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서문

 

<자유로운 아이들 서머힐>A. S. 닐이 선구적인 자치 자유학교인 서머힐을 설립하고 운영해온 50년의 세월을 되돌아본 책이다. 8

 

서머힐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학교를 아이들에게 맞출 수 있는 구조를 갖추려고 했다는 점이다. 10

 

 

닐과 서머힐

 

목표는 유년기와 청소년기 동안에 완전하고 건강한 감정과 개인의 역량을 키워내는 것이었다. 닐은 아이들이 이런 완저함을 성취하기만 하면, 학문에 필요한 것들을 배우려는 동기는 저절로 가지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성장으로 이끄는 열쇠는 아이들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에게 맘껏 놀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이었다. ..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한 아이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 14

 

다른 학교에서는 교육과정의 한 부분으로 가르치는 많은 것들을 서머힐에서는 일상생활의 과정 속에서 다루어나간다. 19

 

따뜻한 마음, 낙관주의, 독립심 그리고 자립성은 서머힐에서는 전염병처럼 쉽게 옮아가는 자질이다. 서머힐의 구조는 아이들을 자립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가장 훌륭한 가족이 그러하듯이 서로에 대한 책임감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21

 

 

들어가는 말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자치, 수업에 들어오거나 들어오지 않을 자유, 필요하다면 며칠, 몇 달, 몇 년이라도 놀 수 있는 자유 , 종교나 도덕이나 정치를 막론하고 모든 교화로부터의 자유, 성격 틀에 맞춰 찍어내기(character oulding)로 부터의 자유. 25

 

학생들과 교사들 사이를 나누는 장벽은 필요 없다. 그런 장벽은 아이들이 만드는 게 아니라 어른들이 만든다. ...

독단적인 권위는 아이에게 평생토록 지속될 열등감을 심어준다. 26

 

아이는 작고 나는 크다. 왜 나는 나보다 작은 아이를 때리고 있는가? 27

 

아이의 무례함은 나를 그 아이의 수준으로 내려버렸다. 그것은 궁극적인 권위로서의 나의 위엄과 지위를 훼손했다. 28

 

서머힐에는 세대 간에 차이가 없다. .. 열두 살짜리 여자 아이가 교사에게 그의 수업이 따분하다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서둘러 한마디 덧붙이자면, 교사 역시 어떤 아이에게 넌 형편없는 말썽꾸러기야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유는 양쪽에 다 적용되어야만 한다.

교육은 개인적이기도 하고 사회적이기도 한 아이들을 길러내야 한다. 자치는 분명히 그것을 해낸다. 28-29

 

어떤 교사도 북을 시끄럽게 두드리는 아이를 치유할 권리는 없다. 꼭 이루어져야 할 유일한 치유는 바로 불행을 치유하는 것이다. 30

 

문제아는 불행한 아이다. 그 아이는 자신과 전쟁 중에 있다. 그 결과 그 아이는 세상과 전쟁을 벌인다. 31

 

 

서머힐의 사상

 

활동적인 아이들을 책상 앞에 붙들어 앉혀놓고 대개는 쓸데없는 과목들을 공부하게 만드는 학교는 분명 나쁜 학교다. 그런 학교를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만 그 학교는 좋은 학교다. 그리고 돈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 문명에 잘 어울리는 유순하고 창조성 없는 아이들을 바라는 창조성 없는 시민들에게도 그 학교는 좋은 학교다. 35

 

서머힐은 어떤 곳인가? 먼저, 수업은 아이들의 선택 사항이다. 아이들은 수업에 들어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원한다면 몇 년 동안 걔속 수업에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 시간표는 있지만 그것은 교사들의 시간표다.

보통은 나이에 따라 학급을 편성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들의 관심사에 따라서 학급이 편성되기도 한다. 우리에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새로운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법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36

 

인간은 결점이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어느해 봄 나는 몇 주에 걸쳐 감자를 심었다. 그런데 6월 들어서 그 감자들 중 여덟 포기가 뽑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야단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나의 그런 행동은 권위주의에 젖은 사람의 행동과는 다르다. 나는 단지 감자를 문제 삼았지만 권위주의에 빠진 사람은 선과 악이라는 도덕 문제까지 끄집어낼 것이다. 감자를 훔치는 건 나쁜 짓이라고 나는 말하지 않았다.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내 감자의 문제로만 삼았다. 그건 내 감자이므로 다른 사람은 그 감자에 손대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그 차이를 분명히 하고 싶다. 42-43

 

자유로운 아이들은 쉽게 남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다. 44

 

강조할 것은 아이들이 어른들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아홉 살 난 아이가 공놀이를 하다 유리창을 깨면 나한테 와서 그 사실을 말할 것이다. 그 일로 내가 호통을 치거나 혹은 부도덕한 짓이라고 분개할 거라는 걱정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는 사실대로 말한다. 그 아이는 유리창 값은 물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훈계를 듣거나 벌 받을까봐 겁낼 일은 없다.

두려움이 없을 때 아이들은 낯선 사람들과 더 쉽게 친해진다. ...

아이가 할 일은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다. 44-45

 

 

전체회의

 

학교 생활 가운데 자치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우리의 목표는 아이들에게 어떠한 것도 강요하지 낳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자유가 제한되는 측면이 있다. 누가 음식을 조리하고 어떤 음식을 조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체회의의 투표로 결정하지 않는다. 새로운 교직원의 채용 문제는 아이들과 공식 협의를 거치지 않는다. .. 학생들에게 자치는 그들의 공동 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상황을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50

 

자치에서 어른들이 하는 역할은 무엇일까? 어른들은 이끌려고 해서는 안 된다. 어느 정도 바깥으로 물러나 있는 재주가 필요하다. 51

 

민주주의란 완벽한 제도가 아님을 나는 인정한다. 다수결의원리가 그렇게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독재가 아닌 다음에야 다른 대안을 찾기는 어렵다. 여러 해 동안 내가 놀란 것은 우리 학교의 소수자들이 다수의 판결을 잘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55

 

 

자치

 

민주주의는 아이들이 투표권을 가지는 나이인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런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선거인 명부에 등록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59

 

아마 우리 민주주의가 민주 정치보다 더 공정할 것이다. 아이들은 서로에 대해 대단히 너그럽고, 아무런 기득권이 없기 때문이다. 59-60

 

자치를 하지 않는 학교는 진보학교라고 불리면 안 된다. 그건 일종의 절충 학교다. 아이들이 자기네 사회 생활에서 자치를 이루어나가는 데 완전한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면, 아이들은 자유로운 게 아니다. 우두머리가 있을 때는 진정한 자유가 없다. 이것은 엄격한 우두머리보다는 자비로운 우두머리에게 더 해당되는 말이다. 활기찬 아이는 모진 우두머리에게는 반항을 하지만, 부드러운 우두머리 밑에서는 오히려 유약해지고 자신의 진실함 감정을 분명하게 느끼지 못한다.

학교에서 자치가 잘 이뤄지려면 나이 든 학생 몇몇이 필요하다. 그들은 평온한 삶을 좋아하며, 악동이 아이들의 무관심이나 반감에 맞서 싸운다. 그들은 표결에서는 지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자치제도를 진정으로 믿고 원하는 아이들이다. 한편 열두 살 이하의 아이들은 자치제도를 잘 운영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은 아직 사회 생활을 영위할 나이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머힐에서는 일곱 살짜리 애도 전체회의에 거의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유치원생들까지 투표권을 가지며 종종 훌륭한 발언을 한다. 62

 

모든 교육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아이들을 나이와 분리해서 대하는 태도다. 64

서머힐은 바깥 세상의 삶에서 도피하지 않는다. 그래서 서머힐은 시대에 앞선 공동체 정신을 가질 수 있고 또 가지고 있다. 삽을 보고 땅도 잘 파지 못하는 형편없는 삽이라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실제로 그 삽을 가지고 도랑을 파는 사람만이 형편없는 삽이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70-71

 

 

놀이와 자율

 

놀이에 대한 이론은 많다. 그 중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론은, 어린아이들이 나중의 삶을 위한 연습 행위로 놀이를 한다는 것이다. 즉 새끼고양이가 털실을 쫓아다니는 것은 미래의 쥐잡기를 준비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것은 새끼고양이가 발로 얼굴을 닦고 몸단장을 하는 데도 어떤 목적이 있음을 전제한다. 또는 그와 달리 동물의 행동에는 장차 신성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신의 힘이 작용한다고 전제하기도 한다. 이런 두 가지 가정에 모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새끼고양이나 강아지가 놀이를 하는 것은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믿어야할 것이다. 아이들의 경우에 그 에너지는 타고난 육체적 에너지인 듯하다.

아동기는 성인기가 아니다. 어린 시절은 노는 시기다. 그런데 어떤 아이든 충분하게 놀지 못한다. 아이 때는 충분히 놀아야 앞으로 일을 시작해 나갈 수 있고 또 닥쳐오는 어려움에도 맞설 수 있다는 것이 서머힐의 이론이다. 74

 

내가 생각하는 놀이는 바로 공상과 관련된 놀이다. 조직되니 게임은 기술과 경쟁 그리고 팀워크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보통 아이들의 놀이에는 기술이 필요 없으며 경쟁이나 팀워크도 거의 요구되지 않는다. 75

 

서머힐에서 여섯 살짜리 아이들은 하루 종일 논다. 공상의 날개를 펴고서. 어린아이들에게 공상과 실재는 아주 가깝게 붙어 있다. 열 살 난 남자 아이가 유령 모습을 하고 나타나면 어린아이들은 좋아라고 비명을 질러댄다. 하얀 침대보를 뒤집어쓴 유령이 토미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유령이 다가오면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무서워하며 비명을 질러댄다.

어린아이들은 공상 속에서 살면서 그 공상을 실제 행동으로 옮긴다, 여덟 살에서 열네 살까지의 남자 아이들은 갱 놀이나 인디언 놀이를 하는데, 늘 사람을 죽이거나 나무 비행기를 타고 하늘 여기저기를 날아다닌다. 어린 여자 아이들 역시 갱 놀이를 하는데 총이나 칼을 쓰지 않는 대신 인신공격 성향이 강하다. 메리의 패거리와 넬리의 패거리는 서로를 싫어한다. 그래서 서로 간에 말다툼과 거친 말이 오간다. 남자 아이들의 경우 상대 패거리는 오직 놀이에서 적일 뿐이다. 그래서 어린 여자 아이들보다는 어린 남자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편이 훨씬 더 수월하다.

공상이 시작되고 끝나는 경계가 어디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어린아이들에게 실재와 공상은 아주 밀접하다. 한 여자 아이가 장난감 접시에 음식을 담아 인형에게 줄 때 그 아이는 잠시라도 인형이 살아 있다고 믿는 걸까? 흔들목마를 아이들은 진짜 발로 생각하는 걸까? 어떤 남자 아이가 손들어!” 하고 외치며 총을 쏠 때 그 아이는 자기 총을 진짜 총으로 생각하는 걸까? 나는 아이들이 자기 장난감을 진짜라고 상상한다고 여기고 싶다. 어떤 감수성 둔한 어른이 끼어들어 그것이 공상임을 일깨울 때 비로소 아이들은 현실 세계로 풍덩 떨어진다.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은 놀이에 대한 생각이 분명히 다른 것 같다. 남자 아이들은 여자 아이들보다 훨씬 많이 논다. 여자 아이들은 놀이 자체보다는 공상 세계에 더 깊이 빠져드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남자 아이들은 거의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남자 아이들은 여자 아이들과 놀지 않는다. 남자 아이들은 갱 놀이를 하고 술래잡기를 한다. 나무 위에 오두막을 짓고 구멍과 참호를 파며 논다. 남자 아이들은 어린아이들이 보통 하는 그런 일을 다 한다. 75-76

 

서머힐에서는 게임을 장려하는지 사람들은 묻곤 한다. 우리는 정말 어떤 것도 장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이들이 모험과 공상으로 가득 찬 게임을 하면서 노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 ..

나는 게임과 놀이를 구별한다. 나에게 축구, 하키 럭비, 야구 등은 진정한 놀이가 아니다. 그런 게임에는 놀이의 상상력이 없다. 자유로운 아이들은 공상 놀이(더 좋은 이름이 없어 이렇게 부르겠다)를 좋하하기 때문에 팀을 이루어서 하는 게임을 피하려 든다. 77

 

놀이라는 제목이 들어간 장에서 아이들의 책에 관해 거론해서는 안되겠지만 어딘가에서는 한 번 언급되어야 할 이야기. 78

 

아이들이 읽는 책을 대체 얼마나 검열해야 할까? 잔인한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가학적인 이야기도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어느 일요일 밤, 나는 학생들에게 모험 이야기를 해주었다. 식인종의 가마솥에서 마지막 순간에 구조되는 장면에 이르자 아이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펄쩍펄쩍 뛰었다. 79

 

아이들의 마음은 어른들의 마음보다 훨씬 더 깨끗해 보인다. 어떤 남자 아이는 헨리 필딩의 <톰 존스>를 읽도고 외설적인 구절을 발견하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아이들을 성에 대한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면 어떤 책에나 있을 수 있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셈이다. 나는 어떤 연령층의 책들에 대한 검열도 단호히 반대한다.

언젠가 학교에 새로 들어온 열네 살짜리 여자 아이가 내 서가에서 <어느 소녀의 일기>라는 책을 뽑아 들었다. 그 아이는 안던니 킥킥 웃어대며 그 책을 읽었다. 여섯 달 후 아이는 다시 그 책을 읽었다. 그러더니 책이 이전보다 재미없다고 내게 말했다. 모르고 읽었을 때는 짜릿했던 것도, 알고 나서 읽으면 시시해지는 법이다.

프로이트가 어린아이들에게도 성욕이 있다는 사실을 밝힌 후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에 대한 연구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그런데 성욕에 관한 책은 여러 권 나왔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자율적으로 자란 아이들에 관한 책을 쓴 사람은 아무도 없다. 80

 

자율은 인간성에 대한 믿음, 즉 원죄는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는 믿음을 내포한다. 자율은 어린 아기가 외부 권위의 강제 없이 자유롭게 사는 권리를 의미한다. 이는 배고프면 밥을 먹고, 그렇게 하고 싶을 때만 개끗한 옷을 입고, 혼이 나거나 볼기를 맞지 않으며, 늘 사랑받고 보호받는다는 의미다 물론 자율도 다른 이론적인 생각들처럼 일반 상식과 결합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81

 

자율은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속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을 의미한다. 자율적으로 아이를키우기 위해서 따로 교육을 받거나 성품을 계발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노인이 된 스코틀랜드의 한 마을에 살고 있는 메리가 생각난다. 메리는 놀랍도록 차분하고 평온한 사람이었다. 결코 안달하지 않았고 호통도 치지 않았다. 메리는 본능적으로 자기 아이들편에 섰다. 아이들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엄마가 자신들을 인정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병아리들을 돌보는 푸근하고 온화한 암탉과 같은 엄마였다. 메리는 남을 소유하려는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을 남에게 베풀 줄 아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81-82

 

아이에게 장난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아이가 혼자 힘으로 도저히 문제를 풀 수 없을 때까지는 어떤 식으로든 아이를 도와주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이 요구하는 대로 모두 주지 말라. 이 문제에서 나는 조금 주관적일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에게 꽤 많은 돈을 빚찐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값비싼 최고급새 경주용 자전거를 보내왔기 때문인데, 나는 그것이 싫다. 일반적으로 말해 오늘날 아이들은 너무 많은 것을 받아서 그만큼 선물의 진가를 알지 못한다. 83-84

 

다른 한편으로 아이들에게 너무 인색해서도 안 된다. 아이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여러분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선물을 하는 부모는 흔히 자기 아이들을 충분하게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보상 심리로 아이들에게 값비싼 선물을 퍼부어 자신들의 사랑을 보여주고자 한다. 84

 

아이들은 음악과 진흙을 좋아한다. 아이들은 계단을 쿵쾅거리며 오르내리고 시골뜨기처럼 소리를 질러대고, 가구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술래잡기를 하다가 지나다니는 중에 고대 로마시대의 골동품인 포틀랜드 꽃병이 놓여 있으면 아이들은 그냥 뀌어넘어갈 것이다. 그것이 뭔지 쳐다보지도 않고.

문명의 폐해는 어떤 아이도 충분히 놀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이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모든 아이들이 어른의 나이에 이르기 전에 이미 어른이 되도록 온실 재배되고 있다는 것이다.

놀이에 대한 어른들의 태도는 지극히 독단적이다. 우리처럼 나이 든 사람들이 아이들의 시간표를 짠다. 9시부터 11시까지 수업하고, 그 후 1시간 반 동안 점심 식사 하고, 다시 오후 3시까지 수업한다. 만약 자유로운 아이가 손수 자기 시간표를 짠다면, 그 아이는 분명히 노는 시간을 길게 잡고 수업 시간을 짧게 할 것이다.

아이들의 놀이에 대해 어른들이 가지는 반감의 근원은 두려움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근심 어린 질문을 골백번도 더 들어왔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하루 종일 놀기만 하면, 도대체 공부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시험에는 합격할까요?” 다음의 내 대담에 수긍하는 부모는 많지 않을 것이다. “당신 아이가 놀고 싶은 만큼 실컷 놀더라도, 이 년만 바짝 공부하면 대학입학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삶의 요소로서 놀이가 지닌 가치를 무시하는 학교에서는 보통 입시 준비로 오 년, 육 년, 혹은 칠 년을 공부하지요.”

그 말 다음에 나는 꼭 이렇게 덧붙인다. “물론 그것은 그 아이가 시험에 합격하고 싶어할 때만 그렇습니다!” 어쩌면 그 아이는 발레리나나 엔지니어가 되고 싶을지도 모른다. 혹은 의상 디자이너나 목수가 되고 싶을지도.

그렇다, 아이의 미래를 두려워하는 마음때문에 어른들은 아이에게서 놀 권리를 빼앗는다. 아니, 거기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놀이를 허용하지 않는 태도의 배후에는 모호한 도덕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아이라는 존재는 별로 좋은 게 아니라는 암시, 청소년들에게 어린애처럼 굴지 마라고 훈계하는 목소리에 담긴 암시가 그것이다.

자신들이 어린 시절에 가졌던 동경과 열망을 잊어버린 부모들, 어떨게 놀고 어떻게 공상하는지를 잊어버린 부모들이 불쌍한 부모들을 만들어낸다. 노는 능력을 상실한 아이는 신체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그 아이는 자기와 사귀려고 다가오는 다른 아이에게 위험한 존재가 된다. 아이들이 원하는 만큼 놀지 못했을 때 어떤 손상을 입는지를 평가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84-86

 

 

일과 정직

 

아이들의 공동체 의식, 즉 사회적 책임감은 적어도 열여덟 살은 지나야 충분히 발달한다. 아이들의 관심사는 당장 눈앞의 것에 있다. 아이들에게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89

 

아이가 지금 놀아야 하는 시기에 자유롭게 지낸다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는 어떤 어려움에도 맞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인생관이 바로 정립된다면 직업이 어떤 것인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90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을 너무 자주 부려먹는다. "메리어느 달려가서 이 편지를 우체통에 놓고 와." 어느 아이든 이렇게 이용당하는 것을 싫어한다. 91

 

아이들 스스로 관심이 일지 않는데, 억지로 관심을 가지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은 시간당 얼마씩 주기로 하고 아이들을 고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과 나는 같은 토대 위에 서게 된다. 즉 나는 내 텃밭에 관심이 있고, 아이들을 가욋돈을 버는 데 관심이 있다. 92

 

건전한 문명이라면 최소한 열여덟 살이 되기 전까지는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지 않으리라는 게 내 의견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열여덟 살이 되기 전에 벌써 많은 일을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이들에게 놀이와 같은 것이며 아마 부모의 입장에서는 비경제적인 일일 것이다. 94

 

좋은 버릇은 일찍이 어린 시절에 몸에 배지 않으면 나주엥는 평생 발달하지 않을 거라는 일반적인 전제가 있다. 우리가 그 전제에 길들여져왔고 또 그 생각이 도전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 전제를 아무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인다. 나는 그 전제를 부정한다.

아이들은 자유 속에서만 자기가 타고난 방식, 즉 좋은 방식으로 자랄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자유가 꼭 필요하다. 다른 학교에서 전학을 온 학생들에게서는 억압의 결과물들을 볼 수 있다. 거짓 공손함과 가식적인 예의를 드러내 보이는 그 아이들은 정직하지 못하다. 97

 

아주 어려서부터 자유롭게 자란 아이는 거짓된 태도를 취하거나 가식적인 행동을 하는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 98

 

아이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두어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 아이들을 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98

 

 

문제아들

 

아이의 범죄는 모든 경우에 사랑의 부족에서 연유한다. 100

 

아이는 본래 이기주의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어떤 다른 것보다 중요한 사실이다. 에고가 충족될 때, 우리는 선이라고 불리는 것을 행한다. 에고가 굶주릴 때, 우리는 범죄라고 불리는 것을 행한다. 자기에게 사랑을 베풀어서 자기 에고의 진가를 인정해주어야 할 사회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범죄자는 사회에 대해서 복수한다. 101

 

아이가 나쁜 짓을 하는 것은 힘에 대한 욕구가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선하다. 사람은 선행을 하기를 원한다.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한다. 증오와 반항은 오로지 좌절된 사랑이요 좌절된 힘이다. 111

 

무엇이 처벌이고 무엇이 처벌이 아닌지를 결정하기는 정말 어렵다. 112

 

사랑은 다른 사람의 편에 서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112

 

 

또 다른 문제들

 

자유로워지면 아이들이 거짓말을 별로 안 한다... 아이들은 대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두려움으로 가득한 가정일수록 아이들의 거짓말은 번성한다. 두려움을 없애면 거짓말도 사라진다. 115

 

나는 거짓말하는 것과 부정직한 것을 구별한다. 여러분은 정직하더라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은 인생의 큰 문제에서는 정직하지만 사소한 문제에서는 가끔 부정직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의도에서 거짓말을 한다. ...

대개 어른들의 거짓말은 이타적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거짓말은 늘 편협하고 개인적이다. 아이에게 오직 진실만을 말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이를 평생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115-116

 

 

개인 상담

 

요즘 나는 정기 심리 치료를 하지 않는다. 신경증에 걸린 아이를 치유하는 것은 그 아이의 억눌린 감정을 풀어주는 일이다. 아이에게 정신의학 이론을 자세하게 설명한다거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방법으로는 아이를 조금도 치유할 수 없을 것이다. 점점 더 나는, 아이들이 자유 속에서 자신의 콤플렉스를 풀고 마음껏 지낼 때는 심리요법이 불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134

 

장차 치유사가 되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할 것이 있다. 친구들에게는 심리요법을 사용하지 말라. 특히 가족들에게는 더더욱 위험하다. 미술 교사들은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잦다. "네 그림을 보니까 너는 엄마를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하는구나." 그 그림에는 한 아이가 도끼를 들고 나무를 자르려 하고 있다.

상징을 해석하는 일은 십자낱말풀이처럼 재미있는 게임이다. 그것은 환자에게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나는 확신한다. 많은 정신분석가들은 이제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꿈을 해석하는 것이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왕도라고 했지만, 프로이트 이론을 추종하는 정신분석가들도 더 이상 꿈을 해석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하튼 교사는 상징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가 심리학을 사용하려 한다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해야 한다. 아이의 꿈을 해석하는 것보다는 아이를 직접 껴안아주는 일이 훨씬 큰 도움이 된다.

그렇다고 교사는 심리학을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는게 아니다.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135-136

 

내가 사용한 방법을 간단히 설명하면, 아이들을 대하는 잘못된 방법과 정반대로 햇다는 것이다. 보통 학교에서 도둑질을 하면 그 아이는 회초리로 맞거나 적어도 도덕적 훈계를 들어야 한다. 나는 도둑질을 도덕과는 무관한 문제로 만들었다. 세 학교에서 도망친 전력이 있는 남자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서머힐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집에 갈 차비가 있다. 벽난로 위에다 놔둘 테니까, 여기서 나가고 싶으면 이 돈을 달라고 해라." 그 아이는 서머힐에서 절대 도망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내 태도 때문이었을까? 혹은 난생처음으로 자유를 맛본 즐거움 때문이었을까?

성공만 한 것이 아니라 실패도 했다. 드레스덴에 있을 때였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여자 아이에게 상자를 만드는 데 너무 많은 못을 쓴다고 말했더니, 그 아이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당신도 전에 만난 잘난 체하는 선생들이랑 똑같아." 나는 그 아이와 다시는 진정한 만남을 가질 수 없었다. 아홉 살 난 레이먼드에게 용돈을 주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현관문을 훔친 벌로 6펜스의 벌금형이야." 그러자 레이먼드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 사건 전에 나는 레이먼드에게 정신병 증세가 있다는 점을 알았어야 했다. 아홉 살 난 아이들에게 모험담을 들려주던 중, 우리가 발견한 금을 마틴이 훔쳐갓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중에 마틴이 울면서 나에게 왔다. "난 절대 금을 훔치지 않았어." 그 이후로 나는 아이들을 악당으로 만들어서 이야기하는 법이 없다. 139

 

이제 노인이 된 나는 심리요법에 대해 어떤 입장인가? 나는 심리요법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잘못된 결과로 가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심리요법도 나름의 장점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 프로이트는 아이들을 위한 자유를 믿지 않았다고 나는 확신한다. 프로이트는 가부장주의를 고수했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심리요법을 찾는 이유는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이지 가족들이 신경증에 안 걸리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142

 

 

건강

 

아이들은 에티켓을 문제 삼는 일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하지만 사회적인 예의라고 불릴 만한 문제에 대해서까지 자유로워서는 안 된다. 146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예의범절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이들에게 가르칠 만한 가치가 없다. 기껏해야 그것은 관습의 유물일 뿐이다. 진정한 예의범절은 저절로 우러나온다. 146

 

서머힐에서처럼 아이가 자신의 이기심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게끔 자유로워지면, 그런 이기심은 점점 이타주의로 바뀌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심과 배려로 변한다. 147

 

우유 문제를 다루어보자. 여러 해 동안 우리 학생들은 독일, 오스트리아, 도싯, 웨일스에 있는 목장에서 짠 우유를 직접 받아먹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온 살균 처리된 우유 외에는 전혀 구할 수가 없다. 또다시 문외한은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내가 아는 바로는 저온 살균 처리된 우유는 맛이 없고 발효되지 않는다. 단지 상할 뿐이다. 살균 처리되지 않은 우유를 먹으면 결핵에 걸릴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가난한 아이들이 영양 부족 때문에 결핵에 걸린다. 우리는 늘 전문가들의 손안에서 놀아난다. 148

 

 

성과 남녀공학

 

우리 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을 잘 보냈다. 그들은 자위행위를 했다고 훈계를 듣거나 벌을 받지 않았다. 많은 아이들이 가정에서 벌거벗은 몸에 익숙했다. 대체로 성에 대한 태도가 건강하고 자연스러웠다. 168

 

남녀공학인 유명한 사립학교에서 온 청소년 몇 명에게, 그 학교에서 이성교제가 이루어지는지 물었더니, 그런 일은 없다고 했다. 그 대답에 내가 놀라자, 아이들이 말했다. "가끔 남자 애와 여자 애가 친구로 지내는 일은 있지만, 서로 사귀는 일은 전혀 없어." 나는 그 학교 교정에서 잘생긴 남자 아이들과 예쁜 여자 아이들을 보앗던 터라, 학교가 학생들에게 사랑에 반하는 관념을 강요하고 있으며, 대단히 도덕적인 학교 분위기가 성을 금기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언젠가 어느 진보학교의 교장에게 물었다. "학교에서 아이들끼리 사귀는 경우가 있습니까?"

