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 출발
정보는 사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이고, 지식은 뒤죽박죽 섞인 사실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지혜는 뒤얽힌 사실들을 풀어내어 이해하고, 결정적으로 그 사실들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 지식은 안다. 지혜는 이해한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종류의 차이이지 정도의 차이가 아니다. ..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다. 지혜는 실천하는 것이다. 6-7

철학은 새로운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도와주고, 바로 거기에 큰 가치가 있다. 11

우리에겐 느 ㄹ지혜가 필요하지만 삶의 단계마다 필요한 지혜가 다르다. 열다섯 살에게 중요한 ‘어떻게’ 질문과 서른다섯 살, 또는 일흔다섯 살에게 중요한 질문은 같지 않다. 철학은 각 단계에 반드시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14


1부 새벽

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오는 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망각이었다. 그는 온전한 삶을 살라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독촉했다. 31-32

마르쿠스는 스스로에게 생각을 그만두고 행동에 나서라고 누차 촉구한다. 32



2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감정도 열차처럼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주기적으로 한바탕 찾아오는 나의 우울은 난데없이 나타난 것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멈춰 서서 그 근원을 잘 살펴보면 숨은 원인을 찾게된다. 나의 슬픔은 바로 앞의 생각이나 감정에 원인이 있고, 이 생각이나 감정은 그 이전의 것에, 그 이전의 것은 1982년에 어머니가 한 말에 원인이 있다. 생각이 그렇듯이 감정도 결코 느닷없이 나타나지 않는다. 열차처럼 앞에서 감정을 끌어당기는 힘이 늘 존재한다. 41-42

사람들은 질문을 물어봅니다. 가끔은 질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질문과 씨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경험하지는 않습니다. 43

소크라테스에게 가장 최악위 무지는 지식의 가면을 쓴 무지였다. 48-49

우리는 종종 궁금해하는 것과 호기심을 같은 것으로 여긴다. 물론 두 가지 다 무관심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 방식은 서로가 다르다. 궁금해하는 것은 호기심과 달리 본인과 매우 밀접하게 엮여 있다. 우리는 냉철한 호기심을 가질 수 있다. 냉철하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하지만 냉철하게 궁금해할 순 없다. 호기심은 가만히 있질 못하고 늘 눈앞에 나타나는 다른 반짝이는 대상을 쫓아가겠다며 위협한다. 궁금해하는 마음은 그렇지 않다. 그 마음은 오래도록 머문다. 호기심이 한 손에 음료를 들고 안락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발을 올려둔 것이 바로 궁금해하는 마음이다. 궁금해하는 마음은 절대로 반짝이는 대상을 쫓지 않는다. 절대로 고양이를 죽이지 않는다.
궁금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좋은 식산 좋은 섹스처럼 절대 서두를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소크라테스도 절대로 대화를 재촉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상대가 점점 지치고 분노할 때초자 인내심을 갖고 대화에 임했다. 55-56

좋은 철학은 느린 철학이다. 57

멈춤은 텅 빈 것이 아니라 잠시 유예된 상황이다. 생각의 씨앗이다. 모든 멈춤은 인식의 가능성, 그리고 궁금해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57

문제를 경험하기 전에 해결하는 것은 식재료를 구매하기 전에 요리를 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너무 자주 우리는 가장 빠른 해결책, 또는 가장 편리한 즐거움에 손을 뻗는다. 63

내 견해가 어떻게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다른 모든 교활한 지배자처럼 나의 의견 역시 내가 자기들을 불러들였ㄷ고 믿게 한다. 정말 내가 그랬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생각이 말도 없이 나타나서 멋대로 내 옷을 걸쳐 입은 걸까? ..
깊이 있는 질문은 느리고 더 깊이 침잠한다. 68

철학은 말뿐이야. 질문만 끝없이 늘어놓고 대답은 없어. 언젠 떠나기만 하고 도착하지는 않는 기차야. ..
철학도 분명 도착지에 관심이 있지만, 여행을 서두르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그저 똑똑한 대답이 아닌 ‘마음의 대답’에 도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69

좋은 질문은 그렇다. 사람을 단단히 붙잡고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좋은 질문은 문제의 프레임을 다시 짜서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좋은 질문은 문제의 해답을 찾게 할 뿐만 아니라 해답을 찾는 행위 그 자체를 재평가하게 만든다. 좋은 질문은 똑똑한 대답을 끌어내기도 하지만 침묵을 끌어내기도 한다. 71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는 내가 문학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들어 있다. ..
‘이제 나는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잠시 멈추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성공은 어떤 모습이지? 솔직히 말하면 아직 이 질문의 답을 찾지 못했고, 어쩌면 영원히 못 찾을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안경의 도수를 다시 맞추었고, 이제 앞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72-73



3 루소처럼 걷는 법


철학자이자 황제인 마르쿠스가 대답을 해준다. ‘상상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역경을 만나면 자기 연민이나 절망에 빠지지 말고 그저 다시 시작하라.’ 이런 식으로 바라보면 삶은 더 이상 실패한 서사나 망쳐버린 결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진실이 아니다. 결말 같은 건 없다. 무한한 시작의 사슬만이 있을 뿐. 99



4 소로처럼 보는 법


소로가 동양으로 눈을 돌린 이유는 평범했다. 인생의 위기, 1837년이었다. 소로는 당시 관습이었던 체벌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콩코드 학교의 교사직에서 막 해고된 참이었다. 무일푼에 갈곳도 없었다. 그때 우연히 책 한 권을 만났다. 1000페이지에 달하는, 무려 “영국령 인도에 관한 역사적 기술적 해설”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소로는 묵묵히 책을 읽어내며 보석을 캐냈다. 책 속에 잇는 생경하고도 친숙한 아이디어들이 천천히 소로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소로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어느 정도는, 아주 가끔이지만, 나 또한 요가 수행자다.”
내 생각에 소로는 요가 수행자보다는 산야시(sannyasi)에 더 가깝다. 힌두교 전통에서 산야시는 가족으로서의 의무를 내던진 사람으로, 모든 재화를 포기하고 오로지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 숲에 틀어박힌다. 113-114

<월든>의 영웅이자 미국 설화의 사랑받는 아이콘, 환경주의의 주창자, 문학의 거성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개자식이었다. 소로를 아는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너새니얼 호손은 소로에게 “무쇠로 만든 부지깽이처럼 뻣뻣한 완고함”이 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호손만큼 친절하지 않았다. 소설가 헨리 제임스와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아버지인 헨리 제임스 시니어는 “소로는 평생 내가 만난 그 누구보다도 유치하고 개념 없고 뻔뻔한 이기주의자"라고 했다.
소로가 받는 혹독한 비난은 주로 위선에 관한 것이다. 소로는 숲속에서 홀로 자족하는 척하면서 몰래 엄마 집에 들러 파이를 먹고 빨래를 맡겼다.
그건 사실이다. 소로는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만큼 월든에 고립되어 살지 않았다. 엄마의 요리를 먹으려고, 또한 우체국과 카페에 들르려고 종종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마을로 향했다. 그렇다면 《월든》은 사기인가? 미국 전역의 중학교 3학년생은 그동안 기만당한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로는 사회와의 끈을 전부 끊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 <월든>은 숲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 관한 책이 아니다. <월든>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 관한 책이다. 115-116

가끔 우리는 의미를 너무 빨리 창출한다. .. 물건과 사람을 너무 빨리 정의 내리면 그것들의 유일무이함을 보지 못할 위험이 있다. 소로는 그러한 경향을 경계했다. “보편 법칙을 너무 성급하게 끌어내지 말 것.” 소로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특수한 사례를 더 명확하게 들여다 볼 것.” 눈앞에 보이는 것을 바로 규정하지 않고 기다리면 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120

소로는 말한다. “어떤 대상을 이해하는 것을 멈출 때에야 나는 비로소 그 대상을 보기 시작한다.” ..
소크라테스처럼 소로도 철저하게 의식적인 무지를 중요하게 여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유용한 무지를 전파하는 모임”을 만들겠다고 했다. 128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고 싶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본질적인 실상에 직면하고 싶어서, 그것들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죽음을 맞이 했을 때 내가 제대로 살지 않았음을 깨닫고 싶지 않아서였다.” 132

관점을 바꾸면 어떻게 보느냐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도 바뀐다. “제대로 된 관점에서 보면 모든 폭풍과 그 안에 든 모든 빗방울이 무지개다.” 133

매일 틀에 박힌 것만 보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소로는 자신의 관점을 바꾸었다. 133

“무엇이든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 143



5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그의 저서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전부 제시되어 있다. .. 20대 때 완성한 이 작품을, 쇼펜하우어는 “한 가지 생각의 산물”이라고 칭했다. 153

책만 열면 바로 해답이 있는데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쇼펜하우어는 대답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생각해서 해답을 내놓는 것이 100배는 더 가치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 함께 머무르지 않고 너무 자주 책 앞으로 달려간다고 말했다. “책은 자기생각이 고갈되었을 때만 읽어야 한다.”
‘읽다’를 ‘클릭하다’로 바꾸면 현재 우리가 겪는 고충이 된다. 우리는 데어터를 정보로 착각하고,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착각한다. ..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썼다. “정보는 그저 통찰로 향하는 수단일 뿐이며 정보 그 자체에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이런 과도한 양의 데어터(사실상 소음)는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이며, 통찰의 가능성을 없앤다. 소음에 정신이 팔린 사람은 음악을 듣지 못한다. 179





2부 정오

6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삶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마라. 만약 그 성취가 네 이웃에게 알려진다면 그 때문에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명령에 언짢아하는 추종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이들에겐 감출 것이 하나도 없었다. 194

에피쿠로스는 경험론자였다. 그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 오로지 우리의 감각만을 통해 세상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194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주요 원칙은 “네 가지 치료법”이라는 뜻의 테트라파르마코스(tetrapharmakos)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약처럼 철학도 일정 간격을 두고 처방된 양을 섭취해야 한다. 약처럼 철학에도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어지러움, 방향 감각 상실, 그리고 때때로 조증 삽화까지. 194-195

진정해. 에피쿠로스가 말한다. 그리고 즐기라고. 그는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끝”인 쾌락을 옹호했다. 그리고 도발적으로 덧붙였다. “만약 내게서 맛의 쾌락을 빼앗는다면, 성적 쾌락을 빼앗는다면, 듣는 쾌락을 빼앗는다면, 아름다운 형태를 보았을 때 느끼는 달콤한 감정을 빼앗는다면, 선을 어떻세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196

“나는 명예가 있는 자와 헛되이 그들을 찬양하는 자에게 침을 뱉는다.” 쾌락은 우리가 그 자체로서 욕망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 밖의 모든 것, 심지어 철학까지도, 쾌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한 수단이다. ..
어린아이는 무엇에 반응하는가? 쾌락과 고통이다. ..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 쾌락을 규정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를 만족으로 이끄는 것은 어떤 것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불안의 부재다.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한다. 에피쿠로스는 향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평정(平靜)주의자’ 였다. 197

현재 우리는 쾌락의 황금시대를 살고 있다. 클릭 한 번이면 우리를 애태우는 수많은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고급 요리, 메모리폼 매트리스, 변태 같은 섹스, 다양한 종류의 기기들, 에피쿠로스라면 이 모든 것이 다 우리를 유인하는 가짜 쾌락이라고 말할 것이다. 201-202

에피쿠로스와 부처의 가르침은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 두 사람 다 욕망을 고통의 근원으로 보았다. 두 사람 다 평정을 수행의 궁극적 목표로 보앗다. 두 사람 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에피쿠로스에겐 정원이, 부처에겐 수행공동체인 승가가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숫자 4를 좋아했던 것 같다. 부처에겐 사성제(四聖諦)가, 에피쿠로스에겐 네 가지 치료법이 있었다. 205



7 시몬 베유처럼 관심을 기울이는 법


관심에 대해 깊이 고민한 이 철학자는 자신에게 관심이 쏟아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보고 싶어 했으나 보이는 것은 원치 않았다. 기차를 타거나 공장에서 일을 할 때 자신의 목표는 익명성,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가서 사라지는 것”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221

