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입는 일상복은 일반 사람 눈에도 보이지만 옷 밖으로 드러나는 신체의 일부분, 그러니까 손이나 목이나 얼굴이나 머리카락이나 귀때기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같은 투명인간끼리는 서로를 볼 수 있다.  6


자전거는 빠른 속도로 인도와 차도를 달리기 때문에 사고 위험이 높아 머리를 보호하는 헬멧은 필수품이다. 넘어졌을 때 손을 다치지 않기 위해서는 장갑을 끼어야 한다. 거기다 눈을 가리는 고글을 쓰고 마스크와 버프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다...

자전거 라이더 복장을 하면 일반인처럼 보이기가 쉽기 때문이다.  7


일소일소 일노일로(一笑一少 一努一老 한일 웃을소 한일 적을소 한일 힘쓸노 한일 늙을노)라, 한번 웃을 때마다 하루 젊어지고 한번 화낼 때마다 하루씩 늙어지나니 네가 웃음만 잃지 않으면 평생 없는 복도 받아가며 살리라.  24


옛적부터 현명한 어른들이 물만 먹고도 살아오셨으니 그것을 백비탕(白沸湯 흰백 끓을비 끓일탕)이라 하느니라, 신라시대 화랑이나 법사는 호랑이에게 물려갔다 돌아온 사람에게 백배탕을 만들어 먹임으로써 정신을 차리게 했다. 만드는 것은 아주 쉽다. 차갑고 깨끗한 샘물을 준비한 뒤 숯불에 물을 팔팔 끓여 달인다. 그 물 삼분의 이를 그릇에 담고 찬 샘물 삼분의 일을 부어 두가지 다른 성질의 물이 섞이기를 기다렸다가 밥 한끼를 먹을 시간 동안 천천히 마시면 된다. 백비탕은 머리를 맑게 하고 잠을 깨우며 허기와 갈증을 면하게 한다. 하루 한번씩 십년을 꾸준히 마시면 석사, 박사보다도 똑똑해질 수 있다.  26


아이가 늦되고 자라면서도 어리숙하고 바보 같은 걸 두고 동네 사람들은 '어비'라고 했는데 만수가 바로 그 짝이 났다. 아이가 비실비실 허약하고 주눅이 들어 매사에 자신이 없으며 경쟁에 뒤처지는 것을 두고 '지실이 든다'고 하는데 만수가 바로 지실이 든 아이였다.  33


소질이 없는 건 할 수 없는 일이나 만수는 성의가 있었다.  39


만수야, 너는 아직 재주가 다 드러나지 않은 망아지, 덜 벼려진 칼과 같구나.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가지만 돈 끼호테의 로시난떼처럼 비루먹고 약한 말도 열흘을 부지런히 가면 천리를 간다고 했다. 또 천리마의 꼬랑지에 붙어 있는 쇠파리 또한 천리를 간단다. 네가 하루 천리를 가는 명마가 아니라고 실망하지 마라. 뭐든지 잘보고 기술을 배워 하루하루 열심히 하면 너는 전기기사, 시계 수리공, 운전기사 등등의 기술자가 될 수 있다... 귀를 크게 열고 입은 꼭 다물고 네 길을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40


그나마 신통한 것은 바로 아래 여동생 명희도 아니고 더 어린 남동생 만수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요강이라도 부시고 할아버지 한테 가서 잘 주무셨는지 손 모아 인사를 하고 와서 돼지며 닭이 제 먹을 것 찾아 밖으로 가도록 문도 열얻주고 제 손으로 세수하고 아침을 먹고는 설거지물 버리는 것도 도와주고 비 오면 빨래도 같이 걷었다. 아버지 따라다니며 나무도 하고 농사도 거들고 온갖 심부름을 다 하고 소 끌고 나가 풀을 뜯기고 소꼴을 베어오고 뱀이든 개구리든 잡아다 돼지우리에 던져넣었다. 나보다 더 나물을 잘 알고 잘 찾고 잘 캐고 했다. 삘기, 오디, 망개, 까마중, 깨곰(개암), 산딸기, 머루, 밤, 도토리, 더덕, 도라지 등등 만수가 집으로 가지고 오는 건 누구보다, 심지어 아버지보다 더 다양했다. 만수는 손재주도 좋아서 동생들한테 새총이나 종이비행기, 바람개비 같은 장난감도 많이 만들어주고 그랬다. 마음이 착하고 순하고 무슨 일에든 제맡은 몫을 다하려고 애를 쓰고 그렇게 신통할 수가 없었다.  71


만수가 소를 열심히 끌고 다니며 풀을 뜯게 하고 정성을 들이는게 그 소를 잘 키워가지고 팔아서 그걸 학비로 삼아 서울서 공부하려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수는 공부를 못하니까 그럴 일이 없다. 옛날처럼 시험을 쳐서 가면 중학교에도 못 갈 거다. 무시험 뺑뺑이가 됐으니 가는 거지. 대학은 턱도 없고 고등학교도 가기 힘들 거다...

누가 봐도 만수가 내 상대가 안되게 멍청하다는 건 분명했다. 줏대가 없이 남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아무리 잘해봤자 중간밖에 안된다.  105


베트남 국민 약 4백만명이 베트남전 당시 고엽제에 노출됐고 기형아 출산이 급증하는 등 부작용이 속속 보고되었습니다. 세계의 비난이 집중됨에 따라 1969년 11월 2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앞으로 미국은 어떤 종류의 세균전도 포기하며 현재 저장된 모든 생물학무기를 파괴하고 인간을 살상하는 화학무기도 선제사용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고엽제의 후유증인 것으로 판단한 미국, 호주, 뉴질랜드 3개국의 월남전 참전 환자 24만명이 미국 정부와 고엽제 제조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손해배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미국 연방법원은 2억 4천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하도록 판결했습니다. 독재정권하에 있는 한국에서는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소송 참가와 언론보도를 금지해 환자들 대부분이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129



야, 이 개씨바라, 니주라기 씹창 내기 전에 해골 디밀지 말고 아가리 처닫아. 네 곱차에서 올라오는 똥 냄새 때문에 오바이트 나올라고 하거든.

해삼 멍게 말미잘 해파리 같은 놈이 이빨 좀 까네. 쪼다 촌놈하나 갈구니까 똥창이 흐뭇하냐.  138-139



내 평생에 가장 한스러운 일은 맏손자 백수가 머나먼 이역 월남에서 비명횡사한 것이다. 나는 백수를 죽게 만든 이데올로기와 전쟁을 증오한다. 백수처럼 무고한 청년들을 죽음의 전장으로 내몬 권력자들, 독재자의 나팔수가 된 언론과 사회지도층이라는 종자들, 동족의 목숨과 피땀으로 제 배를 불린 더러운 장사치들, 죽음의 독약을 만들어 뿌린 제약회사며 군수산업체며 군 지휘자며 죽음의 시공간을 만들어낸 모든 존재를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이십대에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던 벗들이 있다면 물을지도 모른다. 개체의 생물학적 연장인 핏줄에 집착하고 연연하는 것이 세계를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바꿔나갈 책무를 지닌 깨어 있는 인간으로서 온당한 태도인가. 자손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생명을 영세불멸의 것으로 하려는 동물적인 욕망이며 봉건적인 세계관의 발로가 아닌가. 예전이라면 내 속내가 훤히 드러난 것을 부끄러워했겠지만 이제 나는 바로 그게 우리가 바꿔나가려 했던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고 반론할 것이다... 내가 일평생 가장 잘한 일은 식구들을 데리고 개운리 산골짜기로 들어온 것이다. 내가 두번째로 잘한 일은 개운리 살골짜기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이다. 나갔다면 내 벗들이 그랬던 것처럼 옳은 뜻을 제대로 펴지도 못한 채 훼절하고 보도연맹 사건 같은 백색 테러에 어이없게 목숨을 버려야 했을 것이다. 소심한 자의 우연한 선택으로 일신을 지키고 분에 넘치는 자손을 얻고 일신의 기쁨을 누렸으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악랄한 이빨과 발톱에 백수를 잃었다. 실로 통분하다. 억울하다. 나의 무력함이 뼈에 사무친다.  162-163


