 레이첼이라는 딸이 있었다. 그녀는 딸을 홀로 키우면서 인도, 발티스탄, 남미, 마다가스카르 등 어디든지 데리고 다녔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아이와 함께 있다는 것은 당신이 공동체의 선의를 신뢰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88-89


'여행할 나라를 선택하라

여행 안내서를 활용해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지역들을 확인하라

그런 뒤 그 반대 방향으로 가라'

이 조언은 정치적 정당성에 어긋나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여행자와 관광객을 뚜렷하게 구분 짓는 것이 '속물적'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또한 현실적이기도 하다. 현실 도피적인 여행자는 공간, 고독, 침묵을 필요로 한다. 비극적이게도 나는 길이 나면서 자연 서식자가 사라져가는 것을 수차례 목격해왔다.  90


'역사를 열심히 공부하라'

어떤 종교의 역사에 대해 무지한 채 여행한다면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당신의 여행에 새로운 차원을 더해 주리라고 믿는다 해도, 전문적인 사회학적 혹은 정치적인 연구는 불필요하다. 그러지 않아도 여행을 하다 보면 현 정치 상황이 충분히 드러날 것이다... 여행하기 전에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금기 사항들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배워라. 그런 뒤 이 금기들을 성실하게 존중하라. 선물로 돈을 주는 것이 부적절한 곳에서 어떤 대체물이 그 역할을 행하는지를 알아내라.  91-92


'혼자 여행하거나 사춘기 이전의 아이와 함게 여행하라'

어린이의 존재는 공동체의 선의에 대한 당신의 신뢰를 강조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인종이나 문화적인 차이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92


'주의하되 소심해지지 마라'

단지 용감하거나 무모한 사람들만이 지도에 표기되지 않은 곳을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아무 근거가 없다. 사실 현실도피주의자들은 극도로 주의 깊다. 이것이 그들의 특징이며 생존 메커니즘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이다. 그들은 출발 전에 가능한 위험들을 검토하고, 일어날 법한 위험에 대처할 준비를 한다. 

여기에 기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병이 반쯤 비었는가 혹은 반쯤 찼는가? 왜 집에 편안히 있지 않고 외국에서 당신의 뼈를 부러뜨리려고 하는가? 낙천주의자들은 재앙이 발생할 때까지 믿지 않고, 그래서 두려워하지도 않는데, 이는 용감함의 반대라고 할 수 있다.  96


존 스타인벡 : 여행에 대한 글쓰기는 개미탑을 쌓는 행위이다. 

그것은 형태도, 모양도, 목적도 없고, 심지어 요점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것은 가장 예리한 사실주의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 주위에서 보이는 것은 개미가 파낸 흙이 땅 위에 쌓인 개미탑처럼 목적과 요좀이 없기 때문이다. - 1961년 7월의 편지 <스타인벡:편지 속의 삶>  103


여행할 때, 지식을 집으로 가져오고 싶다면 몸에 지니고 와야 한다. - 새뮤얼 존슨의 말, 제임스 보즈웰의 <존슨의 생애>중에서  149


여행가의 조건 - 당신이 건강하고, 모험심이 강하며, 재산이 적당히 있고, 마음을 특정 대상에 집중할 수 있다면 여행하라. - 프랜시스 골턴  201


강력한 사람이 반드시 가장 뛰어난 여행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일을 최상으로 이루는 데 관심을 갖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여행가가 된다. - 프랜시스 골턴


따분한 여행은 일행을 서로 화나게 하기 쉽다. 그러나 여행가는 힘든 상황에서도 그의 의무에 최선을 다한다. 그는 두 배로 친절하게 대하고, 모욕적인 말을 점잖게 받아들이며, 응수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하는 것을 의무라고 여긴다. 이러한 때에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너무 딱딱하게 구는 것은 과잉일 뿐이다. 왜냐하면 정작 어려운 것은 말다춤을 하는 것이 아니라 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프랜시스 골턴  202


한두 가지 시련은 대부분의 위대한 여행기들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여행자는 유쾌하고 수월한 여행으로부터 벗어나 운 나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런 뒤 시련은 책에 진지함과 깊이를 더해준다. 그 결과 우리는 여행자를, 자신의 한계를 시험당하는 한 사람의 본성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205


일반적으로 영국인의 여행의 역사는 햇빛을 찾아 떠난 역사이기도 하다.  220


여행자는 이방인이다.  228


이방인이 되는 것은 어렵다. 여행자는 아무 권력도 영향도 알려진 정체성도 없다. 이것은 여행자에게 낙천주의와 가슴이 필요한 이유이다. 왜냐하면 확신 없는 여행은 비참하게 끝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여행자는 익명이고 무지하고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휘둘리거나 속기 쉽다. 여행자는 '미국인' 혹은 '외국인'으로 알려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떠한 권력도 없다.  230


나는 어떤 곳에 가기 위해 여행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여행할 뿐이다. 나는 여행을 위해 여행한다. 중요한 일은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과 장애물을 좀 더 가까이에서 느끼기 위해, 문명의 이 깃털 침대로부터 내려오기 위해, 그리고 잘린 부싯돌들이 뿌려진 지구를 이 발밑에서 느끼기 위해.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당나귀와 함게한 세벤느 여행>


여행은 기껏해야 자서전의 단편일 뿐이다.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세벤느 일기:프랑스 고산 지대 여행에 대한 노트>  239


나는 기차 여행의 주된 매력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차는 우리를 목적지로 데려간다. 기차는 스쳐 지나가는 장면을 거의 방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그 지방의 차분함과 정적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리고 날듯이 달리는 차량들 안에 우리가 머물러 있는 동안, 사념은 기분이 내키는 대로 인적이 드문 정거장에서 내린다.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질서 잡힌 남쪽>  240


모든 진지한 순례자는 순례의 장소를 발로 여행한다. 걷는다는 것은 정신적인 행위이다. 홀로 걷기는 우리를 명상으로 이끈다. 순례를 가리키는 한자는 '산에게 경의를 표함'이라는 뜻이다.  244


보행자는 사물을 명료하게 본다. 보행자의 머리 위의 태양, 보행자의 얼굴을 스치는 바람, 보행자의 발밑에 있는 땅 등.  253


신성화된 걷기는 육체적인 운동과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걷기는 요가나 정신적인 행위에 더 가깝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말하는 걷기는 병자가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고 아령이나 의자를 드는 운동과 전혀 다르다. 걷기는 하루 일과이며 모험이다." 걷기는 사고의 과정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걸을 때 반추하는 유일한 동물인 낙타처럼 걸어야 한다. 어떤 여행자가 워즈워스가 하인에게 그의 주인의 서재를 보여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가 그의 도서관이에요. 그러나 그의 서재는 야외랍니다.'"  261-262


모트 로젠블룸.. 나는 그가 40년 이상 먼 곳들을 여행할 때 도움이 되었던 몇 가지 여로의 규칙들을 제공해달라고 부탁했다..

셋 - 많은 메모를 하고, 해독할 수 없게 되기 전에 메모들을 재독하라. 아니면 그건 단지 나에게만 해당될지도 모른다. 지금은 녹음기가 신뢰할 만하다. 하나 가지고 다녀라. 당신이 놓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놀랄 것이다. 

열 - 어떤 먼 곳에 도착하자마자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빠져나가는 가장 빠른 길을 알아내는 것이다. 즉 버스나 기차나 비행기 시간표를 체크하라. 어떻게 떠나는지를 미리 알아야 한다.  355-358


레비스트로스는 그의 여행기인 <슬픈 열대>

그는 철학자로 훈련받았지만, 인류학과 언어학의 탁월한 이론가였다. 그는 또한 신화학의 해설자였고 구조주의의 서술자였다. ..

여행은 보통 공간의 이동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부적절한 개념이다. 여행은 공간, 시간, 사회 계층에서 동시에 발생한다. 각각의 인상은 이 세 개의 축에 공동으로 연관될 때에만 규정될 수 있다. 그리고 공간은 본질적으로 3차원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여행에 대해 적절한 묘사를 하려면 다섯 개의 축이 필요하다. - <슬픈 열대>


여행자가 여행을 통해 자신의 문며오가 근본적으로 다르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문명과 접촉했던 시대가 있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그러한 예는 점점 줄어들었다. 현대의 여행자는 인도를 방문하든 미국을 방문하든, 생각보다 덜 놀란다. - <슬픈 열대>


아마도 그때의 여행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막보단느 내 마음의 사막에 대한 탐험이었다. - <슬픈 열대>  359-360



하나 - 집을 떠나라.

둘 - 혼자 가라.

셋 - 가볍게 여행하라.

넷 - 지도를 가져가라. 

다섯 - 육로로 가라.

여섯 - 국경을 걸어서 넘어라.

일곱 - 일기를 써라.

여덟 - 지금 있는 곳과 아무 관계가 없는 소설을 읽어라.

아홉 - 굳이 휴대전화를 가져가야 한다면 되도록 사용하지 마라.

열 - 친구를 사귀어라.  488-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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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좌파란 무엇인가


요동치는 이념의 스펙트럼 속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나는 한국 좌파들의 공통점은 '매우 격렬하게' 좌파 노릇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좌파로서의 삶이 격렬한 만큼이나, 어느 한순간 좌파 되기를 내려놓고 다른 길을 떠나는 자들도 적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좌파 노릇이라는 것이 한때의 신념이었고 직업이었으며 동시에 직장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한때 정신을 잃을 만큼 사랑의 신열 속에 몸을 떨다가 너덜거리는 심장을 부둥켜안고 뒤돌아서는 사람처럼.  6


2008년 프랑스로 돌아와 좌파에 대한 나의 의문을 그대로 이 사회에 투사했을 때 이들에게선 조금 다른 답드이 튀어나왔다. 단지 시대에 유행이 동시대에 공존하는 듯한 이 사회의 다원적 특성처럼, 여기엔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흘러가는 일정한 흐름 대신 저마다 다른 오색찬란한 색깔의 좌파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었다. 반성장주의자, 전투적 페미니스트, 반신자유주의장, 아나키스트, 트로츠키주의자.. 예전에 사라진 줄 알았던 구닥다리 이념정당에서부터 최신 버전의 전위적 좌파들, 혹은 뭐라 명명할 수 없으니 자본의 구심력에서 제 힘으로 벗어나 '마이웨이'를 휘적휘적 걷고 있는 자들이 사회 곳곳에 무수히 흩어져 있었달까. 목숨 바쳐 좌파 노릇을 하지도 않았고, 희생 따위를 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마치 걸치기 편한 옷마냥 좌파의 생각을 걸치고 누리고 있는 이들이었다.  6-7


여기에서도 여전히 좌파로 사는 일은 상당한 지구력과 신념을 요하는 일이다. 자본의 구심력에 빨려 들어가지 않고, 보이지 않는 싸움의 끝에 절망하지 않기 위해.  7




노인을 위한 나라를 꿈꾸다 - 테레즈 클레르


바바야가의 집... 21명의 여자 노인과 네 명의 젊은이가 한 건물 안에 있는 각자의 공간에서 생활한다. 각자가 차지하는 공간의 규모에 따라 월세 시세의 절반에 해당하는 200~400유로(약 24만원~48만원)의 월세를 내며(거의 모든 프랑스 노인은 국민연금을 수혜하므로 이 정도의 집세는 큰 부담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대부분의 노인 요양원들에 비해서는 월등히 낮은 가격이다), 모든 거주자가 일주일에 5~10시간씩 공동체의 운영을 위한 노동시간을 제공한다. 각자의 공간에는 부엌과 화장실, 샤워실이 있고 세탁실만 공동으로 쓴다.  17


"대학은 굳은 지식을 전하는 곳이야. 거기서 배운 지식은 사람들을 해방시키기보다 가두는 경우가 더 많아. 하지만 운동가는 자신이 꾸는 꾸모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문제들로 인해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하고 방법을 모색하게 되지. 토론하고 선언하고 실천해 나가면서 온전히 우리에게 피와 살이 되는 지식과 지혜를 삶 속에서 얻고, 그것은 우리를 더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해방의 열쇠를 제공하지. .. 그러니 질문을 멈추지 말 것. 질문의 노마드(nomad : 유목민)로 계속 살아가는 것. 그것이 활동가의 첫 번째 사명이야."

테레즈는 마흔한 살에 이혼한 후 단 한순간도 페미니스트 활동가로서의 삶을 멈추지 않았다.  28




분홍 돼지 엽서를 그리는 남자 - 에릭 브로시에


디즈니 사가 스테레오 타입의 이미지를 무한복제하고 상업화해서 특정한 스타 캐릭터 속에 상상력을 가두고 이미지를 소비하게 만들어서 아이들을 온순한 자본주의의 노예로 길들인다면 에릭의 모든 작업은 축제의 순간에만 존재한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상상 속의 새로운 존재들을 창조한다.  35


하기 싫은 일이 뭔지 아는 것, 그래서 그 일을 하지 않는 건 쉽다. 일단 흥이 안 날 테고, 몸도 안 따라줄 테니, 그러나 무한히 열려 있는 선택지 앞에서 원하는 것을 고르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도대체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지 못하는 병은 네 개 중 하나의 정답, 그것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하나가 아니라 세상이 옳다고 생각하는 하나를 추정하는 훈련만 무수히 해온 사람드에게는 어쩌면 피할 수 없는 병이다. 많은 이가 죽을 때까지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무수한 세상의 시선과 관심, 대세에 떠밀려 다닌다. 그러다가 결국 원하는 것이 뭐였는지도 모른 채 생은 끝나버리기 십상이다. 죽는 날에도 유행하는 방식에 따라 자손들의 체면을 구기지 않으면서 유행하는 수의를 입고 유행하는 관 속에 얌전히 들어가 주어야 하는 것이 수많은 평범한 사람의 운명이다. 

사람들은 자유의 번잡함이 괴로운 나머지 자발적으로 선택지를 좁힌다. 자율화된 학생들의 복장은 교장들의 용단과 학부모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다시 교복 시대로 복귀하고, 세상의 미혼 남녀들은 자신의 직관과 느낌으로 짝짓기를 포기하고 결혼중계업체의 배를 불리는 선택을 한다. "자유는 싫어. 선택은 귀찮아. 그냥 정해줘. 그럼 시키는 대로 할게." 이런 아우성이 곳곳에서 들린다. 최근 청소년들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심각한 증상은 불같은 반항이 아니라 '무기력'이라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10년간의 짧은 민주화 경험이후 이토록 왕성하게 자라난 독재 시절에 대한 노스텔지어를 생각해보면 지금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은 단지 부정선거의 결과만은 아닌 듯싶다. 절반 정도는 독재와 권위가 익숙하고 편한 사람들이 불러들인 재앙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세상을 움직이는 종교가 되면서 자본의 논리는 지구촌 사람들을 빠른 속도로 제압해갔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뭔가 다른 것을 희망하기를 점점 잊어가는 중이다.  38-39




루브르박물광의 무료입장을 허하라 - 베르나르 아스크노프


박물관에 있는 모든 작품은 시민 모두의 것, 인류 모두의 것이다. 누가 누구의 저자권을 보호하기 위해 사진 찍는 것을 방해하는가.


Q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승리의 경험을 종종 누리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A 결과적으로 그렇다. 난 단지 폭로하는 데서 만족을 느끼고 저항하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운동보다 구체적인 대안을 제안하고 그것이 실천되기를 희망한다.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불의를 폭로하고, 그 순간 언론의 조명을 받는 운동의 방식도 있다. 일시적으로 매우 만족스럽고 뿌듯하지만, 결국 뭔가를 바꾸기 위해선 폭로하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난 구체적인 대안을 제안하고 그것을 얻어내는 경험들이 축적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57-58




세상의 좋은 것들을 자본가에게 뺏기지 마라 - 자크 제르베르


<르피가로>지의 인터뷰 기사를 봤는데, 박근혜란 사람의 세계 인식은 냉전시대에 머물러 있다고 느꼈다.  65


어머니는 나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자본가들에게 좋은 것을 다주지 마라. 우리가 그것을 가져야 한다. 세상의 아름다운 모든 것은 네 것이다. 아름다운 정원을 보았을 때 주저하지 말고 문을 열고 들어가라. 누가 '거긴 네 정원이 아니다'라고 말하거든 이렇게 대답해라.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모두의 것이라고." 나는 어머니의 말대로 행동했다.  69


프랑스 공산당이 더 이상 자기 개혁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자각했던 1979년 나는 당을 떠났다. 공산당은 심각하게 교조화되었고 자기 개혁에 실패하면서 급격히 퇴화해갔다. 그것은 이미 내가 동구 공산당원들에게서 보았던, 비대한 교조주의의 침침한 그림자였다.  


Q 탈당 이후의 삶은 전과 많이 달라졌나? 정치적 지향에도 변화가 있었나?

A 탈당 이후의 나는 '개인적인 공산주의자'로 살기 시작했다. '코뮤니즘(communism)'은 공유재산을 뜻하는 라틴어 '코뮤네(commune)'에서 따온 말로 공동소유, 나눔의 의미를 갖는다. 나는 근본적으로 내가 가진 것들을 이웃과 나누기를 좋아하고 사유하는 것, 나 혼자만 갖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한때는 일상적 실천보다 모순이 쌓이고 쌓여 폭발하는, 이른바 혁명의 방식으로만 세상을 개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둘 다 필요하다. 피에르 라비가 말한 콜리브리정신, 즉 개개인이 각자의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 ㅗㅕㅓ다. 흔히 일상에서의 실천을 말하는 사람들과 혁명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은 각자의 입장만 고수하려 한다. 내가 보기에는 반드시 이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되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이해해야 할 한 가지는 세상을 바꾸기 전에 자기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 스스로를 변혁할 수 있어야 세상도 변혁할 수 있다.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 이다지도 힘든 이유는 개개인이 자신을 변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존재의 감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 힘든 것이다. 16세기 모럴리스트 라 보에시가 <자발적 복종>에서 한 말을 되새겨보자. "독재자가 그토록 커 보이는 것은 우리가 그의 무릎 아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어선다면 더 이상 독재가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세상을 구조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도구를 우리에게 주었다면 프로이트는 우리에게 각자의 내면을 해방할 수 있도록하는 도구를 주었다고 본다. 이 둘이 제공한 도구를 통해 우리는 집단과 개인이 덜 고통스럽고 덜 비굴하게 살 방법을 찾을 수 있다. 72-74


68혁명

68혁명은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파리 10대학에서 남학생들이 여학생 기숙사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요구를 했고, 그에 반대하는 권위적인 대학 당국과 충돌하게 된 것이 시발점이었다. 이 사건은 드골로 대표되는 권위주의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분노의 폭발로 이어졌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노동자들이 연대하면서 프랑스 역사상 가장 큰 총파업이 이뤄졌다. '금지를 금지하라' '리얼리스트가 되라, 불가능을 요구하라' '욕망을 현실로 삼자' '텔레비전을 끄고 눈을 떠라' 같은 일련의 슬로건들은 당시 68혁명의 불길이 가톨릭적 전통과 자본주의 소비사회에 대한 거부, 그리고 구태로부터의 해방으로 번져갔음을 보여준다. 

시위는 결국 4주의 유급휴가 획득, 최저임금 35% 인상, 급여 10% 인상이라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듬해 드골의 퇴임으로 매듭지어졌다. 이후 68혁명은 현대 프랑스 사회의 틀을 재구성하는 계기가 되어 프랑스에서는 공산주의로 대표되는 교조적 좌파의 목소리가 거부되고, 아나키스트운동과 환경, 생태운동, 페미니스트운동, 소수자들에 대한 인권운동이 본격화 되었다. 또한 68혁명은 유럽 전역은 물론, 북미와 남미, 일본의 청년사회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82




내 지식이 자본가를 위해 쓰이기를 거부한다 - 카헬 자닉


2011년 캐나다에서 1년간 지내는 동안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되도록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필요한 모든 것은 돈을 주고 사는 대신 버려진 것들을 재활용하거나 혹은 직접 만들어서 쓰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버려진 의자를 가져와 고쳐 쓰고 버려진 자전거도 주워서 고쳐 탔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쓸 만한 물건들이 수없이 버려진다는 사실에 눈떴고, 최소한의 기술만 가지고도 버려지는 많은 것들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직업을 통해 돈을 벌고, 직업을 벗어나는 모든 영역에서는 한없이 무능해져서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 든다는 사실이 어리석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과연 원시인에 비해 더 유능하고 현명한 인간일까? 이런 의문을 갖게 되면서 나는 소비하는 삶이 아니라 자립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삶으로 서서히 전환하게 됐다.  89


아무것도 손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오지 ㄱ돈을 내고 뭔가를 사서 소모하고, 또 뭔가를 소비하기 위해 돈을 번다는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모델이 역겨워졌다.  92


더 이상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이미 지구상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생산돼 있다. 5년 안에 고장 나도록 설계되는 가전제품, 6개월 안에 다른 옷을 사도록 만들어지는 허름한 천들. 이제 자본주의사회는 엔지니어들에게 이런 기술을 요구한다. 사람들이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이 낭비하게 하는 그런 기술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산된 물건을 자신의 특정한 직업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산다. 집 안을 채우는 모든 물건을 돈으로 사고 모든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는 인간은 실제로 얼마나 무능하고 무력한 존재들인가...

아버지는 엔지니어로, 어머니는 수학교사로 사셨고 별다른 일탈을 시도하지 않으셨지만 두 분 모두 직접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능하셨고, 그 무엇도 낭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98




익숙해지지 말길, 그렇게 새로워지길 - 솔렌 페랑도


Q 당신에게 대체 좌파란?

A 첫째, 좌파는 익숙해지는 걸 거부하는 사람이다...

  둘째, 좌파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현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다. 단순히 현상에 대하여 반대하는 것 외에 또 다른 방향으로의 가능성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다. 반대만 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그 반대하는 대상의 힘을 키워주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지펴으로의 가능성을 찾다 보면 우리는 또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111-113




나의 양심은 총을 들 수 없었다 - 이예다


고등학교 때 친구와 선생님을 통해 정치의식에 조금씩 눈을 뜨면서 이러저러한 집회에도 참가했다. 거기서 의경을 보았다. 그들이 나라를 지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시민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것을 보면서 군대라는 것이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어 미국을 위해, 우리와 상관없는 자들을 위해 싸우는 게 내가 본 우리 군대였다. 나라를 지킨다기보다는 권력자를 위해 합버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 정치적 도구로 이용당하는 조직이라고 보았다. 거기서 총을 들고 죽이는 훈련을 받는다는 것, 군복무를 거부하면 범법자로 취급당하고 감옥에 가야 한다는 그 폭력적 시스템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24




변신을 위해 양쪽의 세계가 필요하다 - 엠마누엘 갈리엔느


좌파는 소수자를 비롯하여 우리 모두가 함게 가지고 누려야 하는 권리에 대해 결코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는 지금 쉽게 반동주의자가 될 수 있는 시절을 살고 있다. 이런 시절에 좌파란 지금까지 싸워 획득한 근본적인 권리를 양보하지 않는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사회적 권리와 보다 정의로운 사회는 그동안의 투쟁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열매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역시 좌파의 몫이다.  150-151




한국 국정원이 나를 투사로 만든다 - 브누아 켄더


"당신은 좌파인가?"라는 나의 첫 질문에 그는 부모님의 이력을 먼저 소개하면서 "좌파의 가치를 자연스러운 지식인의 양심으로 받아들이시는 그분들 밑에서 나도 자연스럽게 그 길로 들어섰다"라고 답한다.  174


각자의 입맛에 맞는 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은 프랑스인들의 전형적인 삶의 방식이다.  176


Q 프랑스-한국친선협회가 북한으로부터 돈을 지원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A 국정원이 퍼뜨리고 다니는 전형적인 악선전의 하나다. 만약 그런 얘기를 하는 언론이나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허위 사실 유포와 중상모력으로 고발할 것이다. 우리 협회의 회원은 170명 남짓이고 그중 120명이 꼬박꼬박 연회비를 납부한다. 우리는 회원들의 연회비로만 운영되는 협회다.


Q 국정원한테 많이 당한 모양이다.

A 물론이다. 한번은 나를 불러서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한국 외교부가 프랑스 외교부를 통해 상원외교위원회에서 나를 쫓아내려고 시도했던 적도 있다. 그리고 우리 협회에 대해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을 시도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얌전하는 브누아 켄더도 이 대목에서는 이를 간다).


Q 그런 위협을 당하면서까지 협회 활동을 계속하는 이유는 뭔가? 

A 이명박 정부 이전까지만 해도 별일 없었다. 조용했다. 이명박이 권력을 잡으면서부터 국정원 활동이 활발해졌고 우리를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2008년 한국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집회가 불붙었을 때 우리도 사이트를 통해 이명박 정권을 비판했다. 국정원의 공격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나에게 접근해왔던 한국인중에 적어도 서너 명은 국정원의 정보원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 활동을 그만둘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 아니, 사실 이명박 정권의 탄압이 있고 나서 이 일에 더 재미가 붙었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뒤로는 더 심해졌다. 일단 파리에 주재하는 국정원 직원의 숫자가 더 늘어났다. 그들이 우리를 방해하면 할수록 우리가 하는 일이 뭔가 의미가 있었던 거구나 싶고, 그렇다면 더 열심히 해줘야지 하는 투지를 불태우게 된다. 나는 프랑스의 고위공무원이다. 협회 활동이 내일에 어떤 지장도 초래하지 않는다. 상원에는 티베트에 열정적인 관심을 가진 의원도 있고 베트남, 캄보디아, 대만 등 여러 나라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많다. 내가 한국에 갖는 열정을 모두가 잘 알고 도와주려고 하지, 방해하거나 압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국정원이 나를 투사로 만든다. (웃음) 넬슨 만델라가 그렇게 오랜 세월 감옥에 있지 않았다면 위대한 만델라가 될 수 없었을 것처럼.  182-183


Q 프랑스 공산당과 북한의 관계는 어떤가?

A 프랑스 공산당은 10년 전부터 북한과의 모든 협력을 끊었다. 북한 노동당은 오히려 프랑스의 우파 정당인 대중민주연합(UMP)이나 사회당(PS)과는 협력관계가 있어도 공산당하고는 없다. 1994년 프랑스 공산당은 자신들의 모델이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아니라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선언하면서 쿠바를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를 모두 끊었다. 단, 베트남 공산당과는 여전히 끈끈한 관계를 유지한다.  185-186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앞선 나라였다. 그런데 지금은 형편없이 추락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않으면 삶의 전반적인 수준이 동반 퇴보 한다. 민주주의의 후퇴를 막아야 한다. 그게 가장 시급한 한국의 과제다. 또 한 가지, 한국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을 잘 모르는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데, 그것은 한국이 아직까지 남들과 구별되는 자신들의 문화로 국제사회를 설득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케이팝이 조금 알려지면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케이팝은 한국 음악에서도 극히 일부에 불과한 엔터네인먼트일 뿐이다.  186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목격하는 것은 그들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속도가 빠르지는 않다...

사람들이 북한을 비판하는 가장 핵심 지점은 세습체제다. 김씨 일가로 이어지는 절대 권력의 세습에 대한 일반적인 프랑스 좌파의 시선은 명확하다. 바로 그 세습 때문에 프랑스 좌파들은 북한을 사회주의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왔고 여러 번 북한에 다녀온 내 의견을 묻는다면 나는 북한의 정치체제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싶다. 그들은 우리와 매우 다른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지극히 가부장적이고 유교적인 질서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들 나름으로는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이라는 과제를 실현하고, 자본에 모드 ㄴ것을 맡기는 대신 국가계획경제 시스템을 가동시키고 있다. 각각의 사회는 그들이 처한 현실과 역사적 배경에 맞추어 각자의 진보를 이루어나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북한은 지금 반제국주의와 반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의 지점에 서 있기도 하다.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에 누구보다도 강력한 지지를 보내는 것이 북한이다. 각자가 선택한 우선 과제가 있고, 각자가 처한 사회적 바탕과 변화의 단계가 다르다. 여기에 우리의 잣대를 그대로 들이밀며 기계적으로 그들을 판단하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그들이 보다 합리적인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도록 교류하고 접촉하는 지점을 늘리는 것이 그들을 돕는 방법이다.  188-189


Q 당신에게 좌파란?

A 좌파란 보다 평등하고 보다 차이를 존중하는 사회로 세상을 변혁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다.  190




혼자서 맞는 해방은 없다 - 루이즈 포르


옛날 어느 숲에 큰 불이 났다. 동물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허둥지둥 달아나고 멀리서 망연자실하게 불이 숲 전체를 삼키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어싿. 그때 작은 벌새 한 마리가 나뭇잎에 물을 떠다가 숲에 난 불을 끄려 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이걸 보고 있던 신이 작은 새의 수선스러움을 보고 "너, 그래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거 알아?" 하고 소리쳤다. 벌새는 대답했다. "나도 알아.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야."

각자 자기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이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이 되면 세상은 비로소 바뀔 수 있다.  203


Q 당신에게 좌파는 어떤 사람인가?

