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해당되는 글 535건

  1. 2016.10.13 (아이의 미래를 바꾸는) 학교 혁명 - 켄 로빈슨 루 애로니카 21세기북스 2015 03370
  2. 2016.10.10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19세기, 푸슈킨에서 체호프까지) - 이현우 현암사 2014 03800 1
  3. 2016.10.06 내 안에 슬픈 육체가 스며 있다(섹스 뒤의 명상) - 문윤근 스테디북 2001 03810
  4. 2016.10.03 시민의 교양 - 채사장 웨일북 2015 03100
  5. 2016.09.29 여행의 심리학 - 김명철 어크로스 2016 03180
  6. 2016.09.26 흰(The Elegy of Whiteness) - 한강 문학동네 2016 03810
  7. 2016.09.22 당신의 여행에게 묻습니다 - 정지우 우연의바다 2015 03190
  8. 2016.09.19 철학, 섹슈얼리티에 말을 건네다 - 김재기 향연 2008 03100
  9. 2016.09.15 Finding Flow (몰입의 즐거움) -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해냄 1999 1
  10. 2016.09.12 교양인을 위한 로마사 - 아오야기 마사노리 교유서가 2016 03920
  11. 2016.09.08 왜 결혼과 섹스는 충돌할까 - 크리스토퍼 라이언 카실다 제타 행복포럼 2011 03180
  12. 2016.09.05 붉은 여왕 - 매트 리들리 김영사 2006 03470
  13. 2016.09.01 내 방 여행하는 법 -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유유 2016 03860
  14. 2016.08.29 다시, 책은 도끼다 - 박웅현 북하우스 2016 03810
  15. 2016.08.25 책은 도끼다 - 박웅현 북하우스 2011 03810
  16. 2016.08.22 이것이 인간인가 - 프리모 레비 돌베개 2007 03880
  17. 2016.08.18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 서경식 창비 2006 03800
  18. 2016.08.15 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 청아출판사 2005 03180
  19. 2016.08.11 청춘의 독서 - 유시민 웅진지식하우스 2009 03810
  20. 2016.08.08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프리모 레비 돌베개 2014 03880
  21. 2016.08.04 7년의 밤 - 정유정 은행나무 2011 03810
  22. 2016.08.01 노력중독(인간의 모든 어리석음에 관한 고찰) - 에른스트 푀펠 베아트리체 바그너 율리시즈 2014 03180
  23. 2016.07.28 오르가슴(12초의 희열이 세계를 바꾼다) - 롤프 데겐 한길사 2007 03470
  24. 2016.07.25 수사학 - 리처드 토이 교유서가 2015 03100
  25. 2016.07.21 표현의 기술 - 유시민 정훈이 생각의길 2016 03800
  26. 2016.07.18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 유시민 생각의길 2015 04800
  27. 2016.07.14 무지한 스승 - 자크 랑시에르 궁리 2008 93100
  28. 2016.07.11 커피 한 잔 할까요? 1 - 허영만, 이호준
  29. 2016.07.07 마크툽 - 파울로 코엘료 자음과모음 2016 03800
  30. 2016.07.04 상처 떠나보내기 - 이승욱 예담 2011 03180

(아이의 미래를 바꾸는) 학교 혁명 - 켄 로빈슨 루 애로니카 21세기북스 2015  03370



실수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독창적인 것을 해낼 수 없다. - 켄 로빈슨


모든 아이는 예술가로 태어난다. 자라면서 그 예술성을 지키는 것이 문제다 - 피카소




들어가는 글 - 자정 1분 전


이 책에서 나는 표준화 문화가 학생과 학교에 어떻게 해를 끼치는지 설명하면서 교육에 대한 차별화된 사고방식을 제시하려 한다. 또한 당신이 어떠너 사람이고 어디에 살고 있든 당신에게는 제도를 변화시킬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8


나는 교사, 연구자, 강연자, 심사관, 자문관 등으로 활동하며 40년 넘게 교육계에 몸담아왔다. 그 과정에서 교육계의 온갖 사람들과 부딪히고 온갖 기관과 조직에서 일했다. 기업, 정부, 무노하단체와 두루두루 협력해보기도 했다. 학교, 교육구, 정부를 도와 실용적 구상을 이끌고 나가기도 했다. 대학에서 교편도 잡아봤고, 새로운 단체의 설립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이 모든 활동을 펼치는 내내 나는 교육에 대해 지금까지보다 더 균형 잡히고 개인 맞춤형이며 창의적인 접근법을 찾아왔다.  10


어떤 사람들은 나의 온라인 강연 영상을 재미있게 보긴 했지만 제도의 변화를 위해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아 아쉽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이들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대답은 세 가지다. 첫 번째, 대화 시간이 18분밖에 없어서 어쩔 수가 없었으니 너그러이 넘어가주기 바란다. 두 번째, 내 생각에 정말로 관심이 있다면 그동안 내가 발표한 책, 보고서, 전략집을 읽어보면 도움이 될지 모른다. 마지막 세 번째, 바로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11


혼동을 야기하는 몇몇 용어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보자.

'학습(learning)' 이란 새로운 지식과 역량을 습득하는 과정이다... 학습 욕구를 계속 북돋우는 일이야말로 교육 혁신의 열쇠다.

'교육(education)'이란 체계적인 학습 프로그램이다. 정규교육의 전제는, 청소년들 스스로에게 맡겨두면 터득하지 못할 것들을 알고, 이해하고, 실천하도록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훈련(training)'은 교육의 한 종류로서 특정한 기술의 습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내가 말하는 '학교(school)'는 으레 아이들과 십대들을 위한 곳으로 여겨지는 전통적 시설으로만 제한되지 않는다. 서로 배우기 위해 사람들이 한데 모인 공동체라면 뭐든 학교다. 즉 이 책에서 학교란 홈스쿨링, 언스쿨링(un-schooling : 집이나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찾아 배우는 것- 옮긴이), 직접적 대면 형태나 온라인 형태의 비공식적 모임까지 아우르는 개념이다.  12-13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은 보수가 높고 자기만의 사무실이 있는 전문직 일자리를 보장받는다. 한편 지능이 비교적 떨어지는 학생들은 당연히 학교 성적도 떨어진다... 나름의 재능에 맞게 그런대로 괜찮은 서비스직이나 노동직에 들어가기도 한다. ..

전세계의 수많은 정책 입안자들이 실제로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지 곰곰이 따져보면 이들 학교와 학부모와 정책 입안자들은 이런 상황을 외면한 채 현재의 교육제도가 건전하다고 믿는 듯하다.  14


이 이야기는 위험한 허상이다. 그토록 많은 개혁이 성공하지 못한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허상 때문이다. ..

하지만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오히려 악화 일로로 치닫고 있다. 왜일까? 이런 문제들은 대개 제도 자체가 원인이기 때문이다.  15


문제를 해결하려면 증상과 원인을 구별해야 한다. 현재 교육 침체를 보여주는 수많은 증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런 증상들은 그 근본적인 문제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해결할 도리가 없다. 그런 문제 중에 하나는 공교육의 산업저 특징이다. 사실 대다수의 선진국은 19세기 중반에야 대규모의 공교육제도를 만들었다. 이런 제도의 발전은 산업혁명에 따른 노동력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측면이커서 대량생산의 원칙에 따라 구성됐다. 표준화운동(정부 주도로 표준 교육과정을 보급하려는 운동-옮긴이) ..  16


전통적 표준을 높이는 식의 교육 개선으로는 지금 우리가 직면한 도전을 충족시키기 힘들다. .. 

표준화운동에 탄력이 붙으면서 훨씬 많은 학생들이 낙제의 희생을 치르고 있다.  17


어떤 식으로든 교육에 관련돼 있다면 변화에 동참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이해해야 한다. 현재의 상황에 대한 비평, 바람직한 모습에 대한 비전, 다른 방향으로 이동할 변화론이다.  18


혁명은 입법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

당신이 어떤 식으로든 교육에 연관돼 있다면 당신에게는 세 가지의 선택이 가능하다. 제도 내에서 변화를 일구거나, 제도에 대해 변화를 촉구하거나, 앞장서서 제도의 틀을 깨거나.  19-20





우리 교사들은 교실에 들어가면 아이들 앞에서 '다들 수학 시험에 통과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아요. 아이 한 명 한 명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죠. '밴드 활동을 하고 싶지? 수석 자리에서 연주하고 싶지? 수학을 잘하면 도움이 될 거야.' 부탁조로 말하는 게 좋아요.  35


과거에는 국가 교육정책이 주로 국내적 문제였는데 요즘에는 정부들이 각국의 교육제도를 국방정책만큼이나 눈에 불을 켜고 주시하고 있다.  36-37


교육이 이렇게 뜨거운 정치적 이슈오 오르내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다. 지난 25년 사이에 기업 형태에 혁신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제조, 서비스 부문에서 경쟁이 심화됐다. ..

두 번째는 문화적 이유다. 교육은 공동체가 고유의 가치와 전통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주된 수단이다. 또한 경우에 따라 교육이 외부 세력에 맞서 문화를 지키는 수단이 되거나 문화적 관용을 촉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

세 번째는 사회적 이유다. 공교육의 공공연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배경과 환경의 차별 없이 모든 학생에게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시민으로 성공할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공교육에는 정부에서 바라는 실질적 목표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사회 안정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태도와 행동을 장려하는 것이다. ..

네 번째 이유는 사적인 것이다.

실제로 교육의 공공정책 관련 문구를 보면 그것이 무슨 의식이라도 되듯, 모든 학생이 자신의 잠재성을 깨달아 만족스럽고 생산적인 삶은 살아야 한다는 등의 구절이 들어가 있기 일쑤이지 않은가.  39-40


학업이 국가 경제의 구세주로 부상한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43


정규교육을 구성하는 3대 요소는 커리큘럼, 지도, 평가다.  44


표준화운동이 지도의 측면에서 선호하는 방식은 조별 활동보다는 학급 전체를 모아놓고 사실에 입각한 지식과 기술을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방식이다. .. 정형화된 필기시험과 객관식 문제의 포괄적 활용을 중시한다.  45


시헙의 목표 중에 하나는 학생, 교사, 학교 간의 경쟁 강화다. 이는 경쟁이 높아지면 자연히 표준도 올라갈 것이라는 가정에 따른 것이다.  45


2014년 4~6년 만에 대학을 졸업한 미국의 대학 졸업생은 평균 2만~10만 달러의 빚을 떠안고 있었다.  50


학력적, 직업적 카스트제도는 교육에서 가장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다.  51


리더들이 직원들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자질은 변화에 대한 '적응성'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창의성' 이었다.  54


미국은 세계에서 투옥률이 가장 높은 나라다. 대략 성인 35명당 한 명이 수감, 보호관찰, 가석방의 형태로 교정제도의 관리 대상이다. ..

미국에서 한 명의 고등학생을 교육시키는 데 매년 평균 1만 1,000 달러의 비용이 들어간다. 그런데 교도소에 수감시킬 경우 1인당 연간 2만 달러 이상이 들어간다.  58


당신이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매년 고객의 3분의 1 이상이 빠져나간다고 치자. 이쯤 되면 진짜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즉 고객이 문제인지 당신의 회사가 문제인지 의문을 가져봐야 하지 않을까?  59


표준화운동은 낮은 학업 성적에 대한 우려에서 시작됐다.  60


아무튼 원인이 무엇이든 여러 조사와 실질적 경험을 통해 거듭 드러난 바에 따르면, 학생의 학업성취도를 높여주는 결정적 요소는 학생 자신의 동기와 기대다. 학업성취도를 높일 최선의 방법은 지도의 질을 향상하고, 균형 잡힌 커리큘럼을 마련하고, 유익한 평가제도를 구축하는 것이다. 정치적 대응은 이와는 반대 방향을 향해왔다. 다시 말해 커리큘럼을 편협하게 짜고 교육 내용, 지도법, 평가를 최대한 표준화시켜 왔지만 이런 대응이 잘못됐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다.  61


표준화운동은 대부분 실패 중이며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더 많은 문제를 유발하고 있다. ..

표준화운동이 추진 중인 원칙과는 다른 원칙에 기초한 교육이 필요하다. 또한 이런 교육이 구체적으로 어떤 교육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본이란 특정 과목도, 특정 지도법이나 평가 전략도 아니다. 원래 역할에 충실한 교육의 근원적 목적을 가리킨다.  62


대안교육 프로그램에서는 .. 자기가 똑똑하지 못하가도 생각했던 학생이 자신이 똑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어른들의 관심, 열정, 전문지식 그리고 학생들의 신뢰, 의지, 헌신이 함께 필요하다.  71


대체로 유럽에서는 100여 년 전에 추진됐던 산업혁명의 일환으로 19세기 중반에야 공교육이 출현했다.  72


애초부터 대중 교육은 사회적 목적성도 높았다. ..토머스 제퍼슨은 "문명국가에서 국민들이 무지하면서도 자유롭게 살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존재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삶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렇듯 대중 교육을 사회 통제의 한 방법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게 교육은 사회적 기회와 공평성을 촉구하는 수단이었다.  75


산업주의에서는 대학 졸업자보다 육체 근로자가 더 많이 필요했다.  76


산업 제조의 목적은 똑같은 상품을 동일한 형태로 생산하는 것이다. 

대중 교육제도도 학생들을 특정 조건의 틀에 짜 맞추려는 의도로 설계됐다... 산없적 방법에서는 특정 규칙과 표준에 따른 획일성을 요구한다. . 표준화운동만 해도 커리큘럼, 지도법, 평가에 대한 순응을 바탕으로 삼고 있지 않은가. 

산업적 방법은 '선형(線形 줄선 형상형) 구조'를 띤다. 원재료가 연속적 단계를 통해 상품으로 만들어지고, 각각의 단계마다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관문으로서 일정 형태의 테스트를 거친다. 대중 교육도 일련의 단계로 설계돼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를 거쳐 그 상위 단계의 교육까지 쭉 이어진다. 학생들은 전형적으로 출생일에 따라 별개의 학년으로 나뉘어 일괄적인 제도에 따라 진학한다. ..

산업 생산은 '시장 수요'와 결부돼 있다. 시장 수요가 높아지거나 낮아지면 제조업자는 그에 맞춰 생산량을 조정한다. 산업 경제에서는 행정직과 전문직 근로자가 비교적 소수만 필요했기 때문에 대학 정원이 엄격히 통제됐다. 반면에 현재는 지적 근로자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대학 진입의 문이 활짝 열리고 대졸자가 사회로 진입하는 물결이 증가 추세다. ..

학교, 특히 고등학교와 고등교육은 공장에서 흔히 그렇듯이 '분업' 중심의 구조로 짜여 있다. 고등학교는 일과가 대개 일정 간격으로 나뉘어 있다. 종이 울리면 모든 학생이 다른 과목을 공부하거나 종종 교실을 바꿔 다른 수업을 받는다. 교사들은 특정 과목을 담당해 하루 종일 이 학급 저 학급을 가르친다.

이런 원칙은 상품을 제조하는 분야에서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사람을 교육하는 분야에서는 온갖 문제를 유발하기 십상이다.  77-78


교육의 획일성이 문제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애초부터 표준화돼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   78


내가 획일성에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교육에서의 제도화된 경향, 즉 하나의 표준 능력으로 학생들을 판단하고 그 표준에 미치지 못하는 학생들을 '저능아'나 '부진아'라는 낙인을 찍으며 정상이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다. 이런 의미에서 획일성에 맞설 대안은 사회 분열을 묵과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양성을 살리는 방식이 되어야 맞다. ..

획일성이라는 편협한 관점을 들이대면 필연적으로 제도로부터 퇴짜 맞거나 구제 대상자로 낙인찍히는 비순응자들이 다수 양산되게 마련이다.  79


우리 인간은 적절한 환경만 갖춰진다면 상상력과 창의력이 대단히 풍부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획일성의 문화에서는 이런 상상력과 창의력이 적극적으로 억제되며, 심지어 괘씸하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선형 원칙은 제조 분야에서는 효과적이지만 사람에게 대입하면 그렇지 못하다. 연령별로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은 아이들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이 '제조일'이라는 가정에 따르는 셈이다.  80


산업적 농업과 마찬가지로 산업적 교육에서도 생산성과 수확이 중요시돼왔고 현재는 그 강도가 더 높아지는 추세다.  89


교육을 개선하려면 반드시 이해해야 할 부분이 있다. 교육 역시 살아 있는 제도라는 점과 사람은 성장 환경에 따라 잘 자라기도 하고 그러지 못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90


학교 문화에 활력을 불어넣어 살아 있는 문화로 끌어올려야 한다. .. 문화를 실현시키려면 무엇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아야 할까? 내 생각에는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개인적 목적의 네 가지다.  91


경제적 목적 - 교육은 학생들이 경제적으로 책임감 있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 학교가 교육의 경제적 목적에 제대로 관여하기 위헤서는 청소년의 재능과 관심사를 아주 다양하게 길러줘야 한다. 학업과 직업훈련 사이의 경계를 없애고 두 분야를 똑같이 중요시해야 한다. 또한 청소년들이 여러 종류의 직업 환경을 직접 체험해보도록 직업 세계와의 실용적 파트너십을 촉진해야 한다.  91-94


문화적 목적 - 교육은 학생들이 자신이 속한 문화를 이해하고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다른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게 이끌어야 한다... 문화적 다양성은 인간을 더욱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주는 요소다. 모든 공동체는 자신의 문화와 더불어 다른 문화의 관행과 전통을 기림으로써 좀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

학교가 문화적으로 우선시해야 할 세 가지는 학생들 자신의 문화를 이해시키고 나아가 다른 문화들을 이해시킴으로써 문화적 관용과 공존에 대한 인식을 장려하는 것이다. 학교들이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편협하고 빈약한 커리큘럼이 아니라 광범위하고 다채로운 커리큘럼이다. 

94-97


사회적 목적 - 교육은 청소년이 능동적이고 온정적인 시민으로 성장하게 해줘야 한다.  97


개인적 목적 - 교육은 청소년이 주변의 세계뿐만 아니라 내면의 세계에소 관심을 갖게 해줘야 한다. .. 교육이 살아 있는 사람의 정신과 마음을 풍성하게 채워주는 것이라는 점을 잊으면 다른 목적들도 충족될 수가 없다. .. 인간으로서 우리는 누구나 두 개의 세계에 산다. 먼저 당신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당신이 오기전부터 있었고 당신이 떠난 후에도 남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사물, 사건, 다른 사람들로 이뤄진 당신 주변의 세계다. 또 하나의 세계는 당신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존재하는 세계다. 당신 자신의 생각, 감정, 지각의 사적인 세계, 즉 당신 내면의 세계다. 이 세계는 당신이 태어나는 순간 탄생됐고 당신이 숨을 거두는 순간 소멸된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세계를 통해서만 우리 주변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다시 말해 감각과 생각을 통해 주변의 세계를 지각하고 분간하면서 비로소 그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100



원칙적으로 노스 스타는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절망을 느끼고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십대들을 위한 곳입니다...

사람을 그냥 내버려주는 것, 스스로 선택하게 해주는 일에는 뭔가 심오함이 배어 있어요. 

이제 저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제가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를 물어봅니다. 아이들도 아직은 잘 모르기 때문에 답을 찾기 위해 갖가지 시도를 해봐야 합니다. 그중 하나가 모든 것에 '아니요'라고 말하며 삶을 철저히 비워낸 다음 한동안 아무것도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는 방법이에요 해보면 정말 재미있습니다.  107-108


켄과 노스 스타는 다양한 형태와 규모의 학습 방법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다. 아이들 모두를 똑같은 방식으로 가르칠 수 없으며, 가장 잘 맞는 학습 방법으로 가장 흥미를 느끼는 것을 가르쳐 줄 때 학생들은 비약적으로 도약한다는 것을 잘 안다.  109


어떤 상황을 혁신시키려면 세 가지를 이해해야 한다. 현재의 방법에 대한 비평, 바람직한 모습에 대한 비전, 다른 방향으로 이동할 방법에 대한 변화론이다.  111


핀란드의 모든 학교는 의무적으로 예술, 과학, 수학, 언어, 인문과학, 체육 등을 포괄하는 광범위하고 균형 잡힌 커리큘럼을 따라야 하지만 그 수행 방법에 관해서는 학교와 교육구에 상당한 재량권이 주어진다. 핀란드에서는 학교들이 실용적 프로그램, 직업훈련 프로그램, 창의성 양성에 높은 우선순위를 둔다. 또한 교사들의 훈련과 발전을 위해 그동안 막대한 투자를 해왔소 덕분에 교직은 위상이 높고 안정적인 직업으로 자리잡고 있다. 학교 교장들은 학교 운영에 폭넓은 재량권을 갖는 한편 전문적인 지원도 받는다. 핀란드는 학교와 교사들에게 경쟁보다는 협력을 장려하면서 자원, 아이디어, 전문 지식을 서로 공유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학교들이 지역 공동체와 학부모를 비롯한 학생의 다른 가족들과 긴밀한 유대를 맺도록 장려한다.

핀란드는 모든 국제적 평가에서 꾸준히 높은 표준 성취도를 보이고 있지만 고등학교 말에 딱 한 번 실시되는 시험 말고는 표준화된 시험이 없다.  113-114


교육은 산업적 제도가 아니라 유기적 제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116




아이들의 타고난 학습 능력은 얼마나 대단할까? 수가타 미트라는 1999년에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뉴델리 빈민가에서 실험을 실시했다. 그는 벽에 컴퓨터를 설치하고 전원을 켜서 인터넷을 연결해놓은 다음 아이들이 이 컴퓨터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봤다. 그곳 아이들은 모두 컴퓨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웹브라우저는 아이들이 알지도 못하는 언어인 영어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컴퓨터 다루는 법을 아주 금세 뚝딱 배우더니 자기들끼리 서로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게임을 하고 자기들만의 음악을 녹음하고 능숙하게 인터넷 서핑을 즐겼다. 당시에 트위터가 있었다면 그 달 만쯤에는 아이들에게 50만 명의 팔로워가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수가타는 더 야심찬 실험을 시도했다. 이번엔 컴퓨터에 음성-문자 변환 프로그램을 설치한 후 텔루구족 억양이 강한 영어를 구사하는 인도 아이들에게 주었다. 아이들은 컴퓨터에게 자신들의 말을 해독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요령을 몰랐다. 수가타는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말한 뒤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주고 떠났다가 두 달 뒤에 다시 찾아갔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컴퓨터가 이해하도록 프로그램돼 있던 영국의 억양에 맞춰 자기들의 억양을 교정한 상태였다.

얼마 후에 수가타는 인도 타밀어를 말하는 12ㅅ의 아이들이 영어로 생물공학을 독학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이번에도 그는 두 달의 시간을 주었고 그 자신조차 결과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죠. '가서 시험을 보게 하면 당연히 0점을 받겠지. 교재를 주고 나중에 다시 가서 시험을 봐도 똑같이 0점이 나올 거야. 그러면 나는 다시 돌아와서 이렇게 생각하겠지. 경우에 따라서는 교사가 필요하다고.'

두 달 후에 다시 가봤더니 26명의 아이들이 아주 아주 얌전한 표정으로 걸어왔어요. 제가 먼저 물었어요. '그래, 좀 봤니?' 아이들은 이렇게 대답했죠. '네, 봤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니?' '아니요, 전혀요.' '그랬구나, 얼마나 연습하다가 정말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매일 봤어요.' '두달 동안 아해도 안 되는 내용을 계속 봤다고?' 그 말에 한 여자아이가 손을 들더니'DNA 분자의 부적절한 복제가 유전병을 유발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이해를 못했어요'라고 말하더군요."

수가타는 정말로 많은 아이들이 효율적인 도구만 주어지면 혼자서도 학습할 수 있다는 증거를 그뒤로도 계속 발견하게 되었다.  134-136


아이들이 이처럼 타고난 학습자라면 학교에서 잘 따라오지 못하고 쩔쩔매는 아이들이 왜 그렇게 많은 걸까? 학교 공부에 지루해하기만 하는 아이들은 왜 또 그렇게 많을까? 여러 면에서 볼 때 학교에 만연된 제도와 관습이 문제다.  136


현재의 학업은 크게 세 요소로 구성돼 있다. 첫 번째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이른바 '명제적 지식'으로 통하는 지식, 이른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미국의 독립선언서가 1776년에 서명됐던 사실이 이런 명제적 지식의 예에 해당된다. 두 번째 요소는 개념, 절차, 가정, 추측 등의 이론적 분석의 강조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와 자유의 본질, 운동의 법칙 소네트의 구조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세 번째 요소는 손재주, 신체적 기술, 눈과 손의 협응 능력, 도구의 사용 등이 수반되는 기술적이고 실용적이며 응용적인 공부 보다는 주로 읽기, 쓰기, 수리가 수반되는 책상머리 공부의 강조다. 

명제적 지식은 때때로 '노잉 댓(knowing that: 방법을 아는 것-옮긴이)'와 구별된다. 절차적 지식은 뭔가를 만들고 실질적 일을 할 때 활용하는 것이다. 그림을 그릴 줄 몰라도 미술사를 학문적으로 공부하고, 악기를 연주할 줄 몰라도 음악 이론을 학문적으로 공부할 수는 있다. 미술 활동이나 음악 활동도 사실상 공부해야 할 부분이 있으므로, 방법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사실을 아는 것도 필요하다. 절차적 지식은 공학에서부터 의학과 무용에 이르기까지 모든 실용적 분야에서 필수적이다. 사람에 따라 학문적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특정 분야의 학문에 열정을 느끼기도 하며 아이디어와 기술의 실용적 응용에 흥미를 느끼면서 특정 실용 분야에 열정을 갖기도 한다.  137-138


모든 학생에게는 학문적 공부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138


우리의 학교제도를 떠받치는 조직적 의식과 지적 습관이 학생들의 다양한 재능을 적절히 반영해주지 못하는 탓이다.

단지 이런 식의 제도에 잘 맞지 않을 뿐인데도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거나, 자신이 별로 똑똑하지 못하다거나, 학습에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너무 많다.  139


가족의 지지는 받았지만, 온전한 관심은 받지 못한..  142


개인 맞춤형 교육이란 어떤 교육일까?

 - 인간의 지능이 다양하고 다각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 학생들이 자신만의 특별한 관심사와 장점을 살릴 수 있게 해주기.

 - 시간표를 학생들의 저마다 다른 학습 속도에 맞춰주기.

 - 개인별 진도와 성취도를 격려해주는 방식으로 학생들을 평가하기.  147


우리 인간은 다른 종들처럼 세상을 직접적으로 살지 않는다. 즉 인간은 세상을 개념과 가치라는 틀을 통해 바라본다. 세상에 대한 개념과 이론을 세우고 그에 따라 세상을 해석하며 그에 따라 스스로나 서로를 바라본다. 이런 상상과 창의성은 지구상의 다른 생물과 인간을 구별짓는 몇 가지 안 되는 특징이지만, 바로 그 특징이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148


집에 새 가전기기를 들여놓고 모든 가족에게 작동법을 알아내보라고 하자. 당신의 배우자는 바로 제품 사용설명서부터 들여다보고, 한 아이는 온라인에 접속해 그 기기와 관련된 유튜브 동영상을 검색하고, 또 다른 아이는 기기를 켜서 무작정 조작해볼지 모른다 이처럼 새로운 물건을 터득하는 방식이 제각각인 것은 각자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렇게 제각각인 모든 사람을 똑같은 방법으로 그것은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비효율적이다.  153-154


개개인의 학업성취도를 높이려면 학생들을 개개인으로서 수업에 참여시켜야 한다.  155


느린 교육 운동의 핵심은 어떤 방식이건 학습 과정을 개별화시키고 학습자에게 자신의 열정과 장점을 발견할 여지와 시간을 허용해주는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느린 교육 운동에서는 의미 있는 결과를 끌어내기 위한 진심 어린 학습이 중요합니다. 교사와 학습자의 참여의 질이 학생을 재능과 시험 성적만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점이 포인트예요."  159


여러 형태의 놀이는 삶의 모든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 놀이의 추방은 표준화교육이 밎은 대비극 중 하나다. 

생물 진화적 관점에서 놀이를 연구해온 보스턴대학교의 심리학 연구교수 피터 그레이에 따르면 아이들은 다른 책임들에 얽매이지 않으면 다른 포유동물과 비교해 훨씬 많이 놀며, 이런 놀이로부터 엄청난 혜택을 얻는다.  160-161


피터 그레이는 "아이들은 본래부터 어른의 간섭 없이 혼자 힘으로 놀고 탐험하도록 태어난 존재다. 아이들이 성장하려면 자유가 필요하다. 자유가 없으면 괴로워한다. 자유롭게 놀고 싶은 충동은 기본적이고 생물학적인 충동이다."

그레이 박사의 말마따나 자유로운 놀이의 결핍은 음식, 공기, 물의 결핍처럼 육체를 죽이지는 않는다 해도 영혼을 죽이고 정신적 성장을 방해한다.

"자유로운 놀이는 아이들에게 학습 수단이다. 자유로운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친구를 사귀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의 삶을 전반적으로 통제하는 요령을 배운다. 또한 놀이를 통해 자신이 자라는 문화에서 성공을 위해 필수적인 신체적, 지능적 기술을 연습하고 습득하기도 한다. 그 무엇을 해준다 해도 빼앗은 자유를 보상해줄 수는 없다. .. 아이들이 자유로운 놀이 속에서 스스로 터득하는 것들은 다른 식으로는 가르칠 수 없는 것들이다."  162-163


'지름길은 없다'

"제가 아이들에게 열심히 공부하길 바란다면 저 자신이 가장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 좋습니다."  169


정규 교육의 3대 요소는 커리큘럼, 지도, 평가다. 대체로 표준화운동은 커리큘럼과 평가에 초점이 집중돼 있다. 지도는 표준을 전하는 역할쯤으로 치부되고 있다. 우선순위가 완전히 거꾸로 뒤집힌 것이다. 커리큘럼이 얼마나 상세한지, 시험에 얼마나 비용을 들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교육 혁신에서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지도의 질이다.  172


표준화운동은 교사들에게 서비스직 종사자의 역할을 맡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교사들이 택배기사나 되는 듯이 표준을 '배달'하는 역할에 치중돼 있다.  173


아이들이 타고난 학습자라면 굳이 교사들이 필요할까? ..

교육은 살아 있는 과정으로서 농업이 가장 적절한 비유가 된다. 농부들은 자신들이 식물을 자라게 해주는 것이 아님을 안다. 농부들이 식물에 뿌리나 잎사귀를 붙여주거나 꽃잎에 색을 칠해주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식물은 스스로 자란다. 농부가 할 일은 식물이 스스로 자랄 최적이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174


아이들은 원래 호기심이 많다. 학습 의욕을 자극하려면 아이들의 호기심을 북돋워야 한다. 질문 중심의 실용적인 지도법이 큰 효과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련한 교사는 학생들이 묻지도 않은 질문에 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의문을 품도록 자극해서 탐구 의욕을 부추긴다.  181


학생들은 유대감을 주는 교사를 필요호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믿어주는 교사를 필요로 한다.  184




커리큘럼은 정규 커리큘럼과 비정규 컬리큘럼으로 구분되는데 정규 커리큘럼은 의무적인 과정인 만큼 시험을 치르고 평가받는 절차가 수반된다. 비정규 커리큘럼에는 모든 자발적 활동이 포함된다. 

커리큘럼의 목적은 학생들이 배워야 할 내용들에 대해 일종이 지침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커리큘럼에는 또 다른 목적도 있다. 학교들이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지, 모든 구성원의 시간과 공간의 이용을 어떻게 배열할지를 결정하는 데도 커리큘럼이 필요하다.  217


내 생각에 교육의 4대 기본 목적에 비추어 학교가 정말로 학생들의 성공적 삶을 돕고 싶다면 여덟 가지 핵심 능력을 개발해 주어야 한다. 

 - 호기심(curiosity)

   인간이 이뤄낸 성취는 탐구하고 시험해보고 싶은 욕망,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하고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알고 싶은 욕망, '왜'라는 의문과 '만약'이라는 의문을 풀고 싶은 욕망이 그 동력이다.

 - 창의성(creativity)

 - 비평(criticism)

   비평적 사고는 형식논리만으로 갖춰지는 능력이 아니다. 의도의 해석, 맥락의 이해, 감춰진 가치와 감정의 간파 동기 판단, 편견 간파, 간결하고 타당한 결론 제시 등도 갖춰야 할 능력이며 이 모두는 연습과 지도가 필요하다.

 - 소통(communication)

   우수한 읽기, 쓰기, 산술 능력. 이와 더불어 분명하고 자신 있게 말하는 능력,, 일명 '구술 능력(oracy)' 역시 중요하다.

 - 협력(collaboration)

   학교 밖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 능력이 지역 공동체를 강화시키고 집단적 도전에 맞서는 데 중요한 요소다... 청소년에게 협력 능력을 키워주면 자존감이 높아지고 호기심이 자극되며 창의성과 성취도가 긍정적인 사회적 행동이 촉진 된다.

 - 연민(compassion)

   연민의 뿌리는 감정이입이다. 단순한 감정이입만은 아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는 황금률을 실제로 표현하는 것이다. 감정이입의 실천이기도 하다.

 - 평정(composure)

 - 시민성(citizenship)

   청소년이 사회의 작동 방식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특히 법적, 경제적, 정치적 제도가 어떻게 운영되고 그런 제도가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 시민성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획일성과 현상 유지가 아니다. 그보다는 평화롭게 살기 위해 동등한 권리, 의견 차이의 가치, 자신의 자유와 타인의 권리 사이에서 균형잡기 등을 장려해야 한다.  222-230


학교의 커리큘럼 구상에 관해 나는 학과라는 개념을 훤씬 선호한다. 학과는 이론과 실용이 조합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231-232


내 견해로는 균형 잡힌 커리큘럼이 되려면 예술, 인문, 언어, 수학, 체육, 과학에 대해 공평한 자격과 자원을 부여해야 한다.  232


표준화시험이 교육의 주된 책무가 되면 커리큘럼을 정하고 지도의 초점을 맞추는 기준으로서 시험을 활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교과목의 테스트 방법은 교과목을 가르치는 방법의 모델이 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학교가 시험 준비 프로그램으로 전락하는 셈이죠."  260


시험을 강조하다 보니 아이들에게 타고난 창의성과 모험가적 재능을 어떻게 활용할지 가르쳐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261


전체 성적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험 성적이 좋지 못할 것 같은 학생들을 낙제시킬 소지도 있다.  262


평가란 학생들의 발전과 성취의 정도를 판단하는 과정이다. 내가 <내 안의 창의력을 깨우는 일곱 가지 법칙>에서도 주장했듯이 평가는 서술과 평가의 두 가지로 나뉜다. 어떤 사람이 1마일(약1.6km)을 4분 만에 달릴 수 있다거나 불어를 말할 줄 안다고 하면, 이것은 그 사람의 실력에 대한 중립적 서술이다. 반면 어떤 여학생이 그 교육구에서 달리기를 가장 잘한다거나 원어민 뺨치게 불어를 잘한다고 말할 경우에는 평가가 된다. 평가가 서술과 다른 점은 개인의 실력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특정 기준에 대비해 판단한다는 것이다.

평가는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우선 진단적 역할을 해서 교사가 학생들의 적성과 발달 수준을 파악하게 해준다. 또한 발달 형성적 역할을 통해 교사가 학생들의 공부와 활동에 대한 정보를 모아 발달을 북돋우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학업 프로그램 말기에 전반적 수행 능력을 판단하게 해주는 총괄적 역할을 한다. 

문자와 성적을 활용하는 평가제도의 문제는 대체로 서술의 비중이 약하고 비교의 비중이 높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때때로 그 의미도 잘 모른 채 성적을 받고 교사들은 때때로 그 이유를 확신하지 못한 채 성적을 매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단 하나의 문자나 숫자로는 복합적 평가를 총괄적으로 담아내지 못한다는 점 또한 문제다. 게다가 일부 성과는 이런 식으로는 적절히 표시할 수가 없다. 저명한 교육자 엘리엇 아이즈너(Elliot Eisner)는 말했다.

"중요한 것이라고 해서 모두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측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 중요한 것은 아니다."  272-273


실질적 학습은 상당히 다루기 힘든 일이다. .. 학교의 주된 초점을 성적이 아니라 학습에 맞추려면 학습과 사람들을 숫자로 전락시키지 못해 안달하는 강박을 버려야 한다.  274


현재 전세계적으로 몇몇 교육구들이 문자와 숫자로 표시되는 성적을 폐지하고 보다 통합적인 평가 방식을 채택하는 시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으며...  283


학교에서 쩔쩔매는 학생들이 그렇게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학생들이 개인으로서 대우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생들 특유의 장점이 발견되지 못하거나 고려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의 깊게 살펴보는 부모라면 담임 교사를 비롯한 대다수 사람들보다도 자신의 자녀를 더 잘 알기 마련이다.  326


인생은 일직선이 아니다  327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학부모의 참여는 사회경제적 위치나 문화적 배경과 상관없이 동기부여와 성취에 직결된다. <증거의 새로운 물결>에 따르면 부모가 "아이들과 학교 문제를 얘기하고, 아이가 잘할 거라고 기대해주고, 대학 진학 계획을 도와주고, 과외 활동을 건설적으로 하도록 확인해주면 아이들은 학교에서 더욱 실력 발휘를 한다.  328


홈스쿨링은 지난 수년 사이에 탄력을 얻으면서 한때는 별난 사람들의 전유물로 취급됐으나 이제를 주류로 들어서고 있다. 미국 교육부에 따르면 2011~2012학기에 학령기 아동의 약 3퍼센트가 홈스쿨링을 받았다고 한다. 홈스쿨링을 매력적 대안으로 선택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 중 한 가지만 들어보면, 앞에서 교육의 개인 맞춤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다뤘던 여러 가지 문제를 홈스쿨링이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즉 표준화시험에 매달리지 않으면서 아이들이 가장 끌리는 열정과 관심사를 발견할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한 학습의 해>에서 저자 퀸 커밍스는 그녀의 딸 앨리스에게 홈스쿨링을 했던 체험담을 풀어놓았다. ' .. 딸이 지성을 한껏 과시하며 자신감을 펼치길 바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딱히 가야 할 곳도 할 일도 없이 멍하니 긴 우호의 따분함을 기분 좋게 즐기기도 바랐다.'  346-347




"저는 아이들이 세 유형으로 나뉜다고 봅니다. 먼저 기술의 수동적 소비자형이 있어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런 프로그램을 소비만 할 뿐, 기술은 이해하지 못하는 유형이죠. 그다음으로 똑똑한 소비자형이 있어요. 분별력 있게 웹을 활용할 줄 아는 아이들이죠. 기술에 대해 더 잘 알지만 실천은 하지 않아요. 마지막 유형은 생산자형 아이들이에요. 오픈소스 활용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유형이죠. 아이가 창의성을 갖길 바란다면 프로그램 짜는 요령을 가르쳐줘야 해요. 컴퓨터가 없는 아이에게 컴퓨터는 정보기술 외 다른 학습으로의 활용 면이나, 아이들의 창의성을 키우는 면으로 활용도가 뛰어난 기구예요."  371


창의성의 풍토를 촉진시키기 위해 활용하는 한 가지 방법은 모든 관련자들을 찬찬히 살피며 "어떤 제안거리가 있는지 알아주고,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저마다의 독특한 재능을 발견해주면서 성장을 유도해주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도 있다.  376




나오는 글 - 모든 사람을 위한 혁명


마리아 몬테소리는 의사이자 교육자였다... 다음과 같이 개인 맞춤형 교육을 강조했다. "교사는 아이가 흥미를 갖는지 안 갖는지 유심히 살펴야 한다. 어떻게 관심을 보이고 얼마나 오래 관심을 보이는지 관심을 기울이며 얼굴에 드러난 표정까지도 잘 살펴봐야 한다. 교사는 자유의 원칙을 어기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아이에게 부자연스러운 활동을 부추길 경우 아이의 자연스러운 활동이 뭔지를 더 이상 분간하지 못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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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러시아 문학으로의 초대

러시아. 딱' 세계의 6분의 1'입니다. 연방이 해체된 지금의 러시아만 하더라도 세계의 8분의 1 정도입니다.  12

러시아의 역사는 그다지 길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상당히 짧지요. .. 러시아는 천 년 조금 넘습니다.  13

최초의 국가를 키예프 루시라고 합니다. '루시'가 '러시아'의 어원입니다. 자기들을 지칭할 때 "우리는 루시인이다"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루시가 나중에 모스크바 시대에 '러시아'로 바뀝니다. ..
그들에 따르면, 루시는 러시아에서 이민족, 즉 이질적인 존재를 뺀 것입니다.
그 다음 13세기에서 15세기까지, 더 정확하게는 1240년에서 1480년까지가 몽골 지배기입니다. 타타르 러시아라고 불리는 시기입니다.  14

몽골의 대제국은 칭기스칸 이후 사한국으로 나뉘어 분할 통치되죠. 러시아는 킵차크한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러다 15세기 후반 몽골 세력이 약화될 무렵 모스크바 공국 시대가 열립니다... 모스크바 공국의 대공은 러시아를 지배하지만 몽골의 칸에게 충성하며, 매년 공물을 보냈어요. 흔히 러시아의 강력한 전제주의 체제를 몽골 지배의 가장 큰 정치적 유산이라고 합니다.  15

공동체에서는 국가가 생기지 않습니다. 공동체는 평등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죠.
사실 러시아는 무척 강한 공동체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농민 공동체인데, 러시아어로 '미르'라고 합니다. 미르는 뜻이 조금 복합적입니다. '세계'라는 뜻도 있고, '평화'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 미르가 농민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미르는 결속력이 상당히 강해요.
러시아에 왜 이렇게 강한 공동체 정신이 남아 있을까요? 그들의 심성이 좋아서가 아니라 땅이 척박해서 그렇습니다. 땅이 척박해서 혼자서는 도저히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품앗이를 해야 합니다... 개인주의는 러시아 전통에서 볼 때 상당히 낯선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이라든가 사생활 개념이 좀 약합니다. 서구식 문화와는 차이가 있는 거죠. ..
러시아 사람들은 세계에서 인내심이 가장 강한 민족으로도 꼽힙니다. 또 러시아는 몹시 폭력적인 군대를 가지고 있는 나라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폭력적인 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 것도 러시아 사람들이 잘 참기 때문입니다. .. 이민 족의 오랜 지배 아래에서 또는 위임 권력 아래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갖게 된 인내심입니다.  16-17

타타르 세력이 약화되지 러시아는 그들을 쫓아내고 모스크바 공국 시대를 엽니다. 그러면서 영토를 끊임없이 확장하기 시작합니다. 러시아가 처음부터 방대한 영토를 차지한 게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한 겁니다.
모스크바 공국 시대는 '제정러시아 시대'라고 하는데, 보통 '표트르 러시아'라고도 합니다. 표트르 대제가 세운 러시아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피터 더 그레이트(Peter the Great)'라고 부릅니다. 표트르 대제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에 근대 러시아를 만듭니다. 러시아사 시대 구분은 단순한데 18세기 이후를 모던(modern) 러시아, 즉 근대 러시아라고 하고 그 이전을 올드(old) 러시아, 즉 고대 러시아라고 합니다. 러시아는 고대와 중세를 따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19

러시아사를 크게 보면 '주인'이라고 할 만한 군주가 둘 있습니다. 한 사람은 근대 러시아를 만든 표트르 대제이고, 또 한 사람은 소비에트 러시아를 건설한 스탈린입니다. 거기에 한 명 더 꼽자면 이반 뇌제가 있습니다. .. 이반 뇌제, 표트르 대제, 스탈린이 러시아사의 '주인'입니다. 러시아를 만든 사람들입니다.
이반 뇌제는 이른바 전제군주의 절대 권력을 확립합니다. 피바람이 불었죠. .. 귀족들을 대거 숙청하고 자기 친위대를 만듭니다. 소비에트 시대의 비밀경찰인 KGB 같은 것의 전신이라고 할 만합니다. 귀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조금이라도 반란의 기미가 있으면 바로 숙청하면서 강력한 일인 지배 체제를 만듭니다.  20-21

표트르 대제. 최초로 해군을 창설하기도 합니다.
농경 국가로, 후진적이고 전근대적인 경제체제를 유지하던 러시아를 무역 국가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에는 항구가 없었어요. .. 표트르 대제에게는 특히 부동항, 즉 겨울에 얼지 않는 항구를 만드는 것이 숙원사업이었습니다. .. 마침내 스웨덴과 싸워 승리를 거둡니다. 이른바 북방전쟁에서 그렇게 승리하면서 어느 정도 교두보를 확보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서유럽 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페테르부르크로 옮깁니다.
페테르부르크는 순수한 인공도시, 계획도시입니다.
18세기에는 유럽 전체에서 가장 세련된 도시, 새로운 도시였는데 지금은 가장 고풍적인 도시가 되었습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을 정도입니다...모스크바가 목조도시라면 페테르부르크는 석조도시입니다.  21-22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보면 모스크바의 귀족들은 다 점잖고 품위가 있습니다. 반면 페테르부르크의 귀족들은 다 야비하고 음흉하게 그려집니다.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화는 과정에서 수천 명이 희생됐습니다. 큰 토목 공사였고 공사 과정이 험난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뼈 위에 세워진 도시' 혹은 '악마의 도시'라고 불렸습니다. .. 러시아 문학이나 문화사의 '페테르부르크 신화'입니다. 도시 자체가 하나의 신화적 공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신화의 시작이 푸슈킨의 <청동 기마상>이고 그다음 이어진게 고골의 '페테르부르크 연작'입니다. 그런 작품들의 정점에 오르는 것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죠. 이게 20세기에는 안드레이 벨리의 소설 <페테르부르크>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하나의 도시 공간 자체가 신화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여러 작품에서 소재 이사의 의미를 갖게 된 경우입니다.   23-24

표트르 대제의 러시아가 이른바 제정러시아입니다. 1917년 2월에 2월 혁명이 일어나고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그게 제정러시아의 끝입니다.  24

우리가 35년간 일제강점기를 경험했다면 러시아는 240년간 몽골 지배를 경험했거든요. 그런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 점에서 비슷하고, 정서적으로도 비슷한 점이 있어요. 그래서 한국 독자들이 가장 접하기 쉬운, 일체감을 느끼기 쉬운 문학이 러시아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25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는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끝나게 되죠. 그 이후를 '포스트 소비에트'라고 부릅니다. .. 키예프부터 따지면 여섯 개 시대, 즉 키예프 러시아, 타타르 러시아, 모스크바 러시아, 표트르 러시아(제정러시아), 소비에트 러시아, 포스트 소비에트 러시아(러시아 연방) 이렇게 시대 구분이 됩니다.  26-27

러시아 연방을 상징하는 문장은 '쌍수 독수리'인데 제정러시아 때인 15세기에 들어왔다고 하죠. 러시아는 모스크바가 로마와 비잔티움을 뒤이은 제3의 로마라는, 이를테면 기독교 선민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잔티움의 문장을 갖다 쓰기도 했는데 쌍두 독수리가 그런 기원을 갖고 있죠.  27

톨스토이도 러시어의 거장이지만 톨스토이 문학이 상대적으로 유럽 공통 문학, 보편 문학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면,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은 러시아에서만 나올 수 있어요. 고골도 마찬가집니다.
러시아 작가의 계보는 푸슈킨에서 시작합니다. .. 그 다음 고골이고, 한 사람 더 들면 레르몬토프가 있습니다. 이 3대 작가가 러시어 근대 문학의 퇘를 만듭니다. 이들이 활동했던 시기는 1820년에서 1840년 정도까지입니다.
한 다리 건너뛰어서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 리얼리즘 누학의 3대 작가가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이들 작가가 주로 활동했던 시기가 1856년에서 1880년까지입니다.
마지막이 체호프입니다. 체호프는 19세기를 마감하는 작가입니다. 별명도 '황혼의 작가'입니다. '가을의 작가'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체호프의 몇 년 후배가 막심 고리키입니다. 20세기 러시아 문학을 시작하는 작가입니다. 고리키부터 20세기 작가로 치면 됩니다.  27-28

러시아 문학은 달리 말하면 인텔리겐치아의 문학이었습니다. 러시아의 지식인 계급을 '인텔리겐치아'라고 합니다. ..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는 지식인이되 비판적 지식인을 말합니다.
책을 읽을 줄 알면 인텔리겐치아 자격으로 충분했습니다. 90% 이상이 문맹이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독자층이 그렇게 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텔리겐치아는 출신에 따라 귀족과 잡계급이 있었습니다. 잡급은 귀족도 아니고 농민도 아닌 부류인데, 대개는 성직자나 상인이나 의사 같은 직종의 사람들이 잡계급을 구성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장 대표적인 잡계급 출신의 작가입니다. 인텔리겐치아가 사회적 계급 또는 세력으로 대두되는 시기가 1830~1840년대입니다.  28-29

표트르 대제 때까지도 러시아에는 '문명'이 없었어요. 표트르의 사절단이 유럽을 일주하면서 지나가는 곳마다 다 쑥대밭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밤마다 먹고 마시며 광란의 밤을 보낸 거죠. 황실이 그 정도였어요. 게다가 몽골의 침입과 지배 때문에 러시아는 르네상스를 경험하지 못했어요.  30

인텔리겐치아는 183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서구파와 슬라브파로 나뉘게 됩니다. 둘 다 기본적으로는 러시아를 사랑합니다.
서구파는 러시아를 '아이'로 봅니다. 잘 돌보고 훈육해야 하는 아이로 보는 거죠. 이때 서구파에게 중요한 건 미래입니다. 우리가 러시아를 미래에 어떤 나라로 만들어야 할 것인가? 유럽을 모델로 하자는 거죠.
반면 슬라브파는 러시아를 어머니로 봅니다. 중요한 건 러시아의 과거이고 전통입니다. 유럽 문명은 오염되고 타락했지만 러시아는 아직 순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이런 독자적 가치를 보존해나가야 한다는 게 슬라브파의 주장입니다.
고골은 나중에 대단한 보수주의자가 되는데, 슬라브파를 지지합니다. 반면 투르게네프는 대표적인 서구파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골수 슬라브파입니다.  31-32

러시아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푸슈킨의 시를 읽습니다. 거의 이유식 같아요. 러시아는 중등 교육 과정이 11년인데 이 기간에 배웁니다. ..
러시아도 독서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하는것이 고전 문학 작품을 영화화하는 겁니다.  32

 


2강 러시아 영혼의 정수 -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읽기

푸슈킨은 1799년에 태어났습니다.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의 관료제 개혁 이후에 세습귀족의 지위가 약화되는데, 푸슈킨 가문이 거기에 해당합니다.
명색이 귀족이었지만, 사치스러운 생활을 감당할 돈은 점점 줄어가던 집안이었어요.
푸슈킨은 러시아 최초의 '전업 작가'였습니다.  39-40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푸슈킨은 상대적으로 부모님의 무관심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혜택이라고 한다면 아버지 서재의 책들을 마음껏 탐독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장서가 3,000권쯤 됐다고 해요.  40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을 계기. 러시아에서 '조국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러시아사에서 보면 1914년 히틀러와의 전쟁과 함께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는 전쟁입니다. 이 두 차례의 조국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이 러시아 사람들의 자부심입니다.  44

당시 귀족 청년들 사이에 '돈 후안 리스트'가 유행했는데, 자기가 유혹한 여자들의 목록을 만들어놓은 거예요. 믿거나 말거나 푸슈킨은 결혼 전에 이 목록에 있는 여자가 100명이 넘었습니다.  49


<예브게니 오네긴>
내용은 한마디로 두 주인공 오네긴과 타치야나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입니다.  52

고전주의는 개인의 개성과 자유보다는 규범이나 조화, 모범 등을 강조했습니다. ..
낭만주의는 자유와 개성을 예찬하고 규범보다는 파격을 좋아합니다. 형식을 그리 존중하지 않아요. 규칙에 대한 위반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문학적 유희가 가능하려면 규칙의 준수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만약 규칙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 위반이 의미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54-55

 


3강 절대 고독과 자의식의 탄생 - 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 읽기

레르몬토프는 십대 때부터 시 습작을 합니다. 27세에 결투로 죽은 요절 시인이라 천재라는 선입견을 갖게 되는데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푸슈킨은 천재적인 시적 재능을 갖고 있었던 반면 레르몬토프는 노력파였어요. 13세경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서 이십대 중반에 제대로 된 시를 쓰게 되니 10년간 습작한 셈입니다.  75

레르몬토프의 작품에는 내면의 자의식을 가진 주인공이 나타난다는 거죠. 러시아 문학사에서 처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영웅>의 주인공 페초린은 오늘날의 독자들도 충분히 동일시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그만큼 현대적입니다. 현대인이 갖고 있는 내면이나 자의식을 엿볼 수 있어서 어떤 연속성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근대적 인간의 자의식을 보여주는 셈인데 이걸 계승하는 작가가 바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내면 묘사는 거의 '창자'까지 드러내놓고 묘사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죠. 가장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부분까지 다 까발려놓습니다. 그게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현대성인데 그런 현대성의 기원을 바로 레르몬토프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85

<예브니 오네긴>이 '오네긴 연구'라면 <우리 시대의 영웅>은 '페초린 연구' 입니다.  88

러시아 근대 소설의 토대를 마련한 작품으로 흔히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 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 그리고 고골의 <죽은 혼>, 이 세 작품을 꼽습니다. 그런데 세 작품이 모두 특이합니다. <예브게니 오네긴>이 운문 소설이고, <우리 시대의 영웅>이 '연작소설'이라면, <죽은 혼>은 부제가 '서사시'라고 돼 있어요. 산문소설이지만 작가 고골이 그렇게 주베를 붙입니다. 1830~1840년대에 쓰인 이 작품들이 러시아 근대 문학의 토대를 마련하게 되고, 그 이후에 본격적인 리얼리즘 산문소설들이 쓰이게 됩니다.  92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걸작을 써낼 수 있는 토양을 푸슈킨, 레르몬토프, 고골이 마련한 것인데, 모델이 없는 상태에서 모델을 만들기 위해 암중모색했던 작가들인지라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쓴게 특징입니다. 동시대 작품인가 싶을 정도로 서로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생각합니다.  94

 

 

4강 웃음과 공포의 미스터리 - 고골의 <페테르부르크 이야기>읽기

고골의 풀네임은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
실제로 '고골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인가' 따져들면 단순해 보이는 작품도 복잡하고 난해해집니다. 사실 작품뿐만 아니라 고골은 생애 자체가 미스터리입니다.  106

고골에게서 작가적 재능은 무엇보다도 유머나 풍자 쪽에 있었습니다.  110

고골은 전형적인 속물드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최고 작가입니다. 문제는 그런 재능과 그가 생각한 작가의 소명이 충돌하는 데 있었습니다.  111

1837년에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푸슈킨이 결투하다 죽은 거예요.
고골 생각에 러시아 문단에는 두 작가가 존재합니다. 푸슈킨과 고골, 푸슈킨과 자신이 러시아 문학을 이끌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10년 연상인 푸슈킨이 앞에서 끌고 가고 자기는 뒤에서 밀고 가고, 푸슈킨이 긍정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자기는 부정적인 군상을 묘사하고, 그런데 푸슈킨이 죽은 겁니다. 고골은 '이제는 나밖에 없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명 의식이 더 강화됩니다.  116

그전까지 고골은 진보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작가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는 고골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당시 독자나 비평가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이 '진보적인 작가'가 <친구들과의 서신 교환선>에서는 노골적으로 러시아정교와 전제주의, 농노제를 옹호합니다. 이 세 가지는 제정 러시아를 지탱하는 세 지주입니다. 관제 이데올로기였어요. 차르의 전제적 지배 체제 아래서 지주들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자유가 제약당하고 처지가 악화된 농노를 고골이 긍정한 겁니다.
1830~1840년대에 투르게네프를 비롯하여 많은 작가와 인텔리겐치아들이 농노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고골은 농노제를 옹호하고 나선 겁니다. 완전히 따돌림당합니다. 고골에 대해서 높이 평가했던 당대 최고의 비평가 벨린스키는 이에 고골을 신랄하게 비판한느 공개 서한을 발표합니다.
상심에 빠진 고골은 1848년에 팔레스타인 성지 순례까지 갔다 와서 다시 집필에 나서지만 진척이 안 됩니다. 마침내 오프티나수도원을 방문하는데 그곳 수도원장이 고골한테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네가 지금까지 쓴 것은 모두 악마의 작품이다." 고골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광신적인 신앙 때문에 지옥에 대한 묵시록적인 두려움을 품고 있었는데, 그 공포를 더 부채질한 셈입니다. 그래서 1852년 <죽은 혼> 2부를 태워버리고 열흘 뒤 반미치광이가 되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117-118

고골에게는 양면이 공존합니다. 무척 유쾌한 풍자적인 세계, 유머러스한 세계와 어둡고 음울하고 무서운 세계가 공존하는 것이 고골 문학입니다. 그래서 고골은 상당히 흥미로우면서도 미스터리한 작가입니다.  139

 

 

5강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출발 -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아버지와 아들> 읽기

투르게네프의 장편소설 <루딘>이 발표도니 1856년부터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출간된 1880년까지 25년 정도가 러시아에서 사실주의 문학이 꽃피운 시기입니다. 곧 투르게네프가 러시아 사실주의 장편소설의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죠. ..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는 1818년 러시아 오룔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납니다. 어머니 쪽이 부유한 대귀족이었고 아버지 쪽은 상대적으로 몰락한 가문이었습니다. 이렇듯 가세가 차이나는 경우는 대개 정략결혼이죠. 투르게네프의 아버지가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켜세우기 위해 부유한 노처녀와 결혼한 겁니다. 자전적 소설 <첫사랑>의 배경이죠.
아버지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투르게네프는 장교로서 보로디노 전투에서 수훈을 세워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수려한 용모와 여성 편력으로 유명했답니다. 23세의 나이에 부유한 여지주 바르바라 페트로브나와 결혼하게 됩니다. 바르바라는 농노가 5,000명이었다니 상당한 대지주였죠. 아버지 투르게네프 집안은 농노가 100여 명이었으니 꽤 차이가 납니다.  142-143

<첫사랑>의 아버지처럼 투르게네프의 아버지 또한 늘 바깥으로 도는 바람에 부부간에 다툼이 잦았습니다. 그때마다 부모 모두 자식들에게 분풀이를 하곤 했죠. 투르게네프는 여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어머니를 닮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상당히 포악한 성격이어서 어린 투르게네프를 아무 이유 없이 때리기도 했고, 특히 농노들을 많이 학대해서 어린 투르게네프가 마음의 상처를 입습니다. 러시아 농노제를 폐지하기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이른바 '한니발의 맹세'를 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죠. 실제로 <사냥꾼의 수기>라는 작품집으로 농노제 폐지에 크게 기여합니다.  143

어쨌든 어린 시절 투르게네프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단연 어머니였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나서 크게 영향 받을 기회가 없었던 반면 어머니로부터는 압도적 영향을 받았죠. 어머니 말고 투르게네프의 삶과 문학에 영향을 준 사람이 두 명 더 있는데, 오페라 여가수 폴린 비아르도와 당대의 비평가 벨린스키입니다.  144

1843년, 그러니까 투르게네프가 만 25세 되던 해 모스크바에 공연을 온 프랑스의 오페라 가수 비아르도를 만나게 됩니다. 투르게네프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유부녀였습니다. 당시 오페라 여가수들의 경우 자신의 후원자와 일찍 결혼을 하곤 했죠. 남편 이름이 비아르도입니다. 이 유부녀 오페라 가수에게 누르게네프는 그만 첫눈에 반합니다. ..
투르게네프는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일련의 장편소설을 계속 써나가면서도 사생활에서는 비아르도에게 일생을 바치게 됩니다. 남편과는 친구로 지내면서요.
벨리스키와 교우가 시작된 것도 비슷한 시기였습니다. 모스크바대학 철학부에 입학했다가 페테르부르크대학으로 옮겨 그곳에서 고골의 강의도 듣고 셰익스피어 작품 중 일부를 러시아어로 옮기기도 하고, 푸슈킨과 교류를 나누기도 하던 투르게네프가 베를린 유학을 다녀온 뒤 서사시 [파라샤]를 발표할 무렵입니다.
벨린스키는 19세가 전반기 러시아 최고의 비평가입니다. 러시아 문학이 낭만적 서정시에서 리얼리즘 소설의 시대로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러시아 문학의 민중성을 강조한 비평가죠. 벨린스키와 교우하게 되면서 투르게네프는 비로소 사회적 문제의식에 눈뜨게 됩니다. 여성적인 데다 내향적이었던 그가 벨린스키를 통해서 사회문제로 눈을 돌리고 작가로서 소명의을 갖게 된 것입니다.  145

투르게네프에게 끼친 벨린스키의 영향은 나중에 투르게네프가 자신의 대표작인 <아버지와 아들>을 벨린스키에게 헌정한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벨린스키는 1848년에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와 아들>은 1862년에 발표됩니다. 투르게네프는 대표작을 벨린스키에게 바쳤을 뿐만 아니라, 죽어서는 벨린스키 옆에 묻힙니다.  147

흥미로운 것은 투르게네프의 생몰 연대와 마르크스의 생몰 연대가 같다는 사실입니다. 둘 다 1818년에 태어나서 1883ㄴ녀에 사망하죠.  147

한 번도 관찰자나 화자가 자기 주장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 못된 지주를 보라는 식의 호소도 없고 어떻게 하라고 요구하거나 주장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게 투르게네프 스타일인데 그저 간결하게 보여주기만 할 뿐입니다. 감정의 찌꺼기를 드러내지 않아요.
그런가 하면 투르게네프는 자전적 소설도 썼습니다. <파우스트>, <아샤>, <첫사랑> 등이죠. 1856년부터 1860년 사이에 쓰인 작품들입니다. 이 작품들은 비록 러서아 사회의 문제를 직접 다루지는 않았지만 투르게네프를 이해하는 데 요김한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8

<루딘> <귀족의 둥지> <전야> <첫사랑> <아버지와 아들> <연기> <처녀지> 이 장편소설 여섯 편으로 투르게네프는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에 자신의 이름을 깊이 새기는데, 이른바 사회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 작품 여섯 편은 1856년부터 1877년까지 20년간 당대 러시아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가 어땠는지를 알려면 이 소설들을 보면 됩니다.  149

투르게네프는 가장 서구적 교양을 갖춘 작가입니다. 그러면서도 러시아의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실물 크기로 보여주는 작가로 평가됩니다. '표면의 작가'라고도 불립니다. ..
그런데 깊이 들어가는 않아요.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인물의 추악한 면까지 들추어내는 것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151

작가로서 투르게네프의 대표작은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그의 작품 중 당대의 독자나 문단으로부터 가장 격찬을 받은 작품은 <사냥꾼의 수기>지만, 가장 논란이 됐던 작품은 단연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1862년작인데 바자로프라는 니힐리스트를 다루어 화제가 된 소설이기도 합니다. 투르게네프가 니힐리즘이나 니힐리스트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을 대중적으로 유행시킨 당사자입니다. 그러니까 니힐리즘의 철학자 니체와 함께 니힐리즘이라는 말에 상당한 지분을 갖는 두 사람 중 한 명인 셈이죠.  152

러시아 문학에서 말은 대개 여성을 상징하죠.  157

1840년대를 주름작았던 철학자가 바로 헤겔입니다. 러시아 문학에서는 헤겔이나 셸링 같은 독일 철학자들이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치는데, 평론가 벨린스키가 대표적 헤겔주의자였어요. 벨린스키가 강조했던 것 중 하나는 리얼리즘이고 나머지 하나는 민중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낭만주의의 대표적 장르인 서정시의 시대는 끝났고, 리얼리즘 산문소설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거죠. 그리고 벨린스키는 누구를 위한 문학인가, 즉 귀족계급(지배계급)을 위한 문학인가, 아니면 억압받는 민중을 위한 문학인가라느 물음을 제기하면서 민중을 위한 문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벨린스키의 이 두 가지 명제를 자기의 문학에 전적으로 수용한 작가가 바로 투르게네프입니다. 리얼리즘에 입각한 산문소설을 썼고, 민중성을 구현하고자 합니다. 물론 민중이 주인공이 돼야 한다는 건 아니었지만 러시아 사회의 전체적인 변혁을 위해서 중간계급에 해당하는 지식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그 전망을 모색해보려고 했어요.  168-169

파벨이 "그런데 도대체 바자로프는 뭐 하는 사람이냐?" 하고 바자로프에 대해 묻자 아르카디가 "그는 니힐리스트예요" 하고 대답합니다. "뭐라고?" 그는 니힐리스트입니다." 아르카디가 재차 얘기합니다. 그러자 니콜라이가 "니힐리스트라고? 내가 알기로 그건 라틴어 '니힐(nihil)', 즉 '무(無)'에서 나온 말인데, 그러면 그 단어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 아니냐?" 하고 묻자 이번엔 파벨이 "아무것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해"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르키다가 "모든 것을 비판적 관점에서 보는 사람입니다"하고 말하죠. 그러니까 세 사람의 입을 통해 니힐리스트에 대한 세 가지 정의가 나온 셈입니다.
니힐리스트라는 말이 당시에는 아주 생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등장한 뒤로 유행어가 되었죠. 1860년대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 그러니까 젊은 지식인들은 스스로 니힐리스트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투르게네프가 이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이들을 니힐리스트라고 부른셈이죠. 그런데 이 말이 보통 허무주의자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좀 어폐가 있습니다. 원래 니힐리스트는 상당히 과격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위를 부정하죠. 그러니까 여기서의 부정은 파괴적인 부정을 뜻합니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의미와 허무주의는 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19세기 후반 니힐리스트라는 말은 테러리스트와 거의 동의어 였습니다.  170

한국인의 사고방식 가장 밑바탕에 흐르는 게 바로 허무주의거든요. '인생 뭐 있어'주의랄까요. 먹는 게 남는 거야, 다 먹자고 하는 거지 하는 식이죠. 정치적으로 진보니 보수니 하지만 대개는 다 껍데기라고 생각해요. 그냥 자기 지방 사람이 나오면 찍잖아요. 그기ㅔ 허무주의예요. 정치적 허무주의죠. 그런데 서구 사람들이게는 그런 세계관 자체가 충격적입니다. 다위니즘이 던진 충격이죠. 그냥 생명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 투르게네프에게서도 그런 세계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뭔가 세상을 바꿔보려는 모든 인간적인 노력,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노력이 있지만 결국엔 다 패배하고 말잖아요. 한 개체로서의 삶은 유한한 운명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집니다. 그게 투르게네프의 비관적 염세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투르게네프가 최선을 다해서 그리고자 했던 것은 그와 같은 근본적 허무주의 앞에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 것, 그 정도가 최대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183

 

 

6강 러시아적 수난과 구원의 변증법 -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읽기

도스토예프스키는 워낙 유명한 작가이고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 문학의 간판스타죠.
러시아 문학은 두 작가에 의해서 양분될 수 있습니다. 더 확장하면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의 세계를 두 작가가 양분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은 비극, 톨스토이 소설은 서사시에 견주기도 합니다. ..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시간이 대단히 압축돼 있다는 것입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방대한 분량임에도 주요 사건은 3일 동안 벌어진 것입니다. <죄와 벌<은 일주일 정도고요.  186

루카치의 유명한 소설 이론서인 <소설의 이론>이 사실은 도스토예프스키론의 서론 격으로 쓰인 것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근대 소설사 전체에 대한 개관이 필요하다는 판단인 거죠. 그래서 서론을 썼는데, 그 이후에 본격적인 도스토예프스키 이론은 쓰지 못했어요.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새로운 세계의 비전을 보고자 했는데,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루카치는 현실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현실에서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굳이 문학을 통해 우회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책의 마지막 대목에서 루카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단 한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다른 세계에 속한다"고 썼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려면 먼저 루카치가 소설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는 소설에서 '본질은 시간과 함께 주어진다'고 규정합니다. 세계의 본질을 시간 속에서 파악한다는 얘기입니다. 서사시는 무 시간적 세계인 것과 달리 소설은 철저하게 시간적 세계입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는 시간이 별 의미가 없어요. 톨스토이는 서사시적 스케일을 갖고 있다고 했는데, 루카치가 말한 근대 소설의 정식에 잘 맞습니다. <전쟁과 평화>에서도 주인공 나타샤가 소녀에서 아이 엄마가 되기까지의 시간을 다루면서 그 안에서 인물들이 변화하고 성숙해가는 과정을 보녀여주니까요.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는 시간이 변수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세계'라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런가 하면 나보코프는 상반된 평가를 내리면서 도스토예프스키를 이류나 삼류 작가로 깎아내렸습니다. 어설프게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설교적 문학을 그는 혐오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자신이 부인하면서도 그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188

도스토예프스키는 출신으로 보면 잡계급입니다. 아버지가 빈민 구제 병원의 의사였어요.
도스토예프스킹게 돈은 평생의 화두였죠. 작춤에서도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에 태어났는데, 성장기에 특기할 만한 것은 10대 후반, 그러니까 1839년에 아버지가 농노들한테 맞아 살해된 일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지병인 간질인데, 언제 처음 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191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의 인물들은 감정 기복이 아주 심한데, 알고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삶 자체가 그랬습니다. 그의 생애를 고려하면 그런 인물들이 크게 이상하거나 작위적으로 비치지 않습니다. 자기가 겪은 감정을 그대로 묘사한 거니까요.  195

1867년, 도스토예프스키가 안나와 결혼했을 때 장장 4년 동안 신혼여행을 떠납니다. 결혼하고 나서 안나가 생각해보니 이렇게 돈에 쪼들려서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싶은 거예요. 바로 짐을 싸서는 남편과 함께 유럽으로 떠납니다. 빚쟁이들 때무에 러시아로 돌아올 수도 없었죠.  202

<죄와 벌>은 1866년 작품입니다.  205

서구에서는 철학을 자기주장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느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주장하는 내요은 시시해도 상관없습니다. 중세 때 바늘 끝에 천사가 몇이나 올라앉을까, 이런 걸로 논쟁하기도 했다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실없는 논쟁이지만 당시에는 진지했어요. 현대 영미권의 분석철학에서도 주제 자체는 사소해보이더라도 어려운 개념들을 동원해서 아주 정밀하게 논증해나갑니다. 왜냐하면 이 과정이 철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시시한 문제를 다루면 철학이 아닙니다.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게 철학입니다. 방법은 반드시 논증이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다룰 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소설가는 언어로, 화가는 그림으로, 작곡가는 음악으로, 영화감독은 영상으로 철학을 할 수 가 있어요. 인간에게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게 바로 철학입니다. 얼마나 논리적으로 엄격하게 입증하느냐는 오히려 부차적입니다. 철학의 개념이나 이미지가 다른 것이죠.  207

러시아 소설에서 가끔 미국 간다는 얘기가 나오는 데, 보통 다 자살합니다.  212

'카라마조프'는 러시아어로 '악에 문드러진'이라는 듯입니다. 그러니 악에 문드러진 집안 이야기입니다.  217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면 전체를 n분의 1로 나눠 가지는 것이냐? 그건 아닙니다. 그건 서구식입니다. 우리는 모두에게 책임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책임이 크다는 게 도스토예프스키식이고 러시아식입니다.  230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러시아인이 되어야 한다고도 말했습니다. 그에겐 지름길이란 없었던 것이죠.  231

 

 

7장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읽기

톨스토이는 러시아를 넘어서 세계적인 대문호로 평가받는 거장이기도 합니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통스토이는 1828년 야스나야 폴라냐의 톨스토이 백작 가문의 4남으로 태어난 걸로 돼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유년과 관련해서 중요한 대목은 일찍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의었다는 겁니다. 어머니는 183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작가가 두 살 때 그러니까 우리 나이로는 세 살 때고, 아버지는 아홉 살 때 세상을 떠납니다. 말하자면 고아인 셈인데 이 때문에 성장기 대부분을 친척 집을 전전하면서 지내게 됩니다. 어머니의 부재가 톨스토이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커서 단지 불우한 어린 시절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의 여성상과 그의 문학에 나타나는 여성상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됩니다. 
1844년 카잔대학교 동양어학부에 들어가는데 이곳에서 톨스토이는 여러 언어를 배우게 됩니다. 거의 10개 국어를 익혔다는군요.  234-235

1852년 잡지 <동시대인>에 [유년시절]을 발표하면서 작가로 데뷔합니다. 이 작품은 톨스토이의 데뷔작이기 때문에 중요하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유년시절]에서 톨스토이는 자신이 작가로서 평생 다루게 될 두 가지 주제의 실마리를 보여주는데, 하난는 '죽음'이고, 하나는 '예술'입니다. 죽음은 주인공이 아홉 살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그려 보이죠. 그때의 낯섦, 공포, 슬픔 등을 그 나이의 시선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죽음 문제는 성 문제만큼이나 톨스토이를 평생 따라다니는 주제입니다. 예술 문제는 주인공이 시를 한 편 쓰는데, 운율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솔직한 감정과는 거리가 먼 거짓된 표현을 집어넣게 됩니다. 그런데 외할머니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에게 친찬을 받죠. 거짓과 기만이 칭찬받는 예술작품을 만든다는 것, 나중에 톨스토이의 예술론으로 이어지는 테마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죽음과 예술 이 두 가지 주제가 데뷔작에 이미 나타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36

젊은 시절엔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결혼도 늦게 하죠. 34세 때인 1862년, 18세의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합니다. 두 사람의 불화는 워낙 유명해서 관련 책도 많이 나왔을 정도입니다. 특이한 것은 두 사람이 평새에 걸쳐 일기를 썼다는 사실입니다. 톨스토이는 이십대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60년 동안 일기를 썼습니다. 아내 소피야도 일기를 썼죠. 처음에는 상대방이 보라는 의미에서 쓰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오해가 해소되지 않으니까 나중에는 후대 사람들이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자료를 남긴다는 차원에서 썼다고 합니다. ..
시비를 건 쪽은 톨스토이인데 자신이 청년 시절에 썼던 일기를 결혼하자마자 아내에게 읽으라고 보여줬답니다. 보통은 다 태워버리고 깔끔하게 정리하는데, 톨스토이는 아내에게 자신의 치부까지 다 보여줘야 과거 생활이 정화된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톨스토이가 가장 싫어했던게 거짓과 기만이었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적 행위라는 것이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이라기보다 자신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볼 때, 아무리 부부간이라 해도 지나친 셈이었죠. 현실은 보통 어느 정도의 기만과 가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237-238

톨스토이는 특히 여성 심리의 대가입니다.
토스토예프스키는 여성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
열네 살에 처음 성경험을 갖는데 그때 느꼈던 것까지 빠짐없이 적어놓았어요. 소피야와 결혼하기 전에는 마을의 젊은 아낙과 육체적 관계에 빠지기도 했죠. 지주였던 톨스토이는 경제적으로 보상을 해주면서 뉴부녀인 그 아낙과 계속 관계를 한 것입니다. 매번 자기비판을 하면서도 그런 관계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결혼하게 된 계기도 빨리 그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소피야가 갓 결혼해서 남편이 보여주는 일기를 보니 집에서 일하는 여지안 악시냐의 이름이 자주 나오는 거예요. 몸집이 뚱뚱한 악시냐가 바로 톨스토이와 관계를 한 아낙이었으니 소피야가 경악할 수밖에 없었겠죠.
부부 모두 결혼생활이 끔찍했다고 술회했지만, 자녀를 모두 13명이나 낳았습니다. 1862년에 결혼해서 1863년 첫아이를 낳고, 열세 번째 이반을 1888년에 낳았어요. 1888년이면 부부 사이가 아주 안 좋았을때인데 그 이휴에도 부부관계는 계속된 걸로 돼 있습니다.  239

크게 다툰 톨스토이는 1910년 10월 28일 가출해서 11월 7일 객사합니다. ..
톨스토이는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일기에 '나는 구제불능이다'라고 써놓기도 했죠. 그래서 결혼도 일부러 늦게 한 면이 있습니다. 청년 시절 숱한 여성편력을 경험햇으면서도 쉽게 결혼하지 못한 것은 누구든 자기와 결혼하고자 하는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거나 존경해서가 아니라, 자기 지위나 재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외모를 보고는 자신을 사랑해줄 여자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런 콤플렉스는 결혼하고 나서도 없어지지 않아 아내 소피야와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내가 자기를 사랑해줄 거라고 믿지 못한 것이죠.  240-241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구상한 것은 1825년 12월의 데카브리스트 봉기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톨스토이의 조상 중에 봉기에 직접 참여한 인사도 있었기에 톨스토이는 데카브리스트의 역사에 대해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데카브리스트 봉기는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로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데카브리스트 봉기에 대해 쓰려면 1812년 전쟁에 대해 먼저 써야 했던 것이죠. 그래서 쓴 게 <전쟁과 평화>인데 워낙 방대하다 보니 정작 데카브리스트 봉기에 대해서는 쓰지 못했어요. <전쟁과 평화>는 1805년 부터 1820년경까지 15ㅕㄴ 정도를 다룬 대하소설입니다.
<전쟁과 평화>는 러시아라는 국가의 정체성, 통일성을 모색한 작품으로서 의의가 있습니다. 한 나라의 정체성은 자발적으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외부의 자극이나 충격이 있어야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거죠. 사춘기가 보통 그렇잖아요. 자기 정체성이 형성되는 기간으로, 비로소 남과 자신을 분리하고 자아 개념이 확고해지죠. 남과 자신을 분리하려면 당연히 타인의 자극이 있어야 해요. 마찬가지로 한 나라의 정체성 또한 외부의 어떤 충격 때문에 생겨나는데, 러시아의 경우 1812년 전쟁이 그런 자극과 충격을 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나폴레옹 군대와의 전쟁이 바로 타자 역할을 한 셈이죠. 그런 타자에 대한 반응으로 러시아란 무엇인가에 관심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전쟁 이후 러시아의 역사가 처음 쓰입니다.  242-243

톨스토이는 타자보다 '나'의 세계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평생 니힐리즘과 대결했다면, 톨스토이는 에고이즘과 싸웠다고 생각되는데, 톨스토이의 경우 데뷔작부터가 자전 3부작이죠. 자기 이야기였던 셈입니다. 이게 확장되면 러시아라는 나라의 정체성과 통일성의 문제가 됩니다.  244

자신의 욕망과 도덕률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또한 톨스토이가 관심을 가졌던 문제입니다.  244

<안나 카레니나>는 .. 완결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까지 레빈이 품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물음, 즉 죽음에 직면해서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삶의 신비나 의미에 대한 물음이 답변을 얻지 못하고 열린 채 남아 있게 되죠. 톨스토이는 이 작품 이후에 모든 예술로서의 소설을 부정하고 포기 하게 됩니다...
보통은 <안나 카레니나>출간을 기점으로, 즉 1878년을 기점으로 톨스토이를 전기와 후기로 나눕니다. 소설가 톨스토이와 그 이후의 사상가 또는 설교가로서 톨스토이를 대비하죠.  246

미학적 장치라는 것은 우회로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미가 세상을 구원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소설가로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미를 우회로로 생각한 것이죠. 반면 후기 톨스토이는 미를 기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으로 가는 지금길이 있다고 여긴 겁니다. 그래서 뒤로 갈수록 소설이 짧아져요. 도덕적 교훈을 위해서는 방대한 소설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간단하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바보 이방 이야기> 등을 쓰게 됩니다. 그냥 그렇게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면 되지 공연히 복잡하게 사유하거나 우회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겁니다.  247-248

<부활>은 1899년 당국의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교도들이 캐나다로 이주할 수 있도록 비용을 대주기 위해서 쓴 소설입니다.  248

신에 대한 인간의 관념은 세 가지가 가능합니다. 인간에 대해서 신이 밖에 있는 경우, 즉 절대적 타자로서의 신입니다. 유대교의 신을 보통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와 달리 기독교의 신은 좀 특이합니다.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는 신, 그리스도가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이었죠. 그런가 하면 내안에 신성이 내재하는 것, 즉 범신론적 신이고 불교적 신입니다. 저마다 부처인 거죠. 자기 안에서 신을 발견하는 겁니다. 톨스토이의 신과은 세번째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동양사상에 매우 친화적입니다.
후기 톨스토이는 비폭력 무저항주의 사상의원조라 할 수 있습니다. 간디나 헨리 소로보다 톨스토이가 ㅁ너저 이른바 톨스토이즘이라고 불리는 비폭력 무저항주의 사상을 내세우죠. 후기 톨스토이는 국가 폭력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국가조차 부정합니다. 대단히 과격한 사상이죠. 이런 부분이 한국에서는 제대로 수용되지 않고 오직 종교적 사상가로만 읽옇는데, 일면적 수용이라고 해야겠습니다.  249

카레닌과의 결혼생활이 그녀에겐 '살이 있는 삶(불륜)'이 아니라 '죽어 있는 삶(결혼)'이었던 것이죠. 삶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라면 따로 고민할 필요가 없겟지만 브론스키와 만난 이후에 안나에게 가로놓인 건 '도덕적이지만 죽어 있는 삶(결혼)'과 '부도덕하지만 살아 있는 삶(불륜)' 사이의 양자택일입니다. 톨스토이는 두 사람이 처음 성관계를 갖는 것을 살인자와 시체의 관계에 비유함으로써 그 부도덕함을 드러내죠. 안나는 자기가 너무 큰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며 울고 있고, 브론스키는 살인자가 된 기분으로 서 있어요.  264

안나의 경우처럼 욕망이 우리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면,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요? 톨스토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육체노동입니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육체노도이고 또 하나는 육식을 자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톨스토이의 생각으로, 그래야 육체적 욕망을 제어할 수 있어요. 적게 먹고 노동으로 열량을 소비하면 그만큼 욕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 거죠.  266

톨스토이는 동양의 우화를 예로 드는데, 나그네가 맹수에 쫓겨 우물에 빠집니다. 빠지는 순간 나무뿌리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데, 밑을 보니까 용이 입을 쫙 벌리고 있어요. 밖에서는 맹수가 으르렁거리고 그러니까 밖으로 나가도 죽고 매달려 있다가 힘이 빠져 떨어져도 죽는 겁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인데 관목 가지에 벌집이 있어서 꿀이 흘러내려요. 나그네는 그 꿀을 핥으며 잠시 도취돼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게 삶이라고 생각했어요. 여기서 진리는 죽음입니다. 필연적 죽음. 그런데 자기의 이런 현실을 곧 삶의 진리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망각하고 기만하는 겁니다. 그렇게 기만하게끔 만드는  꿀에 해당하는 게 가정과 예술입니다. 후기 톨스토이는 그래서 가정을 부정하고 예술도 부정합니다.  267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결론적으로 톨스토이가 안나의 죽음을 통해 육체적 열정과 제도적 결혼은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점입니다. ..
결혼 제도가 열정을 막을 수 없다면 곧 결혼 제도 안에서는 이 열정 문제가 해소될 수 없다면 비극적인 파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게 톨스토이의 결론입니다.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 좋은 결혼과 나쁜 겨혼이 있다는 게 <안나 카레니나>의 서두였지만, 결말은 그런 가능성이ㅔ 대한 회의로 마무리됩니다.  268-269

 

 

8강 코믹과 우수의 작가 - 체호프의 <갈매기>읽기

안톤 체호프는 세계적인 단편 작가이면서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로 평가받는 극작가이기도 합니다. 러시아 문학사에서는 푸슈킨에서 시작한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마감하는 작가이기도 하죠.  272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는 1860년 카간로그라는 지방 항구도시에서 태어납니다.
체호프 가계도 농노였다가 장사로 성공하게 되죠. 하지만 철로가 개통되면서 아버지가 운영하던 잡화상이 장사가 안 되기 시작해 결국 파산하자 김나지움에 다니던 체호프만 남ㄱ두고 가족은 모두 모스크바로 이주합니다. 그 후 5년 동안 체호프는 혼자 학비를 벌어가며 우리 식으로 말하면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죠.
어린 시절 체호프는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많이 맞음 자랐다고 합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것으로 알았단가 대학에 가서야 자신이 특별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걸 깨닫게 되죠.
다정다감하고 관대한 성격이었답니다. 용모에서도 그런 인상을 풍기죠.
공부를 열심히 한 데다 잘하기도 해서 모스크바대학 의학부에 입학합니다. 그러면서 가족과 다시 합류하게 되는데 합류해서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어요. 학비 뿐만 아니라 생활비도 벌어야 했죠. 그래서 쓰기 시작한 게 콩트입니다. 신문과 잡지에 아주 짧은, 한두 페이지짜리 콩트를 쓰기 시작합니다 짤막한 작품들이 다 코믹하면서도 뭔가 여운을 남깁니다. 이 시기에만 400여 편 이상의 작품을 썼답니다.  274

이력 중 특이한 것은 1890년 그의 나이 30세 때 사할린 섬으로 여행을 간 겁니다. 1880년에 데뷔해서 딱 10년 동안 작가로 활동한 다음이었죠. 1886년에 첫 작품집을 낸 뒤 문학상도 받고 작가로 인기도 얻었을 뿐 아니라 지명도도 있었는데 난데 없이 사할린으로 가겟다고 지인들에게 얘기하곤 훌쩍 떠났습니다. 당시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개설되기 전이어서 할린으로 가려면 육로로 마차를 타고 가야 했거든요. 가는 데만 6개월이 걸립니다. 3개월 정도 체류하고 돌아올 때는 배를 타고 와서 한 달 정도 걸렸고요. 아무튼 1년을 꼬박 사할린 여행에 바치게 됩니다. 남들은 유배형을 받고 가는 곳을 굳이 고생을 사서 하면서까지 다녀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체호프는 뭔가 전환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10년 동안 유머 단편을 쓰다 보니 작가로서 매너리즘에 빠진 겁니다. 더는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고 그저 판에 박힌 작품들만 쓰는 것 같다 보니 작가로서 위기의식을 느꼈을 법합니다. 그래서 러시아를 더 알아야겠다고 판단하고 결행한것이 바로 사할린 섬 여행이었건 거죠.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사할린까지 가서 그가 한 작업이 면전 카드를 만드는 것이었어요. 3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만든 면접 카드가 8,000장이라니까 거의 하루에 100여 장씩 만든셈입니다. 그만큼의 사람들을 만났다는 얘기예요. 그렇게 석 달 동안 사람을 만나 면접 카드를 만드는 ㅇ리만 하고 돌아왔어요. 여행이 목적이 아니었던 거죠. 그러고는 <시베리아 여행>이란 기행문과  <사할린 섬>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하게 됩니다.  275-276

문학사가들은 사할린 여행으로 사회적 현실에 대한 체호프의 관심이 더 넓어지고 깊어진 것으로 평가합니다. 사할린 여행 이후에 쓴 작품 중에 대표작이 [6호실]이라는 단편인데, 체호프 작품을 읽어보신 분들은 특이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을겁니다. 분량도 길고, 아주 어둡습니다. 말하자면 체호프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섞어놓은 것 같은 작품이랄까요. 체호프에게는 드문 경우인데 사할린 섬 여행의 영향으로 이해됩니다.  277-278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처럼 핵심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대신 곱씹어서 음미해가며 읽어야 하는 게 바로 체호프의 작품입니다.  286

<갈매기>는 간단한 구도로 보자면 트레플료프 형과 니나 형 인물의 대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301

유한한 삶 속에서 순간순간이라도 제 목소리와 빛을 뽐내는 사소한 즐거움이 있는 것이고, 작가 체호프는 이러한 즐거움의 권리는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불행한 경험에 유폐되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삶에 대한 의지로 승화시키는 니나 같은 여주인공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게 아닐까요.  303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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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처음 이 단상집의 제목으로 생각한 것은 <섹스 뒤의 명상>이었다. 그때의 '섹스 뒤'는 'after sex'가 아니라 'beyond sex'였다. 그러니까 '섹스를 넘어서 버린 상태에서의 사랑에 대한 명상'인 셈이었다.
여기 수록된 단상들은 섹스에 강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유치한 사랑론과 섹스에 사로잡혀 그곳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음담패설적인 사랑론을 경멸하기 위해 씌어진 것들이다.

