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글 - 수 많은 '처음'

수많은 처음이란 결국 끊임없는 성찰(省察 살필성 살필찰)이 나일 수 없습니다.  12







  







우리는 새로운 꿈을 설계하기 전에 먼저 모든 종류의 꿈에서 깨어 나야 합니다. 

꿈보다 깸이 먼저입니다.

꿈은 꾸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서, 누구한테서 꾸어올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꿈과 동시에 갚을 준비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깸은 여럿이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집단적 몽유(夢遊 꿈몽 놀유)는 집단적 각성(覺醒 깨달을각 술깰성)에 의해서만 깨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6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 다할진 착할선 다할진 아름다울미)라 합니다. 목표가 바르지 않고 그 과정이 바를 수가 없으며, 반대로 그 과정이 바르지 않고 그 목표가 바르지 못합니다. 목표와 과정은 하나입니다.  31


바둑에서는 집이 크면 이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는 집이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한다고 합니다. 사람의 크기를 측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사람과 집의 크기를 비교하는 까닭은 짐작이 갑니다. 비슷해야 하는 것은 사람과 집의 크기만이 아닙니다. 사람과 그 사람이 앉아 있는 의자의 크기도 비슷해야 합니다. 의상도 마찬가지입니다.  42


진정한 대환느 애정으로 포용하는 것입니다.  44


높은 곳에서 일할 때의 어려움은 무엇보다도 글씨가 바른지 비뚤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물어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46


우공이산(愚公移山) - 어리석은 사람의 우직함이 세상을 바꾸어 갑니다.  53


모든 시내가 바다를 배운다는 것은 모든 시내가 바다를 향하여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는 뜻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백천학해(百川學海 일백백 내천 배울학 바다해)  55


오늘 저녁의 일몰(日沒)에서 내일 아침의 일출(日出)을 읽는 마음이 지성(知性)입니다.  63


옛사람들에게는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말라는 경구가 있었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거울에 비치는 겉 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경어인(鏡於人 거울경 어조사어 사람인), 모름지기 사람들 속에 자신을 세우고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추어 보기를 가르치는 경구입니다. 무감어수(無鑑於수 없을무 거울감 어조사어 물수)  76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

<주역> 사상의 핵심입니다. 궁극에 이르면 변화하고, 변화하면 열리게 되며, 여려 있으면 오래간다는 뜻입니다. 양적 축적은 결국 질적 변화를 가져오며, 질적 변화가 막힌 상황을 열어 줍니다. 그리고 열려 있을 때만이 그 생명이 지속됩니다. 부단한 혁신이 교훈입니다.  80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역>의 지산겸(地山謙 땅지 뫼산 겸손할겸) 괘는 땅속에 산(山)이 있는 형상입니다. 땅속에 산이 있다니 자연현상과는 모순인 듯합니다. 해설에는 "땅속에 산이 있으니 겸손하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많은 데를 덜어 적은 데에 더하고 사물을 알맞게 하고 고르게 베푼다."고 합니다. 우뚝 솟은 산을 땅속에 숨기고 있어서 겸손하다고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산을 덜어서 낮은 곳을 메워 평지로 만드는 것을 뜻하는지도 모릅니다. "겸손은 높이 있을 때에 빛나고, 낮은 곳에 처할 때에도 사람들이 함부로 넘지 못 한다." 그러기에 겸손은 "군자의 완성"이다. 가히 최고의 헌사라 하겠습니다.  82


물건을 갖고 있는 손은 손이 아닙니다. 더구나 일손은 아닙니다. 갖고 있는 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손이 자유로워집니다. 빈손이 일손입니다. 그리고 돕는 손입니다.  98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 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116


속도는 가속으로 가속은 질주로 이어집니다. 자동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1m의 코스모스 길은 한 개의 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이 가을을 남김없이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꽃길이 됩니다.  119


무념무상은 정신의 피로를 회복하는 빈공간입니다. 잠이 육체의 피로를 회복하는 이완의 정점인 것과 같습니다. 이 비움과 이완이야말로 '생각하는 공간'입니다. 

생각은 답습의 단절이고 기존(旣存 이미기 있을존)의 해체이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우리들의 조작가능성 바깥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만나는 세계를 서둘러 개념화하고 분석하기전에 당혹감 그 자체에 충실해야 합니다. 빈공간을 만들어 그 속에 무심히 앉아 있는 것 그것이 생각의 정점입니다.  120


물은 빈 곳을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 결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차곡차곡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영과후진(盈科後進 찰영 과정과 뒤후 나아갈진))  124


천 개의 손에는 천 개의 눈이 박혀 있었습니다. 천수천안(千手千眼 일천천 손수 일천천 눈안)이었습니다. 그냥 맨손이 아니라 눈이 달린 손이었습니다. 눈이 달린 손은 맹목(盲目 소경맹 눈목)이 아닙니다. 생각이 있는 손입니다. 마음이 있는 손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능력이 있는 사람이 수많은 손을 가진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마음이 있는 손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128


"색은 마음이 보는 것. 세상에는 흰 색과 검은 색 밖에 없는 것이야. 선 아니면 악일 뿐이야."

"흑백은 아예 색이 아니야. 색을 본다는 것은 우산을 먼저 보고 비를 나중에 보는 어리석음이야. 색은 흑백을 풍부하게 사는 데 써야 하는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홀리고 어지럽게 할 뿐이야. '진리'는 간 데 없고 '진리들'만 난무하게 되는 것이야."

그렇습니다. 사람의 눈동자는 95%가 흑백을 인식하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고 색을 인식하는 부분은 불과 5%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134


사랑은 사전(事前 일사 앞전)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사후(事後 일사 뒤후)에 경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경작되지 이전이라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그 이후라면 새삼스레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은 불모의 땅에서도 사랑을 경작한다는 사실입니다.  138


풍요보다 궁핍이 기쁨보다는 아픔이 우리를 삶의 진상에 마주세웁니다. 그리고 삶의 진상은 다시 삼엄한 대립물이 되어 우리 자신을 냉정하게 대면하게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냉정한 인식은 비정한 것이기는 하지만 빈약한 추수(秋收 가을추 거둘수)에도 아랑곳없이 스스로를 간추려보게 하는 용기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아픈 기억을 잊는 것은 지혜입니다. 아픈 기억을 대면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144


중요한 것은 '나아가면서 길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여기'서부터 길을 만들기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나마도 동시대의 평범한 사람들과 더불어 만들어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148


실패가 있는 미완(未完 아닐미 완전할완)이 삶의 참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삶은 반성이며 가능성이며 항상 새로운 시작입니다.  153


'성을 쌓는자 망하고 길을 떠나는 자 흥하리라' 유목주의의 금언입니다.

창조는 변방에서 이루어집니다. 중심주는 지키는 것에 급급할 뿐입니다. 변방이 창조공간입니다.

그러나 변방이 창조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중심부에 대한 컴플랙스가 없어야 합니다.

컴플랙스가 청산되지 않은 변방은 중심부보다 더욱 완고한 교조(敎條 가르칠교 곁가지조)의 아성이 될 뿐입니다.  156


고행이 공부가 되기도 하고, 방황과 고뇌가 성찰과 각성이 되기도 합니다. 공부 아닌 것이 없고 공부하지 않는 생명은 없습니다. 달팽이도 공부합니다. 지난여름 폭풍 속에서 세찬 비바람 견디며 열심히 세계를 인식하고 자신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공부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 형식입니다.  170


아메리카 인디언은 말을 멈추고 달려온 길을 되돌아봅니다. 영혼이 따라오기를 기다립니다. 

공부는 영혼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노인 목수가 그리는 집 그림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리는 순서가 판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반대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을 맨 나중에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189


우리가 훌륭한 사상을 갖기가 어렵다고 하는 까닭은 그 사상 자체가 무슨 난해한 내용이나 복잡한 체계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상이란 그것이 내용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 실현된 것만큼의 사상만이 자기 것이며 그 나머지는 아무리 강론하고 공감하더라도 결코 자기 것이 아닙니다.  203


각 방마다 사정이 비슷하다면 아마 한 방에 두 개 또는 세 개씩, 그러니까 20~30개 정도의 수도꼭지가 있었으 ㄹ것으로 계산됩니다. 20~30개의 수도꼭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물은 부족하고 세면장의 아우성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동 전체 인원이 150명이니까 수도꼭지가 150개 있으면 해결될 것 같았습니다. 비상용으로 한 개씩 더 가져야 한다면 300개, 300개가 있으면 물 문제는 해결될 것 같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이것은 교도소의 수도꼭지 얘기가 아닙니다. 수도꼭지가 만약 상품으로 거래된다면 여섯 개 대신에 300개를 만들어 팔 수 있는 구조가 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해지는 물질적인 낭비를 풍자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생산하는 상품이 수도꼭지 하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수많은 상품이 마치 수도꼭지와 같은 형태로 생산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207