관심은 중요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더, 관심은 우리의 삶을 형성한다.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지금 당장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인 것만이 우리 앞에 존재한다. ..
관심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어디에 관심을 기울이기로 결정했느냐, 더 중요하게는 어떻게 관심을 기울이느냐가 곧 그 사람을 보여준다. 222

가장 강렬하고 너그러운 형태의 관심에는 다른 이름이 있다. 바로 사랑이다. 관심은 사랑이다. 사랑은 관심이다.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이다. “불행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시네게 관심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베유는 말한다. 보답에 대한 기대 없이 타인에게 온전한 관심을 쏟을 때에만 우리는 이 “가장 희소하고 순수한 형태의 너그러움”을 베풀게 된다. 227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일 수 있는 능력은 매우 희귀하고 갖기 어려운 능력이다. 그건 거의 기적에 갂바다. 아니, 그것이 바로 기적이다.” 228

베유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진 않다고 말한다. 짧은 질문 한마디가 마음을 녹이고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지금 무슨 일을 겪고 계신가요?” 베유는 이 질문이 강력한 힘을 지닌 이유가 고통 받는 사람을 “집합체의 한 단위, 또는 ‘불행하다’라는 딱지가 붙은 사회 범주의 한 표본으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그저 어느 날 고통이 특별한 흔적을 남겼을 뿐인 한 명의 인간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228-229

관심은 집중이 아니다. 집중은 강제할 수 있다. 얘들아, 잘 좀 들어! 하지만 관심은 강제할 수 없다. 집중할 때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해보라. ..
집중은 수축한다. 관심은 확장한다. 집중은 사람을 피로하게 한다. 관심은 피로를 회복시켜준다. 집중은 생각을 한곳에 모으는 것이다. 관심은 생각을 유보하는 것이다. 베유는 이렇게 쓰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생각은 텅 빈 채로 기다려야 하고 그 무엇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저 자신의 생각에 침투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이 문장에 그리 당혹스럽지 않다면, 베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문제는 수동성의 결여에서 생겨난다.”라고 선언한다. 233

관심은 우리가 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동의하는 것이다. 헬스보다는 요가에 더 가깝다 베유는 이를 “소극적인 노력”이라고 불렀다. 베유는 진정한 관심이란 일종의 기다림과 같다고 믿었다. 베유에게 이 두 가지는 사실상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가장 귀중한 선물을 얻는 것은 그것을 찾아 나설 때가 아니라 그것을 기다릴 때다.” 관심의 반대말은 산만함이 아니라 조급함이다. 234

우리가 종종 너무 서둘러 판단을 내리듯이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는 데도 너무 성급하다. 어떤 대상이나 생각에 너무 빨리 혹하고, 그 대가를 치른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아름다움이나 친절한 행동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베유는 알지 못하는 상태,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최대한 오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234-235

지적 조급함은 물에 빠진 사람이 칼이라도 붙잡으려 하는 것처럼 나쁜 아이디어라도 붙잡으려고 한다. 베유는 우리의 모든 실수가 “생각이 아이디어를 너무 성급하게 붙잡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며, 이렇게 일찍 차단되면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238



8 간디처럼 싸우는 법


간디는 폭력을 혐오했지만 그가 폭력보다 더 싫어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비겁함이다. 둘 사이에서 골라야 한다면 간디는 폭력을 선택했다. “비겁한 사람은 남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간디의 진정한 목표는 인도의 잃어버린 남성적 힘을, 인도만의 방식으로 되찾는 것이었다. 간디는 그렇게 하면 자유가 자연히 따라오리라 믿었다. 275

간디는 새로운 형태의 비폭력 저항에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사티아그라하. 사티아(satya)는 산스크리트어로 '진실'이라는뜻이고, 아그라하(agraha)는 '결의' 또는 '단호히 하다'라는 뜻이다. 진리의 힘('영혼의 힘'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이다. 이것이 바로 간디가 품고 있던 것이었다. 여기에는 수동적이거나 물렁한 면이 전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능동적인 힘이다. 사티아그라히, 즉 비폭력 저항가는 무장한 병사보다도 더 능동적이며,더 용감하다. 간디는 방아쇠를 당기는 데에는 그 어떤 위대한 용기도, 지능도 필요치 않다고 말했다. 오직 진정으로 용감한 사람만이 인간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자발적으로 고통을 겪는다. 간디의 병사들은 다른 병사들처럼 대의명분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했다. 하지만 다른 병사들과는 달리 대의명분을 위해 다른 사람을 기꺼이 죽이려 하지는 않았다.
“혁명을 하다 보면 이런 일도 생깁니다." 레닌은 자신의 집단학살 명령을 변호하며 이렇게 말했다. 간디의 혁명은 그렇지 않았다. 간디는 피비린내 나는 수단을 이용해 인도의 독립을 쟁취하느니 계속 영국의 속박을 받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간디는 "구덩이 안으로 내려가지 않고 구덩이를 팔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다. 다른 이를 잔인하게 대하는 사람은 곧 스스로를 잔인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혁명이 결국 실패로 끝나는 것이다. 수단과 목적을 혼동한 사람은 스스로를 집어삼킨다. 간디가 보기에 목적은 절대로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했다. 수단이 곧 목적이었다. “불순한 수단은 불순한 결과를 낳는다. 정확히 뿌린 대로 거두게 되는 법이다." 유독한 땅에서 장미나무를 키울 수 없듯이, 피 묻은 땅에서는 평화로운 국가를 세울 수 없다. 284-285

간디는 절대로 비폭력을 하나의 전략으로, “마음대로 걸쳤다 벗었다 하는 옷”으로 여기지 않았다. 비폭력은 하나의 원칙이며, 중력의 법칙처럼 침범할 수 없는 법칙이다. 287

1959년, 마틴 루서 킹 주니어는 인도에서 간디의 가족을 포함한 간디의 추종자들을 만났다. 킹은 이 여행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고, 몇 년 후 흑인 인권운동에서 비폭력 저항의 “단호한 사랑”을 활용했다. 비폭력은 1980년대의 필리핀, 1990년대 초의 동유럽처럼 다른 곳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약 300건의 비폭력 운동을 종합적으로 살핀 연구에서 연구원 에리카 테노웨스와 마리아 슈테판은 이 전략이 절반 이상의 사례에서 효과를 나타냈음을 발견했다(또한 비폭력 전략은 이들이 연구한 사례의 4분의 1에서 부분적 성공을 거두었다). 287-288

간디는 폭력을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상대편을 친구로 바꿀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대부분의 폭력은 부도덕ㅎㄴ 충동이 아닌 상상력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폭력적인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힘들게 노력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주먹을 날리거나 총에 손을 뻗는다. 너무나도 빤한 반응이다. 290

간디가 말한 깨끗한 생각은 “베일을 쓴 폭력”에서 자유로운 사고를 의미했다. 어떤 사람 앞에서 평화롭게 행동하더라도 그 밑에 폭력적인 생각이 깔려 있으면 그것은 깨끗한 게 아니다. 간디는 추종자들이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창피한 줄 알라”고 소리치는 것을 금지한 적이 있다. 오늘날 자기가 싫어하는 정치인의 식사를 방해하는 사람들을 간디는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시위자들은 신체적으로는 그 누구도 해치지 않을지 몰라도 사실은 그저 “비폭력의 가면을 쓰고 있을 뿐”이다. 292

자기 원칙을 타협하는 것은 곧 굴복하는 것, “모두 주고 하나도 얻지 못하는 것”이라고, 간디는 말했다. 더 나은, 더 창의적인 해결책은 양측이 자신이 원하는 줄도 몰랐던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295





3부 황혼

11 니체처럼 후회하지 않는 법


“모든 진실은 구불구불하다.” 니체가 말했다. 모든 삶도 맟찬가지다. 우리는 모든 것이 지난 후에야 과거를 돌이켜보며 서사를 매끄럽게 다듬고 패턴과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지그재그다. 여백도 있다. 과거의 자신을 막 모습을 드러낸 미래의 자신과 갈라주는 텍스트 사이의 빈 공간. 이 여백은 무언가가 누락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백은 무언의 과도기이며, 우리 삶의 흐름이 방향을 바꾸는 지점이다. 372

니체는 읽기 즐거우면서 동시에 읽기 버겁다. 니체가 읽기 즐거운 것은 문자으이 명료함과 상쾌한 단순함이 쇼펜하우어에 맞먹기 때문이다. ..
니체는 철학이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장난기 넘치고, 통렳게 웃기다. 니체는 모든 진실에는 최소한 한 번의 웃음이 따라와야 한다고 말했다. ..
니체가 읽기 버거운 것은 소크라테스처럼 니체도 확고한 신념에 의문을 품으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375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는 법 …… 다르게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376

어떤 철학자는 충격을 준다. 많은 철학자는 논증을 한다. 일부 철학자는 영감을 준다. 오직 니체만이 춤을 춘다. 니체에게 패기와 아모르파티, 즉 운명애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었다. “나는 춤추는 법을 아는 신만을 믿을 것이다.” 니체는 말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미친 것처럼 열렬히, 일말의 자의식도 느끼지 않고 춤을 춘다. 377

니체는 영원한 지옥이라는 기독교 개념을 들며 “어떤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부서지고 변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옥은 실재하지 않을 수 있지만 지옥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의 행동 동기가 된다. 영원회귀를 증명하지 않아도 마치 진짜인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는 것이다. 380

영원회귀는 사고실험이다. ..
영원회귀는 .. 전부냐 전무냐, 둘 중 하나다. 인생이 하나의 패키지다. 당신의 삶은 정확히 똑같이 반복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하나도 없다.” 편집은 불가능하다. 모든 결함과 지루한 대화가 그대로 들어 있는 이 삶을 다시 살아야만 한다. 감독판이다. 니체는 이 시나리오가 당신을 당황시키고 부끄럽게 하리란 걸 안다. 당신이 몇 개 장면은 삭제하고, 다른 장면을 집어넣고, 컴퓨터로 몇 가지 더 바꾸고, 몸매 좋은 대ㅐ역배우를 써서 삶을 수정하고 싶어 하리란 걸 안다. 381

니체는 말했다. “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법을 앞으로 더욱더 배우고 싶다. 그렇게 나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 될 것이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사랑하지 말라고, 바로 그 고통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사랑하라고, 니체는 말한다. 385



12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매가 난파 됐을 때 난 정말 좋은 항해를 했어.” 이 말은 훗날 스토아학파의 핵심 주제가 된다. 바로 고난을 통해 강해지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 로마의 정치가이자 스토아 철학자였던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바람에 수없이 시달리지 않은 나무는 땅에 튼튼하게 뿌리박히지 못한다. 바람에 흔들려야 땅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고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 고난은 덕을 함양할 수 있는 기회다.” 400-401

스토아학파는 유리잔에 물이 반이나 차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에게 유리잔이 있다는 사실을 기적으로 여긴다. .. 애초에 유리잔을 가져본 적 없는 삶을 상상한다. 친구의 부서진 유리잔과 그때 자신이 줄 수 있는 위로를 상상한다. ..
라이트 주립대학의 철학 교수ㅜ이자 스토아철학을 실천하는 윌리엄 어빈이 말한다. “스토아철학을 실천하면 작은 기쁨을 더 섬세하게 느끼게 된다. 우리는 뜬금없이 우리가 우리라서, 우리가 우연히 살게 된 이 우주 안에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을 살고 있어서 기쁨을 느낀다.” 402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몸이 아픈데도 행복하고, 위험에 처했는데도 행복하고, 죽어가고 있는데도 행복하고, 나쁜 평판을 듣는데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내게 보여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내게 데려오라! 신들의 이름으로, 그렇다면 나는 스토아 철학자를 보게 될 것이다!” 404-405

에픽테토스는 기원후 55년에 오늘날 터키 지역에서 노예로 태어났다. 로마 황제의 고문이었던 에픽테토스의 주인은 그를 때렸다. 에픽테토스는 태연하게 고통을 참았다. 406

