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과학



역사철학 3장 - 우금치의 하늘 같은 님들

다행스럽게도 1940년 간행된 오지영(1868~1950)의 <동학사(東學史)>가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
<동학사>는 열두 개 조로 구성된 개혁 강령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해치는 자는 목을 벤다.
둘째, 탐관오리는 제거한다
셋째, 포악스런 지주들은 엄징한다.
넷째, 유림과 양반들의 소굴을 공격해서 파괴한다.
다섯째, 가난한 백성들의 병역 문서를 불태운다.
여섯째, 종 문서를 불태운다.
일곱째, 백정의 머리에서 패랭이를 벗기고 갓을 쓰게 한다.
여덟째, 규정되지 않는 세금은 일절 걷지 않는다.
아홉째, 공사체는 물론하고 과거의 모든 부채는 무효로 한다.
열째, 외적과 연락하는 자는 목을 벤다.
열한째, 토지는 균등하게 나누어 경작한다.
열두째, 농민군의 두레법을 장려한다.  - <동학사> (초고본)  389-391

이 열두 개 강령이 중요한 이유는 집강소가 과거 억압적인 정부처럼 권위적인 정치기구가 아니라 오직 이 강령을 집행하려는 기구기 때문입니다. ‘집강소(執綱所)’란 글자를 보세요. ‘강령(綱)을 집행하는(執) 곳(所)’이라는 뜻입니다.  392

<프랑스내전>에서 마르크스가 파리코뮌을 분석하면서 말했던 “자유롭고 연합적인 노동”이 바로 집강소를 통해서 구체화된 겁니다.  393


정치철학 3장 - 유물론과 관념론을 넘어서

첫 번째 테제의 모든 문장은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들처럼 하나의 개념을 바라보고 있다. “대상적 활동(Genebstandliche Tatigkeit)!”  424

활동(Tatigkeit)이란 말은 사물이 아니라 생명체에만 적용되는 개념이다. 활동하는 고양이라는 말은 써도 활동하는 바위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활동은 모든 생명체가 가진 능동성을 가리키는 개념이라고 하겠다. 결국 핵심은 ‘대상적’이라는 형용사에 들어 있는 ‘대상(Genebstand)’이라는 말이다. 이 독일어는 ‘거스르다’, ‘반대하다’, ‘저항하다’는 뜻의 ‘게겐(Gegen)’이란 어근과 ‘서 있다’라는 뜻의 ‘슈탄트(stand)’라는 어근이 결합된 말이다. 게겐슈탄트는 “우리에게 맞서서 서 있는 타자”나 “우리의 뜻에 거스르는 외부의 무언가”를 의미하는 말이다.  424

우리의 뜻을 좌절시키고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 만들고 나아가 우리의 힘을 시험하는 그 무엇! 삶에서 만나는 회피할 수 없는 어떤 저항과도 같은 그 무엇! 삶에서 만나는 회피할 수 없는 어떤 저항과도 같은 그 무엇! “우리에게 맞서서 우리뜻에 거스르며 당당히 서 있는 것”, 바로 그것이 게겐슈탄트다. 결국 마르크스가 ‘대상적 활동’ 개념으로 포착하고자 했던 것은 이런 게겐슈탄트에 맞서 우리는 활동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425

우리는 우리에게 “나처럼 하라(fais comme mou)”고 말하는 사람에게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우리의 유일한 스승들은 우리에게 “나와 같이하자(fais avec moi)”라고 말하는 사람들, 우리에게 재생해야 할 몸짓들을 제시하는 대신 다질성안에 펼쳐질 기호들을 발산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차이와 반복>(1968)  430-431

들뢰즈는 수영 교사에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한 사람은 “나처럼 하라”고 말하는 수영 교사이고, 다른 유형은 “나와 같이하자”고 말하는 수영 교사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자가 “동일성의 반복”을 강조하는 수영 교사라면, 후자는 “차이의 반복”을 강조하는 수영 교사라고 하겠다. 동일성의 교사와 차이의 교사! 두 종류의 수영 교사는 모두 자기 “신체가 자신의 특이점들을 물결의 특이점들과 결합하는” 데 성공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동일성의 교사는 자기 신체와 학생들의 신체가 ‘차이’가 난다는 것, 그리고 자기가 헤엄쳤던 물결과 학생들이 헤엄칠 물결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니 이 교사는 “나처럼 하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 교사는 수영 교본을 출판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 교본은 수영을 배우려는 사람에게 수영을 잘하리라는 헛된 희망만을 줄 뿐 실제로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차이의 교사는 자기 신체와 학생들의 신체 사이에, 그리고 자신의 물결과 착생들의 물결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안다. 그러니 차이의 교사는 “나와 같이하자”라고 학생들에게 말했던 것이다. 학생들의 신체와 자기 신체의 차이를 알려면, 혹은 그 차이를 학생들에게 알려주려면,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말이다. 물론 차이의 교사는 수용 교본을 집필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433-434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중 첫 번째 테제 첫 문잘을 보라. 마르크스는 “대상을 ...... 객관이란 형식으로만 생각하는” 사유의 맹점을 이야기한다. 마르크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상(Gegenstand)과 객관(Objekts)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객관이란 관조된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435

“비대상적 존재(ungegenstandliches Wesen)는 비존재(Unwesen)다!” 대상적 존재만이 존재한다는 마르크스의 선언이다. 여기서 핵심은 ‘비대상적’이나 ‘대상적’이라는 수식어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대상’ 개념이다. ... 우리 앞에 우리의 의지에 저항하는 무언가가 버티고 서 있다. 바로 이것이 게겐슈탄트, 즉 대상이다. 그 대상이 내 앞을 가로막는 급류일 수도 있고, 비바람일 수도 있고, 산길에거 만난 뱀일 수도 있고, 권위적인 직장 상사일 수도 있고, 달려오는 자동차일 수도 있고, 건물 위에서 떨어지는 물건일 수도 있다. 이렇게 대상과 마주칠 때, 우리는 ‘대상적 존재’가 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마르크스에게 대상과 객관은 완전히 다르다. 삶의 차원에서 마주치는 타자가 대상이고, 의식 차원에서 관조되는 대상이 바로 객관이니까. 달리 말해 대상은 우리 삶에 무언가 저항의 힘을 발휘한다면, 객관은 그저 관조하는 풍경일 뿐 우리에게 저항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440

마르크스의 입장은 분명하다. 대상과의 마주침이 먼저이고 주관과 객관은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대상과 마주치는 대상적 존재는 당연히 감성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보통 시각, 청각, 후각, 미각, 그리고 촉각을 다섯 가지 감각이라고 한다. 대상적 존재의 감성에는 이 오감이 마치 교향곡의 악기들처럼 함께 어울린다.  442

“감성적 존재는 겪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443


마르크스의 대상적 활동 개념이 출현한다. “인간은 자기외화를 통해 자신의 현실적이고 대상적인 존재의 힘들을 낮선 대상들로 정립한다.”
‘자기외화’란 육지에 익숙해진 자신을 포기하고 낯선 물에 들어가는 행위를 가리킨다. 물결의 신체와 인간의 신체가 결합되기를 반복하면서, 점점 그는 수영 달인이 되어간다. 그에게 “대상적 존재의 힘”, 즉 대상적 활동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449

수영 동영상을 아무리 반복해서 본다고 해도 수영하는 신체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수영 교본을 달달 외우고 교본 안의 사진을 숙지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혹은 강가에 앉아 물의 유속과 깊이, 그리고 부력을 과학적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 수영의 경우처럼 나뭄와 마주쳐 근사한 나무 인형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대상적인 존재의 힘을 가진 주체”, 즉 생각과 육체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인간 주체일 뿐이다.  450

마르크스는 자기 철학을 “자연주의(Naturalismus)”나 “인간주의(Humanismus)”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대상적 활동을 긍정하는 이념을 자연주의나 인간주의라고 부르자는 것이다. ... 자연주의의 반대에는 초자연적인 신이나 세계를 초월하는 원리를 긍정하는 초월주의(Transzendentalismus)가 놓여 있다.  ... 인간주의의 반대편에는 인간의 육체성을 부정하는 정신주의(Spiritismus) 전통이 놓여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마르크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자연주의나 인간주의는 “관념론 및 유물론과 구별되며 동시에 이 양자를 통합하는 진리”라고 말이다.  453

인간의 육체성, 수동성, 조건성, 비 자발성을 부저할 때 출현하는 것이 관념론이고, 반대로 인간의 정신성, 능동성, 자유, 혹은 자발성을 무시할 때 출현하는 것이 유물론이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철학은 우리에게 섬세한 사유를 요구한다.  454

마르크스는 인간의 자발성과 자유만을 강조하는 관념론자도 아니었고, 인간이 외적 환경이나 경제적 조건, 혹은 물질적 상황에 규정된다는 유물론자도 아니었다. 그는 철학사의 해묵은 대립, 즉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갈등을 ‘대상적 활동’ 개념으로 해소하는 데 성공하니까.  455

“지금까지 모든 유물론-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포함하여-의 주된 결함은 대상, 현실, 감성을 객관이란 형식이나 직관이란 형식으로만 생각했을 뿐 감성적인 인간 활동이나 실천으로,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활동의 측면은 유물론과 대비되어 관념론에 의해 발전되었지만, 관념론은 현실적이고 감성적인 활동 자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발전은 단지 추상적일 뿐이었다.”
... 마르크스의 입장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유물론은 ‘대상적 활동’에서 ‘대상’만 보았을 뿐 ‘활동’을 부정했고 관념론은 ‘대상적 활동’에서 ‘활동’만 보았을 뿐 ‘대상’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456

마트료시카(Matryoshka)라고 불리는 러시아 전통 인형이 있다. 똑같은 모양이지만 크기가 작은 인형들이 인형 안에 중첩해 들어 있다. 제일 겉 인형이 포이어바흐였고, 이 인형을 열어 만나는 두 번째 인형이 헤겔이었다. 헤겔 인형을 열면 그 안에는 유물론 인형이, 유물론 인형을 열면 그 안에는 관념론 인형이, 관념론 인형을 열면 서양철학 인형이 놓여 있었다. 모두 세계를 변화시키기보다는 세계를 관조하고 해석하는 사유 전통이다. 마르크스는 차곡차곡 작은 인형들을 포이어바흐 인형에 넣어 하나로 만든 다음, 이 인형을 발로 차버린 것이다. 그 빈자리에는 ‘대상적 활동’ 개념이 마르크스의 강건한 발과 함께 남아 있다.  458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중 여섯 번째 테제의 핵심이다. 이것은 사회적 관계가 변하면 인간의 본질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마르크스의 관계주의다. 한마디로 불변하는 본질 같은 것은 없다는 이야기다.  459

본질 혹은 본성의 계보학은 단순하다. 먼저 첫 번째, 자발적이든 타율적이든 관계가 지속된다. 두 번째, 그 관계는 관계에 들어간 개체들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게 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바로 이 사후적 흔적, 지속적으로 관찰되는 이 흔적을 우리는 본성이라고 혹은 본질이라고 부른다.  460

자신에게 어찌할 수 없는 본질이 있다고 믿는 순간 개개인은 주어진 사회적 관계를 극복할 수 없다. 나는 약한 여자니까 어쩔 수 없어, 나는 노예니까 어쩔 수 없어, 나는 노동자니까 어쩔 수 없어 등등. 본질은 없고 관계만이 있다는 관계주의 입장이 해방적 효과가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내가 여자의 본성이 있어서 공손한 여자가 된 것이 아니다. 억압구조가 나를 옴짝달싹 못ㅎ하게 규방에 감금하고 내가 순종적인 여자의 본성을 믿도록 훈육했을 뿐이다. 내가 노예의 본성이 있어서 노예가 된 것이 아니다. 억압구조가 나를 노예로 포획하고 내가 순종적인 노예의 본성을 믿도록 훈육했을 뿐이다. 내가 노동자의 본성이 있어 회사에 출근하는 것은 아니다. 억압구조가 나를 임금노동자로 만들었고 내가 노동을 파는 노동자의 본성을 믿도록 훈육했을 뿐이다. 본질이나 본성이 존재한다는 일체의 입장에 속지 말자! 본질이나 본성에 사로잡히는 순간, 그것을 강요했던 억압구조, 즉 특정한 사회적 관계가 우리 눈에 들어올 리 없으니 말이다.  460-461

고대사회든 중세사회든 아니면 부르주아사회든 다수 민중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소수 지배계급은 항상 자기 체제가 불변하기를 원했다. 노예가 있어야 귀족도 존재하고 농노가 있어야 영주도 존재하고 노동자가 있어야 자본가도 존재하는 법이다. 그러니 귀족은 노예를 계속 소유하려고 하고, 영주는 자기 영지를 지키려고 하고, 자본가는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을 독점하려고 한다. 한마디로 지배계급은 자신을 지배계급으로 만드는 ‘생산력’,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등 물질적 조건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문제는 억압되고 수탈당하는 다수 민중들의 저항이었다. 그들은 언제든지 억압적 관계를 문제 삼을 수 있으니 말이다. 지배계급이 본질주의를 유포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노예는 노예의 본질이 있어서 노예이고 귀족은 귀족의 본질이 있어 귀족이라는 식의 본질주의는 이렇게 탄생한다.  463

지금까지 모든 혁명은 ‘활동양식’을 변화시키지 않은 채, 단지 그 활동의 새로운 분배만을, 즉 다른 사람들에게 노동을 새롭게 분배하는 것만을 문제 삼았다. 이에 반해 ‘코뮌주의혁명’은 지금까지 존재하는 ‘활동양식’에 반대하며 ‘노동’을 없애버리고, 온갖 계급의 지배와 더불어 그 계급들 자체를 없애버린다. - <독일 이데올로기>

마르크스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은 일어난 적이 없다. 노예가 농노가 된 것, 혹은 농노가 노동자가 된 것이 무슨 혁명이란 말인가? 주인집에 감금된 노예가 사라지고 출퇴근하는 노동자가 등장했다고 해서 진보를 이야기할 수 있는가? ... 혁명이랑 아무런 상관이 없고, 단지 지배양식과 수탈양식의 세련화에 지나지 않는다.  465-466

고대사회의 노예도, 중세사회의 농노도, 그 리고 부르주아사회의 노동자도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원하는 걸 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 노동을 분배하는”, 혹은 “노동을 강요하는” 것이 가능한 사회는 본질적으로 노예제사회일 뿐이다.  466

“지금까지 존재하는 활동양식에. 반대하고 ‘노동’을 없애”버려야 한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혁명이다. 정신노동을 담당하는 소수가 지배계급이 되고, 육체노동을 담당하는 다수가 피지배계급이 되는 활동양식을 극복해야 한다. 그래야 더 이상 ‘노동’, 즉 육체노동이 피지배계급을 상징하는 저주가 되기를 그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긍정하는 대상적 활동이라는 자기 자리를 찾게 된다.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고뮌주의혁명이다.  467

어떤 자가 폭력으로 지배하면, 다른 사람들은 다만 그 주먹에 굴복하여 한탄하면서 시달림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야생인들(des homme sauvages) 사잉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에게 복종(servitude)과 지배(domination)가 무엇인지 이해시키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남이 따온 과일이나 잡아온 먹이 또는 은신처인 동굴을 빼앗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어떻게 나들을 복종시킬 수 있겠는가? 게다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어떤 의존적 사슬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한 나무에서 쫓겨났다면 그때는 다른 나무로 옮겨가면 그만이다. 또 만일 어떤 장소에서 고초를 당할 경우 내가 다른 장소로 옮겨가는 것을 그 누가 방해한다는 말인가? ...... 복종관계란 사람들의 상호의존과 그들을 결합시키는 상호욕구가 있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은, 미리 그를 다른 사람이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상황(situation)에 두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황은 자연상태에서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거기에서는 누구나 구속을 벗어나 자유의 몸이며 강자의 법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1754  469-470

동물농장의 동물 가축들을 고삐로 통제했다면, 인간농장의 인간 가축들을 통제하는 데에는 고삐 외에 언어가 필요하다. 바로 이것을 간파했던 것이 루소의 후배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1908~2009)였다. 선배 루소가 다양한 책들을 접하면서 ‘자연상태’와 ‘인간농장’을 구분했지만, 후배 레비스트로스는 프랑스라는 인간농장을 떠나 몸소 자연상태를 해매고 다녔다. 그 결과 그는 선배가 주목하지 않았던 놀라운 사실, 인간농장을 유지하는 비밀을 발견한다. 그것은 문자와 관련된 교육의 문제였다. 그가 최초의 인간농장을 상징하는 기념물 피라미드에서 보았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문자의 출현과 문명의 어떤 다른 특징들을 관련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른 곳에서 그 관련성을 찾아야만 한다. 여기서 항상 수반되는 한 가지 현상은 도시와 제국의 형성이다. 이것은 상당수 개인들을 하나의 정치체제 속으로 병합하는 것이자 이 개인들을 카스트와 계급으로 위계화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현상이 문자가 처음으로 등장했을 순간에 이집트에서 중국에까지 발견되는 발달이다. 이 현상은 인간의 계몽(illumination)보다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수탈(exploitation)을 조장하는 듯하다. 이 수탈은 노동자를 수천 명씩이나 모아서 그들의 체력이 닿는 데까지 강제로 일을 시킬 수 있었다. 이 점과 관련해 우리가 알고 있는 건축의 탄생은 이런 수탈에 의존해 있었음을 알아야만 한다. 만약 나의 가설이 옳다면 의사소통의 한 수단으로서 문자의 일차적 기능은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한) 노예화를 촉진하는 데 있다. 공정한 목적을 위한 문자의 사용, 그리고 지적이거나 미적인 만족을 위한 문자의 사용은 문자 발명의 이차적 결과물에 지나지 않으며, 심지어 문자의 일차적 기능을 강화하고 정당화하거나(justifier) 혹은 은폐하는(dissimuler) 방식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 문자는 인간의 인식(connaissances)을 공고하게 만들지는 않았고, 지배(les dominations)를 영속화하기 위해 불가결한 존재가 되어왔던 것 같다. 우리와 더 가까운 상황을 고려해보자. 19세기 의무교육을 지향했던 유럽 국가들의 체계적 조치는 군복무의 확장과 (민중들의) 프롤레타리아와와 그 맥을 같이한다. 문맹과의 투쟁은 때때로 권력에 의한 시민 통제 강화와 구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을 때에만, “누구도 법을 모른다고 여길 수 없다”고 선포할 수 있으니까. - <슬픈 열대> (1955)
BC 8000년의 농업혁명은 막대한 잉여 생산물을 남기게 되는데, 이것이 무위도식하는 지배자와 지배계급을 탄생시킬 물질적 조건이 된다. 마침내 BC 3000년쯤 ㅇ이집트에 파라오(Pharaoh)라는 최고 지배자가 군림했던 최초의 제국이 세워진다. 정확히는 BC 3150년경 이집트 제1왕조가 탄생한 것이다. 90%의 피지배계급이 육체노동으로 10%의 지배계급을 먹여 살렸던 억압사회다. BC 2613년에서 BC 2494년까지 지속되었던 이집트 제4왕조는 매우 상징적이다. 제4왕조는 피라미드(pyramid)의 왕조였기 때문이다. 피라미드는 왕조의 최고 지배자 파라오의 무덤이지만, 동시에 이집트왕조의 복잡한 위계질서를 그대로 구현한 상징이기도 했다. 피라미드의 제일 하단은 이집트왕조의 피지배계급을 상징한다면 피라미드 상단은 파라오를 정점으로 하는 지배계급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피라미드가 위계구조를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제4왕조는 어느 전투에서 1만 1000명의 포로와 13만 100마리의 양을 전리품으로 얻었다고 하니, 당시 이집트 제4왕조의 인구는 못해도 500만 명 이상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통제하고 수탈하려면 문자와 숫자 체계가 완비되어야 하며, 동시에 피지배계급도 이런 문자와 숫자 체계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포고문만으로 혹은 통지서만으로 지배와 복종 관계가 원활해질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노예 등 최하 지배계급은 문자와 숫자를 배울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노예는 반드시 주인의 음성언어는 이해할 수 있도록 훈육되어야 한다. 그래야 주인이 노예를 부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문자체계의 발달이 억압체제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면, 제4왕조 시절 기자(giza)에 건설된 피라미드를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듯하다. 이 피라미드는 높이 146.5미터와 밑변 230.4미터의 규모로 전체 5900만 톤에 달하는 약 230만 개의 석회암과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 피라미드는 약 10만 명의 인력이 매일 일해 20년 정도 걸려서 완공되었다고 추정된다. 10만 명이다. 일사불란한 언어체계가 없으면 공사장은 그저 난장판이 되기 십상이다. 한 두 명의 노예를 부리는 것이라면 말로도 충분하겠지만, 10만 명의 인력을 부리려면 문자와 숫자에 대한 명료한 체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가장 하급 관리자는 상부에서 받은 명령문을 이해할 수 있어야하고, 직접 돌을 운반하는 노예들도 최소한 하급 관리자의 구두 명령 정도는 알아들어야 한다. <구약>의 첫 장인 <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 이야기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오만하게도 인간이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고 하자 신은 인간의 그 공사를 좌절시키려고 한다. 그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통일되어 있던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해 그들이 상대방의 말을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드는” 방법이었다.
통일되고 체계적인 문자가 없다면, 거대한 피라미드도 만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왕조도 유지될 수 없었다. 그러니 문자와 숫자, 나아가 음성언어에 대한 교육은 억압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조치였다. 레비스트로스가 “문자”, “수탈”, “위계화”, “건축”, “노예화”를 인간논ㅇ장의 최초 징후라고 독해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인간을 가축으로 부릴 때 언어는 가장 효과적이고 결정적인 고삐가 된다. ..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 때, 가장 먼저 한 조치가 일본어 교육이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457-478

인간을 가축화할 때 재갈과 고삐보다 말과 문자가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지배계급은 알았던 것이다.  478

레비스트로스는 노예화와 관련된 일차적 기능 이외에 언어에 다른 기능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표면적으로 문자가 노예화와 무관하게 사용된 사례로 그는 세 가지를 든다. 하나는 “공정한 목적”을 위한 문자 사용, 두 번째는 “지적인 만족”을 위한 문자 사용, 그리고 세 번째는 “미적인 만족”을 위한 문자 사용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란 근본적 위계구조가 전제된 이상, 언어 사용의 이차적 기능은 언어의 노예화 기능을 강화하고 정당화하거나 아니면 은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레비스트로스의 냉정한 판단이다. 479-480


고대문명은 인간 가축화의 서막에 지나지 않고, 그 가축화에는 문자가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이것이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이다. 거대 건축물이 인류 문명의 보고라는 편견에 대한 조롱이기도 하다. BC 3000년 전후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세계 4대 문명은 문명이라기보다 문명의 탈을 쓴 야만의 시작을, 혹은 인간이 동료 인간을 가축화하는 비극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482

피라미드의 인부들 중 그 누구도 피라미드에 묻힐 수 없었던 것처럼, 안전띠를 매고 아찔한 철골 구조에 몸을 맡긴 노동자들 중 그 누구도 피라미드에 묻힐 수 없었던 것처럼, 안전띠를 매고 아찔한 철골 구조에 몸을 맡긴 노동자들 중 그 누구도 이 거대한 건물에 입주할 수 없다. 폭력수단을 독점해 노예와 민중을 지배했던 파라오나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을 독점해 노동자들을 지배했던 자본가들은 여전히 정신노동이란 미명하에 육체노동자들을 착취했던 것이다.  483

파라오 시대와 자본계급 시대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폭발적인 인구 증가에서도 찾을 수 있다.  483

이제는 정말 음성만으로 노동계급을 통제하기에는 역부족이 된 것이다. 바로 여기서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의무교육의 필요성이 대두한다. 물론 의무교육의 핵심은 문자 해독 능력, 다시 말해 문자로 쓰인 주인의 명령을 정확히 이해하고 시행할 수 있는 능력의 함양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말한다. “19세기 의무교육을 지향했던 유럽 국가들의 체계적 조치는 군복무의 확장과 (민중들의) 프롤레타리아화와 그 맥을 같이한다”고.
19세기 이후 본격화한 유럽의 국민국가들을 상징하는 것은 식민지 쟁탈 경쟁이었다. 패권주의로 무장한 국가들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우월한 군사력과 압도적인 생산력을 먼저 확보해야 했다. 군사력과 생산력의 기원은 결국 국민들, 혹은 민중들의 노동력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럽 국가들은 전체 국민을 효과적으로 동원하고 조직하고 운용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고, 그 결과물이 당시 유럽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시행했던 의무교육이었다. 이제 피지배계급은 구두 명령이든 문서 명령이든 지배계급의 명령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능력을 기르도록 강제된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노예화가 제도화된 셈이다. 당연히 의무교육에서 복종의식을 함양하는 작업은 필수적이다. 아무리 명려을 이해하는 문자 해독 능력을 갖추어도 이해된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자유인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굴욕이지만 의무교육이란 미명으로 이 복종 교육은 별다른 무리 없이 진행된다. 의무교육의 대상은 어린아이들이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 때도 일제 시절에도 체제에 대한 충성 맹세가 어린아이들의 입에서 울려 퍼졌다. 1892년 국기 페티시즘을 처음으로 드러냈던 미국은 1953년 생전체제 때 국기에 대해 맹세를 읊도록 했고, 그 맹세는 21세기 지금도 다양한 피부색의 미국 아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우리의 경우 박정희(1917~1979) 군사독재정권이 지배하던 1972년부터 아이들은 조회 때마다 국기를 보며 충성을 맹세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외위고 있는 충성 맹세문은 2007년 참여정부를 자처하며 진정한 민주주의를 표방했던 노무현(1946~2009) 정권 때 개정된 것이다. 1972년 <국기에 대한 맹세>가 일본제국이 우리 아이들을 훈육했던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의 정신과 미국의 국기 페티시즘이 결합된 형태였다면, 2007년부터 우리 아이들이 동요라도 되는 듯 외우고 있는 버전은 그냥 노골적으로 1953년부터 지금까지 미국 아이들이 외우는 <충성의 맹세(Pledge of Allegiance)>의 짝퉁 버전이다. 19세기 이후 지금까지 국민들을 노예화하려는 부르주아국가들의 속내를, 그들이 만들어 강요했던 낯부끄러운 충성 맹세문의 파노라마를 통해 확인해보자.
나는 성스러운 맹세를 신에게 바칩니다.
나는 독일제국과 민중의 지도자이자 군대 최고사령관 아돌프 히틀러에게 무조건 충성을 바칠 겁니다.
나는 용감한 병사로서 항상 이 맹세에 나의 생명을 바칠 준비를 할 겁니다. - <아돌프 히틀러에게 바치는 충성 서약> (1934)
1.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 우리는 인고 단련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황국신민서사>(1937)
나는 미합중국의 국기에 대해, 그리고 이것이 표상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자유와 정의가 함께하고 (기독교의) 신 아래에서 갈라질 수 없는 하나의 국가, 공화국에 대해 충성을 맹세합니다. - <충성의 맹세> (1953)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자유롭게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 <국기에 대한 맹세> (1972)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구그이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 <국기에 대한 맹세> (2007)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 미사여구인지 분명해진다. 국기도, 국가도, 관료도 국민의 위에 있는 것이 아닐 때에만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말이 의미를 가진다. 국가가 내용에나 형식에서 국민들, 즉 사회의 하부에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니까, 그렇지만 나치 때도, 일본제국주의 시절에도, 독재 시절에도 심지어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 당연히 이것은 국가의 최고 실권자에 대한 충성일 수밖에 없다. 2007년 개정된 <국기에 대한 맹세>를 읽어보라. 부르주아체제에서 자유는 사유재산을 가질 수 있는 자유와 그것을 처분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부르주아체제에서 정의는 토지를 가진 사람, 돈을 가진 사람, 그리고 노동력만을 가진 사람 사이에 생산물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정의를 의미한다. 결국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은 우리 국가가 민주주의국가가 아니라 부르주아극가라는 것을 명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484-487

