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작품 몇 권을 읽고 그 중에 <불안(Status Anwiety)>이란 책을 읽으며 저자에게 매력을 느꼈다. 그 후에 저자의 작품들을 검색하여 여러권을 더 읽고 있다.
물론 한꺼번에 읽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여건상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ㅈ자의 작품중에 한국에 번역되어 들어온 모든 작품에 대한 검색과 도서관에 책 내용들을 훑는 작업은 하였다.
저자의 사랑에 관한 소설형식의 3부작중 첫 번째 작품인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Essays in Love)>를 읽었었고, 두번째 작품(우리는 사랑일까-The romantic movement)이 아닌 세번째 작품인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여러 책들을 살펴보면서 이 책을 먼저 들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책 내용에 대해 소개 내용을 읽은 것도 아니다. 다만 중간쯤에 실제 인물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막연한 생각으로 지금의 부인과의 사랑에 대한 관찰과 생각을 담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일 먼저 읽었다.
물론 이때까지는 한국말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그러했었다.

시간이 지나며 원서의 제목을 보고는 한국엔 제목부터가 역시 다르구나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목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기대치와 기대방향에 대해 혼란을 주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을 한다. 물론 내생각 뿐일지는 모르나..
원제는 <Kiss & Tell>이다. 언뜻보면 키스와 대화정도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폭로한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헤어진 연인의 과거를 공개함'이라고 표현할 수 도 있을 듯하다. 직역을 하는것보다는 사람들에게(여기서 독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음을 주의하기 바람) 먹히는 제목이 들어와야 하는건 당연한것일 지도 모르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불안>에서 원제를 먼저 확인하고 책을 보았기에 기대치의 방향이 달라지지 않았었는데, 이 번 책은 그러지 못했다. 이건 분명 나의 잘못이다.
저자의 내용에 매력을 느꼈고, 사진을 먼저 보면서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으니..^^

저자의 개인사를 모르기에 지금의 책이 가족인지 아니면 정말 지나간 연인과의 내용인지를 잘 모르겠으나, 실제 사진이 들어가 있기에 놀랍다.
한국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출판이 가능했을까.. 상대에게 동의를 구할때 동의해 줄까.. 아니 실제 지금의 가족이라 하더라도 쉽게 동의를 할 수 있을까..
우여곡절 끝에 출판이 되었다고 해도 사회적인 파장이 꽤나 클것이란 생각이 든다.

저자는 헤어진 이전 연인에게서 '너를 파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 사람이 그렇게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자신에게 강박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말이야. 너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나르시시스트는 자기밖에 사랑할 수 없어. 나도 남자들이 대부분 소통의 실마리를 잘 찾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너의 무능력은 짜증날 정도로 특별했어. 너는 내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떤 것이든 전혀 존중하지 않았어. 모든 것에 늘 고압적이고 독선적인 태도로 접근했지. 나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이기주의자, 자기 귓불보다 멀리 있는 어떤 것에도 공감을 하기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나는 너무 긴 시간을 낭비했어...'(11)이란 내용의 편지를 통해 여성에게 더욱 다가가기 위해 '이사벨'과의 시간들을 통해 관찰해가면서 알아가려 많은 대화와 자신의 생각들을 서술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전기 작품의 형식을 빌어와 그 작품들에 들어갈 내용들과 저자들의 생각들을 이사벨의 전기형식 작품으로 변환해 나가면서 서술하고 있다. 
저자의 많은 지식과 사유는 즐거움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즐거우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주고 있는것이 저자의 매력이란 생각이 든다.

읽으면서 정말 저정도 까지 연인에게 질문들을 해도 괜찮은걸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알아가려면 차라리 저정도의 질문을 자신의 의도에 대한 설명과 함께 던지는 것이 더 좋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읽어 나간다.
나 또한 남자 이기에 여성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다고 생각을 한다. 관련책들도 여러권 읽어보았으나 그것만으로 나와 다른 구조를 가진 부류를 이해한다는건 거의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을 한다. 직접 겪어봐도 아직 그들에 관해 30%도 알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하다.
언제쯤 70%까지 갈 수 있을까.. 그 정도면 그들과 큰 마찰 없이 긴 시간을 즐거움으로 채워나갈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 헤어짐을 예시하면서 끝난다. 완전 공감한다. 
저정도까지 질문하는 건 넘어선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맞은건지, 아니면 이사벨이 다른 복합적인 이유들을 더 많이 가진건지 모르지만 헤어짐을 마주하면서 내용이 끝이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고서도 여자에 대해 지식이나 지혜가 크게 늘어난것 같지는 않다. 책의 원제처럼 폭로를 통해 저자는 어떠한 생각들을 하였으며 그 생각의 부분 부분 들이 마음에 닿았기는 했다.
부러운것은 이들의 사고방식이 우리내 보다는 많이 열려 있다는 것이고, 이것을 배워나가는데는 도움을 많이 받은 느낌이 든다.

