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원래 대학에서 강의 했던 교양강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 진 것이다.  9


내가 가르치는 것과 똑같은 강좌를 2~3년 정도 담당했던 한 여자 제자와 사석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강의는 할 만한가? 어렵진 않나?"

"별로 어렵진 않은데, 재미가 없어요."

"재미가 없다? 왜?"

"성이라는 게.. 뭐랄까, 너무 뻔한 내용이잖아요. 1~2년 강의하고 나면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없어요. 새로 연구하거나 고민해야 할 내용도 없고..."

... 난 물론 그녀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한 가지는 인정해야만 했다. 성이라는 것이 이제는 대학에서조차 조금은 식상하고 진부한 주제가 되었다는 것 말이다.  18


바야흐로 성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두(話頭 말할화 머리두)가 된 느낌마저 든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창녀인 소냐에게 "여자의 몸에는 평생 파먹어도 마르지 않는 광산이 숨겨져 있지"라고 빈정거렸지만, 어쨌든 우리는 드디어 성이라는 보물단지를 찾아낸 셈이다. 아무리 파내더라도 마르지 않는 샘, 진지한 성찰의 가능성과 통속적 흥미를 동시에 충족시켜줄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20


'성의 과잉'이라고 부를 만한 요즘의 추세 속에서, 또 이론적, 실천적 혼란과 갈등 속에서 성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이나 학문적 관심까지도 시중에 넘쳐나는 수많은 '섹스 이야기'중 하나로 취급될 위험이 있다.  22


"이 책은 해답을 주기 위해 있는 게 아니라 고민을 주기 위해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23


'우리들은 성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사실 시시껄렁한 음담패설 말고는 성에 대한 이야기를진지하게 나눠본 적도 없지 않는가? 사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자유로이 대화하거나 배울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지성인으로서 교양을 쌓아야 한다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자 삶의 일부인 성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지 자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24세, 남학생)  26


성 그 자체가 원래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이라면, 왜 우리는 성에 대해 그토록 부끄러워하는가? 왜 우리는 성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진실을 계속 감추고 부인하는가? 왜 우리는 생명의 원천인 성을 때로는 숭배하고 칭송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더럽고 불결하다 욕하고 또 철저한 금기의 대상으로 삼는가? 아니, 인간의 성에 대한 '단 하나의 객관적 진실'이라는 게 도대체 있기는 한 건가?  28-29


성에 대한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성찰이나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성이 너무나 일상적이고 낯익은 대상이라는 데 있다.  33


육체 없는 성이 있을 수 없는 한 성에 대한 관심은 곧 육체에 대한 관심 아닌가? 물렁거리는 살덩어리와 끈적거리는 액체로 이루어진 육체, 끊임없는 욕망으로 우리를 들뜨게 하고 우리의 고귀한 영혼을 부패시키는 육체, 언젠가는 사멸해버릴 그 저주스러운 육체 말이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는 플라톤의 경구가 잘 말해주듯, 성에 대한 관심을 갖는 순간 우리는 육체에 붙들려 영혼의 순수함과 완전한 앎을 포기해야 한다는 공포가 철학자들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욕망의 힘이 두려워 자신의 성기를 잘라버렸던 초기 교회의 금욕적 수도사들처럼 육체의 성을 부정했던 것이 아닐까?

고대 그리스 이래로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로고스(Logos), 즉 이성과 논리와 언어를 진리 탐구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로고스=진리'라는 등식에 입각해서 피와 살을 지닌 인간의 육체, 아무리 애를 써도 순수하게 논리화될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거의 본능적으로 혐오했는지도 모른다.  46-47


프로이트는 이 주제를 탐구하면서 '성보다는 좀 더 부드러운 '사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사랑이란 기본적으로 성기의 결합이었으니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성적인 사랑'과 다른 종류의 사랑을 구별할 수 없다.  50


우리는 성이라고 하면 단순히 생물학적인 성의 구별이나 직접적인 성행위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의미의 성을 영어로 보통 '섹스(sex)'라고 한다. 서구에서 1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 말은 사실'(둘로) 나뉜 것'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의 'sextum'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말이 처음에는 주로 생식기관의 차이로 구분되는 '생물학적 성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다가, 19세기부터 남녀 양성 사이의 성 관계나 성적 결합을 뜻하는 말로 그 의미가 확대된 것이다.  51


예컨대 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도덕, 성과 관련된 제도나 관습, 이데올로기, 다양한 성 심리나 문화, 성욕, 성적 정체성 등을 모두 살펴봐야 하는데, 이런 넓은 의미의 성을 단순한 '섹스'와 구분하여 학계에서는 보통 '섹슈얼리티(sexuality)라고 부른다.  52


일반적으로 서구 언어에서는 어휘가 형태적으로 확장될 때 '1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명사'가 '2 형용사'로 바뀐 뒤에 다시 '3 그 형용사의 명사형'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살펴보자면, 'unverse(우주)'라는 낱말이 'unversal(우주의, 보편적인)'로 바뀐 뒤 여기에 추상명사를 만드는 어니 '~ity'가 붙어서 'universality(보편성)'라는 새로운 명사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때 'unverse' 와 'universality'를 비교해보면, 전자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사물인 반면에 후자는 추상적 성질임을 알 수 있다. 물론 'universality'는 'unverse'가 갖고 있는 특성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두 명사의 존재론적 차원은 매우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cause(개별사건의 원인)'가 ''causai(원인의)'이 된 뒤 다시 'causality(인과성, 인과관계)'로 바뀌면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의 새로운 명사가 탄생한다. 따라서 sex(구체적인 성행위, 성별) -> sexual(성의, 성적인) -> sexuality(성욕, 성과 관련된 태도, 성적 정체성 등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추상적 성)라는 형태적 어휘 변환 과정을 거칠 때에도 그 의미에 심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52


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성을 '자연적으로 주어진 사실'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구성물'로서 파악하게 되고, 또 그 속에 담겨 있는 사회적, 정치적 의미들까지 탐구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53


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적어도 아래와 같은 세 가지의 접근법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첫 번째로 가능한, 그리고 다른 모든 방법의 기초가 되는 것은 역사적 접근법이다. ..

역사적 접근의 진정한 의의는 현재의 성 관념 및 제도들의 기원과 변천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가운데 "성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

당연히 "더 적은 사변과 더 많은 증거"라는 원리가 지배한다. 따라서 성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라는 애초의 취지가 무색해지기 쉽지만, 성에 관해 쓸 만한 조감도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이 고달픈 과정을 가능한 한 성실히 밟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아마 이론적, 과학적 접근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건축물에 비유해보곤 하는데, 그 토대가 생물학적 측면이라면 기둥들은 인류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측면들을 가리키고 지붕은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성의 각 측면을 분해하여 그 각각을 해당 실증과학의 연구 성과에 따라 고찰하고, 다시 밝혀진 사실들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종합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세 번째 방법은 실천적 문제 중심의 접근법이다...

성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이나 태도는 급변하고 있으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조건들도 실존한다. 단지 사태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만이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53-57


비판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려서 판단하거나 밝히는 것"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기묘하게도 비판이라는 말을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남의 잘못을 들춰내어 따지고 공격하는 것"을 가리킬 때 쓰는 경우가 많다.  58


철학은 경험적으로 주어진 사실들을 기술하거나 설명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성찰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그 이면과 전체적 연관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려고 애쓴다.  58-59


철학은 어떤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며, 성과 관련된 사실들을 실증적으로 직접 탐구하기보다는 그러한 사실들의 의미와 근거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철학이 대상으로 삼는 성은 개별과학자들이 탐구하는 대상과 같은 하나의 사물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진 것, 즉 우리의 언어와 의식 속에 녹아들어 있고 우리 자신의 실천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그 무엇이다. ..

담론(discours)이란 "특정한 목적에 따라 특정한 주체에 의해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된 이야기"를 가리킨다.  59


삶 속에서 성은 언제나 일정한 담론으로서 위세를 떨치고 있으므로 성에 대한 철학의 비판 작업 또한 바로 이러한 '담론으로서의 성'을 분석하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 스스로 새로운 성 담론을 구축해나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60


사람들에게 섹스와 연결되는 낱말들을 적어보라고 하면, "사랑, 결혼, 쾌락, 생식, 욕망, 금기, 남녀의 성기, 지배, 도덕, 성범죄, 변태, 누드, 포르노, 임신, 자위, 신비(스러움), 정력, 매춘, 생리..."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답이 두서없이 튀어나온다. 이처럼 다양하고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이미지와 개념들은 사실상 섹스라는 말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이 정말 복합적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63


성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이처럼 담론화된 성 또는 성 담론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 있다면, 이제 그것은 단순히 "무엇이 진리인가?"를 찾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이 진리라고 할 때 그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는 "왜 그것이 진리라고 여겨지는가?" 등등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69


인간의 성에서 본능적이고 생물학적/생리(학)적인 요소가 더 중요한가, 아니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요소가 더 중요한가를 둘러싼 논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진실은 두 요소의 결합에 의해 인간의 성이 만들어졌다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시선, 우리의 태도, 우리의 평가가 아닐까? 어떤 의도에 따라, 어느 쪽에 더 가중치를 두고, 어떤 요소에 더 주목하며, 어떤 사실들을 더 소리 높이 외치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결국 이러한 '본느의 담론' 자체가 우리의 특정한 인식과 실천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또 거꾸로 이 담론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 성에 대한 인식과 실천이 달라진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74-75


우리는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과 본능들이 동물과 어떻게 다르며, 또 그것이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요인들과 뒤얽히면서 어떻게 우리의 성을 창출해냈는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75


"나는 언제 누구와 섹스해도 괜찮은가?" ...

인간도 동물처럼 오직 생식만을 위해 일정 기간에만 섹스를 했다면 아마도 성에 관한 규제 같은 것은 불 필요했을 것이다.  76


성에 대한 현대의 과학적 연구들은 무지에서 비롯된 수많은 오해를 바로잡고 성 연구에 큰 기여를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바로 통계의 신화와 오르가슴의 신화다.  83


성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단순히 더 많은 쾌락을 가져다주는 기교를 찾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쾌락의 담론 자체를 해부하고 그 속에 들어있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함으로써 성적 쾌락과 이를 둘러싼 논의들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는 데 있다.  84


도덕의 담론. 사실 도덕의 담론은 성과 관련하여 가장 흔하고 표준적인 담론이며 또 빛나는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의 담론이기도 하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성은 무엇보다 먼저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다.  85


우리 사회에서는 평소 그다지 도덕적으로 살지도 않으면서 성에 관해서만큼은 겉으로만 도덕적인 척하거나, 타인의 심각한 공적인 비행(非行 아닐비 다닐행)에 대해서는 지극히 관대하면서도 성에 관련된 문제라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다.  86


이러한 불균형과 자기모순은 성에 관한 '도덕의 담론'과 뿌리 깊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담론의 핵심은 "육체에 기반을 둔 성은 우리를 파멸시킬 수 있는 유혹이므로, 윤리만이 우리를 파멸로부터 구해준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의 밑바닥에는 다시 "섹스란 원래 동물적이고 더럽고 천박한 것인데, 도덕과 제도의 통제를 받을 때에만 인간적인 행위로 승화되고 용인될 수 있다"는 입장이 깔려 있다.  87


'인간의 성에 대한 철학적 고찰'의 핵심은 .. "우리는 생물학적/생리(학)적 본능이라는 말로써 무엇을 생각하고 실천하려 하는가?"를 비판적으로 분석해보는 데 있다. 독자들 스스로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한 번 물어보기 바란다. 

"생물학적/생리(학)적 본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 나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사용하는가? 생물학적/생리(학)적 본능에 대한 이해가 나의 성적 실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101-102


인간은 성과 무관한 영역, 아니 오히려 성을 부정하거나 억압하는 영역을 지니고 있기에 인간다워질 수 있다고 보는 견해야말로 인간의 성을 이해하기 위해 버려야 할 첫 번째 오해인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도덕이나 종교, 예술에서 올 뿐, 벌거벗고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을 때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똑같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렇다면 인간은 왜 벌거벗고 뒹구는 걸로 만족하지 않고 포르노를 만드는지, 또 때로는 벌거벗고 뒹구는 대신에 속된 말로 '변태'라고 불리는 엉뚱한 행위 따위에 집착하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

난잡하고 무분별하게 섹스를 즐기는 것을 '동물적' 이라고 비난하는 우리의 언어습관이 얼마나 부당한지.  106


20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진화생물학의 풍부한 연구 성과는... 더 폭넓은 이해를 위한 발판 노릇을 할 때에만 의의를 갖게 될 것이다.  107


도대체 왜 인간의 성은 생식이라는 자연적 울타리를 넘어서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러한 이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인간의 암컷, 즉 여자에겐 발정기가 없다. 인류의 선조들이 협동노동에 의해 사시사철 먹이를 구할 수 있게 됨으로써 영양 상태가 좋아졌고, 그 결과 특정 시기에만 번식을 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일 년 열두 달 임신이 가능하다는 점 하나만 봐도 다른 동물과 비교하면 엄청난 진보를 한 셈이지만...  108


여성의 배란이 감춰져 있어서 심지어 본인 자신도 알 수 없다.. 

'성 전략(sexual strategies)'을 낳았다. 인간의 선조들은 언제 섹스를 해야 임신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상대를 유혹하고 섹스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복잡다단한 '성 전략'을 발전시켜야 했던 것이다.  110


컴포트(Alex Comfort)가 <섹스의 즐거움(The Joy of Sex)>에서 지적한 대로, "과거에는 성행위의 윤리성에 대해 왈가왈부했지만, 요즘에는 성행위에서 어떻게 만족을 얻을 것인가에 신경을 쏟고 있는" 것이다... 더 많은 쾌락을 얻기 위한 무의식적 노력이 인간의 성 행동과 의식을 규정해왔다고 볼 수 있다.  111


성적 쾌락의 중요성은 인간의 몸 구조에서도 확인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더 많은 쾌락을 얻을 수 있도록 꾸준히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몸 크기와 비교할 때 엄청나게 큰 남자의 성기, 엄청난 양의 신경망이 밀집되어 민감하기 짝이 없는 여성의 클리토리스, 매끄러운 피부와 온몸에 퍼져 있는 성감대, 다양한 성적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신체적 특징들, 예컨대 유난히 발달한 여성의 젖가슴이나 엉덩이, 높은 목소리, 성기 주변에만 남아 있는 털, 붉은 입술, 애교웃음, 예민하게 변하는 눈동자 등등이 이를 증명한다. 또 직립보행에 의해 자유로워진 손과 변화된 성기 위치는 효과적인 애무 동작과 다양한 성교 체위(體位 몸체 벼슬위)를 가능하게 해주었으며, 두뇌의 발달에 따라 사고 능력과 감정도 풍부해졌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성행위를 좀 더 풍요롭고 즐겁게 만든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쾌락의 중요성은 섹스에 소요되는 시간에서도 잘 드러난다. 짧게 끝나는 섹스를 가리켜 속된 말로 '토끼씹'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실제로 토끼의 교미는 10초 이내에 끝나며, 그 밖의 대부분의 동물들, 심지어 정력의 상징인 말이나 백수의 왕이라는 사자의 경우에도 길어야 30초를 넘기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인간의 성교 시간은 수 분, 때로는 수십 분까지 늘어날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 시간을 더 늘리기 위해 무진 애를 쓰기도 한다... 동물들은 단지 쾌감을 증대시키기 위해 인간처럼 길고 복잡한 전희(前戱 앞전 놀희)를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상적인 인간 남녀는 성교를 하기 전에 꽤 오랫동안 서로의 몸을 공들여 애무한다. ..

여성의 경우에는 성교를 통해 오르가슴을 얻는 게 쉽지만은 않으며,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남자는 사정이라는 생리적 매커니즘 때문에 비교적 쉽게 오르가슴을 경험하고 확인할 수있지만, 사정 그 자체가 최고의 성적 만족을 자동적으로 보장해주지 않는 한 결국은 마찬가지다.  112-113


'강한 성적 쾌감'은 인류의 생존에 어떤 도움을 준 것일까?  115


인간이 섹스를 통해 추구하는 쾌락은 자극에 대한 단순한 육체적 반응만은 아니다. 물론 강렬한 생리적 반응이 우리의 뇌리 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러한 쾌감 속에서 확읺되는 총체적 만족감, 즉 '상대와 하나가 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섹스할 때의 자세에서도 확인된다.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얼굴을 마주보고, 즉 서로의 감저오가 반응을 확인하면서 성행위를 한다. ...

얼굴을 마주보는 체위는 우리의 신체구조, 성기의 위치와 잘 맞기 때문에 좀 더 편할 뿐만 아니라, 서로 마주봄으로써 강한 심리적, 정서적 유대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 유대감은 더 나아가 사회적 교류와 관계를 강화시키는 역할도 하며, 바로 이런 측면을 고려할 때만 인류의 정적 진화가 좀 더 효과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116


헬렌 피셔는 <성의 계약(The Sex Contract)>에서 아주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하고 있는데, .."성은 인간 생활의 모든 것을 작동하게 하는 점화장치의 불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 새끼의 양육에 성공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문제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생존을 결정짓는 중대 사항이므로, 인류의 선조들이 번식의 안전을 위해 좀 더 강력하고 지속적인 유대를 발전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피셔에 따르면 이처럼 새끼의 공동 양육과 지속적인 섹스를 통해 형성된 강한 정서적, 사회적 유대를 기초로 최초의 가족과 공동체가 생겨났으며, 이와 더불어 협동심, 애타심, 의무감, 수치심, 정의감,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공포, 성적 질투 등의 기본적 감정들과 갖가지 의사소통 수단, 규칙, 친족 체계, 도덕, 복잡한 사고, 여러 가지 관념들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117-118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바람피우기'가 일부 부도덕한 사람들의 비정상적인 일탈행위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119


생식 결과의 다양성, 다산성(多産性 많을다 낳을산 성품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한 명의 상대하고만 섹스하는 것보다 여러 명의 상대와 섹스하는 게 더 낫기 때문이다.  120


여자들의 바람기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 학자들에 따라서는 여자 또한 자신의 자손에게 더 나은 유전자를 물려주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남자들, 그것도 괜찮은 남자들을 골라 성 관계를 가지려는 심리를 발전시켜왔다고 대답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 양이 아닌 질적인 측면에서 더 나은 생식 결과를 얻기 위해 바람을 피운다는 것이다.  121


우리는 바람기의 원인에 대한 두 번째 답을 찾아봐야 한다... 사람들이 바람을 피우는 좀 더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쾌락과 연관이 잇을 것이다. 인간의 성이 단순한 생식의 효율성을 넘어서 쾌락 그 자체를 지향하게 됨에 따라 섹스에서 다양성과 변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인간 본성의 일부가 되었으며, 이것은 남녀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성향을 잘 보여주는 용어 중에 '쿨리지 효과(Coolidge effect)'라는 게 있다. 미국 대통령이던 쿨리지가 어느 날 부인과 함께 어떤 농장을 방문했는데, 마침 수탉이 암탉과 교미를 하고 있었다. 이를 본 부인이 안내인에게 물었다. "저 수탉은 하루에 몇 번이나 저짓을 하나요?" 안내인이 대답하기를 "수도 없이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은 독기 어린 목소리로 "그 사실을 대통령께 좀 전해주세요"라고 했다. 부인의 말을 전해들은 대통령이 물었다. "그런데 그 수탉은 늘 같은 암탉과 관계를 하나?"  안내인 왈 "아닙니다.  매번 다른 암탉과 하지요". 이에 대통령은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 사실을 영부인께 전해주게." 우스갯소리 같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이 상대가 바뀔 때마다 더 큰 흥분과 만족을 느끼며, 이를 가리켜 '쿨리지 효과'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런 현상은 여자에게도 해당된다. <킨제이 보고서>에 따르면 "언제 성적 흥분을 가장 크게 느끼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남녀의 대답이 크게 달랐지만, 양쪽 모두 1위를 차지한 답은 "새로운 상대와 섹스를 할 때"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바람기는 우리가 처해 있는 또 다른 모순을 보여준다. 강력하고 지속적인 유대를 추구하는 본성과 다양하고 변화 있는 쾌락을 추구하는 본성이 우리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면 인간의 성이 단순하게 결정되지 않으며 근본적인 모순 속에서 정말 다양한 스펙트럼을 만들어낸다는 점이야말로 신비에 싸여 있는 진화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인지도 모른다.  122-123


옛날 아라비아의 속담처럼 "사람이란 그들의 부모보다는 그들의 시대를 더 많이 닮는다."  124


* 엘리아스(Nobert Elias)는 <문명의 역사>에서 성적 수치심이나 충동의 조절 또한 문명의 진보와 함께 발달한 심리적 메커니즘이기 때문에, 야만적이거나 원시적인 사회에서는 알몸이나 성행위 등에 대해 문명인들과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엘리아스의 이런 주장은 최근 몇몇 학자들에 의해 근거 없는 편견과 독단이라고 비판받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한스 페터 뒤르(Hans Peter Durr)의 <나체와 수치의 역사>를 보라. 뒤르에 따르면 알몸과 성에 대한 수치심은 문명의 발달 정도와 관계없이 모든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  129


좀 엉뚱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여자들이 여름에 소매 없는 옷을 입을 때 겨드랑이 털을 없애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대개 "보기 흉하기 때문"이라거나 "지저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정답일까? 우리들이 심리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든 간에, 사실 겨드랑이 털을 없애는 진짜 이유는 미적 감각이나 위생 문제와는 거의 무관한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성들이 겨드랑이 털을 없애는 이유는 여성들이 다리를 벌리고 앉지 않는 이유와 동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겨드랑이 털이란 무엇인가? 겨드랑이 털은 사춘기 이후에 나기 시작하며, 성기 주변의 털과 더불어 성적 성숙을 상징하는 우리 몸의 대표적 신호다. 게다가 그 털은 성기 주변의 털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기 때문에 너무 자극적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겨드랑이 털 자체가 강한 성적 자극을 보내는 신호이기 때문에 남에게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서양의 고전 회화에서 알몸을 그리면서도 음모만은 그리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비록 알몸이라 하더라도 음모가 없다면 성적인 의미가 제거되어 외설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마치 여성이 다리를 벌리는 자세가 성교 자세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금기사항인 것처럼 말이다.  130


고대 중국에서는 여자를 '적(赤=불꽃)', 남자를 '백(白=흙)'으로 상징했는데, '적'은 전통적으로 창조력, 성적 능력, 생명, 빛, 갓 태어난 아이, 알몸의 색깔 등을 나타내는 반면 '백'은 죽음이나 소극성, 성적 무기력 등을 뜻했다. 이 점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성적으로 우위에 있었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또 고대 중국의 신화나 전설에서 여자는 특히 성(=우주적 자기재생산)에 관한 한 신비한 마력을 가진 존재였다. 유명한 <소녀경>을 비롯한 각종 '성 교본'에서도 여자는 완벽한 성 지식을 가지고 성을 수호하는 위대한 스승으로, 남자는 무지한 제자로 그려져 있다. 여자는 교접을 통해 자신의 무한한 기를 남자에게 공급하는 '태모(太母 클태 어미모)'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주나라 이후 가부장제가 확립되면서 음과 양 중 양을 더 중시하게 되고 태초의 여성숭배는 변질되어 '성적 흡혈주의(sexual vampirism)', 즉 여성에 대한 착취로 타락했지만, 어쨌든 음을 중시하는 흐름은 도가나 신비사상, 샤머니즘 등을 통해 민중신앙 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132-133