A 다른 먼지들이 진정한 자유를 갖지 못하고 있을때 '나'라는 먼지만 홀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옆 사람이 불행한데 나 홀로 행복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작은 벌새에서 한 차원 더 내려와 이제 그녀는 우리의 존재를 먼지에 비유한다. 각자의 개별성보다 하나하나가 보여서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는 동양적 사고가 깊이 배어 있는 표현이다.  204


좌파란 또한 "세상 모든 일에 즉각적,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사람, 무엇에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위한 간격을 스스로에게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도 말한다.  206




나는 사회당을 지지하지 않는 '극좌파'다 - 이렌 장(가명)


"일정한 한계선을 그어놓지 않으면 활동가의 일은 거의 모든 자유 시간을 잠식해버리곤 한다."  

이렌의 고백, 활동가의 불타오르는 투지에 사로잡혀 있건만, 때로는 주말이면 전시장을 어슬렁거리던, 자신만 생각하면 되던 시절의 한가로움을 떠올리기도 하는 듯싶다.  235




이토록 아름다운 마녀들 - 폴린 일리에


페멘(FEMEN)은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요란한 악명(!)을 떨치는 새로운 여전사 그룹.  240


반라의 몸 위에 구호를 적고 머리에는 화관을 쓴 채 가부장제에 포섭된 굴욕적인 세상에 맞서는 페니미스트 그룹. 이들은 2008년 우크라이나에서 탄생한다. 키예프에서 만난 네 명의 소녀는 자본주의에 힘없이 투항해버린 세상을 혐오하며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섹스 산업, 독재, 종교의 교조주의'야 말로 가부장주의가 발현시킨 3대 악이란 결론에 이르렀고 이에 저항하기 위한 단체인 페멘을 결성한다.  241


우리는 가부장제 사회를 전복하길 바란다. 그러나 이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우리가 꿈꾸는 사회는 '평등사회'다. 우리가 가부장제의 질서를 부정한다고 해서 그 다음에 올 사회가 모계사회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243


우리는 세상을 만들고 이끌어가는 남자들 뒤에 여자들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동등하게 서서 세상을 함께 이끄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244


우리는 근본적으로 비폭력적이며, 평화를 지향한다. 가부장제의 폭력에 저항하는 운동은 단호 하지만 결코 가부장에의 주체들과 닮은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 누구도 다른 개인적인 이유로 행동에 나서서는 곤란하다.  247


페멘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암살 협박을 받는다. 페멘을 공격하기 위한 카톨릭 계열의 극우 남성 단체 호멘(HOMEN)도 생겨났다. 우리랑 정반대의 목표를 내건 사람들이다. 남성우월주의를 주장하고 동성애자들을 모욕한다.  252-253


아직 많은 프랑스의 좌파들이 페멘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다. 페멘에 대한 의견을 선뜻 말하기보다는 "페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 그 반증이다. 1년 반 전에 답하지 못했던 페멘에 대한 나의 생각을 이젠 말할 수 있다. 우리를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시스템에 무력하게 투항하는 대신 사자처럼 당당하게 포효하는 이 여자들은 옳다. 페멘은 여자의 적이 남자가 아니라 가부장제가 남자와 여자 모두의 적이란 사실, 자본주의와 독재와 종교는 바로 그 가부장제가 작동시키고 있는 구체적인 극복의 대상이란 사실을 지목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적할 무기는 폭력 혁명이 아니라 가부장제가 철저히 굴복시킨 세상의 절반, 그 속에 감춰진 여성성이다.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그 파격적 당당함이 우리 속에 숨죽이고 있던 여신을 되살려낸다. 이 아름다운 마녀들을 지지한다.  256




반공은 모든 독재 정권이 시작되는 징후 - 심영길


Q 당신은 빈 라덴에게 경외감을 표한 바 있다.

A 나는 빈 라덴을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인간형이라 생가한다. 그는 억만장자인 데다 사회적 지위도 높고 수많은 미인들에게 둘러싸인,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간단히 무리고 투사로 살기를 택했다. 아프가니스탄 골짜기에서 소련도 어쩌지 못한 미국을 상대로 무력 저항을 했으니 놀랍지 않은가. 

빈 라덴은 왜 투사가 되었을까? 분노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소련을 내쫓으면 아프가니스탄에 이슬람국가를 세우는 데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빈 라덴 일가는 미국 정부의 말을 믿고 앞장서서 그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들의 믿음을 철저하게 배반했고 빈 라덴은 반미투쟁에 투신했다. 

비행기로 뉴욕의 쌍둥이빌딩을 격파한 청년 19명은 대부분 명문가의 자제들로, 1년 이상을 미국에서 상주하며 조종 훈련을 받았다. 그들에게 목적을 성취한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뜻했다. 그들은 이륙하는 법만 배우고 착륙하는 법은 배우지 않았다. 미국처럼 정보망이 잘 구축된 사회에서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았고 단 한 명의 이탈자도 없었다는 점은 대단한 일이다. 그들은 돈을 대가로 그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을 움직인 힘은 분노였다.

분노의 힘은 매우 정직하고 폭발적이다. 분노의 나를 청춘으로 살게 하는 원천이기도 했다. 개개인이 오랫동안 품어온 분노는 화폐의 가치를 가볍게 무시할 수 있게 하는 유일무이한 힘이다. 자본에 가장 강력하게 대항할 수 있는 힘이라는 의미에서 분노는 고귀하다. 하지만 분노가 이기적으로 작동할 때는 나를 독재자로 만들 수도 있다. 분노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다.  273-274


북한이 3대 독재 세습이라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는 있지만 미국 제국주의에 저항한다는 점에서만큼은 그들을 높이 평가한다.  274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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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25일 비즈니스 카페 재팬이 주최한 최고경영자 모임에서 있었던 강연입니다. 비즈니스 카페 재팬은 나의 오랜 친구 히라카와 카츠미가 설립한 회사로, 컨설턴트를 주 업무로 하고 있습니다.  21



1. 공부로부터 도피하기


교육 받을 기회로부터 스스로 달아난다는 말은 머지않아 '하류사회'로 계층이 내려가는 것을 뜻한다.  25


학령기 자녀를 둔 어른들은 무의적으로 자기 자식을 제외한 다른 아이들의 학력이 내려가면 자기 아이에겐 이익이 된다는 기대감을 자기고 있다. 그런 무의식적인 욕망이 아이들의 학력저하를 심리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31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잠시 보류해 둠으로써 지성이 활성화되는 인간적인 기능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인상을 받는다.  36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모른다'는 것보다 이처럼 '모르는 것이 있어도 개의치 않는 '것이 위기의 징후로 여겨진다.  37


의미를 몰라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이다.  38


어두운 밤 갑판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항해사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바다 위에 떠 있으면 긴장한다. 하지만 만약 시야게 들어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투성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런 상황에서는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또 하나 새로 등장한다 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40


'최근 우리는 하나에서 열까지 돈이 들어가는 생활을 처음으로 경험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각종 미디어에서 정보가 들어오는 생활도 처음이다. 돈이 돈을 낳는 경제구조 속에 완벽하게 말려들어가 있다. 아이들이 일찍부터 '자립'의 감각을 체득하는 것도 이러한 경제 사이클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어 '소비주체'로서의 확신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은 현재의 경제 구조가 보내오는 메시지를 여과 없이 곧바로 받고 있다. 학교가 오늘날의 사회를 가르치고자 '생활주체'나 '노동주체'로서의 자립의 의미를 설명하기도 전에 이미 아이들은 어엿한 '소비주체'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있다. 이미 경제적인 주체인데 학교에 들어가면 새삼스레 교육의 '객체'가 된다는 것은 아이들 입장에서 내키지 않는 일일 것이다.' 스와 테츠지 <왕자와 공주가 되어가는 아이들>

이 부분은 내가 최근 십년 동안 읽었던 교육 관련 글 중에서 가장 계몽적이다. '아이들은 이미 취학 전에 소비주체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있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 

요즘 아이들과 삼십 년 전 아이들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은 처음 사회관계에 들어설 때 노동을 통해 들어가는가, 소비를 통해 들어가는가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벌써 사십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우리들이 어렸을 때 사회적인 활동은 먼저 노동주체로서 자기를 세우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사회적으로 무능력한 어린아이가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가사노동이었다. 식사가 끝난 후 밥그릇을 부엌까지 갖다놓거나, 마당을 쓸거나, 화초에 물을 주거나,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거나, 아버지의 구두를 닦아놓거나, 이처럼 가정에는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꽤 있었다. 부모는 당신들이 분담해야 할 가사노동을 아이들이 적게나마 줄여주니까 당연히 "고맙다"거나 "참 잘했어" 하고 칭찬해준다. 아이들은 그 칭찬이 기쁘고 자랑스럽다.

아이들이 가족이라는 최초의 사회관계 속에서 처음으로 유용한 구성원으로 인지되기 시작하는 것은 가사노동을 분담하면서부터이다. 작지만 가족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감사와 인정을 보상으로 획득하면서 어리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다져간다. 이러한 데서 예전에 아이들은 사회화 과정을 밟아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좀더 자라면 가사노동에 머물지 않고 바깥 사회활동에도 참가하는데, 타인에게 뭔가 도움되는 일을 하면서 그에 대한 감사와 사회적 승인이라는 대가를 받는 교환 행위를 통해 자기 정체성의 기초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는 가사노동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노동의 작은 분담자로서 사회관계 속에 자기를 등록하면서 아이들은 먼저 노동 주체로 자기를 세운다. 아니 이렇게 하는 것 말고는 달리 자기를 세울 방법이 없었다. 적어도 1960년대 중반까지 일본의 아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노동주체로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은 사뭇 다르다. 지금 아이들은 노동 주체라는 형태로 사회적 인정을 받아 스스로를 세울 수 없다. 그럴 기회를 구조적으로 빼앗겼다.

둘러보면 오늘날 가사노동 자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게다가 남은 가사 일이라는 것도 그리 생산적인 일이 아니다. 가령 청소나 빨래처럼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집안이 엉망이 되어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노동은 남아 있지만, 그 일을 하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거나 성취감을 얻거나, 또는 사회성을 기르고 자연스레 학습과 연결되는 일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개를 산책시키고 화초에 물을 주고 풀을 뽑는 일상적인 일들은 자연과 연결되는 일로, 많든 적든 아이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지만 이제는 가정에서 그런 일을 찾기가 힘들다. 부모들 입자에서는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고 싶어도 일거리가 없어서 가사노동을 시킬 수가 없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부모에게 가사노동 분담이라는 작은 선물을 할 수도 없고, 가정이라는 시스템에 작게나마 자신도 공헌하고 있다는 기쁨을 누릴 기회도 없다. 

오히려 지금의 아이들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다. 아이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자체가 집안 질서를 어지럽히는 요소여서, 가능하면 그들에게 할당된 공간 안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공헌이 되었다. 이런 가정이 매우 많다고 본다. "됐으니까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줄래!" 하는 엄마들의 화난 목소리는 요즘 다든 익숙할 정도로 많이 듣는 거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런 식의 금지는 우리들이 어렸을 때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어린아이의 미약한 도움일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고, 그 고사리 같은 손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일본 속담에 '고양이 손이라도 비리고 싶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부탁할 만한 생산 활동이 거의 없어졌다. 반면에 아이들의 소비활동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촉발된다.  48-51


한 사람 몫으로 사회관계의 장에 등장하는 경우, 만일 그가 네 살짜리 어린아이라면 그를 교섭 상대로 대등하게 대우해줄 어른은 없다. 하지만 돈을 쓰는 사람으로서 등장한다면 그 사람의 나이나 식견, 사회적 능력 따위의 속인적 요소는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쓰는 돈이 얼마인지가 중요하지, 돈을 쓰는 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고려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돈의 투명성'이라는 특권적 성격이다. 사회적 능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어린아이가 여기저기서 쥐어주는 용돈을 가지고 소비주체로 시장에 등장할 때 처음 느끼는 소감은 '법을 뛰어넘는 전능함'일 것이다.  52-53


* 니트(NEET) : 용국 정부가 노동정책상 인구 분류로 정의한 용어로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의 약자이다. 교육을 받지 않고, 노동을 하지 않고, 직업훈련도 받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니트는 일반적으로 '일할 의욕이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63


"그럴 시간 있으면 공부해라" 또는 "학원이나 가라"는 요구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국영수 학원에 가거나 예체능 학원에 간다. 그리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지쳐 말할 기운도 없고, 가족들을 신경 쓸 여력도 없다. 그저 온몸으로 피로와 불쾌함을 표현함으로써, 아이도 아이 나름대로 주어진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엄마 아빠가 그렇듯이 자신도 충분히 기분이 언짢은 상태라는 것으로, 자신도 불쾌함을 견디고 있고 따라서 집안에 보탬이 되고 있음을 과시한다.

가족 중에서 '누가 가장 집안에 보탬이 되는가'를 '누가 가장 기분이 나쁜가'로 측정한다. 이것이 현대 일본 가정의 기본 규칙이다.  65


'시장 원리를 기초로 할 때 배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68


배움이란 자기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모르고, 그것이 어떤 가치와 의미와 유용성을 갖는지도 말할 수 없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71


자신의 유아적 욕망을 가슴에 품고, 결코 성장하거나 변화하지 말고 그저 소비주체로 안주할 것. 시장원리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존재하길 요청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이들을 외계의 변화에 적응해 살아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사실을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77


30센티미터 자로 잴 수 없는 것들, 예컨대 무게나 빛, 탄력 같은 것들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가진 거라곤 30센티 자밖에 없어 오로지 그 잣대로 세상의 모든 것을 계량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어린아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82




2. 리스크 사회의 약자들


얼마만큼 노력하면 얼마만큼의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노력과 성과의 안정적인 관계가 붕괴하기 시작한 것, 이것이 리스크 사회의 특징이다.  89


리스크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 생존 전략의 선택에 따라서 양극화는 더욱 진행된다.  90


리스크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것이 국민들에게 부여된 중요한 과제라고 정부틑 선언하고 있음에도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위정자와 교육행정 책임자, 대중매체 지식인들은 '리스크를 제거하라'고만 가르치지, 어떻게 '리스크를 방어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중앙교육심의회의 답신이나 교육학자의 제언 중에 '아이들에게 어떻게 리스크 헤지 방법을 교육할 것인가'를 다룬 내용을 본 적이 없다. 리스크 사회가 도래했다고 경종을 울리면서 아무도 '리스크를 헤지하는 법'을 국민들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105


우리들은 지금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실업을 당해도, 노숙자가 되어도, 병이 들어도 모든 것이 이러한 리스크가 있는 삶을 선택한 자신의 책임이라는 말은 리스크란 개인적인 것임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왜냐하면 리스크 헤지는 자기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105-106


중국인은 자식들을 일본이나 미국, 호주 등지로 뿔뿔이 유학을 보내 그곳에서 사업을 하게 한다. 어느 한쪽이 전쟁이나 공황으로 재산을 잃거나 인종박해로 추방을 당해도 다른 나라에 있는 친족이 지원하거나 받아줄 수 있도록 안전망을 쳐놓는다. 이것은 역사적 경험 속에서 갈고닦은 리스크 헤지의 기법이다. 

유대인도 마찬가지다. 로스차일드 재벌의 창시자 마이야 로스차일드는 다섯 명의 아들에게 유럽 네 도시에 은행을 열게 했다. 장남은 창업지인 프랑크푸르트 본점에 남겨두고, 둘째는 빈, 셋째는 런던, 넷째는 나폴리, 다섯째는 파리에 지점을 열게 했다. 그로부터 2백년이 흐르는 동안 본저모가 나폴리 지점은 폐업하고, 빈 지점은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할 때 망했다. 하지만 런던 지점과 파리 지점은 살아남아서 일족의 이름을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과 두 차례에 걸친 유럽 대전에서도 살아남았기에 이것이야말로 리스크 헤지의 교과서 같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알수 있듯이, 리스크 헤지는 '살아남기'를 목표로 집단이 합의한 계획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그러므로 '개인이 리스크 헤지를 하고, 발생한 리스크에 개인이 대처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개인이 리스크 헤지를 한다는 것은 원리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들은 '살아남는 것을 집단의 목표로 내걸고 상부상조하는 집단에 속한 사람들'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리스크 사회를 살아간다'는 의미는 항간에서 이야기하듯 '자기가 결정하고 그 결과도 혼자서 책임진다'는 원리로 사는 게 결코 아니다. 자기가 결정하고 결과도 자신이 책임지라는 말은 리스크 사회가 약자에게 강요하는 삶의 방식(또는 죽음의 방식)이다.  107-108


고립된 아이가 혼자서 학교라는 시스템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자기 가치관을 학교 시스템에 대등한 것으로 대치시킨다. "이것을 왜 배워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들이댄다. 스스로 배울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지 못하면 아이는 배움을 거부한다. 이것이 자기결정이다. 배우지 않음으로써 초래되는 리스크를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사칙연산을 못하고, 알파벳을 모르고, 한자를 못 읽는다. 흥미 있는 영역에 대한 사소한 지식은 있을지라도 흥미가 없는 분야는 아예 모른다. 벌레가 파먹은 듯 의미의 구멍이 숭숭 뚫린 세상이 별로 불쾌하지 않다는 듯 살고 있다. 이렇게 아이들은 계층 하강의 리스크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115


오늘날의 교육 문제는.. 아이들이 나태해서 초래된 결과가 아니라 노력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학력저하가 아이들의 나태와 주의산만의 결과라면 그 보정은 교육기술 차원의 문제에 지나지 않지만, 현실에서 상당수의 아이들이 학습을 포기하고 공부로부터 도피하는 데서 자신감과 성취감을 얻는다면, 그리고 그 수가 계속 늘어난다면, 이 문제는 교육기술이나 방법을 바꾸는 식의 기술적 차원으로는 해결하기 힘들다. 사회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없이는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120-121




3. 노동으로부터 도피하기


젊은 회사원에 대한 얘기다. 평소 그의 일솜씨를 높이 평가한 상사가 새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되어보라고하자 그는 그 길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책임 있는 자리에 앉으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자기 일은 자기가 결정한다'는 가지결정권에 대한 고착이다. 자기가 결정한 것이라면, 그 결정이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불이익을 초래할지라도 상관없다. 일종의 '자기결정 페티시즘'이다.  125


선택을 강제하면서 선택한 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것을 강요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조리하다.  128


니트는 영국에서 처음으로 문제화된 사회현상이다. 하지만 일본의 니트 문제는 영국의 경우와는 많이 다르다. 영국은 전형적인 계급사회여서, 하층계급 사람들은 취학 기회나 취업훈련 기회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다. 학습 의욕은 있지만 사회적으로 상승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 젊은이들도 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이민을 대량으로 받아들인 사회에서 이민자의 아이들은 교육 기회와 문화자본에서 구조적으로 멀어질 수밖에 없다. 파리 근교에는 HLM(저가 임대 주택)이라는 거대한 주택단지가 있다. 그곳에는 이민자를 비롯한 빈곤층 주민들이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살고 있다. 예전에 이런 교외지역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던 프랑스 여성에게 들었는데, 이런 거대 단지에는 도서관이나 미술관, 책방, 극장, 콘서트홀 같은 문화시설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문화를 접할 기회가 없다고, 설령 예술적 재능이 있다 해도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기회 조차 없는 셈이다. ..

유럽의 니트는 계층화의 한 증상이다. 사회적 상승 욕구가 있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일본의 니트는 유럽과 사뭇 다르다. 사회적 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느넫도 아이들이 스스로 그 기회를 포기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일본에서는 사회적 약자가 자진해서 차별적인 사회구조를 강화하는데 가담하는 방법으로 계층화가 진행되고 있다. 다시 말해 약자가 자신의 사회적 입장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세계에서도 예외에 속하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129-130


공교육의 이념은 유럽의 시민혁명기에 제창되었지만, 일찍이 제도적으로 정비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00년 당시 미국 고등학교 (14세~17세) 취학률은 8.4%였다. 같은 시기 유럽에서 중등하굑 취학률은 3.8% 미만이었다. 그보다 반세기 전 1840년에 초등학교 취학률은 미국 전국 평균이 38.4%였다. 단, 이 경우 '취학자'는 단 하루라도 학교에 갔던 사람까지 포함하고 있고, 당시 미국의 보통학교 개강일은 연간 40일 정도였다(카리야 타케히코 <교육의 세기>)

근대의 초등교육 기관은 부모에 의한 사적 수탈과 지배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는 '피난소'라는 공적 기능도 함께 수행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적인 공교육 사상을 기초로 한 일본 헌법에서는 교육받을 권리를 정한 제26조 다음에 '아동을 혹사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제 27조가 따라온다. 헌법에 이러한 규정이 있는 것은 산업혁명 이후 근대 산업사회가 취학 기회를 갖지 못한 아동을 '저가노동'으로 혹사시켰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다.  131


지금 아이들에게 교육을 받는 것이 '권리'인지 '의무'인지를 묻는다면 아마 90%늬 아이들이 '의무'라고 답할 것이다. 이 대답에는 교육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강제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의무를 위반하는 것을 일종의 정치적 이의제기'로 보는 시각도 성립한다....

'배움'이란 본시 아이들이 먼저 나서서 '침해할 수 없는 권리'로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것을 고역으로 여기게 되었을까?  132


교육의 '권리'를 '의무'로 바꿔서 읽는 도착 행위가 일어난 이유는 경제적 합리성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침투했기 때문이다.  133


노동에의 가치에 비해 임금이 낮은 것은 원리상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임금이란 노동자가 창출한 노동가치에 비해 항상 적다. 당연하다. 그렇지 않다면 기업이 이윤을 낼 수가 없고, 주주에게 배당도 할 수 없으며 설비투자도 불가능하고, 연구개발도 할 수 없다. 경제활동에 들어가는 자금은 모두 노동자로부터 '수탈'한 노동가치에서 조달된다. 노동자가 자신이 창출한 노동가치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경제의 기본 원리다. 여기서 발생한 잉여가 교환을 가속시키고, 그 결과 시장이 형성되고 분업이 이루어지며 계급과 국가가 생겨난다. 인간은 이런 방식으로 사회를 만들어왔다.  141-142


배움의 본질은 지식과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방법에 있기 때문이다.  155

 

졸업생은 '대학이라는 공장'에서 송출한 '제품'이며, 이 제품을 기업이 '매입'한다는 또 하나의 소비모델이 존재한다.  157




4. 이들을 어떻게 도울까


히라카와 : 지식은 일본에서도 활용할 수 있고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교환 가능성에 입각하여 표준화됩니다. 모든 것을 표준화해버리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앞에서 언급했던 '자기 찾기'가 꽤 화재를 모았는데, 모두가 표준화되면 이제 '나'라는 것은 없어집니다. 옆 사람과 나의 차이를 측정하는 도구로 경제적 잣대밖에 없다면, '자기다움'이란 애당초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붕괴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일한 척도인 돈을 양적으로 불려서 자기붕괴를 막고자 합니다.  168


우치다 : 아동학대 사례가 점점 늘고 있습니다만, 이 현상은 육아를 등가교환 관점에서 생각하는 습관이 낳은 피연적인 결과로 보입니다. 육아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엄마들은 육아를 긴 안목으로 생각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극히 짧은 안목으로 생각합니다. 아마도 육아를 비즈니스 관점에서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식은 자기가 만들어낸 '제품'이며, 부모의 서오가는 이 제품에 어떤 부가 가치를 덧붙이느냐에 따라 평가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서오가가 평가를 받으면 부모는 '육아의 성고'이라는 형태로 사회적인 자기실현을 다했다고 여깁니다. 회사가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의 매출이나 평가에 일희일비하는 것과 같은 심리입니다.  

처음에는 똥오줌을 가린다거나, 말을 한다거나, 걸을 수 있다는 식의 눈에 보이는 형태로 아이의 능력을 개발하는 데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 다음에는 영어를 구사한다거나, 피아노를 친다거나, 명문학교에 입학했다거나, 역시 눈에 보이는 형태로 아이들의 부가가치를 높이고자 합니다. 아이들에게 부가된 가치를 부모인 자식의 '사업' 성과로 가시적, 외형적으로 과시하려고 하는 한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학력이나 자격과 같은 외형적으로 주위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누넹 보이는 성과' 이외의 것은 육아의 부가가치로 쳐주지 않습니다.

자식이 있으면 이해하시겠지만 본래 육아는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는 일로, 육아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20년이 걸려도 잘 모르는 법입니다. 잘 모르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육아 노동의 성과를 1~2년안에 눈에 보이는 형태로 드러내 보이라고 압력을 가해서는 곤란합니다. 짧은 시간에 측정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부모들은 눈에 보이는 형태로, 수치화할 수 있는 형태로, 정량적인 형태로 육아의 서오가를 올리라고 재촉당하고 있습니다. 부모 스스로 이런 압력을 강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성장을 느긋하게 기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종종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또 가닭 모를 행동도 합니다. 이럴 때 "이 아이가 뭘 하는 걸까?"라며 아무 말 없이 그냥 바라보는 것이 옳은 양육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양육법은 오늘날 허용되지 않습니다. 

정시노가 의사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사춘기 때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들의 부모에게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아이가 "기분이 좀 나빠요"라거나 "이건 싫어요"같은 불쾌한 메시지를 발신할 때 부모가 이런 메시지는 선택적으로 배제해버립니다. 아이가 심신에 불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정보는, 말하자면 '제품'이 소음을 내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제품이 소음을 낸다는 것은 제품 공정에 하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부모는 자신의 '육아 실패'라는 기호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귀를 막아버리는 것이지요. ...

아이들은 몸과 마음에 이상이 오면 위험신호를 보냅니다. 그런데 부모는 그 신호를 청취하면 자신의 육아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정하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발신하는 '도와주세요'라는 신호에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립니다. 이렇게 둔감한 부모와 살고 있는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무너집니다. 

어린 아이들은 아직 자기가 느끼는 몸과 마음의 불쾌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들이 보내오는 위험신호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신호가 아니라 소음으로 들리니까요. 하지만 여기에서 부모가 제대로 자기 역할을 해내야 합니다. 바로 아이들이 발신하는 소음을 신호로 변환시키는 일입니다. 아이들과 긴 시간을 함게 지내다보면 어느 순간에 아이들이 내는 소음이 신호로 들리게 됩니다.

이것은 아이가 모국어를 습득하는 과저오가 똑같습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지속적으로 해주는 의미 불명의 말들을 분절하여 해독함으로써 마침내 모국어를 습득합니다. 다시 말해 무의미하게 들리던 소음이 의미 있는 신호로 바뀌는 것이지요. 이건 흔히 말하는 커뮤니케이션과는 다릅니다. 커뮤니케이션의 기초가 되는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을 일으키는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음을 신호로 변환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목숨을 건 도약'입니다.  169-172


전후 60년 동안 일본 사회는 약자의 안전망이었던 중간적인 공동체를 계속해서 무너뜨렸습니다. 지역공동체, 친족, 주종관계, 사제관계 전부 다 무너뜨렸습니다.  201


아이들이 노동주체로 출발할지 소비주체로 출발할지 학교에 들어가기전에 이미 결정됩니다.  211


요로 타케시(해부학자, 도쿄대 명예교수, 마음의 문제나 사회현상을 뇌과학, 해부학을 비롯한 의학, 생물학 영역의 다양한 지식으로 설명하는 저술 활동으로 폭넓은 독자층을 얻고 있다.) 선생님께서 "이제는 삶의 매뉴얼이 없는 시대여서 각자가 연구해야 합니다"라는 내용으로 1시간 30분 정도 강연을 하셨는데 한 질문자가 "선생님, 매뉴얼이 없는 시대에는 어떻게 살면 될까요?"라고 물어서 아연실색하셨다고 합니다. 저 역시 때때로 강연을 하기 때문에 비슷한 느낌을 받는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내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에서 무엇을 듣고 있었을까?"라고 말이빈다. 그런 사람은 그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이전부터 자신이 갖고 있던 틀 속으로 모두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틀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부분은 다 잘라버리고 자기 식으로 이해한 부분만 취합니다. 그래서 가끔 "내가 이런 사고방식은 좋지 않다"고 거론한 부분을 거꾸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설이 있는데, 그런 건 경솔하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라고 얘기했는데, 나중에 "좀 존에 선생님은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하면서 확인하러 옵니다. 그때 "아닙니다"라고 말하면 깜짝 놀랍니다. 자기가 동의할 수 있는 내용만 잘라서 듣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꾸 늘어나고 있습니다.  220


히라카와 : 체험교육이라고 할까 수련이라고 할까, 이런 전통적인 교육 기술을 통해 지금은 잃어버린 능력을 계발하는 방법을 어떻게 교육 시스템 안에 다시 한 번 프로그램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지역사회에 합기도 도장을 연 지 15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설계한 교육 프로그램에는 나름대로 확신이 있지만, 어떻게 이 프로그램을 누구에게든 적용할 수 있는 좀 더 보편적인 형태로 전개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계획이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일단 제자를 많이 길러내어 제 프로그램을 충분히 체험한 제자들이 도장을 열고 이를 통해 이런 내용을 널리 알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수 서당식 체인점 같은 방식으로 말입니다.  22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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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 오늘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


근대의 '철학적 다이너마이트'였던 니체 철학은 현대라는 시점에서 '토대학으로서의 철학'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14


니체가 보여준 현대성의 길은 다방면에서 확인된다. 먼저 철학 영역에서 그가 제시했던 탈형이상학적 전환, 이성중심주의 모델과 절대주의 모델의 파기, 실체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의 전환, 다원주의 모델을 통한 일원론 극복 프로그램 등은 서양 철학에서 지각변동을 일으켜, 근대적 패러다임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것은 곧 현대 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변동이었다. 니체 철학의 현대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또 다른 영역은 예술이다. 이성적 경험과 심미적 경험 사이에 놓여 있던 경계를 파기해버리고, 예술의 '탈미메시스'를 감행했던 니체에게서 예술가들은 다양한 꽅을 피울 수 있는 씨앗을 찾아냈다. 음악, 회화, 건축, 무용, 조각 등의 넓은 영역에서 그 씨앗들은 예술의 현대성이라는 아우라를 피워냇다고 할 수 있다. 문학 영역 또한 예외는 아니다. 언어에 대한 회의, 문학과 역사의 관계, 예술과 실제의 관계, 심리 현상과 글쓰기의 관계에 대한 니체의 질문들은 현대 문학이 주목할 만한 소재를 제공했으며, 니체 작품 자체가 문학적 찬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외에도 신의 죽음에 대한 니체의 선언을 둘러싼 신학담론들, 스스로를 철학적 심리학자로 자화자찬할 정도로 예리하게 세공된 심리분석의 내용을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에서 눈여겨본 것은 이미 오래되었으며, 근대 사회의 허무적 요소에 대한 통찰이나 권력국가와 법률국가에 대한 니체의 신랄한 비판은 사회학, 정치학을 넘어 이제는 법학 영역에서도 문제해결 과정에 영감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듯 니체 철학은 현대를 종횡무진 누비는 철학이 되었다.

