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의 웃음판

저자
정민 지음
출판사
사계절 | 2005-05-18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정민 교수가 한시에 나타난 네 계절의 정취를 유려한 문체로 엮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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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 기록 보기


한시로 읽는 사계절의 시정..
한시... 
학교다닐때나 보는 책이라 생각하였다.
그 당시 한시는 참 싫은 부분중의 하나였다. 
'내가 과연 이 책을 읽어 낼 수 있을까?' 생각하였다.
시작은 반신반의 하였으나.. 아주 재밌게 읽었다.
매우 재밌게 읽었다.. 아니 한시가 내 마음에서 느껴졌다고 할면 더 적절한 표현일까... 
내가 한시에게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었다 표현하는 것이 맞을까.. 
느낌이 달랐다.
공부를 하면서 일이되었을때는 느낌이란것이 존재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편하게 감정이 잡혔다...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낭속을 하고 있고, 감탄사를 자아내고 있었다.

평상시 감정이 메말랐다는 말을 자주 듣는 편인 내가 이 정도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참 새롭고도 즐거운 책 읽기 였다.
그 한시에 정민 교수의 해설까지 덧붙여져 있으니, 더욱 이해력을 풍부하게 해주었고, 더 깊이 감정이입을 해 볼 수 있었다.
감저이 북받친다는 표현을 사용하는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이 책을 읽고 '뭐 그정도까지는 아니다'라고 말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지극히 개인적으로 그만큼 좋았다.

속도의 전쟁에서 살아가는 현실에서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것에 영향을 받고 따라가고 있다.
매우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얻은것 보다더 큰 것들을 잃어버렸다.
그 중에 '여유, 풍류, 생각, 사유'..
이러한 것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쫓아가는것에서가 아니라 한 발정도는 떨어져 있어야 가능한 것들이다.

얼마전 윤종신씨가 '놀러와'라는 프로그램에서 한 말이 있다.
지금의 노래는 매체들의 속도에 따라 '추억'을 잃었다고 말하였다.
'예전에는 한 곡이 꽤나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가면서 노래에 얽히는 추억들과 기억들이 남아 있는데.. 지금은 금방 나와서 대체되다 보니 추억을 가지고 향수를 가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사회의 조종이든 아니든 .. 속도에 따라 가고 있다.
그러면서 '생각'을 잃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나에게 그것에서 한 발 물러서 풍류를 가져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한 해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참 좋은 책이었다.

Posted by WN1
,

논문식 글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내용이 들어있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렇게 느꼈다는 것이다.
저자는 조선후기, 그 중에도 정조 시대 유학자들에 대한 책을 꽤 내었었다.
그리고 이 책은 자신이 연구하고 종합 정리한 것을 엮은 것이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중간 결산이라고 한다.
저자의 책 중에 여러권을 읽었기에 이 책의 내용은 배경지식으로 도움이 되었다. 
18세기 조선에 중국에서 엄청난 서적들이 들어오고 사신행렬에 끼여 탐방한 사람들을 통해 많은 문물이 들어오고 경험하면서 이전의 조선 문화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그럼에도 문체반정으로 대표되는 전통을 지키는것, 나라의 근간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핍박을 당하였으나, 깨어있는 지식인들을 통해 여러가지 많은 쟁이들이 생겨나고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대략이라도 전반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당시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과 유사한 점이 많다. 다양한 책들을 통해 문물을 접할 수 있었는데 그렇기에 기준이 모호해져서 우왕좌왕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넘쳐 나는 정보들을 자신에 맞게 섭취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고집과 아집이 넘쳐 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올바름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도 깨어있는 사람들은 올바름을 잃지 않고, 취할것은 취하고 버릴것은 버렸으며, 지금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에 대한 인식도 나타내었다.
다양성과 독창성을 잃지 않으며 창조적인 생각과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를 바라보는 시각도 열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많은 것들이 오늘날과 비슷하다.
지금의 우리에게 무엇이 올바름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특히나 길거리에서 눈을 뜨게 된 장님의 우화는 저자도 여러번 강조한 것처럼 생각할 꺼리를 남겨주고 있었다.





서설
18세기 미친 바보들
18세기 조선에서는 갑자기 '벽(癖 적취 벽)' 예찬론이 쏟아져 나온다. 무언가에 미친다는 뜻의 '벽'.
박제가(1750-1805)는 "벽이 없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또 '치(癡 어리석을 치)', 즉 바보, 멍청이를 자처하고 나서는 경향도 생겨났다.
설치(雪癡), 치재(癡齋), 매치(梅癡), 간서치(看書癡), 석치(石癡) 등 치 자가 들어간 이름이나 호가 부쩍 많아지는 건 그 방영이다.  13
18세기의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한 힘은 정보화에 있다.  14
18세기에는 무언가에 단단히 미친 사람이 많았다. 이런 비 정상적인 몰두와 집착을 그들 스스로는 몹시 자랑스럽게 여겼다. 벽이 없는 인간과는 사귀지도 말라고 했고, 벽이 없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벽은 확실히 이 시기 지식인들을 특징짓는 중요한 코드였다. 
김덕형의 <백화보(百花譜)>에 박제가는 서문을 이렇게 썼다.
'독창적인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건 벽이 있는 사람만 가능하다. 아아! 저 벌벌 떨고 빌빌대며 천하의 큰일을 그르치면서도 스스로 지나친 병통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은 이 책을 보고 경계로 삼을진저.' 벽도 없이 무언가에 미칠 줄도 모르면서, 나는 저런 멍청이가 아니어서 참 다행이라고 기뻐하는 자들에게 이 책을 보고 부끄러운 줄 좀 알라고 일갈한 것이다.  22-23
이 시기에는 이렇듯 백과전서적 지식 경영이 크게 성행했다. 주체와 목표만 정해지면 이들은 모든 정보를 조직화하고 편집해냈다.  25
이런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 정보량의 폭발적 증가를 꼽지 않을 수 없다.  26
박지원이 들려주는 재맹아(再盲兒) 설화는 의미심장하다. 길 가다보니 웬 젊은이가 울고 섰다. 왜 우느냐고 물었다. 원래 어려서 장님이 되어 20년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갑자기 길 가다 눈이 떠졌다. 너무 기뻐 집으로 가려 하니 골목은 갈림길이 많고 대문은 다 같아 제 집을 못 찾아 운다고 했다. 처방은 이렇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장님은 기뻐하며 지팡이를 더듬어 문제없이 제집을 찾아갔다. 
너는 그저 장님 주제로 살란 말이 아니다. 한번 떠진 눈은 다시 감기지 않는다. 문제는 집에서 눈 뜨기 않고 도중에 눈 뜬 데 있다. 그래서 눈을 뜨는 순간 다시 눈이 멀고 말았다. 박지원의 생각에 눈 뜬 장님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었다. 눈만 뜨면 뭣 하는가? 정작 자아의 주체를 주체를 세울 수 없다면 눈을 뜬 기쁨은 새로운 비극의 시작일 뿐이다. 길 잃고 헤매지 않으려거든 도로 눈을 감아라. 본래의 시작일 뿐이다. 길 잃고 헤매지 않으려거든 도로 눈을 감아라.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 좌표축을 세워 출발하라. 확장된 세계, 혼돈스런 정보 앞에서 주체의 확립보다 절박한 건 없다. '나'없는 세계는 카오스일 뿐이다. 이 점은 인터넷 시대라고 다를 게 없다.  32
디드로가 <철학적 사고>에서 '사람들은 왜 정열에 대해 우호적으로 말하면 이성을 모욕하는 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을 위대하게 고양시킬 수 있는 건 위대한 정열뿐이다.'  52
박제가는 '세상에 무언가에 미치지 않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고 목청을 높였다.  53
 

