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여행/인문, 철학'에 해당되는 글 325건

  1. 2021.11.08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아고타 크리스토프 e-book 1
  2. 2019.04.10 마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생텍쥐페리의 아포리즘) E-book - 정여울 홍익출판사 2015 03810
  3. 2019.04.03 임박한 파국 - 슬라보예 지젝 꾸리에 2012 03300
  4. 2019.03.27 멈춰라, 생각하라 - 슬라보예 지젝 와이즈베리 2012 03330
  5. 2019.03.20 바디우와 지젝 현재의 철학을 말하다 - 알랭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도서출판길 2013 03100
  6. 2019.03.13 수레바퀴 아래서(e-book) - 헤르만 헤세 문예출판사 2013 03850 ​
  7. 2019.02.06 그리스인 조르바(e-book) - 니코스 카잔차키스 열린책들 2017 08890
  8. 2019.01.30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 강신주 동녘 2014 03100
  9. 2019.01.23 타자의 추방 -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2017 03100
  10. 2018.12.26 너무 시끄러운 고독 - 보후밀 흐라발 문학동네 2016 03890
  11. 2018.12.12 앵무새 죽이기 - 하퍼리 열린책들 2015 05840
  12. 2018.10.24 대리사회 - 김민섭 와이즈베리 2016 03300
  13. 2018.10.03 철학에세이 - 조성오 동녘 2005 03100
  14. 2018.09.12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 토니 마이어스 앨피 2005 04160
  15. 2018.09.05 지역을 살리는 협동조합 만들기 7단계 - 그레그 맥레오드 한살림 2012 03300
  16. 2018.08.29 동화 넘어 인문학 - 조정현 을유문화사 2017 03100
  17. 2018.08.24 일의 발견(PART THREE) - 조안 B. 시울라 다우출판사 2005 03900
  18. 2018.08.22 일의 발견(PART TWO) - 조안 B. 시울라 다우출판사 2005 03900
  19. 2018.08.20 일의 발견(Part One) - 조안 B. 시울라 다우출판사 2005 03900
  20. 2018.08.10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 니체 책세상 2001 04160
  21. 2018.07.11 인간실격 - 다자이 오사무 민음사 2004 04830
  22. 2018.06.27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 알랭 드 보통 은행나무 2016 03840
  23. 2018.06.06 나의 친애하는 적 - 허지웅 2016 문학동네 03810
  24. 2018.05.30 열한계단 - 채사장 웨일북 2016 03100
  25. 2018.05.09 남쪽으로 튀어 - 오쿠다 히데오 은행나무 2006
  26. 2018.05.02 앨저넌에게 꽃을 - 대니얼 키스 동서문화사 2006
  27. 2018.04.25 보통의 존재 - 이석원 달 2009
  28. 2018.04.19 혼자가 되는 책들 - 최원호 북노마드 2016
  29. 2018.04.17 영화 <뷰티 인사이드> 에서
  30. 2016.11.03 삼십(30)금 쌍담(雙談 둘쌍 말씀담) - 강신주 이상용 민음사 2016 03100



작문 연습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우리는 모눈종이, 연필 커다란 노트를 가지고 부어의 식탁에 앉는다. 우리 둘뿐이다.
둘 중 하나가 말한다.
“네 작문 제목은 ‘할머니 집에도다’야.”
그러면 다른 하나가 다시 말한다.
“네 작문 제목은 ‘우리의 노동’이고.”
우리는 쓰기 시작한다. 종이 두 장에다 두 시간 동안 그 주제로 작문을 한다.
두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서로의 글을 바꿔서 본다, 사전을 찾아가며 상대방의 철자법 틀린 것을 고쳐주고, 끄트머리에는 ‘잘했음’ 또는 ‘잘못했음’ 따위의 평가를 써준다. ‘잘못했음’을 받은 작문은 불 속에 던져버리고, 다음번 작문시간에 같은 주제를 다시 다루게 된다. ‘잘했음’일 경우, 우리는 그 작문 내용을 커다란 작문 노트에 다시 옮겨 적는다.
우리가 ‘잘했음’’이나 ‘잘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와 비슷하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겐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번병은 친절하다’라고 쓴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당번병이 우리가 모르는 심술궂은 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라서 우리는 이렇게만 써야 한다. 당번병은 우리에게 모포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또한 ‘호두를 많이 먹는다’라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라고 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단어는 뜻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다. ‘호두를 좋아한다’와 ‘엄마를 좋아한다’는 같은 의미일 수가 없다. 첫 번째 문장은 입 안에서의 쾌감을 말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감정을 나타낸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생각에 깊이 빠지기 시작하면, 인생을 사랑할 수 없어.”


작품해설 중에

글 쓰는 행위/나의 경우, 글쓰기는 하나의 습관이다.

완성된 작품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쓰는 행위를 정신분석과 같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을 때 거기에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하나의 속임수이다. 쓰면 쓸수록 병은 더 깊어진다 쓴다는 것은 자살 행위이다. 나는 쓰는 것 이외에는 흥미가 없다. 나는 작품이 출판되지 못하더라도 계속 쓸 것이다. 쓰지 않으면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쓰지 않으면 따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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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명백하게 이기는 승리도 있지만, 지는 것 같은데 결국 이기는 승리도 있다. 사람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패배도 있고, 누군가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패배도 있다. 인새은 그 사람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가가 아니라, 인생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 전투 조종사



결국 승리냐 패배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경험에서 내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가 중요했던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은 나를 가난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나를 풍요롭게 한다. 그 사람과 나의 만남으로 우리는 인간으로서 각자의 존재일 때보다 더 높은 무언가가 된다. 자신의 목소리만을 듣는 사람이나 유리에 비친 자신만을 찾는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 - 전투 조종사



인간다움이라는 것.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스스로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중략) 겉으로 보기에는 나의 잘못이 아닌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볼 때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동료가 땀 흐렬 얻어낸 성고을 나 또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음, 아무 생각 없이 깔고 앉은 돌멩이조차도 이 세상의 꼭 필요한 일부분임을 느끼는 그런 태도가 참다운 인간다움이다. - 인간의 대지



고통이나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점점 무감각해지거나,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마음속에 있는 깊은 갈망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나는 경멸한다. 그대는 잊지 말아야 한다. 풀리지 않는 갈등과 모순은 오히려 당신의 마음을 더 크고 깊게 만든다는 것을. - 성채



상처를 피한다는 것은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고, 타인의 관심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고, 결국 인생 자체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다 보면 사람, 인생, 세상이 모두 내 곁에서 멀어지게 되어 있다. 상처 따위에 기죽어선 안 된다. 나는 내 상처보다 훨씬 깊고, 크고, 너른 사람이다.



"꽃의 말을 듣지 말아야 했는데, 꽃이 하는 말은 그대로 믿어서는 안 돼. 그냥 바라보고 향기를 맡아주어야 해. 내 꽃도 내 별을 향기롭게 해주었는데 나는 그걸 즐기는 법을 몰랐어. 그 터무니없는 호랑이 발톱 이야기 때문에 속이 상하긴 했지만, 나는 그 꽃을 가엾게 생각했어야 하는 건데..."

어린 왕자는 계속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어. 행동을 보고 판단해야지 말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그 꽃은 나에게 향기를 선물해주고 내 마음을 환하게 비춰주었어. 꽃을 두고 도망쳐서는 안 되었는데! 그 허영심 섞인 말 뒤에 사랑이 숨어 있는 걸 눈치채야 했는데. 꽃들이란 모순 덩어리거든. 하지만 나는 너무 어려서 그 꽃을 사랑하는 법을 몰랐어." - 어린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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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며 - 이택광

낡은 것이 사라졌는데, 새것이 출현하지 않는 상황이야말로 위기 자체이다.  7


인류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해왔다는 마르크스의 말은 ‘문제의 발견’이야말로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정확한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대답인 것이다.  7


자본주의가 끝난 뒤에 올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만, 지금 여기에서 노력할 수 있는 것은 공산주의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국 사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주장은 너무 이상론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자본주의를 고쳐서 쓰면 인간적인 자본주의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니까 밀이다.  8



1부 임박한 파국, 어떻게 맞설 것인가 - 하얏트 호텔 2012. 6. 25.


일부 좌파들처럼 은행가들이 얼마나 탐욕스럽고 부패했는지 불평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은 항상 탐욕스럽고 부패했기 때문이죠. 문제는 왜 금융자본이 오늘날의 이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는가 하는 겁니다.  20


중국이나 싱가포르를 민주적이라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는 극도로 역동적이고 생산적이며 동시에 파괴적이지만, 더 이상 민주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 비록 우리가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에 있다하더라도 근본적으로 경제 등등은 기술관료들이 모든 결정을 내리고 있는데, 이 상황은 위험천만하죠. ..

저는 서유럽과 미국 등을 포함하여 전 지구적으로 실업의 양상이 마르크스가 ‘노동예비군’(reserve army of labour)이라고 지칭한 그룹(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상대적으로 줄어들며, 잉여 노동인구는 이른바 노동 예지군으로 전락해 생산과정에서 추방당한다고 마르크스는 설명한다_편집자)의 형성과 깊은 연관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점점 더 급진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고 봅니다.

첫째, 산업의 광대한 현대화와 디지털화는 전형적으로 비 고용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영구적으로 비고용의 상태에 있게 만들었습니다.  21-22


또 다른 면으로, 하나의 국가 전체를 서계공동체(world community)에서 배제하는 일도 있습니다. 미국이 콩고를 불량 국가(rogue country)로 지목하여 무역을 규제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 이런 국가들은 내란으로 엄청난 혼란 속에 있으며,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에 단지 허술하게만 묶여져 있을 뿐입니다. 하나의 국가 전체가 실직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육받은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 교육받은 학생들은 동시에 엄청난 불만을 품고 있죠. ... 유럽공동체에서도 흥미롭게 벌어지고 있는 현상으로서, 자본주의의 세 번째 특징입니다.  23


노동문제에서도 이것은 매우 복잡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슬로베니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으로 안타까운 현상을 봅시다. 그들에게는 단체행동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감히 파업을 하지 못합니다. 일자리를 잃어서는 안 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용감하게 파업을 단행하는 유일한 그룹은 변호사나 의사처럼 특권을 가진 샐러리 부르주아들입니다. 그들은 파업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잇습니다. 하지만 다른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파업을 하지는 않습니다. 자신들의 특권을 위해 파업을 하죠. 글자 그대로 부르주아인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파업을 하지만 프롤레타리아이기엔 너무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습니다.  24-25


좌파의 위기...  오늘날 자본주의는 우리가 더 이상 단순한 소비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인도주의자가 되어 소말리아의 굶주린 아이들을 도와주라는 식으로 호소합니다. 소비를 잘하면 인도주의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원리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공적으로 잘 작동되고 있습니다.  27


신자유주의란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이말은 무슨 말인가? 오늘날의 미국을 보면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대통령 - 레이건과 부시 - 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무슨 일을 했는지 보십시오. 이들은 정확히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와는 정반대의 일을 했습니다. 레이건은 가장 원시적인 케인지언(keynesian) 방식으로 수출 지향의 방어적 무역을 내세웠습니다. 미국은 더욱더 강력한 나라가 되었죠. 알다시피 신자유주의는 실천 가능한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가장 중요하다고 할 경제 영역에서 신자유주의는 국가에 반대하면서 국가를 강화했습니다. 교육이나 기타 공공 영역은 민영화하면서 경제 영역은 국가 주도로 바꾸었습니다. 일보노가 중국 또한 마찬가지로 모든 경제 영역이 국가에 의해 신중하게 기획되었습니다. 미국은 강대국이 되면 될수록 신자유주의로 인해 국가의 영향력이 감소되고 기업화되었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전혀 반대였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가장 성공적인 공식은 국가에 의해 매우 치밀하게 계획된다는 것이빈다. 일본도 마찬가지이고 싱가포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싱가포르 국가만큼 치밀한 계획에 의해 집행되는 나라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28-29


좌파는 자본주의를 비판해왔지만, 위기가 닥치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좌파도 해결책을 제시할 수가 없었지요. 최근 대안으로 떠오른 최저소득제(기본소득제) 도입 문제도 자본주의를 지속시킨다는 관점에서 이루어진다면 근본적인 대안일 수 없습니다. 

좌파의 위기는 여기에 있습니다. 좌파도 주도해온 모든 비판적 운동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 그들이 요구한 것은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것들이었습니다.  29


자본주의를 종식시키는 것인가? 규제를 강화하는 것인가? 서로 다른 논의의 장들을 하나로 합치는 것인가? 의회민주주의 국가를 고수하는 것인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구체적인 제안을 할 수가 없습니다.  30-31


오늘날 좌파는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좌파가 된다는 것은, 매우 단순합니다. 비판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32


파국을 인정하면서, 과거의 사안에서 해결책을 가져와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을 피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문제에 공동체주의를 다시 도입해서 대처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코뮌정신 같은 것에 희망을 거는 것 말입니다. 과거에 대한 어떤 노스탤지어도 거부해야 합니다. 

오늘날 좌파는 어려운 문제에 대해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좌파는 훨씬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합니다. 사물이 예상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자각해야 합니다. .. 반동이 아니라 보수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반동은 멍청할 뿐입니다. .. 보수는 해결책을 내놓지는 못해도 난국을 정확하게 인지합니다.  33


홍세화 : <The Idea of Communism>에 실은 글 ‘How to begin from the beginning’(2009. 6. 23)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대의 프롤레타리아는 세 집단으로 분열돼 있다. 하나는 육체 노동자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지닌 지식 노동자들이고, 또 하나는 지식 노동자들과 배제된 자들에 대한 포퓰리스트적 증오를 보이는 노동자들이며, 마지막은 이러한 사회 전체에 적대적인 배제된 자들이다.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외침은 이제 유례없이 어려운 과제가 되어 있다. 이러한 현대 자본주의의 조건 아래서는 노동계급의 이 세 부분이 단결하기만 하면 이것으로 곧 승리다.” 말하자면 이들 세 그룹의 노동자들이 서로 단결하긴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인데, 과연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렸을까요? 그리고 이런 조건에서 좌파의 전망을 재구성한다면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요?  36


저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의 공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 연대하자고 도덕적 호소를 한다? 결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특정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위해 오랫동안 헌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

여기서 저는 염세적인 측면을 고수하고자 합니다. 저는 더 이상 단순한 마르크스주의적 논리를 믿지 않습니다. 위기가 고조되어 사람들이 가난한 상태로 전락ㅎ하게 되면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공감하게 된다는 식으로 쉽게 생각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훈을 언어야 합니다. 지난 위기가 우리에게 준 슬픈 교훈이 이것입니다. 연대감보다는 상대적 부를 통한 분리가 더 강했다는 것이죠. 사회적 약자나 외국인이 손쉬운 배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럽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주민들이 손쉬운 희생양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하층계급들이 이런 외국인에 대한 폭력에 훨씬 잘 동원됩니다, 오히려 부르주아가 관용의 자세를 갖고 있기 일쑤입니다.  38-39


직접 민주주의나 자기 조식화 같은 새로운 정치모델들이 있지만 제대로 작동할 거라 보기 어렵습니다. ..

거리의 민주주의가 문제라기보다, 어떻게 부ㅐ를 없애고 강력한 금융자본을 규제할 것인지 따위의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

많은 좌파들은 오만한 경향이 있습니다, 멍청한 대중이 자기 이익만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번한 대중은 훨씬 개방적이고, 대안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40-41


모든 운동은 다수가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10%만 운동에 참여합니다. 언제나 소수가 중심입니다. 소수에 대해 다수가 공감하는 거죠. .. 이러게 소수이긴 하지만 사회적인 조직화가 필요합니다. ...

수백만이 광장에 모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뒤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변화를 어떻게 느끼는지 그것이 핵심이죠. 이 지점에서 좌파의 고민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조직해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는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사람들의 견해나 일상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43


오늘날 정치의 기술이라는 것은 비록 우리가 체제 자체를 바꿀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현재의 체제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체제란 것은 획일적으로 똑같을 수 없습니다.  44-45


유럽은 유럽의 전통에서 나오고, 남미는 남미의 모색 속에서 나오고, 한국은 한국의 토양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를 위해 다분히 우리는 실용주의적인 입장을 취해야할 것입니다. 그리스가 훌륭한 교훈이 될 수 있겠죠. 위기의 순간에는 아무리 작은 당일라고 할지라도 갑자기 폭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보더라도 우리는 실용주의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배우는 것이 실용주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진정으로 ‘흥미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46




2부 지금, 여기,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 - 경희대 평화의 전당 2012. 6. 27.


1930년대 말 할리우드 코미디 영화에 나온 유머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지요. 주인공이 카페에 가서 크림 없는 커피를 주문합니다. 웨이터는 “죄송합니다만 크림이 다 떨어지고 우유만 있습니다. 크림 없는 커피는 없고 우유 없는 커피만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웃음)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없는 것, 즉 부정이 바로 그 정체성의 일부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변증법의 기본적 메시지의 일부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는 것, 물리적으로 봤을 때 우유 없는 커피는 크림 없는 커피와 같이 그냥 커피일 뿐인데, 그러나 둘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이 없는 커피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56


오늘날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면 직설적인 거짓말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사실이다 혹은 아니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함축적으로 거짓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함축적인 의미를 주면서 정반대의 의미를 전달하는 식이죠. 커피의 예가 적절할 것 같습니다. 우유가 없는 커피를 말하지만 결국은 크림 없는 커피를 준다는 것이빈다. 따라서 함축적 의미에 주목해야 합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그 메시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57


이렇게 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

헤겔의 담론에서는 이것을 총체성(Totality)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실재하는 것의 총체성, 그리고 실재하지 않는 것의 총체성 등등이 포함됩니다. 실제 변증법적 분석을 해보면 핵심은 특정 사건을 조화로운 총체성에 넣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말고 총체적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특정 개념 속에 다양한 부정과 실패를 포함시켜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의 자본주의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자본주의 총체성으로 바라보려면 '이것이 이상적으로 좋은 시스템이다'라고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만을 언급할 것이 아니라 다른 측면까지 포함하여 총체적으로 보아야 하고 또 무엇보다 자본주의가 실패하는 지점도 살펴봐야 합니다. 나아가 국내외적으로도 총체적으로 바라봐야 하지요.  58


이쯤에서 변증법적인 분석을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자본주의 혹은 공산주의에 관한 읿ㄴ적으로 보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에도 각 체제들의 실패 사례들, 또는 의도치 않았던 개념의 부산물드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변증법에서는 이런 실패들이 단지 운이 없어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의 개념 안에 포함된느 것들입니다. 이러한 실수들, 대립의 과정과 끔찍한 파생물들 역시도 그러한 보편적인 개념에 포함된느 것들이란 거지요.  60


우리는 왜 이와같은 협상을 명확하게 예측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지배하는 헤게모니 이데올로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61


자본주의에서 탐욕이 큰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지만, 우리가 자본주의에 대해서 반대한다고 이야기할 때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탓하고 탐욕과 부패로 원인을 돌리는 것은 중요한 분석을 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분석은 시스템 자체에 관한 분석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논의는 시스템 자체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분석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62


유럽에는 산타클로스가 있습니다. 빨간 옷을 입고 어린아이들에게 선물을 갖다 주는 존재, 완벽한 구조 아닙니까? 어른들에게 "산타클로스를 믿으세요?"라고 물어보면 "내가 바보냐?"라며 비웃겠죠. 그럼에도 오른들은 선물을 삽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를 믿니?"라고 물으면 "저도 바보가 아녜요. 부모님이 실망할까 봐 믿는 척하는 거예요."라고 답합니다. 이러한 신념이 하나의 사회적인 연결고리로 작동하지만 실제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믿어야 하는 이 대상이 상상의 존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68


19세기 중반에 독일인 인류학자와 탐험대가 기니에 있는 한 부족을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춤'을 추는 부족으로 아려져 있습니다. 인류학자는 춤을 보고 싶다고 요청했고, 하룻밤을 보내고 난 그 다음날 부족은 그 춤을 보여줬습니다. 인류학자는 상당히 만족스러워하며 원시 부족의 춤에 대한 보고서를 썼습니다. '이 춤은 죽음에 대한 춤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몇 년 후 또 다른 탐험대가 그 부족을 방문해서 예전에 만났던 인류학자와의 만남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두 번째 탐험대는 그 부족의 언어를 미리 배우고 갔기 때문에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부족은 첫 번째 탐험대가 자신들에게 무너가를 요구했고 자신들도 그들이 무엇을 원한느지 간파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족에게서 죽음의 춤을 보기를 원한 것으로 이해하고는 그들에게 최대한 친절을 베풀기 위해 죽음을 형상화하는 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원시적인 고유성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70


'전통의 약', '고유의 약'과 같은 것들을 파는 상점들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아마 한국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뉴질랜드에는 토착민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뉴욕에서 가서 패션이 어떤지를 살펴보고 돌아와서는 토착민들의 의상을 그에 맞게 바꾼다고 합니다. 여기서의 역설이 무엇이냐면, 우리들이 고유성 또는 진품이라는 것에 너무 집착을 함으로서 오히려 그 고유성을 훼손한다는 것입니다.  71


여러분이 탄산음료 캔과 신문지 재활용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이런 행동의 80% 정도는 미신적인 신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의 근본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는 거죠. 쓰레기 분리수거가 지구 환경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산에서부터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지요. 어쨌든 이러한 기이한 현상을 여러분, 깨닫고 있습니까?  74


스타벅스의 출발점은 소비자들에게 어떤 죄책감 같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스타벅스는 사회적으로 굉장히 의식 있는 회사라는 광고를 합니다. '여러분이 카푸치노를 한 잔 마실 때마다 2%씩 소말리아 아동에게 전달되고 열대우립 보존에 사용됩니다'라는 식의 자본주의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광고를 합니다. 소비 뒤의 가격을 상품 속에 포함시키는 것이죠. '너무 소비해서 죄책감을 느끼는가? 괜찮다. 조금만 더 소비하면 죄책감을 해소할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식의 신념과 그것이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현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기를 이해하려면, 그리고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려면, 지금까지의 모든 예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74-75


이데올로기가 반드시 커다란 신념이나 교육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우리의 지적공간의 구조를 뜻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가능케 하는가', 또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가'라고 생각하는 구조적인 틀이 이데올로기입니다.  79


기성세대는 여러분이 사고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 전문가와 지식은은 다릅니다.

전문가는 남들이 규정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문제 해결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 지식인이란 것은 전문가를 넘어선 것입니다. 단순히 남이 규정한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문제 자체에 대한 하나의 법칙을 규명하고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정립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인들은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고 사람들로 하여금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도록 하는 사람들입니다.  88


시스템에 많은 도전을 가함으로서 자유로운 사고를 창출해야 합니다. '이론 공부만 하는데 어떻게 시간과 돈을 투자할 수 있을까? 아프리카 아이들은 굶어 죽고 있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조작입니다. 사고의 흐름을 막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현 상황은 절박하겠지만 바로 그런 상황이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한걸음 물러서서 사고를 해야 합니다.  89




3 청중과의 대화 - 경희대 평화의 전당 2012. 6. 27.


라캉적인 입장.. 원하는 것(want)과 욕망하는 것(desire)을 구분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이 두 가지를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여러분도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입장을 견지한다면 이해할 것입니다. 저는 '사랆들이 공산주의를 욕망하지 않는다'라고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욕망하지만 원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열망하지만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정신분석학의 가장 기초인데요. 우리는 때로 무엇인가를 욕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에 가까워 졌을 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가장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차라리 그것을 얻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욕망하지만 원하지는 않는 것이죠.  95

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라는 단어는 20세기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바보 같은 용어를 계속 사용하는 이유가 뭘까요? 새로운 이름을 붙일 수도 있을 텐데요. 여기에 대한 이유를 네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공산주의는 '공동(common)'의 문제를 건드린다는 점에서 우리가 계속 공산주의라고 지칭하는 것입니다. 세계 자본주의 속에서 잘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지요. 주 번째로는, 공산주의라는 명칭은 쉽게 회복할 수 없는 명칭입니다. 예를 들어 자유라든가 사회주의 등과 같은 다른 용어를 사용하면 결국에는 지금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잠식돼버릴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공산주의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어느 곳에서나 있어 왔습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농노의 반란이나 평등주의 등은 고대에서부터 있어 왔는데 이러한 전토엥 입각해서 우리가 계속 공산주의라고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냉소적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정치적인 프로젝트, 즉 기획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잇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10월 혁명을 예로 들어볼까요? 모든 위대한 것을 꿈꾸며 시작되었지만, 악몽으로 끝이 났지요. 또 스탈린주의, 북녘에 있는 여러분의 동포들, 이러한 모든 것이 어쩌면 파시즘보다도 더 끔찍한 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급진적 운동을 원한다면 항상 그 위험을 알리는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불과 장난을 치는 것이라면 굉장히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겠지요. 저는 지나치게 희망적이거나 믿음이 가지 않는 '공산주의'라는 용어가 좋습니다. 이 용어는 언제나 저에게 '이것이 정말 가능한 것인가? 의도치 않은 새로운 대재앙을 낳게 되지 않을까?'하고 되물을 것입니다.  96-97





4부 일하는 사람들의 공동선을 위한 소명(Possibility of Common Good) - 건국대학교 새천년기념관 2012. 6. 28.


진실은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는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며 싸워야 합니다.  120


'물신적 분열(Fetishist Split)' '저는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정말 그걸 믿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분열은 우리가 보고 아는 바를 거부하도록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실체적 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런 태도도 있습니다. '나는 이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설사 효과가 없을지라도 나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요...' 여하튼 뭔가를 함으로써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일종의 미신인 것입니다. '나는 신문지나 콜라 캔을 잘 재활용하고 있을까?' 이런것들은 그저 쉬운 탈출구일 뿐입니다. 이 방법으로는 마음은 편해지지만 본질적인 문제를 직시하지 않게 되지요.  121


인도의 인류학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tty)를 인용하고 싶습니다. 그는 '우리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인간은 그 압도적 숫자와 화석연료의 연소와 다른 관련 활동 덕택에 지구상의 지질학적 매개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라고 부르는데, 이는 인류 자체가 지질학적 요소가 되는 시대지요. 인류가 단지 당장의 환겨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지구 생명 활동과 생명 순환의 양시겡 직접 영햐을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처음 중국을 방문했을 때 들은 얘기였는데, 정부가 싼샤댐을 건설하기로 결정했을 때 많은 지질학자들이 경고했었다고 하더군요. 댐으로 형성된 거대한 인공호수가 지진을 일으킨 지하 단층 바로 위에 있게 도니다는 것이 그 이유였지요. 이 거대한 인공호수는 강력한 지진의 가능성을 크게 높였습니다. 그리고 기억하시는 것처럼, 정확하게 이것이 수년 전의 쓰촨대지진을 유발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 좋은 징조겠지만, 중국 정부조차도 수십만 명이 사망한 거대한 쓰촨대지진이 우리 인간의 활동에 의해 부분적으로라도 촉발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이처럼 인류가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지질학적 요소가 되었다는 주장인 '인류세'의 또 다른 측면은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상상하기 두려운 일이지만 현재 정부, 위원회 등 권력자들에 의해 '지오 엔지니어링'(지구공학, Geo Engineering)이라는 것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이 가설은 지구온난화를 막기에는 화석연료 규제 등 원칙적 방법으로는 이미 늦었다는 것입니다. 훨씬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그들은 이미 거대한 계획을 논의 중입니다. 예를 들어 수백만 톤의 물이나 바닷물 등으로 된 미세입자를 방사해 이것으로 태양광선을 막는다는 것 등입니다. 이렇게 대기의 조성에 직접 간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상상해보십시오. 지구공학을 통해 인공적으로 바꿨을 때 따라올 부수적인 피해, 의도치 않은 부작용에 대해 그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124-125


생태학의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아는 것이나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데에 있습니다. 자연은 여전히 아름답고 범접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131


인류에게는 다시 일종의 공산주의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어째서 공산주의(코뮤니즘) 재실현이 오늘날 그렇게 상상하기 힘든 것입니까? 지난 세기에 공산주의의 꿈은 비참하게 실패하여 경제적, 미놎ㄱ-정치적, 마지막으로 중요하게 생태적으로도 재앙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꿈을 꾸게 만들었던 문제는 현재도 진행 중이며, 시장과 국가를 넘어선 새로운 형태의 집단 활동이 재창출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불가능과 가능한 것은 이상한 방식으로 분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등위 관계를 넘어서고, 전능한 불멸이 불간으함을 현명하게 받아들이고, 급격한  사회 변화를 위한 공간을 열어, 모든 형태의 근본주의적인 운명론을 어떻게든 피해야 한느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환에는 고매한 윤리가 필요치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장 자크 루소가 말한 '자기애(amour-de-soi)',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진정한 이기주의'를 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기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치 않다. 다른 이들이 져야 한다.' 미국의 작가인 고어 비달(Gore Vidal)의 이 말은 진정한 자기애와 목표 성취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에 대한 장애물을 파괴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형태의 왜곡된 형태의 타인 대비 자아선호인 자기 편에(amour-propre)를 구분한 루소의 논지와 잘 들어맞습니다. 악마적인 인간은 따라서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가 아닙니다. 진정한 이기주의자는 스스로의 선을 챙기느라 너무 바빠 다른 이들에게 불행을 야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악인의 가장 주된 악덕은 바로 그가 자신보다 다른 이들의 생각에 더 정신이 팔려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의 향락적 이기주의 사회에서는 진정한 가치가 상실되었다'고 말하는 비평가들은 완전히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기적 자기애의 진정한 반대는 이타주의나 공동선에 관한 관심이나 나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질투와 원한입니다. 니체와 프로이트가 공유했던 것은 평등으로서의 정의가 질투에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그걸 누리는 '타자'에 대한 질투입니다. 정의의 요구에 숨겨진 것은 따라서 '타자'의 과도한 향유를 줄여 모두가 주이상스(jouissance, 언어화된 쾌락이나 사회적으로 용인된 쾌락 등 우리가 경험하는 불충분한 쾌락의 너머에 있는, 우리를 만족시키고 채우는 그 이상의 어떤 것_편집자)에 대한 접근이 동등해지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의 결과는 물론 금욕주의입니다. 동등한 주이상스를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대신 금지(prohibition)를 동등하게 누리도록 강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대한 것으로 알려진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이러한 금욕주의는 그 반대의 형태를 띱니다. 일반화된 초자아의 강제명령(injunction), 혹은 "즐겨라!"라는 명령의 형태를 띠는 것입니다. 나르시시스트적 '자아실현'과 조깅, 건강식 등의 온전한 금욕과 극기를 조합하는 여피족을 보십시오. 어쩌면 이것이 니체가 '최후의 인가(Last Man)'의 개념을 말할 때 마음에 두고 잇어썬 것인지도 모릅니다. 비록 여피의 쾌락적 금욕주의라는 외양에 숨은 그(최후의 인간)의 윤곽을 진정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오늘에 와서이지만 말입니다.  139-141


지금 우리는 비판적으로 사유해야 합니다.  145




5부 청중과의 대화 - 건국대 새천년기념관 2012.06.028.


저는 순진한 마르크스주의나 휴머니즘에 대한 낙관주의를 펴지 않습니다. .. 제 유일한 역설은,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주 열심히 노력해야만 하는, 정말로 스스로에게 좋은 것을 추구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149


저는 상당한 비관론자입니다. 다만 저는 위험한 상황이 어쩌면 늘 희망적인 상황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린 상황인 것이죠. 어쩌면 더 좋지 않은 상황으로 흘러갈 수도 있고, 조금 나아질 수도 있습니다. 미래는 열려있습니다. 제말은, 진정한 유토피아는 우리가 이것저것 조금씩 고통 받으며 지금처럼 항구적으로 나아간다면 맞이하게 될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150


저는 공산주의를 찬양하지 않습니다.  152


혁명의 폭력은 당신이 의미하는 혁명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

내가 지지하는 폭력은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대화와 사회활동을 중단시키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인민들이 한 것은 수도의 중심 광장을 점거하고 나라 전체를 마비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 이제는 협상할 때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인 무바라크가 말했지요. "당신들의 요구를 들었으니 이제 대화를 하자." 거기에 인민들은 "아니, 토론은 없다. 당신이 떠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내게는 이것이 벤야민이 말한 신성한(신적)폭력입니다. 진짜 폭력은 무바라크의 사람들이 행했고, 인민으 그것은 명확하게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려는 폭력이었습니다. '혼란은 이제 충분하다,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죠. 이것이 제 관점이빈다.

사람들은 제가 "간디가 히틀러보다 더 폭력적이었다"고 하니까 미쳤다고 여겼죠. 히틀러가 수백만 명을 죽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정작 두려워했던 것은 사회구조를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자본주의의 도입을 막기 위해 수백만을 죽였지요. 지나치게 단순화된 마르크스주의식 표현이긴 하지만요. 간디가 인도에서 원했던 것을 히틀러는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간디는 영국 정부가 그곳에서 기능하는 것을 중단시키려 했습니다. 히틀러가 원했던 것은 독일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수백만 명을 죽일 준비가 되어 있었지요. 이것이 저의 폭력관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폭력이 있는지, 어떤 형태의 폭력인지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요지는, 사람들이 폭력을 이야기할 때 어디서 폭력을 보느냐는 점입니다.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우리는 오직 일상생활이 방해받는 지점에서만 폭력을 봅니다. 혼란이 생기고 혁명이 일어나면 "맙소사, 폭력이다!"라고 하지만, 단지 우리가 익숙해졌거나 무시하는데 익숙해진 상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폭력들은 어떤가요? 예컨대 콩고공화국에서 리비아나 이집트 등을 모두 포함한 것보다 매주 더 많은 폭력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저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은 알고 있지요. 확인해 보세요. 1990년대 중반 <타임>지는 지난 10년 동안 콩고에서 400만 명 이상이 자연적이지 않은 이유로 사망한 사건을 커버스토리로 다뤘습니다. 당시 저는 뉴욕에서 열린 어떤 토론회에서 <타임>지의 편집장을 만났습니다. 그는 방향이 클 거라고 예상했는데 겨우 독자 한두 명이 편지를 보낸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무척 놀랐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의 관시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저는 폭력을 지지하지 않지만, 어떤 반항적인 자들이 사람 한두 명을 죽이며 "끔찍하다, 야만적이다!"하면서, 지금 현재 많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이런 일들에 무관심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이런! 우리가 단지 모든 것을 일상적으로 움직여가기 위해 얼마나 엄청난 양의 폭력이 필요한지 인지하고 있습니까? 내게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명확하게 하기 위해 부연하자면, 저는 아랍이나 기타 근본주의자들의 테러를 끔찍하다고 여깁니다.저는 아랍이나 팔레스타인이 고통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테러를 좀 해도 된다거나 반유대주의적인 생각들을 용인해도 된다는 멍청한 좌파가 아닙니다. 안 됩니다. 저는 절대로 이런 것을 요인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이 폭력을 보라는 것입니다. 특히 보이지 않는 폭력들을 말입니다.

짐바브웨를 예로 들까요. 짐바브웨가 공포에 휩싸이게 된게 언제부터입니까? 저는 무가베(1970년대 소수 백인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쳐 독립을 일궈낸 투사로, 1987년부터 총리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이 되면서 현재까지 계속 집권해온 아프리카의 최장수 집권자이다. 2000년 토지 재분배 계획을 강제하면서 백인 농장주가 소유한 토지를 몰수, 백인 주미노가 서방 국가와 마찰을 빚어왔다. 경제난과 국제 사회와의 불화가 계속되면서 무가베는 서방 언론들로부터 아프리카의 민족주의 지도자라는 평판보다는 장기 독재자란 칭호가 따라붙었으며 국내 반정 세력의 불만도 증폭되기 시작했다)를 전적으로 반대합니다만, 그의 집권당이 백인 농부들을 몰아내기 시작할 때부터입니다. 하지만 짐바브웨에는 이미 그전부터 흑인 그룹들 간에 극심한 테러가 있었습니다. 1980년대 말 무가베가 정권을 잡은 직후, 그는 도시 전체에 해당하는 인구인 반대파 1만 명을 죽였습니다. 서구 사회는 여기에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100~200명 정도의 백인 농장주들을 - 심지어 죽인 것도 아니고 - 몰아내기 시작하자 큰 반향이 있었지요. 그런 행위에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폭력을 보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153-156


더욱 의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처럼 '이건 심각하고, 이건 이렇게 가야 하고...' 운운하는 사람만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지루하고 과학적인 책들이 허풍을 더 떨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안착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아무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161


당신이 가진 유일한 것은 당신 자신의 정신입니다. 여기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162


지름길은 없습니다. 이것이 철학의 좋은 점입니다. 무엇이 좋고 아닌지를 말해줄 사람을 구할 방법은 없습니다. 당시은 길을 모릅니다. 당신은 혼자입니다.  162




7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 대한문 쌍용자동차 희생자 합동분향소 2012. 6. 29.


사람들은 보통 "우리는 너무 이기주의자이다"라고 비판하곤 합니다. 남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너무 많이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틀렸습니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면, 그런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사 운영자들을 살펴보면, 이들이 결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많이 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지요. 이들은 하루에 15시간 이상 일하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건강한 이기주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엄청난 관념들을 빌려올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정말 우리 자신을 위해, 또는 아이들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할 것인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결코 이기주의적인 체계가 아닙니다.  178-179


제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나르시시즘에 빠지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계발은 오늘날 우리 문화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해서 더 나은 개인으로 발전하라는 것인데, 이런 자기계발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문명의 특징적 일부이기도 합니다. 이론적으로 훨씬 복잡한 부장이긴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자기를 돌보는 것, 예를 들어 내가 어떻게 나메엑 보일지 신경 쓴느 것이라드가, 매일 조깅을 하면서 체력을 단련한다든가 등등, 이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강제된 모델을 따르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자기계발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멋있게 보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불교가 너 자신을 버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일정하게 동의합니다. 너 자신에 대해 잊어버리라는 것은 사회에서 만들어진 자기 자신을 버리라는 것이니까.  179-180


연대와 관련해서는, 당신을 위해 너무 많이 희생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주의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진정한 연대라는 것은 남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연대라는 것은 당신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그 하나가 되는 연결된 감정에서 가능한 것이죠. 오늘날 미디어가 말하는 연대라는 것은 돈을 기부하라거나, 아프리카에 있는 굶주리는 아이들을 도와달라는 식의 사이비 연대입니다. 이런 사이비 연대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다만 우리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우안을 줄 뿐이죠. 이것이 바로 스타벅스 커피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커피 한 잔을 사면 그 이윤의 1%가 소말리아에 있는 배고픈 아이들에게 간다는 식으로 광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180


먼저, 자살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다양한 종류의 자살이 있을 수 있겠죠. 하나의 자살이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절망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자살하는 경우가 있을 텐데, 이런 경우는 자신의 환경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기에 절망적인 상태에서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깨우는 메시지를 포함한 자살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전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분신한느 자살이 여기에 해당하죠. 또한 남에게 죄책감을 주기 위해 자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자살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해서 자신의 즐거움을 취한다는 점에서 위선적입니다.  181-182


어떤 이가 나무를 깎아서 무엇인가 만드는 일에 열중하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가 자신이 하는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누가 그것으 ㄹ과소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꿈을 추구하고 그것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좋은 이기주의이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좋은 사회 입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없어 고통받는 사회라면 정말 끔찍 할 것입니다. 

좋은 이기주의는 나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을 하는 것이지 남이 하라고 하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182-183


예술가는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입니다. 그 예술작품은 직접적인 행복감을 부여하죠.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술적 퍼포먼스는 기적과 같은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을 사는 이들에게 당신의 작품은 '오 세상에, 이런 것이 있었다니!'라는 자각을 환기시킵니다. 이런 방식으로 예술은 '깨어남'을 선사하죠.  184


고전주의적인 관점에서 어떤 작품이 훨씬 낫다거나, 더 나은 작품을 소유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예술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예술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물론 내가 테러리즘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을 독점하고 있는 갤러리들을 불태우버리는 것입니다.  185


사람들이 선택의 동기를 가지 못할 때 자살하는 것이라는 말은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마치 엄청난 선택의 기회가 있는 사회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 우리는 코카콜라나 펩시콜라 중에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형태의 선택만이 허락된느 사회인 것입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선택의 기회는 널려 있지만, 근본적인 선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삶을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인지에 대한 선택 같은 것을 할 수가 없어요. 무수한 선택의 기회는 사실 우리가 정말 중요한 것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고 있는 허위입니다.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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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월가점령시위 연설 -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마라"

서구 사회의 우리는 금지가 필요 없다. 이미 지배체제가 우리가 꿈꿀 능력마저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보는 영화를 생각해보라. 세상의 종말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종말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7

기억하라.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니다. 체제 그 자체가 문제다. 그것은 사람들을 부패하게 만든다. 적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위에 물타기를 하기 위해 행동에 돌입한 가짜 친구들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카페인 없는 커피, 알코올 없는 맥주, 지방 없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투쟁을 무해한 도덕적 저항으로 만들고자 할 것이다. .. 노동과 고문을 아웃소싱하고 결혼정보업체가 우리의 사랑을 아웃소싱하게 된 이후, 우리는 오랫동안 정치적 참여 역시 아웃소싱 되도록 내버려뒀다. 이제는 되찾아야 한다.  9

사람들은 종종 무언가를 갈망하지만 진정으로 원하지는 않는다. 갈망하는 것을 진정으로 추구하길 두려워하지 마라.  11

2011년 10월 9일 뉴욕 주코티 공원



감수의 글 - '로쟈' 이현우

현재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거스르며 맞서는 행위  15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이라는 게 철학에 대한 그의 정의.  15

왜 모든 문제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가? 그것은 오늘날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손쉬워진 만큼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15

2012년 초 슬라보예 지젝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달라는 주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사유를 시작하라. 단순한 호기심에 그치지 말고 전 생애에 대해 고민을 해야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을 시작해야 한다."  16




1 와 남 니하단 Wat Nam nihadan


페르시아어에는 '와 남 니하단'이라는 멋진 표현이 있다. "누군가를 살해하려면, 시체를 묻은 다음 그 위에 꽃을 심어 시체를 숨기라."  19

지배이데올로기의 일차적 과제는 이러한 사건들의 진정한 중요성을 무효화하는 것이었다. 언론의 지배적인 반응이야말로 정확히 '와 남 니하단'이 아니었던가?  20

(지젝이 말하는 '자본주의의 핵심 적대'는 크게 네 가지다. "다가오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소위 '지적 재산권'과 관련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새로운 기술과학의 발전의 사회 윤리적함의, 새로운 장벽과 빈민가 등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의 생성"(<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창비 2010 p182)  20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결정적인 역사적 순간에는 대다수의 예술적 양식이나 이론적 주장이 모두 합쳐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경향으로 정리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0

현실이 우리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으면, 현실은 그만큼 더 악화될 것이다. 반면 우리의 체계가 적합하다면, (불완전하게나마) 현실에 들어맞는 형식적 틀을 구축하게 된다. 마르크스가 이미 인지했듯이, 사회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규정은 곧 현실에 얽매인 주체들의 '주관적인' 생각, 규정이고, (우리 사고의 한계, 즉 사고의 교착상태와 모순이 곧 객관적인 사회 현실의 적대가 되는)이 구별 불가능한 지점에서는 "진단이 그 자체의 증상"이 된다. 우리의 진단(우리의 행동 범위를 규정하는 모든 가능한 입장들의 체계에 대한 '객관적' 해석)은 그 자체가 '주관적'이다. 진단은 우리가 실천하면서 맞닥뜨리는 교착상태에 대한 주관적인 반응 체계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 해결되지 않는 교착상태 자체의 증상을 나타낸다.  21-22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말했던 "이성의 공적인 사용"이다. 오늘날의 공산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성의 공적인 사용'과 평등주의적 보편적 사유로, 생각하면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칸트에게 '세계시민사회'의 공적 공간이란 보편적 단독성(unversal singularity)의 역설, 즉 일종의 단락(short-circuit)으로 특수성의 매개 없이 곧바로 보편성에 참여하는 단독적 주체의 역설을 가리킨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What is Enlightenment)?>의 그 유명한 구절에서 '사적'에 대립되는 '공적'이라는 표현으로 의미했던 바다. 여기서 '사적'이란 공동적 연대에 반대되는 개인적 유대가 아니라, 한 사람이 특별히 동일시하는 공동적 제도적 질서를 말한다. 이에 반해, '공적'이란 이성의 행사의 초국가적인 보편성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는 이러한 이분법은 좀더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이성의 공적 사용이 지닌 상징적 효능(또는 수행 능력)을 유보하는 데 의존한 것이 아닐까? 칸트는 "생각하지 말고 복종하라!"라는 복종의 일반적인 공식을 거부하지도 않았고, 이와는 '혁명적인' 대척점에 있는 "(남이 시키는 대로) 복종하지 말고 (스스로 머리를 써서) 생각하라!"라는 말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그의 공식은 차라리 "생각하고 복종하라!"였다. (이성을 자유롭게 사용하여)공적으로 생각하고 (권력의 위계 조직의 일부로서) 사적으로 복종하라는 말이다. 

요컨대,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공적 사용'을 통해 기존 질서의 약점과 불의를 목격하게 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통치자에게 개혁을 호소하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G. K. 체스터턴(G. K. Chesterton)처럼 능동적으로 생각하거나 의심할 수 있는 추상적 자유가 실질적 자유를 제한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우리는 대체로 자유사상이 자유를 방지하는 안전 장치 중에서 으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현대적인 예로 다시 표현하면, 노예의 정신적 해방이야말로 노예 해방을 막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의미다. 노예로 하여금 자신이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에 관해 고민하도록 가르쳐라. 그러면 그는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  23-25

'이성의 공적 사용'의 보편성과 참여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을 접목시킨 접근만이 우리가 처한 상항에 대한 '인식적 지도'를 제공할 수 있다. 레닌의 말처럼 "우리는 '사실만을 말해야 하고', 어떤 경향이 있다는 진실을 인정해야 한다."  26




2 지배에서 착취와 저항으로(From Domination to Exploitation and Revolt)


현대 자본주의의 세 가지 특징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이윤 추구에서 지대(rent)(주로 사유화된 '공유 지식'과 천연자원에 기초한 두 가지 형태) 추구로 전환되는 장기적 추세다. 둘째, 더 오랜 기간 '착취'당하는 일이 오히려 특권으로 인식되면서 실업의 구조적 역할이 한층 더 강화되는 현상이다. 그리고 마지막 특징은 장 클로드 밀네(Jean-Claude Milner)가 '봉급 부르주아(salaried bourgeoisie)라고 부른 새로운 계급의 부상이다.  29

밀네의 표현에 따르면, 잉여급여의 필요성은 경제적 의미보다 정치적 의미가 더 강하다. 즉 사회적 안정을 위해 '중간계급'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사회적 위계질서의 자의성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핵심인데, 평가의 자의성이 시장 내 성공의 자의성과 유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폭력은 너무 많은 우연성이 존재할 때가 아니라 그 우연성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 폭발할 위험이 있다.  34

소설 <아틀라스 : 지구를 떠받치기를 거부한 신>에서 에인랜드(Ayn Rand)가 즐겨 쓰던 이데올로기적 환상, 즉 파업에 나선 ('창의적') 자본가의 환상을 떠올려보자. 특권을 누리던 '봉급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의 특권(최저임금 이상의 잉여가치)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이는 오늘날의 수많은 파업에서도 이러한 환상이 도착적인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들의 시위는 프롤레타리아적 시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전락할 위험에 저항하는 시위다. 달리 말하면, 정규직을 얻는 것 자체가 특권인 요즘 상황에서 감히 시위를 벌일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는가? (사양 산업인) 섬유업 등에 종사하는 저임금 노동자가 아니라, (주로 경찰, 사법 관계자, 교사, 대중교통 근로자 등 주로 공무원직에 근무하여) 직업이 보장된 특권층 노동자일 것이다. 학생시위의 새로운 흐름도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이들이 시위를 벌이는 주된 동기는 고등교육을 받아도 졸업 후 잉여급여를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인 것이 틀림없다. 

물론 아랍권에서 서유럽까지, 월스트리트에서 중국까지, 스페인에서 그리스까지 번져간 대규모 시위의 부활을 단순한 봉급 부르주아 계급의 봉기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36

진행중인 경제 위기를 한 측면에 함몰되지 않고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  37

오늘날 우리는 생태자본주의(eco-capitalism)부터 기본소득자본주의(Basic Income capitalism)까지 자본주의를 순치하려는 수많은 공세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시도의 배후에는 다음과 같은 추론이 존재한다. 자본주의가 현재로서는 부를 창출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지만, 동시에 이대로 방치될 경우 자본조의의 재생산 과정에서 착취, 천연자원의 파괴, 집단 고통, 불의, 전쟁 등이 수반된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이윤을 추구하는 재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기본 틀은 유지하되, 글로벌 복지와 사회 정의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자본주의를 조정하고 규제해나가는 것이다. 또 시장에는 그 나름의 수요가 있음을 존중하고, 시장 메커니즘을 직접적으로 교란시키면 대재앙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자본주의라는 짐승이 제 기능을 다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 짐승을 길들이는 일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실용주의적 현실주의와 정의를 고수하는 원칙주의를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보통 그러하듯, 선의로 시작하여 조만간 두 가지 차원의 적대라는 실재(the Real)에 직면하게 된다. 자본주의라는 짐승이 자애로운 사회적 규제로부터 도망치는 일이 거듭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시점엔가 우리는 숙명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정말로 자본주의라는 짐승과 함께 가는 것만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방법일까? 아무리 자본주의가 생산적이라고 해도,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커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일 우리가 계속 이 질문을 회피한 채 자본주의를 길들인다면,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힘을 실어주는 꼴밖에 안 될 것이다.  43-44




3 정치적 대표의 꿈 작업(The 'Dream-Work' of Political Representation)


마르크스는 1848년 프랑스 혁명과 그 여파에 대해 분석한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사회적 대표(경제적 계급과 세력을 대표하는 정치적 행위주체(agent))의 논리를 정확히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복잡화(complicate)'했다.  49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줘야 하므로 공공사업에 착수한다. 그러나 공공사업은 국민의 조세 부담을 가중시킨다. 따라서 종래 5부 이자를 4부5리 이자의 공채로 전화하여 금리생활자를 공격함으로써 세금을 낮춘다. 그러나 중간계급에게도 떡고물이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술을 소매로 구입하는 인민에게는 주세를 배로 인상하고, 도매로 사는 중간계급에게는 주세를 반으로 인하한다. 또 현실의 노동자 조합은 해체하면서, 앞으로 꿈같은 조직을 만들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농민도 원조해줘야 한다. 저당은행들 때문에 농민의 부채가 급증하고 부의 편중이 가속화된다. 그러나 이 은행들은 오를레앙가에서 몰수한 영지를 현금화하는 데 이용되어야 한다. 법령에도 나와 있지 않은 이런 조건에 동의할 자본가는 아무도 없고, 그래서 저당은행은 단지 법령으로 남는다, 등.

한마디로 보나파르트는 모든 계급에게 가부장적 은인으로 비쳐지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한 계급을 착취하지 않고서는 그 어느 계급에게도 은혜를 베풀 수 없다.  52-53

스스로 대표하지 못하여 누군가에 의해 대표될 수밖에 없는 계급이란 당연히 분할지 소농 계급을 말한다.  54

모든 계급 위에 군림하고, 모든 계급 사이를 오가며, 모든 계급의 비천한 잔여물에 직접적인 기반을 두면서도, 아울러 스스로 정치적 대표를 요구하는 집단적 행위주체가 될 수 없는 계급을 궁극적으로 대표해야 한다. 이 역설이 의미하는 바는 순수한 대표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라캉 식으로 표현하자면, 계급 적대는 그러한 전체 대표가 실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게 만든다. 계급 적대는 결국 한 사회의 중립적인 '전체'란 없고, 모든 '전체'는 특정 계급에 은밀하게 특권을 부여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55

오늘날 대부분의 '전문가'와 정치가가 따르는 공리를 떠올려보자. 누누이 들어왔듯이, 우리는 적자와 부채로 점철된 위태로운 시대에 살고 있기에, 모두가 고통을 분담하며 생활수준의 저하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니까. (최고) 부유층을 제외한 모두가 말이다. 부유층에 대한 증세는 절대적인 금기사항이다. 세금이 늘면 그들의 투자 의욕이 꺾여 신규 고용 창출이 줄어들므로 우리 모두가 고통받게 된다는 논리다. 결국 이 힘든 시절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빈자는 더욱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부자들의 부가 조금이라도 상실될 위험에 처하면 사회가 나서서 막아줘야 한다. 금융 위기가 과도한 정부 차입과 지출에서 비롯되었다는 금융 위기에 대한 지배적인 시각은 아이슬란드에서 미국까지 위기의 궁극적인 책임이 대규모 민간은행들에 잇다는 사실과 노골적으로 배치된다. 그 은행들의 도산을 막기 위해 정부는 납세자의 엄청난 혈세를 투입하며 개입했던 것이다. 

계급 적대를 부인하고 전체를 대표한다는 입장을 내세우는 전형적인 방법은, 그 적대의 원인을 그 자체로 사회를 위협하는 반사회적 요인이자 사회에서 배설된 과잉의 상징인 외국인 불청객들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유대주의는 단지 수많은 이데올로기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자체로 본원적인 이데올로기다. 반유대주의는 기본 좌표를 설정하는 영도(zero-lenel)(또는 순수한 형태)의 이데올로기를 구현한다. 이로써 사회적 적대('곅,ㅂ투쟁')는 신비화되거나 전치되어 그 원인을 외부 침입자에게 투영할 수 있게 된다. 라캉의 '1+1+a'의 공식의 가장 좋은 예가 이러한 계급투쟁이다. 두 개의 계급에 '유대인'이라는 과잉, 대상a(object), 대립쌍의 보충물이 덧붙는 것이다. 이 보충적 요소의 기능은 이중적이다. 계급투쟁에 대한 물신주의적 부인(fetishistic disavowal)인 동시에, 바로 그 자체가 '계급 평화'를 영원히 가로막는 이 적대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 만약 보충물없이 '1+1' 상태로 두 계급만 존재했다면, '순수한' 계급 적대 대신 두 계급이 상호 보완하여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는 계급 평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계급투쟁의 '순수성'을 흐리거나 전치하는 요인이 바로 계급 투쟁의 원동력이라는 데 역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현실 세계에서 적대적인 두 계급만 존재하는 경우는 절대 없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 비판자들은 핵심을 놓치고 있다. 바로 그러헥 적대적인 두 계급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계급투쟁이 존속하는 것이다.  55-57

소농은 오늘날 악명 높은 중간계급이 되었다. .. 중간계급은 정치화에 반대한다. 이들은 그저 자신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면서 간섭 없이 일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사회의 광적이 ㄴ정치적 동원을 종식시켜 모두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겠다고 약속하는 독재 쿠데타를 지지하는 성향을 보인다.  58

주인 담론에서 대학담론으로 바뀌는 전 세계적 추세의 일환으로 새로운 집단이 등장했다. 특정한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않고 중립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으로 상황을 지배(또는 차라리 '관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기술, 금융) 전문가 집단이다.  58

문화 전쟁이 곧 전치된 양식의 계급 전쟁이라는 뜻이다.  69

모든 이데올로기 체계는 연쇄적인 등가물을 정립하거나 부여하려는 헤게모니 투쟁의 산물이자, '객관적인 사회경제적 입장'등 외재적 참조점으로는 결코 보장되지 않는 철저히 우연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투쟁의 산물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답변에서 이 수수께끼는 간단히 자취를 감춘다.

여기서 첫 번째로 주목할 것은 일단 문화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양 진영이 있어야 하고, 문화는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근본주의에 저항하고 다문화적 관용을 옹호하는 데 정치를 집중하는 '계몽된'자유주의자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주제라는 점이다. 핵심 질문은 이렇다. 왜 '문화'가 우리 생활의 중심 영역으로 등장했는가? 종교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실제로 믿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속한 공동사회의 '생활양식'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일부) 종교 의식과 관습에 따를 뿐이다. '전통에 대한 존중심'으로 코셔(kosher-유대인의 율법을 따르는 정결한 음식) 원칙을 지키는 비신도 유대인 등이 그런 예다. "실제로 그것을 믿지는 않아. 그냥 내 문화의 일부일 뿐이야."라는 말이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거부되거나 전치된 신앙의 두드러진 양식인 듯하다. 이렇듯 '실제' 종교, 예술 등과는 구별되는 '문화'의 '비근본주의적' 개념이야말로 버려지거나 특정 개인과 무관해진 신앙의 영역을 보여주는 핵심일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믿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키는 '문화' 말이다.

두번째로 주목할 점은 자유주의자들이 가난한 자와의 연대를 주장하는 한편, 대립적인 계급 메시지로 문화 전쟁을 코드화하는 방식이다. 다문화적 관용과 여성의권리를 지지하는 이들의 싸움은 '하층계급'의 이른 바 비관용, 근본주의, 가부장적 성차별주의와 대척점에 설 때가 많다. 이 혼란을 해소하는 한 가지 방법은 진정한 구분선을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 중재적인 용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최근 이데올로기적 공세에서 '현대화'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방식이 그러한 예다. 우선 '현대화주의자'(경제부터 문화까지 모든 측면에서 글로벌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와 '전통주의자(세계화를 반대하는 사람)' 사이에는 추상적인 대립관계가 형성된다. 그러고 나면 전통적 보수주의자와 포퓰리스트에서 '구좌파(복지국가, 노동조합 등을 계속 지지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전부 이 세계화에 반대하는 사람의 범주로 분류된다. 이러한 범주와는 분명히 사회적 현실의 일면을 포착한다. 2003년 초반에 독일에서 교회와 노동조합이 연대를 통해 상점들의 일요일 영업 법제활르 막았던 일을 떠올려보라. 그러나 이 '문화적 차이'가 다양한 계층과 계급을 아우르는 전반적인 사회적 장을 가로지른다고 말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또 다른 대립관계와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될(그래서 글로벌 자본주의의 '현대화'에 저항하는 보수주의의 '전통적 가치'나 자본주의적 세계화를 완전히 지지하는 도덕적 보수주의자가 나올)수 있다는 말도 부적절하다. 요컨대 이러한 '문화적 차이'가 현대 사회적 과정에서 작동하는 일련의 적대 중 하나라고 주장해봐야 별 소요이 없다.  70-72

세번째로 주목할 것은 페미니스트, 반인종차별주의자, 반성차별주의자 등의 투쟁과 계급투쟁 간의 근본적 차이다. 다른 투쟁의 목적은 적대를 차이로 변화하는 것(다양한 성, 종교, 민족 집단의 평화로운 공존)이지만, 계급투쟁의 목적은 정반대로 차이를 계급 적대로 바꾸는 것이다. '빼기'의 요지는 전체적으로 복잡한 구조를 그 적대적인 극호한 차이로 환원하는 것이다. 인종, 성, 계급의 연쇄는 계급의 경우 정치적 입장에 대한 논리가 다르다는 점을 모호하게 만든다. 반인종차별주의자와 반성차별주의자의 투쟁은 상대를 충분히 인정하려는 노력을 지향하지만, 계급투쟁은 서로를 극복하고 진압하며 심지어 근절하는 데 목표를 둔다. 직접적인 물리적 전멸은 아니더라도, 상대의 사회경제적 역할과 기능을 말살하는 것이 목표다. 다시 말해, 반인종차별주의자가 모든 인종이 저마다의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입장을 자유롭게 주장하고 깨닫기 바란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되어도,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목표가 부르주아 계급이 그 정체성을 충분히 주장하고 목적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전자의 경우에는 다양한 정체성을 인정하는 수평적 논리가 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적과의 투쟁이라는 논리가 존재한다.  73-74




4 사악한 민족주의의 귀환(The Return of the Evil Ethnic Thing)


중동 협상 역시 평화의 문제가 관건이 아니다. '평화협상'이라는 명칭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점령을 기정사실화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인 사라들의 손을 들어주는 셈이다.  80

반유대주의는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동성애반대주의 드오가 같은 연장선상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82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는 노골적인 암시인 것이다. 

우리는 이 논리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는 서로 독립적일 뿐 아니라, 현재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중립적'이고 비정치적인 테크노크라시의 경제 정책에 대한 대중의 반대 속에서 진정한 민주 정치가 표출된다.  89

지금 단계의 우리는 당연히 충분히 관용적이지 못하거나, 아니면 이미 너무 지나치제 관용적이어서 여성권 등을 방치하고 있다.  94

우리의 과제는 단지 타인에 대한 관용을 넘어 진정한 공존과 다양한 문화의 혼합을 영속시킬 수 있는 적극저깅고 해방적인 지배문화를 추구하는 것이고, 그 지배 문화를 위한 다가올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다. 단순히 타인을 존중하지 말고, 그들에게 공동의 투쟁을 제안하자. 오늘날 우리를 가장 크게 압박하는 문제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문제이니 말이다.  95




5 탈이데올로기의 사막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Desert of Post-Ideology)


최근 캘리포니아를 방문한 동안, 나는 어떤 교수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슬로베니아인 친구 한 명과 함께 참석했다. 이 친구는 골초였다. 늦은 저녁, 담배 생각이 간절해진 친구는 집주인에게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피워도 되는지 정중히 물엇다. (그에 못지않게) 정중한 태도로 주인이 안 된다고 말하자 친구는 집밖으로 나가서 피우겠다고 말했지만, 그조차도 안 된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이면, 이웃들에게 자기 평판이 떨어진다는 것이 주인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놀란 것은 저녁식사가 끝나고 집주인이 우리에게 가벼운 마약을 권했을 때였다. 이러한 종류의 흡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마치 마약이 담배보다 훨씬 덜 위험하기라도 한 듯이.96-97

라캉이 말하는 '향락(jouissance)'(주이상스)은 치며억인 과잉의 쾌락으로, 쾌락원칙(pleasure principle) 너머에 위치한다. ...

한쪽은 즐거움을 연장시키고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피하기 위해 쾌락을 신중히 계산하는 계몽된 쾌락주의자이고, 다른 한쪽은 치명적으로 과도한 향락 속에서 존재의 절정에 도달하려는 향락주의자(jouisseur)다.  97

계몽된 소비주의적 쾌락주의는 기본적으로 향락에서 그 과잉의 차원, 불온한 잉여, 그리고 아무데도 도움이 안 되는 측면을 박탈하는 기능이 있다. 향락은 용인되고 심지어 권유되지만, 우리의 정신적, 생물학적 안정성을 위협하지 않고 건전해야 한다는 단서조항이 붙는다.  98

예카테리나 대제(Catherine the Grest)의 일화. 그녀는 노예들이 뒤에서 술과 음식을 훔치고 심지어 자신을 조롱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그저 미소만 지었다. 가끔씩 향락의 부스러기를 떨어뜨려줘야 그들이 계속 노예 자리를 지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00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선택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부르짖지만 강요된 민주주의적 합의의 대안이라곤 맹목적인 실력행사뿐인 이 사회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우주인가? .. 유일한 선택이라곤 규칙에 따르는 것과 (자기)파괴적인 폭력 사이 중 하나뿐일 때, 우리가 그토록 찬양하는 선택의 자유란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우리가 점점 더 "세계 없음(Worldless)"으로 경험되는 사회적 공간에 살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러한 공간에서 저항이 취할 수 유일한 형식은 의미 없는 폭력뿐이다.  108-109

영국 폭동이 안고 있는 문제는 폭력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진정한 자기주장이 없었다는 것이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능동적이지 않고 반동적인, 무력한 분노이자 무력(武力 굳셀무 힘력)의 탈을 쓴 절망이었고, 승리의 카니발의 가면을 쓴 질투였다.  120




6 아랍의 겨울, 봄, 여름, 가을(The Arab Winter, Spring, Summer, and Fall)


도하(Doha)의 이슬람미술관(Museum of Islamic Art)의 PO24.1999번 소장품. 

10세기의 단순한 원형 토기접시로, 직경 42센티미터의 매끄러운 흰색 바탕에는 검은색 글씨로 야히아 이븐 지야드(Yahya ibon Ziyad)가 말했다는 속담이 새겨져 있다. "어리석은 자는 기회를 놓치고 나중에 운명을 탓한다."  122

중앙부의 그림. 자기 꼬리를 먹고있는 유명한 뱀 그림과 유사하다.  124

이 말을 뒤집어 보자. "어리석은 자는 기회를 놓치고도 자신의 실패가 운명의 조화임을 알지 못한다." 이것은 세상에 우연이란 없고 모든 것은 불가해한 운명으로 결정된다는 진부한 종교적 문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접시의 속담을 곰곰이 되씹어보면, 이러한 상투적 문구의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다시 한 번 이 접시를 사용하는 시간적 차원을 고려해보자. 저녁 식사가 시작될 때 손님은 음식이 가득 담긴 접시의 가장자리에 새겨진 글귀를 처음 보고 기회를 붙잡으라는 기회주의에 관란 교훈 정도로 일축해버린다. 그러나 음식을 다 먹은 후 접시 밑에 숨어 있던 진짜 메시지가 상투적 상징임을 알고 나면, 처음 본 글귀에 숨어 있던 진실을 놓쳤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 문구로 되돌아가 다시 읽어본 후에야 그것이 기회와 운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하고 흥미로운 이야기, 즉 운명을 선택하는 것은 그들의 소관이라는 메시지임을 알게 된다.  125-126

독재정권이 최후의 위기에 다다를 때 보통 그 붕괴는 두 단계를 거친다. 실제 무너지기 전에 불가사의한 파열이 생긴다. 어느날 문득 사람들은 이미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깯다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130




7 월가점령시위, 또는 새로운 시작을 부르는 폭력적 침묵(Occupy Wall Street, or The Violent Silence of a New Beginning)


축제를 즐기기는 쉽다. 그러나 그 진정한 가치는 축제 다음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의 일상생활이 어떻게 바뀌었고 또 바뀔 것인지에 달려 있다. 여기에는 힘들고 끈질긴 노력이 요구되며, 시위는 그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시위의 기본 메시지는 이 정도다. "금기는 깨졌다. 우리는 실현 가능한 최선의 세계에 살지 않는다. 고로 우리는 대안을 생각해볼 수 있고, 또 생각해봐야만 한다."  146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식 모티프 - <최악을 향하여>에 나오는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를 의미한다 - 의 이러한 변주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실패 뒤에 남은 결과에 집중해야 한다.  147

시위대는 적뿐 아니라 가짜 친구들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시위대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시위를 무해한 도덕적 저항으로 바꾸어 그 의미를 희석시키고자 갖은 애를 쓴다. 복싱에서 '클린치(clinch)'란 상대방의 펀치를 막거나 방해하기 위해 한 팔이나 양 팔로 상대방의 몸을 붙잡는 행위다 월가점령시위에 대한 빌 클린턴의 대응은 정치적 클린치의 완벽한 사례다. 그는 시위가 "종합적으로 볼 때 긍정적인 일"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대의 모호함에 대해 우려는 표했다. "어떤 일에 반대만 하다 보면 우리가 만든 이 진공을 다른 사람이 채우게 될 테니, 그저 반대만 하지 말고 특정한 어떤 것을 지지해야 한다." 그러면서 클린턴은 "1년 6개월 안에 일자리 200만 개"를 창출하겠다고 주장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일자리 정책을 지지하라고 시위대에 제안했다. 그러나 시위대가 거리로 뛰쳐나온 것은 콜라 캔을 재활용하고, 자선단체에 푼돈을 기부하며, 스타벅스 카푸치노를 구매하여 가격의 1%를 제3세계로 보내는 것마능로 만족하는 세계에 질릴 만큼 질렸기 때문이다.  155-156

민주주의는 법치주의에 기반을 둔다.  158

마르크스는 자유의 문제를 고유의 정치적 영역에서 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국가에서 자유선거가 실시되는가? 사법부가 독립적인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가? 인권이 존중되는가? 등). 실제 자유의 핵심은 오히려 시장에서 가족에 이르는 사회적 관계들의 그물망에 있고, 이 영역을 진정으로 개선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정치적 개혁이 아니라 '비정치적'인 사회적 생산 관계의 변혁이다.  161-162

민주주의 기제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자본주의 재생산의 원활한 가동을 보장하는 '부르주아' 국가 장치의 일부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적은 제국이나 자본이 아니라 민주주의라고 불린다."라는 알랭 바디우의 언뜻 의아하게 들리는 주장은 정곡을 찌른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관계의 모든 급진적 변화를 가로막는 주범은 민주주의적 절차 내에서만 모든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민주주의적 환상'인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구체적 강령을 만들어내기 어려운 데는 이처럼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162

월가점령시위의 수많은 (종종 혼란스런) 발언들 기저에는 두 가지 기본적 통찰이 깔려 있다. 첫째, 현재 대중의 불만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대한 것이다. 문제는 시스템 자체이지 그 특정한 부폐 사례가 아니다. 둘째, 현재와 같은 다당제 형태의 대의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해결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는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월가점령시위의 가장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경제생활의 파괴적 결과 앞에서 속수무책임이 입증된 현행 정치형태를 벗어나 민주주의를 어떻게 확장해 나갈 것인가? 다당제 대의민주주의를 뛰어넘어 이렇게 재발명된 민주주의에 과연 이름이 있을까? 있다.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163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어떻게 민주적 다당제 체계를 넘어 집단적 의사결정을 제도화할 수 있을까? 또 누가 이 재발명이 주역이 될 것인가? 잔인하게 말하자면, 당장 오늘 무엇을 해야할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지식인이든 일반인이든 그것을 아는 주체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은 장님이 장님에게 길을 안내하는, 좀 더 정확히는 장님끼리 길을 안내하면ㅅ 서로 상대방은 볼 수 있다고 믿는 교착상태인 것일까? 아니다. 각자 모르는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중은 답을 가지고 있다. 다만 자신들이 답을 가진(혹은 스스로가 답인) 질문을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존 버거(John Berger)는 내부인과 외부인을 가르는 벽의 잘못된 쪽에 서있는 '대중(multitude)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대중은 아직 제기되지 않은 질문의 답을 알고 있고 벽보다 오래 살아남을 능력이 있다. 질문이 아직 제기되지 않은 것은, 그러자면 진심으로 와닿는 용어와 개념이 필요한데 민주주의, 자유, 생산성 등 현재 사건드을 명명할 때 사용되는 용어와 개념은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곧 새로운 개념과 더불어 새로운 질문이 대두할 것이다. 역사는 바로 그러한 질문의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니까. '곧'이라면 언제? 한 세대 내에.'165-166




8 <더 와이어>, 이 아무 일 없는 시대에 해야 할일(The Wire, or What to Do in non-Evental Times)


-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허위적인 종언 이후의 '그저 그런 삶(mere life)'과 '진정한 삶(real life)'을 대비시킨다. '그저 그런 삶'은 자신의 삶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삶이고, 자신의 기득권이 아무 탈 없이 그대로 대대손손 보존되기를 매일 기도하는 삶이다. 그것의 정치적 버전이 자유민주주의다. 지젝이 보기에 자유 민주주의의 최대 관심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마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자유민주주의는 무사건의 당(party of non-party)이다."(이현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자음과 모음 2011 p72, 슬라보예 지젝,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자음과 모음 2011 p210 참조  167

금기어를 사용하여 금기를 깨는 효과.  169

'와이어(wire)'에는 다양한 함의가 있지만(철조망을 따라 걷는다거나 도청장치를 착용하는 등) 사이먼에 따르면 이 제목은 주로 "두 개의 미국 사이의 거의 가상적이지만 침범 할 수 없는 경계", 즉 아메리칸 드림에 동참한 사람들과 낙오된 사람들 사이의 경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더 와이어>의 주제는 한마디로 계급투쟁이자 그 문화적 결과를 포함한 우리 시대의 실재다.  170

사이먼은 이 급진적인 분열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매우 명료하게 설명한다. 

'우리는 마약에 대해 전쟁을 벌이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단지 더이상 노동공급원으로 필요가 없어진 도시 최하층계급을 짐승 취급하며 인간성을 말살하고 있을 뿐이다. (중략) <더 와이어>는 미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낙오된 미국에 대한 이야기다. (중략) 마약 전쟁은 현재 최하층계급이 벌이는 전쟁이다. 그것이 전부다. 다른 의미는 없다.'  170-171

운명이 어떻게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승리를 거두는지에 대해 <더 와이어>는 체계적으로, 이어지는 각 시즌마다 한 단계씩 분석을 진행해 나간다.

시즌1은 마약상 대 경찰이라는 갈등을 제시하고, 시즌2는 노동 계급의 붕괴라는 갈등의 궁극적인 원인을 파해치며, 시즌3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치 전략 및 경찰과 그 실패를 다룬다. 시즌4는 왜(흑인 노동계급 청소년의) 교육만으로는 불충분한지를 보여주고, 마지막 시즌5는 언론의 역할, 즉 일반 대중이 이 문제의 실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유에 초점을 맞춘다.  173

핵심은 그들 모두 어떤 식으로든 법을 위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178

마르크스도 비록 한정된 주관적 입장에서는 생산의 목적이 생산물, 즉 사람들의 (가상적 또는 현실적) 수요를 충족시킬 물건이고, 다른 말로는 사용 가치지만, 이 시스템 전체라는 '절대적 관점'에서 보자면, 개인의 수요의 충족은 단지 자본주의적 (재)생산 지게를 계속 유지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일 뿐이라 말한다.  183

제임슨이 말한 대로 <더 와이어>는 범인이 일개 번죄자(나 범되 단체)가 아니라 사회 전체이자 전체 시스템인 탐정물이다.  183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실재가 추사적이고, 자본의 추상적 가상적 운동이며, 실재와 현실의 라캉식 차이를 동원하자면, 현실이 실재를 가린다는 것이다. '실재의 사막'은 자본의 추상적인 움직임이고, 마르크스가 말한 '실재적 추상(real abstraction)'도 같은 맥락이다.  183

마르크스는 자본의 광포한 자기 증식적 순환을 묘사했고, 자본의 유아론적인 자기 수태적 행보는 오늘날 메타 반영적인 선물 투기에서 절정에 이른다. 아무런 인간적, 환경적 고려 없이 자기 갈 길만 추구하며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는 이 괴물의 유령이란 이데올로기적 추상성에 불과하고, 그 뒤에는 거대한 기생동물 같은 자본적 순환의 토대가 되는 생산력과 자원을 제공하는 실제 사람들과 자연물이 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문제는 그 이데올로기적 추상성이 금융 투기자의 사회 현실에 대한 오해의 일부일 뿐 아니라, 물질적 사회 과정의 구조를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정확히 실재라는 것이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때로는 모든 국가의 운명이 자본의 유아ㅇ론적이고 투기적인 춤사위에 따라 결정되는 판국에, 정작 자본은 자신의 운동이 사회 현실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전혀 무관심한 채 수익성이라는 목표만 추구한다.  183-184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체계적 폭력.

이 폭력은 더 이상 개인이나 그들의 '사악한' 의도에 책임을 물을 수 없이 순수하게 '객관적이고' 체계적이며 익명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reality)과 실재(the real)에 대한 라캉식 구분과 마주하게 된다. 현실은 실제 인간들이 상호작용과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사회 현실인 반면, 실재는 사회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결정하는 자본의 냉혹하고 '추상적'이며 유령 같은 논리다. 이 간극은 생태적 파괴나 인간의 고통으로 얼룩져 생활이 분명 혼란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경제 보고서상으로는 '재정적으로 건전한'국가로 발표되는 어떤 국가를 방문해 보면 실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자본의 상황인 것이다.  185

마르크스도 <자본론>의 유명한 구절에서 상품의 교환과 순환으 감춰진 논리를 끄집어내기 위해 의인법에 의존한다. "만약 상품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의 사용가치는 인간들에게 관심사일지는 몰라도 물적 존재로서의 우리에게는 속하지 않는 것이다. 물적 존재로서 우리에게 속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다. 상품으로서 우리가 교환되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단지 교환가치로서만 서로 관계를 맺는다.  187

<더 와이어>는 종종 권력과 저항, 또는 법과 그 위반 사이의 관계에 대한 푸코식 주제(topos)의 관점에서 해석된다. 순응을 요구하는 규제 과정이 오히려 '억압'하고 규제하려는 대상을 낳는다.  192

주변부의 주관적 입장에서 지배적인 장치에 '저항'하는 식의 전략을 확산하고자 애쓸 것이 아니라 지배적인 장치 자체 내에서 가능한 파열 양상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저항의 현장'에 대한 모든 이야기에서, 비록 당장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때로는 우리가 저항하는 장치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193-194

삶은 거대한 순환이고, 우리는 기린을 먹고, 기린은 풀을 먹는다. 그러나 그 후 우리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풀에게 먹혀 순환이 종료된다. 이것이 가장 꼭대기에 있는 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메시지다. 결정적인 것은 우리가 이러한 '지혜'에 부여하는 정치적 해석이다. 이것은 단순한 철수의 문제일까, 아니면 급진적 행동 조건으로서 철수의 문제일까? 다시 말해, 삶은 항상 원을 이루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 위계질서를 오르내릴 뿐 아니라 원 자체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199-200

운명에 저항하는 (그래서 운명의 실현을 돕는, 마치 오이디푸스(Oedipus)의 부모나 바그다드에서 사마라로 도주했던 하인처럼) 것이 아니라, 운명 자체, 그 기본 좌표를 바꾸는 것이다.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는 "무엇인가를 바꾸어야만 모든 것이 그대로 남는다."라는 말을 뒤집어 언젠가 "아무것도 바꾸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이 달라지게 하자."는 의견을 제안했다.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 혁명화가 요구되는 후기 자본주의의 역동성 같은 일부 정치적 성좌에서는, 어떤 것도 바꾸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오히려 진정한 변화의 주체다. 변화의 원리 자체의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00

우리는 오늘날 '전면적인 경제 불황'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전망이 진정한 집단적인 반체제주의를 야기할까? 결과가 어떻든 간에,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사이먼의 비극적인 비관주의를 오나전히 수용하고 (시스템 내에서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1-202




9 시기와 분노를 넘어서(Beyond Envy and Resentment)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가 이른바 '복지 국가의 이율배반'이란 문제에 대해 해법으로 제시하는, 단순한 시장 교환을 넘어서는 '기부의 윤리학(ethics of gift-giving)'.  203


그가 말하는 변화를 달성하려면, 민주주의 시대에 이상하게 살아남은 전제정치의 잔재인 국가주의(etatisme)를 탈피해야 한다. 전통 좌파조차 놀랄 만큼 강한 이 개념은 국가가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필요시) 그들의 생산물 일부를 법적 강제력을 동원해 몰수 및 결정할 수 있는 명백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것이다. 시민은 자신의 소득 일부를 국가에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날 때부터 국가에 빚을 진 존재처럼 취급받는다.  204

첫 번째 단계는 납세 의무자에서 자원자로의 변경이다. 부자에게 과중한 세금을 매기는 대신, 자발적으로 자신의 부를 어느 정도나 공공복지에 기부할 지 결정할 (법적) 권한을 제공해야 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세금을 급격히 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기부자가 스스로 어디에 얼마를 기부할지 결정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작은 여지라도 열어놓아야 한다는 뜻이다.이러한 시작은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점차 사회 결속력의 근간이 되는 사회 전체의 윤리를 변화시킬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상화이야 어째됐든 결국 해야만 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게 된다는 오랜 역석레 빠지는 것은 아닐까? 선택의 자유가 실은 강요된 선택에 기초하는 거짓 자유가 아닐까?  205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에서 실시된 연구에 대한 보고 내용.

'... 일정 수준이 충족되면, 사람들은 돈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일에 대해 생각한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을 기꺼이 무료로 하거나 일주일에 20시간, 때로는 30시간을 자원 봉사하는 살마도 대단히 많다. 그들은 자신이 만든 것을 팔지 않고 그냥 나눠준다. 대부분 고도의 전문 기술을 보유하고 직업도 있는 이들이 왜 회사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무료로, 때로는 업무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일하는 것일까? 참으로 이상한 경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 '이상한 행동'은 마르크스의 유명한 구호인 '능력에 따른 노동과 필요에 따른 분배'를 좇는 공산주의자의 행동이다. 이것암ㄴ이 진정한 유토피아적 차원을 갖는 유일한 기부의 윤리학이다.  210

MIT 실험에 어떠한 문제가 있든 간에, 자본주의적 경쟁과 이익 극대화가 전혀 '천성적'이지 않다는 점만은 분명히 입증된다. 기본적 욕구가 일정 수준 이상 충족되면, 사람들은 금전적 보수가 아닌 능력에 따라 사회에 기부해가며 '공산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212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건 힘겨운 투쟁을 통해 쟁취하는 것이다. 스파르타인의 가혹한 군사적 규율은 아테네인의 '자유민주주의'와 외적으로 대립하는 동시에 그것의 근간을 이루는 내적 조건이다. 이성이 있는 자유로운 주체는 오로지 혹독한 자기 규율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진정한 자유는 딸기 케이크와 초코 게이크 중 하나를 고르듯이, 안전한 거리를 두고 행해지는 선택의 자유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필연성과 겹쳐진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걸 때에만,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때에만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 조국이 다른 나라에 점령당했을 때 맞서 싸우는 것은 '선택할 자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존엄을 지키고 싶다면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219




10 미래가 보내는 징후(Signs From the Future)


꿈이 사라져버린 듯한 이 우울한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열정이 넘치던 숭고한 순간을 회상하며 향수와 자아도취에 빠지거나,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이러한 시도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냉소적이고 현실적으로 설명하는 것 외에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가장 먼저 언급할 것은 수면 아래에서 여전히 불만이 들끓고 있다는 사실이다. 분노가 계속 쌓여가고 있으니 새로운 저항의 물결이 뒤따를 것이다. .. 확실한 돌파구가 없는데다, 지배 엘리트는 명백히 통치력을 상실하고 있다. 더욱 불안한 것은 민주주의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228

월가점령시위, 아랍의 봄, 그리스와 스페인에서의 시위 같은 사건들은 그렇게 미래에서 보내온 징후로 읽어야 한다. 바꿔 말하자면, 맥락과 기원을 바탕으로 사건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역사주의적 관점을 뒤집어야 한다.  229

우리는 공간상으로는 여기에 위치하고 있지만 시간상으로는 공산주의 사상의 미래, 즉 해방된 미래에 위치한 요소를 적극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에서 인식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징후를 포착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한편, 현재 우리의 행동도 미래가 되어야 온전히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오늘날의 사회에서 '공산주의의 싹'을 필사적으로 찾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허비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가설상 공산주의의) 미래에서 오는 징후를 읽는 이과 그 미래의 근본적인 개방성을 유지하는 일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잡는 일이다. ..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그 균형은 양 극단을 핗는 일종의 현명한 '중도(中道)'와는 무관하다.  229-230

칸트의 이성과 직관의 관계 도식 (-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233

오늘날 공산주의자를 규정짓는 특성은 (현대식 버전의) '기적', 즉 타흐리르 광자의 시위와 같은 예상치 못한 사건 속에서 공산주의적 요소를 찾아내고, 그것을 (공산주의적) 미래에서 온 징후로 읽어내게 해주는 '독트린(이론)'이다.  234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미래는 '객관적'이지 않다. 그 미래를 지탱하는 주관적 참여를 통해서만 현실이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비난을 되돌아봐야 한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적어도 장기적으로는)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원하지 않는 것, 즉 현재 누리는 '자유' 중에서 포기할 각오가 된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을까? 우리는 커피를 원하지만, 우유나 크림이 없는 커피를 원할까? (국가가 없는 자유? 사유재산이 없는 자유? 등)  235

우리에게 위기가 임박했다고 설득하려는 생태학자에 대한 유일하게 적잘한 답변은 그의 필사적인 설득의 진짜 타깃은 자신의 비(非)신념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대답은 이것이다. "걱정 마, 재앙은 반드시 닥칠 거야! 불가능한 일이 이미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어. 하지마 인내심을 가고 지켜봐. 성급한 추측에 굴복하지도 말고, '지금이야! 두려운 순간이 다가왔어!'라고 생각하며 도착적인 기쁨에 빠지지도 마." 생태학에서 이런 종말론적 환상은 다양한 형태를 띤다. 예를 들어, 지구 온난화로 수십 년 내에 모두 물에 잠길 것이라거나, 유전자공학이 인간의 윤리와 책임의식의 종말을 의미한다거나, 벌들이 곧 멸종하고 전 세계적인 기아가 뒤따를 것이라는 등. 물론 이 모든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이러한 주장에 현혹되거나 거짓된 죄책감과 정의감("우리가 만물의 어머니인 대지를 노하게 했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다!")에 빠져서는 안 된다. 대신 냉정한 상태를 유지한 채 '지켜보자.'