이렇게 표현을 하면 여성들이 한숨을 쉬지 않을까..하는 갑작스러운 의문이 든다.
'이런 내용을 보고도 여자에 대해 모르다니'하면서 한 숨을 쉬는 그림이 그려지는건 혼자만의 우려일까..??
꽤나 많은 사람들에게 '무디다' , '눈치없다' , '너무 모른다' 이러한 표현들을 많이 들어서 그런생각이 드는걸까.. 어쩌면 앞서 언급한 저자의 옛 연인이 보낸 편지의 내용이 나에게 적용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더욱 열심히 보려 한 것일지도.. 나의 무의식이 이 책을 먼저 읽게 한 건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나의 무의식은 다 읽고 난 지금 나에게 어느 정도나 실망하고 있을까..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이해해보고, 나 자신을 내 삶이 아닌 다른 삶에 푹 담가보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고, 어린 시절과 꿈을 통해 어떤 사람을 따라가보고, 라파엘전파에서부터 과일 맛이 나는 셔벗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취향을 추적해본다는 생각. 나 스스로 전기를 써보면 어떨까?  18
오직 위인만이 전기의 적합한 소재가 될 수 잇다는 가정은 그대로 유지된다.
200년 전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이 곤혹스러운 만장일치를 잠깐 흔들었지만 이내 무시되고 말았다. 존슨 박사는 '적절하고 충실한 이야기에 담아낼 가치가 없는 삶이란 없다. 모든 사라에게는 그 자신과 똑같은 조건에 잇는 사람이 아주 많으며, 그들에게 자신과 비슷한 사람의 실수와 실패, 회피와 임기응변은 직접적이고 확실한 쓸모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상태란 장식과 위장을 떼어내고 생각하면 매우 균일하여, 인류에게 공통된 것을 제외할 경우 좋든 나쁘든 다른 자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20

나는 유년기를 선형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전기를 시작하는 방법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내 전기가 철저하기를 바랐지만, 그럼에도 여기에는 과거만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와 공존하고 또 현재로부터 나타나는 특정한 방식이 드러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3
절대 인생에 대한 관점(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에번스턴에서 멀리 떨어진 땅에 오래전 살았던 한 아일랜드인을 보는 관점) 자체를 쓰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고, 오히려 편견이나 엉성한 학식에서 나온 관점으로 인한 왜곡으로부터 가능한 한 자유로운 상태에서 삶 자체를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단지 하나의 삶만 있다면, 저닉 작가들이 그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신의 에고와 미뢰의 쓸데없는 간섭에서 멀리 떨어져, 그 삶이 조심스럽게 편견 없이 재구축되도록 하는것이 핵심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삶이 있다.  39
전기의 고상함을 인간적 애착이라는 저열한 영역과 절대 뒤섞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응을 해야 한다면, 애착과 전기를 쓰고자 하는 충동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즉 다른 사람을 완벽히 알고 싶은 충동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애착이 전기를 써나가는 다소간 의식적인 과정(날짜, 특징, 좋아하는 세탁 주기와 간식 등을 파악해 나아가는 것)을 포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전기는 작가와 대상 사이의 다소간 의식적인 감정적 관계를 요구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책을 마무리하는데 필요한 엄청난 에너지를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프로이트는 '전기 작가들은 그들의 주인공에게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고착되어 있다. 많은 경우 그들이 연구의 대상으로 그 주인공을 선택한 것은-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이유로-처음부터 그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뒤에 그들으 ㄴ이상화라는 과제에 에너지를 쏟아, 주인공의 인상에서 개별적인 특징들을 지워버린다. 그 주인공이 평생에 걸쳐 내적이고 외적인 저항들과 싸워온 흔적들을 매끄럽게 다듬어버리고, 그에게 인간적 약점이나 불완전성의 자취를 용납하지 않는다.'  65-66