18세기의 문화 개방과 조선 지식인의 세계화 대응
'무찌르자 오랑캐'의 북벌을 국시로 하던 세상에서 살다가 처음 북경에 도착한 조선의 젊은이들이 받은 문화적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사방으로 죽죽 뻗은 넓은 도로에 넘쳐나는 재화, 으리으리한 건축물들, 거리를 가득 메운 서점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할 정도로 쌓여 있는 서책들, 고딕식 서양 성당과 서구 과학기술 정보들까지 있었다. 그들이 직접 목격한 청나라는 애초에 조선이 무찌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이 목숨만큼이나 소중하게 지켜왔던 성현의 이념가치들이 청나라에서는 이미 철 지난 유행가였다. 북벌의 강고한 이데올로기는 어느 순간 북학(北學)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58
18세기의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한 힘은 정보화, 세계화에 있다. 문화의 개방과 소통에 따라 취급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61
갑작스레 밀려드어온 선진문물 앞에서 주체를 확립하여 제정신을 차리기는 어려웠다. 박지원은 '눈 뜬 장님'의 유명한 비유를 들어 문화종속에 따른 주체의 실종을 경고했다. 장님이 눈을 뜨는 건 좋은 일이지만 집에서 뜨지 않고 길 가는 도중에 뜨게 되면 오히려 제집을 잃고 길에서 울게 되니, 집을 찾아가려면 도로 눈을 감아야 한다고 했다.  62
18세기는 정보 자체가 아니라 정보의 질이 문제가 되는 시대였다. 
모든 지식이 새롭게 편집되고 재배열되었다.
18세기 새로운 지식 경영에 의한 저작들 주에는 한 작가 안에도 실학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 공존한다.
이들 저작을 관통하는 저술 원리는 한 가지다. 널려 있는 정보를 수집 배열해서 체계적이고 활용 가능한 지식으로 탈바꿈한다는 것.  63
토론과 돌려 읽기를 통해 정보를 확충하고 관점을 조정해나가는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65
모방은 어느새 창조의 에너지로 점화되었다.  74
중국의 학자들은 사신행차에 참여해 북경을 밟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중국의 아류가 아닌 좀더 조선적인 저작을 요구했다. 이들은 이 과정을 거쳐, 진정한 경쟁력은 중국의 모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의 독자성에서 나오는 것임을 점차 절감하였다.  76
자고나면 모든 것이 바뀌어 있는 이 문명사적 전환의 시대에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18세기 지식인들의 지식 경영에서 여전히 배울 것이 많고 반성할 점도 많다.
첫째, 18세기 지식인들은 정보가치의 우선순위를 바꿔 지식 경영의 중요성을 강화했다.
변화의 맥락을 읽어내는 정확한 안목이 중요하다. 바꿔야 할 것을 과감히 바꾸고 바꿔선 안 될 것을 지켜나가야 한다. 이 둘을 혼동할 때 변화는 곧 파국을 의미한다. 무조건 바꾸고 보자는 식의 변화 지상주의는 오히려 회복 불능의 상태로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  80
둘째, 18세기의 지식인들은 외국문화를 개방된 자세에서 주체적으로 수용했다.
중요한건 개방성이 아니라 주체성이다. 제대로 하고 나대로 하고 나름대로 해야지, 멋대로 하고 덩달아하고 따라해선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셋째, 18세기 지식인들은 그들이 경험했던 정보화사회에서 지식 경영의 다양한 모델을 실천적으로 제시했다.  81
틀을 세워 정보를 선별하고 토론과 적용을 거쳐 목표에 도달하는 이들의 작업 방식은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과정의 결과여야 한다.
넷째, 18세기 지식인들은 다양한 문하 콘텐츠를 개발하여 주체적 문화역량을 강화했다. 
세계화란 우리 것을 버려 남을 따르는 데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만의 색깔과 개성을 지닐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문화는 변화할 뿐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82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벽'과 '치' 추구 경향
'벽'과 '치'의 추구가 나타나는 점은 아주 흥미롭다. '벽'이나 '치'는 모두 병들어 기댄다는 뜻의 '녁(?)'자를 부수로 하는 글자이다. 이 밖에 의미의 '비(庇)' '비(?)' '고(痼)' 같은 어휘도 자주 사용되었다. '벽'은 의학적으론 오른쪽 갈비뼈 아래 비장(脾臟)에 나쁜 기운이 쌓여 있는 상태를 말한다. 
어떤 것에 대한 기호나 집착이 너무 지나쳐 이성적으로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병적인 상태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하였다.
전 시기까지 이 '벽'은 군자가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대상이었다.
벽이 '상지해기(喪志害己)' 즉 바른 뜻을 잃게 하여 마침내 몸을 해친다고 본 것이다. 이는 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경계하는 유가의 전통적인 '완물상지(玩物喪志)'의 논의와도 맥락을 같이한다.
그런데 이러한 벽에 대한 인식이 18세기에 이르면 일부이기는 해도 지식인들에게 타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없어서는 안 될 미덕으로 변모하게 된다.  92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처럼, 남이 미치지 못할 경지에 도달하려면 미치지 않고는 안 된다. 미쳐야 미친다. 미치려면[及] 미쳐라[狂]!
박제가는 <백화보서(百花譜序)>에서 '사람에게 벽이 없으면 쓸모없는 사람일 뿐이다. 대저 벽이란 글자는 '병(病)'이란 글자에서 나온 것이니, 지나친 데서 생긴 병이다. 그러나 홀로 걸어가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건 왕왕 벽이 있는 사람만이 능히 할 수 있다.'  93
정조의 사위였던 홍현주(1793-1865)는 <벽설증방군효량>에서 '벽이란 병이다. 어떤 물건이든 좋아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좋아함이 지나치면 '즐긴다[樂]'고 한다. 즐기은 사람이 있어 즐김이 지나치면 이를 '벽'이라고 한다.'
미친 듯 몰두하여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는 몰입의 상태를 말한다.  95
홀로 걸어가는 정신이란, 남들이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출세에 보탬이 되든 말든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정신이다 이리저리 재고, 이것저것 따지기만 해서는 어느 한 분야의 특출한 전문가가 될 수 없다. 그것을 가능케하는 힘이 바로 멱이다.  97
홍현주의 <벽설증방군효량>의 뒷부분에서 '내가 평소에 달리 좋아하는 바가 없지만, 오직 그림에 대해서는 벽이 있다. 옛 그림으로 마음에 차는 것을 한번이라도 보면, 비록 화폭이 온전치 않고 장정이 망가졌더라도 반드시 비쌍 값에 이를 구입하여, 목숨처럼 애호하였다. 아무개가 좋은 그림을 지녔다는 말을 들으면 문득 심력을 다해서 반드시 찾아가 눈으로 보고 마음에 녹여, 아침 내내 보고도 피곤한 줄 모르고, 밤을 새우고도 지칠 줄 모르며, 밥 먹는 것도 잊고 배고픈 줄도 알지 못하니, 심하도다 나의 벽이여! 앞서 말한 부스럼 딱지를 즐기거나 냄새를 쫓아다니는 자와 흡사한 부류라 하겠다.'  99
'치'에 대해서는 남경의(南景義)가 <치암설(癡庵說)>에서 정확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치라는 것은 멍청함이 좀 심한 것이다. 멍청함은 교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래서 전(傳)에서는 '비록 어리석어도 반드시 현명해질 것'이라고 햇고, 영무자의 어리석음을 두고 성인께서도 스스로 미칠 수가 없다고 여기셨다. 그렇지만 '치'같은 것은 사라에게 고칠 수 없는 고질이 된다. 그래서 그 글자가 '질(疾)' 자에서 나왔다. 어리석음이 심한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감히 망령되이 '치'란 이름을 얹지 못한다. 대개 세속에서 서로 욕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치'란 상식적으로 볼 때 어리석은 정도가 지나쳐 바보로 보이는 상태다. '벽'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 사람의 눈에는 그들의 상태가 '치'로 밖에 보이지 않늗다.  100-101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자의식 변모와 그 방향성
문화환경의 변화는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이 시기 지식인들의 읫기을 강렬하게 지배한 변화의 축은 크게 세 방향으로 나타난다. 
첫째, '도(道)'를 추구하던 가치 지향이 '진실'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들은 변치 않을 도에 대한 맹복적 신뢰를 거두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눈앞의 진실에 더 큰 관심을 쏟았다. 변치 않을 진리란 것이 존재한다는 걸 그들은 회의했다. 
둘째, '옛날'로 향하던 가치 지향이 '지금'으로 선회했다. 추구해야 할 이상적 가치가 과거에 있다고 믿었던 퇴행적 역사관은 이제 힘을 잃었다. 대신 그 자리에 지금 눈앞의 세계를 중시하는 진보적 역사 인식이 자리 잡앗다. 지금과 무관한 어떤 옛날도 무의미하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셋째, '저기'에 대한 관심이 '여기'를 향한 관심으로 바뀌었다. 즉 중국을 기준으로 삼던 사고가 조선 중심의 사고로 변모한다. 이러한 변화는 겉으로 보아 사소하지만 그 으미는 크다.
가치관의 이러한 변화는 개인적인 문제제기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의 전반적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 결과, '그때 저기'의 '도'를 추구하던 이전의 가치관은 '지금 여기'의 '진실'을 추구하는 새로운 가치관과 갈등을 빚었다. 사람들의 의식은 빠르게 변모해간 반면 제도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더 보수화되어 갔다. 제도는 변모된 의식을 포용할 여유가 없었고, 지식인들은 변화를 포용하지 못하는 제도의 억압을 답답해했다.  111-112
당시 청나라로부터 물밀 듯 쏟아져 들어오던 신문물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길 가다 눈 뜬 장님과도 같은 혼란을 부추겼다. 아예 눈을 감아 외면해버리거나, 눈을 크게 뜨고 휩쓸려버리거나 하는 건 어느 것도 문제의 바른 해결 방법일 수 없다. 눈을 뜬 것이 장님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백배 낫다. 하지만 그것이 겆잡을 수 없는 자기정체성의 혼란을 수반한다면 문제는 다르다. 여기서 자기정체성 또는 주체성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한 자세와 위치의 확보가 요구된다.  115
이러한 가치관의 혼돈 상황을 박지원은 <낭환집서>에서 다른 비유로 이어간다. 임제(林悌)가 술에 취해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나왔다. 하인이 그 사실을 지적하자, 그는 큰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길 오른편에서 나를 본 사람은 내가 가죽신을 신었다고 할 터이고, 길 왼편에서 본 사람은 내가 나막신을 신었다고 할 터이고, 길 왼편에서 본 사람은 내가 나막신을 신었다고 할 터이니 무엇이 문제인가?" 그냥 걸어가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을 짝짝이 신발이, 말 위에 올라타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결과, 역설적으로 그 사람의 짝짝이 신발은 달리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
당시는 저마다 자기가 본 것만을 진실로 여기는 상황이라고 박지원은 생각했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둘 다 틀렸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는데, 그 중간 지점에는 아무도 서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눈 뜬 장님은 길에서 울고 있고, 짝짝이 신을 신은 취객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활보하는 혼란스런 상황이 펼쳐진다.  116
박지원은 <녹천관집서>에서 제자 이서구와의 문답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이씨의 아들 낙서(洛瑞)가 나이 열여섯인데, 나를 좇아 배운지 여러 해이다. 심령이 맑게 열려 지혜가 구슬 같다. 한번은 자신의 <녹천고(綠天稿)>를 가지고 와 내게 물었다.  "아! 제가 글 지은 지 겨우 몇 해이지만 남의 노여움을 산 적이 많습니다 한 마디 말만 새롭고 한 글자만 이상해도 문득 '옛날에도 이런 것이 있었느냐?'하고 묻습니다. 아니라고 하면 낯빛을 발끈하여 '어찌 감히 이 따위를 하는 게야?' 합니다. 아아! 옛날에도 있었다면 제가 무엇하러 다시 합니까? 원컨대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십시오."
내가 두 손을 이마에 얹고 무릎 꿇고 세 번 절하며 말했다. 
"네 말이 참으로 옳다. 끊어진 학문을 일으킬 수 있겠구나. 창힐(蒼頡)이 처음 글자를 만들 때 어떤 옛날을 모방했던가? 안연(顔淵)은 배우기를 좋아했지만 유독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진실로 옛것을 좋아하는 자로 하여금, 창힐이 글자 만들 때를 생각하면서 안자(顔子)가 비처 펴지 못했던 뜻을 짓게 한다면 글이 비로소 바르게 될 것이다. 네 나이 아직 어리니, 남이 성 내거든 '배움이 넓지 못해 미처 옛것을 살피지 못했습니다.'라고 공정히 사과하거라. 그런데도 힐문하기를 그치지 않고 성냄을 풀지 않거든 조심스레 이렇게 대답하여라. '<서경(書經)>의 은고(殷誥)와 주아(周雅)는 삼대(三代) 적의 당시 글이고, 이사(李斯)와 왕츼지도 진(秦)나라와 진(晋)나라의 시속(時俗) 글씨였습니다'라고 말이다."  122-123
<서경>은 성현이 남긴 경전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건 그 문체의 난삽함이나 필치의 난해함이 아니라, 그 당시엔 백성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문장이요, 편한 글씨였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지금 내가 쓰는 글이 후대에 기림을 받으려면, 난삽한 옛 문체를 흉내 내지 말고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지금 여기의 정서를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124
가짜 나를 버리고 참 나로 돌아오는 과정은 결국 '나만의 나'를 추구하는 개성론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이덕무는 흔해빠진 '명숙(明叔)'이란 자를 '무관(懋官)'으로 바꾸면서 개명의 변을 이렇게 적었다.
'내 나이 16세 때 관례를 치르고 명숙을 자(字)로 하였으니, 명숙이란 자로 살아온 것이 12년이다. 하지만 자라는 건 본디 남과 나를 구별할 수 있어야지 서로 뒤섞여서는 안 되고, 하나뿐이어야지 서로 갈라져서는 안 된다. 같으면 혼동되고, 혼동되면 기피하게 되고, 기피하게 되면 갈라지게 마련이다. 옛날의 명현은 말할 것도 없고, 지위가 높은 재상, 늘 맞상대하는 벗들, 지위가 낮은 아전이나 백성 등 열 집 사는 마을이나 한 무리가 모인 곳에 명숙이란 자를 가진 사람이 너무도 많다. 한번은 과거 시험장에 들어갔는데 명숙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길래 불현듯 대답했더니 나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 거리를 자니는데 명숙이라고 부르는 자가 있어 언뜻 돌아보면 나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 혹 여러 번 불러도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더니 이번에는 진짜로 나를 부른 것이었다. 대답해도 잘못되고, 대답하지 않아도 또한 잘못되니, 그 어디에 구별하여 서로 뒤섞이지 않음이 있겠는가?'  126-127
남종현(1783~1840)은 자신의 호를 버리겠다고 선언하는 글을 남겼다. <거호서(去號序)>이다. '배움은 나를 위한 것이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알고 모르고는 남에게 달린 것이지만 부끄럽고 부끄럽지 않고는 내게 달린 문제다. 나는 내가 나를 닦아 부끄러움이 없고자 하는 사람이다. 어찌 세상 사람들처럼 간악하고 위선적이 ㄴ짓을 하여, 속으로는 마음에 부끄러우면서도 남이 알지 못하는 것만 다행으로 여기는 자이겠는가?'
이름을 바꾸는 것이나 이름을 버리는 것이나 모두 '남들의 나'가 아닌 '나만의 나'를 추구하겠다는 다짐에서 나온 행동이다.  129
정약용은 "나는 조선 사람이니, 즐겨 조선의 시를 짓겠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햇다. 박지원은 또 내 시를 읽은 사람이 내 시에서 조선 사람만의 체취와 풍습을 볼수 없다면 그런 글을 쓰나 마나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가짜 나를 버리고 참 나를 찾겠다는 추구가, 이 시기 작가들에게 '지금 여기'의 현실에 눈을 돌리게 했다.'
다만 그들은 여전히 소수였고, 기득권을 쥔 계층의 폭력적 억압은 여전히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 시기 지식인들의 담론에서 유난히 우정의 문제가 강조되는 건 이 때문이다.  131