'물질이 주인인 세상'  164


어쩌다 내기장기를 둬서 고물 자전거를 하나 딴 적이 있었는데 그 자전거를 타고 낯선 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 보고 이야기도 듣고 사는 것도 보고 웃기도 하고 욕도 하고 그랬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나는 누군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공부 같은 거였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보려고 한 거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년을 매일 술 처먹고 공부 비슷한 걸 하다보니 아버지가 서울에서 공부를 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짐작이 갔다. 서울에서는 사는 것 자체가 일이었다. 보통 일이 아니라 큰일이었다.  165


태어날 때부터 싹수가 노란 인간들은 교육만으로 고칠 수 없다. 가정교육 개판, 학교 개판, 사회 개판이니 선생이 아무리 애를 써서 가르쳐봐야 학생이 개보다 좀 낫기나 하면 다행이다. 사실 교사들 역시 수준 차이가 너무 난다. 군 장교 출신인 나 같은 사람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볼 때 후진국인 우리나라는 최상의 교육을 받은 군인들이 국가의 엘리뜨로서 국민과 자라나는 세대의 교사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우리 군인들만이 신라 화랑과 이충무공을 이어 호국선무정신으로 나라를 지키고 경제를 건설하면서 썩어 빠진 정치와 사회의 환부를 도려내왔다.  171


'어벙해 보이는 놈이 알고 보니 당수 팔단'  231



만수는 자신의 시간과 노력이 동생들, 제가 사랑하는 가족에게 투입되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들끼리의 강력한 결속에 내가 끼어들어갈 틈은 없었다.  236


부치지 않을 편지라면 쓰고 싶은 대로 써도 된다. 일기도 쓰고 살아온 날들에 대한 기억에 대해서도 쓴다. 그냥 아무거나 쓰기도 한다. 

뭘 쓴다는 것은 살아온 날을 돌이켜볼 수 있게 해준다. 어떤 사람에 대한 생각, 감정, 어떤 순간을 문증으로 표현하면 조금 더 그게 선명하게 보이고 정리되고 객관적으로 보게 만든다.  237


전두환이가 80년대 체육관 선거에 단독출마해서 99.9퍼센트 득표를 해가지고 대통령이 된 건 알죠? 그때 통일주체국민회의인가 뭔가 하는 허수아비들 이천오백스물다섯명이 딱 한명만 빼고 다 전두환을 찍었지. 그 한명은 반대를 한 게 아니라 어디 찍는 줄 몰라 실수를 해서 무효표가 된 거고...

그때부터 컬러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했잖아. 스리 에스가 뭔지 아나? 스포츠, 섹스, 스크린이야. 컬러텔레비전으로 프로야구 중계하고 야간통행금지도 해제하고 밤새도록 디스코텍에 술집이 영업하고 [에마뉘엘]같은 포르노 영화를 할리우드 직배로 들여와 심야극장에서 상영했지. 그런 게 다 국민들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우민정책이야. 올림픽 유치한 건 바로 스포츠로 국민들 관심을 돌리려고 한 거라고.  249


정말 회의를 해보니까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고 하는 게 민주주의를 못하게 하려고 만들어낸 말이라는 걸 알겠어요. 백성이 입도 벙끗 못하게 하고 시키는 대로만 하게 하는 게 진짜 독재고 철의 장막 같은 거죠.  285


아무튼지 간에, 안 아프고 안 죽었으면 그래도 복 받은 거라고 생각한다고, 우리만 성실하게 열심히 살면 다 잘 풀릴 거야. 

아니, 형님 다니던 회사가 형님이 게으르고 일 안해서 망한 겁니까. 망해도 그렇지, 자본가라는 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그놈들이 형님네처럼 아무것도 없이 나갔겠냐고요.지금도 홍콩이나 하와이 해변 같은 데 가서 빼돌린 돈 가지고 떵떵거리면서 잘살고 있어요.

처남이 착하다는 건 인정한다. 성실하기도 했다. 그런데 방향이 틀렸다. 같이 해야 할 일은 같이 열심히 하겠지만 싸울 일은 싸워서 해결해야 하지 않는가. 또 싸울 때도 상대를 제대로 골라서 싸워야지 제 편, 제 식구에게 피해를 입혀가며 제 살 깎아먹기 식으로 하는 건 나부터 용납할 수 없었다. 그냥 놔두니까 처남은 계속 주절주절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 어릴 때 굶기를 밥 먹듯 하던 때를 생각해봐. 나는 원망하는 사람이 없어. 내 팔자가 그런 걸 뭐. 또 원망해서 뭐해? 그 사람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도 아니고 그럴 능력도 없고. 그 사람들이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냐고. 부도내고 싶어 부도내는 회사가 어디 있겠어? 나는 이렇게 가난하지만 소박하게, 보통 사람 나름의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하네.  290-291


엄마가 없다. 엄마 대신 누가 차가운 손으로 나를 붙잡고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밥을 먹인다. 엄마를 찾아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내가 숟가락을 집어던지니까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두었다. 울었다. 그래도 오지 않는다. 엄마가 아니다.

엄마가 있을 때는 배고파도, 추워도, 옷이 젖어도 울 수 있었다. 울면 엄마가 와서 먹을 걸 주고 과자도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노래도 불러주었다. 잘 자라고, 그냥 자라고, 자고 있으면 무서운 일도 배고플 일도 추울 일도 슬플 일도 없다고, 그런데 엄마가 없다.

엄마가 없는데 내가 울면 무서운 사람이 와서 나를 잡아갈지도 모른다. 나를 해칠 수도 있고 때릴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엄마가 없으면 슬프다. 슬퍼도 눈물이 나지 않고 웃음만 난다. 내 마음대로 울 수도 없다. 더 슬프다. 

엄마가 없다.  295-296


힘 있고 돈 있고 법까지 제 편인 개새끼들한테 계속 갈굼을 당하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뭐예요? 

만수 형님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우리 일곱명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책임을 질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게 올바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무식해서 정치도 모르고 법 같은 건 잘 몰라도 정의가 뭔지는 알아. 아, 이렇게 하는 게 맞다는 게 그냥 느껴지더라고. 할아버지, 형님 같은 가족들, 나중에 사회에서 만난 강철 선배님 같은 분들한테 잘 배워서 그렇지. 노래도 있잖아. 우리들은 정의파다 훌라훌라.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 나는 죽어도 당당하게 서서 고개 들고 웃으며 죽고 싶어.  302-303


가난하고 가진 게 없는 사람들끼리 싸울 일이 더 많은 거였다. 그 연탄을 우리에게 팔아먹고 돈 많이 벌고 세금 많이 걷고 영원히 부와 권력을 물려주고 물려받을 인간들하고 싸울 생각은 하지도 않고, 쳐다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비슷한 처지의 가난한 인간들끼리 머리 뜯고 대가리 깨지고 피 흘리며 싸우고 또 싸우는 것이었다. 그래도 서로 없이 산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정이 들어서 명절에는 서로 떡도 주고받고 어떤 집, 아니 같은 집에 사는 아이가 맞고 오기라도 하면 우르르 몰려가서 같이 복수를 해주곤 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데서 늦게까지 놀고 있는 애가 있으면 귀때기를 붙들어다가 데려다주기도 하고.  304-305