"없이 사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사정을 구구절절 다 얘기하면서 살아요? 그냥 욕먹으면서 사는 거지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대개 먹물들은 자기의 사정을 자상하게 설명하고 변명까지 합니다. 못 배운 사람들은 변명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짧은 것이라 하더라도 자기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사람이 아예 없습니다. 그냥 단념하고 욕먹으면서 살 각오를 합니다. 나는 그의 그러한 태도가 바로 춘풍추상이라는 고고한 선비들의 윤리의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정은 잘 알지 못합니다. 반면에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세심한 사정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불가피했던 수많은 이유들에 대해서 소상하게 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추상같이 엄격하고 자기에게는 춘풍처럼 관대합니다. '대인충푼 지기추상'이란 금언은 바로 이와 같은 자기중심적 관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211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합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233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공존의 철학이 화(和 화할화)입니다. 반대로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동화하려는 패권의 논리가 동(同 한가지동)입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 화할화 말이을이 아닐부 한가지동)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237


세상 사람들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246


미셀 푸코가 지적하듯이, 자유로운 영혼이 근대사회를 구성하는 감옥, 군대, 병원, 학교, 공장의 모든 시스템을 통과하면 반듯하고 조그마한, 계량화되고 규격화된 주체가 됩니다. 지금은 포섭 기제가 굉장합니다. 옛날에는 물리적 강제로 사람들을 규제했지만 지금은 그런 규제가 없습니다. 대단히 자유롭습니다. 감성 자체를 포획해 버립니다.  259


자유롭고 올바른 생각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가 갇혀 있는 문맥(文脈 글월문 맥맥)을 벗어나야 합니다. 문맥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당대의 문맥을 깨닫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중세 사람들은 중세 쳔년 동안 마녀 문맥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우리 시대의 문맥을 깨달아야 합니다. 탈문맥(脫文脈 벗을탈 글월문 맥맥)과 탈주(脫走 벗을탈 달릴주), 이것은 어느 시대에도 진리입니다.  260


공부는 망치로 합니다. 갇혀 있는 생각의 틀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262


공부의 옛글자는 사람이 도구를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일이 공부입니다.

공부란 삶을 통하여 터득하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리고 세계와 인간의 변화입니다.

공부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의 존재형식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존재형식은 부단한 변화입니다.  263


생각하면 여행만 여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 하루하루가 여행이라고 생각힙니다.

소통과 변화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 형식입니다.

부단히 만나고, 

부단히 소통하고,

부단히 변화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가슴에서 다시 발까지의 여행이 우리의 삶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만 못하고,

마음 좋은 사람이 발 좋은 사람만 못합니다.  264


책은 반드시 세 번 읽어야 합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모든 필자는 당대의 사회역사적 토대에 

발딛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를 읽어야 합니다.

독자 자신을 읽어야하는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서는 새로운 탄생입니다.

필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탈주(脫走 벗을탈 달리주)입니다.

진정한 독서는 삼독입니다.  266


책상은 그것을 위한 디딤돌일 뿐입니다. 모든 시대의 책상은 당대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장치입니다. 책상 위에 올라서는 것은 '독립'입니다.-죽은시인의사회  285


우리는 누군가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스승으로 살아갑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삶의 연쇄(連鎖 연결할연 쇠사슬쇄) 속에서 자신을 깨닫게 됩니다.  287


소혹성에서 온 어린왕자는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관계맺음이 없이 길들이는 것이나 불평등한 관계로 길들여지는 것은 본질에 있어서 억압입니다. 관계맺음의 진정한 의미는 공유입니다. 한 개의 나무의자를 나누어 앉는 것이며, 같은 창문에서 바라보는 것이며, 같은 언덕에 오르는 동반입니다.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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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공부

저자
하승창 지음
출판사
상상너머 | 2011-11-17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참된 삶과 세상, 사람에 대한 아주 특별한 멘토링!『지금 우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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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 기록 보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공부란 무엇일까?

시대의 가치관과 일반화에 근거한 공부일 것이다. 무작정 따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평가하여 더 나은 방법을 배우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꽤나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공부는 우리의 사회 전반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찾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공부들을 하는것이 어려운 현실이다.

그럼에도 기득권층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더 많은 세뇌와 노동력을 착취해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쉬운 일도 아니고 감추어진 것이긴 하지만 조금의 노력만으로도 우리는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

때론 매체를 통해 때론 책을 통해 때론 소셜미디어를 통해 ... 여러가지 방법으로 우리는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어느정도 조종을 당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멋진 신세계>에서 처럼 태어나기 전부터 조작이 되고 어린시절부터 세뇌되어 가는 정도는 아닐테지만, 우리는 어린시절부터 길들여져 가고 있는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무엇에 길들여져 가고 있을까?

돈, 이기심, 독자적존재, ... 

속된말로 '있는놈'들이 그들의 영역을 침해 받지 않기 위해 쳐 놓은 범주안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슨 그런 모함성 발언인가하는 생각이 들지는 모르지만 실제 사회전체를 관찰하게 되면 발견하게 되는 진실이다.

현 시대의 '신자유주의'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경제강국들이 자국의 기업들을 살리기 위해 주창하는 정책이지 않은가?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한미FTA를 해서 득을 보는것은 서민들의 생활에서 가장 쉽게 접하는 소소한 몇 가지 득을 보고, 큰 것들을 내 주고 있는데, 관심을 두지 않고 보면 좋아 보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갈 수록 그들의 영역 안에서 우리는 허우적 거릴 수밖에 없어지는 구조.

생활을 하기 위해 직장에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기업의 상품을 사면서 기업에 다시 건네야 하는구조.

'당연히 생활에 필요한 것을 사야하는것 아닌가?' 맞다. 사야 한다. 하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얼마나 되는가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보다 더 큰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길들여져 간다는 점이다.

그들 원하는데로 변해가는 세상 결국은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멋진 신세계>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주체적인 삶이 아니라 신도 아닌 그들을 신처럼 만들어 부조리한 세상을 만들어가는데 일조하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

그래서 책에서는 말한다.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힘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꿈꾸는 순간 변화를 향한 우리의 열망은 현실이 될 수 있다.

변화와 공존, 정의와 행복이라는 우리 시대 가장 뜨거운 쟁점과 화두에 대해 함게 고민하는 시도.'가 필요한 것이라고.


우리가 변해가야 하는것과 변해가서는 안 되는것을 생각해야 한다.

진짜 대학에서 우리가 무엇을 알아가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사회적 이슈가 왜 일어나게 되는것인지 내면을 볼 수 있는것이 중요하지, 정치 핑계만 대고 있는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의는 함께이지 나만이 아니란 사실을 기억하자고 한다.

우리는 행복해 보이고 싶은지 행복할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한다.

소통이 필요한데 어떠한 소통이 필요한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자고 한다.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런 세력이 되기를 주저하고 새로운 세력을 기다리고만 있는 걸까?


무기력한 것은 우리의 원래 모습이 아니라 세상에 치여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도덕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주위를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기르는것이 기계적인 공부보다 필요한 것은 누구나 알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것이 우리의 인성이 변해서인가 아니면 그렇게 변하도록 만든 세상의 조종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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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승창 - 세상을 바꾸자, 언제? 롸잇나우!(공부의 장을 열며)

다른 정치 세력이라고 해도 차이는 별반 없어 새로운 희망을 주고 있지는 못하다. 몇몇 정치인들이 몸으로 함께 부딪히는 '고마운' 정치 활동을 해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위로는 될지언정 문제를 해결해주고 있지는 못하다. 영향력이 약해진 시민단체들은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해도 그렇게 과거처럼 돋보이지도 않는다.

누가 대신해주지 않는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세상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 말하고 우리 스스로 매듭을 풀어가야 한다.  7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힘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꿈꾸는 순간 변화를 향한 우리의 열망은 현실이 될 수 있다.

변화와 공존, 정의와 행복이라는 우리 시대 가장 뜨거운 쟁점과 화두에 대해 함게 고민하는 시도.  8



"모든 것의 시작은 위험하다. 그러나 무엇을 막론하고,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 프리드리히 니체



신영복 - 변화와 불변, 강물처럼 

"삶은 흐르는 강물입니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흐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부딪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텅 빈 사랑입니다." - 수많은 소리와 풍경을 담은 잠들지 않는 물처럼, 신영복  14

우선 변화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뼈대를 지키자', '사람'  17

미셸 푸코는 감옥이란 건 물론 범죄자들을 격리 구금하는 공간이나 시설로 알고 있지만 사실 감옥은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은 갇히지 않았다는 착각을 하게 하는 그런 정치적 장치라고 말입니다.(미셸푸코는 감옥이 문명의 기초가 되는 가장 기본적인 틀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책<감시와 처벌>에서 감옥을 정점으로 하는 감시, 처벌 기구인 가정, 학교, 군대, 병원, 공장 등을 분석하고 사실상 근대사회를 감금사회, 관리사회, 처벌사회, 감시사회로 바라보았다. 푸코에 따르면 우리를 길들여 사회가 바라는 인간으로 탈바꿈시키는 학교나 군대, 아니 사회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라고 할 수 있다.)  21

'역사는 변방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25

중요한 것은 광대한 변방 영역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여럿이 같이 가는 것입니다. 여럿이 함께 가되 속도, 목표, 효율보다는, 그 과정 자체가 인간적이고 아름답고 가치 있어야 됩니다. 