18,19세기 문인 지식인층의 통변 인식과 그 경로
도(道)가 아닌 진(眞)을, 고(古)가 아닌 금(今)을 , 피(彼)가 아닌 아(我)를 문학이 담아야 할 가치로 내세우는 주장이 보편적 설득력을 얻었다.  134
홍양호(1724~1802)가 <계고당기(稽古堂記)>에서 '옛날은 그때의 지금이요, 지금은 후세의 옛날이다. 옛날이 옛날로 되는 건 연대를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다. 대개 말로는 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 만약 옛것만 귀하다 하여 지금 것을 천히 여기는 것은 도리를 아는 말이 아니다. 세상에서 옛것에 뜻이 있다는 자들은 그 이름만을 사모하여 그 자취에 빠지고 만다. 이는 비유컨대, 음악을 배우는 자가 상고 적의 악기인 쇠북 추려(追蠡)를 잡고 질장구 토고(土鼓)를 두드리면서도 순임금의 음악인 소(韶)와 주무왕(周武王)의 음악인 무(武)의 변화를 알지 못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또 맛을 좋아하는 자가 옛날식으로 땅을 파 술동이를 대신해 술잔질을 하고, 아무 조미도 하지 않은 대갱(大羹)을 마시면서 정작 음식의 간을 맞추는 건 모르는 것과 같다. 이러하면서도 남에게 외쳐 말하기를, 
나는 옛것을 잘 안다, 나는 옛것에 능하다"고 한다면 되겠는가?'  135-136
옛날에 대한 정의를 바꾸면 옛날만 옛날의 아니요, 지금도 옛날이 될 수 있다. '말로 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바로 이것이다.  136
심노숭은<여신생천능(與愼生千能)>에서 '내가 일찍이 세상의 글한다는 자를 본건대, 문득 스스로 '고문이다 고문이다'라고 일컫는다. 지금 사람이 어찌하여 고문을 하겠는가. 옛사람의 이전에도 또한 고문은 있었으니, 옛사람이 어찌 옛것만 좋아하고 지금 것은 미워했겠는가? 만약 지금 사람이 지구의 껍데기 사이에 힘을 쏟아 그 비슷함을 추구하여 절절하게 스스로 좋아하더라도, 비슷함을 구하면 구할수록 더욱더 비슷하기 않게 될 것이다.'
지금 사람이 어째서 지금 글을 쓰지 않고 옛글을 쓰는가? 이것이 그가 정면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다. 옛사람은 옛사람을 흉내 내지 않았다. 그들이 더 옛날을 흉내 내싿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옛날은 모두 똑같아야 옳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하나도 같지 않고, 다 다르다. 내가 옛글을 배워 옛날과 같아진다면, 거기에는 옛사람의 껍데기만 있고, 비슷함만 있고, 나의 알맹이는 찾아볼 수 없다. 나는 나고 옛사람은 옛사람이다. 그러니 내가 옛사람과 같아질 이유가 없고, 같아져서도 안 된다.
박지원은 <녹천관집서>에서 옛날과 비슷해지려고만 드는 풍조를 매섭게 질타한 뒤, "대저 어찌 비슷함을 구하는가? 비슷함을 추구한다는 건 진짜가 아닌 것이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 비슷해지려고 하지 말아라. 비슷한 것 속에 나는 없다. 겉모습만 같은 건 같은 것이 아니다. 겉모습은 전혀 달라도 알맹이가 같아야 한다.  137-138
말과 글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다. 중요한 건 옛날이냐 지금이냐의 구분이 아니라, 유용한가 아닌가의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단순해 보이는 이 판단과 자각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옛것을 모방해선 안 된다면 새것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옛것과 다르면서도 사실 그 알맹이는 같은 '새것'의 창조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141
도로 눈을 감으라는 처방은 눈을 뜬 맹인에게 계속 장님으로 살라는 주문이 아니다. 이 우화의 핵심은 길 가는 도중에 눈을 뜨는 바람에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맹인이 비극적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놓여 있다. 그가 당면한 문제는 눈을 뜬 기쁨보다 눈을 뜸으로써 제집을 찾을 수 없게 된 비극적 현실에 있다. 지벵 있다가 눈이 떠졌다면 그가 길을 잃고 울 이유가 없다. 문제는 그의 눈이 길가는 도중에 문득 떠진 데 있다. 눈을 뜨는 순간 세계는 그에게 혼돈 그 자체였다. 방향도 좌표도 없이, 한 걸음도 더 뗄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러니 도로 눈을 감으라는 처방은 분수를 알아 소경 주제로 살라는 얘기가 아니라, 잃어버린 방향과 좌표를 되찾은 뒤에 눈을 다시 뜨라는 주문이다. 내가 내딛는 발걸음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눈을 뜨는 건 더 큰 비극의 시작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한번 떠진 눈은 다시 감기지 않느다. 하지만 좌표를 상실한 맹인에게 눈을 똑바로 뜨고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주문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가 정신을 차리려 들면 들수록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가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도로 눈을 감으라는 것이 그에게 구시대에 안주하라는 요구일수 없다.
당시 청나라로부터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던 신문물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길 가다 눈을 뜬 장님과도 같은 혼란을 부추겼다. 아예 눈을 감아 외면해버리거나, 눈을 뜨고 휩쓸려버리거나 하는 건 어느 것도 문제의 바른 해결일 수 없다. 눈을 뜬 것이 장님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백배 낫다. 하지만 그것이 걷잡을 수 없는 자기정체성의 혼란을 수반한다면 문제는 다르다. 여기서 자기 정체성 또는 주체성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한 자세와 위치의 확보가 요구된다. 그 위치를 위의 이야기에서는 '본분'이란 말로 표현했고, '도로 눈을 감으라'는 방법을 제시했던 것이다. 
도로 눈을 감으라는 건 주체성을 회복하라는 말이다. 남 따라하지 말고 나름대로 하라는 주문이요, 그대로 하지 말고 제대로 하라는 요구다. 이 시기의 글 속에서 비대해진 자의식 앞에 막상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해 고뇌하는 자아의 형상이 자주 보인다.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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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실이나 소식 따위를 알아내기 위하여 사람이나 장소를 찾아감', '명승고적 따위를 구경하기 위하여 찾아감'으로 해석된다.
첫 번째 의미에서 나오는 '알아내다'라는 동사는 '방법이나 수단을 써서 모르던 것을 알 수 있게 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번에 읽은 <길 위의 인문학>은 2010년 대한민국에 인문학 부흥을 위해 이루어진 탐방으로 이루어진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작년 한해 많은 도서관들에서 인문학을 위한 문화 탐방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을 보고 몇번 가보기도 하였다.
우리가 앉아서 글로 보거나 때로는 직접 다녀온 사람들의 자료를 인터넷을 통해 사진으로나마 보는 것과 직접 탐방을 다녀오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몸소 참관하며 느낄 수 있었다.