 

 

 


남녀 사이에 서로 사랑하는 눈치를 보이는 것을 눈맞춘다고 한다. 사랑은 눈에서 시작된다. 눈맞춤은 모든 사랑의 정지(整地 가지런할정 땅지) 작업이다. - 고종석,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중에서


사랑은 이러이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이러하지 않은 것은 사랑이 아니다, 라는 식으로 사랑을 규정하려드는 단세포적인 사람들을 나는 많이 보아왔다. ..
사랑이 어디 혼자 하는 것인가? 섹스가 어디 혼자 하는 것인가? 그대가 했던 사랑이 모두 똑같은 사랑이었던가? 그대는 상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판에 똑같은 섹스를 했던가?  37

21세 때 내가 생각했던 섹스는 현실과 유리된, 어둠 속에서만 할 수 있는 어떤 신성한 것이었다. 나는감히 밝은 빛 아래에서 여자의 속살을 볼 수없었다. 그것은 거부된 지식(denied knowledge)이었다. 요컨대 섹스의 순간은 일상적인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0세가 된 나는 불을 켜고 마음껏 여인의 알몸을 시각적으로 소유한다. 섹스도중 전화가 와도, 절정의 순간이 아닐 경우 거의 대부분은 받는다.(혹은 받으라고 한다) 그리고 전화통화를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서로의 알몸을 애무한다. 내 나이 어디쯤에선가(혹은 어느 여자부터인가)성이 일상으로 편입해 들어온 것이다. 그 옛나르이 신성했던 성이 무의미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지금의, 일상에 편입된 성이 천박하고 동물적이라고 말하지도 않겠다.
신성했던 섹스는 신성했던 섹스대로 나에게 뭔가를 깨우쳐주었고, 일상에 편입된 현재의 섹스 역시 나름대로 나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고 있다.
이제 내 나이 마흔, 나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다른 차원의 만남이 가능하리라는 것을 안다.  39-40

천형(天形 하늘천 형상형)
미안하다. 내 사랑으로는 당신의 상처를 다 품을 수가 없다. 이만큼이 내 사랑의 한계인 것 같다.
내 마음은 당시느이 상처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져주고 싶은데, 내 손은 오히려 당신의 상처를 함부로 찔러대고 있다.
... 여긴 너무 힘든 곳이다.
우리 아예 사랑하지 말까? 상처 같은 건 못 느끼고 그냥 수비게 한세상 살아버릴까? 어차피 밥 먹고 섹스하고 아이 낳아 기르는 건 똑같을 텐데... 그래버릴까?
내 부주의한 손길에 상처입고 비명을 지르며 돌아누운 당신.
전엔 몰랐었다. 이따위 세상, 그냥 바람처럼 지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영혼이지만, 몇십 년 정도는 웃으며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등은 가슴 저미도록 어여쁘기만 하다.
미안하다.
그래, 미안하다. 다시 당신의 상처를 건드리게 된다 할지라도, 그리하여 당신의 상처가 덧나게 된다 할지라도, 다시 당신의 전부를 안고 싶은 것이다.
내 만신창이 된 영혼으로, 어금니 악물고.  44-45

 

 

 

결혼을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항상 되풀이되는 토론의 변함없는 주제였다. 즉 결혼은 개별 존재가 그를 통해 모든 사람들엑 대하여 가치를 지니게 되는 의무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 미셸 푸코, <성의 역사>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해진 길을 간다. 그들은 세계와 자신의 역학 관계를 따져 계획을 세우고, 크든 작든 그 계획의 범주 안에서 무리없이 살아간다. 때때로 모험을 한다고 해도 그 범주 안에서의 모험이다. 그들은 결혼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은 겨혼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낭만주의자들은 어제 계획을 세우고 오늘 그것을 부순다. 도무지 내일을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해와 달이 서로를 마주볼 수 없는것처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헛된 것에 매달려 정열을 소모해 버린다. 이를테면 그들은 자기 생을 방목하는 유목민들이다.  51

인간은 오랜 원시 난혼생활을 하다가 '질투'와 '사유재산'이 발생하여 가족끼리만 성관계를 하는 혈연가족을 형성했다가, 일정한 가족권 내에서 남편과 아내를 공동소유하는 푸날루아(punalua) 가족을 거치고 일부다처제 비슷한 대우혼 가족을 거쳐, 마침내 일부일처 결혼이라는 사회제도를 만들어냈다. ..
공적인 장소에서 사람들은 곧잘 '사랑 없는 결혼이 어디 있는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세상에는 사랑 없는 결혼이 더욱 많다. 그리고 '사랑 있는' 이라는 것도 사랑한다고 믿는 한순간의 착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들은 필요에 의해서,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게 사람 구실을 하는 것 같아서... 등등 매우 건조하고 합리적인 이유로 결혼을 한다.
사랑이 아무리 많아도 조건이 안 맏으면 결혼하지 못한다. 결혼은 사랑의 결합이 아니라 조건과 조건과의 만남, 가족과 가족과의 만남, 즉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정략결혼이고 매춘인 것이다.  52-53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륜을 "맹렬히" 비난한다. 그들은 간음한 자들에게 돌을 던지며 이렇게 외친다.
"나는 너무나도 불행하다. 나는 주어진 운명 때문에 불륜조차 저지르지 못했다. 그런데 저 연놈은 자기들끼리만 몰래 재미를 보지 않았는가!"  60

불건전한 섹스
많은 충돌 끝에 본인이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고 배우자 역시 본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확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어떤 사람들은 과감히 이혼을 하고, 이미 아이가 생겨버린 어떤 사람들은 (오늘의 한국문화의 한계를 절감하며) '미운 정'으로 꾸역꾸역 결혼생활을 유지한다.
그런데 배우자와의 불화를 해결할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이혼 같은 것은 아예 꿈도 꾸지 않으면서, 요컨대 결혼제도가 주는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바람'을 피우겠다고 작정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있기도 한데.. 그들의 사랑은, 그들의 섹스는, 명백히 불건전하다.  61

가정의 붕괴
가정을 파괴하지만 않는다면 불륜은 그다지 지탄받을 이유가 없다. 예고 없이 외박을 하거나 외간남자의 아이를 낳겠다고만 하지 않으면 - 결혼제도 속의 아내몫은 다한 셈이다.
불륜 자체를 정당화하자는 말이 아니다. 부부간에 사랑이 있다면 그런 짓을 하라고 해도 못한다. 나는 지금 사랑 없이 지속되고 있는 결혼, 즉 제도로서의 결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가정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랑 없는 가정, 누군가의 목을 조임으로써 간신히 지탱되는 가정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런 가정일지라도 해체되어선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낡은 가족관에 사로잡힌 자이거나 현재 그런 가족관을 통해 이익을 보는 자일 것이다.
아이들이 받는 정신적 충격? 그것 역시 낡은 가족관의 산물이다.
결혼은 한 번의 약속을 영원히 지속시키기 위한 구속장치일 뿐이다. 사랑과 믿음으로 출발한 결혼이라면 아무리 간통죄를 없앤다 해도 두려워하지 앟을 것이며, 그리고 그러할 때, 내 배우자라 할지라도 언제든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죽음이 갈라놓기 전까지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62-63

자존심
남편의 정부가 자기보다 못난 여자일 때 흔히 아내는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는다. 아니, 뭐가 부족해서 저렇게 못난 여자와 몰래 바람까지 피웠지? 내가 저 여자보다도 못났단 말인가?
남편의 정부가 유명한 여자(혹은 누구나 인정하는 미인)일 경우 아내의 자존심은 그나마 약간 회복된다. 이 경우는 아마 '잘난 남자 간수하기 힘들어' 하고 투덜거리며 남편의 마음이 돌아오길 기다릴 뿐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아내가 바람을 피울 때의 남편의 입장은 약간 다르다. 남편은 자기 아내가 어떤 남자와 바람을 피우든 자존심이 뭉개지는 경험을 한다. 그녀가 자기보다 못난 남자와 바람을 피우든 아니면 훨씬 멋진 남자와 바람을 피우든 말이다.
다르게 나타나는 자존심의 양상은 결혼제도 속의 남녀의 위치 차이에서 온다.(남자는 언제든 가정으로 돌아올 생각으로 '가볍게' 바람을 피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억압적 위치에 있는 여자는 이것저것 다 따져보고는 '끝장'이라는 각오로 바람을 피운다.)  64

 


성(sex)은 은밀한 것으로, 감추면 감출수록 거기서 먼저 타락의 악취가 풍겨 나오게 마련이다. 성(sex)에 대한 금기와 사회적 억압은 사람들의 감정을 갉아먹고 점점 더 변태와 타락의 미궁으로 몰고 간다. - 현실문화연소4 <신세대:네 멋대로 살아라> 중에서


재산의 적자 상속을 목적으로 출발한,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이 일부일처제에 대하여 나는 아무런 사견도 붙일 생각이 없다. 그러나 편한 상태로 배우자를 찾기 힘든 사회구조 속에서의 일부일처제에는 분명히 어떤 빈틈이 있으며('자유롭게 만나 사랑하고 결혼한다'는 연애 결혼의 신화는 그야말로 신화에 불과하다), 그 빈틈을 간통과 매춘이 메우고 있다는 공공연한 사실 정도는 '역사적 사례'로 제시할 수 있겠다. 간통과 매춘마저 할 능력이 없는 자들이 하는 게 강간이다.
강간을 옹호하거나 단순 폭력으로 그 수위를 내려 변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단지 나는 강간 피해자가 '단지 강간을 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인생을 포기해야만 하는 그런 야만적인 사회에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 할 뿐이다.
여자의 자궁은 여자의 것이다.  81-82

잘못된 것은 제도이지 사랑이 아니다. 섹스가 아니다. 쌍방 합의(흔히 '사랑'이라고 표현한다)에 의한 욕망의 교환은 지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자 즐거움이다. 아니, 이런 닫힌 언어로 규정해 버리는 게 억울하기조차 한 그 어떤 신비다. 섹스를 불결하다고 말하는 자들이나 섹스를 음담패설의 소재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 신비를 경험하지 못한 자들일 확률이 매우 높고, 그것은 결코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일이 못 된다.
육체적 접촉을 무시한 사랑은 육체만을 탐하는 사랑만큼이나 비정상적인 것이다.  83

 


사라하는 것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서로 어려운 관계에 놓여 있다. 사랑에 빠진 것 안에는 사랑한다는 것이 들어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무섭도록 사랑을 소유하고 싶어하지만, 또한 능동적으로 사랑을 줄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중에서


예쁜 여자가 섹스도 잘한다.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은 대체적으로 인물은 포기했다면서 몸 관리도 별로 하지 않는다. 평소 배설기관으로밖에 취급되지 못하는 그녀들의 질(vagina) 역시 청결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그녀들도 섹스는 할 줄 안다.
그녀들은 처음엔 안 된다고 남자의 진을 빼다가도, 섹스가 끝나고 나면 이젠 아무것도 감출 필요 없다는 듯이 그대로 널브러지기 일쑤다. 샤워도 하지 않고, 분비물을 닦아낸 휴지조차 제 손으로 치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꼭 샤워를 해야만 하고, 휴지를 여자가 치워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네가 원해서" '그 힘든' 섹스를 했으니까 너는 다 봐줘야 한다는 식인데... 아마 그녀는 섹스에 관한 또 하나의 나쁜 기억을 보태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녀의 섹스를 더욱 더 '힘든' 것으로 만들 것이다.
한번 섹스를 했다고 여자를 자신의 예속물처럼 생각하는 남즈들 역시 여자를 황당하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못 보일 꼴을 함부로 내보인다. 둘 다 섹스를 무슨 계약 취급한 결과다. 인간이라면 똥우줌 정도는 가려가면서 사랑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고집 피운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자신이 예쁘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일단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남자의 진을 빼지 않는다. 섹스 후에도 여전히 예쁘다. 금장 정숙한 여인의 표정으로 돌아와 몸을 적당히 가릴(혹은 노출시킬)줄 알고, 뒷물도 할 줄 알고, 그러면서도 팔 베개를 해달라고 요구할 줄도 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비록 수줍어할지라도 필요 이상으로 움츠러들거나 오버하지 않는다.
물론 '예쁜 여자가 섹스도 잘한다'는 말은 '잘난 남자가 섹스도 잘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118-119

'오 마리아!
어린 아이에게 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세요.
그리고 꽃에세 왜 꽃을 피우느냐고 물어보고,
태양에세 왜 빛나느냐고 물어보세요.' - 막스 뮐러
당신은 여자를 사랑할 때 '어디가 못났기 때문에', '어떤 점이 부족하기 때문에' 등등의 이유를 들어 사랑한다. 당신은 옳다. 그러나 여자들은 당신의 떠나간다. 당신은 실수했다. 왜 절 사랑하세요? 라는 여자들의 물음에 당신은 솔직하게 응답했다. 여자들은 당신에게서 '어디가 못났다', '어떤 점이 부족하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자는 단점을 지적당하는 일에 약하다. 속보이는 칭찬에도 행복해져서 제 가진 것 모두 주고 싶어하는 게 여자라는 존재다('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우리 속담은 여기서 나왔다). 단점을 지적하지 말라. 칭찬할 때는 칭찬만 해라. 칭찬 끝에 작은 단점 하나만 언급해도 앞에서 칭찬한 장점들이 전부 무효가 된다.  129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온 세상을 비춰주는 스크린이다. 왜냐하면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세상의 복잡성에서 벗어나 뜻밖의 존재의 가능성, 즉 존재의 근본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 조르쥬 바따이유 <에로티즘>중에서

"나는 어떤 타입도 아닙니다.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나는 성능 나쁜 로봇처럼 '나는 연애를 이런 식으로밖에 하지 못한다'라고 제한하고 싶지 않습니다. 만나는 상대마다 다른 형태의 연애가 나옵니다. .. 나는 상대에 따라 손잡고 걸을 수도 있고, 팔짱을 끼고 걸을 수도 있고, 혹은 각자 주머니에 손 넣고 걸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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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


두 가지의 삶이 있다. 첫 번재는 세계에 나를 맞추는 삶이다. 세상의 질서를 존중하고,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인생이다. 두 번째는 세계를 나에게 맞추는 삶이다. 세상의 질서와 시스템에 저항하고, 주어진 환경을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인생이다.  4


나를 바꿀 것인가, 세계를 바꿀 것인가는 근원적인 대립니다. .. 사회는 개인을 유혹한다. 넓은 사회의 품에 안겨 쉬라고, 반대로 개인은 극복하고 싶다. 사회를 딛고 일어서려 한다. ..

시민은 그 단어 안에서 두 가지 개념을 모두 포함한다. 하나는 집단으로서의 전체성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으로서의 개체성이다. 쉽게 말해서, 시민은 사회 전체의 구성원인 동시에 독리적이고 자유로운 개별자다. .. 

현실의 팍팍함 속엣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고민할 시간적 여우가 없는 것이 문제다.  5


이 책은 합리적인 시민이 되자는 책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인 시민이 앞으로 진행할 선택에 대한 책이다.  8









세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사회의 방향성은 둘 중 하나다. 시장의 자유 또는 정부의 개입. 그리고 이 두 가지 방향성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인은 세금이다 세금은 사회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근원이다.  16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곳이 시장이다. 그리고 시장에는 두 주체가 있다. 개인과 기업이다.  17


세금과 복지의 관계를 일반적으로 비례한다.  




통시적으로 파악하는가 아니면 공시적으로 파악하는가에 따라 발생. 통시적이란 시간의 흐름을 고려해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공시적이란 시간에 대한 고려보다는 현재 상황을 기준으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26


세금을 높여 복지를 확대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부유층의 세금을 높여서 사회 전체의 복지 수준을높이는 방법. 그리고 국민 한 명당 세금을 일정하게 높여서 그것으로 복지를 실현하는 방법. 그래서 주의해야 한다. 정부나 특정 정당이 복지를 위한 증세를 말할 때, 특히 그 주어를 말하지 않을 때, 실제 주어가 무엇인지 확인해야 한다.  30




문제는 누진세를 적용하는가 하지 않는가가 아니다. 그보다는 책정된 누진세율의 정도가 실제로 정당한지가 논쟁의 핵심이 된다.  36


특정 계층의 세금을 높이지 않고, 국민 전체의 세금을 동일하게 높이는 것. 이러한 세금을 간접세라고 한다.  41





개인의 소득을 고려했을 때는 간접세가 공평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개인에게 부과되는 주민세가 연간 1만 원이라고 해보자. 그리고 앞서 경비를 제외한 월 소득이 100만 원인 W씨와 1,600만 원인 Z씨를 비교해보자. 두 사람은 매해 1만 원을 공평하게 납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소득을 고려하면 월 소득 대비 W씨는 1%를, Z씨는 0.0625%를 세금으로 납부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소득만 놓고 생각했을때 W씨가 느끼는 1만 원의 가치는 Z씨에게 625원 정도로만 느껴질 수 있다. 소득을 기준으로 할 때, 간접세는 저소득자의 실질적인 부담을 증가 시킨다는 면에서 불평등한 세금이다.  42-43


직접세와 간접세 중에서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것이 악인가? 그런것은 없다. 당시의 국내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44


시민은 놀랍도록 참을성이 강해서 문제가 악화되는 시점까지 시다리는 경향이 있다. 가시적으로 문제가 발생해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너무 늦어 악화되었을 때가 보통이지만, 시민의 움직임은 사회의 분위기를 역전시킨다. 

진짜 문제는 움직이지 않는 시민에게 있다. 상황이 악화되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부동의 시민들이 문제다. 그들이 사회의 절대다수일 경우 그 사회는 균형을 잃어버리고 특정 계층, 특정 계급의 이익만을 반복적으로 보장하는 부정한 사회로 변질될 수 있다.  45


한국은 간접세 비율이 높고 직접세 비율은 낮아서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50



최종 정리


첫 번째 질문은 '세금을 인상할 것인가'였고, 두 번째 질문은 '누구의 세금을 인상할 것인가'였다.

첫 번째 질문이 중요한 것은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의 근원에 세금에 대한 논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세금은 복지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세금의 인하는 복지의 축소를, 세금의 인상은 복지의 확대를 가져온다.  52


두 번째 질문인 '누구의 세금을 높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변이 가능했다. 하나는 부유층의 세금을 누진적으로 높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 전체의 세금을 일괄적으로 높이는 것이다.

부유층의 세금을 인상한다는 것은 누진세와 부유세를 높이는 것을 의미한다. 누진세는 개인의 소득에 부과하는 세금이고, 부유세는 개인의 재산에 부과하는 세금이다. 소득과 재산이라는 개인이 부에 직접적으로 세금을 부과하기 때문에 이 둘을 직접세라고 한다. 

다음으로 국민 전체의 세금을 인상한다는 것은 소비세와 주민세를 높이는 것을 의미한다. 소비세는 상품과 서비스에 붙는 세금으로, 개인이 소비한 만큼 발생한다. 주민세는 특정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일괄적으로 부과되는 세금이다. 이 둘은 간접세에 속한다. 간접세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부여된다는 점에서 표면적으로 평등해 보이지만, 개인의 소득과 재산을 고려할 경우 상대적으로 가난한 살마들의 부담이 높아지는 불평등한 세금이라고 할 수 있다.  ..

국가의 방향성을 선택한다는 것은 '세금 징수의 양'과 '세금 납부의 주체'를 결정함을 의미한다. ..

결과적으로 누구의 이익이 보장되는지를 확인하면 된다.  53-54






국가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국가에 대한 저의는 정치적 실체를 말한다. 항구적인 영토와 국민을 기반으로 정치 조직으로서의 정부를 가지고 있는 정치적 실체 말이다. ..

국가에 대한 물음의 근저에는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당위적 역할에 대한 물음이 깔려 있다. 우리가 국가에 대해서 정말 하고 싶은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국가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국가는 무엇이이어야만 하는가?"

두 종류의 국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최소한의 역할을 수행하는 국가가 가능하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방과 치안에 힘쓰지만, 국민 개개인의 삶의 방식이나 경제활동에는 간섭하지 않는 국가. 이러한 국가를 '야경국가'라고 한다. '야경'의 한자어를 풀어보면 '밤 야(夜)' '경계할 경(警)'으로, 국가는 야간에 경비를 서는 정도의 역할만을 한다는 의미다. ...

다음으로 생명과 재산 보호, 국방과 치안을 넘어 개인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국가가 그것이다. 국민이 배가 고프지 않은지, 어디가 아프지는 않은지 신경 쓰며 국민의 삶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가진 국가다. .. 이러한 국가를 '복지국가'라고 한다. 여기서의 '복지'란 건강하고 윤택한, 궁극적인 행복의 상태를 의미한다.  60-61




오늘날의 국가들을단순하게 자유주의, 사회주의 혹은 야경국가, 복지국가로 단정하기를 쉽지 않다는 것이다.  63



공화제는 왕이 없다는 기본적인 전제만을 갖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국가체제로 나타날 수 있다. 우선 왕 대신 귀족이나 소수 엘리트가 집권하는 형태가 있다. 이를 일반적으로 귀족제라고 한다. 다음으로 다수의 인민들에 의해서 국가가 운영되는 형태가 있다. 이를 민주제라고 한다.

공화제의 주인은 왕을 제외한 어떤 사람이라도 될 수 있다. 개념상 귀족이나 소수 엘리트가 독재하는 체제도 공화제라고 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제도 공화제라고 할 수 있다.  77-78


어떤 의미에서는 공화제와 민주제가 대립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공화제가 소수 귀족이나 엘리트에 의한 통치를 긍정하기 때문이다. 공화제와 민주제는 화해할 수 없는 부분을 갖는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엘리트주의와 민주주의 대립으로 알려져 있다.  79





자유


시민이 자유 그 자체.  99


정신은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한 명 한 명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정신이 있다. 이를 '주관적 정신'이라고 한다. 무엇인가 느끼고 생각하고 배우는 나의 정신 말이다. 다음으로 사회가 가진 정신도 있다. 법, 정의, 도덕, 인륜이 그것이다. 헤겔은 이를 '객관적 정신'이라고 불렀다...

헤겔은 두 가지로 구분한 주관적 정신과 객관적 정신을 다시 통합한다. 이 통일된 정신이 절대정신이다.  100


헤겔에게 세계 전체는 절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헤겔은 물질보다는 정신이 세계의 근본이라고 생각한 관념론자였다.

정신이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 ..

정상적인 자신을 기준으로 반대되는 역을 상정한 뒤에 이를 통합해나가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장해가는 운동 과정을 헤겔은 '변증법'이라고 불렀다. 


헤겔은 절대정신의 본성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자유'다. 절대정신은 역사 속에서 자유의 확장으로 드러난다. 세계의 역사는 자유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일관되게 진행되어온 것이다.   102


자유란 타자에게 간섭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자유의 정의다. 이러한 자유의 정의는 실제로는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우선 앞 부분, 자유는 타자에게 간섭받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특정 국가나 권력에 얽매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존재하는 상태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자유를 '소극적 자유'라고 한다. 다음으로 뒷부분, 자유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음을 말한다. 자신이 지향하고 선택하는 것을 주체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상태가 그것이다 이러한 자유를 '적극적 자유'라고 한다.  111


문제는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개념이 국가체제나 경제체제의 쟁점과 연결되어 어른들이 먹고사는 문제에 깊게 관여한다는 데 있다.  112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는 실제 현실에서 다른 단어로 대체되어 사용된다. 우선 소극적 자유는 '자유'라는 말과 동일하게 사용된다. 바꿔 말해서 오늘날 '자유'라는 어휘에는 소극적 자유가 항상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가 들어간 단어들인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시장의 자유 등에는 작은 정부에 의한 소극적 자유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적그적 자유도 마찬가지다. 적극적 자유는 '평등' 혹은 '복지'라는 말로 대체되어 사용된다. 바꿔 말하면 오늘날 '평등' 혹은 '복지'라는 어휘에는 큰 정부에 의한 적극적 자유의 이념이 항상 내포되어 있다.  116


자본주의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에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몰락을 예언하고 실행하려 노력했던 것일까?

바로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생산수단의 개인소유' 때문이다. 

실제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생산수단에 대한 태도에 따라 구분된다.  120



마르크스는 이렇게 도래할 공산주의 사회를 두 단계로 구분했다. 우선 자본주의가 내적인 모순에 따라 무너지면 노동자들에 의한 독재가 이루어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가 발생한다. 이것이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다. 다음으로 이렇게 탄생한 새로운 사회가 안정적으로 생산력을 갖춰 모든 국가는 사라지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이상적인 사회가 도래한다. 이 사회가 최종적인 모습으로, 마르크스는 이를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라고 불렀다.  132


자유는 시민의 이름이었다.인류의 역사는 자유의 확장이라는 일관된 방향성을 갖고 있다. 단 한 명의 자유인이었던 왕에서부터 영주, 부르주아에 이르면서 자유인의 규모는 확대되어왔고, 결국 현대에 이르러 모든 사람이 정치적인 자유를 획득했다. 오늘날의 모든 자유인을 우리는 시민이라고 부른다. 시민은 우연히 탄생한 존재가 아니라, 역사의 필연적 귀결이다.

자유는 두 종류로 구분된다. 소극적 자유는 타자에게 간섭받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제약과 구속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반면 적극적 자유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자신의 욕망과 선택을 실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

자유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특징인 생산수단의 개인소유에 대한 자유였다. ..

자유는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용어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로움이라는 이상적이고 완벽한 그 무언가는 현실에 없다.  135-136





직업


"노동의 신성함에 대한 강조는 사회 구성원들이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그렇지 못한 노동자가 있고, 이로 인해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며, 그래서 노동의 대가로 최소한의 삶만을 겨우 유지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면, 그 사회에서 노동의 신성함을 이야기하는 것만큼 비열한 행위는 없습니다."

시민이 말을 이었다.

"한 명의 개인은 선택하게 됩니다. 두 가지 삶만이 가능하죠. 나를 바꾸는 삶, 세계를 바꾸는 삶. 첫 번째 사람은 나를 바꿉니다. '생산 수단의 개인소유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해? 그렇다면 그걸 내가 가져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인정하고 나를 그 시스템에 맞추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세계를 바꾸려 노력합니다. '생산수단의 개인소유가 그렇게 중요해? 그렇다면 누구도 그걸 독점해서는 안 되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으니, 그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142-143


주주 자본주의는.. 영국과 미국의 자본중ㅢ가 이러한 형태를 띠고 있다. 미국의 경영진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상품을 얼마나 생산하고 판매했느냐가 아니다. 주식의 시세 차익과 배당을 통해 주주의 이익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된다. ...

반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기업과 연계된 사회적 이해관계자 전체를 고려하는 것이 기업의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독일과 일본의 자본주의가 이러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방향성을 가진 기없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주주의 이익이 아니라 모든 관계자와의 공존이다. 노조를 비롯하여 지역사회의 일반 주민들까지도 제한된 범위 내에서 기업 경영에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물론 오늘날의 기업들은 극단적으로 한 가지 형태를 띠는 것이 아니라 혼합된 모습을 보인다. ..

문제는 방향성에 있다. 현재의 복합적인 기업 활동을 기준으로 기업의 방향성이 주주의 이익을 향하는지, 아니면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향하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  156-157


현실의 구체적인 쟁점들은 하나하나가 치열하게 논쟁되고 잇으며 복잡하기 때문에, 개인이 이를 이해하고 자기 나름의 해결 방안을 도출하기까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그래서 시간을 쪼개 써야 하는 바쁜 현대인들은 복잡하고 다채로운 사회적 쟁점에 자연스럽게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보통의 현대인들과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 사이에 투쟁이 벌어진다. 바쁜 현대인들은 안 그래도 정신 사나워 죽겠으니 사회는 소란스럽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현대인의 무관심을 깨우기 위해서라면 소리를 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적 쟁점은 산으로 간다. 구체적인 실제 쟁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시위의 태도, 말하는 방식, 과격성, 이로 인한 불편 등이 이슈화된다.  159-160


"직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게 되는 겁니다. 좋아하는 일이라거나 잘하는 일이라거나, 산업화사회에 이르러서 그런 건 없습니다."

비서실장이 반문했다.

"아니, 왜 없나요? 누구나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 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직업을 선택하는 거 아닌가요?"

"운동화 공장의 생산라인에서 근무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겁니까, 아니면 잘하는 일을 선택한 겁니까?"

...

".. 특정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좋아하거나 잘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었던 운 좋은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 사회의 일반적인 직업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과 노도에서 보람과 성취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직업을 기대할 수 있는 보상은 오직 임금뿐입니다.  162-163


직업 선택에서 고려해야 하는 세 가지 측면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보람, 수익, 리스크가 그것이다. 우선 성취와 보람 면에서는 사업가와 투자가가 이를 향유할 수 있고 노동자가 배제됨을 보았다. 노동자는 그 대신 임금으로 보상 받는다. 

하지만 보상으로서의 수익에서도 노동자는 소외된다. 사업가와 투자가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레버리지를 통해 수익률을 극대화하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직업으로서 임금노동자를 선택하는 것은 가장 비랍리적인 판단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들은 성취감에서 배제되고 수익도 낮다. 하지만 이들의 선택을 단순히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말할 수 는 없었다. 왜냐하면 성장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기업의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자본가의 손실이 예상되기 때무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안정적인 수익이 보장받을 수 있는 임금노동자를 선택하는 것이 이익을 극대화하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그래서 최근의 노동시장 유연화가 문제가 된다. 임금노동자가 그나마 다른 직업군에 비해서 만족스러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리스크의 회피 때문이다. 성취와 보람 그리고 수익으로부터 배제되는 대신 안정을 선택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박탈될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 노동시장의 유연화라고 할 수 있다.

비정규직 확대의 본질은 투자가와 사업가가 져야 할 리스트를 다수의 노동자에게 전가한다는 것이다.  182


생산수단의 개인소유를 인정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업을 선택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동시에 계급적 관계망 안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선택한 직업 안에서 발생하는 인간적인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갈등은 우연적이라기보다는 직업군의 관계 양상이 민들어낸 결과물이다.  186






교육


교육은 구분된다. '교육의 내용'과 '교육의 형식'으로, 그중에서 일반적으로 교육의 형식은 교육의 내용보다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 개인은 교육의 형식을 통해 배움을 체화한다.  193


벤담이 처음 파놉티콘을 제안했던 것은 단지 효율성 때문이었다. 그에 따르면 파놉티콘은 감옥뿐만이 아니라 학교, 병원, 공장, 병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설에 적용할 수 있는 효율적인 시스템이다. 소수의 감시자만으로 다수의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으므로 비용 절감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벤담이 살던 시기에 파놉티콘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이를 재조명한 것은 20세가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철학자 미셸 푸코였다. 푸코는 벤담의 파놉티콘을 재해석했다. 푸코에 따르면 파놉티콘은 단지 효율적인 감시도구를 넘어서 근대사회에서 규율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 된다. ..

근대사회가 되면 규율 권력은 세련되게 작동한다. 규율은 폭력이 아니라 감시의 시선과 이를 통한 자발적인 내재화로 작동한다. 우리는 서로를 감시함으로써 규율과 규칙을 자발적으로 준수하는 것이다. 파놉티콘은 근대사회의 규율 권력이 어떻게 개인에게 내재화 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파놉티콘의 사례에서 환경이라는 형식이 어떻게 개인을 학습시키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으려고 한다. ..

오늘날 학교라는 형식에서 우리가 실제로 교육받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에 대한 이념'과 '경쟁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체화한 채로 학교를 졸업한 후 사회에 나온다.  196-197


질리가 외부에 실재한다는 입장을 '객관주의 인식론'이라 한다. 이 관점을 토대로 하면 교육은 개인에게 진리를 주입하는 방법을 취한다. 인류의 지식과 지혜라는 진리가 실재하고 있으니, 교사는 학생들의 머릿속에 이것을 넣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는 교육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학생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역할.  198


진리가 개인의 내부에서 구성된다는 입장을 '주관주의 인식론'이라고 한다. 이 관점을 토대로 하면 교육은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한다. 진릴르 만들어내는 것은 학생 스스로다. 따라서 교사는 학생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하고 도움을 주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에 한정된다. 학생은 주체적으로 학습해나간다. 이러한 교육 방식은 다양성을 길러낸다. 진리가 개개인에 의해서 구성되는 만큼 모든 개별자는 나름대로의 진리를 보유한 존재로 대우받는다. 이제 중요한 것은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생과 학생 사이의 관계와 대화다. 교육은 토론 형식을 취한다. 




강의식 교육과 전통적 교실 구조 그리고 객관적 평가가 진행되는 A학교에서 성장한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진리가 실재한다는 절대주의적 진리관을 가진 어른이 된다. ..

이들은 개인적인 문제에 봉착하거나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전문가를 찾는다. 정답을 아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어른들 간에 이익이 충돌하면, 이들은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논쟁한다. 그리고 보통은 틀렸다고 전제하지 않으므로, 우선은 상대방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사고방식은 자신의 세계를 선으로 타자의 세계를 악으로 상정하는 세계관으로 발전한다. 나는 합리적이고 열린 사고를 가졌으므로 타자의 말에 귀 기울이지만, 다른 정당, 다른 종교, 다른 이념, 다른 체제, 다른 가치관은 사실 틀렸다고 이미 상정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타협과 양보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다만 이러한 교육을 통해 성장한 어른들은 효율적이고 집중적인 교육 방식으로 훈련된 까닭에 학습 능력이 우수하고, 사회의 관려적 시스템이 주는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있는 인내력을 갖춘다. 험난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203-204


토론식 교육과 원탁형 교실 구조 그리고 서술식 평가가 진행되는 B학교에서 성장한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진리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상대주의적 진리관을 가진 어른이 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어른들 간에 이익이 충돌하면, 이들은 우선 상대방을 쉽게 악으로 규정하려는 극단적인 태도를 지양한다.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한 길고 지루한 조율과 설득의 과정을 돌입한다. 대화가 발생시키는 피로감은 인내하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교육을 통해 성장한 어른들은 제도화되고 획일화된 평가 기준에서 좋은 성과를 드러내기 어렵고, 사회의 관료적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표준화와 효율성을 강조하는 현대사회에 적합한 노동자로 성장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204-205


'경쟁'이라는 교육의 형식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학생들은 자신의 평가 결과와 무관하게 교육의 형식을 통해 경쟁이 정당하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206


안타깝게도 경쟁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을 개인이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오랜 시간 동안의 의무교육 과정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경쟁의 정당성을 내재화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교과 내용에 경쟁의 정당성이 나온다는 것이 아니다. 시험과 평가라는 학교 교육의 형식이 아이들을 가르친다. ..

경쟁률을 발생시킨 사회구조에 주목해야 한다. 평가 결과에 따른 우선적인 책임은 사회에 있다. 중간 성적에 속한 학생들이 칭찬받고, 중간 정도 노력하는 사람이 취업할 수 있고, 중위 소득에 속하는 사람이 먹고살 수 있는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다. 이러한 사회에서 이루어진 경쟁이라고 할 때에만, 우리는 그 결과의 책임을 비로소 개인에게 물을 수 있다.  212-213


교육 문제의 근본은 구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구조란 경제체제를 말합니다. 경제체제가 교육의 형태와 문제를 규정합니다.  215


교육의 본질은 자기 수양과 학문에의 정진이라고 생각할 수동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교육은 직업 획득의 문제, 개인의 경제생활 영위 능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일자리의 양과 소득격차의 수준은 그 사회의 교육의 분위기를 결정한다. 일자리가 적고 소득격차가 커서 소수의 사람들만이 양질의 일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사회라면 학생들과 취업자들이 심각한 경쟁 환경에 던져지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다.  223


'유연안정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flexibility)'과 고용의 '안정성(security)'을 조합해서 만든 '플렉시큐리티(flexicurity)'라는 개념이다. 덴마크를 비롯해서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이 시행하고 있는 제도다. 이 개념은 시장 자유와 정부 개입의 두 가지 특성을 적절하게 조합하고 있다.

기업이 노동자를 쉽게 해고하고 고용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덴마크는 강력한 노조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가 쉽게 해고될 수 있다. 그래서 전체 노동자의 평균 근속 기간은 8년여 정도에 불과하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쉬운 해고가 고용을 창출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기업은 쉽게 구조조정을 할 수 있으므로 시장의 변화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만큼 채용에서도 적극적이게 된다. 실제로 덴마크의 고용률은 75%로, 유럽 평균인 65%를 상회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가능한 것은 노동자들이 희생을 감수하기 때문이 아니다. 국가가 강력한 고용 안정성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정부의 강력한 개입으로 높은 세율과 포괄적인 복지가 이루어지는 까닭에 개인은 실직 상황에서도 위축되지 않는다. 덴마크는 해고된 노동자에게 최장 4년 동안 이전 급여의 90%를 지급한다. 단, 실직 기간 동안의 직업교육이 필수 의무이며, 정부가 제공하는 일자리는 특별한 이유 없이 지속적으로 거부할 경우 실업급여는 중단된다.  225


교육은 경제가 결정한다. 경제적 상황과 환경, 구체적으로는 일자리와 소득격차의 정도가 어떠한가에 따라 교육의 모습이 결정된다.  227






정의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우하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것을 다르게 대하는 것을 '배분적 정의'라고 한다. 그리고 같은 것을 같게 대하는 것을 '평균적 정의'라고 한다.  239


두 가지가 적절히 조화될 때가 가장 이상적인 상태일 것이다. 문제는 개인, 집단, 국가에 따라 어디까지를 같다고 보고, 어디까지를 다르다고 볼 것인지를 규정하는 기준이 상이하다는 데 있다. 그래서 정의는 두 가지 관점으로 나뉜다. 특정 사안에서 평등함을 기준으로 정읠르 판단해야 한다는 관점과, 반대로 차등을 중심으로 정의를 평가해야 한다는 관점이 그것이다. ..

윤리에서의 정의는 '정의로움'으로, 경제에서의 정의는 '분배'로, 정치에서의 정의는 '선택'으로 드러난다.  240


정의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수직적 정의관과 수평적 정의관. 어떤 사람들은 정의로움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수직적 질서를 준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대우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 노력한 사람과 노력하지 않은 사람, 법을 준수하는 사람과 준수하지 않는 사람, 같은 민족과 다른 민족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차등적으로 대우하는 것이 정의인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다른 것은 다르게' 분배해야 한다는 '차등적 정의관'에 부합한다.  248


다른 사람들은 정의로움이 수평적인 평등을 이루는 거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성별, 인종, 나이, 지역, 부에서 어떠한 차별도 받아서는 안 된다. 특히 현재 어려움에 처해 있고 폭력적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면 그들의 인권은 절대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한발 더 나아가서 정부는 그들이 인격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같은 것은 같게' 분배해야 한다는 '평등적 정의관'에 부합한다.  249


자유주의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현재의 분배 상태를 인정함으로써 개인의 재산권을 보장하는 것이 정의롭다는 이념이다. 사회주의는 인위적인 노력으로 부에 대한 강력한 재분배가 이뤄지는 것이 정의롭다는 이념이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분배 방식의 다른 이름이다.  256


자유주의적 이념에 뿌리를 두는 경제체제가 있다. 초기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수정 자본주의가 그것이다. 다음으로 사회주의 이념에 뿌리를 두는 경제체제가 있다. 사회문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그것이다.  257


근대라는 시대를 열어젖힌 것이 초기 자본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258


베른슈타인은 엥겔스 사후에 영향력을 얻기 시작했다. 그는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를 붕괴시켜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에 반대했다. 대신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

마르크스주의를 '공산주의'로, 베른슈타인주의를 '사회민주주의'로 불렀다.  266-267




오늘날의 한국은 경제체제의 스펙트럼상에서 신자유주의에 위치해 있다. 이에 대한 근거는 세율에서 찾을 수 있다.  272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국가의 세율은 대략 20%대다. 이에 속하는 대표적인 국가는 미국, 일본, 한국이다. 수정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국가는 이보다 높아져서 대략 40%대의 세금이 부과된다. 프랑스, 영국 등이 여기에 속한다. 다음으로 사민주의는 50~60%대의 세금이 부과된다. 북유럽 국가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273








미래


인플레이션은 물가의 점진적인 상승을 의미하고, 디플레이션은 물가의 점진적인 하락을 의미한다. 

그런데 물가 하락이 무조건 디플레이션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기존에 인플레이션이 급하게 이루어졌고 이것이 정상화되는 과정에 있다면, 이러한 상태는 디플레이션이 아니라 디스인플레이션이라고 한다. 디스인플레이션을 넘어서 물가가 마이너스가 되기 시작하면 이를 디플레이션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가 강기간 지속되어서 격국 극단적으로 경기가 불황에 머무르는 상태를 '불경기'라는 뜻으로 디프레션이라고 한다.  201-291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

아비투스는 20세기에 프랑스에서 활동한 사회학자인 부르디외가 제시한 개념이다. 보통 '습관'이나 '습속'으로 번역되고, 영어에서 습관을 의미하는 'Habit'과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습관이라기보다는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형성되는 습관을 의미한다. ..

나의 행동과 취향과 선택은 정말 나의 개인적인 것일까? 부르디외는 그러한 일관된 행동 패턴으로서의 습관은 계급적이고 구조적인 사회적 환경이 나에게 내재화된 것이라고 말한다. 즉, 나의 취향은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 아니라 계급적인 취향이다. ..

노동자는 노동자처럼 말하고, 노동자처럼 생각하고, 노동자처럼 행동한다...

자본가는 자본가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우리가 지극히 개인적이라고 생각해왔던 나의 취향과 성향과 선택은 나의 것이 아니라 계급적인 것이다. 이것이 아비투스다. 사회적 계급과 환경에 의해 형성된 나의 사고와 행동의 패턴. ..

문제는 지배적 위치를 점유한 계층이 아비투스를 이용해서 지배를 정당화하고 지배질서를 유지한다는 점에 있다. 부르디외는 이를 '상징적 폭력'이라고 부른다.  327-328


자본가와 노동자의 아비투스를 나눌 수도 있지만,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의 아비투스를 나눌 수도 있다. 부모 세대는 성장하는 사회를 경험하면서 그 속에서 성장하는 사회의 아비투스를 내재화한다. 타인보다 노력함으로써 성공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이를 위해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야 하고, 저축과 투자를 함으로써 부를 쌓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내재화된다.

반면 자녀 세대는 앞으로 정체된 사회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성장하지 않는 사회의 아비투스를 내재화할 것이다. 노력이 성공을 보장하지 않으며, 최소한의 권리도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음에 만성적인 피로를 느낄 것이다. 이로 인해서 경쟁과 성공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안정적인 직장도 없고 저축과 투자도 의미 없다.  329


문제는 사회의 중심을 차지한 부모 세대의 가치관이 주변부를 맴도는 자녀 세대에게 상징적 폭력으로 주입된다는 점에 있다.  330






에필로그


세금, 국가, 자유, 직업, 교육, 정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 일곱 가지 분야는 한 명의 시민이 탄생했을 때, 그가 현실 세계에서 만나는 것들이다.  340


시민은 그 자체로 자유다.  345


세계를 복잡하게 이해하려다 지치지 말고, 세계를 관통하는 단순함에 집중해야 합니다.  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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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행을 떠나려 할까? 

"나는 왜 여행을 떠날까?"라는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하려면, 즉 우리의 여행 동기를 정확히 알려면 먼저 여행 동기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다음으로는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한 뒤 자신의 여행 동기가 어떤 특징을 띠는지를 파악해봐야 한다. 얼핏 복잡해 보이지만 질문의 구조는 단순하다. 먼저 "사람들은 왜 여행을 떠날까?"라는 질문을 하고 다음으로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고 물은 뒤 "나는 왜 여행을 떠날까?"라고 자문해보는 것이다.  22


메릴랜드 대학의 이소 아홀라(Sepp.o E. Iso-Ahola)는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유래한 접근-회피 동기 개념을 이용해 "사람들은 왜 여행을 떠날까?"라는 질문에 답함으로써 여행 동기 연구에 오랜 기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인간은 무언가를 얻고 무언가를 하려는 '접근 동기'에 따라 행도에 나서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피하고 무언가를 하지 않으려는 '회피동기'에 따라 움직이기도 한다. ..

접근 동기와 회피 동기는 언제나 동시에 나타나서 일정한 비율로 조합된다. 세상 모든 일에는 A를 얻는 것과 B를 회피하는 측면이 전부 있기 때문이다. 

이소 아홀라는 여행도 이와 똑같다고 말한다. 여행은 무엇인가를 피하려는 회피 활동인 동시에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는 접근 활동이다. 여행은 도피이지 탐색이며 탈출이자 추구이다. 따라서 여행을 통해 도피하고 탈출하려는 대상과 여행을 통해 탐색하고 추구하려는 대상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다.  23


접근 동기와 회피 동기가 각기 어느 정도 비중으로 조합되느냐 하는 것도 나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두 동기의 조합 양상이 여행의 양상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여행의 양상은 여행자의 성격과 가치, 여행자가 수집한 정보, 여행지의 이미지, 타인의 영향, 여행 기술, 돈, 시간 등 다양한 요인에 따라 결정되는데, 접근 동기와 회피 동기의 비율도 여기에 고유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24


성격 5요인(또는 '빅 파이브').

성실성이란 계획성과 끈기, 목표 지향성을 뜻하는 성격 특성이다. 성실성이 높은 사람은 항상 시간을 잘 지키고, 꼼꼼하고, 인내심이 강하고, 자기 통제력이 강한 사람이다. 성실성이 낮은 사람은 게으르고 주의가 산만하며 의지가 박약한 사람을 뜻한다.

우호성은 대인 관계 상황에서 어떤 감정과 행동을 나타내는지에 대한 성격 특성이다. 우호성이 높은 사람은 상냥하고 친절하며 스스로 솔직하면서 남을 잘 믿는 사람이다. 우호성이 낮은 사람은 냉소적이고 교활하며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신경증 성향은 정서적 안정성/불안정성을 나타내는 성격 특성이다. 신경증 성향이 높은 사람, 즉 정서적 불안정성이 높은 사람은 매사 자신이 없고 건강염려증이 있으며 항상 불안하고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신경증 성향이 낮은 사람, 즉 정서적 안정성이 높은 사람은 차분하고 강인하며 편안한 사람이자 감정적이지 않은 사람이다.  32


외-내향성은 대인관계나 직장 생활, 여가 활동 등에 폭넓고 강한 영향을 끼치는 성격 특성이고, 당연히 여행의 동기와 여행자의 행동에도 강한 영향을 끼친다. 외향인은 지루한 일상가 답답한 인간관계에서 탈출하여 신나고 자극적인 경험과 강렬한 육체적 활동, 새로운 사람들과의 열렬한 인간관계를 추구하는 여행을 떠난다. 

반면 내향인은 스트레스를 주는 환경과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평온함을 느끼고 자기를 성찰하며 친밀한 살마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여행을 즐긴다. 

개방성은 특히 새로운 시직을 습득하고 다양한 문화와 상호작용하며 미적, 예술적 생활을 즐기는 양상과 큰 관련이 있는 성격 특성이다. 즉 어떤 사람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음악가 또는 미술가를 좋아하거나 베스트셀러가 아닌 책을 읽고 있다면 이 사람이 오타쿠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보다는 이 사람의 개방성이 높을 것이라 짐작하는 편이 낫다. 

개방성은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문화에 접촉하고 새로운 지식과 현상을 탐사하는 특성을 띠는 여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개방성이 높은 사람은 여행을 통해 지적, 예술적 호기심을 충족하려 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과 문화의 틀을 체험하려 한다. 

반면 개방성이 낮은 여행자들은 고향에서 가깝고, 문화적인 차이가 작고, 안전하고 깨끗한 여행지를 찾아내서 그곳을 몇 번이고 다시 방문하며 만족스러운 여행을 즐긴다.  37-38


외-내향성과 개방성에서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곧 "나는 왜 여행을 떠날까?"라는 질문에도 답할 수 있게 된다.  38


기대감이란 우리가 어떤 기대를 하고 있든 바로 그 기대가 충족되리라는 희망적인 예측에서 오는 것이다.  45


다양한 긍정 정서와 행복감 체험에서 한발 더 나아가 여행은 우리가 인생의 다양한 부분에서 더 큰 만족감을 경험하게 해준다.  46


관계 강화의 측면은 여행의 큰 매력 중 하나이다. 

여행학 연구가 다루는 중요한 여행 행동 가운데 하나로 '반복 방문'(또는 '재이용')이라는 것이 있다. 반복 방문이란 어떤 사람이 자기가 벌써 가봤던 여행지를 다시 찾는 현상으로, 공급자 처지에서는 그 원인과 촉진 조건이 매우 궁금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47


사람들이 어떤 여행지를 두 번 이상 방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좋았으니까" "한번 가본 곳이라 친숙하고 편하니까" "어려움이 없고 별다른 계획을 짜지 않아도 되니까" "이미 검증되었으니까" "다른 곳은 잘 모르니까" 등등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이유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리처드 기텔슨(Richard J. Gitelson)과 존 크럼프턴(John L. Crompton)은 이런 이유들 외에 한 가지 뜻밖의 요인을 밝혀냈다. 이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그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같은 여행지를 반복해서 방문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정말 좋다고 느꼈던 경치를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 사람 손을 잡아끌고 그곳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은 자기가 마음에 들어했던 음식을 누군가에게 맛보여주기 위해 그곳으로 돌아간다. 혼자서 봤던 멋진 축제를 함께 감상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안겨주고 이를 함께 느끼기 위해 돌아간다. 아름답지 않은가?  48


여행은 우리를 다방면에서 한층 성장하게 한다...

매슈 스톤(Matthew J. Stone)과 제임스 페트릭(James F. Petrick)은 여행이 '경험학습'을 유발하기 때문에 이런 자기 성장의 효과를 가져온다고 설명했다. 경험학습이란 우리가 기존의 지식이나 경험 또는 호기심을 바탕으로 능동적인 실험을 하고, 실험을 통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경험을 하며, 이 경험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곱씹으면서 추상적인 개념을 도출해내는 학습 과정을 뜻한다.  49


여행을 통해 우리의 정서지능이 상승한다.

우리는 각종 정서를 더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고("이게 행복이로구나!") 정서가 발생한 원인을 잘 추론할 수 있으며("날이 더우니까 아무한테나 화를 내게 되네!") 각 정서가 낳는 결과가 무엇인지도 이해하게 된다("아무 데서나 화를 내면 곤란한 상황에 빠지기도 하는구나!"). 마찬가지로 정서를 강렬하게 표현하는 타인을 바라보며 타인의 정서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법을 익힐 수 있다.  50-51


여행은 물론 문화지능의 상승과도 깊은 관계를 맺는다.  51


2011년, 세니자 코셰비치(Senija Causevic)와 폴 린치(Paul Lynch)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여행 산업이 수행하는 역할을 다룬 논문을 발표했다. 연구자들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처럼 전쟁과 학살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지역으로 여행하는 것을 '불사조 여행'이라 정의한다. 여행자들이 여행지의 사회공동체가 잿더미를 딛고 다시 피어나도록 돕기 때문이다.

코셰비치와 린치가 설명하는 불사조 여행의 작동 단계는 다음과 같다. 먼저 전쟁과 학살을 겪은 장소는 여행자들에게 삶과 인간성, 국가와 공동체에 대해 숙고하게끔 하는 고유한 매력을 지니게 된다. 여행자들은 이러한 통찰을 얻는 동시에 전쟁에 지친 여행지 민중에게 도움을 주고자 이와 같은 장소를 여행하기로 마음먹는다.

일단 여행자들이 유입되면 여행지 민중은 여행자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공동체를 재생할 수 있다. 여행자와 상호작용하기전, 즉 여행지 민중이 전쟁의 참상을 자기들끼리만 끌어안고 있는 상태에서는 전쟁의 참상이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로만 남아 있다. 즉 무너진 집은 여전히 '무너져버린 내 집'이고 학살의 희생자들은 여전히 '죽어버린 우리 가족'이다. 반면 전쟁의 폐허와 학살의 장소를 여행자들에게 공개하고 나면 여행지 민중은 이제 전쟁의 희생자들에게 '두 번째 장례'를 치러줄 수 있게 된다. 여행자들과 대화하고, 폐허와 학살지를 관광지로 정비하면서 여행지 민중은 전쟁의 '상처'를 아물어가는 '흉터'로, '살해당한 가족'을 '돌아가신 역사적 인물'로 다시 정의할 수 있다. 즉 여행지 민중은 전쟁과 학살을 비로소 과거의 일로 묻어두고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다. 

따라서 불사조 여행을 하는 여행자는 전쟁과 학살을 겪은 여행지에 경제적 도움과 심리적 지지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여행지 민중이 자기들의 아픈 경험을 객관화하고 역사화할 수 있게끔 돕는다. 전쟁 후 보스니아를 여행한 사람들은 이렇게 보스니아 사람들이 오늘날 다문화주의와 다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화합과 재생을 강조하는 공동체를 수립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54-56


여행의 만족이나 행복은 항상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62


좋은 여행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기가 막힌 궁합만은 아니다. 여행과 관련된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할 필요가 있고, 행복한 여행을 하게 해주는 마음가짐을 체득할 필요가 잇으며, 행복한 여행을 오래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행동 규범을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기술과 심리적인 자질을 갖추고 올바른 규범을 익힌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만족스러운 여행을 하고 여행의 가치과 효과를 최대한 누리며 전파하는 '좋은 여행자'가 될 수 있다. 좋은 여행자가 된다면 우리가 앞서 품었던 마지막 의문인 "여행이 딱히 그런 의미와 가치는 없는 것 같은데?"라는 의구심 또한 자연스럽게 해소될 거싱다.  63




여행은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맞춰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내가 터득한 요령을 세 가지만 적어보고자 한다.  80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그만큼 공동체의 복지를 증진하고 문명의 진화를 촉진할 수 있는 다양한 대안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먼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항상 문화적 접촉과 교류를 통해 다채로운 대안을 섭취하고, 이를 변용하거나 자신의 문화와 연결함으로써 새로운 발명품, 새로운 지식과 이론, 새로운 사회 제도를 창조해왔다. ..

물론 '선진국'으로 떠나는 여행에서도 다양한 지식을 습들하고 많은 문화적 아이디어를 습득할 수 있다. ..

문화적 교류는 상대적으로 덜 발전한 지역이 더 발전한 지역의 문화를 '공부'해서 일방적으로 수입해 쓰는 식으로만 진행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매우 창조적인 존재이며, 남이 잘 만들어놓은 것을 베껴서 쓰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한테서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서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문화를 만들어낼 줄 안다. 피카소는 아프리카의 공예품에서 문화적 아이디어를 취해 입체파를 개창했고, 이로써 서구의 회화 양식에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현대를 사는 우리도 여전히 다양한 나라에서 다양한 것들을 얻을 수 있다.

당장 아시아에만 나가보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의 공존이라는 가치를 느낄 수 있고, 인도 펀자브에서는 근면과 봉사의 정신을 몸으로 느낄 수 있으며, 태국에서는 관용과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문활르 경험하고, 일본에서는 철저한 질서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를 목도할 수 있다. 태국과 인도네이사의 색다른 패션, 일본의 아기자기한 공예품, 인도의 색감과 영화, 노래, 춤, 각국의 다양하고 고유한 음식들에 이르기까지 신선한 자극을 주는 문화적 요소들의 목록은 끝이 없다. 심지어 여행지의 문화에서 이런 장점들을 읽을 수 없다면, 적어도 그곳의 문화에서 안타깝다 싶은 점을 반면교사로 삼을 수는 있다.  87-89


문화충격을 완화하여 생경한 문화를 만족스럽게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치료제는 대략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시간, 둘째는 문화 지능, 셋째는 여행자의 성격과 동기이다.

먼저 시간. 고전적인 문화충격 연구자들은 우리의 문화충격 경험이 시간에 따라 4단계로 전개된다고 말한다. 1단계는 새로운 문화에 매력을 느끼는 동시에 다양한 문화적 장벽에 직면하는 단계이다. 이때 우리는 아직 낯설고 이국적인 문화에 호기심과 흥미를 간직하고 있다. 반면 2단계에 접어들면 이제 낯설고 이국적인 문화에서 적대감과 실망을 느끼고 고국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게 된다. 이때 우리 입에서는 "이 사람들 너무 더러워서 안 되겠어. 역시 한국이 위생 면에서는 최고야" "애들이 너무 싸가지가 없네. 이걸 보면 한국이 그래도 교육은 잘 시킨단 밀이야" 등등의 말이 튀어나온다.

여행 기간이 매우 짧을 경우, 우리는 가히 주화입마(走火入魔 달릴주 불화 들입 마귀마)의 단계라 할 수 있는 이 문화충격 2단계에 접어든 채 여행을 마치게 된다. 여행지의 문화에 대한 반감과 여행에 대한 불만족을 품에 안은 채로. 그러나 여행 기간을 조금만 더 길게 가져간다면 우리는 문화적 적응도가 향상되고 긴장감이 감소하는 문화충격의 3단계에 접어들 수 있다. 어떤 지역을 석 달 이상 장기간에 걸쳐 여행한다면 현지 문화를 온전히 이해하고 진정한 다문화주의를 취할 수 있는 문화충격의 4단계(더는 충격이라 표현할 수 없는 상태이다)를 체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때문에 시간은 문화충격의 좋은 치료제 중 하나라는 것이 고전적인 이론가들의 견해이다.  

반면 최근의 심리학자들은 단순한 시간 요인보다 문화지능을 더 중시한다. 문화지능이란 상이한 문화에 접촉했을 때 어떤 지식과 행동이 필요한지 파악해서 이런 지식과 기술을 익히고 실제로 적용하는 정도를 나타낸다. 즉 문화지능이 높은 사람은 "외국에 나가면 인사법이나 예절을 잘 알아야 해. 난 이번에 일본에 가니까 일본식 예절을 좀 연습해야겠어"라고 생각하고 이를 잘 실천해내는 사람이다. 

문화충격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화되듯 문화지능 또한 여행지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쭉쭉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문화지능의 측면에서도 오직 시간이 약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문화지능은 우리가 여행에 나서기 전에 웬만큼 확보할 수 있는 여행 자원이기도 하다. 아주 간단한 현지어 회화를 익히고 현지 역사에 관한 간략한 소개 글을 읽고 친구들의 심플한 조언에 귀 기울이기만 한다면 우리의 문화지능은 향상되고 여행 첫날의 문화충격은 큰 폭으로 감소한다. 여행지에 흥미를 느껴서 공부하면 할수록 실제 여행에 나섰을 때의 문화적 충격이 신선하고 기분 좋은 놀라움으로 바뀔 가능성이 커진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여행을 오래 할 필요도 없고 여행지를 많이 공부할 필요도 없이 이국 타향의 문화를 그저 즐겁게 향휴하기도 한다. 문화충격에 관여하는 마지막 요인인 성격과 동기의 개인차라는 것 때문이다. 이는 바로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끼고 다양성을 중시하며 이질적인 것에 관용을 보이는 특성인 개방성의 차이이다. 개방성이 높은 사람은 이국의 문화와 접촉하는 상황에서 남들보다 훨씬 적은 노력을 기울이고도 훨씬 큰 만족을 느낄 수 있다.  89-92


우리가 역사 유적을 좋아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깊은 심리적 뿌리가 있다...

실제로 우리가 역사 유적과 유물에서 매력을 느끼는 메커니즘은 우리가 마법에 혹하게 되는 메커니즘과 맞닿아 있다. 

제임스 G. 프레이저의 유명한 인류학 시리즈인 <황금가지>는 마법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는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이론서 중 하나이다. 프레이저는 특히 마법의 '유사성 원리(law of similarity)'와 '감염 원리(Law of contagion)'에 주목한다. 

유사상 원리는 비슷한 행동이나 현상이 비슷한 결과를 부른다는 인간의 원초적 믿음에 바탕을 둔다. 일례로 우리나라에서는 가뭄이 들었을 때 땅이나 강에 물을 뿌리는 행동(비가 오는 것과 비슷하다)으로 기우제를 대신하고 부채질(바람만 씽씽 부는 가뭄과 비슷하다)을 금지하기도 했다. 반면 감염 원리란 "한번 접촉한 것은 영원히 접촉된 것이다"라는 믿음을 뜻한다. 즉 세종대왕이 만졌던 물건은 그가 죽고 사라진 뒤 몇백 년의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세종대왕의 손길이 남아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108-110


폴 로진(Paul Rozin)을 비롯한 여러 심리학자는 우리가 여전히 유사성 원리와 감염 원리 같은 미신적인 사고의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빠르게 쑥쑥 자라는 콩나물을 먹으면 우리 키도 쭉쭉 자랄 것이라 생각하고, 인간의 성기를 닮은 음식을 먹거나 정력이 강하다고 알려진 동물으 ㄹ먹으면 정력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험을 보기 전에는 물건이 떨어지는 게 너무 싫고 미끌미끌한 미역국도 먹기가 싫다. 우유로 세수하면 피부가 하얘질 것만 같다. 이처럼 우리는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결과를 낳는다고 여전히 믿고 있는 것이다.  110


이런 생각과 느낌은 모두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인류는 이런 비합리성을 아름다운 문화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작가가 유사성 원리를 잘 활용하면 멋진 복선과 암시, 상징을 만들어낼 수 있다("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은 안개다"). 또한 감염 원리를 문화적으로 승화시키면 위대한 역사 유적과 고귀한 유물을 갖게 된다. 우리는 경주 토함산 석굴암에서 장엄함과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신라 사람들의 숨결과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연결의 느낌을 바탕으로 유저고가 유물에 역사적, 사회적,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이에 따라 석굴암은 시날의 역사와 신라 사람들의 수학적인 능력과 한국인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장소가 된다.  111


결론적으로 말해서 역사 유적은 감염 원리에 따라 강한 힘을 부여받은 여행의 요소이며 시각적 경외감, 판타지 세계에 들어간 듯한 느낌, 역사적 의미, 지적 흥미 등의 다양한 만족감을 두루 제공한다. 그러나 모든 역사 유적이 저마다 다른 매력이 있다는 점은 꼭 기억해두자.  112


여행 중에 산 물건은 실용서오가는 거리가 있다. 대신 그 나라 옷을 사 입고 그 나라를 여행할 때는 자신이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며 다양한 정체성을 한 몸에 수용하는 개방적 여행자임을 표현할 수 있다. 예전 여행에서 산 낡은 티셔츠를 여행 떠날 때마다 꺼내 입는 것은 자신이 모허모가 도전을 좋아하는 장기 여행자라는 신호를 보내는 셈이다. ..

기억을 촉진하는 기능과 정체성을 표현하는 기능은 구입한 물건의 실용서오가는 별 관련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여행 중에 쇼핑하는 사람들은 물건의 질보다는 어떤 물건이 각 여행지의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고유한 물건인지에 더 신경 쓰는 경향이 있다.  124




여행의 사회적 효과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여행자들의 행동 또한 여행자 대상 범죄를 낳는 다양한 요인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역설한다. 우리는 여행자가 여행지를 평가하는 것을 당연시하면서 가끔 그 반대도 당연한 일임을 깜빡하곤 한다. 현지인들도 여행자를 평가한다는 사실 말이다.  139


세상에는 두 가지 혐오가 있다.

첫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원초적인 의미의 혐오로, 더러운 것이나 썩은 것이 입에 닿거나 입안에 들어오거나 몸에 닿았을 때, 또는 이런 가능성이 감지될 때 우리가 느끼는 강렬한 불쾌함을 뜻한다. 이런 원초적 혐오는 심리학 용어로 '핵심 혐오(core disgust)'라고 하며, 몸에 좋지 않은 썩은 시체나 독극물을 먹지 않게끔 하여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준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주로 썩거나 맛이 고약한 음식물, 배설물, 사람과 동물이 사체나 장기, 곤충, 쓰레기 등의 모습이나 냄새에서 혐오를 느낀다. ..

핵심 혐오는 공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타고난 본능과 평생 동안의 학습이 조합되어 나타나는 정서이다.  151-152


두 번째 혐오에 대해 알아볼 차례다. 우리는 썩은 음식과 시체, 배설물 외에 또 어떤 것에서 혐오를 느낄까? 살인자, 강간범, 가정폭력범, 아동성추행범, 동물 학대범, 무식을 자랑하는 자, 예의 없고 상스러운 자,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는 자, 무능한 리더, 혹세무민하는 자와 곡학아세하는 자, 모리배, 시정잡배 등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사회공동체에 해로운 사람들이나 이들의 행동을 혐오하는 마음은 썩은 음식물이나 동물의 사체, 배설물을 혐오하는 마음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사회적, 규범적, 인격적 혐오감을 따로 '도덕적 혐오' 또는 '경멸'이라 일컫는다.

대신 경멸의 신체적, 행동적인 반응은 혐오와 똑같다.  154-155




여행을 떠나 최상의 날씨와 만나면, 더는 다른 것이 필요 없을 정도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뜨겁고 습하거나 주야장천 비가 내리는 날씨 등은 여행의 다른 모든 요소를 압도하여 아예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169


좋은 음식은 여행에 만족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음식이 생각나서라도 그걸 먹었던 곳으로 반드시 돌아가게 만들곤 한다. 심지어 오로지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는 목표 하나만으로 미식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도 있다.  182


진짜 경치가 제공하는 원대하고 깊은 입체감과 우리 피부에 와닿는 그곳의 바람, 나무 향기와 풀 냄새, 강과 폭포의 소리, 그리고 이런 다양한 요소들이 한데 어울리며 자아내는 황홀함은 어떻게 달리 재현할 수가 없다. 결국 그곳에 직접 가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단 여행을 떠나기만 하면 우리는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멋진 경치와 맞닥뜨리게 된다.  192


일단 경치에 이끌려 어떤 여행지에 도착한 뒤에는 이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어떤 행복한 홀동을 할 수 있는지가 경치 자체보다 훨씬 중요해진다. 즉 경치는 다른 활동과 조합됨으로써 여행의 행복을 증폭시키는 '배경'이자, 문화와 음식 및 각종 액티비티 등 각 지역의 다양한 여행 요소들을 결합하여 여기에 통일성과 주제를 부여하는 '틀'이지 여행의 목적 자체는 아니다.  195


여행자는 자신의 성격, 목표, 자원, 각종 여행 요소를 대하는 태도 등을 종합하여 자신에게 딱 맞는 완벽한 숙소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205


여행 동반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동반자들의 성격과 취향의 유사성은 사실 그렇게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동반자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자주 소통하고, 서로의 욕구와 취향과 가치를 절충하거나 공유함으로써 좋은 여행을 만들어나가려는 의지가 있느냐이다.  216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심리학자 중 한 명인 앨버트 밴듀라(Albert Bandura)는 .. 지식과 기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지식과 기술 말고도 뭔가를 '잘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심리적 요인들이 있다고 강조한다.

대표적으로 "이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믿음", 즉 자기 효능감은 공부건 일이건 분야를 막론하고 매우 중요하다.  228


지식과 기술, 자기 효능감 신념, 목표의 특성, 자기 평가 표준을 중시하는 밴듀라의 이론을 사회인지 이론이라고 한다.  229



여행 중의 기술에는 왕도가 따로 없다. 여행자 한 명 한 명이 여행 경험을 통해서 체득하는 고유한 노하우들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주누가 여행 중에 활용하면 좋을 기술도 두 가지 정도는 있다. 하나는 '마음을 챙기며 여행하기'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 정서에 휩쓸리지 않기'이다. ..

'마음 챙김(mindfulness 또는 sati)'이란 원래 불교적 명상 수행과 관련한 개념인데.. 핵심은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집중하며 마음을 열기'라는 점에는 대략적인 동의가 이루어져 있다. ..

여행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마음 챙김이란 여행 중 발생하는 모든 상황에 항상 호기심을 품고, 이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 종합하여 능동적인 해석을 내놓는 것이다.  245-246


우리가 외향적이든 내향적이든, 개방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여행 중에는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절대 마음을 닫아서는 안 된다.  247


마르시알 로사다, 바버라 프레드릭슨 같은 연구자는 긍정 정서와 부정 정서의 비율이 최소 3 대 1 정도가 되어야 행복하고 번창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248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다. 부정 정서는 긍정 정서보다 더 강렬하게 체험되고, 더 강렬하게 기억되는 편이라는 사실이다...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부정 정서의 이런 강력한 영향을 최소화하고 긍정 정서 경험을 오래도록 간직할 필요가 있다...

감사 편지 쓰기는 고마운 사람을 날마다 떠올려보며 이들에게 감사 편지를 쓴느 것을 뜻한다.  249


만약 여행 중 부정 정서를 경험하는 날이 생긴다면, 그날이 저물어갈 즈음 하루 동안 있었던 긍정적인 경험을 떠올려보거나 고마운 사람들을 생각해보고 서로의 행복한 여행을 응원해주자.  250


우리는 우리 여행을 여러 편의 재미난 이야기로 만들어야 한다. .. 

우리가 여행 중 겪었던 여러 가지 좋은 일과 여러 가지 나쁜 일의 세세한 의미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이야기 안에 배치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좋았던 일은 강렬한 추억이 되고, 나빴던 일은 귀중한 배움이 된다. ..

어떤 사람의 여행은 아름답고 의미가 있어서 여행기로 쓸 만하고, 다른 사람의 여행은 그럴 가치가 없어서 여행기로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모든 여행은 여행기로 쓰인 뒤에야 아름다워지고 모두와 공유할 만한 의미를 얻는다. 적어도 우리 마음속에서 크고 작은 여행기로 집대성되지 않은 여행이야말로 진정 무가치하고 의미가 없는 여행이다.  251


"여행은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는 여행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판단, 취향, 가치관이 묻어난다. "여행에서는 어떤일이 일어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우리가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지 그렇지 앟은지가 드러나고, 여행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노출된다. 그리고 "나는 여행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서는 우리가 항상 행복한 여행을 하는 좋은 여행자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중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잘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떤 것을 잘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신념과 기대가 바로 이것이다. 앨버트 밴듀라는 이를 '자기 효능감 신념'이라 표현한다.  253-254


자기 효능감 신념을 증진하는 중요한 메커니즘 가운데 하나는 모델링 학습이라고도 하는 '관찰 학습'이다.  255


여행에 나서면 더욱 다양하고 훌륭한 모델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256


자기 효능감을 높이는 또 다른 대표적인 메커니즘은 작은 성공 경험을 스스로 직접 쌓아나가는 것이다. ..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직접적인 여행 경험을 통해 효능감을 높일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바로 무슨 일이든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하면서 차근차근 배워나가려 하는 '학습목표'를 가진 사람들이다.  257


어떤 사람이 학습목표를 지향할 것인지 수행목표를 추구할 것인지는 이 사람이 지니고 있는 '능력이라는 것'에 대한 신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즉 사람의 능력이란 유동적이고 경험에 따라 성장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학습목표를 지향하게 된다. 반면 사람의 능력은 고정된 것이고, 세상을 살아가려면 자기가 타고난 능력 한도 내에서 최대한 남들에게 잘 보이며 살아야 하는 법이라고 생각하는 살마은 수행목표를 취하게 된다. 이런 점을 특히 강조하는 연구자는 심리학의 거장 중 한 명인 캐럴 드웩(Caro; Dweck)이다. 드웩은 능력이 향상한다고 믿는 사람을 능력에 대한 '증진 이론'을 가진 사람이라 정의하고, 반대로 능력이 타고난 상태로 고정된다고 믿은 사람을 능력에 대한 '실체 이론'을 가진 사람이라 정의했다.  258


여행은 우리의 능력을 증명하는 활동이 아니다. 여행의 목표는 행복과 성장이다. ...