<국기에 대한 맹세>가 울려 퍼지는 국가에서 의무교육의 일차적 목적은 너무나 자명하지 않은가. 지배계급의 명령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문자 교육과 그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제2의 천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체제의 유지와 발전에 도움이 되는 실무교육도 아울러 병행된다. .. 물론 부르주아체제는 기회 균등을 이야기하면서 자기 속내를 효과적으로 은폐한다. 다시 말해 교육은 민중들 자신을 위한 것이지 국가나 지배계급을 위해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생각해 보라. 정말로 민중들을 위하는 것이라면 교육을 ‘의무’의 형태로 강요하는 일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487

1987년 10월 29일 마지막으로 개정된 우리 헌법을 보라.
제31조 (교육을 받을 권리 의무, 평생교육 진흥)
1항.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2항. 모든 국민은 그 보호하는 자녀에게 적어도 초등교육과 법률이 정하는 교육을 받게 할 의무를 진다.
…..
제32조 (근로의 권리 의무, 최저임금제, 여자 연소자 보호, 국가유공자에 대한 기회 우선)
1항.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지닌다. 국가는 사회적 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 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
2항. 모든 국민은 근로의 의무를 지닌다. 국가는 근로의 의무의 내용과 조건을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법률로 정한다.  - 대한민국 헌법
권리는 힘이다. 개인에게 어떤 것에 대해 권리가 있다는 것은 그걸 할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교육이 권리라면, 그것은 교육을 받지 않을 권리도 함축해야 한다. .. 그렇지만 우리 헌법은 얼마나 모순되는가? 교육이든 노동이든 권리라고 말하자마자, 입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바로 교육과 노동을 의무로 규정하니까. 구조도 똑같다. 31조나 32조 모두 1항은 권리를 이야기하고, 2항은 의무를 이야기한다. 바보가 아닌 이상 1항은 2항에 의해 강제된다는 사실, 나아가 1항은 2항을 은폐하는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일이다. 결국 교육은 강제되고 노동도 강제된다. 물론 그 주체는 국가이고 그 객체는 민중들이다.  488-489

바로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의무교육이 민중들을 프롤레타리아로 만드는 과정과 같이한다는 레비스트로스의 지적이다. 프롤레타리아화! 이것은 민중들에게서 노동력을 제외하고 모든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을 박탈하는 과정이다.  4899

이렇게 시간이 갈수록 노동자들에게 교육은 타율적 강요가 아니라 점점 자발적 복종의 중요한 매커니즘으로 변질된다.
일본제국주의 시절을 생각해보라. 일본어를 하는 우리 노동자는 그렇지 않은 동료를 지도하는 십장이 되어 있을 것이다. 더 많이 배울수록 직접적이고 힘든 육체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식민지 시대 불행한 우리 선조들은 일본제국주의가 원하는 걸 더 많이 습득하려고 애썼다. 489–490

내가 원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국가나 자본이 원하는 것을 배운다! 국가나 자본의 간택을 받아야 생계를 도모할 수 있고 나아가 풍요로운 삶도 누릴 수 있다!  490-491

중요한 것은 의무교육이 타율적 훈육이 아니라 자발적 학습, 즉 타율적 복종이 아니라 자발적 복종으로 타들어가는 도화선의 불꽃이었다는 사실이다.  491

“자발적인 학습은 교육이란 제도 발명의 이차적 결과물에 지나지 않으며, 심지어 교육의 일차적 기능을 강화하고 정당화하거나 은폐한다.” 레비스트로스  492

만약 모든 사람이 문자를 모른다면, 강자는 몸소 벽을 감시하거나 꿀병을 지키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문맹을 없애는 순간, 이제 강자 대신 경고문이 사람들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  492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관계, 즉 억압구조의 핵심은 생산수단 독점의 문제로 귀결된다. 생산수단을 탈취한 자는 생산수단을 빼앗긴 자를 지배하는 법이다. .. 지주와 농민 사이의 사회적 관계, 혹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사회적 관계는 이렇게 출현한 것이다. <독일 이데올로기>엣 마르크스는 이것을 “다른 인간과의 관계”나 “사회적 교류형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간단히 “환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 마르크스가 말한 환경은 자연환경이 아니라 억압적 사회구조, 즉 인위적 환경을 의미했던 것이다. 바로 이 환경을, 사회의 억압적 교류양식을 원활하게 기능하도록 하는 목적으로 만든 것이 19세기부터 발달했던 교육제도다. 표면적으로 체제는 교육이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기에 민중들에게 유리한 제도라고 역설한다. 기회 균등의 논리는 단순하다. 교육의 기회는 모두에게 주어지니, 성적으로 교육을 잘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만약 증명에 성공한다면 노동자에게는 부르주아에 가까운 삶이 제공될 것이고, 실패한다면 고단한 육체노동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부와 가난, 혹은 성공과 실패는 주어진 교육의 기회를 잡지 못한 개개인들의 탓이지 사회구조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19세기 이후 의무교육이란 이름으로 강조되었던 교육은 부르주아사회의 새로운 노예, 즉 노동자들을 상호 경쟁으로 내모는 미끼였을 뿐이다. 치려한 경쟁은 억압적 환경 전체를 구조적으로 성찰할 여유를 노동자들에게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본 계급이 아니라 동료 노동자들을 적대시하는 잘못된 감성을 노동자들의 내면에 각인한다. “입사 경쟁률이 왜 이리 높아. 저들이 원서만 내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자, 이제 우리에게 심각한 결단의 순간이 찾아왔다. 노예화를 강요하는 억압적 구조에 맞서 싸우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 아니면 주어진 환경에 순응해 그나마 안정된 삶을 확보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  495-496

마르크스에게는 .. 주인과 노예라는 억압적 환경, 그리고 이 환경을 강요하는 노예화 교육! 그에게 이것은 적응과 순응의 대상이 아니라 파괴와 극복의 대상일 뿐이다.  497

노예제를 극복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햇던 스파르타쿠스 자유군단, 농노제에 도전에 농노 신분을 털어내려고 했던 뭔스터코뮌, 노동자제를 무너뜨리고 임금노동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파리코뮌을 생각해보라. 길들여진 개는 주인을 물지 않고, 길들여진 소는 뿔로 주인을 들이받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간은 완전히 가축화할 수 없는 존재다. .. 인간은 대상적 활동의 힘을 가지고 있다. .. 인간은 주어진 조건에 지배를 받는 수동적인 존재지만 동시에 그걸 넘어서려는 주체적 의지를 가진 능동적 존재이기도 하다. 수동적인 능동자!  498-499

20세기 내내 억압받는 자들은 자신들을 억압이 없는 미래로 이끌어나갈 정당이나 정권의 인도나 지도를 받는다. 사이비 사회주의나 사이비 코뮌주의가 마침내 탄생한 것이다. 소수 지배계급이 다수 인간들에게서 대상적 활동을 박탈할 때, 억압사회는 등장하는 법이다. 그래서 억압사회에서는 소수 지배계급만이 대상적 활동의 힘을 향유한다. 당연히 억압받는 다수는 지배자의 명령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대상, 혹은 사물과도 같은 상태에 처하게 된다. 아무리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다고 해도 정치적 엘리트주의로 무장한 사이비 사회주의나 사이비 코뮌주의가 새로운 억압체제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억압받는 자들에게 대상적 활동이 허락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501

“환경이 인간에 의해 변화되고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 한다!” 환경이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맞지만, 바로 이 인간이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근본 입장이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그가 “인간이 환경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환경도 인간을 만든다”고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도. 억압을 받는 것도 인간이지만 억압을 극복하는 것도 바로 그 동일한 인간이니까. 여기에는 포이어바흐도, 엥겔스도, 스탈린도, 마오쩌둥도, 김일성도 필요가 없다. 그래서 마르크스에게 사회는 두 부분으로 나뉠 필요가 없다. 아니 나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속내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할, 혹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분할 자체가 바로 억압의 가장 분명한 힘을 절단하는 데서 찾아온다. 대상의 측면만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피지배계급이라면, 활동의 측면을 독점하는 사람들이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지배계급이니 말이다. 502-503

경제적 조건들은 우선 그 나라의 민중들을 노동자들로 변형시킨다. 자본의 지배는 이 민중들에게 공통된 상황, 공통된 이해를 만들어 준다. 따라서 이 대중은 이미 자본에 반하는 하나의 계급이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이미 몇몇 구절로 지적했던 투쟁속에서 이 민중은 결합하고 스스로를 대자적 계급으로 구성한다. 이에 따라 민중들이 옹호하는 이해는 계급이해가 된다. 계급에 대한 계급의 투쟁이 바로 정치투쟁이다. - <철학의 빈곤> (1847)
.. 헤겔<정신현상학>의 핵심 개념 ‘즉자(卽自)’와 ‘대자(對自)’를 사용하면서 마르크스는 억압받는 자들이 대상적 활동의 주체로 변하는 과정, 다시 말해 억압에 순응했던 자들이 억압에 저항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주체로 변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글자 그대로 즉자는 자신에게 매몰되어 있는 상태, 그리고 대자는 자신을 반성하거나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자신을 반성하거나 타인을 의식할 수 없는 상태가 즉자이고, 자신을 반성하고 타인을 의식하는 상태가 대자라고 정리해두면 좋다. 문제는 사람도 사물처럼 즉자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503-503

완벽한 노예는 사물화된 노예, 다시 말해 즉자적 노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사물처럼 박제가 되었다고 해도 인간은 인간일 수밖에 없다. 어느 순간 수치심과 모욕감이 찾아올 때, 완벽한 모예는 사라지고 만다. 자신의 신세를 돌아보고 한숨을 쉬거나 분노하고 자신의 삶을 굴욕적으로 생각하는 노예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대자적 노예의 탄생이다. ..
대자적 노예는 노예라는 신분을 넘어서려고 할 것이다. 이제 귀족과의 목숨을 건 투쟁, 혹은 노예제사회에 대한 전면적 투쟁만이 남는다. .. 환경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바꾸려는 대상적 활동의 주체는 바로 이렇게 탄생한다. 모세가 나타나 노예를 귀족의 수중에서, 농노를 영주의 수중에서, 노동자를 자본가의 수중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노예가, 농노가,  노동자가 새로운 주인으로 모세를 섬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스스로 모세가, 혹은 메시아가 되어야 한다. 대상적 활동의 힘을 회복해야만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말했던 것이다. “환경의 변화 그리고 인간의 활동 혹은 자기변화 사이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505

인간이 환경과 교육의 산물이라는 말은, 즉 인간이 즉자적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인간은 자신의 삶을 당연시하는 것이 아니라 회으하게 된다. 대자적 삶이 찾아온 것이다. 마르크스는 바로 이것을 ‘자기변화’라고 개념화한다. .. 불행히도 역사를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것처럼 대자적 줓체로 변형된 억압받는 사람들이 억압적 환경 자체를 바꾸는 데 성공한 적은 없다. “인간의 활동”, 즉 “자기 변화”가 “환경의 변화”를 낳는 데 역부족이었던 탓이다. 즉자적 인간이 대자적 주체가 되었지만, 다시 말해 억압받는 자들이 대상적 활동의 주체가 되었지만, 불행히도 그들의 저항은 환경을 바꾸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506

교육은 선생이 원하는 것을 학생들도 원하도록 훈육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찾아내도록 하는 데 있다. 마르크스는 말했다. “선생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만큼이나 학생들에게 배워야 한다”고.  선생은 학생들의 잠재적 차이를 아직 모르고, 동시에 학생들도 자기의 차이를 모르기에,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다양한 경험을 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학생들에게 제공한 다양한 경험의 기회들은 선생 입장에서 아이들이 꽃필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선생은 자신의 확신을 항상 접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선생이 학생들에게 배워야 한다”는 말의 의미다.  509

아이들의 차이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선생은 체제의 명령을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동일성의 교사가 될 수밖에 없다.  510


‘대상적 활동’이란 개념이 마르크스 철학의 심장이라면, ‘인간 사회’라는 이념은 마르크스 철학의 머리라고 할 수 있다.  513


1852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는 말했던 적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자신이 바라는 꼭 그대로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는 못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 스스로 선택한 환경 아래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곧바로 맞닥뜨리게 되거나 그로부터 조건지어지고 넘겨받은 환경하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거”이라고.
마르크스는 억압체제 전체 차원에서 꿋꿋하게 진행되는 인간의 대상적 활동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사소한 개인들의 일상에서도 그래도 관찰될 수 있다. 직장생활에 투여되는 에어지를 줄여 가족과 애인에게 정성을 기울이는 직장인, 오른손에 가짜 붕대를 감고 원치 않은 모임에 참여하는 여성, 돈이 떨어져도 히치하이킨을 해서 여정을 계속하는 젊은이, 예비군 훈련장에서 만화책을 가져와 들키지 않고 보는 젊은이, 지도교수가 건넨 술잔을 교묘히 딴 그릇에 버리는 대학원생, 혹은 추울 때 따뜻한 물을 담은 물병을 껴안고 잠을 청하는 사람, 이런 모든 사람이 대상적 활동의 작은 촛불들이다. 그렇지만 이런 작은 불꽃들이 모이지 않으면 어떻게 전체 억압사회를 불태울 수 있는 거대한 산불이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
어떤 경우든 인간은 주어진 대상적 조건에 순응하지 않고 그것에 능동적으로 개입해 자기만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고 인간의 삶이다. .. 유물론적 사유 전통이 인간의 삶에 강하게 영향을 끼치는 대상적 조건만을 강조한다면, 반대로 관념론적 사유 전통은 인간의 자발성과 능동성만을 중시해왔다. 이런 해묵은 철학사적 대립은 마르크스의 ‘대상적 활동’ 개념으로 해소되고 만다. 대상적 활동 개념은 인간의 삶이 비자발적 자발성, 수동적인 능동성, 혹은 조건적인 자유라는 걸 해명했기 때문이다.  516-517

개체의 삶이 대상적 활동이라면,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도 대상적 활동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정신적인 차원에서도 수동성과 능동성이 동시에 있고, 육체적인 차원에서도 수동성과 능동성이 동시에 있다는 것이다.  519

정신적인 것이 전면에 부각되었다고 해도 육체적인 것이 자기 기능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신적인 것이 나가도록 버팀목이 될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 어느 정도 나가야 할지 그 한계도 정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육체적인 것이 전면에 부각될 때도 마찬가지다. 변증법, 그것 벌거 아니다. 정신과 육체, 이론과 실천, 그리고 인식과 경험을 각각 두 다리로 생각하고 대범하게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가는 것, 바로 그것이 변증법이니까.
마르크스가 “의식을 살아 있는 개인으로 간주하는 접근 방식”, 즉 헤겔식 사유를 비판했던 이유는 이제 분명해진다. 이것은 마치 육체라는 오른발을 간과한 채 의식이란 왼발만을 움직이겠다는 생각과 같기 때문이다. 헤겔은 절름발이의 인간만을 봤을 뿐, 살아가는 개인 혹은 삶을 살아내야 하는 개인을 보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잘해야 헤겔식 인간은 세상을 관조하는 인간일 뿐이다.  521-522

마르크스의 인간은 의식이 움직이면 몸이 움직이고 몸이 움직이면 의식도 이어서 움직이는 인간이다.  522

마르크스는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 생성 과정에 있는 인간”을 강조한다. 특정한 대상과 마주치고 관계해야 하나의 특정한 조건이 만들어진다. 결국 ‘특정한 조건’이란 대상과 관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처한 조건이나 상황을 가리킨다. 대상적 조건이 어떤 것이든 간에 인간은 여기에 전적으로 함몰되지 않고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존재다. 그 결과는 과거와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생성이다.  522-523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중 두 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말한다. “대상의 진리가 인간 사유로 귀속될 수 있는지의 문제는 이론의 묹2ㅔ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라고.. 대상의 진리가 .. 인간이 마주친 대상에 대한 진리, 혹은 인간과 관계하는 대상에 대한 진리다. 결국 대상의 진리에는 대상과 마주친 인간의 모든 역사와 경험, 그리고 힘을 전제한다. 그러니 정확히 말해 마르크스가 말한 대상의 진리는 대상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의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525

명심해야 한다. 대상적 활동을 영위하는 모든 주체는 자기 사유의 진리를 증명해야만 한다. 마르크스에게 육체적인 것도 대상에 대한 육체적인 것이고, 정신적인 것도 대상에 대한 정신적인 것이다. 당연히 사유도 대상에 대한 사유이고, 실천도 대상에 대한 실천일 뿐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말한다.  “실천으로부터 유리된 사유가 현실적인 가 비현실적인가를 논하는 것은 순전히 스콜라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실천으로부터 유리된 사유는 관저적인 사유일 수밖에 없으니까.  ..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당신은 대상적 활동의 주체인가? 그렇다면 당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다시 말해 당신의 생각이 현실적이라는 것을, 당신의 생각이 힘이 있다는 사실을, 당신의 생각이 공회전하는 사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천을 통해 증명하라!  527

어떤 시대에서도 지배적 사상(herrschenden Gedanken)은 곧 지배계급의 사상(Die Gedanken der herrschenden Klasse)이다. 즉 사회의 물질적 힘을 지배하는 계급은 동시에 사회의 정신적인 힘도 지배한다. …… 따라서 그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지배하고 한 역사 시대의 범위와 한계를 결정하는 한, 당연히 그들은 모든 영역에 걸쳐 그 지배를 행할 것이며, 따라서 무엇보다도 사고하는 자로서, 사상의 생산자로서 지배하고, 그래서 그 시대의 사상의 생산과 분배를 규제할 것이다. …… 만약 우리가 역사 과정을 파악할 때 지배계급의 사상을 지배계급 그 자체에서 분리시켜 독자적인 존재라고 간주한다면, 혹은 그 어떤 시대에는 이러저러한 사상이 지배했다고 말하기만 하고 그 사상들이 만들어지게 되는 조건 및 그 생산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면, 혹은 그 사상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각 개인들과 세계상태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예를 들어 귀족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명예’, ‘충성’ 등의 개념이 찌배적이었고, 부르주아가 지배하던 시대에는 ‘자유’, ‘평등’ 등의 개념이 지배적이었다고만 말해도 될 것이다. - <독일 이데올로기>
… 정확히 말해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거나 같은 말이지만 피지배계급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피하기 위해 지배계급이 만든 것이 바로 특정 시대의 지배적 사상이라는 것이다.  529-530

여성을 모성의 화신으로 찬양하는 인문학자들, 신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종교인들, 인간 사유의 고유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는 철학자들, 배려와 공존 등 공동체적 윤리를 역설하는 설교자들, 모두 좋은 사회를 꿈꾸고 있지만 그들은 자신이 억압사회를 지속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걸 모른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란 구분법이 통용되는 억압적 구조를 정면으로 응시해서 돌파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534

어떻게 하면 이데올로기적 거울상이나 메아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인간이 누구도 지배하지 않고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 사회,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중 열 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가 말한 ‘인간사회’다. .. 귀족이나 영주나 자본가를 위한 물질적 생산과 물질적 교류가 아니다. 노동하는 사람들 자신의 물질적 생산과 물질적 교류다. 주인들의 생산이자 주인들의 교류다.  538-539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포이어하브에 관한 테제들> 11  539

포이어바흐의 생각은 기독교가 지배적이었던 독일사회에 단순한 지적 센세이션을 넘어 충격을 안겨준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성 일반, 혹은 인간 본질을 투사해서 만든 것이 신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퐆이어바흐가 말한 인간 일반이란 지배계급으로부터 추상된 것이라는 데 있다. .. 결국 신은 최상의 지배자나 초치선의 지배자로 상상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왜 가난한 민중들이 신의 궁전에 찾아가 그에게 무릎을 꿇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현실의 군주에게 억압받고 수탈당하자, 그들은 천상의 군주에게 사랑받는 노예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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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 2장 - 포이어바흐를 넘어서 도달한 곳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은 각 개인에게 내재된 추상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은 본질이란 말뜻처럼 불변하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관계가 만들어내는 앙상블과도 같다는 것이다.  ... 개별 연주자들이 최상급 연주 실력을 뽐내도 다른 연주자들의 연주에 녹아들지 못하면, 연주는 불협화으믕로 끝나고 만다. 앙상블 연주로는 완전히 실패한 셈이다.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인간을 솔로 연주자로 보지 말고 앙상블에 참여한 개별 연주자로 보자는 것이다. ... 마르크스는 ‘본질주의(Essentialism)’, 즉 개인이나 사물 안에는 본질이 내재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해체하고자 한다. 겉보기에 아ㅜ리 달라 보여도 서양철학 전통 일반은 모두 이 본질주의에 발을 걸치고 있다.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중요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본질주의 대신 마르크스는 ‘관계주의(Relationalism)’라고 부를 만한 입장을 표방하기 때문이다. 관계주의는 개인이나 사물 등 우리 눈에 식별되는 대상들이 아니라 직접 눈에 띄지 않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223-224

식사를 하던 아이가 귀가 가려웠는지 젓가락으로 귓속을 긁는다. 식탁에 있던 어머니는 기겁을 하며 아이를 나무란다. “젓가락은 음식을 집어먹는 거야. 귀를 파고 싶으면 귀이개를 써야지.” 익숙한 밥상 풍경이지만, 여기에도 보질주의와 관계주의가 작동하고 있다. 젓가락의 본질은 무엇인가?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음식을 집어먹는 것’리다.  ... 본질주의가 삶에서나 정치엣 항상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본질주의는 본질이란 이름으로 기존 질서를 맹목적으로 따를 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224-225

자유란 별게 아니다. 어떤 사물과 하나의 관계만 가능한 사람보다 서너 가지의 관계가 가능한 사람이 더 자유로운 법이다. 아이는 의자가 없어도 근사한 바위에 앉아서 쉴 수 있고, 사용하지 않는 냄비에 흙을 담아 꽃씨를 묻을 수도 있다. 물론 급하게 소변을 보고 싶으면, 아이는 신속하게 인기척이 없는 곳에서 시원하게 소변을 볼 수도 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어머니나 선생임의 훈육으로 사회적 규범에 동화되고 만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사회구조가 지정한 관계로만 세상과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가 말한 초자아가 제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초자아라는 내적 검열지구가 작동하자마자, 모든 사물은 하나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결과적으로 이제 사물은 본질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  225-226

남편이 있는 아내나 아이의 엄마만을 강조하는 순간, 이 사람의 본질은 여성이 되고 만다. 혹은 이 삶이 편의점에서 일하는 것만 강조되는 순간, 이 사람의 본질은 프롤레타리아, 그것도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최악의 프롤레타리아가 된다.  227

마르크스에게 부르주아 경제학자들 대부분은 일조으이 본질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방적기, 목화솜, 공장, 그리고 노동자등 개별적인 대상들만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본과 노동이란 관계, 원초적으로 불평등한 관계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자본가는 돈으로 공장을, 방적기를, 목화솜을, 그리고 노동자를 산다. 면직물을 만들어 투자한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다. 반면 노동자는 일체의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을 박탈당해 노동력만 가지고 잇다. 생계를 위해 돈이 필요한 노동자는 면직공장에 취업해야만 한다.  228

억압과 수탈 관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생각해 보자.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을 누군가 독점하는 순간, ‘3P의 삼각형(the triangle of 3P)’으로 작동하는 지배관계는 탄생한다. 먼저 소수가 부유해지면서 다수는 가난해진다. 첫 번째 P는 재산(property)이고 두 번째 P는 가난(poverty)이다 부유한 소수는 가난한 다수를 지배하게 된다. 세 번째 P는 권력(power)이다. 권력은 재산과 가난 사이의 관계를 영속화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이자 공권력이란 이름으로 이 원초적 관계를 지키려는 힘이다. ‘재산-가난-권력’으로 이루어지는 ‘3P의 삼각형’은 대부분의 인간을 자기 안에 감금해 피지배계급으로 포획한다. 3P의 삼각형이 만들어지면, 지배관계는 공고화된다. 그러니 권력을 해명하고 싶다면, 우리는 재산과 가난의 문제를 우회해서는 안 된다. 재산을 비판하고 싶다면, 우리는 권력과 가난의 문제를 숙고해야만 한다. 그리고 가난을 해결하고 싶다면, 우리는 권력과 재산의 문제를 극복해야만 한다. 재산과 가난이 분열되면서 권력을 낳고, 재산과 권력이 결합하면서 가난을 지속시키고, 마지막으로 권력이 가난을 적대시하면서 재산은 안정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대상이 아니라 관계를 사유해야 한다! 이것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이다. 지배계급 이데올로그들은 소수의 재산과 다수의 가난이 서로 무관하다고, 소수의 재산과 소수의 권력이 서로 무관하다고, 나아가 소수의 권력과 다수의 가난이 서로 무관하다고 역설한다. 이 궤변을 다수의 가난한 자들이 받아들이는 순간, 억압과 착취의 체제는 승리를 구가하게 된다.  245-246