우선 글이나 사진은 여운을 주는데 한계가 있었다.
문화를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는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또한 표현한다고 해도 그것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마다의 관점이 틀리기에 본인만이 느끼는 감정과 본인만이 사물을 바라보는 초점이 틀리기에 나와 다른이들의 관심 대상은 조금씩은 차이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전체적인 영상은 자신이 직접 눈으로 주위 환경을 같이 둘러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꽤 크다고 생각된다.
여러가지가 많이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현장의 생생함이 아닐까 한다.
직접 눈으로 하나하나 관찰하고 당시의 감정을 전달 받아보고 구석구석을 눈으로 살핀다는 즐거움과 감동은 체험에 의해서 나온다고 생각을 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 ?'는 질문을 받으면 늘 답하는 말이 '여행입니다'라고 하는데, 그래서 블로그 이름에도 여행이라는 표현을 넣고 있다.
여행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을 할 정도로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다.
참 많이도 다녔다. 한국의 구석구석을 다니고 해외 배낭여행도 다니면서 많은 만남들을 가지면서 나는 성장에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만남이라는 표현은 대게 사람들과의 만남만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만남이 꼭 사람만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만남은 꼭 살아있는 생명체에게만 국한하기에는 그 단어가 아깝다는 생각도 한다.
그래서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중에 내가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면 모두 만남이지 않을까...
때로는 사람이기도 하고, 동물이기도 하고, 건물이기도 하고, 제품이기도 하고, 자연이기도 한... 그러한 만남들... 
나의 생각을 자극해 주기도 하고 깨달음을 주기도 하는 만남들은 나의 스승이 되어 왔다.