하지만 니체의 철학은 미래에도 여전히 고전일 것이다. 철학의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철학 자신의 수단인 비판을 통해 보여준 모범으로서, 철학이 삶의 창조적 가능성을 고취시켜야 하고 늘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 보여준 모범으로서,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정신의 높이를 자랑스러워하는, 거리의 파토스가 깃든 자유정신의 모범으로서, 삶을 사랑하고 세계를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적 영혼의 모범으로서... 무엇보다도 인간과 사회의 건강성을 염려하고 그것의 확보를 과제로 삼는, 철학자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모범으로서...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 우리는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될 것이다.  15-16




니체는 어떤 사상가인가 - 니체의 철학적 실존과 자화상


철학자들의 글과 삶은 어느 정도 관계가 있을까?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은 그들의 삶에 대한 지식이 없이도 글을 읽는 것만으로 그들의 사유를 이해하기에 충분한 경우다. 글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철학자들은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홉스, 루소 등이 있다. 그런데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삶을 꼭 들여다보아야 하는 철학자들도 있다. 소크라테스, 파스칼, 키르케고르, 비트겐슈타인이 그러하고, 니체 역시 여기에 속하며 그 전형적인 경우다.  21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읽기와 쓰기에 관하여]  22


삶과 철학의 통일적 관계를 보여준 니체에게서 철학은 인식적 차원의 지혜를 찾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철학은 이제 삶의 지혜를 찾는 실존적 행위가 된다. 그 지혜는 바로 디오니소스적 지혜다. 즉 건강한 삶의 본능에서 나오고 건강한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혜, 파괴와 창조라는 두 계기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생명성 자체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아는 지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거대한 관계세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깨닫는 지혜, 그 속에서 모든 것이 의미 잇고 모든 것이 필연적이어서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통찰하는 지혜다.  25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며,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었을까? 

(1) 예술가-철학자, 니체 : 문헌학 교수였던 니체가 <비극의 탄생>이라는 철학적 저술을 집필할 때부터 이미 그는 자신을 예술가-철학자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의 예술가는 그림을 그리거나 곡을 짓는 예술가적 실천을 하는, 좁은 의미의 예술가를 넘어서는 개념이다. '철학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철학적 예술가는 '위대하고도 고귀한 목표'를, 즉 위대한 문화와 위대한 인간과 위대한 미래를 '창조'해내려는 '과제'를 지니고, 그 과제를 건강성 회복을 수단으로 실제로 수행하는 존재다.  26


(2) 계몽가와 교육자, 니체 : 니체는 19세기 당대를 총체적으로 진단하고 치료하고자 했던 시대진단가이자 계몽가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살던 시대를 총체적인 의미 상실과 목표 상실의 시대, 인간의 생명력이 퇴화되어 병들어 있는 시대, 철학과 문화와 정신이 방황하는 시대로 진단한다.

시대와 인간과 문화가 앓고 있는 병증을 인간과 사회의 '건강성' 회복의 길을 제공하면서 치유하는 것이다.  28


(3) 자유정신, 니체 : 자유정신은 말 그대로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다시 소유하는, 자유롭게 된 정신"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자유정신을 위한 책]으로 이해하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자유정신은 단순히 이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삶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도 니체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유정신은 여러 가지 덕목을 갖추어야 한다. 지적 성실성과 정직성, 비판의 힘과 새로운 대안 제시의 힘,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자기 자신을 믿는 '용기', 자신에 대한 '긍지' 등 수많은 덕목들이 거기에 속한다.  29-30


(4) 철학적 심리학자, 니체 : 니체는 자신을 '타고난 심리학자' 혹은 '영혼의 분석가'로 이해하기도 한다. 실제로 아들러나 융 등의 정신분석학자들이 프로이트보다 한 수 위라고 찬탄할 정도로.  30


니체 철학은 낭만적 시기(<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실증적 시기(<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즐거운학문>), 창조적 시기(<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후)로 구분될 수 있다.  31


1881년을 기점으로 니체의 철학이 변모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생성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 프로그램이 본격화됨.  31-32




1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라는 실험철학의 과제


실험철학은 몇 가지 측면에서 실험적이다. 첫째, '지금까지의 철학의 주체'를 '새로운 척도와 새로운 방식'을 사용하여 해명한다. 새로운 척도는 바로 '건강한 삶'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세계를 긍정하는 삶으로, 오로지 이 척도에 의해 모든 것이 재평가된다. 이때 실험철학은 둘재, 질문의 방식을 변경한다. 평가대상 '그 자체'에 대해 묻지 않고, 평가대상의 '가치'에 대해 묻는다. 즉 그것이 갖고 있는 의미와 기능을 점검한다. 그래서 실험철학의 질문방식은 '그것은 무엇인가?'가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삶을 위해 그것은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가?'이다. 평가척도와 질문방식을 변경하여 실험철학은 셋째, 기존의 자명성의 '토대'를 점검하는 실험을 시작한다. 서양의 온갖 자명성의 토대가 될 정도로 가치 있다고 여겨졌던 것들의 '가치'를 의문시한다. 그런데 그 실험적 이문은 매우 부정적인 답변을 듣게 된다. 그 가치들이 삶에 대한 부정의식에서 출발했고 삶의 건강성을 해치고 있는 실상이 목격된 것이다. 그래서 실험철학은 '기존 가치의 탈가치화(Entwertung)를 수행하는, 파괴와 해체의 망치를 든다. 여기서 실험철학의 네 번째 실험적 성격이 확보된다. 기존 가치의 탈가치화가 심리적 공황 상태를 발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즉 토대의 상실은 곧 의미근거와 가치근거의 상실이며, 이것은 다시 '왜?'. '무슨 목적으로?'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실험을 두고 위 인용문에서의 '부정의 말에, 부정에, 부정에의 의지'에 머무르는 '허무주의의 가능성을 선취'한 것으로 표현한다. 결국 실험철학 스스로 망치를 들어 기존 가치들을 탈가치화시키면서 허무주의라는 장을 시험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하지만 실험철학은 다섯째, 그런 허무적 상태를 넘어서는 또 한 번의 실험을 한다. 새로운 의미근거와 가치의 토대를 제공하게 만드는 실험을, 그것은 인용문이 말하듯 '정시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견뎌내는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감행하는가?'를 척도로 진행되는 실험이다. 그것은 곧 '인간이 얼마나 건강한가?'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건강한 인간은 진리를 수없이 감행하고, 수많은 진리를 견뎌낸다. 정확히 말하면 그 스스로 건강한 삶을 위해 진리들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을 다시 건강한 삶의 조건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는 삶의 건강성을 척도로 새로운 가치체계를 구성해낼 수 있다.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의 힘이 강하다. 결국 허무적 상태를 넘어서게 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건강한 디오니소스적 인간'을 창출해내는 것이며, 이것이 실험철학이 감행하는 '가치의 척도(Umwertung)라는 실험의 목적이다.  41-42


자기 삶에 대한 사랑을 니체는 운명애라고 부른다. 운명애는 이미 결정되어 주어져 있는 삶에 대한 숙명적 체념과는 다르다. 오히려 운명애는 자신이 창조적 주체로서 구성해가는 삶에 대한, 스스로 구성해가는 운명에 대한 그야말로 운명적인 필연성을 지닌 사랑이다.  45


디오니소스적으로 삶을 마주한다는 것,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니체 자신의 해명을 들어보자.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들에 직면해서도 삶 자체를 긍정한다 ; 자신의 최상의 모습을 희생시키면서 제 고유의 무한성에 환희를 느끼는 삶에의 의지-이것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다." -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46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첫째, 창조와 파괴, 대립과 싸움을 통해 형성되고, 그 어떤 계기라도 불필요하지 않으며, 그런 것으로서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성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생명은 매순간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파괴가 일어나는 과정이다. 생명은 즉 파괴와 창조라는 모순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모순성은 생명의 생성적 성격을 보증해준다. 그런데 니체는 생명의 이런 모순성을 삶에의 의지에 의한 것으로 생각한다. 즉(힘에의 의지로서의) 삶에의 의지가 매순간 자신이 구현해놓은 '최상의 모습'을 스스로 파괴하고, 삶에의 의지의 파괴작용은 곧 삶에의 의지의 새로운 창조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생명의 지속은 곧 삶에의 의지의 무한성 및 영원성에 대한 증거가 된다. 이렇게 해서 니체는 생명 그 자체의 모순성 및 모순적 생명의 무한서오가 영원성을 각각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생명은 모순적이기에 디오니소스적이며, 모순으로서 무한하고 영원하기에 디오니소스적이다...

둘째, 디오니소소즉인 것은 기쁨과 환희로 전환된 고통을 의미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고통에서 발생한 환희"다. '자신이 구현해놓은 최상의 모습'을 파괴해야만 하는 생명은 파괴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니체는 생며을 가능하게 하는 삶에의 의지는 파괴의 고통을 피해야 할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오히려 기쁨이다. 생명의 모순적 구조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셋째, 디오니소스적인 것은-수사적 표현이기는 하지만-"넘쳐흐르는 살모가 힘의 느낌"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생명의 모순성과 지속은 생명력(삶에의 의지)이 결여되거나 결핍 상태에 있을 때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것이 계속 유지되고 고갈되지 않고 풍요로워야 가능하다...

넷째,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최고의 긍정 양식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니체는 이 점을 "디오니소스적 상징 안에는 긍정이 그 궁극적인 지점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긍정의 여러 양식 중에서 최고의 긍정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성이 보여주는 모든 계기에 대한 조건 없고 유보 없고 예외 없는 긍정을 하기 때문이다.  47-50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개념이 갖는 의미는 힘에의 의지를 방법적 개념으로 삼은 니체의 후기 사유에서도 여전히 지속된다. 이제 그것은 힘에의 의지와 동의어가 된다. 힘에의 의지의 복수(plural)적-상승적-관계적 수행은 영원히 지속되는 모순적 생명성, 그 과정이 보여주는 고통의 기쁨으로의 전환, 생명력의 지속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63


후기 사유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그것이 갖는 긍정의 함의다... 디오니소스적 인간이야말로 '고통 자체와 삶 자체의 모든 의문스럽고도 낯선 것들에 대한 아무런 유보 없는 긍정'의 전제인 것이다. 긍정의 철학은 그래서 '긍정하는 인간'에 대한 철학이 된다. 니체가 그런 인간을 육성하는 과제를 절실한 철학적 과제로 상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후기 사유 전체는 바로 그런 '긍저하는 인간'을 어떻게 육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라고도 할 수 있다.  64




2 '신의 죽음에 대한 선언'은 '신의 죽음에 대한 고발'


<즐거운 학문>에서 미친 사람의 입을 빌려 처음 고지된 신의 죽음은 니체의 그리스도교 비판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방향타 역할을 한다. '인간이 신을 죽게 한 장본인이라는 것, 그리스도교 교회는 살아 있는 신의 집이 아니라, 죽어버린 신의 무덤과 묘비에 불과하다는 것'.  69


사제들의 권력추구 욕망 때문...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사랑하지 못할 때, 그리스도교가 제시한 신 개념은 전략적으로 인간에 의해 부정될 수밖에 없다는 고백을 듣게 된다.  70


인간이 태양을 잃은 세계에서 헤매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 스스로 신의 '역할'을 대신하여 존재와 의미와 가치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럴 정도로 강해져야 하고, 그럴 수 있는 자신의 힘을 긍정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자시을 건강한-디오니소스적 인간으로, 위버멘쉬로 고양시켜야 한다.  7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4부 [나귀의 축제]에서 재등장하는 더없이 추악한 자는 '신을 다시 믿는 자'로 설정되어 있다. 물론 그가 믿는 신은 옛 신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신의 '나귀'를 섬긴다. 이것은 최악으로 뒤틀린 심사에서 나온, 신에게 보내는 비웃음이자 신엑 최대의 모욕을 안겨주는 방식이다. 그러면서 그는 신을 '철저히' 살해한다. '나귀'는 이제 그가 찾아낸 새로운, 지상에 있는-국가든, 돈이든, 과학이든-우상이다. 이것을 그는 다시 신격화한다. 병리적 인간인 그가 자기부정이라는 병리적 상태를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형하고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창조적 주체로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지도,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갖지도 못한다.  76-77




4 건강한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대명사, 위버멘쉬


인간을 '우연과 사제'의 손에서 해방시키고, 인간이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을 사랑하고 긍정하는 길을 철학적으로 확보한다. 니체의 철학적 야심은 이것이었다. ..

'누가 있어 긍정의 노래를 함께 부를 것인가?' 니체의 눈에 비친 사람들은 하나같이 방황하는 정신을 지닌 무기력한 "인간 말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I [머리말]  133


위버멘쉬는 오로지 인간이기 때문에, 오로지 인간만이 획득할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134


위버멘쉬는 기본적이면서도 일차적인 의미의 항상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인간이다. 즉 자신의 현 상태를 늘 넘어서는 '자기극복'의 노력을 의식적-의지적으로 기울이는 인간이다.  135


인간존재의 의미이자 이상적인 실존의 모습인 위버멘쉬, 그것의 의미는 먼저 '자유정신'이라는 개념으로부터 획득된다. 자유정신은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파토스를 지니고 가치의 새로운 중심을 제시할 수 있는 정신의 자유로운 상태를 말한다.  136


자유정신은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고 획득할 수 있는 자다...

"..평가라는 것을 통하여 비로소 가치가 존재하게 된다. 귀담아듣도록 하여라. 창조하는 자들이여! 가치의 변천, 그것은 곧 창조하는 자들의 변천이기도 하다. 창조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자는 끊임없이 파괴를 하게 마련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I [천개의 목표와 하나의 목표에 대하여]  137


여기서 창조는 가치평가작용 혹은 의미창조작용, 즉 '해석(Interpretation)'을 말한다.  138


인간이 '그의 세계'를 더 이상 구성하지 않는 경우는, 다으모가 같은 경우들일 것이다. 그의 창조력이 무기력해졌을 경우, 혹은 자신이 구성해낸 세계를 세계 그 자체와 동일시하여 절대화시켜버리는 경우,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구성된 가치와 의미의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여버리는 경우. 이 경우들이 모두 '크나큰 피로'의 증후이며, 그것은 삶의 지속적인 창조를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반면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고,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인간, 니체가 '해석자'라고도 부르는 그가 자신의 삶의 상승을 위해 해석을 할 때, 그는 이제 위버멘쉬의 조건 하나를 갖춘 것이다.  139


도대체 이성활동과 지각활동, 그리고 의식층은 어느 정도로 관계적이며, 어느 정도로 힘에의 의지의 규제를 받는 '도구'인 것인가? ..

니체는 이것에 대한 전통철학의 논의가 형이상학적으로만 진행되어 왔으며, 그래서 매우 제한적이면서도 비과학적이었다고 비난한다. 의식이나 정신은 신체의 특수한 기능에 대한 명칭이며, 신체는 육체성과 심리성의 구분 자체가 어려운 '관계적 유기체'다. 그래서 의식과 정신에 대한 물음은 곧 인간 유기체 전체에 대한 물음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철학적-생물학적-생리학적-심리학적 등 개별적 탐구방식이 모두 동원되어야 한다. 그런 총체적인 탐구에 의해서도 완전한 파악으ㄴ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형이상학적의식 탐구의 결과가 "정신과 의식을 과대평가"하는 "엄청난 실책"에 불과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경험성과 육체성을 무시하고 간과하는 "반과학적 정신"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신경계와 세포와 혈행과 근육계 등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모든 기관과 기능과 현상 전체를 고려해보면, 의식이라고 불리는 것은 첫째, 단일체가 아닌 흐름이고, 둘째, 그 과정은 우리에게 의식디는 부분과 의식되지 못하는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잇지만, 셋째, 그 구분은 고정되거나 확정된 불리가 아니라, 우리에게 의식되지 못하는 부분들이 의식되는 부분들로 이행하는 것이고, 그것도 경우에 따라 달리 진행된다는 것 등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의식과 의식 이전의 층은 진행의 정도에 따른 구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의식되는 부분을 '의식-이라는 명사형으로 이해한다. 마치 의식이 단일한 어떤 것처럼, 의식 이전적 현상과 분리 가능한 어떤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 그렇게 사용하는 언어적 표현방식일 뿐이다.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익숙해져 '생각행위와 느끼는 행위와 욕구행위의 담지자'로서의 의식, '정신적 원인'으로서의 의식이라는 생각을 도출시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언어적 표현에 불과할 뿐, 사실은 아니다.  143-144


창조자이자 해석자이며 신체적 존재라는 자의식의 소유자, 삶의 창조적 구현을 매순간 이루어내는 존재, 파괴와 창조를 하는 자유정신의 눈, 이성의 수단적 성격 및 의식의 기호적 속성과 한계를 인지하는 인간, 그러면서 자기극복의 과정을 이어가는 인간.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위버멘쉬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음 장들에서 추가될 위버멘쉬의 다른 특징들-주권성, 귀족성, 주인의식, 책임과 자유 등-을 부가하지 않아도, 이미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렵고도 고단하다. 도대체 왜 이런 쉽지 않은 일을 니체는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일까? 그래야 비로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다고, 인간의 존재의미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그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147-148


위버멘쉬적 삶을 사는 것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고단함과 어려움은 어느 순간 위버멘쉬로의 노력을 중단하게 할 수 있다. 니체도 그런 위험을 잘 알고 있다. 그가 우리에게 실존적 결단을 내리라고, 온전한 의미에서의 실존적 결단을 내리라고 강요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148




5 관점주의라는 인식 모델 : 절대적 진리? 해석적 진리!


니체는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만드는' 작용이라고 부른다. 영원한 흐름 속에 있는 생성세계를 포착해내고 파악해내고 붙잡아내어 한 가지 면으로 고정시키는 것, 여러 경험들 중에서 특정한 것만 받아들이는 것, 비교하고 도식화하고 예속시키고 범주화하고 일반화하는 것, 그래서 특수성과 개별성보다는 범주성과 일반성에 주목하는 것, 이런 모든 일들이 지성뿐만 아니라 감각기관을 포함한 우리 신체 전체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고 싶은 것만 안다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고 친숙한 형태의 것으로 포섭시켜 유형화해서 말이다. 그래야 우리가 낯설고 친밀하지 않은 새로운것들 속에서 생기는 불안감과 공포를 떨치고 삶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만드는 일'은 그 자체로 삶을 위한 전략적 행위다. 우리 인식이 이런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치기에, 해석은 대상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묘사나 기술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주관적 필요에 의해, 우리에게 이해 가능한 형태로 구조조정되어 있다. 그것은 결국 삶의 상승이라는 우리의 실천적 욕구들이 반영된 오류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오류들을 통해서만 세계와 소통하고, 이런 오류들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 결국 삶에 대한 유용성 전략은 해석의 필연적 오류성을 이미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65




6 자유와 평등을 원하는가? 먼주 주권적 존재가 되어라


니체는 .. '인간은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

'오로지 주권적 존재만이 약속도 할 수 있고, 책임도 질 수 있다. 따라서 오로지 주권적 개인만이 자유와 평등을 요구할 수 있다. 약속과 책임과 자유와 평등이라는 것은 이렇듯 주권적 개인만이 획득 가능한 특권이다.'  177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조건이 바로 약속권리에 있다고 니체가 생각.  178


기억은 앞으로의 자신의 사고와 행위를 산정하고, 그것을 규칙적인 것으로 만들며, 그것을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만드는 인간의 능력이다. 이 능력에 의해서 약속도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렇기에 기억은 약속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려는 인간의 (망각보다) 고급한 기능일 수 있는 것이다. 기억능력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에게 보증할 수 있다. 그런데 니체는 이런 기억을 '의지'의 능력으로 이해한다. 

"일단 의욕한 것을 계속하려는 의욕, 즉 본래적인 의지의 기억인 것이다." - <도덕의 계보>  180


누구나 다 자신의 해위와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책임질 수 있음은 그래서 특권이다.  183





맺음말


그는 인간과 세계의 병증을 진단하고 치유하는의사, 건강하게 살기를 가르치고 권유하는 교육자이자 계몽가다. 

먼저 네 자신을 창조할 수 있어야, 세계가 네 작품이 된다. 네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세계도 지배할 수 있다. 네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할 줄 알아야, 세계가 너의 화원이 된다. 네 자신에 대한 긍지를 지녀야, 세계도 경외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 먼저 네 자신이 되어라!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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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이 여행을 마음먹는 순간, 평범한 사람들이 잊지 못하는 연애, 평범한 사람들의 적당한 자린고비 배낭여행, 평범한 사람들이 바라는 미래라면 쓸 수 있을 거 같았다. ..

나는 길 위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다. 

지치고 고독한 여행이면 더 좋다.  6



잘 살아가기 위한 걱정이 아니라 잘 사는게 무엇인지 고민하고 싶다.

고민하면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고민하는 모습은 불안해 보일 수도 있다.  16



가끔 오지선다형 보기 내에서 해야 할 일을 찾는다. 다른 사람의 드라마틱한 스토리에 환호하지만 평범한 삶의 발버둥에는 핀잔을 보낸다. 결과만 인정한다.  39



여행은 객관식의 삶을 주관식으로 바꾸는 여정이다.  40



행복은 저축되지 않는다...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43



사랑은 이름 붙여 부르지 않아도 사랑이다.  94



가끔 세상에서 혼자 되는 시간과 장소가 필요하다.  113



여행에서 조심할 필요는 있지만 벽을 두는 것은 좋지 않다. 그 경계를 조율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118



명동의 백화점에서 하지 못할 행동은 외국에 나가서도 하지 말아야 한다.  122



언제 어디서든 스승을 만날 수 있다.  139



정성스레 드라이크리닝 된 정장을 입고 간 결혼식장에서 신랑신부의 이름도 모른 채 뷔페 접시를 나르는 것보다 진실 어린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게 아름다운 것처럼 여행도 마찬가지다.  166



시간이 지나야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내가 더 여물수록 커지는 감동이 있다.  220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가 더 소중해질 수 있는 것.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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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이 책에 니체가 일한 곳들의 모습, 니체가 무언가를 기록하거나 원고를 준비하거나 교정을 본 지방과 장소의 풍경을 담았다.  4



서문

니체는 왕의 은혜로 목사 자리를 얻게 된 시골 루터교 목사의 아들, 귀족을 공경하고 서민을 경멸하는 아이로 남아 있었고, 어른이 되어서는 현대의 중요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 거의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유럽인(특히 독일인), 민족주의, 제국주의, 군국주의에 대한 주요 비평가 중 한 명이었다.  9


아주 일찍부터 니체는 자신이 '단지'독일인일 뿐 아니라 유럽인이라고 생각했다. 열다섯 살 때는 남부 이탈리아인, 스위스인, 북부 독일인 주인공들이 각자의 운명을 펼치는 [카프리와 헬골란트]라는 단편을 썼는데, 이야기 초반에 북부의 영웅인 폰 아델스베르크는 "우리는 이 세상의 순례자다. 우리의 조국은 어디에나 있고 아무 곳에도 없다. 우리 모두는 같은 태양이 비춘다. 우리는 이 세상의 시민들이다. 지구가 우리 왕국이다!"(니체 초기 작품집)라고 선언한다.  10


1880년대 중반에 니체는 자신을 "고국이 없는" 유럽인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FW, 377;3, 628~631)  11


니체는 글을 쓰기위해, 그만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즉 서구 문화(종교, 과학, 학문, 권력욕)를 종말로 몰아가고 있는 금욕주의의 계보와 그러한 금욕주의를 굴복시킬 수 있길 바라며 발전시킨 사상('같은 것의 영원회귀')을 쓰기 위해 유럽이 필요했다.  12


글을 잘 쓰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말을 잘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글을 더 잘 쓴다는 것은 더 나은 생각을 한다는 의미다. 전할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항상 생각해내고 실제로 그것을 전하는 법을 안다는 의미다.(MAM2, WS 87, 2, 592~593)  13


니체는 좋은 유럽인이 되려면 내면에 대한 순종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사람은 자신이 쓰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면의 소리를 들은 뒤 그것을 쓰는 데 도움이 되는 장소로 서둘러 가야 한다.  14


니체는 자연에 대해 박물학자라기보다 우주론자였고 도시에 대해서는 건툭가라기보다 문화비평가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 방대한 역사 지식, 고도의 문학 감수성, 고대 신화의 세계와 문화에 대한 친밀함, 이 모든 것이 니체와 자연, 도시의 유대를 풍요롭게 해주었다.  19




제1장 시작과 끝


'나는 어린 시절부터 혼자 있는 걸 좋아했고, 방해받지 않고 내 자신에게 몰두할 수 있을 때가 가장 기분이 좋았다...'(J1, 8)

열여섯 살 때 쓴 기록에서는 같은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려준다. "아주 일찍부터 내 안의 다양한 특성이 나타났다. 나는 사색적이고 과묵한 편이어서 다른 아이들과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가끔씩 나도 모르게 열정이 표출되기도 했지만."(J1, 279)  46


글쓰기와 작곡은 혼자 있기 좋아하는 사람이 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일들로 보인다. 열네 살 때 니체는 "나는 항상 혼자만을 위한 작은 책을 쓰고 싶었다. 나는 아직도 이 소박한 허영에 사로잡혀 있다"(J1, 11)라고 썼다. 니체는 마흔 살 때도 다시 같은 글을 썼을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 보면 니체는 항상 모든 사람에게 읽히기 위한 책을 썼지만 한편으로는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을 책을 쓴 것이다.  73


엄격한 질서를 내세운 학교에서 학생들을 동질화시키는 훈육이었다. 

이런 식의 훈육은 집단 전체의 효과를 노리고 짜여졌기 때문에 개인을 냉정하고 추상적으로 다룬다.  78


"..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할 수 있는 한 스스로 견딜 만한 존재로 자신을 위장하는 일일까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적당히 노력해서 할 수 있는 한 가장 좁은 테두리 안에서 사는 데 익숙해지는 겁니다. 정신이라는 초의 심지를 멋지게 잘라내고 부를 좇고 세상의 오락을 즐기며 사는 것이지요. 아니면 인생의 추잡한 면과 우리가 인생을 즐기려 할수록 오히려 더 인생의 노예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 인생의 좋은 것들을 단념하고 포기를 연습할 수도 있어요.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드에게는 우호적으로 대하면서도.(우리는 누추한 우리 동료들에게 동정심을 느끼니까요.) 한마디로 오늘날의 지나치게 달콤하고 모호한 기독교가 아니라 원래 기독교의 엄중한 요구에 따라 사는 것이지요. 기독교는 지나는 길에 "동행하거나", 유행이니까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인생은 견딜 만할까요? 예, 그렇고말고요. 인생의 짐이 계속 가벼워지고 어떤 끈도 더 이상 우리를 그 짐에 묶어놓지 않으니까요. 괴롭지 않게 포기할 수 있으니 인생은 견딜 만한 것이 됩니다."(B2, 95~96)  83-84


본에서 라이프치히로 옮겨갈 무렵 니체는 헤겔의 철학을 두루 섭렵했다...