또한 여해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은 한국에서 가지고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여행을 떠나 하나하나 시도하고 적용해보면서 몸으로 익혀나가는 것이다.  260


여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지 않은 사람은 평가 표준도 모호해서, 자기가 여행을 잘하고 있는지, 어떤 점을 개선하면 좋을지를 파악하지 못한다. 또한 여행지가 제공하는 다양한 여행 요소와 그 특징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엉뚱한 표준을 엉뚱한 곳에 들이밀 수도 있다. ..

여행에 대한 학습목표가 있는 살마은 늘 "나는 지금 다양한 여행 경험을 통해 여행에 대해 많이 배우고 있나?"라는 기준으로 자기를 평가하는데, 이는 갈수록 좋은 여행을 할 수 있게끔 보장해주는 좋은 평가표준이다.  268


윤리적 여행이란 여행지의 환경을 보호하고 현지의 문화를 존중하며 여행지 경제에 정의로운 기여를 하는 세 가지 요소를 이루어 진다고 볼 수 있다.  269


에밀 저번(Emil Juvan)과 세라 덜니커(Sara Doincar)는 "사람들은 윤리적 여행의 표준을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이를 잘 지키지 않을까?"라는 문제를 분석해 보았다. 저번과 덜니커가 내린 결론은 윤리적 표준을 잘 지키지 못하는 여행자들의 행동 패턴에는 '인지부조화'라는 유명한 심리적 메커니즘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인지부조화란 이런 것이다. 우리가 "현지 아이들에게 적선을 하면 안 된다"는 신념이 강하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어느 날 캄보디아를 여행하던 중 그 많은 아이들의 공세에 시달리다 못해 볼펜 한 자루와 우리나라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주고 아이들이 그린 그림도 3달러어치 사고 말았다. 그러면 우리 머릿속에서 부조화가 발생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적선을 하는 사람이야 안 하는 사람이야?" 

이처럼 우리의 태도 또는 신념과 우리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쪽은 우리의 행동이다. 그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고 원초적이다. 태도와 신념은 바꾸면 되지만 일단 저질러버린 행동은 없었던 것으로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이 때문에 우리는 태도와 행동의 부조화가 발생했을 때 간단히 태도를 수정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곤 한다. 즉 위의 상황에서는 "사실 아이들한테 적선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지. 암, 그렇고 말고"라는 식으로 우리의 윤리적 표준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274


저번과 덜니커는 여행자들이 인지부조화에 따라 태도를 변화시킬 때 전형적으로 보이는 여섯 가지 부조화 해소(즉 변명) 양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는 우리가 기존의 표준에 어긋나는 일을 하긴 했지만, 알고 보면 그게 그렇게 부정적인 결과를 낳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결과의 부정' 패턴이라고 한다. .. 

둘째는 '하향 비교'이다. 우리 자신도 뭔가 잘못을 하긴 했지만 우리보다 훨씬 심한 자들이 있으니, 우리 잘못을 잘못 축에도 못 든다는 식의 변명 양상이다...

셋째는 '책임의 부정'으로, 이는 어떤 행동이 현지인들 때문에 발생했다고 변명하는 것을 뜻한다...

넷째는 "나도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거기에선 꽁초를 거기에 버렸어야 했다고"라는 식으로 말하는 '통제의 부정'이다. 즉 책임의 부정이 현지인 탓을 하는 패턴이라면, 통제의 부정은 상황을 탓하는 패턴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는 "휴가는 예외라고요. 여기 나와서까지 윤리 같은 걸 신경 써야 해요?"라고 말하는 '예외 형성'이다. ..

여섯째 패턴은 "사실 나는 나쁜 일보다는 좋은 일을 더 많이 해요"라고 말하는 '보상'이다. 이는 아주 교묘하고 기가 막히게 잘 먹히는 변명 양상이다.  275-276


우리는 완벽할 수도 없고, 변명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렇지만 위의 여섯 가지 변명은 그저 변명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적어도 좀 더 나은 여행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잘못을 변명하는 것은 괜찮다. 다음에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한다면 말이다.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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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투성이의 문 위에 붓질을 할 때마다 더러움이 지워졌다. 송곳으로 그은 숫자들이 사라졌다. 핏자국 같은 녹물들이 사라졌다.  17



배내옷

내 어머니가 낳은 척 아기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고 했다. 

달떡처럼 얼굴이 흰 여자아이였다고 했다. 여덟 달 만의 조산이라 몸이 아주 작았지만 눈코입이 또렷하고 예뻤다고 했다. 까만 눈을 뜨고 어머니의 얼굴 쪽을 바라보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어머니는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아버지와 함께 외딴 사택에 살았다. 산달이 많이 남아 준비가 전혀 없었는데 오전에 갑자기 양수가 터졌다. 아무도 주변에 없었다. 마을에 한 대뿐인 전화기는 이십 분 거리의 정류장 앞 점방에 있었다. 아버지가 퇴근하려면 아직 여섯 시간도 더 남았다.

막 서리가 내린 초겨울이었다. 스물세 살의 엄마는 엉금엉금 부엌으로 기어가 어디선가 들은 대로 물을 끓이고 가위를 소독했다. 반짇고리 상자를 뒤져보니 작은 배내옷 하나를 만들 만한 흰 천이 있었다. 산통을 참으며, 무서워서 눈물이 떨어지는 대로 바느질을 했다. 배내옷을 다 만들고, 강보로 쓸 홑이불을 꺼내놓고, 점점 격렬하고 빠르게 되돌아오는 통증을 견뎠다.

마침내 혼자 아기를 낳았다. 혼자 탯줄을 잘랐다. 피 묻은 조그만 몸에도 방금 만든 배내옷을 입혔다. 죽지 마라 제발. 가느다란 소리로 우는 손바닥만한 아기를 안으며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처음엔 꼭 감겨 있던 아기의 눈꺼풀이, 한 시간이 흐르자 거짓말처럼 방긋 열렸다. 그 까만 눈에 눈을 맞추며 다시 중얼거렸다. 제발 죽지 마. 한 시간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모로 누워 그 몸이 점점 싸늘해지는 걸 견뎠다. 더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20-21



하얗게 웃는다

하얗게 웃는다, 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

그는 하옇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 (아마)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80



당의정

자신에 대한 연민 없이, 마치 다른 사람의 삶에 호기심을 갖듯 그녀는 이따금 궁금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먹어온 알약들을 모두 합하면 몇 개일까? 앓으면서 보낸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마치 인생 자체가 그녀의 전진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반복해서 아팠다. 그녀가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힘이 바로 자신의 몸속에 대기하고 있는 것처럼. 그때마다 주춤거리며 그녀가 길을 잃었던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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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가 인생 최고의 쾌락으로 인정받는 가운데, 여행은 그중에서 가장 값비싸면서도 가치 잇는 소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4


현대인이 소비를 통해 유토피아로 초대된다면, 그 유토피아의 최정상에는 여행의 장소가 있다.  5


아마 현대사회에서 여행 정도의 지위를 부여받고 있는 것은 돈과 사랑 외에는 없을 것이다.  6


이전까지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적 탈출구는 '섹스'라 말해져 왔다. 자유주의, 여권 신장, 자본의 확장은 정확히 섹스 산업의 번성과 맞물렸다. 이제 이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여행이 되어가고 있다.  7

 

사랑이나 여행은 모두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 그것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기 시작하면, 즉 모든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처럼 권유되고 심지어 '강요'되기까지 할 때는 반드시 왜곡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제대로 사랑하고 제대로 여행하려면, 먼저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사랑과 여행을 분명히 보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맹목적으로 요구되는 것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어느덧 자기도 모르게 '욕망'하게 된 것들에 대해 의심해야 한다.  8



나는 여행을 다녀왔다거나 여행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꼭 질문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여행에서 무엇을 얻으셨나요? 여행이 왜 가치 있다고 생각하세요? 여행이 왜 좋으세요? 여행을 다니며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19



현대인에게 권태는 일상이 되었다. 그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쾌락도 일상이 되었다. 도시는 권태를 조장하고, 그것을 잊게 만드는 일시적 향락을 제공한다. 

어느 시점이 되면 우리는 깨닫는다. 내가 이 회색의 도시 한가운데에서 탈색되고 있다는 것을, 색채 없는 무미건조한 도시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21



도시는 우리에게 삶의 형식과 안전망을 제공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삶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완벽함 때문에 우리는 도시에서, 그 도시 속에 붙박인 우리의 현시에서 떠나고 싶어진다. 그 이유는 저 태곳적의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모순적이게도, 변덕스럽게도, 용납하고 싶지 않게도 자유와 안락이라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을 모두 원한다.  22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이러한 '이미지를 향한 갈망'을 인간의 중요한 특성으로 지적한다. 라캉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상상계와 상징계로 뒤덮여 있다. 여기에서 상상계란 이미지의 세계이며, 상징계는 언어적 질서의 세계이다. 우리 머릿속은 늘 이미지와 언어로 뒤얽혀 있으며, 영원히 그 두 가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이미지나 언어가 우리를 '완벽하게 만족시켜 주리라' 믿으며 욕망하고 나아가지만, 실제로는 무한한 욕망의 연쇄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면, 뒤이어 다른 이미지를 욕망한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언어(의미)를 획득하더라도, 곧 욕망해야 할 다른 언어(의미)가 생긴다.

여행에 대한 갈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특정한 여행지에, 정확히 말해 그 '여행지의 이미지'에 완벽한 만족이 있을 거라는 환상을 가진다. 그 이미지에는 자유, 낭만, 쾌락, 꿈, 희망, 관능, 행복, 열정, 성장, 드라마, 성공, 여유, 휴식, 모험과 같은 온갖 언어가 덧씌워진다. 이렇게 이미지와 언어가 결합한 '그곳'은 우리에게 뜨거운 갈마의 대상이 되지만, 정작 그곳에 도착하더라도 우리가 꿈꾸던 완벽한 향락은 존재하지 않느다. 우리는 다시 다른 여행을, 여행의 이미지를, 여행이 줄 어떤 언어(의미)를 꿈꾼다.  26



'여행은 단순히 여해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에 대한 열망들이 집약되어 있다.  27



우리는 자신의 삶에 좀 더 엄밀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욕망, 우리가 선택한 삶의 방식, 결국 우리를 규정하게 되는 존재 방식에 대해 더 엄격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삶은 짧고,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은 지나가고 나서야 후회로 되돌아오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넘쳐나는 가짜 여행들 속에서, 혹은 온갖 욕망으로 점철된 환영들 속에서 '진짜 여행'을 가려내야 한다.  28



'자유'는 모든 조건과 억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어떤 '순수한 상태'라고 오해되곤 한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한계 속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런 자유를 누리는 건 불가능하다. 오히려 자유는 자기가 어떤 현실에 속해 있는지를 아는 것이며, 그러한 현실적 조건들을 어떻게 수정할 수 있는지에 관여하는 것이다. ..

여행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자유는 나를 조건 지어 왔던 수많은 요소들과 의무들에 대해 다시 생각할 최선의 기회를 제공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뭐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재정립하고 새롭게 장악하며 수정할 수 있는 기회와 힘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31



여행에는 우리가 살아온 현실, 앞으로도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의 논리가 아니라 다른 논리로 살아 보고자 하는 욕망이 들어 있다. 특히 배낭여행객의 마음은 이 한 번뿐인 인생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방식의 삶을 체험해 보고자 하는 욕망으로 움직인다. 그 이후에는 다시 이 현실로 돌아올지라도, 조금은 다른 마음으로, 조금은 다른 형태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미한 희망을 가지고 저 '다른 삶'으로 떠나 보는 것이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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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원래 대학에서 강의 했던 교양강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 진 것이다.  9


내가 가르치는 것과 똑같은 강좌를 2~3년 정도 담당했던 한 여자 제자와 사석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강의는 할 만한가? 어렵진 않나?"

"별로 어렵진 않은데, 재미가 없어요."

"재미가 없다? 왜?"

"성이라는 게.. 뭐랄까, 너무 뻔한 내용이잖아요. 1~2년 강의하고 나면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없어요. 새로 연구하거나 고민해야 할 내용도 없고..."

... 난 물론 그녀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한 가지는 인정해야만 했다. 성이라는 것이 이제는 대학에서조차 조금은 식상하고 진부한 주제가 되었다는 것 말이다.  18


바야흐로 성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두(話頭 말할화 머리두)가 된 느낌마저 든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창녀인 소냐에게 "여자의 몸에는 평생 파먹어도 마르지 않는 광산이 숨겨져 있지"라고 빈정거렸지만, 어쨌든 우리는 드디어 성이라는 보물단지를 찾아낸 셈이다. 아무리 파내더라도 마르지 않는 샘, 진지한 성찰의 가능성과 통속적 흥미를 동시에 충족시켜줄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20


'성의 과잉'이라고 부를 만한 요즘의 추세 속에서, 또 이론적, 실천적 혼란과 갈등 속에서 성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이나 학문적 관심까지도 시중에 넘쳐나는 수많은 '섹스 이야기'중 하나로 취급될 위험이 있다.  22


"이 책은 해답을 주기 위해 있는 게 아니라 고민을 주기 위해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23


'우리들은 성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사실 시시껄렁한 음담패설 말고는 성에 대한 이야기를진지하게 나눠본 적도 없지 않는가? 사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자유로이 대화하거나 배울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지성인으로서 교양을 쌓아야 한다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자 삶의 일부인 성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지 자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24세, 남학생)  26


성 그 자체가 원래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이라면, 왜 우리는 성에 대해 그토록 부끄러워하는가? 왜 우리는 성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진실을 계속 감추고 부인하는가? 왜 우리는 생명의 원천인 성을 때로는 숭배하고 칭송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더럽고 불결하다 욕하고 또 철저한 금기의 대상으로 삼는가? 아니, 인간의 성에 대한 '단 하나의 객관적 진실'이라는 게 도대체 있기는 한 건가?  28-29


성에 대한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성찰이나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성이 너무나 일상적이고 낯익은 대상이라는 데 있다.  33


육체 없는 성이 있을 수 없는 한 성에 대한 관심은 곧 육체에 대한 관심 아닌가? 물렁거리는 살덩어리와 끈적거리는 액체로 이루어진 육체, 끊임없는 욕망으로 우리를 들뜨게 하고 우리의 고귀한 영혼을 부패시키는 육체, 언젠가는 사멸해버릴 그 저주스러운 육체 말이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는 플라톤의 경구가 잘 말해주듯, 성에 대한 관심을 갖는 순간 우리는 육체에 붙들려 영혼의 순수함과 완전한 앎을 포기해야 한다는 공포가 철학자들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욕망의 힘이 두려워 자신의 성기를 잘라버렸던 초기 교회의 금욕적 수도사들처럼 육체의 성을 부정했던 것이 아닐까?

고대 그리스 이래로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로고스(Logos), 즉 이성과 논리와 언어를 진리 탐구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로고스=진리'라는 등식에 입각해서 피와 살을 지닌 인간의 육체, 아무리 애를 써도 순수하게 논리화될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거의 본능적으로 혐오했는지도 모른다.  46-47


프로이트는 이 주제를 탐구하면서 '성보다는 좀 더 부드러운 '사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사랑이란 기본적으로 성기의 결합이었으니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성적인 사랑'과 다른 종류의 사랑을 구별할 수 없다.  50


우리는 성이라고 하면 단순히 생물학적인 성의 구별이나 직접적인 성행위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의미의 성을 영어로 보통 '섹스(sex)'라고 한다. 서구에서 1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 말은 사실'(둘로) 나뉜 것'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의 'sextum'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말이 처음에는 주로 생식기관의 차이로 구분되는 '생물학적 성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다가, 19세기부터 남녀 양성 사이의 성 관계나 성적 결합을 뜻하는 말로 그 의미가 확대된 것이다.  51


예컨대 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도덕, 성과 관련된 제도나 관습, 이데올로기, 다양한 성 심리나 문화, 성욕, 성적 정체성 등을 모두 살펴봐야 하는데, 이런 넓은 의미의 성을 단순한 '섹스'와 구분하여 학계에서는 보통 '섹슈얼리티(sexuality)라고 부른다.  52


일반적으로 서구 언어에서는 어휘가 형태적으로 확장될 때 '1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명사'가 '2 형용사'로 바뀐 뒤에 다시 '3 그 형용사의 명사형'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살펴보자면, 'unverse(우주)'라는 낱말이 'unversal(우주의, 보편적인)'로 바뀐 뒤 여기에 추상명사를 만드는 어니 '~ity'가 붙어서 'universality(보편성)'라는 새로운 명사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때 'unverse' 와 'universality'를 비교해보면, 전자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사물인 반면에 후자는 추상적 성질임을 알 수 있다. 물론 'universality'는 'unverse'가 갖고 있는 특성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두 명사의 존재론적 차원은 매우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cause(개별사건의 원인)'가 ''causai(원인의)'이 된 뒤 다시 'causality(인과성, 인과관계)'로 바뀌면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의 새로운 명사가 탄생한다. 따라서 sex(구체적인 성행위, 성별) -> sexual(성의, 성적인) -> sexuality(성욕, 성과 관련된 태도, 성적 정체성 등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추상적 성)라는 형태적 어휘 변환 과정을 거칠 때에도 그 의미에 심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52


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성을 '자연적으로 주어진 사실'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구성물'로서 파악하게 되고, 또 그 속에 담겨 있는 사회적, 정치적 의미들까지 탐구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53


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적어도 아래와 같은 세 가지의 접근법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첫 번째로 가능한, 그리고 다른 모든 방법의 기초가 되는 것은 역사적 접근법이다. ..

역사적 접근의 진정한 의의는 현재의 성 관념 및 제도들의 기원과 변천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가운데 "성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

당연히 "더 적은 사변과 더 많은 증거"라는 원리가 지배한다. 따라서 성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라는 애초의 취지가 무색해지기 쉽지만, 성에 관해 쓸 만한 조감도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이 고달픈 과정을 가능한 한 성실히 밟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아마 이론적, 과학적 접근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건축물에 비유해보곤 하는데, 그 토대가 생물학적 측면이라면 기둥들은 인류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측면들을 가리키고 지붕은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성의 각 측면을 분해하여 그 각각을 해당 실증과학의 연구 성과에 따라 고찰하고, 다시 밝혀진 사실들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종합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세 번째 방법은 실천적 문제 중심의 접근법이다...

성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이나 태도는 급변하고 있으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조건들도 실존한다. 단지 사태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만이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53-57


비판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려서 판단하거나 밝히는 것"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기묘하게도 비판이라는 말을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남의 잘못을 들춰내어 따지고 공격하는 것"을 가리킬 때 쓰는 경우가 많다.  58


철학은 경험적으로 주어진 사실들을 기술하거나 설명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성찰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그 이면과 전체적 연관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려고 애쓴다.  58-59


철학은 어떤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며, 성과 관련된 사실들을 실증적으로 직접 탐구하기보다는 그러한 사실들의 의미와 근거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철학이 대상으로 삼는 성은 개별과학자들이 탐구하는 대상과 같은 하나의 사물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진 것, 즉 우리의 언어와 의식 속에 녹아들어 있고 우리 자신의 실천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그 무엇이다. ..

담론(discours)이란 "특정한 목적에 따라 특정한 주체에 의해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된 이야기"를 가리킨다.  59


삶 속에서 성은 언제나 일정한 담론으로서 위세를 떨치고 있으므로 성에 대한 철학의 비판 작업 또한 바로 이러한 '담론으로서의 성'을 분석하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 스스로 새로운 성 담론을 구축해나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60


사람들에게 섹스와 연결되는 낱말들을 적어보라고 하면, "사랑, 결혼, 쾌락, 생식, 욕망, 금기, 남녀의 성기, 지배, 도덕, 성범죄, 변태, 누드, 포르노, 임신, 자위, 신비(스러움), 정력, 매춘, 생리..."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답이 두서없이 튀어나온다. 이처럼 다양하고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이미지와 개념들은 사실상 섹스라는 말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이 정말 복합적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63


성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이처럼 담론화된 성 또는 성 담론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 있다면, 이제 그것은 단순히 "무엇이 진리인가?"를 찾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이 진리라고 할 때 그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는 "왜 그것이 진리라고 여겨지는가?" 등등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69


인간의 성에서 본능적이고 생물학적/생리(학)적인 요소가 더 중요한가, 아니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요소가 더 중요한가를 둘러싼 논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진실은 두 요소의 결합에 의해 인간의 성이 만들어졌다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시선, 우리의 태도, 우리의 평가가 아닐까? 어떤 의도에 따라, 어느 쪽에 더 가중치를 두고, 어떤 요소에 더 주목하며, 어떤 사실들을 더 소리 높이 외치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결국 이러한 '본느의 담론' 자체가 우리의 특정한 인식과 실천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또 거꾸로 이 담론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 성에 대한 인식과 실천이 달라진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74-75


우리는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과 본능들이 동물과 어떻게 다르며, 또 그것이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요인들과 뒤얽히면서 어떻게 우리의 성을 창출해냈는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75


"나는 언제 누구와 섹스해도 괜찮은가?" ...

인간도 동물처럼 오직 생식만을 위해 일정 기간에만 섹스를 했다면 아마도 성에 관한 규제 같은 것은 불 필요했을 것이다.  76


성에 대한 현대의 과학적 연구들은 무지에서 비롯된 수많은 오해를 바로잡고 성 연구에 큰 기여를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바로 통계의 신화와 오르가슴의 신화다.  83


성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단순히 더 많은 쾌락을 가져다주는 기교를 찾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쾌락의 담론 자체를 해부하고 그 속에 들어있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함으로써 성적 쾌락과 이를 둘러싼 논의들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는 데 있다.  84


도덕의 담론. 사실 도덕의 담론은 성과 관련하여 가장 흔하고 표준적인 담론이며 또 빛나는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의 담론이기도 하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성은 무엇보다 먼저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다.  85


우리 사회에서는 평소 그다지 도덕적으로 살지도 않으면서 성에 관해서만큼은 겉으로만 도덕적인 척하거나, 타인의 심각한 공적인 비행(非行 아닐비 다닐행)에 대해서는 지극히 관대하면서도 성에 관련된 문제라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다.  86


이러한 불균형과 자기모순은 성에 관한 '도덕의 담론'과 뿌리 깊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담론의 핵심은 "육체에 기반을 둔 성은 우리를 파멸시킬 수 있는 유혹이므로, 윤리만이 우리를 파멸로부터 구해준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의 밑바닥에는 다시 "섹스란 원래 동물적이고 더럽고 천박한 것인데, 도덕과 제도의 통제를 받을 때에만 인간적인 행위로 승화되고 용인될 수 있다"는 입장이 깔려 있다.  87


'인간의 성에 대한 철학적 고찰'의 핵심은 .. "우리는 생물학적/생리(학)적 본능이라는 말로써 무엇을 생각하고 실천하려 하는가?"를 비판적으로 분석해보는 데 있다. 독자들 스스로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한 번 물어보기 바란다. 

"생물학적/생리(학)적 본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 나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사용하는가? 생물학적/생리(학)적 본능에 대한 이해가 나의 성적 실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101-102


인간은 성과 무관한 영역, 아니 오히려 성을 부정하거나 억압하는 영역을 지니고 있기에 인간다워질 수 있다고 보는 견해야말로 인간의 성을 이해하기 위해 버려야 할 첫 번째 오해인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도덕이나 종교, 예술에서 올 뿐, 벌거벗고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을 때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똑같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렇다면 인간은 왜 벌거벗고 뒹구는 걸로 만족하지 않고 포르노를 만드는지, 또 때로는 벌거벗고 뒹구는 대신에 속된 말로 '변태'라고 불리는 엉뚱한 행위 따위에 집착하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

난잡하고 무분별하게 섹스를 즐기는 것을 '동물적' 이라고 비난하는 우리의 언어습관이 얼마나 부당한지.  106


20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진화생물학의 풍부한 연구 성과는... 더 폭넓은 이해를 위한 발판 노릇을 할 때에만 의의를 갖게 될 것이다.  107


도대체 왜 인간의 성은 생식이라는 자연적 울타리를 넘어서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러한 이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인간의 암컷, 즉 여자에겐 발정기가 없다. 인류의 선조들이 협동노동에 의해 사시사철 먹이를 구할 수 있게 됨으로써 영양 상태가 좋아졌고, 그 결과 특정 시기에만 번식을 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일 년 열두 달 임신이 가능하다는 점 하나만 봐도 다른 동물과 비교하면 엄청난 진보를 한 셈이지만...  108


여성의 배란이 감춰져 있어서 심지어 본인 자신도 알 수 없다.. 

'성 전략(sexual strategies)'을 낳았다. 인간의 선조들은 언제 섹스를 해야 임신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상대를 유혹하고 섹스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복잡다단한 '성 전략'을 발전시켜야 했던 것이다.  110


컴포트(Alex Comfort)가 <섹스의 즐거움(The Joy of Sex)>에서 지적한 대로, "과거에는 성행위의 윤리성에 대해 왈가왈부했지만, 요즘에는 성행위에서 어떻게 만족을 얻을 것인가에 신경을 쏟고 있는" 것이다... 더 많은 쾌락을 얻기 위한 무의식적 노력이 인간의 성 행동과 의식을 규정해왔다고 볼 수 있다.  111


성적 쾌락의 중요성은 인간의 몸 구조에서도 확인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더 많은 쾌락을 얻을 수 있도록 꾸준히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몸 크기와 비교할 때 엄청나게 큰 남자의 성기, 엄청난 양의 신경망이 밀집되어 민감하기 짝이 없는 여성의 클리토리스, 매끄러운 피부와 온몸에 퍼져 있는 성감대, 다양한 성적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신체적 특징들, 예컨대 유난히 발달한 여성의 젖가슴이나 엉덩이, 높은 목소리, 성기 주변에만 남아 있는 털, 붉은 입술, 애교웃음, 예민하게 변하는 눈동자 등등이 이를 증명한다. 또 직립보행에 의해 자유로워진 손과 변화된 성기 위치는 효과적인 애무 동작과 다양한 성교 체위(體位 몸체 벼슬위)를 가능하게 해주었으며, 두뇌의 발달에 따라 사고 능력과 감정도 풍부해졌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성행위를 좀 더 풍요롭고 즐겁게 만든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쾌락의 중요성은 섹스에 소요되는 시간에서도 잘 드러난다. 짧게 끝나는 섹스를 가리켜 속된 말로 '토끼씹'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실제로 토끼의 교미는 10초 이내에 끝나며, 그 밖의 대부분의 동물들, 심지어 정력의 상징인 말이나 백수의 왕이라는 사자의 경우에도 길어야 30초를 넘기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인간의 성교 시간은 수 분, 때로는 수십 분까지 늘어날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 시간을 더 늘리기 위해 무진 애를 쓰기도 한다... 동물들은 단지 쾌감을 증대시키기 위해 인간처럼 길고 복잡한 전희(前戱 앞전 놀희)를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상적인 인간 남녀는 성교를 하기 전에 꽤 오랫동안 서로의 몸을 공들여 애무한다. ..

여성의 경우에는 성교를 통해 오르가슴을 얻는 게 쉽지만은 않으며,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남자는 사정이라는 생리적 매커니즘 때문에 비교적 쉽게 오르가슴을 경험하고 확인할 수있지만, 사정 그 자체가 최고의 성적 만족을 자동적으로 보장해주지 않는 한 결국은 마찬가지다.  112-113


'강한 성적 쾌감'은 인류의 생존에 어떤 도움을 준 것일까?  115


인간이 섹스를 통해 추구하는 쾌락은 자극에 대한 단순한 육체적 반응만은 아니다. 물론 강렬한 생리적 반응이 우리의 뇌리 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러한 쾌감 속에서 확읺되는 총체적 만족감, 즉 '상대와 하나가 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섹스할 때의 자세에서도 확인된다.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얼굴을 마주보고, 즉 서로의 감저오가 반응을 확인하면서 성행위를 한다. ...

얼굴을 마주보는 체위는 우리의 신체구조, 성기의 위치와 잘 맞기 때문에 좀 더 편할 뿐만 아니라, 서로 마주봄으로써 강한 심리적, 정서적 유대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 유대감은 더 나아가 사회적 교류와 관계를 강화시키는 역할도 하며, 바로 이런 측면을 고려할 때만 인류의 정적 진화가 좀 더 효과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116


헬렌 피셔는 <성의 계약(The Sex Contract)>에서 아주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하고 있는데, .."성은 인간 생활의 모든 것을 작동하게 하는 점화장치의 불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 새끼의 양육에 성공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문제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생존을 결정짓는 중대 사항이므로, 인류의 선조들이 번식의 안전을 위해 좀 더 강력하고 지속적인 유대를 발전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피셔에 따르면 이처럼 새끼의 공동 양육과 지속적인 섹스를 통해 형성된 강한 정서적, 사회적 유대를 기초로 최초의 가족과 공동체가 생겨났으며, 이와 더불어 협동심, 애타심, 의무감, 수치심, 정의감,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공포, 성적 질투 등의 기본적 감정들과 갖가지 의사소통 수단, 규칙, 친족 체계, 도덕, 복잡한 사고, 여러 가지 관념들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117-118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바람피우기'가 일부 부도덕한 사람들의 비정상적인 일탈행위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119


생식 결과의 다양성, 다산성(多産性 많을다 낳을산 성품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한 명의 상대하고만 섹스하는 것보다 여러 명의 상대와 섹스하는 게 더 낫기 때문이다.  120


여자들의 바람기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 학자들에 따라서는 여자 또한 자신의 자손에게 더 나은 유전자를 물려주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남자들, 그것도 괜찮은 남자들을 골라 성 관계를 가지려는 심리를 발전시켜왔다고 대답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 양이 아닌 질적인 측면에서 더 나은 생식 결과를 얻기 위해 바람을 피운다는 것이다.  121


우리는 바람기의 원인에 대한 두 번째 답을 찾아봐야 한다... 사람들이 바람을 피우는 좀 더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쾌락과 연관이 잇을 것이다. 인간의 성이 단순한 생식의 효율성을 넘어서 쾌락 그 자체를 지향하게 됨에 따라 섹스에서 다양성과 변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인간 본성의 일부가 되었으며, 이것은 남녀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성향을 잘 보여주는 용어 중에 '쿨리지 효과(Coolidge effect)'라는 게 있다. 미국 대통령이던 쿨리지가 어느 날 부인과 함께 어떤 농장을 방문했는데, 마침 수탉이 암탉과 교미를 하고 있었다. 이를 본 부인이 안내인에게 물었다. "저 수탉은 하루에 몇 번이나 저짓을 하나요?" 안내인이 대답하기를 "수도 없이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은 독기 어린 목소리로 "그 사실을 대통령께 좀 전해주세요"라고 했다. 부인의 말을 전해들은 대통령이 물었다. "그런데 그 수탉은 늘 같은 암탉과 관계를 하나?"  안내인 왈 "아닙니다.  매번 다른 암탉과 하지요". 이에 대통령은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 사실을 영부인께 전해주게." 우스갯소리 같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이 상대가 바뀔 때마다 더 큰 흥분과 만족을 느끼며, 이를 가리켜 '쿨리지 효과'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런 현상은 여자에게도 해당된다. <킨제이 보고서>에 따르면 "언제 성적 흥분을 가장 크게 느끼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남녀의 대답이 크게 달랐지만, 양쪽 모두 1위를 차지한 답은 "새로운 상대와 섹스를 할 때"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바람기는 우리가 처해 있는 또 다른 모순을 보여준다. 강력하고 지속적인 유대를 추구하는 본성과 다양하고 변화 있는 쾌락을 추구하는 본성이 우리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면 인간의 성이 단순하게 결정되지 않으며 근본적인 모순 속에서 정말 다양한 스펙트럼을 만들어낸다는 점이야말로 신비에 싸여 있는 진화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인지도 모른다.  122-123


옛날 아라비아의 속담처럼 "사람이란 그들의 부모보다는 그들의 시대를 더 많이 닮는다."  124


* 엘리아스(Nobert Elias)는 <문명의 역사>에서 성적 수치심이나 충동의 조절 또한 문명의 진보와 함께 발달한 심리적 메커니즘이기 때문에, 야만적이거나 원시적인 사회에서는 알몸이나 성행위 등에 대해 문명인들과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엘리아스의 이런 주장은 최근 몇몇 학자들에 의해 근거 없는 편견과 독단이라고 비판받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한스 페터 뒤르(Hans Peter Durr)의 <나체와 수치의 역사>를 보라. 뒤르에 따르면 알몸과 성에 대한 수치심은 문명의 발달 정도와 관계없이 모든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  129


좀 엉뚱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여자들이 여름에 소매 없는 옷을 입을 때 겨드랑이 털을 없애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대개 "보기 흉하기 때문"이라거나 "지저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정답일까? 우리들이 심리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든 간에, 사실 겨드랑이 털을 없애는 진짜 이유는 미적 감각이나 위생 문제와는 거의 무관한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성들이 겨드랑이 털을 없애는 이유는 여성들이 다리를 벌리고 앉지 않는 이유와 동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겨드랑이 털이란 무엇인가? 겨드랑이 털은 사춘기 이후에 나기 시작하며, 성기 주변의 털과 더불어 성적 성숙을 상징하는 우리 몸의 대표적 신호다. 게다가 그 털은 성기 주변의 털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기 때문에 너무 자극적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겨드랑이 털 자체가 강한 성적 자극을 보내는 신호이기 때문에 남에게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서양의 고전 회화에서 알몸을 그리면서도 음모만은 그리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비록 알몸이라 하더라도 음모가 없다면 성적인 의미가 제거되어 외설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마치 여성이 다리를 벌리는 자세가 성교 자세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금기사항인 것처럼 말이다.  130


고대 중국에서는 여자를 '적(赤=불꽃)', 남자를 '백(白=흙)'으로 상징했는데, '적'은 전통적으로 창조력, 성적 능력, 생명, 빛, 갓 태어난 아이, 알몸의 색깔 등을 나타내는 반면 '백'은 죽음이나 소극성, 성적 무기력 등을 뜻했다. 이 점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성적으로 우위에 있었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또 고대 중국의 신화나 전설에서 여자는 특히 성(=우주적 자기재생산)에 관한 한 신비한 마력을 가진 존재였다. 유명한 <소녀경>을 비롯한 각종 '성 교본'에서도 여자는 완벽한 성 지식을 가지고 성을 수호하는 위대한 스승으로, 남자는 무지한 제자로 그려져 있다. 여자는 교접을 통해 자신의 무한한 기를 남자에게 공급하는 '태모(太母 클태 어미모)'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주나라 이후 가부장제가 확립되면서 음과 양 중 양을 더 중시하게 되고 태초의 여성숭배는 변질되어 '성적 흡혈주의(sexual vampirism)', 즉 여성에 대한 착취로 타락했지만, 어쨌든 음을 중시하는 흐름은 도가나 신비사상, 샤머니즘 등을 통해 민중신앙 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132-133


남성들은 늘 여성의 우월한 성적 능력을 숭배하면서도, 때론 그것을 두려워하고 힘으로 통제하려 애써왔던 것이다. 어쨌든 경배와 공포가 뒤얽힌 지점에서 이제 성 자체가 신비스러운 베일에 가려진 보편적 금기대상이 되며, 그 금단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어떤 신성한 힘에 의해 그 자격과 절차, 구체적인 방법 등을 허락받아야 한다. 한마디로 자연 상태에서는 '보편적 허용과 특수한 금지'가 기본 규율이었던 반면, 이제 반대로 '보편적 금지와 특수한 허용'이라는 원칙이 성의 질서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135-136권력의 이동은 늘 체제의 근본적 전환을 가져오는데.. 남근숭배가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면서 원시사회의 성 관념 및 성 풍속들이 서서히 제거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여성에 대한 숭배는 멸시와 경계로 바뀌고, 종종 종교의식이나 주술과 연관되어 남녀 모두에게 생식과 쾌락의 결합 또는 쾌락의 자유로운 추구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원시적인 성 풍속들은 좀 더 엄격한 도덕적 통제에 묶이게 된다.  145


남성의 입장에서는 자기 자식을 낳아서 대르 잇고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므로, 이제 여성의 불임은 큰 죄가 되었다. 불임을 막는 풍속들이 생겨났고, 임신중절이나 자위행위, 남색(男色 사내남 빛색) 등은 엄하게 처벌되었다. 과거에 공동체 전체에 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찬미되던 여성의 생식력은 이제 한 남자의 값진 재산이 되었으며, 매매혼이나 약탈혼이 보편화되었다.  147


어차피 우리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내고, 우리가 만든 신화 속에 갇혀서 산다. 신화에 대한 비판과 분석까지도 그러한 순환의 고리를 완전히 잘라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151



15~16세기에 시작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 육체와 욕마의 해방을 주장함과 동시에 성대 대해서도 좀 더 긍정적인 사고를 제공하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르네상스 초기 처음에는 '성의 해방'이 주로 예쑬의 에로티시즘을 통해 표현되었지만, 사실상 이것은 중세 말 십자군 전쟁, 페스트 등으로 인구가 격감하고 생산력이 정체함에 따라 전면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결혼과 출산이 최고의 미덕으로 칭송되기 시작했던 사회경제적 배경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 이후 노동력과 군대의 필요 때문에 더욱 가속화되었다.  167-168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루터(M. Luther)는 가톨릭교회의 극단적 금욕주의와 위선적인 행태들을 비판하면서도 부부간의 성애를 긍정하고 인간 육체의 불완전함을 인정했다. 또 칼뱅(J. Calvin)은 성행위는 성스러운 것이며, 모든 성인은 가정을 가져야 하며 가정 안에서 삶을 공유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가정을 공동체의 주춧돌로 파악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주장은 가족을 중심으로 새로운 생산양식의 주체가 되어야 할 초기 부르주아 계급의 입장(가족의 노동력을 중심으로 하는 소상품생산은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학을 했다)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이는 그들이 이제 성 문제를 종교적 문제나 단순한 도덕의 문제가 아닌, 사적 생산과 결부된 개인의 문제로 파악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근대 초기는 부르주아사회의 성 윤리가 만들어지고 정착되는 시기이기도 했는데, 개인들 간의 계약으로서 결혼, 일부일처제 등이 확고한 원칙이 됨에 따라 역설적으로 그 보완물로서 성 매매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168-169


18세기에 들어서서 이른바 절대주의 시대가 되자 육체는 더욱더 성적 도구가 되었고, 몰락해가고 부패한 기생계급이 되어버린 귀족들의 성 관념과 성적 유희는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성을 단순한 쾌락의 수단, 유희의 도구로만 파악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여성의 육체도 파편화되어 관능적 쾌락의 도구로만 평가되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여성의 가슴이나 다리를 노출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심지어 젖가슴이나 허리, 허벅지, 엉덩이, 생식기 등을 각각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풍습까지 생겨났던 것이다.(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자신의 젖가슴을 석고로 모형을 떠서 과일 그릇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풍속의 역사> 제3권 까치, 1987. 43쪽)  170


이 시기에는 육체적 쾌락을 위한 연애기술이 숭배되었으며, 연애란 '두 피부의 접촉'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만연하여 성의 쾌락만이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연애를 위한 성교육, 그러니까 상대를 유혹하고 즐거움을 누리는 기술에 대한 교육이 성행했으며, 상류사회에서는 외설적인 농담을 주고받는 기술이 품위 있는 풍류로 취급되기도 했다. ..

성적 타락이 심해지면서, 지배계급 안에서는 극단적이고 심지어 변태적인 성욕을 추구하는 경향이 생겨났고, 반대로 중간계급 사이에서는 감상적 연애나 지나치게 관념화된 정신적 사랑 등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처럼 연애풍속은 거의 문란하다 할 정도로 자유분방해졌지만, 결혼은 여전히 인습에 묶여 있었다. 귀족들에게 아내나 애인의 아름다움은 단지 과시의 수단이었고, 결혼과 연애는 완전히 분리된 채 혼인은 철저한 거래가 되었다. 특히 귀족과 대부르주아지 사이의 정략결혼이 많았는데, 그것은 돈을 벌어서 성공한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딸을 귀족에게 갖다 바침으로써 사회적 명예를 구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하층 부르주아지들 사이에서는 '첫눈에 반한 사랑'이 경멸받았다. 왜냐하면 사회적 권력이나 지위도, 커다란 재산도 없었던 사람들은 배우자를 고를 때 서로를 관찰하고 시험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근검절약하는 생활태도와 성실성이었기 때문이다.  171-172


육체적 쾌락을 탐하는 시대 분위기에 어울리게 절대주의 시대는 성 매매가 대호황을 누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18세기 말 유럽 최대의 도시였던 파리의 인구 60만 중 4만 명이 성 매매 여성이었으며, 오스트리아의 빈에는 1만 4천 명, 런던의 경우에는 첩 말고도 5만 명 이상의 성 매매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도시의 하층계급에 속하는 젊은 여자들은 대부분이 매춘부가 되었고, 르네상스 시대처럼 성 매매 여성이 특별한 복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소도시나 농촌에서도 은밀한 방법으로 성 매매가 지속되었다. ..

여관, 온천, 카페, 식당, 주점 등이 모두 성 매매에 이용되고 뚜쟁이들에 의해 시골 처녀들이 도시로 팔려가는 일도 흔했는데, 성 매매의 성행은 필연적으로 성병의 확산을 가져왔고 결국 19세기까지 매독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이 시기의 성 풍속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방탕하기 그지없는 '성적 향연(Orgie)'이 성행했다는 점일 것이다. 예컨대 일부 귀족들 사이에서는 축제에서 여자 파트너를 서로 바꾼다든지, 넷 또는 여섯이 참여하는 섹스 파티를 연다든지, 채찍이나 물리적 도구, 여러 가지 향료와 최음제 등을 사용한다든지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는데, 악명 높은 사드 후작의 기행(奇行 기이할기 다닐행) 또한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전제로 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프랑스혁명 후 절대주의가 종말을 맞이하고 산업사회가 도래하면서, "노동하고 활동하는 인간, 감정, 이성, 육첵 통합된 새로운 인간"이라는 새로운 미의 이상이 생겨났다. 퇴폐적인 것보다는 건강한 아름다움이 중시되기 시작했고, 복장에서도 민주화가 이루어져 여성들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활동적이며 자연스러운 복장, 다시 말해 "옷을 입고도 벗은 것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복장을 수용하게 되었다. ..

이제 계급과 무관하게 모든 여성은 아주 억압적인 청교도 윤리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다.

중매와 구혼 광고가 일반화되면서 결혼 또한 철저한 계산임이 백일하게 드러났는데, 이러한 추세는 부르주아지의 경우에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

성에 대한 억압적인 청교도 윤리에도 불구하고, 모든 계급에서 혼전 성 관계는 점점 늘어나 일종의 보편적 현상이 되었으며, 자본에 의한 임금 통제와 빈곤 때문에 일찍 결혼할 수 없었던 젊은 독신 노동자들은 자유연애를 통해서 욕망을 해소하려고 하게 되었다. 또 이들의 성에 대한 무지는 미혼모, 낙태 등의 심각한 사회문제를 낳았고, 결국 부르주아사회가 그토록 신성시하던 '가족의 가치와 구속력' 마저 약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172-174


('자유연애'란 문자 그대로 독립된 개인들이 자신의 욕망과 필요에 따라 사랑하는 상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것을 가리킨다.)  175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현대 부르주아사회가 이룩해낸 하나의 공로는 성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이해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음탕한 사색과 무지로부터 성을 해방시키는 첫걸음은 바로 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

형대 사회에서 일어난 성의 혁명적 변화 중 하나는 아마도 산아제한과 임신중절, 피임법 등의 발전으로 인해 점차 생식과 성애가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점일 것이다.  177


산업화된 현대사회가 인간의 성을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변화시킨 것은 물론 아니다. ..

생활고에 지친 노동자계급의 경우에는 남녀 사이에 강력한 정신적 유대를 바탕으로 하는 성애를 만들어내고 실천하기가 어렵다. 결국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찰나적인 쾌락과 육체적 욕망의 충족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만들어지며, 이는 다시 사회 전반의 성적 타락, 야수화, 성폭력 등등의 문제를 낳는다. 또 근래에는 포르노, 마약 등과 함께 변태적 성욕과 성범죄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데, 어찌 보면 문명화된 사회의 억압적 분위기와 변화 없는 일상 생활이 거꾸로 성범죄와 포르노산업을 확산시키는 주범이라고 볼 수도 있다.  179


인간의 노동력 자체가 상품화되고 이를 기초로 팔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상품이 되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이ㅔ서 유독 성의 상품화에 대해서만 울분을 떠뜨리는 것은 위선적인 태도일 수도 있다...

이미 거대한 산업이 되어 부르주아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현대의 성 산업은 도덕적 분노만으로 상대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상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매매의 부정적 효과는 너무도 분명하다. 성 매매는 사회 전체를 눈에 보이지 않게 타락시켜 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끊임없이 왜곡하고, 세상 모든 여자들을 성 매매 종사자들과 성적으로 경쟁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권력구조를 재생산하고 은폐하고 강화하는 데에도 간접적으로 이바지하는 것이다.  180


이미 18세기부터 본격화된 생물학 연구는 성에 관한 과학적 탐구의 토대를 마련해놓고 있었지만 ...

성에 대한 좀 더 체계적이고 실증적인 탐구는 19세기 후반에서부터 20세기 초까지 주로 의사들에 의해 '비정상적인' 성욕이나 성행동을 다룬 수많은 저작들.. 등이 나오면서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이때부터 좀 더 엄밀한 의미의 현대적 성과학(sexology)이 시작된 것이다. ..

성 충동은 "본능적이고 자연발생적이며 절실하기 때문에 억제하기 힘든" 욕망의 힘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185-187


성과학은 성에 대한 기존의 무지와 미신을 폭로했다는 점에서, 또 성을 전통 종굔나 윤리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진지한 학문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초기의 성을 연구한 사람들은 대부분 의사들이었기 때문에, 성 연구 또한 의학적, 생리학적 관점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았다.  189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다형도착증(polymorphous perversion)이 있으며 유아에게는 양성애적(兩性愛的 두양 성품성 사랑애 과녁적) 기질이 나타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건강한 사람들도 누구나 (정상적인) 성 목적에 덧붙여 성도착으로 간주할 수 있는 행위를 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사례가 보편적으로 발견된다는 사실은 성도착이라는 말에 비난의 뜻을 포함시켜 쓰는 것이 어람나 부적절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191


현대 성 연구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변곡점을 만들어낸 것은 인간의 직접적인 성행위에 대한 실험적이고 실증적인 연구였다.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인간 성행위의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려는 의도로 시작된 이 연구들은 생식으로부터 쾌락이 분리되고, 생식보다는 쾌락이 우선시되는 세태와  맞물리면서 새로운 성 담론과 성 관념들을 만ㄷ르어내는 데 일조했다.  201


매스터스(W. Masters)와 심리학자인 그의 아내 존슨(E. Johnson) .. 1954년부터 1965년 사이에 700명이 넘는 지원자들을 실험실에 집어넣고 실제로 섹스를 하게 한 뒤, 성행위를 하는 동안 그들의 몸에 나타나는 생리적 반응들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핵심은 우리가 흔히 오르가슴이라고 부르는 현상에 대한 해명이었다. 잘 알려져있듯이 오르가슴이란 성행위를 할 때 신체적, 심리적 흥분과 쾌감이 절정에 이르는 것을 가리키는데, 매스터스와 존슨의 연구에 따르면 오르가슴은 생리적 측면에서는 척수와 성감대 주변의 신경망을 잇는 신경계의 작용, 근육의 운동, 혈류의 운동 등으로 확인될 수 있다. 두 사람은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인간의 성 반응을 다음과 같은 네 개의 단계로 구분했다. 첫 번째 단계는 흥분기로서 근육이 긴장되기 시작하고 맥박 및 호흡수가 증가하며, 남성 성기의 발기가 시작된다. 또 여성의 질 안에 분비물이 많아지고 질 안쪽의 3분의 2가 넓어지며, 음핵과 젖꼭지가 팽창하기 시작하는 반응이 일어난다. 두 번째 단계는 고조기인데, 남녀 모두 근육의 긴장이 강화되고 맥박 및 호흡이 더욱 빨라지며, 피부에는 붉은 반점이 나타나고 남성의 성기는 딱딱해진다. 또 질 바깥쪽의 3분의 1이 부풀면서 질구가 수축되고, 여성의 외부 성기는 팽창할 뿐만 아니라 색깔도 변화하며, 젖꼭지 주위와 유방 또한 커진다. 세 번째 단계로 절정기에 이르면 수 초 동안 짧고 빠르게 지속되는 리드미컬한 근육의 수축이 일어나는데, 이때 뇌파에도 변화가 오고 심지어 몇 초 동안 의식을 잃기도 한다. 또 무의식적인 표정의 변화와 함게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게 되며, 성기에 집결해 있던 피가 순간적으로 빠져나가면서 쾌감이 성기 주변으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물론 남성의 사정이 이루어지는 것도 바로 이때이다. 마지막으로 쇠퇴기 또는 회복기에서는 신체의 모든 변화가 평소와 같은 상태로 되돌아오면서 땀을 흘리게 되고, 특히 남성에게는 일정 시간 동안 성적 자극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무반응기'가 나타난다.  203-204


그렇다고 해서 오르가슴을 둘러싼 모든 논란이 종식된 것은 아니다. 오르가슴을 둘러싼 다양하고도 세세한 논점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연구가 진행 중이며, 특히 여성의 오르가슴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이 해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204-205


성에 대한 미셸 푸코의 연구는 그 기본성격과 방향에서 이전의 다른 어떤 성 연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새롭고 획기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전의 성 연구들은 인간의 성 자체를 직접적 탐구대상으로 삼아 소위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진행하거나, 그게 아니면 일정한 가설과 이론적, 이데올로기적 틀을 전제로 성에 대해 상당히 규범적이고 선언적인 담론들을 생산해내는 작업이었던 반면, 푸코는 그러한 연구 자체를 가능하도록 해주는 '권력의 의지'에 초점을 맞추고 연구를 통해 생산된 성 담론들에 대한 메타비판(meta는 '~다음에, ~을 넘어서서'라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메타비판이라고 하면 어떤 대상에 대한 직접적이고 1차적인 비판이 아니라, 그 대상을 설명하는 이론이나 개념들에 대한 2차적 비판, 즉 '비판에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207


푸코는 죽기 직전에 쓴 세 권짜리 저작 <성의 역사>를 통해서 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

그가 사용하는 '권력'이라는 개념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푸코는 전통적인 권력 이론을 비판하면서, 과거의 권력 이론을 크게 둘로 나눴다. 그 하나는 권력을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는 상품처럼 보는 '경제적 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가 여기에 속한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권력을 물질적 생산영역에 근거를 둔 계급지배의 도구로 보며, 자유주의는 권력을 상호계약에 따라 법적 효력을 갖는 권리와 의무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비경제적 이론'으로서 권력을 경제와는 무관한 억압으로 보는 입장인데, 푸코는 프로이트나 빌헬름 라이히, 마르쿠제 등이 제시했던 '성욕의 억압'이라는 가설이 그 대표적 사례라고 보았다. 그러나 푸코는 기존의 두 입장과는 달리 권력을 '힘을 향한 의지'가 서로 충돌하는 일종의 싸움으로 파악한다. 그에 따르면 권력은 위에서부터 작동하는 단 하나의 단일한 힘이 아니라, 수많은 권력관계들의 그물망을 통해 아래로부터 구성되고 자기검열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수단들에 의해 지속되는 '비밀스러운 전쟁'이다.  208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것만을 뜻하지 않고, 개인의 일상과 신체에까지 스며드는 '미시권력(micropouvoir)'이기도 하다. 개개인은 언제나 권력의 억압에 의해 핍박받고 희생될 뿐이라는 소박한 '억압가설'은 힘을 잃게 된다.  209


한마디로 권력은 우리의 일상 속에 파고들어와 우리의 신체에 작용을 가하고, 또 그를 통해 우리의 주체를 구성하는 힘이다. 그리고 권력은 자신을 관철시키기 위해 진리 또는 지식을 자신의 전략에 이용하는데, 이때 권력의 전략적 행위는 일정한 담론으로서 수행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권력의 작용을 이해하기 위해 "누가 권력으 갖고 있는가?"라든가 "권력자의의도가 무엇인가?"라는 물음보다는 권력에 의해 지속적으로 우리의 언어, 신체, 행동이 예속되고, 또 주체 또한 그것에 따라 구성되는 과정에 주목해야 하며, 다양한 담론들 안에서 진리의 효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역사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210


'섹스'라는 의미에서 인간의 성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중 하나가 '남자와 여자'라는 주제인지도 모르겠다. ..

서구 언어의 섹스라는 말 또한 기본적으로는 그런 뜻이다. 우리는 섹스라고 하면 성행위를 먼저 떠올리지만, 이 낱말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의 'setum'은 '나뉜/쪼개진 것'이라는 뜻.  218


남자는 '인간의 수컷+α'이고, 반대로 여자는 '인간의 암컷+β'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일정한 생식기능에 초점을 맞춘 '암수'의 구분만으로는 인간 '남녀' 사이의 구별을 다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α'와 'β'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게 정확하게 무엇이든 간에 그 'α'와 'β'야말로 인간 남녀 사이의 경계르 가르는 기준이며, 그 경계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기보다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219


남성성이든 여성성이든 우리가 성에 부여한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역할과 특성들은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특정한 목적과 사회경제적 지배구조에 따라 사회 속에서 만들어지며 역사적으로도 끊임없이 변천한다.  226


수많은 사회적 학습과 시험을 거쳐.. 우리가 수용해온 '바람직하고 정상적인' 남성성 또는 여성성의 틀은 사실 사회적 필요에 의해서 주조되고 고안된 것이다.  227


남녀평등을 위한 수많은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고 성 차별이 하나의 사회적 죄악으로서 단죄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삶의 미시적인 영역을 세밀히 들여다보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지도 모른다. 우리들 또한 갓난 아이가 사내아이면 파란색 이불을 덮어주고 여자아이면 분홍색 옷을 입혀주며, 사내아이에게는 장난감 자동차와 총을 사주고 여자아이에게는 인형을 선물하는 게 보통이니까 말이다.  228


잘못된 통념과 왜곡된 교육 때문에 여성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의 일부분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여성들의 성기를 처음으로 제대로 보고 만지는 사람이 당사자가 아니라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남성인 경우가 많다는 현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99%의 남성은 자위를 하고 1%의 남성은 거짓말을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듯이 거의 대부분의 남성이 자위를 경험하는 반면, 자위를 해본 여성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게다가 남성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자위 경험을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개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을 그런 사실을 쉽게 발설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단지 남녀의 신체구조상의 차이 때문에 생겨난 결과는 아니다. 이쯤에서 단지 남녀의 신체구조상의 차이 때문에 생겨난 결과는 아니다. 이쯤에서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자위를 옹호하고 심지어 권장하기까지 하는 이유를 한번 생각해보자. 그들의 진정한 목표는 단순한 '성의 해방', '쾌락의 해방'에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오도된 인식과 억압된 실천을 넘어서서 자시늬 신체에 대한 자율적 통제권을 되찾는 것, 자신의 서오가 욕망과 쾌락에 대한 긍정적이고 주체적인 시각을 되찾는 것, 그것이 없이는 남성과 대등한 인격체로서의 여성 해방은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

이른바 '정상인'으로서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으며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모두 다 죽는 날까지 매일 매 순간 자신이 남자 또는 여자임을 의식하면서 거기에 맞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느껴야만 한다.  229-230


남자라고 인정받기 위해서, 사회 속에서 남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아니요, 나는 여짜 계집애'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데 왜 우리는 '진짜 사나이'라는 말에 그토록 열광하는 걸까? .. 왜 우리는 거기다 굳이 '진짜'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걸까? 생각해보라! "이거 진짜 루이뷔통 가방입니다"라는 말은 전혀 어색하지 않지만, "이거 진짜 개미입니다"는 이상하지 않은가? 진짜를 강조한다는 건 그 반대편에 가짜도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고, 그 진짜와 가짜 사이를 가로지르는 경계선들은 자연적이지 않고 인위적임을 함축하는 것이다.  233-234


남자든 여자든 개인에 따라 다양한 기질과 성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왜 남자는 반드시 이러해야 하고 여자는 저러해야 한다는 틀을 고수하려고 그토록 애쓰는 걸까? 

그동안 별생각 없이 당연하게 여겨왔던 성 역할의 틀에 대해서 비판적 고찰을 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성 정체성의 탐구가 그러한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작동시키는 사회구조와 권력에 대한 탐구이며,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왜 어떤 시대에는, 또 어떤 곳에서는 이러저러한 행동이나 특성들이 남자다운 것으로 여겨지고, 또 다른 시대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특수한 방식으로 규정된 성 저체성들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그 뒤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권력이 숨어 있는가? 성 정체성을 '고정된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양분된 틀 속에 가둬두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이런 물음들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성 정체성의 숨겨진 의미가 무엇인지 비판적으로 숙고하도록 만들어줄 것이며,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234-235


남자와 여자는 다르며, 우리는 누구나 그 차이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현상적 차이가 곧 영원불변한 본질적 차이라고 단정해버리는 태도이다.  236


동성애는 있어도 그 반대개념으로서의 이성애는 없다. 있다면 그냥 '정상적인 사람들의 사랑'이 있을 뿐! 대부분의 이성애자들은 자신들을 이성애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인간'이라고만 생각한다. 뒤집어 말해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동성애가 이성애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거울이라는 사실조차 부정하고 있다.  246


각자의 구체적인 실천적 노력이 없는 한, 번듯하고 빛나는 논리만으로 쌓아올린 이론의 탑은 현실 앞에서 사상누각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론이 무용한 것은 아니다. 기존의 틀을 깨고 바꾸는 힘은 비판적 사고에서 시작하며, 철학의 역할 또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259


속마음이야 어떠하든, 또 개인적 경험이야 어떠하든 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공식적인 담론은 이렇다.

"성욕이나 성행위는 사랑에 기반을 둬야만 하며 - 그렇지 않으면 부도덕하거나 나쁜 게 된다 - 사랑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265


몸에 대한 관점은 크게 자연주의(naturalism)와 사회구성주의(social sonstructionism)로 나눠서 생각해볼 수 있는데, 우선 자연주의는 주로 생물학과 진화론의 영향 아래서 발전해왔으며, 18세기 이후 서구의 근대 부르주아사회를 대표하는 이론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관점은 기본적으로 몸이 자아와 사회를 구성하는 물질적 토대라고 본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지만, 인체의 능력과 한계까 개인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삶의 양식을 특징짓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관계까지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생물학적 결정론에 치우쳐 있다. 또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경제적 불평등 또한 생물학적인 몸에 의해 결정되거나 최소한 몸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자연주의적 관점은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자들, 경제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극우파,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크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반면 사회구성주의의 관점은 몸을 순전히 생물학적 현상으로서만 분석할 수 있다고 보지 않고, 몸에 부여되는 구체적인 특성과 의미, 상이한 집단들의 몸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 등이 모두 다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관점은 그동안 첨예한 대립을 보여왔고, 둘 모두 일정한 과학적 근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줄 수는 없다.  270-271


몸이 중요해지면 질수록, 또 몸이 인간 존재의 근원적 조건이 되면 될수록, 몸이 지니고 있는 성적 의미의 의의도 그만큼 커지게 된다. 

'몸의 혁명'이 반드시 성적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몸에 대한 생각과 태도의 변화는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성에 대한 생각과 태도의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74


우리는 무엇이 섹시하고 에로틱한가, 또는 조금 속된 표현으로 무엇이 야한가라는 물음에 별 고민 없이 대답하곤 한다. 벌거벗은 육체, 노출된 성기, 정사 장면, 한마디로 음란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미지들, 뭐 이런 것들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많은 사람들을 성적으로 자극하고 흥분시키기 때문에 분명 에로틱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들은 성적 자극을 느끼지 않으며, 또 동일한 사람이라도 경우에 따라서 자극을 받기도 하고 안 받기도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

정답은 육체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육체를 바라보는, 그리고 평가하는 우리 자신의 시선에 있다.  276


몸과 마음의 전통적 이분법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을 정당하게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큰 장애가 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육체를 기반으로 하는 성을 올바르게 성찰하는 데에도 악영향을 미쳐왔다. 우리는 육체 없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한, 육체 없는 성도 육체 없는 사랑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생물학/생리학의 한계에 갇힌 좁은 의미의 육체가 아니라, 사회적 만남을 통해서 다양한 의미를 구성해내는 육체, 그러한 만남을 통해서 친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내는 사회문화적 의미의 육체를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육체를 통해서만 고결하고 기품 잇는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들도 현실적 의의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체와 육체의 욕망을 추잡하고 음탕하며 동물적인 본느에 의해 지배되는 어떤 것, 따라서 통제하고 억압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만 보는 한, 인간의 성에 대한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성찰 또한 요원하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83


어떤 것이 사랑이고 어떤 것은 아닌지 구별할 수 있을까?   

첫째, 15세의 여중생이 이웃집에 사는 20대 초반의 대학생 오빠를 짝사랑한다고 가정하자. 그 오빠는 소녀의 존재조차 잘 모르지만, 소녀는 먼발치에서 그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오빠 생각에 밤잠을 설칠 정도이다. 둘째, 바람난 유부녀가 연하의 건달에게 반한다. 두 사람은 육체적으로도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럴수록 그녀는 남편에게서는 얻지 못했던 관능적 충족을 느끼면서 더욱더 상대ㅔ게 빠져든다. 셋째, 20대의 대학생 남녀가 서로 사귄다. 주위에서도 모두들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하고, 결혼을 약속한 두 사람은 평범하지만 행복한 연애를 하고 있다. 넷째, 결혼해서 20년쯤 된 부부가 있다. 솔직히 두 사람 사이에는 예전과 같은 열정이 없으며, 상대에 대한 성적 관심이나 욕망은 거의 사라졌고 성 관계도 거의 하지 않지만 그래도 친밀한 가족으로서 서로를 아끼고 필요로 한ㄷ. 다섯째,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40대의 이혼남과 남몰래 만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무척 사랑하지만,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서 자신들의 관계를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

위에 든 예 중에서 사랑인 것은, 또 사랑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것이 사랑이라면, 또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

자신으 어떤 이유를 내세워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의 경계를 나누었는가? 자신이 내세웠던 이유들을 잘 살펴본다면, 아마도 자신은 사랑에 대해 평소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다시 말해 자신이 무의식중에 믿고 받아들여왔던 사랑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드러날 것이다.  290-291


내가 진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랑을 정의하는 게, 그리고 그 정의를 실제 사례에 적용하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292



'좋은 사랑/나쁜 사랑'에 대한 가치판단은 분명 필요하고 '더 좋은 사랑'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사랑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불완전하고 부도덕한 것들까지 포함하는 현실 속의 수많은 사랑들을 잇는 그대로 고찰해야 하지 않을까?  292



우리는 평범하지만 심오한 진리에 마주치게 된다. 그건 바로 단 하나의 사랑, 즉 영어로 표현하자면 'The Love;가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종류의 사랑들, 즉 'many kinds of love'가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랑에 대해 "그건 사랑이 아니야"라든지 "그 사람은 날 진짜 사랑한 게 아니었어"라고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그건 내가 원하던 사랑 방식이 아니었어" 라든가 "그때 우리의 사랑에는 이런 점들이 부족했어"라고 반성하는 게 훨씬 더 유익하고 객관적인 판단이 아닐까? 우리는 좋은 사랑과 나쁜 사랑, 자신에게 맞는 사랑과 맞지 않는 사랑을 구별할 수도 있고, 또 실생활에서는 그런 구별이 꼭 필요하기도 하겠지만, 몇 가지 기준만으로 모든 사랑을 다 설명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져서는 안 된다.  299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사랑의 유형, 또 반대로 자신이 원하는 사랑의 유형을 파악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을 위해 매우 중요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사랑 스타일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하기도 할 것이다.  302


사랑의 개념이나 유형에 대한 이론적 분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현실속의 사랑이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조건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끝없이 변해왔다는 사실이다.  302-303


"진리는 중간이 아니라 극단 속에 있는"(<풍속의 역사> 제1권 1988 10쪽. 전체 문장은 "진리는 중간이 아니라 극단 속에 있다. 사물이나 인간은 극단으로까지 과장됨으로써 클로즈업된다. 그러므로 과장이란 그 과장된 것이 좋은 면이든 나쁜 면이든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며, 각 시대의 기록인 경우 문제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요소다.")지도 모른다. 일상생활에서야 대개 극단을 피하고 중용을 취하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어떤 문제의 논리적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때때로 극단까지 밀고 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모든 것이 두루뭉술해져서, 상식적으로야 수긍할 수 있는 답이 나올지 몰라도 날카로운 논증이나 심오한 통찰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312


프로이트는 성욕의 메커니즘에 대해서도 좀 더 상세한 분석을 시도하는데,..

그에 따르면 쾌락의 목적과 생식의 목적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며, 따라서 '성적인 것'과 '생식적인 것'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성적 쾌감은 신체의 어떤 부분에서도, 즉 생식기가 아닌 곳에서도 느낄 수 있으며, 인간의 성욕에는 성기를 사용한 행위와 무관한 충동들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입으로 빨거나 손으로 더듬는 등의 애무행위도 성욕을 구성하는 정상적인 본능이라는 것이다.  319


우리는 성을 언제나 생식과 연결시키는 생물학주의의 고정관념 때문에, 생식능력과 무관한 성욕을 은연중에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 문제는 어디까지나 왕성한 생식능력을 갖춘 젊은이들의 문제이며, 어린아이나 노인들의 성욕, 신체적인 장애인들의 성욕, 그리고 동성애자들의 성욕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망측한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육체적인 노화가 성에 대한 욕망까지 자동으로 제거해주는 것은 아니다....

성이 모든 인간 존재의 보편적 근거이자 욕망과 행복이 기반이기도 하다면, 소외된 노인들의 성을 언제까지나 외면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권과 복지의 사각지대를 또 하나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321


"억압된 욕망과 충동이 무의식의 근원이라면 억압은 도대체 왜 일어나는가?" 

자아는 자신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욕망, 충동)들을 의식으로부터 몰아내 무의식의 세계에 가둠으로써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하려고 하는데, 바로 여기서 억압이 발생한다. 따라서 억압이란 결국 자아가 성숙해지기 위해 갖가지 장애로부터 자신을 총체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방어하는 하나의 메커니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326


인간 욕망의 특성은 늘 완벽하게 충족될 수 없고, 끊임없이 변형된다는 데 있다.  349

 

아동심리학자들이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고 한다. 넓은 운동장 한편에 모여 놀고 있는 유아들의 주위에 금을 그어 표시한 뒤, "이 금 안에서만 놀고, 금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지시를 했다는 것이다. 학자들이 숨어서 지켜보니까, 몇몇 아이들이 금 주위에서 두려운 듯 눈치를 살피다가 살ㅉ가 한 발을 금 밖으로 내딛어보더란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씩 그애들을 따라 금을 넘어가게 되고, 시간이 지나자 더 멀리 밖르오 나가는 아이들도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뒤에 학자들이 되돌아와 금을 지워버리고 나서 "이제 아무 데서나 맘대로 놀아도 좋다"고 하자, 아이들은 다시 원래 놀던 운동장 한편 구석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들로 하여금 조심조심 금 밖을 넘보게 만든 욕망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 그런 욕망의 불을 지펴놓은 것일까? 운동장은 원래 유아들이 전체를 다 쓰기에는 너무 넓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한쪽 구석에서 노는 걸로도 충분했다. 쉽게 말해 객관적으로만 보면 아이들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운동장 한가운데로 나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비밀은 바로 금에 있는 게 아닐까? 움직임을 제한하는 금이 그어지는 순간, 거꾸로 그 제한을 깨뜨리려는 욕망이 생긴 게 아닐까? 

우리는 흔히 금기가 욕망을 제한하고 억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욕망이 원래 있고, 그 욕망이 너무 크거나 지나쳐서 문제가 될 때, 그것을 통제하는 금기가 생겨난다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지만 할까?   350-351


프랑스의 현대사상가 조르주 바타유는 <에로티즘>에서 .. 인간 성욕의 본질은 고립된 개인들이 합리적 일상의 세계를 벗어나 어떤 신비스러운 체험을 통해 존재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얻으려는 데 있다. 그는 규율(=금기)이야말로 동물과 인간을 구별해주는 문명의 상징이며 폭력과 무질서에 반대하는 이성의 산물이지만, 거꾸로 이 규율을 의식하면서도 의도적으로 깨뜨리는 폭력만이 가장 높고 강렬한 욕망을 충족시켜준다고 주장한다. 생식이란 본래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고 낡은 세대가 죽음으로써 개체성이 부정되고 연속이 실현되는 과정인데, 이런 점에서 생식과 연결된 성은 늘 규율 위반, 폭력, 죽음, 전쟁(살해), 광란의 축제, 주연(酒宴 술주 잔치연), 희생물을 바치는 종교적 의식 등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이 인간에게 공포와 경배의 대상이듯이 성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숭배와 공포, 신성함과 폭력, 욕망과 금기의 이 같은 모순적 결합은 아마도 월경, 처녀막의 파열(출혈), 출산 등과 관련된 피와 고통의 이미지, '작은 죽음'(프랑스어로 오르가슴을 '작은 죽음'이라고 부른다)이라고 불릴 만큼 합리적 일상과는 철저히 단절되는 느낌을 주는 절정의 쾌락(=오르가슴)의 이미지, 성기와 성행위에 대한 혐오감(성기는 배설기관이기도 하며 성행위 그 자체는 아주 동물적이다) 등이 복합적으로 뒤섞임으로써 생겨났을 것이다. 아무튼 바타유에 따르면 노동(=규율), 자의식(=전체로부터 분리된 개체), 수치심(=성과 관련된 자의식),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은 모두 인간만이 갖는 특성이며 사실상 같은 계기의 다른 측면들인데,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바로 그 경계선에 이런 계기가 놓여 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스스로 이 계기를 부정함으로써 더 높은 도약을 꾀하며, 이것이 바로 '에로티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354-355


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상식적 시각은 자연주의적이고 본질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관점에 매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자연주의가 뭔가? 성은 자연적인 것, 본능적인 것, 생리적인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또 본질주의 역시 성에 '고정된 불변의 본질'이 미리 주어져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럼 환원주의는 뭘까? 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어떤 '기본 요소'로 환원하여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을 말한다. 그리고 그 '기본 요소'란 결국 생물학적/생리(학)적인 메커니즘, 그러니까 생식을 위한 메커니즘을 가리킬 것이다. 이처럼 단순하게 도식화되어 있는 성 관념이 우리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한, 어떤 이론이나 과학적 발견으로도 우리의 성 의식을 업그레이드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의 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니, 진지한 성찰의 대상으로 삼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이러한 자연주의적, 본질주의적, 환원주의적 접근에서 비롯된 고정관념의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럼 우리는 왜 그토록 성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일까?..

성은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하고 중요한 문제이기에 오히려 한 발 물러서서 비판적으로 성찰하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  359-360


서구에서 '섹스'라는 말이 16세기에 처음 사용되었을 때는 단지 남녀의 성별 구분을 뜻했지만, 19세기 초부터 일련의 의미변화를 겪고 난 뒤 이 단어가 마침내 '양성 사이의 육체적 성 관계'를 뜻하게 되었다는 데에서 출발하는 게 좋겠다. 이러한 어의변화 속에는 우선 양성, 즉 남녀의 명백한 구분, 심지어 대립과 적대가 전제되어 있는데, 사실 이것이 자연주의적 오류의 첫 번째 내용이다.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일 뿐이며 그 구분은 자연에 의해 정해진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한 사회적, 문화적으로 구성되는 성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다음으로 '성'이란 저항할 수 없는 본능적, 파괴적 힘이며, 특히 남성의 성기 속에서 꿈틀거리는 '생물학적 명령'이라는 가정이 있다. 현대의 성 이론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킨 프로이트마저 이런 가정을 받아들일 정도였으니, 그 위력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아무튼 우리 사회의 수많은 남성들, 아니, 심지어 여성들까지도 이런 생각에 동조하고 있으며, 그래서 예컨대 "남자는 다 늑대다"라는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남자는 늑대"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애먼 늑대들, 인간의 핍박으로 지구상에서 멸종해가는 가여운 늑대들에 대한 부당한 비난일 뿐만 아니라, 남성 전체에 대한 모욕인 동시에 거꾸로 일부 남성들에게는 면죄부를 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늑대들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끝으로 자연주의적 관점은 '피라미드처럼 위계서열을 가진 성 모델'을 만들어내며, 그 속에서 '남성이 주도하는 이성애적 삽입성교'라는 이상적 성 모델로부터 속된 말로 여러 가지 '변태'에 이르기까지 그 가치와 정당성에 따라 수직적인 성의 위계질서가 등장한다. 그리고 기존의 성과학 이론들이 많건 적건 이러한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음은 앞에서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아무튼 이러한 자연주의적 오류를 통해서, 또 그것에 의해 만들어진 위계질서를 통해서 '자연적 성'이라는 허구의 실체가 마치 하나의 객관적 대상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질서가 다 그렇듯이, 이 위계질서를 유지하고 정다화하려는 지배 권력의 개입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이는 물리적인 힘으로서 직접 작동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의식과 실천을 남몰래 조종하고 통제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이 용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지만, 가장 폭넓게 본다면 "무의식중에 형성되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적 의식"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361-362


현대에 들어와서는 성에 대한 자연주의적, 본질주의적 관점 대신에 '성정치(학)(sexual politics)'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된다. ..

쉽게 얘기해서 성을 정치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며, 이 용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정치'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부터 고칠 필요가 있다.  365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잘 보여주듯이, 잘못된 정치는 때때로 평범한 개인들의 삶을 파멸시킬 수도 있고 어찌 보면 우리 일상의 모든 행복이 정치에 의해서 좌우될 수도 있는데, 우리가 정치를 향해 더럽다고 침 뱉고 돌아서면 그걸로 끝인가? 물론 정치의 문제는 현실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정치란 소수 권력자들과 관계된 일'이라는 일상적 인식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를 뜻하는 영어의 'politics' 라는 말은 본래 그리스어의 'politikos'에서 온 말이고, 이 말은 다시 도시국가나 공동체를 뜻하는 '폴리스(polis)'의 형용사형이다. 아마 독자 여러분도 학창 시절 세계사 시간에 배웠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스파르타 같은 도시국가를 폴리스라고 불렀다는 것을! 다시 말해 '정치' 또는 '정치적'이라는 말은 본래 '국가, 공동체, 사회'와 연관되는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규정했을 때에도 그 의미는 "인간의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동물"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말한 것이지, 인간은 본래 "권력 다툼을 좋아하고 음모나 술수를 부리며 남을 지배하는 것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은 절대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어떤 인간도 정치와 무관할 수 없으며, 정치적인 것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이해관계에 따라 집단을 이루어 복잡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는 늘 타인에 대한 지배와 힘의 행사, 즉 권력의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은 직접적인 물리력을 통해서 관철되기도 하지마ㄴ, 대개는 제도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즉 일정한 정당성을 확보하고 사람들의 의식을 남몰래 지배함으로써 실현된다.  367-368


지배와 이데올로기에 의한 '성의 사회적 구성'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알기 위해 여러 가지 요소들을 면밀하게 살펴봐야 하는데, 대체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영역이 고려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친족 및 가족제도다. 이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성의 가장 '자연적인 축'으로서 강조되어 왔다. 예컨대 친족 내의 '근친상간 금지'는 보편적 법칙으로 간주되어왔으며, 자연 상태에서 사회(=문화)로 이행하는 징표로 인정되어왔다. 그러나 '근친상간 금지'가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는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전혀 다르다. 또 '혈연관계'라는 것도 문화라는 틀을 통해 재해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친족이라는 개념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기보다는 경제적 요인과 사회적, 문화적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

친족 및 가족제도는 경제적 요인, 가족법, 결혼 및 이혼에 대한 규제, 사회복지와 조세정책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국가 개입에 의해 부단히 재구성되며, 이것들 모두가 성에 대한 인식과 실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개인들은 가족 안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최초로 이해하게 되며, 또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가족이야말로 성장 과정에서 우리의 성적 욕망이 최초로 조직되는 영역이기도 하므로, 친족 및 가족제도는 성의 사회적 구성에서 매우 중요한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조직들이다. 경제적 변화와 새로운 계급구조의 출현 또한 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서구에서 근대 부르주아사회가 형성된 후 새로운 연애형태와 가족형태, 성도덕 등이 등장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 산업혁명 후 사생아의 출산이 크게 늘어 났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여성이 공장에 취업함으로써 산아제한이 보편화되었으며, 1950~60년대 이후에는 기혼여성의 취업이 늘어나는 등 시대에 따라 수많은 경제적, 사회적 변화들이 일어났는데, 이 또한 사람들의 성 관념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 역시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적 토대가 성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기본적 전제와 한계만을 제공한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물학적/생리(학)적 결정론 못지 않게 위험한 경제 결정론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사회적 규제들이 있다. 사회나 문화에 따라 성생활에 대한 구체적 규제는 실제로 아주 다양한데, 그 자체가 상당한 자율성을 갖는다. 예컨대 종교, 국가의 역할, 결혼 유형을 결정하는 도덕적 규준, 이혼율과 성적 일탈의 범위등이 성에 대한 규제에 영향을 미친다. 종교적인 이유로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과 규제가 심한 이슬람권 국가에서의 성과 이혼이 매우 자유롭고 이혼율 또한 높은 서구 사회에서의 성이 같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서구 사회를 기준으로 볼 때 근대 이후의 특징적인 현상은 성에 대한 규제가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규제로부터 점차 의학, 교육, 심리학, 사회사업 및 복지 등에 의한 세속적 규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근대 이전까지는 자위를 금지하고 죄악시하는 이유가 <구약성서>에 있었지만, 19세기가 되자 의사들이 앞장서서 "자위는 건강에 해로우며 청소년들의 성장 발달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자위를 금지시킨다. 그러나 20세기가 되면 다시 건강을 들먹이는 의학적 담론이 사라지고, 그 대신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자위에 몰두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식의 새로운 이유가 제시된다. 결국 자위를 금지하고 성을 통제하려는 권력의 의지에는 변함이 없지만, 시대 변화와 과학적 지식의 발전에 따라 담론의 형식만이 바뀌었던 셈이다. 사실 사회적 규제는 일률적으로 관철되지 않는다. 예컨대 음란물에 관한 규제는 거꾸로 음란물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며, 동성애에 대한 규제는 동성애자들의 단결을 촉진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형식적 방법이 아닌 비공식적인 규제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다. ..

넷째로는 직접적인 정치적, 법적 규제들도 중요하다. 비공시적이고 관습적이던 갖가지 사회적 규제들도 특정 시기의 정치적 세력관계에 의해 정치적 의미가 강화될 때는 법률적 규제에 관한 논쟁을 낳는다. 예컨대 낙태나 동성동본 결혼, 간통죄 폐지 등을 둘러싼 논란은 단순히 성 문제에 대한 논란으로 그치는 게 아니고, 언제나 진보와 보수가 대립하는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된다. 또 서구에서 1980년대 이후 신보수주의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페미니즘이나 반(反 되돌릴반)인종주의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반격이 활발해지는 것을 보면, 성을 둘러싼 정치적 투쟁의 가능성을 잘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이 성 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태도를 취하기 어려운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

마지막으로 지적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실천이다. 사실 지배와 통제가 있는 곳에는 늘 저항도 있게 마련이므로 기존의 성 관념에 맞서는 저항문화와 저항이데올로기 또한 성의 사회적 구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려사항인 것이다. 그동안 저항문화나 저항이데올로기는 대개 공식적인 역사서술에서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여성들은 오랫동안 낙태의 권리를 위해 투쟁해왔고 동성애자들 또한 자신들의 사랑을 정당하게 인정받기 위해서 싸워왔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이러한 저항운동을 극적으로 표면화시킨 대표주자가 현대의 페미니즘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사실 노인이나 청소년, 소수민족, 유색인종 등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은 언제든 성 정치에서도 억압되고 배제되는 타자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실천적 운동 또한 앞으로의 성 관념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369-373


굳이 어려운 역사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성생활의 유형은 계급에 따라 아주 상이하다. 예컨대 킨제이의 조사에 따르면 남자들의 성 행동은 계급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또 우리나라의 몇몇 조사에서도 소득 수준이 높고 학력이 높은 계층일수록 좀 더 대담하고 자유분방한 성적 쾌락을 추구하며 성행위 방식도 더 다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현실을 고려해볼 때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성욕이나 성 행동이 계급이나 권력과 얽혀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도 결코 우연이나 허구가 아니다. 성을 노골적으로 묘사해서 유명해진 로렌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도 상류계급의 여성이 비천한 하층 계급의 남성과 욕정을 불태우는 내용 때문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던가.