길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도로'가 속도와 효율 자본의 논리라면, '길'은 인간적인 논리 아닐까요? 도로는 직선이지만 길이 직선으로 되어 있는 건 없습니다. 동물들도 대개는 곡선으로 나아갑니다. 냄새도 맡고, 소변도 남기면서 그렇게 가거든요.  26



신영복 - 새로운 변화, 새로운 창조성은 변방에서

새로운 변화, 새로운 창조성은 늘 변방에서 나타납니다. 중심부는 언제나 기득권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는 영역입니다. 중심부에서는 창조적인 변화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의 전개 과정을 보더라도 문명의 중심부는 늘 변방으로, 변방으로 옮아갔어요. 왜 그러냐면 중심부의 저항이 완고할 뿐 아니라 변방은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새로운 것이 태동할 수 있는 창조의 지반이거든요.

하지만 지금 논의되고 있는 연대연합에 관한 이야기는 주로 기존의 집단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일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연합이 그 바깥에서 이루어져야 된다고 봐요. 바깥이라는 것은 반드시 공간적, 물리적인 외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이해관계 집단이 자기 영역들을 과감하게 개방하고 제거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봐요.

알랭 바디우는 탈근대 철학자 가운데 주체 문제를 고민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의 탈근대 담론의 핵심은 '주체해체'입니다. 바디우는 주체해체가 가져오는 무정부성, 무장해제에 대한 위험성을 간파하고 있지요. 주체는 기존의 주체를 승계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원래 주체는 후사건적 실천 과정에서 형성된다고 주장해요. 기존의 진리 체계의 바깥에서 사건으로 돌출하고 그 사건에 충실한 실천가들의 꾸준한 노력이 사후적으로 주체를 만들어낸다는 거죠.(알랭 바디우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주류가 된 들뢰즈에 반대하여 '진리'와 '보편성'을 주장하는 플라톤주의적 전통과 이성적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데카르트주의적 전통을 잇는 프랑스 철학자이다. 알랭 바디우는 주체를 일컬어 '진리의 투사'라고 말한다. 즉, 주체는 진리라고 믿는 것에 대해 충실성을 다하는 상태이며 주체는 존재론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34

외부와 바깥, 변방과 마이너리티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35

먼저 우리 인식의 틀이라든가 우리의 정서를 바꾸어야 해요. 사람이란 게 자기 경험에 갇히기 쉽지요. 우리가 자주 듣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수사는 한마디로 자기 경험 지상주의죠. 좁은 틀에 갇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의 개인적인 경험, 또 우리 시대가 갇혀 있는 문맥, 이걸 깨뜨리는 게 필요합니다. 그게 아주 중요합니다.  37



백낙청 - 원(願 원할 원)을 말하다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 - 전태일

"기본적인 상식이랄까 교양이랄까 인간적인 예의나 염치, 이런 것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지도 되고 평화도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지요." - 새로운 시대의 열쇠란, 백낙청



천준호 - 우리가 꿈꾸는 나라

한국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 정치가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굉장히 넓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치는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민들의 열망은 높은데, 현재의 정당들이 정치를 바꾸는 과저에선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그 때문에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개입해서 정치를 변화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요?  54



정수현 - 진짜 대학이란 무엇인가?

어떤 지점들을 Re디지인해야 하나?

사회 안에서 대학의 가장 바람직한 역할은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또한 대학 시절만큼은 우리 시대의 바람직한 '가치'에 대해서 끊임없이 묻고 배우고 관계를 맺는 학문의 장이 되어야 해요.

하지만 오늘날 대학들은 평가 시스템과 같은 성과주의나 순위 매기기(몸값 높이기)에 급급한 채 실용적이고 실무적인 과목에만 집중하고 있어요. 인문학의 위기나 기초과학 및 다양한 분야에서 고르게 인재들이 배출되지 못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대학이 '취업학원'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은 부끄럽지만 사실이 되어 가고 있어요.  62

Re디자인을 위한 주요한 의제로는?

첫 번째는 한국 대학들의 구조적 문제(대학생 당사자 권리찾기, 대학의 가치 철학과 경영 방식 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현재 대학이 배움의 장으로서 적절하게 기능하고 있는지, 학생 주체들이 설 곳이 얼마나 제대로 마련되어 있는지, 기업화된 대학들로 인해서 생길 미래의 문제들은 무엇인지 가감없이 이야기 나누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두 번째는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주체들의 역할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즉, 가장 중요한 대학 주체인 대학생들과 교수들, 대학 경영진들, 일반 시민사회, 언론, 정책결정자 등 각각이 대학이라는 공간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 필요한 방안을 다자적 접근으로 마련하는 것입니다.  64



조성주 - 청년에게 '빚'이 아닌 '빛'을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 질러!" 사람들은 아프니까 청춘이고, 청춘은 원래 방황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사회구조적으로 청년들이 자연스레 연령이 높아지면서 취업도 되고 가족도 꾸리고 하는 것이 가능할 때 할 수 있는 위로입니다.  75



"스스로 배울 생각이 있는 한, 천지만물 중 하나도 스승이 아닌 것은 없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스승이 있다. 하나는 대자연, 둘째는 인간, 셋째는 사물이다." - 장 자크 루소



박웅현 - 공존! 가슴의 울림으로

B.C. 10,000년부터 시작해서 수평을 달리던 인구곡선이 산업혁명 직후부터 해서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개체 수가 갑자기 확늘어나니 다른 데에 피해가 생길 수밖에 없는 거, 이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거 같습니다.  91



박웅현 -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공부

전 인문학이 아직 뭔지 모르겠어요. 국문학자들이 들으면 "이놈!" 할지 모르겠지만, 문사철만 인문학인가요? 그럼 물리학 같은 건 인문학이 아닌가요? 결국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이런 대화, 시장 아줌마의 살아나가는 모습, 요즘 뜨는 음악의 패턴, 현대 그림의 흐름 이런 게 다 인문학인 것 같아요.  105



이강오 - 한강변에 원전이 세워진다면

식량을 얻기 위해 한 방울의 석유도 필요치 않던 50년 전과 1칼로리의 음식을 섭취하는 데 10칼로리의 석유가 필요한 오늘날, 3억 년 전 석탄기의 태양이 422년 동안 보내준 빛 에너지를 소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 단 1년.

지구 전체 에너지 소비가 공급을 앞질러 '에너지피크'에 도달할 2060년의 미래에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써야 하는 유서는?

1970년대 중반부터 풍력과 태양광 등 재생가능에너지 기술에 관심을 기울여 온 독일은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직후 본격적인 탈원전 계획을 세우고 2002년에는 탈원자력법을 시행했다. 그러나 산엽계의 반발과 고유가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대안으로 전 세계적으로 원전 르네상스가 일면서 독일 정부는 핵발전소 가동 시한을 평균 12년을 더 연장하려 했다. 그러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다시 탈원전 정책으로 돌아가 2022년까지 독일 내 모든 핵발전소를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독일 그린피스는 '지나치게 느리다'고 반박하며 2015년까지 핵에너지로부터의 탈피가 가능하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보고서는 2040년까지 모든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쇄와 2050년까지 재생가능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다.  121

좀 더 근본주의적인 입방으로 보면 그린피스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더 빠르게 진보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만 문제해결이 가능할 것 같아요.

우리가 마시는 콜라 한 잔 같은 경우에도 1칼로리를 위해 20칼로리에 해당하는 석유를 쓰고 있다고 해요.

미국의 '커뮤니티솔루션'이라는 단체에서는 무한경쟁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를 지역공동체 경제 중심으로 바꾸어야만 문제해결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영국 정부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시스템은 소형 열병합발전소인데요. 대형 발전 시스템에서 소형 열병합발전소로 전환하면 기본적으로 에너지소비 30%를 줄일 수 있고, 소비를 감축하여 에너지믹스 체계를 단계적으로 신재생으로 바꾸면 에너지 문제에 충분히 대응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죠.  122



황윤옥 - 분단, 우리가 잊고 있던 불편한 진실

분단이나 통일이나 평화처럼 너무 커 보여서 일상의 나하고는 아무 관계없을 것 같았던 주제에 대해서, 그게 알고 보면 사실 일상과도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단 얘기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127

정치 핑계될 일이 아닙니다.  131



오관영 - 동네 땅값 올리는 게 지방자치?

지방자치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는 분권과 참여입니다. 중앙 정부가 독점하고 있는 재정, 인사 등의 권한이 지방자치 단체로 대폭 이양되어야 합니다. 이러함 분권이 지방자치의 필요조건이라면 참여는 충분조건입니다. 지방자치단체의 모든 권한이 단체장에게만 집중되는 제왕적 단체장이 존재한다면 분둰은 오히려 지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킵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이 자신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주민참여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지방자치가 가능합니다.  138



조국 - 입은 자유롭고 밥은 공정하게!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기계적 중립, 균형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에게 보다 유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오히려 정의롭고 공정한 것이며, 진정한 '중용'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강자가 손해 보며 약자를 배려하는 게 정의, 조국

제가 한국 사회의 법 현실과 법치의 문제점에 대한 얘기를 하면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즉, "악법도 법 아니냐? 당신이 현 체제와 현행 법률에 대해서 불만이 있다 하더라도 일단 실정법률은 지켜야 되는 거 아니냐?"라는 반응입니다. 정부 측 인사는 물론 일반 대중도 이러한 질문을 많이 던집니다. 이에 이어서 "악법도 법이라고 소크라테스도 말을 하지 않았느냐?"라는 말이 나옵니다. 근래 들어 종종 정부는 '국격을 높이려면 법질서가 준수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있기도 하지요.