'그러나 지켜보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하모가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3:33~37)

계속 깨어 있으면서 무엇을 지켜보라는 걸까?  236-238

프랑스어에는 영어로 정확히 옮기기 힘든, '미래'를 뜻하는 두 단어가 있다. '퓌뛰흐(futur, 미래)'와 '아브니흐(avenir, 장래)'다. '퓌뛰흐'는 현재의 연속선상으 미래로, 이미 존재하는 경향성이 완전히 실현된 것을 나타낸다. 반면 '아브니흐'는 보다 급진적인 중단, 현재와의 단절을 가리킨다. 단순히 '앞으로 될 것(hwat will be'이 아니라 '앞으로 닥칠 것(what to come)'을 의미한다.  240

파국에 맞서 싸우는 방법은 파국적인 '고정점'으로 치닫는 이 표류를 중단시키고, '도래할' 급진적 타자성(Otherness)을 야기할 위험을 스스로 떠안는 것이다. 여기서 "미래가 없다(no future)"는 슬로건이 얼마나 모호한지를 알 수 있다. 좀더 깊이 파고들면, 이 슬로건은 종결 혹은 변화의 불가능성을 의미하기보다, 우리가 쟁취해야 할 것, 즉 파국적 '미래'의 영향을 중단시키고 이로써 '다가올' 새로운 것을 위한 공간을 여는 일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분에 기초하면, 마르크스(와 20세기 좌파)의 문제를 알 수 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너무 이상적인 꿈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미래적'이어서 문제였다. 마르크스가 플라톤에 대해 썼던 말(플라톤의 <국가>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기존 고대 그리스 사회의 이상적 이미지였다)은 그대로 본인에게 적용된다. 마르크스가 구상했던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이상화된 이미지, 자본주의 없는 자본주의, 즉 이익과 착취가 없는 확대 재생산으로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르크스에서 헤겔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를 인도하는 어떠한 숨은 목적론도 없고, 모든 개입이 곧 미지의 세계로의 도약이며, 따라서 결과가 언제나 우리 기대를 좌절시키는 그러한 사회적 과정에 대한 '비관적' 견해로 말이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기존 체계의 무한한 재생산은 불가능하다는 사실뿐이다. .. 중동의 새로운 전쟁이나 경제적 혼란, 이례적인 환경 참사는 우리 곤경의 기본 좌표를 순식간에 바꿔놓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열린 가능성을 충분히 수용하면서, 미래가 보내는 모호한 징후에 의거하여 스스로를 익르어가야 한다.  24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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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서문(페터 엥겔만(Peter engelman))


이 책은 철학자들이..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들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논의하고 있다.  6


두 사람은 중요한 철학적 개념들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사건(the Event)이나 실재(thw Real)와 같은 개념들과 관련해서 그들은 서로 다른 입장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상상계의 역할 또는 정치에 대한 이해에서도 서로 의견을 달리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들은 철학적 개입이 철학적 사유의 특유성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하고,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한계를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한다.  8



1 알랭 바디우 - 사건을 사유하기


진정한 철학자는 중요한 문제들이 무엇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  16


철학적 상황으로 분류될 수 있는 세 가지 예를 소개하려고 한다.

첫 번째 예....철학은 선택으로서의 사유, 결정으로서의 사유에 직면하게 되고, 철학의 고유한 임무는 선택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하는 것이 된다. .. 실존의 선택 혹은 사유의 선택  17, 19


두 번째 ...거리에 대해 사유하고 고려하는 것, 또는 이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창안해 내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 22


철학적 상황에 대한 첫 번째의 정의 : 선택, 즉 결정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기. 철학적 상황에 대한 두 번째 정의 : 권력과 진리들 사이의 거리를 규명하기.  22


세 번째 ...예외를 사유해야 한다. 일상적이지 않은 것에 대해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아야 한다. 삶의 변형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24


선택과 거리, 그리고 예외를 다루는 것이 철학이 수행해야 할 세 가지 큰 과업이 되는 것이다. 적어도 철학이 삶 속에서 학문적 분과와는 다른 어떤 중요성을 가지려면 말이다.  25


가장 심오한 철학적 개념들은 우리에게 "만약 당신의 삶이 어떤 의미를 지니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사건을 받아들여야만 하고, 권력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며, 확고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라고 말해 준다.  26


플라톤은 한때 철학이 깨어남이라고 말했다. 이 깨어남이 잠과의 어려운 단절을 함축한다는 것을 완벽하게 잘 알고 있었다. .. 역설적인 관계, 관계 아닌 관계, 균열의 상황이 존재할 때마다 철학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리의 생각은 정당한 것이 된다.

나는, '어떤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철학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철학은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것에 대한 사유가 결코 아니다. 철학은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것에 대한 사유가 결코 아니다. 역설적인 관계들이 존재하기 ㄸ매ㅜㄴ에, 단절들이나 결정들, 거리들, 사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철학이 존재하는 것이고 또 철학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28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 관련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관계 아닌 관계가 존재하는가? 통약 불가능한 요소들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긍정적일 경우 우리는 선택과 거리, 예외가 존재한다는 결론을 끌어낼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의견에 대한 단순한 고려로부터 철학적 상황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 철학적 참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조건들 아래서이다. 이렇게 해서 철학적 참여는 철학적 기준들을 사용하면서 철학이라는 영역에 대한 자신만의 고유한 확신을 창조하게 될 것이다.  32-33


나는 철학적 참여가 갖는 단독성(singularity)을 강조하고 싶다.  33


철학은 정치적 기호들을 토대로 작동할 수 있으며 정치적 기호들을 사용함으로써 문제들을 구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철학이 정치 자체와 혼동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33


일반적인 의미에서 철학적 참여는 이질적인 것이다 이질성을 소유하지 못한 채 그저 진부한 것이 될 때, 이와 같은 역설에 몰두하지 않을 때 철학적 참여는 꼭 철학적일 필요가 없는 정치적 참여, 이데올로기적 참여, 시민의 참여가 된다는 의미이다.철학적 참연느 그것의 내적 이질성에 이해 특정지어진다.  35


보편성이란 정확하게 무엇인가? 나는 보편성에 대한 여덟 개의 명제들로 이 질문에 답해 보려 한다. 

명제 1 사유는 보편성의 고유한 매개이다. 

'사유'라는 개념을 가지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주체, 그러니까 기존의 지식이 갖는 총체성을 중단시키는 과정을 통해 구성되는 주체이다. 또는 자크 라칸(Jacques Lacan) 식으로 지식 내부에 구멍을 내는 그런 주체를 말한다.  36-37


비추이적 관계 : 추이성은 귀속과 포함의 일치나 균형을 통해 온전히 닫힐 수 있는 하나를 구성한다. 그러나 바디우에게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상황이나 집합을 요소로 귀속될 수 없어 셈할 수 없는 잉여를 포함한다. 셈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집합을 불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내용 없음으로 말미암아 셈을 가능하게 하는 공백이 바로 사건의 자리이다. 상황이 자신의 부분으로 귀속될 수 없는 공백을 품게 될 때, 우리는 비추이성의 지배를 받게 된다. 상황의 셈에 따라 규정되거나 지식으로 만들어질 수 업슨 '유적'진리. 특수성이 식별할 수 없는 공백인 단독성. 이들은 모두 상황이 자신 속의 공백에 노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을 온전하지 못하게 하는 고백을 품고 잇는 관계(아닌 관계)가 바로 비우이성인 것이다.  39


명제 2 보편적인 모든 것은 단독적인 것 또는 단독성이다.


명제 3 모든 보편성은 사건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사건은 상황의 특수성과 비추이적 관계를 맺는다.


사건에 대한 수정주의적 관점은 보편성과 단독성 사이의 연관 관계를 타깃으로 삼는다.  42


보편성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기 위해서는 만남이나 선언이 함축하는 단독성, 다시 말해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내는 그러한 단독성이 존재해야 한다.  43


명제 4 보편성은 처음부터, 결정 불가능한 것에 대한 결정으로서 스스로를 제시한다.   


적절한 신분증명서를 갖추지 못한 채 여기 프랑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 나라의 일부분인가? 그들은 여기에 속하는가? '아마도, 그들이 여기서 살고 일하고 있기 때문에', 또는 '아니, 그들이 프랑스인임을, 합법적으로 여기 살고 잇음을 보여주는 서류들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불법 이민자'라는 용어는 가치의 불확실성 또는 가치의 무가치를 지시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여기 살고 있지만 정말로 여기 속하지는 않는 사람들, 그런 의미에서 이 나라 밖으로 쫓겨날 수도 있는 사람들, 프랑스에서 노동자들로서의 그들의 현존이 갖는 가치의 무가치성에 노출될 수 있는 사람들을 지시하는 것이다.  45-46


- 상황의 실재(그것이 이미 거기 있었다는 점에서)로서,

- 그렇지만 가치의 급진적 변화를 경험하는 어떤 것으로서, 이는, 그것이 결정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이제 결정되었다는데 기인한다. 이전에는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이다.  47


명제 5 보편성은 내포적 형식을 갖고 있다.


<메논>에 등장하는 플라톤의 해명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만약 한 노예가 기하학이라는 사건의 토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주어진 정사각형보다 면적이 두 배나 큰 정사각형의 구성을 확증할 수 없는 상태로 남을 수밖에 업삳.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그에게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그가 그것을 주체화하는 데 동의한다면 그는 문제가 된 정사각형의 구성 또한 주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정사각형의 구성을, 그리스에서의 기하학의 출현에 의해 시작된 현재 속에 각인시키는 내포는 이렇게 해서 보편적으로 합당한 것이 된다.  49-50


명제 6 보편적인 것은 일의적인 것이다.


언표가 사건의 사라짐과 내포적인 방식으로 연관되어 있는 한, 언표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존재나 의미의 질서라기보다는 '행위'의 질서이다. 그리고 바로 이 행위의 영역이 일의적이다.  52


명제 7 모든 보편적 단독성은 완전해질 수 없는 상태 또는 열린 상태로 남아 있다.


명제 8 보편성은 무한한 유적 닷성의 충실한 구겅에 다름 아니다.


유적 다수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내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주 단순하게 저일하자면 그것은 상황의 부분집합, 그러니까 백과사전적 지식을 특징짓는 속성들 중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 부분집합을 지시한다. 다시 말해 상황에 소속되거나 상황을 구성하는 요소들 중 하나이지만 정체성이나 어떤 특수한 자질을 소유함으로써 생기는 결과로 환원돌 수 없는 바로 그 다수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55


이렇게 해서 보편성은 우연적인 대리보충의 기회에 근거해 발생하는 것이 된다. 보편성은, 그것의 토대가 되었던 사건이 사라졌음을 보여주는 흔적으로서 단순하고 사심 업슨 언표를 남긴다. 보편성은 잉ㄹ의적 행위속에서 자신의 절차를 시작하고, 바로 이 일의적 행위를 통해서 가치를 결여한 것이 갖는 가치가 비로소 결정되는 것이다. 보편성은 이러한 해우이를 그것의 결과들을 창안하게 될 주체 - 사유와 연관시키고, 무한한 유적 다수성을 충실하게 구성한다. 그리고 무한한 유적 다수성은 자신의 텅 빔으로 말미암아 투키디데스가 자신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바로 이것(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함축하는 역사적 특수성과는 다른 것이다)이라고 선언했던 '영원한 사로잡힙'(ktema es aiei)이 된다.  56


보편성에 대한 여덟 가지 명제들과 역설적 상황들에 대한 정의를 결합한다면, 여러분은 철학자들이 현재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답할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될 것이다.  56-57




2 슬라보예 지젝 - '철학은 대화가 아니다'


철학은 대화가 아니다.  62


철학적 대화는 없다.  62


우리가 집단적으로 대면하게 되는 대안들이 이접적 종합을 형성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다시 말해 대안이라고 하는 것들이 그릇된 것일 수도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 철학자가 취하는 첫 번째 제스처가 되어야 한다. 철학자는 논쟁을 구성하는 바로 그 개념들을 바꿔야만 하는 것이다.  63


내가 보기에 일단의 요구들에 직면해서 철학자가 취해야 하는 첫 번째 제스처는 논쟁을 구성하는 개념들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65-66


쾌락주의라는 주제로 넘어가 보자. 쾌락주의와 관련해서도 또한 우리는 어떤 입장을 정할 필요가 있다. 오래된 가치들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믿음을 잃어버린채 자기중심주의를 키워나가며 쾌락을 추구하는 데에만 삶을 투자하는 상황에서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가? 이에 대한 입장 역시 두 부류로 나뉜다. 이미 굳어진 모든 도덕적 태도들은 폭력 행위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주디스 버틀러는 독이어로 출간되 그녀의 최근 책 <윤리적 폭력 비판>에서 바로 이 전형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우리가 융통성 있는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은 다시 한 번 노마드적 주체성이라는 주제와 마주치게 된다. 또 다른 부류에서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것으 ㄴ고정된 가치와 연관 관계들이라는 대답을 제공한다. 물로 ㄴ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문제를 직접적으로 공략해야 한다. 논의를 구성하는 개념들을 브레히트적 소격 효과의 형태로 표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상황 자체는 이렇게 해서 상당히 이상해진다. "아니, 잠깐만. 우리가 지금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지?"철저한 금지로 특징지어지는 소비 사회 속 쾌락주의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즐겨라. 그러나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항상 덧붙여진다. "물론 너는 즐겨야 해. 하지만 정말로 즐길 수 있으려며 ㄴ먼저 조기을 하러 가야 하고 다이어트를 해야 해. 그리고 어느 누구도 성적으로 괴롭혀서는 안돼." 결국 이는 총체적인 육체적 규율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 다시 오늘날 우리가 믿음을 잃어버렸다는 상투적 문구로 되돌아가 보자. 오늘날 우리가 전보다 더 믿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 이는 거짓 논쟁이며, 로버트 팔러(Robert Pfaller)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오히려 전보다 더 믿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논쟁을 구성하는 개념들은 그러므로 더 이상 이전과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철학자들 대부분은 이런 높은 수준의 도전을 향해 발을 대닌지 않은 채 우리에게 거짓 대답들을 안겨주고 있다.  67-68


철학적 패스트푸드와 같은 대답, 다시 말해 심오한 설명으로 행세하지만 실제로는 사유 자체를 필요 없게 만드는 대체물에 불과한 그런 대답.  69


유전자공학과 관련해서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논의할 수 있을까? 유전자공학이 우리의 자유와 자율성을 위협하는가? 내 생각에 이는 잘못된 질문들, 그러니까 여하튼 간에 진정한 철학적 질문들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유일한 철학적 질문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본성, 인간적인 존재 방식이라 이해되는 것을 재규정하도록 강요하는 어떤 것이 유전자공학의 결과물들 속에 존재하는가?  72


지금 나는, 정상적인 철학이 존재할 것이라는 꿈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철학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비정상성에 다름 아닌 것인지도 모르낟. 나는 이런 방식으로 바디우의 이론을 읽고 싶다. (바디우와 나느 ㄴ서로를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서로 미워한다. 우리 둘은, 만약 내가 권력을 차지하게 되면 당신은 수용소로 가게 될 것이라는 농담을 자주 주고 받는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나는 또한 철학의 조건들에 대한 바디우의 명제들, 다시 말해 철학은 정의상 과도한 것이라는 명제, 그리고 철학은 말 그대로 외부 조건들(그것들이 사랑, 정치, 과학, 예술 어느 것이든)과의 과도한 연관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그의 명제에 깊은 동의를 표하는 바이다.  80


전치(displacement)를 통해 출현하는 이런 이질성의 순간에 여러분이 관심을 가지도록 이끌고 싶다.  81


철학은 항상 유기적 사회의 와해를, 최소한의 틈을 필요로 한다.  81


데카르트 <방법서설>의 두 번째 섹션에서 이와 관련된 데카르트의 유명한 주장을 발견할 수 있는데, 거기서 데카르트는 여행을 하면서 어떻게 다른 나라의 관습들이 갖는 이질성을 목격하게 되었는지 설명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른 눈으로 바라볼 경우 우리 자신의 문화 역시 마찬가지로 이상할 수도, 심지어 우스워 보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바로 이곳이 철학이 시작되는 지점 또는 모든 철학자들이 채택하는 전치의 장소이다.  82


철학이 전하려고 하는 근원적인 메시지는, 우리가 특수한 동일시를 넘어서서 즉각적으로 보편성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83




3 토론 


바디우 : 내가 보기에 철학적 참여와 관련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종종 무엇보다 비판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입니다. .. 의구심을 품다. 비판 정신 등과 같은 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철학의 과업은 무엇보다 부정적인 것이 됩니다. 나는 이런 생각이 완전히 뒤집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적 개입의 본질은 정말로 긍정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죠. 철학적 개입의 본질이 그정적인 것으로 규정되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역설적인 상황에 개입할 경우 또는 관계라고 할 수 없는 관계에 개입할 경우 새로운 사유의 틀을 제안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역설을 사유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했다는 것이, 모든 것이 마해지고 행해졌다는 유일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 철학은 근본적으로 개념들의 구성에 다름 아닌 것이라고 들뢰즈는 말하는데,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차원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철학을 비판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에 의심을 품었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옳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94-95


지젝 : 공식적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모든 것이 허용되고 검열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일은 매끄럽게 진행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에 속아서는 안돼요.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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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견진성사를 치루고 난, 과도한 공부에 시달려 몸이 몹시 야윈 소년들이 국비로 라틴어 학문의 여러 가지 분야를 서둘러 배우고 나서 8, 9년 후에는 인생 행로의 후반기(대개는 긴 세월이지만)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고 나서 국가에서 받은 은혜를 갚아 나가는 것이다.



“영혼을 더럽히는 것보다는 육체를 열 번 더럽히는 것이 더 나아!”(구두장이 플라크의 말) 



정부는 오래전부터 언덕과 숲에 감춰져 속세를 떠난 듯한 이 훌륭한 수도원을 프로테스탄트 신학교 학생들에게 내주었다. 아름답고 고요한 환경을 쉽게 감동하는 젊은 마음들에게 제공해주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있으면 젊은 학생들은 마음을 어지럽히는 도시와 가정의 영향에서 벗어나 유해한 환경에 노출되지 않도록 보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은 몇 년간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연구를 다른 참고 과목과 함께 아주 성실하게 생활의 목표로 삼고, 젊은 영혼의 갈망을 순수하고 이상적인 학문에 집중시켰다. 기숙사 생활도 자아 교육을 촉진하고, 단체 생활의 정서를 길러주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신학교 학생들은 국비로 생활하고 공부했다, 그 대신 정부는 학생들이 특별한 정신을 갖도록 애쓰고 있다. 그 정신 때문에 나중에라도 그들이 신학교 학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교모하고 확실한 표지였다. 가끔 수도원을 탈출하는 거친 녀석들을 제외하면 슈바벤 신학교 학생은 한평생 그 면모를 확실히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이 한무리의 소년들이 주의 소년들 가운데서 선발된 대단한 인재들이라는 걸 인정할 수 있으리라. 주입식 교육을 받아왔음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소년들과 비범하고 슬기로운 소년들, 반발이 심하고 개성이 강한 소년들도 적지 않았다. 



“저것 봐! 너는 저 아름다움을 주의 깊게 본 적 있니?”

두 사람이 파라다이스 옆을 지날 때 하일러가 물었다.

“홀, 아치형 창문, 회당, 식당, 고딕식과 로마네스크식, 이 모든 풍부하고 정교한 건축물이 예술가들의 손끝에서 탄생했어. 하지만 이런 매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목사가 되려는 불쌍한 소년들 서른 여섯 명을 위해 존재할 뿐이지. 나라에 돈이 넉넉한 모양이야.”



너는 어떤 공부든지 좋아서 자진해서 하는 게 아니야. 단지 선생들이나 네 아버지가 무섭기 때문이지. 1등이나 2등이 되면 뭐하니? 나는 20등이지만 그래돋 너희 꽁생원들보다 어리석진 않아.”

하일러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들은 한 명의 천재보다 열 명의 얼간이를 원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선생의 역할은 정상을 벗어난 인간이 아니라 라틴어를 잘하고 수학을 잘하는 꼼꼼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 더한 피해자이며 어느 쪽이 더한 가해자인가. 그리고 상대방의 영혼과 인생을 망치고 더럽히는 것은 둘 중 어느 쪽인가. 그것을 생각한다면 누구나 부끄러운 기분으로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학교에서 학교로 규칙과 정신의 싸움은 언제나 반복된다. 국가와 학교가 매년 나타나는 몇몇 탁월하고 깊은 정신의 소유자를 뿌리째 뽑아버리려고 애쓰는 걸 우리는 목격하곤 한다. 언제나 다른 사람도 아닌 학교 선생들에게서 미움을 받는 자, 탈출에 성공한 자, 추방된 자들이 먼 훗날 우리 국민에게 보물을 안겨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내면의 방황 속에서 자신을 망치며 파멸하고 만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누가 알겠는가!



교장... 허영심.

“피곤하지 않도록 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수레바퀴에 깔리고 말 테니까.” ...

‘하나만 더 묻겠는데 기벤라트, 자네 하일러와 열심히 교제하는 것 같더군. 그렇지 않나?”

“네 좀 친하게 지냅니다.”

“다른 학생 이상으로 가까운 것 같던데?”

“그렇습니다. 그 애는 제 친구니까요.”

“대체 어떻게 친해졌지? 두 사람은 성격도 아주 다른데 말이야.”

“모르겠습니다. 제 친구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그 친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자네도 알고 있겠지. 그는 침착하지도 않은 데다 불만투성이야. 재능은 있을지 모르지만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자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도 못해. 자네가 그 친구를 멀리한다면 좋겠는데 어떻겠나?"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교장선생님."

"안 된다고? 도대체 왜?"

"왜냐하면 그 애는 제 친구인걸요.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음, 하지만 다른 학생들과 좀더 가까이 지낼 수도 있지 않나. 하일러에게 나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자네뿐이야. 그 결과가 벌써 눈에 보여, 대체 그 친구의 어떤 점에 끌리는 거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ㄴ서로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를 버린다면 저는 비겁한 사람이 됩니다."

"허어, 그래. 그러면 강요하지 않겠네. 그러나 차츰 그 친구한테서 멀어지면 좋겠네. 그렇게 되면 나로서도 좋은 일이야. 아주 기쁜 일이지."

교장의 마지막 말은 처음의 온화한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한스는 겨우 방을 나갈 수가 있었다.



하일러는 몇 마일이나 떨어진 어느 숲속에 누워 있었다. 추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으나 진심으로 자유로운 기분에 도취되어 깊은 숨을 내쉬며 좁은 새장에서 풀려난 새와 같이 손발을 뻗어보기도 했다. 그는 점심때부터 달음질을 쳐왔다. 그니틀링겐에서 산 빵을 씹으며 아직 봄빛이 남아 있는 나뭇가지 사이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칠흑 같은 어둠과 별과 빠르게 스쳐가는 구름이 있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는 문제가 되지 앟았다. 적어도 오늘 저녁만큼은 몸서리쳐지는 수도원을 뛰쳐나와 그의 의지가 명령이나 금지보다 강하다는 걸 교장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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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제까지 대가리에 잉크를 뒤집어 쓴 채 종이나 씹으면서 있겠다는 것인가? 나와 함께 가세. 저 멀리 카프카스에, 위험에 처한 수많은 동포가 있잖아. 함게 가서 구해 주자고... 자네는 이렇게 설교하지 않았는가,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하려고 앴는 것이다'라고.. 그럼 구해야지."  ...

배가 세 번째로 고동을 울렸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면서 헛소리로 제 감정을 가렸다. 

"Au revoir(다시 보세), 이 책벌레야!" ...

서로를 좋아했지만 우리는 살가운 말을 나눈 적이 없었다. 우리는 짐승처럼 장난을 치며 서로를 할퀴었다. 친구는 이지적이고 냉소적인 문명인이었고, 나는 야만인이었다. 


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뻘 속에 갇혀 있어서 무디고 둔한 것이다. 영혼의 지각 능력이란 조잡하고 불확실한 법이다. 그래서 영혼은 아무것도 분명하고 확실하게는 예견할 수 없다.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우리 이별은 얼마나 다른 것일 수 있었을까.

?

친구가 나를 '책벌레'라고 불렀을 때, 불쑥 솟아로르던 그 분노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시 내가 영위하고 있던 삶에 대한 나의모든 역겨운 감정이 그 말로 형상화되었다. 그토록 강렬하게 인생을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책 나부랭이와 잉크로 더렵혀진 종이에다 자신을 그리도 오랫동안 내박쳐 둘 수 있단 말인가! 그 이별의 날, 내 친구는 내가 나 자신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게 해준 셈이었다. 속이 후련했다. 병통을 알았으니 이제는 쉬 정복할 수 있으리라. 이제 그것은 모호하지도 막연하지도 않았다. 이름과 형태가 있으니 그에 맞서 싸우기도 훨씬 수월할 터였다.

 

나는 종이 나부랭이를 팽개치고 행동하는 인생으로 뛰어들 구실을 찾게 되었다. .. 크레타 해안에 폐광이 된 갈탄광 한 자리를 임차했다. .. 들뜬 마음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나는 내 삶의 양식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 미완성 원고와 마주쳤다. .. 나는 아기를 싸듯이 조심스럽게 그 원고를 포장하여 다른 짐 속에 넣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오?"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보는 버릇 말이오. 자, 젊은 양반, 결정해 버리쇼. 눈 꽉 감고 해버리는 거요."


"무슨 일을 하십니까?"

"닥치는 대로 하죠. 발로도 하고 손으로도 하고 머리로도 하고.. 하지만 해본 일만 해가지고서야 어디 성이 차겠소!"


"스무 살 때였소. 우리 마을에서 처음 산투르 소리를 들었지요. 혼을 쭉 빼놓는 것 같습니다. .. 있는 걸 몽땅 털고 몇 푼 더 보태 산투르를 하나 샀지요. ... 산투르를 다룰 줄 알게 되면서 나는 전혀 딴사람이 되었어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나 빈털터리가 될 때는 산투르를 칩니다. 그러면 기운이 생기지요. 내가 산투르를 칠 때는, 당신이 말을 걸 수도 있겠지만, 내게 들리지는 않아요. 들린다고 해도 대답을 못해요. 하려고 해도 안 돼. 할 수가 없어."

"정열이라지요. 바로 그게 정열이라는 것이지요!"


"산투르를 치려면 온갖 정성을 산투르에만 쏟아야 해요. 알겠어요?"

조르바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母胎)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언어, 예술, 사랑, 순수성, 정열의 의미는 이 노동자가 지껄인 가장 단순한 인간의 말로 내게 분명히 전해져 왔다. 


"마음이 내키면. 알죠? 마음이 내키면 말이오. 일이야 당신이 바라는 만큼 해주겠소. 거기 가면 나는 당신 사람이니까. 하지만 산투르 말인데, 그건 달라요. 산투르는 짐승이오.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 마음이 내키면 칠 거요. 또 노래도 할 거요. .. 나한테 강요하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2


조르바는 창백해진 얼굴을 찡그린 채 뱃머리의 밧줄 타래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레몬 한 알을 들고 냄새를 맡으며, 그 큰 귀로 국왕과 크레타 출신 정치가 베니젤로스를 놓고 옥신각신하는 승객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 말고는 고개를 내저으며 침을 탁 뱉고 빈정거렸다. 

"시덥잖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자식들, 창피한 줄도 모르는 모양이야."

"시덥잖은 소리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조르바?"

"무슨 뜻이냐 하면, 임금이니, 민주주의니, 국민 투표니, 국회의원이니 해봐야 다 그게 그거니까 하는 소리요." 

...

그의 정신은 세상보다 더 빨리 달리고 있었다. 


그의 왼손 집게손가락이 반 이상 잘려 나간 걸 알았다. ...

"한때 도자기를 만들었지요. 그 놀음에 미쳤더랬어요. 흙덩이를 가지고 만들고 싶은 건 아무거나 만든다는 게 어떤건지 아시요? 프르르! 녹로를 돌리면 진흙 덩익 동그랗게 되는 겁니다. 흡사 이런 말을 알아들은 듯이 말입니다. '항아리를 만들어야지, 접시를 만들어야지, 아니 램프는 만들까,  귀신도 모를 물건을 만들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모름지기 이런 게 아닐까요, 자유 말이요!" ...

"참, 그게 녹로 돌리는 데 자꾸 거치적거리더란 말입니다. 이게 끼어들어 글쎄 내가 만들려던 걸 뭉개어 놓지 뭡니까. 그래서 어느 날 손도끼를 들어.."

"아프지 않던가요?"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목석이 아니요. 나도 사람입니다. 당연히 아프지요. 하지만 이게 자꾸 거치적거리며 신경을 돋우었어요. 그래서 잘라 버렸지요."


1896년..

"총을 들고 크레타 반란군에 가담했지요.."

"그때는 내 피가 뜨거웠어요. 도무지 '왜'라든지 '어째서'같은 걸 생각해 볼 수가 없었으니까요. 사물을 제대로 보고 생각하려면 나남없이 나이 처먹어 분별이 좀 생기고 이빨도 좀 빠져야 합니다. 이빨 하나 없는 늙은이라면, '안 돼, 얘들아. 깨물면 못써'하고 소리치긴 쉽습니다. 그러나 이빨 서른두 개가 말짱할 때는.. 사람이란 젊을 동안은 아주 야수 같은가 봐요. 그애요, 두목. 사람 잡아먹는 야수 말이오!"


"우리는 반란군이 되어 그 지랄을 했는데, 사기 치고, 훔치고, 죽이고 했는데, 그 덕분에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크레타로 왔답니다. 그러고는 자유라니!"...

"우리가 이 더러운 놈의 세상에서 자유를 누리고 싶으면 살인을 저지르고 사기를 치고 해야 한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하나의 정열에서 풀려나와 다른 더 고상한 정열의 지배를 받는 것, 그러나 이 역시 예속의 한 형태가 아닌가? 이상을 위하여, 종족을 위하여,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다? 우리의 지향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더 길어지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훨씬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의 한계에 이르지 않은 채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자유일까?


붓다의 노래가 내가 선 대지에서 솟아나 내 존재의 심연으로 들어왔다. '내 언제면 혼자, 친구도 없이, 기쁨과 슬픔도 없이, 오직 만사가 꿈이라는 신성한 확신 하나에만 의지한 채 고독에 들 수 있을까? 언제면 욕망을 털고 누더기 하나만으로 산속에 묻힐 수 있을까? 언제면 내 육신은 단지 병이며 죄악이며 늙음이며 죽음이란 확신을 얻고 두려움 없이 숲으로 은거할 수 있을까. 언제면, 오, 언제면?'



3


수 세기 동안 사라센인들로 이루어진 코르세르 해적은 이슬람 국가 정부의 묵인 아래 이 아프리카에 면한 크레타 해안을 기습하여 기독교인들의 양과 여자와 아이들을 노략질하지 않았던가. 해적들은 붉은 혁대로 희생자들을 묶어 선창에 처넣고는 알제, 알렉산드리아, 베이루트 등지에 팔아넘겼다. 그 해변에서 물이 빠진 일이 없었으니 수 세기 동안 크레타 여자들의 곡소리는 끊일 날이 없었을 터이다.  


"시장하지 않으시다! 하지만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들지 않았어요? 육체에는 영혼이란 게 있습니다. 그걸 가엾게 여겨야지요. 두목, 육체에 먹을 걸 좀 줘요. 뭘 좀 먹이셔야지. 아시겠어요? 육체란 짐 싣는 짐승과 같아요.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다 두목을 팽개치고 말 거라고요."


"만일 고개를 들어 받를 보거나 나무를 보거나 여자를(늙은것이라도 말입니다)보면, 그때까지 하던 계산이나 숫자가 확 날아가 버려요. 날개를 달고 날아가 버리면 나는 또 쫓아가야 하고.."

"하지만 그거야 당신 잘못이죠, 조르바." 나는 그를 놀려 주려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정신 집중을 못하니까."

"두목 말씀이 옳으리도 모르지.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거든요. 현명한 솔로몬 대왕도 어쩌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봅시다, 어느 날 나는 조그만 마을로 갔습니다. 갔더니 아흔을 넘긴 듯한 할아버지 한 분이 바삐 아몬드 나무를 심고 있더군요. 그래서 내가 물었지요. '아니, 할아버지! 아몬드 나무를 심고 계시잖아요?' 그랬더니 허리가 꼬부라진 이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리며, '오냐, 나는 죽지 않을 것처럼 산단다.' 내가 대꾸했죠. '저는 금방 죽을 것처럼 사는데요.' 자, 누가 맞을까요, 두목?"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대답을 못하시나?"

나는 조용히 있었다. 두 갈래의 똑같이 험하고 가파른 길이 같은 봉우리로 이끌 수도 있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사는 거나, 금방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사는 것은 어쩌면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조르바가 물었을 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영혼이라는 이름의 짐을 지고 다니는 육체라는 이름의 짐슨을 실컷 먹이고 마른 목은 포도주로 축여 주었다. 음식은 곧 피로 변했고, 세상은 더 아름다워졌고, 우리 옆에 앉은 여자는 시시각각으로 젊어져, 얼굴의 주름살도 사라져 가고 있었다.  



4


"여자를 보는 남자는 모두가 반드시 그 여자를 갈망해야 해요. 그것이 발 여자라는 가여운 동물이 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자라면 여자에게 그렇게 하고, 여자를 기쁘게 해줘야 하는 겁니다."


지나가는 여자를 봐도 그는 말을 멈추고 큰일이나 난 듯이 말한다.

"대체 저 신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는 묻고 또 묻는다. "여자란 무엇인가요? 왜 이렇게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지요? 말해 보시오, 나는 저 여자란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있는 거요."

그는 남자나, 꽃핀 나무, 냉수 한 컵을 보고도 똑같이 놀라며 의문을 갖는다. 조르바는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는 듯이 대하는 것이다.


"두목, 이렇게 말한다고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만 마쇼. 당신 대가리는 아무리 봐도 아직 여문 것 같지 않소. 올해 몇이시오?"

"서른 다섯이오."

"그럼 앞으로도 여물긴 텄군."

그러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이 일격에 얼떨떨했다.

"조르바, 당신은 사람을 너무 믿지 않는 것 같은데요?" 내가 반격했다.

"두목, 화내지 마쇼.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소. 내가 사람을 믿는다면, 하느님도 믿고 악마도 믿을 거요. 그럼 온통 그것밖에 없어요. 두목,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고 골치 아픈 문제가 무더기로 나한테 닥쳐요.


"두목, 인간이란 짐승이에요."

"짐승이라도 엄청난 짐승이에요. 두목같이 고매하신 양반은 이걸 모르시겠지. 즘승한테는 모든 게 너무 쉬워요. 거리낄 게 없으니까요. 아니라고요? 짐승이라니까요! 짐승은 사납게 대하면, 당신을 조녕하고 두려워해요. 친절하게 대하면 눈이라도 뽑아 갈 거요. 두목, 거리를 둬요! 놈들 간덩이를 키우지 말아요. 우리는 평등하다, 우리에겐 똑같은 권리가 있다, 이따위 소리는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당신에게 달려들어 당신 권리까지 빼앗을 거예요. 당신 빵을 훔치고 굶어 죽게 내버려 둘 거요. 정말이지 두목을 위해 충고하건대, 거리를 둬요!"

"아니,당신은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나는 격분해서 소리쳤다. 

"안 믿지요. 아무 것도 안 믿어요. 몇 번이나 얘기해야 알아듣겠소?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그놈이 유일하게 내가 아는 놈이고, 유일하게 내 수중에 있는 놈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 나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삭여 내어요. 나머지야 몽땅 허깨비지. 내가 죽으면 만사가 죽는 거요.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 게요."

... 

내 머리는 조르바에게 동의하고 있었지만 내 가슴은 거부했다.



5


"두목, 사람들 좀 그대로 놔둬요. 그 사람들 눈뜨게 해주려고 하지 말아요! 그래, 눈의 띄워 놓았다고 칩시다. 뭘 보겠어요? 자기들 비참한 처지밖에 더 봐요? 두목, 눈 감은 놈은 감은 대로 놔둬요! 꿈꾸게 내버려 두란 말이에요!"


"만의 하나, 그 사람들이 눈을 떴을 때, 당신이 지금의 암흑 세계보다 더 나은 세계를 보여 줄 수 있다면 또 모르겠소. 보여 줄 수 있어요?"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어렴풋하게나마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르바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그 머리는 지식의 세례를 받은 일이 없다. 하지만 그는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열려 있고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을 고스란히 품은 채 잔뜩 부풀어 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두 발로 대지에 단단히 뿌리박고 선 이 조르바의 겨냥이 빗나갈 리 없다. 아프리카인들이 왜 뱀을 섬기는가? 온몸으로 땅을 쓰다듬는 뱀은 대지의 모든 비밀을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뱀은 배로, 꼬리로, 그리고 머리로 대지의 비밀을 안다. 뱀은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한다. 조르바의 경우도 이와 같다. 우리들 교육받은 자들이 오히려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빈 것들일 뿐.



6


"먹는 음식으로 뭘 하는가를 가르쳐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말해 줄 수 있어요. 혹자는 먹은 음식으로 비계와 똥을 만들어 내고,혹자는 일과 좋은 기분을 만드렁 내고, 혹자는 신을 만드어 낸다나 어쩐다나 합디다. 그러니 인간에게 세 가지 부류가 있을 수밖에요. 두목, 나는 최악의 인간도 최선의 인간도 아니오. 중간쯤에 들겠지요. 나는 내가 먹는 걸로 일과 좋은 기분을 만들어 냅니다. 뭐,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요!"

그는 장난기 있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두목, 당신은 말이오..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먹는 걸로 신을 만들어 내려고 애를 쓰는 것 같소. 그러데 그게 잘 되지 앟으니까 괴로워하는 거고. 까마귀에게 일어났던 일이 당신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까마귀에게 일어난 일이라니, 그게 뭡니까 조르바?"

"말씀드리지요. 원래 까마귀는 까마귀답게 점잖고 당당하게 걸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 까마귀에게 비둘기처럼 거들먹거려 보겠다는 생각이 난 거지요. 그 이후로 이 가엾은 까마귀는 제 보법(步法)을 몽땅 까먹어 버렸다지 뭡니까. 뒤죽박죽이 된 거예요. 기껏해야 절뚝절뚝 걸을 수밖에는 없었으니까 말이오."


"여자에게 뭘 기대할 수 있겠어요? 한다는 짓이, 처음 만난 사내와 붙어 새끼를 까놓는 게 고작이오. 사내에게서 뭘 기대할 수 있겠어요? 사내들이란 그 덫에 걸리고 맙니다."


지금 세상이 아닌, 좀 더 원시적이고 창조적인 시대였다면, 조르바는 한 종족의 추장쯤은 넉넉히 했으리라. 


"두목, 나는 벌써 대가리 꼭대기가 하얗게 세어 있고 이빨도 흔들거리기 시작해요. 그래서 미적거릴 시간이 없어요. 당신은 젊으니까 참고 기다릴 수 있겠지요. 하지만 감히 선언합니다만, 나이 먹을수록 나는 더 거칠게 살 겁니다. 어느 놈도 사람일ㄴ 나이를 먹으면 침착해진다는 소릴 못하게 할 겁니다. 죽음이 오는 걸 보고는 목을 쑥 내밀고 '날 잡아 잡수, 그래야 천당 가지' 이런다는 것도 안 될 말이지요!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나는 반항합니다.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세계를 정복해야 하니까요!"


"인생이란 늙은 부불리나와 아주 똑같습니다. 늙었지요? 그래요. 하지만 묘미가 없지 않아요. 사람을 껄떡 넘어가게 하는 쪽으로는 아주 조예가 깊다니까요. 눈을 감으면 스무 살짜리 계집을 안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말지요. 맹세코 말하지만, 불 끄고 그 짓 할 때 저 늙은 것은 영락없는 스무 살이에요.

당신은 이렇게 반문하겠죠. 무르익다 못해 쉬어 터진 여자 아니냐, 어디 좀 많이 방탕하게 살고, 어디 한두 명하고 놀아났냐.. 제독, 선원, 군인, 농부, 유랑 극단 단원, 목사, 신부, 경찰관, 학교 선생, 치안 판사! 그래서 뭐요? 뭐가 어쨌다는 겁니까? 저 여자는 금방 잊어버려요. 저 늙은 갈보가 그렇다고요. 옛날 애인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할 때마다 달라져요. 절대 농담 아닙니다. 할 때마다 다정한 비둘기가 되었다가 순결한 백조가 되었다가 상큼한 종달새가 되었다가.. 그리고 낯빛을 붉혀요. 그래요, 정말 그런다고요. 처음 하는것인 양 낯빛을 붉히고 파르르 떨어요! 두목, 여자라는 건 참 알다가도 모를 동물이지요? 천 번을 깔려도 천 번을 처녀로 다시 일어서는 겁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요? 기억을 못 하니까 그렇죠!"


나는 앵무새란 놈이 카나바로 이름을 부르는게 기분 좋은걸 어쩝니까? 밤에 저 늙은 죄인은 앵무새 새장을 침대 머리에다 걸어 놓습니다. 이 작은 악마에겐 어둠을 뚫어보는 힘이 있어서 둘이서 기분을 내자마자 소리를 지릅니다. '카나바로! 카나바로!' 하고.

내 맹세코 말씀올립지요만, 두목, 쓰레기 같은 책만 잔뜩 집어넣어 놓은 당신 머리가 이해할 턱이 없겠소만, 이건 정말 맹세할 수 있어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내 발에는 에나멜 장화가 척 신겨서고, 머리에는 깃털 모자가 씌워지고, 보드라운 수염에서는 파촐리 향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답니다. 'Buon giorno! Buona sera! Magiate macaronia!(좋은 아침! 좋은 저녁! 마카로니 드세요!)' 나는 진짜 카나바로가 되는 겁니다. 나는 수천 발의 총탄을 맞은 역전의 기함(旗艦)에 척 올라 떠나가는 겁니다... 보일러에 불을 댕겨! 포격 개시!"

조르바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두목, 나를 용서해 주셔야겠소. 아무래도 나는 우리 알렉시스 할아버지 닮았어. 하느님께서 그의 유택을 지켜 주시기를! 할아버지는 백 살 되던 해에도 문 앞에 앉아 우물로 물 길러 가는 처녀 아이들에게 추파를 던지고는 했지요. 그러나 시력이 좋지 않아 똑똑히 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처녀 아이들을 가까이 오라고 불렀지요. '어디 보자, 네가 누구더라?' '마수트란도니 집 딸 크제니오예요.' '가까이 오너라. 어디 좀 만져 보자. 오래두. 겁낼 것 없느니라!' 처녀 아이는 예의에 맞는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다가갑니다. 그러면 우리 할아버지는 손을 들어 천천히, 그리고 아주 육감적으로 얼굴을 쓰다듬지요. 그럴라치면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린답니다. '할아버지, 왜 우세요?' 내가 언제 할아버지께 여쭈어 봤지요. '얘야, 내가 저렇게 많은 계집아이들을 남겨 놓고 죽어 가는데 울지 않게 생겼니?'

후유~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내가 할아버지 말씀에 얼마나 공감하는지 아시오? 나는 이따금 이렇게 한탄하지요. '아, 제기랄! 참한 계집들은 나 죽을 때 몽땅 죽어 버렸으면!' 하지만 그 잡것들은 계속 살아 있을 거고, 여전히 뜨끈뜨끈하게 재미 보고, 사내들은 그런 것들을 끼고 주물럭거리겠죠, 나는 그것들이 밟고 다닐 흙이 되어 있을 텐데!"



7


행복이란 얼마나 단순하고 소박한 것인지 다시금 느꼈다. 포도주 한 잔, 군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다 소리. 단지 그뿐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행복이 있음을 느끼기 위해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만 있으면 된다.


"나는 남자 아닌 줄 아시오? 딴 놈들처럼 나도 저 일생일대의 실수를 하고 말았지요. 나는 결혼을 그렇게 부릅니다(결혼한 자들이여, 나를 용서하시라)!"


여자는 맑은 샘물과 같습니다. 거기 들여다보면 모습이 비칩니다. 마시면 되는 겁니다. 뼈마디가 녹신녹신할 때까지 마시면 되는 겁니다. 이윽고 목이 마른, 다음 사람이 옵니다. 그 사람도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며 마시면 되는 겁니다.



8


그는 울타리 곁을 지나다 갓 핀 수선화 한 송이를 꺽었다. 그러고는 한동안 그 꽃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성이 차지 않는다는 듯이, 수선화를 생전 처음으로 보는 사람처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눈을 감고 냄새를 맡더니 한숨까지 쉬었다. 그는 꽃을 내게 건네주었다. 

"두목, 돌과 비와 꽃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어쩌면 우리를 부르고 있는데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라요. 두목, 언제면 우리 귀가 뚫리까요? 언제면 눈을 떠서 볼 수 있을까요? 언제면 우리가 팔을 벌리고 만물 - 돌, 비, 꽃 그리고 사람들 - 을 안을 수 있을까요? 두목, 어떻게 생각해요? 당신이 읽은 책에는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나는 조르바가 즐겨 쓰는 표현으로 대답했다. "악마나 물어 가라고 합디다! 그래요, 악마나 물어 가라고 합디다. 당신 말마따나. 딴건 없어요."

조르바가 내 팔을 잡았다.

"두목, 내 생각을 말씀드리겠는데, 부디 화는 내지 마시오. 당신 책을 몽땅 쌓아 놓고 불이나 확 싸질러 버리쇼. 그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은 바보가 아니고, 당신은 착한 사람이니까... 뭔가 썩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이 대목에서 두목한테 한번 믿고 맡겨 봅시다. 자, 수컷을 불명예스럽게 만들지 마시오! 신과 악마가 이 기찬 음식을 당신에게 내린 겁니다. 당신에게 이가 있지요? 그럼 이를 박아요. 손을 내밀어 저 과일을 따 먹어요! 조물주가 손을 뭣하라고 달아 놓았겠어요! 손을 내밀어 취하라고 달아 놓은 거지! 그러니까 잡아요! 살아오면서 별별 여자를 다 보아 왔습니다. 그렇지만 저 망할 년의 과부는 교회뾰족탑도 족히 흔들어 놓을 것 같습디다!"

"말썽이 생기는 건 질색이에요!" ...

"산다는 게 곧 말썽이오. .. 두목, 당신,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조르바의 말이 옳다는 건 나도 알았다. 그러나 그럴 용기가 내겐 없었다. 나는 아무래도 인생의 길을 잘못든 것 같았다 타인과의 접촉은 이제 나만의 덧없는 독백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타락해 있었다.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에 대한 책을 읽는 것 중에서 택일해야 한다면 책을 선택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9


"여자가 혼자 잔다면 그건 우리 남정네들의 잘소잉에요. 우리는 최후의 심판 날에 우리가 한 짓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해요. .. 여자와 잘 수 있는데도 자지 않는 사내에게 화 있을진저! 남자와 잘 수 있는데도 안 자는 여자에게 화 있을진저!"



10


"도대체 누가 만들어 내었는가? 이 주저의 미로를, 이 추측의 사원을, 이 죄악의 물주머니를, 천 가지 기만이 파종된 이 밭을, 이 지옥의 문을, 잔꾀로 넘쳐 나는 이 바구니를, 꿀맛이 나는 이 독을, 중생을 땅에 묶어 놓는 이 사슬을 - 바로 여자를!"

나는 화덕 앞 바닥에 앉아 천천히, 그리고 묵묵히 이 붓다의 노래를 옮겨 적고 있었다. 마(魔 마귀마)를 몰아내려는 몸부림이었다. 내 마음속에 들어앉은 비에 젖은 여인의 몸, 그 영상을 떨쳐 내려 기를 썼다.  


"이 세상일은 간단한 거예요. 몇 번이나 말씀드려야해요? 간단한 걸 가지고 자꾸 복잡하게 만들어 헷갈리게 하지 말래도!"


"확대경으로 음료수를 들여다보면 어떤 줄 알아요? 언젠가 기술자 하나가 가르쳐 줍디다. 물에는 맨눈으로 보이지 ㅇ낳는 쬐그만 벌레가 우글거린답디다. 보고는 못 마시지... 안 마시면 목이 마르지... 두목, 확대경을 부숴 버려요. 그럼 벌레도 사라지고, 물도 마실 수 있고, 시원해지는 거지!"


나는 내 인생을 돌아보았다. 미적지근하고 모순과 주저로 점철된 몽롱한 반생이었다. 나는 허망한 기분으로 지난 일을 생각했다. 허공중에서 바람을 받은 한 조각 구름처럼 내 인생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어 갔다. 흩어졌다가는 다시 모이고, 모였다가는 다시 모습을 바꾸어, 차례로 백조가 되고, 개가 되고, 악마가 되고, 전갈이 되고, 원숭이가 되었다. 구름은 하염없이 흩날리고 찢겼다. 하늘의 바람에 밀리며 무지갯빛으로 물들었다.


오늘나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12


내가 좋아해서 여기까지 가져온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말라르메의 시집이었다. 천천히 마음 내키는 대로 읽다가 책을 덮었고, 다시 펼쳤다가 결국은 내려놓고 말았다. 그의 시는 핏기도 없고 냄새도 없고 인간의 본질을 비켜가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경험한 느낌이었다. 그의 시가 창백한 진공 속의 공허한 언어로 보였던 것이다. 박테리아 한 마리 없는 완벽한 증류수였지만 영양분 역시 하나 없는 물 같은 것, 요컨대 생명이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창조의 섬광을 상실한 종교에서 제신(諸神 모두제 귀신신)은 결국 인간의 고독과벽면을 치장하는 시적 모티프나 예배 용품으로 전락했다.  


인간의 본질은 야만스럽고, 거칠며 불순한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사랑과 살과 고통의 절규로 이루어진 것이다.


전에는 그토록 나를 매혹하던 이 모든 것들이 이날 아침에는 지적인 곡예. 세련된 협잡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다. 그것이 문명이 쇠퇴하는 모습니다.


아무렴. 무릇 위대한 환상가와 위대한 시인은 사물을 이런 식으로 보지 않던가! 매사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인간은 자기가 선택한 대로만 행동하네.'(아프리카에 있는 친구 카라얀니스의 편지 내용 중에서)


나는 죽기 전에 되도록 많은 땅과 바다를 보고 만지고 싶었다.


'열정과 광기로 싸우는 자가 행복하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야. 자네 식으로 말하면, 나는 행복을 내 키에 맞게 재단했는지 어쩐지 잘 모르겠네. 용케 그렇게 했다면, 그렇다면 나는 위대한 사람일 것일세. 나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에 맞추어 키를 늘이고 싶네.... 친구여, 행동하기 싫어하는 내 스승이여. 행동, 행동... 구원의 길은 그것뿐이네.'(책 초반에 떠난 친구의 편지 내용)



13


'사람에겐 바보 같은 구석이 있게 마련입니다. 가장 바보 같은 놈은, 내 생각에는 바보 같은 구석이 엇는 놈일 것입니다.'(칸디아로 간 조르바의 편지 내용 중에서)


'모험은 건강에 아주 좋습니다.'(칸디아로 간 조르바의 편지 내용 중에서)


'나는 자유를 원하는 자만이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는 자유를 원하지 않아여. 그런데 여자도 인간일까요?'(칸디아로 간 조르바의 편지 내용 중에서)



14


"젊은이들이야 까짓 말썽 같은 걸 겁낼 필요 없지!"



15


"무슨 음식을 특히 좋아하십니까, 영감님?"

"아무거나 다 좋아하지요. 이건 좋고, 저건 나쁘다고 하는 건 큰 죄악이지요."

"왜요? 골라서 먹을 수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안 되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 안됩니까?"

"굶주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지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내 마음은 일찍이 그런 품위와 연민의 높이에 이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몸을 떨었다. '영원'이라는, 식인(食人)의 단어에 잡아먹힐 위험에 처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원'이라는 단어에 거의 빠질 뻔했다. 또 '사랑', '희망', '국가', '하느님' 같은 숱한 단어에도 빠질 뻔했다. 그 단어 하나하나를 정복하고 지날 때면 나는 흡사 위험에서 빠져나와 전진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나는 겨우 단어를 바꾸어 놓고 그것을 구원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2년 전부터는 '붓다'라는 말의 가장자리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이제 확실히 느낀다. 조르바 덕분이다. 붓다는 최후의 우물, 마지막 낭떠러지 단어가 될 것이며, 이제 나는 영원히 해방될 것이라고. 영원히? 그거야 우리가 늘 하는 말이다.


'명상도 일종의 광산이 아닌가. 그럼 나도 파야지.' ..



16


'자기 자신 안에 행복의 근원을 갖지 않은 자에게 화 있을진저!'

'남을 즐겁게 하려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금생(今生 이제금 날생)과 내생(來生 올래 날생)이 하나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나는 붓다, 하느님, 조국, 이상, 이 모든 허깨비들에게서 풀려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붓다, 하느님, 조국, 이상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지 못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7


"이게 사람이 자유를 얻는 도리올시다. 내 말 잘 들어요. 터질 만큼 처넣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금욕주의 같은 걸로는 안 돼요. 생각해 봐요, 두목. 악마를 이기려면 자기가 악마 한 마리 반은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18


조르바가 구석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게 네 번째 이론이 있소이다!"

나는 불안스럽게 조르바를 바라보았다. 주교도 그를 돌아보았다.

"말씀해 보시오. 당신의 이론 역시 축복을 받으시기를! 그래, 무엇이오?"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는 것!" 조르바가 엄숙하게 말했다.

주교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섯 번째 이론도 있지요, 영감님." 조르바는 말을 이었다. "무엇이냐 하면, 둘 더하기 둘은 넷이 아니라는 거요. 어때요, 영감님. 내기 한번 해봅시다! 하나 고르시지!"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소." 주교는 떠듬거리면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시선을 내게로 던졌다.

"나도 모르겠소!" 조르바가 이렇게 말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세만트론의 달콤한 소리에 매혹되었다. 이런 생각이 스쳤다. 삶의 고양된 리듬은 심지어 그것이 쇠락했을 때조차 그 감동적이고 고귀한 외적 형식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구나. 정신은 떠나고, 오랜 진화 끝에 조개껍데기처럼 정교해진 정신의 커다란 집만 뒤에 남았다.



20


"만사는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그가 조금 뜸을 들이고는 말을 계속했다. "믿음이 있습니까? 그럼 낡은 문설주에서 떼어 낸 나뭇조각도 성물(聖物)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나요? 그럼 거룩한 십자가도 그런 사람에겐 문설주나 다름이 없습니다.


"당신에게는 아무래도 쇠귀에 경 읽기가 될 수밖에 없겠어요."

내가 항변했다. "뭐라고요? 나도 이해할 건 이해하는 사람인데.. 그건 좀 잊지 말고 삽시다."

"그래요, 당신은 그 잘난 머리로 이해라는 걸 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그래, 팔과 가슴이 뭘 합니까? 침묵한다 이겁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흡사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이겁니다. 그래,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로? 웃기지 맙시다!"


"사람이라는 게 언제쯤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하게 될까요? 우리는 바지를 입고 셔츠를 걸치고 칼라를 세우고 모자를 씁니다만 그래 봐야 아직 노새 새끼, 여우 새끼, 이리 새끼, 돼지 새끼를 못 면해요. 하느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누가? 우리가? 나 같으ㅕㄴ 인간의 그 멍청한 쌍통에도 침을 탁 뱉겠소!"


"내 조국으로부터 해방되고, 신부들로부터 해방되고, 돈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나는 짐을 덜기 시작했습니다. 있는 족족 덜어 버린 겁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내 짐을 덜었습니다. 자, 이런 걸 뭐라고 하던가요? 나는 구원의 길을 찾는 겁니다. 나는 인간이 되고 있습니다."


"내게는, 저건 터키 놈, 이건 불가리아 놈, 요건 그리스 놈,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두목, 나는 당신이 들으면 머리카락이 쭈뼛할 짓도 조국을 위해서랍시고 태연하게 했습니다. 나는 사람의 멱도 따고 마을에 불도 지르고 강도 짓도하고 강간도 하고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햇습니다. 왜요? 불가리아 놈, 아니면 터키 놈이었기 때문이지요. 나는 때로 자신을 이렇게 질책했습니다. '염병할 놈, 지옥으로 곧장 가라, 이 돼지 같은 놈! 싹 꺼져버려. 이 병신아!' 요새 와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놈, 이런 식입니다.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키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요새 내게 문제가 되는 건 이것뿐입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 - 마지막으로 입에 들어갈 빵 덩어리에다 놓고 맹세합니다만 -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 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쓰여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그 모든 걸 종헙했습니다. 내게는 끝났어요.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조르바라는 사내가 부러웠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었다. 내가 고독 속에서 의자에 눌어붙어 풀어 보려고 하던 문제를 이 사나이는 칼 한 자루로 산속의 맑은 대기를 마시며 풀어 버린 것이었다.


그 역시 봄 풍경에 화들짝 놀란 것이었다. "저게 무엇이오?" 그가 놀라도 크게 놀라면서 물었다. "두목, 저기 저 건너 가슴을 뭉클거리게 하는 파란 색깔, 저 기적이 무엇이오? 당신은 저 기적을 뭐라고 부르지요? 바다? 바다? 꽃으로 된 초록빛 앞치마를 입고 있는 저것은? 대지라고 그러오? 이걸 만든 예술가는 누구지요? 두목, 내 맹세코 말하지만, 내가 이런 걸 보는 건 처음이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그를 불렀다. "조르바, 혹 돌아 버린 건 아닌가요?"

"무얼 비웃고 있어요? 당신 눈에는 안 보이는가요? 두목, 봐요. 저 모든 기적 뒤에 도사리고 있는 마술을 말이오."


"대가리는 안 달고 있어도 상관없는데, 모자는 제대로 된 걸 써야 한단 말입니다..! 이 미친놈의 세상에서는!"


“모든 문제가 일을 어정쩡하게 하기 때문이에요. 말도 어정쩡하게 하고 선행도 어정쩡하게 하는 것,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다 그 어정쩡한 것 때문입니다.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 못을 박을 때도 한 번에 제대로 때려 박는 식으로 해나가면 우리는 결국 승리하게 됩니다.”



21


나는 걸으면서 나도 모르게 조르바의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렇다. 바다, 여자, 술, 그리고 맹렬한 노동! 일과 술과 사랑에 자신을 던져 넣고, 하느님도 악마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것이 젊음이란 것이다!" 그러면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처럼 나는 조르바의말을 계속 되뇌면서 걸었다.  


시원한 초록 바닷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육체적 행복가밍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내 정신이 이 육체의환희를 가로채어 제 틀에 욱여 넣고 그것으로 생각들을 만들어 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내 온몸이 한 마리 짐승처럼 환희를 즐기도록 내버려 두었다. 



22


"이놈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같이 불의, 불의 , 불의입니다! 나는 이놈의 세상에 끼지 않겠어요. 암, 나 조르바, 벌레 같은 놈, 굼벵이 같은 놈이지만 어림없고말고! ..." 

"두목, 참을 수가 없어요. 산택 좀 하고 와야겠어요. 산을 두어 번 오르내려 내 몸을 피로로 잔뜩 채워야 오늘 밤 잠잠할 겁니다. 오, 과부여! 내 그대를 위해 미롤로그를 불러야 할 것 같구나!"

그는 밖으로 뛰어나가 산 쪽을 향하더니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침대에 누워 등불을 껐다. 그리고 내 졸렬하고도 비인간적인 습관에 ㄸ라 다시 한 번 현실을 왜곡하기 시작했다. 현실에서 피와 살과 뼈를 제거하여 추상적 관념으로 환원시키고, 그것을 일반적 법칙들과 연결시켜 지금 일어난 일은 결국 필연적이었다는 끔찍한 결론에 도달했다. 더 나ㅏ가, 오늘의 비극은 우주적인 조화(調和 고를조 화할화)에 기여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거라는 최종의 가증스러운 위안에 이르렀던 것이다.


자기 위안 단계에 이른 나는 과부 이야기를 하려 했다. 조르바는 그 긴팔을 쑥 내밀어 손바닥으로 내 입을 막아 버렸다.

"닥쳐요!" 그가 구겨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닥쳤다. 부끄러웠다. '진짜 사내란 이런 거야...' 나는 조르바의 슬픔을 부러워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그는 피가 덥고 뼈가 단단한 사나이... 슬플 때는 진짜 눈물이 뺨을 흐르게 했다. 기쁠 때면 형이상학의 채로 거르느라고 그 기쁨을 잡치는 법이 없었다.



23


이게 인생이거니... 변화무쌍하고, 요령부득이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그러나 마음대로 안 되는... 무자비한 인생 ... 무지몽매한 크레타 농사꾼들은 지구 저쪽 끝엣 온 퇴물 카바레 가수를 둘러싸고 죽어 가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마치 그 여자는 한 인간이 아니라는 양 비인간적으로 즐거워 하고 있었다. 흡사 온 마을 사람들이 해변으로 몰려와, 하늘에서 떨어진 낯선 새가 날개를 부러뜨리고 퍼덕거리며 죽어 가고 있는 꼴을 구경하는 형국이었다. 부인이 늙은 공작새, 늙은 앙고라 고양이, 병든 물개나 되는 것처럼...



24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누가 이들을 창조했을까요? 왜요? 그리고 무엇볻도." 여기에서 조르바의 목소리는 분노와 공포로 떨었다. ".. 왜 사람들은 죽는 것일까요?"

"모르겠어요, 조르바." 내가 대답했다. 부끄러웠다. 가장 단순한질문, 가장 기초적인 질문을 받고도 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 같아서였다.

"모르신다!" 조르바는 놀라움으로 눈을 둥그렇게 뜨고 소리쳤다.

"아니, 두목, 당신이 읽은 그 모든 빌어먹을 책들.. 그것들은 대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건 왜 읽어요? 책이 그런 걸 알려 주지 않으면 도대체 뭘 알려 주는데요?"

"인간의 당혹감에 대해 알려 주죠. 당신이 나한테 던진 발 그런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할 수없는 이간의 당혹감 말이에요."


"두목, 제발 설명해 주시오.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오랜 세월 당신은 청춘을 불사르며 마법의 주문이 잔뜩 쓰인 책을 읽었어요. 모르긴 하지만 종이도 한 3톤은 족히 씹고 또 씹었을 거예요! 거기에서 뭔가 얻어 낸 게 있을 것 아닙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너무나도 깊은 비통함이 묻어 있어서 나는 가심이 미어졌다. 아, 이 사라에게 대답할 능력이 내게 있었다면!


"나는 매순간 죽음을 생각해요. 죽음을 보는 거지, 무서웧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절댈, 절대로, 나는 저게 좋아하ㅗ는 하지 않아요. 아니, 전혀 좋지 않아요!"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 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얼마 후 그는 말을 계속했다.

"부불리나가 살아 있을 동안 말입니다. 그 어떤 카나바로도 나만큼 그 여자를 기쁘게 해준 사람은 없습니다. 이 쪼그랑 망태기 같은 조르바만큼 말입니다. 이유를 알고 싶어요? 이 세상의 모든 카나바로는 그 여자에게 키스하면서도 자기 함대나, 왕이나, 크레타나,훈장이나, 마누라나... 이런 걸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걸 깡그리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이 할망구도 그걸 알고 있었어요. 유식한 양반한테 하나 가르쳐 드리는데, 여자에게 그 이상의 기쁨은 없는 법입니다. 진짜 여자는.. 잘 들어 두시오, 도움이 될 테니까.. 진짜 여자는 남자에게서 기쁨을 받는 것보다 자기가 기쁨을 주고 있다는 데서 더 큰 기쁨을 느끼는 법이에요."


"조르바, 사람이란 누구나 뱃속에 악마 몇 마리쯤은 갖고 있으니 그건 걱정 마세요.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거지요. 중요한 건, 이 악마들의 최종 목적이 같아야 한다는 거죠. 가는 방법은 다르더라도."

이 말이 조르바를 감동시킨 모양이었다. 그는 그 큰 머리를 무릎 위에 올리고 생각했다. 

"무슨 목적?" 그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조르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너무 어려운 걸 물어보네요. 그걸 내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그냥 간단히 말해 봐요. 나도 좀 알게. 지금까지 나는 내 속에 든 악마가 하고 싶다는 대로 하게 내버려 뒀고, 가고 싶다는 대로 가게 내버려 뒀지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나를 엉큼하다 하는가 하면 정직하다 하고, 또 날 보고 미쳤다 하는가 하면 솔로몬처럼 지혜롭다고 해요. 그것들이 다 내가 맞고, 그보다 훨씬 많은 걸 더해야 나라는 인간이 돼요. 그러니까 완전 잡탕이야. 자, 그러니 두목, 날 좀 도와주슈. 이 문제 좀 풀어 보게.. 무슨 목적이오?"

"조르바, 내 말이 틀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세 부류의 사라이 있다고 생각해요. 소위, 살고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돈 벌고 명성을 얻는 걸 자기 생의 목표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또 한 부류는 자기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인류의 삶이라는 것에 관심이 있어서 그걸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지요. 이 사람들은 인간은 결국 하나라고 생각하고 인간을 가르치려 하고, 사랑과 선행을 독려하지요. 마지막 부류는 우주 전체의 삶을 살려는 목표를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나무나 별이나 우주 만물, 우리는 모두 하나다, 우리 모두는 무시무시한 하나의 싸움에 가담한 하나의 실체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요. 무슨 싸움일까요? ..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싸움이지요."


나는 생각했다. 추상적 생각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고 나서야, 그래서 한 편의 이야기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입을 열 수 있었으면! 그러나 오직 위대한 시인만이 그 경지에 이르고, 범부는 수백 년 묵묵히 노력해야만 그런 경지에 이르는 걸 어찌하랴.



25


인간이라는 불운한 존재는 작고 초라한 자신의 삶 둘레에 난공불락이라고 믿는 방벽을 쌓아 올린다. 그 안을 피난처로 삼아, 삶에 미미한 질서와 안정을 부여하려 애쓴다. 미미한 행복을 말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밟아 다져진 길들을, 신성불가침의 반복적 일상을 따라야 하며, 안전하고 단순한 규칙들을 지켜야 한다. 알 수 없는 것들의 무서운 침범을 막으려 요새처럼 방비한 그 테두리 안에서, 자잘한 확신들이 지네처럼 꼬물꼬물 기어다니며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적이 딱 하나 있다. 모두가 죽을 듯이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그 적의 이름은 '거대한 확신'이다. 지금, 이 거대한 확신이 내 존재의 장벽을 뚫고 들어와 내 용혼을 덮치려 한 것이다.



26


"나도 당신 방법을 써볼 거예요. 당신은 버찌를 정복했으니 나는 책으로 책을 정복할 참이에요. 종이를 잔뜩 먹으면 언젠가는 구역질이 날 테지요. 구역질이 나면 확 토해 버리고 영원히 손 끊는 거지요."


"나, 당신과 함께 여기 있을 수도 있어요.." 나는 조르바의 절망적인 애정에 당황하고 말았다. "당신과 함께 어디론가 떠날 수도 있고. 나는 자유로우니까."

조르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보다 좀 길 거예요.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매달려 있으니까, 이리저리 다니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를 거요!"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당신한테는 무식이 좀 필요해요. 무식, 아시겠어요? 모든 걸 걸고 도박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머리가 힘이 세니까 항상 그 머리가 당신을 이겨 먹을 거라고요. 인간의 머리란 구멍가게 주인과 같은 거예요. 계속 장부에 적으며 계산을 해요.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아주 좀상스러운 소매상이지요. 가진 걸 몽땅 거는 일은 절대 없고 꼭 예비로 뭘 남겨 둬요. 머리는 줄을 자르지 않아요. 아니, 아니지! 오히려 더 단단히 매달려요, 이 잡것은! 붙잡고 있던 줄을 놓치기라도 하면 머리라는 이 병신은 그만 허둥지둥하다가 완전 끝장나 버려요. 그런데 사람이 이 줄을 끊어 버리지 않으면 산다는 게 무슨 맛이겠어요? 노란 카밀러 맛이지. 멀건 카밀러 차 말이오. 럼주하고는 완전히 다르다고요. 럼주는 인생을 확 까뒤집어 보게 만드는데!"


조르바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어릴 때에는 나도 미친 충동과 초인적인 욕망이 넘쳐, 세상이 못마땅했다.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조용해졌다. 나는 한계를 정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가르고, 내 연(鳶 솔개연)을 꼭 붙들고는 놓치지 않으려 했다. 


오라지게 추워 할 수 없이 결혼했습니다.(조르바의 편지 중에서)


나는 곧잘 친구들에게 이 위대한 인간의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의 이성보다 더 깊고 더 자신만만한 그의 긍지에 찬 태도를 존경했다. 우리들이라면 고통스럽게 몇 년을 걸려 도달할 정신의 경지에 그는 단숨에 가닿았다. 그래서 우리는 말했다. '조르바는 위대한 인간이다!' 때로 그는 그 경지를 훌쩍 넘어 더 멀리 나가 버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우리는 말했다. '조르바는 미쳤다!'




역자해설 - 20세기의 오디세우스


신을 통하여 구원을 받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바로 그 사람이다.


구체적인 체험으로서의 여행이 추상적인 꿈을 심화시키고 그 꿈이 여행의 무대를 확장시키듯...


3단계 투쟁, 혹은 3단계 깨달음의 과정..

‘압제자 터키로부터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1단계 투쟁, 우리 내부의 터키라고 할 수 있는 무지, 악의, 공포 같은 모든 형이상학적 추상으로부터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2단계 투쟁, 우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우리가 섬기는 중에 우상이 되어 버린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3단계 투쟁...’


카잔차키스의 삶은,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내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사색과 행동 등등의, 영원히 모순되는 반대 개념에서 하나의 조화를 창출하려는 끊임없는 투쟁으로 이루어진다.


그가 베르그송에게 경도된 것은, 인간 존재란, 신이 어떤 목적에 따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딛고 넘어가게 마련된 단계에 불과한 것, 따라서 ‘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 도약의 디딤돌로 인간이 창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자기의 예감을 베르그송의 생철학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야생마 같은 주인공 조르바는 실제 인물이다. 

조르바라고 하는 호쾌한 기인이 있었다. 행적이 대체 얼마나 기이했는지, 조르바의 어록을 기억나는 대로 옮겨보면 대략 이렇다. 

‘손가락 하나가 왜 없느냐고요? 질그릇을 만들자면 물레를 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왼손 새끼손가락이 자꾸 거치적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도끼로 내려쳐 잘라 버렸어요.’

‘하느님요? 자비로우시고말고요. 하지만 여자가 잠자리로 꾀는데도 이거 거절하는 자는 용서하시지 않을걸요. 거절당한 여자는 풍차라도 돌릴 듯이 한숨을 쉴 테고, 그 한숨 소리가 하느님 귀에 들어가면, 그자가 아무리 선행을 많이 쌓았대도 절대 용서하시지 않을 거라고요.'

'도 닦는 데 방해가 된다고 그걸 잘랐어? 이 병신아, 그건 장애무링 아니라 열쇠야, 열쇠.'

'결혼 말인가요? 정당하게는 한 번 했지요. 부정하게는 1천 번, 아니, 3천 번 쯤 될 거요. 정확하게 몇 번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수탉이 장부 가지고 다니는 거 봤어요?'

'확대경으로 보면 물속에 벌레가 우글우글하대요. 자, 갈증을 참을 거요. 아니면 확대경 확 부숴 버리고 물을 마시겠소?'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 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구려.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그의 인생과 작품의 핵심에 위치하는 노른자위 개념이자 그가 지향하던 궁극적인 가치의 하나인 '메토이소노(聖化)'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메토이소노'는 '거룩하게 되기'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육체와 영혼 , 물질과 정신의 임계 상태 저 너머에서 일어나는 변화, 이것이 '메토이소노'다. 물리적, 화학적 변화 너머에 존재하는 변화, '거룩하게 되기'가 바로 이것이다.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것은 무리적인 변화다. 포도즙이 마침내 포도주가 되는 것은 화학적인 변화다.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聖體)'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다. 




2011년에 본 <그리스인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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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어른은 별다른 노력이 없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그냥 나이를 먹으니 어른이 되어 버렸고, 주변 사람들도 우리를 어른으로 대접하고 있으니까요. 5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힘과 자유가 없다면, 어른이라고 해도 어른일 수 없는 법이니까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아야 어른입니다. 싫은 건 싫다고 하고 좋은 건 좋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어른입니다... 힘과 자유는 나이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용기를 갖고 싸워 얻어야 하는 것임을. 6



프롤로그 - 잠옷을 입고 실내에 있을 수도 없고 실외로 나갈 수도 없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는가?


‘도대체 내가 했던 모든 행동 중 오직 나만이 할 수 있었던 행동은 있기라도 한 것일까?’ ...

나와 같은 사람은 1,000년 전에도 없었고 1,000년 뒤에도 없을 겁니다. 아니, 지금도 나와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모든 행동은 너무나 타인들과 유사합니다. 그것도 지독하게 유사합니다. 이건 내가 나로서 살아가기보다는 누군가를 흉내 내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 아닐까요... 베케트(Samuel Baclay Beckett, 1906-1989)라는 우리 시대 가장 탁월한 작가가 고민했던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로 행동하고 생각할 수 있을까?’ 13


‘화두(話頭)’.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결코 해결할 길이 없는 딜레마나 역설로 가득 차 있는 물음이 바로 화두입니다. ...

화두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내려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관문 같은 겁니다. 상식에 따라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풀릴 수 없는 역설로 보이지만,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쉽게 풀리는 것이 화두이기 때문이지요. 15


스님들이 싯다르타를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데 멋지게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16


‘무문관’ .. ‘문이 없는 관문’. 18


타인이 만든 문을 찾으려 두리번거리지 말고 온몸을 던져 뚫어 내라는 겁니다. 20



어느 날 사찰 깃발이 바람에 나무끼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두 스님이 서로 논쟁을 했다.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라고 말하고, 다른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라고 주장했다. 서로의 주장만이 오갈 뿐, 논쟁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이때 육조 혜능은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두 스님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문관> 29칙 비풍비번(非風非幡). 24

깨달음을 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과 그것을 몸소 체현하고 산다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습니다. 32



서암 사언 화상은 매일 자기 자신을 “주인공!”하고 부르고서는 다시 스스로 “예!”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깨어 있어야 한다! 예! 남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 예! 예!”라고 말했다. <무문관> 12칙 암환주인(巖喚主人). 33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된다면, 그때 내가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36

<논리철학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말을 빌린다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하는 법입니다. 37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단지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 달리 말해 내 자신이 가진 잠재성을 활짝 꽃피우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7



송원 화상이 말했다. “힘이 센 사람은 무엇 때문에 자기 다리를 들어 올릴 수 없는가?” 또 말했다. “말을 하는 것은 혀끝에 있지 않다.” 20칙 대역량인(大力量人) 42

‘여여(如如)’ 혹은 ‘타타타’라고 부릅니다. ‘있는 그대로’라는 뜻이지요. ...

불변하는 영원한 자아를 불교에서는 ‘아(俄, atman)’라고 부릅니다. 불교는 이런 영원한 자아를 부정합니다. 영원한 것, 불변하는 것에 대한 집착은 우리 마음에 심각한 고통을 안겨 주기 때문이지요. 세상에 영원하거나 불변하는 것은 없으니까요. 44

불교의 가르침, 그리고 수행은 우리의 생생한 경험을 떠나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겪는 경험을 있는 그대로 보는 순간, 우리의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희론(戱論)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올바른 인식을 희롱하는 논의,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보지 못하게 우리의 마음을 왜곡시키는 잘못된 논의라는 뜻이지요. 한마디로 말해 희론은 세상을 왜곡해서 보도록 만드는 색안경과 같은 것이지요.  45

?비트겐슈타인의 충고를 반복하고 싶습니다. "생각하지 말고, 보라(Don't think, but look)!"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럴 거야'라는 가치평가나 희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자신의 삶에서 벌어지는 근본적인 경험을 있는 그래도 여여하게 직시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50



파토 화상이 대중들에게 말했다. "너희에게 주장자가 있다면, 너희에게 주장자를 주겠다. 너희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너희에게서 주장자를 빼앗을 것이다." <무문관> 44칙, '파초주장(芭蕉?杖)'  51

주장자(柱杖子)를 아시나요. 큰스님들이 길을 걸을 때나 설법을 할 때 들고 계시는 큰 지팡이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장자는 불교에서는 깨달은 사람, 즉 '불성(佛性)', 혹은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실현한 사람을 상징하게 된 것입니다.  51

'주장자가 없다'는 생각, 그리고 부처라는 생각마저 내려놓아야 깨달을 수 있다는 파초 스님의 생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53

베그르송(Henri Bergson, 1859~1941)은 자신의 주저 <창조적 진화>에서 "'없다'고 생각된 대상의 관념 속에는, 같은 대상이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의 관념보다 더 적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라고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 '없다'는 생각이 '있다'는 생각보다 무엇인가 하나가 더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54

'지갑이 없어',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애인과 헤어졌어' 등등. 우리는 매번 '없음'에 직면하며 당혹감과 비통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것은 물론 우리가 지갑이 주머니에 있었다는 기억을, 살아 계신 어머니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집착의 기원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에게 없어진 것이 소중한 것일수록 그것의 부재가 주는 고통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고통일 겁니다. 없다는 느낌은 그만큼 그것이 있었을 때 느꼈던 행복을 안타깝게도 더 부각시키는 법이니까요.  55, 58

"너희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너희에게서 주장자를 빼앗을 것이다." .. 부처를 꿈꾸는 마음이 강해지면, 이제 역으로 자신이 아직 깨달은 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하기 쉽습니다. 이런 절망이 다시 부처에 더 집착하도록 만들게 될 겁니다. .. 집착은 깨달은 자가 가지는 자유와는 무관한 것이니까요. .. 주장자가 있다는 오만도, 그리고 주장자가 없다는 절망도 모두 집착일 뿐입니다.  59



구지 화상은 무엇인가 질문을 받으면 언제나 단지 손가락 하나를 세울 뿐이었다. 뒤에 동자 한 명이 절에 남아 있게 되었다. 외부 손님이 "화상께서는 어떤 불법을 이야기하고 계시나요?"라고 묻자, 동자도 구지 화상을 본더 손가락을 세웠다. 구지 화상이 이런 사실을 듣고, 동자를 불러 칼로 그의 손가락을 세웠다. 구지 화상이 이런 사실을 듣고, 동자를 불러 칼로 그의 손가락을 잘랐다. 동자는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방 밖으로 나가오 ㅆ는데, 구지 화상은 동자를 다시 불렀다. 동자가 고개를 돌리자, 바로 그 순간 구지 화상은 손가락을 세웠다. 동자는 갑자기 깨달았다. 

구지 화상이 세상을 떠나면서 여러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는 천룡 스님에게서 '한 손가락 선'을 얻어 평생 동안 다함이 없이 사용했구나!" 말을 마치자 그는 입적했다. <무문관> 3칙. '구지수지(俱?竪指)'  60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자신의 본래면목을 실현하는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61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반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나는 '동일자의 반복'이고 다른 하나는 '차이의 반복'입니다.  63

<장자(莊子)>라는 책에는 '한단지보(邯鄲之步)'라는 고사가 하나 등장합니다. 초(楚)나라 사람이 세련되어 보이는 조(趙)나라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다가 조나라 스타일의 걸음걸이도 익히지 못하고 예전 초나라 스타일의 걸음걸이마저 까먹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 다른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것이 '동일자의 반복'이라면, 자기만의 걸음걸이를 걷는 것이 바로 '차이의 반복'에 해당. 그러니까 남을 흉내 내지 않는 것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자기만의 차이를 실현할 수 없다면, 우리는 항상 남을 흉애 내는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으니까 말입니다.  65



남전 화상은 동당과 서당의 수행승들이 고양이를 두고 다투고 있으므로 그 고양이를 잡아 들고 말했다. "그대들이여, 무엇인가 한다미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고양이를 살려 줄 테지만, 말할 수 없다면 베어 버릴 것이다." 수행승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전은 마침내 그 고양이를 베어 버렸다. 그날 밤 조주가 외출하고 돌아왔다. 남전은 낮에 있던 일을 조주에게 이야기했다. 바로 조주는 신발을 벗어 머리에 얹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자 남전은 말했다. "만일 조주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무문관> 14칙. '남전참묘(南泉斬猫)'  68

신발을 머리에 얹었다는 것은 조주가 집착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모자는 머리에 얹고 신발을 발에 신는 것을 영원불변한 진리이자 규칙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니까 결코 신발을 머리에 얹거나 모자를 발에 신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것이야말로 주인공이 아니라 습득한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 아닐까요. 반면 신발을 머리에 얹음으로써 조주는 신발과 모자와 관련된 기존의 통념, 혹은 기존의 생활양식을 경쾌하게 부정해 버립니다.  71-73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는 판단력을 '규정적 판단력(bestimmende Urteilskraft)'과 '반선적 판단력(reflektierende Urteilskraft)'으로 구분합니다. 모자는 머리에 쓰고 신발은 발에 신어야 한다는 기존의 규칙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규정적 판단력이라면, 기존의 규칙을 부정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내는 판단이 바로 반성적 판단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규정적 판단력이 규칙을 따르는 생각이라면, 반성적 판단력은 규칙을 창조하는 생각이라고 간단히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73



어느 스님이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묻자, 운문 스님은 "마른 또 막대기"라고 말했다. <무문관> 21칙, '운문시궐(雲門屎?)'  104

부처에게 의지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성불할 수 없습니다. 부처란 당당한 주인공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니까요.  107

깨달음은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아는 것이고, 해탈은 조연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109



동산 스님이 설법하려고 할 때, 운문 스님이 물었다. "최근에 어느 곳을 떠나 왔는가?" 동산은 "사도(査渡)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운문 스님이 "여름에는 어디서 있었는가?"라고 묻자, 동산은 "호남의 보자사(報慈寺)에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바로 운문 스님이 "언제 그곳을 떠났는가?"라고 묻자, 동산은 8월 25일에 떠났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운문 스님은 말했다. "세 차례 후려쳐야겠지만 너는 용서하마."