계급과 더불어 남녀의 성별 또한 오랫동안 지배와 이데올로기의 원천이었다. 굳이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남녀관계는 기본적으로 권력관계였으며, 성 차별이 많이 사라진 오늘날에도 그러하다. 남성지배 사회에서 여성의 성 정체성은 남성 권력의 산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의 성은 남성의 시각과 틀에 의해 좌우되어 왔고,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난 여성의 성에 대해서는 남성 권력의 폭력이 정당화되어왔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와 그릇은 밖으로 내돌리면 깨진다", "여자는 사흘만 패지 않으면 여우가 된다"라든가 "북어와 여자는 두들길수록 맛이 좋아진다" 등등!  375


성과 관련하여 우리가 놓치기 쉬운 또 하나의 전선은 나이에 따라 형성된다. ..

일상의 성 관념 속에 파고들어 중대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차별 중에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나이 차별(ageism)이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ageism'이라는 용어를 처음 들어볼 것이다. 그건 그만큼 우리 사회가 이러한 차별에 둔감하다는 뜻이리라. ..

우리가 차별을 차별로 의식하지 못한다는 건 차별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차별이 보편화, 일상화되어 있음을 가리킬 뿐이다. ..

내가 지금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일상의 나이 차별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서오가 관련된 나이 차별은 일상의 나이 차별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

젊을수록 더 많은 권력을 갖게 되며, 따라서 젊은이들은 성에 관한 한 당연히 더 많은 특권을 누려야 하고, 그러한 세태에 눈살을 찌푸리며 뒤에서 투덜댈지언정 나이든 기성세대 또한 그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지는 못한다. 아니, 도전하기는 커녕 어떻게 해서든 젊은이들 틈에 끼여 그 권력의 혜택을 조금이라도 나눠가지려고 발버등을 치기도 한다. ..

법으로 정해졌든 사회통념으로 정해졌든 간에 일정한 나이에 도달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성 정치의 전선에서 철저하게 배제되는 또 다른 타자일 뿐이다. ..

우리는 이런 식의 나이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근대의 성 담론은 결국 아동 학대의 사회, 노인 유기의 사회로서의 자본주의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근대 이후 아동기, 사춘기 등등의 발견을 통해 나이별로 위계서열화된 성의 질서는 이제 급기야 결혼적령기, 가임기, 갱년기, 폐경기 등등의 사회학적, 생리학적 용어들을 통해 더욱 세분화되었으며, 인간의 생애 전체와 성생활 자체가 바로 이러한 분할 선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376-378


마지막으로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하지만 인종 또한 중요한 전선이다.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성 모델은 "백인=문명인/유색인=야만인"이라는 도식에 기초해 있다. 유색인종(=비유럽인들)은 아직 덜 진화된 인간들로 그만큼 자연에 가깝고, 따라서 그들의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성은 더 위험하고 파괴적이라는 것이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논리였다.  378


한국에서 일하는 수많은 제3세계 빈국 출신의 노동자들이 엄청난 차별과 박해를 받고 있는데도, 정작 우리 사회의 주류 언론은 무슨 사건 하나만 터지면 그들을 잠재적으로 위험한 성폭력 범죄자들로 매도하지 않는가? 이처럼 유색인종의 외국인이라면 질색을 하는 한국의 젊은 여성들도 백인남성들에게는 영어로 말 한마디 붙여보려고 온갖 아양을 다 떨며, 또 그걸 잘 알고 악용하는 일부 건달 같은 백인남성들은 "한국이야말로 백인남자를 위한 성의 천국"이라고 떠벌인다 하지 않는가?  379-380


사실 성정치는 근대 세계가 안고 있는 사회적 적대와 모순의 그물망 전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을 하나의 단일한 실체로 보려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늘 상기해야 한다. 성의 사회적 구성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이며, 우리는 지금도 계속 상연되고 있는 무대의 배우이자 관객이며 주체이자 대상인 것이다.  381




에필로그


일상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건 결국 공염불 아니면 기껏해야 지적 유희로 끝날 것.

어찌 보면 실천을 통해서 뒷받침되지 않는 한, 이 책의 내용을 진실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성에 관해서 어떤 것을 용인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의 생각(또는 태도)은 대체로 그것에 대한 자신의 실천적 경험 여부와 비례한다."  387


실천을 많이 해야 하는 셈이다.

물론 실천이 중요하다고 해서 돈키호테 식으로 일단 뭐든지 저질러놓고 나중에 생각해도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성을 둘러싼 새로운 실천에 시동을 걸려면, 먼저 새로운 '성 담론'이라는 연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선인식->후실천'이라는 기계적 도식이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삶의 모든 과정이 그렇듯이 여기서도 진정한 변화는 '인식과 실천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실현되기 때문이다.  388-389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이라고 해서 다 자기 생각이 아니며,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해서 다 자기 말이 아니라는 것을! 대지를 적시는 빗방울처럼 어느샌가 내 의식 속으로 스며들어와 나를 지배하게 된 수많은 관념과 이데올로기들은 마치 복화술사가 인형을 이용해 자기 목소리를 전달하듯이 나의 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주체성과 나의 생각과 나의 말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

진정한 주체성은 비판적 성찰을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것은 소크라테스 이래로 철학의 상식이다. 개개인 모두가 어떻게든 남들과 다르게 튀어보려고 앴는 현실, 하지만 개성 있는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에는 목을 매면서도 개성의 바탕이 되어야 할 진정한 주체성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오늘날의 현실은 역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슬픈 회화가 아닐까?

이처럼 기존의 성 담론들이 우리 자신의 혼과 정성이 담긴 창작품이 아니라 사회가 우리 머릿속에 심어놓은 칩이라고 해도, 어쨌든 개인의 성적 실천은 그 담론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391-392


우리는 기존의 성 윤리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재고해봐야 한다. 철학자들의 이상에 따르자면 본래 윤리라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함을 향해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일 뿐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 속에서 윤리는 반드시 그런 긍정적 기능만을 해온 것은 아니다. 윤리는 때때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면서 기존의 지배질서만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393



기존 성 문화의 문제점부터 짚어봐야 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현재 우리 사회의 성 문화에서 가장 큰 문제는 첫째로, 관능성 즉 단순한 감각적 쾌락과 넓은 의미의 섹슈얼리티를 혼동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라는 점 아닐까? 남녀관계에 대해 미국 학자들은 이른바 "find(상대를 찾고), feel(상대와 정서적 교감을 나누고), fuck(상대와 섹스하고) & forget(상대와 헤어진다)"이라는 도식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쉽게 말해 여기서 'feel'이 생략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둘째로, 성을 남성 중심적, 이성애 중심적, 성기 중심적, 성교 중심적으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섹스란 남자가 자신의 성기를 여성 성기 안에 삽입하여 사정에 이르는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인 셈이다. 이런 시각은 예컨대 성폭행을 다룰 때에도 나타나며, 또 포르노에서는 한층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강간사건의 경우 현행 형법은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질 속에 들어갔느냐 들어가지 않았느냐를 기준으로 범죄 여부를 가리기 때문이다. 또 포르노의 경우는 어떤가? 여성을 위한 포르노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이론적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포르노는 남성의 시각에서 남성의 관행적인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래서 포르노에서는 대개 남성의 행위와 욕망과 시선이 성 전체를 지배하는 힘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컨대 대부분의 포르노에서는 카메라의 시선이 철저하게 여배우에게 맞춰져 있어서 여배우의 얼굴, 몸, 성기는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만, 상대인 남성의 모습은 발기된 성기를 제외하면 그다지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또 포르노의 끝부분에서는 남성이 여성의 몸(안이든 밖이든) 또는 얼굴이나 입 안에 사정함으로써 성행위가 종료되었음을 보여주는데, 이 또한 '남성의 사정=만족=섹스의 목표 달성'이라는 도식을 시각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포르노의 내용은 대개 남성의 발기로 시작하여 성기의 삽입과 더불어 이어지는 끝없는 동작에서 남성의 질외 사정으로 끝이 난다. 남성이 쾌감에 도달하면 성행위는 종료된다. 여성의 오르가슴은 가장되고 은폐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여성의 쾌락을 무시하는 것이며, 남성의 관점에서 재현된 성행위 과정일 뿐이다.'(이나영 <포르노, 섹슈얼리티, 그리고 페미니즘> 1999 148쪽)  ...

셋째로, 우리 사회에서는 앞서 말한 성의 다양한 기능들을 대개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을 생식수단으로만 보거나 단순한 관능적 쾌락의 수단으로만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남성의 경우에는 관능적 쾌락으로서의 성이 당연한 것이지만, 아직도 여성이 적극적으로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갖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여성의 성이나 소수자들의 성에 대한 무지가 널리 퍼져 있으며, 이것은 두 번째로 지적한 남성 중심적, 이성애 중심적, 성교 중심적 성의 이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 예로 여성이 성적 쾌감을 느끼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신체기관은 음핵인데도 불구하고, "섹스란 성기의 삽입"이라는 고정관념에 매달리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여성의 질을 음핵보다 더 중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또 동성애자라면 무조건 항문성교를 할 것이라는 편견도 '섹스=삽입'이라는 도식에 매달리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398-401


성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 즉 성을 '신비하고 성스러운 것'과 '더럽고 범죄적인 것'으로 나누는 사고방식을 극복해야 한다. 

둘째로, 모든 윤리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상대적임을 인정해야 하며, 성을 윤리적 차원에서만 보는 편헙한 시각도 지양해야 한다. 셋째로, 어떤 행위를 판단할 때 그 행위의 관습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 법적 측면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구체적인 규범의 목록들은 개인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인간 해방을 지향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위와 같은 변화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베리오티는 성도덕을 반드시 피해야 할 오류들로서 환원주의의 오류, 추상의 오류, 초역사주의의 오류, 고립주의의 오류, 경직성의 오류 등을 거론하고 있다.)  405


어른들이여! 당신의 첫 섹스는 어땠나? 그렇게 심사숙고하고, 그렇게 또렷또렷 맨 정신에, 그렇게 이성적으로, 그렇게 자율적 판단과 엄밀한 계산에 따라서 이루어졌나? 그렇게 도덕적으로도 완벽했고, 마른 대낮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하루 온종일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올 만큼 당당하고 깨끗했나? 그게 아니라면 제발 철딱서니 없는 어린것들이 뭘 알아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비난부터 하지는 마라. 나이가 스물이 됐든 스물다섯이 됐든 실제로 첫 섹스를 하기 전까지는 그 민망한 문제에 관한한 우리 모두 철딱서니 없고 경험도 없는 무지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실제 경험이 없는데 나이만 먹으면 저절로 섹스에 관해 철이 드나? 아마 사람 보는 눈이나 계산하는 능력은 좀 나아질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 괜히 나이 가지고 폼 잡을 필요는 없다. 오케이?

그럼 다시 물어보자.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합의하에 하는 섹스가 범죄인가? 그래서 그 오린 나이에 감히 섹스를 한 발랑 까진 년들은 마치 성범죄자에게 중형을 내리듯이 배움의 터전으로부터도 가차 없이 추방해야만 하는가? 아니, 범죄가 아니라면 섹스는 부도덕한 행위인가? ..

분명히 말하거니와 도덕이라 이름 붙여진 갖가지 사회적 편견과 시대착오적인 관행, 기성세대의 협박 때문에 생겨난 공포 등등을 제거하고 나면, 섹스 그 자체는 범죄도 아니고 부도덕도 아니다.  409-410


지금 우리가 청소년들의 섹스를 금하는 이유는 그야말로 실용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적, 경제적 이유로 인해 사랑해도 함께 살 수 없고 애를 낳아 키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기성세대는 서로 사랑하는 10대 후반의 젊은이들이 자유롭고 섹스하면서 살아갈 수 없도록 제도적,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존재들이기도 하다. 왜 이기적이냐고? 입만 열면 윤리 타령을 늘어놓는 그들은 그 섹스를 맘껏(때로는 과도하게!) 즐기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사실 그들이 섹스를 즐길 수 있는 권리는 그들의 도덕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권력에서 나올 뿐이다.  411


이슬람교에서는 인간의 행위를 크게 다섯 가지 범주로 나눠서 설명한다고 한다.

첫째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즉 절대적 의무다. 예컨대 신자라면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둘째는, 하면 좋지만 안 해도 죄가 되지는 않는 것, 즉 권장사항이지만 의무는 아닌 것들이다. 예컨대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셋째는,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해야 하는 것도 아닌 일들, 다시 말해 의무나 금지와는 무관한 일들이다. 아마 밥 먹고 잠자는 등 우리 일상생활의 대부분의 행위들이 그렇지 않을까? 

넷째는, 안 하는 게 더 좋지만, 한다고 해서 죄가 되지는 않는 것들이다. 예컨대 담배를 푸이는 일 등등.

마지막 다섯째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예컨대 부녀자를 폭행하는 일 등이 이에 속한다.

난 이 구분법이 진정한 의미에서 상당히 '실용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구분법을 빌려다 쓰자면, 몸과 마음이 어느 정도 성숙한 10대 후반 청소년들의 섹스는 "권장할 일은 아니지만, 또는 안 하는 게 더 낫겠지만, 한다고 해서 죄가 되지는 않는 일"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사회적, 경제적 여건들을 고려해볼 때, 현재의 한국 사회는 분명 10대 청소년들에게 자유로운 섹스를 권장할 만한 사회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섹스를 범죄나 부도덕으로 여겨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도 않는다.  412


"성에 대해 좀 더 당당하면서도 동시에 담담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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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상의 구조

'삶'이란 무엇일까?

아까운 시간과 재능을 허비하지 않고 나만의 개성을 한껏 발휘하면서 복잡다단한 이 세상과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충만한 생활을 뜻하는 말이리라.

'삶'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선인들의 지혜에 귀기울이는 한편 그 지혜를 과학이 꾸준히 축적해 온 앎과 접맥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실과 미래의 가능성을 현재의 시점에서 이해하려고 꾸준히 노력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길을 깨달을 수 있다.


개인이 주도적으로 선택하여 현실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운명의 굴레를 박차고 나설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진 이들이다.


삶은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서 경험이다.

경험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시간은 아주 귀중한 자산이다.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경험의 내용이다.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할당하고 투자할 것인가를 지혜롭게 결정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우리가 보낸 하루하루를 모두 더하였을 때 그것이 형체 없는 안개로 사라지느냐 아니면 예술 작품에 버금가는 모습으로 형상화되느냐는 바로 우리가 어떤 일을 선택하고 그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가에 달려 있다.


2. 경험의 내용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는 자기가 하는 일을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경험의 내용과 더 관계가 깊다.


삶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행복감만은 아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가도 삶의 질을 좌우한다.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주는 목표를 개발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정력을 충분히 써먹지 못할 경우, 우리는 좋은 감정의 극히 일부만을 맛보게 된다.


우리는 주어진 과제에 관심을 쏟는 것을 지향점 또는 목표를 설정했다고 표현한다. 목표를 얼마나 끈질기고 일관되게 추구하느냐는 동기 부여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의도, 목표, 동기부여는 심리적 반엔트로피를 조성한다. 정신력을 한곳에 집중시키고 작업의 우선 순위를 조정하면서 의식 안에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내적 동기 부여(이것을 하고 싶다)든 외적 동기 부여(이것을 해야 한다)든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집중을 해야 할 어떤 목표도 갖지 못하고 마지못해 일을 하는 상태보다는 삶의 질을 끌어올려 준다.

우리가 도달하려는 자아의 모습을 결정짓는 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다.

자신의 목표를 다스리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은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첫걸음이다.


최선의 방안은 자기 욕망의 뿌리를 이해하고 그 안에 숨어 있는 편견을 인식하면서, 사회적 ? 물질적 여건을 지나치게 흩뜨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신의 의식에 질서를 가져올 수 있는 목표를 겸허하게 선택하는 것이다. 이보다 덜한 목표를 세우는 것은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며, 이보다 과도한 목표를 세우는 것은 좌절을 자초하는 셈이다.


의식의 내용으로 감정 ? 목표에 버금가게 중요한 것은 사고의 인지적 과정이다.

사고라고 부르는 것은 정신력에 질서가 갖추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정신의 작용을 깊이 있게 파고들려면 집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생각은 논리적 인과 관계에 따라서 가지런히 배열되는 것이 아니라 두서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얽혀 있다.

노력을 한 곳으로 모으지 못하면 사고는 아무런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지리멸렬해진다.


‘몰입’은 삶이 고조되는 순간에 물 흐르듯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느낌을 표현하는 말이다.

명확한 목표가 앞에 있을 때 몰입할 가능성이 높다.

몰입 활동의 또 하나 특징은 되먹임, 곧 피드백의 효과가 빨리 나타난다는 것이다.

몰입은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버겁지도 않은 과제를 극복하는 데 한 사람이 자신의 실력을 온통 쏟아부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몰입은 정신력을 모조리 요구하므로 몰입 상태에 빠진 사람은 완전히 몰두한다.

삶을 훌륭하게 가꾸어주는 것은 행복감이 아니라 깊이 빠져드는 몰입니다. 몰입해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일이 마무리된 일이 마무리된 다음에야 비로소 지난 일을 돌아볼 만한 여유를 가지면서 자신이 한 체험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했는가를 다시 한 번 실감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되돌아보면서 행복을 느낀다.


어떻게 하면 좀더 신바람 나는 몰입의 상태로 넘어갈 수 있을까? 답은 자명하다. 실력 연마에 좀더 힘을 쏟아야 한다.

몰입 경험은 배움으로 이끄는 힘이다. 새로운 수준의 과제와 실력으로 올라가게 만드는 힘이다.


명확한 목표가 주어져 있고, 활동의 효과를 곧바로 확인할 수 있으며, 과제의 난이도와 실력이 알맞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면 사람은 어떤 활동에서도 몰입을 맛보면서 삶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다.


3. 일과 감정

삶의 질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그 일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달려 있다. 사람이 저마다 하는 행동은 경험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정말로 성숙해지려면 대화를 통해 자극을 얻을 수 있는 참신한 사고를 가진 상대를 만나야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긴요한 것은 결국 고독을 견디는 능력, 아니 고독을 즐기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어떤 활동을 하느냐, 누구와 함께 있느냐 못지않게,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도 우리가 갖는 경험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경험의 질에 창조적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을 누구와 하느냐 못지않게 어떤 여건에서 하느냐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이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외부 조건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용하는가다

눈부신 일상 생활은 결국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일을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


인생은 이런 식으로 살라고 누가 정해 놓은 규칙이 있는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내는 일이다.


4. 일의 역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일'처럼 생각되느냐 '놀이'처럼 생각되느냐 물어보면, 6학년 아이들은 학교 공부는 일 같고 운동 시합은 놀이 같다고 약속이나 한 듯이 대답한다. 재미있는 건, 청소년들은 대체로 다신이 일로 여기는 활동을 할 때 이 일이 자신의 앞날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이것이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고 자부심을 높여 준다고 대답한다는 점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되면 필요하지만 내키지 않는 일과 쓸모없지만 즐거운 일을 확연히 구분 할 줄 안다. 


미국 고등학교 1학년생의 57퍼센트, 고등학교 3학년생의 86퍼센트가 봉급을 받고 일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다.


청소년들이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건 일 같지도 않고 놀이 같지도 않은 걸 할 때 가장 괴로워한다.

청소년은 하루 시간의 35퍼센트를 '일 같지도 않고 놀이 같지도 않은 행동'을 하면서 보낸다.


이렇다 할 수입도 없이 한가로움만 주어진다면 그 사람은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고 참담함에 젖는다.

흔히 직업에서 얻을 수 있는 목표 의식과 도전 의식이 없이는, 자기 절제가 아주 뛰어난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의미있는 삶을 누리기에 충분할 만큼 마음을 한군데로 모으기가 어렵다.


우리가 하는 활동 중에서 게임에 가장 가까운 성격을 가진 것이 일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곧잘 간과한다. 일에는 명확한 목표와 규칙이 있다. 

일은 산만함을 누르고 집중력을 살린다. 이상적인 경우는 일의 난이도가 일을 하는 사람의 실력과 엇비슷할 때다.


여가 시간이 필요조건일 수는 있지만 불행하게도 여가 시간 그 자체가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여가 시간을 지혜롭게 활용하는 법을 터득하기란 예상보다 쉽지 않다.

객관적 작업 환경과 우리의 주관적 태도,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일이 즐겁다는 생각을 좀처럼 갖기 어렵다. 하지만 문화적 편견에 좌우되지 않고 일을 개인적으로 의미있게 만들고 싶다는 단호한 의지를 갖고 이 문제에 접근한다면 아무리 범속한 일이라 하더라도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


지식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다 보면 어려움도 많고 내면의 갈등도 심할 수밖에 없지만 미지의 영역으로 정신을 넓히는 데서 느끼는 희열은 보통 사람 같으면 벌서 은퇴하고도 남았을 노령의 연구자들마저도 항상 느끼는 즐거움이다.


일이 한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값지게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외부 조건이 아니다. 문제는 일을 어떻게 하고 일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어려움에서 어떤 경험을 끌어내는가에 달려 있다.



5. 여가는 기회이며 동시에 함정

여가는 일보다 즐기기가 더 어렵다. 효과적으로 쓰는 요령을 모르면 삶의 질은 올라가지 않는다. 그것은 절대로 사람이 저절로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ESM 연구 조사에서 우리는 사람이 어떤 목표 하나에 집중할 때 심지어는 몸까지도 더 좋아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것은 게으름이 사람의 천성이 아님을 시사한다. 목표가 없고 교감을 나눌 수 있는 타인이 없을 때 사람들은 차츰 의욕과 집중력을 잃기 시작한다. 마음은 자꾸만 흔들리고, 불안감만 조성하는 해결 불능의 문제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마음이 붕괴되는 이런 최악의 무질서 상태를 피하기위하여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불안의 샘을 의식에서 지워주는 자극에 의존하게 된다. 그것은 드라마, 연애소설, 추리소설, 도박, 섹스, 술, 마약 등

이것들은 의식에서 벌어지는 혼돈을 짧은 시간 안에 줄여주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허무감과 불쾌감이다.

내부에서부터 정신력을 자유자재로 운용할 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사람의 기분은 몰입 상태에 있을 때 절정에 이른다. 그것은 도전을 이겨내어 문제를 해결한 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몰입을 낳는 활동은 대부분 명확한 목표, 정확한 규칙, 신속한 피드백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런 외적 조건들이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집중하고 긴장한다.


능동적 여가와 수동적 여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며 심리적 효과도 당연히 판이하게 나타난다.


몰입할 수 있는 활동은 하나같이 처음에 어느 정도 집중력을 쏟아 부어야 그 다음부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몰입을 낳는 활동은 까다롭고 어려워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때가 자주 있다. 수동적 여가 활동은 불안을 거의 낳지 않는다. 그것은 대체로 사람을 이완시키고 무감각하게 만드는 활동이다. 여가 시간을 수동적 활동으로 채우면 아주 즐겁지는 않아도 어쨌든 골치 아픈 상황은 피해갈 수 있다. 사람들은 수동적 여가 활동의 바로 이런 점에 끌리는 듯하다. 

수동적 여가가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그것이 자유 시간을 보내는 유일한 방편으로 쓰이는 순간부터다.


목입 경험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은 책을 많이 읽고 TV를 적게 보는 사람이며, 몰입 경험을 가장 적게 하는 사람은 책은 거의 안 읽고 TV로 소일하는 사람이었다.

살아가면서 이렇다 할 몰입의 대상을 찾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부담스럽지 않은 수동적 여가에 의지하는지도 모른다.

수동적으로 여가를 보내는 습성은 이전에 누적된 문제들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문제의 원인으로 작용하여 삶의 질을 고양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봉쇄하기에 이른다.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오늘의 소수민들은 스포츠나 연예 분야로 진출하여 사회적 신분 상승을 이루겟다는 꿈에 젖어 있다. 농구 ? 야구 ? 권투 ? 대중음악은 부와 명예를 약속하면서 사람들의 남아도는 막대한 정력을 흡수하고 있다 입장에 따라서는 이것을 두 가지의 전혀 상반된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마르크스가 종교를 두고 한 말을 끌어오자면 여가가 ‘인민의 아편’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비판하는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아니면 뾰족한 대안이 없는 위험스러운 상황 앞엣 창조적으로 나온 반응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여가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려면 일을 할 때처럼 창조력을 발휘하고 정력을 쏟아야 한다.

한 사람의 삶이 알차려면 자유로운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여가 활동이 사회적 차원에서건 개인적 차원에서건 원인과 결과로서 동시에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세상은 흥미진진한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상상력이 부족하고 게으르기 때문에 그걸 모르고 살아갈 뿐이다.



6. 인간관계와 삶의 질

우리가 평상시에 하는 행동 중에서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남들과의 교제다.

인간관계가 우리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것이다.


마음의 균형을 잡는 데 남들과의 어울림이 그초록 중요하다면 타인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직시하고, 그 영향을 어떻게 하면 긍정적 경험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사람관계엣 마음이 무질서에 빠지지 않고 바람직한 질서를 유지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하나는 우리의 목표와 다른 사람의 목표 사이에서 어떤 합치점을 찾아내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목표에 관심을 기울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친구로 선택한 것은 그와 나의 목표에 합치점이 있어서이며 서로 평등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우정은 서로에게 득을 준다. 외적 강제 관계가 아니다. 이상적 우정은 늘 새로이 정서적 ? 지적 자극을 주어 권태나 무감각이 스며들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달리 깊이 사귈 만한 대상이 없는 사람은 자기처럼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의존하여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고 하는데, 이 경우 우정은 파괴적을 작용한다.


좋은 친구를 사귀기가 워낙 어려워서인지 미국에서는 부모 ? 배우자 ? 자식이 친구처럼 지내는 새로운 가능성이 모색되고 있다.

가족 관계가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력은 너무나 막중해서 글로 엮는다면 무궁무진하게 나올 것이다.

아주 일반화시켜서 말하자면 사람이 하루 중에 느끼는 감정의 기복에서 조절판 역할을 하는 것이 가정이라 할 수 있다.


남자는 아직도 아이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에 관심을 두는 반면, 여자는 아이들이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가를 중시한다.


원만한 가정을 꾸러나가는 비결이 무엇인가? 

식구 하나하나의 정서적 안정과 성장을 뒷받침하는 가정에는 두 개의 거의 상반된 특성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원칙과 자발성, 규율과 자유, 높은 기대와 무조건적 사랑의 공존이다.


보통 사람은 하루 중 깨어 있는 시간의 삼 분의 일을 혼자서 보낸다. 너무 많은 시간을 혼자서 보내는 사람도 문제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적은 사람도 문제가 있다.

고립된 망상이나 비현실적 공포에 빠져들기 쉽다는 점을 많은 사회과학자들도 지적한다.


혼자 있을 때 유일하게 올라가는 경험의 요소는 집중력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고독을 견디는 능력이 있다고 과신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고독을 즐기건 즐기지 않건 어느 정도의 외로움을 견디며 살아가지 앟으면 안 되는 시대다. 생각을 모으려면 집중력이 필요한데 주변의 불필요한 말 한마디에, 다른 사람에게 주목해야 할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좀체 집중할 수가 없다.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혼자 있는 걸 싫어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개발 할 수가 없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연구소에서 실험을 하려면 혼자 보내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창조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의견을 나누며 서로의 작업에 대해 이해를 넓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과학자 프리먼 다이슨은 “연구할 때 나는 문을 열어 둔다. 기회만 있으면 사람들과 대화를 하려고 애쓴다. 그렇게 자꾸 어울려야만 흥미로운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하지만 집필은 전혀 다르다. 글을 쓸 때 나는 문을 닫는다...”


창조적인 개인들이 삶을 헤쳐나가는 방식에서 우리는 사람이 외향적이면서 동시에 내향적일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읽는다.



7. 삶의 패턴을 바꾼다.

자신의 정력을 잘만 활용하면 누구보다도 알찬 경험을 할 수 있는데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점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장벽들을 보란 듯이 극복 한 예 

 - 안토니오 그람시 : 주위의 기대없이 병마와 싸우면서도 탁월한 문필가와 이론가가 됨.

 - 라이너스 폴링 : 독서광이며 탐구심이 많았지만 형편으로 어렵게 친구의 부모를 통해 대학을 가고 온갖일을 하면서 학업에 정진하여 노벨화학상과 평화상을 받음)


전보다 몰입 경험을 하는 빈도가 크게 늘어난 청소년들은 공부를 더 많이 하고 수동적 여가에 시간을 조금 투자했으며, 몰입 경험의 빈도가 줄어든 청소년들보다 집중력 ? 자부심 ? 희열 ? 적극성 면에서 높은 점수를 얻었다.

몰입 경험이 늘어난 청소년들이 줄어든 청소년들보다 “행복하다”는 응답을 더 많이 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우리가 몰입할 가능성이 더 많은 활동들에 정신력을 투자함으로써 삶의 질을 현실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음을 시사한다.


직장을 고역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작용.

첫째, 하나마나한 일을 한다는 불만.

둘째, 지겨운 일을 밥 먹듯이 되풀이해야 한다는 불만.

셋째, 직장일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준다는 점.

사람이 자기 일에서 만족을 얻느냐 못 얻느냐를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보수나 안정성보다는 바로 이 세 가지 요인이다 


선뜻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힘겨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은 결국 우리에게 있다.


활동이 이루어지는 전체 맥락을 늘 염두에 두고 자신의 행동이 전체에 미칠 영향을 이해한다면, 아무리 사소한 직업이라도 세상을 전보다 살 만한 곳으로 탈바꿈시키는 인상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자기 일을 묵묵히 하면서 주변의 무질서를 줄이는 데 이바지한 직장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웃음 띤 얼굴로 와이퍼를 갈아주면서 그런 사소한 친절에 대해서는 돈을 받을 수 없다며 한사코 나의 사례를 거부한 주유소 직원, 집을 사고 몇 년이 흘렀어도 도움의 손길을 거두지 않았던 부동산중개인, 다른 직원들이 모두 공항을 떠난 다음에도 끈까지 남아 손님이 분실한 지갑을 찾으려고 애쓰던 승무원....

이 모든 사례에서 직무의 가치가 크게 올라간 것은 근무자가 자기 일에 남들보다 더 정성을 쏟아부어 거기서 남다른 의미를 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직무 수칙에 규정된 수준 이상으로 생각을 하고 배려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관심도 자연히 높아지기 마련이며 이러한 관심이야말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값진 자산이다.


노력하지 않으면 지겨운 일은 계속 지겨운 일로 남기 마련이다. 

어느 한구석도 소홀히 하지 않는 성실함으로 직무에 임하면서, 이런 조치는 과연 필요한가,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 정말로 필요한 일이라면 더 잘,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할 수는 없는가, 어떤 조치를 곁들여야 내가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더 가치가 생길 수 있는가를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우리는 보통 불필요한 구석을 없앰으로써 일을 최소화하는 방안이 무성인지를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그러나 그것은 근시안적 전략이다. 같은 정력을 일을 더 잘하는 방법을 생각하는데 쏟아붓는다면 일엣 느끼는 즐거움도 커질 테고 직장에서 성공할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누군가가 상황이 요구하는 수준 이상으로 관심을 기울이면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 우리의 삶을 뒤바꾸는 중대한 발견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이 워낙 흐트러져 있어서 무슨 일이 터져도 그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어간다.


사소한 변화에 주목하면 위대한 발견을 낳을 수 있는 것처럼, 조금만 태도를 바꾸면 지긋지긋하고 넌더리나던 일이 빨리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날 정도로 기다려지는 환상적 활동으로 변모한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첫째,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이해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둘째, 지금의 방식이 업무에 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수동적 자세에서 탈피해야 한다. 

셋째, 대안을 모색하면서 더 좋은 방법이 나타날 때까지 실험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일에서 느끼는 스트레스 문제를 푸는 데 이런 식의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여러분은 이제 수긍이 갈 것이다. 몰입 경험에는 스트레스가 암적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맨 먼저 취해야 할 조치는 머리를 어지럽히는 각종 요구들 속에서 우선 순위를 매기는 일이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은 자기가 처리해야 하는 사항을 메모로 조목조목 정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어울리는 전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일이다.

일처리에 순서를 정하고 일을 끝내는 데 필요한 내용을 부석하며 해결 전략을 수립하는데 좀더 관심을 쏟아야 한다. 통제력을 잃지 않아여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다.


창조적인 사람들이 살아온 과정을 보면 자기가 원하는 쪽에 일을 맞추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이미 깔려 있는 길을 밟은 것이 아니라 걸어가면서 스스로 길을 만들어 냈다.

아무리 단순한 일을 하더라도 창조적인 사람들을 본받아 작업에 임하는 태도를 바꾸면 엄청난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스톡홀름 카롤린스카연구소의 종야생물학자 게오르크 클라인은 자기일을 좋아하지만 질색으로 여기는 두 가지일이 있다. 하나는 공항 대합실에서 즐을 서는 일, 또 하나는 정부 앞으로 연구비 지원신청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이 둘은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두 가지를 하나로 결합시키려 했다.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연구비 지원 신청서를 쓰기로...

휴대녹음기를 이요하여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연구비 지원 신청서 내용을 구술하였다.

객관적으로 보면 처리해야 하는 일은 그대로지만 통제력을 발휘한 덕분에 그것을 거의 놀이의 경지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사람의 집중력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어서 일단 어떤 한 가지 목표에 주의를 빼앗기면 다른 곳에 관심을 돌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두 차원(일, 인간관계) 가운데 어느 하나를 무시하면서 행복을 누리기는 어렵다 


어느 집단에서든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힘은 대체로 두 가지다. 

하나는 음식, 따뜻함, 신체적 보살핌, 돈이 제공하는 물질적 에너지

다른 하나는 상대방의 목표에 관심을 기울여주는 정신적 에너지이다.(정성)


같이 있는 시간이 정말로 즐겁기 위해서는 구성원의 목표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모두가 공통의 목표에 정성을 쏟을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이득이 되도록 돕는 것이 사실은 자기에게도 가장 득이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인간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일과 인간관계에서 몰입을 경험하는 사람의 삶은 질이 올라갈 수 밖에 없다. 특별한 묘책도 없고 손쉬운 지름길도 없다. 자기한테 찾아온 기회를 함부로 내버리지 않고 잠재력을 끝까지 살리려고 노력하면서 삶을 풍부한 경험으로 가득 채우려는 사람만이 드높은 삶의 경지에 올라설 수 있다.



8. 자기목적성을 가진 사람

열정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삶에 뛰어드는 사람의 성격을 자기목적성으로 충만해 있다고 말한다.


자기목적성을 뜻하는 영어 ‘autotelic’은 그리스어 ‘auto(자기)’ 와 ‘telos(목적)’가 결합한 말이다. 그 일 자체가 좋아서 할 때 그 일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때를 우리는 자기목적적이라고 한다.


자기목적성을 가진 사람은 원하는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보상이 되기에 별도의 보상이 필요하지 않다. 외부적 보상이 없어도 무방하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에 관여한다. 삶의 흐름에 깊숙이 빠져들 줄 안다는 소리다.


어떤 사람이 자기목적성을 가진 인간형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장기간에 걸쳐 다양한 상황 속에서 그가 어떻게 처신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주어진 상황에서 과제의 난이도가 높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실력이 있을 때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자기목적성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바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다.

사람은 몰입을 낳기에 좋은 활동, 곧 정신노동이나 능동적 여가 활동을 할 때 비로소 몰입을 경험하다.


자기목적성이 있는 청소년들은 집중을 더 잘하고 즐거움도 많이 느끼며 자긍심도 높고 자기가 하는 일이 미래의 목표 달성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자기목적성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더 행복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복잡한 활동을 하고 있으므로 자신에 대한 만족감은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자기목적성을 가진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가족과 지내는 시간이 유달리 많다는 점이다.

가정이 보호막과 함께 적절한 자극도 주는 상당히 정교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만 이러한 ‘사회적 미숙’ 기간이 아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목적성을 가진 사람들은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남들보다 더 많은 걸 알아차리며 눈앞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그저 좋아서 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자기목적성을 중시하는 사람은 나라는 울타리를 가볍게 뛰어넘어 삶 자체를 향유할 수 있는 정식적 여유를 가지고 있다.

창조적인 사람은 대체로 자기 목적성을 중요시한다. 획기적인 업적이 그들의 머리에서 나오는 이유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일에도 정력을 쏟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목적성을 중시하는 사람의 관심사가 수동적이거나 관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중요한 것은 이런 관심을 사심 없이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이 기울이는 관심의 내용이 당사자의 목표나 야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을 때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할 기회를 잡게 된다.

관심을 사심 없이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삭막한가.

말로 하기는 쉽지만 사실 그 원칙을 실천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건성으로 임할 게 아니라 정신을 집중하여 처리하는 습관부터 몸에 익히도록 하자.

단순한 일도 충분한 정성을 기울이면 응분의 보상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그것들은 우리에게 정말로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는다.

시간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사실은 자기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인 경우가 많다.

‘우리가 하는 일 중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 얼마나 될까? 

 우리의 관심을 흐트려놓는 판에 박힌 일들을 잘 추려서 우선 순위를 매긴다면 지금처럼 시간이 없다는 아우성이 터져나올까?‘

빠져나가는 시간을 수수방관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늘 시간이 부족하다. 

우리에게는 시간을 잘 다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먼 훗날 재산을 불리고 안정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삶을 즐기기 위해서라도..!!


시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마음을 통제하는 힘이다.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먼저 관심을 기울이는 훈련을 해야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흥미를 느끼는 건 그 만큼 거기에 공을 들였기 때문이지 저절로 그렇게 되는건 아니다.

정보는 우리가 그것에 관심을 기울일 때만 우리에게 다가온다.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여 그 현실성을 인정한 다음, 우리가 선택한 다른 대상으로 하루빨리 관심을 돌릴때만 우리는 고통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중요한 건 우리의 태도이다.

활동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결과는 대수롭지 않으며 나의 관심을 다스리는 데서 희열을 맛보면 그만이라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관심의 방향을 좌우하는 힘은 유전 명령과 사회 관습, 우리가 어릴 적에 익힌 버릇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알게 되고 우리 의식에 어떤 정보가 들어올 것인가를 결정하는 주역은 나 자신이 아니다.


삶의 지배권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자신의 의지가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기울이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이다.



9. 운명애

진지한 유희의 정신이 살아 있고 근심과 겸손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사람은 어딘가에 전념하면서도 무심함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몰입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는 게 좋다. 목표를 달성하는 게 중요해서라기보다는 목표가 없으면 한곳으로 정신을 집중하기가 어렵고 그만큼 산만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자신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니체 철학의 중심 개념이라 할 ‘운명애’에서 잘 들어난다

“운명애를 가진 사람은 위대하다는 게 나의 신조다. 운명애는 살아갈 날에서도, 살아온 날에서도, 달라지지 않기를, 아니, 영원히 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자세다. 불가피한 것을 견디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사랑할 줄 아는 태도다.”

“나는 피치 못할 일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법을 자꾸자꾸 배우고 싶다. 그럼 나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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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은 고대라는 시대를 총결산한 사회입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유럽은 중세 기대로 접어들었고 이후 근대와 현대에 이르렀습니다.  14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수없이 많은 왕정 시대에 관해 증언과 물증이 일치하는 중요한 사실은 로마와 그 주변의 라티움 문화는 초기 단계부터 사비니 문화나 에트루리아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이런 문화구너에 로마가 초기 단계부터 속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라티움 문화는 빌라노바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초기 철기 문화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라티움 문화는 사비니 문화나 에트루리아 문화의 영향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로마가 나중에 세력을 확대할 때 별다른 문화충격 없이 사비니인이나 에트루리아인의 땅을 로마의 영토로 편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6-37


집정관의 선출이나 전쟁 개시 등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다수결을 원칙으로 했지만,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투표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켄투리아에 한 표가 할당되어 있었으므로 총 투표 수는 193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을 반영할 수는 없었지만 상당히 민주적이 ㄴ제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들의 의견이 우선시되는 교묘한 구조였습니다. 토표가 기사부터 시작되어 제1계급, 제2계급으로 재산이 많은 순으로 이루어지고, 과반수에 달하는 시점에서 끝났기 때문입니다. 기사 켄투리아 18표와 제1계급 켄투리아 80표에서 이미 98표로 과반수에 도달하므로 제2계급 이하의 투표는 사실상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40-41


피로스 전쟁 이전의 젼쟁은 승리하면 적의 영토와 재물을 획득하는 단순한 도식의 전쟁이었습니다.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 벌어진 한정된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중해 세계라는 당시 국제 사회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로마는 복잡한 국제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피로스와의 전쟁에서 처음 경험했던 것입니다.  65


기원전 130년에 37만 5천 명이었던 인구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약 100만명으로 팽창했습니다.  148


봄부터 가을까지 지중해가 호수와 같이 평온한 시기에 적재량이 100톤에서 300통인 배가 밀을 싣고 옵니다. 적재량 300톤의 배라 해도 1400척의 배가 당시 수도 로마의 가장 큰 외항인 나폴리 만의 푸테올리(현재의 포추올리)에 짐을 가득 싣고 도착했습니다.  151


건강하지도 않고 용모도 볼품없고 말솜씨도 업성 일족의 지지를 얻지 못했던 클라우디우스였지만 연설만큼은 품격과 박식함이 넘쳤습니다. 황제가 되기 전에는 공적 활동을 해야 할 시간에 독서만 했기 때문이겠지요. 

역사, 문학, 로마의 오랜 관습에 정통한 문인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대국 로마에 어울리는 행정권을 강홧하고, 국고 관리를 간소화하고 따로 독립시켰으며, 제국의 영토를 확대하는 커다란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161


네로가 즉위 이후 모친인 아그리피나를 암살하기까지 첫 5년은 후대의 현제들로부터도 가장 좋은 정치가 이루어진 시대로 높이 칭송받았습니다. ..

하지만 17살의 네로가 당시의 정치 상황을 파악하여 원로원 의우너들을 감탄시킬 만한 정책을 만들어냈을 리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스토아학파 철학자이자 당대 최고의 저술가였던 세네카(네로의 가정교사이자 후견인이기도 했습니다)의, 현실을 꿰뚫어본 상황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163


이제껏 없었던 대화재가 일어납니다. 64년 7월 19일 일몰 무렵이었습니다. 이 화재는 엿새나 계속되어 시가지 대부분이 불탔습니다. 불에 타 허허벌판이 된 로마를 재건하기 위해 네로는 '신도시 계획'을 세워 방재 도시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거리의 폭을 넓히고, 주택과 주택을 나누는 벽을 방화벽으로 만드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면 네로는 후세에 로마의 재건자로서 높이 평가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정치에 대한 관심을 잃고 개인적인 취미와 정념의 포로가 네로가 가장 정열을 쏟은 것은 신도시 계획이 아니라 자신이 기거하기 위한 황금 궁전(도무스 아우레아)의 건설이었습니다. 80헥타르나 되는 토지를 수용하여 온갖 사치를 다 부린 궁전을 세우고 그 주위에 푸른 정원과 인공 호수를 배치했습니다. 화재로 집을 잃은 많은 시민들로부터 비난을 산 것은 당연했습니다. 게다가 복구 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증세를 단행했으며, 대부호들을 잇따라 처형하여 그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166


로마 제국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관료 제도가 없었습니다. 원로원에는 법무관, 조영관, 재무관 등 정무관 제도가 있어 의원들의 호선으로 연령에 따라 선출되었습니다. 직책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각각 재판, 건설 사업 및 치안, 국고 관리 등을 담당했습니다.  169


클라우디우스 시대에는 방대한 행정 사무를 처리하는 조직이 정비되었고, 그 정비에 의해 권력이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황제가 관할하는 행정의 경우에는 유능한 해방노예를 많이 거느린 기사계급 가운데 클라우디우스의 신임이 두터운 사람들에게 운영과 관리를 맡겨 황제 관료단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조직이 형성되었습니다. 그 조직은 적어도 다섯 개의 담당 부서, 즉 내무, 재무, 법무, 진정 접수, 그리고 문교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내무는 황제와 속주 사이에 오가는 서신, 보고서, 의결서 등을 작성하고 관리하는데, 내무장관인 그리스인 해방노예가 호아제 행정의 중심인물로서 실권을 가졌습니다. 또 재무장관에도 그리스인 해방노예가 임명되어 재정을 관리하는 중임을 맡아 큰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두 사람의 강대한 권력은 그만큼 그들의 권익을 보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국고가 비었을 때, 클라우디우스의 고민을 들은 어느 남자는 그 두 사람의 재산과 황제 금고를 합치면 돈은 남아돌게 될 것이라고 비아냥거렸을 정도입니다.  171


로마 사회의 노예는 공노예와 사노예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공공 시설의 청소와 유지, 행정 사무, 죄인의 처형 등에 종사하는 공노예는 일반적으로 사노예보다 더 혜택을 받고 있었습니다. 또 사노예라도 가내 노예는 농사나 채석 일을 하는 노예만큼 중노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172


2세기 초반에 하드리아누스는 노예의 생살여탈권을 주인으로부터 거둬들여 재판에 준한 절차를 밟도록 했고, 4세기 초반에 콘스탄티누스는 노예 살해를 살인으로 규정했습니다...

노예는 생산 활동 외에도 공적인 장에서의 노동이나 가내 노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도맡았기 때문에 단순히 속박하며 강제적으로 노동을 시키기만 해서는 효율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노예들이 일할 의욕을 가지게 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한 방책이 노예 신분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노예는 해방노예라고 불리며 자유민과 거의 동등한 권리를 얻을 수 있었지만, 지방 도시에서 선거권 등을 가진 시민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노예를 해방하려면 소유자가 재판관이나 감찰관에게 신청하거나 유언에 명기할 필요가 있고 어떤 경우든 일정한 절차와 심사가 필요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해방노예가 너무 많아지지 않도록 소유하는 노예의 수에 따라 해방할 수 있는 노예 수를 정해두었습니다.  173-174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교육 제도를 정비하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그때까지 어느 황제도 손을 대지 않았던 분야이고 그래서 더욱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그때는 자녀 교육을 부모가 도맡았으므로 수업료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 가정의 자녀들만이 교사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 교사는 초보적인 읽고 쓰기나 주판을 가르치는 초등교사(리테라토르), 그리스어 혹은 라틴어 문법이나 초보적 수사학을 가르치는 중등교사(그람마티쿠스), 그리고 수사학이나 철학, 법률을 가르치는 고등교사(레토르)로 나누어졌는데, 각각의 지도 내용이나 명성에 따라 수업료도 달랐습니다. 그 밖에 기하학, 음악, 체육 등을 가르치는 학교나 상업에 필요한 산술과 속기를 가르치는 실업 학교도 있었습니다. ..

한 명의 교사가 점포나 다락방을 빌려 운영하였으므로 오늘날의 학교와는 달랐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중등교사와 고등교사에게 면세 특궈능ㄹ 주고 그리스의 우수한 교사가 수도 로마로 이주하도록 장려했습니다. 이러한 교사으 특권은 뒤에 의사에게도 적용되어 면세뿐 아니라 병역과 부역의 면제로까지 확대됩니다.  183-184


영토 확대 정책을 포기하기로 한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이라는 범위 안에서 경제 활동을 활성화하고자 애썼습니다. 이것은 속주 중시 정책으로서 내수를 확대하기 위한 정책입니다. 황제가 속주 곳곳을 방문하여 적절한 지시를 내리고 중앙정부의 지원을 약속함으로써 내수가 확대되고 속주 경제도 호전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고, 경제 활동을 자극하는 새로운 방책이 필요했는데, 하드리아누스 이후의 황제들에게는 효과적인 방책이 더이상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부터 북방과 동방에서 전쟁이 시작됩니다.  214


열악한 품질의 화폐를 주조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황제들은 세금을 더 걷기 위해 범죄나 다름없는 정책을 실시한 것입니다.  216


멸망의 원인을 하나의 요소, 하나의 현상에서만 찾을 수는 없습니다. 쇠퇴 증후군과도 같은 상황에 여러 가지 요인이 겹치면서 멸망하는 속도가 빨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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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우리는 앞으로 이 책에서 1만 년 전에 시작된 거대한 문화적 격변이, 어떻게 인간 성생활에 관한 진실을 파괴적이며 위협적인 것으로 만들었는가를 설명할 것이다. 그 결과 그 진실이 어떻게 종교적 권위에 의해 침묵을 강효당했는가, 어떻게 의사에 의해 병적인 것으로 취급받았는가, 어떻게 과학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무시당했는가, 어떻게 도덕적 훈계를 일삼는 치료사에 의해 감춰졌는가를 설명할 것이다.

길들여진 우리의 무지(無知 없을무 알지)는 파괴적이다. ..

긴 여정을 함께 해 온 부부들 중 얼마나 많은 쌍들이 대체할 수 없는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 - 가족의 안정성, 동료애, 비록 성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감정적인 친밀감 - 의 제단(祭壇 제사제 제터단)에 기꺼이 자신들의 에로티시즘을 희생했을까?  11


우리는 성적 자유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게끔 유도되고 있다. 하지만 이 시대 인간 성생활은 큰 소리로 말해서는 안 되는, 명백하지만 고통스러운 진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가 '느낀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느끼는 것' 사이에 충돌은 이 시대의 혼란, 불만족, 불필요한 고통의 가장 큰 근원인것 같다.  13-14


인간이 진화해 온 수렵채집인 사회들은 거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고도로 평등한 소규모 집단들이었다. ..

보츠나와의 꿍산족은 호주 오지 원주민들, 아마존 우림 오지의 부족들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인류학자들은 '극단적 평등주의'에는 즉각 보상의 수렵채집인 사회가 거의 보편적이라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공유는 단순한 권장사항이 아니라 의무이다.  22


우리는 이 공유 행위가 섹스에도 마찬가지로 확대됐다고 믿는다. 영장류학, 인류학, 해부학, 심리학의 많은 연구들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23


계절마다 같은 땅에서 농사를 짓게 되자, 대부분의 사회에서 작동 방식이 공동 소유에서 사유재산으로 재빨리 대체됐다. ..

농업공동체 정착생활을 시작했을 때, 사회적 현실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뿌리 깊이 변화했다.  24


농업 혁명의 가장 큰 패배자 - 아마도 노예는 제외하고 - 가 여성이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여성은 수렵채집인 사회의 중심이며 존경받는 위치에서 집, 노예, 가축과 마찬가지로 남성이 얻고 지켜야 할 또 하나의 소유물로 전락했다...

<섹스의 선사시대>의 저자인 고고학자 티모시 테일러는, 관련 고고학적 증거에 고나한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수렵채집인의 섹스는 공유와 상보성(相補性 서로상 도울보 성품성) 개념의 모델이 된 반면, 초기 농업사회의 섹스는 관음증 성향에다 억압적이고 동성애를 혐오하며 생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는 "농부들은 야생(野生 들야 날생)이 두려워 그것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라고 말한다.  25


초기에 호주를 여행한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만난 원주민들이 비참하게 살고 있으며 만성적 기근에 시달린다고 보고했다. 원주민들은 대부분의 수렵채집인과 마찬가지로 보고하면서도 원주민들이 전혀 수척하지 않다는 사실에 당혹했다.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이 굶주려 죽을 정도라고 확신했다. 왜? 왜냐하면 그들은 원주민들이 최후의 수단 - 곤충, 위체티 그럽, 쥐를 먹는 것 - 에 의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것들은 굶주리지 않는다면 아무도 먹지 않을 생물들이다. 그 음식들이 영양가가 높고, 풍부하며, 호두 향을 곁들인 으깬 계란과 부드러운 모차렐라 치즈 멋을 낼 수 있다는 생각을 영국인들은 하지 못했다.  31


어떤 것이 자연스럽다 혹은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지는' 것은 실제로 그렇다는 의미가 아니다. .. 특별히 우리는 식생활이나 섹스처럼 친숙하고, 개인적이며, 생물학적인 경험에 관해 이야기 할 때, 문화적으로 친숙한 것이 마음속 깊이 파고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초기 유럽인들처럼, 우리는 무엇이 정상이며 자연스러운 것인가에 관한 인식의 제약을 받는다.  32


인간 성생활의 기원과 본성에 관한 표준적 담화는, 기만적이며 꺼림칙한 성적 일부일처제의 발전을 설명한다고 주장한다. ..

남성은 싸고 풍부한 씨앗을 멀리 널리 퍼뜨리려고 앴느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부성(父性 아비부 성품성) 확실성을 높이기 위해 한 명 혹은 소수의 여성을 통제하려고 노력한다. 반면 여성은 공급이 제한된, 신진대사 상으로 비싼 알들을 가치 없는 구혼자들로부터 보호한다. 그러나 일단 한 부양자(남편)에게 역이면, 배란기에 재빨리 치마를 끌어올린다. 유전적 우월성이 확실한, 턱이 네모진 남성과의 신속하고 더럽고 은밀한 짝짓기를 위해서이다.  35


찰스 다윈은 진화론적 변화가 발생하는 두 가지 기본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잘 알려진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 이다.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이 아직도 '자연 선택'을 선호한다. 하지만 경제철학자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는 훗날 이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적자 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진화란 개선의 과정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히 종(種 씨종)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함으로써 변화한다고 자연 선택은 주장한다.  48


다윈은 특별히 갈라파고스 군도(群島 무리군 섬도)의 여러 섬에서 본 핀치 새들의 미묘한 차이에 끌렸다. 이런 통찰력을 통해 다윈은 환경이 분화 과정에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49


진화적인 변화에 대한 두 번째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그것은 성적 선택이다. 성적 선택의 중심 전제는 대부분의 포유류에서 암컷이 수컷보다 자식에게 훤씬 더 많은 투자를 한다는 것이다. 암컷은 임신, 수유, 연장된 새끼 양육에 매인다. 피할 수 없는 희생이라는 이 불평등 때문에 암컷은 더 주저하는 참여자가 되며, 그 희생이 좋은 생각이라는 확신을 필요로 한다고 다윈은 추론했다. 반면 수컷은 생식에 고나해 암컷에게 크게 감사함으로써 그런 확신을 주기를 열망한다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은 짝짓기에 대한 암수의접근법이 본질적으로 충돌하는 의제라는 믿음 위에서 성립한다.  55-56


우리는 누구이고, 어떻게 오늘에 이르렀으며, 이와 관련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우리의 진화된 성적 성향을 인정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현재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 '호모사피엔스'만큼 조급히, 창조적으로, 부단히 성적인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61


인류학자 헬렌 피셔(Helen Fisher)가 '고전적 설명'이라고 부른 것. 은폐된 배란과 확장된(더 정확히 말하면 끊임없는)성적 수용성은 초기의 인간 여성들에게서 지화했다. 늘 성적으로 흥분해 있는 남자짝의 관심을 잡아둠으로써 짝 유대를 발전시키고 굳건히 하기 위한 방법으로 진화햇다는 것이다. 이 능력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했다고 추정된다. 첫째, 여성은 언제든(배란기가 아닐 때에도) 섹스가 가능했기 때문에 짝이 성적 쾌락을 위해 다른 여자를 찾을 이유가 없었다. 둘재, 여성의 생식력은 숨겨저 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자기 자녀의 피임 가능성을 증대시키면서 언제든(짧은 발정기뿐만 아니라) 그녀와 짝짓기를 한 다른 남자가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위해 늘 그녀 주변에 붙어 있게 됐다. 피셔는 "소리 없는 배란은 특별한 친구가 늘 가까이에서 그녀에게 소중한 보호와 음식을 제공하도록 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과학자들에게 '짝 보호 행동'으로 알려졌지만, 현대 여성들은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 몹시 불안하고 성가신 사람'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75




농경사회로의 이행은 그것을 감내하는 대부분의 개인에게 사실상 재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것이 위대한 진보로 묘사되는가를 설명하는 데에 개인과 집단 이익의 불일치는 도움이 된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수집한, 수렵채집 생황에서 노업으로의 이행기 무렵의 유골들을 살펴보면, 모두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기근의 증대, 비타민 결핍, 성장 저해, 수명의 대폭적인 감소, 폭력의 증가.. 축하해야 할 이유는 거의 없었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수렵채집 생활에서 농업으로의 이행은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서 묘사도니 대로 대재앙이었다는 것을, 미래를 향한 거대한 도약이라기보다 은총을 상실한 아찔한 추방이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100


평균적인 침팬지는 우리 몸무게의 절반이 안 되지만 콧수염 난 소방대원 4, 5명의 힘을 가지고 있다. 많은 동물들이 인간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으며, 더 깊이 다이빙할 수 있고, 더 잘 싸울 수 있으며, 더 멀리 볼 수 있고, 더 희미한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인간에게는 침묵처럼 들리는 미묘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파티에 무엇을 가지고 갈까? 인간에게 특별한 것은 무엇인가?  101


큰 두뇌. 맞다. 그러나 우리의 독특한 두뇌는 수다스러운 사회성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정확히 왜 인간 두뇌가 그렇게 빨리, 그렇게 커졌는가에 대해서는 열띤 논쟁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인류학자 테렌스 디컨(Terrence W. Deacon)이 쓴 글에 동의할 것이다. "인간 두뇌는 단지 더 나은 지능에 대한 일반적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어에 필요한 능력을 정교하게 발전시킨 진화 과정에 의해 형성됐다." ..

불균형적으로 큰 두뇌 그리고 언어와 관련된 능력 외에도, 우리는 특별히 인간적인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  .. 

우리의 과장된 성(性)이 그것이다. 

어떤 동물도 지구상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시간을 호모사피엔스보다 더 많이 섹스에 호들갑스럽게 쓰지 않는다.  102


(남미의) 아체(Ache)족 실험대상자들에게 그들의 아버지를 밝혀 보라고 요청했다. .. 321명의 아체족이 600명이 넘는 아버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누가 당신의 아버지들인가? 

아체족은 아버지를 네 종류로 구분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인류학자 킴 힌(Kim Hill)에 따르면, 네 가지 유형의 아버지는 다음과 같다.

 - 미아레(Miare) : 그것을 주입한 아버지

 - 페로아레(Peroare) : 그것을 혼합한 아버지들

 - 몸보아레(Momboare) :  그것을 넘치게 한 아버지들

 - 바쿠아레(Bykuare) : 아이의 본질을 제공한 아버지들  109


<어머니들과 타인들(mothers and Others)>의 저자 사라 블래퍼 흐르디(sarah Blaffer Hrdy)는 "다른 영장류와 다양한 부족사회에서의 자녀 공유 이야기는 인류학 문헌의 중심에 서 본적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엄마와 자녀의 생존과 생물학적 건강의 측면에서, 공동 보육의 결과는 모두에게 좋은 것으로 판명된다." 라면서 한탄한다.  125


데스몬드 모리스(Desmond Morris)는 폴리네시아에서 한 여성 트럭운전사와 함께 보낸 오후를 기억한다. 그녀는 자신이 9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 2명은 불임인 친구에게 주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 자녀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모리스가 묻자, 그녀는 "우리 모두가 모든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아이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128


많은 사회에서 처녀성은 그 개념을 의미하는 단어 조차 없을 정도로 전혀 중요하지 않다.  141


결혼 자체는 어떤 종류의 의식이나 종교의식 없이 이루어진다. 재물이나 서약의 교환도 없으며 심지어 잔치도 하지 않는다. 단지 당신의 해먹을 여성의 해먹 옆에 걸기만 하라. 그러면 당신은 결혼한 것이다.  142


오토 키퍼(Otto Kiefer)는 1934년 <고대 로마의 성생활(Sexual Life in Ancient Rome)>에서, 로마인의 관점에서 "자연법칙과 물리학 법칙들은 결혼의 유대와 무관하며 심지어 상반된다. 따라서 결혼하려는 여성은 자신을 훼손시키는 데 대해 대자연에 속죄해야만 하고, 사전 음란으로 결혼의 순결을 사기 위한 자유로운 매춘의 시기를 거쳐야 한다." 라고 설명한다.  146


여자와 남자는 결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랑은 계절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고 간다. - 양 에르체 나무(모수오족 여성)  148


'결혼' '짝짓기' '사랑'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현상들이며, 특정 문화의 외부에서는 그 의미가 거의 혹은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 걷잡을 수 없이 일상화된 그룹섹스, 스와핑, 억제되지 않는 가벼운 정사, 사회적으로 허가된 순차적 섹스에 관해 우리가 언급한 사례들이 인류학자들이 '일부일처제'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회에서 보고됐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결혼'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곳에서도 일어난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결혼, 일부일처제, 핵가족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그 같은 개념 해석으로는, '누구와도 동침하는' 초원들쥐조차 일부일처제의 자격을 얻을 것이다.  161


침으로 발효시킨 맥주와 암소의 피로 만든 밀크셰이크를 맛보는 것에서부터 샌들을 신은 채 양말을 신는 것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거의 무엇이든 간에 자신들의 사회가 그것이 정상적이라는 확신을 그들에게 준다면, 기꺼이 그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입고 행동하고 믿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사람들이 파열점(破裂點 깨뜨릴파 찢을열 점찍일점)을 넘어서도록 자신들의 목을 늘이고, 자신들의 갓난아기들의 머리를 조이거나, 자신들의 딸들을 신전(神殿 귀신신 대궐전) 매춘에 팔아넘기게끔 확신을 주는 사회적 힘들은, 성적 질투를 바고 같고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적 질투를 새롭게 조형하거나 중성화시킬 힘을 충분히 가진다. 성적 질투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164-165


인간은 암을 치료하고 화성에 가고 인종적 편견을 없애고 이리호(Lake Erie)에 물을 채울 때가 아니라, 원시적인 공동체에서 다시 살 수 있는 방법들을 발견할 때 더욱 행복해질 것이다. 그것이 나의 유토피아이다. - 쿠르트 폰네구트 주니어  175


프리드만은 "이스라엘인들 사이의 신성한 맹세는 남성의 음겨엥 손을 올려놓음으로써 성립됐다"라고 썼다. 자신의 고환에 손을 얹고 맹세하는 행위는 증명하다(testify)라는 단어 속에 살아남아 있다.  280


생식 생물학자 로저 쇼트(Roser Short)는 "발기한 인간의 커다란 음경은 유인원들의 음경과는 극적인 대조를 보이는데 거기에 어떤 특수한 진화적 힘들이 작용해 왔는지를 궁금하게 만든다." 라고 썼다. 제프리 밀러가 막 나타나서는 "성인 남성은 생존해 있는 모든 영장류 중에서도 가장 길고, 가장 두꺼우며, 가장 탄력있는 음경을 갖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됐다. 

호모 사피엔스, 위대한 음경을 가진 위대한 유인원!  281





남성들이 받는 모든 나쁜 압력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은 평균 4분에서 7분 사이의 시간을 기록함으로써 보노보(15초), 침팬지(7초), 또는 고릴라(6초)보다 훨씬 더 오래 성교를 지속한다.  283


게다가 인간이 한 번 사정할 때 평균 정액략은 침팬지의 약4배인데, 사정당 전체 정자 세포의 수는 침팬지의 사정 범위 내에 머문다.  284


인간의 정자 생산량과 고환의 용적이 최근에 극적으로 감소했음을 시사하는, 설득력 있는 증거가 존재한다. 연구자들은 생존하는 정자의 활성의 감소뿐 아니라 평균 정자 수의 우려스러운 감소를 입증했다. 한 연구자는 덴마크 남성의 평균 정자 수가 1940년의 113 * 10의 6승 개에서 1990년에는 약 절반(66 * 10의6승)으로 급락했다고 시사한다. 폭락의 잠재적 원인들의 목록은 대두(大豆 큰대 콩두)와 임신한 젖소의 우유 속에 있는 에스트로겐 같은 화합물에서부터 살충제, 비료, 가축의 성장 호르몬, 그리고 플라스틱에 사용된 화학물질에 이르기까지 매우 많다. 최근의 연구는 광범위하게 처방되는 우울증 치료제 파록세틴(paroxetine) - 세록새트(Seroxat)와 팍실(Paxil)이란 이름으로 팔린다 - 이 정자 세포 속의 DNA에 손상을 가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한다. 로체스터대학교의 인간 생식 연구는 임신 기간 중 1주일에 일곱 번 이상 소고기를 먹은 어머니가 낳은 남성들은 수정능력 부족(subfertile) - 정액 1ml당 정자 수 2,000만 개 미만 - 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3배 이상 높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처럼 소고기를 먹은 사람들의 아들들 가운데 수정능력 부족으로 분류된 사람의 비율은 17.7%인 것에 비해, 소고기를 덜 먹은 어머니들의 아들들 가운데 수정능력 부족으로 분류된 사람의 비율은 5.7%였다.

인간은 일부일처제적인 또는 일부다처제적인 어떤 영장류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정자 생산 조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85


사용하지 않으면 잃는다(use it or lose it)는 격언은 자연 선택의 기본적인 교의(敎義 가르칠교 옳을의)중의 하나이다. 가차 없는 절약 원칙을 통해, 진화는 수행되지 않는 과업을 위해 유기체에게 어떤 기관을 좀처럼 갖추어 주지 않는다.  286


섹스에 관한 이 책 전체를 쓰면서, 우리는 우리 대부분이 섹스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다소 혼란스럽게 시사하고 싶었다.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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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우리는 흔히 생물의 진화에 영향을 미치는 환겨으로 우선 기후 조건이나 서식지 등 이른바 '물리적 환경'을 떠올린다. 그러나 생물은 누구나 다른 생물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기 때문에 '생물 환경' 또한 중요하다. 생물 환경은 물리적 환경과 달라서 그 자체가 진화한다.  6



서문 


내 역할은 다른 사람들의 연구로 이루어져 있는 헝겊 조각들을 연결해서 조각보로 만드는 일이다.  10



역자서문

이 책은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알아야 하며, 인간의 본성이 진화해온 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성이 어떻게 지화해왔는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15








인간에게는 전형적인 본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 책에 설정된 가정이다. 이 책의 목표는 바로 인간의 본성을 찾는 것이다.  24


개코원숭이의 '미소'는 위협을 나타낸다고 하지만, 인간의 미소는 늘 즐거움을 나타낸다. 이것은 세계 공통의 인간 본성이다. ..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특성만큼 독특한 측성 역시 수없이 존재한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문화적 차이를 연구하는 학문이 문화인류학이다. ..

이 책은 그러한 인간 본성의 본질에 대한 하나의 질문인 셈이다. 이 책의 주제는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알지 못하고서는 인간의 본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성(性)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진화의 중심 주에는 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25


인간의 본성은 모두 궁극적으로 번식의 성공에 기여하도록 주도면밀하게 선택되었다.

이 말은 매우 오만한 주장처럼 들릴 것이다. 이는 마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순결을 지키는 정숙한 사람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며, 또한 인간을 오직 번식에만 치우치게 프로그램된 로봇처럼 묘사하는 듯하다.  26


어떤 동물이 생존력이 탈월하고, 경쟁자에 비해서 배우는 능력이 우수하며 오래 살 수 있다 하더라도, 생식력이 없다면 그 동물의 우수한 유전자들은 자손에게 전수되지 못하기 때문에 쓸모가 없다. ..

따라서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이해하려고 한다면, 질문의 핵심은 번식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유전자들이 자연선택에 의해 도태되지 앟고 살아남으려면 번식의 성공이라는 시험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인간의 정신이나 본성에는 번식과 관련짓지 않고서 이해할 수 있는 면이 거의 없다는 점을 주장하고자 한다.  27


인간은 과거에 의해 형성된다는 생각은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중요한 통찰이었다. ..

모든 생명체는 특별한 생활양시기에 적응하기 위한 그들의 조상들의 선택적 생식을 통하여 상당히 무의식적으로 '설계'되었다.  28


인간의 본성은 자연선택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나는 '잘 가라'는 인사를 던질 뿐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가정을 거의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함께 토론할 이유가 없다.  29


이 책에서는 인간의 공통된 본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

인간은 곧 개인이다. 모든 개인은 서로 조금씩 다르다.   36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인간이 유일한 존재라면 어떻게 보편적이면서도 인간에게만 특이한 인간의 본성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역설의 해결점은 성이라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성이야말로 두 남녀의 유전자를 함께 섞을 수 있으며, 섞인 유전자의 반을 버림으로써 어떤 자식도 어머니나 아버지 중 한쪽만을 꼭 닮을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

모든 개인은 2명의 부모와 4명의 조부모, 8명의 증조부모, 16명의 고조부모를 갖는다. 이렇게 계산해 나가면, 단지 30세대만 올라가도 대력 1066년쯤 되는데, 이때는 10억(2의 30승)명 이상의 직계 조상을 갖게 된다.  37-38


개인의 고유성은 인간의 본성에 성이 관여하는 것 중 단지 첫 번째에 지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인간에게는 사실상 두 개의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남성과 여성이다. 성의 근본적인 비대칭성은 필연적으로 남녀의 서로 다른 성적 본성을 만든다. 이들 본성은 각각의 성이 지닌 독특한 역할에 잘 맞는다. ..

인간의 본성에 성이 관여하는 것 가운데 세 번째는 현존 인구의 절반이 우리 아이들의 유전자의 반을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최상의 유전자를 찾던 조상의 자손이며 우리 또한 그런 습성을 물려받았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좋은 유전자들을 지닌 짝을 찾아 그 유전자들을 얻으려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조상에게 물려받은 습성 때문이다.  39-40


나는 항상 '왜'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왜'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라는 질문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43


물리학에서는 '왜'라는 질문과 '어떻게'라는 질문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

그러나 생물학의 경우는 다르다. 이는 진화 때문인데, 진화는 우연한 역사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45


역사와 진화에서, 진보는 점점 더 어떤 일을 잘함으로써 상대적으로 같은 위치에 머물고자 애쓰는 시지푸스의 분투와 같이 항상 허무한 것이다. 런던의 혼잡한 거리를 지나가는 자동차들은 한 세기 전에 말이 끌던 마차보다 빠를 것이 없다. 컴퓨터는 생산성에 아무런 효과도 없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수행하기 쉬운 일들을 스스로 복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46


모든 진보가 상대적이라는 개념을 생물학에서는 '붉은 여왕(Red Queen)'이라고 부른다. 이는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거울 속에서 만난 체스판의 말로서, 주변 경치가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별로 멀리 가지는 못하면서 끊임없이 뛰어야 하는 그 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 더 빨리 뛰면 뛸수록 세상 또한 빨리 움직이므로 점점 더 진보가 둔화 된다는 것이다.  47


붉은 여왕의 원리는 특히 포식자와 먹이, 기생생물과 숙주, 동일 종 내에서암 암컷과 수컷의 관계에 적용된다. 지구의 모든 생물은 그들의 기생생물(혹은 숙주)이나 포식자(혹은 먹이), 그리고 무엇볻다도 그들의 짝에 대항하여 붉은 여왕의 체스판 위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 ..

붉은 여왕은 뒤섞인 협동과 갈등이라는 또 다른 주제 없이는 결코 나타나는 법이 없다.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는 아주 분명하다. 어머니나 자식 둘 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어머니는 자식의, 자식은 어머니의 행복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추구한다. 남편과 그 아내으 정부와의 관계라든지, 직장 여성과 그녀의 직장 라이벌과의 관계 같은 것도 역시 매우 명확한 관계이다. 두 경우 모두 상대방이 잘못되기를 바란다. 앞서 말한 두 경우는 협동의 관계이고, 뒤의 두 경우는 갈등과 경쟁의 관계이다. 그렇다면 아내와 남편은 어떤 관계일까? 둘 다 상대방의 행복을 빌어준다는 점에서는 협동의 관계이다. 그런데 왜 상대방의 행복을 빌어주는가? 그것은 서로가 상대방을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남편은 아내를 이용하여 자신의 자식을 낳도록 한다. 반면 아내는 남편을 이용하여 자신의 자식을 양육하는 데 도움을 얻는다.  48-49


성선택. 이 이론의 핵심적인 통찰은 동물의 목표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번식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생존과 번식이 서로 상충되는 지점에서는 번식이 우선권을 차지하게 된다.  50


사실 이 책은 인간의 지성 자체가 자연선택이 아니라 성선택의 소산물이라는 놀라운 가설로 끝맺을 것이다.  51


정상적인 보통 사람은 몸에 있는 모든 세포 속에 각각 75,000개의 유전자(인간게놈프로젝트 팀과 셀레라지노믹스 사가 2001년 2월 12일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인간의 유전자 수는 약 4만 개로 예상된다 - 옮긴이)로 이루어진 염색체를 한 쌍 씩 지니고 있다. 사람이 지닌 이 15만 개의 유전자를 통틀어 유전체(genome)라고 부르며, 유전자는 다시 23쌍의 리본처럼 생긴 염색체 위에 놓여 있다. 남자가 여자를 임신시킬 때, 정자 하나하나에는 23개의 염색체 위에 있는 75,000개의 유전자가 들어 있다. 이 유전자들은 난자 속의 23개의 염색체에 있는 다른 75,000개의 유전자와 합쳐져서 23쌍의 염색체와 75,000쌍의 유전자를 지닌 완전한 태아를 만들게 된다.

필수적인 학술용어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감수분열로, 남성이 정자로 들어갈 유전자를 고르고 여성이 난자로 들어갈 유전자를 고르는 과정이다. 남자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75,000개의 유전자를 그대로 고를 수도 있고, 아니면 어머니에게 받은 75,000개의 유전자를 그대로 고를 수도 있지만, 어버이 양쪽의 유전자를 섞어서 고를 가능성이 가장 높다. 감수분열을 하는 동안에는 특이한 일들이 일어난다. 23쌍의 염색체들은 각각 상대편 염색체들과 나란히 마주 놓이게 된다. 한 염색체의 일부분과 상대편 염색체의 일부분이 교환이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을 재조합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완전한 한세트의 염색체가 다른 쪽 부모로부터 온 한 세트의 염색체와 짝을 이루어 자손에게 전해진다. 이 과정을 우리는 이종교배(異種交配 다를이 씨종 사귈교 짝지을배)라고 한다. 

성은 재조합에 이종교배가 더해진 것이다. 즉 유전자의 혼합이야말로 성의 주요한 특징이다. 결과적으로 어머니와 아버지에 의해(이종교배를 통해서)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 네 사람의 유전자가 섞여서(재조합을 통해서) 아기가 태어난다.  61-62


성은 유전자 혼합과 같다. 의견의 불일치가 생기는 것은 유전자 혼합이 왜 좋은가를 이해하려 할 때다.  62


진화는 목표가 아니라 문제점을 해결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64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의 부제는 바로 '우수한 종의 보전'이다.  66


한 생물이 마주치게 되는 가장 가까운 경쟁자는 바로 같은 종의 일원이다.  68


분자생물학의 선도자인 미국 애리조나대학의 해리스 번스타인 교수는, 성이 유전자를 복구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81


유전학자들도 역시 손상된 DNA에 집착한다. 번스타인이 복구되는 손상에 관심을 집중한 반면 유전학자들은 복구될 수 없는 손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유전학자들은 이것을 돌연변이라고 부른다.  86


유전학자들은 수년 동안 좋은 돌연변이에 관심을 집중해 왔다.  87


유전자를 빌리는 가장 명백한 이유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개체로부터 유익한 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은 여러 돌연변이를 끌어모아 우연히 일어나는 상승 효과를 얻을 때까지 끊임없이 유전자를 재배열시켜 새로운 조합을 이뤄낸다.  88


성을 설명하는 순전히 유전적인 이론으로서 널리 호응을 받고 있는 이론은 아직 없다. 그래서인지 성의 위대한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유전학이 아니라 생태학 안에 있다고 믿는 진화학도들의 수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96


세사에는 민들레와 도마뱀에서부터 박테리아와 아메바에 이르기까지 종 차원에서 성을 가지지 않은 생물들이 많지만, 목(目) 차원에서 완전히 성이 없는 생물은 델로이데아가 유일하다. 아마도 그 때문이겠지만 델로이데아들은 대체로 비슷하게 생겼다...

델로이데아는 성을 가지지 않고는 진화가 거의 불가능하고 생물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생물학 교과서의 전통적인 지식에 대한 살아 있는 반례이다. 델로이데아의 존재는 '진화의 한 추문'이다.  99


진화의 특징은 변화가 아닌 안정이다. ..

모든 생물은 돌연변이 발생률을 0 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진화는 돌연변이 방지의 실패에 달려 있다.  109


붉은 여왕은 바람처럼 움직이지만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는 아주 무서운 여인이다.

'앨리스는 여전히 조금씩 헐떡이며 말했다.

"음, 우리 세상에서는 지금처럼 오랫동안 빨리 뛰었다면 보통 어디엔가 도착하게 돼요."

여왕은 말했다.

"느릿느릿한 세상이군. 그렇지만 보다시피 이곳에서는 같은 자리에 있으려면 최선을 다해 뛰어야 해. 어딘가에 가고 싶다면 적어도 그 두 배 이상 빨리 뛰어야 한단다."'  111


붉은 여왕 이론은 세상이 필사적인 경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정말로 계속 변화한다. 그렇지만 방금 전에는 종들이 몇 세대 동안 안정적이며 좀처럼 변화를 겪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붉은 여왕 이론의 핵심은 그녀가 계속 달리고 있지만 항상 같은 장소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결국 시작한 지점으로 되돌아온다. 변화는 있지만 발전은 없다.

붉은 여왕 이론에 따르면 성은 더 커지거나, 더 잘 위장하거나, 더 추위를 잘 견디거나, 더 잘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생물의 세계에 적응하는 것과 아무 관계가 없다. 성의 존재 이유는 반격하는 적과 싸우는 것이 전부이다.  112


공격의 모든 혁신은 곧 방어의 혁신에 의해 무마된다.  115


기생생물은 고도의 전문가들이지만 무기 경쟁 비유는 이들에게 적절하지 못하다.  116


개인적으로 합리적인 행동이 모여서 비합리적인 결과를 낳는 것이다. 불로소득자는 선량한 시민의 희생을 딛고 번성한다.  146


사람은 왜 자웅동체가 아닐까? ..

'왜 성(sex)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은 '왜 성별(sexes)이 있는가?' 하는 질문 없이는 무의미하다. ..