"아니오, 없습니다." 그가 근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는 문제아를 받지 않습니다."

조건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가끔 사랑할 능력을 상실한다. 섹스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되는 소식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젊은이에게 사랑을 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인간적으로 커다란 비극이다. 168

 

젊은이의 사랑에 반대하는 주장들 중 이치에 맞는 주장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거의 대부분의 주장이 억압된 감정이나 삶에 대한 증오심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들은 종교적이고 도덕적이며 독단적이고 외설적이다. 170

 

 

극장과 음악

 

연기는 교육에 꼭 필요한 부분이다. 연기는 대체로 자기과시다. 하지만 연기가 단순히 자기과시에 그쳤을 때, 서머힐에서는 그 배우를 칭찬하지 않는다. ..

연기자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동일시하는 힘이 강해야 한다. ..

연기는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갖게 하는 방법이다. 177

 

마음대로 생활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면, 율동은 모든 아이들에게 유익할 것이다. 180

 

 

교사들과 가르침

 

교사들은 나무 뒤의 숲을 보지 못한다. 그 숲은 풍성한 삶, 성격틀에 맞춰 찍어내기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교사들 대상의 강연을 할 때, 나는 교과나 규율 그리고 수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거라고 애초부터 말한다. 청중들은 한 시간 동안 쥐 죽은 듯 조용히 이야기를 경청한다. 진심 어린 박수갈채 속에 강연을 마치면 사회자가 질문을 하라고 한다. 그런데 그 질문 가운데 적어도 4분의 3이 교과나 가르치는 문제에 관해서다.

무슨 우쭐한 마음으로 이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나는 교실 벽과 감옥 같은 학교 건물이 얼마나 교사의 시야를 좁게 만들고 교육의 진정한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슬픈 심정으로 말하는 것이다. 교사들은 아이들의 목 위 머리 부분만 다룬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핵심 부분인 아이들의 감정은 그들에게 낯선 영역이 되고 만다.

부모들 역시 학교에서 학습이란 측면이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잘 깨닫지 못한다. 어른들처럼 아이들도 자기가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운다. 상을 주고 점수를 매기고 시험을 보는 것은 모두 온전한 개성 발달에서 어긋난다. 학자연하는 사람들만이 책을 통한 학습을 교육이라고 주장한다.

책은 학교에서 가장 중요성이 떨어지는 도구다. 아이들에게는 읽기, 쓰기, 산수 세 가지면 족하다. 나머지 필요한 것들은 공구, 찰흙, 운동, 극장, 그림, 자유 등이다.

이제 우리는 학교 공부에 대한 개념에 도전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아이들이 수학, 역사, 지리, 과학, 약간의 예술, 특히 문학을 당연히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깨달아야만 한다. 보통의 아이들은 이런 과목들에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190

 

학습을 놀이에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재미있게 한답시고 의도적으로 학습에 놀이를 가미해서도 안 된다. 191

 

아이에게 배움을 강제하는 것은 의회의 법령으로 종교를 강제하는 것과 똑같다. 그것은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192

 

청소년들이 하는 학교 공부의 대부분은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인내력의 낭비일 뿐이다. 그것은 아이들에게서 놀고 놀고 또 놀 권리를 앗아간다. 아이들의 어깨 위에 늙은이의 머리를 얹는 꼴이다. '교육'은 아이들의 동기를 고려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노려는 욕망, 자유로워지려는 갈망, 그리고 자신의 모습대로 사는 법을 모르는 어른들이 강제로 틀에 맞춰 키워내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갈망을 '교육'은 고려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모든 나라가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공들여 학교를 세운다. 하지만 존이나 피터나 이반이, 부모와 교사 혹은 우리 문명의 강압성이 가한 억압 때문에 입게 된 정서적 손상과 사회악을 극복하는 데 학교의 실험실이나 작업실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학교 교과들이 왜 그렇게 규격화되었는지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왜 역사는 있고 식물학은 없는가? 왜 지리학은 있는데 지지학은 없는가? 왜 수학은 있는데 시민학은 없는가? 늙은 퍼블릭스쿨 교장의 말에 그 답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이가 그것을 싫어하는 한,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든 아무 상관없다." 193-194

 

사범대 학생들에게 강연을 하다보면, 쓸모없는 지식들로 가득찬 그 젊은이들의 미성숙함에 자주 충격을 받는다. 그들은 많은 것을 안다. 논리에 뛰어나고 고전들을 인용할 줄도 안다. 하지만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에서 그들 대다수는 어린아이 수준이다. '아는 법'은 배웠지만 '느끼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친절하고 유쾌하고 의욕에 차 있지만, 뭔가가 부족하다. 감정적 요소, 생각을 감정에 종속시킬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들이 놓쳐버렸고 또 지금도 놓치고 있는 그 세계에대해 이야기해준다. 그들의 교과서는 성격이나 사랑, 자유, 자기 결정 같은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그러니 책을 통한 지식 습득만을 목표로 하는 체계가 지속되고, 머리는 가슴에서 계속 분리되어간다. 199

 

우리네 교육에서 진정한 행위, 진정한 자기표현은 얼마나 될까? 손으로 하는 작업은 전문가의 감독 아래 접시를 만드는 게 고작이다. 유도식 놀이 체계로 유명한 몬테소리 교육법조차, 아이로 하여금 행위를 통해 배우게 만드는 인위적인 방식이다. 거기에는 창조적인 면이라곤 하나도 없다.

창조자들은 자신들의 독창성과 천재성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도구들을 얻기 위해 자신들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운다. 학습을 강조하는 교실 안에서 얼마나 많은 창조성이 죽어가고 있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200

 

공부는 중요하다. 하지만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다. 200

 

 

서머힐의 교직원

 

토요일 밤 전체회의에서는 어른들과 아이들 사이의 갈등이 드러난다. 그런 갈등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다양한 연령층으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어린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면 아이들을 완전히 망쳐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 잠자리에 든 시간에 나이 많은 아이들 패거리가 늦게까지 자지 않고 웃고 떠들면 어른들은 싫은 소리를 한다. 해리는 자신이 한 시간이나 걸려 현관문에 쓸 판자를 만들어놓았는데, 점심을 먹고 와보니 빌리가 그것으로 선반을 만들어버린 것을 알고는 볼멘소리로 투덜거린다. 나는 납땜 도구를 빌려가서는 되돌려주지 앟는 아이들을 비난한다. 나이 어린 세 아이가 저녁 식사 후 배가 고프다면서 빵과 잼을 가져갔는데 다음날 아침 복도에 빵 조각이 널려 있는 것을 보고 아내는 흥분해 소리를 지른다. 피터는 도예실에서 아이들이 자기의 귀중한 찰흙을 던지며 장난친다고 몺 언짢아한다. 어른들의 입장과 아이들의 부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계속된다. 하지만 그 싸움은 결코 서로의 인격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거기에는 개인에 대한 어떤 반감도 없다. 이런 갈등으 서머힐을 생동감 있게 만든다. 204

 

당신이 정말 아이의 편이라면 아이는 그것을 안다. 205

 

수업이 강제가 아닐 때, 아이들을 수업에 들어오게 하려면 정말 좋은 교사가 되어야 한다. 물론 내가 원하는 교사는 어느 정도 유머가 있고 위엄은 전혀 없는 교사다. 두려움을 불러일으켜서도 안 되고 도덕가가 되어서도 안 된다.

유머가 없는 사람은 아이들에게는 분명 위험한 존재다. 유머는 아이들에게 친근감, 존경을 표할 필요 없음, 두려움 없음, 다시 말해 어른들의 애정을 의미한다. 유머는 대개 위아래를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교실이란 울터리를 벗어나 있다. 유머는 교사로서 요구하는 존경을 없애버린다. 왜냐하면 아이들과 함께 웃는 교사의 웃음은 그를 너무나 인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장 훌륭한 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웃는' 사람이고, 가장 자쁜 교사는 아이들을 보고 '비웃는' 사람이다. 206-207

 

내가 서머힐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다른 재미난 아이들 사이에서 나도 한 명의 재미난 아이가 될 수 있었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재미는 수학이나 역사 그리고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다른 모든 교과목들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유머는 일종의 정서적 안전판이다. 재미있게 웃을 수 없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에 죽어 일흔이 되어서야 땅에 묻힌다고 누군가가 썼다. 분명 유머가 없는 사람을 가리켜 한 말이다. 209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어른이나 아이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209

 

많은 사람들이 가르치는 일은 숙련이 필요 없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212

 

 

종교적 자유

 

행복은 모든 아이들의 권리다. 미래의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삶을 대비한답시고 아이들에게 힘든 삶을 살게 하는 것은 죄악이다. 216

 

아이들을 도덕적으로 훈계해야 할 경우는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심리학적으로 잘못이다. 어린아이에게 이기적이지 말라고 요구하는것은 잘못이다. 모든 아이들은 이기주의자다. 온 세상이 모두 자기 것이다. 아이들의 열망은 강렬하다. 아이들을 오직 바라기만 하는, 세상의 왕이다. 사과를 손에 쥐면 오직 사과를 먹겠다는 바람 한 가지뿐이다. 그리고 엄마가 동생과 사과를 나눠 먹으라고 하면 아이는 동생을 미워하게 된다.

아이에게 이기적이지 말라고 '' 가르쳐도 이타주의는 나중에 자연스럽게 생긴다. 그런데 아이에게 이기적이지 말라고 가르치면 아마 이타주의는 전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타적인 아이는 자신의 이기심을 만족시키면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기를 좋아하는 아이일 뿐이다.

아이의 이기심을 억업하면 그 이기심은 고착된다. 충족되지 않은 바람은 무의식 속에 잠재한다. 이기적이지 말라고 가르침을 맏은 아이는 평생 이기적인 데 매달릴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훈계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219-220

 

내가 아는 가장 행복한 가정은 부모가 도덕으로 가르치려 들지 않는, 아이들에게 숨김없이 정직한 가정이다.... 거짓된 위엄과 강요된 존경은 사랑과 거리가 멀다. 강요에서 나온 존경에는 '' 두려움이 따른다. ..

잘 자란 아이는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숨을 쉰다. 그것은 바로 아이가 두려움 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표시다. 220

 

만약에 아이가 어떤 것을 죄악이라고 배운다면 삶에 대한 그 아이의 사랑은 분명 두려움과 증오로 바뀐다. 자신들이 자유로울 때 아이들은 결코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221

 

 

서머힐의 졸업생들

 

송공에 대한 나의 기준은 '즐겁게 일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230

 

"열한 살이 되었는데 아직 글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른단 말이야!"하고 큰소리치는 아줌마들이 있게 마련이다. 바깥의 환경은 온통 놀이를 반대하고 공부에 찬성한다는 것을, 아이들은 어렴풋하게 느낀다. 243

 

 

서머힐의 미래

 

나는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사소한지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을 익히려 들지 않거나 혹은 아예 그런 안목을 익힐 여지가 없는 부모를 만나면 화를 낸다. 267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른다면 소극적인 구경꾼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 한편 나는, 어떤 아이가 여려 해 동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듯 보이더라도 절대 실망하지 않았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 내면의 본성에 따라 이루어지는 성격 형성하기가 바로 교육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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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가두면 공기가 되어버리니까. 

 난 바람이고 싶어.

 그래서 그냥 통과하게 높아두는 거야.

 가두지 않고."



어른이 된다는건, 몸만 뻣뻣하게 굳는것이 아니라 생각이 흘러가는 길까지 굳어지게 되는것.

중요한건 끝까지 유연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마음도, 생각도, 몸도...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

여행지에서 일어난 일들

여행지에서 향유하는 순간들

여행이 가져다주는 깨달음으로 

우리의 일상은 넉넉해진다.

때론 여행지에서 평소 시도하지 못했던 일들을

스스럼없이 해보기도 하며 

그 과정에서 또다른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래서 떠나면 떠날수록 내가 누구인지

더 잘 알게 되고 

길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삶이란 완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를 채워주고 잘 서 있을 수 있도록 서로 지탱해주는 것이다. 내가 힘이 있을 때는 누군가에게 나의 어깨를 빌려주고 내가 힘들때는 누군가에게 기대하고 의지하는 것. 어떠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이런 지혜를 얻기 위해 여행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말할때 우리는 길을 떠난다고 한다. 

'길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길에게' 떠나는 것이 아니라 

'길을' 떠난다고 말한다.

여행은 새로운 길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던 길을 내려놓거나 지금 가고 있던 그 길을 떠나 

잠시 안녕,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게 익숙한 그 길과

다시 돌아왔을대 변한건 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익숙한 길을 걷다 멈출 줄 아는 용기

익숙한 것들을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

그것이 여행이 길을 떠난 자에게 주는 선물이다.



사람의 마음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는 것일까.

나는 그 흘러가는 시간의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여행에는 흔적이 남는다. 

잠시 머문곳이든 매일 아침 지나던 길이든 '안녕'하고 눈 인사를 나눴던 사람이든 스쳐간 것들은 그렇게 기억되고 또 추억이 된다.



내가 가는 모든 길이, 선명하게 보여야 안심할 수 있다는 새악도 어쩌면 욕심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길이 더 평화롭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여행하는 방법은 또 달라질 것이다.

삶을 대하는 방법이 달라지듯 떠나는 방법도 달라지고

또 머무는 방법도 달라지겠지.

이렇게 변화할 수 있어서 그렇게 변하는 나를 보게 해주어서 참 고맙다.

여행이라는 친구에게.


내가 하는 일

내가 가는 곳

내가 먹는 것

내가 만나는 사람은 거의 정해져 있다.

그것을 깰 수 있는 건 

여행뿐이다.



여행은 애인처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

남루해진 마음이 쉬고 싶을 때나 삶이 푸석거리고 재미없을때 언제나 달뜬 마음으로 꿈꾸게 되는 것. 자랑하고 싶으면서도 나만의 것으로 남겨 두고 싶은 것.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시간을 보내든 그 자체로만으로도 충분한 것.

아무리 시간을 많이 보내고 머물렀던 곳을 또 지나간다해도 언제나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것.

여행은 애인처럼 친구들은 부러워하지만 엄마 아빠에게는 왠지 미안한 것.



여행은 스스로 써내려가는 옴니버스 영화의 시나리오 일지도 모른다. 

큰 세트는 일단 정해져 있고, 그 공간을 어떻게 꾸밀것인지는 나에게 달려 있다.

혼자 독백하듯 모놀로그 스타일로 이야기를 전개할 것인지, 각각의 등장인물을 적절히 넣어 흥미있는 에피소드로 풀어갈 것인지는 순전히 글을 쓰는 나의 몫이다. 길을 물어보는 짦은 에피소드에 한 명을 등장시키더라도 이야기를 풍성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면 여행이 즐거워 진다.  



'잠시 내 손에 머물다 가는 것들을 잘 놓을 줄 안다면 내가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면 인생을 여행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울 것 같다.' -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인생은 머무르지 않고 흐르는 것.

세월이 흐르듯, 삶이 흘러가듯, 시간도 흐르고 인연도 흐르는 것.

내가 할 일은 애써 잡으려고 발버둥치는게 아니라 그것들이 내게 잠시 머무는 동안 아끼고 사랑해주는 것이다.

함께 흘러갈 수 있도록 기대하며 같이 있는 동안 즐거워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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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가 손이나 얼굴에서 완벽하게 그려지는 때가 있는가 하면, 

바다나 언덕에서 느끼는 어떤 감정이 그 무엇보다 우선할 때도 있다.

어쩔 때는 열정이나, 깨달음, 지적인 환희가

너무도 진실되고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경험의 결과가 아닌 경험 그 자체이다.

우리에겐 다채롭고 극적인 삶에 대해 

매우 한정된 시간만이 허락되었다.

어떻게 하면 그 속에서 최상의 조건으로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삶의 에너지가 절정으로 타오르는 지점을 찾아 

계속, 끊임없이 움직일 수 있을까?

단단하고 보석 같은 불꽃으로 언제나 활활 타오르며 

이 환희를 유지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 월터 페이터의 <르네상스 역사에 관한 연구> 중에서



최고의 벤처캐피털 투자자들은 선두주자가 될 만한 가능성이 있는 기업에만 투자를 한다. 팽창하다 결국 균형을 찾아가는 대부분의 시장에서 흑자를 달성하고 주가가 오르게 되는 기업은 한 두 곳에 불과하다. 따라서 처음부터 시장을 '장악'할 수 있는 사업계획을 세워야 한다.  55


"사업계획에 '최악의 경우'도 가정해서 담아요. 아마도 그 계획이 약간의 위험 가능성을 줄여줄 거에요. 그 정도의 시장 점유율로는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 수가 없겠지만요. 모든 것을 고려해서 계획을 짜지 못할 거라면 이런 일은 하지 말아요. 경쟁업체가 생기더라도 선두를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투자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

"레니, 왜 이 사업이 근사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죠?"

"시장도 크고 돈도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삶의 방식의 변화를 줄 수 있을까요?"

"세상을 변화시키는 부분 말인가요? 비탄에 빠진 사람들을 상대로 돈 버는 악덕업자들의 소행을 막을 수 있습니다. 현재 시스템은 엉망이에요."

"오프라인에서의 중개 역할을 당신이 온라인으로 대체하면서 제품의 판매 방식만 바뀔 뿐이죠."

"그게 뭐가 잘못된 겁니까?"

"아뇨, 아마도 좋은 사업전략일지도 모르죠. 그런데, 5년 후에는 이 사업을 어떻게 전망하나요?"

"4억 달러? 5억 달러?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결국 달라지는 것은 없는 거 아닌가요? 같은 제품을 같은 방식으로 판매하겠죠?"

"그렇습니다."

그는 뭔가를 놓친 것처럼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게 문제가 될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부 투자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말이죠."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죠. 경쟁력은 얼마나 될까요? 유사업체들을 물리칠 만큼 독특하고 개성 있는 제품이나 세비스를 제공할 수 있나요? 시장을 다 차지한다고 해도 그 점유율을 지킬 수 있나요? 혹, 밤 새워 하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하루 아침에 모방할 수 있는 건 아닌가요?"  56-57


장례용품 마진율이 그렇게 높다면 일반 장례업자들이 어느 정도까지 가격을 인하할지 누가 알겠는가? 게다가 인터넷상에서의 경쟁 문제도 있다. 유사업체들이 진입을 막을 도리가 있을까?..

이 사업의 관건은 속도였다. 인터넷 사업 본질상 당연했다..

"사람들에게 인터넷 장례업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릴 생각이죠? Funerals.com의 브랜드를 어떤 식으로 확립하고 존재를 알릴 계획인가요? 전자상거래에 필요한 것은 전파, 인지도 형성, 노출입니다. 게다가 인터넷의 포턱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텃세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58


"세 번째 질문으로 가죠."

다시 레니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팀원들 문제입니다. 선점하기 위해서는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냐가 중요하죠. 업무를 익힐 시간이 없으니 말입니다."  60


".. 사업을 진행시키면서 학습하려면 융통성이 있어야 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하죠.."  63


투자자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을 보고 투자한다. 따라서, 팀원은 똑똑하고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어야 하며, 맡은 분야에 경력이 있고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또한, 빠른 지식 흡수력을 필요로 한다. 일단 창업을 하고 나면 시장에 대한 정보와 경쟁업체들이 넘쳐날 것이다. 이를 훑어 가면서 흐름과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심지어 대폭적으로 전략을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팀원은 불확실성과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63-64


나는 레니에게 벤처기업을 부화시키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벤처기업에게 리더십과 경험을 제공하고, 아이디어를 성공적인 기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준다... 고용된 인력이 아니라 파트너이지 팀원의 입장에서, 주인이자 지휘봉을 잡은 입장에서 회사를 지원한다. 그 대가로 동등한 관계를 부여받는다. 그런 관계하에 팀원처럼 생각하고 창립 멤버들과 함께 침몰하거나 헤엄치기도 한다.  75


벤처 사업을 시작하려면 과감한 실행력과 끊임없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이때 내 역할은 회오리바람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통찰력과 방향 감각, 안정감을 제시하는 것이다. 나는 각 기업을 도울 때마다 자금 확보, 전략 수립, 팀 구성 및 지휘, 중요한 관계 수립, 상품 및 서비스 개발, 상품 및 서비스 시장화, 계약 성사 면에서 내가 알고 있는 경험을 모두 쏟아 붇고 모든 인맥을 총동원한다.  76


인터넷 벤처기업의 열풍 속에서 선발 주자가 기득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는 어느 누구도 장담 할 수 없다. 먼저 시작하는 것보다는 알맞은 시장을 골라서 제대로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할지 모른다.  82


창업을 할때, 아주 신중하게 걸음을 옮겨야 하는 경우도 있다.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도전하는 회사라면 더욱 그렇다. 그들을 이끌어 줄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한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그들만의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시장을 가까이 접할 수 있고 잠재 고객들로부터 의견을 들을 수 있으며 몇 번의 실수 정도는 감당 할 수 있도록, 당분간은 작은 규모와 융통성 있는 태도를 유지하라고 충고할 것이다.  83


교훈을 얻으려면실수를 딛고 일어설 줄 알아야 하고, 성공을 거두려면 그 교훈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84


레니에게는 사업가다운 기질이 있었다. 거대한 장애물을 과속 방지턱 정도로 바꿀만한 꿋꿋한 의지와 정신력이 있었다.  85


세월을 거치면서 나는 사업이라는 것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창의력을 펼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회화나 조각처럼 개인의 재능을 표현하는 캔버스와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왜냐고? 사업의 핵심은 변화이기 때문이다. 사업과 관련이 있는 것들 중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시장은 달라지고 제품은 발전하며 경쟁사는 동지가 되고 직원들은 들어 왔다가 나간다.. 기업은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몇 안 되는 사회기관이다...

미국에서 기업의 법칙은 물리학의 법칙과 같아서, 태생적으로 선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적용하기 나름이다. 기업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몰고 갈지, 파괴적인 방향으로 몰고 갈지를 결정하는 주체는 바로 인간이다.  87


인생을 두 부분으로 확실히 나눠야만 한다.

1단계 : 해야만 하는 것을 해라.

(그렇게 미룬 후, 궁극적으로)

2단계 :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라.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비슷한 말을 수없이 들으며 자란다. '뛰기 전에 걷는 것부터 배워라' '첫 술에 배부르랴'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99


열정이란, 저항할 수 조차 없이 어떤 것으로 당신 자신을 끌어가는 것을 말한다. 반면 의자란, 책임감 또는 해야만 한다고 생각되는 일에 의해 떠밀려가는 것이다.

조금이나마 자기 인식을 하고 있는 사람은 내가 어떤 분야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있다.

'미뤄놓은 인생 설계'의 삶에서 1단계에 발휘되는 것은 의지이다. 잠시 보류시켜 놓은 2단계야 말로 열정이 담겨 있는 시기이다.  121


'내일 당장 숨을 거두게 된다면 오늘 어떤 일을 하고 싶을지 생각해보라는 뜻이었습니다. 의지와 열정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의지는 떠밀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의무감과 책임감 때문에 말입니다. 열정은 본래의 자신과 일치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느끼는 유대감 같은 것이지요. 열정이 있어야 어려운 시기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131


사업을 할 때 조금은 눈도 멀고 귀가 막힌 것도 좋지만, 완전히 눈이 멀고 귀가 막히면(사실 많은 사업가들이 그렇지만) 시장을 파악하고 조언을 들으며 비전을 현실로 만들어 가는 작업을 할 수가 없다.  139


비전을 담고 일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열정과 책임감을 불어넣는다. 이는 조직 목표와 열정을 연결시키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 불가능한 것을 이루고, 큰 사람이 되려 하는 사람들에게는 재정적 보상보다 감동이 필요하다..

애착을 느낄 무엇인가.  146


비즈니스 환경은 늘 변한다. 사람들은 전략과 수익 모델을 변화하는 환경에 맞게 지속적으로 재검토하고 필요에 따라 수정해야 한다. 하지만 수정할 때마다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기업의 큰 비전이다. 긴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구성권의 감동을 읶르어 내는 비전을 포기하면, 나침반 없이 남겨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나는 기업의 위치를 돌아볼 때 현재 상황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목표와 방향 점검도 병행돼야 한다는 충고를 늘 하고 있다.

나침반을 맞추고 길을 따라 나아가라. 그래야,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방향 감각을 유치할 수 있을 것이다.  149


실리콘밸리의 베테랑이라면 누구나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이 있다. 바로 벤처기업에는 단계별로 세 명의 대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과 가장 절친한 친구인 개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나는 그것을 개에 비유하곤 한다. 첫 번째 단계의 대표는 '리트리버'같아야 한다. 그의 역할은 일관성 있는 비전 하에 핵심 팀을 구성하고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며 시장의 방향을 결정한다. 또한 초기 자금을 유치하고, 고객과 협력업체를 확보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는 끈기와 창의력이 빛을 바란다. 두 번째 단계의 대표는 '블러드하운드'같아야 하낟. 그의 역할은 시장의 냄새를 맡고 기업의 입지를 다지는 것으로서, 경영진을 구성하고 시장에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는 예리한 방향 감각과 기업의 규모 확장에 필요한 기술이 중요하다. 세 번째 단계의 대표는 '허스키'같아야 한다. 사람들과 함께 상장사의 책임성을 가지고 매일 비중 있게 성장하는 팀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이 단계에서는 일관성 있는 태도와 결단력이 중요하다. 중요성의 관점에서 이들 세 역할 모두가 중요하다. 대표의 기질과 능력에 있어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177


관리는 체계적인 과정을 말하는데 그 목적은 정해진 시간과 예산 내에서 원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리더십은 인격과 비전으로 다른 사람을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도록 만든다. 관리는 리더십을 보완하고 지원하지만, 리더십을 내포하지 않은 관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리더는 아랫사람들의 의혹을 해소시키고 불완전한 정보를 가지고도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181


리더의 묘미는 계산기를 두드리고 생산라인을 개선하는 방법을 찾는 것에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한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북돋고, 사람들이 위대해 질 수 있도록 자극을 주며 나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는 데 있었다. 또한 사람들이 조화롭게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었다. 그게 수준 높다 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187


나는 창업 지망생들에게 사업상의 위험부담과 성공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이런 말을 한다.