니체는 랠프월도 에머슨의 독일어 번역본을 오랫동안 읽었다. 에머슨은 여러해 동안 니체의 충실하고 지속적인 동반자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헤겔은 곧 칸트와 쇼펜하우어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87


'우리 학자 대부분이 학식을 너무 꽉 채우지만 않는다면 학자로서 더 가치가 높아질 거야.'(B2, 205~206)  90




제2장 나는 신이 되느니 바젤의 교수가 될 것입니다


니체는 대학에서 그리스 문학사, 플라톤 이전의 철학, 그리스와 로마의 수사학, 고대 그리스 종교, 플라톤의 생애와 가르침, 아이스킬로스의 <공양하는 여자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헤시오도스의 <노동과 나날>을 가르쳤다. 김나지움에서는 플라톤의 <변명>, <파이돈>, <파이드로스>, <향연>, <국가>, <프로타곻라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엄선된 책들, 아이스킬로스의 <포박된 프로메테우스>,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를 가르쳤다. 학생들은 에우리피데스의 <바카이>를 읽고 디오니소스 숭배에 대한 각자의 느낌을 보고서로 써야 했다.  139-140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를 준비하며 쓴 기록에서 니체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대충 가르치거나 애매하게 설명했다면 모든 학생이 내게 더 많은 설며오가 해석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교사는 모든 수준의 학생들을 이해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140


김나지움과 대학의 많은 학생이 니체의 능변과 탁월한 명석함에 대한 증언을 남겼지만 개인적인 면에 대한 묘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동료들은 니체에게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실제로 동료들은 1874년에 니체를 학과장으로 선출했는데, 니체와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어도 그를 신뢰했음을 알 수 있다. 니체는 지루한 디너파티에서 빠져나가려고 변명을 해야 하는 일이 불만스러웠다. 그는 혼자 바깥에서 산택하는 편을 훨씬 더 선호했다. 니체의 고독과 자기수양은 아마도 나중에 그가 금욕적인 이상이라고 분석한 것의 결실일 것이다.  142


니체는 학창 시절 초기에 존재의 균열을 느낀 적이 있었다. 특히 슐포르타에서는 예술과 음악에 대한 끌림이 비판을 받아 억제되었다. 보노가 라이프치히에서는 문헌학이 그를 신학으로부터 구해주었지만 '포기'와 '체념'의 삶을 선고받았다. 마지막으로 바젤에서는 일상의 고되고 단조로운 일이 그의 에너지를 빼앗아갔고 트립셴을 방문할 때도 지성과 취향에 있어서 많은 걸 타협해야 했다. 답답한 상태가 점점 더 심해지자 니체의 건강은 더 악화될 조짐을 보엿다... 이러한 위기에 대한 대응은 여행을 가는 것이엇다.(여행이 항상 니체의 첫 번째 대응 방법이었다).  165


니체는 루가노에서 <비극의 탄생>을 탈고하면서 이미 자신의 직업적 자아, 교수로서의 자아에 균열, 분열 혹은 정신분열의 압박감을 느꼈다. "나는 스스로 문헌학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예리하게 느끼고 있다. 그것도 완전히 심각한 상태다. 찬사와 비난, 내가 이쪽에서 받았던 실로 가장 고귀한 찬미가를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 그래서 나는 서서히 철학적 존재로 옮겨가고 있고 이미 자신에 대한 믿음도 생겼다. 뿐만 아니라 시인이 될 준비도 이미 되어 있다."(B3, 190)  171


니체는 유대인의 종교와 도덕률에 대해서는 계속 양면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유럽의 고급문화를 대체로 유대인들이 만들어냈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176


인간은 투병생활을 통해 자신의 삶과 한계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 어떤 일에 집중하고 신중하게 계획을 세울 기회를 얻는다. 다른 한편 병이 들면 약해지고 낙담하여 어떤 진지한 계획을 세울 용기를 잃어버린 채 망성이고 위축되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니체는 한 음악가 친구에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의 이유를 잊은 채 사는 병든 생황이다"라고 써싿. 1875년 8월 11일에는 파리의 말비다 폰 마이젠부크에게 편지를 썼다.

".. 우리가 완전히 낫기 위한 비법은 둔감해지는 것입니다. 그 방법만이 우리 내면의 엄청난 연약함과 고통에 대한 유일한 해독제이지요. 적어도 외부의 어떤 것도 우리와 충돌하여 쉽게 해를 끼칠 수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튼 동시에 내부와 외부 양쪽의 불과 맞서야 하는 것보다 제게 더 힘든 일은 없습니다."(B5, 104)  191-192


'골똘히 생각하고 글을 끼적거리는 문제 많은 습성은 지금까지 내 건강을 해쳤을 뿐이다. 내가 단순히 학자 입장이었을 때에는 건강을 해쳤을 뿐이다. 내가 단순히 학자 입장이었을 때에는 건강했다. 하지만 그 뒤로 음악에 관한 것들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난해하기 그지없는 철학과 별 의미도 없는 수만 가지 일이 나를 걱정으로 몰아넣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교사가 되고 싶다.'(B2, 250)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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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12월 3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출판용 제목과 내용이 준비되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심리학적 질문이 주를 이루고 형이상학적 질문이 부차적인 책으로, 어쩌면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계보를 탐구하는 니체의 성향이 마침내 꽅을 피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211-213


스위스 '시민권'을 포기하면서 그에게는 다시 집이 없어졌다. 니체는 새로운 아침을 찾아 더 멀리 산속으로 달아났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묘사했던 바로 그 방랑자가 된 것이다.

방랑자. 조금이라도 이성의 자유를 얻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지상에서 스스로 방랑자라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가는 여행자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방랑장게는 그런 목표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반면 방랑자는 세상의 모든 일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유심히 관찰하고 살필 것이다. 그래서 방랑자는 어떤 특정한 일에 지나치게 애착을 가져서는 안된다. 오로지 변화와 무상함에서 기쁨을 찾는 자가 되어야 한다.  217




제3장 높은 산의 고독


니체의 유랑생활에는 주기가 있었다. 겨울은 지중해에서, 여름은 고지 엥가딘의 산에거 보냈다. 여름에는 먼저 제노바에 갔다가 니스로 향했고, 겨울에는 항상 질스마리아에서 지냈다.  24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1부에서 4부까지 모두 1883년과 1885년 사이에 쓰이고 출판되었다(4부는 자비로 출판했다). 니체의 편지들이나 철학적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사람을 보라>는 <차라투스트라>가 니체의 가장 위대한 성취이자 걸작임을 알려준다.  266


'이제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나오게 된 내력에 대해 설명하겠다. 이 책의 기본 개념인 영원회귀 사상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긍정 형식이며, 1881년 8월에 떠오른 사상이다. 이것은 "인간과 시간의 6000피트(1830미터)저편"이라고 서명된 종이에 적혔다. 그날 나는 실바플라나 호수 근처의 숲을 산책하다가 주를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옆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곳에서 이 사사이 내게로 왔다.'(W6, 355)

영원회귀 사상의 고향이 질스의 산속이라면 <차라투스트라>는 이탈리아 리비에라에서 탄생했다.  267


<차라투스트라> 1부를 완성한 니체는 하인리히 쾨셀리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책을 "일종의 설교"이자 자신의 최고작, "자신의 영혼에서 굴러나온 보석 같은" 책이라고 불렀다. "내 손에서 나온 책 중에서 이보다 더 진지하거나 역동적인 것은 없네. 나는-다른 색과 섞어 사용할 필요가 없는-이 색이 지금부터 내 '본래의' 색이되길 진심으로 바라네."  268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1884년 2월 6일에는 오버베크에게 이렇게 열변을 토했다. 

'전반적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수십 년 동안 내 안에 쌓여온 힘이 폭발한 것일세. ...'(B6, 475)  272


니체는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악의 저편>을 "내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일종의 논평"이라고 말했다.(B7, 270) 나중에 게오르크 브란데스에게는 <선악의 저편>이 자신의 모든 저작의 "열쇠"이므로 자신의 철학을 전체적으로 공부하려면 그 책으로 시작하라고 권했다...

쾨셀리츠에게(B7, 166~167)쓴 편지다. "나는 책을 쓰면서 힘들게 지난 겨울을 보냈네. 용기, 그 책을 출판하는 데 필요한 용기가 때로 마구 흔들렸다네. 이 책에는 다음 제목을 붙였네."

<선악의 저편>

미래 철학의 서곡  278 


<선악의 저편>에서는 철학자들의 편견, 특히 분명하게 정의된 가치들의 대립에 대한 철학자들의 순진한 믿음, 신앙(특히 그리스도교)의 기원, 도덕의 '자연발생사', 학문과 학문적 훈련의 현 상태 및 함께 학문을 연마하는 사람들의 '덕',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귀함의 의미 등을 다루었다. 니체는 이 책에서 플라톤 이후 서구의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모든 전통을 수용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279


1887년 11월 <도덕의 계보>가 출판. 6월 10일에서 17일 사이에 <도덕의 계보>를 썼다. 이 책은 형식 면에서는 1880년대 초기의 아포리즘 작품들보다 1870년대에 쓴 <반시대적 고찰>과 더 유사하다. <도덕의 계보>의 세 논문은 각각 (1) '선과 악' '좋음과 나쁨' (2) '죄'와 '양심의 가책' (3) 서구의 종교, 도덕 체계, 학문, 철학에서의 '금욕적 이상'의 의미를 다룬 일관되고 세심하게 구성된 명상이다. 그러나 문체는 이전의 어떤 글보다 상당히 더 예리하고 심지어 신랄하기까지 했다.  282


니체는 <도덕의 계보>를 <선악의 저편>의 부록 혹은 보충서라고 불렀지만 이 책의 발단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흔한번째 생일인 1885년 10월 15일에 니체는 하인리히 폰 슈타인 남작에게 최근 '양심'에 관한 파울 레의 책을 읽었다고 쓰면서 "얼마나 공허하고 지루하며 오류가 많은지!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것들에 관해서만 이야기해야 합니다"라고 부르짖었다.(B7, 99) ...

20세기 들어 많은 사상가, 특히 미셸 푸코, 질 들뢰즈가 니체의 도덕의 계보 작업을 확장했다. 이들에게는 니체의 '논쟁'이 분명 그의 가장 중요한 성취 가운데 하나였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를 <선악의 저편>ㅗ가 비교하면서, 후자는 음조가 "중립적이고" 아주 천천히, 심지어 머뭇거리며 리듬이 발전한다고 묘사한 반면, <도덕의 계보>는 "노골적이고 가공되지 않은 파릇파릇한 열정"으로 알레그로 페로체(빠르고 거칠게)로 쓰였다고 말했다.(B8, 245)  283


니체 자신은 수월하게 술술 쓰였던 <우상의 황혼>이 자신의 사상을 잘 소개해준다고 생각했다. "그 책은 내 철학의 완벽하고 총체적인 입문서다."(B8, 414) ..

실제로 니체는 <우상의 황혼>이 특히 <안티크리스트> 입문서로서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291


<안티크리스트>

가장 유명한 장으로는 '소크라테스의 문제' '어떻게 참된 세계가 결국 한갓 꾸며낸 이야기가 되어버렸는지'등이 있고 가장 신랄한 장으로는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방법에 관한 다음의 충고가 포함된 '독일인에게 모자란 것'을 꼽을 수 있다.

'인간은 보는 법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세 가지가 지향하는 것은 고결한 문화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눈을 평온과 인내, 일들이 자신에게 다가오게 놔두는 데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판단을 미루고 특정한 경우를 모든 측면에서 탐색하고 검토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비철학적인 용어로 강한 의지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강한 의지에서 본질적인 것은 결정을 보류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보류할 수 있는 '능력'이다. (..) 춤을 배우려고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법도 배우려고 해야 한다. 생각은 일종의 춤이다. (..) 발로도 춤출 수 있지만 개념과 단어로도 춤을 출 수 있다. 펜으로도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는 말과 사람들이 글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을 꼭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W6, 108~110)  291-292


니체가 고지 엥가딘에서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 것은 고독이었다. 고독은 여행객들과 단절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부의 한 기록에서 여행객들을 이렇게 정의했다. '여행객-그들은 동물들처럼 말없이 땀에 젖어 산을 기어오른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길가에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고 말해주는 것을 잊어버렸다.'(W2, 641) 하지만 여기에는 가족과 친구들,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하면 간헐적이고 주의 깊게 조정된 인맥과의 단절도 포함되었다. 니체는 고독과 외로움 사이의 악명 높은 가느다란 줄 위에 자리잡기 위해, 즉 사람이 아무도 없는 땅에서 살기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301


1884년 여름에 니체는 자신의 '문헌', 즉 <비극의 탄생>부터 <차라투스트라>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쓴 모든 책을 읽었다. 마흔 번째 생일을 앞두고 있던 니체는 자신의 30대를 평가하며 40대의 계획을 세우는 데 몰두했다.  308




제4장 바다와의 친밀한 대화


<아침놀>의 서문에서 니체는 독자들에게 옛 문헌학자, 즉 이성(logos)을 사랑하고 "천천히 읽는 법을 가르치는 교사"를 위해 이 책은 느린 박자로 천천히 읽으라고 당부했다.(W3, 17) 또한 <즐거운 학문>의 서문은 이 책을 즐거움, 즉 "되돌아온 힘, 다시 한번 열린 바다에 대한 갑작스런 느낌과 예감에 직면해 터져나오는 환호성"이라고 선언했다.(W3, 346)  360


라팔로와 니스, 즉 이탈리아 리비에라와 프랑스 리비에라는 모두 <차라투스트라>의 주요 집필 장소였다. 우리는 종종 차라투스트라를 산속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초인과 영원회귀에 관한 생각을 가르치기 위해 인간들에게 갔으며 산에서 내려갔을 때는 바다에서 가장 자주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367


니체는 유랑생활을 했던 10년 동안 실명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도 니체는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모든 학술서, 형이상학, 지식론, 종교와 도덕의 역사에 관한 책들뿐 아니라 시와 소설도 읽었다. 니스에 있을 때였기에 프랑스어 번역판으로 읽은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니체를 사로잡았다. 니체는 도스토옙스키가 스탕달 이후 자신과 재능과 통찰력을 공유한 유일한 심리학자라도 주장했다.  380


바닷가에서건, 높은 산에서건 1880뇬댜애 니체를 괴롭힌 풀리지 않는 딜레마는 고독과, 사람들과의 교류의 필요성이었다. 특히 1880년대 중반에 니스에서 지내면서 니체는 남을 가르치고 싶은 깊은 욕망에 시달렸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가르치고 전해야 했다. 그러나 니체에게 배우려는 사람들은 종종 "평번한 애호가들"로 판별되었고, 타렵적으로 교제하는니 완전한 고독이 나아 보였다. 따라서 니체의 편지들에서 우리는 심한 고독과 고독의 부재, 불충분한 교제와 과도한 교제에 대한 상충되는 불만이 공존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384


메타 폰 살리스는 니체가 이야기를 매우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고 "주변의 단순한 일도 무시하지 않았다"고 전한다.(N2, 529~530) 한 예로, 잔 두리쉬가 추수기 직전에 황소의 발굽과 입에 병이 났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자 니체는 진심으로 관심을 보였다. 아무리 체제 전복적인 일을 한다 해도 니체에게는 누군가와 자신의 열정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이 니체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폰 살리스는 "그는 상냥하고 상처입기 쉬운 사람이었다. 또한 화합할 준비가 되어 있고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고 말한다. "반면 그가 하는 작업은 준엄함을 요구하고 타협을 금했으며 그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과 비통함을 가져다주었다."(N2, 530)  386


'지금 저는 세계사에 남을 만큼 냉소적으로 제 자신에 관한 글을 썼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라는 제목의 이 책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최소한의 죄책감도 없이 암살합니다. 이 책은 기독교적인 모든 것, 혹은 기독교에 감염되어 청력과 시력을 잃어버릴 모두를 공격하는 천둥과 번개로 끝납니다. 궁극적으로 저는 그리스도교를 분석하는 최초의 심리학자입니다. 늙은 포병이 된 저는 어떤 그리스도교 반대자도 상상하지 못한 강력한 총을 꺼내들 수 있습니다. 이 책 전체는 완성된 채 제 앞에 놓여 있는 <모든 가치의 재평가>의 서문입니다...'(B8, 482~483)  412-413




옮긴이의 말

이 책은 단순한 전기가 아니라 니체의 삶, 니체가 머물렀던 공간, 인간관계를 니체가 쓴 글들과 교차시켜가며 엮어내고 있다.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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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한 교사로 자기 차고에서 목을 맸던 나이 지긋한 남자가 "아웃사이더"가 자살을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살을 두고 누구나 하게 되는 한 가지 행동은 자살에 대해 설명하는 겁니다. 설명하고, 판단을 내리죠. 남겨진 사람들에게 자살이란 매우 무시무시한 일이에요. 자살에 대해 견해가 필요할 정도로요. 어떤 사람들은 자살을 비겁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죠. 어떤 사람들은 범죄라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거라고 생각하고요. 영웅적이고 용기 있는 행위로 여기는 관점도 있죠. 그다음으로 결벽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문제 삼는 건 이겁니다. 정당한 자살인가, 충분한 이유가 있었는가? 심리학자들의 견해는 좀더 임상적인데, 징계하려 하거나 이상화하혀 하지도 않아요. 그냥 자살자의 정신 상태를, 자살할 때 그가 어떤 정신 상태에 있었는지를 설명해 보려 하죠."  23-24


페긴이 그의 집에 드렀다. 버몬트 주 서쪽에 있는 규모는 작지만 진보적인 여자대학인 프레스콧에 최근 강사 자리를 얻은 페긴은 학교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빌린 조그만 집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액슬러가 사는 곳은 거기서 서쪽으로 한 시간 거리로, 주 경계선 건너편의 뉴욕 주 외곽에 있었다. 방학 동안 부모님과 여행을 다니던 발랄한 대학생이었던 그녀를 본 게 벌써 이십여 년 전 일이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몸이 유연하고 가슴이 풍만한 마흔 살의 여자가 있었다...

그 첫날 오후, 액슬러는 페긴을 집 안으로 들이다 발을 헛디뎌 널찍한 돌계단 위로 세게 넘어졌는데, 손을 짚었다. 손바닥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구급약은 어디 있어요?" 페긴이 물었다. 그가 말해주자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찾아들고 나와 과산화수소를 묻힌 솜으로 상처를 씻어내고 반창고 두어 개를 붙였다. 그리고 물도 한 컵 가져다주었다. 누가 그에게 물을 가져다준 것도 몹시 오랜만이었다.

그는 저녁을 먹고 가라며 그녀를 붙들었다. 결국 그녀가 저녁을 준비했다. 누가 그에게 저녁을 차려준 것도 몹시 오랜만이었다. 그가 주방 식탁에 앉아 음식을 만드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그녀는 맥주 한 병을 비웠다. 냉장고에는 파르메산 치즈 한 덩이와 계란, 베이컨, 크림 반 통이 있었는데, 그것들과 파스타 1파운드로 그녀를 둘이 먹을 카르보나라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그의 주방에서 그녀가 자신의 주방인 것처럼 편하게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는 그녀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던 갓난아기였을 때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몸이 탄탄하고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생기 가득한 존재였다. 이윽고 그는 자신이 재능을 잃은 채 세상에서 고립되었다는 느낌을 더이상 받지 않게 되었다. 그는 행복했다. 뜻밖의 기분이었다. 보통 그는 저녁식사 때 하루 중 가장 우울했다. 그녀가 음식을 만드는 동안 그는 거실로 가서 브랜들이 연주하는 슈베르트 음반을 얹었다. 마지막으로 음악을 들으려 했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지만, 결혼생활이 행복했던 시절에는 늘 음악을 틀어놓았었다.

"아주머닌 어떻게 된 거예요?" 스파게티를 먹고 와인 한 병을 나눠 마신 뒤 그녀가 물었다.

"아무렴 어떤가. 너무 지루한 사연이네."

"아무도 없이 여기서 혼자 지낸 지 얼마나 된 거예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을 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외로움을 느끼기에 충분할 만큼 오래. 달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는 동안 여기 앉아서 내가 없어도 시간은 계속 흐르리라는 생각을 하면 때로 놀랍기도 해. 내가 죽었을 때도 그럴 테지."

"배우 일은요?" 그녀가 물었다.

"난 이제 배우가 아니야."

"그럴 리가요." 그녀가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것도 자세히 이야기하기엔 지루한 사연이지."

"은퇴한 거예요, 아니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돌아 그녀에게 다가갔고, 그녀가 일어서자 키스했다.

그녀는 놀라 미소를 짓더니,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난 성적으로 평범하지 않아요. 여자랑 자요."

"그건 알아채기 어렵지 않더군."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두번째로 키스했다.

"그런데 뭘 하는 거죠?" 그녀가 물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안다고 말하진 못하겠는걸. 남자하곤 한 번도 없었나?" 그가 물었다.

"대학 때요."

"지금도 여자와 지내나?"

"대체로요." 그녀가 대답했다. "아저씬요?"

"난 아니야."

그는 근육이 발달된 그녀의 팔에서 힘을 느꼈고, 그녀의 묵직한 가슴을 주물렀다. 그리고 그녀의 탄탄한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감싸쥐고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다시 한번 키스했다. 그런 다음 그녀를 거실 소파로 이끌어싿.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청바지를 벗었고, 대학 시절 이후 처음으로 남자와 했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레즈비언과 했고.

몇 개월 뒤 그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날 오후에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차를 몰고 왔지?" "당신이 다른 사람하고 같이 사나 보고 싶어서요." "그래서 보고 나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죠. 나라고 안 될 게 있나?" "늘 그런 식으로 계산하며 사나?" "계산이 아니에요. 원하는 걸 추구하는 거죠." 그녀는 덧붙였다. "더는 원치 않는 걸 추구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요."  58-65


그녀는 자신의 부모가 그들 사이를 알게 되길 원치 않았다. 그들은 매우 속상해할 게 분명했다.  69


그럼에도 어느 날 아침식사 때 액슬러는 이렇게 말했고, 그 말에 그녀만큼이나 그 자신도 놀라고 말았다. "이게 정말 당신이 원하는 건가, 페긴? 그동안 서로 즐겁게 지냈고, 색다른 기분도 강렬했고, 감정도 격렬했고, 쾌락도 만끽하긴 했지만, 난 지금 당신이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 궁금하네."

"그럼요, 알아요. 난 이 생활이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끝내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내 말뜻을 알겠지?"

"그럼요. 나이 문제, 성적 이력의 문제, 당신과 우리 부모님의 오래된 관계. 이것 말고도 스무 가지는 더 있을걸요. 하지만 그 가운데 날 괴롭히는 건 하나도 없어요. 당신을 괴롭히는 게 있어요?"

"여러 사람의 마음을 괴롭게 만들기 전에 우리가 물러서는 게 좋지 않을까?" 그가 대꾸했다.

"행복하지 않아요?" 그녀가 물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내 삶은 정말 위태로웠네. 이젠 희망이 산산 조각나는 걸 견뎌낼 힘이 없어. 결혼생활은 불행할 만큼 불행했고, 그전에도 여러 여자와 이별을 경험했네. 그건 늘 고통스럽고, 늘 가혹하지. 그래서 이쯤 살고 보면 그런 걸 자초하고 싶지 않아."

"사이먼, 우린 둘 다 버림받은 사람들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나락에 떨어진 상태였는데, 부인은 당신 혼자 감당하라고 내버려둔 채 짐을 꾸려 떠나버렸죠. 난 프리실라한테 배신당했고요. 나를 떠났을 뿐 아니라, 잭이라는 이름의 수염 난 남자가 되기 위해 내가 사랑했던 몸도 버렸어요. 혹시 우리가 실패한다면, 그들 때문도 아니고 당신이나 내 과거 때문도 아니고 우리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해요. 당신에게 모험을 하라고 권하고싶진 않아요. 당신에겐 이 상황이 모험인 걸 알아요. 어쨌거나 우리 둘 다에게 모험이에요. 나도 모험이라고 느끼니까. 물론 당신하곤 종류가 다르지만요.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결과는 당신이 날 떠나는 거예요. 이제 당신을 잃으면 난 견디지 못 할 거예요. 그래야만 한다면 견뎌보겠지마, 모험인 게 문제라면, 우린 이미 모험이 기렝 들어섰어요. 이미 저질러버렸다고요. 물러서서 피해가기엔 너무 늦었어요."

"그러니까, 잘 지내는 동안에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길 원치 않는다는 뜻인가?"

"바로 그거예요. 난 당신을 원해요. 알잖아요. 당신이 내 사람이라고 믿게 됐어요. 나한테서 억지로 떠나려 하지 마요. 난 지금 이대로가 좋고, 이 생활을 끝내고 싶지 않아요. 그것 말고는 할말이 없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당신이 노력한다면 나도 노력하겠다는 것뿐이에요. 이젠 잠깐의 외도 같은 게 아니에요."

"우린 모험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그녀의 말을 되풀이했다.

"우린 모험의 길에 들어섰어요." 그녀가 대꾸했다.

이 네 마디 말은 그에게 버림받는다면 그녀가 최악의 시간을 보낼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 여자는 필요하다면 연속극에 나올 법한 말이라도 하겠지. 몇 달이나 지났는데도 프리실라가 준 충격과 수차례에 걸친 루이즈의 최후통첩으로 아직도 마음고생을 하고 있으니, 저러는 걸 기만이라고 할 순 없지. 우리가 본능적으로 택하는 전략이니까. 하지만 결국 언젠가 상황이 바뀌면, 액슬러는 생각했다. 그녀는 이 관계를 끝내버릴 수 있는 더 강한 위치에 올라서고 나는 너무 우유부단해서 이 관계를 지금 끊어버리지 못한 탓에 힘업슨 위치로 떨어지겠지. 그리고 그녀가 강해지고 내가 약해졌을 때 가해질 타격을 나는 견뎌내지 못하겠지. 

그는 자신들의 미래를 자신이 명료하게 적시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예상되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미래를 바꾸기에 지금 그는 무척 행복했다.  71-73


척추 통증 때문에 그는 그녀와 섹스할 때 그녀 위로 올라갈 수 없었고 심지어 옆에서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반듯이 눕고, 그녀는 체중이 그의 골반에 실리지 않도록 무릎과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그의 몸 위로 올라갔다. 처음에 그녀는 남자 위에서 하는 법을 다 잊어버려 그가 두 손을 사용해 그녀에게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줘야 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페긴이 수줍게 말했다. "당신은 말 등에 앉아 있는 거야." 액슬러가 설명했다. "말을 타봐." 그가 그녀의 항문에 엄지손가락을 밀어넣자 그녀는 쾌감으로 한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누가 거기에 뭔가를 집어넣은 건 처음이에요."  "그럴 리가." 그가 속삭였다. 그리고 이후에 그가 그곳에 성기를 삽입하자 그녀는 더 밀어넣을 수 없을 정도로 깊숙이 받아들였다. "아픈가?" 그가 물었다. "아파요. 하지만 당신이잖아요." 끝나고 나면 그녀는 자주 손바닥에 그의 성기를 올려놓고 발기가 풀리는 것을 응시하곤 했다. "뭘 그렇게 생각하지?" 그가 물었다. "이건 꽉 채워줘요." 그녀가 말했다. "딜도나 손가락으론 느낄 수 없는 방식으로. 이건 살아 있어요. 살아 있는 존재예요." 그녀는 곧 말 타는 법에 숙달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며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날 때려요." 그가 그녀를 때리면 그녀는 조롱하듯 말했다. "지금 그게 때린 거예요?" "얼굴이 이미 빨개졌잖나." "더 세게." 그녀가 말했다. "좋아, 그런데 왜?' "내가 당신한테 그렇게 해도 좋다고 허락했으니까. 그렇게 하면 아프니까. 그렇게 하면 내가 어린 여자애 같은 느낌이 들고, 내가 창녀 같은 느낌이 드니까. 어서 해요. 더 세게."