에픽테토스는 소크라테스를 존경했고, 많은 면에서 그를 모방했다. 소크라테스처럼 에픽테토스도 작은 오두막에 매트리스 한 장만 놓고 간소하게 살았다. 소크라테스처럼 에픽테토스도 형이상학에는 관심이 없었다. 에픽테토스의 철학은 철저하게 실용적이었다. 소크라테스처럼 에픽테토스도 무지를 진정한 지혜로 향하는 길에 반드시 필요한 단계로 여겼다. 철학은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의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에픽테토스는 말했다.
삶의 많은 것들이 우리의 통제 바깥에 있지만,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지배할 수 있다. 바로 우리의 생각과 충동, 욕망, 혐오감, 즉 우리의 정신적 감정적 삶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헤라클레스의 기운과 슈퍼히어로의 파워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내면세계만을 제어할 수 있다. 내면세계를 지배하라, 그러면 “천하무적”이 될 것이라고, 스토아철학은 말한다. 407-408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스스로를 바꾸는 것이 훨씬 쉽다. 408

스토아철학은 이렇게 말한다. “해야 할 일을 하라. 그리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게 두라.” 408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 ..
스토아학파는 우리의 감정이 이성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믿지만 그 사고에는 결함이 있다고 본다. 사고방식을 바꿈으로써 자신의 느낌도 바꿀 수 있다. 스토아철학의 목표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느끼는 것이다. 409

고전 연구자 A. A. 롱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보통 아무 이유 없이 화가 나거나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나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내 것이어야 할 성취를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낀다.” 우리 생각과 해애동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듯 우리 감정에 대한 책임도 우리에게 있다. 감정은 우리가 내리는 판단의 결과이며, 이 판단은 틀린 경우가 많다. 우리가 잘못 이해했거나 갈피를 못 잡는다는 뜻이 아니다. 스토아학파는 그런 판단이 말 그대로 실제 경험과 다르다고 말한다. 410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한 장면에서 피터 오툴이 연기한 로렌스는 엄지와 검지로 태연하게 성냥불을 끈다.
동료 장굑 똑같이 하려다 고통에 소리를 지른다. “아야, 이거 엄청 뜨거운데요.” 동료가 말한다.
“물론 뜨겁지.” 로렌스가 대답한다.
“어떻게 한 거예요?”
로렌스가 말한다. “비결은 뜨겁다는 데 마음을 쓰지 않는 거야.”
로렌스의 대답은 스토아철학을 잘 보여준다. 당연히 로렌스는 고통을 느꼈지만 그 고통은 날것의 감각, 반사적 반응에 그쳤다. 이 반응은 본격적인 감정으로 발달하지 않았다. 로렌스는 말 그대로 고통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몸이 경험한 것을 마음이 경험하고 증폭시키도록 두지 않았다. 412

에픽테토스는 조언한다. 만약 공중목욕탕에 간다면 “그곳에는 물을 튀기는 사람들, 거칠게 떠미는 사람들, 욕을 하는 사람들,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몸이 물에 젖는다고, 누가 물건을 훔쳤다고 놀라선 안 된다. 416

스토아 진료실에서 놔주는 또 다른 백신은 프리메디타치오 말로룸(premeditatio malorum), 즉 ‘최악의 상황에 대한 예상’이다. 417



13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프랑스의 자랑스러운 지식인인 보부아르는 ‘잘 늙어갈 수 있는 열 가지 방법’같은 목록은 절대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자랑스러운 사람도 아니고 프랑스인도 아닌 나에게는 그런 거리낌이 없다.
1. 과거를 받아들일 것
2. 친구를 사귈 것
3. 타인의 생각을 신경 쓰지 말 것
4. 호기심을 잃지 말 것
5. 프로젝트를 추구할 것
6. 습관의 시인이 될 것
7. 아무것도 하지 말 것
8. 보조리를 받아들일 것
9. 건설적으로 물러날 것
10.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넘겨줄 것



14 몽테뉴처럼 죽는 법


내가 여행에서 만난 철학자들은 전부 내게 말을 건다. 481

죽음은 우리 모두를 철학자로 만든다. ..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죽음은 두려워할 일인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지? 죽음은 진정한 철학을 가리는 테스트다. ..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 모든 지혜와 이론의 핵심은 결국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 482

크세주(Que sais-je). ‘나는무엇을 아는가?’ 486

몽테뉴는 죽음을, 자기 자신의 죽음을 온전히 직면하지 않고선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없다고 말한다. “죽음에서 낯선 느낌을 제거하고, 죽음을 알고, 죽음에 익숙해지자. 다른 무엇도 죽음만큼 자주 생각하지 말자. 매 순간 죽음의 모든 양상을 상상하자. 말에서 떨어질 때, 건물 타일이 떨어질 때, 아주 살짝 바늘에 찔릴 때, 즉시 이렇게 생각하자. 지금 내가 죽는다면?” 489

“죽음은 우리가 타고난 조건이다. 우리의 일부다. 죽음에서 도망치는 건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 쪽으로 방향을 재설정해야 한다. 죽음은 우리 밖에 있는 ‘무엇’이 아니며 우리는 죽음의 희생자가 아니다. 493

죽음의 해결책은 더 긴 삶이 아니다. 절망의 해결책이 희망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죽음과 절망 모두 같은 약을 필요로 한다. 수용이다. 보부아르처럼 몽테뉴도 결국 받아들였다. 마지못한 수용이 아니라 완전하고 관대한 수용이었다. 죽음에 대한 수용이기도 했지만 삶에 대한 수용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수용이기도 했다. 자신의 긍정적 성격에 대한 수용이자(“자신을 실제보다 낮추어 말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어리석은 짓이다”) 자신의 결점에 대한 수용이었다. 497






“춤이 끝나면 이렇게 말할 것. 아니, 외칠것. 다 카포! 처음부터 다시 한번.”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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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태어날 당시 동네 사람들은 악마를 쫓는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용모는 대머리처럼 벗겨진 큰 이마에 크고 둥근 얼굴에는. 불거진 듯이 툭 튀어나온 두 눈과 사자코 같이
뭉퉁한 코가 두툼한 입술 위에 자리하고 있었고, 땅딸막한 키에 수박처럼 불룩한 올챙이배는 뒤뚱거리는 오리걸음을 그에게 걷게
하였다. 텁수룩하게 털이 나 있는 가슴과 팔 다리는 튼튼한 체격과 강인한 의지력을 소유하였다는 것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소년 시절에 부친의 직업을 이어받아 조각을 하기도 했으며, 당시 아테네 중류 시민의 자제들처럼 문학과 음악, 체육
등 일반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18세에서 24세까지는 당시의 청년들처럼 군대에 입대하여 복무했으며, 나중에도 여러
차례 종군하여 군 생활을 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인생의 참다운 지혜를 얻기 위해 알카라오스와 아나가고라스에게서 항상 배웠으며
진리 탐구열에 감화를 받았다. 또한 소피스트들에게도 배웠지만, 참다운 지혜를 얻을 수가 없어서 배움을 중단하고는 스스로 궁리하고
탐구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가 얼마나 사색과 탐구를 중시하며 진지한 사색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내용으로 알 수 있다. 종군 중이던 그는 어느
무더운 여름날, 아침부터 한 곳에 넋을 잃고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막사에서 이를 지켜보던 병사들은 밤이 깊어지자 하나둘
잠이 들었는데, 그는 이튿날 아침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꼬박 밤을 새웠다. 그리고는 아침해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그
자리를 떠나 평소처럼 일과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 "음미함이 없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가 40세가 될 무렵에 그의 정열적인 친구이자 제자였던 카이레폰이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으로 가서 아폴로신에게 여쭈어 보았다.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자, 신은 신전의 미녀를 통해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소포클레스는 현명하다. 유리피데스는 더욱 현명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만민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
  그러나, 대단히 기뻐하던 친구에게 이 신탁을 전해들은 소크라테스는 크게 놀랐다. 그것은 그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자 자타가 현명하다고 공인하는 정치가들, 예술가들, 기술자들을 차례로
찾아가서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지혜를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것처럼 자만에 빠져 있었다. 그때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의 사명을 자각하였다.



  "그들은 모른다는 사실을 진짜로 모르고 있다"
  그래서 아폴로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라는
금언을 좌우명으로 삼고 시민들의 부패하고 마비되고 타락한 양심을 일깨우고자 했다. 그 후 그는 70세 때까지 신탁을 통해
자신에게 부과된 사명인 아테네의 쇠파리 노릇을 하며 살았다.


 


  소크라테스는 50대에 결혼을 했고 세 아들이 있었다. 그가 70세로 사형될 당시 큰 아들은 18세였다. 결혼 후에도
그는 시민들을 깨우치는 사명을 위해 무료로 가르치는 일만 했을 뿐 전혀 가사를 돌보지 않고 외면했다. 그래서 더욱 가난한 형편에
처하게 되었고, 그의 아내 크산티페로부터 심한 푸대접을 받았다.


 


  어떤 이가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사모님의 잔소리를 어떻게 견디어 내십니까?"
  그러자, 그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도 귀에 익으면 괴로울 것이 없지"


  하루는 소크라테스가 부자 손님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예상대로 그의 아내인 크산티페가 투덜거렸다.
  "대접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사람들에게 부끄럽기 짝이 없어요"
  그러자,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염려 말아요. 그들이 이치를 아는 사나이들이라면 그걸 참아 줄 것이고, 만일 시시한 친구들이라면 그런 녀석들에게는 그렇게 신경 쓸 필요조차도 없으니까"


 


  하루는 소크라테스가 집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때 그의 아내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강론을 계속하자, 그녀는 큰소리로 욕을 해대며 그에게 구정물 세례를 퍼부었다. 그런데도 그는 태연스레 말했다.
  "천둥이 친 다음에 소나기가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알키비아데스가 참다 못해 말했다.
  "부인의 잔소리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달래듯이 제자에게 말했다.
  "나는 이젠 완전히 단련이 되어 있지. 우물에서 도르레가 언제나 가랑가랑 소리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야. 자네도 거위가 꽥꽥 우는 건 참아 낼 수 있을 거야"



  그러자, 제자도 지지 않고 말대꾸를 했다.
  "허지만 거위는 알을 낳아 주고 새끼를 까 길러주고..."
  이에 스승도 한마디 했다.
  "크산티페도 아이를 낳아 준다네"


 


  하루는 크산티페가 시장 바닥에서 소크라테스의 옷을 잡아 벗기려 하자, 친구들이 손으로 막아 말리면서
  "왜 그럽니까?" 하고 그녀에게 충고조로 말했다.
  이때 소크라테스가 크산티페를 대신해서 말했다.
  "결단코 그래야만 하겠지! 여러분이 우리가. 싸우는 걸 보고, '소크라테스, 힘을 내라!', '야아, 잘한다, 크산티페!' 하고 응원하기 때문에..."


  어느 날 소크라테스는 한 사람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잔소리쟁이와 함께 사시는 이유가 이유가 뭡니까?"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내가 잔소리쟁이와 함께 사는 건, 기수가 준마를 좋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기수는 그 녀석을 잘 길들이고 나면 그 다음은 누워서 떡먹기거든. 내가 내가 크산티페를 잘 길들이게 되면 내가 제어하지 못할
사람도 없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하고 잘해 나갈 수 있을 거니까".


 


  한 제자가 소크라테스에게 질문했다.
  "선생님!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까,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까?"
  그러자, 그가 답변했다.
  "결혼하게나! 온순한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사나운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테니까!"


  소크라테스의 아들 람프인클레스는 어머니 크산티페를 향해 소리쳤다.
  "어머니의 잔소리는 어느 누구도 참을 수 없을 거예요"
  훗날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스(디오게네스의 스승)도 그 여인에 대해 한마디 언급한 바 있다.
  "그녀는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여자들 가운데서 가장 시끄러운 여자일 것이다"


 


  부자요 명문 출신인 알키비아데스는 스승인 소크라테스에게 집을 지으라고 넓은 땅을 제공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는 신발이 필요하나 만일 자네가 이것으로 신발을 만드십시오 하고 가죽을 준다고 하여 내가 그걸 받았다면 참으로 이상할 거야"


 


  한번은 그의 제자 카르미데스가 스승의 가난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몇 명의 노예를 헌납하면서 간청했다.
  "제발, 이 노예들을 부려 수입을 올리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제의를 굳이 물리쳤다.