남성들은 늘 여성의 우월한 성적 능력을 숭배하면서도, 때론 그것을 두려워하고 힘으로 통제하려 애써왔던 것이다. 어쨌든 경배와 공포가 뒤얽힌 지점에서 이제 성 자체가 신비스러운 베일에 가려진 보편적 금기대상이 되며, 그 금단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어떤 신성한 힘에 의해 그 자격과 절차, 구체적인 방법 등을 허락받아야 한다. 한마디로 자연 상태에서는 '보편적 허용과 특수한 금지'가 기본 규율이었던 반면, 이제 반대로 '보편적 금지와 특수한 허용'이라는 원칙이 성의 질서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135-136권력의 이동은 늘 체제의 근본적 전환을 가져오는데.. 남근숭배가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면서 원시사회의 성 관념 및 성 풍속들이 서서히 제거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여성에 대한 숭배는 멸시와 경계로 바뀌고, 종종 종교의식이나 주술과 연관되어 남녀 모두에게 생식과 쾌락의 결합 또는 쾌락의 자유로운 추구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원시적인 성 풍속들은 좀 더 엄격한 도덕적 통제에 묶이게 된다.  145


남성의 입장에서는 자기 자식을 낳아서 대르 잇고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므로, 이제 여성의 불임은 큰 죄가 되었다. 불임을 막는 풍속들이 생겨났고, 임신중절이나 자위행위, 남색(男色 사내남 빛색) 등은 엄하게 처벌되었다. 과거에 공동체 전체에 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찬미되던 여성의 생식력은 이제 한 남자의 값진 재산이 되었으며, 매매혼이나 약탈혼이 보편화되었다.  147


어차피 우리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내고, 우리가 만든 신화 속에 갇혀서 산다. 신화에 대한 비판과 분석까지도 그러한 순환의 고리를 완전히 잘라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151



15~16세기에 시작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 육체와 욕마의 해방을 주장함과 동시에 성대 대해서도 좀 더 긍정적인 사고를 제공하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르네상스 초기 처음에는 '성의 해방'이 주로 예쑬의 에로티시즘을 통해 표현되었지만, 사실상 이것은 중세 말 십자군 전쟁, 페스트 등으로 인구가 격감하고 생산력이 정체함에 따라 전면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결혼과 출산이 최고의 미덕으로 칭송되기 시작했던 사회경제적 배경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 이후 노동력과 군대의 필요 때문에 더욱 가속화되었다.  167-168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루터(M. Luther)는 가톨릭교회의 극단적 금욕주의와 위선적인 행태들을 비판하면서도 부부간의 성애를 긍정하고 인간 육체의 불완전함을 인정했다. 또 칼뱅(J. Calvin)은 성행위는 성스러운 것이며, 모든 성인은 가정을 가져야 하며 가정 안에서 삶을 공유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가정을 공동체의 주춧돌로 파악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주장은 가족을 중심으로 새로운 생산양식의 주체가 되어야 할 초기 부르주아 계급의 입장(가족의 노동력을 중심으로 하는 소상품생산은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학을 했다)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이는 그들이 이제 성 문제를 종교적 문제나 단순한 도덕의 문제가 아닌, 사적 생산과 결부된 개인의 문제로 파악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근대 초기는 부르주아사회의 성 윤리가 만들어지고 정착되는 시기이기도 했는데, 개인들 간의 계약으로서 결혼, 일부일처제 등이 확고한 원칙이 됨에 따라 역설적으로 그 보완물로서 성 매매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168-169


18세기에 들어서서 이른바 절대주의 시대가 되자 육체는 더욱더 성적 도구가 되었고, 몰락해가고 부패한 기생계급이 되어버린 귀족들의 성 관념과 성적 유희는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성을 단순한 쾌락의 수단, 유희의 도구로만 파악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여성의 육체도 파편화되어 관능적 쾌락의 도구로만 평가되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여성의 가슴이나 다리를 노출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심지어 젖가슴이나 허리, 허벅지, 엉덩이, 생식기 등을 각각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풍습까지 생겨났던 것이다.(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자신의 젖가슴을 석고로 모형을 떠서 과일 그릇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풍속의 역사> 제3권 까치, 1987. 43쪽)  170


이 시기에는 육체적 쾌락을 위한 연애기술이 숭배되었으며, 연애란 '두 피부의 접촉'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만연하여 성의 쾌락만이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연애를 위한 성교육, 그러니까 상대를 유혹하고 즐거움을 누리는 기술에 대한 교육이 성행했으며, 상류사회에서는 외설적인 농담을 주고받는 기술이 품위 있는 풍류로 취급되기도 했다. ..

성적 타락이 심해지면서, 지배계급 안에서는 극단적이고 심지어 변태적인 성욕을 추구하는 경향이 생겨났고, 반대로 중간계급 사이에서는 감상적 연애나 지나치게 관념화된 정신적 사랑 등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처럼 연애풍속은 거의 문란하다 할 정도로 자유분방해졌지만, 결혼은 여전히 인습에 묶여 있었다. 귀족들에게 아내나 애인의 아름다움은 단지 과시의 수단이었고, 결혼과 연애는 완전히 분리된 채 혼인은 철저한 거래가 되었다. 특히 귀족과 대부르주아지 사이의 정략결혼이 많았는데, 그것은 돈을 벌어서 성공한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딸을 귀족에게 갖다 바침으로써 사회적 명예를 구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하층 부르주아지들 사이에서는 '첫눈에 반한 사랑'이 경멸받았다. 왜냐하면 사회적 권력이나 지위도, 커다란 재산도 없었던 사람들은 배우자를 고를 때 서로를 관찰하고 시험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근검절약하는 생활태도와 성실성이었기 때문이다.  171-172


육체적 쾌락을 탐하는 시대 분위기에 어울리게 절대주의 시대는 성 매매가 대호황을 누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18세기 말 유럽 최대의 도시였던 파리의 인구 60만 중 4만 명이 성 매매 여성이었으며, 오스트리아의 빈에는 1만 4천 명, 런던의 경우에는 첩 말고도 5만 명 이상의 성 매매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도시의 하층계급에 속하는 젊은 여자들은 대부분이 매춘부가 되었고, 르네상스 시대처럼 성 매매 여성이 특별한 복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소도시나 농촌에서도 은밀한 방법으로 성 매매가 지속되었다. ..

여관, 온천, 카페, 식당, 주점 등이 모두 성 매매에 이용되고 뚜쟁이들에 의해 시골 처녀들이 도시로 팔려가는 일도 흔했는데, 성 매매의 성행은 필연적으로 성병의 확산을 가져왔고 결국 19세기까지 매독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이 시기의 성 풍속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방탕하기 그지없는 '성적 향연(Orgie)'이 성행했다는 점일 것이다. 예컨대 일부 귀족들 사이에서는 축제에서 여자 파트너를 서로 바꾼다든지, 넷 또는 여섯이 참여하는 섹스 파티를 연다든지, 채찍이나 물리적 도구, 여러 가지 향료와 최음제 등을 사용한다든지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는데, 악명 높은 사드 후작의 기행(奇行 기이할기 다닐행) 또한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전제로 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프랑스혁명 후 절대주의가 종말을 맞이하고 산업사회가 도래하면서, "노동하고 활동하는 인간, 감정, 이성, 육첵 통합된 새로운 인간"이라는 새로운 미의 이상이 생겨났다. 퇴폐적인 것보다는 건강한 아름다움이 중시되기 시작했고, 복장에서도 민주화가 이루어져 여성들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활동적이며 자연스러운 복장, 다시 말해 "옷을 입고도 벗은 것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복장을 수용하게 되었다. ..

이제 계급과 무관하게 모든 여성은 아주 억압적인 청교도 윤리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다.

중매와 구혼 광고가 일반화되면서 결혼 또한 철저한 계산임이 백일하게 드러났는데, 이러한 추세는 부르주아지의 경우에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

성에 대한 억압적인 청교도 윤리에도 불구하고, 모든 계급에서 혼전 성 관계는 점점 늘어나 일종의 보편적 현상이 되었으며, 자본에 의한 임금 통제와 빈곤 때문에 일찍 결혼할 수 없었던 젊은 독신 노동자들은 자유연애를 통해서 욕망을 해소하려고 하게 되었다. 또 이들의 성에 대한 무지는 미혼모, 낙태 등의 심각한 사회문제를 낳았고, 결국 부르주아사회가 그토록 신성시하던 '가족의 가치와 구속력' 마저 약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172-174


('자유연애'란 문자 그대로 독립된 개인들이 자신의 욕망과 필요에 따라 사랑하는 상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것을 가리킨다.)  175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현대 부르주아사회가 이룩해낸 하나의 공로는 성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이해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음탕한 사색과 무지로부터 성을 해방시키는 첫걸음은 바로 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

형대 사회에서 일어난 성의 혁명적 변화 중 하나는 아마도 산아제한과 임신중절, 피임법 등의 발전으로 인해 점차 생식과 성애가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점일 것이다.  177


산업화된 현대사회가 인간의 성을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변화시킨 것은 물론 아니다. ..

생활고에 지친 노동자계급의 경우에는 남녀 사이에 강력한 정신적 유대를 바탕으로 하는 성애를 만들어내고 실천하기가 어렵다. 결국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찰나적인 쾌락과 육체적 욕망의 충족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만들어지며, 이는 다시 사회 전반의 성적 타락, 야수화, 성폭력 등등의 문제를 낳는다. 또 근래에는 포르노, 마약 등과 함께 변태적 성욕과 성범죄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데, 어찌 보면 문명화된 사회의 억압적 분위기와 변화 없는 일상 생활이 거꾸로 성범죄와 포르노산업을 확산시키는 주범이라고 볼 수도 있다.  179


인간의 노동력 자체가 상품화되고 이를 기초로 팔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상품이 되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이ㅔ서 유독 성의 상품화에 대해서만 울분을 떠뜨리는 것은 위선적인 태도일 수도 있다...

이미 거대한 산업이 되어 부르주아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현대의 성 산업은 도덕적 분노만으로 상대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상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매매의 부정적 효과는 너무도 분명하다. 성 매매는 사회 전체를 눈에 보이지 않게 타락시켜 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끊임없이 왜곡하고, 세상 모든 여자들을 성 매매 종사자들과 성적으로 경쟁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권력구조를 재생산하고 은폐하고 강화하는 데에도 간접적으로 이바지하는 것이다.  180


이미 18세기부터 본격화된 생물학 연구는 성에 관한 과학적 탐구의 토대를 마련해놓고 있었지만 ...

성에 대한 좀 더 체계적이고 실증적인 탐구는 19세기 후반에서부터 20세기 초까지 주로 의사들에 의해 '비정상적인' 성욕이나 성행동을 다룬 수많은 저작들.. 등이 나오면서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이때부터 좀 더 엄밀한 의미의 현대적 성과학(sexology)이 시작된 것이다. ..

성 충동은 "본능적이고 자연발생적이며 절실하기 때문에 억제하기 힘든" 욕망의 힘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185-187


성과학은 성에 대한 기존의 무지와 미신을 폭로했다는 점에서, 또 성을 전통 종굔나 윤리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진지한 학문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초기의 성을 연구한 사람들은 대부분 의사들이었기 때문에, 성 연구 또한 의학적, 생리학적 관점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았다.  189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다형도착증(polymorphous perversion)이 있으며 유아에게는 양성애적(兩性愛的 두양 성품성 사랑애 과녁적) 기질이 나타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건강한 사람들도 누구나 (정상적인) 성 목적에 덧붙여 성도착으로 간주할 수 있는 행위를 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사례가 보편적으로 발견된다는 사실은 성도착이라는 말에 비난의 뜻을 포함시켜 쓰는 것이 어람나 부적절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191


현대 성 연구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변곡점을 만들어낸 것은 인간의 직접적인 성행위에 대한 실험적이고 실증적인 연구였다.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인간 성행위의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려는 의도로 시작된 이 연구들은 생식으로부터 쾌락이 분리되고, 생식보다는 쾌락이 우선시되는 세태와  맞물리면서 새로운 성 담론과 성 관념들을 만ㄷ르어내는 데 일조했다.  201


매스터스(W. Masters)와 심리학자인 그의 아내 존슨(E. Johnson) .. 1954년부터 1965년 사이에 700명이 넘는 지원자들을 실험실에 집어넣고 실제로 섹스를 하게 한 뒤, 성행위를 하는 동안 그들의 몸에 나타나는 생리적 반응들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핵심은 우리가 흔히 오르가슴이라고 부르는 현상에 대한 해명이었다. 잘 알려져있듯이 오르가슴이란 성행위를 할 때 신체적, 심리적 흥분과 쾌감이 절정에 이르는 것을 가리키는데, 매스터스와 존슨의 연구에 따르면 오르가슴은 생리적 측면에서는 척수와 성감대 주변의 신경망을 잇는 신경계의 작용, 근육의 운동, 혈류의 운동 등으로 확인될 수 있다. 두 사람은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인간의 성 반응을 다음과 같은 네 개의 단계로 구분했다. 첫 번째 단계는 흥분기로서 근육이 긴장되기 시작하고 맥박 및 호흡수가 증가하며, 남성 성기의 발기가 시작된다. 또 여성의 질 안에 분비물이 많아지고 질 안쪽의 3분의 2가 넓어지며, 음핵과 젖꼭지가 팽창하기 시작하는 반응이 일어난다. 두 번째 단계는 고조기인데, 남녀 모두 근육의 긴장이 강화되고 맥박 및 호흡이 더욱 빨라지며, 피부에는 붉은 반점이 나타나고 남성의 성기는 딱딱해진다. 또 질 바깥쪽의 3분의 1이 부풀면서 질구가 수축되고, 여성의 외부 성기는 팽창할 뿐만 아니라 색깔도 변화하며, 젖꼭지 주위와 유방 또한 커진다. 세 번째 단계로 절정기에 이르면 수 초 동안 짧고 빠르게 지속되는 리드미컬한 근육의 수축이 일어나는데, 이때 뇌파에도 변화가 오고 심지어 몇 초 동안 의식을 잃기도 한다. 또 무의식적인 표정의 변화와 함게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게 되며, 성기에 집결해 있던 피가 순간적으로 빠져나가면서 쾌감이 성기 주변으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물론 남성의 사정이 이루어지는 것도 바로 이때이다. 마지막으로 쇠퇴기 또는 회복기에서는 신체의 모든 변화가 평소와 같은 상태로 되돌아오면서 땀을 흘리게 되고, 특히 남성에게는 일정 시간 동안 성적 자극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무반응기'가 나타난다.  203-204


그렇다고 해서 오르가슴을 둘러싼 모든 논란이 종식된 것은 아니다. 오르가슴을 둘러싼 다양하고도 세세한 논점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연구가 진행 중이며, 특히 여성의 오르가슴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이 해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204-205


성에 대한 미셸 푸코의 연구는 그 기본성격과 방향에서 이전의 다른 어떤 성 연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새롭고 획기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전의 성 연구들은 인간의 성 자체를 직접적 탐구대상으로 삼아 소위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진행하거나, 그게 아니면 일정한 가설과 이론적, 이데올로기적 틀을 전제로 성에 대해 상당히 규범적이고 선언적인 담론들을 생산해내는 작업이었던 반면, 푸코는 그러한 연구 자체를 가능하도록 해주는 '권력의 의지'에 초점을 맞추고 연구를 통해 생산된 성 담론들에 대한 메타비판(meta는 '~다음에, ~을 넘어서서'라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메타비판이라고 하면 어떤 대상에 대한 직접적이고 1차적인 비판이 아니라, 그 대상을 설명하는 이론이나 개념들에 대한 2차적 비판, 즉 '비판에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207


푸코는 죽기 직전에 쓴 세 권짜리 저작 <성의 역사>를 통해서 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

그가 사용하는 '권력'이라는 개념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푸코는 전통적인 권력 이론을 비판하면서, 과거의 권력 이론을 크게 둘로 나눴다. 그 하나는 권력을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는 상품처럼 보는 '경제적 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가 여기에 속한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권력을 물질적 생산영역에 근거를 둔 계급지배의 도구로 보며, 자유주의는 권력을 상호계약에 따라 법적 효력을 갖는 권리와 의무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비경제적 이론'으로서 권력을 경제와는 무관한 억압으로 보는 입장인데, 푸코는 프로이트나 빌헬름 라이히, 마르쿠제 등이 제시했던 '성욕의 억압'이라는 가설이 그 대표적 사례라고 보았다. 그러나 푸코는 기존의 두 입장과는 달리 권력을 '힘을 향한 의지'가 서로 충돌하는 일종의 싸움으로 파악한다. 그에 따르면 권력은 위에서부터 작동하는 단 하나의 단일한 힘이 아니라, 수많은 권력관계들의 그물망을 통해 아래로부터 구성되고 자기검열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수단들에 의해 지속되는 '비밀스러운 전쟁'이다.  208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것만을 뜻하지 않고, 개인의 일상과 신체에까지 스며드는 '미시권력(micropouvoir)'이기도 하다. 개개인은 언제나 권력의 억압에 의해 핍박받고 희생될 뿐이라는 소박한 '억압가설'은 힘을 잃게 된다.  209


한마디로 권력은 우리의 일상 속에 파고들어와 우리의 신체에 작용을 가하고, 또 그를 통해 우리의 주체를 구성하는 힘이다. 그리고 권력은 자신을 관철시키기 위해 진리 또는 지식을 자신의 전략에 이용하는데, 이때 권력의 전략적 행위는 일정한 담론으로서 수행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권력의 작용을 이해하기 위해 "누가 권력으 갖고 있는가?"라든가 "권력자의의도가 무엇인가?"라는 물음보다는 권력에 의해 지속적으로 우리의 언어, 신체, 행동이 예속되고, 또 주체 또한 그것에 따라 구성되는 과정에 주목해야 하며, 다양한 담론들 안에서 진리의 효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역사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210


'섹스'라는 의미에서 인간의 성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중 하나가 '남자와 여자'라는 주제인지도 모르겠다. ..

서구 언어의 섹스라는 말 또한 기본적으로는 그런 뜻이다. 우리는 섹스라고 하면 성행위를 먼저 떠올리지만, 이 낱말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의 'setum'은 '나뉜/쪼개진 것'이라는 뜻.  218


남자는 '인간의 수컷+α'이고, 반대로 여자는 '인간의 암컷+β'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일정한 생식기능에 초점을 맞춘 '암수'의 구분만으로는 인간 '남녀' 사이의 구별을 다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α'와 'β'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게 정확하게 무엇이든 간에 그 'α'와 'β'야말로 인간 남녀 사이의 경계르 가르는 기준이며, 그 경계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기보다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219


남성성이든 여성성이든 우리가 성에 부여한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역할과 특성들은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특정한 목적과 사회경제적 지배구조에 따라 사회 속에서 만들어지며 역사적으로도 끊임없이 변천한다.  226


수많은 사회적 학습과 시험을 거쳐.. 우리가 수용해온 '바람직하고 정상적인' 남성성 또는 여성성의 틀은 사실 사회적 필요에 의해서 주조되고 고안된 것이다.  227


남녀평등을 위한 수많은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고 성 차별이 하나의 사회적 죄악으로서 단죄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삶의 미시적인 영역을 세밀히 들여다보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지도 모른다. 우리들 또한 갓난 아이가 사내아이면 파란색 이불을 덮어주고 여자아이면 분홍색 옷을 입혀주며, 사내아이에게는 장난감 자동차와 총을 사주고 여자아이에게는 인형을 선물하는 게 보통이니까 말이다.  228


잘못된 통념과 왜곡된 교육 때문에 여성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의 일부분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여성들의 성기를 처음으로 제대로 보고 만지는 사람이 당사자가 아니라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남성인 경우가 많다는 현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99%의 남성은 자위를 하고 1%의 남성은 거짓말을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듯이 거의 대부분의 남성이 자위를 경험하는 반면, 자위를 해본 여성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게다가 남성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자위 경험을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개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을 그런 사실을 쉽게 발설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단지 남녀의 신체구조상의 차이 때문에 생겨난 결과는 아니다. 이쯤에서 단지 남녀의 신체구조상의 차이 때문에 생겨난 결과는 아니다. 이쯤에서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자위를 옹호하고 심지어 권장하기까지 하는 이유를 한번 생각해보자. 그들의 진정한 목표는 단순한 '성의 해방', '쾌락의 해방'에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오도된 인식과 억압된 실천을 넘어서서 자시늬 신체에 대한 자율적 통제권을 되찾는 것, 자신의 서오가 욕망과 쾌락에 대한 긍정적이고 주체적인 시각을 되찾는 것, 그것이 없이는 남성과 대등한 인격체로서의 여성 해방은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

이른바 '정상인'으로서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으며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모두 다 죽는 날까지 매일 매 순간 자신이 남자 또는 여자임을 의식하면서 거기에 맞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느껴야만 한다.  229-230


남자라고 인정받기 위해서, 사회 속에서 남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아니요, 나는 여짜 계집애'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데 왜 우리는 '진짜 사나이'라는 말에 그토록 열광하는 걸까? .. 왜 우리는 거기다 굳이 '진짜'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걸까? 생각해보라! "이거 진짜 루이뷔통 가방입니다"라는 말은 전혀 어색하지 않지만, "이거 진짜 개미입니다"는 이상하지 않은가? 진짜를 강조한다는 건 그 반대편에 가짜도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고, 그 진짜와 가짜 사이를 가로지르는 경계선들은 자연적이지 않고 인위적임을 함축하는 것이다.  233-234


남자든 여자든 개인에 따라 다양한 기질과 성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왜 남자는 반드시 이러해야 하고 여자는 저러해야 한다는 틀을 고수하려고 그토록 애쓰는 걸까? 

그동안 별생각 없이 당연하게 여겨왔던 성 역할의 틀에 대해서 비판적 고찰을 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성 정체성의 탐구가 그러한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작동시키는 사회구조와 권력에 대한 탐구이며,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왜 어떤 시대에는, 또 어떤 곳에서는 이러저러한 행동이나 특성들이 남자다운 것으로 여겨지고, 또 다른 시대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특수한 방식으로 규정된 성 저체성들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그 뒤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권력이 숨어 있는가? 성 정체성을 '고정된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양분된 틀 속에 가둬두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이런 물음들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성 정체성의 숨겨진 의미가 무엇인지 비판적으로 숙고하도록 만들어줄 것이며,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234-235


남자와 여자는 다르며, 우리는 누구나 그 차이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현상적 차이가 곧 영원불변한 본질적 차이라고 단정해버리는 태도이다.  236


동성애는 있어도 그 반대개념으로서의 이성애는 없다. 있다면 그냥 '정상적인 사람들의 사랑'이 있을 뿐! 대부분의 이성애자들은 자신들을 이성애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인간'이라고만 생각한다. 뒤집어 말해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동성애가 이성애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거울이라는 사실조차 부정하고 있다.  246


각자의 구체적인 실천적 노력이 없는 한, 번듯하고 빛나는 논리만으로 쌓아올린 이론의 탑은 현실 앞에서 사상누각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론이 무용한 것은 아니다. 기존의 틀을 깨고 바꾸는 힘은 비판적 사고에서 시작하며, 철학의 역할 또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259


속마음이야 어떠하든, 또 개인적 경험이야 어떠하든 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공식적인 담론은 이렇다.