어느 주말 그녀는 섹스 기구들이 담긴 작은 비닐주머니를 가져와서는 침대에 들려 할 때 시트 위에 쏟아놓았다. 딜도 같은 것이라면 그도 볼 만큼 봤지만, 가죽 벨트로 몸에 딜도를 단단히 고정해서 한 여자가 다른 여자 위로 올라가 삽입할 수 있게 만든, 그 마구처럼 생긴 걸 사진이 아닌 실물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녀에게 그 장난감들을 갖고 오라고 부탁한 것은 그였다. 그는 그 기구를 양 허벅지에 꿰어 엉덩이 위로 끌어올린 다음 벨트처럼 단단하게 몸에 채우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옷을 입고 있는 총잡이 같았다. 거드럭거리며 걷는 총잡이 같았다. 그런 다음 그녀는 자신의 음핵 위치에 홈이 있는 벨트에 초록색 고무 딜도를 끼워 넣었다. 알몸에 그것만 입은 채 그녀는 침대 옆에 섰다. "당신 것도 보여줘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팬티를 벗어 침대 가장자리 너머로 던져버렸고, 그녀는 베이비오일을 미리 발라놓은 초록색 음경을 움켜쥐고 남자처럼 자위하는 흉내를 냈다. 그가 감찬조로 말했다. "그럴듯한데." "내가 이걸로 한번 해주면 좋겠죠." "고맙지만 됐어." 그가 말했다. "안 아프게 할게요." 그녀가 어르듯, 교태를 부리듯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약속해요. 아주 부드럽게 해줄게요." "재밌겠군. 하지만 부드럽게 해줄 것 같진 않은데." "겉모습에 속으면 못써요. 아이, 하게 해줘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좋아하게 될걸요. 이건 신천지예요." "당신이 좋아하겠지. 됐어, 난 당신이 내 걸 빨아주면 더 좋겠는데." 그가 말했다. "내 음경을 단 채로." 그녀가 말했다. "좋지." "커다랗고 두꺼운 초록색 음경을 단 채로."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야." "난 커다란 초록7nh 7nh 7nh 7nh 7nh 7nh 7nh 7nh색 음경을 달고 있고, 당신은 내 젖꼭지를 가지고 노는 거예요." "그거 괜찮은데." "그리고 내가 당신 걸 빨아준 다음에는," 그녀가 말했다. "당신도 내 걸 빨아주는 거예요. 내 커다란 초록색 음경을 입안에 넣는 거예요."

"그건 할 수 있지."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 할 수 있단 말이죠. 희한하게 선을 긋네요. 여하튼 나 같은 여잘 보고 성적으로 흥분하는 걸 보면 당신도 아직 엄청 꼬여 있는 남자라는 걸 알아야 해요." "내가 꼬인 남자일진 모르지. 하지만 당신은 더는 당신 같은 여자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런, 이제 아닌가요?" "이백 달러짜리 머리를 한 채로는 아니지, 그런 옷들을 입고서도 아니지. 당신 어머니가 당신을 따라 구두를 사게 된 이상 아니지." 그녀의 한 손이 계속 딜도를 천천히 아래위로 움직였다. "당신 정말로 지난 열 달 동안 내 안에서 레즈비언을 몰아냈다고 생각해요?" "요즘도 여자하고 잔다는 건가?" 그가 물었다. 그녀는 그저 딜도만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거야, 페긴?" 자유로운 나머지 한 손으로 그녀가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다. "그게 무슨 뜻이지?" 그가 물었다. "두 번요." "루이즈하고?" "미쳤어요?" "그럼 누구하고?"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차를 몰고 학교로 가는데 야구장에서 여자 소프트볼부가 경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차를 세우고 내려 그쪽으로 가서 벤치 옆에 서 있었죠."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가 털어놓았다. "경기가 끝난 뒤 금발을 포니테일로 묶은 투수랑 같이 집으로 갔어요." "그럼 두번째는?" "그 투수의 상대팀 투수요." "그런 식이었다면 꽤 많은 선수들이 언제 자기 차례가 오나 기다렸겠는데." 그가 말했다. "그럴 생각은 없었어요." 여전히 초록색 음경을 애무하며 그녀가 말했다. "아무래도 페긴 마이크." [서부의 플레이보이]에서 연기한 이후 사용한 적 없었던 아일랜드 억양으로 그는 말했다. "다시 그럴 계획이라면 나한테 말해주는 게 좋겠는데. 당신이 그러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녀를 붙잡아두고 독차지하기에는 자신이 무력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열정이 우스꽝스러워졌다는 걸 알면서도, 아일랜드 사투리 뒤에 애써 감정을 숨기면서 그는 말했다. "말했잖아요.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그러고는 정욕에 사로잡혔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입을 다물길 바랐기 때문인지 그녀는 천천히 그의 성기를 끝까지 입에 밀어넣었다. 그의 시선은 최면에라도 걸린 듯 그녀의 음경에 붙들려 있었고, 그러는 동안 둘의 연애가 헛되고 어리석다는 생각, 페긴이 살아온 내력은 쉽게 바뀔 수 없다는 생각, 페긴이 그의 손에 닿지 않는데 있다는 생각, 새로운 불행을 자초한 것은 자신이라는 생각 들이, 그리고 그의 내면의 무력감이 차츰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대다수 사람은 이런 이상한 결합을 싫어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이함이 정말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공포도 있었다. 또다시 완전히 끝나버리는 것에 대한 공포. 제2의 루이즈가 되는 것에 대한 공포, 비난하고 발광하고 복수하는 전 애인이 되는 것에 대한 공포.  101-105


액슬러는 트레이시를 페긴과 함께 뒷좌석에 태우고 텅 빈 캄캄한 시골길을 따라 집으로 차를 몰았다. 꼭 트레이시를 유괴하는 것 같았다. 페긴이 신속하게 행동에 들어간 것에 그는 놀라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 침실에 들어가자 페긴은 비닐주머니에 든 기구들을 침대에 쏟아놓았다. 그중에는 아주 부드럽고 가느다란 검정 가죽끈 다발이 달린 채찍 같은 기구도 있었다.  121-122


페긴은 그 기구를 입고 가죽 벨트를 조정해 단단히 고정하고는 딜도가 똑바로 앞을 향하도록 끼웠다. 그런 다음 트레이시 위로 몸을 숙이고 그녀의 가슴을 주무른 다음 아래쪽으로 미끄러져내려가 딜도를 부드럽게 트레이시에게 삽입했다. 페긴은 트레이시가 몸을 열도록 힘쓸 필요가 없었다. 

초록색 음경이 그 아래 널브러진 풍만한 나신 속으로 처음에는 느리게, 이윽고 보다 빠르고 세게, 그다음에는 한층 더 세게 찌르고 들어갔다 나왔다 했고, 트레이시 몸의 모든 굴곡이 그 움직임과 일체가 되어 움직였다.  123


그의 심장이 흥분으로 쿵쾅거렸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음탕한 눈길로 몰래 엿보는 판(그리스 신화에서 호색한으로 묘사되는 반인반수의 목신(牧神 칠목 귀신신)이 된 기분이었다.

이제 페긴은 트레이시 옆에 등을 대고 누워 쉬며 조그만 검정 가죽 채찍으로 트레이시의 긴 머리칼을 빗질하듯 쓸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앞니 두 개를 보이며 예의 그 어린애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액슬러를 건너다보며.. "당신 차례예요. 이애를 더럽혀줘요." 그러곤 트레이시의 한쪽 어깨를 잡고 "조련사가 바뀔 시간이야"라고 속삭이고는 낯선 여인의 커다랗고 따스한 몸을 액슬러 쪽으로 부드럽게 굴렸다.  124


자정 무렵 그들은 트레이시를 그녀의 차가 세워져 있는 호텔 옆 주차장으로 다시 데려다줬다. 

"두 분은 이런 거 자주 하세요?" 트레이시가 뒷좌석이ㅔ서 페긴의 품에 안긴 채 물었다.

"아니." 페긴이 말했다. "넌?"

"한 번도 안 해봤어요."

"그래서 어땠어?" 페긴이 물었다.

"머리가 안 돌아가요. 머릿속에 생각해야 할 온갖 것이 꽉 차 있어요. 회로가 끊겨버린 기분이에요. 약을 한 것 같은 기분이기도 하고."

"이런 짓을 할 객기는 어떻게 낸 거야?" 페긴이 트레이시에게 물었다. "술 기운에서?"

"당신이 입은 옷 때문에요. 당신 외모가 주는 인상 때문에요. 두려워할 필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있잖아요. 남자분, 그 배우 맞죠?" 투래아사눈 액슬러가 그 차 안에 없기라도 한 것처럼 페긴에게 물었다.

"맞아." 페긴이 대답했다.

"바텐더가 말해줬어요. 당신도 배우예요?" 그녀가 페긴에게 물었다. 

"이따금은." 페긴이 말했다.

"미친 짓이었어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맞아." 페긴이 대답했다. 단순히 서투른 애호가가 아니었던, 상황을 극한까지 몰고 갔던 채찍을 휘두르는 딜도 전문가 페긴이.

작별 인사를 나눌 때 트레이시는 페긴에게 열정적으로 키수했다. 페긴도 열정적으로 화답하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의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그들이 만났던 호텔 옆 주차장에서 두 사람은 잠시 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런 다음 트레이시가 자기 차에 올랐고, 액슬러는 그녀가 차를 몰고 떠나기 저넹 페긴이 그녀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조만간 보자."  125-126


스스로 자신에게 가하던 고통은 끝났다. 그는 자신감을 회복했고, 비통함을 밀어냈고, 지긋지긋한 두려움을 몰아냈다. 그에게서 달아났던 모든 것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인생 재건이 어디선가 시작되어야 했는데, 그의 경우에는 놀랍게도 그 일을 위해 고용된 여자인 듯한 페긴 스테이플퍼드에게 그가 빠져든 순간 시작되었다.  130


그는 자그마한 몸집의 시블 밴 뷰련을, 교외 주택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주부로 체중이 100파운드(45킬로그램)도 안 나가지만 자신이 작정한 일을 해치운, 무시무시한 살인자 역을 맡아 성공적으로 연기해낸 그녀를 떠올려보라고 자신을 다그쳤다. 그래, 그는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악귀 같은 존재였던 남편에게 그토록 끔찍한 짓을 할 힘을 끌어낼 수 있었다면, 나도 최소한 나 자신에게 이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그는 무자비한 최후를 계획해 실행한 그녀의 강인함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어린 두 아이를 집에 남겨두고,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하며 별거중인 남편의 집을 향해 차를 몰아가서, 계단을 걸어올라가고, 초인종을 누르고, 사냥총을 들어올리고, 그리고 남편이 문을 열었을 때 주저 없이 코앞에서 두 발을 발사하기 위해 그녀가 동원한 무정한 광기를. 그녀가 할 수 있었다면, 나도 할 수 있다!

시블 밴 뷰련이 용기의 기준이 되었다. 마치 간단한 한두 마디가 세상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일을 실행할 수 있게 해주기라도 한다는 듯 그는 그 격려의 말을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그녀가 할 수 있었다면, 나도 할 수 있다, 그녀가 할 수 있었다면... 마침내 연극에서 자살을 하는 것인 척하면 되겟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까지. 체호프의 희곡을 연기하는 것처럼. 이보다 더 딱 들어맞을 수 있을까? 이것으로 다시 연기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한 레즈비언의 십삼 개월간의 실수이자, 터무니없고 치욕스럽고 허약하고 하찮은 존재이므로 이일을 해치우기 위해서는 그의 모든 걸 걸어야 할 것이다.  149-150


그녀가 할 수 있었다면, 나도 할 수 있다.

그주 후반에 청소를 하러 온 여자가 다락방 바닥에서 그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그의 옆에는 이렇게 적힌 쪽지가 놓여 있었다. "사건의 진상은 콘스탄틴 가브릴로비치가 총으로 스스로를 쏘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갈매기>의 마지막 대사였다.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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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함께 읽고 함께 쓰다


조정래 작가는 "영혼의 배고픔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독서를 강요하지 말라"고 말했다.  5


저녁이 있는 삶  7






엄기호의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에 따르면, 체험은 너무 개별적이고 특이해 설명이 불가능한 반면, 경험은 이를 이야기로 만들어 누군가를 깨닫게 할 수 있다. 경험은 오직 관계를 맺을 때 일어난다. 즉 남는 게 없는 읽기란 책과의 관계 맺음에 실패한 체험에 불과하다.  13


'책을 읽은 뒤 최악의 독자가 되지 않도록 하라. 최악의 독자라는 것은 약탈을 일삼는 도저고가 같다. 결국 그들은 무엇인가 값나가는 것은 없는지 혈안이 되어 책의 이곳저곳을 적당히 훑다가 이윽고 책 속에서 자기 상황에 맞는 것, 지금 자신이 써먹을 수 있는 것, 도움이 될 법한 도구를 끄집어내어 훔친다. 그리고 그들이 훔친 것만을 마치 책의 모든 내용인양 큰소리로 떠드는 것을 삼가지 않는다. 결국 그 책을 완전히 다른 것을로 만드렁 버리는 것은 물론, 그 책 전체와 저자를 더럽힌다.' - <니체의 말>  19


'지금 생각하는 바를 지속적으로 합리화하면서 고집하기 때문에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18세기 프랑스의 교육철학자 콩도르세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과 '믿는 사람'으로 나누었다. 이는 다시 말해 '근대적 인간'과 '중세적 인간'으로 나눈 것인데, 이를 다시 내 식대로 적용해 보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를 물을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라고 물을 때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그나마 열리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는,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믿는' 사람으로 남기 때문이다.' - 홍세화 <생각의 좌표>  41-42


'내가 지금까지 아주 참된 것으로 간주해 온 것은 모두 감각으로부터 혹은 감각을 통해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감각은 종종 우리를 속인다는 것을 이제 경험하고 있으며, 한 번이라도 우리를 속인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신회하지 않는 편이 현명한 일이다. - 데카르트 <성찰>  44


공감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간접경험의 확률 또한 높아진다. 문제는 공감력이 부족한 독자, 어떤 책을 보든 자기 문제가 아니면 몰입을 하지 못하는 경우다.  45


권위적인 부모 밑에서 자랐거나, 규율을 꼭 지켜야 하는 환경에 놓인 아이들은 표현력이 금세 좋아지지 않는다.  67


요즘 학생들은 조금이라도 다르거나 튄다고 생각되면 냉소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은 특별해보이길 원하면서 친구가 다르게 보이는 것은 원치 않는다. 아이들은 놀리거나 냉소하며 상대의 개성을 묵살한다.  71


독서토론의 가장 큰 목적은 책을 잘 읽는 것이다. 여가서 잘 읽는다는 의미는 '넓고 깊게'로 해석할 수 있다.  71


독서토론에서 아이들이 배우는 가장 큰 가치 또한 자기관찰이다.  72


배움의 공동체 숭례문학당은 '100권 읽고 토론하면 인생이 바뀐다'는 슬로건을 내세운다.  80


수다로 끝나는 도서모임은 만족시키지 못했고 성장시키지도 못했다. 인문학을 중심으로 한 고급 독서토론 모임.  81


학습공동체 '숭례문학당'은 2008년에 문을 연 rws인스티튜트로부터 시작됐다. 독서가 '책(reading)'으로 끝나지 않고, '글(writing)'과 '말(speech)'로 구현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은데, 서점 아니면 출판사, 그 외에는 직업으로 할 만한 게 없어서 취미인지 사업인지 경꼐도 불분명한 '일'을 시작했다.  121


너무 진지한 것만도 아니고, 너무 소비적이지도 않은 모임. 재미와 의미를 함께 추구하는 학습공동체!

독서는 힐링이나 자기계발 차원에서 머물던 수동적인 독서에서 자기 성찰과 토론을 통해 주관을 확보하는 능동적인 독서로 발전해야 한다.  124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가 너무 '각론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 대학세어 인문학의 위기가 오고 기술을 우선시하는 현상도 그 자장안에 있다. 총론의 방향성은 차치하고 각론의 성급함한 요구한다.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만 얻고자 한다. 씨를 뿌리지 않고 수확만 기대하는 꼴이다.  134


양이 쌓여야 질이 올라간다  146


존 로크가 "독서는 다만 지식의 재료를 공급할 뿐이며, 그것을 자기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사색의 힘"이라고 말한 이유도 바로 독후활동, 독서를 자기 것으로 체화하는 과정을 강조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147


소비적인 독서를 하곤 한다. 이른바 독서쇼핑이나 강연소핑처럼.  147


숭례문학당이 설계한 독서토론은 '미투지투(味2智2 맛미 지혜지)'를 지향한다. 재미와 의미, 메시지와 에너지를 모두 담을 수 있도록 모델화했다.  176


독서토론을 하는 이유는 .. 사고를 확장하고 자신이 보지 못한 새로운 이면을 보기 위해서다.  193


독서토론은 시끄러워야 재미가 있다.

다양한 의견과 논리적인 근거들로 시끄러워야 한다.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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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 '보통 사람'이라는 뜻.  63


흙은 관의 나무 뚜껑 위에 떨어지면서 사람의 존재 안으로 빨려드는 소리를 냈다.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였다.  64


아버지를 묻는 이 일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65


예순다섯 살이었으며, 막 퇴직을 했고, 이제 세번째로 이혼한 상태였다. 그는 메디케어(의료보험의 한 종류)를 받았으며,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기 시작했고, 변호사와 함께 앉아 유언장을 작성했다. 유언장을 작성하는것-그것은 나이가 드는 것, 심지어는 아마도 죽어가는 것에서 가장 좋은 부분일 것이다. 유언장을 작성하고, 시간이 흐르면 갱신하고 수정하고, 유언장을 다시 작성하는 문제를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보는 것.  68


이 사악한 새끼들!(그의 아들들) 삐치기만 잘하는 씨발놈들! 할 줄 아는 게 비난밖에 없는 이 조그만 똥 덩어리들! 내가 달랐고, 일을 다르게 처리했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까? 그는 자문해보았다. 지금보다 덜 쓸쓸할까?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이게 내가 한 짓이야! 나는 일흔하나야. 나는 이런 인간이 된 거야. 이게 내가 여기 오기까지 한 일이고, 더 할 말은 없어!  102


모험 없이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역효과를 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별 볼일 없는 그림을 그리는 것조차도!  108


위로를 얻고자 하는 소망은 하찮은 것이 아님을 그는 깯라았다. 더군다나 기적적으로 아직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에게서.  112


(피비, 둘째 부인)"이 여자는 당신한테서 세실리아를 없애주고, 훌륭한 딸을 낳아주고, 당신 인생을 완전히 바꿔줬어. 그런데 당신은 그 여자를 위해 뭘 해야 좋을지 몰랐어. 덴마크 년하고 그 짓을 하는 것 말고는 말이야... 모든 일의 기초는 신뢰야. 안 그래? 안 그래?"  126


"거짓말은 정말 경멸스러운 방식으로 값싸게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거야. 다른 사람이 불완전한 정보에 따라 행동하는 걸 지켜보는 거야. 다른 사람이 수모를 겪는 걸 지켜보는 거라고, 거짓말은 아주 흔하지만, 당하는 쪽이 되어보면, 그건 정말 경악스러운 거야. 당신 같은 거짓말쟁이들에게 배신을 당하는 사람들은 점점 많은 수모를 겪게 돼. 그러다보면 마침내 당신도 그 사람들을 전보다 하찮게 여길 수밖에 없어, 안 그래? 당신처럼 능숙하고 집요하고 사악한 거짓말쟁이들은 언젠가는 틀림없이 자신에게 심각한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거짓말을 한느 상대한테 그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아마 스스로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조차 못할 거야. 거짓말이 섹스도 안 하는 가여운 짝의 감정을 고려해주는 친절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겠지. 자기 거짓말이 미덕이고, 자기를 사랑하는 얼간이를 향한 관용의 행도잉라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이건 그냥 이거야. 빌어먹을 거짓말이라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빌어먹을 거짓말이란 말이야. 야, 이런 짓을 계속할 필요가 뭐가 있어. 이런 일은 다 너무 잘 알려진 거잖아.  127


"뜨거움은 사라졌어. 아내도 나이가 들어 예전의 그 여자가 아니거든. 하지만 아내는 육체적 애정이 있는 걸로 충분해. 그냥 침대에 남편과 함께 있는 거. 아내는 남편을 안고, 남편은 아내를 안고, 육체적 애정, 부드러운 태도, 동지애, 친밀함... 하지만 남편은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어. 남자는 없으면 살 수가 없거든. 그래, 하지만 이봐요, 당신은 이제 진짜로 없이 살게 될 거예요. 많은 것 없이 살게 될 거야. 없이 산다는 게 도대체 뭔지 제대로 알게 될 거야!"  128


어떤 의미에서는 각오를 하고 있었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이게 각오한다는 게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집에 와보니 이미 쓰러져서 죽은 상태더라고요. 끔찍한 충격이었어요.  148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와 전화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자신의 에스프리를 소생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알게 된 것은 삶의 종말이라는 피할 수 없는 맹공격이 가져온 결과 전체와 비교하자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긴 직장생활 동안 사귄 모든 사람의 괴로운 사투를 알았다면, 각각의 사람들의 후회와 상실과 인내가 담긴, 공포와 공황과 고립과 두려움이 담긴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알았다면, 이제 그들이 떠나야 할 것, 한때 그들에게 생명과도 같았던 그 모든 것을 알았다면, 그들이 체계적으로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알앗다면, 그는 하루 종일, 또 밤늦도록 계속 전화기를 붙들고, 전화를 적어도 수백 통은 해야 했을 것이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162


자신이 없애버린 모든 것, 이렇다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스스로 없애버린 모든 것, 더 심각한 일이지만, 자신의 모든 의도와는 반대로,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없애버린 모든 것을 깨닫자, 자신에게 한 번도 가혹하지 않았던, 늘 그를 위로해주고 도와주었던 형에게 가혹했던 것을 깨닫자, 자신이 가족을 버린 것이 자식들에게 주었을 영향을 깨닫자, 자신이 이제 단지 신체적으로만 전에 원치 않았던 모습으로 쪼그라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깨닫자, 그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그의 자책에 박자를 맞추어 쳤다. 신장제세동기를 불과 몇 센티미터 차이로 빗나갔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어디가 부족한지 랜디나 로니보다 훨씬 잘 알 수 있었다. 보통 냉정하던 이 사람은 마치 기도하는 광신자처럼 사납게 자기 가슴을 쳤다. 이 실수만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실수, 모든 뿌리 깊고, 멍청하고, 피할 수 없는 실수들로 인한 가책에 시달리다-자신의 비참한 한계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면서도, 마치 삶의 모든 파악할 수 없는 우연을 스스로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심지어 하위도 없어! 이렇게, 심지어 하위도 없이 끝이 나다니!"  164-165


그는 세 번 이혼했다. 한때 헌신보다는 비행과 실수로 더 유명했던 연쇄 남편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계속 혼자 감당해 나가야 할 터였다. 이제부터는 모든 걸 혼자 처리해야 했다.  166


목적없는 낮과 불확실한 밤과 신체적 쇠약을 무력하게 견디는 일과 말기에 이른 슬픔과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 결국 이렇게 되는 거야. 그는 생각했다. 이거야 밀리 알 도리가 없는 거지.  167





옮긴이의 말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작가인 필립 로스 자신이 충분히 공감하는 말, 나아가서 그 자신이 소설을 쓰는 태도를 대변하는 말이라는 느낌도 든다.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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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도시


대합실.. 퀸은 혹시 오른편 젊은 여자 쪽에는 읽을 만한 것이 있을까 해서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나이는 스무 살 안팎으로 보였고 왼쪽 뺨에는 분홍색 화장분으로 덮어 감추기는 했지만 여드름이 몇 개 나 있었다. 그녀는 쩍쩍 소리를내며 껌을 씹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검붉은 색의 표지로 된 문고판 책을 읽고 있어서 퀸은 제목을 보려고 몸을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그런데 참으로 뜻밖에도, 그것은 바로 그가 쓴 책이었다. 맥스 워크가 등장하는 첫 번째 소설인 윌리엄 윌슨의 <강요된 자살>. 퀸은 종종 그런 상황,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자기의 독자와 만나는 즐거운 상황을 상상해 보았었다. 아니, 심지어는 그다음에 이어질 대화를 생각해 보기까지 했다. 낯선 사람이 자기 책을 칭찬하면 상냥하게 삼가는 태도를 보이다가 차마 거절을 할 수 없어 겸손하게 [굳이 원하신다니] 하면서 속표지에 서명을 해주기로 동의하는, 그런데 이제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자 그는 몹시 실망스러웠고 화가 나기까지 했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가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자기가 그처럼 많은 노력을 쏟아 부었던 그 페이지들을 건성으로 훑어 내리는 태도에 기분이 상하기도 했다..

퀸은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보고 그녀가 책을 읽느라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려고 하면서 글줄을 따라 왔다 갔다 하는 그녀의 눈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아마도 그가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았던 모양이다. 잠시 후에 그녀가 짜증스런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며 이렇게 물은 것을 보면. "아저씨, 무슨 일 있어요?"

"아무 일 아닙니다." 퀸이 애매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단지 그 책이 마음에 드는지 알고 싶어서요."

여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퀸은 그쯤에서 이야기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가 그대로 물러서려고 들지를 않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떠나지도 전에 먼저 말이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그 책 재미 있습니까?"

여자가 다시 어깨를 으쓱하고 요란스럽게 껌을 씹었다. "그저 그래요. 탐정이 돌아 버리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은 좀 무섭고요."

"똑똑한 탐정인가요?"

"네. 똑똑해요. 하지만 말이 너무 많아요."

"아가씨는 행동이 더 많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것 같아요."

"그 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어째서 계속 읽고 있는 거죠?"

"몰라요." 그 여자가 어깨를 다시 한 번 으쓱했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겠죠. 어쨌든 별것 아닌 일이잖아요. 이건 그저 책일 뿐이에요."  63-65


유년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눈은 그대로 남는다. 그래서 눈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론적으로는 사진에 나와 있는 소년의 눈을 보고 노인이 된 뒤의 그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퀸은 정말로 그럴지 의심스러웠지만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사진뿐이었고, 그것이 현재와 연결된 유일한 다리였다.  65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말은 이 세상과 부합하지 못하고 있소. 사물들이 온전했을 때 사람들은 인간의 언어가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다고 자신했었지. 하지만 이제는 그 사물들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고 부서져서 혼돈 속으로 무너져 내리고 만 거요. 그런데도 우리의 언어는 예전 그대로요. 말하자면, 언어가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거지. 그래서 우리는 뭔가 본 것을 말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가 표현하려고 하는 바로 그 사물을 왜곡시켜 잘못 말하게 되는거고. 그 때문에 모든것이 다 엉망이 되고 말았소. 하지만 댁도 알다시키, 언어는 변할 수가 있는 거요.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보여 주느냐 하는 거지. 바로 그래서 나는 지금 가능한 한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 아주 단순해서 어린애라도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 작업하고 있소. 어떤 사물을 가리키는, 이를테면 [우산]이라는 말을 한번 봅시다. 내가 [우산]이라는 말을 하면 댁은 마음속으로 그 물건을 떠올릴 거요. 꼭 대기에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금속 살들이 붙어 있어서 펼치면 비를 맞지 않게 해주는 방수 천의 뼈대가 되는 막대기처럼 생긴 물건 말이오. 이 마지막 부분이 중요한 거요. 우산은 사물일 뿐만 아니라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물건,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의지를 표현하는 물건이오. 잠시 생각해 보면 오든 물건이 어떤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는 우산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소. 연필은 글을 쓰기 위한 것이고, 구두는 신고 다니는 것이고, 자동차는 타고 다니는 것이고. 그런데 이제 내 의문은 이런 것이오. 어떤 물건이 더 이상 고유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여전히 똑같은 물건인가. 아니면 뭔가 다른 것이 되었는가? 우산에서 방수 천을 찢어 낸다면 그 우산을 여전히 우산이라 할 수 있을까? 그 우산살을 펼쳐서 머리 위에 쓰고 빗속으로 걸어 나간다면 흠뻑 젖을 터인데도? 그래도 이 물건을 우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체로 사람들은 그걸 우산이라고 부르지요. 이껏해야 그 우산이 망가졌다고나 할 테고, 내가 보기엔 이것이 아주 심각한 오류,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그 우산은 이제 우산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우산과 닮은 것, 한때 우산이었던 것일 수는 있지만, 지금은 뭐낙 달느 것으로 바뀌었소. 그런데도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고. 따라서 그 이름으로는 더 이상 그 물건을 표현할 수 없소. 그건 부정확하고 거짓되고, 그 물건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감추는 말이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일상적으로 들고 다니는 흔한 물건들의 이름조차 짓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들에 대한 얘기를 과연 무슨 수로 할 수 있겠소?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서 변화의 개념을 구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 길을 잃게 될 거요.  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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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지금 사고 현장에서는 가까스로 핵분열은 억제되어 있는 듯하지만, 장기적으로 핵연료를 식히고 더 이상의 방사능 누출을 막을 수 있는 안정된 시스템의 구축은 요원한 것으로 보인다..