  제자인 아이스키네스가 스승에게 말했다.
  "선생님, 저는 가난해서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으니까 이 몸을 바칩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다정히 말했다.
  "아니, 어째서? 너는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있는데 그걸 모르느냐?"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소크라테스의 강연을 들으면서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눈물이 쏟아지며 노예 상태와도 같은 경험을 했던 알키비아데스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페리클레스의 웅변을 들어도 감동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지만 소크라테스의 강연을 듣는 사람이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에우크레이데스는 메가라인으로 일찍이 철학 공부를 했으며, 소크라테스의 강연을 듣고는 열렬한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런데
아테네와 메가라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그리하여 메가라인이 아테네에 들어오면 종신형에 처한다는 법령이 만들어졌다. 그런데도 그는
여자로 변장하고 몰래 들어와 소크라테스의 강연을 열심히 들었다.


 


  안티스테네스는 고르기아스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다가 소크라테스의 명성을 듣고는 자기 제자들과 함께 소크라테스의 문하로 들어가 겸허히 가르침을 받았다.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은 '건강한 힘'이라는 뜻이다. 그는 철학 이외에도 신체 건강을 위해 체력 단련을 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강조했다. 그는 몸소 아침 산책, 체조, 무도를 즐기면서, 절제 있는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러나, 제자들이 초대하여
대접하면 사양하지 않고 참석하여 즐겼다.


 


  소크라테스와 함께 전쟁에 참전했다가 그에게 구조되었던 알키아비아데스가 훗날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실제로
전쟁에서 흔히 있듯이 어딘가에서 차단을 당해 굶기를 강요당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인내심이 없는 다른 병사들과는 달랐다. 그러나
잘 먹게 되었을 때에는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 특히 그는 주량이 컸다. 자진해서 마시는 일은 없었지만 강요당했을 때는
누구보다도 많이 마셨다. 그럼에도 그는 한번도 술에 취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겨울의 추위에 대한 인내심도 대단하였다. 언젠가
그는 혹독한 추위가 닥쳐왔을 때, 모든 병사들이 진영 안에 있는 옷을 모두 껴 입고 구두를 신고 발을 담요와 양가죽으로 감싼 채
꼼짝도 않고 있었는데, 오직 그만이 평상시처럼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서 외출을 하는 것이었다. 구두를 신지 않고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쉽게 얼음 위를 걸었다. 병사들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데리온 전투, 암피폴리스 전투, 데리온 전투에 출정해서 침착하고도 용감하게 싸운 소크라테스에 대해 용장 라케스는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그때 다른 사람들도 소크라테스처럼만 행동 했었더라면 결코 패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국의 명성을 드날렸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추첨 결과 본의 아니게 500인 평의원에 뽑혔을 때였다. 그 무렵 아르기누사이 섬 앞바다의 해전에서 패전한
장군들을 모두 국회에서 재판하자는 안이 평의원회에서 의결되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협박을 받으면서도 최후까지 이에 반대하였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다른 생물에 비해 인간이 다른 점은 무엇인지요?"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다음과 같이 인간에 대해서 찬미하였다.
  "신은 인간을 바로 서게 하고,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손을 주었으며, 다른 생물에게는 일정한 시기에만 한정 시킨 쾌락을 인간에게는 아무 때나 즐기도록 허용하였으며, 거기다가 또 영혼을 심어 주었다"


 


  소크라테스는 평소에 '인간의 참된 삶이란 잘 사는 것이요, 잘 사는 것이란 아름답게 사는 것이요, 올바르게 사는 것이다'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하였다. 어느 날 한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인간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에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
  "그건 사람의 마음을 잘 보살피는 것, 즉 행복한 기분이 되게 해주는 것이야.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또 만나고 싶고, 만나면 몸을 만지고 싶고, 만지면 이번에는 소유하고 싶어지는 것이지"
  그러자, 다른 제자가 곁에 있다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하고나 잠자리를 같이 하는 아테네 제일의 미녀 모델이 지금 어느 화가의 화실에서 지금 나체가 되어 있습니다"



  제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승이 대꾸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진실한 아름다움은 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지. 가보자! 그러나, 미인의 포로가 되어 인간다움을 잃어버릴 자는 따라오지 말라"


  어느날 소크라테스는 한 청년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청년의 덕은 무엇인지요?"
  그러자, 그는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그건 지나치지 않는 것이지"
  그러면서 그는 청년 앞에 시종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며 말을 이었다.
  "장래가 넉넉해서 미지수인 자여!"


 


  소크라테스는 어느날 꿈을 꾸었다. 자기 무릎 위에 앉아 있던 백조 새끼 한 마리가 금방 날개가 돋더니 예쁜 소리를 내어
울고는 순식간에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는 꿈이었다. 그 다음날 플라톤이 그의 제자로 입문해 왔다 소크라테스는 그를 보고 말했다.
  "자네는 어젯밤 내가 꿈에 본 그 백조가 틀림없어"(당시 백조는 아폴론 신전에 바쳐졌던 '싱싱한 새'였다. 그것은 마치 아테네 여신의 사자인 올빼미를 아테네 신전에 바치는 것과 같았다)


  소크라테스는 노년에 리라 악기의 연주를 배우려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은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그래서 어린이들과 함께 늙은 소크라테스를 제자로 삼고 가르친 음악 교사인 콘노스는 '할아버지 교육자'라는 별명을 하나 얻게 되었다.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아테네는 패배하였다. 그래서 아테네는 친 스팔르타 인사와 반민주주의자 30인으로 구성된 과두
체제를 수립하여 공포정치(참주정치)를 시작하였다. 이 공포 정치의 수령인 크리티아스는 어느 날 소크라테스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관청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레온이라는 사나이를 사형에 처하기 위해 구인해 올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를
위법이라고 여겨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의 강연은 자연히 제재를 받게 되었다.


 


  정적을 사정없이 탄압하던 과두 체제인 참주정치가 8개월만에 무너져 버렸다. 그래서 아테네는 다시 민주체제로 환원되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이번에는 민주파 인사들로부터 오해를 받게 되었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 "구름" 때문에 더욱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구름"의 개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선량한 시민인 스토렙시아제스는 승마에 미친 아들 때문에 많은 빚을 지게 된다. 그 빚을 갚아야 하는 날이 점점
다가오자 안절부절 못한 그는 소크라테스를 찾아가서 '빚을 갚지 않아도 되는 방법'에 대한 자문을 구하면서 만약 가르쳐 주면
은혜를 꼭 갚겠다고 신의 이름을 빌어 맹세한다. 그때 소크라테스는 '신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것을 기르고 또 여러 가지 모습을
하는 구름일 수밖에 없다'고 해석을 해준다. 그 후 그와 그의 아들은 소크라테스에게 변론술을 배워와 빚쟁이를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아들과 말다툼을 벌이게 되고 폭행을 당한다. 그러나, 아들은 배운 변론술로 그 폭행을 정당화한다. 이런
지경에 이른 그는 이 모든 책임을 '신을 믿지 않는 소크라테스'에게로 돌린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집에 불을 질러 버린다.
소크라테스와 제자들이 연기 속을 헤치고 뛰어나온다. 막이 내린다"


 


  이 극이 초연되던 날, 소크라테스는 무대 위에 서서 싱글벙글거리면서 자기 배역을 맡은 배우가 자기와 닮았는지 어떤지를 관람객들에게 비교하게 했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소크라테스에게 큰 피해를 줄 줄이야!


 


  소크라테스가 고소를 당하게 된 때는 그의 나이 70세 되던 봄이었다. 고소인은 젊은 시인 메레토스였고, 유력한 민주정치가이자 실업가인 아뉴토스와 변론가인 리콘은 고소인의 변호인이었다. 그 고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핏토스 구의 메레토스의 아들 메레토스는 아로페케구의 소프로니스코스의 아들 소크라테스를 상대로 다음의 고소장을
제출하고 그 사실에 상위가 없다는 선서를 했다. 곧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인정하는 신들을 믿지 않고 괴이한 신(Dimonion,
신적인 것, 즉 양심)을 끌어들여 청소년들을 부패 타락케 하였다. 그 죄는 모름지기 사형에 해당된다"


 


  고소를 당한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 앞에서 조금도 굽힘 없이 자신의 소신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아테네 시민들이여! 만일 나에게 지금까지의 진리 탐구의 생활을 그만둔다면 석방해 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느
때처럼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복종하기보다는
오히려 신에게 복종하겠습니다. 그리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힘이 미치는 한, 지혜를 사랑하라고 여러분에게 권하겠습니다"


 


  당시는 30세 이상으로서 국가 채무가 깨끗한 아테네 시민이면 누구나 배심원에 지망 할 수가 있었다. 단, 그 지망자가
많을 경우에는 당일 추첨하여 500명을 뽑았는데, 소크라테스의 변론 후 치뤄진 투표 결과 60표 차이로 유죄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때 자신의 형량에 대한 발언권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이 사람에게는 영빈관에서 평생 무료 식사를 하는 대접을 받게 해주십시오 여러분은 올림픽
경기의 우승자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만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경기에 이기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러분을
즐겁게 할 뿐이지만 나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다가 나는 가난하므로 부양을 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잘못하면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재판관들 앞에서 조금도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소신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이번 사건은 나에게 매우 유익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죽는 것을 옳지 않다고 봅니다. 죽음이란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이 완전한 허무로서 모든 감각이 없어진다면 꿈도 꾸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잠든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죽음이란 벌이 아니라 굉장한 소득일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죽음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서 저승으로 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즐거운 여행을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우리는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기 위하여 이곳을 떠납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 누가 더 행복할 것인가 하는 것은 오직 신만이 알
것입니다"


 


  재판이 진행되고 있을 때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변호할 양으로 단상으로 뛰어 올라 가서 소리쳤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일찍이 이 단상에 올라온 자 중에서 가장 젊지만..."
  여기까지 말했을 때 재판관들로부터 꾸짖음을 당했다.
  "내려와! 내려와!"
  할 수 없이 단상을 내려와야 했던 플라톤의 당시 나이는 29세였다.


  유죄 판결 후, 소크라테스는 고소인이 요구한 사형 형벌에 대해 의의를 제시했다.
  "본인은 아테네를 위해 신이 제시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고 믿는다. 따라서 본인에게 알맞은 형벌은, 국가의 다른 공로자들처럼 앞으로 국비로 향응해 줄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그러나, 최후로 친구들의 간절한 권유에 따라 30므나의 벌금을 제시했다(이때 플라톤이 보증인들 중 한 사람이
되어 주었다) 그런 다음, 투표를 실시한 결과, 360표 대 140표가 나와 220표 차이로 그에게 사형이 결정되었다. 당시
법률에 의하면 사형 선고를 받게 되면 24시간 이내에 처형을 받게 되는데, 그때 마침 델로스 섬으로 아폴로 신과 아르테미스
신(아폴론의 쌍동이인 여동생)에게 생일의 감사 재물을 바치러 배가 떠나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배가 돌아올 때까지 그
집행이 연기되었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생일은 소크라테스의 생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옥중에서 다음과 같은 찬가를 지어 읊었다.


  어서 오소서, 델로스의 주인 아폴론이여!
  어서 오소서, 아르테미스여! 품격 높은 아들들이여!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가장 열렬한 숭배자인 아폴로도로스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선생님! 당신께서 아무 죄도 없이 사형에 처해지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제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면서 미소를 짓는 얼굴로 말했다.
  "사랑하는 아폴로도로스여! 너는 내가 죄없이 사형에 처해지는 것보다도 오히려 죄가 있어서 사형에 처해지는 것을 보기를 희망하고 있었던가?"


  사형 선고가 구형된 지 한 달 후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그에게 면회를 가서 탈출을 권유하면서 말했다.



  "당신은 부당하게 사형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러면 당신은 내가 정당하게 사형되기를 원하오?"