"성욕이나 성행위는 사랑에 기반을 둬야만 하며 - 그렇지 않으면 부도덕하거나 나쁜 게 된다 - 사랑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265


몸에 대한 관점은 크게 자연주의(naturalism)와 사회구성주의(social sonstructionism)로 나눠서 생각해볼 수 있는데, 우선 자연주의는 주로 생물학과 진화론의 영향 아래서 발전해왔으며, 18세기 이후 서구의 근대 부르주아사회를 대표하는 이론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관점은 기본적으로 몸이 자아와 사회를 구성하는 물질적 토대라고 본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지만, 인체의 능력과 한계까 개인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삶의 양식을 특징짓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관계까지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생물학적 결정론에 치우쳐 있다. 또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경제적 불평등 또한 생물학적인 몸에 의해 결정되거나 최소한 몸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자연주의적 관점은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자들, 경제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극우파,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크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반면 사회구성주의의 관점은 몸을 순전히 생물학적 현상으로서만 분석할 수 있다고 보지 않고, 몸에 부여되는 구체적인 특성과 의미, 상이한 집단들의 몸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 등이 모두 다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관점은 그동안 첨예한 대립을 보여왔고, 둘 모두 일정한 과학적 근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줄 수는 없다.  270-271


몸이 중요해지면 질수록, 또 몸이 인간 존재의 근원적 조건이 되면 될수록, 몸이 지니고 있는 성적 의미의 의의도 그만큼 커지게 된다. 

'몸의 혁명'이 반드시 성적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몸에 대한 생각과 태도의 변화는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성에 대한 생각과 태도의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74


우리는 무엇이 섹시하고 에로틱한가, 또는 조금 속된 표현으로 무엇이 야한가라는 물음에 별 고민 없이 대답하곤 한다. 벌거벗은 육체, 노출된 성기, 정사 장면, 한마디로 음란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미지들, 뭐 이런 것들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많은 사람들을 성적으로 자극하고 흥분시키기 때문에 분명 에로틱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들은 성적 자극을 느끼지 않으며, 또 동일한 사람이라도 경우에 따라서 자극을 받기도 하고 안 받기도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

정답은 육체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육체를 바라보는, 그리고 평가하는 우리 자신의 시선에 있다.  276


몸과 마음의 전통적 이분법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을 정당하게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큰 장애가 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육체를 기반으로 하는 성을 올바르게 성찰하는 데에도 악영향을 미쳐왔다. 우리는 육체 없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한, 육체 없는 성도 육체 없는 사랑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생물학/생리학의 한계에 갇힌 좁은 의미의 육체가 아니라, 사회적 만남을 통해서 다양한 의미를 구성해내는 육체, 그러한 만남을 통해서 친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내는 사회문화적 의미의 육체를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육체를 통해서만 고결하고 기품 잇는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들도 현실적 의의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체와 육체의 욕망을 추잡하고 음탕하며 동물적인 본느에 의해 지배되는 어떤 것, 따라서 통제하고 억압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만 보는 한, 인간의 성에 대한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성찰 또한 요원하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83


어떤 것이 사랑이고 어떤 것은 아닌지 구별할 수 있을까?   

첫째, 15세의 여중생이 이웃집에 사는 20대 초반의 대학생 오빠를 짝사랑한다고 가정하자. 그 오빠는 소녀의 존재조차 잘 모르지만, 소녀는 먼발치에서 그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오빠 생각에 밤잠을 설칠 정도이다. 둘째, 바람난 유부녀가 연하의 건달에게 반한다. 두 사람은 육체적으로도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럴수록 그녀는 남편에게서는 얻지 못했던 관능적 충족을 느끼면서 더욱더 상대ㅔ게 빠져든다. 셋째, 20대의 대학생 남녀가 서로 사귄다. 주위에서도 모두들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하고, 결혼을 약속한 두 사람은 평범하지만 행복한 연애를 하고 있다. 넷째, 결혼해서 20년쯤 된 부부가 있다. 솔직히 두 사람 사이에는 예전과 같은 열정이 없으며, 상대에 대한 성적 관심이나 욕망은 거의 사라졌고 성 관계도 거의 하지 않지만 그래도 친밀한 가족으로서 서로를 아끼고 필요로 한ㄷ. 다섯째,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40대의 이혼남과 남몰래 만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무척 사랑하지만,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서 자신들의 관계를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

위에 든 예 중에서 사랑인 것은, 또 사랑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것이 사랑이라면, 또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

자신으 어떤 이유를 내세워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의 경계를 나누었는가? 자신이 내세웠던 이유들을 잘 살펴본다면, 아마도 자신은 사랑에 대해 평소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다시 말해 자신이 무의식중에 믿고 받아들여왔던 사랑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드러날 것이다.  290-291


내가 진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랑을 정의하는 게, 그리고 그 정의를 실제 사례에 적용하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292



'좋은 사랑/나쁜 사랑'에 대한 가치판단은 분명 필요하고 '더 좋은 사랑'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사랑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불완전하고 부도덕한 것들까지 포함하는 현실 속의 수많은 사랑들을 잇는 그대로 고찰해야 하지 않을까?  292



우리는 평범하지만 심오한 진리에 마주치게 된다. 그건 바로 단 하나의 사랑, 즉 영어로 표현하자면 'The Love;가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종류의 사랑들, 즉 'many kinds of love'가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랑에 대해 "그건 사랑이 아니야"라든지 "그 사람은 날 진짜 사랑한 게 아니었어"라고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그건 내가 원하던 사랑 방식이 아니었어" 라든가 "그때 우리의 사랑에는 이런 점들이 부족했어"라고 반성하는 게 훨씬 더 유익하고 객관적인 판단이 아닐까? 우리는 좋은 사랑과 나쁜 사랑, 자신에게 맞는 사랑과 맞지 않는 사랑을 구별할 수도 있고, 또 실생활에서는 그런 구별이 꼭 필요하기도 하겠지만, 몇 가지 기준만으로 모든 사랑을 다 설명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져서는 안 된다.  299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사랑의 유형, 또 반대로 자신이 원하는 사랑의 유형을 파악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을 위해 매우 중요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사랑 스타일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하기도 할 것이다.  302


사랑의 개념이나 유형에 대한 이론적 분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현실속의 사랑이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조건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끝없이 변해왔다는 사실이다.  302-303


"진리는 중간이 아니라 극단 속에 있는"(<풍속의 역사> 제1권 1988 10쪽. 전체 문장은 "진리는 중간이 아니라 극단 속에 있다. 사물이나 인간은 극단으로까지 과장됨으로써 클로즈업된다. 그러므로 과장이란 그 과장된 것이 좋은 면이든 나쁜 면이든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며, 각 시대의 기록인 경우 문제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요소다.")지도 모른다. 일상생활에서야 대개 극단을 피하고 중용을 취하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어떤 문제의 논리적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때때로 극단까지 밀고 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모든 것이 두루뭉술해져서, 상식적으로야 수긍할 수 있는 답이 나올지 몰라도 날카로운 논증이나 심오한 통찰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312


프로이트는 성욕의 메커니즘에 대해서도 좀 더 상세한 분석을 시도하는데,..

그에 따르면 쾌락의 목적과 생식의 목적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며, 따라서 '성적인 것'과 '생식적인 것'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성적 쾌감은 신체의 어떤 부분에서도, 즉 생식기가 아닌 곳에서도 느낄 수 있으며, 인간의 성욕에는 성기를 사용한 행위와 무관한 충동들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입으로 빨거나 손으로 더듬는 등의 애무행위도 성욕을 구성하는 정상적인 본능이라는 것이다.  319


우리는 성을 언제나 생식과 연결시키는 생물학주의의 고정관념 때문에, 생식능력과 무관한 성욕을 은연중에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 문제는 어디까지나 왕성한 생식능력을 갖춘 젊은이들의 문제이며, 어린아이나 노인들의 성욕, 신체적인 장애인들의 성욕, 그리고 동성애자들의 성욕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망측한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육체적인 노화가 성에 대한 욕망까지 자동으로 제거해주는 것은 아니다....

성이 모든 인간 존재의 보편적 근거이자 욕망과 행복이 기반이기도 하다면, 소외된 노인들의 성을 언제까지나 외면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권과 복지의 사각지대를 또 하나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321


"억압된 욕망과 충동이 무의식의 근원이라면 억압은 도대체 왜 일어나는가?" 

자아는 자신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욕망, 충동)들을 의식으로부터 몰아내 무의식의 세계에 가둠으로써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하려고 하는데, 바로 여기서 억압이 발생한다. 따라서 억압이란 결국 자아가 성숙해지기 위해 갖가지 장애로부터 자신을 총체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방어하는 하나의 메커니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326


인간 욕망의 특성은 늘 완벽하게 충족될 수 없고, 끊임없이 변형된다는 데 있다.  349

 

아동심리학자들이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고 한다. 넓은 운동장 한편에 모여 놀고 있는 유아들의 주위에 금을 그어 표시한 뒤, "이 금 안에서만 놀고, 금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지시를 했다는 것이다. 학자들이 숨어서 지켜보니까, 몇몇 아이들이 금 주위에서 두려운 듯 눈치를 살피다가 살ㅉ가 한 발을 금 밖으로 내딛어보더란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씩 그애들을 따라 금을 넘어가게 되고, 시간이 지나자 더 멀리 밖르오 나가는 아이들도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뒤에 학자들이 되돌아와 금을 지워버리고 나서 "이제 아무 데서나 맘대로 놀아도 좋다"고 하자, 아이들은 다시 원래 놀던 운동장 한편 구석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들로 하여금 조심조심 금 밖을 넘보게 만든 욕망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 그런 욕망의 불을 지펴놓은 것일까? 운동장은 원래 유아들이 전체를 다 쓰기에는 너무 넓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한쪽 구석에서 노는 걸로도 충분했다. 쉽게 말해 객관적으로만 보면 아이들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운동장 한가운데로 나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비밀은 바로 금에 있는 게 아닐까? 움직임을 제한하는 금이 그어지는 순간, 거꾸로 그 제한을 깨뜨리려는 욕망이 생긴 게 아닐까? 

우리는 흔히 금기가 욕망을 제한하고 억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욕망이 원래 있고, 그 욕망이 너무 크거나 지나쳐서 문제가 될 때, 그것을 통제하는 금기가 생겨난다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지만 할까?   350-351


프랑스의 현대사상가 조르주 바타유는 <에로티즘>에서 .. 인간 성욕의 본질은 고립된 개인들이 합리적 일상의 세계를 벗어나 어떤 신비스러운 체험을 통해 존재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얻으려는 데 있다. 그는 규율(=금기)이야말로 동물과 인간을 구별해주는 문명의 상징이며 폭력과 무질서에 반대하는 이성의 산물이지만, 거꾸로 이 규율을 의식하면서도 의도적으로 깨뜨리는 폭력만이 가장 높고 강렬한 욕망을 충족시켜준다고 주장한다. 생식이란 본래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고 낡은 세대가 죽음으로써 개체성이 부정되고 연속이 실현되는 과정인데, 이런 점에서 생식과 연결된 성은 늘 규율 위반, 폭력, 죽음, 전쟁(살해), 광란의 축제, 주연(酒宴 술주 잔치연), 희생물을 바치는 종교적 의식 등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이 인간에게 공포와 경배의 대상이듯이 성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숭배와 공포, 신성함과 폭력, 욕망과 금기의 이 같은 모순적 결합은 아마도 월경, 처녀막의 파열(출혈), 출산 등과 관련된 피와 고통의 이미지, '작은 죽음'(프랑스어로 오르가슴을 '작은 죽음'이라고 부른다)이라고 불릴 만큼 합리적 일상과는 철저히 단절되는 느낌을 주는 절정의 쾌락(=오르가슴)의 이미지, 성기와 성행위에 대한 혐오감(성기는 배설기관이기도 하며 성행위 그 자체는 아주 동물적이다) 등이 복합적으로 뒤섞임으로써 생겨났을 것이다. 아무튼 바타유에 따르면 노동(=규율), 자의식(=전체로부터 분리된 개체), 수치심(=성과 관련된 자의식),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은 모두 인간만이 갖는 특성이며 사실상 같은 계기의 다른 측면들인데,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바로 그 경계선에 이런 계기가 놓여 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스스로 이 계기를 부정함으로써 더 높은 도약을 꾀하며, 이것이 바로 '에로티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354-355


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상식적 시각은 자연주의적이고 본질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관점에 매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자연주의가 뭔가? 성은 자연적인 것, 본능적인 것, 생리적인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또 본질주의 역시 성에 '고정된 불변의 본질'이 미리 주어져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럼 환원주의는 뭘까? 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어떤 '기본 요소'로 환원하여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을 말한다. 그리고 그 '기본 요소'란 결국 생물학적/생리(학)적인 메커니즘, 그러니까 생식을 위한 메커니즘을 가리킬 것이다. 이처럼 단순하게 도식화되어 있는 성 관념이 우리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한, 어떤 이론이나 과학적 발견으로도 우리의 성 의식을 업그레이드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의 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니, 진지한 성찰의 대상으로 삼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이러한 자연주의적, 본질주의적, 환원주의적 접근에서 비롯된 고정관념의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럼 우리는 왜 그토록 성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일까?..

성은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하고 중요한 문제이기에 오히려 한 발 물러서서 비판적으로 성찰하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  359-360


서구에서 '섹스'라는 말이 16세기에 처음 사용되었을 때는 단지 남녀의 성별 구분을 뜻했지만, 19세기 초부터 일련의 의미변화를 겪고 난 뒤 이 단어가 마침내 '양성 사이의 육체적 성 관계'를 뜻하게 되었다는 데에서 출발하는 게 좋겠다. 이러한 어의변화 속에는 우선 양성, 즉 남녀의 명백한 구분, 심지어 대립과 적대가 전제되어 있는데, 사실 이것이 자연주의적 오류의 첫 번째 내용이다.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일 뿐이며 그 구분은 자연에 의해 정해진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한 사회적, 문화적으로 구성되는 성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다음으로 '성'이란 저항할 수 없는 본능적, 파괴적 힘이며, 특히 남성의 성기 속에서 꿈틀거리는 '생물학적 명령'이라는 가정이 있다. 현대의 성 이론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킨 프로이트마저 이런 가정을 받아들일 정도였으니, 그 위력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아무튼 우리 사회의 수많은 남성들, 아니, 심지어 여성들까지도 이런 생각에 동조하고 있으며, 그래서 예컨대 "남자는 다 늑대다"라는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남자는 늑대"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애먼 늑대들, 인간의 핍박으로 지구상에서 멸종해가는 가여운 늑대들에 대한 부당한 비난일 뿐만 아니라, 남성 전체에 대한 모욕인 동시에 거꾸로 일부 남성들에게는 면죄부를 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늑대들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끝으로 자연주의적 관점은 '피라미드처럼 위계서열을 가진 성 모델'을 만들어내며, 그 속에서 '남성이 주도하는 이성애적 삽입성교'라는 이상적 성 모델로부터 속된 말로 여러 가지 '변태'에 이르기까지 그 가치와 정당성에 따라 수직적인 성의 위계질서가 등장한다. 그리고 기존의 성과학 이론들이 많건 적건 이러한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음은 앞에서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아무튼 이러한 자연주의적 오류를 통해서, 또 그것에 의해 만들어진 위계질서를 통해서 '자연적 성'이라는 허구의 실체가 마치 하나의 객관적 대상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질서가 다 그렇듯이, 이 위계질서를 유지하고 정다화하려는 지배 권력의 개입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이는 물리적인 힘으로서 직접 작동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의식과 실천을 남몰래 조종하고 통제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이 용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지만, 가장 폭넓게 본다면 "무의식중에 형성되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적 의식"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361-362


현대에 들어와서는 성에 대한 자연주의적, 본질주의적 관점 대신에 '성정치(학)(sexual politics)'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된다. ..

쉽게 얘기해서 성을 정치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며, 이 용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정치'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부터 고칠 필요가 있다.  365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잘 보여주듯이, 잘못된 정치는 때때로 평범한 개인들의 삶을 파멸시킬 수도 있고 어찌 보면 우리 일상의 모든 행복이 정치에 의해서 좌우될 수도 있는데, 우리가 정치를 향해 더럽다고 침 뱉고 돌아서면 그걸로 끝인가? 물론 정치의 문제는 현실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정치란 소수 권력자들과 관계된 일'이라는 일상적 인식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를 뜻하는 영어의 'politics' 라는 말은 본래 그리스어의 'politikos'에서 온 말이고, 이 말은 다시 도시국가나 공동체를 뜻하는 '폴리스(polis)'의 형용사형이다. 아마 독자 여러분도 학창 시절 세계사 시간에 배웠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스파르타 같은 도시국가를 폴리스라고 불렀다는 것을! 다시 말해 '정치' 또는 '정치적'이라는 말은 본래 '국가, 공동체, 사회'와 연관되는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규정했을 때에도 그 의미는 "인간의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동물"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말한 것이지, 인간은 본래 "권력 다툼을 좋아하고 음모나 술수를 부리며 남을 지배하는 것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은 절대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어떤 인간도 정치와 무관할 수 없으며, 정치적인 것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이해관계에 따라 집단을 이루어 복잡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는 늘 타인에 대한 지배와 힘의 행사, 즉 권력의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은 직접적인 물리력을 통해서 관철되기도 하지마ㄴ, 대개는 제도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즉 일정한 정당성을 확보하고 사람들의 의식을 남몰래 지배함으로써 실현된다.  367-368


지배와 이데올로기에 의한 '성의 사회적 구성'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알기 위해 여러 가지 요소들을 면밀하게 살펴봐야 하는데, 대체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영역이 고려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친족 및 가족제도다. 이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성의 가장 '자연적인 축'으로서 강조되어 왔다. 예컨대 친족 내의 '근친상간 금지'는 보편적 법칙으로 간주되어왔으며, 자연 상태에서 사회(=문화)로 이행하는 징표로 인정되어왔다. 그러나 '근친상간 금지'가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는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전혀 다르다. 또 '혈연관계'라는 것도 문화라는 틀을 통해 재해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친족이라는 개념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기보다는 경제적 요인과 사회적, 문화적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

친족 및 가족제도는 경제적 요인, 가족법, 결혼 및 이혼에 대한 규제, 사회복지와 조세정책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국가 개입에 의해 부단히 재구성되며, 이것들 모두가 성에 대한 인식과 실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개인들은 가족 안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최초로 이해하게 되며, 또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가족이야말로 성장 과정에서 우리의 성적 욕망이 최초로 조직되는 영역이기도 하므로, 친족 및 가족제도는 성의 사회적 구성에서 매우 중요한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조직들이다. 경제적 변화와 새로운 계급구조의 출현 또한 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서구에서 근대 부르주아사회가 형성된 후 새로운 연애형태와 가족형태, 성도덕 등이 등장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 산업혁명 후 사생아의 출산이 크게 늘어 났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여성이 공장에 취업함으로써 산아제한이 보편화되었으며, 1950~60년대 이후에는 기혼여성의 취업이 늘어나는 등 시대에 따라 수많은 경제적, 사회적 변화들이 일어났는데, 이 또한 사람들의 성 관념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 역시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적 토대가 성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기본적 전제와 한계만을 제공한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물학적/생리(학)적 결정론 못지 않게 위험한 경제 결정론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사회적 규제들이 있다. 사회나 문화에 따라 성생활에 대한 구체적 규제는 실제로 아주 다양한데, 그 자체가 상당한 자율성을 갖는다. 예컨대 종교, 국가의 역할, 결혼 유형을 결정하는 도덕적 규준, 이혼율과 성적 일탈의 범위등이 성에 대한 규제에 영향을 미친다. 종교적인 이유로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과 규제가 심한 이슬람권 국가에서의 성과 이혼이 매우 자유롭고 이혼율 또한 높은 서구 사회에서의 성이 같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서구 사회를 기준으로 볼 때 근대 이후의 특징적인 현상은 성에 대한 규제가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규제로부터 점차 의학, 교육, 심리학, 사회사업 및 복지 등에 의한 세속적 규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근대 이전까지는 자위를 금지하고 죄악시하는 이유가 <구약성서>에 있었지만, 19세기가 되자 의사들이 앞장서서 "자위는 건강에 해로우며 청소년들의 성장 발달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자위를 금지시킨다. 그러나 20세기가 되면 다시 건강을 들먹이는 의학적 담론이 사라지고, 그 대신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자위에 몰두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식의 새로운 이유가 제시된다. 결국 자위를 금지하고 성을 통제하려는 권력의 의지에는 변함이 없지만, 시대 변화와 과학적 지식의 발전에 따라 담론의 형식만이 바뀌었던 셈이다. 사실 사회적 규제는 일률적으로 관철되지 않는다. 예컨대 음란물에 관한 규제는 거꾸로 음란물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며, 동성애에 대한 규제는 동성애자들의 단결을 촉진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형식적 방법이 아닌 비공식적인 규제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다. ..

넷째로는 직접적인 정치적, 법적 규제들도 중요하다. 비공시적이고 관습적이던 갖가지 사회적 규제들도 특정 시기의 정치적 세력관계에 의해 정치적 의미가 강화될 때는 법률적 규제에 관한 논쟁을 낳는다. 예컨대 낙태나 동성동본 결혼, 간통죄 폐지 등을 둘러싼 논란은 단순히 성 문제에 대한 논란으로 그치는 게 아니고, 언제나 진보와 보수가 대립하는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된다. 또 서구에서 1980년대 이후 신보수주의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페미니즘이나 반(反 되돌릴반)인종주의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반격이 활발해지는 것을 보면, 성을 둘러싼 정치적 투쟁의 가능성을 잘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이 성 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태도를 취하기 어려운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

마지막으로 지적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실천이다. 사실 지배와 통제가 있는 곳에는 늘 저항도 있게 마련이므로 기존의 성 관념에 맞서는 저항문화와 저항이데올로기 또한 성의 사회적 구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려사항인 것이다. 그동안 저항문화나 저항이데올로기는 대개 공식적인 역사서술에서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여성들은 오랫동안 낙태의 권리를 위해 투쟁해왔고 동성애자들 또한 자신들의 사랑을 정당하게 인정받기 위해서 싸워왔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이러한 저항운동을 극적으로 표면화시킨 대표주자가 현대의 페미니즘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사실 노인이나 청소년, 소수민족, 유색인종 등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은 언제든 성 정치에서도 억압되고 배제되는 타자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실천적 운동 또한 앞으로의 성 관념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369-373


굳이 어려운 역사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성생활의 유형은 계급에 따라 아주 상이하다. 예컨대 킨제이의 조사에 따르면 남자들의 성 행동은 계급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또 우리나라의 몇몇 조사에서도 소득 수준이 높고 학력이 높은 계층일수록 좀 더 대담하고 자유분방한 성적 쾌락을 추구하며 성행위 방식도 더 다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현실을 고려해볼 때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성욕이나 성 행동이 계급이나 권력과 얽혀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도 결코 우연이나 허구가 아니다. 성을 노골적으로 묘사해서 유명해진 로렌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도 상류계급의 여성이 비천한 하층 계급의 남성과 욕정을 불태우는 내용 때문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던가.

계급과 더불어 남녀의 성별 또한 오랫동안 지배와 이데올로기의 원천이었다. 굳이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남녀관계는 기본적으로 권력관계였으며, 성 차별이 많이 사라진 오늘날에도 그러하다. 남성지배 사회에서 여성의 성 정체성은 남성 권력의 산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의 성은 남성의 시각과 틀에 의해 좌우되어 왔고,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난 여성의 성에 대해서는 남성 권력의 폭력이 정당화되어왔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와 그릇은 밖으로 내돌리면 깨진다", "여자는 사흘만 패지 않으면 여우가 된다"라든가 "북어와 여자는 두들길수록 맛이 좋아진다" 등등!  375


성과 관련하여 우리가 놓치기 쉬운 또 하나의 전선은 나이에 따라 형성된다. ..