억압과 착취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소작농이 지주가 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새로운 소작농을 양산하는 길일 뿐, 불평등한 관계 자체를 소멸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자본가가 생산과 생계의 절대적 수단, 즉 돈을 독점했기에, 노동자들에게는 팔 수 있는 노동력만 남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자본가-노동자’ 관계를 인식하지 못한 노동자는 자신의 처지를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이제 그에게 남은 꿈은 단순하다 많은 임금을 받기를 꿈꾸거나 아니면 언젠가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자본가가 되는 걸 꿈꾸게 된다. 자본가가 있기에 자기 삶이 비참해졌다는 것을 알았다면 노동자가 이런 헛된 꿈에 매진할 리 없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가 자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노동자’ 관계가 소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억압받는 자들은 폐부에 새겨 잊지 말아야 한다. 대상이 아니라 관계를 사유하라! 불평등한 관계가 다수를 “눈물의 골짜기”에 던져 넣었다면, 그 억압적 관계를 우리는 돌파해야만 한다. 넘어진 곳이 바로 우리가 일어나야 할 곳이다.  247
마르크스는 ‘인간의 감성’ 이외에 ‘실천적 활동’이란 의미를 강조했던 것이다. “실천적인 인간적-감성적 활동”으로서 감성은 우리의 몸적 인식이자 실천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무언가 했더니 사람이로구나”라는 인식이나 “사람인 줄 알았는데, 바위구나”라는 인식도 이미 이런 몸적 인식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니 지성의 판단이나 개념의 자발성도 결코 몸과 무관한 정신만의 고유한 기능이 아니라, 엄격히 말하면 몸적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피지렌’이란 독일어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비가 얼굴에 떨어지면 우리는 그걸 느낀다. 비가 우리를 촉발한 것이다. 태양이 작열하면 우리는 그걸 느낀다. 태양이 우리를 촉발한 것이다. 매혹저긴 향내가 나면 우리는 그걸 느낀다. 향기가 우리를 촉발한 것이다. “직관이 감성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즉 우리가 대상에 의해서 촉발되는 방식만을 포함한다는 것은 우리 본서으이 필연적 결과다.” 여기까지 칸트의 말은 옳을 뿐만 아니라 정확하다. 그렇지만 우리 몸이 비오는 날 집 밖에 있었다는 사실, 우리 몸이 여름날 바닷가에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 몸이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다는 사실도 그만큼 중요하다. 온몸으로 물을 느끼려면 대홍수가 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그저 계곡물이나 바닷물, 아니면 욕조물에 몸만 담그면 된다. ‘아피지렌!’ 그것은 무엉ㅅ보다도 특정 시공간을 점유하는 몸들 사이의 마주침이 전제된 것이다. 일단 마주쳐야 타자든 나든 상대방을 촉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253

산길을 걷다가 “무언가 했더니 사람이구나”라는 인식에 이르렀다. 이 인식을 바꾸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 “마음의 수용성을 감성”이라고 정의하면서 감성의 의미를 축소했던 칸트의 입장을 밀어붙이면 된다. 다시 말해 일체의 미동도 하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있으면 된다. 다시 말해 일체의 미동도 하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있으면 된다. 칸트가 감성의 능력을 ‘직관’이나 ‘관조’라고 표현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직관’이나 ‘관조’를 뜻하는 독일어 ‘안샤우웅(Anschauung)’은 원래 동사 ‘안샤우엔(Anschauen)’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말은 ‘거리를 두고 관찰하거나 바라본다’는 의미이기에 보통 ‘관조한다’는 말로도 번역된다. 결국 대상을 직관하거나 관조하는 칸트식 감성이 작동하려면, 우리 몸은 결코 움직여서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X를 관조하면 “무언가 했더니 사람이구나”라는 인식은 수정될 여지가 없다. 바로 이것이 핵심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감성을 ‘직관’이나 ‘관조’의 기능에 국한하지 않고 “실천적인 인간적-감성적 활동”이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칸트의 감성이 수동적 감각에 지나지 않는다면, 마르크스의 감성은 수동성과 능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몸적 인식, 혹은 실천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강조했던 감성의 원래 모습을 복원하지 않으면, ‘바위구나’라는 새로운 인식이 만들어질 여지가 없다.  254-255

역사적 인식은 무언가 사라지고 무언가 새롭게 생기는 과정에 대한 앎이다. 무엇이 사라졌을까? 무엇이 새롭게 생겼을까? 왜 사라졌을까? 이런 의문은, 오직 무언가 없어지고 무언가 새로 생기는 일은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260

잊지 말자. 피지배계급의 무기력을 조장하거나 증폭시키는 주범은 항상 지배계급이라는 사실을, 과거부터 지금까지 지배계급은 항상 원한다. 자기 의지가 관철된 모든 것을 피지배계급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관조하고 순응하기를, 이런 식으로 소수의 지배계급은 다수를 배제한 채 역사의 주체로 등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포이어바흐적 관조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수 피지배계급이 소수 지배계급에 필적할 만큼 분명한 역사의식을 갖는 것이다.  266

역사의식이 중요한 이유는 이를 토대로 우리가 실천의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 하나의 공식처럼 기억해두자. 역사의식이 사라지면 우리는 세상을 관조하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전락하게 된다는 사실.  266-267

“우리는 단지 유일한 과학, 역사의 과학만을 알 뿐이다.” 마르크스가 남긴 유명한 명언 중 하나다. 이 문장이 담긴 전체 단락이 없어질 뻔했다니 섬뜩한 일 아닌가? 역사의 과학이다! 이것을 흔히 역사학이라고 불리는 과목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가 말한 역사의 과학이란 정확히 말해 관조의 과학이 아니라는 뜻이니까 말이다. 역사의 과학이란 말은 인간의 모든 학문과 인식이 역사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반면 역사학은 과거의 역사를 불변하는 팩트로 고정시킨다. 결국 역사의 과학이 가변성과 실천성을 강조한다면, 역사학은 불변성과 관조성에 기반을 둔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학마저 시대에 따라 부팀을 거듭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의 역사학과 지금 시대의 역사학이 동일한 과거를 다뤄도 그 함의가 다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268-269

지금 배운 진리가 ‘역사적’일 수밖에 없다는 걸 자각한 학생들이 있을 수 있다. 마르크스적인 과학도들인 셈이다. 이들은 자연의 법칙을 새롭게 해명해 언젠가 교재에 자신의 이름이 붙은 법칙을 남길 가능성이 크다. 이제 물리학은 ‘물리에 대한 역사 과학’, 화학은 ‘물질 변화에 관한 역사 과학’, 그리고 생물학은 ‘생물에 관한 역사 과학’의 줄임말이라고 생각하자. 진정한 물리학자는 물리를 관조하지 않고 실천적으로 개입하고, 진정한 화학자는 변화를 관조하지 않고 변화에 참여하며, 진정한 생물학자는 생물을 관조하지 않고 생명체의 거동에 관여한다. 과학자들의 이런 실천적 참여로 해당 과학의 내용은 급변한다. 그래서 자연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은 과학사라고 할 수 있다.  269-270

‘인류가 지구 환경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시대’라는 뜻의 인류세는 1990년대 네덜란드 대기화학자 크뤼천(Paul Jozef Crutzen, 1933~)이 사용해 유명해진 개념이다. ... 1900년에 16억 명이었던 인구는 2000년에 돌입하면서 60억 명을 돌파한 뒤 지금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당연히 다른 종들은 멸종의 길을 걷거나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인간은 엄청난 규모의 숲도 없애고 거대한 댐도 만들고 대도시도 확장하고, 심지어는 기차와 자동차로 대지를, 비행기로는 대기를, 대현 선박으로는 대양을 가로지르고 있다. 환경오염 외에도 다른 종들이 살 수 있는 공간 자체가 협소해진 것이다. 현재 기린은 약 8만 마리, 늑대는 20만 마리, 침팬지는 25만 마리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한정된 땅덩어리에 인류의 개체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생태 환경이 파괴됨에 따라 다른 생물들은 멸종으로 떠밀리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나무늘보를 포함한 동물원의 동물 대부분은 멸종 위기 상태에 있다. 바로 이것이 인류세의 풍경이다. 인류가 멸종한 뒤, 다른 지적인 생명체가 지구의 역사, 혹은 자연의 역사를 탐구한다고 해보자. 아마 그들은 인류세를 방사능 물질, 이상화탄소, 그리고 플라스틱의 시대였다고 말할 것이다. 혹은 그들은 인류세를 보여주는 지층에서 엄청난 닭 뼈를 발견하고 경악할지도 모른다. 인류는 한 해 평균 600억 마리의 닭을 먹어치우니, 수백 년 동안 지층에 쌓인 닭뼈의 양은 무시무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274-275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인류세라는 용어가 낳을 수 있는 오해와 관련된 것이다. 마치 인류가 환경 파괴의 주범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나올 수 있으니까. 사실 중요한 것은 소수의 지배계급이 존재하는 억압사회다. 대다수 인류를 생태 파괴의 현장으로 몰아넣고 동시에 그들을 자연 재앙에 제일 먼저 노출시킨 장본인이 누구인가? 바로 소수의 지배계급이다. BC3000년 전후 인간이 문자로 자기 역사를 기록한 이후 인류의 힘은 비약적으로 커졌고 문명은 발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억압체제는 외양만 바뀌었을 뿐 구조적으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농업혁며으이 시대냐 산업혁명의 시대냐의 구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농업경제 기반의 억압사회가 산업경제 기반의 억압사회로 바뀌었을 뿐이니까.
토지가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이란 절대적인 지위를 돈에 양보하고, 지주는 지배계급의 권좌를 자본가에게 물려주고, 그와 동시에 농민, 천민, 혹은 여성 등은 노동력을 제외한 모든 것이 박탈된 새로운 인간형, 즉 노동자라는 새로운 피지배계급이 되었을 뿐이다. 여전히 지배계급은 두 종류의 착취를 지속적으로 자행하고 있다. 하나는 동료 인간을 착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지배계급을 매개로 자연을 착취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세라는 표현은 수정이 필요하다. ‘지주-농민’이란 사회적 관계를 대신해 등장한 ‘자본가-노동자’란 사회적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토양과 하천, 나아가 바다까지 오염시키는 방사능 물질. 대기를 치명적으로 교란하는 이산화탄소. 깊은 바닷속 어패류의 소회기관에까지 침투한 플라스틱 조각들. 농업경제 시절 짐작도 못할 정도로 인류는 지구를 망가뜨리고 있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진정한 원인은 인류 전체가 자본주의체제에 포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류세라는 용어를 ‘자본세(capitolocene)’로 바꾸자는 논의가 나온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 용어는 스웨덴의 생태학자 안드레아스 마름(Andreas Samuel Magnus Malm, 1977~)이2009년 처음 사용했지만, 그와 무관하게 해러웨이(Donna J. Haraway, 1944~)가 2012년 대중강연에서 독립적으로 사용해 유명해진 개념이다.
인류세라는 용어는 환경 파괴의 원인을 막연히 인간 전체로 돌릴 위험이 있다. 이 용어는 지구라는 별에서 인간이 사라져야 생태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잘못된 생각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원인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인류세라는 용어보다 자본세가 더 좋다는 것이다. 생태계 교란과 파괴의 책임은 자본주의체제를 주도하면서 잉여가치에 대한 맹목적 충동에 사로잡힌 자본계급에게 있기 때문이다. 소수의 자본계급이 다수의 인간과 지구 환경을 수탈하고 착취하고 있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 아닌가? 이에 비해 자본계급에게 착취당하는 노동 계급, 나아가 자본주의체제와 다르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환경 파괴의 피해자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어떻게 자본주의체제를 극복할 것인가?” 2015년 해러웨이가 자본세라는 용어에 만족하지 못하고, ‘커스루센(Chthulucene)’이란 용어를 다시 만들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인간이 부분으로 속해 있는 힘들(forxe)과 역능들(powers),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지구와 함께하는 이런 힘과 역능들에는 하나의 이름이 필요하다고 나는 주장했다. 물론 지금 이 지속성이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아마도, 정말 아마도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종들이 풍요로운 앙상블을 이루는 시대가 가능할 것이다. 나는 과거든, 현재든, 그리고 미래든 이런 시대를 커스루센이라고 부르고 있다. 커스루센은...... 지구 도처에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촉수적인(tentacular) 역능들과 힘들, 그리고 서로 모여 사는 사물들(collected things)을 본떠 만든 말이다. ...... 커스루센은 적어도 하나의 (물론 하나 이상의 함의를 갖는) 슬로건을 요구한다. ...... “아이를 만들지 말고 친족을 만들어라(Make kin not Babies)!” ...... 지구를 함께 공유하면서 (sym-chthonically), 그리고 함께 만들어가면서(sym-poetically) 우리는 친족을 만들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를 지구에 속한 것들과 함께 만들고 생성하고 구성해야만 한다. 나는 친족의 확장과 재구성이 모든 지상의 것들이 가장 깊은 의미에서 친족이라는 사실로 긍정된다고 생각한다. ...... 모든 생명체는 수평적으로, 기호학적으로, 그리고 계보학적으로 공통된 ‘살(flesh)’을 공유하고 있다. 조상들은 매우 흥미로운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분명하지만, 친족은 (우리가 가족이나 부족이라고 생각하는 것 바깥에 있기에) 익숙하지 않고, 기묘하고, 매력적이고, 능동적인 것이다. 작은 슬로건에 너무 많은 것을 부여했다는 사실, 나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노력해야만 한다. 지금으로부터 200년이 지나면 아마도 이 혹성의 인간종은 다시 20억이나 30억으로 줄어들고, 동시에 지금까지 목적만이 아닌 수단으로 간주되었던 다양한 인간 존재들과 다른 생명체들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아이들이 아니라, 친족을 만들자!’ - <인류세, 자본세, 플렌테이션세, 대지세 : 친족 만들기(Anthropocene, Capitalocene, Plantationocene, Chthulucene : Making Kin)>
<환경 인문학(Environmental Humanities)>(2015, 6번째 권)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 자연의 역사, 즉 지구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산업 자본주의체제와 거기에 포획된 인류의 힘을 우회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시대를 규정하려는 다양한 용어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인류세란 용어가 막연히 인류의 힘을 강조했다면, 자본세는 자본주의체제의 무한한 탐욕을 강조한다. 나아가 2014년 덴마크 오르후스대학에서 열린 학술대회에는 플래ㅐㄴ테이션세라는 용어가 제안된 적이 있다. 이 용어는 제3세계 국가에 다국적 자본들이 만든 수많은 플랜테이션들이 생태 파괴의 주범이라는 걸 강조한다. 플랜테이션이라고 불리는 기업화된 농장들은 생태 문제뿐만 아니라 심각한 인권 문제를 야기한 것으로 유명하다. 거의 노예제에 가까운 노동조건으로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을 착취했으니까. 플랜테이션세라는 용어는 전체 인간 세계가 하나의 자본주의체제로 묶이면서 선진국과 제3세계 국가 사이의 관계에도 ‘자본가-노동자’라는 관계가 관철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은 자신들의 공장을 제3세계 국가들로 이식하면서, 유럽에만 국환된 생태 문제를 전 지구적 문제로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인류세든 자본세든, 아니면 플래네이션세든 모두 지구 환경 파괴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견을 같이하는 용어다. 인류세가 인류의 반성을 촉구하고, 자본세가 자본주의체제의 폐단을 강조하고, 플랜테이션세가 자본의 세계화가 낳은 재앙을 경고한다. 이런 용어들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자본주의체제를 극복해 생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막연하기만 하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커스루센’이란 근사한 용어를 고안한 것이다.
2016년 저서 <곤경과 함께하기(Staying with the Trouble)>에서 그녀는 커스루센이란 용어가 ‘지상의’, 혹은 ‘대지의’라는 뜻의 희랍어 ‘크토니오스(khthonios)’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굳이 번역하자면 ‘대지세’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대지세는 하나뿐인 지구에 모든 생명체가 서로 공존하며 사는 시대,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종들이 풍요로운 앙상블을 이루는 시대”를 가리킨다. 여기서 대지세라는 용어가 인류세나 자본세, 혹은 플랜테이션세와는 다른 이유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산업자본주의 체제가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라 그걸 극복한 싣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인류세, 자본세, 그리고 플랜테이션세가 ‘구성적인(konstitutiv)’ 용어였다면 대지세는 ‘규제적인(regulativ)’ 용어였던 셈이다. 대지세는 산업자본주의시대를 해명하려는 용어가 아니라 산업자본주의체제를 극복하고 이루어야 하는 시대를 뜻하니까 말이다. 해러웨이가 대지세를 위한 실천적 강령을 제안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아이를 만들지 말고 친족을 만들어라!” 해러웨이의 요구를 친족이 아닌데 친족을 억지로 만들라는 이야기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녀에 따르면 “모든 지상의 것들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친족이고, ...... 모든 생명체를 수평적으로, 기호학적으로, 그리고 계보학적으로 공통된 ‘살’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는 공통된 살! 그건 지속적으로 살아 있는 지구를 가리킨다. 죽은 몸이나 혹은 무생물에게는 살이라는 용어를 쓰지는 않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들과 무관하게 지구가 살아 있다는 의미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생명체들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하고 있기에 지구는 살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친족을 확장하고 재구성하라고 요구한다. 인간은 이미 자연과 함께 살아가며, 지구라는 거대한 생태계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에서도 확인되는 인간중심적인 사유, 인간은 자연 바깥에 존재하며 자연을 지배하고 소유하는 존재라는 사유에서 벗어나라는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다른 종의 생명체뿐만 아니라 동료 인간을 지배하거나 소유하려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생며체는 수평적으로, 기호학적으로, 그리고 계보학적으로 공통된 ‘살’을 공유하는” 대등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녀가 왜 아이를 만들기보다는 친족을 만들라고 요구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내 아이’, 혹은 ‘우리 아이’라는 소유의식이 문제였던 것이다. 농업경제 시절 생겼단 오래된 인간중심주의다. 아이들, 특히 남자 아이를 선호한 이유는 그만큼 농사일을 감당할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문맥에서 부모와 자식은 양유고가 부양이란 교환관계에 묶이고, 이로부터 가족이란 배타적인 공동체가 형성된다. 이런 배타성이 어떻게 “공통된 살”을 공유하는 삶과 공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아이를 낳더라도 그 아이와 ‘친족’관계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내가 낳은 아이든, 남이 낳은 아이든, 아니면 나무늘보든 가시연꽃이든,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공통된 살을 공유하는 친족관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니까. 이렇게 친족이 많아지면 인간이 구태여 많은 아이를 낳을 이유가 있을까? 자기편을 많이 만들려고 노력할 이유가 있을까? 해러웨이가 꿈꾸는 대지세에서 인간의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친족관계를 이루는 것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삶은 충만함에 둘러싸일 테니까. 그래서 그녀는 대지세에 돌입한 지구의 미래를 조심스레 다음처럼 묘사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0년이 지나면 아마도 이 혹성의 인간종은 다시 20억이나 30억으로 줄어들고, 동시에 지금까지 목적만이 아닌 수단으로 간주되었던 다양한 인간 존재들과 다른 생명체들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275-281

친족이 된다는 것! 해러웨이의 칸트식 표현을 빌리자면 자연을 “단지 목적만이 아니라 수단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말 그것들과 친족이 되면, 어떻게 우리가 자본주의체제에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잉여가치 확보라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다수의 인간뿐 아니라 자연 전체를 수단으로 치부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체제니까.  282-283


거리를 두고 사람을 관조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삶에 뛰어드는 것!
후자는 전자가 줄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가르쳐준다. 그중 중요한 것 두 가지만 언급해보자. 첫째, 타인들의 삶에 뛰어들면 누구나 자신의 과거 관계를 자각하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 그 누구도 백지 상태에서 새로운 관계에 돌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자신처럼 타인들도 자신만의 고유한 관계와 역사를 전제한다는 걸 알게 된다. 타인을 이해하려면, 첫인상이나 직업 등 그에 관한 표면적인 정보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그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리고 과거에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그 역사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외국에 가야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걸, 나아가 자신이 특정 삶의 형식에 따라 살았다는 걸 자각하는 법이다. 결국 타인들의 삶이 낯설어 보였던 이유는 우리 자신이 특정 사회관계에 적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낯선 도시를 관광하는 것보다 그곳에 사는 것이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낯선 사람들이 내면화한 관계와 우리 자신이 내면화한 관계가 우리 자신이 내면화한 관계가 모두 드러나니 말이다.  290-291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영위되는지에 관한 진실 말이다. 이렇게 되물어보자. 지금 우리의 일상적 삶은 관광객이 아니면서도 관광객처럼 영위되고나 있지 않은지.  292-293

이제 생각해보자. 직장에서 우리는 관광객이지 않은가? 자신이 다니는 회사가 어떻게 작동하며 무엇을 생산하는지, 그리고 그 상품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고민하지 않으니까. 심지어 우리는 직장 동료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잇는지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업무상 관계로만 연결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관광객의 달러나 신용카드처럼 월급은 직장관계의 유일한 혈액이 된다. 가족들과 함께할 때도 우리는 관광객이지 않은가? 시부모가 친정부모도 심지어는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식들을 고립된 개인들로 식별하고 관조하고 있으니까. 돈과 선물이 가족관계를 유지하는 가느다란 끈이 되고 만다. 편의점이나 카페, 극장 등에 들를 때도 우리는 관광객이지 않은가? 계산을 해주는 젊은 이들이나 안내를 해주는 젊은이들의 내면과 그들의 역사를 읽으려고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돈을 받은 만큼 그에 어울리는 서비스를 행해야만 하는 사람들로 보일 뿐이니까. 여기서는 돈과 신용카드가 유일한 연결 줄이 된다.
여기에 스마트폰까지 가세하면 우리의 관광객 모드는 그야말로 정점을 찍게 된다. 파리의 시위 현장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는 것처럼, 이제 액정화면은 마치 영화를 보듯 세상을 관조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댓글을 달면서 사회에 참여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들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에 공감하고 악당을 욕하는 행위와 어떻게 다른가? ‘사변적 관조’가 아니라 ‘감성적 활동’이다. 관광객적 인식이 아니라 주체적 인식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모두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규정되어 있다는 걸 자각할 수 있다. 소망스럽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모색하려면, 우리는 먼저 자신이 어떤 관계에 포획되어 있는지 봐야 하는 것 아닐까?  293-294

관계의 변화가 바로 역사의 동력이다. 아니 더 단호하게 말한다면 관계의 변화 자체가 역사라고 할 수 있다.   294

그렇다고 관계와 역사를 파악하는 일이 만만하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둘 사이의 관계를 포착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처음에는 순간적으로 고립된 두 개체만 보일 것이다. 한 사람은 안경을 착용한 30대의 젊은 여성으로 청바지를 입고 있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리듬을 타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편안한 차림의 캐주얼 복장을 한 40대 초반의 남성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다. 여기까지가 포이어바흐의 직관적 유물론이 적용되는 지점이다. 그렇지만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나아가 두 사람이 각각 과거에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를 아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아주 천천히 두 사람을 관찰해야만 한다. 다행스럽게도 남성이 손을 들어 여성의 어깨를 감싼다면, 우리는 쉽게 두 사람이 연인관계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둘은 언제 어디서 만났을까? 둘은 왜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연인일까, 아니면 부부일까? 그것도 아니면 불륜관계일까? 벤치의 관찰마으로 해명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다. 그들을 계속 따라다니며 관찰해야 하고, 나아가 그들이 남긴 과거 흔적들을 찾아 헤매야만 한다.  294-295

‘3P의 삼각형’을 기억해보라. 권력(power)은 재산(property)과 가난(poverty)을 통해서 형성되고 재산과 가난 사이, 즉 부유한 소수와 가난한 다수 사이의 위계를 지키는 기능을 한다.  297

1863년 1월 1일 당시 미국 북구 비역의 지지를 받던 대통령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은 <노예해방 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을 발표한다. 1861년 4월 12일 시작된 미국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이 북부 지역이 승리로 끝나리라는 확신을 링컨이 피력한 셈이다. 흔히 남북 전쟁은 인권과 자유의 전쟁이고, 링컨은 민주 투사로 기억된다. 그렇지만 남북전쟁의 이면은 인궈느 자유, 혹은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남북전쟁은 산업자본주의체제에 맞게 값싼 노동자가 필요했던 미국 북부 지역과 목화농장을 위해 400만의 흑인 노예가 필요했던 미국 남부 지역 사이의 충돌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고대사회와 부르주아사회가 기이하게 병존했던 신대륙 국가 미국은 1965년 4월 9일 북부 지역의 최종 승리로 400만 흑인 노예를 흑인 노동자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해방된 흑인 노예뜰은 이미 노예로 태어난 노예 1세대의 까마득한 후예들에 지나지 않는다. 1619년 처음으로 흑인 노예 19명이 영국 식민지였던 북미대륙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에 들어온 이후로 수많은 노예선이 엄청난 흑인 노예를 실어 날랐다. 조상들의 땅 아프리카는 상사도 할 수 없는 그저 까마득한 전설의 땅에 지나지 않았기에, 해방된 흑인들 대부분은 그곳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가진 것이 몸뚱어리밖에 없었던 그들로서는 노동계급으로, 그것도 쵷ㅎ하의 노동계급으로 편입되었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선택지였던 것이다.
관계의 변화가 역사의 핵심이다! 문제는 그 관계가 억압적 관계라는 데 있다. BC 3000년부터 지금까지 지배계급은 억압의 양상을 변화시키면서 억압적 관계라는 본질은 그대로 유지해왔다. 역사의 발전을 외치는 모든 지식인이 기본적으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그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들은 과거보다 지금이 낫고, 지금보다 미래가 낫다는 진보의 이념을 표방하기 때문이다. 노예제를 극복하고 농노제가 들어온 것도 진보이고, 농노제가 사라지고 자본주의체제가 들어온 것도 진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소수 지배계급과 다수 피지배계급으로 구성된 근본적 억압구조는 조금도 변한 적이 없지 않은가. 단지 지배계급이 노예주에서 영주로, 그리고 자본계급으로 그 스타일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 노예는 목줄에서 벗어났지만 땅에 묶인 농노가 될 수밖에 없었고, 땅에 묶인 농노는 돈에 목을 매는 노동자가 되었을 뿐이다.  300-301

