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여행/인문, 철학'에 해당되는 글 325건

  1. 2016.01.14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 아니 에르노 열림원 1998 03860
  2. 2016.01.11 부끄러움 - 아니 에르노 열림원 2000 03860
  3. 2016.01.07 탐닉 - 아니 에르노 문학동네 2004 03860
  4. 2016.01.04 집착 - 아니 에르노 문학동네 2005 03860
  5. 2015.12.28 소설 (하) - 제임스 미치너 열린책들 2009 03840
  6. 2015.12.24 소설 (상) - 제임스 미치너 열린책들 2009 03840
  7. 2015.12.21 프래니와 주이 - J.D.샐린저 문학동네 2015 03840 1
  8. 2015.12.07 심리정치(신자유주의의 통치술) -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2015 03100
  9. 2015.12.03 에로스의 종말 -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2015 03100
  10. 2015.11.30 피로사회 -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2012 03100 2
  11. 2015.11.23 포옹 - 필립 빌랭 문학동네 2001 03860
  12. 2015.11.19 단순한 열정 - 아니 에르노 문학동네 2012 04860
  13. 2015.11.12 소송 - 프란츠 카프카 열린책들 2011 03850
  14. 2015.11.05 남자의 자리 - 아니 에르노 열린책들 2012 03860 2
  15. 2015.11.02 한 여자 - 아니 에르노 열린책들 2012 03860 1
  16. 2015.10.29 리스본행 야간열차 - 파스칼 메르시어(페터 비에리) 들녘 2014 04850
  17. 2015.10.22 동물농장 - 조지오웰 열린책들 2014 03840
  18. 2015.10.19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 히가시노 게이고 현대문학 2012 03830
  19. 2015.09.21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2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문학동네 2009 04870
  20. 2015.09.18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1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문학동네 2009 04870
  21. 2015.09.09 오베라는 남자 - 프레드릭 베크만 다산책방 2015 03850 11
  22. 2015.08.26 투명인간 - 성석제 창비 2014 03810
  23. 2015.08.21 투명인간 - 허버트 조지 웰스 열린책들 2014 03840
  24. 2015.08.07 빅 퀘스천(대답을 기대할 수 없는 큰 질문들) - 더글라스 케네디 2015 03840
  25. 2015.08.04 김대식의 빅퀘스천(우리 시대의 31가지 위대한 질문) - 김대식 동아시아 2014 03400
  26. 2015.08.01 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언 - 더글라스 케네디 밝은세상 2014 03840
  27. 2015.07.24 원 플러스 원: 가족이라는 기적(one plus one) - 조조 모예스 살림 2014 03840 1
  28. 2015.07.21 미 비포 유(me Before you) - 조조 모예스 살림 2013 03840 1
  29. 2015.07.15 초인수업(나를 넘어 나를 만나다) - 박찬국 21세기북스 2014 03100
  30. 2015.07.10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 요나스 요나손 열린책들 2014 03850


이제는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어머니가 나의 어린 딸이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어머니가 될 수는 없다.



작가의 말


나는 세르지에 있는 우리 집으로 어머니를 모셔 가기로 결심했다.  9


나는 어머니가 아직 우리 집에 머물렀던 바로 그 기간 동안 나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어머니의 여러 가지 행동들과 어머니가 한 말들을, 날짜도 쓰지 않은 채 종이 조각들 위에 적어두기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가 그처럼 피폐되어가는 모습을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 날 화가 나서 어머니에게 "제발 미친 짓 좀 그만 하세요!"라며 고함지르는 꿈을 꾸었다. 그후로 나는 퐁투아즈 병원에서 어머니를 문병하고 돌아올 때면 점점 더 절박하게 느껴지는 어머니의 말들과 모습을 어김없이 적어야만 했다.  10-11


나는 추호도 어머니 곁에 있었던 그 순간들을 수정해서 옮겨 적고 싶지 않았다.  12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라는 말은 어머니가 글로 쓴 마지막 문장이다.  13



1984년


1월


어머니는 더러워진 팬티를 베개 밑에 감추어둔다. 오늘밤 나는 예전에 어머니가 감추어두곤 했던 피투성이의 팬티들을 생각해보았다. 어머니는 세탁하는 날까지 창고 속에 넣어두는 더러운 속옷 더미 속에 그 팬티들을 깊숙이 파묻어두곤 했다. 그때 내 나이는 대력 일곱 살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황홀에 겨워 피 묻은 팬티들을 들여다보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 어머니의 팬티는 똥투성이인 것이다.  18-19


나는 어머니가 전에 쓰기 시작했던 편지 한 장을 발견했다. '사랑하는 폴레트,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았어'라고 적혀 있었다. 어머니는 이젠 글마저도 쓸 수 없게 되었다. 이 편지의 글들은 마치 전혀 다른 여자가 써놓은 것 같았다. 어머니가 이 편지를 쓴 것은 바로 한 달 전의 일이었다.  19


토요일이다. 어머니는 커피를 토해내고는 기진맥진하여 꼼짝 않고 누워 있다. 한층 더 작아진 눈 주위가 붉게 가라 앉아 있었다. 옷을 갈아입히려고 어머니의 옷을 벗겨보니 아직까지도 살결이 희고 부드러웠다. 옷을 갈아입힌 후 나는 울었다. 예전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지금 다름아닌 내 몸을 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까봐 두렵다. 어머니가 세상에 없느니 차라리 미쳐서라도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  20-21


2월 25일 월요일

우리가 응급실에서 두 시간이나 기다리는 동안 어머니는 들것에 실려 누워 있었다. 그 사이 어머니는 오줌을 누었다...우리가 진찰실로 들어가 보니 어머니는 진찰대 위에 몸을 길게 쭉 펴고 누워 계셨다. 인턴이 복부까지 어머니의 잠옷을 걷어올리자 넓적다니, 음모가 없는 맨송맨송한 음부, 그리고 몇 군데 파열된 피부의 줄무늬가 눈에 띄었다. 대번에 내가 그처럼 적나라하게 전시되어 누워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열다섯 살 때 죽음 암고양이가 생각났다. 그 고양이는 죽기 전에 내 베개 위에다 소변을 보았다. 그리고 20년전 낵가 유산했을 때 쏟았던 피와 분비물들도 생각났다.  21


3월 28일 화요일

쭈글쭈글 흉하게 변해버린 어머니의 두 손. 관절로부터 불쑥 튀어나온 집게 손가락은 새의 발톱과 흡사하다. 어머니는 손가락을 깍지낀 채 비비적거렸다. 난 어머니의 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24


4월 14일 토요일

어머니는 내가 가져온 딸기 파이를 먹고 있다. 크림 한가운데 들어 있는 과일을 파먹으면서 "여기서는 나를 소홀히 대접해. 검둥이처럼 일만 시키고 먹을 것도 잘 주질 않아" 하고 불평했다. 가난한 사람이 될까봐 두려웠던 어머니의 강박관념을 나는 잊고 있었다.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독일 포로 수용소 부헨발트의 유령처럼 바싹 말라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어떤 여자가 무시무시하게 눈을 부릅뜬 채 아주 똑바른 자세로 우리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잠옷을 들추자 기저귀 찬 팬티가 보였는데 음부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이와 똑같은 장면이 텔레비전에서 방영된다면 소름끼치도록 혐오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비일비재한 이곳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이건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일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여자인 것이다.  26


4월 부활절 일요일

어머니의 옆사람은 한 손을 팬티 속에 집어넣은 채 자고 있다. 그것은 슬픔을 넘어선 참혹한 모습이었다.  27


4월 29일 일요일

어머니는 일시적으로 제장신이 들자, "난 죽을 때까지 이곳에 있을 테다"라고 말한 후 "난 네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다했다. 그런데 그 때문에 너는 한층 더 불행했을 거다"라고 말했다.  28


5월 13일 일요일

이곳 우스(발두아즈 내에 있는 마을로서, 이곳에 사설 양로원이 있다)는 퐁투아즈보다 환경 조건이 여러모로 열악하다. 간병인이 내게 "당신 어머니가 오줌을 누었어요. 방안 여기 저기에 오줌을 누고 다니니 어쩜 좋아요, 그래"라며 나무라듯 말한다.

어머니를 때려주고 싶은 사디즘적 욕구가 솟구쳐 올라와 나 자신이 소름끼치도록 무서웠다...

오늘 내 안에서 비집고 올라왔던 사디즘적인 욕구는 돌이켜보면 내 어린 시절, 다른 소녀들에게 느꼈던 가학적 욕구와 다르지 않았다. 아마도 어머니가 자꾸 나를 공포에 떨게 하므로 보상심리에서 내가 가학적 욕구를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  30


6월 15일 금요일

내가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찌푸린 표정으로 승강이 옆에 앉아 있었는데 아주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복도에서 어머니는 허리를 반쯤 구부린 채 당신의 병실 쪽을 향해 걸어갔다. 어머니는 마카롱 과자를 주자 먹지는 않고 부스러뜨리기만 했다. 내게 이런 식으로 사랑을 요구하고 있는 어머니를 보니 울고만 싶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드릴 수 있는 사랑이란 이 이상 더는 충족시켜 드릴 수 없는 한계에 달한 사랑이었다.  35


6월 23일 토요일

1층 로비에는 파자마를 입은 한 노인이 항상 진을 치고 있었는데 전화를 걸려고 무척 애를 썼다. 어느 날 이 노인이 종이 위에 적힌 전화번호를 내게 보여주길래 그대로 다이얼을 돌려주었지만 틀린 번호였다. 하루 종이 ㄹ이 노인은 아마도 어떤 단체 혹은 자식들 중의 하나인 듯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싶어했지만 그것은 매일 아침 반복되는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극도로 쇠약해진 어머니는 아무것도 쳐다보지 않는다. 거의 타인과 격리된 상태이다. 어머니는 이젠 개인 소지품을 몽땅 잃어버리고도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 모두 포기해버린 것이다. 어머니가 우리집에 있을 때 화장품 도구 세트를 찾아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애쓰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사물들에 집착함으로써 세상에 매달려 있고자 고군분투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이제 아무것도 가진게 없다. 손목시계도 화장수마저도 없어지고 지금 갖고 있는 것이라곤 먹을 것 밖에 없다.  36-37


8월 24일 금요일

난 지금, 나도 모르게 치솟아 오르는 감정에 편승한 채 글을 쓰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하고 있다.  42


9월 29일 토요일

내가 식당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 틈에 끼여 있던 어머니만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항상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어머니가 예측할 수도 없는 일을 저지른다는 점이다. 어머니가 드실 비스킷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려고 머리맡 탁자의 서랍을 열었다. 나는 서랍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당연히 과자라고 생각하고는 집어들었다. 그것은 똥덩어리였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당황한 나머지 얼른 서랍을 도로 닫아버렸다. 곧이어 떠오른 생각은, 만약 내가 서랍 속에 똥덩어리를 그냥 내버려둔다면 사람들이 이를 발견할 테고 그렇게 되면 어머니가 얼마나 쇠퇴해졌는지를 사람들에게 확인시켜주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를 은근히 바랬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종이로 싸서 화장실로 가져갔다.  48


12월 크리스마스

어머니의 손톱을 깎아드렸다. 아프지 않도록 온갖 정성을 들여 조심스럽게 깎고 있는데도 어머니는 지레 겁을 먹고 끙끙 신음소리를 낸다.  58




1985년 


1월 19일 토요일

어머니는 모든 기력을 총동원해서 게걸스럽고 억척스럽게 먹는 행동에 몰두한다.  61


6월 9일 일요일

어머니와 같은 병실에서 생활하고 있는 옆사람은 자기의 벽장 속에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끄집어내어 반시간 동안이나 정돈한 다음 다시 전부 제자리에 갖다 넣는다. 도대체 이런 행동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집에서 치매 초기 증세를 보이실 무렵 어머니 또한 왜 이 노인처럼 행동하셨던 것일까? 그들의 정신 속에 부재하는 질서를 외부에서라도 바로 잡으려는 생각에서 그러는 것일까?...

어머니는 내 친구가 날 만나러 올 때면 "아니! 누가 찾아 왔다"고 하시며 기뻐하곤 했다. 어머니는 방문을 아주 중요시했다. 그것은 사랑의 증거이며 타인이 마음속에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징표라고 생각했다.  77


9월 19일 목요일

어머니는 받기보다는 주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의 품위를 높이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인정받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 나 역시 어릴 적에는 사랑받고 인기를 누리고 싶어서 그림책과 사탕들을 나누어주길 좋아했었다. 그후론 준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 게다가 내가 지금 무언가를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주는 방법이 아닐까? 

어린 시절에 보앗던 광경이 떠오른다. 침대에서 어머니는 벌거벗은 채, 누워 계신 아버지 쪽으로 몸을 돌리고 계셨다. 아버지는 웃음을 터뜨리며 "예쁘지도 않네"라고 했다. 어머니의 음부, 즉 세계의 근원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90-91


10월 18일 금요일

어머니가 그랬듯이 시자에서 구걸하는 장님에게 적선했다. 

"인생을 살면서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만 한다"라는 어머니의 말에 비추어 본다면 적선을 하는 어머니의 행위는 그 동냥자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의무를 단념시키는 일을 한 결과가 된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이 말은 청춘 시절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터라 그때마다 얼마나 거부감을 일으켰는지 모른다.

어머니에 대한 환상적인 이미지가 내 머릿속에 그려진다. 가게에서 일할 때 입었던 작업복과 평상시에 입던 새하얀 블라우스 자락이 내 뒤에서 끊임없이 나부낀다.  94


10월 21일 월요일

어머니는 항상 사람들에게 말 한마디 던지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곤 했다. "누구한테든지 말을 적게 해라"하고 말하곤 했다. 

나는 어머니의 사고방식과 사랑했던 방식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어머니의 관점에 따르면 섹스란 겉으로 보기에 절대적인 악이었다. 실제로도 그런 것일까?  95


11월 3일 일요일

어머니는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양손이 생각대로 움직여주질 않아 한참 헤맨 후에야 두 손을 맞잡을 수가 있었다. 오른손이 마치 낯선 물체를 잡고 있는 양 왼손을 꽉 쥐고 있다. 과자를 먹으려고 시도할 때마다 입에 정확히 갖다 대지 못하고 빗나간다. 어머니의 손에 쥐어준 과자도 다시 떨어뜨리기 때문에 입 안에 넣어드려야만 했다. 어머니는 너무도 쇠약해졌고 그럴수록 동물적인 본능이 강하게 드러난다. 난 모든 것이 두렵다. 희미한 어머니의 눈빛, 어머니는 갓난 아이처럼 혀와 입술을 쪽쪽 빨아들였다 내밀었다 하다. 난 어머니의 머리를 빗기기 시작했고 머리를 묶을 고무줄이 없었기 때문에 머리 손질을 멈추었다. 바로 그때 어머니는 "난 네가 머리를 빗겨줄 때가 참 좋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말과 동시에 어머니의 모든 동물적 본능의 모습은 사라져버렸다. 말끔히 머리를 빗고 씻은 어머니는 다시 인간다운 모습을 회복한 것이다. 어머니의 머리를 빗겨주고 단장시켜주는 이 기쁨이여! 내가 병실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와 한 병실에서 생활하고 있는 옆사람이 어머니의 목과 다리를 쓰다듬고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살아 있다는 건 어루만지는 손길을 받는다는 것, 즉 접촉을 한다는 것이다.  96-97




1986년


4월 7일 월요일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 오늘 아침부터 내내 울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모든 것이 고스란히 거기 제자리에 있건만 생각은 멈추어버렸다. 그렇다. 정지해버린 것이다. 이렇게까지 괴로울 줄은 미처 몰랐다. 어머니를 다시 보고 싶은 욕망을 주체할 수가 없다. 이 순간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예측조차도 못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느니 차라리 미쳐서라도 살아 있기를 바랬다.

머리가 아프고 토할 것만 같다. 나는 어머니와 화해하려고 이 모든 시간을 보냈지만 충분히 화해하지 못했다. 어제가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날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114-115


4월 8일 화요일

일거수 일투족을 옮길 때마다 어머니와 관련되 추억들이 떠오른다. 어쩌면 난 이렇게 나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기록하여 진술함으로써 내부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의 뿌리를 끌어내어 고갈시켜버리고, 지쳐버린 고통이 더이상 작용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116


4월 10일 목요일

지하실로 내려가 보았다. 동전 지갑이 들어 있는 어머니의 여행용 가방과 흰색 여름용 핸드백, 머플러 몇 장이 있었다. 나는 여행용 가방을 벌려놓은 채 이러한 몇 가지 물건들을 앞에 두고서 멍하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 나 자신도 몰랐다.

내가 어머니에게 썼던 편지들도 거기에 있었지만 난 그것을 펼쳐보고 싶지 않았다. 차마 읽어볼 수가 없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는 단지 두세 번 정도 이런 상태를 경험했다. 실연의 슬픔을 겪었을 때와 유산을 한 후에 나는 지금처럼 제정신이 아니었다.  118-119


4월 12일 토요일

내가 어린 시절에 살던 동네의 어떤 여자는 10개월 된 어린딸아이를 잃어버리고서도 오후에는 미장원에 갔다. 지금에서야 나는 그 여자의 심정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같다. 기대를 망각해버리려는 그 심정을.  124


4월 20일 일요일

50세 때 찍은 어머니의 사진들을 들여다보았다. 생기가 넘쳐 흐르는 얼굴과 적갈색의 금발머리를 늘어뜨리고 있는 어머니는 꼭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흑백 사진이었지만 햇빛이 내리쬐고 있어서 마치 컬러 사진을 보고 있는 것같았다.

오후 서너 시쯤 되면 2주일 전 어머니가 살아 있었던 그 마지막 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128


4월 28일 월요일

오늘 아침, 계산서에 적혀진 막힌 물이라는 말을 읽으면서 내가 예닐곱 살 적에 이 말을 꽉 막힌 놈이라고 부르곤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부르던 어머니의 별명이었다. 눈물이 흘러 내린다. 유수 같은 세월의 흐름 때문이다.  128-129




옮긴이의 말


이 작품에서 에르노는 자신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일상적 소재를 깊이 있게 응축하는 데 단문과 극도의 생략법을 사용하고 있다...명사 혹은 부사로 압축되어 끝나는 단호한 문장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인식해가는 작가의 절박한 심정을 그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또, 작가의 침묵적 고백, 이것은 인간의 삶 속에 필연적으로 내재된 실존적 고독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31-132


글쓰기를 통해 현실적 삶의 고통에 밀착되어 떠나지 않으려는 작가의 의지는 독자로 하여금 소중하고 경건한 고통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동시에 삶에 대해 끝없는 희망을 가질 의무를 부여해 준다.  133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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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넘었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어머니는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아버지와 한바탕 벌인 말다툼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주엥도 쉽게 멈춰지지 않았고, 식탁을 치우고 밀납을 입힌 식탁보를 훔쳐낸 뒤에도 그칠 줄을 몰라싿. 어머니는 연신 아버지를 비난하며 매번 화가 날 때마다 그랬듯이 쥐구멍만한 부엌-식당과 식품점을 겸하는 가게와 2층으로 연결된 계단 사이에 끼여있는-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버지는 묵묵부답 창가 쪽으로 고개를 발작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 아직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낯설고 탁한 목소리로 악을 쓰고는 내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주넉으로 때리며 식당으로 질질 끌고 나왔다. 나는 2층으로 도망쳐 침대로 몸을 던지고는 베개 속에 머리를 파묻었다.이내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살려!" 하는 목소리가 식당 쪽 지하로부터 들려왔다. 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온 힘을 다해 악을 썼다. "사람 살려요."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어개인지 목덜미인지를 틀어쥐고 있었다. 아버지의 손에는 평상시 나무 둥치에 박혀 있는 낫이 들려 있었다. 지금 기억나는 건 울음소리와 비명뿐이다. 잠시 후 우리 세 식구는 다시 부엌에 모였다.  7-8


아버지는 "넌 왜 울어.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다고?"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머니는 "자, 이젠 끝났다."라는 말을 했다.

1952년 6월 15일의 일이었다.

훗날 몇몇 사람에게 나는 "내가 열두 살 무렵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려 했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 말을 털어놓고 싶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9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만 해도 나는 자세한 부분까지 낱낱이 기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실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란 그저 그때의 분위기나 부엌에서의 각자의 위치, 몇 마디 말뿐이었다.  10


나는 정신분석이나 가족 심리학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위압적인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죽음으로 위협해서 그녀에 대한 복종심을 파괴한 아버지 등등. 이러한 초보적 결론을 내리는 것이라면 이미 옛날에 어렵지 않게 얻어냈을 것이다. '그건 가족에 대한 정신적 외상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라거나 '유년기의 신의 이미지가 그날부터 몰락한 겁니다.'와 같은 말은 그 장면에 대한 어떤 해석도 하지 못하며, 그 순간 내게 떠오른 '재수 옴 붙었네.'라는 표현만이 그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다. 추상적 단어들은 그저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21


당연히 현실을 추적하는 대신 현실을 생산하고자 하는 옛날 이야기는 꾸며내지 말 것, 추억 속의 이미지를 거론하여 번역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이 이미지를 다양한 접근 방식을 통해 스스로 속살을 드러내는 자료로 취급할 것. 한마디로 나 자신의 인류학자가 될 것.  27


인생의 시간은 '무엇 무엇을 해야 하는 나이'로 구분된다. 영세를 받을 나이, 손목시계를 선물 받을 나이, 여자 아이는 처음으로 파마 머리를 할 나이, 남자 아이들은 첫 양복을 입는 나이, 첫 월경을 하고 스타킹을 신는 나이.

식사주엥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는 나이, 담배 필 권리가 있는 나이, 음담패설을 할 때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있는 나이. 

직장에서 일하고 댄스 파티에 가고 '데이트'할 수 있는 나이, 군대 갈 나이, 오락 영화를 볼 수 있는 나이, 결혼하고 아기를 가질 수 있는 나이, 검은 옷을 입는 나이, 더 이상 일하지 않는 나이, 죽는 나이.

이쯤 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되고 모든 것이 완성 된다.  42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는 말, '발전'되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는데, '발전'이란 거역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불가항력의 힘이라고 여겨졌다. 그 증거도 무수히 늘어나서 플라스틱, 나일론 스타킹, 볼펜, 소형 오토바이, 레토르트 수프, 그리고 의무 교육 같은 것이었다.

나의 열두 살은 이런 세상의 법칙과 관례 속에서 보내졌다. 다른 것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43


남들처럼 살자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목표이자 성취해야 할 이상이었다. 개성은 일탈, 심지어 조금 미친 것 같다는 증세로 간주되었다.  48


당시에는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실망했을 때는 '멍청했었지'. 불만이 있을때는 '나빴었지'같은 표현이 고작이었다.  51


(카톨릭 사립학교 시절) 사진이 있는 연애소설을 읽거나 일요일 오후 포토 회관의 댄스 파티에 가는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 번도 억압된 삶을 산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63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그들의 궁핍한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6월 일요일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 이상 인식하지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이 모멩 배어버렸기 때문이다.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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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화처럼 살고 싶다(voglio vivere una favola) -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성당 계단에서 본 익명의 낙서에서



서문


1989년 11월 16일.. 나는 한 해 전에 모스크바, 트빌리시, 레닌그라드를 여행하는 작가들의 모임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우리 여행의 수행역을 맡고 있었다. 우리는 레닌그라드에서의 마지막 밤을 함께 보냈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 우리는 관계를 지속했다. 우리의 행위는 의식처럼 일정했다. 그는 내게 전화를 걸어 그날 오후나 저녁, 드물게는 그 다음날이나 이틀 후에 만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는 와서 단 몇 시간 동안만 머물렀다. 우리는 그 시간에 섹스를 했다. 그가 떠난 후, 나의 일과는 다음번 전화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는 서른다섯 살이었다.  9-10


(그는) 고르바초프와 페레스트로이카의 지지자라고는 했지만 술에 취하면 브레주네프(구소련의 정치가, 스탈린 이후 최장기인 18년 동안 소련을 통치함) 시대에 대한 향수와 스탈린에 대한 흠모를 감추지 않았다.  10


이 기간 동안, 나는 잡지사에서 청탁해오 ㄴ원고 외에는 아무 글도 쓰지 않았다. 사춘기 때부터 불규칙적으로 적어오던 일기가 나의 유일한 글쓰기의 장이 되었다. 그것은 다음 만남을 기다리며 견디는 방법이었고 동시에 에로틱한 몸짓과 말들을 기록함으로써 쾌락을 배가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 

그가 프랑스를 떠난 후, 나는 내 온 존재를 기배했고 그때까지도 계속 내 안에 살아 있던 그 열정에 관해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간헐적으로 집필되었고 1991년에 쓰기를 마쳐 1992년 '단순한 열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11


2000년 1월인가 2월, 나는 5년 전부터 들춰보지 않았던, S에 대한 나의 열정의 시간에 해당되는 일기장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

나는 컴퓨터에 텍스트를 입력하면서 수정하거나 삭제하지 않았다. 생각이나 느낌들을 포착하기 위해 순간순간 종이 위에 나열해놓은 단어들은 나에게 시간만큼이나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다. 한마디로 그 단어들은 시간 그 자체다.  12




1988년


9월 


27일 화요일

S ... 이 모든 아름다움. 지난 1958년, 1963년, 그리고 P때와 똑같은 욕망, 똑같은 행위, 몽롱함과 무력감마저 똑같다.  17


나는 옛날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단지 아름다움, 열정, 욕망일 뿐.  19



10월 


3일 월요일

그는 나의 가장 '유치한' 부분, 그리고 가장 사춘기적인 부분을 대변한다. 별로 지적이지 않고, 큰 자동차를 좋아하고, 운전하면서 음악을 틀어놓고,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그는 '내 젊은 시절의 남자'이며, 금발이 약간 촌스럽다(손과 네모난 손톱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사랑은 나의 머리와 육체 속에서 한 가지일 뿐이다.  24


4일 화요일

그가 관계를 지속하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기다렸던가! '예쁘게' 치장하고, 준비하고, 그러나 아무것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다.  25


5일 수요일

아직도 내 안에 그가 남아 있다. 나의 모든 비극이 바로 거기 있다. 그를 잊을 수도, 홀로 설 수도 없다. 나는 그의 말, 몸짓을 빨아들인다. 나의 육체는 그의 육체를 흡수한다. 이런 밤을 보낸 후에는 일하는 것이 쉽지 않다.  26


6일 목요일

그는 여자를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여성 정치가들에 대해 비웃음을 금치 못한다. 그 여자들은 제대로 하는 게 없어, 등등. 그리고 나는 그런 것들을 재미있어 한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나의 이해할 수 없는 즐거움. 그는 점점 <빈 장롱>에서 내가 묘사했던 이상형, '내 젊은 날의 남자'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로제르 골목에 세워놓은 자동차 안에서 그가 절정에 이를 때까지 입으로 그를 애무했다. 그런 후, 우리는 끝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 눈을 뜨며 나느 ㄴ어제의 장면들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했다.  27


8일 토요일

"다음주에 전화할게." 이것은 '이번 주말에 당신을 만날 수 없어'라는 뜻이다. 나는 미소지었다. "알았어." 만남의 간격을 좀 두는 게 낫다는 것을 알면서도 질투로 고통스럽다. 육체의 향연 후에 나는 다시 혼란 속에 빠진다. 내가 너무 달라붙는 것처럼 보일까봐, 너무 늙어 보일까봐(늙었기 때문에 다라붙는 것이다) 겁난다.  29


12일 수요일

나는 단순한 생물로서 이것이 언제나 마지막인 것처럼-게다가 그렇지 않다는 법이 또 어디 있나- 사랑을 나눈다.  30


18일 화요일, 19일 수요일

그(아니 우리)는 점점 더 강렬하고 격렬한 욕망으로 사랑을 한다. 말하고 보드카를 마시고 또 사랑을 하고... 네 시간 동안 세 번. ..

간간이 사랑의 순간들을 다시 생각한다(그는 나에게 돌아누우라고 요구한다. 누워서 오럴 섹스로 절정에 오른 순간, 그는 신음 소리를 낸다. 그리고 내게 말한다. "당신 정말 기가 막히게 해." 그는 부드럽게 나를 자기 배 쪽으로 끌어당겨 사랑의 행위를 시작한다). 기억, 마비 상태, 이런 것들이 사라지면 나는 다시 그가 필요하다. 하지만 혼자다. 다시 기다리기 시작한다.  33-34


25일 화요일

요즘처럼 내가 아름다웠던 적이 없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어제 오샹(대형 슈퍼마켓 상호)에서도 그랬듯이 나를 유혹하려는 남자들은 수도 없이 많다. 스무 살, 서른 살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37


27일 목요일

한밤에 불리는 내 이름, 쾌락의 신음 소리, 그의 성기에 대한 숭배. 그를 열렬히 애무하는 나를 보려고 그가 몸을 반쯤 일으켰을 때(우리가 처음 관계 맺기 시작했을 때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십자가에서 떼어낸 나신의 예수 그림을 생각했다. 너무나 나른하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에 관해서 쓰는 것, 너무나 신비롭고 짜릿한 '그것'에 관해 쓰는 것 말고는.

이제 나는 사랑 속에서 진실을 찾지 않는다. 관계의 완벽성, 아름다움, 쾌락을 찾을 뿐이다. 상처주는 것을 피할 것, 즉 그에게 기분좋은 말만 할 것.  40



11월


15일 화요일 

눈을 뜨면서 기다림이 시작된다. '그후에'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그가 벨을 누르고 들어오는 순간에 정지한다는 말이다. 그가 오직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끊이없이 나를 괴롭힌다. 끝없는 불안감 때문에 이 이야기는 아름답다.  52


25일 금요일

호우헤 프랭탕 백화점의 '섹스 코너'에 가서 책들을 들춰보았다... 나는 를뢰 박사의 <애무에 관하여>, 그리고 75개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고 80만 권이 팔렸다는 <부부와 사랑> <육체적 사랑의 테크닉>을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내 뒤에 여자들이 서 있다. 나는 태연하다. 점원이 책을 포장했다. 나는 사람들이 내 이름을 알지 못하도록 은행 카드로 지불하지 않는다. 전철 안에서는 이 책들을 읽지 말아야지. 나는 완벽한 육욕과 승화를 위해 이 책들을 구입했다.  60



12월


6일 화요일

내게 세상에서 견딜 수 있는 두 가지는 오로지 사랑과 글쓰기다. 나머지는 암흑이다. 오늘 저녁에는 둘 중 아무것도 없다.  66


9일 금요일

내가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까봐, 특히 그에게 충분한 즐거움을 주지 못할가봐 두렵다. 하지만 이런 모든 두려움이 없다면 그것은 내가 무관심하다는 것을 의미하리라.  67


15일 목요일

너무 견디기가 힘들어 지금과 비슷했던 때를 떠올려본다. 어쩔 수 없이 1958년과 1963년이 떠오른다. 삶에 대한 흥미를 되찾기 위해서는 전화벨 하나면 충분하다. 언젠가 이 일기장을 읽게 된다면, "아니 에르노 작품에 나타난 상실감"이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작품 속에서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로, 나는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예외 없이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a) 초기에는 무관심, 더 나아가 혐오감까지도.

b) 주로 외모에 대한 '놀라운 발견'.

c) 잘 절제된 즐거운 관계. 가끔 싫증을 느끼는 시기도 있지만.

d) 고통, 중독으로 인한 끝없는 결핍감. 그러고는 극심한 고통(나의 현재 상태). 행복한 순간들은 미래의 고통일 뿐. 고통을 가중시키기만 함. 

e) 끝으로 이별. 가장 완벽한 단계인 무관심에 도달.  71-72


그를 생각하면, 내 방에 있었던 그의 나신이 보인다. 나는 그의 옷을 벗긴다. 그의 발기한 성기와 욕정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73


20일 화요일

혼외관계라는 틀 속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형화'되지는 않은 것 같다. 성적 집착도 있고, 약간 미친 듯도 하다. 그에게 내가 어떤 존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것-P와 사귀었을 때보다 어렵다-은 매우 도발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75


24일 토요일

나는 어머니가 노인병원에 있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끊임없이 이 노트에 기록하고 있다.  77


27일 화요일 

물론(나는 기다렸지만...) 예상대로 그는 '내일이나 모레'에 전화히자 않았다. 울고 싶고 구토가 난다. .. 오늘밤, 그의 부재와 혐오감이 엄청난 무게로 나를 누른다. 잠을 자야지, 자야지.  79


28일 수요일

한숨도 못 잤다. 끔찍한 상태다...

나는 굶주린 여인이다. 이것이 나에 관해 거의 유일하게 정확한 표현이다.  79-81


30일 금요일

이런 생각들로 꽉 찬 "나는 안나 카레니나다". 브론스키에게 미친 안나. 두려움.  82-83




1989년


1월 


1일 일요일

가끔 그랬듯이, S에게 편지를 쓸지도 모르겠다. 그가 오면 그 편지를 줄 것이다. 전화와 마찬가지로 편지도 보낼 수 없다! 좋은 소설감이다.  88


4일 수요일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연애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왜 사랑을 바라는가? 그는 내게 아무것도 약속한 적이 없고 나 자신도 아름다움밖에 바라는 것이 없는데, 그러나 더이상 아름다움은 없다. 이제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90


6일 금요일

소유권을 나타내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 공세를 하는 심리를 이해할 수 있다(프루스트 <갇힌 여인>).  92


8일 일요일

S에 대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점 중에서 확실히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 첫째, 지적으로 더 우월하고 약간의 질투심을 가진 여자와 함께 있는, 젊고 잘생긴 바람둥이(내 남편과 나의 경우). 둘째, 약간 내성적이고, 자기 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별로 바람을 피우지 않는 남자. 섹스할 때의 그의 태도나 경험 부족으로 봐서는 둘재 경우가 맞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아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기 전에 나 혼자서는 결코 정확히 알 수 없으리라.  


9일 월요일

간절한 기다림. 내가 이런 세세한 것까지 기록하는 이유는 기억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93


12일 목요일 

서로 못 본 지 벌써 1주일이 넘었다. 나에겐 다음 약속 날짜말고는 다른 미래가 업삳. 그리고 다음 약속이 정해지지 않는 한, 미래도 없다.  97


28일 토요일

독일에서 돌아옴. 그곳에서는 고통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파리가 가까워올수록, 기다림과 욕망이 되살아난다.  104


31일 화요일

그가 결별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징조들을 모두 모으려는 순간, 전화가 왔다. 5시에 온단다...

21시. 그가 막 떠났다. 기진맥진한 육체. 이보다 피곤할 수 없다. 다른 애인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의 웃음. 어린애 같은 웃음.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언제나 소파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그가 그것을 좋아하는 것을 안다. 그는 반쯤 옷을 벗고 눕는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의 머리서부터 성기까지 천천히 애무하고 나서 입을 맞춘다.  107



2월


1일 수요일

상대방의 몸을 배우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109


5일 일요일 

나는 전화로 그에게 "당신을 원해"라고 말했다. 그는 거북한 어투로 "아!"라고만 대답했다. 말해선 안 되는 것을 그가 드덱 하는 이상한 대화. "당신에게 말하는 게 나아, 안 그래?" "그래." 그가 대답한다. "말하는 게 나아, 아니면 말하지 않는 게 나아?" "말하는 거." 하지만 그가 전화로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처음인 게 확실하다. 어쩌면 그는 내가 에로틱한 대화를 주도하기를 무의식적으로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110


10일 금요일

글은 욕망을 유지하게 한다.  112


24일 금요일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읽는다.  120


27일 월요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S와의 오늘 저녁은 너무나 열정적이어서, 마치 내가 용서받은 것 같았다. 다섯 달이 지난 후 또 새로운 쾌락을 발견했다(발견하는 사람은 언제나 나다...). 부드러운 애무와 육체에 취한 나머지 아무 생각이 없다. 우리는 텔레비전 앞에서 함께 얕은 잠이 들었다. 그는 남성다움과 나르시시즘을 부각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좋아한다.(나는 그의 뒤에서 손으로 그의 성기를 잡고 자위행위를 대신해준다. 그는 내 손만 볼 뿐, 나는 보지 못한다.) 에로티시즘과 많은 가능성을 발견해가면서...  122


28일 화요일

오후 내내 그를 용두질시키는 내 손을 보기 위해 몸을 숙이고 있던 장면이 계속해서 떠올랐다(나는 그의 뒤에 있었다). 그는 사춘기였을 때의 행동을 되새기거나, 어쩌면 좀더 어렸을 때의 환상을 반추하는 듯하다. 그의 추억을 되살리고 그와 함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갔음에 행복감을 느낀다.  123



3월


10일 금요일

지나가는 푀조 405 또는 505 자동차를 볼 때면, S가 이런 유의 남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대형 승용차를 선호하고 출세에 몰두하는 나르시시스트, 그리고 내가 작가라는 사실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으로 섹스 생각이 날 때마다 만날 수 있는, 그의 물건을 불끈 달아오르게 해서 사정하게 해주는 예쁘장한 여자라고만 생각하는 남자.  127


18일 토요일

오직 나만의 내적 결핍, 나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내가 필요로 했기 때문에 시작된 필립과의 결혼생활... S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나를 결코 사랑한 적이 없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의 젊음이며, 언제나 나를 매혹시키는 사람이며, 현 세계의 가장 큰 수수께끼인 소련이라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는 점이다.  132


21일 화요일

내 의사와 관계없이 3주 동안 그를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를 냉정하고 무관심하게 한다.  133


27일 월요일

노트 한 권에 다섯 달분의 일기밖에 적지 못했다... 이것은 내가 분석을 많이 할수록 글을 더 많이 쓰는 습관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하지만 집착의 괴력, 그 자체에 관해서는 어떤 분석도 할 수 없다.  135-136


28일 화요일

내가 이 노트에 일기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 필연적으로 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욕망의 종말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거역할 수 없는 순서를 따라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아직도 이 열정으로부터 빠져나올 힘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현재 매달리고 있는 것보다 좀더 확실하고 명확한 신호들이 있어야 한다. 모험을 하듯 결별의 편지를 써야 한나? 현재 상태는 필립 때와 비슷한 S의 무관심, 우유부단한 태도인 것 같다. 나를 버리려고? 그래.

편지를 쓰면 끝날 것이다. 그래서 쓸 용기가 나지 않는다.  137


30일 목요일

이 일기 속에서 그는 나에게 무엇인가? 나는 S에 대해 '계속' 쓰고 싶다. 가능할까? 나의 꿈은 휴가를 모스크바에서 보내는 것. 그곳은 S와 휴가를 보내기에 가장 '이상적인 곳'이다.  138



4월


4일 화요일

그가 방에서 옷을 다시 챙겨입는 끔찍한 침묵의 순간. 옷가지들 하나하나-내가 네 시간 전에 벗겼던 옷들-를 천천히 다시 입는다. 처음에 팬티, 메리야스, 그 다음은 바지, 혁대, 셔츠, 넥타이, 구두(양말은 절대 벗지 않는다). 이 의식을 보는 내 가슴은 찢어진다. 이별, 무한히 느릿한 슬로 모션...

그의 기둥서방 성향. 시바스리갈 위스키 반 병을 마시고, 뜯은 말보로 담배를 보루째 가져간다. 나는 어머니와 창녀를 겸한다. 나는 언제나 모든 역할을 다 맡는 걸 좋아했다.  141


13일 목요이

코펜하겐 넵튠 호텔의 방(1985년과 같은 호텔), 침대 옆 탁자 위에는 신약성서가 있고 텔레비전 위에는 포르노 영화 비디오테이프가 놓여 있다. 호기심에서 '언제' 볼까 망성인다(계산서에 포함되어 드러날 테니까!).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도 배우기 위해서.  143-144


28일 금요일

그는 어제 11시쯤 왔다. 욕정. 그는 무릎을 꿇고 내 성기에 입맞추었다. 크리스마스 이후 처음이다. 다정한 사랑의 표현.  151



5월


3일 수요일

결심 : 내가 저지(Jersey)로 떠나기 전에 그가 세르지에 오지 않는다면, 한 번만 더 만나고 결별을 한다. 아니면 전화로 끝낸다.  153


6일 토요일

오직 S만이 나의 관심사다. 나를 그에게 밀착시키는 이 힘은 아마도 그의 비밀스런 성격, 예측 불가능함, '기이함' 속에 있는 것 같다.

그가 침묵하는 원인에 대한 검토 :

1) 대사관 영화 시사회-나는 참석했고 그녀는 불참했던-와 관련해서 자기 부인과 다툼. 만약 내가 온 사실을 그가 감췄다면.

2) 내가 차로 데려다 주겠다고 제의한 알렝N에 대한 질투심.

3) 권태(내 꿈에서처럼), 그리고 만나는 간격을 늘여가면서 나를 버린다.

4) 업무, 내가 알지 못하는 일들(KGB가 아닐까?).  155


8일 월요일

저녁. 전화가 왔다. 아주 '평상시처럼'. 내 상상의 날개가 한꺼번에 꺾인다. 잠이 온다. 그와 결별하고 싶지 않다. 다음번까지..  157


12일 금요일

11시 445분. 그가 와서 다섯 시간쯤 머물렀다. 오래 전부터 이렇게 완벽한 시간, 이처럼 조화로운 시간이 없었다. 매번 다른 바업ㅂ으로 네 번의 정사를 나누다. (침실, 애널 섹스, 아주 부드럽고 오랜 애무 후에 아래층 소파에서 다정하게 남성 상위 체위로, 침실에서는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내 정액을 당신 배 위에 쏟을 거야." 소파에서, 완벽한 일체를 이루었던 애널 섹스.) 우리 둘의 육체, 존재에 대한 끝없는 갈망.  158-159


13일 토요일

그가 8월에 떠나는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오늘 아침 시내에서 운전하는 동안 끝없이 눈물이 흘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떴을 때처럼. 그리고 낙태 후 루앙 거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 삶에서 비밀스런 의미를 지닌 굵직한 선들. 아직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한 동일한 상실, 오직 글을 통해서만 그것을 진정으로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159-160


16일 화요일

지금에야 나는 사랑을 사랑하고, 섹스를 사랑한다. 더이상 슬프고 고독한 것이 아닌 사랑을 사랑한다.  161


20일 토요일

나는 결코 사랑이라는 감정의 힘을 믿은 적이 없다. 보통 사회적인 여러 요인들이 다분히 작용하기 때문이다.  163


21일 일요일

도서박람회. 그를 보지 못했다. 저녁에도 무소식. 그가 목요일대사관 영화 시사회에도 가지 않는다면? 혹 다른 여자라도 생겼다면? 이 고통스런 기다림은 그가 또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 수많은 여자들과.  164


27일 토요일

2년 전부터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다. 더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 남자와 글 사이를 오가는 지옥 같은 순환.  170



6월


3일 토요일

지금 내 가슴을 뭉크랗게 만드는, 정액을 연상시키는 어떤 것-그전에는 혐오하던 냄새-들이 있다. 5월 12일에 그가 내게 한 말. "당신 배 위에 사정해도 돼?" 그후로 엄청난 세월이 흐른 것 같다. 이런 추억들은 매번 생각할 때마다 나를 전율케 한다. 그는 이제 오지도 않고, 이런 말들을 다시 하지도 않을 것이다. 러시아 식으로 짤막하게 발음하는 말들. 정액에 대한 혐오감이 그리움으로 변한 것으로 그에 대한 내 애착의 강도를 가늠할 수 있다..

밤에 르 루아레에서 온 S의 전화로 행복이 절정에 이른다.  173


11일 일요일

불면의 밤. 또 한 번 레닌그라드를 떠올린다. 그때의 기쁨, 그때의 감각들을 되살려본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는 내게 별로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다. 그저 하룻밤 상대였을 뿐. 내가 레닌그라드의 밤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가 그후 섹스를 한 수십번의 밤과 오후 때문이다... 요즘 나는 반쯤 마취 상태에 있다. 글을 쓸 의욕도 책을 읽을 의욕도 없고, 이제는 습관 같은 그의 무소식에도 걱정조차 되지 않는다.


15일 목요일

반쯤 의식이 들면서 깨어나는 순간에 끼어드는 진실들. S에게 나는 그저 섹스를 잘해서 가끔씩 만나볼 만한 여자일 뿐이다.  178 


17일 토요일

육체는 숨결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무성(無性 없을무 성품성)의 생명이자 욕망이다.  180


19일 월요일

전화가 없는 날들에 점점 더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날짜를 꼽는다. 하지만 그는 아마도 시간에 대하여 나와는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181


29일 목요일

두 가지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 하나는 약속 없는 고통의 시간, 다른 하나는 오늘처럼 아무 생각 없이 곧 실현될,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실현될, 망연자실한 욕망의 시간이다.  188



7월


15일 토요일

그는 15시 25분, 30분경에 왔다가 20시 15분에 떠났다. 다섯 시간. 지난 겨울(11월)보다 약간 덜해진 그에 대한 욕정. 하지만 언제나 거듭되는 우리의 애무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어제 그에게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이럴 땐 대화가 더 많아진다. 비극은 가눌 수 없는 피로감이었다. 어젯밤, 나는 침대에서 움직일 수 없는 돌같이 누워 있었다. 그가 스며든 내 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특히 글쓰기 작업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보름 만에 만났다. 이제 이게 평균적인 간격이다. 1주일 정도면 좋겠다. 부인이 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나... 아니면 다른 여자인가? "여자들은 힘들어"라는 그의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가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애썼다는 말인가, 아니면 힘들게 다른 여자와 성공했다는 말인가? 일반적으로 그가 여자를 쉽게 유혹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199-200


27일 목요일

나는 그에게 말한다. "Ta tebya lioubliou.(러시아어로 '당신을 사랑해'라는 뜻.)" 그가 내게 러시아 마로 대답했다. 나는 이해하지 못해서 그에게 다시 한번 말해보라고 한다. "단지 마샤만 사랑해?" "응". 내가 대답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떠날 거야. 하지만 당신은 슬퍼하지 않겠지. 강한 남자니까." 그가 대답한다. "그래 맞아." 그가 떠날 시간이었다. 어떤 말로도 덮을 수 없는 그 말이 내 가슴을 찢어놓았다. "다음주에 당신에게 전화할게. 집에 있을 거야?" 라는 말뿐. 일순간에 정신이 번쩍 든다. 그를 거칠고(그리 심하지는 않지만), 즐기기만 하는(나쁠 것도 없지) 플레이보이 또를 고르비보이로 봐야 한다. 떠나며 탁자 위에 있는 말보로 담배 보루를 가져가도 되겠냐고 묻는 그 남자를위해 내가 1년이란 시간과 돈을 잃었음을 확인했다. 스무 살에나 마흔여덟 살에나, 언제나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남자 없이, 삶 없이 무엇을 하겠는가?  205-206



8월 


3일 목요일

이런 일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3일인 오늘 오후 16시 15분에 왔다(그리고 밤 10시에 떠났다). 육체적, 심리적으로 완전히 지쳐 있다. 광적인 섹스로 얼이 빠져 있다. 예외적으로 그가 만난 지 1주일 만에 왔다.(과거보다는 미래, 즉 내가 전혀 확신할 수 없는 것과 비교해보기 위해 이런 것들을 기록한다.) 처음으로 내 베개 밑에 그의 것으로 젖은 팬티를 하나 간직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예전과 달리 내 젖가슴을 삼킬 듯이 온 입으로 애무하고, 부끄러움 없이 벗은 채로 돌아다녔고, 지난번 내가 준 편지에 대해 얘기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내게는 아직도 불투명하고, 사랑을 증명하지 못한다. 물론 사랑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209


11일 금요일

우리는 사랑하고, 먹고, 애무했다. 땀이 범벅이 되어도 떨어지지 않는 입술. 그래,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긴가. 나는 어제 쾌락에 꽌한 나의 한계들을 또 한 번 넘었다. 그에게는 아마 퍼포먼스 같기도 했으리라.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오직 욕망만이 중요할 뿐...

흐린 날씨다. 머릿속도, 가슴도 나는 언제나 스물두 살이다.  212-213


18일 금요일

카날 플뤼스(유료 텔레비전 채널. 시청하기 위해서는 디코더가 필요한데, 이 장치 없이 보면 화면이 흐릿하고 음향이 없다)에서 디코더 없이 포르노 영화를 봤다. 처음엔 클로즈업된 성기들을 보고 놀랐다(특히 카메라를 가까이 접근시켰을 때가 매우 좋았다). 하지만 너무 기계적이라 별로 흥분되지 않았다. 그리고 음향이 없어서 책보다 덜 에로틱했다. 끝까지 다 보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아침 그 영상들은 나를 쫓아다닌다. 그것들은 명백한 '사용법'을 보여준다. 행위를 보는 것은 언어를 통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수행적(遂行的 드디어수 다닐행 과녁적)이다. 가장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장면은 남자가 여자 배 위에 사정하는 장면이다. "나는 그녀 위에 평화와 정액을 강물처럼 흐르게 하리라."(성경)  216-217



9월


1일 금요일

생일이 온다. 마흔아홉 살. 곧 끔찍한 '50대'가 된다.  223


5일 화요일

그에게 그가 태어난 날에 발행된 신문을 선물했다.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는 것이 그를 얼마나 행복하고 다정하게 만드는지. 이제 순조롭게 되어가는 건가?... "당신은 멋져"라고 그가 말했다. 그때처럼 우리는 서로 입술로 애무했다. 우리는 깊은 합일을 이뤘다. 나는 그가 나를 완전히 정복하여 내가 순종의 자세를 취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나를 등쪽에서 보고, 나는 그를 보지 못한다. 그리고 오럴 섹스. 아직도 그의 얼굴에 대한 기억들을 모으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고도 금방 잊어버린다...