동산은 다음 날 다시 운문 스님의 처소로 올라와 물었다. "어저께 스님께서는 세 차례의 몽둥이질을 용서하셨지만, 저는 제 잘못이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운문 스님이 말했다. "이 밥통아! 강서로 그리고 호남으로 그런 식으로 돌아다녔던 것이냐!" 이 대목에서 동산은 크게 깨달았다. <무문관> 15칙. '동산삼돈(洞山三頓)'  120

깨달음을 얻은 스승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은 제자가 스스로 깨달음의 등불을 발화시키도록 격려하고 자극하는 것뿐입니다.  121

<임제록>에서 임제의 속내를 가장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는 그의 사자후가 아닐까 싶습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란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는 뜻입니다. ..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해탈한다는 것, 그래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일체의 외적인 권위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당당한 주인공이 된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122-123

여행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짜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진짜 여행입니다. 눈치가 빠르신 분은 무슨 말인지 금방 짐작하실 겁니다. 가짜 여행은 출발지도 있고 목적지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짜 여행을 하는 사람은 여행 도중에서도 항상 출발지와 목적지에 집착하느라 여행 자체를 즐길 수가 없을 겁니다. 서둘러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고, 그리고 서둘러 출발지로 되돌아와야만 하니까요. 당연히 여행 도중에서 만나게 되는 코를 유혹하는 수많은 꽃 내음들, 뺨을 애무하는 바람들, 실개천의 속삭임들, 지나가는 마을에서 열리는 로맨틱한 축제조차도 그는 향유할 수도 없을 겁니다. 아니, 그는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이런 사건과 사물들을 저주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목적지에 가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그에게 여행의 주인공은 그 자신이라기보다는 출발지와 도착지라고 해야 할 겁니다.

장자(莊子, BC369~BC289?)는 진짜 여행을 '소요유(逍遙遊)'라고 표현했던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소요(逍遙)'라는 말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한가하다'는 의미입니다. 장자도 진짜 여행이란 출발지와 목적지에 집착하지 않는 여행이라는 것을 알았던 셈입니다. 진짜 여행을 하는 사람은 항상 여행 도중에 자유롭게 행동합니다. 멋진 곳이면 며칠이고 머물지만, 그렇지 않은 곳이면 과감하게 떠납니다. 간혹 아름다운 새를 쫓다가 다른 곳으로 가기도 일쑤입니다. 그는 출발지와 목적지의 노예가 아니라, 맵ㄴ 출발지와 목적지를 만드는 주인이기 때문이지요. 알튀세르(ALouis Althusser, 1918~1990)눈 <유물론 철학자의 초상>이라는 글에서 이런 사람을 '유물론 철학자'라고 부릅니다. "그는 아주 늙었을 수도 있고, 아주 젊었을 수도 있다. 핵심적인 것은 그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언제나 그는 미국 서부영화에서 그런 것처럼 달리는 기차를 탄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기원), 어디로 가는지(목적) 전혀 모르면서."

인간의 삶을 여행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삶 자체가 바로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번밖에 없는 소중한 삶을 제대로 영위하려면 우리는 기원과 목적, 과거와 미래, 출발지와 목적지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출발지와 목적지를 염두에 두지 않으니, 우리가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자연스럽고 여유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임제 스님의 말처럼 모든 것이 참될 수밖에 없지요. 당연히 만나는 것마다 따뜻한 시선으로 모두 춤어 줄 수 있을 겁니다. 반면 목적지로 가느라, 혹은 출발지로 되돌아오느라 분주한 사람에게 어떻게 자신을 돌보고 타인을 돌보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자비로운 마음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무문관>의 열다섯번째 관문을 통화하면서 우리의 가슴에 임제의 가르침을 한 글자 한 글자 깊게 아로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수(隨)' '곳 처(處)', '될 작(作)', '주인 주(主)', '설 입(立)', '곳 처(處)', '모두 개(皆), '참될 진(眞)'. 수처작주, 입처개진!  125-127



옛날 석가모니가 영취산의 집회에서 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여 주었다. 이때 대중들은 모두 침묵했지만, 오직 위대한 가섭만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말했다. "내게는 올바른 법을 보는 안목, 즉 열반에 이른 미묘한 마음, 실상(實相)에는 상(相)이 없다는 미묘한 가르침이 있다. 그것은 문자로 표현할 수도 없어 가르침 이외에 별도로 전할 수밖에 없기에 위대한 가섭에게 맡기겠다." <무문관> 6칙, '세존염화(世尊拈花)'  130

평범한 사람에게도 그만의 세계가 있고, 깨달은 사람에게도 그만의 세계가 있는 법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자신의 세계를 부정하고 다른 진짜 세계, 혹은 초월적인 세계를 꿈꾸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집착입니다.  136-137



어느 스님이 물었다. "광명이 조용히 모든 세계에 두루 비치니..." 한 구절이 다 끝나기도 전에 운문 스님은 갑자기 말했다. "이것은 장졸 수재의 말 아닌가!" 그 스님은 "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운문 스님은 "말에 떨어졌군"이라고 말했다.

뒤에 사심 스님은 말했다. "자, 말해 보라! 어디가 그 스님이 말에 떨어진 곳인가?" <무문관> 39칙, '운문화타(雲門話墮)'  138

제도나 관습에 의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주인공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숭배하는 노예의 삶일 뿐이기에, 스님이 되어야만 부처가 된다는것은 불교에서는 용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139

 - 깨달은 삶을 살아가는 것과 깨달음에 대해 말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습니다. -

현대 영국의 철학자 라일(Gilbert Ryle, 1900~1976)도 자신의 논문 <실천적 앎과 이론적 앎>에서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해당 상황에 대한 지적인 명제들을 안다고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요리하거나 운전할 줄 모를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할 줄 아는 실천적 앎과 단지 이론적으로만 아는 이론적 앎을 명확히 구분한 이야기입니다.  143-144

말이 무엇이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진짜로 깨달았는지의 여부니까요. 진짜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의 횡설수설이 모두 오도송입니다. 반대로 깨닫지도 않은 사람이라면 그가 경전이나 선사의 말에 부합되는 말을 아무리 잘해도 그것은 모두 횡설수설에 불과한 법입니다.  145

깨달은 스승이 깨닫지 않은 제자를 강제로 깨달음에 이끌 수는 없습니다. 제자 스스로 깨닫도록 도울 수밖에 없습니다.  148



백장 화상이 설법하려고 할 때, 항상 대중들과 함게 설법을 듣고 있던 노인이 한 명 있었다. 설법이 끝나서 대중들이 모두 물러가면, 노인도 물러가곤 했다.그런데 어느 날 노인은 설법이 끝나도 물러가지 않았다. 마침내 백장 화상이 물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러자 노인은 말했다. "예.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옛날 가섭 부처가 계실 때 저는 이 산에 주지로 있었습니다. 당시 어느 학인이 제게 물었습니다.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因果)에 떨어지는 경우는 없습니까?' 저는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가 500번이나 여우의 몸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화상께서 제 대신 깨달음의 한마디 말을 하셔서 여우 몸에서 벗어나도록 해 주십시오." 마침내 노인이 "크게 수행한 살마도 인과에 떨어지는 경우는 없습니까?"라고 묻자, 백장 화상은 대답했다. "인과에 어둡지 않다." 백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노인은 크게 깨달으며 절을 올리면서 말했다. "저는 이미 여우 몸을 벗어서 그것을 산 뒤에 두었습니다. 화상께서 죽은 스님의 예로 저를 장사 지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백장 화상은 유나에게 나무판을 두들겨 다른 스님들에게 알리도록 했다. "공양을 마친 후 죽은 승려의 장례가 있다." 그러자 스님들은 서로 마주보며 쑥덕였다. "스님들이 모두 편안하고 열반당에도 병든 사람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이런 분부를 내리시는 것인지?" 공양을 마친 후 백장 화상은 스님들을 읶르로 산 뒤쪽 큰 바위 밑에 이르러 지팡이로 죽은 여우 한 마리를 끌어내어 화장(火葬)을 시행했다.

백장 화상은 저녁이 되어 법당에 올라가 앞서 있었던 사연을 이야기했다. 황벽 스님이 바로 물었다. "고인이 깨달음의 한마디 말을 잘못해서 500번이나 여우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매번 하나하나 틀리지 않고 말한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러자 백장 화상은 말했다. "가까이 앞으로 와라. 네게 알려 주겠다."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황벽 스님은 스승 백장의 뺨을 후려갈겼다. 백장 화상은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달마의 수염이 붉다고는 이야기하지만, 여기에 붉은 수염의 달마가 있었구나!" <무문관> 2칙, '백장야호(百丈野狐)'  154-155

죽어서 천국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인간이 살아 낼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려는 것, 이것이 바로 불교의 정신입니다.  155

나가르주나(Nagarjuna, 150?~250?). .. 불교 역사상 가장 탁월한 이론가입니다. 나가르주나는 흔히 제2의 싯다르타이자 동시에 대승불교 여덟 종파의 시조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

그의 주저 <중론(中論)>에 보면 "어떤 존재도 인연(因緣)으로 생겨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空)하지 않은 것이 없다."  156

그저 인연이 맞아서, 혹은 인연이 서로 마주쳐서 무엇인가 생기는 것이고, 반대로 인연이 다해서, 혹은 인연이 서로 헤어져서 무엇인가가 소멸할 뿐입니다. 그러니 무엇인가 생겼다고 기뻐하거나 무엇이 허무하게 사라진다고 해도 슬퍼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공'이라는 개념으로 나가르주나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것을 공하다고 보기에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157-158

핵심은 '있는 그대로'라는 말로 표현되는 불교의 강력한 현실주의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 대부분이 사태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무엇인가 색안경을 끼고 본다는 것을 전제하는 겁니다.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색안경으로 사태를 보는 생각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상견(常見 항상상 볼견)이고, 다른 하나는 단견(斷見 끊을단 볼견)입니다. 글자 그대로 상견이 모든 것에는 '불변하는 것(常)'이 있다는 견해(見)라면, 단견은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변해 '연속성이 없다(斷)'는 견해(見)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상견은 아주 강한 절대적인 인과론이고, 단견은 인과론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상견도, 단견도 버려야만 합니다. 그래야 있는 그대로 사태를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 원인과 결과는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도,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무관한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158-159



혜능 스님이 혜명 상좌가 대유령에까지 추적하여 자기 앞에 이른것을 보고 가사와 발우를 돌 위에 놓고 말했다. "이것들은 불법을 물려받았다는 징표이니 힘으로 빼앗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대가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가도록 하라!" 혜명은 그것을 들려고 했으니 산처럼 움직이지 않지 당황하며 두려워했다. 혜명은 말했다. "제가 온 것은 불법을 구하기 위한 것이지, 가사 때문은 아닙니다. 제발 행자께서는 제게 불법을 보여 주십시오." 혜능 스님이 말했다. "선(善)도 생각하지 않고 악(惡)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바로 그러한때 어떤 것이 혜명 상좌의 원래 맨얼굴인가?" 혜명은 바로 크게 깨달았는데,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혜명은 깨달았다는 감격에 눈물을 흘리며 혜능에게 절을 올리며 물었다. "방금 하신 비밀스런 말과 뜻 이외에 다른 가르침은 없으십니까?" 그러자 혜능은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말한 것은 비밀이 아니네. 그대가 스스로 자신의 맨얼굴을 비출 수만 있다면, 비밀은 바로 그대에게 있을 것이네." 혜명은 말했다. "제가 비록 홍인 대사의 문하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제 자신의 맨얼굴을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스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것이 마치 사람이 직접 물을 먹으면 차가운지 따뜻한지 스스로 아는 것과 같았습니다. 지금부터 스님께서는 저의 스승이십니다." 그러자 혜능은 말했다. "그렇다면 나와 그대는 이제 홍인 대사를 함께 스승으로 모시는 사이가 된 셈이니, 스스로를 잘 지키시게." <무문관> 23칙, '불사선악(不思善惡)'  164-165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긍정하지 못하는 순간, 인간은 외적인 무엇인가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권력과 지위를 추구하는 것도, 엄청난 부를 욕망하는 것도, 그리고 학위를 취득하려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165

"선과 악을 넘어. 이것은 적어도 좋음과 나쁨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니체의 주저 중 하나인 <도덕의 계보학>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과 악(Good & Evil)'과 '좋음과 나쁨(Good & bad)'을 구별해야만 합니다. 핵심은 '선과 악'의 기준과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선과 악'의 기준은 외적인 권위에 의해 부가되지만, '좋음과 나쁨'은 우리 자신의 삶에서 판단하는 겁니다. 외적인 권위로는 종교적 명령이나 사회적 관습을 들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선악이라는 관념은 우리 자신의 삶에 기원을 두기보다는 외적인 권위에 굴복하고 적응할 때 발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9

선악을 넘어서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는 맨얼굴을 회복한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삶의 주인공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을 니체는 초인(Ubermensch)이라고, 혜능은 부처라고 불렀던 겁니다.  170



동산(東山)의 법연 스님이 말했다. "석가도 미륵도 오히려 그의 노예일 뿐이다. 자, 말해 보라! 그는 누구인가?" <무문관> 45칙, '타시아수(他是阿誰)'  172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1908~2009)는 1955년에 출간된 자신의 주저 <슬픈 열대>에서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문자야말로 계급과 권력이 발생하는 기원이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문자가 출현하면서 문자를 독해할 수 있는 계층과 그렇지 않은 계층으로 사람들이 분화된다는 것입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오래된 위계적 분업 체계가 발생한 것도 사실 문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174



조주가 어느 암자 주인이 살고 있는 곳에 이르러 물어싿. "계십니까? 계십니까?" 암자 주인은 주먹을 들었다. 그러자 조주는 "물이 얕아서 배를 정박시킬 만한 곳이 아니구나"라고 말하고는 바로 그곳을 떠났다. 다시 조주가 어느 암자 주인이 살고 있는 곳에 이르러 물었다. "계십니끼? 계십니까?" 그곳 암자 주인도 역시 주먹을 들었다. 그러자 조누는 "줄 수도 있고 뺏을 수도 있으며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구나"라고 말하고는 그에게 절을 했다. <무문관> 11칙, '주감암주(州勘庵主)'  189

<서경(書經)>에도 나오지 않던가요. "성인도 망념을 가지면 광인이 되고, 광인도 망념을 이기면 성인이 된다."  195



어떤 스님이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묻자, 마조는 말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무문관> 33칙, '비심비불(非心非佛)'  197

마조의 개성을 이해하려면, 그가 자신의 스승 남악(南岳, 677~744)에게서 무엇을 배웠는지 알아야만 합니다. 남악 스님은 바로 육조 혜능(六祖慧能)의 직제자이지요. 마조와 나악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옵니다. 어느 날 남악이 마조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대는 좌선하여 무엇을 도모하는가?" 그러자 마조가 말했습니다. "부처가 되기를 도모합니다." 그러나 남악은 벽돌 한 개를 가져와 암자 앞에서 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기이한 풍경에 마조는 스승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벽돌을 갈아서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당황스런 얼굴로 마조는 물었다고 합니다. "벽돌을 간다고 어떻게 거울이 되겠습니까?" 그러자 남악은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벽돌을 갈아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좌선하여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마조의 이야기를 담은 <마조록(馬祖錄)>에 실려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198-199

더 좋다는 것을 추구하고 더 나쁘다는 것을 피한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외적 가치의 노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런 일체의 가치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아닐까요. .. 평생 남의 꽁무니마 ㄴ쫓아다녀서야 어떻게 자신의 의지대로 한걸음이라도 걸어 보는 경험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란 무엇인가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집착은 무엇인가에 집중해 마음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200

마조를 상징하는 명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평상시의 마음이 바로 부처가 되는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교종이 자랑하는 불겨엥 대한 지적인 이해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종 전통에서 강조하는 좌선도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그저 평상시의 마음만 유지할 수만 있다면, 바로 그 순간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203

물을 긷고 땔나무를 나를 때도, 제자들에게 몽둥이질을 할 때도, 최고 권력자를 만날 때도, 어느 경우나 '평'의 마음이 '지속'될 때 마침내 우리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204



어느 스님이 말했다. "저는 최근 이 사찰에 들어왔습니다. 스승께 가르침을 구합니다." 그러자 주조는 말했다. "아침 죽은 먹었는가?" 그 스님은 말했다. "아침 죽은 먹었습니다." 조주가 말했다. "그럼 발우나 씻게." 그 순간 그 스님에게 깨달음이 찾아왔다. <무문관> 7칙, '조주세발(趙州洗鉢)'  213

마음을 양파 껍질처럼 벗겨서 제거하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지박이라고 말입니다. 불교의 가르침, 즉 불법은 집착을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불법에 집착하는 것 자체도 집착일 수밖에 없습니다. ..  중요한 것은 내면이냐 외면이냐가 아닙니다. 핵심은 집착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217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순간, 아니면 무엇인가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219



운문 화상이 말했다. "세계는 이처럼 넓은데, 무엇 때문에 종이 울리면 칠조(七條)의 가사를 입는 것인가?' <무문관> 16칙, '종성칠조(種聲七條)'  221

벤야민의 주저 <아케이드 프로젝트(Arcades Project)>에는 "역사의 진보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진보도 항상 그때그때의 1보만이 진보이며 2보도 3보도 n+1보도 결코 진보가 아니다." ...

1보는 걷지 않고서 꿈꾸는 2보도, 3보도, 그리고 n+1보도 단지 백일몽에 불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현실적으로 말해 2보보다는 3보를, 3보다는 4보를, 아니 100보를 꿈꾸는 순간, 우리는 1보 내딛는 것의 중요성을 망각하게 됩니다.  222



'젊은 사람의 소중한 역할이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과 부딪히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런 가치도 없어!'라고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으며 강압적이라는 걸 스스로 확신하는 데 있다. - 바디우(Alain Badiou, 1937~)  231



위산 화상이 백장 문하에서 공양주의 일을 맡고 있을 때였다. 백장은 대위산의 주인을 선출하려고 위산에게 수좌와 함께 여러 스님들에게 자신의 경지를 말하도록 했다. "빼어난 사람이 대위산의 주인으로 가는 것이다." 백장은 물병을 들어 바닥에 놓고 말했다. "물병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너희 둘은 무엇이라고 부르겠는가!" 수좌가 먼저 말했다. "나무토막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백장은 이어 위산에게 물었다. 그러자 위산은 물병을 걷어차 넘어뜨리고 나가 버렸다. "수좌는 위산에게 졌구나!"라고 웃으면서 마침내 위산을 대위산의 주인으로 임명했다. <무문관> 40칙, '적도정병(?倒淨甁)'  232

모든 사람이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삶을 사는 것, 그래서 들판에 가득 핀 다양한 꽃들처럼 자기만의 향과 색깔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화엄세계입니다.  233

불교의 역사도 마찬가지지만 선종의 역사는 자기가 속한 학파를 극복하는 역사, 혹은 스승의 스타일을 부정하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단독화(singularization)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순간이 바로 깨달음에 이른 순간.  233

스승을 통쾌하게 짓밟고 자신의 길을 가는 것, 이것이 바로 다른 종교나 사상이 범접하기 힘든 불교만의 정신이자 스타일입니다.  234

삶의 주인공은 죽이 되는 밥이 되든 스스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 합니다.  238



흑암 화상이 말했다. "서쪽에서 온 달마는 무슨 이유로 수염이 없는가?" <무문관> 4칙, '호자무수(胡子無鬚)'  240

<이입사행론>은 깨달음에 들어가는(入) 두 가지(二)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입(理入)'이고, 다른 하나는 '행입(行入)'입니다. 이치로 드어가는 지적인 방법과 실천으로 들어가는 실천적인 방법, 이 두 가지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겁니다.  242



어느 스님이 노파에게 "오대산으로 가는 길은 어느 쪽으로 가면 되나요?"라고 묻자, 노파는 "똑바로 가세요." 스님이 세 발짝이나 다섯 발짝인지 걸어갔을 때, 노파는 말했다. "훌륭한 스님이 또 이렇게 가는구나!" 뒤에 그 스님이 이 일을 조주에게 말하자, 조주는 "그래, 내가 가서 너희들을 위해 그 노파의 경지를 간파하도록 하마"라고 이야기했다. 다음 날 바로 노파가 있는 곳에 가서 조주는 그 스님이 물었던 대로 묻자, 노파도 또한 대답했던 대로 대답했다. 조누는 돌아와 여러 스님들에게 말했다. "오대산의 노파는 내가 너희들을 위해 이제 완전히 간파했다." <무문관> 31칙, '조주감파(趙州勘婆)'  266

용기가 있어서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바로 용기가 있는 겁니다. 근기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상근기여서 부처가 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끈덕지게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상근기인 겁니다. 그러니까 산사에는 상근기가 많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산사라는 좋은 조건 때문에 부처가 되려는 열망이 쉽게 식지 않아서 사람들이 끈덕지게 수행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268-269



향엄 화상이 말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나무에 올랐는데, 입으로는 나뭇가지를 물고 있지만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붙잡지도 않고 발로고 나무를 밟지 않고 있다고 하자. 나무 아래에는 달마가 서쪽에서부터 온 의도를 묻는 사람이 있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가 질문한 것을 외면하는 것이고, 만일 대답한다면 나무에서 떨어져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무문관> 5칙, '향엄상수(香嚴上樹)'  282

불교에서는 행동을 업(業, Karman)이라고 합니다. 행동은 그에 걸맞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 바로 이것이 불교의 업보(業報, karma-vipaka)이론입니다. 타인에게 좋든 그르든 강한 결과를 남기는 업을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바로 삼업(三業)이지요. 몸으로 짓는 업을 신업(身業), 말로 짓는 업을 구업(口業), 생각으로 짓는 업을 의업(意業)이라고 부릅니다.  283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해야만 하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에도 침묵해야만 합니다. 침묵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침묵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286



어느 날 덕산 화상이 발우를 들고 방장실을 내려갔다. 이때 설봉 스니이 "노스님!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도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시나요?"라고 묻자, 덕산 화상은 바로 방상실로 되돌아갔다. 설봉 스님이 암두 스님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암두 스님은 말했다. "위대한 덕산 스님이 아직 '궁극적인 한마디의 말'을 알지 못하는구나!"

덕산 화상은 이 이야기를 듣고 시자(侍者)를 시켜 암두 스님을 불러 오라고 했다. 덕산 화상은 암두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는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암두 스님이 아무에게도 안 들리게 자신의 뜻을 알려 주자, 덕산 스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덕산 화상이 법좌(法座)에 올랐는데, 정말 평상시와 같지 않았다. 암두 스님은 승당 앞에 이르러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이제 노스님이 '궁극적인 한마디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기뻐할 일이다. 이후 세상 사람들은 그를 어쩌지 못하리라." <무문관> 13칙, '덕산탁발(德山托鉢)'  298

누구나 알고 있듯 불교는 자비를 슬로건으로 합니다. 보통 자비는 불쌍한 사람에게 베푸는 연민이나 동정의 뜻으로 쓰이지만, 산스크리트어를 살펴보면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됩니다. 우정을 뜻하는 '마이트리(maitri)'라는 말과 연민을 뜻하는 '카루나(karuna)'로 구성된 합성어가 바로 자비(maitri-karuna)니까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마이트리, 즉 우정 혹은 동료애라는 의미 아닐까요. 자비라는 말에는 근본적으로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라는 수직성보다는 동등한 두 사람이라는 수평성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사람일지라도, 그 역시 우리와 동등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299



오조 법연 화상이 말했다. "길에서 도(道)에 이른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응해서는 안 된다. 자, 말해 보라! 그렇다면 무엇으로 대응하겠는가?" <무문관> 36칙, '노봉달도(路逢達道)'  323

'왜 부처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응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깨달은 사람, 그러니까 주인공으로 삶을 당당히 영위하는 사람은 타인의 평판, 즉 타인의 말이나 침묵에 동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27



조산 화상에게 어느 스님이 물었다. "저 청세는 고독하고 가난합니다. 스님께서는 제게 무언가를 베풀어 주십시오." 조산 화상은 말했다. "세사리!" 그러자 청세 스님은 "네"라고 대답했다. 이어 조산 화상은 말했다. "청원의 백 씨 집에서 만든 술을 세 잔이나 이미 마셨으면서도, 아직 입술도 적시지 않았다고 말할 셈인가!" <무문관> 10칙, '청세고빈(淸稅孤貧)'  334

생면부지의 남이나 혹은 미워하는 사람에게 소중한 것을 주는 행위, 즉 보시는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보시라는 실천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엄청난 의지를 수반하는 수행 행위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사랑하든 그렇지 않든, 나와 관계가 있든 없든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것, 바로 그것이 보시이기 때문이지요.  337



점심 공양 전에 스님들이 법당에 들어와 앉자 청량(淸?)의 대법안 화상은 손으로 발을 가리켰다. 그때 두 스님이 함께 갓 발을 걷어 올렸다. 그러자 대법안 화상은 말했다. "한 사람은 옳지만, 다른 한 사람은 틀렸다." <무문관> 26칙, '이승권렴(二僧卷簾)'  343

세상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상태에 있지 않고, 최소한 세 가지 마음 상태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객(主客) 관계에 사로잡힌 마음 상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번데기는 맛있는 대상이고 자신은 번데기를 좋아하는 주체라고 믿는 사람이거나, 혹은 반대로 번데기는 혐오스러운 대상이고 자신은 번데기를 싫어하는 주체라고 믿는 사람의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들의 특징은 모두 자신의 과거 습관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을 아는 마음 상태를 가진 사람입니다. 번데기가 먹음직스럽거나 혐오스러운 것은 모두 자신의 과거 습관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이 경우에 속할 겁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메커니즘을 알고는 있지만, 그들은 현실에서 여전히 번데기를 좋아하거나 혐오하리라는 점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자신의 과거 습관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는 마음 상태를 가진 사람입니다. 번데기를 기호 식품으로도 혐오 식품으로도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깨달은 사람, 즉 부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344-345



남전 화상이 말했다.

"마음은 부처가 아니고, 앎은 도가 아니다." <무문관> 34칙, '지불시도(智不是道)'  351

참선과 같은 치열한 내성을 거쳤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불성을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스스로 불성을 실현하며 사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354

임제의 말처럼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야" 부처입니다. 홀로 있을때는 주인으로 살 수 있지만 타인과 만났을 때 바로 그 타인에게 휘둘리는 사람이 어떻게 부처일 수 있겠습니까. 결국 혼자 있을 때도 주인이고, 열 명과 함께 있을 때도 주인이고, 만 명과 함께 있을 때도 주인일 수 있어야 우리는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358

자신이 부처가 되었다고 확신하는 것과 실제로 부처가 되었다는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는 법입니다.  358



석상 화상이 말했다. "100척이나 된느 대나무 꼭대기에서 어떻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겠는가!" 또 옛날 큰스님은 말햇다. "100척이나 된느 대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는 사람은 비록 어떤 경지에 들어간 것은 맞지만 아직 제대로 된 것은 아니다. 100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서 반드시 한 걸음 나아가야, 시방세계가 자신의 전체 모습을 비로소 드러내게 될 것이다." <무문관> 46칙, '간두진보(竿頭進步)'  360

실연을 당한 사람만이 실연한 사람을 제대로 위로할 수 있고, 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 있게 된 사람만이 음악을 들으려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361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 1813~1855)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는 주관적이지만 모든 타인들에 대해서는 객관적,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객관적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정확히 자신에 대해서는 객관적이고 모든 타인들에 대해서는 주관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주저 중 한 권인 <사랑의 역사>에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 '주관적'이라는 말은 'subjective'를 번역한 겁니다. 잘 알다시피 철학에서 ' subject'는 주관이자 주체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에 대해서는 주관적"이라는 말은 자신을 하나의 주체로, 그리고 주인으로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객과적'이라는 뜻을 가진 'objective'는 사물이나 대상을 뜻하는 'object'라는 말에서 유래한 겁니다. 그러니까 "타인드에 대해서는 객관적"이라는 말은 타인을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 본다는 것을 말하는 셈이지요.  364-365

키에르케고르의 주장은 아주 단순합니다. 보통 우리는 자신을 주체로 생각하지만, 타인들은 하나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타인들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물건처럼 생각한다는 겁니다. 타인을 물건처럼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타인을 노예로 부리는 것에 다름 아니니까요. 당연히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타인도 나와 마찬가지로 주체이고 주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무에 대해 이야기했던 겁니다. "정확히 자신에 대해서는 객관적이고 모든 타인들에 대해서는 주관적일 수 있는 것이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고민하니까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고, 이것은 물론 타인을 주관으로, 즉 당당한 주체로 보아야만 가능한 겁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바로 이것이 사랑을 하려는 사람이 반드시 수행해야 할 임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365-366



외도(外道)가 세존에게 물었다. "말할 수 있는 것도 묻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것도 묻지 않으렵니다." 세존은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감탄하며 말했다. "세존께서는 커다란 자비를 내려 주셔서, 미혹의 구름에서 저를 꺼내 깨닫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예의를 표하고 떠나갔다.

아난이 곧 세존에게 물어보았다. "저 사람은 무엇을 깨달았기에 감탄하고 떠난 것입니까?" 그리저 세존은 말했다.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는 좋은 말과 같은 사람이다." <무문관> 32칙, '외도문불(外道問佛))'  376

지적인 허영에 빠진 학생에게는 그 허영을 충족시켜 줄 지적인 대답을 해 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학생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생과 지적인 대화를 한다는 허영심만 가중시킬 테니까요. 제가 아무리 친절하게 대답을 해도 그 학생은 제 이야기를 그냥 지적으로 납득할 뿐, 자신의 삶으로 흡수하지 않을 겁니다.  378

삶의 차원에서 매순간 중요한 문제는 오직 하나일 뿐입니다. 만일 두 가지의 문제가 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삶의 차원이 아니라 머리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자신의 삶을 살아 내지 못하고, 그저 관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379

무문 스님은 서른두 번째 관무을 마무리하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계단이나 사다리를 밟지 않아야 하고, 매달려 있는 절벽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계단이나 사다리에 의존해 절벽에 매달려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설 수가 없을 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계단이나 사다리가 우리의 당당한 삶을 막고 있었던 셈입니다. 무언가에 의존한다는 것, 그건 우리가 그것에 좌지우지된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도움이 되어도 그것이 외적인 것이라면, 어느 순간 반드시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만 합니다. .. 계단과 사다리로 상징되는 일체의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온몸으로 깨닫지 않는다면, 그건 깨달음일 수도 없는 법이니까요. 깨달음은 스스로 주인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82



어떤 스님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법(法)이 있으신가요?"라고 묻자, 남전 화상은 "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스님은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법인가요?" 남전 화상은 말했다. "마음(心)도 아니고, 부처(佛)도 아니고, 중생(物)도 아니다." <무문관> 27칙, '불시심불(不是心佛)'  400

디테일에 빠지지 말고, 그 핵심을 보아야 합니다.  401



오조 법연 화상이 말했다. "비유하자면 물소가 창살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머리, 뿔, 그리고 네 발굽이 모두 창살을 통과했는데, 무엇 때문에 꼬리는 통과할 수 없는 것인가?" <무문관> 38칙, '우과창령(牛過窓櫺)'  409

창이 있는 방을 생각해 보세요. 그곳에 자유를 잃고 갇혀 있는 물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중 한 마리는 남달랐습니다. 구속에 적응하기보다는 구속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으니까요. 자유를 되찾으려는 열망과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어서 인지, 그 물소는 창살을 지나 바깥으로 나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자유의 대로가 펼쳐진 겁니다. 이제 그냥 아무 곳이나 뛰어가면 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몸통이 창살을 통과했다면, 꼬리는 어렵지 않게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요. .. 무엇일까요. 창살을 통과하지 않은 그 물소의 꼬리는? 자유를 되찾은 그 물소는 혼자서 자유를 만끽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자신이 탈출한 방에는 아직도 동료 물소들이 갇혀 있으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물소들이 탈출할 수 있을 때까지, 그는 탈출구를 동료들에게 알려 주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니 꼬리를 창살에 남겨둘 수밖에요. 이것이 자비의 마음, 다시 말해 이타의 마음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416



도솔 종열 화상은 세 가지 관문을 설치해, 배우려는 사람에게 물었다. "깨달은 사람을 찾아 수행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불서을 보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대의 불성은 어디에 있는가? 자신의 불성을 알았다면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어떻게 그대는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하겠는가?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다면 바로 가는 곳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육신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가 흩어질 때, 그대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무문관> 47칙, '도솔감관(兜率三關)'  418

<무문관>의 48개의 관문을 지키고 있는 선사들은 가혹하게 자신이 들고 있는 등불을 꺼 버리면서 제자들이 스스로 불을 켜기를 촉구합니다.  420

새끼들을 절벽에 던지는 호랑이와 같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천 길이나 되는 낭떠러지로 제자들을 무자비하게 밀어붙이니까요.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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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것의 테러


오늘날 타자의 부정성은 같은 것의 긍정성에 밀려나고 있다. .. 박탈이나 금지가 아니라 과잉소통과 과잉소비가, 배제와 부정이 아니라 허용과 긍정이 사회체를 병들게 한다.  7


타자의 폭력만 파괴적인 것이 아니다. 타자의 추방은 아주 다른 파괴 과정을, 즉 자기파괴를 작동시킨다. 타자의 부정성을 거부하는 시스템은 자기파괴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이러한 폭력이 변증법은 보편적으로 작동한다.

같은 것의 폭력은 그 긍정성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다. 같은 것의 창궐은 스스로를 성장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어떠 ㄴ특정한 지점을 넘어서면 생산은 더 이상 생산적이지 않고, 파괴적이며, 정보는 더 이상 정보를 주지 않고 왜곡하며, 소통은 더 이상 소통적이 아니라 그저 누적적이다.

오늘날에는 지각 자체도 "빈지워칭(Binge Watching)"즉 혼수상태에 이르도록 뚫어지게 보기의 형태를 취한다. 이는 어떠한 시간 제한도 없이 비디오와 영화를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 소비자들의 취향에 아주 잘 맞는,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드는 영화와 시리즈 들이 지속적으로 소비자들에게 제공된다. 소비자들은 언제나 새로운 같은 것을 섭취하고 소비가축처럼 살이 찐다. 혼수상태에 이르도록 뚫어지게 보기는 오늘날의 지각 방식 전반으로 일반화될 수 있다. 같은 것의 창궐은 악성종양이 혼수상태처럼 작동한다. 그것은 어떠한 면역 방어의 방해도 받지 않는다.  8


경색은 같은 것의 과잉, 시스템의 비만으로 인해 일어난다. 경색은 감염적이 아니라 과지방적이다. 지방에 대해서는 항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9


같은 것은 형태가 없다. 같은 것에는 변증법적인 긴장이 없기 때문에 서로 무관심한 병존, 서로 구별되지 않는 창궐하는 덩어리가 생겨난다.  9


오늘날 같은 것의 테러는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산된다. 우리는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면서도 하나의 경험도 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인지하면서도 어떤 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정보와 데이터를 쌓으면서도 어떤 지식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체허모가 흥분을 애타게 추구하면서도 언제나 같은 상태로 남아 있다. 친구와 팔로워를 쌓으면서도 어ㄸㄴ 타자도 만나지 못한다. 사회 매체들은 사회적인 것의 절대적인 소멸 단계를 보여준다. 

전면적인 디지털 네트워크와 소통은 타자와의 만남을 쉽게 해주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히려 낯선 자와 타자를 지나쳐 같은 자와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발견하도록 하고, 우리의 경험 지평이 갈수록 좁아지게 만든다.  10


타자의 부정성과 변모가 엄밀한 의미에서의 경험을 만들어낸다. 어떤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를 기습하는 것, 우리를 맞히는 것, 우리를 덮치는 것,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 우리를 변모시키는 것"을 말한다. 경험의 본질은 고통이다. 그러나 같은 것은 고통을 주지 않는다. 오늘날 고통은 같은 것을 지속시키는 '좋아요'에 밀려난다.

정보는 단순하게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에 반해 엄밀한 의미에서의 지식은 느리고 긴 과정이다. 지식은 아주 다른 시간성을 지닌다. 지식은 성숙한다. 성숙은 오늘날 우리가 점점 잃어버리고 있는 시간성이다.  11


정보들을 가장 대규모로 모아놓은 빅데이터에도 지식은 거의 들어 있지 않다. 빅데이터는 상관성을 조사하는 데 사용된다. 상간성이란 A가 발생하면 흔히 B도 발생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알지 못한다. 상관성은 인과관계, 즉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조차 밝혀내지 못하는 가장 원시적인 지식의 형태다. 그것은 그렇다. 왜라는 질문은 제기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것도 파악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식은 파악하기다. 빅데이터는 이렇게 사유를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은 그렇다'에 만족한다.

사유는 아주 다른 것으로 진입할 수 있다. 사유는 같은 것을 중단시킬 수 있다. 그래서 사유는 사건성을 지닌다. 이에 반해 계산은 같은 것의 무한한 반복이다. 사유에 반해 계산은 어떤 새로운 상태도 낳을 수 없다. 계산은 사건을 모른다. 반면, 진정한 사유는 사건적이다.  11-12


엄밀한 의미에서의 인식도 변모를 낳는다. 인식은 새로운 의식의 상태를 산출한다. 인식의 구조는 구원의 구조아 비슷하다. 구원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구원은 구원이 필요한 자를 완전히 다른 존재 상태로 옮겨 놓는다.  12-13


사건에는 부정성이 내재한다. 사건은 현실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새로운 세계를, 있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낳기 때문이다. 사건은 갑자기 모든 것이 아주 새로운 빛 속에서 나타나도록 한다. 하이데서(Martin Heidegger)가 말하는 "존재망각(Seinsvergessenheit)"이란 바로 이 사건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14


오늘날 네트는 모든 다름, 모든 낯섦이 제거된 특별한 공명 공간으로, 메아리의 방으로 변하고 있다. 진정한 공명은 타자의 가까움을 전제로 한다. 오늘날 타자의 가까움은 같은 것의 무간격에 밀려난다. 지구적인 소통을 같은 타자 혹은 다른 같은 자만을 허용한다.

가까움에는 그 변증법적인 상대방으로서 멂이 새겨져 있다. 멂의 제거는 가까움을 키우지 않고, 오히려 가까움을 파괴한다. 가까움 대신 완전한 무간격이 생겨난다. 가까움과 멂은 서로 얽혀 있다. 변증법적인 긴장이 양자를 결합시킨다. 사물들이 그 대립물, 즉 그 자신의 타자에 의해 활력을 얻는다는 것이 이 긴장의 핵심이다. 무간격과 같은 단순한 긍정성에는 이런 활력을 주는 힘이 없다. 가까움과 멂은 동일자와 타자처럼 서로를 변증법적으로 매개한다. 그러므로 무간격도, 같은 것도 활력이 없다.  15


디지털 무간격은 가까움과 멂의 모든 변주 형태들을 제거한다. 모든 것이 똑같이 가깝고, 똑같이 멀다. ... 아우라에는 타자, 낯선 자, 수수께끼의 부정성이 내재한다. 디지털 투명사회는 세계의 아우라를 없애고, 신비를 없앤다.  16


타자의 추방은 충만함의 비만한 공허를 낳는다. 같은 것이 질주하는 정지 상태를 초래하는 과잉가시성, 과잉소통, 과잉생산, 과잉소비는 외설적이다. "같은 것을 같은 것과 연결하는 것"은 외설적이다. .. 

유혹의 양태는 성과와 생산에 대립되는 양태로서의 유희다. 오늘날에는 유희조차 생산 형태로 바뀌고 말았다. 노동이 게임화되는 것이다.  17


클론들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모두가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18




세계적인 것의 폭력과 테러리즘


세계화는 모든 것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것, 비교할 수 있는 것(vergleichbar)으로, 따라서 같은 것으로 마드는 폭력적 힘이 있다. 전면적인 같게-만들기(Ver-Gleicben)는 궁극적으로 의미의 소멸을 낳는다. .. 같은 것이 같은 거소가 만나는 지점에서 세계적인 것은 최고 속도에 도달한다.  21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이미 세계화의 광기가 테러리스트라는 광인을 만들어 낸다고 지적한 바 있다.  22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일반적인 교환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단독적인 것을 쓸어 없앤다. 테러리즘은 세계적인 것에 맞서는 단독적인 것의 테러다. 어떤 교환도 거부하는 죽음은 단독적인 것 그 자체다. 죽음은 테러리즘과 함께 시스템 속으로 난폭하게 침입한다. 시스템 안에서 삶은 생산과 성과로 전체화된다. 죽음은 생산의 종말이다. 테러리스트들의 죽음 예찬과 삶을 그저 삶으로서 무조건 연장하려고만 하는 오늘날의 건강 히스테리는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다. "너희는 삶을 사랑하고, 우리는 죽음을 사랑한다"라는 알카에다의 구호는 바로 이런 체계적인 연관을 지적하고 있다. 22-23


신자유주의는 세계적 차원에서 엄청난 불의를 낳고 있다. 착취와 배제는신자유주의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신자유주의는 체제비판적인 혹은 체제에 부적합한 사람들을 달갑지 않은 인물들로 확인하고 배제하는 "반옵티콘(banopticon)", 즉 추방의 옵티콘을 구축한다. 판옵티콘(panopticon)은 훈육을 위해 작동하지만, 반옵티콘은 안전을 위해 작동한다. 서양의 복지 지역 안에서조차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철폐한다.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의 창시자인 알렉산더 뤼스토우(1885~1963, 독일의 사회학자, 경제학자)는 이미 신자유즈의적 시장법칙에만 맡겨지면 사회는 반인간적으로 변하고, 사회적인 배척을 야기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그는 연대와 공동체의식을 산출하는 "생명정치(Vitalpolitik)"로 신자유주의를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24-25


자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외국인에대한 적대적 태도로 바뀐다. 자신에 대한 걱정은 외국인에대한 증오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증오로도 표현된다. 두려움의 사회와 증오의 사회는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다.  ... 

이슬람 테러리스트와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는 실제로는 적이 아니라 형제다. 양자는 동일한 발생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25


오늘날, 같은 것을 전체화하는 세계적인 것의 지배적인 질서 안에는 사실상 같은 다른 것 혹은 다른 같은 것밖에 없다. 새로 설치된 경계 울타리들 주변에서는 타자에 대한 환상이 생겨나지 않는다.  26


이주자들과 난민들도 실제로는 실재하는 위협, 현실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타자도, 낯선 자도 아니다. 이들은 오로지 상상적인 것 속에만 있다. 이주자들과 난민들은 오히려 부담으로 여겨진다. 이웃이 될 수도 잇는 그들이 일으키는 감정은 분노와 질투인데, 이는 공포와 두려움, 역겨움과는 달리 진정한 면역 반응이 아니다. 외국인에게 적대적인 대중은 북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반감을 느끼지만, 바로 이 대중이 북아프리카로 패키지여행을 떠난다.  27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라(Protect me from what I want)"라는 제니 홀저(미국의 개념미술가)의 구호는 긍정성의 폭력이 지닌 탈면역적인 성질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28


신자유주의는 절대 계몽주의의 종착지가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이성에 의해 인도된 것이 아니다. 바로 신자유주의는 광기가 테러리즘과 민족주의의 형태로 분출되는 파괴적 긴장을 산출한다. 신자유주의는 자신을 자유로 내세우지만, 이 자유는 광고다. 세계적인 것은 오늘날 보편적 가치들까지 잠식하고 있다. 그 결과 자유 자체가 착취당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실현한다는 망상에 빠져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한다. 자유의 억압이 아니라 자유의 착취가 생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으의 비열한 기본 논리다.

세계적인 것의 폭력에 맞서 우리는 보편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에 의해 잠식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따라서 단독적인 것에도 자신을 열어놓는 보편적 질서를 반드시 만들어내야 한다. 세계적인 것의 시스템에 폭력적으로 침입하는 단독적인 것은 대화를 허락하는 타자가 아니다. 테러리즘은 대화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악마적이다. 멂과 다름이 허용된 가까움 속에 머무르는 화해된 상태에서만 단독적인 것은 악마성을 버릴 것이다.  28-29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실제의 세계 전쟁처럼 사망자들과 난민들을 만들어낸다. 상업정신이 강요하는 평화는 한시적일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반옵티콘으로서의 복지 지역 혹은 복지의 섬은 경계를 표시하는 울타리들과 난민수용소와 전쟁터로 둘러싸여 있다.  30


이성에 의해 세워진 영구 평화에 대한 칸트의 관념은 무조건적인 "환대"에 대한 요구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이에 따르면 모든 이방인은 다른 나라에서 체류할 권리를 지닌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평화로운 태도를 유지하는 한" 적대적으로 취급받지 않고 머무를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지구상의 어떤 장소에 있을 권리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갖고 있지 않다." 환대는 유토피아적 표상이 아니라 이성이 강요하는 관념이다. "앞선 조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는 인간애가 아니라 권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환대(손님으로 머무를 권리)는 이방인이 타지 사람의 땅에 도착했다는 이유로 타지 사람에 의해 적대적으로 취급받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환대는 "법에 대한 공상적이거나 과장된 표상 방식이 아니라, 공적인 인권 자체를 위해, 따라서 영구 평화를 위해 국내법과 국제법의 성문화되지 않은 법전을 보충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킬 때만 우리는 영구 평화를 향해 지속적으로 접근해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환대는 자기 자신에 도달한 보편적 이성의 가장 높은 표현이다. 이성은 동질화하는 힘을 행사하지 않는다. 이성은 친절함을 통해 타자를 그 타자성 안에서 인정하고 환영할 수 있게 된다. 친절함은 자유를 의미한다.

환대의 관념은 이성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무언가를 제시한 다.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환대가 "너무나 풍요로운 영혼"의 표현이라고 했다. 이런 영혼은 모든 단독적인 것들을 자신 안에 머물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생성 중인 것, 떠도는 것, 추구하는 것, 덧없는 것을 나는 여기서 환영한다! 이제 환대는 나의 유일한 친교관계다." 환대는 화해를 약속한다. 미적으로 그것은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낯선 것에 대한 우리의 선의와 인내심과 공평함과 온유함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된다. 이 보상은 낯선 것이 천천히 자신의 베일을 벗고, 새롭고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음으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이루어진다-이것이 우리의 환대에 대한 그의 감사다." 아름다움의 정치는 환대의 정치다.  31-33


한 사회의 문명화 정도를 보여주는 척도는 바로 이 사회의 환대, 나아가 친절함이다. 화해는 친절함을 뜻한다.  33




진정성의 테러


오늘날 진정성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진정성은 신자유주의의 모든 광고들과 마찬가지로 해방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진정하다는 것은 사전에 만들어진, 외부에서 정해진 표현과 태도의 틀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말한다. 진정성은 오직 자기 자신과만 같을 것, 오로지 자신을 통해서만 자신을 정의할 것, 자기 자신의 저자이자 원작자일 것을 강요한다. 진정성의 명령은 자신에 대한 강제를 만들어낸다. 영구적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자신을 듣고, 자신을 엿보고, 자신을 포위하라는 강제 말이다. 그럼으로써 진정성의 명령은 나르시시즘적인 자기관계를 첨예화한다.

진정성의 강제는 자아로 하여금 자신을 생산하도록 강요한다. 진정성은 궁극적으로 자아의 신자유주의적 생산 형태다. 진정성은 만인을 자기 자신의 생산자로 만든다.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의 자아는 자신을 생산하고, 자신을 실행시키고, 자신을 상품으로 내놓는다. 진정성은 판매 논리다. 

오로지 자신하고만 같고자 하는 진정성의 노력은 타인들과의 영구적인 비교를 낳는다. 같게0만들기의 논리는 다름을 같음으로 바꾼다. 그 결과 다름의 징정성은 사회적인 동형성을 고착시킨다. 이 진정성은 시스템과 일치하는 차이만을, 다시 말해 잡다함만은 허용한다. 신자유주의적 용어로서의 잡다함은 착취할 수 있는 자원이다. 이런 잡다함은 어떠한 경제적 활용도 거부하는 상이성과 대립한다.

오늘날에는 누국나 타인들과 다르고자 한다. 그러나 이 타인과 다르고자 함 속에서 같은 것이 계속된다. 이는 보다 높은 차원의 동형성이다. 같음은 다름을 관통하여 계속 자신을 고수한다. 다름의 진정성은 오히려 억압적인 획일화보다 더 효과적으로 동형성을 관철시킨다.  34-35


신자유주의적 생산 전략으로서 진정성은 상품화할 수 있는 차이들을 산출한다. 이를 통해 진정성은 자신을 물질화하는 상품들의 다양성을 증가시킨다. 개인들은 자신의 진정성을 무엇보다 소비를 통해 표현한다. 진정성의 명령은 자율적인 주권자로서의 개인을 형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명령은 상업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다.

진정성의 명령은 나르시시즘적인 강제를 낳는다. 나르시시즘은 병적인 것과는 무관한, 건강한 자기애가 아니다. 건강한 자기애는 타자에 대한 사랑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나르시시즘은 타자를 보지 못한다. 타자는 에고가 이 타자 안에서 자신을 알아볼 때까지 계속 왜곡된다.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는 세계를 오로지 자신의 음영으로만 지각한다. 그 불행한 결과가 타인의 소멸이다. 자신과 타인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자신이 용해되어 불명료해진다. 자아는 자신 안에서 익사한다. 이에 반해 안정된 자아는 타인에 직면할 때 비로소 형성된다. 이와 달리 과도하고 나르시시즘적인 자기연관은 공허감을 낳는다.  37-38


자존감은 나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다. 이를 위해서 나는 나를 사랑하고, 칭찬하고, 인정하고, 높이 평가해주는 타자를, 충족을 제공해주는 기관으로서의 타자를 필요로 한다. 인간의 나르시시즘적 고립화, 타자의 도구화, 전면적인 경쟁은 충족이 생겨날 수 있는 환경을 파괴한다. 나를 확인해주고 인정해주는 시선이 사라지고 있다. 안정된 자존감을 갖기 위해 나는 내가 타인들에게 중요한 사람이며, 타인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표상을 필요로 한다.  40


모든 부정성의 제거가 오늘날 사회의 특징이다. 소통 또한 매끄러워져서 서로 만족감을 교환하는 행위가 된다. 슬픔처럼 부정적인 감정에는 어떤 언어도, 어떤 표현도 제공되지 않는다. 타인으로 인한 상처의 모든 형태가 회피된다. 그러나 이는 자기상해로 부활한다. ..

알랭 에랭베르(Alain Ehrenberg)에 따르면 우울증이 증가하는 것은 사람들이 갈등 관계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오가와 최적화를 중시하는 오늘날의 문화는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허용하지 않는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 때문이다. 오늘날의 성과주체는 오직 두 가지의 상태만을 알고 있다. 기능하기와 실패하기다. 이 점에서 성과주체는 기계와 비슷하다. 기계 또한 갈등을 알지 못한다. 기계는 오류없이 기능하거나, 아니면 고장이 났다.

갈등은 파괴적이지 않다. 갈등에는 건설적인 측면이 있다. 갈등을 통해서야 비로소 안정된 관계와 정체성이 성립된다. 사람은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하는 가운데 성장하고 성숙한다. 생채기를 내는 행윈느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갈등 처리 과정 없이, 누적된 파괴적 긴장을 신속하게 완화시켜준다는 점에서 유혹적이다. 생채기로 인한 화학 과정이 신속하게 긴장을 완화한다고 한다. 몸이 스스로 산출하는 마약이 뿌려진다는 것이다. 이 마약은 항우울제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항우울제 또한 갈등 상태를 억압함으로써 우울한 성과주체가 신속하게 기능하도록 만든다.  41-42


셀카 중독도 자기애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셀카 중독은 고립된 나르시시즘적 자아의 공회전일 뿐이다. 내면의 공허에 직면하여 사람들은 자신을 생산하려고 헛되이 노력한다. 그러나 공허만 재생산된다. 셀카는 공허한 형태의 자아다. 셀카 중독은 공허감을 강화한다. 자기애가 아니라 나르시시즘적인 자기관계가 셀카 중독을 낳는다. 셀카는 텅 빈, 불안한 자아의 매끄러운 표면이다. 고통스런 공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오늘날 면도날을 들거나 스마트폰을 쥔다. 셀카는 공허한 자아를 잠시 동안 은폐하는 매끄러운 표면이다. 그러나 셀카를 뒤집으면 피가 흐르는 상처들로 가득한 뒷면을 보게 된다. 셀카의 뒷면은 상처들이다  42-43




두려움


두려움은 아주 다른 것의 부정성을 전제로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두려움은 존재자의 전적인 타자로서 경험되는 무 앞에서 생겨난다. 존재자의 전적인 타자로서 경험되는 무 앞에서 생겨난다.  45


"세인(das man, 世人 대(代, 대신할대)세 사람인)"은 사회적인 동형성을 체현한다. 세인은 우리가 어떻게 살고, 행동하고, 지각하고,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는지를 정한다. "우리는 세인이 향유하는 대로 향유하고 즐긴다. 우리는 문학과 예술에 대해 세인이 보고 판단하는 대로 읽고, 보고, 판단한다. (...) 우리는 세인이 괘씸하게 생각하는 것을 '괘씸하다'라고 생각한다." "세인"인 독재는 현존재로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으로부터, 고유성으로부터 소외시킨다. "이 안정화된, 모든 것을 ' 이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자기-같게 하기 속에서 현존재는 소외로 빠져든다. 이 소외 속에서 현존재에게는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이 은폐된다." 익숙한 이해 지평의 붕괸느 두려움을 낳는다. 두려움 속에서 비로소 현존재에게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의 길이 열린다.

지금은 "세인"의 특징인, "모든 타인이 다른 타인과 같은" 획일성이 지배하지 않는다. 획일성은 생각들과 선택지의 잡다함에 밀려난다. 잡다함은 제체 순응적인 차이들만 허락한다. 잡다함은 소비할 수 있게 만든 다름이다. 이 잡다함은 획일성보다 더 효과적으로 같은 것을 지속시킨다. 가상적이고 피상적인 다양성으로 인해 우리는 같은 것의 체계적인 폭력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양성과 선택 가능성은 실제로는 없는 다름이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한다.  46-47


하이데거가 말하는 "고유성"은 진정성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심지어 진정성과 대립하기까지 한다. <존재와 시간>의 용어에 따르면 오늘날의 진정성은 "비고유성"의 한 형태다. 고유성은 일상성의 붕괴를 전제로 한다. 안정화하는 세인의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현존재는 집 바깥의 섬뜩함에 직면한다. 이에 반해 다름의 진정성은 일상성의 질서 속에서 발생한다. 진정한 자신은 자신의 상품 형태다. 그는 소비를 통해 자신을 실현한다.  47


정신은 "부정적인 것을 똑바로 쳐다보고, 부정 적인 것의 곁에 머무를 때만 이 힘"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부정적인 것 곁에 머무르는 대신 그것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을 고수하면 같은 것만 재생산된다. 부정성의 지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성의 지옥도 있다.  49


익숙한 세계으 부오기가 일으키는 두려움은 깊은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깊은 권태와 비슷하다. 얕은 권태는 불안하게 "바깥을 향해 안달한다." 깊은 권태에 빠질 때는 현존재가 모조리 우리로부터 분리된다...

깊은 권태는 지금은 나는 권태를 느낀다는 상태 속에 방치되고 있지만 현존재를 움켜잡을 수도 잇는 저 행동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깊은 권태는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움켜잡으라고, 다시 말해 행동하라고 현존재에게 요구한다. 깊은 권태에는 요구하는 성질이 있다. 그것은 말하낟. 그것은 목소리가 있다. 과잉활동에 수반되는 오늘날의 권태에는 언어가 없다. 이 권태는 침묵한다.  50


오늘날은 존재론적 무차별성이 지배하고 있다. 사유도 삶도 자신의 내재성의 차원을 스스로 보지 못하게 하고 있다.  51


오늘날의 두려움은 병원학적으로 아주 다른 원인을 갖는다. .. 그것은 일상적인 동의 안에서 생겨난다. 그것은 일상적인 두려움이다. 그것의 주체는 "세인"이다. "자아는 타자를 기준으로 삼고, 더 이상 보조를 맞출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게 된다. (...) 타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내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표상이 이렇게 사회적 두려움의 원인이 된다. .. 

하이데거가 말하는,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과 고유한 자기존재를 택할 결단을 내린 현존재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지향한다. .. 내부 지향은 타인과의 영구적인 비교를 필요 없게 만든다.  52-53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실패와 좌절과 배척에 대한 두려움,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결정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자신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리라는 두려움 등 여러 막연한 두려움에 고통받고 있다. 이 두려움은 타인들과의 지속적인 비교로 인해 강화된다. 이 두려움은 전적인 타자, 섬뜩한 것, 무 앞에서 느끼게 되는 수직적인 두려움과 반대로 수평적인 두려움이다.  53


신자유주의의 기만적인 논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두려움이 생산성을 높인다.  54




문턱


두려움은 문턱에서도 깨어난다. 두려움은 문턱에서 생기는 전형적인 느낌이다.문턱은 미지의 것으로 넘어가는 이행의 장소다. 문턱 너머에서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 상태가 시작된다. 그래서 문턱에는 항상 죽음이 새겨져 있다. 모든 이행의 이식들, 이른바 통과의례(rites de passage)에서 우리는 한 번 죽고, 문턱의 저편에서 다시 태어난다. 여기서 죽음은 이행으로 경험된다. 문턱을 넘어가는 사람은 자신을 변신에 내맡긴다. 변신의 장소로서 문턱은 고통을 준다. 문턱에서 고통의 부정성이 내재한다. "문턱의 고통을 느낀다며느 너는 관광객이 아니다. 네게는 이행이 일어날 수 있다." 오늘날 문턱이 많은 이행은 문턱이 없는 통로에 밀려난다. 인터넷 속에서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관광객이다. 우리는 더 이상 문턱에 거주하는 호모 돌로리스(homo doloris, 슬픔의 인간)가 아니다. 관광객은 변신과 고통을 수반하는 경험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상태에 머무른다. 그들은 같은 것의 지옥을 여행한다.  55-56


투명성의 강젠느 모든 시각적 빈틈과 정보의 빈틈을 제거하고, 모든 것을 전면적인 가시성에 내놓는다. 그리고 후퇴와 보호의 공간들을 모조리 제거한다. 그 결과,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위협적일 만큼 가깝게 다가온다. 우리를 차단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는 우리 자신이 세계적인 네트워크 안에 있는 통로에 지나지 않는다. 투명성과 과잉소통은 우리를 보호해주는 모든 내면성은 앗아간다. 실로 우리는 이 내면성을 자발적으로 양도하고 우리 자신을 디지털 네트워크에 내던진다. 그리고 이 네트워크는 우리를 관통하고, 투광(透光 통할투 빛광)하고, 우리에게 구멍을 숭숭 뚫어 놓는다. 디지털 과잉조명ㅇ과 노출은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이 과도함으로 인한 잠재적인 두려움을 낳는다. 같은 것의 투명한 지옥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계속 강화되어가는 같은 것의 소음은 두려움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57




소외

(독일어의 소외(Entfremdung), 이방인(der Fremde), 낯섦(die Fremheit)은 모두 '낯설다'는 뜻의 형용사 fremd에서 파생된 말이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소설 <이방인>은 낯섦을 존재와 실존의 근본적인 감정으로 서술한다. 인간은 세계에 대해 이방인이며, 인간들 사이에서 이방인이며, 나아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방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는 언어 창살에 의해 타인들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낯섦은 말없음으로 나타난다. 각자는 언어 창살로 타인들로부터 격리된 감방에 갇혀 있다 이 낯섦은 오늘날의 과잉소통 시대에도, 안락함의 지대 혹은 백화점으로서의 세계에도 속하지 않는다.  58


오늘날 우리는 이방인의 부정성이 제거된 안락함의 지대에서 산다. 좋아요가 이곳의 구호다. 디지털 화면은 점점 더 우리를 낯선 것, 섬뜩한 것의 부정성으로부터 차단한다. 오늘날 낯섦은 정보와 자본의 순환을 가속화하는 데 장애가 되므로 달갑지 않게 여겨진다. 가속화 강제는 모든 것을 같은 것으로 획일화한다. 과잉소통의 투명한 공간은 비밀도, 낯섦도, 수수께끼도 없는 공간이다.

소외로서의 타자도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의 노동관계는 소외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는 서술할 수 없다.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란 노동자가 자기 노동의 생산물을 낯선 객체로 대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에서도, 자신의 행위에서도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노동자는 더 많은 재화를 생산할수록 더 빈곤해진다. 그는 자신의 생산물을 박탈당한다. 노동자의 행위는 그의 탈현실화를 초래한다. "노동의 실현은 노동자가 아사(餓死 주릴아 죽을사)에 이르도록 탈현실화될 만큼 지극한 탈현실화로 나타난다." 노동자가 자신을 소모할수록, 그만큼 더 그는 착취하는 타자의 지배를 받게 된다. 마르크스(Karl Marx)는 소외와 탈현실화로 이끈느 이 지배관계를 종교와 비교한다. "인간이 신에게 더 많은 것을 부여할수록, 인간 안에 남아 있는 것은 줄어든다. 노동자는 자신의 삶을 대상 속에 투여한다. 그러나 이제 그의 삶은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라 대상의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 활동이 커질수록 노동자는 더 대상을 상실한다. 그의 노동의 생산물은 그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생산물이 커질수록 노동자 자신은 더 작아진다." 노동관계 속의 소외로 인해 노동자는 자신을 실현할 수 없다. 그의 노동은 지속적인 자기 탈현실화다.  60-61


나는 나를 실현한다느 믿음 속에서 자발적으로 나 스스로를 착취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비열한 논리다. 소진(Burn-out)에 대한 열광의 첫번째 단계가 그러하다. 나는 열광적으로 노동 속으로 뛰어들어 결국 쓰러진다. 나는 죽음에 이르도록 나를 실현한다. 나는 죽음에 이르도록 나를 최적화한다. 신자유주의의 지배는 망상적인 자유 뒤에 숨어 있다.  62


오늘날에는 새로운 형태의 소외가 생기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세계나 노동으로부터의 소외가 아니라, 파괴적인 자기소외, 즉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다. 이 자기소외는 다름 아닌 자기최적화 및 자기실현과 더불어 생겨난다.  62




반체(反體 되돌릴반 몸체)


"객체(Object)"라는 말은 내던지다. 앞에 두다, 앞에 던지다와 같은 뜻을 지닌 라틴어 동사 오비케레(obicere)에서 유래한다. 객체는 무엇보다도 반대다. 나에게 대립하는 것, 나를 향해 던져지고 내게 맞서는 것, 나를 거역하는 것, 내게 반대하고 저항하는 것이다. 이것이 객체의 부정성이다. 이의 혹은 반론을 뜻하기도 하는 프랑스어 오브젝시옹(objection)에는 객체의 이런 의미 차원이 남아 있다.  64


오늘날 반대의 소멸은 모든 차원에서 일어난다. '좋아요'는 오비케레에 대립한다. 이제는 모든 것이 '좋아요'를 요구한다. 반대의 전적인 부재는 이상적 상태가 아니다. 반대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런 완충장치도 없이 우리 자신에게로 추락하기 때문이다. 반대의 부재는 자기침식을 낳는다.  68




시선 


독서는 주시(注視 물댈주 볼시)됨을 의미한다.  71


영화 <달콤한 인생(La Do;ce Vita)>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먼동이 틀 무렵 파티에서 밤을 새운 사람들이 해변으로 나가 거대한 가오리가 바다에서 건져지는 것을 관찰한다. 카메라는 가오리의 크고 심원한 눈을 근접 촬영으로 보여준다. 주인고 ㅇ마르첼로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저놈이 계속 노려보는군." 자크 라캉은 여러 번 이 장면을 파고 들었다. <정신분석의 윤리 : 세미나7>에서 그는 우리를 쳐다보는 가오리를 흉측한 "사물"로 서술한다. "날이 밝아올 때, 향락자들의 그룹이 떨리는 빛 속에서 곧 헤어질 것처럼 해변의 소나무 줄기들 사이에 가만히 서 있다가 갑자기 무엇을 목표로 삼는지도 알 수 없이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 바로 이 순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내가 말한 저 유명한 사물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 순간을 좋아했다. 그 사물이한 그물에 갇혀 바다에서 건져지는 어떤 흉측한 것이었다.

라캉이 말하는 "사물"은 영상으로부터, 재현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얼룩, 오점이다.  71-72


사물은 나를 쳐다보는 전적인 타자다. 그래서 사물은 두려움을 낳는다. "바로 그것이 극도로 우리를 쳐다보는 것, 우리에게 관여하는 것이며, a(라캉이 말하는 대상 a는 결여된 타자로서 욕망의 원인이자 대상이다)의 명령을 받는 욕망의 장소에서 어떻게 보는 행위로부터 두려움이 생겨나는지를 밝혀준다.  73


사르트르(Jean-Paul sartre)에게도 타자는 시선으로 나타난다. 사르트르는 시선을 인간의 눈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주시된다는 것은 오히려 세계 내 존재의 핵심적인 측면이다. 세계는 시선이다. 나뭇가지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나 반쯤 열린 창문, 혹은 커튼의 가벼운 움직임도 시선으로 지각된다. 오늘날 세계에는 시선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주시된다거나 어떤 시선에 내맡겨져 있다는 느낌을 거의 받지 않는다. 세계는 우리의 마음에 들고자 하는 눈요기로 나타난다. 디지털 화면도 시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윈도우(Windows)는 시선 없는 창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시선으로 부터 차단한다.  74-75


오늘날 시선은 여러 층위에서 사라지고 있다. 지배도 시선 없이 이루어진다. 벤담(Jeremy Bentham)이 말한 판옵티콘은 시선의 지배에 기초한다. 판옵티콘에 갇힌 수감자들은 감시자의 시선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 감시탑에 있는 감시자는 모든 것을 보지만, 그 자신은 보이지 않도록 구성 되어 있다. "판옵티콘은 보기와 보이기라는 쌍을 분리시키기 위한 기계다. 감시탑을 둘러싼 원형 건물에 있는 수감자는 완전히 보이지만, 그 자신을 전혀 볼 수 없다. 중앙탑에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보지만, 그 자신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수감자들은 중앙탑의 실루엣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감시당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감시자가 없을 때에도 언제나 주시되고 있다고 느낀다. 시선의 지배는 중앙원근법적이다.  75-76


디지털 매체는 시선 없는 매체라는 점에서 시각적 매체와 구별된다. 사실은 옵티콘(opticon, '모든 것을 본다'는 의미의 판옵티콘(panopticon)에서 '모든 것'을 뜻하는 pan을 뺀 opticon은 '보는' 구성물을 의미한다.)이라고 할 수도 없는 디지털 판옵티콘 또한 시선에, 중앙원근법적 광학에 의존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디지털 판옵티콘은 아날로그 판옵티콘보다 훨씬 많이, 나아가 훨씬 더 깊이 본다. 여기서 중앙과 주변의 구별은 아무 의미가 없다. 디지털 판옵티콘은 원근법 없이 작동한다. 원근법 없는 전면 조명은 원근법적 감시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우리를 모든 측면에서, 심지어 내부로부터도 샅샅이 비추기 때문이다. 시선은 생각을 파고들 수 없다. 그러나 디지털 판옵티콘에서는 생각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빅데이터에는 시선이 전혀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중앙원근법적인 감시와는 반대로 원근법 업슨 전면 조명에는 맹점이 전혀 없다. ..

디지털 판옵티콘의 수감자들은 누군가 자신으 ㄹ주시한다고, 다시 말해 감시받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롭다고 느끼며,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출시킨다. 디지털 판옵티콘은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착취한다.  77-78




음성 


음성은 다른 곳으로부터, 바깥으로부터, 타자로부터 온다. 우리가 듣는 음성은 장소를 전혀 특정할 수 없다. 서양의 형이상학이 음성을 직접적 자기현존의, 직접적 현재의 장소로 선호했고, 음성이 의미와 로고스에 특별히 가깝다고 생각한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유명한 음성중심주의 테제는 음성의 탈영토성을 전혀 보지 못한다. 시서노가 마찬가지로 음성은 오히려 자기현존과 자기투명성을 파괴하고, 자기 안에 전적인 타자, 미지의 것, 섬뜩한 것을 써 넣는 매체다.  79


카프카는 음성을 타자의, 전적인 타자의 매체로 자주 등장시킨다. 약점, 형이상학적인 허약함, 근본적인 수동성이 비로소 타자의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해준다. 밀레나(Milena Jesenska, 1896~1944 : 1920년 즈음에 카프카의 애인이었다.)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프카는 예언자들을 "음성이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뇌가 찢어지는 듯한 두려움"을 느낀 "허약한 아이들"에 비교했다. 그들은 타자의 위력적인 음성 앞에서 허약하다. 음성의 에로틱함 또한 "심리적 주체"가 "자신을 견고하게 만드는 것"을 가로막는 데 있다. 음성은 주체를 허약하게 만든다. 주체는 자신을 잃어버린다. 음성은 "자기상실"로 이끈다.  82


칸트의 이성 또한 명령하는 음성으로서 등장한다. 행복과 감각적 성향에 맞서 오로지 도덕 법칙에, "이성의 음성"에, "악한들조차 떨게 만드는" "천상의 음성"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바로 인륜성이다. 하이데거는 이성의 음성 대신 "양심의 음성"을 내세운다. 이 양심의 음성은 현존재에게 "가장 고유한 존재의 가능성"을 붙잡으라고 요구한다. 여기서도 음성에는 탈영토성이 깃들어 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아주 갑작스럽게 "모든 현존재가 자기 곁에 두고 있는" "친구의 음성"에 대해 말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친구의 음성을 듣는 것"은 "심지어 현존재를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향해 본질적이고 실제적으로 열어놓는다." .. 친구는 타자다. 여기서 하이데서는 음성에 일정한 초월성을 부여하기 위해 친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87


하이데거는 "음성과 시선의 같음"에 대해 말한 바 있다.  88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는 디지털 반향 공간으로부터 점점 더 타자의 음성이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타자의 부재로 인해 음성이 줄어들었다. 너와는 달리 그것(Es, 마르틴부버에 따르면 진정한 만남과 대화는 나-너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나-그것의 관계에서는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다.)에는 음성이 없다. '그것'에서는 상대를 향한 말도, 시선도 생겨나지 않는다. 상대가 사라짐으로써 세계는 음성과 시선을 잃는다. 

디지털 소통에는 시선과 음성이 매우 부족하다. .. 실로 관계와 만남은 음성과 시선의 특별한 경험들이다. 그것들의 몸의 경험들이다.  89-90


디지털 매체는 탈육체화하는 작용을 한다. 디지털 매체는 음성으로부터 거칢을, 육체성을, 나아가 공동(空洞 빌공 마을동)과 근육, 점막, 연골의 심층을 빼앗는다. 음성은 매끄러워진다. 음성은 의미를 위해 투명해지고, 완전히 기의로 변한다. 이 매끄럽고, 육체가 없고, 투명한 음성은 유혹하지 않고, 아무런 육욕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유혹을 낳는 것은 기의로 환원될 수 없는 기표의 과잉이다.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고, 아무 정보도 전달해주지 않는 그 음성은 "기표들의 육욕"을 가능하게 한다.  90




타자의 언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세상에 대한 낯섦"을 예술의 한 계기로 본다. 세상을 낯선 것으로 지각하지 않는 자는 세상을 전혀 지각하지 않는다. 음전압, 즉 부정적 긴장은 예술에 본질적이다. 따라서 아도르노는 편안함의 예술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낯섦은 철학의 계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정신 자체에 내재 한다. 따라서 정신은 본질적으로 비판이다.

'좋아요'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것이 된다.  93


디지털 화면은 경이를 전혀 허락하지 않는다. 익숙함이 증가할수록 정신을 활성화하는 경이의 잠재력이 모조리 사라진다. 예술과 철학은 낯선 것, 주관적 정신과 다른 것에 대한 배반을 철회하는 작업을 할 의무를 지닌다. 다시 말해 주관적 정신의 확정적인 네트워크로부터 타자를 구원하고, 타자에게 그 낯설게 하는, 경이로운 다름을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이다.  94


"폭력 없는 관찰"과 "거리의 가까움", 나아가 멂의 가까움만이 사물들을 행동 주체의 강제로부터 해방시킨다. .. 행동 주체가 뒤로 물러날 때, 객체를 향한 주체의 맹목적인 충동이 꺾일 때, 그럴 때만 사물들은 그 다름을, 그 수수께끼의 성질을, 그 낯섦과 비밀을 돌려받는다.  94-95


예술은 자기초월을 전제한다. 예술을 염두에 두는 사람은 자신을 망각한다. 예술은 "나에 대한 멂"을 만들어낸다. 자신을 망각한 채 예술은 섬뜩한 것, 낯선 것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나의 의문에 부로가하지만, 무낳ㄱ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망각한 자아와 함께 저 섬뜩한 것, 낯선 것으로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지상에서 시적으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안락한 디지털 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 우리는 같은 것의 수적인 디지털 공간 속을 돌아다닌다.  96


오늘날의 과잉소통은 침묵과 고독의 자유 공간을 억압한다. 그러나 이 자유 공간 안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실로 말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말할 수 있다. 과잉소통은 자신 안에 침묵을 본질적 요소로 지니고 있는 언어를 억압한다. 언어는 정적으로부터 생겨난다. 정적이 없으면 언어는 이미 소음이다. 첼란에 따르면 문학에는 "침묵을 향한 강한 성향"이 내재한다. 소통의 소음은 경청(Lauschen)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97


프랑스의 작가 미셸 뷔토르(1926~2016, 프랑스 누보로망을 대표하는 작가)는 문학이 오늘날 위기에 빠졌음을 확인하고, 이 위기를 정신의 위기로 파악한다. "지난 10년 혹은 20년 동안 문학에서는 거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신작들이 홍수처럼 쏟아졌지만, 정신적으로는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어요. 이는 소통의 위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경탄할 만한 새로운 소통 수단을 갖게 되었지만, 그것은 엄청난 소음을 불러일으킵니다."  97-98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도 관심을 타자의 호출을 전제로 하는 "더 많은 의식"이라고 보았다.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타자의 탁월함을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지금은 관심의 경제가 관시의 시학과 관심의 윤리학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관심의 경제는 타자에 대한 배반을 추동시키고, 자아의 시간을 전면화한다. 이에 반해 관심의 시학은 타자에 고유한, 가장 고유한 시간을, 타자의 시간을 발견한다. 관심의 시학은 "그것, 즉 타자에 가장 고유한 것이 함께 말하게 한다. 타자의 시간 말이다."  99-100


오늘날의 소통은 극도로 나르시시즘적이다. 이 소통은 너가 전혀 없이, 타자를 전혀 호출하지 않은채 진행된다. 이에 반해 시에서는 나와 너가 서로를 만들어낸다. "이 대화의 공간 안에서 비로소 말상대가 구성되고, 이 말상대는 그에게 말을 걸고 이름을 지어주는 나의 주위에 집결한다. 그러나 말상대는, 그리고 이 이름을 통해 말하자면 너가 된 자는 그 자신의 다름 또한 현재 속으로 가지고 온다."  100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매체를 통해 타인을 최대한 가까이 내게로 끌어오고자 한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이상 타자를 갖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타자를 소멸시킨다. .. 

오늘날의 소통은 타자로부터 너-계기를 제거하고, 타자를 "그것(Es)"으로, 즉 같은 것으로 획일화하려고 한다.  101




타자의 생각 


자신으로 존재함은 단순히 자유롭게 존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은 짐과 부담이기도 하다. 자신으로 존재함은 자신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102


오로지 에로스만이 자아를 우울증으로부터, 자신에게 나르시시즘적으로 얽혀 있는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타자의 구원의 공식이다. 나를 나로부터 떼어내어 타자에게 끌고 가는 에로스만이 우울증을 이길 수 있다. 우울한 성과주체는 타자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다. 타자에 대한 욕망, 나아가 타자를 향한 호출 혹은 "전향"은 자아의 나르시시즘적 껍질을 깨는 형이상학적 항우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에 의해 깨어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수수께끼 혹은 비밀로서의 타자에 대한 경험을 잃어버렸다. 타자는 이제 유용성의 목적론에, 경제적 계산과 가치평가의 목적론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 타자는 투명해진다. 타자는 경제적 객체로 강등된다. 이에 반해 수수께끼로서의 타자는 전혀 가치평가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다름을 전제로 한다. 타자의 다름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다름도 사랑의 전제다. 사람의 이원성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 필수적이다. "다른 한 사람이 우리와 다른, 우리와 대립된느 방식으로 살고 활동하고 느낀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기뻐하는 것 말고 무엇이 사랑이겠는가? 대립하는 것들을 기쁨으로 연결하려면 사랑은 이 대립하는 것들을 제거해서도, 부정해서도 안 된다. 심지어 자기애도 한 사람 속에 있는, 서로 뒤섞을 수 없는 이원성(혹은 다원성)을 전제로 한다.  105-106


사랑은 세상을 타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창조하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사랑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 시작되게 하는 사건이다. ... 

우리는 삶을 다시 타자로부터, 타자에 대한 관꼐로부터 새롭게 보고, 타자에게 윤리적인 우선권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나아가 타자를 경청하고 타자에게 대답하는 책임의 언어를 다시 배워야 한다. 레비나스는 "말하기(dire)"로서의 언어를 다름 아닌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이라고 보았다.  107




경청하기


오늘날 우리는 경청하는 능력을 갈수록 잃어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점점 더 에고에 집중하는 것이, 사회가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이 경청을 어렵게 한다.  108


경청은 수동적 행동이 아니다. 특별한 능동성이 경청의 특징이다. 나는 우선 타자를 환영해야 한다. 다시 말해 타자의 다름을 긍정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를 경청 한다. 경청은 선사하는 것, 주는 것, 선물이다. 경청은 타자가 비로소 말을 시작하도록 돕는다. 경청은 타자의 말을 수동적으로 좇아가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경청은 말하기에 선행한다. 경청은 타자로 하여금 비로소 말을 하게 한다. 나는 타자가 말을 하기 전에 이미 경청한다. 혹은 나는 타자가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경청한다. 경청은 타자를 말하기로 초대하고, 타자가 그의 다름을 드러내도록 풀어준다. 경청은 타자가 자유롭게 말하는 공명이 공간이다. 그래서 경청은 치유할 수 있다.  108-109


손님을 환대하는 경청자는 자신을 비워 타인을 위한 공명 공간을 만들어낸다.  110


경청의 기술은 호흡의 기술로 수행된다. 타자를 환대하는 영접은 들숨이다. 하지만 이 들숨은 타자를 자신에게 편입시키는 대신 그에게 장소를 제공하고 그를 보호해준다. 경청자는 자신을 비운다. 그는 무명의 인물이 된다. 이 비어 있음이 경청자의 친절함의 핵심이다. "그는 지극히 다양한 것들을 받아들여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타자에 대한 경청자의 책임감 있는 태도는 인내로 표현된다. 인내의 수동성이 경청자의 준칙이다. 경청자는 망설임 없이 자신을 타자에게 내맡긴다. 내맡김은 경청자의 윤리학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준칙이다. 오직 이것만이 우리가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것을 막는다. 에고는 경청하지 못한다. 경청의 공간은 에고가 보류된 타자의 공명 공간으로서 열린다. 나르시시즘적인 에고 대신 타자에 대한 몰입, 타자에 대한 욕망이 들어선다.  111-112


경청은 정보의 교환과는 아주 다른 것을 의미한다. 경청할 때는 어떤 교환도 일어나지 않는다. 친근함과 경청이 없으면 공동체도 형성되지 않는다. 공동체는 경청하는 집단이다.  115


오늘날 인터넷은 고립화된 자아의 공명 공간일 뿐이다. 광고는 어떠한 경우에도 경청하지 않는다.  117


소란스런 피로사회는 듣지 못한다. 어쩌면 미래의 사회는 경청하고 귀 기울이는 자들의 사회라고 불릴지도 모르겠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전혀 다른 시간이 시작되게 하는 시간혁명이다. 타자의 시간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 오늘날의 시간 위기는 자기 시간의 가속화가 아리나 전면화로 인한 것이다. 타자의 시간은 가속화 압박을 낳는, 성과와 효율성 제고의 논리를 벗어난다. 신자유주의적 시간 정책은 타자의 시간을 제거한다. 이 시간 정책에게 타자의 시간은 그저 비생산적인 시간일 뿐이다. 자기 시간의 전면화는 오늘날 모든 생활 영역을 파고들어 인간의 전면적인 착취를 낳고 있는 생산의 전면화와 동시에 진행된다. 신자유주의적 시간 정책은 생산 논리를 벗어나는 고양된 시간인 축제의 시간도 제거한다. 축제는 탈생산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고립화하고 개별화하는 자기 시간과는 반대로 타자의 시간은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타자의 시간은 좋은 시간이다.  119-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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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 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드로가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 사실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9-10


가치 있는 무언가가 담신 책이라면 분서의 화염 속에서도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테니까.  10-11


삼십오 년째 나는 책과 폐지를 꾸려왔고, 십오 대에 걸쳐 사람들이 글을 읽고 써온 나라에서 살고 있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그보다 더 큰 슬픔이 담긴 생각과 이미지를 머릿속에 차근차근 쌓아가는 습관과 광기가 항시 존재해온 유서 깊은 왕국에 나는 거주한다. 단단히 동여맨 한 보따리의 개념에 기꺼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살고 있다.  11


고상한 정신의 소유자가 반드시 신사일 필요도, 그렇다고 살인자일 필요도 없다는 헤겔의 생각에 나 여교시 동의하니까. ...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책에서 배워 안다. 사고하는 인간 역시 인간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고라는 행위 자체가 상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 책은 내게 파괴의 기쁨과 맛을 가르쳐주었다. 세차게 퍼붓는 비와 건물 폭파 기사들을 나는 사랑한다. 거대한 타이어에 바람을 넣듯 폭파 기사들이 지보가 거리를 송두리째 날려 보내는 광경을 나는 몇 시간이고 서서 지켜본다. 벽돌과 돌과 지주가 몽땅 들리는 그 첫 순간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뒤이어 집들이 고요히 내려앉는다.  12


밀려드는 폐지 더미 속에서 희귀한 책의 등짝이 빛을 뿜어낼 때도 있다. 공장 지대를 흐르는 혼탁한 강물 속에서 반짝이는 아름다운 물고기 같달까. 나는 부신 눈을 잠시 다른 곳으로 돌렸다가 그 책을 건져 앞치마로 닦는다. 그런 다음 책을 펼쳐 글의 향기를 들이마신 뒤 첫 문장에 시선을 박고 호메로스풍의 예언을 읽듯 문장을 읽는다. ..