3P의 삼각형이 노예 재의 얼굴로 나타나자, 그 자유정신은 노예제와 맞서 싸웠다. 로마제국의 노예제에 도전했던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Spartacus, BC 111?~71)와 6만의 해방된 노예들이 바로 그들이다. 3P의 삼각형이 농노제로 변형되자, 이번에 그 자유정신은 농노제와 맞서 싸웠다. 1534년 에서 1535년까지 제빵사 얀 마티스(Jan Matthys, 1500?~1534)와 재단사 얀 반 레이덴(Jan van Leiden, 1509~1536) 등이 이끄는 재세례파가 독이 ㄹ뮌스터에 억압이 없는 공동체, 즉 코뮌을 구성해 봉건체제와 맞서 싸웠던 것이다. 3P의 삼각형이 이번에는 자본주의체제로 변신하자, 다시 자유정신은 이 자본주의체제와의 싸움에 목숨을 걸었다. 1871년 3월 18일에서 5월 28일까지 블랑키(Louis Auguste Blanqui, 1805~1881)의 정신으로 무장한 파리 시민들이 파리 코뮌으로 부르주아 정권과 맞섰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여기서 조금의 오해도 있어서는 안 된다. 스파르타쿠스 군단은 노예제 대신 농노제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얀 마티스와 얀 반 레이덴이 농노제 대신 자본주의체제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 파리코뮌 전사들 역시 자본주의체제 대신 스탈린의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모두 원했던 것은 코뮌, 즉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였을 뿐이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스파르타쿠스가 1871년 파리에 있었다면 자본주의체제와 맞서 싸웠을 것이고, 얀 마티스와 얀 반 레이덴이 BC 72년 로마에 있었다면 자유군단에 속했을 것이고, 블랑키가 1535년 독일 뮌스터에 있었다면 봉건체제의 포위를 뚫으려고 분투했을 것이다.  301-303

노예제는 노예가 스스로 자유인이 되었을 때 소멸되는 것이지, 누군가가 자유를 부여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니까. 남이 허락한 자유는 언제든 바로 그 사람에 의해 취소될 수 있다. ... 자유인은 스스로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그래야 누군가 자유를 뺏으려 할 때 그에 맞서 싸울 수 있으니까.  308

포이어바흐! 그는 관계도, 그리고 역사도 인식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저 자신 앞에 있는 것을 관조했던 순진한 철학자였다. 그가 로마시대에 살았다면 그는 노예는 노예로, 귀족은 귀족으로 보았을 것이다. 노예는 귀족의 발을 씻겨주고, 귀족은 역사와 삶을 논하는 풍경을 그저 당연한 이치로 여겼을 것이다. 주인뿐만 아니라 로마제국과 맞섰던 스파르타쿠스를 보았다면, 그는 이걸 일회적 사건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사실 노예가 주인에게 반기를 드는 사건은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 권력이 귀족들의 노예 소유권을 공권력으로 확실히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순종하는 노예와 자애로운 귀족 사이의 조화와 평화, 그리고 질서는 이렇게 억압적으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는 화려한 외양을 자랑하는 로마 제국의 피 묻은 뼈대, 즉 고대사회의 사회적 관계와 그 역사를 백일하에 폭로한 사건이다. 포이어바흐는 스파르타쿠스를 통해 고대사회 전체를 지탱했던 억압구조를 간파했어야 했지만, 불행히도 그는 그것을 일시적 일탈로만 보았으리라.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가 “유물론자인 한 포이어바흐는 역사를 다룰 수가 없고, 역사를 고찰하는 한 그는 결코 유물론자가 아니다.  ... 마르크스의 이야기처럼 포이어바흐의 직관적 유물론은 “역사와는 완전히 결별되어”있는 절름발이 유물론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309-310

불행한 것은 봉건사회에 태어났어도 직관적 유물론자로서 포이어바흐의 길은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귀족의 거대한 농장에서 농노들이 올리브를 수확하는 장면이나 아니면 귀족의 저택에서 주인의 발을 씻겨주는 농노의 부인의 모습이 그의 눈에 조화롭고 평화로운 풍경화처럼 보였을 것이고, 여우 사냥을 즐기러 나온 영주를 보고 잠시 농사일을 멈추고, 경의를 표하는 농노의 모습이 아름다운 풍경화로 들어왔을 테니 말이다. 물론 간혹 소작료에 저항하는 농노도 나오겠지만, 포이어바흐는 이것도 일시적 일탈로 치부했을 것이다. 영주와 농노를 관조하는 그에게 땅을 미리 독점해 무위도식할 수 있는 영주의 계급성이 보일리 없으니까. 직관적 유물론의 맹점은 부르주아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미 부르주아사회로 돌입한 19세기 부르주아국가 독일에서 태어났기에 포이어바흐의 눈에는 도자기공장, 자기 장인과 아내와 같은 자본계급, 그리고 노동자들이 평화로운 풍경화처럼 들어온다. 아내와 자신은 가까운 냇가에서 돗자리를 깔고 일몰을 응시하고 도자기공장에서 노동자들은 휴식시간에 해맑게 대화를 나눈다. 혹은 그가 공장에 들르기라도 하면 그곳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밝은 모습으로 자신에게 인사는 건넨다. 물론 그 자신도 노동자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는 걸 잊지 않는다. 자본가는 자본가이고 노동자는 노동자일 뿐이고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수탈관계를 볼 수 없기에 그의 마음은 편하기만 하다. 파업이라는 이례적인 사건이 벌어져도, 포이어바흐에게 있것은 노동자들의 일시적 일탈로 보일 뿐이다. 그는 노동자의 파업이 부르주아사회의 억압적 구조가 드러나는 징후라는 걸 알 수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으니까. 세계를 관조했던 대가는 이렇게 치명적이다. 자신도 모르게 포이어바흐는 부르주아사회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310-311

실천이 아니라면 삶에서 남는 것은 과조일 뿐이다.  312

‘낡은 유물론의 입장(Standpunkt)은 ‘부르주아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장은 ‘인간사회(menschliche Gesellschft)’ 또는 ‘사회적 인간(gesellschaftliche Menschheit)’이다. -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10
...
마르크스의 “사회적 인간”이란 개념. .. 인간 사회에서 모든 인간은 사회에 참여하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고, 모든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운명을 타인에게 맡기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결국 “인간사회”는 “사회적 인간들”의 공동체라는 생각이다.  312-313

스파르타쿠스 군단이, 뮌스터코뮌이, 파리코뮌이 원했던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 혹은 마르크스의 새로운 유물론이 서고자 했던 인간사회는 단호하게 분업체계와 배타적 활동을 거부하는 공동체다.  318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가 지향하는 두 가지 원칙만 확인하면 되니까. 첫째, 사회가 생산 전반을 통제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자본가 한 사람이 생산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 전체가 생산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는 그 일을 언제든지 멈출 수 있는 자유를 전제한다는 점이다. 생산의 사회성과 노동의 자유! 인간사회, 혹은 사회적 인간의 두 다리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가 “참된 현실적 공동체(der wirklichen Gemeinschaft) 속에서, 각 사람들은 그들의 연합(Assoziation) 속에서, 그 연합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자유(Freiheit)를 획득하게 된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319


BRIDGE - 다시 불러보는 인터내셔널의 노래

<인터내셔널 찬가>
일어서라!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이여!
일어서라! 기근의 죄수들이여!
이성은 화산처럼 요동친다.
이것은 종말의 분출이다.
과거를 백지로 만들자.
노예가 된 대중들이여! 일어서라! 일어서라!
세계의 토대가 바뀌고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다.

<코러스 ; 마지막 싸움이다.
함께 모이자, 그리고 내일
인터내셔널은
인류가 되리라.>

최상의 구원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도 아니고, 케사르도 아니고, 호민관도 아니다.
생산자들이여! 스스로를 구하라.
공동의 구원을 포고하라!
도둑이 자기가 먹은 것을 토해내고
정신이 자기 감옥에서 풀려나올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풀무질을 하고,
뜨거울 때 쇠를 두드려라.

<코러스>

국가는 억압하고, 법은 기만하고
세금은 피 흘리게 한다, 불운한 자들을.
어떤 의무도 부유한 자에게 부과되지 않고
가난한 자의 권리는 공허한 말일 뿐.
감시는 충분히 힘들 만큼 견뎠다.
평등은 다른 법을 원한다.
의무 없이는 권리도 없다고 새로운 법은 말한다.
평등하게 권리 없이는 의무도 없다고.

<코러스>

찬양에 몸을 숨긴
광산의 왕들과 철도의 왕들!
그들은 지금까지 노동을 훔치는 일 외에
무슨 일을 했었나!
도둑들의 견고한 금고 안에는
노동이 창조했던 것들이 들어가 있다.
그 도둑들에게 그걸 되돌려주라고 명형하자.
민중들은 단지 자기 몫만 원할 뿐.

<코러스>

왕들은 우리를 연기에 취하게 했다.
우리 안의 평화, 폭군에 대한 전쟁!
군대들이 파업해,
진압을 포기하고 서열을 해체하도록 만들자!
만일 그들이 완강히 버틴다면, 이 카니발들은
우리를 영웅으로 만들 것이고,
그들은 곧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총탄이
우리 장군들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코러스>

일꾼들이여! 농민들이여! 우리는
노동자들의 가장 큰 부분이다.
대지가 인간들에 속할 때만.
게으른 자는 다른 곳에 머물 것이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살을 그들은 소진시켰는가?
그러나 성직자들, 고리대금업자들이
어느 날 사라진다면,
태양은 언제나 항상 빛나리라.

<코러스>

- <인터내셔널 찬가> (1871)  323-325



역사철학 2강 - 파리코뮌을 보아버렸던 시인 랭보

70여 일 짧은 시간 동안 유지된 파리코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찬란했던 순간에 랭보는 코뮌의 핑크빛 후광을 받은 파리와 파리 시민들을 가장 자연적으로 그리고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했던 겁니다. 그러나 70여 일이 지나 파리코뮌이 괴멸되고 과거의 위계 질서가 복원된 뒤 돌아보면, 1881년 3월 18일에서부터 5월 28일까지 존속했던 그 찬란했던 시간은 마치 꿈인 것처럼, 마치 상징인 것처럼, 마치 초현실적인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냥 간단히 이렇게 정리해보죠. 파리코뮌 시기에 랭보의 시는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자연적인 것이었다고, 그렇지만 그 찬란했던 시기가 지나고 나자 이제 그의 시는 상징적이고 초현실적인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입니다. 이런 착시효과는 현재 우리의 의식에도 그대로 적용되죠. 파리코뮌의 인문주의나 민주주의에 온몸으로 공명하는 독자라면 랭보의 시는 심장을 바로 뛰게 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감동을 바로 전달할 겁니다. 반대로 권위적인 정치질서나 신자유주의로 노골화된 자본주의체제에 적응한 독자라면 래보의 시는 상징적이고 초현실적인 것으로, 그만큼 난해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간신히 머리로만 이해될 수 있을 겁니다.  343

지배계급의 눈치를 보면서 피지배계급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는 순간, 문학은 그리고 시는 억압체제에 대한 찬가가 됨.  352

‘주관적 시’는 객관에 대한 투철한 인식 없이, 그냥 주관이 백일몽을 꾸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강철 덩어리가 물에 둥둥 뜨는 몽상에 빠지고 희희낙락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죠. 반면 ‘객관적 시’는 실현 불가능한 백일몽이 아니라, 세상을 변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객관적 시’는 강철의 속성들을 정확히 알고, 그 속성을 어기기는커녕 그걸 이용해 물에 뜰 수 있는 강철 배를 설계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죠.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객관적 시’가 가능하려면, ‘객관(=대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만일 이런 인식이 없다면 아무리 ‘객관적 시’를 썼다고 해도 그것을 바로 ‘주관적 시’로 전락할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객관(=대상)’을 정확히 인식한 사람이 없다면, ‘객관적 시’는 불가능한 법입니다. 바로 이것이 랭보가 “저는 시인이 되고 싶고, 스스로 견자(見者, voyant)가 되려고 분투하고 있다”(<1871년 5월 13일 이장바르에게>)고 말했던 이유입니다. 견자는 글자 그대로 보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내 의지나 바람에 따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나 바람을 좌절시키면서 내 앞에 주어진 것을 봐야 합니다. 만일 내 의지나 바람, 혹은 감정에 따라 본다면, 그것은 객관적으로 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주관적으로 본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대상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지 않더라도 대상이 보라고 강요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 바로 그가 견자입니다. 결국 견자가 되려면, 우리는 이미 훈육되어 익숙한 사유나 감정들, 혹은 우리 내면에 이미 각인되어 작동하는 견해나 감정, 그리고 의지를 해체해야만 합니다. 랭보가 견자가 되는 방법으로 “모든 감각들의 착란”을 이야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354

이것만 보고 저것은 보지 말라고 하는 체계는 우리를 훈육하고, 그 결과 우리는 정말 눈에 보이는 것마저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니 보지 말라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에게는 불안감과 불쾌감이 엄습할 겁니다. 보이는 대로 보려면, 아니 정확히 말해 이렇게 보라고 강요하는 대상을 제대로 보려면, 우리는 감각의 질서를 규정하는 지배적인 사유체계와 가치체계를 전복해야만 합니다. 결국 견자가 된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주체로 태어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스스로를 노예로 자처했던 노동자들이 당당히 주인이라고 선언했던 것이 파리코뮌이라면, 체제가 강요하는 감각들의 질서를 뒤죽박죽 만드는 것이 바로 랭보의 견자였던 셈입니다. 감각들의 착란을 통해 견자가 되었을 때, 그가 보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가 보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바로 이것이 랭보가 말한 ‘미지(l’inconnu)’입니다 한국어로 ‘미지의 것’으로 번역된 프랑스어 ‘랭코뉘(l’inconnu)’는 이외에도 ‘보잘것없는 것’이나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사실 무언가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는 ‘미지’라는 뜻보다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이란 의미가 훨씬 더 랭보가 말한 ‘랭코뉘’의 뜻에 가까울 듯합니다.  355

랭보가 제안했던 ‘견자의 미학’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자유로운 주체, 즉 견자가 되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을 보게 된다고 말입니다.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을 보게 된 견자가 그것을 언어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시인이 될 수 있습니다. 랭보가 말한 ‘객관적 시’는 바로 이렇게 탄생하게 되지요.  356

그(랭보)에게 “시인은 진실로 불의 도둑”. 제우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불을 건네준 프로메테우스! 시인은 바로 프로메테우스 같아야 한다는 겁니다. 권력자나 지배계급의 불이 힘이 있는 이유는 다수 피지배계급에게 불이 없어서 입니다. 어둠 속에서 공포와 탄식의 삶을 피지배계급이 영위하는 것도 지배계급이 불을 독점했기 때문이죠. 프로메테우스처럼 그 불을 훔쳐 피지배계급에게 가져와 암흑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들이 갈 길을 명료히 보도록 도와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소임이자 자부심의 원천이죠. “인류, 심지어는 동물까지도 모두 짊어지는 것!”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가 그리고 1871년 랭보가 감당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357-358

랭보는 관료들과 글쟁이들을 작가, 창작자, 시인과 구별합니다. 그에 따르면 기존의 규칙, 기존의 이성, 혹은 기존의 사유에 따라글을 쓰는 사람들이 바로 관료들이나 글쟁이들입니다. 그러나 감각들을 착란시켜 기존의 규칙, 이성, 사유를 전복시켜서 감각들의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글들이 출현할 수 없는 법이지요. 바로 이래야 진정한 시인, 혹은 진짜 시인이 탄생하는 것 아닌가요. 반대로 가짜 시인도 존재하죠. 그것은 관료처럼 글을 쓰는 시인들, 과거 위대한 시들에서 규칙과 테크닉을 축출해 그에 따라 시처러 ㅁ보이는 시들을 쓰는 시인일 겁니다. 진정한 시인은 이런 식으로 탄생할 수 없습니다.  358-359

기존 사유에서 해방된 감각, 혹은 착란된 감각으로 세계를 느끼는 사람이 견자라면, 이렇게 느낀 세계에 새로운 언어를 부여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작가이자 창작자, 그리고 랭보의 경우에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각들의 착란으로 기존 사유가 붕괴됩니다. 자유와 해방은 바로 여기서 가능해지는 셈이지요. 바로 이 해방된 감각들의 힘으로 견자는 세계를 보게 됩니다.  359

관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주관적 시’를 쓰는 시인들에게 견자의 삶이나 시는 무언가’비규범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고, 당연히 저주받고 모욕당하기 쉽지요.  359-360

파리코뮌을 경험했던 사람들이나 지금 새로운 코뮌을 꿈꾼느 사람들의 눈에는 랭보의 작품은 너무나 규버적이고 쉬워 보일 겁니다. 반대로 파리코뮌을 부정하거나 애써 회피하면서 자본, 국가, 종교에 포획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면 랭보의 시는 비규범적이고 난해해 보일 테죠.  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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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종교적인 것과 관조적인 것을 넘어서


역사철학 1장 - 붉은 피로 지켜낸 파리코뮌

블랑키.
1885년 출간된 <사회적 비판 (Critique Sociale)> 두 번째 권에 “자본가의 기생이 대중들의 빈곤을 낳는 원인이다.” ... 항상 생산수단 독점은 폭력수단 독점과 함께하는 법입니다. 결국 피억압자가 억압자의 힘을 압도할 수 있는 ‘힘(force)’을 가지지 않는다면, 정의와 평등은 그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생산수단 독점에 맞서 싸우면서 폭력수단 독점과는 싸우지 않겠다는 투쟁, 즉 간디식 비폭력 투쟁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승리야 가능하겠지만, 이런 투쟁이 현실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을 테니 말입니다. 47

파리코뮌 시기 혁명가 트리동(Gustave Tridon, 1841~1871)의 책 <에베르주의자: 역사의 재난에 맞서는 탄식(Les Hebertister: plainte contre une calomnie de I’Histoire)>에 블랑키가 쓴 서문입니다.
‘승리는 옳은 자(le droit)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승리가 없다면 옳은 자는 더 이상 옳을 수 없게 되고, 대천사의 발톱 아래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탄처럼 될 테니 말이다.’ - <서문> (1864) 49

19세기의 파리는 단순히 프랑스의 수도만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의 수도였죠. 이 도시를 ‘악의 꽃(Les Fleurs)’이라고 느꼈던 시인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보들레르(Charles Pierre HBaudelaire, 1821~1867)입니다. ‘악의 꽃’은 매춘부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돈이 있어야 품을 수 있는 존재가 매춘부인 것처럼, 자본주의의 수도 파리도 돈이 없다면 향유할 수 없는 ‘악의 꽃’이었던 겁니다. 51

어떤 것을 정의하려면 그것에 대립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법입니다. 73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생산수단을 가진 자가 그렇지 못한 자를 지배한다는 정치경제학적 진리를 말입니다. 81

생산수단, 특히 토지나 자본을 공동 소유하는 것이 원칙인 사회, 바로 그것이 코뮌입니다. 83

자유를 되찾은 사람에게 항복은 죽음보다 끔찍한 일이죠. 85



정치철학 1장 - 종교적인 것에 맞서는 인문정신

자기소외((Selbstentfremdung), 혹은 소외(entfremdung)라는 개념. 이는 자신이 만든 것이 자신에게 낯선 것으로 다가오는 현상을 가리킨다. 103

무언가를 긍정한다는 것은 그것을 다른 걸로 바꿀 수 없다는 의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긍정이 항상 단독성의 긍정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
니체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개체, 그리고 세상을 “존재하는 유일한” 것, 즉 단독적인 것으로 긍정하려고 한다. 119

모든 지배와 억압의 논리 이면에는 단독성을 특수성으로 치환하는 작업이 수행된다는 걸 잊지 말자. 120

불멸하는 영혼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몸을 경멸하게 된다. 돈이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상품으로 팔리는 굴욕을 겪는 것처럼, 혹은 인간, 노동자, 학생, 여자, 남자, 유대인, 한국인, 일본인 등등 일반 개념이 등장하면서 단독적인 개체들은 특수한 개체들로 분류되어 지배되는 것처럼. 121

신으로부터 창조행위를 빼앗은 인간, 억압된 창조력을 폭발시키는 인간을 니체는 위버멘쉬라고 부른다. ... 위버멘쉬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을 뜻하는 ‘멘쉬(mensch)’가 아니라 ‘넘어선다’는 의미의 ‘위버(Uber)’다. 124


고고학에 따르면 농업혁명이 일어나기 전 인류에게는 전쟁도 없었고, 종교도 없었다. ... 종교나 정신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수렵채집 시기에는 ‘우월(superiority)과 열등(inferiority)’이라는 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들소 사냥에 성공했다고 해도 인간은 자신이 들소보다 우월하다고 느끼지 않았고, 반대로 사냥 중에 들소의 뿔에 받혀 죽어가면서도 인간은 들소보다 자신이 열등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야생 사과를 딸때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자신이 우월하고 그 사과가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한마디로 말해 자연에 대해 인간은 우월이나 열등에 대한 의식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애니미즘으로 상징되는 이런 자연관은 그대로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한 인간은 다른 인간보다 약할 수는 있지만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반대로 다른 인간보다 강할 수는 있지만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26-127

BC 8000년 즈음 농업혁명이 발생하면서 모든 것이 변한다. 분명 농업혁명이 수렵채집 시기보다 더 큰 풍요와 안정을 가져다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 잉여 생산물의 증가는 인구 증가와 인구 밀집을 낳았고, 이것이 인간을 기아와 질병에 노출시켰다. 127

농업시대에 들어서면서 생산수단을 가진 자가 그렇지 않은 자를 지배하고 수탈하는 억압과 착취 형식이 발생한 것이다. 129

농경생활에 들어오면서 인간에게는 ‘우월’과 ‘열등’이란 의식이 발생한다. 129

농경생활이 진행되면서 전체 우주는 우월과 열등의 질서로 재편되고 만다. 마침내 ‘신-인간-자연’, 조금 구체화하면 ‘신-지배자-피지배자-자연’이란 위계질서가 탄생한 것이다. 130-131

마르크스는 국가나 사회가 ‘전도된 세계’라고 단언. 전도된 세계라는 것은 제대로 서 있는 세계가 아니라 뒤집혀 있는 세계라는 의미다. 생부지의 사람 10명이 식사를 하려고 한다. 9명이 짜장면을, 나머지 1명은 김치찌개를 먹고 싶었다. 9명은 중국집에 가고 나머지 1명은 한식집에 가면 된다. 이것이 정상적인 세계, 혹은 제대로 서 있는 세계다. 그런데 이들 10명은 모두 한식집에 가서 김치찌개를 먹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9명은 1명의 압도적 힘에 굴복하고, 그 결과 원하지 않은 음식을 먹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도된 세계다. 154-155

‘약하다’는 의식과 ‘열등하다’는 의식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자신이 약하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은 차근차근 강해질 준비를 하거나 혹은 자신을 지배하는 사람이 약해질 때를 호시탐탐 노릴 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이 열등하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은 그저 우월한 사람이 자신을 더 아껴주기를 기대할 뿐이다. 열등한 사람들이 언제든지 최고로 근사한 지배자를 상상하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의 고난을 속속들이 아는 지배자, 자신의 고난을 덜어주려는 의지를 가진 지배자, 그래서 하염없이 자신을 사랑하는 지배자를 꿈꾸게 된다. 바로 이때 신은 탄생한다. 마르크스가 “이 국가, 이 사회는 전도된 세계이므로 종교, 즉 전도된 세계의식을 생산한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계보학적으로 생각해보자.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한다. 그 지배를 영속화하기 위해, 혹은 약한 자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지배자는 피지배자의 내면에 열등의식을 각인시킨다. 155-156

‘종교에 대한 투쟁은 간접적으로 정신적 향료로 종교가 가지고 있는 저 세계, 즉 피안(jene Welt)에 대한 투쟁이다. 종교적 고통은 현실적 고통의 표현인 동시에 현실적 고통에 대한 저항이다. 종교는 억압된 자들의 한숨이자, 심장 없는 세계에서의 심장이고, 영혼 없는 상황에서의 영혼이다. 한마디로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민중에게 환각적 행복을 낳는 종교를 폐기하라는 이유는 민중으로 하여금 현실적 행복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민중에게 자기 삶의 조건에 대한 환각을 포기하라고 요청 한다는 것은 환각을 필요로 하는 조건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 비판은 태생적으로 종교가 후광이 되는 눈무르이 골짜기에 대한 비판일 수밖에 없다.’ - <서문> <헤겔 법철학 비판> (1843). 158

마음껏 사유하고 마음껏 의지하고 마음껏 사랑하는 격조 높은 삶, 인간 일반의 본질을 실현하는 근사한 삶을 살지 못해서 인간이 종교를 만들고 그것을 믿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차안에서 사는 삶이 너무나 불행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가 파는 아편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해 피안에서의 작은 행복이나마 꿈꾸었던 것이다. ... 마르크스가 “민중에게 환각적 행복을 낳는 종교를 폐기하라는 이유는 민중으로 하여금 현실적 행복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 이유다. 환각적 행복에 취해 있다면, 민중은 현실적 행복을 얻으려는 투쟁에 나설 수 없으니까. 1559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 종교는 단지 인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환상적인 태양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피안(Jenseits der Wahrheit)이 사라진 뒤에, 차안의 진리(Wahrheit des Siesseits)를 확립하는 것은 역사의 임무다.’ -<서문> <헤겔 법철학 비판> 162