곧 1년이 된다. 새로운 키스 방법과 욕망을 해소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끝없이 고안해야겠다.  224-225


7일 목요일

피렌체. .. 열정의 추억들을 남겨놓고 이제 곧 프랑스를 떠나려는 한 남자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오늘밤에도 나는 기차 안에서 끊임없이 지난 월요일의 장면들을, 그리고 내가 앞으로 준비하고 있는 장면들을 떠올렸다.  226


16일 토요일

돌아온 후로 계속되는 이틀간의 침묵. 그가 목요일에 전화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죽음이고 암흑이다. 지금 이 순간 그가 떠났다는 확신이 미친 듯이 나를 휘감으며, 그를 다시 볼 거라고 생각했던 피렌체에서 품었던 나의 기대가 혐오스러워진다.  240-241


28일 목요일

그를 보기 위해 이렇게 기다리는 것은 하나의 소유이고 재산이며, 그 나머지 시간들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이다. 그저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게 너무 어렵지만. 지금 나는 평소에 나를 사로잡고 있던 것들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에게 다른 여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번이 마지막은 아닐까? 등등.  247


29일 금요일

어제, 그와 함께 TF 1(프랑스 최대의 민영 방송국)의 멍청한 오락 프로그램들, 예를 들면 <정확한 가격 알아맞히기> 따위를 보면서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절망감을 느꼈다. 그가 얼마나 지적인 것과 거리가 있는지를 발견했다. 저녁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본 영화는 끝까지 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찌나 지루해하는지, 끊임없이 몸을 뒤틀며 보기 드물게 신경질적으로 굴었다.  249



10월


1일 일요일

이달이 가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침묵. 다시는 러시아 악센트의 '아-니'도, 자동차 소리를 기다리는 것도, 오후의 발소리도 들을 수 없겠지.  250


10일 화요일

"현재란 무엇인가?" 현재는 이곳에 존재한다. 그것은 버거운 미래와 두려움이다. 그를 볼 것이라는 행복감과 서너 시간의 만남이 흐른 후에 그를 더이상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감. 멍청한 노래 한 곡이 머릿속을 맴돈다.  253


12일 목요일

약간의 시간이 더 나아 있다... 그는 러시아 혁명 기념식 후에 떠난다. 사도마조히즘적 체험을 했다. 하지만 거칠지 않고 부드러웠다(애널 섹스와 '정상 체위'의 혼합으로. 완전히 녹초가 됨. 한순간, 그 부분이 찡어지는 줄 알았다). 그가 말했다. "아니(Annie), 사랑해."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자히 않는다. 섹스를 할 때 한 말이니까. 그러나 어쩌면 유일한 진실은 거기에 있는 것일지도.  254


19일 목요일

아직 샴페인 병은 가득 차 있고 위스키도 지난번보다 덜 마셨다. 사랑의 몸짓과 체위에 대한 끝없는 발명. 그의 성기 위에 샴페인을 부었다. 그런 것은 그가 해보지 않았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면서. 애널 섹스. "언제 어디서건, 당신이 무엇을 요구하건, 나는 당신을 위해 그걸 할 거야. 당신을 위해서 그걸 할 거야" 라는 나의 말에 당환항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싶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인 듯했다. 그가 먹고 있던 음식 조각을 내 입 안에 넣었을 때 그는 감동했다.

어쩌면 한 번 더, 단 한 번이라도 더... 모든 것, 애무, 희ㅣ한 말들, 또는 애정을 표현하는 구체적인 각각의 신호를 다 기억할 수가 없다. 가죽 의자 위에서 머리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하는, 놀라운 서커스 같은 체위. 나에게는 완벽주의적이고 창의적인 면이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내가 골몰하는 대상은 사랑이다.  258



11월


1일 수요일

5년 전부터 즐거움과 자신감(섹스, 질투심, 사회적 출신 성분 역시)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더는 수치심을 갖고 살지 않기로 했다. 수치심은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앞으로 더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또한 내게 글 쓰는 작업은 도덕적 기능을 지닌다는 생각을 했다. 때문에 예전에는 글쓰기에 대한 집념을 잃지 않기 위해서 사랑의 모험을 원치 않았다. 오랫동안-아직도 그렇지만-글을 써왔기 때문에 쾌락적인 삶은 내게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내 남편이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그가 글을 쓰지 않기 때문에 용서했다. 글을 쓰지 않는 인생이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먹고, 마시고, 섹스하는 걸 빼고는.  266-267


3일 금요일

내가 한 남자를 위해 러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268


7일 화요일

"다시 돌아올 거야." "나는 늙어빠졌을 거야." "내게 당신은 결코 늙지 않는 사람이야." "늙지 않도록 노력할게."

나는 왜 내가 작가이기 때문에 더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나는 작가가 아니다. 나는 글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일 뿐.)  273


9일 목요일

"언제부터 언제까지 나는 열정적인 사랑을 했다"로 시작하는 책을 쓰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사랑을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할 경우 S를 다시 볼 수 없을 것이고, 어쩌면 그에게 누를 끼칠지도 모른다. 어쨌든 다분히 한계가 있는 저술 계획뿐.  274


14일 화요일

아직 하루가 남았다. 나는 그의 좁은 미간과, 약간은 잔인해 보이는 치아로 거의 확실히 예견할 수 있었던 사실을 부정해보려고 애쓴다. 내가 그저 쾌락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는 사실. 그렇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잊으려고 애썼다. 남편과 보낸 18년보다 1년을 지우는 것이 더 힘들까? 증오는 그 세월을 지우는 걸 쉽게 하지만 사랑은 그것을 복잡하게 만든다.  277-278


15일 수요일

확실히 최악이다. 예전에 "아냐, 더이상 만나지 않을래, 더는 만나지 말자"라고 말하지 못했던 나의 나약함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내가 그에게 준 모든 것을 따져본다. 아주 치사하게. 뒤퐁 라이터, 파리에 관한 책, 고판화, 그가 태어난 날 발행된 신문, 말보로 담배 보루들, 수많은 위스키... 아마도 스무 병쯤, 최근에는 훈제 연어와 샴페인. 그는 세르지에 서른네 번, 스튜디오에 다섯 번 왔다. 아무 소용 없는 계산이다. 마흔 번이고 백 번이고 지금에 와서 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끝났다는 것,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맑은 의식이 주는 고통만이 남았을 뿐이다.  279-280


16일 목요일

한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거기 있는 것, 그리고 섹스하고, 꿈을 꾸고, 그가 또 오고, 섹스하고, 모든 것이 기다림일 뿐이다...

오샹 슈퍼마켓 정면 모퉁이에 있는 속옥 가게에서 보라색 브래지어와 가터벨트를 본다. 은행. 여자들이 내 앞에서 기다린다. 이 여자들은 한 남자를 잃는다는 것, 광적인 사랑을 잃는다는 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을까. "아니(Annie), 당신을 사랑해." "당신 정말 멋져." "아니(Annie), 나 사정할 거야." 그녀들은 느긋하게 기다리지 못한다. 나도 그냥 습관적으로 시계를 들여다본다. 하지만 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어떻게도 할 수 없이 많은 시간을, 내겐 미래가 없다...

니콜에게 전화를 했다. 나 : "그놈은 나쁜 자식이야!" 그녀 : "아냐, 그는 불행한 거야. 그래서 일부러 전화 안 한 거야." 내가 화조차 낼 수 없게 하고 가당치 않은 미미한 희망을 갖도록 해석하는 그녀가 원망스럽다. 이건 더욱더 가당치 않은 해석이다.  281-283


18일 토요일

살아남는다는 것은 참혹하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잘못 걸려온 전화다. 이상한 말투를 쓰는 여자였다. 사는 동안은 희망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황당한 순간에라도. 니콜과 한 소녀에 관한 꿈을 꾸다. 아버지도 꿈에 보인다. 우리가 읽는 에로틱하고 노골적인 책들에 반발하는 아직 젊은 아버지의 모습. 아마도 오이디푸스 콜플렉스일 것이다.

나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상태가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이다. 유일하게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리라. 나를 구한 것은 그녀에 대한 책이었다. 지금 나는 그에 관해 쓸 '권리'가 없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1982년 10~11월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쓰게 될 책과 상실의 결합...

내가 그를 사랑했던 것만큼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를 위해 나는 멋진 책을 쓰고 싶다.  285-286


24일 금요일

마지막으로 그를 본 지 18일이 지났다. 4월과 9월 가운데 24일간을 보지 않은 최고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기다리는 대상이 없다. 날짜를 꼽는 것이 이젠 아무 의미가 없다. 언젠가는 그를 본지 두 달, 석 달, 여섯 달이 되겠지. 우리가 마지막 만난 날 서재의 이중 커튼을 직접 치고 싶어한 그의 모습을 요즘 매일 저녁 커튼을 칠 때마다 생각하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나 : "커튼 치는 게 어려워..." 그 : "내가 할 수 있어!"  290


28일 화요일 

오늘도 아무 희망 없이 보낸 하루. 옛날 에는 내게 아무 감흥도 주지 않았던 노래를 듣는다. "그래, 나야 제롬이야. 아냐, 난 변하지 않았어/나는 너를 사랑했던 그때 그 사람이야..."(누가 불렀지? 클로드 프랑수아?) 아침식사를 하다가 운다. 그 노래가 돌아온 사람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이제 나는 언제나 S의 모습을 생각한다. 키가 크고, 부드럽고, 발가벗은, 말하자면 우리가 만나는 동안 내게 고정된 그 이미지 그대로, 그가 모든 것을, 눈부시게 에로틱했던 날들을 모두 잊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부재, 추억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긍정적인 점은, 내가S가 떠날 때처럼 차리고 있으면-내가 그를 언제나 입으려고 했던 이 검은 정장-아직도 남자들을 흥분시킬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때다.  292-293



12월


1일 금요일

잊기 위해서 재미있는 관계를 갖고 살고 싶은 욕망, 그냥 재미있는 관계(콘돔을 사는 것이 그 증상).  293


14일 목요일

문득문득, 끊임없이 떠오르는 S 생각, 솟구치는 눈물. 한 달이 지났는데, 아직 너무 힘들다. 물론 아무 희망도 없다. 그러나 이것을 쓴다는 것은 내가 희망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이성적 판단과 마지막 몇 달을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가 떠난 시점이 우리 관계의 확실한 종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98


15일 금요일

거의 한 달이 되어가는 지금, '내가 그에게 어떤 존재였나'라는 의문을 점점 더 냉정한 시선으로 볼 수 있다. 언제나 똑같은 이야기, 근본적으로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그 이야기를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난 1년 동안 내 관심을 끌었던 짧은 장면들이 생각난다. 로시아 호텔에서의 첫날 그의 얼굴과 미소, 그가 나를 포옹하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까진 나를 모르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그는 바람둥이 기질이 있는 것... 1988년 11월, '프랑스-소련 친선의 밤'에서 그가 대사관 여직원 일행과 떠나면서 의도적으로 짓던 표정.  299





1990년


1월


19일 금요일 

한 남자를 잃는다는 것은 한꺼번에 몇 해를 늙는다는것, 그가 있었을 때는 흐르지 않았던 그 모든 시간을 한꺼번에 늙는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상상속의 시간들을 한꺼번에 늙는 것이다. 이 욕망은 내가 어쩌면 다른 누군가와 똑같은 동화 같은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315


31일 수요일

내일이면 2월이다. 월 초마다, 매달 15일마다-은행에서 잊를 챙기듯-S가 서유럽으로 다시 와서 내게 전화하길 막연히 기다린다. 이제 곧 석 달이 된다. 어쩌면 이렇게 회복이 더딜까, 모든 것이 느리고 무가치하다.  317



2월


2일 금요일

글 쓰기 행위는 나에게 언제나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 S에게 품은 것과 같은 그 열정과 글쓰기가 절대적 가치라는 것에 대하여 나는 강한 확신을 품고 있다. 그것들이 순수함과 아름다움에 결부되어 있다는 생각과 함께.  319


29일 목요일

예전에는 '안정된 생활'을 위해, 그리고 '형제애'를 위해 남자를 찾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지금은 오로지 사랑만을 위해 남자를 원한다. 즉, 글쓰기와 가장 가까운, 나 자신의 상실을 위해, 빈 곳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기 위해 남자를 찾는다.  341





옮긴이의 말 - 고통과 열정의 외침

당시 35세, 아니 에르노는 48세였다.  346


자신의 애인이 작가라는 사실이 제일 중요한, 속물 같은 남자와의 육체의 향연에 에르노는 혼신의 정열을 기울인다.  346-347


그에게서 전화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거리의 거지에게 적선을 베풀기도 하고, 애인과의 완벽한 육체적 합일을 위해 포르노 영화나 사랑의 기교에 관한 책을 보고 연구하여 창조적이고 서커스 같은 체위를 직접 연출하기도 한다. 매번의 만남이 '쾌락의 한계를 넓혀가는' 시간이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그녀는 욕망과 에로티시즘에 '굶주린 여인'이다.  347


그런에도 점점 식어갈 수밖에 없는 열정에 대한 안타까움, 결별에 대한 두려움, 젊은 애인이 하눈팔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그의 아내에게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질투심... 그녀의 일기에는 사랑에 빠진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껴봤을 고통과 열정의 외마디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347-348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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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내가 쓴 글이 출간될 때쯤이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글을 쓰고 싶어했다. 나는 죽고, 더이상 심판할 사람이 없기라도 할 것처럼 글쓰기, 진실이란 죽음과 연관되어서만 생겨난다고 믿는 것이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9



육 년간의 관계를 끝내고 몇 달 전 W를 떠난 사람은 바로 나였다. 열여덟 해 동안의 결혼생활 뒤 다시 얻게 된 자유를 그가 처음부터 애타게 원했던 동거생활과 맞바꿀 수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싫증이 나서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후로도 계속 전화 연락을 주고 받았고, 가끔씩 만나기도 했다. 어느 저녁 그는 내게 전화를 걸어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나와서 한 여자와 함께 살 거라는 소식을 알려왔다. 그의 휴대전화로만 해야 하고, 만나는 것도 저녁이나 주말에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듯한 감각 속에서도 나는 새로운 무언가가 솟아올랐음을 깨달았다. 그순간부터 이 다른 여자의 존재가 나를 온통 사로잡았다. 그녀를 통해서가 아니면 더이상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11-12


어떻게 해서든 그 여자의 성과 이름, 나이, 직업을 알아내야만 했다. 개인을 정의하기 위하여 사회가 파악하는 이런 요소들은, 한 사람을 진정으로 알고자 할 경우 별 흥미로운 요소가 아니라고 흔히들 경솔하게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었다.  13


내가 만나는 여성들의 육체가 그 여자의 육체로 탈바꿈하는 현상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내 눈에는 '가는 곳마다 그 여자가 보였다.'  16


질투를 할 때 가장 이상야릇한 것은, 한 도시가, 온 세상이 결코 마주쳤을 일이 없는 하나의 존재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이다.  17


나는 그와의 헤어짐으로 인해 고통받기 시작했다.

그 여자에게 사로잡힌 상태가 아닐 때면, 나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의미를 띠게 된, 우리가 함께 보낸 과거를 악착같이 상기시키는 외부세계의 공격 표적이 되었다.  19


난 무엇보다도 우리 관꼐가 막 시작되던 무렵을, 내 일기에 적혀 있듯이 그의 페니스가 벌이는 '굉장한' 기교를 추억하곤 했다. 결국 내가 내 자기에 세워놓는 사람은 다른 여자가 아니라, 다시는 그렇게 될 수 없을 나, 사랑에 빠져서 그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으며 아직 우리 사이의 그 모든 일이 일어나기 직전의 나였다.

나는 그를 다시 소유하고 싶었다.  22


시나리오가 어떻든 간에 여주인공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면, 여배우의 육체를 빌려서 끔찍스럽게 배가되어 표현되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고통이었다.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영화가 끝나면 안심이 될 정도였다. 어느날 저녁에는 일본 흑백 영화를 보다가, 내 고뇌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고 느꼈다. 전후를 배경으로 한 그 영화에서는 끝도 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고통이 펼쳐지는 것을 봐도 충분한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육 개월 전이었다면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봤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싿. 사실, 열정의 폐해를 겪어보지 못한 살마들만이 카타르시스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23-24


우리는 변함없이 카페나 내 집에서 만나곤 했다.  25


만약 사회가 내 안에 잠재해 있는 충동에 재갈을 물리지 않았다면 내가 저지를 수도 있었을 행위들, 예를 들면 단순히 인터넷에서 그 여자의 이름을 찾아보는 대신 "갈보 같은 년! 더러운 년! 잡년!"이라고 울부짖으며 권총으로 그녀를 마구 쏘아대는 등의 행위들이 언뜻언뜻 떠올랐다. 게다가 권총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나는 커다란 목소리로 종종 그런 짓을 저질렀지 않은가. 결국 내가 겪는 고통, 그것은 그 여자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31


다시 자유로워지는 것, 내 안에 자리잡으 ㄴ이 무게를 바깥으로 던져버리는 것이 문제였기에, 내가 하는 모든 일은 그 목적에 맞추어 이루어졌다.

W가 나를 사귀게 되면서 버렸던 여자가, "바늘을 꽂아서 방자(남에게 재앙이 내리도록 귀신에게 비는 행위) 하겠어"라고 분노에 떨며 말했다던 그 여자가 생각났다. 빵의 말랑말랑한 부분으로 사람 형상을 만들어서 핀을 꽂을 수도 있다는 것이 더이상 천치 같은 생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동시에, 두 손으로 빵을 주무르고 머리나 심장 자리에 정성들여 핀을 꽂고 있는 내 모습을 떠올려보니,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가엾고 순진한 한 여자를 보는 것 같았다. '거기까지 내려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내려가보고 싶은 유혹에는, 우물 안으로 몸을 수그려 저 깊숙한 곳에서 떨고 있는 자신의 영상을 바라볼 때처럼, 사람을 끌어당기면서도 무시무시한 그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여기에 글을 쓰고 있는 행위도, 어쩌면 바늘을 꽂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32-33


그 여자와 W가 살고 있는 건무의 모든 입주장게 전화를 걸어보는 것-미니텔에서 이름과 전화번호를 찾아 명단을 만들어두었다-은 내가 가장 해보고 싶은 일이었고, 또한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36 51(발신자 제한번호)을 누른 다음 꼼꼼하게 모든 전화번호를 눌러보았다.  35


전화를 걸어본 이름들 중에 자동응답기에 자신의 휴대전화번호를 남겨놓은 도미니크 L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36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알고자 하는 욕망에 시달리던 내게, 제쳐놓았던 단서들이 갑작스럽게 다시 의미심장한 것이 될 때가 있었다. 잡다하기 짝이 없는 사실들을 끼워맞춰 인과관계를 부여하는 나의 능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가 다음날로 예정되어 있던 우리의 약속을 미루자고 한 날 저녁에 일기예보를 듣다가, 진행자가 "내일은 성 도미니크 축일입니다"라는 말로 일기예보를 마치는 순간, 그 여자의 이름이 도미니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내 집으로 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일은 그녀의 축일이니 함께 레스토랑에 갈 것이고, 촛불을 밝히고 저녁 식사를 한다든가 뭐 그런 일들을 해야 할 테니까. 이 추론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도미니크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갑작스럽게 차가워진 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은 나의 추론이 옳다는 확신을 주었다.

이러한 탐색과 광적으로 여러 단서들을 짜맞추는 행위를 보며 지능의 탈선적 사용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차라리 지능의 시적 기능, 문학과 종교 및 편집증엣 작동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그 기능이라고 하고 싶다.  38


나는 일기에다가 "다시는 그를 보지 않기로 결심했다"라고 적었다. 이 말을 적는 순간에는 더이상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글쓰기로 인해 고통이 가벼워진 것을 상실감과 질투가 끝난 것으로 혼동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기장을 덮자마자, 그 여자의 이름을 알고 싶으며, 그 여자에 관한 정보들을, 여전히 고통을 낳게 될 모든 것을 알아내고 싶다는 욕구에 다시금 시달렸다.  41


글쓰기를 통해 나의 강박증과 고통을 여기에 노출하고 있는 행위와, 랍 대로에 가면 그들 눈에 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노출을 두려워하던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글스기, 그것은 무엇보다도 타인의 시선엣 벗어나서 행하는 것이다. 나의 얼굴, 나의 육체, 나의 목소리, 나라는 인간의 특징을 형성하는 이 모든 것을 나와 마찬가지로 집어삼킬 듯 바라보고는 내팽개쳐버릴 누군가의 눈앞에 드러내는 것은 더없이 잔인한 짓이라고 생각했던 만큼이나, 지금은 내 강박증을 드러내고 헤집어보는 일이 전혀 거북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반항심도 전혀 없다. 진실을 말하자면, 난 정말이지 아무 느낌도 없다. 나는 나를 본거지로 삼았던 그 질투가 꾸며내는 온갖 상상과 행동들을 묘사하려고만 애쓰며, 개인적이며 내밀한 것을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는 실체로 변모시키려고만 애쓰고 있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 형체 없는 익명의 사람들이 아마도 그것들을 제 것으로 삼을 것이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더이상 나의 욕망, 나의 질투가 아니라 그저 욕망, 질투에 속하는 것이고, 나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곳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43-44


유일하게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그가 아직도 나를 만나고 있으며, 가령 얼마 전에 내 생일선물로 브래지어와 T팬티를 선물했다는 사실을 그 여자가 알게 되는 상상을 할 때였다. 그러면 온몸의 긴장이 풀어졌고, 진실이 드러났다는 지극한 행복감 속에 잠겨들었다. 마침내 고통이 육체를 바꿔 탄 것이다. 난 그녀가 느낄 고통을 상상하면서 내 고통을 일시적으로나마 덜 수 있었다.  49


가장 커다란 행복처럼 가장 커다란 고통도 타자로부터 오는 것 같았다. 나는 두려움 때문에 그 고통을 피하려고 앴는 사람들을 이해한다. 그들은 그 고통을 두려워하여 적당히 사랑하거나, 음악이나 정치참여, 정원이 있는 집과 같은 관심사의 일치를 더 중시하거나, 혹은 삶과 유리된 쾌락의 대상으로 여러 명의 섹스 파트너를 둠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이 육체적 사회적 고통에 비하면 비이성적이며 심지어 물의를 일으킬 만한 것일지라도, 하나의 사치일지라도, 나는 생의 평온하고 유익했던 몇몇 순간보다도 그 고통을 더 사랑할 것이다.  50


욕망이란 필요한 모든 것을 논거로 끌어다 사용하는 놀랄 만한 능력을 갖고 있어서, 나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잡지 속에나 굴러다니는 상투적이며 진부한 생각들을 내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 여자의 딸이 엄마보다도 훨씬 어린 엄마의 연인을 참아내지 못해서, 혹은 딸아이가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되어서 그들이 더이상 함께 살 수 없게 될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52


유일하게 진실한 것, 결코 말하지 않을 진실은 "난 당신과 섹스하고 싶고, 그 여자를 잊게 만들고 싶어"라는 말이었다. 그밖의 것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모두 허구였다.  53


어느 일요일 오후, 프랑스에 잠깐 들른 L과 극장에 갔다. 그를 다시 보는 것은 친 년 만이었다. 그날, 우리는 서로에게 저절로 이끌려 그의 부모 집 거실에 놓여 있는 소파 위에서 섹스를 했다. 그는 내가 아름다우며, 기가 막히게 잘 빨더라고 말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종종 성행위를 통해 얻고자 했던 '정념의 정화'-"아! 네 물건을 어서 넣어줘/ 그리고 끝장내버려/ 아!/ 그 이야기는 이젠 그만"과 같은 외설적 유행가가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성적 쾌락엣 모든 것을, 쾌락 이상의 것을 기대했다. 사랑, 융합, 무한, 글쓰기의 욕망, 이제껏 내가 그에게서 얻어냈다고 여기는 최상의 것, 그것은 냉철함으로, 감상주의에서 탈피해 갑자기 단순하게 세계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56-57


이제 나는 "당신, 페니스 좋아하지, 그렇지? 아무 페니스나 말고, 당신 거" 따위의, 예전엔 거리낌없이 서로 속삭이던 대화를 전화로 나누고 싶어져도 참게 되었다. 그런 말들이 지금의 그의 페니스를 부풀게 하기는 커녕 흥분을 싹 가시게 하는 외설스러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62


(학교에서 문학 텍스트의 구절들에 제목을 붙이듯이, 자기 삶의 순간들에 제목을 붙이는 것은 아마도 삶을 통제하는 수단이 아닐까?)


우리는 가끔씩, 순전히 의례적으로 전화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것 역시 끝났다.

그의 페니스가 생각날 때면, 첫날 밤에 본 모습이 그대로 떠오른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내 눈앞에, 거대하고 강력하며 끝이 버섯 갓 모양으로 부푼 채 불끈 솟아 있던 그의 페니스,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낯선 사람의 페니스를 보는 것 같다.  67


에이즈 검사를 받았다. 그것은 청소년기에 고해하러가던 것과 유사한 습관으로, 일종의 정화의식이 되었다.

이젠 그 여자에 관해서 이름은 물론 그 어떤 것도 알아내고 싶은 욕망이 조금도 없다(혹시라도 친절하게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사람들이 생길지도 모르니, 미리 정중히 거절한다는 의사를 밝히는 것이다). 마주치는 모든 여자들이 그 여자처럼 보이는 일도 없어졌다. 파리의 거리를 걸을 때도 이제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는다. [해피 웨딩]이 흘러 나와도 라디오 채널을 돌리지 않는다. 가끔씩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들지만, 더이상 담배나 약물에 의존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는 사람과 흡사한 정도다. 


글쓰기는 더이상 내 현실이 아닌 것, 즉 길거리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엄습하던 감각을 간직하는 방식, 그러나 이제는 '사로잡힘'이자, 제한되고 종결된 시간으로 변해버린 그것을 간직하는 방식이었다.  67-69





옮긴이의 말 - 질투의 심연에서 만난 치열한 글쓰기


'그'가 떠나갔다.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홀몸의 자유를 포기할 정도로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듯 미적지근한 연인관계를 유지해오던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 한들, 그것이 '나'의 삶에 무에 그리 영향을 미치겠는가? 하지만 '그'가 '나'를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서라면? 갑자기 '그'에 대한 '나'의 빛바래가던 감정은 애초의 생생한 색깔을 되찾는다. '나'와 '그'의 관계를 규정짓던 타성과 습관은 어느새 그 힘을 상실하고, '그'를 되찾고자 하는 '나'의 무시무시한 눈먼 욕망만이 길길이 날뛴다. 

아니 에르노의 <집착>은 이렇듯 '나-작가'가 겪은 질투에 관한 이야기이다.  73-74


에르노의 <집착>은 '자전적 허구'를 작가들의 노출 욕구나 배출 통로쯤으로 치부하던 독자들에게는 하나의 예외로 다가온다. 우선, 에르노의 글은 치열하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가장 내밀한 부분가지 올올이 드러낸다...

'글쓰기, 그것은 무엇보다도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서 행하는 것이다'라고 못박는 에르노에게 글쓰기란 타인의 시선에서 놓여난 시공간엣 행해야 할 작업이다.  75


에르노는 지극히 이성적이며 계산할 줄 아는 작가이다. 끊임없이 군더더기를 떨어내고, 치밀하게 자르고 다듬어 완벽하게 아귀를 맞추어놓은 문장들 사이에는 세워놓은 바늘을 바라보는 듯한 아슬아슬한 균형이 자리잡는다.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주어와 동사를 품지 않은 문장들은 이 벼리기 작업의 가시적 결과이다. 에르노의 글은 푸근하지 않고, 정련된 문장들이 안져주는 정신의 긴장을 즐기는 독자들로부터 그래서 더욱 인정을 받는다.  77


작가는 '주요 관심사'나 '점령'을 의미하는 'L'occupation'이란 제목을 고름으로써, '질투'의 두 가지 양상을 겨눈다. 하나는 질투의 메커니즘이 작동한 뒤로 어떤 다른 일에도 정신을 쏟지 못하고 '그 여자'를 찾아내는 일이 '나'의 '주요 활동'이 되어버린 것이며, 다른 하나는 마치 무엇엔가 들리기라도 한듯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여자'의 존재에 완전히 사로잡혀버린 '나'의 상태이다.  7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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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 칼 스트라이버트




"글을 쓸 때 혈관을 통해 뜨거운 피가 흐른다는 강렬한 의식이 없으면, 그 글에 어떤 중요한 의미가 담길 수 없다는 것이지요. 글쓰기란 곧 신체의 모든 부분을 다 동원해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겁니다. 스트라이버트 교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죠. '주전자의 물이 끓을 때 그 속에 모든 재료를 다 집어 넣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작가가 될 수 없습니다.'"  287


"만일 여려분이 각 인물들이 어떠한 감정에 휩싸여 있는지 상상도 못하고 또 그런 감정들과 자신의 감정을 일치시켜 어떤 공감도 이루어 내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작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대단히 가증스럽건, 고귀하건, 자기 희생적이건 혹은 대단히 속되건 간에, 여러분은 스스로를 고무하여 그 인물들의 상황 속에 자신을 위치시켜야 하며, 또 그 인물들의 가슴속에 파고들어야 하는 겁니다."

이 말이 끝나고 내 계보도를 소개하면서 나는 예의 그 의식을 치르기 시작했다. 즉, 사전에 아무런 설명이나 주의도 주지 않고 장차 작가가 되겠다고 모여든 학생들 가우넫 아무나 지목하여 자신을 무시무시한 곤경에 처한 계보도의 인물이라 가정하고 그럴 때 그 인물이 무슨 말을 했겠으며, 혹은 무슨 생각을 했겠는지 낭송해 보라고 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면 마치 고대 그리스 인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의 대사를 쓰듯 학생들은 그 인물들이 했을 법한 말이나 머릿속에 품었을 생각을 모두 말로 나타내야 했다.  288-289


"여러분이 의미 있는 서사의 비밀을 캐내기 원하신다면 단 네 명의 영국 소설가만 살펴보면 됩니다. 연대순, 그러니까 태어난 시간순으로 말하면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헨리 제임스, 그리고 조지프 콘래드입니다."  306


삶의 겉면망을 다룬 작가들이며, 그래서 훌륭한 작가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윌리엄 새커리, 찰스 디킨스, 토머스 하디, 존 골즈워드 이렇게 넷입니다. 이들 작가의 작품은 쉽게 읽을 수 있으며, 독자의 마음도 끌고, 또 재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어떤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을 제공해 주지는 못하는 소설가들입니다.  306-307


말하지 마라. 대신 글로 표현하라.  309


도시의 머리 위로 아침이 열릴 때쯤 나는 장차 교수로서의 나의 삶에 활기를 줄 진리들을 찾아 내었다. '예술가는 보통의 삶을 살 수도 없고, 살아서도 안 되는 창조적인 인간이다. 그는 자기 자신처럼 믿을 수 있는 자신의 친구들에게서 본질적인 것을 찾아내야 한다. 예술가의 임무란 사회에 신선한 충격과도 같은, 또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신랄한 그 사회의 초상을 그려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의 최고의 선, 즉 한 인간의 척도가 되는 행위란 친구에 대한 충직성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친구들에게 내보일 수 있는 신뢰감이 바로 선이다.' ...

내가 찾아낸 금싸라기와도 같은 진리를 잊어버리기 전에 기록해 둘 심산이었다. 그러나 종이에 적은 글을 다시 읽어 보았을 때 나는 뭔가 빠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몇 자를 더 적어 놓았다. '그리고 그 친구는 여성일 수도 있다'  323


데블런 교수님 "소설에서 역시 그 편지들을 차지하려 했던, 다소 역겨운 인물로 나오는 존 쿰너라는 영국인 말일세, 어쩌면 그자가 나일 수도 있겠고 젊은 미국인은 자네일 수도 있네." 곧 이어, 제임스의 소설에서 묘사된 것과 똑같은 집을 찾으려는 우리의 노력은 베네치아에 있는 실제 저택이 아니라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허구적인 삶이면서도 좁은 보도에서 우리 곁을 지나쳤던 살아 있는 이탈리아 인들의 실제 삶보다도 더 여실하게 보이는 소설적인 삶의 탐구로 바뀌었다. "그게 바로 소설이 해야 할 일일세." 데블런 교수님은 힘있게 말씀하셨다. "종이 위에 단어들을 연속해서 풀어헤쳐 놓는 것과 누구나 보통의 사전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그런 단어들을 풀어놓는 것은 바로 실제 환경 속에 있는 실제의 사람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일일세. 자, 우리가 이 쾨쾨한 냄새나는 운하와 마주하고 있는 저 낡은 집을 소설 속에서 묘사한다고 치세. 그렇다면, 가령 잠비아로 휴가를 떠나 그 소설을 읽는 어느 독자로 하여금 그 배경을 실제 육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게 하고, 또 그 심리학적 중요성까지 음미할 수 있도록 하려면 우리는 과연 50만 내가 되는 영어 단어들 중에서 어떤 단어들을 골라 써야 할까? 이용 가능한 단어들을 다 쓰면 되네. 마구 뒤섞여 있는 단어들 중에서 그냥 고르기만 하면 되지.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그 단어들을 올바른 질서로 배열해야 한다는 점일세. 그래야 우리가 노리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네.

그다음 우리는 만의 소설로 넘어갔다. 콜레라가 만연된 베네치아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콜레라가 없지 않습니까?"

"아닐세, 있네. 무서운 콜레라가 모든 서구 사회에 창궐해 있지. 신문과 전파를 통해 토하듯 쏟아지는 대중문화라는 콜레라 말이네. 그것이 모든 것을 죽이고, 또 모든 것을 싸구려로 만들고 있다네. 언젠가는 우리 목까지 그 오물 같은 콜레라가 차 오라 우릴 질식시키고 말걸세."

데블런 교수님은 떨쳐 버릴 수 없는 문명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조심스럽게 설명하시더니 그 불행한 통속성으로의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서 창조적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셨다. "가장 큰 적은 대중들의 수용에 있네. 왜냐하면 대중들이 인정해야 어떤 예술가가 대중 욕구의 최소 공통분모 정도는 만족시켰다는 점이 입증되기 때문일세. 하지만 예술가의 임무는 그런 것이 아니에. 예술가는 연구와 통찰을 통해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수준으로 올라서야 하는 것이고, 그다음 동료들과 소통하고, 또 그들을 찾아내고, 그들과 사상을 교환해야 하네. 그러고 난 다음 그들을 찾아내고, 그들과 사상을 교환해야 하네. 그러고 난 다음 그들이 관심을 쏟고 잇는 문제가 무엇인지 밝혀 내기 위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드는 것일세. 진정한 예술이란 고양된 수준에서 동등한 사람들끼리 의사 소통하는 것이지. 그밖의 다른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야."

나는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알 수는 있었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하지만 저는 교수님이 컬럼비아 대학에서 저희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통해 모든 글쓰기의 최종점은 출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것도 별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니 대체 어떤 의미인지.."

"자네 아직도 그 폭풍과도 같았던 강의를 기억하나? 그래, 조지 에리엇은 보물이고, 찰스 디킨스는 엉터리 약장수야. 그리고 조지프 콘래드는 고수하되 존 골즈워디는 버리게."

"하지만 그 작가들이 책으로 남겨 둔 것은 어떻게 하고요? 교수님이 폄하한 작가들이 무엇인가를 책을 통해 전파 시켰다면 그것 나름대로 어떤 건설적인 목적을 이룬 것을 아닐까요?"

"아닐세. 내가 무시하라고 한 작가들은 마취제와도 같은 존재들이지. 해도 없지만 아무런 득도 주지 못하는 작가들일세."

"그렇다면 출판의 존재 이유는요?"

"진정한 출판의 목적은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대화를 수행하기 위해서라네. 책상에 앉아 자네의 청중이 누구인지, 자네의 독자가 누구인지 한번 상상해 보게. 자넨 분명 훌륭한 학자가 될 테지만, 지식인으로서 자네의 임무란 바로 자네 세대의 최고의 정신들, 즉 베를린, 레닌그라드, 소르본 혹은 버클리에 있는 생각 깊은 남녀들과 교류하는 것일세."

"그렇지만 출판업이란 교수님이 경멸하는 책들을 팔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아냐, 그렇지 않아! 자네가 틀렸네. 칼, 출판사는 위대한 작품을 출판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쓰레기 같은 글들을 파는 것일세. 자,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쿄, 마드리드. 모스크바, 더블린, 그리고 두 곳의 케임브리지, 이런 지성의 중심지를 차지하고 있는 뛰어난 정신들의 그물망을 한번 상상해 보게. 그런 곳은 이 세계를 한데 결집시키려는 보기 드문 지식인들이 모이는 곳이라네. 그들과 얘기하고 그들을 격려하게. 그리고 자네의 명석함으로 자네가 끌어 모은 광명을 그들에게도 나누어 주게. 그 밖의 나머지 것들은 다 필요 없어."  326-328


우린느 역사적인 북부 도시 테살로니키를 통해 그리스로 들어섰다. 꿈을 꾸듯 반도를 따라 내려가는 동안 고대의 이름들이 현실의 것으로 불쑥불쑥 떠오르자 하늘까지도 달리 보였다. 데블런 교수님은 그 옛 이름들을 어찌나 많이 아시는지 나는 내 무지에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다 고전을 공부한 결과라네. 고전을 배워야 해. 자네도 그렇게 배웠을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처럼 가볍게 지나치는 정도로는 안 되지." 아테네에 도착하기 전 데블런 교수님은 "여기가 스파르타로 가는 분기점이네"라고 하시면서 코린토스의고대 운하를 가리키셔따. 높은 도로에서 보니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제2의 반도로 들어서기 위해 그 유명한 수로를 가로지를 때는 노예들이 힘차게 노를 젓는 고대 그리스의 전함들이 깃발을 휘날리며 앞다퉈 수면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상상되기도 했다.

스파르타는 기대했었던 것보다는 실망스러웠다. 전투가 벌어졌던 평원 위에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는 쓸쓸한 잔해에 불과했다. 데블런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자, 보게. 한 사회가 군사 독재에 굴복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잘 보여 주는 곳일세. 스파르타의 어린아이들은 일곱 살 때부터 군사 훈련을 받았다네. 모든 결정을 군사 평의회에서 내렸지. 모든 것을 정복한 세계 최고의 군대. 그러나 결국엔 독재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꼴이 되고 말았지. 왜 그런지 아나? 자유인들은 항상 전제를 이겨내기 때문일세. 그렇지, 전제를 패퇴시키지는 못하지만 그것보다는 오래 살아남기 때문이지."

그 지역은 그리스의 웅장함이나 스파르타 군대의 승리를 보여 줄 만한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초라한 건물 몇 개가 애처로이 모여 있을 뿐이었다. 다시 데블런 교수님이 입을 여셨다. "미국에 있을 때 나는 슬픈 느낌이었다네. 만일 스파르타 독재 같은 것이 자네 나라의 학교를 개선해주고, 소수 인종을 통제해 주고, 여성들을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 보내고, 종교적 지상권을 회복시켜 주고, 또 권리선언의 어리석음을 다 끝장내 준다면 자네 국민의 80%가 그런 독재를 환영하리라는 것을 읽었기 때문일세. 내 눈엔 많은 현대 미국인들이 그런 제의라면 쌍수를 들고 기뼈 날뛸 것으로 보였지. 그래서 자넬 이곳 스파르타로 데려와 구경시키고 싶었던 것일세. 자, 보게. 지금 자네 눈에 보이는 것이 그런 선택의 결과라네."  329-330


우리는 마치 소설을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보물인 양 논의하면서 이미 알려진 어떠 ㄴ이야기를 어떻게 서술해야 최선인가, 즉 어떤 관점에서 이야기를 서술해야 최선의 효과를 가져올까 하는 문제를 두고 하루 온종일 씨름하였다. 그 주제에 대해서 데블런 교수님은 아주 확고한 생각을 지니고 계셨다. "가장 나쁜 것은 작가가 이따금씩 자신의 은밀한 논평을 끼워 넣는 형식이지. 작가의 그런 개입이 이야기의 흐름을 깰 땐 얼마나 불쾌한지 모른다네. 게다가 이야기의 끝이 엉성하게 건초 더미를 실은 짐마차처럼 삐걱거리면 정말 얼마나 혐오스러운지... 자넨 그러지 말게. 자네가 가르칠 어떤 학생이라도 그렇게 하도록 해서는 안 되네. 만일 그런 책을 평할 기회가 있으면 가차 없이 혹평하게.  331


우리는 소설의 주제로 어떤 것이 가장 좋은가에 대해 긴 토론을 하였으며, 데블련 교수님은 두 가지 점을 지적하셨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어떤 행위든 다 소설의 질료라네." 

"어떤 것이든 다 될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런 셈이지."

"근친상간도요?"

"그리스 비극을 뒤져보면 근친상간을 둘러싼 위대한 드라마가 무궁무진하다네. 불과 분노와 복수로 일관된 것들이 많지."

"전 그리스 비극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렇담 이번 여름이 자네가 못 보고 그냥 넘어간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군.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자네가 문학의 내적 의미를 파악하려 할 때 분명 장애가 될걸세."

그런 다음 소설 주제에 관한 두 번째 주의 사항을 그분은 아주 단호한 어조로 피력하셨다. "추상적 개념에 관한 소설은 단연코 좋은 소설이 못되네. 차라리 논문을 쓰는 게 나을 걸세. 소설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어야지 어떤 원형이나 전형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 그러나 만일 어떤 추상적인 워칙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그리고 것이라면 그것은 강한 인상을 주는 소설이 될 수 있다네."  333-334


사람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지혜를 터득한다. 하나는 이용 가능한 모든 증거를 끈기 있게 축적하고 분석함으로써 지혜를 얻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한 순간에 모든 대륙과 전 역사에 빛을 밝혀 주는 에피파니(epiphany, 일상의 경험 속에서 어느 한 순간 맞이하는 직관적 통찰이나 깨달음을 일컫는다. 흔히 현현(顯現 나타날현 나타날현)이라고 말한다.)를 통해 지혜를 얻는 것이다.  335


"우리가 하는 일이란 고작해야 문학이라는 커다란 관목을 흔들어 뭐 떨어지는 것이 없나 땅바닥을 뒤지는 꼴이라네. 문학의 근간인 실제의 삶은 모두 우리 주위에 드러나 잇는데 말일세."  341


나는 엄숙한 어조로 서두를 꺼냈다. " ... 아무튼 제 생각엔 무엇이 서사인가를 이해하고 또 책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네 명의 미국 작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연대순으로 이름을 들면 허먼 멜빌, 스티븐 크레인, 이디스 워튼, 윌리엄 포크너입니다."  343


" ... 어쨌건 그들에 반대되는, 상당한 대중적 인기를 얻었지만 미학적인 관저에서는 거의 형편없는 작품을 내놓은 네 작가를 언급할 차례입니다. 다시 연대순으로 말해 보면, 싱클레어 루이스, 펄 벅,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입니다..."  344


(편집자 마멜과의 대화, 문학 비평집 출간에 대한 내용) " .. 자기 현시적인 일화는 최소로 하시고 중요한 예는 많이 집어넣으세요."

"어떤 걸 말씀하십니까?"

"중요한 요점을 기술하시고, 그다음엔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본보기를 짧게 두 가지 정도 인용하시면 될 거예요."  355





독자 제인 갈런드


근본적인 것들을 고집하는 그들의 자세  550


루카스 요더가 아랫입술을 떨며 창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요더 씨!" 내가 불렀다. "어디 아프세요?"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지금 펜스터마허 사람들은 잔인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고는 참던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의 비탄에 잠긴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다가 문득 그가 펜스터마허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는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살인자의 부모가 있는 그 놎아에 가 있었다. 그들의 감정이 그의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작품을 쓰는 비결인 모양이다. 그가 어떤 사람에 대해 글을 쓸 때면 그는 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등장인물의 입장 소에서 살고, 그들과 똑같은 고통을 느끼며 그들의 정신적 혼란을 똑같이 겪었다. 이 즐거운 크리스마스에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펜스터마허를 잊고 있었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그를 소설가이게끔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599







사람들이 사는 세상 - 소설의 세계


1. 왜 읽는가?


미국의 저명한 비평가인 헤럴드 블룸은 <어떻게 읽고 왜 읽을 것인가>의 프롤로그인 <왜 읽는가?>라는 글에서 '왜 글을 읽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뒤, 그 이유는 깊이 있는 지속적인 독서만이 '자율적인 자아'. 즉 주체적 자아를 온전하게 확립해 주고, 또 그 자아의 주체성을 증진시키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율적인 자아' 형성을 위해 어떤 글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블룸은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독서에는 논쟁적인 글보다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글이 더 적합하다는 전제 아래, 정치, 철학, 종교 등 이데올로기를 담은 글보다는 소설, 극, 단편, 시 등의 문학 작품이 그가 말하는 독서에 어울리는 대상이라고 말한다. 물론 블룸은 정치 경제학에 관한 글이나 철학에 관한 글이 그 글을 읽는 사람의 생에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율성>을 과거의 사고방식에서 해방되는 것, 구체적으로는 개인의 삶과 운명에 관해 우리가 인습적으로 생각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았던 블룸은, 어느 특정의 개인에 관한 우리의 판단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문학이 우리를 우리 자신의 과거에서 해방시키는 가장 중요한 실천의 도구가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브룸은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 박사의 말을 빌려 독서의 주요 목적이 [우리 정신에서 상투적인 것을 씻어 내는것]에 있다고 한다. 여기서 [상투적인 것]으로 옮긴 [cant]는 실상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일상적으로 던지는 말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의미를 확대하면 사람들이 으레 당연히 여기는 것, 인습적으로 그렇게 여겨 왔던 것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정신 속에서 그런 상투적인 것을 지워 낸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을 다시 새롭게 다시 보는 힘을 키우고, 기성(旣成 이미기 이룰성)의 것을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를 아무 생각 없이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에 만족한다면 우리는 그 사상이나 생각의 노예에 불과하며, 기존의 사고의 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편협한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우리 상상의 노력이 그 신선함을 상실하거나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의심의 능력을 상실할 때 우리느 ㄴ이미 [상투적인 것]의 그무렝 갖힌 꼴이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그런 [상투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과거에서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 해방은 우리 각자가 처해 있는 정치, 경제, 종교, 혹은 철학적 현상에 변화를 시도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현재의 제도를 정당화시키는 기성의 사상이나 생각과 단절을 도모하는 노력의 출발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노력의 바탕에 개인의 변화가 없으면 해방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실로 개인적인 차우너을 넘어선 공적인, 사회적인 차원의 변화는 그 구성원 각자의 질적인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며, 아무리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한다 해도 개인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굳이 그 예를 들지 않아도 우리가 익히 경험을 통해 확인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질적인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우리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혹은 상상의 경험을 통해 가능하다. 그런데 시간적인 제약과 공간적인 제약으로 인해, 우리가 몸으로 체득하는 직접적인 경험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 삶에서 더욱 중요한 것이 바로 상상의 경험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상상의 경험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독서이다. 우리는 독서를 통해 우리의 [과거]로 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그 해방을 통해 더 많은 감수성을 지니고 더 많은 통찰과 지혜를 지닌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은 바로 [반성(反省 되돌릴반 살필성)]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결과이며, 그 과정을 통해 우리가 더욱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곧 [자기 확대]로 나아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독서는 사회적인 차원의 행위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는 개인적인 차원의 행위에 속하는 것으로, 블룸은 이런 독서의 행위를 [고독한 실천(solitary praxis)]이라 부른다. 말하자면 독서는 자기반성과 자기 확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그 공간 속에서 우리는 본연(本然 근본본 그러할연)의 [나]에 가까이 다가가는 질적인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블룸이 말하는 [자율성]의 획득이며, 이는 비록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의 과정이지만 실은 그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변화으 단초가 되는 과정인 셈이다.  619-622



2. 세상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사는 땅의 이야기


앞에서 <왜 읽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독서어ㅔ 관한 이야기를 한 것은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소설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독서를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자율성이고 진정한 자기 자신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마 존재의 진정성과 관련한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이 자율성과 진정성을 달성하는 길은 [진리는 무엇인가?]와 같은 철학적, 형이상학적 물음이기보다 오히려 더없이 세속적일 수 있는, 더없이 평범한 것일 수 있는, [세상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다. 진부한 물음일 수도 있는 이 후자의 물음을 통해 우리는 아집과 편견과 과거에서 해방되어, 세상살이가 혼자가 아닌 관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 관계를 실천할 수 있는 보다 넓은 지평의 삶 속에 진입할 수 있는 열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622-623


제임스 미치너는 바로 [이 세상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땅]에 가장 정직하게 다가간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세상은 나의 집>이라는 그의 자서전 제목이 보여주듯, 미치너는 실제로 세계의 많은 곳을 여행하며 곳곳의 색다른 지리적 공간과 그 공간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직접 관찰한 작가다.  623


미치너가 세상의 낯선 지형과 낯선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서로 다른 기후와 민족성과 종교와 피부색을 지닌 사람들이라도 모두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사람들이며, 마치 우리의 이웃처럼 우리와 어울려 살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의 지경(地境 땅지 지경경)과는 다른 곳의 먼 역사를 이해하고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자 했던 미치너가 스스로를 [정신적으로 혼혈인]이라고 부른 것도 그러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거꾸로, 자신이 유대인일 수도 있고 러시아인일 수도 있고 흑인일 수도 있다는 정신의 개방성으로 인해, 사람에 대한 믿음과 그 사람들의 삶에 대한 솔직한 이해로 나아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땅(land)이 존재의 근본적인 한 부분]이라고 언급한 미치너는 그 땅 위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차별 없는 존재의 평등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삶의 질의 차이, 혹은 문명의 차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사는 지형(地形 땅지 형상형)의 다름에 따라 혹은 좋든 나쁘든 문명의 개입에 따라 불가피하게 형성된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런 차이는 어느 지형 밖에서 관찰한 상대적인 차이일 뿐이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 좋고 나쁜의 차이는 아니다. 다만 그런 차이에 따라 생겨난 부산물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명일 테고, 그 문명의 높고 낮음의 구분은 역사적 시간의 지연(遲延 더딜지 끌연)에 따른 차이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땅과 사람들의 삶의 차이 혹은 다름에 대한 관찰이 차별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로 나아가는 미치너의 태도가 아닌가 싶다.  624-625


[다른 사람들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훌륭한 이야기꾼이 될 수 없다]고 한 미치너의 말에서 우리는 그가 낯선 땅과 낯선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눈을 뜨고 어떻게 귀를 기울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스스로가 한 사람의 지리학자, 한 사람의 나그네가 되어 자신이 지나온 길의 경허모가 그 속에서 터득한 지식을 재구성하여 독자들과 나누고자 했던 작가인 미치너는 어떤 면에서는 사물이나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과 이해와 관심이 아주 단순하면서 소박한 이야기꾼이다. 그는 뛰어난 유머가도 아니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읶르어 내고 환상적인 구도 속에 이야기를 전재시키는 뛰어난 문장가도 아니다. 그렇다고 인물의 심리 분석에 뛰어난 작가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다단한 삶의 구도는 취급하지 않는다. 자신이 다룰 수 없는 부분이 많다고 인정하는 그는 다만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에 지나치지도 모라자지도 않은 소박한 관심을 지닌 작가다. 그런 관심으로 한 편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할 수 있으며. 한 인물을 솔직하게 그릴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시킬까에 과도한 신경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 이야기가 그 스스로 풀려나가기를 원하는 작가다. 그는 사람들에게 교훈적인 이야기나 설교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누구를 계몽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그러면서 자신의 삶의 경계를 넓히는 그런 보통의 사람이었다.  625-626



3. 왜 이야기가 필요한가?