뒤이어 나를 위한 미사인 독서 의식을 행하고, 내가 만든 꾸러미 안에 그렇게 읽은 책을 올려놓는다. 각각의 꾸러미를 아름답게 꾸며 하나하나에 나의 개성을 부여하고 내 서명을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14


종이 더미 발치에 있던 나는 손에 책을 든 채 수풀 속에 숨은 아담처럼 몸을 잔뜩 움츠리고 겁에 질린 시선으로 낯선 주변 세계를 둘러본다. 한번 책에 빠지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책 속에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일이지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 순간 나는 내 꿈속의 더 아름다운 세계로 떠나 진실 한복판에 가닿게 된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에도 열 번식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이 되어 묵묵히 집으로 돌아온다. 그날 찾아낸 수많은 책들, 내 가방 속에 든 책들 생각에 골몰해 길을 걷는다. 전차와 자동차와 보행자 들을 피해가면서, 녹색등이 켜지면 기계적으로 길을 건넌다. 행인이나 가로등과 부딪치는 일도 없이 걸어간다. 몸에서 맥주 오물 냄새가 나도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건, 가방에 책들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녁이면 내가 아직 모르는 나 자신에 대해 일깨워줄 책들, 시끌벅적한 거리를 걸으면서도 빨간불에 길을 건너는 법이 없다. 의식의 문턱에서 반쯤 졸며 무의식적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날 하루 압축한 꾸러미들의 모습이 내 안에서 서서히 스러져갈 때문 내 몸이 바스러진 책 꾸러미처럼 여겨진다. 내 안에서 한줄기 불꽃이, 온수기나 증기 응결기의 불꽃과도 흡사한 작은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다. 작업을 하면서 어쩌다 읽게 된 책들, 그 안에 든 사고의 기름으로 내가 날마다 영원한 야등을 밝히는 책들을 이제 집으로 가져간다. 그렇게 나는 집으로 돌아온다.  16-17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19


탈무드의 구절들이 딱 들어맞는다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올리브 열매와 흡사해서, 짓눌리고 쥐어짜인 뒤에야 최상의 자신을 내놓는다."  26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인간의 전쟁만큼이나 전면적인 회색 쥐들과 검은 시궁쥐들의 전쟁과 관련해 그들이 쓴 기사였다. 그 전쟁 중 하나가 회색 쥐들의 오나벽한 승리로 막을 내린 참이었다. 쥐들이 지체 없이 두 개의 무리, 두 개의 종족, 두 개의 조직화된 사회로 나뉘어 싸웠던 것이다. 프라하의 하수구와 시궁창에서는 쥐들이 생사를 건 대전쟁을 벌이는데, 승리하는 쪽이 포드바바까지 흘러가는 배설물과 오물을 전부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변증법의 논리대로 승자가 다시 두 진영으로 나뉜다는 것도 그 고매한 하수구 청소부들이 내게 알려주었다.  37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은 내가 헤겔에게서 배운 것들을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서 단 한 가지 소름 끼치는 일은 굳고 경직되어 빈사 상태에 놓이는 것인 반면, 개인을 비롯한 인간 사회가 투쟁을 통해 젊어지고 삶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야말로 단 한가지 기뻐할 일이라는 사실 말이다.  37-38


내가 맥주를 네 단지째 비우고 있을 때 압축기 근처에 우아한 젊은이 하나가 나타났다. 나는 그를 대번에 알아보았다. 예수였다. 연이어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 그의 곁으로 와 섰다. 노자가 아니면 누구랴.  50


그들의 사고를 통찰하는 데 그들 각자의 나이를 아는 게 필수 조건임을 깨달은 건 처음이었다.  51


산등성이를 쉬지 않고 오르는 예수의 모습이 보였다. 노자는 이미 산 정상에 올라 있었다.세상을 바꾸고 싶은 열정적인 젊은이와 체념 어린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는 노인. 삶의 근원으로 회귀함으로써 안감을 두둑이 댄 영원의 옷이 만들어진다. 예수는 기도를 통해 현실을 기적으로 만들려고 한 반면, <도덕경>의 노자는 순진무구의 지혜에 도달하기 위해 자연법칙들을 유일한 방편으로 삼았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51


청년들과 아름다운 처녀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빛을 발하는 젊은 예수에게서 나는 눈을 떼지 못한 채 맥주를 단지째 들이켰다. 반면 노자는 홀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무덤을 찾고 있었다. 피 묻은 종이에 극도의 압력이 가해지면서 곤죽으로 짓이겨진 파리떼와 뒤섞인 핏방울이 튀는 외중에도 예수는 그윽한 황홀경에 빠져 있고, 노자는 깊은 우수에 젖어 무심하고도 거만한 자세로 압축통 모서리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믿음이 가득한 예수가 산 하나를 들어 옮기는 동안, 노자는 내 지하실에 불가해한 지성의 그물을 펼쳐놓았다. 예수가 낙관의 소용돌이라면, 노자는 출구 없는 원이다. 예수가 극적인 갈등 상황과 싸우고 있다면, 노자는 도더고가 관련된 상반되는 요소들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조용히 명상한다.  52


예수가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progressus ad futurum. 미래로의 전진)이라면, 노자는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regressus ad originem. 근원으로의 후퇴)이었다.  59


내 직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는 나선과 원이 상응하고,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과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이 뒤섞인다. 그 모두를 나는 강렬하게 체험한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행복이라는 불행을 짊어진 사람인데,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progressus ad originem. 근원으로의 전진)과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regressus ad futurum. 미래로의 후퇴)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이제야 깨닫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저녁식사를 하며 <프라하 석간신문>을 읽듯이, 이제 나는  그런 생각들을 소일거리로 삼는다.  69-70


쇼펜하우어가 나타났다. 사랑은 지고의 율법이며, 이런 사랑은 연민이다.  76


은하수 모양의 어린 집시 여자 하나가 내 몽상의 물결 위로 어김없이 나를 만나러 왔다. 내 젊은 시절의 사랑.  77


나는 이름도 모르는 그 집시 여자와 함께 살았다.  80


나는 땅거미가 지는 해질 무렵을 너무도 사랑했다. 하루 중에서 무언가 굉장한 일이 닥칠 것만 같은 기분에 젖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이런 불확실한 시각에는 모든 거리와 장소가 평소보다 더 근사해 보였다. 사람들의 표정도 명상에 잠긴 듯 온화해졌고, 그 순간만은 나 역시 아름다운 청년이 된 것 같은 환사에 빠졌다. 거울이나 상점 진열창을 힐끗거리면 주름살 하나 없는 내 모습이 보였고, 놀란 내 손가락들이 얼굴을 더듬었다.... 날마다 해질녘이면 아름다움을 향해 가는 문이 열렸다.  81


어느 저녁, 집에 돌아왔는데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불을 켠 뒤 밖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새벽까지 기다렸지만 헛일이었고,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었다. 한 개비 장작처럼, 성령의 숨결처럼 단순했던 내 어린 집시 여자. 내 난로에 불을 지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여자. 건물 잔해 속에서 찾아낸 무거운 널빤지들을 커다란 나무 십자가처럼 어깨에 메고서 끌고 오던 여자. 감자 스튜와 말고기 소시지면 족했고, 난로에 불을 지피고 가을 하늘에 커다란 연을 날리는 것 외에는 더이상 바라는 게 없었던 여자.

나중에, 훨씬 나중에야 나는 게슈타포가 그녀를 다른 집시들과 함께 강제로 끌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마이다네크 혹은 아우슈비츠의 어느 소각로에서 태워져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아직 인간적이었다.  83-84


그들이 사회주의 노동단원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업체측 비용으로 금요일이면 버스 한 대가 그들을 크르코노셰의 별장으로 데려다준다는 것과 지난여름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방문했단느 것도 알 수 있었다. 올해는 그리스와 불가리아를 짧게 다녀올 계획이라고, 그들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르며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여행에 빠짐없이 참여하도록 서로를 부추겼다.  92-93


부브니의 사회주의 노동단원들은 일이 밀리는 법이 없었다. ... 불안에 곤두선 책장들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며 그 안에 숨겨진 가치 따위는 전혀 아랑곳없이 냉정하게 작업을 이어갔다. 누군가가 쓴 책들이었다. 누군가가 교정을 보고, 읽고, 삽화를 넣고, 잇달아 인쇄에 들어가 제본되어 나온 책들일 것이다. 누군가가 가독성이 없다는 결정을 내리고, 검열하고, 쓰레기장으로 보낸 책들이었다. 그렇게 책들은 트럭에 실려 이곳에 왔을 것이다.노란색과 오렌지색 장갑을 낀 노동자들이 책들의 내장을 꺼내 곤두선 책장들을 무정한 컨베이어 벨트 위로 던진다. 그것들은 거대한 피스톤 밑으로 조용히 흘러들어 보따리 크기로 압축된 뒤 제지 공장에서 생을 마친다. 거기서 글자로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새 종이로 탄생해 머지않아 새로운 책들로 인쇄죌 날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93-94


나는 끝내 리부시의 닭 가공 공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일정한 속도로 내려오는 살아 있는 닭들의 내장을 숙련된 동작으로 뜯어내던 여공들도 저 아이들과 똑같았다. 그 젊은 여자들도 웃고 농담을 하며 작업을 햇다. 반쯤 죽거나 살아 있는 닭돌로 가득한 무수한 닭장이 슬로프를 타고 내려왔다. 달아난 몇 마리가 트럭 위에 내려앉아 있는 동안 다른 몇 마리는 닥치는 대로 모이를 쪼아댔다.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선 여공들의 손에서 형제들의 목이 꼬챙이에 꿰이는 순간에도 달아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나느 고개를 떨구었다.  94-95


그리스에 갈 수만 있다면 나는 우선 아리스토텔레스가 태어난 스타기라에서 경베를 올릴 것이다. 그런 다음 올림피아 경기장을 한 바퀴 돌 테지. 장식 술이 촘촘히 달린 긴 반바지를 입고 올림픽경기의 우승자들 모두에게 경의를 표하며 달릴것이다. 그리스에 갈 수만 있다면.. 저 사회주의 노동단원들과 함께 그리스로 떠날 수 있다면 그들에게 건축과 철학 강의를 하고, 자살한 이들과 데모스테네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에 대한 강의도 할 것이다. 그들과 함께 그곳에 갈 수만 있다면... 하지만 이제 우리는 새 시대, 새 세상으로 진입했고, 그런 것들은 그들의 이해를 헐씬 넘어 선다. 저 젊은이들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인 게 확실했다.  97


나는 쓰레깃더미를 치우듯 그것들을, 슬그머니 눈길이 가닿은 <도덕 형이상학>마저 내 압축기 속에 처넣었는데, 그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익명의 꾸러미들을 미친듯이 압축하고 또 압축했다. 고대나 현대 화가의 복제화 따위도 염두에 없었다. 고대나 현대 화가의 복제화 따위도 염두에 없었다. 나는 보수를 받고 일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예술과 창조, 미으 창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런 속도로 일하면 혼자서도 사회주의 노동단원이 되어 연 50%의 생산성 향상을 약속할 수 있을 것 같앗다. 기업이 소유한 별장도 이용할 수 있겠고, 여름휴가를 그리스에서 보내며 속바지를 입고 올림피아 경기장을 돌거나 스타기라에 가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나는 우유를 병째 들이마시며 일했다. 부브니 사람들처럼 무심하고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99-100


카페 '검은 양조장' 카운터에 기대앉아 나는 맥주 한 잔을 마신다. 이봐, 오늘부터 넌 혼자야. 홀로 세상에 맞서야 해. 마음이 안내키더라도 사람들을 보러 나가 즐기고 연기를 해야 할 거야. 이땅에 발붙이고 있는 동안은 말이야. 오늘부터는 수심에 찬 언들만 소용돌이치는군... 전진이 곧 후퇴인 셈이지. 그래,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과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은 같은 말이야. 너의 뇌는 압축기에 짓이겨진 한 꾸러미의 사고에 불과하지.  119


솔로몬 왕의 봉인. 그의 젊은 시절 작품인 <아가서>와 노년의 결산인 <전도서>가 고백하는 바니타스 바나타툼(vanitas vanitatum. '헛되고 헛되니'라는 뜻의 라틴어. 전도서 12:2) 사이의 균형.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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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무엇보다도 간단한 요령 한 가지만 배운다면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어." 아빠가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야." 

"네."

"말하자면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다니는 거지."  64-65


"아빠, 깜둥이들을 변호하세요?"

"그렇단다. 스카웃, 그런데 '깜둥이'라고 말해선 안 돼. 그 말은 품위 없는 말이거든."

"학교에서는 모두 다 그렇게 부르는데요. 뭐."

"이제부턴 다른 사람이 다 그래도 너만은 그러지마라." ....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변호해선 안 된다고 하는데 왜 하시는 거예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읍내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고, 이 군을 대표해서 주 의회에 나갈 수 없고, 너랑 네 오빠에게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다시는 말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야." ....

".. 고개를 높이 들고 주먹을 내려놓는 거다. 누가 뭐래도 화내지 않도록 해라. 어디 한번 머리로써 싸우도록 해봐.. 배우기 쉽기는 않겠지만 그건 좋은 일이란다."

"아빠, 우리가 이길까요?"

"아니."

"그렇다면 왜."

"수백 년 동안 졌다고 해서 시작하기도 전에 이기려는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할 까닭은 없으니까."  146-149


"로즈 에일머는 어떻게 지내요?" 오빠가 물었습니다.

로즈 에일머는 잭 삼촌의 고양이 이름이었습니다. 그 고양이는 털이 노랗고 예쁘게 생긴 암컷인데, 삼촌은 그 녀석이 언제까지나 참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여성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153


"... 앵무새를 죽이는건 죄가 된다는 점을 기억해라."

어떤 것을 하면 죄가 된다고 아빠가 말씀하시는 걸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디 아줌마에게 여쭤 봤습니다.

"너희 아빠 말씀이 옳아." 아줌마가 말씀하셨습니다.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 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뭘 따 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 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게 없어.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거야."  174


"분별 있는 사람이알면 자기 재능을 자랑하지 않는 법이란다." 모디 아줌마가 말씀하셨습니다.  188


"이제 여름이 오면 넌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에 당면할 텐데 그때도 이성을 지켜야 할 거야... 너와 젬에게 부당하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때로 최선을 다해서 극복해야 할 경우가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어떻게 처신하느냐 하는건 ... 글쎄,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너와 젬이 어른이 되면 어쩌면 조금은 연민을 느끼면서, 내가 너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이 문제를 되돌아볼 거라는 사실이야. 이 사건, 톰 로빈슨 사건을 말이다, 아주 주용한 한 인간의 양심과 관계있는 문제야.. 스카웃, 내가 그사람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난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어."

"아빠, 아빠가 잘못 생각하시는 거예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음,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옳고 아빠가 틀렸다고 생각하신느 것 같아서요..."

"그들에겐 분명히 그렇게 생각할 권리가 있고, 따라서 그들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해 줘야해." 아빠가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기 전에 나 자신과 같이 살아야만 해. 다수결에 따르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한 인간의 양심이다."  200


"..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말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 승리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지만 때론 승리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 ..."  213




2부


"알고 있는 걸 모두 말할 필요는 없지... 사람들은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이 옆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아. 화가 나는 거지. 올바른 말을 한다고 해도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바꿔 놓을 수 없어. 그들 스스로 배워야 하거든. 그들이 배우고 싶지 않다면 입을 꼭 다물고 있거나, 아니면 그들처럼 말하는 수밖에."(캘퍼니아)  237


"딜, 넌 지금 잘못 말하고 있는 거야.. 네 식구들은 너 없이는 살 수 없어. 다만 너한테 조금 소홀한 것뿐이지. 그 문제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 말해 줄게."

어둠 속에서 딜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이어졌습니다. "문제는,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말이야.. 내가 없으면 그분들은 훨씬 잘 지내신다는 거야. 내가 그분들을 도와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 소홀하신 게 아냐.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다 사주시거든. 하지만 '이제 이것 갖고 나가서 놀아라'하는 식이지. 물건들이 방에 가득해. '그 책을 사줬으니 그거나 읽어라'하는 식이란 말이야."...

"아니, 그분들은 소홀하시지 않아. 아침이면 '잘 잤니?', 저녁이면 '잘 자!', 어디 갈 때는 '잘 갔다 와'하시면서 입맞춤과 포옹을 퍼부어 주시거든.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도 잊지 않으시고.. 스카웃, 우리 아기나 하나 데려오자."  268


"형, 저 아저씨는 봉지에 든 뭔가를 마시고 있는데." 딜이 말했습니다.

돌퍼스 레이먼드 아저씨가 그러고 있는게 분명했습니다...."저 아저씨는 코카콜라 병에다 위스키를 가득 담아 가지고 조잉 봉지 안에 넣어 둔 거야. 여자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말이지. .."

"그런데 왜 흑인드롸 같이 앉아 계신 거야?"

"언제나 그러셔. 우리보다는 흑인들을 더 좋아하나 봐. 멀리 군경계선 근처에 혼자 사시지. 흑인 여자를 얻어서 온갖 혼혈아들을 낳았어..."

"아저씨는 '백인쓰레기' 처럼 보이지 않는데." 딜이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아냐. 강둑 한쪽 땅이 모두 아저씨거야. 게다가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거든."

"그런데 왜 저런 식으로 행동하시는 걸까?"

"그게 아저씨의 방식이니까." 오빠가 대답했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아저씨는 결혼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해서 그러신단느 거야. 누구더라.. 그렇지. 스펜서네 집안 여자하고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다나.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데. 결혼식 예행연습을 마친 뒤 신부가 2층에 올라가서 자기 머리통을 날려 버린 거야. 엽총으로 말이지. 발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겨서."

"왜 그랬는지 밝혀졌어?"

"아니, 돌퍼스 아저씨 말고는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른대." 오빠가 대답했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아저씨 한테 흑인 여자가 있다는 걸 알아냈다는 거지. 아저씬 그 여자를 그냥 둔 채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거였고, 그 뒤로 줄곧 아저씨는 술에 절어 지내셔. 하지만 아저씬 자기 아이들에겐 진짜 잘해 주시고."

"오빠 혼혈아가 뭐야?"내가 물었습니다. 

"백인 피가 절반, 흑인 피가 절반인 사람이야. 스카웃, 너도 봤잖아. 잡화점에서 배달하는 빨간 곱슬머리 애. 걔가 바로 혼혈아인데 정말로 비참해."

"뭐가 비참하다는 거야?"

"그 사람들은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으니까. 흑인 들은 반쪽이 백인이라고 배척하고, 백인들은 반쪽이 흑인이라고 배척하거든. 그러니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느 어정쩡한 상태지. 돌퍼스 아저씨는 자기 아이들 중 둘을 북쪽으로 보내 버렸대. 북쪽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상관하지 않는다나 봐." ....  299-300


"그런 식으로 하지는 않았어, 그때는.."

"딜, 그 사람들은 길머 검사님이 세운 증인이었으니까 그렇지."

"어쨌든, 핀치 변호사님은 메이엘라와 유얼 영감을 반대 신문하실 때 그런 식으로 대하진 않았어. 그런데 그 사람은 그를 계속해서 '젊은이'라고 부르며 비웃고 그가 답변할 때마다 배심원들을 휘둘러 보고..."

"그런데 말이야, 딜, 결국 그는 흑인이잖아."

"난 그런 거 손톱만큼도 상관 안 해,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건 옳지 않아. 옳지 않다고. 어느 누구도 그런 식으로 말할 권리는 없어. 그게 나를 구역질 나게 만드는 거야."

"딜, 그건 길머 검사님의 방식일 뿐이야. 그분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대해. 넌 아직 그분이 누군가를 혹독하게 다루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잖아. 그런데 말이야, 그게 언제더라... 오늘 말이야, 긺 검사님은 평소 때보다 반도 안 되었던 것 같아. 내 말은 대부분의 검산느 모두가 다 그런 식이라는 거야."

"핀치 아저씨는 그렇지 않잖아."

"딜, 아빠는 표본이 아니지, 아빤..."

나는 모디 앳킨슨 아줌마가 한 멋들어진 말을 생각해 내려고 더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 말을 생각해 냈지요. "너희 아빠는 큰길에 있을 때나 법정에 있을 때나 늘 한결같으셔"라는 말 말입니다.

"내 말은 그게 아니야." 딜이 말했습니다.

"얘야,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우리 뒤쪽에서 들렸습니다. 나무둥치에서 들려오는소리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 주인공은 바로 돌퍼스 레이먼드 아저씨였습니다. 아저씨는 나무 뒤쪽에 있다가 고개를 돌려 돌아보셨습니다. "너희들은 낯가죽이 두껍지 않아. 그래서 구역질이 나는 거지?"  367-369


"자, 여기 있다. 한 모금 힘껏 빨거라. 그러면 좀 진정될 거야." 빨대가 꽃혀 있는 종이 봉지를 딜에게 내밀며 아저씨가 말씀하셨습니다. 

딜은 빨대를 빨고는 씩 웃더니 한참 후에 입을 뗐습니다.

"히히." 레이먼드 아저씨는 분명 아이 하나를 타락시킨 것을 즐거워하는 듯한 웃음을 지으셨습니다.

"딜, 너 조심해." 내가 딜에게 경고했습니다.

딜이 빨대를 놓으면서 싱긋 웃었습니다. "스카웃, 이건 그냥 코카콜라야."

...

"아저씨가 종이 봉지에 넣고 마신 것이 콜라였단 말씀이에요? 그냥 콜라였어요?"

"그렇단다, 꼬마 아가씨." ... "평소에 마시는 바로 그거란다." ..

"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아 그건, 내가 왜 사람들을 속이냔 말이지? 글쎄다. 사실 아주 간단하지." 아저씨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말이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거든. 그들에게 지옥에 떨어질 놈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 제놈들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ㅇ낳든 개의치 않아. 난 정말이지 제놈들이 좋아하든 좋아히지 않든 상관하지 않아, 정말이야- 그럼에도 그들더러 지옥에 떨어질 놈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니?"

우리는 "아저씨, 잘 모르겠는데요."하고 대답했습니다.

"난 그들에게 구실을 주려는 거야. 사람들은 구실이 생기면 기분이 좋아지지. 내가 아주 어쩌다 읍내에 나올 때, 조금 비틀거리며 이 봉지에 든 뭔가를 마시면, 사람들은 돌퍼스 레이먼드가 술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하는 거야. 저러니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면서 말이야. 저자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고, 그래서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아저씨, 그건 정직하지 않잖아요. 지금보다도 아저씨를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데다가 이미.."

"물론 정직하지는 않다만 사람들에게는 아주 도움이 되거든. 핀치 아가씨, 이건 비밀인데, 사실 난 술을 잘하지 못해. 하지만 내가 원해서 지금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전혀, 정말이지 눈곱만큼도 이해하지 못한다."

혼혈아들을 낳았고 누가 그것을 알아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이 죄 많은 아저씨 말을 듣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저씨한테는 아주 매력적인 데가 있었습니다. 고의로 자신을 깎아내리는 사람을 나는 한 명도 만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도대체 왜 아저씬느 가장 깊숙이 숨겨 둔 비밀을 울리에게 털어놓고 계신 걸까요? 그래서 그 이유를 여쭤 봤습니다.

"너희들은 어리고, 어린이들은 그걸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저 애가 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야."

아저씨는 딜을 향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아직 저 애의 양심은 세상 물정에 물들지 않았어. 하지만 조금만 나이를 먹어 봐. 그러면 저 앤 구역질을 느끼지도 않고 울지도 않을 거야. 어쩌면 세상에서 옳지 않은 일을 봐도 울먹이지 않을 거야. 앞으로 몇 년만 나이를 더 먹어 봐. 그렇게 될 테니."

"아저씨, 내가 도대체 뭐 때문에 운다는 거예요?" 딜의 남자다움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고통 때문에 우는 거지, 심지어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말이야. 흑인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일부러 생각한 것도 아닌데 백인이 흑인에게 안겨 주는 그 고통 때문에 우는 거란 말이다."

"아빠는 흑인을 속이는 것은 백인을 속이는 것보다 열 배는 더 나쁘다고 말씀하세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행동이라고 하셨어요." 내가 중얼거리며 말했습니다.  371-373


".. 테일러 판사님이 그 청년을 변호하도록 너희 아빠를 임명하신 게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니? 테일러 판사님이 너희 아빠를 임명하신 데는 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는 걸 말이야." ...

모디 아줌마가 계속 말씀했습니다. " .. 이런 생각을 했단다. 애티커스 핀치는 이길 수 없어, 그럴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는 그런 사건에서 배심원들을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들 수 있는 지역에서 유일한 변호사야. 그러면서 나는 또 이렇게 혼자서 생각했지. 우리는 지금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거야, 아기 걸음마 같은 것이지만 그래도 진일보임에는 틀림없어."  398-399


"..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넌 일상생활에서 백인들이 흑인들을 속이는 걸 매일매일 보게 될 거다. 하지만 네게 말해 주고 싶은 게 있구나. 이 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흑인을 속이는 백인은, 그 백인이 누구이건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건 아무리 명문 출신이건 쓰레기 같은 인간이야."

아빠는 너무나 조용히 말씀하셨기 때문에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는 말이 우리들 귀에 부딪쳐 바스라졌습니다.  408


아빠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말이다, 자업자득이란다. 우리는 보통 우리 수준에 맞는 배심원을 갖기 마련이거든. 우선 첫째, 용감한 메이콤 시민들은 재판에 관심이 없지. 둘째, 걱정도 되지. 그러니 그들은."

"왜 걱정을 해요?" 오빠가 물었습니다.

"그게 말이다. 가령 레이첼 아줌마 자동차에 모디 아줌마가 다쳤고, 그 손해 배상금을 링크 디스 아저씨가 결정해야 한다고 치자. 링크 아저씨는 자기 가게에 어느 아줌마 고객도 잃고 싶지 않겠지? 그래서 아저씨는 테일러 판사님에게 배심원이 될 수 없다고 말할 거다. 배심원석에 앉아 있는 동안 가게를 돌봐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이야. 그러면 테일러 판사님은 그 아저씨를 배심원에서 빼줄 수밖에 없거든. 화를 내면서 면제해 줄 때도 있어."  409-410


"그들이 좋은 사람ㄷ르이라면, 도대체 왜 제가 월터에게 잘해 주면 안 되나요?"

"잘해 주지 말라고는 안 했어. 그 애한테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해 줘야 한다. 누구한테나 점잖게 행동해야 돼. 하지만 그 애를 집에 초대할 필요까지는 없잖아."

"고모, 그 애가 우리 친척이라면요?"

"일단 그 앤 우리 친척이 아냐. 설령 그렇다 해도 내 대답은 마찬가지일 거야."

그러자 오빠가 내 편을 들고 나섰습니다. "고모, 아빠가 말씀하시길, 친구는 선택할 수 있어도 집안은 선택할 수 없댔어요. 친척은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친척일 수밖에 없으니, 인정하지 않으면 아주 어리석어 보인다고 하셨거든요."

"또 너희 아빠 타령이구나. 다시 한 번 말한다만, 진 루이즈, 넌 월터 커닝햄을 집에 초대해서는 안돼. 만약 그 애가 너의 겹동서의 겹동서라고 해도 일 때문에 아빠를 찾아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집에 들일 수 없어. 이제 이것으로 그 일은 결정된 거야."

고모는 이렇게 "안돼"라고 확실히 말씀하시고 나서 다음번에는 그 이유를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고모, 전 월터랑 놀고 싶어요. 왜 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고모는 안경을 벗고 나를 빤히 쳐다보셨습니다. "놀아선 안 되는 이유를 말해 주지." 고모가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애는 .. 쓰레기 같은 애니까. 그러니까 너는 그 애하고 놀아선 안 되는 거야. 난 네가 그 애하고 어울리며 행동거지나 본받고 다른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게 그냥 놔두지 않을 테야. 지금 현제로도 넌 네 아빠한테 충분히 골칫거리거든."  415-416


"이 읍내에는 공정한 게임이란 백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몇 있어. 공정한 재판은 우리 백인들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고, 또 흑인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나도 그렇게 태어났을 텐데, 하고 겸손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모디 아줌마  436


"히틀러를 증오해도 되는 거죠?"

"아니, 그렇지 않아. 어느 누구도 증오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야." 아빠가 대답하셨습니다. 

"아빠,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어요. 게이츠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히틀러가 지금 하는 행동은 끔찍하다고 하시면서 진짜로 얼굴이 새빨갛게 되셨어요."

"아마 그러셨을 거다."  ...

"뭐 물어볼 게 있어."

"말해 봐." 오빠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두 다리를 쭉 뻗었습니다.

"게이츠 선생님은 좋은 분이시지, 안 그래?"

"물론이지. 그 선생님 반에 있을 때 좋았어."

"히틀러를 엄청 싫어하시던데.."

"그게 뭐 잘못이야?"

"그게 말이지. 오늘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그렇게 대하는게 얼마나 나쁜 일인지 말씀하셨거든. 오빠, 누구라도 박해하는 건 옳지 않잖아? 내 말은, 심지어는 어느 누구에 대해서 나쁜 생각을 갖는 것조차 말이야, 안 그래?"

"스카웃, 물론 옳지 않고말고. 그런데 왜 그렇게 안달을 해?"

"그게 말이야. 그날 밤 게이츠 선생님이 법정에서 나오고 계셨거든 - 우리보다 앞서서 계단을 내려가셨기 때문에 오빠는 선생닝을 볼 수 없었지 - 선생님이 스테퍼니 아줌마랑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어. 누군가 그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때가 됐다, 점점 분수도 모르고 주제넘게 군다, 이러다가는 우리하고 결혼할 생각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들었거든. 오빠, 히틀러를 그토록 끔찍하게 미워하면서도 돌아서서는 어떻게 바로 자기 나라 사람에게 비열하게 대할 수 있냔 말이야."  454-455


아빠의 말이 정말 옳았습니다. 언젠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신적이 있습니다.  514


아빠의 두 손이 이불을 잡아당겨 내게 덮어 주시느라고 내 턱 밑에 있었습니다.

"스카웃, 결국 우리가 잘만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멋지단다."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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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대리인간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하며


타인의 운전석에서 나는 세 가지의 ‘통제’를 경험했다. 

우선 운전에 필요하지 않은 모든 ‘행위’의 통제다.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고 깜빡이를 켜는, 그런 간단한 조작 외에는 그 무엇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사이드미러나 백미러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도 그럭저럭 운행할 수 있으면 그대로 두고, 의자의 기울기에도 몸을 적응시켜 나간다. 차의 주인이 자기 몸에 맞춰 조절해 놓은 것들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다. 에어컨이나 히터를 작동시키거나 음악의 볼륨을 조절하는 일 역시 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말’의 통제다. 손님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대리기사는 거의 없다. 차의 주인이 화제를 정하고 말을 건네면 반가이 화답하지만, 그가 침묵하면 나도 묵묵히 운전만 한다. 서로 대화를 시작하더라도 제한적으로 “네, 맞습니다”라는 대답만 주로 하게 된다. 그의 의견이 나와 다르더라도 웨남ㄴ해서는 그저 웃으며 동의한다. 특히 종교나 정치와 관련된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차 주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다. 

마지막으로 ‘사유’의 통제다. 주체적으로 행위하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사유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와도 같다. 처음에는 하고 싶은 말이 맴돌아 답답했지만, 나중에는 그런 대로 편해졌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운전만하면 되었고, 손님이 뭐라고 하든 “네, 맞습니다”하고 영혼없이 대답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타인에게 질문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운전석은 이처럼 한 개인의 주체성을 완벽하게 검열하고 통제한다. 신체뿐 아니라 언어와 사유까지도 빼앗는다. 그런데 운행을 마치고 운전석에서 내려와도 나의 신체는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여전히 ‘대리’라는 단어에 묶여 있었다. 8-9


지금껏 우리를 통제해 온 대리사회의 괴물이 있다. 그것은 이 사회가 만들어낸 견고한 시스템과 마주하는 일이다. 외면하고 침묵하는 것으로는 그 무엇도 나아지지 않는다. 온전한 나로서 사유하고, 또 주변의 또 다른 나를 주체로서 일으켜세워야 한다.  11




몸으로 배운 가치들은 삶의 태도를 보다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무엇보다 타인의 입장에서 사유할 수 있는 연습을 반강제로 시켰다. 그것은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환희와 기쁨이었다. 그래서 ‘지방시’의 어느 장에 “어떠한 삶을 살아가게 되든 육체노동을 반드시 하겠다”고 썼다. 거기에도 덧붙였지만 나는 나약한 인간이기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렵게 배운 삶의 태도를 잃어버릴 것 같아 두렵기 때문이었다.  18-19


책을 덮고 일어나야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 있다.  21


나는 대학에서 조교와 시간강사로 존재했던 8년을 ‘유령의 시간’으로 규정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리의 시간’이었다. 온전한 나로 존재하지 못하고 타인의 욕망을 위해 보낸 시간이었다. 실존에 대한 고민은 책상에서 일어섰을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임을, 대학을 그만두고 몇 달의 시간을 허비하고서야 다시 배웠다.  21-22


대학이 구축한 시스템은 그 자체로 하나의 ‘괴물’이었습니다. 학부생, 대학원생, 시간강사로 이어지는 노동력 착취의 구조는 공고하며, 그 어떤 기업보다도 신자유주의적입니다. 사무실, 연구소, 기숙사, 대학의 어느 부처에 가든 재학생 근로 조교들이 있습니다. 4대보험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연봉 천만 원 남짓한 시간강사들이 강의의 절반을 책임집니다. .. 그뿐 아니라 학생들의 밥을 퍼준 이도, 강의동의 환경미화와 경비를 책임지는 이도, 모두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 이처럼 여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값싼 노동으로 대학 행정과 강의의 최전선이 지탱되고 있습니다.  24


교수들은 종종 학생들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데 소극적이라고, 그래서 주체적이지 않다고 비판하곤 한다. 그러나 학생을 주체로 대하지 않는 자신의 태도에 문제가 있음은 알지 못한다.  33


타인의 운전석에서 내리며, 나의 신체를 되찾는다. 무엇보다 사유하고 발화할 자유를 되찾아 온다. 더 이상 상대방의 눈치를 보며 기계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반복되면서 나는 조금씩 주체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데 익숙해져 갔다. 상대방이 말하는 대로 수용하고 긍정하는 간편한 대화의 방식, 말하자면 ‘순응’이 어느새 자연스럽게 몸에 각인된 것이다. 누군가 나를 주체로서 대우한다고 해도 익숙해진 몸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면 어디에서든 주체로서 발화할 수 없게 된다. ‘순응하는 몸’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34


부하 직원은 직장 상사에게 아이디어를 내지 않고, 학생은 교사의 의도에서 벗어난 답을 제출하지 않는다. 아이 역시 부모 앞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털어놓지 않는다. 자신이 주체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부터 시작해 교사,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을의 공간'에서 순응하는 방법을 주로 배워왔다.  35


국가는 순응하는 몸을 가진 국민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 어떤 비합리와 비상식과 마주하더라도 그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 국민이 늘어나기를 바란다. 대신 순응하지 않는 이들을 감시하고 격리해 나가면서 자신들의 욕망을 대리할 '대리국민'을 양산해 낸다. 그러한 국민/개인들은 국가/조직이 얼마든지 간편하게 통치/통제할 수 있다. 

국가 시스템에 효율적으로 통제되면서도 자신을 주체로 믿는, 동시에 사유하지 않고 모든 현상을 바라보는 국민은 지금의 국민국가가 지향하는 '대리사회'의 이상향이다. 그렇게 '대리국민'이 된 이들은 국가를 위한 싸움에 스스로 나선다.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국가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자신들의 국가'를 위해, 그에 순응하지 않는 이들과 몸소 싸워나간다.  35-36


욕망을 대리하는 '대리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불평해야 한다. 그것은 한 개인이 가진 사회적 책무이자 다음 세대를 위한 성찰이다.  36


호칭은 한 인간의 주체성을 대리하는 수단이 된다. 자신을 그 공간의 주체라고 믿게 만드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여러 구조적 문제들을 덮어버린다. 나 역시 내가 속한 공간에는 아무런 무넺가 없고 나는 그 구성원이라는 화상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그 환각에 익숙해질 때, 우리 모두는 '대리'가 된다.  53


스스로 물러서서 나를 둘러싼 구조와 마주하지 못하고 호칭이 주는 환각에 취해 살아왔다.  54


대학은 그 어느 기업보다도 더 기민하게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영합해 왔다.  77


스스로 한 발 물러서서 타인의 눈으로 자신의 공간을 바라보는 일은 절대로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괴물에 잡아먹히지 안은 주체들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행위다. 그러고 나면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행동과 말은 통제되더라도 사유하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을 아주 어렵게 배웠다.  77


순간의 감정으로 욱, 하는 이들보다 오히려 타인의 수고를 농락하는 이들이 더 많다. 양쪽에서 전화를 받아 누가누가 먼저 오나 경주를 시키기도 하고, 자신의 요구에 따라 거리를 내달려 온 이들을 취소 문자 하나로 돌려세우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 일상의 '갑질'이다. .. 대리라는 직함을 달고 있다고 해서 감정까지 대리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정규직이라고 해서 그 어떤 비정함에 무뎌질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인간은 주체로서 아파하고 주체로서 절망한다.  96


어쩌면 가족은 끊임없이 서로를 위한 '대리'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위해, 너는 나를 위해, 우리는 너를 위해, 그렇게 끊임없이 주체와 대리의 경계를 넘나든다. 나는 아직 모든 가족을 주체로 두는 방법을 잘 모른다. 하지만 아내하고든 아이하고든, 조금은 더 많이 대화하려고 한다. 기꺼이 그들을 위한 대리의 삶을 살며, 그렇게 조금은 더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다.  105


연구자이면서 남편가 아버지도 되어야 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장모님을 1년쯤 모시고 살면 어떨지 아내에게 물었다. 몸도 머리도, 그리고 감정도, 지칠 만큼 지쳤을 때였다. 하지만 아내는 장인어른이 그것을 견뎌낼 것 같지 않다고 답했다. 그러고 보니 차로 20분 거리에 계신 장모님은 일주일에 한 번 오가는 일도 버거워했다. 결국 서울에 계신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사정이 이러저러하니 1년 정도 아이 돌보는 것을 도와달라고 여쭈었다. 어머니는 너희가 맞벌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느냐고 되물어싿. 그러면서 우리가 너희를 키울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엄살이 심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어머니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주변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모두 육아를 하는 데 양가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항변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두 세대의 희생이 필요한 시대다. 아이의 부모는 일하고, 은퇴한 조부모가 손자를 돌보고, 이것은 어느덧 한 '집안'이 살아남는 방식이 되었다.  136


사회는 우리를 '대리인간'으로 만든다. 나아가 소중한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한다. 그러한 대리사회의 욕망은 결국 모두를 집어 삼키고, 주체로서의 자리 역시 빼앗는다. 하지만 그러한 고난의 시간을 추억으로 남겨서는 안 된다.  138


아이를 보는 데는 두 사람의 하루를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145


나는 노동자가 자신의 유니폼을 위해 돈을 지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용자는 노동자에게 노동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환경을 제공하고, 노동자는 사용자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 그것이 내가 배운 '노동'의 관계다.  172


기업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노동자의 주체성을 농락한다. 자신을 대신해 내세울 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에게 언제나 가혹하다. 그런데 그것은 명백한 위법이나 합법도 아닌, 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방식으로 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법의 틈새를 이용한 '편법'이다. 인턴이라는 정체불명의 직함을 부여하고서는 무임금으로 사람을 부리고, 언제든지 해고하고, 기본적인 사회적 안전망조차 보장하지 않아도, 기업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에 더해 국가/정부는 기업을 위한 법안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간다. 결국 노동자는 노동 현장의 주체가 아닌 대리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매장의/학교의 주인처럼 일하라'는 수사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이것은 정말이지 파렴치한 역설이다. 노동자의 주체성을 강탈하는 동시에 그 빈자리에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것이다. 그것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자신을 주체로 믿는 대리가 된 노동자만이 존재한다. 어쩌면 '열정 착취'보다도 한 단계 진화한 방식이다. 노력뿐 아니라 행복과 만족까지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영혼 착취'라고 규정하고 싶다. 

우리 시대의 노동은 '대리노동'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의 주체이면서, 또한 주체가 아니다 대리운전뿐만 아니라 대학에서도, 동네 마트에서도, 장례식장에서도, 그 어느 노동의 공간에서도, 우리는 노동자가 아닌 '대리인간'으로서만 존재한다. 지금 이 사회에서 타인의 운전석보다 나은 공간이 얼마나 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173-174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을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또 다른 을이다. 반드시 폭언이나 폭력을 수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전쟁의 수행자가 된다. 내 주변의 목소리를 외면하거나 그와 나 사이에 선을 긋는 것 역시, 갑의 욕망을 대리하는 행위인 것이다.

분노는 주변의 을이 아닌 저 너머의 갑을 향해야 하고, 공고하게 구축된 시스템에 닿아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을은 계속해서 도원되고 희생될 것이다.  183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조직을/사용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먼저 고민하는 것이다.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  195



화면을 바라보는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즐겁다.  211


타인의 즐거움을 보며 대리로서 즐거워야 한다면, 역설적으로 나는/우리는 지금 그만큼 즐겁지 않다는 것이다. 현실이 만족스럽다면 남들이 먹고 노래 부르는 것에 지금처럼 필요 이사으로 열광할 이유는 없다. ...

이전에는 출연자들이 외국을 배경으로 평생 먹을 일이 없을 것만 같은 이국적인 음식을 먹고 즐겼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주변의 맛집이나 거리로 간다. 평범한 냉장고에서 누구나의 집에 있을 법한 재료를 꺼내 몇 분 만에 요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일상의 공간에까지 이제 그들은 침투했다. 그리고 익숙함을 무기 삼아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묻는다. "우리는 이렇게 즐겁고 행복한데, 너도 그렇지?"

그들은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즐거워하고, 우리는 그들을 지켜본다. 그러면서 삶의 고단함과 절박함을 잠시 잊는다. 익숙한 공간이 재현되며 이전보다 더욱 주체가 되어 함께 그 즐거움에 동참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러한 대리만족은 오래가지 않는다. 곧 누구에게도 대리시킬 수 없는 허탈함이 찾아온다. 특히 자신을 둘러싼 사회구조에는 아무런 무넺가 없고, 남들처럼 즐거울 수 없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기게 된다.  212


'힐링'이라는 단어의 소멸 이후 '분노'와 '혐오'가 우리 사회를 뒤덮었다. 개인들은 이제 더 이상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둘러싼 구조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213


대리사회의 괴물은 여전히 개인들이 그 분노를 온전히 발산할 수 없게 만든다. 대신 대리만족의 기제를 계속 내보내면서, 행복하지 않은 개인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마취되고 나면 개인의 분노는 자신을 둘러싼 구조, 그 괴물에게 향하지 않는다. 대신 주변의 개인이나 스스로를 혐오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더욱 자극적인 마취/환각제를 원하게 되고, 그에 따라 점점 더 강한 쾌락의 기제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아주 잠시 즐겁고, 오래 외롭다.  213-214


현실이 가혹하고 절박할수록 현실과는 동떨어진 일상의 판타지가 강요된다. 처음에는 그것이 공감과 즐거움을 주기도 했지만 이제는 저마다에게 외로움을 주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분노를 토로하는 개인들도 많아졌다. 아마도 곧 노래와 음식을 넘어 또 다른 대리만족을 주는 무언가가 새롭게 등장할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다시 열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리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개인들은 다시 다양한 방식으로 분노할 것이다. 다만 그 분노가 개인을 향한 혐오가 되어서는 안 되고,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어서는 더욱 안 된다. 익숙한 공간에까지 이미 침투한 대리사회의 괴물에게 온전히 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강요된 환각에서 깨어나 온전한 나로서/우리로서 '즐겁게' 싸워나가야 한다. 그러면 외롭지 않을 것이다.  214-215



사람의 인연은 쉽게 끊을 수 없으니 누군가 먼저 용기를 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곧 잊고 있던 선을 기억해 내고 서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227



 - 운전을 시작하면 손님은 가족에게 전화를 한다. 그러지 않더라도 곧 전화가 오곤 한다. 그런데 "대리 불러서 가고 있어"라고 하는 이들이 있고, "대리 오셔서 가고 있어"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부르다'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고, '오시다'의 주체는 타인이다. '(내가) 대리를 불렀어'와 '(대리가) 왔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가끔은 '대리...'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불렀어'하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 망설임은 아마도 상대방을 주체로 상상하기 위한 시간일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주체의 언어로 말하는 데 인색하다. 별것 아닌 말의 습관이라 할 수 있겠지만, 상대방을 동등한 주체로서 대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가 된다. '대리 오셨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보이는 그 삶의 태도에 대해 순수한 존경을 보낸다.  238


사실 노동의 본질은 '대리'다. ... 과정의 수고로움은 잘 드러나지 않고 결과만이 남는다는 점에서 노동 그 자체는 대개 은폐되기 마련이다.  241



에필로그 - 경계인에게만 보이는 것


사실 그동안 나아가는 법만 배워왔지 물러서야 한다고는 그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 공간에서의 패배를 고백하는 것이고 경쟁에서 도태된다는 의미와도 같다. 무엇보다도 '우리'에서 이탈해 고립되기를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경계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다. 그런 평범한 개인이었다.  250


우리는 모두가 한 사람의 대리운전 기사다. 자신이 그 차의 주인인것처럼 도로를 질주한다. 하지만 조수석에는 이미 누군가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시동을 걸기 이전부터 거기에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것을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그들의 욕망은 내비게이션을 통해 끊임없이 전달되고 개인의 의지는 통제되고 검열된다. 차를 멈추고 운전석에서 잠시 내려, 그렇게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어느 균열의 지점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액셀을 더 강하게 밟는 데만 힘을 쏟는다. 단속 카메라가 보이면 브레이크를 밟고, 경로를 이탈했다는 경고음에 다시 도로로 올라오면서도, 자신이 주체라는 환상에 빠져 계속 운전대를 잡는다. 그렇게 대리사회의 욕망을 대리하는 '대리인간'이 된다. 

대리사회의 괴물은 대리인간에게 물러서지 않는 주체가 되기를 강요한다. '주인 의식'을 가지라고 끊임없이 주문하는 가운데, 정작 한 발 물러서서 자신을 주체로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봉쇄한다. 결국 개인은 주체로서 물러서는 법을 잊는다. 내가 그랬듯 밀려나고서야 자신이 어느 공간의 대리로서 살아왔음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다. 밀려난 개인은 잉여나 패배자로 규정되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대리인간이 들어선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말하자면 우리 사회를 포위한 '대리올로기'의 서사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 누구도 가르쳐준 바 없지만, 결국 우리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야 한다. 밀려나기를 쉽지만 스스로 물러서기는 어렵다. 그것은 공간의 주체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고 절대로 패배가 아니다. 그러고 나면 시스템의 균열이 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그 균열의 확장을 통해, 그동안 자신의 욕망을 대리시켜 온 대리사회의 괴물과 마주할 수 있다. 그때부터는 '사유하는 주체'가 된다. 여전히 행동과 언어는 통제될지라도, 정의로움을 판단하고 타인을 주체로서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강요되는 천박한 욕망을 거부할 용기를 얻는다. 

우리 모두는 경계에 있다. 다만, 한 걸음만 물러설 용기를 가지면 된다 대리인간으로 밀려날 것인지, 스스로 물러서고 다시 나아오는 주체가 될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251-252


대학은 세상을 전부가 아닌 조금 특별한 일부일 뿐이다. 나는 대학 바깥에서 얼마든지 '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대학을 나온 몇 개월 동안 몸의 언어로 배웠다.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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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봉오리는 피어나고 있다

우리는 사물이 실제로 움직이며 변화하고 있는데도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변화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66)



꽃 : 봉오리가 피어오르기까지의 변화

시계 : 시침의 변화

우주 : 별의 탄생에서 소멸하는 변화

지구 : 대륙이동설에 입각한 대륙의 변화

생물 : 무수한 진화과정

인간 : 원숭이에서 인간으로의 변화. 네발에서 두발로의 변화. 노동으로 인한 언어의 발생

사회 : 공동생산에서 계급사회 봉건제로 다시 현재의 사회로

이러한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즉 현재는 과거와 똑같고 미래도 현재와 똑같다고 생각한다면 새로운 사물이 발생하거나 본래 있던 사물이 변화하여 다른 것으로 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70)



사물에는 정지 상태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물론 있습니다. 달걀은 부화해서 병아리로 변화하지만, 병아리로 변화하기 전의 달걀은 어디까지나 달걀입니다. 사물은 끊임없이 운동, 변화하지만 동시에 일정한 단계에서는 근본적 성격이 변화하지 않으면서 일정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즉 질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지요.(70)



사물은 자체 운동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서 질적 안정성을 가지면서 정지 상태를 유지하지만, 그것은 상대적일 뿐 절대적으로는 끊임없이 운동, 변화하는 과정에 있습니다.(71)



변증법 - 사물이 운동하는 과정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모순으로 인해 자신을 부정하게되고, 다시 이 모순을 지양함으로서 다음 단계로 발전해 가는 논리적 사고법(백과사전)

변증법과 형이상학

모든 사물은 관련되어 있고 변화하고 있다는 입장에 선 철학적 견해를 ‘변증법(dialetics)’이라 부른다.

사물의 상호 관련성을 부인하여 사물을 고립적으로 보고, 사물의 운동, 변화를 부인하여 고정적, 정지적으로 보는 철학적 견해가 있다. 바로 ‘형이상학(metaphysics)’이다.(72)



창과 방패 이야기

변화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물 내부에 있을까요, 외부에 있을까요?(75)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사물 내부에 있습니다.(76)



연못에 돌을 던지면 물결이 일어나는 것은 돌의 영향도 있지만 물이 물결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달걀이 병아리가 되는 것은 그 내부에 병아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정란은 아무리 외부적인 요인을 가져와도 병아리가 될 수 없는것처럼.

사회 발전이라는 변화에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요인은 지리적 요인이나 기후적 요인 같은 사회 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내부에 있는 발전의 가능성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사물은 변화하며 그 변화의 근본 원인은 사물 내부에 있습니다.(78)



사물이 운동, 변화하는 근본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물 내부에 있는 내적 모순(矛盾)’입니다.

모순이라는 말은 중국의 고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모(矛)는 창이라는 뜻이고 순(盾)은 방패라는 뜻입니다.(79)



자신의 무지와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는 서로 대립하는 대립물이면서 상대방을 각각 자기 존재의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

상호대립하는 두 사물이 상대방이 없으면 자신도 존재할 수 없는 관계(이를 상호 의존 관계라고 말합니다)로 결합되어 있는 것을 ‘대립물의 통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물의 통일’이 바로 철학에서 말하는 모순입니다. 즉 모순이란 한편으로는 상호 대립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 의존하는 관계로 통일되어 있는 두 사물의 관계입니다.(82)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모르고 있음을 의식하고 동시에 이를 알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때 비로소 공부하는 것이다.

달걀 : 달걀이면서 달걀이 아닐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 모순의 투쟁을 통해 달걀이 병아리로 변화한다.

사람이 왜 죽는가? 생명과 죽음이라는 두 대립물의 통일이며, 내적 모순. 죽음이 생명을 극복했을 때 사람은 죽는다.

상품 : 사용가치와 교환 가치라는 두 대립물의 통일에서. 이 모순에서 상품이 화폐로 변화한다.

외적 원인도 사물의 변화에 영향을 미칩니다.(88)



내적 모순은 변화의 근거이고 외적 원인은 변화의 조건이며, 외적 원인은 내적 모순을 통해 작용합니다.

변화의 근거란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변화가 일어나는 , 바꾸어 말하면 그것이 없는 경우 결코 그런 변화가 일어날 수 없는 근본 원인입니다.

이에 반해 변화의 조건이란 변화의 근거가 있더라도 거기에 이러이러한 조건이 가해지지 않으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부차적 원인을 말합니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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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글 - 지젝에게 물어본 정신분석학의 행방


오늘날 지젝을 최고의 인기 논객으로 만든 것이 다름아닌 그의 정신분석학적, 철학적 '고상함'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6




지젝은 철학을 끊임없이 오락거리로 만든다. .. 

영국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1943~)은 지젝을 "지난 수십 년 동안 유럽에 출현한 사람 중 가장 놀라운 명민함으로 정신분석학, 혹은 문화 이론을 해설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

그는 끊임없이 놀라서 묻는다. 왜 모든 것이 이와 같은가? ..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것은 그와 같다' , '법은 법이다'등)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 순간, 우리가 현실로 대면하고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묻는 순간, "철학은 시작된다."  21-22


지젝은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놀란다. 그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관찰의 향락에 빠질 수 있게, 일반적인 경우라면 반드시 느꼈을 죄의식 없이 향락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마치 '물론 나는 화장실이나 사도마조히즘, 그리고 발기에 관한 이 모든 이야기가 지극히 외설적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모든 삶의 측면들을 이론화해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지젝은 죄의식 속에서 향락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보통 사람들의 자기 책망을 덜어주어, 좀 더 즐겁게 그의 책을 읽을 수 있게 만든다.  24


부정어법은 '어떤 것을 언급하지 않겠다고 말함으로써 바로 그것을 말하는 장치'다. .. 부정어법은 담화 내부의 구멍을 그러낸다. 어떤 것을 언급하지 않겠다고 말함으로써 바로 그것의 윤곽을 드러내는 것이다.  24-25


지젝은 하나의 의미체계를 다른 의미체계로 번역한다. 가령 라캉의 체계는 헤겔의 체계로, 마르크스의 체계는 라캉의 체계로, 할리우드의 체계는 지젝의 체계로 번역된다. 지젝 스스로 조김스럽게 지적하듯이, 이런 번역은 항상 완전한 대응은 아니지만 만만치 않은 설명적 통찰을 가져다준다. 지젝은 '만약 이전의 방법으로는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다른 각도에서는 이해된다면 그 각도에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다.  27


지젝의 책을 주의 깊게 읽은 독자라면, 그가 매번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그러니 그의 책을 읽을 때 각 논의의 세부 사항까지 전부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조만간 일련의 등가성들 속에서 더 생산적인 각도로 이전의 논의를 이해시켜주는 '이것은~가 아닌가?'의 순간에 직면할 테니까. .. 

아르헨티나의 철학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가 지젝의 첫 번째 영어 저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The Sublime of Ideology)>에 대해 평가한 것처럼.  28


지젝의 지적 여정은 그가 속한 공식 문화와 거리를 두거나 이질적인 특징을 보여왔다.  36


지젝의 이론은 객관적 체계 속의 일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주체적이었다. .. 지젝이 비판 이론에 미친 주된 영향 중 하나가 이 주체의 개념을 정교하게 다듬은 것이다. 지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묻지 않고 넘어간 '주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파고들었다. ...

이 주체가 바로 민주주의의 주체이다. 민주주의는 개별 국민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37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반휴머니즘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람들에 맞춰 만들어진'게 아니라 아무런 감정도 없는, 오직 형식적인 추상에 의해 만들어졌다. 민주주의라는 개념 안에는, 어떤 구체적인 인간적 내용으로 채워지거나 공동체적 결속의 진정성에 내어줄 자리가 없다. 민주주의는 추상적 개인들의 형식적 결합일 뿐이다.'

민주주의는 개별적 인간의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종교, 재산, 식사 예절, 수면 습관 따위에 무관심하다. 민주주의가 취급하는 것은 이 모든 개별적인 특질들이 제거되었을 대 남는 것, 지젝이 '주체'란 용어로 지시한, 모든 시민들이 평등하게 똑같이 고유하는 측면이다.  38


그가 사상가로서 가지만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게 그가 속해 있던 체계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비판철학에 대한 지젝의 가장 중요한 공헌 중 하나인 주체 이론에 초점을 맞춘다.  39




각 분야마다 그에게 주된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는데, 철학에서는 게오르그 헤겔, 정치학에서는 칼 마르크스, 정신분석학에서는 자크 라캉이다.  43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1)은 무수한 주석가들이 지적하듯이, 서구 관념론의 전통에서 정점에 도달한 독일 철학자이다. 관념론이란 세계를 사물들의 연쇄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물에 대한 관념들로 세계를 설명하는 철학체계이다.  43-45


일반적으로 헤겔의 변증법의 세 단계로 되어 있다고 한다. 먼저 어떤 테제(定立 정할정 설입)나 관념이 있고, 다음에는 안티테제(反定立 되돌릴반 정할정 설입)나 관념의 구체적 한정이 그에 대립된다. 마지막으로, 이 둘은 어떤 종합이나 더 포괄적인 관념으로 통합된다. 가령 '모든 영화는 훌륭하다.'는 테제를 주장한다고 할 때, 그 다음엔 그에 대한 안티테제로 '<타이타닉>은 실제로 나쁜 영화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둘의 종합은 '대다수의 영화는 훌륭하다.'가 될 것이다. 이 종합은 새로운 테제가 될 수 있고, 이 과정은 완전한 진실(총체성. 이 경우에는 '오직 몇몇 영화만이 훌륭하다.'는)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될 수 있다.

이것이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관습적인 생각으로, 이에 따르면 서로 다른 관점들은 언제나 더 큰 진리로 화해할 수 있다. .. 지젝이 읽은 헤겔의 변증법은 어떤 화해나 종합적 관점이 아닌, 헤겔 자신이 말한 '모순은 모든 동일성의 내적 조건'이라는 인식을 생산한다.  45-46


테제가 '모든 영화는 훌륭하다.'이고 안티테제가 '<타이타닉>은 실제로 나쁜 영화이다.'라면, 지젝의 종합은 '모든 영화가 훌륭한 것은 <타이타닉>이 실제로 나쁜 영화이기 때문이다.'가 된다. 이것은 일견 사리에 맞지 않거나 모순으로 들린다. 하지만 이 주장의 진실은 바로 이 모순 속에 있다. 만약 나쁜 영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영화가 좋은지 알지 못할 것이다. 서로 비교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영화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쁜 영화가 적어도 하나는 존재해야 한다. 이 경우 <타이타닉>은 문자 그대로 '규칙을 입증하는 예외'이다.  46


모순어법이란 '메마른 비' '차가운 열' '물리적 지성'처럼 모순적인 어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47



마르크스는 사회가 조직되는 방법을 예리하게 비판했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 혹은 자유시장경제 체제는, 다수에 대한 야비한 억압과 지배를 통해 소수가 광대한 부를 축적하도록 허용하는 불평등으로 인해 분열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47


자기 자신을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선언하는 지젝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이 갖는 가치와 진실을 확신하며, 더 나은 방법으로 사회를 조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다. ..

'이론적 실천(praxis)'이라고 불리는 이런 종류의 사유는, 단순히 경험을 반영하거나 범주화하는 게 아니라 경험을 바꾸려는 시도이다.  49


지젝은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인상적인 공헌을 남긴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개인들이 사회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정의한다.  51



라캉은 거치면서 정신분석학은 이 협소한 영역을 넘어 정치학, 철학, 문학, 과학, 종교 등 모든 인간 존재의 활동 영역으로 그 분석적 야망을 확대시켰다. 이 오만한 기획을 위해 라캉이 마련한 초석은, 모든 정신 작용을 분류할 수 있는 세 가지 '질서(Order)' 즉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이다.

일차적으로 상상계는 자아(ego)가 탄생하고 인식된느 과정을 가리킨다. 보통 '거울 단계(mirror stage)'로 불리는 이 과정은, 태어난지 6개월 정도부터 시작된다. 라캉이 지적하듯, 인간은 7세 무렵까지는 자신의 신체적 움직임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미숙한 상태이다.  53-54


* 라캉의 세 질서,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 라캉의 세 질서를 쉽게 설명하면, '개인의 심리행위에 작용하여 그들의 삶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주는 힘의 장(場 마당장)'으로 풀 수 있다. 상상적인 것, 상징적인 것, 실재적인 것, 이 세 형용사형은 특정한 질서를 지칭하는 명사로도 사용된느데, 그 경우 해당 질서와 관련된 특정한 사물이나 경험을 가리킨다. 

또한 '질서'라는 표현이 암시하듯, 이 세 질서는 심적 경험을 분류하는 체계의 일부일 뿐 아니라, 그 경험을 유사윤리적 기준 속에서 등급화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라칸의 저작을 보면 '상상적인' 것은 부정적인 의미로, '상징적인' 것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재계야말로 가장 으뜸가는 것으로, 이 질서를 언급할 때 라캉의 어조에는 거의 존경과 숭배가 묻어난다.  53


상상계는 넓은 의미에서 영원한 자기 찾기를 가리킨다. 그것은 자기 통일의 신화를 수립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본(寫本 베낄사 근본본)과 유사물의 사례를 융합시키는 과정이다. 그래서 상상계는 라캉과 지젝에게 항상 경멸의 시선으로 받는 세계이다. 우리에게는 안됐지만, 라캉은 현대사회를 정점에 도달한 상상계로 본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강박되어 자신과 자신의 창조물을 세계 위에 둔다고 보기 때문이다.

상징계는 언어에서부터 법에 이르는 모든 사회적 체계들을 포함하는 가장 광범위한 세계이다. 상징계는 우리가 보통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의 긍정적인 부분을 구성한다. 상징계는 사회의 비인격적 틀로서, 거기서 우리는 다른 인간 존재들과 함께 특정한 공동체 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령 대다수의 사람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상징계에 등록된다. 이미 이름이 정해지고, 가족이나 사회경제적 집단, 젠더, 인종 등에 소속되기 때문이다.  54-55


실재계는 알 수 없는 삶의 영역을 가리킨다. ..

우리는 결코 직접적으로 세계를 알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실재계는 언어에 의해 포획되기 이전의 세계이다.  59


상징계는 실재계에 대해 작용한다. 라캉이 말했듯, 상징계는 실재계를 절단한다. 그것은 무수하게 다른 방법으로 실재를 분절한다. 그래서 실재를 인식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어떤 것이 상징화에 적용되지 않는 순간을 주목하는 것이다. 앞에서 든 예에서 우리는 인간 존재가 사람과 동물, 유인원, 포유동물, 동물 등으로 상징화되는 모든 사례들을 열거함으로써 그 존재 중 일부는 실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어떤 것을 명명하거나 분류할 때 우리는 상징계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 전에는 실재계 속에 있다.  60


실재는 상징계가 작동하여 분절된 단위로 조각 내기 이전의 충만한 사물의 상태라는 점에서, 상징계에 앞서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실재는 상징계가 이런 분절 과정을 완수하고 남은 잔여물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실재는 상징계 이후에 발생한다.  61


실재와 상징계의 관계에서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만약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에이즈가 CIA의 음모라는 것, 모든 인간 존재는 원숭이와 같은 부류하는 것, 새싹이 식물 세계의 가장 멋진 생산물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인간 존재나 주체가 아닌 단지 상징적 질서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자동기계나 로봇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탈물질화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결정하고 선택하고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우리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63


지젝은 '실재의 철학자'라고도 불린다. .. 우리의 생활과 직접 연관된 '실재적'인 주제를 다룬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얘기한 라캉적 의미의 '실재'를 확장하고 자기화햇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염두에 둘 점은, 지젝은 거의 언제나 상징계와의 관계 속에서 실재를 다룬다는 점이다.  65


이론가들은 상징계와 상상계의 관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지젝은 실재와 상징계 사이의 적대성에 관심을 돌림으로써 성차적(性差的 성품성 어긋날차 과녁적), 이데올로기적, 윤리적, 탈근대적 형상들 속의 주체를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었다.  66




코기토(cogito)에 대한 생각은 원래 기독교 교회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e, 354~430)가 제기하였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코기토는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가 창안한 것이다.  71


'코기토'라는 단어의 의미는 데카르트가 말한 "철학의 제1원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cogito ergo sum)'이다.  73


탈구조주의자에게 코기토는 중심화된 주체 혹은 '개인(individual)'의 토대로, 그들은 코기토를 철학의 방탕아로 여긴다. 개인은 말 그대로 분리 불가능하다.  74


코기토의 '나'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  74-75


지젝에게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현실적 개인의 '나'가 아니라, 부정성의 텅 빈 지점이다. 이 텅 빈 장소는 '아무것도 아닌'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반대편, 모든 규정된 것들의 부정성이다. 지젝은 바로 여기ㅣ, 아무런 내용물도 없는 텅 빈 장소에 주체를 위치시킨다. 즉, 주체는 공백이다.  82-83


* '사라지는 매개자'는 말 그대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 사이의 이행을 매개하고 곧 사라지는 개념이다.  83


주체는 지제그이 용어로, 자연과 문화 상태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 '사라진느 매개자'이다...

코기토에서 정점에 도달한 '자기로의 철회'가, 자연과 문화의 간극을 잇는 사라지는 매개자로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상징적 질서라는 형식으로 실재를 대체하기에 앞서 그 실재를 '제거'해야 한다. 지젝은 이 사라지는 매개자를 광기로 이행하는 것으로 읽으며, 이렇게 해서(사라지는 매개자인) 주체를 광기로 파악한다.  84

우리 자신을 언어나 그 외 상징적 질서에 종속시키는 과정을 지젝은 '주체화'라 부른다.  92


'자기'는 주체의 공백을 메우는 것으로서 주체는 변하지 않지만 '자기'는 끊임없이 갱신된다.  94


우리는 소위 관용적인 서구 사회에서 이를 목격할 수 있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향락의 이미지와 쾌락에 대한 몰두를 보면, 이젠 더 이상 성적 쾌락이 금지되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지젝의 말처럼, 성적 희열은 이미 공식 이데올로기의 지위를 차지했다. 더 나아가 이제는 섹스를 즐기라고 강요받는다. 이 뻔뻔함, "즐겨라!"는 이 명령은 초자아의 귀환을 표시한다.  109


지젝이 지적하듯, 향락이 강제적이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즐겁지 않다.  109


탈 근대의 자유는 문법적 트리 없는 언어활동의 자유와 유사하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해석 규칙이나 구범도 없다. 따라서 대타자의 붕괴가 이를 보상하기 위해 무수히 작은 타자들, 혹은 부분적인 대타자들을 발생시킨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지젝은 그 증거를 과학기술의 성과에거 비롯된 윤리적 딜레마들을 해결하기 위해 자꾸 전문가 위원회를 찾는 경향에서 찾는다.

이런 위원회의 증가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징적 금기들의 부재를 시사한다. 이런 상징적 금기들의 부재 때문에, 각종 윤리위원회들은 사이버 스페이스, 유전자생물학, 의학 등에 관한 규제 원칙들을 창안해야 한다. 윤리위원회들은 태아에 대한 유전자 조작을 얼마나 허용해야 하는지, 생명 연장 기계에 의존하는 이들이 실질적으로 살아 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인터넷 상에서 하는 섹스에 어떤 문제점이 잇는지 답한다. 이런 윤리적 난제들에 대한 해명 책임을 이들 위원회에 떠넘김으로써, 개별 주체들은 본래 자기들 몫이었던 해명의 자유가 주는 부담을 털어버린다.  114


지젝이 보기에 탈근대적 정치 담론은 자유주의-자본주의의 지평 안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그 지평 내의 서로 다른 부분들, 가령 어떻게 의료 서비스에 필요한 자금을 모을지, 그중에서 세금의 비중은 얼마큼 할지 등에 대해서는 주장을 펴지만, 자본주의 자체는 결코 진지하게 문제 삼지 않는다.  122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탈이데오로기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냉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지배된 세계를 살고 있다. 

지젝은 냉소주의적 태도를 "그들은 자신의 행위 속에서 자식이 환영을 달고 있음을 잘 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렇게 한다"로 요약한다. ..

지젝은 우리가 어떤 이데올로기의 허위를 비난할 수 있는 진리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이데올리기 속에 던져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 방식이 현실과 이데올로기를 대립시키는 이원체계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젝은 삼원체계, 혹은 삼항 구조에 입각하여 이데올로기를 분석한다.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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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자들에게

 

이 책은 공산주의나 자본주의와 다른 접근방법을 찾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과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다. ..

이 책의 기본 견해는 훌륭한 사업이란 우정이 있는 관계를 통해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6

 

1. 3~4명의 소규모 모임부터 시작한다

2. 목표와 가치에 합의한다

3. 기존 사업체를 통해 성공과 실패 요인을 찾는다

4. 무엇을 할 것인지 선택한다

5. 필요한 자원을 발굴한다

6. 사업체의 법인 형태를 선택한다

7. 사업을 시작한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잇다. 기능에 관계 없이 도덕적 헌신성만을 기준으로 지역사회 공동체 사업 모임(community business team)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흔히 나타나는 실수이다. ..

지역사회 공동체들은 여러 유형의 사람들로 구성된다. 상인도 있고, 전문가도 있고, 실업자도 있고, 생활복지 대상자도 있으며, 학생도 있다. 여기에 그물을 던져서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하나의 일관되고 통일된 집단을 영입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15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해야 하기 때문에 일을한다. 사람들은 주로 돈벌이가 되는 일을 하지만 좋아서 하기보다 그 일이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최선의 것이기 때문에 한다. 16

자원활동(volunteering)은 여가 활동의 일종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여가 활동을 한다. 의무감에서 일하는 자원봉사자는 그것이 비록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여도 크게 효과적인 일꾼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17

 

열정적인 태도는 위험할 수 있다.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도록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23

 

유명한 학계의 인물들은 이제 지역에 근거를 두는개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은 다음의 발상과 똑같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있는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더 보편적인 수준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출발점이 다를 뿐이다. 24

 

모임들은 공유할 수 있는 조직의 비전(미래상)을 먼저 발전시키지 못하면 재대로 가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토론은 그때그때 이루어질 수 있다. ..

지역 사회 공동체 기업을 설립하는 맥락에서 공유할 수 있는 비전이란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들을 총합하여 정리한 것이다. .. 일상생활의 행동 유형을 관찰하면 사람들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행동에서 자주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추구하는 가치가 아니다. 27-28

 

의미 있는 사상을 공유하지 않고는 어떤 의미 있는 행동도 함께하지 못할 것이다. 28

 

기본가치는 다음 5가지 정도다.

첫째, 돈은 수단이다. 돈은 인간의 발전을 위해 쓰여야 하며 그 반대로 쓰이면 안 된다. 지역사회 공동체의 사업은 인간적이고 지역사회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수단이며,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둘째, 개인의 헌신이 기본 요건이다. 이는 신념에 따라 참여한 자원봉사자에게서 나타난다. 금전적 보상에 대한 관심이 아니다.

셋째, 민주주의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이는 투입한 자금의 규모에 관계없이 개인이 각각 동등한 의결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가정하는 것이다. 이 가치는 투표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계속해서 이루어 나가야 하는 과정으로서 경영과 자문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다.

넷째, 경영 직무는 훈련되어야 하고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 이는 이사회의 구성과 간부의 발탁에 반영된다.

다섯째, 지방의 지역사회 공동체와 연대 관계를 유지한다. 만약 실업이 있을 때는 일자리 창출 기업체들을 만들어 내도록 인격적 투자를 앞서서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 28-29

 

최선의 접근방법은 조직 자체를 학습하는 기회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29

 

합의는 행동에 대한 약속까지 포함해야 한다. 32

 

이제는 주위를 살펴볼 차례다. 여러분은 행동을 시작하기 전에 생각이 비슷한 다른 단체들이 하고 있는 일을 분석해야 한다. 그들이 어떤 영역에서 실패했고 어떤 분야에서 성공했는가? 무엇이 잘 작동하였고 무엇이 그렇지 못했는가?

실패 사례에 대해 반드시 던져야 하는 질문은 그 원인이 내부에 있는가, 아니면 외부에 있는가이다. 내부에 원인이 있다면 그 실패가 운영체계의 결과인지 사람의 문제인지 파악해야 한다. 내부적인 요소는 통제할 수 있고 치유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러나 외부적인 요소는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는 경우가 많다. 실수를 범했다고 인정하려는 단체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평가는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하다.

실패 또는 성공 요인을 찾아내는 작업은 어려울 수 있다. 33

 

자치권(autonomy)’은 실패한 지역사회 공동체 사업체들이 주장해 온 가장 공통된 가치 중 하나였다. ..

실패한 지역사회 공동체 사업체들이 언급하는 다른 형태의 공통된 가치는 전통이다. 40

 

성공적인 사업들은 유용한 자원을 발견함으로써 가능하다. .. 자연상태의 물질은 사람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통해서만 자원이 된다는 점 역시 명심해야 한다. 53

 

자원으로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는 상당 부분 선택하는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다. 두 세대 전에만 하더라도 바닷가재는 먹을 수 없는 청소동물(동물 사체를 먹는 동물 종류)로 간주되어싸다. 해덕(Haddock : 대구와 비슷하나 그보다 작은 바닷 고기)이 헐씬 값비싼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의 취향이 뒤바뀌었다. 바닷가재가 해덕보다 훨씬 값비싼 것이 되었다. 54

 

우리의 전통 경제에서 자원으로 인식되어 온 것은 석유, 석탄, 광물 등과 같은 물질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더 복잡하다. 미국의 한 회사에는 밤하늘을 밝히고 있는 수십억 개의 별이 가치 있는 자원이 되었다. 국제별등록회사가 설립되어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별에 요금을 받고 신청자의 이름을 붙여준다. 이 회사는 새롭게 명명된 별의 우주 내 위치가 표시된 증명서를 제공하고 국제등록소에 그 이름을 올려준다. 이제 미국의 젊은이들은 여자 친구에게 다이아몬드를 선물하는 대신 별에 이름을 붙이고 있다. 55

 

성공 여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인적, 금전적 자원과 정부의 자원에 얼마나 잘 접근할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55

 

문제에 대해 고도로 조직화된 대응 체계가 없을 때에는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참여가 중요한 자원이 된다. 56

 

핵심은 지도자의 높은 수준의 정신과 헌신이다...

어떤 지역의 독특한 문화와 역사야말로 핵심 자원들이다. 59

 

지역사회 공동체가 목표인 곳에서는 주주들이(주식회사의) 소유하고 있는 주식의 수에 관계없이 1표씩의 의결권만을 가지도록 제한하는 법률적 합의를 체결해 둔다. 사실상 주식회사도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할 수 있다. 69

 

지역사회 공동체 기업의 더욱 전형적인 형태는 협동조합의 법률적 구조다. 69

 

건실한 사업이라도 무엇이든 성공을 하려면 지방의 문화에 적응해야 한다. 88

 

어떤 유형의 사업이든 경영자가 참석하지 않는 이사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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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를 팔아야 하는 아버지와 아들을 손가락질하게 만든 것도 이런 조작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수의 말을 두려워하고 도 그 말에 휘둘리기도 합니다. 때론 실수를 하고 그러면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기도 하죠. 그런데 우리는 처음부터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한 비웃음을 받고 싶지 않아서겠죠 우유부단하면 안 된다거나 주변 살마들의 말에 휘둘리면 안 된다또는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입니다.

두렵지만 무언가를 시도하고, 여러 번 실패를 겪지만 그 속에서 다시 일어나 성취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성공을 권하는 우리 사회는 실패의 시간을 허락해 주지 않죠. ‘효율성이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패하고 고민하는 시간은 비효율적일 뿐입니다. 당나귀를 팔려고 나갔으면, 빠른 시간 안에 시장에 도착해서 좋은 값을 받고 팔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최대한 빨리 돌아온다면, 그만큼 시간을 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간만큼 밭에라도 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리고 무언가 시도하는 것 자체가 성공의 이데올리기 안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늘 효율적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남들이 말하는 성공을 거둔 이들이 성공을 만끽했다는 이야기도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맛을 안다는 말처럼 무언가를 누리는 것도 겪어봐야 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까 우리에게 강요된 성공의 이미지만 좇다 보면 성공은 할지 몰라도 그것을 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돈은 많지만 돈 쓰는 법을 모르고, 집은 좋지만 과시와 투자 외에는 집의 효용성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이룬 성공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죠.

이솝은 우리에게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라고 전합니다. 여전히 유효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적당히 무시할 줄도 알아야 우리 자아가 온전할 테니까요. 하지만 역사를 보면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성공(?)한 사람만큼 무서운 사람도 없습니다. 고대로부터 폭군, 독재자, 살인자는 모두 단호하고 신속하게 목적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자신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다른 사람의 말에는 귀를 닫았습니다. 그들이 당나귀를 파는 아버지와 아들처럼 자신의 행동을 의심하고 다른 방법을 고안했다면, 역사 속의 비극적인 사건도 많이 주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30-31

 

규율 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 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 - <피로사회> 한병철 34

 

우리는 학창 시절 내내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우리 교육은 규율에 맞춰 살며 질서를 지키는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목표인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무조건 복종하는 인간을 만들어 내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얼마전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보았습니다. 서울대에서 4.0이상의 학점을 받은 학생들의 공부 비법을 알아 본 결과, 대부분이 교수의 말을 토씨 하나까지 틀리지 않게 필기한다고요. 충격이었습니다. 우리의 교육 과정은 마치 단거리 달리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입 시험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질주하게 만들죠. 그래서 질문이 많고 궁금한 것이 많은 학생들이 고득점을 얻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34-35

 

모든 것을 긍정하고, 모든 것에 정력적이어야 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차 무기력한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무기력해진 인간은 분노하는 법도 잊습니다. 저자는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인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 간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자는 사색을 제안합니다. 사색적 삶이란 생각하는 삶을 말합니다. 36

 

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 부정적 힘 없이 오직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 힘만 있다면 우리의 지각은 밀려드는 모든 자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처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어떤 정신성도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무언가를 생각할 힘밖에 없다면 사유는 일련의 무한한 대상들 속으로 흩어질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기(Nachdenken)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 <피로사회> 한병철 36-37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어른들 중에는 아이들이 규칙을 어기거나 어떤 일에 혼란스러워할 때도 아이의 의견만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사회에서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육은 무엇이 되고 안 되는지를 배우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또한 아이들은 절망에 대한 것도 배웁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에 속수무책일 째, 위로받고 힘내는 법도 배웁니다. 어른이, 선생이 옆에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두 가지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격렬하게 우는 아이를 잠시 내버려 둘 줄 알며, 기꺼이 소년의 짝이 되려는 사람이 바로 좋은 선생입니다. 49

 

우리들의 경제 구조는 조직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대립없이 함께 일하며 점점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 기호가 획일화하고, 쉽게 동화하고, 수요를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대중들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제도는 인간이 자유롭고 독립적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남들이 바라는 모든 것들을 다 하는 사람들과, 사회라는 기계에 아무런 마찰도 없이 조립되고 강제나 통솔자가 없어도 통솔되고, 맹목적으로 휘둘려지는 인간들을 필요로 한다. 이런 제도는 사람을 순하게만드는 제도이다.’ - <서머힐> 알렉산더 닐 51-52

 

독일의 철학자 훔볼트(Karl Wilhelm Von Humboldt)모든 인간의 목표는 개인의 능력을 가장 고귀하고 조화롭게 발전시켜 모순이 없고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표면적으로 학교가 내세우는 정신과 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개인의 능력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지점에서 말이죠. 훔볼트는 개인은 잠재력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전제하에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가 경험한 학교들을 돌이켜 보면, 대부분 개인의 능력을 무시한 교육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교의 커리큘럼은 아이들의 능력을 발견하는 데 무관심하고, 수많은 시험은 잠재력을 들여다볼 만한 시간을 빼앗죠. 개인의 잠재력과는 상관없이 학교, 혹은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 학교의 목표인 것입니다. 53

 

금기(禁忌 금할금 꺼릴기)’란 어기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호기심은 그 어떤 두려움도 이겨 내기 때문이죠. 59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은 항상 환기가 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음식과 공기와 물이 몸 안과 바깥을 드나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말도 내 몸의 안과 밖으로 들고 나야 합니다. ..

우리가 그토록 친구를 필요로 하고, 어릴 적 친구를 가장 편하게 대하는 이유도 자신의 치부까지 다 본 사이라서 어떤 이야기를 하든, 어떤 상황에 빠져 있든 그대로 봐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자존심이 필요 없는 사이가 가장 이상적인 대나무 숲인 것입니다. 64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우리가 우리 안에서 무서운 임금님 노릇을 하는 자존심을 꺾고 자신의 구질구질한 개인사를 남에게 털어놓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화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누군가의 대나무 숲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이유입니다. 65

 

세상을 살다 보면, 너무 아픈 데도 침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대나무 숲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친구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좋은 친구가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가슴에 담아 두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말하면 그도 속상할 테니, 아예 말하지 않아요.” 66

 

인디언의 어느 부족은 친구를 내 짐을 어깨에 지고 가는 사람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우리가 내 인생의 짐을 상대의 어깨에 부려 주기도 하고, 내가 견딜 만할 때는 상대의 아픔을 지는 그런 사람이 되면 어떨까요? 지나친 도시화로 대나무 숲을 보기 힘든 이 시대에 말입니다. 66-67

 

위대한 도가 없어지자 인()과 의()가 생겨났고,

(교묘한) 지혜가 나타나자 큰 거짓이 생겨났다.