‘열등’과 ‘우월’과 관련된 감정이 종교적 감정이라면, 가장 최고의 종교적 감정은 바로 자본주의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168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불교든 세게 종교는 하늘, 고독, 여행, 그리고 무역과 함께하는 종교일 수밖애 없다. 결국 숙명적으로 세계 종교는 자본주의와 같은 혈족이었던 셈이다. 즉 화폐경제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수많은 지역 종교들은 자의 반 타의 반 고사와 괴멸의 길을 걸어갔다. 185

18세기와 19세기 영국 도처에서 일어났던 ‘인클로저(enclosure)’, 즉 ‘울타리 치기’와 ‘고지대 청소’라고 번역할 수 있는 ‘하이랜드 클리어런시스(highland Clearances)’에 주목해야 한다. ‘울타리 치기’는 소수의 자산가들이 과거 공유지엿던 곳에 울타리를 쳐서 그곳을 사유지로 만드는 과정을 말한다. 엄청난 양의 공유지가 사라지자, 수많은 빈농들은 이제 더 이상 땔감을 얻거나 사냥을 하거나 소나 양을 키울 수 없게 된다. 당시 ‘울타리 치기’를 시행했던 소수의 기득권층들은 국가로부터 법률적 보호를 받았지만, 생계의 위험에 노출된 다수의 농민들은 공장이 있는 대도시로 몰려가 저임금노동자로 전락하고 만다. 인클로저 법인이 영국 국회를 처음으로 통과했던 때는 1773년이었다. 농민을 임금노동자로 만들 필요가 더 많아지자, 1845년부터 1882년까지 국회를 장악하고 있던 기득권층들은 인클로저 법안을 자그마치 15번이나 개정하게 된다. 그만큼 당시 지배계급들은 농민들을 프롤레타리아로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고지대 청소’는 영국 북부 고지대에서 농사를 짓던 소작농들을 깨끗이 청소하는 과정을 말한다. <자본론>에 등장하는 서덜랜드 공작부인(the Duchess of Sutherland, 1765~1839)이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녀는 영국군을 고용해 1만 5000명의 소작농을 내몰고 80만 에이크의 땅에 양 13만 1000마리를 방목한다. 1마 ㄴ5000명의 고지대 농민들도 ‘울타리 치기’로 대도시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던 농민들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고, 아울러 고지대에서 키운 양털들은 맨체스터나 글래스고 등에서 번성했던 직물산업의 원료로 공급된다. 191

체제의 대변인들은 18세기에도, 19세기에도, 20세기에도, 그리고 지금 21세기에도 동일한 이야기를 반복한다. 자본주의 이후 인간의 삶은 생각하지 못할 만큼 좋아졌다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데 이로운 자료들을 알아볼 만큼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기에, 예나 지금이나 그들은 이런 자료들을 토대로 자본주의를 옹호하기에 여념이 없다. 첫째, 노예제도나 농노제도가 사라지면서 인격을 긍정하는 사회가 열렸다. 둘째, 사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않았던 폐쇄적인 공동체가 사라지면서 개방성이 확산되었다. 셋째, 장인이 되려는 사람들에게 도제 생활을 강요했던 장인공동체가 소멸되고 평등하고 보편적인 교육제도가 정착되었다. 넷째, 여성들의 삶을 옥죄던 가부정적 가족 질서도 힘을 잃게 되면서 여성이 해방되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자기 찬양도 이 정도면 거의 정신분열 수준이다. 이 안에는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피로 얼룩지고 불길에 타오르는 문자”로 기록될 수밖에 없는 강압과 수탈의 역사가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 농민에게 지대를 받는 것보다 그들을 노동자로 만들어 착취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걸 지배계급이 자각했을 뿐이다. 192-193

산업자본주의체제가 정착될 때마다 ‘울타리 치기’나 ‘고지대 청소’와 같은 정책이 항상 수반되었다는 사실이다. ... ‘울타리 치기’와 ‘고지대 청소’ 정책은 스탈린체제의 경우 ‘집단농장’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으로, 그리고 중국이나 인도, 브라질의 경우 지역공동체 해체 정책으로 반복되었던 것이다. 195

‘자유로운 노동자(Freie Arbeiter),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자, 그러므로 노동을 파는 자가 있다.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뜻이다. 즉 노예와 농노처럼 그들 자신이 직접 생산수단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자유롭다는 의미이고, 또 자영농민의 경우처럼 그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즉 생산수단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다는 의미다.’ - <자본론> 1권 (1867) 197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에게 자유란 아주 제약된 것임을 폭로한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어느 자본가에게 팔 것인지를 결정할 자유만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이것은 전혀 자유가 아니다. 자기 노동력을 판매할 수도 있고 판매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는 노동자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을 자유는 노동자들에게 단지 자살할 자유만을 의미할 뿐이다. 200

자본주의가 단순한 억압체제를 넘어서는 지점은 그것이 종교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노동력을 팔아야만 생활할 수 있는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를 양산한 주범이면서도, 자본주의체제는 노동계급마저 자본을 숭배하도록 유혹할 수 있다. 돈은 피안의 막연한 행복보다 차안의 행복을 보장한다는 악마의 속삭임이다. 201

농업경제가 지배하던 시절 제정신을 가진 농민들은 땅을 독점하는 억압체제에 저항했고, 산업경제가 지배하던 시절 정상적인 노동자들은 돈을 독점한 체제와 맞서 싸웠던 것이다. 이와 달리 자본교도로 거듭난 노동자의 안중에는 억압이 없는 사회, 즉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의 속내에는 지배자가 되려는 욕망만이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교도는 자본가로부터 착취당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자본가가 되려는 뒤틀린 욕망을 가지고 있다. 맞는 사람이 되기보다 때리는 사람이 되겠다는 말초적 생각이니, 이것보다 왜곡된 욕망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본교가 교세를 확장할수록, 자본주의의 억압구조는 그만큼 어떤 저항이나 도전도 받지 않는다. ...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가 “종교 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라고 말했던 이유다. 202

마르크스나 짐멜이 기독교와의 유사성을 통해서 자본교를 해명하려고 했다면, ... 벤야민은 기독교와 자본교 사이의 유사성뿐만 아니라 그 차이점도 분명히. 203

벤야민에 따르면 자본교의 첫 번째 특징은 “숭배의 구체화”다. 자본교도는 감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대상, 즉 구체적인 상품을 숭배한다는 것이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며 감각을 초월한 신성에 몰두하는 기독교의 숭배와는 완전히 반대 방향이다. 두 번째 특징으로 벤야민은 “숭배의 영속화”를 이야기한다. 매일매일 휴일도 없이 자본교도는 강박증적으로 상품숭배에 몰두한다는 의미다. 반면 기독교도는 보통 주일을 기다려 예수와 신을 숭배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자본교가 기독교와 달라지는 지점은 자본교의 세번째 특징에서 분명해진다. 벤야민은 자본교의 “숭배는 ‘죄를 만드는(verschuldend)’ 것”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숭배가 속죄행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자본교는 그야말로 기독교와 완전한 대척점에 있는 종교였던 것이다. 벤야민의 주장은 명확하다. 상품에 대한 숭배, 즉 “구체적인” 상품을 “영속적으로” 구매하는 행위는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신적인 돈을 상품의 성전에 제물로 바치니, 이것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벤야민은 부연한다. “자본주의는 아마도 속죄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만드는 숭배의 첫 번째 사례일” 것이라고, 여기서 벤야민이 사용하는 단어 ‘슐트(schuld)’에 주목하자. 독일어 ‘슐트’는 ‘죄’만이 아니라 동시에 ‘부채’를 의미한다. 그러니 자본교의 숭배는 죄를 만드는 숭배이자 동시에 부채감을 만드는 숭배였던 셈이다. 208-209

자본주의가 종교로 기능하는 이유는 이 체제가 인간에게 우월과 열등에 대한 신앙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 신분사회만이 인간에게 열등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만큼 집요하게 열등의식을 우리 뇌리에 각인하는 체제도 없으니까. 억압체제가 항상 승승장구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지배계급의 주문에 걸려 자신이 열등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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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 우파니샤드, 인도 철학과 사상의 바이블

우파니샤드는 인도 정신문명의 뿌리인 베다의 꽃이요 열매다. 베다 정신의 총합이 곧 우파니샤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베다의 마지막 결정체라는 뜻으로 우파니샤드를 베단타 철학이라 이른다. 베단타 철학은 우파니샤드의 내용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다른 이름이다.  13-14

우파니샤드 이전에 인도 최초의 고전적 경전인 베다가 신화와 제의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전개했다면, 우파니샤드는 신화와 제의적 겉치레에 종지부를 찍고 인간 내면의 각성과 탐구에 중점을 두는 세계관의 전환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구약성서의 모세 율법에 대해 신약성서의 예수가 사랑의 율법을 새롭게 천명한 것과 같다. 따라서 베다를 구약성서에 비유한다면, 우파니샤드는 신약성서에 비유되기도 한다.  15


우파니샤드는 어떤 철학인가 - 우주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가르침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다. 인더스 문명이 발원하던 기원전 3000년 무렵 이후 오랜 침묵의 세월이 흐른 뒤, 서부 아시아에서 아리아인들이 인도 대륙을 점령해 들어오면서 새로운 인도 문화를 꽃피운다. 그 문화의 꽃이 인도 초기의 고전적 종교 경전으로 손꼽히는 유명한 <리그베다>(Rig Veda)에 드러나 있다. 이 경전은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000년 무렵에 형성된 것으로, 우주 창조의 노래, 최초의 인간의 탄생 과정, 죽음과 장례의 노래, 그리고 제의와 각종 신들에 대한 찬가로 가득차 있다.
그 후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 500년간 <리그베다>에 나타난 고대 사상을 인간 내면의 세계와 결부시켜 철학적으로 발전시킨 고전적 지혜의 담론이 우파니샤드(Upanishads)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우파니샤드가 인도 문화와 종교, 사상의 꽃을 피우던 기원전 6세기 무렵에는 자이나교의 창설자 마하비라(Mahavira, 기원전 540~기원전 468)와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 기원전 563~기원전 483)가 나타나 동시대에 각각 다른 형태의 종교적 가르침을 펼치기도 했다. 이 시대에는 브라만(brahman) 계급을 중심으로 한 바라문교와 불교 그리고 자이나교가 널리 퍼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서기 1000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인도에서 불교의 위력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그 후 이슬람 문명의 침입으로 힌두 문명과 함께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문명과 충돌 또는 습합(習合)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19-20

10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도시 중심의 부와 중앙집중식의 권력이 와해되었고, 질서가 무너지면서 통제가 불가능해진 시기에 아리아인(‘고귀한 자’라는 뜻)들이 침입해왔고, 인더스 강의 지류가 변하는 지리학적 변화와 함께 찬란했던 고대 인더스 문명은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리아인들이 백지 상태에서 전혀 새로운 문명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인더스 문명은 잔존해 있었고, 남쪽이나 갠지스 강변에 흩어져 있던 피정복민인 비(非)아리안 민족 속에서도 인더스 문명은 전승되고 있었다. 바로 이들이 간직한 인더스 문명은 전승되고 있었다. 바로 이들이 간직한 인더스 문명이 아리아인들의 문화 속으로 유입되면서 또 하나의 위대한 문명, 곧 인도-아리안 문명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
인더스 문명의 원주민들이 농업을 중심으로 한 농부들이었다면, 아리아인들은 목축업을 위주로 하는 유목민들 이었다.  24

문학적 형태로 된 우파니샤드는 그 문헌의 수가 200개를 넘어선다. 하지만 대개 인도의 전통에서 그 수를 108개로 제한하고 있는데, 이는 <묵티카 우파니샤드>(Miktika Upanishad)에서 구원(해탈)은 108개의 우파니샤드를 공부해야 가능하다고 한 데서 비롯된다.  40

우파니샤드에서 진리란 특정 개인에 속한 것이 아니며 영원한 것이고, 영감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신의 계시와 인간의 응시(contemplation)라는 두 측면을 지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42

우파니샤드는 분명 체계적이고 짜임새 있는 철학적 성찰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정신적 각성과 계몽의 수단으로 작용하며, 고도의 추상적이고도 풍부한 영적 경험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추상적이라 해도 인간의 개인적 경험의 차원을 떠나 있는 것도 아니며 논리적 이성을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내면의 명상에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향한 진정한 지식의 추구라는 점에서 실천적 수행의 차원을 담고 있는 구원의 철학 체계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파니샤드의 철학, 곧 브라흐마 비드야는 삶을 통한 지혜의 추구 그 자체다.  43

“진실로 먼저 브라만이 있었다. 그는 오직 그 자신에 대해 ‘나는 브라만이다’라고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이 되었다. 신들 중에 누구든지 이 사실을 진실로 깨달은 자는 그와 같이 되었다. 이것은 현자들이나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실로 현자 바마 데바도 이것을 알고 ‘나는 마누(Manu)였고 태양이었다’고 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구든지 이와 같이 ‘나는 브라만이다’라는 깨달음을 얻으면 이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신들도 이같이 브라만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하는 까닭은 깨달은 자는 신들의 아트만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자신과 브라만을 다르게 생각하면서 (그 자신의 아트만 외에)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자는 깨달은 자가 아니다. 그는 신들에게 희생되는 동물과 같다. 짐승들이 사람에게 봉사하듯 그도 신들에게 봉사할 따름이다. 한 마리의 짐승이 없어져도 기분이 나쁠 텐데 많은 짐승들이 없어진다면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신들은 인간이 (브라만을) 깨닫게 되는 것을 조항하지 않는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4.10)
우선 브라만의 우선성을 말하고 있다. … 브라만에게서 만물이 시작되고 만물이 그에게 귀속됨을 말한다. 그런데 그 브라만이 바로 깨닫는 자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이다. ..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 누구에게나 유효하다. …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 행위는 동물들이 인간에게 봉사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그러므로 자신과 브라만의 동일성을 깨닫지 못하고 제사나 드리는 행위는 짐승 같은 행위에 불과하다고 혹평한다.  44-45

“사칼리야가 말했다.
‘야즈나발키야여, 쿠루-판찰라의 브라흐마나를 경시하면서까지 그대가 안다고 말하는 바라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나는 신들과 신들의 기반이 되는 사방의 방향을 알고 있소.’
야즈나발키야가 대답했다.
‘그대가 신들과 그 신들의 기반이 되는 방향을 안다면 동쪽 방향은 어떤 신이라고 생각하오?’
‘태양신이오.’ 야즈나발키야가 대답했다.
‘그러면 태양신의 기반은 무엇이오?’
‘눈(眼, caksus)이오.’
‘눈의 기반은 어디요?’
‘형태(色, rupa)요.’
‘형태의 기반은 어디요?’
‘마음(hrdaye)이오. 마음을 통해 형태를 알 수 있기 때문이오. 오직 마음에만 형태가 기반할 수 있는 것이라오.’ 야주나발키야가 대답했다.
‘야즈나발키야여, 옳은 말씀이오.’”(<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I.9.20)  46-47

“‘남쪽을 그대는 어떤 신으로 여기시오?’
‘죽음의 신이오.’ 야즈나발키야가 대답했다.
‘그러면 죽음의 신의 기반은 무엇이오?’
‘사제에게 바치는 봉헌 제물이오.’
‘사제에게 바치는 봉헌 제물의 기반은 무엇이오?’
‘믿음이오. 믿음이 있을 때 사제에게 봉헌 제물을 바칠 수 있기 때문이오.’
‘그러면 믿음의 기반은 무엇이오?’
‘마음이오.’
‘마음을 통하여 믿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오. 실로 마음에만 믿음이 기반할 수 있는 것이라오.’ 야즈나발키야가 대답했다.
‘야즈나발키야여, 옳은 말씀이오.’”(<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I.9.21). 47-48

제사도 희생적 봉사도 중요하지만 우파니샤드는 브라만과 아트만을 이해하는 지혜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55



1 둘이 아닌 하나의 세계 - 우파니샤드의 불이론

“이제 실로 세 개의 세계가 있다. 인간의 세계, 조상의 세계, 신들의 세계가 그것이다. 인간의 세계는 자식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지 다른 수단을 통하여 되는 것이 아니다. 조상들의 세계는 의례와 같은 행위로 구제되는 것이고, 신들의 세계는 지혜로 획득된다. 실로 신들의 세계는 최상의 세계다. 그러므로 지혜를 찬양하라.”(<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5.16)  
현실적 인간의 세계와 죽은 조상들의 세계, 그리고 죽음이 없는 영원한 신들의 세계라는 세 개의 세계를 상정해놓고, 가장 중요한 세계는 바로 신들의 세계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신들의 세계는 과거처럼 동무르이 희생 제의 같은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지혜를 통해 획득되는 세계다. 그러므로 우파니샤드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지혜다. 산스크리트어의 ‘비드야’(vidya)는 엄격한 의미에서 ‘지식’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세속적인 지식이라기보다는 궁극적 실재를 아는 지식이다. 그런 점에서 이성의 감각에 기초한 지식이라기보다는 직관적 또는 계시적 통찰력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71-72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은 인도 전통 풍속이 관습적으로 지녀오던 카스트(Caste)의 굴레에 매여 있지 않다. 오히려 영적 우주의 세계로 인간의 영역을 확대시키고 있다. ‘그것이 바로 너다’라는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의 선언에서처럼, 인간은 더 이상 어떤 제도와 풍습에 얽매이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본질인 브라만, 그것(Tat)과 다르지 않다는 혁명적인 선언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다시 묻고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인간이 도달하게 되는 최종의 목적은 다음 세상에 더 좋은 하늘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카르마(karma, 業)의 우주적 법칙에서 벗어나 참된 영혼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우파니샤드가 베다의 내용을 중시하고 그것을 깊이 연구 계승하고는 있지만, 가장 중심이 되는 내용은 훌륭한 스승들의 개인적인 경험과 가르침을 토대로 하고 있다. 대표적인 스승들 가운데 야즈나발키야와 샨딜리야 같은 이들이 있으며, 이들이 제자들과 나누는 대화가 우파니샤드의 중심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그 중심 주제는 바로 ‘내가 곧 브라만’이라는 생각의 결론을 얻는 것이다.  78-79



2 위대한 실재, 만물의 근원 - 우파니샤드의 본령 브라만

도이센은 브라만의 사상적인 체계를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첫째, 신학(Theology)은 만물의 첫번째 원리로서의 브라만에 대한 교리이며, 둘째, 우주론(cosmology)은 우주를 형성하게 된 원리로서의 진화에 대한 교리다. 셋째, 심리학(Psychology)은 자신으로부터 전개된 우주 속으로 침투하게 되는 영혼으로서의 브라만의 출현에 대한 교리이며, 넷째, 종말론(Eschatology)과 윤리학(Ethics)은 죽음 이후의 영혼의 운명에 대한 교리와 그에 따라 요청되는 삶의 윤리다.  81-82

브라만의 속성과 본질을 이해하려는 대화 가운데 우선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호흡히었고, 그 호흡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었다. 동시에 호흡은 근원자로서의 브라만이다. 그런데 호흡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아닌 것’이고,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성찰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신앙과 사색’에 기초한다고 말한다. 이 ‘신아오가 사색’이 브라만을 이해하는 신학적 진술의 토대가 된다.
그다음 단계로 가면 신앙과 사색을 올바로 하기 위한 방편으로 견고하게 스승을 공경하는 것과 수행하는 가운데 절제와 집중이라는 실천이 요구된다. 수행은 무한함을 의식하는 기쁨 속에서 가능하다. 그 무한의식이 바로 자아의식과 결부되며 궁극적으로 브라만과 하나 되는 길이 된다. 브라만의 영원성 또는 불멸성의 자유에 이르는 과정에서 수많은 일과 학문과 언어와 노래 등은 부차적으로 존재하는 요소일 뿐이다.  94

인도의 정통 바라문들은 궁극적 진리인 브라만을 이해하기 위한, 그리고 브라만과 하나 되기 위한 이른바 구원의 길, 곧 해탈에 이르는 네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을 아쉬라마라고 부르는 데, 바로 인생의 네 가지 주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 첫 번째는 베다를 공부하는 학습기인 브라흐마차린(brahmacarin)이고, 두 번째는 제사의 의무와 선행을 수행하는 가주기(家住期) 그리하스타(Grihastha), 세 번째는 숲속에서 엄격한 금욕을 수행하는 은둔기 바나프라스타(Vanaprastha), 네 번째는 인생의 마지막 단계로 방랑 걸식하며 영혼의 해방을 추구하고 유행(遊行)하는 산야신(Sannyasin :  방랑 고행자)이자 비구(bhikshu)로서의 삶인 파리브라자카(Parivrajaka)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 진정한 아트만, 곧 지고의 아트만을 깨닫고 해탈을 얻게 되는 것으로 설명.  95

“아트만은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neti nnety atma). 이해될 수 없기에 ‘이해될 수 없는 자’이며, 파멸될 수 없기에 ‘파멸될 수 없는 자’이고, 집착하지도 않기에 ‘집착하지 않는 자’이며, 얽매여 있지도 않고 고통을 받지도 않기에 ‘고통이 없는 자’다  …… 깨달은 사람은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그것이 그에게 괴로룸을 주지 못한다.”(<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V.4.22)  96

“모든 베다가 말하고(padam) 있고 모든 고행자가 언급하는, 그리고 베다의 지식을 공부하는 생도의 삶을 살면서 열망하게 되는 그 단어를 그대에게 한마디로 말하겠다. 그것이 옴이다.” (<카타 우파니샤드> I.2.15)
모든 베다라는 것은 <리그베다> <사마베다> <야주르베다> 아타르바베다>를 의미한다. 이 베다가 말하는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이 바로 ‘옴’이라는 것이다.  104-105

‘옴’의 뜻과 기능은 그리스도교에서 ‘그렇게 될 줄로 믿는다’는 의미로 말하는 ‘아멘’(Amen)과 같다.  106

“악의 길을 단념하지 않는 자, 마음의 평정을 얻지 못한 자,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는 자,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자는 올바른 지식으로도 아트만에 도달하지 못한다.” (<카타 우파니샤드> I.2.24)  113

“빛과 순수의 본질로 인간의 내면에 있는 이 아트만은 진리와 고행과 (아트만을 아는) 올바른 지혜, 그리고 꾸준히 정숙함을 유지하는 것으로 얻어진다. 불완전한 것들을 떨쳐버리는 금욕적인 수행을 통해 그는 아트만을 보게 되리라.” (<문다카 우파니샤드> III.1.5)
압축해서 말하면 진리와 고행이다. …
고행으로서의 마음의 집중 또는 마음의 평정 이외에도 여전히 금욕적 수행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때의 금욕은 정숙함을 유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비움으로서의 도덕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114

아트만(브라만)에 이르는 영성적 삶이 윤리 차원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를 살펴보았다. 브라만에 이르기 위해서는 첫째, 올바른 스승을 일과 다섯 가지의 엄격한 수행이 요구되며, 그 다섯 가지 수행은 내면의 평정, 자기억제, 비움, 인내, 집중이다. 이러한 수행의 조건들이 몇몇 다른 부차적인 수행들과 함께 후기 우파니샤드의 전체적인 내용과 골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114-115



3 아트만을 알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니 - 브라만에 이르는 초월적 지식

우파니샤드에서 아트만은 북과 북소리의 비유를 통해 상징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북을 칠 때 들리는 다양한 소리를 모두 파악할 수는 없지만 북과 북치는 사람의 두들김을 알면 소리도 구분하여 들을 수 있다. 고동을 불면 밖으로 들리는 고동 소리를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고동과 고동 부는 방법을 알면 그 소리를 구분하여 들을 수 있다. 비나(vina: 기타와 유사한 고대 현악기)를 연주할 때 들리는 소리를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비나와 비나의 연주법을 알면 그 소리를 구분하여 들을 수 있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4.7~9)
아트만이 북 같은 악기라면 우주의 현상은 그 악기의 연주 소리에 비유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연주 소리의 이해는 오직 악기를 알 경우에만 파악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우주의 다양한 현상도 아트만을 이해함으로써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139-140

“그것에 의해 들리지 않는 것을 듣게 되고 감지할 수 업는 것을 감지하고 이해될 수 없는 것이 이해된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VI.1.3)
모든 참 지식은 아트만과 관련된 진리를 알지 못하고서는 참 지식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다. … 아트만 이외의 모든 현상적 사물세계는 앞서본 바와 같이 ‘오직 명칭’(nama eva)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140

“아트만은 감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자기원인을 자기는 스스로 존재하는 아트만이 우리의 감각 기관을 밖으로 향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감각적 인식은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지 않고 밖으로만 향한다. 그러나 일부 지혜로운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찾아 그의 눈을 내면으로 돌려 아트만을 발견한다.” (<카타 우파니샤드> II.1.1)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부세계를 바라보고 거기에 만족하고 산다. 그러나 일부 영혼이 성숙한 지혜로운 자들은 내면의 세계로 주의를 돌려 아트만을 찾고 불멸을 얻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감각이 쓸데없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적절히 잘 조절되고 통제되면 점차 높은 단계의 초월적 지식으로 가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감각의 눈’에서 ‘초월의 눈’으로의 전환이 필요할 뿐이다. ‘초월의 눈’은 영적인 눈이다. 우파니샤드는 일반적으로 감각을 조절하라고 말하지 억압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영적인 추구는 신적 계시 속으로 들어가는 영혼의 지고한 여행이다.  141-142



4 만물의 근저에 실재 주의 실재로 내재하다 - 만물이 발생하는 원리

“실로 그대들은 모두 이 바이쉬바나라 아트만을 부분적으로만 알고 그대들의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 바이쉬바나라 아트만(우주적 자아)을 자신의 아트만(개체적 자아)으로 알고, 또는 (우주를 측정하는)새로운 특정 도구로 알고 명상하는 자는 모든 세상에서, 모든 존재들 가운데서, 모든 개체적 자아들 속에서 자신의 양식을 삼습니다. 이러한 바이쉬나바라 아ㅡ만에서 머리는 훌륭한 바람이요, 몸통은 광대한 가득함이며, 오줌통은 부유함이며, 발은 땅입니다. 실로 가슴은 제단이며, 머리카락은 거룩한 잔디요, 심장은 가르하파티야의 불입니다. 마음은 안바하르야-파차나 불이며, 입은 아하바니아 불입니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V.18.1~2)
바아쉬나바라 아트만, 곧 우주적 자아는 다양한 형태의 개체적 자아 속에 존재하지만, 그것을 부분적으로 바라보고 숭배할 것이 아니라 바로 모든 사물 속에 공유되고 있는 개체적 자아의 전체적 연관성을 바라보고, 그 연관성 속에 내재한 통일적 원리로서의 우주적 아트만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게 될때 비로소 자신의 개체적 자아도 우주적 자아와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게 된다는 말이다.  154