일상의 성 관념 속에 파고들어 중대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차별 중에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나이 차별(ageism)이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ageism'이라는 용어를 처음 들어볼 것이다. 그건 그만큼 우리 사회가 이러한 차별에 둔감하다는 뜻이리라. ..

우리가 차별을 차별로 의식하지 못한다는 건 차별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차별이 보편화, 일상화되어 있음을 가리킬 뿐이다. ..

내가 지금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일상의 나이 차별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서오가 관련된 나이 차별은 일상의 나이 차별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

젊을수록 더 많은 권력을 갖게 되며, 따라서 젊은이들은 성에 관한 한 당연히 더 많은 특권을 누려야 하고, 그러한 세태에 눈살을 찌푸리며 뒤에서 투덜댈지언정 나이든 기성세대 또한 그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지는 못한다. 아니, 도전하기는 커녕 어떻게 해서든 젊은이들 틈에 끼여 그 권력의 혜택을 조금이라도 나눠가지려고 발버등을 치기도 한다. ..

법으로 정해졌든 사회통념으로 정해졌든 간에 일정한 나이에 도달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성 정치의 전선에서 철저하게 배제되는 또 다른 타자일 뿐이다. ..

우리는 이런 식의 나이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근대의 성 담론은 결국 아동 학대의 사회, 노인 유기의 사회로서의 자본주의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근대 이후 아동기, 사춘기 등등의 발견을 통해 나이별로 위계서열화된 성의 질서는 이제 급기야 결혼적령기, 가임기, 갱년기, 폐경기 등등의 사회학적, 생리학적 용어들을 통해 더욱 세분화되었으며, 인간의 생애 전체와 성생활 자체가 바로 이러한 분할 선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376-378


마지막으로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하지만 인종 또한 중요한 전선이다.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성 모델은 "백인=문명인/유색인=야만인"이라는 도식에 기초해 있다. 유색인종(=비유럽인들)은 아직 덜 진화된 인간들로 그만큼 자연에 가깝고, 따라서 그들의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성은 더 위험하고 파괴적이라는 것이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논리였다.  378


한국에서 일하는 수많은 제3세계 빈국 출신의 노동자들이 엄청난 차별과 박해를 받고 있는데도, 정작 우리 사회의 주류 언론은 무슨 사건 하나만 터지면 그들을 잠재적으로 위험한 성폭력 범죄자들로 매도하지 않는가? 이처럼 유색인종의 외국인이라면 질색을 하는 한국의 젊은 여성들도 백인남성들에게는 영어로 말 한마디 붙여보려고 온갖 아양을 다 떨며, 또 그걸 잘 알고 악용하는 일부 건달 같은 백인남성들은 "한국이야말로 백인남자를 위한 성의 천국"이라고 떠벌인다 하지 않는가?  379-380


사실 성정치는 근대 세계가 안고 있는 사회적 적대와 모순의 그물망 전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을 하나의 단일한 실체로 보려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늘 상기해야 한다. 성의 사회적 구성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이며, 우리는 지금도 계속 상연되고 있는 무대의 배우이자 관객이며 주체이자 대상인 것이다.  381




에필로그


일상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건 결국 공염불 아니면 기껏해야 지적 유희로 끝날 것.

어찌 보면 실천을 통해서 뒷받침되지 않는 한, 이 책의 내용을 진실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성에 관해서 어떤 것을 용인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의 생각(또는 태도)은 대체로 그것에 대한 자신의 실천적 경험 여부와 비례한다."  387


실천을 많이 해야 하는 셈이다.

물론 실천이 중요하다고 해서 돈키호테 식으로 일단 뭐든지 저질러놓고 나중에 생각해도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성을 둘러싼 새로운 실천에 시동을 걸려면, 먼저 새로운 '성 담론'이라는 연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선인식->후실천'이라는 기계적 도식이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삶의 모든 과정이 그렇듯이 여기서도 진정한 변화는 '인식과 실천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실현되기 때문이다.  388-389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이라고 해서 다 자기 생각이 아니며,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해서 다 자기 말이 아니라는 것을! 대지를 적시는 빗방울처럼 어느샌가 내 의식 속으로 스며들어와 나를 지배하게 된 수많은 관념과 이데올로기들은 마치 복화술사가 인형을 이용해 자기 목소리를 전달하듯이 나의 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주체성과 나의 생각과 나의 말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

진정한 주체성은 비판적 성찰을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것은 소크라테스 이래로 철학의 상식이다. 개개인 모두가 어떻게든 남들과 다르게 튀어보려고 앴는 현실, 하지만 개성 있는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에는 목을 매면서도 개성의 바탕이 되어야 할 진정한 주체성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오늘날의 현실은 역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슬픈 회화가 아닐까?

이처럼 기존의 성 담론들이 우리 자신의 혼과 정성이 담긴 창작품이 아니라 사회가 우리 머릿속에 심어놓은 칩이라고 해도, 어쨌든 개인의 성적 실천은 그 담론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391-392


우리는 기존의 성 윤리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재고해봐야 한다. 철학자들의 이상에 따르자면 본래 윤리라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함을 향해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일 뿐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 속에서 윤리는 반드시 그런 긍정적 기능만을 해온 것은 아니다. 윤리는 때때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면서 기존의 지배질서만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393



기존 성 문화의 문제점부터 짚어봐야 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현재 우리 사회의 성 문화에서 가장 큰 문제는 첫째로, 관능성 즉 단순한 감각적 쾌락과 넓은 의미의 섹슈얼리티를 혼동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라는 점 아닐까? 남녀관계에 대해 미국 학자들은 이른바 "find(상대를 찾고), feel(상대와 정서적 교감을 나누고), fuck(상대와 섹스하고) & forget(상대와 헤어진다)"이라는 도식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쉽게 말해 여기서 'feel'이 생략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둘째로, 성을 남성 중심적, 이성애 중심적, 성기 중심적, 성교 중심적으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섹스란 남자가 자신의 성기를 여성 성기 안에 삽입하여 사정에 이르는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인 셈이다. 이런 시각은 예컨대 성폭행을 다룰 때에도 나타나며, 또 포르노에서는 한층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강간사건의 경우 현행 형법은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질 속에 들어갔느냐 들어가지 않았느냐를 기준으로 범죄 여부를 가리기 때문이다. 또 포르노의 경우는 어떤가? 여성을 위한 포르노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이론적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포르노는 남성의 시각에서 남성의 관행적인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래서 포르노에서는 대개 남성의 행위와 욕망과 시선이 성 전체를 지배하는 힘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컨대 대부분의 포르노에서는 카메라의 시선이 철저하게 여배우에게 맞춰져 있어서 여배우의 얼굴, 몸, 성기는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만, 상대인 남성의 모습은 발기된 성기를 제외하면 그다지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또 포르노의 끝부분에서는 남성이 여성의 몸(안이든 밖이든) 또는 얼굴이나 입 안에 사정함으로써 성행위가 종료되었음을 보여주는데, 이 또한 '남성의 사정=만족=섹스의 목표 달성'이라는 도식을 시각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포르노의 내용은 대개 남성의 발기로 시작하여 성기의 삽입과 더불어 이어지는 끝없는 동작에서 남성의 질외 사정으로 끝이 난다. 남성이 쾌감에 도달하면 성행위는 종료된다. 여성의 오르가슴은 가장되고 은폐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여성의 쾌락을 무시하는 것이며, 남성의 관점에서 재현된 성행위 과정일 뿐이다.'(이나영 <포르노, 섹슈얼리티, 그리고 페미니즘> 1999 148쪽)  ...

셋째로, 우리 사회에서는 앞서 말한 성의 다양한 기능들을 대개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을 생식수단으로만 보거나 단순한 관능적 쾌락의 수단으로만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남성의 경우에는 관능적 쾌락으로서의 성이 당연한 것이지만, 아직도 여성이 적극적으로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갖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여성의 성이나 소수자들의 성에 대한 무지가 널리 퍼져 있으며, 이것은 두 번째로 지적한 남성 중심적, 이성애 중심적, 성교 중심적 성의 이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 예로 여성이 성적 쾌감을 느끼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신체기관은 음핵인데도 불구하고, "섹스란 성기의 삽입"이라는 고정관념에 매달리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여성의 질을 음핵보다 더 중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또 동성애자라면 무조건 항문성교를 할 것이라는 편견도 '섹스=삽입'이라는 도식에 매달리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398-401


성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 즉 성을 '신비하고 성스러운 것'과 '더럽고 범죄적인 것'으로 나누는 사고방식을 극복해야 한다. 

둘째로, 모든 윤리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상대적임을 인정해야 하며, 성을 윤리적 차원에서만 보는 편헙한 시각도 지양해야 한다. 셋째로, 어떤 행위를 판단할 때 그 행위의 관습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 법적 측면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구체적인 규범의 목록들은 개인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인간 해방을 지향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위와 같은 변화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베리오티는 성도덕을 반드시 피해야 할 오류들로서 환원주의의 오류, 추상의 오류, 초역사주의의 오류, 고립주의의 오류, 경직성의 오류 등을 거론하고 있다.)  405


어른들이여! 당신의 첫 섹스는 어땠나? 그렇게 심사숙고하고, 그렇게 또렷또렷 맨 정신에, 그렇게 이성적으로, 그렇게 자율적 판단과 엄밀한 계산에 따라서 이루어졌나? 그렇게 도덕적으로도 완벽했고, 마른 대낮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하루 온종일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올 만큼 당당하고 깨끗했나? 그게 아니라면 제발 철딱서니 없는 어린것들이 뭘 알아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비난부터 하지는 마라. 나이가 스물이 됐든 스물다섯이 됐든 실제로 첫 섹스를 하기 전까지는 그 민망한 문제에 관한한 우리 모두 철딱서니 없고 경험도 없는 무지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실제 경험이 없는데 나이만 먹으면 저절로 섹스에 관해 철이 드나? 아마 사람 보는 눈이나 계산하는 능력은 좀 나아질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 괜히 나이 가지고 폼 잡을 필요는 없다. 오케이?

그럼 다시 물어보자.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합의하에 하는 섹스가 범죄인가? 그래서 그 오린 나이에 감히 섹스를 한 발랑 까진 년들은 마치 성범죄자에게 중형을 내리듯이 배움의 터전으로부터도 가차 없이 추방해야만 하는가? 아니, 범죄가 아니라면 섹스는 부도덕한 행위인가? ..

분명히 말하거니와 도덕이라 이름 붙여진 갖가지 사회적 편견과 시대착오적인 관행, 기성세대의 협박 때문에 생겨난 공포 등등을 제거하고 나면, 섹스 그 자체는 범죄도 아니고 부도덕도 아니다.  409-410


지금 우리가 청소년들의 섹스를 금하는 이유는 그야말로 실용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적, 경제적 이유로 인해 사랑해도 함께 살 수 없고 애를 낳아 키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기성세대는 서로 사랑하는 10대 후반의 젊은이들이 자유롭고 섹스하면서 살아갈 수 없도록 제도적,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존재들이기도 하다. 왜 이기적이냐고? 입만 열면 윤리 타령을 늘어놓는 그들은 그 섹스를 맘껏(때로는 과도하게!) 즐기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사실 그들이 섹스를 즐길 수 있는 권리는 그들의 도덕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권력에서 나올 뿐이다.  411


이슬람교에서는 인간의 행위를 크게 다섯 가지 범주로 나눠서 설명한다고 한다.

첫째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즉 절대적 의무다. 예컨대 신자라면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둘째는, 하면 좋지만 안 해도 죄가 되지는 않는 것, 즉 권장사항이지만 의무는 아닌 것들이다. 예컨대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셋째는,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해야 하는 것도 아닌 일들, 다시 말해 의무나 금지와는 무관한 일들이다. 아마 밥 먹고 잠자는 등 우리 일상생활의 대부분의 행위들이 그렇지 않을까? 

넷째는, 안 하는 게 더 좋지만, 한다고 해서 죄가 되지는 않는 것들이다. 예컨대 담배를 푸이는 일 등등.

마지막 다섯째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예컨대 부녀자를 폭행하는 일 등이 이에 속한다.

난 이 구분법이 진정한 의미에서 상당히 '실용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구분법을 빌려다 쓰자면, 몸과 마음이 어느 정도 성숙한 10대 후반 청소년들의 섹스는 "권장할 일은 아니지만, 또는 안 하는 게 더 낫겠지만, 한다고 해서 죄가 되지는 않는 일"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사회적, 경제적 여건들을 고려해볼 때, 현재의 한국 사회는 분명 10대 청소년들에게 자유로운 섹스를 권장할 만한 사회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섹스를 범죄나 부도덕으로 여겨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도 않는다.  412


"성에 대해 좀 더 당당하면서도 동시에 담담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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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우리는 앞으로 이 책에서 1만 년 전에 시작된 거대한 문화적 격변이, 어떻게 인간 성생활에 관한 진실을 파괴적이며 위협적인 것으로 만들었는가를 설명할 것이다. 그 결과 그 진실이 어떻게 종교적 권위에 의해 침묵을 강효당했는가, 어떻게 의사에 의해 병적인 것으로 취급받았는가, 어떻게 과학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무시당했는가, 어떻게 도덕적 훈계를 일삼는 치료사에 의해 감춰졌는가를 설명할 것이다.

길들여진 우리의 무지(無知 없을무 알지)는 파괴적이다. ..

긴 여정을 함께 해 온 부부들 중 얼마나 많은 쌍들이 대체할 수 없는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 - 가족의 안정성, 동료애, 비록 성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감정적인 친밀감 - 의 제단(祭壇 제사제 제터단)에 기꺼이 자신들의 에로티시즘을 희생했을까?  11


우리는 성적 자유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게끔 유도되고 있다. 하지만 이 시대 인간 성생활은 큰 소리로 말해서는 안 되는, 명백하지만 고통스러운 진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가 '느낀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느끼는 것' 사이에 충돌은 이 시대의 혼란, 불만족, 불필요한 고통의 가장 큰 근원인것 같다.  13-14


인간이 진화해 온 수렵채집인 사회들은 거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고도로 평등한 소규모 집단들이었다. ..

보츠나와의 꿍산족은 호주 오지 원주민들, 아마존 우림 오지의 부족들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인류학자들은 '극단적 평등주의'에는 즉각 보상의 수렵채집인 사회가 거의 보편적이라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공유는 단순한 권장사항이 아니라 의무이다.  22


우리는 이 공유 행위가 섹스에도 마찬가지로 확대됐다고 믿는다. 영장류학, 인류학, 해부학, 심리학의 많은 연구들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23


계절마다 같은 땅에서 농사를 짓게 되자, 대부분의 사회에서 작동 방식이 공동 소유에서 사유재산으로 재빨리 대체됐다. ..

농업공동체 정착생활을 시작했을 때, 사회적 현실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뿌리 깊이 변화했다.  24


농업 혁명의 가장 큰 패배자 - 아마도 노예는 제외하고 - 가 여성이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여성은 수렵채집인 사회의 중심이며 존경받는 위치에서 집, 노예, 가축과 마찬가지로 남성이 얻고 지켜야 할 또 하나의 소유물로 전락했다...

<섹스의 선사시대>의 저자인 고고학자 티모시 테일러는, 관련 고고학적 증거에 고나한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수렵채집인의 섹스는 공유와 상보성(相補性 서로상 도울보 성품성) 개념의 모델이 된 반면, 초기 농업사회의 섹스는 관음증 성향에다 억압적이고 동성애를 혐오하며 생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는 "농부들은 야생(野生 들야 날생)이 두려워 그것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라고 말한다.  25


초기에 호주를 여행한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만난 원주민들이 비참하게 살고 있으며 만성적 기근에 시달린다고 보고했다. 원주민들은 대부분의 수렵채집인과 마찬가지로 보고하면서도 원주민들이 전혀 수척하지 않다는 사실에 당혹했다.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이 굶주려 죽을 정도라고 확신했다. 왜? 왜냐하면 그들은 원주민들이 최후의 수단 - 곤충, 위체티 그럽, 쥐를 먹는 것 - 에 의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것들은 굶주리지 않는다면 아무도 먹지 않을 생물들이다. 그 음식들이 영양가가 높고, 풍부하며, 호두 향을 곁들인 으깬 계란과 부드러운 모차렐라 치즈 멋을 낼 수 있다는 생각을 영국인들은 하지 못했다.  31


어떤 것이 자연스럽다 혹은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지는' 것은 실제로 그렇다는 의미가 아니다. .. 특별히 우리는 식생활이나 섹스처럼 친숙하고, 개인적이며, 생물학적인 경험에 관해 이야기 할 때, 문화적으로 친숙한 것이 마음속 깊이 파고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초기 유럽인들처럼, 우리는 무엇이 정상이며 자연스러운 것인가에 관한 인식의 제약을 받는다.  32


인간 성생활의 기원과 본성에 관한 표준적 담화는, 기만적이며 꺼림칙한 성적 일부일처제의 발전을 설명한다고 주장한다. ..

남성은 싸고 풍부한 씨앗을 멀리 널리 퍼뜨리려고 앴느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부성(父性 아비부 성품성) 확실성을 높이기 위해 한 명 혹은 소수의 여성을 통제하려고 노력한다. 반면 여성은 공급이 제한된, 신진대사 상으로 비싼 알들을 가치 없는 구혼자들로부터 보호한다. 그러나 일단 한 부양자(남편)에게 역이면, 배란기에 재빨리 치마를 끌어올린다. 유전적 우월성이 확실한, 턱이 네모진 남성과의 신속하고 더럽고 은밀한 짝짓기를 위해서이다.  35


찰스 다윈은 진화론적 변화가 발생하는 두 가지 기본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잘 알려진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 이다.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이 아직도 '자연 선택'을 선호한다. 하지만 경제철학자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는 훗날 이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적자 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진화란 개선의 과정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히 종(種 씨종)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함으로써 변화한다고 자연 선택은 주장한다.  48


다윈은 특별히 갈라파고스 군도(群島 무리군 섬도)의 여러 섬에서 본 핀치 새들의 미묘한 차이에 끌렸다. 이런 통찰력을 통해 다윈은 환경이 분화 과정에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49


진화적인 변화에 대한 두 번째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그것은 성적 선택이다. 성적 선택의 중심 전제는 대부분의 포유류에서 암컷이 수컷보다 자식에게 훤씬 더 많은 투자를 한다는 것이다. 암컷은 임신, 수유, 연장된 새끼 양육에 매인다. 피할 수 없는 희생이라는 이 불평등 때문에 암컷은 더 주저하는 참여자가 되며, 그 희생이 좋은 생각이라는 확신을 필요로 한다고 다윈은 추론했다. 반면 수컷은 생식에 고나해 암컷에게 크게 감사함으로써 그런 확신을 주기를 열망한다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은 짝짓기에 대한 암수의접근법이 본질적으로 충돌하는 의제라는 믿음 위에서 성립한다.  55-56


우리는 누구이고, 어떻게 오늘에 이르렀으며, 이와 관련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우리의 진화된 성적 성향을 인정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현재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 '호모사피엔스'만큼 조급히, 창조적으로, 부단히 성적인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61


인류학자 헬렌 피셔(Helen Fisher)가 '고전적 설명'이라고 부른 것. 은폐된 배란과 확장된(더 정확히 말하면 끊임없는)성적 수용성은 초기의 인간 여성들에게서 지화했다. 늘 성적으로 흥분해 있는 남자짝의 관심을 잡아둠으로써 짝 유대를 발전시키고 굳건히 하기 위한 방법으로 진화햇다는 것이다. 이 능력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했다고 추정된다. 첫째, 여성은 언제든(배란기가 아닐 때에도) 섹스가 가능했기 때문에 짝이 성적 쾌락을 위해 다른 여자를 찾을 이유가 없었다. 둘재, 여성의 생식력은 숨겨저 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자기 자녀의 피임 가능성을 증대시키면서 언제든(짧은 발정기뿐만 아니라) 그녀와 짝짓기를 한 다른 남자가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위해 늘 그녀 주변에 붙어 있게 됐다. 피셔는 "소리 없는 배란은 특별한 친구가 늘 가까이에서 그녀에게 소중한 보호와 음식을 제공하도록 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과학자들에게 '짝 보호 행동'으로 알려졌지만, 현대 여성들은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 몹시 불안하고 성가신 사람'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75




농경사회로의 이행은 그것을 감내하는 대부분의 개인에게 사실상 재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것이 위대한 진보로 묘사되는가를 설명하는 데에 개인과 집단 이익의 불일치는 도움이 된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수집한, 수렵채집 생황에서 노업으로의 이행기 무렵의 유골들을 살펴보면, 모두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기근의 증대, 비타민 결핍, 성장 저해, 수명의 대폭적인 감소, 폭력의 증가.. 축하해야 할 이유는 거의 없었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수렵채집 생활에서 농업으로의 이행은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서 묘사도니 대로 대재앙이었다는 것을, 미래를 향한 거대한 도약이라기보다 은총을 상실한 아찔한 추방이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100


평균적인 침팬지는 우리 몸무게의 절반이 안 되지만 콧수염 난 소방대원 4, 5명의 힘을 가지고 있다. 많은 동물들이 인간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으며, 더 깊이 다이빙할 수 있고, 더 잘 싸울 수 있으며, 더 멀리 볼 수 있고, 더 희미한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인간에게는 침묵처럼 들리는 미묘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파티에 무엇을 가지고 갈까? 인간에게 특별한 것은 무엇인가?  101


큰 두뇌. 맞다. 그러나 우리의 독특한 두뇌는 수다스러운 사회성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정확히 왜 인간 두뇌가 그렇게 빨리, 그렇게 커졌는가에 대해서는 열띤 논쟁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인류학자 테렌스 디컨(Terrence W. Deacon)이 쓴 글에 동의할 것이다. "인간 두뇌는 단지 더 나은 지능에 대한 일반적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어에 필요한 능력을 정교하게 발전시킨 진화 과정에 의해 형성됐다." ..

불균형적으로 큰 두뇌 그리고 언어와 관련된 능력 외에도, 우리는 특별히 인간적인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  .. 

우리의 과장된 성(性)이 그것이다. 

어떤 동물도 지구상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시간을 호모사피엔스보다 더 많이 섹스에 호들갑스럽게 쓰지 않는다.  102


(남미의) 아체(Ache)족 실험대상자들에게 그들의 아버지를 밝혀 보라고 요청했다. .. 321명의 아체족이 600명이 넘는 아버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누가 당신의 아버지들인가? 

아체족은 아버지를 네 종류로 구분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인류학자 킴 힌(Kim Hill)에 따르면, 네 가지 유형의 아버지는 다음과 같다.