굳이 그는 자신의 작풉에 대한 평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반박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는 정직한 작가로 기억되길 원했을 뿐이다 그런에도 미치너오 같은 작가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우리의 과거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이해의 광장으로 나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방에서 벗어나 광장으로 나가야 비로소 본연의 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또한 그래야 나의 이야기가 의미 있는 울림으로 상대방에게 퍼져 나가는 것이다.  627


이 소설에서 미치너는 자신을 모델로 한 루카스 요더의 입을 통해 작가가 독자들에게 전해 주는 것은 재미보다는 이야기의 호소력이라고 하며, 자신의 토지와 물리적 환겨엥 초점을 맞춘 자신의 이야기가 하나의 구성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인물과 플롯의 전개에 더 많은 관심이 있는 편집자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 미치너는 전통적인 이야기꾼인 자각와는 다른 예술관을 지닌 비평가의 시선을 통해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으며, 또한 문학이란 대중의 정서에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독자를 통해서는 비평가와는 다른 시각을 지닌 대중들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런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는 이처럼 생각의 차이, 판단의 차이를 그대로 노출시킴으로써 그의 <소설>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또 다른 층위의 생각의 단계로 올라서게 해주는 것이다.  628


움베르토 에코는 한 신문에 기고한 글을 통해, 오늘날처럼 물질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근원적인 진정성을 회복하려면 [우리 삶의 의미를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확인시킬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야기가 필요한것이 아닐까 싶다. 혼자만의 독백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재구성하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보다 근본적인 자기 존재에 가까이 다가가는 방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리처드 로티가 말했던 [궁극의 어휘]가 필요하다.


모든 인간은 그들의 행동과 믿음과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름의 언어들을 지니고 다닌다. 그 언어를 통해 우리는 친구를 찬양하고 적을 경멸하기도 하며, 우리의 원대한 구상을 말하기도 하고 우리 자신의 가슴 아픈 자기회의를 드러내기도 하고 우리 자신의 가슴 아픈 자기회의를 드러내기도 하고 드높은 희망을 펼치기도 한다. 그 언어들이 바로 우리가 때로는 앞을 내다보며, 때로는 뒤를 돌아다보며 우리 삶의 이야기를 말하는 바로 그 언어인 것이다.  628-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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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루카스 요더


내가 계속 글을 쓸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도와준 아내, 그러면서도 전혀 짜증이나 불만의 기색을 안 비치던 아내였다.  19


책이 세상에 나왔다가는 곧 날개 찢긴 새처럼 퍼덕거리다가 죽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더욱이 네 번씩이나 그러한 고통을 경험하다니! 정말 불운한 세월이었다.  60


요즈음 책은 출판되기도 전에 성공을 보장받는 경우가 많다. 북 클럽, 영화, 텔레비전 연속극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책의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다.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는 만큼 공정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미국 전역에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다. 좋-지-않-다-.  61


사실 글을 쓸 때나 쓴 글을 수정할 때면 온 신경과 힘을 다써야..  126


6월의 한 주가 몽땅 아무 한 것도 없이 그냥 지나가 버리자 나는 <돌담>을 수정하는 데도 시간이 엄청나게 걸리는데 과연 교정쇄나 제대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튼 나는 이용 가능한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해 열심히 작업은 계속했으며, 이따금씩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내 손놀림을 보고는 내 스스로 감탄까지 하곤 했다.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이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권태롭기 그지 없었다. 그래도 이번이 내 소설을 완벽에 가깝도록 고칠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에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떤 때는 글쓰는 일이 마치 무슨 지고한 영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 웃기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은 심정이 들기도 했다. 정말 글쓰기란 고된 노동인 것이다.  153


나는 엠마에게 원고가 인쇄기로 들어가 책으로 나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작가는 다 처음 글을 쓸 때의 심정과 다를 바 없다고 일러주었다.  168






편집자 이본 마멜


문학 박사인 파인슈라이버 교수님은 내가 학교를 떠나던 그 슬픈 날 이렇게 말씀하셨다. "... 자네의 가슴과 정신에 이 거대 도시가 무료로 제공하는 풍성함을 받아들이게. 그러면 결국에 가선 자네가 우리 모두들보다 더 훌륭한 교육을 받을 셈이 될걸세."  180


나는 인파 한가운데 멈춰서서 중얼거렸다. "내가 이런 식의 삶에 묻혀 버릴 순 없어. 책의 세계, 사상의 세계가 있잖아.."  181


"영화와 책 둘다 중요합니다. 예, 중요하지요. 그렇지만 위대한 창작의 비밀을 파헤치려면 음악과 그림에도 관심을 쏟아야 할 겁니다."

"인생이 길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 많은 걸..."

"인간 노력의 최고 진수를 탐구하는 것. 그것 말고 삶의 진정한 의미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가 소설이라는 허구의 창조에 있어서 최고의 목표라고 설파한 것은 참다우면서도 온당한 인물의 창조였다. 그리고 그러한 인물의 창조란 온갖 역경 속에서 그 인물이 겪게 되는 정신적 변호를 여실하게 그림으로써 당성된다고 그는 믿었다. "소설은 곧 성장을 보여 주는 겁니다." 그는 몇 번이고 이 말을 강조하였다.  203


"전 소설이 진정 무엇인지 어렵게 어렵게 배웠어요. 조김스럽게 선택된 약6만 개 정도의 단어들. 그것들을 의미 있는 방식으로 종이 위에 옮겨 놓지 못한다면 소설이란 존재하지 않는 거라고요."  262


나의 두 남자, 래트너와 요더 씨를 비판적으로 생각할 때면 요더 씨는 칼럼니스트들이 말하듯 [출판계에 부를 모아다 주는 작가]이며 가장 확실하게 성공을 보장해 주는 작가이지만 사실 그가 쓰는 소설들에서 지적인 만족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의 그렌즐러 시리즈 중 여섯 번째 작품에 해당하는 <유제품 제조 판매소>에 대한 그의 구상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따분만 것이었다. 똑같은 공식에 똑같은 인물들, 펜실베이니아 독일인들에 관한 매력적이긴 하나 똑같은 내용들, 그리고 거의 변함이 없는 우스꽝스러운 방언들의 흩뿌림. 그런 소설이라면 나도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가 소설을 쓴다고 해서 그 소설이 이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인지 그것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내가 정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에반 케이터 교수와 베노래트너가 설파한 소설에 대한 이념들이었다. 그들은 소설을 어떤 폭발적인 것, 즉 경이로움과 장엄한 계시적 광경으로 가득 차 있고, 평범한 행위에 대한 시적인 해석과 기묘하게 보이는 것에 대한 산문적 설명이 꽉 들어차 있는 것으로 보았다. 나는 베노가 꿈꾸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소설이 지닌 무한한 지평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생경한 이념들로 불꽅이 일 듯 활기에 넘치고, 수많은 도전으로 폭풍이 일 듯 힘이 넘치는 소설. 내가 이제 소설에서 구하는 것은 그렌즐러 지역에 관한 또 하나의 산문시가 아니라, 나 같은 지각 있는 사람이 어떻게 베노 래트너와 같이 자기 파괴적인 사람과 살면서 그 많은 세월을 허비할 수 있는지, 아무에게도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그런 묘한 삶에 대한 설명이다. 이와 같은 내 의식의 놀라운 전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때면 나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자릴르 지키세요. 루카스. 경이로운 친구여. 날카로운 칼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신뢰할 만한 그대. 이 세상에서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사람. 선한 일만 할 당신. 그러나 래트너, 당신이 옳았어요. 채겡 관한 모든 토론에서 당신은 항상 옳았어요. 당신은 우리들이 꿈도 꿔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죽은 거예요. 당신은 꿈은 꿨지만 그 꿈을 6만 개의 잘 꾸며진 단어들로 전환 시키지 못했어요.  274-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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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란 자고로 여장을 가볍게 하고 길을 떠나야 하는 법이다.  81


 

"난 네가 결혼을 했으면 좋겠구나." 글래스 부인이 불쑥 아쉬운 듯 말했다...

"글쎄, 난 그랬으면 좋겠다." 그녀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안 할 이유라도 있니?"

주이가.. "난 기차 타는 걸 너무 좋아해서요. 결혼하면 기차에서 절대 창가 자리에 못 앉거든요."

"그건 이유가 못 돼!"

"완벽한 이유예요."  136-137



거의 칠 년 만에 처음이었다. 주이가 시모어와 버디의 예전 방에, 흔한 드라마적 표현을 쓰자면, '발을 디딘' 것은...

한때는 눈처럼 희었던 메모 보드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상당히 커서 거의 문짝만큼이나 길고 넓었다. 순잭의 매끈하고 넓은 표면은 한때 애처로이 먹물과 블록체 글씨를 갈구했을 것 같았다.. 보드에는 세계의 다양한 문학작품을 인용한 문구들이 우아해 보이는 데 개의 세로 단을 이루며 빈틈없이 구석구석 장식하고 있었다.  221


인용 문구나 작가를 어떤 카테고리나 그룹으로 묶으려는 시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주이는 가까이 다가서서, 왼쪽 세로 단 제일 윗부분에서 시작해 아래로 읽어내려갔다...


당신에게는 일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그 일의 가치를 위해서다. 그 일의 열매에 대해 당신은 어떤 권리도 없다. 일의 열매에 대한 욕망이 일을 하는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태함에 져서도 안 된다.

하나하나의 행동을 할 때마다 지고하신 신께 마음을 쏟으라. 그 열매에 대한 집착을 끊으라. 성공과 실패에 일희일비하지 말라(글씨를 쓴 사람 중 하나가 밑줄을 그어놓았다.) 이러한 평정이 바로 요가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결과물에 대한 초조함으로 행하는 일은 그런 초조함 없이 스스로를 포기함으로써 오는 평온 속에 행하는 일보다 훨씬 열등하다. 브라만의 지식에서 피난처를 구하라. 결과물을 위해 이기적으로 일하는 자들은 불행하다. - <바가바드 기타>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오 달팽이

올라라 후지 산.

느릿느릿 - 고바야시 잇사


신을 이야기할 때, 신격(神格 귀신신 격식격)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이 있다. 존재는 하지만 발분하지도 관여하지도 않으며, 무엇에 대해서도 사전 숙고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세번째 부류는 신격이 존재하고 사전 숙고도 하지만 위대한 것, 천국에 관한 문제에만 그러하며 지상의 일에는 그러하지 못한다고 본다. 네번째 사람들은 천국의 일들과 마찬가지로 지상의 일들에도 그러하지만 일반적일 뿐 각 개인의 일들에 대해서는 그러하지 못한다고 본다. 다섯번째 사람들은, 그들 중엔 오디세우스와 소크라테스도 있는데, 이렇게 외친다. "내 움직임에 대해 당신이 모르는 것은 없습니다!" - 에픽테토스


모르는 사이였던 남자와 여자가 동쪽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함께 이야기를 하게 될 때, 사랑의 대상이 될 사람과 절정은 찾아온다.

"어서요." 크루트 부인이 말했다. 그녀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랜드캐니언은 어땠어요?"

"그냥 동굴이더군요." 동반한 남자가 대답했다.

"아주 재미있게 표현하는군요!" 크루트 부인이 말했다. "이제 내게 뭔가 연주해줘요." - 링 라드너, <단편소설 쓰는 법>


신은 사상이 아닌 고통과 모순으로 마음을 가르친다. - 장피에르 드 코사드


"아버지!" 하고 외치며 키티는 두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알았다, 이야기하지 않으마!" 그는 말했다. "나는 정말, 정말...기쁘...아아! 나는 어쩌면 이렇게 바보처럼..."

그는 키티를 끌어안고 그녀의 얼굴과 손에, 또다시 얼굴에 입맞춤하고 그녀에게 성호를 그어주었다.

그리고 키티가 오랫동안 부드럽게 아버지의 투실투실한 손에 입맞춤하는 것을 보자, 지금까지는 남이었던 이 노공작에 대한 새로운 애정이 별안간 레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 <안나 카레니나>


"선생님, 우리는 사람들에게 사원에서 우상과 그림을 숭배하는 것이 잘못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라마크리슈나 : "너희 캘커타 사람들은 그런 식이다. 가르치고 설교하고 싶어하지. 자신이 거지면서도 많은 돈을 주고 싶어하고.. 신이 자신이 우상과 그림으로 숭배받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하는가? 숭배하는 이들이 혹여 실수를 할때 그들의 마음속을 꿰뚫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 <스리 라마크리슈타의 복음>


"우리와 함께하고 싶지 않나?" 최근에 자정이 지나 살마들이 거의 떠나고 없는 어느 커피집에서 혼자 있는 나를 우연히 본 한 지인이 내게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네." - 카프카


사람들과 함께 있는 행복. - 카프카


성 프란체스코 살레시오의 기도 : "네, 아버지시여! 네, 또한 언제나, 네!"


서암이 매일 자신을 불렀다. "주인아."

그러고 자신이 대답하였다. "네."

그러고 그가 덧붙였다. "늘 냉철하거라."

다시 그가 대답했다. "네."

"그러고 나서는 다른 이들에게 속지 마라." 그가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 <무문관(無門關)>


메모 보드의 글씨가 아주 작았기에 여기까지 읽어도 위에서 5분의 1 정도밖에 안 되었다.  222-227


지금부터 최후의 심판일까지 계속 예수기도문을 외울 순 있겠지만, 종교적인 삶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 거리 두기라는 걸 깨닫지 못하면, 네가 평생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있을까? 거리 두기, 친구, 오직 거리 두기. 욕망에서 자유롭기. '모든 갈망을 멈추기.'  248


예술가의 유일한 관심은 어떤 완벽함을 달성하는 것이고,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의 완벽함이야.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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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


우리는 자유 자체가 강제를 생성하는 특수한 역사적 시기를 살고 있다. 할 수 있음의 자유는 심지어 명령과 금지를 만들어내는 해야 함의 규율보다 더 큰 강제를 낳는다. 해야 함에는 제한이 있지만, 할 수 있음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강제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처럼 강제의 반대여야 할 자유가 강제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자유롭다고 여기는 성과주체는 실제로는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성과주체는 주인에 묶여 있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점에서 절대적 노예라고 할 수 있다.  10-11


신자유주의적 노예는 헤겔이 말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속에 등장하는 주인의 주권, 즉 노동하지 않고 오직 향유만 하는 주인의 자유를 알지 못한다...

헤겔의 노예는 주인에게도 노동을 강제한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노동의 전체주의를 초래한다.  11


자유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어휘다. 사람들은 좋은 관계 속에서, 타인과의 행복한 공존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초래하는 개개인의 전면적 고립 상태는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자유를 새롭게 정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자유를 강제로 전복시키는 숙명적인 자유의 변증법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말이다.

신자유주의는 자유 자체를 착취하는 매우 효율적이고 영리한 시스템이다...

타자의 착취는 그다지 많은 성과를 올리지 못한다. 자유의 찾취야말로 최상의 수익을 낳는다. 

흥미롭게도 마르크스 역시 자유를 타자와의 좋은 관계라는 면에서 정의한다. "모든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체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소질을 모든 방향으로 온전히 발전시킬 수 있는 수단을 획득한다. 그러니까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개인의 자유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자유롭다는 것은 타인과 함께 자아를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는 성공적인 공동체와 동의어다.  12-13


자본은 자유 경쟁을 통해 자기 자신, 즉 또 다른 자본과 관계함으로써 자신의 증식을 추진한다. .. 개인적 자유는 스스로의 증식을 추구하는 자본에 악용된다는 점에서 노예 상태와 다름없다...

"자유 경쟁 속에서 자유롭게 해방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자본이다."

개인의 자유를 통해 실현되는 것은 자본의 자유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개인은 자본의 성기로 전락한다.  13


오늘날 과도한 형태에 이른 개인의 자유는 결국 자본 자체의 과잉을 의미할 따름이다.  14


자본주의의 변이체인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를 경영자로 만든다..

오늘날은 모두가 자기 자신의 기업에 고용되어 스스로를 착취하는 노동자다. 모두가 주인인 동시에 노예다.  15


신자유주의 질서는 타자에 의한 착취를 어떤 '계급'도 빠져나갈 수 없는 자기 착취로 탈바꿈시킨다. 마르트스는 이러한 무계급적 자기 착취를 전혀 알지 못했다. 사회 혁명이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의 구별을 전제로 한다면, 무계급적 자기 착취는 바로 사회 혁명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16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에서 실패하는 사람은 사회나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리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바로 여기세 신자유주의적 지배 질서의 특별한 영리함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을 위해서 일한다. 자본에서 생성되는 자본의 고유한 욕구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구라고 착각한다. 자본은 새로운 초월성, 새로운 예속의 형식이다.  17


우리는 정말로 자유롭고자 하는 것일까? 우리는 자유롭지 않아도 되려고 신을 발명하지 않았던가? 신 앞에서 우리는 모두 빚을 진 존재다. 그런데 빚은 자유를 파괴한다...

우리가 빚이 없다면, 즉 완전히 자유롭다면, 우리는 정말로 행동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행동하지 않아도 되려고, 즉 자유롭지 않아도 되려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영원히 채무자로 머무는 것인지도 모른다...

발터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종교로 파악한다.  18-19


디지털 네트워크는 처음에 무제한의 자유를 주는 매체로 환영받았다.  19


무제한의 자유와 커뮤니케이션은 이제 전면적 통제와 감시로 돌변한다. 소셜미디어 역시 점점 더 사회적 관계를 감시하고 가차 없이 착취하는 디지털 파놉티콘의 모습을 띠어간다...

벤담의 파놉티콘에 갇힌 수감자들은 훈육을 위해 격리되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금지된다. 반면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서로 격렬하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노출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디지털 통제사회는 고도로 자유에 의존한다. 그것은 오직 자발적인 자기 조명과 자기 노출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여기에 디지털 파놉티콘의 효율성이 있다.  20

 

신자유주의는 시민을 소비자로 만든다. 시민의 자유는 소비자의 수동성으로 대체된다. 오늘날 소비자가 된 유권자는 정치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없다. 즉 적극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해가고자 하는 의욕이 없는 것이다. 그는 공동의 정치적 행동을 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는 궁시렁궁시렁 불평하면서 정치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따름이다.  22


미래가 열려 있다는 것은 행동의 자유를 구성하는 본질적 요인이다. 그러나 빅데이터는 인간 행동에 대한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로써 미래는 계산하고 조종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디지털 심리정치는 자유로운 결정의 부정성을 사실 관계의 긍정성으로 탈바꿈시킨다. 인간 자체가 긍정화되어 양화하고 측정하고 조종할 수 있는 사물이 된다...

모든 명령 체제, 모든 지배의 기술은 피지배자를 예속시키기 위한 고유한 성물을 만들어낸다..성물은 곧 예속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일종의 디지털 성물이다. 아니, 디지털의 성물이 곧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은 묵주처럼 예속화의 도구로 기능한다...스마트폰과 묵주는 모두 자기 검열과 자기 통제에 사용된다.  25


좋아요는 디지털 아멘이다. 우리는 좋아요를 클릭하는 순간 스스로 지배에 예속되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효과적인 감시 도구일 뿐만 아니라, 모바일 고해실이기도 하다.  26





스마트 권력


저항을 분쇄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것만이 권력은 아니다. 권력이 반드시 강제의 형식을 취한다고 할 수는 없다... 권력 자체가 아예 화제조차 되지 않는 때야말로 권력은 어떤 의심도 받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권력은 크면 클수록 더 조용히 작동한다.  27


권력은 심지어 자유를 이용할 수도 있다... 오늘날 권력은 점점 더 허용적 형식을 취해간다. 너그럽게 허용하는 친절한 권력은 부정성을 벗어버리고 자유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신자유주의적 권력의 기술은 섬세하고 유연하며 스마트한 형태를 취하며, 결국 사람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예속된 주체는 자신이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예속된 주체에게 지배 관계는 완전히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28


신자유주의적 궐력 기술의 목표는 인간을 온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존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친절한 스마트 권력은.. 안 된다고 말하기보다 그러라고 말하는 권력이며, 억압적이기보다 유혹적인 권력이다. 그것은 긍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착취하려고 애쓴다. 그것은 금지하는 대신 유혹한다. 그것은 주체와 대적하는 대신 주체의 욕구에 부응한다. 

스마트 권력은 심리를 훈육하거나 강제와 금지의 굴레에 묶어두지 않고, 오히려 심리에 착 감겨온다. 그것은 우리에게 침묵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털어놓으라고, 함께 나누라고, 참여하라고, 우리의 의견, 욕망, 소원, 선호를 전달하고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끊임없이 자극한다. 이처럼 친절한 권력은 억압적 권력보다 더 막강하다. 이때 권력은 우리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자유로운 결정은 미리 정해져 있는 가능성들에 대한 선택으로 전락한다.  29-30


스마트 권력은 우리의 의식적, 무의식적 사고를 읽고 분석한다. 그것은 우리들이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조직화하고 최적화하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권력이 제압해야 할 저항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배는 큰 힘을 소모할 필요도 없고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는다. 지배는 그냥 저절로 이루어진다. 스마트 권력은 호감을 사고 의존하게 만듦으로써 지배하려고 한다.  30-31





생정치


푸코에 따르면 17세기부터 이미 권력은 신과 같은 군주가 휘두르는 죽음의 권력이 아니라 규율 권력이 된다. 군주의 권력은 칼의 권력이다. 그것은 죽음의 위협으로 군림한다. 그것은 "생명을 손아귀에 쥐고 제거해버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반면 규율 권력은 죽음의 권력이 아니라 삶의 권력이다. 그것의 기능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완벽한 관철에 있다. 오랫동안 막강한 위력을 발휘해온 죽음의 위협은 "몸의 세심한 관리"와 "계산적인 계획"으로 대체된다.

군주의 권력에서 규율 권력으로의 이행은 생산 형식의 변화, 즉 농업 생산에서 산업 생산으로의 변화에 기인한다. 산업화의 지전은 몸을 훈육하고 기계 생산에 적응시킬 필요성을 낳는다. 규율 권력은 몸을 고문하는 대신 규범 체계속에 묶어둔다. 철저히 계산된 강제가 신체의 모든 부분을 관통하여 몸 속에 자동화된 습관으로까지 새겨진다. 그리하여 몸은 생산 기계로 정비된다.  35-36


규율은 "신체 활동을 정교하게 통제하고 그 힘을 지속적으로 종속시키는 방법, 그것을 빠릿빠릿하게/쓸모 있게 만드는 방법이다."

규율 권력은 표준화하는 권력이다. 그것은 주체를 규범, 명령, 금지의 체계에 예속시키고, 일탈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요소를 제거한다. 바로 이러한 조련의 부정적 성격이 규율 권력의 본질적 요소다. 그 점에서 규율 권력은 군주의 권력과 인접 관계에 있다. 군주 권력도 부정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군주 권력의 부정성은 솎아내는 부정성이다. 군주의 권력도 규율 권력도 타자 착취를 수행한다. 양자 모두 복종하는 주체를 만들어낸다.

규율 권력이 구사하는 훈육의 기술은 신체적인 차원을 넘어서 정신적인 영역에까지 파고든다. 영어 단어 "industry"에는 근면이라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Industrial School"은 비행 청소년의 교화 기관이다. 벤담 또한 파놉티콘이 수감자들의 도덕적 개선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심리는 아직 규율 권력의 초점에 놓여 있지 않다. 규율 권력이 구사하는 정형외과적 기술은 심리의 심층과 그 속에 숨어 있는 소망과 욕구, 갈망에까지 파고들어가 이를 좌지우지하기에는 너무 조악하다. 벤담의 빅브라더도 파놉티콘의 수감자들을 외적으로 관찰할 뿐이다. 벤담의 파놉티콘은 시각 매체에 의존한다. 파놉티콘은 내면의 생각이나 욕구를 들여다보지 못한다.

규율 권력은 "인구"를 발견한다. 인구는 생산 및 재생산을 하는 무리로서, 세심하게 관리해야 할 대상이다. 여기에 생정치의 과업이 있다. 생정치는 번식, 출생률과 사망률, 건강 상태, 기대 수명 등을 고려하고 점검한다. 푸코도 명시적으로 "인구의 생정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생정치는 규율사회의 통치술이다. 하지만 그것은 심리를 착취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 인구 통계를 활용하는 생정치는 심리적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인구 통계는 주민의 심리 지도 작성을 위한 자료를 제공하지 않는다. 인구 통계는 심리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심리의 비밀을 밝혀주지 않는다. 그 점엣 통계는 빅데이터와 구별된다. 빅데이터는 개인의 심리 지도뿐만 아니라 집단적 심리 지도, 더 나아가 무의식의 심리 지도까지도 작성할 수 있게 해준다. 이로써 심리의 무의식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훤히 비추고 착취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36-38





푸코의 딜레마


신자유주의는 심리에서 생산력을 발견한다. 이러한 심리와 심리정치로으 전환은 현대 자본주의의 생산 형식과도 긴밀한 관계가 있다...신체의 훈육은 정신의 최적화로 대체된다.  41


오늘날 몸은 직접적인 생산 과정에서 해방되어 미적인 또는 건강 기술적인 최적화의 대상이 된다... 오늘날의 생산 과정에서 푸코의 "빠릿빠릿한 몸"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는 없다..

몸의 최적화는 단순한 미용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활동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섹스니스(sexness)와 피트니스(fitness)는 증식시키고 상품화하고 착취해야 할 새로운 경제적 자원으로 떠오른다.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생권력이라는 푸코의 개념이 우리 시대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한다. "나는 푸코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무엇보다도 유럽과 관련하여 대단히 설득력 있게 기술한 생권력이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권력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는다." 스티글레르에 따르면, 생권력의 자리를 물려받은 것은 "심리 권력의 심리 기술"이다. 그가 말하는 심리 기술이란 텔레비전과 같이 사람들을 충동에 조종되는 미숙한 소비 동물로 만들어 결국 대중의 퇴행을 초래하는 "원격 지배적" "프로그램 산업"을 말한다.  42-43


문제는 스티글레르가 텔레비전을 지나치게 중시한다는 점이다. 그는 텔레비전을 심리 기술의 거의 유일한 도구로 격상시킨다. "이제는 라디오, 인터넷, 휴대폰, 아이팟, 컴퓨터, 비디어 게임, PDA도 우리의 주의를 끌기 위해 경쟁하고 있지만, 정보의 유입 과정을 지배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텔레비전일 것이다." 텔레비전을 읽기/쓰기와 대립시키는 것은 낡은 문화 비판적 도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도식으로는 디지털 혁명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참으로 구별되는 인터넷, 소셜미디어 등의 본격 디지털 매체와 그 커뮤니케이션 구조에 대해 아무런 논의도 펼치지 않으며, 디지털 네트워크의 파놉티콘적 구조에도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는 디지털 기술에 엄청나게 의존하는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를 파악하는 데 완전히 실패하고 만다.  43-44


신자유주의 체제의 권력 기술은 푸코의 권력 분석에서 맹점으로 남아 있다. 푸코의 신자유주의적 지배 체제가 자아의 기술을 완전히 포섭했다는 것, 신자유주의적 자아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자아의 부단한 최적화가 지배와 착취의 효율적 형식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적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열정적으로 착취한다. 예술작품으로서의 자아는 아름다운, 하지만 기만적인 가상이다. 그러한 가상은 자아를 완벽하게 착취하려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의해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권력 기술은 섬세한 형식을 취한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개인을 예속시키지 않는다. 개인이 자발적인 자기 제어를 통해 지배 관계를 자신의 내면에 전사(轉寫 구를전 베낄사)하도록 유도한다. 개개인은 이렇게 내며넹 전사된 지배 관계를 자유로 해석하게 된다. 여기서 자아의 최적화와 복종, 자유와 착취는 하나가 된다. 자기 착취라는 형식으로 자유와 착취를 결합시키는 이러한 권력 기술은 푸코의 시야 너머에 있다.  44-45






힐링 혹은 킬링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점점 더 세련된 자기 착취의 형식을 고안해낸다. 수많은 자기 관리 워크숍, 모티베이션 주말 워크숍, 인성 세미나, 멘탈 트레이닝 등이 끝없는 자아 최적화와 효율성 향상을 약속한다...

자아를 최적화하라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은 시스템 내에서 완벽하게 기능하라는 명령에 지나지 않는다.  46


자아의 최적화를 추동하는 것은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이 아니다. 자아 최적화의 필요성은 시스템의 강제, 즉 양화 가능한 성공을 요구하는 시장 논리에서 유래한다.

군주의 시대는 재화와 노역을 빼앗고 가로채는 착복의 시대다. 군주의 권력은 무엇보다도 처분권과 압류권으로 나타난다. 반면 규율사회는 생산에 중점이 놓여 있다. 규율사회의 시대는 적극적인 산업적 가치 창출의 시대다. 이러한 실문 가치 창출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렸다. 오늘날의 금융자본주의에서는 심지어 가치의 극단적인 파괴가 진행되고 있다. 신자유주이 체제와 함께 소진의 시대가 개막된다. 이제는 심리가 착취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대는 우울증이나 소진증후군 같은 심리적 질병을 함께 가져온다.  47


사람의 인격을 긍정성의 강제 속에 완전히 묶어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정성이 없다면 삶은 "죽은 존재"로 쭈그러들 것이다. 부정성은 삶을 생동하게 한다. 고통은 경험의 본질적 부분을 이룬다. 삶이 순전히 긍정적 감정과 플로우(몰입) 경험만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인간적 삶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영혼에 깊은 긴장을 선사하는 것은 바로 부정성이다.  48


긍정성의 폭력은 부정성이 폭력만큼이나 파괴적이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의식(意識 뜻의 알식)산업을 활성화하며 이로써 결코 긍정 기계일 수 없는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주체는 자아 최적화의 명령, 즉 더 큰 성과를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강제 속에서 몰락해간다. 힐링은 킬링으로 귀결된다.  49-50





쇼크


전기 쇼크의 작용 방식은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기 쇼크의 효과는 심리적 내용의 마비와 제거에 있다. 부정성이 전기 쇼크의 본질적 특징이다. 반면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에서 지배적인 것은 긍정성이다. 그것은 부정적 위협 대신 긍정적 자극을 통해 작동한다. 그것은 "쓴 약"이 아니라 좋아요를 주입한다. 그것은 영혼을 충격적으로 흔들어놓고 마비시키기보다 영혼에 아첨한다. 그것은 영혼에 반대하기보다 영혼을 유혹하고 영혼에 호의를 베푼다. 그것은 영혼을 "탈주조"하기보다 영혼이 욕망하는 것, 필요로 하는 것을 세심하게 기록한다. 그것은 예측을 바탕으로 인간 행동에 선수를 친다. 그것은 행동을 가로막는 대신, 행동에 앞서 행동한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억압하기보다는 호감을 사고 욕구를 채워주려고 애쓰는 스마트 정치다.  55





친절한 빅브라더


신자유주의 체제의 권력 기술은 금지하고 방지하고 억압하기보다, 내다보고 허용하고 기획한다. 소비는 억제되지 않고 극대화된다. 결핍이 아니라 과잉, 즉 과도한 긍정성이 생성된다. 우리는 커뮤니케이션하고 소비하도록 독려받는다. 오웰의 감시국가에서도 지배적으로 작용하던 부정성의 원리는 오늘날 긍정성의 원리에 자리를 내준다. 욕구는 억압되기보다 더욱 장려되고 활성화된다. 우리는 고문과 협박으로 자백을 강요받는 대신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다 털어놓는다. 스마트폰이 고문실을 대신한다. 빅브라더는 이제 친절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빅브라더의 친절함이 감시를 대단히 효과적으로 만든다.

벤담의 빅브라더는 보이지는 않지만 수감자들의 머릿속에 편재한다. 그들은 빅브라더를 내면화한다. 반면 디지털 파놉티콘에서는 아무도 감시받거나 협박당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감시국가"라는 용어는 디지털 파놉티콘을 지칭하기에는 부적합하다. 우리는 그 속에서 자유롭다고 느낀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감정, 오웰의 감시국가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자유의 감정이야말로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디지털 파놉티콘은 수감자들의 자발적이 ㄴ자기 노출을 활용한다. 자기 착취와 자기 조명은 자유의 착취라는 점에서 동일한 논리를 따른다. 디지털 파놉티콘에는 우리에게서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정보를 강탈해가는 빅브라더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발가벗긴다.  58-59





감성 자본주의


오늘날 기업 경영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기분이 점점 더 중요해진다. 합리적 경영의 자리에 감성 경영이 들어선다. 오늘의 경영자는 합리적 행동의 원리와 결별한다. 그는 점점 더 모티베이션 트레이너를 닮아간다. 모티베이션(Motivation)은 기분(Emotion)과 결부되어 있다. 두 단어 모두 움직임(Motion)을 표현한다. 긍정적인 기분은 모티베이션의 강화를 위한 효소가 된다. 

기분은 일정한 행위를 촉발한다는 의미에서 수행적이다. 기분은 일정한 행위를 향한 경향으로서, 행위의 에너지 역학적, 감성적 토대를 이룬다. 기분은 대뇌변연계에 의해 조종된다(충동 역시 변연계에 속한다). 기분은 반성 이전의 층위, 행위하는 인간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반의식적이며 신체적이고 충동적인 층위에 속한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이러한 반성 이전의 층위에서 행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기분을 장악한다. 심리정치는 기분을 통해 인격 깊숙한 부분에까지 개입한다. 기분은 인격의 심리정치저 ㄱ조종을 위해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매체가 된다.  70





게임화 


감성 자본주의는 생산성의 증진을 위해 본래는 노동의 타자라고 할 수 있는 놀이의 영역마저 점령한다. 감성 자본주의는 삶의 세계와 노동의 세계를 게임화한다.  71


노동의 게임화는 호모 루덴스를 착취한다. 인간은 이제 놀이하는 가운데 지배의 매커니즘에 예속된다. 오늘날에는 "좋아요" "친구" "팔로워"에서 드러나듯이 사회적 커뮤티케이션도 보상 논리에 따라 게임화되어간다. 커뮤니케이션의 게임화는 커뮤니케이션의 상업화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적 커뮤니케이션의 파괴를 초래한다.  72


마르크스도 결국 노동 우선의 원칙을 고집한다. 그리하여 "자유 시간이 증가"는 "최대의 생산력"으로서 "노동의 생산력"에 역으로 긍정적 영향을 미쳐야 한다. 이로써 필연성의 왕국은 자유의 왕국을 식민화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한가로운 시간은 더 고차원적인 활동을 위한 시간으로서" 그러한 시간을 가진 사람은 그저 일만 하는 주체보다 더 많은 생산력을 지니는 "새로운 주체"로 탈바꿈한다. 자유 시간은 "개인의 완전한 발전을 위한 시간"으로서 "고정 자본의 생산"에 기여한다. 그렇게 지식은 자본이 된다. 한가로운 시간의 증가와 함께, 현대적 표현을 사용한다면, 인적 자본도 증가한다. 목적도 강제도 없는 행위를 가능케 할 한가로움은 자본에 흡수되어버린다. 마르크스는 "인간 자신이 고정 자본이 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일반적 지성"과 함께 자본으로 변신한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오직 삶이 자본이라는 새로운 초월성에서 완전히 해방될때만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의 초월성은 삶의 내재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가로막고 있다.

마르크스의 가정과는 달리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변증법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는 새로운 착취 관계 속에 얽어맨다 이제 우리는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를 넘어서 사유해야 할 것이다. 자유를, 자유로운 시간을 정말 우리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말이다. 자유로운 시간은 오직 노동의 타자만이, 생산력이 아닌 다른 힘, 어떤 노동력으로도 전환되지 않을 어떤 힘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다. 즉 생산 형식이 아닌 어떤 삶의 형식, 완전히 비생산적인 어떤 것.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생산의 피안에서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찾아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73-74


진정한 행복은 일탈과 방종함, 풍부함, 무의미함, 넘침, 잉여에 있다. 즉 필요, 노동과 성과,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 하지만 오늘날에는 과잉 자체가 자본에 흡수되어 그 해방의 잠재력을 빼앗기고 말았다. 놀이 또한 사치에 속한다. 단, 그것은 노동과 생산의 과정에서 분리된 것이어야 한다. 생산 수단으로서의 게임화는 놀이의 해방적 잠재력을 파괴한다. 놀이는 사물을 자본의 신학과 목적론에서 해방시켜 사물의 완전히 다른 쓸모를 발견하게 해준다.  75


사유에는 두 가지 형식이 있다. 노동하는 사유와 놀이하는 사유가 그것이다. 헤겔의 사유와 마르크스의 사유를 지배하는 것은 노동의 원칙이다. 하이데어의 <존재와 시간> 역시 마찬가지로 노동의 의무에 묶여 있다. "염려"와 "불안"에 빠져 있는 "현존재"는 놀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느긋함"에 바탕을 둔 놀이를 발견한다. 그는 이제 세계 자체를 놀이로 해석한다. 그는 "거의 예측하지 못했던, 이전에 숙고된 바 없는 놀이 공간의 개방성"을 탐사한다. 하이데거의 "시간-놀이-공감"은 어떤 형태의 노동과도 무관한 시간-공간을 지시한다. 그것은 예속화 수단으로서의 심리학의 완전히 극복된 사건의 공간이다.  77





빅데이터


과연 빅데이터가 인간의 행동을 감시하는 데 그치지 ㅇ낳고 그것을 심리정치적 조종의 대상으로까지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문명사회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전혀 상상치 못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하여튼 빅데이터를 통해 매우 효율적인 형태의 통제가 간으해진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당신의 고객에 대한 전방위 시선을 제공합니다." 이것은 미국 빅데이터 기업인 액시엄의 광고 문구다. 디지털 파놉티콘은 실제로 수감자에 대한 전방위 시선을 가능케 한다. 벤담의 파놉티콘은 원근법적 시점의 제약에 묶여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수감자들이 모래 자신들의 비밀스러운 소망과 생각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사각지대가 남아 있다.

디지털 감시는 시점이 없기 때문에 그토록 효율적인 것이다.  79


데이비드 브룩스는<뉴욕타임스> 칼럼엣 데이터 혁명의 도래를 선포한다. 이 새로운 신앙의 이름은 "다타이즘(Dataismus, 데이터주의)이다. "당신이 오늘날 이떤 철학이 새롭게 등장하는지 묻는다면, 나는 다타이즘이라고 대답하겠다. 우리는 이제 거대한 양의 데이터를 모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능력은 일정한 문화적 믿음을 산출하는 듯이 보인다. 이에 따르면 측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측정해야 하고, 그러한 데어터는 감정적,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걸러내는 투명하고 신뢰할 만한 렌즈이며, 우리에게 이를테면 미래를 예언하는 것 같은 놀랄 만한 능력을 준다. [...] 데이터 혁명은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는 놀라운 수단을 제공한다."

다타이즘은 2차 계몽주의의 물결과 함께 등장한다. 1차 계몽주의 때 사람들은 통계학이야말로 지식을 신화적 내용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1차 계몽주의는 통계학을 열렬히 환영했던 것이다. 볼테르는 심지어 통계학을 통해 신화에 오염되지 않은 역사가 도래하기를 간절히 소망하기까지 했다. 볼테르에 따르면, 통계학은 "시민으로서, 철학자로서 역사를 읽고자 하는 사람에게 호기심의 대상"이다. 통계학적으로 재평가된 역사는 철학적이다. "통계학의 숫자는 볼테르가 그저 이야기로서만 존재하는 모든 역사에 대해 방법론적 불신을 표명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한다. 볼테르에게 구역사의 모든 이야기는 신화적인 것의 주변을 벗어나지 못한다." 볼테르에게 통계학은 계몽주의를 의미한다. 통계학은 신화적 이야기에 맞서서 숫자로 증명된, 숫자에서 나오는 객관적 지식을 내세운다. 

투명성은 2차 계몽주의의 구호다. 데이터는 투명한 매체다. <뉴욕타임스> 칼럼에도 씌어 있듯이 데어터는 "투명하고 신뢰할 만한 렌즈"인 것이다. 2차 계몽주의의 명령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이 데이터와 정보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데어터 전체주의, 데이터 물신주의가 2차 계몽주의의 영혼을 이룬다. 모든 이데올로기를 과거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고 믿는 다타이즘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다. 다타이즘은 디지털 전체주의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디지털 계몽주의가 노예제로 역전될 것임을 깨우쳐줄 3차 계몽주의가 필요하다. 

빅데이터가 지식을 주관적 자의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라고들 한다.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직관은 고차원적인 지식의 형식이 되지 못한다. 직관은 그저 주관적인 것, 객관적 데이터 부족을 만회하기 위한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복잡한 상황에서 직관은 맹목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론조차 이데올로기의 혐의에 빠진다. 데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이론은 불필요하다. 2차 계몽주의는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지식의 시대다. 크리스 앤더슨은 예언자적 수사법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언어학엣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인간 행동에 관한 모든 이론은 과거지사가 되었다. 분류법도, 존재론도, 심리학도 모두 잊어라. 왜 인간이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는지 대체 그 누가 말해줄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저 그렇게 행동할 뿐이고, 우리는 유례없이 정확하게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아내고 측량할 수 있게 되었다.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1차 계몽주의의 매체는 이성이다. 이때는 이성의 이름으로 상상력, 육체성, 욕망이 억압되었다. 계몽주의의 치명적인 변증법은 계몽주의를 야만으로 역전시킨다.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변증법이 정보와 데어터와 투명성을 바탕으로 하는 2차 계몽주의 역시 위협하고 있다 2차 계몽주의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계몽주의의 변증법은 신화를 파괴하기 위해 등장한 계몽주의가 한 걸음씩 전진할 때마다 스스로 신화 속에 얽혀든다는 데 있다. "거짓된 명확성은 신화의 또 다른 표현일 따름이다." 아도르노라면 아마도 투명성 역시 신화의 또 다른 표현이며, 다타이즘은 거짓도니 명확성을 약속할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동일한 변증법에 의해 이데올로기에 반기를 든 2차 계몽주의 또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데어터 야만주의로 돌변하게 될 것이다.

다타이즘은 디지털 다다이즘(digitaler Dadaismus)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다다이즘 역시 의미 맥락을 포기한다. 언어는 그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다. "삶의 사건들은 시작도 끝도 없다. 모든 것이 대단히 어리석은 방식으로 흘러간다. 따라서 모든 것은 동일하다. 그 단순함을 다다라고 한다." 다다이즘은 허무주의다. 다다이즘은 의미를 완전히 포기한다. 데어터와 수치는 그저 더해져갈 뿐, 아무런 서사도 지니지 않는다. 반면 의미는 서사를 바탕으로 한다. 서사의 부재로 인한 의미의 공허는 그저 데어터로 채워질 뿐이다. 

오늘날 수치와 데어터는 절대화되는 데 그치지 않고 섹슈얼하고 물신적인 성격까지 지니게 되었다. 예컨대 "양화된 자아"는 그야말로 리비도적 에너지로 작동한다. 다타이즘은 전반적으로 리비도적인, 심지어 포르노적이기까지 한 특성을 타나낸다. 다타이스트들은 데어터와 성교한다. 그래서 요즘에는 "데어터 성애자"에 대한 얘기도 종종 들을 수 있다. 데어터 성애자들은 "철두철미하게 디지털"하다고 한다. 그들은 데어터를 "섹시"하다고 느낀다. 디기투스(손가락)는 팔루스(남근)에 가까워진다.  80-84


수치는 자아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한다.  85


오늘날 우리가 하는 모든 클릭, 우리가 입력하는 모든 검색어는 저장된다. 웹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보는 관찰되고 기록된다. 우리의 삶은 디지털 망에 완벽하게 모사된다. 우리의 디지털 습관은 우리의 인격, 우리의 영혼을 매우 정확하게 재현한다. 디지털 습관을 통한 재현은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보다 더 정확하고 완벽할지도 모른다.  87


벤담의 파놉티콘에는 효율적인 기록 시스템이 없다. 다만 집행된 형벌과 그 이유를 적어둔 "조치 대장"이 있을 뿐이다. 수감자의 삶은 기록되지 않는다. 감시하는 빅브라더는 어차피 수감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소망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건망증이 심한 빅브라더와는 반대로 빅데이터는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이미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디지털 파놉티콘은 벤담의 파놉티콘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88


규율사회의 생정치를 실현하는 수단의 하나인 인구조사는 인구통계학적으로 의미 잇는 자료를 제공하지만, 심리학적으로 활용 가능한 자료를 생산하지는 못한다. 생정치에서 심리에 대한 섬세한 개입은 불가능하다. 반면 디지털 심리정치는 심리적 과정에 선제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자유 의지보다 더 빠를지도 모른다. 디지털 심리정치는 자유 의지를 추월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자유는 종언을 고할 것이다.  89


빅데이터를 통해 우리는 어쩌면 우리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소망을 읽어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특정한 상황에서 의식조차 되지 않는 모종의 애착을 발전시킨다. 우리는 심지어 왜 갑자기 특정한 욕구를 느끼는지조차 알지 못할 때도 많다. 임신부가 특정 임신 주차에 어떤 물건에 대한 욕망을 가지게 된다면, 이때 임신 상태와 욕망 사이에는 일정한 연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녀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저 그 물건을 구입할 뿐, 그것을 왜 사는지는 모른다. 그냥 그럴 뿐이다.그냥 그럴 뿐이라는 것, 이는 아마도 의식적 자아에 잡히지 않는 프로이트의 이드와 심리적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빅데이터는 이드를 심리정치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에고로 만들어준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만일 빅데이터가 우리의 행동과 소망의 배후에 있는 무의식이 왕국으로 입장하게 해준다면, 우리의 심리 속으로 깊숙히 파고들어가 이를 착취하는 심리정치도 충분히 가능해질 것이다.  90


오늘날 빅데이터는 빅브라더의 모습으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빅데이터는 빅딜(Big Deal)이기도 하다. 빅데이터는 무엇보다 큰 장사다. 개인 관련 데이터는 남김없이 상품화되어 금전적 거래의 대상이 된다. 오늘날 인간은 경제적 이익을위해 이용할 수 있는 데이터 패키지로 다루어지고 거래도니다. 인간 자신이 상품으로 전락한다 빅브라더와 빅딜은 동맹을 맺는다. 감시국가와 시장은 하나가 된다.