  소크라테스가 옥중에 있을 동안 그의 친구들은 비밀리에 탈옥 준비를 갖추어서 그에게 몇 번이나 권면해 보았다. 제선이
항구로 들어오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는 그의 친구 클리톤이 밤중에 그를 몰래 찾아가 다시 한번 탈옥을 간곡히 권했다.
  "이 재판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자네의 죽음은 자신은 물론 친지와 제자들 모두의 불행이야! 돈은 얼마나 들더라도 관리들을 매수 할 테니 제발 탈출하게나"



  그러나, 그는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며 말했다.
  "내가 재판을 받을 때에는 그 결과가 내게 이롭건
해롭건 그 재판의 결과에 복종할 것을 서약한 것이네. 이제 나에게 사형이라는 불리한 판결이 내렸다고 해서 이에 응하지 않고 탈옥
도주한다는 것은 부정이요, 배신이야. 우리는 국법의 보호를 받고 살아가고 있네. 국가의 법률이 지금 나를 향해서 죽으라고
명령하였다면, 설사 국법이 옳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를 배반할 수는 없는 것이네.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일세. 우리는 절제할 줄 알아야 하네. 절제는 무절제 보다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일세. 우리는
중용을 지켜야 하네. 과장은 자기를 손상시키고 또 자기의 치욕이기 때문일세. 우리는 공사를 버려서는 안 되네. 사회의 안녕이
동시에 개인의 안녕이기 때문일세. 우리는 국법에 복종해야 하네. 준법은 우리 자신과 국가에 대해서 최대의 이익을 낳기 때문일세.
우리는 유덕한 생활을 해야 하네. 덕은 신과 인간으로부터 최대의 보수를 받기 때문일세"


 


  최후 날, 그 전날 밤부터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베는 자식들과 함께 남편 곁에서 보냈다. 아침 일찍 찾아온 그의 친구들을 보자마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여보, 드디어 이것이 마지막이로군요! 친구들이 당신에게, 당신이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제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울먹이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고는, 그는 친구들과 오랜 시간에 걸쳐 '영혼의 불멸'에 관해서 변함없이 문답을 주고 받았다.


 


  드디어 해가 서산으로 기울 무렵 간수들이 독인삼을 담은 그릇을 가지고 들어왔다. 사형 집행 시간이 일몰로 정해져
있는데, 대개의 사형수들은 음식을 원대로 먹거나 여자를 불러 욕정을 채우기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들어오는
간수를 보자마자 이야기를 마치고는 목욕을 하고 독배를 들이킬 준비를 하였다. 이때 아폴로도로스가 훌륭한 죽음의 나들이 옷을
선물하면서 마지막 부탁을 드렸다.



  "선생님 부디 이걸 입고 돌아가십시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나무랐다.
  "뭐야? 내가 입은 옷이 입고 살기에는 지장이 없었는데, 입고 죽기에는 너무 허름하다는 말인가?"
 
그러고 나서, 그는 간수가 건네준 독인삼 잔을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자, 이를 지켜 보고 있던 친구들과
제자들은 눈물만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소리내어 우는 자도 있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꾸짖었다.
  "이 무슨 망측한 꼴인고? 그러길래, 내가 부인들은 돌려보낸 게 아닌가?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말일세. 사람은 조용히 죽어야 한다고 나는 들어왔네. 그러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참게나!"


 


  독배를 마신 후, 소크라테스는 옥리의 지시로 잠시 동안 감옥 안을 거닐다가 다리가 점점 무거워지자 침대에 가서
드러눕더니 덮개로 얼굴을 가렸다. 독 기운은 발끝에서부터 위로위로 서서히 기어올라왔다. 그러다가 배 부분까지 차가워졌을 때였다.
그는 잠깐 얼굴 덮개를 벗기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친구에게 말했다.
  "클라톤! 내가 아스클레피오스(의약의 신)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갚아 주겠나?"
  그러자, 크리톤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반듯이 갚아 주겠네! 다른 부탁은 없는가?"
  그러나, 침대에서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결국 운명한 것이다. 이 날이 기원전 399년 4월 27일이었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한 편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저술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의 제자였던 크세노픈이 쓴 "소크라테스의 추억"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그는 언제나 신의 명령에 따라서 행동할 만큼 경건하였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을 정도로 극기심이 강하였고, 선악의 결정에
있어서 한번도 그릇됨이 없을 정도로 현명하였고, 또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선량하고 가장 행복한 인간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죽자, 한 비극 시인은 아테네인들을 책망하며 이렇게 탄식했다.
  "너희들은 뮤즈(시의 신)의 매우 현명한 휘파람새(봄이 옴을 알리는 새)를 죽여 버렸어, 죽여 버렸다고"


 


  소크라테스를 사형시킨 아테네 시민들은 곧 이를 후회하여, 소크라테스가 생전에 곧 잘 젊은이나 소피스트들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곤 하던 씨름판이나 체육관을 폐쇄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고 고소인 메레토스는 사형에 처해졌고, 그밖의
고소인들도 추방당했다. 추방당한 아뉴토스는 헬라클레이아로 도망쳤으나 그곳에서도 추방당하고 말았다. 또한 아테네 시민들은 조각가인
리시포스로 하여금 소크라테스의 동상을 만들게 하고 이를 폼페이언(보물상자)에 장식하여 그 공을 길이 기렸다.


 


  소크라테스의 사후에 그의 가르침을 밑바탕으로 한 여러 학파가 생겨났는데, 플라톤 학파, 키니코스 학파, 키니크 학파, 메가라 학파, 엘리스 학파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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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N1
,

소크라테스

생각/인물 2010. 8. 26. 18:40



 백과사전에서 말하는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Σωκράτης, 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 5월 7일)는 고대 그리스철학자이다. 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일생을 철학의 제 문제에 관한 토론으로 일관한 서양 철학의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흔히 4대성인으로 불린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기원전 399년에 고소되어 사형을 당했다.


생애

[편집] 소크라테스 문제

역사상의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적 관점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상당한 논쟁거리이다. 이 문제를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적인 글을 쓴 적이 없다. 소크라테스 자신과 생애, 철학에 대한 지식은 그의 제자들과 당대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플라톤의 기록이며, 그 밖에도 크세노폰,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파네스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런 저작들은 정확한 사실이 아닌 철학 또는 극적인 글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 소크라테스를 알기는 어렵다. 당대 고대 그리스에서 투퀴디데스(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나 철학자들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다)를 제외하고는, 소크라테스 시대를 사실에 입각해서 서술하는 사례가 없다. 이런 결과,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언급한 사료들은 역사적으로 정확성을 내세울 까닭이 없었으며, 때론 당파적이기까지도 하였다.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처형한 사람들은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가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업적에 대하여 정확하고 일관성있는 역사를 쓰기 위해 당대 인물들이 쓴 여러 사료들을 일치시켜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반드시 사실적이지는 않으며 다만 일관성을 갖추었을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에 대해 가장 믿을 만하고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일부 저작에서 플라톤은 자신이 저작속에서 구현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실제 소크라테스의 언행보다 더욱 미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저작이나 유물을 통해서 소크라테스가 단지 플라톤이 날조한 인물은 아님이 드러난다.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은 플라톤의 저작에 나오는 일반적인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 유용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조각가인 소프로니코스를 아버지로, 해산술을 업으로 하던 파이나레테를 어머니로 하여 아테네의 서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따라 조각을 하면서 다른 청년들처럼 기하학·철학·천문학 등을 배웠고, 중장보병에 편입되어 세 번이나 전투에 참가하였다. 기원전 406년, 500명 공회의 일원이 되어 1년간 정치에 참여한 일이 있고, 40세 이후에는 교육자로 청년들의 교화에 힘썼다.

그는 자연 철학을 배웠으나, 그 기계론적 세계관에 불만을 품었다. 그때는 아테네의 몰락기였으므로 보수적·귀족적인 정신과 진보적·개인주의적·비판적 정신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였다. 그도 이러한 경향을 지니게 되었으나 당시의 소피스트들처럼 궤변으로 진리를 상대적·주관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진리를 찾아서 이상주의적, 목적론적인 철학을 수립하려고 하였다.[1]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의·절제·용기·경건 등을 가르쳐 많은 청년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으나, 공포정치 시대의 참주였던 크리티아스 등의 출현이 그의 영향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어 '청년을 부패시키고 국가의 여러 신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명으로 고소되고, 배심원들의 투표 결과 40표로 이 애국자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는 도주할 수도 있었으나 그의 투철한 준법 정신에 의해서 "악법도 법이다"라고 하며, 태연히 독배를 들어 마시면서 자신이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을 빚졌다며 자신 대신 갚아 달라고 친구에게 당부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 그의 신전에서 치료받은 사람은 닭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고 한다.)

[편집] 사상

아무런 저서도 남긴 바 없는 소크라테스의 확실한 사상을 알기는 어려우나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 라이르티우스, 크세노폰, 특히 플라톤의 저서 등에 언급된 것을 보면 그는 델피의 신탁인 "만인 중에 소크라테스가 제일 현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스스로의 무지를 자처하던 소크라테스는 신의 신탁이 사실인가 확인 하기 위해 의아심을 품고 여러 현명한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말을 확실히 알고 언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방법으로 제논의 변증법을 활용하여 논변을 진행시키는 사이에 잘못된 판단의 모순을 깨우치고 다시금 옳은 판단으로 유도시켰는데, 이것이 유명한 산파술이다. 그는 합리주의자였으나, 때로는 초경험적인 내심의 소리, 즉 다이몬의 소리를 경청하고, 때로는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였다.

그가 다룬 문제는 종래의 철학이 대상으로 한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었으며 '정신의 배려'를 사명으로 삼았다. 덕은 인간에 내재한다고 믿고 사람들에게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온갖 계층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고 용기나 정의 등에 관한 윤리상의 개념을 설교하고 다녔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해 사약을 마시게 되었다. 그의 탁월한 지적·도덕적 성격에 의해 비단 철학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인류 최대의 교사'로 불리고 있다.

[편집] 변론과 크리톤

'악법도 법이다'(라틴어: Dura lex, sed lex)라는 말이 회자되지만, 소크라테스가 직접 이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변론'에서 법정이 철학을 포기한다면 석방해주겠다는 제안을 하더라도 자신이 철학을 하는 이유는 하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 외에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법 이상의 철학적 원칙과 신념에 기초하여 의사결정을 했던 몇가지 사례들이 있다. 반면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독배를 내린 법률에 대해 자신이 국외 추방을 제의하지 않음으로써 소극적으로 동의한 절차적 정당성을 뒤늦게 훼손할 수 없다고 친구인 크리톤에게 밝힌다. 그러나 '크리톤'은 소크라테스가 평소의 냉정한 변증법적·이성적 논법을 구사하지 않고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모습으로 크리톤을 설득하고 있어서 전적으로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변론'과 '크리톤'의 이런 모순적인 모습 중 '크리톤'에 실린 모습이 과장되어 '변론'에 담긴 법령 불복종자로서의 모습을 누르고 지금까지 이어져왔으며 소크라테스의 일관된 삶과 철학에 비추어불 때 이런 말 자체가 결코 성립할 수없는 것이다. 진정한 철학자는 진리조차도 회의하고 가짜로 드러나는 순간 바로 폐기시키는 엄중함이 있는데, 기껏해야 인위적인 실정법을 무조건 옹호할 수없는 것이다.철학과 법의 기본 성격조차 모르는 무지의 소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어이없게도 독재치하에서 정치에 악용되는 방편으로 원전에 대한 확인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 말을 계속 악용하여 왔다. [2]

[편집] 미(美)

소크라테스는 미학적인 범주를 최소한 셋으로 나누었다. 그 세 범주는 부분의 조립을 통해 자연을 표현하는 '이상적인 미', 시선을 통해 영혼을 표현하는 '정신적인 미', 그리고 '유용한(혹은 기능적인) 미'이다.[3]

[편집] 영향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 전해져 메가라 학파, 퀴니코스 학파, 키레네 학파 등을 이루고, 특히 수제자인 플라톤의 관념주의로서 피어나, 그 후의 서양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4]

그는 일생을 통해 자신이 직접 책을 쓴 일이 없고 또한 문학적 흥미도 지닌 바 없으나 그가 철학의 방법으로 취한 대화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걸작 대화집을 낳게 했고, 그의 독창적 개성과 비극적인 죽음은 전기문학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소크라테스만큼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철학자도 없습니다. 그는 무척 뭇생긴 사람이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천하의 악처러 알려진 그의 아내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 만큼이나 유명한데 실제로 그녀가 그토록 지독한 악처였는지는 불확실합니다. 그는 많은 질문을 통해 스승들을 곤라하게 만들었고 마침내는 아테네 청년들의 스승이 되어 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는어떠한 저서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플라톤을 비롯한 제자들의 글에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그에 대해 알수 있을뿐입니다.그는 아테네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자신의 삶을 마감하엿는데 그가 태어날당시의 아테네는 에게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는 소피스트의 시대를 살았고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전하여 국력이 기울며 몰락하기 시작하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소피스트들에 반대하여 인간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일이었습니다. 소피스트들은 분명 철학의 관심을 인간으로 돌려 놓는 공헌을 했습니다.그러나 그들은 지나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를 설파함으로써 사회의 가치관을 무너 뜨렸고 정신적인 혼란을 던져 주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정신적 혼란기에 나타난 아테네의 스승입니다.