조화와 이기심, 몸 안에서 일어나는 유전자 간의 이익을 차지하기 위한 분쟁, 불로소득 유전자(free-rider gene)와 무법자 유전자(outlaw gene)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

체내의 유전자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마을은 협동 없이는 공동 사회가 될 수 없다.  147


공산주의자들의 강요된 협동 같은 것은 모두에게 공짜인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이기적인 야망에 의해 퇴색되기 쉽다. 마찬가지로 유전자에게 자신이 거주하는 육체의 생존을 향상시키는 능력은 있더라도, 생식률이 억제되거나 자신이 생식을 통해 후대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면, 그 유전자는 멸종할 것이고 그 능력은 사라질 것이다.  149


염색체는 몇몇 세포를 합쳐서 초세포(seper cell)를 만들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세포는 이렇게 여러 종류의 박테리아가 모여서 형성되었다. 부족에서 국가로, 그리고 제국이 되어가듯이, 세포들은 뭉쳐서 유전자 집합체의 거대한 집합체인 동식물과 균류를 만들었다.  150


질병이 다른 경쟁자의 감염으로 재발한다는 증거는 많다. 예컨대 에이즈를 일으키는 HIV 바이러스는 사람의 뇌세포에 감염되어도 발병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 하지만 전혀 다른 종류의 바이러스인 사이토메갈로 바이러스가 이미 HIV로 감염된 뇌세포에 침투하면, 잠자고 있던 HIV 바이러스는 깨어나 급속히 증식한다. 이것이 HIV에 감염된 사람이 또 다른 병에 복합 감염될 때 HIV가 에이즈를 일으키는 이유로 보인다. 그리고 에이즈의 특성 중 하나는 우리 몸속에서 별 탈 없이 존재하는 뉴모시스티스 폐렴균, 사이토메갈로 바이러스나 포진처럼 대체적으로 무해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에이즈가 진행되는 중에 갑자기 독성을 띠게 되고 위해한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에이즈가 면역계 질병이라서 이런 병에 관한 면역 체계의 감시가 풀리는 데도 이유가 있지만, 진화적 관점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숙주가 죽어가고 있다면 바이러스의 최선은 아주 빠르게 번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른바 기회성 감염은 대체로 아프거나 신체 기능이 저하되었을 때 기세를 부린다. 또 한 과학자는 면역계의 교차반응(한 종류의 병원균에 감염되었을 때 같은 종의다른 형질의 병원균에 대해서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이미 침입한 기생생물이 자신의 경쟁자가 침입하지 못하게 문을 닫는 것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세지했다.

경쟁자가 나타났을 때 끝장을 보는 것이 기생생물에게 이롭다면, 숙주로서는 두 형질의 기생생물들에 의한 교차 감염을 방지하는 것이 이로울 것이다. 그리고 성교보다 교차 감염의 위험률이 높은것은 없다.  163-164


운동성 있는 생물은 자웅이체(성이 따로 존재함)이고 식물과 따개비 같은 고착생물은 자웅동체라는 것은 일반적인 경향이다.  165


성염색체의 개발과 성공적인 세포질 유전자의 반란 진압도 유전자 사회의 조화로운 생활을 성사시키지는 못했다. 성염색체들이 자기 소유주의 자손의 성별에 관심을 갖지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남자의 성별을 결정하는 유전자는 Y염색체 위에 존재한다. 남성의 정자 반은 X를 지니고 나머지 반은 Y를 지닌다. 여아를 낳기 위해 남자는 자신의 배우자에게 X수용정자를 건네주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는 배우자에게 Y유전자는 전해주지 않는다. Y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여아는 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래서 Y유전자는 그 남성의 X수용정자를 파괴하고 다른 Y유전자를 희생하여 그 남성의 자손에 대한 독점을 보증하며 번성할 것이다. 모든 자손이 아들이 되고, 따라서 종족이 멸종하게 된다는 것은 Y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Y는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173


레밍은 만화가에게는 절벽에서 무리를 지어 몸을 내던지는 것으로 잘 알려진 통통한 북극 쥐이다. 생물학자에게는 갑작스럽게 수가 증가하다가, 지나치게 개체들이 불어나 식량원이 훼손되면 그 수가 감소하는 경향으로 유명하다. 그렇지만 다른 이유로도 유명한데, 바로 자손의 성별을 결정하는 특이한 방법 때문이다. 이 동물은 W, X, Y 세 종류의 성염색체를 지닌다. XY는 수컷이고, XX, WX와 WY는 모두 암컷이다. YY는 살아남지도 못한다. 여기서는 추진력 있는 X염색체의 돌연변이형인 W가 생겨나서 Y의 남성화 능력을 억누르는 일이 일어난다. 그 결과 암컷의 광이 증가가 나타난다.(이것은 우연히도 마담 B 가족의 경우를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 현상은 수컷을 귀하게 마듦으로써 수컷이 X수용정자보다 Y수용정자를 더 많이 생산하는 능력을 개발하게 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왜일까? 생물학자들은 초기에 자성의 과잉이, 인구 폭증이 일어나는 가운데 생태계가 딸만 출산하게 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비가 자성으로 치우친 이유는 유전적인 것과 관련이 있지 생태적인 것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Y수용정자만 생산하는 수컷은 XX 암컷과 교미해서 수컷(XY)만을 낳을 수 있으며, WX 암컷과는 수컷과 암컷을 반반씩 낳고, WY암컷과도 교미할 수 있다. 마지막 경우에는 YY수컷이 모두 죽으므로 WY인 암컷만을 낳게 된다. 그러므로 최종 결과는 이 수컷이 각 경우의 암컷과 각각 교미하면 같은 수의 수컷과 암컷을 낳으며, 이때 암컷들은 모두 WY 암컷으로 암컷만을 낳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Y수용정자만 생산하는 수컷은 Y 정자만을 생산하여 성비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치우치게 한다. 이런 레밍의 경우는 성염색체의 개발마저도 반란적인 염색체가 성비를 교란시키는 것을 막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174-175


하버드 대학의 스티브 오스터드(Steve Austad)와 멜선퀴스트(Mel Sunquist)는 트리버스-윌러드는 .. 베네수엘라에서 교배하지 않은 암컷 주머니쥐 40마리를 잡아서 표시를 하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20마리의 굴 앞에 이틀에 한 번씩 125그램의 정어리를 놓아두었다. 이것은 주머니쥐에게는 아주 놀랍고도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고 나서 매달 이 주머니쥐가 낳은 새끼의 성별을 분류햇다. 정어리를 먹이지 않은 암컷의 새끼 256마리의 암수 비율은 정확히 1대 1이었다. 정어리를 먹인 암컷의 새끼 270마리는 암수 비율이 1대 1.4였다. 영양 상태가 좋은 주머니쥐가 그렇지 못한 쥐보다 수컷을 많이 낳는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영양 상태가좋은 주머니쥐는 크기가 큰 새끼를 낳았다. 크기가 작은 수컷보다 크기가 큰 수컷이 후에 많은 암컷을 거느릴 확률이 높다.  181


대체로 모든 수컷의 목표는 되도록 많은 아내를 거느리는 일이고, 가끔은 좋은 어머니가 될 암컷을 찾기도 하지만 좋은 아냇감을 찾는 경우는 거의 없다.  202


수컷은 자식 양육에 덜 투자하며 많은 암컷을 찾게 되고, 반면에 암컷은 자식 양육에 더 많이 투자하며 수컷의 질을 따지게 된다.  203


진화는 가장 적합한 개체가 살아남은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가장 적합한 개체의 번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지구의 모든 생물은 기생생물과 숙주 사이에, 한 유전자와 다른 유전자 사이에, 같은 생물의 구성원들 사이에, 그리고 다른 성을 지닌 개체를 차지하기 위해 같은 성을 지닌 구성원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련의 끊임없는 역사적 투쟁의 결과이다. 그러한 투쟁은 같은 종의 다른 구성원들을 이용하고 속여먹는 등 심리학적 측면도 포함한다. 하지만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자는 결코 없다. 왜냐하면 한 세대에서 싸움에 이겼더라도 다음 세대에서는 적들에게 밀려나는 일이 쉽사리 일어나기 때문이다. 삶이란 끝없는 경주와 같다. 아무리 더 빨리 결승선을 향해 달려도 결승선을 통과하고 나면 또 하나의 경주가 시작된다.  264


교육이 제외된 본성은 없으며, 본성이 없이는 학습되지도 않는다. 모든 행동은 경험에 의해 연습된 본능으 산물이다...

인간의 몸은 자연선택의 산물이지만 인간의 마음과 행동은 '문화'의 산물이라고 한다. 인간의 문화는 인간의 본성을 반영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의 본성이 문화를 반영한다고 한다.  265


남자에게 여자는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해줄 수 있는 운반 도구이다.  265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부일처제 사회에서 살아가지만, 이것도 단지 사회적 평등 체제가 규정한 것을 말해줄 뿐, 인간의 본성이 원하는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268


인간이 짝짓기 체계는 정확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사람들은 인종, 종교, 재산, 그리고 생태에 따라서 습관에 엄청난 유연성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몇 가지 보편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 여성들은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사회에서조차도 공통적으로 일부일처제 결혼을 추구한다. 드물게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여성들은 신중하게 남자를 선택하고자 하며, 그러고 나서 남자의 가치가 존재하는 한 일생 동안 한 남자를 독점하고, 아이를 기르는 데 그 남자의 도움을 받고, 십중팔구는 죽을 때도 함께 죽기를 원한다.

둘째, 여성들은 본질적으로 성관계의 다양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물론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들이나 현실의 여성들은 전혀 색광증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주장하며, 우리가 그 말을 믿지 못할 이유도 없다. 일므도 모르는 남자와의 하룻밤 정사에 흥미가 있는 요부는 남성들의 포르노그라피가 만들어낸 환상이다. 남자의 본성에 의해 강요된 구속에서 자유로워진 여성 동성애자가 어느 날 갑자기 난교에 빠지지는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여성 동성애자들은 놀랍게도 일부일처론자들이다. 이런 사실은 어떤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셋째, 여성들은 가끔 부정을 저지른다. 모든 불륜이 남성들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여성들이 남창이나 낯선 사람과의 일시적인 성교에 관심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하더라도, 일일연속극 같은 생화에서 그녀가 그 시기에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여성은 아는 남성과의 불륜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스스로 제안할 수도 있다. 이것은 하나의 모순이다. 이 문제는 다음 세 가지 중 한 가지로 풀 수 있다. 가장 다루기 어려운 살마이라 하더라도 유혹하는 사람의 설득하는 힘이 언제나 상대의마음을 약간 움직일 수 있다고 본다면, 우리는 간통의 탓을 남자들에게 돌릴 수 있다. 이것을 '위험한 관계'(프랑스 작가 라클로가 1782년에 쓴 장편소설. 18세기의 퇴폐적인 프랑스 귀족 사교계를 무대로 한 심리 풍속 소설로, 1988년에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음 -옮긴이)식 해설이라 하자. 혹은 간통을 현대 사회의 탓으로 돌리고, 불행한 결혼이나 현대 생활 등에서 오는 좌절감과 복잡성이 본래의 방식으 망가뜨리고 여자들에게 전혀 다른 습관을 불러들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댈러스'(1980년대 초에 방영된 미국의 텔레비전 인기 드라마로 재산과 치정에 얽힌 한 가족의 이야기 -옮긴이)식 해설이라하자. 또는 결혼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혼외정사를 추구하는 것에 대해 어떤 종류의 유효한 생물학적 이유를 제안할 수도 있다. 그 생물학적 이유란 여성들에게는 성교 계획 A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성교 계획 B를 선택하는 자신을 부정하려 하지 않는 어떤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바리 부인'(프랑스의 작가 플로베르가 1857년에 쓴 장편 소설 <보바리 부인>의 주인공. 분방한 정사로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주목을 받음 -옮긴이)식 해설이라 하자. 

나는 이 글에서 간통이 인간 사회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고 주장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부일처제의 결혼 안에서도 다른 성 상대를 찾는 것이 종종 남녀 모두에게 이득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

간통을 인간의 성교 체계를 형성한 원동력으로 묘사함으로써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

간통을 저지하려는 사회적, 법적 기구를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간통과 간통에 대한 비난은 모두 다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328-331


유인권인 사람의 정소는 중간 크기로, 고릴라의 것보다는 상당히 큰 편이다. 침팬지의 정소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소는 이미 만들어진 정자를 서늘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말하자면 정자의 저장 수명을 늘릴 수 있도록 몸 바깥으로 늘어져 있는 음낭 속에 저장되어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정자 경쟁의 증거로 보인다.  333


베이커와 벨리스는 우선 남성이 사정할 때 얼마나 많은 양의 정자를 배출하는지를 측정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유심히 관찰하였다. 그들은 질 속에 유지되는 정자의 양은 여성이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만약 여성이 오르가슴을 갖지 못하거나, 남성이 사정하기 전에 이미 1분 이상 오르가슴을 느끼고 있다면, 질에는 정자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남성이 사정하기 직전의 1분 이내에 오르가슴에 이르거나 사정 후 45분 이내에 오르가슴에 도달했다면, 대부분의 정자는 질 안에 머물러 있게 된다. 또한 그것은 그녀가 그 전에 마지막으로 성관계를 가진 지 얼마나 되었는가에 의해서도 좌우된다. 그녀가 그 사이에 과학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삽입하지 않고 얻는 오르가슴'을 갖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기간이 길면 길수록 더 많은 양의 정자가 질 안에 머무른다. 임신의 가능성을 증가시키는 유일한 것은 성교 동안 오래 남는(즉 늦게 도달하는) 오르가슴이다.

이제까지 이 가운데 어떤 것도 놀랄 만한 결과를 보여준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실들은 베이커와 벨리스가 그들의 연구(선정된 부부들과 잡지에서 질문에 응답한 4,000명의 사람들을 조사해서 얻은 실례로 구성된)를 하기 전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그것들이 반드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베이커와 벨리스는 혼외정사에 관한 질문도 했다. 그들은 정숙한 여성의 오르가슴의 약 55%가 매우 지속적인(즉, 가장 생식력이 좋은) 유형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문란한 여성은 남편과의 정사에서는 이런 생식력이 좋은 오르가슴 유형을 겨우 40%만 보이지만, 애인과의 정사 중에는 70%를 보인다는 것을 발견해냈다. 더욱이 일부러 그런 것이든 아니든 간에 문란한 여성들은 한 달 중 가장 생식력이 좋을 때에 그들의 애인과 정사를 가진다. 이 두 가지 효과를 종합하면, 그들이 다룬 실례 중에서 문란한 여성은 애인보다 남편과 2배나 더 자주 성관계를 갖지만, 여전히 남편보다 애인의 아기를 밸 가능성이 약간 더 높음을 알 수 있다.

베이커와 벨리스는 자신들의 연구 결과는 진화에서 한 발자국 앞선 여성과 그렇지 못한 남성의 무기 경쟁인 붉은 여왕의 게임으로 해석했다. 남성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아버지가 될 가능성을 높이려고 노력한다. 그의 정자 중 대부분은 난자를 수정시키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지만, 대신에 다른 정자를 공격하거나 그들의 길을 막는다.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남성의 성적 행동은 난자를 수정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극대화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여성은 자신이 원하지 않을 때에는 임신을 막는 정교한 기술을 고안해왔다. 특히 현명한 오르가슴에 의해 사실상 그녀는 2명의 애인 중 누구의 아이를 임신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다. 물론 여성들은 전에는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렇게 하려고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베이커와 벨리스의 연구가 맞는 것으로 입증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놀라운 것은 그들이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어떻게 해서든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물론 전형적인 진화론적 설명이다. 도대체 왜 여성들은 성관계를 가지려고 하는가? 왜냐하면 그들의 의식적으로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그들의 의식적으로 원하는가? 왜냐하면 성교는 생식으로 이어지고, 그들은 생식을 했으며 또한 생식으로 이어지기를 언한 사람들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같은 논쟁의 반복일 뿐이다. 아내가 남펴노가 헤어지지 않은 채로 무의식적으로 애인의 아기르 임신하려고 했을 때 전형적인 여성의 부정과 오르가슴의 양상이 나타난다고 예측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베이커와 벨리스는 자신들의 발견이 진실에 대한 힌트에 블과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간통 정도를 측정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들은 유전학적 조사를 통해 리버풀의 한 아파트에서는 아이들 중 실제 제 아버지의 자식은 5명당 4명도 안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머지는 명백하게 다른 사람의 아이였다.  이것이 리버풀에서만의 특정적인 경우일까 봐 그들은 영국의 남쪽 지방에서 똑같은 조사를 했고 같은 결과를 얻었다. 우리는 그들의 앞선 연구를 통해서 오르가슴 효과를 통해 적은 비율의 간통이 높은 비율의 부정한 임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새처럼, 여성은 상당히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남편을 떠나지 않은 채 유전적으로 더 가치 있는 남성과 바람을 피우는 두 가지 일을 모두 할지도 모른다. 

남성은 어떠한가? 베이커와 벨리스는 쥐의 실험을 통해 수컷 쥐가 그가 교미하고 있는 암컷이 최근에 다른 수컷 가까이에 있었음을 알 때에는 2배나 더 많은 정자를 사정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대담무쌍한 과학자들은 즉시 인간도 똑같은 일을 하는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들은 그런 일을 했다. 하루 종일 부인과 함께 있는 남성들은 하루 종일 부인이 나가 있는 남성들보다 더 적은 양의 정사를 사정했다. 이것은 마치 남성들이 현실로 닥칠지 모를 여성의 간통의 가능성을 잠재의식적으로 상쇄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특수한 성교의 전쟁에서는 여성들이 더 높은 위치에 잇다. 왜냐하면 남성이 자기 아내가 최근에 오르가슴이 없었던 것과 그의 아이를 임신하지 않으려는 욕망을(무의식적으로) 연관짓기 시작한다 해도, 그녀는 언제나 그를 속임으로써 응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340-343


캐나다에 있는 맥마스터대학의 마고 윌슨(Margo Wilson)과 마틴 델리(Martin Daly)는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입증할 수 있듯이, 사랑과 질투라는 두 감정이 모두 성 독점 욕구의 일부로서 단순히 같은 동전의 양면임에도, 질투는 멸시받는 감정인 반면에 사랑은 찬탄받는 감정이라는 사실을 숙고해보았다. 현대의 많은 부부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질투의 부재는 관계를 안정시키기는 커녕 그 자체로 불안감의 원인이 된다. 내가 다른 남자나 여자에게 관심을 기울일때 그나 그녀가 질투하지 않는다면, 그나 그녀는 우리의 관계가 계속될지의 여부에 관해 더 이상 관심이 없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질투의 순간이 결핍된 부부들은 질투하는 부부들보다 관계를 지속할 가능성이 적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358


심리학자들은 질투를 인간의 본성을 타락시키기 위해 영원한 악의 사회에서 온 것이고, 다스려야 할 치료의 대상이라고 보았으며, 일반적으로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그들은 질투가 자격지심과 감정적인 의존성을 보인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바로 진화론적인 이론이 예측한 바이다.  359


실제로 계급이 더 뚜렷한 사회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아들보다 딸을 더 선호했다 그러나 이것은 부계의 확실성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집 딸들이 아들들보다 자손을 남길 가능성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362


사회의 최상부에서는 이와는 정반대의 편견이 우세했다. 중세의 지주들은 딸들 중 다수를 수녀원으로 추방했다. 전세계에 걸쳐서 부유한 남자들은 언제나 아들들을 더 선호해왔고, 종종 그중 한 아들만을 선호했다. 부유하고 권력 있는 아버지는 그의 지위나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재산을 아들들에게 물려줌으로써, 그들에게 많은 서자(庶子 무리서 아들자)를 갖는 성공적인 간통자들이 될 자금을 남겨주는 것이다. 

이것은 별난 결과를 이끌어내나. 남자나 여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성공적인 일은 부유한 남성에게 합법적인 상속자를 낳아주는 것이다. 또 이와 같은 논리에 따르면 바람둥이들도 아무한테나 구애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최고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여성들, 최상의 남편을 갖고 있어서 가장 성공적인 아들을 낳을 잠재력이 있는 여성들을 유혹해야 한다.  363


시카고 노스웨스턴대학의 윌리엄 아이언스(William Irons)는 인간은 언제나 자식에게 '인생의 좋은 출잘점'을 마련해주어야 할 필요성을 고려해왔다고 믿었다. 그들은 결코 양을 위해서 아이들의 질을 희생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낮은 출생률로 인구학의 변천이 일어난 무렵에 값비싼 교육이 성공과 부의 선행 조건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는 비용을 부담할 수 있도록 아이들의 수를 줄이고 재조정했다.  369


수렵-채집인이었을 때 이래로 유전적 변화는 거의 없었지만, 현대 남성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단순한 남성 수렵-채집인 법칙이 있다. 권력을 얻도록 노력하여 그것을 후계자를 낳을 여성들을 유혹하는 데 사용하라. 부를 얻도록 노력하여 그것을 의붓자식을 낳을 다른 남자의 부인과의 불륜을 사는 데 사용하라. 이것은 한 토막의 싱싱한 생선이나 꿀을 매력적인 이웃의 아내와의 짧은 정사와 교환한 남자에서 시작하여 그의 메르세데스에 모델릉 데리고 가는 팝스타에게까지 계속되고 있다.

부와 권력은 여성을 얻기 위한 것이고, 여성은 유전적 영원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대 여성의 마음 깊은 곳에는 너무도 최근에 진화했기에 많이 변하지 않았을 수렵-채집인 법칙이 있다. 음식을 주고 네 아이들을 돌볼 부양자 남편을 얻도록 노력하라. 그 아이들에게 1등급 유전자를 줄 수 있는 애인을 찾도록 노력하라. 그녀는 매우 운이 좋은 경우에만 두 가지를 다 갖춘 한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것은 부족에서 가장 훌륭한 총각 수렵인과 결혼하고, 또 이웃의 가장 훌륭한 수렵인 남편과 바람을 피워서, 자기 아이들에게 풍부한 고기를 공급해줄 것을 보장받은 여성에서 시작되었고, 태어나 자라면 자신의 건강한 경호원을 닮을 아이를 임신할 부유한 타이쿤(일본 막부 말기의 쇼군을 당시의 외국인들이 부른 호칭 -옮긴이)의 아내로 이어졌다. 남자들은 부계의 보살핌, 재산, 그리고 유전자의 제공자로서 이용된다. 냉소적인가?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이야기에 비하면 그 절반만큼도 냉소적이지 않다.  370-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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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관찰을 통해 나는 인간이 영혼과 동물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둘은 서로 별개일지라도 하나가 다른 하나에 완전히 포섭되거나 딱 겹쳐지기도 한다. 따라서 둘을 확연히 구분 지으려면 영혼이 동물성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

예전에 한 선생이 플라톤은 물질을 타자(他者 다를타 사람자)로 지칭했었다는 얘기를 해 준 적이 있다. 참으로 어울리는 명칭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이 명칭을 영혼과 더불어 인간을 구성하는 동물성에 갖다 쓰기로 한다. 동물성이라는 실체야말로 타자이며, 아주 요상하게 우리 인간을 희롱하기 때문이다.  30


동물성이 영혼에 끌려다니기도 하고, 반대로 영혼이 동물성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원리에 입각해 보면 한쪽은 입법권을, 다른 한쪽은 집행권을 지닌 셈인데, 이 두 권력은 곧잘 충돌한다. 뛰어난 이들은 자신의 동물성을 조련하는 데 가장 신경 쓴다. ..

이 점에 대해서는 예가 필요할 것 같다.

책을 읽다가 갑자기 흥미로운 생각이 뇌리를 스치면 그 생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기계적으로 글자와 문장을 따라갈 뿐, 이미 책은 안중에도 없을 때가 있다. 무엇을 읽었는지도 모르고 방금 읽은 내용도 기억하지 못한 채 책장만 넘긴다. 당신의 영혼은 자신의 짝인 동물성에게 책을 읽으라고 명령은 해 놓은 채, 정작 자신은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는다. 그러면 타자는 영혼이 더는 귀 기울이지 않는 책 읽기를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31-32


물질에서 벗어나 영혼이 언제든 홀로 여행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람직하고도 유용한 일이다.  37


아, 왜 우리는 근심 걱정과 고통스러운 야망을 타자에게 넘기지 않는 걸까? 가엾은 그대여, 이리 오라. 그대가 지은 감옥의 문을 부숴 버리고 내가 그대를 인도할 천상과 낙원의 저 하늘 위에서 홀로 부와 명예를 좇는, 세상에 던져진 그대의 동물성을 내려다보라. 세상 사람들 속에서 그대가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지 보라. 세상 사람들은 예의상 서로 거리를 두고 있지만, 각자 홀로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 안을 배회하여도 사람들은 그대에게 영혼이 깃들어 있기나 한지 혹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  42


나는 의자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걸친 뒤 벽난로 선반 위에 두 발을 올려놓았다... 참으로 아늑한 자세가 아닐 수 없다. 긴 여행길에서 어쩔 수 없이 한곳에 머물러야 할 때 이보다 더 유용하고 편한 자세가 있을까.  66


독자 여러분은 시시콜콜하다고 나에게 뭐라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여행자들이 좀 그렇지 않은가. 몽블랑을 오르거나 쫙 벌어진 엠페도클레스의 무덤으 오를 때면 소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고 기록할 것이다. 일행은 몇 명이며, 노새는 몇 마리인지, 챙겨 간 음식의 맛은 어떠한지 그리고 일행들은 얼마나 잘 먹었는지부터 노새가 발을 헛디뎌 비틀거린 얘기에 이르기까지 노트에 꼼꼼히 다 기록할 것이다.  69


진솔한 자세로 이론을 개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음과 같이 답할 것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글을 쓸 때는 어조가 단정적이 되곤 하는데, 이는 글쓴이가 제가 회하를 옹호할 때 그랬던 것처럼 겉으론 공정한 척하면서 미리 어떤 암묵적 판단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쓴 길은 반박을 낳을 수밖에 없고, 결론은 미심쩍을 수밖에 없지요.  103


나의 하인과 나의 개에게 철학과 인도주의를 배우고 있다.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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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독서는 나만의 해석이다


- <문장론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독서에 관하여> 마르셀 프루스트



'다독(多讀 많을다 읽을독)은 인간의 정신에서 탄력을 빼앗는 일종의 자해(自害 스스로자 해칠해)다. 압력이 너무 높아도 용수철은 탄력을 잃는다.' ..

쇼펜하우어는 무분별한 지식으로 생각할 여력이 없어지는 사람의 모습을 용수철로 표현한 게 아닌가 싶어요. 읽기만 하지 말고 읽은 걸 느껴야 합니다.  17-18


'진정 스스로 사색하는 자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그 소재를 현실세계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독서는 어디까지나 작가에 의해 가공된, 인공적인 현실이다.'

즉, 내가 경험한 것으로부터 나만의 지혜를 찾아야 하는데, 남 얘기나 내가 직접 보지 않은 것에서 내 것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 독서가 내 주변의 제대로 봐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까닭에서 쇼펜하우어는 독서를 반대합니다.  18-19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을 빌려 지금 내가 있는 곳으 살피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겠다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 읽기가 내 생활에 들어와야 합니다. 쇼펜하우어도 아마 이런 부분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책을 읽지 말라고 반문한 게 아닐까요?  19


'많은 지식을 섭렵해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면 그 가치는 불분명해지고, 양적으로는 조금 부족해 보여도 자신의 주관적인 이성을 통해 여러 번 고찰한 결과라면 매우 소중한 지적 자산이 될 수 있다.' ..

'호학심사 심지기의(好學深思 心知基意 좋을호 배울학 깊을심 생각할사 마음심 알지 터기 뜻의), 즐겨 배우고 깊이 생각해서 마음으로 그 뜻을 안다'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우리에게는 심사, 깊이 생각함이 빠져 있는 듯합니다.  20


'알기 위해서는 물론 배워야 한다. 그러나 안다는 것과 여러 조건을 통해 스스로 깨달은 것은 엄연히 다르다. 앎은 깨닫기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내가 안 것을 깨닫기 위해서 '학(學 배울학)'도 필요하고 '호학(好學 좋을호 배울학)'도 필요합니다... 우리 내부에서는 바깥에서 들어온 정보를 내 것으로 만드는 작업읗 해야 합니다.

나만의 단어를 만들어야 합니다.  21


최근에 자주하는 생각인데 지혜란 것은 크고 넓은 것, 많이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 움큼인 것 같아요.  22


'독서와 학습은 객관적인 앎이다. (중략) 사색은 주관적인 깨달음이다.'

책에 쓰여 있는 것은 객관적인 앎입니다. 사색은 주관적인 깨달음인거죠. 이게 지식과 지혜의 차이 같아요. 독서는 주관적인 깨달음을 지향해야 합니다.  22


'나만의 고유한 사색에 의해 어떤 진리에 도달했으면, 비록 그 내용이 앞서 다른 책에 기재되었을지라도 타인의 사상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체험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색을 통해 기대하는 결과는 단순히 산 정사엥 도달했다는 물리적 결과만이 아니라 정상에 도달하는 동안 겪었던 체험도 포함되어 있다.'  23


'그대의 조상이 남긴 유물을 그대 스스로의 힘으로 획득하라.'  24


언제까지 읽기를 끝내야지 하고 목표를 정하지 마시고, 얼마만큼 내 것으로 만들 것인지에 방점을 찍으셨으면 합니다.  24


'읽기 쉽고 정확하게 이해되는 문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주장하고 싶은 사상을 소유'해야 한다.'

너무나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게 없이 원고지 12매를 채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25


'학식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쉽게 말하고, 학식이 부족할수록 더욱 어렵게 말한다.'  26


'"...(상략) 보는 법을 배우라!" 바로 그 순간 작가는 모습을 감춘다. 바로 이것이 독서의 가치이자 한계이다. 시작임에 불과한 것을 마치 규범인 것으로 여기는 것은 독서에 지나치게 큰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독서는 정신적인 삶의 도입부에 있다. 독서는 그러한 삶에 안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나와 다른 영혼이 개입하도록 허용하되, 그때 들어온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들어내는 과정도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28


책을 통해 알았으면 그것을 내 삶을 변화시키는 연료로 써야 하는 것이고, 삶에서 앎을 행하면서 바꿔나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

알랭 드 보통도 비슷한 얘기를 했어요. "모든 독자는 자기가 읽은 책의 저자다."  29


책이 중요한 이유는 새로운 시선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33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말재주와 옷뿐인, 예술가인 체하는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만 조화로운 비율을 한 대상을 찾는다. 하지만 진정한 예술가에게는 주변의 모든 것이 호기심을 자극하고 작은 근육 하나조차 의미를 가진다.'

주변의 것을 아름답게 보는 시선, 예술의 역할이기도 해요.  38


처음 보는 사람한텐 정말 엄청난 물건인 거죠. 그러나 익숙한 우리에겐 그것이 전혀 새롭지 않아요. 흥미도 없고요. 관습 안에 갇혀 아름다움이 약해진겁니다. 그걸 일깨워주는 것이 예술이고 독서라는 게 프루스트의 이야기죠.  40





2강 관찰과 사유의 힘에 대하여


- <곽재구의 포구 기행> <길귀신의 노래>  곽재구

  <시를 어루만지다> 김사인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법인


'나란히 누워 서로의 살갗을 부비는 집들, 담장들, 빤히 들여다보이는 이웃들의 꿈, 가난, 숨결들.'

별 볼일 없는 풍경, 그것을 주목하는 힘. 그게 삶의 지혜이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이자, 시인의 재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문장이에요.  53-54


'짧은 길을 긴 시간을 들여 여행한 사람은 경험상 행복한 사람입니다.' ..

짧은 길을 긴 시간을 들여서 여행하려고 노력하는 것, 많이 보려고 하지 말고 자세히 보려고 하는 것이 중요해요. 책 읽는 것도 마찬가지 같아요. 제가 다독 콤플렉스를 버리자고 자주 말하는데요. 자랑하려고 많이 읽는 게 핵심이 아니죠. 얼마나 체화했느냐, 얼마나 내 인생에 좋은 영향을 미쳤느냐 이런 것들이 중요합니다.  57


우리의 삶은 모호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명료한 답을 원해요..."어떠한 일반론도 각자 삶의 특수성 앞에서는 무력하다"  61

'한국의 나폴리 ..(중략).. 이런 비유 당신도 좋아하나요. 소박하고 따뜻하고 성실한 자신의 무엇인가를 바보스럽게 위축시키는..'

우리가 무심히 쓰는 말들이죠. 들을 때마다 어딘가 좀 불편한, 한국의 스티브 잡스, 한국의 빌 게이츠, 한국의 누구누구, 이런 표현 속에는 언급하고 있는 그 개인의 존재감에 대한 배려가 없는것 같아요.  63


'살아 있음이란 내게 햇살을 드에 얹고 흙냄새를 맡으며 터벅터벅 걷는 일입니다.'

이 글을 보고 저는 '나이가 한 살 더 든다는 건, 봄을 한 번 더 본다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66


거듭 말하지만 많이 읽는 것보다 제대로 읽는 게 저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71


'시를 쓰고 읽기 위해서는 개념의 운용 능력보다는 실물적 상상력의 운용 능력이, 공감과 일치의 능력이 더 긴요하게 연습되어야 한다.'

개념을 운용하는 능력은 법전 해석이나 논리적인 이야기에서는 중요하겠죠. 철학에서는 아주 엄밀하게 중요하겠죠. 철학에서는 이런 실물적 상상력은 배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학은요, 실물적 상상을 해야 하고, 정서적 공감을 하며, 거기에 내 마음을 일치시키는 능력이 있어야 해요.  73


문학에 임하는 상상력은 이러한 표피적 사실 진술에 잘 만족하지 못한다. 그날 새벽 이순신의 조반상 위에는 어떤 음식이 올랐는지, 그의 심경이 어떠했을 것인지, 그날 바다 빛깔은 어땠는지, 세수는 제대로 했을 것인지, 옷차림은 어땠을 것인지, 방문을 나서는 그의 수염발이 동짓달의 바닷바람에 어떻게 쓸렸을 것인지, 휘하 병사들 하나 하나는 그 심경과 얼굴 표정이 어땠을 것인지 등등 까지를 궁금해한다.

쉽게 말해 4D 영화입니다. 시를 4D로 읽으라는 거예요. 2D로 읽지 말고 문장을 일으켜 세워서 바람도 느끼고, 물방울 튀는 것도 느끼면서 읽으라는 거죠.  74


법정스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지식은 밖에서 들어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우러나온다고요. 사유하는 시간을 갖기 않으면 내 안에서 자생적으로 우러나오는 것들을 못 건져냅니다.  84


'목표가 곧 인생의 목적이고 꿈이라고 착각하는 세상.'

'수행은 늘 깨어 있는 삶을 사는 일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늘 자신을 성찰하고 생각을 높이며 끊임없이 성숙시키는 것이다. 성찰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살피는 것이다. 사색은 사물과 일에서 참되고 깊은 의미를 찾는 일이다.'  86


'달은 어디에나 있지만 보려는 사람에게만 뜬다.'

친구가 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조지아 오키프의 말처럼, 노력해야 해요.  89






3강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미성의 시간이다 


-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레프 톨스토이

  <미크로메가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볼테르



'세상사에 시선이 따뜻한 사람이 시인이다. 

시를 안 써도 시인이다.'  97


토스토이는 작품마다 자신이 살던 시대의 흐름, 당대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을 등장인물들을 통해 투영해놨습니다. 저는 책을 읽을 때 스토리 중심으로 보기보다는 문장을 구석구석 살피며 작가가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 하며 읽습니다.  102


'인간이란 흐르는 강물과 같다.'

저는 '사람은 물이다'라는 얘기를 자주 합니다. 사람은 고여 있지 않죠.  103


'식사를 준비하고 집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고

 일상적 노도을 무시하고서는

 훌륭한 삶을 살 수 없다.'

알랭드 보통은 "우리는 아이를 위해 빵에 버터를 바르고 이부자리를 펴는 것이 경이로운 일임을 잊어버린다"고 말했습니다. 행복은 거기 있는 건데 말이죠.  104


'육체노동이 정신적인 삶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은 정반대이다.

  육체노동을 할 때만이 지적이고 영적인 삶이 가능하다.'

그래서 몸을 번잡하게 만들어야 해요. 잘 살려면 몸을 번잡하게 하고 마음을 평화롭게 해야 합니다.  109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진리는 그저 몸에 살짝 붙어 있는 데 그치지만 스스로 발견한 진리는 몸의 진정한 일부가 된다.'  117





4강 시대를 바꾼 질문, 시대를 품은 미술


- <1417년, 근대의 탄생> 스티븐 그린블랫

  <시대를 훔친 미술> 이진숙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끊임없이 토론을 요청하며 질문을 던졌어요.  144


오직 하나만의 목적을 위해 질문을 내려놓은 시대, 중세와 닮아 있지 않나요?  146


불교에서 수행의 최종 목적은 황새잉 아니라 멸(滅 멸망할멸)이랍니다. 다시는 무엇으로도 태어나지 않는 것이죠. 더 좋은 무엇으로 태어나도 연(緣 인연연)은 필시 생길 따름이고 그러면 삶은 또 다시 무거워질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영원히 태어나지 않는게 목적이랍니다.  149


'모두들 기성 제도와 관습, 관행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에 새로워져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이것에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친부살해의 욕망입니다. 자기 아버지를 죽여야 하는 거예요. 자기 아버지를 죽여야 비로소 새로운 가치가 태어나는 거니까요.  173


시대가 너무 물질적인 가치만 따르며 가다 보니까 나는 다른 길을 찾겠어 한 거죠. 또 다시 친부살해이지요.

'미래를 얻기 위해서 현실과는 단절이 필수적이다. 추상은 구상의 억압과 배제 위에서 탄생한다.'

추상은 두 가지예요. 구상이 비구상화 되는 추상이 있고 시작부터 완전한 추사으로 출발하는 추상이 있어요.  174





5강 희망을 극복한 자유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기행문


- <스페인 기행> <영국 기행> <카잔차키스의 천상의 두 나라>(<일본 중국 기행>개정판) 니코스 카잔차키스


소재보다는 그 소재를 해석해내는 카잔차키스의 역량을 높이 봤스빈다. 카잔차키스의 기행문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이 그 부분입니다. 여행지 자체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여행지를 소재로 한 작가의 생각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말이죠. .. 

카잔차키스의 기행문은 '대상에 대한 저자의 사색'이 주제가 됩니다. ..

카잔차키스의 기행문은 '어떻게 삶을 대할 것인가?'라는 한 가지 방향으로 흐릅니다. 그는 온몸이 촉수인 사람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순간순간 예민하고 싶어 했죠. 

'나는 그런 영혼이오. 세계를 만지는 촉수가 다섯 개 달린 덧없는 동물.'  182-183


왜 온몸이 촉수인 삶을 살아야 할까요?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어디에도 완벽한 것은 없기 때문인 것 같아요. 현명하게 사는 방법은 그 순간을 온전하게 사는 것뿐이죠.  184


'행복은 하늘이나 땅의 딸이 아니라 인간의 딸이다.'

행복은 어디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므로 우리가 찾아내야 한다는 거죠. 그리고 장자 얘기를 하나 인용해요.

'하늘 아래에는 가을의 작은 나뭇잎 이상 위대한 것은 없다!'

이것은 소재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입니다.  185


'보고 듣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서둘러서는 안 된다. 서두르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할 것이다.'

한 사물을 오랫동안 바라보면 영혼이 훈련이 된 사람들은 그 한 장면을 보고도 그 장면 속에서 많으 이야기들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여러 나라르 다녔다 할지라도 아무것도보지 않은 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작가는 속도에 대한 이야기를 한 다음에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성급함과 초조함과 서두름을 극복했다.'

'예술품의 완전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예술품이 태어난 나무와 물과 언덕 사이에서 그것을 보아야 한다.'  188


아무런 감정도 없고 깊은 접촉도 없이 세상을 냉담한 시선으로 보는 영혼에게는 '객관적인' 진리 - 그것은 얼마나 하찬ㅎ은 것인가! - 만이 존재할 뿐이다. 고통스럽게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은 신비로운 교접을 통해 자신이 보는 풍경과, 마주치는 사람과, 선택하는 사건과 소통한다. 따라서 모든 완벽한 여행자는 항상 자신이 여행하는 나라를 창조하는 것이다.'

풍경들을 객관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서 온전히 느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만의 여행을 할 수 있어요. ..내가 읽고 내 속에서 해석되어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되면 비로소 그때에 좋은 책이 되겠지요. 

모두 똑같은 여행은 없습니다.  189


'다른 사람들 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서 있게나.

자신 앞에서는 엄격한 얼굴로 서 있게나.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용감하게 서 있게나.

일상 생활에서는 기분 좋은 얼굴을 하게나.

사람들이 자네를 칭찬할 때면 무심하게나.

사람들이 자네는 야유할 때면 꼼짝도 하지 말게나.'  189-191



인류사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나예요.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내 인생이니까 그런 겁니다. 세상의 모든 잘난 것들도 내 안의 입법자와 협의해서 동의가 되면 그때 받아들이는 거예요.  197


'사람이 책을 읽으면서 자기가 읽는 대목의 의미를 알고 싶다면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단단하든 부드럽든 단어들의 껍질을 깨고, 그 단어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 응축되어 있는 의미가 자신의 가슴속에서 폭발하게끔 해야 하는 것이다. 작가의 기술이란 인간의 정수를 알파벳 문자들에 압축해 넣는 마술,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독자의 기술은 그 마술적 장치들을 열고 그 속에 갇혀 있는 뜨거운 불이나 부드러운 숨결을 느끼는 것이다.'

김사인 선생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작가는 인간의 정수라 할 만한 무언가를 몇 개의 알파벳 속에 집어넣었어요. 그걸 우리가 제대로 읽으려면 그 문자를 풀어야 해요. 봉인을 해제해야 합니다. 이것은 문장을 일으켜 세운다는 것과 같은 의미죠.  202-203


'나는 이 세상에 왔던 것에 만족합니다. 내가 무수한 고난을 겪었음에, 중대한 실수들을 저질렀음에, 만족합니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겠지만, 실수를 했다고 해도 결과를 받아들이며 다시 살아가죠. 아모르 파티(Amor fati)입니다.  203


'순간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그 순간이 완벽해야 한다.

부족함 없어야 하고 바라는 게 없어야 한다.

모든 희망의 극복이 필요하다.'

언젠가 노트에 적어놓은 메모입니다.  210






6강 장막을 걷고 소설을 만나는 길


- <커튼> 밀란 쿤데라


밀란 쿤데라는 들라크루아의 유명한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예로 드는데요. 그 그림은 철저한 해석입니다. 들라크루아가 생각한 자유의 여신의 이데아를 그려놓은 작품이죠.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이 유명한 그림은 들라크루아가 선해석의 커튼에 있는 장면을 그대로 베낀 것이다. 바리케이드 위에서 한 젊은 여자가 심각한 얼굴로 가슴을 드러내놓고 겁을 주고 있다. 그 여자 옆에는 권총 한 자루를 손에 쥔 코흘리개가 있다.'

쿤데라가 보기에 이 그림은 키치의 전형입니다. 자유의 여신이 깃발을 들고 있는 바로 옆을 보세요. 옆에서 죽어가는 살마들의 비명소리나 피비린내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자유의 여신의 가슴은 전쟁터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깨끗하잖아요. 이런 것들이 전부 키치인 거예요. 쿤데라는 이렇게 말을 잇습니다. 

'내가 이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이 그림이 명화의 대열에서 제외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226-228











''말 그대로의' 역사, 즉 인류의 역사는 이제는 없는 것들, 직접적으로 우리의 삶에 참여하지 않는 것들의 역사다. 예술의 역사는 가치의 역사이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 항상 현존하는 것, 항상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의 역사다. ..'

마차를 생각해보세요. 요즘 누가 마차를 타요. 없어졌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지금 우리는 아직도 몬테베르디라는 16세기의 작곡가도 만나고 스트라빈스키라는 20세기의 작곡가도 만나고 있어요. 이들은 각자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만약 진보의 역사를 잣대로 두고 판단한다면 몬케베르디의 음악은 없어졌어야죠. 과학이 추구하는 것이 '더 나은(better)'의 세계라면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다른(different)'의 세계입니다. 남들과 어떻게 다를 것이냐.  234-235


키치는 앞에서도 언급했는데요, 다시 말하자면 편집입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겠다는 겆. 로맨티스트는 모두 키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로맨티스트는 어떤 상황이든 낭만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이거든요. 지극히 주관적이죠. 로맨틱한 상황에 방귀 냄새가 나서 되겠어요? 로맨틱한 사람은 그 순간 농담을 던지면 뺨을 때리겠죠. 정신 못 차린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때문에 재치라는 것이 매 순간 좋기만 한건 아니에요.  241


'그러나 몽상은 그만! 우리 모두는 출생의 날짜와 장소에 절망적으로 못박혀 있다. 우리의 '자아'는 우리 삶의 구체적이고 유일한 상황을 벗어나서 생각할 수 없으며, 이러한 상황에서만 그리고 그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조건을 벗어나서 우리의 자아를 생각할 수 없어요. 상황이 중요한 거죠. 내가 어느 나라에서, 어느 시대에 태어나, 어떤 상황 속에 살고 있느냐에 못 박혀 있는 겁니다. 이런 것들을 주목한 사람이 프란츠 카프카입니다. 카프카는 이 사람이 귀족이든 아니든, 성격이 좋든 그렇지 ㅇ낳든,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고 당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소설을 씁니다. <성>과 같은 소설이 그렇습니다.  252-253



니체가 이런 말을 했죠.

'16세기에 교회의 타락이 가장 덜한 곳은 독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곳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음을 지적한다. 오직 "타락의 초기에만 타락을 참을 수 없다고 느끼기"때문이다.'

이탈리아의 교회가 더 많이 타락했지만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거죠. 타락이 몸에 배면 익숙해지고 무뎌지게 되거든요.  

'카프카 시대의 관료주의는 오늘날과 비교할 때 순진한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카프파는 관료주의의 끔찍함을 간파했고 그 후로 관료주의는 일상적이 되어 이제는 아무도 과심을 갖지 않는다.'

카프카가 그 시대의 관료주의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초기 관료주의의 끔찍한 모습을 예민하게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현실이 전혀 부끄러움 없이 되풀이된다면, 그 반복되는 현실에 직면한 사상은 결국 언제나 입을 다물게 되는 법이다.'

이게 참 무서운 것 같아요. 조심해야 할 거고요. 예를 들어서 약자를 대상으로 한 폭력들이 이 사회에 계속 존재하고 있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런 문제들에 무덤덤해지는 거죠. 우리는 아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들이지만, 제3자의 시선에서 잡히는 문제들도 분명히 있죠. 시스템의 사회, 관료주의적 사회는 익명성의 시대로 이어집니다.

'예전에 우리 부모들이 휴가를 떠날 때면 기차가 출발하기 십 분 전에 역에서 표를 샀다. 그들은 시골 호텔에 묵었고 마지막 낳 주인에게 현금으로 숙박료를 지불했다. 그들은 아직 슈티프터의 세상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휴가는 다른 세상에서 일어난다.'

오늘날 그런 시대는 끝났죠. 나의 휴가는 다른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우리가 먹는 고기를 생각해보세요. 옛날에는 내가 먹는 고기가 어디서 온 건지 다 알고 먹었는데 지금은 모르죠. 익명성의 시대니까요.

'에어프랑스의 관리들과 노조 관리들 사이에 일어났던 분쟁이 파업으로 이어진다. 전화를 수없이 돌리고 난 후에야 에어프랑스에서 한마디 사과도 없이(K에게 사과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행정은 예의범절 저 너머에 있다.)환불을 받고, 기차표를 산다.'

이게 상황입니다. 누구를 욕하겠어요. 시스템 때문에 어쩔 수없는 거잖아요. 내가 에어프랑스 티켓을 샀으니 비행기를 타고 가는 건 내 권리예요. 그런데 내가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노조 문제가 생겼대요. 이때 나의 민원을 접수한 창구의 사람들은 나에게 미안해 하지 않아요. 그저 환불해주겠다고 간단히 말할 뿐이죠. 이런 얘기들이 이미 카프카의 소설에서 K를 둘러싼 상황을 통해 묘사되면서 예측됐던 것이죠.  254-256


익명성뿐만이 아닙니다. 자유의 개념도 예외 없이 바뀌었죠.

'자유의 개념. 측량사 K에게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기관은 없다. 그러나 정말로 완전히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까? 모든 권리를 가진 시민이라 해도, 가장 가까운 자기의 환경, 자기 집 밑에 지어진 주차장과 창문 바로 맞은편에서 웅웅거리는 확성기를 과연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그의 자유는 무한하지만 그만큼 무력하다.'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행동을 금지하는 기관은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정말 자유로워졌나요? 사생활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법으로 사생활을 보장받고 있어요. 그러나 SNS를 통해 우리의 모든 것이 기록되고 있지 않나요? 진짜 사생활이 있는 건가요? 무력할 수밖에 없죠. 이런 시대로 들어섰어요. 시간의 개념도 변화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의 개념.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대립할 때는 동등한 시간 두 개가 대립한다. 덧없는 인생의 제한된 시간 두 개.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사람 대 사람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과 맞닥뜨린다. 젊음도, 노화도, 피곤도, 죽음도 모르는 존재. 인간의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 인간과 행정은 서로 다른 시간을 산다.'

지난겨울 폭설로 무더기 결항이 된 제주공항 사태 때처럼 책임지는 사람 없이 개인이 바로 행정이라는 거대한 시스템과 맞닥뜨리는 거예요. 결국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요.

'측량 기사 K를 짓누르는 것은 잔인성이 아니라 성의 비인간적 시간이다. 인간은 면담을 요청하고 성은 그것을 뒤로 미룬다. 소송은 길어지고 삶은 끝이 난다.'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가 겪는 일들이에요. 모험도 개념이 바뀌었답니다. 그 옛날의 모험은 내가 모험을 떠나겠어 하고 결심하면서 시작이 되었는데요.

'모험의 개념. 예전에 이 단어는 자유와 마찬가지로 삶에 대한 찬미를 나타냈다. 개인의 용감한 결정으로 자유롭고 확고한, 놀라운 일련의 사건이 시작되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의 피해자 유가족들은 지금 모험의 길에 올랐습니다. 그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시민이 됐어요. 그 사람드의 성격이나 성향이 바뀌었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상황입니다. 모험에 들어선 것은 그 사람의 의지인가요? 상황 때문이잖아요. 어쩔 수 없는 상황,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돈키호테의 모험과는 전혀 다르죠. 그렇다면 그 모험은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찾아오는 일입니까? 아니죠. 그런 상황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지만 나에게도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어요. 어쩔 수 없는 그 상황이 우리에게도 생긱고 나면 우리의 삶 역시 완전히 바뀔 겁니다. 이런 시대에 대한 이야기들은 <커튼>에 들어 있어요.

'싸움의 개념 역시 모험과 비슷하다. (중략) 몸 대 몸의 싸움은 없다. 보험, 사회보장, 상업조합, 법원, 국세청, 경찰, 도청, 시청, 우리의 적에게는 몸이 없다.'

어느 순간 다 우리의 적이 될 수 있는 것들이죠.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적이 될 수 있죠.

'그 모든 소동 후에 K는 지쳐서 죽는다.'

K에 우리 이름을 대입하면 딱 들어맞을 것 같지 않으십니까? 대단한 통찰이에요. 이게 바로 카프카입니다. 놀라울 정도로 지금 우리들이 사는 시대와 꼭 들어맞습니다. 시대를 앞서 읽은 소설이네요.  256-258






7강 소설이 말하는 우리들의 마술 같은 삶


- <콜레라 시대의 사랑>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한밤의 아이들> 살만 루슈디







8강 나만을 위한 괴테의 선물, 파우스트


- <파우스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라.'

방황하지 않는다는 건 노력하지 않는 거죠. 삶을 향한 어떤 노력들과 그로 인한 방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풀어가야 하는지, 이 한 문장에 잘 나와 있어요.  329


'그러면 고서(古書 옛고 글서)들이 신성한 샘물과 같아서,

 그걸 한 모금 마시면 갈증을 영원히 진정시켜준단 말인가?

 그것이 자네 자신의 영혼에서 솟아나지 않는다면,

 결코 상쾌한 마음을 얻지는 못할 것일세.'

체화되지 않는 지식들은 무용합니다. 좀 더 자세히 들어가볼까요? 고서에 적힌 훌륭한 말들이 신성한 샘물처럼 여겨지겠지만 그것들이 갈증을 영원히 진정시켜줄 순 없습니다. 그 말이 내 내면 속에서 영혼속에서 계속해서 솟아나야만 갈증이 가랑앉겠죠. 책을 읽었으면 그걸 내 것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겁니다.  333


'그러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결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할걸세.'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노자가 말했죠. 진실한 말에는 꾸밈이 없고, 꾸미는 말에는 진실이 없다고요. 이걸 <파우스트> 버전으로 볼까요?

'이성이 있고 올바른 생각만 있으면,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연설은 저절로 나오는 법일세.

 자네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진지하다면, 

 말마디를 꾸미려고 애쓸 필요가 있겠는가?'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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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 울림의 공유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개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 1904년 1월, 카프카, [저자의 말] <변신> 중에서 


인간에게는 공유의 본능이 있다. 울림을 공유하고 싶다.



1강 시작은 울림이다


- 이철수 <산벚나무, 꽃피었는데-이철수 신작 판과 100선전>

  이철수 <마른풀의 노래>

  이철수 <이렇게 좋은 날>

  최인훈 전집 1

  이오덕 <나도 쓸모 있을걸>



저는 여느 독서가들과 비교했을 때 독서량이 평균에 미치지 못할 겁니다. 매번 읽은 책들을 메모해놓는데, 통계를 내보면 일 년에 읽는 책이 서른 권에서 마흔 권 사이입니다. 한 달에 세 권 정도 읽는 건데 독서량이 많은 건 절대 아니죠. 대신 저는 책을 깊이 읽는 편입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꼭꼭 눌러 읽습니다. 여기 제가 써놓은 것들을 프린트해왔습니다. 

우선 저는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좋은 부분들, 감동받은 부분들에 줄을 치고, 한 권의 책 읽기가 끝나면 따로 옮겨놓는 작업을 합니다. 이 강의의 목표는 이런 방식의 책 읽기를 통해 제가 느낀 '울림'을 여러분께 전달하는 것입니다.  14


'땅콩을 거두었다

덜 익은 놈일수록 줄기를 놓지 않는다

덜된 놈! 덜떨어진 놈!'


이 한 줄만으로도 덜된다는 게 이런 얘기구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익으면 떨어지는데, 익지 않아 '덜 떨어진다'는 겁니다. 이 한 줄이 자연 현상이 인간사로 넘어오는 순간입니다. 현기증 나는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그냥 자연현상인데 순식간에 사람의 것으로 이입이 됩니다.

이철수는 또 저에게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동양의 삶의 태도와 서양의 삶의 태도를 가장 극명하게 비교하게 해주었는데요, 그것은 역시 판화 [가을사과]에 쓴 한 줄의 글이었습니다.


'사과가 떨어졌다

만유인력 때문이란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과가 떨어진 걸 만유인력 때문이라고 기거이 과학적으로 밝혀내고야 마는 것은 서양의 장점입니다. 그리고 동양의 장점은 때가 되어서 떨어지는 걸 왜 안달복달 난리들이야 하며 자연을 아우르는 철학입니다... 서양의 장점이 가져다준 문명적인 혜택, 충분히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자연적 재앙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연현상을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파악하는 동양의 지예가 다시 힘을 발휘해야 할 때가 되었구나 생각합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런 것이 통찰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창의력이 무엇이냐고 자주 묻는데, 저는 이런 통찰이 창의력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사과를 많이 봤지만, 뉴턴이나 이철수와 같은 생각은 한 번도 못해봤습니다. 같은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이 사람의 힘인 것이죠.  22-23


소설가 김훈에 따르면 글쓰기는 자연현상에 대한 인문적인 말 걸기라고 합니다. 자연은 자연이고 인간의 글은 인문(人文)이잖아요. 그런데 자연을 해석하려고 인문이 노력을 하는 겁니다. 쉽지 않죠? 조금 설명을 덧붙인다면, 

'산에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예전에는 김소월의 [산유화]라는 시를 좋은 줄 모르고 들었습니다. '그게 뭐야, 당연히 산에 꽃이 피지 뭐'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김훈이 이렇게 안내해줬습니다. "이 노래는 말을 걸수 없는 자연을 향해 기어이 말을 걸어야 하는 인간의 슬픔과 그리움의 노래로 나는 들린다"라고 말이죠. 멋진 걸 보고 '우와'라는 표현밖에 못 하는 사람과 다르게 그들은 기어이 말을 걸고 싶은 인문적인 갈증이 있는 것입니다.  25


'깊은데 

 마음을 열고 들으면

 개가 짖어도 

 법문이다' - [개소리] 전문 26


어른들은 .. '지식'으로 세상을 봅니다.

아이들이 .. '감성'으로 본 겁니다.  36


'시골집 선반 위에

 메주가 달렸다.

 메주는 간장, 된장이 되려고

 몸에 곰팡이가 

 피어도 가만히 있는데,

 우리 사람들은

 메주의 고마움도 모르고

 못난 사람들만 보면

 메주라고 한다.' - 부산 감전국교 6년 이경애, [메주]


'껌은 빳빳하지요.

 그러나 입속에 넣으면

 사르르 녹지요.

 아무리 나쁜 사람도

 껌과 같지요.


 모두가 나쁜 사람이라고 

 팽개쳐버려도

 누군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싸 주면

 껌과 같이 사르르 녹겠지요.

 딱딱한 마음이

 껌과 같이 되겠지요.' - 부산 감전국교 6년 김경숙 [껌 같은 사람]  39-40


사람은 물입니다. 조용한 데 이르면 조용히 흐르고, 돌을 만나면 피해가고, 폭포를 만나면 떨어지고, 규정된 성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톨스토이 소설에 악당이 없다..  40


창의성과 아이디어의 바탕이 되는 것은 '일상'입니다. 일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고, 대처 능력이 커지는 것이죠. 

요즘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고수들이 일상의 중요성에 대해 깨달았구나 싶습니다. 박재삼이, 존 러스킨이, 헬렌 켈러가 같은 생각을 했어요. 사과가 떨어져 있는 걸 본 최초의 사람이 뉴턴이 아니잖아요. 사과는 늘 떨어져 있지만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은 겁니다. 상황에 대한 다른 시선, 절박함이 사과를 보고 이론을 정리하게 했죠. 답은 일상 속에 있습니다. 나한테 모든 것들이 말을 걸고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 들을 마음이 없죠. 그런데 들을 마음이 생겼다면, 그 사람은 창의적인 사람입니다.  45



행복은 지금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삶은 순간의 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을 레이스로 생각합니다.  46


레이스가 된 삶은 피폐하기 이를 데 없죠.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그래서 저는 순간순간 행복을 찾아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행복은 삶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그러나 풍요롭기 위해서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같은 것을 보고 얼마만큼 감상할 수 있느냐에 따라 풍요와 빈곤이 나뉩니다. 그러니까 삶의 풍요는 감상의 폭이지요.  47


중요한 것은 휘슬러의 <화가의 어머니>를 보면서 소름이 돋으려면 훈련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이 "문화미와 예술미는 훈련한 만큼 보인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47-49


시이불견 청이불문(視而不見 聽而不聞 볼시 말이을이 아닐불 볼견 들을청 말이을이 아닐불 들을문). 제가 좋아하는 말입니다. 시청은 흘려 보고 듣는 것이고 견문은 깊이 보고 듣는 거죠.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면서 그저 지겹다고 하는 것은 시청을 하는 것이고요, 사계의 한 대목에서 소름이 돋는 건 견문이 된 거죠. [모나리자] 앞에서 '얼른 사진 찍고 가자'는 시청이 된 거고요, 휘슬러 [화가의 어머니]에 얼어붙은 건 견문을 한 거죠. 어떻게 하면 흘려보지 않고 제대로 볼 수 있는가가 저에게는 풍요로운 삶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겁니다. 존 러스킨은 "당신이 보고 난 것을 말로 다 표현해보라"라고 했습니다. 나뭇잎을 봤다면, 나뭇잎의 균형감각이 어떻게 되어 있고, 앞뒷면의 촉감이 어떻게 다르고, 끝부분은 어떤 모양이고, 햇살이 떨어진 각도에 따라 나뭇잎의 색깔이 어떻게 다른지 볼 줄 알면 창의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49-50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51





2강 김훈의 힘, 들여다보기


- <자전거 여행>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자전거 여행2>

  <개-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화장]<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바다의 기별>


구어가 곧 문어(文語 글월문 말씀어)라는 겁니다. 말로 나오는 문장을 그냥 받아적으면 글로 쓸 수 있는 정도입니다.

김훈의 특징은 사실적인 글쓰기를 한다는 겁니다.  59


'탐사취재' 

정밀탐사 ...

김훈의 글은 형용사나 부사를 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사실만 불러내서 정서를 전달하는데, 생각보다 그 힘이 굉장히 큽니다.  60


김훈은 무엇을 보든 천천히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64


'디자인은 단순한 멋 부리기가 아니다.

 디자인은 깊은 생각의 반영이고

 공간에 대한 배려다.'  68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인 조르바를 통해 "그에게 두려웟던 것은 낯선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이었다"라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습니다. 익숙한 것 속에 정말 좋은 것들이 주변에 있고, 끊임없이 말을 거는데 듣지 못한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90


'식물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나무밑동에서 살아 있는 부분은 지름의 10분의 1정도에 해당하느 바깥쪽이고, 그 안쪽은 대부분 생명의 기능을 소멸한 상태라고 한다. 동심원의 중심부는 물기가 닿지 않아 무기물로 변해 있고, 이 중심부는 나무가 사는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 이 중심부는 무위와 적막의 나라인데 이 무위의 중심이 나무의 전 존재를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버티어준다.'

지금 생명활동에는 아무런 관여를 하고 있지 않지만, 중심부가 있지 않으면 나무가 서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92


<바다의 기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쓴 장편소설 <칼의 노래> 첫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입니다. (...) 나는 처음에 이것을 "꽃은 피었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있다가 담배를 한 갑 피면서 고민고민 끝에 "꽃이 피었다"라고 고쳐놨어요. 그러면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하늘과 당의 차이가 있습니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입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은 것이죠.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입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나의 문장과 서술은 몽매해집니다.'  93


'보편적 죽음이 개별적 죽음을 설명하거나 위로하지는 못한다.'

왜군들은 군인으로 오지만 죽을 때는 개인으로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군들이 올 때는 군인이라는 집단명사로 옵니다. 나라를 위해서, 국가의 명예를 위해서 오는데 죽을 때는 일본 군인으로 죽는 게 아니라 가족과 헤어져 외롭고 고통스러운 슬픈 개인으로 죽습니다. 죽음은 전부 개별적이라는 이야기죠. 보편적 죽음이 개별적 죽음을 설명할 수 없어요. 그리고 위로할 수도 없고요. 그래서

'인간은 보편적 죽음 속에서, 그 보편서오가는 사소한 관련도 없이 혼자서 죽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끝끝태 개별적이다. 다들 죽지만 다들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이다.'

맞아요. [화장]에 아무리 사랑을 해도 아픔은 전이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픔도 개별적이에요. 냉정하지만 사실이죠. 아무리 자식이 아프다고 해도, 아파하는 걸 보면서 마음이 아플 뿐이지 그 아픔을 진짜 느낄 수는 없어요. 철저히 개별적인 객체입니다. 평소에 너무 아프거나 추해서 의도적으로 보려 하지 않는 것들을 김훈은 날것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렇게 각성과 새로운 시선을 전져주죠. 김훈은 말합니다.

'나는 사실만을 가지런하게 챙기는 문장이 마음에 듭니다.'  96-97





3강 알랭 드 보통의 사랑에 대한 통찰


- <불안>

  <우리는 사랑일까>

  <동물원에 가기>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개정판으로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우리 모두는 불충분한 자료에 기초해서 사랑에 빠지며, 우리의 무지를 욕망으로 보충한다.'

사실 상대에 대한 전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 사랑에 빠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대상이 있으면 그 사람의 어떤 한 면을 봅니다. 말 한마디의 한 컷, 그 사람이 나에게 얘기했던 한순간만 보고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예쁘다, 멋지다. 매력적이고 좋다고 생각한 뒤 나머지 부분은 다 상상으로 채우죠. 그 상상은 나의 욕망으로 채워집니다.  105


우리는 워홀이 통조림에 했던 발견을 자신에게 해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아마 통조림은 워홀을 사랑하고 평생의 연인으로 삼을 겁니다. 눈물을 흘릴지도 몰라요. 자기를 그렇게 아름답게 봐준 사람이 처음이니까요. 아무도 자기를 중요하게 혹은 예쁘게 안 봐줬어요. 그런데 워홀은 '너 대단히 예쁘다'라고 끌어서 액자 속에 걸어놓아줬어요. 사랑의 감정이 싹트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얘기예요.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상대가 다른 누구도 주목해주지 않았던 어떤 부분을 주목해주거나 다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진가를 알아줬을 때 사랑에 빠진다는 거죠. 그걸 연결해서 알랭 드 보통은 워홀이 물감으로 한 일과 사라의 유사점에 대해 또 하나의 이야기를 합니다.

'워홀이 물감으로 한 일과, 오랫동안 있는 줄도 몰랐던, 

코나 손의 점들을 애인이 칭찬해주는 일은 비슷하지 않을까?

애인이 "당신처럼 사랑스런 손목/사마귀/속눈썹/발톱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거 알아? 라고 속삭이는 것과 예술가가 

수프 통조림이나 세제 상자의 미적인 성질을 드러내는 것은 구조적으로 같은 과정이 아닐까?'

대단한 통찰이죠? 우리가 사람에게 하는 것이나 예술가들이 사물에 하는 것이 같은 과정이라는 메시지가 이 소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또 공감할 만한 건 사랑이라는 게임에서 드러나는 '권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보통 권력이라는 건 '뭔가 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란 게임에서만큼은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것', 그게 권력입니다. 만약에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데, 둘 중 영화를 보고 싶거나 여행을 가고 싶거나 뭘 더 하고 싶은 쪽이 상대를 더 사랑한다는 겁니다. 사실 덜 사랑하는 쪽은 상관이 없는 거죠. "하고 싶은 거 해, 뭘 하든 상관 없어"라고 적당히 무관심한 듯 물러서서 아무 의견을 내지 않아요. 그래서 사랑에서의 권력은 무엇을 할 수 있는 느엵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것이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영역에서와는 달리,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도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다.'  115-116


옛날에는 시인을 볼 견(見 볼견)자를 써서 견자(見者 볼견 사람자)라고 했다죠. 들여다보는 사람, 삶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들이 못보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라는 뜻일 겁니다.  123


카프카가 한 말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냐.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  129


책을 많이 읽고 인문적인 소양을 갖춘 사람들은 촉수가 민감해지죠.  130


<인문학으로 광고하다>에 존 러스킨의 "말로 그림을 그려보라"라는 말을 인용했는데요. 그런 것이죠. 말로 그림을 그리듯 자세히 볼 줄 알아야 합니다.  134





5강 햇살의 철학, 지중해의 문학


- 김화영 <행복의 충격-지중해, 내 푸른 영혼> <바람을 담는 집>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김화영 예술기행>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천상의 두 나라>

  로버트 카플란 <지중해 오디세이>

  알베르 카뮈 <이방인>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장 그르니에 <섬>

  릴케 <말테의 수기>


영혼을 구원한다는 이유로 신부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다고 하자 뫼르소는 처음으로 불같이 화를 내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너에게는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217





6강 결코 가볍지 않은 사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키치의 세계는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보기 때문이죠. 체제가 다를 뿐 모든 세계에 키치가 존재하는 겁니다. 작가는 키치에 의해 유발된 느낌은 가장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감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과감한 짓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

'그녀는 일생 동안 자신의 적은 키치라고 단언했었다. 그러나 그녀 자신조차도 자신의 존재 깊숙한 곳에 키치를 품고 살았던 것을 아닐까? (...) 텔레비전의 멜로드라마 속에서 배은망덕한 딸이 버림받은 아버지를 품 안에 껴안는 모습이나 행복한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의 창문이 황혼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면, 그녀는 두 눈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266





7강 불안과 외로움에서 당신을 지켜주리니, 안나 카레니나


-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1,2,3


'기계적 인문'. 기계적 인문은 제가 만든 말인데, 땅에 발을 디딘 현실적인 인문학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이론만 가지고 사회를 파악하려고 하는 인문을 말합니다. 기계적인 인문을 하는 사람들은 현실과 부딪혀 문제를 풀지 않아요. 책으로만 배운 인문은 민중의 해방을 위해 민중을 교육시켜야해요. 그런데 민중이 일을 해야 하니 일을 하게 둬요. 그리고 밤늦게 일이 다 끝난 후 학습을 시켜요. 그 학습은 민중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시간 투자이기 때문에 절대 빠져서도 안 돼요. 그러니까 잠을 못 자게 하고, 술 한 잔도 정신이 흐트러져 안 된다고 금지하는 거예요. 민중은 그게 싫어요. 사실 그들은 대단한 미래를 바라지도 않아요. 현재도 충분히 행복하니까요.  286






8강 삶의 속도를 늦추고 바라보다


- 법정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손철주 <인생이 그림 같다-미술에 홀리느 손철주 미셀러니>(<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 재출간)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미술이야기>

  오주석 <한국의 미 특강> ㅡ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2 권 <그림 속에 노닐다>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한형조 <붓다의 치명적 농담>



'뼈빠지는 수고를 감당하는 나의 삶도 남이 보면 풍경이다.'

모든 삶이 그 사람한테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지만 멀리서 보면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죠. 그러고 보니까 모든 근경은 전쟁이고, 모든 원경은 풍경 같습니다.  322-323


벗나무 아래 엄숙할 것 없는 문명사. 자연사보다 결코 대단할 것 없는 문명사. 예술을 한 번도 동경한 적 없는 자연.  327


'형상이 드러나지 않은 여백을 바라보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거기에는 마치 위대한 음악의 중간에 침묵의 몇 초를 기다리는 순간과 같은 마음 졸임이 있는 까닭이다.'

'침묵의 위대함은 앞뒤의 음향이 만든다. 그림 속 여백의 의미심장함은 주위의 형상이 조성한다.'  329


'예술의 격조란 정확히 감상자의 수준과 자세만큼 올라간다.'  334


우리는 책에 대한 긍정적인 편견이 있습니다. 책이면 다 좋다는 편견이죠. 하지만 읽는 시간이 아까운 글들도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점수의 삶의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돈오하려면 깨달음을 줄 만한 좋은 책들을 찾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45


호학심사 심지기의(好學深思 心知基意 좋을호 배울학 깊을심 생각할사 마음심 알지 터기 뜻의), 즐겨 배우고 깊이 생각해서 마음으로 그 뜻을 안다는 뜻입니다. 비단 책뿐 아니라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촉수를 모두 열어놓으면 풍요롭고 행복한 인생을 즐기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행복은 선택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잔디이론으로 봅니다. 저쪽 잔디가 더 푸르네, 저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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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사고체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인생을 얼마쯤 살다 보면 완벽한 행복이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거소가 정반대되는 측면을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드물다. 즉 완벽한 불행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말이다. 이 양 극단의 실현에 걸림돌이 되는 인생의 순간들은 서로 똑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모든 영원불멸의 것들과 대립하는 우리의 인간적 조건에 기인한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늘 모자란 인식도 그중 하나다. 그것은 어떤 때에는 희망이라 불리고 어떤 때에는 불확실한 내일이라 불린다. 모든 기쁨과 고통에 한계를 지우는 죽음의 필연성도 그중 하나다. 어쩔 수 없는 물질적 근심들도, 이것들이 지속적인 모든 행복을 오염시키듯, 이것들은 또 우리를 압도하는 불행으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돌려놓음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파편화하고, 그만큼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18


위엄 있게 죽음을 맞을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종종 그 소수는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이다. 침묵할 줄 아는 사람, 다른 사람의 침묵을 존중해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20


우리는 모두 그 문 안에 갇힌다. 머리를 박박 깎인 채 알몸으로 서 있다. 발이 물에 잠긴다. 샤워실이다.  29


아우슈비츠 근처 모노비츠에 와 있다.포로들은 일종의 고무인 부나(부나는 원래 부타젠과 나트륨의 첫 글자를 딴 것. 모노비츠에 있는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는 이 합성고무를 만들기 위한 공장이 있었는데 이를 부나 공장이라 불렀다)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한다. 그래서 수용소 이름도 부나다.  31


종이 울리자 여전히 깜깜한 수용소가 깨어나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진다. 5분 동안의 축복이다. ..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뭔지 알 수 없는 넝마 조각들을 우리에게 던졌고 밑창이 나무로 된 신발 한 켤레 속에 우리의 두 손을 쑤셔넣었다. 상황을 이해할 시간도 없이 우리는 바깥에, 새벽녘의 푸르스름한 눈 위에 나와 있다. 맨발에 알몸으로, 손에는 옷과 신발을 든 채 우리는 1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다른 막사까지 달려가야만 한다. 우리는 그 막사에서 옷을 입을 수 있다.  33


우리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옷, 신발,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빼앗아갔다. ..그들은 우리의 이름마저 빼앗아갈 것이다.  34


해프틀링(포로). 나는 내가 해프틀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이름은 174517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고 죽을 때까지 왼쪽 팔뚝에 문신을 지니고 살게 될 터였다...

"숫자를 보여줘야만" 빵과 죽을 받을 수 있었다.  35


수용소의 고참들은 수인번호로 모든 것을 알았다. 수용소에 들어온 시기, 타고 온 기차, 국적이 수인번호에 나타났다. 3만에서 8만 대의 번호를 지닌 사람들을 보면 누구나 존경을 표하곤 했다. 이제 겨우 수백 명에 불과한 이들은 바로 폴란드 게토의(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 14세기 초부터 19세기까지 유럽 곳곳에 존재했다. 독일군은 1940년부터 동유럽의 주요 도시에 게토를 재건했는데, 그곳은 곧 기아와 질병 수용소로의 강제연행 등으로 비극적인 죽음의 무대가 되었다. 바르샤바의 게토에서는 1943년 봄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결국 그곳에 있던 거의 모든 유대인이 학살됨으로써 진압되었다.) 생존자들이었다.  36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수용소가 그런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빨리 그리고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38


막사마다 200~250명씩 수용되는 일반 해프틀링이 사는 곳이다...

공동 침실의 바닥 면적이 얼마나 좁냐 하면, 같은 B블록에 사는 사람들은 반 정도가 침대에 누워 있지 않는다면 전체가 동시에 그 공간에 있기도 힘들다. .

우리는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이 세 부류로 나뉜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범죄자, 정치범, 그리고 유대인이었다. 모두 줄무늬 옷을 입고 있고 모두 해프틀링이지만, 범죄자들은 상의에 박힌 숫자 옆에 초록색 삼각형을 달고 다닌다. 정치범들은 빨간색이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빨간색과 노란색의 유대인 별을 단다.  44


우리는 음식물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다. 이제 우리도 식사를 마친 뒤 반합의 바닥을 열심히 긁어내고 빵을 먹을 때는 부스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턱 밑에 반합을 댄다. 이제 우리는 죽통의 윗부분에서 푼 죽과 밑에서 푼 죽이 같지 않다는 것도 안다. 우리는 죽통의 크기에 따라 줄을 설 때 어느 죽통 앞에 서는 게 제일 유리한지 계산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다 쓸모가 있음을 배웠다. 철사는 신발을 묶는 데, 천 조각은 발을 감싸는 데 필요하고 종이는 추위를 막기 위해(불법으로) 상의에 대는 데 필요하다. 우리는 모든 물건을 도둑맞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만 방심하면 반드시 도둑맞는다는 것을 배운다. 도둑맞지 않기 위해 반합부터 신발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모두 강의에 집어넣어 보따리를 만들어 베개로 베고 자는 기술을 익힌다.  45


자신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 이성적일 수 있는 인간은 매우 드물다. 운명이 위태로울 때 사람들은 극단적인 태도를 취한다. 성격에 따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잃었고 여기서는 살 수 없으며 종말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금방 확신하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우리를 기다리는 삶이 힘겹기는 하지만 구원의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이 멀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믿음과 힘이 있다면 우리집으로 다시 돌아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인 이 두 부류가 그렇게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불가지론자들이 많아서라기보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화 상대와 상황에 따라, 기억도 일관성도 없이 두 극단적인 입장 사이에서 동요하기 때문이다.  50


나는 수레를 밀었고, 삽질을 했고, 비에 젖었고, 바람에 몸을 떨었다. 내 육체는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배는 볼록하게 나왔고 팔다리는 장작개비 같았으며 얼굴은 아침이면 부었다가 저녁이면 홀쭉해졌다. ..

사나흘 만나지 못하면 서로를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우리 이탈리아인들은 매주 일요일 저녁 수용소 한쪽 귀퉁이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곧 그만두어야 했다 숫자를 세는 게 너무 슬펐기 때문이다. 우리의 수는 매번 줄어들었고 매번 몰골이 더 사납고 더 비참해졌다. 모임에 나가려고 몇 발짝 떼어놓는 것도 힘이 들었다. 게다가 다시 만나게 되면 필연적으로 기억을 떠올리고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51


솔직히 고백하면, 수용소 생활 일주일 만에 나는 청결의 욕구를 잃어버렸다. 내가 세면장을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거기에 쉰 살이 다 된 내 친구 슈타인라우프가 웃통을 벗고 서 있었다. 그는 몸을 문지르고 있으나 별 효과가 없다(비누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목과 어깨를 씻는다. 슈타인라우프는 나를 보자 인사를 한다. 그러다 곧바로 정색을 하며 다짜고짜 내가 왜 안 씻는지 묻는다. 내가 왜 씻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면 내게 도움이라도 된다는 건가? 내가 누구의 마음에 더 들게 되기라도 한다는 건가? 하루, 아니 한 시간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 반대다. 오히려 수명이 더 짧아질 것이다. 씻는 일도 노동이고 에너지와 칼로리의 낭비니까. 슈타인라우프는 우리가 석탄 자루밑에서 30분만 낑낑대노라면 자기와 내가 구분조차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런 생활환경에서 얼굴을 씻는다는 것은 어리석고 심지어 무례하기조차 한 것 같다. 이것은 기계적인 습관일 뿐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절멸의 의례를 처량하게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아니, 이미 죽기 시작했다. 기상과 노동 사이에 여우 시간이 10분밖에 없다면, 나는 그 시간을 다른 데 쓰고 싶다. 나 자신 속으로 침잠하여 결산을 하거나, 이것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늘이나 바라보고 싶다. 아니면 아주 잠시나마 한가로움이라는 사치를 즐기도록, 그냥 그렇게 살아 있도록 내버려두고 싶다. 

하지만 슈타인라우프가 내 생각을 가로막는다. 그는 세수를 다 했고, 무릎 사이에 끼워두었던, 나중에 걸칠 아마포 상의로 몸의 물기를 닥는다. 그러고는 나에게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는데, 그 와중에도 자기가 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56-57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도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이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

이것이 바로 마음씨 좋은 사람 슈타인라우프가 나에게 말해준 것이다.  57-58


카베는 크랑켄바우, 즉 위무실의 약자다. ..

회복의 기미를 보이는 사람은 카베에서 치료를 받고, 병이 점점 심해지는 사람은 가스실로 보내진다.

이 모든 게 우리가 다행히 '경제적으로 유용한 유대인'으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65


카베의 삶은 림보(<신곡>의 지옥을 구성하는 아홉 개의 원 중 가장 형벌이 가벼운 제1원을 말한다.)의 삶이다. 굶주림과 질병 본래의 아픔 말고는 불편함이 상대적으로 적다. 춤지도 않고 일도 안 한다.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구타를 당하지도 않는다.  72


11시 30분에 오늘 죽은 어느 정도일지, 맛은 어떨지, 죽통의 윗부분 혹은 아랫부분 중 어느 것이 우리 차지가 될지 하는 판에 박은 질문들이 시작된다. 난 이런 질문들을 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그래도 그 대답에 탐욕스럽게 귀를 기울이고 부엌에서 실려오는 연기에 코를 킁킁거리지 않을 수 없다.  103


삶의 의미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모든 힘줄 속에 뿌리 박혀 있다. 이것이 인간 본질이 지닌 속성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이러한 목적에 많은 이름을 부여하며 그 성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토론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문제는 훨씬 더 단순하다.