'만약 당신이 똑똑하면 위험부담이 15~20% 정도 감소한다. 하루에 24시간 일한다면 15~20% 정도 감소한다. 나머지 60~70%의 위험 부담은 당신이 절대로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다.  201-202


사업의 묘미란 바로 텅 빈 캔버스 하나를 들고서 현상을 무너뜨리고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206





에필로그 - 길

여행은 그 자체가 주어지는 보상과 같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225




역자의 글

안철수 교수님은 '기업가정신' 수업시간에 바로 이 책, '승려와 수수께끼'를 교재로 삼았다. '선택'의 의미가 무엇이고, 내 삶 속에서 본질적인 '우선순위'가 무엇이며, 그것이 사업이든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일이든 어떤 생각이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지를 공감하도록 추천하신 책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 해야만 하는 것 보다... 그래야 진지해 질 수 있고, 오래 갈 수 있으며, 이를 지속함으로써 그 분야에서 뭔가 이루고 마침내 성과를 낼 수 있다."

늘 지키려 하면서도 매일 무너지는 원칙들이 있지만, 내가 사라앟고 즐거운 일에 몰두해야 한다는 것만큼은 흔들리지 않으려 나를 담금질한다.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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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넘었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어머니는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아버지와 한바탕 벌인 말다툼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주엥도 쉽게 멈춰지지 않았고, 식탁을 치우고 밀납을 입힌 식탁보를 훔쳐낸 뒤에도 그칠 줄을 몰라싿. 어머니는 연신 아버지를 비난하며 매번 화가 날 때마다 그랬듯이 쥐구멍만한 부엌-식당과 식품점을 겸하는 가게와 2층으로 연결된 계단 사이에 끼여있는-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버지는 묵묵부답 창가 쪽으로 고개를 발작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 아직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낯설고 탁한 목소리로 악을 쓰고는 내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주넉으로 때리며 식당으로 질질 끌고 나왔다. 나는 2층으로 도망쳐 침대로 몸을 던지고는 베개 속에 머리를 파묻었다.이내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살려!" 하는 목소리가 식당 쪽 지하로부터 들려왔다. 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온 힘을 다해 악을 썼다. "사람 살려요."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어개인지 목덜미인지를 틀어쥐고 있었다. 아버지의 손에는 평상시 나무 둥치에 박혀 있는 낫이 들려 있었다. 지금 기억나는 건 울음소리와 비명뿐이다. 잠시 후 우리 세 식구는 다시 부엌에 모였다.  7-8


아버지는 "넌 왜 울어.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다고?"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머니는 "자, 이젠 끝났다."라는 말을 했다.

1952년 6월 15일의 일이었다.

훗날 몇몇 사람에게 나는 "내가 열두 살 무렵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려 했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 말을 털어놓고 싶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9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만 해도 나는 자세한 부분까지 낱낱이 기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실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란 그저 그때의 분위기나 부엌에서의 각자의 위치, 몇 마디 말뿐이었다.  10


나는 정신분석이나 가족 심리학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위압적인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죽음으로 위협해서 그녀에 대한 복종심을 파괴한 아버지 등등. 이러한 초보적 결론을 내리는 것이라면 이미 옛날에 어렵지 않게 얻어냈을 것이다. '그건 가족에 대한 정신적 외상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라거나 '유년기의 신의 이미지가 그날부터 몰락한 겁니다.'와 같은 말은 그 장면에 대한 어떤 해석도 하지 못하며, 그 순간 내게 떠오른 '재수 옴 붙었네.'라는 표현만이 그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다. 추상적 단어들은 그저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21


당연히 현실을 추적하는 대신 현실을 생산하고자 하는 옛날 이야기는 꾸며내지 말 것, 추억 속의 이미지를 거론하여 번역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이 이미지를 다양한 접근 방식을 통해 스스로 속살을 드러내는 자료로 취급할 것. 한마디로 나 자신의 인류학자가 될 것.  27


인생의 시간은 '무엇 무엇을 해야 하는 나이'로 구분된다. 영세를 받을 나이, 손목시계를 선물 받을 나이, 여자 아이는 처음으로 파마 머리를 할 나이, 남자 아이들은 첫 양복을 입는 나이, 첫 월경을 하고 스타킹을 신는 나이.

식사주엥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는 나이, 담배 필 권리가 있는 나이, 음담패설을 할 때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있는 나이. 

직장에서 일하고 댄스 파티에 가고 '데이트'할 수 있는 나이, 군대 갈 나이, 오락 영화를 볼 수 있는 나이, 결혼하고 아기를 가질 수 있는 나이, 검은 옷을 입는 나이, 더 이상 일하지 않는 나이, 죽는 나이.

이쯤 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되고 모든 것이 완성 된다.  42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는 말, '발전'되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는데, '발전'이란 거역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불가항력의 힘이라고 여겨졌다. 그 증거도 무수히 늘어나서 플라스틱, 나일론 스타킹, 볼펜, 소형 오토바이, 레토르트 수프, 그리고 의무 교육 같은 것이었다.

나의 열두 살은 이런 세상의 법칙과 관례 속에서 보내졌다. 다른 것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43


남들처럼 살자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목표이자 성취해야 할 이상이었다. 개성은 일탈, 심지어 조금 미친 것 같다는 증세로 간주되었다.  48


당시에는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실망했을 때는 '멍청했었지'. 불만이 있을때는 '나빴었지'같은 표현이 고작이었다.  51


(카톨릭 사립학교 시절) 사진이 있는 연애소설을 읽거나 일요일 오후 포토 회관의 댄스 파티에 가는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 번도 억압된 삶을 산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63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그들의 궁핍한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6월 일요일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 이상 인식하지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이 모멩 배어버렸기 때문이다.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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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화처럼 살고 싶다(voglio vivere una favola) -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성당 계단에서 본 익명의 낙서에서



서문


1989년 11월 16일.. 나는 한 해 전에 모스크바, 트빌리시, 레닌그라드를 여행하는 작가들의 모임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우리 여행의 수행역을 맡고 있었다. 우리는 레닌그라드에서의 마지막 밤을 함께 보냈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 우리는 관계를 지속했다. 우리의 행위는 의식처럼 일정했다. 그는 내게 전화를 걸어 그날 오후나 저녁, 드물게는 그 다음날이나 이틀 후에 만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는 와서 단 몇 시간 동안만 머물렀다. 우리는 그 시간에 섹스를 했다. 그가 떠난 후, 나의 일과는 다음번 전화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는 서른다섯 살이었다.  9-10


(그는) 고르바초프와 페레스트로이카의 지지자라고는 했지만 술에 취하면 브레주네프(구소련의 정치가, 스탈린 이후 최장기인 18년 동안 소련을 통치함) 시대에 대한 향수와 스탈린에 대한 흠모를 감추지 않았다.  10


이 기간 동안, 나는 잡지사에서 청탁해오 ㄴ원고 외에는 아무 글도 쓰지 않았다. 사춘기 때부터 불규칙적으로 적어오던 일기가 나의 유일한 글쓰기의 장이 되었다. 그것은 다음 만남을 기다리며 견디는 방법이었고 동시에 에로틱한 몸짓과 말들을 기록함으로써 쾌락을 배가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 

그가 프랑스를 떠난 후, 나는 내 온 존재를 기배했고 그때까지도 계속 내 안에 살아 있던 그 열정에 관해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간헐적으로 집필되었고 1991년에 쓰기를 마쳐 1992년 '단순한 열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11


2000년 1월인가 2월, 나는 5년 전부터 들춰보지 않았던, S에 대한 나의 열정의 시간에 해당되는 일기장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

나는 컴퓨터에 텍스트를 입력하면서 수정하거나 삭제하지 않았다. 생각이나 느낌들을 포착하기 위해 순간순간 종이 위에 나열해놓은 단어들은 나에게 시간만큼이나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다. 한마디로 그 단어들은 시간 그 자체다.  12




1988년


9월 


27일 화요일

S ... 이 모든 아름다움. 지난 1958년, 1963년, 그리고 P때와 똑같은 욕망, 똑같은 행위, 몽롱함과 무력감마저 똑같다.  17


나는 옛날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단지 아름다움, 열정, 욕망일 뿐.  19



10월 


3일 월요일

그는 나의 가장 '유치한' 부분, 그리고 가장 사춘기적인 부분을 대변한다. 별로 지적이지 않고, 큰 자동차를 좋아하고, 운전하면서 음악을 틀어놓고,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그는 '내 젊은 시절의 남자'이며, 금발이 약간 촌스럽다(손과 네모난 손톱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사랑은 나의 머리와 육체 속에서 한 가지일 뿐이다.  24


4일 화요일

그가 관계를 지속하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기다렸던가! '예쁘게' 치장하고, 준비하고, 그러나 아무것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다.  25


5일 수요일

아직도 내 안에 그가 남아 있다. 나의 모든 비극이 바로 거기 있다. 그를 잊을 수도, 홀로 설 수도 없다. 나는 그의 말, 몸짓을 빨아들인다. 나의 육체는 그의 육체를 흡수한다. 이런 밤을 보낸 후에는 일하는 것이 쉽지 않다.  26


6일 목요일

그는 여자를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여성 정치가들에 대해 비웃음을 금치 못한다. 그 여자들은 제대로 하는 게 없어, 등등. 그리고 나는 그런 것들을 재미있어 한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나의 이해할 수 없는 즐거움. 그는 점점 <빈 장롱>에서 내가 묘사했던 이상형, '내 젊은 날의 남자'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로제르 골목에 세워놓은 자동차 안에서 그가 절정에 이를 때까지 입으로 그를 애무했다. 그런 후, 우리는 끝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 눈을 뜨며 나느 ㄴ어제의 장면들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했다.  27


8일 토요일

"다음주에 전화할게." 이것은 '이번 주말에 당신을 만날 수 없어'라는 뜻이다. 나는 미소지었다. "알았어." 만남의 간격을 좀 두는 게 낫다는 것을 알면서도 질투로 고통스럽다. 육체의 향연 후에 나는 다시 혼란 속에 빠진다. 내가 너무 달라붙는 것처럼 보일까봐, 너무 늙어 보일까봐(늙었기 때문에 다라붙는 것이다) 겁난다.  29


12일 수요일

나는 단순한 생물로서 이것이 언제나 마지막인 것처럼-게다가 그렇지 않다는 법이 또 어디 있나- 사랑을 나눈다.  30


18일 화요일, 19일 수요일

그(아니 우리)는 점점 더 강렬하고 격렬한 욕망으로 사랑을 한다. 말하고 보드카를 마시고 또 사랑을 하고... 네 시간 동안 세 번. ..

간간이 사랑의 순간들을 다시 생각한다(그는 나에게 돌아누우라고 요구한다. 누워서 오럴 섹스로 절정에 오른 순간, 그는 신음 소리를 낸다. 그리고 내게 말한다. "당신 정말 기가 막히게 해." 그는 부드럽게 나를 자기 배 쪽으로 끌어당겨 사랑의 행위를 시작한다). 기억, 마비 상태, 이런 것들이 사라지면 나는 다시 그가 필요하다. 하지만 혼자다. 다시 기다리기 시작한다.  33-34


25일 화요일

요즘처럼 내가 아름다웠던 적이 없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어제 오샹(대형 슈퍼마켓 상호)에서도 그랬듯이 나를 유혹하려는 남자들은 수도 없이 많다. 스무 살, 서른 살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37


27일 목요일

한밤에 불리는 내 이름, 쾌락의 신음 소리, 그의 성기에 대한 숭배. 그를 열렬히 애무하는 나를 보려고 그가 몸을 반쯤 일으켰을 때(우리가 처음 관계 맺기 시작했을 때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십자가에서 떼어낸 나신의 예수 그림을 생각했다. 너무나 나른하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에 관해서 쓰는 것, 너무나 신비롭고 짜릿한 '그것'에 관해 쓰는 것 말고는.

이제 나는 사랑 속에서 진실을 찾지 않는다. 관계의 완벽성, 아름다움, 쾌락을 찾을 뿐이다. 상처주는 것을 피할 것, 즉 그에게 기분좋은 말만 할 것.  40



11월


15일 화요일 

눈을 뜨면서 기다림이 시작된다. '그후에'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그가 벨을 누르고 들어오는 순간에 정지한다는 말이다. 그가 오직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끊이없이 나를 괴롭힌다. 끝없는 불안감 때문에 이 이야기는 아름답다.  52


25일 금요일

호우헤 프랭탕 백화점의 '섹스 코너'에 가서 책들을 들춰보았다... 나는 를뢰 박사의 <애무에 관하여>, 그리고 75개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고 80만 권이 팔렸다는 <부부와 사랑> <육체적 사랑의 테크닉>을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내 뒤에 여자들이 서 있다. 나는 태연하다. 점원이 책을 포장했다. 나는 사람들이 내 이름을 알지 못하도록 은행 카드로 지불하지 않는다. 전철 안에서는 이 책들을 읽지 말아야지. 나는 완벽한 육욕과 승화를 위해 이 책들을 구입했다.  60



12월


6일 화요일

내게 세상에서 견딜 수 있는 두 가지는 오로지 사랑과 글쓰기다. 나머지는 암흑이다. 오늘 저녁에는 둘 중 아무것도 없다.  66


9일 금요일

내가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까봐, 특히 그에게 충분한 즐거움을 주지 못할가봐 두렵다. 하지만 이런 모든 두려움이 없다면 그것은 내가 무관심하다는 것을 의미하리라.  67


15일 목요일

너무 견디기가 힘들어 지금과 비슷했던 때를 떠올려본다. 어쩔 수 없이 1958년과 1963년이 떠오른다. 삶에 대한 흥미를 되찾기 위해서는 전화벨 하나면 충분하다. 언젠가 이 일기장을 읽게 된다면, "아니 에르노 작품에 나타난 상실감"이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작품 속에서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로, 나는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예외 없이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a) 초기에는 무관심, 더 나아가 혐오감까지도.

b) 주로 외모에 대한 '놀라운 발견'.

c) 잘 절제된 즐거운 관계. 가끔 싫증을 느끼는 시기도 있지만.

d) 고통, 중독으로 인한 끝없는 결핍감. 그러고는 극심한 고통(나의 현재 상태). 행복한 순간들은 미래의 고통일 뿐. 고통을 가중시키기만 함. 

e) 끝으로 이별. 가장 완벽한 단계인 무관심에 도달.  71-72


그를 생각하면, 내 방에 있었던 그의 나신이 보인다. 나는 그의 옷을 벗긴다. 그의 발기한 성기와 욕정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73


20일 화요일

혼외관계라는 틀 속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형화'되지는 않은 것 같다. 성적 집착도 있고, 약간 미친 듯도 하다. 그에게 내가 어떤 존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것-P와 사귀었을 때보다 어렵다-은 매우 도발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75


24일 토요일

나는 어머니가 노인병원에 있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끊임없이 이 노트에 기록하고 있다.  77


27일 화요일 

물론(나는 기다렸지만...) 예상대로 그는 '내일이나 모레'에 전화히자 않았다. 울고 싶고 구토가 난다. .. 오늘밤, 그의 부재와 혐오감이 엄청난 무게로 나를 누른다. 잠을 자야지, 자야지.  79


28일 수요일

한숨도 못 잤다. 끔찍한 상태다...

나는 굶주린 여인이다. 이것이 나에 관해 거의 유일하게 정확한 표현이다.  79-81


30일 금요일

이런 생각들로 꽉 찬 "나는 안나 카레니나다". 브론스키에게 미친 안나. 두려움.  82-83




1989년


1월 


1일 일요일

가끔 그랬듯이, S에게 편지를 쓸지도 모르겠다. 그가 오면 그 편지를 줄 것이다. 전화와 마찬가지로 편지도 보낼 수 없다! 좋은 소설감이다.  88


4일 수요일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연애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왜 사랑을 바라는가? 그는 내게 아무것도 약속한 적이 없고 나 자신도 아름다움밖에 바라는 것이 없는데, 그러나 더이상 아름다움은 없다. 이제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90


6일 금요일

소유권을 나타내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 공세를 하는 심리를 이해할 수 있다(프루스트 <갇힌 여인>).  92


8일 일요일

S에 대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점 중에서 확실히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 첫째, 지적으로 더 우월하고 약간의 질투심을 가진 여자와 함께 있는, 젊고 잘생긴 바람둥이(내 남편과 나의 경우). 둘째, 약간 내성적이고, 자기 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별로 바람을 피우지 않는 남자. 섹스할 때의 그의 태도나 경험 부족으로 봐서는 둘재 경우가 맞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아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기 전에 나 혼자서는 결코 정확히 알 수 없으리라.  


9일 월요일

간절한 기다림. 내가 이런 세세한 것까지 기록하는 이유는 기억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93


12일 목요일 

서로 못 본 지 벌써 1주일이 넘었다. 나에겐 다음 약속 날짜말고는 다른 미래가 업삳. 그리고 다음 약속이 정해지지 않는 한, 미래도 없다.  97


28일 토요일

독일에서 돌아옴. 그곳에서는 고통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파리가 가까워올수록, 기다림과 욕망이 되살아난다.  104


31일 화요일

그가 결별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징조들을 모두 모으려는 순간, 전화가 왔다. 5시에 온단다...

21시. 그가 막 떠났다. 기진맥진한 육체. 이보다 피곤할 수 없다. 다른 애인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의 웃음. 어린애 같은 웃음.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언제나 소파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그가 그것을 좋아하는 것을 안다. 그는 반쯤 옷을 벗고 눕는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의 머리서부터 성기까지 천천히 애무하고 나서 입을 맞춘다.  107



2월


1일 수요일

상대방의 몸을 배우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109


5일 일요일 

나는 전화로 그에게 "당신을 원해"라고 말했다. 그는 거북한 어투로 "아!"라고만 대답했다. 말해선 안 되는 것을 그가 드덱 하는 이상한 대화. "당신에게 말하는 게 나아, 안 그래?" "그래." 그가 대답한다. "말하는 게 나아, 아니면 말하지 않는 게 나아?" "말하는 거." 하지만 그가 전화로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처음인 게 확실하다. 어쩌면 그는 내가 에로틱한 대화를 주도하기를 무의식적으로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110


10일 금요일

글은 욕망을 유지하게 한다.  112


24일 금요일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읽는다.  120


27일 월요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S와의 오늘 저녁은 너무나 열정적이어서, 마치 내가 용서받은 것 같았다. 다섯 달이 지난 후 또 새로운 쾌락을 발견했다(발견하는 사람은 언제나 나다...). 부드러운 애무와 육체에 취한 나머지 아무 생각이 없다. 우리는 텔레비전 앞에서 함께 얕은 잠이 들었다. 그는 남성다움과 나르시시즘을 부각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좋아한다.(나는 그의 뒤에서 손으로 그의 성기를 잡고 자위행위를 대신해준다. 그는 내 손만 볼 뿐, 나는 보지 못한다.) 에로티시즘과 많은 가능성을 발견해가면서...  122


28일 화요일

오후 내내 그를 용두질시키는 내 손을 보기 위해 몸을 숙이고 있던 장면이 계속해서 떠올랐다(나는 그의 뒤에 있었다). 그는 사춘기였을 때의 행동을 되새기거나, 어쩌면 좀더 어렸을 때의 환상을 반추하는 듯하다. 그의 추억을 되살리고 그와 함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갔음에 행복감을 느낀다.  123



3월


10일 금요일

지나가는 푀조 405 또는 505 자동차를 볼 때면, S가 이런 유의 남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대형 승용차를 선호하고 출세에 몰두하는 나르시시스트, 그리고 내가 작가라는 사실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으로 섹스 생각이 날 때마다 만날 수 있는, 그의 물건을 불끈 달아오르게 해서 사정하게 해주는 예쁘장한 여자라고만 생각하는 남자.  127


18일 토요일

오직 나만의 내적 결핍, 나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내가 필요로 했기 때문에 시작된 필립과의 결혼생활... S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나를 결코 사랑한 적이 없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의 젊음이며, 언제나 나를 매혹시키는 사람이며, 현 세계의 가장 큰 수수께끼인 소련이라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는 점이다.  132


21일 화요일

내 의사와 관계없이 3주 동안 그를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를 냉정하고 무관심하게 한다.  133


27일 월요일

노트 한 권에 다섯 달분의 일기밖에 적지 못했다... 이것은 내가 분석을 많이 할수록 글을 더 많이 쓰는 습관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하지만 집착의 괴력, 그 자체에 관해서는 어떤 분석도 할 수 없다.  135-136


28일 화요일

내가 이 노트에 일기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 필연적으로 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욕망의 종말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거역할 수 없는 순서를 따라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아직도 이 열정으로부터 빠져나올 힘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현재 매달리고 있는 것보다 좀더 확실하고 명확한 신호들이 있어야 한다. 모험을 하듯 결별의 편지를 써야 한나? 현재 상태는 필립 때와 비슷한 S의 무관심, 우유부단한 태도인 것 같다. 나를 버리려고? 그래.

편지를 쓰면 끝날 것이다. 그래서 쓸 용기가 나지 않는다.  137


30일 목요일

이 일기 속에서 그는 나에게 무엇인가? 나는 S에 대해 '계속' 쓰고 싶다. 가능할까? 나의 꿈은 휴가를 모스크바에서 보내는 것. 그곳은 S와 휴가를 보내기에 가장 '이상적인 곳'이다.  138



4월


4일 화요일

그가 방에서 옷을 다시 챙겨입는 끔찍한 침묵의 순간. 옷가지들 하나하나-내가 네 시간 전에 벗겼던 옷들-를 천천히 다시 입는다. 처음에 팬티, 메리야스, 그 다음은 바지, 혁대, 셔츠, 넥타이, 구두(양말은 절대 벗지 않는다). 이 의식을 보는 내 가슴은 찢어진다. 이별, 무한히 느릿한 슬로 모션...

그의 기둥서방 성향. 시바스리갈 위스키 반 병을 마시고, 뜯은 말보로 담배를 보루째 가져간다. 나는 어머니와 창녀를 겸한다. 나는 언제나 모든 역할을 다 맡는 걸 좋아했다.  141


13일 목요이

코펜하겐 넵튠 호텔의 방(1985년과 같은 호텔), 침대 옆 탁자 위에는 신약성서가 있고 텔레비전 위에는 포르노 영화 비디오테이프가 놓여 있다. 호기심에서 '언제' 볼까 망성인다(계산서에 포함되어 드러날 테니까!).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도 배우기 위해서.  143-144


28일 금요일

그는 어제 11시쯤 왔다. 욕정. 그는 무릎을 꿇고 내 성기에 입맞추었다. 크리스마스 이후 처음이다. 다정한 사랑의 표현.  151



5월


3일 수요일

결심 : 내가 저지(Jersey)로 떠나기 전에 그가 세르지에 오지 않는다면, 한 번만 더 만나고 결별을 한다. 아니면 전화로 끝낸다.  153


6일 토요일

오직 S만이 나의 관심사다. 나를 그에게 밀착시키는 이 힘은 아마도 그의 비밀스런 성격, 예측 불가능함, '기이함' 속에 있는 것 같다.

그가 침묵하는 원인에 대한 검토 :

1) 대사관 영화 시사회-나는 참석했고 그녀는 불참했던-와 관련해서 자기 부인과 다툼. 만약 내가 온 사실을 그가 감췄다면.

2) 내가 차로 데려다 주겠다고 제의한 알렝N에 대한 질투심.

3) 권태(내 꿈에서처럼), 그리고 만나는 간격을 늘여가면서 나를 버린다.

4) 업무, 내가 알지 못하는 일들(KGB가 아닐까?).  155


8일 월요일

저녁. 전화가 왔다. 아주 '평상시처럼'. 내 상상의 날개가 한꺼번에 꺾인다. 잠이 온다. 그와 결별하고 싶지 않다. 다음번까지..  157


12일 금요일

11시 445분. 그가 와서 다섯 시간쯤 머물렀다. 오래 전부터 이렇게 완벽한 시간, 이처럼 조화로운 시간이 없었다. 매번 다른 바업ㅂ으로 네 번의 정사를 나누다. (침실, 애널 섹스, 아주 부드럽고 오랜 애무 후에 아래층 소파에서 다정하게 남성 상위 체위로, 침실에서는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내 정액을 당신 배 위에 쏟을 거야." 소파에서, 완벽한 일체를 이루었던 애널 섹스.) 우리 둘의 육체, 존재에 대한 끝없는 갈망.  158-159


13일 토요일

그가 8월에 떠나는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오늘 아침 시내에서 운전하는 동안 끝없이 눈물이 흘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떴을 때처럼. 그리고 낙태 후 루앙 거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 삶에서 비밀스런 의미를 지닌 굵직한 선들. 아직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한 동일한 상실, 오직 글을 통해서만 그것을 진정으로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159-160


16일 화요일

지금에야 나는 사랑을 사랑하고, 섹스를 사랑한다. 더이상 슬프고 고독한 것이 아닌 사랑을 사랑한다.  161


20일 토요일

나는 결코 사랑이라는 감정의 힘을 믿은 적이 없다. 보통 사회적인 여러 요인들이 다분히 작용하기 때문이다.  163


21일 일요일

도서박람회. 그를 보지 못했다. 저녁에도 무소식. 그가 목요일대사관 영화 시사회에도 가지 않는다면? 혹 다른 여자라도 생겼다면? 이 고통스런 기다림은 그가 또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 수많은 여자들과.  164


27일 토요일

2년 전부터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다. 더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 남자와 글 사이를 오가는 지옥 같은 순환.  170



6월


3일 토요일

지금 내 가슴을 뭉크랗게 만드는, 정액을 연상시키는 어떤 것-그전에는 혐오하던 냄새-들이 있다. 5월 12일에 그가 내게 한 말. "당신 배 위에 사정해도 돼?" 그후로 엄청난 세월이 흐른 것 같다. 이런 추억들은 매번 생각할 때마다 나를 전율케 한다. 그는 이제 오지도 않고, 이런 말들을 다시 하지도 않을 것이다. 러시아 식으로 짤막하게 발음하는 말들. 정액에 대한 혐오감이 그리움으로 변한 것으로 그에 대한 내 애착의 강도를 가늠할 수 있다..