육친[六親, 아버지 자식 형 동생 남편 아내, 곧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자 효성과 자애가 생겨났고,

국가가 혼란해지자 충신이 나왔다.’ - <노자> 노자 69

 

노자는 자연스러움이 사라진 상태에서 도덕과 윤리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진실을 덮기 위해서 거짓이 거짓을 낳는 것과 비슷한 상태라고도 할 수 있지요. 70

 

어린이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는 것은 반대로 그만큼 모르는 것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어린이만큼 사람 그 자체, 세계 그 자체에 빠져드는 존재도 드물 것입니다. 90

 

아무리 설명한다 해도 진심이 아니면 머리에 남지 않고, 겪지 않으면 가슴에 담기지 않습니다. 97

 

인어 공주는 바다 마녀를 찾아가 자신의 목소리를 인간 다리와 교환합니다. 어릴 적에는 인어 공주의 용기만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안타깝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인어 공주가 이루려는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고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 교환은 매우 불공정해 보입니다. 이제까지 이 교환에 대해 반발을 느꼈다는 독자가 없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요. 동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어 공주를 살리려는 언니들의 교환 조건을 보죠. 인어 공주를 다시 바다로 데려오기 위해, 죽음의 위기에 빠진 막내의 목숨 값으로 언니들이 마녀에게 준 것은 머리카락뿐입니다. 공주의 머리카락이 제아무리 탐스럽다 해도 목소리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마녀가 내준 약과 칼은 성격이 다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녀의 약과 칼, 둘다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하게 해 주죠.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자가 막내 인어 공주라는 것 또한 같습니다. 인어 공주는 육지로 가기 위해 마지막 순간 모래사장에서 스스로 약을 먹고, 인어 공주로서의 삶을 끊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다로 가기 위해 왕자를 칼로 찔러 왕자를 사랑했던 시절을 끊어야 했죠. 그러므로 마녀가 내준 것은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녀는 같은 성질의 것에 다른 값을 받았습니다. 108-109

 

흔한 사랑의 경구 중에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말이 있죠. 하지만 프롬의 말대로 사랑도 기술처럼 갈고 닦아야 하는 능력이라면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수동적인 자세에서 배울 수 있는 기술은 없으니까요. , 내가 하지 않는 사랑이란 불가능합니다. 127

 

사랑의 근본적인 모순은 하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서로 다른존재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사랑만큼 어려운 문제도 없습니다. 128

 

고독한 존재로서 우리는 누구나 사랑을 갈망합니다. 하지만 교환 가치가 당연해진 세상에서 사랑 또한 본질이 훼손되었습니다. 물질적이고 획일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랑 또한 교환 가치가 있는 보시 대상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교환 가치를 넘어선 사랑을 꿈꿉니다.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상대가 나를 예쁘고 잘생겼을 때만 사랑한다고 느낄때, 나의 돈과 능력 때문에 나를 소중히 여긴다는 생각이 들때 쓸쓸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아이를 낳고 키우기 때문에, 매월 일정액을 벌어 오기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는 부부 사이에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요? 조건을 넘어 선 사랑, 주고받음의 대차대조표가 없는 사랑이 이상적이라면, 우리의 본능 자체를 이상적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본주의의 편리성에 길들여진 우리는 사랑 또한 교환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릴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을 버리면 사랑을 위해 우리는 진정한 우리 자신과 대면해야 할 테니까요. 에리히 프롬은 자본주의 사회가 사랑에 대한 높은 이상을 훼손시키며 우리를 하찮은 존재로, 사랑을 모르는 존재로 만든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단언합니다. 그러한 세상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요.

현존하는 체계 아래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예외다.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사랑은 필연적으로 주변적인 현상이다. 많은 직업들이 사랑하는 태도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생산 지향적이며, 상품에 탐욕스러운 사회의 정신은 오직 순응하지 않는 자만이 그에 맞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 해결책으로서 사랑에 진지하게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사랑이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주변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 되려면 우리의 사회 구조 내에 중요하도고 급진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129-131

 

엄마란 어떤 사람 일까요...?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하나 없다는데, 엄마에 대해서는 고정된 이미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여자가 100명이라면 엄마의 이미지도 100개여야 할 텐데, 우리는 엄마라는 단어에 헌신적인, 자애로운, 희생적인등의 단어를 갖다 붙입니다. 세상 모든 자식이 똑같은 덕목을 가지지 못했듯, 엄마의 이미지도 획일적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엄마와 자식이 사회에서 만든 이상적인 엄마 상이라는 그림에 갇혀 불화를 겪고 상처를 받죠. 140

 

어른의 마음속에는 이상적인 어른의 모습이 있죠. 143

 

학교를 그만두고 싶어도 부모님께서 어떻게 성공할 거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서, 아무 말 못하고 있어요.”

어느 날, 열일곱 살 친구에게 이런 고민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쓴 청소년 소설의 독자로 만났던 그 친구는 저보다 훨씬 어른스러웠습니다. 모든 면에서 주체적으로 고민하는 모습이 제 열일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했죠. 과연 그 친구보다 제가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지 늘 헤살렸지만, 그래도 저를 필요로 하면 그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곤 했습니다.

?”

제가 되물었습니다.

고민했는데, 솔직히 모르겠어요. 어른들은 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고 하잔항요. 학교는 아닌 것 같은데, 다른 방법이 뭐냐고 물으면 말이 막히는 거예요.”

저도 낯설지 않은 화두였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방법을 벗어날 때, 누구나 같은 고민을 하게 되겠죠. 저는 그동안 저를 괴롭히고 헤매게 만든 질문, 그러나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을 그 친구에게 던졌습니다.

왜 성공을 해야 하는데?”

성공해야 행복하잖아요.”

친구는 제가 생각했던 과정을 그대로 밟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게 했듯이 다음 과정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행복이 뭔데?”

?”

구체적으로 말이야. 네가 생각하는 행복의 풍경은 어떤 거야? 괜찮은 차? 서울에 있는 고급 아파트?”

“..... 비슷한 거 아니에요?”

가진 것의 합이 행복일까? 네 행복은 그런 거니?”

열일곱 살 친구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마치 저의 옛 모습을 보는 듯했죠. ‘행복을입에 달고 사는 현대인이지만, 사실 행복의 구체적인 풍경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저는 행복의 풍경을 그리려 몇 번을 고민한 끝에 우리가 세뇌된 행복에 길들여져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서부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에 이르기까지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이 곧 행복이라고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유토피아가 우리의 행복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물질적 풍요가 곧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다고 해서 바로 자신만의 행복을 그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는 행복의 풍경이 우리 자신이 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64-166

 

어른 보다 아이가 바이러스에 치명적인 것처럼, 이 사회의 병든 이데올로기에 가장 취약한 것도 어린아이입니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물질적인 것밖에 꿈꾸지 못하는 아이들, 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이기도 합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행복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자가 되면 행복해질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 그 이미지를 만든 것은 우리 자신일까요? 혹시 누군가에 이해 감염된 것을 행복이라 믿는 것은 아닐까요?

세라는 행복해졌다고 작가는 썼습니다. 금광을 소유한 아버지 친구가 세라의 법적 후견인이 되었습니다. 세라는 아버지의 몫 외에도 미혼인 아버지 친구의 재산까지 상속받게 도리 것입니다.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렸던 세라는 친구들과 함게 행복한 생활을 할 뿐 아니라,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며 봉사 활동에도 앞장섭니다. 부유하고 윤택해진 세라, 하지만 세라는 분명히 행복해졌을까요?

세라의 환경에서 변한 것은 경제 상황 뿐입니다. 세라는 여전히 고아이고, 후견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일이 세라 앞에 벌어질 것입니다. 작가는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자마자 세라의 행복을 단언했지만, 세라는 왠지 동의할 것 같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만이 그녀의 행복을 결정한다면, 그녀는 앞으로 돈만 아는 숙녀로 성장하겠죠. 하지만 기품 잇는 그녀는 진지하게 스스로의 미래를, 행복의 풍경을 그려냈을 것만 같습니다. 결코행복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긴 시간 동안 말이죠.(<소공녀> 프랜시스 버넷) 167-168

 

우리는 늘 예쁜 것이 최고의 가치라는 말을 농담(?)처럼 듣고 삽닌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외모 지상 이데올로기에 허우적거리고 있죠. 모델처럼 늘씬하지 않아서, 복근이 없어서, 키가 작아서 ...... 수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외모의 조건에 자신이 세운 기준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외모지상주의의 포로가 되었을까요? 새 왕비에게 거울이 있었다면, 도대체 우리에게는 무엇이 있길래 그럴까요? 우리에게도 마법의 거울이 있습니다. 바로 질문 대신 리모컨으로 작동되는 거울, 피로의 푼다며, 심심하다고 보는 텔레비전. 그것이 바로 오늘날 마법의 거울입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떼려야 땔 수 없는 관계에 있는 텔레비전은 자본주의에서 선호하는 이미지, 즉 팔리기 좋은 이미지를 강조합니다. 그 이미지들은 또 텔레비전에 예쁘게 나오죠. 소비자인 남성, 혹은 여성이 좋아하는 이미지입니다. 자신의 만족에 의해 설정된 외모 기준이 아니라 텔레비전, 즉 자본주의 사회가 선호하는 외모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메시지를 담은 텔레비전을 매일 시간이 날 때마다 틀어 봅니다. 그리고 내 것이 아닌, 내것이어도 나의 행복은 될 수 없는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마법의 거울은 백설 공주와 새 왕비에게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텔레비전을 꺼야 하는 이유입니다. 거울의 목소리는 신뢰를 가장한 억압이므로, 텔레비전을 끄면 우리는 좀 더 자신의 진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내가 진짜 원하는 삶, 내게 잘 어울리는 이미지를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182-183

 

스펙터클(spectacle)이란 간단히 구경거리라 번역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눈을 뗄 수 없고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의 현란한 구경거리에 스펙터클이란 말이 붙죠.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는 <뽀로로>나 어른들의 저녁 시간을 잡아먹는 드라마는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현대 사회의 스펙터클입니다. 하지만 텔레비전만이 스펙터클은 아닙니다. 1년을 분기별로 나누게 하는 스포츠, 이제는 텔레비전 뉴스에도 나오는 한류 스타들의 공연, 떠들썩한 세몰이로 정치 바람을 일으키려 앴는 전당 대회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엄청나게 역동적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쇼들을 모두 스펙터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펙터클의 세꼐는 역동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현대 사회를 사는 모든 사람은 스펙터클의 세계에서 능동적으로 뛰어들어 사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 즐기는 우리도 과연능동적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능동적인 인간은 보는인간이 아니라 행동하는인간입니다. 184-185

 

능동적으로 사는 인간은 스스로 그것에 뛰어들어 활동하는 인간입니다. 자신의 삶에 완벽히 뛰어들면 자신의 삶이 가장 흥미진진한 쇼가 되죠. 굳이 스펙터클한 볼거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185

 

일반적인 역사적 삶이 지니고 있는 결함의 다른 측면은 개인적 삶이 아직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스펙타클적 극화(劇化 심할극 될화) 속에 밀려드는 가장된 사건들은 이 사건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는 사건들이 아니다. (...) 분리된 일상생활에서의 개인적 경험은 언어나 개념이 부재한 채로, 이를 테면 어느 곳에서도 기록되지 않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비판적 접근도 없는 채로 존속한다. 개인적 경험은 고통되지 않는다. 개인적 경험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없는 스펙타클적인 가장된 기억을 위해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망각된다.’ - <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

흔히 셀레브리티(celebity)라 말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학자, 예술인, 정치인만이 아니라 대중 매체가 일자리인 셀레브리티 상당수가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186

 

셀레브리티는 대부분 상류층입니다. 그들 자신과 자녀는 텔레비전을 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즐길 거리도 많습니다. 186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인간은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드라마속 재벌남자와 평범한 여자의 꿈 같은 로맨스가 끝나면, 울는 현실 속 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텔레비전의 세계가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역동적이면 역동적일수록 우리네 삶이 더욱 남루해보이죠. 187

 

존엄성을 지킨다는 말은 거창해 보이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지킨다는 말입니다 육체는 '자기 자신'의 첫 번째이자 가장 기초적인 요소죠. 자신의 몸을 존중하고, 키우고, 단련하는 법이야말로 가장 어린 시절에 배워야 하는 기초가 아닐까요? 한 끼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그 시간을 충실히 누리는 법을 배우는 것도 기나긴 인생을 위한 수업이 아닐까요?

우리 사회는 어릴 적부터 남의 기준에 맞춰 살도록 강요합니다. 공부라는 타인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라면 나 자신 '따위'는 무시해도 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주입합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누구나 알게 됩니다. 정말 중요한 결정 앞에서 타인의 기준이나 사례는 아무 쓸모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지요.

자신을 가벼이 여기는 삶은 자신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삶입니다. 그 시간이 오래될수록 우리는 인생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헤매게 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깊어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니 어떤 부분이 약한지 모릅니다. 작은 펀치 하나에 온 존재가 휘청이고 나면 이미 때는 늦었죠. 이렇게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닥쳐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때일수록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릴적에 배워야 했던 끼니의 중요함, 체력 키우기 등을 이제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의 손과 발을, 눈과 코와 입술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머리에 새기며 자신과 사귀어야 합니다. 그렇기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자신을 인정해 가며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하나하나 받아들여야 합니다. 돌아가는 길이라 더디고 어렵지만, 한 가지 위로할 만한 것은 인간은 생각보다 견고하다는 점입니다. 스스로 빗장을 열러 주지 않는 한, 우리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29-230

 

시스템은 다수의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신이나 왕권 같은 불가침한 영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시스템에 대하여 늘 고민하는데, 현대 철학자 중에 이를 깊이 고민한 학자가 바로 존 롤즈(john Rawls. 1921~2002, 미국의 철학자로, '정의'라는 한 주제에 대해 깊이 연구한 학자로 정평이 나 있다)입니다.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정연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면 개선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 (...) 정의는 타인들이 갖게 될 보다 큰 선을 위하여 소수의 자유를 뺏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본다. 다수가 누릴 보다 큰 이득을 위해서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해도 좋다는 것을 정의는 용납할 수 없다.' - <정의론> 존 롤즈

우리나라에서는 '국가를 위하여', '경제 발전을 위하여'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 많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침묵을 강요한 정부가 그랬고, 노동자에게 희생을 요구한 재계(財界)가 그랬죠. 242


정의로운 사회가 행복한 사회라는 말에 동의를 한다면, .. 한 가지 실험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인을 찾기 위한 실험이 아니라 우리의 시스템을 정의롭게 만들기 위한 실험을 말이죠.

존 롤즈는 이를 위한 사고 실험을 제안했습니다. 통칭 '무지의 베일'이라 불리는 실험이죠. 내가 남한에 태어날지 북한에 태어날지 모르는 상태, 나의 집이 부자일지 가난할지 모르는 상태, 내가 이성애자가 될지 동성애자가 될지 모르는 상태, 내가 건강할지 아닐지 모르는 상태........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의 베일 속의 인간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최대한 공정한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것뿐입니다. ..

내가 생각하는 평등을 다른 사람이 불평등이라 말할 때, 다른 사람의 평등이 내게는 너무나 불평등하게 느껴질 때, 잠시 무지의 베일을 꺼내 보는 것은 어떨까요? 243-244

 

가만히 돌이켜 보니 우리는 소시민에게 감정이입을 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릴 적 읽은 동화나 어른이 되어 즐기는 영화의 주인공들 대부분은 특별한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즐기기 위한 것입니다. 독서나 영화 관람이 끝난후에 일상생활에서 씁쓸함을 느낀다면, 우리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겠죠. 저는 그것이 일상적 감정이입의 문제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즐길 때나 진행되어야 할 감정이입이 우리의 일상생활까지 지배하고 있다고 말이죠.

평범한 우리가 특별한 사람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특별한 사람의 성취를 목표로 삼다 보니, 작은 성취 같은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커다란 목표를 바라보니 자신은 늘 제자리, 실패자인 것만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내면은 스스로 관객이 되어 평범한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 합니다.

이 사회는 늘 성공하라고 세뇌를 하죠. 성공해야 행복해진다는 이데올로기가 내면 깊이까지 침투해 있습니다. 백인백색(百人百色)이라고 하는데, 이 사회에서는 성공의 모습까지도 기성품처럼 정해져 있습니다. 도심의 평수 넓은 아파트, 멋진 자동차, 명품 옷과 액세서리 등등. 이런 것들을 갖춘다고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성공으로 가는 궤도에서 이탈하는 것은 불안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공을 위하여 맹목적으로 달려갑니다. 성공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말을 되뇌이면서요. 하지만 성고이란 자기 충족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기 충족할 수 있을 것 같거나 충족해야만 할 수준의 무언가를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입니다. 임금에게 가장 멋진 옷이 성공의 척도였듯이 우리도 결코 도달하지 못할 목표를 위해 미친듯 달려갑니다. 자기계발이란 말이 고전적 단어가 되고, 이미지 메이킹이란 말도 시들해지니 이제 셀프 브랜딩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충족하는 삶은 임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성공한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퇴화죠.

"나는 이 정도 디자인과 옷감이면 만족해" 혹은 "나는 여기까지만 성공할래"라고 말하는 순간, 비웃음을 당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사회에서 멈추는 순간 허물어질 것이라는 불안도 만연하죠. 사실 우리 사회에서 소시민의 충족한 삶은 살짝 밀기만해도 무너질 만큼 허약합니다. 모두가 그것을 알기에 마족하고 싶어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소시민이면서도, 평생 소시민에서 벗어날 수 없으면서도, 마치 임금이라도 된 양 임금과 같은 각오와 부담감을 안고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어른으로 성장하는 도안 소시민으로 살아도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는 사회, 임금이 되어 본 적도 없는데 벌거벗었다고 손가락질하는 사회, 지금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것을 지키기 위해 더 무엇을 노력해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249-251

 

조선의 세자들은 지독한 조기 영재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보통 예닐곱 살 정도에 시작된 교육은 그 양과 질에서 조선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공부에 야간 자율학습과 월말 평가는 물론이고, 수업 시작 전에는 여러 명의 스승들 앞에서 전날 배운 것을 암송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왕이 그 자리에 직접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스무 명이 넘는 학자들이 어린 세자 한 명을 가르치기 위해 24시간 준비 상태였는데, 그들 모두 내노라하는 공부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매서운 눈으로 감시하며 공부를 시켰으니, 조선의 세자도 웬만해선 버티기 힘든 자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힘든 공부를 사도 세자는 네 살에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넘치는 사랑 덕분에 생후 48개월 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쉴 시간도 없이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어린 사도 세자는 꽤 똘똘한 아이여서 시키는 대로 공부를 곧잘 했다고 합니다. 그렇잖아도 귀여운 아들이 조선 최고 지식인들에게 뛰어나다는 평까지 들으니, 영조의 기대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공부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수업 시간도 늘어났습니다. 한창 뛰어놀아야 할 나이의 건강한 사내아이가 재미있어 할 리가 없겠죠. 그러나 영조는 놀고 싶어 하는 세자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커녕 조금이라도 꾀를 부릴라치면 버럭 화를 냈습니다. 사도 세자의 아내인 혜경궁 홍 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 세자는 영조에 대한 공황장애를 겪었던 것 같습니다. 266-267

 

어른이 아이에게 요구하는 '착함'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조용히 하라고 하면 조용히 하고, 단정하게 입으라고 하면 그리 하고, 자야할 시간에 자는 아이, 한마디로 어른 손을 덜 타는 아이입니다.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도 그럴까요? 갓난 아이는 수동적입니다. 자라나는 아이만이 자신의 생각과 그것을 관철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어른들의 위협으로 그 의지가 꺾이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면, 아이는 개성은 커녕 자신에 대한 주체적 인식조차 성장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합니다. 아이의 말에 윽박지르는 일은 비교육적이라는 인식이 보편적이죠. 그래서 되레 식당 같은 공공 장소에서 아이의 제멋대로 행동을 제지하지 않아 사회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286

 

우리 사회의 부모들은 성가시게 하는 질문이나 고집은 수긍해도, 아이들이 공부하지 않겠다는 말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공부는 이 사회의 인력으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요. ..

어른이 되어 사회가 속삭인 약속이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에는 이미 레일 밖으로 나오기엔 늦었습니다. 부모의 손을 타지 않는 아이, 어른의 말에 순종적인 학생, 사회 질서에 반기를 들 줄 모르는 국민...... 사회가 깔아놓은 레일 위에서 만들어지는 인간 군상입니다. 286-287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우리는 어떠한 외적 권위에도 종속되지 않고, 우리의 사상이나 감정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자유야말로 거의 자동적으로 우리의 개체성을 보장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는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가질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또한 외적 권위로부터의 자유는 내부의 심리적 상황이 우리가 자기의 개체성을 확립할 수 있게 될 때에야 비로소 항구적인 성과가 된다.' 289

 

이 책은 자유롭다는 사회에서 우리가 왜 이렇게 부자유스럽게 살아가는지, 답답하고 절망적인 우리의 병증을 시원하게 아려 줍니다. 프롬은 말합니다. 우리는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자유란 그것을 향유할 우리가 건강해야만, '자신의 생각과 개체성'이 확고 해야만 누릴 수 있다고요.

에리히 프롬은 우리가 왕이나 교회의 권위로부터 자유를 쟁취했다고 믿지만, 실은 경제적으로 자본의 노예가 됨으로써 고독이나 불안을 경험하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도피를 시도한다고 말합니다. 아니, 처음에는 시도였을지 모르지만 자본의 지배가 가속되자 '자유롭다고 믿는 자동인형'을 만드는 시스템은 공고화되었지요. 290

 

'...... 개인이 자기 자신이 됨을 그치고 변화하는 것이다. , 그는 일종의 문화적인 양식에 의해 부여되는 성격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 전적으로 동일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자신에게 기대하는 그런 상태로 변화된다. 그와 함께 ''와 외부 세계와의 갈등은 사라지고, 고독과 무력함을 두려워하는 의식도 사라진다. (...) 개인적인 자아를 버리고 자동 인형이 되어 주위 수백만의 다른 자동인형과 동일해진 인간은 이미 고독이나 불안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대신 그가 지불한 대가는 혹독하게 비싼 것으로, 그것은 바로 자아의 상실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회가 자동인형이 된 인간으로 가득해진다고 합니다. 자아를 상실한 인간은 인간적인 무력감과 절망에 휩싸입니다. 자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지고 인생이 무의미해질 때, 인간은 자신을 찾기 위해 싸우는 대신 인생의 의미를 대신 찾아줄 무언가를 갈망하게 됩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사회가 바로 파시즘의 온상이라고 지적합니다.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서서 개인의 개성을 증오하는 그 이데올로기 말입니다.

민주주의라면 인간에 대하여 모든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인생을 스스로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백인백색, 모든 주체적인 인간은 각각의 개성을 뽐내겠지요. 그것은 또한 각 개인의 권리이며 수많은 피를 흘리며 되찾아 온 권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든 권력이 그러하듯 그것을 빼앗으려는 시도는 집요하기만 합니다. 착한 아이, 양순한 시민으로만 살아가서는, 절대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없죠. 가만히 있으라는 기득권의 지시에 반항하지 않고서는 지킬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평생 투쟁심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동인형이 되어 파시즘의 깃발에 열광하여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면 말이지요. 긴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제야 겨우 조금, 풀꽃들 사이에서 춤을 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춤추기 위하여 우리는 언제든 싸울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피곤하게 느끼겠지만, 노예로 사는 것보다 그것이 나은 삶 아닐까요? 당신이 출 춤에 미리 박수를 보냅니다. 291-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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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THREE 일과 삶

 

10 우리는 시간과 투쟁한다.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전보다 더 오래 살고 있으면서도,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졌기 때문에 시간은 더 없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247

 

아이들에게 기다림을 가르치는 것은 양육에서 중요한 부분인 동시에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은 조직 시간이 자주 자기 시간이나 상호작용 시간보다 우선시되는 세계에서 꼭 필요한 기술이다. 25

 

우리 문화에서 시간은 돈이다... 일을 더 빨리 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시간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비행기, 자동차 컴퓨터는 빠르지만, 우리는 그것들과 더불어 점점 더 많은 곳을 가고 더 많은 일을 한다. 우리가 더 빨리 일할수록 우리의 시간은 더 빨리 새로운 일로 채워진다. 우리가 더 빨리 움직일수록 우리는 더 적은 시간을 갖게 된다. 사람들이 속도에 집중할수록 서로에 대한 인내심은 점점 줄어든다. 또한 빠르게 돌아가는 삶은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사람들은 자유시간이 전혀 없다고 불평한다. 253-254

 

앨빈 토플러가 <미래 충격>에서 지적했듯이, 사회 변화가 빠른 시기에는 문화 전체가 일시적인 공황을 경험할 수 있다. 254

 

시간의 속도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의 수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더 많은 시간 동안 일할 뿐만 아니라 더 많이 이동해야 하고, 가야 할 곳도 더 많다. , 더 많은 것을 사야 하고,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즐겁게 해줄 오락활동들도 더 많이 있다. 우리가 정해진 시간에 더 많은 활동들을 끼워 맞추려고 노력할수록, 시간은 더 빨리 가는 듯하다. 오늘날 우리는 시간이 더 없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에 더 시간이 없는 것처럼 느끼는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255

 

사람들이 시간에 맞춰 일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뤄진 현상이 아니다. 과거 고용주들은 사람들을 시간에 맞춰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분투했다... 숙련된 장인들은 늦게 일어나 더 늦게 일을 시작했다. .. 17세기 초까지 영국의 노동자 계급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산업화 이전의 삶은 대학생들의 생활과 약간 유사했다. 불규칙적인 식사와 수면이 과음과 파티, 그리고 잠샘 작업과 어우러져 있었다. ..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산업화 이전 사람들의 시간에 대한 태도는 우스꽝스럽고 유치해 보인다. 우리는 이미 조직 시간의 요구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 산업화 이전의 노동자는 게으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시간을 돈으로 여기지 않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돈보다 여가가 더 가치있는 것이었다. 255-256

 

17세기와 18세기 유럽의 남성 및 여성 근로자들은 매주의 첫날에는 일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스스로 정한 그 휴일을 () 월요일이라고 불렀다. 남성들은 술을 마시고, 길모퉁이를 서성거리고, 싸우고, 투견이나 투계 선술집에서 내기 게임을 하며 월요일은 보냈다. 일요일은 가족을 위한 날이고, 월요일은 친구를 위한 날이었던 것이다. 여성들도 술을 마셨지만 대개는 집안일을 하면서 월요일을 보냈다. 성 월요일의 흔적은 1970년대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서 헤일리는 베스트셀러 소설 <자동차>에서,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월요일에 만들어진 차를 결코 사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주말이 끝난 후, 근로자들은 병가를 내서나 피곤한 상태로 출근하기 때문에 월요일에 만들어진 차들은 다른 날 만들어진 차들보다 덜 믿음직한 성능 기록을 가지고 있는 편이라는 것이다. 256

 

고용주들은 사람들에게 규칙적으로 일을 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낮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일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1900년대 초, 헨리 포드는 전혀 다른 방식을 택했다. 노동규율을 강화하기 위해 낮은 임금을 이용하는 대신 오히려 보수를 높여주고 주당 근무 시간도 줄여주었다. 그는 사람들을 착실한 근로자로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탐욕스런 소비자로 만드는 것, 즉 충분한 임금과 쇼핑하기에 충분한 시감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가지 모두 기업에 이득이 되었다. 257

 

테일러화(과학적 관리법의 창시자인 테일러의 이론에 따라 모든 업무를 단편화하고, 개별 작업자의 동작을 규정, 감시함으로써 시간과 동작의 낭비를 줄여 일의 생산성을 높이려는 것.). 260

 

아마도 현대의 일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점은 자신이 생산한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시간에 대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점일 것이다. 263

 

시간에 맞춰 일하는 것에 저항했던 산업화 이전의 우리 조상들과, 시간과 과업에 의해 구조화된 일을 하는 현재 사람들의 상태는 일과 시간에 대해 세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첫째 아마도 과업 지향적인 일이 시간 지향적인 일보다 더 자연스럽고 만족스러운 듯하다. 둘째, 아마도 우리들 대다수는 짧은 시간 동안 열심히 일하고 긴 자유시간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셋째, 그러나 우리 문화에 존재하는 시간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고려한다면, 일정한 노동 시간이 정해지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다. 264

 

근무시간 자유선택제는 고용인들에게 자신의 노동시간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264

 

근무시간 자유선택제는 어떤 면에서 20세기의 가장 급진적인 경영 혁신이다. .. 지난 백년 동안, 대부분의 경영 혁신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일에 끼워맞추도록 돕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다... 근무시간 자유선택제는 바닷속의 좁쌀 한 알(滄海一粟, 창해일속)’에 불과하지만, 개인이 자기 삶을 중심으로 일을 조절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황에 맞게 일을 조정하도록 하는 또 다른 방법은 시간제 근무이다. 시간제 근무는 최근 나쁜 평판을 얻어왔으며,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 많은 고용주들은 전일제 고용인들을 해고한 다음 그들의 자리를 더 값싸고 쉽게 내보낼 수 있는 시간제 고용인들로 메우고 있다. 둘째, 시간제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회보장 혜택을 받고 있지 않으며, 임금 수준도 낮고 승진 가능성도 없는 직업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시간제 근무를 선호한다. 265

 

우리들 대부분은 업무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266

 

일이 우리 삶에서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할수록 모든 활동은 점점 더 일처럼 느껴진다. 시계와 일정표는 우리의 사회생활로부터 자연스러움을 빼앗아간다. 이제 사람들이 친구의 집을 예고 없이 방문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 되고 있다. .. 현재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거나,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하고 있지 않은 일은 아마도 잠자는 일일 것이다. 신경 생리학자인 스탠리 코랜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첨단 기술인 시계가 지배하는 생활방식 덕분에우리는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보다 연간 500시간의 수면을 덜 취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269

 

최근에는 컴퓨터, 이메일, 팩스, 휴대전화, 호출기 등이 우리를 일터의 벽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제 일부 사람들은 침대에서 잠옷을 입고 일하거나 해변에서 수영복을 입고 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

근로자들이 직장 내의 책상에서 떠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술은 일하는 시간의 범위를 넓히거나 그 시간의 양을 증가시키는 데도 이용된다. 270

 

장소에서의 융통성은 근무시간에도 융통성을 부여한다. ..

신기술은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었지만, 그것은 잠재적으로 우리를 하루 24시간, 1365일 내내 고용인으로 만든다. 271

 

시간은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것을 팔고, 사용하고, 사고, 투자하고, 아끼고, 죽인다. 274

 

샘 킨은 자신의 책 <열망>에서 .. 일이 사람들을 지배하면 사람들은 무력해지고, 성적 구별이 사라지며, 시장 원칙만이 추종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일직이 알베르 카뮈가 말했듯이, 일이 없으면 삶 전체가 타락한다.”그러나 자유시간이 없어도 삶은 타락할 수 있다. 275

 

 

11 여가와 소비주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가가 인간의 행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믿었다. ..

그리스어로 여가라는 단어는 스콜레(skole)’이며, 라틴어로는 오티움(otium)’이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모두, 일을 뜻하는 단어는 여가를 뜻하는 단어의 부정형이다. ‘이라는 뜻의 아스콜리아(ascholia)’네고티움(negotium)’은 둘다 여가가 아닌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스페인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뜻하는 스페인어네고시오(negosio)’여가각 아닌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어, 라틴어, 스페인어 모두 여가가 마치 생활의 중심인 것처럼 일을 여가와 관련시켜 비유한다. 영어단어 레저(lisure)는 라틴어의 리케레(licere)로부터 파생되었는데, 그것은 허락되다라는 의미이다. 영어에서는 마치 일이 생활의 기준인 듯 여가를 일에 빗대서 표현하고 있다. , 우리가 일을 멈추도록 허락되었을때가 여가라는 것이다. 276-277

 

사업가들은 일요일을 우울하고 지루한 날로 만들려는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그렇게 하면 일을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여가가 너무나 보람차고 즐겁다면 사람들은 일터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279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고용주들은 토요일 휴가를 주는 것에 반대했다. 그들은 고용인들이 말썽만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280

 

TV를 더 보고 싶다는 이유로 일하러 가기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 사람들은 나뭇조각으로 카누를 만들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가한 시간을 원하지만, 단지 TV를 더 많이 보기 위해 여가시간을 원하지는 않는다(비록 한가한 시간에 그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TV를 보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282

 

마르크스는 인간에게 본성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다. 283-284

 

한때 여가는 아마추어를 위한 시간으로 여겨졌다. 아마추어라는 단어는 라틴어 아마토르(amator)’, 애호가라는 단어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아마추어를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애호하는 사람또는 어떤 것에 대해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아마추어는 돈이나 명성 같은 외적인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재미있고 본질적으로 보람을 주기 때문에 취미를 개발한다. 285

 

1970, 경제학자 스테판 린다는 <곤경에 처한 유한계급>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부유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자유시간더 많은 소비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대부분 더 많은 소비를 선택한다고 주장했다. 286

 

돈을 쓰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돈을 벌기 위한 시간, 쇼핑할 시간, 그리고 유람용 모터보트나 패키지 투어 등 돈으로 구매한 물건들을 사용할 시간이 필요하다. ...

소비는 일하고자 하는 욕구가 약할 때조차 일을 해야 할 필요를 창출한다.. 287

 

십대(teenager)들조차 자신의 여가를 소비와 교환한다. 과거의 십대들은 가족을 돕거나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 자신이 원하는 사치품을 사기 위해 일하는 중산층 십대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국인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젊은이들에게 을 장려했다. 그들은 젊은이들이 일을 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규율을 발전시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287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는 것은 십대의 학업을 방해할 뿐 아니라 호기심 많고, 상상력 풍부하고, 호전적이어야 할 시기에 적응된 온화함(adjusted blandness)”을 심어줄 수 있다는 그린버거와 스타인버그의 주장이다. 288

 

여가와 소비재를 교환하는 십대들은 그들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일과 소비의 패턴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을 잃는다. 만약 그들이 물건을 사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자유시간을 포기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여가를 가질 수 없다. 그들은 어떤 활동들이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좋은지 발견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은 (부모를 비롯하여 다른 권위 있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일이다. 말썽을 일으킬 위험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시장이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닌, 자기 방식대로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289

 

우리는 미국인들이 점차 타인 지향적으로 변해가고 있다1950년대 데이비드 리스먼의 주장을 논의한 바 있다. 타인 지향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원할 뿐 아니라 시장의 물질적 동기와 고용주가 제공하는 심리적 유인에 의해 움직인다. 리스먼의 말은 옳았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택권을 제공하는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지만, 아마도 그로 인해 우리의 행동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안에 불어넣은 욕구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쇼어는 소비가 대개 지위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290

 

주디스 윌리엄슨은 <열정의 소비>에서, 시장이 우리의 열정을 소비하고, 그것이 더는 기존의 사회 질서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무장해제시킨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

돈은 당신이 돈을 번 방법을 포함하여 많은 것을 숨겨준다... 우리는 고객으로서 권력을 가지고 있다. 시장에서는 현금이나 수표, 혹은 신용카드를 갖고 있기만 하면, 당신이 누구든 상관하지 않는다. 292

 

'여가'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본질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가행위를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단지 그 행위 자체를 즐긴다. 293

 

만약 당신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주변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지 않다면, 일과 소비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여가를 즐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 여가는 돈이 들지 않는다. 친구나 가족과 어울리는 것, 소설책을 읽거나 단지 공상에 잠기는 것만으로도 여가를 즐길 수 있다. 여가는 우리에게 소중하고 할 만한 가치가 있는 활동을 하는 시간이다. 여가는 자유로운 시간 이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장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이다. 여가가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릴 것이다. 여가가 없다면 우리는 삶을 이해하는 것이 한층 더 어려울지 모른다. 295

 

 

12 의미 있는 일, 그리고 행복한 삶

 

"의미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어떤 이들에게 의미 있는 일은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일을 뜻한다. 다른 이들은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원한다. 의미 있는 일의 본지로가 그에 대한 욕구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철학적 질문의 모태가 되는 질문에 직면해야만 한다. ,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296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한다. 300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 자체가 정신 질환의 징후라고 생각했다. 마리 보나파르트에게 보낸 편지엣 그는 이렇게 썼다. "누군가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묻는 순간, 그는 이미 병에 걸린 것이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 왜 나는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가?"처럼 부정적인 방식으로 제기되면 우울한것이 사실이다. ..

심리치료자이자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인 빅터 E.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중심으로 치료 방법을 개발했다. '의미치료(logotherapy : 이 이름은 '의미'리는 뜻의 그리스어인 '로고스'로부터 파생되었다)'는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 원동력이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 프랭클은 삶의 의미는 변화하는 것이고 사람마다 다른 것이지만, 사람들은 선행을 하고, 가치를 경험하고, 마지막으로 고난을 통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300-301

 

<나의 고백>이라는 글에서 레오 톨스토이는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기 시작한다. 톨스토이는 모든 인류가 삶의 의미를 알고 있지만, 자기 자신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303

 

놀랍게도,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관심을 기울인 현대 철학자는 거의 없다. 또한 관심을 기울였더라도, 그들의 대답은 어쩔 수 없이 신학자나 심리학자들의 대답만큼 구체적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질문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곤 한다. E. D. 클림케는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영역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눈다. 첫 번째 질문은 우주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존재 이유와 그 목적에 관한 것이다. 가장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세 번째 질문이다. 나는 왜, 어떤 목적으로 존재하는가? 만약 목적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그것을 발견할 것인가? 목적이 없다면 내 삶은 어떤 의미나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일부 철학자들은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 자체가 하나의 대답만을 암시한다는 이유로 그 질문을 해체시킨다. 다른 이들은 그러한 질문에는 대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무의미한 질문으로 여긴다. 305-306

 

철학자 L.J. 러셀이 지적하듯이, 만약 삶의 의미가 오직 그 결과에 의거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결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모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내일 잼을 만들어라, 어제 잼을 만들어라. 그러나 오늘은 잼을 만들지 말아라.", "당신은 자녀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당신의 자녀들도 그들의 자녀를 위해 마찬가지로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잼을 먹지는 못한다." 의미 있는 삶이란 현재를 위한 삶과 미래를 위한 삶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러셀을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들은 삶의 의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이라고 좋아한다. 그러나 러셀은 삶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오늘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307

 

도덕성이 반드시 당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다른 모든 이들의 가치 있는 삶을 살 권리를 존중한다면, 이론상으로 우리는 모두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 행복으로 가득한 삶은 의미 있는 삶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행복한 삶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행복하기'위해 해복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 즉 삶의 목표이다. 어리스토텔레스는 실용적인 지혜, 탁월함, 즐거움이라는 세 가지가 행복한 삶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세상에 대해 배우는 것은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학구적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수준에서의 학습, 재능이나 기술을 발전시키는 일이 삶의 보람된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세스는 탁월함에 대해서도 도덕적이고 지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우리는 두 가지 설명을 모두 종합하여,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다. 309-310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 또한 행복의 중요한 요소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무 즐거움이나 행복의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오직 고귀하고 도덕적인 즐거움만이 참다운 행복으로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행복은 오직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행복은 활동적인 사람에게만 온다. 이러한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가생활은 게으른 생활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활동적인 삶이다. 인간은 어떤 일을 '' 때 가장 행복하다. 누군가를 감옥의 텅 빈 독방에 가두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최악의 고문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죄수에게서 자유뿐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행위와 상호작용까지 박탈하는 것이다. 포로 수용소의 생존자들은 종종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활동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미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삶 전체에 대한 평가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삶의 행복한 부분의 총합 이상이다. 당신이 항상 행복할 필요는 없다. 행복한 삶은 고통과 슬픔까지도 포함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급자족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결핍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는 행복이란 게 반드시 살아가면서 원하는 걸 얻는 데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때때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원하는 것을 얻어도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과 의미는 모두 도덕성과 관련되어 있다. 행복하고 싶다면 당신은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며, 도덕적으로 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원해야 한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행복에 대한 보편적인 요구와 우리 문화에 널리 퍼져있는 불행은 일을 지향하는 문화의 산물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는 오직 일을 통해서만 행복을 얻는다. 그것은 극도의 피로와 회복이 반복되는 과정이다. 310-311

 

심리학자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행복 연구는, '일이 행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만들어낸다'는 아렌트의 견해를 지지하는 듯하다...

칙센트미하이는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 동안에는 약 절반 가량의 시간 동안 몰입을 경험하고, 여가시간에는 18% 정도만 몰입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일에 몰입할 때 창조적이고, 강하고, 활동적이며, 집중적이고, 동기화된 느낌을 더 많이 갖는다는 의미였다. 311

 

칙센트미하이의 연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통찰은, 현재 우리의 문화에서 사람들은 일터가 아닌 곳엣 이러한 행복한 순간을 제공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312-313

 

자본주의는 삶의 수단을 제공할 뿐 삶의 목적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315

 

20세기 내내 고용주들이 조직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이것을 손에 넣어 이용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중 맨 처음에 등장한' 과학적 관리법'은 육체를 손에 넣으려고 시도했고, 다음으로 출연한 '인간관계론'은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으며, 이제 몇몇 컨설턴트들은 '영혼'을 건드리려 하고 있다. 317

 

'직장에서의 영성'은 대중 심리학과, 일시적으로 유행했던 경영학 이론이 항상 해왔던 일을 반복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 그것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듦으로써, 애초에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만들었던 권력과 갈등, 자율성에 관한 심각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대신 그거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이다. 318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제공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의미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320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처럼, 의미 있는 일은 주관적인 특성과 객관적인 특성을 모두 지닌다. .. 일의 사회적 의미와 도덕적 가치는 문화와 개인에 따라, 그리고 시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세상을 '인식'할 뿐 아니라,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창조'해주지 않는다. 320

 

개인이나 조직이 의미를 창출하려고 시도할 수는 있지만, 만약 그러한 의미가 교묘한 속임수로 만들어낸 환상이라면 그것은 냉소주의만을 가져올 뿐이다. 앞서 우리는 따로따로 일하는 사람들을 ""이라고 불렀던 회사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어떤 것의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그 의미까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한 상황 혹은 실재를 파악해야만 한다. .. 모든 고용인들은 존엄과 존중을 가지고 처우받아야 한다(너무나 많은 근로자들이 수년간 자신들이 '성인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해왔다)...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이라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삶에 참여하는 방식에 대해 약간 다른 주장을 했다. 그는 결정하고 생각하는 능력이 결여된 노예라도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워지면 이러한 능력을 되찾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일부 사람들은 노예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대신해서 생각하고 결정해주는 것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한다. 321

 

의미 있는 일은 우리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정의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그것을 보면 알게 된다. 종교직과 같은 일부 직업들은 본질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직업들보차도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이 의미를 발견할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의미 있는 일이 항상 편안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고통이나 고된 일 혹은 스트레스를 수반한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여전히 좌절하거나 지쳐서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은 대체로 개인의 삶에 활기를 북돋워준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경험과 우리가 논의한 숭고한 여가의 개념은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322-323

 

모든 사람이 의미 있는 일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존중받기'를 워하며, 어느 정도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고 싶어할 뿐이다. 결국 선의는 심리적으로 계획되기보다는 존중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번성하는 경향이 있다. 323

 

 

 

에필로그 - '''삶의 질'을 향상시켰는가?

 

이 책은 저주로부터 소명으로, 그리고 그 이상의 것으로 변화한 일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다...

일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첫째, 일은 더 나아졌는가? 그리고 "더 낫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분명 임금 노동자는 노예보다는 낫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을 노예와 농노, 계약제 하인, 그리고 초기 산업 노동자들보다는 육체적으로 덜 고되고 덜 지저분하고 덜 위험하다. 그러나 "더 낫다"는 것은 또한 고용주와 고용인들 간의 도덕적 관계를 포함해야만 한다. 직장 내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공정성이 존재하는가? 개인들은 '더 나은' 처우를 받고 있는가? 혹은 일이 우리의 삶을 향상시켰는가? 이 역시 "더 낫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달려 있다. 일이 삶의 물질적 조건들을 향상시켰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삶의 질'을 향상시켰는가? 우리의 직업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324-325

 

나는 현대의 경영자들이 올바른 직장을 '만들기'보다는 개인으로 하여금 기분 좋게 '느끼도록'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을 비판해왔다. .. 현대의 경영 기법이 낳은 또 다른 결과는 일이 점차 우리 삶의 보다 큰 부분을 차지하도록 일의 사회적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

오늘날의 고용주들은 자신들이 많은 것을 고용인들에게 약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특히 주주들에게 그토록 많은 것을 약속해야 할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들은 교묘한 속임수로는 신뢰와 헌신을 얻어낼 수 없음을 알고 있다. 325

 

고용주들은 자기 책임을 회피하고 고용인들에 대한 의무 없이 그저 권한만 유지하려 든다. 글나 근로자들은 자신의 실수뿐 아니라 경영자 및 경제의 실수와 "불운"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더욱 나쁜 것은 그들이 그것을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질책한다는 것이다. 326

 

고용불안정은 실업률이 낮을 때보다 새로운 삶의 방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326

 

정직한 직장은, '약속을 지키는 최상의 방법은 자신이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하는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328

 

과거의 사회계약이 사라졌다면 새로운 사회계약은 어떤 것일까? 조직은 직업 안정성을 약속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정보의 공유를 약속할 수는 있다. .. 경영자들은 조직의 모든 정보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용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될 정보는 가능한 한 많이 고용인들과 공유해야 한다. .. '정직한 직장'이란 고통스러운 진실을 이야기해줌으로써 그들이 그것에 대비할 수 있게 해주는 조직을 의미한다. 결국 그것이 "근로자들을 성인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329

 

상호존중은 단기적인 헌신관계를 만들어내는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서로에게 존중을 표하고 존중을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진실이 항상 듣기 좋은 것만은 아니며, 우리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항상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을 '신뢰'한다...

존중, 신뢰, 정직은 양 방향으로 작동한다...

'진실'은 그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울 것이다. 분명 대부분의 고용인들과 학생들은 평균 이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향상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준다면 그들은 진짜로 평균 이상이 될 기회를 얻는 것이다. 330

 

전통적인 노동윤리 아래서 개인의 고결함은 그가 어디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일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일하는지에 달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경영이론가와 고용주 들은 '일을 잘하는 고용인일수록 자기 삶을 희생한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한다. 331

 

 

내가 현대인의 일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한 가지 이유는 단지 직장 내의 불의, 경영 술수, 혹은 경제적 불안정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적인 큰 그림을 살펴보았을 때, 나는 삶 자체가 더 편해져야 할 시대에 이르러서도 유급고용이 살을 지배하는 것을 보고 당혹감을 느꼈다. 우리들 대다수는 어디서 어떻게 살지, 어느 곳에서 일하고 어떤 물건을 구입할지에 대해 전례 없이 많은 선택권을 가진 놀라운 시대, 후기 산업사회에 살고 있다. 기계들은 우리의 노예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기본적인 필수품을 상대적으로 쉽게 얻을 수 있다. 지금은 삶이 온갖 종류의 보람 있는 활동들로 가득 차야 할 시기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오랜 근무시간뿐 아니라 채무에 시달리고 있으며, 스트레스와 외로움, 그리고 가정해체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왜 그런가?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항상 더 많은 것을 워하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331-332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우리는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 , 생활 속에서 선택의 방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학예(liberal arts)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332

 

보다 광범위한 질문은 "우리는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삶을 원하는지 알고 있고, 그것을 위해 무언가를 기꺼이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그것을 위해 현재 포기하고 있는 것만큼의 가치를 갖는가?"이다. ..

일이 지배하는 삶 역시, 그것이 의식적인 선택이고 개인을 행복하게 만든다면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삶을 일에 꿰어맞추는 대신 일을 삶에 통합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333

 

 

 

 

역자 후기 - '일과 삶', 그 본질에 대한 고찰

 

일 혹은 일의 부재는 우리 삶에 너무나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정작 지금껏 우리가 하는 ''에 대해, 그리고 '일과 삶의 관계'에 대해 통찰해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335

 

현대사회에서 일은 자아실현의 수단이자, 개인의 존재를 의미 있게 만드는 도구로 그럴듯하게 포장된다. 일은 우리의 모든 것이며, 우리는 일을 잃음으로써 그에 수반되는 모든 것을 - 심지어 가정까지도 - 잃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올바르고 바람직한 현상인가? 일은 본래부터 모든 희생을 감내하면서 지켜야 하는 무엇이었나? 일은 종류에 상관없이 무조건 개인에게 성취감과 만족을 주는가?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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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TWO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5 일과 자유

 

독립, 자유, 평등과 같은 미국의 문화적 가치들에 비춰볼 때 타인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은 ()미국적인것에 가깝다. 이것은 미국인들이 서로 돕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그들은 자기 방식대로 무언가를 하고 싶어할 뿐이다. 115

 

노예제도는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는 방법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방법이다.

노예제도는 일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 가치의 타락, 최악의 상태로서의 일을 의미한다. 오늘날까지도 노동자들은 그는 나를 노예 취급해라든지 나는 그녀의 노예가 아니야혹은 그 사람은 정말이지 노예 감독관이야라는 말을 종종 한다. 불쾌하지만, 노예제도는 매혹적인 관리법의 전형이다. 그것은 일꾼들에 대한 완전한 소유와 통제를 의미한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위해 일한다. 그러나 노예는 살아 있기위해 일한다. 117-118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도를 찬성했지만, 노예제도가 사람들로 하여금 짐승과 분되는 인간의 측성, 즉 선택하고 숙고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 등을 발휘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인간 이하로 만든다고 저술했다. 그의 글에 따르면, 노예들은 자신들의 삶에 대해 아무런 통제권을 갖지 못하므로 어떠한 행복도 갖지 못했다. 그들의 랆은 대부분 일과벌, 음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노예들을 동기 부여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에게 언젠가는 자유를 주겠다는 상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들은 다시 인간이 되는 셈이다. 118


가장 가혹한 근로조건 아래서 일하는 현대의 고용인들조차도 노예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 노예들과 달리 그들은 항상 일을 그만둘 수 있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유를 되찾을 때까지 보통 여덟 시간만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항상그만둘 수 있을까? . 일터를 떠난다고 해서 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118-119

 

불행히도, 노예제도는 완전히 과거의 것은 아니다. 영국의 노예폐지협회(Anti Slavery Society), 노예제도에 관한 국제연합 실무위원회(UN Working Group on Slavery), 그리고 인도의 노예해방전선(Bonded Liberation Front) 같은 단체는 노예제도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 여전히 존재한다고 보고한다. 이들 집단은 자신의 노동으 자발적으로 그만둘 수 없는 사람은 누구나 노예로 간주한다. 여기에는 대금업자에게 돈을 갚기 위해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하는 강제 노역자들, 자신이 일하는 경작지를 떠날 수 없는 농노들,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착취당하거나 가족에 의해 팔려 무보수로 일하는 아동들이 포함된다. 119

 

계약제 하인들에게 사회계약은 실질적으로 고용주가 대부분의 힘과 권리를 갖는 법적 계약이었다. 뉴잉글랜드 바깥 지역의 초기 백인 이주자들은 절반 이상이 계약제 하인이나 무임도항(無賃渡航) 이주자들(도착한 후 일정 기간 동안 노동을 해주기로 약속하고 무임으로 도항한 이들)로 미국에 왔다. 그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일해야만 했다. 결국 고용이란 자유와 기회로 이어지게 될 일시적인 노예 상태를 의미하였다. 122

 

영국 정부는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한 수단으로 계약노예제도를 인가했다. 앞서 말했듯이, 민간 해운 업체들은 다른 어떤 상품보다도 노동력을 팔아 더 많은 돈을 벌곤 했다. 존 반 더지는 새뮤얼 애덤스, 존 애덤스, 제임스 오티스,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작가들이 폭정(tyranny)’굴종(slavery)’ 같은 단어를 자주 사용한 이유가 계약노예제도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계약노예제도는 과거의 유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연구자들은 불과 몇 년 전에 로스앤젤레스의 노동착취 사업장(sweat shop)에서 계약노예제도를 사용하는 태국인 고용주를 발견했다. 그들은 하루 열일곱 시간씩 재봉틀로 옷을 박는 일흔 네 명의 태국인 여성들을 발견했다. 고용주는 한 아파트에 여성들을 가두고는, 만약 도망치려고 시도하면 그들과 가족들을 해치겠다고 위협했다. 미국의 초기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오는 뱃삯을 갚는 데 수년이 걸렸던 것처럼 태국 여성들도 고용주에게 항공료를 지불하기 위해 칠 년간 일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여성들 중 일부는 자신들에 대한 처우 방식에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오로지 집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부치는 것뿐이었다. 또한 미국에서는 오페어(au pairs)들의 처우에 관련된 추문도 있었다. ‘오페어란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외국 여자로, 숙식을 무료로 제공받는 대신 한 가조고가 살면서 가사를 돕고 아이를 보살피는 일을 한다. 당시 미국에 온 젊은 오페어들은 학대와 과로, 저임금에 시달리곤 했다. 그들은 미국에 가게 된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싼값에도 기꺼이 일하러 온다. 그리고 땔 그들은 자신들이 계약제 하인보다 나을게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24-125

 

노예제도와 계약노예제도에서는 타인의 노동을 빌리기보다는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드러난다. 백인 계약제 하인들은 1650년경에 시작되어 1800년대에 확대된 흑인노예들의 대규모 유입 이전에 미국에 왔다. .. 남부의 농장주들은 백인인 하인들보다 흑인노예들을 훨씬 좋아했는데, 이는 흑인노예들이 기후에 더 잘 적응하고 더 온순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주인이 그들을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25

 

노예제도를 옹호했던 노예 소유자들은, 남부의 노예들이 북부의 임금노예들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오히려 남부의 노예들이 더 나은 상태에 있다고도 주장했다. 주인들이 노예들을 부양하고 있고, 어둡고 더러운 공장에서 일하는 산업 고용인들과는 달리 위생적인 야외에서 더 짧은 시간 동안 일한다는 것이었다. 북부 사람들은, 임금 노동자들이 자신의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자신의 일에 대해 현금으로 보수를 받는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이에 대해 반박했다. 그러나 자물쇠를 채운 상태로 장시간 공장 노동을 시키는 것, 아동의 노동, 위험한 기계, 유해한 공기 등을 포함한 끔찍한 노동조건은 북부인들의 이러한 도덕적 주장을 약화시켰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영국의 산업 노동자들을 미국의 노예들과 비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그들은 미국의 흑인들보다도 못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철저히 감시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처럼 살아가도록,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도록 요구되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그들도 비인간적인 생산양식으로 인해 마찬가지로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북부 생산업자들에 대한 반론은 임금노동자들의 자유가 비인간적인 노동 현실을 보상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126

 

문제는 그들이 과연 북부의 생산업자들보다 더 적은 이윤을 원했거나 필요로 했을까하는 점이다. 127

 

한 개인이 자신의 일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사실이 고용주의 학대를 반드시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문제는 한 개인이 얼마나 많은 선택권을 실제로갖고 있는가이다. 127

 

굶주리고 겁에 질린 사람이 자신에게 음식과 안전을 제공할 만한 사람과의 계약관계를 자유롭게맺기로 선택할 수 있는가? 128

 

철학자 존 로크는 빈곤한 자의 복종은 주인의 동의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굶어죽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하인이 되는 것을 택한 가난한 자의 동의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노예가 되도록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가난한 사람이 당신의 노예나 계약제 하인이 되기로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란 얘기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것일까? 128-129

 

우리는, 착취당하는 가난한 자들이 만약 착취당하지않았다면 훨씬 더 못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라는 착취의 논리에 쉽게 빠져든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이러한 논리를 보여주는, 일하는 원숭이들에 대한 풍자적인 보고서를 실은 적이 있다. 채국 남부에서는 매년 150만 톤의 코코넛 열매를 따기 위해 수천 마리의 원숭이들이 고용된다. 마을의 가족들은 원숭이를 훈련시켜, 농장주들에게 빌려준다. 원숭이들은 농장주로부터 달걀과 쌀, 과일 등 원숭이 임금으로 매달 약 12달러 정도를 벌어들인. 일하는 원숭이들에게는 이름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목욕시키고, 돌보고, 하루 세 번 음식을 준다. 때로 그들의 주인은 자신의 모터스쿠터 뒤에 그들을 싣고 일하는 곳가지 태워다주기도 한다. 아픈 원숭이는 하루 동안 일을 쉰다. 너무 늙어서 일을 할 수 없는 원숭이는 은퇴해서야생으로 돌아가거나 가족의 애완 동물로 남는다. 일하는 원숭이의 불리한 점은 항상 사슬에 묶여 있고 원하는 대로 번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사는 이러한 형태의 고용이 인간에 의해 서식지가 파괴되고 있는 게잡이원숭이 같은 몇몇 종들의 멸종을 막아준다고 지적한다. ...

농부가 원숭이의 자유를 빼앗기는 하지만, 원숭이들은 특히 서식지 대부분을 농부들에게 빼앗긴 이후 그들끼리 야생의 생태계에 남겨지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지내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는 원숭이의 생각이 어떤지 알 수없다. ... 제도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간단하다. 농부들은 원숭이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생각하기에원숭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원숭이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괜찮다고 한다...

농부는 원숭이가 하루 세 번의 식사를 필요로 한다고 결정하고 원숭이가 이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때로 고용주들은 고용인들이 갖고 있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 욕구를 충족시킨다. 130-131

 

우리 모두 정도는 다르지만 생계를 꾸리기 위해 우리의 노동과 시간을 팔아야 한다. 131

 

일반적으로 우리는 취직을 할때,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고용주들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는 것에 동의한다. ..

임금이 상실된 자유에 대한 보상이라는 견해는 또한 몇몇 터무니없는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은 한 살마이 직업에서 더 적은 자유를 누릴수록, 더 많은 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현실은 정반대이다. 표면적으로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직업일수록 더 높은 지위를 나타내고, 더 많은 돈을 받는 경향이 있다. 폴 퍼셀은 자신의 책 <계급>에서, 한 사람이 직업에서 누리는 자유의 양이야말로 임금보다 나은 계급의 지표하고 주장한다. 132

 

사람들은 직업에서 더 많은 통제권을 갖도록 해주는 전문 지식을 얻기 위해 기꺼이 시간과 돈을 희생한다. 예를 들면, 과거 젊은이들은 장인의 도제로 수년을 보냈는데 이것은 사실상 계약고용었다. 미국의 도제들은 장인과 일하기 위해 노동계약서에 서명했다. 영국의 도제제도는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그 제도를 운용했던 조합은 건너오지 않았다. 그 결과, 자격 기준이나 인증서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133

 

장인의 가치와 힘은 무언가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버지들은 기술의 비밀을 아들들에게 물려주었고 스승들은 도제들에게 물려주었다. .. 비밀은 장인들에게 힘과 자율성을 주었다. 그러나 미국에는 비밀성을 강화해줄 만한 강한 조합제도가 없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장인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책과 간행물을 통한 정보의 보급이 광범위해지면서 몇몇 장인들은 자신의 비밀을 인쇄하여 대중들에게 팔기도 했다. <유용한 천 가지 비밀(1795)>과 같은 실용서(how-to book)들은 조각, 철물상, 니스칠, 시멘트 바르기, 밀랍으로 봉하기, 유리, 페인트, 도금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 135

 

오늘날에도 여전히 번성하고 있는 실용서의 전통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실용서가 아닌 산업화가 장인들의 힘과 권위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일이 갖는 의미를 급격히 변화시켰다. .. 기계화는 일을 보다 효율적으로 실행시켰을 뿐 아니라 몇몇 업무를 단순 작업화함으로써 사람들은 기계의 일부처럼 쉬비게 대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136

 

 

6 일꾼 길들이기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의 생산업자들은 미국인 숙련 노동자의 태도 문제(attitude problem)”와 싸워야 했다. 숙련된 미국 태생의 일꾼들은 자신의방식으로, ‘자신의 속도에 맞춰 일하고 싶어했다. ..고용주들은 생산에 대한 통제권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미국의 자유와 평등 원칙에 공공연히 위배되지 않으면서도 노동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해야만 했다. 137

 

테일러는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를 중퇴하고, 산업 현장에서 일하기 위해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할 기회를 거절했다. 140

 

노동자들을 장악하고 생산 속도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열쇠는, 누구나 최대한 효율적으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도록 일을 설계하는것이었다. 141

 

1878년 미드베일 제강에 입사한 테일러는 빠른 속도로 십장과 주임기사 자리에 올랐다. 미드베일에 있는 동안, 그는 산업 생산성을 증진시키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 테일러가 창안한 가장 유명한 과적적 관리법의 실례는 펜실베이니아로 이민 온 네덜란드인 헨리 놀의 사례이다. 테일러는 자신의 연구에서 그를 슈미트라고 이름붙였다. 141

 

테일러는 슈미트가 제대로만 한다면 하루에 47톤의 무쇠를 실어나를 수 있다고 계산했다. 현재 속도는 하루 12.5톤이었다. 테일러는 슈미트와 나눈 대화를 <과학적 경영의 원리>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그는 당신은 몸값이 높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값싼 노동자들 가운데 한 명입니까?” 하고 슈미트에게 묻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그러고는 하루 1.15달러를 벌고 싶은지, 아니면 1.85달러를 벌고 싶은지 물어본다. 슈미트는 후자를 택하고, 테일러는 이 냉정하고 짧은 대화에서 값비싼 일꾼(혹은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을 제시한다.

이제 당신은, 몸값이 비싼 사람은 아침부터 밤까지 지시받은 대로 정확히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값비싼 일꾼이라면 당신은 이 남자가 내일 당신에게 지시하는 대로 아침부터 밤까지 정확히 실행해야 합니다. 만약 그가 당신에게 무쇠를 들고 걸으라고 말하면 .. 당신은 무쇠를 들고 걷습니다... 그가 앉아서 쉬라고 하면 당신은 앉습니다. 이제 값비싼 일꾼은 지시받는 대로만 행하고 말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슈미트는 지시에 따랐고 하루에 47.5톤의 무쇠를 운반했다. 60% 더 많은 보수를 받는 대가로 400%나 더 많은 일을 한 것이다. 그러자 다른 노동자들도 변하기 시작했다.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든 돈을 위해서든 혹은 두 가지 모두 때문이든, 그들 여기시 슈미트와 똑같이 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테일러가 <과학적 경영의 원리>를 출판한 덕분에 슈미트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노동자가 되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곧 에스페란토를 포함한 12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테일러의 방식은 세계 도처에서 위대한 발전으로 인정받았다. 비평가들은 슈미트의 경험과 그에 대한 테일러의 묘사에 숱한 경멸감을 나타냈다. 이 책이 노동과 생산에 대한 엄격한 통제에 관한 것임을 고려한다면, 러시아 판에 주를 단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나 아돌프 히틀러, 그리고 한 때 테일러의 미망인을 만나 그의 사진을 요청한 적이 있는 베니토 무솔리니 등이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142-143

 

과학적 관리법의 네 가지 기본 요소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첫째, 과학적 관리법은 중앙집권화된 계획과 일의 순차적 단계들을 정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과거에사람이 먼저였다면, 미래에는 체계가 먼저일 것이다.” 둘째, 과학적 관리법은 각각의 작업을 가장 단순한 부분들로 쪼갰다. 셋째, 과학적 관리법은 경영진에게 고용인들을 훈련시키도록 요구했고, 각각의 노동자들은 업무 수행을 면밀히 감시받게 되었다. 테일러는 일의 구조뿐 아니라 고용인들의 가치관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용인들은 서로를 통해 일뿐만 아니라 할당량을 유지하고”, “남자답게 처신하는도덕적 자세를 배웠기 때문에 회사로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일하도록 고용인들을 훈련시키는 편이 더 나았다. 속도를 중시했던 테일러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할당량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과학적 관리법의 넷째 요소는 고용인이 지시받은 대로 일하도록 하기 위한, 주의 깊게 고안된 임금 체계에 기초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자신의 논문 <왜 생산자들은 대학생을 싫어하는가?>에서 협력이란 노동자들이 지시를 받았을 때 의문을 제기하거나 제안하는 일 없이 신속히 지시받은 대로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저술했다. 테일러는 순종을 얻어내고 할당량을 깨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용인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의 사리사욕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20년대 중반, 과학적 관리법의 논리는 거의 모든 산업에서 호응을 얻는다. 143-144

 

미국노동총연맹에서는 테일러의 체계를 생산성 증가 체계(speedup system)”라고 불렀다. 144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에서는 노동쟁의가 밣생했다. 145

 

대부분의 고용주들은 평온한 노사관계를 원했기 때문에 고용인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기로 했다. 1차 세계대전이 할창일 때, 애국심이 사람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을 보고 감명받은 몇몇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조직에서 그러한 종류의 정신과 헌신을 끌어내는 것을 보고 감명받은 몇몇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조직에서 그러한 종류의 정신과 헌신을 끌어낼 수는 없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복지 자본주의에 대한 영감은 노동 불안에 대한 두려움, 높은 이직률로 인한 비용, 자선 단체들, 그리고 대외관계 등을 포함한 여러 원천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또한 진심으로 고용인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고 싶어하는 사업주들도 있었다. 복지 자본주의의 이면에 자리잡은 일반적인 생각은 고용인들을 행복하게 하거나 그들의 이익이 그들 자신의 계급적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닌, 고용주의 이익과 결합된는 공동체에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146

 

초기 복지제도의 일부는 침대차 제조업자인 조지 모티머 풀먼이 고용인들을 위해 1880년 시카고 외곽에 지은 시범 마을처럼 근로자들의 삶을 통제하기 위해 고안된 온정주의적 기획이었다. 풀먼은 그들의 고용주였을 뿐 아니라 집주인이자 지역 상점의 소유자였다. 146-147

 

또 다른 복지제도들은 근로자들에게 회사의 주식과 더 높은 안정성을 제공하기도 했다. .. 1923P&GIBM같은 회사들은 연간 48주의 전일 고용을 보증하기 시작했다. P&G는 또한 1886년 이익분배제도를 시작했으며, 시어스 로벅 사도 1886년에 그것을 시작했다. 1927년까지 80만 명의 근로자들이 이러한 이익분배제도나 소위 근로자주식소유제도(ESOPs; employee stock ownership plans)10억 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 인터내셔널 하비스터 사는 1911년에 연금제도를 실시한 수많은 기업들 중 하나였다. 당시의 또 다른 혁신에는 건강보험, 안전기준의 개선, 회사 구내식당 같은 시설이 포함되었다. 147

 

고용주들은 미국식 제도 아래서 복지 자본주의의 많은 교의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고용인들의 충성과 협력을 얻어낼 수 있기를 바랐다. 148

 

1935, 전국노동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은 고용인들이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할 권리나 결정에 관한 진정한 발언권을 갖고 있지 않다면 품질관리 서클을 비롯한 모든 유사한 참여 조직들도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법안은 허위조합(sham unions)”, 또는 실제 조합을 막으려는 시도로 고용주가 만든 사내 조합을 금지했다. 오늘날 고용주들은 이 법안이 작업장에서 참여 조직의 활동을 금지한다고 불평하곤 한다. 148

 

복지 자본주의와 미국식 제도는 192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고, 1930년대 대공황이 오자 재빨리 자취를 감추었다. 당시의 한 비평가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분명한 것은 임금노동자들의 복지를 고용주들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많은 회사들은 실제로 고용인들엑 대해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대공황기에 미국식 제도가 소멸되자 곧바로 고용주와 고용인 간의 신뢰와 충성을 방해하는 주요한 장애물 가운데 한 가지가 부각되었다. ..

1935년의 한 경영자 회의에서, 뉴저지 벨 사의 회장인 체스터 버나드는 복지 자본주의가 근로자의 발전이나 협력 증진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49

 

1920년대는 산업 혁신과 실험 그리고 노조 억압의 시대였다. 경영에서의 인간관계 접근은 고용인들의 태도와 감정이 어떻게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 경영진은 고용인들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고용인드로과 대화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방법을 알 필요가 있었다. 150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조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노조라고 하면 어떤 이들은 게으르고 돈만 많이 받는 부패한 특수 이익집단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어떤 이들은 노조가 지나친 욕심과 낮은 생산성으로 세계시장에서 미국의 경쟁력을 파괴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 노동조합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많은 부패와 난폭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의 탄생은 여전히 역사상 가장 중요한 노사관계 혁신이다. 이는 노동조합이 양자간에 존재하는 힘의 불균형을 조절해주기 때문이다. 157

 

 

7 노동의 두 얼굴

 

1950년대에 C.라이트 밀스 같은 사회 비평가들은 대기업이 고용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우려했다. 그는 거대한 관료 조직에서의 사무직 노동의 우울한 모습을 그렸다. 밀스에게 일의 황금기는 가족 농장과 소규모 독립 상인들의 시대인 1850년대였다. 그는 1850년대에는 일이 삶과 잘 통합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다고 기술했다. 자신이 사는 집에서 일했던 장인이나 상인에게는 이것이 사실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밀스는 또한 일을 살에 통합시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고, 소외는 나쁜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는 산업 노동자들과 사무직 노동자들에게는 일의 의미가 너무나 축소된 탓에, 일이 더는 내적인 방향성과 사회와의 연결성을 제공하지 모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믿었다.

밀스가 보기에, 사무직 노동은 어떤 면에서 비숙련 노동보다도 못했다. 그는 계약노예들(paroles)”은 육체적으로는 고생스럽더라도, 적어도 집에 가면 자유인 반면 사무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뿐 아니라 개성까지도 팔아치워야 한다고 말했다. 밀스는 사무직 노동자를 새로운 작은 사람(new little man)””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고, 뿌리가 얕아 충성심이라고는 없으며, 항상 서두르지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밀스에 따르면, ‘새로운 작은 사람은 반영웅적이고, 자신의 역사를 알지 못하며, 어려운 시기에 회상할 만한 황금기를 겪어보지 못했다. 162

 

새로운 작은 사람에 대응하는 인물을, 밀스는 미국 조직의 새로운 권력자(new men of power)””라고 불렀다. ...

밀스에 따르면, 일의 상당수가 파편화되고 무의미해져서 계급 이동성과 향상의 여지가 거의 없는 대규모 복합 조직에서는, 열심히 일한 개인이 자기 발전(혹은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가 실행될 수 없다. .. 밀스는 인사 부서의 목적이 쾌활하고 협조적인 부하들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용인들의 감정마저도 조직이 바라는 대로, 조직의 손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직장 내의 정서를 통제함으로써, 고용주들은 근로자들을 소외시키지 않고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정당화할 수 있게 되었다.

밀스는 사무직 근로자가 조직의 목적에 적합한 사람이 되도록 조직에 의해 심리적으로 강요당하며, 자신의 개성을 팔아버렸기 때문에 이후 일 외의 부분에서는 천박하고 보잘것없는 삶을 살도록 운명 지워진다고 주장했다. .. 밀스가 설명하듯이, 일은 가정생활과 공동체 내애서의 생활을 향상시키기보다는 파괴한다. .. 밀스와 같은 비평가들이 실제로 우려하는 것은, 근로자들이 이로 인해 시간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 미치는 조직의 영향력으로 인한, 일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개인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163-164

 

데이비드 리스먼이 1950년에 출간한 책 <고독한 군중>

이 책 속의 타인 지향의 생활: 보이지 않는 손에서 악수하는 손까지라는 장에서, 리스먼은 타인 지향적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공예 기술보다는 사람 다루는 기술을 더 강조하고, 은행계좌의 잔고보다는 교제비를 더 중시한다고 주장했다. 일은 재미있는 것으로 가정되고, 관리자들은 비서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사장과 고객들을 기쁘게 하는 악수하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리스먼에 따르면, 타인 지향적 사람은 회사에 우선적으로 속하고, 가정과 교회, 공동체에는 더 얕게 뿌리내리는 경향이 있다.

1950년대 후반의 직장은 오늘날의 직장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 “사회윤리이러한 윤리는 조직의 충성 요구를 합리화하고, 진심으로 스스로를 희생하는 고용인들에게 헌신하고 있다는 느낌만족을 준다. 이러한 윤리에는, 집단은 창조성의 원천이며 개인은 궁극적으로 소속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리고 경영학 분야에서 일하는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들이 그러한 소속감을 창출하는 방법을 고안할 수 있다는 믿음이 포함된다. 165

 

1950년대의 사회 비평가들은 사람들이 조직에 순응하는 것, 그리고 새로 등장한 교외생활의 가치에 대해 걱정했다. 오늘날 우리는 합의된 가치의 부재와 도시 및 교외 공동체의 파괴를 우려한다. 직장에서는 여전히 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이 증가하고 있고, 집단의 가치가 강조된다. 누구도 창조성의 상실이나, 개인의 정체성이 집단의 정체성에 종속되는 문제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듯하다. 경영자들은 팀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의 문제에 보다 큰 관심을 갖는다. 너무나 많은 그들의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오늘날 경영 이론가들은 집단과 팀이 모든 바람직하고 생산적인 것의 토대라고 믿는다.

와이트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릇된 집단화에서 가장 잘못된 시도는 집단을 창조적 도구로 보려는 시도이다.” 오늘날 인기 있는 경영 개념과는 반대로, 와이트는 사람들이 집단 내에서 제대로 사고하거나 창조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집단은 단지 일의 시행을 지시할 뿐이다. 166

 

와이트의 책 이후로, ‘팀의 영광(glories of teams)’에 대한 끝없는 저작과, ‘집단에 대한 엄청난 양의 연구가 쏟아졌다. 오늘날 조직의 수사학(rhetoric of organizations)은 팀, 파트너, 가족, 동료와 같은 단어를 포함한다. 그러나 단결된 조직과 팀이 일을 하거나 의사결정을 하는 데 늘 최상의 방법인 것은 아니다. 어빙 제니스 같은 연구자들은 우리에게 집단적 사고의 불이익을 경계하라고 충고했다. 집단적 사고 강태에서 한 집단의 구성원들은 비슷하게 사고하기 시작하고,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보지 못하게 된다. ...

조직은 더 이상 와이트가 자신의 책에서 논의했던 인성 검사를 실시하지는 않지만, 대신 마이어스브리그스 유형지표(MBTI ; Myers-Briggs Type Indicator) 같은 다른 유형의 검사들을 실시한다. 이것은 개인의 성격 유형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지표이다. 167

 

일부 조직들은 순응적인 고용인을 선택하기 위해 아직도 검사를 이용하고 있다. 168

 

와이트가 보기에 인성 검사는 개인의 자율성과 사생활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러나 많은 고용인들은 그러한 검사를 자기 인식 및 발전을 위한 도구로 여긴다. 별자리 운세나 성적 매력에 대한 잡지 퀴즈들처럼, 심리 검사는 내적인 자아를 명확히 보여줄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문제는 우리가 직장에서 그러한 검사를 받게 되면, ‘자기 인식을 얻은 대가로 자기 노출과 어쩌면 부당한 분류깢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

책의 결론 부분에서 와이트는 독자들에게 조직과 싸울 것”, 그리고 회사의 순응 요구에 말려들지 말 것을 권고한다. 168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욕구 단계” ...

욕구야말로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전부라고 가정하는 것은 인간의 열정, 이상, 가치가 갖는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자신의 가치나 자신에게 중요한 것에 기반한 선택을 한다. .. 우리는 우리가 가치있게 여기는 것을 선택한다. .. 피라미드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우선순위를 갖고 있는 고용인들은 경영진에게 악몽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조직이 줄 수 있는 것, 즉 소속감과 명성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172

 

일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다양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다른 사람들과 일할 때, 우리들 대부분은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은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우리가 걸치는 페르소나와 허용되는 감정의 범위는 직업에 띠라 달라진다. 181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하는 동안 자기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서비스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특정한 감정 상태를 지녀야 한다. 과거의 서비스 분야 종사자들은 정중해야 했다면, 오늘날에는 친절하기까지 해야 한다. 알리 러셀 혹실드는 그녀의 도발적인 책 <감정의 통제>에서 ...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제품을 생산하는 데 지적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서비스를 제공할 때 자신의 실제 감정을 항상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서비스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은 자신의 존재와 아무 상관도 없는 무언가를 마지못해 생산하고 있다고 느낀다. 182-183

 

유리는 매일 상업화된 개별화와 쾌활함, 친절함에 노출되어 있다(비록 어떤 경우, 이러한 감정은 상당히 진실된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서비스의 즐거운 얼굴(happy face)” 관점은 정중함과 공손함 이상의 것이다. 183

 

 

8 유망한 직장

 

1980년대에는 수많은 최신 경영 방법들이 엄청나게 유행했다. .. 직장 민주주의 실험이 쇠퇴했음에도, 많은 회사들은 고용인들에게 권한을 주거나일에 대한 더 많은 발언권을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학자들은 점점 더 많은 근로자들이 일에서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지식노동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해싿. 1980년대가 되자, 일은 매력적이고 재미있으며 흥미로운 것처럼 보였으며 직장은 마치 행복한 대가족인 듯했다. 187

 

하버드나 와튼 같은 주요 경영대학원들은 그러한 주제에 대한 강의를 들으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6년까지, <포춘>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의 75%사명선언문이나 윤리강령을 갖고 있었다.

윤리강령에 대한 관심이 1980년대에 높아진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일부 회사들은 부정적인 보도 추무느 소소으 불법 활동들에 대해 염려했다. 또 다른 회사들은 고용인들이 다양한 배경과 가치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통된 윤리적 가치를 진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대중 및 고객과 즇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바람을 가진 일부 기업들은 윤리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말뿐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체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사는 윤리강령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막연하게 느끼는 기업 지도자들도 있었다. 188

 

노예제도와 계약노예제도, 그리고 과학적 관리법을 거친 1980년대 중반의 기업들은 과연 이상적인 직장이 되었을까? 189

 

1980년대의 잘 팔리는 경영학 서적들에서 자주 몸델로 제시되었던 회사들은 휴렛팩커드, 존슨 앤 존슨, 리바이 스트라우스, AT&T와 같은 존경받는 성공한 기업들이었다. 또한 경영학 연구에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기업드로과 잘 팔리는 경영학 서적을 쓴 컨설턴트의 고용주들이 이런 책에 자주 등장했다. 이들 회사는 경영 혁신의 성공을 증명한다. 한편 이러한 상황은 대기업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자금 지원을 받은 경영학 연구가 과연 객관성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질손의 견해가 여전히 타당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또한 조직 내의 힘, 권력, 갈등에 관한 질문들이 왜 경영학 교과서나 대중 문학에서 논의되는 일은 드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을 수 있다. 190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 그리고 주로 일본과의 세계경쟁에 의해 많은 기업들이 황폐화되었던 1980년대에 경영자들은 좋은 충고를 갈망했다. 시장에는 경영자들의 사기를 향상시키고 근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쓰여진 경영학 서적들이 일시적으로 넘쳐났다. 191

 

<초우량 기업의 조건>은 분명 1980년대의 가장 중요한 경영서였다. ..

피터스와 워터만은 조직 속에서의 경영자 역할이 기업문화를 형성하고, 고용인들에게 의미를 창출해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피터스와 워터만은 가치, 상징, 이데올로기, 언어, 신념, 의식([儀式 거동의 법식), 그리고 조직의 신화를 의미하는 말로 기업문화를 사용했다. .. 피터스와 워터만은 직장 민주주의를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통제되고 잘 조직화된 체계 내에서 자신의 일을 잘할 수 있는 자유를 강조했다. 그들은 무엇이 고용인들을 흥분시키는 지 알아내고 조직내에서 호손 효과를 의도적으로 지속시키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고용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2-193

 

1982년에 출판된 텔렌스 E. 딜과 앨련 A. 케네디의 <기업문화>.. “강한 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하는 일을 더 기분 좋게 느끼도록 만든다. 따라서 그들은 더 열심히 일하는 경향이 있다.” ... 딜과 케네디는 강한 기업문화가 고용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 즉 구조와 가치 체계, 그들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회사에 소속되었다는 자부심 등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삶에서 불확실성을 제거해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위 고용인들이 인식하고 있는 문제점들 중 일부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았다. 과연 고용인드르의 개인적인 취미는 무엇이며, 그들이 거기에 시간을 쓰는 것이 왜 잘못되었는가? 우리는 우리 삶의 가치를 확신하고있어야 하는가? 193-194

 

강한 기업문화의 커다란 이점은 그것이 포괄적이고 자동 조절되는 사회 체제라는 점이다. 불리한 점은 그것이 억압적인 동시에 변화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부정적인 면은 고용인들이 충분히 일 바깥에서 충족시킬 수 있는 욕구, 예를 들면 우정의 욕구 같은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점점 더 일에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당신이 실직하게 되면 당신은 이로가 소득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195

 

로버트 하워드는 <놀라운 새 일터>에서 새로운 조직은 일터를 보다 인간적으로 만듦으로써 다시 마술에 걸리도록 시도하는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

하워드의 놀라운 새 직장에서는 도넛 타임이나 맥주 파티 같은 사교 모임들이 의사소통을 증진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임에 참석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일종의 억압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장치들은 팀 정신과 조직에 대한 헌신을 끌어내기 위해 적절히 이용되었다. .. 기업문화가 다양한 노동자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더라도 여전히 모든 살마들은 함께 도넛을 먹어주어야 한다. 마법에 걸린 회사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종류의 일을 하도록 요구한다. 본래의 업무와 이러한 사교생활에 참석하는 일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두 가지 일 모두에 대해 평가를 받는다. 에티켓 전문 작가인 주디스 마틴(“미스 매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업무상 사교(business entertaining)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줌으로써, 직무관계(business dealing)에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 충성같은 사회적 기준을 적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업무상 사교는 모순 어법이다. 196-197

 

프레더릭 윈슬로 테일러가 말한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조직에서 일터는 ... 힘과 통제의 관계가 명확했다. 주어진 기능을 수행하면 될 뿐 자아를 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 단순하고 눈에 보이는 세계이다. 하지만 이제 더욱 고달파지고 둔감해진 일의 세계에서는 직업을 계속 유지하는 것 자체가 유인(誘引)이 된다. 197

 

존 미클스웨이트와 애드리언 울드리지는 자신들의 책 <주술사들>에서, 오늘날에는 너무나 많은 경영 이론들이 있으며, 그들이 서로 모순되곤 한다는 점을 지적햇다. 예컨대 어떤 이론은 독특한 기업문화일수록 좋은 것이라 말하고, 다른 이론은 다문화적인 기업일수록 좋은 기업이라고 말한다. 한 이론은 (quality)’’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다른 이론에서는 중요한 것은 속도라고 말한다. .. 경영학 이론의 유행 주기는 10년에서 1년으로 짧아졌다. 컨설팅 회사 베인 앤 컴퍼니25개의 인기 있는 경영학 이론들을 골라, 기업들이 얼마나 많은 이론들을 자신들의 업무에 적용하는지에 대한 조사를 전세계에 걸쳐 실시했다. 조사 결과, 1993년에는 평균 11.8, 1994년에는 12.7개의 이론이 사용되었으며, 1995년에는 그 수가 14.1개로 증가할 것이라고 베인앤 컴퍼니는 추정했다. 제너럴 일렉트릭 사의 CEO인 잭 웰치는 기업이 서로 다른 경영 아이디어들을 시도해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고용인들에게도 유익할까? 201

 

1980년대, 그들은 조직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회사의 사교 모임에 참여했다. 1990년대, 이제 훈련은 팀 만들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202

 

경영학에서의 일시적 유행과 관련된 문제점은 그들이 종종 무비판적이고 역사적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경영 이론가들은 일에 대한 동일한 사실을 반복해서 발견하고, 그것을 발견할 때마다 매번 또다시 기뻐한다. ‘팀워크1980년대와 1990년대 경영자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던 커다란 ()개념들 가운데 하나이다. 203

 

미클스웨이트와 울드리지는 오늘날 스포츠팀은 점점 더 사업가처럼 활동하는 반면, 회사 조직들은 고용인들로 하여금 보다 더 스포츠팀처럼 행동하도록 장려한다며, 이런 상황이 얼마나 반어적인지에 주목한다. ..