후쿠시마 원전 일대의 지반이 지금 거의 액상화되고 있다고 한다.  5


답답한 것은, 체르노빌 혹은 후쿠시마라는 대참사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에서 근본적인 방향 전환의 노력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본 정부가 여전히 원자력에 대한집착을 떨치지 못한 채, 다수 국민들의 뜻을 무시하고 원전 재가동, 나아가서는 원전 시스템 수출에 대한 기대를 접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7




책을 내면서


약 두 시간 동안 진행되는 내 탈핵강의가 말하려는 것은 딱 두 가지 이다. 하나는 한국은 탈핵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14


우리는 그동안 정부로부터 원자력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어왔다. 원자력은 안전하며, 경제적이며, 친환경적이며, 미래의 희망이며, 과학의 상징이며, 세계 에너지 산업을 주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런 이야기가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가능한 증거를 모두 동원하여 정부의 원자력에 관한 선전을 반박한다. 원자력은 위험하며, 비경제적이며, 반환경적이며, 미래세대에 엄청난 부담을 주며, 무지의 상징이며, 세계 에너지 산업 동향과는 정반대 방향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원자력의 대안으로서 '탈핵의 두 바퀴'를 소개한다. 한국탈핵은 가능하며, 세계가 이미 그 길로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15




후쿠시마 핵사고는 언제 수습괼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100년 정도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는 여전히 사고 원전을 체르노빌처럼 덮어야 한다는 의견과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녹아버린 핵연료'를 수거해야 한다는 의견이 공존한다.  31


고농도로 오염된 물은 모두 회수되지 못하고 태평양으로 매일 방출되는 실정이다.  34


체르노빌 당시에는 원전의 아래쪽으로 굴을 파 들어가서 콘크리트로 원전의 아래쪽을 막았다고 한다. 이렇게 지하수와의 접촉을 막았지만 일본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생각을 하더라도, 체름노빌과 달리 네 개의 원전 아래쪽을 모두 막는 공사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이 오염수 문제는 용융된 핵연료를 모두 걷어낼 때까지 앞으로 50년 정도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35


핵발전소 사고는 한순간의 폭발이 문제가 아니라 장기적인 방사능 오염이 문제가 된다...

고농도 지역의 넓이가 남한 넓이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세슘 137의 반감기가 약 30년이고, 반감기가 ㅇ려 번 정도는 지나야 오염이 대개 사라질 것.  39


현재 원전밀집도 2위인 벨기에는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탈핵을 결정.

현재 3위인 타이완 역시 내용적으로 탈핵을 결정하였다... 2013년 현재 일본 원전은 모두 중지한 상태이다.  59



어떤 질환은 자주 발생하고 다른 질병들은 드물게 발생하는데, 자주 발생하는 질병들은 암, 유전병, 심장병의 3대 질환이다.  94



네 가지의 피폭 경로 

첫째는  외부피폭이다. 방사능 물질이 우리 몸에 들어오지 않고 방사선만 우리 몸을 통과하는 것이다. 

둘째는 피부를 통한 내부피폭이다. 방사능에 오염된 비를 맞을 경우 피부에 묻은 방사능 물질 중 일부는 피부를 통해서 흡수된다. 또한 방사능에 오염된 화장품을 사용할 경우에도 피부를 통한 피폭이 가능하다. 

셋째는 호흡기를 통한 내부피폭이다. 공기 중에 방사능 물질이 섞여 있는데, 호흡을 통해서 이 물질들이 우리 몸에 들어오고, 폐를 통하여 흡수가 된다면 방사능 물질이 우리 몸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렇게 방사능을 가진 물질들(세슘, 요오드, 스트콘륨등)이 호흡을 통해서 우리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호흡을 통한 내부피폭이라고 한다. 

넷째는 음식을 통한 내부피폭이다. 가장 중요한 피폭 경로인데, 방사능 물질이 들어 있는 음식을 먹으면 이 음식 속에 들어 있는 방사능 물질이 우리 몸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핵사고에 의해서 발생하는 방사성 물질들은 약 200종인데, 이들 방사능 물질이 어떤 경로로든지 음식을 오염시키면, 이 음식을 통하여 인체가 피폭될 수 있는 것이다.

외부피폭은 방사능 물질과 접한 시간 동안만 피폭이 진행된다. 그러나 내부피폭은 하루 24시간 지속적으로 방사능에 피폭된다.  94-97


우리 몸속으로 들어온 방사능 물질은 그 생물학적 반감기가 열 번 이상 지나거나 물리적 반감기가 열 번 이상 지날 때까지 우리 몸을 피폭시킨다.

생물학적 반감기는 방사능 물질의 절반이 우리 몸에서 자연적으로 배출되는 시간을 말한다. 예를 들어서 세슘134와 세슘137의 경우는 70일이고, 요오드131의 경우는 138일이다. 즉, 세슘은 우리 몸에 드어온 후 70일 만에 그 절반이 배출되고, 요오드는 138일 만에 절반이 배출된다...

스트론튬은 50년, 플루토늄은 200년 이상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방사능 물질은 우리 몸에 들어오면 아예 배출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편 물리적 반감기는 방사능 물질 자체의 방사선 방출량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기간을 말하는데, 요오드131의 경우에는 8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슘134는 2년, 세슘137은 30년이어서 요오드보다 훨씬 그 반감기가 길다. 스트론튬90은 28년, 플루토늄239는 24,000년이니까 플루토늄의 경우에는 영원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98


요오드는 우리 몸에 들어온 후 두 달 반 정도 후에는 거의 모두 배출된다고 보면 되고, 세슘137은 2년 정도 후에 모두 배출된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스트론튬과 플루토늄의 경우에는 영원히 배출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100


핵사고가 발생할 경우 약 200가지의 인공방사성 물질이 발생한다...

기화가 잘 되는 물질들은 바람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고 판단된다.

요오드의 경우에는 어떤 경로로 우리 몸에 들어오더라도 거의 모두 갑상선으로 몰려든다. 우리 몸속에 있는 대부분의 요오드 성분은 갑상선에만 분포한다. 우리 몸 세포 중에서 요오드를 필요로 하는 세포는 갑상선뿐이기 때문이다. 갑상선에서는 갑상선호르몬이 생산되는데, 이 호르몬을 이루는 성분 중에 요오드가 포함된다. 방사능에 피폭된 후 발생하는 암 중에서 갑상선암이 가장 흔한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세슘은 우리 몸속에서 마치 칼륨과 같이 분포한다. 칼륨은 우리 몸에 있는 모든 세포에 고루 분포한다. 큰 차이는 아니지만 근육세포에는 이 갈륨이 좀 더 많이 분포하는데, 근육 중에서도 심장근육에 조금 더 많이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세슘은 심장 등 근육세포에 조금 더 많이 분포하고, 다른 세포에도 고루 분포하게 된다. 방사능 피폭 이후 발생하는 가장 흔한 질병 세 가지 중에 심장질환이 포함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세슘이 아닌가 생각한다.  102


후쿠시마 핵사고 때는 해양으로 많은 양이 누출되었고, 현재도 누출되고 있다. 스트론튬은 일단 우리 몸에 들어오면 생물학적 반감기와 물리적 반감기가 길어서 거의 배출이 되지 않는 물질이다. 우리 몸속의 칼슘과 비슷하게 분포하는데, 특히 뼈에 침착되어 골수에 영향을 줄 것으로 생각된다.  103


전체 방사능 물질 중에서 세슘의 비중이 대부분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원자력계의 방사능 위험에 대한 고의적인 축소 싣라고 생각한다.  106


스트론튬90은.. 생물학적 반감기는 50년으로 .. 주로 뼈에 침착되어서 마치 자신이 칼슘인 양 행동하여 골수암, 백혈병 등을 일으키는 데 기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107


방사능 피폭에 의한 질병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암이지만, 유전병 역시 피폭량에 비례하여 증가한다는 것이 의학적 정설이다. ICRP 보고서에는 암 뿐 아니라 유전병 역시 역치가 없이 피폭량에 비례하여 증가한다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120


잘 모르는 위험에 대해서는 "위험하다"고 가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121


기준치는 의학적 근거가 있는 숫자가 아니다.  123


370 * 1년간 먹는 음식의 양(kg/y) * 세슘 선량계수(1.3*10-5) = 1mSv


이렇게 계산해보면 1년간 먹는 음식의 양은 210킬로그램이 된다. 이것을 365일로 나누면 하루에 약 600그램이 된다. 즉, 기준치만큼 오염된 음식을 먹어서 피폭량 기준치를 맞추려면 하루에 음식을 600그램만 먹어야 한다. 우리 인간이 하루에 600그램의 음식만 먹을까? 그렇지 않다. 이 음식에는 음료수나 물도 포함되기 때문에 하루 600그램은 말이 되지 않는 적은 양이다. 그나마 호흡을 통한 피폭과 외부피폭, 그리고 병원피폭이 모두 제로라는 전제하에 계산해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것만 확인해도 우리나라 음식의 기준치가 얼마나 높은지 짐작할 수 있다.  135-136


후쿠시마 앞바다보다 더 많은 세슘에 오염된 음식을 먹어도 된다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기준치 논리인 것이다.  137


만일 한국이 후쿠시마 핵사고의 영향을 받는다면 그 경로는 일본산 식품의 유통을 통한 내부피폭이 거의 대부분이라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145


역학조사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이유는 방사능 오염은 그 가해자가 정부이기 때문이다.  155


이렇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앞에 두고도 우리나라의 핵산업계는 원전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추진할 생각을 하고 있다. 뒷감당은 뒷 사람이 할 일이니 우리 일은 아니라는 것인지, 그 속내가 궁금하다.  179


핵폐기물에 관해서 요즘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격언은 다음과 같다. "핵폐기물을 만들지 말라. 만들더라도 이동시키지 말라. 이동시키더라도 땅에 묻지 말라."  201



태양광, 풍력, 소규모 조력, 소규모 수력발전, 지열발전 등이 설치되면 그곳에서 생산되는 만큼의 전기가 남게 되는데, 그 남는 만큼의 핵발전소를 끄면 이것이 바로 탈핵으로 가는 길이 되는 것이다.  236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지라는 점.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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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가 손이나 얼굴에서 완벽하게 그려지는 때가 있는가 하면, 

바다나 언덕에서 느끼는 어떤 감정이 그 무엇보다 우선할 때도 있다.

어쩔 때는 열정이나, 깨달음, 지적인 환희가

너무도 진실되고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경험의 결과가 아닌 경험 그 자체이다.

우리에겐 다채롭고 극적인 삶에 대해 

매우 한정된 시간만이 허락되었다.

어떻게 하면 그 속에서 최상의 조건으로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삶의 에너지가 절정으로 타오르는 지점을 찾아 

계속, 끊임없이 움직일 수 있을까?

단단하고 보석 같은 불꽃으로 언제나 활활 타오르며 

이 환희를 유지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 월터 페이터의 <르네상스 역사에 관한 연구> 중에서



최고의 벤처캐피털 투자자들은 선두주자가 될 만한 가능성이 있는 기업에만 투자를 한다. 팽창하다 결국 균형을 찾아가는 대부분의 시장에서 흑자를 달성하고 주가가 오르게 되는 기업은 한 두 곳에 불과하다. 따라서 처음부터 시장을 '장악'할 수 있는 사업계획을 세워야 한다.  55


"사업계획에 '최악의 경우'도 가정해서 담아요. 아마도 그 계획이 약간의 위험 가능성을 줄여줄 거에요. 그 정도의 시장 점유율로는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 수가 없겠지만요. 모든 것을 고려해서 계획을 짜지 못할 거라면 이런 일은 하지 말아요. 경쟁업체가 생기더라도 선두를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투자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

"레니, 왜 이 사업이 근사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죠?"

"시장도 크고 돈도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삶의 방식의 변화를 줄 수 있을까요?"

"세상을 변화시키는 부분 말인가요? 비탄에 빠진 사람들을 상대로 돈 버는 악덕업자들의 소행을 막을 수 있습니다. 현재 시스템은 엉망이에요."

"오프라인에서의 중개 역할을 당신이 온라인으로 대체하면서 제품의 판매 방식만 바뀔 뿐이죠."

"그게 뭐가 잘못된 겁니까?"

"아뇨, 아마도 좋은 사업전략일지도 모르죠. 그런데, 5년 후에는 이 사업을 어떻게 전망하나요?"

"4억 달러? 5억 달러?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결국 달라지는 것은 없는 거 아닌가요? 같은 제품을 같은 방식으로 판매하겠죠?"

"그렇습니다."

그는 뭔가를 놓친 것처럼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게 문제가 될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부 투자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말이죠."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죠. 경쟁력은 얼마나 될까요? 유사업체들을 물리칠 만큼 독특하고 개성 있는 제품이나 세비스를 제공할 수 있나요? 시장을 다 차지한다고 해도 그 점유율을 지킬 수 있나요? 혹, 밤 새워 하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하루 아침에 모방할 수 있는 건 아닌가요?"  56-57


장례용품 마진율이 그렇게 높다면 일반 장례업자들이 어느 정도까지 가격을 인하할지 누가 알겠는가? 게다가 인터넷상에서의 경쟁 문제도 있다. 유사업체들이 진입을 막을 도리가 있을까?..

이 사업의 관건은 속도였다. 인터넷 사업 본질상 당연했다..

"사람들에게 인터넷 장례업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릴 생각이죠? Funerals.com의 브랜드를 어떤 식으로 확립하고 존재를 알릴 계획인가요? 전자상거래에 필요한 것은 전파, 인지도 형성, 노출입니다. 게다가 인터넷의 포턱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텃세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58


"세 번째 질문으로 가죠."

다시 레니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팀원들 문제입니다. 선점하기 위해서는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냐가 중요하죠. 업무를 익힐 시간이 없으니 말입니다."  60


".. 사업을 진행시키면서 학습하려면 융통성이 있어야 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하죠.."  63


투자자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을 보고 투자한다. 따라서, 팀원은 똑똑하고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어야 하며, 맡은 분야에 경력이 있고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또한, 빠른 지식 흡수력을 필요로 한다. 일단 창업을 하고 나면 시장에 대한 정보와 경쟁업체들이 넘쳐날 것이다. 이를 훑어 가면서 흐름과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심지어 대폭적으로 전략을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팀원은 불확실성과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63-64


나는 레니에게 벤처기업을 부화시키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벤처기업에게 리더십과 경험을 제공하고, 아이디어를 성공적인 기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준다... 고용된 인력이 아니라 파트너이지 팀원의 입장에서, 주인이자 지휘봉을 잡은 입장에서 회사를 지원한다. 그 대가로 동등한 관계를 부여받는다. 그런 관계하에 팀원처럼 생각하고 창립 멤버들과 함께 침몰하거나 헤엄치기도 한다.  75


벤처 사업을 시작하려면 과감한 실행력과 끊임없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이때 내 역할은 회오리바람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통찰력과 방향 감각, 안정감을 제시하는 것이다. 나는 각 기업을 도울 때마다 자금 확보, 전략 수립, 팀 구성 및 지휘, 중요한 관계 수립, 상품 및 서비스 개발, 상품 및 서비스 시장화, 계약 성사 면에서 내가 알고 있는 경험을 모두 쏟아 붇고 모든 인맥을 총동원한다.  76


인터넷 벤처기업의 열풍 속에서 선발 주자가 기득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는 어느 누구도 장담 할 수 없다. 먼저 시작하는 것보다는 알맞은 시장을 골라서 제대로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할지 모른다.  82


창업을 할때, 아주 신중하게 걸음을 옮겨야 하는 경우도 있다.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도전하는 회사라면 더욱 그렇다. 그들을 이끌어 줄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한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그들만의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시장을 가까이 접할 수 있고 잠재 고객들로부터 의견을 들을 수 있으며 몇 번의 실수 정도는 감당 할 수 있도록, 당분간은 작은 규모와 융통성 있는 태도를 유지하라고 충고할 것이다.  83


교훈을 얻으려면실수를 딛고 일어설 줄 알아야 하고, 성공을 거두려면 그 교훈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84


레니에게는 사업가다운 기질이 있었다. 거대한 장애물을 과속 방지턱 정도로 바꿀만한 꿋꿋한 의지와 정신력이 있었다.  85


세월을 거치면서 나는 사업이라는 것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창의력을 펼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회화나 조각처럼 개인의 재능을 표현하는 캔버스와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왜냐고? 사업의 핵심은 변화이기 때문이다. 사업과 관련이 있는 것들 중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시장은 달라지고 제품은 발전하며 경쟁사는 동지가 되고 직원들은 들어 왔다가 나간다.. 기업은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몇 안 되는 사회기관이다...

미국에서 기업의 법칙은 물리학의 법칙과 같아서, 태생적으로 선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적용하기 나름이다. 기업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몰고 갈지, 파괴적인 방향으로 몰고 갈지를 결정하는 주체는 바로 인간이다.  87


인생을 두 부분으로 확실히 나눠야만 한다.

1단계 : 해야만 하는 것을 해라.

(그렇게 미룬 후, 궁극적으로)

2단계 :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라.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비슷한 말을 수없이 들으며 자란다. '뛰기 전에 걷는 것부터 배워라' '첫 술에 배부르랴'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99


열정이란, 저항할 수 조차 없이 어떤 것으로 당신 자신을 끌어가는 것을 말한다. 반면 의자란, 책임감 또는 해야만 한다고 생각되는 일에 의해 떠밀려가는 것이다.

조금이나마 자기 인식을 하고 있는 사람은 내가 어떤 분야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있다.

'미뤄놓은 인생 설계'의 삶에서 1단계에 발휘되는 것은 의지이다. 잠시 보류시켜 놓은 2단계야 말로 열정이 담겨 있는 시기이다.  121


'내일 당장 숨을 거두게 된다면 오늘 어떤 일을 하고 싶을지 생각해보라는 뜻이었습니다. 의지와 열정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의지는 떠밀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의무감과 책임감 때문에 말입니다. 열정은 본래의 자신과 일치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느끼는 유대감 같은 것이지요. 열정이 있어야 어려운 시기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131


사업을 할 때 조금은 눈도 멀고 귀가 막힌 것도 좋지만, 완전히 눈이 멀고 귀가 막히면(사실 많은 사업가들이 그렇지만) 시장을 파악하고 조언을 들으며 비전을 현실로 만들어 가는 작업을 할 수가 없다.  139


비전을 담고 일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열정과 책임감을 불어넣는다. 이는 조직 목표와 열정을 연결시키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 불가능한 것을 이루고, 큰 사람이 되려 하는 사람들에게는 재정적 보상보다 감동이 필요하다..

애착을 느낄 무엇인가.  146


비즈니스 환경은 늘 변한다. 사람들은 전략과 수익 모델을 변화하는 환경에 맞게 지속적으로 재검토하고 필요에 따라 수정해야 한다. 하지만 수정할 때마다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기업의 큰 비전이다. 긴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구성권의 감동을 읶르어 내는 비전을 포기하면, 나침반 없이 남겨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나는 기업의 위치를 돌아볼 때 현재 상황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목표와 방향 점검도 병행돼야 한다는 충고를 늘 하고 있다.

나침반을 맞추고 길을 따라 나아가라. 그래야,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방향 감각을 유치할 수 있을 것이다.  149


실리콘밸리의 베테랑이라면 누구나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이 있다. 바로 벤처기업에는 단계별로 세 명의 대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과 가장 절친한 친구인 개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나는 그것을 개에 비유하곤 한다. 첫 번째 단계의 대표는 '리트리버'같아야 한다. 그의 역할은 일관성 있는 비전 하에 핵심 팀을 구성하고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며 시장의 방향을 결정한다. 또한 초기 자금을 유치하고, 고객과 협력업체를 확보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는 끈기와 창의력이 빛을 바란다. 두 번째 단계의 대표는 '블러드하운드'같아야 하낟. 그의 역할은 시장의 냄새를 맡고 기업의 입지를 다지는 것으로서, 경영진을 구성하고 시장에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는 예리한 방향 감각과 기업의 규모 확장에 필요한 기술이 중요하다. 세 번째 단계의 대표는 '허스키'같아야 한다. 사람들과 함께 상장사의 책임성을 가지고 매일 비중 있게 성장하는 팀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이 단계에서는 일관성 있는 태도와 결단력이 중요하다. 중요성의 관점에서 이들 세 역할 모두가 중요하다. 대표의 기질과 능력에 있어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177


관리는 체계적인 과정을 말하는데 그 목적은 정해진 시간과 예산 내에서 원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리더십은 인격과 비전으로 다른 사람을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도록 만든다. 관리는 리더십을 보완하고 지원하지만, 리더십을 내포하지 않은 관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리더는 아랫사람들의 의혹을 해소시키고 불완전한 정보를 가지고도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181


리더의 묘미는 계산기를 두드리고 생산라인을 개선하는 방법을 찾는 것에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한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북돋고, 사람들이 위대해 질 수 있도록 자극을 주며 나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는 데 있었다. 또한 사람들이 조화롭게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었다. 그게 수준 높다 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187


나는 창업 지망생들에게 사업상의 위험부담과 성공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이런 말을 한다.

'만약 당신이 똑똑하면 위험부담이 15~20% 정도 감소한다. 하루에 24시간 일한다면 15~20% 정도 감소한다. 나머지 60~70%의 위험 부담은 당신이 절대로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다.  201-202


사업의 묘미란 바로 텅 빈 캔버스 하나를 들고서 현상을 무너뜨리고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206





에필로그 - 길

여행은 그 자체가 주어지는 보상과 같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225




역자의 글

안철수 교수님은 '기업가정신' 수업시간에 바로 이 책, '승려와 수수께끼'를 교재로 삼았다. '선택'의 의미가 무엇이고, 내 삶 속에서 본질적인 '우선순위'가 무엇이며, 그것이 사업이든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일이든 어떤 생각이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지를 공감하도록 추천하신 책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 해야만 하는 것 보다... 그래야 진지해 질 수 있고, 오래 갈 수 있으며, 이를 지속함으로써 그 분야에서 뭔가 이루고 마침내 성과를 낼 수 있다."

늘 지키려 하면서도 매일 무너지는 원칙들이 있지만, 내가 사라앟고 즐거운 일에 몰두해야 한다는 것만큼은 흔들리지 않으려 나를 담금질한다.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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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와 섹스는 간헐적이나 결혼은 생활이다.'  9


결혼생활학교 수업은 1년 과정에 384시간으로 되어 있었다. 1년 동안 토요일 일요일에 각각 3시간 5시간씩 수업을 받게 되어 있었는데, 1월 초의 등록기간과 명절, 여름휴가철 혹은 개인적 일로 꼭 쉬고 싶은 한 주 정도를 빼면 48주 동안 주말과 휴일마다 꼬박 출석해야 했다. 이것은 어느 학교나 마찬가지였다.

속성반은 없었다. 한꺼번에 몰아서 채우든 어쨌든 384시간만 채우면 되는 게 아니라, 48주에 걸쳐 384시간을 채우도록 정해져 있었다. 1년 과정을 이수하는 동안 발생하기 마련인 심리적 변화에 주목한 제도였다.

결혼생활학교 384시간 강좌를 이수해야 결혼면허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고, 결혼면허증이 있어야 결혼할 수 있다...결혼면허시험. 필기와 실기로 나누어 진행되는 시험에서 각각 70점 이상을 획득하면 결혼면허증이 주어졌다. 시험에 떨어지면 6개월 안에 한 번 더 응시할 수 있으나. 두 번째도 떨어지면 6개월 과정의 보충교육을 받아야 했다. 

보충교육 이수 후 다시 두 번 응시할 수 있으며, 그래도 떨어지면 다시 6개월의 보충교육을 받아야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14-15


결혼을 기준으로 인생을 설계하는것은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사랑과 결혼은 인생의 여러 항목 속에 있는 것이지, 사랑과 결혼을 위해 인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35


행복세. 부부의 1년 수입중 10%에 해당하는 금액.

행복세 정산의 기준은 결혼 11년차에게 부부의 1년 총 수입의 10%, 결혼 21년차에게 전재산의 1%엿다. 10년에 한 번 납부하는 행복세를 내는 것도 아깝다면 그것을 어떻게 행복한 가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행복하지 않은 가정이라면 이혼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55


늦가을에 파종해 겨울을 나고 봄에 거두는 시금치는 비닐하우스에서 화학비료와 난방기를 이용해 속성으로 키운 시금치보다 영양분이 30배 가까이 더 들어 있다고 했다. 한 달 만에 속성으로 키워 수확하는 상추가 아니라 밭에서 두 달 이상을 보내고 조금씩 따먹는 상추는 특유의 향과 맛이 진하다고 했다. 원예 강사는 무 하나 토마토 하나를 키워서 먹더라도 가족끼리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족끼리 사랑한다고 볼을 비벼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과정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자신의 아내와 남편,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더 많은 자부심을 느낀다는 말이었다.  65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고, 이심이체입니다. 아니, 이심이체여야 합니다. 부부가 일심동체여야 한다고 생각에 갇혀 있는 한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아야 하고, 아내가 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78


부부는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결혼과 동시에 지옥을 구경하게 될 것입니다. 너무 가까워지려고 하지 마세요. 익숙함은 경멸을 낳고 낯섦은 매혹을 더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79


남자분들, 아내나 연인이 억지를 부리는 이유를 아십니까?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것은 억지를 부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자기 말이 억지라는 걸 본인도 압니다. 말하자면 여자는 지금, 말도 안 되는 내 질문에 답해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외록고 우울하고 힘드니까 위로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131


환상 너머의 칙칙한 생활에 대해 충분히 대비함으로써, 환상을 현실화하라는 것입니다. 충분히 대비할 능력이나 마음이 없다면 결혼하지 마십시오. 결혼 안 해도 안 죽습니다. 오히려 더 즐겁고 의미 있게 살 수도 있습니다.  136


부부간에는 사랑보다 우정이 있어야 합니다. 평생 친구 같은 아내와 남편이 아주 이상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관계가 되자면 부부관계는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야 합니다...

속물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부부관계만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야 하는 사업도 없습니다. 꼭 경제적인 부분만을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사람의 생존조건 자체가 속물적입니다. 사람은 한끼 굶으면 배가 고프고, 하루를 굶으면 온몸에서 힘이 쏙 빠집니다. 사흘을 굶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도둑질이나 구걸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습니다. 그걸 부정한다고 달라질 건 없습니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이해관계 속에 있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집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고상하거나 취미가 서로 전혀 다르거나, 세계관이 다를 때는 양쪽 모두 힘이 많이 듭니다.

가장 좋은 상재는 나와 비슷한 사람입니다. 음악 하나를 두고도 사람마다 인식이 다릅니다. 아내 입장에서는 청소하다가 스피커 위치를 조금 바꿨을 뿐인데, 또 반대로 내 음악세계를 지켜달라는 남편의 호소를 아내는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딴죽 건다고 받아들입니다.

사람은 흔히 자신과 다른 성향의 이성에 끌린다고 합니다. 소심한 사람은 대범한 상대에게 끌리고, 덤벙대는 사람은 꼼꼼한 사람에게 끌린다는 거죠.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단순한 끌림일 뿐입니다. 이런 끌림만으로 평화로운 결혼생활을 지속하기는 어렵습니다. 끌림은 순간이지만 생활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137-138


나와 비슷한 사람을 어떻게 찾느냐? 복잡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내 친구들을 보면 됩니다. 유유상종이라고 했습니다. 부담 없이 오래 만나는 내 친구들은 나와 이념이나 성향, 세계관, 삶의 수준, 취향이 비슷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배우자 역시 그런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다만 결혼상대를 고를 때와 친구를 사귈 때 다르게 고려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한 집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밖에서는 좋은 친구가 집에서는 전혀 뜻밖으로 안 맞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내 친구드로가 비슷한 사람을 찾되, 집안 환경도 나와 비슷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경제력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내가 양쪽 부모가 모두 계시는 집안에서 자랐다면, 상대 역시 양쪽 부모가 다 있는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 더 적합합니다. 내가 한쪽 부모 아래에서 자랐다면 나의 배우자도 한쪽 부모 아래에서 자란 사람이 좋습니다. 아버지 없이 자랐다면 상대도 아버지 없이 자란 살마이 좋습니다. 내가 스무살 넘어서 부모가 돌아가신 경우에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만...

사람은 학교나 책에서만 배우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역할과 어머니의 역할을 배우고, 자신도 모르게 그런 것에 대한 기대치를 갖기 마련입니다. 결혼생활 중에 이 암묵적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불만이 쌓이게 됩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뭐 한 가지를 잘못해도 아버지 없이 자랐으니 저 모양이다, 엄마 없이 자랐으니 저렇다, 우리 엄마는 안 그랬는데 저 사람은 엄마가 없었으니 엄마 노릇을 못 하는구나, 하는 인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양쪽 부모가 다 있으면 좋겠지요. 하지만 그런 문제 때문에 서로의 역할관계가 깨질 수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무론 부모 없이 자랐더라도 자신의 노력 여하게 따라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오랜 세월 몸이 습관처럼 체화했어야 할 것들을 머리로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머리로 생가하고 행하면 어색하고, 왠지 생객내는 것처럼 비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요. 이런 건 어느 쪽이 맞다 틀리다의 문제가 아니라, 자란 환경이 달라서 생기는 생활문화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9-140


상식적이라는 말, 상식선에서 해결하자는 말은 때때로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147


좋은 남편, 좋은 아내는 내게 맞는 사람입니다. 나와 똑같은 부류의 사람이 나와 맞는 좋은 배우자인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내가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알아야 합니다.  148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면 그 사람을 얻기 위해 나를 속이고 상대를 파악하려고 합니다. 상대에게 맞추려고 합니다. 이거야말로 욕심 때문에 사지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소간 맞춰가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루이틀도 아니고 상대에게 억지로 맞춰가며 평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결혼하면 달라지겠지,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상대에게 억지로 맞추다보면 많은 것을, 어쩌면 타고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나를 아고, 내게 맞는 상대를 찾는 것이 가장 신뢰할 만한 방법입니다.  149


'사람은 끼니마다 배를 채워야 하지만, 식다에서 살지는 않는다.' 늘 식당에 머물기를 원하는 사람과 가끔 식당에 들렀다 떠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비좁은 공간에서 평화로운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다.