초등학교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과 달리 아이들을 정상, 비정상이라는 자기들에게 편리한 기준으로 구분했다. 평균적인 아이들을 길러내는 교육방식에 맞지 않는 아이들은 가차없이 걸러졌다. 태석이의 담임을 맡은 여교사는...  321



우리가 오이씨디 국가 중에서 제일 자살률이 높다는 오명을 쓰고 있어도 해마다 삼십만이 자살 시도해서 죽는 사람이 만오천명뿐이래. 확률로 치면 오 퍼센트라고.  354



어떤 사람이 투명인간이 되는지 정확하게 잘 모르겠다.  361



행복은 성적순으로 매겨지고 부는 상위 일 퍼센트가 독점하며 권력은 세습된다. 정경유착, 금권언(金權言 쇠금 권세권 말씀언)유착, 초국적기업, 신정주의(神政主義 귀신신 정사정 주인주 옳을의), 광신적 테러가 그런 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나 혼자 깨끗하게 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것도 상관이 없다는 건가. 

지금 이 세상이 이렇게라도 굴러가는 것이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누군가는 노력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그렇게 하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363-364


내 경험으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살을 기도하거나 아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지기로 선택한 사람들 중에 투명인간이 된 사례가 더러 있다. 당신은 그런 생가을 한 적이 없는가. 죽는 게 낫겠다.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데로 가서 새로운 생을 개척해보자든가. 그래서 다리 위에서 투신을 했다든가.  354-365  




작가의 말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370

Posted by WN1
,



여행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인식하는 그 정도만 기억되는 부분일 것이다.  108


네 시간만 달리면 땅 끝에 다다를 수 잇는 우리나라의 땅 덩어리와는 달리 언제까지나 끝없이 펼쳐질 것만 같은 대지 위에 있는 지평선, 창문을 힘껏 열어젖혀 사막의 모래바람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창문 틈으로 모래 알갱이들이 미친 듯이 몰아쳐 와서 내 얼굴과 머리는 물론 목구멍까지 타고 들어왔다. 나는 호들갑스럽게 창문을 닫아 내렸다. 기차 안은 이미 뿌연 모래연기로 가득했다. 창문을 연 내가 사고를 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의자며 배낭, 옷가지 위로 모래가 한 가득이다. 손바닥으로 쓰윽 문지르니 모래 덩어리가 묻어나왔다. 벌써부터 문 닫으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니 육두문자를 날리지 않았으면 다행이지 싶었다. 창문을 여는 동안 인도인 누구도 창문을 닫아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나의 이런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웃고만 있었다. 기다려주는 여유, 답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잡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모습. 내가 바라던 여유가 아니겠는가.  110


길 가운데서 길을 잃게 된다는 바라나시에서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

'길을 잃었을 때는 무조건 강가로 나아가라!'

인생도 그러하다. 길은 그렇듯 여러 갈래지만 종극엔 하나의 물줄기로 만나 흐르게 되는 것. 나 역시, 그 강가로 흘라들어 가고 있는 중이리라.  186

Posted by WN1
,

Posted by WN1
,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쇠붙이에 그치지 말고 면도날이 돼라"고 말한 바 있다.

창의성을 발휘하려면 끊임없이 자신으 낯설게 해야 한다. 그래야 그 속에서 솔루션을 찾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박사를 언급하면서 <창의성의 즐거움>에서 말한 창의성의 발현 3요소를 언급한다. 일련의 상징적 규칙과 절차로 이뤄진'영역', 영역으로 가는 길목에서 문지기 역할을 하는'현장', 창의성을 발휘하는 '개인'

그러면서 예로써 영국축구 프리미어에 대해 언급하는데, 영역=축구, 현장=프리리어리그, 개인=플레이어로 표현한다.

창의성이란 거대한 벽에 부딪혔을 때, 반드시 그 벽을 넘고 말겠다는 도전 의식과 필사적인 자기 투쟁의 과정 속에서 길어 올릴 수 있는 인간의 고유한 성질에 가깝다. 

칙센트 미하이는 '창의성의 중심지'를 "다양한 문화가 교차하는 곳, 여러가지 생활방식과 지식이 융합하는 곳, 사람들이 새로운 사고를 수용할 수 있을 만한 여건을 조성해 주는 곳이다"

창의의 개념을 정리해보면, 창발(creativeness)은 발상의 프로세서, 창조(creation)는 발상의 프로세스를 거친 결과로서의 산물, 창의(creativity)는 발상의 프로세스와 그 산물이나 결과를 모두 포함한다. 사실상 이 3가지는 하나다.

세계에는 정답이 없는 문제들이 훨씬 많다. 창의성은 새로운 문화를 만든다.
모방 -> 변화 -> 문화
창의성의 필수 사항이 있다면 '범상치 않은 호기심'뿐이다.

창조적 상상력을 체득하려면
첫째, 30 대 70의 원칙을 지켜라. 
자기 시간의 30%는 실질적인 업무에 쏟되, 나머지 70%는 재충저노가 여가 혹은 남들 눈에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에 투자해야 한다.
둘째, 고전을 많이 읽어라.
고전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깊이가 있다. 비단 책만이 아니라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곳에 가보는 것 즉 스스로를 남들과 차별화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낯설게 만들라는 것이다.
셋째, 몰입의 즐거움을 배워야 한다. 
미쳐야 몰입할 수 잇고 몰입해야 뭔가를 창조해낼 수 있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창의적 사고법 7가지
1. 호기심 - 호기심은 발며오가 발견의 발전소다.
2. 실험정신 - 무엇이든 의심하고 실험하라. 실수에서 배워라.
3. 오감 - 감각의 날을 세워라. 그만큼 세상도 열린다.
4. 낯섦 - 낯선 것에 도전하라. 낯선 것이 창의적 솔루션을 가져온다.
5. 전뇌사고 - 뇌 전체로 사고할 때 입체적인 생각이 가능하다.
6. 양손쓰기 - 육체적 성질을 고착시키지 말고, 양손 쓰기를 통해 균형 감각을 키워야 한다.
7. 연관 사고 - 모든 사물과 현상의 얽힘 속에 창의가 숨어 있다.

창의성의 발현은 일종의 정신적 레이스이며, 이것에는 지켜야할 원칙이 있다.
첫째, 페이스를 잃지 말라. 오버페이스는 완주할 수 없게 한다.
둘째, 구간 기록을 체크해야 한다.
셋째, 지난 레이스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넷째, 시선을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몰입하면 환호든 관신이든 야유든 신경 쓰지 않는다.
다섯째,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뛰어야 한다.
여섯째, 경쟁자가 아닌 목표를 보고 뛰어야 한다.
일곱째,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달려야 한다.

윈스턴 처칠은 "Never, Never, Never Give up!" 이라 독려했듯이...


창의성 발현을 위한 5가지 
첫째, 창의성의 족쇄를 풀어라. 고정관념을 깨고, 당연하다는 사고방식을 버려라.
둘째, 생각을 줄 세우지 말라. 선형적으로 읽지 말고 입체적으로 읽어야 한다. 메모 또한 마찬가지로.
셋째, 야생의 사고를 자극하라. 내 안에 밀림 같은 놀이터를 만들고 생각들이 서로 싸우고 뒹굴게 해야 한다.
넷째,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을 하라.
다섯째, 마인드 맵핑(mind mapping)을 하라.