오늘 그리고 여기서 우리의 목표는 봄에 도달하는 것이다. 지금은 다른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제 이런 목표 뒤에 다른 목표는 아무것도 없다.  106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완전한 행복의 상태를 누릴 수 없어서라기보다 불행의 상태가 지니는 복잡한 성질을 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없이, 차례대로 늘어선 그 불행의 이유들이 단 하나의 이름을, 가장 큰 이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유가 힘을 잃어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 때 우리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비탄에 잠길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뒤로 또 다른 이유들이 줄을 서 있다.  110-111


민간 관리국은 부나에서 도둑질하는 것을 벌주지만, SS는 오히려 허용하고 조장한다. SS가 엄금하는 수용소 안에서의 도둑질이 민간인들에게는 정상적인 교환 행위로 간주된다. 해프틀링들 간의 도둑질은 일반적으로 처벌을 받으며, 도둑과 피해자가 동일한 강도의 벌을 받는다. 나는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이라는 단어가 수용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지 한번 생각해보라고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다.  130


우리는 명백하고 손쉬운 추론을 믿지 않는다. 모든 문명적 상부구조가 제거되면 인간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잔인하고 이기적이고 우둔하다는 추론 말이다. 이러한 추론에 따르면, '해프틀링'은 거리낌이 없는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생각에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궁핌과 지속적인 육체적 고통 앞에서 수많은 사회적 습관과 본능이 침묵에 빠진다는 것뿐이다.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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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는 <안네의 일기>, 빅토르 프랑클의 <밤과 안개>, 엘리 비젤의 3부작 <밤> <새벽> <낮>과 함께 나찌 독일이 저지른 만행의 진상을 전하는 증언 문학의 대표작으로서 지금도 널리 읽힌다.  22


1987년 4월 11일에 또리노의 레 움베르또(Re Umberto)거리에 있는 자택에서 자살했다.  23


67세의 쁘리모 레비는 아파트 4층 난간을 넘어 아래층의 홀로 몸을 던졌다.  27


생전의 쁘리모 레비와 면식이 있던 타께야마 씨는 "내가 아는 레비는 명랑하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를 지닌 쾌활한 인물로, 눈에는 지적 호기심이 넘치고, 언제나 농담을 즐겨 했다.(...) 그런 그가 돌연 자살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고 회고한다.(<지금이 아니면 언제>의 역자후기)

그 부분을 읽을 때, 내가 바로 머릿속에 떠올린 것은 한나 아렌트의 [우리 망명자들]이라는 글이었다. 그 글은 <파리아(pariah, 차별받는자를 뜻한다)로서의 유대인>이라는 평론집에 수록되어 있다.

'우리 중에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한참 나눈 후, 집으로 가서 가스를 틀어놓거나 마천루에서 뛰어내리는 기묘한 낙관주의자들이 있다. 우리가 선언한 쾌활함이 죽음을 곧바로 받아들일 듯한 위험스러움과 표리일체임을 그들은 증명하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생명이야말로 최고의 선이며 죽음이 최대의 공포라는 확신 아래서 자랐는데, 생명보다 지고한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 채 죽음보다도 나쁜 테러의 목격자가 되고 희생자가 되었다.'

한나 아렌트가 이 글을 쓴 것은 1943년이었다.  28-29


아렌트는 여기에서 망명 유대인드의 '동화' 지향, '성공' 지향을 비판하고 하이네, 카프카에서 채플린에 이르는 "'의식적 파리아'의 입장을 선호한 유대인 소수파의 전통"을 상기할 것을 주장했다. '파리아'라는 아이덴티티에 입각하여 차별과 억압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모든 '파리아'의 해방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과 통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렌트는 망명 유대인의 자살 충동을 분석하고, "(그들은) 싸우는 대신에 또는 어떻게 하면 저항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대신에, 친구나 친척의 죽음을 바라는 것에 익숙해져버렸다"고 진술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누군가 죽으면 이제야 그 사람이 완전히 어깨의 짐을 벗었구나 하고 쾌활하게 생각하"곤 한다. 결국에는 "자신도 얼마나마 어깨의 짐을 벗을 수 있길 원하게 되고, 그래서 실제로 자살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 표면상의 쾌활함과는 정반대로 그들은 항상 자신에 대한 절망감과 싸운다. 그리고 결국 일종의 자기 본위로 죽음을 선택한다"고 말했다.  29-30


1943년 7월 10일 연합군이 씨칠리아(Sicilia)섬에 상륙하자 이딸리아의 정세는 크게 역전되었다. 7월 25일에 파시스트정권은 내부적으로 붕괴하여 무쏠리니는 실각하고 바돌리오정권이 새로 들어섰다. 바돌리오정권은 독일과 관계를 끊고 연합국과 단독강화의 길을 찾아, 9월 3일 드디어 연합군과 비밀리에 휴전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9월 8일에 그것이 공표되자 독일군은 곧바로 북이딸리아를 점령해 감금되었던 무쏠리니를 구출하고, 그를 옹립하여 가르다(Garda)호반(湖畔 호수호 두둑반)의 쌀로(Salo)를 보넉지로, 흔히 '쌀로공화국'이라 불리는 '이딸리아사회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때부터 반파시즘 운동은 독일 점령군과 그들을 돕는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무장투쟁의 시기로 접어든다.  35


1943년 12월 13일 쁘리모 레비는 스파이에게 속아 산중의 외딴집에 갇힘으로써 어이없이 체포되고 말았다. 부대에 참가한 지 불과 몇 주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38


즉결로 총살된 많은 빨치산과는 다르게, 유대인인 그는 다음 해인 1944년 2월 이딸리아의 포쏠리 디 까르삐(Fossoli di Carpi) 중계수용소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죽음보다도 나쁜 테러의 목격자"가 되었다.  39


쁘리모 레비는 1919년 7월 31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기사(技師 재주기 스승사)였다. 지적인 중산계급 가정에서 자란 레비는 지역의 명문 마씨모 다젤리오(Massimo D'Azeglio) 고등학교를 나온 후 역시 같은 지역의 또리노대학에 들어가 화학을 전공했다. 무쏠리니의 파시스트당이 정권을 쥔 때가 1922년임을 생각하면, 그는 소년기를 전부 파시스트체제 아래서 보낸 것이다.

''아리아인'이든지 유대인이든지, 나 혹은 우리 세대의 전반에는, 파시즘에 저항해야 하며 또 그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아직 확실하게 의식화되지 않았다.'<주기율>  50-51


레비는 대학의 화학과를 함께 다니던 친구 싼드로 델마스뜨로(Sandro Delmastro)에게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물질에 대항해 이긴다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며, 물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주와 우리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때문에 그때 피나는 노력으로 구명하던 멘젤레예프의 주기율이야말로 한 편의 시였으며, 고등학교 시절 암기해온 어떤 시보다도 장중하고 소중했다. (...)

사물을 생각할 수 있는 인간에게 그 무엇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치욕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모든 독단, 증명 없는 단언, 유무를 대답할 수 없는 명령에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가?' ([철], <주기율>)

쁘리모 레비에게는 화학과 물리학이 파시즘에 대한 대항물이었다. 그것은 '명료하며 하나하나가 증명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60


열여섯 살 때 화학에 심취한 그가 친구와 함께 몰래 전기분해 실험을 하는 이야기가 <주기율>의 [수소]라는 단편에 그려져 있다. 어린 쁘리모는 "부푸는 꽃봉오리나 화강암 안에서 빛나는 운모 그리고 자기 자신의 손을 보고" 마음속으로 부르짖는다.

"이것도 밝혀내고 말 테다. 하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바와는 다른 방법으로 모든 걸 밝혀내고 말 테다. 지름길을 밝혀 낼 테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고 말 테다, 문을 비집어 열어 보이겠어."

'이해'에 대한 간절한 욕망, 그것은 소년 시절부터 변함없이 쁘리모 레비의 생애를 관통하고 있다. 과학정신은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였다. 그는 비합리적인 정신주의에 대한 경멸과 혐오감을 통해 파시즘에 의한 부식으로부터 자신의 혼을 지켰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아우슈비츠라는 이해할 수 없는 역(逆 거스를 역)유토피아의 세계에 던져졌을 때, 역유토피아를 지상에서 실현한 '독일인'을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어져갔다.  61


쁘리모 레비의 선조는 1492년 대추방으로 인해 에스빠냐에서 쫓겨난 유대인이며, 남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을 거쳐 1500년경에 삐에몬떼 지방으로 왔다. 그들은 또리노에서 거부당해 삐에몬떼 지방 남부의 농업지대에 정착하며 견직 기술을 도입했지만, "최전성기에도 대단히 수가 적어, 소수파의 상태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73


쁘리모 레비는 또리노를 '진정한 고향'이라고 했는데, 실은 그가 태어난 1919년은 그의 선조 유대교도들이 또리노에서 살도록 허락되고부터 불과 70년 정도밖에 흐르지 않은 싯점이었다. '고향'은 오랜 기간 그들을 계속 거부해왔던 것이다.  74


무쏠리니의 파시스트정권도 당초는 유대인 배격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이딸리아에는 망명 유대인이 유입되었고, 독일에서 압력이 강하게 들어왔다. 무쏠리니 측에서도 독일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할 방침을 정했고, 1937년 11월에 일본, 독일, 이딸리아는 삼국 방공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1938년 9월에 파시스트 정권은 인종법을 제정하여 일련의 반유대 조치를 선포했다.

이 싯점에 이딸리아에는 전인구의 0.1% 전후에 해당하는 약 5만 7천 명의 유대인이 살았다. 그 가운데 약 1만명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망명한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도시에 살았으며, 1만 3700명이 살았던 로마를 필두로 밀라노, 뜨리에스떼에 이어서 쁘리모 레비의 고향인 또리노에는 네번째로 많은 3700명의 유대인이 살았다.  81-82


1939년 6월에 공포된 정부령에 따라서 전문직에 종사하는 유대인은 유대인 고객과 환자만을 상대해야 했다. 또 유대인과 이딸리아인의 결혼을 금지하고, 유대인이 재산 소유, 특히 농지 소유를 제한했다. 1919년 이후에 국적을 취득한 귀화 유대인(쁘리모 레비의 일가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의 국적을 박탈하고, 외국 국적의 유대인과 귀화 유대인에게 1939년 3월까지 재산을 포기하고 이딸리아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1941년 말까지 7천 명의 사람들이 해외로 이주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귀화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이딸리아에서 반유대정책은 불완전하게 실시되었을 뿐이다. 법령은 외견상 독일에서 실시되던 것과 동일할 정도로 철저했는데, 이딸리아 정부는 그 법령을 철저하게 시행할 수 없었다. 실제 이딸리아에서는 유대교도와 기독교도의 '혼합물(混合婚 섞일혼 합할합 혼인할혼)' 비율이 높았고, 상당히 많은 유대인이 군의 장교나 고급관료, 고위정치가 같은 직책에 있었다. 이렇게 유대인이 이딸리아 사회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유대인 박해는 심리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곤란한 측면까지 있었다.(<절멸>)  82-83


쁘리모 레비는 자신을 유대인이라기보다 이딸리아인이라고 느꼈을 것이며, 그보다 이성에만 복종하는 '인간'의 일원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보편성 앞에서는 '유대인'인 것이 '주근깨'정도의 차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대학에 입학한 이듬해에 인종법이 공포되자, 기독교도인 학우와 교수는 대부분 쁘리모 레비에게서 멀어져갔다.  84


아우슈비츠는 폴란드 남서부의 고도(古都 옛고 도읍도) 크라쿠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마을이다. 본래 지명은 오시비엥침이지만 나찌 독일이 점령한 후 그와 같은 독일식 지명으로 개칭했다.  93


'아우슈비츠'라는 말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 마을과 그 주변 지역에 위치한 45개 강제수용소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아우슈비츠'는 수인의 수용, 노역, 절멸과 같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세 단계에 모두 대응할 수 있는 거대한 수용소복합체였다. ..

1942년 7월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이 이송되기 시작해, 종전까지 폴란드에서 30만 명을 비롯해서 네덜란드에서 6만 명, 프랑스에서 6만 9천 명, 헝가리에서 43만 8천 명 등 다수의 유대인이 이송 수감되었다. 그중 이딸리아에서 이송된 7500명은 이들 중에서도 '소수파'였다.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된 희생자 수는 110만 명 내지 150만 명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그중 90%는 유대인이었다.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 때, 1백만 벌 이상의 의복, 7톤의 모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구두와 안경이 발견되었다. 그 싯점에 살아남은 수인은 6만 5천여 명, 그 대부분은 철수하는 나찌에 의해서 '죽음의 행진'에 연행되어갔기 때문에 해방된 수인은 약 7천 명에 불과 했다. 쁘리모 레비는 이 행운의 7천 명 중 한 사람이었다.  96-97


유대인 희생자의 총수는 6백만 명이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97


도시 안의 폐쇄된 좁은 지역에 유대인을 몰아넣는 '게토화'정책. ..

바르샤바에서는 1940년 10월 12일에 게토 설치를 명하는 법령이 공포되었다. 게토는 십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벽으로 외계와 완전히 격리되었고, 그로 인해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접촉은 단절되었다. 바르샤바 전역의 2.4%밖에 안되는 좁은 지역에 시 전체 인구의 30%에 해당하는 4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갇혔다.

주거 환경은 콩나물시루 속과 같아서 4인 기준의 방에 보통 10명에서 15명이 생활했다. 게토에 공급되는 식료품은 심하게 제한되었기 때문에 수인들은 기아에 시달렸으며 열악한 위생 상태와 함께 발진티푸스 등의 전염병으로 하나둘 죽어갔다. 사체는 매장할 인력이 없어 며칠이나 도로에 방치되었다.  99


나찌 친위대(SS) 경제관리본부 본부장 오스발트 폴은 1942년 4월 30일 정부령에서 강제수용소에서의 노동을 이렇게 정의한다. "사역(使役 부릴사 부릴역)이란 최고의 생산 상태를 얻기 위해서 말뜻 그대로 '소모'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해 9월 14일 법무장관 티라크가 괴벨스와 회담할 때 이 '소모'라는 말에 주석을 달아 "노동을 통한 절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반제 회의의 서기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증언에 따르면, 회의에서 '문제 해결의 여러 형태', 즉 여러 살해 방법이 솔직하게 토의되었고, 참가자들에게 "진심 어린 동의" 이상의 것을 얻어냈다. 회의는 한 시간 반 이상 걸리지 않았고, 그후에는 음식이 나와서 그들 모두는 점심 식사를 했다. "기분 좋고 조촐한 사교적 모임"이었다.

'아이히만에게 이 회의가 잊힐 수 없는 데는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는 최종적 해결에 협력하기 위해서 이제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이런 피비린내 나는 폭력에 의한 해결'에는 다소 마음속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 의문이 지금 풀린 것이다. "지금 이 반제 회의에서 당시 가장 높은 자리의 사람들이, 제3국의 법왕들이 발언했던 것이다." 히틀러, 하이드리히와 '스핑크스' 뮐러, SS나 당뿐만 아니라, 전통을 자랑하던 국가관료 엘리뜨들까지도 이 '피비린내 나는' 문제에서 서로 선두에 서려고 경쟁하는 것을 그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빌라도가 맛본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에게는 전혀 죄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01-102


영화 <쇼아>에도 등장하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필립 뮐러(Filip Muller)는 특별작업반으로서 사체 처리작업에 종사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가스실에서의 살육 모습은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몇 알의 치클론 B가 가스실 바닥에서 승화하면, 희생자들은 절규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올라오는 독가스를 피해 도망치려고 힘센 사람은 약한 사람을 때려눕히고, 좀더 살겠노라고 아직 독가스에 오염되지 않은 공기를 찾아서 쓰러진 사람들 위로 올라섰다.

15분 내에 가스실 안의 전원이 사망했다.

약 30분 후에는 문이 다시 열렸다. 사체는 탑처럼 층층이 쌓여 있었고, 앉은 채로 죽은 자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죽은 자도 있었다. 밑에는 아이나 노인의 사체가 있었다. 사체에는 녹색 반점이 있었고, 피부는 핑크빛으로 변해 있었다. 입에 거품을 문 사체나 코피를 흘리는 사체도 있었다. 대소변 배설물로 뒤범벅이 된 사체도 있었고, 임신중이 ㄴ여성 중에서는 출산이 시작된 경우도 있었다.

유대인으로 구성된 특별잡업반이 가스마스크를 착용하고 통로를 만들기 위해 문 근처의 사체를 잡아 끌어낸 후, 사체에 호스로 물을 뿌려, 사체 사이에 남은 독가스를 씻어냈다. 특별작업반은 그런 위에서 비로소 사체를 옮겼다. 

모든 수용소에서 사체의 구멍이란 구멍을 수색해 귀중품을 숨겼는지 확인했고, 죽은 자의 입에서 금니를 뽑았다.  105-106


약 9백만 명의 유럽 유대인 중 3분의 2가 살해되었다. 특히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유대인 주민의 9할이 살해되었다. 

특정한 인간 집단에 대한 이 특이하고 철저한 절멸정책은 오늘날 주로 '홀로코스트'라 불린다. 그 어원은 구약성서에 기술된 "구워서 신전(神殿 귀신신 대궐전)에 바치는 희생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라고 한다. 또한 최근에는 '대파괴, 파멸'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쇼아'가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107


레비의 팔에 새겨진 번호는 174517 이었다.

"수인번호에는 유럽 유대인의 말살 과정이 요약되어 있다." 10000부터 80000까지의 수인은 폴란드의 게토에서 몇 안되는 생존자였고, 119000부터 117000은 그리스의 쌀로니까(Salonica) 출신자였던 것이다. 이딸리아 유대인은 174000번대의 번호를 받았다.  117


인간이 어떻게 이토록 잔혹할 수 있을까?

인간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같은 잔혹함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을까?  137


'아우슈비츠'가 비교 불가능한 '유일무비(唯一無比 오직유 한일 없을무 견줄비)'의 사건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아우슈비츠'는 '비교 가능'한 사건이다. 비교 후에 도출된 대답은 그것이 과거 인간 또는 인간사회의 제도가 보여줄 수 있었던 냉혹함과 잔인함의 극한적 실례라는 것이다.  138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 따라서 내일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얼굴을 씻고 이를 닦는다. 자기 자신에게 규율과 질서를 부과하고 자기 생활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 때문에 노예보다 못한 신분으로 추락하더라도 '덕과 지'를 구하는 것이다. 단떼를 상기하고, 오디쎄우스처럼 끝없는 고난의 항해를 이겨내려고 하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금 지옥에서 인간세상으로 생환하여 증언하기 위해서.  155


장 아메리(Jean Amery)의 본명은 한스 마이어(Hans Mayer)라고 한다.  157


벨기에에서 추방된 유대인 2만 5437명 가운데 약 2만 3천 명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아메리는 불과 615명의 생존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전후에는 오스트리아 국적을 회복했지만, 브뤼쎌에 계속 거주하며 저술가가 되었다. 본명인 마이어(Mayer)의 철자를 바꿔서 아메리(Amery)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55년부터다. 1976년에 <자신에게 손을 내밀며 - 자살에 대해서>를 간행하고 그 2년 뒤인 1978년 10월 16일 잘츠부르크의 한 호텔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

쁘리모 레비에게 아메리의 자살은 틀림없이 대단히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159


아메리는 말한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수용소에 없다. 오히려 어떻게 죽을까 생각한다. 가스실에서 독가스의 효과가 나타나는 데 걸리는 시간에 대해서 논쟁하거나, 페놀 주사에 의한 죽음의 고통을 추측하여 서로 대화하거나 하는 등.  161


1944년 크리스마스도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쁘리모 레비가 있던 모노비츠 수용소의 수인들은 점호를 받기 위해 광장에 정렬했다. 

투광기의 빛과 나무틀 교수대, 그런 도구들과 잔인한 의식은 그들에게 이미 낯설지 않았다. 쁘리모 레비는 그때까지 열세 차례나 교수형 장면을 목격했다. 예전에는 교수형이 보통 사소한 범죄나 주방에서의 절도, 태업, 탈주 등에 대한 징벌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공개 처형의 희생자는 비르케나우의 소각로를 파괴한 반란 집단의 일원이었다. 이 반란은 가스실에서 사체 처리를 강요받았던 유대인 특별작업반 340명이 감행한 것이었다. 머지않아 자신들도 처분될 거라 확신한 그들은 몇 개월 동안 준비해 경기관총 한 정, 권총 몇 정, 수제 폭탄, 톱, 도끼, 쇠지렛대, 호미 등을 가지고 1944년 10월 7일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제4소각로에 방화하고, 제2소각로의 설비를 파괴한 후 철조망을 절단하여 도주를 기도했다. 그러나 반란은 나찌 친위대의 공격을 받고 250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결국 실패했다. 그날 밤, 또다시 2백 명의 유대인이 사살되었다. 친위대 쪽 희새자는 세 명이었다. 이 사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역사에서 유일한 무장 저항이었다.(<절멸>)  175-176


우리 생존자들은 진정한 증인이 아니다. .. 우리는 극히 적을 뿐만 아니라 이례적인 소수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눈속임이나 요령 혹은 행운에 의해서 심연의 바닥까지 가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이다.(<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  178


츠베땅 토도로프는 쁘리모 레비가 시달리던 수치의 감각을 '기억으로서의 수치' '살아남은 자의 수치' '인간이라는 수치'등 3단계에 걸쳐 분석한다. ...

저항의 의지조차도 전면적으로 파괴된 굴욕의 기억, 자신은 '카인'이라는 자기 고발. 증인으로 자신이 적격한지를 둘러싼 의혹(하지만 궁극적으로 '진정한 증인'은 죽은 자이며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자기 자신도 인간이라는, 수치심을 느껴야 할 종족의 일원이라는 생각... 이렇게 몇 겹으로 쌓인 수치의 감각이 자신의 몸을 갉아먹어가자 쁘리모 레비는 자신의 몸을 '심연의 바닥'에 내던진 것일까?  178-179


왜 아우슈비츠의 생존자가 '인간이라는 수치'에 시달려야 했을까? 수치스러움을 모르는 가해자의 수치까지도 피해자가 고스란히 받아서 시달려야 하는, 이 부조리한 전도가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

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은 인간 이하'라는 사상에 희생된 까닭에, 그 사상을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대치해야 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독일인'도 물론 '인간'에서 예외는 아니다. 한번 파괴된 '인간'이라는  척도를 재건하려고 하는 한, '인간'이 저지른 죄는 어김없이 그들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181-182


싸르트르의 이런 말이 떠올랐다. 알제리 해방전쟁중에 프랑스군이 알제리에서 자행한 고문이나 잔학 행위를 고발한 글의 한 부분인데,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적을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라도 그리고 어떤 안전책을 두더라도 모든 국민이, 인류 전체가 비인간적인 것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실제 우리가 왜 인간이 되기 위해서 혹은 계속해서 인간의 위치에 있기 위해서 크게 괴로워하는 걸까? 비인간적인 것이 바로 우리의 진실이 되는 것이다. (...)

음침하며 허위에 가득 찬 그런 생각들은 모두 '인간은 비인간'이라는 동일한 원리에서 나온다([하나의 승리] <상황들>)  184


바르똘로뮤 라스 까싸스가 쓴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서>.

그들은 누가 단칼에 몸을 정확히 두 동강 낼 수 있는지, 누가 일격에 머리를 잘라낼 수 있는지, 내장을 파열시킬 수 있는지 등의 내기를 했다. 그들은 어머니에게서 젖먹이 아이를 빼앗아 그 아이의 다리를 잡고서 바위에 머리를 내려치기도 했다. (...)

그리고 그들은 겨우 발이 땅에 닿을 정도의 커다란 교수대를 만들고, 다른 방법도 있으련만 자신들이 구세주와 12명의 사도를 받들기 위해서라며 항상 13명씩 교수대에 걸고 그 밑에 장작불을 지폈다. 이렇게 그들은 인디오들을 산 채로 구웠다. (...)

보통 그들은 인디오들의 영주나 귀족을 다음과 같은 수법으로 살해했다. 땅속에 박아둔 4개의 봉 위에 가느다랗고 긴 봉으로 만든 석쇠 같은 것을 얹어놓고, 거기에 그들을 매달아 그 밑에서 약한 불을 지폈다. 그러면 영주들은 그 잔학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절망하다가 서서히 죽어갔다. (...)

기독교도들은 마치 미친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인류를 파멸로 내모는 사람들이었으며 인류 최대의 적이었다. 비인도적이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쳐 살아남ㅇㄴ 인디오들은 모두 산속으로 숨거나 다른 방법으로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자 기독교도들은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사냥개를 사납게 훈련했다. 사냥개는 인디오를 한 명이라도 발견하면 순간적으로 그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들'이란 말할 것도 없이 에스빠냐 정복자를 가리킨다.

신대륙으로 건너간 에스빠냐 사람들은 원주민에게 공조(貢租 바칠공 구실조)를 요구하고, 그것이 부족하면 강제노동을 부과했다.  185-186


에스빠냐인은 기독교화라는 미명 아래 아스께까왕국이나 잉까제국을 정복한 후 원주민을 혹사하고 학살했다. ..

라스 까싸스는 1541년 국왕을 알현하고 자신의 견문에 기초한 보고서를 제출하여 정복 중지를 호소했다. 그 보고서를 훗날 가필하여 발간한 것이 바로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서>다. 

라스 까싸스는 이 <보고서>에서 신대륙 도착 이후 40년 동안 1200만 명 내지 1500만 명의 원주민이 희생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 그 희생자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미증유의 제노싸이드(대학살)였음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 또한 기독교화되지 않은 원주민은 인간 이하라는 사상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86-187


대서양을 넘어 신대륙으로 '이송'된 아프리카인의 수는 1200만 내지는 2천만 명이라고 하지만, 이 숫자도 지금은 확정 불가능하다. 더구나 거기에는 노예사냥 도중에 죽은 사람이나 항해주엥 죽어서 바다에 버려진 사람들의 수는 포함되지 않았다(<신서 아프리카사>)  189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는 '일부 인간은 인간 이해'라고 하는 사상, '인간은 비인간이다'라는 원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는 한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2


소련군에 의해 해방된 그는 이딸리아인 수인이나 포로 들과 함께 전쟁 말기의 오랜 혼란기 내내 폴란드와 소련의 영토 내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리고 거의 8개월 후에야 비로소 특별열차로 루마니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독일 영토를 거쳐 이딸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환까지의 혼돈과 권태의 시간, 그 부조리하며 축제 갇기도한 나날을 그린 작품이 쁘리모 레비의 두번재 작품 <휴전>이다.  198


<주기율>의 [바나듐]이라는 단편에 ..

레비가 부나에서 실험실에 배치되었을 때, 거기에 출입하던 민간인 주에 뮐러 박사라는 인물이 있었다. ..

뮐러는 착하고 소심하며 정직하면서도 무기력했다. 대다수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당시 자신의 무관심이나 무기력을 무의식 속에서 정당화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직접적인 가해자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나찌의 범죄에 가담하거나 그것의 수혜를 받은 인물이 희생자에게 무거운 말투로 '원수에 대한 사랑'이나 '인간에 대한 신뢰'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안의 천박함, 아니 불쾌감 ..게다가 그가 완고한 나찌였다면 이야기는 간단했을 테지만, 그는 당혹스럽게도 '과거의 극복'을 바란다고 말한다.

'일단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준비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개전의 태도를 확실히 보일 때, 즉 원수임을 포기할 때 가능하다고 밝혔다. 반대의 경우, 계속 원수로 존재하며 고통을 만들어내겠다고 고집할 경우에는 물론 용서해서는 안된다. 그 사람을 옳은 방향으로 고치려고 노력하고, 그 사람과 토론하는 것은 가능하지만(그래야 한다!),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 현실에서는 무장 집단이 존재했고, 아우슈비츠를 만들었으며, 정직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은 그것을 위한 정지(整地 가지런할정 땅지)작업을 했다. 그 때문에 아우슈비츠에 대해서 바로 모든 독일인에 그리고 인류 전체에 책임이 있으며, 아우슈비츠 이후 무기력한 것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레비가 뮐러의 만나자는 요청에 답하기 위해서 쓴 편지의 초안이다....

결국 이 편지를 우체통에 넣지는 못한다. 뮐러에게서 뜻하지 않게 전화가 걸려 와 만날 약속을 했는데, 그러자마자 그가 병사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세계는 여전히 단절된 그대로였다. 그뿐만 아니라 단절은 점차 절망적인 것이 되었다. 저편과 이편은 '사랑'이나 '인간'이라는 말의 의미조차 서로 통하지 않은 것이다.  200-206


나도 뮐러와 같은 일본인을 자주 만난 적 있다.

일본에는 예전부터 그때는 '시대'가 좋지 않았고 '전쟁'은 그런 것이며, 일부의 '광신적 군인'이 폭주한 것이지 국민도 천황도 이 '사실을 몰랐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조선의 식민지 지배에 관해서는 일본이 아니었으면 러시아가 그렇게 했을 것이라며, 결과는 불행했지만 일본은 뒤처진 조선인을 일본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했고, 그 '선의'는 인정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편다. 하지만 나의 '뮐러'는 이 타입이 아니다.

나의 '뮐러'도 또한 내게 "왜 그렇게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까?"라며 일견 성실한 듯 보이는 둔감함으로 묻곤 한다. 혹은 "왜 그러헥 화난 겁니까?"라든가 "왜 슬퍼하는 겁니까?"라든가... 그들은 자기 자신도 그 불안과 분노 그리고 슬픔의 원인과 관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대개 자신을 휴머니스트이며 평화 애호가라고 굳게 믿고 있다. 서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면, 한국에 여행한 적이 있다는 둥 친한 친구 중 '재일(조선인)'이 있다는 둥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자신은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둥 자신은 '재일일본인'이라는 둥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다도 좀 있으면 '도대체 언제까지 사회하면 되는 걸까요?'라는 흔한 질문을 슬쩍 던져본다. 그리고 이쪽이 무언가 말하려 하기 전에 지금은 '국제화' 시대이기 때문에 서로 '미래지향적'으로 '공생'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며 공소(空疎 빌공 트일소)한 키워드를 늘어놓는다. 

'뮐러와 같은 일본인'이라고 했지만 재일조선인 중에소 '뮐러'는 있다. 이 '뮐러'들은 한목소리로 '공생'을 위해서는 서로 '원한(ressentiment)'을 버릴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혼화한 어조로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들은 미리 자신들을 '원한'등과 같은 비생산적인 감정을 초월한 이성의 높은 위치에 두고, 어느새 이쪽의 위치에 저급한, 보복 감정을 지닌, 비이성적인 사람들이라는 레테르를 붙인다. 나는 조선인이 일본인에게 '원한'을 품는 이유를 얼마든지 댈 수 있지만, 그와 반대의 경우는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서로'라는 말이 어쩐지 수상쩍기만 하다. 이와 같이 그들은 실제 '증오'의 원인이 된 역사적, 사회적 현실을 개선하려고 하기는 커녕 가해자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들고, 상처를 치유할 수 없는 피해자에게 은근한 어조로 과거를 잊어버리라고 강요한다.  206-208


'죄'는 법적 개념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과 관련된다." 그와 다르게 정치 공동체의 성원이라면 누구나 짊어져야 할, 정치적 의미에서의 '집단적 책임'이 있다. 바꿔 말하면 '독일인'이라는 집단 중에서 '죄'를 지은 개인은 있지만 '독일인' 전체에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독일인 전체의 죄'라는 생각은 오히려 죄를 지은 개인을 은닉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독일 국민이라면 누구나 독일이라는 정치 공동체의 행위에 '집단적 책임'이 있는 것이다.  212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의 권말에 젊은 독자와의 문답이 실려 있다. 거기에서 "독일인은 몰랐나요?"라는 물음에 레비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대다수 독일인은 알지 못했다. 그것은 알고 싶지 않았고 무지의 상태로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행사하는 테러리즘은 분명 저항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무기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독일 국민이 전혀 저항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 일반 독일 시민은 무지한 채 안주하고, 그 위에 껍질을 씌웠다. 나찌즘에 동의한 것에 대한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무지를 이용한 것이다. 눈, 귀, 입을 모두 닫고 눈앞에서 무엇이 일어나든지 상관하진 않았다. 때문에 자신은 공범이 아니라는 환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220-221


그는 '독일인'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된 지 20년 이상이 지나 유령처럼 나타난 뮐러, 정직하고 무기력한 평균적인 독일인인 그는 '과거의 극복'을 말하는 한편, I.G. 파르벤을 변호하고 유대인이 학살된 사실은 "몰랐다"고 한다. 부나에 있으 ㄹ때조차 유대인인 레비에게 "왜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느냐?"고 물은 인물이었다. 말살의 위협에 노출된 강제수용소의 수인이 매일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측의 사람에게 자신이 왜 불안한지 설명하기를 요구받은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그런 부조리를 전혀 "모른다"고 한다. 그런 인물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227


쁘리모 레비는 생존자들이 두 부류로 나눠진다고 말한다. 첫번째는 잊고자 애쓰면서도 강제수용소의 "악몽에 시달리며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사람들" 혹은 "제대로 잊고 모든 것에서 벗어나 무(無)에서부터 다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한편 두번재 부류의 생존자들은 "기억해내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며, "그들은 잊으려고 하지 않은 채, 오히려 사회가 망각해가는 것을 경계한다." 물론 레비는 자신을 두번째 부류로 규정했다. 그는 "판사보다 증인이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이 보고 견뎌 이겨낸 것을 증거로 가지고 돌아오는" 일이 자신의 '의무'였다고 거듭 밝히고 있다.(<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  242


수용소에서 쁘리모 레비를 매일 밤 고통스럽게 한 악몽은 현실이 되었다. '이편'으로 살아 돌아와보니 사람들은 오디쎄우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옥은 이미 종교적인 신념이나 몽상이 아니라, 집과 돌 그리고 나무처럼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누구 하나 그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파리아로서의 유대인>)  244-245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는 '인간'이라는 이념이 보편적으로 공유된 단순 명쾌한 세계가 아니다. 단절되고 금이간 세계다. 여기에서 '인간'이라는 말은 단절을 숨기는 미사여구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단절 속에서 온몸으로 떨쳐 일어난 증인들이 '인간'의 재건을 위해서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이편'의 사람들은 보신이나 자기애 때문에, 천박함과 나약함 때문에, 상상력의 빈곤함과 공감대의 결여 때문에 증인들의 모습을 바로 보지 않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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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 

조각난 삶의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엮어 하나의 확고한 형태를 갖춘 의미와 책임을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프랭클 박사가 독창적으로 고안해낸 '실존적 분석' 즉 '로고테라피'의 목표이자 과제이다.  15-16


오늘날 유럽은 프로이트의 정신의학에서 크게 방향을 전환해 실존적 분석을 폭넓게 받아들이는 추세로 나아가고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거부하지 않고, 그의 업적 위에 기꺼이 그 자신의 것을 쌓아올리는 것. 자기의 것과는 다른 형태의 실존적 치료법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논쟁하지 않고, 그들과 유대를 맺으며 공동보조를 해나가는 것. 이런 관대함이 프랭클 이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7






1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



감시하는 병사들보다도, 나치 대원들보다도 카포들이 수감자들에게 더 가혹하고 악질적인 겨우가 많았다. 물론 카포들은 수감자 중에서 뽑았다. ...

일단 카포가 되면 그들은 금세 나치대원이나 감시병들을 닮아갔다.  26


일정한 수의 수감자를 다른 수용소로 이동시킨다고 공식적인 발표가 났을 경우를 살펴보자. 그러면 사람들은 그 최종 목적지가 당연히 가스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감자 중에 병에 걸렸거나 쇠약해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뽑아 가스실과 화장터가 있는 큰 수용소로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 해당자를 가리는 과정이 곧 개별적인 수감자들 사이에, 혹은 수감자 집단 사이에 벌어지는 무차별적인 싸움의 도화선이 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희생자 명단에서 자기 자신의 이름이나 친구의 이름을 지우는 것이다. 한 사람을 구하려면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27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잔혹한 폭력과 도둑질은 물론 심지어는 친구까지도 팔아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29


나는 수용소에서 마지막 몇 주를 제외하고는 정신의학자 노릇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의사 노릇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힌다.  31


나는 119104번 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철로에서 땅을 파고 선로를 부설하는 일로 보냈다.  32


수용소 생활에 대한 수감자의 심리적 반응이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번째 단계는 수용소에 들어온 직후이며, 두번째 단계는 틀에 박힌 수용소의 일과에 적응했을 무렵, 그리고 세번째 단계는 석방되어 자유를 얻은 후이다.

첫번째 단계의 특징적인 징후는 충격이다. 어떤 경우에는 수용소로 들어가기도 전에 경험하기도 한다.  33


정신의학에 보면 소위 

집행유예 망상(delusion of reprieve)'이라는 것이 있다.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처형 직전에 집행유예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갖는 것이다.  36


수용소에서 자살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객관적으로 계산을 하고, 모든 기회를 감안해 보아도 보통 수감자들이 살아나갈 가능성이 아주 희박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보장도 없이 자기가 수많은 선별의 관문을 무사히 통과해 살아남는 극소수의 사람 중에서 하나가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아우슈비츠의 수감자들은 첫번째 단계에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가스실 조차도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오히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만들었다.  48-49


자기 '구역'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규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몇 주 먼저 이곳에 들어온 동료 한 사람이 몰래 내 막사로 숨어 들어왔다. .. 

그는 익살스러우면서도 저돌적인 말투로 우리에게 몇 가지 정보를 알려 주었다... 

"가능하면 매일 같이 면도를 하게. 유리 조각으로 면도를 해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마지막 남은 빵을 포기해야 하더라도 말일세. 그러면 더 젊어 보일 거야. 뺨을 문지르는 것도 혈색이 좋아 보이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 자네들이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어. 일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

그러니까 늘 면도를 하고 똑바로 서서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그러면 더 이상 가스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49-50


레싱이 이런 말을 햇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일이 있는가 하면 더 이상 잃을 이성이 없게 만드는 일도 있다."  51


두번째 단계는 상대적인 무감각의 단계로 정신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감정과는 별도로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그 고통을 약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무엇보다 먼저 찾아오는 것은 집과 가족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이다. 이 그리움은 너무나 간절해서 그리워하는데 자기 자신을 완전히 소진시키고 말 정도가 된다.

그런 다음에는 혐오감이 찾아온다. 자기를 둘러싸고 잇는 모든 것에 대한 혐오감, 심지어 그저 생긴 모양에서도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52


처음에 사람들은 다른 그룹의 사람들이 줄지어 행진하며 단체기합을 받는 것을 보면 고개를 돌렸다. .. 며칠 혹은 몇 주가 지나면 사정이 달라진다. ..

감정이 무뎌져서 그것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단계가 된다.  53-54


두번째 단계의 주된 징후인 무감각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이 불확실하면 오로지 한 가지 과제에 모든 노력과 감정이 모아지게 된다. 즉 내 자신의 생명과 친구의 생명을 보존하겟다는 과제이다.  64


수용소 생활이 후반부에 이르렀을 때에는 하루에 한 번밖에 빵이 배급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그 빵을 어떻게 먹을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끝도 없이 논쟁을 벌였다. 생각은 두 편으로 나뉘었다. 그 중 한 편은 그 자리에서 빵을 다 먹어치우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비록 잠깐 동안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극심한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도둑맞거나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에 다른 한 편은 배급받은 빵을 나누어서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편 중에서 나는 결국 후자에 들기로 했다.  69


어느 날 아침에는 평소 꽤 용감하고 의연한 것으로 알려진 한 친구가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우는 것을 보았다. 신발이 그가 신기에는 너무 작아 할 수 없이 맨발로 눈 위를 걸어 작업장까지 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료가 슬퍼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나는 다른 신나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호주머니에서 작은 빵 조각을 꺼내서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70


우리는 어둠 속에서 큰 돌멩이를 넘고 커다란 웅덩이에 빠지면서 수용소 밖으로 난 길을 따라 비틀거리며 걸었다. 호송하던 감시병들은 계속 고함을 지르면서 총의 개머리판으로 우리를 위협했다. 다리가 아픈 사람은 옆 사람의 팔에 의지해서 걸었다. 한 마디도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얼음같이 차가운 바람 때문에 누구든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높이 세운 옷깃으로 입을 감싸고 있던 옆의 남자가 갑자기 이렇게 속삭였다. 

"만약 마누라들이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꼴을 본다면 어떨까요? 제발이지 마누라들이 수용소에 잘 있으면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을 몰랐으면 좋겠소."

그 말을 듣자 아내 생각이 났다. 빙판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수없이 서로를 부축하고,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면서 몇 마일을 비틀거리며 걷는 동안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지금 아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76-77


그때 한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자기 시를 통해서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과 믿음이 설파하는 숭고한 비밀의 의미를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 말할 나위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게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천사들은 한없는 영광 속에서 영원한 묵상에 잠겨 있나니.'  77-78


나는 아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랐다.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수용소에는 오는 편지도 가는 편지도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내 사랑의 굳건함, 내 생각, 사랑하는 사람의 영상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사실 그때 아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는 일에 내 자신을 바쳤을 것이다. 나와 그녀가 나누는 정신적 대화 역시 아주 생생하고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나를 그대 가슴에 새겨 주오. 사랑은 죽음만큼이나 강한 것이라고."  79-80


외부 사람들 중에는 강제수용소에 예술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뿐만 아니라 유머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 더 놀랄 것이다. 비록 그 흔적이 아주 희미하고, 몇 초 혹은 몇 분 동안만 지속되지만,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였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 준다.  86-87


유머 감각을 키우고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기 위한 시도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면서 터득한 하나의 요령이다. 고통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수용소에서도 이런 삶의 기술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88


이 말은 곧 아주 사소한 일이 큰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 예로 아우슈비츠에서 다카우에 있는 한 수용소로 갈 때 체험했던 일을 얘기해 보겠다...

우리가 비교적 작은 규모(수용인원이 2,500명밖에 안 되었다)의 이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나이 많은 살마으로부터 드은 첫번째 주요 뉴스는 그곳에는 살인용 오븐도, 화장터도, 가스실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곧 몰골이 '회교도'로 변한 사람도 곧바로 가스실로 갈 염려가 없다는 것을 뜻했다. 아우슈비츠로 돌려 보내기 위한 '환자수송차'가 올 때까지는 적어도 안전하다는 것이다. 이 기쁜 소식이 우리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아우슈비츠에 있던 우리 고참 관리인이 소망하던 것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아우슈비츠와는 달리 '굴뚝'이 없는 그 수용소로 가능한한 빨리 뛰어 들어갔다. 그 후 몇 시간 동안을 아주 힘들게 보내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는 웃으면서 연신 농담을 주고받았다.

도착 후 인원점검을 하면서 한 사람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없어진 사람을 찾을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차가운 바람과 비를 맞으며 밖에 서 있어야 했다. 그는 막사 안에서 발견되었다. 피곤에 지친 나머지 그만 잠에 곯아떨어진 것이다. 그 다음 점호는 기합 행렬로 바뀌었다. 오랜 여행의 긴장도 풀지 못한채 우리들은 밤을 꼬박 새우고 이튿날 아침 늦게까지 꽁꽁 언 채로 비를 맞으며 밖에 서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행복했다. 이 수용소에는 굴뚝이 없고, 또 아우슈비츠는 여기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88-90


우리는 아주 작은 은총에도 고마워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를 잡는 시간을 준다는 것도 우리에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물론 이를 잡는 일 자체는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를 잡기 위해서는 천장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린 추운 막사에서 옷을 벗고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잡는 도중에 공습경보가 울리지 않아 전등불이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고마워했다. 만약 이 시간에 이를 제대로 잡지못하면 하룻 밤의 절반을 꼬박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용소 생활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은 일종의 소극적인 행복 - 쇼펜하우어가 '시련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했던 - 이었고,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상대적인 행복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거의 없었다.  91-92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항상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끄는 강요된 공동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잠시 동안만이라도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때가 이싿.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혼자 있게 되기를, 혼자서 사색에 잠길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들은 자기만의 개인적인 공간, 혼자있는 고독을 열망했다. 그런데 소위 말하는 '요양소'로 옮긴 후, 나는 한번에 5분 정도 혼자 고독을 즐기는 흔치않은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98


수용소에서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지 이것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오로지 번호 뿐이다. 오로지 죄수번호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그 사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글자 그대로 번호가 되었다.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번호'의 생명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그 번호의 이면에 있는 것, 즉 그의 삶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못 된다.  100-101


수용소에 살아남은 사람들, 여전히 일할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해야만 했다. 그들은 절대로 감상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이 전적으로 감시병들의 기분 - 운명의 노리개라고나 할까? - 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이 그들 자신을 환경에 강요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으로 만들었다.

아우슈비츠에 있을 때, 나는 내 자신을 위한 하나의 규칙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좋은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자 그 후 내 동료들도 모두 이 규칙에 따랐다. 나는 대체로 모든 종류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을 하는 편이다. 하지만 딱 꼬집어서 질문을 받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만약 누군가 내 나이를 물으면 나는 나이를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내 직업을 물었을 때는 다른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그냥 '의사'라고만 대답했다.  102


환자 호송계획이 세워졌다...

그날 저녁 10시 15분 전에 평소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주치의가 다가오더니 넌지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직실에 얘기를 잘 해두었소. 당신을 리스트에서 빼도록 했으니 10시까지 당직실로 가보시오."

나는 그에게 이것이 내 길이 아니라고, 나는 운명이 정해 놓은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나는 내 친구들 곁에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의 눈이 연민의 빛을 띠었다. 마치 내 운명을 알고 있기나 하는 것처럼, 그는 말없이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것은 삶을 위한 악수가 아니라, 삶과 작별하는 악수였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막사로 돌아왔다. 막사에는 친한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 정말로 그 사람들과 함께 가기를 원하나?"

그가 슬픈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네. 나는 갈 거야."

그러자 그의 눈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런 다음 할 일이 있었다. 유언을 하는 것이었다.

"잘 듣게, 오토. 만약 내가 집에 있는 아내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리고 자네가 아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녀에게 이렇게 전해 주게. 내가 매일같이 매시간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잘 기억하게. 두번째로 내가 어느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 세번째로 내가 그녀와함께 했던 그 짧은 결혼생활이 이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는 여기서 겪었던 그 모든 일보다 나에게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전해 주게."

오토. 자네는 지금 어디에 있나? 아직 살아있나? 우리가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낸 후 자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자네 아내를 다시 만났나? 그리고 기억하나? 자네가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는 동안에도 내가 자네에게 내 유언을 한마디 한마디 외우에 했던 것을.  104-105


이튿날 아침, 나는 호송자들과 함께 그것을 떠났다.

가스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요양소로 가는 것이었다.  105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나는 그 전의 수용소에 있던 한 친구를 만났다. 그는 자기가 수용소의 보안원으로 시체 더미에서 없어진 인육 조각을 어떻게 찾아냈는지를 나에게 말해 주었다. 요리 중인 냄비 안에서 찾아내 압수했다는것이다. 기아에 시달린 나머지 드디어 수용소 안에서 인육을 먹는 사태까지 발생했던 모양이다. 내가 때맞추어 그 수용소를 잘 떠난 셈이다.  106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통해 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을 입증해 주는 예(이런 이야기는 종종 영웅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즉 무감각 증세를 극복하고, 불안감을 제압한 경우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수용소에도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120


수면부족과 식량부족 그리고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리 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는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121-122


수감자 중에서 아주 적은 사람만이 충만한 내면의 자유를 지키고, 시련을 견딤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얻었다.  123


수감자들을 심리학적으로 관찰해 보면 내면세계가 간직하고 있는 도덕적, 정신적 자아가 무너지도록 내버려둔 사람이 결국 수용소의 타락한 권력의 희생자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6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린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130


평범하고 의욕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스마르크의 이 말을 들려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는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 놓았더 ㄴ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그런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들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 수도 있었다.  131


내가 실제로 경험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날 나는 거의 눈물을 흘릴 정도의 극심한 통증(찢어진 신발 때문에 발에 심한 종기가 생겼다)을 겪으며 긴 행렬에 끼어서 수용소에서 작업장까지 몇 킬로미터를 절뚝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날은 추웠고,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우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나는 우리의 누추한 생활과 연관된 끊임없이 자질구레한 문제들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무엇을 먹게 될까? 만약 특별배급으로 소시지가 나온다면 그것을 빵과 바꾸어 먹을까? 2주일 전에 상으로 받았던 담배 한 개비를 수프 한 그릇과 바꾸어 먹을까? 한쪽 신발끈이 끊어졌는데 끈을 대신할 철사를 어디서 구하지? 시간 안에 작업장에 가서 평소에 내가 일하던 작업반에 낄 수 있을까? 그렇지 않고 다른 작업반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고약한 감독을 만나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 매일 긴 행렬에 끼어서 작업장에 가지 않고 대신 수용소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 주는 카포는 없을까? 그 카포와 잘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다가 매일같이 시시각각 그런 하찮은 일만 생각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 나는 생각을 다른 주제로 돌리기로 했다. 갑자기 나는 불이 환희 켜진 따뜻하고 쾌적한 강의실의 강단에 서 있었다. 내 앞에는 청중들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내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강제수용소에서의 심리상태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보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방법을 통해 나는 어느 정도 내가 처한 상황과 순간의 고통을 이긴느 데 성공했고, 그것을 마치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관찰할 수 있었다. 나 자신과 문제는 내가 주도하는 흥미진진한 정신과학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스피노자가 그의 <윤리학>에서 무엇이라고 했던가?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미래 - 그 자신의 미래 - 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132-133


수용소주치의로부터 들었던 말에 의하면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의 사망률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더 ㄴ추세로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주치의는 이 기간 동안 사망률이 증가한 원인은 보다 가혹해진 노동조건이나 식량 사정의 악화, 기후의 변화, 새로운 전염병 때무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희망적인 뉴스가 들리지 않자 용기를 잃었으며, 절망감이 그들을 덮쳤다. 이것이 그들의 저항력에 위험한 영향을 끼쳤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기에 이른 것이다.  136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137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과제들, 즉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138


각각의 개인을 구별하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독자성과 유일성은 인간에 대한 사랑처럼 창조적인 의미를 비니고 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사라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142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145


"그대의 경험, 이 세상 어떤 권력자도 빼앗지 못하리!"

경험뿐이 아니다. 우리가 그 동안 했던 모든 일, 우리가 했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생각들,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고통, 이 모든 것들은 비록 과거로 흘러갔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간직해 왔다는 것도 하나의 존재방식일 수 있다.  146


우리가 처한 가혹한 현실에 과감하게 직면하자고 했다.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되고, 우리들의 가망 없는 싸움이 삶의 존엄성과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누군가가 - 친구나 아내, 산 사람, 혹은 죽은 사람, 혹은 하나님 - 각각 다른 시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했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그 사람은 우리가 자기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의연하고 비굴하지 않게 시련을 이겨내고, 어떤 태도로 죽어야 하는지를 알기를 바란다고.  147


심리적 반응의 세번째 단계, 즉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에 대해 설명할 차례가 되었다.  148


지단과 집단 사이의 경계선이 서로 겹쳐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천사, 저 사람들은 악마라고 부르면서 문제를 단순화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151


강제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인간의 영혼을 파헤치고, 그 영혼의 깊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인간성에서도 선과 악의 혼합이라는 인간 본연의 특성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모든 인간을 관통하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단층은 아주 심오한 곳까지 이르러 인간성긔 바닥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강제수용소라는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152


극도로 긴장했던 며칠이 지난 후 수용소 정문 위에 흰 깃발이 펄럭였던 그날 아침의 경험담 중에서 하나를 소개하리고 하겠다.

우리가 미친 듯이 기뻐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들은 피곤한 발걸음으로 몸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수용소 정문으로 걸어갔다. 조금씩 사방을 둘러보고, 의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서로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과감하게 수용소 밖으로 몇 발자국 걸음을 옮겨보았다. 우리에게 고함을 치며 명령하는 사람이 없었다.

세상세! 감시병들이 우리에게 담배를 권하고 있지 않은가! 처음에 우리는 그들을 거의 못 알아보았다. 왜냐하면 재빠르게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천히 수용소 밖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우리는 절뚝거리며 걸었다. 자유인의 눈으로 그 전까지 미처 보지 못했던 수용소 주위를 한번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유. 우리는 스스로 몇 번이나 이 단어를 되뇌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지난 몇 년간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면서 얼마나 자주 이 단어를 입에 올렸는지 이제는 그것이 의미를 잃고 말았다. 현실이 우리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자유가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다.

드디어 꽃이 만발한 초원에 이르게 되었다. 꽃이 만발해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알았지만 거기에서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불꽃 튀는 것 같은 기쁨을 느낀 것은 꼬리에 여러 가지 색깔의 깃털을 단 수탉을 보았을 때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저녁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막사에 모였을 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은밀하게 물었다..

"말해 보게. 자네 오늘 기뻤나?"

우리 모두 똑같은 느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 사람이 부끄러운 듯이 대답했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아니야."

우리는 글자 그대로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앞으로 천천히 그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이렇게 갇혀 있다가 석방된 죄수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을 정신의학적인 용어로 '이인증(depersonalization, 離人症 떠날이 사람인 병증세증)'이라고 할 수 있다.  154


육체는 마음보다는 거부감이 적은 법이다. 육체는 처음부터 새롭게 얻은 이 자유를 잘 활용했다. 드디어 우리 육체가 게걸스럽게 먹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몇 시간 동안, 며칠 동안, 그리고 심지어는 한밤중에도 우리는 먹었다. 한 사람이 먹어치우는 음식의 양이 심히 놀라웠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이웃에 있는 친절한 농부의 초대를 받아 그 집에 갔는데, 거기에도 그는 먹고 또 먹고 그리고 커피까지 마셨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혀를 풀리게 했다. 그는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몇 년 동안 그의 마음을 짓누르던 중압감이 마침내 사라진 것이다. 그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알았을 것이다. 그에게 말이 필요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욕구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는 것을.  155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며칠 동안 견뎌야 했던 극도의 정신적 긴장(예를 들어 게슈타포의 혹독한 심문 같은 것)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이 아무런 장애 없이 순탄했던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에게는 더 이상 정신적 치료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잘못된 생각이다. 그렇게 심한 정신적 압박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받았던 사람에게는 자유를 얻은 후에도 그전과 똑같은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특히 그런 정신적 억압상태에서 갑자기 벗어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위험은 정신위생학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잠수병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물 속의 잠함에서 일하던 잠수부가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올 때 가장 위험한 것처럼 엄청난 정신적 억압을 받다가 갑자기 풀려난 사람은 도덕적, 정신적 건강에 손상을 입을 위험이 크다.

이런 심리적 단계에서 원색적인 기질을 지닌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야만성의 영향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156-157


어느 날 나는 다른 친구와 함께 들을 가로질러 수용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앞에 농작물이 자라고 있는 밭이 나타났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친구가 내 팔을 잡고 나를 밭으로 끌고 들어갔다. 나는 더듬거리면서 어린 농작물을 짓밟지 말자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러자 그는 짜증을 냈다. 화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그런 말 하지 말게. 그만큼 빼앗아쓰면 충분한 거 아니야? 내 아내와 아이는 가스실에서 죽었어. 그것으로 더 이상 할 말 없는 거 아니야? 그런데도 자네는 내가 귀리 몇 포기 밟는다고 뭐라고 하다니!"

이런 사람들은 아주 천천히 평범한 진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지도해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엑 옳지 못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한 권리는 어느 누구에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158


정신적 억압에서 갑자기 풀려나게 되었을 때, 도덕적 결함이 보이는 현상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성격에 손상을 입힐 수 있는 두 가지 기본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을 때 겪에 되는 비통함과 환멸이다.

비통함은 그가 살던 마을로 돌아왔을 때 그가 부딪치게 되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보면 그저 어깨를 으쓱하거나 상투적인 인사치레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 그는 점점 비통해지면서 자기가 과연 무엇 때문에 그 모든 고통을 겪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거의 모든 곳에서 거의 똑같은 말을 듣는다. "우리는 그것을 몰랐어요." 그리고 "우리도 똑같이 고통을 받았어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저 사람들은 정말로 나에게 할 말이 없는 것일까?"

환멸을 경험하는 것은 이와는 또 다른 문제다. 여기서 그가 환멸을 느끼는 것은 사람들(그들의 상투성과 감정결핍이 너무 혐오스러워서 마침내 구멍으로 기어들어간 것처럼 사람들을 더 이상 보려고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게 된다.)이 아니라 그토록 잔인해 보이는 운명 그 자체이다. 몇 년 동안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시련과 고난의절대적인 한계까지 가보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직도 시련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시련에는 끝이 없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시련을, 더 혹독하게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59-160





2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



로고테라피는 환자의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말하자면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말이다.(로고테라피는 이렇게 의미에 중점을 둔 정신치료법이다) 동시에 로고테라피는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데 아주 커다란 역할을 하는 악순환 형성과 송환기재를 약화시킨다. 그렇게 해서 정신질환 환자에게 전형적인 자기집중증상이 발생하고 심화되는 것을 막는다. ...

로고스(Logos)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로고테라피' 혹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빈 제3정신의학파'로 불리는 이 이론은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나가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167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의지도 좌절을 당할 수 있다. 이것을 로고테라피에서는 '실존적 좌절'이라고 한다. 여기서 '실존적'이라는 단어는 다음의 세 가지 의미로 쓰일 수 있다. 1) 존재 그 자체, 즉 인간 특유의 존재방식 2) 존재의 의미 그리고 3) 각 개인의 삶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찾아내려는 노력, 즉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를 말한다.

실존적 좌절 역시 정신질환을 초래할 수 있다. 정신의학에서는 그 동안 이것을 심인성 노이로제(psyshogenic neurosis)라고 했지만 로고테라피에서는 이것을 누제닉 노이로제(noogenic neurrosis)라고 부른다.  170-171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이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한다.  171


갈등을 겪는다고 해서 다 신경질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의 갈등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고통도 역시 모두 다 병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그 고통이 실존적 좌절 때문에 생긴 경우에는 그것을 신경질환 증세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성취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이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거나 아니면 그런 것이 과연 있을까 하고 의심하거나 간에 이런 현상이 병 때문에 생긴다거나 혹은 이것 때문에 결국은 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나는 단호하게 부정한다. 실존적 좌절 그 자체는 병적인 것도 병원적인 것도 아니다.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것에 대한 절망도 실존적 고민이지 정신질황은 아니다.  172-173


로고테라피는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 주는 것을 그 과제로 삼고 있다. 그렇게 하려면 환자의 실존 안에 숨겨져 있는 '로소스'를 스스로 깨닫도록 해야 하는데, 이것은 상당한 분석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런 점에서 로고테라피는 정신분서고가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로고테라피가 환자에게 어떤 것을 다시 깨우쳐 주는 과정에서는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본능적 요소에만 국한하지 않고 그의 실존적 현실, 즉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의 의지 뿐만 아니라 앞으로 성취되어야 할 실존의 잠재적 의미까지도 고려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분석이든, 심지어 치료과정엣 정신론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분석일지라도 환자가 자기 존재의 깊숙한 곳에서 정말로 소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인간을 그저 충동과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쾌락을 얻거나 서로 갈등하고 있는 이드와 자아, 초자아를 정충시키거나 혹은 사회와 환경에 그저 순응하고 적응하는 데에만 관시을 갖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주된 관심사하 어떤 의미를 성취한느 데 있다고 보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로고테라피는 정신분석과 구별된다.  173-174





3 비극 속에서의 낙관



명심해야 한다. 낙관적인 생각이 명령이나 지시를 받아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220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221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듯이 사람이 삶의 의미에 도달하는 데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일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두번째는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의미는 일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로 들어가는 세번째 길이다.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무력한 희생양도 그 자신을 뛰어넘고, 그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인간은 개인적인 비극을 승리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230-231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 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233


한번은 한 미국 여자로부터 이런 비난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신은 어떻게 아직도 책을 독일로 쓸 수가 있지요? 그건 아돌프 히틀러가 쓰던 말 아닙니까?"

이 말에 응수하면서 나는 그녀에게 자기 집 부엌에 칼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녀가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당황스럽고 놀랍다는 제스처를 쓰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살인자들이 칼을 가지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찌르고 죽였는데 어떻게 아직도 칼을 사용할 수가 있지요?"

그 말을 듣고 그녀는 더 이상 내가 독일어로 책을 쓰는 것을 비난하지 않았다.  236


어떤 상황에서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으로 의미 있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 개인의 가치는 언제나 그 사람과 함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람이 과거에 실현시킨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그 사람이 쓸모 있느냐 없느냐 하는 조건에 기반을 둔 것을 절대 아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이런 유용성은 그 사람이 사회에 이로운 존재인가 아닌가 하는 기능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정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사람이 이루어낸 성과를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행복한 사람, 특히 젊은 사람을 숭배하는 것이 요즘 사회의 특징이다.

실제로 이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가치는 무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과, 인간의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차이를 애매모호한 것으로 만든다.

만약 이런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의 가치가 오로지 현재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히틀러의 계획에 따라 자행된 안락사, 즉 나이가 들어서, 불치의 병에 걸려서,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해서, 혹은 고통스러운 어떤 장애 때문에 사회적으로 더 이상 쓸모없게 된 사람들을 죽였던 '자비로운' 행위에 대해 변명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오로지 개인적인 모순의 탓으로 돌려 버린다.  239


"Sed omnia praclara tam difficilia quamrara sunt(그러나 모든 위대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실현시키는 것도 힘들다)" 스피노자 <윤리학>의 마지막 문장이다.  242


이제 경계심을 갖자. 두 가지 측면에서의 경계심을.

아우슈비츠 이후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히로시마 이후로 우리는 무엇이 위험한지를 알게 되었다.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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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리영희 선생은 말한다. 진실, 진리, 끝없는 성찰, 그리고 인식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신념과 지조.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용기. 지식인은 이런 것들과 더불어 산다.  47-48



우리 모두는 갖가지 편견과 고정관념을 지니고 산다.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모든 종류의 통념이 논리적, 경험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일일이 시험하고 검토할 수 없는 일이기에, 많은 경우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관념과 사고방식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는 맬서스와 얼마나 다른가. 내가 옳다고 믿는 것, 내 신념을 받치고 있는 수많은 통념들 가운데 그릇된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없을 것인가? ..

<인구론>과 맬서스는 금이 간 거울이다. 내 생각도 그릇된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일그러져 있지 않은지 경계하면서, 거기에 나를 비추어 본다. 생각은 때로 감옥이 될 수 있다!  90-91



배불리 먹고 편안하게 지내기만 하면서 배우지 않으면 백성은 짐승에 가까워지므로...  126



마르크스는 사회를 "대립하는 계급의 통일"로 보았다. 그의 세계에는 언제나 투쟁이 진행 중이며 혁명이 준비되고 있다. 그는 부르주아 독재를 타도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혁명이 필연적이며 그것이 역사의 진보라고 믿었다.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마르크스가 혁명의 소용돌이에 몸소 뛰어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베블런의 세계는 유한계급과 생산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그의 세계는 매우 안정되어 있다. 여기서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 인습과 제도의 진화가 있을 뿐이다. 보수성은 지배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보편적 특성이다. 유한계급의 규범과 생활양식은 모든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명예로운 표준으로 통용된다. 하층계급은 유한계급을 타도하기보다 그 일원이 되기를 원하며 그들을 흉내 내려고 애쓴다. 사회와 인간을 이렇게 보면 세상의 소란에 신경 쓰지 않고 이방인으로 살다 가는 쪽이 자연스럽다.  238-239


폭력이 '무지'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무지'란 "처지를 바꾸어놓고 생각해보는 능력의 전적인 결여"를 의미한다.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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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then, at an uncertain hour, 

That agony returns,

And till my ghastly tale is told

This heart within me burns.

그때 이후, 불확실한 시간에

고통은 되돌아온다.

그리고 나의 섬뜩한 이야기가 말해질 때까지

내 안의 심장은 불타리라.

                     -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늙은 뱃사람의 노래> 582~585행




서문 


라거에 대한 진실을 확산시키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독일 민족이 저지른 가장 중대한 집단 범죄의 하나이며 히틀러의 테러로 인해 독일 민족이 다다른 비겁함을 가장 명백하게 증명해주는 것이다. 관습 속으로 들어와버린 비겁함, 너무나 깊어서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자식에게도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비겁함이다. 이 비겁함이 없었더라면 그토록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고 유럽과 세상은 오늘날 달라져 있을 것이다.  14


라거의 악행을 알고 있던 수많은 잠재적 '민간인' 증인들 역시 의도적인 무지와 두려움으로 침묵했다.  15


생존자들 가운데는 포로생활중에 어떤 특권을 누린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여러 해가 지난 오늘날, 라거의 역사는 거의 전적으로 나처럼 바닥까지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쓰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거나, 자신의 관찰 능력이 고통과 몰이해로 마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특권층' 증인들은 확실히 더 나은 관측소를 이용했다. 적어도 더 높은 곳에 있었고, 따라서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특권에 의해 크게든 작게든 그 또한 왜곡된 것이었다.  17


나치의 라거로부터 해방된 지 이미 40년 이상이 흘렀다. 이 상당한 간극은 사건을 명확하게 밝혀줄 모순적인 결과들을 가져왔는데, 아래에 열거해보겠다. 

첫째는 바람직하고 정상적인 정제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

세월의 흐름은 역사적으로 부정적인 또 다른 결과를 낳고 있다. 원고와 피고 측 증인 대다수가 이미 사라지고 없으며, 아직 남아 있는, 그리고(자신들의 가책이나 저마다의 상처를 극복하고) 여전히 증언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흐릿하고 정형화된 기억을 갖게 된다. 이는 종종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책을 읽거나 타인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하면서 나중에 알게 된 정보로부터 영향받은 기억들이다.  19


또 다른 정형화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에게, 우리 생활자들에게, 아니 더 정확하게는 우리 가운데 생환자로서 자신의 조건을 가장 단순하고 가장 덜 비판적인 방식으로 살아가기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

라거 내부는 복잡하게 얽히고 계층화된 소우주였다. 내가 앞으로 말하게 될 "회색지대"는 어느 정도는, 또 어쩌면 좋은 의도에서 당국에 협조한 포로들의 층으로 결코 얇지 않았다. ..

처음 받은 위협, 첫 모욕, 첫 구타는 SS로부터 온 게 아니라 다른 포로들, '동료'들, 갓 입소한 사람들이 방금 갈아입은 것과 똑같은 줄무늬 유니폼 차림의 그 불가사의한 인물들로부터 왔던 것이다.  20-21




이 책은 아직까지도 분명치 않아 보이는 라거 현상의 몇 가지 양상들을 밝히는 데 이바지하고자 한다. 보다 야심찬 목적도 있다. 좀 더 급박한 질문, 우리의 이야기를 읽을 기회가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노예 제도나 결투 의식이 그랬던 것처럼, 수용소 세계는 어디까지 사멸했으며 더 이상 되돌아오지 않을 것인가, 어디까지 되돌아왔거나 되돌아오고 있는가, 위협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적어도 이러한 위협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들 각자는 무엇을 할 수있는가?  21





1 상처의 기억


인간의 기억은 놀라운 도구인 동시에 속이기 쉬운 도구이다. ..

세월이 흐르면서 지워지고 종종 변형되며 심지어 상관없는 일들을 껴 넣으면서 자라나기도 한다. 

동일한 사건의 두 목격자가 사건을 같은 방식으로, 또 같은 말로 묘사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23


오스트리아 철학자 장 아메리(한스 마이어)는 벨기에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게슈타포에게 고문당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글은 우리를 경악에 빠뜨린다.

'고문당한 사람은 고문에 시달리는 채로 남는다... 고문당한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 적응할 수 없을 것이다.'  25


사건들이 과거 속으로 멀어질수록 편리한 진실의 구축은 점점 더 커지고 더 완벽해진다.  28


내가 보기에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데 익숙한 자는 결국 사적인 자리에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한테도 거짓말을 하게 된다. 자신을 평안하게 살도록 해주는 편리한 진실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선의와 악의를 뚜렷이 구분하는 데는 큰 비용이 요구된다. 자기 자신에 대해 온전히 솔직할 것을 요구하며 지적이고 도덕적인 노력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29


우리가 자라난 체제는 자율적인 결정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신 결정을 내렸고 다른 식으로는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정하는 능력을 거세당했기 때문이다. ..

근대적인 전체주의 국가가 개인에게 행사할 ㅅ 있는 압력은 무시무시하다. 그 무기는 본질적으로 세 가지이다. 교육, 지도, 대중문화로 위장한 프로파간다 또는 직접적인 프로파간다. 정보의 다원주의에 반하는 봉쇄, 그리고 테러가 바로 그것이다.  30 


저지른 죄에 대한 기억을 변형하는 극단적 경우로는 기억의 제거가 있다. ..

기억의 존재를 부인함으로써 그는 배설물이나 기생충을 몰아내듯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로운 기억을 몰아냈다.  32


히틀러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진실로의 길을 봉쇄했다. 모든 도박꾼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미신적인 기만들로 짜인 무대를 자기 주변에 구축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이 모든 독일인에게 요구했던 바로 그 광신적인 믿음을 결국 스스로도 믿게 되었다. 곧 히틀러의 몰락은 인류의 구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진실이 조작될 때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34


방어의 목적에서, 현실은 기억 속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일어나는 행위 자체에서도 왜곡될 수 있다.  35





2 회색지대 


보통 '이해하다'의 의미는 '단순화시키다'라는 말과 일치한다. 심오한 단순화 과정이 없다면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정의할 수 없고 끝도 없이 얽히고 설킨 실타래와 같을 것이다. 이는 곧 우리의 방향설정 능력과 행동결정 능력을 위협할 것이다. 요컨대,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인식 가능한 것들을 도식적으로 축소시킬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역사도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건들이 정렬되는 도식이 언제나 분명하게 규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39


민중사는 물론 학교에서 배우는 정식화된 역사도 중간색과 복합성을 피하는 이러한 이분법적 경향에 영향을 받는다. 즉 인간 세계의 넘쳐흐느는 사건들을 갈등으로, 갈등은 대결로, 우리와 그들, 아테네인과 스파르타인, 로마인과 카르타고인 등과 같은 대결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바로 이것이 축구, 야구, 권투와 같은 두 팀 또는 두 명으로 이루어진 스펙터클한 스포츠가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이유이다. 뚜렷이 구분되고 확인 가능하며 경기가 끝나면 승자와 패자로 갈리기 때문이다. ..

단순화의 욕구는 정당화되지만, 단순화가 언제나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40


굶어 죽거나 굶주림에 비롯된 질병으로 죽는 것이 포로들의 일반적인 운명이었다. 오로지 추가적인 음식 숩취를 해야만 이 운명을 피할 수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크든 작든 특권을 손에 넣어야 했다...

수용소의 현실에 맞닥뜨린 최초의 충격은 예견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었던 누군가의 공격이었느넫, 관리자 포로라는 새롭고 이상한 적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44-45


죄인은 길들여지거나 죽을 때까지 체계적이고 분노에 찬 구타를 당한다.  45


관리자 포로라는 혼성 계층은 수용소의 골격을 형성하며, 동시에 극도의 불안감을 조성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주인과 하인의 두 영역을 나누는 동시에 연결하는, 경계가 불분명한 회색지대이다.  46


'프로텍치아'('특권'을 가리키는 이디시어 방언이자 폴란드어 protekcja)와 협력의 회색지대는 다양한 뿌리로부터 탄생한다. 첫째, 권력층의 그 폭이 좁으면 좁을수록 그만큼 외부의 조력자가 더 필요해진다. ..

두 번째는 억압이 거셀수록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기꺼이 권력에 협력하려는 의향이 더욱더 확산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향은 미묘한 차이들과 다양한 동기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칭송 일색의 성인전 같은 수사학적인 어떤 정형화와는 대조적이다. 공포, 이데올로기적 유혹, 승자를 곧이곧대로 모방하는 것, 어떤 권력이건 간에 -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시간과 장소에 제한된 권력이라 할지라도 - 그것을 향한 근시안적 욕망, 비겁, 명령이나 규율 자체를 교묘하게 피하려는 철저한 계산에 이르기까지 그 동기는 다양하다.  46-48


"선동가들, 탄압자들, 어떤 식으로든 타인을 해치는 모든 자들은 유죄다. 그들이 저지른 악행 때문만이 아니라 상처받은 사람들의 영혼을 타락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한 만초니(Alessandro Manzoni)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억압당하는 환경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49


카포(우두머리, 태장)는 누가되었나?

첫째, 가능성이 주어진 사람들, 즉 라거의 사령관이나 그의 대리인들이(흔히는 뛰어난 심리학자들이었는데) 협력자로서의 잠재력을 알아본 사람들이다.

둘째, 감옥에서 차출해온 일반 범죄자들이다. 그들에게 간수일은 수감생활의 훌륭한 대안을 제공했다. 

셋째, 5~10년의 고통의 세월에 쇠약해진, 아니면 어쨌든 도덕적으로 약화된 정치범들이다. 나중에는 유대인들도 카포가 되었는데, 자신들에게 주어진 보잘것없고 미미한 권력에서 '최종 해결책'을 피할 유일한 방법으로 찾게 된 사람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권력을 원했다. 특히 사디스트들이 권력을 원했다. 물론 숫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커다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특권의 지위란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과 굴욕을 가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좌절한 사람들도 권력을 원했다. 그리고 이 역시 라거라는 소우주 속에 전체주의 사회라는 대우주를 재현하는 특징이다. 당국에 경의를 기꺼이 표하는 자에게 권력이 자비롭게 주어지며, 이런 식으로 그들은 달리는 도달할 수 없는 사회적 진급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억압받는 사람들 중의 많은 이들이 권력을 원했다. 그들은 억압하는 자들로부터 전염되었고 무의식적으로 억압하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53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살인자가 도사리고 있는지 나는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나는 내가 무고한 희생자였고 살인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안다. 나는 살인자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독일에서만이 아니라는 것도, 은퇴했거나 여전히 현역으로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54


협력의 극단적 예는 아우슈비츠와 기타 절멸 수용소의 존더코만도스(Sonderkommandos)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는 특권을 말하기가 머뭇거려진다. 존더코만더스에 속한 사람은 특권층이었지만 부러움을 받는 자리였기 때문에 특권층이었던 것을 물론 아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특혜란 몇 달 동안 충분히 먹을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SS(Schutz-Staffel의 약자, 나치스 친위대. 1929년 히틀러의 경호대로 창설되었다. 그후 독일군 내에서도 나치스 이데올로기르 광신적으로 체현한 특수군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SS의 임무는 유대인을 포함한 나치스의 적들을 탐색하고 체포하는 것, 강제수용소의 관리와 방어 등이었다. - <이것이 인간인가> 13페이지에서)는 "특수부대"라는 적당히 애매한 이름으로 포로들의 한 그룹을 지정한 뒤 화장터의 운영을 맡겼다.  56


한 명은 이렇게 단언했다. "이 일을 하게 되면 첫날 미쳐 버리든가 아니면 익숙해지든가 둘 중 하나다." 반면에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스스로 죽거나 죽임을 당하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고 싶었다. 복수하기 위해 그리고 증언하기 위해. 여러분은 우리가 괴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당신들과 같은 사람들이다. 단지 훨씬 더 불행할 뿐"이라고 했다.  59-60


특수부대를 기획하고 조직한 것은 국가사회주의의 가장 악마적인 범죄였다.

이러한 기관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정확히 말하자면 희생자들에게 죄의 짐을 떠넘기려고 시도한 것이다.  60


특수부대의 베테랑들을 대하는 SS의 태도는 달랐다. 그들은 이 베테랑들을 확장된 동료로 인식했다. 곧, 이제는 자신들만큼이나 비인간적인 존재, 어쩔 수 없이 부과된 공범성이라는 추악한 굴레에 묶인 한 배에 탄 동료로서 말이다.  62


우리의 판단 욕구와 판단력은 특수부대 앞에서 흔들린다. 

왜 그들은 그 임무를 받아들였는가? 왜 그들은 반항하지 않았는가? 왜 그들은 차라리 죽음을 원하지 않았는가?  66


우리가 알고 있는 저 비참한 학살 실행자들은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다. 곧 즉각적인 죽음보다도 다만 몇 주라도 삶을(도대체 무슨 삶인가!) 연장하기를 바랐던 사람들이다. ..

나는 누구든지 감히 심판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추론적 실험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67


베펠노트슈탄트(Befehlnotstand), 즉 '명령에 따른 강제 상태'  68


억압에 의해 치명적으로 유발된 인간의 모호성이라는 근본 주제에 관한 굉장히 웅변적인 이야기.  69


나치의 게토는 중세의 반종교개혁적인 게토 체제를 나치의 근대적인 잔혹성으로 인해 더욱 악화된 모습으로 복구시킨 형태였다.  70


실패로부터 도덕적 힘을 끌어내는 사람들은 소수인 것이다. 정치적 강압은 모호함과 타협의 불분명한 영역을 만들어내며 이것은 거의 필연적이다.

모든 절대 왕좌의 발치에는.. 인간들이 한 줌의 작은 권력을 움켜쥐기 위해 몰려든다. 이것은 되풀이되는 광경이다. ..

처음에는 맹목적이었다가 나중에는 범죄자가 되었고, 죽어가는 사악한 한 줌의 권력을 나눠가지려고 맹렬히 싸웠다. 권력은 마약과도 같다. 권력에 대한 욕망도, 마약에 대한 욕구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러나 우연하게라도 한 번 시작한 뒤에는 중독되고 필요한 투여량은 점점 더 많아진다. 또한 현실에 대한 부정과 전지전능을 갈구하는 유아적 꿈으로 돌아가는 일도 나타난다. ..

즉, 중독은 너무나 강해서 개인의 모든 의지의 불씨를 꺼뜨릴 정도로 보이는 환경에서조차 만연한다는 사실 말이다.  77-78


국가사회주의와 같이, 무시무시한 부패 권력을 행사하는 지옥같은 체제로부터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체제는 자신의 희생자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자신과 비슷하게 만든다. 크고 작은 공범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매우 단단한 도덕적 뼈대가 필요하다...

만약 불가피하게 몰릴 때, 동시에 유혹이 무리 마음을 부추길 때 우리들 각자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78


권력과 위신에 현혹되어 우리의 본질적인 나약함을 잊어버린다. 우리 모두 게토 안에 있다는 것을, 게토 주위엔 담벼락이 둘려 있고 그 밖에는 죽음의 주인들이 있으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자발적이든 아니든 간에 권력과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  80





3 수치


"기쁨은 괴로움의 자식"이 아니다. 괴로움이 괴로움의 자식이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단지 운좋은 소수나 굉장히 단순한 영혼들에게만 잠시 환희를 가져왔을 뿐, 거의 언제나 불안의 양상과 겹쳐져 있었다.  82


독일인들은 모르던 수치심, 타인들이 저지른 잘못 앞에서 의로운 자가 느끼는 수치심이었다.  84


우리 각자가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자기 방식대로 라거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원해서도 무기력해서도 아니었고 죄가 있어서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수개월 또는 수년을 동물적인 수준에서 살았다. 우리의 나날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배고픔과 피로와 추위, 두려움으로 채워져 있었고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기 위한 성찰의 자리는 없어졌다. 우리는 더러움과 사샐활의 결핍과 자기 존재의 축소를 정상적인 삶이었을 때보다는 훨씬 덜 괴로워하면서 견뎠다. 우리의 도덕적 잣대가 변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우리 모두는 도둑질을 했다. 부엌에서 , 공장에서, 운동장에서, 요컨대 '다른 살마들에게서', 상대편에게서 훔쳤지만, 그래도 도둑질은 도둘질이었다. 소수의 몇몇 사람들은 심지어 자기 동료의 빵까지 훔치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의 나라와 문화뿐만 아니라 가족과 과거, 우리가 그렸던 미래 또한 잊어버렸다. 왜냐하면 우리는 동물들처럼 현재의 순간에만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

해방은 어쨌든, 반성과 우울함이라는 해일과 함께 찾아온 위기의 순간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소비에트 수용소들을 포함해서 라거를 연구하는 많은 역사학자들은, 포로생활 도중에 자살이 일어난 경우는 드물다는 사실에 동일하게 주목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시도되었다. 나는 세 가지 해석을 제시하는데, 이 해석들이 상호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첫째, 자살은 동물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라는 점이다. 즉, 심사숙고한 행위이고, 자연스럽지도 않고 충동적이지도 않은 하나의 선택이다. ..