"결혼을 생각하고 남자를 만날 때는 이 사람이 식당에 머물 사람인지, 배만 채우면 금방 일어날 사람인지를 아는 게 중요해."

"가슴이 쿤 내려 앉는 사람이 아니고?"

성애와 인선이 동시에 물었고, 희주는 "놀고들 있네"라고 했다. 가슴이 쿵 내려앉는 남자는 연애할 남자고, 결혼할 남자는 함께 밥을 먹을 남자라고 했다.

가슴이 쿵 내려앉을 만큼 매력적이면서도 지겨워하지 않고 밥을 함께 먹어줄 수 있는 남자는 없는 것일까. 꼭 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인생이 너무 측은하다 싶었다.  152


많은 사람들이 결혼하는 이유를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장담하건대 지금까지 없던 행복이 결혼한다고 생겨나지는 않습니다.  177


결혼하기 전에 이미 행복한 사람만이 결혼한 뒤에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기 홀로일 때도 행복했던 사람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는 것이지, 홀로일 때 불행했던 살마이 결혼한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178


가족들을 충분히 사랑하고 배려하십시오. 그리고 희생하십시오. 그러나 집착하지는 마십시오. 가족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183


털털하고 너그럽던 남자가 좀팽이가 되고, 성질을 부리고,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은 대체로 자신이 무기력한 사람이라고 느낄 때입니다.  192


세계적인 문명사학자 윌 듀런트 박사는 '여자가 가정이란 것을 만들고 남자를 자신의 가축으로 길들여 집안에 들이고, 사회성과 예의를 훈련시켰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애초에 가정이나 일부일처제도는 여성이 고안해낸 제도일 뿐 남성과 여성의, 그러니까 인간의 속성과는 거리가 먼 제도라는 말입니다. 안정적이고 행복하다는 가정은 남편이 가축처럼 일하는 데 만족하고, 아내가 집안 전체를 통솔하는 형태인 경우가 많습니다. 남편=가축, 아내=주인인 구조가 흔들릴 때 가정은 불안정하거나 깨지기 일쑵니다. 그 구조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현실입니다.

여성이 일부일처제를 원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여러 가지 원인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남자에게 2세가 친자라는 확신을 주어 충분한 보호와 식량을 얻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227


남자는 기본적으로 한 여자와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한 여자와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혼은 그 자체로 앞으로 평생 거짓말과 거짓행도을 하겠노라는 일종의 약속이라고 했다.  229


여러분이 우리 ML결혼생활학교 1년 과정 동안 저한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씀이 바로 '나와 맞는 배우자를 만나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 좋은 배우자는 아니라는 말씀도 여러 차례 드렸습니다.  300


늘 강조하는 바이지만, 결혼을 한다고 없던 행복이 생기지 않습니다. 먼저 혼자서도 당당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라, 이심이체여야 합니다.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둘이 만나 둘이 되는 것입니다.  305




작가의 말

나는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불행의 근원이 되어버린 '부부라는 관계'에 대해 쓰고 싶었습니다.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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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부티의 쓰레기통


나의 미래는 아주 일찍부터 너무 위태로웠던지라 엄마는 나의 현재에 대해 결코 마음을 놓지 못했다.  13


그러니까 나는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었다. 어렸을 때, 나는 날마나 학교에서 들볶이다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왔다. 내 공책에는 선생님들의 꾸지람이 적혀 있었다. 반에서 꼴찌가 아닐 때는 꼴찌 바로 앞이었다. (축배를 들어야 할 일이었다!) 처음엔 계산, 그다음엔 수학에서 꽉 막혔고, 심각한 철자 습득 장애에다, 역사의 연대 암기와 지리의 장소 파악에도 먹통이었고, 외국어 습득 불능에다 (수업은 듣지 않고 숙제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라는 명성이 자자했으며, 음악이나 체육 혹은 그 외의 어떤 과목으로도 벌충하지 못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성적표를 집으로 가져오곤 했다.  16


"그러니까 학교에 관한 책이 또하나 나오는 거네? 그런 책은 꽤 많지 않아?"

"학교에 관한 책이 아냐! 모두들 하굑를 다루고 있고, 신구 논쟁은 끝없이 계속되고 있어. 학교의 프로그램, 학교의 사회적인 역할, 그 궁극적인 목표, 과거의 학교와 오늘의 학교... 그런데 열등생에 관한 책은 없거든!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에 대해 그리고 그로부터 겪게 되는 정신적인 충격을 다루는 책..."

"그게 그렇게 힘들었어?"  22-23


"요컨대 넌 핑계를 만들어냈던 거야,"

그렇다. 그게 바로 열등생의 속성이다. 그들은 자신의 열등함에 대해 굽이굽이 반복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난 한심해, 난 정대 할 수 없어, 그러니 노력해볼 필요도 없어. 이미 다 망했어. 내가 그랬잖아요, 학교는 나한테 맞지 않는다고... 열등생에게 학교는 출입이 금지된 몹시 폐쇄적인 집단으로 보인다.  25


두려움은 분명 학창 시절 내내 나의 가장 큰 문제였고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교사가 된 뒤, 나의 급선무는 공부 못하는 학생들의 두려움을 치료하고 방해물을 치워버려 앎이 스며들 기회를 갖게 해주는 일이었다.  30





2. 되다


어머니들 모두가 조금은 창피해하고, 모두가 자기 아들의 미래를 걱정한다. "대체 이애가 뭐가 될까요?" 대부분의 어머니는 미래라는 강박적인 화폭에 현재를 투영해 그려놓은 것을 아이의 미래로 생각한다. 희망 없는 현재의 이미지가 터무니없이 비대하게 투영된 벽을 미래라고 생각하는 것, 바로 여기에 모든 어머니의 거대한 공포가 있다.  61


나는 우스운 이야기를 시도해본다.

"신을 웃기는 유일한 방법을 아세요?"

전화 저편의 머뭇거림.

"신에게 당신의 계획을 맗는 겁니다."

다시 말해 놀랄 것 없다는 것, 그 어떤 일도 예상대로 이렁나지 않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 미래가 과거가 되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유일한 사실이다.

물론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 쉽게 아물지 않을 상처에 반창고나 붙여주는 격일 테니까. 하지만 나는 전화로는 그렇게 하고 있다.  62-63


어떤 미래도 없다. 

뭔가 되지 못할 아이들.

절망적인 아이들.

초등학생, 다음에는 중학생, 그다음에는 고등학생이 된 나 역시 그렇게 앞날이 없는 삶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것은 바로 공부 못하는 학생이 스스로를 설득하는 최초의 사실이다. 

"이런 성적으로 뭘 기대해?"

"중1이나 마칠 수 있을 것 같니?(중2, 중3, 중4, 고1, 고2는...?)"

"대학에 들어갈 가능성이 얼마나 될 거 같아? 퍼센트로 따져 얼마나 될지 계산 좀 해볼래?"

혹은 정말로 즐거운 비명까지 질러가며 호언장담하던 중학교때 교장 선생님 같은 사람도 있다.

"페나키오니, 네가 중학교를 졸업하겠다고? 절대 그럴 수 없을 거다. 알겠니? 절대로!"

그 여자는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  69-70


나는 학교생활을 따라가지 못했고 언제나 그런 모습뿐이었다. 물론 시간은 지나갈 것이었고, 물론 성장할 것이었고, 물론 사건들도 일어날 것이었고, 물론 삶도 계속될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결과에도 결코 이르지 못할 그런 실존을 횡단할 것이었다. 그것은 확신보다 더한 것이었고, 그게 나였다.

어떤 아이들은 이러한 사실에 재빨리 설득당한다. 그리하여 자신을 각성시켜줄 누군가를 찾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실패에 열정을 쏟게 된다. 열정 없이는 살 수 없으므로.  72


겨울 저녁. 나탈리가 흐느껴 울며 학교 계단을 급히 내려간다. 누군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슬픔...

선생은 생각한다. 이런, 학교의 슬픔이로군.. 

"선생님 ... 흑흑... 흑흑... 선생님... 저는 ... 저는 이해를... 이해를 못하겠어요."

"뭘 이해해? 뭘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야?"

"양... 양보..."

그리고 갑자기 병마개가 쑥 뽑히듯 단번에 답이 나온다.

"양보와 대립의 종속 접속절요."

침묵.

웃어선 안 된다.

절대 웃으면 안 된다.

"양보와 대립의 종속 접속절? 그것 때문에 그렇게 울고 있는거야?"

안도감. 선생은 재빨리. 아주 진지하게 문제의 그 접속절을 생각한다. 이 아이에게 그건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 잘 몰라도 그 절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생각한다...

".. 이건 아주 쉬운 거야. 자, 봐. 됐지, 알겠니? 그래, 예문을 하나 만들어봐. 아이는 정확한 문장을 만들어낸다. 이해한 것이다. 자, 이제 좀 괜찮니? 어! 그런데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다. 아이는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다시금 눈물을 흘리고 크게 울먹이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선생님은 아무것도 몰라요. 제 나이 열두 살하고도 반년이 지났는데, 암것도 한 일이 없어요." ...

다음날 저녁이 되어서야 나는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나탈리의 아버지는 어느 회사 간부였는데 십 년간의 성실한 직장생활 끝에 얼마 전 해고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간부직 해고 사태의 첫 사례였다. 때는 80년대 중반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실직이란 말하자면 노동직 문화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회사에서의 자기 역학을 의심하지 않았던 모범적이고 세심한(작년에 나는 나탈리의 아버지를 자주 보았다. 그는 소심하고 자신감이 너무 부족한 딸 때문에 근심이 많았다) 젊은 간부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는 결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러고는 가족들이 모인 식탁에서 끊임없이 되뇌었다. "내 나이 서른다섯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  73-76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자살하는 일이 일어날 정도로 말이다. 이것이, 적어도 모든 면에서 나타나는 우리 교육의 균열이다.  86


들통난 거짓말, 선생님들의 분노, 부모의 슬픔, 비난, 처벌, 아마도 퇴학, 자아로의 복귀, 무기력한 죄의식, 모욕, 우울한 희열, 그들 말이 옳아, 나는 한심해, 한심해, 한심해.

난 한신한 놈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자신이 한심하다는 확신에 빠져 잇는 청소년은-이게 바로 체험이 우리에게 가르쳐줄 최소한의 사실인데-하나의 멋잇감이다.  94-95


아이의 거짓말에 동조한 어른들에 관한 이야기 중에 가장 기억할 만한 것은 내 친구 B의 동생에게 일어난 일이다. 당시 B의 동생은 열두세 살쯤이었을 것이다. 그애는 수학 시험이 겁나서 단짝 친구에게 맹장의 정확한 위치를 짚어달라고 했다. 그러더니 끔찍한 발작이 일어난 시늉을 하며 쓰러졌다. 학교 지도부는 그애의 말을 믿는 척하며 집으로 돌려보냈는지데. 어쩌면 그애를 치워버리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자 부모는-그애는 부모에게 다른 거짓말도 했다-별생각 없이 아이를 인근 병원으로 데려갔는데, 병원에서는 깜짝 놀라며 당장 수술을 했다! 수술 후, 핏빛의 기다란 뭔가가 담긴 병을 들고 나타난 외과의사는 순진하고 환한 얼굴로 이렇게 외쳤다. "수술하기를 잘했습니다. 하마터면 복막염이 될 뻔했어요!"

사회란 공유하는 거짓말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100


가장 좋은 기숙학교는 선생님들도 함께 기숙하는 학교다.  102


열등생이 선생님으로 변신한 것은 무엇에서 기인한 걸까?

덧붙여, 알파벳도 깨치지 못하던 애가 소설가로 변신한 것은?

나는 어떻게 해서 뭔가가 되었을까?  108


아이에게 장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한을 센티미터로 재라고 요구하는 꼴이다. '되다'라는 동사가 아이를 주눅들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어른들의 걱정이나 질책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게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조금도 생각해내지 못했고, 그냥 순진하게 영원히, 언제나 바보일 거라는 그들의 말을 믿었다. '영원히'와 '언제나'는 상처받은 자존심이 열등생에게 시간을 헤아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단위였다.  111


최고 권력자들이 이미 파산선고를 내렸는데 죽어라 공부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보다시피 나는 궤변론자의 태도 같은 걸 키워가고 있었다. 이것은 선생이 된 내가 열등생 제자들에게서 한눈에 구별해내는 기질이다.

그 뒤에 나의 첫번째 구원자가 나타났다.

국어 선생님. 

중4 때.

당시의 나를 있는 그대로 알아보았던 분. 즉 명랑하게 자멸해가는 진지한 망상가로 말이다.

틀림없이 그 선생님은 가르쳐준 것은 배우지 않고, 숙제 못한 핑계를 어떻게 둘러댈까 늘 잔머리를 굴리는 나의 적성에 대경 실색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 소설 한 편을 쓰라고 명령하고 대신 논술을 면제해주기로 작정한 것이다. 일주일에 한 장(章 글장)씩 써서, 한 학기에 소설 한 편을 끝내야 했다. 주제는 자유지만, 틀린 글자 하나 없는 소설을 내야 했다. 선생님은 "비평의 수준을 고양시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소설 자체는 까맣게 잊어버렸는데도 그 표현만큼은 기억난다.) 그분은 교직 말년을 우리에게 바친 노교사였다. 더이상 궁핍할 수 없는 파리 북쪽 변두리 중학교에서 당신의 은퇴를 연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 낡아빠진 기품을 지닌 노선생이 내 안의 이야기꾼 기질을 알아본 것이다. 그는 내게 철자 습득 장애가 있든 말든 학교 공부를 따라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면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주 열정적으로 소설을 썼다. 사전(그날 이후 사전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의 도움을 받아가며 조심스레 단어 하나하나를 고치고, 신문에 연재하는 전업 작가처럼 날짜를 지켜가며 매주의 분량을 갖다 냈다. 지금 떠올려보면, 아주 슬픈 이야기였고, 당시 내가 큰 영향을 받았던 토머스 하디풍의 글이었다. 토머스 하디의 소설들은 오해에서 재난으로, 재난에서 어찌할 수 없는 비극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운명에 대한 나의 취향을 매혹 했다. 출발선부터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 내 생각이 바로 그거였다.

그해 내가 뭔가에서 중요한 발전을 이루어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학창 시절 처음으로 어떤 선생님이 나에게 하나의 지위를 부여했고, 나는 계속 따라가야 할 노선이 있는 개인으로, 지속적으로 견뎌내고 있는 한 사람으로, 누군가의 눈에 학생으로 존재했다. 물론 나의 후원자인 노선생님이 미치도록 고마워쏘, 그가 꽤 거리를 두고 있었음에도 내 비밀스러운 독서를 털어놓을 만큼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래, 페나키오니, 요즘은 뭘 읽고 있니?"

나에겐 독서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게 나를 구원해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때의 독서는 요즘처럼 터무니없는 자랑거리가 아니었다. 시간 낭비이자 학업을 망치는 일로 평판이 난 소설 읽기는 수업 시간에 금지되었다. 책을 몰래 숨어서 읽는 내 취향은 거기서 비롯했다. 소설책을 교과서로 씌워 읽고, 되도록 모든 곳에 책을 숨겨두고 읽고, 야밤에 손전등을 켜고 읽고, 체육 시간을 면제받아 읽고, 혼자서 책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이든 좋았다. 이런 취미를 길러준 곳이 바로 기숙사다. 나만의 세계가 필요했는데, 그게 책들의 세계였다. 집에 있을 때는 무엇보다 식구들이 책을 읽는 모습을 관찰했다. 아버지는 파이프를 물고 안락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무릎에 책을 올려놓고 둥근 램프 아래, 나무랄 데 없는 가르마를 약지로 무심히 쓰다듬으며 읽었다. 베르나르 형은 방에서 다리를 구부린 채 옆으로 길게 누워 오른손으로 머리를 괴고 읽었다... 이런 태도들에는 행복 같은 게 있었다. 따져보면 나를 독서로 밀어붙였던 것은 책 읽는 사람의 이런 자태였다. 처음에는 오로지 그런 자세들을 따라해보려고, 그리고 다른 자세를 개발해보려고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언제나 지속되는 행복 속에 신체적으로 정착했다. 무엇을 읽었나? <미운 오리 새끼>를 나로 여겨 안데르센의 동화책들을 읽었다. 하지만 검과 말 그리고 마음의 움직임에 대한 동경으로 알렉상드르 뒤마도 읽었다. 그리고 셀마 라겔뢰프의 멋진 <예스타 베를링>, 주교에게 추방당한 그 훌륭한 술주정뱅이 사제는 에세뷔의 다른 기사들과 더불어 내 모험의 지치지 않는 동반자였다. 중3으로 올라갈 때 베르나르 형이 준 <전쟁과 평화>는 맨처음 나타냐와 안드레이 공작의 사랑 이야기로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사랑 이야기에만 집중하면 소설은 100페이지쯤으로 줄어든다. 중4 때 두번째로 그 책을 읽었을 때는 나폴레옹식의 서시시로 읽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보로디노 전투, 모스크바의 화재, 러시아군의 퇴각(나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거대한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수업 시간에 몰래 그렸던 그 작은 인간들을 학살당하게 했다). 이것은 기껏해야 200~300페이지로 압축된다. 고1 때 다시 읽었을 때는 피에르 베주호프의 우정이 눈에 들어왔다(이자는 또다른 미운 오리 새끼이긴 해도 생각보단 많은 걸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3 때 소설의 전체가, 그러니까 러시아와 쿠투조프, 클라우제비츠 같은 인물이, 토지개혁이 그리고 톨스토이가 눈에 들어왔다. 물론 디킨스-올리버 트위스트는 나를 필요로 했다-도 읽고 에밀리 브론테도 읽었다. 브론테의 모럴은 내게 구조를 요청했다. 또한 스티븐슨, 잭 런던, 오스카 와일드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을 처음으로 읽었다. 당연히 <노름꾼>이 있었다(왜 그런지는 알아봐야 하는데, 도스토옙스키는 항상 이 <노름꾼>으로 시작된다). 나의 독서는 이런 식으로 우리집 서재에서 찾아낸 책들로 이루어졌고, 물론 <탱탱> <스피루> 그리고 당시를 휩쓸었던 <흔적의 표시들> 혹은 <봅 모란> 같은 만화도 읽었다. 내가 학교로 가져가는 책들이 첫째 조건은 학교 독서 프로그램에 없는 것이어야 했다. 아무도 내게 묻지 않았다. 누구도 내 어깨 너머로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책의 저자와 나는 우리끼리 오롯이 머물렀다. 책들을 읽으면서 내가 교양을 쌓아가고 있었다는 것, 그 책들이 내 안에 어떤 욕구를 일깨웠소 그 욕구는 책들이 잊히더라도 살아남을 거라는 걸 나는 몰랐다. 청소년기이 이러한 독서는 세상의 기호들을 향해 사방의 문을 열어놓으며 완수되었고, 그중에서도 네 권의 책이 서로 구별되지 않은 채,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이유로 내 안에서 밀접한 친족관계를 직조해냈다.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 위스망스의 <거꾸로>, 롤랑 바르트의 <신화지> 그리고 페렉의 <사물들>이 바로 그 책들이다.

난 고급 독자는 아니었다. 플로베르에게는 실례가 되겠지만, 열다섯 살에 에마 보바리처럼 오로지 감각의 만족을 위해 책을 읽었고, 다행히 그 감각은 지칠 줄 모르고 나타났다. 나는 이러한 독서로부터 학교생활에 도움이 될 어떤 이득도 끌어내지 못했다. 모든 선입관과는 반대로 이처럼 삼키듯 읽은-그리고 아주 빨리 잊힌-수천 페이지의 글은 나의 철자법을 개선해주지 않았고, 철자법은 요즘도 내게 불분명한 채로 남아 언제 어디서든 사전을 찾아봐야 한다. 아니다. 내 철자법의 실수들이 일시적으로나마(하지만 이 일시적인 것이 결정적으로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극복되었던 것은 노선생님이 주문한 소설에서였다. 철자법에 신경쓰느라 독서 수준을 낮추고 싶지 않다는 선생님의 요구에 나는 틀린 글자 없는 원고를 갖다드려야만 했다. 요컨대 대단히 천재적인 교수법이었다. 아마도 오로지 나에게만 통했을, 그리고 오로지 그런 상황에서만 통했을 방법이지만, 어쨌든 천재적이다!

나는 이렇게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선생님을 중4와 고3 사이에 세 분 더 만났다.

한 분은 수학 자체였던 수학 선생님이고, 또 한 분은 역사 구현력이 누구보다 뛰어난 놀라운 재능의 역사 선생님, 그리고 나머지 한 분은 철학 선생님이다...

네 분의 선생님은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구원했다.  112-118


요컨대 우리는 뭔가가 된다.

하지만 사람은 그리 많이 변하지 않는다. 생긴 대로 된다.  123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뭔가가 된다.

예상대로 되는 일은 드물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뭔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때로 계획이 이루어지고 적성이 실현되고 밀래가 약속을 지키기도 한다.  130


우리는 뭔가가 되어간다. 살아가는 한 모두 뭔가가 되고, 때로는 뭔가를 이루어낸 사람들이 되어 서로 마주친다.  131





3. 거기 혹은 '구현의 현재'


자기불만에 휩싸인 선생은 누구보다 재빨리 학생을 야단친다.  158


수업에 완전하게 몰두하는 선생님의 현존은 단번에 감지된다. 아이들은 학기 첫 순간부터 그것을 느끼며, 우리 모두가 그것을 경험했다. 선생님이 막 들어선다. 그는 절대적으로 여기 있다. 그것은 그가 바라보는 방식, 학생들에게 인사하는 방식, 자리에 앉아 자기 책상을 차지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그는 아이들의 반응을 걱정하며 두리번거리지 않으며,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지도 않는다. 그는 처음부터 바로 자기 일에 빨려들어가 그 자리에 현존하고, 아이들 각자의 얼굴을 구별해내며, 학급은 즉시 그의 눈앞에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현존감을 얼마 전 블랑메닐의 어느 학교 교실에서 새롭게 체험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토록 생기 넘치는 아이들의 에어니를 제어하기 위해 어떻게 처신하는지 물었다.

"절대 아이들보다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아요. 그게 요령이죠." ...

"아이들과 함께 있거나 숙제를 검토할 때 나는 딴 데 가 있지 않아요."

"내가 다른 곳에 있으면 절대로 아이들과 함께할 수 없죠." ...

"아이들 각자는 자기 악기로 소리를 내고 있는 건데, 그걸 거스를 필요가 없어요. 까다로운 일은 우리의 음악가들을 잘 꿰뚫어 보고 조화를 찾아내는 거죠. 좋은 학급이란 발맞춰 행진하는 군대가 아니라 모두 함께 같은 교향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예요. 만일 그들이 땡땡거리기만 하는 작은 트라이앵글이나 브롱브롱 소리만 나는 갱바르드(말굽자석처럼 생긴 조그만 악기로, 하모니카처럼 입으로 물고 손가락을 튕겨서 소리를 낸다)를 물려받았다면, 적절한 순간에 최선을 다해 내는 그 모든 소리, 그들이 훌륭한 트라이앵글과 나무랄 데 없는 갱바르드가 되는 일, 그래서 각자의 기여가 전체에 부여한 음악의 질에 자랑스러워하는 일이죠. 조화에 대한 감각은 그들 모두를 발전시키고, 조그만 트라이앵글은 마침내 음악을 알게 되는 겁니다. 아마도 제1바이올린만큼 화려하지는 않겠지만 그 역시 똑같은 음악을 체험하는 거지요." ...

문제는 사람들이 그 아이들에게 제1바이올린 주자만 중시하는 세상을 믿게 한다는 거예요." ...

"어떤 동료들은 자신이 카라얀인 줄 알고 시골의 마을 합창단 지휘를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그들은 모두 베를린 필을 꿈꾸죠. 이해가 가는 일이에요..."  159-162


받아쓰기 - 우리의 받아쓰기가 맞춤법에 치중하여 초등 저학년에 한정된 것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철자와 문법 그리고 구문의 이해력까지 포함하며 성인들의 여가에까지 널리 활용되는 문학적 훈련을 의미한다.  170


나는 언제나 받아쓰기를 언어와의 완전한 만남으로 생각해왔다. 소리나는 대로의 언어, 이야기하는 대로의 언어, 사유하는 대로의 언어, 글로 쓰고 만드는 대로의 언어, 세심한 교정 훈련을 통해 분명해지는 의미. 왜냐하면 받아쓰기의 교정에는 텍스트의 정확한 의미에, 문법 정신에, 말들의 풍부함에 다가가고자 하는 목표 말고 다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  172


아이들이 스스로를 형편없다고 고백한 것에 대한 즉각적인 반향으로, 즉석에서 생각해낸 돌발 받아쓰기였다.

니콜라는 철자법에서 항상 빵점일 거라고 주장하는데, 그 유일한 이유는 한 번도 다른 점수를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ㅍ레데리크, 사미, 베로니크도 같은 생각입니다. 맨 처음 받아쓰기 때부터 그들은 쫓아다니던 빵점이 그들을 뒤따라와 삼켜버린 것입니다. 그애들 말로는 저마다 빵점 속에 살고 있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자기들 주머니에 열쇠가 들었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문장을 만들어내는 도안, 아이들의 호기심을 흥겹게 일깨우려는 생각으로 각자에게 역할을 나눠주면서 문법적으로 설명할 것들을 고려했다. 동사 변화와 목적어의 위치, 보어의 위치, 보어 인칭댐ㅇ사의 위치, 주격 관계대명사 등등을.

받아쓰기가 끝나자 우리는 즉각 교정을 시작했다.

"좋아, 니콜라. 맨 첫 문장을 읽어봐라."

"'니콜라는 철자법에서 항상 빵점일 거라고 주장하는데.'"

"그게 첫 문장이야? 거기서 끝나? 확실해?"

"....."

"주의해서 읽어봐."

"아! 아니에요. '그 유일한 이유는 한 번도 다른 점수를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맨 처음 나오는 활용 동사는 뭐지?"

"'주장하는데'?"

"그래. 원형은?"

"'주장하다'요."

"몇 군 동사지?"

"어..."

"3군 동사지. 그건 좀 있다가 설명해주마. 시제는 뭐지?"

"형재형이요."

"주어는?"

"저요. 그러니까 '니콜라'요."

"인칭은?"

"3인칭 단수요."

"그래. '주장하다' 동사의 현재형 3인칭 단수지. 동사의 어미를 주의해라. 자, 이제 베로니크 차례다. 이 문장의 두번째 동사는 뭐지?"

"'못하다'요!"

"'못하다'? 확실해? 다시 읽어봐!"

"..."

"..."

"아, 아니에요, 선생님. 죄송합니다. '받아보지'예요. 그러니까 '받다' 동사요."

"어떤 시제지?"

교정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174-176


체계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은 암기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런 정신의 소유자는 작품의 진수를 이용할 줄 안다는 것이다.  187


"저는 앵무새가 아니에요!"