특정한 벽장이나 다락방 때문에 예정된 경로에서 벗어나 옆길로 새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도대체 그녀의 어머니가 어떤 식으로 바람을 피웠냐고 이사벨에게 물을 때 옆길로 새는 것과 비슷하다. 나의 그런 호기심은 (흔히 그렇듯이, 또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듯이) 나 자신의 삶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내고, 남들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더 선명하게 도드라질 어떤 정체성을 찾아나가려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느 ㄴ사람이나 전기에 대한 관심 가운데 그 근본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친구나 나폴레옹이나 베르디나 W.H. 오든과 얼마나 다를까?' 하는 문제, 따라서 간접적으로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하는 문제의 답을 찾아내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난 부분이 얼마나 될까?  89
자, 그럼 댁의 인생을 갖고 뭘 하고 계시는지 자세히 이야기 좀 해주실래요?  92

누군가에게 과거를 기억하라고 재촉하는 것은 총을 들이대고 재채기를 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진정한 기억은 재채기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25
실제로 과거를 기억할 때는 그런 것들과는 달리 손에 분명히 잡히지 않는 이미지들이 우리를 쫓아다닌다. 심지어 어떤 사건 같은 확실한 것은 전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잇다. 이야기는 쏙 빠져버리고, 기분과 분위기만 기억할 수도 있다. 따라서 과거에 푹 빠져 있으면서도 자신은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일이 흔히 일어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이사벨과 내가 목요일 퇴근 후 파링던 로드 근처 커피숍에 있을 때 그녀는 바로 그런 예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둘 다 사무실에서 종일 수다를 떨고 난 날이면 찾아오곤 하는 침묵의 분위기에 싸여 있있지만, 나는 그녀의 침묵의 길이가 문제의 신호일 수도 잇다는 느낌이 들어 그녀에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가 대답하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어. 있잖아, 이런저런 것들. 사실 아무것도 아니야."
"됐어."
실제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생각하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 아마 잠 다음으로 그것이 가장 인기 있는 소일거리일 것이다.  132
우리는 이야기를 할 때 상대가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여, 한 두 가지 사항을 분명하게 전달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의 의식에서 전개되는 혼란스러운 과정을 공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133
".. 지금 나는 사실 별 생각을 하지 않았어. 그냥 구름 속에 파뭇혀 있었을 뿐이야."  136

남들에 대한 호기심은 자기 성찰을 피해가고자 할 때 애용하는 방법이다. 내적인 투쟁을 덮어버리고 인용을 할 권리나 편지 내용을 사용할 허가를 얻기 위한 싸움을 앞세울 수 있는 것이다.  150
섹스가 친밀성의 상징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두 사람이 친밀해질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상징은 오히려 자신이 상징하는 상태의 실현을 방해할 수도 있었다. 서로 알아가는 더 힘든 과정을 피하는 방법으로 상대와 잘 수도 있으니까. 마치 책을 읽는 일을 면하기 위해 책을 사는 것처럼.
"그럼 행복해지려면 뭔 해야 한다는거야?"
"나도전문가는 아니야. 그냥 상대와 미리 친밀한 경험을 해보지 않고 같이 자버리는 게 반드시 좋은 생각은 아니라는 얘기일 뿐이야."
"예를 들어 어떤 경험?"
"있잖아, 질투를 하고, 욕을 하고, 교활한 면을 보여주고, 토하고, 코를 풀고, 발톱을 깎고."
내가 둔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네 발가락에 무슨...?"
"아냐, 아무 문제 없어."
"그런데?"
"뭐, 발톱을 깎는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건 좀 사적인 거니까. 발톱이 발에 붙어 있으면 그건 괜찮아. 하지만 일단 떨어져 나가면 그건 쓰레기잖아. 예를 들어, 사람 머리에 난 머리카락을 보는 것하고 욕조에 붙어 잇는 머맅카락을 보는 건 다르잖아."
"그런데 왜 발톱을 깎는 게 섹스를 하는 것보다 더 친밀한 거야?"
"섹스를 하는 상대는 그 앞에서 발톱을 깎아도 창피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얘기일 뿐이야."  153
삶의 사적인 부분은 사람을 이해하는 문제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실제 이상으로 과시하려고 한다.  155
하지 못하는 키스가 하는 키스보다 더 흥미로울 수도 있는 것이다.  190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생각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자체의 특질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의 마음 상태와 더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94