각설하고 책을 읽으며 나는 지나온 탐방을 되새기기도 했으며, 참 많이 돌아다녔다고 생각을 했지만 아직도 모르는 곳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 탐방들도 있었다.
이 책은 2부로 나뉘는데, 1부는 사람의 자취를 따라 떠나는 탐방이고, 2부는 역사의 흔적을 따라 떠나는 탐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 12개의 탐방이 나오는 데, 내가 이전에 탐방이든 그냥 여행이든 가본 곳들은 6군데 였다. (퇴계의 도산서원, 강진의 다산초당과 백련사, 허균과 허난설헌이 있던곳, 강화도, 강릉, 서울성곽)
되새기며 그 당시를 떠올려 보는 즐거움 내 머리속에 남아 있던 영상을 떠올리는 즐거움, 그리고 새로운 곳을 탐방하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가보지 못한 곳을 읽을때는 뭔가 아쉬운 생각들이 드는것이 이것을 글로만 읽게 되니 감흥이 떨어지는 느낌을 가졌다고나 할까..
그래서 올해 2군데 정도는 가 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프롤로그에서 인문학 부흥의 목적이 나와 있었는데, 그 표현들이 진정 오늘에 더욱 절실함을 느끼게 한다.
'노인(路人)'이라는 옛말이 있다. 그야말로 나와 관계없이 무심코 길 위를 스쳐지나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노인'은 옛말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말이다. '노인'은 지금 더 많이 존재할지 모른다. 바쁘고 쪼들린 일상생활, 그 속에서 일상화된 무관심과 무감동은 현대판 '노인'을 양산하고 있다.  4
'길 위의 인문학'은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 과거와 현재와의 교감을 활성화해, '노인(路人)'을 해방시키고 그들 사이를 소통시켜주는 신선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길 위의 인문학'은 내부로부터의 위기를 해소하려는 시도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5