밤에 르 루아레에서 온 S의 전화로 행복이 절정에 이른다.  173


11일 일요일

불면의 밤. 또 한 번 레닌그라드를 떠올린다. 그때의 기쁨, 그때의 감각들을 되살려본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는 내게 별로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다. 그저 하룻밤 상대였을 뿐. 내가 레닌그라드의 밤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가 그후 섹스를 한 수십번의 밤과 오후 때문이다... 요즘 나는 반쯤 마취 상태에 있다. 글을 쓸 의욕도 책을 읽을 의욕도 없고, 이제는 습관 같은 그의 무소식에도 걱정조차 되지 않는다.


15일 목요일

반쯤 의식이 들면서 깨어나는 순간에 끼어드는 진실들. S에게 나는 그저 섹스를 잘해서 가끔씩 만나볼 만한 여자일 뿐이다.  178 


17일 토요일

육체는 숨결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무성(無性 없을무 성품성)의 생명이자 욕망이다.  180


19일 월요일

전화가 없는 날들에 점점 더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날짜를 꼽는다. 하지만 그는 아마도 시간에 대하여 나와는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181


29일 목요일

두 가지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 하나는 약속 없는 고통의 시간, 다른 하나는 오늘처럼 아무 생각 없이 곧 실현될,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실현될, 망연자실한 욕망의 시간이다.  188



7월


15일 토요일

그는 15시 25분, 30분경에 왔다가 20시 15분에 떠났다. 다섯 시간. 지난 겨울(11월)보다 약간 덜해진 그에 대한 욕정. 하지만 언제나 거듭되는 우리의 애무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어제 그에게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이럴 땐 대화가 더 많아진다. 비극은 가눌 수 없는 피로감이었다. 어젯밤, 나는 침대에서 움직일 수 없는 돌같이 누워 있었다. 그가 스며든 내 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특히 글쓰기 작업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보름 만에 만났다. 이제 이게 평균적인 간격이다. 1주일 정도면 좋겠다. 부인이 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나... 아니면 다른 여자인가? "여자들은 힘들어"라는 그의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가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애썼다는 말인가, 아니면 힘들게 다른 여자와 성공했다는 말인가? 일반적으로 그가 여자를 쉽게 유혹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199-200


27일 목요일

나는 그에게 말한다. "Ta tebya lioubliou.(러시아어로 '당신을 사랑해'라는 뜻.)" 그가 내게 러시아 마로 대답했다. 나는 이해하지 못해서 그에게 다시 한번 말해보라고 한다. "단지 마샤만 사랑해?" "응". 내가 대답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떠날 거야. 하지만 당신은 슬퍼하지 않겠지. 강한 남자니까." 그가 대답한다. "그래 맞아." 그가 떠날 시간이었다. 어떤 말로도 덮을 수 없는 그 말이 내 가슴을 찢어놓았다. "다음주에 당신에게 전화할게. 집에 있을 거야?" 라는 말뿐. 일순간에 정신이 번쩍 든다. 그를 거칠고(그리 심하지는 않지만), 즐기기만 하는(나쁠 것도 없지) 플레이보이 또를 고르비보이로 봐야 한다. 떠나며 탁자 위에 있는 말보로 담배 보루를 가져가도 되겠냐고 묻는 그 남자를위해 내가 1년이란 시간과 돈을 잃었음을 확인했다. 스무 살에나 마흔여덟 살에나, 언제나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남자 없이, 삶 없이 무엇을 하겠는가?  205-206



8월 


3일 목요일

이런 일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3일인 오늘 오후 16시 15분에 왔다(그리고 밤 10시에 떠났다). 육체적, 심리적으로 완전히 지쳐 있다. 광적인 섹스로 얼이 빠져 있다. 예외적으로 그가 만난 지 1주일 만에 왔다.(과거보다는 미래, 즉 내가 전혀 확신할 수 없는 것과 비교해보기 위해 이런 것들을 기록한다.) 처음으로 내 베개 밑에 그의 것으로 젖은 팬티를 하나 간직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예전과 달리 내 젖가슴을 삼킬 듯이 온 입으로 애무하고, 부끄러움 없이 벗은 채로 돌아다녔고, 지난번 내가 준 편지에 대해 얘기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내게는 아직도 불투명하고, 사랑을 증명하지 못한다. 물론 사랑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209


11일 금요일

우리는 사랑하고, 먹고, 애무했다. 땀이 범벅이 되어도 떨어지지 않는 입술. 그래,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긴가. 나는 어제 쾌락에 꽌한 나의 한계들을 또 한 번 넘었다. 그에게는 아마 퍼포먼스 같기도 했으리라.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오직 욕망만이 중요할 뿐...

흐린 날씨다. 머릿속도, 가슴도 나는 언제나 스물두 살이다.  212-213


18일 금요일

카날 플뤼스(유료 텔레비전 채널. 시청하기 위해서는 디코더가 필요한데, 이 장치 없이 보면 화면이 흐릿하고 음향이 없다)에서 디코더 없이 포르노 영화를 봤다. 처음엔 클로즈업된 성기들을 보고 놀랐다(특히 카메라를 가까이 접근시켰을 때가 매우 좋았다). 하지만 너무 기계적이라 별로 흥분되지 않았다. 그리고 음향이 없어서 책보다 덜 에로틱했다. 끝까지 다 보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아침 그 영상들은 나를 쫓아다닌다. 그것들은 명백한 '사용법'을 보여준다. 행위를 보는 것은 언어를 통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수행적(遂行的 드디어수 다닐행 과녁적)이다. 가장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장면은 남자가 여자 배 위에 사정하는 장면이다. "나는 그녀 위에 평화와 정액을 강물처럼 흐르게 하리라."(성경)  216-217



9월


1일 금요일

생일이 온다. 마흔아홉 살. 곧 끔찍한 '50대'가 된다.  223


5일 화요일

그에게 그가 태어난 날에 발행된 신문을 선물했다.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는 것이 그를 얼마나 행복하고 다정하게 만드는지. 이제 순조롭게 되어가는 건가?... "당신은 멋져"라고 그가 말했다. 그때처럼 우리는 서로 입술로 애무했다. 우리는 깊은 합일을 이뤘다. 나는 그가 나를 완전히 정복하여 내가 순종의 자세를 취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나를 등쪽에서 보고, 나는 그를 보지 못한다. 그리고 오럴 섹스. 아직도 그의 얼굴에 대한 기억들을 모으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고도 금방 잊어버린다...

곧 1년이 된다. 새로운 키스 방법과 욕망을 해소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끝없이 고안해야겠다.  224-225


7일 목요일

피렌체. .. 열정의 추억들을 남겨놓고 이제 곧 프랑스를 떠나려는 한 남자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오늘밤에도 나는 기차 안에서 끊임없이 지난 월요일의 장면들을, 그리고 내가 앞으로 준비하고 있는 장면들을 떠올렸다.  226


16일 토요일

돌아온 후로 계속되는 이틀간의 침묵. 그가 목요일에 전화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죽음이고 암흑이다. 지금 이 순간 그가 떠났다는 확신이 미친 듯이 나를 휘감으며, 그를 다시 볼 거라고 생각했던 피렌체에서 품었던 나의 기대가 혐오스러워진다.  240-241


28일 목요일

그를 보기 위해 이렇게 기다리는 것은 하나의 소유이고 재산이며, 그 나머지 시간들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이다. 그저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게 너무 어렵지만. 지금 나는 평소에 나를 사로잡고 있던 것들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에게 다른 여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번이 마지막은 아닐까? 등등.  247


29일 금요일

어제, 그와 함께 TF 1(프랑스 최대의 민영 방송국)의 멍청한 오락 프로그램들, 예를 들면 <정확한 가격 알아맞히기> 따위를 보면서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절망감을 느꼈다. 그가 얼마나 지적인 것과 거리가 있는지를 발견했다. 저녁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본 영화는 끝까지 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찌나 지루해하는지, 끊임없이 몸을 뒤틀며 보기 드물게 신경질적으로 굴었다.  249



10월


1일 일요일

이달이 가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침묵. 다시는 러시아 악센트의 '아-니'도, 자동차 소리를 기다리는 것도, 오후의 발소리도 들을 수 없겠지.  250


10일 화요일

"현재란 무엇인가?" 현재는 이곳에 존재한다. 그것은 버거운 미래와 두려움이다. 그를 볼 것이라는 행복감과 서너 시간의 만남이 흐른 후에 그를 더이상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감. 멍청한 노래 한 곡이 머릿속을 맴돈다.  253


12일 목요일

약간의 시간이 더 나아 있다... 그는 러시아 혁명 기념식 후에 떠난다. 사도마조히즘적 체험을 했다. 하지만 거칠지 않고 부드러웠다(애널 섹스와 '정상 체위'의 혼합으로. 완전히 녹초가 됨. 한순간, 그 부분이 찡어지는 줄 알았다). 그가 말했다. "아니(Annie), 사랑해."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자히 않는다. 섹스를 할 때 한 말이니까. 그러나 어쩌면 유일한 진실은 거기에 있는 것일지도.  254


19일 목요일

아직 샴페인 병은 가득 차 있고 위스키도 지난번보다 덜 마셨다. 사랑의 몸짓과 체위에 대한 끝없는 발명. 그의 성기 위에 샴페인을 부었다. 그런 것은 그가 해보지 않았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면서. 애널 섹스. "언제 어디서건, 당신이 무엇을 요구하건, 나는 당신을 위해 그걸 할 거야. 당신을 위해서 그걸 할 거야" 라는 나의 말에 당환항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싶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인 듯했다. 그가 먹고 있던 음식 조각을 내 입 안에 넣었을 때 그는 감동했다.

어쩌면 한 번 더, 단 한 번이라도 더... 모든 것, 애무, 희ㅣ한 말들, 또는 애정을 표현하는 구체적인 각각의 신호를 다 기억할 수가 없다. 가죽 의자 위에서 머리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하는, 놀라운 서커스 같은 체위. 나에게는 완벽주의적이고 창의적인 면이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내가 골몰하는 대상은 사랑이다.  258



11월


1일 수요일

5년 전부터 즐거움과 자신감(섹스, 질투심, 사회적 출신 성분 역시)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더는 수치심을 갖고 살지 않기로 했다. 수치심은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앞으로 더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또한 내게 글 쓰는 작업은 도덕적 기능을 지닌다는 생각을 했다. 때문에 예전에는 글쓰기에 대한 집념을 잃지 않기 위해서 사랑의 모험을 원치 않았다. 오랫동안-아직도 그렇지만-글을 써왔기 때문에 쾌락적인 삶은 내게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내 남편이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그가 글을 쓰지 않기 때문에 용서했다. 글을 쓰지 않는 인생이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먹고, 마시고, 섹스하는 걸 빼고는.  266-267


3일 금요일

내가 한 남자를 위해 러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268


7일 화요일

"다시 돌아올 거야." "나는 늙어빠졌을 거야." "내게 당신은 결코 늙지 않는 사람이야." "늙지 않도록 노력할게."

나는 왜 내가 작가이기 때문에 더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나는 작가가 아니다. 나는 글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일 뿐.)  273


9일 목요일

"언제부터 언제까지 나는 열정적인 사랑을 했다"로 시작하는 책을 쓰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사랑을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할 경우 S를 다시 볼 수 없을 것이고, 어쩌면 그에게 누를 끼칠지도 모른다. 어쨌든 다분히 한계가 있는 저술 계획뿐.  274


14일 화요일

아직 하루가 남았다. 나는 그의 좁은 미간과, 약간은 잔인해 보이는 치아로 거의 확실히 예견할 수 있었던 사실을 부정해보려고 애쓴다. 내가 그저 쾌락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는 사실. 그렇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잊으려고 애썼다. 남편과 보낸 18년보다 1년을 지우는 것이 더 힘들까? 증오는 그 세월을 지우는 걸 쉽게 하지만 사랑은 그것을 복잡하게 만든다.  277-278


15일 수요일

확실히 최악이다. 예전에 "아냐, 더이상 만나지 않을래, 더는 만나지 말자"라고 말하지 못했던 나의 나약함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내가 그에게 준 모든 것을 따져본다. 아주 치사하게. 뒤퐁 라이터, 파리에 관한 책, 고판화, 그가 태어난 날 발행된 신문, 말보로 담배 보루들, 수많은 위스키... 아마도 스무 병쯤, 최근에는 훈제 연어와 샴페인. 그는 세르지에 서른네 번, 스튜디오에 다섯 번 왔다. 아무 소용 없는 계산이다. 마흔 번이고 백 번이고 지금에 와서 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끝났다는 것,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맑은 의식이 주는 고통만이 남았을 뿐이다.  279-280


16일 목요일

한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거기 있는 것, 그리고 섹스하고, 꿈을 꾸고, 그가 또 오고, 섹스하고, 모든 것이 기다림일 뿐이다...

오샹 슈퍼마켓 정면 모퉁이에 있는 속옥 가게에서 보라색 브래지어와 가터벨트를 본다. 은행. 여자들이 내 앞에서 기다린다. 이 여자들은 한 남자를 잃는다는 것, 광적인 사랑을 잃는다는 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을까. "아니(Annie), 당신을 사랑해." "당신 정말 멋져." "아니(Annie), 나 사정할 거야." 그녀들은 느긋하게 기다리지 못한다. 나도 그냥 습관적으로 시계를 들여다본다. 하지만 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어떻게도 할 수 없이 많은 시간을, 내겐 미래가 없다...

니콜에게 전화를 했다. 나 : "그놈은 나쁜 자식이야!" 그녀 : "아냐, 그는 불행한 거야. 그래서 일부러 전화 안 한 거야." 내가 화조차 낼 수 없게 하고 가당치 않은 미미한 희망을 갖도록 해석하는 그녀가 원망스럽다. 이건 더욱더 가당치 않은 해석이다.  281-283


18일 토요일

살아남는다는 것은 참혹하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잘못 걸려온 전화다. 이상한 말투를 쓰는 여자였다. 사는 동안은 희망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황당한 순간에라도. 니콜과 한 소녀에 관한 꿈을 꾸다. 아버지도 꿈에 보인다. 우리가 읽는 에로틱하고 노골적인 책들에 반발하는 아직 젊은 아버지의 모습. 아마도 오이디푸스 콜플렉스일 것이다.

나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상태가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이다. 유일하게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리라. 나를 구한 것은 그녀에 대한 책이었다. 지금 나는 그에 관해 쓸 '권리'가 없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1982년 10~11월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쓰게 될 책과 상실의 결합...

내가 그를 사랑했던 것만큼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를 위해 나는 멋진 책을 쓰고 싶다.  285-286


24일 금요일

마지막으로 그를 본 지 18일이 지났다. 4월과 9월 가운데 24일간을 보지 않은 최고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기다리는 대상이 없다. 날짜를 꼽는 것이 이젠 아무 의미가 없다. 언젠가는 그를 본지 두 달, 석 달, 여섯 달이 되겠지. 우리가 마지막 만난 날 서재의 이중 커튼을 직접 치고 싶어한 그의 모습을 요즘 매일 저녁 커튼을 칠 때마다 생각하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나 : "커튼 치는 게 어려워..." 그 : "내가 할 수 있어!"  290


28일 화요일 

오늘도 아무 희망 없이 보낸 하루. 옛날 에는 내게 아무 감흥도 주지 않았던 노래를 듣는다. "그래, 나야 제롬이야. 아냐, 난 변하지 않았어/나는 너를 사랑했던 그때 그 사람이야..."(누가 불렀지? 클로드 프랑수아?) 아침식사를 하다가 운다. 그 노래가 돌아온 사람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이제 나는 언제나 S의 모습을 생각한다. 키가 크고, 부드럽고, 발가벗은, 말하자면 우리가 만나는 동안 내게 고정된 그 이미지 그대로, 그가 모든 것을, 눈부시게 에로틱했던 날들을 모두 잊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부재, 추억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긍정적인 점은, 내가S가 떠날 때처럼 차리고 있으면-내가 그를 언제나 입으려고 했던 이 검은 정장-아직도 남자들을 흥분시킬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때다.  292-293



12월


1일 금요일

잊기 위해서 재미있는 관계를 갖고 살고 싶은 욕망, 그냥 재미있는 관계(콘돔을 사는 것이 그 증상).  293


14일 목요일

문득문득, 끊임없이 떠오르는 S 생각, 솟구치는 눈물. 한 달이 지났는데, 아직 너무 힘들다. 물론 아무 희망도 없다. 그러나 이것을 쓴다는 것은 내가 희망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이성적 판단과 마지막 몇 달을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가 떠난 시점이 우리 관계의 확실한 종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98


15일 금요일

거의 한 달이 되어가는 지금, '내가 그에게 어떤 존재였나'라는 의문을 점점 더 냉정한 시선으로 볼 수 있다. 언제나 똑같은 이야기, 근본적으로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그 이야기를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난 1년 동안 내 관심을 끌었던 짧은 장면들이 생각난다. 로시아 호텔에서의 첫날 그의 얼굴과 미소, 그가 나를 포옹하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까진 나를 모르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그는 바람둥이 기질이 있는 것... 1988년 11월, '프랑스-소련 친선의 밤'에서 그가 대사관 여직원 일행과 떠나면서 의도적으로 짓던 표정.  299





1990년


1월


19일 금요일 

한 남자를 잃는다는 것은 한꺼번에 몇 해를 늙는다는것, 그가 있었을 때는 흐르지 않았던 그 모든 시간을 한꺼번에 늙는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상상속의 시간들을 한꺼번에 늙는 것이다. 이 욕망은 내가 어쩌면 다른 누군가와 똑같은 동화 같은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315


31일 수요일

내일이면 2월이다. 월 초마다, 매달 15일마다-은행에서 잊를 챙기듯-S가 서유럽으로 다시 와서 내게 전화하길 막연히 기다린다. 이제 곧 석 달이 된다. 어쩌면 이렇게 회복이 더딜까, 모든 것이 느리고 무가치하다.  317



2월


2일 금요일

글 쓰기 행위는 나에게 언제나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 S에게 품은 것과 같은 그 열정과 글쓰기가 절대적 가치라는 것에 대하여 나는 강한 확신을 품고 있다. 그것들이 순수함과 아름다움에 결부되어 있다는 생각과 함께.  319


29일 목요일

예전에는 '안정된 생활'을 위해, 그리고 '형제애'를 위해 남자를 찾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지금은 오로지 사랑만을 위해 남자를 원한다. 즉, 글쓰기와 가장 가까운, 나 자신의 상실을 위해, 빈 곳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기 위해 남자를 찾는다.  341





옮긴이의 말 - 고통과 열정의 외침

당시 35세, 아니 에르노는 48세였다.  346


자신의 애인이 작가라는 사실이 제일 중요한, 속물 같은 남자와의 육체의 향연에 에르노는 혼신의 정열을 기울인다.  346-347


그에게서 전화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거리의 거지에게 적선을 베풀기도 하고, 애인과의 완벽한 육체적 합일을 위해 포르노 영화나 사랑의 기교에 관한 책을 보고 연구하여 창조적이고 서커스 같은 체위를 직접 연출하기도 한다. 매번의 만남이 '쾌락의 한계를 넓혀가는' 시간이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그녀는 욕망과 에로티시즘에 '굶주린 여인'이다.  347


그런에도 점점 식어갈 수밖에 없는 열정에 대한 안타까움, 결별에 대한 두려움, 젊은 애인이 하눈팔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그의 아내에게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질투심... 그녀의 일기에는 사랑에 빠진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껴봤을 고통과 열정의 외마디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347-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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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 칼 스트라이버트




"글을 쓸 때 혈관을 통해 뜨거운 피가 흐른다는 강렬한 의식이 없으면, 그 글에 어떤 중요한 의미가 담길 수 없다는 것이지요. 글쓰기란 곧 신체의 모든 부분을 다 동원해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겁니다. 스트라이버트 교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죠. '주전자의 물이 끓을 때 그 속에 모든 재료를 다 집어 넣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작가가 될 수 없습니다.'"  287


"만일 여려분이 각 인물들이 어떠한 감정에 휩싸여 있는지 상상도 못하고 또 그런 감정들과 자신의 감정을 일치시켜 어떤 공감도 이루어 내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작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대단히 가증스럽건, 고귀하건, 자기 희생적이건 혹은 대단히 속되건 간에, 여러분은 스스로를 고무하여 그 인물들의 상황 속에 자신을 위치시켜야 하며, 또 그 인물들의 가슴속에 파고들어야 하는 겁니다."

이 말이 끝나고 내 계보도를 소개하면서 나는 예의 그 의식을 치르기 시작했다. 즉, 사전에 아무런 설명이나 주의도 주지 않고 장차 작가가 되겠다고 모여든 학생들 가우넫 아무나 지목하여 자신을 무시무시한 곤경에 처한 계보도의 인물이라 가정하고 그럴 때 그 인물이 무슨 말을 했겠으며, 혹은 무슨 생각을 했겠는지 낭송해 보라고 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면 마치 고대 그리스 인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의 대사를 쓰듯 학생들은 그 인물들이 했을 법한 말이나 머릿속에 품었을 생각을 모두 말로 나타내야 했다.  288-289


"여러분이 의미 있는 서사의 비밀을 캐내기 원하신다면 단 네 명의 영국 소설가만 살펴보면 됩니다. 연대순, 그러니까 태어난 시간순으로 말하면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헨리 제임스, 그리고 조지프 콘래드입니다."  306


삶의 겉면망을 다룬 작가들이며, 그래서 훌륭한 작가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윌리엄 새커리, 찰스 디킨스, 토머스 하디, 존 골즈워드 이렇게 넷입니다. 이들 작가의 작품은 쉽게 읽을 수 있으며, 독자의 마음도 끌고, 또 재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어떤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을 제공해 주지는 못하는 소설가들입니다.  306-307


말하지 마라. 대신 글로 표현하라.  309


도시의 머리 위로 아침이 열릴 때쯤 나는 장차 교수로서의 나의 삶에 활기를 줄 진리들을 찾아 내었다. '예술가는 보통의 삶을 살 수도 없고, 살아서도 안 되는 창조적인 인간이다. 그는 자기 자신처럼 믿을 수 있는 자신의 친구들에게서 본질적인 것을 찾아내야 한다. 예술가의 임무란 사회에 신선한 충격과도 같은, 또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신랄한 그 사회의 초상을 그려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의 최고의 선, 즉 한 인간의 척도가 되는 행위란 친구에 대한 충직성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친구들에게 내보일 수 있는 신뢰감이 바로 선이다.' ...

내가 찾아낸 금싸라기와도 같은 진리를 잊어버리기 전에 기록해 둘 심산이었다. 그러나 종이에 적은 글을 다시 읽어 보았을 때 나는 뭔가 빠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몇 자를 더 적어 놓았다. '그리고 그 친구는 여성일 수도 있다'  323


데블런 교수님 "소설에서 역시 그 편지들을 차지하려 했던, 다소 역겨운 인물로 나오는 존 쿰너라는 영국인 말일세, 어쩌면 그자가 나일 수도 있겠고 젊은 미국인은 자네일 수도 있네." 곧 이어, 제임스의 소설에서 묘사된 것과 똑같은 집을 찾으려는 우리의 노력은 베네치아에 있는 실제 저택이 아니라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허구적인 삶이면서도 좁은 보도에서 우리 곁을 지나쳤던 살아 있는 이탈리아 인들의 실제 삶보다도 더 여실하게 보이는 소설적인 삶의 탐구로 바뀌었다. "그게 바로 소설이 해야 할 일일세." 데블런 교수님은 힘있게 말씀하셨다. "종이 위에 단어들을 연속해서 풀어헤쳐 놓는 것과 누구나 보통의 사전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그런 단어들을 풀어놓는 것은 바로 실제 환경 속에 있는 실제의 사람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일일세. 자, 우리가 이 쾨쾨한 냄새나는 운하와 마주하고 있는 저 낡은 집을 소설 속에서 묘사한다고 치세. 그렇다면, 가령 잠비아로 휴가를 떠나 그 소설을 읽는 어느 독자로 하여금 그 배경을 실제 육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게 하고, 또 그 심리학적 중요성까지 음미할 수 있도록 하려면 우리는 과연 50만 내가 되는 영어 단어들 중에서 어떤 단어들을 골라 써야 할까? 이용 가능한 단어들을 다 쓰면 되네. 마구 뒤섞여 있는 단어들 중에서 그냥 고르기만 하면 되지.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그 단어들을 올바른 질서로 배열해야 한다는 점일세. 그래야 우리가 노리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네.

그다음 우리는 만의 소설로 넘어갔다. 콜레라가 만연된 베네치아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콜레라가 없지 않습니까?"

"아닐세, 있네. 무서운 콜레라가 모든 서구 사회에 창궐해 있지. 신문과 전파를 통해 토하듯 쏟아지는 대중문화라는 콜레라 말이네. 그것이 모든 것을 죽이고, 또 모든 것을 싸구려로 만들고 있다네. 언젠가는 우리 목까지 그 오물 같은 콜레라가 차 오라 우릴 질식시키고 말걸세."

데블런 교수님은 떨쳐 버릴 수 없는 문명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조심스럽게 설명하시더니 그 불행한 통속성으로의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서 창조적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셨다. "가장 큰 적은 대중들의 수용에 있네. 왜냐하면 대중들이 인정해야 어떤 예술가가 대중 욕구의 최소 공통분모 정도는 만족시켰다는 점이 입증되기 때문일세. 하지만 예술가의 임무는 그런 것이 아니에. 예술가는 연구와 통찰을 통해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수준으로 올라서야 하는 것이고, 그다음 동료들과 소통하고, 또 그들을 찾아내고, 그들과 사상을 교환해야 하네. 그러고 난 다음 그들을 찾아내고, 그들과 사상을 교환해야 하네. 그러고 난 다음 그들이 관심을 쏟고 잇는 문제가 무엇인지 밝혀 내기 위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드는 것일세. 진정한 예술이란 고양된 수준에서 동등한 사람들끼리 의사 소통하는 것이지. 그밖의 다른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야."

나는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알 수는 있었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하지만 저는 교수님이 컬럼비아 대학에서 저희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통해 모든 글쓰기의 최종점은 출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것도 별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니 대체 어떤 의미인지.."

"자네 아직도 그 폭풍과도 같았던 강의를 기억하나? 그래, 조지 에리엇은 보물이고, 찰스 디킨스는 엉터리 약장수야. 그리고 조지프 콘래드는 고수하되 존 골즈워디는 버리게."