둘째, "생각할 다른 일이 있었다"는 점이다. 하루 일과는 빡빡햇다. 허기를 채우고, 어떤 식으로든 피로와 추위를 피하고 구타를 피할 생각을 해야 했다. 늘 코앞에 닥쳐온 죽음 때문에 죽음에 대한 생각에 집중할 시간이 없었다. ..

셋째, 대부분의 경우, 자살은 어떤 형벌도 덜어주지 못한 죄책감에서 생겨난다는 점이다. 이처럼 포로생활의 힘겨움은 형벌로 인식되었고 죄책감은(형벌이 있다면 죄가 있다는 것이므로) 해방 후에 다시 나타나기 위해 제2선으로 밀려나 있었다.  87-89


동료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고 빼앗고 구타한 데 대해 자신의 유죄라고 느낀 생존자들은 소수이다. 그런 일을 한 사람들은(카포들, 그러나 그들만이 아니다) 그 기억을 지운다. 그에 반해 거의 모든 사람들은 도움을 베풀지 않은 데 대해 자신이 유죄라고 느낀다. 더 약하고 더 서툴고 더 나이가 많거나 아니면 너무 어린 옆자리의 동료는 도움을 청함으로써, 또는 단순히 '있다'는 사실(이미 그 자체로 간청하고 있다)만으로 집요하게 괴롭힌다. ...

보통 그런 요구를 받는 사람도 자기 입장에서는 도움이 필요한 처지에 있었다.  91


뒤늦은 수치심은 합리화될 수 있을까, 없을까?  95


자신을 찬찬히 검토하고, 자신의 기억들을 모두 되살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또 그 기억들 중 무엇도 가면을 쓰고 있거나 위장하고 있지 않기를 바라면서 스스로를 점검해본다. 

명백한 범법행위를 발견하지 못한다. 누구의 자리를 빼앗은 적도 없고, 누구를 구타한 적도 없으며(그럴 힘이라도 있었겠는가?), 어떤 임무를 받아들인 적도 없고(맡겨지지도 않았지만..), 그 누구의 빵도 훔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각자가 자기 형제의 카인이라는 것, 우리 모두가(나는 이번에는 매우 광대한, 아니 보편적인 의미에서 "우리"라고 한다) 자기 옆 사람의 자리를 빼앗고 그 사람 대신에 산다는 것은 하나의 상상, 아니 의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상이 우리의 정신을 갉아먹는 것이다. 좀벌레처럼 우리 머릿속 깊숙이 자리 잡고 들어앉아 갉아먹으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낸다.  95-96


라거의 '구조된 자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을 타곻난 사람들, 메시지의 전달자들이 아니었다. 내가 본 것, 내가 겪은 것은 그와는 정반대임을 증명해 주었다. 오히려 최악의 사람들, 이기주의자들, 폭력자들, 무감각한 자들, '회색지대'의 협력자들, 스파이들이 살아남았다. ..

내 눈앞에서, 남들의 눈앞에서 끝없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느꼈다. 최악의 사람들, 즉 적자(適者 맞을적 사람자)들이 생존했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크라코비아의 시계상이자 신실한 유대인이었던 하임은 죽었다. 그는 외국인인 나에게 언어의 어려움에도 나를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사악함으로 가득한 첫 며칠의 고비에서 수용소의 기본적인 생존 법칙들을 설명해주려고 애썼다. 과묵한 헝가리 농부 사보도 죽었다. 키가 거의 2미터여서 누구보다도 배가 고팠지만, 기력이 있는 한 더 쇠약한 동료들이 밀고 당기는 것을 도와주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주위로 용기와 믿음을 발산하던 소르본느 대학의 교수 로베르도 죽었다. 5개 국어를 할 줄 알앗던 그는 자신의 놀라운 기억 속에 모든 것을 기록하려 애썼고 만약 살아남았다면 내가 답할 수 없는 여러 의문들에 답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리보르노 항구의 부두 하역부였던 바루크도 죽었다. 첫날 바로 죽었느넫, 처음 날아온 주먹에 주먹으로 답했기 때문이다. 연합한 세 명의 카포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들과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용기에도 불구하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용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97-98


반복 하지만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 ..

우리 생존자들은 근소함을 넘어서 이례적인 소수이고, 권력 남용이나 수완이나 행운 덕분에 바닥을 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바닥을 친 사람들, 고르곤(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끔찍한 모습의 세 자매 괴물. 스텐노, 에우리알레, 메두사. 그 중 메두사는 고르곤을 대표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는데, 그 얼굴을 본 사람은 돌이 되었다고 한다)을 본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고, 아니면 벙어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무슬림들", 가라앉은 자들, 완전하 증인들이고, 자신들의 증언이 일반적인 의미를 지녔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이다.  98-99


끊임없이 잠을 설치게 하는 이름 모를 불편함 때문에 모두가 시달렸다. 그것을 "노이로제"라고 정의하는 것은 너무 환원주의적이고 우스꽝스럽다.  100


좀 더 광범위한 수치심이 있다. 곧 세상에 대한 수치심이다...

타인과 자신의 죄 앞에서 그 죄를 보지 않도록, 그래서 느낄 수 없도록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히틀러 치하의 12년간, 보지 않는 것이 모르는 것이며 모르는 것이 공모와 묵인에 대한 자신들의 부담을 덜어줄 것이라는 환상 속에서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그렇게 행동했다. 자발적인 무지의 장막. ..

우리 가운데 의로운 사람들은(더도 덜도 아니고, 여느 인간 집단에 있는 딱 그만큼 존재했다) 자신들이 아닌 타인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그리고 자신들이 거기에 연루됐다는 생각 때문에 가책과 수치심이라는 고통을 느꼈다.  101





4 소통하기


의사소통이 금지된 나라에서는, 또 그런 시대에는 다른 모든 자유도 곧 시들게 된다. 토론은 영양실조로 죽게 되며, 타인의 견해에 대한 무지가 만연하고 강요된 견해들이 맹위를 떨치게 된다. 토론의 부재 속에, 20년간 수확을 망쳤던 리센코(Trofim Lysenko, 러시아의 농업생물학자, 가을에 심는 밀을 인위적으로 저온에 저장하여 봄에 심는다는 춘화처리법을 실시했다. 이후 농업생산 분야에서의 부진과 과도한 정치적 행동 때문에 비판받았다.)가 소련에 설파한 말도 안 되는 유전학은 이에 대한 유명한 예이다(리센코의 반대자들은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비관용은 검열의 경향을 띠고, 검열은 타인의 논지에 대한 무지, 즉 비관용 자체를 증폭시킨다. 이것은 깨기 어려운 단단한 악순환의 고리이다.  124





5 쓸데없는 폭력


2주간 지속될 수도 있는 여행(살로니카에서 이송되는 유대인의 경우)을 위해 독일 당국은 식량도, 물도, 나무 바닥을 덮을 깔개나 짚도, 생리현상을 해결할 용기도,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마련해주지 않았다. 또한 지역 당국이나 집결수용소의 책임자들(있을 경우)에게 이송 상황을 알리고 어떤 식으로든 병참 물품을 조달하는 데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통지를 하는 것에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바로 이러한 체계적인 태만은 결국 쓸데없는 잔인함으로, 고통 자체가 목적인 고통의 고의적 유발로 변모했다.  132


우리의 역설적인 행운(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행운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망설여진다) 덕분에, 우리의 화물칸에는 몇 개월 안 된 아기들을 데리고 탄 두 명의 젊은 엄마가 있었고 그녀들 중 한 명이 요강을 가지고 있었다. 여행한 지 이틀이 지나고 나서 우리는 판자벽에 박힌 못들을 발견했다. 못 두 개를 빼내 한쪽 구석에 다시 박고 줄을 쳐서 담요를 걸고 임시변통으로 몸을 가릴 곳을 만들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 짐승이 아니라는, 우리가 저항하려고 노력하는 한 우리는 짐승이 안 될 것이라는.  134


거대한 공동화장실, 의무적으로 정해진 짧은 시간,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익숙해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고 적지 않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서서, 참을성 없이, 때로는 애원하며, 또 때로는 윽박지르면서 10초 마다 "하스트 두 게마흐트(Hast du gemacht, 아직 멀었어?)라고 물어온다. 그럼에도 몇 주 안에 불편함은 줄어들더니 결국 사라졌고, 그 자리에 익숙함이(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고!) 찾아왔다. 이는 인간에서 동물로의 변화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자비로운 방식이었다.  135


배설에 대한 강압과 비슷한 것이 바로 나체에 대한 강압이다.  136


공개적이고 집단적인 나체화... 쓸데없는 과도함 때문에 모욕적인 하나의 폭력이었다. ..

의복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차라리 스스로를 땅바닥에 기어다니는 지렁이처럼 벌거벗고 느리고 비천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이 언제라도 짓이겨질 수 있다고 느낀다.

포로생활 첫 며칠 동안 숟가락이 없다는 사실은 이와 똑같은 무력감과 박탈감을 불러일으켰다... 숟가락 없이는 매일 죽을 개처럼 핥지 않고는 먹을 수가 없었다.  137


라거의 SS들은 교묘한 악마라기보다는 둔감한 야수들이었다. 그들은 폭력적이 되도록 교육받았다. 

그들의 얼굴에서, 그들의 몸짓과 언어에서 폭력은 새어나왔다. '적'에게 굴욕감을 주고 고통을 겪에 만드는 것이 날마다 하는 그들의 업무였다. 이런 것들에 대해 그들은 이성적 사고를 하지도 않았고, 다른 목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146-147


하루에 수톤 씩 화장터에서 나온 인간의 재는 대개 치아나 척추 뼈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것은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습지대를 메우기 위해, 목조 건물의 벽 사이에 넣을 단열재로, 심지어 인산비료로 말이다. 특히 수용소 옆에 위치한 SS 군의 마을길을 포장하는데 자갈 대신에 사용되었다. 나는 이것이 순전한 냉담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 재의 출처 때문에, 곧 그것이 짓밟아야 할 재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151


트레블링카의 전(前 앞전) 사령관 프란츠 슈탕글과 지타 세레니의 긴 인터뷰(<그 암흑 속에서>, 아델피 출판사, 밀라노, 1975)에서 발췌한 다음과 같은 두 문장 속에 축약되어 있는 것 같다.

"그들을 어차피 다 죽일 것이었는데... 굴욕감을 주고 잔혹행위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나요?" 뒤셀도르프의 감옥에서 종신형에 처해 있던 슈탕글에게 작가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실질적으로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사람들을 길들이기 위해서, 그들에게 자신들이 하고 있었던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다른 말로 하자면 희생자는 죽기 전에 인간 이하로 비하되어야 했다. 죽이는 자가 자신의 죄의 무게를 덜 느끼게끔 말이다. 이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설명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쓸데없는 폭력의 유일한 유용성이라고 하늘에 외치고 있다.  151-152





6 아우슈비츠의 지식인


장 아메리(한스 마이어)는 .. 이탈리아인들은 거의 희귀할 정도로 소수였기 때문에, 게다가 내가 라거에서 마지막 두 달간 기본적으로 내 일을, 화학자로서의 일을 수행했고 이는 훨씬 더 희귀한 경우였기 때문에 그는 나를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157


가스실 선발이나 공중 폭격 같은 결정적 순간들에서뿐만 아니라, 고된 일상 속에서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더 잘 살았다. 아메리와 나, 우리 둘 다 그것을 알아차렸다. 종교적 믿음이든 정치적 믿음이든 그들의 믿음이 무엇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가톨릭 사제나 개신교 목사, 다양한 정통성을 가진 랍비들, 전투적 시오니스트, 순진한 마르크스주의자 또는 진화된 마르크스주의자, 여호와의 증인들은 자신들의 믿음 속에서 구원의 힘을 얻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우주는 우리의 우주보다 더 방대하고, 시간과 공간 속에 더 확장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열쇠와 기댈 버팀목이 있었다. 자신의 희생이 의미를 가질 수 있게 해줄 천년왕국의 내일이 있었으며, 천상이나 지상의 어딘가에 정의와 연민이 승리르 거둔(또는, 멀지만 확실한 미래에 승리를 거둘) 장소가 기다리고 있었다. .. 그들의 굶주림은 우리의 굶주림과 달랐다. 그것은 신의 형벌이나 속죄, 봉헌물, 또는 자본주의의 부패의 결과였다. 그들 마음속의 고통이나 그들 주위의 고통은 해석 가능한 것이었고, 따라서 절망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들은 연민의 눈길로, 때로는 경멸의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일부는 힘든 노동의 막간에 우리를 전도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어떻게 믿음이 없는 사람이 '시의적절한' 믿음을 단지 시의적절하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거나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177-178


반쯤 죽은 사람들의 섬들, 아마도 교양 잇는 사람들이었거나 믿음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섬들, 그런 그들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은 의미 없고 잔인한 일이다.  179


아메리가 지적하기를, 지식인은(나는 여기서 '지식인'을 젊은 지식인이라고 명시하고 싶다. 아메리와 내가 체포되어 포로생활을 했던 그 시절처럼) 자신의 독서로부터 아무런 냄새도 없고 아름답게 장식된 문학적인 죽음의 이미지를 끌어냈다고 했다. ..

아우슈비츠에서의 죽음은 사소하고 관료적이며 일상적인 일이었다. 언급되지도 않았고 "눈물로 위로를 받지도" 못했다. 죽음 앞에서,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죽음 앞에서 문화와 비문화의 경계는 사라졌다. 아메리는 죽게 될 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 생각했다고 말한다.

'가스실의 독이 그 효과를 발휘하는 데 필요한 시간에 대해 토론을 벌이곤 했다. 페놀 주사에 의한 죽음의 고통스러움에 대해 짐작해보곤 했다. 뒤통수를 한 대 맞고 죽는 것을 바라야 할까, 아니면 의무실에서 기력이 소진해서 죽는 것을 바라야 할까?' ..

아마도 내가 좀 더 젊고 그보다 더 무지했기 때문에, 아니면 좀 덜 괴로웠거나 죽음을 덜 의식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거의 한 번도 죽음에 바칠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다. 나는 다른 수많은 일들로 쉴 틈이 없었다. 빵 조각을 찾는다거나, 무지막지한 노동을 피한다거나, 신발을 덧댄다거나, 빗자루를 훔친다거나, 내 주위의 얼굴들과 징후들을 해석하는 일 따위로 말이다. 삶의 목표는 죽음에 저항하는 최선의 방어이며, 이는 라거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179-181





7 고정관념들


포로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리고 훨씬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가혹한 경험을 한 모든 사람들은) 중간지대가 거의 없이 두 가지 범주로 뚜렷이 나뉜다 곧 침묵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와 같은 태도를 취하는 데에는 양쪽 다 분명한 이유가 있다. 단순화해서 내가 "수치"라고 부른 저 심적 불편함을 더 깊이 느끼는 사람들, 자기 자신과 평화를 이루지 못한 사람들, 또는 상처라 아직도 화끈거리는 사람들은 침묵한다. 반면 다른 쪽 사람들은 서로 다른 충동에 이끌려 말을 한다(대개는 말을 많이 한다). 그들이 말을 하는 것은 다양한 의식 수준에서 삶의 중심이, 또 좋건 나쁘건 자신들의 전(全 온전할전) 존재에 중요한 획을 그은 사건이 자신들의 포로생활(이미 먼 옛날 일이 되었다 할지라도) 속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자신들이 세계적이고 세기적인 규모의 재판에 증인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며, (이디시어 속담에 있듯이) "지나간 고난을 이야기하는 것은 멋진 일"이기 때문이다.  182


왜냐고 묻는 어떤 질문들에 대답하기가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역사가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니며 단지 증인들이다. 어쨌든 인간 만사의 역사가 엄격한 논리적 도식을 따른다고 말할 수 없으며, 모든 변화가 한 가지 이유에서 나왔다고도 할 수 없다. 단순화는 학교의 교과서에만 적합한 것이다. 이유들은 많을 수 있고, 서로 혼란스럽게 얽혀 있거나 알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184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나라들에서,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자유를 어떤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안 되는 하나의 선(善 착할선)으로 생각한다. 자유 없이는 살 수 없고, 자유는 당연하고 명백한 권리이며, 게다가 건강이나 숨 쉬는 공기처럼 공짜로 갖는 것이라고, 이와 같은 선천적인 권리가 거부되는 시대와 장소는 그들에게 멀고 낯설며 이상해 보인다. 따라서 그들에게 감금이라는 개념은 도망이나 저항과 결부되어 있다. 포로의 조건은 부당하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요컨대 탈출이나 반란으로 치유되어야 할 질병처럼 말이다.  184-185


감금과 탈출의 이러한 도식적 이미지는 강제수용소의 상황과는 유사한 점이 거의 없었다. 강제수용소라는 용어를 보다 넓은 의미로 이해해보면(즉, 이름이 만천하에 알려져 있는 절멸 수용소들 외에도, 군인 포로들과 다양한 피억류자들이 있던 수많은 수용소들을 포함하여), 독일에는 노예 상태에 있던 수백만의 외국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노동의 피로에 지쳐 있었고, 멸시를 받았으며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또 제대로 입지도 보살핌을 받지도 못한 채 조국과의 접촉으로부터도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그들은 '전형적인 포로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강직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의기소침하고 쇠약해진 사람들이었다.  186


그들은 짐을 실어 나르는 가축들보다도 더 가치가 없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느꼈다. 그들은 빡빡 깎은 머리에 당장에 알아볼 수 있는 꾀죄죄한 옷을 걸쳤고, 빠르고 조용한 걸음을 방해하는 나막신을 신고 있었다.  187


노예 한 명의, 특히 "생물학적 가치가 열등한" 종에 속하는 노예의 도주는 말 그대로 패배한 자의 승리와 신화의 붕괴를 타나내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더 현실적으로 말해서, 각 포로는 세상이 알아서는 안 될 것들을 본 사람이기 때무넹 이는 객관적 피해이기도 했다.  188-189


탈주자를 산 채로든 죽은 채로든 찾을 때까지, 막사의 동료들이나 때로는 수용소의 모든 포로들은 시간 제한도 없이 며칠이고, 눈이 오든 비가 오든 뙤약볕이 내리쬐든 점호 광장에 서 있어야 했다.  189


'그곳'에서의 실제 상황과 개략적으로 책이나 영화, 신화들이 키워낸 현재의 상상력에 의해 표현되는 상황 사이의 간극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러한 상상력은 치명적인 단순화와 고정관념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이러한 현상이 가까운 과거에 대한 인식이나 역사적 비극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는 훨씬 더 일반적이고, 타인의 경험을 인지하는 데 잇어 우리가 가진 어려움이나 무능력의 일부를 보여준다. 타인의 경험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또 질적으로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이러한 어려움이나 무능력은 더 심해진다. 우리는 타인의 경험을 '주변'의 경험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아우슈비츠에서의 굶주림이 한 끼를 건너뛴 사람의 배고픔인 것처럼, 또는 트레블링카에서의 탈출이 로마 감옥에서의 탈출과 비슷한 것처럼 말이다. 연구되는 사건들로부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넓어지는 이러한 간극을 메우는 것은 역사가의 과제일 것이다.  192


불편한 진실은 그 길이 험한 법이다. 

감금과 탈출의 결합과 마찬가지로 억압과 반란의 결합 역시 하나의 고정관념이다. 이것이 전혀 유효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언제나 유효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반란의 역사, 그러니까 '소수의 권력자'에 대항하는 '억압받는 다수'의 아래로부터의 봉기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고, 또 그만큼 다양하고 비극적이다. 승리를 거둔 몇몇 소수의 반란이 있었고 많은 반란들은 패배로 끝났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다른 반란들은 역사에 자취를 남기지도 못하고 일찌감치 진압되었다. ..

어떤 경우든 간에 가장 억압받는 개인들은 운동의 선봉에는 결코 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오히려 보통은 대담하고 편협하지 않으며, 개인적으로는 안정적이고 평온하며, 심지어 특권을 누릴 수도 있는 삶을 살 가능성이 있음에도 관대함으로(또는 야망으로) 투쟁에 투신하는 지도자들이 혁명을 이끈다.  194-195


세기말이자 천년의 끝자락을 지나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확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  202





8 독일인들의 편지


나는 특정한 독자를 생각하고 글을 쓴 것은 아니었다. 내게 그 들들은 내 안에 들어 있었던, 나를 압도하고 있던 무엇이었고 나는 그것들을 밖으로 쫓아내야 했다. 그것들을 말해야 했다. 아니 지붕 위에서 소리소리 질러야 했다. 그러나 지붕 위에서 소리 지르는 사람은 모두에게 외치는 것이자, 아무에세도 외치는 것이 아니다. 사막에서 외치는 아우성이다. 그 계약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이 변했고, 내게는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나는 그 책을 물론 아탈리아어로, 이탈리아 사람들을 위해서, 자식들을 위해서, 알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알고 싶어 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위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발적으로든 아니든 인간성에 대한 침해에 동의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썼다. 그러나 이 책의 진정한 수신자는, 마치 무기처럼 이 책이 겨냥하고 있던 사람들은 바로 그들, 독일인들이었다.  205


내 임무는 이해하는 것,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소수의 중범죄자들이 아니라 그들, 그 국민들, 내가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 자신들 중에서 SS대원으로 차출된 바로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 가운데 믿었던 사람들과 믿지 않으면서도 침묵했던 사람들을, 우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작은 용기, 우리에게 빵 한 조각을 던져주거나 인간적인 말 한 마디를 나지막이 중얼거릴 작은 용기도 없었던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206


독자들은 두 부류로 명확히 구분된다. 첫 번째는 기분 좋은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불쾌한 부류이다. 중간에 속하는 경우는 드물다. 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기쁨을 주고 가르침을 준다. 그들은 책을 주의 깊게, 흔히는 한 번 이상 읽은 사람들로, 때로는 작가 자신보다도 더 책을 잘 이해하고 사랑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책을 통해 자신들이 풍요로워졌다고 밝히며, 자신들의 견해와 때로는 비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들은 작가에게 작품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며 흔히는 작가에게 답장 쓸 필요가 없다고 대놓고 말한다.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지루함을 주고 시간을 낭비하게 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과시하며 잘난척한다. 흔히는 서랍 안에 자신의 습작들을 넣어두고 있으며, 담쟁이덩굴이 나무둥치 위로 기어오르듯이 책과 작가 위로 기어올려는 의도를 슬며시 드러낸다. 또는 허세를 부리느라, 아니면 내기를 해서, 아니면 작가의 사인을 받기 위해서 편지를 쓰는 어린이나 청소년도 있다.  222


그녀의 첫 편지에 나는 내 책이 독일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내 책을 읽을 필요가 덜 한 독일인들 사이에서였다고 썼다. 죄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죄 없는 사람들이 뉘우치는 편지들을 내게 보내왔던 것이다. 죄인들은 당연히 침묵했다.  237





결론


모든 곳에서 일어날 수 있다.  247


그들은 평균적 인간이었고, 평균적 지능을 가졌으며, 평균적으로 악한 사람들이었다.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면 그들은 괴물이 아니었으며 우리와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된 교육을 받았다. ..

모두가 크든 작든 책임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독일 국민들 대다수는 정신적 나태함 때문에, 근시안적 타산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국민적 자부심 때문에 애초에 히틀러 대장의 "아름다운 말들"을 받아들였다. 히틀러에게 행운이 따른 동안에 그를 추종했고 아무런 가책도 없이 그를 지지했다.

바로 그런 독일 국민들 대다수의 책임도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다.  251-252





부록 - 프리모 레비와 <라 스탐파>지의 인터뷰 : 이해하는 것이 용서하는 것은 아니다.


왜 프리모 레비는 문학적 경험을 포함하여 다른 많은 경험을 한 뒤에 다시 이 주제를 선택한 것일까? 진실에 대한 필요 때문이라고 그는 주저 없이 대답한다.  254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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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모르는 자가 바다를 얕본다. 바다를 얕보는 자, 바다에 데기 마련이었다.  31


은주는 해질녘 놀이터에 익숙한 아이였다. 아이들과 그들의 활기가 빠져나간 자리에도 익숙했다. 어두운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등에 업은 막냇동생을 재우는 일이 갓 여덟 살이 된 그녀의 일상이었으므로, 다섯 살배기 여동생 영주는 가로등 밑에서 혼자 소꿉놀이를 하고, 두 살 배기 기주는 별사탕 같은 손으로 은주의 머리칼을 마구 잡아당기곤 했다. 은주는 그 따분하고 쓸쓸한 시간을 간절한 기도로 보냈다. 시간이 마구 점프하기를, 하루빨리 어른이 되기를, 그리하여 이 지겨운 집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폐차버스를 개조해서 탁자 몇 개 놓고 막걸리를 파는 왕대폿집도 '집'이라 부를 수 있다면.

'지니네 왕대포'의 여주인 지니는 젓가락장단의 고수였다. '목포의 눈물'을 이난영보다 더 간드러지게 부르는 여자였다. 불망 한복저로기 깃이 다 들릴 만큼 젖가슴이 큰 여자였다. 가슴골로 손이 들어오든, 돈이 들어오든 사내의 것이라면 사양하지 않는 여자였다. 코를 찡긋거리며 잇몸까지 드러내고 웃어주는 여자였다. 엉덩이를 뒤로 빼고 오리처럼 둥싯둥싯 걷는 여자였다.  18


제 몸 간수도 제대로 못하는 어린 딸에게 제각각 씨가 다른 여동생과 갓난쟁이 남동생을 떠안긴 여자였다. 은주를 낳은 여자였다.

은주는 막내인 기주가 잠들어야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은주는 지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아마도 도덕시간이었을 것이다. 선생은 '자유의지'라는 단어를 칠판에 적더니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는 자기 삶을 지킬 수 있다."

그날 은주는 자신을 꼼꼼하게 평가해봤다. 가진 밑천이 무언지, 잘할 수 있거나, 그럭저럭 해낼 수 있는 일이 뭔지, 무엇을 갖춰야 하고 갖출수 있는지. 손바닥만 한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녀는 자신이 배우가 될 재목이 아님을 인정했다. 귀여운 구석이야 있었지만 지나가는 남자를 기절시킬 만큼 예쁘지는 않았다. 수재가 아니라는 건 성적표를 통해 확인했다. 예술이나 운동에도 재능이 없다는 걸, 수업을 통해 깨우쳤다. 그녀는 음치였고, 몸치였고, 일기 한 줄 그럴싸하게 쓰지 못했다. 그러나 왜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지니처럼 살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타고난 근성이 있었다.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는 자존심이 있었다. 그 정도면 자신의 미래를 믿을 근거로 충분한 것 같았다.은주는 계획을 세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열여덟 살까지 지니네 왕대폿집에 붙어 있을 것. 지니의 빨강 브래지어를 훔쳐다 팔아서라도 고교졸업장을 손에 쥘 것. 취직에 필요한 자격증을 모두 따둘 것. 취직하면 바로 튈 것. 3년 안에 전세방을 얻을 것. 폐차버스를 돌아보지 말 것.  131-132



그의 손은 은주의 뺨으로 날았다. 은주는 이삿짐 사이로 날아가 떨어졌다. ...

그는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자신이 뭔 짓을 저지를지 몰라 두려웠다. 무작정 걷다가 도착한 곳이 동네 소줏집이었다. 술이 들어가자 한 남자가 기억났다. 술만 마시면 살림을 뒤엎고 처자식을 죽사발로 만들던 구척 거한. 월남에서 돌아온 용감한 '최상상'. ..

은주 표현에 의하면, 통제가 안 되는 그의 왼손은 힘이 남아돌아 어쩔 줄 모르는 '오랑우탄'이었다. 최상사가 그의 몸에 남긴 유전자였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최상사의 아들임을 상기시키는 저주의 징표였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최상사처럼 살지 않았다. 다르게 살아왔다고 믿었다.  142-143



아이들 말로, 세령은 '전교생의 왕따'였다. 5년째 다니는 미술학원에서도 외톨이기는 마찬가지였다. ..

그의 세계에 속한 세령과 세상에 속한 세령의 모습이 딴판으로 다르다는 것. 그가 아는 세령은 제 엄마 축소판이었다. 고집 세고, 영악하며, 당돌한 계집애. 세상 속 세령은 지나치게 내성적인 아이였다.  147



난 말이지, 그때나 지금이나 참는 게 제일 싫은 사람이야. 내 맘대로 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고.  289-290



한 집안의 가장 노릇하는 미래가 제 앞에 있었어요. 그것이 삶이긴 하겠지만 과연 나 자신일까, 싶었던 거죠. 나와 내 인생은 일치해야 하는 거라고 믿었거든요.

현수는 자신의 손끝에서 깜박거리는 담뱃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인생과 그 자신이 일치하는 자가 얼마나 될까. 삶 따로, 사람 따로, 운명 따로, 대부분은 그렇게 산다.  323


몇 달 전, 유럽여행을 다녀온 처제부부가 집에 들른 적이 있었다. 선물이라고 사온 것이 칼바도스였다. 한국에선 흔하지 않은 술이라 형부 생각이 나서 샀다고 했다. 그는 고마운 마음으로 받았다. 처제부부가 돌아간 뒤, 은주는 있는 대로 성미를 부렸다. 분노의 몸통은 아니꼬움이었다. '집도 없는 것들이 유럽씩이나 나다니는 정신 나간 행태'에 속이 뒤집혀 있었다.  328



그 시절엔 집안일이 다 내 몫이었어. 동생들 치다꺼리에 집안 청소, 아버지 식사 차려드리는 일. 어머니가 퇴근을 해야 비로소 거기서 해방이 되는 거지. 문제는 내가 야구를 시작하면서 집에 오는 시간이 늦어지고, 그러다 보니 아버지 일상이 불편해졌다는 거야. 운동을 하고 집에 가는 날마다 죽도록 매를 맞았어.  372



어디선가 그런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총을 가지면 누군가를 쏘게 되어 있으며, 그것이 바로 인간의 천성이라고.  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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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세상에는 끝없이 무한한 것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주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하지만 우주가 실제로 끝이 없는지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7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완전한 바보다.  8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아주 결함이 많은 존재이며 어리석음 때문에 그 결함을 장점으로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라는, 또한 이미 한계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분야에서 더 많은 성과를 올리기 위해 죽어라 노력하고 잇다고 말이다.  8-9


지난 몇십 년에 걸친 지식의 폭발적 증가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어리석은 존재라는 우리의 확신을 깨는 데 아무런 반증이 되지 못했다.  9


지난 천 년 동안 인간 개개인의 지적 능력은 크게 즈악되지 않았고 단지 지식이 널리 보급되었을 뿐이다.  10





1장 지식 중독


우리는 왜 지능  테스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할까?  22


교과과정을 만든 사람들이 학생 평가의 기준을 잘못 설정한 것은 아닐까?

정해진 교육 계획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을 위한 자리는 없다. 

어리석은 교과과정으로 인해 수많은 가능성들이 묻히고 있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분명히 두 가지의 형태를 지닌다. 하나는 어리석은 교과 형식으로 인해 학생들이 받아야 할 괴로우모가 그 결과로 얻는 저조한 성적이다. 그 성적은 IQ와는 그다지 상관도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 사람이 가진 약점이나 장점, 한계와 가능성을 포함하여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로 인해 파괴되는 것은 학교 생활뿐이 아니다.  28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영향을 받는 사회적 동물이다. 우리는 어떤 행동이 옳고 또 어떤 행동이 그른지를 알려주는 타인에 의해 형성되며 많은 시도와 실패를 겪는 가운데 사회에 적응한다.  30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 오스트리아 작가)은 1937년 어리석음에 관한 대담에서 이렇게 말햇다. 방금 이야기한 두 종류의 어리석음은 사실 근본적으로 다르다. 첫번째 예는 낮은 지능지수가 문제였는데, 현대의 교육이론에서는 이로 인한 사회적 낙인을 우려해 지능이 낮다고 해서 더 이상 '멍청하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두 번째의 사례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무질은 "정직하고 단순한 어리석음이 있는 반면 역설적인 어리석음이 있는데, 이것은 일면 똑똑함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전자는 낮은 지능으로 인한 것이며 후자는 오히려 지능은 높지만 무엇인가가 결여된 것으로서 이런 종류의 어리석음이 훨씬 더 위험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31


모든 것이 비교 가능한 수치와 가치로 평가될 때 오히려 교육은 어리석음으로 물들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게 아닐까?  32


푀펠 교수는 "PISA(Programmes for Internationally Student Assessment, 국제학업성취도 프로그램)의 상위 순위에 올리기 위한 방식으로 교육을 전환시킨다는 것은 인간의 수많은 다른 재능들은 썩어가도록 방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사회를 망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

교육적 관점에서 에른스트 푀펠은 누구나 자신의 영역에서만큼은 남에게 조롱당하지 않을 정도의 깊이 있는 지식을 갖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자기 분야와 동떨어진 영역에서도 위축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의 식견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인문학에 조예가 깊고 그 방면에 전문적이고 심오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연과학이나 수학 혹은 통계학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출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는 지향적 지식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이러한 지향적 지식을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대학 당국의 나태함도 문제지만 가르치는 이들이 어리석은 탓도 크다.  34-35


학생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분석하는 대신 선다형 문제의 답을 찾는 것을 배운다.  40


사람은 제각기 다른 성향과 능력과 재능을 갖고 있다.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그 능력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44


사과와 배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다만 기준이 확실할 때 어떤 것이 더 나은지는 말할 수 있다. 과즙으로 따지면 배가 더 맛있다. 식감에서는 사과가 더 나을 수 있다. 하지만 순위를 매기기 시작하면 이 명백한 원칙이 무시된다. 최고의 의사와 최고의 대학, 최고의 휴양지와 최고의 여행 코스 등 실제로 있지도 않은 비교 기준이 활개를 친다. 신경과학을 연구하는 창의적인 연구진이 많은 대학과 시장에 적합한 현실적 지식으로 무장한 엔지니어들을 배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학을 어떻게 서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  45


사회의 시스템은 알게 모르게 속임수를 부추긴다. 우리는 일정 선을 벗어나지 않는 규격화된 사고 방향으로 헤엄치고 있으며 그러다 보면 진정으로 새로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타인에게 알려주기란 거의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개척해 나가는 부분에서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기존 견해를 단순히 반복하기보다는 스스로를 단련시키기고 한 단계 앞서 사고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게임을 하듯이 일단 기존 사고에 대한 반대의 논점을 개진해보라. 창의성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50-51


창조의 과저에서 생겨나는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비판과 창조하를 두 가지 측면을 두 개의 창구로 분리할 필요가 있다. 우선 새로운 생각과 정의를 정리해서 끝까지 저술한다. 이때는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비정상적인 생각도 과감하게 기술한다. 그런 다음 자신이 저술한 부분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거나 가까운 친구들에게 보여주어라. 이런 식으로 분리해놓으면 창의성을 발휘할 때에는 비판적 사고를 의식할 필요가 없다.  51


칸트가 말한 '자기 마음을 주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요기를 가져라!' 다른 책에서 칸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진실의 정점을 찾아가는 것과 같다. 또한 언제든지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바로 계몽의 핵심이다.'  57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는 것이 많아진다고 무식함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상하리만큼 무지함이 증가한다. 지식이 진보할수록 인간이 알아야 할 근본적인 지식과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한다. 그렇다면 연구 작업을 일절 중단하고 새로운 지식을 철저히 멀리하는 게 좋을까? 이것이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58





2장 속도 증가


컴퓨터의 신속한 거래 방식은 이 사회에 어떠한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이로 인해 엄청난 돈을 버는 거래자가 생기기는 했지만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아무런 이익도 챙기지 못했다.  67


시간의 속도와 압력이 지나치게 되면.. '극도의 무기력'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것을 '만성 피로로 인한 우울 상태' 혹은 '번아웃'상태라고 부른다.  69


지나치게 패턴화된 행동으로 바쁘다 보니 결국은 쓸데없는 행동만 하는 셈이다. 이는 또한 '극도의 무기력 상태'이기도 하다.  70


극도의 무기력 상태를 경험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복잡함을 줄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몇 개만 골라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멈춤의 시간을 가져야 가능하다.  71


빨리 빨리 해서 시간을 절약하는 동안 더 많은 시간이 파괴된다는 것을. .. 20분을 걷는 대신 택시를 타면 시간을 쪼개게 된다. 택시를 잡고 택시에 오르고 운전사에게 목적지를 이야기하고 돈을 지불하고 내리고 이 모든 행동들이 필요하다.  72-73


달리는 사람은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하는 것밖에 못한다. .. 현재에 충실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사람이 되었다. 다시 말해 걸으면서 그 걸음에 집중하는 것이다.  74


사람이 지금 이 순간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며, 어리석기 짝이 없는 속도광의 반대 지점에 서 있다는 뜻이다.  77


이미 2000년 전에 로마의 호라티우스는 송시 11번에 그 유명한 '카르페 디엠' 즉 '오늘을 즐겨라'라는 문장을 남겼다. 오늘은 제대로 쓰고 하루를 창조적으로 보내라. 창조적 생산은 속도에 미친 어리석음에 대항할 수 있는 멋진 방법이기 때문이다.  77


즉각적이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쌓인 것이건, 감정적 반응에는 공통된 부분이 있다. 즉 두뇌 속에 이미 정형화된 패턴으로 기억된다는 것이다. 항상 두뇌 속에 각인되어 있으면서 특정 자극에 의해 분출되는 것이다. 이 분출은 어느 정도의 한계치가 작용한다. 다정한 말 한마디에 곧바로 사랑이 생기지 않듯이 거친 말 한마디가 곧 바로 분노를 야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특정 자극이 어느 정도로 계속 쌓이면 감정의 분출이 시작되는 것이다. 생존에 필요한 감정의 경우에는 약간의 자극만으로도 곧바로 반응이 분출된다. 하지만 그다지 속도가 중요하지 않은 감정의 경우, 분출하는 데는 많은 자극이 필요하다.  82


두뇌 구조가 외부 세계에 적응하는 과정을 각인이라고 부른다. 이 두뇌의 각인은 감정을 분출하는 한계치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에 따라 어떤 상황은 편하게 받아들이지만 또 어떤 상황은 충동적으로 강하게 받아들인다. 또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에 따라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즉 두뇌에 각인된 것 이외에도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83


세상에 즉석 행복이란 없다. 자기 행동을 후회하고 있다면 상대방의 눈을 들여다보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하다. 

감정적 안정은 시간을 들여야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조급함은 진실한 감정의 친밀도를 파괴한다.  86


우리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마음에 호소하며 먼 미래에 경고장을 보내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오히려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즉 미래의 모습을 현재에 대입시켜 감정적으로 느껴보는 것이다.  93





3장 편견 


두뇌는 도전을 받는 영역만 발전한다.  103


중요한 문제든 작고 사소한 문제든, 관점을 바꿔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공고한 위치나 확심을 버리기란 쉽지 않다. 또한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생각의 든든한 초석이 꼭 필요하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자신의 지평을 넘어서서 보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결국 고집스럽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109-110


관점 바꾸기 훈련은 나이 든 사람뿐 아니라 젊은이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 관점을 옹호하는 토론을 해보는 것이다...

저이는 어떻게 저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거기에는 어떤 장점이 있을까? 또 그 생각들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  122


중요한 것은 자기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한번 서보는 것이다.

한번 해보시라.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창조적 활동의 새로운 원천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23


관점을 바꾸려면 우선 자신이 그 관점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서 자신을 새로운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자신의 견해와 편견이 객관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보다 효과적이고 정직하게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사람의 견해를 따르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127





4장 친구 중독


다른 사람과 함께할 때의 내 모습이 여러 가지로 다르다는 것은 타인이 내 감정과 인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타인은 내 안에 있는 나의 모습을 보완해주고 내 안의 또 다른 모습이 형성되는 데 많은 역할을 한다...

에른스트 푀펠에 따르면 언제 어디서나 똑같은 행동을 한다는 건, 고집스럽다기보다는 오히려 편협함의 신호에 가깝다. 다른 사람이 우리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라는 사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136


사람의 경험은 후성유전학적 관점에서 볼 때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각인된다. 태아기와 세 살에서 열 살까지, 그리고 사춘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때 겪은 경험과 부모 혹은 조부모의 경험이 한 사람의 유전자가 활성화 혹은 불활성화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 외에도 일생을 살며 겪은 트라우마는 후성유전학적 구조에 큰 영향을 미친다. 후성유전학을 통해 우리는 같은 세포 속에 같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음에도 마치 다른 생을 사는 타인처럼 우리의 도플갱어들이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유를 알 수 있다.  141


당신의 선택이 무엇이건, 둘 중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지만 더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당신이 선택한 것이 무엇이건, 당신의 자아는 그로 인해 변화되었다.  141-142


지나친 자기반성은 과잉이다. 자신을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라. 자신의 변화를 유머러스하게 바라보고 현재를 즐겨야 한다. 자신 속에 있는 여러 면들, 사랑받지 못하는 모습들과 싸워봤자 소용없다. 그저 그것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의미 있고 나를 더 자유롭게 만드는 길이다.  142


친구 맺기에 대한 욕망의 이면에는 사회적 존재라는 인간의 본성이 도사리고 있다. 진화론적 유산에 의해 우리 인간은 안정감을 위해 친구와 소속 단체를 필요로 한다. 정기적으로 같이 훈련하고 모임을 갖는 스포츠 동호회가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또 어떤 사람들은 늘 같은 사람이 모이는 길모퉁이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선호한다. 나이 든 남자들에게는 정기적으로 앉아 있을 자리가 중요한데 외부인의 눈으로 보면 부족 간의 친밀함으로 보이기도 한다.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안전함을 느끼는 것이다.  146


진정한 우정은 서로에게 자신을 보여주고 상대의 신뢰를 얻는 데 필요한 내적 교류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서로를 알아가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시간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다 관계가 지속되면서 서로에게 유연해지는 시기가 온다. 두뇌는 서로를 데이터 처리 과정에서 받아들이고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낸다.  153


패스트푸드 식의 우정...  167





5장 완벽에의 강박


어째서 사람들은 결정하기를 두려워하는가? 매우 간단하다. 결정한다는 것은 주어진 가능성 중에 하나 혹은 여러 개를 포기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74-175


일을 시작하거나 끝맺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은 단지 게으름 탓만은 아니다. 실패에 대한 극단적인 두려움이 그 이면에 숨어 있다.  177


우리는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하나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직관이다.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은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장점과 단점을 사로 비교해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직관은 떠오르는 생각이나 영감 혹은 내면의 소리를 바탕으로 한 것이므로 사실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178


우리가 뭔가를 가슴속에서부터 느낀다는 것은 그 속에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정신적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179


머리와 가슴 중 어떤 것이 더 나은 선택일지를 결정하는 데는 그동안 우리가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이 큰 역할을 한다.  ...

경험이 풍부할 때 직관은 아주 유용하지만 경험이 적을 때는 그렇지 않다.  180


사이코패스는 외부의 관점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186


결정이란 늘 합리적이면서도 감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때론 강하고 때론 약하게 서로 결부돼 있다. 이때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여러 고려사항이나 요소들이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모든 사항을 의식적으로 일일이 확인하고 지각하기란,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무리다.

물론 그 과정이 복잡하다고 해서 결정을 내리지 않는 건 더욱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합리성과 느낌이 서로 일치할 경우 대체로 올바른 결정이 내려진다는 것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 둘이 서로 다른 결론을 내놓을 경우는 어떻게 될까? 이때에는 시간이라는 제3의 요인을 고려해 봐야 한다.  187


우리 스스로가 결정을 내리는 것일까, 아니면 결정이 스스로의 방향을 정하는 것일까? 두뇌 연구의 관점에서 볼 때 대답은 명확하다. 결정이 스스로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의식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무엇'인가가 결정하는 것이다. 결정의 크고 작음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 모두는 무의식적인 결정의 과정에 굴복하는 것이다.  194


하나의 결정은 언제나 복잡한 관계의 그물망을 통해 이루어진다. 에른트 푀펠 교수는 이것을 2008년에 펴낸 저서 <타고난 결정자. 기업 운영자의 두뇌 연구>에서 결정에 대한 E-피라미드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198




전략적 목표는 모든 결정을 관통하는 기본 목표를 말하며, 개인적 삶이나 사회생활에서 균형을 찾는 것일 수 있다...

전략적 목표는 분명하게 제시될 수 있어야 한다.  199


맨 윗부분이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라면 피라미드의 가장 낮은 부분은 인간의 기본적인 조건, 개인적 사회적으로 안정감을 얻을 수 잇는 조건을 가리킨다.  201


E-피라미드의 바탕에는 경제적 이해 부분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돈을 중시하는 사회에 살고 있으며, 이런 외부 요인과 동떨어진 삶을 살 수 없다.  203


결정을 못함으로써 병이 생기고 불만이 늘어나며 자신이 원하는 삶을 꾸려가는 데 방해가 된다.  204-205






6장 전문성에 대한 맹신


오늘날 대부분의 주제는 아주 복잡해서 전문가들조차 자기 영역에 속하는 지식의 일부분밖에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229


두뇌 연구 분야의 경우 매년 10만 건 가량의 학술물이 출간된다. ..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해도 겨우 1% 정도밖에 읽을 수 없다.  234


전문가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단지 만나보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실수나 속임수를 간파할 수 있을까? 대답은 예스다. 재정문제나 보험 혹은 인테리어 문제로 전문가를 만나 상담할 때 당신이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자세히 캐물어보라.  240





7장 독서 중독


어째서 독서가 사람을 멍청하게 만단다는 걸까? 

인간에게 내재된 능력이 아닌 인공적인 능력이기 때문이다. 읽기 능력은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유전되지 않는다. 읽기 능력을 개발시키기 위해서는 두뇌의 특정 부위가 원래의 목적에서 이탈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시각적인 것을 해석하는 후두엽의 시각 피질 부분이다. ..

알파벳 글자를 읽든 그림글자(픽토그램)을 읽든 두뇌에서는 항상 같은 영역이 원래의 목적과 상관없이 사용된다. 이것을 통해 두뇌는 최선을 다해 개인에 맞도록 최대한의 업적을 달성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부정적으로 본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두뇌는 독서를 위해 혹사당하고 있다고, 독서 기능을 위해 두뇌는 본래의 감각 정보를 지각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착취당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247-248


책벌레인 푀펠 교수는 "독서는 사람을 지적으로 풍요롭게 만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한 관점을 앗아가고 그 자리에 간접 경험이 대신 들어앉게 되지요."

"눈앞에 펼쳐진 세상을 더 이상 예전처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요. 시각적으로 내 앞에 열려 있는 다채롭고 풍요로운 세상에 눈을 감은 채 무딘 채로 살아가는 일이 많아요. 눈앞의 색채를 알아보지만 더 이상 경험하지 못하는 겁니다."  249


이자르(뮌헨 지역에 있는 계곡과 강) 계곡의 아름다음을 설명해놓은 가이드북을 들여다보느라고 실제 경관을 놓쳐버리는 관광객과 똑같은 것이다. 이 세상을 간접적이고 보조적인 장치를 통해서 접하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직접 세상을 경험하지 않고 묘사해놓은 것들을 읽기만 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무엇인가를 할 때도 사람들은 주위를 돌아보는 것을 잊어버린다. 보조 수단이 우리의 눈과 귀, 코를 비롯한 다른 감각들이 제대로 활동하는 것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251


어째서 운전자들은 자기 마음보다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을까? 아마 그것은 신호와 시각적 보조 장치에 의존해 세상을 보기 시작한 습관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주어진 질서에만 순응할 뿐 '직접' 자신의 눈으로 마주보려고 하지 않는다.  253


인간의 지식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명백하게 활자화된 의미론적 지식으로, 쓰기라는 형식을 통해 전달될 수 있다. 이러한 지식은 순수한 사실만을 다루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 별다른 문제없이 공유될 수 있는 지식이다. 하지만 인간의 지식은 또한 그림 지식이라는 형태로도 표현될 수 있다. 살아가는 동안 감정적 인상을 바탕으로 중요한 사건에 대한 그림이 머릿속에 저장된다. 이는 언어로 전달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마지막으로 암시 혹은 직관적 지식이 있는데, 이는 언어를 넘어서는 부분이다. 우리가 표현할 수 없는 형태의 몸 언어나 두뇌의 알 수 없는 곳에서 진행되는 지식의 유형이기도 하다.  262


우리가 무엇인가를 읽는다는 것은 개인적인 경험으로 그 텍스트에 접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독자들이 읽는 것은 쓰인 그대로의 내용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뼈대 속의 내용인 것이다. 이러한 뼈대는 독자의 기대나 의견, 편견 등을 먹고 자란다.  269


우리는 작가가 쓴 것과는 달리 자신의 경험과 생각에 비추어 텍스트의 내용을 읽는다. 독자들은 책에 쓰인 내용을 읽는 것이 객관적인 지식을 전달받는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착각이야말로 독서의 과정에서 생겨난 것일 뿐이다.  269-270


'책의 운명은 독자의 손에 놓인다.'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이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기 때문이다.  271





8장 인간


왜, 어째서 왜인가?


1000킬로그램은 왜 1톤인가?

3 곱하기 3은 왜 7이 아닌가?

왜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도는가?

에르나는 어째서 요네가 아니라 에르나인가?

어째서 그 녀석은 나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는가?


어째서 교수는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가?

어째서 연미복에는 검정 넥타이를 할 수 없는가?

왜 우린 모든 것을 알 수 없는가?

왜 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가?

왜 남자들은 지저분한 농담을 좋아하는가?


왜 우리는 돈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가?

어째서 가끔씩 자살을 하면 안 되는가?

왜 우린 겨울에 겨울옷을 입는가?

왜 누가 죽으면 웃으면 안 되는가?

왜 사람들은 항상 왜, 라고 묻는가?

 

                             - 에리히 캐스트너  291


집착


아이는 엄마한테 목을 매고

농부는 땅에 

청교도는 루터에

유화는 벽에 

포도송이는 포도덩굴에

개는 주인의 시선에

어떤 사람은 삶에 목을 매고

또 어떤 사람은 밧줄에 목을 맨다.

   

                             - 하인츠 에르하르트  292



누가 알겠는가


열정의 시를 쓰는 사람이라도 

그 마음속에 깃든 것이 다 표현되지 못하듯

신이라 할지라도

그가 상상한 세계는

창조한 세계보다 더 멋진 것이 아니었을지.

            

                              - 에우겐 로스  296


생명의 시작에 대해서는 역시 자연 과학자들도 답변할 수 없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 첫 번째 단계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또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직까지도 커다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300


모든 두뇌에는 크게 세 종류의 신경 세포가 있다. 첫 번째는 외부에서 정보를 받아들이고 투입된 정보를 책임지는 세포다(감각세포 혹은 수용세포), 그 다음에는 근육과 내부기관을 통제하고 관리하면서 외부에 정보를 내보내는 세포로, 이들은 정보의 출력을 책임진다. 마지막으로 이 두 가지 세포 사이에서 정보를 조정하고 이동시키는 역할을 하는 세포가 있다. 일부 신경 해부학자들은 이 신경세포들을 '거대한 중개 정보망'이라고 부른다.  317


관찰의 추상적인 단계(영혼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찰하는 단계)에서 우리는 정신의 레퍼토리를 단 네 개의 기능적 영역으로 묘사할 수 있다. 즉 인식과 기억, 느낌과 의도라는 영역이다. 그 이상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 또한 앞서 말한 네 범주에 기초한 것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이 네 가지 영역이 우리가 '생각'하는 내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331


모듈 형태의 정보 처리 방식은 두뇌의 모든 영역에 해당되며, 이는 배움과 기억에도 적용된다. 어떤 정보를 받아들여 오래도록 기억 저장소에 두려 할 때 두뇌에 자리 잡은 특정 장소의 신경프로그램이 새로운 정보의 저장을 책임진다. 가령 우리가 의식적으로 인용하려는 참고지식의 저장을 위해서는 측두엽 해마부의 기능이 중요하다.  333


여러 문화의 비교 연구를 통해 우리는 세계 어디에서나 인류 공통으로 표정을 통해 드러나는 여섯 가지 기본 감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여섯 가지 감정은 모든 문화에 동일하게 표현되는데, 인간의 유전자 속에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당신의 표정을 보면 알겠지만 그것은 기쁨과 놀람, 공포와 귀찮음, 환멸 그리고 슬픔이다.  335


정신세계를 더 잘 이해하려면 신경학적으로 서로 다르게 자리 잡은 두 가지 기능 영역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 두 가지란 '무엇이 기능하는가'라는 내용적 측면과 '어떻게 기능하는가'라는 형식적 측면이다.

내용적 측면은 다시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지는데 활동과 집중, 시간적 구성이다. 활동은 소위 두뇌에 '전력 공급'이 됨으로써 정신 활동이 가능해지고 우리가 의식이라는 것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전력 공급이 없으면 보거나 듣는 것, 기억이나 느낌, 의도나 희망 등을 갖는 것도 불가능하다. 아무것도 안 되는 것이다.  340-341


정신건강을 위해 주의 집중을 통제하고 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는 한 번에 한 가지씩의 일에만 집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신적 사건의 경로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사라지게 하는 능력도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대상에 집중할 수 있는 반면 집중하는 대상에서 마음의 눈을 분리시킬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  343


우리 인간에게는 이 세상에서 자기 길을 찾아가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드는 문제가 있는데 바로 단선적 인과관계라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문제의 원인을 찾으면서도 하나의 원인을 발견하면 그것에 만족해버린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가진 '병'은 두 모습을 보인다. 하나는 이유에 대한 갈망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의 원인을 찾았을 때 그것에 만족하는 모습이다.  365


하나의 원인 혹은 하나의 해석 안에 모든 것을 귀결시키는 태도야말로 단선적 인과관계의 좋은 예일 뿐 아니라 학문적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예다.

물론 상황을 단순하게 설명하는 작업은 필요하다. 하지만 너무 단순화시키는 것이 문제다.  366


어리석음이 인간 모두가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면 이 전 세계적 질병과 싸우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하나의 강구책으로 '상호보완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2500여 년 전에 상호보완을 일종의 생성원리로 설명했다. 그는 모든 만물은 하나이며 서로 반대되는 것도 하나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고대 중국에서도 음양의 개념.  367



우리는 어째서 모든 것에 '왜'라는 질문을 해야 하며 

사물을 '왜'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인간은 어리석게 태어난 존재여서 

아무리 열심히 배운다 하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똑똑해지거나 하지 않는다.

인간이 결코 알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

그리고 항상 모른 채로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 중 한 부분이다.  373




옮기고 나서 - 어리석음을 위한 변명


저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어리석음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선천적이고 생물학적인 한계에 의한 어리석음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 스스로가 만들고 쌓아온 경험적, 후천적 어리석음이다.  402


생물학적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노력을 통해 어리석음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는 잇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명상이나 자기 반성을 통해 지나치게 외부의 자극에 의존하고 통제받는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좋다. 또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들여다보고 조롱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되면 어리석음의 함정에 거듭 빠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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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운동 방향은 짝짓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만물은 그것을 향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짝짓기는 만물을 끌어들이는 중심점이다. - 미셸 몽테뉴



프롤로그 - 생명의 승리, 오르가슴


현세의 대표격인 종교계에서는 육욕을 말살시키려는 시도에 대해 축복을 가져오는 일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중세시대의 교수(敎父 가르칠교 아비부)들은 미친듯이 육체적 쾌락과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대부분의 종교가 성교의 쾌락을 몰아내고자 열정적으로 분투했던 근본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오늘날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어쩌면 오르가슴이 우리를 전율케 만드는 성자들만의 비밀인 '어마어마한 신비'(misterrium tremendum)를 위협하는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22-23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최근 수십 년 동안 각기 다른 분야에서 이룩된 오르가슴에 관한 연구결과들을 한데 모아보고 싶은 야심찬 소망에서 비롯되었다.  25




현대 진보생물학에 따르면, 모든 생물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유전자를 집단 속에 퍼뜨리기 위한 행동을 하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다위주의의 현대적 예언자 리처드 도킨스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몸속에 들어있는 생식세포가 명령하는 대로 노예처럼 행동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29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생물학자 맬컴 포츠와 로저 쇼트는 이렇게 지적했다. "인간의 성행위에 관한 꿈과 환상은 임신이나 출산 또는 수유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거의 언제나 성교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성충동은 너무나 강렬한 탓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으며, 오르가슴이나 여성의 신체에 매료되는 남자들의 모습은 많은 여자들을 정신 못 차리게 만든다." ..

세계보건기구의 추산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이루어지는 성행위는 하루에 1억 회에 달한다. 그러나 성기의 결합이 임신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그 중의 1%인 100만 건에 미치지 못한다.  33


몇 년 전 미국에서 실시된 장기간의 실험에서 피험자들에게 하루 동안 겪은 중요한 정서적 체험을 기록하게 하고, 그 농도에 따라 점수를 매겼다. 그리하여 감정의 농도를 비교해보니 성적 황홀경을 능가하는 경험은 없었다.  34-35


1962년 노벨 생리 의학상을 수상한 미국 생물학자 제임스 웟슨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성의 두뇌에서 이루어지는 사고활동의 90%가 섹스와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  37


캘리포니아 주 산타클라라에 위치한 신경행동센터의 뇌과학자 라운 조지프의 말을 들어보자. "다른 짐승의 암컷과 달리 인간 여성은 계절이나 배란기와 상관없이 1년 내내 성교를 할 수 있고, 또 그럴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렇게 되기를 갈망한다. 여성은 관능적으로 부풀어오른 가슴과 큼직한 엉덩이를 갖고 있는데, 다른 영장류에게는 이것이 성적 자극과 성교 욕망을 나타내는 신호인 것이다. 또한 인간 여성은 화장품, 향수, 입술연지 따위를 사용하여 다른 영장류의 발정상태를 나타내는 성징들을 모방함으로써 집요하게 남성의 욕망을 자극한다."

일부 인류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어떤 화장품은 여성의 육체를 오르가슴 상태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작용을 하고, 입술은 성적 흥분 상태에 도달했을 때 홍조를 띠면서 부풀어오르는 음순을 연상시키는데, 여성들이 립스틱 바르기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38-40


고고학적 발굴 과정에서 석기시대에 동물의 뼈와 상아로 만든 방망이 형태의 나무토막이 많이 발굴되었는데, 콩코르디아 대학의 동물학 교수 폴 바세이는 이것을 가리켜 페니스 형상을 본뜬 것임이 분명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는 이른바 '남근봉'의 제례적 의미, 혹은 종교적 의미를 읽어내고자 무진 애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바세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리한 조상들이 순전히 욕정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남근 모형을 사용했다고 선뜻 인정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비슷한 장면을 묘사한 일련의 벽화가 발견됨으로써 그러한 분석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우리의 선조들이 수음과 수간(獸姦 짐승수 간사할간), 구강성교, 심지어 사체 강간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방법으로 성행위를 즐기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다양한 성행위 양상과 '변태적 성행위'를 말로 표현하려면 현재의 어휘로는 부족하다. 인간처럼 성행동이 '난잡'한 동물은 어디에도 없다.  41-42


인간이 사냥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한곳에 정착하여 경작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그와 같은 호색적 기질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43


피임수단의 발명은 ... 인간이 생식세포를 하찮게 여긴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강조한다.  43


절정의 파도가 지나간 직후에 갑작스레 엄습하는 허탈감은 일상에 불편한 감정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크게 느껴진다. 우리 마음속의 부정적 감정들이 그정적 감정에 비해 그 반향이 훨씬 강하고 그만큼 신체적 흥분도 커지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인간의 정신은 삶 속에서 부딪히는 불쾌한 일보다는 좋은 일에 훨씬 더 활발한 반응을 보이도록 만들어져 있다. 실제로 우리는 성공, 기회, 승리 따위보다는 위험, 비판, 패배 따위로부터 더 큰 충격을 받는다. 불쾌한 감정이란 따지고 보면 위험하거나 해로운 상황이 사라지도록 빨리 개입하라는 신호인 셈이다.  48


인간의 두뇌는 공작새으 깃털과 같은 구애의 도구이고, 애당초부터 여자들이 똑똑하고 창조적인 남자를 선호했던 까닭에 두뇌는 점차 지능이 발달하면서 부피가 커졌으며, 풍부한 감정과 창조력 덕분에 갈수록 새로운 방법으로 상대를 유혹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밀러의 연구에 의하면 대부분의 중요한 예술작품들은 20세에서 30세 사이의 남성들에 의해, 정확히 말해서 성충동이 절정에 달한 시기의 남성들에 의해 창조되었다.  54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적어도 포유동물 수컷은 인간의 오르가슴과 유사한 절정을 경험한다고 보고 있다.  65


인류학자 시먼스는, 일반적으로 포유류 암컷의 성 역학이 짝짓기 행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국한되지 않았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많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주도적으로 교미를 유도하기도 하는데, 아마 교미를 통해서 재미를 느낄 개연성이 매우 높다." 뇌생화학 연구 결과로도 그러한 증거가 발견되었다. 미국 단백질 합성 분야의 전문가 캔디스 퍼트는 짝짓기 직전으 암컷과 수컷 햄스터를 실험대상으로 골라 방사선 추적물질을 주입하고 체내의 엔도르핀 잔량을 측정하였다. 엔도르핀은 두뇌를 자극하여 통증에 대항하거나 욕구를 발생시키게 하는 물질이다. "교미행위가 진행되는 동안 뇌 속의 엔도르핀 농도가 200%까지 상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69




과학이 아무리 발전했어도 오르가슴에 관한 비밀은 오늘날까지 풀리지 않은 부분이 많다...

오르가슴에 도달한 순간의 느낌은 이를 데 없이 환상적이지만 그 맛을 즐기기 위해서는 당사자에게 상당한 적극성뿐만 아니라 헌신적 자세와 풍부한 창의력이 요구된다.  90


미국의 성과학자 비벌리 위플이 이끄는 연구팀의 조사에 따르면, 

남성의 오르가슴 지속 시간은 대체로 10초에서 13초 사이로 나타났다. 그들의 연구결과를 평균치로 계산하여 콤마 이하 단위까지 정확하게 나타내면 12.2초가 된다. 이 통계를 근거로 캘리포니아의 심리치료사 미첼 맥과이어가 계산한 바에 의하면, 남자 한 사람이 일생에 걸쳐서 성적 극치감에 휩싸이는 시간을 모두 합치면 평균 9.3시간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여성의 경우는 통계수치가 좀 애매하다. 여성 자신들의 주관적인 느낌을 조사한 결과 오르가슴의 평균 지속시간은 짧게는 7초에서 길게는 107초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좀 혼란스러운 것은 주관적으로 느끼는 지속시간과 객관적으로 측정한 근육의 긴장시간이 너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동일한 연구 사례인데도 근육의 긴장시간은 13초에서 51초에 불과하다.

하여간 여성은 특별히 유리한 조건하에서는 전문용어로 '오르가슴 상태'라고 일컫는 일종의 '지속적 오르가슴'을 경험할 수 있다.  104


섹스 황홀경에 빠져들면 육체는 통증에 대해 점차 무감각해지고 심지어 심한 상처를 입어도 알아채지 못한다. 평상시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겠지만 섹스를 할 때는 그야말로 최고의 희열을 선사하는 자세도 있다. 성기 역시 성행위가 진행됨에 따라 통증 감각이 부분적으로 정지도니다. "성적 흥분이 최고조에 달하면 시력이 희미해져서 바로 눈앞에서 움직이는 불빛뿐만 아니라 그밖의 어떠한 시각적 자극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청각, 후각, 촉각, 온도감각이 마비되기도 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본다면 오르가슴은 모든 정신활동을 오로지 쾌락을 생산하는 데로 집중시키는 것 같다.  107-108


성적 쾌감은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성기 자극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발생한다. ..

성감대를 비롯한 민감한 신체부위를 장시간 집중적으로 자극하며 '오르가슴 반응'을 유발시킬 수 있는 것이다.  109


연쇄살인범들이 범행을 저지르는 순간에 성적 희열을 느낀다는 사실은, 오르가슴이라는 충동이 성행위가 아닌 다른 행동과 결합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말할 수 있다.  113


영국 셰필드 대학의 성과학자 레바인은 최근의 연구에서 성욕이 정지되는 시기를 두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초기에 '절대적 무반응기'가 시작되면 여성이 아무리 강하게 자극해줘도 남성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상대적 무반응기'로 넘어가면 자극에 대해 어느 정도 반응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에로틱한 유혹이 전혀 색다른 것이거나 농도 짙게 주어지면 희미하던 남성이 다시금 기지개를 펴게 된다. 

비아그라의 구성 약제인 '실데나필'은 건강한 30대 남성에게 평균 10.8분이던 무반응 시간을 2.8분으로 단축시키는 효과를 보인다고 한다. 일명 '푸른색 다이아몬드'로 불리는 이 약이 본래 발기부전을 해결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지 성능력 증진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위와 같은 효과는 참으로 놀랍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레바인은 비아그라가 앞으로도 성능력 증진제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예견한다.  115


'쿨리지 효과'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황소로 하여금 동일한 암소를 상대로 여러 번 짝짓기를 시키면 거부반응을 보이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후 실시된 연구에 따르면 동물계의 모든 수컷은 동일한 암컷을 놓고 반복해서 교미를 시키면 성욕이 감퇴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반면에 '새로운' 암컷을 데려다주면 잠들었던 수컷의 성욕은 뚜렷하게 되살아난다.  124




잡지기사나 대중서적의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면, 성교시에 성적 만족을 가져다주는 호르몬은 옥시토신이다.  148


이 기적의 호르몬은 시상하부의 명령에 따라 뇌하수체선에 의해 혈액의 흐름 속으로 스며들어 산통을 유도하고 모유 생산을 촉진하며 유방조직의 혈액 흐름을 촉진시킨다. 그리고 산모와 신생아 모두에게 안정감과 온화한 기분을 안겨준다.

발기가 일어나면 옥시토신 농도는 순식간에 평균치의 세 배로 치솟고, 여성의 경우에는 오르가슴 순간에 최대의 농도를 나타낸다. 과학자들이 남성의 옥시토신 수용체를 차단하자 오르가슴은 일어나도 짜릿한 쾌감은 발생하지 않았다.  149


독일 에센 대학병원의 만프레트 쉐들로프스키를 중심으로 한 연구팀은 획기적으로 발전된 연구방법으로 지금까지의 약점을 모두 극복했다. 그들은 남녀 실험 대상자 모두를 오르가슴에 도달케 하고 모든 종류의 호르몬을 세심하게 검사했다. 그 결과 이른바 옥시토신 분비량의 광범위한 증가현상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수치가 다소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기대했던 상승현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149


하체 마사지법..

치료를 핑계로 실시된 '문지르기' 행위가 어째서 남편들의 의심과 질투를 불러오지 않았는지 오늘날에 와서 확인할 방법은 없다.  159


심리분석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로이트의 이론에서는 여성의 오르가슴을 '질 오르가슴'과 '클리토리스 오르가슴'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전자는 성숙한 단계의 오르가슴이고, 후자는 질을 대신하는 유아기에만 나타나는 일시적 단계일 뿐이다. 프로이트의 주장에 의하면, "단단한 땔감을 태우기 위해서는 먼저 작은 관솔조각에 불을 붙여야 하듯이" 성장 과정에서 어린 소녀기의 성감대는 클리토리스가 대신하지만 성장함에 따라 옆에 있는 질의 위치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이로써 질 오르가슴에 관한 그릇된 인식이 생겨났다.  161-162


1953년 앨프리드 킨제이는 문헌들을 세심하게 조사한 겨로가 질 오르가슴 이론의 엄청난 모순을 발견하고 그 사실을 자신의 저서 <여성의 성행동>에 실었다. 

클리토리스는 고도로 민감한 반면에, 질 내벽은 잘라내도 아무런 통증이 없을 정도로 감각능력이 거의 없다. 여성이 스스로 수음을 통해서 오르가슴을 즐기려 할 때 자궁 깊숙이 물건을 집어넣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레즈비언들도 파트너끼리 아무런 삽입행위 없이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성의 성장 과정에서 성충동이 클리토리스에서 질 쪽으로 옮겨간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164


1976년에 광범위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작성된 <하이트 리포트(Hite-Report:하이트 리서치 소장인 셰어 하이트가 1976년에 저술한 책으로 영국에서 '20세기의 명저 100권'에 선정되었다-옮긴이)가 이 문제에 관한 최수의 의문점을 해소했다. 삽입만으로는 오르가슴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응답한 여성이 전체 응답자 중의 70%였다.  164 


3차원 카메라를 이용하여 여성 열 명의 신체를 촬영한 멜버른 대학의 젊은 산부인과 전문의 헬렌 오코넬. 검사 결과 여성의 클리토리스는 빙산처럼 극히 일부만 겉으로 드러나 있고 대부분은 몸속에 숨어 있음이 밝혀졌다. ...

클리토리스의 겉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은 안쪽에 피라미드 형태의 해면조직으로 이어지는데 엄지손가락 크기에 해당한다.  165


페니스와 클리토리스는 발달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기관이다. 그러니까 태아 단계에서는 동일한 기관으로 출발하여 남성 호르몬의 지배를 받으면 페니스로 발전하고, 그렇지 않으면 클리토리스로 성장한다. 바꾸어 말해서 페니스와 클리토리스는 태아상태에서 근원이 동일하므로 상동기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포유동물 암컷은 이와 같은 '쾌감돌기'를 갖고 있다.  166


여성의 클리토리스는 그 크리뿐만 아니라 질과의 거리에 있어서도 개인차가 심하다. ..

평군적으로 요도 입구와 클리토리스 사이의 거리는 38밀리미터 이하이다. 측정 결과 그 거리가 38밀리미터 이상인 여성은 삽입이 되어도 절정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반대로 클리토리스의 위치는 의미가 없고 오히려 유동성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167


유감스럽게도 산업국가의 과학자들이 수세기 전부터 여성 성감의 진원지가 몇 센티미터 더 높으냐 낮으냐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동안 아프리카의 수백만 처녀들은 마을 여인들에 의해 성욕을 최대한 억제시킬 목적으로 클리토리스가 절단되는 아픔을 겪고 있다. 수단,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등의 많은 나라에서 실제로 모든 여성들이 이러한 생식기 절단의 제물이 되지만, 남성의 성기 절단과 다름없는 이러한 행위는 종종 '여성할례'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고 있다.

여성할례의 절차는 끔찍스러운 여러 단계로 자행된다. 클리토리스를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잘라내는 '음핵 제거술'로부터 '음부 봉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학다. 음부 봉합의 경우에는 클리토리스와 소음순을 도려낸 다음 대음순의 가장자리를 벗겨내어 요도 입구와 질 입구를 마치 벌어진 상처를 꿰매듯이 봉합하고 분비물이 흘러나올 수 있도록 작은 구멍만 남겨둔다.  169-170


생식기 절단은 이미 이슬람교가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고대 이집트의 관습이었다. 짐작건대 이집트인들은 이와 같은 진기한 '명예'를 파라오의 딸들이나 그 외의 고위 계급에게 베풀어주었을 것이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클레오파트라도 어쩌면 클리토리스가 제거된 상태로 사랑을 나누엇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극단적 형태의 성기 훼손행위가 여전히 '파라오식 할례'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미국의 인류학자 라이트푸트 클레인의 보고에 의하면, 할례 대상자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주변 여인들에게 혐오스럽게 일그러진 그 '물건'을 다리 사이에 계속 지니고 다니면 인간적인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한다고 세뇌를 받는다고 한다.  170


할례 대상자는 대개 일곱 살 내지 여덟 살 소녀들이다. 그들이 마침내 '진짜 여자'가 되는 일종의 의식 절차라고 믿는 할례행사에서는 여기에 관여하는 주변의 여성들이 당사자에게 장밋빛 미래를 제시해주기 때문에 즐거운 긴장감이 주어지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시골에서는 아무런 교육을 받지 못한 '산파'에 의해 마취나 살균처리 없이 수술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수술 직후에 과다출혈이 일어나거나, 며칠이 지나 패혈증, 파상풍, 괴저로 인해 사망하는 소녀들이 속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살아남앗다 하더라도 상처가 좀처럼 아물지 않거나 하혈과 소변으로 감염되어 몇 개월 동안 하체 통증에 시달렸다.  171


현대적인 심리연구 작업이 수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질 오르가슴에 관한 프로이트의 신화는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174


'G-스폿' 이론이 프로이트 학파의 질 오르가슴 이론에 새로운 불씨를 제공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질의 앞쪽 부분인 요구 입구 근처에 성적 자극에 아주 민감한, 호두알 크기의 조직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이 주장을 제기한 독일 산부인과 의사 그래펜베르크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G-스폿'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부분은 흥분상태에서만 만져지는 강낭콩 모양의 해면체로 여성의 성감대 중에서 성적 쾌감이 가장 크다는 것인데, 훈련 받은 사람이 이곳을 자극하면 여러 차례 오르가슴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또 G-스폿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남성의 전립선에 해당되는 부위에 연결되어 있는데, 이곳이 이른바 '여성의 사정'을 조절하는 지휘 센터로서 절정에 도달한 순간 남성의 전립선액과 유사한 정액을 배출한다는 것이다. ...

전설적 영웅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성배를 찾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기울였듯이 일부 성과학자와 부인과 의사들도 G-스폿을 찾아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쾌감 포인트'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은 오로지 문진뿐이었고, 여성의 사체에 대한 해부학적 조사로는 그 부분에 해당하는 위치를 찾아내지 못했다.

미국 페이스 대학의 의학자 테렌스 하인스는 관련 분야의 전문서적을 철저하게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최근의 질 오르가슴 이론에 대해 반론을 폈다. 물론 결론은 그런 종류의 성감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주장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 해부학이든 생리학이든 어느 분야에서도 여성의 몸에 그렇게 혈류량과 신경세포가 특별히 많이 분포된 부위가 있음을 증명한 경우는 없었다."  176


1953년에 앨프리드 킨제이가 8,000명 이상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를 보면, 규칙적으로 오르가슴을 경험한 여성은 대상자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에 미국에서 실시된 면밀한 조사로는 성행위 때마다 오르가슴을 경험한 여성은 29%였다. 독일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주간 뉴스 잡지 <포쿠스>의 의뢰를 받아 생명공학연구소(INRA)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29%의 여성들만이 극치감을 경험한 것으로 대답했다. <카마수트라>의 본국인 인도에서도 오르가슴을 경험한 여성은 10~15%에 불과했다.  181


네덜란드 흐로닝언 대학에서 375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실시한 페니스 경험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그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남근의 크기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응답한 여성이 77%에 달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페니스 크기 문제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사이콜러지 투데이>지의 조사에 따르면, 스스로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여성들은 크기를 중요시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성경험이 많은 여성들도 거대한 남근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191


중앙 폴리네시아의 망가이아 섬에 거주하는 여성들은 대단히 열정적으로 성충동을 발산한다고 알려져 있다. 인종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망가이아 여성들은 성교를 할 때마다 두세 번식 오르가슴에 도달한다고 한다. 남자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경험 많은 여성에 의해 자기도 모르게 고도의 기교를 터득한다. 뿐만 아니라 망가이아 주민들은 요즘의 유럽 의학자들보다 여성의 해부학적 구조에 대해 오히려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  196


이불 속이 조용한 경우, 남성의 성욕 부족보다는 여성의 무관심이 그 원인인 경우가 많았다.  199


여성의 오르가슴은 일단 '발견'이 되면 자연스럽게 사회적 기능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일단 오르가슴을 경험한 여성은 계속해서 원하게 된다. ..

남성과 함께할 때라면 남성은 파트너에게 꽃다발을 선물하듯이 오르가슴을 선사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선물'을 받은 파트너는 상대방의 자의식을 세워주려고 오르가슴에 도달하려고 애쓰거나 그런 척 할 것이다.  218


섹스가 사창가에서 이루어지든 화물차 뒷좌석에서 벌어지든, 어떤 체위를 취하든 상관없이 오르가슴은 '성공적' 성행위임을 인지할 수 있도록 마련된 현상이므로 여성들은 오르가슴에 도달한 것처럼 속이는 경우가 많고, 파트너를 오르가슴으로 유도하지 못한 남성들은 스스로 무능한 남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222


여성들이 침실에서 어느 정도 연극을 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오래 전의 연구에 따르면 속이는 비율이 49%엿다. 여성지 <마드무아젤>이 실시한 설문 결과로는 여성 독자의 69%가 가끔씩 연극을 한다고 응답했다.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의학심리학연구소의 한스 페터 로젠마이어 연구팀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90%로 나타났다. 미국 심리학자들이 여대생들의 진술을 청취한 결과, 기본적으로 거의 모두가 절정에 도달한 척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시인했다.  224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 파트너에게 쾌감을 '액션'으로 증명해 보인다면 누구나 섹스를 더욱 진하게 즐길 수 있다. 쾌감을 표현할 때 약간 과장함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려는 행동은 인간의 보편적 행동 방식일 것이다.  224-225


여성이 침실에서 연기를 더 잘한다는 사실은 남성들의 진술에서도 나타났는데, 50%의 남성들이 여성의 가짜 오르가슴을 알아차릴 수 있다고 대답했다. 반면에 여성의 66%가 자신의 연기를 남성 파트너가 절대로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226


침실에서 연기가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성교를 통해서 모든 여성이 황홀경 속으로 들어가는 가상의 세계를 그려낸 책이나 영화가 등장한 시기였다. 질 오르가슴을 주장한 프로이트의 이론도 한몫을 담당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대표적인 대중매체들은 '굴곡위' 자세를 취하면 로켓처럼 격정을 분출시킬 수 있다고 연인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이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성행위를 실천하지 못하는 여성들은 열등감과 수치심과 좌절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27


남성은 여성에게 "오르가슴을 느꼈어?"라는 식으로 노골적인 질문을 던질 것이 아니라, "우리들 성생활이 재미있지?"라고 일반적인 질문으로 운을 떼기 시작한 다음에, 편안한 표현을 써서 "당신을 더 즐겁게 해주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좋겠어?"라고 구체적인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고 (성치료사) 캐럴 달링은 조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결국 여성의 오르가슴은 남성 책임이 아니라 여성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여성은 자신의 성생활에 관하여 남성 파트너에게 이해를 시켜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오르가슴이 아니라 함께 누리는 즐거움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230-231




이불 속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남성 85%와 여성 83%가 적어도 어느 정도는 만족스럽다고 대답했다. 여성 27%와 남성 33%는 너무나 만족스러워서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미국에서는 남성 47%와 여성 41%가 현재의 관계를 "육체적으로 지극히 즐겁다"라고 평가했다.

성생활을 통해서 최고의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은 기혼자 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이다. 결혼하지 않은 채 동침하는 경우는 분명히 부부간 성교 만큼의 욕구 충족을 보장하지 않는다. ...

독신이든 기혼이든, '난혼'을 즐기는 남녀들이든 구별 없이, 모든 그룹들이 구체적으로 생각나는 마지막 오르가슴을 기분 좋은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234


남성이 만족감을 얻는 데 중요한 것은 남성 자신의 오르가슴보다는 여성 파트너의 오르가슴이다. "성교 도중 여성이 자주 오르가슴에 도달할 때 남녀 모두에게 감정적으로 가장 많은 만족감을 준다." 반면에 남성의 흥분이 고조되어 사정에 이르렀는지의 여부는 여성의 만족감과 아무 상관이 없다. .. 