데이터 회사인 액시엄은 약 3억 명에 이르는 미국인의 개인 정보를 가지고 장사를 한다. 그러니 사실상 거의 모든 미국인의 개인 정보가 액시엄의 소유 아래 있는 것이다. 액시엄은 이제 미국인에 대해 FBI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액시엄은 70개의 범주로 나눈다. 액시엄의 카탈로그에 인간은 70개 종류의 상품으로 제시되어 있다. 필요에 따라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여기서 경제적 가치가 낮은 사람은 "웨이스트(waste)" 즉 "쓰레기"로 지칭된다. 시장 가치가 비교적 높은 소비자는 "슈팅 스타(shooting star)" 그룹에 들어 있다. 나이는 36세에서 45세로 활동적이고, 아침 일찍 일어나 조깅을 하며, 아이는 없으나 기혼이고, 여해을 즐기며 시트콤 <사인필드>를 시청한다.

빅데이터는 새로운 디지털 계급사회를 만들어낸다. "쓰레기"로 분류된 사람은 최하층 계급에 속한다. 점수가 낮은 사람은 신용대출을 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파놉티콘과 나란히 "바놉티콘"이 수립된다. 파놉티콘이 시스템에 갇힌 수감자를 감시한다면, 바놉티콘은 시스템에서 떨어져 있거나 시스템에 대해 적대적인 자들을 불청객으로 낙인찍고 배제하는 기구다. 고전적인 파놉티콘이 훈육의 기능을 수행한다면, 바놉티콘은 시스템의 안전과 효율을 보장한다. 

디지털 바놉티콘은 경제적으로 무가치한 인간을 쓰레기로 낙인찍는다. 쓰레기는 치워버려야 하는 대상이다. "그들은 모두 잉여입니다. 인간 폐품, 사회에서 버려진 자들이죠. 한마디로 쓰레기라는 겁니다. '쓰레기'란 쓸모없음의 화신입니다. 어떻게 해도 결코 쓸모 있게 될 수 없는 모든 것이 '쓰레기더미'에 속합니다. 실제로 쓰레기가 수행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역할은 오직 유용하게 활용할 수도 있었을 공간을 더럽히고 막아버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바놉티콘의 궁극적 목적은 쓰레기가 '가치 있는' 생산물과 분리되어, 쓰레기 처리장으로 보내질 수 있도록 확실히 치워두는 데 있는 것입니다."  92-94


빅데이터는 매우 파편적인 지식만을 제공할 뿐이다. 빅데이터가 보여주는 상관관계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한다. 빅데이터에는 개념도 없고 정신도 엊ㅅ다. 빅데이터가 약속하는 절대지는 절대무지와 다름이 없다.

개념은 자신의 계기들을 자기 경계 내에 거두어들디고, 포함시키는 하나의 통일체다. 개념은 속에 모든 것이 완전히 포함되어 있는 결론의 형식을 취한다("모든 것은 결론이다"라는 말은 "모든 것은 개념이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절대지는 절대적 결론이다. "절대적인 것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절대적인 것은 결론이다." 계속 덧붙여가는 것만으로 결론에 이를 수는 없다. 결론은 덧붙이기가 아니라 이야기다. 절대적 결론이란 그 뒤에 덧붙이기를 허용하지 않는 어떤 것이다. 이야기로서의 결론은 덧붙이기의 반대 형상이다. 순수한 덧붙이기로 이루어지는 빅데이터는 결코 결론이나 완결에 이르지 못한다. 빅데이터가 생성시키는 상관관계나 덧붙이기와는 반대로 이론은 서사적 지의 형식을 취한다.

정신은 하나의 결론, 즉 부분들이 지양되어 의미 있게 담겨 있는 전체다. 전체는 결론의 형식이다. 정신이 없다면 세계는 단순히 덧붙여진 것들의 더미로 해체되고 말 것이다. 정신은 자기 안에 모든 것을 모아들이는 세계의 내면, 세계의 총화를 이룬다. 이론 역시 부분들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거두어들이는 하나의 결론이다. 크리스 앤더슨이 선포한 "이론의 종말"은 결국 정신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빅데이터는 정신을 완전히 불구로 만든다. 순수하게 데이터의 힘으로 추진되는 인문과학은 더 이상 인문과학이 아니다. 총체적인 데이터 지식은 정신의 원점에 놓여 있는 절대적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98-100


모든 이성적인 것이 결론이라면, 빅데이터의 시대는 이성이 없는 시대인 셈이다.  101


17세기에 통계학적 방법이 발명되었을 때 과학자도, 도박사도, 시인도, 철학자도 모두 이 새로운 방법 앞에서 숨이 멎을 정도로 흥분했다. 그들은 새로 발견된 통계적 확률과 규칙성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이러한 당시의 환희는 오늘날 빅데이터에 대한 반응과 충분히 비교할 만하다. 통계학은 세계의 우연성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신의 섭리에 대한 믿음을 되돌려주었다. 예컨대 18세기에 존 아버스넛이 쓴 논문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신의 섭리에 대한 증명. 영국에서 관찰된 출생 성비의 규칙성을 근거오." 신생아 가운데 남아가 여아보다 많다는 통계학적 조사 결과 앞에서 철학자들은 신의 섭리를 확인했다고 믿었고, 이를 근거로 전쟁을 정당화하기까지 했다.

칸트 역시 법칙성을 드러내는 통계적 계산에 매혹되어 이를 자신의 목적론적 역사관 속에 편입시킨다. 그는 한편으로 자유 의지를 가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의지의 자유에 한계를 설정하기도 한다. 그에 따르면 자유 의지의 현상 형태인 인간의 행동 역시 다른 모든 자연적 사실과 마찬가지로 일반적 자연 법칙에 의해 규정된다. 그래서 인간 의지의 자유가 행하는 놀이를 "거시적으로" 관찰해보면 어떤 법칙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개별 주체들의 행동이 아무리 불규칙적인 것처럼 보인다 해도, 인류 전체로 볼 때는 "원초적인 성향들이 비록 느리기는 하지만 꾸준하게 계속 발전해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어서 칸트는 통계 수치에 관해 이야기한다. "따라서 결혼, 이에 따른 출산, 죽음은 여기에 인간의 자유 의지가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치는 까닭에 계산을 통해 그 수를 예측할 수 있게 해줄 어떤 규칙도 성립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큰 나라들에게 나오는 연간 통계표는 그러한 일들도 변함없는 자연 법칙에 따라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치 하루하루 변화해가는 날씨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렇게 변화무쌍한 날씨도 전체적으로는 식물의 생장, 강물의 흐름, 기타 자연 현상들이 항상적이고 중단 없이 계속되도록 유지하는 데 부족함이 없듯이 말이다. 개개인들, 심지어 만방의 민족들초자 각자 자기 원하는 대로, 때때로 다른 이들의 의지에 반하여 자기 자신의 의도를 추구하지만, 실은 그들도 무의식적으로 그들 자신은 알지 못하는 자연의 의도가 읶는 대로 나아가고 자연이 조장하는 대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1차 계몽주의는 근본적으로 통계학적 지식에 대한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 루소의 "일반 의지" 역시 통계학적-수학적 연산의 결과다. 일반 의지의 형성에는 어떤 소통의 과정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통계학적 중간값에서 나온다. "전체 의지와 일반 의지 사이에는 종종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일반 의지가 오직 공동의 이익만을 지향하는 데 반해, 전체 의지는 사적 이익을 따르며 다수의 특수한 의지들이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특수한 의지들 가운데 일단 지나친 부분과 모자라는 부분이 서로를 상쇄하고 나면 차이들의 총합으로서 일반 의지가 남는다."

루소는 일반 의지의 확립이 커뮤니케이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것, 심지어 커뮤니케이션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적을 강조한다. 커뮤티케이션은 통계학적 객관성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소는 정당과 정치단체의 결성을 금지한다. 루소의 민주주의는 토론과 커뮤니케이션이 없는 민주주의다. 이러한 통계학적 방법은 다중과 진리의 종합을 수립한다. 루소는 무엇으로 좋은 정부인지를 알아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답하면서 생정치적 입장을 표명한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도덕적 접근을 회피한다. 정치적 공동체의 목적은 오직 그 구성원들의 생존과 안녕뿐이다. 그리고 이 목적이 달성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신호는 인구 증가다. 통치 기간 동안 국민의 수가 "계속해서 증가"한다면, 그 정부야말로 이론의 여지 없는 최상의 정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루소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통계학자들이여! 이제 그대들 차례다. 세고, 재로, 비교하라."

오늘날 일고 있는 빅데이터에 대한 열광은 통계학에 대한 18세기의 열광과 대단히 흡사하다. 통계학은 아마도 18세기의 빅데이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아 잦아들었으니, 통계학적 이성은 곧 낭만주의 운동과 같은 저항에 부딪혔던 것이다. 평균적인 것, 범상한 것에 대한 혐오는 낭만주의의 근본 정서에 속한다. 낭만주의는 통계학적 개연성의 대립항으로서 독특한 것, 비개연적인 것, 돌연한 것을 내세우며, 통계학적 정상성보다는 별난 것, 비정상적인 것, 극단적인 것을 양성한다. 통계학적 이성에 대한 혐오는 니체에게서도 나타난다. "통계학은 역사에 법칙이 있음을 증명한다. 그렇다. 통계학은 군중이 얼마나 구역질 날 정도로 천박하게 획일적인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너희가 통계학을 한 번 아테네에 적용해봤다면! 그랬다면 차이를 느낄 수 있었으리라! 군중이 저급하고 몰개성적일수록 통계 법칙은 더 엄격하게 관철된다. 군중이 더 고귀하고 뛰어난 사람들로 이루어졌다면, 법칙은 당장 끝장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저 꼭대기로 가서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에 이르면, 너희는 더 이상 계산조차 할 수 없으리라. 위대한 예술가들은 언제 결혼했을까! 이에 관한 법칙을 찾으려 하다니, 그 무슨 헛수고란 말이냐! 그러니 역사에 법칙이 있다 한들, 그런 법칙이란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고, 그런 역사, 즉 법칙에 따라 일어난 일이라는 것도 무가치한 것이다." 통계학은 "역사의 무대 위에서 행동하는 위대한 인물들 대신 엑스트라들만을" 고려할 따름이다. 니체는 "거대한 군중의 움직임을 중요하고 주된 것으로 취급하고 모든 위대한 인물들을 단순히 그것의 가장 뚜렷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거대한 물결 위로 드러나 있는 작은 물방울 정도로 이해하는" 모든 역사 서술에 대해 반대한다.

니체에게 통계 수치는 그저 인간이 무리 짓는 짐승이라는 것, "점점  더 인간이 똑같아진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이러한 획일화는 오늘의 투명사회, 정보사회의 특징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즉시 드러난다면, 일탈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투명성으로부터 타자, 낯선 것, 불일치를 제거하는 순응의 압력이 발생한다. 빅데이터는 무엇보다도 집단적 행동 패턴을 가시화한다. 다타이즘 자체가 동일화의 증대 경향을 강화한다. 데어터 마이닝은 기본적으로 통계학과 다르지 않다. 데이터 마이닝이 드러내는 상관관계는 통계적 개연성의 표현이다. 그것은 통계적 평균치를 계산해낸다. 따라서 빅데어터는 유일무이한 것에 접근하지 못한다. 빅데이터는 사건을 보지 못한다. 역사를, 인류의 미래를 규정하는 것은 통계적 개연성이 아니라 개연적이지 않은 것, 유일한 것, 사건이다. 따라서 빅데이터는 미래도 보지 못한다.  101-107





주체를 넘어서


니체에 따르면 인간의 "자연화"에는 "절대적으로 갑작스러운 것과 파괴적인 것에 대한 각오"가 포함된다. 지금가지 통용되던 것,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사건은 자연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예측할 수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그것은 모든 계산과 예상을 벗어난다. 이로부터 한마디로 완전히 새로운 상태가 시작된다. 사건은 어떤 외부적인 요소를 판 안으로 끌어들여, 주체를 열어젖히고 예속 상태에서 해방시킨다. 사건은 새로운 자유 공간을 여는 단절과 불연속성을 의미한다.  108


사건은 전환이다. 전환을 통해서 전도, 지배 권력의 전복이 이루어진다. 사건은 이전 상태에는 전혀 없던 무언가가 일어나게 한다.  109


체험과 반대로 경험은 비연속성을 바탕으로 한다. 경험은 변신을 의미한다. 어느 대담에서 푸코는 니체, 블랑쇼, 바타유가 말하는 경험이란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떼어내어 주체가 더 이상 주체 자신이 아니게 되거나, 주체가 자신의 파괴 또는 해체로 내몰릴 지경에 이르게" 하는 어떤 것이라고 지적한다.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은 주체를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다. 경험은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가 주체를 예속 상태 속에 더 깊이 빠뜨리기 위해 이용하는 체험 또는 기분과 정반대다.

푸코가 말하는 삶의 기술은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을 낳는 자유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탈심리화의 과정 속에서 완성된다. "삶의 기술이란 심리학을 죽이는 것, 자발적으로, 또한 다른 개체들과도 어울리며, 아무 이름도 없는 존재, 관계, 특성 들을 생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이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삶의 기술은 예속화를 위해 동원되는 "심리학적 테러"에 반항한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심리학적 프로그래밍과 제어를 통해 지배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지속시키는 통치술이다. 따라서 자유의실천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의 기술은 탈심리학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의 기술은 예속화의 매체인 심리정치를 무장해제시킨다. 주체는 탈심리화되고, 비워진다. 이로써 아직 이름이 없는 삶의 형식을 위한 자유가 생겨난다.  109-110





백치


1980년 스피노자 강의에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말씀드립니다. 그들은 바보 노릇을 합니다. 바보 노릇하기. 바보 노릇하기는 언제나 철학의 기능이었습니다." 철학의 기능은 바보 노릇하기에 있다. 철학은 처음부터 바보짓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새로운 표현 방식, 새로운 언어, 새로운 사유를 창조하는 모든 철학자는 본래 바보였음이 틀림없다. 오직 바보만이 완전히 다른 것에 접근할 수 있다. 백치 상태 속에서 사유는 모든 예속화와 심리화에서 이탈하는 사건과 유일무이한 것으로 이루어진 내재성의 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

철학사는 바보짓의 역사다. 자기가 모른다는 것만을 아는 소크라테스는 바보다. 모든 것을 회의하는 데카르트 역시 바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바보 같은 말이다. 사유의 내적 수축은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한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데, 이는 곧 생각을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감으로써 처녀 상태를 회복한다. 들뢰즈는 데카르트적 바보의 맞은편에 다른 유형의 바보를 내세운다. "예전의 바보는 명증성을 원했고, 거기에 자기 스스로 도달하려 했다. [...] 새로운 바보는 도대체 어떤 명증성도 원하지 않으며, [...] 부조리한 것을 원한다. 이것은 생각에 대한 완전히 다른 이미지다. 예전의 바보는 진리를, 새로운 바보는 부조리를 생각의 최고 권능으로 끌어올린다."  111-112


커뮤니케이션과 순응의 압박 앞에서 바보짓은 자유의 실천을 의미한다. 본질적으로 바보는 묶여 있지 않은 자, 네트워크에 낚이지 않은 자, 정보가 없는 자다. 그는 모든 커뮤니케이션과 네트워크에서 벗어나 있는, 어떤 상상을 초월하는 외부 공간에 거주한다. "바보는 목적 지향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소용돌이 속에서 마치 떨어진 한 송이 장미처럼 빙빙 맴돌고 있다. 합의하는 인간들, 놀라운 의견일치의 공동체에 속한 자들 사이에여."

바보는 현대의 이단아다. 이단은 본래 선택을 의미한다. 즉 이단아는 자유로운 선택권을 쥐고 있는 자다. 그는 정통에서 이탈할 용기가 있다. 그는 순응의 압박을 용감하게 떨쳐버린다. 이단아로서의 바보는 합의의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형상이다. 그는 아웃사이더의 마력을 보존한다. 순응의 압박이 점점 더 강화되어가는 오늘날, 이단적 의식의 날을 벼려야 할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다. 

바보짓은 신자유주의적 지배 권력과 그것이 강제하는 총체적 커뮤니케이션과 총체적 감시에 반기를 든다. 바보는 '소통하지' 않는다. 바보는 소통 불가능한 것으로 소통한다. 그는 침무그이 장막 속으로 들어간다. 바보짓을 통해 침묵과 고요, 고독이 있는 자유로운 공간, 정말 말해질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들뢰즈는 이미 1995년에 이러한 침묵의 정치를 선언했다. 그것은 곧 커뮤니케이션과 의사 표현을 강요하다시피 하는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에 대한 반대 선언이다. "오늘날의 난관은 더 이상 우리가 자유롭게 말할 수 없다는 데 있지 않다. 우리가 뭔가 말할 것을 찾을 수 있는 자유로운 고독과 침묵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이제 억압적 세력은 더이상 우리의 의견 표명을 막지 않으며, 오히려 의견을 말하도록 강제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한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대단한 해방인가! 우리는 그럴 때만 점점 더 희귀해지는 어떤 것, 그러느까 과연 말해질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창조해낼 수 있게 되리라."

지혜로운 바보는 완전히 다른 지식에 접근할 수 있다. 그는 수평적인 차원을 넘어, 단순히 정보화되고 네트워크화되어 있는 상태를 넘어, 더 고차원적 영역으로 상승한다. "애초에 자폐증 환자를 의미하는 말이었던 '지혜로운 바보'는 그 개념적 의미를 덜어내고 어쩌면 그저 끼리끼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 모험가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바보짓은 순결한 공간, 사유가 완전히 새로운 언어에 이르기 위해 필요로 하는 저 먼 곳을 열어준다. 지혜로운 바보는 등주 고행승(기둥 위에서 금욕 생활을 실천하는 동방교회의 수도승-옮긴이)처럼 먼 곳을 보고 산다.수직적 긴장이 그를 더 고차원적인 합일에 이를 수 있게 해준다. 그리하여 그는 사건들, 미래에서 온 신호를 예민하게 수신한다. "등주 고행승, 안테나. 어마어마한 방송의 전파가 성자의 입에서 울려나오게 하는 것과 동일한 소리가, 바보가 세계의 약한 신호를 수신하는 순간 울려나온다."  113-116


들뢰즈는 마지막 글인 <내재성: 하나의 삶...>에서 내재성을 행복의 공식으로 끌어올린다. "우리는 순수한 내재성이란 하나의 삶이며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삶 속의 내재성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어떤 것 속에도 있지 않은 내재적인 것으로서, 그 자체가 하나의 삶이다. 하나의 삶은 내재성의 내재성, 절대적 내재성이다. 즉 그것은 온전한 능력, 완전한 행복이다." 내재성은 어떤 다른 것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에만 내재하기 때문에 "그 어떤 것 속에도 있지 않은" 내재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내재성의 내재성"이다. 그것은 그 무엇에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그 스스로 자족적이다. 삶의 이러한 내재적 차원에서는 어떤 지배 질서도 수립될 수 없다. 자본은 삶을 삶 자체에서 소외시키는 초월성으로 나타난다. 삶의 내재성은 이러한 소외 관계를 폐기한다. 

순수한 내재성은 심리화되지도, 예속화되지도 않는 공허다. 내재적 삶은 비어 있는 만큼 더 가볍고, 더 풍부하고, 더 자유롭다. 개별성이나 주체성이 아니라 독특함, 특이성이 바보의 본질이다. 그래서 바보는 아직 개인도, 인격도 아닌 아기들과 근본적으로 닮았다. 개인적 속성이 아니라 비인격적 사건이 아기들의 존재를 이루는 핵심이다. "그래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들은 비슷비슷하고 개성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 하지만 특이성은 있다. 미소, 몸짓, 찡그림, 이는 어떤 주체적 특질이 아닌 사건들이다. 아기들은 내재적 삶으로 충만하다. 그러한 삶은 순수한 능력이며 심지어 고통과 무상함을 훌쩍 뛰어넘는다." 바보는 "그 누구와도 혼동되지 않지만 더 이상 이름이 없는" "호모 탄툼(Homotantum, 특성 없는 인간)" 을 닮았다. 바보가 들어갈 수 있는 내재성의 층위는 탈예속화와 탈심리화의 매트릭스다. 그것은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해방시켜 "저 측량할 수 없는 텅 빈 시간 속으로" 보내는 부정성이다. 바보는 주체가 아니다. "차라리 꽃의 실존. 빛을 향한 단순한 트임."  117-118





옮긴이 후기

자유의 그물을 넘어서 - 한병철의 <심리정치>에 부쳐, 김태환


자본주의 체제에서 진행되는 억압적 권력의 약화와 사회적 자유의 확대 현상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자본주의 체제와 질서 자체가 혁명에 의해 전복될 위험이 줄어들고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마치 너무나 당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연의 질서처럼 여겨지게 되면서, 이른바 불온한 세력에 대한 폭력적 억압과 배제의 필요성도 사라진다. 자본주의적 질서에서 불변의 철칙이 있다면, 돈이 없는 자는 돈이 있는 자에 비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는 경우(또한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관습과 제도와 법에 따른 부자유, 즉 사회적 부자유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전복을 추구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무산자의 부자유를 노예나 농노의 부자유와 마찬가지로 지배 계급으 부당한 폭력에 따른 사회적 부자유로 규정하고, 전근대적 신분제가 사회 혁명을 통해 철폐되었듯이 무산자 역시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실제 마르크스주의 혁명을 통해 성립한 공산주의 체제는 자본주의 질서의 근본 원칙을 철폐함으로써 유산자에게서 자유를 박탈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무산자를 해방시킨다는 목표에는 접근도 해보지 못한채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보다더 큰 정치적 억압과 강제를 낳으며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그 사이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들은 돈과 시장의 질서를 완벽하게 자연화하는 데 성공한다.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자본주의 질서 너머의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은 현실적 기반을 상실했고, 돈 없는 자가 감수해야 하는 사회적 부자유는 자연이 인간에게 부과한 부자유보다도 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자연적 부자유 상태는 때로 기술 혁신을 통해 해소되기도 하지만, 돈 없는 자를 부자유 상태에서 해방시켜줄 기술 혁신은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그런 마법과 같은 기술이 존재한다면 이는 곧 자본주의의 종말을 의미할 것이다. 돈으로 인해 생겨나는 부자유는 오직 돈을 통해서만, 즉 자본주의의 논리 자체를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 무산자의 부자유가 움직일 수 없는 자연적 질서로 고착화되고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이 질서를 철혜할 가능성을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국가가 자본주의 체제의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강제와 폭력을 행사하는 억압적 권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필요성은 거의 사라진다. 국가는 그저 "공공의 안녕"을 유지하는 데 전념하기만 하면 된다. 내가 돈으로 인해 느끼는 부자유는 숙명적이고 자연적인 삶의 조건이 되었고, 그것의 바탕에 놓인 질서는 나를 포함하여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드이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자본주의적 질서에 따른 사회적 부자유가 기술적 불가능성보다도 더 견고한 자연적인 불가능성으로 간주되는 세계, 그 결과로 권력의 노골적인 통제와 강압이 사라져버린 세계, 그것은 바로 한병철이 말하는 '자유'의 감정이 생겨날 수 있는 토양이 된다.

둘째, 20세기 후기자본주의 체제에서 일어난 현저한 변화, 즉 금지하고 규제하는 경직되고 억압적인 권력에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자유와 가능성을 허용하는 친절하고 유연하며 방임적인 권력으로의 이행은 자본의 이해관계와 일치한다. 자본의 관점에서 볼 때, 금지와 규제의 해제를 통한 자유의 확대는 기술 혁신에 의한 새로운 가능성의 생성과 마찬가지로 이윤 창출의 기회를 증대시킨다. 자본주의적 생산을 위해 처음으로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져야 하던 시대, 인간의 필수적인 욕구에 부응하는 정도의 생산만으로도 산업의 성장이 가능하던 시대에는 당연히 근면이나 절약과 같은 금욕주의적 덕목이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으로 간주되었다. 자본주의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방종한 욕망과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태도는 배격되어야 했다. 하지만 전통적인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고 축적된 자본이 이윤을 얻을 수 잇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욕망의 통제는 더 이상 자본주의 경제와 양립하기 어렵게 도니다. 살마들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어야 자본이 투자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이 생긴다. 어떤 도덕이나 종교, 혹은 다른 이념에 사로잡혀 사람들의 욕망을 억압하고 금욕을 강요하는 정치권력이나 사회적 권위는 후기자본주의 체제에 맞지 않는다. 자본은 방임적 권력을 필요로 한다. 이런 면에서 억압적 권력의 약화와 사회적 자유화는 자본의 이해관계가 관철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33-137


자본은 '너는 이것을 할 수 있어'라고 말하며 현란한 가능성들을 펼쳐 보인다.  141


자유의 예속성이라는 역설은 다음 세 가지 측면을 지닌다. 첫째, 우리는 이러한 자유에 대해 주체적인 관계에 있지 못하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내가 선택하고 창조한 가능성이 아니라 자본이 착취를 위해 선별하고 생산한 자유, 자본이 미리 구성해서 제공하는 레디메이드 옵션일 뿐이다. 우리의 모든 욕망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착취 가능한 욕망, 상품화될 수 있는 욕망에만 자유가 주어진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전 존재가 관련되어 있는 실존적 자유와 거리가 멀다. 둘째, 자본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 자본에 의존하게 된다. 자본이 아니라면 우리는 자본이 가능하게 해준 자유로운 삶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유를 자본에 의존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자본에 순응하게 된다. 셋째, 자본이 제공하는 자유는 상품의 형태를 취한다. 따라서 우리는 돈을 주고 자유를 사야 한다. 애플은 공짜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어지는 다채로운 자유의 옵션들을 충분히 누리기 위해서는 많은 돈을 자본에 갖다 바쳐야 한다. 자본은 자유를 위해 돈을 지불하도록 유혹하고, 우리는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일함으로써 다시 자본에 봉사한다. 더 많은 성과는 더 많은 돈을, 더 많은 돈은 더 많은 자유를 약속한다. 우리는 자본이 약속하는 자유를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최대한 착취한다. 자유를 위해 자유를 희생시키는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의 시대는 자본에게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자유를 생산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을 제공한다. 빅데이터가 그것이다. 빅데이터는 우리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습관과 행동 패턴, 우리의 무의식적 욕망까지 읽어낸다. 빅데이터를 통해 자본은 우리에게 '무얼 드릴까요?'라고 물어보지도 않고 우리가 원할 것이라고 예상되는 옵션들을 눈앞에 제시해준다. 이제 우리는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스스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자본이 그것을 대신 생각해준다. 우리의 내밀한 소망을 파악한 자본의 유혹은 더욱 강력해지고, 우리는 꼭두각시처럼 자본의 암시에 따라 조종당할 위험에 처한다. 자본은 명령이나 강압을 통해서 조종하지 않는다. 자본은 다만 할 수 있는 자유를 줌으로써 하게 만들 뿐이다. 뭔가를 할 수 있게 했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실제로 할 확률이 100%라면, 자본의 조종은 완벽하게 성공한 셈이다. 완벽한 유혹, 빅데이터는 자본에게 완벽한 유혹의 방법을 안내한다.  141-143


한병철은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라는 제니 홀저의 말을 <심리정치>의 모토로 삼는다. 제니 홀저는 자기 자신의 소원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한다. 그것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와는 다른 차원의 자유를 암시한다. 오늘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는 대단히 수상쩍은 것이 되었다. 우리는 자본이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하고 싶어 하게 되었고, 이로써 우리의 소원은 자본의 인질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화에서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보다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이 자유의 실천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제니 홀저의 경구에서 타자에게 붙들려 낯설게 되어버린 자아의 소원은 자아를 공격하는 적으로 나타난다. 자아를 지켜달라는 호소문의 형식은, 자신의 소원과 자유에서 자유로워지고자하는 자아의 욕망과 동시에 스스로 자아를 지킬 수 없다는 무기력감을 동시에 표현한다.

한병철은 우리의 소원, 우리의 마음 자체가 자본의 인질로 붙들려 착취의 대상이 된 심리정치의 시대에 내면을 비우고 백치 상태에 이를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면이 없는 바보는 자본이 만들어놓은 자유의 그물 속에 얽혀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함부로 가로질러간다. 지폐 뭉치를 가지고 놀다가 찢어버린 그리스의 아이들이 그런 바보다. 돈은 바로 자본이 제공하는 모든 자유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돈을 찢어버린 그리스 아이들 같은 바보가 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자본이 제공하는 자유의 그물 너머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형식의 자유에 이를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자본에 너무나 깊이 길들여져 있고, 자본이 제공하는 레디메이드 자유의 촘촘한 그물 속에 잘 적응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자본주의 자본이 확장해가는 새로운 가능성에 열광적으로 달려들기 전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이 추진해가는 선택적 자유화의 과정에서 선택되지 않은 자유의 가능성에 대해, 자본이 결코 착취할 수 없는 자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힘을. 한병철은 말한다. "바로 사유야말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144-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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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사랑의 재발명(알랭 바디우)


진정한 사랑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있는 적은 대체 누구인가? 물론, 현대 사회의 개인주의, 모든 것을 시장 가격으로 환산하려는 태도, 오늘날 개인의 행동을 조종하는 이해관계의 차원 등등이다.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사실상 현대 세계, 세속화된 자본주의 세계의 이 모든 규범에 반항한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결코 그저 두 개인 사이의 기분 좋은 동거를 목적으로 하는 계약이 아니라, 타자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인 경험이며, 아마도 현 시점에서 사랑 외에는 그런 경험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5-6


이 책은 진정한 사랑의 최소 조건, 즉 사랑을 위해서는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데 대한 철두철미한 논증인 동시에, 전적으로 안락하모가 나르시시즘적 만족 외에는 관심이 없는 오늘의 세계에서 에로스의 싹을 짓누르고 있는 온갖 함정과 위협 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6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사랑의 경험은 불능에 의해 만들어지며, 불능은 타자의 완전한 현형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인 것이다.  8





멜랑콜리아


타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사실 극적인 변화이지만, 치명적이게도 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이 진행중이라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18


우리는 끊임없이 모든 것을 모든 것과 비교하며 이로써 모든 것을 동일자로 평준화한다. 타자의 부정성은 소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비사회는 아토포스(atopos : 장소가 없는 무소(無所 없을무 바소)적인)적인 타자성을 제거하고 이를 소비 가능한, 헤테로토피아적 차이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애가 아니다. 자기애를 지닌 주체는 자기 자신을 위해 타자를 배제하는 부정적 경계선을 긋는다. 반면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명확한 자신의 경계를 확정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르시시즘적 주체와 타자 사이의 경계는 흐릿해진다. 그에게 세계는 그저 자기 자신의 그림자로 나타날 뿐이다. 그는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인정할 줄 모른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경우에만 의미가 존재한다고 느낀다...

우울증은 나르시시즘적 질병이다.  19-20





할 수 있을 수 없음


성과사회는 금지 명령을 발하고 당위('해야 한다')를 동원하는 규율사회와 반대로 전적으로 '할 수있다'라는 조동사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착취를 위해서는 동기 부여, 자발성, 자기 주도적 프로젝트를 부르짖는 것이 채찍이나 명령보다 더 효과적이다.  29


푸코(Michel Foucault) 역시 신자유주의적인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규율사회에 살고 있지 않으며 자기 자신이 경영자로서 더 이상 복종적 주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정말로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것, 자기 자신을 찾취하면서 자유롭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신자유주의적 자유의 구호를 자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자유로 해석한다. "나는 당신에게 자유의 가능성을 마련해주겠다. 나는 당신이 자유로울 자유가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겠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자유의 구호는 실제로는 "자유로워져라"라는 역설적 명령문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명령은 성과주체를 우울증과 소진 상태속에 빠뜨린다. 푸코가 말하는 "자아의 윤리"는 억압적 정치 권력, 즉 타자 착취에 대항하기는 하지만 가지 착취의 바탕에 놓여 있는 자유의 폭력에 대해서는 맹목적이다.  30-31


'넌 할 수 있어'는 심지어 '넌 해야 해'보다 더 큰 강제력을 행사 한다. 자기 강제는 타자 강제보다 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좌절하는 자는 결국 자기 잘못이며 장차 이러한 죄를 계속 짊어지고 다니게 된다.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물을 만한 사람은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  31


자본주의에는 속죄의 가능성, 채무자를 채무에서 해방시켜줄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채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속죄할 수 없다는 것은 성과주체를 우울증에 빠뜨리는 원인이기도 하다. 우울증은 소진증후군과 더불어 할 수 있음이 초래하는 구제할 수 없는 좌절이며, 다시 말해 심리적 파산 상태를 드러내는 질병이다. 

에로스는 성과와 할 수 있음의 피안에서 성립하는 타자와의 관계다.  32


할 수 있음의 절대화는 바로 타자를 파괴한다. 타자와의 성공적인 관계는 일종의 실패로 여겨진다.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자를 소유하고 붙잡고 알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닐 것이다.  41


부버에 따르면 근원거리는 "인간의 원리"로 기능하며 타자성이 성립할 수 있는 초월적 전제를 이룬다. "근원거리 두기"는 타자가 하나의 대상, '그것'으로 전락하고 사물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성적 대상으로서의 타자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 그러한 타자와는 어떤 관계도 맺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성적 대상을 부를수는 있겠지만 그것에게 말을 건넬 수는 없다. 성적 대상에는 "얼굴"도 없다. 42


'가까움'은 그 속에 '멂'이 기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부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가까움은 부정성이기에 속에 긴장을 품고 있다. 반면 거리의 부재는 긍정성이다. 부정적인 것은 그 대립자에 의해 활력을 얻는다. 바로 여기에 부정성의 힘이 있다. 오직 긍정적이기만 한 것에는 이처럼 생동하게 하는 힘이 없다.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어 향락의 공식으로 여겨진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안락한 감정을 생성해야 한다. 사랑은 더 이상 행위도, 이야기도, 드라마도 아니며, 흔적을 남기지 ㅇ낳는 기분이요 흥분이다. 이제 사랑은 상처와 급습과 추락의 부정성을 알지 못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조차 너무 부정적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부정성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을 이룬다. "사랑은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다. 사랑은 우리의 주도권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밑도 끝도 없이, 우리를 급습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다." 하룻 있음이 지배하는 성과사회,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 주도권과 프로젝트가 전부인 사회는 상처와 고뇌로서의 사랑에 접근하지 못한다.  43-44


에로스가 깨어나는 것은 "타자를 주면서 동시에 빼앗는" "얼굴들"에 직면할 때이다. "얼굴"은 비밀이 업슨 페이스의 대척점에 있다.  48





벌거벗은 삶


에바 일루즈는 연구서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에서 오늘날 사랑이 "여성화"되고 있다고 확언한다. "상냥한" "친밀한" "조용한" "편안한" "달콤한" "부드러운"처럼 낭만적 사랑 장면의 묘사에서 사용되는 형용사들은 전부 다 "여성적"이다. 남자든 여자든 여성적 감정의 영역으로 몰아놓는 낭만주의의 이미지가 세상에 가득하다. 그러나 그녀의 진단과 달리 오늘날 사랑이 단순히 "여성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삶의 여역이 긍정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사랑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소비의 공식에 따라 길들여진다. 모든 부정성, 모든 부정의 감정은 회피된다. 고통과 열정은 안락한 감정과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흥분에 자리를 내준다. 속성 섹스의 시대, 즉흥적 섹스, 긴장 해소를 위한 섹스가 가능한 시대에는 성애 역시 모든 부정성을 상실한다. 부정성의 완전한 부재로 인해 오늘날 사랑은 소비와 쾌락주의적 전략의 대상으로 쪼그라든다. 타자를 향한 갈망은 동일자의 안락함으로 대체된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동일자의 편안한 내재성, 편하게 늘어져 있는 내재성이다. 오늘날의 사랑에는 어떤 초월성도, 어떤 위반도 없다.  51-52


죽음을 햔한 자유를 알지 못하는 자는 자신의 삶을 걸지 못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데리고 죽음에까지 가는" 대신에 "죽음의 내부에서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노예가 되고 일을 한다.

노동과 벌거벗은 삶은 죽음의 부정성에 댛산 반응이라는 점에서 서로 긴밀하게 열결되어 있다.  52-53


벌거벗은 삶에 매달려 노동하는 노예는 에로틱한 경험을 하지도 못하고, 에로틱한 갈망을 품을 줄도 모른다. 오늘날의 성과주체는 헤겔의 노예와 유사하다. 다만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53-54


자본주의는 벌거벗은 삶을 절대화한다. 좋은 삶은 자본주의의 목표가 아니다. 축적과 성장을 향한 자본주의의강박은 바로 죽음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자본주의에서 죽음은 절대적 손실일 뿐이기 때문이다.  54-55


부지런히 삶을 돌보려는 노력이지만, 그것은 좋은 삶을 위한 노력은 아니다. 자본과 생산의 운동은 좋은 삶을 목표로 하는 이념을 떨쳐버림으로써 무한한 가속화 과정에 빠진다. 방향을 상실한 운동은 극단적으로 가속화된다. 이로써 자본주의는 노골적이고 파렴치해진다.  55


우울한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는 어떤 결론도 맺지 못한다. 하지만 결론이 맺어지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흘러가고 떠내려가버릴 것이다. 우울증의 주체가 안정된 자아상을 갖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유부단함, 결단력의 결핍이 우울증의 전형적 증상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울증은 과도한 개방과 탈경계이 와중에서 끝맺음을 하고 완결지을 수 있는 능력이 실종되어버린 이 시대의 특징적 현상이다. 사람들은 삶을 완결지을 줄 모르기 때문에 죽는 법도 잊어버렸다.  58


마르실리오 피치노에게도 사랑이란 타자 속에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하면서, 나는 당신 속에서 나를 다시 발견한다. 당신이 나를 생각하기에. 그리고 당신 속에서 나를 버린 뒤에 나는 나를 되찾는다. 당신이 나를 살아 있게 하므로." 피치노는 사랑하는 자가 다른 자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망각하지만 이러한 소멸과 망각 속에서 오히려 자기 자신을 "되찾고" 심지어 "소유"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소유는 곧 타자의 선물일 것이다... 에로스의 힘은 무력함을 함축한다. 무력해진 나는 스스로를 내세우고 관철하는 대신, 타자 속에서 혹은 타자를 위해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타자는 그런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다. "지배자는 자기 자신을 통해 타자를 장악하지만, 사랑하는 자는 타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각각 자기 자신에게서 걸어나와 상대방에게로 건너간다. 그들은 각자 자기 안에서 사멸하지만 타자 속에서 다시 소생한다."  59-60


모두가 자기 자신의 경영자인 사회에서는 생존의 경제가 지배한다. 그것은 에로스, 혹은 죽음의 비경제와 정반대된다. 자아의 충동과 성과의 충동이 전혀 억제되지 않는 신자유주의의 사회 질서 속에서 에로스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죽음의 부정성을 밀어내버린 긍정사회는 오직 "불연속성 속에서 생존을 확보"해야 한다는 일념만이 지배하는 벌거벗은 삶의 사회다. 그러한 삶이란 노예의 삶일 뿐이다. 벌거벗은 삶에 대한 염려, 생존에 대한 염려는 삶에서 모든 생동성을 빼앗아간다. 오직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생동성이 없다. 부정적인 것은 생동성의 본질적 계기를 이룬다. "그러니까 오직 모순을 자기안에 내포하고 있는 것, 모순을 자기 안에 품고 견질 수 있는 힘을 지닌 것만이 살아 있을 수 있다.  61-62





포르노 


포느로가 음란한 것은 과다한 섹스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섹스가 없다는 사실이 포르노를 음란하게 만든다. 오늘날 성애를 위협하는 것은 쾌락을 적대시하면서 섹스를 뭔가 "더러운 것"처럼 피하는 "깨끗한 이성"이 아니다. 성애는 바로 프로노그래피에 의해 위기에 빠진다. 가상공간에서의 섹스만이 포르노인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는 실제 섹스 역시 포르노로 변질된다.  65-66





에로스의 정치


우리는 에로스를 결코 충동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에로스는 충동뿐만 아니라 용기까지도 관장한다.  83


신자유주의의 토대는 충동이다.  84


사랑은 "둘의 무대"다. 사랑은 개별자의 시점을 벗어나게 하고, 타자의 관점에서 또는 차이의 관점에서 세계를 새롭게 생성시킨다. 이로 인해 일어나는 근원적 전복의 부정성은 경험과 만남으로서의 사랑이 지니는 특징에 속한다.  85


포르노그래피는 이질성을 완벽하게 소거함으로써 습관화의 경향을 더욱 강화한다. 포르노그래피의 소비자에게는 성애의 상대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개별자의 무대 위에 거주한다. 포르노적 이미지에서는 어떤 타자의 저항도, 어떤 실재의 저항도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떤 예의도, 어떤 거리도 없다. 포르노적이라는 것은 바로 타자와의 접촉, 타자와의 만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를 낯선 것의 접촉과 감정적 격동에서 지켜주는 자기성애적인 자기 접촉, 자기 애착은 포르노적이다. 포르노그래피는 자아의 나르시시즘적 성향을 강화한다. 반면 사건으로서의 사랑, "둘의 무대"로서의 사랑은 탈습관화, 탈나르시시즘화의 방향으로 작용한다. 사랑은 습관적인 것과 동일한 것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고 구멍을 뚫는다.  86-87





이론의 종말


얼마 전 <와이어드(Wired)>지의 편집장 크리스 앤더슨이 "이론의 종말"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글을 발표한 바 있다. 여기서 그는 이제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양의 데어커가 활용 가능해짐에 따라 이론적 모델은 완전히 불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구글처럼 엄청난 데이터 풍요의 시대에 성장한 회사들은 틀린 모델에 의지할 이유가 없다. 아니 도대체 모델이라는 것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데이터를 분석하고 귀속 및 종속 관계를 바탕으로 거기에서 패턴을 찾아낸다. 가설적인 이론적 모델은 데이터의 직접 비교에 자리를 내준다. 인과 관계는 상관관계로 대체된다. "언어학에서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인간 행동에 관한 모든 이론을 버려라. 분류법도, 존재론도, 심리학도 모두 잊어라.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누가 안단 말인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다는 사실이고, 우리는 사상 유례없는 정확하게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추적하고 측정할 수 있다.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앤서슨의 테제의 근저에는 허약하고 단순화된 이론 개념이 깔려 있다. 이론은 실험으로 검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가설이나 모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같이 강한 이론들은 데이터의 분석으로 대체할 수 있는 모델이 아니다. 이러한 이론들은 강한 의미의 사유를 바탕으로 한다.  90-91


오늘날 학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데이터와 정보의 더미에 휩쓸려, 이론과 사유에서 아주 멀리 떠나가고 잇다. 정보는 그 자체 긍정적이다. 데이터에 바탕을 둔 실증과학, 데이터를 비교하고 평균을 내는 게 전부인 실증과학은 강한 의미에서의 이론에 종언을 고한다. ..

정보와 데이터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오늘날 오히려 이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하다.  92


사유는 고요함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고요함 속으로의 탐험이다.  93


정신이란 본래 불안을 의미한다. 정신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정성이다.

정보는 그저 알아두기의 대상일 뿐이다...

정보는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한다. 반면 인식은 부정성이다. 인식의 본질은 배제하고, 엄선하고, 결단하는 데 있다. 인식은 기존의 것 전체를 뒤흔들고 뭔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작하게 한다. 과다한 알아두기에서는 아무런 인식도 산출되지 않는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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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서문

한국 사회 역시 성과사회이고 그에 따른 사회적 폐해와 정신 질환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적어도 그 점에서는 서구 사회와 전혀 다르지 않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6-7




신경성 폭력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연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11-12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전 사회를 장악한 이러한 면역학적 장치의 본질 속에는 어떤 맹목성이 있다.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면역 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자체이다.

아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12


어떤 패러다임 자체가 반성의 대상으로 부상한다는 것은 그 패러다임이 몰락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인 경우가 많다... 냉전의 종식 역시 바로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13


오늘날 이질성은 아무런 명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되었다. 면역학 이후 시대의 차이, 후기근대적 차이는 더이상 병을 유발하지 않는다. 명역학적 차원에서 차이란같은것이나 마찬가지다. 차이에는 말하자면 격렬한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가시가 빠져 있다. 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한다. 낯선 것은 이국적인것으로 변질되며, 여행하는 관광객의 향유 대상이 된다. 관광객, 또는 소비자는 더 이상 면역학적 주체가 아니다.  13-14


보드리야르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자는 같은 것으로 인해 죽는다", "현존하는 모든 시스템의 비만 상태"를 지적하기도 한다.  17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  18-19


보드리야르 "네트워크와 가상세계의 폭력은 바이러스성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은 정면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전염, 연쇄 반응, 모든 면역성의 제거 등과 같은 수단을 통해 작동한다는 점에서 바이러스적이다. 또한 전통적인 부정적 폭력과 반대로 긍정성의 과잉을 통해 작동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끝없는 증식과 비대화, 변이를 통해 몸을 잠식해 들어오는 암세포처럼, 가상성과 바이러스성 사이에는 은밀한 친족성이 있다."

보드리야르가 구성한 적(敵 원수적)의 계보학에 따르면 최초 단계의 적은 늑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늑대는 외부의 적으로서 사람들은 이러한 적을 막기 위해 요새를 짓고 성벽을 쌓는다." 다음 단계에서 적은 쥐의 형태를 취한다. 이 적은 지하에서 활동하며 위생학적 수단으로 퇴치할 수 있다. 그다음 단계인 해충의 단계를 거치고 나면 마지막으로 바이러스적 형태의 적이 출현한다. "네번째 단계는 바이러스이다. 바이러스는 사실상 사차원에서 활동한다. 바이러스는 시스템의 심장부에 들어와 있는 까닭에, 바이러스에 대한 방어는 훨씬 더 까다로운 과제가 된다." "전 지구에 퍼져 있는 적, 하나의 바이러스처럼 도처에 스며들고 권력의 모든 틈새로 파고드는 유령 같은 적"이 출현한다. 바이러스성 폭력은 시스템 속에 테러리즘의 비밀 세포로 자리를 잡고 시스템을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키려 하는 개별자들에게서 나온다.  19-20


신경성 폭력은 어떤 면역학적 시각에도 포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부정성이 없기 때문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  21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노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24


알랭 에랭베르(Alain Ehrenberg)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

우울증을 초래하는 요인 가운데는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도 있다. 우울증의 이러한 측면은 에랭베르의 논의에서 빠져 있다. 그는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이러한 폭력이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26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28




깊은 심심함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 야생에서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기법이 멀티태스킹인 것이다.