"하지만 그 작가들이 책으로 남겨 둔 것은 어떻게 하고요? 교수님이 폄하한 작가들이 무엇인가를 책을 통해 전파 시켰다면 그것 나름대로 어떤 건설적인 목적을 이룬 것을 아닐까요?"

"아닐세. 내가 무시하라고 한 작가들은 마취제와도 같은 존재들이지. 해도 없지만 아무런 득도 주지 못하는 작가들일세."

"그렇다면 출판의 존재 이유는요?"

"진정한 출판의 목적은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대화를 수행하기 위해서라네. 책상에 앉아 자네의 청중이 누구인지, 자네의 독자가 누구인지 한번 상상해 보게. 자넨 분명 훌륭한 학자가 될 테지만, 지식인으로서 자네의 임무란 바로 자네 세대의 최고의 정신들, 즉 베를린, 레닌그라드, 소르본 혹은 버클리에 있는 생각 깊은 남녀들과 교류하는 것일세."

"그렇지만 출판업이란 교수님이 경멸하는 책들을 팔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아냐, 그렇지 않아! 자네가 틀렸네. 칼, 출판사는 위대한 작품을 출판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쓰레기 같은 글들을 파는 것일세. 자,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쿄, 마드리드. 모스크바, 더블린, 그리고 두 곳의 케임브리지, 이런 지성의 중심지를 차지하고 있는 뛰어난 정신들의 그물망을 한번 상상해 보게. 그런 곳은 이 세계를 한데 결집시키려는 보기 드문 지식인들이 모이는 곳이라네. 그들과 얘기하고 그들을 격려하게. 그리고 자네의 명석함으로 자네가 끌어 모은 광명을 그들에게도 나누어 주게. 그 밖의 나머지 것들은 다 필요 없어."  326-328


우린느 역사적인 북부 도시 테살로니키를 통해 그리스로 들어섰다. 꿈을 꾸듯 반도를 따라 내려가는 동안 고대의 이름들이 현실의 것으로 불쑥불쑥 떠오르자 하늘까지도 달리 보였다. 데블런 교수님은 그 옛 이름들을 어찌나 많이 아시는지 나는 내 무지에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다 고전을 공부한 결과라네. 고전을 배워야 해. 자네도 그렇게 배웠을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처럼 가볍게 지나치는 정도로는 안 되지." 아테네에 도착하기 전 데블런 교수님은 "여기가 스파르타로 가는 분기점이네"라고 하시면서 코린토스의고대 운하를 가리키셔따. 높은 도로에서 보니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제2의 반도로 들어서기 위해 그 유명한 수로를 가로지를 때는 노예들이 힘차게 노를 젓는 고대 그리스의 전함들이 깃발을 휘날리며 앞다퉈 수면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상상되기도 했다.

스파르타는 기대했었던 것보다는 실망스러웠다. 전투가 벌어졌던 평원 위에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는 쓸쓸한 잔해에 불과했다. 데블런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자, 보게. 한 사회가 군사 독재에 굴복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잘 보여 주는 곳일세. 스파르타의 어린아이들은 일곱 살 때부터 군사 훈련을 받았다네. 모든 결정을 군사 평의회에서 내렸지. 모든 것을 정복한 세계 최고의 군대. 그러나 결국엔 독재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꼴이 되고 말았지. 왜 그런지 아나? 자유인들은 항상 전제를 이겨내기 때문일세. 그렇지, 전제를 패퇴시키지는 못하지만 그것보다는 오래 살아남기 때문이지."

그 지역은 그리스의 웅장함이나 스파르타 군대의 승리를 보여 줄 만한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초라한 건물 몇 개가 애처로이 모여 있을 뿐이었다. 다시 데블런 교수님이 입을 여셨다. "미국에 있을 때 나는 슬픈 느낌이었다네. 만일 스파르타 독재 같은 것이 자네 나라의 학교를 개선해주고, 소수 인종을 통제해 주고, 여성들을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 보내고, 종교적 지상권을 회복시켜 주고, 또 권리선언의 어리석음을 다 끝장내 준다면 자네 국민의 80%가 그런 독재를 환영하리라는 것을 읽었기 때문일세. 내 눈엔 많은 현대 미국인들이 그런 제의라면 쌍수를 들고 기뼈 날뛸 것으로 보였지. 그래서 자넬 이곳 스파르타로 데려와 구경시키고 싶었던 것일세. 자, 보게. 지금 자네 눈에 보이는 것이 그런 선택의 결과라네."  329-330


우리는 마치 소설을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보물인 양 논의하면서 이미 알려진 어떠 ㄴ이야기를 어떻게 서술해야 최선인가, 즉 어떤 관점에서 이야기를 서술해야 최선의 효과를 가져올까 하는 문제를 두고 하루 온종일 씨름하였다. 그 주제에 대해서 데블런 교수님은 아주 확고한 생각을 지니고 계셨다. "가장 나쁜 것은 작가가 이따금씩 자신의 은밀한 논평을 끼워 넣는 형식이지. 작가의 그런 개입이 이야기의 흐름을 깰 땐 얼마나 불쾌한지 모른다네. 게다가 이야기의 끝이 엉성하게 건초 더미를 실은 짐마차처럼 삐걱거리면 정말 얼마나 혐오스러운지... 자넨 그러지 말게. 자네가 가르칠 어떤 학생이라도 그렇게 하도록 해서는 안 되네. 만일 그런 책을 평할 기회가 있으면 가차 없이 혹평하게.  331


우리는 소설의 주제로 어떤 것이 가장 좋은가에 대해 긴 토론을 하였으며, 데블련 교수님은 두 가지 점을 지적하셨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어떤 행위든 다 소설의 질료라네." 

"어떤 것이든 다 될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런 셈이지."

"근친상간도요?"

"그리스 비극을 뒤져보면 근친상간을 둘러싼 위대한 드라마가 무궁무진하다네. 불과 분노와 복수로 일관된 것들이 많지."

"전 그리스 비극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렇담 이번 여름이 자네가 못 보고 그냥 넘어간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군.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자네가 문학의 내적 의미를 파악하려 할 때 분명 장애가 될걸세."

그런 다음 소설 주제에 관한 두 번째 주의 사항을 그분은 아주 단호한 어조로 피력하셨다. "추상적 개념에 관한 소설은 단연코 좋은 소설이 못되네. 차라리 논문을 쓰는 게 나을 걸세. 소설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어야지 어떤 원형이나 전형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 그러나 만일 어떤 추상적인 워칙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그리고 것이라면 그것은 강한 인상을 주는 소설이 될 수 있다네."  333-334


사람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지혜를 터득한다. 하나는 이용 가능한 모든 증거를 끈기 있게 축적하고 분석함으로써 지혜를 얻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한 순간에 모든 대륙과 전 역사에 빛을 밝혀 주는 에피파니(epiphany, 일상의 경험 속에서 어느 한 순간 맞이하는 직관적 통찰이나 깨달음을 일컫는다. 흔히 현현(顯現 나타날현 나타날현)이라고 말한다.)를 통해 지혜를 얻는 것이다.  335


"우리가 하는 일이란 고작해야 문학이라는 커다란 관목을 흔들어 뭐 떨어지는 것이 없나 땅바닥을 뒤지는 꼴이라네. 문학의 근간인 실제의 삶은 모두 우리 주위에 드러나 잇는데 말일세."  341


나는 엄숙한 어조로 서두를 꺼냈다. " ... 아무튼 제 생각엔 무엇이 서사인가를 이해하고 또 책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네 명의 미국 작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연대순으로 이름을 들면 허먼 멜빌, 스티븐 크레인, 이디스 워튼, 윌리엄 포크너입니다."  343


" ... 어쨌건 그들에 반대되는, 상당한 대중적 인기를 얻었지만 미학적인 관저에서는 거의 형편없는 작품을 내놓은 네 작가를 언급할 차례입니다. 다시 연대순으로 말해 보면, 싱클레어 루이스, 펄 벅,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입니다..."  344


(편집자 마멜과의 대화, 문학 비평집 출간에 대한 내용) " .. 자기 현시적인 일화는 최소로 하시고 중요한 예는 많이 집어넣으세요."

"어떤 걸 말씀하십니까?"

"중요한 요점을 기술하시고, 그다음엔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본보기를 짧게 두 가지 정도 인용하시면 될 거예요."  355





독자 제인 갈런드


근본적인 것들을 고집하는 그들의 자세  550


루카스 요더가 아랫입술을 떨며 창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요더 씨!" 내가 불렀다. "어디 아프세요?"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지금 펜스터마허 사람들은 잔인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고는 참던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의 비탄에 잠긴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다가 문득 그가 펜스터마허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는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살인자의 부모가 있는 그 놎아에 가 있었다. 그들의 감정이 그의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작품을 쓰는 비결인 모양이다. 그가 어떤 사람에 대해 글을 쓸 때면 그는 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등장인물의 입장 소에서 살고, 그들과 똑같은 고통을 느끼며 그들의 정신적 혼란을 똑같이 겪었다. 이 즐거운 크리스마스에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펜스터마허를 잊고 있었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그를 소설가이게끔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599







사람들이 사는 세상 - 소설의 세계


1. 왜 읽는가?


미국의 저명한 비평가인 헤럴드 블룸은 <어떻게 읽고 왜 읽을 것인가>의 프롤로그인 <왜 읽는가?>라는 글에서 '왜 글을 읽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뒤, 그 이유는 깊이 있는 지속적인 독서만이 '자율적인 자아'. 즉 주체적 자아를 온전하게 확립해 주고, 또 그 자아의 주체성을 증진시키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율적인 자아' 형성을 위해 어떤 글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블룸은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독서에는 논쟁적인 글보다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글이 더 적합하다는 전제 아래, 정치, 철학, 종교 등 이데올로기를 담은 글보다는 소설, 극, 단편, 시 등의 문학 작품이 그가 말하는 독서에 어울리는 대상이라고 말한다. 물론 블룸은 정치 경제학에 관한 글이나 철학에 관한 글이 그 글을 읽는 사람의 생에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율성>을 과거의 사고방식에서 해방되는 것, 구체적으로는 개인의 삶과 운명에 관해 우리가 인습적으로 생각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았던 블룸은, 어느 특정의 개인에 관한 우리의 판단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문학이 우리를 우리 자신의 과거에서 해방시키는 가장 중요한 실천의 도구가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브룸은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 박사의 말을 빌려 독서의 주요 목적이 [우리 정신에서 상투적인 것을 씻어 내는것]에 있다고 한다. 여기서 [상투적인 것]으로 옮긴 [cant]는 실상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일상적으로 던지는 말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의미를 확대하면 사람들이 으레 당연히 여기는 것, 인습적으로 그렇게 여겨 왔던 것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정신 속에서 그런 상투적인 것을 지워 낸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을 다시 새롭게 다시 보는 힘을 키우고, 기성(旣成 이미기 이룰성)의 것을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를 아무 생각 없이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에 만족한다면 우리는 그 사상이나 생각의 노예에 불과하며, 기존의 사고의 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편협한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우리 상상의 노력이 그 신선함을 상실하거나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의심의 능력을 상실할 때 우리느 ㄴ이미 [상투적인 것]의 그무렝 갖힌 꼴이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그런 [상투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과거에서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 해방은 우리 각자가 처해 있는 정치, 경제, 종교, 혹은 철학적 현상에 변화를 시도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현재의 제도를 정당화시키는 기성의 사상이나 생각과 단절을 도모하는 노력의 출발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노력의 바탕에 개인의 변화가 없으면 해방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실로 개인적인 차우너을 넘어선 공적인, 사회적인 차원의 변화는 그 구성원 각자의 질적인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며, 아무리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한다 해도 개인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굳이 그 예를 들지 않아도 우리가 익히 경험을 통해 확인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질적인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우리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혹은 상상의 경험을 통해 가능하다. 그런데 시간적인 제약과 공간적인 제약으로 인해, 우리가 몸으로 체득하는 직접적인 경험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 삶에서 더욱 중요한 것이 바로 상상의 경험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상상의 경험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독서이다. 우리는 독서를 통해 우리의 [과거]로 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그 해방을 통해 더 많은 감수성을 지니고 더 많은 통찰과 지혜를 지닌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은 바로 [반성(反省 되돌릴반 살필성)]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결과이며, 그 과정을 통해 우리가 더욱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곧 [자기 확대]로 나아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독서는 사회적인 차원의 행위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는 개인적인 차원의 행위에 속하는 것으로, 블룸은 이런 독서의 행위를 [고독한 실천(solitary praxis)]이라 부른다. 말하자면 독서는 자기반성과 자기 확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그 공간 속에서 우리는 본연(本然 근본본 그러할연)의 [나]에 가까이 다가가는 질적인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블룸이 말하는 [자율성]의 획득이며, 이는 비록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의 과정이지만 실은 그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변화으 단초가 되는 과정인 셈이다.  619-622



2. 세상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사는 땅의 이야기


앞에서 <왜 읽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독서어ㅔ 관한 이야기를 한 것은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소설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독서를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자율성이고 진정한 자기 자신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마 존재의 진정성과 관련한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이 자율성과 진정성을 달성하는 길은 [진리는 무엇인가?]와 같은 철학적, 형이상학적 물음이기보다 오히려 더없이 세속적일 수 있는, 더없이 평범한 것일 수 있는, [세상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다. 진부한 물음일 수도 있는 이 후자의 물음을 통해 우리는 아집과 편견과 과거에서 해방되어, 세상살이가 혼자가 아닌 관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 관계를 실천할 수 있는 보다 넓은 지평의 삶 속에 진입할 수 있는 열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622-623


제임스 미치너는 바로 [이 세상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땅]에 가장 정직하게 다가간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세상은 나의 집>이라는 그의 자서전 제목이 보여주듯, 미치너는 실제로 세계의 많은 곳을 여행하며 곳곳의 색다른 지리적 공간과 그 공간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직접 관찰한 작가다.  623


미치너가 세상의 낯선 지형과 낯선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서로 다른 기후와 민족성과 종교와 피부색을 지닌 사람들이라도 모두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사람들이며, 마치 우리의 이웃처럼 우리와 어울려 살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의 지경(地境 땅지 지경경)과는 다른 곳의 먼 역사를 이해하고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자 했던 미치너가 스스로를 [정신적으로 혼혈인]이라고 부른 것도 그러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거꾸로, 자신이 유대인일 수도 있고 러시아인일 수도 있고 흑인일 수도 있다는 정신의 개방성으로 인해, 사람에 대한 믿음과 그 사람들의 삶에 대한 솔직한 이해로 나아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땅(land)이 존재의 근본적인 한 부분]이라고 언급한 미치너는 그 땅 위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차별 없는 존재의 평등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삶의 질의 차이, 혹은 문명의 차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사는 지형(地形 땅지 형상형)의 다름에 따라 혹은 좋든 나쁘든 문명의 개입에 따라 불가피하게 형성된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런 차이는 어느 지형 밖에서 관찰한 상대적인 차이일 뿐이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 좋고 나쁜의 차이는 아니다. 다만 그런 차이에 따라 생겨난 부산물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명일 테고, 그 문명의 높고 낮음의 구분은 역사적 시간의 지연(遲延 더딜지 끌연)에 따른 차이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땅과 사람들의 삶의 차이 혹은 다름에 대한 관찰이 차별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로 나아가는 미치너의 태도가 아닌가 싶다.  624-625


[다른 사람들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훌륭한 이야기꾼이 될 수 없다]고 한 미치너의 말에서 우리는 그가 낯선 땅과 낯선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눈을 뜨고 어떻게 귀를 기울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스스로가 한 사람의 지리학자, 한 사람의 나그네가 되어 자신이 지나온 길의 경허모가 그 속에서 터득한 지식을 재구성하여 독자들과 나누고자 했던 작가인 미치너는 어떤 면에서는 사물이나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과 이해와 관심이 아주 단순하면서 소박한 이야기꾼이다. 그는 뛰어난 유머가도 아니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읶르어 내고 환상적인 구도 속에 이야기를 전재시키는 뛰어난 문장가도 아니다. 그렇다고 인물의 심리 분석에 뛰어난 작가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다단한 삶의 구도는 취급하지 않는다. 자신이 다룰 수 없는 부분이 많다고 인정하는 그는 다만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에 지나치지도 모라자지도 않은 소박한 관심을 지닌 작가다. 그런 관심으로 한 편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할 수 있으며. 한 인물을 솔직하게 그릴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시킬까에 과도한 신경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 이야기가 그 스스로 풀려나가기를 원하는 작가다. 그는 사람들에게 교훈적인 이야기나 설교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누구를 계몽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그러면서 자신의 삶의 경계를 넓히는 그런 보통의 사람이었다.  625-626



3. 왜 이야기가 필요한가?


굳이 그는 자신의 작풉에 대한 평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반박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는 정직한 작가로 기억되길 원했을 뿐이다 그런에도 미치너오 같은 작가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우리의 과거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이해의 광장으로 나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방에서 벗어나 광장으로 나가야 비로소 본연의 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또한 그래야 나의 이야기가 의미 있는 울림으로 상대방에게 퍼져 나가는 것이다.  627


이 소설에서 미치너는 자신을 모델로 한 루카스 요더의 입을 통해 작가가 독자들에게 전해 주는 것은 재미보다는 이야기의 호소력이라고 하며, 자신의 토지와 물리적 환겨엥 초점을 맞춘 자신의 이야기가 하나의 구성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인물과 플롯의 전개에 더 많은 관심이 있는 편집자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 미치너는 전통적인 이야기꾼인 자각와는 다른 예술관을 지닌 비평가의 시선을 통해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으며, 또한 문학이란 대중의 정서에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독자를 통해서는 비평가와는 다른 시각을 지닌 대중들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런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는 이처럼 생각의 차이, 판단의 차이를 그대로 노출시킴으로써 그의 <소설>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또 다른 층위의 생각의 단계로 올라서게 해주는 것이다.  628


움베르토 에코는 한 신문에 기고한 글을 통해, 오늘날처럼 물질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근원적인 진정성을 회복하려면 [우리 삶의 의미를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확인시킬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야기가 필요한것이 아닐까 싶다. 혼자만의 독백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재구성하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보다 근본적인 자기 존재에 가까이 다가가는 방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리처드 로티가 말했던 [궁극의 어휘]가 필요하다.


모든 인간은 그들의 행동과 믿음과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름의 언어들을 지니고 다닌다. 그 언어를 통해 우리는 친구를 찬양하고 적을 경멸하기도 하며, 우리의 원대한 구상을 말하기도 하고 우리 자신의 가슴 아픈 자기회의를 드러내기도 하고 우리 자신의 가슴 아픈 자기회의를 드러내기도 하고 드높은 희망을 펼치기도 한다. 그 언어들이 바로 우리가 때로는 앞을 내다보며, 때로는 뒤를 돌아다보며 우리 삶의 이야기를 말하는 바로 그 언어인 것이다.  628-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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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아무에게도 길을 물어보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길을 잃을 자유조차 잃게 되리라"라고 어느 현자를 말했다. 

남들이 백 번도 더 지나간 길에서, 틀에 박힌 생각에서, 그림엽서처럼 뻔한 풍경과 집단 수용 천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제 '우연'에 진심 어린 존경을 표하고 본래의 권위를 돌려줘야 할 때가 왔다.  9




딴 데 가서 알아봐 - 프랑스인들은 '딴 데 가서 알아봐'라는 말을 자주 한다. 성가신 사람을 멀리 쫓아낼 때 쓰는 이 표현은, 누구라도 들으면 기분이 언짢아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이라면, 이 '딴 데 가서 알아봐'는 여행자의 지상 목표가 된다. 그런데 이곳을 떠나 당신을 둘러싼 환경이 달라졌는데도 정작 당신 자신은 달라지지 않았다면 그 여행은 망쳤다는 뜻이다.  16-17


은인 - 한 나라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현지인 친구를 사귀는 것만 한 방법이 없다. 이들이 보여주는 일상적인 친절과 배려는 가이드가 늘어놓는 청산유수 같은 설명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나치게 경계심을 품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요컨대 분별이 관건이다.  21


출항 - 프랑스 소설가 폴 니장(Paul Nizan)은 "여행은 돌이킬 없는 상실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26


오지 - 낯선 지역, 어쩌면 덜 알려진 지역을 가리킬 때 쓰는 용어, 이런 지방은 관광지 바깥에 위치한다. 이처럼 가게 뒷방에 깊이 숨겨진 보석 같은 고장에 찾아가 자신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고정관념을 뒤른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26



"여행은 젊은이를 가르치고 노년을 미리 경험하게 한다." - 프랜시스 베이컨(Bacon Francis, 1561~1626)



짐 - 비행기에 탈 때 짐이란 짐은 다 덜어내도 마음의 짐은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니 불행인지도 모르겠지만, 이 짐의 무게는 어느 항공사에서도 재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나 할까?  38



"그러나 진정한 여행자들은 오직 떠나기 위해 떠나는 자들 마음은 풍성처럼 가볍게 숙명은 결코 떨치지 못한 채 그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늘 '가자!라고만 말하네." - 샤를 보들레르(Baudelaire Charles, 1821~1867)



베르베르족 속담 - 여행은 자기 삶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다.  41


지도 -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행자다."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쉬아레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63


기분 전환 - "우리는 장소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 여행한다." 이폴리트 텐(프랑스의 비평가, 역사가)  71


사냥꾼 - 홀로 나와 바람 냄새를 맡으며 우연을 찾아다니는 여행자들은 '즉흥 사냥꾼'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길을 가다 자신이 원하는 것뿐 아니라 예상치 못한 만남도 얻는다.  71


길 위에서 - 여행은 삶과 같다. 목적지가 아니라 거기까지 가는 길이 중요하다. 시간에 쫓기며 정해진 목표를 향해 서둘러 갈 권리도 있겠지만, 길가에서 경험하는 경이와 아름다움을 놓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72


중국 속담 - 진정한 여행자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75


세상 끝에 사는 친구 - "여행자란 어떤 사람인가? 세상 끝까지 가서 말 한마디라도 나눠보려고 훌쩍 떠나는 이가 아닌가!" 쥘 바르베 도르비이(프랑스의 소설가)  82


호기심 - 두뇌와 오감을 사용하는 여행이야말로 호기심 많은 사람이 맛보는 최고의 즐거움이다. 경이에 대한 욕구가 없고, 여행자의 시선으로 길가에 널린 놀라움을 거둬들일 줄 모른다면, 자기 방에서 멀리 떠나 모험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87


현지에서 작업 걸기 - 어떤 나라를 속속들이 알기 위해서는 뭐니 뭐니 해도 현지인과 살을 맞대보거나 적어도 감정이 오가는 관계를 만드는 게 최고다. 현지 풍속과 언어를 속속들이 알기 위한 이런 여행 방식이 기혼 여행자의 정조 관념과 갈등을 빚지 않는다면, "항구마다 기다리는 애인 한 명씩은 만들어라"라는 유명한 말은 진정한 탐험가들이 응당 마음에 품을 법한 것이며 앎에 대한 목마름에 훌륭히 부합한다고 하겠다.  106


여행작가 - 여행작가와 글도 쓰는 여행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여행 작가의 시선은 깐깐하다 못해 열정과 비판으로 남들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글도 쓰는 여행자는 보통 타협적이고, 자신이 특별한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최상급 형용사들을 줄줄이 늘어 놓는다...

글쓰기와 여행은 언제나 서로를 사로잡는다. 이 둘은 모두 상상 세계를 향해 떠날 준비를 마쳤거나 모든 가능한 세계를 이미 탐험한 이들, 그러니까 '다른 곳을 열망한 이들'의 부름에 대한 대답인 것이다.  111-112


깨어남 - "자신이 꿈꾸는 여행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다운 여행이 아니다. 이때 말하는 꿈은 정신을 잠재우는 꿈이 아니라, 땀에 흠뻑 젖고 목이 메면서, 수염이 자라 덥수룩해진 채로 몸을 부르르 떨며 깨어나게 되는, 이야기할 수 없는 꿈,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이를 먹는 것조차 멈춰버리는 그런 꿈이다." 다니엘 메르메(프랑스의 언론인, 작가)  120


청년 교육 - "여행은 젊은이들을 가르친다"라고 몽테뉴는 말했다.