아트만은 우파니샤드에서 브라만과 동일시되고 있는 개념이지만, 다음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되기도 한다. 우선 인간의 ‘자아’ 그 자체를 지칭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자아’라고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것에 대해 도이센은 세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첫째, 몸속에 지닌 육체상의 자아다. 둘째, 육체로부터 자유로운 개별 영혼의 자아다. 이것을 우리는 인식 대상과 대조되는 인식 주체로서의 자아라고 부른다. 셋째, 지고(至高)의 영혼으로서 인식의 주관과 객관을 더 이상 구별하지 않는 초월적 인식의 주체다.  155

그런데 다른 본문인 <타이티리야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아트만은 좀더 세분화되어 다섯 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그것은 생명과 의지와 지식이라는 세 가지 원리 속에서 각각의 아트만이 상호 작용한 결과다. 다섯 종류의 아트만은 안나마야(Annamaya), 프라나마야(Pranamaya), 마노마야(Manomaya), 비즈나마야(Vijnamaya) 그리고 아난다마야(anandamaya)인데, 이들은 각각 인간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의 아트만이다.
이 다섯 종의 아트만 가운데 앞의 넷은 마지막 다섯 번째인 핵심적 아난다마야 아트만을 둘러싸고 있는 외형적 아트만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이들 아트만을 차례로 하나씩 궁구해가면서 그 외형을 벗겨보면, 마지막 남은 다섯 번째 단계의 아트만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 본질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다섯 가지의 아트만을 차례로 살펴보자.
첫 번째의 안나마야 아트만은 음식에 의존하는 아트만이다. 이것은 육체의 몸을 입고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진 성육화(成肉化)된 아트만이다. 다시 말해 성육신 아트만이다 그리하여 육체의 감각적 기관들이 모두 아트만의 부분을 이룬다.
두 번째의 프라나마야 아트만은 생명의 호흡에 의존하는 아트만이다. 이 아트만은 자연적 생명의 원리다. 그 주된 부분은 생명의 호흡과 관꼐되며 날숨, 들숨을 관장한다. 동시에 이 아트만은 우주적 의미로도 적용되어 우주 공간이 모두 이 아트만의 몸체요, 땅은 그 토대가 된다. 이 아트만을 넘어서 한 단계 더 들어가면 세 번재의 아트만을 대하게 된다.
세 번째의 마노마야 아트만은 마음작용(의지)에 의존하는 아트만이다. 인간의 마음(manas)작용에 의존하는 이 아트만에 대해서는 이미 네 개의 베다와 브라흐마나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인간과 신들에게 부여된 이 아트만은 인간의 의지작용의 원리에 따라 작용하는 것으로, 주로 인간의 이기적 욕망의 실현을 위해 작용하는 아트만이다. 대체로 베다의 제사 행위와 관련되어 많이 언급되는데, 인간적 욕망의 실현에 적용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네 번째의 비즈나마야 아트만은 지식에 의존하는 아트만이다. 앞서 언급된 것들보다 더욱 심층적인 아트만으로, 제사와 노동등의 행위에서 찬가를 노래하거나 지식을 제공하는데 관련되는 아트만이다. 이때는 각각 독립적으로 신성을 자각하고 예배하게 되는데, 이런 단계도 마침내 외투처럼 벗어버려야 하는 존재다. 진정한 아트만이 바로 그다음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의 아난다마야 아트만은 환희에 근거한 아트만이다.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의 세계에 근원적으로 자리한 이 아트만은 환희(ananda), 곧 무한한 기쁨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환희 앞에서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 외에 모든 단어와 사고가 물러선다.” 더 이상 지식의 대상이 없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경험적 실재의 지식과 달리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으며 의식적으로 의식할 수도 없는 무의식의 비실재(not-reality)다. 이는 경험적 실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비실재라고 표현한것으로, 실재가 없다는 뜻의 무실재(un-reality)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아트만은 환희의 존재 그 자체로, 환희를 창조하는 자아기도 하다.  161-163

“실로 처음에 비존재(asat:드러나지 않은 것)가 있었다. 실로 그러부터 존재(sat:드러난 것)가 생겼다. 그 자신이 영혼이 되었다. 그리하여 ‘멋지게 만들어졌다’(sukrtam)고 불린다. 실로 그 ‘멋지게 만들어진 자’야 말로 존재의 본질이다.
이 본질을 깨닫게 되면 누구나 환희를 누린다. 대공 속에서 이러한 환희가 없다면 실로 그 누가 숨을 쉬며 살 수 있을까? 환희를 가져다주는 자가 바로 그다.
보이지도 않고 형체도 없고 규정할 수도 없으며 지지할 수도 없는 그를 지지함으로써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된다면 아무것에도 두려움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를 깨닫기 전까지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한다. 실로 ‘제대로 명상을 하지 못하는 지식인’ 들에게는 두려움이 된다.” (<타이티리야 아파니샤드> II.7.1)  165

환희(ananda)와 두려움(bhaya)은 인간의 근원적 물음이요 해답이다. 두려움이 있는 한 환희는 없고, 환희가 있는 한 두려움은 없다. 이 둘은 절대적 상대다. 아트만의 세계가 환희의 세계요 창조의 세계라면 아트만이 아닌, 다시 말해서 비본질적 세계는 두려움의 세계다. 두려움을 불안하다. 그 불안의 감정은 ‘타자’에 대한 감정에서부터 시작된다. 타자를 넘어선 ‘하나 됨’의 의식 속에서는 불안이 사라진다. 아트만의 세계는 바로 이 ‘타자를 넘어선 하나 됨’의 세계이기에 불안은 근원적으로 해소되고 환희만 춤을 춘다. 166-167



5 상징 안에서만 존재하는 존재 - 브라만의 상징들

신에 대한 찬가로서 힌두교 최초의 경전인 <리그베다>나 그것을 노래한 <사마베다>도 결국 이 ‘옴’에서 하나가 된다. 요컨대 모든 베다의 최종 결정판은 ‘옴’속에 다 들어 있다는 비밀스런 상징적 가르침이다. 특히 <리그베다>와 <사마베다>가 옴을 통해 ‘짝이 되어 하나가 된다’는 표현은, 성적 결합으로서의 ‘하나 됨’을 뜻하기도 하는 ‘미투나’(mithunam)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187



6 존재와 의식과 환희의 브라만 - 브라만과 아트만의 세 가지 본질적 특성

존재로서의 브라만
“만물의 근원인 그 미세한 존재를 세상 만물이 아트만으로 삼고 있다. 그 존재가 진리다(tat satyam), 그 존재가 아트만이다(sa atma), 그것이 바로 너다(tat tvam asi), 슈베타케투야.”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VI.8.7)
여기서 우리는 존재가 진리요 아트만이며 더 나아가 ‘그것이 바로 너 자신이다’라는 진술을 듣게 된다. ‘그것이 바로 너다’라는 이 유명한 명제, ‘타트(그것이) 트밤(너) 아시(이다)’는 우파니샤드 전체에서 ‘진리 중의 진리’라는 말로 설명된다. 너 자신이 우주의 근원이며 궁극적 진리라는 충격적인 선언은 ‘참 나’로서의 아트만이 바로 존재 그 자체의 뿌리요 진리라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그 존재가 진리다’(tat satyam)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그 존재가 아트만이며(sa atma) 바로 너 자신’이라고 말한 것이다.  211-212

의식으로서의 브라만
“이것이 소(牛)다, 이것이 말(馬)이다라고 말할 수 있듯이 모든 것 속에 깃들어 있는 아트만으로서 가까이에서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브라만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그것이 아트만이오.’
‘야즈나발키야여,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그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보는 것을 보는 자를 보지 못하고(na drster drastaram), 듣는 것을 듣는 자를 듣지 못하고(na sruter srotaram srnuyah),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는 자를 생각하지 못하고(na mater. Mantaram manvithah),  깨닫는 것을 깨닫는 자를 깨닫지 못하는 법이오(na vijnater vijnataram vijaniyah). 그가 모든 것 속에 깃들어 있는 그대의 아트만이오. 그 밖의 모든 것을 덧없이 소멸되는 것(artam)이오.’
그러자 우사스타는 침묵했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I.4.2)
이 대화에서 우리는 앎의 문제, 곧 깨달음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전 감각적 과정을 거쳐서 결국 터득하게 되는 그 과정에서 감각과 인식을 주관하는 자, 내면의 존재, 즉 아트만을 깨닫는 것이 요청되고 있다. 보는 자를 보고, 듣는 자를 들으며, 생각하는 자를 생각하고, 깨닫는 자를 깨달을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아트만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밖의 것을 본질적인 것이 되지 못하여 변화 속에서 곧 소멸되어버리고 마는 것들이다. 이 모든 과정에 깨달음이라고 하는 ‘의식’의 차원이 브라만/아트만의 실체를 구성하고 있다. 216-218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에서 마이트레이에게 들려주는 비유에 의하면, 의식으로서의 이 아트만은 바다와 같아서 모든 물이 그곳에서 모여드는 것 같은 ‘하나의 도달점’(ekayanam)으로 설명된다. 또 아트만을 인체의 감각 기관에 비유하여, 피부는 모든 감촉을 느끼는 하나의 도달점이며, 혀는 모든 맛을, 코는 모든 냄새를, 눈은 모든 형태를, 귀는 모든 소리를 감지하고, 마음은 모든 생각을 감지하고 의식하는 하나의 도달점이라는 말한다. 또한 두 손은 모든 행위가 하나로 수렴되는 도달점이며, 생식기는 모든 기쁨이, 항문은 모든 배설이, 두 발은 모든 움직임이, 목소리(언어)는 모든 베다가 하나로 수렴되는 도달점이다.
의식으로서의 브라만은 이와 같이 ‘하나의 도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이 이 하나의 의식 속으로 수렴된다는 의미다. 역설적으로 이 의식은 다시 모든 만유 속에 편재하게 된다.  219

환희로서의 브라만
“이제 카홀라 카우시타케야(Kahola Kausitakeya)가 물었다. ‘야즈나발키야여, 곧바로 현존하고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브라만, 곧 모든 것들 속에 깃들어 있는 아트만에 대하여 설명해 주시오.’
‘모든 것들 속에 깃들어 있는 그것이 그대의 아트만이오.’
‘야즈나발키야여, 모든 것 속에 무엇이 들어 있다는 것이오?’
‘배고픔과 목마름, 슬픔과 미혹, 늙음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 들어 있소. 현자는 그 아트만을 알고, 자손에 대한 갈망(esana), 부에 대한 갈망, 세속적인 욕망에 대한 갈망을 버리고 수도승(수행자)의 삶을 살지요. 자손에 대한 갈망은 부에 대한 갈망이며, 부에 대한 갈망은 세속적인 갈망으로 이들 모두 갈망에 불과할 뿐이오. 그러므로 현자는 깨달음(공부)을 얻은 후에 어린아이처럼 살기를 꿈꾸지요. 그는 깨달음을 얻은 후 어린아이처럼 살면서 모든 것을 아는(nirvidya) 성자(munih)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그는 침묵하거나(maunam) 침묵하지 않거나(amaunam) 브라만을 아는 자(Brahmana)가 되는 것입니다.’
‘브라만을 아는 자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그는 무슨 행동을 하게 되든지 브라만을 아는 자로서 행동하게 됩니다. 브라만을 아는 지혜 외에는 일체가 덧없을 뿐입니다.’
그러자 카홀라 카우시타케야는 입을 다물었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I.5.1)
본문에서는 고통이라는 문제와 브라만/아트만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엄연히 현존하는 고통과 슬픔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현자 야즈나발키야의 대답은, 배고픔과 목마름과 슬픔 등 생로병사가 현존하지만 그 현존하는 고통을 초월(극복)하는 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이 브라만이요 아트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초월하게 하는 브라만과 아트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모든 고통의 근원이 ‘갈망(esana, kamah)임을 알고, 그것을 극복하는 공부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며, 그 결과로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상태(balya)’를 유지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상태’의 문자적 의미는 ‘자기중심적 지식의 철저한 비움’(jnana-bala-bhava)이다. 이것을 이른바 ‘비움의 영성’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갈망의 극복으로서의 ‘초월’은 ‘비움’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순수한 비움의 상태에 이를 때 비로소 브라만을 알게 되고 동시에 브라만이 되어 브라만으로서 행동하게 된다. 그 순수함 속에 이미 브라만과 아트만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
어린아이처럼 산다는 것은 직접적이고 단순한 데서 오는 순수성을 말한다.  222-225

깨달음 이후에 얻게 되는 침묵(mauna)은 말을 삼가는 것을 명상적 삶에 도움이 된다. … 실존 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침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병들어 있다. 만일 내가 의사라면,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충고를 부탁한다면 나는 말할 것이다. ‘침묵을 창조하라’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침묵할 수 있도록.”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자라면 불필요한 말을 삼갈 것이며, 동시에 말을 할지라도 시끄럽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고통의 이해에서 출발하여 그 근원이 되는 갈망과 초월의 문제를 비움의 차원에서 논의했다. 그리고 그 비움의 결과는 어린아이처럼 사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226

우파니샤드에서의 환희, 곧 지복(至福)은 브라만의 속성이나 또는 어떤 상태를 말한다가보다는 오히려 브라만의 독특한 본질 그 자체다. 굳이 속성이라고 말한다면 브라만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브라만은 환희를 ‘지닌 자’(anandin)라기보다는 환희(ananda) ‘그 자체’라는 뜻이다. 이러한 브라만과 환희(아난다)의 동일시는 두 가지 견해에 기인하는 것이다. 첫째는 주관과 객관의 대립적 구별을 넘어선 깊고 꿈 없는 잠의 상태로서 브라만과 일시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다는 견해다. 둘째는 모든 고통이 사라진 상태로서의 더없는 기쁨이다.  227

“의식으로서의 이 존재(브라만과 아트만)가 깊은 숙면의 상태에 들면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은 채 심장으로부터 온몸에 분포되어 있는 ‘히타’(hitah:선행을 베푼다는 뜻)라 불리는 칠만 이천 개의 정맥 속으로 흘러들어와 심낭 쏙에 머물게 된다. 어린아이가 그리하듯, 또는 훌륭한 왕이나 훌륭한 사제가 그리하는 것처럼 지극한 환희(atighnim anandasya)의 안식을 즐기듯 의식으로서의 브라만과 아트만도 그러한 환희 속에 안식한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1.19)
위의 본문 속에서 우리는 브라만과 아트만의 ‘존재’가 어떤 상태로 ‘의식’하며 어떤 상태로 ‘환희’를 누리는가 하는 문제를 동시에 보게 된다. 그것은 아트만이 몸의 중심부가 되는 심장에서 생명을 공급하는 혈맥으로 이어진 정맥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가서 다시 온몸으로 돌아오는 과정 속에 존재할 뿐 아니라, 깊은 숙면의 상태에서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는 의식 그 자체로서 지극한 환희를 즐긴다. 말하자면 주객 도식을 극복한 대상적 의식이 없는 주체적 의식이다.  227-228



7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 - ‘네티 네티’의 브라만

“모든 방향에 모든 생명이 있다. 그러나 아트만은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 이해될 수 없기에 ‘이해될 수 없는 자’이며, 파멸될 수 없기에 ‘파멸될 수 없는 자’이고, 집착하지도 않기에 ‘집착하지 않는 자’이며, 얽매여 있지도 않고 고통을 받지도 않기에 ‘고통이 없는 자’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V.2.4)
… 아트만은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라는 부정의 진술이다. 이 진술이야말로 브라만과 아트만 이해의 초석이 되는 선언적 명제다.  234

모든 생명이 사방에서 숨을 쉬고 있지만 그 숨의 근원적 실체를 감각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파악할 수 없기에 그는 파악되어지지 않는 자이며, 우주는 끊임없이 생멸을 거듭하면서도 파멸되어지지 않는 것처럼 파멸되어지지 않는 불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으나 이해되어지지 않는 불가지한 존재로 남게 된다.
그렇다면 그 불멸의 브라만과 아트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거듭 ‘’부정의 길’을 통해 더듬어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많은 인간은 하느님을 느끼고 감지한다. 다만 그 하느님은 인간마다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다르게 감지될 뿐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는 또 별개의 논의거리다. 허상과 실상,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논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브라만과 도(道)와 하느님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각각 별개의 존재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도 또 다른 문제제기가 된다. 우리는 지금 우파니샤드의 체계 속에서 브라만과 아트만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인 만큼 어디까지나 우파니샤드 현자들의 이야기에 주목할 뿐이다.  235-236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다.
‘이 물에 소금을 담그고 내일 아침에 오너라.’
아들은 그대로 했다.
아침이 되자 아버지는 아들 슈베타케투에게 말했다.
‘네가 어젯밤에 물에 담근 소금을 꺼내 오거라.’
아들은 완전히 녹아버린 소금물에서 소금을 찾을 수 없었다.
‘이 한쪽 끔에 있는 물 표면의 맛을 조금 보거라 어떠냐?’하고 아버지는 물었다.
‘짭니다.’ 아들이 대답했다.
‘이제 물 가운데 표면의 맛을 조금 보거라. 어떠냐?’
‘짭니다.’
‘이제 물 반대쪽 끝 표면의 맛을 조금 보거라. 어떠냐?’
‘짭니다.’
‘그러면 이제 물을 버리고 내게 오거라.’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아들은 그대로 했고,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소금은 항상 그대로 있음을 알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내 아들아, 실로 순수의 존재가 여기 있어도 너는 알지 못했구나. 실로 그 존재는 여기 있는 것이다. 만물의 근원인 그 미세한 존재를 세상 만물이 아트만으로 삼고 있다. 그 존재가 진리다. 그 존재가 아트만이다. 그것이 바로 너다, 슈베타케투야.’”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VI.13.1~3)
‘그것이 너다’라는 선언이 나오기까지 아버지는 아들에게 소금물의 비유를 통해 아트만의 실상을 가르치고 있다. 이 선언은 우파니샤드의 가장 위대한 진술 가운데 하나다. ‘그것이 너다’라는 표현은 직설적이기는 하지만, 아트만을 직접 이해시킬 수 없는 언어의 한계로 인해 비유를 통해 설명한 결과로서의 직설적 표현이다.  239-241

“아트만, 그는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멀리 가 있고 누워 있으면서도 어느 곳이든지 간다.
기뻐하기도 하며 기뻐하지 않기도 하는 신, 그를 나 외에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카타 우프니샤드> I.2.21)
브라만을 이해하는 길은 ‘네티 네티’라는 ‘부정의 길’밖에 없음을 말해왔다.  241-242

<이샤 우파니샤드>의 진술처럼 아트만은 규정할 수 없는 존재로,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움직이는, 또는 움직이기도 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그리고 이 세상 안에도, 또는 이 세상 밖에도 존재하는, 논리를 초월한 존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부동의 동자(不動의 動者)와 유사한 개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절대적 존재가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남을 움직이는 창조적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면, 우파니샤드의 존재자인 브라만/아트만은 ‘자신이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움직이는’, 또는 ‘움직이기도 하고 움직이지 않기도 하는’ 역설적 초논리적 존재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런 점에서 불가지적 존재라는 것이다.  242

“하늘과 그 모든 것을 넘어서, 모든 것 위에 더없이 높은 세계의 저편에 빛나는 빛이 있나니, 실로 그것은 여기 인간의 내면에서도 빛나는 푸루샤의 빛과 같은 것이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III.13.7)
모든 우주 위에서,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서 영원히 빛나는 아트만도 ‘인간의 내면에서 빛나는’(antaah puruse jyotih) 존재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우주적 원리가 곧 인간 내면의 영적 원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의 진술에 의하면, 이 불멸의 아트만은 땅에 머물면서 그 ‘속에서 움직이게 하는 자(아트만)’요, 물에 머물면서 그 ‘속에서 움직이게 하는 자’며, 불에 머물면서 그 ‘속에서 움직이게 하는 자’다.  256



8 이 세계 모든 것이 브라만이다 - 브라만과 세계

브라만의 우주적 원리, 즉 브라만이 세계와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 도이센은 이를 네 가지 범주 속에서 체계화하고 있는데, 인도 사상의 핵심적 분류법인 실재론(realism), 유신론(theism), 범신론(pantheism), 관념론(idealism)이 그것이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실재론적 사고에 입각하면 물질(질료)은 신이나 영원성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신은 그리스 신화의 데미우르고스처럼 단지 세계를 만든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창조력이 행사되는 순간 물질 그 자체는 별개의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상키야 철학이 말하듯이 원형적 인간의 푸루샤와 물질적 세계의 원초적 원리인 프라크리티(prakrti)가 이원화되어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째, 유신론적 세계관에 따른 브라만의 이해다. 이는 신이 무(無)에서 세계를 창조했다는 사상으로 구약성서의 하느님과 유사한 개념이다. 이 유신론은 점차 범신론적으로 기울어간다. 신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서 신 자신이 세계 속으로 스며들어 세계의 실체가 신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셋째, 유신론적 세계관에서 변형된 범신론이다. 신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그 자신을 세계로 변형시킨 결과일 뿐이라는 관점이다. 일단 창조된 물질이 신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된 세계 그 자체가 실재이며 무한할 뿐 아니라 신이 세계를 떠나 따로 독립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며, 동시에 창조된 세계 그 자체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이라는 용어와 세계라는 용어는 동의어가 된다.
넷째, 관념론이다. 신만이 실재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실재일 수 없다. 우주는 오직 공간적으로 신의 연장에 불과하며, 구성된 몸체는 실로 비실재적인 것이다. 그것은 오직 환영에 불과할 뿐이다. 외형적으로 드러난 모든 요소들은 신이 될 수 없고 오직 신의 반영물일 뿐이며 신적인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261-262

주(主)라는 뜻을 지닌 ‘이샤’(Isa) 또는 ‘이슈바라’(Isvara)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
“주(Isa)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이 결합되어 모든 만물을 지탱하고 있다. 주가 아닌(anisas) 개체 아트만(catma, 또는 개체 영혼)은 그 자신의 기쁨(향락)으로 얽매이게 되지만, 신(devam, 아트만)을 알게 됨으로써 모든 족쇄에서 해탈을 얻게 된다.”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 I.8)
모든 만물을 지탱하는 자로서의 아트만이 이제 ‘주’라는 인격신으로 불리고 있다. 동시에 ‘주’가 아닌 개체 영혼은 자신이 추구한 향락으로 인해 세속적인 것들에 얽매이게 된다. 그러나 개체성에서 벗어나 신적인 우주적 통치자로서의 아트만을 깨닫게 됨으로써 모든 억압과 굴레에서 벗어나 참된 해방을 맛보게 된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의 본문에 의하면, 이 불멸의 아트만은 지고(至高)의 아트만으로서 또 다른 이름 ‘하라’(Hara)로도 불린다.
“멸망할 성질 프라드하나(Pradhana, 性質), 멸망하지 않는 불멸(amrtaksaram)의 하라(主), 멸망할 것과 멸망하지 않을 영혼(아트만) 이 두 가지를 오직 이 유일한 신(하라)이 통치한다. 이 하라를 명상(abhidhyana)하고, 그와 연합하여 그를 점점 더 깊이 숙고함으로써 모든 세상의 환영(visva-maya)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 I.10)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아트만의 신명(神名)인 ‘하라’를 접하게 된다. 하라는 세계의 파괴와 재생의 역할을 담당하는 시바(Siva)의 여러 이름 가운데 하나인데, 샹카라에 의하면 하라는 ‘무지(無知)를 제거한 자’라는 뜻을 지닌다. 이 불멸의 신 하라는 멸하는 것과 멸하지 않는 것을 모두 통치한다는 점에서 지고의 신, 곧 파람 이슈바라로서의 브라만/아트만이다.
이 지고의 신과의 합일은, ‘그에 대해 명상’함으로써 그와 연합을 이루게 되어 결국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누리게 되는 것을 말한다. 브라만과의 합일은 근본적 실재와의 합일이며 내적 실재와의 참된 연합이기에 ‘스스로 존재함’에 이르는 해탈과 다르지 않다. 그 해탈은 동시에 모든 ‘세상의 환영’(visva-maya)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이것은 일종의 브라만의 열반, 곧 ‘브라마-니르바나’(brahma-nirvana)이다.  273-276

“움직이는(jagat:변화하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신(Isa:님)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므로 비움으로 그대의 즐거움을 찾고 다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샤 우파니샤드> 1)
…. ‘이샤’(Isa)라고 표현되고 있는 신은 ‘이시타 파람 이슈바라’(Isita paramesvarah)의 의미로, ‘지고의 신 이슈바라’라는 뜻이다. 세계는 이 지고의 신에게 깊이 싸여 있으며, 또한 신들의 거처로 표현되고 있다.
이 세계는 ’변화하는 것’(jagat)이다. 그러므로 ‘비움으로써 즐거움을 찾으라’(tyaktena bhunjitthah)고 말한다. 우주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변화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 무상(無常)을 알고 집착에서 벗어나는 ‘비움’(tyaga)은 아집(我執)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쁨, 곧 환희가 비움에서 온다는 주장은 동서의 주요 경전들이 이미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모든 것이 나의 ‘소유’가 아님을 알진대, ‘집착하지 말고’(magrdhah) 다만 ‘즐기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들에 핀 개나리와 산수유가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알 때 진정으로 그 꽃을 즐길 수 있듯이 말이다.  276-279



9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을 얻다 - 해탈

아트만은 ‘존재’(being)이지 ‘되어가는 존재’(becoming)가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아트만이 ‘되어감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새로운 형태로의 변형이 아니라 본래적 자아(아트만)로서의 존재를 발견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 처음부터 ‘존재’ 그 자체로 항구여일(恒久如一) 할 뿐이다. 변화하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무상함이 없는 아트만, 곧 인간 내면의 아트만이자 동시에 모든 만유의 총합이며 실재가 되는, 그리하여 만유를 창조하고 지탱하고 보존하는 아트만을 깨닫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305-306