법치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입 닥치고 법 지켜라"가 될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법치관이 우리 사회에 횡행하고 있지요. 저는 1982년에 법과 대학에 입학하여 1992년에 교수가 된 이후 줄곧 법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마는 이러한 법치관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먼저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을 했는가부터 확인해보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릇된 또는 부정의한 일에 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을 것이며, 복종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겠다."

그러고는 독배를 마시고 죽었지요.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자기에게 철학을 포기하라고 명하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에게 사형을 선도한 배심에 대해서는 "당신들은 현자를 사형에 처했다고 하는 악명과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악법도 법이다"라고 누가 요약했냐 하면, 일제 시대 때 일본의 군국주의 법착자 오다카 도모오였어요. 소개한 소크라테스의 법사상을 "악법도 법이다"라고 요약한다면 이는 난독증 또는 의도적 왜곡일 것입니다. 대입 논술시험에 이런 식으로 요약한다면 저는 최하점을 줄 것 같습니다.("악법도 법이다"란 말과 소크라테스를 연관지은 가장 오래전의 학자는 일본의 오다카 도모오로, 그는 경성제국대학교, 동경대학교 법학부 교수이자 <실정법질서론>이라는 책을 쓴 일본의 유명 법철학자였다. 1930년대 '번역의 빈곤'이 낳은 이 말은 그 후 우리나라로 건너와 군사독재 시절 권위주의 정권의 억압적인 법 집행을 정당화하는 해석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142-143

"악법도 법이다"라는 주장의 전제는 "존재하고 있는 것은 무조건 옳으니, 그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품지 말고 따르라"라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지요.

질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질서의 전제는 자유입니다.  144

자메이카(23위), 대만(48위), 아프리카 가나(54위), 대한민국(70위), 2011년 세계언론자유도에서 한국은 196개국 중 70위.

미국의 보수성향 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마저 2011년 세계언론자유도에서 한국을 70위로 매겼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던'자유국가'의 지위를 박탈하고, '부분 자유국가'로 강등시켰습니다. '부분 자유국가'인 때가 언제냐 하면 1980년대 때, 즉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이었습니다. 요컨대, 한국 언론의 자유 수준은 1980년대로 후퇴한 것입니다.  147

이명박 정부의 법치관은 'Rule by Law'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학자들은 'Rule by Law'와 'Rule of Law'를 엄격히 구별합니다. 'Rule by Law'는 실정법을 도구로 사용하는 지배, 즉 실정법의 정당성을 묻지 않고 그것의 준수를 요구하고 그것을 통한 지배를 강조하는 관념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의 민주주의 법학자들이 다 공유하고 있는 법치는 'Rule of Law'입니다. 이는 일정한 도덕적 요청과 정의의 요청에 충족하는 법에 의한 지배를 뜻합니다. 실정법의 내용과 실질을 따지는 것이지요.  148



박래군 - 죽음의 행렬, 무엇이 문제인가?

"모든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킬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지킬 권리가 있다." - 세계인권선언 제3조, 생존권

그러나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 대한민국,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 25명, OECD 평균인 11.2명의 2배 이상 또한, OECD 국가 중 산업재해 1위, 근로자 10만 명당 산재사고 사망자 수 18명으로 미국 3.7명, 일본 2.7명에 비해 월등히 높음.(2010년 고용노동부 조사결과)

매년 150명 정도의 청소년들이 자살하고, 해고노동자와 비정규직, 철거민들이 사회적 타살을 당하는 나라, 거리에서는 노숙인이, 쪽방에서는 독거노인이, 시설에서는 장애인이 죽어가는 나라, 빚 독촉에 죽고, 생활고에 죽고, 온갖 차별과 멸시속에 죽음을 택하는 소수자들... 그런데도 너무나도 죽음에 무뎌진 사회.

얼어붙은 세상을 녹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자살 혹은 타살, 죽음의 행렬'에서 이 죽음의 행렬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알죠. 근데 눈에 비치지 않는 일상화된 죽음의 행렬은 인지를 못 하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이 매년 평균적으로 150명씩 죽어갑니다. 거리의 노숙인은 또 얼마나 죽어갈까요?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많은 사람들도요.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1위잖아요. 그런데 이런 죽음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굉장히 무감각해져 있어요.

지금 우리 사회의 구조는 죽은의 구조인데, 이걸 어떻게 타파하고 삶의 구조로 바꿀 것인가가 저한테는 큰 화두거든요. 인권의 기본이 생명권인데,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사회적인 구조, 분위기, 문화가 만연해있어요.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자면 이런 죽음을 드러내 성찰해 보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71

'저 사람의 문제가 내 문제'라는 것이 인권의 가장 중심적인 원리인데, 예전에는 이것을 당위로 받아들였는데 요즘에는 연대의 의미부터 다시 설명해야 하죠. '저 사람의 문제에 내가 관심 갖고 개입하는 것이 나한테 왜 중요한가? 왜 필요한가?' 하는 것들부터 설명해 줘야 해요. 연대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끌어내고, 연대를 위해 필요한 정책돌도 얘기해야 하는 거죠... '인권 감수성'  172

사람들이 '이게 나만의 고통이 아니다' , '저 사람도 저런 고통이 있구나'하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연대를 찾아나가거든요.  173


오창익 -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내가 뽑았지만, 대법관이나 대법원장은 내가 뽑은 적이 없다. 뽑을 기회도 없었고, 얼굴도 모른다. 다시 말해 선출된 권력이 아니다. 그런데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법원이 어떻게 선출된 권력인 대통령과 국회의원처럼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느냐, 내가 뽑지 않았는데, 내가 그런 권한을 위임해 준 적이 없는데....'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게 바로 시민적 상상력인 것 같아요. 유감스럽게도 이런 상상력이 그 동안의 시민운동진영이나 학계에서는 잘 안 나왔습니다. 법원이 선출된 권력이 아니니까 법원 추천 몫을 줄이거나 없애야 한다는 생각 역시 법조계나 저희처럼 기존의 문법에 익숙한 사람들에게선 잘 안 나왔습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국민이 뽑지만, 국민이 뽑지도 않은 검찰이 어떻게 입법부나 행정부와 같을 수 있나요?'라는 의문은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도 얼마든지 품을 수 있다고 봐요. 사실은 이런 의문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상상력이라고도 할 수 있죠. 바로 이 '시민적 상상력'이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는 권력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83



정란아 - 기업은 물건만 잘 만들면 땡인가?

기업이 경제를 끌고가는 큰 원동력이면서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큰 힘인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잘못을 해도 사회적으로 용인하거나 이해해주는 측면이 과해서는 안 된다는 게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기업 활동을 하면서도, 사회의 근본적인 가치들을 존중하고 지키는 것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인 겁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건 어려운 담론도 개념도 아닌, 인권이나 기본권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왜 안 지킬까 고민해보면, 기업이 권력화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거죠.  188

소비자나 시민으로서 기업 권력에 맞서는 액션플랜을 제시해주신다면...

첫째, 일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기업의 제품은 구매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우선은 벌어놓고, 나중에 베풀자'라는 생각을 가진 기업을 경계합니다.

셋째, 기업의 최우선 목적이 주주의 몫을 챙겨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기업을 경계합니다.

넷째, 국외와 국내의 모습이 다른 기업을 조심해야 합니다.  192



이희욱 - 표현이 자유와 권리침해의 충돌

인터넷을 정치적 저항 수단이나 공간으로만 보지는 않지만, 정치와 관련해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정치적 민주화운동이나 사회운동, NGO 활동을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지금, 인터넷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소셜네트워크와 스마트폰 덕분에 정보는 어느 때보다 빠르고 넓고 촘촘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정보 확산이 넓고 깊게 이뤄지면 대응도 다층적이고 다변화된 양상을 띠게 되겠죠. 돌이나 화염병 대신 트윗 한 줄, 문자메시지 한 통이 모이고 엮여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이런 변화를 막으려 투박한 둑이나 산성을 세운다 한들, 조그만 구멍까지 빈틈없이 메우진 못할 겁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보자면, 정치나 사회 변화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는 규제의 기억을 잊지 않고 각인하는게 중요하리라 봅니다. 정치적 격변기엔 규제가 강화되고, 사회적 대응도 거칠어집니다. 허나, 그 시점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쉽게 잊는 게 반복돼온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촘촘히 얽힌 보조기억장치를 갖고 있습니다. 집이든 사무실이든 이동 중이든, 시간 저편에 묻혀 있던 규제의 기억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내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틀림없이 찾아냅니다. 이런 과거의 오류를 바로잡고 제대로 평가하는 게 인터넷 시대에 맞는 사회적 대응이 아닐까요?  198-199

부작용에만 애써 집착할 게 아니라, 이를 바로잡는 시민사회의 정화 능력도 믿어볼 일입니다.  200



"모두 자신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 그렇지만 기술적으로 하나가 된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행복을 바라더라도 남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과 하나가 되지 않는 한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 버트런드 러셀



김여진 - 무조건 행복!

"함께 살아야 합니다. 함께 행복해야 하구요. 하지만 그걸 함께 하는 우리의 마음이 무겁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내가 다 구할 수는 없어요. 한 가지만, 여러분들이 꽂히는 그 한 가지만, 그게 뭐든 한 가지만을 일주일에 그냥 한 두 시간만 내시면 될 거 같아요." - 혼자보다 함께여서 더 좋은 행복, 김여진(230)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나만 행복해지는 법'을 찾기 때문이라고요.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옆에 누군가가 불행한데, 옆에 있는 누군가가 부당한데, 옆에 있는 누군가가 정말 도움이 필요한데, 그걸 모른 체 하고 나는 저런 걸 당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순간 내 마음에는 두려움이 생기죠. '내가 저렇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그 두려움이야말로 우리가 행복해지는 걸 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합니다.  212

행복해 보일 것인가 아니면 행복할 것인가를요. 