창의적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걸까?
사람든은 많이 듣고 보기때문에 이 단어를 매우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자신이 알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진정 안다는 것은 자신이 체득하여 느꼈을 때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들어본것이다.

창의적인 것은 어떠한 일에서도 발생된다. 아주 중요하고 큰 일에서도 가능하지만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경영학의 대가 톰 피터스의 '리틀빅씽'은 경영학의 구루가 쓴 자기계발서이다.
여기서는 제목처럼 작지만 강한것을 중점으로 다룬다.
그도 사소한것의 강력함에 대해서 강조하는데, 탁월함을 이루기 위한 조건으로 사소한 것들에서부터 관심을 기울이고 창의적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현대 성공한 기업들 중에는, 이러한 사소한 것부터 창의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최근에 갈갈이 삼형제에서 벌집삼겹살 대표가 된 이승환씨의 강의를 들었는데, 그가 말에서도 사소한 것부터 창의적이 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예로써 든 붕어빵 아저씨의 성공스토리는 "왜 안돼?"로 시작하여 차별화두고 붕어빵의 인식을 전환하게 함으로 고객이 반할 수 있는 것들로 시작 하였다고 한다.
복장 간판 포장지에서 부터 서비스 정신에 고객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작지만 강력한 요소들을 통해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성공기업의 조건들을 작은 가게들에 심어 문화를 형성시켰다고 했다.

스타벅스 역시 그러한 창의적인 것들로부터 시작되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물론 미국 내에서 그들은 고객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감동을 줌으로 그들만의 공간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당시의 미국은 커피가 5센트에 마실수 있는 것이었지만 스타벅스는 8배가 넘는 돈을 받아 내면서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만들어 내었다.

이처럼 창의적인 것은 남들과는 다른 것을 찾아내는 입체적인 사고와 연관된 사고를 하여, 늘 몰입함으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 창의적인것은 지금 당연시 받아들이는 것을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하여 더 좋아질 수 없는가라는 의문으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Posted by WN1
,


인문학(人文學)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통찰의 힘이다.

'12년 전 빈곤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취재 중이던 언론인 얼 쇼리스(Earl Shorris)는 뉴욕의 한 교도소에서 살인 사건에 연루돼 8년째 복역 중인 비니스 워커라는 여죄수와 마주 앉았다. "사람들이 왜 가난 하다고 생각하느냐"는 다소 판에 박힌 질문에 20대 초반의 여죄수는 "시내 중심가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정신적 삶이 없기 때문"이라는 의외의 답을 내놨다. 여죄수의 말이 종교적인 것을 뜻하겠거니 생각한 쇼리스가 "정신적 삶이 뭐냐"고 재차 묻자 "극장과 연주회, 박물관, 강연 같은 거죠. 그냥 인문학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얼 쇼리스는 '반성적이고 성찰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삶이 달라진다. 인문학을 통해 반성적이고 성찰적인 사고를 시작하고 다른 삶을 살고 싶은 소망을 갖게 하는것'이하 하였다.

인간의 학명(學名)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다.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은 생각만 하고 살지 않는다. 그래서 호모 파베르(homo faber)이면서 동시에 호모 루덴스(homo ludens)다. 뭔가를 끊임없이 '만드는 사람'이면서 쉼 없지 '놀이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이면서도 동시에 호모 섹스쿠스(homo sexcus)다. '말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몸으로 교감하는 사람'이다.
인문학은 바로 그 사람의 다면체적이고 변화무쌍한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인문학의 숨은 힘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힘이다.

wn1 - 저자인 정진홍씨는 SERICEO 에서 <정진홍의 감성리더십>코너를 최장기간 진행하며 변화와 혁신 그리고 창조의 감성리더십 분야를 개척하였다.
이 책은 그의 내용을 정리해서 만들어 졌는데, 오래전부터 눈에 끄는 제목이었고 좀 늦은감은 있으나 읽기 시작하였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방대한 내용에 매료되어 책을 읽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하나의 주제를 따로 정리해 보는것도 매우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였다.

지금 서문을 시작으로 주제들을 다룰것이다.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일들을 경험하고 겪어야만 한다. 
종종 사람들을보고 있노라면 참 우리네가 생각없이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연시 치부하는 일이기에 생각할 여지가 없이 보일 수 있으나,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측면에서는 이처럼 바보같은 행동도 없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변화를 꽤하는 것은 아닐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큰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소한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EBS 에서 '인간의 두 얼굴'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다.
사람은 군중심리에 의해, 다수에 의해 생각없이 끌려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것으로 인해 매우 큰 해를 입게됨에도 불구하고 따라가기도 한다.

우리가 그런 행동을 했더라도 그때그때 반성하는 시간을 갖거나 깊은 생각을 한 번만이라도 한다면 비슷한 잘못은 저지르지 않게 될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반복된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물론 그러한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늘 불편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그것마저도 불쌍한 인간을 보이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의 글처럼 인간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동시에 놀고 만들고 말하고 교감하며 행동을 한다. 변화무쌍한 감정과 그러한 무리들에서 예상치 못한 행동이나 결과들이 나오게 된다.
그럴때 우리가 한번쯤은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것이 얼마나 자신에게 필요한지를 기억해야 할것이다.

인문학은 우리가 사고의 통찰력을 가지도록 도움을 주는 분야이다.
사고의 힘!! 그것은 그냥 오는것이 아니다.
스스로 노력한 결과에 의해 나오는 것이며, 인과관계가 없는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공통점이나 관련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서문 첫 줄에서 말한 것처럼 통찰의 힘을 키워나가자.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나 하나의 단어들을 통해 힘을 키워나가 보도록 한다. ^^
Posted by WN1
,


1906. 3. 19 독일 졸링겐~1962. 5. 31 이스라엘 텔아비브.
제1차 세계대전 때 가족과 함께 독일에서 오스트리아 린츠로 이주했다. 1932년 4월 린츠에서 비밀 나치당에 입당했고 11월 하인리히 히믈러가 조직한 나치 친위대(SS) 정예부대에 들어갔다. 1933년 린츠를 떠나 바이에른 레히펠트의 '오스트리아 군단'이라는 테러리스트 양성학교에 들어갔다. 1934년 1~10월 다하우에 있는 SS부대에서 일한 뒤, 베를린의 보안국(Sicherheitsdienst/SD) 중앙본부의 유대인 담당부서에서 일했다. SS 내에서 꾸준히 승진했으며 오스트리아 합병(1938. 3) 뒤에는 유대인을 추방하는 임무를 띠고 빈으로 파견되었다. 1년 뒤 같은 사명을 안고 프라하로 갔다.
1939년 히믈러가 국가안전국(Reichssicherheitshauptamt/RSHA)을 창설했을 때 베를린에 있는 유대인 담당부서로 전보되었다. 1942년 1월 베를린 근처 반제에서 나치 고위관리들이 모여 유대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에 필요한 계획과 병참업무 준비에 관한 회의를 열었다. 아이히만은 이 문제의 책임을 맡음으로써 사실상 대량학살을 뜻하는 이 '마지막 해결책'의 집행자가 되었다. 그는 유대인을 식별하고 집결시켜 그들을 집단수용소로 보내 죽음으로 몰아넣었다(→홀로코스트).
전쟁 뒤 아이히만은 미군에 붙잡혔으나 1946년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중동지역을 전전하다가 1958년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나치 전범 추적자 지몬 비젠탈과 이스라엘 '자원봉사' 단체에 의해 정체가 드러나 1960년 5월 11일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에서 체포되어 9일 뒤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이송되었다. 이러한 조치가 아르헨티나 법을 위반했다는 여론이 진정된 뒤,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의 특별 3심 법정에서 재판을 열었다. 1961년 4월 11일에서 12월 15일까지 계속된 이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