현재를 눈부시게 만들고 자기 앞의 생을 환히 밝히기 위해 여행을 하다 보면 내면이 풍요로워진다.  125



"독서가 여행이고, 여행이 독서다." - 빅토르 위고(Hugo Victor, 1802~1885)



"또다시 우리의 울퉁불퉁한 여행 가방이 보도 위에 쌓였다. 우리 앞에는 가야 할 길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길이야말로 삶인 것을." - 잭 케루악(Kerouac Jack, 1922~1969)



"아무리 생각해봐도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집에만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 러디어드 키플링(Kipling Rudyard, 1865~1936)



세계를 읽다 -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 책을 한 쪽밖에 읽지 못한 셈이다." 외젠 다비(프랑스 소설가)  170


거꾸로 여행 - "진정한 여행은 어딘가에 가는 행위 그 자체다. 일단 도착하면 여행은 끝난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끝에서부터 시작한다." 위고 베를롬(프랑스 작가)  171


책 - "모든 책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은 세상에 한 권뿐이며, 세계 모든 나라의 국경을 열어주는 8절판의 작은 책, 바로 내 여권이다." 알랭 보레(프랑스 비평가, 여행 작가)  177



"여행을 많이 하고 자신의 생각과 삶의 형태를 여러 번 바꿔본 사람보다 더 완전한 사람은 없다." - 알퐁스 드 라마르틴(Lamartine Alphonse, 1790~1869)



"여행은 문과 같다. 우리는 이 문을 통해 현시렝서 나와 꿈처럼 보이는 다른 현실, 우리가 아직 탐험하지 않은 다른 현실 속으로 파고들어 가는 것이다." - 기 드 모파상(Maupassant Guy de, 1850~1893)



무어인 속담 - 여행하지 않는 살마은 인간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196


앙리 드 몽프레 - "삶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모험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며, 우연과 행운과 운명을 신뢰하라. 길을 떠나 다른 공간과 다른 희망을 정복하라. 그러면 나머비는 덤으로 주어지리라."  203


테오도르 모노 - "우리는 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는 잘 알지만, 언제, 어떻게, 어떤 길로 그곳에 이르게 될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미리부터 너무 고민할 필요가 없다. 두고 보면 알게 된다."  203


미셸 에켐 드 몽테뉴 - "왜 여행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늘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내가 무엇을 피하는지는 잘 알지만, 내가 무엇을 찾는지는 잘 모른다'라고 말이다. 자신의 생각을 타인의 두뇌에 문질러 다듬기 위해서라도 여행을 해야 한다."  203


베트남의 해변 도시, 나짱 - '삶의 운치'를 즐긴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다른 모험을 향해 전속력으로 당신을 떠밀어대는 안내책자의 프로그램은 그럴 계획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음 기회에... 이런 식의 여행은 '바보 같은 여행'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딱할 뿐이다.  206-207


프랑스 최대 여행사, 누벨 프롱티에르 - 오늘날 고객은 한곳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특별히 피하는 곳도 특별히 가고 싶은 곳도 없이 특정 브랜드를 고수하지도 않고, 그저 일종의 소비요겡 이끌려 '기획 상품'만 찾는 뚜렷한 경향을 보인다.  210


길을 잃을 자유 - "아무에게도 길을 물어보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길을 잃을 자유조차 잃게 되리라" 랍비 나흐만 드 브라트슬라브가 남긴 이 경구는 진정한 여행자, 곧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호기심으로 가슴 설레는 사람에게 마음의 지주가 된다.  232


페르시아 속담 - 우리가 여행에서 가져올 수 있는 최고의 기념품은 건강하고 무사한 자기 자신이다.  234


긴 여정, 짧은 산책 - 한가로이 거닐면서 우리는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우연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여행 그 자체를 만끽하는 방법이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노자는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비행기 덕분에 완전히 거꾸로 여행할 수 있게 된 만큼, 그러니까 한 걸음에 천리 길을 갈 수 있게 된 만큼, 수천 킬로미터 거리를 훌쩍 날아간 뒤에 한 발짝 한 발짝 디딜 때마다 여행의 꽃이 활짝 피어난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235-236


해변 -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임을 내세우는 곳은 수십군데지만, 문제는 그것이 객관적인 평가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242



"무언가를 발견하는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으려는 여행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가지려는 여행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Proust Marcel, 1871~1922)



추구 - "여행은 동기가 없어도 된다. 여행 그 자체만으로 족하다는 것이 이내 입증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여행이 당신을 만들거나 당신을 해체하는 것이다." 니콜라 부비에  252


만남 - "우리는 자신을 피하기 위해서 여행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자신과 만나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이다." 장 그르니에  268


추억 - 여행은 추억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다. 가장 빛나는 추억은 현재에 만들어진다는 것을 때때로 망각할 정도다. 기억은 경험을 자양분으로 삼는 만큼 지금 이 순가에 머물기를 잊고 추억을 모으는 데만 급급해한다면 껍데기만 남는다. 무엇보다도 그토록 먼 곳까지 가서 찾고 느끼려했던 것들을 놓쳐버릴 수 있다. 그러니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야 한다. 받아들일 줄만 안다면 덧없는 한순간보다 더 지속적인 것도 없다.  283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 "나는 어딘가에 가려고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걷기 위해 여행한다. 그러니까 여행하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움직이는 것이고, 삶의 필요서오가 난처함을 더 가까이 느끼는 것이다."  284


여행자의 인사, "스토 칼로" -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건네는 그리스의 인삿말이다. '스토 칼로 나파스(Sto kalo nappas)'의 준말인 이 표현은 선(善)과 아름다움을 향해 가라'라는 뜻이다. 여행자를 올바른 길로 안내해줄 만한 좋은 말이다.  285


티베트 속담 - 여행은 본질로의 회귀다.  296


투아레그족 속담 - 첫 번째 여행에서 우리는 발견을 하고, 두 번째 여행에서 우리는 풍요로워진다.  299


관광객 - '관광객'이라는 말은 이탈리아 산책 수첩에 "어느 관광객의 회상록"이라는 제목을 붙인 스탕달에 의해 처음으로 생겨났다. 이후 그의 뒤를 이어 떠나는 방문객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때로는 이들이 낯선 곳의 '점령자'가 되는 지겨엥 이르렀다. 이 점령자들이 자신이 방문하는 장소를 변화시킬 때 여행자는 새로운 발견의 여지를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다. 이때 여행자는 풍경에 어우러지기보다는 풍경에 거치적거리는 존재가 돼버린다.

여행의 민주화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의미하지만, 이러한 진보의 정점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의 그림을 이루는 온전한 풍경을 더 이상 일그러뜨리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302-303



"여행은 도시와 시간을 이어주는 일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아름답고 철학적인 여행은 그렇게 머무는 사이 생겨나는 틈에 있다." - 폴 발레리(Valery Paul, 1871~1945)



여행필수품 - 스페인의 시인 안토니오 마차도는 이런 말을 남겼다. "행복으로 이끄는 길은 없다. 행복이 바로 길이다.", "여행자여, 길은 바로 그대의 발자취다."  321


잔스카르 속담 - 여행은 그대의 아버지다. 그대는 자기 자신을 찾았을 때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그 땅은 그대의 어머니다.  339


에밀 졸라의 겉치레 말 - "여행만큼 지성을 함양하는 것은 없다"라고 이 작가는 말했다. 관광산업의 유혹에 넘어가 여기저기 우르르 몰려 다니기를 낙으로 삼는 이들이 흡족해할 만한 말이다.  하지만 그저 움직였다고 여행을 한 것일까? 예전에는 어떤 사람의 지성이 그가 주파한 거리와 비례할 수 있었는지 몰라도, 불행히도 이런 시대는 지나가지 않았는가!    341-342




옮긴이의 글

모든 것을 계획하고 떠나며 꿈꾸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는 여행과 정반대의 여행이 있다. 마음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이곳이 아닌 다른 하늘 아래로 몸을 피해야 숨이라도 겨우 쉴 듯한, 그러나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는 여행.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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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 엄마들 중에도 가끔 아무런 정보 없이 무작정 오는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의 특징은 계획이 없는 만큼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여행을 한다는 것이다. 19 올레길을 걷다가 아이가 바닷가 모래사장을 만나니 주저 앉아 놀기 시작한다. 갈 길이 멀다고 아이를 재촉하는 대신 엄마도 털썩 주저앉아 바다를 본다... 어떤 마음으로 제주도에 오는가에 달렸다. 20 지금까지의 여행 패턴은 일명 '꼭 가봐야 할 곳'으로 분류된 관광지나 맛집을 정복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하다. 가봐야 할 곳 리스트에 맞춰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제주에 사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소소한 삶의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하는 게 참 안타깝다. 21 대부분의 엄마들은 말로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푹 쉬자." 해놓고 꼭 한 두 가지씩의 예외사항을 둔다. '다른 건 몰라도 일기는 쓰자' '공부는 습관이니까 학습지 두 장씩만 풀자' '영어 단어 다섯 개씩만 외우자'하고 말이다. 31 창의력 향상 놀이, 자기주도학습 같은 것을 잘하는 아이로 만들려면 아이들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스스로 책을 펴서 들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한다. 심심해 몸을 뒤틀고, 방바닥을 파며 구르더라도 스스로 놀 거리를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자. 32 전문가들은 아이가 어른이 되길 원한다면 어른으로 대접하라고 한다. 특히 아이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려면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해서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35 툭하면 약을 먹이는 아이들에 비해 살짝 방치한 아이들의 면역력이 훨씬 좋듯, 괴로움과 실패를 경험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반복한 아이들이 결국 자기주도적인 인생을 살아나가는 성인으로 성장할 확률이 높다. ... 우리 나라에는 아이를 전학시키지 않고도 다른 지역의 학교에 한 달씩 보낼 수 있는 '위탁교육제도'라는 것이 있다. 36 당연한 얘기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살게 돼 있다. 51 규칙을 세우면 예외를 두지 않아야 아이들이 따라준다. 55 딱히 혼날 짓을 한 건 아니지만 내 맘에 들지 않았을때, 특히 다른 여러가지 이유로 내 감정 상태가 예민한데 아이마저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라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이다. '빨리 해'라는 재촉도, '그만해'라는 금지도 결국은 나의 속도와 행동방식을 기준에 놓고 아이를 재단하려 들 때 나오는 말들이다. 59 잔소리도 습관이다. 좀 더 느긋한 엄마가 되겟다는 다짐이 다짐에서 그치지 않으려면 아이들과 약속을 하고 규칙을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61 '불평없는 세상 프로젝트'. 미국 캔자스시티의 한 목사가 시작한 이 캠페인은 '모든 불행은 불평을 말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도서 <불평 없이 살아가기>) 62 제주도에서 같은 곳을 함께 여행했더라도 아이가 본 풍경과 엄마가 본 풍경은 다를 것이다. 78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상관 없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몇 번이고 반복해서 대상이 되는 풍경을 보고 관찰햇다는 것이 중요하다. 80 아이가 무언가를 요구하기도 전에 미리 알아서 갖다 바치는 그 정성과 관심만큼, 엄마들이 스스로에 대해 정성을 쏟는지는 의문이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왜 이리도 사는 게 헛헛한지 불쑥불쑥 짜증이 솟구치고 불안한 마음이 되는 이유는 뭔지.. 조용히 귀 기울이기.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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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고가 없는 제주에 이주한 4년간의... 가족 성장기입니다.  5


제주도 특유의 '연세'라는 제도.

제주도에서는 전셋집 개념이 거의 없고 월세 1년 치를 한 번에 내는 연세가 정착되어 있었는데, 20년이 다 된 낡은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내야 하는 연세 370만 원이 너무도 아깝게 느껴졌다.  20


아이가 울 때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첫째는 배가 고파서, 두 번째는 기저귀가 젖었을 때다. 한 달이 넘어가자 놀고 싶어서가 세 번째 이유가 되었다.  47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나에게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얼굴을 익힘으로써 가족 이상의 관계를 펼쳐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56


'얼굴만 아는 이웃'에게 육아와 관련된 부탁을 할 수 있을까? 결국 사람이 할 일을 돈이 해결할 수밖에 없는데 마을에서만큼은 편하게 부착할 수 있고 또 책임을 지고 부탁한 것을 채워준다. 아이에게 이러한 '사회적 관계'를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정서발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57


아이를 키우고 살아가는 것은 나의 유년 시절을 돌아보는 일이고 부모, 자식간의 관계를 복원하는 일인 것 같다.  63


<한겨레21>의 독자 편집위원이 되어 김형태(황신혜밴드)씨와 하게 된 인터뷰였다.

"... 생활에서 조금만이라도 벗어나면 낙오될까봐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벗어나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로워지죠."  69


아이를 대하는 부모의 마음가짐이란 무엇일까?  110


우리 가족에게는 나름 독서육아에 대한 원칙이 있다. 억지로 책을 읽히지 않고 자연스럽게 책을 접하게 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 그 나이 때에 읽어야 할 책을 선택하여 읽히되 다독을 권하지 않는다는 것이 두 번째 원칙이다...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나름의 원칙을 만들었다.  113


가끔 "아이를 어떻게 키웠으면 좋겠냐"는 질문을 받게 되는데 늘 대답은 "잘 모르겠다"였다...

집에서 벌레가 나오면 항상 잡아서 없애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이를 낳고는 벌레 또한 꼬물꼬물 기어다니는 '아기'라고 생각하니 차마 마이 앞에서 죽일 수가 없다.  151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몫'이 있다. 그 '몫'을 자신만이 떠맡으려거나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것은 서로에게 좋지 않다.  200


지금까지도 어려운 부분이 바로 '아이를 관찰하는 법'인데 시간이 충분하더라도 아이의 행동을 잘 알아보고 이를 유추해서 해석하고 아이의 성장과정에 맞는 적절한 처방을 내리는 데까지는 한참 부족하다.  215


불안해하지 않고 아이의 힘을 믿으려면 부모부터가 시간을 관조하는 힘이 있어야 함을 깨닫고 있다.  218


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아이가 사고를 치지 않는지'. '제재할 거리가 없는지'를 살피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불편한 것은 없는지, 영양은 제대로 섭취하는지, 사고의 위험요소를 없는지를 적극적으로 살피고, 스스로 판단하고 그때그때 바로 처방하는 과정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 그 첫 번째 단계가 바로 '관찰'이다.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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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비루해지기 쉬우며, 자칫하면 찌그러지고 찌질해지기 쉬운 일상적인 삶이야말로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한 곳이고, 그곳이 '지혜에 대한 사랑'을 자처하는 철학이 달려들어야 세계라고 저는 믿습니다.  8


독재나 억압이 더욱 나쁜 것은 마치 그것이 사라지면 사람들이 자유로워질 것 같은 환상을 유포하기 때문이다. 동성애에 대한 금기가 더욱 나쁜 것은 마치 그것이 사라지면 동성애자들이 자유로워지리라는 안이한 발상을 배양하기 때문이다. 그믹와 거리가 먼 이성애자는 모두 자유롭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자유를 위해 모든 구소고가 억압이 사라져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이 때문이다.  13


제약이나 구속 대신 필연성과 대립되는 상태가 자유라고 믿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필연성이란 피할 수 없는 구속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필연성과 대비하여 '가능성'이,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자유의 폭으 ㄹ결정한다고들 한다.  13


돈이 많아 노동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 사람은 자유로울까?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니 자유로울 거라고?

자유를 부러워하는 게 아니라 돈 쓰는 걸 부러워하는 것이다. 자유란 돈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것이지 돈을 실컷 쓰는 게 아니다.  13-15


자유란 이런저런 조건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발행되는 자판기 티켓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든 나 자신이 만들어가야 할 세공품이다.

자유란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갈 수 있는 '능력'과 결부된 것이다. 삶이나 행동의 방향과결부된 어떤 힘이나 능력이다. 

억압이나 구속은 그 자체로 자유와 반대되는 상태가 아니라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이 가동되는 출발선에 불과하다.  15


자유를 위해선 자신의 '자유의지'만이 아니라 자신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자신의 생각만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는 게 필요하다.  16


한 줌의 용기가 없다면 사실 자유로운 살밍란 말해봐야 공허한 것이고, 들어봐야 '남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용기는 고통을, 자유를 위해 넘어서야 할 저항으로 바꾼다. 

용기는 모든 것을 거는 어떤 도박적인 내기가 아니라 단지 '한 줌'의 용기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17


단 한 번의 거대한 결단보다 더 어려운 것은 매 순간의 삶에서 자유로운 걸음을 걷는 것이다. 매 순간을 갈 만한 길로 가는 것이고, 매일매일 살 만한 삶을 사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매 순간 진행되는 삶 자체를, 매번 내딛는 발걸음을 자유로운 삶으로 스스로 믿고 가는 법. 그것이 철학을 통해 배워야 할 삶의 지혜다.  19


이런 의미에서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필로-소피아(philo-sophia)는 '삶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필로-비오스(philo-bios)의 다른 이름이라고 나는 믿는다.

옳다고 주어지는 것이 정말 옳은지 다시 생각하고, 자신이 정말 긍정할 수 있는 좋은 삶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하는 것은 이 한 줌의 용기로 시작한다.  20



사건과 자유 -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진" 사건에 대하여


가령 교통사고는 물리학이나 생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노래 한 곡 들은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신체적 변화를 야기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얼른 치료하여 이전의 삶으로 되돌리려 한다. 그것 이전의 삶으로 최대한 되돌아가려 한다. 반면 그로 인한 신체적 변화를 받아들이고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사고 아닌 사건이 될 것이다. 

따라서 '사고'란, 그것이 실제로 나를 애초에 바라던 거소가 다른 곳으로 밀고 가더라도, "없었으면 좋았을" 어떤 것이다. 그로 인해 발생한 두 지점 간 간극의 폭은 그가 느끼는 불행의 크기를 뜻한다. 사고란말에 부정적인 색채가 담겨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 그게 '사건'이 되는 것은 그로 인한 변화를 나의 새로운 삶으로 받아들이고 긍정함으로써다. 그것을 받아들인다 함은, 피할 수 없이 이미 내게 밀고 들어온 그것이 내 삶 안에 자리잡았음을 받아들임이며, 그것을 긍정한다 함은 그것으로 인한 변화를 새로운 삶의 기회로, 또다른 삶의 가능성으로 긍정함이다.

사건이란 어떤 일로 인해 발생한 곡절, 애초의 궤적에서 벗어난 이탈에 대한 긍정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에 사고가 많은 인생은 그 사고의 수와 크기만큼 안타깝고 불행하지만 , 사건이 많은 삶은 그 사건의 수와 크기만큼 풍요롭고 행복하다.  27



긍정과 자유 - 기적 같은 삶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다큐 영화 <서칭 포 슈가맨>

처음에 음반 제작자가 찾아왔을 때, 얼마나 기뻤을 것인가. 시를 쓰고 노래를 만들며 사는 멋진 삶이 다가왔다고 생각했을 게다. 대중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도, 혹은 그 이상도 가능할 것 같은 성공이 손을 내미는 것이리라 생각했을 게다. 그만큼 그것이 제작자도 놀랄 만한 실패로 끝났을 때 그가 느꼈을 실망은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참담했을 것이다. 그런데 실패 이후 로드리게스는 잠시 꿈꾸었던 무대 위의 화려함을 얼른 포기하고 어쩌면 남들보다 훨씬 어둡게 느껴졌을 무명의 일상 속으로 돌아간다. 좋아하던 음악을 접고 공장에서 노동을 하는 극히 평범한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공장에서 동료드로가 좀더 나은 삶을 위해 운동을 한다. 목소리를 내기 위해 반복해서 떨어지는 선거에 출마하고, 자식들을 책이 있는 삶으로 인도하는 그런 삶을 산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 다가올 머나먼 타국에서의 기적 같은 부활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은 바로 그 삶을, 큰 기대를 안고 시작했던 노래가 어떤 인기나 성공도 주지 못할 때, 그런 행운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희소한 일인지를 안다면, 정말 이것이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기적이고 아무도 모르는 기적이다. '비밀의 기적'이다.  33-34


각자에겐 각자의 자유가 있다. 좋든 싫든 자신이 안고 살아가야 할 각자의 몸이 있고, 그 각각의 몸에 깃든 능력이 있고, 각자의 몸이 펼칠 각자의 삶이 있다. 그 삶마다 가능한 각자의 자유와 행복이 있다. 각자가 서 있는 곳마다 다를 게 분명한 자유와 행복의 길이 있다. 모든 자유와 행복은 자신의 현재, 지금의 모모가 지금의 조건을 출발점으로 한다. 그 몸과 조건을 자기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자유와 행복의 가능성은 시작된다.  39



고통과 자유 - 피할 수 없는 고토으 그 '운명적인' 만남에 대하여


고통이란 '유기체'의 부적절한 삶의 방식에 대한 기관이나 세포들의 호소와 항의의 목소리고, 질병이란 그 부적절한 삶의 방식에 잠식된 신체의 비명소리다. 이 비명이나 항의의 몫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의식으로 신체 전반의 움직임을 장악한 '유기체'가 자신의 세포나 기관에 대해 무대포의 일방적인 독재를 시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독재의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모든 억압된 것은 되돌아온다는 ㅍ로이트의 말처럼, 억압된 세포와 기관의 고통 역시 되돌아온다. 유기체의 생명과 분리된 채 오직 자기만의 생존을 전면에 내세우며 증식하는 세포들로, 그런 세포를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세상에선 '암세포'라고 명명한다.  43-44


삶이란 어떤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있는게 아니라, 과정 그 자체가 목적이기에, 삶 전체를 걸고 어떤 것을 할 수 있다 함은 삶 자체와 대면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47


고통이 삶을 심오하게 하는 것은 단지 고통에 익숙해지는 훈련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배우려 하지 않는 자에겐 위대한 스승이나 책이 아무것ㅅ도 가르쳐줄 수 없듯이, 고통을 직시하고 고통에서 배우려 하지 안흔 한, 고통은 삶의 깊이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 고통은 고통을 긍정할 수 있는 자에게만, 삶의 심오함을 가르쳐주는 스승으로 온다. 고통을 통해 삶에 물음을 던지며, 고통을 스승으로 삼아 다른 방식으로 살기 위한 길을 찾고자 할 때, 그때 비로소 고통은 지혜로운 삶의 안내자가 된다. 

삶에 던지는 그 물음과 더불어, 그때마다의 답을 들고 현재 속으로 반복하여 되돌아올 때마다, 나는 다른 나로 되돌아온다. 이전의 나와 다른 새로운 내가 탄생한다.  48


강자와 약자..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과 만나고 대면하는 방식의 차이가 그 둘을 갈라놓는다. 약자는 가지보다 강한 자들에게서도 약점이나 단점을 찾지만, 강자는 자기보다 약한 자들에게서도 강점이나 장점을 찾는다.  50


논평이나 비판을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약자들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자신의 약함을 알기에 항상 방어하려는 '본능'이 작동하기 때문이고, 또한 자신의 약함이 드러날까 두려워 날을 세워 듣기 때문이다. 반면 강자는 비판이나 비난에도 동요하지 않으며 칭찬 또한 가볍게 넘긴다.  51


세상에 오직 두 가지 길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필경 거짓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번에는 어떤 방식으로 대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53



기쁨과 자유 - 기쁨의 윤리학과 웃음의 비행술


스피노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양태(mode)'라고 부른다. 사람도 양태, 개도 양태, 컴퓨터도 양태, 물도 양태다. 세상사란 모두 양태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56


신체와 영혼에 발생하는 변화는 어떤 경우든 이 두 가지 방향뿐이다. 수많은 감정들은 강도나 양산을 달리하며 나타나는 이 기쁨과 슬픔의 다른 표현들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감정이나 정서를 크게 둘로 나눈 것이다.  57



꿈과 자유 - 꿈꾸는 영혼의 감옥


돈을 잘 벌면서도 돈 버는 것 말고는 꿈꿀 줄 모른다면 우리의 영혼은 돈에 갇혀 있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만나도 가족밖에는 꿈꿀 줄 모른다면, 우리의 영혼은 가족에 갇혀 있는 것이다.  77



매혹과 자유 - 술병 속의 연인이 내미는 매혹의 손


사물을 인간의 이 목적성 안에서 본다는 것은, 사물이 갖고 있는 힘과 생명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사물이 내미는 손을 감지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며, 사물과 만나는 어떤 사건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뜻대로 쓰다가 맘에 안 들면 주저 없이 내버리는 이들에게서 사물의 '주인'으로서 행사하는 능력이 아니라, 다가오 ㄴ이의 매력으 ㄹ알아보지 못하는 안목 없는 이의 무능력을 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89



선물과 자유 - 아, 존재 자체만으로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수 있다면...


의무가 된 선물, 답례의 의무를 통해 '교환'되는 선물은 과연 선물일까? 데리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답례가 의무가 되는 순간, 선물은 되갚아야 할 채무가 되기 때문이다.  124


  

돈과 자유 - 헝그리 정신과 궁상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려면, 돈을 적게 벌어야 하고, 그러러면 돈을 적게 써야 한다.  133


자본주의와 부에 대해 속속들이 연구했던 맑스는 이런 '경제적 부' 개념과 대비하여, '실질적인 부'란 필요노동시간(먹고사는 데 필요한 비용을 버는 데 사용되는 시간) 이외의 가처분시간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정치경제학 비판요강2>). 쉽게 말하면, 돈을 버는 데 투여되는 시간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부'라는 것이고, 그런 시간이 많은 이들이 '부유한 자'라는 것이다.  135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선 시간만 필요한 게 아니라 돈도 필요하고 그걸 할 수 있는 조건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136


부유함에 대한 이런 관념은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가처분시간을 대개 뻔한 방식으로 패턴화된 소비를 위해 사용하게 한다. 밀리는 자동차 안에서 시간을 보낼 게 뻔함에도 주말이면 자동차를 끌고 나서는 것은, 다른 돈 있는 이들처럼 여가나 레저를 즐기고 있다는 관념을 향유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잘 알려진 관광지를 돌며,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 거기 있음을 확인하고, 이미 익숙한 방식의 소비와 향유 바익을 반복하는 그 패턴화된 소비는 이제 일종의 의무가 된 것 같다. 모두가 하고 있기에 나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핍감과 불안함을 느끼게 되어 어떻게든 동참해야 할 것 같은, 또다른 '일'이 된 듯하다.

나는 실질적 부를 돈을 비롯한 '가처분자원'이나 맑스가 말한 가처분시간보다는 오히려 그런 것을 자신의 삶을 위해 '처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가처분능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간이 있고 돈이 있어도, 능력이 없다면 그것들은 자유를 위한 자원이 아니라 단순한 소비와 소모의 대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139


헝그리 정신은 돈을 쓰지 않는 법이 아니라 돈을 쓰는 법이다. 돈을 잘 쓰기 위한 삶의 원칙이고 이념 내지 철학이다.  142


헝그리 정신은 무엇보다 돈에 대해 '능동적'임을 뜻한다. 돈에 대해 능동적이라 함은 돈을 자기 뜻대로 부리며 산다는 뜻이다...

궁상을 떠는 것은 '대타적으로는' 남들 앞에서 없는 티를 내는 것이고, '대자적으로는' 궁핍 앞에서 사고나 행동이 위축되거나 빈약해지는 것이다...

반면 헝그리 정신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의 삶을 위해 능동적으로 가난을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가난 앞에서 당당하다.  143


항상 검소하게 살고자 하고 엔간하면 돈 쓸 일을 안 만들지만, 써야 할 일이 있을 때 머뭇거리면 안 된다.  145



감각의 자유 - 감각의 자유, 혹은 피 냄새가 나지 않는 비상의 방법에 대하여


감각의 갑옷만큼 우리의 일상적 삶을 구속하고 자유로움을 제한하는 것도 찾기 힘들다. 감각의 구속은 종종 너무 자연스러워서 때로 우리는 구속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기 어렵다. 그 구속은 우리에게 편안함을 준다.  150


철학자 들뢰즈는 진정한 '넘어섬의 경험', '초월의 경험'이란 지각 불가능한 것과의 피할 수 없는 만남엣 온다고 말한 적이 있다(<차이와 반복>). 감각적으로 피할 수 없게 닥쳐왔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없는 어떤 것과의 만남, 그것이 지각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지금의 나의 감각이나 지각능력을 벗어나 있어서일 것이다. 그 지각될 수 없는 것을 향해, 그 알 수 없는 것의 지각을 향해 나의 감각을 밀고 나아갈 때, 나는 나의 감각능력을, 나의 경험능력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을 경험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예컨대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예술작품이나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알기 어려운 책들은, 그것을 피하고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감각능력이나 사고능력을 확장해준다. "문제는 감각의 착란을 통해서 미지의 것에 도달하는 것이다."(랭보)  155-156


자유란 비장한 결단을 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혀용된 영웅들의 문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이들 각자에게 주어진 각자의 문이다. 그런데도 그리 들어가는 이가 적은 것은, 카프카의 유명한 우화 [법 앞에서]의 농부처럼, 그게 자신을 위한 문임에도 평생 그 앞에서 들어갈 수 있을지 찔러보고 그게 정말 나를 위한 문인지 물어볼 뿐, 밀치고 들어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농부처럼 다들 그 앞에서 늙어죽기 때문이다. 