먹이를 먹는 동물은 이와 동시에 다른 과업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를테면 경쟁자가 먹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고, 먹는 중에 도리어 잡아먹히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하며, 동시에 새끼들도 감시하고, 또 짝짓기 상대도 시야에서 놓치지 않아야 한다. 수렵자유구역에 사는 동물은 주의를 다양한 활동에 분배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까닭에 깊은 사색에 잠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먹이를 먹을 때도, 짝짓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동물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에 사색적으로 몰입할 수 없다. 언제나 그 배경의 사태도 계속 정신적으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멀티태스킹뿐만 아니라 컴퓨터게임과 같은 활동 역시 야생동물의 경계 태세와도 크게 다르지 않는 주의구조, 넓지만 평면적인 주의구조를 생산한다.  30-31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hyperattention)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벤야민은 꿈의 새가 깃드는 이완과 시간의 둥지가 현대에 와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탄한다.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런 것을 "짜지도, 잣지도" 않는다. 심심함이란 "속에 가장 열정적이고 화려한 안감을 댄 따뜻한 잿빛 수건이다." 그리고 "우리는 꿈꿀 때 이 수건으로 몸을 감싼다." 우리는 "수건 안감의 아라베스크 무늬 속에서 안식한다." 이완의 소멸과 더불어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이 소실되고 "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도 사라진다. 이 공동체의 정반대편에 있는 것이 우리의 활동 공동체이다.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둔다.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에게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걸으면서 심심해하고 그런 심심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잃고 안절부절못하며 돌아다니거나 이런저런 다른 활동을 해볼 것이다. 하지만 심심한 것을 좀더 잘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어쩌면 걷는 것 자체가 심심함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그로 하여금 완전히 새로운 움직임을 고안하도록 몰아갈 것이다. 달리기, 또는 뜁박질은 새로운 움직임의 방식이라기보다 그저 걷기의 속도를 높인 것일 뿐이다. 이를테면 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움직임이다. 오직 인간만이 춤을 출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은 걷다가 깊은 심심함에 사로잡혔고 그래서 이런 심심함의 발작 때문에 걷기에서 춤추기로 넘어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걷기가 그저 하나의 선을 따라가는 직선적 운동이라면 장식적 동작들도 이루어진 춤은 성과의 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사치이다.  32-34


떠다니는 것, 잘 눈에 띄지 않는 것,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이야말로 오직 깊은 사색적 주의 앞에서만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긴 것, 느린 것에 대한 접근 역시 오랫동안 머무를 줄 아는 사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지속의 형식 또는 지속의 상태는 과잉활동성 속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34





보는 법의 교육


사색적 삶은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전제한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 과업을 거론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보는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배움의 목표는 니체에 따르면 "고상한 문화"이다.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눈을 평온과 인내, '자기에게 다가오게하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눈으로 하여금 깊고 사색적인 주의의 능력, 오래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정신성을 갖추기 위한 최초의 예비 교육"이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의 부재 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여기서 니체가 표명하는 것은 바로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이는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저 긍정하는 수동적인 자기 개방이 아니다. 사색적 삶은 오히려 몰려오는, 또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기보다 주체적으로 조종한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실상 활동과잉은 다름 아닌 정신적 탈진의 증상일 뿐이다.  47-48


활동성이 첨예화되어 활동과잉으로 치달으면 이는 도리어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성으로 전도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활동성의 변증법이다. 그것은 자유 대신 새로운 구속을 낳는다. 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거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48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못하는 과잉활동적 반응과 해소 작용으로 흩어져버릴 것이다. 순수한 활동성은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연장할 뿐이다. 진정 다른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려면 중단의 부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행동의 주체는 오직 잠시 멈춘다는 부정적 계기를 매개로 해서만 단순한 활동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우연의 공간 전체를 가로질러 볼 수 있다. 머뭇거림은 긍정적 태도는 아니지만,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오늘날 우리는 중단, 막간, 막간의 시간이 아주 적은 시대를 살고 있다. [활동적 인간의 주된 결함]이라는 아포리즘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쓴다. "활동적인 사람들은 보통 고차적 활동을 하는 법이 없다. [..] 이런 점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 돌이 구르듯이 활동적인 사람들도 기계적인 어리석게 계속되는 활동은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가속화와 활동과잉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분노하는 법도 잊어가고 있다. 분노는 특별한 시간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전반적인 가속화 및 활동과잉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가속화와 활동과잉은 넓은 시간적 지평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때 미래는 현재의 연장시킨 것 정도로 축소되고, 다른 것에 시선을 던질 수 있는 부정적 태도가 싹틀 여지는 전혀 없다. 반면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제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부논의 전제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춰 선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분노는 짜증과 구별된다. 오늘의 사회를 특징짓는 전반적인 산만함은 강렬하고 정력적인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버렸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사람들은 불가피한 일에 대해서도 짜증을 내곤 한다.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와 유사하다. 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불안은 현존재 전체를 붙들고 흔들어댄다. 분노 역시 하나하나의 사태에 관한 것이 아니다. 분노는 전체를 부정한다. 분노가 보여주는 부정성의 에너지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분노는 예외적 상태이다. 세계가 점점 더 긍정적으로 되어가면서 예외적 상태도 더 줄어든다. 아감벤은 이처럼 긍정성이 확대되고 있는 현실을 간과한다. 예외 상태가 한계를 이탈하여 정상 상태가 되어간다는 그의 진단과는 반대로, 오늘날 사회의 전반적인 긍정화는 모든 예외 상태를 흡수해버린다. 그리하여 정상 상태가 전체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증대되는 세계의 긍정성이야말로 "예외 상태"나 "면역성"과 같은 개념에 대해 사람들이 주목하게 된 이유이다. 하지만 그렇게 주목받는다고 해서 이런 개념들이 현재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이들이 소멸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49-51


사회의 긍정성이 증가하면서 불안이나 슬픔처럼 부정성에 바탕을 둔 감정, 즉 부정적 감정도 약화된다. 사유 자체가 "항체와 자연적 면역성으로 이루어진 그물"이라면, 부정성의 부재는 사유를 계산으로 변질시킬 것이다. 컴퓨터가 인간의 뇌보다 더 빨리 계산할 수 있고 엄청난 데이터를 조금도 토해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컴퓨터에 어떤 종류의 이질성도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컴퓨터는 긍정기계이다. 천재 백치가 보통은 계산기 밖에 해낼 수 없는 과제를 척척 해내는 것은 바로 부정성의 부재와 자폐적 자기 관련성 덕택이다. 세계가 전반적으로 긍정화되는 추세 속에서 개인도 사회도 자폐적 성과기계로 변신한다. 또는 성과를 극대화하려는 과도한 노력이 가속화 과정에 방해가 되는 부정성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인간이 부정의 존재라고 한다면, 세계의 전면적 긍정화는 무시할 수 없는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헤겔에 따르면 부정성이야말로 인간 존재를 생동하는 상태로 지탱해주는 것이다.  51-52


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니체의 말을 빌린다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다. 이러한 부정적 힘은 단순한 무력함, 무언가를 할 능력의 부재와는 다른 것이다. 무력함은 단순히 긍정적인 힘의 대립항일 뿐이다. 무력함은 무언가를 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결국 그 무언가에 대한 종속이며 그 점에서 긍정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부정적 힘은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는 이런 긍정성을 넘어선다. 그것은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다. 지각하지 않을 수 있는 부정적 힘 없이 오직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 힘만 있다면 우리의 지각은 밀려드는 모든 자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처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어떤 "정신성"도 생겨날 수 없을 거이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무언가 생각할 힘밖에 없다면 사유는 일련의 무한한 대상들 속으로 흩어질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기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긍정적 힘, 긍정성의 과잉은 오직 계속 생각해나가기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52-53


무위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예컨대 참선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들이닥쳐 오는 것에서 스스로 해방함으로써 무위의 순수한 부정성, 즉 공(空 빌공)에 도달하려 한다. 그것은 극도로 능동적인 과정이며 수동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참선은 자기 안에서 어떤 주권적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연습, 중심이 되고자 하는 연습이다. 이에 반해 긍정적 힘만을 지닌 사람은 대상에 완전히 내맡겨진 신세가 된다. 역설적이게도 활동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것은 긍정적 힘의 일방적 절대화가 낳은 결과이다.  53-54





피로 사회 

피로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모리스 블랑쇼


활동사회라고도 할 수 있는 성과사회는 서서히 도핑사회로 발전해간다..도핑은 말하자면 성능 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한다. 최근에는 어엿한 과학자들조차 그런 약물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무책임한 태도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외과의사가 신경향상제의 도움으로 좀더 정신을 집중하면서 수술할 수 있다면 실수도 줄어들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신경향상제를 복용하는 것도 별 문제가 아니다.  65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66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72






역자후기


한병철은 긍정성의 과잉이 자아를 새로운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마치 늘어나는 자기 자신의 지방질에 병들어가는 사람처럼,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마모시켜간다. 그 결과 스스로를 낙오자로 느끼는 우울증 환자가 넘쳐나고, 성과를 위해 약물을 불사하는 도핑주체도 증가하고 있다. 이는 금지, 강제, 억압의 철폐, 타자에 대한 관용의 확대가개인의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유토피아로 이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오늘의 주체는 오히려 자유의 무게에 짓눌려 소진되고 있는 것이다. 피로는 성과주체의 만성질환이다.  120-121


한병철이 이야기하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 부정성의 패러다임에서 긍정성의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생산적인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학교 교육과 관련하여 체벌이나 학생 인권 조례 등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논쟁은 우리 역시 그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과정 속에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일 것이다. 의무 과목의 축소 및 철폐, 자기 주도 학습의 강조, 학생 개개인의 창의성과 개별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입시 전형 방식의 도입(예컨대 입학사정관제)은 학생들을 입시 지옥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주체로 길러내기보다는 더욱더 복잡하고 불투명한 경쟁, 한병철이 말하는 "절대적인 경쟁"(남과의 상대적 경쟁이 아니라 스스로를 끝없이 뛰어넘어야 하는 자기 자신과의 경쟁)의 무대로 몰아가고 있다. 입시 지옥에서의 해방을 약속한 최초의 교육부 장관이 내세운 구호가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 갈 수 있다'였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20개에 가까운 교과목의 무게에 신음하던 학생들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들렸을 이 구호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며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주체의 등장을 예고한 것이 아니었을까?  122-123


한병철은 성과사회와 성과주체의 이상이 오늘의 세계에서 전일적 지배를 확립한 자본주의의 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더욱 생산적으로 될 것'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본적 요구라면, 이 요구가 관철되는 방식이 후기 자본주의에 이르러 지배와 강제에 의한 타자 착취에서 성공적 인간이 되기 위한 자기 착취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한병철은 그것을 착취의 진화로 파악한다. 타자 착취에 의한 생산성의 향상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더욱 효율적인 방법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바로 자기 착취라는 것이다.  126-127


성공적 인간이라는 이상에 유혹당한 사람들의 열망과 실천이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확대 재생산에 기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작 인간 자신은 소진되고 마모된다...

한 병철은 시스템이 이상적인 자아가 되고자 하는 개인들의 욕망으로 지탱되고 있다면, 개개인이 그러한 욕망의 허구성에 대해 각성하는 데서 비로소 시스템의 변화도 시작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는 우울증을 이 시대의 핵심적 질병으로 지목하고, 그 배후에 성과사회의 압력이 놓여 있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병의 진단은 나왔지만 그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타자의 강제가 인간을 옥죄고 있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그런 타자에 대한 폭력적 저항을 통해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마르크스주의의 모델이다. 그러나 우울증의 배후에 놓인 성과사회의 압력은 단순한 외적 강제가 아니라 유혹의 형태를 취하며, 오직 인간 자신의 욕망을 매개로 해서만 관철된다. 따라서 성과사회의 압력은 끝없는 성공을 향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 12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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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별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 이야기를 글로 옮겨야만 할 것 같다.  8


아버지는 일도 안 하고 잠도 안 자고 가끔 씻고 조금 먹고 하루 종일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현관만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이별의 장면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거나 아니면 어머니가 돌아오길 하염없이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그 시절, 나는 아버지가 어떤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는데 아버지는 도무지 제목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깊은 상처를 다시 들쑤실까 두려워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우리 두 사람 사이의 묵계였다. 아버지는 그 책을 구입한 뒤 외출할 때에는 윗도리 주머니에 넣고 나가고 소파에 앉아 있을 때에도 마치 알을 품고 있는 사람처럼 책을 깔고 앉았다. 그 책은 아버지의 슬픔을 자극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위로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숨을 붙이고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오후, 아버지가 책을 부엌 탁자에 놓고 나가서(일부러 내게 보여주려고 그랬을지 모른다) 나는 아버지의 비밀을 발견하게 되었다. <단순한 열정>이란 제목의 책이었다. 동구권 국가의 외교관이자 자기보다 연하인 A라는 유뷰남을 사랑한 여자가 자신의 열정을 토로하는 내용이었다. 작가는 자서전 형식을 빌려 하루하루 남자를 기다리는 심정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10-11


우리는 곧바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외딴 장소를 찾았다. 한번은 소르본 대학 맨 꼭대기 층의 코쉬 대형 강의실 앞에서 누군가에게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위험 속에서 선 채로, 또 한번은 생 쉴피스 성당 안의 들라크루아의 그림 <천사와 야곱의 싸움> 아래에서, 그런 후에는 서로 앞 뒤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걸었다...

영화관이나 극장에 가면 그녀는 내 쪽은 보지 않은 채 무릎 위에 올려놓은 내 코트 밑으로 손을 집어넣고 바지 단추를 끌렀다...

그런 날 저녁에 우리가 자주 가던 극장에서 그녀가 느낀 것은 나에 대한 특별한 욕망이 아니라 상황이 만든 욕망이었다고 짐작된다.  34


나는 '성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그녀의 작품에 대한 논문을 시작했다. 

<단순한 열정>에 관련된 인터뷰 내용을 찾기 위해 그녀의 책을 출간한 출판사에서 나온 홍보자료를 검토했다. 

또한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진실을 그녀의 말 속에서 찾아내길 기대하며 <단순한 열정>을 수사관의 독법으로 꼼꼼하게 읽어내려갔다. 너무 여러 번 읽다 보니 결국 전체 문장을 외우게 되었다. 나는 대화를 하다가 그녀의 반응을 실험해 보려고 그중 몇 문장을 인용해보았다. 그녀는 마치 내가 자기 기억의 한 부분에 폭행을 가했다는 듯 돌연 입을 다물더니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데"라는 표정을 짓고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혹시 내가 쓴 거 아니야? 그 책이 지독한 강박관념이 되었구나 그 책에 대해선 나보다 네가 더 잘아니 말이야." 지금까지 내가 쓴 것을 다시 읽어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혹은 의식적으로 내가 그녀의 문체와 표현을 되풀이하면서 그것에 물들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를 소유하지 못했는데 그녀의 모든 글쓰기가 내 안에서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나는 우리의 글쓰기가 이렇듯 얽혀서 서로 만나길 원했다.  87


우리 이야기는 책이 끝났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라, 그녀의 단어가 내 몸을 떠나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 될 때 끝날 것이다.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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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슈퍼마켓에 가고, 영화를 보고, 세탁소에 옷을 맡기러 가고, 책을 읽고, 원고를 손보기도 하며서 저노가 다름없이 생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몸에 밴 급곤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끔찍스럽게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상마저 내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11


신문에서 그 사람의 나라에 관한 기사를 읽는다.  12


책을 읽을 때 나의 마음을 휘어잡는 문장은 남녀관계를 묘사한 대목이었다. 그런 내용은 내게 A에 관한 무언가를 가르쳐주었고, 사실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들에 확신을 주었다. 가령,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에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포옹할 때 눈을 지그시 감는다"라는 구절을 읽으면, A가 나를 안을 때 그렇게 하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 씌어 있는 그 밖의 다른 내용들은 그 사람과 다시 만날 때까지의 빈 시간을 메워주는 수단일 뿐이었다.

약속 시간을 알려올 그사람의 전화 외에 다른 미래란 내게 없었다. 내가 없을 때 그의 전화가 올까봐 그가 알고 있는 일정에 한해서, 일에 관계된 어쩔 수 없는 용건을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외출을 하지 않았다. 또 행여 전화벨 소리를 못 들을가 진공청소기나 헤어드라이어를 사용하는 일조차 피했다.  13


그 사람을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해서 우리의 약속이 깨지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에 시달렸다.  15


나는 이 남자와 함께 침대에서 보낸 오후 한나절의 뜨거운 순간이, 아이를 갖는 일이나 대회에서 입상하는 일, 혹은 멀리 여행을 떠나는 일보다 내 인새에서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음을 가지러 부엌에 들어가서 문 위에 걸려 있는 벽시계를 쳐다보며 "두 시간밖에 남지 않았어" "이제 한 시간..." 혹은 "한 시간 후면 저 사람은 가고 나만 혼자 남게 되겠지"하는 말들을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도대체 현재란 어디에 있는 걸까?"하고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16


나는 그 사람이 내게 남겨놓은 정액을 하루라도 더 품고 있기 위해 다음 날까지 샤워를 하지 않았다.  17


그날 밤을 나는 그 사람의 품 안에 잠들어 있는 듯한 반수(半睡 반반 잘수) 상태로 지냈다. 날이 밝자 그 사람이 내게 해준 말과 애무를 한없이 되새기면서 마비 상태로 또 하루를 보냈다...PER(파리와 외곽을 잇는 고속 전철) 안에서나 슈퍼마켓에서도 그 사람이 "당신 입으로 거길 애무해줘"하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런 몽롱한 상태에서 서서히 벗어나면, 나는 다시 전화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날짜에서 멀어질수록 고통과 불안은 점점 커졌다... 그의 전화를 받지 못한 채로 여러 날이 지나면 그 사람이 나를 떠난 게 틀림없다고 단정 짓곤 했다.  18


가끔, 이러한 열저을 누리는 일은 한 권의 책을 써내는 것과 똑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완성해야 하는 필요성, 세세한 것까지 정성을 다한다는 점이 그랬다. 그리고 몇 달에 걸쳐서 글을 완성한 후에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이 열정이 끝까지 다하고 나면-'다하다'라는 표현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겠다-죽게 되더라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19-20


그 사람과 사귀는 동안에는 클래식 음악을 한 번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가요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예전 같으면 관심도 갖지 않았을 감상적인 곡조와 가사가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23


일상생활에서 가끔 일어나는 귀찮고 짜증스러운 일에도 나는 무덤덤했다...

나는 도로가 막히거나 은행 창구가 붐벼도 조용히 기다렸고, 직원들이 불친절해도 화는 내지 않았다.  24


요즈음 나는 내가 매우 소설적인 형태의 열정을 지닌 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25


그 사람의 전화만 기다리며 고통을 겪는 일이 너무 끔찍해서 그와 헤어지기를 원했던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럴 때면 나는 그 사람과 헤어지는 순간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사는 나날들이 되풀이되겠지. 나는 결국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사람에게 다른 여자, 아니 여러 여자가 있다고 하더라도(그의 곁에 있는 여자가 한 명일 경우 내 고통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 사람과의 만남을 계속하기로 했다.  39


그 사람은 6개월 전 프랑스를 떠나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다시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45


몇 주 동안,

나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나 아침까지 깨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생각을 할 수도 없는 몽롱한 상태로 있곤 했다. 푹 자고 싶었지만 그가 계속 내 몸 아래에 있는 듯한 느낌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47


A가 떠난 지 두 달쯤 지난 후부터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A와의 관계에 관련된 것들은 무엇이든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다....

글을 쓰는 시간은 열정의 시간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에서부터 립스틱을 고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 페이지부터 계속해서 반과거 시제를 쓴 이유는, 끝내고 싶지 않았던 '삶이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영원한 반복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52


글에는 자신이 남겨놓고자 하는 것만 남는 법이다....

써 놓은 글을 찬찬히 읽어보니,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59


그 사람이 돌아와주기를 간절히 기원했었다.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65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663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66




해설 - 지난 세기말부터 현재까지 프랑스 문학의 흐름을 정리한 문학사는 이 시기의 주도적 현상을 '자아의 글쓰기'라는 용어로 요약했다.  69


문학사에 따르면 자전적 예술이 이토록 확대된 것은 두 가지 현상이 맞물려 작동한 결과이다. 우선 소위 거대 담론의 붕괴로 인해 작가의 시선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구조에서 주체로 이동한 것이 그 첫번째 현상이라면, 이와 더불어 그간 예술적 관심사에서 외면당했던 평범한 개인의 낮은 목소리와 사소한 몸짓이 부각되면서 일상의 의미가 새롭게 해석되는 현상이 그 두번째일 것이다.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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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그저 당신 자신에 대해서나 생각하라는 거요. 괜히 자신이 결백하니 뭐니 하며 소란을 떨지 말시오.  그래 봤자 그리 나쁘지 않은 당신 인상마저 망칠 뿐이니까. 그리고 말도 자제하는 편이 좋겠소. 비록 몇 마디밖에 하진 않았지만 당신이 방금 한 모든 말은 당신 ㅎ애동에서 다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이었소. 그런 말을 지껄여 봤자 당신한테 크게 이로울 것도 없소.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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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필요에 얽매였던 삶을 그리려고 할 때, 내겐 예술의 편을 들 권리도, 무언가 [굉장히 재미있다]거나 [감동적인]것을 만들 권리도 없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말과 행동과 취향, 그의 생애의 주요 사건들, 나도 함께한 바 있는 그 삶의 모든 객관적 표징을 모아 볼 것이다.

추억을 시적으로 꾸미는 일도, 내 행복에 들떠 그의 삶을 비웃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단순하고도 꾸밈없는 글이다.  21


그는 내가 온종일 책에 파묻혀 있다가, 그들에겐 딱딱한 얼굴로 신경질만 내는 모습을 보면서 몹시 답답해했다. 저녁마다 내 침실 문 아래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고 내가 건강을 망쳐 가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공부는 좋은 신분을 얻고, 직공과 결혼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고통이었다. 하지만 내가 머리를 쥐어짜는 공부를 좋아한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고 여겼다. 꽃다운 나이에 인생을 즐기지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가끔 그는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89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 할 말이 없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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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어머니는 이야깃 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어머니는 늘 거기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여는 첫 행위는 시간의 관념에서 벗어난 이미지들 속에 어머니를 고정시키는 것.  18


나는 어머니의 폭력, 애정 과잉, 꾸지람을 성격의 개인적 특색으로 보지 않고 어머니의 개인사, 사회적 신분과 연결해 보려고 한다. 그러한 글쓰기 방식은 내보기에 진실을 향해 다가서는 것이며, 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발견을 통해 개인적 기억의 고독과 어둠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돕는 것이다.  51


(어머니는) 가끔씩 인식했다. '내 상태가 돌이킬 수 없게 될까봐 두렵구나.' 혹은 기억했다. '나는 내 딸리 행복해지라고 뭐든지 했어.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걔가 더 행복한 건 아니었지.'  102


그들은 그녀를 보러 오지 않았고, 그들에게 그녀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본인은 살고 싶어 했다. 끊임없이 성한 한쪽 다리에 의지해 일어서려고 애를 썼고, 자신을 붙잡아 맨 띠를 떼어 내버리려고 했다. 자신의 손이 미치는 범위 안에 들어온 모든 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늘 배고픔을 느꼈고, 갖고 있는 에너지는 온통 입에 집중되었다. 키스를 받기 좋아했고, 자신도 그러려고 입술을 내밀었다. 그녀는 어린 계집아이였고, 결코 자라지 않을 터였다.  104


이 글을 써내려간 10개월 동안 나는 거의 밤마다 어머니 꿈을 꾸었다. 한번은 내가 강 한가운데에 누워 있었고, 내 양옆으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 배에서부터, 그리고 계집아이의 성기처럼 다시 매끈해진 내 성기에서부터 식물들이 구불구불 자라나 흐느적흐느적 떠다녔다. 그것은 단지 나의 성기만이 아니었고, 내 어머니의 성기이기도 했다.  108


그녀는 받기보다는 아무에게나 주기를 좋아했다. 

글쓰기도 남에게 주는 하나의 방식이 아닐까.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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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은 창백한 그녀의 얼굴에 분노가 일었다. 소리를 질러 가라앉힐 수 있는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꾹 누르며 견디어 온 분노, 내면을 향한 분노였다.  11


거울 앞에 서서 안경의 물기를 닦고, 얼굴도 닦았다. 이마에 적힌 숫자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따뜻한 물에 수건 끝을 적셔 이마를 문지르려다 말고 멈칫했다 몇 시간 후 그날 일어난 일을 다시 떠올려보면서, 거울 앞에 서 있던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되었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수수께끼 같은 여자와 만난 흔적을 지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그 찰나에 들었던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마에 전화번호가 적힌 채 교실로 들어서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는 이 건물, 아니 이 학교가 세워진 이래 가장 믿을 만하고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사람이었다. 30년 이상 일을 해오는 동안 실수한 적도, 비난받을 일을 한 적도 없었다. 약간 지루한 선생일지는 몰라도 학교 제도의 기둥으로 존경받았고, 고전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 때문에 대학에서조차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새 학년이 시작되면 학생들로부터 사랑이 담긴 놀림을 받았다. 학생들은 그를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고문헌 중에서도 거의 읽지 않는 부분만 골라 해석을 묻곤 했다. 하지만 그는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다른 주석까지 곁들여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학생들은 건조하면서도 창조적인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짧게 줄여서 불러야 할 만큼 엄청나게 고루하고 고전적이었다. 그는 고전문헌학으로 세계 전체를 짊어지고 다니는 것 같았다. '문두스'는 이 같은 그의 본질을 강조하는 데 가장 적절한 단어였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뿐 아니라 헤브라이어에도 조예가 깊었다. 구약학 교수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러니 여러 개의 세계를 지고 다녔다고 표현하는 게 옳았다. "진짜 학자를 보고 싶다면 여기 있는 이분이 바로 그분입니다." 교장은 새로운 학급에 그레고리우스를 소개할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13-14


그레고리우스는 학생들을 한 명 한 명 살펴보았다. 그는 지금 학생들을 향한 자기감정이 어떤지 중간 점검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교실의 가운데쯤 왔을 때, 자기가 얼마나 자주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생각했는지 알게 됐다. 이 아이들에게는 아직 남아 있는 날들이 얼마나 많은가. 창창한 미래, 얼마나 많은 일이 생길 것인가. 무수히 많은 일을 경험하게 될 이 아이들!  19


천천히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가 옷걸이에 걸려 있던 젖은 외투를 내린 다음,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교실에서 나왔다.  20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남의 이목을 끌지 않고 하굑를 관찰할 수 있는 어떤 걸물의 모퉁이까지 갔다. 그곳에서 학교를 바라보며 그는 자신이 학교와 관련된 모든 것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앞으로 얼마나 그리워할 것인지를 절절하게 느꼈다. 상상하지 못햇던 격렬한 감정이었다.  20-21


그레고리우스가 졸업시험을 치른 이유는 오로지 아내 플로렌스의 강요 때문이었다. 박사 학위를 딸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중요한 것은 아주 단순했다. 문법이든 표현 양식이든 고전의 외진 구석까지 모두 알고 표현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역사를 아는 것, 다른 마롤 하면 자신의 일을 잘하느 ㄴ것이었다. 이것은 겸손함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요구가 많은 사람이었다. 변덕이나 뒤틀린 허영심도 아니었다. 나중에 그는 가끔, 자신의 이런 태도는 잘난 척하는 세상을 향한 조용한 분노, 허풍선이들을 향한 꺾이지 않는 고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레고리우스보다 훨씬 능력이 없던-정말 말도 안 되게 공부를 못하던-사람들도 졸업시험을 시험을 치르고 확실한 직장을 얻었다. 그러나 그에게 이런 사람들은 다른 세상, 견딜 수 없이 천박한 세상, 그가 경멸하는 기준을 지닌 세상에 속해 있었다. 그를 내보내고 대신 졸업장이 있는 교사를 채용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학교에 아무도 없었다. 교장도 고전문헌학을 전공했지만, 그레고리우스가 자기보다 실력이 월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 그를 내보내면 학생들이 폭동을 일으키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21-22


<언어의 연금술사>  27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 관찰의 대상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 말은 경험한 것에서 미끄러져 결국 종이 위에서 모순만 가득하게 남는다. 나는 이것을 극복해야 할 단점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혼란스러움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익숙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경험들을 이해하기 위한 왕도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이상하고 묘하게 들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서야 깨어 있다는 느낌, 정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27-28



-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28



비행기에 올라타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완전히 다른 세상에 도착한다는 사실-그 중간에 놓인 개별적인 모습들을 받아들일 시간도 없이-은 그레고리우스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30


그레고리우스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벨이 울렸다. 학교로군. 벨 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그는 전화 옆에 서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오늘 오전부터 제 인생을 조금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문두스 노릇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저도 모릅니다만, 미룰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전에게 주어진 시간은 흘러가 버릴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삶에서 남는 건 별로 없을 테니까요. 그레고리우스는 크게 소리 내어 이렇게 말해보았다. 이 말은 옳았다. 그는 자기 인생에서 이렇듯 옳고 의미 있는 말을 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전화기에 대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3



- 황금 같은 침묵 속의 언어. 신문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카페에 앉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다 보면 쓰인 글과 하는 말에서 보고 듣는 늘 똑같은 언어 때문에-어법이든 말장난이든 은유든- 혐오감과 구역질을  자주 느끼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보면 나 역시 끊임없이 똑같은 말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들은 소름이 끼치도록 낡았고 평번하며, 수백만 번 사용하여 닳고 닳은 것들이다. 이런 말들에도 과연 의미가 있을까? 무론 말은 나누는 기능을 한다. 사람들은 이 말에 따라 행동하고 웃고 울며,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가고, 종업원은 커피나 차를 가지고 온다. 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말이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이런 말이란 그저 쓸데없는 수다가 새겨진 흔적으로써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효과음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그럴 때면 나는 해변으로 가서 목을 길게 늘여 바람에 머리를 맡기고, 우리에게 익숙한 것보다 훨씬 더 차가운 바람이 불기를 바란다. 낡은 단어들과 진부한 언어 습관을 내 머릿속에서 날아가게 하고, 늘 똑같은 잡담의 찌꺼기를 묻히고 사는 나를 씻겨 깨끗한 정신으로 돌아오게 해줄 바람. 그러나 그런 다음에도 뭔가 할 말이 생기면, 예전과 조금도 달라진 바 없는 나를 보게 된다. 내가 원하는 정화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난 이를 위해 무엇인가를, 언어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을? 내가 나의 언어에서 탈출하여 다른 언어로 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언어에서 도피하는 게 아니다. 언어를 새로 발명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

난 아마 포르투갈어 단어들을 새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다. 새로운 문장들은 낡고 진부하다거나 흥분하여 기교를 부린다거나 의도적이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포르투갈어로 된 문장의 중심을 이루는 원형(原形 근원원 형상형)이라서, 에움길이나 오염이 없이 다이아몬드와 같은 투명한 본질에서 바로 나온다는 느낌을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 단어들은 윤을 낸 대리석처럼 흠이 없고,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은 모두 완벽한 침묵으로 변화시키는 바하의 변주곡 음색처럼 맑아야 한다. 가끔 언어의 진흙 구덩이와 타협하려는 마음이 내 안에 약간 남아 있다면, 그 마음은 화기애애한 거실의 부드러운 고요함이나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느긋한 평온함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끈적거리는 언어 습관에 대한 분노가 나를 에워싸면, 그 분노는 빛이 없는 우주의 맑고 서늘한 적막함 이상이어야 한다. 내가 포르투갈어로 말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 소리 없는 열차를 끌고 가는 우주.... 종업원이나 이발사나 승무원은 새로운 조어를 들으면서 그 문장의 빛나는 간결함, 그 아름다움에 놀랄 것이다. 내 생각에 이런 문장들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엄격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청렴하고 확고부동하게 서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신의 말과 비슷하고, 또한 과장이나 격정이 없이 정확하고 간결하여 단 하나의 단어나 쉼표도 뺄 수 없다는 점에서 언어의 연금술사가 엮은 시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38-40



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드는 잔인함이 그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45


오랫동안 외국-다른 대륙, 다른 기후, 다른 언어 환경-에 살다가돌아온 학생들을 만날 때면 마음의 평정을 더 많이 잃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아직 키르헨펠트에 계세요?" 그들은 이렇게 묻고는 가던 발걸으을 재촉했다. 그런 날 밤이면 그레고리우스는 이 질문에 대한 변명거리를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변명을 해야 한다는 느낌조차 견디기 힘들어졌다.  46


무엇인가와 작별을 할 수 있으려면 내적인 거릳기가 선행되어야 했다.  47



-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이런 생각은 술 취한 저널리스트와 요란하게 눈길을 끌려는 영화제작자, 혹은 머리에 황색 기사 정도만 들어 있는 작가들이 만들어낸 유치한 동화일 뿐이다.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 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 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안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無音 없을무 소리음)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55



-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60



"아무 때나 전화하세요. 낮이든 밤이든." 독시아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둘이 처음 만났던 20년 전을 떠올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의사는 외국인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는 독특한 억양으로 말했다. 

"눈이 먼다고요? 아닙니다. 그냥 운이 나빴던 거예요. 정기적으로 망막을 검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레이저도 있는걸요.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는 그레고리우스를 문까지 배웅하다가 멈춰 서더니 눈을 깊게 들여다보며 물었다.

"무슨 다른 걱정거리라도?"

그레고리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플로렌스와의 이혼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말은 몇 달이 지난 후에야 할 수 있었다. 그리스 의사는 별로 놀라지 않은 듯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가끔 정말 두려워하는 어떤 것 때문에 다른 무엇인가에 두려움을 갖기도 하지요." 그때 그가 한 말이었다.  62-63


그때 형태가 잡히지 않은 채 우리 앞에 놓여 있던 그 열린 시간에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무엇을 해야 했을까. 자유로워 깃털처럼 가벼웠고, 불확실하여 납처럼 무거웠던 그 시간에.  75


지나온 시간이 괴롭지 않은 사람도 돌아가려고 할까?  77


낯선 사람의 삶을 산다는 게 어떤 것일까 생각하며 남의 뒤를 밟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금 전 그의 마음속에서 터져 나온 감정은 아주 새로운 호기심이었다. 그 호기심은 기차를 타고 오면서 경험했고, 파리 리용 역에 내리면서도-어제였든 아니면 언제였든- 느꼈던 새로운 종류의 각정과 어울릴 만한 것이었다.  80


그레고리우스는 뭘 해야 좋을지 모를 때마다 독서를 하곤 했다. 베른 근처 산간 마을 농부의 딸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책을 읽는 일이 드물었다. 가끔 읽는다고 해도 루트비히 강호퍼(1855~1920, 향토 소설로 유명한 독일 작가)의 향토소설 정도만 읽었는데, 그것조차도 몇 주씩 걸렸다. 아버지는 텅빈 박물관 전시실의 무료함을 잊는 수단으로 독서를 시작했고, 읽는 데 취미를 붙이고부터는 손에 잡히는 책은 무엇이든 읽었다. "이제 너도 책 속으로 도망치는구나." 독서의 기쁨을 발견한 아들에게 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책에 대한 어머니의 이런 생각, 좋은 글이 지닌 마술과 같은 힘이나 광채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는 그를 슬프게 했다. 

그는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 즉 책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독서를 하는지 하지 않는지는 금방 알 수 있으며, 사람 사이에 이보다 더 큰 구별은 없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들으면 놀랐고, 그의 괴상한 성격에 머리를 가로젖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레고리우스는 알고 있었다. 정말 알고 있었다.  101-102


담배를 피우는 이방인이 유리에 비친 나의 모습에서 일그러진 상(像 형상상)을 만들어 내리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고, 내 관념 세계에 관한 그의 공상은 일그러진 채 점점 쌓여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이중으로 이방인이 된다. 우리 사이에는 허위적인 외부세계뿐 아니라 외부세계가 각자의 내부세계에 만드는 망상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106-107


우리는 서로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108


모든 사람이 똑같은 그를 보았지만, 프라두가 말하듯 사람드링 보는 외부세계의 한 부분은 내면세계의 한 부분이기도 하므로 모두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프라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 그대로였던 때는 자기 인생에서 단 일 분도 없다고 확신했다.  108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110


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레고리우스는 깃털처럼 가벼운 새 안경을 벗고 눈을 문지른 다음, 다시 한 번 썼다. 그런데 사실이었다. 예전 그 어느 때보다 잘 보였다.  114


새 안경으로 세상은 더 넓어졌고, 공간은 실제로 3차원이 되어 사물들이 마음껏 몸을 펼 수 있었다. 전혀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115



-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인함과 자비심과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가득한 감독.  116



- 사람들의 만남이란 한밤중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달려가는 두 기차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는 뿌연 창문 저편의 흐릿한 불빛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시야에서 바로 사라져서 알아볼 시간도 없는 사람들에게 빠르고 덧없는 시선을 던진다. 무(無)에서 나와 아무런 의미나 목적 없이 텅빈 어둠 속에서 조각처럼 빛나던 창틀, 그 창틀에 들어 있는 유령들처럼 스쳐간 것이 정말 한 남자와 여자였던가? 두 사람은 아는 사이였을까? 둘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가? 웃었던가, 울었던가? 사람들은 이런 광경이란 서로 모르는 타인이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날 산책하면서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말할지 모른다. 이 경우에는 그런 비교가 어느 정도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우리는 많은 살마들과 오랫동안 마주보고 앉아 있다. 함께 먹고 일하며 옆 자리에서 잠을 자고, 한 지붕 아래서 산다. 스쳐 지나가는 덧없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속성과 신뢰감과 친밀한 이해심을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속임수는 아닐까? 매순간 견딜 수 없으므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이 덧없음을 은폐하고 없애려는 시도... 다른 사람을 향한 눈빛이나 시선 교환은, 모든 것을 흔들고 덜컹거리게 만드는 엄청난 속도와 기압에 마비된 기차 승객들이 서로 스쳐 지나가며 던지는 지극히 짧은 시선의 만남과 같은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스치며 지나가는 밤의 만남처럼 언제나 서로에게서 벗어나고, 추측과 생각의 단상과 날조된 특성들만 우리에게 남겨두는 건 아닌지. 만나는 게 사실은 사람들이 아니라, 상상이 던지는 그림자들은 아닌지.  122-123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과거로 돌아가 그를 새롭게 아는 것..

자기 삶과는 완전히 달랐고 자기와는 다른 논리를 지녔던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까.  127


'글을 쓰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깨어 있다고 할 수 없어.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 자기가 어떤 사람이 아닌지는 더욱 알지 못하지고.'(아드리아나의 증언 중)  141


(에사)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1952년 가을, 영국에서였소. 런던에서 브라이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였지...

내가 탄 기차 칸의 문이 열리더니 머리카락이 헬멧처럼 반짝이는 그 사람이 들어오더군. 차가우면서도 부드럽고, 우울해 보이는 눈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그는 신부 파치마와 함께 장거리 여행을 하는 중이었소. 그때든 그 후로든, 그 사람에게 돈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소. 난 그가 의사라는 것, 그리고 특히 뇌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리고 원래 사제가 되려고 했지만, 철저한 유물론자라는 것도. 아주 많은 일에 역설적인 견해를 지녔던 사람이었지. 모순적이 아니라 역설적인 견해 말이오."  150-151


".. 의사들은 믿지 않았거든. 의사들을 믿지 않는 의사라.. 그 사람은 그랬고. 아마데우는."  152


그는 저항운동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소. 성격도 맞지 않았지. 저항운동가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꿈꾸는 사람의 감수성 예민한 영혼이 아니라 나처럼 투박한 두개골이 필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너무 위험 부담이 크고 실수도 하게 되어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어버린다오. 그는 만용에 가까운 행동을 할 수 있을 만큼 아주 냉혹했지만, 인내심이나 우직함은 없었소.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어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은 없었지.  153


(멜로디) ".. 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자비하고 타협하지 않는 오빠의 비판을 좋아했어요..."

"..오빠는 벌써 네 살 때 글을 읽기 시작해서 손에 잡히는 건 뭐든 읽었다고 해요. 초등학교에서는 지루해서 죽을 정도였고, 중등학교에서도 두 번이나 월반을 했어요. 스무 살 때는 온갖 것들을 모두 알게 됐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스스로에게 묻기에 이르렀어요. 그러느라 공놀이 같은 건 잊은 거지요."  179


"그레고리우스, 그건 글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말하는 건 글이 아니라고요. 그냥 말을 하는 거예요."

그레고리우스가 사람들이 서로 연관이 없고 모순된 말을 한다고, 그리고 말한 것도 금방 잊어버린다고 불평했을 때 한 대답이었다. 독시아데스는 그의 말에 마음이 많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자기처럼 택시 운전, 그것도 테살로니키엣 택시 운전을 해본 경험이 있다면 사람들이 하는 말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주 확실하게-이렇게 확실하게 아는건 인생에서 몇 개 안 될 정도로-안다고 했다. 그냥 말하기 위해 말을 할 뿐이라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다면, 그럼 말로는 도대체 뭘 해야 하느냐고 그레고리우스가 물었다. 독시아데스는 껄껄 웃었다. 

"스스로 말을 하는 계기로 삼아야지요! 그래서 말이 계속 이어지도록."  180-181



- 영혼의 그림자.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처럼 확실한가? 스스로의 말이라는 것이 맞기는 할까?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람들은 신빙성이 있을까? 그러나 내가 고민하는 진짜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정말고민스러운 문제는 이런 이야기에 도대체 진실과 거짓의 차이가 있기나 할까라는 것. 외모에 관한 이야기에는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183



- ... 지금의 내가 안니,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그 시절로 다시 가고 싶은-꿈과 같이 격정적인 -갈망.... 다시 한 번 손에 모자를 쥐고 따뜻한 이끼 위에 앉아 있고 싶은 것, 이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길 원하면서 그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겪은 나를 이 여행에 끌고 가려고 하는 것, 이는 모순되는 갈망이 아닌가.  184-185



(바르톨로메우 신부) "..아마데우는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앉아 있었소. 그 아인 기억력이 엄청나게 뛰어났지. 검은 눈은 옆에서 아무리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 해도 흔들리지 않는 달관한 시선과 굉장한 집중력으로 두꺼운 책들을 한 줄씩, 한 쪽씩 모두 빨아들였소. 어떤 선생이 이렇게 말하더군. '아마데우가 책을 읽고나면 그 책에는 더 이상 글씨가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아마데우는 책의 의미만 삼키는 게 아니라 잉크까지 먹는다니까요.'.."  193


"..재능이 많았던 아마데우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소. 하지만 못하는 게 한 가지 있었지. 놀고 즐기고 절제 없이 행동하는 거였소. 엄청난 각성과 통찰과 자제를 향한 열정적인 욕구는 자기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지..."  195


"..아마데우는 천박한 허영심을 대하면 잔인해졌소. 아주 심하게...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드는 듯했지. '천박한 허영심은 우둔함의 다른 형태죠. 우리의 모든 행위가 우주 전체로 봤을 때 얼마나 무의미한지 몰라야 천박한 허영심에 빠질 수 있어요. 그건 어리석음이 조야한 형태로 나타난 거예요.' 그는 늘 이렇게 말했소.."  202


아마데우가 졸업식에 낭독한 글..

첫 문장을  들은 직후부터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소. 시간이 지날수록 정적은 더 심해졌지. 이미 인생을 다 산 듯한 열일곱살짜리 우상파괴자의 펜 끝에서 나온 문장은 마치 채찍질과도 같았소...

나중에 선생도 보게 되겠지만, 마지막 문장은 감동적이면서도 겁을 주는 협박이오..

아마데우는 그 문장을 크게 말하지도, 주먹을 불끈 쥐고 말하지도 않았소. 차분하고 거의 부드럽기까지 한 목소리였소.  209


그레고리우스는 대강당으로 가서 코르테스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프라두의 연설을 듣던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책방 봉지에서 바르톨로메우 신부의 서류철을 꺼내 끈을 풀고, 아마데우가 연설을 끝내고 교탁에 선 채 놀란 청중의 침묵 속에서 정리했던 종이뭉치를 꺼냈다..


- 신의 말씀에 대한 경외와 혐오.

난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이 세상의 범속함에 맞설 대성당의 아름다움과 고상함이 필요하니까. 반짝이는 교회의 유리창을 올려다보며 그 천상의 색에 눈이 부시고 싶다. 더러운 제복의 단조로운 색깔에 맞설 광채가 필요하니까. 교회의 혹독한 냉기로 내 몸을 감싸고 싶다. 병영의 단조로운 고함 소리와 들러리 정치인의재기 넘치는 수다네 맞설, 명령을 내리는 듯한 그 정적이 필요하니까. 행진곡의 새된 천박함에 대항할 물 흐르는 듯한 오르간의 울림이, 흘러넘치는 그 숭고한 음색이 듣고 싶다. 난 기도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천박함과 경솔함이라는 치명적인 독에 대항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필요하니까. 난 성서의 강력한 말씀을 읽고 싶다. 언어의 황폐함과 구호의 독재에 맞설, 그 시(詩)가 지닌 비현실적인 힘이 필요하니까. 이런 것들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이 또 하나 있다. 우리 몸과 독자적인 생각에 악마의 낙인을 찍고 우리의 경험 가운데 최고의 것들을 죄로 낙인찍는 세상, 우리에게 독재자와 압제자와 자객을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세상. 마비시킬 듯한 그들의 잔혹한 군화 소리가 골목에서 울려도, 그들이 고양이나 비겁한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거리로 숨어들어 번쩍이는 칼날로 등 뒤에서 희생자의 가슴까지 꿰뚫어도... 설교단에서 이런 무뢰한을 용서하고 더구나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일 가운데 하낟. 설사 누군가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이는 유례가 없는 허구이며 완벽한 불구하는 값을 치러야 하는 무자비한 자기기만이다. 적을 사랑하라는 이 괴상하고도 비상식적인 명령은 사람들의 의지를 꺾고 용기와 자신감을 빼앗아, 필요하다면 무기까지도 들고 독재자에게 대항하여 일어나야 할 힘을 얻지 못하도록, 그들의 손아귀에서 나긋나긋해 지도록 하기에 적합해 보인다.  

난 신의 말씀을 경외한다. 시적인 그 힘을 사랑하므로, 난 신의 말씀을 혐오한다. 그 잔인함을 증오하므로, 이 사랑은 아주 힘든 사랑이다. 말씀의 광채와 자만하는 신이 만드는 엄청난 예속을 끝없이 구분해야 하니까. 이 증오도 아주 힘든 증오다. 이 세상의 멜로디인 말씀을, 우리가 어릴 때부터 경외하라고 배운 말씀을 어떻게 증오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다음부터 우리를 봉화처럼 비추던 말씀을, 우리로 하여금 지금의 존재가 되도록 이끌어준 그 말씀을?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친자식을 동물처럼 도살하라고 요구했음을. 이런 말씀을 읽을 때 느끼는 분노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자신과 논쟁하려 한다고 욥을 비난하는 신은 도대체 어떤 신인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자기가 겪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욥을? 욥을 그렇게 만든 게 누구던가? 신이 아무런 이유 없이 어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이, 평범한 사람이 그러는 것보다 덜 부당할 이유는 뭔가? 욥이 불평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았던가?

신의 말씀이 지닌 시적 분위기는 너무나 대단해서 모든 것을 침묵하게 하고, 모든 저항을 하잘것없는 불만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선포된 요구와 굴종이 너무 심하여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는 성서를 옆에 밀어놓는 정도가 아니라 던져버려야 한다. 성서에서는 생활과 동떨어져 있으며 즐거움이라고는 없는 신이, 자유로워야 묘사할 수 있는 인생의 그 큰 범위를 복종이라는 단 한 가지 영역으로, 꼼짝할 수 없는 영역으로 한정하려 한다. 우리는 죄를 짊어져 꼬부라지고, 품위를 잃게 하는 예속과 고해성사로 위축되어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긋고, 그의 품 안에서 더 나은 인생을 누리기 위해 수천가지 희망을 거부한 채 무덤을 향해 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모든 기쁨과 자유를 빼앗은 그의 품 안에서 어떻게 인생이 더 나아진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에게서 나오고 그를 향해 가는 말씀은 현혹적으로 아름답다. 복사(服事 옷복 일사) 때 난 그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제단의 촛불 속에서 그 말씀은 얼마나 나를 취하게 했던가! 이 말씀이 온갖 일들의 척도임을 얼마나 당연하게 생각했던가! 사람들이 다른 말-혐오스러운 산란함과 본질의 상실을 의미하는 말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또 얼마나 이해할수 없는 일이었던가! 난 지금도 그레고리오 성가를 들으면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예전의 그 심취가 이제 반란에 돌이킬 수 없이 자리를 내준 사실에 잠시 슬픔에 젖는다. '지성의 희생(sacrificium intellectus)'이라는 두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화염처럼 내 안에서 솟구쳤던 반란...

호기심과 질문, 의혹과 논거, 생각하는 즐거움 없이 우리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우리의 목을 치는 칼날과 같은 두 단어는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느끼고 행동하며 살라는 요구이자 광대한 분열을 향한 선동이며, 우리 삶의 내적인 통일과 조화라는 행복의 정수를 희생하라는 명령이다. 갤리선의 노예는 쇠사슬에 묶여 있지만 원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행위를 가슴 깊은 곳에서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 그것도 기쁨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큰 경멸이 있을까?