[아이히만의 비극-아무 생각 없는 삶의 비극]


아이히만은 독일 나치스 친위대 장교 출신입니다. 그에 의해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된 유대인 수는 약 600 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는 독일 패망 후 아르헨티나에 가족과 함께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숨어 지내다, 1960년 5월 이스라엘 비밀경찰에게 발각, 강제 연행되어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 받아 결국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런 아이히만이 재판에 섰을 때 세계 언론은 '인간의 얼굴을 한 악마'를 보기 위해 취재 열풍이 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열풍은 단 2 주만에 식어 버립니다. 그것은 아이히만이, '너무나 평범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이히만이 성 격파탄자나 정신 이상자일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을 학살한 친위대 장교이면서도, 그는 유대인 여자를 정부(情婦)로 두었습니다. 그는 나치의 정강(政綱)도 몰랐고, 히틀러의 '나의 투쟁'도 읽어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친위대도 그저 친구의 권유에 등 떠밀려 들어간 것이라 합니다. 그를 추적, 관찰한 현대의 유명 철학자 하이데거의 제자 아렌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지극히 가정적인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 그래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일상 생활에서 아주 근면했고 무능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다. 다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가 엄청난 범죄자가 된 것은 순전히 성찰의 부재(thoughtlessness)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비극을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에서 찾았고, 그런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악'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기에 아무 생각 없이 명령을 따랐고, 아무 생각 없이 살기에 함부로 그렇게 엄청난 비극을 초래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분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떠들고 아무 생각 없이 말하고 아무 생각 없이 함부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요즘 흔히 일어나는 성폭행, 사기 등의 온갖 비극이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사 는 우리들에 의해 일어납니다.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결코 할 수 없을 그런 일들을, 아무 생각이 없기에, 그저 내 욕심, 내 삶만 바라보기에 아무 생각 없이 범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히 보는 무심코 버리는 담배 꽁초, 무심코 빼무는 담배 연기, 전철 간에서 흔히 보는 주위를 생각하지 않는 요즘 젊은이들의 짙은 애정 표현도 그런 아무 생각 없는 삶의 한 단면입니다.


더구나 인터넷이나 언론이 특정 목적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부추기고 세뇌시키면 사람들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아무 생각' 없어집니다. 옳다고 하는 일에 옳음에, 그르다고 하는  일엔 그름에 취해, 그리하여 쉽게 분노하고 흥분하여 앞뒤 좌우를 가리지 않고 마녀 사냥을 하며 온 세상을 흔들어 놓습니다.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도 모르고, 부추기고 세뇌하는 세력들에 의해 마치 스탈린의 '쓸모 있는 바보들'처럼,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이 짜 놓은 각본대로 흘러갑니다.

 

아무리 이성을 찾아라, 편견을 갖지 말고 세상을 똑바로 보라, 한 면만 보지 말고 사물의 양면(中道)을 모두 보라, 제대로 알고 말하라 고 일러 드려도, 그렇게 시작된 아무 생각 없는 아우성, 행동은 도무지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비극은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만 갑니다.


당신들은 아무 생각 없는 것이 아니노라 강변하시겠지만, 그래서 당신도 이성이 있고 나름대로 당신의 길을 간다고 하시겠지만, 죄송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정말 '아무 생각 없는 분들'입니다. 다만 교묘한 방법으로 세뇌되어 세뇌 되신지도 모 른 채 '남 따라 장에 간다'는 속담처럼, 분노에 사로 잡혀 머리끝까지 원통함과 증오로 차 올라 아무 생각 없이 남이 짜 놓은 각본대로 가실 뿐인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 중의 하나가, 그렇게 광란의 분노를 내뱉은 분들이 나중에 사물의 진실을 알고 말씀하는 한 마디가 단지 '그 때는 그게 사실인 줄 알았다!'며 자신에겐 아무 책임도 없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일입니다. 고작해야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더할 뿐, 그 분들에게 더 이상의 잘못은 자신에겐 없습니다. 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다른 분을 비통에 빠뜨렸는지,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다른 분들의 삶을 방해했는지에 대한 일말의 반성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보는 우리나라는, 이렇게 온통 아무 생각 없는 분들의 생각 없는 삶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 삶의 성찰보다 그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일색의 삶이 있을 뿐입니다. 비정상적일 정도의 성형 중독, 비쌀수록 잘 팔리는 상품들, 그저 즐기고 자극적인 내용의 TV 드라마들, 난무하는 악플들... 이런 어처구니 없는 모습도 그런 아무 생각 없는 우리 모습의 반영이라 할 것입니다. 



---------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한국에서는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사상가다. 그의 지적 계보를 잇는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의사소통행위 이론'으로 1980년대에 널리 알려진 데 반해, 아렌트는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그의 저작이 번역되기 시작했다. 아렌트의 사상에 알게 모르게 기대고 있는 '시민의 정치참여'가 이 땅에서 대중적 슬로건이 된 것을 감안하면, 그를 발견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걸렸다고 해야 할 정도다. 그 뒤늦음을 만회하려는 듯 그의 주요 저작이 속속 우리말로 옮겨지고 있고, 탄생 100돌을 맞아 지난 달에는 아렌트 학술 심포지엄이 열리기도 했다.

그의 저작 가운데 가장 최근에 번역된 것이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 (김선욱 옮김, 한길사 펴냄)이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은 난이도 높은 그의 사상서 중에서 유일하게 대중적 저작이다. 1961~1962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시대 유대인 학살 실무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의 재판 과정을 이야기체로 풀어 쓴 것이 이 책이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은 아렌트에게 대중적 명성을 안겨 주었고 동시에 그를 엄청난 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 저작은 책의 대중적 성격과는 상관없이 아렌트 정치철학의 핵심 주제를 포괄하고 있어 그의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용이한 통로를 제공한다.

감정 앞세우지 않은 이야기체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의 원고는 애초에 잡지 < 뉴요커 > 에 연재한 기사였다. 1960년 5월 아르헨티나에 숨어 지내던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체포돼 예루살렘으로 압송되자 아렌트는 대학 강의를 중단하고 < 뉴요커 > 특파원 자격으로 그의 재판을 취재했다. < 뉴요커 > 는 지식인들, 특히 교육 받은 뉴욕 사람들을 주요 독자층으로 삼은 대중 잡지였다. 독일 출신으로 나치 박해를 피해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이라는 아렌트의 '신분'이 유대인 학살자 아이히만 재판의 현장 취재 기자라는 '신분'과 만나는 것만으로도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아렌트의 글은 연재되자마자 유대계 사회의 거친 분노에 휩싸였다. 아렌트가 홀로코스트라는 참극의 희생자인 유대인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고 있으며, 마치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라는 듯 국외자처럼 사건을 대하고 있다는 것이 분노의 이유였다. 실제로 글 안에서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에 유대인 사회가 어떻게 협력했는지 밝혔을 뿐만 아니라, 그 야만의 집행자 아이히만을 묘사할 때도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그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홀로코스트 범죄의 책임자라기보다는 희생자에 가까운 사람으로 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히만은 '유대인 절멸'을 기획하고 교사한 사람들, 곧 히틀러를 정점으로 한 나치 지도부의 명령을 받은 처지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나치당의 강령도 알지 못했고 히틀러의 < 나의 투쟁 > 도 읽지 않았다. 그의 직급은 나치 친위대의 중간관리자(중령급)에 지나지 않았다. 히틀러는 그를 대면할 기회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며, 설령 대면했다 해도 아이히만의 이름은커녕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법을 준수하는 '건실한 시민'이었던 아이히만은 명령받은 일을 이행하는 것을 의무라고 느꼈고, 유대인 전문가로서 그들을 수용소에 배분하는 일을 착실히 수행했다.