감각의 자유란 익숙하지 않은 것, 새롭고 이질적인 것들 안에 깃들어 있는 어떤 것을 감지하는 능력이다. 처음에는 불편하기에 피하고 싶은 어떤 것을 향해 귀를 여는 작은 용기면 누구나 올라가기 시작하 수 있는 평번한 계단이다. 따라서 어떤 것 앞에서 그저 편안하다면 그것은 혹시 구속의 징표는 아닌지 한번쯤 의심해야 한다.   156-157



감정과 자유 - 이 은밀한 복수의 드라마를 어떻게 정지시킬 것인가?


'능동적인 것'은 먼저 자극하느냐 나중에 반응하느냐의 문제만은 아니다.

능동적 감정은 반동적 감정의 자극에 다르게 '반응'하는 방식으로 시작하기도 한다.   166


'능동적인' 의미의 사랑이란 상대방의 반응과 상관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고, 능동적인 우정이란 친구의 행동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믿고 좋아하는 것 아닐까? 결코 쉬운인은 아니겠지만.  168



지성과 자유 - 누구에게나 주어진, 누구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선물에 대하여 


'유식한' 스승은 자신이 아는 것을 학생들에게 알려주는 데 그치지만, 무지한 스승은 학생 스스로 자신이 모르는 것을 배우게 한다.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가르친다.  173



욕망과 자유 - 언제까지 우리는 '그들의 삶'을 살 것인가?


나는 10년 이상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거의 모든 강의엣 학생들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 첫째 질문에 '저는 이러저러한 것을 잘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답한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었다. 둘째 질문에서는 약간의 단서를 단다. 지금 밥 먹고 싶다, 요즘 연애하고 싶다, 장래에 돈을 많이 벌고 싶다 식의 대답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인데, 그걸 물으려는 게 아니라고. 무언가를 진정 하고 싶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걸고 하고 싶은 게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지, 최소한 10년이나 20년 정도는 '아, 이거 하고 살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게 있을 때 그렇다고 답해야 한다고, 이 질문은 앞의 것보다 좀더 쉬운 편인지, 지금까지 다섯 명 정도가 답을 했다. 하지만 10년 넘게 수많은 학생들 가운데 다섯 명 정도라니, 정말 놀라운 숫자 아닌가! 

이 질문을 받으면, 많은 경우 대답 이전에 자신이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없다는 사실에 놀란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이고, 자신의 능력과 욕망에 대한 질문인데, 그것조차 자신이 알고 있지 못하고 있는 셈이니까.  207


어떤 것을 해보지 않고선 내가 그걸 좋아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해본다는 것도 그렇다. 잠시 맛이나 보듯, 혹은 며칠짜리 캠프에 들어가보듯, 찔러보듯이 잠시 해보는 것으로는 그걸 정말 좋아할 수 있을지 아닌지 알기 어렵다. 처음엔 재미있어 보여도, 제대로 하기 위해선 어떤 것도 때론 단조로울 수도 있고 때론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힘겨운 터널을 필경 하나는 지나가야 한다. 즉 어떤 일을 정말 잘할 수 있을지, 좋아할 수 있을지 알기 위해선, 특별한 재능이나 인연이 있는 게 아니면, 필경 고통이나 지루함을 수반하는 어려움의 문턱과 대면하고 그것을 넘어선 깊이까지 들어가보아야 한다.  211


프란츠 카프카는 아버지로 대변되는 '그들'의 욕망에 의해, 또한 스스로 먹고살기 위해 보험회사 직원이 되어 일을 했지만, 자신이 정말 하고자 했던 것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했다. 밤, '그들'의 욕망이 잠드는 시간에, 그는 자신이 하고 싶던 것을 했다. <아동의 탄생>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역사가 필리프 아리에스는 '일요 역사가'를 자칭했다. 돈을 벌어야 했기에 대학원에 가지못하고 출판사에서 일을 해야 했지만, '일요일'로 표현된느, 노동이 중단되는 시간에 자신이 정작 하고 싶었던 역사 연구를 계속했다. 카프카도 아리에스도, '그들'이 말하는 삶을 피할 순 없었지만, 그 사이에서, 그들의 욕망 사이에 있는 빈틈에서 자신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216


나의 삶을 시작하기에 '이미 늦었어'의 시제란 없는 것이라고, 아무리 늦었다고 해도 시작하지 않고 끝낼 순 없는 거 아니냐고.  219



인정욕망과 자유 - 날 선 자존심과 '그저 웃는' 자긍심의 차이에 대하여


'나의 욕망'이라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은 사실상 엄마, 아버지, 사회 등 '타자'의 욕망이란 것이다. 인정욕망이 ㅡㄱ 타자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삼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무의식이라는 심층의 깊이에까지 침투한 타자의 욕망이다. 라캉이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224


인간의 본질로까지 소급해서 보면, 칭찬이나 직접적인 인정을 구하는 경우는 물론, 그렇지 않은 욕망까지 모두 인정욕망이 된다. 사실일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우리는 필경 남의 인정을 구하는 삶을 사는 존재가 되고 만다. 이는 그들의 삶, 그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아닐까?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행동과, 남의 시선을 의식해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하는 행동을, 둘 다 어차피 그게 그거라고 말해도 좋을까? 실은 그걸 구별하는 것이야말로 단지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결정적인 것 아닐까?  225


자긍심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긍지의 표현이다. 그것은 남이 아닌 자신의 시선, 자신의 척도에 스스로를 비추어 본다. 남의 인정을 구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확신하는 것,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에 비추어 자신이 잘했는지, 잘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기 삶에 자긍심을 가진 이라면, 가난을 감추고자 하지도 않을 것이며, 가난이 드러난다고 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자신이 선택한 것의 일부고, 자신이 긍정하려는 것이니까. 왜 그런 식으로 사느냐고 누가 물으면, 굳이 해명할 필요도 느끼지 못할 것이고, 누가 오해할까 걱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잘 알려진 김상용의 시에서처럼 "왜 사냐건 웃지요" 식으로 여유 있는 웃음 한 번이면 충분할 것이다. 오직 자기가 세운 기준만이 자기를 흔들 것이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자 그럼 다시 한번'하며 자신이 긍정할 수 있는 곳을 향해 스스로를 일으켜세우고 새로 시작하도록 촉발할 것이다.

자존심은 약한 자들이 자신의 약함을 가리기 위한 방어기제고, 자긍심은 강한 자들이 스스로 갖고 있는 힘에 대한 긍정이다. 전자는 남을 향한 것이라면, 후자는 자기를 향한 것이다.  232


긍정의 긍정.

첫번째 긍정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 잘할 수 있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라면, 두번째 긍정은 그렇게 자신이 긍정하여 선택한 삶으로인해 야기되는 어떤 결과도 긍정하는 것이다.  233


자유로운 삶, 그것은 두 번의 긍정에서 온다.  234



속도와 자유 - 속도의 강박증과 춤추는 신체의 시간


함께 산다는 것은 속도를 맞추어 사는 것이다. 걸음걸이의 속도를 맞추지 않고선 함께 걸을 수 없는 것처럼, 속도를 맞추지 않고선 함께 행동할 수 없고, 함께 대화할 수 없으며, 함께 생활할 수 없다. 물론 속도를 맞춘단느 것은 숫자로 표시되는 어떤 크기를 같은 값이 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신체와 영혼마다 각기 다른 속도가 있기에, 그것을 어느 하나에 일치시키려 한다면 '일치'는 자기 속도에 대한 억압이 된다. 속도를 맞춘다는 것은, 가령 걸음이 빠른 이가 같이 가는 느린 이의 속도에 자기 속도를 '맞추려고'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완급을 조절하는 것이며, 앞서 갔다면 기다려주는 것이다. 느린이도 평소보다는 빨리 걸으며 속도를 '맞추려고'할 것이다.  240



공부와 자유 - 공부와 학인, 혹은 학생부군손오공신위


학습은 머리로 하는 것이라면, 공부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몸에 붙지 않은 것, 몸으로 실철한 수 없는 것은, 절대적 진리라도 '죽은 문구(死句)'에 지나지 않는다.  254


공부는 학습보다 훨씬 어렵다. 알아도 아는 게 아니니 말이다. 항상 자신의 물음을 던지고, 자신의 감각과 생각으로 따져보고 몸에 붙여야 그 일부라도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는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하기 어렵다'는 걸 이유로 배우고 알려는 노력을 냉소해선 안 도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그대로 실행하며 사느냐고 누가 물었을 때, "그렇진 못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애쓰며 산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공부하는 학인의 삶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앴는 마음을 흔히 향상심(向上心 향하다 향, 윗 상, 마음 심)이라 한다. 그 향상심이, 옳다고 아는 것을 조금식 몸에 붙여가는 힘일 것이다.  255


공부를 몸으로 하는 것이지만, '뜻한 대로' 몸을 움직여 원하는 것을 이루는 능력이나 기술에 머문다면, 그것은 아직 공부를 시작한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몸을 움직이는 자신의 '뜻'을 주시하면서 그것을 다스리고 연마하지 못한다면, 몸에 붙은 기예는 재앙의 원천이 될 것이다...

공부는 몸의 연마, 기술의 연마에서 마음의 연마로 넘어갈 때, 밖을 향하던 시선이 자신을 향할 때 시작된다.  257


밖을 향해 있던 선이 안을 향한다 함은 대상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향해 돌리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몸은 관성적이고 습관적인 지금까지의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향하게 된다. 장인적인 기술이나 술법의 숙련은 필요한 동작을 아무생각 없이 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습관적인 움직임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익숙해진 순간, 습관적으로 행하게 한다. 습관이 되고 나면 생각 없이 행하게 하고, 관성의 선을 따라가게 한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것은 그 습관적 관성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이런 것을 '행(行)을 닦는다(修)'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부는 '수(修)-행(行)'이다. 그것은 삶에 던진 시선을 통해 길어올린 다른 삶의 가능성, 아직 살아보지 않은 삶의 가능성을 향해 가는 것이다. 공부란 그런 식으로 다른 삶을, 도래할 삶을 만들어 낸다.  259


도래할 삶을 만드는 것은 이전의 삶에 기대어 그것을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은 난감한 딜레마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습관이나 기억에 기대면서 동시에 그것에 의해 유지되는 동일성을 벗어나야 한다.  261



무아와 자유 - 나 없는 자유의 유쾌한 웃음을 위하여


차이의 철학이란 차이의 긍정을 주장하는 철학이다. 이것의 가장 단순하고 통속적인 버전은 나와 다른 차이를 인정하자는 주장이다. 자기가 옳다는 믿음이 강하면 나와 다른 차이를 인정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269


좀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차이의 긍정이란, 나와 다른 어떤 것과의 만남을 긍정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차이를, 나를 바꿀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이다. 

나를 내려놓을 때,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척도로서의 나를, 아상(我相 나 아, 서로 상)을 내려놓을 때, 차이의 철학은 비로소 가능하게 될 것이다.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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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든 손의 손놀림도 중요하지만 사과를 든 손의 손놀림도 똑같이 중요하다. 
사랑은 이렇게 오른손과 왼손이 조화롭게 움직이며 사과를 깎는 것과 같다.
어느 한 손이라도 엇박자로 움직이면 칼에 손을 베어 사과에 피멍이 들고 만다.
피를 본 후에 사과하는 것은 사과에 대한 예의도 사랑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문명의 발전은 사과조차도 쉽게 깍을 수 있게 만들었다.

사과를 깍으며 조심조심, 가능하면 껍질을 얇게 깍기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없을 만큼으로..

어쩌면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기계들이 생겨나고 발전해 가면서 좀더 편하게 편리하게 바뀌고, 그만큼 노력이 필요 없어지는듯 보이게 만들어 가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사랑조차도 사람이 아닌 사랑을 사랑하게 되는 시대가 아닌지..

그 표현보다 '인스턴트적'인 사랑을 하고 있다. 

자본이 세상을 잠식해가면서 사랑보다는 돈이 우선이 되고, 사랑보다는 섹스가 우선이 되고, 사랑보다는 단순한 만족만을 추구하는 세상은 어쩌면 3분카레, 컵라면이 되어 가고 있다. 

이젠 사랑도 돈으로 살 수 있다. 진정한 마음이 필요 없어져 가고 있기때문에...


칼을 든 손과 사과를 든 손이 협력하여 조화를 이루어 갈때, 그리고 눈은 그것을 바라보며 거리와 힘과 각도 조절 신호를 알려줄때.. 그렇게 집중할때 매끈하게 사과를 깍을 수 있는데 그것자체가 귀찮아서 더 편해지려고 피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감정도 느낌도 피하게 되어 가는지도 모른다.


위의 표현처럼 사과에 대한 예의..

우리는 지금 현재 자신의 인생에게 예의를 다하고 있는가?

자신의 인생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에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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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이 슬퍼 보이는 사람은 슬픈 거다.
뒷모습은 거짓말을 못한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싶어합니다.

자신의 감정이 드러나면 왠지 모든것을 보인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슬픈감정은 더욱 감추고 싶어 애써 밝은듯 연기를 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연기를 하더라도 뒤로는 연기가 안 되나 봅니다.

뒷모습은 애써 감추는 연기가 안되나 봅니다.


슬픔을 슬픔이라 표현하는 자신이 뒷모습을 더 당당해 지게 하는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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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외로움을 들키는 것이다.



외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감추는 것일까, 아니면 드러내는 것일까?

관심받고자 하는 사람의 당연한 본능에 대한 표출일까?


우리는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를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외로움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마음속에서 이상꾸리한 생각이 들고 혼자있지만 누군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면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외로움은 그 이상꾸리한 느낌이 들때 외로움이라 표현하기로 한것일 뿐이다.

사실 우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다.

또한 사람마다 그 이상꾸리함이 틀리다. 많이 틀릴 수도 있고 적게 틀릴 수도 있다.


사실 대충그러한 것을 뭉뚱그려 그렇게 부른다.

어쩌면 성급한 일반화 일수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부른다고 세뇌되었기에 자신의 느낌에 대한 세밀한 감정을 느끼기 보다는 그렇다고 짜맞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이상꾸리함을 어떻게 표현할지는 몰라도 스스로는 앞전의 이상꾸리함과 지금의 이상꾸리함이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느낌을 차분히 생각해 봐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외로움을 들키면 더 외로워 지는 이유는 다른이들은 나의 이상꾸리함을 자신의 이상꾸리함으로 느낄테고,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기보다는 외로움이라 단정지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외로움이라 보지말고 .. 이상꾸리한 그 느낌을 조용히 생각해보자.

앞전과 지금의 다른점과 같은점을.. 지금과 똑같은 느낌이 들었던 때는 언제였었는지에 대해서도 ..


위 사진의 여인은 우리가 생각하는것과는 달리, 자신의 이상꾸리함이 어디서 왔는지 찾아보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외로워 웅크리고만 있는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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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하지 않음' , '분위기 따위가 안정되지 않고 뒤숭숭함'이다.
이 단어를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인간 존재의 밑 바닥에 자리잡은 허무(虛無)로부터 비롯하는 위기적 의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심리적인 것이다. 불안이라는 단어는 사람의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심리적 단어이다.

우리는 불안을 늘 가지고 살아간다. 사람은 자신이 해 보지 않은 것을 하려 할때 언제나 불안감이 언습한다. 또한 일상에서도 자신이 늘 하는 것과 거리가 있는것일 수록 불안감을 더 느끼게 된다.
아무런 이유없이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하거나, 가슴이 두근두근거리기도 한다.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면 우리는 불안이 엄습하는 느낌을 가진다. 이유를 모르기때문이다. 즉 우리는 이유를 모르는 것이 발생할 때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불안에 대한 저자의 원인 규명과 해법을 서술한 책이다.
'불안'이란 단어는 매우 포괄적이다. 
책의 제목은 단순하게 불안이란 표현을 하였지만, 원서의 제목은 <Status Anxiety> 즉, '지위에 대한 불안'이다. 
저자는 불안 중에도 인간이 많이 느끼는 것 중의 하나인 지위에 대한 인간적인 불안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위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원인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을 제안한다.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원인은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이며, 그에 대한 해법으로는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이다.
한국사람들에게도 꽤나 유명한 저자의 철학적 사색과 철학자들의 사색을 통해 우리는 위안과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세계화에 의한 발전과 압도적인 신자유주의자들의 등살에 대한민국은 죽을때까지 공부해야 하는 나라가 되어 있다. 
그것은 더 나은 직업과 더 나은 지위를 얻지 못하면 안 된다는 심리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실제 세계의 기득권층은 그렇게 만들어 가고 있다. 그들만의 즐거움과 권력을 위해 같은 세대간의 경쟁, 세대간의 경쟁, 진입장벽등을 통해 억누르고, 교육을 통해 이겨야만 한다는 세뇌를 시켜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신세계>에서 유전자 조작으로 이미 태어나고 무의식상태로 세뇌되어 태어날때부터 자신의 역할이 정해져 있다고 느끼는 그러한 상태가 지금의 이 시대에 우리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심리적인 무력감에 기인한다.

우리가 조금 떨어져서 세상을 바라보고 주입된 주관성이 아니라 좀더 넓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그것이 보이게 된다.
보통의 생각과 접근을 따라가면서 객관성에 조금더 가까이 가게 될 수 있을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많이 공감이 간 내용들은 철학과 보헤미안이며,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었던 부분은 예술과 기독교 였다.



정의 
지위 - 사회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 지위(status)는 신분이라는 뜻의 라틴어 statum('서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stare의 과거분사)에서 파생되었다.
        - 좁은 의미에서 이 말은 한 집단 내의 법적 또는 직업적 신분을 가리킨다(기혼자, 중위등). 그러나 더 넓은 의미에서는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을 가리키며, 이 책에서는 이 의미가 더 중요하다.

지위로 인한 불안 -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 위험에 처했으며, 그 결과 존엄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 우리가 사다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우리의 자아상(自我像)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 안타까운 것은 높은 지위를 얻기가 어려우며, 그것을 평생에 걸쳐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것이다. 지위는 자신의 실수와 실패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적의 때문에 실패할 수도 있다.
                         - 실패에서 굴욕감이 생긴다. 우리의 가치가 아니라 성공한 사람들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부끄러워할 처지에 놓였다는 괴로운 인식에서 나온다.

명제 - 지위에 대한 갈망은 다른 모든 욕구와 마찬가지로 쓸모가 잇다. 이것은 자신의 재능을 공정하게 평가하도록 자극하며, 남들보자 나아지도록 고무하며, 남에게 해를 주는 괴팍한 행동을 못하게 억제하며, 공동의 가치 체계를 중심으로 사회 구성원들을 결합한다. 그러나 모든 욕구가 그렇듯이, 이 갈망도 지나치면 사람을 잡는다.
       -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가장 유익한 방법은 이 상황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7-10


원인
I. 사랑결핍
지위와 관련된 사랑을 받는 사람 역시 낭만적인 사랑을 받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호의적인 눈길을 받으며 편안함을 느낀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16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The Theory og Moral Sentiment)>에서 "인간 삶의 위대한 목적이라고 하는 이른바 삶의 조건의 개선에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이 주목을 하고, 관심을 쏟고, 공감 어린 표정으로 사근사근하게 맞장구를 치면서 알은체를 해주는 것이 우리가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자가 자신의 부를 즐거워하는 것은 부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상의 관심을 끌어 모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부끄러워한다. 가난 때문에 사람들의 시야게서 사라졌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가장 열렬한 욕구의 충족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18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21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22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자신의 인겨겨을 신뢰할 수도 없고 그 인격을 따라 살 수도 없다.  23




II.속물근성
'속물근성(snobbery)'이라는 말은 영국에서 1820년대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많은 대학의 시험 명단에서 일반 학생을 귀족 자제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옆에 sine nobilitate(이것을 줄인 말이 's.nob.'이다), 즉 작위가 없다고 적어놓는 관례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 말은 처음에는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을 가리켰으나, 곧 근대적인 의미, 즉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28
신문 때문에 문제는 더 복잡해 진다. 속물은 독립적 판단을 할 능력이 없는 데다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갈망한다.  33
두려움은 세대를 따라 전해진다.. 속물도 속물을 낳는다.  35
젊은 시절에 속물근성에 분개했다고 해서 그 뒤에 스스로 속물이 되어가지 말란 법도 없다. 거만한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36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38

III. 기대
18세기 초 영국에서 서양의 위대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농경 기술 덕분에 생산이 급격히 늘어나고, 산업과 교역이 늘게된다.
증기기관과 면 역직기로 사회적 기대가 바뀌었다. 도시 규모가 급격히 팽창했다. 
사치품은 일반용품이 되었으며 일반용품은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46
유럽과 미국 전역에 거대 백화점이 문을 열고, 과학기술 발명품이 속속등장한다. 
전역에 쇼핑몰의 발전은 새로운 갈망들이 생겨났다. 1970년대에 이르자 미국인들은 일터와 쇼핑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55
어떤 것의 적절한 수준은 결코 독립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준거집단(準據集團), 즉 우리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조건과 우리의 조건을 비교하여 결정된다.
설사 웃풍이 심하고 비위생적인 오두막에 살면서 크고 따뜻한 성에 사는 귀족의 지배에 시달린다 해도, 우리와 동등한 사람들이 우리와 똑같이 사는 것을 본다면 우리의 조건은 정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57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겨 우리 자신과 비교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질투할 사람도 늘어난다.  60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1835)의 '왜 미국인은 번영 속에서도 그렇게 불안을 느끼는가'라는 제목의 장에서 불만과 높은 기대, 선망과 평등의 관계를 끈질기게 분석한다.
".. 불평등이 사회의 일반 법칙일 때는 아무리 불평등한 측면이라도 사람들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대체로 평등해지면 약간의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 그래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이 종종 묘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평온하고 느긋한 환경에서도 삶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자살률 증가를 걱정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자살은 드문 대신 광증이 다른 어느 곳보다 흔하다고 한다."  67
하버드 심리학 교수인 제임스는 '시도가 없으면 실패도 없고, 실패가 없으면 수모도 없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자존심은 전적으로 자신이 무엇이 되도록 또 무슨 일을 하도록 스스로를 밀어붙이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실체 성취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  자존심 = 성공/잠재력'
제임스의 방정식은 우리의 기대 수준이 높아지면 수모를 당할 위험도 높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무엇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이 결정된다.  71
장-자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4)에서 다들 야만인과 근대의 노동자 가운데 노동자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과연 정말일까 하고 물었다.
루소의 주장은 부에 대한 명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근대 사회는 첫 번째 방법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욕망에 줄기차게 부채질을 하여 자신의 가장 뛰어난 성취의 한 부분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부유하다고 느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와 같다고 여겼지만 우리보다 더 큰 부자가 된 사람과 실제로나 감정적으로나 거리를 두면 된다. 더 큰 물고기가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옆에 있어도 우리 자신의 크기를 의식하며 괴로울 일이 없는 작은 벗들을 주위에 모으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면 된다.
발전하는 사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전보다 높아진 소득을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를 더 부유하게 해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볼 때 우리를 더 궁핍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80-81

IV. 능력주의 
예수가 전도를 시작한 서기 약 30년부터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회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처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미에 대하여 세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들은 그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듣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불안을 덜어주었을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 -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 책임이 아니며 가난한 사람은 사회에서 가장 쓸모가 크다.
두 번째 이야기 - 낮은 지위에 도덕적 의미는 없다.
세 번째 이야기 - 부자는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강탈하여 부를 쌓았다.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서기 30년부터 1989년까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인 가장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그것들이었다. 이 이야기들은 좋은 운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기운을 북돋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86-95
안타깝게도 18세기 중반 무렵부터 괴로운 이야기 세 가지가 생겨나 꾸준히 영향력을 늘여가면서 앞의 이야기들에 도전하게 되었다.
첫 번째 이야기 - 빈자가 아니라 부자가 쓸모있다.
버나드 맨드빌은 운문으로 쓴 소채자 <벌의 우화>를 발표했고, 이것이 부자와 빈자를 바라보는 방법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97
두 번째 이야기 - 지위에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세 번째 이야기 - 가난한 사람들은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어리석음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새뮤얼 스마일스는 <자조>(1859)에서 궁핍한 젊은이드에게 높은 목표를 세우고, 공부하고, 신중하게 돈을 쓰라고 권한 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돕는 정부는 비난했다. '사람들 대신 일을 해주면 그들에게서 스스로 그 일을 할 동기와 필요를 빼앗게 된다. 법을 인간 발전의 동인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과대평가다. 아무리 엄중한 법이라도 게으른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들 수 없고, 낭비벽이 심한 살마을 검소하게 만들 수 없고, 주정뱅이가 술을 끊게 만들 수 없다.'  116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  119

V. 불확실성
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다. 생계를 우지하고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면 적어도 다섯 가지 예측 불가능한 요인이 뜻대로 따라주어야 하는데, 이것은 사회적 위계 내에서 자신이 바라는 자리를 얻거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다섯 가지 이유가 되기도 한다.
① 변덕스러운 재능
지위가 성취에 의존한다면 성공에 일반적으로 필요한 것은 재능과 그 재능을 믿을 만하게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다.  124
② 운
우리의 지위는 '운'이라는 말로 느슨하게 얽어 넣을 수 있는 어떤 범위의 우호적 조건들에 의존하고 있다.  125
승자는 운을 만든다. 이것이 현대의 주문(呪文)이다.  127
③ 고용주
삶의 조건의 예측 불가능성은 우리의 지위 문제가 고용주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더욱 심각해진다.  127
④ 고용주의 이익
고용의 안정성은 조직 내의 정치만이 아니라 회사가 시장에서 계속 이윤으 ㄹ내는 능력에도 달려 있다.  132
⑤ 세계 경제
회사와 종업원들의 생존은 경제 전체의 성적 때문에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기도 한다.  134

우리가 실패에 대한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성공을 해야만 세상이 우리에게 호의를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136
인간은 웃어줄 만한 확실한 이유가 없으면 좀처럼 웃엊지 않는 법이다.  137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에 어떤 동지애가 이룩된다 해도, 노동자가 어떤 선의를 보여주고 아무리 오랜 세월 일에 헌신한다 해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지위가 평생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그 지위가 자신의 성과와 자신이 속한 조직의 경제적 성공에 의존한다느 것, 따라서 자신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감정적인 수준에서 변함없이 갈망하는 바와는 달리 결코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늘 불안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142-143



해법
I. 철학
명예의 문제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사람들을(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예를 위해 결투하는 관습)  비난하는 눈으로 바라볼지 모르지만, 그러는 우리도 그런 사람들의 정신구조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공휴하고 있을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의 경멸에 매우 약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자존심 역시 다른 사람들이 부여하는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우리도 성질 급하게 결투에 나서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을지 모른다.  152
'다른 사람들의 머리는 진정한 행복이 자리를 잡기에는 너무 초라한 곳이다.' -쇼펜하우어 <소품과 단편집>(1851)
'자연은 나에게 '가난해지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 또 '부자가 되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자연은 나에게 '독립적으로 살라'고 간청할 뿐이다. -샹포르 <격언집>(1795)
'나를 부유하게 하는 것은 사회에서 내가 차지하는 자라기 아니라 나의 판단이다. 판단은 내가 가지고 다닐 수 있다... 판단만이 나의 것이며, 누구도 나에게서 떼어낼 수 없다.' -에픽테토스 <어록>(100년경)  154
철학은 외부의 의견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한다. 상자를 하나 떠올리면 좋을 것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른 살마들의 인식은 모두 이 상자에 먼저 들어가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만일 그것이 참이면 더 강한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만일 거짓이면, 웃음을 터뜨리거나 어깨를 으쓱하고 털어버리는 것으로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주지 못하고 사라져버린다. 철학자들은 이 상자를 '이성'이라고 불렀다.  