그들은 마지막까지 항의했고, 그건 정당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건 그런 말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부모들, 아! 그들은 어찌나 변했는지 부모들 스스로 때로 이렇게 말한다. "페나키오니 선생님, 아이들에게 텍스트를 외우게 한다면서요? 세사에, 제 아들은 이제 어린애가 아니랍니다!" 어머님, 언어에 잇어서 만큼은 아드님은 영원히 어린애일 것이고, 어머님 자신도 아주 어린 아기이며, 저는 우스꽝스러운 어린애입니다. 우리 모두가 문학의 구어적이 ㄴ원천이 넘쳐흐르는 거대한 강에 실려가는 잔챙이 물고 기인 한은 말입니다. 아드님은 언어 안에서 헤엄치는 걸 좋아하게 될 테고, 언어에 실려 목을 축이고 젖을 취하며,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자랑스럽게 말입니다. 아이를 믿으세요. 아이는 자기 입속의 말맛, 머릿속 생각의 빛나는 불꽃을 아주 좋아하게 될 것이고, 자신의 대단한 기억력, 그 무한한 유연성, 그 울림통,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노래하게 하고 가장 분명한 생각을 울려퍼지게 하는 놀라운 음량을 발견하게 도리 것입니다. 언젠가 기억 속의 그 끝없는 동굴을 발견할 때는 언어 속에 잠겨 헤엄치며 깊숙이 잠수해 텍스트들을 건져올리는 일을 좋아할 것입니다. 평생 그것들이 그곳에서 자기 존재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즉흥적으로 그것들을 외울 수도 있고, 말들의 묘미를 위해 입 밖으로 소리내볼 수도 있다는 걸 좋아하게 될 겁니다. 그 덕분에 아이는 다시 입말이 된 문학의 전통을 아마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게 될 것입니다. 공유하기 위해서든 유혹의 유희를 위해서든 잘난 척하기 위해서든 그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는문자 이전의 시간, 생각의 존속이 오직 우리의 목소리에만 의존하던 그 시간과 다시 연결될 겁니다. 어머님은 그것을 퇴행이라고 말씀하기지만, 저는 재회라고 말하겟습니다! 앎이란 무엇보다 육체적인 것입니다. 앎을 포착하는 것은 우리의 귀와 눈이고, 그것을 옮기는 것은 우리의 입입니다. 물론 앎은 책으로부터 우리에게 오지만, 책은 우리를 벗어납니다. 생각이란 소란스러우며, 읽고자 하는 의욕은 말하려는 욕구의 유산입니다.  189-190


나는 아이들을 텍스트 속에 방치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들과 함께 그 속에 빠져든다.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아이들의 텍스트 분석을 따라가면서, 가장 어려운 글을 함께 배우기도 했다... 아이들은 읽은 내용을 이해하게 되자 기억의 능력을 찾아냈고, ...아이들은 나열된 단어를 암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단지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라 언어의 지성, 즉 타자의 언어, 타자의 사유 안에서 소리를 낸 것이다. 단순히 <에밀>을 암기한 것이 아니라 루소의 추론을 복원한 것이다.  196


지식을 가지고 유희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유희란 노력의 숨고르기이고, 심장의 또다른 박동이며, 학습에 심각한 해를 끼치기는 커녕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리고 교과를 가지고 노는 일은 그것을 제어하는 훈련이 됩니다.  200


1969년부터 1995년까지, 엄선해서 정원을 뽑은 한 학교에서 보낸 이 년을 제외하면, 내가 맡은 학생들 대둡분이 옛날의 나처럼 학교생활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었다. 가장 심한 상태에 이른 아이들은 그맘때의 나와 거의 같은 증상을 보였다. 자신감 상실, 모든 노력의 포기, 집중 불가, 산만, 과대망상, 불량배 패거리 조직. 가끔은 술도 마시고 마약도 했는데, 자기들 말로는 약한 거라고 했지만 아침에 보면 눈에 축축이 젖어 있곤 했다.  205


노력이라는 말의 개념을 다시 가르쳐주고, 결과적으로 고독과 침묵의 맛을 되찾아주고, 무엇보다 시간을, 즉 권태를 제어하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때로는 아이들을 지속되는 시간 속에 앉혀 놓기 위해 권태를 연습하라고 충고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놀리도 말고, 먹지도 말고, 대화도 하지 말고, 공부도 하지 말고, 요컨대 진짜로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 저녁 이십 분간 권태 연습을 하는 거다. 공부 시작 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야."

"음악 듣는 것도 안 돼요."

"그거야말로 안 돼."

"이십 분이요?"

"그래, 이십 분. 시계를 손에 쥐고. 오후 5시 20분부터 5시 40분까지. 곧장 집으로 돌아가 아무에게도 말을 건네지 말고, 도중에 딴 데로 새지도 말고, 게임기도 무시하고, 친구들도 못 본 체하고, 너희들 방으로 곧장 들어가 침대 옆 구석에 앉아 책가방도 열지 말고, 워크맨도 끼지 말고 게임기도 들여다보지 말고, 허공에 눈을 박고 이십 분을 기다려봐."

"뭐하러 그래요?"

"어떻게 되나 보게. 흘러가는 시간에 집중하고, 일 분도 놓치지 말고 어땠는지 내일 얘기하는 거야."

"우리가 했는지 어떻게 검사하실 거죠?"

"나야 할 수 없지."

"그리고 이십 분이 지난 다음에는요?"

"허기진 사람처럼 각자의 일에 달려드는 거야."  206-207


세상 누구도 무능함의 사과를 영원히 깨물고 있진 않는다!

가르친다는 일은 아마도 그런 것일 게다.  208


가르치든 교사가 질문을 던질 때마다 학생들이 내놓을 수 있는 답변은 세 가지다. 정답과 오답과 터무니없는 답.  213


터무니없는 대답이 오답과 다른 점은 어떤 추론의 시도도 거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흔히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터무니없는 대답은 반사적인 행위일 뿐이다.

던져진 질문에 대답한 게 아니라 자기한테 질문이 던져졌다는 사실에 대답한 것이다.  215


선생님이 던진 질문을 겨우 이해만 할 뿐이다. 그걸 고백할 수 있나? 침묵을 선택할까? 아니다. 차라리 아무 대답이나 하는 게 낫다. 가능하면 천진난만하게. 제가 엉뚱하게 빗나갔나요, 선생님? 후회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저 운을 한번 걸어봤고, 그게 실패한 것뿐이다. 저한테 빵점을 주시고 사이좋게 지냅시다. 터무니없는 대답은 무지에 대한 외교적인 고백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어떤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물론 전형적인 반항 행위를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선생님이 나를 귀찮게 굴고 나를 꼼짝 못하게 해. 선생님한테 왜 그러느냐고 물어볼까?

이 모든 경우 이런 대답에 점수를 주는 것-일테면 답안지를 교정하면서-은 아무 대답에나 점수를 주기로 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 자체가 터무니없는 교육 행위를 저지르는 일이 된다.  215-216





4.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사실 가족과 선생님들이 공부 못하는 학생에게 가장 흔히 하는 비난 중 하나가 바로 그 불가피한 지적인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다. 직접적인 비난이든("핑계 대지 마.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수많은 설명에 뒤이은 분노든("세상에, 이럴 수는 없어.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제삼자에게 건네진 정보, 즉 혐의자가 부모의 방문 앞에서 듣고 놀라게 될 말이든("분명 그 녀석이 일부러 그러는 거야!") 간에 말이다.  233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어쨌거나 이 문장의 주인공은 일부러라는 부사다. 문법을 무시하고 그 부사를 대명사 너에 직접 연결하면, '너 일부러!'가 된다. 거야는 부차적이고 그러는은 완전히 무색무취다. 중요한 것, 즉 비난받는 사람의 귀에 울려대는 말은 누가 뭐래도 너 일부러라는 말이고, 이것은 꼿꼿이 세워진 검지를 떠오르게 한다.

죄인은 바로 너야.

유일한 죄인,

그것은 고의로 그런 죄인이지!

이것이 메시지다. 

어른들의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라는 말은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 아이의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라는 말과 쌍을 이룬다.

격렬하지만 별 기대 없이 맞받아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는 거의 자동적으로 다음과 같은 대꾸를 끌어들인다.

"그러길 바란다!"

"그나마 다행이네!"

"설상가상이군!"

이 반사적인 대화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며 세상의 모든 어른은 적어도 처음에는 자신들의 반격이 정신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거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에서 일부러는 그 위력을 조금 잃고, 그런은 어떤 힘도 얻어내지 못한 채 일종의 보조 역할로 남고, 그거는 여전히 벼로 중요하지 않다. 죄지은 자가 여기서 우리 귀에 울려주려고 애쓰는 말은 아니에요라는 부정어에 연결된 대명사 나다.

너 일부러라는 어른의 말에 아이의 나 아니에요가 대응하는 것이다. 

부사도, 목적어도 없이 나만 있고, 그 안에서 아니다에 들러붙은 이 나는, 이 경우, 나는 나에게 속해 있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다. 

"아니, 분명코 넌 일부러 그랬어!"

"아니, 난 일부러 그러지 않았어요!"

"너 일부러!"

"나 아니에요!"

귀머거리들의 대화, 문제를 회피하고 파국을 연장할 필요. 우리는 해결책도 환상도 없이, 한쪽은 복종하지 않는다고, 다른 쪽은 이해받지 못했다고 확신하고는 헤어져버린다.

여기서는 문법이 여전히 유용해 보일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이 불화의 영역에 버려진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말, 즉 우리 대화의 모든 끈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던 그거라는 말에 관심을 갖기로 동의한다면 말이다.

자, 예전의 문법 연습을 조금 해보자. 내가 '개량'반 아이들과 했던 것처럼, 그냥 한번 보자는 거다.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원어는 Tu le fais expres)'라는 표현에서 그거(le)가 어떤 품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

"저요, 저요! 관사예요. 선생님!"

"관사? 어째서 관사지?"

"그거를 표현하는 le, la, les가 관사잖아요! 정관사요!"

의기양양한 어조. 뭔가 안다는 것을 선생에게 보여주었다는 표정... un, une, des는 부정관사이고, le, la, les는 정관사, 자, 봐요, 맞잖아요!

"그래? 정관사라고? 그러면 그 관사가 한정하는 명사는 도대체 어디 있지?"

"......"

찾아보지만, 명사는 없다. 난처함.

관사가 아니다. 

그럼 이 그거(le)는 뭔가?

"......"

"......"

"그건 대명사예요, 선생님!"

"브라보! 어떤 종류의 대명사지?"

"인칭대명사요!"

"그래?"

"보어대명사요!"

"그래. 아주 잘했다! 바로 그거다."

이제 교실을 떠나 우리 얘기로 다시 돌아와 어른들 사이에서 이 보어대명사를 분석해보자. 신중하게, 이 보어대명사들은 위험한 말이고, 분명한 의미 아래 깊이 숨어 있는 반(反 되돌릴반)인칭적인 폭약이라 뇌관을 잘 제거하지 않으면 여러분 얼굴로 폭발해버린다. 예를 들어 이 그거(le)..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라는 비난의 말을 하면서 그때의 그거라는 말이 그 상황에서 무엇을 표현하는지 우리는 몇 번이나 자문해보았던가? 일부러 뭘 그런다는 것일까? 가장 최근의 바보짓? 아니다. 이 비난을 던졌을 때의 우리 어조(어조 또한 있기 때문이다!)는 그 죄인이 언제나 일부러 그런다는 사실과, 매번 일부러 그러는데 최근의 바보짓은 그런 고집의 확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암시한다. 그렇다면 일부러 뭘 그런다는 것일까?

복종하지 않는다?

공부하지 않는다?

집중하지 않는다?

이해하지 않는다?

이해하려고 노력조차 않는다?

반항한다?

몹시 화가 나게 한다?

선생들을 화나게 한다?

부모들을 절망시킨다?

최악의 결점에 굴복한다?

현재를 망쳐 미래를 침몰시킨다?

세상을 조롱한다?

어, 그런 거야? 세상을 조롱하는 거야? 우리를 선동하는 거야?

그래, 말하자면 이 모든 거라고 하자.

그러면 부사의 문제가 떠오른다. 왜 일부러인가? 무슨 목적으로? 무슨 이유로? 그가 일부러 그런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목표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뭐하러 일부러 그러는가?

순간을 즐기려고? 단지 그 순간을 즐기기 위해? 하지만 불가피한 다음 순간, 즉 그가 나와 함께 보내는 다음의 십오 분은 내가 야단을 치기 때문에 아주 고약한 시간이다! 그는 야단맞는 일에 무심한 채로 게으름의 상태를 평온히 살고 싶은 걸까? 쾌락주의 같은 것? 하지만 그는 무위도식의 행복이 경멸적인 시선의 대가, 자기혐오를 낳는 결정적인 지탄의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그러는가?

다른 열등생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열중하는 게 배신이라서? 젊은이가 노인에게 반항하듯, 일부러 선한 것에 대항하며 악을 즐기는 걸까? 자기 나름의 사회화 방식일까?

아무려나. 어쨌든 그것은 모더니티에 관한 가장 인기 있는 명제다. 무능한 이들의 소집단화 현상.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너나없이 불량배가 우글거리는 거대한 저지대로 도피하는 것. 이런 설명은 사회학적인 진실에 어느 정도 근거한다는 편리한 점이 있으며, 그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어떤 의구심도 없다. 하지만 이 설명은 무리의 현상이건 아니건 간에 언제나 독자적인 그 아이라는 개인을 몰아낸다. 아이는 이러저러한 순간 혼자 있게 되며, 자신의 실패를 홀로 마주하고, 자신의 미래를 홀로 마주하고, 밤에 잠들기 전에도 자기 자신과 홀로 마주한다. 이제 아이를 살펴보자. 잘 바라보자. 그 아이가 행복할 거라는 데 단돈 한푼이라도 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 아이가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사실을 말하자면 이러한 설명 중 어느 것도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모든 설명이 다시간 그럴듯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문법 규칙 같은 것은 접어두고, 그 대명사가 문장 외부의 어떤 대상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을까? 예컨대 우리 자신으... 우리 자신의 눈에 비친 우리 이미지의 하강. 우리의 이미지 또한 바람직한 거울을 많이 필요로 한다.

무능하고 초조한 어른, 이해할 수 없는 거절의 희생자인 어른의 이미지를 타인-여기서는 한심한 학생-이 나에게 되돌려 준다고 비난하는 듯한 그것. 그렇지만 내가 그 아이에게 주입시키려는 원칙들이 건전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흩뿌려준 앎이 정당하다는 것도! 

그 아이의 고독에 어른인 나 자신의 고독이 대답한다.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리고 그것이 반 전체의 문제가 될 때, 서른 명의 학생이 일부러 그러기 시작할 때, 교사인 나는 문화적 린치의 대사이 되고 있음을 확실히 체감한다. 그리고 그 대명사가 한 세대 전체-"우리 때는 그런 건 상상할 수도 없었어!"-에 영향을 미친다면, 연이은 세대들이 일부러 그런다면, 그때 우리는 멸종 위기에 처한 종족의 마지막 대표들로, 젊은이들(그 시절의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던 전(前 앞전) 시대의 생존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노년의 삶에서 외로움을 절감한다. 물론 여전히 명석하고, 아주 세심하고, 얼마나 유능한데! 요컨대 우리들 사이에서는 말이다. 젊었을 때는 문명화된 세대의 얼마 안 되는 증인이었던 우리가 생각은 여전히 제대로 하고 있는데도 현실로부터 어쩔 수 없이 소외된 것처럼.

소외된...

소외감은 단지 순환하는 수많은 원 밖으로 내던져진 사람들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들, 즉 힘 있는 다수인 우리 역시 위협한다. 우리를 둘러싼 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엉뚱한 분위기가 시류를 타는 순간, 소외감은 우리 역시 위협한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당혹스러운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들을 지목하도록 밀어붙인다.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고작 대명사 하나가 그토록 엄청난 고독을 말하다니!  234-241





6. 사랑한다는 말이 뜻하는 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해내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을 모두 잊게 하는 데는 한 분-단 한반!-의 선생님이면 충분하다. 

어쨌든 그것이 내가발 선생님네 대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다. 

그분은 내가 고2였을 때의 수학 선생님이다. 몸짓의 관점에서 보자면 키팅 선생과 정반대였다. 영화적인 구석이라곤 거의 없는 선생님이었으니까. 타원형 얼굴에 날카로운 목소리, 그리고 시선을 잡아끄는 특징이 전혀 없었다. 당신 책상에 앉아 우리를 기다렸고 다정하게 인사하고는 첫마디부터 우리를 수학에 들어서게 했다. 그렇게 우리를 잡아둔 시간을 무엇으로 메웠느냐고? 무엇보다 발 선생님이 가르치는 과목이자 그분이 자로잡혀 있는 듯 보였던 수학으로 메워졌다. 수학은 묘하게도 그분을 활기차고 차분하고 선량하게 만들었다. 지식 자체에서 탄생한 그 이상한 선량함, 자신의 정신을 매혹했던 '과목'을 우리와 고유하고 싶다는 그 자연스러운 욕망. 그분은 그 과목이 우리에게 혐오스러울 수 있다거나 단지 낯설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발 선생님은 자신의 과목과 제자들로 빚어진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수학의 요람에 사로잡힌 듯한 무언가가, 믿을 수 없는 순수함 같은 게 있었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한번도 스치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 또한 그분을 놀려대고 싶은 마음이 한 번도 들지 않았다. 그만큼 가르침에 대한 그의 행복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온순한 청중이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이 지부티의 쓰레기통 출신이었던 우리는 전혀 흥미로운 학생들이 아니었다. 나만 해도 야밤의 싸움질, 애정과는 거리가 먼 내면의 원한 청산에 몰두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발 선생님의 문턱을 넘어서면 우리는 마치 수학에 몰입하여 성스러워진 듯했고,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테마티코스('수학'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어느 날, 우리 중 가장 형편없는 아이드이 자기들 낙제 점수를 자랑삼아 떠벌리고 있을 때 선생님이 미소 띤 얼굴로 자신은 '공(空)집합'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공집합에 대해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던졌고 그에 대한 우리의 단순한 대답을 아주 귀한 원석처럼 여겼는데, 이런 일이 우리를 아주 즐겁게 했다. 그러더니 칠판에 12라는 숫자를 쓰고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었다.

영악한 아이들이 대답을 시도했다.

"손가락 열두 개요!"

"모세의 12계요!"

하지만 순진무구한 그의 미소는 정말이지 우리의 기를 꺾었다. 

"너희가 바칼로레아에서 받아야 하는 최소 점수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너희가 겁을 먹지 않는다면."

그러고는

"이런 얘기는 다시 하지 않으마. 우리가 여기서 몰두해야 할것은 바칼로레아가 아니라 수학이니까.

정말로 그분은 다시는 바칼로레아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한 해동안 우리를 무지의 심연에서 조금씩 끌어올리는 일에 주력했고, 그런 우리를 매우 박식한 사람으로 여기면서 즐거워했다. 우리 자신이 아무리 부정해도, 그분은 우리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늘 경이로워했다.

"너희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엄청나게 많이 알고 있거든! 봐라, 페나키오니, 너는 네가 그걸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니?"

물론 이러한 산파술만으로 우리 모두가 수학의 귀재가 되지는 못했지만, 발 선생님은 우리를 너무도 깊던 우물에서 그 우룸의 가장자리까지, 즉 바칼로레아의 평균 점수까지 끌어올려주었다. 

다른 많은 선생님들 말에 따르면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다는 우리의 그 비참한 앞날에 대해서는 털끝만한 암시도 하지 않고서 말이다.  318-321


그분은 위대한 수학자였을까? 그리고 이듬해에 만난 지(Gi) 선생님은 대단한 역사가였을까? 재수 때 나를 가르친 S선생님은 유례없는 철학자였나? 그러리라 추측하지만 솔직히 나는 모른다. 단지 이 세 선생님이 자기 과목을 전해주려는 열정에 빠져 있었다는 것만 알 뿐이다. 선생님들은 그런 열정으로 무장하고서 낙담의 구렁텅이에 있는 나를 찾아왔고, 일단 내 두 발을 자신들의 수업에 굳건히 딛게 하고서야 나를 놓아주었다. 그들의 수업은 내 인생의 전(前)단계가 되었다. 그분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나에게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분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나 못하는 아이들이나 공평하게 대했고, 단지 공부 못하는 아이들에게 이해하려는 욕망을 되살려줄줄 알았던 것뿐이다. 그분들은 내 노력을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해주었고, 우리의 진전을 기뻐했으며, 우리의 느림에 조바심내지 않았고, 우리의 실패를 결코 개인적인 모욕으로 치부하지 않았으며, 가르치는 일의 특성과 일관성과 관대함에 근거한 더없이 엄격한 까다로움을 우리와 함께하는 가운데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점을 제외하면 달라도 너무 다른 선생님들이었다. 발 선생님은 굉장히 차분하고 잘 웃는 상이라 수학 부처님 같았고, 지 선생님은 반대로 회오리바람처럼, 태풍처럼 게으름의 외피로부터 우리를 떼어내 자신과 함께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이끌어갔다. 회의적이고 날카로운(뾰족 코, 뾰족 모자, 뽈롭 배) 철학자인 S 선생님은 잔잔한 얼굴의 통찰력으로 저녁마다 나를소란스러운 질문 속에 남겨두었고,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고 싶어 안달했다. 나는 장황한 논술문을 제출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선생님은 교정자의 편의를 위해 좀더 간결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넌지시 덧붙였다. 

모든 점을 잘 따져보면 이 세 분의 선생님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은 모른다고 하는 우리의 고백에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철자법의 결함을 이유로 내세우며 지 선생님은 내게 얼마나 여러 번 논술문을 다시 쓰게 했던가? 발 선생님은 내가 복도에 멍하니 있거나 자습실에서 몽상에 잠겨 있었다는 이유로 얼마나 여러 번 보충수업을 시켰던가? "시간이 있으니까 우리 한 십오 분만 더 수학을 해보면 어떨까, 페나키오니? 자, 십오 분만 해보자...) 익사 위기에서 구해내려는 그 몸짓의 이미지, 자살하려는 몸짓을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저 위로 나를 끌어올리려는 그 손목, 내 옷자락을 단단히 움켜쥔 살아 있는 손의 생생한 이미지, 이런 것들이 바로 그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맨  처음 떠오르는 모습이다. 그들의 현존 안에서-그들의 과목 안에서-나는 나 자신의 모습에 눈을 떴다. 수학자인 나, 역사가인 나, 철학자인 나로. 그러한 나는 이 스승들을 만날 때까지 진정으로 여기 있다는 느낌을 방해했던 나를 한 시간 동안 잠시 잊고, 나를 괄호 속에 집어넣고, 나로부터 나를 치워버렸다.

또하나, 그분들에게는 하나의 스타일이 있었던 듯하다. 자신의 과목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그들은 예술가였다. 수업은 물론 소통 행위였지만, 그것은 거의 자발적인 창조로 통할 만큼 숙달된 지식의 소통이었다. 어찌나 편안하게 수업을 했던지 우리는 매시간의 수업 자체를 하나의 사건처럼 기억할 수 있었다. 지 선생님은 역사를 부활시켰고, 발 선생님은 수학을 재발견했으며, 소크라테스는 S선생님의 입을 통해 표현되었다! 수학공식, 평화조약, 철학개념 같은 것들이 마치 바로 그날 만들어진 것처럼 기념비적인 수업을 해주었다. 그분들은 가르치면서 사건을 창조했던 것이다.

그분들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력은 거기서 멈추었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영향력은 그랬다. 교과목을 벗어나서는 우리에게 어떤 인상을 주려 하지 않았다. 부성(父性) 이미지의 부재로 고심하는 청소년에게 유효한 영향력을 끼치는 걸 영광으로 삼는 그런 선생님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구조하는 스승이라는 의식만 가졌던 걸까? 우리는 그저 수학과 역사와 철학 과목에서 그들의 제자였고, 그게 다였다. 물론 우리는 폐쇄적인 클럽의 회원들처럼 그들의 제자라는 사실에서 약간은 속물적인 자만심을 끌어내긴 했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사십오 년 뒤, 그들 덕에 선생이 된 제자 하나가 동상을 세워줄 정도로 후계자를 자처하려 든다는 사실을 알면 누구보다 먼저 놀라워할 것이다! 그분들은 블랑메닐의 첼로 연주자처럼, 일단 집으로 돌아가면 답안지를 교정하거나 수업 준비를 하는 것 말고는 우리에 대해서는 더이상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들에게는 확실히 다른 관심사, 열린 호기심 같은 게 있었고, 그것이 그들의 힘을 키워냈을 것이고, 이것은 무엇보다 교실 안에서의 그분들의 밀도 있는 존재감을 설명해주었다.(특히 지 선생님은 내가 보기에 세상사와 도서관들을 탐식한 것 같았다.) 이 선생님들이 우리와 공유했던 것은 단지 앎만이 아니라, 앎에 대한 욕망 자체였다! 그리고 나에게 나누어준 것은 그 앎을 전달하고픈 의욕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뱃속의 허기를 느끼며 그들의 수업에 들어가곤 했다. 우리가 그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분명 관심(요즘 젊은이들 말로 하자면 존중)을 받았고, 그 관심은 우리의 숙제에 써놓은 교정 문구들, 우리들 각자에게 일일이 건네주었던 그 코멘트에도 나타나 있었다. 그 분야의 본보기는 고등사범학교 준비반에서 역사를 담당하던 봄 선생님이었는데, 그분은 우리가 제출하는 논술문의 마지막 페이지를 백지로 내게 해 각자의 글에 대한 자세한 교정 내용을-붉은색으로 빽빽하게-타이핑해 돌려주었다.

학창 시절 막바지에 만났던 이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일관성없는 공공의 군집으로 축소시키고 '그런 학급'을 극히 열등하다고 말하던 모든 선생님들에 대한 내 생각을 크게 변화시켰다.  322-326


오늘날 지구상에는 다섯 종류의 아이들이 존재한다. 제 나라안에서 고객이 된 아이, 다른 하늘 아래서 생산자가 된 아이, 다른 곳에서 군인이 된 아이, 매춘부가 된 아이, 그리고 지하철 관고판의 죽어가는 아이. 굶주리고 체념한 그 아이의 모습이 정기적으로 우리의 권태로운 시선에 걸려든다.

다섯 모두 아이들이다.

다섯 모두 도구화된 아이들.  348

고객이 된 아이들 중에는 부모의 수단을 이용하는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있다. 부모에게 돈을 받아 물건을 사거나 어떻게든 돈을 마련햇 사거나. 이 두 경우에 쓰이는 돈이 개인적인 노동의 산물인 경우는 드물 테니 어린 구매자는 대가 없이 소유권을 얻는 것이다. 아이 고객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수많은 소비에서 부모나 선생과 동일한 영역(의복, 음식, 통신기. 음악, 전자기기, 교통수단, 여가...)을 가진 아이는 아무 어려움 없이 사적인 소유권을 얻는다. 그럼으로써 아이는 자신의 교양과 교육을 담당한 어른들과 똑같은 경제적 역할을 하게 된다. 어른들처럼 시장의 거대한 한 부분을 구성하고, 어른들처럼 외화를 유통시킨다(그 외화가 아이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아이의 욕망은 부모의 욕망처럼 기계를 계속 돌리기 위해 늘 자극받고 새러워져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이는 완전한 권리를 가진 중요한 인물이다. 어른들처럼. 

자율적인 소비자.

아이의 최초 욕망에서부터.

그 만족감은 아이가 받는 사랑의 측정치로 간주된다. 

어른들이 막아보려 한들 별수없다. 시장경제사회라는 게 그렇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자기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너무도 바라던 아이였기 때문에 아이의 탄생은 부모에게 끝없는 사랑의 빚 구덩이를 파게 한다)은 아이의 욕망을 사랑하는 일이며, 그 욕망은 대단히 중대한 욕구로 재빨리 표현된다. 사랑의 욕구와 물건에 대한 욕망이 거의 마찬가지인 까닭은 사랑의 징표가 물건의 구매로 통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욕망이란...  349-350


각각의 시대는 가족간의 사랑에 자신의 언어를 강요한다. 우리 시대의 언어는 사물들의 언어를 규정한다.  352


"너희 선생들은 하나같이 똑같아! 너희에게 결핍된 건 무지한 상태에 대한 강의야! 모든 시험을 통화하고 온갖 지식의 경연대회를 통과했을 때, 그때 너희가 갖춰야 할 최초의 자질은 너희는 알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파악해내는 능력이어야 해!.."  361


요컨대 가르치겠다고 나선 자들은 자신의 학창 시절에 대해 분명한 시각을 가져야만 해. 우리를 무지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최소한의 기회라도 얻으려면 무지의 상태를 조금이라도 느껴야 하거든!"  362-363


"감정이입 하지 마! 당신들의 감정이입 따위 관심 없거든! 당신들의 그 감정이입이 우리를 침몰시켜! 누구도 당신들에게 우리 입장이 되어달라고 요구하지 않거든. 도움조차 요청할 수 없는 아이들을 구해달라는 것뿐이야, 이해할 수 있겠어? 당신들의 모든 지식에다 무지에 대한 직관을 보태달라고, 그리고 열등생을 건져내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그게 당신들 일이야! 스스로 헤쳐나가는 법을 가르쳐주면 공부 못하는 학생도 스스로 헤쳐나갈거라고! 당신들한테 요구하는 건 그게 다야!"  364


"감정이입을 치워버리면, '그것'은 어떻게 치유하지?"

여기서 그는 엄청 주저한다.

다그쳐야 한다.

"말해봐,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어도 모든 걸 다 안다며? '그것'에 대해 준비되어 있지 않고서도 가르치는 수간이 뭐야? 방법이 잇기는 한 거야?"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있는 건 방법들뿐이지! 당신들은 언제나 방법들 속으로 숨느라 시간을 보내잖아. 그 방법들만으론 충분하지 않다는 걸 마음속 깊이 잘 알면서 말이야. 뭔가가 빠져 있어."

"뭐가 빠져 있지?"

"말 못해."

"왜?"

"엄청난 말이거든."

"'감정 이입'보다 더해?"

"비교도 안 되지. 네가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아니 대학이나 그 비슷한 곳에서는 절대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이야."

"뭔데? 해봐."

"아니, 정말이지 못하겠어..."

"자, 어서!"

"난 못한다니까! 교육을 말하면서 이 말을 내뱉었다간 넌 린치당할 거야."

"......"

"......"

"......"

"사랑."  366-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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