이 표현들처럼 우리는 변화되는 현실의 속도에 맞춰가려다 보니 참 바쁘다. 
빌게이츠는 '생각의 속도'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속도를 강조하기도 하고, 앨빈토플러 역시도 '부의 미래'에서 속도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지난 몇 백년동안의 변화의 양보다, 최근 10년의 변화의 양이 훨씬 크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해보지 않기에 마냥 변화의 속도에 따라가느라 똥줄이 타고 있는게 지금의 현실이다.
사람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없다는 표현처럼 우리가 흐름에 따라만 가다보니 실제 중요한 사유의 과정은 자신의 삶에서 빠져 버리고 있는 현실이다.
좋은 소식을 대중매체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좋은 소식이라고 하면 스포츠 선수들의 활약상이나 될까...
우리는 너무 외부의 것들에 치우쳐 따라만 가는 어찌보면 노예가 되어 가는 지도 모른다.
자신의 내면의 소리는 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외부의 환경때문에 그것을 듣지 못할 때가 많다. 내면의 소리를 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한가지 방법은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우리는 여유가 너무 없는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의 '나'도 여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고...
그래서 2010년은 인문학의 부흥을 가지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정진홍씨는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의 서두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는데, 참 오래동안 머릿속에 남아 있다.
'인문학은 언제나 있어 왔다. 근래 인문학이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는데, 이것이 단순히 유행만을 가지고 사라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걱정을 한다.'는 내용이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이런 의미를 가지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우리에게 인문학은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고 교감하기에 가장 필요한 부분이다. 이것이 한때의 유행으로 간다면 우리는 정말 속도에 미쳐가는 삶을,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할 지도 모른다.

이처럼 인문학은 계속 우리의 삶에서 지표가 되어 주는 역할을 할 것인다.
인문학을 바라보는 시선을, 인문학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책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책중의 하나가 아닐까..!!


답사한 사람들은 '잘 몰랐던 선인들의 인간적 면모를 알게 되어 더욱 재미있고 유일하다'거나, '한 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돌아온 느낌', '살아 숨 쉬는 교육', '드라마보다 더 생생한 우리 조상의 문화유산 현장을 확인하는 자리'라고 했다. 
인문학을 통해 대중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삶의 '재미와 유익'으로 요약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감동과 느낌이 있을 때만이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성찰로 나아간다. '감동과 느낌'의 인문학은 일방적이고 교화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향적이며, 가르치고 배우는 자가 서로 소통하는 친화적인 인문학이 되어야 가능하다.
인문학은 문학·역사·철학을 중심으로 인간의 감성과 이성의 본질을 탐구하거나, 그로부터 이뤄진 인간세계를 분석해 미래의 보다 나은로운 삶을 추구함으로써 현재의 인간과 세계에 정신적인 풍요와 여유로움을 제공하는 학문 분야이다.  7
대중들은 좀 더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피부에 와 닿는 인문학을 요구한다.  8

인문학은 인간을 탐구대상으로 한다. 그러기에 도덕적이고 철학적이며 종교적이고, 미학적이며 역사적인 자기 성찰의 경험으로 표출된다.  17
<자성록>은 퇴계 선생의 덕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저술이다. 많은 편지 가운데 자신의 사상적 원숙기라고 할 수 있는 58세 때 22통을 직접 엮은 <자성록>은 ... 내용상으로는 유교의 핵심을 체계적으로 담고 있으면서, 유교의 공부론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24
퇴계의 학문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기본으로 한다. '자신을 위한 공부'를 중심 내용으로 인격함양을 위한 수양과 더불어 사회생활을 위한 올바른 도리와 질서를 탐구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강조한다. 자기의 재능과 본분을 알고 그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자기 공부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함께 나누는 공부이다. 이것은 유교의 전통인 수기치인의 학문이다.  25
'사람은 사람답기 위해서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
'어떻게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가?' 등 공부를 향한 반성과 열정이 오롯이 담겨 있다.  26
학문(學問)은 결국 '배우고 묻는 행위' 자체라고 할 수 있다.  27
편지가 사무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녹아 있는 진솔한 것이라면, 그 실천까지도 담보해야 한다는 것이 퇴계의 생각이다.  29
책을 읽되 마음을 괴롭힐 정도로는 하지 마세요. 많이 읽는 것은 아주 좋지 않습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그 맛을 즐기고, 이치를 탐구하는 것도 일상생활의 평이하고 명백한 곳에서 간파해 숙달해야 합니다. 이미 아는것을 바탕으로 마음껏 음미하게요. 그리하여 염두에 두는 것도 아니요, 염두에 두지 않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꾸준히 계속하면 저절로 자세히 이해하게 되어 얻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너무 집착하거나 마음이 거기에 얽매여 빠른 효과를 거우려고 해서는 더욱 안 됩니다.  34
퇴계는 일상생활에서 마음의 병통이 일어나는 것은 억지로 서둘러서 무엇인가를 빨리 이루려고 하는 행위 때문에 병통이 일어난다는 
것이라 했다.  36
<맹자>에 나오는 '알묘조장(揠苗助長)' - 식물은 적절한 환경 조건에 따라 일정한 기간이 지나야 그에 맞게 자란다. 싹이 자라서 알곡으로 익을 때까지 자라나는 데는 점진적인 시간이 요구된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이 얼마나 지혜롭지 못하고 어리석은지, 어쩌면 우리의삶은 어리석음의 바다와도 같다.
21세기 현재에도 이런 일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속성교육, 조기교육, 모든 게 빨리빨리 공부이다. 게다가 선행학습에 이르기까지두가 알묘조장이다. 인간을 마주하고 있는 건, 다양한 스펙트럼의 스트레스성 질병이다. 무엇이 그리 급한가? 물론 빨리해야 할 일도 있다. 그것은 그 상황에 따라 적절히 하면 도니다. 그런데 천천히 해야 할 일을 빨리하면 남는 것은 생명력의 상실일 뿐이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빨리 자라지 않는다고 사지를 당겨서 늘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 현대인은 바쁘다는 핑계로 상당수가 알묘조장의삶을 살고 있다.  38
공부에서 마음의 변, 즉 일상생황에서 스트레스를 없애는 방법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휴식과 여가를 즐기며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함양은 쉽게 얘기하면 '마음으로 무젖게 해 기르는 일'이고  체찰은 '몸으로 살피는 일'이다.  39