공감의 핵심은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능력이라고 한다. 이 행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길은 비뚤어진 시각 때문에 대체로 왜곡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운이 좋고 민첩하면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특권을 누릴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적어도 잠시라도 우리의 상대성을 넘어설 수 있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197

이사벨은 그 무렵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를 다 읽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걸작이 매우 감동적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교환했다. 나는 어떤 책도 이 책만큼 죽음이라는 현실에 가까이 다가가게 해준 적이 없다는 그녀의 의견에 공감했지만, 그럼에도 나느 ㄴ그녀가 이반 일리치를, 그리고 그가 살았던 집과 그의 부인이나 가족의 얼굴을 어떻게 상상했느냐 하는 괴상한 질문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반적인 문학적 토론을 넘어, 단지 도덕성, 상징, 파국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과 사람들, 또 방을 어떻게 보았느냐, 그런 무대용 소도구들이 너의 삶의 어디에서 유래했느냐 하는 지점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206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주파수가 다르고, 주어진 환경에서 눈여겨보는 것도 다르다.  208
사람들이 상황을 다양하게 해석하고, 그런 뒤에 해석보다는 상황을 놓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는 방식을 증후적으로 보여 주기도 한다. '이성적(rational)'이라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 이 말은 이사벨의 사전에서는 이런 뜻이고 내 사전에서는 저런 뜻이기 때문에, 내가 그녀를 매우 '이성적'이라고 칭찬하면 그녀는 그 말이 욕이 아닌가 의심한다.
그녀의 사전에는
'형용사 
1. 따분하고 현학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2. 감정에 대립되며, 전통적인 가족의 이분법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의 여동생은 감정적인 사람이고, 그녀는 이성적인 사람이다.
3. 가이가 그녀에게 한 적이 있는 욕이다.'
그러나 내가 전달하고자 한 것은 내 사전에서 정의된 항목이다.
'형용사
1. 고귀한 정신에게 바치는 찬사.
2. 조지 엘리엇, 마리퀴리, 버지니아 울프는 이성적이다.
3. 감정과 양립하고, 감정을 고양할 수 있다.'
이런 차이에서 발생한 작은 갈등은 하나의 사건이 서로 다른 설명을 낳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209-210

존슨박사는 '우리 모두 똑같은 동기에 자극을 받고, 똑같은 오류에 속고 희망에 힘을 얻고, 위험에 막히고, 욕망에 휩쓸리고, 쾌락의 유혹을 받는다.'
존슨은 사람들이 서로 다르지만 그럼에도 똑같은 단일한 가족에 속해 있으며, 따라서 인간 공동체로 가는 여권을 기초로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당신의 동기를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내 베개 밑에서 비슷한 동기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 안에서 똑같은 경험을 발견하여 당신의 경험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이 사랑 때문에 얼마아 괴로웠는지 안다. 나 또한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 저녁을 견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의 질투를 인정한다. 나 또한 나의 부족한 면으로 인해 겪은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232-233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을 직접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비슷한 상황에서 느낄 만한 것을 생각하여 그들이 영향을 받는 방식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 형제가 고문을 받고 있다 해도, 우리 자신이 편안하다면 우리는 그가 겪는 고통을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오직 상상에 의해서만 그가 느끼는 고통에 대한 개념을 형성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상상에 의해 우리 자신을 그의 상황에 집어넣고 우리 자신이 똑같은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한다.'
상상으로 남들과 함게 고통을 겪는 것의 미덕에도 불구하고, 베개 이론의 우울한 전제는 남들의 경험을 진정으로 상상하려면 충분한 경험이 축적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축적된 경험만으로는 절대 우리 자신을 넘어선 곳에서 만나는 감정들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전제는 우울할 수밖에 없다.  233
사람들은 자신이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도 우리가 그들의 경험이 어떤 것이지 알아야 한다는 가정 때문에 자기 경험의 본질에 관해 입도 뻥긋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삐치기 잘하는 사람은 말을 하거나 비유를 들거나 설명을 하지 않아도 자신이 남들에게 이해받을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기 쉽다. 말을 한다는 것은 말 이전의 더 친밀한 수준의 소통이 좌절되었다는 증거일 뿐이라는 것이다. 직관이 고장이 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목청으 ㄹ가다듬어야 하며, 따라서 우리의 목소리는 우리의 외로움을 일깨울 위험이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직접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235