“지고의 브라만을 깨닫는 자(paramam brahma veda), 그가 브라만이 될 것이다. 그의 가문에는 브라만을 알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그는 고통을 넘어서며 죄악을 넘어선다. 그는 얽힌 속박의 매듭을 풀고 불멸의 존재로 해탈을 얻게 된다(vimukto’mrto bhabati).” (<문다카 우파니샤드> III.2.9)
.. 결국 문제는 ‘깨달음’(veda)에 있다. 그런데 그 해탈이란 ‘깨달음으로 얻어지는 결과’라기보다는 ‘깨달음 그 자체 속에 이미 해탈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306-308

“깨달은 자는 죽음을 보지 않고, 질병도 슬픔도 없다. 그는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을 얻는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VII.26.2)
깨달음을 얻은 자는 이미 세계 그 자체가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얻을 것도 없어지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얻은 자가 되는 셈이다. 이 같은 상황을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에서는 “흑암도 없고 밤낮도 없고 존재와 비존재의 구별도 없는 오직 그 불멸의 유일한 존재만 있을 뿐이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상의 진술을 토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 즉 ‘깨달음은 곧 해탈’이라는 방정식을 얻게 된다.  309

경험적 측면에서 볼 때 아트만은 이해될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아트만은 유일 실재이다. 그러나 그 아트만은 오직 인간이 지닌 비범한 ‘직관’의 통찰로 ‘각성’될 것이다. 그 각성은 ‘아트만의 자기발견’이 될 것이고, 자아를 발견한 아트만은 자신이 세계임을 다시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파니샤드가 가르치는 해탈의 방정식이다. ..
살아서 해탈을 얻게 되면 생해탈로서(jivanmukti) 유여열반에 들 것이고, 죽을 때 해탈을 얻게 되면(videhamukti) 무여열반에 들것이다.  310



10 비움으로 소유하다 - 우파니샤드 사상의 요약과 결론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숲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그 숲속의 가르침이 아라냐카였다. 아라냐카는 숲속의 은자들에게 제사의 중요성과 인간과 우주에 대한 신비적 사색을 하게 해줌으로써 베다 사상의 결정판이자 최종적 철학 체계인 우파니샤드의 세계로 안내해주었던 것이다.
아라냐카는 원래 제의 문서인 브라흐마나의 보충적 주석서로 출발했지만, 제의를 비유와 상징적 방식으로 해석하면서 점차 브라흐마나와는 결별하게 되었다. 하지만 완전한 결별은 아니었고, 다만 아라냐카는 제의를 신비적, 사색적으로 해석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아라냐카를 더 깊게 사색한 결과로서의 작품이 베다의 끝을 차지하는 베단타 철학, 곧 우파니샤드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313

윤회의 이론은 바라문의 사고이기보다 왕들을 중심으로 한 크샤트리아들이 제기한 사상이었다.  314

우파니샤드는 지혜, 곧 깨달음으로서의 지식을 중시한다. 그것은 세속적인 지식이 아닌 궁극적 실재를 아는 지식이다. 그러므로 이성적 지식이라기보다는 직관적 또는 계시적 통찰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18

인간은 어떤 제도에 얽매이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본질인 브라만, 즉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혁명적 선언을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319

브라만/아트만의 영적 원리는 우주의 인격신으로 발전한다. 우주적 실재로서의 브라만은 후기 우파니샤드의 시대로 갈수록 관념론적 차원이나 실재론적 차원에서 유일신적 차원으로 점점 발전해가면서 인격신 이슈바라로서의 브라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고대 우파니샤드에서 후기 우파니샤드로 갈수록 신관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다양한 신들이 출현하는 다신론에서 점차 브라만/아트만을 중심으로 하는 유일신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새로운 변화는 브라만/아트만이 ‘주’(主)라는 뜻을 지닌 ‘이샤’(Isa) 또는 ‘이슈바라’(Isvara)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격신으로서의 브라만의 통치를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로서의 이슈바라도 점차 ‘최고의 주’라는 ‘파람 이슈바라’로 불리게 된다.
만물을 지탱하는 자로서의 아트만이 이제 ‘주’라는 인격신으로 불리고 있고, ‘주’가 아닌 개체 영혼은 자신이 추구한 향락으로 인해 세속적인 것들에 얽매이게 된다. 그러나 개체성에서 벗어나 우주적 통치자로서의 아트만을 깨닫게 되면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해방을 맛보게 된다. 이것을 깨닫는 즉시 ‘파람 이슈바라’로서의 브라만/아트만이 된다. 이 지고신과의 합일 후에는 ‘그에 대한 명상’을 통해 그와의 연합을 이룸으로써 속박을 벗어나 해탈을 누리게 된다. 브라만과의 합일은 근원적인 내적 실재와의 참된 연합이기 때문에 ‘스스로 존재함’에 이르는 해탈과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그 해탈은 동시에 모든 ‘세상의 환영’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이것이 일종의 브라만의 열반(涅槃), 곧 ‘브라마-니르바나’다.  332-335

불멸의 신적 아트만에 이르는 해탈의 길에 대하여 우파니샤드는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일원론적 차원에서 공통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비록 이원론을 전개하는 상키야 철학에서는 해탈의 방식이 조금 다르기는 해도 해탈의 기본적 전제를 ‘지식’(깨달음)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를 보인다. ‘지식’(지혜)을 통한 해탈이라는 이러한 전제는 우파니샤드의 전체 내용을 관통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혜로서의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선적으로 아트만이 유일한 일자로서의 참된 실재라는 것과 다자로서의 세계는 환영의 세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환영’으로 구성된 다자의 세계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으로서의 지혜(깨달음으로서의 지식)가 곧 해탈에 이르는 필수적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 환영적 세계의 실상을 모르는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은 바로 아트만에 대한 이해에서 가능하다. 무지는 고통이나 족쇄, 또는 집착의 근원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영-무지-윤회’라는 삼중적 세계의 실상을 동시에 통찰해야 한다. 족쇄를 끊는 검으로서의 통찰은 궁극적으로 ‘모든 욕망의 비움’이라는 형식에서 성취된다.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고통스러운 실존으로부터의 해방, 그것이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기도 한 것처럼, 우파니샤드가 말하는 해탈의 길도 고통과 죽음의 극복으로 맞게 되는 구원의 길이요 불멸의 길이다. 환영에서 벗어나 ‘내가 곧 푸루샤요 내가 곧 브라만/아트만이다’라는 실재의 실상을 깨닫는것, 그것이 우파니샤드가 말하는 비밀스런 가르침으로서의 해방의 길, 곧 해탈의 최종적인 가르침이다. 그 궁극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네 개의 위대한 진술, 즉 마하바키야(Mahavakyas)로 압축된다. 이것이 우파니샤드의 결론 중의 결론이다.
“의식이 브라만이다.”(아이타레야 우파니샤드>)
“내가 브라만이다.”(<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그것이 바로 너다.”(<찬도기야 우파니샤드>)
“이 아트만이 브라만이다.”(<만두키야 우파니샤드>)  335-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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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 오늘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


근대의 '철학적 다이너마이트'였던 니체 철학은 현대라는 시점에서 '토대학으로서의 철학'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14


니체가 보여준 현대성의 길은 다방면에서 확인된다. 먼저 철학 영역에서 그가 제시했던 탈형이상학적 전환, 이성중심주의 모델과 절대주의 모델의 파기, 실체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의 전환, 다원주의 모델을 통한 일원론 극복 프로그램 등은 서양 철학에서 지각변동을 일으켜, 근대적 패러다임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것은 곧 현대 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변동이었다. 니체 철학의 현대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또 다른 영역은 예술이다. 이성적 경험과 심미적 경험 사이에 놓여 있던 경계를 파기해버리고, 예술의 '탈미메시스'를 감행했던 니체에게서 예술가들은 다양한 꽅을 피울 수 있는 씨앗을 찾아냈다. 음악, 회화, 건축, 무용, 조각 등의 넓은 영역에서 그 씨앗들은 예술의 현대성이라는 아우라를 피워냇다고 할 수 있다. 문학 영역 또한 예외는 아니다. 언어에 대한 회의, 문학과 역사의 관계, 예술과 실제의 관계, 심리 현상과 글쓰기의 관계에 대한 니체의 질문들은 현대 문학이 주목할 만한 소재를 제공했으며, 니체 작품 자체가 문학적 찬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외에도 신의 죽음에 대한 니체의 선언을 둘러싼 신학담론들, 스스로를 철학적 심리학자로 자화자찬할 정도로 예리하게 세공된 심리분석의 내용을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에서 눈여겨본 것은 이미 오래되었으며, 근대 사회의 허무적 요소에 대한 통찰이나 권력국가와 법률국가에 대한 니체의 신랄한 비판은 사회학, 정치학을 넘어 이제는 법학 영역에서도 문제해결 과정에 영감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듯 니체 철학은 현대를 종횡무진 누비는 철학이 되었다.

하지만 니체의 철학은 미래에도 여전히 고전일 것이다. 철학의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철학 자신의 수단인 비판을 통해 보여준 모범으로서, 철학이 삶의 창조적 가능성을 고취시켜야 하고 늘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 보여준 모범으로서,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정신의 높이를 자랑스러워하는, 거리의 파토스가 깃든 자유정신의 모범으로서, 삶을 사랑하고 세계를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적 영혼의 모범으로서... 무엇보다도 인간과 사회의 건강성을 염려하고 그것의 확보를 과제로 삼는, 철학자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모범으로서...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 우리는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될 것이다.  15-16




니체는 어떤 사상가인가 - 니체의 철학적 실존과 자화상


철학자들의 글과 삶은 어느 정도 관계가 있을까?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은 그들의 삶에 대한 지식이 없이도 글을 읽는 것만으로 그들의 사유를 이해하기에 충분한 경우다. 글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철학자들은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홉스, 루소 등이 있다. 그런데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삶을 꼭 들여다보아야 하는 철학자들도 있다. 소크라테스, 파스칼, 키르케고르, 비트겐슈타인이 그러하고, 니체 역시 여기에 속하며 그 전형적인 경우다.  21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읽기와 쓰기에 관하여]  22


삶과 철학의 통일적 관계를 보여준 니체에게서 철학은 인식적 차원의 지혜를 찾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철학은 이제 삶의 지혜를 찾는 실존적 행위가 된다. 그 지혜는 바로 디오니소스적 지혜다. 즉 건강한 삶의 본능에서 나오고 건강한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혜, 파괴와 창조라는 두 계기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생명성 자체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아는 지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거대한 관계세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깨닫는 지혜, 그 속에서 모든 것이 의미 잇고 모든 것이 필연적이어서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통찰하는 지혜다.  25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며,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었을까? 

(1) 예술가-철학자, 니체 : 문헌학 교수였던 니체가 <비극의 탄생>이라는 철학적 저술을 집필할 때부터 이미 그는 자신을 예술가-철학자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의 예술가는 그림을 그리거나 곡을 짓는 예술가적 실천을 하는, 좁은 의미의 예술가를 넘어서는 개념이다. '철학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철학적 예술가는 '위대하고도 고귀한 목표'를, 즉 위대한 문화와 위대한 인간과 위대한 미래를 '창조'해내려는 '과제'를 지니고, 그 과제를 건강성 회복을 수단으로 실제로 수행하는 존재다.  26


(2) 계몽가와 교육자, 니체 : 니체는 19세기 당대를 총체적으로 진단하고 치료하고자 했던 시대진단가이자 계몽가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살던 시대를 총체적인 의미 상실과 목표 상실의 시대, 인간의 생명력이 퇴화되어 병들어 있는 시대, 철학과 문화와 정신이 방황하는 시대로 진단한다.

시대와 인간과 문화가 앓고 있는 병증을 인간과 사회의 '건강성' 회복의 길을 제공하면서 치유하는 것이다.  28


(3) 자유정신, 니체 : 자유정신은 말 그대로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다시 소유하는, 자유롭게 된 정신"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자유정신을 위한 책]으로 이해하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자유정신은 단순히 이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삶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도 니체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유정신은 여러 가지 덕목을 갖추어야 한다. 지적 성실성과 정직성, 비판의 힘과 새로운 대안 제시의 힘,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자기 자신을 믿는 '용기', 자신에 대한 '긍지' 등 수많은 덕목들이 거기에 속한다.  29-30


(4) 철학적 심리학자, 니체 : 니체는 자신을 '타고난 심리학자' 혹은 '영혼의 분석가'로 이해하기도 한다. 실제로 아들러나 융 등의 정신분석학자들이 프로이트보다 한 수 위라고 찬탄할 정도로.  30


니체 철학은 낭만적 시기(<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실증적 시기(<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즐거운학문>), 창조적 시기(<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후)로 구분될 수 있다.  31


1881년을 기점으로 니체의 철학이 변모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생성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 프로그램이 본격화됨.  31-32




1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라는 실험철학의 과제


실험철학은 몇 가지 측면에서 실험적이다. 첫째, '지금까지의 철학의 주체'를 '새로운 척도와 새로운 방식'을 사용하여 해명한다. 새로운 척도는 바로 '건강한 삶'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세계를 긍정하는 삶으로, 오로지 이 척도에 의해 모든 것이 재평가된다. 이때 실험철학은 둘재, 질문의 방식을 변경한다. 평가대상 '그 자체'에 대해 묻지 않고, 평가대상의 '가치'에 대해 묻는다. 즉 그것이 갖고 있는 의미와 기능을 점검한다. 그래서 실험철학의 질문방식은 '그것은 무엇인가?'가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삶을 위해 그것은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가?'이다. 평가척도와 질문방식을 변경하여 실험철학은 셋째, 기존의 자명성의 '토대'를 점검하는 실험을 시작한다. 서양의 온갖 자명성의 토대가 될 정도로 가치 있다고 여겨졌던 것들의 '가치'를 의문시한다. 그런데 그 실험적 이문은 매우 부정적인 답변을 듣게 된다. 그 가치들이 삶에 대한 부정의식에서 출발했고 삶의 건강성을 해치고 있는 실상이 목격된 것이다. 그래서 실험철학은 '기존 가치의 탈가치화(Entwertung)를 수행하는, 파괴와 해체의 망치를 든다. 여기서 실험철학의 네 번째 실험적 성격이 확보된다. 기존 가치의 탈가치화가 심리적 공황 상태를 발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즉 토대의 상실은 곧 의미근거와 가치근거의 상실이며, 이것은 다시 '왜?'. '무슨 목적으로?'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실험을 두고 위 인용문에서의 '부정의 말에, 부정에, 부정에의 의지'에 머무르는 '허무주의의 가능성을 선취'한 것으로 표현한다. 결국 실험철학 스스로 망치를 들어 기존 가치들을 탈가치화시키면서 허무주의라는 장을 시험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하지만 실험철학은 다섯째, 그런 허무적 상태를 넘어서는 또 한 번의 실험을 한다. 새로운 의미근거와 가치의 토대를 제공하게 만드는 실험을, 그것은 인용문이 말하듯 '정시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견뎌내는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감행하는가?'를 척도로 진행되는 실험이다. 그것은 곧 '인간이 얼마나 건강한가?'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건강한 인간은 진리를 수없이 감행하고, 수많은 진리를 견뎌낸다. 정확히 말하면 그 스스로 건강한 삶을 위해 진리들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을 다시 건강한 삶의 조건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는 삶의 건강성을 척도로 새로운 가치체계를 구성해낼 수 있다.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의 힘이 강하다. 결국 허무적 상태를 넘어서게 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건강한 디오니소스적 인간'을 창출해내는 것이며, 이것이 실험철학이 감행하는 '가치의 척도(Umwertung)라는 실험의 목적이다.  41-42


자기 삶에 대한 사랑을 니체는 운명애라고 부른다. 운명애는 이미 결정되어 주어져 있는 삶에 대한 숙명적 체념과는 다르다. 오히려 운명애는 자신이 창조적 주체로서 구성해가는 삶에 대한, 스스로 구성해가는 운명에 대한 그야말로 운명적인 필연성을 지닌 사랑이다.  45


디오니소스적으로 삶을 마주한다는 것,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니체 자신의 해명을 들어보자.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들에 직면해서도 삶 자체를 긍정한다 ; 자신의 최상의 모습을 희생시키면서 제 고유의 무한성에 환희를 느끼는 삶에의 의지-이것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다." -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46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첫째, 창조와 파괴, 대립과 싸움을 통해 형성되고, 그 어떤 계기라도 불필요하지 않으며, 그런 것으로서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성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생명은 매순간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파괴가 일어나는 과정이다. 생명은 즉 파괴와 창조라는 모순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모순성은 생명의 생성적 성격을 보증해준다. 그런데 니체는 생명의 이런 모순성을 삶에의 의지에 의한 것으로 생각한다. 즉(힘에의 의지로서의) 삶에의 의지가 매순간 자신이 구현해놓은 '최상의 모습'을 스스로 파괴하고, 삶에의 의지의 파괴작용은 곧 삶에의 의지의 새로운 창조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생명의 지속은 곧 삶에의 의지의 무한성 및 영원성에 대한 증거가 된다. 이렇게 해서 니체는 생명 그 자체의 모순성 및 모순적 생명의 무한서오가 영원성을 각각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생명은 모순적이기에 디오니소스적이며, 모순으로서 무한하고 영원하기에 디오니소스적이다...

둘째, 디오니소소즉인 것은 기쁨과 환희로 전환된 고통을 의미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고통에서 발생한 환희"다. '자신이 구현해놓은 최상의 모습'을 파괴해야만 하는 생명은 파괴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니체는 생며을 가능하게 하는 삶에의 의지는 파괴의 고통을 피해야 할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오히려 기쁨이다. 생명의 모순적 구조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셋째, 디오니소스적인 것은-수사적 표현이기는 하지만-"넘쳐흐르는 살모가 힘의 느낌"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생명의 모순성과 지속은 생명력(삶에의 의지)이 결여되거나 결핍 상태에 있을 때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것이 계속 유지되고 고갈되지 않고 풍요로워야 가능하다...

넷째,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최고의 긍정 양식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니체는 이 점을 "디오니소스적 상징 안에는 긍정이 그 궁극적인 지점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긍정의 여러 양식 중에서 최고의 긍정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성이 보여주는 모든 계기에 대한 조건 없고 유보 없고 예외 없는 긍정을 하기 때문이다.  47-50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개념이 갖는 의미는 힘에의 의지를 방법적 개념으로 삼은 니체의 후기 사유에서도 여전히 지속된다. 이제 그것은 힘에의 의지와 동의어가 된다. 힘에의 의지의 복수(plural)적-상승적-관계적 수행은 영원히 지속되는 모순적 생명성, 그 과정이 보여주는 고통의 기쁨으로의 전환, 생명력의 지속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63


후기 사유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그것이 갖는 긍정의 함의다... 디오니소스적 인간이야말로 '고통 자체와 삶 자체의 모든 의문스럽고도 낯선 것들에 대한 아무런 유보 없는 긍정'의 전제인 것이다. 긍정의 철학은 그래서 '긍정하는 인간'에 대한 철학이 된다. 니체가 그런 인간을 육성하는 과제를 절실한 철학적 과제로 상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후기 사유 전체는 바로 그런 '긍저하는 인간'을 어떻게 육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라고도 할 수 있다.  64




2 '신의 죽음에 대한 선언'은 '신의 죽음에 대한 고발'


<즐거운 학문>에서 미친 사람의 입을 빌려 처음 고지된 신의 죽음은 니체의 그리스도교 비판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방향타 역할을 한다. '인간이 신을 죽게 한 장본인이라는 것, 그리스도교 교회는 살아 있는 신의 집이 아니라, 죽어버린 신의 무덤과 묘비에 불과하다는 것'.  69


사제들의 권력추구 욕망 때문...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사랑하지 못할 때, 그리스도교가 제시한 신 개념은 전략적으로 인간에 의해 부정될 수밖에 없다는 고백을 듣게 된다.  70


인간이 태양을 잃은 세계에서 헤매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 스스로 신의 '역할'을 대신하여 존재와 의미와 가치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럴 정도로 강해져야 하고, 그럴 수 있는 자신의 힘을 긍정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자시을 건강한-디오니소스적 인간으로, 위버멘쉬로 고양시켜야 한다.  7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4부 [나귀의 축제]에서 재등장하는 더없이 추악한 자는 '신을 다시 믿는 자'로 설정되어 있다. 물론 그가 믿는 신은 옛 신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신의 '나귀'를 섬긴다. 이것은 최악으로 뒤틀린 심사에서 나온, 신에게 보내는 비웃음이자 신엑 최대의 모욕을 안겨주는 방식이다. 그러면서 그는 신을 '철저히' 살해한다. '나귀'는 이제 그가 찾아낸 새로운, 지상에 있는-국가든, 돈이든, 과학이든-우상이다. 이것을 그는 다시 신격화한다. 병리적 인간인 그가 자기부정이라는 병리적 상태를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형하고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창조적 주체로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지도,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갖지도 못한다.  76-77




4 건강한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대명사, 위버멘쉬


인간을 '우연과 사제'의 손에서 해방시키고, 인간이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을 사랑하고 긍정하는 길을 철학적으로 확보한다. 니체의 철학적 야심은 이것이었다. ..

'누가 있어 긍정의 노래를 함께 부를 것인가?' 니체의 눈에 비친 사람들은 하나같이 방황하는 정신을 지닌 무기력한 "인간 말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I [머리말]  133


위버멘쉬는 오로지 인간이기 때문에, 오로지 인간만이 획득할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134


위버멘쉬는 기본적이면서도 일차적인 의미의 항상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인간이다. 즉 자신의 현 상태를 늘 넘어서는 '자기극복'의 노력을 의식적-의지적으로 기울이는 인간이다.  135


인간존재의 의미이자 이상적인 실존의 모습인 위버멘쉬, 그것의 의미는 먼저 '자유정신'이라는 개념으로부터 획득된다. 자유정신은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파토스를 지니고 가치의 새로운 중심을 제시할 수 있는 정신의 자유로운 상태를 말한다.  136


자유정신은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고 획득할 수 있는 자다...

"..평가라는 것을 통하여 비로소 가치가 존재하게 된다. 귀담아듣도록 하여라. 창조하는 자들이여! 가치의 변천, 그것은 곧 창조하는 자들의 변천이기도 하다. 창조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자는 끊임없이 파괴를 하게 마련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I [천개의 목표와 하나의 목표에 대하여]  137


여기서 창조는 가치평가작용 혹은 의미창조작용, 즉 '해석(Interpretation)'을 말한다.  138


인간이 '그의 세계'를 더 이상 구성하지 않는 경우는, 다으모가 같은 경우들일 것이다. 그의 창조력이 무기력해졌을 경우, 혹은 자신이 구성해낸 세계를 세계 그 자체와 동일시하여 절대화시켜버리는 경우,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구성된 가치와 의미의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여버리는 경우. 이 경우들이 모두 '크나큰 피로'의 증후이며, 그것은 삶의 지속적인 창조를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반면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고,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인간, 니체가 '해석자'라고도 부르는 그가 자신의 삶의 상승을 위해 해석을 할 때, 그는 이제 위버멘쉬의 조건 하나를 갖춘 것이다.  139


도대체 이성활동과 지각활동, 그리고 의식층은 어느 정도로 관계적이며, 어느 정도로 힘에의 의지의 규제를 받는 '도구'인 것인가? ..

니체는 이것에 대한 전통철학의 논의가 형이상학적으로만 진행되어 왔으며, 그래서 매우 제한적이면서도 비과학적이었다고 비난한다. 의식이나 정신은 신체의 특수한 기능에 대한 명칭이며, 신체는 육체성과 심리성의 구분 자체가 어려운 '관계적 유기체'다. 그래서 의식과 정신에 대한 물음은 곧 인간 유기체 전체에 대한 물음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철학적-생물학적-생리학적-심리학적 등 개별적 탐구방식이 모두 동원되어야 한다. 그런 총체적인 탐구에 의해서도 완전한 파악으ㄴ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형이상학적의식 탐구의 결과가 "정신과 의식을 과대평가"하는 "엄청난 실책"에 불과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경험성과 육체성을 무시하고 간과하는 "반과학적 정신"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신경계와 세포와 혈행과 근육계 등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모든 기관과 기능과 현상 전체를 고려해보면, 의식이라고 불리는 것은 첫째, 단일체가 아닌 흐름이고, 둘째, 그 과정은 우리에게 의식디는 부분과 의식되지 못하는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잇지만, 셋째, 그 구분은 고정되거나 확정된 불리가 아니라, 우리에게 의식되지 못하는 부분들이 의식되는 부분들로 이행하는 것이고, 그것도 경우에 따라 달리 진행된다는 것 등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의식과 의식 이전의 층은 진행의 정도에 따른 구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의식되는 부분을 '의식-이라는 명사형으로 이해한다. 마치 의식이 단일한 어떤 것처럼, 의식 이전적 현상과 분리 가능한 어떤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 그렇게 사용하는 언어적 표현방식일 뿐이다.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익숙해져 '생각행위와 느끼는 행위와 욕구행위의 담지자'로서의 의식, '정신적 원인'으로서의 의식이라는 생각을 도출시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언어적 표현에 불과할 뿐, 사실은 아니다.  143-144


창조자이자 해석자이며 신체적 존재라는 자의식의 소유자, 삶의 창조적 구현을 매순간 이루어내는 존재, 파괴와 창조를 하는 자유정신의 눈, 이성의 수단적 성격 및 의식의 기호적 속성과 한계를 인지하는 인간, 그러면서 자기극복의 과정을 이어가는 인간.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위버멘쉬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음 장들에서 추가될 위버멘쉬의 다른 특징들-주권성, 귀족성, 주인의식, 책임과 자유 등-을 부가하지 않아도, 이미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렵고도 고단하다. 도대체 왜 이런 쉽지 않은 일을 니체는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일까? 그래야 비로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다고, 인간의 존재의미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그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147-148


위버멘쉬적 삶을 사는 것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고단함과 어려움은 어느 순간 위버멘쉬로의 노력을 중단하게 할 수 있다. 니체도 그런 위험을 잘 알고 있다. 그가 우리에게 실존적 결단을 내리라고, 온전한 의미에서의 실존적 결단을 내리라고 강요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148




5 관점주의라는 인식 모델 : 절대적 진리? 해석적 진리!