'양심'의 문제가 여기서 불거졌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범죄를 저지른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며, 그의 양심은 상부의 명령을 정확히 행동에 옮기라고 요구했다. 그는 피고석에서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아렌트는 양심이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여건에 제약되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상주의적 열정도 한몫

이상주의적 열정도 아이히만의 정신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는 유대인 독립국가 건설 운동인 시온주의에 열렬히 공감했으며, 그들이 이상주의자라는 점에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의 이상주의는 관념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였고, 그것도 과격한 실천이라는 점에서 독특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이상주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아버지마저도 죽음으로 보냈을 것이라고 경찰 심문에서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얼마나 이상주의자로서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려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이히만은 난데없이 나타난 악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규칙과 명령과 '주어진 이상'에 맞추려고 노력한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이히만이라는 인간형이 이렇게 분석되고 난 뒤, 이 책으로 하여 결정적인 의미를 띄게 된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이히만은 스스로 악인이 되려고 한 적도 없었고, 반듯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하기까지 했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이다."

아렌트는 이 '순전한 무사유', 곧 사유하지 않음이야말로 아이히만의 진정한 특성이라고 말한다. 그의 '생각 없음'은 바꿔 말하면,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음'을 뜻한다. 사회적 환경에 제약된 양심을 품고 이상주의로 무장하고서 이 '무사유'를 실천할 때 얼마나 가공할 일이 벌어지는지를 아이히만은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아렌트는 다른 글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의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그의 유일한 특징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이었다."

아렌트는 정치의 영역을 시민들이 저마다 인격을 걸고 의견을 표출하여 경쟁하는 장으로 여겼다. 그 정치 공간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판단하는 훈련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상적인 공론장이다. 그런 정치의 장이 마련되고 강화할 때 아이히만과 같은 사례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아이히만이 평범한 것은 우리가 언제든 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말한다. "우리 안에 아이히만이 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차이와 평등의 정치철학' 한나 아렌트 따라읽기 붐

한나 아렌트 저작의 한국어판은 10년 전인 1996년 처음 얼굴을 내밀었다. 그의 대표작인 < 인간의 조건 > (이진우·태정호 옮김)이 '한길그레이트북스' 시리즈의 하나로 출간된 것이다. 1958년에 미국에서 나온 < 인간의 조건 > 은 아렌트를 정치철학자로서 우뚝 세운 저작이다. 아렌트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사상가로 평가받는 데 이 책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그의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실존주의를 재해석해 자신의 정치철학의 밑돌로 삼았다. 그는 인간에게 부여된 실존적 조건을 '복수성' 혹은 '다양성'에서 찾았다. 인간은 서로 다른 차이의 존재이며 따라서 인간들의 삶은 전체로 볼 때 언제나 복수일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차이는 인간이라는 보편성의 지평 위에 놓여 있다. 그것을 아렌트는 평등이라고 불렀다. 다름이 없다면 인간은 교류하고 소통할 이유가 없으며, 평등하지 않다면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할 것이다.

< 인간의 조건 > 출간 뒤 2000년대에 들어 '아렌트 르네상스'라 할 만한 현상이 벌어졌다. < 혁명론 > (홍원표 옮김, 한길사 펴냄) < 과거와 미래 사이 > (서유경 옮김, 푸른숲 펴냄)이 잇따라 나왔고, 1971년 저작 < 정신의 삶1-사유 > (홍원표 옮김, 푸른숲 펴냄)과 < 칸트 정치철학 강의 > (김선욱 옮김, 푸른숲 펴냄)도 출간됐다. 아렌트는 애초에 < 정신의 삶 > 을 '사유' '의지' '판단'이라는 칸트의 세 기획에 맞추어 3부작으로 내려고 했는데, 그 중 '정신'편만 완성했다. 유고를 갈무리한 < 칸트 정치철학 강의 > 는 이 기획의 '판단' 편에 해당한다.

'의지'편은 현재 번역중이며 또 아렌트에게 학자로서 첫 명성을 안겨준 1951년 저작 < 전체주의의 기원 > 도 한국어판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이밖에 < 정치의 약속 > < 공화국의 위기 > 등이 푸른숲에서 나올 예정이다. 이들이 빛을 보면 한나 아렌트 르네상스의 명실상부한 실체를 갖추게 되는 셈이다. 김선욱 숭실대 교수가 쓴 < 정치와 진리 > (책세상 펴냄) < 한나 아렌트 정치판단이론 > (푸른숲 펴냄)은 국내 아렌트 전공자가 쓴 아렌트 해설서로서 아렌트 사상을 이해하는 데 길잡이 노릇을 해준다. 


-----


유대인 학살범 아이히만, 아르헨티나에서 덜미 잡히다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이 예루살렘의 법정 피고석에 앉아 있다. 아데나워 총리 시절(1949~63)의 독일인은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었다.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았고, 교사들은 그 주제를 피했다. 그들은 아이히만 재판을 계기로 잊으려 애썼던 과거와 직접 대면하게 되었다.

 

[그때 오늘]

 

1960년 5월 11일 저녁 6시30분, 아돌프 아이히만은 늘 하던 대로 버스를 타고 일터에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세 사람이 나타나 그를 승용차에 싣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의 한 주택으로 데려갔다. 아이히만은 이스라엘에서 온 ‘전문가들’임을 즉각 알아챘다. 어떠한 폭력도 사용되지 않았다.

1942년 1월 나치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을 수립했고, 아이히만은 그 책임자로서 유대인 집단 학살을 주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군에 체포됐다 1946년 탈출한 그는 이후 몇 년 동안 중동지역을 전전하다 1958년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나치 전범 추적 단체에 의해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에서 체포돼 9일 뒤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이송됐다.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열었다. 1961년 4월부터 12월까지 계속된 이 재판에서 그는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946년 11월의 여론조사에서 독일인 중 33%는 유대인이 아리아인과 동일한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12년간 나치 지배를 받고 난 직후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생각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6년 뒤인 1952년의 조사 결과다. 수치가 더 늘어나 37%가 독일 영토에 유대인이 없는 것이 독일에 더 낫다고 밝혔다. 그들은 세계가 자신들을 어떻게 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피점령국 사람들의 고통보다는, 자신들이 겪었던 전후의 식량·주택 부족 등에 주목하면서 스스로를 ‘희생자’로 간주했다. 1951년 바이에른주 판·검사의 94%, 재무부 직원의 77%가 나치 전력자였다.

전범 아이히만 재판은 독일이 ‘과거’에 관심을 갖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재판과정에서 홀로코스트(대학살)의 실상이 낱낱이 조사되었기에 학살의 참상을 수백만 명에게 교육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 결과 히틀러를 위대한 정치가라고 믿는 서독인의 비율은 1955년 48%에서 1967년 32%로 하락했다. 갈 길은 아직도 남았다. 진정한 변화는 그 후 10여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1970년 브란트 총리는 바르샤바의 나치 희생자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었고,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이 살해되었다.

1979년 독일 텔레비전은 메릴 스트리프 주연의 4부작 미니시리즈 ‘홀로코스트’를 방영했다. 그제야 비로소 유대인의 고통은 독일 국민의 공공 의제가 되었다.

하지만 ‘집단적 기억상실’ 덕분에 나치 잔당에 의해 전후 독일의 놀라운 ‘경제 회복’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정의’와 ‘경제’는 양립할 수 없는 걸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


[홀로코스트]아이히만은 칸트 철학을 어떻게 독해했나?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제8장 법을 준수하는 시민의 의무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내몬 살인마, 아돌프 아이히만이, 재판과정에서 칸트 철학과 그의 정언명령에 대해 읽은 적이 있고, 그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는 점이다.