팀은 문화보다 훨씬 더 강력한 형태의 사회적 통제를 가능하게 만든다. 204

 

고용인들이 협력을 얻어내는 것은 항상 도전이었다. 많은 회사들이 팀을 만들어 이끌거나 코치하는 법을 배우는 데 투자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205

 

팀 지도자들은 팀과 한몸이 되어야 하는 반면, 팀 구성원들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205-206

 

딜버트 만화는 이러한 태도를 가장 잘 요약한다. 딜버트의 상사가 고용인들에게, 그들을 빠르게 움직이는 팀으로 재편성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자, 고용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좋은 계획이네요 우리가 스스로를 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그 다음엔 우리가 무기력하고 세밀하게 조종되는 노예라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할 테니까요.” 206

 

1980년대의 경영 이론들 중에서 종합적 품질경영(TQM; Total Quality Management)만큼 열렬히 신봉된 것은 없었다.. ..이것은 품질관리가 전 과정에 걸쳐 이루어져야 하지, 과정의 마지막에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208

 

만약 제품의 질을 향상시키면 생산성도 향상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완제품에 대한 품질관리를 하는 대신 전 과정에 걸쳐 품질관리를 하라는 것이다. 209

 

미국 정부는 TQM을 채택하고 장려했다. ...

리처드 J. 피어스는 TQM과 리더십에 관한 자신의 책에서 현장 관리자들이 지도자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 피어스는 계속해서, 근로자들 또한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분야에서 품질 성과를 개선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기는 해도, 아무런 부가적 보상을 가져오지 않을 것(“내게 무슨 득이 돌아오나요?”)이다. 그렇지만 생산성 및 품질의 개선은 장기적으로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 필요가 있다. .. 당근을 대신하는 채찍(혹은 숨겨진 위협)인가? TQM의 이면에는 기술에 대한 자부심과, 제대로 행한 일은 본질적으로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을 포함한 장인윤리의 회복이라는 고귀한 정신이 존재한다. 210-211

 

데밍이 원래 제시했던 품질경영의 열네 가지 본질적 요소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이 회사를 위해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직장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직장에서의 두려움에 관해 연구한 캐슬린 D. 라이언과 대니얼 K. 오스트리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복과 앙갚음, 그리고 징계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두려움을 낳는 또 다른 원인들은 조직 내에서 사람들이 논의하기 두려워하는 것, 논의 불가능한 것들에서 발견된다. 22개 조직의 260인을 대상으로 한 라이언과 오스트리치의 조사에서 가장 논의 불가능한 것으로는 사장의 경영 방식이 꼽혔다. 그 다음으로는 동료의 서오가와 보상 및 급여가 차지했다. .. 생산성 증가는 팀워크코칭과는 전혀 상관없는, 두려움 같은 요인들의 결과일 수 있다. .. TQM을 비롯한 경영 혁신들은 사람들에게 일을 더 나은것으로 만들어주었는가? 다시 말해 일은 보다 즐겁고, 의미 있고, 유익한 것이 되었는가? 이러한 새로운 제도들은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해주었는가? 그것들은 약속했던 모든 것-권한위임, 훈련, 팀 구성원이 되는 기쁨-을 주었는가? 213-214

 

리엔지니어링(Reengineering)20세기의 마지막 주요 경영 이론으로서 과학적 관리법과 적절한 대조를 이룬다... 리엔지니어링은 일련의 과업들이 한 사람에 의해 행해질 수 있도록 조정하는 새로운 기법을 사용했다. 과학적 관리법은 근로자들을 전문가로 변화시키고, 일을 지루한 것으로 만들었다. 리엔지니어링은 고용인들을 만능일꾼으로 만듦으로써 일을 보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것으로 만든다. ...

리엔지니어링은 마이클 해머와 제임스 챔피의 공동 작품이다. ..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모든 경영 혁신들 주에서, 리엔지니어링은 한 개인이 하는 일을 보다 흥미롭게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214-215

 

한때 지시받은 대로 일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다... 경영자들은 이제 감독관처럼 행동하지 않고 코치처럼 행동한다. 근로자들은 상사에게 덜 신경 쓰는 대신 소비자의 욕구에 더 신경을 쓴다.’ ..

해머는 리엔지니어링은 더 적은 인원으로 더 적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구조조정이나 조직개편과는 다르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리엔지니어링은 더 적은 인워능로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다. 216-217

 

 

9 배신하는 직장

 

1990년대 중반의 많은 미국인들... 회사에서 해고당한다. .. 그들은 회사가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일을 해치우고 싶어했기때문에 직정을 잃은 것이다. 그들은 세계경제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여성들과 소수민족의 사람들도 해고를 당했으며...직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 소득, 연금, 친구, 평판, 심지어 가족까지 잃는 일도 있다, 그들이 일한 세월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조직이 약속했던 것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일만 잘하면 은퇴할 때까지 직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묵언의 사회적 꼐약을 고용주들과 맺었던 것이다. ...

해고의 아픔을 극복하고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기술을 배워 더 나은 직장으 얻은 사람들에 대한 좀더 유쾌한 이야기도 있다. .. 그러나 이들 성공 스토리에 등장하는 사람들조차도 이전 직장에서 누렸던 것과 같은 생활 수준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1995년 노동부는 실직 노동자의 35%만이 동일하거나 더 나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 직장을 얻게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221-222

 

어떤 이들은 구조조정이 올바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잘못될 것이 없다고 좋아한다. ..

1990년대의 커다란 아이러니 중 하나는 실제 경영에 있어서는 구조조정을 강조했던 반면, 당시의 경영서들과 경영학적 수사법들은 헌신”, “충성”, “신뢰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

헌신은 노동력을 줄이고, 근로자들의 작업량을 두 배로 늘린 회사들이 특히 필요로 하는 덕목이었다. 222-223

 

구조조정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존재했으며 강한 노동조합에 의해 강화되어온 노동의 암묵적인 사회계약을 변화시켰다. ..

사회적으로 구조조정은 근로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알고 있었거나 의심해온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 고용주들과 경제는 변덕스러우며, 당신은 조직에 너무 많은 것을 투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말이다. .. 산업화와 더불어 근로자는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취급받았다. 225

 

근로자에 대한 배신에 있어, 구조조정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 지난 20년간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기업들은 고용인들과 이윤을 공유하기는 커녕, 시장과 주식시장에서 거둔 성공을 치하한다며 임원들에게만 막대한 상여금과 스톡옵션을 주고 있다. 226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고든은 저서 <살찌고 비열한>에서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갖고 있는 경제적 문제들의 주요 원천은 대부분의 미국 기업들이 고용인들을 다루는 방식과 비대한 관료주의를 유지해온 방식에 있다고 주장했다. .. 대중은기업의 이윤과 중역들의 보수는 증가하지만 자신들의 임금은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체되거나 하락한 임금을 설명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끌어들이는 혐의는 세계 노동시장에서의 경쟁이다. ..

경제학자 제임스 K. 갤브레이스는 정부가 부자들의 편에 서 있는 탓에 중산층과 빈자들을 위한 정책에 실패하여 임금 및 소득의 불평등이 증가했다고 비난한다. 227

 

1974CEO들은 평균적인 근로자보다 40배나 많은 돈을 벌었다. .. 1999년 노동조합 단체인 페이워치(Paywatch)CEO의 평균 급여가 공장 근로자 평균 임금의 326배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급여 전문가인 그래프 S. 크리스탈은 이렇게 말한다. “CEO의 급여는 너무 빨리 오르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더는 놀라지 않는다.” 228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기분 좋게느끼게 만듦으로써 고용주들은 근로자들의 내게 무슨 득이 돌아오느냐?”고 묻지 않도록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현혹시킨다. .. 오늘날에도 불성실한 경영자들은 갈등과 사기 문제를 피하기 위해 근로자들에 대한 평가를 부풀린다(이것은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영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임금 인상은 억제되었고, 노동조합 참여는 감소했으며, 남아 있는 노조들의 힘도 약해졌다. 힘의 균형은 압도적으로 고용주에게 유리한 상태가 되었다. 229

 

엘튼 메이오의 시대 이후 경영진의 목표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돈을 덜 주면서 더 많은 일을 시킬 수 있을까?”였다. 연구 결과는 월급 인상이 반드시 사람들을 더 열심히 일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니며, 근로자들은 자신의 성과에 대해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어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직장에서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주되니 이유가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한다는 느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TQM이 너무나 효과적으로 실행되어서 근로자들이 실제로 내게 득이 되는 게 뭐죠?”라고 묻지 않는 일이 이제 가능해진 것인가? 그들은 정말로 업무 품질에 대한 인정만을 바랄 뿐 보수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가? 231

 

일을 보다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본래 그 자체로는 훌륭한 의도이다. 그러나 근로자들이 부당한 임금을 받고도 열심히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일을 더 그럴듯해 보이게 하는 것은 착취이다. 232

 

미래의 불확실성에 근거한 미묘한 두려움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일에 매달리도록 만든다. 우리들 대다수는 어떤 막연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더 오랫동안 일한다....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와 달리 두려움의 노동윤리는 구원의 희망을 약속하지 않는다. 단지 좀더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시장은 변덕스러워서 개별 고용주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오늘날 고용주는 사람들을 해고할 때 미안 하네, 경기가 안 좋아서...”라든지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지 않으면 경쟁할 수가 없네라고 이야기한다. 좌절한 실직자들은 누구를 비난하고, 누구에게 소리쳐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경영자들이나 정치가들을 비난할 수 없다. 그들 역시 세계경제를 통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직한 근로자들은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초점 잃은 분노를 품는다. 확정되지 않은 미래의 언젠가, 그들의 회사를 보다 경쟁력 있게 만들기 위해 그들의 삶은 혼란에 빠진다. 235

 

만약 카를 마르크스가 오늘날에도 살아 있었다면 그는 혁명을 요구했을 것이다. - “전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너희들이 잃을 것은 구속뿐이다.” 그러나 칸막이나 팀 안에서 일하는 오늘날의 근로자들은 단결할 수도 없고, 단결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잃을 것이 있다. 바로 그들의 직장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파업이나 저항 운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

냉소주의자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고, 단결하여 조합을 형성하지도 않고, 저항하지도 않기 때문에, 혁명론자들보다도 함께 일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대신에 그들은 봉급을 받을 때 수동적인 저항과 비웃음으로 침묵의 파업을 행한다.

복지 혜책의 과감한 삭감, 더 긴 노동시간, 증가된 노동량, 구조조저으 그리고 급등하는 중역들이 보수에 대한 근로자들의 공공연한 침묵은 우리의 귀를 멀게 한다. 238



PART ONE 일의 의미와 역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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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일의 의미, 삶의 의미를 찾아서

 

우리가 가진 모든 연장들이 우리의 명령에 의해서든, 스스로 필요성을 인식해서든, 알아서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라... 베틀의 북이 혼자서 앞뒤로 움직이고, 연주자가 저절로 움직이는 리라를 연주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면 공장주들은 더 이상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노예의 주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쉬지 않고 일하는 로봇들에 의해 자동화된 공장을 보며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다수는 그렇지 않다. 이 시대를 기쁨으로 맞이하는 대신, 우리는 전보다 더 필사적으로 일(work)에 매달린다. 우리 사회는 일을 지향하는 사회이다. .. 우리는 일을 축복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일을 없애려고 하는 모순적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8

 

이 책은 우리 삶에서 일과 직장이 갖는 의미에 관한 책이다. 8

 

일은 우리의 지위뿐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까지도 결정한다.

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시장이나 고용주의 손에 맡겨두는 결과를 가져온다. 괜찮은 삶을 사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 이상의 것(something more)’을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용주들은 자기개발이나 자아실현 같은 다양하고도 추상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방법을 찾는다. 9-10

 

오늘날의 일은 대부분 우리 사생활의 일부를 포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과거의 노동자들이 단지 과로했을 뿐이라면, 오늘날의 많은 노동자들은 과로할 뿐 아니라 과도한 통제를 받고 있다. 14

 

 

 

PART ONE 일의 의미와 역사

 

1 왜 일하는가?

 

잠시 동안 일하지 않는 생활을 상상하기는 쉽지만, 평생을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어떤 사람들에게 왜 일하는가?”라는 질문은 우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한 선택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합니다.” 이것이 대다수 사람들이 유급노동을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종류의 일을 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19

 

윌리엄 줄리어스 윌슨은 그의 저서 <일이 사라졌을 때>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일자리가 부족하면 사람들은 단지 빈곤으로 고통을 겪을 뿐 아니라 공식적인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소소감을 상실한다. 더는 일이 그들의 생활을 규제하는 규칙적인 힘으로 작동하기를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윌슨에 따르면,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일은 규율, 소속감, 규칙성, 자기 효능감 같은 다양한 심리적 사회적 욕구를 만족시킨다. 그러나 과연 일이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가? 왜 실직자들은 여가를 통해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가? 20-21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직자들이 여가를 갖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또 다른 통찰을 제시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평화나 적당한 미덕, 교육이 없이는 여가도 가질 수가 없다. “비즈니스에는 용기와 인내가 요구되며, 여가를 위해서는 철학이 요구된다. 절제와 정의는 두 가지 모두에 필요하지마 특히 평화와 여가의 시기에 더욱 요구된다. 절제와 정의는 두 가지 모두에 필요하지만, 특히 평화와 여가의 시기에 더욱 요구된다. 왜냐하면 전쟁은 사람들을 공정하고 절제하도록 만드는 반면, 평화와 함께 찾아오는 상당한 재산과 여가는 사람들을 오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2

 

두려움, 물질적 필요, 책임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여가를 통해 스스로를 계발하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여가를 위한 교육을 통해 스스로에게 유익한 학습과 활동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활동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들이 읽기, 쓰기, 미술, 신체적 훈련, 음악 같은 과목들을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교양인 학계(liberal arts)’의 기초가 된다. 로마의 키케로도 학예가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교육에서, 삶의 필수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진리와 그 자체로 추구할 가치가 있는 지식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론적으로 볼때 교양은 일하는 방법이 아닌, 여가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

여가는 단순한 자유시간이상이다. 그것은 일에 대한 욕구와 필요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이며, 특정한 일으르 하기 위한 기회이다. 직업을 이맇었거나 직업을 가질 수없는 사람들은 결코 일에서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일할자유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선택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23

 

인간의 가장 흥미롭고 독특한 점은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난 에도 스스로 일하기를 선택한다는 점이다. 24

 

일을 통해 소득을 얻는다는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직업을 갖는 것이 우리 문화에서 그토록 바람직한 이유는 명백하다. 일은 우리에게 유용하기 때문이다. 일은 규율과 정체성, 가치를 제공한다. 일은 우리의 시간을 조직하고 우리의 삶에 리듬을 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이 우리에게 매일매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 준다는 점이다. 교육과 소득, 평화와 안전이 주어진다 해도, 유급노동이 일의 중심이 되는 문화에서 자발적으로 일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매일매일을 만족감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활동으로 채울 수 있을까? 우리들 대다수는 그것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일을 통해 만족과 행복을 얻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일은 우리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준다. 그러나 인간이 일 자체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많은 학자들을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장 자크 루소는 게으름이야말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생산활동의 필요성은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부지런한 습관은 일이 가져다주는 산물이며, 우리가 일을 통해 얻는 실용적인 교육이 무언가를 해야 할 필요성과 바쁜 습관을 만들어낸다고 저술하고 있다. 요컨대 우리는 타고난 기질 때문이 아니라, 훈련과 도덕적 조건화로 인해 일할 필요성을 느낀다는 것이다. 25-26

 

일의 의미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일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27

 

개미와 같은 이런 유형의 사람은 은퇴를 위해 저축하며, 남은 20년 동안 이전의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바라면서, 삶의 45년 내지 50년 동안 어느 정도의 즐거움을 저당잡힌다. 32

 

개미는 미래를 위해 살지만, 막상 미래가 왔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항상 아는 것은 아니다. 33

 

개미와 달리 베짱이는 현재를 위해 살고 미래를 희생한다. 그의 놀이는 아무데에도 이르지 못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노는 삶에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 있는 삶인가? 꿀벌은 개미처럼 일하면서도 베짱이처럼 자신이 우추구하는 것을 즐긴다. 꿀벌은 다른 사람들이 고맙게 여기는, 훌륭하고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데서 기쁨을 얻고 의미를 찾는다. 꿀벌은 유용하고 보상을 주는 일을 상징한다(물론 실제 꿀벌의 삶은 이야기 속의 꿀벌의 삶과는 전혀 다르다). 개미는 일하는 삶, 안전한 삶의 표본인 반면, 베짱이는 놀이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경솔한 삶을 대표한다. 그렇다고 해서, 베짱이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34-35

 

버나드 수츠 <베짱이의 놀이, , 유토피아>.. 수츠의 주장에 따르면, 당신은 다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에만 일하면서 놀 수가 있다. 첫째, 당신은 일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둘째, 당신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

이솝 우화의 꿀벌은 개미처럼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개미와 달리 꿀벌은 꿀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즐기거나, 꿀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즐기거나, 여전히 꿀 만들기를 즐긴다. .. 몇몇 생산적인 활동은 필요성은 없으나 만족을 준다. 36

 

매미의 노래처럼, 놀이를 하는 유일한 목적은 즐거움이다. 이솝 우화 속의 베짱이는 무책임해서 굶어 죽지만, 매미는 배고픈 예술가로 그려진다. 매미는 음악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굶어 죽는 것이다. 두 개의 우화는 서로 다른 메시지를 전달한다. 예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반면 일보다 노래를 더 좋아해서 죽는 것은 어리석다. 우리들 대다수에게 더욱 적절한 질문은 만약 당신이 개미처럼 산다면, 즉 나이 들어 쇠약해질 때까지 일해서 돈을 저축한다며, 그것은 의미 있는 인생인가?”이다.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주어진 시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37

 

일은 일 이외의 삶을 잠식한다. 일 이외의 삶은 일하는 삶보다 더 많은 것을 제공한다. 44

 

 

2 일이란 무엇인가?

 

일의 의미를 탐색하기 위한 좋은 출발점은 일(work), 노동(labor), 수고(toil), 업무(job)와 같은 단어들의 뜻을 살펴는 것이다. 우리가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정의하는 방식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어휘 사용이 시간이 지남따라 그 단어의 집합적인 이용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46-47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거나, 어떤 것의 이름을 바꾸는 행위는 잠재적으로 강력한 행위이다. 당신이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은 그것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48

 

일에 붙는 직함이나 사람들이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용어들은 직장에 대한 개념도를 형성한다. 고용주가 조직문화를 바꾸고자 할 때, 그들은 자주 재명명 방법을 사용한다. 49

 

필요성’.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 그것을 반드시 해야 하거나,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51

 

모든 문화에서 일에 대한 태도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태국어에서는 을 뜻하는 단어와 파티를 뜻하는 단어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

태국 사람들은 일이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며, ‘일 자체는 좋은 것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도 태국인들은 결코 게으르지 않다. 그들의 문화는 재미를 뜻하는 사눅(sanuk)’에 큰 가치를 둔다. 모든 활동은 사눅(재미있는)’마이 사눅(mai sanuk:재미없는)’로 구분된다. 사눅은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근심없는 즐거움을 뜻한다. 일이건 놀이이건 상관없이 어떤 활동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속성이 바로 사눅이다. 가령 태국의 어느 마을주민에게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단조로운 업무가 주어진다면, 그는 그 업무를 팽개치고 가버릴 것이다. 그것은 사눅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그 사람은 여러 날 동안 쉬지 않고 마을이 사원을 짓는 일을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일에서는 사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태국에 처음 공장을 지었을 때, 그들은 사눅의 중요성을 발견했다. 사실 초기에는 태국인들이 그다지 열심히 일하지 않았으며, 특히 아침마다 차려 자세로 서서 사가(社歌)를 부르는 의식을 싫어했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관습을 버리고 공장에서 음악을 틀어주기 시작했드며, 더 많은 휴식시간을 주고 작업중에 할 수 있는 놀이도 가르쳐주었다. 태국인들의 의식 속에서 일이 사눅이 되자 생산성이 증가 했다. 일과 놀이에 대한 태국인들의 태도는 같다. , 작업 파티는 생일 파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53

 

(work)은 너무나 다양한 것을 의미한다. 정말이지 대단한 단어이다. 우리는 일(work)하고일터(work)간다.’일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하는것이며, 우리가 만들어내는것이다. 미술 건축 음악 문학 작품(work)’도 있다. 우리는 의사, 회계사, 자동차 수리공이나 카펫 판매원의 솜씨(work)에 감탄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공간이나 나뭇조각, 빵 반죽, 고장난 자물쇠 등을 가지고도 일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의 해답을 내거나(work someone over), 운동을 하거나(work out), 좋은 일을 하거나(do good works), 누군가를 때려주거나(work someone over), 흥분하거나(get worked up), 자칫하면, 심지어 일벌레(workaholics)까지 될 수 있다.

이라는 단어는 동사이자 명사이며, 활동이자 활동의 산물이기도 하다. 55

 

노동(labour)’이라는 단어는 14세기 영어에서 최초로 등장했다. ..

동사노서의 노동(labor)은 행위만을 나타낼 뿐 행위의 대상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지만, 우리는 그가 딸기를 만들었다:고 말하지 안흔다. 비록 그의 행위가 딸기를 따는 이주 노동자보다는 훨씬 더 딸기를 만든 것에 가깝더라도 말이다. 화가가 그림 그리는 행위를 통해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노동하는 사람들은 대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는 육체적인 일을 하지만 직접 그것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56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노동,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필요한 물건을 다루는 일을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하는 하인의 일과 같다고 생각했다. 노동과 일은 두 가지 요인에 의해 구분된다. 첫째, 노동은 일에 비해 육체적 노려고과 더 크게 관련된다. 둘째, 노동자와 노동 대상의 관계는 일하는 사람과 그 대상과의 관계와 다르다. ..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노동자의 첫번째 정의는 봉사행위로서, 혹은 생계를 위해 육체적인 노동을 행하는 살마인 반면 일하는 사람의 첫 번째 정의는 만들거나 창조하거나 생산하거나 고안해내는 사람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노동이라는 단어가 로 격하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이 한 개인에 의해, 그리고 개인을 위해 행해지는 것인 반면 노동이라는 단어는 무언가를 만들거나 행하는 데 대한 개인의 기여를 암시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용어라고 말했다. ‘은 노동의 산물을 나타내는 명사이지만 노동은 일하는 사람들을 나타내는 명사이다. ‘노동은 육체적인 일을 하는 살마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반면, ‘은 다양한 행위나 그러한 행위의 대상을 가리킨다. 우리는 일조합이 아닌, ‘노동조합을 결성한다. 대부분의 조직에서 일은 협동적이며 상호 의존적인 사람들의 집단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터라는 말 대신 일터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집합적이고 육체적인 일보다는 개인적이고 비육체적인 일을 강조하는 것이다. 57

 

노동이나 수고같은 단어어비해 업무(job)’라는 단어는 상당히 유쾌하게 들린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명사 ‘job’덩어리(gob)’라는 단어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려준다. .. 17세기까지.. ‘업무란 영구적인 고용이 아니라, 일시적인 일을 의뢰받거나 잠시 고용되는 것을 가리켰다. 60

 

업무라는 단어는 대개 명사로 사용되는 반면 일하다라는 동사의 형태와 그들의 일에서와 같은 명사의 형태가 거의 비슷하게 사용된다. .. ‘업무의 또 다른 차이는 일은 보수를 받는 것과, 받지 않고 행하는 활동까지 가리키는 반면, ‘업무는 보수나 소득을 얻는 일에만 구체적으로 관련된다는 것이다. 61

 

업무라는 단어는 보수를 받기 위해 하는 도구적인 활동을 나타낸다. 그것은 일, 노동, 수고, 고역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업무의 정의는 일하는 살마과 그 산출물 간의 연관성을 암시하지 않는다. .. 일의 양에 대해서 ..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이 보수를 받기 위해 하는 한정된 양의 활동이라는 점이다. 62

 

 

3 일의 역사

 

살기 위해 일한다는 우리의 인식은 어떻게 해서 일하기 위해 산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을까? 64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일은 저주였다. ... 기원전 4세기의 역사가인 크세노폰은 사람들이 생의 좋은 것들을 누리는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 일이라고 기록했다. 만약 일이 신들의 저주라면, 그것은 정복당한 적이거나 포로가 된 외국인, 혹은 노예의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저주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편이 가장 낫다. 노예는 부유한 고대 그리스인들을 일에서 해방시켰다. 그리스인들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활동을 노예의 일로 여겼다. 노예제도는 인간의 지위를 강등시켰을 뿐 아니라 일의 사회적 도덕적 가치까지도 격하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이란 가능하면 노예들에게 떠맡겨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이득을 얻기 위해 하는 일은 그 자체로 저주가 되리 수 있다고 믿었다. 재산(땅과 노예들)을 소유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야말로 그가 생각한 인간적인 삶의 기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집 안에서 사용할 물건을 만드는 일과 상업적 이득을 위한 일을 구분했다. 그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기 위해 집에서 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인간의 필요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도 유한하다고 말했다. ..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소매업이나 금전적인 이득을 위한 일은 인간의 욕망(want)을 위해 실행되는 것이므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욕망은 인간의 필요(need)와 달리 무한한것이다. .. 돈을 벌거나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는 것 자체에만 열중할 뿐 잘 사는데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 어떤 것을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여가 활동의 정의이다. 게다가 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는데, 그들이 원하는 것과 그것을 얻기 위한 일은 결코 중단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65-66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개인의 생각과 견해가 그의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 평범한 거리의 그리스인은 유용한 상품을 개발하는 것에 대해 이러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을 것 같지 않다. 물론 우리는 그들이 정말로 그랬을지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평범한 살맘들은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을 하기 전에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원전 여러 동양 문화에서도 물질적인 세계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세계보다 덧없고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들이 을 경멸한 것은 아니다. 67

 

정신적 수양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이었다. 일의 과정은 결과보다 더 중요했다. 부처에게는 바닥을 쓸고 닦고 연료를 모으는 것 같은 가장 비천한 일조차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었다. 68

 

종교나 문화에 따라 일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혹은 중립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문화 내에서도, 서로 다른 종류의 일은 상이한 영적 도덕적 사회적 가치를 지닐 것이다. 모든 사회에는특정 유형의 일에 대한 고유한 편견이 존재한다. 68

 

고대 그리스인들은 다른 살맘들에 대한 봉사와 일반적인 육체노동에 대해 강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봉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시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치학>에서 그는 장인과 노동자들은 공동체의 하인들, “꼭 필요한사람들이기 때문에 시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장인이 시민이 될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로는 그들 대다수가 노예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조각의 황금기에 이 책을 저술했지만 조각가들이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조각은 격렬한 육체노동을 포함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조각을 노예 예술(servile art)’로 여겼다. 고대 그리스에서 육체노동자들은 시민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몇몇 훌륭한 조각가들은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반면 그림을 그리는 일은 육체적인 노력을 덜 필요로 했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람이 행하는 학예(學藝)로 간주되었다. 학예는 깨끗하고 지적인 일일 뿐 아니라, 자유로운 사람의 일을 암시했다. ..

육체노동에 대한 편견은 르네상스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그림이 학예와 노예 예술의 중간쯤에 위치한다고 생각한 반면 조각은 여전히 노예 예술이었다. 69

 

생업이 목수였던 그리스도는 직업이란 무의미한 것이라고 설교했다. ...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질서와 정당한 보상, 수양을 위한 일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그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규칙적으로 살라고 충고한다. “여러분 가운데는 무절제하게 살면서 일을 하지는 않고 만들기만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하는데, 다른 이들의 빵을 먹음으로써 그들에게 짐이 되지 말라.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 여기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있다. 첫째, 일은 생활 리듬의 일부이며 사람들을 시끄러운 문제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둘째, 개미에 관하 이솝 우화에서처럼 일하지 않는 자가 먹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71

 

교회는 을 세 가지 정도로 구분했다. 그것은 삶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 다른 이들을 위한 일, 개인적인 이득이나 물질적 이득을 얻기 위한 일이다. 72

 

우리가 태만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기력이라는 뜻의 아시디아(acedia)’를 대략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태만을 게으름이나 일하기 싫어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시디어의 본뜻이 아니다. 태만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게으름에 대한 비난이 아니며, 일의 가치에 대한 긍정도 아니다. 태만은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73

 

단순한 노동에 불과했던 이 두러지게 긍정되기 시작한 것은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이다. .. 529년 성 베네딕트는 몬테 카시노의 꼭대기에 수도원을 지었다. ...

성 베네딕트 이전의 수도사들은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힘들고 고통슬운 노동을 해야 했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육체적인 일에 보다 긍정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규정집의 주제는 오라 에 라보라(ora et labora)’,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이다. 베네딕트는 수도사들에게 신에 대한 헌신의 한 방버브으로서 무슨 일을 하든 착월함을 추구하라고 장려했다. “무엇보다, 어떤 일을 시작하든지 그것을 완전하게 해주십사 하고 신에게 진심으로 기도하라.” 74

 

성 베네딕트에게 일은 직업이나 소명(calling)이 아니라, 일종의 눈에 보이는기도였다. .. 베네딕트 교단은 유럽 전역에 걸쳐 퍼져나갔으며, 중세의 마으로과 도시를 발전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베네딕트회 수도사들은 중세 초기의 가장 능숙한 농부이자, 장인이자 기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노동을 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수도사들 중 가장 낮은 지위로 간주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일 자체를 가치 있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일과 신앙심 사이에 일련의 관계가 있음을 발견햇다 베네딕트 수도회의 전통에서 비롯된 노동윤리는 기독교인의 영적 미덕을 수공업을 비롯한 다른 직업에 까지 확대시켰다. 75

 

12세기에 이르러, 그 사람의 직업과 동일시한 성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베이커(빵 굽는 사람), 카펜터(목수), 대처(이엉장이), 스미스(대장장이), 위버(베 짜는 사람), 골드스미스(금 세공인), (요리사). 77

 

개인 및 집단의 정체성이 직업에 따라 새로이 형성되자 교회의 정책도 자신들의 일에 대해 보다 존중해 달라는, 조합과 중산층의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교회는 기꺼이 실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한 예로, 교회는 이 무렵 증가하는 중산층을 위한 중간 단계의 집으로서 연옥을 만들어냈다. 연옥은 중산층에게 천국과 지옥, 힘 있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존재하는 그들만의 진정한 영적 지위를 부여하였다. 연옥의 개념은 15세기 이전까지는 별로 유행하지 않았다. 15세기에 이르자 비록 비참하기는 해도 훌륭한 자금조달 장치(gimmick)인 연옥이 소곡(小曲)을 통해 찬미되었다. “금고에 동전 소리가 울리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솟아오른다.” 78

 

일에 관해 말할 때 우리가 가장 애용하는 묘사, 창조로서의 일은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했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으며 인간은 음악과 미술을 비롯한 아름다운 거슬의 창조자이다. .. “예견하다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프로메테우스.. 고대인들에게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를 고된 노동으로 몰아넣은 사기꾼이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 인류가 운명을 붙잡을 수 있도록 허락한 영웅이 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신의 섭리를 막연히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기 시작하면서, 일이 지니는 가치도 커졌다. 14세기의 피렌체는 우리에게 세계를 만들어내고 자연의 형태를 바꾸는 창조자로서의 인간, 즉 호모 파베르(homo faber)의 이미지를 선사했다. .. 만약 종교가 중세의 아편이었다면 창조성과 미는 르네상스 시대의 각성제였다.

르네상스 시대는 고유한 노동윤리를 가지고 있었다. .. 자신의 돈으로 무엇인가를 도모하되 구두쇠처럼 돈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부자가 되어도 상관이 없었다. ..

육체와 정신을 룬련시켜야 한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믿음에, 르네상스는 손을 훈련시키는 것을 더했다. 81-82

 

15세기 인문주의자 로렌조 발라는 중세의 전통과 교황이 누리는 현세의 권력을 공격했다. 진정한 선의 본질에 대한 그의 저서 <쾌락에 대하여>에서 발라는 쾌락과 덕을 재정의함으로써 쾌락과 아름다움을 가득 찬 삶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소박함과 자기 절제를 명하는 스토아 학파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다. .. 그는 덕()쾌락으로 환원될 수 있는 요소(calculus pleasure)”라고 주장했다. 쾌락은 짐승 같은 충동이 아니라 이성과 통찰의 원리이며, 덕은 재능이자 인내하는 능력이었다. 82-83

 

1516년에 저술된 모어의 <유토피아>는 공리주의 원칙에 입각한 공산주의 사회를 이상향으로 그리고 있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는 청소나 도살, 사냥과 같이 시민들이 비천하고 창피스럽게 여기는 일은 모두 범죄자와 노예들이 도맡아 했다. 따라서 시민들은 보다 흥미로운 일에 종사할 수 있으며, 하루에 여섯 시간만 일해도 된다. ..

1602년에 쓰여진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는 공동체 생활과 과학적인 사회 질서를 강조했다. 캄파넬라의 이상향에서는 모든 사회 계층이 평등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그곳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캄판넬라는 가장 고귀한 사람들은 한 가지 이상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

일이 인간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일을 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르네상스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고 성취를 이룬 사람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고 자신의 일을 조절할 수 있는 사라이다. 따라서 전형적이 르네상스인은 오늘날의 인간관과는 급격한 대조를 이룬다. 83

 

16세기부터 18세기 사이에는 노동자의 자살을 금지하는 법이 확산되었다. 이는 당시 사회가 더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했고 그만큼 노동자 가치가 증가한 반면 노동자들의 절망 역시 더 커지고 있음으로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지표이다. 84


루터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게으른 거지와 부랑자들을 꾸짖었다. 그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집이 없는 이유는 그들이 일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었다.(바로 이 시점부터 오늘날까지, 몇몇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러한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다른 주요 종교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 관점에서 크게 이탈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코란에서는 거지들을 세상의 자연스런 질서의 일부라고 생각했으며 자선은 도덕적 영적 의무라고 생각했다. 85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 자체를 위한 일이라는 개념과 휴식과 쾌락에 대한 혐오는 칼뱅과 루터로부터 비롯된 거이다. 이것은 노동윤리라고 불리는 것의 수많은 형태 중 하나에 불과하다. 85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일과 모든 노동자들을 똑같이 존중하도록 가르쳤다는 점이다. .. 루터와 칼뱅의 노동윤리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람들을 구속해온 믿음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선하고, 일하지 않거나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이다. 86

 

종교 개혁가들은 모든 일을 베루프(Beruf, 시간을 차지하는 이르 직업이라는 의미의 독일어), 소명으로 정의했다. 소명은 일의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에 대한 태도를 일컫는다. ... 모든 일이 신의 명령이라는 생각은, 일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불쾌하며 보수가 적더라도 누구나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보증해주었다. .. 프로테스탄트의 소명 개념은 일에 영적인 차원을 부여했다. 그것은 결코 일이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 ‘소명이라는 개념은 이제 우리의 일상 언어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현재는 종교적인 직업을 일컫는 데 주로 사용되고 있다. 대신에 소명이라는 말은 천직(vocation)’이라는 말로 세속화되었다. 우리는 때로 소명천직을 번갈아 사용하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창가 있다. 당신의 소명은 신이 결정하지만 천직은 당신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다. 87

 

우리는 지금까지 종교가 일의 도덕적 가치를 형성해온 과정을 살펴보앗다. 고대인들은 일을 강제적인 것이자 저주로 보았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일에 단순한 위엄(simple dignity)’을 부여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일에 매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신교도들은 일을 의미와 정체성, 구원의 징표를 찾는 과정으로 만들었다. 단순한 노동을 넘어선 일, 즉 소명으로서의 일 개념은 일의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특징을 강조했다. 일은 일종의 기도가 되었다. 일은 삶의 수단을 넘어 삶의 목저이 되어싸다. 일은 저주에서 소명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이르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수많은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88

 

 

4 일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

 

우리가 물려받은 노동윤리는 단일한 개념이 아니라 세 가지 개념이 융합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첫 번째 개념은 공정함과 사회적 책임의 원칙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부양할 의무를 갖는다. .. 두 번째 요소는 우리의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한다는 것. 세 번째는, 루터와 칼뱅의 독특한 견해로 일 자체가 도덕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지니며, 모든 사람은 살면서 어떤 종류의 일을 하도록 신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일은 그것이 아무리 비천해도, 또한 보수가 얼마든 간에 좋은것이다. .. 공정함, 개인의 탁월성, 개인의 선함이라는 이 세 가지 기본 개념으로부터 일은 고역아니라 의미 있는 것이라는, 일에 대한 낭만적 개념이 생겨났다. 그리고 우리는 일을 통해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89-90

 

18세기, 벤자민 프랭클린은 프로테스탄트의 관점과 계몽주의의 이상을 조합하여 새로운 노동윤리를 만들어냈다. 그는 사람들이 인도적인 방법으로 부를 사용하여 사회를 돕기 위해서는 우선은 부를 얻으려고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는 종교적 의무가 아닌,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일을 강조했다. 92

 

막스 베버는 프랭클린이 노동윤리로부터 윤리학을 이끄르어냈다고 생각했다. 프랭클린의 노동윤리가 낳은 윤리학은 두 가지 도덕적 개념에 기반하였다. 첫 번째는 공리주의이다. .. 두 번째 도덕적 개념은, ‘유용성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는 것이다. 92-93

 

프랭클린은 자서전에서 성공을 위해 필요한 열한 가지 미덕을 열거하는데 절제 침묵, 규율, 결단, 성실, 중용, 청결, 평정, 순결, 겸손이 그것이다. 그는 현세에서의 금욕주의를 설교했지만 또한 돈이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그 목적은 바로 생을 즐길 수 있는 자유였다. 93

 

1836년부터 1900년 사이에 모든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맥거피가 엮은 <간추린 어린이 독본> 시리즈를 읽었다. 이 시리즈는 칼뱅의 신학을 강조했으며 고된 노동과 근면, 검약의 윤리를 찬양했다. 94

 

메인 주 출신의 목사이자 교육자인 자콥 애벗은 1832롤로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들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 내에 자리잡은 프로테스탄트의 노동윤리를 명확히 표명했다. 예를 들어 <일하는 롤로>에서 롤로의 아버지는 그에게 한 시간 동안 못을 분류하라고 했다. 롤로는 그 일이 매우 지루하다고 불평했고,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한 가지 일에 꾸준히, 끈이 있게 몰두하는 능력을 가져야 해. 어린 소년들은 일이 놀이처럼 재미있을 거라는 잘못된 기대를 하더구나.” 롤로의 아버지에 따르면, 진정한 남자는 일이 노력과 자제력을 요구하며, 고되고 지루한 것임을 안다.

1950년대 중반, 산업화가 시작될 무렵부터 아이들의 동화는 바뀌기 시작했다. ..

1800년대 중반에 등장한 싸구려 소설은 올리버 옵틱을 비롯한 수많은 아동문학가들로 하여금 이야기의 색채를 바꾸게 만들었다. 지나치게 교훈적인 이야기들은 본격적인 모험소설만큼 잘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옵틱은 범죄나 잃어버린 친척, 인디언 전쟁 등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 이들의 모험은 단지 주인고으이 도덕적 개선이라는 진짜 이야기이 배경이 뿐이라며 독자들을 설득한 것이다. 옵틱의 새로운 영웅들을 여전히 도덕적 모범이 되었지만, 그들의 규범은 부지런히 일하는 것에서 용감한 행동으로, ‘개인적인 절제에서 추진력으로 변화했다. 95

 

일에 대한 교훈이 가득한 아동용 동화들은 미국 남부에서는 제대로 뿌리내린 적이 없었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땅과 노예를 소유하고 싶어했고, 그들은 돈보다 혈통을 더 중시했다. 97

 

경제 전문 기자(business jounalists)의 수가 증가하면서 많은 이들이 사업가들을 추켜세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스코틀랜드 이민자인 버티 찰스 포브스는 덕 잇는 사업가에 대한 찬양을 영구적인 예술의 형태로 표현했는데, 그것은 일과 미덕, 부는 행복과 사회적 이이긍로 이어진다는 프랭클린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1916<포브스>지를 창간하면서 그는 이 간행물이 사업과 인생 전반에 더 많은 인간애, 기쁨, 만족을 줄것이라고 설명했다. 98

 

위대한 사업가의 신화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기가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그저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99

 

예일 대학교 출신의 콘웰은 1888년 필라델피아에 템플 대학교를 설립한 침례교 전도사였다. 그는 오늘날 사람들이 동기부여자(motivational speaker)”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 콘웰 목사는 도덕적 충고와 사업상의 건전한 충고를 혼합했다. 그는, 돈을 버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내어 그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

18세기와 19세기의 노동윤리 옹호자들은 강한 도덕성이야말로 부에 이르는 열쇠라고 설교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데일 카네기가 1936년에 쓴 <카네기 인간 관계론>에 나타나듯이 개인의 성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도덕성이 아니라 심리학이 성공에 이르는 열쇠가 된 것이다. 99-100

 

성공에 대해 이야기하는 19세기의 많은 작가들과 설교자들, 심지어 몇몇 정치가들은 상업을 칭송하고 정치를 비방했다. 제임스 A. 가필드는 대통령이 되기 전인 1869, 워싱턴 전문대학의 졸업반 학생들에게 고전 학문을 가르치는 대학은 젊은이들의 직업 생활 준비에 완전히실패했다고 이야기했다. 100

 

19세기 미국을 방문한 유럽인들은 미국인의 에너지와 근면성에 아연실색했다. 특히 그들은 유한계급이 없다는 것에 대해 놀아워했다. 빈의 이민자인 프란시스 그룬트는 미국에서 상업이 주된 쾌락과 즐거움의 원천이라는 데 주목했다.

활동적인 직업은 그들 행복의 주요 원천이자 그들 국가를 위대하게 만드는 근원이다. .. 그들은 돌체 파르 니엔테(dilce far niente : 게으름의 달콤함)’대신, ‘게으름의 공포만을 알고 있다. 상업이야말로 미국인의 정수이다. .. 모든 인간 행복의 원천으로서 그것을 추구한다. .. ’. 101

 

과거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과 스스로를 동일시했고, 심지어 자기 이름까지 일에 맞추어 지었다. 반면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는 일과 정체성에 대한 두 가지 새로운 견해를 내세웟다. 일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를 발견하거나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1

 

산업화 이후부터는 이리에 대한 두 가지 유형의 견해가 존재했다. 첫 번째 견해는 계몽주의적인 것, 즉 과학과 지식이 진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산업화 이전에 일은 거칠고도 육체적으로 고된 노역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 두 번째 견해는 장 자크 루소와 같은 비평가들이 말한 것으로, 일이 일종의 은총받은 상태로부터 타락했다는 것이다. ‘은총으로서의 일이란, 자율적인 장인이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여 유용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어내고,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농부가 자신의 풍성한 녹색 들판에 씨를 뿌리고 수확하면서 조용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18세기의 저작에서, 루소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임금을 받기 위해 일하는 산업 사회의 몇몇 문제점을 예견했다. 루소는 인류가 타인의 노동으로부터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부터 일의 황금기는 끝났다고 믿었다. ..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일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창조성과 일하고자 하는 욕구를 잃었다. .. <에밀>에서 루소는 최상의 삶의 방식으로서 장인의 기능을 강조했다. 그의 낭만적 이상은 농부처럼 일하고 철학자처럼 사고하는 인간으로, 말에 편지를 박는 동안 진리와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는 목가적인 르네상스인이었다. 102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유재산과 자본주의 생산체제는 일로부터 얻는 창조적이고 사회적인 보상과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을 사용하는 기쁨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켰다.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일과 동일시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여겼는데, 특히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한 선택권을 거의 갖지 못하고 매우 세부노화된 일을 할 때 그러했다. .. 마르크스는 루소를 흉내내어 이러한 세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가 오른 한 가지 일을 하고 내일은 다른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 세상, 사냥꾼이다. 어부, 소 치는 사람이나 비평가가 되지 않고도, 마음먹은 대로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고기를 잡으며 저녁에는 소를 사육하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비평을 할수 있는 세상이다.’ 103

 

중요한 점은 이러한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한 가지 직업의 정체성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일과 정체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를 극단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림 그리는 사람만 있을 뿐 화가는 없을 것이다. 103

 

마르크스의 이상적인 세계에는 단 한 사람의 전문가도 없는 것일까? 병을 고치는 사람만 있을 뿐 의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마르크스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만약 당신이 청소부로 고용되어 있는 동시에 교회 집단의 우두머리이자 조각가라면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을 그저 청소부로만 여기기를 원하겠는가?... 마르크스는 사람들의 살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일이 유급고용 이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04

 

윌리엄 모리스는 당대의 르네상스인이자, 도이시대인들의 묘사에 따르면 일벌레였다. 그는 설계자, 장인, 시인, 번역가로서 탁월성을 발휘했다. 1884년 모리스는 사회주의 연맹을 창설하고 자본주의 노동체제와 생산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모르스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을 공유했지만, 동시에 일 자체의 심미적 가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한 편지에서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나는 왜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살 수 없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네.... 정말이지 나는 행복하게 일한다네. 그런 나의 시간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운명지워진 것, 칭찬받거나 보상받지 못하는 단조로운 고역일 뿐인 것과 비교하면, 부끄러움을 느낀다네.’

산업화된 영국의 짙은 매연과 보기 흉한 건물을 보며 경악한 모리스는 작업장에 아름다운 정원을 꾸밀 것을 제안했다. 그는 또한 대량생산된 상품들의 흉한 모습을 조롱했다. 그는 기계가 노동을 절약해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생각하는 손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 자체가 주는 심미적 가치는 유용성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물건들을 만들어내는 데서 오는 만족감에서도 비롯된다고 믿었다. 104-105

 

일의 의미에 대한 모리스의 흥미로운 통찰 가운데 하나는 가치 있는 일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모리스는 일이 삶의 빛이 될 수도, 혹은 삶의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첫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있는 반면 두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모리스에 따르면, 사람들로 하여금 일을 원하도록 하고 그 일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희망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가치 있는 일은 휴식의 즐거움에 대한 희망, 일을 통해 만든 것을 사용함으로써 느끼게 되리 즐거움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일상적인 창조의 기능에서 느끼는 즐거움에 대한 희망을 수반한다.” 105

 

가치 있는 일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희망이 잠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일뿐 그 실현 가능성 여부는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주관적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만든 물건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리스의 논점은 만약 그들이 그럴 수 있다면 그들은 그것을 사용하거나 소유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낄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사람들은 다양한 창조적 기술을 이용하여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할지에 대해 제각기 다른 희망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분한 여가와 고품질의 유용한 산물, 기술을 연마할 기회를 제공해주는 직업을 갖고 싶어하리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일은 객관적이다. 106

 

인간이 실제로 하는 에는 두 가지 이상적인 유형이 있다. ‘장인의 일혹은 손을 이용해서 하는 일과, ‘전문가의 일혹은 정신을 가지고 하는 일이 그것이다. 106

 

전문가( professional)’ 라는 단어는 원래 성직에 들어가는 사람이 공식적인 선서를 하는데 사용된 공언하다(profess)’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107

 

중세의 유일한 전문직은 대개 학자이자 법률가이자 의사였던 성직자들이었다. 전문직의 근저에는 세 가지 기준이 존재했다(이러한 기준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첫 번째, 모든 전문직은 공식적인 기술교육과 그러한 훈련을 확인시켜주는 일정한 제도적 인증 과정을 요구했다. .. 두 번째 기준은 전문직에서 사용하기 위한 기술을 발전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 세 번째로, 전문가는 그 전문직이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게 이용되도록 보장하는 일종의 제도적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윤리적 행위를 보증할 수 있는 조직화가 이뤄져야 한다. 미국의 변호사협회나 의사협회의 목적이 그러한 것이다. ..

사회학자 탈콧 파슨스는 “”기업인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에 상관없이 사리사욕만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반며느 전문가는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이타적으로 봉사한다.” 이것은 그가 50년 전에 쓴 글이다. ...

이상적으로 생각하자면 전문가들은 일에 대한 보수를 받지 않아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문가는 업무를 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비용을 보조받는것이기 때문이다. 108

 

대중이 전문가들의 비윤리적 행위에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여전히 전문가들이 사회에 대해 공식적 서약을 맺는다고 암묵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109

 

일에 대한 우리의 열정은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가 되고 싶은 것, 혹은 얻고 싶은 것에 달려 있다. 일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모리스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일을 원하려면 먼저 미래에 대한 어느 정도의 희망 혹은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노예와 농노들, 그리고 지독하게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힘 없는 사람들에게 노동윤리는 결코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111

 

 




PART TWO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바로가기



PART THREE 일과 삶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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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나의 치유와 자기 회복을 위해 언제나 내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고립되어 있고, 고립된 시선으로 보지 않으려는 신념이었다.  10


우리는 ‘자유정신’의 유형이 언젠가 완전해질 때까지 성숙하고 단 맛을 낼 수 있도록 정신이 어떤 위대한 해방 속에서 결정적인 사건을 겪었으며 그 사건이 전에는 얼마나 속박된 정신이었고 귀퉁이와 기둥에 영원히 묶여 있었을 것처럼 보였는지 추측할 수 있다. 무엇이 가장 단단하게 묶을까? 완전히 잘라버릴 수 없는 밧줄은 어떤 것일까? 고상하고 선택된 부류의 인간에게 그것은 의무가 될 것이다. 젊음에 어울리는 외경심, 오랫동안 숭배하고 가치를 부여해온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나약함, 자신들이 성장했던 땅, 자신들을 이끌어주었던 손길, 숭배를 배웠던 성전 등에 대한 감사, 바로 그들의 최고의 순간 그 자체가 그들을 가장 단단히 묶고 가장 지속적으로 의무를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위대한 해방은 이처럼 속박된 것에 마치 지진처럼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 그러면 젊은 영혼은 단 한번에 동요되고 분리되어 떨어져버리고 만다 - 그들 자신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충동과 혼란이 그 영혼을 지배하고 그에게 명령하는 주인이 되어 버린다 ; 의지와 소망은 어떻게든 그리고 어디로든 나아가려고 눈을 뜨게 된다 ; 미지의 세계를 향한 불굴의 모험적인 호기시이 그의 모든 감각에서 불타오르고 불꽃이 흔들거린다. “여시거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 이렇게 단호한 목소리와 유혹이 울려퍼진다. ‘여기’그리고 ‘집에’라는 말은 그가 지금껏 사랑해온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가 사랑해왔던 것에 대한 갑작스런 공포와 의심, 의무로 불렸던 것에 대한 섬광 같은 멸시 그리고 방랑, 타향, 소외, 냉각, 환멸, 냉담에 대한 선동적이고 의식적이며 화산처럼 솟구치는 욕망, 사랑을 향한 증오심, 아마도 자신이 지금까지 숭배했고 사랑했던 곳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신전모독과 같은 행동과 눈초리, 아마도 자신이 방금 한 일에 대한 불타오르는 수치심과 동시에 그 일을 해냈다는 기쁨 그리고 그 승리를 알림으로써 느끼는 더할 나위없는 내면적인 기쁨의 전율이다 - 승리라고? 무엇에 대한, 누구에 대한 승리란 말인가? 그것은 수수께끼 같이 의문스럽고 모호한 승리이긴 하지만 어쨌든 최초의 승리이다 : - 위대한 해방의 역사에는 이와 같은 아픔과 고통이 따른다. 해방은 동시에 인간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하나의 병이기도 하다. 스스로 정의하고 스스로 가치를 정립시키려는 힘과 의지가 만드는 이 최초의 폭발, 자유로운 의지를 향한 이 의지 : 그리고 풀려난 자, 해방된 자가 이제부터 자신이 사물을 지배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할때 그의 거침없는 시도와 기묘한 행동에는 얼마나 많은 질병이 나타날 것인가! 그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으로 무섭게 배회한다 ; 그의 긍지의 위태로운 긴장 상태는 그가 약탈하는 것으로 보상되어야만 한다. 그는 자신을 자극하는 것을 파괴해버린다. 그는 자신이 은폐하는 것, 부끄러움 때문에 간직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을 악의에 찬 미소로 뒤집어버린다 : 그는 만약 이러한 사물들을 뒤집어버리면 그것들이 어떻게 보일 것인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지금까지 좋지 못한 평판을 받아온 것에 자신의 명예를 되돌려놓으려고 한다면, 그리고 호기심으로 시험해보려는 듯이 가장 금지된 것의 주위로 몰래 기어 들어가려 한다면 거기에는 자의와 자의에서 나오는 쾌감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의 행동과 방황의 배후에는 더욱 위험한 호기심의 의문부호가 자리잡는다. 왜냐하면 그는 마치 황야에서처럼 불안하면서도 정처없는 행로의 중간에 있는 것이므로. ‘모든 가치를 뒤집을 수는 없는 것일까? 아마도 선은 악이 아닐까? 그리고 신은 악마의 발명품일 뿐이거나 악마를 더욱 고상하게 만들어놓은 것은 아닐까?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허위가 아닐까? 또 우리가 속았다면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동시에 속이는 자가 아닐까? 우리는 속이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 이런 생각이 그를 인도하고 더욱 멀리, 더욱 빗나가도록 그를 현혹한다. 고독이 그를 겹겹이 에워싼다. 저 무시무시한 여신이자 잔인한 정념의 어머니인 고독이 그를 더욱 위협하고 목을 조르고 심장을 짓누른다. - 그러나 고독이 무엇인지를 지금 어느 누가 알겠는가? ...


이러한 병적인 고립 상태와 황량하기만 한 시험기에서 벗어나, 저 흘러 넘치는 섬뜩한 확실성과 가히 질병마저도 포괄하는 건강성에 이르는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질병은 인식의 수단이며 인식을 낚는 낚싯바늘로서 반드시 필요하다. 자기 통제와 심정의 수양이며, 수없이 많은 대립적인 사유방시에 이르는 여러 길을 허용하는 그 성숙한 정신의 자유에까지 이르는 길은 멀다 - 정신이 자신의 길에서도 자신을 잃고 방탕하며 어느 한 구석에 취한 듯 주저앉아 버리게 될 위험을 몰아낼 수 있는 저 넘치는 풍요함의 내면적인 광대함과 자유분방함에 이르게 될 때까지의 길은 멀다. 그리고 위대한 건강의 표시인 저 유연하고 병을 완치하며 모조해내고 재건하는 힘이 넘쳐흐르기까지의 길도 아직 멀다. 그렇게 넘쳐흐르는 힘은 자유정신으로 하여금 시험에 삶을 걸고 모험에 몸을 내맡겨도 된다는 위험스런 특권을 부여한다. 그것은 자유정신의 거장다운 특권이다! 그 사이에는 긴 회복기가 놓여 있다. 그 시간은 고통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이고 다체로운 변화가 가득하여, 벌써 건강이라는 옷을 입고 위장을 한 강이한 건강을 향한 의지에 지배되고 규제되는 시간들이다. 거기에는 나중에 이러한 운명을 가진 한 인간을 감동 없이는 회상할 수 없는 중간 상태가 있다 : 거기에는 창백하고 섬세한 빛과 태양의 행복이 속해 있다. 즉 새의 자유, 새의 조망, 새의 오만에서 나온 감정과 호기심과 갸날픈 멸시의 감정이 얽힌 제3의 감정이 있다. ‘자유정신’ - 이 차가운 단어는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편안하며 따뜻하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랑과 증오의 속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마음대로 가까이 가고 멀어지며, 기꺼이 도주하고 피해다니며 날아다니고 다시 사라지거나 또다시 높이 날아오르며 사는 것이다 ; 사람들은 언젠가 자신 가운데에서 엄청난 다양성을 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변하게 된다. - 그러고는 자신과 무관한 사물을 걱정하는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자유정신을 괴롭히지 않는 그런 것과 관계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


한 단계 더 회복되면, 자유정신은 다시 삶에 천천히, 거의 반항적으로, 거의 의심스러운 듯 가까이 다가간다. 그의 주위는 다시 점점 따뜻해지고 마치 노란색 같은 빛을 띠게 된다 ; 감정과 공감은 깊어지고, 눈을 녹이는 듯한 온갖 바람이 그 위로 지나간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주위에 처음으로 눈을 뜬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그는 놀란 채 조용히 앉아 있다 : 도대체 그는 어디에 있었던가? 이 친근하고 가장 가까운 사물들 : 그 사물들이 그에게 얼마나 달라 보이는가! 그것들은 그 사이에 어떤 솜털과 매력을 얻었는가! 그는 감사하며 뒤를 돌아본다 - 자신의 방랑과 고집, 자기소외, 자신이 차가운 하늘을 새처럼 날며 멀리 보았던 것에 감사하며. 그가 나약하고 우둔한 게으름뱅이처럼 언제나 ‘집에’, 언제나 ‘제정신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던 것은 얼마나 잘한 일인가! 그는 자신을 잊고 있었다 :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서야 그는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 그때 그는 거기서 얼마나 놀라운 것을 발견하는가! 미지의 전율! 회복기에 있는 사람이 느끼는 피로감과 오랜 질병 그리고 병이 재발한 가운데 느끼는 행복! 고통에 쌍 조용히 앉아 인내심을 키우는 일과 햇빛 아래 누워 있는 일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누가 겨울의 행복과 벽에 드리워진 햇빛의 얼룩을 그만큼 잘 알 수 있단 말인가! 삶을 향하여 다시 몸을 반쯤 돌린 이 회복기에 있는 자, 즉 도마뱀이야말로 세사에서 가장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가장 겸손한 동물인 것이다 : - 그들 중에는 질질 끌리는 옷자락에 작은 찬가를 달고 다니지 않으면 하루도 못 견디는 자도 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 이러한 자유정신의 기질을 가지고 병에 걸려 한동안 앓고 나서, 그 후에 더 오랫동안 건강하게, ‘더욱 건강하게’ 되는 것이 모든 염세주의(알려진 것처럼 염세주의는 낡은 이상주의자와 거짓말쟁이의 암이다)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법이다. 그 속에 있는 지혜, 즉 삶의 지혜는 오랜 기간 동안 소량의 약만으로 건강 자체를 처방한다는 것이다.  12-17



제1장 최초와 최후의 사물들에 대하여


인류는 유래와 기원에 관한 질문을 의식에서 몰아내고 싶어한다. 그 반대의 경향을 자기 속에서 느끼게 되려며 ㄴ우리는 거의 탈인간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24


철학자들의 유전적 결함 - 철학자가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두 근본적으로 극히 제한된 시기의 인간에 대한 증언에 불과하다. 여갓적 감각의 결여는 모든 철학자가 지닌 유전적 결함이다.  .. 절대적 진리가 없는 거소가 마찬가지로 영원한 사실도 없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역사적으로 철학하는 일이 필요하며, 그와 동시에 겸양의 덕이 필요하다.  24-25


현상과 물 자체 - 수천 년 전부터 우리는 도덕적, 미학적, 종교적 요청과 맹목적인 애착, 정열 또는 경외감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았으며 비논리적인 사고의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세계는 점차 이처럼 이상할 정도로 다채롭고, 끔찍하게 의미심장하고 감정이 넘치게 되었다. 세계가 색채를 띠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색을 칠한 사람은 우리였던 것이다. 인간의 지성이 현상을 나타나게 했으며, 근본적인 자신의 해석을 사물 속으로 끌어들였다.  38


회의(懷疑 품을회 의심의)의 추정적 승리 - 한 번쯤은 회의적인 출발점을 인정해보라. 만약 다른 형이상학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고 우리에게 알려진 유일한 세계에 대한 모든 형이상학에서 나온 설명들이 전적으로 소용없는 것이라면, 그때 우리는 어떤 눈길로 인간과 사물들을 보게 될 것인가?  44


비교하는 시대 - 사람들이 관습에 묶이지 않을수록 그만큼 동기의 내면적 운동은 활발해지며, 그에 상응하여 외적 불안정, 인간의 뒤얽힌 혼란, 노력의 다성음악도 그만큼 커진다. 자기 자시이 있는 곳에 자신과 후손을 묶어두는 엄격한 강제성이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 존재하는가? 도대체 누구에게 아직도 무엇인가 엄격하게 속박하는 것이 존재하는가? 모든 종류의 예술양식이 나란히 모조되고 있다. 모든 단계나 모든 종류의 도덕, 관습, 문화 또한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시대는 서로 다른 세계관, 도덕, 문화가 비교될 수 있고 나란히 체험될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 고뇌를 두려워하지 말자! 오히려 시대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과제를 우리는 가능한 한 크게 생각하도록 하자.  46-47


꽃잎의 향기에 취해서 - 종교와 예술은 세계의 꽃이지만, 그것이 줄기보다 세계의 뿌리에 더 가까운 것은 결코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종교와 예술로 사물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는 없다. 오류는 종교와 예술과 같은 꽃을 피우게 할 만큼 인간을 깊고 섬세하며 상상력이 풍부하게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53


추리할 때의 나쁜 습관들 - 사람들이 가장 흔히 범하는 오류 추리는, 어떤 사항이 실재하므로 그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53


비논리적인 것은 불가피하다 - 비논리적인 것이 인간세계에 필요하며 비논리적인 것에서 좋은 것이 많이 생겨난다는 인식은 사상가를 절망에 빠뜨릴 수도 있는 것 중 하나다. 비논리적인 것은 정열, 언어, 예술, 종교 등에 그리고 대체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에 상당히 깊이 파고들어 가 있어서, 이들 아름다운 것들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주지 않고는 비논리적인 것을 퇴치할 수 없다.  54


불공정함은 불가피하다 - 어떤 사람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 대해 우리가 겪은 경험은 총체적 평가를 위한 논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할만큼 완전할 수는 없다. 모든 평가는 성급하며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재는 척도, 즉 우리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코 불변의 크기를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분위기와 동요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에 대한 어떤 사항의 관계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확실한 척도라고 믿어야만 한다. 아마 이상의 모든 면에서 본다면 사람은 전혀 판단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평가하지 않고, 혐오와 애착 없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든 혐오는 모든 애착과 마찬가지로 역시 평가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처음부터 비논리적인, 따라서 불공정한 존재이며,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현존재의 가장 크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부조화 중의 하나이다.  55-56




제2장 도덕적 감각의 역사에 대하여


매우 진지한 개인과 민족에게 가벼움이 필요하듯, 마찬가지로 다른 부류에 속하는 매우 자극받기 쉬운 자와 동요하기 쉬운 자에게는 자신들의 건강을 위해 가끔 무겁게 짓누르는 짐이 필요하다. 점점 불길에 휩싸여가는 시대의 우리 더욱 정신적인 인간들은 우리가 적어도 지금처럼 부단히 악의 없고 절도를 지키녀 살아갈 수 있도록, 또한 이 시대에 거울과 자기반성으로서 이바지할 수 있도록, 불을 끄고 식히는 존재하는 모든 수단들을 잡기 위해 손을 뻗어야만 하지 않을까?  68


예지적 자유에 대한 우화 - 소위 도덕적 감각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주요 단계를 거친다. 첫째, 사람들은 동기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개별 행위를 단지 이롭거나 해로운 결과들에 의해 선 또는 악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 이런 명칭의 유래를 잊고, 그것의 결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행위 자체에 ‘선’ 또는 ‘악’의 특징이 내재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한다. 언어가 돌 자체를 단단하다고, 나무 자체를 푸르다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오류다. 즉 그렇게 함으로써 결과를 원인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선함 또는 악함을 동기 속에 집어 넣고, 행동 자체가 도덕적으로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사람들은 선하다, 악하다는 술어를 개별 동기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 전체에 부여한다. 식물이 흙에서 자라는 것처럼, 인간의 본질에서 동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은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다음에는 행위에 대해서, 다음에는 동기에 대해서,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차례차례 책임을 묻는다. 결과적으로 인간들은 이 본질 역시 필연적인 결과이며, 과거와 현재의 사건들의 여러 요소와 영향으로 결합되어 있는 이상, 그것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곧 인간은 어떤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본질, 동기, 행위, 나아가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로써 도덕적 감각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이자 책임성에 관한 오류의 역사이며, 그것은 의지의 자유에 관한 오류에서 나오고 있다는 인식에 이른다. ... 불만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만은 행동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필요는 없다는 잘못된 전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므로 후회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불만은 인간이 고칠 수 있는 습관이다.   69-70


친절의 경제학 - 인간의 교제에서 가장 효험 있는 약초이며 힘으로 간주되는 친절과 사랑은 대단히 가치 있는 발견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마 이 향기로운 약을 가능한 한 경제적으로 사용하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친절의 경제학이란 가장 무모한 몽상가의 꿈이다.  76


동정을 유발시키려고 하는 것 - 로슈푸코의 (그리고 플라톤의)판단에 의하면 동정이란 영혼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동정을 입증해야 하지만, 동정을 갖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낟. 왜냐하면 불행한 사람들은 어쨌든 동정을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큰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여길 정도로 어리석기 때문이다. ... 동정에 대한 열망은 자기 만족을 향한 열망이며, 더욱이 이웃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동정심은 지극히 자기애에 빠져 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라 로슈푸코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음"때문은 아니다.  78


진리의 명목상의 단계들 - 흔히 있는 잘못된 추리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누군가가 우리에 대해서 진실하고 솔직하기 때문에 그는 진리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부모의 판단을 믿고 그리스도교도는 교회 창설자의 주장을 믿는다. 이처럼 사람들은 지난 몇 세기 동안 행복과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옹호해온것이 모두 오류에 불과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것이 진리의 단계였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무엇인가를 믿고 자신의 믿음을 위해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을 경우에, 사실은 단지 오류가 그를 부추겼을 뿐이었다면, 이것은 너무나 부당한 일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런 과정은 영원한 정의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민감한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정신과는 반대로 다음의 명제를 명령한다. 즉 도덕적 행위와 예지적 통찰 사이에는 철저하게 필연적이 ㄴ유대가 이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영원한 정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81


거짓말 -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신이 거짓말을 금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거짓말에는 날조, 위장, 기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위프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짓말을 하는자는 자신이 져야 할 무거운 짐에 관해서는 거의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즉 그는 하나의 거짓말을 주장하기 위해서 또 다른 스무 개의 거짓말을 생각해내야 한다.) 다음으로 단순한 상황에서는 나는 이것을 원한다, 내가 이것을 했다 등으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유리하며, 따라서 강제와 권위를 택하는 편이 교활한 방법보다 훨씬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한 어린이가 복잡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면 그는 이와 같이 자연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언제나 자기에게 이익이 되게끔 말한다.  82


자기분할로서의 인간의 도덕 - 진정으로 자신의 일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작가는 누군가가 찾아와서 그 일을 더 명확하게 표현해주고, 여기에 포함된 문제에 대해 남김없이 대답함으로써 자신을 파괴해주기를 원한다. 사랑을 하고 있는 소녀는 연인이 저지른 부정에서 자신이 사랑이 헌신적이며 충실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군인은 조국의 승리를 위해 전쟁터에서 쓰러지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최고 소원도 조국의 승리를 통해 승리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 즉 수면과 가장 좋은 음식을, 사정에 따라서는 자신의 건강과 재산을 자식에게 주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비이기적인 상황들일까? 쇼펜하우어의 말에 따라 이런 도덕적 행위들은 "불가능하면서도 현실적"이기 때문에 기적일까? 이들의 경우에는 인간은 자신의 그 무엇을, 하나의 사상, 하나의 욕망, 하나의 작품 등을 자신의 다른 것보다 한층 더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분할해서 한쪽을 다른 한쪽의 희생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이 명확하지 않은가? 어느 고집 센 사람이 "내가 이 인간에게 한 걸음이라도 길을 양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총에 맞는 편이 낫다"고 할 때,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일까? 어떤 것에 대한 애착(소원, 충동, 욕망)은 앞서 말한 모든 경우에 존재하고 있다. 애착을 가지는 것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비이기적"이지 않다. 도덕에서 인간은 자신을 분할할 수 없는 것, 개체(individuum)로서가 아니라 분할할 수 있는 것(dividuum)으로서 다룬다.  85


약속할 수 있는 것 - 행동은 약속할 수 있으나 감정은 약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감정은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항상 사랑하겠다거나 미워하겠다거나, 항상 그에게 충실하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은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행동은 약속할 수 있다. 이런 행동은 대체로 사랑, 증오, 충실함의 결과이지만, 한편 다른 동기에서 나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러 방법과 동기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익르어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언제까지나 사랑하겠다는 약속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한 나는 너에게 사랑의 행위를 입증할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ㅇ낳게 되더라도, 다른 동기에 의해서일지라도 나는 똑같은 행동을 너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언제까지나 똑같은 것이라고 하는 가상이 상대방의 머리 속에는 존속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기만 없이 누군가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경우, 그것은 사랑의 가상에 대한 외관상의 지속을 약속하는 것이다.  86


지성과 도덕 - 주어진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좋은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 동정심을 가지려면 강력한 상상력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도덕은 지성의 우수함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86


복수하기를 원하는 것과 복수하는 것 - 복수심을 품는 것과 복수를 실행하는 것은 격렬한 열병의 발작에 걸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나가버린다. 그러나 복수를 실행할 힘과 용기가 없는데도 복수심을 품는 것은 만성병, 육체와 영혼의 중동증을 안고 있는 것과 같다. 의도만을 중시하는 도덕은 두 경우를 양이 같은 것으로 평가하고, 통상적으로 전자의 경우를 더 나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아마도 복수의 행동이 수반할지도 모르는 나쁜 결과 때문일것이다). 두 가지 평가 모두 근시안적이다.  87


사랑과 정의 - 왜 인간은 정의를 손상시켜가면서 사랑을 과대평가하고, 마치 정의보다 사랑이 더 고상한 본질들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랑을 향해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분명히 사랑은 정의보다 훨씬 더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틀림없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그만큼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것이다. 사랑은 어리석은 것이며, 풍부한 풍요의 뿐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이 뿔에서 자기의 선물을 누구에게나 나누어준다. 그가 그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 번도 그것을 감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성서와 경험에 의하면 사랑은 정의롭지 못한 사람뿐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는 정의로운 사람에게도 피부 속까지 흠뻑 젖게 하는 비처럼 공평하다.  91


피해자와 가해자의 착각들 -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서 어떤 소유물을 (예를 들면 영주가 서민한테서 연인을) 빼앗을 경우, 가난한 자는 착각을 한다. 자신이 소유한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빼앗아갈 정도로 그 사람은 참으로 흉악한 사람임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자느 ㄴ개개의 소유물의 가치를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사람의 입장을 생각할 줄 모르며,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심하 ㄴ부정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양자 모두 서로에 대하여 잘못된 표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분갷살 만한 권력자의 부정도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엄청난 것은아니다. 이미 물려받은 감각은 더 높은 것이 요구되는 더 고귀한 존재가 되기 위해 그들을 매우 냉정하게 만들고, 양심을 무디게 한다. 만약 우리와 다른 존재의 차이가 아주 크면, 우리는 모두 부정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어, 예를들어 모기 한 마리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죽이게 된다. 그래서 크세르크세스(Xerxes, 그리스 사람들조차 모두 그를 특별히 고귀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의 경우, 전체 원정군에게 불안하고 불길한 불신감을 조성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몸을 토막내게 한 것은, 그의 사악함의 표시가 아니다. 이런 경우에 한 개인은 마치 불쾌한 곤충처럼 제거된다. 세계의 지배자가 오래 느끼도록 자극하기에는 그는 너무나 무가치한 존재다. 그뿐 아니라 어떠 ㄴ잔인한 자도 학대받은 자가 믿고 잇는 그런 정도로 잔인하지 않다. 고통을 상상하는 것은 고통당하는 괴로우모가는 같지 않다. 공정하지 못한 재판간과 사소한 부정직함으로 인해 세상의 여론을 오도하는 저널리스트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원인과 결과는 이런 모든 경우에 잔혀 다른 감정과 사상들로 둘러싸여 있다. 반면 사람들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똑같이 생각하며 느낀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이 전제에 입각하여 한 사람의 죄를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특정한다  96-98


수치심의 예민함 - 사람들은 부정한 것을 생각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이런 부정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브끄러워할 것이다.  98


개개인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평을 통하여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자신 앞에서 입증하고 싶어 한다. .. 그들은 다른 살마의 판단력을 자신의 판단력보다 신뢰하고 있다.  100


성숙한 개인의 도덕 - 자신에게서 완전한 개인을 만들어내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최고의 행복을 주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동정적인 감동과 행위보다 그를 훨씬 더 진보시켜준다. 물론 우리 모두는 여전히 개인적인 것을 너무 사소하게 여기는 병을 앓고 있다. 그것은 잘못 교육되어온 것이다. 우리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자. 우리의 감각은 오히려 강제적으로 개인적인 것에서 분리되었으며, 마치 개인적인 것이란 희생되어야만 하는 나쁜 것이기라도 한 듯 국가, 학문,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희생물로 제공되었다.  104-105


인륜과 윤리적인 것 - 도덕적, 윤리적, 윤리학적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확립되어온 규범이나 관습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억지로 복종하는지 또는 기꺼이 복종하는지의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앟으며 그것을 실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사람들로 하여금 윤리적인 것과 비윤리적인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의 구별을 가능하게 한 근본적 대립은 '이기적인 것'과 '비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관습과 규범에 구속되어 있는가 아니면 해방되어 있는가에 있다. 여기서 어떻게 관습이 성립된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쨌든 관습은 선과 악 또는 어떤 내재적 정언 명법을 고려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한 공동체, 한 민족을 유지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잘못 해석된 우연을 근거로 하여 성립된 모든 미신적 관례는, 그것을 따르는 것이 윤리적이라는 관습을 강요한다. 즉 관습에서 해방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공동사회에서는 개인의 경우보다 훨씬 더 해롭다. 모든 관습은 근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많이 잊혀질수록, 계속 더 존중할 만한 것이 된다. 그리고 관습에 바쳐지는 존중은 세대가 지남에 따라 쌓여, 관습은 마침내 신성한 것이 되며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어떤 경우든 경건의 도덕은 비이기적인 행위들을 요구하는 도덕보다 훨씬 더 오래된 도덕이다.  105-106


인륜 안에서의 쾌감 - 쾌감과 도덕성의 근원에 대한 중요한 부분은 습관에서 생겨난다. ... 인륜이란 쾌적한 것과 유익한 것의 결합체이며, 게다가 그것은 심사숙고할 필요가 없다.  106-107


소위 악한 행위에서의 무죄함 - 모든 '악한' 행위들의 동기는 보존 본능, 더 정확히 말해서 개인은 쾌감을 지향하고 불쾌감을 회피한다는 사실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그렇게 동기 규정된 것이라면 그것은 악한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고통을 주는 것'은 철학자들의 두뇌 속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쾌감을 가져다주는 것'(쇼펜하우어적인 의미에서 동정심)도 이와 마찬가지다. 국가 형성 이전의 상태에서 우리는,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나무로 모여들때 우리보다 먼저 그 나무의 열매를 빼앗으려는 자가 있으면 그가 원숭이든 인간이든 죽였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는 불모의 땅에서 방랑하게 될 경우 동물에 대해 그런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를 가장 분노하게 만드는 악한 행위들은, 그런 행위를 우리에게 가하는 상대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그의 의향에 따라 이런 나쁜 행동을 우리에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착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의향이라는 것에 대한 이 믿음은 증오, 복수심, 악의를 야기하고 상상력을 완전히 손상시킨다. 반면 우리는 동물에 대해서는 그렇게 격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들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보존본능에서가 아니라 보복하기 위해 해를 가하는 것. 그것은 잘못된 판단의 결과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뵈가 없다. 개인은 국가 이전의 상태에서는 위협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가혹하고 잔인하게 다룰 수 있었다. 그것은 자기 힘을 위협적으로 시험해 보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 약한 자를 자신에게 굴복시키는 폭력을 행사하는 자, 권력자, 최초의 국가 설립자는 그렇게 행동한다. 오늘날에도 국가가 여전히 그렇게 행하고 있는 것처럼 거기에는 그럴 권리가 있다. 오히려 그것을 방해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예를 들어 사회, 국가와 같은 더 큰 개체와 집단적 개체가 개인을 굴복시켜서 그들의 개별성에서 그들을 이끌어내어 집단으로 흡수하게 되면, 비로소 모든 도덕성을 위한 토대가 제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도덕성에는 강제가 선행한다. 또한 도덕성 그 자체는 잠시 동안은 여전히 불쾌감을 피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순응하는 상제일 것이다. 나중에 그것은 인륜이 되고 훨씬 후에느 ㄴ자유로운 복종이 되며, 마침내는 거의 본느에 가까워지고 만다. 그때 그 도덕성은, 오랫동안 익숙해지고 자연적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쾌감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덕이라고 불린다.  109-110


판단하지 말라 - 앞서 간 시대들을 고찰할 때 우리는 부당한 비방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노예제도의 불공정함, 인간가 민족들을 정복하는 과정에서의 잔인성은 우리의 척도로 측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는 정의의 본능이 아직 충분히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기주의는 악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웃' (이 말은 그리스도교적 기우너을 가진 것으로 진실에 일치하지 않느다)에 대한 표성이 우리에게는 극히 미약히기 때문이며,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마치 식물과 돌을 대하느 ㄴ것처럼 자유롭고 책임이 없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다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결코 그것을 완전히 배울 수는 없다.  111-112


'인간은 항상 선하게 행동한다' - 자연이 뇌우를 내려 우리를 젖게 했다고 해서 자연을 비도덕적이라고 탓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해를 끼치는 사람을 비도덕적이라고 부르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후자의 경우에는 자의적으로 타나타는 자유의지를, 전자의 경우에는 필연성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구별은 오류이다. 또한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는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는 것에 대해 비도덕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인간은 모기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모기를 아무 거리낌없이 의도적으로 죽이고, 우리 자신과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 범죄자를 의도적으로 처벌하고 그에게 고통을 준다. 첫번째의 경우는 개인이 자기 보존을 위해서 또는 자신이 불쾌해지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자가 되며, 두번째 경우에는 국가가 그러하다. 모든 도덕은 의도적으로 해를 가하는 것을 정당방위로 인정한다. 단 그것이 자기 보존의 문제가 되는 경우라면!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가하는 모든 악행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관점만으로도 충분하다. 인간은 자신으 ㄹ위해서 쾌감을 원하고 불쾌감을 없애고자 한다.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자기 보존의 문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말은 타당하다. 인간은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선을 행한다. 즉 인간은 지성의 정도와 이성의 갖가지 척도에 따라 언제나 자신에게 선하게(유리하게) 보이는것을 행한다.  113


만약 인간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개별적인 모든 행위는 미리 계산될 것이다. 인식의 모든 진보, 모든 오류, 모든 악의도 말이다.  118


많은 행위가 악하다고 말하지만 그 행위들은 단지 어리석은 행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를 선택했던 지성의 정도가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한 의미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모든 행위는 어리석다. 왜냐하면 현재 이를 수 있는 최고의 인간 지성은 반드시 또 추월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120





제4장 예술가와 저술가의 영혼으로부터


완전한 것은 생성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 - 우리는 완전한 것에 대해서는 모두 그것의 생성에 의문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현존하는 것이 마치 마술에 의해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즐기는 데 익숙해 있다. ...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즉흥적인 것이라는, 기적처럼 갑자기 생긴 것이라는 믿음을 불러일으킬 때 완전한 효과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예술의 학문은 이런 착각을 가장 분명하게 거부해야 하고, 예술가의 그물에 걸리느 한, 지성의 그릇된 추론과 악습들을 적발해내야 한다. 그것은 자명한 일이다.  167


예술가는 일생 동안 어린아이와 젊은이인 채로 있으며 자신에게 예술 충동이 엄습했던  지점에 머물러 있다.  169


손으로 하는 작업의 성실성 - 재능과 타고난 능력에 대해서만 말하지 말라! 타고난 재능이 거의 없이도 위대해진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위대한 사람이 되었고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천재'가 되었다. 그런한 자질을 의식하고 있는 살마이라면 아무도 그것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커다란 전체를 만드는 일을 감행하기 전에, 우서 부분을 완전히 만든는 것을 배우는 숙련된 장인의 성실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부분을 완성하기 ㅏ여 시간을 부여했다. 왜냐하며 그들은 현혹시키는 전체의 효과보다 작은 것, 지엽적인것을 잘 만드는 일에 더 많은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하여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 있을 까 하는 방법은 쉽게 제공할 수 있으나, '나에게느 재능이 충분치 않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질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느 그 자질을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2페이지를 넘지는 않지만 거기에 포함된 모든 단어가 필연적이라고 할 만큼 명확한 소설을 백 개 이상 습작해보라. 가장 함축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일화의 형식을 배울 때까지 매일 일화를 쓰도록 하라. 인간의 유형과 성격을 수집하거나 윤색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 특히 주위의 다른 사람드에게 미치는 효과를 유심히 바라보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에게 말을 자주 하고 남이 말하는 것을 귀를 쫑긋 세워 듣도록 하라. 풍경화가와 의상 디자이너처럼 여행하도록 하라. 잘 표현되면 예술적 효과를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개개의 학문에서 발췌하도록 하라. 끝으로 인간 행위의 동기에 대해서 잘 생각하고 이 점에서 가르침을 주게 될 어떤 지침도 냉대하지 말고 밤낮으로 이런 것들의 수집가가 돼라. 이와 같은 다양한 훈련으로 2,30년을 내라. 그 후에는 작업실에서 창작된 것이 거리의 빛 속으로 나가도 좋다. 그런데 대부부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들은 부분에서가 아니라 전체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마 한 번은 선택이 적절하여 주목을 끌게 되지만 그때부터 항상 실패할 것이다. 그것은 충분히 당연한 근거에서 나오는 일이다. 때때로 이러한 예술적 삶의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이성과 성격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에는 운명과 필욕 그 자리를 물려받아 미래의 거장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여 그의 손으로 하는 작업의 모든 조건을 거쳐 단계적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181-182


대중의 예술적 교육 - 동일한 주제가 서로 다르 거장에 의해서 수많은 방식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대중은 소재에 관심을 갖는것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작업들에 의해 그 주제르 알게 되고 새로운 것이 주는 매력과 긴장감의 매력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며느 결국에는 이 주제를 취급할 때의 어떤 뉘앙스, 섬세하고 새로운 발명도 파악하고 즐기게 될 것이다.  185