지리산은 두류산, 방장산, 방호산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다. 
'두류산(頭流山)'은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에서 뻗어 내려 웅거한 산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방장산(方丈山)'은 신선이 사는 산으로, 중국 전설 속 삼신산의 하나이다. 방장산은 방호산(方壺山)이라고도 한다.  51
남명은 덕산에 들어가 새집을 짖고 '산천재(山天齋)'라 했다. '산천'이라는 말은 <주역>에서 대축괘(大畜卦)에서 따온 것이다. 대축괘는 산(山)과 천(天)이 합한 괘로, 괘사(卦辭)에 "강건하고 독실하고 휘광(輝光)해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고 했다.
남명이 덕산으로 들어간 궁극적인 이유는 자신을 더 강건하고 독실하고 빛나게 갈고닦아 날마나 그 덕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 였던 것이다.  62
덕천서원은 남명이 별세한 뒤에 후인들이 그 학덕을 기리기 위해세운 학교이다.
남명을 모신 서원의 이름을 경의당이라고 한 것은 후인들이 남명 학문의 핵심을 경의로 드러내기 위해 붙인 것이다.
남명학은 한마디로 경의(敬義)로 일컬어 졌다.
경(敬)이란, 공경(恭敬) 또는 외경(畏敬)이다. 몸과 마음가짐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엄숙하게 하는 것, 마음이 다른데로 흩어지지 않게 한결같이 유지해 나가는 것, 마음을 거두어들여 달아나지 않게 하는 것, 마음을 항상 깨어 있게 하는 것이다.  71
경(敬)은 공경의 차원을 넘어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의(義)는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그 일을 처리하는 기준이다. 경은 내면의 마음을 긴장상태로 유지하는 것이고, 의는 밖으로 일을 처리 할 때의 척도이다. 
의는 박으로 일을 조처하는 것이기 때문에 늘 실천적인 것과 연계된다. 
개인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에 모두 행위의 준거가 될 수 있는 것이 의이다.  72

추사는 "내가 '오만한 천재'였다는 그 시각은 하나만 알고 열을 모르는 유치한 시각일세. 천재라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미안하지만 나는 천재가 아닐세. 흔히 추사를 명필이라 말하고, 추사의 글씨를 천재의 글씨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것은 실없고 허랑한 소리네. 이 세상에는 하늘에서 타고난 천재는 없네. 내 평생, 붓글씨를 쓰기 위해 먹을 갈고 또 간 까닭으로 닳아져서 밑구멍이 뚫어진 벼루가 몇 번째인 줄 아는가. 추사라는 한 남자가 평생 글씨를 써오면서, 닳아져 못 쓰게 되어 버린 몽당붓이 몇 백 자루나 되는 줄 아는가? 천재는 없고 신을 향한 도전이 있을 뿐이네. 사람은 남자이건 여자이건 내 손으로 세사을 바꾸어놓겠다는 의지와 열정을 가져야 하는 법일세.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물의 흐름, 바람의 흐름을 바꾼다는 것이고, 세상르 비추는 햇살의 색깔을 바꾼하는 것이네. 검게 보이던 세상을 밝고 희게 보이게 한다는 것이고, 무지갯살을 일어나게 하여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는 것이네. 그 짓을 나는 경전 읽기와 글씨 쓰기로 해온 것이네."  86
"사람들의 광기를 아는가. 사람들의 작은 광기는 사냥을 하고, 큰 광기는 전쟁을 일으키네... 모든 스포츠는 광기 어린 경기들일세. 그것의 역사는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벌어진 죄수들의 검투, 노예 출신 장사와 황소와의 경기에서부터 시작되었네... 내가 살았던 조선조 후기의 그 정국은 광기 어린 탄핵 열풍으로 들끓고 있었네..."  92
"...'추사체'라는 것은 일부러 남과 달리 독특하게, 기괴하고 고졸하게 쓴 글씨라는 것입니까?"  96
"오천 권 이상의 책을 읽음으로써 내 머릿속에 형성된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 하늘과 땅으로부터 얻은 영삼을 가지고, 벼루 열개를 구멍내고 천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드는 미치광이같이 꾸준하게 연습을 한 사람만이 먹물 속에 숨어 있는 글씨를 꺼내놓을 수 있는 법이네. 말하자면, 머리에 들어간 수많은 책 기운이 글씨로 나타난 것이야."  97
"요즘 사람들이 자식 교육시키는 데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보십니까?"
"내가 쓴 '인재설(人才說)'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쓴 바 있네. '모든 사람이 아이였을 적에는 대개 총명한데, 이름을 기록할 줄 알만 하면 아비와 스승이 '경전의 주석'과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들을 위해 모아놓은 어려운 어구풀이'들만을 읽힘으로써 그 아이를 미혹시키는 바람에, 종횡무진하고 끝없이 광대한 고인들의 글을 읽지 못하고 혼탁한 흙먼지를 퍼먹음으로써 다시는 그 머리가 맑아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넓디 넓은 세상 속에서, 우리 후세들의 영혼이 너무 가볍게 단세포화 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네."  103
"왜 추사에 집착하는가."
"추사와 그의 시대를 읽어 보면, 아주 슬프고 절망적인 현실과 광기 어린 삶을 만나게 됩니다. 청나라로부터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개혁하려는 북학파인 추사를, 지긋지긋하게 탄핵하고 공격해 죽이려 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이 땅의 어떤 거대한 보수집단하고 같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저는 '추사와 그의 시대 이야기'를 통해 그 반복되는 슬픈 일을 나 스스로 각성하고 경계하고 싶었습니다."  104

다산이 말하는 4가지 의로움이란 담백한 생각, 장중한 외모, 과묵한 말, 무거운 몸가짐을 가리킨다.
'생각은 담백해야 한다. 담백하지 않음이 있거든 서둘러 이를 맑게 해야 한다. 외모는 장중해야 한다. 장중하지 않음이 있거든 빨리 단속해야 한다. 말은 과묵해야 한다. 과묵하지 않음이 있어면 거둘러 멈춰야 한다. 동작은 무거워야 한다. 무겁지 않음이 있으면 재빨리 더디게 해야 한다. 이에 그 방에 이름을 붙여 사의재라 했다. 마땅하다(宜)는 것은 의롭다(義)는 뜻이다. 의로움으로 통제한다는 의미다. .. 스스로 방성하기를 바란 것이다.' -사의재기(四宜齎記)  108
내가 산석(황상의 아명)에게 문사 공부할 것을 권했다. 산석은 머뭇머뭇 하더니 부끄러운 빛으로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둔한 것이요, 둘째는 막힌것이며, 셋째는 답답한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배우는 사람에게 큰 병통이 세 가지 있는데,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 데 민첩하면 그 폐단이 소홀한 데 있다. 둘째로 글짓기에 날래면 그 폐단은 들뜨는 데 있지.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그 폐단은 거친 데 있다. 대저 둔한데도 천착하는 사람은 그 구멍이 넓어지고, 막혔다가 뚫리게 되면 그 흐름이 성대해지며, 답답한데도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이게 도니다. 천착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뚫는 것은? 부지런히 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네가 어떻게 부지런히 해야 할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109