여성들은 자신이 먼저 제안을 했을 경우에 성행위를 통해서 가장 진하게 쾌감을 느꼈다. 침실에서 남녀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의 '모험심'이었다.  237


미국의 통계전문지 <아메리칸 데모그래픽스>가 미국인의 성생활 통계를 분석한 바에 의하면, 성교 기회를 갖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격차가 경제적 빈부격차보다도 훨씬 더 크다고 한다. 이 분석에 따르면 성인의 15%가 전체 성행위 통계의 절반을 차지하고, 성인 인구의 42%가 이성간에 이루어지는 성활동의 85%를 차지한다. 이것과 비교하여 미국인의 20%가 미국인 전체 재산의 절반가량을 소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성생활의 불평등현상은, 미국인의 5분의 1이 지난 1년 동안 총체적 금욕 생활을 유지했다고 진술한 것과 관련이 있다. 반면에 미국인 스무 명 중에서 한 명이 매주 3회 이상 섹스를 즐겼다고 한다. 이와 같은 '섹스 부자들'은 미국에서 벌어지는 모든 성행위의 30%를 독점하였다.  253


성행위를 보통 이상으로 자주 즐기는 유형은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본래 흑인음악에서 유래된 재즈의 마니아들은 일반인 평균치보다 30% 정도 더 섹스를 즐긴다. 록이나 랩과 같은 기타 장르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정도로 일반 대중보다 두드러지지는 않다. 흑인들의 '원시적 예술'을 부러워하던 미국작가 노먼 메일러가 재즈를 '오르가슴 음악'이라고 표현한 것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257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적어도 머릿속에서나마 이상한 행동(예를 들어 사슬로 묶는 행위)을 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응답자의 73%(여성 74%, 남성 71%)는 재미있는 것이라면 무슨 짓이든 좋다고 했다. 다만 그럴 의지는 있으나 실천을 주저할 따름이다. ...

우디 알렌은 "섹스가 추잡한 것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제대로 하면 그렇지"라고 대답했다. 실베스타 스텔론은 마돈나를 침실의 '유탄'이라고 칭찬했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양심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259



'쿨리지 효과'

이 용어는 미국의 제30대 대통령 캘빈 쿨리지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전문잡지에도 가끔씩 인용되는 일화에 의하면, 쿨리지 대통령이 영부인을 대동하고 어느 농장을 방문하였다. 쿨리지 여사의 시야에 마침 교미 중인 수탉이 보였다. 영부인은 수탉이 이런 행동을 하루에 열두 번씩 한다는 설명을 듣고 이렇게 대답했다. "내 남편한테도 설명해주세요." 대통령이 설명을 듣고 나서 신기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항상 같은 암컷만을 상대하는가?" 매번 다른 암탉과 교미한다는 대답을 들은 대통령은 다시금 이렇게 말했다. "내 아내한테 그 말을 전해주게."  262


네바다의 엘코에서 조산원이자 산부인과 전문의로 일하고 있는 조지 윈치 주니어. "여성이 아직 갱년기에 돌입하지 않았고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면, 성행위를 많이 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292


코넬 대학의 비뇨기과 전문의 프랑수아 에이드는 "페니스는 놀라울 정도로 강인하다. 그러나 과도하게 사용하면 페니스의 해면체에 지속적 손상이 올 수 있다." 젊은 남성이 정력이 너무 좋아서 거친 섹스를 좋아하면, 해면체가 손상될 수 있다는 것이다. ...

페니스가 자연스러운 조건에서 한동안 축 느렁지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잠깐 동안 휴식을 취하는 것과 같다. 그동안 내부를 흐르는 혈액에 산소가 공급된다."

발기된 상태에서는 남성의 소중한 그 물건에 피가 거의 흘러들어오지 않는다. 삽입할 때는 압력이 매우 강해져서 혈액이 전혀 흐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페니스에 휴식을 주지 않으면 근육조직이 산소결핍 상태에 이르고 마침내 음경 강직사태가 발생한다.  293


연구자의 입자에서 보면 사랑은 섹스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선택수단이다. "낭만적 사랑은 본래 단순하고 동물적인 행위에 불과했던 섹스를 복잡하고 상징적인 문화적 경험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297





하노버 의과대학의 성연구가 우베 하르트만은 "섹스 문제는 대중의 병이 되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305


여성 성기능장애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증상으로 요약되는데, 이 증상들은 독립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복합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첫째, 성적으로 흥분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머릿속에서는 에로틱한 환상이 떠오르지만 그것이 성기로 연결되지 않고, 질 분비물도 양이 아주 작다.

둘째, 섹스를 해도 오르가슴에 도달하지 못한다. 절정감이 억제되거나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셋째, 통증이 온다. 전반적인 음부 통증과 질경련 때문에 성교가 불가능해지거나 극도로 고통스럽다.

넷째, 성욕을 못 느낀다. 사랑의 유희를 위한 준비 단계인 성적 환상이나 생각이 전혀 없다. 과거에 '불감증'이라고 일컬어지던 장애현상이 심화되어 성접촉이라면 뭐든지 싫어진다.  309


비아그라는 페니스가 단단해지는 과정의 압력 문제를 해결해주는 데만 효과를 발휘하므로, 성적 흥분이 안 되는 환자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스타킹을 신은 여자에 대해서만 흥분하는 사람에게는 비아그라와 함께 스타킹이 필요하며, 동성연애자인 사람은 앞으로도 동성 파트너를 상대할 것이고, 성욕이 없는 사람에게는 비아그라가 있어도 소용이 없다. 아내가 지겹게 느껴지는 남자는 비아그라를 복용해도 아니에 대해 욕구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비아그라가 상업적 성공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모든 기대가 달성된 것은 아니다.  315


본래 비아그라는 여성의 흥분장애 및 오르가슴 장애를 치료하는 데도 사용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

실제로 여성용인 '장미색' 비아그라를 복용시킨 결과 음핵과 질의 혈액순환이 좋아진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

섹스 치료사 울리히 브란덴 부르크는 "비아그라는 하체에 효과가 있지 머리에는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뇌가 가장 중요한 성감대이다."  318




에필로그 - 육욕의 미래


맨체스터 대학의 진화생물학자 로빈 베이커는.. "현재는 섹스와 번식이 불완전하게 분리되어 있지만, 이런 현상은 21세기 초반이 지나기 전에 예외적 현실이 될 것"이라고 베이커는 예측한다. 다시 말해서 섹스는 단지 오르가슴에 도달하기 위한 즐거운 시동걸기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352


하노버 대학의 성과학자 우베 하르트만은 "인간이 성욕으로 인해 어쩔 줄 몰라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한다면, 그 매력은 상실되지 않을 것이다."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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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이 책의 목적은 수사학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수사학의 긍정적 측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자 한다.  11


수사학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언어을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맥락 안에 놓아야.  13


무엇보다 수사학은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생각을 생성하는 수단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4


수사학은 서기전 5세기 후반 아테나이에서 기원했다. 수사학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 여기저기에서 모여든 소피스트라는 교사 집단이었다. ...

이들의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은 공교롭게도 적수들의 저작이었다. 따라서 후대 학자들이 공들여 연구했음에도 소피스트의 이미지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소피스트술(sophistry, 궤변)'이라는 단어가 '기발하지만 청중을 오도하는 추론과 잘못된 논증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기술'의 대명사로 쓰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18-19


브라이언 비커스(brian Vickers) 말마따나 "플라톤은 수사학을 희화화함"으로써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소피스트의 명성은 "플라톤의 일격에서 결코 회복되지 못했"다.  25


아리스토텔레스(서기전 384~322년)도 수사학을 옹호했지만, 수사학을 학문의 총체로 여기지는 않았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람이 형식논리를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개념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27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요한 정의를 몇 가지 제시했다. 수사학은 "어떤 경우에든, 가능한 설득 수단을 찾아내는 능력"으로 정의되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사법적 수사학, 제시적 수사학(예:추도사), 토론적 수사학(법률을 통과시키거나 전쟁을 선포하는 등 청중이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설득하는 것)의 세 장르로 나누었다.  28


앤드루 W. 로버트슨은 후보자를 찬양하는 '칭찬' 수사학에서 투표자에게 특정한 세계관을 지지하라고 촉구하거나 충고하는 '권고' 수사학으로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후자의 수사학은 "간접적이고 정서적인 방법으로 청중에게 (대체로 진실이지만 종종 과장되고 이따금 허구인) 사건이나 원칙, 정책을 제시했"다.  52


수사학이 어떻게 수용되는가는 기술, 문화, 사회 내의 권력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비록 꾸준히 효과를 발휘하는 기법이 있지만, 그 자체로 성공을 보장하는 규칙은 없다. 그런 규칙을 정하려는 시도는 계급, 성별, 인종 같은 전제에 오염될 수밖에 없다. 이런 까닭에 수사학에 대한 -또한 수사학이 왜 논란이 되는지에 대한- 연구는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좋은 출발점이다. 한 사회의 논증은 그 사회가 무엇을 중요시하는가를 드러내며, 사회가 논의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53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수사술은 당면한 상황에서 기회를 찾는 것이지 맥락을 무시하고 연설 자체를 위해 문채를 조합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포괄적 체계가 아니라 기본적 연장이다. 이 연장이 있으면 다른 연설가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고 자신이 시도하려는 것의 본보기를 얻을 수 있다.  58


웅변술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보통 세 갈래로 나눈다.

첫째는 사법적 연설(법정을 비롯한 법적 상화에서 벌어진다), 둘째는 제시적 연설(찬양하거나 비난한다), 셋째는 토론적 연설(투표자나 입법권자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설득한다)이다.  58-59


모든 연설을 장르별로 정확하게 분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각각의 연설에서 사법적, 제시적, 토론적 요소를 찾아보아야 한다.  62


흔히 수사학에서 다섯 가지 규범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1) 발상(invention/discovery), 

(2) 배열(arrangement),

(3) 표현(style),

(4) 기억(memory),

(5) 발표(delivery)다.

이것은 수사학을 다섯 가지 요소로 나눈 것으로, 연설의 장르와 무관하게 적용된다.  62


발상은 상황에 알맞은 논증을 떠올리는 과정으로, 그러려면 청중의 성격을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

연설 주제에 논란이 있을 경우는, 진짜로 문제가 되는 사안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것도 발상 단계에 포함된다. ...

스타시스(stasis, 쟁점)라는 기법은 연설가가 자신의 믿음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수 있는 문제를 발상 과정에서 찾아내기 위해 스스로 던지는 표준적 질문이다.  62-64


'배열'은 연설의 순서를 매기는 것이다. ...

논증의 구조는 설득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도입부의 목적은 키케로의 말을 빌리자면 "청중의 정신을 연설의 나머지 부분을 받아들이기에 알맞은 조건으로" 바꾸는 것, 달리 말하자면 청중의 주목을 끌고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

수사적 구조를 분석할 때는 늘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구절은 왜 저기가 아니고 여기에 있을까? 어떤 효과를 의도햇을까? 연설을 더 효과적으로 배열할 수는 없었을까?  65-66


'표현'은 언어와 관계가 있다. ...

수사적 표현은 언뜻 피상적 현상으로 보이지만, 이에 대한 논증은 정치적, 사회적, 민족적 갈등을 미묘하게 자극할 수있다.  66-67


'기억'

고전기 수사학 교육에는 기억술 훈련법이 포함되었다. 그중 하나는 연설의 요소(각 부분의 실마리가 되는 상징)들을 집안의 각 방에 넣어두어 시각화하는 것이다.  68



사법적 연설이든 제시적 연설이든 토론적 연설이든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대락적으로 각각 성품, 감정, 논리에 해당한다)에 호소해야 한다.  71


세 요소의 경계선은 흐리거나 애매할 수 있다. "저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에토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파토스) 자신에게도 최선일 것입니다(로고스)"처럼 하나의 문장으로 둘 이상의 효과를 거두는 방법도 있다.  72


분석의 한 차원은 이른바 수사학의 '거시적' 문제에 관심을 둔다. 어떤 성격의 연설인가? 어떻게 구성되고 표현되는가? 이성, 감정, 성품 중 무엇에 호소하는가? 하지만 연설가의 전체 목표를 절에서 절로, 문장에서 문장으로 진행시키는 (또는 지연시키는) 미시적 기법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75-76


수사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세 가지를 꼽아보라는 물음에 데모스테네스는 첫번째도 발표, 두번째도 발표, 세번째도 발표라고 대답했다.  78


단어든, 소리든, 구든, 문장이든, 생각이든 반복은 필수적인 수사학 전략이다. 다음의 옛 격언은 메시지 전달의 핵심을 짚고 있다. "무엇을 말할 것인지 말하고, 말하고, 무엇을 말했는지 말하라."  80


연설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할 것인지, 했는지를 청중에게 곧잘 이야기한다. 이것을 '메타담화(meta-discourse)'라 하며, 말이나 글에서 "제가 주장하려는 바는 ..."이라거나 "제가 입증한 것처럼..."이라는 문구로 논의 대상을 설명하는 것을 일컫는다.  80


역언ㄴ법(paralipsis)은 어떤 사안을 짐짓 건너뛰는 척하여 오히려 주의를 끄는 수법이다. 이를테면 "상대토존자의 음주 문제는 굳이 언급할 필요를 못 느끼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81


수사학을 분석할 때 "모든 청중이 알거나 믿는다고 연사가 가정하는(또는 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85


'수사학의 발판'을 이해하는 것은 수사법을 구사할 때든 분석할 때든 매우 유용하다. 언어 선택을 의식적으로 성찰하면 수사학의 설득력을 키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상투적 생각 패턴의 무분별한 반복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수사학을 고안하거나 해독하는 바법의 공식 같은 것은 없다.  91


수사적 분석의 한 가지 목표는 말을 '해독'하여 그 속에 새겨진 의미를 드러내는것이 아니라 주어진 맥락에서 특정한 진술이나 상징의 사회적 의미를 간파하는 것이다.  97




20세기에, 수사학이 쇠퇴하고 심지어 경멸당하기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많은 이론가들이 '신수사학(new rhetoric)'을 제안했다. ..

사회학의 새로운 분야들에서 (부분적으로) 얻은 새로운 지식을 통해 수사학을 확대하고 재평가하고 다시 활성화하려는 욕망의 발현이었다.  114-115


수사학 이론에 큰 영향을 끼친 학자 케네스 버크 또한 (관점이 약간 다르기는 했지만) 담화가 합리적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했다. "옛 수사학의 핵심어는 '설득'이었으며 옛 수사학이 강조한 것은 의도적 계획이었다. '새' 수사학의 핵심어는 '동일시'일 것이며 여기에는 연설의 호소력에 담긴 부분적으로 '무의식적'인 요인이 포함될 수 있다."  115-116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으나, 무언가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를 강하게 느낀다. 버크는 "사람들이 서로 분리되지 않았으면 수사학에서 통일을 내세울 필요도 없을 것이다"라고 설명햇다.  116



수사적 분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첫째, 무엇을 분석할지 정해야 한다.

어떤 자료를 연구할지 대충이라도 정했다면 질적 접근법과 양적 접근법 중에서 무엇을 위주로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121-124


수사적 분석을 계획하고 있다면 우선 짧은 현대 연설뭉을 꼼꼼히 읽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다(현대 연설문은 진본 여부가 문제되지 않는다). 맨 처음 할 일은 토론적, 사법적, 제시적 요소를 찾는 것이다. 그다음에는 각 부분이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중 무어셍 어떻게 호소하는지 살펴본다. 중의성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심사의 예를 찾는다. 문채를 찾고, 연사의 메시지가 문채를 통해 어떻게 전개되는지-또는 방해되는지-분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짜 쟁점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이를테면 평범하게 위장한 온건한 표현이 실은 외집단의 가치를 공격하는 것일 수 있다. 자신의 분석을 뒷받침하는 다른 근거(이를테면 연설문 초고, 사진, 일기, 신문 등)가 없는지 알아본다. 이 자료들을 어떻게 배열하여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명심할 것은, 이런 과체에서 결정적인 '정답'은 없을지라도 (적어도) 설득력 있는 답을 찾을 수는 있는 것이다.  127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지금도 형편없는 싸구려 수사가 난무한다. 조금만 노력하면 군계일학이 되기는 어렵지 않다. 적당한 속도로 명료하게 말하면 삼절문과 대조법을 구사하기도 전에 좌중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다. ...

무엇보다 중요한 첫걸음은 진짜 사안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한편, 수사학의 이해는 다른 면에서도 도움이 된다. 수사학 기법을 알면 논증의 타당성을 평가할 수 있으며 그럴듯하지만 오류인 주장에 현혹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주장을 맞받아칠 수도 있다.  169-170


수사학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고안되는 경우가 많지만 단순히 사회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변화를 추동하는 원동력이다.  173


수사학은 스스로의 토대를 허물 운명을 타고났으며, 새로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한다. 수사적 과정은 창조적 파괴의 영구 순환이다.  174




역자후기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수사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사상이나 감정 따위를 효과적, 미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문장과 언어의 사용법을 연구하는 학문."  180


수사학은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생각을 생성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수사학은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바라보는 태도에 중대한 영향들 끼친"다. 이점에서 말하기 연습은 곧 생각하기 연습이기도 하다.  180-181


민주주의는 대화를 통한 합의를 바탕으로 삼는다. 우리는 설득하고 설득당하면서 합의에 도달하고 그 합의를 존중한다. 수사학을 동원하지 않고 합의를 도출하겠다는 것은 독단이다. 수사학은 상대방의 견해에도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는 열린 태도다. 수사학은 민주주의의 토대다.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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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은 ..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인간의 자유와 사회의 정의를 파괴한다고 믿었고, 모든 유형의 집단주의와 전체주의를 악으로 규정했습니다.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글 쓰는 이유를 네 가지로 나누었는데요. 뜻은 그대로 전하되 표현은 제 취향에 맞게 바꾸어 보겠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욕망입니다. 

둘째는 의미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학적 열정'입니다. 자신이 보고 느낀 세상의 아름다움을 글로 표현하고 싶어 하며,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험을 글에 담아 타인과 나누려고 한다는 것이죠. 

셋째는 역사에 무엇인가 남기려는 충동입니다. 자기가 발견한 사실과 진실을 기록해 후세에 남기려고 하는 욕구는 영원한 것에 대한 갈망과 관계가 있습니다. 

넷째는 정치적인 목적입니다. 여기서 정치적인 목적이란 '세상을 더 좋게 바꾸는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입니다.  17-18


사람은 무엇을 글로 쓸까요? 

우리는 내면에 지닌 생각과 감정을 글로 씁니다.  39


글쓰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답게 글을 쓸 수 있습니다.  42


글 쓰는 사람은 관념에 속박당하기 쉽습니다.  44


글 쓰는 사람이 미학적 열정을 자유롭게 발현하려면 어떤 도그마에도 예속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믿기 때문에 저는 어떤 '주의'가 아니라 '옳은 것'과 '선한 것', 그리고 '아름다운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직관의 힘에 의지합니다.  50-52


예술적으로 쓰고 싶다면 자유롭게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정해진 도그마보다 자기 자신의 눈과 생각, 마음과 감정을 믿는 게 현명합니다.  60


저는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문제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글을 씁니다.  65


'완벽하고 치열한 무플'로 대응하는 것이 저의 '민간요법'입니다. 악플러와 싸우지 마십시오. 달래려 하지도 마십시오. 눈길을 주지 마십시오. 극복하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싸울 가치가 없고, 달랠 수 없으며, 눈길을 줄 이유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으니까요. 'X무시'가 최선의 대처법입니다.

악플은 그 대상이 된 사람의 잘못이 아니며 그 사람이 해결해야 할 문제도 아닙니다. 악플을 쓴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남루하며 황폐한지 보여 주는 증거일 뿐이에요.  74


악플 다는 사람을 미워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나쁜 사람만 악플을 다는 게 아니니까요. 다른 사람 처지에서 생각해 보는 태도가 없으면 악하지 않은 사람도 악플을 답니다. 해결해야 할 갈등이 있는데도 소통이 잘 되지 않아 감정이 격해질 때도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악플은 소통을 가로막는 원인인 동시에 소통이 막혀서 생긴 결과이기도 합니다.  82


우리는 남들이 주는 것을 안 받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마음도 살펴서 받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83


비정상적인 악플과 정상적인 비판 글을 구별하는 기준은 근거가 있는지 여부 하나뿐입니다.

표현이 거칠고 어조가 아무리 격렬하다고 해도 일정한 근거를 제시하면서 어떤 주장을 한다면 악플이 아닙니다.  88


틀린 주장이라고 해서 악플이 되는 건 아니에요...

우리는 절대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알려고 노력할 뿐이지요.  89


말이 도무지 통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제 대답은 내버려 두라는 겁니다. ...

사람은 스스로 바꾸고 싶을 때만 생각을 바꿉니다.  95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요? 대화하는 것뿐입니다. 강요하지 말고, 바꾸려 하지 말고, 이기려고 하지 말고, 무시하지도 말고, 그 사람의 견해는 그것대로 존중하면서 그와는 다른 견해를 말과 글로 이야기하면 됩니다.  96


말로든 글로든, 싸워서 이기려고 하지는 맙시다.  97


상대방이 토론하다 말고 화를 내면 한발 물러서는 게 좋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논리적으로 흔들린다는 증거입니다.  98


소수의 사악함보다 다수의 어리석음이 사회악을 부르는 때가 더 많습니다.  101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좋게 바꾸려면 우리 자신이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덜 어리석어져야 합니다.  102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대답할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대답할 수 있습니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대답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다운 글을 쓸 수 있으니까요.

나는 누구인가? 이름을 묻는 게 아닙니다. '나'라는 철학적 자아의 특성이 무엇인지 묻는 겁니다. 인간 일반의 본성 위에 그 어떤 '자기만의 것'을 세웠는지 말하라는 것이죠.  106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한다고 해서 정체성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잇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 것 아닌 게 많거든요. 내가 가진 생각과 감정, 세계관과 인생관은 모두 내가 오감을 동원해서 스스로 경험하고 깨달은 것인가? 자문(自問 스스로자 물을문)해 보면 아니란 것을 바로 알게 됩니다. 우리들 각자의 정신세계에는 문명이 생긴 후 수천 년 동안 철학자와 과학자, 지식인들이 창조한 지식과 정보와 이론의 조각들이 무수히 박혀 있습니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이것을 '문화유전자(밈, memo)'라고 했습니다.  106-107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인문학의 중심을 꿰뚫는 질문입니다. 제대로 살아가려면 끊임없이 내가 누구인지 물어야 하고,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어떤 대답을 찾아야 합니다.  108


쓰고 싶고 또 의미도 있다 싶은 주제를 찾으면 관련 자료를 읽으면서 글을 구상합니다. 초고는 빠른 속도로 씁니다. 문장의 멋보다는 내용을 채우는 데 초점을 두고 쓰기 때문에 초고의 상태가 좋을 리 없죠. 초고가 다 되면 그때부터는 횟집 주방장이 칼을 벼리는 것처럼 내용과 문장을 다음어 나갑니다.  130


베스트셀러 글을 쓰려면... 문장 쓰는 기술이 첫 번째 조건입니다. 좋은 문장으로 표현한 생각과 감정이 훌륭해야 합니다. 두 번째 조건입니다. ...

세 번째 요소는 감정 이입입니다. 독자가 쉽게 이해하고 깊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도록 써야 한다는 것이죠.  131-132


글로 타인의 공감을 일으키려면 쓰는 사람이 독자에게 감정을 이입해야 합니다. 자신이 쓴 글을 타인의 눈으로 살펴보면서 읽는 이가 쉽고 명확하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지 점검해 보는 것이죠.  135


독자가 깊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도록 글을 쓰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그렇게 쓰려는 의지, 둘째는 그렇게 쓸 수 있는 능력입니다.  137


감정 이입을 하기 좋게 글을 쓰는 능력에 대해서 말해 보겠습니다. 일반적 원리는 저도 모릅니다. 제가 쓰는 방법을 말씀드릴 테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텍스트 자체만 읽어도 뜻을 알 수 있도록 씁니다.

둘째, 텍스트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데 필요한 콘텍스트를 텍스트 안에 심어 둡니다.  140-141


길든 짧든, 텍스트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콘텍스트(context)를 파악해야 합니다.

콘텍스트는 텍스트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환경, 배경, 조건, 사실, 관계, 맥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콘텍스트를 '문맥'이라 옮기는 분들도 있는데 문맥은 의미가 너무 좁습니다. 텍스트와 쌍을 이루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여기서는 콘텍스트라는 말을 그대로 쓰기로 하겠습니다.

글은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문자 텍스트입니다. 그런데 독자는 나와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내가 쓴 텍스트를 나와 똑같이 해석한다는 보장이 전혀 없습니다. 내가 글에 담은 생각과 감정을 독자도 똑같이 읽어 가도록 하려면 그에 필요한 콘텍스트를 함께 담아야 합니다. 글쓴이가 독자에게 해석의 자유를 무제한 허용하는 문학 글쓰기라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겠지만, 정보 교환과 소통, 공감을 목표로 하는 생활 글쓰기와 논리 글쓰기라면 그렇게 써야만 제대로 메시지를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42-143


마크 트웨인의 말로는 딱 맞는 표현과 대충 어울리는 표현은 반딧불과 번개만큼 차이가 크다니까, 퇴고는 정말 중요한 작업이에요.  151


책을 많이 읽는 데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단 한 권을 읽더라도 책 속으로 젖어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남이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이해하지도 못할 책, 읽어도 공감이 일어나지 않는 책을 굳이 붙들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161-162


독자가 이해하기 어렵고 공감할 수 없는 책은 올라갈 길이 없는 산과 같습니다. 아무리 대단하고 아름다워도 소용이 없습니다. 길이 있다고 해도 너무 크고 높은 산은 오르기 어렵습니다. 히말라야 봉우리를 아무나 오를 수는 없어요.  162


'배우는 책 읽기'를 넘어 '느끼는 책 읽기'에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169


중요한 문장을 남의 글에서 통째로 가져온 경우에 인용 표시를 하는 정도면 충분해요. 각주나 후주로 출처를 밝히는 것이죠. 원문 그대로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자료를 요약해서 한 문장이나 한 단락을 썼을 때는 참고한 자료가 무엇인지 밝혀 두는 게 좋습니다.  182


<국가란 무엇인가>는 제 자신이 국가의 본질과 진화 과정을 알고 싶어서 공부하면서 썼죠. 국회도서관에서 국가론 관련 책을 검색해서 100권 넘게 빌렸습니다. 하나씩 읽으면서 흥미로운 대목마다 색종이를 붙여 표시했어요. 하나라도 색종이가 붙은 책은 따로 추려서 표시한 대목들을 발췌했습니다. 발췌한 인용문을 큰 주제로 나누어 관련성이 있는 것끼리 묶은 다음 작은 주제로 또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책의 목차를 만들었고, 엮어 놓은 인용문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제 생각을 보태 본문을 썼지요.  192-193


사람 따라 책 따라 자료를 찾고 활용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뚜렷한 목표와 방향을 정하고 써야 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어떤 글을 쓰든, 자료를 찾기 전에 먼저 질문을 만들어야 합니다. 질문을 잘 만들면 글은 이미 절반은 완성한 거나 다름없어요.  194


비평다운 비평은 아래 네 가지 조건을 갖추면 된다고 저는 생각.

1) 무엇에 관한 글인지 주제가 분명하다.

2) 필요한 정보를 적절한 논리적 맥락으로 말이 되게 엮었다. 

3) 주제와 무관한 것을 끌어들이거나 엉뚱한 곳으로 가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했다.

4) 꼭 맞는 단어와 표현, 자연스럽고 쉬운 문장으로 주장을 명확하게 전달했다.  205-206


저는 서평이라면 두 가지를 반드시 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에 대한 '객관적 정보'와 비평하는 사람의 '주관적 해석'입니다.

서평은 책 자체를 정확하게 소개해야 합니다. 누가 무엇에 관해 쓴 책이며 그 특성은 어떠한지, 책에 대한 핵심 정보를 제공해야 합니다.  216


일단 어떤 책인지 최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소개해야 읽는 이가 관심을 갖게 됩니다.

서평은 또한 책을 읽은 소감, 해석, 평가를 담아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책 소개일 뿐 서평은 아닙니다.  218


글을 잘 쓰려면 문장 쓰는 기술, 글로 표현할 정보, 지식, 논리, 생각, 감정 등의 내용, 그리고 독자의 감정 이입을 끌어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어느 것이 제일 중요할까요? 독자의 감정 이입을 끌어내는 능력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글쓰는 기술은 외모입니다. 롱다니, 브이라인, 에스라인, 빨래판 복근 같은 것이죠. 내용은 사람이 가진 것이에요. 체력, 돈, 재능, 지식입니다. 감정 이입 능력은 성격, 마음씨, 인생관이라고 할 수 있죠. 사람들은 흔히 외모를 부러워하고 돈과 지식을 선망하지만 행복한 삶을 사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성격과 마음씨와 인생관입니다.  231


일상적으로 쓰는 글은 무엇보다 '유머코드'를 살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면 자신부터 행복해야 합니다.  232


거듭 말씀드리지만 글쓰기는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자기표현은 강제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표현하고 싶어야 잘 표현할 수 있습니다.  250




정훈이의 '표현의 기술'


어릴 때부터 저는 놀이를 통해 상상훈련을 했습니다. 습관적으로 말이죠.  279


상상은 무한한 자유를 누린다는 거 다들 동의하실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적 통념으로 자기검열을 하면서 스스로 그 자유를 억압합니다.

자랄 때 늘 듣던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해라.'처럼 현실적인 생각이 상상을 억압하기도 합니다.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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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은 논리적 글쓰기 일반론이다...

논리적인 글은 구조와 특성이 모두 같다.  11


두려움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글쓰기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12


생각과 느낌을 소리로 표현하면 말이 되고 문자로 표현하면 글이 된다. 생각이 곧 말이고, 말이 곧 글이다. 생각과 감정, 말과 글은 하나로 얽혀 있다. 그렇지만 근본은 생각이다. 논증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여주는 글을 쓰고 싶다면 무엇보다 생각을 바르고 정확하게 해야 한다. 논리 글쓰기를 잘하려면 먼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18


논증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려면 꼭 지켜야 하는 규칙 세 가지를 먼저 소개하겠다.

첫째, 취향 고백과 주장을 구별한다.

둘째, 주장은 반드시 논증한다.

셋째,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한다.  19


논리학이나 수학에는 공리(公理 공변될공 다스릴리, axiom)라는 것이 있다. 증명하지 않고도 참이라고 인정하는 명제가 공리다. 유클리드기하학의 평행선 공리가 널리 알려진 사례다. 글을 쓸 때는 사실을 수학의 공리처럼 대해야 한다. 증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사실로 인정받지 못한 주장은 반드시 그 타당성을 논증해야 한다. 사실과 주장을 엄격하게 구별하고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27


논증 없는 주장으로는 타인의 생각과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설득과 공감은 고사하고 기본적 소통과 교감도 하기 어렵다.  ...

우리는 오랜 세월 논증 없는 주장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 살았다. 사실과 논리에 입각해 합리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목소리 크고 힘센 쪽이 이기는 현실에 익숙하다. ...

부모들은 꼬박꼬박 어른한테 말대꾸한다며 논리적인 주장을 펴는 자녀를 혼냈다. 교사와 교수는 질문하는 학생을 귀찮게 여기거나 구박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 논리적인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다.  31-32



글을 쓸 때는 주제에 집중해야 한다...

이 규칙을 지키려면 무엇보다 주관적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자기의 감저엥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제어하고 관리할 수는 있다.  37


냉정한 태도로 글을 써야 한다. 자기 자신의 감정까지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해야 한다.

말과 글로 논증하고 토론할 때 지켜야 할 규칙을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그 규칙을 지키면서 글을 쓰는 것은 훨씬 어렵다.  45


글쓰기를 하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텍스트 발췌 요약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61


글쓰기에는 철칙(鐵則 쇠철 법칙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많이 읽어야 잘 쓸 수 있다. 책을 많이 읽어도 글을 잘 쓰지 못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많이 읽지 않고도 잘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많이 쓸수록 더 잘 쓰게 된다. 축구나 수영이 그런 것처럼 글도 근육이 있어야 쓴다. 글쓰기 근육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쓰는 것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그래서 '철칙'이다.  62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거의 100% 발췌 요약'이었다. ...

어떤 텍스트를 요약하려면 가장 중요한 정보를 담은 부분을 먼저 가려내야 한다. 효과적으로 요약하려면 정확하게 발췌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63


내가 남의 말을 경청하고 바르게 이해해야, 남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남들이 잘 이해하고 공감하는 글을 쓰고 싶다면, 내가 먼저 남이 쓴 글을 이해하고 공감할 줄 알아야 한다.  65


논리글.. 우선 쉽게 읽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반박하거나 동의할 근거가 있는 글이어야 한다. 

이렇게 글을 쓰려면 네 가지에 유념해야 한다.

첫째,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주제가 분명해야 한다.

둘째, 그 주제를 다루는 데 꼭 필요한 사실과 중요한 정보를 담아야 한다.

셋째, 그 사실과 정보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분명하게 나타내야 한다.

넷째, 주제와 정보와 논리를 적절한 어휘와 문장으로 표현해야 한다.  74-75


어떻게 하면 훌륭한 글을 쓸 수 있을까? 

첫째는 텍스트 독해, 둘째는 텍스트 요약, 셋째는 사유와 토론이다.  77


논리적인 글을 잘 쓰려면 주제와 관련되어 있는 중요한 사실과 정보를 최대한 많이 그리고 정확하게 알아야 하며, 그것을 적절한 논리적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78


글은 지식과 철학을 자랑하려고 쓰는게 아니다. 내면을 표현하고 타인과 교감하려고 쓰는 것이다.  91


독해력과 언어 구사 능력을 기르려면 책 읽기를 즐겨야 한다. 책에서 우리는 지식을 얻는다. 일상생활의 범위에서 벗어나 추상적, 논리적 사유를 하는 데 필요한 개념을 익히며, 여러 개념을 연결하는 논리적 상관관계를 배운다. 하지만 독서도 억지로 하면 좋지 않다.  123


독해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텍스트는 내용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문제점과 한계까지 탐색하면서 읽어야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면 그 문제점과 한계가 어디서 왔는지도 추론해볼 수 있다.  132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글로 쓰라고 하면 더 어려워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견해를 세우는 데 꼭 필요한 개념과 어휘를 몰라서 그런 경우가 많다. 뭘 몰라서 말도 못 하고 글도 못 쓰는 것이다. '침묵은 금'이라는 격언이 늘 타당한 것은 아니다. 적절한 때 꼭 필요한 말만 하려고 일부러 침묵을 지키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지만 뭘 몰라서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무는 것은 그렇지 않다. 모든 침묵을 다 금으로 대접하면 무지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135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책을 고르는 기준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인간, 사회, 문화, 역사, 생명, 자연, 우주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개념과 지식을 담은 책이다. 이러한 책을 읽어야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지시고가 어휘를 배울 수 있으며 독해력을 빠르게 개선할 수 있다.

둘째는 정확하고 바른 문장을 구사한 책이다. 이런 책을 읽어야 자기의 생각을 효과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문장 구사 능력을 키울 수 있다. 한국인이 쓴 것이든 외국 도서를 번역한 것이든 다르지 않다.

셋째는 지적 긴장과 흥미를 일으키는 책이다. 이런 책이라야 즐겁게 읽을 수 있고 논리의 힘과 멋을 느낄 수 있다. 좋은 문장에 훌륭한 내용이 담긴 책을 즐거운 마음으로 읽으면 지식과 어휘와 문장과 논리 구사 능력을 한꺼번에 얻게 된다.  136-137


논리적 글쓰기를 하려면 추상적 개념을 담은 어휘를 많이 알고 명료한 문장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추상적 개념을 익히려면 문학작품만이 아니라 인문학과 자연과학 교양서도 많이 읽어야 한다.  140


훌륭한 글을 쓰고 싶다면 훌륭하게 쓰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못난 글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  168


잘 쓴 글은 말하듯 자연스러운 글이다.  195


글은 단문이 좋다..

길어도 주어와 술어가 하나씩만 있으면 단문이다. 문장 하나에 뜻을 하나만 담으면 저절로 단문이 된다.  199


단문이 복문보다 훌륭하거나 아름다워서 단문을 쓰라는 것이 아니다. 뜻을 분명하게 전하는 데 편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문은 복문보다 쓰기가 쉽다. 주술 관계가 하나뿐이어서 문장이 꼬일 위험이 없다.  202


단문 쓰기만큼 중요한 것이 어휘 선택이다. ..

어휘가 부족하면 같은 단어와 표현을 반복해서 쓸 수밖에 없다.  204


무엇보다 뜻이 두루뭉수리 불분명해서 아무 곳에나 넣어도 되는 단어는 쓰지 말아야 한다.  205


딱 맞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면 아무 데나 넣어도 대충 뜻이 통할 것 같은 단어라도 넣어야 한다. 어휘를 많이 알아도 정확한 언어로 생각하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으면 그럴 수 있다.  209


글을 쓰면서 그때그때 딱 맞는 단어와 표현을 찾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니다. 뜻은 비슷한데 느낌이 다른 말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똑같은 단어도 다른 말과 어울리면 조금은 다른 맛과 색을 낸다. 이런 것을 뭉뚱그려 '어감(語感 말씀어 느낄감)', 외래어로는 '뉘앙스(nuance);라고 한다. 토박이말로 표현하자면 '말의 맛' '색깔' '분위기' '결' '무늬' 정도가 되겠다.  210


'모양'은 겉으로 보는 생김새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뜻이 있는 단어는 '모양' 말고도 많다. '모습' '자태' '꼴' '꼬락서니' '몰골' 같은 말이다. 느낌이 좋은 순서로 배열하면 자태-모습-모양-꼴-꼬락서니-몰골이 된다. 이 여섯 단어를 잘 어울리는 다른 단어와 묶어보자. 천사처럼 고운 자태, 사나이다운 모습, 여러 가지 모양, 지저분한 꼴, 한심한 꼬락서니, 비참만 몰골, 이렇게 된다. 서로 무늬가 잘 어울리는 또는 궁합이 맞는 조합이다. 이렇게 어울리는 단어를 조합해 뜻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좋은 문장이 된다.  210-211


우리는 어휘의 무늬 또는 뉘앙스를 특별히 배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말을 익힐 때 문장 안에서 단어를 익혔기 때문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현을 만나면 저절로 어색한 느낌을 받는다. 어색하게 들리는 말은 사람들이 쓰지 않는 말이다. 그런 말은 나도 쓰지 않는게 현명하다.  211-212


스물일곱 살부터 서른 살이 될 때까지 2년 남짓, 나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글을 썼다. 작은 스프링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뇌리를 스치는 모든 생각을 적으려고 노력했다. 완전한 문장을 만들지는 않고 중요한 단어만 적었다. 나중에 메모를 보면서 그때 생각했던 것을 재생했다.  224


티끌은 모아봐야 티끌이라는 우스개가 있다. 하지만 글쓰기는 그렇지 않다. 글쓰기는 티끌 모아 태산이 맞다. 하루 30분 정도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수첩에 글을 쓴다고 생각해보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매주 엿새를 그렇게 하면 180분, 세 시간이 된다. 한 달이면 열 두 시간이다. 1년을 하면 150시간이 넘는다. 이렇게 3년을 하면 초등학생 수준에서 대학생 수준으로 글솜씨가 좋아진다.  228


글쓰기 훈련을 하는 사람은 분량을 엄격하게 정해두고 글을 쓰는 게 좋다. 그렇게 해야 압축의 미학과 경제적 효율성을 갖춘 글을 연습할 수 있다.  234


짧은 글을 쓰려면 정보와 논리를 압축하는 법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압축 기술은 두 가지다.

첫째, 문장을 되도록 짧고 간단하게 쓴다.

둘째, 군더더기를 없앤다.  236


글을 압축하려면 단문을 기본으로 하고 특별한 경우에 복문을 쓴다는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뜻과 느낌을 강하고 확실하고 깊게 전하려면 복문을 써야 한다는 판단이 들때만 복문을 쓰는 것이다. 간단한 원칙이지만 해보면 금방 효과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군더더기를 없애는 것이다. 문장의 군더더기란 무엇이며 군더더기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간단하다. 없애버려도 뜻을 전하는 데 큰 지장이 없으면 군더더기다. 문장의 군더더기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접속사(문장부사), 둘째는 관형사와 부사, 셋째는 여러 단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관형어나 부사어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문장 성분이다.  237


부사와 관형사도 적게 쓸수록 좋다. 이미 완성된 문장이라도 반드시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문장 요소가 있으면 과감하게 빼야 한다.  239


내 글이 왜 쉬울까?

어려운 용어를 쓰고 복잡한 문제를 다루어도 독자가 쉽다고 느낄 수 있도록 써서 그런 것이다. 나는 주제에 대해 특별한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살마도 주의 깊게 읽기만 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끔 텍스트를 쓴다. ...

다른 정보가 없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텍스트를 쓰려면 철저하게 독자를 존중해야 한다.  244



우리는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로 인생을 채운다. 내면에 잇는 생각, 감정, 욕망을 제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삶이 답답해진다. 각자의 내면에 무엇이 있으며 또 어떻게 그것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  257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행위다. 표현할 내면이 거칠고 황폐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글을 써서 인정받고 존중받고 존경받고 싶다면 그에 어울리는 내면을 가져야 한다. 그런 내면을 가지려면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

글은 온몸으로, 삶 전체로 쓰는 것이다.  260


사람은 무엇인가 표현할 것이 있으면 글을 쓰고 싶어진다. 내면에 어떤 가치 있는 것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글로 표현해 타인의 마음을 움직인다.  263


써야 해서 쓰는 글을 잘 쓰려고 노력하면 쓰고 싶어 쓰는 글도 잘 쓸 수 있으며 그 역(逆 거스를역)도 성립한다.

기술만으로는 훌륭한 글을 쓰지 못한다. 글 쓰는 방법으ㄹ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내면에 표현할 가치가 있는 생각과 감정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훌륭한 생각을 하고 사람다운 감정을 느끼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그런 삶과 어울리는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무엇이 내게 이로운지 생각하기에 앞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해야 한다. 때로는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264


자기를 표현하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생각과 감정을, 욕망과 충동을, 기대와 소망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표현해서 타인과 교감할 때 우리는 기쁨과 성취감을 느낀다.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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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년에 루뱅 대학 불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가 된 조제프 자코토는 어떤 지적 모험을 했다.  9


스승이 해야 할 가장 중차대한 일이란 학생들에게 자기가 가진 지식을 전달함으로써 그들을 스승이 가진 학식의 수준만큼 차츰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르친다는 것은) 잘 짜인 점진적 순서에 따라 가장 간단한 것에서 가장 복잡한 것으로 정신을 이끌고 가면서 그 정신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13


누구도 자신이 이해한 것 말고는 정녕 알지 못한다.  15


[옮긴이] 이 책에는 교육과 관련된 표현들이 여럿 사용된다. 주로 나오는 동사들 중 일부를 굳이 구분하자면 enseigner는 '가르치다'를, insruire는 '깨우치다'를, eduquer는 '교육하다'를, former는 '길러내다'를 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동사들의 명사형인 enseignement은 '가르침 및 교육'으로, instruction은 '지도'로, education은 '교육'으로, formation은 '양성'으로 옮겼다. 그밖에 pedagogic는 '교육학이나 교수법'으로 옮겼다.  15


설명자가 가진 체계의 노닐를 뒤집어야 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바로잡기 위해 설명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 무능력이란 설명자의 세계관이 지어내는 허구이다...

교육자의 행위이기에 앞서, 설명은 교육학이 만든 신화다. 그것은 유식한 정신과 무지한 정신, 성숙한 정신과 미숙한 정신,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 똑똑한 자와 바보같은 자로 분할되어 있는 세계의 우화인 것이다.  19


교육학의 신화는 지능을 둘로 분할한다. 열등한 지능이 있고 우월한 지능이 있다. 

열등한 지능은 지각을 무작위로 등록하고, 기억해두고, 해석하고, 습관과 욕구의 좁은 고리 안에서 경험을 통해 되풀이한다. 이것이 어린아이와 보통 사람이 가진 지능이다. 

우월한 지능은 사물들을 이성으로 인식한다. 그것은 방법에 따라,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부분에서 전체로 나아간다. 우월한 지능을 가졌기 때문에 스승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학생의 지적 능력에 맞추어 전달할 수 있고, 또 학생이 배운 것을 잘 이해했는지 검증할 수 있다. 이것이 설명의 원리다. 

이것은 자코토가 말하는 바보 만들기(abrutissement)의 원리가 될 것이다.  20


바보를 만드는 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지식을 학생의 머릿속에 주입하는 늙어빠진 둔한 스승이 아니다...

반대로 그는 유식할수록, 눈이 뜨였을수록, 선의를 가졌을수록 더 효과가 있다. 유식하면 유식할수록, 그가 아는 것과 무지한 자들의 무지 사이의 거리는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무엇보다 학생은 이해해야 한다. 그러려면 사람들이 그 학생에게 항상 더 잘 설명해주어야 한다. 눈이 뜨인 교육자의 고민은 이런 것이다. 꼬마가 이해할까? 이해 못 하지. 그에게 설명해줄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지. 원리에서 더 엄밀하면서도 형식에서 더 관심을 끄는 그런 방식을. 그리고 아이가 이해했는지 검증해 보아야지...

이 이해하다라는 슬로건이 바로 모든 악의 근원이다. 그 단어 때문에 이성의 운동은 멈추고, 이성에 대한 신뢰는 파괴된다...

이해시키는 방식의 모든 개선(방법론자들과 개선론자들의 이 위대한 근심)은 바보 만들기의 진보가 된다.  21-22


조제프 자코토는 생각했다. 모든 추론은 사실에서 출발해야 하고, 사실에 따라야 한다고....

그의 학생들이 설명의 도움 없이도 프랑스어로 말하고 쓰는 것을 스스로 익혔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23


평등의 방법은 먼저 의지의 방법이다. 사람은 배우고자 할 때 자기 자신의 욕망의 긴장이나 상황의 강제 덕분에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도 혼자 배울 수 있다.  29


스승과 학생 사이에는 의지와 의지의 관계만 성립되었다.  30


인간, 특히 아이는 자신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의지가 충분히 강하지 않을 때 스스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예속(sujetion)은 순전히 한 의지가 다른 의지에 예속되는 것이다. 예속이 하나의 지능과 다른 지능을 연결할 때 그것은 바보 만들기가 된다.  31


빠른 길이라고 해서 가장 좋은 교육의 길인 것은 아니었다. ...

가르치는/배우는 행위는 다양하게 조합되는 네 가지 한정을 따라 산출될 수 있다. 해방하는 스승이냐 아니면 바보로 만드는 스승이냐. 유식한 스승이냐 아니면 무지한 스승이냐.  32


[옮긴이]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의 뜻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무지한 스승은 학생에게 가르칠 것을 '알지 못하는 스승'이다. 둘째, 무지한 스승은 어떤 앎도 전달하지 않으면서 다른 앎의 원인이 되는 스승이다. 셋째, 무지한 스승은 불평등을 축소하는 수단들을 조정한다고 여겨지는 불평등에 대한 앎을 '모르는 스승'이다.  32-33


학생을 해방한다면, 다시 말해 학생이 그의 고유한 지능을 쓰도록 강제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 

지능은 스스로에게 필연적으로 되어야지만 그 고리에서 빠져나가게 될 것이다. 무지한자를 해방하기 위해서는 본인 스스로 해방되어야만 하고, 또 그렇게 되기만 하면 된다. 즉 인간 정신의 진정한 힘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34


Age quod agis, 즉 네가 하는 것을 계속하라.

[옮긴이] "보편적 가르침은 모두가 하는 것, 우리가 날마다 하는 것, Age quod agis에 기초한다고 나는 내 제자에게 말한다. 오늘, 내일, 늘 네가 시작했을 때처럼 너의 교육을 계속하라. 네가 이날까지 따라온 절차에 따라 네 언어 공부를 완수하라. 그것을 바꾸지 마라. 너는 네가 알고 있는 문법의 기초들에서 [그 언어를] 배웠던 것이 아니다. 시간 낭비하지 마라. 네가 혼자 익힐 수 있는 것을 너에게 가르쳐주겠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마라. 그들은 너를 지연시킬 테니까."  36

그는 상호 지도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각각의 무지한 자가 다른 무지한 자에게 스승이 될 수 있는 것 말이다. ..

자코토에게 문제는 해방이었다. ...

해방하지 않고 가르치는 자는 바보를 만든다. 그리고 해방하는 자는 해방된 자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걱정할 일이 없다. 해방된 자는 그가 원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39


[옮긴이] 자코토는 보편적 가르침이 '개인'을 지적으로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즉 우리는 혼자서만 해방될 수 있다.  40


가난하고 무지한 가장도 스스로 해방되기만 하면 설명해주는 어떤 스승의 도움 없이도 가지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옮긴이] 해방된 가장 - 자코토는 가르치는 자 자신이 먼저 해방되는 것을 보편적 가르침의 '필요조건'으로 본다.  41




"가르침을 받은 모든 사람은 반쪽 인간일 뿐이다."  50


지적 능력의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적 능력의] 본성상의 평등을 의식하는 것이 바로 해방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것이 앎의 나라로 가는 모든 여행길을 연다.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더 잘 배우거나 못 배우거나, 더 빨리 배우거나 더 늦게 배우거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61


"옛날 방식은 문자들부터 시작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 방법은 지적 불평등의 원리에 따라, 더구나 아이들이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원리에 따라 학생들을 지도하기 때문이다. 구식은 문자가 단어보다 더 구별하기 쉽다고 믿는다. 이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결국 구식은 그렇게 믿는다. 구식은 아이 같은 지능이 C, A, CA를 배우기에 알맞을 뿐, 칼립소를 배우려면 어른의 지능, 다시 말해 우등한 지능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62


불평등의 원리, 낡은 원리는 무슨 수를 쓰건 바보로 만든다.  63


우리가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 것, 이는 다만 우리가 모르는것 전체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학식도 필요치 않다. 무지한 자는 무엇이든 물을 수 있다.  67


무지한 자는 더 적게하는 동시에 더 많이 할 것이다. 그는 학생이 찾아낸 것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구한 것을 검증할 것이다.

사람이기만 하면 [학생이] 공부한 것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옮긴이] 무지한 자는 학생이 작업한 결과를 검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적게' 하지만, 학생이 들인 수고와 주의를 검증하고, 나아가 지능의 평등을 입증하기 때문에 '더 많이' 한다.  68


한 명의 무지한 자가 한 번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무지한 자들이 언제나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무지에는 위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지한 자들과 유식한 자들이 모두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우리가 지적 존재의 힘이라고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평등의 힘은 이원성의 힘인 동시에 공통성의 힘이다. 하나의 정신과 다른 정신의 엉김, 묶음이 있는 곳에는 지능이 없다. 각자 행위하고, 자신이 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신의 행위의 실제성을 입증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곳에 지능이 있다. 두 지능 사이에 위치한 공통된 것/사물은 이 평등을 보증하는 보증물이다. 그것은 이중의 명목으로 그러하다. 물질적인 것/사물은 먼저 "두 정신을 소통하게 해주는 유일한 다리"다. 다리는 통로이며, 또한 유지된 거리다. 책의 물질성은 두 정신에 똑같이 거리를 둔다. 하지만 설명은 한 정신으로 다른 정신을 무화시킨다.  70


타인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해방되어야 한다. 모든 다른 여행자와 비슷하게 정신의 여행자로서, 지적인 존재들의 공통된 역량에 참여하는 지적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73


해방이란 모든 인간이 자기가 가진 지적 주체로서의 본성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데카르트의 정식을 거꾸로 뒤집은 평등의 정식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곤 햇다. 이 대철학자의 훌륭한 생각은 보편적 가르침의 원리 중 하나다. 우리는 그의 생각을 뒤집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이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이 뒤집기는 인간 주체를 코기토(나는 생각한다)의 평등 안에 포함시킨다. 생각은 사유 실체가 가지 ㄴ한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속성이다. "너 자신을 알라"를 모든 인간 존재의 해방 원리로 변형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의 금지에 맞서 <크라틸로스>의 환상적인 어원 중 하나를 가지고 장난을 펴야 한다. 인간, 즉 anthropos는 자신이 본 것을 검토하는 존재, 자신의 행위를 헤아리는 가운데 자신을 아는 존재다. 보편적 가르침의 모든 실천은 다음의 질문으로 요약된다. 너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보편적 가르침의 모든 힘은 그 실천이 스승에게서 실현되는 해방, 학생에게서 생겨나는 해방을 의식하는 데 있다.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앎으로써, 다시 말해 자신이 그것의 주체가 되는 지적 행위들을 검토함으로써, 그가 자신의 행위 속에서 사유하는 존재의 힘을 쓰는 방식에 주목함으로써 시작한다면 자기 자식을 해방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 의식은 먼저 무지한 자가 가진 지적 실력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다. 무지한 자는 자신의 언어를 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상태에 맞서 항의하기 위해서나 자신의 상태를 알거나 그보다 더 많이 안다고 믿는 자들에게 질문하기 위해 그 언어를 쓸 줄 안다. 그는 자신의 직업, 자신의 도구, 그 도구의 사용법을 안다. 그는 필요할 때 그것들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능력들에 대해 반성하고, 그가 그 능력들을 획득한 방식에 대해 반성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 반서에 대해 정확히 따져보자. 손과 인민의 앎들, 도구와 노동자의 지능을 학교의 학식이나 엘리트의 수사학과 맞세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누가 성문이 일곱 개인 테베를 건설했는지 묻고, 사회 질서에서 건축가와 생산자가 받아야 할 자리를 주장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다. 반대로, 두 가지 지능은 없음을 인정하고, 인간의 기술이 들어간 모든 작품은 동일한 지적 잠재성이 실행된 결과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도처에서 관찰하고, 비교하고, 조합하고, 만들고, 또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도처에서 이 반성이, 이 자기로 되돌아가기가 가능하다. 반성이란 사유 실체가 하는 순수한 숙고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지적 행위에, 자기가 그리는 길에, 그리고 새로운 영토들을 정복하는 데 동일한 지능을 쏟아부으면서 그 길로 항상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에 무조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노동자의 손 그리고 [사회를] 먹여 살리는 인민이 빚어낸 작품을 수사의 구름들과 맞세우는 자는 바보로 남는다. 구름 제조는 더도 덜도 말고 딱 신발과 자물쇠 제조만큼의 일과 지적인 주의를 요구하는 인간 기술의 작품이다. 아카데미 회원인 레르미니에 씨는 인민의 지적 무능력에 대해 논한다. 레르미니에 씨는 바보다. 그러나 바보는 멍청이나 게으름뱅이가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가 쓴 논고에서 나무, 돌, 가죽을 변형하는 사람들이 가진 것과 같은 기술, 같은 지능, 같은 일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우리도 똑같이 바보가 된다. 오로지 레르미니에 씨가 한 일을 인정해야지만 우리는 가장 보잘것없는 자들이 빚어낸 작품 속에 발현된 지능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르노블 부근에 사는 시골 빈민들은 장갑을 만드는 일을 한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장갑 12켤레에 30수(=1.5프랑)를 지불한다. 빈민들은 해방되고 나서 잘 만들어진 장갑을 보고, 공부하고, 이해하는 데 몰두한다. 그들은 이 장갑의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짐작할 것이다. 그들은 결국 12켤레에 7프랑을 버는 도시 여자들만큼 잘 말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가위, 바늘, 실을 가지고 말하는 언어를 배우는 것만이 중요하다. (인간 사회에서는) 언어를 이해하고 말하는 것만이 문제다."

언어의 물질적 관념성은 황금의 자손과 철의 자손 사이의 모든 대립을 반박하며, 손으로 일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들과 사유를 발휘하기로 운면 지어진 사람들 사이의 모든 위계 - 설령 그 위계가 뒤집어진다 하더라도 - 를 반박한다. 언어로 빚은 모든 작품은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고 실행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지한 자는 자신을 알게 된 뒤부터 그가 읽을 줄 모르는 책에서 자기 자식이 한 탐구를 검증할 수 있다. 무지한 자는 그의 자식이 무슨 교과를 공부하는 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자식이 어떻게 하는지 알아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또 그는 자식에게 한 가지만 주문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구할 때 도구를 이리저리 돌려보는 것처럼 자식더러 단어와 문장을 이리저리 돌려보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77-81


자기 자식의 의지를 강제함으로써 가난한 가장은 그의 자식이 그와 같은 지능을 가졌고, 그와 마찬가지로 구하고 있음을 검증한다.  82


해방은 평등에 대한 의식이다...

인민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지도 부족이 아니라 인민의 지능이 열등하다는 믿음이다.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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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고 가. 내가 줄 수 있는 건 커피뿐이야.

한 잔 커피에 담긴 위로의 양은 평등하지만 그걸 마시는 사람들의 상처는 결코 똑같지 않지. 

창작은 외로움이잖아. 그 외로움은 깊게 패인 상처를 남기는 법.

커피 한 잔으로 예술가들의 상처에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어.



God Shot! : 창작에 영감을 주거나 삶의 변화를 일으킬 만한 극적인 커피 한 잔.



에스프레소의 진정한 매력은 입안에 감도는 향극한 향기와 달콤한 여운에 있고 그런 에스프레소 한잔을 마시고 나면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를 나눈 것과 같은 기분이 든다. 



카페도 손님과 궁합이 있다.

집하고 가깝다는 등의 자잘한 이유일 수도 있겠으나 여하튼 그 카페여야 했던 이유가 있었을 거야.



화는 커피 내리는 일에 도움이 안 돼.

화난 상태에서 내린 커피를 손님한테 내놓을 순 없어.



보온병 커피는 언젠가 식는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보온병에 실망할 것이 아니라 마시기 좋은 온도의 커피를 다시 채워 넣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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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글은 1993년 6월 10일 ~ 1994년 6월 11일까지 <라 폴라 지 상파울루>에 연재한 글들 중에서 선별한 것이다.  12-13




실패들로 이루어진 비디오테이프만 본다면, 우리는 계속 무력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성공한 경험들로 이루어진 비디오테이프만 본다면, 자신이 실제보다 더 지혜롭다고 믿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성공과 실패에 대한 두 가지 비디오테이프가 다 필요하다.  19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면, 열심히 한 뒤 결과를 감내해야 한다. 우리는 결과가 어떨지 미리 알 수 없다.  24


제자가 스승에게 말했다. "저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생각하고, 바라지 말아야 할 것들을 바라고, 세우지 말아야 할 계획들을 세우며 보냅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집 뒤의 숲을 산책하자고 제안했다. 스승은 도중에 풀 한 포기를 제자에게 가리키며 그 풀의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다.

제자가 대답했다.

"벨라돈나입니다. 그 잎사귀를 먹으면 목숨을 잃게 되지요."

"그렇다. 하지만 그냥 보기만 하면 목숨을 잃지 않지. 마찬가지로 네가 나쁜 욕망에 유혹받지 않는다면, 그 욕망은 너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한단다."  33


스승이 제자에게 말했다.

"네가 탐색의 길을 떠나면 길 초입에 어떤 글이 쓰인 문 하나가 있을 것이다. 돌아와서 그 문에 뭐라고 쓰여 있었는지 말해다오."

제자는 길을 떠났고, 마침내 그 문을 발견했다. 그는 길을 되짚어 스승에게 와서 말했다.

"길 초입에 '들어가지 마시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스승이 물었다.

"그 글이 어디에 쓰여 있었느냐? 벽에 쓰여 있었는냐, 문에 쓰여 있었느냐?"

"문에 쓰여 있었습니다."

"그러면 손잡이를 잡고 그 문을 열어라."

제자는 스승님 말대로 했다. 문이 돌아가자, 문에 적힌 글도 함께 돌아갔다. 문이 완전히 열린 뒤에는 그 글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제자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41


늙은 은자가 당대에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의 궁정에 초대받았다. 왕이 은자에게 말했다. 

"나는 적은 것으로도 만족하며 사는 당신이 부럽소."

"저는 저보다도 적은 것으로 만족하며 사시는 전하가 부럽습니다."

왕이 기분이 상해서 외쳤다.

"이 나라가 다 내 것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이오?"

늙은 은자가 대답했다. 

"저는 세상의 음악을 갖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강과 산을 갖고 있습니다. 달과 해를 갖고 있습니다. 제 마음속에 신이 계시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전하께서 가지신 것은 이 왕국뿐입니다."  55


일관되게 행동하려고 애쓰지 말라. 성 바울도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어리석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일관되게 행동한다는 것은 언제나 양말과 잘 어울리는 넥타이를 매는 것, 내일도 오늘과 같은 의견을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겠는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너희는 때때로 의견을 바꿀 수 있고, 부끄러움 없이 모순되는 말을 할 수도 있다. 너희는 그럴 권리가 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결국 자기 마음대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을 편히 가져라. 세상이 너희 주변에서 움직이도록 내버려두고, 스스로에게 놀라움을 느끼는 기쁨을 누려라.  65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살다 보면 여유를 가져야 할 때가 많다. 그러나 가끔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상황과 대면해야 한다. 그럴 때 행동을 나중으로 미루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78


여행자가 포트로더데일에서 변호사인 여자 친구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서 한 남자가 술에 취해 무척 흥분해서 똑같은 말을 시끄럽게 되뇌었다. 여자 친구가 그 남자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남자는 계속 고집을 부리며 이렇게 말했다. "왜 그러시죠? 나는 술 마시지 않은 남자라면 결코 하지 않을 방식으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내 기쁨을 보여주었고, 낯선 사람들과 의사소통도 시도했어요. 그게 뭐 잘못됐습니까?"

"때가 적절하지 않잖아요."

여자 친구가 대답했다.

"그럼 자신의 행복을 표현해도 좋은 때가 따로 있단 말입니까?"

이 말을 듣고 우리는 그 남자에게 우리 테이블에 합석하라고 청했다.  87


툴롱 포위 공격 때 청년 나폴레옹은 맹렬한 포격을 보고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그 모습을 본 어느 병사가 동료들에게 말했다. "저 친구 좀 봐. 무서워서 죽으려고 해!"

그 말을 듣고 나폴레옹이 말했다.

"맞아. 하지만 나는 계속 싸울 거야. 만약 너희들이 내가 느끼는 두려움을 절반이라도 느꼈다면 벌써 오래전에 도망쳐버렸을걸."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이 곧 비겁하다는 뜻은 아니다. 두려움은 어떤 상황에서 용감하고 위엄 있는 행동을 하게 해준다. 두려움을 느끼지만 주눅 들지 않고 전진하는 사람은 용감한 사람이다. 반대로 위험을 고려하지 않고 어려운 상황에 맞서는 사람은 무책임한 사람이다."  101


"삶에 투신하세요! 살아 있는 사람은 팔을 휘두르고, 펄쩍펄쩍 뛰고, 시끄럽게 소리 내고, 웃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삶은 죽음의 반대니까요. 죽는 것은 한곳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조용하다면 그건 살아 있는 게 아니죠."  102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잘 만들어진 단어들이 있다. '염려(preoccupation)'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보자. 이 단어는 'pre'와 'occupation'으로 나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 단어는 어떤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미리 걱정하는 것을 뜻한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해서 무엇 하겠느냐? 절대 걱정하지 마라. 걱정할 시간에 너의 운명과 네가 갈 길에 주의를 기울여라. 너에게 맡겨진 빛의 검을 잘 다루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을 배워라. 친구들, 스승들, 적들이 어떻게 분투하는지 잘 살펴보아라. 충분히 훈련해라. 그러나 적이 너에게 어떤 타격을 가할지 다 안다고 믿는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지 마라."  130


흔히들 사는 것이 어렵다고 하지만 사실은 매우 쉽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 된다. 그러면 절대 고통받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고, 실망하고, 꿈이 좌절되는 경험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해야 할 전화 통화,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 베풀어야 할 선행들에 관해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쉽게 살고 싶다면, 상아탑 안에 있는 척하고 결코 눈물 흘리지 않는 척하면 된다. 남은 생 동안 정해진 역할만 하면서 살면 된다. 

삶이 선사하는 좋은 것들을 전부 거부하면 된다. 그러면 사는 것이 무척 쉬워진다.  140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더 쉬울 때가 많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도움과 지지를 받아들이기를 주저한다. 독립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그들이 우리에게 사랑을 증명할 기회를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자식들이 어렸을 때 받은 애정과 지지를 돌려주려 하면 늙은 부모들은 한사코 거절한다. 가혹한 운명이 닥쳐왔을 때 많은 남편(또는 아내)들이 배우자에게 의존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그 결과 사랑의 강물이 흘러넘치지 못한다. 

우리는 이웃이 보내는 사랑의 몸짓을 받아들여야 한다. 누군가가 우리를 돕도록, 우리를 지지하도록, 계속 살아갈 힘을 우리에게 부여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 사랑을 받아들일 때, 사랑이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닌 동참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143


"지혜로운 사람은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민첩하게 대처해서 벗어난다."  161


여행자의 친구가 네팔의 어느 수도원에서 몇 주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날 오후, 그는 많은 사원들 중 한 곳으로 들어갔고, 웬 수도사가 제단 위에 앉아 빙긋이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친구가 수도사에게 물었다.

"왜 웃고 계십니까?"

"바나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수도사는 자루를 열어 썩어버린 바나나 한 개를 꺼내보이며 설명했다.

"이것은 적절한 순간에 붙잡지 못하고 흘려보낸 삶입니다. 붙잡기에는 너무 늦어버렸지요."

이윽고 수도사는 자루에서 아직 푸른빝을 띠고 있는 바나나 한 개를 꺼내 친구에게 보여주었다. 그런 다음 그것을 다시 자루에 집어넣은 뒤 덧붙여 말했다. 

"이것은 아직 오지 않은 삶입니다.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하지요."

마지막으로 수도사는 잘 익은 바나나 한 개를 꺼내 껍질을 벗겨 여행자의 친구와 나눠 먹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지금 이 순간입니다. 두려워 말고 이 순간을 사세요."  162-163


어떤 전통에서는 제자들이 일 년에 하루 또는 필요한 경우 일주일에 한 번 집에 있는 물건들을 정리한다. 물건들을 일일이 손으로 만지면서 "나에게 이 물건이 정말로 필요할까?"라고 큰 소리로 묻는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꺼내들고 "언젠가 내가 이 책을 다시 읽을까?"라고 묻는다.

간직해둔 기념품들을 찬찬히 살펴보며 "이 물건에 읽힌 기억이 내게 여전히 중요한가?"라고 묻는다. 옷장을 열고, "내가 이 옷을 입지 않은 지 얼마나 되었나? 이 옷이 나에게 정말로 필요한가?"라고 묻는다.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물건에는 고유한 에너지가 있다. 사용하지 않는 물건은 고인 물이 되어버리고, 그때부터 집은 곰팡이와 모기가 살기 좋은 곳이 된다.

물건들의 에너지가 자유롭게 발산되도록 해야 한다. 오래된 물건들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새로움이 차지할 공간이 없어진다."  166-167


한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박탈해도,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는 행복은 빼앗을 수 없다.  171


아프리카의 마법사가 견습생을 숲으로 데려갓다. 마법사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민첩하게 걸었지만, 견습생은 몇 번이나 미끄러지고 넘어졌다. 견습생은 저주 섞인 욕설을 내뱉은 뒤 일어나, 자신을 넘어지게 한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래도 스승을 계속 따라갔다. 오랫동안 걸은 뒤, 그들은 신성한 장소에 도착했다. 그러나 마법사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왔던 길을 곧바로 되짚어 갔다. 

또 한 번 넘어진 뒤, 견습생이 투덜대며 말했다. 

"오늘 스승님께서는 저에게 아무런 가르침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마법사가 대꾸했다.

"나는 너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네가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거겠지. 나는 인생을 살면서 저지르는 실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가르쳐주고 싶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데요?"

"네가 오늘 길을 걷다가 넘어졌을 때 어떻게 대처햇는지 떠올려보아라. 너는 넘어진 곳을 저주하는 대신, 네가 무엇 때문에 미끄러졌는지 찾아보아야 했다."  184-185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티포스는 시라쿠사의 압제자 디오니시오스의 궁정에서 권력자들에게 아첨을 했다. 어느 날 오후, 그는 디오게네스를 만났다. 디오게네스는 소박한 렌즈콩 요리를 만드는 중이었다. 아리스티포스가 말했다. "당신이 디오니시오스에게 가서 머리를 조아리면 렌즈콩 같은 것을 먹지 않아도 될 텐데."

그러나 디오게네스가 대꾸했다.

"당신이 렌즈콩을 먹는 것에 만족한다면 디오니시오스에게 가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아도 될 텐데."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리고 그 대가는 상대적이다. 꿈을 좇을 때 비참하고 불행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속의 기쁨이다."  187


덕이 넘쳐 보이는 사람은 허영심, 자만심, 아집을 감추고 있는 경우가 많다.  222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때때로 우리는 선한 일을 해놓고 부끄러워한다. 선한 일을 하면서도 마음속의 죄책감 때문에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 한다거나 신을 '현혹'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비웃음과 무관심 밑에 우리의 선한 행동들을 감춘다. 마치 사랑이 연약함과 동의어인 것처럼."  252-253


꽤나 효율적인 인성 훈련법이 있다. 평소 우리가 기계적으로 하는 행동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숨 쉬고, 눈을 깜박이고, 주변의 사물들을 보는 행동 말이다.  256


안토니오 마차도(에스파냐의 시인, 극작가)가 말했다.

"그때그때 한 걸음씩 가라, 

여행자여, 길은 없다. 길은 걸으면서 만들어진다. 길은 걸으면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 결코 다시 밟지 않을 오솔길이 보인다. 

여행자여, 그것은 길이 아니다. 길은 걸으면서 만들어진다."  264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써라! 편지를, 일기를, 아니면 전화 통화하면서 종이에 메모라고 해라. 어쨌든 써라! 쓰는 행위는 우리를 신 그리고 이웃과 가까워지게 한다. 이 세상에서 너희가 감당해야 할 역할을 잘 이해하고 싶다면 글을 써라.

아무도 그 글을 읽지 않는다 해도, 또는 너희가 비밀로 간직하려 한 글을 결국 누군가가 읽는다 해도, 글을 통해 너희의 영혼을 작동시키도록 애써라. 글을 쓰는 단순한 행위가 생각을 정리하고 주위의 일들을 명확히 파악하도록 도와준다. 종이 한 장과 펜 한 자루가 기적을 일으킨다. 그것은 고통을 치유해주고, 꿈을 실현해주고, 잃어버렸던 희망을 일깨워준다. 글에는 힘이 있다."  265


머릿속에 주입된 진지하고 합리적인 행동 방식을 조금은 포기해라. 겉으로는 하찮게 보일지 몰라도, 이런 시도가 인간적이고 영적인 엄청난 모험의 문을 너희에게 열어줄 수 있다.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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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자기와 마주하는 시간 


상담을 잘 견뎌낸 사람들은 삶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자기 자신에게 더 솔직해지고, 자신을 더 수용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덜 보게 되고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헛된 노력을 멈춘다.

어찌 보면 정신분석이란 자기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아는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여기 다섯 사람의 그러한 과정이 있다. 남편으로 인해 우울한 채영씨, 느닷없는 사고로 절망에 빠진 은철씨, 관계에 대한 집착으로 언제나 목마른 제니스. 주변사람들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 괴로워하는 미영씨,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고 낙담한 어느 성직자.  7


깊은 우울, 극심한 좌절, 사랑에 대한 집착, 타인을 향한 분노, 자신의 무가치함으로 인한 주눅 듦. 이 다섯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8




레슬러의 사랑


 - 관계란 손안에 든 물과 같다. 놓치지 않으려 주먹을 꼭 쥘수록 물은 더 빨리 손에서 빠져 나간다. 그렇게 관계를 잃고 나면 필사적으로 잡으려 했던 힘보다 더한 분노가 찾아온다. 그러나 사실 그 분노는 관계가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지 못한 자신을 향한 책망이다. 


관꼐의 경계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해야 할 분석가들도 종종 경계선 성격장애라는 명명에 한 인간의 모든 삶을 밀어 넣음으로써 또 다른 경계를 지어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16


처음의 조용하고도 서로에게 예의 바른 그 시기를 우리는 '신혼(Honeymoon period)'이라고 불렀다.  24


나는 내가 '정상'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34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제 전부를 주려고 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제 의도를 모르는 것 같아요.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요."(제니스)  39


내가 완전히 받아들여져 본 적이 있던가, 누군가 내게 100%를 주는 경험은 고사하고 아무런 사심 없이, 편견 없이, 의도 없이 온전하게 나를 받아들여준 사람이 있던가, 결국 나는 누군가의 목적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졌구나 하는 생각이요. 그러니 제겐 100%를 줄 기회도 없었던 거예요."(제니스)  39-40


정신분석적 이론에서는 초기 애착관계에서 형성된 불안정 애착, 양가감정형 애착을 경계선 성격장애의 주원인으로 설명한다.  43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계가 아니라 공간이 아닐까요? 경계는 오직 하나의 선이어서 바로 눈앞에 두고도 넘어갈 수 없게 하는 장벽, (투명한) 차단막입니다. 따라서 경계는 관계의 균열입니다. 하지만 관계 사이의 공간은 공명을 가능하게 하죠. 공간은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때로는 물리적인) 영역이고, 그것은 사생활의 존중이라는 방식으로, 또는 정서적 여유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적, 또는 특수한 환경으로서 공간의 제공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46


우리는 어떻게 관계의 공간을 마련할 것인가?  47


단정적인 말투는 갈등을 불러온다. 단정적인 태도 역시 갈등을 일으킨다.

자녀나 배우자나 친구들을 대하는 자신의 말투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지면 좋겠다.  47


그가 내게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그의 감정이 자유롭게 전해질 수 있도록 채근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가 내 기분대로 해주지 앟아도 나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을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상대가 내 뜻대로 해주지 않을 때, 사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자기 실망감 때문에 좌절한다. 그래서 좌절감을 느끼게 만든 그 사람을 증오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심리적 기제를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왜 화가 나는지 알지 못한다.  48


사실 증상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통로인 것이다.  49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경계선 성격장애는 완전한 사랑르 받지 못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사랑을 받지 못해 생겨난다고 말이다.  54





스스로를 없앤 청년


- 걸려 넘어진 돌을 딛고 일어서 오히려 디딤돌로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넘어지던 바로 그 순간에 어떤 실수를 했는가, 다시 잘 돌이켜본다. 실수에 대한 수치심을 무릅쓰고서라도.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많은 것들 중 잃어버린 그 하나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할 때가 너무나 많다.  60


'난 장애에 대해 아무런 편견도 없어.'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사실은 '난 장애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어'.'가 더 정확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86


그는 태어나서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에 소아마비를 앓았다.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으세요?"

"한 번도 달려본 적이 없어서 달린다는 것이 어떤 감각인지 알지 못해요. 그러니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죠."

달리는 감각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사람과 달리는 감각을 또렷이 기억하는 사람이 달리지 못할 때, 그 고통은 어느 쪽이 더 클까?  90

'내담자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그들이 진정으로 변해야겠다고 결심하게 하는 것이 어렵다.'

심지어 라캉은 "내담자들은 변화하기 위해 분석을 받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유지할 방법을 찾기 위해 분석가에게 온다."고까지 말한다.  103





구원받기를 원하는 여자


- 분노가 자신을 향할 때 우울이 된다. 우울한 사람은 사실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왜, 누구에게 분노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납득하지 못한다면 우울은 해결되지 않는다.



가족들은 자신들이 만든 과거의 고통에 매몰되어 있었다.  113


얼마나 많은 부부들이 사실은 애정 없이 사는지, 놀라울 일도 아니다.  117


처음에는 공감능력이 없는 남편들을 원망하다가 남편에게 없는 것을(공감능력) 달라고 징징대는 아내들에게 더 공감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120


"교활한 거죠. 채영  씨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교활하다고 느껴질 만큼 교묘하고 복잡합니다. 그렇게 복잡하게 얽어놓아야 자기 치부가 쉽게 드러나지 않으니까요."  131


화를 내는 궁극적인 목적은 화나게 한 이유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많은 사람들이 화에 대해 잘못된 생가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화를 내면 자신이 화난 이유가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화의 뜨거움만큼 화난 이유가 강력하게 전달될 것이라고 믿지만, 사실은 그 뜨거움만큼 상대의 방어벽도 강력해진다....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날것의 감정 그대로를 드러내기보다는 그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해낼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합시다.."  141


우리는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농담', 그런 건 없다. 농담이야말로 가식 없는 진심이다. 정신분석은 농담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그것만이 진심이라고 확정한다.  147





누락된 자의 슬픔 


- 외로움으로 인한 상처는 대화할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로부터도 말 걸어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체험에서 비롯된다.



남자 분석가들조차도 자신의 아내를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고, 친밀한 정서적 관계를 맺지 못해 발생하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을 가지고 있다.  197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경험을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괴로움의 원인으로 돌아가, 그 자리에 붙박여 있던 자기 자신을 만나고 미뤄왔던 삶의 과정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205


많은 사람들이 외롭다고 느낀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외로운 것이 아니라 심심한 것이다. 그 심심함이 반복되면 불만이 쌓인다. 그래서 남편에게, 자녀들에게 놀아달라고 요구한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좀 더 멀리 있는 관계를 찾는다. 친구나 이웃, 동호회 사람들과 만나 심심함을 달랜다. 그 순간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깊은 외로움은 이런 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그들과 아무리 수다를 떨어도 오히려 헛헛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외로움은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심심함과 외로움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외로움이란, 내가 말할 대상이 없는 데서 비롯된 상처가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도 말 걸어지는 대상이 아니라는 데서 비롯도니 것이고 했다. 말 걸어지는 대상이라는 것은, 존재감의 확인이다. 우리에게는 말 걸어주기를 진정 원하는 사람, 오직 한 사람, 또는 소수의 몇 명이 있다. 그들은 대체로 부모들이다. 그들의 말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수용적이어야 한다. 어루만지는 말이어야 한다. 그것이 최선이다.  217-218





마음이 가난한 자


-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가난이다. 가난을 가장 소중한 재산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신은 주저함 없이 그를 참된 아들로 삼을 것이다.



부모는 우리를 살리기도 하지만, 그들만큼 우리를 금지하고 명령하고 체벌하는 사람도 없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들을 생각해보라. "하지마!", "만지지 마!", "울지마!", "가만히 있어!", "뚝!", "혼난다!", "맞는다!", 납득할 수 없는 체벌을 누구로부터 가장 많이 받았는지 생각해보라.  222-223


사랑하지만 무엇을 주어야 할지 모르거나 자식에 대해 아예 고민을 하지 않기도 한다.  223


후회는 과거를 바꿀 수 없지만 미래를 실패로부터 구원한다. 그런 후회의 경험은 성찰로 승화된다. 하지만 상습적인 후회는 변화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다.  229


무의식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고 사는지 우리는 잘 인식하지 못한다.  252


우리는 대체로 가능하면 고통을 빨리 잘라내고 싶어 한다. 어떤 고통들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삶의 핵심과 관련된 고통일수록 단박에 잘라내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고통을 친구로 삼아야 한다.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의 삶이 불행하다는 반증이다. 고통을 없애려는 노력보다 고통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장악하고, 고통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마음의 품격이 고매한 사람일수록,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안다. 그들은 삶과 고통은 한 몸이라는 것을 알고 받아들인 이들이다.  264





맺음말 - 자신을 안다는 것


성찰이란, 어떤 상황이나 원칙에 자신의 삶과 경험을 대입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더 나은 자신으로 변화하기 위해, 어떤 배움을 얻기 위해 적극적인 사유 활동을 할 때 가능하다.  269


더 이상 교활해지지 말고, 자신에게 있는 그대로 솔직해져야 한다.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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