주로는 행복해 보이기 위해 대부분의 인새을 쓰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마찬가지구요. 행복해 보이려면 안정된 직장,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직장이 있어야겠죠. 또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배우자, 그럴듯한 집, 심지어 아이들한테도 1등하라 그러죠. 저희 어머니도 만날 그러셨어요. 왜? 남들 보기에 그럴듯하니까요. 우리가 평생 가장 많은 힘을 쓰고 있고, 추구하는 거의 모든 부분들은 행복해 보이기 위한 거죠. 남들한테...

그걸 위해 애쓰다 애쓰다 나는 과연 언제 행복한가?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자, 그럼 여기서 우리가 언제 정말 행복한가에 잠깐 집중을 해볼게요. 생각해보니까 저는 이거 같아요. 일단 재미가 있어야 돼요. 만화책 볼때 행복하고, 재밌는 드라마 볼 때 행복하고, 영화 볼때도 행복해요. 친구들하고 수다 떨 때도 행복해요. 근데 그건 잠깐인거 같아요. 그때가 지나면 다시 허무해지죠.

그래서 사람들은 의미를 찾는 거 같아요. 의미 있는 일 말이죠. 이게 어떤 의미가 있나, 어떤 결과를 갖고 오나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죠. 전 행복이란 재미가 있고 의미가 있는 일을 하면서 그때그때 사는게 행복한거지 돈이나 차나 좋은 집이 있다고 행복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돈이 필요가 없단 얘기냐? 그런 거 아닙니다 먹고는 살아야죠. 애도 키워야 되는데, 그럴만한 사회와 환경이 되어야죠. 물론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게 분명히 있어요. 그걸 함께 풀어나가는 것조차도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213

무기가 없는 곳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229



김여진 - 세상을 바꾸는 행복의 힘

직접 가서 내 눈으로 보는 게 최고예요. 

그냥 기사로 보고 책으로 봐서 분노하고 화내는 것은 정말 얼마 안 가요.  233

내가 정말 언제 행복한지 따져보면 돼요. 잠 푹 잤을 때, 맛있는 것 먹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이런 때잖아요. 사실 그 과정에 세상을 바꿔야 하는 것들이 분명히 들어가요. 내 옆의 누군가가 부당한 일로, 또는 먹지 못해서 울고 힘들어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그걸 외면한 단 말이죠. 외면하는 게 편할 것 같아서 도망가요. 두려워요. '내가 저렇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두려움이 생겨서 더 움츠러들어요. 그게 지금의 우리 모습인것 같아요. 부당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은 세상에 굉장히 많은데, 나는 못 하겠다는 거죠. 왜? 무서워서. 내 코가 석 자라서. 모든 사람들의 코가 석 자예요. 모두 다 같이, 개별로 떨어져서 각자 두려움에 떨게 되는 거죠. 정말 단순하게, 배고픈 사람과 빵 나눠 먹고, '너 억울한 일 당했어? 같이 가줄게' 하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한 거죠. 하지만 그 순간 '내가 나서서 일이 잘 안 되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하면 다시 움츠러들어요. 그게 욕심이라는 거죠. 내가 한다고 꼭 잘되리란 보장은 없어요. 그저 최선을 다하는 거죠. 실패하면 방법을 바꿔서 또 해보는 거죠. 

저는 모든 국민이 세상에 기여할 한 가지 문제를 자기 과제로 삼으면 좋겠어요. 한 가지를 정해서 평생 그것만 하는 거예요. 일주일에 한두 시간이라도 내서 그걸 했을 때 자기 마음이 얼마나 부자가 되겠어요? 세상의 주인으로 서는 거잖아요.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는 거잖아요.  237



김창난 - 소통부재의 시대, 행복을 위한 소통

소통의 열쇠, 공감(共感, sympathy)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

"인간은 홉스가 말했듯 경쟁적, 이기적인 동물이 아니다.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나? 물질 소유가 아니다. 공감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협력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 삶은 스트레스 덩어리다. 우리는 서로에게 공감하며, 서로에게 위로받고자 프로그램되어 있는 존재다. 공감의 유전자가 이것을 도와준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본서이다. 공감의 감수성이 인간뿐 아니라 생태계 전체를 향해 확장돼야 한다. 모든 생물권을 존중하며 살아갈 때 지구상에서 우리의 삶이 지속될 수 있다." - <공감의 시대> 작가 제레미 러프킨의 인터뷰 중

프로가 아니고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더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는 거지요. 우리가 프로라고 나선다면 그 순간 우리가 가진 장점들은 다 사라지는 거죠. 그러니까 우린 영원한 아마추어인 거예요.  241

'모 아니면 도'라는 거. 그걸 바꿔야죠. 다양하고 풍부한 마이너리그가 존재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게 풍부해야 메리저리그 주류도 끊임없이 새로운 자양분을 공급받으면서 버텨낼 수 있다는 거죠.  243

누가 이 뽑아서 군대 면제 받았다고 해서 나도 이 뽑아야겠다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누가 음주 운전했다고 나도 해야겠다는 사람도 별로 없구요. 근데 긍정적인 역할 모델이 된다면 그 영향력은 무척 커요. 그런면에서 긍정적 역할 모델이 될 수 잇는 셀러브리티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한국 사회의 변화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죠.  245

'공감'입니다.

김제동, 김미화, 김여진, 박혜경, 권해효, 강풀 같은 셀러브리티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게 공감과 연민의 능력이죠. 그분들이 그렇다고 대단한 진보적 신념을 가졌거나 이념에 따라 행동하는 분들은 아니거든요. 다만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면서 그들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거죠. 이게 중요한 거예요.

공감의 힘이란 예컨대 이런 거죠. 혁명이든 사회변화든, 이론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에요. 대중들에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이론적으로 설명해 봐야 설득이 쉽지 않아요. 그거보다는 "저기 굶어 죽어가는 아이를 보십시오"라고 말할 때 확실히 공감의 폭이 넓어지는 거죠. 변화의 동력도 생기고요.  246



노민영 - 총체적 삶의 운동과 맛있는 혁명

달팽이를 상징으로 하는 슬로푸드 운동이 중시하는 것은 먹거리와 생물다양성 보호와 미각 교육의 확대 그리고 생산자와 소비자의 연대!

지킴(사라질 우려가 있는 전통적인 식재료나 요리법. 질 좋은 식품과 전통주를 지킨다)

가르침(성장하는 아이들은 물론 음식 소비자에게 미각 교육을 진행한다)

지지함(질 좋은 식재료를 제공하는 생산자를 보호한다) - 1996년에 발표된 슬로푸드 법렬 중



김지수 - 행복은 과연 성적순일까?

서울시 교육청이 초중고교 65곳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체개발한 '학생행복지수'를 측정한 결과, 성적이 상위권인 학생들의 행복지수 평균은 100점 만점에 71점, 중위권은 62점, 하위권 학생들은 54점으로 나타났다.

경쟁 내몰린 학생들 "행복은 성적순이 맞잖아요."

우리나라 청소년 10명 중 7명(69.6%)은 생활 전반에서 스트레스를 호소, 청소년들의 고민거리 중 가장 큰 부분은 공부(38.6%)와 직업(22.9%)문제.

청소년 8.8%는 "1년간 자살 생각해본 적 있다." - 통계청 2011 청소년 통계


우리 교육은 지금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학생으로 보지 말고 한 인격으로 보면 좋겠어요. 요즘 아이들은 자기 삶에 대해 굉장히 성실하게 고민하고, 자원봉사 같은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세상에 대해 다양하게 경험하고 싶다고 말해요. '교육은 곧 배움'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배움은 그 어디에도 있는 거죠.

성적이 아닌 행복을 키우는 교육,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고, 또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일까요?

행복은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문제이기에 나름대로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행복을 키우는 교육은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지속적으로 자기가 살아가고 싶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도록 힘을 북돋아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이 아이들에게 '가슴 떨림'을 줄 수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이 가슴 떨림을 느낄 수 있게 하느냐가 문제인 거지요. 가슴 떨림은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행동하게 만들고, 그 행동 하나하나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도록 만들어줍니다. 기적과 같은 힘인 거죠.

그런데 지금의 교육은 이상을 꿈꾸는 아이들에게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하겠어?" 라는 말로 아이들의 이상을 현실로 끌어내리고 있어요. 꿈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신념을 가지고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신념으로 만들어진 이상이 현실로 끌려 내려오면 세상은 그만큼 발전하지 못하겠지요. 더 큰 문제는 아이들의 신념도 함께 사라진다는 겁니다. 아이들의 이상이 자유롭고 꿈꿔지고 실천되어질 수 있는 세상, 아이들의 신념이 지속가능하게 유지될 수 있는 세상, 그것을 위해 더 늦기 전에 지금부터라도 아이들이 행복한 교육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60



공부를 바치며 - 변화가 만들어낼 우리의 미래

한 가지 묻고 싶다.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런 세력이 되기를 주저하고 새로운 세력을 기다리고만 있는 걸까?  261

이제 우리는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새로운 시작의 기로에 서있다.