철학은 성공과 실패의 위계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 과정을 재구성할 뿐이다.  159
감정은 과녁을 넘어가거나 못 미치기 십상이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이성을 이용하여 감정을 적절한 목표로 이끌라고 충고해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자문해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데미아 윤리학>(기원전 3590년경)에서 인간 행동은 제어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보통 극단으로 흐르는 오류를 범한다고 예를 들어 설명한 뒤, 지혜로우면서도 침착한 중도(中道)를 이상으로 제시하면서, 이성의도움을 받아 중도에 이르는 것을 행동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160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서글픈 동시에 묘하게 위안이 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고 이야기해왔다. 어떤 문제이든 다수의 의견에는 혼란과 오류가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샹포르는 '여론은 모든 의견 가운데 최악의 의견이다.' 
아첨을 하듯이 상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개 언어도단에 가깝다고 덧붙인다. 단순화와 비논리, 편견과 천박함으로 얼룩뎌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나 가장 터무니없는 관습과 가장 어처구니없는 의식들이 '하지만 그것이 전통이야'라는 말로 용인되고 있다.'  163
철학적인 접근 방법의 장점은 심리적인 면에서 드러난다. 누가 우리에게 번대하거나 우리를 무시할 때마다 상처를 입는 대신 먼저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이 정당한지 검토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비난 가운데도 오직 진실한 비난만이 우리의 자존심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  164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피상적이고 하찮다는 것, 그들의 시야가 편협하다는것, 그들의 감정이 지질하다는것, 그들의 의견이 빙퉁그러졌다는 것, 그들의 잘못이 수도 없이 많다느 것을 알게 되면 점차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철학적 연세주의의 중요한 모범을 보여준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165
쇼펜하우어는 묻는다. 정말로 그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할까?
'만일 청중 한두 사람만 빼고 모두 귀머거리라면 그들의 우렁찬 박수 갈채를 받는다 해서 연주가가 기분이 좋을까?'  166
이렇게 인간성을 통창력 있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유용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불리한 점은 이런 관점을 따를 경우 친구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166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에서는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는 곧이어 모든 젊은이들이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충고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만날 일이 줄어 들수록 더 낫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167
철학자들은 함께 모여 연구를 한 것도 아닌데 입을 모아 외부의 인정이나 비난의 표시보다는 우리 내부의 양심을 따르라고 권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하는 것이다.  168

II. 예술
예술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많은 논평자들이 이런 답을 내 놓았다. 별 쓸모가 없다.  171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보라. 영국 문단에서 시인이자 비평가인 매슈 아널드는 제안한다. '인간의 잘못을 없애고, 인간의 혼돈을 정리하고, 인간의 곤궁을 줄이고자 하는 욕망'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세상을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낫고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갈망'에 사로잡혀 있다. 예술가들이 이런 갈망을 늘 노골적인 정치적 메시지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스스로 그런 갈망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항의가 나타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고, 아름다움을 인식하도록 교육하고, 고통을 이해하거나 감수성에 다시 불을 붙이도록 돕고, 감정이입 능력을 길러주고, 슬픔이나 웃음을 통하여 도덕적인 균형을 다시 잡아주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174


(저자는 소설 그림 비극 희극 유머를 예로들며 예술작품이 인간의 균형을 위한 어떤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비극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실패에 평소보다 훨씬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 잡품을 통해 실패의 유래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더 많이 아는 것은 곧 더 많이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211
프로이트는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1905)에서 '우리는 농담을 통해 장애 때문에 공개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적의 우스꽝스러운 부분을 활용할 수 있다.'
'농담의 형태가 아니라면 결코 듣지 않을 사람의 귀에도 들어가게 할 수 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비판할 때 농담을 특별히 애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23
만화가들의 밑바닥에 깔린 무의식적 목표는 유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그런 식으로 조롱할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세상을 만들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234

III. 정치
지위를 분배하는 원칙은 무엇인가?  244
이상적인 지위는 오래전부터 계속 바뀌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이런 변화 과정을 묘사하는 데 정치라는 말을 사용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246
부를 축적한 사람은 일단 주요한 미덕이 적어도 네 가지는 있다고 칭송을 받는다. 그 네 가지란 창의성, 용기 지능 ,체력이다. 
돈에는 윤리적 가치가 부여된다. 돈은 그 소유자의 미덕의 증거다.  248
이런 이상이 아무리 자연스러워 보인다 해도.. 이것은 단지 인간이 만든 것일 뿐이다.
소스틴 베블런의 <유한계급론>(1899)에서 한 말에 따르면, 상업 사회에서는 덕은 잇지만 가난한 사람은 존재하기 어렵다. 따라서 아무리 물질주의적인 태도와 거리가 먼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부를 축적하여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불명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요구를 느낄 것이며, 그렇게 하지 못하면 불안한 마음과 책임감에 시달릴 것이다.  249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필수품'으로 꼽히게 되었다. 그것들을 소유하지 않으면 아무도 품위 있는 살마이라고 여기기 않으며, 따라서 심리적으로 편안한 생활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250
근대으 성공적 삶이라는 이상은 돈과 선(善)을 연결시킬 뿐 아니라, 또 하나의 연결도 시도한다. 즉 돈과 행복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런 관념은 세 가지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첫째는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확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로 근대 문명에서 접할 수 있는 엄청나게 다양한 직업과 소비재가 우리의 행복과 별 관계없이 욕망만 부추기는 번지르르한 소모적 전시품이 아니라, 실제로의 가장 중요한 요구 몇 가지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쓸 수 있는 돈이 많을 수록 제품과 용욕도 더 많이 이용할 수 있고, 따라서 우리가 행복해질 가능성도 커진다는 것이다.  258
이런 가정들에 반박하는 가장 강력하면서도 읽기 쉬운 책은 여전히 장-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다.  259
선사시대에는 인간이 루소가 말하는 자연 상태에서 살았는데, 이때는 사람들이 숲에 살면서 장을 보지도 신문을 읽지도 않았다. 루소는 이 시기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더 수비게 이해했으며, 만족스러운 삶의 핵심적인 특징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고 상상한다.  260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268
우리는 어떤 직업이 주는 매력도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 눈에 보이는 것이다.
선망을 멈추지 못한다면, 엉뚱한 것을 선망하느라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인가.  269
존 러스킨은 <이 최후의 사람에게>에서 부에 대한 일반적인 금전적 관점을 버리고 '삶'에 기초한 관점을 채택하라고 호소했다.  271
토머스 칼라일도 <미다스(Midas)>에서 '우리는 삶의 호화로운 장식은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 와중에 사는 것은 잊어버렸다... 우리는 현금 지불이 인간들의 유일한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273-274

사회적 위계 때문에 아무리 기분이 상하거나 난처해지더라도 우리는 그런 위계가 너무 뿌리가 깊고 너무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그 위계를 지탱하는 공동체나 신념들을 바꾸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이런 위계가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하여 체념을 하고 그냥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275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들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이런 과념들은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면 결코 지배를 할 수가 없다.
이데올로기적인 진술의 핵심은 높은 수준의 정치적 감각이 없으면 그 편파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무색무취의 가스처럼 사회에 방출된다. 그것은 신문, 광고, 텔레비전 프로그램, 교과서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이데올로기느 ㄴ자신이 편파적인, 어쩌면 비논리적이고 부당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세상에 접근한다는 사실을 감추면서, 자신은 그저 오래된 진실을 이야기할 뿐이며, 오직 바보나 미치광이만이 여기에 반대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278
'꼭 이래야 하는가?'
억압적 상황은 영원한 고통을 겪으라는 자연의 심판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변화 가능한 어떤 사회 세력들 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잇다. 이렇게 되면 죄책감과 수치감은 이해로, 지위의 더 평등한 분배 방식에 대한 탐구로 바뀔 수도 있다.  279
관념이나 제도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때는 고통의 책임을 아무에게도 묻지 못하거나 고통을 겪은 당시자에게 묻게 된다.  281
정치적 관점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다. 분석을 통하여 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밝혀 그 뇌관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어리둥절한 채 우울한 표정으로 대응하던 태도를 버리고, 눈을 똑똑히 뜨고 그 원인과 결과를 계보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284
정치적 어려움을 이해하는 것은 기후 위성으로 기상 상태의 위기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늘 문제를 막어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거기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유용한 것을 가르쳐 준다. 그 결과 피해의식, 수동적 태도, 혼란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288

IV. 기독교
죽음을 생각하는 관점에서 의미있는 활동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기독교적인 생각과 세속적인 생각은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 진정한 사회관계, 자선에 대한 강조는 공통되는 것 같다. 또 권력, 군사적인 힘, 금전적인 야욕, 명예에 대한 관심을 비판하는 것도 공통되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한 생각 옆에 갖디 놓으면 어떤 행동들은 하찮아 보일 수밖에 없다.  301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전도서>의 저자는 그렇게 탄식한다(1장 2절)
'한 세대가 가면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이 땅은 영원히 그대로이다'(1장 4절)  303
기독교 도덕가들은 불안을 달래려면 낙관적인 사람들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모든 것이 최악으로 흘러간다고 강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천장은 무너져 내리고, 은행은 폐허가 되고, 우리는 죽고,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사라지고, 우리가 이룬 것들, 심지어 우리의 이름마저 땅에 짓밟힐 것이다. 이런 생각이 위로가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지위에 대한 우리으 ㅣ하찮은 걱정을 천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미미함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된다.  320
우리 자신이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은 우리 자신을 더 중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321

(그림1과 2는 58페이지에 언급된 내용이며, 그림3과 4는 321페이지에 있다.)


물론 기독교는 세속 도시와 그 가치를 없애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도 서양에서 사람들이 부와 미덕을 구분한다면, 또 중요한 사람이냐 아니냐만 따지지 않고 선한 사람이냐 아니냐도 따진다면, 그것은 많은 부분 수백 년 동안 자신의 자원과 위신을 이용하여 지위의 의로운 분배에 대한 몇 가지 특별한 관념을 옹호해온 기독교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342

V. 보헤미아
19세기 초 서구와 미국에서 새로운 집단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박한 옷을 입었고, 도시의 싼 지역에 살았고, 책을 많이 읽었고, 돈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다수는 우울한 기질이었고, 사업이나 물질적 성공보다는 예술과 감정에 충실했고, 가끔 단발이 유행하기 오래전에 단발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들을 '보헤미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앙리 뮈르제가 파리의 다락방과 카페의 생활을 그린 <보헤미안의 생활>(1851)을 써서 성공을 거둔 뒤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품위라는 부르주아적 개념에 들어맞지 않는 광범위한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351
아서 랜섬은 <런던의 보헤미아>(1907)에서 '보헤미아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태도다'라고 말했다.  352


보헤미안들은 부르주아지가 대표하는 거의 모든 것을 지독하게 싫어했으며, 그들을 무절제하게 모욕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353
보헤미아와 부르주아지를 궁극적으로 갈라놓는 것은 대화의 화제나 후식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누가 높은 지위를 얻을 자격이 있고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하는 문제엿다.  354
부르주아지는 상업적 성공과 공적인 평판에 기초하여 지위를 부여한 반면, 보헤미안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 우아한 집이나 옷을 살 수 있는 능력보다 당연히 더 중요했던 것은 세상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감정의 주요한 저장소인 예술에 관람자나 창조자로서 헌실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보헤미안의 가치 체계에서 순교자적 인물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또는 여행이나 친구와 가족에게 헌신하기 위해 안정된 정규 직장과 사회의 존경을 희생한 사람들이었다.  355
보헤미안의 가치 체계에서는 돈으로 명예를 얻지 못하듯이 소유로도 명예를 얻지 못한다. 그것은 오만과 천박의 상징이다.  360
1845년 7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보헤미안 가운데 한 사람인 헨리 소로는 메사추세츠 주 콩코드 시 근처 월든 호수에 자신이 손으로 지은 통나무집으로 이사했다. 
소로는 '사람은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행복해진다.'
'영혼에 필요한 것을 사는 데 돈은 필요하지 않다.'  364
주류 문화와 갈등하면서도 자신 있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직접적인 환경에서 작동하는 가치 체계. 우리가 사교적으로 어울리는 사람들, 우리가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보헤미안들의 통찰이다. 
보헤미안들은 대도시에 살면서 지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피하고 대신 진정한 친구들과 매일 접촉할 수 있는 동네에 모여 살았다.  364
보헤미안들은 또 실패라는 말도 조심스럽게 재규정했다.
보헤미안들은 세상이 어리석음과 편견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여 외적인 실패를 버로 해석하지 않았다.  366
오해를 받고 거부를 당하며 살지만 그럼에도 인사이더보다 우월한 아웃사이더라는 신화는 보헤미아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 다수의 삶을 반영하거나 그 삶을 규정한다.  367
집단과 그 전통은 열등하다는 보헤미아의 믿음과 더불어 개인의 우월성에 대한 강조가 나타났으며, 이와 더불어 관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나타났다.
빅토르 위고는 <에르나나>(1830)의 서문에서 '이제 규칙은 없다. 재능 잇는 사람이 개인적 독창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신이 하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에세이 <자립>(1840)에서도 '인간은 모름지기 순응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결코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지 말자... 이 시대의 매끈한 평범함과 비열한 만족을 모욕하고 질책하자.'  372

보헤미아의 과도한 점을 지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많은 보헤미안들이 영적인 관심을 삶의 전면에 내세우는 데 몰두한 나머지 실제적인 문제를 태만히 햇다. 이 대문에 그들은 생존할 만한 일을 찾는 데 안간힘을 써야 했으며, 이렇게 되자 영을 생각할 시간은 줄어들고 몸 생각을 해야 하는 시간은 늘어났다. 심지어 물질주의적이라고 욕하던 바쁜 판사나 약사보다 나을 것이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380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 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산업가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보헤미안으로부터 인정 받을 수도 있으며,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철학자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다.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이 아무리 불쾌하다 해도 그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좋은 인생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실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창피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야심을 품고, 어떤 결과들을 선호하고, 자신 외의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데서 나오는성공적인 삶과 성공적이지 못한 삶 사이의 공적인 차이를 인정할 경우 치를 수밖에 없는 대가다.
그러나 지위에 대한 요구는 불변이라 해도, 어디에서 그 요구를 채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창피를 당할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은 어떤 집단의 판단 방식을 우리가 이해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결국 우리가 따르는 가치와 관련이 되는 경우에만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따르는 것은 두려움을 느껴 나도 모르게 복종을 하기 때문이다. 마취를 당해 그 가치가 자연스럽다고, 어쩌면 신이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거기에 노예처럼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너무 조심스러워 대안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 이 다섯 집단은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수치와 명예의 구분 자체는 유지하면서, 무엇이 각 항복에 속해야 하는지를 재규정하려 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각 세대마다 높은 지위에 대한 지배적인 관념들을 충실하게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럼에도 패자나 이름 없는 사람이라는 잔인한 규정과는 다른 규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정당성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 판사나 약사의 결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384-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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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다
조용필답다. 열정적이라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서태지답다. 새로움이라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신해철답다. 날카로움이라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윤도현답다. 믿음직이라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김장훈답다. 따뜻함이라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당신의 이름 뒤에도 답다를 붙여보세요.
떠오르는 그림이 있나요?  없다면 다행입니다.
지우고 그리는 것보다 백지 위에 그리는 것이 훨씬 쉬우니까요
, 오늘부터 세상에 하나뿐인 그림을 그려가는 겁니다
당신답게





'답다'가 있나?
연기일 뿐인것 아닐까.. 다운게 있다면 연기일 뿐이다.
사람이 그렇게 일관적으로 살아가나?
어제와 오늘이 다른데, 아까와 지금이 다른데, 오죽하면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때가 다르다'하지 않는가.
'답다'에 끼워 맞추는 자신이 너무 힘들게 된다.
어제는 좋다가 오늘은 싫어지는게 사람인데...
그 마음을 다 잡아 나간다고 해서 그 사람이 변하는게 아니다.
변한척 할 뿐.. 그 마음은 얼마 안있어 다시 올라 올것이다.
그렇게 싸워나가 인간 승리하여 다른이들이 일관적이라 평해주면 그것이 만족이 되나?
자신이 자신을 세뇌시키는게 만족인가?
어느 정도 세뇌가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다만 '답다'는 자신을 너무 가혹하게 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답다 보다는 어느 정도 다워지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자신의 여러면을 인정하고 보담아주는 인간미와 따뜻함이 공감시키는 능력을 갖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게 필요한 것 아닐까..
언급된 사람들은 그런 사람일 뿐이다.
'답다'의 감옥, 족쇠를 풀어보자.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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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보는 방법

마음에 2010. 9. 29. 15:22


사람을 보는 방법 / 공자

wn1 -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평가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기에 때로는 없음에도 있는듯, 그렇지 않음에도 그런듯... 싫으면서도 좋은듯한 표정을 짓고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실상은 정말 좋은 사람을 찾는것이 매우 어렵기도 합니다.
아래 공자님의 말씀처럼 사람이 좋은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해 보기위해 여러가지를 통해 알아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누가 누구를 평가한다는 것이 못마땅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본성보다는 '척'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조사가 필요할 것입니다.

사실 자신이 타인을 평가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에게 9가지 테스트에서 얼마나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는 작업부터 합시다.
자기를 잘 알때 남도 알 수 있는 법이며, 자신을 알아야 상대에게 좀더 나은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 수 있기도 하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무릇 사람의 마음은 험하기가 산천보다 더하고,
마음속을 꿰뚫어 보기는 하늘보기 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하늘에는 그래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과 
아침, 저녁의 구별이 있지만,
사람은 꾸미는 얼굴과 깊은 감정 때문에 알기가 어렵다.

외모는 진실한 듯하면서도, 마음은 교활한 사람이 있고
겉은 어른다운 듯하면서도, 속은 못된 사람이 있으며,
겉은 원만한 듯하면서도, 속은 강직한 사람이 있고,

겉은 진실한 듯하면서도, 속은 나태한 사람이 있으며,
겉은 너그러운 듯하면서도, 속은 조급한 사람이 있다.

또한, 의로 나아가기를 목말라 하는 사람은
의를 버리기도 뜨거운 불을 피하듯 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사람을 쓸 때에

1. 먼 곳에 심부름을 시켜 그 충성을 보고
2. 가까이 두고 써서 그 공경을 보며
3. 번거로운 일을 시켜 그 재능을 보고
4. 뜻밖의 질문을 던져 그 지혜를 보며
5. 급한 약속을 하여 그 신용을 보고
7. 위급한 일을 알리어 그 절개를 보고
8. 술에 취하게 하여 그 절도를 보며
9. 남녀를 섞여 있게 하여 그 이성에 대한
   자세를 보는 것이니

이 아홉 가지 결과를 종합해서 놓고 보면 사람을 바로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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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와 같은 고민을 하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
'아이와 대화를 나누고 싶을때 아이가 잘 응하는가?' 설문조사를 하면 ...어느정도나 긍정적인 답변을 할까?
직접 만난 부모들만으로 나누어 보면 10%에도 미치지 못하였다.(참고로 상담을 1시간 이상 해본 부모만 700여명 정도이며 그 중에 70%는 고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이며 나머지는 중학생을 둔 부모이다.)

대체 왜 이렇게 아이들은 대화에 응하지 않는 것일까?
결론을 먼저 말하면.. 야속하거나 인정하기 싫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이 부모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예전에 공익광고에서 이러한 문구가 있었다.."그 아이를 기다린 시간이 10개월(300일), 그 아이의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기다린 시간이 12개월(360일), 이젠 그 아이가 말해주기를 기다립니다..' 이런 식의 광고 였는데 기억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광고 문구의 의미는 무엇인가?
바로 부모가 아이와의 대화를 단절 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부모는 대화를 단절하는가?  이 질문을 하면 대부분의 부모는 단절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당신도 그러한가?  애석하게도 인정해야 한다..
부모인 내가 대화를 단절하였었고, 현재도 단절하고 있으며 어쩌면 앞으로도 단절하게 될것이라는 사실을..어떻게 대화를 단절했는지 스스로 깊이 생각해 보라..
 
대화가 이루어 지기 위해서는 아이의 심리적인 상태와 감정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혹 나는 이런 부모가 아니었나?
아이의 행동이 비이성적이거나 비상식적이어서 무작정 야단을 치거나 무조건 이렇게 해야 한다고 복종을 강요한 적 말이다.혼자서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특히 한국의 부모들은 유교의식의 영향을 아직 받고 있기에 그리고 어린시절을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다.이것은 복종형부모 유형이다...

또는 이렇지는 않은가.. 무작정 복종시키기에 아이들이 불쌍해 보인다거나 막연히 그건 아닌거 같다거나 ...때론 글에서 복종만을 강요하면 안된다하여 아이에게 어느정도의 자유를 주어야 겠다고 생각하여... 실제로는 방관하고 있는 상태 말이다.방관형 부모 또한 매우 위험하다...아니 아이와의 대화를 단절하는 행동이다.

성인으로 우리는 상대와 대화를 하거나 생활을 할때 충분히 대화를 이루지 못해 상대가 나의 감정 상태를 몰라 주거나 무시한다고 느꼈을 때 어떠한 기분이 들겠는가?혹 이럴경우에 내 생각을 무조건 강요하고 감정상태를 강요하는가? 아니면 알아주든 몰라주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상대의 생각도 어느정도 무시하는가?
만약 그러하다면 분명 감정은 상하게 될 것이고 어쩌면 서로간의 오래로 인해 다툼이 생기거나 때론 안보게 되기도 하지 않은가..!!성인과 성인과의 관계에서 감정이 상한다는 것은 성인뿐만을 의미하는것은 아니다..
바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모두 해당된다.다시 말하면 우리의 자녀 역시 한 개인으로써 그들의 감정이 있고 기분이 있으며 상황이 있는데, 그것을 부모가 무시하는것 처럼 보이게 되면 ...시간이 길어질 수록 부모와의 대화의 창은 좁아지게 되는 것이다.이것이 이해가 되는가?당신이 부모라면 내 아이가 어디서든지 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할 것이다.

원활한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우선 생각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것의 의미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상대방의 감정상태도 느낄 수 있으며 그럴때 이해력과 자신이 해야할 말에 대해서도 알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것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들어줄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
적극적 듣기란 토머스 고든의 'PET'에서 표현하는데 아이가 말하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감정상태를 이해해 주는 것이다.
그 책에서는 예로써 이렇게 표현한다.
아이 : 저녁먹기 싫어요.
부모 : 밥 먹을 기분이 아니라고? (적극적 듣기)
아이 : 응 싫어. 힘드어서 밥을 못 먹겠어요.
부모: 뭔가 힘들 일이 있구나? (적극적 듣기)
아이 : 힘든 정도가 아니라 무서울 지경이에요.
부모 : 무서운 일이 있었구나. (적극적 듣기)
                .
                .
                .

이처럼 아이의 상태를 인정해 주고 그것이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알아주는 과정이 필요한것이다.

사실 이러한 대화는 자녀가 어린시절부터 꾸준하게 되어져 와야 한다. 다시 말하면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가 이러한 대화를 시도하면 처음부터 난항을 겪게 된다.부모가 결심하여 이렇게 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시도하면 아이들은 당황해 하며 어색하니 '하던데로 하'라는 말로 돌아온다.
그러면 부모는 '그래 좋은건 알겠지만 ... 안맞나봐..'하고 포기하는 모습이 너무 많았다..

그렇더라도 지속적으로 시도를 해야한다...적어도 14,5년을 그런 대화를 해 보지 않은 아이는 당황하는게 당연하며 어색하지 않는것이 이상할것이다.
아이의 반응은 '지금은 어색하니 계속해서 익숙하게 만들어 주세요'란 의미이다.이것을 보이고 들리는 반응만으로 이해 한다면 이것 역시 적극적 듣기가 아닐 것이다.

나는 이 적극적 듣기란 표현을 '열린듣기'라고 표현한다..열린듣기란 말 그대로 열린 마음으로 아이의 행동과 말을 수용해 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우리가 수십년전으로 돌아가 10대의 시절을 생각해 보라.나의 부모와 내가 어떻게 대화를 하였던가?..아니 부모가 내 생각을 이해해 주었던가?

이렇게 반응하는 부모들이 있다..
'아이들을 이해는 하죠..하지만 지금 아이들은 너무 도에 지나쳐요.'
생각해 보라 부모가 말하는 '지나친 도'는 무엇을 기준으로 한 말인가?
당연히 부모의 생각을 기준으로 하는것이 아닌가?
부모인 당신...아니 사회 구성원인 당신의 생각은 모두 옳고 해답인가?

이런 부모에게 아이들은 '세상이 바뀌었는데, 부모님은 그런 것은 모르면서 자꾸 예전 방식만이 맞다고 주장하니..대화를 할 수 없어요... 부모님 방식으로 가다간 친구들에게서 멀어져만 가요.'이 말이 틀린 말이라 할 수 없다...
아이들은 아이들의 세상이 있으며 그것이 그들이 성장한 후에도 이루어 지게될 사회인것이다.. 물론 부모의 생각과 기준이 좋은 방식일 지라도 그것을 무작정 아이들에게 강요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며 이것으로 아이들과의 거리감을 늘려나가게 될 것이다.

아이를 이해할 수 있는 열린 마음으로 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내 아이와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첫번째 포인트 이다. 


- 블로그에 올려진 글들은 많은 정리를 해서 올린다기 보다는 생각을 풀어놓는 의미로 올리기에 중간중간 끊기는 내용이거나 어느정도 난해한 내용일 수도 있을것이다..혹 의문나는 내용이 있으시다면 댓글을 달아 놓으시면 상세히 답변을 드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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