신은 그 편재함으로 낮이나 밤이나 우리를 관찰하고 매시간, 매분, 매초마다 우리의 행위와 생각을 장부에 기록하며, 온전하게 우리 자신일 수 있는 시간을 단 한순간도 주지 않는다. 비밀이 없는 사람은,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있는 생각과 소망이 없는 사람은 과연 어떠한가? 종교재판 때와 현재의 고문 기술자들은 알고 있다. "피의자가 내부로 후퇴할 길을 차단하라, 불을 절대 끄지 마라, 절대 혼자 두지 마라, 그에게서 잠과 평온함을 빼앗으라, 그러면 곧 자백할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훔쳐가는 고문은 호흡하는 데 필요한 공기와도 같은 외로움, 우리가 스스로와 마주 설 수 있는 그 외로움을 파괴한다. 우리의 구주, 우리의 신은 자신의 방종한 호기심과 반감을 일으키는 그 궁금증으로 불멸이어야 할 우리의 영혼을 훔치고 있다는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영원히 죽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이 과연 있으랴? 누가 영원히 살고 싶어할까? 말 그대로 끝없이 많은 날과 달라 해가 앞으로 오므로, 오늘과 이 달과 올해에 일어나는 일이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지루하고 공허한가? 정말 영원히 산다면, 의미가 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을까 우리는 시간을 계산하지 않아도 되고, 놓치는 것도 없으며, 서두를 필요도 없다. 우리가 어떤 일을 오늘 하든 내일 하든 아무런 상관이, 정말 완벽하게 아무런 상관이 없다. 회복할 시간이 얼마든지 있으므로 수없이 많은 실수도 영원 앞에서는 무(無)가 되고, 뭔가 후회한다는 것도 무의미해진다. 하루하루 태평하고 편안하게 느낄 수도 없다. 이러한 행복은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자각을 먹고 살기 때문에, 그리고 게으름뱅이는 죽음과 마주한 모험가요 성급이라는 명령과 싸우는 십자군이므로, 언제 어디든 누구에게든 시간이 한없이 많다면 시간을 낭비하면서 얻는 기쁨이 설 자리가 어디에 있으랴?

두 번째로 오는 느낌은 처음과 같지 않다. 그것은 반복을 의식함으로써 퇴색된다. 너무 자주 오고 오래 지속되는 감정은 우리를 지치고 싫증나게 한다. 불멸하는 우리의 영혼 속에는 이런것들이 결코,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아는 데서 오는 어마어마한 권태감과 절규하는 절망감이 자랄 것이다. 우리도 변화하는 감정과 함께 변하기를 원한다. 감정은 바로 예전의 자신을 떨쳐버리기 때문에, 그리고 스스로 다시 사라질 미래를 향해가기 때문에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의 물결이 영원으로 흐른다면, 조망이 가능한 시간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가 전혀 상살할 수 없는 수천 가지 감정이 마음속에 생겨날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에게 어떤 약속이 주어지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우리가 영원토록 우리여야 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우리인 이 강요된 상황에서 언젠가 벗어난다는 위안은 결코 없다는 뜻인가? 우린 여기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하며 또 영원히 알 수 없을 터인데, 이런 무지는 축복이다. 불멸이라는 이 낙원은 바로 지옥임을, 그 한 가지 사실은 알고 있으므로.

현재에 아름다움과 두려움을 부여하는 것은 죽음이다. 시간은 죽음을 통해서만 살아 있는 시간이 된다. 모든 것을 안다는 신이 왜 이것은 모르는가? 견딜 수 없는 단조로움을 의미하는 무한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난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유리창의 반짝임과 서늘한 고요함과 명령을 내리는 듯한 정적이, 오르간의 물결과 기도하는 사람들의 성스러운 미사가, 말씀의 신성함과 위대한 시의 숭고함이 필요하니까. 나는 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자유와 모든 잔혹함에 대항할 적대감도 필요하다.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무의미하다. 아무도 나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말기를.  215-221


글을 세번 읽는 동안 그레고리우스의 놀라움은 점점 커갔다.  211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가 쓴 글을 숨도 쉬지 않고 읽었다.  248



- 난 그를 위해 그랬던가? 살아남는다는 그의 관점에서 내가 행한 일인가? 그게 내 의지였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까? 환자들을 대할 때면 물론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난 그렇게 행동한다. 어쨌든 그랬길 바란다. 내 행동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자신의 의지였다고 알고 있는 동기 외에 완전히 다른 어떤 동기에 영향을 받는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는?

내 손은 자신만의 고유한 기억을 지닌 듯하고, 이 기억은 자기 관찰을 위한 다른 어떤 원천보다도 더 신뢰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멩지스의 심장에 바늘을 찌르던 이 손의 기억. 이 손은 폭군살해자의 손, 그러나 역설적인 행위로 이미 죽은 폭군을 다시 살린 손이었다. (늘 새롭게 경험하는 일이지만, 내 원래 생각과 반대되는 현상은 여기서도 증명된다. 육체가 정신보다 매수되기 어렵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정신은 스스로에 대한 확실한 신뢰와 스스로에게 더 이상 놀라지 않는 인식의 친근함을 우리에게 그럴듯하게 꾸며대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단어들로 엮여 있는 자기기만의 매력적인 활동 무대다. 이렇듯 수월한 자기 확신 속에서 사는 인생은 얼마나 지루한가!)

그러니 사실은 내가 날 위해 그 일을 한 건가? 내가 훌륭한 의사요 증오를 억누를 수 있는 힘을 지닌 용감한 인간임을 나 스스로에게 보이기 위해? 승리를 거둔 극기를 칭찬하고 자기 통제의 기쁨을 즐기기 위해? 그러니까 도덕적인 허영심, 아니 그것보다 더 나쁜 지극히 일상적인 허영심에서? 그러나 그 몇 초 동안의 경험은 결코 향락적인 허영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확실하다. 오히려 나 자신의 뜻과 반대로 행동하고, 끓어오르는 보복과 심술이라는 감정을 눌러야 했던 경험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허영심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허영심, 반대 감정 뒤에 숨어 있는 허영심도 있지 않을까?

'난 의사요.' 흥분한 군중 앞엣 내가 했던 말이다. '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사람이오, 그건 신성한 선서요. 그 선서를 어기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요. 무슨 일이 있어도...'가로 말할 수도 있었겠지. 난 이런 말을 좋아하고, 또 사랑한다. 이런 말은 나를 감동시키고 황홀하게 한다. 사제의 서약처럼 들리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내가 인간백정에게, 그에게 잃어버린 목숨을 돌려준 것은 일종의 종교적인 행위였을까? 더 이상 교조와 예배를 통해 우월감을 느낄 수 없음을 마음속으로 아쉬워하는, 제단 촛불이 지닌 천상의 광채를 아직도 그리워하는 사람의 행위? 다시 말해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행위? 나 스스로도 느끼지 못했지만, 내 영혼 속에서는 예전에 신부님의 귀여움을 받던 제자와 아직 한 번도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않은 폭군살해자 사이에 짧고도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던가? 생명을 구하는 '독'이 든 주사바늘을 심자엥 꽂은 것은 사제와 살인자가 함께한, 각자가 원하던 것을 얻은 행위였나? 

나에게 침을 뱉은 사람이 이네스 살루마옹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면, 난 나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우리가 너에게 요구한 건 살인이 아니었다."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었겠지.

"법적이나 도덕적인 의미에서나 그건 범죄가 아니었어. 그가 그냥 죽게 내버려두었더라도 너에게 판결을 내릴 판사도 없었고, '살인하지 말라'는 모세의 십계명을 어겼다고 말할 사람도 없었다. 우리가 원했던 건 아주 단순명료하고 간단한 일이었어. 우리에게 불행과 고무노가 죽음을 불러온 사람의 목숨, 우리를 불쌍히 여긴 하늘이 이제 드디어 없애려고 하던 목숨을 그렇게 온 힘을 다해, 그가 앞으로도 계속 유혈 체제를 유지하도록 붙잡지는 않는 거였다."

난 무슨 말로 나를 변호했을까?

"어떤 사람이든, 무슨 짓을 저질렀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할 권리가 있다. 우리에겐 다른 사람의 생사 여부를 판단하거나 주관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그게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의미한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총을 쏘는 누군가를 발견한다면, 그 사람을 쏘지 않는가? 당신이 살인을 저지르는 멩지스를 눈앞에서 본다면 필요한 경우 살인을 해서라도 그의 살인을 막지 않을까? 당신이 했어야 할 일,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것과 비교하면 별것 아니지 않은가?"

그를 죽게 그냥 내버려두었더라면 내 기분은 지금 어떨까? 사람들이 나에게 침을 뱉는 대신 치명적인 나의 방임을 칭송 했더라면? 분노를 뿜어내는 실망 대신 느긋한 안도의 숨소리가 골목에서 들렸더라면? 난 분명 악몽을 꿀 정도로 시달렸을 것이다. 이유가 뭘까? 내가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수 있어서? 아니면 그를 죽게 내버려두는 냉혹한 행위는 내가 나 자신에게 낯설어짐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의 나도 그저 우연의 산물일 뿐이 아닌가.

이네스에게 가서 초인종을 누르고, 이렇게 말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어쩔 수 없었어요. 난 원래 그래요. 사정이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됐어요. 내가 생긴 게 워낙 그러니, 달리 어떻게 할 수 없었어요."

그러면 그녀는 아마 이렇게 대답하겠지.

"당신 기분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건 정말 하찮은 거니까. 하지만 멩지스가 건강해져서 제복을 다시 입고, 살해 명령을 계속 내린다고 생각해봐요. 아주 자세하게 상상해보라고요. 자, 이제 자기 자신을 판단해보시죠."

내가 그녀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어떻게, 무슨 말을?  248-252



멩지스가 눈앞에 누워 있을 때, 프라두가 본 것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특정한 개인이었다. 오직 그라는 개별적인 한 인간, 프라두는 멩지스의 삶을 다른 사람들과 연관지어, 더 큰 범위 속의 한 요소로 계산할 수 없었다. 프라두의 혼잣말에 등장하는 여자는 바로 이 점을 비난했다. 그가 개별적인 다른 사람들의 목숨과도 똑같이 관련된, 그것도 여러 사람들의 목숨과 관련된 결과를 생각하지 않은 것. 한 사람의 개별적인 목숨을 여러 사람의 개별적인 목숨을 위해 희생하지 않은 것.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가 이런 일을 배우려고 저항운동에 참여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의도는 실패로 끝났다. "한 사람 대 여러 사람의 목숨. 이런 식으로 계산할 수는 없지 않나요?" 몇 년 뒤에 프라두는 바르톨로메우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253



- "그래, 하지만 왜 불안하지? 고통이나 실망이나 슬픔 또는 분노가 아니라 왜 불안일까? 불안은 이제 앞으로 올 일, 일어날 일에 대해 갖는 감정 아닌가? 네가 피아노를 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늘 알고 있었고, 우린 그걸 '현재'로 다퉜잖아. 이 불행은 지속될지는 몰라도, 불안하다는 느낌이 타당할 만큼 커질 수는 없지 않을까? 연주를 할 수 없을 거라는 뚜렷한 인식은 네 기운을 빠지게 하고 답답하게 만들지는 몰라도, 공포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야."

"그건 오해야."

조르지가 반박했다.

"공포는 새로운 인식 때문이 아니야. 무엇에 대한 인식인지가 문제야. 미래의 것이긴 하지만 현재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내 인생의 불완전함, 지금 이미 결핍이라고 느끼는 이 불완전함이지. 이 결핍이 너무 커서 늘 알고 있었던 사실이 내 안에서 공포로 변해."  266



- 인생이 가볍든 힘들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상관없이 더 많은 삶을 원한다. 끝나고 나면 모자라는 인생을 더 이상 그리워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들은 삶이 끝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복잡하고 분석적인 사유는 직관적인 인식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린 둘 중에 어떤 것을 더 신뢰해야 하나?  269



조르지는.. 왜 이 일에 관심이 있는지 물었다...

"제가 그였더라면 어땠을지 알고 싶어서요."

그레고리우스가 대답했다...

"그게 가능할까요?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 '그'가 된다는 것이?"

그레고리우스는 적어도 그라고 상상하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있지는 않느냐고 대답했다.  280


책은 훔쳤소. 책을 읽는 데는 돈이 들지 말아야 한다는 게 당시 내 생각이었는데,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소.  288


둘은 차를 마시며 체스를 두었다. 말을 움직이는 에사의 손이 떨렸다. 말을 새로 놓을 때마다 딱 소리가 났다. 그레고리우스는 에사의 손등에 난 화상 자국에 번번이 놀랐다. 

"끔찍한 건 고통이나 상처가 아니오."

에사가 말했다. 

"가장 끔찍한 건 굴욕이지. 바지에 오줌을 쌌다는 걸 알았을 때의 굴욕감... 석방되고 나서 난 복수심에 불탔소. 고문기술자들이 퇴근하여 나올 때까지 숨어서 기다렸지. 그들은 사무실에 다니는 사람들처럼 뻣뻣한 외투 차림에 서류가방을 들고 나왔소. 난  그들의 뒤를 밟아 집까지 갔지. 눈에는 누, 이에는 이로 보복하기 위해. 내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을 만지는 게 구역질이 났기 때문이었소. 보복을 하려면 어차피 손을 댈 수밖에 없었소. 총을 사용하는 건 그들에겐 너무 관대한 처벌이었을 테니까. 마리아나는 내가 도덕적인 성숙의 과정을 겪은 줄 알아. 그건 전혀 아니었소. 난 언제나 이른바 '성숙'이라는 걸 거부하던 사람이오. 싫어해. 난 사람들이 말하는 성숙이란 걸 낙관주의나 완벽한 권태라고 생각하오."  290-291



- 실망이라는 향유. 실망은 불행이라고 간주되지만, 이는 분별없는 선입견일 뿐이다.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또한 이런 발견없이 자기 인식의 근본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그러니 실망이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함을 어떻게 얻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우리는 실망을, 없으면 우리 인생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한숨을 지으며 할 수 없이 견뎌야 하는 그 무엇이라고 취급해서는 안 된다. 우린 실망을 찾고 추적하며 수집해야 한다. 젊은 시절에 숭배했던 영화배우가 이제 노화와 쇠락의 징후를 보이는 것에 나는 왜 실망하는가? 성공의 가치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에 대한 실망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부모님에 대한 실망을 평생 동안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 사람들에게서 우린 뭘 기대했던가? 무자비하게 고통스러운 통치 아래서 평생 시달려야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고통을 주고 경제적인 도움도 주는 사람들-행동에서 실망을 느낀다. 그들의 행동이나 말이나 감각은 너무나도 미미하다. 

"뭘 기대하는 겁니까?"

내가 묻는다. 그들은 대답하지 못한다. 이들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기대, 실망할 수도 있는 기대를 오랫동안 품고 다녔다는 사실에 놀란다.

자신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실망스러운 경험의 수집이란 그에게 중독과도 같을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독. 그에게는 실망이 뜨겁게 파괴하는 독이 아니라 서늘하게 긴장을 풀어주는 향유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의 진정한 윤곽이 무엇인지 눈을 뜨게 해주는 향유...

그에게는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실망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실망이 스스로를 향한 길잡이라고 인식한 사람은, 없는 용기와 모자라는 성실함 또는 자신의 감각과 행동과 말에서 끔찍하도록 좁은 한계 등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내기 위해 온갖 힘을 쏟는다. 우리가 우리에게서 바라고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우리에게 한계가 없다는 것? 아니면 우리가 사실은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

기대를 줄임으로써 더 현실적이 되고, 단단하고 신뢰할 만한 본질만 남아 실망의 고통에 맞서는 저항력을 지니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포괄적이고 원대한 기대를 금지하고, 버스의 도착 여부와 같은 무의미한 기대만이 존재하는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292-294



"난 아마데우처럼 거리낌 없이 몽상에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소."

에사가 말했다.

"그리고 실망을 그토록 싫어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소. 아마데우의 이 글은 스스로에게 맞서서 쓴 거요. 자주 자신의 뜻에 거스르며 살아야 했던 그의 삶과 마찬가지로..."  294



- 우스꽝스러운 무대. 우리가 중요하고 슬프고 우습고 아무 의미도 없는 드라마를 상연하기를 기다리는 무대로서의 세계. 이런 생각은 얼마나 감동적이고 매혹적인가, 그리고 올마나 불가피한가!  307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를 잊을 수 있을까?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의 드라마를 상연하는 무대 역할을 한다고 해도? 망각이 아니었다면 그건 무엇이었을까?  309



- 내적인 넓이. 우리는 지금 여기서 산다. 예전에 다른 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과거다. 대부분은 잊어버렸고, 남아 있는 작은 부분들도 무질서한 기억의 파편들일 뿐이다. 단편적인 우연 속에서만 빛을 내다 사라지는 기억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습관적으로 이렇게 생각하곤 한다. 우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다른 사람인 경우에도 이는 가장 자연스러운 사유 방식이다. 이 사람들은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가 아니라 정말 지금 여기 우리 눈앞에 있으므로, 기억의 내적인 일화-그 기억의 현실성이 전적으로 그 사건의 현재성에만 있는-라는 형태를 통해서가 아니면, 이들이 과거와 갖는 관계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나 자신의 내부라는 관점에서 보면 상황은 아주 달라진다. 이 경우 우리는 현재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과거로 깊숙이 들어간다. 이런 일은 깊은 감각, 다시 말해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라는 느낌은 어떤 것인지를 결정하는 감각이 누구만 가능하다. 이 감각은 시간을 초월하고, 시간을 인정하지도 안흔다. 내가 지금도 여전히 손에 모자를 들고 학교 계단에 앉아 혹시 마리아 주앙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여학교로 눈길을 보내는 소년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물론 잘못된 주장이다. 30년도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실이기도 하다. 어려운 과제를 앞두고 두근거리는 내 가슴은, 수학을 담당했던 랑송이스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올 때 뛰던 그 가슴이다. 온갖 권위에 직면했을 때 답답해지는 가슴속에서는, 허리를 굽힌 아버지의 호령이 함께 울려 퍼진다. 모르는 여자의 반짝이는 눈빛과 마주칠 때마다, 그 옛날 학교 유리창에서 마리아 주앙의 시선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고 느꼈을 때처럼 숨이 멎는다. 난 늘 그곳에, 먼 시간의 저편에 있다. 결코 그곳을 떠난 적이 없다. 과거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거나, 그곳에서 출발하며 산다. 이 과거는 단순하고 짧은 일화 형태로 반짝이는 기억이 아니라 현재다. 시간이 몰고 온 수천 가지 변화는, 시간을 초월하는 현재의 이 감각과 비교하면 꿈처럼 덧없고 비현실적이며 환영처럼 기만이 심하다. 이 변화들은, 고통과 걱정거리를 안고 나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내가 마치 완벽한 자신감과 용기를 지닌 의사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불안에 떨며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신뢰감은, 그들이 내 앞에 있는 한 나 스스로 이것을 사실로 믿도록 강요한다. 하지만 환자들이 나가자마자 난 그들에게 소리치고 싶다. 난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학교 계단에 앉아 있는 소년일 뿐이라고, 내가 하얀 가운을 입고 이렇게 거대한 책상 앞에 앉아 환자들에게 충고를 하는 것은 정말 하찮은 일이고 사실은 거짓이라고, 우리가 같잖은 천박함으로 현재라고 부르는 현상에 속지 말라고...

우리는 시간상으로만 광범위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공간적으로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훨씬 넘어서 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장소를 떠나면서 우리의 일부분을 남긴다. 떠나더라도 우리는 그곳에 남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그곳으로 돌아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단조로운 바퀴 소리가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그 여정이 아무리 짧더라도-장소로 우리를 데리고 가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가까이 가고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을 떠난다. 우리가 낯선 정거장의 플랫폼에 두 번째로 발을 디디면, 그래서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다른 곳과 확연히 구별되는 냄새를 맡으면 우리는 외형상으로만 먼 곳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 먼 곳에도 이른 것이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에게서 아주 외딴 구석, 우리가 다른 곳에 있을 때면 무척 어두워 보이지 않았던 곳에... 그렇지 않고서야 승무원이 지명을 크게 외치고 기차가 멈추느라고 내는 끼익 소리를 들으면, 역 건물의 그림자가 우리는 삼키기 시작하면, 왜 그렇게 가슴이 뛰고 숨이 차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왜 우리는 기차가 마지막으로 덜컥이며 완전히 멈추는 순간을 마술적이고 소리 없는 드라마라고 생각하는가?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플랫폼에 첫 발자국을 디딘 순간부터, 그 옛날 기차의 첫 덜컥임을 느꼈을 때 중단하고 떠났던 삶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중단된 삶, 온갖 약속으로 가득한 그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 더 흥분되는 일이 또 어디에 있으랴? '지금'과 '여기'가 본질적이라는 확신으로 이것에 집중하는 행위는 오류이며, 또한 불합리한 폭력이다. 중요한 것은 확실하고 느긋하게, 알맞은 유머와 멜랑콜리로 '우리'라는 시간과 공간상의 내적인 경치 속에서 움직이는 일이다. 여행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뭔가? 그들이 외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내적으로도 뻗어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계발할 수 없고, 스스로를 향한 먼 여행을 떠나 지금의 자기가 아닌 누구 또는 무엇이 될 수 있었는지 발견할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살아간다.  315-318



"체스는 그렇게 잘 두면서, 왜 인생에서 싸울 줄은 몰라요?" 프롤렌스는 이런 말을 여러 번 했다. 인생에서 싸우는 건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자기 자신과 싸울 일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 그가 했던 대답이었다.  324



- 계획된 것도 아니고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지만,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남기는 불가피하고도 쉴 새 없는 부담의 흔적-절대 없애지 못하는 화상의 흉터처럼-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려, 부모들이 지닌 의도나 불안의 윤곽은, 완벽하게 무기려하고 자기가 어떻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아이들의 영혼에 달군 철필로 쓴 글씨처럼 새겨지지, 우리는 낙인찍힌 글을 착고 해석하기 위해 평생을 보내면서도, 우리가 그걸 정말 이해했는지 결코 확신할 수 없어.  356



내가 아빠의 상상에 대해 아는 게 있던가? 왜 우리는 부모의 상상에 대해 이다지도 모를까? 어떤 사람이 상상을 통해 받는 이미지에 대해 알지 못하면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과연 무엇을 알 수 있을까?  363



- 그러나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384



이따금 나는 인가의 약점보다 '생각 없음'이 더 많은 잔인함을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387


그레고리우스는 고통을 겪는 엄한 판사 아버지와 공명심이 강한 어머니-신처럼 떠받드는 아들을 통해 자기 인생을 살았던-아래에서 자랐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410


(아드리아나)"말을 하지 못하는 것. 오빠는 '감정 교육'이 무엇보다도 느낌을 드러내는 기술, 말을 통해 느낌을 풍요롭게 하는 경험을 우리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곤 했어요. 아버지는 그걸 얼마나 못하셧던지!"  415-416


"마지막 해에 오빠는, 우리 모두가 두려워하는 외로움의 본질이 도무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우리는 외로움이라고 말하는 그게 도대체 뭐지? 단순하게 다른 사람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아. 혼자 있으면서도 전혀 외롭지 않을 수도 있고,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외로울 때가 있으니까. 그러니 그게 뭘까? 오빠는 사람드이 온갖 소란 가운데서도 외로울 때가 있다는 생각에 골몰했어요. '좋아. 다른 사람들이 옆에 있다는 것, 내 옆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상황만 말하려는 건 아니야. 함께 파티를 하거나 친근한 분위기 속에서 감정이 이입된 현명한 조언을 할 때도 그래. 그럴 때도 우린 외로움을 느끼지. 그러니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의 존재 여부는 물론, 함께하는 행위와도 상관이 없어. 그러면 도대체, 도대체 무엇과 관련이 있을까?'.."

'경멸에서 오는 외로움'이라는 메모가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존경과 인정을 거두어가면, 왜 우린 그들에게 '그런 건 필요 없소. 나 자신만으로도 충분하니까'라고 말하지 못하나? 이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건, 소름끼치는 속박의 한 형태가 아닐까?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는 건 아닌가? 이런 일을 견디는 댐이나 보루로 어떤 감정을 세워야 하나? 내적인 견실함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그레고리우스는 책상 위로 몸을 굽히고, 벽에 붙은 메모지의 빛바랜 글씨를 읽었다.

신뢰에서 오는 협박.

"환자들은 오빠에게 아주 사적인 일이나 위험한 일들도 이야기 했어요."

아드리아나가 말했다.

"정치적으로 위험한 일들 말이에요. 그런 다음에 그 사람들은, 자기가 벌거벗었다는 느낌을 갖지 않으려고 오빠도 뭔가 고백하기를 기다렸어요. 오빠는 그걸 이루 말할 수 없이 증오했지요. '난 다른 사람들이 내게서 뭔가 기대하는 게 싫다.' 오빠는 발을 구르며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도대체 경계선을 긋는 일이 왜 이렇게 힘드니?' '어머니와 경계선을 긋는 일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어요. '어머니와 말이야.' 하지만 하지 않았어요. 오빠 스스로 알고 있었으니까."

인내라는 위험한 덕목.

"오빠는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인내라는 단어에 지독한 거부 반응을 보였어요. 인내심을 지닌 누군가를 보면 오빠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어요. '잘못을 저지르는 기괴한 방식일 뿐'이라고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했어요. '우리 안에서 솟구치는 분수에 대한 불안이지.' 난 동맥류를 알고 난 뒤에야 이 말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었어요."  417-419


"난 오빠를 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요. 오빠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믿었어요. 몇 년 동안 매일 오빠를 보아왔고, 자기 느낌과 생각과 더구나 꿈에 대해서도 말하는 걸 들어왔으니까요..."  420


'경멸에서 오는 외로움' 프라두가 생의 마지막에 골몰하던 주제였다. 우리가 타인의 존경과 관심에 의지하고, 그것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  431



- 유치함은 모든 감옥 가운데 가장 악질적이다. 창살은 단순하고 비현실적인 감정으로 도금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를 궁전의 기둥으로 착각한다.  434-



(마리아 주앙)".. 그런 일이 있지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없는지 알지 못해요. 그게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그러다가 그게 나타나면 단 한순간에 확실해지지요..."  455


(마리아 주앙)'상상력은 우리의 마지막 성소다.' 그가 늘 했던 말이지요. '상상력과 친근함은 언어 외에 그가 인정한 유일한 성스러움이었으니까요.  462



(마리아 주앙)".. 조르지를 나쁘게 말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를 향한 아마데우의 비판 없는 경탄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난 농부의 딸이라 농부의 아들들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어요. 낭만적이 아니지요. 큰일이 벌어지면 조르지는 일단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할 사람이었어요. 

아마데우를 매혹했던 것, 거의 취하도록 그를 끌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과 스스로의 경계를 지슨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던 조르지의 성격이었어요. 그는 간단하게 '싫어'라고 말하고는, 그 큰 코를 벌쭉이며 웃으면 그만이었으니까요. 그에 비해 아마데우는, 경계를 지으려면 그게 마치 구원의 문제라도 되는 듯 싸워야 했어요."  464


실우베이라가 말했다. "우리가 인생을 조망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앞으로든 뒤로든. 뭔가 일이 잘 풀렸다면 그건 그냥 운이 좋았던 것이겠지요."  471



- 배신적인 언어. 자기 자신이 다른 누군가에 대해 또는 단순히 어떤 일에 대해 말을 할 때 우리는 말을 통해 스스로를 열어 보이려 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타인에게 알리고, 타인에게 우리의 영혼을 잠깐 엿보기를 허용하는 것이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우리 마음의 한 조각을 타인에게 준다라는 뜻이다. 배 난간에 서 있을 때 어떤 영국인이 나에게 한 말이었는데, 새빨간 축구공을 가지고 있던 올소울의 아일랜드 학생에 대한 추억을 제외하면 그 낯선 나라에서 가지고 온 것들 가운데 좋은 거라고는 그 말이 유일하다.)

이런 상화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여는 문제에 관한 한 독자적인 감독이요 결정권을 지닌 극작가다. 하지만 어쩌면 이건 완벽하게 잘못된 생각, 자기기만이 아닐까? 우리는 말을 통해 자기를 드러낼 뿐 아니라 스스로를 배신하기도 한다. 표현하려던 것보다 훨씬 더 심하게 속내를 드러내어 원래 의도했던 바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타인은 우리의 말을 우리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에 대한 증상으로 해석한다. 우리라는 질병에 대한 증상, 타인을 이렇게 관찰하는 일은 흥미로우며 또한 우리를 매우 관대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우리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기도 한다. 타인도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똑같이 본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 입을 열려던 순간 말이 목에 걸린다. 그 충격은 우리를 영원히 침묵하게 만들 수도 있다.  476-477



- 분노라는 들끊는 독. 타인 때문에-그들의 뻔뻔함과 부당함,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우리가 화를 낸다면 우리는 그들의 권력 아래에 놓인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고 자란다. 분노는 들끓는 독과 같아서, 부드럽고 우아하며 평화로운 감정들을 파괴하고 우리에게서 잠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불을 켜고, 우리를 빨아먹고 기운을 빼는 기생충처럼 우리 안에 자리를 잡은 분노를 터뜨린다. 우리가 입은 피해에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오로지 우리 안에만 퍼져간다는 사실에도 분노한다. 우리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감싸며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는 동안, 우리를 희생자로 만든 원인 제공자는 분노의 파괴력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있으니까. 번쩍이는 조명이 무언의 분노에 쏟아지는 내부의 무대, 관객이 없는 그 무대에서 우리는 비현실적인 인물과 비현실적인 언어로 비현실적인 적들에게 효과라고는 전혀 없는 분노-우리가 내부에서 차갑게 들끓는 화염으로 인식하는-를 터뜨리며 우리를 위한 드라마를 홀로 상연한다. 이 모든 것이 상상 속의 드라마일 뿐, 타인에게 해를 입히고 번민의 균형을 만들어낼 실제 논쟁이 아니라는 인식을 우리가 확실하게 하면 할수록 유독한 그림자들은 더 사납게 춤추며 악몽의 가장 어두운 지하무덤까지 우리를 쫓아온다. (잔인하게 역습을 하리라고 생각하며, 상대방에게 소이탄과 같은 효력을 발휘할 만한 말을 밤새도록 궁리한다. 그래서 화창한 평화로움 속에서 우리가 커피를 마실 동안, 분노의 불길이 이번에는 그에게서 타오르도록.)

분노를 올바르게 다스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만나도 상관없는 무정한 존재, 차갑고 냉철한 판단만 내리는 존재, 진정으로 신경을 쓰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그 무엇도 흔들어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분노라는 경험을 전혀 알지 못하고, 메마른 무감각과 구별할 수 없는 태연함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기를 진심으로 원할 리는 없다. 분노도 우리가 누구인가에 관해서 어느 정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우리가 분노를 인식했을 때 그 독에 빠지지 않으며 분노가 우리에게 득이 되도록 하려면 우리 자신을 어떻게 교육하고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이다.

이것이 임종 순간에 마지막 대차대조표의 한 부분으로 남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분노에, 그리고 효과가 없는 상상 속의 드라마-쓰러질 정도로 번민하는 우리만 알고 있는 드라마-에서 타인에게 복수하는 데 너무나 많은 것을, 너무 많은 힘과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이 대차대조표는 청산염처럼 쓴맛이 나리라. 이 표를 개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 부모님이나 선생님, 다른 교육자들은 왜 이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을까? 이 엄청난 의미에 대해 왜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을까? 스스로를 파괴하는 분노 때문에 영혼을 낭비하지 않게 도와줄 나침반은 왜 주지 않은 걸까?  496-498



당신 내가 지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네? 문두스,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에요!" 왜 이런 모든 일이 지금까지도 이렇게 아플까? 왜 20년, 30년이 지나도록 이 기억들은 털어내지 못할까?  503


"문두스,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에요!" 플로렌스는 왜 그냥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까. "당신이 지루한 사람이냐고요? 세상에, 절대로 아니에요!"라고.

인간이 상처를 떨어낼 수 있기는 한 걸까? 우리는 과거로 깊숙이 들어간다. 프라두가 남긴 글이었다. 이런 일은 깊은 감각, 다시 말해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라는 느낌은 어떤 것인지를 결정하는 감각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 감각은 시간을 초월하고, 시간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507


그리고리우스는 그들에게 삶이 만족스러운지 물었다. 베른의 고전문헌학자인 문두스가 세상의 끝에서 가릴시아의 어부들에게 삶에 대한 견해를 묻고 있었다.  508


한 명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만족하냐고? 다른 삶은 모르는 걸!"

어부들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나중에는 그칠 줄 모르는 웃음바다로 변했다. 그레고리우스도 얼마나 흥겹게 따라 웃었던지 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509


친근함, 그것은 신기루처럼 헛되고 변하기 쉽다. 프라두가 쓴 말이었다.  516


덧없음. 프라두가 좋아하던 단어 가운데 하나라고 마리아 주앙이 말해주었다.  519



- 독재적인 친근함. 우리는 친근함 속에서 서로 뒤엉켜 있다. 보이지 않는 끈들은 '자유롭게 하는 사슬'이다. 이 뒤엉킴은 독재적이라, 독점을 요구한다. 나눔은 배반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사람만 좋아하고 사랑하고 접촉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다양한 친근함을 연출하고, 주제와 말과 몸짓과 함께 나눈 지식과 비밀에 관해 옹졸하리만큼 꼼꼼한 장부를 써야 하는가? 이런 친근함은 소리 없이 떨어지는 독이다.  530



타인을 자기 삶의 건축용 석재로, 자기 구원의 경주를 위한 일벌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536


사람의 정체성은 언제 유지되는가. 늘 그래왔던 그 모습일 때? 스스로를 바라보았을 때처럼? 아니면 들끓는 생각과 감정의 용암이 온갖 거짓과 가면과 자기기만을 묻어버릴 때? 달라졌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사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원하는 그 모습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러니까 타인의 안녕에 대한 걱정과 염려라는 가면을 썼을 뿐, 결국 익숙한 것이 흔들릴까봐 대항하는 투쟁 문구의 일종인가?  537


그레고리우스는 여행안내 책자를 사서 수도원을 하나씩 차례로 구경했다. 그는 명소를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뭔가에 몰리면 그는 고집스럽게 바깥에 머물러 있었다. 베스트셀러라는 책들을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읽는 것도 이런 성격 때문이었다. 지금 그는 관광객의 호기심으로 명소를 찾아다니는 게 아니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그레고리우스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프라두의 흔적을 찾아다닌 그동안의 시간이 성당과 수도원에 대한 그의 느낌을 바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544


두 사람이 피니스테레 해변에 앉아 있을 때 배 한 척이 지나갔다. 

"아마테우가 배를 타자고 하더군요. '브라질 밸렘이나 마나우스로, 아마존으로 가는 게 제일 좋겠어. 덥고 습기가 많은 곳으로. 색깔과 냄새와 끈적거리는 식물들과 열대우림과 동물들 이야기를 쓰고 싶어. 난 지금까지 언제나 정신에 관한 글만 썼어.' 그가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 오빠가, 그렇게도 현실적이던 우리 오빠가..." 아드리아나의 말이 떠올랐다.

"사춘기 소년의 낭만이나 중년 남성의 유치함이 아니었어요. 그건 현실이었고, 진정이었어요. 하지만 그것 역시 저와는 상관이 없었지요. 그는 오로지 자신만의 여행, 자기 영혼의 억압된 분노를 향한 여행에 제가 동행하기를 원했던 거예요. 저는 아마데우에게 당신은 너무 허기졌다고, 그 여행에 동행할 수 없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어요.

그가 개선문 아래로 끌어당기던 날 밤, 저는 이 세상 끝까지 그를 따라가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그의 무서운 허기를 알지 못했지요.  553


에스테파니아가 그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오후 내내 책을 읽었어요. 처음에는 놀랐지요. 아마데우가 아니라 저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는 생각에 몹시 놀랐어요. 그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깨어 있던 살마인지, 자신에게 얼마나 무자비할 만큼 공정했는지, 거기에 문장력도.. 이런 살마에게 '당신, 너무 허기졌어요'라고 말했던 제가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렇게 말햇던 게 옳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의 글을 예전에 알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554



- 많은 여자들 가운데 당신인 이유는? 어느 순간엔가 모든 살마이 하는 질문이다. 속으로만 내뱉어도 이 질문이 위험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 임의성이나 대체 가능성과 똑같지는 않지만 우연이라는 생각, 우연이라고 발음하는 생각이 그토록 소름 끼치는 이유는? 왜 우리는 이러한 우연을 인정하고 웃음으로 넘기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우연이 사랑의 의미를 축소한다고, 우연을 당연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왜 사랑을 폐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556



'우리가 서로 운명적으로 정해진 사이라고 생각해요?'

서로 운명적으로 정해진 사람은 없소. 그런 섭리도 없을 뿐더러 서로의 운명이 맺어지도록 해주는 그 누군가도 없으니까. 우연한 욕구와 습관의 엄청난 힘을 넘어서는 필연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소...

난 완벽하게 우연히 이곳에, 당신은 완벽하게 우연히 그곳에 있었소. 그 사이에는 샴페인 잔들... 그래요. 그랬던 거요. 필연은 없었소.  557



열린 시선이 이렇게 어려운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게으른 존재다.  559

그레고리우스는 사진을 다시 훑어보고, 또 한 번 보았다. 과거가 그의 시선 아래에서 얼어붙기 시작했다. 기억은 과거를 고르고, 조절하고, 수정하고 속일 것이다. 기억 말고는 다른 근거가 없으므로, 누락과 비틀기와 거짓을 나중에 인식할 수 없다는 점이 소름 끼쳤다.  565





작가와의 대담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건가?"

대담자 " 실리야 우케나


우케나 : .. 우리 모두 삶의 일부분밖에 경험할 수 없는 거라면, 우리 안에 있는 나머지들 즉 경험하지 못한 나머지 대다수 부분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비에리 : 남아 있는 부분은 의미가 아주 큽니다.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해도 우리 삶에 색깔을 입혀주고 멜로디를 주는 건 바로 그 부분입니다. 그 나머지 부분이 어떻게 구현되는가에 따라 자기 삶이 만족스럽거나 진실하게 흘러가겠지요. 하지만 한번 규정한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을 관통할 수도 없고 그만큼 실망할 일도 드물지요. 뭔가를 막연히 기다리면서도 입 밖에 내지 못할 수도 있고요. 이것들은 간혹 그들의 인생에서 극적인 형태로 돌출됩니다. 그때 우리는 도망치거나 파멸하거나 생의 위기를 겪게 되죠. 예기치 못했던 파국은 지극히 사소한 일로 시작합니다. 사실 오랫동안 축적되었던 게 드러나는 경우지만요.  572-573


우케나 : 그냥 떠나는 것, 누구에게나 가능할까요?

비에리 : 무엇보다 자기 인식, 즉 깨달음이 절대적이죠.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별해주는 인식작용 말입니다. 자기 앞에 놓인 생을 그대로 살아갈 것인지, 그게 정말 원하는 것인지 자문하는 거요. 오직 우리 인간만이 자기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고, 진실한 자아를 탐구하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어떤 동물도 내 삶이 옳은 것인지, 지금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것인지 질문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그럴 가능성이 열려 있는 셈이지요. 

우케나 :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삶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떠나는 건 아니잖아요?

비에리 : 아니죠. 누구든 자기 삶이 총체적으로 잘못 진행된다 느끼고 지금 상황이 가망 없다고 판단하면 떠날 수 있습니다... "이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야"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규범을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아정체성을 확립할 수도 없고요. 그러니까 '불가피한 떠남'이란 다시 말해 나의 어떤 부분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고 싶은 목적이 있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새롭게 도달하고 싶어하는 그 상태도 결국은 의무, 가능성, 불가능성의 경계를 지닙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요.  574-575


우케나 : 결단이 어려운 경우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까요? 

비에리 : 정해진 것은 없어요. 경우마다 다르기 때문에 해결책도 개별적이지요. .. 

의무감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허덕이면서 다른 사람의 생에 좋은 영향을 줄 수는 없습니다...  576


우케나 : 자유를 향한 인간의 욕구는 과연 얼마나 강력한가요? 

비에리 : 현실에서 떠난다고 해서 모두 자유로워지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어요. 자유를 향한 진일보도 되지만 잘못된 길일 수도 있으니까요. 자신의 경우가 어느 쪽에 해당하는지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판타지는 그래서 중요해요. 판타지를 통해 일탈을 시도해볼 수 있으니까요. 친구들과 나누는 이야기도 아주 중요하지요. 우리 인간의 불행은 대개 감정과 판타지를 언어로 잘 다루지 못하거나 그것들을 말로 표현할 용기를 갖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우케나 : 그런 상황에 처한 친구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을까요?

비에리 " 가장 좋은 길은, 우리가 상상력이 풍부하고 용감한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인정받고 즐겁고 재미있는 환경은 이루지 못한 판타지가 좀 있어도 훨씬 자유롭습니다. 우리는 내면에서 요구하는 모든 삶을 다 살아낼 수 없습니다. 누군가, 그렇다면 경험하지 못한 나머지는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머지 부분은 당신의 판타지를 놓아두는 공간이다"라고 대답할 도리밖에 없습니다. 감당해야 했던 소망의 무게가 극치에 이른 때가 언제인지, 또 이런 소망을 드러내야 한다면 어떤 사람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지 등을 정확하게 아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과연 이것을 인식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예견해 줄 수 없고,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알아내야만 합니다. 행여 그렇게 된다면 대단한 행운이지요.  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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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판 서문 

1930년 이후 나는 소련이 진정한 사회주의라고 부를 만한 쪽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지배자들이 어떤 권력층보다도 더 확고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계급 사회로 변모하는 분명한 조짐을 보았다.  12




(메이저) 나는 오래 살았고, 우리에 혼자 있을 때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 지구상에 살아 있는 어떤 동물 못지않게 삶의 본질을 이해한다고 말해도 좋을 듯싶습니다.  20


자, 동지 여러분, 우리 생활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21


인간을 정복할 때에도 그들의 악습을 배워서는 안 됩니다. 어떤 동물도 집에서 살거나 침대에서 자거나 옷을 입거나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돈을 만지거나 장사를 해서는 안 됩니다.  25


스노볼과 나폴레옹이 가장 탁월했다. 나폴레옹은 덩치가 크고 꽤 사납게 생긴, 이 농장에서 유일한 버크셔종 수퇘지로 말수는 적지만 하고 싶은 것은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라는 평판을 얻고 있었다. 스노볼은 나폴레옹보다 활발하고 언변도 더 뛰어나고 더 창의적이지만 속은 덜 깊다는 평을 들었다. 

스퀼러라는 덩치가 작고 살이 찐 돼지. 그의 볼은 둥글둥글하고 눈은 번쩍거리고 움직임은 민첩하고 목소리는 날카ㅇ로웠다. 그리고 언변이 뛰어나고 어려운 문제를 토론할 때면 꼬리를 흔들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버릇이 있었는데, 아무튼 그것은 꽤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다른 동물은든 스퀼러가 검은색을 흰색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도 가졌다고 이야기했다.  30-31



커다란 창고의 한쪽 벽.. [7계명]

1. 두 발로 걷는 자는 누구나 적이다.

2. 네 발로 걷거나 날개가 있는 자는 누구나 친구다.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4.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5.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40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생충 같은 인간이 없어지자 각자가 먹을 음식은 더 많아졌다.  43


다른 동물들은 투표할 줄은 알았지만 스스로 결의안을 내놓을 생각은 엄두도 못 냈다.  46


나폴레옹은 스노볼이 조직한 위원회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어린 동물들의 교육이 이미 다 자란 동물들의 교육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49


나폴레옹에 따르면 동물드이 총기를 구입해 사용법을 익혀 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총기를 구입해 사용법을 익혀 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스노볼의 주장은 보다 많은 비둘기들을 보내 다른 농장의 동물들에게 반란을 선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66


사실 그들(다른 동물들)은 나폴레옹의 말을 들으면 그것이 옳은 것 같고 스노볼의 말을 들을 때면 또 그것이 옳은 것 같았다.  66


나폴레옹은 개들을 데리고 메이저가 일전에 연설했던 높은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는 일요일 아침마다 열리는 회의를 이제부터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그런 회의는 시간만 낭비하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농장의 운영에 관한 모든 문제는 자기가 의장직을 맡고 있는, 돼지들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69


스퀼러는 농장을 돌아다니며 동물들을 안심시켜 주었다. 그는 동물들에게 인간들과 거래해서는 안 된다느니, 돈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느니 하는 그런 결의안은 통과된 적이 전혀 없고, 심지어 제안조차 한 적리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것은 순전히 공상이며 어쩌면 맨 처음 스노볼의 입에서 나온 거짓말이 퍼진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80


돼지들은 갑자기 농장 본채로 이사해 거기서 거주하게 되었다.  82


(스퀼러) 동지들, 여러분은 우리 돼지들이 요즘 본채의 침대에서 잔다는 말을 들었지요? 그렇게 하면 안 됩니까? 그렇게 하지 말라는 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침대는 그저 잠을 자는 장소에 불과합니다..  83


클로버의 눈에는 눈물이 그득했다. 만약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수년 전에 인간을 전복시키기 위해 일을 벌였을 때 목표한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런 공포와 학살의 장면은 메이저 영감이 처음 그들에게 반란을 선동했던 그날 밤 꿈꾸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이 미래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은 동물들이 배고픔과 매질로부터 해방되고, 모든 동물들이 평등하고,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메이저가 연설하던 그날 밤 자신의 앞발로 새끼 오리들을 감싸 주었듯 강자가 약자를 보호해 주는 동물들의 사회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는 이 농장에 충성을 다하고 열심히 일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고 나폴레옹의 지도를 받아들일 겁니다. 그러나 그녀와 다른 동물들은 그 때문에 희망을 갖고 열심히 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풍차를 건설하고 존스의 총탄에 과감히 맞선 것은 결코 그런 것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비록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말솜씨는 부족했지만 아무튼 그녀의 생각은 그러했다. 

마침내 그녀는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노래가 대신할 수 있다는 듯 '영국의 짐승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101-102


세 번째 노래를 막 끝냈을 때 스퀼러가 두 마리의 개를 대동하고 무언가 중대 발표라도 할 것처럼 동물들에게 다가왔다. 그는 나폴레옹 동지의 특별 지시에 따라 '영국의 짐승들'이 금지되었다고 발표했다. 지금부터 이 노래는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동물들은 깜짝 놀랐다.

[왜 금지되었죠?] 뮤리엘이 소리쳐 물었다.

[동지, 이 노래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소.] 스퀼러가 딱딱하게 말했다. ['영국의 짐슬들'은 반란의 노래였소. 그러나 반란은 이제 끝났소. 오늘 오후의 반역자 처형이 마지막 행동이었소. 우리는 농장 안팎의 적들을 모두 패배시켰소. '영국의 짐승들'에서 우리는 미래의 좋은 사회에 대한 동경을 표현했소. 그러나 그 사회는 이미 성취되었소. 분명이 이 노래는 이제 어떤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소.]

비록 겁에 질려 있었지만 몇몇 동물들은 항의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로 그 순간 양들이 여느 때처럼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고 외쳐 댔다. 이 외침 소리는 몇 분 동안 계속되었고 결국 토론은 시작도 못하고 끝나 버렸다.  102-103


며칠 후 처형 사건이 몰고 온 공포가 누그러져 갈 때, 일부 동물들은 7계명 중 여섯 번째 계명인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를 기억하거나 혹은 기억한다고 생각했다...

클로버는 뮤리엘을 데려갔다. 뮤리엘은 그녀에게 그 계명을 읽어 주었다. 거기에는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이유 없이 죽여서는 안 된다'라고 씌어 있었다.  105


그해 내내 동물들은 지난해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했다. 농장의 일상적인 일을 다 하면서 전보다 두 배나 더 두껍게 풍차의 벽을 쌓고 예정된 날짜에 풍차 건설을 끝낸다는 것은 엄청난 노동이었다. 존스 시대보다 더 오랫동안 일하고 먹는 것도 더 나아진 게 없다는 생각이 들때도 있었다. 일요일 아침이면 스퀼러가 기다란 종이 두 마리를 앞발로 들고 각 식량 생산량이 200퍼센트, 300퍼센트, 혹은 경우에 따라 500퍼센트 증가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통계 수치를 발표했다. 동물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반란 전의 생활상이 어땠는지 뚜렷이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06


스퀼러는 연설할 때면 나폴레옹의 지혜, 특히 다른 농장에서 무지와 노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불행한 동물들에 대한 그의 사랑 등을 생각하며 눈물을 줄줄 흘리기도 했다.  107


나폴레옹 동지가 이 세상에서 취하는 마지막 조치로서 엄한 포고령을 내렸다고 했다. 그것은 술을 마시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121-122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두 개의 단어가 들어 있었다. 실제로 벽에 적힌 계명은 이랬다. '어떤 동물도 술을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된다.'  123


돼지들과 개들의 배급량은 그대로 둔 채 다른 동물들의 배급량은 다시 한 번 줄어들었다. 스퀼러는 식량 배급을 지나치게 평등하게 만드는 것은 동물주의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쨋든 그는 겉으로 보기엔 어떨지 모르지만 실제로 식량이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다른 동물들에게 어렵지 않게 증명해 보였다. 물론 당분간은 배급량을 재조정할 필요(스퀼러는 한 번도 '감소'라는 말을 하지 않고 항상 '재조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가 있지만 존스 시대와 비교하면 사정이 훨씬 나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125


고달픈 일들을 수없이 감내해야 했지만, 그래도 현재의 삶이 과거보다 훨씬 더 품위 있다는 사실이 그 고달픔을 덜어 주었다.  128


양들은 자진 시위에 가장 열성적이었는데, 간혹 누군가가 이 행사는 시간 낭비이고 추위에 떨며 오래 서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불만을 터뜨리기라도 하면(몇몇 동물들은 돼지와 개가 주위에 없을 때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양들이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라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입을 확실히 다물게 했다. 그러나 대체로 동물들은 이 축하 행사를 즐겼다. 어쨌거나 그들은 자기들이 농장의 진정한 주인이고 따라서 하는 일도 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며 스스로 위로했다. 그리하여 노래와 행진, 스퀼러의 통계 수치, 우렁찬 총포 소리, 젊은 수탉의 울음소리, 펄럭이는 깃발 등으로 동물들은 배고픔을 잠시나마 잊어버릴 수 있었다.  129


까마귀 모세..[동지들, 저기 위쪽에.] 그는 커다란 부리로 하늘을 가리키며 엄숙하게 말하곤 햇다. [저기 위쪽, 검은 구름 저 너머에 '얼음사탕 산'이 있어. 우리 같은 불쌍한 동물들이 일하지 않고 영원히 편히 쉴 수 있는 행복한 나라가 있단 말이야!]...