허난설헌의 <곡자(哭子)> 
지난해에 귀여운 딸을 잃었더니 
이번 해엔 사랑하는 아들마저 잃었네.
가슴 메어지도다, 광릉의 흙이여
작은 무덤을 나란히 마주 세웠네.
......
응당 언니 아우의 혼들이 알아
밤마다 서로 손잡고 놀아라.  158
허난설헌은 '삼한(三恨)', 곧 '세 가지 한탄'을 노래했다.
첫째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남편과 금실이 좋지 못한 것이라 한다. 첫째는 바로 그녀가 시재를 널리 뽐낼 수 없는 좁은 풍토를 안타까워한 것이고, 둘째는 남성으로 태어나 마음껏 삶을 노래하지 못한 것을 뜻하는 것이다. 셋째는 그녀의 남편이 나이가 들어가는데 더욱 방탕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음을 말한다.  159
그녀는 많은 한과 원망을 가슴 가득히 안고, 스물 일곱의 나이에 죽었다.  160

1636년의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병자호란은 17세기 초, 동아시아의 역사적 전환기에 우리의 대응이 적절치 못했기 때문에 초래된 국난이었다. 사람들은 남한산성에서 병자호란을 떠올린다.  212
국난(國難)의 실상과 고통의 전모,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인물들의 행적을 살펴봄으로써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는 거울로 삼고자 한다.  213
병자호란은 불과 2개월여의 짧은 전쟁이었지만 그것이 남긴 정신적 충격은 임진왜란보다 더 컸다.
조선은 과연 이 전쟁을 피할 수 없었는가?
조선의 관인들이 보여준 태도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척화 - 주화의 논쟁만 뜨거웠지 중앙에서 지방으로 이어지는 통신 체계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224
청군의 침략이 시작되었을 때 고의 지휘관들이 보여주었던 태도 역시 심각했다.
도원수 김자점은 청군의 침입 상황을 회피하고 도주했다. 때문에 인조와 도성 백성들은 피난할 시간적 여유조차 가질 수 없었다.
검찰사 김경징의 직우 유기는 '천혜의 요새'라는 것만 믿고 청군의 상륙 작전에 대비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조선 조정은 병자호란에서 별다른 교훈을 얻지 못한 듯하다.
수많은 생령(生靈)을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은 별다른 처벌조차 받지 않고 인조 말년에 영의정까지 올랐다. 척화 - 주화 논쟁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란만 가열되었을 뿐 전쟁을 초래한 원인에 대한 냉철한 반추는 이뤄지지 않았다. 국가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고, 고위 공직자들이 책임을 방기했음에도 그에 대한 교정과 반성이 제대로 이워지지 않았다. 그에 따른 피해는 온전히 하층 백성들에게 전가되었던 것은 병자호란에서 무엇보다 되새겨 봐야 할 교훈이 아닐 수 없다.  225
변자호란을 통해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정보 파악의 태만과 실패', '공직자들의 책임 방기와 단죄 결여'를 우선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보다 근본적으로 돌아봐야 할 교훈은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한반도의 약체성'을 극복하는 것이다. 일정한 수준의 힘과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 '외교'란 결국 허망한 것이다.  227

초당순두부
                              이홍섭

순두부 같은 밤이 온다.
모질게 마음 먹어도
나는 늘 초당 바닷가에 서 있다.

친구들은 모두 서울로 떠나고
바다 소나무에 기대어
꾸역꾸역 토하던 청춘의 여름밤

푸른 혀로도
끝내 닿을 수 없었던 그 많은 눈보라

모두부 같은 마음도, 모두부를 자르는 마음도
다 부질없다 부질없다고 되뇌는
서울의 밤

멀리서, 새벽길을 더듬으며
순두부 끓는 냄새가 온다.      238



길을 길이라 말하면 늘 그러한, 꼭 같은 길이 아니요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늘 그러한, 꼭 같은 이름이 아니로다.

이름이 없는 것, 그것은 하늘과 딸이 처음 열리는 상황이요

이름이 있는 것, 그것은 모든 것의 바탕이라네.

늘 하고자 함이 없으며, 그 묘함을 보고

늘 하고자 함이 있으면, 그 한계를 보네.

이 둘은 근원적으로 같은 것

나와서 이름을 달리했을 뿐이라네.

같은 것을 일러 가물거린다고 하고

가물거리고 또 가물거리는것, 

그건, 모든 묘함이 나오는 문이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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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이은상은 <적벽유(赤壁遊)>에서 
            백년도 잠깐이요 천년이라도 꿈이라건만
            여름날 하루해가 그리도 길더구나
            인생은 유유히 살자 바쁠 것이 없느니
바쁠 것 하나 없는 뜬구름 인생들이 이리 복닥 저리 복닥 대며 아웅다웅 다투는 꼴이 새삼 부끄럽구나..  96

그렇다. 
한 번 살다가는 인생인데 우리가 사회의 조작(?)에 따라 속도만 키우면서 잃어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글쓴이의 머리말
시는 고도로 농축된 언어다.
한시는 절제와 함축을 강조한다. 한시는 과장의 언어다. 그래서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된다. 따져 보고 가늠할 줄 알아야 한다.  4

평생에 품은 바람 이미 다 글렀으니 
게으름 열 배 더함 어이하지 못하겠네.
꽃 그늘 돌아들어 낮잠에서 깨어나 
어린 아들 손을 잡고새 연꽃을 보노라.
  - 이첨 李詹 1345~1405 <용심 慵甚>   62

활짝 펼친 운전지에 취중 시가 더디더니 
수풀도 잔뜩 흐려 빗방울이 후두둑.
서까래 같은 붓을 움켜쥐고 일어나
낚아채듯 휘두르니 먹물이 뚝뚝 듣네.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 정약용 丁若鏞  1762~1836 <불역쾌재행 不亦快哉行>  88

곱던 모습 아련히 보일 듯 사라지고 
깨어 보면 등불만 외로이 타고 있네.
가을비가 잠 깨울 줄 진작 알았더라면
창 앞에다 오동일랑 심지 않았을 것을
  - 이서우  1633~1709  <도망실>  145

월하노인 통하여 저승에 하소연해 
내세에는 우리 부부 바꾸어 태어나리.
나는 죽고 그대만이 천리 밖에 살아남아
이 마음의 이 슬픔을 그대에게 알게 하리.
  - 김정희 1786~1856 <배소만처상>  147
   이승에서의 미진한 사랑을 잇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때에는 내가 먼저 죽고 당신은 살아남아, 지금의 내찢어질 듯 아픈 마음을 당신으로 하여금 알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이것은 독백이 아니라 절규다.  147

사람을 기다리기 괴롭지만은 
하늘 가서 자식을 기다림이랴.
사는 일은 자식들 걱정뿐인데
막힌 길의 아비 노릇 부끄럽구나.
  - 이광사 1705~1777  <대아행>  182

여덟 해에 일곱 해를 병 앓았으니 
돌아가 눕는 것이 편안할 테지.
흰 눈ㄴ이 펄펄 오는 오늘 이 밤에
어밀 떠나 추운 줄도 모르는구나.
  - 남씨  생몰미상  <곡손녀>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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