소크라테스는 텔포이 신탁을 계기로 자신이 길을 찾습니다. 어느날 카에로폰이라는 사람이 델포이 신에게 아테네에서 제일 현명한 사람은 소크라텟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신이 거짓말을 할리는 없다고 생각하고자신이 현명한 사람인 이유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한가지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무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소크라테스 자신은 스스로 아는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 때만 무엇을 알수있습니다.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스스로 아는것이 무지를 전제한 후 대화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잘못된 주장에 맞닥뜨렸을대 그 잘못된 주장을 직접 비판하는것이 아니라 상대방이동의할 많안 다른 의견을 제시하며 대화를 이끌어 갑니다.대화 상대자는 소크라테스의 의견에 동의해 나가는 와중에 스스로 자신의 원래 주장을 부정하게 되거나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대화 상대자의 입장에서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것입니다. 그의질문은 집요합니다.그는 피상적인지식이나 독단적인 관념을거부하기 때문에 항상 정확한 대답을 요구합니다.

예를 들어 경건한것과불경한 것에 대해 에우티프론과 토론할때 소크라테스는 경건한 행동몇 가지가 아닌 모든 경건한 행동을 경건하게 하는 경건성 그자체가 무엇인지 말할것을 요구합니다. 마침내 에우티프론이 모든 신이 사랑하는것이 경건이고 싫어하는것이 불경이라고 대답하자 소크라테스는 '신들이 어떤 행동이 경건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들이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경건한 행동이되는 것인지'를 그에게 되묻습니다. 에우티프론은 피상적인 대답만을 반복하고 소크라테스는그 말을 듣고 더욱 구체적으로 되묻습니다. 에우티프론은 결국 그 자리를 떠나고맙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대화 방법은 그 자체로 인간 이성에 대한 믿으믈 표현합니다.그는 보편적인 진리의 존재를 부인할 수없으며 계속되는 대화를 통하여 진리의 길로 접어들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진리에 대한, 나아가 인간의 능력에 대한 회의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인간은 대화를 통하여 자신으 무지를 깨닫고 모든 사람이 공유할수있는 진리를 발견할수있다고 소크라테스는 믿었던 것입니다.



★ 악처가 철학자 남편을 만든다?


세계 4대 성인중의 한 사람인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행패가 대단히 심해서 악처라고 세상에 이름이 높았었다.

어느 날 그녀는 책을 읽고 있는 소크라테스에게 심한 욕설을
한참 동안이나 퍼붓다가 물이 가득 찬 물통을 들고 들어와
"이 못난 영감쟁이야...물벼락이나 한번 맞아봐라.." 하면서
소크라테스의 머리 위에다 물을 쏟아 부었다.


그제야 소크라테스는 책에서 눈을 떼며 털털한 웃음으로
심술궂은 아내와 맞싸우지 않고 유머로써 웃어 넘겼다. 이때 제자들이
몰려와서 남자는 꼭 결혼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결혼은 반드시 해야지. 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나쁜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테니까... 훌륭한 수부는 바다에서
사나운 파도와 싸워보아야 하는 것이고, 또 훌륭한 기수는 성질이 사나운 말을
택하는 법이니,   사나운 말을 잘 달래가며 탈수 있는 기수라면  다른 어떤
말 이라도 다 잘 탈수 있듯이 나 역시 성질 나쁜 아내를 잘 달랠 수 있다면
다른 어떤 사람이라도 훌륭하게 상대할 수가 있을 것 아니겠나 ? "



그는 왜 토론을 하는가?

서양철학자 중에서 아마도 일반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은 소크라테스일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전문가에게 가장 적게 알려진 서양철학자가 바로 소크라테스이다! 심지어 버트런드 러셀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지, 조금 알고 있는지 조차도 확실하지 않다고 말한다.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기원전 469년에 아테네에서 출생하여 기원전 399년에 죽은 소크라테스는 생전에 어떤 글도 남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대해서 주로 그의 제자 플라톤과 크세노폰, 그리고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남긴 글을 통해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 모습과 생각은 서로 다를 뿐더러, 플라톤의 여러 대화편에서도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연구자들은 무엇이 진짜 소크라테스의 모습인지에 대하여 지금도 논란을 벌이고 있다. 이것을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의 문제(Socrates Problem)’라고 부른다. 플라톤은 상상력이 뛰어난 문학가였으며, 크세노폰은 군인,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는 패러디 전문가였다. 이들 모두가 ‘정품’이 아닌 ‘짝퉁’ 소크라테스를 만들 소질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문제’로 인해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다는 식의 과민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의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확실하게 알려진 그의 삶에 이미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소크라테스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여러 주제에 대한 그의 생각, 한 마디로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이다. 그러나 이런 논란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 철학자가 자신의 글을 남겨도 일어나는 문제다. 그가 남긴 글의 해석이냐, 아니면 그 글의 해석의 해석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삶을 통해 철학사에 남긴, 아니 인류를 위해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은 무엇일까?


고대 그리스의 도자기에 그려진 토론하는 그리스인들의 모습.
소크라테스는 광장에 나가 격의없는 토론을 즐겼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하기’ 정확히 말해 독백이 아닌 대화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철학자의 이미지는 골방에서 혼자 사색에 잠기거나,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우주의 진리를 글에 담는 모습이기 쉽다. 누가 칸트나 헤겔의 철학이 ‘100분 토론의 결과’라고 주장하겠는가? 놀랍게도 서양철학의 아버지 격으로 숭상되는 소크라테스는 이런 고독한 철학자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가 가장 좋아했고 죽기 직전까지 했던 것은 토론, 즉 어떤 주제에 대하여 논쟁적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테네 토론의 광장 아고라에 나가서 어느 누구와도 격의 없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즐겼다. 플라톤의 대화편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의 나이 불문, 재산 불문하며 대화를 즐겼다고 말한다. 나아가 아테네의 법이 이 즐거움을 금지시키면 자신은 법을 지키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심지어 그는 ‘스스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독배를 마시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옥리에게 뇌물을 주고 도망가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도 토론을 했다. 이것이 플라톤의 대화편 [크리톤]의 내용이다. 소크라테스와 동년배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크리톤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는 아테네의 법을 어기고 도망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아무도 토론 마니아 소크라테스를 말릴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소크라테스와 크리톤과의 대화내용을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로 줄여 표현했지만, 이것은 매우 잘못된 해석이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말을 했다는 증거도 없고, 아테네의 법을 그는 악법이라고 부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젊은이를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언도를 받아 죽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아테네 시민과 토론을 벌여 많은 적을 만든 것이 화근이 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고, 재판 중에도 자극적 토론을 벌여 사형언도를 받았고, 재판이 끝난 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토론을 벌인 후 “죽는 것이 옳다”는 결론에 따라 행동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토론은 공기와 물 같은 것이었다.

 

 

 

 

영국 경찰이 발견하고 미법무부가 번역하여 공개한 [알 카에다 훈련교범]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가 대결하고자 하는 신앙심 없는 정권은 소크라테스적 토론도, 플라톤적 이상도 아리스토텔레스적 외교도 모른다. 이들은 총알의 대화, 암살, 폭격, 파괴라는 이상, 그리고 대포와 기관총의 외교만을 알 뿐이다.” 알 카에다가 ‘소크라테스적 토론’이 무엇인지 이해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소크라테스로부터 토론을 분리시킬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왜 토론을 하고자 했을까? 물론 그가 남과 이야기하기를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히 옳은 대답이다. 그러나 대답의 전부는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다른 철학자들이 갖고 있지 않는, 설사 갖고 있다 하더라도 남에게 공개하기 꺼리는 경험을 자랑스럽게 공개하였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받은 ‘델피의 신탁’이다. ‘신탁(神託)’이란 신이 사람을 통해 신의 뜻을 나타내거나 인간의 질문에 답하는 것, 즉 계시 혹은 점과 같은 것이다. 언젠가 소크라테스는 친구와 함께 신탁을 받은 적이 있다. 이때 신탁의 내용은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는 없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적인 토론은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게 하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신탁을 믿어 왔던 소크라테스도 이번 경우에는 신탁의 내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현명하다고 일컬어지는 아테네의 정치가, 문학가, 장인들을 찾아다녔다. 과연 이들은 현명한가? 놀랍게도 이들 모두 스스로 현명하다고 자부하였지만, 대화의 결과는 정반대였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어느 누구도 현명하지 않았다. 아테네의 젊은이들은 이런 대화를 재미있게 구경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따라했다. 왜냐하면 ‘현명하다는 사람의 무식이 폭로되는 토론’은 실로 재미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토론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민 중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고, 이것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이처럼 토론을 즐긴 이유는 단순히 상대방의 무식이나 현명하지 못함을 폭로하는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에게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즉 철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덕(virtue)을 밝히고 실행하는 것이었다. 덕의 실행은 재산이나 직위 그리고 명예보다도 중요하며 심지어 죽음도 방해할 수 없는 인간 영혼의 본질이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를 경멸한 이유는 무엇보다 영혼을 계발하는 철학을 돈과 결부시켰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단 한 번도 돈을 받고 대화를 한 적이 없음을 그의 가난이 증명한다고 [변명]에서 말하고 있다. 다른 한편 소크라테스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선이 무엇이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파하였다. 선이 무엇인지 안다면 결코 악행을 저지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지행합일이란 단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현자 찾기 프로젝트’가 실패하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많은 믿음들은 그 옳고 그름이 확인되지 않은 것이 태반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역설적으로 델피의 신탁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소크라테스에게 대화는 재미만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름을 밝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물론 그에게는 이처럼 옳고 그름을 밝히는 토론이 가장 재미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가 스스로 글을 쓰지 않은 이유도 짐작이 간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토론을 ‘산파술’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산파는 직접 아이를 낳지 않지만 낳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다. 다른 한편 아이를 낳지 않아본 여인은 낳는 것을 도와줄 수 없기에 산파가 될 수도 없다.

 

그리스 자연철학으로부터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관심을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라는 인간사회의 규범으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정의, 덕, 선과 같은 규범적 개념은 사회의 복잡한 관계망에서 쉽게 파악되기 어렵다. 어떤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부정적일 수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에 부합하는 사물의 측면만을 보기 일쑤다. 이때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으로 알려진 부정적 논증(elenchus)이 힘을 발휘한다. 그것은 상대방의 주장이 일단 옳다고 가정하고, 상대방도 동의하는 다른 지식이나 명제들을 원래의 주장과 결합하여 모순을 끌어내는 귀류법(reductio ad absurdum)을 의미한다. 즉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기본적으로 ‘부정의 논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정의 논법을 통해서도 논파되지 않는 주장, 그것이 옳은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적 토론은 논쟁 기술보다는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 모두에게 훨씬 더 중요한 태도를 요구한다. 그것은 ‘권력이 옳고 그름을 정한다’는 믿음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이런 믿음을 옳다고 말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믿음에 순종하고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아테네 시민에게 신이 보낸 등애(gadfly)라고 표현했다. 등애가 쏘면 황소도 펄쩍 뛴다. 바꿔 말해 소크라테스는 당시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있던 아테네의 큰 문제, 즉 집단적 오류를 등애처럼 날카롭게 쏘아댔다. 그 결과가 소크라테스의 재판이었다. 이처럼 권력과 잘못된 믿음과의 결합은 민주주의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정치체제에서도 있을 수 있으며, 소크라테스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현대는 정보의 공유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쉽고 빠르다. 이를 통해 옳건 그르건 집단화된 믿음이 순식간에 형성될 수 있다. 소크라테스적 토론이 더욱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소크라테스적 토론을 현대 사회에 도입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누명을 쓰고 독배를 마시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까지도 토론을 벌였다.