그들이 생각하기에 현재 자신들의 삶은 배고프고 고달팠다. 그런데 여기 아닌 다른 어딘가에 현재보다 더 나은 세계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해서 과연 잘못되고 옳지 못한 것일까?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모세에 대한 돼지들의 태도였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얼음사탕 산에 대한 그의 이야기가 모두 거짓말이라고 경멸조로 말하면서도 그에게 일을 시키지도 않고 매일 맥주 한 홉씩 제공하면서 농자에 살도록 허용했다.  130-131


여러 해가 흘렀다. 계절들이 여러 번 왔다 가고, 짧은 동물들의 생애는 어느덧 빠르게 흘러갔다. 클로버, 벤저민, 까마귀 모세, 그리고 상당수의 돼지들을 제외하고는 반란 전의 옛 시절을 기억하는 동물은 하나도 없었다.  140


이제 농장에는 초창기에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식구가 많이 늘어나 있었다. 많은 동물들이 새로 태어났으며 그들에게 반란은 단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희미한 전통에 불과했다.  141


벤저민 영감만이 긴 자기 생애의 모든 일들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금 농장의 사정은 옛날보다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좋아질 수도 나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며, 배고픔과 고난과 실망은 삶의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물들은 희망을 절대 버리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이 동물 농장의 일원이라는 영예와 특권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이 농장은 영국 땅 전체에서 동물들이 경영하는 유일한 곳이었다.  143-144


비록 그들의 삶은 고달프고 또 그들의 희망이 모두 성취된 것은 아니지만, 동물들은 자신들이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다고 느꼈다. 그들이 굶주린다면 그것은 독재자 인간들을 먹여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열심히 일을 했다면 그것은 적어도 자신들을 위해 그렇게 했다. 그들 중 누구도 두 다리로 걷지 않았다. 어떤 동물도 커다란 동물을 '주인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모든 동물들은 평등했다.  144-145


클로버가 입을 열었다. [난 시력이 나빠. 하긴 젊었을 때도 저기 씌어 있는 것을 읽을 수 없었어. 하지만 저 벽은 달라 보여. 7계명이 그대로 있어, 벤저민?]

벤저민은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는 자신의 규칙을 이번만은 깨뜨리기로 하고 벽에 쓰인 것을 큰 소리로 읽어 주었다. 거기엔 7계명은 온데간데없고 단 하나의 계명만 남아 있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147


나폴레옹이 파이프를 물고 농장 정원을 산책하는 모습이 눈에 띄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랬다. 이상하지 않았다. 돼지들이 존스 씨의 옷자엥서 옷을 꺼내 입어도, 나폴레옹이 검은색 코트에 반바지 사냥복을 입고 가죽 각반을 차고 나타나도, 또 그의 총애를 받는 암퇘지가 존스 부인이 일요일이면 업던 물결무늬 비단 옷을 입고 나타나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148


폭스우드 농장의 필킹턴 씨가 한 손에 맥주잔을 들고 일어섰다. 그는 일동에게 건배를 청할 생각인데 그에 앞서 꼭 할 말이 있다고 말했다...

동물 농장의 하층 동물들이 이 나라의 어떤 동물들보다 일은 더 많이 하면서도 식량은 더 적게 배급받는 이런 정책은 당연하다.  149-150


[만약 여러분에게 다루어야 할 하층 동물들이 있다면 우리 인간들에게도 다루어야 할 하층 계급이 있습니다!] 이 재치 있는 말을 듣고 좌중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필킹턴 씨는 그가 동물 농장에서 관찰한 대로 돼지들이 동물들에게 식량 배급은 적게 하면서도 일은 오랫동안 시키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동물들이 대체로 없다는 사실에 대해 돼지들에게 다시 한 번 찬사를 보냈다.  151


어느 쪽이 인간이고 어느 쪽이 돼지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154




에세이 - 작가와 리바이어던(1948년 3월에 써서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는 문학잡지 <정치와 문학> 여름호에 실림)


우리는 자신이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참된 문학 기준들이 적용된다고 가장하고 있을 뿐이다.  157


내가 알고 있는 한, 어느 누구도 자신들을 [부르주아]로 간주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이며, 반파시스트이며, 반제국주의자이며, 인종 차별을 경멸하고, 인종 편견에 분노를 터뜨린다.  159


실제로 노동자들은 자기가 착취당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사회주의 쪽으로 많이 넘어갔지만, 엄밀하게 말해 그들 또한 찾취자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제는 어느 모로 보나 노동자 계급의 생활수준이 향상은 말할 것도 없고 현상 유지도 어려운 지겨엥 이르렀다. 부자들을 몰아낸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일반 대중은 소비를 더 적게 하든가 생산을 더 많이 해야 한다.  162-163


정통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항상 풀리지 않는 모순을 물려받는 것이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든다면, 신중한 사람들은 모두 산업주의와 그 생산품에 불쾌감을 갖지만, 빈곤의 극복과 노동 계급의 해방을 위해서는 산업화의 축소보다는 오히려 그것의 확대가 필요하다고 인식한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어떤 일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일종의 강제 없이는 결코 행해지지 않는다. 또 강력한 군사력 없이는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외에도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이 모든 경우에, 우리가 공식적인 이데올로기에 개인적으로 충성하지 않아야만 이끌어 낼 수 있는 명백한 결론이 있다. 일반적인 반응은 그 질문을 우리 마음의 한쪽 구석으로 몰아넣고 답을 유보한 채 모순적인 슬로건만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163-164


내키진 않지만 할 일을 한다는 의지가 있다고 해서 그 일에 동반되는 신념까지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한 작가가 정치에 참여할 때, 그는 한 시민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참여해야지 작가로서 참여해서는 안 된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신이 속한 정당을 위해서는 절대로 글을 써서는 안 된다.  165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이므로 기꺼이 참전할 수 있지만, 당연히 전쟁 선전문 쓰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 작가가 정직하다면, 자신의 글과 정치 활동이 상호 모숨될 때도 있다. 분명 이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경우들이 있다. 그럴 때면 자신의 충돌을 왜곡시키지 말고 침묵을 지키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166


정치란 것이 얼마나 더럽고 비열한 사업인지를 알고 있지만..  166-167


우리는 정치에서 두 개의 약 가운데 어떤 것이 덜 악한 것인지에 대해 결정할 뿐이며 그 이상의 것은 결코 할 수 없다.  167




작품해설 - 정치적 글쓰기와 동물 소설

1917년 러시아에서 차르 체제를 무너뜨린 노동자들의 혁명이 스탈린 등장 이후 애초의 혁명 정신은 사라지고 전체주의적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줄곧 주시해 왔다.


<동물 농장>에 등장하는 사건들과 동물들은 모두 알레고리 수사법의 특성상 고도의 비유적 수법으로 암시되어 있다.  176


이 소설은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부터 1943년 테헤란 회담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러시아 역사에 걸친 정치 문제를 다루고 있다.  176-177




돼지들 - 거대한 러시아의 관료제를 무너뜨리고 혁명을 이끈 볼셰비키 지식인들을 가리킨다.


나폴레옹 - 러시아 혁명기의 스탈린을 가리킨다. 그는 계급 없는 평등 사회를 지향했던 메이저 영감의 혁명적 이상주의를 저버리고 1인 독재자로 군림한다.


스노볼 - 트로츠키(1905년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한 공산주의 혁명가. 스탈린과 극도로 대립하다 결국 1927년 당에서 축출되고 1929년에 소련에서 추방당했다)를 가리킨다. 트로츠키처럼 스노볼은 뛰어난 연설가이며 혁명에 대한 지적 열망을 가진 인물이다. 혁명적 이상주의를 실천하고자 자신을 희생시키는 인물로 묘사되지만 나폴레옹에게 쫓겨나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한다. 진정한 혁명가의 표본이다.


메이저 영감 - 혁명의 기본적 이론과 이상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를 가리킨다.


스퀼러 - 그는 새로운 사회의 성장과 더불어 발전하면서 그 사회 안에서 높은 지위를 획득하는 인물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회에 존재하는 정치 선전 기구의 거대한 선전 활동을 반영한다.


복서 - 러시아 혁명기의 '프롤레타리아트'를 대표한다. 복서는 모든 사회 체제의 성공에 꼭 필요한 정직하고 열성적인 무지한 일반 노동자를 대변한다. 그 같은 노동자는 독재나 전체주의 정권하에서 필연적으로 착취당하는 존재이다.


벤저민 -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성실함이나 능력을 의심하는 냉소주의자이자 또 많은 사실적 이론의 진실을 의심하는 회의론자를 대변한다. 다른 동물들처럼 그 역시 읽는 법을 배우지만 그 기술을 유용한 목적에 이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마 작가는 힘 있는 지식인도 신념이나 이상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을 그를 통해 보여 주려 한 것 같다. 


클로버 - 동물 농장의 모성적 동물이다. 복서의 단순한 선과 힘의 특질을 보완한다. 어떤 다른 동물보다도 동정과 친절함을 많이 보여 주는 동물로, 끝까지 살아남으며 억압받는 동물들을 위한 안락하모가 힘의 원천이 된다.


몰리 - 몰리는 성격이 변덕스러운 보조적 역할을 하는 동물로 엘리트 계급을 대변한다. 그녀는 이 소설의 중간쯤에서 사라진다. 어떤 면에서 그녀는 인간과 같은 방법으로 다른 동물들을 착취한다. 클로버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개들 - 다른 동물들에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러시아의 비밀경찰을 가리킨다. 


양들 - 개들과 더불어 나폴레옹의 권력 장악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종의 선전대이다. 양들은 대중을 대변하며 대중들이 어떻게 조종될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 


모세 - 까마귀 모세는 어떤 면에서 피지배자보다는 지배자와 손을 잡는 동물로 교회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오웰의 견해를 보여 준다.


뮤리엘 - 염소 뮤리엘은 메이저 영감의 회합에 참가한 똑똑한 동물들 중 하나이다. 그녀는 읽는 법을 배우지만, 읽은 것에 대한 올바른 판단은 내리지 못한다. 그녀는 적혀 있는 모든 것은 사실이라고 믿으며 7계명이 돼지들에 의해 바뀌었을 때도 결코 질문을 하지 않는다.


존스 -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를 가리킨다. 


필킹턴 - 폭스우드 농장을 경영하는 인간. 영국의 처칠을 가리킨다.


프레더릭 - 핀치필드 농장을 경영하는 인간. 독일의 히틀러를 가리킨다.


매너 농장 - 니콜라이 2세 치하의 러시아를 가리킨다.


동물들의 반란 -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발생한 '10월 혁명'을 가리킨다.


외양간 전투 - 10월 혁명 이후 일어난 내란. 이 전투에서 존스와 함께한 일당은 볼셰비키를 몰아내려고 했던 외국 세력들이다. 


풍차 전투 - 1941년 독일의 러시아 침공을 가리킨다.


암탉들의 반란 - 1921년 1만 5,000여 명의 수병과 시민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서쪽 핀란드 만에 위치한 크론슈타트의 해군 기지에서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궐기한 사건을 나타낸다.


풍차 건설 - 1928년 급속한 산업화와 농장의 집단화를 요구하며 시작된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나타낸다.


동물들의 거짓 자백과 처형 - 1936년부터 1938년 사이에 있었던 '스탈린 대숙청'을 가리킨다.


돼지들과 인간들의 파티 장면 - 제2차 대전 기간인 1943년 11월 28일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이란의 테헤란에 모여 회의를 한 [테헤란 회담]을 가리킨다.  177-183


오웰 <동물 농장>에서 혁명의 이상적 사상은 과연 실천 가능한 철학인가를 인간의 권력 욕구와 결부시켜 그 물으모가 해답을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다.    183


혁명 초기부터 이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공평한 사회가 이루어지지 않고 돼지들을 중심으로 한 특정 엘리트 사회로 변질되기 시작.

작가는 권력 쟁취를 위해 비밀리에 개들을 키우는 나폴레옹의 경우를 포함해 엘리트 집단으로 성장하기 위한 돼지들의 의도적 행위를 혁명적 이상에 대한 가장 큰 위험 요소로 꼽았다. 돼지들의 권력 욕구와 그에 따른 필연적인 타락.  184


동물들은 스퀼러의 조직적인 거짓말, 양들의 대중 선동 등과 같은 언어의 왜곡으로 인해 과거에 대한 진실을 완전히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그들에겐 과거는 없고 오로지 현재만 있을 뿐이다.  185


동물 농장에서 전개되는 반란 이후의 상황은 마르크스가 사회주의에 대해 생각했던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되지 못하고 위로부터의 혁명이 되고 만다. 혁명의 기본 문제는 과거의 독재자들이 행사했던 억압적 권력이 아닌 공정한 권력을 이상과 어떻게 결합시키느냐 하는 것이지만, 동물 농자의 경우에는 나폴레옹을 위시한 돼지들의 권력 욕구로 인해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다.  185-186


구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돼지들이 인간화되는 서글픈 장면은 '실천 철학'으로서의 '마르크스적 이상'에서 출발한 러시아 혁명이 스탈린이라는 한 개인의 전제 정치로 전락해 버린 러시아의 정치 상황을 포함한 당대의 정치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환멸감을 극명히 보여 준다...

오웰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독재자 스탈린의 등극으로 애초의 이상과는 다르게 전체주의적 상황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자신의 사회주의적 전망이 점점 절망적으로 흐럴간 것이지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적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 자체를 반대한 것은 결코 아니다.  186-187


<동물 농장>에서 오웰은 '이상'이 아무리 바람직하더라도 자연적 본능인 '권력에 대한 욕망'때문에 계급 없는 사회는 불가능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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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빛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 알아봐준다.  133



참 우스운 얘기라고 다카유키는 생각했다. 잡화점 주인이 뜬금없이 남의 고민을 상담해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이 이렇게 된 속사정은 다카유키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주간지에서 취재를 하러 왔을 정도인 것이다. 그 직후에는 상담 건수가 부쩍 늘기도 했다. 진지한 내용도 있지만 대개는 장난 비슷한 것이 많았다. 명백히 해코지로 보이는 편지도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것은 하룻밤 새에 서른 통이 넘는 편지가 날아온 일이다. 누가 보더라도 한 사람의 필적이었다. 내용은 모조리 엉터리로 지어낸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하나하나 답장을 해주려고 했다. 그때만은 다카유키도 아버지를 말렸다.

"이건 어떻게 보건 못된 장난질이에요. 진지하게 대해주는 게 바보짓이죠."

하지만 늙은 아버지는 전혀 짜증스러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는 커녕 딱하다는 듯이 다카유키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너는 아직도 뭘 몰라."

내가 뭘 모르느냐고 짐짓 불끈해서 따지고 들자 아버지는 서늘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해코지가 됐든 못된 장난질이 됐든 나미야 잡화점에 이런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다른 상담자들과 근본적으로 똑같아. 마음 한구석에 구멍이 휑하니 뜷렸고 거기서 중요한 뭔가가 쏟아져 나온 거야. 증거를 대볼까? 그런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반드시 답장을 받으로 찾아와. 우유 상자 안을 들여다보러 온단 말이야. 자신이 보낸 편지에 나미야 영감이 어떤 답장을 해줄지 너무 궁금한거야. 생각 좀 해봐라. 설령 엉터리 같은 내용이라도 서른 통이나 이 궁리 저 궁리 해가며 편지를 써 보낼 때는 얼마나 힘이 들었겠냐. 그런 수고를 하고서도 답장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없어. 그래서 내가 답장을 써주려는 거야. 물론 착실히 답을 내려줘야지. 인간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어떤 것이든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돼."  157-159



"내가 몇 년째 상담 글을 읽으면서 깨달은 게 있어. 대부분의 경우, 상담자는 이미 답을 알아. 다만 상담을 통해 그 답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거야. 그래서 상담자 중에는 답장을 받은 뒤에 다시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많아. 답장 내용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지."  167



중요한 것은 태어나는 아이가 행복해질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반드시 부모가 있어야만 행복해진다고 할 수는 없다.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견뎌내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런 각오가 없다면 설령 남편이 있다고 해도 아이는 낳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하겠다.  204-205



가족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생각은, 좋은 일로 잠시 헤어져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싫어져서, 그만 지겨워져서, 라는 이유로 서로 뿔뿔이 헤어진다는 것은 가족의 참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58


하긴 이별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고스케는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 끊기는 것은 뭔가 구체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아니, 표면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서로의 마음이 이미 단절된 뒤에 생겨난 것, 나중에 억지로 갖다 붙인 변명 같은 게 아닐까. 마음이 이어져 있다면 인연이 끊길 만한 상황이 되었을 때 누군가는 어떻게든 회복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이미 인연이 끊겼기 때문이다.  269



이름 없는 분에게. 

어렵게 백지 편지를 보내신 이유를 내 나름대로 깊이 생각해봤습니다. 이건 어지간히 중대한 사안인 게 틀림없다. 어설피 섣부른 답장을 써서는 안 되겠다, 하고 생각한 참입니다. 

늙어 망령이 난 머리를 채찍질해가며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결과, 이것은 지도(地圖 땅지 그림도)가 없다는 뜻이라고 내 나름대로 해석해봤습니다.

나에게 상담을 하시는 분들을 길 잃은 아이로 비유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지도를 갖고 있는데 그걸 보력고 하지 않거나 혹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마 당신은 그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것 같군요. 당신의 지도는 아직 백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목적지를 정하려고 해도 길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일 것입니다. 지도가 백지라면 난감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구라도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겠지요.

하지만 보는 방식을 달리해봅시다. 백지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 하기 나름인 것이지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가능성은 무한히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멋진 일입니다. 부디 스스로를 믿고 인생을 여한 없이 활활 피워보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상담 편지에 답장을 쓰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멋진 난문(難問 어려울난 물을문)을 보내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나미야 잡화점 드림  447




옮긴이의 말 - 기적과 감동을 추리한다


주위 사람들에게서 칭찬받을 만한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끝없이 노력해야 하는 현실이 힘에 버거워 가장 편한 길로 도망친 것이다. 현실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스스로를 정직하게 바라보았을 때, 기적이 일어난다.  450-451


이 소설은 2012년 '중앙 공론 문예상'을 수상했다. 시상식 자리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어렸을 때, 나는 책 읽기를 무척 싫어하는 아이였다. 국어 성적이 너무 좋지 않아서 담임선생님이 어머니를 불러 만화만 읽을 게 아니라 책도 읽을 수 있게 집에서 지도해달라는 충고를 하셨다. 그때 어머니가 한 말이 걸작이었다. "우리 애는 만화도 안 읽어요." 선생님은 별수 없이, 그렇다면 만화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나는 작품을 쓸 때, 어린 시절에 책 읽기를 싫어했던 나 자신을 독자로 상정하고, 그런 내가 중간에 내전지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쓰려고 노력한다.'  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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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발길을 돌리는 순간 나는 레밍턴 타자기를 다시-꾸준히 자신 있게, 충동적으로, 끝없이-쳐대는 소리를 들었다. 버스를 타고 미라플로레스로 돌아오면서 나는 페드로 카마초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어떤 사회적 환경이, 상황과 사람과 인연과 문제와 사건과 뜻하지 않은 일들 간의 어떤 연쇄 작용이 그처럼 열매를 맺고 하나의 작품으로 표현되어 청취자들을 끄는 이 문학적(문학적이라? 만일 그게 아니라면 대체 뭐라고 불러야할까?) 재질을 산출해냈을까? 어떻게 그는 작가의 전형인 동시에, 자신의 재능에 바치는 시간과 생산해내는 작품 덕분으로, 페루에서 작가라 불릴 만한 단 하나뿐인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시인이니 소설가니 극작가니 하는 이름으로 통하는 그 숱한 정치가, 법조인, 교수... 문학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활동에 허비되는 삶에서 짧은 막간을 이용해 얄팍한 시집이나 빈약한 단편집을 한 권 냈다고 해서, 그들이 과연 진정한 작가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어째서 문학을 일종의 치장이나 구실로 삼는 사람들이 오직 글을 쓰기 위해 살고 있는 페드로 카마초보다도 더 진정한 작가로 대우받을 권리가 있는 것일까? 그들이 프루스트, 포크너, 조이스의 책을 읽었던(아니면 적어도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반면 페드로 카마초는 거의 문맹이나 다름없기 때문일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면서 나는 슬프로 속이 상했다. 날이 갈수록 이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유일한 일은 작가가 되는 것이란 생각이 점점 더 분명해졌고,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과 정신을 오로지 문학에만 쏟아야 한다는 생각 또한 점점 더 굳어져갔다.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절대로 시시한 삼류 작가나 아르바이트 작가가 아니라 진정한 작가였다. 누구처럼? 그때껏 내가 만났던 사람 중에서 자기 직업에 몰두하고 전념하여 진정한 작가가 되는 데 가장 접근한 사람은 라디어 연속극을 쓰는 볼리비아인 작가였으며, 그것이 바로 그가 나를 그처럼 매혹시킨 이유였다.  13-14



"괴로움은 훌륭한 스승이니까."  100




옮긴이의 말 - 이런 소설 보셨나요?


이 소설은 작가의 실제 결혼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개성있는 주인공들과 유머러스한 상황을 적절히 배합해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 일종의 자전 소설이다. 작가는 자신을 모델로 한 주인공이 마침내 집안 아주머니뻘 되는 연상의 여성과 결혼하는 과정을 그림으로써 금지된 사랑의 유혹을 다루는 동시에, 한 젊은이가 세상과 자신의 집안에서 설 자리를 찾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해시켜가는 성장 소설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훌리아 아주머니와의 사랑 이야기와 더불어 저명한 방송작가 페드로 카마초의 연속극 이야기를 병렬식으로 전개함으로써 현실과 허구를 교묘히 짜맞추고 있다.  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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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녀 입장에서 제일 못마땅한 건 사내라면 누구나 꼬시려고 든다는 그런 게 아냐." 훌리아가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보다는, 이혼녀니까 로맨틱하게 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거지. 사내들은 이혼녀하고는 시시덕거리지도 않고 달콤한 헛소리를 속삭이지도 않아. 그저 아주 저질스럽게 자기네 욕구가 뭔지를 대놓고 까발린다니까. 정말 넌더리가 나. 그게 바로 내가 나이든 놈팽이하고 춤추러 가기보다는 너하고 영화를 보러 가는 이유야."  29


예술가에게는 온 세상이 다 고향.  86


보르헤스의 작품처럼 엄정히 객관적이고 지적이고, 간결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쓰고 싶었다.  90


서머싯 몸의 작품처럼 가볍고 재미있는 것이나 아니면 모파상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비꼬인 사랑 얘기 같은 것으로.  96


연인과 애인이라는 정반대의 두 범주 중간쯤에 놓이게 되었다.

우리는 애인들의 고전적인 특성-내밀함, 남의 눈에 띌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우리가 대단한 모험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공유했지만, 그러면서도 성관계는 가진 적이 없었으므로(그런데 하비에르는 나중에 우리가 서로를 '애무한'적도 없다는 걸 알고 몹시 놀랐다) 정신적인 애인이었다. 동시에 우리는 그 당시 미라플로레스의 청춘남녀들이 지키고 있던 고전적인 연인들의 의례들(영화 보러 가기, 영화 보는 중에 키스하기, 손잡고 길거리 쏘다니기)을 존중했으며 우리의 행동 또한 순결하고 정숙했다. (그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는 미라플로레스의 처녀들 대부분이 결혼식을 올리는 날까지 숫처녀였고, 연인에게 가슴이나 사타구니를 만지도록 허용하는 것도 약혼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어 연인이 약혼자로 격상된 다음이었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상당한 나이 차와 서로 인척 간이라는 엄연한 사실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겠는가?) 우리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엉뚱하고 애매한지를 알게 되자 우리는 장난 삼아 그런 관계를 빗대기에 적당한 재미있는 이름들을 생각해냈고, 우리의 관계를 영국식 약혼이니 스웨덴식 로맨스니 터키식 드라마니 하고 불렀다.  178-179


마크 트웨인부터 버나드 쇼, 하르디엘 폰셀라, 그리고 페르난데스 플로레스에 이르기까지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유머러스한 작품들은 닥치는 대로 다 읽었다.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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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는 뭐든 간에 발길질을 하면서 물건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남자였다.  15


그는 줄줄이 늘어선, 자기 집과 똑같이 생긴 집들을 따라 차를 몰았다. 그들이 처음 여기 왔을 때 이 동네에 있던 집은 겨우 여섯 채였다. 이제는 수백 체가 있다. 한때 여기에서는 숲이 있었지만 이제는 집들뿐이다. 물론 다 융자를 낀 집들, 그게 오늘날 일을 하는 방식이었다. 신용카드로 쇼핑을 하고 전기차를 몰고 다니며 전구 하나 바꾸려고 수리공을 고용했다. 딸각딸각 맞추는 조립식 마루를 깔고 전기 벽난로를 설치한 뒤 그럭저럭 살아간다. 급박한 상화에도 벽에 못 하나 박지 못하는 사회. 이게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45


오베는 자기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들만 이해했다.  57


아마 그녀(소냐)에게 운명이란 '무언가'였을 텐데, 그건 오베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베에게 운명이란 '누군가'였다.  103


"자기 원칙을 걸고 싸울 준비가 된 사람들이 더 이상 세상에 없는 걸까?" 루네가 물었다.

"하나도 없지." 오베가 대답했다.  117


이 세상은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나기도 전에 그 사람이 구식이 되어버리는 곳이었다. 더 이상 누구에게도 무언가를 제대로 해낼 능력이 없다는 사실에 나라 전체가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범속함을 거리낌 없이 찬양해댔다.

아무도 타이어를 갈아 끼우지 못했다. 전등 스위치 하나 설치 못했다. 바닥에 타일도 못 깔았다. 벽에 회반죽도 못 발랐다. 자기 세금 장부 하나 못 챙겼다. 왜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타당성을 잃어버린 형태의 지식들만 넘쳐났다.  119


오베는 첫 번째 불꽃이 자기 집을 기어오르는 광경을 봤다. 그는 잔디를 가로질러 뛰어갔지만 이내 소방관들에게 제지당했다. 별안간 그들이 사방을 둘러쌌다. 

그리고 오베를 집에 못 들어가게 막았다.

하얀 셔츠를 입은, 오베가 이해한 바로는 일종의 소방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그의 앞에 다리를 쩍 벌리고 서서 오베가 자기 집의 불을 끄도록 놔둘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너무 위험해서라고 그랬다. 그런 뒤 안타깝게도 소방관들 역시 관계당구겡서 적법한 허가가 내려올 때까지는 불을 끌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오베의 집이 정확히 시 경계선 위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지휘 센터에서 무전기로 승인을 해주어야만 그들이 진화 작업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었다. 허가가 나고 서류에 도장이 찍혀야 한다고 했다.

"규칙은 규칙이니까요." 오베가 항의하자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오베는 몸부림을 치며 거기서 벗어난 뒤 분노에 차 호스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헛된 일이었다. 소방관들이 이제 다 끝났다는 신호를 보냈다. 불길이 이미 집을 삼켜버렸다. 

오베는 정원에 서서 무력함과 슬픔에 휩싸인 채 집이 불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134-135


사람들은 오베와 오베의 아내가 밤과 낮 같다고 늘 말했다. 오베는 당연하게도 자기가 밤 쪽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게 그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반면 누군가 그런 말을 할 때 오베의 아내는 항상 재미있어했는데, 왜냐하면 그럴 때마다 낄낄 웃으면서 사람들이 오베를 밤이라고 생각하는 건 그가 태양 쪽으로 가기에는 너무 못돼먹어서라고 지절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가 왜 자기를 택했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음악이나 책이나 이상한 단어 같은 추상적인 것들을 사랑했다. 오베는 손에 쥘 수 있는 것들로만 채워진 남자였다. 그는 드라이버와 기름 여과기를 좋아했다. 그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인생을 살아갔다. 그녀는 춤을 췄다.

"모든 어둠을 쫓아버리는 데는 빛줄기 하나면 돼요." 언젠가 그가 어째서 늘 그렇게 명랑하게 살아가려 하느냐고 그녀에게 물었을 때,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읽는 책 중 하나에 프란체스코인가 하는 수도사가 그렇게 써놓은 게 분명했다.

"날 속이면 안 돼요. 여보." 그녀가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커다란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무도 안 볼 때 당신의 내면은 춤을 추고 있어요, 오베. 그리고 저는 그 점 때문에 언제까지고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당신이 그걸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간에."

오베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결코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그는 춤을 춰본 역사가 없었다. 춤이란 너무 무계획적이고 어지러워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직선과 명료한 결정을 좋아했다. 그게 그가 늘 수학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수학에는 정답 아니면 오답만 있었다. 수업 중에 '네 입장을 토론해보자'며 사기를 치려 드는 히피 같은 과목들과는 달랐다. 마치 누가 긴 단어를 더 많이 아는지 점검하는 게 결론을 내리는 방법이기라도 한 것인양. 오베는 옳은 건 옳은 것이고 틀린 건 틀린 것이길 원했다. 

그는 몇몇 사람들이 자기를 인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심술궂은 영감탱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건 그들이 오베에게 사람을 다른 식으로 볼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살다보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될지 결정을 내릴 때가 오게 마련이다. 다른 사람이 기어오르게 놔두는 사람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때가.  152-154


모든 남자들에게는 자기가 어떤 남자가 되고 싶은지를 선택할 때가 온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없다면, 남자에 대해 모르는 것이다.  159


오베는 그녀를 만나기 전 어떻게 살아왔느냐는 질문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물어봤다면, 그는 살아도 산게 아니었다고 대답했으리라.  182


"당신이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는건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오베가 소냐에게 솔직히 고백하고나서 일어나면서.)  186


그녀는 그저 "다 괜찮을 거예요, 여보"라고 속삭이며 그의 팔에 자기 팔을 기댈 뿐이었다. 그녀는 집게손가락으로 그의 손바닥을 부드럽게 눌렀다. 그리고 눈을 감은 뒤 죽었다.

오베는 그녀의 손을 몇 시간 동안 그대로 잡고 있었다...

누군가 묻는다면, 그는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자기는 결코 살아 있던 게 아니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녀가 죽은 뒤에도.  189


'사람은 자기가 뭘 위해 싸우는지 알아야 한다.'  273


오베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고 분노에 찬 엘크처럼 턱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하얀 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아니타와 루네의 집으로 들어갔다.  364


오베의 몸에서 모든 힘이 다 빠져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아니타의 기진맥진한 얼굴을 봐서였을 것이다. 더 큰 견지에서 보면 이 단순한 전투에서 이겼다느 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깨달음 때문이었을 것이다.스코다가 갇혀 있건 말건 아무 차이도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돌아온다. 그들이 소냐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조항드로가 서류들을 들고. 하얀 셔츠의 남자들이 언제나 이긴다. 오베 같은 남자는 언제나 소냐 같은 사람을 잃는다. 아무도 그에게 그녀를 되돌려주지 못한다. 

결국 부엌 조리대에 기름칠을 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곤 하지도 않는 하루하루가 길게 이어지는 것 외에 아무것도 남는 게 없었다. 오베는 더는 극복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어느때보다 지금 이 순간 확실히 느꼈다. 그는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다. 더 이상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모든 게 다 멈추기만을 바랐다.

파르바네는 계속 그에게 반박하려 했지만 그는 그냥 문을 닫았다. 그녀가 문을 쾅쾅 두드렸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현관의 의자에 주저앉아 자기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심장이 정말로 세게 뛰는 바람에 귀가 폭발할 것 같았다. 마치 거대한 어둠이 숨틍을 걷어차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의 압박이 20분 넘도록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베는 울기 시작했다.  368-369


"사람들은 모두 품위 있는 삶을 원해요. 품위란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무언가를 뜻하는 거고요." 소냐는 그렇게 말했다. 오베와 루네 같은 남자들에게 품위란, 다 큰 사람은 스스로 자기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뜻했다. 따라서 품위라는 건 어른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는 권리라고 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통제한다는 자부심, 올바르게 산다는 자부심, 어떤 길을 택하고 버려야 하는지 아는 것. 나사를 어떻게 돌리고 돌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안다는 자부심. 오베와 루네 같은 남자들은 인간이 말로 떠드는 게 아니라 행동하는 존재였던 세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물론 소냐는 오베가 자기의 이름 없는 분노를 어떻게 끌어안고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370-371


어떤 남자들이 갑자기 어떤 일을 하는지 이유를 설명하기란 때로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때가 올 때까지는 늘 낙관적이다. 다른 사람과 무언가를 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대화를 나눌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민원을 제기할 시간도.  387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어렵다. 특히나 무척 오랫동안 틀린 채로 살아왔을 때는.  410


사람들은 늘 오베가 '까칠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빌어먹을 까칠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내내 웃으며 돌아다니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게 누군가가 거친 사람으로 취급당해 싸다는 얘긴가? 오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 남자를 이해했던 유일한 사람을 땅에 묻어야 할 때, 그의 내면에 있던 무언가는 산산조각이 난다. 그런 부상은 치료할 수 없었다.  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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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입는 일상복은 일반 사람 눈에도 보이지만 옷 밖으로 드러나는 신체의 일부분, 그러니까 손이나 목이나 얼굴이나 머리카락이나 귀때기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같은 투명인간끼리는 서로를 볼 수 있다.  6


자전거는 빠른 속도로 인도와 차도를 달리기 때문에 사고 위험이 높아 머리를 보호하는 헬멧은 필수품이다. 넘어졌을 때 손을 다치지 않기 위해서는 장갑을 끼어야 한다. 거기다 눈을 가리는 고글을 쓰고 마스크와 버프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다...

자전거 라이더 복장을 하면 일반인처럼 보이기가 쉽기 때문이다.  7


일소일소 일노일로(一笑一少 一努一老 한일 웃을소 한일 적을소 한일 힘쓸노 한일 늙을노)라, 한번 웃을 때마다 하루 젊어지고 한번 화낼 때마다 하루씩 늙어지나니 네가 웃음만 잃지 않으면 평생 없는 복도 받아가며 살리라.  24


옛적부터 현명한 어른들이 물만 먹고도 살아오셨으니 그것을 백비탕(白沸湯 흰백 끓을비 끓일탕)이라 하느니라, 신라시대 화랑이나 법사는 호랑이에게 물려갔다 돌아온 사람에게 백배탕을 만들어 먹임으로써 정신을 차리게 했다. 만드는 것은 아주 쉽다. 차갑고 깨끗한 샘물을 준비한 뒤 숯불에 물을 팔팔 끓여 달인다. 그 물 삼분의 이를 그릇에 담고 찬 샘물 삼분의 일을 부어 두가지 다른 성질의 물이 섞이기를 기다렸다가 밥 한끼를 먹을 시간 동안 천천히 마시면 된다. 백비탕은 머리를 맑게 하고 잠을 깨우며 허기와 갈증을 면하게 한다. 하루 한번씩 십년을 꾸준히 마시면 석사, 박사보다도 똑똑해질 수 있다.  26


아이가 늦되고 자라면서도 어리숙하고 바보 같은 걸 두고 동네 사람들은 '어비'라고 했는데 만수가 바로 그 짝이 났다. 아이가 비실비실 허약하고 주눅이 들어 매사에 자신이 없으며 경쟁에 뒤처지는 것을 두고 '지실이 든다'고 하는데 만수가 바로 지실이 든 아이였다.  33


소질이 없는 건 할 수 없는 일이나 만수는 성의가 있었다.  39


만수야, 너는 아직 재주가 다 드러나지 않은 망아지, 덜 벼려진 칼과 같구나.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가지만 돈 끼호테의 로시난떼처럼 비루먹고 약한 말도 열흘을 부지런히 가면 천리를 간다고 했다. 또 천리마의 꼬랑지에 붙어 있는 쇠파리 또한 천리를 간단다. 네가 하루 천리를 가는 명마가 아니라고 실망하지 마라. 뭐든지 잘보고 기술을 배워 하루하루 열심히 하면 너는 전기기사, 시계 수리공, 운전기사 등등의 기술자가 될 수 있다... 귀를 크게 열고 입은 꼭 다물고 네 길을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40


그나마 신통한 것은 바로 아래 여동생 명희도 아니고 더 어린 남동생 만수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요강이라도 부시고 할아버지 한테 가서 잘 주무셨는지 손 모아 인사를 하고 와서 돼지며 닭이 제 먹을 것 찾아 밖으로 가도록 문도 열얻주고 제 손으로 세수하고 아침을 먹고는 설거지물 버리는 것도 도와주고 비 오면 빨래도 같이 걷었다. 아버지 따라다니며 나무도 하고 농사도 거들고 온갖 심부름을 다 하고 소 끌고 나가 풀을 뜯기고 소꼴을 베어오고 뱀이든 개구리든 잡아다 돼지우리에 던져넣었다. 나보다 더 나물을 잘 알고 잘 찾고 잘 캐고 했다. 삘기, 오디, 망개, 까마중, 깨곰(개암), 산딸기, 머루, 밤, 도토리, 더덕, 도라지 등등 만수가 집으로 가지고 오는 건 누구보다, 심지어 아버지보다 더 다양했다. 만수는 손재주도 좋아서 동생들한테 새총이나 종이비행기, 바람개비 같은 장난감도 많이 만들어주고 그랬다. 마음이 착하고 순하고 무슨 일에든 제맡은 몫을 다하려고 애를 쓰고 그렇게 신통할 수가 없었다.  71


만수가 소를 열심히 끌고 다니며 풀을 뜯게 하고 정성을 들이는게 그 소를 잘 키워가지고 팔아서 그걸 학비로 삼아 서울서 공부하려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수는 공부를 못하니까 그럴 일이 없다. 옛날처럼 시험을 쳐서 가면 중학교에도 못 갈 거다. 무시험 뺑뺑이가 됐으니 가는 거지. 대학은 턱도 없고 고등학교도 가기 힘들 거다...

누가 봐도 만수가 내 상대가 안되게 멍청하다는 건 분명했다. 줏대가 없이 남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아무리 잘해봤자 중간밖에 안된다.  105


베트남 국민 약 4백만명이 베트남전 당시 고엽제에 노출됐고 기형아 출산이 급증하는 등 부작용이 속속 보고되었습니다. 세계의 비난이 집중됨에 따라 1969년 11월 2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앞으로 미국은 어떤 종류의 세균전도 포기하며 현재 저장된 모든 생물학무기를 파괴하고 인간을 살상하는 화학무기도 선제사용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고엽제의 후유증인 것으로 판단한 미국, 호주, 뉴질랜드 3개국의 월남전 참전 환자 24만명이 미국 정부와 고엽제 제조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손해배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미국 연방법원은 2억 4천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하도록 판결했습니다. 독재정권하에 있는 한국에서는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소송 참가와 언론보도를 금지해 환자들 대부분이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129



야, 이 개씨바라, 니주라기 씹창 내기 전에 해골 디밀지 말고 아가리 처닫아. 네 곱차에서 올라오는 똥 냄새 때문에 오바이트 나올라고 하거든.

해삼 멍게 말미잘 해파리 같은 놈이 이빨 좀 까네. 쪼다 촌놈하나 갈구니까 똥창이 흐뭇하냐.  138-139



내 평생에 가장 한스러운 일은 맏손자 백수가 머나먼 이역 월남에서 비명횡사한 것이다. 나는 백수를 죽게 만든 이데올로기와 전쟁을 증오한다. 백수처럼 무고한 청년들을 죽음의 전장으로 내몬 권력자들, 독재자의 나팔수가 된 언론과 사회지도층이라는 종자들, 동족의 목숨과 피땀으로 제 배를 불린 더러운 장사치들, 죽음의 독약을 만들어 뿌린 제약회사며 군수산업체며 군 지휘자며 죽음의 시공간을 만들어낸 모든 존재를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이십대에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던 벗들이 있다면 물을지도 모른다. 개체의 생물학적 연장인 핏줄에 집착하고 연연하는 것이 세계를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바꿔나갈 책무를 지닌 깨어 있는 인간으로서 온당한 태도인가. 자손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생명을 영세불멸의 것으로 하려는 동물적인 욕망이며 봉건적인 세계관의 발로가 아닌가. 예전이라면 내 속내가 훤히 드러난 것을 부끄러워했겠지만 이제 나는 바로 그게 우리가 바꿔나가려 했던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고 반론할 것이다... 내가 일평생 가장 잘한 일은 식구들을 데리고 개운리 산골짜기로 들어온 것이다. 내가 두번째로 잘한 일은 개운리 살골짜기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이다. 나갔다면 내 벗들이 그랬던 것처럼 옳은 뜻을 제대로 펴지도 못한 채 훼절하고 보도연맹 사건 같은 백색 테러에 어이없게 목숨을 버려야 했을 것이다. 소심한 자의 우연한 선택으로 일신을 지키고 분에 넘치는 자손을 얻고 일신의 기쁨을 누렸으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악랄한 이빨과 발톱에 백수를 잃었다. 실로 통분하다. 억울하다. 나의 무력함이 뼈에 사무친다.  162-163


'물질이 주인인 세상'  164


어쩌다 내기장기를 둬서 고물 자전거를 하나 딴 적이 있었는데 그 자전거를 타고 낯선 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 보고 이야기도 듣고 사는 것도 보고 웃기도 하고 욕도 하고 그랬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나는 누군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공부 같은 거였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보려고 한 거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년을 매일 술 처먹고 공부 비슷한 걸 하다보니 아버지가 서울에서 공부를 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짐작이 갔다. 서울에서는 사는 것 자체가 일이었다. 보통 일이 아니라 큰일이었다.  165


태어날 때부터 싹수가 노란 인간들은 교육만으로 고칠 수 없다. 가정교육 개판, 학교 개판, 사회 개판이니 선생이 아무리 애를 써서 가르쳐봐야 학생이 개보다 좀 낫기나 하면 다행이다. 사실 교사들 역시 수준 차이가 너무 난다. 군 장교 출신인 나 같은 사람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볼 때 후진국인 우리나라는 최상의 교육을 받은 군인들이 국가의 엘리뜨로서 국민과 자라나는 세대의 교사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우리 군인들만이 신라 화랑과 이충무공을 이어 호국선무정신으로 나라를 지키고 경제를 건설하면서 썩어 빠진 정치와 사회의 환부를 도려내왔다.  171


'어벙해 보이는 놈이 알고 보니 당수 팔단'  231



만수는 자신의 시간과 노력이 동생들, 제가 사랑하는 가족에게 투입되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들끼리의 강력한 결속에 내가 끼어들어갈 틈은 없었다.  236


부치지 않을 편지라면 쓰고 싶은 대로 써도 된다. 일기도 쓰고 살아온 날들에 대한 기억에 대해서도 쓴다. 그냥 아무거나 쓰기도 한다. 

뭘 쓴다는 것은 살아온 날을 돌이켜볼 수 있게 해준다. 어떤 사람에 대한 생각, 감정, 어떤 순간을 문증으로 표현하면 조금 더 그게 선명하게 보이고 정리되고 객관적으로 보게 만든다.  237


전두환이가 80년대 체육관 선거에 단독출마해서 99.9퍼센트 득표를 해가지고 대통령이 된 건 알죠? 그때 통일주체국민회의인가 뭔가 하는 허수아비들 이천오백스물다섯명이 딱 한명만 빼고 다 전두환을 찍었지. 그 한명은 반대를 한 게 아니라 어디 찍는 줄 몰라 실수를 해서 무효표가 된 거고...

그때부터 컬러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했잖아. 스리 에스가 뭔지 아나? 스포츠, 섹스, 스크린이야. 컬러텔레비전으로 프로야구 중계하고 야간통행금지도 해제하고 밤새도록 디스코텍에 술집이 영업하고 [에마뉘엘]같은 포르노 영화를 할리우드 직배로 들여와 심야극장에서 상영했지. 그런 게 다 국민들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우민정책이야. 올림픽 유치한 건 바로 스포츠로 국민들 관심을 돌리려고 한 거라고.  249


정말 회의를 해보니까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고 하는 게 민주주의를 못하게 하려고 만들어낸 말이라는 걸 알겠어요. 백성이 입도 벙끗 못하게 하고 시키는 대로만 하게 하는 게 진짜 독재고 철의 장막 같은 거죠.  285


아무튼지 간에, 안 아프고 안 죽었으면 그래도 복 받은 거라고 생각한다고, 우리만 성실하게 열심히 살면 다 잘 풀릴 거야. 

아니, 형님 다니던 회사가 형님이 게으르고 일 안해서 망한 겁니까. 망해도 그렇지, 자본가라는 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그놈들이 형님네처럼 아무것도 없이 나갔겠냐고요.지금도 홍콩이나 하와이 해변 같은 데 가서 빼돌린 돈 가지고 떵떵거리면서 잘살고 있어요.

처남이 착하다는 건 인정한다. 성실하기도 했다. 그런데 방향이 틀렸다. 같이 해야 할 일은 같이 열심히 하겠지만 싸울 일은 싸워서 해결해야 하지 않는가. 또 싸울 때도 상대를 제대로 골라서 싸워야지 제 편, 제 식구에게 피해를 입혀가며 제 살 깎아먹기 식으로 하는 건 나부터 용납할 수 없었다. 그냥 놔두니까 처남은 계속 주절주절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 어릴 때 굶기를 밥 먹듯 하던 때를 생각해봐. 나는 원망하는 사람이 없어. 내 팔자가 그런 걸 뭐. 또 원망해서 뭐해? 그 사람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도 아니고 그럴 능력도 없고. 그 사람들이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냐고. 부도내고 싶어 부도내는 회사가 어디 있겠어? 나는 이렇게 가난하지만 소박하게, 보통 사람 나름의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하네.  290-291


엄마가 없다. 엄마 대신 누가 차가운 손으로 나를 붙잡고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밥을 먹인다. 엄마를 찾아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내가 숟가락을 집어던지니까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두었다. 울었다. 그래도 오지 않는다. 엄마가 아니다.

엄마가 있을 때는 배고파도, 추워도, 옷이 젖어도 울 수 있었다. 울면 엄마가 와서 먹을 걸 주고 과자도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노래도 불러주었다. 잘 자라고, 그냥 자라고, 자고 있으면 무서운 일도 배고플 일도 추울 일도 슬플 일도 없다고, 그런데 엄마가 없다.

엄마가 없는데 내가 울면 무서운 사람이 와서 나를 잡아갈지도 모른다. 나를 해칠 수도 있고 때릴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엄마가 없으면 슬프다. 슬퍼도 눈물이 나지 않고 웃음만 난다. 내 마음대로 울 수도 없다. 더 슬프다. 

엄마가 없다.  295-296


힘 있고 돈 있고 법까지 제 편인 개새끼들한테 계속 갈굼을 당하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뭐예요? 