정의와 상식이 통하는 건강한 사회를 위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함께 꿈꾸고 공부하여 깨어 있는 시민,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내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마침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 나는 그리고 또 우리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 상상력이 바꾸는 세상을 꿈꾸며 하승창  262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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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론' 에 대해 일관적으로 진행하는 내용이다.
저자의 표현처럼 '5천년이 넘는 기가긴 기간동안의 동양 철학의 진수를 호미로 긁는 것일 뿐인 내용'이라는 표현은 있지만, 서양의 존재론과 대조할 수 있는 동양의 관계론에 대한 서술을 하고 있다.
관계 즉 인간관계는 늘 우리에게 숙제로 남겨져 담론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 그리도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우리는 깊은 생각을 해볼 시간이 별로 없다.
세세한 담론을 전개해 나가지는 않지만 경전들의 특징중에 하나인 큰 틀만 언급해도 세세한 가지치기는 스스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관계에 관해 우리가 생각해 볼 만한 점들을 담고 있다.

저자가 처음으로 동양고전을 접한것은 어린시절 할아버지의 사랑방에서였다. 그리고 잊혀진 고전은 20여년간의 옥고 생활에서 이어진다.
두껍고 상대적으로 읽기 힘든 동양고전을 선택하게 된 배경은 수형생활에서 3권의 책만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읽어가면서 더욱 빠지게 되고, 급기야 아버지께 부탁하여 여러권을 한 권으로 제본하여 들고 들어오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읽는 것과는 분명 틀렸다.
우리는 종종 철학과 고전은 해설이 없는 책을 보는것이 좋다고 듣는다.
이유는 자신만의 해석을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분명 그러한 시간을 충실히 보냈음을 내용을 통해 깊이 느낄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좋은 내용 그 내용에 대한 저자의 해설 그리고 독법을 어찌 하는 것이 좋을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본을 배울 수 있었다.

시(詩)와 언(言), 주역(周易), 논어(論語), 맹자(孟子), 노자(老子), 장자(莊子), 묵자(墨子), 순자(荀子), 한비자(韓非子), 불교(佛敎), 신유학(新儒學), 대학(大學), 중용(中庸), 양명학(陽明學) 에 대한 저자의 해설이 담겨 있다.
강의를 한 것을 책으로 엮었기에 제목도 강의다.
자신이 긴 시간동안 고전을 읽으며 생각하고 느꼈던 점들 중에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관계론'에 입각한 해설을 한다.
인간은 누구나 관계를 가지고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고전을 통해 우리에게 설파한다.
모든 내용들을 길게 다룬 건 아니고 길게 다룬 내용들도 있고 짧게 언급하면서 넘어간 내용들도 있다.
또한 이 고전들의 모든 내용을 다루지 않는다. 자신에게 다가온 내용중에 독자에게 말하고 싶은 것들을 엄선한 내용일 것이다.

다만 읽는 우리는 그의 사유를 통해 새로운 관점을 배우고, 또한 자신도 사유를 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책에서 많은 것을 배운 것이리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새로운 생각의 세상을 접하고 새로운 관점을 알아가는 유익한 시간임과 동시에 가까운 것은 가까이 하였으나 멀리 있었던 고전들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우리들이 고전을 읽는 이유가 역사를 읽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면서 동시에 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짐이기 때문에 지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로 만드는 방법이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고전 독법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면서 동시에 미래와의 대화를 선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6

내가 동양고전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할아버님의 사랑방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까지였어요.
나로서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지요. 너무 어렸습니다. 그러나 유년 시절의 경험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층의 정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16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옥방(獄房)에 앉아서 생각한 것이 동양고전을 다시 읽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것에 대한 공부를 해야겠다는 것이 었어요.  17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시한 문안도 그런 문제의식에 따라 선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1
고전 강독은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에 관한 근본적 담론을 주제로 할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고전 강독의 전 과정이 화두(話頭)를 걸어놓고 진행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걸어놓은 화두는 '관계론(關係論)'입니다.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存在論)'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23
근대사회의 사회론(社會論)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 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關係網)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고전 강독은 결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닙니다. 우리의 당면 과제를 재조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4

욕심입니다만 고전 예시 문안을 여러분이 다 암기하면 좋지요. 암기는 못하더라도 혼자서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5

최근 동양학에 대한 서구의 관심은 이와 같은 성찰적 동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양적 구성 원리가 인문주의인 것은 사실이며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는 구조인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동양에 대한 관심은 그것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신대륙에 대한 콜럼버스의 관심입니다. 과도하게 축적된 초국적 자본이 자본주의 시장권에서 분리되어 있던 동구권과 러시아 대룩에 이어서 다시 관범한 중국 시장에 쏟는 관심, 이것이 주된 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32-33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34
서양에서는 철학은 Philosophy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智)에 대한 애(愛)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양의 도(道)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beaten pass)입니다. 도(道) 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착(辵)과 수(首)의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착(辵)은 머리카락 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입니다. 수(首)는 물론 사람의 머리 즉 생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36
도는 길처럼 일상적인 경험의 축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서양의 철학과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7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38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근대 사회의 신념 체계인 자본주의의 성장 논리는 물론이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서구의 인본주의(人本主義)자체가 반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9

일반적으로 동양 사상의 특징으로서 인간주의라고 하는 경우 그것은 그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가 인문적 가치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40
최고의 가치가 바로 사람과 관련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논어>에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란 글귀가 있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입니다. 덕성(德性)이 곧 인성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인간관계라는 관계성의 실체로 보는 것이지요.  41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自己)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으 ㄹ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42

오래된 시(詩)와 언(言)
<시경(詩經>은 동양고전의 입문입니다.  52
<시경>에는 모두 305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그 절반이 넘는 양이 국풍입니다. 국풍은 각국의 채시관(採詩官)이 거리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백성들의 노래를 수집한 것입니다.
기원전 12세기 말부터 춘추(春秋) 중엽인 기원전 6세기까지 약 600년간의 시(詩)와 가(歌)를 모아 기원전 6세기경에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경>은 제후국 간의 외교 언어로 소통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공통 언어가 성립되고 나아가 중국의 문화적 통일성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56
<서경(書經)>은 2제(요堯, 순舜) 3왕(우왕禹王, 탕왕湯王, 문왕文王 또는 무왕武王)의 주고 받은 언(言), 즉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67
<서경>, <춘추>와 같은 기록 문화는 후대의 임금들이 참고할 수 있는 사례집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 어떠한 제도보다도 강력한 규제 장치로 작용하리라는 것은 상상이 어렵지 않습니다.  68

<주역(周易)>의 관계론
<주역>은 대단히 방대하고 난해합니다. <주역>의 관계론에 초점을 두기로 합니다.  87
우리가 보통 점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상(相), 명(命), 점(占)으로 나눕니다. 
상은 관상(觀相) 수상(手相)과 같이 운명 지어진 자신의 일생을 미리 보려는 것이며, 명은 사주팔자(四柱八字)와 같이 자기가 타고난 천명, 운명을 읽으려는 것입니다. 상과 명이 이처럼 이미 결정된 운명을 미리 엿보려는 것임에 반하여 점은 '선택'과 '판단'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결정된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판단이 아려울 때, 결정이 어려울 때 찾는 것이 점입니다.  89
<주역>을 읽고자 할 때는 십익을 먼저 읽는 것이 좋습니다. 십익은 해설서기 때문에 <주역>의 전체 구성과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92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이 8괘(八卦)를 낳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8괘 중에서 태극기에 있는 네 개의 괘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8괘를 구성하는 세 개의 음양을 나타내는 부호를 효(爻)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효과 괘를 중심으로 <주역>을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93
<주역>에는 8개의 소성괘와 64개의 대성괘가 있습니다. 이 64개의 대성괘마다 괘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각 대성괘를 구성하고 있는 여섯 개의 효마다 효사가 붙어 있습니다. <주역>의 경(經)은 8괘, 64괘, 괘사, 효사의 네 가지라고 했지요.  95
이 8괘의 이름과 성격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역>독법의 기본적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97


1년 내내 겨울이 지속되는 극지(極地)나 반대로 상하(常夏)의 열대 지역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사상임에 틀림없습니다. <주역>은 변화에 관한 사상이고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주역>의 관계론적 철학 사상이 이러한 사회 역사적 지반 위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주역>은 글자 그대로 주(周)나라 역사 경험의 총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나라 역시 그 이전의 여러 문화 사상의 총괄이라 할 수 있습니다.  107
'평탄하기만 하고 기울지 않는 평지는 없으며 지나가기만 하고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어렵지만 마음을 곧게 가지고 그 믿음을 근심하지 마라. 식복이 있으리라.'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이것이 천지의 법칙이다.'  113
내가 붓글씨로 즐겨 쓰는 구절을 소개하지요.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은 서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선하지 않으면 진미할 수 없고 진미하지 않고 진선할 수 없는 법입니다. 목적과 수단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목적은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적입니다.
나는 우리드르이 삶과 사회의 메커니즘을 다시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바쁘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노동이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될 뿐 아니라 생산 과정에서 소외되어 있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면 우리는 생산물의 분배에 주목하기 보다는 생산 과정 그 자체를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는 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129
<주역>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通)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久)라 할 수 있습니다.
계사전에서 요약하고 있는 <주역> 사상은 한마디로 '변화'입니다. 변화를 읽음으로써 고난을 피하려는 피고취락(避苦取樂)의 현실적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130
<주역>은 변화의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변화를 사전에 읽어냄으로써 대응할 수 있고, 또 변화 그 자체를 조직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절제란 바로 이 변화의 조적, 구성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절제와 겸손이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느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31