진리와 이데아의 빛

쪽빛 바다가 한 눈에 가득 들어온다. 지중해 세계에서 빛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빛은 모든 은폐된 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스 사람들은 은폐된 것이 드러나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빛이 있어야 사물을 볼 수 있다. 플라톤 철학의 핵심 개념인 이데아도 그 어원은 본다는 것이다. 이데아의 빛이 비칠 때 세계는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다고 그는 믿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었을 때 그는 스물 여덟의 청년이었다. 그때 그는 심한 혼돈과 현기증을 느꼈다고 한 편지에서 기록했다. 그리고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인식의 근원은 철학”이며, “참된 철학을 열심히 연구하기까지에는 인류는 고민에서 풀려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플라톤 철학의 시작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서 출발한 셈이다. 그래서 플라톤 철학을 이야기할 때는 보통 소크라테스 철학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시작부터 우리는 난감한 사실에 봉착한다.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의 철학은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제자가 그대로 반복했다는 뜻이 아니다.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 철학이 동일한 소스에 담겨있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소크라테스 철학을 플라톤이 쓴 기록을 통해서 읽는다. 플라톤의 [대화편]이라고 부르는 35편의 책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철학에서는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역사적 인물로서의 소크라테스이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인가 하는 점이 항상 문제가 된다. 그것을 철학사가들은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따져보면 이러한 사례는 어찌 소크라테스뿐일까? 공자의 가르침을 기록한 [논어]도 그렇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기록한 불교 경전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공자와 석가모니 역시 자신들이 직접 책을 쓰지 않았다.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옮겨 적었을 따름이다.


소크라테스의 조각상 앞에서 불멸에 대한 사색에 잠긴 플라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동일체를 이룬다.

 

시대를 더 내려오면 신약성경과 코란도 그렇다. 예수도, 무함마드도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기독교와 이슬람 경전을 직접 기록하지는 않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 국한해서 보더라도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도 대부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고대 철인들의 말씀을 기록한 많은 책에서는 그것이 진짜냐 가짜냐를 따지는 위서 논란이 심심하면 터져 나온다. 그들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해석학적 문제도 뜨거운 감자가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대 철인의 말씀을 기록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 크게 부각되는 법은 거의 없다. 예외가 있다. 바로 플라톤이다. 그는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모아서 집대성한 단순 기록자로 취급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대화편은 플라톤이 30대에서 70대까지 쓴 책들이다. 스타일은 거의 비슷하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변호한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제외하면 모두 대화체 형식이다. 플라톤이 쓴 일련의 책들을 대화편이라고 통칭해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통점이 또 있다. 한 편을 제외하면 모든 대화편에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거의 대부분이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주도하는 주인공이다. 이렇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대화편을 통해서 하나의 철학적 동일체가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 철학을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잠깐! 플라톤의 대화편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초기 대화편에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와 후기 대화편에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에 미묘한 차이가 드러난다. 그래서 고대 철학사를 연구하는 사가들은 플라톤이 젊었을 때 쓴 초기 대화편에서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철학을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반면, 원숙한 나이에 쓴 플라톤의 후기 대화편에서는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서 플라톤 자신의 철학을 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처음에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철학의 손 노릇을 했지만, 나중에는 소크라테스가 플라톤 철학의 입 노릇을 했다는 이야기다. 서두가 좀 길어졌지만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가지치기 작업이기도 하다. 앞에서 우리는 ‘역사적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를 구분하는 난제를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불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대화체 형식의 책을 썼는가 하는 점을 ‘플라톤의 퍼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거리의 철학자였다. 그는 아테네 거리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대화를 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조용한 사색의 장에서 토론과 대화의 장으로 옮긴 인물이다. 그는 대화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때로는 아테네 시민들이 즐겨 찾는 아고라 광장에서, 때로는 푸른 지중해가 한 눈에 보이는 아테네 근처의 바닷가에서, 때로는 지인들과 밤늦게 술잔을 기울이면서 토론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식 철학을 문자로 생중계한 플라톤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토론 철학이 가진 강점과 약점이 동시에 드러난다. 대화편은 마치 한 편의 희곡을 보는 듯한 재미가 있다. 대화의 내용뿐만 아니라 토론을 하는 그때 그곳의 분위기까지 그대로 잡힌다. 마치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일어나는 일이 마치 우리 눈 앞에서 펼쳐지는 듯하다. 그러나 때로는 대화편이 철학 책으로서는 체계적이지 못하고, 때로는 아무런 결론 없이 대화를 마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당연하다. 대화편은 어떤 특정한 주제를 체계적으로 전개하는 논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철학의 역사에서 대화편과 같이 고전적 지위에 우뚝 오른 다른 철학서적,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35권의 대화편은 과제나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지도 않고, 다양한 여러 주제들이 하나의 책에 뒤섞여 함께 논의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왜 이렇게 거리에서 철학을 했을까? 그리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아테네 거리 철학을 왜 문자로 생중계했을까? 그 단서는 대화편 중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나온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참된 지식은 글이나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대화를 통해서만 전달된다고 역설한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그림으로 기록할 때 그 그림은 죽어있듯이, 살아 있는 말을 문자로 쓸 때 문자로 기록된 말은 죽어있다고 말한다. 문자로 된 말은 질문을 던지지도 질문을 받지도 못한다. 그렇다. 플라톤이 대화 형식으로 글을 쓴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봐야 한다.

 

아테네 아카데미에 있는 플라톤 조각상.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라는 말처럼 플라톤은 서양철학의 기본을 완성했다.


서양 철학의 역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라는 말이 있다. 20세기 전반에 영국 캠브리지대와 미국 하버드대에서 철학을 가르친 화이트헤드가 만년에 한 강연에서 한 이야기다. 많은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지만, 플라톤 철학의 요체를 이처럼 적절하게 설명한 말도 드물다. 나는 화이트헤드의 이 말을 플라톤 철학의 체계가 뛰어나다는 칭송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뛰어난 것은 그의 답안에 있지 않고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서 끝없이 던지는 질문 방식에 있다. 서양 철학이 플라톤 철학의 각주가 된 이유는 그의 철학 체계보다는 그가 쓴 철학적 발제에 있다.  지금까지 이 글을 세심하게 읽은 독자라면 이런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좋은 질문을 던진 사람은 플라톤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아닌가?

 

맞다. 굳이 저작권 개념으로 따진다면, 문자 중계한 플라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 발언자인 소크라테스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왜 플라톤이 서양 철학의 전통을 기본 포맷한 철학자로 인정받는가? 이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소크라테스로 돌아가야 한다. 좀 지겹겠지만 할 수 없다. 철학적 동일체를 이룬 스승과 제자의 몸통을 분리하는 수술이 아닌가?

 

 

 

 

소크라테스 철학의 요체는 대화법 또는 산파술로 요약되는 질문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답을 내놓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아는 게 없다. 그래서 그는 대화 상대자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가실 정도로 끝없는 질문을 던진다. 주로 상대방 이야기의 논리의 허점을 파고 든다. 상대방은 자신의 주장이 모순에 빠졌음을 깨닫고 우물쭈물한다. 큰 당혹감과 혼돈에 빠져든다. 상대방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주시한다. 옳은 답을 듣기 위해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답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대화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종료된다. 해결되지 못하고 끝난 문제 – 이것을 철학 용어로는 아포리아(aporia)라고 부른다. 그 어원은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다는 뜻이다. 출구가 막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길도 진리의 길이 아니고, 저 길도 우리를 진리로 이끌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우리와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주의 원리를 규명하는 작업은 잠시 숨을 고른다고 하더라도 매일매일 우리가 숨 가쁘게 살아야 하는 인간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도대체 어떤 기준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가?

 

소크라테스 시대의 아테네로 돌아가자. 고대 그리스 문명의 중심이었던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에서는 이미 철학의 관심이 피시스(자연세계)에서 노모스(인간세계)로 옮겨가고 있었다. 노모스의 세계에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철학의 화두로 떠올랐다. 소피스트라고 불리는 일군의 철학자들이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관심도 다르지 않았다. 그 점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재판 법정에서 한 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지하의 일이나 천상의 일을 탐구했다고 고소장에 씌어있지만 자신은 자연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자연에 대해서 간단하게라도 언급한 사실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말해달라고도 주문한다. 그렇다고 자연철학자를 경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도 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는 도대체 어떤 점에서 다른가? 철학사에서는 그 양자의 차이를 보편주의와 상대주의의 격돌로 정리한다. 소피스트는 인간사회의 규범은 상대적이라고 이야기한 반면, 소크라테스는 보편적인 규범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보편적 진리를 수호한 순교자로 소크라테스를 자리 매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가? 나는 소크라테스를 보편 철학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답안을 내놓기보다는 상대 답안의 논리적 허점을 등에처럼 성가시게 물고 늘어져 철학적 대화를 아포리아 상태로 몰고 간 소크라테스 철학이 어떻게 보편주의로 연결될 수 있는가 하는 논리적 연결고리만큼은 분명히 설명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가르친 철학의 정신이 아닌가? 만약 그 연결고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소크라테스 대화법(엘렌쿠스)은 보편적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보편주의가 아니라 그러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회의주의, 또는 진리는 때와 장소 그리고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상대주의와 더 가깝게 된다.

 

바로 이 대목에서 플라톤 철학의 핵심인 이데아 이론이 빛을 발한다. 플라톤 철학이 스승의 몸통에서 분리되는 대목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포리아가 출구가 막힌 종착점이 아니라 새 탐구의 출발점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집요하게 질문을 던져서 대화를 막장에까지 다다르게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노린 것이 아닐까?

 

스승이 즐겨 사용한 엘렌쿠스로서의 철학은 제자의 이데아 철학의 뒷받침을 얻어 출구에서 탈출한다. 아니, 이 말이 소크라테스에게 큰 모욕이 된다면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을 통해서야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제대로 독해할 수 있다. 앞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제관계에서 처음에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손 노릇을 했지만, 점차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입 노릇을 한다고 지적했다. 그 분기점이 바로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 개념이 등장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또 그 때를 기점으로 토론이 아포리아에서 벗어난다. 아포리아가 해결불능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탐구의 시작이 되는 셈이다. 이 점을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철학은 아포리아의 놀라움에서 시작한다.” 철학적 사유는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철학은 항상 상식적인 사고를 요청하지만 아무도 그 상식에 이의를 달지 않을 때 철학적 사유는 멈춘다.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의 막다른 길에서 이데아의 빛을 향한 플라톤의 사상이 시작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지금으로부터 2400여 년 전에 죽은 소크라테스는 그의 삶과 죽음, 용모에서 언행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우리에게 던져 주었다.  

  기원전 469년.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태어났다. 그리고 70년 후, 시민 500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들 중 280명의 유죄 결정에 의해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 500명의 배심원들은 나이가 예순셋 이상인 노인과,  집에서 무료한 시간을 견디기 싫증난 사람들에게는 꽤 잡잘한 액수인 배심원 수당 3오블 -당시 그리스 화폐단위-을 받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소크라테스는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낸 철학자이다. 심하게 못 생긴 얼굴에, 오래 된 누더기옷. 악처로 이름 높은 아내 크산티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인용과,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언 아닌 유언.

  아내 크산티페를 두고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그런 여자와 결혼한 이유를 물으면 " 말[마]을 훈련시키는 사람은 거친 말을 다룰 줄 알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식으로 대답하였다.