 - 미아레(Miare) : 그것을 주입한 아버지

 - 페로아레(Peroare) : 그것을 혼합한 아버지들

 - 몸보아레(Momboare) :  그것을 넘치게 한 아버지들

 - 바쿠아레(Bykuare) : 아이의 본질을 제공한 아버지들  109


<어머니들과 타인들(mothers and Others)>의 저자 사라 블래퍼 흐르디(sarah Blaffer Hrdy)는 "다른 영장류와 다양한 부족사회에서의 자녀 공유 이야기는 인류학 문헌의 중심에 서 본적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엄마와 자녀의 생존과 생물학적 건강의 측면에서, 공동 보육의 결과는 모두에게 좋은 것으로 판명된다." 라면서 한탄한다.  125


데스몬드 모리스(Desmond Morris)는 폴리네시아에서 한 여성 트럭운전사와 함께 보낸 오후를 기억한다. 그녀는 자신이 9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 2명은 불임인 친구에게 주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 자녀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모리스가 묻자, 그녀는 "우리 모두가 모든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아이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128


많은 사회에서 처녀성은 그 개념을 의미하는 단어 조차 없을 정도로 전혀 중요하지 않다.  141


결혼 자체는 어떤 종류의 의식이나 종교의식 없이 이루어진다. 재물이나 서약의 교환도 없으며 심지어 잔치도 하지 않는다. 단지 당신의 해먹을 여성의 해먹 옆에 걸기만 하라. 그러면 당신은 결혼한 것이다.  142


오토 키퍼(Otto Kiefer)는 1934년 <고대 로마의 성생활(Sexual Life in Ancient Rome)>에서, 로마인의 관점에서 "자연법칙과 물리학 법칙들은 결혼의 유대와 무관하며 심지어 상반된다. 따라서 결혼하려는 여성은 자신을 훼손시키는 데 대해 대자연에 속죄해야만 하고, 사전 음란으로 결혼의 순결을 사기 위한 자유로운 매춘의 시기를 거쳐야 한다." 라고 설명한다.  146


여자와 남자는 결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랑은 계절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고 간다. - 양 에르체 나무(모수오족 여성)  148


'결혼' '짝짓기' '사랑'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현상들이며, 특정 문화의 외부에서는 그 의미가 거의 혹은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 걷잡을 수 없이 일상화된 그룹섹스, 스와핑, 억제되지 않는 가벼운 정사, 사회적으로 허가된 순차적 섹스에 관해 우리가 언급한 사례들이 인류학자들이 '일부일처제'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회에서 보고됐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결혼'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곳에서도 일어난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결혼, 일부일처제, 핵가족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그 같은 개념 해석으로는, '누구와도 동침하는' 초원들쥐조차 일부일처제의 자격을 얻을 것이다.  161


침으로 발효시킨 맥주와 암소의 피로 만든 밀크셰이크를 맛보는 것에서부터 샌들을 신은 채 양말을 신는 것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거의 무엇이든 간에 자신들의 사회가 그것이 정상적이라는 확신을 그들에게 준다면, 기꺼이 그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입고 행동하고 믿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사람들이 파열점(破裂點 깨뜨릴파 찢을열 점찍일점)을 넘어서도록 자신들의 목을 늘이고, 자신들의 갓난아기들의 머리를 조이거나, 자신들의 딸들을 신전(神殿 귀신신 대궐전) 매춘에 팔아넘기게끔 확신을 주는 사회적 힘들은, 성적 질투를 바고 같고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적 질투를 새롭게 조형하거나 중성화시킬 힘을 충분히 가진다. 성적 질투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164-165


인간은 암을 치료하고 화성에 가고 인종적 편견을 없애고 이리호(Lake Erie)에 물을 채울 때가 아니라, 원시적인 공동체에서 다시 살 수 있는 방법들을 발견할 때 더욱 행복해질 것이다. 그것이 나의 유토피아이다. - 쿠르트 폰네구트 주니어  175


프리드만은 "이스라엘인들 사이의 신성한 맹세는 남성의 음겨엥 손을 올려놓음으로써 성립됐다"라고 썼다. 자신의 고환에 손을 얹고 맹세하는 행위는 증명하다(testify)라는 단어 속에 살아남아 있다.  280


생식 생물학자 로저 쇼트(Roser Short)는 "발기한 인간의 커다란 음경은 유인원들의 음경과는 극적인 대조를 보이는데 거기에 어떤 특수한 진화적 힘들이 작용해 왔는지를 궁금하게 만든다." 라고 썼다. 제프리 밀러가 막 나타나서는 "성인 남성은 생존해 있는 모든 영장류 중에서도 가장 길고, 가장 두꺼우며, 가장 탄력있는 음경을 갖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됐다. 

호모 사피엔스, 위대한 음경을 가진 위대한 유인원!  281





남성들이 받는 모든 나쁜 압력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은 평균 4분에서 7분 사이의 시간을 기록함으로써 보노보(15초), 침팬지(7초), 또는 고릴라(6초)보다 훨씬 더 오래 성교를 지속한다.  283


게다가 인간이 한 번 사정할 때 평균 정액략은 침팬지의 약4배인데, 사정당 전체 정자 세포의 수는 침팬지의 사정 범위 내에 머문다.  284


인간의 정자 생산량과 고환의 용적이 최근에 극적으로 감소했음을 시사하는, 설득력 있는 증거가 존재한다. 연구자들은 생존하는 정자의 활성의 감소뿐 아니라 평균 정자 수의 우려스러운 감소를 입증했다. 한 연구자는 덴마크 남성의 평균 정자 수가 1940년의 113 * 10의 6승 개에서 1990년에는 약 절반(66 * 10의6승)으로 급락했다고 시사한다. 폭락의 잠재적 원인들의 목록은 대두(大豆 큰대 콩두)와 임신한 젖소의 우유 속에 있는 에스트로겐 같은 화합물에서부터 살충제, 비료, 가축의 성장 호르몬, 그리고 플라스틱에 사용된 화학물질에 이르기까지 매우 많다. 최근의 연구는 광범위하게 처방되는 우울증 치료제 파록세틴(paroxetine) - 세록새트(Seroxat)와 팍실(Paxil)이란 이름으로 팔린다 - 이 정자 세포 속의 DNA에 손상을 가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한다. 로체스터대학교의 인간 생식 연구는 임신 기간 중 1주일에 일곱 번 이상 소고기를 먹은 어머니가 낳은 남성들은 수정능력 부족(subfertile) - 정액 1ml당 정자 수 2,000만 개 미만 - 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3배 이상 높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처럼 소고기를 먹은 사람들의 아들들 가운데 수정능력 부족으로 분류된 사람의 비율은 17.7%인 것에 비해, 소고기를 덜 먹은 어머니들의 아들들 가운데 수정능력 부족으로 분류된 사람의 비율은 5.7%였다.

인간은 일부일처제적인 또는 일부다처제적인 어떤 영장류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정자 생산 조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85


사용하지 않으면 잃는다(use it or lose it)는 격언은 자연 선택의 기본적인 교의(敎義 가르칠교 옳을의)중의 하나이다. 가차 없는 절약 원칙을 통해, 진화는 수행되지 않는 과업을 위해 유기체에게 어떤 기관을 좀처럼 갖추어 주지 않는다.  286


섹스에 관한 이 책 전체를 쓰면서, 우리는 우리 대부분이 섹스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다소 혼란스럽게 시사하고 싶었다.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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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와 섹스는 간헐적이나 결혼은 생활이다.'  9


결혼생활학교 수업은 1년 과정에 384시간으로 되어 있었다. 1년 동안 토요일 일요일에 각각 3시간 5시간씩 수업을 받게 되어 있었는데, 1월 초의 등록기간과 명절, 여름휴가철 혹은 개인적 일로 꼭 쉬고 싶은 한 주 정도를 빼면 48주 동안 주말과 휴일마다 꼬박 출석해야 했다. 이것은 어느 학교나 마찬가지였다.

속성반은 없었다. 한꺼번에 몰아서 채우든 어쨌든 384시간만 채우면 되는 게 아니라, 48주에 걸쳐 384시간을 채우도록 정해져 있었다. 1년 과정을 이수하는 동안 발생하기 마련인 심리적 변화에 주목한 제도였다.

결혼생활학교 384시간 강좌를 이수해야 결혼면허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고, 결혼면허증이 있어야 결혼할 수 있다...결혼면허시험. 필기와 실기로 나누어 진행되는 시험에서 각각 70점 이상을 획득하면 결혼면허증이 주어졌다. 시험에 떨어지면 6개월 안에 한 번 더 응시할 수 있으나. 두 번째도 떨어지면 6개월 과정의 보충교육을 받아야 했다. 

보충교육 이수 후 다시 두 번 응시할 수 있으며, 그래도 떨어지면 다시 6개월의 보충교육을 받아야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14-15


결혼을 기준으로 인생을 설계하는것은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사랑과 결혼은 인생의 여러 항목 속에 있는 것이지, 사랑과 결혼을 위해 인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35


행복세. 부부의 1년 수입중 10%에 해당하는 금액.

행복세 정산의 기준은 결혼 11년차에게 부부의 1년 총 수입의 10%, 결혼 21년차에게 전재산의 1%엿다. 10년에 한 번 납부하는 행복세를 내는 것도 아깝다면 그것을 어떻게 행복한 가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행복하지 않은 가정이라면 이혼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55


늦가을에 파종해 겨울을 나고 봄에 거두는 시금치는 비닐하우스에서 화학비료와 난방기를 이용해 속성으로 키운 시금치보다 영양분이 30배 가까이 더 들어 있다고 했다. 한 달 만에 속성으로 키워 수확하는 상추가 아니라 밭에서 두 달 이상을 보내고 조금씩 따먹는 상추는 특유의 향과 맛이 진하다고 했다. 원예 강사는 무 하나 토마토 하나를 키워서 먹더라도 가족끼리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족끼리 사랑한다고 볼을 비벼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과정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자신의 아내와 남편,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더 많은 자부심을 느낀다는 말이었다.  65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고, 이심이체입니다. 아니, 이심이체여야 합니다. 부부가 일심동체여야 한다고 생각에 갇혀 있는 한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아야 하고, 아내가 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78


부부는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결혼과 동시에 지옥을 구경하게 될 것입니다. 너무 가까워지려고 하지 마세요. 익숙함은 경멸을 낳고 낯섦은 매혹을 더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79


남자분들, 아내나 연인이 억지를 부리는 이유를 아십니까?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것은 억지를 부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자기 말이 억지라는 걸 본인도 압니다. 말하자면 여자는 지금, 말도 안 되는 내 질문에 답해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외록고 우울하고 힘드니까 위로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131


환상 너머의 칙칙한 생활에 대해 충분히 대비함으로써, 환상을 현실화하라는 것입니다. 충분히 대비할 능력이나 마음이 없다면 결혼하지 마십시오. 결혼 안 해도 안 죽습니다. 오히려 더 즐겁고 의미 있게 살 수도 있습니다.  136


부부간에는 사랑보다 우정이 있어야 합니다. 평생 친구 같은 아내와 남편이 아주 이상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관계가 되자면 부부관계는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야 합니다...

속물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부부관계만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야 하는 사업도 없습니다. 꼭 경제적인 부분만을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사람의 생존조건 자체가 속물적입니다. 사람은 한끼 굶으면 배가 고프고, 하루를 굶으면 온몸에서 힘이 쏙 빠집니다. 사흘을 굶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도둑질이나 구걸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습니다. 그걸 부정한다고 달라질 건 없습니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이해관계 속에 있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집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고상하거나 취미가 서로 전혀 다르거나, 세계관이 다를 때는 양쪽 모두 힘이 많이 듭니다.

가장 좋은 상재는 나와 비슷한 사람입니다. 음악 하나를 두고도 사람마다 인식이 다릅니다. 아내 입장에서는 청소하다가 스피커 위치를 조금 바꿨을 뿐인데, 또 반대로 내 음악세계를 지켜달라는 남편의 호소를 아내는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딴죽 건다고 받아들입니다.

사람은 흔히 자신과 다른 성향의 이성에 끌린다고 합니다. 소심한 사람은 대범한 상대에게 끌리고, 덤벙대는 사람은 꼼꼼한 사람에게 끌린다는 거죠.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단순한 끌림일 뿐입니다. 이런 끌림만으로 평화로운 결혼생활을 지속하기는 어렵습니다. 끌림은 순간이지만 생활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137-138


나와 비슷한 사람을 어떻게 찾느냐? 복잡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내 친구들을 보면 됩니다. 유유상종이라고 했습니다. 부담 없이 오래 만나는 내 친구들은 나와 이념이나 성향, 세계관, 삶의 수준, 취향이 비슷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배우자 역시 그런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다만 결혼상대를 고를 때와 친구를 사귈 때 다르게 고려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한 집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밖에서는 좋은 친구가 집에서는 전혀 뜻밖으로 안 맞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내 친구드로가 비슷한 사람을 찾되, 집안 환경도 나와 비슷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경제력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내가 양쪽 부모가 모두 계시는 집안에서 자랐다면, 상대 역시 양쪽 부모가 다 있는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 더 적합합니다. 내가 한쪽 부모 아래에서 자랐다면 나의 배우자도 한쪽 부모 아래에서 자란 사람이 좋습니다. 아버지 없이 자랐다면 상대도 아버지 없이 자란 살마이 좋습니다. 내가 스무살 넘어서 부모가 돌아가신 경우에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만...

사람은 학교나 책에서만 배우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역할과 어머니의 역할을 배우고, 자신도 모르게 그런 것에 대한 기대치를 갖기 마련입니다. 결혼생활 중에 이 암묵적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불만이 쌓이게 됩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뭐 한 가지를 잘못해도 아버지 없이 자랐으니 저 모양이다, 엄마 없이 자랐으니 저렇다, 우리 엄마는 안 그랬는데 저 사람은 엄마가 없었으니 엄마 노릇을 못 하는구나, 하는 인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양쪽 부모가 다 있으면 좋겠지요. 하지만 그런 문제 때문에 서로의 역할관계가 깨질 수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무론 부모 없이 자랐더라도 자신의 노력 여하게 따라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오랜 세월 몸이 습관처럼 체화했어야 할 것들을 머리로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머리로 생가하고 행하면 어색하고, 왠지 생객내는 것처럼 비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요. 이런 건 어느 쪽이 맞다 틀리다의 문제가 아니라, 자란 환경이 달라서 생기는 생활문화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9-140


상식적이라는 말, 상식선에서 해결하자는 말은 때때로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147


좋은 남편, 좋은 아내는 내게 맞는 사람입니다. 나와 똑같은 부류의 사람이 나와 맞는 좋은 배우자인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내가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알아야 합니다.  148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면 그 사람을 얻기 위해 나를 속이고 상대를 파악하려고 합니다. 상대에게 맞추려고 합니다. 이거야말로 욕심 때문에 사지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소간 맞춰가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루이틀도 아니고 상대에게 억지로 맞춰가며 평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결혼하면 달라지겠지,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상대에게 억지로 맞추다보면 많은 것을, 어쩌면 타고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나를 아고, 내게 맞는 상대를 찾는 것이 가장 신뢰할 만한 방법입니다.  149


'사람은 끼니마다 배를 채워야 하지만, 식다에서 살지는 않는다.' 늘 식당에 머물기를 원하는 사람과 가끔 식당에 들렀다 떠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비좁은 공간에서 평화로운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다.

"결혼을 생각하고 남자를 만날 때는 이 사람이 식당에 머물 사람인지, 배만 채우면 금방 일어날 사람인지를 아는 게 중요해."

"가슴이 쿤 내려 앉는 사람이 아니고?"

성애와 인선이 동시에 물었고, 희주는 "놀고들 있네"라고 했다. 가슴이 쿵 내려앉는 남자는 연애할 남자고, 결혼할 남자는 함께 밥을 먹을 남자라고 했다.

가슴이 쿵 내려앉을 만큼 매력적이면서도 지겨워하지 않고 밥을 함께 먹어줄 수 있는 남자는 없는 것일까. 꼭 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인생이 너무 측은하다 싶었다.  152


많은 사람들이 결혼하는 이유를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장담하건대 지금까지 없던 행복이 결혼한다고 생겨나지는 않습니다.  177


결혼하기 전에 이미 행복한 사람만이 결혼한 뒤에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기 홀로일 때도 행복했던 사람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는 것이지, 홀로일 때 불행했던 살마이 결혼한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178


가족들을 충분히 사랑하고 배려하십시오. 그리고 희생하십시오. 그러나 집착하지는 마십시오. 가족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183


털털하고 너그럽던 남자가 좀팽이가 되고, 성질을 부리고,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은 대체로 자신이 무기력한 사람이라고 느낄 때입니다.  192


세계적인 문명사학자 윌 듀런트 박사는 '여자가 가정이란 것을 만들고 남자를 자신의 가축으로 길들여 집안에 들이고, 사회성과 예의를 훈련시켰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애초에 가정이나 일부일처제도는 여성이 고안해낸 제도일 뿐 남성과 여성의, 그러니까 인간의 속성과는 거리가 먼 제도라는 말입니다. 안정적이고 행복하다는 가정은 남편이 가축처럼 일하는 데 만족하고, 아내가 집안 전체를 통솔하는 형태인 경우가 많습니다. 남편=가축, 아내=주인인 구조가 흔들릴 때 가정은 불안정하거나 깨지기 일쑵니다. 그 구조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현실입니다.

여성이 일부일처제를 원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여러 가지 원인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남자에게 2세가 친자라는 확신을 주어 충분한 보호와 식량을 얻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227


남자는 기본적으로 한 여자와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한 여자와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혼은 그 자체로 앞으로 평생 거짓말과 거짓행도을 하겠노라는 일종의 약속이라고 했다.  229


여러분이 우리 ML결혼생활학교 1년 과정 동안 저한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씀이 바로 '나와 맞는 배우자를 만나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 좋은 배우자는 아니라는 말씀도 여러 차례 드렸습니다.  300


늘 강조하는 바이지만, 결혼을 한다고 없던 행복이 생기지 않습니다. 먼저 혼자서도 당당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라, 이심이체여야 합니다.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둘이 만나 둘이 되는 것입니다.  305




작가의 말

나는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불행의 근원이 되어버린 '부부라는 관계'에 대해 쓰고 싶었습니다.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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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발길을 돌리는 순간 나는 레밍턴 타자기를 다시-꾸준히 자신 있게, 충동적으로, 끝없이-쳐대는 소리를 들었다. 버스를 타고 미라플로레스로 돌아오면서 나는 페드로 카마초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어떤 사회적 환경이, 상황과 사람과 인연과 문제와 사건과 뜻하지 않은 일들 간의 어떤 연쇄 작용이 그처럼 열매를 맺고 하나의 작품으로 표현되어 청취자들을 끄는 이 문학적(문학적이라? 만일 그게 아니라면 대체 뭐라고 불러야할까?) 재질을 산출해냈을까? 어떻게 그는 작가의 전형인 동시에, 자신의 재능에 바치는 시간과 생산해내는 작품 덕분으로, 페루에서 작가라 불릴 만한 단 하나뿐인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시인이니 소설가니 극작가니 하는 이름으로 통하는 그 숱한 정치가, 법조인, 교수... 문학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활동에 허비되는 삶에서 짧은 막간을 이용해 얄팍한 시집이나 빈약한 단편집을 한 권 냈다고 해서, 그들이 과연 진정한 작가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어째서 문학을 일종의 치장이나 구실로 삼는 사람들이 오직 글을 쓰기 위해 살고 있는 페드로 카마초보다도 더 진정한 작가로 대우받을 권리가 있는 것일까? 그들이 프루스트, 포크너, 조이스의 책을 읽었던(아니면 적어도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반면 페드로 카마초는 거의 문맹이나 다름없기 때문일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면서 나는 슬프로 속이 상했다. 날이 갈수록 이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유일한 일은 작가가 되는 것이란 생각이 점점 더 분명해졌고,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과 정신을 오로지 문학에만 쏟아야 한다는 생각 또한 점점 더 굳어져갔다.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절대로 시시한 삼류 작가나 아르바이트 작가가 아니라 진정한 작가였다. 누구처럼? 그때껏 내가 만났던 사람 중에서 자기 직업에 몰두하고 전념하여 진정한 작가가 되는 데 가장 접근한 사람은 라디어 연속극을 쓰는 볼리비아인 작가였으며, 그것이 바로 그가 나를 그처럼 매혹시킨 이유였다.  13-14



"괴로움은 훌륭한 스승이니까."  100




옮긴이의 말 - 이런 소설 보셨나요?


이 소설은 작가의 실제 결혼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개성있는 주인공들과 유머러스한 상황을 적절히 배합해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 일종의 자전 소설이다. 작가는 자신을 모델로 한 주인공이 마침내 집안 아주머니뻘 되는 연상의 여성과 결혼하는 과정을 그림으로써 금지된 사랑의 유혹을 다루는 동시에, 한 젊은이가 세상과 자신의 집안에서 설 자리를 찾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해시켜가는 성장 소설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훌리아 아주머니와의 사랑 이야기와 더불어 저명한 방송작가 페드로 카마초의 연속극 이야기를 병렬식으로 전개함으로써 현실과 허구를 교묘히 짜맞추고 있다.  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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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독자의 말 - 정이현

낭만적 사랑의 영속성을 굳게 믿는다면, 그 꿈에서 영원히 깨고 싶지 않다면, 이 소설의 첫 페이지를 열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진실을 알고 싶다면? 말할 것도 없다. 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 된다.


운명의 상대를 찾아 헤매다 드디어 서로를 알아 본 한 남자와 한 여자. 소설은 그 '끝'에서 시작된다. 결혼으로 완성된 그들의 사랑은 일상에서 어떻게 변해가는가, 즉 아름다운 해피엔딩 뒤에 펼쳐지는 리얼리티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일부일처의 결혼제도 안에서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가는 밴과 엘로이즈에게는 어떤 드라마틱한 사건도,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해줄 반전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은 그저 천천히 녹슬고 천천히 닳아갈 뿐이다.  4-5


작가의 말

혼자가 아니라는 발견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 남자의 시선으로, 그 남자의 관심과 고민을 통해 사랑을 탐구하고 세상을 바라보려 애썼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남자들이 얼마나 쉽게 사랑에 빠지고 또 쉽게 싫증내는지를.

이 소설은 '오래된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낭만적 사랑의 시기가 지나고 나면, 사랑에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6-7



딱히 누군가와 사귀고 있지 않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진지한 로맨티스트일지 모른다.  16


벤은 현재 결혼해서... 여섯살, 네살배기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아내 엘로이즈에게 깊은 애정을 느꼈지만, 자신의 감정 패턴을 분석해봤을 때 그녀를 향한 욕망이 늘 어떤 특정 맥락에서만 생겨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의 십 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의 사랑의 진앙(震央)은 엘로이즈가 생면부지의 남이었던 때, 노팅힐의 어느 술집에서 처음 만난 직후의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  17


긴 시간을 지나오면서 전혀 아무런 느낌이 없었던 때도 많았다. 

사랑은 뜻밖의 순간에 되돌아와 다시금 그에게 확신을 주었다. 패딩턴의 병원 응급실로 실려간 엘로이즈는 급성패혈증 진단을 받았고, 담당 의사가 나중에야 알려준 사실이지만,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

밤새워 기도하며 지켜보는 동안, 벤은 사랑의 존재를 추호도의심하지 않았다. 엘로이즈가 곁에 없다면 결코 다시는 삶의 의미나 기쁨을 알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이 특권을 박탈당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확실해질수록 기이하게도 그 감정은 점점 더 불확실해졌다.  18-19


에로티시즘이란 결국 벌거벗은 몸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욕망하고 있다는 심리적 기대감에서 비롯되는데, 어쩌면 스키복과 모자로 꽁꽁 싸매고 나란히 리프트에 앉아 산기슭을 오르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텔레비전 화면 속 리포터가 피스타치오 코르네토 아이스크림을 격찬하는 동안, 방 안의 부부 침대에는 발트해의 누드비치 같은 무덤덤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22


방금 술집에서 만난 상대와 잠자리를 갖지 못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런 퇴짜에는 나름의 대처방법이 있다. 반면, 평생을 함께하기로 서약한 사람과 섹스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은 훨씬 더 기이하고 창피스러운 사태다. 벤과 엘로이즈가 마지막으로 섹스한 게 꼬박 팔 주 전이었다.  23


이제 벤은 그 날짜라면 귀신같이 기억했다. 지난번엔 육 주 만이었고, 지지난번엔 십 주 만이었다. 작년 한 해를 통틀어 벤과 엘로이즈는 여섯 번 했다.