 

학살자의 심리와 독일이성철학이 결합되는 방식과, 독자와 철학자의 책이 오독되는 방식 그리고 그의 오독이 그를 흔들리지 않는 학살자로, 그리고 결국 그를 사형대 위에서 사라지게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의 난독증 에 대한 이야기… ^ ^

 

아렌트의 기록에 따르면, 재판과정에서 아이히만은 칸트의 정언명령에 대한 거의 완벽한 정의를 내렸다고 한다.

 

아이히만 ,“칸트에 대해 언급하면서 제가 말하려 한 것은, 나의 의지의 원칙이 항상 일반적 법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계속되는 질의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읽었노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가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을 추진하라는 명령을 받은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칸트의 원리를 따르지 않았으며, 자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아렌트는 그의 고백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 아이히만은 그가 살던 나치 제3제국치하에서, 즉 국가가 범죄를 합법화한 시대에서, 칸트의 정언명령이 더 이상 적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이고, 이 같은 판단은 칸트철학에 대한 오독이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가령 나치의 법률가 한스 프랑크가 제3제국의 정언명령에 대해, “만일 총통이 당신의 행위를 알았을 때, 총통께서 승인할만한 방식으로 행위하라고 정의한 바 있다.

 

하지만, 아렌트에 따르면, 칸트는 이런 식으로 주장할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 칸트적 정신이란, 인간은 법에 대한 복종 이상을 행해야 한다는 것, 단순한 복종을 넘어, 법의 배후에 있는 원리와 자신의 의지를 일치시켜야 한다는 요구에 다름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 철학에서 그 원천은 바로 실천이성이었다. 결국 칸트에게는 모든 사람이 행위를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입법자이며, 인간이 자신의 실천이성을 사용하여, 법의 원칙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 원칙들을 발견해야만 하는 것이며, 결국, 인간에게는 법에 대한 복종이상의 것이 요구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유대인 문제를 최종해결을 수행하면서, 아이히만을 사로잡은 것은 실천이성이 아닌, 총통의 이성이었다.

 

아이히만의 내면에서는, 유대인 문제를 최종해결하라는 히틀러의 이성을 실천하기 위한 철저함이 보인다. 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문제에 관한 불편한 진실이 있다면, 아이히만이, 종전 무렵 하인리히 힘러를 위시한 다수 친위대들이 유대인 문제에 대한 타협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그가 끝까지 철저하게 견지한 비타협성이고,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 그의 광신이 아니라, 그의 양심이라는 점이다.

 

종전이 가까워오고, 나치의 패배가 명약관화해 지면서, 친위대 내부에서는 그 수장 힘러를 위시해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온건파들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연합군 과 유대인들과의 모종의 협상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힘러와 그 부하 온건파들의 타협시도에 대해, 아이히만은 완강히 저항했다. , 총통 히틀러의 의지와 힘러의 의지가 충돌한 경우, 아이히만의 선택은 항상 히틀러의 유대인문제 최종해결 명령이라는 의지였음은 한치의 의심도 없었던 것이고, 협상을 모색한 친위대 온건파들의 관점을 그는 부패라 간주했다. 이 과정에서 만약 아이히만이 어떤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면, 그것은 유대인 대학살을 명령한 그의 최고 상관인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라는 것이 바로 아이히만의 양심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치시대의 양심은 다음과 같은 역설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문명화된 나라에서 살인과 관계된 양심이란, “살인하지 말라라면, 히틀러의 독일 제3제국 시절의 법이란, 비록 살인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정상적인 욕구와 성향에 반한다는 것을 유대인 대학살의 조직가들이 아주 잘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히틀러식 양심의 소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너는 살인할 지어다라고 속삭였던 것이다.

 

아이히만의 칸트 읽기와 그 오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은, 인간은 법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상의 판단,실천을 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치의 전범재판 중 하나였던, <뉘른베르크 재판>의 판례에 따르면, 비록 상관 혹은 국가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인륜범죄라면, 명령을 단순히 수행한 자에게도 법적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




Eichmann in Jerusalem - Hannah Arendt


이 책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유대인을 학살한 죄인에 대한 재판을 다룬 책임에도 불구하고 시온주의(유대인 민족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는 점만 해도 이 책의 흥미진진함을 느낄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히만 재판은 그가 나치독일치하에서 유대인 관련업무만을 맡았던 공무원이기에 나치독일의 여러 민족에 대한 범죄로 기소된 뉘른베르크 재판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재판이 열리게 된 과정부터 독특했는데, 이스라엘은 아이히만이 살고있는 아르헨티나에서 국제법을 어기며 납치해왔으며 국제재판소를 여는게 더 적절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 열렸다는 점입니다. 이것에 대해 아이히만 당사자에 대한 재판이 아닌 반유대주의에 대한 재판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로인해 예루살렘 재판은 여러 문제점을 야기했다고 지적하는데, 피고를 위한 증인을 허용하지 않은 점 뿐만 아니라 잘못을 행하려는 의도가 범죄를 구성하는데 필수적이라는 가정을 했다는 점입니다.

이 책은 아이히만의 성장과정을 따라갑니다. 평범한 학생이 성장해 결혼을 하고, 감압정유회사에 취직하고 나치당에 가입했고 친위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당의 정강도 알지 못했고 '나의 투쟁' 도 읽지 않았습니다. 젊은 변호사 칼텐브루너의 "친위대 가입해보면 어때?" 라는 질문에 "그렇게 하지 뭐" 정도의 신념으로 가입했던 것입니다. 그가 유대인 문제 전문가로 성장하며 맡았던 것은 나치당의 유대인 해결책과 동일했습니다. 추방, 수용, 학살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정책이 변화할때마다 그는 맡은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아이히만이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를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마치 본디오 빌라도가 된 심정이였다고 말합니다. 유대인은 예수를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몰아 빌라도에게 고발했고,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확신했지만 유대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십자가형에 처한뒤 손을 물로 씻으면서 자신의 죄가 없다고 말한 바로 그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의 추방 및 수용은 몰라도 최종해결책, 즉 학살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결국 자신의 양심을 무마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 방법이란 학살에 반대한 사람을 단 한명도 볼수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입니다.

나치가 유대인을 그토록 많이 학살하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들 중 하나는 바로 유대인 지도자들입니다. 유대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독일은 그 짧은 시기에 유대인을 그렇게 대량으로 학살할수 없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나치는 유대인을 추방,이송하는데 있어서 유대인 공동체를 이용했는데, 명단을 작성하고 돈을 인수하고 기차에 태울수 있게 경찰력을 제공하는 등 유대인 중앙위원회는 유대인처리에 있어서 절대적 권리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비밀을 맹세했고, 자기 민족을 파멸로 이끄는 새로운 권력에 취해 홀로코스트를 이룩함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합니다. 간혹 유대인을 구한 경우도 있었는데 헝가리에서 카스트너 박사는 47만 6000명의 희생자를 내고 1684명을 구출했습니다. 이러한 저명한 유대인은 전쟁중에도 학살당하지 않았고 그들을 위해 덜 저명한 유대인은 항상 희생되었습니다. 히틀러는 340명의 일등급 유대인에게 독일인의 지위를 부여했고 수천명의 반쪽 유대인은 모든 제약을 면제받았습니다. 심지어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을 학살한 의사들은 유대인 부대도 있었습니다.