<논어(論語)>, 인간관계론의 보고
요컨대 과거란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편의를 위한 관념적 재구성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149
덕치주의(德治主義) ... 행정명령으로 백성을 이끌어 가려고 하거나 형벌로써 질서를 바로 세우려 한다면 백성들은 규제를 간섭과 외압으로 인식하고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될 수 있으면 처벌받지 않으려고 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부정을 저지르거나 처벌을 받더라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와 반대로 덕(德)으로 이끌고 예(禮)로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153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교통순경이 교통법규 위반 차량 네다섯 대중에서 한두 대만 딱지를 끊자 적발된 차량 운전자가 당연히 항의를 하였지요. 저 애도 위반이라는 것이지요. 교통순경의 답변이 압권이지요. '어부가 바닷고기 다 잡을 수 있나요?' 처벌받는 사람은 법을 어긴 사람이 아니라 다만 운이 나쁜 사람인 것이지요.
사카구치 안고의 <타락론(墮落論)>에 의하면 사회적 위기의 지표로 '집단적 타락 증후군'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집단적 타락 증후군도 여러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만, 우선 이 교통법규 위반 사례와 같이 모든 사람이 범죄자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그중의 하나입니다. 적발된 사람만 재주 없는 사람이 되는 그러한 상황입니다. 또 한 가지는 유명인의 부정이나 추락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 대신에 고소함을 느끼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부정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거나 추락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기보다는 한마디로 고소하다는 것이지요. 타인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기보다는 한마디로 고소하다는 것이지요. 타인의 부정과 추락에 대하여, 그것도 사회유명인의 그것에 대하여 오히려 쾌감을 느끼는 단계가 집단적 타락 증후군이라는 것이지요. 타인의 부정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부정의 연쇄를 끊을 수 있는 전략적지점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본질에 대하여 수많은 논의가 있습니다만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156
동양학에서는 어떤 개념을 설명하는 경우 그 개념 자체를 상술(詳述)하거나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보다는 그와 대비되는 개념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 뜻이 드러나게 하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160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의 논리 아래에서는 단지 양적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163
"극좌(極左)와 극우(極右)는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 격동기에 도처에서 확인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나는 극좌와 극우가 다 같이 동(同)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라는 극우 논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극좌 논리는 둘 다 강철의 논리이며 존재론적 구조이며 결국 동의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극좌와 극우는 그 근본적인 구성 원리에 있어서 상통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새로운 문명은 이 동의 논리와 결별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화(和)의 논리는 자기오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타자란 없으며 모든 타자와 대상은 사실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입니다.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 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비로소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명제가 바로 이러한 논리라고 생각하지요.  164-165
우리의 삶에 잇어서 인간과 관련이 없는 지식이 과연 존재하는가? 없습니다.
자연과학적 지식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적 당파성에 기초해 있는 것이지요. 모든 지식은 사람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는 법입니다. 여기까지는 특별한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타인에 대한 이해입니다. 여러분도 어떤 사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한 적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의 어떤 측면에 주목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도 하고 그 사람에 관한 파일을 구하거나 그 살마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알려고 하는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의 대상물과는 달리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나를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쌍방향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하고 나를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174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이래하 진정한 의미의 지(知)라는 사실입니다.  175
상품미학이란 상품의 표현형식입니다. 상품이 잘 팔릴 수 있도록 디자인된 형식미입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상품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통일물로 설명하고 이를 상품의 이중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상품은 교환가치가 본질입니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에 종속되는 것이지요. 상품은 한마디로 말해서 팔리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합니다. 상품미학은 광고 카피처럼 문(文), 즉 형식이 승(勝)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감성이 상품미학에 포섭된다는 것은 의상과 언어가 지배하는문화적 상황으로 전락한다는 것이지요.
형식미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미의 끊임없는 변화에 열중하게 되고 급기야는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게 되는 것이 상품 사회의 문화적 상황입니다. 상품의 구매 행위는 소비 이전에 일어납니다. 상품의 브랜드, 디자인, 컬러, 포장 등 외관 즉 형식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광고 카피 역시 소비자가 상품이나 상품의 소비보다 먼저 만나는 약속입니다. 광고는 그 상품에 담겨 있는 사용가치에 대하여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소비 단계에서 그 허위가 드러납니다. 이 약속이 배반당하는 지점, 즉 그 형식의 허위성이 드러나는 지점이 패션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는 사실은 여러번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196-197
지(知)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好)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樂)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하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 호, 낙의 차이를 규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각각을 하나의 통합적 체계 속에서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를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고 한다면 호는 대상과 주체 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입니다. 그에 비하여 낙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가 분석적인 것이라면 호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낙은 주체와 대상이 원융(圓融)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낙은 어떤 판단 형식이라기보다는 질서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체와 대상, 전체와 부분이 혼연한 일체를 이룬 어떤 질서와 장(場)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는 역지사지하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호는 대상을 타자라는 비대칭적 구조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와 호를 지양한 곳에 낙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고전 강독의 관점에서 이를 규정한다면 '낙은 관계의 최고 형태'인 셈입니다. 그 낙의 경지에 이르러 비로소 어떤 터득이 가능한 것이지요. 
세계 인식이 정보 형태의 파편적 분석지(分析知)에 머물거나 이데올로지적 가치판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낙의 경지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지요. 
지에서 호로, 호에서 낙으로, 세계와의 관계를 높여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199-201

<맹자(孟子)>의 의(義)
<논어>가 선어(禪語)와 같은 함축적인 글임에 비하여 <맹자>는 주장과 논리가 정연한 논설문입니다.  213
오늘나르이 우리 사회는 만남이 없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不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이 있을리 없는 것이지요.
식품에 유해 색소를 넣을 수 있는 것은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식품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로 이루어진 구조입니다.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처럼 한 점에서, 그것도 순간에 끝나는 만남이지요. 엄격히 말해서 만남이 아니지요.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관계없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2차대전 이후 전쟁이 더욱 잔혹해진 까닭이 바로 보지 않은 상태에서 대량 살상이 가능한 첨단 무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237
모스크바 지하철에서는 젊은이들이 노인을 깍듯이 예우합니다. 노인이 타면 얼른 일어나 자리로 안내하고, 노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어쩌다 미처 노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가는 그 자리에서 꾸중을 듣는다고 합니다. 의아해 하는 나에게 들려준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이 지하철을 저 노인들이 만들지 않았느냐!'는 것이었어요. 그것도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 한 젊은이한테 물어보았지요. 물론 잘 아는 젊은이였지요. 이 지하철을 만든 이가 바로 저 노인들인데 왜 자리를 양보하지 않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들의 답변 또한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어요. '자기가 월급 받으려고 만들었지 우리를 위해서 만든 것은 아니잖아요.' 참으로 충격적인 대답이었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모스크바의 지하철이건 서울의 지하철이건 젊은이들이 만들지는 않았지요. 노인들이 만든 것이 사실입니다. 똑같은 사실관계를 두고 모스크바의 젊은이와 서울의 젊은이가 판이한 대답을 하는 까닭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똑같은 사실관계가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는 까닭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241
모스크바의 젊은이와는 판이한 우리나라 젊은이의 대답은 인간관계가 세대간에 어떻게 단절되고 잇는가를 보여주는 예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대 간의 관계가 그만큼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는 종횡으로 단절되어 있습니다.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남에게 모질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242

<노자(老子)>의 도와 자연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 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가 가리키는 근본은 자연(自然)입니다. 노자의 귀(歸)는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자의 자연은 천지인(天地人)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  253-254
노자 사상은 상식과 기존의 고정과념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게 하는 고도의 철학적 주제입니다.  262
'성인은 무위의 방식으로 일하고 무언으로 가르쳐야 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 법이며 간섭할 필요가 없다. 
 생육했더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되며
 자기가 했더라도 뽐내지 않으며
 공(功)을 세웠더라도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아야 한다.
 무릇 공로를 차지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  276
먼저 잘못된 인식을 반성한 다음 올바른 방식으로 실천하기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 실천론의 요지입니다.  277
'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 비어있음(無)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잇음(無)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있음(無)으로 해서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유(有)가 이로운 것은 무(無)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수레를 타고, 그릇을 사용하고, 방에서 생활하지만 그것은 수레나 그릇이나 방의 있음(有)에만 눈을 앗기어 막상 그 있음의 배후(無)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지요. 숨어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292
현상을 있게 하는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상과 본질의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293
언어는 소통의 수단입니다 소통은 화자와 청자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 단어가 연상시키는 경험 세계의 소통 없이는 결코 전달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화자의 연상 세계와 청자의 그것이 서로 어긋나는 경우 정확한 의미의 소통은 차질을 빚게 됩니다.
말을 더듬고 느리게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불일치를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것이지요. 화자가 청산유수로 이야기를 전개해가면 청자가 따라오지 못하게 되지요. 느리게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언어란 불충분한 표현수단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지요. 언어는 무엇을 지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찾아내고 그 대상에 대한 청자와 화자의 합의가 도출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될 수 있으면 언어를 적게, 그리고 느리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302