  그의 죽음에 관한 그림은 쟈크루이 다비드, 샤를 알퐁스 뒤프레누아, 푸셍, 켕틴, 페이론 등 많은 화가들이 앞다투어 그려냈다고 한다. 동양에 공자가 있다면, 서양엔 소크라테스를 말한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직접 쓴 저서는 없다.  

  그런 그가 떠난지 2400여 년. 왜 그의 죽음을 생각하는가. 그는 이땅에 필로(philo,사랑 )과 소피아(sophia,지혜)를 전파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였기에 이땅의 최소한의 규칙을 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악법도 법이다" 라며 독미나리 잔을 받아들였다. 법은 이 사회, 이 세상 사람들을 잘 살게 하려고 만든 가장 작은 규칙이므로.

  소크라테스가 인용하였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곰곰 되씹어 본다. 이 말은 현대에 와서 다른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에 의해 "우리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부정하여야 한다"라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우리는 이 두 철인의 말을 모두 되새겨야 할 것이다. 부단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부족한 우리 자신을 더욱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도 작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10%의 희망을 가지고 90%의 불가능을 이겨낸 사람들도 있고, 90%의 사람들을 위한답시고 소외된 10% 의 가녀린 외침을 무시했다가 낭패를 당한 자도 있었다. 이에 대하여 일찌기 성경에서는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위하여---"라는 말을 하였다.

  시대의 투철한 시인정신을 지닌 김수영 시인은 "모래야 나는 얼마나 작으냐"라고 반어법적으로 노래하였다.

  소수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 주는 사회를 기대하며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을 다시 중얼거려본다.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백발의 노인. 무리의 중앙에 사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군중에게 설파하고있다.

" 모든 것은 자신이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 " 자! 예를 들어볼까요?

여기에 큰돌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돌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요? 이돌에 대한 사람들의 느낌이 모두 다를 것입니다. " 어떤이는 석상을 만들려할 것이고, 어떤이는 주춧돌을, 또 어떤이는 징검다리로, 마당의 의자로 ... 이처럼 사람들은 같은 사물일지라도 자신의 입장과 느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드립니다. 하지만 각 개인의 느낌이 바로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지배합니다. 이러한 느낌은 진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제 각기 진리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견해대로 행동방향을 결정합니다. 이말은 곧 모두에게 한결같이 적용되는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 진리는 개인의 잣대를 통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연설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고, 그사람은 자신이 가르칠 제자들을 모집중에 있었다.

- 그때 군중을 비집고 들어와 맨 앞쪽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노인이 일어서서 나옴.

군중이 외친다, " 소크라테스 잖아! " 제자(학생)들을 모집하는 강사는 그를 천적으로

인식하는데, 강사는 적지아니 당황한 기색이다.

" 존경하는 강사 선생, 이 무지한 늙은이가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소? " 강사는 마지못해 " 좋습니다. " 라고 말한다. " 선생, 저것이 무엇입니까? " 강사가 답한다. " 돌입니다." 소크라테스 "여러분 중에 저것이 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은 나오십시요.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 선생, 저것으로 만약 제우스 신상을 만들어 놓는다면 선생은 그것을 신이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돌이라고 하겠습니까? "

강사 " 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돌이라고,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 소크라테스 " 그래요? 그러면 하나 더 물어봅시다."  " 저 돌로 만든 제우스 신상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저돌은 더 이상 돌이 아닙니까? "

 

강사, 얼굴이 더 붉어지며 머뭇거린다.  " 강사선생, 저것으로 무엇을 만들든 저것은 언제까지나 돌입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저돌을 신으로 생각한다해도 저돌은 여전히 돌일 뿐입니다. " " 따라서 사람의 생각에 따라 사물이 달라진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 사물은 사람의 생각과 관계없이 사물자체의 고유한 성질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만약 저들이 사람의 생각에 따라, 개, 말도 되고 - 사람의 느낌에 따라 변할 수 있다면 개나 말도 사람의 느낌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

강사는 뒷걸음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더 이상 강사를 몰아칠 생각이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군중들을 향해 몸을 돌리는 사이, 강사는 군중들 속을 빠져나간다. 

 

소크라테스, " 돌로 무엇을 만들든 여전히 그것이 돌이듯, 진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느낌에 관계없이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 " 이 변하지 않는 진리에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군중속의 한 젊은이, 묻는다. " 선생님, 그러면 도대체 그 변하지 않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 소크라테스 " 진리를 묻는 그대는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청년, " 저 말입니까? " " 저는 귀족이고, 남자이며 젊고, 영리합니다. 진리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사실 지금 생각해 보니, 저는 제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아는게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린다. " 웃지 마십시요!" " 이 청년은 지금 아주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 "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는게 있는데 " " 그것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 " 진리를 알기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닳아야 합니다."

" 인간은 모든 동물중 유일하게 자기속에 들어있는 진리를 알아 낼 수 있는 힘을 가졌습니다., 그 일의 시작이 바로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함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자기 뿐 아니라 모든 사람 속에 똑같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보편적인 진리에 따라 행동하면 여러분은 가치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곤 소크라테스는 "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을 남기곤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러면 " 나는 누구인가? "  네델란드의 시인, 극작가, 철학가 - 존 쉘라(1759 - 1801)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합니다.

" 누구나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자신이 매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요구하는 가격은 타인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서 위대하고도 또 미약하게도 된다. "

즉, 우리 모두는 환경이나 운명의 꼭두각시로 창조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고 친구를 선택하고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고 우리의 할 일을 결정하는 힘과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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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 밀은 천재적인 사상가로 유명하지만, 독서법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평범한 지능을 갖고 태어났지만, 영국 공리주의 지도자였던 아버지, 제임스 밀에게 천재 독서교육을 받은 뒤 천재적인 두뇌를 갖게 되었고, 20대 중반에는 천재 사상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의 독서법은 초등학교 때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데카르트 같은 천재 사상가들의 저작을 열심히 읽고 소화해서 그들의 위대한 사고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독서를 말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초등학교 때 다음과 같은 책들을 읽고, 매일 아침마다 아버지와 깊이 있게 토론했다.


 

* 저학년 : 퀴로파이데이아, 소크라테스 ‘추상록’, 아드 데모니쿰, 아드 니코클렘, 플라톤 대화편 ‘에우튀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크라튀로스’ ‘테아이테토스’, 헤로도토스의 모든 저서, 디오게네스 라이르티오스가 지은 철학자들의 전기.


 

* 중고학년 : ‘로마사’, ‘플루타르크 영웅전’ 영국 역사의 정치적 개관, 교회사, 유클리드의 기하학 서적 전부, ‘일리아드’, ‘오디세이아’,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수사학 서적 전부, 스콜라 철학에 관한 각종 논문들.

 


 


 

철학 고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초급 과정 : 철학 고전 독서 목록 Ⅰ

 

1. 초급 1단계

- 파이돈(범우사), 논어(홍익출판사), 맹자(홍익출판사)


2. 초급 2단계

- 프로타고라스(범우사), 노자(범우사), 장자(범우사), 손자(범우사), 시학(문예출판사), 묵자(홍익출판사)


3. 초급 3단계

- 니코마코스 윤리학(서광사), 한비자(한길사)


4. 초급 4단계

- 의무론(서광사), 최고선악론(서광사), 방법서설(문예출판사)


 

* 중급 과정 : 철학 고전 독서 목록 Ⅱ


1. 중급 1단계

- 에우튀프론(서광사), 소크라테스의 변명(서광사), 크리톤(서광사), 프로타고라스(범우사), 손자(범우사)


2. 중급 2단계

- 소피스테스(한길사), 정치가(한길사), 한비자(한길사)


3. 중급 3단계

- 티마이오스(서광사), 영혼에 관하여(궁리)


4. 중급 4단계

- 범주론, 명제론(이제이북스)


 

* 고급 과정 : 철학 고전 독서 목록 Ⅲ


1. 동양 철학

- 논어, 맹자, 순자, 노자, 장자, 열자, 묵자, 손자, 한비자, 사기본기, 사기열전 등


2. 서양 철학

- 플라톤 : 소크라테스의 변명, 뤼시스 크리티아스 알키비아데스, 프로타고라스, 국가, 티마이오스,

  소피스테스, 정치가, 필레보스

- 아리스토텔레스 : 시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영혼에 관하여, 범주론 명제론, 소피스트적 논박

- 키케로 : 의무론, 최고선악론,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 데카르트 : 성찰, 방법서설


 

독서 방법 4단계


1. 먼저 철학 고전 저자에 관해 쉽게 설명한 책을 읽는다. 이런 책들은 도서관이나 서점 에 가면 많이 있다.

2. 철학 고전을 통독한다. 이해가 잘 되지 않더라도 그냥 읽는다. 소리 내어 읽으면 더욱 좋다.

3. 정독을 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만나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할 때까지 몇 번이고 소리내어 읽을 것을 권한다.

4. 노트에 중요 구문 위주로 필사를 하면서 통독한다. 필사는 철학 고전 독서의 핵심이 라 할 수 있다. 필사를 통해 학 고전 저자의 사고 능력을 조금이나마 내 것으로 만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사를 하면, 몇 번이고 정독할 때도 이해 불가능하던 구절들이 한순간에 이해될 수 있다.

 

 

 

 

철학 고전 독서의 효과를 몸소 체험한 사람들의 고백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다. 친구들이 『이솝우화』같은 책을 읽을 때 나는 키케로 같은 철학 고전을 읽었다. 물론 나는 키케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점차 열광적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런 나를 부모님은 사랑으로 격려해 주셨다

-르네상스 시대를 연 천재 인문학자 페트라르카


다른 귀족의 자제들처럼 나 역시 철학 고전 독서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건성으로 독서했던 그들과 달리 나는 철학 고전 독서를 아주 깊이 사랑했다. 특히 플라톤 철학은 따로 교수를 고용해서 교육을 받았을 정도였다. 이 책들이 나에게 미친 영향은 심히 크다.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 통치자 로렌초 데 메디치

 

나는 공식적인 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저서들이 지닌 심오한 가치를 깨닫고, 철학 고전을 개인적으로 심도있게 공부했다.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나는 초등학교 시절 지진아였다. 그런 나에게 교장선생님은 철학 고전 독서교육을 시켰다. 이 과정을 통해 나의 두뇌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후일 캠브리지 대학생이 된 나는 노트의 첫 장에 아리스토렐레스를 필사했다. 그리고 노트 위에 이렇게 적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의 친구이다.”

-과학자 아이작 뉴턴

 

나는 10대 시절 외삼촌의 지도로 플라톤, 데카르트, 네테스 하임 같은 철학자들의 저작을 치열하게 읽고 소화했다. 철학 고전 독서가 나의 사고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내가 12살 때부터 16살 때까지 읽었던 책 중에는 변증신학 관련 서적들, 디포의 『기업론』이나 메이데 박사의 『선행록』같은 책들, 로크의 『인간오성론』이나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추상록』같은 책들이 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기본적인 철학 고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책들은 나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치가 벤저민 프랭클린


10대 시절에 내가 온 정열을 기울여서 읽었던 책은 철학 고전이다. 나는 플라톤, 키케로, 루키아노스, 테렌티우스, 볼테르 등이 쓴 철학 고전을 열광적으로 읽었다. 바로 이 책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정치가 벤저민 디즈레일리
 

나의 최상의 즐거움은 매주 토요일 오후에 학자들과 함께 고전을 읽고 공부하는 일이다. 고전에는 나를 성장시키는 힘이 있다.

-유대인 재벌 로스차일드


학생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책을 정말 열심히 읽어라. 특히 철학 고전을 온 힘을 다해서 읽어라. 이 책들은 여러분을 좀더 나은 사고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시켜 줄 것이다.

-월가 최고의 투자자 존 템플턴
 

나는 매일 새벽 5시부터 3시간 동안 독서를 한다. 내가 가장 즐겨 읽는 책은 플라톤의 저작들이다.

-미국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석학들 중에는 철학이나 역사를 외면하고 자신의 연구 분야에만 매달리는 사람은 없다. 양자역학을 창시한 어윈 슈뢰딩거는 그리스와 인도 철학의 전문가였고, 쿼크의 존재를 발견하고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머레이 겔만은 현대문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미네소타 대학 교수 김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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