누구나 감추는 것이 있다. 누구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어떤면을 알면 그 후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욕구 뒤에는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이 알려지면 우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놓여 있다. 그래서 속임수를 쓰는 바람에 이따금씩 비밀이 드러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기게 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게 되면 부모 앞에 선 아이처럼 열등한 위치에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투명성에 대한 공포, 다른 사람이 선태긔 여지를 주지 않고 우리의 비밀을 알아낼 것이라는 공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공개를 좌우하는 주인이라는 생각, 우리가 남들보다 우리 자신을 잘 안다는 생각 때무넹 점차 줄어들게 된다.  240-241

어떤 사람의 행동이 중요할수록 그 사람의 하찮은 것들도 흥미를 자아낸다.  301
인간은 세 가지 전기적 범주로 나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부터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i] 특별하지만 평범한 일(의자에 앉거나, 자식을 낳거나)을 하는 것.
[ii] 평범하지만 특별한 일(살인을 하거나, 복권에 당첨되거나)을 하는 것.
[iii] 평범하면서 평범한 일(포테이토칩을 먹거나 우표를 사거나)을 하는 것.  302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두 노부인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한쪽 여자의 남편에게 줄 생일 선물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래리한테 뭘 해줄 거야?"
"모르겠어. 올해는 아무 생각이 안 떠오르네."
"책을 사주는 게 어때?"
"그럼 무슨 얘기가 나올지 뻔해."
"뭐라고 하는데?"
"이럴거야. '내가 장님이고 귀머거리인 것도 모자라, 술꾼으로 까지 만들려는 거야?'"
굳이 가서 확인할 필요도 없이,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어떻게 반응할지 정확하게 아는 것. 이것이 어떤 사람을 충분히 잘 안다는 완벽한 상징 아닐까? 가끔 오랜 결혼 생활의 우울한 특징으로, 바람을 피우거나 도예 강좌에 등록하기 직전에 나타나는 조짐으로 간주되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이 시작한 말을 정확하게 마무리하는 드문 기술에는 큰 지혜가 담겨 있다.  316

"나도 왜 내가 머리를 올리지 않는지 모르겠어. 어쩌면 올려야 할지도 몰라. 어쩌면 그게 더 나을지도 몰라, 그건 내가 왜 치즈를 정육면체로 자르는지, 내 우편번호의 끝자리가 무엇인지, 나무 빗을 어디서 샀는지, 직장까지 거리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내 자명종에 어떤 배터리가 들어가는지, 왜 나는 화장실에서 뭘 못 읽는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야. 낳산테는 나도 이해 못하는 게 많아. 솔직히 말하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도 많고. 왜 너한테는 모든 게 그렇게 분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마치 사람들의 삶이 그 말도 안 되는 전기 안에 요약 정리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나한테는 나 자신도 납득할 수 없고 당연히 너한테도 납득이 안 될 괴상한 것들이 가득해. 나도 독서를 더 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TV 보는 게 더 편해. 나한테 잘 대해주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툴툴거리는 사람들이 한번 달려들어보고 싶다는 의욕을 더 자극해. 나는 동정심을 발휘하고 싶지만, 행복이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다는 걸 알아.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싶지만, 차가 더 편해. 아기를 낳고 싶지만, 어머니가 되는 게 무서워. 내 인생에서 무너가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8시 15분이 지났기 때문에 이러다 지하철을 놓치는 게 아닌가 안달하고 있을 뿐이야."  330-331


옮기고 나서
사람들을 알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공감하게 되고, 공감하면 사랑하게 되느 ㄴ것일까? 다시 말해서, 아는 만큼 공감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 그관계를 떠나, 이 가정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사람을 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332
'내 글은 모두 일종의 자서전이죠. 나는 늘 독자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관련을 맺는 것, 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글을 쓰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아시아나 기내지 2010년 4월 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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