욕망을 해방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근래의 역사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믿음을 심어주는 데 초첨을 맞추어왔음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볼품없는 의상으로 신체를 가릴 필요가 없으며, 원치 않는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될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섹스를 즐겁게 자주 맛보아야 할 감정적으로 풍요롭고 순수한 오락 이상의 다른 무엇으로 여길 필요는 전혀 없다.  24


로맨스와 에로스, 그리고 가족이라는 세 가지 황금요소를 완벽하게 융화시킨 궁극의 결혼도 당연히 있다. 종종 냉소주의자들은 행복한 결혼은 신화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렇게 섣불리 치부하고 단언할 수만은 없다.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긴 해도, 궁극의 결혼은 분명 존재한다. 결혼이 우리의 소망에 부응하지 말아햐 할 형이상학적 이유 같은 건 없다. 다만 상황이 우리에게 몹시 불리할 뿐이다.  35



벤과 엘로이즈의 경우 대략 일주일에 한 번은 자잘하게 싸웠고 보름에 한 번은 대판 싸웠다. 심각한 부부싸움은 그 자체로 너무나 불쾌한 일이라 일단 싸움이 끝나면 자신들이 어떤 지경까지 갔었는지 되돌아보는 일조차 끔찍했다.

다음과 같은 주제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여름휴가는 핵가족답게 노포크의 시골집에서 보낼지(벤의 입장) 아니면 가족 동반으로 스페인에 놀러가자는 친구들의 초대에 응할지(엘로이즈의 입장), 아이들에게 휴일처럼 특별한 날에만 아이스크림을 줄지(벤의 입장) 아니면 먹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 주는 게 좋을지(엘로이즈의 입장), 현관 벽에 자전거 체인의 기름때가 묻었으니 수일 내로 페인트칠을 해야 할지(벤의 입장) 아니면 집 안의 다른 뭔가가 망가져서 전체적으로 새단장이 필요해질 때까지 몇 달이고 내버려둬도 괜찮은지(엘로이즈의 입장) 등이었다. 물론 가장 최근에 다뤄진 심각한 사안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묻지 않아도 되는지(벤의 입장) 아니면 그것은 단지 의지박약의 문제인지(엘로이즈의 해석)였다.  40-41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일은 상대가 내 눈에 어떤 사람으로 비쳐야 하고 그와 함께하는 삶이 어떻게 펼쳐져야 마땅하다는 이상을 바탕으로 서로의 행복을 염원하는 것이다. 이는... 최고의 완벽을 구현하려는 시도다.  41


결혼생활하는 부부들은 화장실 타일을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남에게 사과할 때 구사해야 할 억양에 이르기까지, 삶의 전 영역에 걸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배우자에게 줄기차게 의견을 제시한다. 

평균적인 부부들은 커뮤니케이션, 요리, 미학, 교육, 정치, 패션, 섹스, 재정에 이르는 온갖 영역에서 끊임없이 상대에게 자신의 이상을 관철하려 든다.  42


우리는 자신의 학생을 구슬려 달래지도 못하고, 뭔가 배우고 싶도록 마음을 사로잡지도 못하며, 그렇다고 혼란스러워하는 상대를 이해해주거나 산만한 태도에 인내심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설명은 극도로 아끼면서, 시작부터 다짜고짜 화난 눈빛으로 목청을 한껏 높여 상대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꾸짖을 뿐이다. 그리고 뛰어난 간파력을 발휘해 상대를 괴롭히고 자존심을 건드린다. 자신의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성공인지 실패인지 여부에 그다지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훌륭한 교사의 전제조건 중 하나라고 할 때, 연인 사이란 이를 깨닫기엔 최악의 조건이다.  45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결혼해서 잘 사는 법을 굳이 배우지 않아도 터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비행기 착륙법이나 외과수술법을 직관으로 터득하길 기대해선 안 되듯이, 아무런 도움도 없이 더불어 살기라는 과업을 완수하는 비결을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선 안 된다.  47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려고 할 때 우리는 대개 그럴듯하고 평범한 답변을 대려는 경향이 있다. 그 사람이 착하고 똑똑하고 예쁘고 건강하기 때문에 끌렸다고 말이다. 사랑은 후손을 낳고 정서적으로 풍요로워지기 위해, 즉 두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 하나가 되도록 이끄는 힘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내는 생각할 때마다 벤은 이런 통설에 의문이 들었다. 엘로이즈는 건강하고 매력적이며, 무럭무럭 잘 자라는 아이들도 낳아주었다. 그럼에도 그는 배우자를 선택할 때 뭔가 좀더 비합리적이고 모순된 힘이 자신에게 작용한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정신분석은 이에 대해 가혹하지만 타장한 의견들을 내놓았다. 우리가 사랑에서 기대하는 것은 행복이라기보단 친밀함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단순하게 그 자체로 좋은 것보다는 평범한 것을 더 선호한다.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이상적인 방식으로 양육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부모는 자식들에게 도덕적 강박과 히스테리, 깐깐함과 속물근성, 단호함과 신중함 등 서로 상충되는 요소들로 뒤범벅된 형태의 애정을 쏟아부었다. 그래서 우리에겐 보다 덜 이상적인 상황들을 참아내는 능력이, 더 나아가 그런 상황에 대한 '욕구'가 발달한다. 우리는 결혼한 상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지만, 실은 감정적으로 훨씬 덜 힘들었던 다른 후보자들이 무수히 많았음에도 어떻게든 그들을 외면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에게 어떤 결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결점이 충분히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완벽함에는 익숙하지 않은 편안함이 깃들어 우리를 소스라치게 만들었다.  56-57


벤의 입장에서 아내가 특별히 가깝게 느껴지는 순간은 그런 두려움을 느낄 때였다. 비슷한 수준의 교육을 받은 또래의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을 그가 해내지 못했을 때, 사람들은 당장 그를 무시하고 낙오자라는 판결을 내릴 것이다. 그 사실을 직시하고 겁에 질리는 순간, 아내에 대한 그의 감정은 더욱 애틋해졌다. 심지어 자신이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더 성공했더라면 덜 헌신적인 남편이 됐을 거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의 사랑은 가난과 치욕에 대한 두려움의 결과였다. 

조금 과장하자면, 우리가 자본주의로 알고 있는 것은 부르주아가 발명했거나 적어도 그들의 강력한 옹호와 지지 덕분에 발전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낭만적 사랑도 부르주아의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관습은 서로 공생관계에 있다. 자본주의의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해 우리는 낭만적 사랑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으로 얼마나 성공하고 얼마나 많이 투자하고 생산하는가를 기준으로 존재를 가차없이 심판하는 시스템 솏에서, 더구나 이처럼 종교를 저버린 시대에 우리의 정신이 버텨낼 수 있으려면 비물질적인 가치에 초점을 맞춘 다른 평가방식이 절실해진다. 그 보루마저 없다면 심판의 위력이 어무나 막강해서 우리의 내면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유감스럽게도 사랑에 대한 우리의 낭만적 이상주의에는 사악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낭만적 이상주의는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방어해준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가치가 경제적 능력에 따라 준엄하게 평가되는 시스템으로부터 해방될 가능성 또한 차단해버린다. 낭만적 이상주의는 부와 사랑이 보다 골고루 아낌없이 분배되는 대안적 방식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만일 경제 시스템을 바꾼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필사적으로 짝을 찾아 헤매고 두려움에 떨며 서로에게 매달릴 필요를 훨씬 적게 느낄 것이다.  65-66


지하철 안에서 그는 남은 저녁시간을 근사하게 보내는 공상에 잠겼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두 아이, 조금 지친 아내, 그리고 모종의 위기.  68-69


그는 자기가 속한 시대의 보편적 견해를 충실히 따르게 되었다. 

아이가 누누 단계에서 정서적으로 충분히 보살핌 받지 못하면 그것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고, 치료하는 데 큰돈이 들며 시간도 오래 걸린다.  73


'부모 되기'란 겉보기엔 전혀 대수롭지 않은 일들, 가령 학교 숙제를 도와주거나 아이가 만든 레고 공항을 칭찬해주고 있는 순간에도 마천루의 기초를 다지는 작업만큼이나 까다롭고 고된 작업을 매일 수행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벤과 엘로이즈가 아이들을 키우며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이 세상에 한 인간을 부려놓은 존재들은 한 발짝 물러서서 편견 어린 시선으로 자신의 피조물에 감탄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 인간은 누군가 그를 사랑한다고 말햇을 때 상대의 말을 믿는 능력이 결여되어, 자기 자신에게도 없는 믿음을 다른 사람이 가졌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상대를 단죄하려 들 것이아. 그게 아니라면, 잠시잠깐 이라도 박수갈채가 멎으면 못 견뎌하고, 남들의 인정에 목말라하며,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과감한 선택 같은 건 절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도 아니면, 정말 훌륭한 일을 해내더라도 스스로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느끼지 못화며, 삼십 년 또는 사십년 전에 자신이 제대로 사랑받지 못했다는 뼈아픈 생각에 괴로워하며 매일 밤 배갯잇을 적시다 잠들 것이다.  74


노아가 거실 바닥에 쿠션을 쌓아놓고 난파당한 선원 흉내를 내며 상어가 나타났다. 전갈에 물렸어, 살려주세요하고 소리지를 때 아이는 그저 밉살맞은 짓을 하는 게 아니었다. 아이는 장차 실연(失戀)을 이겨내고 좋은 직장을 얻는 데 유리하게 작용할 '무력감'과 '회복능력'이라는 상반된 감각을 탐구중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나가 주황과 파랑 색종이로 눈은 넷이고 얼굴은 새처럼 생긴 키 큰 여자의 콜라주를 만든 것은 엄마의 과도한 간섭에 시달리는 아이의 스트레스가 표출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부모는 자식이라면 쩔쩔매고 한없이 응석을 맏아주게 된다.  75


경제체제가 요구하는 자질은 자신감과 창조력 그리고 독창성이다. 이것들은 고대 스파르타의 우람한 근육이나 프리드리히 대체 시절 프러시아의 절제와 금욕과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 사람들이 반드시 갖춰야 할 자질이다.  76


아이들을 얻기 전까지 벤은 항상 감정을 속이며 살아왔다. 그래야 점잖고 분별 있어 보이는 줄 알았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그가 느끼는 기분은 적절치 못하거나 아니면 아예 아무 감정이 없었다. 생일파티에선 슬펐고, 휴일엔 우울하고 초조했으며, 장례식에선 쑥스러웠다. 섹스가 끝나면 멍해졌고, 어쩌다 소위 걸작이라는 문화예술품을 접해도 하나같이 지루햇다. 하지만 이제 아이들에 관한 한, 그가 반드시 느껴야 할 감정은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강렬하게 느꼈다.  81


엘로이즈와 사귀던 초창기에는 그녀에게 이런 비밀을 속속들이 보여줄 수 있었다. 장시간에 걸친 음란한 폴섹스도 해봤고, 외설적인 상상을 함께 즐겼고, 야한 옷도 입어보았다. 이런 것을 터놓고 할 수 있다는 기쁨에다, 자신의 비밀스러운 성적 판타지를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이 더해지자 고통스럽게 혼자서만 느끼고 역겨워했던 감정이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관계가 깊어질수록 섹스는 그가 엘로이즈에 대해 갖게 된 폭넓은 책임감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제 곧 평생의 동반자가 될, 자신의 첫아이를 임신한 지 석달 된 여인에게 엘리베이터 안에서 벌어진 강제섹스 장면이 포함된 야설(冶說)을 보여주는 건 가당치 않았다. 그는 엘로이즈가 그런 행동은 그만두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그녀가 원하리라고 믿는 자신의 모습(에서 거의 빗나가지 않도록), 올곧은 인간의 이미지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검열해야 할 것만 같았다.

벤의 성생활은 일찍이 그의 엄마나 할머니 같은 인생 초기의 여성상으로부터 그를 분리했고, 이제는 그를 그의 아내로부터 갈라놓았다. 그는 인생에서 극히 짧은 기간 동안만 자신이 성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감출 필요 없이 살았고, 그것은 광활한 거짓의 사막에 자리한 솔직함이라는 오아시스였다.  102-103


억압은 빅토리아시대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와 영원히 함께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하러 가야 하고 우리를 둘러싼 관계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저 우리는 성을 자유롭게 표현해선 안 된다. 그것은 우리를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그것의 본성 자체가 해방을 거부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103-140


우리가 섹스를 회피하는 건 재미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섹스의 쾌감이 가정생활에 수반되는 다른 많은 일들을 감내하는 우리의 수용능력을 위태롭게 할 만큼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107


섹스는 함께 가정을 꾸려나가는 동료 관리자와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오고 균형을 무너뜨린다. 일단 섹스를 시작하려면 본인이 원하는 것을 말로 설명하려는 노력을 멈추고 자신이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꽤 이상하게 비칠 것들을 스스로 폭로함으로써 약점을 드러내고 잠재적으로 굴욕적인 상태에까지 이르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108


성적 욕구는 객관적으로 보면 터무니없고 경멸스럽게 여겨질 법한 많은 것들을 애걸하게 만든다. 그래서 결국은 일반적이고 품격 있는 삶을 영위해나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의지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아예 이런 원초적인 욕구를 드러내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른다.  108


사랑하는 살마과 섹스할 수 있는 상대, 이렇게 둘로 구분하려는 욕망은 특히 남자들의 습성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마리아-창녀' 콤플렉스는(서로 다른 젠더간의 상호이해를 위해서라면 다행이겠지만) 결코 남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여성들에게선 흔히 '착한남자-나쁜남자' 콤플렉스가 발견된다. 여성들은 다정다감하고 세심하게 보살펴주며 대화가 잘 통하는 남성에게 끌린다는 데 이론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섹스가 끝나자마자 곧 다른 대륙을 찾아 떠나는 잔인한 악당이 성적으로 훨씬 매력적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못한다.  109-110


섹스에 적극적일 수 있는 능력을 가로막는 근심거리가 또 있다. 나의 파트너가 실제로 나와 얼마나 자고 싶어하는가에 관한 문제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의 욕구에 극도로 예민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필립 로스의 신작 소설이나 루이스 부뉴엘의 새 영화를 보고 있는 상대방을 본의 아니게 귀찮게 하지는 않을까 저어하게 된다. 사랑은 우리가 평소 섹스를 나누고 있는 상대에게 폐를 끼칠까봐 매우 신중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고 만다.  110


다방면에서 결혼생활에 매우 이롭게 작용했다. 온화한태도, 비위맞추기, 평등의정신, 가정생활의 각종 허드렛일을 독단적으로 분배하는 것에 대한 거부등의 수확을 이끌어낸 것이다. 부엌에서 더 많은 공감과 이해를 장려한 덕분에 이제 침실에서의 섹스는 더 어려워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12


한 명의 파트너와 장기간 성생활을 하는 데사 오는 현대의 위기는 대개 누가 먼저 시도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한쪽이 원하지 않을까봐 양쪽 모두 감히 시작할 엄두를 못 댄다. 섹스할 기회를 잡는 일 자체가 너무나 소모적인 것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섹스를 원할 때조차 그 사실을 스스로에게 일깨워줄 다른 누군가가 필요해진다. 우리의 정신은 이성적인 문제들만으로도 너무나 바빠서 보다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내면의 충동들로부터 차단된 채 살아가고 잇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본능에 가까운 진정한 자아에 더 가까워지도록 우리를 되돌려줄 사람이 절실해지는 것이다.  113


벤은 베키를 다시 보기 않길 바랐다. 그녀에게 못마땅한 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결혼한 사람이 기회 될 때마다 바람피우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얼마나 비겁한 사람인지를 정확히 아는 데서 오는 겸손함 때문이다. 결혼생활이 그들에게 깨닫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통찰이다.  126


그는 점심에 뭘 먹었는지 거짓말할 수 있을 것이다. 꾀병을 불리 수도 있고, 있지도 않은 고객 얘기를 지어낼 수도 잇고, 출장 간다고 속일 수도 있다. 예금계좌를 숨길 수도 있고, 딴 살림을 차릴 수도 있다. 그런데 그가 유독 이 일탈을 고백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면, 이유는 바로 자신의 감쪽같은 거짓말이 드러낸 진실, 즉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자각에서 비롯된 현기증을 덜고 싶어서였다. 그렇긴 해도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129


배신당한 사람의 분노는 기본적이고 불가피한 진실과 맞닥뜨리지 않으려는 시도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전부가 될 수 없다는 진실 말이다.  132


의도의 근본적 '오류'는 결혼의 경우와 동일하게 그 속에 담긴 이상주의에서 비롯된다. 비뚤어지고 가만 없어 보이는 일에 말려드는 것 같지만, 사실 외도는 마음속의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외도가 결혼의 불충분한 요소들을 마술적으로 정리해주고, 잘 지어낸 알리바이로 복잡미묘한 기대들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으리라는 신념을.

하지만 밖에서 누군가와 자면서 결혼생활 안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망가뜨리지 않을 순 없다.  138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현대의 결혼은 섹스, 사랑, 가족이라는 세 가지 욕구를 조화시킬 수 있는 무대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각각 다른 것들에 위협이 되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와 섹스하는 능력을 위태롭게 한다. 특별히 사랑하진 않지만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누군가와 섹스하는 것은 사랑하지만 더이상 흥분되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를 위태롭게 한다. 아이를 갖는 것은 사랑과 섹스 모두를 위태롭게 한다. 그리고 사랑과 섹스에만 몰두하는 것은 다음 세대의 육체와 정신의 안녕을 위태롭게 한다.  139


침대 시트가 말끔히 정된되지 않듯이, 결혼생활 역시 어느 한 가지를 완벽하게 만들거나 개선하려 들면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긴다. 한 귀퉁이의 구김살을 펴려 하면 다른 귀퉁이들이 헝클어지게 되어 있다.  140


아이들은 대개 세 가지 이유에서 좌절감을 느끼고, 그래서 화를 내고 컨트롤이 안 되는 것이었다. 첫째, 아이들은 자신이 느끼는 것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표현할 수도 없다. 둘째, 그들에게 충분히 귀기울여주지 않았다. 셋째, 부모가 아이들의 불합리한 요구에 제대로 선을 긋지 않았다. 이때 요구란, 하고 오플린 부인은 다 안다는 듯 웃으며 재빨리 덧붙였다. "나이가 많든 적든 사람은 누구나 끊임없이 세상을 알아가고 싶어하지요."  151-152


이상화된 어린 시절의 모델레 맞춰 사랑을 감상적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 시절에 맛본 안온한 느낌을 되살려줄 성인은 어디에도 없으며,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고 연약함과 불안을 막아줄 사람을 기대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하게 된다.

어른의 사랑은 아이일 때 어떻게 사랑받았는지를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 상상해보는 것이어야 한다.  157


진정한 용기는 불안에 시달린다고 쉽사리 파괴되지 않는 것이다. 상대의 약한 모습에 좌절하여 상처주지 않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을 자신과 똑같이 상처받은 사람들로 보는 것이다. 자신과 같은 죄에 오염되었다고 아이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미치거나 자살하지 않는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삶이라는 엄청나게 어려운 과제를 그럭저럭 계속해나가는 단순한 일, 이것이 진짜 용기이며 영웅주의다.  165




작가 대담 - 정이현 & 알랭 드 보통 : 사랑을 말하다

<연인들>이야말로 연애의 초라한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인물드르이 사랑에 감정이입을 할수록 낭패감을 느끼게 되죠.  169


보통 씨가 결혼한 지 오래된 기혼 남녀의 사랑을, 저는 결혼을 꿈꾸는 미혼 남녀의 연애를 다룬다는 출발선이 그어져 있었던 거죠.  171


벤은 '낭만적 사랑'이 얼마나 미화되고 왜곡된 신화인지를 역설하고, 사랑과 정욕과 결혼이 각기 다른 영역에 속한 일이라고 말하지요. 그럼에도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향한 사랑을 지키려는 의지가 굉장히 강해요. 민아와 준호가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소소한 것임에 비하면, 벤은 일부일처의 결혼제도가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거듭 말하면서도 엘로이즈와 아이들에 대한 사라으이 감정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붓죠. 심지어 그의 인터넷 포르노 중독이나 외도의 경험조차 그러한 의지적 노력의 일부로 볼 수 있어요. 충족될 수 없는 갈망을 채우기 위해 지치지 않고 거듭 시도하는 정력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벤은 역설적으로 굉장한 로맨티스트가 되지요.  173


제가 생각한 벤은 다중적인 성격의 인물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다지 일관되진 않은 취향, 원칙, 가치관 들로 뒤범벅인 유동적인 존재가 아닐까 싶어요.  179


벤은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했어요.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 거라는 걸 알아요. 사랑하는 법은 그냥 자연스럽게 아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벤도 제 생각에 동의하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일부러 배우지 않아도 결혼해서 잘 사는 법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에요. 하지만 직관만으로 비행기를 조종하거나 외과수술하는 법을 알 수 없듯이, 함께 사는 방법을 저절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순수한 감정이 다칠까 무서워서 사랑이라는 영역에선 너무 이성적이거나 체계적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더욱 유감스러운 일이고요. 현대의 연인들은 아직도 자기들의 삶에 의식적인 절차를 도입하고 외부의 도움을 받는 걸 주저해요. 너무 많이 생각하면 느끼지 못하게 될 수도 잇다는 만츠라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죠. 하지만 끊임없이 많이 생각하지 않으면 결국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고 말 겁니다.  185


결혼의 곤란한 점은, 해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도 느낄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것들투성이라는 겁니다. 결혼한 살마들만이 맛볼 수 있는 기쁘거나 행복한 순간도 가끔은 있지만, 많은 시간 그것은 짐작보다 훨씬 더 씁쓸하고 고달프고 무미건조하고 짐스럽습니다. 결혼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고난과 시련으로 가득하지만, 그 속에서 어떤 기쁨을 찾아내는 것은 각자의 몫이죠. 저는 이런 어려움을 무릅쓰고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부부들을 위한 책, 동지적 연대감을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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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으로 갈라서는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뚜렷한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성격문제, 아니었습니다.
경제문제, 아니었습니다.
자녀문제,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결혼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결혼이 만듭니다. 이혼만 야단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결혼은 당연히 해야 하는거라고 생각하고, 말도 그렇게 합니다.

물론 시간의 흐름속에 현대는 결혼은 하지 않아도 되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아직은 결혼은 당연히 하는 거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혼이란 것은 나쁜것, 바르지 않은것,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당연한 것일지 모릅니다.

결혼을 창시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창조론에 입각해서 말을 하는것입니다.

그렇다면 진화론에서는 어떻습니까? 진화론에서는 자연적인 진화속에 인간의 DNA는 이성을 찾도록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혼에 대해서는 창조론에 입각하면, 부부가 갈라서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물론 배우자의 외도에 의한 이혼만이 허용되는 사유라고 합니다. 

진화론에서는 솔직히 이혼에 대한 이론이 없습니다. 

과학적으로 밝혀낸 것이 이성을 찾도록 구성되어 있는 DNA는 있을 뿐 이혼에 관련된 내용은 없습니다. 단지 사랑에 물질이 18개월이 지나면 나오지 않게 된다는 점만을 밝혔을 뿐입니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쩌면 이혼은 바람직한 것이 될 수 도 있습니다. 