예술가와 그의 추종자는 보조를 맞춰야 한다 - 양식이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진행하는 것은, 예술가뿐 아니라 청중과 관중도 이 진행에 참여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아주 느리게 진행되어야 한다. ... 왜냐하면 예술가가 대중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이미 대중은 급속히 낮은 곳으로 가라앉기 때문이다.  186


집단정신 - 훌륭한 저술가는 자신의 정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구들의 정신까지도 가지고 있다.  192


학문에 대한 관계 - 학문 속에서 그들 스스로 어떤 것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학문을 흥미롭게 여기기 시작했던 사람은 모두 학문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193


작가의 역설들 - 소위 독자가 불쾌하게 느끼는 작가의 역설들은 그 자각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흔히 독자의 머리 속에 있다.  193


기지 - 가장 기지에 넘치 작가들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미소를 거의 만들어내지 않는다.  194


문장가로서의 사상가 - 사상가는 대부분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의 사상뿐만 아니라 그 사상을 사유하는 것까지 우리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194


독자의 정신을 거역하는 죄 - 단지 독자와 같아지기 위해서 저자가 자신의 재능을 부인한다면, 그는 독자가 결코 용서하지 않을 치명적이 죄를 범하는 것이다. 즈 독자가 그것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눈치채는 경우에 말이다. 인간은 인간에게 모든 나쁜 욕을 해도 좋다. 그러나 어떻게 그 말을 하는지의 양식에서는 인간의 허영심을 다시 바로 세워줄 방법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194-195


글쓰기와 가르치기에서의 주의점 - 처음으로 글으 써보았거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글쓰기에 대한 정열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시도하고 체험하는 모든 것에서 문체상으로 전달할 수있느 것만을 배운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저술가와 독자들만을 생각한다. 통찰을 원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기 일을 하는 데는 무능력하다. 그는 언제나 자기 학생의 행복을 생각하고, 그가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인 한 모든 인식은 그를 기쁘게 하낟. 결국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열의를 잃어버리고, 지식의 한 통로, 흔히 수단으로 자신을 파악한다.  199


아킬레우스와 호메로스 - 언제나 아킬레우스와 호메로스의 관계 같은 것이 존재한다. 한족은 체허모가 감각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쪽은 그것들을 기술하는 것이다. 참다운 저술가는 남의 격정과 체험에 다만 단어들을 부여할 뿐이며, 자기가 경험했던 적은 것들에서 많은 것을 추측해내는 예술가이다. 예술가들으 결코 대단한 열정을 가진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흔히 열정을 가진 인간으로 무의식적인 감정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 즉 그들의 삶이 예술의 영역에서 체험을 말하게 될 때, 사람들은 그들이 그렸더 열정을 더욱 신뢰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을 자유롭게 내버려두고 자제하지 않으며 자신의 분노와 욕구를 위해 넓은 자리만 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곧 세상 사람은 저 사람은 얼마나 열정적인가! 하고 외친다. 그러나 깊이 파고드는, 개인을 소모시키며 때로는 잠식해 들어가는 열정인 경우에는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이러한 열정을 체험하는 사람은 분명히 그것을 극이나 음악 또는 소설에서 묘사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예술가가 아니라면 흔히 방종한 개인이다. 그러나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205




제5장 좀 더 높은 문화와 좀 더 낮은 문화의 징후


퇴화를 통해 고상해짐 - 우리는 한 민족의 혈통은, 사람들이 대부분 자신들의 일상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근본  법칙들의 동일성에 따라, 즉 그들의 공동 믿음에 따라 살아 있는 공동심(共同心 함께공 한가지동 마음심)을 가지고 있을 때 가장 잘 존속한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여기서 훌륭하고 탄탄한 풍습이 강화되고, 개체의 종속성을 배우며 품성에는 이미 강인함이 생일 선물로 주어져서, 그 후에는 그것이 습관하된다. 강하고 동질적이며 특징적인 개체들을 기반으로하는 이런 공동체가 가지는 위험은 세습에 의해 점차 강화되는 우둔화이다. 이것은 한번 정착되면 그림자같이 뒤따라다닌다. 그와 같은 공동체의 정신적 진보는 속박받지 않고 더 불안정하며 도덕적으로 더 약한 개체들에게 따라다닌다. 대개 새로운 것과 다양한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종류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약함 때문에 별 뚜렷한 영향도 보이지 않고 소멸해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들이 후손을 가지게 되면, 긴장이 완화되어 때로는 공동체의 안정된 요소에 상처를 초래한다. 새로운 그 무엇은 바로 이 상처로 인해 약화된 자리에서부터 전체로 접종되는 것이다. 그러나 것의 전체적인 힘은 이 새로운 것을 그의 피 속으로 받아들여 동화시킬 수 있을 만큼 강해야 한다. 퇴화해가는 본성들은 진보가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대개 모든 진보에는 어떤 부분적 약화가 성행되어야 한다. 가장 강한 본성들은 유형을 계속 지켜나가고 좀더 약한 본성은 유형을 계속 형성해나가는 것을 돕는다. 비슷한 일이 개별적인 인간들에게도 일어난다. 일종의 퇴화, 불구, 나아가서는 악덕 그리고 신체적 또는 도덕적 결손까지도 다르 한편으로는 때때로 하나의 장점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더 심하게 병든 인간들은 아마 호전적이고 침착하지 못한 종족 속에서 혼자 있으 계기를 더 많이 가지게 됨으로써 더욱 침착하고 현명해지며, 외눈을 가진 사람은 더욱 강한 한쪽 눈을 가지게 될 것이고, 눈먼 사람은 한층 더 깊이 내부를 보고 어쨌든 더욱 날카롭게 듣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저 유명한 생존 경쟁이 한 인간과 종족의 진보와 강화가 해명될 수 있는 유일한 관점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두 가지 것이 한데 합쳐져야 한다 그 하나는 신앙과 공통된 감정 안에서 정신들을 결합함으로써 정착된 힘을 증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퇴화해가는 본성들을 그리고 그 정착된 힘을 부분적으로 약화시키고 손상시킴으로써 더 높은 목표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다. 좀더 여리고 섬세한 것으로서의 더 약한 이 본성들이 대체로 모든 진보를 가능하게 한다. 어디에서인가 부패하고 약해져가는, 그러나 전체로서는 아직 강하고 건강한 민족은 새로운 것의 감염을 받아들여 장점으로 동화시킬 수가 있다. 개별적인 인간의 경우, 교육의 과제는 전체적인 인간으로서의 그가 더 이상 자신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를 확고하고 확실하게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그러나 그 후에 교육자느 그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아니면 운명이 그에게 입힌 상처를 이용해야 한다. 그리하여 고통과 욕구가 생겨나면, 그 상처 입은 부분에 새롭고 고상한 그 어떤 것이 접종될 수 있는 것이다. 교육자의 전체적 본성은 그것을 받아들여, 나중에 그 열매들 속에서 고상해지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국가에 관해서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설프게 교육받은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통치의 형식은 아주 사소한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정치의 최대 목표는 영속성이며, 이것은 자유보다도 훨씬 가치가 있어 다른 모든 것을 능가 한다." 대체로 지속적인 발전과 고상하게 하는 접종은 확실하게 기초가 마련되고 영속성이 최대한 보증될 때에만 가능하다. 물론 모든 영속성의 위험한 동료인 권위라는 것이 통상적으로 그 일을 방해하게 될 것이지만 말이다.  225-227


자유정신은 상대적 개념이다 - 어떤 혈통과 환경, 신분과 지위 또는 지배적인 시대의 견해를 근거로 그에게서 예살할 수 있는 거소가 다르게 사유하는 사람을 자유정신이라고 부른다. 자유정신은 예외이며 속박된 정신은 상례이다. 속박된 정신은 자유정신의 자유로운 기본 원칙이란 눈에 띄고 싶은 병적인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거나 또는 속박된 도덕과는 전혀 화해할 수 없는 순전히 자유로운 행위에 불과한 것이라고 단정짓고 자유정신을 비난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자유로운 기본 원칙들이 머리의 괴팍하모가 엉뚱함에서 나온다고 추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말을 하면서 자신의 말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함으로써 단지 상처를 입히려는 악의를 가지고 잇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자유정신의 얼굴에는 보통 속박된 정신도 충분히 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지성의 비범한 우수성과 예리함이 증거로서 역력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정신 활동의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기원은 공정하게 평가된 것이다. 사실상 많은 자유정신이 이러한 또는 저러한 양식으로 성립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자유정신이 그런 방법으로 성취한 원칙들은 속박된 정신의 원칙들보다도 더 진실하며 신뢰할 수 있다. 진리의 인식에서는, 어떤 충동에서 그것을 추구했으며,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발견했는지가 아니라 그 진리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자유정신이 정당하다면 따라서 속박된 정신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다. 전자가 부도덕에서 진리에 이르렀는가 그리고 후자가 지금까지 도덕에서 비진리를 고집했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자유정신이 정당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에 관계 없이 그가 관습적이 ㄴ것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이 자유정신의본질에 속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유정신은 역시 진리를, 또는 적어도 진리탐구의 정신을 자기 편으로 삼게 될 것이다. 자유정신은 근거를 요구하고 다른 정신들은 신앙을 요구한다.  227-228

 

신앙의 기원 - 속박된 정신은 자신의 입장을 근거에서가 아니라 습관에서 받아들인다.  228


모든 국가와 신분, 결혼, 교육, 법률과 같은 사회질서, 이 모두는 그것들에 대한 속박된정신의 믿음 속에서만 힘과 영속성을 가지게 된다.  229


속박된 정신에서의 사항의 척도 - 속박된 정신들은 네 가지 종류의 사항에 대하여 그것들이 옳다고 말한다. 첫째, 영속성이 있는 모든 사항은 옳다. 둘째, 우리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모든 사항은 옳다. 셋째, 우리에게 이득을 가져오는 모든 사항은 옳다. 넷째, 그것을 위해 우리가 희생을 치른 모든 사항은 옳다. 예를 들어 이 마지막 것은, 왜 국민의 의지를 거역하여 시작된 전쟁이 우선 희생이 치러지면 곧바로 열광적으로 게속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232


강한 정신 - 관습을 자기 편에 두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떤 근거도 필요하지 ㅇ낳는 사람과 비교하면, 자유정신은 항상 약한 쪽이다. 특히 행동에서 그렇다. 왜냐하면 자유정신은 너무나 많은 동기와 관점들을 알고 있고, 그 때문에 확신이 없으며 미숙한 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가 적어도 자신으 관철시키며 아무 성과도 없이 파멸하지 않을 정도로, 그를 비교적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 있는 것일까? 강한 정신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이것은 개별적인 경우에는 천재의 생산에 대한 문제이다. 한 개인이 관습에 맞서 완전히 개인적인 세계 인식을 지향하는 그 활력, 그 불굴의 힘, 그 인내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232-233


기적적 교육 - 사람들이 신과 신의 배려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바로 그곳에서 교육의 관심은 비로소 크게 성장할 것이다. 마치 기적의 치료에 대한 믿음이 끝났을 때 비로소 치료술이 발전할 수 ㅇ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모두 기적적인 교육을 여전히 믿고 있다. 사람들은 실제로 엄청난 무질서, 목표의 혼란, 상황의 불리한 조건에서 가장 창작력이 풍부하고 가장 강한 사람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러한 것이 당연한 일로 일어날 수 있었던가? 이제 사람들은 앞으로 이런 경우들을 좀더 상세히 관찰하고 세심하게 조사하게 될 것이다. 그때 기적은 결코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상황 아래에서 많은 살맏르이 계속 멸망해간다. 대신 구제된 각 개인들은 대체로 훨씬 더 강력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타고난 강인한 힘으로 이 역경을 타개하고 이 힘을 더욱 훈련하여 키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적은 설명될 수가 있다. 기적을 이미 믿지 않는 교육은 세 가지 사항에 대하여 유의해야 한다. 첫째, 얼마나 많은 활력이 유전되는가? 둘째, 무엇을 통하여 새로운 활력이 점화될 수 있는가? 셋째, 어떻게하면 개인이 불안에 빠져 그 고유성을 파괴당하지 ㅇ낳고 문화의 다양한 요구들에 적응할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하면, 어떻게 한 개인이 사적 문화와 공적 문화의 대위법 속에 참가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가 곡조를 지휘하면서 동시에 그 곡조를 연주할 수 있을까?  242-243


학문의 미래 - 학문은 노력하고 탐구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만족을 주고, 그 성과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극히 적은 만족밖에 주지 않는다. 그러나 학문의 모든 중요한 진리는 조금씩 평번하고 저속해지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 조금밖에 없는 만족도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그 경탄할 만한 구구단을 일단 배우게 되면 이미 더 이상 기쁨을 느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학문이 스스로를 통하여 점점 더 작은 기쁨밖에 주지 못하게 되면, 그리고 위로를 주는 형이상학, 종교, 예술을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더 많은 기쁨을 빼앗게 되면, 인류의 거의 전부가 혜택을 입고 있는 쾌감의 가장 큰 샘이 고갈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좀더 높은 문화는 인간에게 우선 학문을, 그 다음에 비학문을 느낄 수 있는 두 개의 뇌실 즉 이중 두뇌를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두뇌는 혼란 없이 병행하고 분리할 수도 있고 폐쇄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것은 건강상의 요구 사항이다. 한 영역에는 동력원이 있고 다른 영역에는 조절기가 있어서 환상, 편협, 정열로 가열되어야 하며 인식하는 학문의 도움으로 과열된 것의 나쁘고 위험한 결과들이 예방되어야 한다. 만약 좀 더 높은 문화의 이런 요구가 채워지지 않는다면, 아픙로의 인간 발전의 경과는 거의 확실히 예언될 수 있다. 쾌감을 적게 제공하게 되면 참된 것에 대한 관심은 사라져 버린다. 환상, 오류, 공상은 쾌감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거에 자신들이 주장했던 땅을 단계적으로 쟁취해간다. 그 다음의 학문의 쇠퇴이며 야만으로의 역전이다.  250-251


흥미로운 것의 증가 - 좀더 높은 교양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흥미로워진다. 그는 자신의 사고의 빈 틈이 교양으로 채워질 수 있거나 사상이 교양으로 인해서 확인될 수 있는 곳에서는 재빨리 그 문제의 교훈적인 측면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지적할 줄 안다. 거기서 권태는 점점 더 사라지고, 그와 함께 지나친 감정의 흔분도 사라진다. 그는 마침내 식물 사이를 지나다니는 자연 연구자처럼 인간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자기 자신을 단지 그의 인식 충동을 강하게 자극하느 ㄴ데 불과한 하나의 현상으로 인지한다.  253


학문을 통해서 훈련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능력이다 - 인간이 어느 일정한 시간 동안 엄밀한 학문을 철저히 해왔다는 것의 가치는 그 성과들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성과들은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로 이루어진 바다에 비교한다면 사라져 없어질 만큼 작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활력, 추진력, 인내력의 강인함을 증대시킨다. 인간은 어떤 목적을 합목적적으로 달성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한 한에서, 언젠가 학문적인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그 뒤에 하게 될 모든 일에서 볼 때 대단히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254


거대한 것에 호의적인 편견 - 사람들은 분명히 모든 거대한 것과 뚜렷한 것을 과대 평가한다. 이는, 만약 어떤 사람이 한 가지 분야에 전력투구하여 자신을 흡사 하나의 거대한 기관으로 만들 때, 이 일이 대단히 유익하다고 느끼게 되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통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확실히 인간 스스로에게는 자신의능력을 균형 있게 훈련하는 것이 더 유익하고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모든 재능은 다른 힘들에서 피와 힘을 빨아먹는 흡혈귀이며, 지나친 생산은 가장 재능 있는 사람까지도 거의 미치게 만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술 안에서도 역시 극단적인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 매우 주의를 끈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는 훨씬 낮은 문화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힘을 가지기를 원하는 모든 것에 굴복한다.  256-257


학교에서의 이성 - 학교는 엄밀한 사고, 신중한 판단, 일관성 있는 추론을 가르치는 것 외의 다른 과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학교는 이 작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것, 예를 들어 종교를 무시해야 한다. 물론 학교는 인간적인 불투명함, 습관 그리고 욕망이 아주 팽팽하게 당겨진 사고의 활을 나중에 다시 느슨하게 만들게 되리라는 것을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학교는 그 영향력이 미치는 한, 인간에게 있는 본질적인 것과 탁월한 것을 강요해야 한다. 그것은 적어도 괴테가 판단하듯이, '인간의 이성과 학문은 최상의 힘'이다. 위대한 자연 탐구자 폰 베어(von Bear)는 동양인에 비해서 모든 유럽인이 뛰어난 점을,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근거들을 말할 수 있는, 훈련된 능력에서 찾고 있다. 동양인들은 이런 능력이 전혀 없다. 유럽은 일관성 있고 비판적인 사고의 학교로 나아갔고, 동양은 여전히 진리와 허구 사이에서 구별할 줄을 모르고, 자신의 호가신이 자신의 관찰과 규칙에 따른 사고에서 유래하는 것인지, 또는 상상력에서 유래하는 것인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서의 이성은 유럽을 유럽으로 만들었다. 중세에 유럽은 다시 동양의 한 부분과 부속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즉 그리스인에게 감사해야 했던 학문적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263-264


좀더 높은 문화는 필연적으로 오해된다 - 지적 충동 외에는 단지 습관이 된 종교적 충동만을 하나 더 가지고 있는 학자들처럼, 자신의악기에 줄을 두 개만 매어놓고 있는 사람은, 더 많은 현으로 연주할 수 있는 사람드을 이해하지 못한다. 더 낮은 사람들에 의하여 항상 잘못 해석되는 것은 많은 현을 가진 더 높은 문화의 본질에 속한다. 잘못된 해석은 예를 들어 예술이 종교적인 것의 가장된 형식으로 간주되는 경우에 일어나게 된다. 오로지 종교적이기만 한 사람들은, 마치 노아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닌 음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문조차도 종교적 감정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275-276


활동적인 사람들의 주요 결점 - 활동적인 사람들에게는 흔히 더 높은 활동이 결여되어 있다. 여기서는 개인적인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관리, 상인, 학자들로서 즉 유적 존재로서는 활동적이지만 아주 특정한 한 개인, 유일무이한 인간으로서는 활동적이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태만하다. 활동적인 사람들의 불행은 그들의 활동이 거의 언제나 약간은 비이성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돈을 모으고 있는 은행가에게 그가 쉬지 않고 일하는 활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서는 안 된다. 이 활동은 비이성적인 것이다. 활동적이 ㄴ사람들은 돌이 굴러가듯 기계적인 성격의 우둔함에 따라 굴러간다. 모든 인간은 모든 시대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노예와 자유인으로 나뉘어 있다. 왜냐하면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노예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그는 자신이 원하는 그 누구, 즉 정치가, 상인, 관리, 학자이다.  277-278


활동적인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태만한가 - 나는 다양한 의견이 가능한 모든 것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 개인은 스스로 다른 모든 사물에 대해서 하나의 새로운,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위치를 차지하는 자기만의 그리고 일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활동적인 사람의 마음속에 근본적으로 들어 있는 태만함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샘에서 물을 깆는 것을 방해한다. 의견의 자유는 건강과 마찬가지다. 양쪽이 모두 개인적인것이며, 양쪽 모두에게서 인정되는 보편 타당한 개념은 세워질 수 없다. 한 개인의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것이 다른 한 개인에게는 이미 질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정신의 자유를 향한 많은 수단과 방법이 더 높이 발달한 본성은 지닌 사람들에게는 부자유로 향하는 방법들과 수단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279-280


부수 효과 - 진정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런 억압이 없어도 결점과 악덕의 경향들을 버리게 될 것이다. 분노와 불쾌함이 그를 엄습하는 일도 좀더 드물어질 것이다. 즉 그의 의지는 인식하는 것과 인식하기 위한 수단, 즉 그 안에서 그가 인식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속적인 상태 외의 아무것도 더 절실히 원하지 않게 될 것이다.  280


앞으로 나아가라 - 그러면 확실한 발걸음과 신뢰를 가지고 지혜의 길로 나아가라! 네가 어떤 존재이든 스스로 경험의 샘이 되어 너 자신으 도우라! 너의 본질에 대한 불만을 던져버리고 네 자신의 자아를 용서하라. 왜냐하면 어쨌든 너는 인식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백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사다리를 가지고 잇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종교와 예술을 어머니와 유모처럼 사랑해봤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명해질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서 바라보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그 마력속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너는 역사에 정통해야 하고, '이쪽-저쪽'의 조심스러운 저울접시 놀이에도 정통해 있어야 한다. 과거의 황야를 통해 그 고통에 찬 위대한 걸음을 걸었던 인류의 발자취를 밟아서 거꾸로 거닐어보라. 그러면 인류가 결코 다시 갈 수 없고 가서는 안 되는 곳을 너는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미래의 매듭이 또 맺어질 것인지를 전력을 다하여 미리 탐색함으로써, 네 자신의 삶은 인식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얻게 된다. 네가 체험한 모든 것, 모든 시도, 오류, 실수, 착각, 정열, 너의 사랑과 희망이 너의 목표속에서 남기없이 꽃을 피우도록 성취하는 것은 네 손에 달려 있다. 이 목표란, 스스로 문화의 고리의 필연적인 하나의 사슬이 되는 것이며, 이 필연성에서 보편적인 문화의 진행 속에 있는 필연성을 추론하는 일이다.  283-284




제6장 교제하는 인간 


호의적인 위장 - 사람들과 교제할 때에는 흔히 우리가 마치 그들의 행위의 동기를 간파하지 못한 듯 호의적으로 위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287


평등의 두 가지 방식 - 평등의 욕구는 다른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까지 끌어내리려고 하거나(헐뜯거나 비밀로 하거나 다리를 걸어서) 또는 자신으 모든 사람과 함께 끌어올리려는(인정하거나 도와주거나 남의 성공을 기뻐함으로써)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288-289


신뢰와 친밀함 - 다른 사람과 의도적으로 친밀해지려고 애쓰는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상대방의 신뢰를 얻고 있는지에 대하여 확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뢰를 확신하는 사람은 친밀함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289-290


사려 깊은 - 아무도 기분 상하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정의로운 기질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이 많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292


논쟁하는 데 필요한 것 - 자신의 사상을 얼음 위에 놓는 법을 이해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논쟁의 열기 속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292


교제와 자만심 - 사람들은 자신이 항상 공로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만심을 잊어버리게 된다. 혼자 잇다는 것은 교만을 심는 결과가 된다. 젊은 사람들은 자만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많은 것을 의미하려는 그들 자신과 똑같은 사람과 사귀고 있기 때문이다.  292-293


공격의 동기 - 사람들은 단지 누구에게 아픔을 주고 그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마 자신의 힘을 의식하기 위해 공격하기도 한다.  293


아첨 - 교제할 때 아첨을 통하여 우리의 조심성을 무디게 하려는 사람들은, 위험한 수단 즉 수면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수면제가 잠이 들게 하지 못하면, 오히려 더 깨어 있게 만들 것이다.  293


침묵 - 양편 모두에게 가장 불쾌한 논쟁의 응수 방법은 화를 내고 침묵을 지키는 일이다. 왜냐하면 공격하는 편은 흔히 침묵을 경멸의 표시로 표명하기 때문이다.  295


대화를 하면서 -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정당함이나 부당함을 인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습관의 문제다. 전자를 인정하는 것도 후자를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가 있다.  297


설명하는 사람 - 그 무엇을 설명하는 사람은 그 사실이 그의 관심을 끌기 때문에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설명하는 것을 통해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싶기 때문에 말하는 것인지를 쉽게 알아차리게 만든다. 후자의 경우에 그는 과정을 하고, 최상급도 사용하며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는 일반적으로 더 서툴게 말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실에 대하여 잘 생각하고 있지 못하지 때문이다.  300-301


모욕하는 것과 모욕당하는 것 - 모욕하고 나중에 용서를 비는 것이 모욕당하고 용서해주는 것보다 훨씬 기분 좋은 일이다. 전자를 행하는 사람은 힘을 과시하고 그 뒤에 성격이 호의적임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후자는, 만약 그가 비인간적이라고 인정받지 않으려면, 이미 용서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강박관념 때문에 상대방을 굴복시킨 데 대한 즐거움도 적어진다.  303


사교 모임 후의 양심의 꺼림직함 - 왜 우리는 일반적인 사교 모임 후에 꺼림칙함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리가 중대한 사실을 가볍게 받아들였기 때문이거나, 인물들에 대하여 논의할 때 완전히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는 말을 해야 했을 때 침묵했기 때문이며, 적당한 시기에 일어나서 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사교 모임에서 마치 우리가 거기에 속하는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304


잘못 평가된다 - 자신이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가에 언제나 귀 기울이고 있는 사람은 항상 화가 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우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이미 잘못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들ㄷ조차고 자신들의 언짢음을 때로는 시기하는 말들로 표출한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우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그들이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의 판단은 많은 아픔을 준다. 왜냐하면 그 판단들은 아주 솔직하고 거의 사실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대자인 어떤 사람이 우리가 비밀로 하고 있는 점을 우리 자신처럼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처음에 그 불쾌한 기분은 얼마나 크겠는가!  304


오해된 정직함 - 대화를 하면서 자기 자신을 인용하는 것은("나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자만하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된다. 반면 그것은 자주 이와는 정반대의 근원에서 나온다. 그것은 적어도 그 순간을 과거의 어떤 순간에 속하는 묘안들로 장식하고 꾸미지 않으려는 정직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305


자만심의 징후로서 동정심의 요구 -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을 모욕하면서 처음에는 자신을 나쁘게 여기지 않기를, 두 번째에는 자신이 극심한 발작에 지배당하고 있으므로 동정해주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의 자만심은 이렇게 멀리 나아간다.  306


소크라테스의 경험 - 인간은 한 가지 일에 대가가 되고 나면, 통상적으로 바로 그 때문에 대부분의 다른 일들에서는 완전히 무능해진다. 그러나 이미 소크라테스가 경험한 것처럼, 사람들은 정반대로 판단하고 있다. 이것이 대가들과의 교제를 즐겁지 않게 만드는 나쁜 상태다.  307-308


고귀함과 감사하는 마음 - 고귀한 사람은 감사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즐겁게 느끼고, 의무를 가질 기회들을 소심하게 피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후에 감사함을 표현하는 데에도 태연하다. 반면에 천박한 살마은 모든 의무를 지는 것에 대해 저항하거나, 후에 그 감사를 표현하는 데도 과장된 행동을 하거나 너무 고의적으로 애를 쓴다. 그런데 후자의 행동은 더 낮은 혈통 또는 억압된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들에게 보여진 호의가 그들에게는 은혜의 기적을 의미하는 것이다.  309-310


우정을 위한 재능 - 우정에 대해서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는 두 가지 유형이 드러난다. 한 가지 유형은 끊임없는 상승 속에서 어떤 발전 단계에서도 잘 어울리는 친구를 발견한다. 그가 이런 방법으로 얻은 일련의 친구들은 그들끼리 관계를 가지는일이 드물고 때로는 알력과 대립 상태에 빠진다. 이것은 나중의 발전 단계가 앞의 단계들을 지양하거나 해를 입히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런 사람은 농담으로 사다리라고 불려도 좋을 것이다. 

또 다른 유형은 전혀 다른 성격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매력을 발휘하여 하나의오나전한 동아리를 이룰 정도의 친구들을 얻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이 친구들은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들끼리 서로 친구가 된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으 ㄹ원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전혀 다른 성향과 본성들의 일체성이 어떻게든 이미 형성되어 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친구를 가지는 재능이 좋은 친구가 되는 재능보다 훨씬 가치 있다.  311


불만의 해소 - 어떤 일에서 실패한 사람은 실패의 원인을 우연으로 돌리기보다 차라리 다른 사람의 나쁜 의지로 돌리낟. 그의 화난 감정은 그가 실패한 게 사물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함으로써 가벼워진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복수를 할 수 있지만 우연에 의한 고통스러움은 억지로 삼ㅌ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주의 측근은 어떤 일에서 실패하면, 어떤 한 사람을 명목상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모든 궁신의 이익을 위하여 그를 희생시키곤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영주느 ㄴ운명의 여신 자체에게는 복수를 할수가 없으므로 그의 불쾌감이 그들 모두에게 표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312


자만심 - 우리의 모든 좋은 수확을 망치는, 자만심이라 불리는 저 잡초가 자라나는 것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마우것도 없다. 왜냐하면 자만심은 진실한 마음에, 경의의 표현에, 호의적인 친근감에, 연애에, 친절한 충고에, 실수의 고백에, 남을 위한 동정에 들어 있기 때문이며, 그 잡초가 그 사이에서 자라나면 이 모든 아름다운 것이 반감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자만하는 사람, 즉 있는 대로 또는 인정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항상 계산을 잘 한다. 물론 그는 자신의 자만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보통 두려움 또는 편리함 때문에 그가 요구하는 정도의 존경을 그에게 표시하는 한, 순간적인 성과만은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나쁜 보복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그에게 주었던 가치에서 그가 정도를 넘어서 요구한 만큼을 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자만심을 꺾는 일보다 더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는 일은 없다. 자만하는 사람은 자신의 참으로 위대한 업적도 다른 사람의 눈에 의심스럽고 사소하게 보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흙 묻은 발로 그것을 짓밟기도 한다. 자랑스러운 행동이라 할지라도 오해받지 ㅇ낳고 자만으로 보이지 않을 가장 확실한 곳에서만, 예를 들어 친구와 아내 앞에서만 허용될 것이다. 왜냐하면 살마들과의 관계에서 자만심이라는 평판을 초래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손히 거짓말하는 것을 배우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나쁘다.  314-315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ㅇ벗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고 ㄷ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인 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ㅇ벗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고 ㄷ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ㅇ낳앗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이 ㄴ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없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곧 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인 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자유정신과 결혼 - 자유정신이 여성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나는, 자유정신이 고대의 예언하는 새처럼, 현재의 진정으로 생각하는 자 그리고 진리를 말하는 자로 혼자 나는 것을 선호할 것임이 틀림없다고 믿는다.  342


두 화음의 부조화 - 여성들은 봉사하고 싶어하고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자유정신은 봉사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  345




제8장 국가에 대한 조망


문화와 사회계층 - 더 높은 문화는 사회의 서로 다른 두 계층, 노동하는 계층과 여가를 지닌 계층, 즉 참된 여가를 가질 자격을 지닌 계층이 있는 곳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또는 좀더 강하게 표현하면 강제노동 게급과 자유노동 계급이 있는 곳에서만 성립할 수있다. 좀더 높은 문화를 생산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경우에는 행복의 분배에 대한 관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경우도 여가를 가진 계층이 고통을 더 잘 견뎌낼 수 있는 계층이며 고통을 받는 계층이고 현존에 대한 그들의 즐거움은 더 적으며 그들의 과제는 훨씬 더 크다.  353


전복하려는 사람들 중에서 위험한 사람들 - 사회 전복에 대해 숙고하는 사람들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과 손자를 위해서 그 무엇을 달성하려는 사람들로 나누어보면, 후자가 훨씬 더 위험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욕이 없다는 믿음과 거리낌없는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들은 적당히 물리칠 수가 있다. 지배적인 사회는 그렇게 하기에 아직 충분할 정도로 부유하고 영리하다. 목표들이 비개인적인 것일 때, 위험은 즉시 시작된다. 비개인적인 관심을 가진 혁명가들은, 현존하는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모두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하며 따라서 그들보다 스스로가 우월하다고 느낄 수 있다.  363


대중의 위대한 사람 - 대중에게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리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게 주어져 있다. 모든 상황에서 대중에게 아주 즐거운 그 무엇을 마련해주거나 또는 먼저 머리 속에 이것저것이 아주 즐거울 것이라는 생각을 넣어주고 그 다음 그것을 제공하면 된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곧바로 제공해서는 안 되며 최대한의 노력으로 그것을 쟁취하거나 아니면 쟁취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좋다. 강력하고 게다가 정복하기 어려운 하나의 의지력이 거기에 있다는 인사을 대중이 받아야만 한다. 적어도 그러한 의지력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라도 해야 한다. ㄱ상한 의지에는 누구나 다 감탄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사람은 만약 자신이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과 자신의 이기주의에 더 이상 아무러 ㄴ한계가 없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강한 의지가 자신의 열망이 원하는 것에 귀 기울이는 대신 대중에게 아주 즐거운 그 무엇을 얻게 해준다는 것이 보이면, 사람들은 다시 한번 감탄하고 그들 자신의 행복을 원한다. 그 밖에도 그는 대중의 모든 특성을 가지고 잇다 .그래서 대중은 그의 앞에서 그만큼 수치심을 덜 느끼게 되고, 그는 그만큼 더 대중의 인기를 얻는다. 따라서 그는 난폭하고 질투하고 착취를 즐겨하며 음모를 좋아하고 아첨을 잘하고 비굴하고 교만하며 사정에 따라서는 이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다.  367-368


전복에 대한 이론에서의 망상 - 가장 자랑스럽고 훌륭한 인류의 신전이 저절로 드러나리라는 믿음 속에서 모든 질서의 전복을 열렬히 그리고 웅변적으로 촉구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공상가들이 있다. 이러한 위험한 꿈속에는 루소의 미신이 아직도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 미신은 기적적이고 근원적이지만 묻혀진 채 있는 인간 본성의 장점을 믿고, 그 묻혀진 채 있는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사회, 국가, 교육에 나타나는 문화의 여러 제도에 돌리낟.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그러한 모든 전복이 오래 전에 파묻혀버린 아득한 옛 시대의 처참함과 무절제 같은 가장 난폭한 에너지를 새로운 것으로 부활시킨다는 사실을 역사적 체험으로 잘 알고 있다. 즉 전복은 아마 지쳐버린 인류에게는 일종의 힘의 원천일 수는 있겠지만, 결코 인간 본성을 정리하는 자, 건축가, 예술가, 완성자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정리하고 정화하며 개조하는 경향이 있는 볼테르의 절도 있는 본서잉 아니라, 루소의 정열적인 어리석음과 반쯤의 거짓말들이 혁명의 낙관주의적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 정신에 대하여 "그 비열한 자를 굴복시켜라!"고 외친다. 그 정신 때문에 계몽 정신과 진보적 발전의 벙신은 오랫동안 축출되었다. 우리는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서 그 정신을 다시 불러오게 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주시하자!  368-369


학교 제도 - 큰 국가들의 학교제도는 항상 기껏해야 평범한 수준일 뿐이다. 그것은 큰 부엌에서 기껏해야 평범한 정도의 음식이 만들어지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이다.  370


행복의 시간들 - 행복한 시대가 전혀 불가능한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단순히 원하기만 할 뿐, 가지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개인은 그에게 조흔 날들이 찾아오면 틀림없이 불안과 비참함을 기원하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운명은 행복한 순간을 맏을 준비가 되어 있다. 모든 삶에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러나 행복한 시대를 맞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대는 '산의 저편'으로 그리고 조상들의 유산으로 인간의 상상속에 존속해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한 시대라는 개념은 아마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간이 사냥과 전쟁으로 심하게 긴장한 후, 휴식에 몸을 맡기고 팔다리를 뻗으며 잠의 날개가 자신의 주위에서 소리내는 것을 듣는 그런 상태에서 추측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 오랜 습관에 따라서 그가 이제 고통과 수고의 모든 시간 후에도 역시 거기에 상응하는 상승과 지속 속에서 그 행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추론이다.  371-372


종교와 정부 - 국가 또는 좀더 명백히 말해서 정부가 미성숙한 많은 사람들의 후견인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을 위해서 종교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폐지할 것인지를 숙고해보는 한, 정부는 항상 거의 확실히 종교를 유지하는 쪽으로 결정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상실, 결핍, 두려움, 불신의 시간들, 즉 정부가 개인의 마음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하여 직접적으로 그 무엇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바로 그곳에서 개별적인 심정을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편적이고 피할 수 없으며 우선은 불가항력적인 재난(식량난, 금융위기, 전쟁들)에서까지도 종교는 진정시키고 기다리며 신뢰하는 태도를 대중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국가 정부의 필연적 또는 우연적 결함들이나 왕조의 관심사들이 낳은 위험한 결과들이 통찰력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서 그를 반항적으로 만드는 모든 곳에서, 통찰력이 없는 사람들은 신의 손가락을 보게 될 것으로 믿고 위의(이 개념에는 보통 신적 통치 양식과 인간적 통치 양식이 융합되어 있다) 지시들에 인내하면서 복종하게 될 것이다. .. 대체로 국가는 사제들을 끌어들이는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사제들을 끌어들이는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사제들의 가장 개인적이고 은밀한 영혼의 교육이 필요하고, 겉으로 보아 외면적으로는 전혀 다른 관심을 대표하고 있는 시종들을 존중하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국가가 종교에서 더 이상 아무 이익도 스스로 끌어내서는 안 될 경우나, 종교적 조치를 취하느 ㄴ데 정부에게 같은 종류의 통일적인 방법이 허용되어서는 안 될 정도로 국민이 종교적 사실들에 대하여 너무 다양하게 생각하고 있을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종교를 사적인 일로 취급하고 각 개인의 양심과 습관에 넘겨야 하는 타개책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제일 먼저 종교감각이 강화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국가가 무심코 또는 고의적으로 생명의 공기를 기꺼이 허락하지 않았던 은폐되고 억압된 종교감정의 동요가 이제 터져나와 극단적으로까지 무절제해진다. 나중에는 종교가 종파들로 뒤덮이게 되고, 종교가 개인적인 문제가 된 그 순간에 용의 이빨이 뿌려졌다는 많은 사실이 입증된다. 싸움의 광경과 종교적 신조가 지닌 모든 약점에 대해 적개심에 차 폭로하는 것은 결국 더 뛰어난 자와 재능이 있는 자로 하여금 비종교성을 개인적인 무넺로 삼게 하는 타개책만을 허용할 뿐이다. 이러한 의향은 통치하는 사람들의 정신에서도 역시 만연하게 되고, 거의 자신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그들이 하는 조처들에 반종교적인 성격을 주게 된다. 이 현상이 나타나면 곧 과거에는 국가를 반쯤 또는 완전히 신성한 그 무엇을 우러러보았던, 여전히 종교적으로 감동되어 있던 사람들의 분위기는 결정적으로 반국가적인 분위기로 변한다. 그들은 정부의 조치에 대해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많이 방해하고 충돌하며 교란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반대파와 비종교적인 사람들을 그들의 항의의 열기를 통하여 국가에 대한 거의 광적인 감격으로 몰아넣는다. ...

모든 통치자들에 대한 불신, 단기간의 투쟁들이 보여주는 무익하고 소모적인 것에 대한 통찰은 사람들로 하여금 와전히 새로운 결심들, 즉 국가 개념의 폐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대립하는 것을 지양하도록 몰라갈 것이 분명하다. 사적인 단체들이 한 단계씩 국가의 업무들을 자신 속으로 끌어들인다. 결국 낡은 통치 활동에서 남아 있는 가장 끈질긴 잔여물(예를 들면 사적인 인간들이 사적인 인간들을 확실히 지켜야 하는 저 활동)까지도 언젠가는 사적인 기업가에 의해 처리될 것이다. 국각의 경시와 붕괴, 국가의 죽음 그리고 사적인 인간(모든 인간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합리성과 불합리성을 잉태하고 있는)를 달성하고 오래된 병이 재발하는 것을 모두 극복하고 나면 인류의 이야기책에는 새로운 한 장이 펼쳐지고 거기서 사람들은 온갖 종료의 기이한 역사들과 아마 몇 개의 좋은 이야기도 읽게 될 것이다.  372-376


수단의 관점에서 본 사회주의 - 사회주의는 거의 노쇠해버린 전제주의의 뒤를 이르려는 공상적인 동생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노력들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반동적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전제주의만이 가졌던 것과 같은 국가 권력의 충만함을 갈망하기 때문이며, 개인의 진정한 파멸을 추구함으로써 과거의 모든 것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사회주의에게는 자연의 부당한 사치로 나타나며 사회주의에 의해서 하나의 합목적적인 공동체의 기관으로 개조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유사성 때문에 사회주의는 항상 고대의 전형적인 사회주의자 플라톤이 시칠리아의 전제군주의 궁정에 나타났던 것처럼, 모든 권력 발전의 과도기적인 주변에서 나타난다. 사회주의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저넺주의의 후계자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 세기의 독재 권력국가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촉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유산조차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사회주의에는 아직 한 번도 그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가장 겸손한 복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국가에 대한 진부한 종교적 경건함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현존하는 국가들을 제거하는 데 힘써야 하므로 그러한 경건함을 제거하기 위하여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 때문에 사회주의는 단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극단적인 테러리즘을 통하여 여기저기에 한 번씩 존재하기를 희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은밀히 공포정치의 조짐을 보이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대중에게 머리에 못을 박듯이 '정의'라는 단어를 머리 속에 박아둔다. 그것은 그들의 오성을 오나전히 빼앗아버리고 (오성이 이미 이 얼치기 교양으로 인해 심하게 손상을 입은 뒤에), 그들이 해야 하느 ㄴ나쁜 장난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이다. 사회주의는 국가 권력의 모든 축적의 위험을 실로 난폭하고 적나라하게 가르치고, 그러한 한 국가 그 자체에 대한 불신삼을 품게 할 수가 있다. 만약 사회주의의 거친 목소리가 '가능한 한 많은 국가를' 이라는 함성으로 다가오면, 그 함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시끄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곧 그것과 반대되는 '가능한 한 적은 국가를' 이라는 함성이 더 큰 힘으로 터져나올 것이다.  378-379




제9장 혼자 있는 사람


진리의 적들 - 신념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391


너무 집착하지 않도록 - 어떤 일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그 일에 충실한 것은 드문 일이다. 그들은 단지 그 깊이를 밝혔을 뿐이다. 항상 그곳에는 매우 불쾌한 것이 보인다.  392


의도하지 않은 고결함 -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들에게 항상 베푸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고결한 행동을 하게 된다.  394


친구 - 동정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기쁨이 친구를 만든다.  395


가장 고귀한 위선자 -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고귀한 위선이다.  396


인간의 운명 -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위하고 판단하더라도, 좀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부당함을 알고 있다.  399


위대함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 어떤 강물도 자기 자신에 의해 크고 풍부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주 많은 지류들을 받아들이며 계속 흘러가는 것, 그것이 강물을 그렇게 만든느 것이다. 모든 정신의 위대함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그 많은 지류들이 뒤따라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다. 그가 처음부터 재능이 없는지 재능이 풍부한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400


너무 큰 목표들 - 공개적으로 큰 목표들을 세우고 그 후 비밀리에 자신은 그것을 하기에 너무나 약하다는 사실을 통찰하게 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그 목표들을 공개적으로 철회하기에 충분한 힘도 가지고 있지 않고 그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위선자가 되어버린다.  405


강물의 흐름 속에서 - 세차게 흐르는 물은 많은 암석과 관목숲을 휩쓸고 가며, 강한 정신은 수많으 ㄴ어리석은 사람들과 명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휩쓸고 간다.  405


정신의 육체화 - 한 사람이 많이 그리고 현명하게 사고하면 그의 얼굴뿐만 아니라 현명한 모습을 얻게 된다.  406


잘 보지 못하고 잘 듣지 못하는 것 -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은 점점 더 적게 보게 되고, 잘 듣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몇 가지를 더 듣게 된다.  406


허영심의 자기만족 - 허영심에 차 있는 사람은 탁월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탁월하다고 느끼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기만과 자기계략의 수단을 거부하지 못한다. 그에게 잊혀지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다.  406


예외적으로 허영심에 차 있는 - 보통 자기를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육체적으로 병에 걸리게 되면, 예외적으로 허영심에 차게 되며 평판과 칭찬에 대해 민감해진다. 그가 자신을 상실해가는 정도 만큼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 즉 외부에서 다시 자신을 되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406-407


유일한 인간의 권리 - 관습적인 것에서 벗어난 사람은 비범한 것에 바쳐진 제물이다. 관습적인 것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관습적인 것의 노예이다. 어떤 경우든 사람들은 파멸하게 되어 있다.  408


얼치기 지식 - 외국어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은 외국어를 훌륭하게 말하는 살마보다 외국어에 대해 더 큰 즐거움을 가지고 있다. 얼치기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만족이 있다.  408


의심을 품는 것 - 사람들은 좋아할 수 없는 인간들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으려고 한다.  409


친구가 없는 것 - 친구가 없는 것은 질투와 자만심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그가 질투할 아무런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다행스러운 상황 덕으로 친구를 가지고 있다.  410


참회 -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나면 그 죄를 잊어버린다. 그러나 대개 다른 사람은 그의 죄를 잊지 않는다.  412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 인간은 사랑하는 것과 호의를 베푸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젊어서부터 배워야 한다. 만약 교육과 우연이 우리에게 이런 감각을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을 때 우리의 영혼은 메마르고 친절한 사람들의 섬세한 감각을 이해하는 데도 적합하지 못하게 된다.  424


다른 사람과 세상에 대한 불만 - 우리가 원래는 자신에게 불만을 느끼고 있으면서, 흔히 그러듯이 다른 사람에게 불만을 터뜨린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판단들을 흐리게 만들고 기만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후에 다른 사람의 실수와 결점을 통해 이 불만에 동기를 부여하려 하고, 자기 자신을 보려 하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 가차없는 재판관이기도 한 종교적으로 엄격한 사람들은 동시에 인간성 일반에 대해 가장 많이 나쁜 욕을 해왔다. 자신에게는 죄를, 다른 사람에게는 덕을 남겨주는 성자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부처의 법도에 따라 자신의 선을 사람들 앞에서 숨기고, 자신의 악만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사람도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426


고독한 사람들 -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함께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져서 자신을 다른 사람과 전혀 비교하지 않고 조용하고 즐거운 기분으로 자기 자신과 좋은 대화를 나누며, 게다가 웃음을 지으며 독자적인 삶을 엮어 나간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하면 자기 자신을 구차하게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 관한 유익하고 정당한 의견을 남에게서 비로소 다시 배우도록 강요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그들은 배워 익힌 이 의견에서도 되풀이해서 조금 빼거나 값을 깎으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혼자 있음을 기꺼이 허락해야만 하지만 흔히 일어나는 일처럼 그 때문에 불쌍히 여기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아야만 한다.  436


방랑자 - 어느 정도 이성의 자유에 이른 사람은 지상에서는 스스로를 방랑자로 느낄 수밖에 없다. 비록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하여 여행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왜냐하면 이와 같은 목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세상에서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주시하고 그것에 대하여 눈을 크게 뜨고 보려 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개별적인 것에 너무 강하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 변화와 무상함에 대한 기쁨을 가진 방랑하는 그 무엇이 그 자신 속에 존재함이 틀림없다.  449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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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릴 때부터 정말이지 자주 참 행운아다, 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가운데서 사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저더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 쪽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 16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란 것이 알 수가 없어졌고, 저 혼자 별난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웃 사람하고 거의 대화를 못 나눕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입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7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無)야. 바람이야. 텅 비었어. 그런 생각만이 강해져서 저는 익살로 가족을 웃겼고, 또 가족보다 더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한 머슴이랑 하녀들한테까지도 필사적으로 익살 서비스를 했던 것입니다. 19


제 본성은 장난꾸러기 같은 것하고는 도대체가 정반대의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미 저는 하녀와 머슴한테서 서글픈 일을 배웠고 순결을 잃었습니다....만일 제가 진실을 말하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었다면 당당하게 그들의 범죄를 아버지 어머니한테 일러바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 어머니조차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 호소한다. 저는 그런 수단에는 조금도 기대를 걸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한테 호소해도, 어머니한테 호소해도, 순경한테 호소해도, 정부에 호소해도 결국은 처세술에 능한 사람들의 논리에 져버리는 게 고작 아닐까. 25


태어나서 처음 타향에 나온 셈입니다만 저한테는 그 타향 쪽이 제가 태어난 고향보다도 훨씬 마음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중학교 입학때) 30


“나도 이런 도깨비 그림을 그리고 싶어.”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기를 바라는 심리. 신경이 날카로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더 강하게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다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익살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다케이치가 말한 것처럼 과감하게 ‘도깨비 그림’을 그려낸 것입니다. 여기 장래 나의 동료가 있다고 저는 눈물이 날 정도로 흥분하여 “나도 그릴 거야. 도깨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라고, 왜 그랬는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다케이치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40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것을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추악한 것에 구토를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희열에 잠겼던 것입니다. 즉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원초적인 비법... 41


저는 이윽고 화방에서 어떤 미술 학도로부터 술과 담배와 창녀와 전당포와 좌익 사상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호리키 마사오). 44

술, 담배, 창녀, 그런 것들이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상당히 괜찮은 수단이라는 사실을 저도 이윽고 알게 되었습니다. 47


여자 수행은 창녀한테서 쌓는 것이 제일 엄격하고 효과도 있다고 하던데, 이미 저한테는 ‘여자를 잘 다루는 도사’ 냄새가 배어버려서... 48


뭔가 여자들로 하여금 꿈을 꾸게 만드는 분위기가 저의 어딘가에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은, 이건 여복(女福) 자랑이니 뭐니 하는 그런 바보 같은 농담이 아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49


심부름을 시킨다는 것은 결코 여자를 실망시키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여자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 또한 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57


백치 창녀들 품 안에서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던 느낌하고는 또 완전히 다르게 이 사기범의 아내하고 보낸 하룻밤은 저 한테는 행복하고 해방된 밤이었습니다...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쓰네코) 62


어차피 들킬 게 뻔한데도 솔직하게 말하기가 무서워서 반드시 거기에 뭔가 꼬리를 다는 것이 저의 서글픈 버릇의 하나인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며 멸시하는 성격과 비슷하지만 저는 무슨 득이라도 보려고 그런 꼬리를 단 적은 거의 없습니다. 81


아무하고도 교제가 없다. 아무 데도 찾아갈 곳이 없다. 82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예전보다도 다소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즈코의 말을 빌리자면 저는 조금 멋대로 굴게 되었고 쭈뼛쭈뼛 겁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93


그리하여 그 다음 날도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어제와 똑같은 관례를 따르면 된다.

즉 거칠고 큰 기쁨을 피하기만 한다면,

자연히 큰 슬픔 또한 찾아오지 않는다.

앞길을 막는 방해꾼 돌을

두꺼비는 돌아서 지나간다.

- 샤를 크로 Guy Chales Cros.

(프랑스 시인. 현실의 고뇌를 섬세한 감수성으로 노래. 저서로 <소리와 침묵>등.). 95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의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 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大洋)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라며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의 환영에 겁먹는 데서 다소 해방되어 예전만큼 이것저것 한도끝도 없이 신경 쓰는 일은 그만두고, 말하자면 필요에 따라 얼마간은 뻔뻔하게 행동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97


저는 점차 세상을 조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이라는 곳이 그렇게 무서운 곳은 아니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여태까지 저의 공포란, 봄바람에는 백일해를 일으키는 세균이 몇십만 마리, 목욕탕에는 눈을 멀게 하는 세균이 몇시만 마리, ... 등의 소위 ‘과학적 미신’에 겁먹는 것이나 다름없는 얘기였던 것입니다. 98


‘조시 이키타’(‘정사(情死, 사랑하는 남녀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함께 자살함), 살았다’ 라는 뜻). 100



<루바이야트> (페르시아의 시인 오마르 하이얌(1048~1131)의 4행시 시집으로 술과 미녀와 장미를 칭송한 감미롭고 우수에 찬 시들로 이루어져 있음.)

‘쓸데없는 기도 따위 그만두라니까

눈물 흘리게 만드는 것 따위 벗어던져 버려

자! 한잔하자고

좋은 일만 떠올리고

쓸데없이 신경 쓰기 따위는 잊어버려

불안과 공포 따위로 사람을 겁주는 놈들은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죄가 두려워

죽은 자의 복수에 대비하려고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계략을 꾸미지

불러라, 술 넘치니 내 가슴도 기쁨으로 충만하고

오늘 아침 깨어나니 황량하기만 하네

기이하다 하룻밤 사이에

달라진 이 기분이라니

뒤탈 따위 생각하는 건 그만둬

멀리서 울리는 북소리처럼

왠지 그 녀석은 불안해

방귀 뀐 것까지 일일이 죄로 친다면 못 살지

정의가 인생의 지침이라고?

그렇다면 피로 물든 전쟁터에

암살자의 칼끝에

어떤 정의가 깃들어 있다는 건가?

어디에 지도의 원리 있는가?

무슨 예지의 빛 있는가?

아름답고도 끔찍한 것은 이 세상이니

연약한 사람의 자식은 짊어질 수 없을 만큼의 짐을 짊어지고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정욕의 씨가 심어진 탓에

선이다 악이다 죄다 벌이다 하며 저주받을 뿐

어쩌지도 못하고 그저 갈팡질팡할 뿐

눌러 꺾을 힘도 의지도 점지받지 못한 탓에

어디를 어떻게 싸다니고 있었던 게야

뭐? 비판, 검토, 재인식?

흥! 헛된 꿈을, 있지도 않은 환영을

에헷, 술을 안 마셨으니 모두 헛된 생각이라고

어때, 이 한도 끝도 없는 하늘을 보렴

그 가운데 콕 떠 있는 점이라고

이 지구가 뭣 때문에 자전하는지 알게 뭐야

자전 공전 반전도 마음대로라고

모든 곳에서 지고한 힘을 느끼고

모든 나라 모든 민족 속에서

동일한 인간성을 발견하는

나는 이단자라나 봐

모두 성경을 잘못 읽고 있는 거라고

아니면 상식도 지혜도 없는 거라고

살아 있는 육신의 기쁨을 금하고 술을 못 먹게 하고

됐어 무스타파, 나 그런 것 끔찍이 싫어해’ 101-103



여성 명사, 중성 명사 등의 구별이 있는데 그렇다면 희극 명사, 비극 명사의 구별도 있어야 마땅하다. 109


반의어 맞히기였습니다. 검정의 반의어는 하양. 그러나 하양의 반의어는 빨강. 빨강의 반의어는 검정. ... 110


“자네는 죄라는 것에 전혀 흥미가 없는 것 같군.”

“그야 그렇지. 너 같은 죄인이 아니니까. 나는 난봉은 즐겨도 여자를 죽게 하거나 여자한테서 돈을 우려내거나 하지는 않거든.”

죽인 게 아니야. 우려낸 게 아니야, 라고 마음속 어딘가에서 희미한 그러나 필사적인 항변의 소리가 끓어올라 왔습니다. 그러나 아니 내가 나쁜 거야, 라고 금방 다시 고쳐 생각해 버리는 이 버릇. 저는 아무리 해도 정면으로 맞서서 당당하게 토론을 하거나 하질 못합니다. 113-114


신뢰는 죄인가요? 117


불행한 사람은 남의 불행에도 민감한 법이니까, ... 그 부인하고 얼굴을 마주 보고 서 있는 사이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부인의 큰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넘쳐 흘렀습니다. 124


다정한 미소가 고맙고 기뻐서 저도 모르게 얼굴을 돌리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 다정한 미소 하나에 저는 완전한 인생의 패배자가 되어 매장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129


제 불행은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130


정신 병원.. 광인, 폐인이라는 낙인.

인간 실격. 131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134




작품 해설


“인간이 아닌” 존재로서의 자기 인식 178


“전쟁에 졌기 때문에 추락하는 게 아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추락하는 것이고, 살아 있기 때문에 추락하는 것이다... 인간은 추락할 수 있는 데까지 추락해야 한다. 그리고 일본도 인간과 함께 떨어져야 한다. 떨어질 데까지 떨어져서 자기 자신을 찾아내고 구원해야 한다. 정치에 의한 구원 따위는 피상적인, 웃기는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사카구치 안고, <타락론>, 1946). 183


현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절망이 요구되는 격변기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은 가치관의 혼란, 세대간의 갈등 증폭,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들 간의 대립 구조 심화 등으로 어떤 해법을 모색해야 할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게 한다. 이런 때일수록 인간이기 때문에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나약함, 불신감, 절망감에 목숨을 걸고 천착하고자 한 다자이 오사무의 작가적 자세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자이의 절망이 그대로 해법이 될 수는 없다고 해도 처절한 자기반성과 책임 의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같은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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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낭만주의


결혼의 시작은 청혼이 아니고, 심지어 첫 만남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 사랑에 대한 생각이 움틀 때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맨 처음 영혼의 짝을 꿈꿀 때다. 12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심산할 만큼 감동적인 최초의 순간들에 잠식당하고 기만당해왔다. 우리는 러브스토리들에 너무 이른 결말을 허용해왔다.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시작하는지에 대해서는 과하게 많이 알고, 사랑이 어떻게 계속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모하리만치 아는 게 없는 듯하다. 27


그(라비 칸)와 커스틴은 결혼을 하고, 난관을 겪고 돈 때문에 자주 걱정하고,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28


사랑이란 우리의 약점과 불균형을 바로잡아줄 것 같은 연인의 자질들에 대한 감탄을 의미한다 사랑은 완벽을 추구한다. 30


사랑은 우리의 혼란스럽고 창피하고 당황스러운 부분을 우리의 연인이 다른 누구보다, 어쩌면 우리 자신보다 훨씬 잘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 드러난 순간 최고조에 달한다. 이들은 우리를 간파해내고, 신뢰하고 나눌 줄 아는 우리의 능력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알아보고 공감해주고 용서해준다. 당황스럽고 난처한 영혼에 대한 연인의 통찰력에 바치는 감사의 배당금이다. 35-36


성욕은 처음에는 단지 생리적 현상, 호르몬을 깨우고 신경 말단 을 자극한 결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실은 감각적이라기보다 관념적이다. 무엇보다 받아들여졌다는 생각, 외로움과 부끄러움이 끝날 거라는 기대와 관련이 있다. 41


성 해방에 관한 온갖 담론에도 불구하고, 성을 둘러싼 비밀과 어정도의 부끄러움은 사실 늘 그래왔듯이 지금도 존재한다. 우리는 여전히 누구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한다. 부끄러움과 충동 억제는 단지 우리의 조상들과 절제의 종교들이 ㅇ매하고 불필요한 이유로 붙들고 있었던 것들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상수로 존재한다. 바로 그 때문에, 낯선이가 우리의 방어를 풀고, 한때 몰래 죄를 짓는 마음으로 갈망했던 것과 거의 동일한것을 바랄 수 있게끔 허하는 (일생에 몇 번뿐일지 모를)그 진기한 순간들이 그렇게 큰 힘을 갖게 된다. 44


우리는 흥분이라 부르지만, 사실 그 말이 암시하는 바는 드디어 우리의 내밀한 자아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 연인이 나의 본모습에 드려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격려하고 인정하는 족을 선택했다는 발견의 기쁨이다. 45


역사가 시작된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람들은 논리적 이유로결혼을 했다. .. 합리적 결혼은 어떤 진실한 관점엣도 전혀 합리적이지 않았으며, 자주 편의주의적이고, 편협하고, 속물적이고, 착취적이고, 모욕적이었다. 이를 대체한 것 - 감정에 의거한 결혼 - 이 그 존재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면제받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57


결혼이 실용적인 면에서 '불필요하다'는 것은 오히려 결혼에 더욱 감정적인 설득력을 부여한다. 결혼했다는 것은 조심성, 보수적 경향, 소심함과 연관 지을 수 있지만, 결혼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더 무모하고 그래서 호소력이 더 큰 낭만적 제안이다. 58


우리는 사랑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우리가 추구하는 건 친밀함이다. 우리는 유년기에 아주 익숙했던 감정들 그대로를 성년의 관계 안에서 재현하길 바라고, 그 감정은 다만 애정과 보살핌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렸을 때 맛본 사랑이란 보다 파괴적인 다른 역학들과도 얽혀 있다. 예를 들어, 통제 불능의 어른을 도와주고 싶은 느낌, 아빠나 엄마가 다정하지 않다거나 그들의 분노가 두렵다는 느낌 또는 철없는 소원을 자유롭게 표현할 만큼 집안 분위기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느낌과도 뒤얽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인이 된 우리가 어떤 후보군을 그들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조금은 너무 옳기 때문에 - 왠지 지나치게 안정적이고 성숙하고 분별 있고 믿음직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 거부하게 되는 것도 얼마나 필연적인가. 심정적으로 이러한 올바름은 이질적이고 누군가에게만 특별히 주어진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보다 자극적인 사람을 쫓는다. 그들과 함께하는 삶이 더 조화로울 것이라는 믿음에서가 아니라, 그 삶에서 겪을 좌절의 양식이 안심하리만치 친밀할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기 때문이다. 63-64


결혼 :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버린 미래에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 무한히 친절한 도박. 65




2부 그 후로 오래오래


낭만주의는 직관의 합의를 중시하는 철학이다. 진실한 사랑에서는 말로 설명하거나 글로 쓰느라 수고할 필요가 없으며, 두 사람이 하나가 되면 (마침내) 둘 다 세계를 완전히 같은 눈으로 보는 경이로운 상호 감정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72


우리는 삶의 중요한 영역들(국제무역, 이민, 종양학 등)에서는 복잡성을 감안하고, 이견을 수용하고 참을성 있게 해결해나간다. 그러나 가정생활에서만큼은 치명적일 정도로 안이한 가정을 세우곤 하며, 이 때문에 협상이 오래 걸리는 데 대해 날카로운 반감이 생긴다. 76


작은 쟁점들은 사실 단지 필요한 관심을 받지 못한 큰 쟁점들이다.

그가 자신이 몰두하고 실망하는 바를 더 예리하게 파악하는 살마이었다면, 이불 밑에서 (실내 온도와 관련하여)이렇게 설명했을지 모른다. "당신이 한겨울에 창문을 열어놓고 싶다고 말할 때면 난 두렵고 속이 상해. 신체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인 이유에서 말이야. 앞으로 소중한 것들이 짓밟힐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든. 그럴 때면 당신에겐 내가 벗어나고 싶어 하는 가학적인 금욕주의와 너무 왕성한 용기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어떤 잠재의식의 차원에서 당신이 진짜로 원하는 건 상쾌한 공기가 아니라, 당신 특유의 매력적이지만 무뚝뚝하고 합리적이고 사람을 위축시키는 방법으로 나를 창밖으로 밀어내는 것일까 두려워."

이와 마찬가지로 커스틴도 시간을 엄수하려는 자신의 태도를 면밀히 들여다봤다면,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에 라비에게(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운전기사에게) 가슴 뭉클한 연설을 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일찍 출발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 건 결국 공포 증상이야. 그게 내가 무질서하고 놀라운 일이 가득한 세계에서 불안과 정체불명의 지독한 두려움을 지우기 위해 개발해낸 기술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권력을 갈망하는 거나 내가 시간을 지키고 싶어 하는 거나 매한가지야. 안전의 욕구와 다르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걸 고려하면, 비록 조금이지만 그 조금이라도 이해되지 않아? 온전한 정신을 지키려고 하는 나만의 미친 방법인 거야."

이렇게 각자 욕구의 맥락을 살피고 서로가 상대방의 믿음에 깔린 원인을 이해했다면 새로운 융통성이 뒤따랐을지 모른다. 78-79

협상을 위한 인내심이 없으면 비통해진다. 원인도 잊은 채 화가 나는 것이다. 잔소리를 하는 쪽은 굳이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이야기를 끝내려고만 하고, 잔소리를 듣는 쪽은 자신의 반발이 합리적 반론이나 그도 아니면 가엾고 용서받을 만한 성격상의 결함에서 나온 것임을 더는 설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양 당사자는 그들에게 똑가팅 지루하기만 한 이 문제가 그냥 지나가기만을 바란다. 79


우리는 다른 커플들에 비해 우리 커플이 훨씬 나쁜 일들을 겪는다고 상상한다. 불행할 뿐 아니라 우리의 불행이 대단히 드물고 기형적인 것이라 착각한다. 더 나아가 종국에는 우리의 싸움들이 기본적으로 전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결혼 생활의 증거라기보다는, 우리가 뭔가 드물고 근본적인 실수를 범한 징표라고 믿게 된다. 81-82


이 둘은 두 개의 믿을 만한 치유책 덕에 지속적인 비통함에서 벗어난다. 첫째는 나쁜 기억력이다. 목요일 오후 4시쯤 되니 전날 저녁에 택시에서 무엇 때문에 격노했는지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별 이유 없이 일찍 퇴근해야겠느냐는 그의 말에 커스틴이 경솔하고 달갑지 않게 반응한 것과 그녀의 설핏 경멸하는 듯한 말투와 관련이 있다는 건 알지만 불쾌함의 정확한 윤곽은 이미 초점이 흐려졌다. 이는 아침 6시에 커튼을 뚫고 들어온 햇살, 라디오에서 재잘거리는 스키 리조트에 관한 정보, 가득 찬 이메일 수신함, 점심을 먹으며 주고받은 농담, 회의 준비와 웹사이트 디자인에 관한 두 시간짜리 미팅 덕분이다. 이것들이 합쳐져 성숙하고 솔직한 대화를 한 것 못지않게 둘 사이를 거의 바로잡는 효과를 낸다.

두번째 치유책은 보다 추상적이다.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를 생각하면 너무 오랫동안 분노를 안고 가기가 어렵다. 이케아 사거 ㄴ이후 몇 시간이 흐른 오후 나절에 라비와 커스틴은 에든버러 남동쪽에 있는 레머뮤어 구릉으로 오래전에 계획한 산책을 나선다. 출발할 때는 둘 다 말이 없고 시큰둥하지만, 자연이 동정심이 아니라 숭고한 무관심을 통해 그들을 서로에 대한 적개심에서 서서히 해방시킨다. 82-83


토라짐의 핵심에는 강렬한 분노와 분노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려는 똑같이 강렬한 욕구가 혼재해 있다. 토라진 사람은 상대방의 이해를 강하게 원하면서도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설명을 해야 할 필요 자체가 모욕의 핵심이다. 만일 파트너가 설명을 요구하면, 그는 설명을 들을 자격이 없다. 덧붙이자면, 토라짐의 대상자는 일종의 특권을 가진다. 다시 말해, 토라진 사람은 우리가 그들이 입 밖에 내지 않은 상처를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를 존중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토라짐은 사랑의 기묘한 선물 중 하나다. 86-87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토라진 사람의 분노를 감당해야 하는 특별한 표적이 되었을 때에도 온화하게 웃는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진짜 메시지는 지극히 퇴행적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느 ㄴ아직 젖을 먹는 아기이니, 지금 당장 나의 부모가 되어줘야 해. 당신은 무엇이 나를 아프게 하는지를 정확히 헤아려주어야 해. 내가 아기였을 때, 사랑에 대한 관념들이 처음 형성되었을 때, 사람들이 그래주었듯이 말이야."

토라진 연인게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호의는 그들이 불만을 아기의 떼쓰기로 봐주는 것이다. 상대방을 어리게 취급하면 거만하게 윗사람 행세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만연한 탓에 우리는 성숙한 자아 너머의 것을 바라보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내면의 아이를 만나는 - 그리고 용서해주는 - 것이 가끔은 가장 큰 특권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는다. 89-90


사랑이 있을 때에만 섹스가 바람직할 수 있다는 견해는 기독교가 서양 세계에 남긴 가르침이다. 이 종교는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몸을, 눈길을 아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낯선 사람을 성적으로 생각하면 사랑의 참된 정신을 저버리고 신과 자신의 인간성을 배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감동적이기도 하고 무시무시하기도 한 그런 가르침들은 한때 그 토대를 이웠던 믿음이 쇠한 지금에도 완전히 증발하지 ㅇ낳았다. 확고했던 유신론적 근거는 사라졌지만 낭만주의 이데올로기가 그 가르침들을 흡수해, 사랑에는 정절이 내포되어 있다는 개념에 여전히 고귀한 지위를 부여했다. 세속의 세계 역시 일부일처제를 헌신적인 감정과 고결함을 표하는 필요하도고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선언해왔다. 우리 시대는 지나간 종교의 중요한 경향, 즉 참된 사랑에는 완전한 정절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고스란히 유지해온 것이다. 93-94


우리 시대의 분위기는 자유분방하지만, '기이함'과 '정상'의 차이가 사라졌다고 가정한다면 이는 순진한 생각이다. 그 차이는 언제너처럼 확고하며, 사랑과 섹스의 규범적 한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즉시 을러서 경계선 안으로 밀어 넣는다. 요즘은 짧은 반바지를 입거나 배꼼을 노출하거나 동성과 결혼하거나 재미로 포르노를 좀 보는 것도 '정상'으로 간주하지만, 진실한 사랑은 단혼제에 있고 욕망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믿는것 역시 여전히 확고부동한 '정상'이다. 이 근본 원칙에 반기를 들려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가장 혹독하고 수치스러운 낙인이찍힐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변태라고 말이다. 99


의사 전달을 잘하는 기본 요건은 자신의 성격 중 더 문제가 되거나 더 특이한 면이 있더라도 그 때문에 당황하지 않는 능력이다. 의사 전달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분노나 성적 취향 또는 일반적이지 ㅇ낳고 거북할 수 있는 자기 의견에 대해 자신감을 잃거나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고 숙고할 줄 안다. 그들이 명료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대체로 원만한 사람이라는 대단히 가치있는 인식을 길러낸 덕분이다. 그들은 적정한 수준의 인내심과 상상력을 발휘하며 자신을 표현할 수단만 갖추고 있다면 다른 살마의 호의를 받을 만하고 또한 받을 수 있다고 능히 믿을 만큼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의사 전달을 잘하는 이런 사람은 어릴 적, 모든 면에서 적절하고 완벽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도 아이를 사랑할 줄 아는 보호자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축복을 누렸음이 ㅣ분명하다. 그런 부모는 자식이 - 적어도 한동안은 - 가끔 이상하거나, 난폭하거나, 화를 잘 내거나, 심술궂거나, 기이하거나, 슬퍼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수용할 줄 알고 그래도 가족의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 자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줄 안다. 그렇게 하여 자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도 솔직히 고백하고 대화할 수 있는 용기의 원천을 심어준다. 100-101


잘 들어주는 사람은 잘 말하는 사람 못지않게 드물거나 중요하다.잘 들어주는 사람 역시 특별한 자신감이 그의 비결이다. 이는 어떤 확고한 가정에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는 정보로 인해 경로를 이탈하거나 그 무게에 무너져 내리지 않을 수 있는 수용력을 말한다. 잘 들어주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라면 마음속에 얼마간 담아둘 혼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미 경험을 통해 모든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103


우리는 의식에서 거의 지워져버린 위기들이 오래전에 만들어놓은 대본에 따라 행동할 때가 너무나 많다. 지금은 기억에서 사라져 폐물이 된 논리에 따르고, 우리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밝히지 못할 ㅢ미를 좇는다. 우리는 우리가 진정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있고, 정확히 어떤 사람을 상대하고 있으며, 앞에 있는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른다. 곁에 두기에 약간 고달픈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112-113


마음이 전이에 말려들면 우리는 사람이나 상황을 믿어주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불안에 빠져 즉시 과거가 지정해놓은 최악의 결론으로 나아간다. 애석하게도 우리가 과거의 혼란에 의거하여 지금 벌어지는 일을 해석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은 초라하고 꽤 굴욕적인 일이 느껴진다. 우리의 파트너와 실망스러운 부모, 남편이 잠시 지체하는 것과 아버지의 영원한 유기, 더러운 빨랫감 몇 개와 내전의 차이를 설마 모르겠는가 하는 것이다.

감정을 그 출발점으로 송환하는 일은 사랑의 가장 섬세하고도 필요한 과제다. 전이의 위험성을 인정하면 짜즈오가 비난보다 공감과 이해에 우선순위를 두게 된다. 두 사람은 갑자기 폭발하는 불안이아 적대감이 항상 그들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그러니 그런 폭발에 매번 분노나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대응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격분과 비난이 동정심에게 자리를 내준다. 114-115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익혀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다. 116


사랑의 모든 가정들 중 아주 얄팍하리만치 불합리하고 미숙하고 개탄스럽지만 그럼에도 가장 흔히 볼 수있는 것은 우리가 사랑을 서약한 사람이 우리의 감정적 실존의 중심일 뿐 아니라 - 그 로가로서, 또한 대단히 이상하고 객관적으로 비상식적이고 아주 부당한 방식으로 -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다 그에게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듯 사랑에는 기이하고 병적인 특권이 있다. 122


우리가 불만 목록을 노출할 수 있는 사람, 인생의 불의와 결함에 대해 누적된 모든 분노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그 사람 탓을 하는 건 당연히 부조리 중에서도 부조리다. 하지만 이렇게만 본다면 사랑의 작동 법칙을 잘못 이해한 셈이다. 우리는 정말로 책임이 있는 권력자에게 소리를 내지를 수가 없기에 우리가 비난을 해도 가장 너그럽게 보아주리라 확신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 주변에 있는 가장 다정하고, 가장 동정 어리고, 가장 충성스러운 사람, 즉 우리를 해칠 가능성이 가장 적으면서도 우리가 마구 소리를 치는 동안에도 우리 곁에 머물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에게 불만을 쏟아놓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퍼붓는 비난들은 딱히 이치에 닿지 않는다. 세상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그런 부당한 말들을 발설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난폭한 비난은 친밀함과 신뢰의 독특한 증거이자 사랑 그 자체의 한 증상이고, 제 나름대로 헌신을 표현하는 비꾸러진 징표다. 분별 있고 예의 바른 말은 모르는 사람에게 할 수 있지만, 밑도 끝도 없이 무분별하고 터무니없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믿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뿐이다. 123-124


혹독한 수업은 학생들에게 그들의 교사가 단지 미쳤거나 성질이 나쁜 것이고 그래서 그 자신들은 논리상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는 안일한 생각에 기댈 여지를 준다. 터무니없이 극단적인 판정을 들으면, 우리는 파트너가 악랄하지만 한편으로는 약간이나마 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깨끗이 지워버리고 위안을 얻는다.

감정에 치우쳐 우리는 배우자의 부정적인 평가와-조금이라도 비교할 만한 요구가 지워져 있지 않은-친구 및 가족들의 격려하는 어조를 대비시킨다. 사랑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사랑과 가르침의 관계를 바라보는 유용하고도 시류와 다른 관점을 제안한다. 그들이 보기에 사랑은 무엇보다 먼저 타인의 훌륭한 점을 찬탄하는 감정, 고결한 특질과 대면했을 때 느껴지는 흥분이었다.

그 결과 사랑의 깊어짐은 항상 보다 고결해지는 방법-화를 잘 참거나 관대해지는 법, 탐구심을 키우거나 더 용감해지는 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욕구를 수반하게 됐다. 성실한 연인이라면 상대방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런 수용은 관계의 목적을 나태하고 비겁하게 통째로 배신하는 행위였다. 그런고로 우리 자신을 향상하고 다른 이들에게 가르쳐줄 것들은 항상 존재할 터였다.

이 고대 그리스의 렌즈를 통해 본다면 연인이 상대방의 성격으로 인해 불행하서나 불편한 점을 지적해도 그가 사랑의 정신을 포기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파트너의 자아를 더 발전시키려는, 사랑의 본질에 아주 충실한 일을 하려 했다고 축하받아야 한다. 현재보다 더 진보한 세계, 그리스식 사랑의 이상에 조금 더 깨어 있는 세계에서는 우리가 어떤 것을 알려주고자 할 때에 어색함과 두려움과 공격성이 약간 줄어들고 피드백을 받을 때에도 다소 덜 호전적이고 덜 예민해질 것이다. 관계 안에서 교육이란 개념이 불필요하게 섬뜩하고 부정적이었던 함의를 벗게 될 것이다. 신뢰하고 협력하는 분위기에서는 두 프로젝트-가르치기와 배우기, 상대방의 결점을 환기하고 상대방의 비판을 허용하기-가 결국 사랑의 참된 목적에 충실하다는 점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137-138




3부 아이들


아이들은 결국 나이가 몇 배나 많은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한 선생이 되어-그들의 철저한 의존서으 자기중심주의, 연약함을 통해-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랑에 대한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한다. 이 사랑은 상호 호혜를 강렬히 원하지도 성급하게 후회하지도 않고, 타인을 위해 자아를 초월하는 것만을 진정한 목표로 한다.  146


아이들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은 봉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사랑이란 말은 갈수록 부정적 의미들을 내포하게 되었다. 개인주의와 자기충족에 빠진 문화는 만족과 타인의 부름에 응하는 행동을 쉽게 등치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타인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매혹하고 위로해주는 능력에 대한 보답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데에 익숙하다. 그러나 아기는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없다. 더 자란 아이들이 가끔 큰 불안을 느끼며 판단을 내리듯이, 아이들은 아무 '요점'이 없고, 이것이 아이들의 요점이다. 아이들은 그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도와줄 위치에 있기 때문에-어떤 보받도 기대하지 않고 베푸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우리는 장점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약점에 대한 동정, 즉 인류 모든 구성원에게 공통으로 존재하고 한때 나 자신의 것이었고 결국 나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오는 그 취약성을 동정하는 사랑으로 인도되낟. 자율과 독립성을 늘 지나치게 강조하고 싶어 하는 와중에 이 무기력한 피조물은 아무도 결국은 '자력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인생은-문자 그대로-사랑하는 능력에 의지한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남의 종이 되는 것이 굴욕이 아니라 정반대라는 것을 배운다. 나 자신의 왜곡되고 만족을 모르는 본성에 끊임없이 응해야 하는 피곤한 의무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 자신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목표를 부여받았다는 위안과 특권을 알게 된다.  147-148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는 어려운 관례다. 본질상 부모의 사랑은 그 사랑을 베풀기 위해 쏟은 노력을 감추는 작용을 한다. 부모의 사랑은 받는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의 복잡한 사정과 슬픔을 감추고, 부모가 사랑의 이름으로 다른 이익, 친구, 관심사를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지를 드러내지 않느다. 부모의 사랑은 무한한 너그러움으로 이 작은 존재를 한동안 우주의 중심에 놓는다. 부모의 사랑이 그토록 강한 것은 아이가 괴롭고 두려운 심정으로 어른 세계의 진짜 척도와 불편한 고독을 이해해야 할 그날을 위해서다.  155


사랑을 위한 노력이 그들을 녹초로 만든다.  156


라비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이렇게 까탈을 부린 적이 없었지만, 동시에 아버지에게서 진심으로 사랑을 받는다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166


좋은 부모의 역할에는 중요하면서도 무척 까다로운 요건이 딸려 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소식을 끊임없이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부모는 필히 아이의 장기적 이익을 폭넓게 지켜줘야 하는데, 아이들로서는 부모의 생각이 유익하다고 흔쾌히 동의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것이 있다는 것도 예상하지 못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는 양치질, 숙제, 방 정돈, 취침 시간, 마음 넓게 쓰기, 컴퓨터 사용 제한에 대해 말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는 재미가 정말 시작되려는데 삶의 달갑지 않은 면들을 들이미는 싫고 짜증 나고 따분한 배역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렇듯 사랑을 드러나지 않게 실행한 결과로, 좋은 부모는 그 실행이 잘된 경우에 강렬한 분노와 적개심의 표적이 되고 만다.  167-168


성적 흥분은 결국 옷을 벗은 상태와 거의 무관한 듯하다. 그 동력은 열렬히 열망하고, 전에는 금지되었으나 이제는 기적적으로 접근 가능해진 상대를 소유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가능성에서 나온다. 성적 흥분은 고립과 단절이 만연한 세계에서 그 손목, 허벅지, 귓불과 목덜미가 마침내 우리 눈앞에 당도했다는 데 대한 거의 불신에 가까운 경탄의 표현이다. 다시 한 번 기쁨에 차 만지고, 채우고, 드러내고, 벗기며 우리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우리의 연인은 얼마나 멀고 독립적으로 느껴졌는지 계속 몇 시간마다 확인하고 싶다는 특수한 개념이다. 성적 욕구는 확고히 친밀해지고자 하는 염원에서 나오며, 그렇기에 사전의 거리감을 전제로 하고, 그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이 매우 독특한 기쁨과 안도감을 선사한다.  184


자위의 판타지에서 무작위로 만난 낯선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낳은 순위의 모티프가 된다는 사실은 낭만주의의 이데올로기에서는 논리를 획득 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친밀함이 만든 무거운 짐들을 바로잡고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랑과 섹스의 냉정한 분리, 바로 그것이다. 모르는 사람을 이용하면 분노, 감정적 취약성, 상대방의 욕구를 신경 써야 할 의무를 우회할 수 있다. 우리는 비난이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원하는 선까지 특이하고 이기적으로 굴 수 있다. 모든 감정이 완벽하게 차단되어, 이해되기를 바라는 일말의 소망도 없고 따라서 잘못 이해될 위험도 없으며 그 결과 괴로워하거나 실망하게 될 위험도 전혀 없다. 마침내 삶의 소모적이고 거치적거리는 나머지 부분을 침대로 가져갈 필요 없이 욕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87-188


어떤 관점에서는, 공상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삶을 추구하는 대신에 판타지를 지어내야 하는 신세가 처량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판타지는 대개 다수의 모순된 소망으로부터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결과물이다. 판타지가 존재하는 덕분에 하나의 현실을 파괴하지 않고 다른 현실에 거주할 수 있다. 판타지는 완전히 무책임하고 무섭도록 기이한 우리의 충동으로부터 우리가 아끼는 사람들을 지켜준다. 판타지는 나름대로 인류의 성취이자 문명의 결실이며, 친절한 행동이다.  189


현대사회는 부부가 모든 면에서 평등하기를 기대한다지만, 실제로 기대하는 것은 고통의 평등이다. 그러나 괴로움의 복용량을 정확히 똑같게 계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불행은 주관적인 경험으로, 각 당사자가 실제로는 자신의 삶이 더 저주받았으며 파트너는 이를 인정하거나 속죄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언제라도 진지한 경쟁에 돌입할 수 있다. 자신이 더 힘들게 살고 있다는 자기 위안식의 결론을 피하려면 초인적인 지혜가 필요하다.  194


오늘날 부모들이 겪는 어려움은 부분적으로 위신을 분배하는 방식 탓에 발생한다. 부부는 매시간 실용적인 요구에 시달릴 뿐 아니라, 그런 일이 굴욕적이고 시시하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단지 요구를 견뎌냈다는 이유마능로 누군가를 동정하거나 칭찬해주는걸 꺼린다. '위신'이란 말은 등하교시키기와 세탁물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들린다. 그런 특성은 수준이 높은 정치나 과학 연구, 영화나 패션 같은 다른 세상에 속해 있다고 가르친 해로운 훈련 때문이다. 그러나 거품을 제거하고 핵심을 보면 위신은 단지 인생에서 가장 고결하고 중요한 무언가를 가리킨다.