만수 형님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우리 일곱명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책임을 질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게 올바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무식해서 정치도 모르고 법 같은 건 잘 몰라도 정의가 뭔지는 알아. 아, 이렇게 하는 게 맞다는 게 그냥 느껴지더라고. 할아버지, 형님 같은 가족들, 나중에 사회에서 만난 강철 선배님 같은 분들한테 잘 배워서 그렇지. 노래도 있잖아. 우리들은 정의파다 훌라훌라.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 나는 죽어도 당당하게 서서 고개 들고 웃으며 죽고 싶어.  302-303


가난하고 가진 게 없는 사람들끼리 싸울 일이 더 많은 거였다. 그 연탄을 우리에게 팔아먹고 돈 많이 벌고 세금 많이 걷고 영원히 부와 권력을 물려주고 물려받을 인간들하고 싸울 생각은 하지도 않고, 쳐다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비슷한 처지의 가난한 인간들끼리 머리 뜯고 대가리 깨지고 피 흘리며 싸우고 또 싸우는 것이었다. 그래도 서로 없이 산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정이 들어서 명절에는 서로 떡도 주고받고 어떤 집, 아니 같은 집에 사는 아이가 맞고 오기라도 하면 우르르 몰려가서 같이 복수를 해주곤 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데서 늦게까지 놀고 있는 애가 있으면 귀때기를 붙들어다가 데려다주기도 하고.  304-305


초등학교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과 달리 아이들을 정상, 비정상이라는 자기들에게 편리한 기준으로 구분했다. 평균적인 아이들을 길러내는 교육방식에 맞지 않는 아이들은 가차없이 걸러졌다. 태석이의 담임을 맡은 여교사는...  321



우리가 오이씨디 국가 중에서 제일 자살률이 높다는 오명을 쓰고 있어도 해마다 삼십만이 자살 시도해서 죽는 사람이 만오천명뿐이래. 확률로 치면 오 퍼센트라고.  354



어떤 사람이 투명인간이 되는지 정확하게 잘 모르겠다.  361



행복은 성적순으로 매겨지고 부는 상위 일 퍼센트가 독점하며 권력은 세습된다. 정경유착, 금권언(金權言 쇠금 권세권 말씀언)유착, 초국적기업, 신정주의(神政主義 귀신신 정사정 주인주 옳을의), 광신적 테러가 그런 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나 혼자 깨끗하게 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것도 상관이 없다는 건가. 

지금 이 세상이 이렇게라도 굴러가는 것이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누군가는 노력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그렇게 하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363-364


내 경험으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살을 기도하거나 아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지기로 선택한 사람들 중에 투명인간이 된 사례가 더러 있다. 당신은 그런 생가을 한 적이 없는가. 죽는 게 낫겠다.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데로 가서 새로운 생을 개척해보자든가. 그래서 다리 위에서 투신을 했다든가.  354-365  




작가의 말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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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할수록, 춥고 더러운 날씨와 북적거리는 문명사회의 도시에서 투명 인간이 되는 것이 얼마나 부자유스럽고 어리석은 짓인지를 더욱 절실히 깨달았다네. 이 미친 실험을 하기 전에는 수많은 이점을 꿈꾸었지.

나는 사람이 원하는 것들을 꼽아 보았네. 눈에 보이지 않으면 확실히 그것들을 손에 넣을 수는 있겠지만, 손에 넣은 것을 즐길 수는 없어. 높은 자리에 올라도, 거기에 나타날 수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여자의 이름이 들릴라일 수밖에 없다면, 그 여자의 사랑을 얻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나는 정치에는 전혀 취미가 없고, 유명한 망나니짓이나 자선 활동이나 스포츠에도 전혀 취미가 없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았을까? 그 때문에 나는 몸을 완전히 감싼 수수께끼, 몸을 감싸고 붕대로 감은 인간 캐리커처가 되어 버렸어!  20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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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동안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에 대한 생각과 의견들

여행은 움직이는 고해소다.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은 다시 볼 사이가 아니기에 삶에 깃든 어두운 비밀이나 상처, 슬픔 등을 주저하지 않고 털어 놓을 때가 많이 있다.

인생이라는 여정에서도 우리는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할 때가 많이 있다. 삶의 복잡한 문제를 드러내고 구체화하려면 그 문제를 말로 표현해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소설가에게 가장 중요한 재료는 '다른 사람의 삶'이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나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내가 인생에서 직면했던 어려운 문제들을 되짚어보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 더글라스 케네디




1 행복은 순간순간 나타나는 것일까?


키르케고르는 '인생은 앞으로만 나아간다. 지나간 뒤에야 인생을 이해할 수 있다'라고 했다.  

철학자 니체 '시련으로 죽지 않는 한, 사람은 그 시련으로부터 더욱 단단해진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13


당시 내 나이 45세

그 무렵 나는 인생에서 배우게 되는 여러 가지 교훈들 중 비로소 한 가지를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절만, 낙심, 비극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절망, 낙심, 비극은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통과의례라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커다란 시련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넓고 깊게 트인다. 사람은 상실, 재난, 아픔, 슬픔 따위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삶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3-14


인간 조건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읽기 쉬운 이야기와 문장으로 결합하는 능력, 마치 슬픈 코미디처럼 인간관계가 변모해가는 모습,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불공평에 대해 차가운 일침을 가하는 절규 등이 나의 소설 세계와 일치하는 부분이었다.  15


조르주 심농이 1946년에 쓴 소설 <뉴욕의 매그레>를 읽으며 내 상황을 소설에 대입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다음 구절은 특히 내 처지를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통 형태 그대로 눌려 있는 배게, 잠 못 들고 몸을 심하게 뒤척이다 구겨진 시트, 파자마, 슬리퍼, 의자에 널브러진 옷가지, 탁자 위에 펼쳐진 책 옆에는 먹고 남은 저녁음식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외로운 남자의 끔찍한 음식... 불현듯 그는 자신이 도망쳐 온 모든 것들을 떠올렸다. 그는 입구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기 두려워 얼어 붙어 있었다.'

사람은 왜 책을 읽을까? 혹시 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이 혼돈의 세상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은 아닐까?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추락하는 감정, 내가 처해 있는 불행과 산적한 문제들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 같았다.  16-17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빼고 나면 내 삶은 점점 더 지리멸렬해지고 있었고, 생에 대한 의구심만 커져갔다.  22


어른이 되어 '즐거워할 수는 있지만 행복할 수는 없어.' 라고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시점이 있다. 그 시점을 지나고 나서부터는 갑자기 행복과 마주친다는 생각만으로도 당황하게 된다. 행복, 그 심오하고 모순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를 입 밖으로 끄집어내어 말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의미를 전하고 싶어 한 것일까?  23


행복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인간의 모든 딜레마가 포함되어 있는 거대한 구조물에서 행복은 왜 큰 초석으로 여겨지는가? 

행복은 사랑과 비슷한 개념이다. 우리는 사랑과 행복을 간절히 소망하지만 스스로 장애물을 만들어가며 앞을 가로막기도 한다.

우리는 과연 행복해지길 원할까? 우리는 혹시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근원적인 결핍을 끌어안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건 아닐까? 오히려 우리에게 불편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자초하며 사는 건 아닐까? 우리는 삶에 만족을 주는 조건들을 스스로 밀어내는 행위를 하며 사는 건 아닐까?  23-24


내가 소설가로서 여러 가지 곤경에 현명하게 대처해 왔다고 해도, 아들의 자폐증을 치료하기 위해 지혜롭게 대처해 왔다고 해도, 직업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내가 책임져야 할 의무들을 훌륭하게 잘 수행해 왔다고 해도, 여전히 삶에 대한 식지 않은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나는 언제나 위기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누구나 가슴속에 '언젠가 내 모든 게 드러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품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모두의 인생에 깃든 가장 큰 두려움이 아닐까?

우리는 스스로 얼마나 한심하고 비겁한지 잘 알고 있다. 언젠가 자신의 실망스럽고 부족한 모습을 들키지 않을까 늘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 인간은 자기의심에 빠질 확률이 높다. 자기혐오에 빠질 확률도 높다. 아니, 자기 자신의 모습을 불편하게 여길 확률도 높다.

나는 그런 증상드렝 대해 잘 알고 있고, 마침내 한 가지 결론에 도달 했다.

'행복은 동화 속에나 있다. 행복이란 손에 넣은 사람이 극히 드문 꿈이며, 나의 감정이나 심리로는 도저히 취할 수 없는 개념이다.'  25-26


삶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양성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다양성이란 단순한 인정이나 타협을 뜻하는 게 아니다. 삶이란 정답 없는 심오한 의문과 끊임없이 조우하는 일이다. 삶에 대한 정답을 찾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애써야 하는 건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이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인생은 왜 끊임없이 불공평한가? 인생을 이루는 근원적이며넛도 영원한 요소인 괴로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인류가 지구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인간과 함께해 왔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해 온 질문이 한 가지 더 있다.

'생명의 불이 꺼지고 내가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ㅇ낳게 될 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인류는 죽음의 공포를 달래기 위해 갖가지 조직과 구조를 만들어 왔다. 가장 핵심적인 것이 종교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도 죽음과 함께 인생의 경이가 모두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물론 용기 있게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침착하게 수용할 수는 있다. 삶에 지친 나머지 죽음의 안식을 워할 수도 있다.  29


행복이란 특정한 순간에만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나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며 잠 못들게 하는 것들을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언제라도 경이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  31


사람이 과연 줄곧 행복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프랭크 시내트라의 노래 가사처럼 '편하고 쉽게'만 나아가기에는 우리의 삶은 지나치게 복잡하고 신비롭다...

괴롭고 불안한 일이 아무리 많더라도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끊임없이 유지한다면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희망이란 바로 '흥미로운 삶'을 이루는 것이다.

'흥미로운 삶'이란 무엇일까? 끝없는 질문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과연 그 '흥미로운 삶'의 뿌리를 잃지 않고 지켜갈 수 있을까?  32




2 인생의 덫은 모두 우리 스스로 놓은 것일까?


나는 <컬리지트>에 다녔다는 것을 대단한 행운이라 여기고 있다. 그 학교를 다니는 동안 비판적 사고 능력, 독서의 필요성, 명확하고 창의적인 글쓰기 등을 배웠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소양이 사람의 지성과 감성을 고양시키는 필수적인 요소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컬리지트>의 단점이라면 성적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문화, 엘리트주의, 실패는 죄악이라는 생각 등이었다.  42


사람들은 누구나 내적 갈등을 겪으며 살아간다. 스스로 만들어낸 내적 갈등이야말로 그 사람의 삶을 좌우한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직업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도 한 겹 벗기고 바라보면 후회와 미련으로 점철된 생을 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니까.

삶이란 결코 원하거나 꿈꾸는 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후회를 줄이고 있는 그대로의 생을 끌어안을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암울한 현실을 결코 벗어던질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암울한 현실을 만들어낸 사람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절망감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56


'사람은 누구나 내적 갈등을 안고 살아간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기본적으로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내 정신과 의사가 들려준 말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적 갈등과 끊임없이 싸워야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 깨달음이란 바로 '어느 누구도 타인의 행복을 모두 책임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58


자녀의 삶을 부모의 뜻대로 이끌어갈 수는 없다. 결국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개척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과제를 풀 책임은 당사자들에게 있다.

부모가 자녀의 행복을 대신 만들어줄 수 있을까? 

사람은 각자 지문이 다르듯 행복을 느끼는 의미와 조건 역시 다르다. 우리는 배우자가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  58-59


독서광들이 대개 그러하듯 나 역시 내가 읽어낼 수 있는 양보다 훨씬 많은 책을 충동적으로 구입한다. 책을 사는 것도 중독이다. 책을 사는 게 코카인이나 포르셰를 사는 것보다 돈이 덜 들고, 책을 집필하느라 노고가 많았던 작가를 돕는 일이긴 하지만 중독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내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 중에서 아직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책이 부지기수다.  64


스스로 덫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더욱 두려운 질문들이 기다리고 있다. 

과연 덫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를 가두고 있는 불행한 삶 너머로 탈출할 수 있을까?

아니면 불행한 삶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며 끝까지 버텨내야 할까?

그런 질문들에는 골치 아픈 개념이 숨어 있다. 바로 '변화'라는 개념이다. '변화'는 미국의 낙관주의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68


'변화'는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상륙할 당시부터 미국의 기본 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청교도정신의 중심에는 '죄악'의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섹스에 있어서는 특히 심하다. 그런 점들은 미국과 프랑스를 비교해 보면 훨씬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프랑스에서는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바람을 피우는 것에 대해 가정과 분리해 사회적으로 묵인한다. 미국에서도 장기간 결혼생활에서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권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부가 서로 합의 아래 외도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다만 미국사회에서의 외도는 어디까지나개인적인 문제로 국한된다. 프랑스에서의 외도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것과 명백한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69


간통 행위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보상받는 기분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몰래 간직한 기분, 은밀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에 짜릿한 쾌감을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반면 자기혐오에 빠질 수도 있고, 차분하게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도 있다.  70


우리는 수많은 의무들에 갇혀 있다. 모기지론, 자동차 할부금을 갚아나가야 할 의무와 함께 자녀양육의 기나긴 의무가 있다. 평생을 따라다니는 부모라는 꼬리표를 무시할 수 없고, 자신이 선택한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그런 문제들은 미국사회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권태는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문제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권태로운 결혼생활이나 직업을 그대로 유지해 간다는 건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는 그런 삶을 유지해가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덫에 갇혔다는 생각이 들때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가장 불편한 진실은 그 덫을 만든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72


우리는 나이를 먹고 나서야 세상에서 살다간 모든 사람들이 맞닥뜨렸을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인생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던 사람들은 나이가 지긋해지고 나서야 자기 자신에게 잔인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삶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때서야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 덫에 갇혀 더없이 소중한 인생을 불행에 빠뜨리고도 바꿀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진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삶의 덫에 갇혀 더없이 소중한 인생을 불행하게 보내기로 결정한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76


우리는 누구나 떠나는 꿈을 꾼다. 자유를 얻는 대신 외로움을 덤으로 얻게 될 미지의 땅으로 모험을 떠나는 것은 어려운 결정이다. 가정이나 직업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로워지기로 결심한다는 건 어른이 되어 내릴 수 있는 결정 중에서 가장 힘들다. 그런 까닭에 나는 떠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키케로는 듣기에는 불편하지만 일리 있는 말을 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건 대단히 위험하다. 하지만 그런 위험은 세상의 도처에서 너무 쉽게 일어난다.'  77




3 우리는 왜 자기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야기를 재구성하는가?


절망에 몰린 사람은 비이성적인 시나리오를 유일한 해결책으로 착각하게 된다고 하잖아.  88


'실증적 사실'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이견이 없는 진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복잡한 상황들을 설명할 때 단 하나의 실증적 사실만 적용할 수는 없다.  89


왜 상대의 '진실'은 나의 진실과 다른가? 더욱 간단히 말해 우리는 왜 자기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야기를 재구성하는가?

하나의 사건을 재구성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건 인간의 행동 유형에서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다.  93


내 경험상 어떤 진실을 부정하고 이야기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94


마음은 그 자체로 장소이며, 지옥을 천국으로,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 말 뒤에는 또 다른 질문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어떨게든 하루하루를 견디기 위해 현실을 재구성한다.'

거리의 철학자로 통하는 에릭 호퍼는 말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할 때 가장 크게 거짓말한다.'  95


우리는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에 갇혀 사는 경우가 많다. 그 이야기는 우리의 관점이 만들어낸 허구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얼마든지 관점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이야기를 바꿀 수 있다.  112


(고모할머니) 벨은 "그동안 인생을 비극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어. 아무리 힘들어도 인새을 비극이라 여기면 안 돼. 난 늘 우울한 생각에 빠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왔어. 내가 그 아이를 잃고도 살아갈 수 있었던 건 바로 그런 결심 덕분이었지. 비극적 인생 이야기에 나를 포함시키지 않겠다고 결심했지....

'이제 부터 나는 더 이상 절망에 허덕이지 않는 길을 선택하겠어.' 라고.. 그렇게 마음먹는다고 해서 그 일이 당장 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는 않아. 그렇지만 나는 더 이상 그 일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어. 물론 한순간도 그 아이의 모습이 머릿소에서 사라지지 않았지만 나는 가능한 한 유쾌해지려고 애썼지."  114-115


비극을 갈무리하고 지나갈 길을 찾아낼 수는 있다. 하지만 인생사의 수많은 비극을 완벽하게 극복할 수 있는 해답은 없다. 인생사의 비극적인 문제들을 성공적으로 극복해낸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그 그늘까지 완벽하게 해소할 수는 없다. 사람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괴로움을 끝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살아 있는 동안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쓸 필요가 있다.  116




4 비극은 우리가 살아 있는 대가인가?


작가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 한 가지 조언을 하겠다. 누구나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에는 엄청난 비방이 쏟아진다는 점을 명심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설령 냉소적인 비방들을 무사히 극복하게 되더라도 작가가 되려는 사람의 앞길에는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들이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다. 출판사의 거절을 충격 없이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의 혹독한 평을 아무렇지 않게 견디는 것이 작가가 되려는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자세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작가가 되려는 사람은 끈기와 노력을 통해 끊임없이 창작에 필요한 기교를 연마하고, 작품에 대해 애정 없는 비판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웃는 얼굴로 마주볼 수 있어야 한다.  122-123


1970년대에만 해도 우울증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치료할 약도 변변히 준비돼 있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우울증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자살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해 심각한 벌을 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절망과 공허로 뒤덮인 어둠의 질곡을 헤매게된다. 누구나 암담한 순간에 처하는 경험을 한다. 우리는 누구나 영원히 세사오가 작별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기도 한다. 

단 한 번도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거짓말쟁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한 시나리오를 머릿속 한편에 감춰두고 '아주 몹쓸 생각'이라고 표시한 다음 하루하루를 버텨가고 있을 뿐이다.  127


죽음은 앞으로 전개되는 '삶'의 이야기를 앗아간다.  130


"표절행위가 발각되기를 바랐나요?"

내 질문에 하워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대답했다.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나요? 아버지가 말하곤 했죠.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 사실이 남들에게 발각되기를 바란다고요. 내 경우에는 일이 모두 엉망으로 끝난 다음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어요."

"대개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결과를 봐야만 그 의미를 알게 되죠."

"의미를 깨닫게 되더라도 너무 늦은 경우가 많기도 하죠."  155


하워드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말했다. 

"우리는 누구나 예기치 못한 비극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비극은 어떻게든 우리를 덮치죠. 그렇지 않나요?"

"사실 인생의 아주 많은 부분이 우리 손이 미치지 않는 영역에 있긴 하죠."

하워드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자기 파괴적인 일탈 행위로 비극을 자초한 게 얼마나 한심하고 비참한 짓이었는지 뒤늦게야 깨달았아요. 내 자신이 자초한 비극이었죠.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비극을 피하려면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어야만 하죠. 우리는 매일 아침 거울 속에 들어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며 살아가죠. 그렇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 그 사실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큰 비극입니다."  156




5 영혼은 신의 손에 있을까, 길거리에 있을까?


작가라면 대부분 그렇듯이 나도 어떤 사람들이 당면한 문제를 여러 가지 가정에 대입해 생각해보곤 한다.  167


나는 '만물을 관장하는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개념을 깊이 숙고해 본 적이 있는데 결국 그 말에 수긍할 수 없었다. 전지전능한 신보다 세상일에 덜 끼어드는 초월적 존재도 내 머리로는 수긍이 되지 않는다. 

신이 세상을 만들었지만 세상은 신의 간섭 없이 돌아간다고 주장하는 이신론은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이신론을 주장하는 사상가는 많지만 볼테르가 대표적이다. 내가 보기에 이신론은 불가지론의 지류로 생각된다. 이신론으 우주의 기원은 있지만 생명체들은 각각의 상황을 따르지 신의 명령을 따르지는 않는다는 세계관이다.  169


종교란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베들레힘으로 몸을 숨기는 게 아니면 무엇일까? 파란만장한 인생에서 조금이나마 기대 쉴 수 있는 안식처를 찾는 게 아니라면 무엇일까? 우리에게 일어나는 온갖 문제들에 대해 끝없이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한 탐구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173


몇 년 전 이스라엘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때 만난 70대 노인이 나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유대교는 모계로는 분명하게 이어지지만 부계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어머니가 유대인일 경우 그 자식은 유대인으로 친다. 아버지가 유대인인 경우에는 자식을 유대인으로 치지 않는다. 그 아들이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174




6 왜 '용서'만이 유일한 선택인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상대로부터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한다. 갖가지 난제가 콘크리트 벽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는게 뻔히 보이는데도 못 본 척하고 넘어간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기 때문이다.  216


자기애가 지나치게 강한 사람은 남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은 사랑을 주지 않으면서도 사랑을 바라는 사람을 기꺼이 묶어두려 한다.  236


용서는 인간 조건의 중요한 요소다. 세계의 주요 종교들은 모두 용서를 가르친다. 탈무드에 나오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 

'완고하면 안 된다. 마음을 누그러뜨릴 줄 모르면 안 된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건 쉽게, 화를 내는 건 어렵게 살아야 한다. 상대가 진심으로 잘못을 빌 경우 기꺼운 마음으로 용서해야 한다.'

신약에도 용서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와 비유가 많이 나온다. 

그 유명한 산상수훈도 사실은 용서에 대한 글로 볼 수 있다. 자주 인용되는 다음 문장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불교에서도 미움과 증오를 마음의 독이 되는 병으로 간주한다. 불교에서는 용서하지 않으면 업이 쌓이고,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오히려 더욱 불행한 사람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사람이 나를 이용했어, 그 사람이 나를 괴롭혔어, 그 사람이 나를 짓눌렀어, 그 사람이 내가 가진 모든 걸 빼앗았어.'라는 생각을 품고 있으면 마음속에서 번뇌가 끊이지 않는다.

용서에 대해 가장 공감할 수 있는 말을 남긴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일 것이다. 몇 세기 뒤에 살았던 몽테뉴와 함께 아우구스티누스는 현대적인 실존주의의 토대다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용서는 죄를 사하는 것이다. 용서함으로 한 번 길을 잃었던 마음이 다시는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현대 의학과 정신분석학에서는 '용서 모델'로 불리는 연구가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용서하고 미움을 넘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받은 피해의 부스러기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을 훨씬 더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의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

큰 상처를 준 사람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건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게 남아 있는 분노를 줄여나가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분노를 줄이는 건 정신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용서는 정신건강에 좋다. 다만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용서하기란 정말이지 몹시 힘든 일이다.  239-240


분노의 대상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가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결국 후회할 일을 한 가지 더 만들게 될 뿐이죠.  250


분노가 당신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죠. 우리는 분노를 너무 많이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큰 피해를 당할 경우 특히 극심한 분노의 감정이 일게 되죠.  251


용서는 자기 안에 있는 온갖 나쁜 기운을 밖으로 점차 내보내는 일이다. 

내가 '점차 내보내는 일'이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하기 바란다.  257


용쇼는 먼저 자기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미움과 원망을 버리는 일이다. 용서를 상대에 대한 수동적 공격의 도구로 사용하면 안 된다. 타인의 잘못을 용서했으니 자기 자신의 도덕적 우위가 증명된 셈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용서는 존재론적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 각자가 세상에 홀로 서서 모든 행도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면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타인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도 자신의 책임이다. 사는 동안 만나게 될 수밖에 없는 어려움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해야 할 책임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았을 때 그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것도 자기 자신의 몫이다. 

용서는 '잊기'와 다르다. 요즘 '잊기'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다. '잊기'는 살아가면서 힘겨운 일을 겪에 돼 괴로움에 처했을 때 그 상처를 상자에 담아 마음 깊은 곳에 꼭꼭 묻어두고 다시는 열어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258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이 우리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용서는 우리가 모든 상처를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과도 같다...

용서의 과정은 전적으로 혼자 이루어가야 하기에 더욱 두렵고 힘든 일이다.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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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뇌에는 '결정적 시기'라는 것이 있는데, 이 시기의 뇌는 젖은 찰흙 같아 주변 환경의 영향으로 자유자재로 주물러지고 변형될 수 있다. 오리는 태어난 지 몇 시간, 고양이는 4주에서 8주, 원숭이는 1년, 인간은 약 10년까지 유지되는 '결정적 시기'에 겪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뇌 구조가 완성된다. 그래서 아이슬란드에서 성장한 뇌는 아이슬란드에 최적화된 뇌를, 카르타고에서 자란 뇌는 카르타고에 최적화된 뇌를 가지게 된다.  26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인류의 모든 전설과 신화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유 없이 떠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바로 헤어짐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세상과 이별한 자에게는 도전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성숙이다. 떠남을 통해 성숙한 자는 다시 익숙한 세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자는 더 이상 떠나기 전의 그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귀향이다. 캠벨은 이렇게 인류의 모든 스토리들이 헤어짐, 성숙, 그리고 귀향으로 이뤄진다고, 이 과정이야말로 인류 공통의 '단일신화(monomyth)'라고 이야기한다.  27



우리가 떠나는 진정한 이유는 어쩌면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28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있고, '왜'라고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순간 우리는 질문을 짊어진 무거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65



인간은 23쌍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다. 각 염색체들은 노화 진행을 나타내는 텔로미어(telomere)라는 DNA 조각으로 끝난다. 세포들은 주기적으로 세포분열을 통해 DNA를 복제하는데, 세포 끝 부분인 텔로미어는 복제되지 않아 궁극적으로 분열 때마다 점차 짧아진다. 통계적으로 고양이는 8번, 말은 20번, 인간은 60번 정도 세포분열을 할 수 있다. 더 이상 분열되지 않으면 세포는 노화하고 우리는 결국 죽음에 이른다. 텔로미어가 잘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까? 다행히도 가능하다. 텔로머아제아(telomerse, 말단소립 복제효소)를 이용해 세포가 분열해도 텔로미어의 길이를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 암세포가 가장 유명한 경우이다. 텔로머라아제가 활성화한 암세포들은 끊임없이 세포분열이 가능하다. 암세포들에게는 영원한 '삶'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94



현재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은 해마다 약 1,000억 톤의 탄소를 필요로 하는데 그 중 오로지 5억 톤 정도만 생태계에서 자연스럽게 생산된다. 나머지 995억 톤의 탄소는? 죽은 생명체의 시체들을 재활용해 만들어진다. 죽음이 없으면 생명에 핑요한 탄소의 200분의 1만 만들어지고 죽음 없는 세상에서는 새로운 삶이 200배 덜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지구에는 그런 죽음이 있기 때문에 약 200배의 더 많은 삶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96



인생은 생각과 선택의 꼬리물기이다. 선택과 생각은 뇌로 하는 것이고, 뇌는 수천억 개 신경세포들의 합집합니다. 그 수많은 신경세포들을 단순히 '내가 원한다'라는 의지 하나로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시대는 매우 순진해 보인다. 완벽한 자유의지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선택은 수많은 요소들(물리법칙, 유전, 경험, 학습, 우연...)로 구성된 '선택의 풍경'을 통해 확률적으로 만들어진다. 선택의 틀은 정해져 있지만, 선택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완벽한 '자유의지'를 통한 완벽한 '선택의 자유'가 존재한다고 믿을까?  104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실이란 외부 세상과 머리 안에 존재하는 내부 세상과의 동일성을 의미한다며, 진실 추구를 지성과 사실 간의 방정식에 비유하기도 했다.  118



역사철학자 비코는 진실을 '구성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진실은 객관적이기보다는 역사, 사회, 경제적 조건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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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악으로 번영하는 사람도 있고, 선행으로 몰락하는 사람도 있다.' - 셰익스피어 <법에는 법으로> 2막 1장



"당신이 내 옆에 있어줘서 정말 좋아. 그렇지만 좌절감을 느끼면서까지 내 옆에 있어줄 필요는 없어."

"좌절감을 느끼다니?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말한 적 없지만 느낄 수 있어."

"내 진실을 알아주니 눈물 나게 고맙네.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능력에 A학점 줄게. 그 대단한 이기심에 A+를 주지."

"이기심?"

"그래, 착한 척하는 가면 뒤에 숨어 있는 당신의 이기심..."

그 말을 하고 나서 곧 후회했지만 화가 나 다툴 때 이성적인 사람은 없다. 게다가 가장 가까운 사람과 싸울 때는 더욱 그랬다. 화가 치솟을 때는 온갖 끔찍한 말들이 머릿속에서 떠오르고, 생각해볼 여지없이 입에서 불쑥 튀어나오게 마련이었다.  62-63



"우리의 인생 자체가 덫인지도 모르지."

우리는 스스로 덫을 놓는다.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 상황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67



미국은 무릎 꿇고 순순히 자기 역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국가가 나서서 박살내는 나라죠.  159



"마음먹기에 따라 지옥도 천국이 될 수 있고, 천국도 지옥이 될 수 있어."  167



"... 개인이든 집단이든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강력한 자극을 가해 흔들어줘야 하지."  175



왜 사람들은 가진 것과 갖고 싶은 것들을 이야기하는데 이처럼 많은 시간을 쏟아 부을까?  223



25년 동안 교직에 몸담으며 깨달은 바가 있다면 아이들의 성격은 타고난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부모는 단 한순간도 자식에 대한 걱정을 놓을 수 없게 마련이었다.  238



NPR에서 브람스의 <저먼 레퀴엠>이 흘러나왔다. 진행자가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짧다는 깨달음을 주는 곡이라고 설명했다.

마치 브람스가 내 마음을 알고 위로하는 듯했다. 좋은 싫든 우리는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263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붙잡는다.  272



"네 엄마와의 결혼생활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게 뭔지 아니? 우린 수없이 '이제 그만 헤어져.'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살아왔어. 상대에게 가장 강력한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말이었기 때문일 거야. 그렇지만 우리는 끝내 헤어지지 않고 지금껏 살아왔어."

"왜 헤어지지 못했는데요?"

"안정을 추구해서도 아니었고, 변화가 두려워서도 아니었어. 지금도 이유를 모르겠지만 네 엄마가 없는 인생을 상상할 수 없었어. 네 엄마도 내가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 없었을 거야. 단순한 것 같기도 하고, 대단히 복잡하기도 한 결론이지.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끝없이 괴롭히며 살아가지. 82년이란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배운 게 있다면 용서하고 용서받는 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거야.  278



부모란 자식이 잘못을 저리르면 혼자 남몰래 자책하는 존재이다. 가끔 부모가 된 걸 크게 후회한다. 자식이 없었다면 지지고 볶고 부대끼며 함께 어우러지는 삶은 없었겠지만 훨씬 더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살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313



"어떤 일도 가능하고, 어떤 일도 불확실하다."  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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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당신과 함게 있으면서 잘못을 저지르는 게, 모든 것이 제대로 된 듯 느끼면서 당신이 없는 것보다 좋아요."  546


".. 난 시도해보고 싶어요. 당신과 나요. 엄청난 실수였다고 생각하면서 끝맺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할 거예요."  547



대수의 법칙과 결합한 확률 법칙에 따르면, 불리함을 극복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어떤 일을 점점 더 많이 반복해야 한다고 한다.  

더 많이 할수록 성공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아니면 내가 엄마에게 설명한것처럼, 때로는 그냥 계속해서 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노먼을 정원으로 데리고 나가서 이번 주에만 86번째로 공을 던졌다. 노먼은 여전히 그 공을 물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언젠가는 해낼 거라고, 나는 믿는다.  55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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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 살의 나는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확신이 없다. 사실 일자리를 잃을 때까지는 그런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27


사랑한다면 끝까지 곁에 있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뭐 그런 거?  77



"그쪽은 그쪽이 더 잘 안다고 생각했겠죠. 다들 나한테 뭐가 필요한지 자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해..."  81



투석기로 발사된 돌덩이처럼 완전히 다른 삶 속에 처박히게 되면, 아니 적어도 얼굴이 유리창에 닿아 짜부라질 정도로 심하게 등 떠밀려 남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84



세상에는 훨체어를 탄 사람과 같이 다니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이 잇다. 하나는 포장도로 상태가 얼마나 거지 같은가 하는 실감이다. 여기저기 푹푹 파인 데를 엉망진창으로 땜질해 놓았거나 아예 울퉁불퉁하다..

또 하나는 사려 깊은 운전자가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보도 진출입로를 아예 막고 주차를 하거나 너무 빽빽하게 차를 붙여 놓아서 실제로 훨체어가 도로를 건널 길이 아예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98



보통 사람의 시간이 있고 병자의 시간이 따로 있다. 시간은 정체되거나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고 삶은, 진짜 삶은, 한 발짝 떨어져 멀찌감치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114



"당신은 지나치게 똑똑해. 지나치게 흥미 진진하고." 그는 나를 보던 눈길을 돌렸다. "인생은 한 번밖에 못 사는 거요. 한 번의 삶을 최대한 충만하게 보내는 건 사람으로서 당연한 도리요."  277


"행복할 수 있는 일이 뭔지를 찾아서 내가 원하는 일이 뭔지를 알아내고, 그 두 가지 일이 가능한 직업의 훈련을 받은 겁니다."

"당신 말만 들으면 참 간단해 보이네요."

"간단해요. 문제는, 굉장히 힘이 든다는 겁니다. 글너데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노력을 하고 싶지 않은 거죠."  291



"사람들은 대체로 나처럼 사는 게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라고 생각한다는 걸 알아요. 그렇지만 더 나빠질 수도 있어요. 혼자 숨을 쉴 수도 없는 지경이 될 수도 있고, 말도 못 하게 될지도 몰라요. 순환계에 문제가 생기면, 팔다리를 잘라내야 한다는 뜻이죠. 무한정 입원하게 될 수도 있어요. 지금도 사실 산다고 하기엔 형편없는 삶이지만, 클라크. 얼마나 더 나빠질 수 있는지 생각하면... 어떤 날 밤에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진짜로 숨이 안 쉬어지기도 해요."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이런 거 알아요? 아무도 그런 얘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거. 아무도 두렵다든가, 아프다든가, 무슨 멍청하고 뜬금없는 감염으로 죽게 될까봐 무섭다는 얘기는 원치 않아요. 다시는 섹스를 할 수 없고 자기 손으로 만든 요리를 다시는 먹을 수 없고 절대 자기 자식을 안아볼 수 없게 되면 기분이 어떨지, 그런 걸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 휠체어에 이렇게 앉아 있다보면 가끔 죽도록 답답해져서, 이렇게 또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고 싶어진다는 걸,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실낱 같은 희망에 매달려 살고 있는데 아직도 우리 아버지를 사랑하는 내가 용서가 안 돼요. 동생은 이번에도 또 나 때문에 자기가 뒷전이 됐다는 사실 때문에 날 원망하고 있지만... 내가 불구가 됐다는 얘기는, 어렸을 때부터 죽 그래왔던 것처럼 나를 제대로 미워할 수도 없다는 뜻이죠. 우리 아버지는 그냥 싹 다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고, 궁극적으로, 그 사람들은 다 밝은 면만 보고 싶어 하는 거죠. 그래서 내가 긍정적으로 생각해줘야 하는 거고."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정말로 재앙에도 밝은 면이라는 게 있다는 믿음이 꼭 필요한 거죠."  358-359



".. 그 친구가 행복하기를 세상 그 무엇보다 바라지만 나는... 나는 도저히 그가 하려는 일을 감히 내 잣대로 판단할 수가 없어요. 그건 그 친구가 선택할 일이에요. 그가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444


"아니요. 그 친구가 살면 좋겠어요." 

"하지만.."

"하지만 그 친구가 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억지로 살라고 하는 건, 당신도, 나도, 아무리 우리가 그 친구를 사랑해도, 우리는 그에게서 선택권을 박탈하는 거지 같은 인간 군상의 일원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445-446



"어떻게든 되겠죠." 내가 말했다. "우리 둘이서,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거예요."

내가뭘 원하는지 깨달은 흐로, 그 말이 내 캐치프레이즈였다.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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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너의 도시를 세워라"라고 외칩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평온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베수비오 화산처럼 가혹해지기를 바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과 대결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다 강하고 깊은 존재로 고양시킬 수 있습니다.  12


근대는 사람들이 겪어야만 하는 운명의 부담을 가능한 한 줄여 주려는 시대입니다. 자연마저도 과학과 기술을 통해서 인간을 위한것으로 길들이고, 사회도 빈곤과 불평등을 줄여서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안락한 삶을 보장하려는 것이 근대의 경향입니다. 또한 근대는 사람들이 투쟁하지 않고 서로를 동정하고 도우면서 평온하게 사는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라고 여깁니다.  13


장영희씨는 <노인과 바다>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정신을 상기시킵니다. 스스로 위험한 투쟁을 택하기보다는 남의 전리품을 약탈하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는 상어 떼의 정신입니다. 상어 떼는 노인이 힘겹게 잡은 대어에 달려들어 수비게 그 고기를 뜯어 먹습니다.... 니체는 이렇게 쉽고 안락하게만 인생을 살려는 정신을 '말세인들의 정신'이라고 일컫습니다.  16


저는 이 책에서 니체라면 우리가 사는 것을 버겁게 느끼면서 던질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질문들에 어떻게 답했을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많은 살마들은 니체가 주창하는 정신을 예수나 부처가 설파하는 사랑과 자비의 정신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또한 헝가리의 철학자 루카치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니체가 주창하는 정신을 약한 자들에 대한 지배와 정복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의 정신으로 해석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저는 니체가 주창하는 정신은 예수나 부처식의 사랑이나 자비의 정신도 아니고 제국주의적인 정신 역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약한 자들에 대한 사랑과 동정을 주창하는 근대인들이 망각하고 있는 강건한 정신으로, 고통과 험난한 운명을 자신의 고양과 강화를 위해 오히려 요청하는 패기에 찬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초인(超人 뛰어넘을초 사람인)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



첫 번째 질문 -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할까?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을 경멸하라


초조가 세상을 뒤엎고 있다. 

현대인들은 너나없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20


쇼펜하우어,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22


과학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를 알려줍니다. 

이에 반해 철학은 우리가 이미 삶 속에서 체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고 있는 것을 확실하게 개념화해서 우리 눈앞에 보여줍니다.  27


'아름다움이란 우리 인간이 자신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세계에 나눠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40


우리는 흔히 고난과 고통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고통스럽게하는 고난이 일어나지 않고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이와 함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통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한 인간'은 고난과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 않고, 그런 것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평정과 충일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입니다.  43



두 번째 질문 -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 무엇일 필요합니까?

인생, 의미를 찾지 않을 때 의미 있는 삶이 된다


니체는 '인간의 정신은 낙타의 정신에서 사자의 정신으로, 그리고 사자의 정신에서 ㅇ라이의 정신으로 발전해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47


니체가 말하는 낙타의 정신은 사회의 가치와 규범을 절대적인 진리로 알면서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정신을 뜻합니다.  48


니체는 '사자의 정신은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는 못한다'라고 이야기했지요. 기존의 가치와 의미가 붕괴된 자리에 남아 있는 가치와 의미의 공백 상태는 정말이지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기존의 가치와 의미가 무너지고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결여된 상태를 두고 니체는 니힐리즘(nihilism, 허무주의)이라 명명.  50-51


아이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말은 곧 인생을 유희처럼 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어떤 재미있는 놀이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왜 이 놀이를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놀이가 재미잇어서 놀 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 '왜 이 놀이를 해야 하지?'라며 놀이의 의미를 묻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놀이의 재미가 사라졌는데도 계속해서 그 놀이를 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 하나의 재미있는 놀이로 여겨지는 사람은 '이 놀이를 계속해야 하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저 삶이라는 놀이에 빠져서 그것을 즐길 뿐이지요. 우리가 삶의 의미를 묻게 되는 것은 삶이 더 이상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으로 느껴질 때입니다.  60


중력의 정신이란 우리를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두려움과 걱정, 시기와 원한과 같은 부정적인 정신을 뜻합니다.  70



세 번째 질문 - 내 맘대로 되는 일은 왜 하나도 없을까?

위험하게 사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운명에 대해서 우리가 취할 수 이쓴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운명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인간이 노력하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극단적인 자유의지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면 된다'는 철학이지요. 

그런데 니체는 이러한 극단적인 자유의지의 철학을 '단죄(斷罪 끊을단 허물죄)의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자유의지의 철학은 사회적으로 실패한 사람을 단죄합니다. '그대가 실패한 것은 그대의 노력 부족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공부 재능이 없다면 아이에게 주어진 다른 운명적 소질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계발시켜줘야 하고, 이렇다 할 아무런 재능도 없으면 평범하게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있는 자세를 키워줘야 하겠지요.  77-80


두 번째 태도는 숙명론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패배주의로서 모든 것을 운명 타승로 돌리는 태도에 해당합니다. 자유의지의 철학은 사람들을 단죄하지만 숙명론은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80


세 번째 태도는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역경을 오히려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면서 험난한 운명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운명애(運命愛 옮길운 목숨명 사랑애)의 철학은 언뜻 보면 자유의지의 철학과 동일한 것 같지만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런 철학은 힘든 운명을 하나의 기회로 승화시키려고 합니다.  81


운명애의 사상에 엄습되었을 때 니체는 그의 책이 거의 팔리지 않을 정도로 전혀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런 자신의 인생에 만족했고 그것을 긍정했습니다.  85



네 번째 질문 -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어떻게 풀 수 있을까? 

당신의 적을 경외하라


적과 대등하다는 것 - 이것이 대개 성실한 결투의 첫째 전제다. 상대방을 얕보고 있는 경우, 전쟁은 할 수 없다.  103


니체는 강간 등 여러 가지 사회악을 만들어낸다고 해서 성욕을 제거하려 하거나, 경쟁심이 인간들 간의 갈등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경쟁심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치통을 막기 위해 치아를 빼버리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위라고 말합니다.  111



다섯 번째 질문 - 신을 믿지 않으면 불행해지는 걸까?

당신을 위한 신은 어디에도 없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 그리고 신을 죽인 자는 바로 우리다! 살해자들 중의 살해자인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위호할 것인가?' 

'신은 죽었다' 니체의 이 말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신이 인간과 달리 신일 수 있는 이유는 죽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이 죽었다'라는 니체의 말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것은 근대에 들어와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게 되엇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서양의 중세 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부딪힌 문제들을 신에 의지하여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와서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은 보통 자연 또는 사회에서 오는 것이지요. 폭우나 가뭄처럼 자연으로부터 오는 재해가 있는가 하면 전쟁이나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고통이 있습니다. 

근대인들은 자연에서 비롯되는 재해에 대해서는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또 잘못된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대해서는 사회구조의 개혁을 통해서 극복하려 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부딪힌 문제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많은 부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고 이에 따라 인간은 신보다는 잣니의 힘을 더 믿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근대에 들어와 과학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굳이 신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도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벼락을 신의 진노라고 해석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것을 자연법치겡 따라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 인류학이나 민속학 같은 사회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굳이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민족들도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에 따라 그리스도교가 서양 사회에서 갖는 영향력은 중세 시대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두고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119-121


니체는 종교를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죄책감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의 힘을 강화시키고 고양시키는 종교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종교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이 만들어낸 그리스도교처럼 지상의 힘이나 쾌락을 죄악시하고 끊임없는 회개를 강요하는 종교입니다. 

니체는 종교란 결국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생각합니다.  135



여섯 번째 질문 - 살아가는 데 신념은 꼭 필요한 걸까? 

신념은 삶을 짓누르는 짐이다


변화하는 세계를 하나의 이론 체계로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니체는 체계를 만들려는 의지는 모두 불성실하다고 보았습니다.  166


확신이란 감옥이다. 

가치와 무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격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아래에 - 그리고 자기 뒤에 - 오백 가지나 되는 확신들을 봐야 한다.  167


인류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것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특정한 종교적 혹은 정치적 이념에 대한 독단적인 확신이 아닌가 합니다.  173


확신은 확신에 사로잡힌 인간을 지탱해주는 기둥이다. 여러 가지 사물들을 보지 않는다는 것, 어떤 점에서도 공평하지 않다는 것, 철저하게 편파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것, 모든 가치를 하나의 엄격하고 필연적인 관점에서 본다는 것 - 이것만이 확신에 사로잡힌 인간이 존속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는 진실한 인간과 진리에 반대하고 그것에 적대하는 자가 된다.  174-175


어떤 독단적인 이념을 확신하는 사람은 자신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이념이 자신의 삶에 확고한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습니다.

어떤 이념을 독단적으로 신봉하는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에게 삶의 위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175


니체가 말하는 자유로운 정신은 곧 독단적인 이념이 우리에게 주는 삶의 위안을 값싼 위안으로 간주하여 거부하면서 세계와 사물을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176



일곱 번째 질문 - 예술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예술은 삶의 위대한 자극제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오래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짧게 살더라도 충만하게 사는 것입니다.  187


'인간은 근본적으로는 사물에 자기 자신을 반영시키며, 자신의 모습을 되비추어주는 모든 것을 아름답다고 여긴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오직 인간만이 아름답다'라고, 이것이야말로 모든 미학의 제1의 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상응하여 제2의 진리에 해당되는 것은 '퇴락한 인간 이외에는 아무것도 추하지 않다'라고 니체는 이야기합니다.  193


니체는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느끼는 기쁨과 분리될 수 없다고 봅니다.  195


그는 예술이 삶의 위대한 자극제라고 생각했습니다.  196



여덟 번째 질문 - 죽는다는 것은 두렵기만 한 일일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절정이다


니체는 삶을 사랑하는 자라면 우연하거나 돌연하게가 아니라 자유로우면서도 의식적으로 죽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129



아홉 번재 질문 - 나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너만의 꽃을 피워라


니체는 우리의 타고난 성격과 소질에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스타일을 부여할 것을 요구합니다.  229


사람들은 틀에 맞추어지지 않는 자신을 악한으로 간주했고 되책감에 시달렸습니다.  

'도덕이 삶에 대한 고려나 배려 그리고 삶의 의도에서 비롯되지 않고 그 자체로 단죄하는 한, 도덕은 동정할 여지가 없는 특수한 오류이며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해를 끼친 퇴락한 자들의 특이체질이다.'  233


'우리 다른 사람들, 비도덕주의자들은 정반대로 모든 종류의 이해와 파악 그리고 긍정에 우리의 가슴을 활짝 열어 놓았다. 우리는 쉽게 부정하지 앟으며 긍정하는 자라는 점에서 명예를 찾는다. 우리는 성직자와 성직자의 병든 이성의 거룩한 무지가 배격하는 그 모든 것을 필요로 하며 이용할 줄 아는 경지에 갈수록 더 눈이 열리게 되었다.'

니체는 인간을 교육하는 방법을 길들이는 방식과 길러내는 방식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누고 있습니다. 길들이는 방식은 인간을 특정한 틀에 맞추도록 강요하는 것인데, 이런 방식을 인간을 병들게 만들고 위축되게 합니다. 이에 반해 길러내는 방식은 인간의 타고난 소질과 성향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는 방식입니다.  234-235


니체는 '그대 자신이 되어라'라고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는 주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235



열 번째 질문 -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감정을 다스리는 것을 넘어 몸을 다스려라


우리는 보통의 경우 초인이 아니라 안일을 탐하는 말세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극복을 하려면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 필요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권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승리다... 전쟁을 일으키는 삶을 살도록 하라! 오래 연명하는 삶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그는 '모든 위대한 것과 충일한 힘은 끊임없는 자기극복을 통해서 형성된다'라고 말합니다.  250


니체는 자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감정과 생각을 다스리는 것을 넘어서 신체를 다스려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힘들다고 해서 함부로 눕지 말고 그때마다의 상황에서 요구되는 적절한 자세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단순히 감정과 사상을 훈련하는 것으로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 가장 먼저 설득시켜야만 하는 것은 바로 신체다.'  255


신체를 완전히 우리의 지배 아래 둘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본능까지 건강하고 기품 있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본능이 건강한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도 건강하게 만드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건강한 본능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경쾌하고 가벼우며 필연적이고 자유롭게 건강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257


그는 우리가 고귀한 인간이 되려면 보는 법과 생각하는 법 그리고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에 대해서 니체는 '눈에 평정과 인내의 습관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성급하게 속단하지 않고 판단을 유보하면서 하나하나의 경우를 모든 측면에서 검토하고 조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258-259


보는 법을 배우게 되면 사람들은 대체로 서두르지 않게 되고, 쉽게 믿지 않게 되며, 낯설고 새로운 것을 접하더라도 우선을 적의를 품은 평정과 함께 그것을 대하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생각하고 쓰는 법인데, 니체는 이것을 '무용을 배우듯'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탁월한 무용수는 섬세하고 우아한 몸짓으로 춤을 춥니다. 그런 몸짓 하나하나를 언어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하지요. 그런에도 우리가 사유하고 글을 쓸 때에는 사물들이 갖는 섬세한 뉘앙스를 느끼면서 그것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259




에필로그

니체의 시각에서 보면 오늘날의 사회는 거대화되고 있는 반면 그 안의 각 개인은 갈수록 왜소해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사회가 잘 굴러가는 데 필요한 나사 부품이 되는 대가로 안락과 향락을 누릴 수 있는 물자를 받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아무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기 바라는 소심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니체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대지는 작아졌고, 모든 것을 작게 만드는 '말세인'이 그 위에서 날뛰고 있다.   26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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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놈베코)는 어머니의 바통을 이어받아아, 무서운 현실에 대한 화학적 방패를 만드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해 보았다. 하지만 장례식 후에 봉급을 받게 되었을 때, 그녀는 일단 먹을 것을 샀다. 배고픔이 가라앉자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자문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 일상이 힘들고, 먹을것이 궁하면, 먹기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먹고나면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자본주의는 먹고나면 다시 먹을것을 걱정하게, 먹을것이 풍부해지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생각을 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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