도덕적인 관점에서 이혼이 좋지 않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18개월이 지나면 헤어지는것이 생리적인 당연함일 수 있습니다.

꽤 오래전 한 광고에서 '사랑은 18개월이다'라는 카피가 생각납니다.


우리는 어떠한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고 생활합니다.

그래서 자주 사용하던 것이 당연한 답이라고 착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위의 글에서처럼 결혼이 없다면, 이혼도 없습니다. 

결혼에서 문제가 만들어 지지 않는다면, 이혼이란 것도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지금 내가 내리는 답이 정답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확신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 모범답안이 있습니까?


이혼에 변명을 해야 하는 이유는, 이혼이 무조건 나쁘다는 생각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혼을 장려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란 것은 아시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관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바라볼 때 더 나은 해결책들이 펼쳐 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혼 전에 그렇게 하려 노력한다면 이혼을 피해 갈 확률이 매우 높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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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 전문가들의 책은 여러권 읽었다. 
이 책도 마찬가지의 책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종종 읽을 것이다.
그러면서 나를 찾아가는 분석적인 측면에서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여러권 읽게 되면서 공통적으로 언급한 부면들이 꽤 있다. 그런것이 분명 우리에게 많이 필요한 부면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사랑'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집필된 책이다.
우리는 이성을 만나고 헤어지는 횟수가 늘면서 자신도 모르게 방어벽을 치게 된다.
처음 좋아했던 사람에게 너무 빠져 있다가 헤어나오는게 너무 힘들고 많은 것을 잃게 되고, 그 다음 또 그 다음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면서 사랑에 대해 두려움과 일정 선을 유지하려는 방어벽을 띄게 된다.
이것은 자신이 알지만 자신도 모르게 치게 되는 방어벽이다.
그렇기에 사랑의 감정은 있으나 더 이상 마음을 주지 않음으로 헤어질 것을 대비하고 있게 된다. 그러다 보면 그것이 장애가 되어 상대는 떠나가는 상황을 만들게 되고 그러한 반복에 의해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물론 그러한 경험들을 통해 사랑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면 가장 좋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사랑에 대한 불신은 사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가깝지만 가깝지 않은 그러한 사람으로 변해 버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사랑의 감정 따위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그냥 살아간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 신이 있다면 신이 준 능력이고 자연발생적이라면 본능적인 인간의 탐구는 이성에 대한 갈망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는 어쩌면 불행한 어쩌면 서글픈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각자가 판단할 몫이겠지만 나는 좋은 일이라 생각지 않는 부류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서양의 분석철학이 무조건 옳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들의 한계를 동양에서 찾지 않을 테니까. 
우리의 생활방식이 너무 서양화 되면서 비만인구만 증가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감정 상태의 혼돈도 엄청나다. 
그렇기에 서양식 분석 철학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감정상태를 철저하게 관찰해 보면서 자신이 지금 어느 지점에서 있으며 헤매고 있는 건지 평안함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알게 됨으로 막연함이 사라지는데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사랑... 평생 풀어도 다 풀지 못하는 것이겠지만 지금보다는 더 많이 풀어내는데 도움을 받게 된다면 조금 더 불안함을 떨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프롤로그
우리의 마음속엔 저마다 지워지지 않는 한 아이가 살고 있다... 어린아이의 시선과 두려움과 공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아이.
그 아이의 불안을 잠재우는 길은 성장을 멈추어 버린 그 아이에게 다시금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사랑은 바로 그 아이를 성장시키 수 있는 좋은 기회다.  5
안타깝게도 요즘 사람들은 지독한 외로움으로 사랑을 절실히 원하면서도, 사랑을 두려워한다. 사랑이란 감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상처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친밀해지는 것조차 두려운 것이다
상처를 두려워하면 사랑을 할 수가 없다.  10

1. 사랑을 시험하는 것들
운명(Destiny)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종종 사랑을 과거의 문이 쾅 닫히며 항상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24
프로이트는 낭만적인 사랑이나 성인의 모든 인간 관계는 이전 감정의 재편집이며, 아이가 생후 초기 어머니와 가졌던 유대감과 나중에 에디푸스 갈등과 관련된 아버지에게 느꼈던 감정의 재현이 바로 사랑의 끌림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에게 '모든 사랑은 재발견'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사랑은 무의식의 운명이다.  25
짝을 잘 만난 경우는 상대방이 가진 자질을 올바로 파악한 것이다. 반면 실패한 '필(feel)'은 외모나 분위기로 상대의 모든 부분을 혼자 유추하여 자기 내부에 있는 어떤 대상을 다짜고짜 투사시켜 받는 느낌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에 대한 파악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26
옥타비오 파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랑이란 존재의 위험과 불행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지도,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지도 않지만, 인간에게 시간을 확장시켜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실존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사랑안에서는 몇 분이 몇 세기로 바뀌고 그 질량을 측정할 수 없게 되면서 인간은 찬나나마 죽음의 질병에 대한 잠정적 치유책을 발견 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은 인간에게 이처럼 잠정적이나마 존재론적 구원을 베풀어 주기에 사랑은 지구사에서 축복받은 자가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에 가장 근접해 있는 것이 된다.'  
그렇게 때문에 사랑은 비록 상처를 받을지라도 하는 게 낫다. 
'운명적인 만남'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다만 무의식이 어떤 사람을 선택하느냐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임을 말이다.
모든 사랑의 감정은 진실하다. 다만 첫눈에 반한 사랑에 대한 과대 포장은 당신에게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  30

사랑(Love)
혹시 사랑의 장애물로 사랑 그 자체를 생각해 본 적이 잇는지. 사랑이 힘들면 힘들수록 우리가 유일하게 믿고 기대게 되는것이 바로 사랑이지만 사랑은 결코 믿을 만한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이 사랑을 시험하게 만든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슬픔과 외로움, 미움을 동반하기 때문에 빋어지는 현상이다.  36
사랑이라는 것은 성인으로서 새로운 사람을 찾아 떠나는 여행의 시작,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곧 내가 과거에 사랑했더 부모나 가족과의 결별을 뜻하기 때문에 슬플 수 밖에 없다. 그러한 슬픔은 사랑으로 인해 생겨나지만 사랑이 결코 채워 주지 못한다.
가슴 한쪽엔 언제나 설명할 수 없는 외로움과 소외감이 메아리를 울리고 있다.  37
나와 다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사랑해 주는 상대에 대해 깊은 감사를 느끼면서 비로소 사랑은 성숙해지고 더욱 깊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됨을 견디지 못하고 부정하면, 상대에게 매달리고 끊임없이 확인을 요구하며, 서로를 피로와 혐오 속에 몰아 넣을 수도 있다.  38
슬픔과 미움과 외로움과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사랑을 하기 위해선 그 친구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40

섹스(Sex)
요즘 사람들은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 한다. 상처받을까 봐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때그때 자신들의 감정에 따라 관계를 맺는다.  47
성과 사랑을 분리하는 사람들에게 상대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상대반은 자신의 쾌락을 충족시키는 도구일 뿐이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굶주림처럼 끝없이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  48
정상적인 여성들도 50% 정도는 성교 행위만으로는 오르가슴에 이르지 못한다.  49
에로틱한 욕동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즐거움을 추구한다.
둘째, 사랑하는 사람이 성적으로 흥분하고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것을 보며, 자신이 마치 그가 된 듯 상대와 동일시함으로써 합치감의 희열을 강화하는 것이다.
셋째, 성의 에디푸스적 구조에서 유래된 금기를 극복하는, 일종의 반란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51
밀접하게 친밀해진다는 것은 서로의 내부에 있는 원초적 욕망이나 공격성이 변형되거나 승화되지 않은 채 그대로 상대를 향해 달려나갈 수 잇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섹스에서 서로의 경계를 지켜 주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섹스에의 강렬한 충동을 성적인 유희로 바꾸어 줄 수 있는 부드러움이 필수가 된다.  52
결론적으로 섹스의 위험성을 막아 줄 수 있는 것은 사랑뿐이다.  53
육체적인 사랑은 열정적인 사랑과 분명히 다르다.  54
사랑이 없으면 서로가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고 그들의 관계는 소유와 집착과 파괴로 바뀌어 버린다.  56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를 한닥 해서 인간 본연의 고독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섹스가 가진 모순 때문이다.
자기의 확고한 경계를 의식하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함과 동시에, 반면 자기를 초월하여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로 합쳐지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57
사랑이 두려워 섹스만 하고 싶은, 섹스를 통해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그러나 내 존재조차 버거워 결국 섹스도 사랑도 떠나게 되는 그들의 초라한 모습.  58

21세기(The 21 century)
넘쳐나는 자극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우리의 마음은 자신의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고 순간순간의 욕구 충족을 좇게 한다. 모든 것 -우리의 정신조차도- 은 파편화해 총체선과 통합성을 잃어버리고 그저 순간마다 각자의 '전체적 자기(whole self)'가 아닌 '부분적 자기(part self)'로 관계할 뿐이다. 
'마리보적 존재(marivaudian being)' 매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과거도 미래도 없는 인간으로서, 역사를 가지지 않는다.  63
아이들은 열등하고 무기력한 진짜 자기 모습을 감추려 하고, 없어도 있는 듯이 위자을 하고, 못하는 것도 잘하는 양 으스댄다. 그리고 점점 성장해 감에 따라 무기력하고 약한 자기의 모습을 방어하기 위한 고도의 기술들을 발달시키는데, 이것이 몸에 익은 '과대 자기'의 모습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과시적인 만족은 실체가 없는 거품 같은 것, 물속에 비친 자기 환영과 같은 것이다.  64
자신만의 성을 높이 쌓고, 이상적으로 보이는 관계를 유지하는 자신에게 만족하며, 메아리 없는 세상에서 숨죽이고 사는 나르시시스트들, 그들이 하는 사랑의 특징은 감각적이고, 순간적이며, '감정이 배제된 성'이 사랑을 대치한다.
그들은 '자기 이상(ego-ideal)'을 상대에게 투사시켜 그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자기의 이상이 실현되는 듯한 착각을 즐긴다. 즉 상대를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속에 투사된 자기의 이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65
순전히 성을 위해 존중되는 성은 미래에 대한 모든 관계를 상실하고 영속적인 관계에 대한 어떤 희망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역으로 영속적인 관계에 대한 두려움만을 가져올 뿐이다.  67
병적인 자기 과대가 발달한 그들에게 가장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상처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헤어질 때 슬픔을 느끼기보다는 아예 자신의 감정을 거두어 버리고 아무 일도 없던 듯이 쉽게 돌아서선 곧 다른 대상을 찾아 나선다.  69

결혼(Marriage)
최초의 열정과 사랑을 관계의 핵심으로 여기는 사람드은 결국 환멸을 느끼거나 이혼하기 쉽다는 연구 결과.
미네소타 대학의 사회 심리학자 엘렌 버셰이드는 열정적인 사랑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관계가 파탄에 이를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버트랜드 러셀도 낭만적인 사랑을 찬양하면서도 그것이 행복하고 안정된 결혼 생활의 토대가 될 수 없다고 믿었다.  77
낭만적인 사랑에 대한 잘못된 오해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낭만적 사랑은 결혼이라는 마차를 이끄는 첫 부분일 뿐임을 명심하고, 결혼 생활의 문제를 모두 낭만적인 사랑이 식었기 때문이라고 돌리는 태도부터 버려야 하는 것이다.  79
보통 사람들은 사랑하면 으레 '사랑에 빠지는 것(falling in live)'만을 떠올린다.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다. 사랑은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랑을 하는 것(being)'을 거쳐 '사랑에 머무는 것(sraying in love)'이란 단계에 이르는 과정을 거친다.
'사랑을 하는 것'은 사라에 빠진 연인들이 각자 자신의 인생의 방향을 틀고, 자기의 에너지를 한 방향으로 서서히 맞추어 가는 것을 말한다.
'사랑에 머무는' 상태는 그들의 사랑하느 관계가 외부 세계와 격리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견디어 나가는 단계다.
어쩌면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사라에 머무는 것이다.  80
애정 어린 결합은 사랑의 열정이 희미해진 후 남게 된다.  81
사랑에 머물면서 그들은 같이 인생을 걸어가는 상대방을 소중히 하고, 그와의 경험을 소중히 한다. 충절의 표현이다.
라쉬 교수는 사라에 머물면서 서로가 이러한 애정으로 결합되는 것을 '차가운 세상에 있는 천국'이라 표현했다.
최적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각자의 자율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도 둘만의 결합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부분의 연인들에게 최적의 거리감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그것은 텅 빈 느낌 없이 주기적으로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이요, 서로의 친밀감 안에서 자신을 열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82
열정적인 관계는 부부 사이에도 각자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계속해서 피어날 수 있다. 우선 둘 사이에 서로 열정적인 사라에 빠지겠다는 합의가 암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한 사람만의 노력은 둘 사이에 더 큰 상처만을 남기기 십상이다.  84


2. 그래도 의심이 풀리지 않는다면 문제는 당시에게 있다
'기억'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사실 열 사람이 어떤 사건을 동시에 목격한다 해도, 그들이 사건에 대해 말하는 느낌은 모두 다르다. 왜냐하면 기억이라는 것은 그것이 저장될 당시의 그대로가 아닐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 저장될 때, 그것은 그 본질과는 조금 다르게 변형되어 저장되는 경우가 많다.  91
기억은 주관적이며, 기억하는 사람의 마음 상태와 무의식적 소망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는다.  92
남녀가 사랑을 할 때는 두 사람의 성별만 다른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두 인간이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혀 다른 두 인간이 만나 사랑을 느끼게 되면, 사랑이라는 감정의 재료를 사용하여 그들이 만들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97
우리가 사라을 할 때 빠지는 대부분의 오류는 상대를 자신의 기준과 시각에서 해석하려는 데서 시작된다. 자싱이 가진 가치 기준을 가지고 상대의 태도와 감정을 재단한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발생한 원인은 항상 상대편이나 외부적인 환경에서 찾게 된다.
실제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겪게 되는 갈등의 원인 대부분은 나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단지, 그 갈등의 원인이 자신의 무의식에 있는 경우엔 자기 자신조차 그것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98

사랑없이는 단 하루도 견디지 못하는 당신에게
사랑 중독증...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사라에 의존하게 되는 것.  102
사랑 중독즈에 빠진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졌다가, 곧 그 사랑이 식어지면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나는 것을 반복한다.  
반복될 수록 자신감은 더 없어져 가고 그러한 불안감 때문에 더욱더 다른 사람의 사랑에 의존하게 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된다.  103
사랑 중독증을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필요한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104
진정한 사랑이란 서로의 영역을 지키면서 상대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맞추어 가며, 그 안에서 자신과 상대를 발견하고 같이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다.  105

상대를 있는 그대로 못 보는 당신에게
피그말리온식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는 한마디로 자신이 창조한 상대를 독점하고 지배하려 하는 데에 있다.
조작할 수 없는 것을 조작하려 하고, 강압할 수 없는 것을 강압하려고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을 타락시키게 될 것이다. 상대방을 지치게 하는 것은 물론 자신 또한 상대를 자꾸만 의심하게 될 테니까.  113
어쩌면 피그말리온은 어떤 사랑에서든 일반적으로 조금씩은 발견되는 얼굴일는지 모른다.  114

희생만이 기쁜이 되는 당신에게
어떻게 보면 '준다'는 행위는 내 자시에게 나를 과시할 수 있고, 그러면서 내가 살아 있음을 생생하게 확인시켜 주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것이다. 사랑을 통해 내가 가진 무언가를 내주는 경험을 한다는 건 아주 뜻깊은 일이다.  118
마조히즘이라 불리는 '피학적인 사랑'
이런 타입의 사람들은 자신을 처벌하고 싶은 무의식적인 욕구 때문에 자기를 완전히 상대에게 내어주어 상대로 하여금 자신을 학대하게끔 유도한다. 노예같이 상대에게 예속되면서 절망적인 사랑으로 치닫는 것이다.  120
왜 학대받는 관계를 참고 견딘 것일까? 이것은 부모로부터 거절당한 어린 시절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대인 관계의 결함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함의 가장 큰 원인은 다름 아닌 죄책감이다.  123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으 모든 것을 내어주는 희생만을 기쁨으로 아는 당신, 혹시 당신은 열등감이나 박탈감을 숨기려고, 사랑을 가장하여 상대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의 목적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합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합치를 위해서는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고 내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에게 예속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125

그래도 의심이 풀리지 않는다면 문제는 당신에게 있다
'사랑을 못하는 것은 사랑을 할 만한 상대가 안 나타나서다.'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혹시 당신이 기다리는 그 누군가가 캐럴이나, 마술적인 상대가 아니었는지 묵고 싶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그 누구를 만나도 만족하지 못하고 내 반쪽은 따로 있을 거라고 의심할 것이다.
사랑의 마술은 마술적인 상대를 만나는 데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은 모두 나처럼 외롭고 약한 존재이다.  131

당신이 사랑을 밀어내 버리는 방식
방어 기제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일종의 정신 역동인데, 사람은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방어 기제를 쓴다.  136
독립적인 사람은 상당히 의존적인 배우자를 선택하기 쉽다. 왜냐하면 자신이 과거에 억압하던 의존 욕구를 재경험을 통해 충족시키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되면 다시 자신의 세계에서 의존적인 배우자를 쫓아내려 한다.  141
누구나 방어 기제를 사용한다. 문제는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하느냐에 있다. 만약 당신이 돌이켜 보건대 사랑을 함에 있어 과다한 방어 기제의 사용으로 사랑을 그르쳐 왔다면, 그리고 매번 같은 태도를 반복해 왔다면 그것은 위험 수위일지 모른다.  142


3. 사랑을 하려거든 사랑할 수 있는 능력부터 키워라
어쩌면 당신은 사랑 불능자 일지도 모른다
'사랑 불능자?'
미국의 정신 분석가 컨버그에 따르면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크게 세 유형으로 나눈다.(두 가지만 다룬다)
첫 번째 유형은 내게 없는 걸 가지고 있는 상대를 시기하고, 상대의 감정을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져서 사랑에 빠지기 힘든 사람들 이다. 이들에게 사랑은 그 시작도 물론 어렵지만 설령 사랑이 진행된다 해도 자기 자신에 도취되어 있어 순탄하지 않은 길을 걷게 된다. '자기애적 인격장애'는 바로 이러한 인격적 결함을 병적으로 가진 사람들의 장애를 지칭하는 말이다.  147-148
두 번째 유형은 자아가 탄탄하지 않아서 상당히 충동적이고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다. '경계성 인격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은 항상 자기 자신을 채워 줄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데, 이들의 문제는 가까워지는 것, 즉 친밀감을 견디지 못하는 데 있다.  150
사랑 불능은 치유될 수 있다.  152
필요한 것은 사랑을 하기 위한 당신의 노력이다.  153

상처없는 사랑이란 없다
소모적인 싸움은 갈등을 본질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한다.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싸움을 '진짜 갈등'을 회피하기 위한 불필요한 노력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진짜 갈등은 그들이 속해 있는 내적 현실의 깊은 차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162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일지라도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동안 알게 모르게 서로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서로 도움은 안 돼도 사랑은 할 수 있다며 갈등을 회피해선 안 된다. 그러면 오히려 서로의 상처만 깊어질 따름이다.  166

사랑을 하려거든 사랑할 수 있는 능력부터 키워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상대와 내가 분리된 존재임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상대가 내 속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나와 분리된 아주 독립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그에게 어찌 감사한 마음이 안 들겠는가.  170
'사랑받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비례하지 않을까?'
사랑받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당신에게 사랑을 하려거든 사랑할 수 있는 능력부터 키우라고 말하고 싶다.  173
사랑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은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모든 탓을 상대에게 돌리지 않고, 그 전에 나를 한 번 돌아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성숙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성숙을 이끄는 성숙 과정의 한 기능이기도 하다.  174

소홀히 넘겨 버리는, 그러나 아주 중요한 문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어린 왕자와 여우의 대화에서 여우는 왕자에게 '특별한 관계'를 원한다면 '내가 너를 신뢰 할 수있도록 해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간의 사랑 역시 서로 다른 둘이 만나 관계를 발전시킨다는 면에서 그것과 다르지 않다.  183
자신과 상대에게 믿음을 주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의 사랑이 괴로워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신뢰가 부족한 사람들이 사랑을 할 때 나타나는 또 한 가지 문제점은 상대와의 '공감'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공감 대신 '동정'을 한다. 상대의 감정으로 들어가 아예 하나가 되어 버림으로써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공감은 상대의 감정을 함께 공유하지 만 다시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 그래서 상대의 감정에 같이 휩쓸리지 않고, 그 감정에 대해 상대방이 어떤 식으로든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184
그러나 무엇보다 신뢰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친밀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데 있다.  185

정신분석에서 배우는 사랑의 지혜
오래된 연인드의 특징 하나. 자신이 사랑하는 이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문제는 그것이 더 이상 알게 없다, 혹은 익숙해지니까 식상하고 지루하다는 생각과 연결된다는 데에 있다.
'사라을 통해 내가 결국 나중에서야 깨달은 건 너와 나는 타인이라는 사실이다'
언젠가 이런 문구를 읽으면서 나는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사랑할 때 되새겨야 할 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190
무굴 사랑한다는 것은 함께 하는 것이다. 그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같이 느끼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서로를 깊게 받아들이는 과정, 그 과정에서 연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치유와 성숙의 과정을 함께 하는 것이다.  197

사랑하는 능력을 키우는 네 가지 방법
어쨌든 중요한 건 있는 그대로, 거짓됨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데미안이 말했던가.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204
첫째, 과거를 재구성하라
자신이 늘 구박만 받았다고 생각하던 어린 시절의 상처를 되살리면서 굉장히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 냈다. 엄마와 아빠가 자신을 많이 사랑했지만, 그걸 표현하는 방식이 서툴렀다는 것. 엄마 입장이 되어 보고, 아빠 입장이 되어 보니 부모가 애초부터 자신을 미워하고 상처를 주려고 한 게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결국 그때 그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부모에 대한 분노를 거둘 수 있었다.  205
둘째, 분노를 두려워하지 말라
붐노를 너무 자주 폭발시키는 사람만큼이나 전혀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도 문제다.  206
마음속에 분노를 담아 두지 말자. 상대에게 자신이 느끼는 불만을 털어놓는 걸 두려워해선 안 된다. 내가 느끼는 그대로를 상대에게 전달했을 때, 나는 또 한 번 자유로워진다.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이고, 그 부분에 있어서는 더 이상 아닌 것처럼 가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분노를 적절하게 터뜨릴 줄 안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  208
셋째, 'all good, all bad'에서 벗어나라.
'all good, all bad'에서 벗어난다는 것의 의미는 좋고 싫은 감정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는 걸 의미한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점만큼이나 나쁜 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타인을 장단점이 혼재한 인간으로 보지 못한다.  
'all good, all bad' 태도를 고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속을 먼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209
넷째, 'So, it's me'
'그래, 그것이 바로 나다(So, it's me)'
자기 자신의 상처까지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으로부터 담담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210
프로이트는 정상의 기준을 '약간의 히스테리(a little hysteric), 약간의 편집증(a little paranoid), 약간의 강박(a little obsessive)을 가진 것'이라 했다. 이것은 곧 어떤 사람도 이런 것들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왜 모든 사람이 성숙한 사랑을 해야 하는가? 왜 모든 사람이 열정적인 사랑을 해야 하는가? 어떤 모습이든 그 안에서 행복할 수 있고 편안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거다.  211