우리는 인류의 영광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회사를 설립하고, 경이로울 정도로 얇은 반도체를 생산하는 데에 있을 뿐 아니라, (설령 수십억 인구 사이에 널리 분포된 능력이라 하더라도) 생후 몇 달 된 아기에게 요구르트를 떠먹이고, 사라진 양말을 찾고, 변기를 청소하고, 떼쓰는 아이를 달래고, 식탁에 굳어 있는 기름때를 닦아내는 능력에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듯하다.  195


라비와 커스틴이 고통받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접한 예술이 그런 싸움을 공감하며 반영하는 걸 좀처럼 보지 못하는 데에도 있다. 예술은 오히려 이들이 마주하 ㄴ문제를 얕잡아 보고 유치하게 놀리는 경향이 있다. 예술은 참을성 없이 짜증을 부리며 몸을 꿈틀거리는 아이에게 외국어를 가르치려고 애쓰는 그들의 용기에 감탄하지 않는다. 코트의 단추를 늘 잘 채우고 모자를 잃어버리지 않을 때, 집 안을 정갈하게 유지할 때, 그리고 매일매일 가장 작지만 까다로운 이 사업을 협력해 이끌 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결코 바깥에서 저명해지거나 큰돈을 벌지 못할 테고, 무명 인사로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월계관을 써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그럼에도 문명의 질서정연함과 연속성은 그들이 보이지 않는곳에서 말없이 수행하는 노동에 작지만 필수적으로 의존한다.  196




4부 외도


중년의 유혹자가 솔직한 것은 자신감이나 오만함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처량한 인식에서 나오는 일종의 조급한 절망감 때문이다.  204


배우자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에 불륜에 뛰어드는 경우는 드물다. 파트너를 배신하는 수고를 감내하려면 대개 파트너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207


다른 종류의 행동들은 거의 다 쉽게 묵인하는 사람들에게도 간통은 하늘이 노할 위반이자, 사랑의 가장 신성한 전제들을 깨뜨리는 섬뜩한 행위다. 

첫 번째 전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든 함께하는 삶이 소중하다고 주장하면서-길을 벗어나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런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면 애초부터 사랑은 없었다.  212-213


두 번째 전제 : 간통은 우리가 익히 아는 불성실과는 종류가 다르다. 세상은 벌거벗음을 수반한 계율 위반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이고, 지각변동에 버금가는 엄청난 종류의 배신이라고 말한다. 바람피우는 짓은 그냥 나쁜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한다고 공언하는 상대에게 할 수 있는 극악 행위다.  214


세 번째 전제 : 일부일처제에 충실하다는 것은 상대방을 깊이 배려하고 그의 번영과 안녕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이다. 이를 고수하는 것은 상대방의 최선의 이익을 진심으로 염려한다는 확실한 징표다.  215


네 번째 전제 : 일부일처는 자연스러운 사랑의 모습이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항상 한 사람과 사랑하기를 원한다. 일부일처는 정신 건강의 기준점이다.  216


다른 사람에게 가끔 욕망을 느끼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있을까? ... 우리 모두의 삶이 얼마나 짧은지, 그래서 어떤 절박한 호기심으로 단 한 명의 동시대인보다 더 많은 독특한 관능적 개성을 탐험해야 할지 깨닫지 못하고 유혹을 느끼는 데 실패한 것, 사실은 '잘못된 것' 아닐까? ... 간통의 발생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은 곧 인생의 풍요로움을 부정하는 셈 아닌가? 반대로, 어떤 특정 상황엣 부정한 행위에 정말로 일말의 호기심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신뢰하는 게 합리적인 것일까?  217


성숙해지면 소유욕을 초월하게 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질투는 아기들에게나 어울린다. 성숙한 사람은 어떠 ㄴ사람도 다른 사람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걸 안다. 이는 어렸을 때부터 현명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온 교훈이다. 잭이 네 소방차를 갖고 놀게 해주렴, 그 아이가 한 번 갖고 논다고 해서 남의 것이 되는 건 아니다, 화가 난다고 바닥을 뒹굴면서 네 작은 주먹으로 카펫을 내리치지 마라, 네 여동생이 아빠에게 소중한 사람이듯 너도 아빠에게 소중한 사람이다, 사랑은 케이크가 아니다, 한 사람에게 사랑을 준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줄 사랑이 줄어들진 않는다. 사랑은 집안에 아기가 새로 태어날 때마다 계속 커진다. 

나중에 이 주장은 섹스를 둘러싸고 훨씬 더 합당해진다. 파트너가 한 시간 동안 당신을 떠나 신체의 특정 부위를 낯선 사람의 제한된 부위에 비볐다고 왜 파트너를 나쁘게 생각하겠는가? 어쨌든 그들이 모르는 사람과 체스를 두거나 명상 그룹에서 촛불을 켜놓고 친밀한 얘기를 주고받는다고 분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229-230


질투는 그 우둔함 때문에 우리가 설교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 군침 도는 표적이 된다. 하지만 말을 아끼는 게 좋다. 대단히 볼썽사납고 어리석긴 해도 순간의 질투는 우리를 빗겨 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술을 만지거나 손이라도 스쳤다는 말을 듣는 순간 누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우리가 과거에 어쩌다 바람을 피웠을 때 가졌을 매우 진지하고 충실한 생각과는 상반되고 논리에 어긋난다. 하지만 지금은 이성의 명령이 들리지 않는다. 현명하다는 것은 도저히 현명해질 수 없는 순간을 아는 것이다.  230-231


상대방의 충실함이 무의식을 가득 채워주는 한 외도라는 문제에도 태연자약 할 수 있다. 한 번도 배신당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신의를 계속 유지하기에 좋으 전제조건이 못 된다. 보다 진실하고 충실한 사람이 되려면 적절한 예방 접종을 겪어봐야 한다. 한동안 극한의 공황과 모욕을 겪고 붕괴 일보 직전까지 가봐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배우자를 배신하지 말라는 명령이 틀에 박힌 말이 아니라 영구히 뚜렷하게 빛을 발하는 도덕적 의무로 변모한다.  232


사랑의 열병은 망상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목을 가누는 방식은 실제로 그 사람이 자신 있고, 심술궂고, 예민하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다. 누군가는 그의 눈이 암시하는 유머와 지성, 그의 입이 넌지시 말하는 상냥함을 실제로 지니고 있을 수 있다. 열병의 오류는 좀 더 교묘한 문제다. 우리가 다양한 단점을 꿰뚫고 있는 현재의 파트너뿐 아니라 사람은 누구에게나 우리가 더 많은 시간으 함게 보낼 때 드러날 상당히 심각한 결점, 황홀했던 처음의 감정을 비웃음거리로 만들 만한 결점도 있다는 인간 본성의 중요한 진리를 잊게 하는 것이다. 우리 눈에 정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우리가 아직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뿐이다. 사랑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다.  236

결혼 :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대단히 기이하고 궁극적으로 불친절한 행위.  237


아무것도 희생되지 않는 깔끔한 해결 방안은 어디에도 없다. 모험과 안전은 양립할 수 없다는 걸 그는 알았다. 사랑이 넘치는 결혼 생활과 아이들은 자연스러운 성욕을 죽이고, 외도는 결혼 생활을 죽인다. 두 패러다임이 아무리 매력적이라 해도 자유사상가인 동시에 결혼한 낭만주의자가 될 순 없다.  238


우울감은 치료를 요하는 병이 아니다. 우울은 처음부터 이 각본에는 실망이 적혀 있었다는 확신과 마주할 때 밀려오는 일종의 지적 슬픔이다.  239


어떤 관계도 온 마음을 다해 친밀하고자 하는 헌신 없이는 첫걸음을 떼지 못한다. 그러나 사랑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파트너가 여전히 수많은 생각들을 혼자 간직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정직성에 너무 감명하는 탓에 정중함의 미덕들을 망각한다. 아끼는 사람이 우리의 본성에서 상처를 줄 수 있는 면과 항상 전명적으로 마주치지는 않게 하려는 욕구 말이다. 

어느 정도 자제하고 자기 편집에 조금 열성을 보이는 억제 능력은 솔직한 고백 능력 못지않게 당연히 사랑에 포함된다. 스스로 비밀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정직함'을 내세워 상대방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상처가 되는 정보까지 털어놓는 사람은 절대 사랑의 편이 아니다. 또한 파트너가(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한 일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간밤에 어디에 있었는지 등등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는 의심이 들어도(우리의 관계가 훌륭하다면 주기적으로 그럴것이다), 날카롭고 무자비한 심문자처럼 굴지 않는 편이 좋다. 그저 눈치채지못한 척하는 편이 더 친절하고 더 현명하고 사랑의 참된 정신에 더 가까울 수 있다.  241-242


역사의 거의 전 기간 동안 사람들이 결혼 생활을 유지한 것은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고, 약간의 재산을 지키고, 가문의 통합이 유지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뒤 아주 다른 기준이 서서히 세상을 장악했다. 그에 따르면 부부는 둘 사이에 진실한 열정, 욕망, 충족감 같은 몇몇 감정들이 통용되는 한에서만 함께 있어야 했다. 이 새로운 낭만주의의규칙에서 배우자들은 부부의 일상이 지루해졌거나, 아이들이 그들의 신경을 건드리거나, 섹스가 더 이상 마음을 끌지 못하거나, 어느 쪽이든 최근 들어 약간 불행하다고 느껴왔다면 당연히 각자의 길을 갈 수 있었다.  243




5부 낭만주의를 넘어서


1950년대에 영국의 존 볼비와 그의 동료들이 전개한 애착 이론은 우리가 맨 처음 경험하는 부모의 보살핌에서부터 관계의 긴장과 갈등을 추적한다. 조사 결과 서유럽과 북미 인구 3분의 1이 생애 초기에 부모에 대한 실망을 경험하고(C. B. 바실리, 2013), 그 결과- 견딜 수 없는 불안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원초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신뢰와 친밀함의 능력은 결여되어 있다. 위대한 저직인 <분리 불안>(1959)에서 볼비는 최초의 가정환경에서 실망을 겪은 사람은 성인이 되어 관계의 어려움이나 모호함에 직면 할 때 두 종류의 반응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볼비가 '불안정 애착'이라 명명한, 두려워하고 집착하고 지배하는 행동 양식이고, 둘째는 '회피 애착'이라 명명한, 방어 및 후퇴 작전이다. 불안정한 사람은 파트너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질투심을 분출하고, 그들의 관계가 '더 가깝지' 않은 것을 슬퍼하며 일생의 많은 시간을 보내기 쉽다. 한편 회피적인 사람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식의 말을 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고, 때때로 성적 친밀함에 대한 요구를 힘겹게 느낄 수 있다. - 조애나 페어베언 박사, <부부 관계에서의 안정 애착과 불안정 애착 : 대상관계 이론의 관점>  251-252


불안정 애착의 징후는 침묵, 지연, 막연함 같은 애매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은 즉시 모욕이나 악의적인 공격과 같이 부정적으로 해석된다. 불안정 애착을 가진 사람들은 사소한 모욕, 경솔한 말, 부주의를 파탄의 전조라도 되는 양 불길하고 강력한 위협으로 느낀다. 좀 더 객관적인 설명은 와 닿지 않는다. 이들은 내심 그들이 삶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경험한다. 그들은 보통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유약함을 설명하지 못하고 그래서 심술궂다거나 성마르다거나 잔인하다는 꼬리표가 붙는다. 253-254


회피 애착 유형은 정서적 피룡가 충족되지 않으면 갈등을 피하고 상대방에게 노출을 줄이려는 강한 욕구를 느낀다는 특징이 있다. 회피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열심히 공격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설득은 전혀 먹히지 않는다고 쉽게 가정한다. 자리를 피해 도개교를 올리고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유감스럽게도 회피적인 사람은 두려움에 찬 방어적인 행동 양식을 파트너에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 결과 그들의 소원하고 무덤덤한 행동들 뒤에 숨어 있는 이유들은 안개 속에 싸인 채 진실과는 정반대로 무정하고 무심하다는 오해를 쉽게 불러일으킨다. 회피적인 사람은 사랑을 주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느끼게 되었을 뿐, 마음속으로는 상대방을 깊이 염려한다. 257-258


하잔과 셰이버가 최초로 고안한 이 설문 조사(1987)는 애착 유형을 평가하는 데에 널리 이용된다. 자신이 어떤 유형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응답자는 아래의 세 진술 중 자신과 가장 가까운 것을 고르게 된다

'나는 정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원하지만, 상대방이 종종 뚜렷한 이유도없이 실망스럽거나 이기적으로 나온다. 나는 스스로 타인과 너무 가까워지는 걸 용인하면 상처를 입게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나는 혼자 지내도 괜찮다.'(회피 애착)

'나는 타인과 정서적으로 친밀해지기를 원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내가 바라는 만큼 가까워지는 것을 꺼려 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소중히 생각하는 만큼 그들도 나를 소중히 여길까 하고 걱정한다. 그 때문에 아주 속이 상하고 화가 날 때가 있다.'(불안정 애착)

'나는 비교적 쉽게 다른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친밀해진다. 타인에게 의지하고 그들이 나에게 의지하는 데 편안함을 느낀다. 나는 혼자 있거나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안정 애착) 260


한 사람이 파멸에 이르기까지 많은 걸 요하지도 않는다. 그저 몇 번의 실수로 갑자기 그렇게 된다. 상황이 몇 번만 꼬이거나 외부 압박을 어느 정도 받으면 그 역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그가 자신을 제정신이라 여길 수 있게 하는 화학적 행운이란 부서지기 쉬우며, 인생이 제대로 시험해보기로 한다면 그 자신이 비극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다. 267-268


옛날에는 사람이 재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떤 이정표에 도달하면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의 이름이 붙은 집, 리넨으로 가득 채운 혼수, 벽난로 위에 진열된 자격증, 또는 소 몇 마리와 얼마만큼의 땅을 소유하는 것이 그런 이정표였다.

그런 뒤 낭만주의 사사의 영향으로 이런 실질적인 측면이 지나치게 금전을 따지고 계산을 하는 행위가 되었고, 초점이 감정적 특질로 이동했다. 올바른 감정들, 그 중에서도 특히 영혼의 짝을 만났다는 믿음, 상대방이 나를 완벽히 이해한다는 느낌, 다시는 상대 말고는 다른 누구와도 잠자리를 하고 싶지 않다는 확신이 중요하다고 여겨진 것이다. 278


이제 라비는 낭만주의 개념들이 재난을 낳는다는 것을 안다. 그의 준비된 마음을 완전히 다른 기준들에 기초한 결과다. 그가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무엇보다 완벽함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278


연인이 '완벽하다'는 선언은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징표에 불과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상당히 실망시켰을 때 그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알기 시작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연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은 근본에 있어서는 불완전할 것이다. 기차에서 만난 낯선 사람, 옛 동창생, 인터넷에서 사귄 새로운 친구 등도 우리를 실망시킬 소지가 다분하다. 삶의 현실은 우리의 모든 본성을 변형시킨다. 상처 없이 살아온 사람이 누가 있을까.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이상에 못 미치는 양육을 받았다. 우리는 설명하기보다 싸우고, 알려주기보다 들볶고, 고민거리를 분석하기보다 초조해하고, 거짓말을 하고 엉뚱한 데로 화살을 돌린다.

이렇게 우험 요소들이 중첩되어 있는 와중에 완벽한 인간이 나올 가능성은 전무하다. 낯선 이들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알기 전에 그들을 깊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화를 내는지 즉시 나타나지 않을지라도(몇 해가 걸릴 수도 잇다). 이론상 그 존재는 처음부터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결혼할 사람을 선택하기란 감정의 존재 법칙을 우회할 방법을 찾아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고통을 흔쾌히 견딜지 결정하는 일이다. 아니면 우리는 모두 당연히 악몽의 전형인 '엉뚱한 사람'을 곁에 두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재앙일 이유는 없다. 진보한 낭만적 비관주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모든 것일 수는 없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또 다른 타락한 생명체와 함께 사는 현실에 나 자신을 적응시킬 최대한 부드럽고 친절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결혼은 '어지간히 좋은' 결혼만 있을 수 있다.

정착을 하기 전에 몇 명의 애인을 사귀어보는 것도 이 깨달음을 깊이 새기는 데 도움이 된다. '제짝'을 만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사람은 없으며, 가까이서 보면 사실은 모든 사람이 조금씩 잘못되었다는 진실을 직접 그리고 다양한 상황에서 발견할 기회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278-280


사랑은 아주 든든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이 이해되고 있다는 경험에서 시작된다. 상대방은 나의 외로운 내면을 이해하고, 나는 왜 하필 그 농담이 그렇게 재미있는지를 그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공동의 적을 미워하고, 상당히 특화된 성적 시나리오를 함께 시도해보고 싶어 한다.

이 상황이 영원히 계속되진 않는다. 연인의 이해 능력에는 적정 한계가 잇고, 우리는 언젠가 그 한계에 부딪힌다 하더라도 직무유기라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애석하도록 무능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충분히 헤아릴 수 없으며,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게 정상이다. 어떤 사람도 다른 누군가를 정확히 이해하고 충분히 공감하지 못한다. 280


만일 수시로 자신이란 사람이 당황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자기 이해를 향한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은 것이다. 281


결혼이라는 새장 안에서 집안 살림, 친인척, 청소 분담, 파티, 식료품 같은 사소한 일로 화를 내면 당연히 '까다롭게' 보인다. 하지만 그건 상대방의 허물이 아니며,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려는 삶의 속성일 뿐이다. 애개 난감한 것은 결혼이란 제도이지, 관련된 개인들이 아니다. 281


우리는 마치 '사랑'을 단일하고 분화되지 않은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은 매우 상이한 두 가지 양식인 사랑받기와 사랑하기로 이루어져 있다. 후자를 실행할 준비가 된 동시에 전자에 대한 우리의 비정상적이고 위험한 집착을 인식할 때 결혼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

처음에는 '사랑받기'에 대해서만 알고 인생을 시작하낟. 아주 그릇되게도 사랑받는 일이 표준처럼 보인다. 아이들은 마치 부모가 항상 온정 어린 마음으로 흔쾌히 그들을 위로해주고 인도해주고 즐겁게 해주고 먹여주고 씻겨주는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개념을 성년기까지 갖고 간다. 성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보살핌을 받고 다 받아들여지던 그 느낌을 되살리고 싶어 한다. 우리는 마음속 은밀한 구석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예측하고, 우리의 심정을 읽어내고, 이타적으로 행동하고 모든 면엣 더 나아지게 해줄 연인을 그린다. 이건 '낭만적'인 것 같지만, 재난의 예고이다. 281-282


중요한 여러 분야에서 파트너가 우리보다 더 현명하고 합리적이고 성숙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우기를 바라야 하고, 그들에게 지적당하는 것을 인내해야 한다. 또한 다른 순간에는 최고의 교사로서 모범을 보이고, 소리를 지르거나 상대방도 알리라 지레짐작하지 않고 우리의 제안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미 완벽한 사람만이, 서로 가르친다는 생각은 사랑이 아니라고 일축할 수 있다. 283


낭만주의 결혼관은 '제짝'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우리의 허다한 관심사와 가치관에 공감하는 사람을 찾는 것으로 인식된다. 장기적으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너무 다양하고 특이하다. 영구적인 조화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제짝'의 진정한 표지는 완벽한 상보성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는 차이를 수용하는 능력이다. 조화는 사랑의 성과물이지 전제 조건이 아니다. 283-284


완벽한 행복은 아마 한 번에 5분이 채 넘지 않을, 작고 점진적인 단위들로만 찾아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이 순간은 두 손으로 붙잡아 소중히 간직해야 할 행복이다.

싸움과 갈등은 금세 다시 고개를 들 것이다. 291-292


완전히 평범한 인생을 사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을 유지하고, 거의 정상인이라는지위를 계속 확보하고,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고, 결혼 생활을 지속하면서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 이 계획들이 어느 영웅담 못지않게 영웅적인 면모를 보일 기회를 제공한다. 조국에 봉사하거나 적과 싸우라고 부름을 받을 리는 없지만, 그의 제한된 영역 안에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불안에 굴복하지 않을 용기, 좌절하여 남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 용기, 세상이 부주의하게 입힌 상처를 감지하더라도 너무 분노하지 않을 용기, 미치지 않고 어떻게든 적당히 인내하며 결혼 생활의 어려움들을 극복할 용기, 이것은 진정한 용기이고, 그 무엇보다 더욱 영웅적인 행위이다. 293




옮긴이의 말 - 진짜 러브스토리


결혼이 사랑의 결실인 건 알겠는데, 그렇다면 결혼 생활의 진정한 동력은 무엇일까? 295


일상의 비끗거림은 맹독으로 작용하기 쉽지만 성찰에 담그면 묘약으로 연금된다.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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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주변 세계를 친애하는 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확실히 도움이 되어 주었습니다. 6


좋은 빛들이 있다. .. 느닷없이 알게 된다. 그 빛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나 또한 그 빛을 그저 나를 밝히기 위해 이용했다는 걸 말이다. 그러고 나면 그 빛이 슬퍼 보인다. 슬프게, 보인다. 15


천장이 슬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하늘이 내려앉아 쥐어짰고, 나는 텅 비고 말았다. 19


'현실주의자가 되자. 하지만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68혁명 당시 체 게바라가 한 말이라고 대중에 알려진 글귀이지만 대개의 유명한 펀치라인이 그러하듯이 실제 화자와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 생각은 내게 참 소중했다. 내가 만난 많은 어른들은 정확히 그와 반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겉으로 몽상가처럼 세상에 관한 따뜻하고 근사한 말을 늘어놓되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단 한 치의 손해도 용납할 수 없다는 뜨거움으로 그를 믿어 왔던 주변의 많은 이들을 집어삼켰다. 21


나는 불행하게도 좋은 어른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다. 그것이 사회 일반의 반영인지 혹은 그저 나의 박복함의 결과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최악의 어른이란 늘 갱신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25


타인의 정상성을 의심하고 억지로 분류할 때 공동체의 정상성은 훼손된다. 반대로 타인의 정상성을 의심하고나 분류하지 않고 그럴 수 있는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을 때 공동체의 성상성은 굳건해진다. 32


내가 경험해보지 않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곧 비정상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살다보면 별일이 다 있기 때문이다. 33


청소보다 중요한 건 정리다. .. 정리가 직관적으로 잘되어 있으면 매일 하는 청소에 드는 시간은 십 분이면 충분하다. 정리가 되어 있는 집은 청소를하루 이틀 하지 않아도 티가 나지 않는다. 정리의 묘는 얼마나 잘 감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버리느냐에 달려 있다. 49


부동산 취득 자격먼허 같은 걸 만들어서 시험장에서 혼자 청소할 수 있는 최대 평수를 측정해 딸 수 있게 하면 좋겠다. 사람의 욕심을 다스릴 수 있는 가장 기능적인 목적의 면허가 아닌가. 52


나는 늘 내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해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115


좋은 다큐는 반드시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진실에 관해 스스로 한 번 더 의심한다. 그리고 그런 의심의 사유를 통해 관객이 영화를 찬양하게 만드는 대신 관객이 영화에 당황하게 만든다. 그런 종류의 당황은 필연적으로 관객의 고민과 깊은 울림을 이끌어 낸다. 229


누구나 그럴듯한 상황과 환경이 주어지면 사랑을, 혈연을, 우정을, 금전을, 위계를 빌미로 악을 행사한다. 그 자신만이 그것을 악으로 인식하지 않고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 혹은 선의로 인식할 뿐이다. 악은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지 않는다. 261


문제는 가해자를 승자인 채로 피해자를 패자인 채로 남겨두고 사회 통합이라는 알량한 거짓말을 들어 침묵하고 지워버리는 태도에 있다. <액트 오브 킬링>과 <침묵의 시선>이 공히 주장하는 건 청산되지 않은 과거를 짊어진 사회는 반드시 곪아 부패한다는 것이다. 294


가치관이 충돌하는 사안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관계를 두고는 균형을 찾을 이유가 없다. 확실한 사실관계를 두고도 무게중심을 찾는다며 진영논리를 끄집어내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라. 그들은 용돈을 받았다. 298


대중매체는 현실을 조명하는 데 게으르다. 혹은 겁을 먹는다. 시청자들이 스크린에서까지 현실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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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 당신은 표류하지 않고 항해하는 삶을 살기를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해서,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남긴 말이다.

"그렇기에 노년의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보고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백발의 노인은 오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생존한 것일지 모른다." 4


인생을 산 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

어떻게 성장에 이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우선 표류하는 자신을 깨뜨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을 개뜨리기 위해서는 외부의 힘이 필요하다. 그 외부의 힘이란 나를 불편하게 하는 오래된 지혜다. ..

일상에서 표류하는 자신을 멈춰 세우고 깨달음으로 밀어 올리는 불편한 지식들을 만나야 한다. 그 지식들은 지혜가 되어 우리를 성장하게 할 것이다. 5



소년, 불편함의 계단 앞에 서다

계단을 오르는 길에는 사람들이 있다. 나를 앞서가는 사람, 내 뒤를 따르는 사람. 어떤 이는 계단 중간 어딘가에서 이미 자리를 잡았다. 그 계단의 높이가 그는 가장 마음에 들었으리라.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더 오른다.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불안함을 감수하면서, 다른 세계를 보고자 한다. 그는 성장하는 사람이다.

어떤 삶도 괜찮다. 13


내가 전혀 알지 못함에도 이미 거짓이라고 믿고 있던 세계, 그렇게 피해왔던 세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책은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17-18



다섯 번째 계단, 과학

사회와 국가는 당신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회와 국가는 오직 당신의 노동력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전문성의 요구에 저항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노동자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 구각와 사회가 규정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규정해나가는 주체적인 조재로 변모하게 될것이다. 168



여섯 번째 계단, 이상 - 체 게바라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 외에는 타인을 평가할 줄 모르거든. .. 사람들이 보기에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가시적인 서오가를 낸 사람들만이 칭송의 대상이 되지. 238


이상적인 인간은 대주으이 평가, 혹은 사회의 인정과는 무관해. ..

타자의 평가는 이상적인 인간에게 불필요하다. 239



일곱 번째 계단, 현실 - 공산당 선언

낯선 시스템에 던져진 초기에는 누구나 그 시스템의 단점과 문제점을 쉽게 발견한다. 열정적인 그는 저항하고 좌절하면서 내적인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시스템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곧 시스템이 생각보다 효율적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말한다.

단점과 문제점이 없는 완벽한 시스템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때부터 그는 시스템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규칙성 속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우리는 한 가지에만 집중한 사람들의 한계를 쉽게 본다. 책만 본 사람들과, 현실에 적응하기만 한 사람들의 한계. 우선 책만 본 사람들의 한계는 타인에게 엄격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이 쉽다. 왜냐하면 책의 울타리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실제 세상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까닭에 현실의 폭력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다른 사람들이 나약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하지만 막상 현실에 발을 디디면 이들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당황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나약함을 부정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된다. 모든 일에서 불평 불만거리를 찾아내는 사람, 타인의 잘못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 선과 도덕과 정의를 습관적으로 강조하는 사람.

다음으로 현실에 적응하기만 한 사람들의 한계는 자신에게 너무도 너그럽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계획과 일정에 따라 정확하게 진행되는 일 따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음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문제에 봉착했을 때, 옳고 그름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타협과 조율을 통해서만 상황에 따라 문제를 봉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된다. 선과 도덕에 대해 하찮게 여기는 사람, 모든 것을 손익으로 판단하는 사람, 심연의 깊은 대화가 불 가능한 사람.

두 가지가 병행되어야 한다. 250-251


삶은 받아들이는 방식으로만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 314


우리는 자신이 체험한 만큼의 시야 안에서 세상을 해석하며 살아갑니다. 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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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운동으로는 안 일어나.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으로 일으키는 것이라고!

집단은 어차피 집단이라고. 부르주아도 프롤레타리아도 집단이 되면 모두 똑같아.

권력을 탐하고 그것을 못 지켜서 안달이지!

개인 단위로 생각할 주 아는 사람만이 참된 행복과 자유를 손에 넣는 거얏!"

 

"모모코, 국가 교육이라는 건 애초에 잘모소디었어. 미국을 좀 봐라. 세계 곳곳엣 전쟁을 벌여 죄 없는 민중을 죽이고, 그러면서도 자기들만이 정의라고 하고 있잖아. 그거야말로 국가적인 사상 교육의 결과야. 일본은 그런 미국의 앞잡이 격이라고."

 

"그 섬은 어느 누구의 통치도 받지 않아. 자급자족으로 살아가고, 전쟁도 없고, 모두가 자유야. 아니, 국가 같은게 아니라니까. 그냥 커뮤니티야. 사람들의 모임, 어느 나라의 영토에도 속자히 않으려고 지도에 실리는 것도 거부한 거야. (중략) 호자 살더라도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들면 정치경제가 발생해.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걸 생각하지 않으면 정치가도 자본가도 필요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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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적인 사람이라면 갑자기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데에 두 가지 경우가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즉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갈 때와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올 때이다. 이는 육체의 눈뿐만 아니라 마음의 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통찰력이 부족한 사람을 보고 함부로 비웃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앞서 그는 이 사람의 영혼이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 그 어둠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어둠에서 밝은 태양 아래로 나와 눈이 부신 것인지를 물을 것이다. 그리고 뒷사람을 복된 이로 생각하고, 앞사람을 불쌍히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어둠에서 빛으로 나온 영혼을 보고 웃는다면, 이 웃음엔느 밝은 곳에서 어두운 굴 속으로 들어온 사람을 보고 웃는 웃음과는 다른, 보다 큰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 플라톤의 <국가>에서

 

박사님은 자네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며, 그렇게하면 자네의 문제를 밝힐 수 가 있다고 말했다. 61

 

당신이 앞으로도 평생 어린아이로 살고 싶다면 예기는 달라지지만, 당신 슷로 답을 찾아야 해요. 옳고 그름을 '직감'할 수 있어야 해요. 찰리, 먼저 자신을 믿는 것을 배워야 해요. 109

 

전에 그들은 나를 조롱하며 내 무지와 우둔함을 경멸했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지능과 지성을 갖췄다 하여 나를 미워 하고 있다. 그들은 왜! 도대체,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 128

 

스트라우스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더 쉽고 평이하게 얘기하고 쓸 필요성을 지적했다. 그는 언어가 마음을 통하게 하는 길이 아니라 때로는 장벽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지능이라는 담장 저편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건 아이러니다. 135

 

노마가 태어나 그녀도 정상적인 아이를 낳을 수 있으며, 내가 잘못 태어난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자, 그녀는 나를 고치겠다는 노력을 그만두었다. 한편 나는 그녀가 원하는 영리한 아이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나를 사랑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168

 

그녀를 쫓아낼 구실은 얼마든지 있지만 나는 단념했다.

"진 있어요?" 하고 그녀가 묻는다.

"아니, 술은 별로 마시지 않아요."

"집에 조금 있으니까 가지고 올게요." 말릴 새도 없이 창문으로 나가서, 3분의 2쯤 들어 있는 술병과 레몬을 한 개 들고 곧 돌아왔다. 부엌에서 술잔을 두 개 가지고 와서 진을 따른다.

"자요. 이걸 마시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예요. 술이 저 직선들을 허물어 버릴 테니까.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건 바로 저거거든요. 모든 것이 숨막힐 듯이 너무 빈틈이 없고 똑발라서 마치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조각 속의 앨저넌처럼."

처음에는 마실 생각이 없었지만, 기분이 너무 침울해서 좀 마셔도 괜찮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상황을 악화시킬 리는 없고, 내 행위를 이해하지 모하는 누에 의해 자신이 보여지고 있다는 의식도 둔해질지도 모른다.

그녀는 나를 취하게 만들고 말았다. 218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지적으로는 계속 성장하는 한편으로, 감정적으로는 어린 찰리 그대로였소. 227

 

내가 작곡한 첫번째 피아노 협주곡을 페이에게 바쳤다. 그녀는 자신에게 헌정되었다는 것으로 흥분했지만, 곡이 마음에 들지는 않아 하는 것 같았다. 한 여자에게 모든 것을 바랄 수는 없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일부다처제를 주장할 이유가 또 한 가지 늘었다. 238

 

"저 안에는 뭐가 있나?"

"냉동고와 소각로." 그는 육중한 문을 열고 불을 켰다.

"표본을 소각로에서 처리하기 전에 동결하는걸세. 부패를 방지하면 악취를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되지." 그는 발길을 돌리려 했지만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앨저넌은 그러지 말게. 그러니까.... 만약.... 그때는 .... 즉 그를 이 안에 던져 넣지 말아달라는 걸세. 나에게 주지 않겠나? 내가 처리할 테니까."

그는 웃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243

 

며칠 동안 나는 심리학 서적에 몰두했다. 임상심리학, 성격심리학, 심리측정학, 학습심리학, 실험심리학, 동물심리학, 생기심리학, 행동주의학파, 게슈탈트학파, 정신분석학파, 기능주의파, 역동론파, 유기체론파 등등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학설과 학파 사상체계를 독파했다. 우려되는 것은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지능과 기억, 학습에 대해 믿음을 두고 있는 학설의 대부분은 모두 이러이러하기를 바란다는 희망적 사고라는 것이다. 247

 

그 중에서 그래도 지능이 높은 사람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어요. 그들은 나간 지 1주일 정도 지나면 대부분 다시 돌아옵니다. 바깥 세상에서는 있을 곳이 아무 데도 없다는 걸 알게 되면요. 세상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곧 깨닫게 되는 거죠. 250

 

"이 아이들은 마, 말수가 적은 편이지요." 그는 내 무언의 질문을 느낀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 농아들입니다."

"이곳에 106명 있습니다." 윈슬로가 보충설명을 했다.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아 특별히 연구하는 아이들이지요."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보통 사람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것 없는 걱만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인가! 정신지체에 귀머거리이고 벙어리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열심히 벤치를 갈고 닦고 있다. 254

 

"돈이나 물질을 주는 사람은 많지만 시간과 애정을 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256

 

워렌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차가운 잿빛 느낌, 체념이 나를 에워쌌다. 체념. 재활이라든가 치료, 또는 그런 사람들을 세상으로 복귀시키는 데 대한 얘기는 한 마디도 없었다. 희망을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받은 인상은 살아있는 시체같다는 느낌이었고, 더 나쁘게 말하면 완전히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모른다는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시든 영혼이 나날의 시공을 그저 응시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는 것이다. 257

 

나는 당신들이 간과한 한 가지를 깨달았어요. 인간적인 애정의 뒷받침이 없는 지능과 교육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말이오...

지능은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자질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지식을 구하는 마음이 애정을 구하는 마음을 배제해 버리는 일이 너무 많아요. 이건 극히 최근에 발견한 건데, 나는 이것을 하나의 가설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즉 애정을 주고 받는 능력이 없는 지능은 정신적, 도덕적인 붕괴를 초래하고, 신경증 내지는 정신병까지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중심적인 목적에서 그 자체에 흡수되어 그 자체에 관여할 뿐인 마음, 인간관계를 배제하는 마음은 폭력과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거지요. 277-278

 

그녀에게(엄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 그녀 자신보다 가족보다 먼저 이웃의 평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옳다고 생각했다. 인생에는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보다 주요한 것이 있다고 아버지는 이따금 설교했다.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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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보다 긴 여운

여행은 내게 여전히 힘들고 많은 생각을 안겨준다. 나는 정말 아직도 여행을 잘 모르겠지만 알 수 없는 오기 같은 것이 생겨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 집에만 있을 거야, 라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여행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나 책을 읽을 수 있으며 통신 수단이 없어도 답답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사람.” 61

 

 

순간 속의 사람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로버트 레드폳가 메릴 스트립에게 말하길

마사이족에겐 특별한 것이 있다고 했다.

그들은 절대로 길들여질 수 없는 존재들이어서

만약 감옥에라도 갇히게 되는 날엔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머릿속엔 오직 현재라는 개념밖엔 없기 때문에

앞으로 이곳을 나가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처음엔 황당할 정도로 희망이 엇는 사람들이구나 싶었는데

이내 누구보다 순간에 충실할 수 있다는 점이 부럽게 느껴졌다.

결코 내일이란 없는 사람들, 오로지 지금 이 순간뿐인 그들에게

세상이란

아마 내가 살고 있는 여기와는 다른 곳이겠지. 373-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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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대상을 더 알고 싶어지고 

이해하고 싶어진다. 따라서 질문은 

자신이 질문을 던지는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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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행동으로) 말을 하고 있었구나. 내가 내 사랑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뿐.'
(이수-한효주-의 나레이션, 1:35:00)

'날마다 같은 모습으로 날마다 다른 나'
(이수의 나레이션, 1:4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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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하는데... 안락한 자리만을 바라지. 그런 자리를 차지하고 나면 마음은,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말지." - 아르튀르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 철>  9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의 [착란 1]에 나온 시구를 빌려 와 이렇게 적었다.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어디 사랑만이 그러하겠는가. 랭보의 시 역시 시의 재발명이었고, 오늘날 하염없이 스러져 가는 세월 속에서도 놀라운 자태를 뽐내는 동서고금의 미술 작품 역시 재발명된 회화, 조각들이다. 영화 또한 재발명되어야 한다. 재발명된 것들이 모여 있을 때 비로소 '삶의 재발명'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 루이스 부뉴엘의 <비리디아나>, 피에르 파솔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는 모두 (우리의 삶을 둘러싼) 기존의 영역을 재발명한 영화들이다. 이들 감독의 재발명 방법은 매우 강력하다. 그들은 사랑에 대해, 종교에 대해, 사디즘과 카니발리즘에 대해, 폭력과 도덕에 대해 극단적인 지점까지 밀고 나갔다. 저 영화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구토하게 하고, 혐오감에 빠지게 하며, 심지어 영화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 우리는 이러한 재발명을 꿈꾼다.  10


여기서 다워진 영화들은 기존 영화가 지닌 통념과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새롭게 구현된 재발명은 우리들 스스로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은 무엇인지, 사랑은 무엇인자, 성은 무엇인지, 폭력은 무엇인지, 종교는 무엇인지, 나와 너는 누구인지를 질문하게 한다. 새로운 예술은 항상 재발명의 방식을 통해 재질문하고, 재사유하게 한다.

이 책이 단순히 '교양'이나 '입문' 수준에서 읽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이 책이 삶을 재발명하고, 섹스를 재발명하고, 사유를 재발명하게 하는 '본격적인 재발명 도구'가 되기를 원했다.  11


오늘날 우리는 재발명된 영화와 점점 더 만나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 까닭은 영화가 더 이상 재발며으이 영역이 아닌, 산업 시스템에 사로잡혀 기성품 복제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발명이 아니라 통속적 반복을 되풀이하고 있다. 진정으로 재발명된 영화는, 쾌적한 극장의 안락한 의자에 앉아 달콤한 시간을 누리고 싶어 하는 관객의 기대감을 배신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배신(영화의 대중 배신)은 위험천만한 일로 여겨지고 있으며, 사람들 또한 안온한 극장이 제공하는 향락을 즐기다가 더욱 안전한 집으로 귀가하기를 선택한다. 강렬함을 잃은 영화는 금세 잊힌다. 물론, 영화는 아무것도 구원하지 못한다. 다만 하나의 충격파로서 우리를 흔들어 깨울 것이며, 그것을 통해 새로운 길을 내다볼 수 있는 작은 틈을 보여 주리라. 그럴 때 영화는 친구가 된다.  12





전체적으로 그런 기운이 느껴지는 섹스 - <감각의 제국> 1976 일본, 프랑스 108분, 오시마 나기사


<감각의 제국>은 1976년에 만든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작품입니다. .. '감각'이라는 말은 작지만 큰 울림을 지녔어요.  21


동시대를 대표하는 괴물은 '좀비'예요. 좀비의 가장 큰 특징은 감각이 없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고통을 느끼고 있나요. 혹은 어떤 무감각에 빠져 있나요.  22


<감각의 제국>은 1936년도에 실제 일본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었어요.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던 치정 사건을 재현하면서도(내부를 들여다보면서도), 바깥의 시스템(국제 합작)을 통해 주제 의식에 다가선 셈이니까요.  27


많은 이들이 사랑은 금기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랑의 형태에 대해서만큼은 엄격한 잣대를 갖고 있어요. 불륜이 대표적인 사례죠. 

그런데 사랑과 불륜 중 어떤 것이 더 큰 범주에 속합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사랑이 더 큰 범주에 속할 겁니다. 상위 범주에 해당하는 사랑은 금기가 아닌데, 그 하위 개념인 불륜이 금기에 속한다는 건 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요.  29


현실을 들여다보면 사랑에 대한 금기가 참으로 많아요. 불륜도 그렇고,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커플로 잏상한 눈으로 바라봐요. 동성애에 대한 갑론을박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금기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금기들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대단히 협소한 것'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습니다. 금기를 넘어서지 않을 때에만 우리는 사랑을 '사랑'이라고 여기게 되는 겁니다. ..

인간의 자유를 품은 사랑은 '모든 것을 무릅쓰고' 실천하는 행위예요. 이 영화가 위험하고도 지독한 사랑을 다루는 건 협소한 통념을 까발리기 위함이에요.  30


<감각의 제국>이 누군가에겐 '불편한 사랑 이야기'라는 점이 중요한 겁니다. 이들의 강렬한 러브 스토리는 통념에 의해 마비된 감각을 흔들어 깨우니까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사다는 기치의 성기를 자릅니다. 흔히 상대를 파괴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겁니다. 그런데 기치는 기꺼이 그 순간을 용인합니다. ..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까지 상대를 용인할 수 있을까요. .. 저로서는 감히 못 할 일이기에, 이들의 사랑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게 바로 <감각의 제국>의 출발점입니다. 타인의 사랑을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  31


나의 알몸은 상대에 대한 솔집함과 사랑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반면, 전적으로 타인인 누군가의 알몸은 정상적인 것을 벗어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타인이 '옷'으로서 드러나기를 바라죠.

왜 그럴까요. 이것은 인간 사회가 지닌 인식의 문제와도 깊이 연관돼 있어요. 옷은 타인의 경제력, 신분, 직업, 성별 등을 나타내는 기호입니다. 벌거벗은 몸은 '존재 그 자체'로 다가오기에, 우리는 그 타인이 누구인지 분별할 수 없어요. 그게 불편한 겁니다.  32


'벌거벗음'은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삼아요. 일종의 평등주의적 태도죠. 어쩌면 '복면 시위'도 이와 같은 맥락이겠죠.  32-33


그들의 나체는 불편한 게 아니라 오히려 불쌍한 것일 수도 있어요. 벗은 몸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니까요. 항상 그 벗은 몸으로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인 거죠.  34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말했던 유명한 '무인도 농담'이 있어요. 한 농부가 무인도에 아름다운 슈퍼 모델과 단둘이 갇혔어요. 상황이 좀 그렇다 보니, 결국 두 사람은 성관계를 갖게 됐죠. 그 후 슈퍼 모델이 농부에게 좋았느냐고 물어봐요. 그러자 농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좋았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 부탁을 하나 들어줄 수 있느냐.'라고 대꾸하죠. 그는 슈퍼 모델에게, 얼굴에 수염을 그리고 밀짚모자를 쓴 채 곁에 와 달라고 부탁해요. 슈퍼 모델은 그 청을 들어줍니다. 그녀는 약속한 대로 남장을 하고 농부의 곁에 와 앉죠. 그러자 농부가 슈퍼 모델을 툭 치며 말을 걸죠. '어이, 친구! 방금 내가 멀 했는지 알아? 그 유명한 슈퍼 모델과 잤다고!'

기치와 사다. 이들 두 사람도 그래요. 끊임없이 자신들의 결합을 과시하고 싶어 해요. .. 페이스북에 '아무개와 연애 중'이라고 자신의 '상태'를 공개하는 것도 같은 심리예요...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상태를 노출합니다. 자신들의 관계가 은밀하기를 원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노출되기를 원하는 거죠.

사다와 기치를 변태라고 욕하지 마세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자신을 노출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노출한 신체를 누군가가 봐 주기를 강렬히 희망합니다.  34-35


<감각의 제국>에 등장하는 사다와 기치의 벗은 몸에 대해 부끄러움이나 불편함을 느끼셨다면, 그건 분명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응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그 누구보다도 정열적으로 사랑했던 사람들. 우리도 이만큼 나아가 볼 수 있을까, 사랑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밀고 가 볼 수 있을까? 부끄럽게도 그러지 못할 겁니다. 수치심은 아주 끈질기게 인간의 판단과 사유의 발목을 붙잡고 있으니까요.  37


조르주 바타유가 쓴 <에로티즘>을 참고 문헌.


왜 인간은 이토록 섹스를 하고, 일체감을 얻으려고 할까요. 바타유는 동물과 인간의 섹스를 구분합니다. 동물의 섹스는 후손을 남기기 위한 생산성을 무엇보다도 중시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섹스는 생산에 관심이 없어요. 우리들 모두 '자손을 꼭 남기고 말겠어!'라고 생각하며 섹스를 하지 않잖아요. 오히려 섹스를 통해 쾌락을 추구하죠. 바타유에 따르면 인간은 에로티즘을 통해 쾌락을 추구하는 유일무이한 동물이에요.  40-41


인간은 쾌락을 위해 죽음 직전에까지 이르는 격한 에로티즘을 추구하기도 해요. .. 단지 벗는 행위뿐 아니라 성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금기가 존재하고,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제도화하죠. 에로티즘이 야기하는 '쾌락의 혼돈'을 억누르기 위함이에요. 동시에 미묘한 건, '에로티즘은 금기가 없으면 추구될 수 없다.'라는 바타유이 말입니다. 금기를 위반하는 것만큼 짜릿한 쾌락이 없거든요. 그래서 에로티즘과 금기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붙어 있습니다.  41


에로티즘의 관점에서 보자면 <감각의 제국>은 두 사람 사이의 쾌락을 극단적으로 밀고가는 영화예요. 그들을 둘러싼 금기가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이들은 더 강한 쾌락에 중독될 수밖에 없죠.  42


아무리 사랑이라도, 그 본모습을 정면으로 응시하기는 힘들죠.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는 쓰고 맛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포장하면 이보다 더 달콤할 수 없죠.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사랑은 금기인가?'라는 질문을 드렸죠. 사랑이 금기가 아니라고 여기는 건 우리가 '포장된 사랑'을 주로 봐왔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 주듯, 날것 그대로의 사랑을 마주하면 사실 역겨워요.  43


종교의 금기가 공동체의 금기를 깨는 영화보다 더 자극적인것은 섹스라는 금기를 다루는 영화라고 할 수 있어요. .. 섹스는 여전히 거부감과 결합된 묘한 흥분을 줄 것입니다.  49


들뢰즈처럼 '개념의 창조'를 해보자면 이 영화는 '섹시힐리즘', 즉 '섹스'와 '니힐리즘'을 합친 새로운 개념으로 읽을 수 있어요. 사실 아주 쉽죠. 소유욕의 화신인 사다와 인생이 허무한 남자 기치의 이이기예요.  50


사다의 상황은 빤해요. 그녀는 어린 나이에 남편과 헤어졌고요. 건강하죠. 나이도 분명 20대 초반일 것 같아요. 사다는 갈 데까지 가려고 하고, 소유하고 독점하려고 하죠. .. 사다는 알아요. 이 남자의 허무를 채울 수 없다는 걸요. 그래허 계속 섹스를 원하죠.  .. 진짜 슬픈 건 기치가 사정하고 난 다음이에요. 더 큰 허무가 그를 덮치고 말겠죠. ..

단도직입적으로 섹스가 허무일 수도 있다는 걸 말하고 있어요. 이 영화의 지침은 거기에 있어요. 섹스로 허무를 달랠 수 있지만, 없애지는 못해요.  51


첫 경험을 하고 나면 누구나 섹스에 대해 품고 있던 큰 판타지가 깨져요. 그래도 그 허무를 채우려고 섹스를 계속 이어 가죠. 인간의 섹스는 그래요. 동물의 발정기와 다르기 때문에 매번 더 몰입하죠. 그 순간적인 충만감을 느끼려고요.  52-53


사실 우리가 금기라고 하는 건 말초적인 것들이에요. 어찌 보면 유치하죠.  53


제가 정의를 잘하지 않았나요? '섹시힐리즘', 섹스+니힐리즘이에요. 허무한 남자를 사랑하는, 허무를 잡으려고 했던 한 여자의 이약. 마지막에 사다는 이 남자를 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닫죠. 딱 한 번뿐인 사랑, 목을 조르고 성기를 자르기 직전의 그 마지막 사랑이 그들의 유일한 섹스였을지도 몰라요.  54


결국 중요한 것은 섹시힐리즘에 대한 통찰이 아닐까 해요. 우리는 때때로 허무주의를 달래기 위해 섹스에 몰입합니다. .. 섹시힐리즘은 섹스가 가진 강도와 충만감으로 자신이 느끼는 허무를 채우려는 정신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을 듯해요. 허무는 일종의 무기력입니다. ..

치명적인 섹시힐리즘은 자신의 허무를 오직 섹스로만 채우려고 할 때 작동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행동이든 자꾸 반복하게 되면, 매너리즘에 젖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더 새로운 섹스, 더 기묘한 섹스, 심지어 엽기적이기까지 한 변태적 섹스가 나타나게 되는 거죠. 이럴때 섹스는 이제 그 자체의 즐거움을 잃고, 일종의 절대적인 수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마침내 섹스마저도 허무주의의 먹이가 되는 거죠.  55


어쩌면 사랑은 기꺼이 더러워지는 것, 타자와 섞이는 일인지도 몰라요. 타액을 섞고, 피부를 어루만져야 정신적으로도 더 많은 걸 공유할 수 있어요. 텔레파시같이 정신적으로, 아무런 접촉도 없이 교감할 수 있는 건 실상 없어요. .. 

롤랑 바르트도 서로의 대화가 애무라고 했죠.  58


한 사람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모습, 이미 그 자체로 에로틱한 사건'이라고요! ..

섹스를 말초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대화는 더 섹시한 성기일 수 있어요. 더 육감적인 향기일 수도 있고요. .. 플라토닉러브? 웃기지 마세요. 플라토닉에 집중하지 말고, 러브에 집중해요. 자신감 없는 사람들이 하는 게 플라토닉러브예요. ..

사랑과 불륜이 구별되는 지점은 어디일까요. 사랑이라 생각하면 밀어붙이고, 불륜이라고 느껴지면 관계를 포기할 준비를 하는 건 아닐까요. 수차례 말씀드렸다시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륜은 매우 흔한 테마일뿐 아니라 거의 모든 인류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관계 유형 중 하나예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죄악은 아닌 거죠.  59-60


본인의 마음속 울림이 더 중요하잖아요. 제가 하라고 한들, 하지 말라고 한들 뭐가 대수겠어요?

불륜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세요. 이 단어는 '아니 불(不)' 에 '무리 륜(倫)'자로 이뤄져 있어요. 사랑의 핵심에는 늘 불륜성이 도사리고 있어요. .. 불륜이라는 건 무리에서 떠나는 행위입니다. 그 땜ㄴ에 우리가 불륜을 저주하는 건 고착화된 욕망이에요. 기존의 틀을 유지하겠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죠.  60


사랑의 핵심은 기성의 해체와 새로운 것을 향한 전망이죠. 그걸 감당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 문제예요. 예전 관계에 너무 많이 의존해 있으면 해체하지 못해요. 그건 아무나 하는게 아니에요.  61


즉각적인 혐오에 따라 판단하지 말고, 무엇이든 숙고해 봐야 해요.  63


회자정리(會者定離 모을회 사람자 정할정 떠날리). 만난 것들은 반드시 이별해요.  66


음란한 사람일수록 섹스를 지나치게 신성시해요. 차라리 매춘부들이 가장 플라토닉한 사랑을 하지요.  69



제 주변엔 안타까운 여자 선배들이 많아요 페미니즘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돌연 어떤 남자랑 한 번 자고 나더니 결혼해 버리고 말았어요. 그게 성숙한 걸까요? 유치한 사람일수록 자기 수준을 모르면서 성숙한 줄 알아요.  72





비정상적 영혼의 정상화를 위한 폭력 - <시계태엽 오렌지> 1971 영국 137분, 스탠리 큐브릭


"사람에게 자유 의지가 없다면, 그는 이미 사림이 아니지." - 등장인물 신부의 대사  87


1971년에 선보인 <시계태엽 오렌지>는 앤서니 버지스의 원작 소설을 영화로 옮긴 작품이죠.  91


큐브릭은 '미래3부작'을 선보입니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인류가 달에 가기 1년 전에 만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그리고 <시계태엽 오렌지>가 그것입니다.  92


폭력은 단순히 폭력으로만 끝나지 않죠. 결국 섹스와도 연결이 되고, 정치와도 연결돼요.  96


금기는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하는 명령이에요.  97


루드비코 프로그램은 실제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마음속에 그러한 욕망을 품기만 해도 고통받도록 만들어 버린 거예요. 즉, 루드비코 프로그램은 '욕망'을 처벌합니다.  98


이 영화가 논란을 일으킨 건 '우리는 모두 선이 긍정적이고 아름답다고 배웠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야. 인간은 악이든 선이든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가져야 해. 그것이 인간이야!'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에요. 약물을 주사하든 거세를 하든 따져 보아야 할 것은 자유 의지를 박탈당한 인간이 과연 인간인가, 하는 거예요.  98-99


무엇을 금기하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선뜻 선택할 수 없을 때 바로 금기가 되는 거예요. 선택 할 수 없는 것, 그게 다 금기예요 고를 수 있는 게 단 한 가지뿐이라, 선택이 배제된 것 말이죠. 그래서 이 영화의 주제가 금기인 거예요. 인간은 금기조차도 금기가 아닌 듯 선택할 수 있다는 게 이 영화가 보여 주는 핵심적 주제거든요.  99


인간이 가진 가장 일반적인 특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망하는 게 가장 쉽거든요. 그 순간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선한 자가 되는 겁니다. 니체는 이걸 '노예 감정'이라고 말했어요.

'주인'은 원망하지 않아요. 주인은 문제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원망하기보다 해결하고 타계할 길을 궁구하죠. ..

우리에게 자유로운 선택이 얼마나 허용됐는지를 살펴보면, 우리 안의 금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어요. .. 알렉스가 악마였던 이유는(영화 전반부에 나오듯) 그가 욕망을 '행했기' 때문이에요. 우리 역시 다양한 욕망을 갖고 있어요. 다만 그걸 다 표출하지 않을 뿐이죠. 꿈은 자유롭게 꿀 수 있지만, 모든 꿈을 행하지는 않잖아요. 현실에서는 어느 정도 금기가 작동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오직 금기만 남는다거나 강력한 금기에 붙들리면 문제가 돼요. 자유를 빼앗기게 되니까요.  100


금기의 문제. 첫째,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을 때 금기가 우리 내부에서 작동하기 시작해요. 둘재, 모든 것을 원망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노예'가 되고 말죠. 도덕은 태곳적부터 정해진게 아니에요. 단지 그것이 쌓이고 두터워져 금기가 되는 거예요. 한데 보통 대중매체는 이런 금기를 건드리지 않아요. 불편하니까요. 

예술은 금기를 건드리면서 인간의 자유를 드러내는 영역이에요. ..

사유는 쾌락이 아니라 불쾌함의 여지, 즉 '부정성'을 통해 찾아옵니다. 부정성은 왜 이 영화가 불편한지 묻게 하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 합니다. .. 그것은 금기에 순종하는 게 아니라 금기를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드러나는 부정성입니다.  104


타인에 대해 너무 쉽게 정죄하지 말고, 함부로 판단하지 맙시다.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벌어지는 만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이야기했습니다. 윤리적, 도덕적 잣대는 대개 약자들이 맹싢는 거예요. '나는 순수하다.'라고 믿는 거죠. 가난한 자는 순수해요. 힘이 없어 큰 죄를 저지를 수 없거든요.  106


선은 영원한 선이고 악은 영원한 악이라고 보는 시선이 있어요. 그런데 니체는 <선악의 저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나에게 선(good)과 악(evil)은 없다. 단지 좋은 것(good)과 나쁜 것(bad)만 있다."라고요. 나한테 어떤지가 중요해요. 독을 써서 죽는 사람이 있고 치료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근원적인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한다면 선생님, 아버지, 체제, 사회가 주장하는 선악일 뿐이죠. 따라서 우리에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걸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끊임없이 뭐가 맞는지 물어보죠. 그러다가는 평생 남의 명령만 받다가 죽는 거예요.  106-107


우리 모두 '폭력'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어요. 그런데 그 뉘앙스는 다 다르죠. 명확히 규정해야 해요. '오십보백보 모두 다 폭력이다.'라고 말하면 잘못된 거예요. 권력자가 사용하는 전형적인 물타기 수법이에요. 폭력이 나쁘다는 교육을 받다 보니, 정당방위마저 폭력이라고 생각해요. 균형 감각이 필요합니다. 물론 최소한의 폭력에도 균형 감각은 꼭 필요하죠.  108


정신분석학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딱 한 가지예요. 외적인 지배가 모든 개인에게 금기나 금지를 내면화시킨다는 것! 그 내면화가 완성되는 순간, 한 생명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새로 태어나게 되는 거죠. '나는 고유한 나'라고 생각하는 건 헛소리예요.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들 모두 전부 비슷하게 살고 있잖아요. 누가 누군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요.  113


학창 시절만 봐도 '성적 일등'과 '주먹질 일등'이 학교의 권력을 양분해요. 그들은 서로이 영역을 나눠 갖고 침범하지도, 치고받지도 않아요. 상대의 권력을 인정하는 거죠. 흥미롭지 않나요? 경쟁을 강요해서 일등을 상찬하는 사회 구조에서는 일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걸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 말이에요. 주먹 일등, 게임 일등, 저항 일등, 공부 일등, 섹스 일등 ... 일등만이 모든 인정과 존경을 독점하는 사회! 아렉스는 바로 이런 사회가 길러 낸 괴물, 아니 이런 사회가 낳은 적장자라고 할 수 있지요.  115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느 우리 시대에 대한 비판이 될 수도 있어요. 정치권력에는 개기지 못하니 성적 쾌락에만 몰입하는 시대잖아요. 본디 '코미디'란 금기 체계를 건드려서 희열을 주는 거예요. 광대들은 그 옛날에도, 지엄한 왕에게조차 마음대로 시비를 걸 수 있었어요. 그게 광대(피에로)의 역할이었죠. 결국 코미디는 정치와 성(性), 이 모든 것을 건드려야 재미있어져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적 비판을 제대로 할 수 없어요. 그러니 <SNL>등 온갖 개그 프로그램에 오직 '섹스 코미디'만 오르내리는 겁니다. 알렉스의 경우, <베토벤 교향곡 9번>을 통해 정치적 검열을 당한 거죠. 이제 그는 쫄아서 아무것도 못 할 거예요. 따라서 그에게 남은 건 <싱잉 인 더 레인>의 세계뿐이죠. 미국적 자본주의의 세계, 뮤지컬의 세계 말이에요. 어쩌면 스탠리 큐브릭은 이러한 부분들을 건드리고자 했던 것일 수도 있어요. 어쨌든 알렉스는 정치적 영역에서 거의 '거세'를 당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그는 섹스를 꿈꿀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치유됐다.'라고 선언하죠. 정말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도 이렇게 탄생한 것이구나.'하고 깨달았어요.  121


세뇌는 곧 마비입니다. 자기 스스로 어떤 대상에 다가갈 수 없게, 욕망할 수 없게 하는 거예요. 각종 매체를 통해 획일화된 문화가 대량으로 살포되면서 우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 잊게 돼요.  127


폭력에 무감각해지는 것은 그것에 반복적으로 노출됐기 때문이 아닙니다. 상처 난 데를 또 다치면 아프지, 무감각해지지는 않잖아요. 단지 매체의 힘으로 무감각해질 뿐입니다. 현실의 폭력과 매체가 다루는 폭력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물론 현실의 폭력에 대해서도 무각각해질 수는 있어요. 그러나 이때의 무감각은, 매체를 통해 습득한 무감각과는 완연히 다릅니다.  128


검열의 가장 기본적인 단계가 '타인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해요. 그래서 남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자신의 솔직한 모습, 진솔한 욕망을 방출하거나 표현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129


선택을 할 때는 두 갖를 고려해야 해요. 하나,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방향.

둘, 내 삶을 지금처럼 그대로 유지하는 방향. .. 어떤것을 선택하려면 그 선택의 단점을 모두 감당할 것, 그리고 버린 선택의 장점을 전부 포기할 것! 이 정도는 각오해야 해요.  131





배신하지 않는 동물의 왕국을 꿈꾸는 정치 - <살로, 소돔의 120일> 1975 이탈리아 114분,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파솔리니 감독의 논문 <시의 영화>는 오늘날에도 영화 이론을 연구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문헌으로 통해요.  153


금기라는 주제를 다룰 때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사드 후작이죠.  154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라 할 수 있는 걸 인용해 보겠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쾌락을 느낄 수 있는 건 단순히 육체적 쾌락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떤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들의 말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야말로 성욕, 식욕을 능가하는, 즉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보여 주죠.  160-161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 앎의 의지>에서 권력의 문제를 흥미롭게 성찰합니다. 군주의 주권적 힘을 '생살여탈권'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왕이나 군주가 타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 인간이 타인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면, 그런 권력은 분명 신적인 쾌락을 줄 겁니다. 파시스트들은 이러한 상황에 흥분합니다. 그래서 파시스트가 행하는 권력과 폭력의 강도는 점점 더 세질 수밖에 없어요. 마치 무언가에 중독된 것처럼 말이죠. 맞아요.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에, 그것이 주는 쾌락에 중독되어 가는 거예요.

자본주의도 비슷하죠. 돈이 곧 권력이 되는 시대인 겁니다. 돈이면 못 할게 없다는, 즉 갑질의 야망을 품게 돼요. 타인에 대한 배려는 사라지고,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해지죠. 파시즘이 인종주의로 모든 사유를 차단했듯, 자본주의는 돈을 통해 모든 생각을 단순화합니다. "돈 주면 될 것 아니야!" 파시즘과 자본주의는 모두 '한 가지'로 세상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재편하는, 권력의 놀라운 횡포를 보여 줍니다.  162


파시스트들은 소년과 소녀들을 사물로 취급합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가 아름다은 엉덩이를 선별하는 장면입니다. 인간을 상품으로 보는 거이죠. 이러한 시선은 파싯트만 지닌 게 아니에요. 돈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는 부분이죠.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사물화해요. 그런 면에서 파시즘과 자본주의는 서로 연결됩니다. 인간을 사물처럼 대하는 파시즘은, 생며을 돈으로 환산하는 자본주의와 등가를 이루죠.  165


<살로, 소돔의 120일>은 파시즘의 행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예요. 그런데 이걸 정면으로 보지 못한다면 진짜 세상에 대해선 아예 편히 눈감아 버리게 되지 않을까요.  171


'리베르탱(libertin)'이라는 말입니다. 이걸 검색해 보면 '자유연애주의자'라고 나올겁니다.  174 


우리는 열심히 사랑해야 저항할 수 있어요. 남자가 손을 의연히 들어 올리는 장면, 그게 파솔리니가 말하려고 했던 것의 전부라고 봐요. 파시즘에 저항하지 않으면 우리는 강간당하고 똥을 먹게 되고, 누군가를 고발해 가며 죽여야 해요.  178


온몸으로 체험해 본 우여곡절이 없으니, 남의 이야기만 앵무새처럼 읊조리는 거예요.  186


'절차적 민주주의'라는게 있죠? 이 절차들이 우리를 죽여요. 가령 우리가 시위를 한다고 해 봐요. 헌법에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있으니, 당당하게 해도 될 것 같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도로 교통법'을 더 우선시하죠. 씨발, 이게 뭐야? 그래서 불만을 제기했더니, 옳다구나 하면서 소송을 걸어 보래요. 지금 시위하기도 바쁜데, 대법원까지 가야겠어요? 절차를 복잡 미묘하게 만드는 게, 바로 부르주아 사회의 특징이에요. 

소송이 발생하면 대기업이나 자본가들은 당장 변호사를 사죠. 하지만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변호사를 만날 수조차 없어요. 그러니 소송 과정에서 우리는, 약자들은 진이 빠질 수밖에요. 대기업은 변호사에게 소송을 맡기고 다른 일을 하는데, 우리는 생업을 제쳐 두고 재판에 몰입해야 해요. 설령 소송에서 이기도라도 우리는 망한 거죠. 그중 제일 치사한 게 파업했다고 업무 방해죄로 고소하는 놈들이죠. 정말 법대로 끝까지 가면 결국 노동자가 이길 테지만, 법정에서 소송을 이어 가는 수년 동안 그 사람은 뭘 먹고살겠어요? 어느 광고 문구처럼 '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하는 거죠.  187-188


이탈리아 철학자 중에 그람시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람시가 가장 문제시했던 게 바로 '투표를 통해' 무솔리니를 뽑았다는 사실이었어요. 뻔히 전쟁을 일으킬 미친놈을, 무려 선거로 뽑은 거예요! 우리로 따지면 이명박이나 박근혜를 왜 대통령으로 뽑았느냐, 하는 수준의 문제랄까요. 누가 봐도 정리 해고를 하고 임금 피크제를 시행할 사람들인데도 찍잖아요. 그가 또 지적한 게 있었는데, 이탈리아 대중이 크로체라는 작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었어요. 우리나라에 맞게 말하자면, 왜 사람들이 이문열과 신경숙을 그리도 좋아하는지, 의문을 품었던 거죠. 그러니까 좀 진보적이고 삶에 진짜 도움이 되는 쓰디쓴 이야기는 싫어하고, 보수적이고 대중적이기만 한 글을 좋아하느냐는 거였어요.  193-194


사실 우리가 보는 많은 영화들, 그중에서도 '수직적 관계'를 강조하는 영화들은 몽땅 파시즘적이에요. 남편이 부인을 때리고, 아버지가 자식의 결혼에 반대하는 것도 일종의 파시즘이에요. 파시즘이 아닌 건 '수평적 관계'예요. 가령 파시즘의 허구성을 다룬 게 있다면, 바로 홍상수의 영화예요. 가부장적 권력을 휘두르려는 남자 주인공들이 정말 보잘것없이 그려지잖아요.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정치를 다루지 않더라도 제대로 된 감독들은 다 그런 걸 만든다고요. ..

예술과 인문학의 궁극적 귀결은 자유와 사랑이에요. ..

홍상수 감독은 누가 보든 안 보든, 생활 속의 파시즘을 고발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아요. 반면 이문열과 신경숙의 문학은 비난을 피할 수 없죠. 이문열에게는 뿌리 깊은 영웅주의가 있고, 신경숙에게는 남성에게 복종하며 정신 승리만 해 대는 태도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이야기만 읽으려고 해요. 자신의 얘기, 나를 위로해 주는 이야기만 듣고 싶은 거예요. 비정규직이 많다. 취업이 불안하다. 통탄하면서 오히려 그런 책을 읽죠. 가슴을 후벼 파는 작품은 외면하고요. 결국 똥을 던질 수밖에!  194-195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길 바라는 종교 - <비리디아나> 1961 스페인 90분, 루이스 부뉴엘


그가 극도로 혐오한 것은 종교적 도그마, 맹신주의, 교회의 위선과 억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4


제가 가장 흥미롭게 본 건 '줄넘기'예요. 

첫 번째 장면에서 하녀의 딸이 혼자 줄넘기를 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장면에서는, 비리디아나가 소녀와 함께 줄넘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줄넘기는 숙부가 자살할 때 목을 매는 도구로 쓰입니다. 숙부의 집으로 돌아온 비리디아나가 줄넘기를 목격하고, 곧장 장면이 바뀌더니 다시 줄넘기를 넘는 소녀가 나옵니다. 그때 영기 관리를 돕는 남자 하인이 나타나 소녀를 나무라지요. "왜 죽은 사람이 쓴 줄넘기를 가지고 노느냐."라며 말이죠. 그러자 소녀는 "그건 제 것이니까요."라고 당돌하게 대꾸합니다. 결국 소녀는 아랑곳없이 줄넘기를 넘죠. ..

영화 후반부에 갑작스럽게 줄넘기가 다시 등장합니다. 비리디아나는 숙부의 유산을 가지고, 마을 걸인들과 부랑자들을 모아 일종의 생활 공동체를 만듭니다. 그들 중 한 명이 부엌에 있던 줄넘기를 가져다가 자신의 허리끈으로 사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후 이 줄넘기(혹은 허리끈)는 비리디아나가 부랑자들에게 추행을 당하는 장면에서 또다시 등장합니다. 비리디아나가 완력을 쓰는 부랑자들에게 저항하며 붙드는 것이 바로 그 줄넘기인 겁니다.  221-222


한 사회가 경직되고 금기를 강하게 통제할수록 '이건 꼭 이 방법으로만 써야 한다.'라고 규정을 내려 버립니다. 법의 적용도 마찬가지죠. 사회가 강퍅해지루록 원칙만 강조해 댑니다. 여하튼 사물에는, 근본적으로 맥락이 없어요.  223


줄넘기는 단순한 놀이 기구였어요. 그런데 숙부가 그걸로 목을 매단뒤부터, 줄넘기는 죽음과 관련된 하나의 터부가 됩니다. 이제 줄넘기는 죽음을 암시하는 불길한 대상이 된 겁니다. 하지만 소녀로서는 황당했을 겁니다. 줄넘기는 분명 자신의 소유물이었으니까요. 그러니 무엇이 문제냐며 반문하는 거죠. 이 저항은 뭔가 불쾌하고 미묘한 

느낌을 주는 장면입니다. 이런 느낌은, 영화 후반부에 줄넘기가 부랑자의 허리띠로 전용(轉用 구를전 쓸용)되면서 더 큰 불쾌감으로 증폭됩니다.

줄넘기가 소녀의 손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저 잠깐의 놀이 기구였겠죠. 자살의 도구도, 성폭력의 도구도 아니에요. 그저 하나의 줄일 뿐인데 우리는 이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상한 용도로 사용하지요. 이건 부뉴엘이 사물을 통해 우리의 통념을 흔드는 방식입니다. '줄넘기는 놀이 도구에 불과해.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당신이 장면 장면마다 얼마나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보라고. 당신은 줄넘기를 제대로 가지고 놀 줄도 모르잖아. 줄넘기는 한 사람의 자살 도구이면서, 성적 뉘앙스를 지닌 폭력의 흉기이기도 해. 그게 사물의 본성이야. 사물은 사용하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애초에 부여된 본성은 아무것도 없어.  223-224


부뉴엘은 사물에 대한 의미 부여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소녀와 같은 아이가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흔히 사물에 대한 집착을 페티시라고 합니다. 이 말에는 물건을 신격화하는 미신, 중독적인 욕망까지 아우르는 꽤 광범위한 의미가 들어 있어요. 흔히 페티시즘을 변태 성욕쯤으로 여기는데요. 가령 여성의 팬티에만 유독 집착하는 남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의 욕망을 가리켜 페티시즘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사실 페티시즘은 사물에 집착하는 모든 욕망을 가리켜요. 

비리디아나는 예수의 가시 면류관, 십자가, 칼 같은 것들에 집차과죠. 종교적 집착, 성물(聖物 성스러울성 만물물)에 대한 집착도 페티시즘이에요. 

페티시즘은 단순히 변태 성욕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이 돈을 숭배한다면, 돈에 페티시가 있는 거죠.  ..

페티시는 특정 사물에 집착함으로써 발생하는 다양한 우상화 작업이에요. 

부뉴엘은 이러한 페티시즘이야말로 현대인의 본질이라는 점을 보여준 거죠. 동시에 이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덧없고 무의미한 일인지를 보여 주기도 합니다. 

숙부가 지닌 여자 다리에 대한 집착도 당연히 페티시즘이지요. 페티시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결국 자기만의 우상을 품고 있는 겁니다. .. 줄넘기하는 소녀를 달아야 해요. 사물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저 사물일 뿐이에요.  224-225


비리디아나가 집을 비운 사이에 부랑자들이 만찬을 벌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기념사진을 찍는다며 포즈를 취했을 때 나타난 화면 구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과 똑같습니다. ..

인간은 원본을 훼손시키는 걸 참지 못하죠. 그런데 패러디를 활용하는 예술의 가장 놀라운 점은 원본을 '모독'하면서 전혀 새로운 흥미와 가치를 유발한다는 데 있습니다. 

초현실주의가 기치로 내걸었던 것 중 하나가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수많은 예술적, 미적 영역을 훼손하고 모독하는 것이었어요. 모독이 왜 중요하냐고요? 모독은 우리를 원본주의나 절대주의로부터 자유럽게 해 주거든요. 그래서 대통령을 희화한 작품이 많은 곳일수록 민주적 사회인 겁니다.  225-226


일단 어떤 대상을 비판하려면 거기에 매혹돼야 해요. 대뜸 보자마자 생리적으로 '저건 무조건 싫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대상을 제대로 비판할 수 있을까요? 어떤 대상에 흠뻑 빠져 본 사람만이 안팎을 넘나들며 잘 비판할 수 있어요. .. 최악의 비평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호불호만 던지는 거예요.  228


우리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무조건 착하다.'라는 테제에 빠지기 쉬워요. 부자가 나쁘다는 통념처럼, 가난하고 힘없으면 무조건 착하다는 생각 또한 통념이라는 사실을 부뉴엘은 건드리고 있는 거예요. ..

성직자든 누구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위선적인 모습을 가진다는 겁니다.

약자나 소수자는 (약하고 소수이기 때문에) 선할 수밖에 없다는 진영 논리가 생기기도 해요. 그런데 이러한 논리가 더 위험할 수 있죠. 그들을 위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비좁은 테두리 안에 가두는 일이니까요.  231


라캉은 '여자는 히스테리 환자고 남자는 강박증 환자다.'라고 말했어요. 히스테리라는 단어의 어원은 '자궁'이에요. 엄마 말을 잘 듣던 아이가 갑자기 짜증을 내는 거 있죠. 그런 게 바로 히스테리입니다. 히스테리에 걸리는 사람의 특징은 타인의 욕망만 중시하고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는 데에 있어요. 참고 참다가 갑자기 자신의 욕망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바로 이럴 때를 가리켜 '히스테리를 부린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히스테리가 유독 여자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이라고 굳게 믿다가 갑자기 자신의 진짜 욕망을 발견하는 거예요. 

반면 남자는 강박증이에요. 자기 욕망만 중요하다고 여기죠. 가족끼리 산에 가 보면 정확히 알 수 있죠. 오히려 딸들이 항상 산을 잘 올라요. 가족들한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 남자들은 등산을 하다가 힘들면 중간에 퍼져요. 그러고는 아버지한테 이러겠죠. '아우 씨발, 존나 힘들잖아!' 그러면 가족들이 달래요. 그렇게 법석을 놓아도 남자는 쫓겨나지 않아요. 그게 다 가부장제 때문이에요. 그래서 여자들은 집안일을 도우며 부모의 욕망을 잘 맞춰요. 하지만 아들은 안 그래요.  241


비리디아나의 운명도 행복할 것 같지 않아요. 언제쯤 그녀는 자각하게 될까요? 남자와 자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을, 힘 있는 남자로부터 안전을 확보하려는 자신의 욕망을... 그래서 비리디나아는 숙부가 가장 원하는 모습에 계속  맞춰 주려고 하고, 호르헤가 바라는 모습에 결국 자신을 맞추고 마는 히스테릭한 면모를 보이는 겁니다. 그래요. 우리 모두는 성별에 관계없이 비리디아나인지도 모릅니다. 모 두가 히스테리 증상을 가지고 있는 거지요.  243-244


결혼을 왜 해요? 결혼은 '부르주아 제도'예요. 상대의 '성기'에 대한 독점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거예요. 차라리 연애만 하든가, 쿨하게 헤어지든 해야죠. 나중에 이혼하더라도 위자료를 받으면 괜찮다고요? 여러분의 10년, 20년 세월을 1억, 2억에 팔래요? 그런데 대부분 팔아 버리고 말죠. 지금까지 자신의 성기를 사용해 온 사용료를 모두 받아 내는 겁니다. '애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면서요. 이게 마지막 자존심인데도 품위를 지키긴 힘들죠. 오만 가지 얘기를 다 하죠. 돈 몇 푼으로 뭘 하려고 그래요? 순간적으로 보면 돈을 받는 게 좋긴 해요. 그게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딜레마입니다. ..

독실한 종교인이라면 결혼하지 마세요. 그냥 하나님과 순수한 사랑이나 나누세요. 아가페를 하며 살아요. 모든 신은 강한 남성성을 가져요. 내 남자 친구는 늘 바쁘다 하고, 다른 사람한테 눈도 돌려요. 사람이니까. 그러니 인간한테는 아무리 기도를 해도, 내게 완전히 오지 않죠. 그런데 신은 기도만 하면 내 옆에 있어 줘요.  246


순수가 유지되리라는 생각을 하지 마세요! 순수는 순간적인 것일 뿐이에요. 그게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지나치게 깨끗함만 추구하려다 보니, 아예 자기 영역에 아무도 안 들이는 사람조차 있어요. 오직 자기만의 만족을 위해 순수를 지향하는 건 미친 짓이에요. 환대를 위해 순수를 추구해야 맞죠. '집을 깨끗하게 청소해서 친구가 편하게 지내도록 해야지.'라고 생각해야지, '집이 깨끗이 청소되었으니, 너는 함부로 어지럽히면 안 돼!'라고 하는게 말이 되나요? 누군가가 오면 처오를 해야지 나 혼자 깨끗하게 있으려고 노상 쓸고 닦는다면 미친 거 아닌가요?  248


나를 위한 청소만 하지 말고, 타인을 위해 청소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그때부터 종교가 탄생하는 거예요. 나만을 위한 총소, 나만을 위한 순수, 그것이 바로 종교의 감각이니까요...

또 아이가 새로운 마음으로 집 안을 어지럽히길 바라며 청소를 하는 부모가 돼야 해요. 아이한테 집에 오자마자 '발 씻어! 손 씻어!'하면 그 애가 집에 오고 싶겠어요? 괴로울 뿐이죠. 타인을 위한 순수가, 결국 사랑이 아닐까 싶어요. 사랑엔 분명 순수의 요소가 들어가지만, 사랑 자체가 순수인건 아닌 셈이지요. ..

단순하게 정리해 보자면, 사랑이 싹트는 과정은 '더러워지는 것'이에요. 만지고 더듬고, 키스하고 침을 섞는 과정인 거죠. .. 감염되고 섞여야 해요. .. 표백된 사랑을 순수하고 보면 안 돼요.  248-249


인간은 적당히 위선적이고 적절히 위악한 게 맞아요. 관념이 앞서면 힘들죠. 관념이 생긴다는 건, 사실 인간은 선하지만 않다는 걸 반증하는 거예요.  250


필요한 건 솔직해지는 거예요. 위선적이라는 말 자체가 솔직하지 않다는 뜻이죠. 어떤 질문에 답하기 어려울 땐 어렵다고 말하면 돼요. 솔직한 게 제일 좋아요. 위선적으로 살지 않으려면 '나는 못 생겼다.' '엄청 무식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시인하면 돼요. 순간순간 닥쳐오는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더 나아가 그대로 행동할 수 있다면 정말 괜찮은 사람인 거죠. 어쨌든 완벽하게 위선적이지 않은 사람이 되긴 정말 어려워요.  250-251


남한테 욕을 들어도 되고 인정을 안 받아도 되면 위선적이지 않게 돼요. 타인의 인정, 점수, 평가에 민감할수록 약자이고, 미성숙한 겁니다. '누가 감히 날 평가해?' 라는 생각을 품고 있다면, 여러분은 완전한 자아를 가진 거예요. 불교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해탈이라고 하죠. .. 국가와 체제가 우리를 조련하는 방법이 무엇인 줄 아세요? 상과 벌입니다. 칭찬받고 싶어하고 욕먹는 걸 싫어한다는 점을 이용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그렇게 배워 왔잖아요. 부모, 국가가 원하는 것만 죽어라 하고 살잖아요. 미셸 푸코라면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타인의 칭찬에 기뻐하지 말고 남의 욕에 화내지 말라고요. 그럼 정말 완벽한 거죠. 이게 말처럼 쉽진 않지만요.

칭찬과 비판, 이 모든 것에 너무 큰 의미를 두면 안 돼요. 나보다 힘이 센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위선이에요.  251


좌우지간 욕먹었다고 상처받지 말아요. 전부 잊어야 해요. 무슨 말을 들었든 거기에 휘둘리면 안 돼요.  252





마치 그곳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낯선 곳을 찾아 들어가야 한다. 여행이 주는 달콤함은 우리 내면을 지배하던 신이 사라진 그 자리에 살냄새가 나는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260




OUTRO - 시험해 보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착한 사람은 남의 말을 그대로 듣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을 가리켜 착하고 선량하다고 말한다. 결국 착한 사람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의지에 따라 혹은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규칙을 잘 따르는 사람, 혹은 부모든 선생이든 경찰이든 타인이 금지하는 걸 어기지 않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착한 사람이다. 부당한 조건인데도 계약서만 믿고 묵묵히 일하는 사람, 어른들의 몰상식한 대우에도 참고 따르는 고등학생, 갑작스러운 멀미와 현기증이 찾아왔는데도 노약자 지정석에 앉지 못하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여고생, 후미진 곳에서 오줌을 누라고 해도 화장실이 없다며 고추를 잡고 서 있는 어린아이... 정말 착한 사람들이다. 

사실 착한 사람은 길들여진 사람일 뿐이다. 외부에서 강제한 규칙, 혹은 금기가 아예 한 살마의 내면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이제 외부에서 누군가가 완력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내면에 자리를 잡은 규칙이 착한 사람의 행동을 착하게끔 강제하게 된 것이다. 겉으로 보면 외부의 직접적인 강제가 없기에, 착한 사람은 스스로 양심껏 행동하고 있다고 믿기 쉽다. ..결국 착한 사람은 남이 하라는 것만을 하고,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인생을 주체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느 누구도 그렇다고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다. '자발적 복종' 상태의 핵심은, 바로 '복종'에 있으니까 말이다. 심지어 처음 자신에게 규칙을 강요했던 부모님, 선생님, 혹은 국가 기구가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착한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각인된 초자아의 명령에 기꺼이 복종하며 살 것이다. 다니엘 디포가 쓴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 등장하는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갇히고 나서도 영국에서 통용되던 여러 격식들을 자발적으로 수행했던 것처럼 말이다.  267-268


타인들이 나쁘다고 했을 때에만, 우리의 행동은 타자의 이익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행동이 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 평가에 따라 행동하게 될 테다. 자신의 삶에 진짜 좋은 건지 나쁜 것인지, 혹은 자신에게 유쾌한지 불쾌한 일인지를 알려면, 우리는 어떤 규칙이나 금기에 연연하지 말고 직접 도전하고 행동해야만 한다. .. 우리는 더 당당하게 외쳐야 하지 않을까. '시험해 보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268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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