유대인 위원회가 유대인을 학살하는데 큰 영향력을 끼친 증거로 나치독일 점령국에서의 유대인 학살과정을 들수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간의 문제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반응에 따라 유대인학살수치에 큰 영향을 가져옴을 알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무국적 유대인을 희생시키는데 있어서 오히려 프랑스 비시정부가 자발적으로 앞장섰으나 프랑스계 유대인을 포함시키려 하자 격렬하게 저항한 결과 25만명의 유대인이 살아남을수 있게 되었습니다. 벨기에의 경우 더 비협조적이였지만 나라가 작다보니 숨기가 어려워 피해가 좀 있었습니다. 덴마크의 경우 독일의 반유대정책에 대해 대놓고 반대했고 무국적자마저 덴마크 정부가 보호해줬을뿐만 아니라 돈없는 유대인을 위해 덴마크시민들이 탈출비를 제공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완강한 저항을 보게 되자 정작 덴마크에 파견된 독일당국마저 베를린의 명령에 대해 거부심을 표하게 됩니다. 불가리아의 경우 더욱 완강한 정책으로 불가리아 유대인은 이송되거나 자연사가 아닌 죽임을 당한 사람은 한명도 없게 됩니다. 그런 반면 루마니아의 경우 독일보다 더 극렬한 반유대정책으로 유대인학살의 원조격인 친위대마저 루마니아인들의 학살에 공포심을 느꼈으며 유대인을 구하기위해 개입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독일의 도움 없이도 독일 친위대가 도착하기 전에 벌써 30만명을 학살했습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였습니다. 그의 친척중에도 유대인의 피를 잇는 사람이 있었고, 교양있는 유대인 지도자들과 친분을 나눴으며 자신이 맡은 유대인학살소(테레지엔슈타트)의 학살과정을 보고 경악했으며 그의 희망은 유대인의 발아래 확고한 땅을 두려는 것이였습니다. 그것은 그의 니스코 모험이나 마다가스카르 계획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최종 해결책이 다가옴에 따라 취소되었고 그는 변경된 정책을 따랐습니다.

이스라엘 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판결문에서 그는 15개의 기소 항목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그것은 유대인의 대량학살 및 폴란드인, 슬로베니아인 추방죄와 집시추방죄를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집시의 학살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판결문에서 살상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대통령은 아이히만의 사면 청원서와 미국랍비중앙회, 미국개혁주의 유대교대표단 등에서 보내온 호소편지문을 모두 물리쳤고 몇시간뒤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쳐해졌습니다.

아이히만은 사악한 동기에서 행동하지 않았고, 누구를 죽일 어떤 의도도 없었으며, 유대인을 증오하지도 않았지만 다르게 행동할 수 없었으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그를 통해 그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사고의 무능력함을 지적했고, 그가 행한 모든 일은 그가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서 인식한 만큼 행동한 것이었다. 그는 경찰과 법정에서 계속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의무를 준수했지만 그 법과 조국, 숭고한 명령에 대해 사고하지 못했음을 지적했고, 설령 대량학살의 조직체에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을 지지했고 인류 구성원 중 어느 누구도 아이히만과 이 지구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할수 없기 때문에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아주 평범하게도, 밀그램의 실험에서 버튼을 누른 대다수의 사람에 불과했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평범한 아버지였고, 평범한 공무원이였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누구라도 그처럼 될수 있는 평범한 악 이였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 책이 예루살렘 재판의 성공여부(헌법재판소로서 정의를 부여하는 행위)만을 다루고 있다고 글을 마무리하지만, 역사속에서 유대인학살을 최소화할수있었던 좋은 예들(덴마크나 불가리아의 유대인정책 등)을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알수 있을 것입니다.


----------

한국판 아이히만에 면죄부 준 용산 판결 / 조영관 한겨레

지난달 28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에서 열린 용산참사 재판에서 형사합의27부는 특수공무방해치사상 등의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 9명에게 최고 징역 6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용산참사의 모든 책임은 농성했던 철거민에게 있다는 것이다.

히틀러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에 책임이 있는 나치의 고위 장교들 중 한 사람으로, 자신은 승진을 위해 특별히 근면했던 것을 제외하고 아무런 악의적 동기가 없었고, 스스로를 ‘오류의 희생자’라 주장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통해 ‘악’이라는 것이 ‘일상적’으로 저질러질 수 있는 ‘단순한’ 것이며, 그러한 행위의 본질은 악을 행하는 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하게 하는 ‘무사유성’이라고 보았다.

이번 사법부의 판결은 한국판 아이히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정치적 판결이다. 용산참사는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세입자들이 생존권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자, 정부가 공권력으로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행위가 ‘정상’이라고 믿으며 작전을 수행했고, 결국 5명의 철거민과 1명의 경찰이 목숨을 잃었다. 용산참사에 책임을 지고 있는 수많은 한국판 아이히만들은 이번 판결을 통해 자신의 행위의 결과반성기회거부당했다. 합리적 해결을 바라는 수많은 시민들은 또다시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좌절감을 느끼며, 복종을 강요당했다. 정의롭지 못한 권력자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던 구청 공무원, 경찰, 소방관, 용역업체 직원들은 사회 상층부의 행위양식에 또다시 적응해야 했다. 권력에 대한 ‘복종’이 만들어낸 행위의 무사유성은 더 거대한 폭력을 불러올 수 있다.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다는 ‘악의 평범성’은 용산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너무 쉽게 마주할 수 있는 비극이다.

조영관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생각 >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진규 -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0) 2010.09.19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와 명상록  (0) 2010.09.17
유영만  (2) 2010.09.03
소크라테스 일화들  (1) 2010.08.30
소크라테스  (0) 2010.08.26
Posted by WN1
,

wn1 -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움직이는 것에는 젊음이 유지 된다... 이와 같은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예전의 일이지만 7개월여를 최소한만 움직이는 생활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집안에서만 생활하였고 필요물품을 사야하거나 할 때에만 밖으로 나갔으며 밖에서도 자동차로 움직였기에 실제적인 움직임은 거의 없었습니다.

처음엔 별 다른 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력해졌고.. 필요한것을 사러 나가면 걸음걸이가 좀 이상해졌습니다.. 다리에 힘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죠
그리고 심심하면 설사를 하기도 하였습니다..병원을 가면 장이 예민하다고 하고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했지요..

7개월 여가 지나고 몸을 움직이고 운동장을 걸으면서 점차 장이 튼튼해 졌고.. 다리에 힘도 들어갔으며 ... 무력함이 사라졌습니다.

사람이 신체를 움직이지 않으면 신체가 무력해 지고... 정신을 사용하지 않으면 정신이 무력해 지게 됩니다.
신체야 운도으로 쉽게 돌릴수 있지만... 정신이 멈추어 버리면 참으로 돌아오기 힘듭니다.
정신적인 무력감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특히 이 무력감이 편협한 사고와 만나면 '자신은 아무것도 잘 할 수 있는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신을 움직입시다..
정신을 움직인다는것은 새로운 관점을 바라보는 것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정해진것이라 하더라도 더 나은 방법이 있을것이라는 생각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을 창조하는 일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일.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자신에게 자신을 만들어 준다


창조의 노력이 멎을 때 나무건 사람이건, 
늙음과 죽음과 질병이 온다
.


겉으로 보기에 나무들은 표정을 잃은 채 
덤덤히 서 있는 것 같지만, 
안으로는 잠시도 창조의 일손을 멈추지 않는다.

땅의 은밀한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새 봄의 싹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시절 인연이 오면 안으로 다스리던 생명력을 
대지 위에 활짝 펼쳐 보일 것이다.
 
                                 - 법정스님의 수상집 <산방한담> 중에서 - 

Posted by WN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