죽음보다 더한 고통, 실연은 이렇게 떠나보내라
실연의 산을 무사히 넘은 사람은 이제 다른 산을 잘 오를 수 있는 체력을 갖게 되고, 산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됨으로써 다음 산행에서 위험을 피할 수 있으며, 어떤 산이 오를 만한 가치가 있는지, 또 진정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지 볼 수 있는 여력을 가진다. 그리고 실연의 산 정상에서 인생의 깊은 의미를 깨달아 다음 산행을 더욱 의미 있게 계획하기도 한다. 문제는 인생을 살면서 가끔 마주칠 수 있는 이 산행에서 어떤 것을 배우며 얻어 가느냐 하는 것이다.  214
실연의 과정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고통은 아무에게도 버여 주지 않던 자신의 깊은 내면을 상대에게 보여 주었다는 사실이다.  215


4. 사랑을 온몸으로 껴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자유롭다
당신도 혹시 첫사랑을 찾고 있는가?
아마도 첫사랑은 우리가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기에, 애태우던 기억이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게 아닐까.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28
첫사랑은 우리가 간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기억인지 모른다. 동시에 첫사랑은 성장이라는 여행길에서 우리가 성인의 사랑으로 진입하기 위해 지나쳐야 한 땅이며, 우리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는 영토이기도 하다.  231
첫사랑, 그것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기에 우리에게 계속 꿈으로 남으며, 메마르고 냉혹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마른 목을 적혀 주어 다시 힘을 내게 만드는 오아시스가 된다.  232

플라토닉 러브가 반쪽짜리 사랑인 이유
플라토닉 러브의 개념이 지금처럼 자리잡힌 것은 중세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금욕 주의로 점철되어 있던 그때 '플라토닉 러브'는 순서한 정신적 사랑만을 강조하는 최고의 이상적인 사랑의 형태로 추앙받았다.  233
그런데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젊은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데 왜 굳이 육체적인 면을 무시하고 정신적인 사랑만을 고집해야 하는지.  234
사랑이란 '에로스(욕망)'와 '프시케(영혼)'가 총체적으로 결합된 상태다. 사랑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측면은 어느 한 쪽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이 중요하다. 정서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합쳐진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황홀한 경험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236
나는 플라토닉 러브를 현실의 사랑이라기보다는 꿈속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라고 말하는 데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플라토닉 러브는 이상화한상대를 향한 사랑이며,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자신이 보고 싶은 측면만을 동경하고 갈망함이며, 성적인 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억압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238

에디푸스 콤플렉스가 사랑에 미치는 영향
에디푸스 콤플렉스를 잘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보이는 대표적인 사랑의 유형이 바로 삼각관계 안에서만 사랑을 느끼는 경우다.  245

사랑 없이는 정말 살 수 없는 걸까?
사람은 사랑이 있어야만 제대로 태어나고 자랄 수 있는 운명을 지녔다. 그리고 사랑은 인간을 동물과 구분지어 주는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은 사랑을 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남자든, 여자든, 가족이든 혹은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든, 아니면 예술이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든.... 결국 어떤 형태로든 모두 사랑을 하고 사는 것이다.  256

사랑을 온몸으로 껴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자유롭다
현명한 선택의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결국 자신이 가장 만족스러운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자신이 감당할 자신이 없는 선택은 곧 자기 파괴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든지 책임의 문제는 따른다. 책임에 대한 마음의 준비 없이 취하는 선택은 성숙한 판단이라고 하기 어렵다. 때로는 그 선택으로 인해 자신에게 돌아오는 처벌도 달게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사랑이 강렬한 만큼, 그 고통도 그만큼 따르는 것이다 생각하면서...  267
비가 오면 지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으세요. 그럼 아마 그 바람은 서서히 잦아들지 않을까요?
웃는 건 바보스럽게 보일 위험이 있다. 
눈물을 흘리는 건 감상적인 사람으로 보일 위험이 있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건 남의 일에 휘말릴 위험이 있다. 
감정을 드러내는 건 자신의 참 모습을 들킬 위험이 있다. 
대중 앞에서 자신의 기획과 꿈을 발표하는 건 그것들을 잃을 위험이 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되돌려받지 못할 위험이 있고,
산다는 건 죽을 지도 모를 위험이 있다.
희망을 갖는다는 건 정말에 빠질 위험이 있으며,
시도를 하는 건 실패할 위험이 있다.

하지만 위험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일은
아무런 위험에도 뛰어들지 않으려는 것이니까.

아무런 위험에도 뛰어들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으며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그는 고통과 슬픔을 피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는 배울 수 없고, 
느낄 수 없고, 
달라질 수 없으며
성장할 수 없다.

자신의 두려움에 갇힌 그는 노예와 다를 바 없다.
그의 자유는 '갇힌 자유'다.

위험에 뛰어드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자유롭다.
                                                                          - 작자미상  268-269
사랑은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들지도 모른다. 더 이상 사릉으로 인해 상처를 입지 않으려면, 역설적이지만 상처를 오픈하고 사랑을 온몸으로 껴안아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원하는 자유를 얻게 되지 않을까?  269
사랑을 온몸으로 껴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자유롭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나에게 허락된 삶의 마지막까지, 나는 노력할 것이다. 후회 없이 사랑하고, 사랑받다 갈 수 있도록...  270



김혜남의 정신분석 카페
마음의 키를 재는 척도, 사랑
마음의 키는 언제까지 자랄까? 
최근의 정신분석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성숙하고, 그가 처한 환경이나 사회적 요구에 따라 적응하고 성장한다고 한다.  257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좌절을 견디는 능력, 적어도 타인과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능력이 있음을 말해 준다. 사랑을 마음의 키를 재는 척도라고 말할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58

Posted by WN1
,

 참 유명한 책이다. 저자의 책은 여러권을 읽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6,7년쯤 전이라고 기억한다.(물론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와 지금은 분명 다르다. 그때의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읽으면서 느낌이라는 것이 있는데 나에게 더 많이 와 닿는 것이 있었다.
책은 저자의 처녀작이기도 하고 20대 중반에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통찰적 부면은 가히 뛰어나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특히나 한국 사람에게는 더욱 크게 와 닿을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유교적인 효 사상에 입각하여 교육을 받았기에 감정을 표출해내는데 매우 서툴다. 그러기에 어느새 감정의 새새함을 잊고 있는데 이 책은 그것을 디테일하게 서술하고 있으니 우리에게는 고개를 끄덕이고 무릎을 치는 표현들이 곳곳에서 박견될 수 밖에 없다. 
쉽게 읽히면서도 깊은 표현과 철학적인 사유가 섞여 읽는 이로 하여금 즐거움을 주는 책이라 생각한다.
표지를 찾기위해 책을 검색해보니 '2010 대학 신입생 추천 도서'라고 한다.
신입생때 읽고 졸업하고 읽어보면 자신이 얼마나 지적인 성장 사유의 성장을 이루었는지 가늠해보기에도 좋은 책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새해 첫 책으로 읽은 것은 시기에 맞게 책이 들어왔기도 하지만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을 해보기 위해서 였다.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되고 관계를 형성해 나가면서 사랑에 대한 생각을 더 이상하지 않게 되고, 우리는 이전 사랑의 모습을 간직한채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된다.
그렇기에 수동적으로 한 걸음 뒤에서 할 수 있는것이 비교 관찰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우리는 관찰자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깊이 있는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렇지 않나 생각하여 새로운 생각들을 해 보기위해 책을 선택하였다.

다시금 저자의 내면의 감정 서술에 감탄해 가면서 더불어 나의 생각들도 정리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역자 후기에서는 이 책이 95년도에 <로맨스>(한뜻출판사)라는 책으로 번역이 되었었다고 한다.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표지의 영문 제목을 보았다. <Essays in Love> 이다. 미국에서의 제목은 <On Love>라고 한다.
95년도의 번역은 미국식으로 제목을 정했다. 지금은 위의 제목으로 번역하였다. 제목이 참 우리에게 깊은 호기심을 유발하게 한 것이다.

 



어떤 사람을 두고 자신의 필생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살아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따라서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11
클로이를 만난 것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딱 맞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12

'사람들을 꿰뚫어보는 것은 아주 쉽다. 하지만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엘리아스 카네티(1905-94 불가리아 태생의 유대계 영국작가)...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람을 꿰뚫어보는 일을 중단하고자 하는 순간적인 의지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가끔 사랑에 빠지는 것은 습관화되다시피 한 맥빠지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19
클로이의 휴가 이야기는 지루했다. 그러나 지루함은 이제 흠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 이야기를 일상 대화의 세속적 논리에 따라서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그녀의 말에서 통찰이나 유머를 찾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녀가 그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그녀가 하는 모든 말에서 완벽함을 찾아내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이었다.  22-23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묘한 상실감, 슬픔을 느꼈다. 이것이 정말 사랑일까? ..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최초의 꿈틀거림은 필연적으로 무지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사랑이냐 단순한 망상이냐? 시간[이 또한 그 나름으로 거짓말을 하지만]이 아니라면 누가 그 답을 말해줄 수 있을까?  26

가장 매력을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가장 쉽게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한 모든 믿음을 잃었다는 뜻이다.  39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잇을 때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것은 상대가 따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매력적인 사람과 함게 있을 때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따분한 사람은 나 자신이 되고 만다.  41

생각만큼 섹스와 대립하는 것은 없다. 섹스는 본능적이고, 반성하지 않으며, 자연발생적이다. 이에 반해 생각은 신중하고, 말려들지 않으려 하고, 판단하려고 한다. 내가 섹스를 하는 동안에 생각을 했다는 것은 성적 교류의 근본법칙을 어긴 것이다.  52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안전하게 고통스럽다. 자신 외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초한 달곰씁쓸하고 사적인 고통이다. 그러나 사랑이 보답을 받는 순간 상처를 받는다는 수동적 태도는 버려야 하며, 스스로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책임을 떠안을 각오를 해야 한다.  65
클로이가 나와 함께 자고 나에게 잘해줌으로써 오히려 그녀에 대한 내 평가 점수가 낮아졌다면, 그것은 혹시 그녀가 그 과정에서 나라고 하는 심한 전염병에 감염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68
대부분의 관계에는 보통 마르크스주의적인 순간이 있다. 사랑이 보답을 받는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어떻게 헤치고 나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사랑과 자기 혐오 사이의 균형에 딸려 있다. 자기 혐오가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의 보답을 받게 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저런 핑계로]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다고 [자신의 쓸모없는 면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잘 맞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이 보답받게 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수준이 낮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72

성숙한 사랑의 이야기에서는 절대 첫눈에 반하는 일이 없다. 맑은 눈으로 물의 깊이와 성질을 완전히 조사할 때까지는 도약을 유보한다. 부모 노릇, 정치, 예술, 과학, 부엌에 비치할 적당한 간식에 관하여 철저하게 의견 교환을 한 뒤에라야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할 준비가 된 것인지 판단할 수 있다. 성숙한 사랑의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상대를 진정으로 알 때에만 사랑의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상대를 진정으로 알 때에만 사랑이 자라날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왜곡된 사랑의 현실 [우리가 알기 전에 태어나는 사랑]에서는 아는 것이 늘어날 경우, 그것은 유인이 아니라 장애가 될 수도 있다 - 유토피아가 현실과 위험한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75
가장 사랑하기 쉬운 사람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78

왜 나는 나의 일용할 양식을 파는 신문 판매소 주인은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면서 내가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할까?  93
신문 판매소 주인의 샌들은 내가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짜증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서 신문과 우유를 얻고 싶을 뿐이지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 내 영혼을 드러내고 싶지도, 그의 어깨에 기대어 울고 싶지도 않다. 따라서 그의 신발은 나에게 거치적거리지 않는다.  95
차이를 농담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 [적어도 사랑의 90퍼센트를 이루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유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짜증의 벽들을 따라서 늘어서 있었다. 농담 뒤에는 차이에 대한, 심지어 실망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긴장이 완화된 차이였고, 따라서 상대를 학살할 필요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97

아름다움이 사랑을 낳을까, 아니면 사랑이 아름다움을 낳을까? 클로이가 아름답기 때문에 내가 그녀를 사랑할까, 아니면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가 아름다울까? 무한히 많은 사람드에게 둘러싸여 사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전화를 하거나 맞은편 욕조에 누워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왜 우리의 욕망이 이 특정한 얼굴, 이 특정한 입이나 코나 귀를 선택했는지, 왜 이 목의 곡선이나 보조개가 우리의 완벽성의 기준에 그렇게 정확하게 응답했는지 묻게 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하나하나는 아름다움의 문제에 대해서 각기 다른 해결책을 제시하며, 그들의 얼굴 풍경만큼이나 독창적이고 특색있는 방식으로 매력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재규정한다.  98

나는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119
호기심이 덜한 사람이나 사랑이 덜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의미 없어 보일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 바로 연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120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와 나의 예민하고 감정이 풍부한 연인 사이에 실제로 일치하는 부분은 얼마나 될까?  120
사랑은 내가 그녀의 몸짓, 세이프웨이에서 우리와 함께 줄을 섰던 사람들에게는 달리 해석되었을 수도 있는 몸짓에 내가 부여하기로 결정한 어떤 것일 뿐이다.  121
윌은 신중하게도 클로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지 않고, 더 정확하게 내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느냐고 물었다.  122
연인들은 의심하고 캐물으려는 철학적 충동에 대립되는, 믿고 신앙을 가지려는 종교적 충동에 굴복한다. 연인들은 사랑 없이 의심을 하는 것보다는 틀려도 사랑을 하는 모험을 더 좋아한다.  130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오직 인간만이 연체동물이나 지렁이와는 달리 자신을 규정하고 자의식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143
의미론적으로 볼 때 사랑과 관심이 거의 맞바꾸어 쓸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는 나비를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나는 나비에 관심이 많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며, 그 관심으로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 더 풍부하게 느끼게 해 준다는 것이다.  144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많은 부분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로 구성된다.  169
나는 클로이에 대한 내 사랑이 그 순간으 나의 자아의 본질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이 한시적인 것으로서 끝을 맺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내 일부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73

현재를 살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평생 갈망해온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깨달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기대나 기억이라는 보호를 받는 자리에서 벗어나는 데에 대한 두려움이며, 이것이 내가 살 수 있는 단 한 번의 삶 [천국의 개입은 논외로 하고]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다. 헌신릉 한 판의 달걀이라고 본다면, 현재에 헌신하는 것에는 달걀을 과거와 미래의 바구니에 나누어 담지 않고 모두 현재의 바구니에 나누어 담지 않고 모두 현재의 바구니에 담는 위험이 있다. 이 비유를 사랑으로 옮긴다면, 내가 클로이와 행복하다는 사실을 마침내 인정하는 것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내 모든 달걀이 그녀의 바구니 안에 확실하게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181
사랑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 답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더 무시무시한 의문이 있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 것이냐 하는 의문이다. 이것은 마치 건강과 힘이 충만한 상태에서 자신의 죽음을 상상해보려는 것과 같다.  186

내 소망은 내가 모든 것을 잃고 '나'만 남았다고 해도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이 신비한 '나'는 가장 약한, 가장 상처받기 쉬운 지점에 자리잡은 자아로 간주된다. 내가 너한테 약해 보여도 될 만큼 나를 사랑하니? 모두가 힘을 사랑한다. 하지만 너는 내 약할 것 때문에 나를 사랑하니? 이것이 진짜 시험이다. 너는 내가 잃어버릴 수도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린 나를 사랑하는가? 내가 영원히 가지고 있을 것들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가?  192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하는 질문만큼이나 대책 없는 [또 훠씬 덜 즐거운]질문이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완전한 오만으로 기울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한 겸손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겸손한 연인은 자신이 무엇을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묻는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사랑을 거부당하는가?' 배반당한 연인은 그렇게 묻는다. 그러면서 오만하게도 절대 자신의 몫이 아닌 선물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사랑을 베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하여 오직 한 가지 대답밖에 할 수가 없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이 답을 듣게 되면 질문을 했던 사람은 자만과 우울 사이에서 위험하게, 예측할 수 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201-202
모든 삐침의 밑바닥에는 그 즉시 이야기를 했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질 수 있는 잘못이 놓여 있다.  209
불쾌한 일이 있으면 그 즉시 화를 표현하는 것이 가장 너그러운 일이다. 그렇게 하면 상대는 죄책감을 키울 필요도 없고, 전투를 중단해달라고 삐친 사람을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210

사랑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야. 느끼는 것과 하는 일이 모두 강렬해진다는 것이 중요한 거지.  220
이마누엘 칸트에 따르면 도덕적 행동이 비도덕적 행동과 구별되는 것은 그것이 고통이나 쾌락과는 관계없이 의무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의 행동에 대한 보상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의무감에만 인도되어 어떤 행동을 할 때 나는 도덕적이다.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선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도덕률에 일치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행동이 도덕률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기질의 결과로 이루어진 행동은 도덕적이라고 할 수 없다.
칸트 이론의 핵심은 도덕성이란 어떤 행동을 수행하는 동기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예상되는 보답에 관계없이 사랑을 할 때에만, 사랑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랑을 줄 때에만 도덕적이다.  223
나는 나에게 쾌락을 주느냐 고통을 주느냐에 따라서 클로이에게 어떤 도덕적 딱지를 붗일 것이냐를 결정했다. 나는 세계와 그녀가 이 세계 속에서 가지는 의무를 나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판단하는, 자기 중심적인 도학자였다. 나의 도덕률은 나의 욕망의 승화된 형태일 뿐이다.  225-226
사랑이 없다면,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산다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자유라는 것이 버림받을 자유를 의미한다면 자유란 대체 무엇인가?  226
사랑의 보답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사랑을 받고 싶다는 오만이 생겨났다 나는 내 욕망만 가지고 홀로 남았다. 무방비 상태에, 아무런 권리도 없이, 도덕률도 초월해서, 충격적일 정도로 어설픈 요구만 손에 든 모습으로. '나를 사랑해다오!' 무슨 이유 때문에? 나에게는 흔히 써먹는 지질하고 빈약한 이유밖에 없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228

고통을 겪으면서 무한히 지혜로워진 나는 물론 그녀가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녀를 용서하고, 동정하고, 그녀에게 선심을 쓸 수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무한한 안도감을 주었다.  247
클로이가 떠나는 바람에 나는 죽을 뻔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도덕적으로 높은 자리라는 영광스러운 지위에 올라갈 수 있었다. 나는 순교자였다. 
예수 콤플렉스는 마르크스주의의 정반대편에 자리잡고 있다. 자기 증오에서 생겨난 마르크스주의 때문에 나는 나를 받아들이려는 어떤 클럽의 회원이 되지 못했다. 예수 콤플렉스 역시 나를 클럽 문간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자기 사랑의 결과이며, 내가 클럽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내가 너무 특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249
자기 혐오를 피해가려고 약점을 미덕으로 바꾸는 연금술에는 공감을 할 수밖에 업삳. 나의 고통이 예술 콤플렉스로 진화환 것에는 틀림없이 어느 정도 건강한 면이 있었을 것이다. 자기 혐오와 자기 사랑 사이의 미묘한 내적 균형에서 이제 자기 사랑이 우세한 위치에 있었다. 클로이가 나를 버린 것에 대한 나의 최초의 반응은 자기 혐오적인 것이었다. 우리 관계를 풀어나가는 데 실패한 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계속 클로이를 사랑했고 나 자신을 미워했다. 그러나 예술 콤플렉스가 생기면서 그 등식이 뒤집혀, 이제 클로이가 나를 찬 것은 클로이를 경멸할 만한, 잘해야 동정할 [기독교 미덕의 모범] 만한 증거로 해석되었다. 예수 콤플렉스란 자기 방어 메커니즘에 불과했다. 나는 클로이가 나를 떠나기를 바라지 않았고, 그 어떤 여자보다 클로이를 사랑했는데, 이제 그녀는 캘리포니아로 날아갔다. 내가 그 견딜 수 없는 상실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처음부터 그녀가 그렇게 가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고 뒤집어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거짓말이엇다. 그러나 버림받아 절망적인 상태일 때, 옆방에서 들려오는 행복에 겨운 오르가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호텔 방에서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낼 때, 정직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251

헤어짐이 없었던 것 같은, 우리가 여전히 함께하는 것 같은 환각에 빠지기도 햇다. 언제라도 전화를 걸어서 오디온으로 영화를 보러 가자거나 공원에 산책을 하러 가자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러다가 갑자기 어떤 일이 벌어져서 나는 클로이가 없는 현재로 거세게 내동댕이쳐지곤 했다. 전화벨이 울려서 전화를 받으러 가는 길에 욕실에 클로이가 빗을 두었던 자리가 이제는 비어 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곤 했다. 빗이 없다는 사실이 심장을 찌르는 단검처럼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고,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253
변화의 거부는 세계가 내 영혼을 반영하지 않는단는 것, 내가 거기 살든 살지 않든, 행복하든 불행하든, 살아 있든 죽었든 관계없이 움직여가는 독립된 실체임을 일깨워주었다.  255
그러다가, 불가피하게, 나는 잊기 시작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몇 달 뒤, 나는 런던의 그녀가 살던 동네에 갔다가, 그녀에 대한 생각이 전처럼 괴롭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256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교훈들이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아니면 마냥 행복한 표정으로 실수를 무한히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식사, 죽음, 돈에 지혜로워질 수 있듯이 사랑에도 지혜로워지고 싶다는 야심은 정당한 것이 아닐까?  259
지혜는 사랑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사랑은 커피나 담배처럼 완전히 끊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포도주 한 잔이나 초콜릿처럼 가끔은 허용되는 것일까? 사랑은 지혜가 대표하는 모든 것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일까? 현자들도 사랑 때문에 이성을 잃게 될까, 아니면 몸만 어른이지 정신을 아이인 사람들만 이성을 잃는 것일까?  260
복잡한 문제들을 파고들다보면 가끔 도달하게 되는 순진한 상식으로 나는 가끔 묻곤 했다.[마치 답을 봉투의 뒷면 정도에 다 적을 수 있는 것처럼]. "왜 우리는 그냥 서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  262
대책이 서지 않는 사랑의 고통 때문에 비관적이 된 나는 사랑으로부터 완전히 떠나버리기로 결심했다. 낭만적 실증주의가 도움이 될 수 없다면, 유일하게 유효한 지혜는 다시 는 사랑에 빠지지 말라는 금욕주의적 충고였다. 
그러다가 어느날 디너 파티에서 레이첼이라는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사무실 생활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나는 그녀의 눈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순간 나는 금욕주의적 철학을 내팽개치고 클로이에게 저질렀던 실수를 모조리 되풀이하는 이이 얼마나 쉬운지를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270
사랑에 고통이 없을 수 없고, 사랑이 지혜롭지 못한 것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잊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금욕주의의 핵심에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실망시킬 기회를 주기 전에 스스로 실망해버리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금욕주의는 다른 사람과의 애정에서 생기는 위험 사막에서의 삶보다 더 큰 인내심이 있어야만 직면하게 되는 위험에 대항하는 서툰 방어였다. 금욕주의는 감정적 혼란으로부터 자유로운 수도사적 존재를 요구한다고 하면서, 고통스러울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적 요구들의 정당성을 부정하려고 할 뿐이었다. 금욕주의자가 아무리 용감하다고 할지라도 최고의 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점, 즉 사랑의 순간에는 결국 겁쟁이에 불과했다.  272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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