<장자(莊子)>의 소요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야 살기 때문이다." 이 것은 <장자> 외편(外篇)의 추수(秋水)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309
혹시 나 자신도 우물 속에 있는 것은 아닌가를 반성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입니다. 
수많은 담론의 와중에서 우리가 골몰하고 있는 것이 결국은 패권 경쟁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장자> 독법의 핵심적 과제라고 생각하지요.  311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즉 도(道)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과의 합일(合一)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이리화정(以理化情)입니다.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도를 깨닫는 것은 이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요. 정서적 공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이해가 못 된다고 해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장자의 이리화정은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있습니다. 사실은 머리보다는 가슴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교실과 책과 시험으로 채워진 학교 시절을 끝내고, 싱싱한 삶의 실체들과 부딪치며 살아가기 시작하면 이 말이 절실하게 가슴에 와닿으리라고 생각합니다.  328
"내가 스승에세 들은 것이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이 있게 마련이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네.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네. 내가 (기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  329
장자의 논거는 오늘날의 논의와는 그 장을 달리 합니다.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종속적 지위로 전락하고,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경멸적 문화가 자리 잡는 그러한 일련의 반 노동 과정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지요. 좀 더 근원적인 문제를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일과 놀이와 학습이 통일된 형태가 가장 바람직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계는 바로 이 통일성을 깨트리는 것이지요. 노동은 그 자체가 삶입니다. 삶의 지출(支出)이 노동이지요. '지출'이란 단어를 사용하자니 좀 이상합니다. 삶의 '실현'이라고 하지요. 지출 보다는 실현이 더 적절한 어휘라 할 수 있습니다. 노동이 삶 그 자체, 삶의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지요. 노동을 그 본연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지요.  331
자본주의적 채용 형식이 아니라면 기계 자체로서는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기계가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기꼐는 그 효율성으로 말미암아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여가를 가지게 하고 그 생산성으로 말미암아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소비를 할 수 있게 합니다. 그로 인한 실업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여가와 소비의 증대가 인간성의 실현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곧 장자의 문제의식입니다.  332
'세상에서 도(道)를 얻기 위하여 책을 소중히 여기지만 책은 말에 불과하다. 말이 소중한 것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뜻이 소중한 것은 가리키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그 뜻이 가리키는 바를 전할 수가 없다. 도대체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은 형(形)과 색(色)이요 귀로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은 명(名)과 성(聲)일 뿐이다.'  338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떠내려와서 자기 배에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비키라고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두 번 소리치고 두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친다. 세번째는 욕설이 나오게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빈 배로 흘러간다는 것이 바로 소요유입니다. 빈 배는 목적지가 있을리 없습니다.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보행(步行)이 아닙니다. 삶이란 삶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343

<묵자(墨子)>의 겸애와 반전 평화
묵가는 유가(儒家)와 함께 당시에는 현학(顯學)이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비주류로 물러났습니다만 당시에는 가장 강력한 주류 학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묵자께서 말씀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 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382
순자는 묵자를 비판하여 '실용에 눈이 가려 문화를 모른다' 즉 문화라는 소비가 생산을 증대시킨다는 반론을 폈다. 
절용이 미덕이다. 아니아.. 오늘날도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체제하의 생산과 소비 수준은 한마디로 사람들의 삶을 기준으로 하여 그 규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 축적 논리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390

<순자(荀子)>, 유가와 법가 사이
순자는 대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학문적 권위나 유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하여 남아 있는 자료는 매우 소략합니다. 그가 유가의 이단(異端)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일반적으로 유학은 객관파(客觀派)와 주관파(主觀派)로 나누어집니다. 사회질서와 제도를 강조하는 순자 계통이 객관파로 분류되고, 반대로 개인의 행위를 천리(天理)에 합치시키고자 하는, 다시 말해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는 맹자 계통이 주관파로 분류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후에 기학파(氣學派)와 이학파(理學派)로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순자는 예(禮)에 의한 통치를 주장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덕(德)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주관파와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주관파에서도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를 계승하여 예를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순자의 예는 공자의 예와는 달리 선왕(先王)의 주례(周禮)가 아니라 금왕(今王)의 제도와 법을 의미합니다. 대체로 안정기에는 예가 개인의 수양과 도덕규범으로 해석되고 사회 변혁기에는 사회질서와 제도의 의미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국 말기가 급격한 변혁기였음은 물론입니다. 순자의 예는 법의 의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자를 법가(法家)의 시조로 보는 견해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지요. 전국 말기의 상황에서는 순자의 주장이 패자(覇者)들의 관심을 더 많이 끌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법가 이론을 집대성한 한비자와 진시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 재상 이사(李斯)가 순자 문하에서 수학한 제자들이지요.  404-405
'하늘은 사람이 추위를 싫어한다고 하여 겨울을 거두어가는 법이 없으며, 땅은 사람이 먼 길을 싫어한다고 하여 그 넓이를 줄이는 법이 없다. 군자는 소인이 떠든하고 하여 할 일을 그만두는 법이 없다. 하늘에는 변함없는 법칙이 있으며, 땅에는 변함없는 규격이 있으며, 군자에게는 변함없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  407
하늘만을 하늘같이 바라보거나 하늘을 칭송하는 숙명론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운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운명이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순자의 사상 체계입니다.  
순자의 체계에서 하늘을 칭송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람으 ㅣ도리 여하에 따라서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409
맹자의 성선설이든 순자의 성악설이든 우리는 본성론 자체를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선악 판단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올바른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회로 자연을 재단하는, 이른바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414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담론 환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만나는 것이 바로 인간 본성 문제입니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는 것이지요. 시장 원리를 뒷받침하고 사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제도가 바로 '역사의 종말'이라는 주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묵자는 인간 본성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백지와 같은 것입니다. 묵자는 소염론(所染論)에서 인간의 본성은 물드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416
순자의 성악설.. 전국시대의 사회적 혼란의 원인을 분석하고 처방하는 논리의 일환입니다. 순자의 이론 체계는 교육이라는 후천적 훈련과 예(禮)라는 사회적 제도에 의하여 악한 성(性)을 교정함으로써 사회의 혼란을 방지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순자는 모든 사람은 인의(仁義)와 법도(法度)를 알 수 있는 지(知)의 바탕을 갖추고 있으며 또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에 대한 불신이나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순자는 모든 가치 있는 문화적 소산은 인간 노력의 결정이라고 주장하는 인문 철학자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417
순자의 인문 철학... 예란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物)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
순자의 예론의 기본적 내용은 법과 제도입니다. 그러나 이 법과 제도가 안정적으로 작동케 하기 위해서 교육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도량(度量)과 분계(分界)가 안정적으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교육에 의하여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이 순자의 교육론입니다.  421
'나는 말한다. 학문이란 중지할 수 없는 것이다. 푸른색은 쪽에서 뽑은 것이지만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된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다. 먹줄을 받아 곧은 나무도 그것을 구부려서 둥근 바퀴로 만들면 컴퍼스로 그린 듯 둥글다. 비록 땡볕에 말리더라도 다시 펴지지 않는 까닭은 단단히 구부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무는 먹줄을 받으면 곧게 되고 쇠는 숫돌에 갈면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군자는 널리 배우고 날마다 거듭 스스로를 반성하면 슬기는 밝아지고 행실은 허물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산에 올라가지 않으면 하늘이 높은 줄 알지 못하고 싶은 골짜기에 가보지 않으면 땅이 두꺼운 줄 알지 못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선비는 선왕의 가르침을 공부하지 앟으면 학문의 위대함을 알 수 없는 것이다.'  422
순자가 교육론을 전개하는 것은 첫째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모든 인간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426
대부분의 유가가 치인(治人)에 앞서서 수기(修己)를 요구합니다. 이 경우의 치인이 순자의 체계에서는 예(禮)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순자는 수기보다는 치인을 앞세우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수양에 앞서 제도의 합리성과 사회적 정의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덕성은 선천적인 것도 아니며 개인의 수양의 결과물도 아니며 오로지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순자는 개량주의적 이기보다는 개혁주의적입니다.  424
그에게 일관되고 있는 것이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사실입니다.  425

<한비자(韓非子)> 법가와 천하 통일
법가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법가의 현실성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성이란 점에 있어서 다른 학파와 어떠한 차별성을 갖는 것인가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431
세상이 변화하면 도를 행하는 법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법가의 현실 인식입니다.  433
한비자가 주장한 법의 기본 성격을 종함해보면 첫째 법의 성문화, 둘째 전국적으로 공포된 공지법, 셋째 전국적인 법의 통일성이라는 세 가지 요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444
춘추전국시대란 무도한 시대이며 혼란의 극치를 보이는 시대입니다. 임금을 죽인 것이 36번, 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52번이었습니다. 이러한 하극상과 혼란이 재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법가가 선택한 방법이 바로 관료에 대한 견제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관료는 언제든지 제후나 대부의 지위로 바뀔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료들의 이반(離叛)을 통제하고 견제하지 못하는 한 전기(前期)의 모순과 혼란이 반복되지 않을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군주의 술치는 군주의 은밀하고 부정적인 권력이라기보다는 관료제라는 새로운 제도의 작동 원리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462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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