니체는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만드는' 작용이라고 부른다. 영원한 흐름 속에 있는 생성세계를 포착해내고 파악해내고 붙잡아내어 한 가지 면으로 고정시키는 것, 여러 경험들 중에서 특정한 것만 받아들이는 것, 비교하고 도식화하고 예속시키고 범주화하고 일반화하는 것, 그래서 특수성과 개별성보다는 범주성과 일반성에 주목하는 것, 이런 모든 일들이 지성뿐만 아니라 감각기관을 포함한 우리 신체 전체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고 싶은 것만 안다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고 친숙한 형태의 것으로 포섭시켜 유형화해서 말이다. 그래야 우리가 낯설고 친밀하지 않은 새로운것들 속에서 생기는 불안감과 공포를 떨치고 삶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만드는 일'은 그 자체로 삶을 위한 전략적 행위다. 우리 인식이 이런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치기에, 해석은 대상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묘사나 기술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주관적 필요에 의해, 우리에게 이해 가능한 형태로 구조조정되어 있다. 그것은 결국 삶의 상승이라는 우리의 실천적 욕구들이 반영된 오류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오류들을 통해서만 세계와 소통하고, 이런 오류들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 결국 삶에 대한 유용성 전략은 해석의 필연적 오류성을 이미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65




6 자유와 평등을 원하는가? 먼주 주권적 존재가 되어라


니체는 .. '인간은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

'오로지 주권적 존재만이 약속도 할 수 있고, 책임도 질 수 있다. 따라서 오로지 주권적 개인만이 자유와 평등을 요구할 수 있다. 약속과 책임과 자유와 평등이라는 것은 이렇듯 주권적 개인만이 획득 가능한 특권이다.'  177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조건이 바로 약속권리에 있다고 니체가 생각.  178


기억은 앞으로의 자신의 사고와 행위를 산정하고, 그것을 규칙적인 것으로 만들며, 그것을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만드는 인간의 능력이다. 이 능력에 의해서 약속도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렇기에 기억은 약속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려는 인간의 (망각보다) 고급한 기능일 수 있는 것이다. 기억능력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에게 보증할 수 있다. 그런데 니체는 이런 기억을 '의지'의 능력으로 이해한다. 

"일단 의욕한 것을 계속하려는 의욕, 즉 본래적인 의지의 기억인 것이다." - <도덕의 계보>  180


누구나 다 자신의 해위와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책임질 수 있음은 그래서 특권이다.  183





맺음말


그는 인간과 세계의 병증을 진단하고 치유하는의사, 건강하게 살기를 가르치고 권유하는 교육자이자 계몽가다. 

먼저 네 자신을 창조할 수 있어야, 세계가 네 작품이 된다. 네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세계도 지배할 수 있다. 네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할 줄 알아야, 세계가 너의 화원이 된다. 네 자신에 대한 긍지를 지녀야, 세계도 경외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 먼저 네 자신이 되어라!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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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비루해지기 쉬우며, 자칫하면 찌그러지고 찌질해지기 쉬운 일상적인 삶이야말로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한 곳이고, 그곳이 '지혜에 대한 사랑'을 자처하는 철학이 달려들어야 세계라고 저는 믿습니다.  8


독재나 억압이 더욱 나쁜 것은 마치 그것이 사라지면 사람들이 자유로워질 것 같은 환상을 유포하기 때문이다. 동성애에 대한 금기가 더욱 나쁜 것은 마치 그것이 사라지면 동성애자들이 자유로워지리라는 안이한 발상을 배양하기 때문이다. 그믹와 거리가 먼 이성애자는 모두 자유롭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자유를 위해 모든 구소고가 억압이 사라져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이 때문이다.  13


제약이나 구속 대신 필연성과 대립되는 상태가 자유라고 믿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필연성이란 피할 수 없는 구속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필연성과 대비하여 '가능성'이,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자유의 폭으 ㄹ결정한다고들 한다.  13


돈이 많아 노동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 사람은 자유로울까?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니 자유로울 거라고?

자유를 부러워하는 게 아니라 돈 쓰는 걸 부러워하는 것이다. 자유란 돈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것이지 돈을 실컷 쓰는 게 아니다.  13-15


자유란 이런저런 조건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발행되는 자판기 티켓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든 나 자신이 만들어가야 할 세공품이다.

자유란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갈 수 있는 '능력'과 결부된 것이다. 삶이나 행동의 방향과결부된 어떤 힘이나 능력이다. 

억압이나 구속은 그 자체로 자유와 반대되는 상태가 아니라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이 가동되는 출발선에 불과하다.  15


자유를 위해선 자신의 '자유의지'만이 아니라 자신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자신의 생각만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는 게 필요하다.  16


한 줌의 용기가 없다면 사실 자유로운 살밍란 말해봐야 공허한 것이고, 들어봐야 '남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용기는 고통을, 자유를 위해 넘어서야 할 저항으로 바꾼다. 

용기는 모든 것을 거는 어떤 도박적인 내기가 아니라 단지 '한 줌'의 용기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17


단 한 번의 거대한 결단보다 더 어려운 것은 매 순간의 삶에서 자유로운 걸음을 걷는 것이다. 매 순간을 갈 만한 길로 가는 것이고, 매일매일 살 만한 삶을 사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매 순간 진행되는 삶 자체를, 매번 내딛는 발걸음을 자유로운 삶으로 스스로 믿고 가는 법. 그것이 철학을 통해 배워야 할 삶의 지혜다.  19


이런 의미에서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필로-소피아(philo-sophia)는 '삶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필로-비오스(philo-bios)의 다른 이름이라고 나는 믿는다.

옳다고 주어지는 것이 정말 옳은지 다시 생각하고, 자신이 정말 긍정할 수 있는 좋은 삶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하는 것은 이 한 줌의 용기로 시작한다.  20



사건과 자유 -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진" 사건에 대하여


가령 교통사고는 물리학이나 생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노래 한 곡 들은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신체적 변화를 야기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얼른 치료하여 이전의 삶으로 되돌리려 한다. 그것 이전의 삶으로 최대한 되돌아가려 한다. 반면 그로 인한 신체적 변화를 받아들이고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사고 아닌 사건이 될 것이다. 

따라서 '사고'란, 그것이 실제로 나를 애초에 바라던 거소가 다른 곳으로 밀고 가더라도, "없었으면 좋았을" 어떤 것이다. 그로 인해 발생한 두 지점 간 간극의 폭은 그가 느끼는 불행의 크기를 뜻한다. 사고란말에 부정적인 색채가 담겨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 그게 '사건'이 되는 것은 그로 인한 변화를 나의 새로운 삶으로 받아들이고 긍정함으로써다. 그것을 받아들인다 함은, 피할 수 없이 이미 내게 밀고 들어온 그것이 내 삶 안에 자리잡았음을 받아들임이며, 그것을 긍정한다 함은 그것으로 인한 변화를 새로운 삶의 기회로, 또다른 삶의 가능성으로 긍정함이다.

사건이란 어떤 일로 인해 발생한 곡절, 애초의 궤적에서 벗어난 이탈에 대한 긍정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에 사고가 많은 인생은 그 사고의 수와 크기만큼 안타깝고 불행하지만 , 사건이 많은 삶은 그 사건의 수와 크기만큼 풍요롭고 행복하다.  27



긍정과 자유 - 기적 같은 삶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다큐 영화 <서칭 포 슈가맨>

처음에 음반 제작자가 찾아왔을 때, 얼마나 기뻤을 것인가. 시를 쓰고 노래를 만들며 사는 멋진 삶이 다가왔다고 생각했을 게다. 대중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도, 혹은 그 이상도 가능할 것 같은 성공이 손을 내미는 것이리라 생각했을 게다. 그만큼 그것이 제작자도 놀랄 만한 실패로 끝났을 때 그가 느꼈을 실망은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참담했을 것이다. 그런데 실패 이후 로드리게스는 잠시 꿈꾸었던 무대 위의 화려함을 얼른 포기하고 어쩌면 남들보다 훨씬 어둡게 느껴졌을 무명의 일상 속으로 돌아간다. 좋아하던 음악을 접고 공장에서 노동을 하는 극히 평범한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공장에서 동료드로가 좀더 나은 삶을 위해 운동을 한다. 목소리를 내기 위해 반복해서 떨어지는 선거에 출마하고, 자식들을 책이 있는 삶으로 인도하는 그런 삶을 산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 다가올 머나먼 타국에서의 기적 같은 부활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은 바로 그 삶을, 큰 기대를 안고 시작했던 노래가 어떤 인기나 성공도 주지 못할 때, 그런 행운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희소한 일인지를 안다면, 정말 이것이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기적이고 아무도 모르는 기적이다. '비밀의 기적'이다.  33-34


각자에겐 각자의 자유가 있다. 좋든 싫든 자신이 안고 살아가야 할 각자의 몸이 있고, 그 각각의 몸에 깃든 능력이 있고, 각자의 몸이 펼칠 각자의 삶이 있다. 그 삶마다 가능한 각자의 자유와 행복이 있다. 각자가 서 있는 곳마다 다를 게 분명한 자유와 행복의 길이 있다. 모든 자유와 행복은 자신의 현재, 지금의 모모가 지금의 조건을 출발점으로 한다. 그 몸과 조건을 자기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자유와 행복의 가능성은 시작된다.  39



고통과 자유 - 피할 수 없는 고토으 그 '운명적인' 만남에 대하여


고통이란 '유기체'의 부적절한 삶의 방식에 대한 기관이나 세포들의 호소와 항의의 목소리고, 질병이란 그 부적절한 삶의 방식에 잠식된 신체의 비명소리다. 이 비명이나 항의의 몫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의식으로 신체 전반의 움직임을 장악한 '유기체'가 자신의 세포나 기관에 대해 무대포의 일방적인 독재를 시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독재의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모든 억압된 것은 되돌아온다는 ㅍ로이트의 말처럼, 억압된 세포와 기관의 고통 역시 되돌아온다. 유기체의 생명과 분리된 채 오직 자기만의 생존을 전면에 내세우며 증식하는 세포들로, 그런 세포를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세상에선 '암세포'라고 명명한다.  43-44


삶이란 어떤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있는게 아니라, 과정 그 자체가 목적이기에, 삶 전체를 걸고 어떤 것을 할 수 있다 함은 삶 자체와 대면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47


고통이 삶을 심오하게 하는 것은 단지 고통에 익숙해지는 훈련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배우려 하지 않는 자에겐 위대한 스승이나 책이 아무것ㅅ도 가르쳐줄 수 없듯이, 고통을 직시하고 고통에서 배우려 하지 안흔 한, 고통은 삶의 깊이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 고통은 고통을 긍정할 수 있는 자에게만, 삶의 심오함을 가르쳐주는 스승으로 온다. 고통을 통해 삶에 물음을 던지며, 고통을 스승으로 삼아 다른 방식으로 살기 위한 길을 찾고자 할 때, 그때 비로소 고통은 지혜로운 삶의 안내자가 된다. 

삶에 던지는 그 물음과 더불어, 그때마다의 답을 들고 현재 속으로 반복하여 되돌아올 때마다, 나는 다른 나로 되돌아온다. 이전의 나와 다른 새로운 내가 탄생한다.  48


강자와 약자..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과 만나고 대면하는 방식의 차이가 그 둘을 갈라놓는다. 약자는 가지보다 강한 자들에게서도 약점이나 단점을 찾지만, 강자는 자기보다 약한 자들에게서도 강점이나 장점을 찾는다.  50


논평이나 비판을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약자들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자신의 약함을 알기에 항상 방어하려는 '본능'이 작동하기 때문이고, 또한 자신의 약함이 드러날까 두려워 날을 세워 듣기 때문이다. 반면 강자는 비판이나 비난에도 동요하지 않으며 칭찬 또한 가볍게 넘긴다.  51


세상에 오직 두 가지 길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필경 거짓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번에는 어떤 방식으로 대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53



기쁨과 자유 - 기쁨의 윤리학과 웃음의 비행술


스피노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양태(mode)'라고 부른다. 사람도 양태, 개도 양태, 컴퓨터도 양태, 물도 양태다. 세상사란 모두 양태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56


신체와 영혼에 발생하는 변화는 어떤 경우든 이 두 가지 방향뿐이다. 수많은 감정들은 강도나 양산을 달리하며 나타나는 이 기쁨과 슬픔의 다른 표현들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감정이나 정서를 크게 둘로 나눈 것이다.  57



꿈과 자유 - 꿈꾸는 영혼의 감옥


돈을 잘 벌면서도 돈 버는 것 말고는 꿈꿀 줄 모른다면 우리의 영혼은 돈에 갇혀 있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만나도 가족밖에는 꿈꿀 줄 모른다면, 우리의 영혼은 가족에 갇혀 있는 것이다.  77



매혹과 자유 - 술병 속의 연인이 내미는 매혹의 손


사물을 인간의 이 목적성 안에서 본다는 것은, 사물이 갖고 있는 힘과 생명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사물이 내미는 손을 감지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며, 사물과 만나는 어떤 사건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뜻대로 쓰다가 맘에 안 들면 주저 없이 내버리는 이들에게서 사물의 '주인'으로서 행사하는 능력이 아니라, 다가오 ㄴ이의 매력으 ㄹ알아보지 못하는 안목 없는 이의 무능력을 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89



선물과 자유 - 아, 존재 자체만으로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수 있다면...


의무가 된 선물, 답례의 의무를 통해 '교환'되는 선물은 과연 선물일까? 데리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답례가 의무가 되는 순간, 선물은 되갚아야 할 채무가 되기 때문이다.  124


  

돈과 자유 - 헝그리 정신과 궁상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려면, 돈을 적게 벌어야 하고, 그러러면 돈을 적게 써야 한다.  133


자본주의와 부에 대해 속속들이 연구했던 맑스는 이런 '경제적 부' 개념과 대비하여, '실질적인 부'란 필요노동시간(먹고사는 데 필요한 비용을 버는 데 사용되는 시간) 이외의 가처분시간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정치경제학 비판요강2>). 쉽게 말하면, 돈을 버는 데 투여되는 시간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부'라는 것이고, 그런 시간이 많은 이들이 '부유한 자'라는 것이다.  135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선 시간만 필요한 게 아니라 돈도 필요하고 그걸 할 수 있는 조건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136


부유함에 대한 이런 관념은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가처분시간을 대개 뻔한 방식으로 패턴화된 소비를 위해 사용하게 한다. 밀리는 자동차 안에서 시간을 보낼 게 뻔함에도 주말이면 자동차를 끌고 나서는 것은, 다른 돈 있는 이들처럼 여가나 레저를 즐기고 있다는 관념을 향유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잘 알려진 관광지를 돌며,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 거기 있음을 확인하고, 이미 익숙한 방식의 소비와 향유 바익을 반복하는 그 패턴화된 소비는 이제 일종의 의무가 된 것 같다. 모두가 하고 있기에 나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핍감과 불안함을 느끼게 되어 어떻게든 동참해야 할 것 같은, 또다른 '일'이 된 듯하다.

나는 실질적 부를 돈을 비롯한 '가처분자원'이나 맑스가 말한 가처분시간보다는 오히려 그런 것을 자신의 삶을 위해 '처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가처분능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간이 있고 돈이 있어도, 능력이 없다면 그것들은 자유를 위한 자원이 아니라 단순한 소비와 소모의 대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139


헝그리 정신은 돈을 쓰지 않는 법이 아니라 돈을 쓰는 법이다. 돈을 잘 쓰기 위한 삶의 원칙이고 이념 내지 철학이다.  142


헝그리 정신은 무엇보다 돈에 대해 '능동적'임을 뜻한다. 돈에 대해 능동적이라 함은 돈을 자기 뜻대로 부리며 산다는 뜻이다...

궁상을 떠는 것은 '대타적으로는' 남들 앞에서 없는 티를 내는 것이고, '대자적으로는' 궁핍 앞에서 사고나 행동이 위축되거나 빈약해지는 것이다...

반면 헝그리 정신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의 삶을 위해 능동적으로 가난을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가난 앞에서 당당하다.  143


항상 검소하게 살고자 하고 엔간하면 돈 쓸 일을 안 만들지만, 써야 할 일이 있을 때 머뭇거리면 안 된다.  145



감각의 자유 - 감각의 자유, 혹은 피 냄새가 나지 않는 비상의 방법에 대하여


감각의 갑옷만큼 우리의 일상적 삶을 구속하고 자유로움을 제한하는 것도 찾기 힘들다. 감각의 구속은 종종 너무 자연스러워서 때로 우리는 구속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기 어렵다. 그 구속은 우리에게 편안함을 준다.  150


철학자 들뢰즈는 진정한 '넘어섬의 경험', '초월의 경험'이란 지각 불가능한 것과의 피할 수 없는 만남엣 온다고 말한 적이 있다(<차이와 반복>). 감각적으로 피할 수 없게 닥쳐왔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없는 어떤 것과의 만남, 그것이 지각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지금의 나의 감각이나 지각능력을 벗어나 있어서일 것이다. 그 지각될 수 없는 것을 향해, 그 알 수 없는 것의 지각을 향해 나의 감각을 밀고 나아갈 때, 나는 나의 감각능력을, 나의 경험능력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을 경험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예컨대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예술작품이나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알기 어려운 책들은, 그것을 피하고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감각능력이나 사고능력을 확장해준다. "문제는 감각의 착란을 통해서 미지의 것에 도달하는 것이다."(랭보)  155-156


자유란 비장한 결단을 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혀용된 영웅들의 문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이들 각자에게 주어진 각자의 문이다. 그런데도 그리 들어가는 이가 적은 것은, 카프카의 유명한 우화 [법 앞에서]의 농부처럼, 그게 자신을 위한 문임에도 평생 그 앞에서 들어갈 수 있을지 찔러보고 그게 정말 나를 위한 문인지 물어볼 뿐, 밀치고 들어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농부처럼 다들 그 앞에서 늙어죽기 때문이다. 

감각의 자유란 익숙하지 않은 것, 새롭고 이질적인 것들 안에 깃들어 있는 어떤 것을 감지하는 능력이다. 처음에는 불편하기에 피하고 싶은 어떤 것을 향해 귀를 여는 작은 용기면 누구나 올라가기 시작하 수 있는 평번한 계단이다. 따라서 어떤 것 앞에서 그저 편안하다면 그것은 혹시 구속의 징표는 아닌지 한번쯤 의심해야 한다.   156-157



감정과 자유 - 이 은밀한 복수의 드라마를 어떻게 정지시킬 것인가?


'능동적인 것'은 먼저 자극하느냐 나중에 반응하느냐의 문제만은 아니다.

능동적 감정은 반동적 감정의 자극에 다르게 '반응'하는 방식으로 시작하기도 한다.   166


'능동적인' 의미의 사랑이란 상대방의 반응과 상관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고, 능동적인 우정이란 친구의 행동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믿고 좋아하는 것 아닐까? 결코 쉬운인은 아니겠지만.  168



지성과 자유 - 누구에게나 주어진, 누구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선물에 대하여 


'유식한' 스승은 자신이 아는 것을 학생들에게 알려주는 데 그치지만, 무지한 스승은 학생 스스로 자신이 모르는 것을 배우게 한다.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가르친다.  173



욕망과 자유 - 언제까지 우리는 '그들의 삶'을 살 것인가?


나는 10년 이상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거의 모든 강의엣 학생들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 첫째 질문에 '저는 이러저러한 것을 잘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답한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었다. 둘째 질문에서는 약간의 단서를 단다. 지금 밥 먹고 싶다, 요즘 연애하고 싶다, 장래에 돈을 많이 벌고 싶다 식의 대답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인데, 그걸 물으려는 게 아니라고. 무언가를 진정 하고 싶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걸고 하고 싶은 게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지, 최소한 10년이나 20년 정도는 '아, 이거 하고 살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게 있을 때 그렇다고 답해야 한다고, 이 질문은 앞의 것보다 좀더 쉬운 편인지, 지금까지 다섯 명 정도가 답을 했다. 하지만 10년 넘게 수많은 학생들 가운데 다섯 명 정도라니, 정말 놀라운 숫자 아닌가! 

이 질문을 받으면, 많은 경우 대답 이전에 자신이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없다는 사실에 놀란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이고, 자신의 능력과 욕망에 대한 질문인데, 그것조차 자신이 알고 있지 못하고 있는 셈이니까.  207


어떤 것을 해보지 않고선 내가 그걸 좋아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해본다는 것도 그렇다. 잠시 맛이나 보듯, 혹은 며칠짜리 캠프에 들어가보듯, 찔러보듯이 잠시 해보는 것으로는 그걸 정말 좋아할 수 있을지 아닌지 알기 어렵다. 처음엔 재미있어 보여도, 제대로 하기 위해선 어떤 것도 때론 단조로울 수도 있고 때론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힘겨운 터널을 필경 하나는 지나가야 한다. 즉 어떤 일을 정말 잘할 수 있을지, 좋아할 수 있을지 알기 위해선, 특별한 재능이나 인연이 있는 게 아니면, 필경 고통이나 지루함을 수반하는 어려움의 문턱과 대면하고 그것을 넘어선 깊이까지 들어가보아야 한다.  211


프란츠 카프카는 아버지로 대변되는 '그들'의 욕망에 의해, 또한 스스로 먹고살기 위해 보험회사 직원이 되어 일을 했지만, 자신이 정말 하고자 했던 것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했다. 밤, '그들'의 욕망이 잠드는 시간에, 그는 자신이 하고 싶던 것을 했다. <아동의 탄생>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역사가 필리프 아리에스는 '일요 역사가'를 자칭했다. 돈을 벌어야 했기에 대학원에 가지못하고 출판사에서 일을 해야 했지만, '일요일'로 표현된느, 노동이 중단되는 시간에 자신이 정작 하고 싶었던 역사 연구를 계속했다. 카프카도 아리에스도, '그들'이 말하는 삶을 피할 순 없었지만, 그 사이에서, 그들의 욕망 사이에 있는 빈틈에서 자신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216


나의 삶을 시작하기에 '이미 늦었어'의 시제란 없는 것이라고, 아무리 늦었다고 해도 시작하지 않고 끝낼 순 없는 거 아니냐고.  219



인정욕망과 자유 - 날 선 자존심과 '그저 웃는' 자긍심의 차이에 대하여


'나의 욕망'이라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은 사실상 엄마, 아버지, 사회 등 '타자'의 욕망이란 것이다. 인정욕망이 ㅡㄱ 타자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삼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무의식이라는 심층의 깊이에까지 침투한 타자의 욕망이다. 라캉이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224


인간의 본질로까지 소급해서 보면, 칭찬이나 직접적인 인정을 구하는 경우는 물론, 그렇지 않은 욕망까지 모두 인정욕망이 된다. 사실일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우리는 필경 남의 인정을 구하는 삶을 사는 존재가 되고 만다. 이는 그들의 삶, 그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아닐까?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행동과, 남의 시선을 의식해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하는 행동을, 둘 다 어차피 그게 그거라고 말해도 좋을까? 실은 그걸 구별하는 것이야말로 단지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결정적인 것 아닐까?  225


자긍심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긍지의 표현이다. 그것은 남이 아닌 자신의 시선, 자신의 척도에 스스로를 비추어 본다. 남의 인정을 구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확신하는 것,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에 비추어 자신이 잘했는지, 잘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기 삶에 자긍심을 가진 이라면, 가난을 감추고자 하지도 않을 것이며, 가난이 드러난다고 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자신이 선택한 것의 일부고, 자신이 긍정하려는 것이니까. 왜 그런 식으로 사느냐고 누가 물으면, 굳이 해명할 필요도 느끼지 못할 것이고, 누가 오해할까 걱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잘 알려진 김상용의 시에서처럼 "왜 사냐건 웃지요" 식으로 여유 있는 웃음 한 번이면 충분할 것이다. 오직 자기가 세운 기준만이 자기를 흔들 것이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자 그럼 다시 한번'하며 자신이 긍정할 수 있는 곳을 향해 스스로를 일으켜세우고 새로 시작하도록 촉발할 것이다.

자존심은 약한 자들이 자신의 약함을 가리기 위한 방어기제고, 자긍심은 강한 자들이 스스로 갖고 있는 힘에 대한 긍정이다. 전자는 남을 향한 것이라면, 후자는 자기를 향한 것이다.  232


긍정의 긍정.

첫번째 긍정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 잘할 수 있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라면, 두번째 긍정은 그렇게 자신이 긍정하여 선택한 삶으로인해 야기되는 어떤 결과도 긍정하는 것이다.  233


자유로운 삶, 그것은 두 번의 긍정에서 온다.  234



속도와 자유 - 속도의 강박증과 춤추는 신체의 시간


함께 산다는 것은 속도를 맞추어 사는 것이다. 걸음걸이의 속도를 맞추지 않고선 함께 걸을 수 없는 것처럼, 속도를 맞추지 않고선 함께 행동할 수 없고, 함께 대화할 수 없으며, 함께 생활할 수 없다. 물론 속도를 맞춘단느 것은 숫자로 표시되는 어떤 크기를 같은 값이 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신체와 영혼마다 각기 다른 속도가 있기에, 그것을 어느 하나에 일치시키려 한다면 '일치'는 자기 속도에 대한 억압이 된다. 속도를 맞춘다는 것은, 가령 걸음이 빠른 이가 같이 가는 느린 이의 속도에 자기 속도를 '맞추려고'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완급을 조절하는 것이며, 앞서 갔다면 기다려주는 것이다. 느린이도 평소보다는 빨리 걸으며 속도를 '맞추려고'할 것이다.  240



공부와 자유 - 공부와 학인, 혹은 학생부군손오공신위


학습은 머리로 하는 것이라면, 공부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몸에 붙지 않은 것, 몸으로 실철한 수 없는 것은, 절대적 진리라도 '죽은 문구(死句)'에 지나지 않는다.  254


공부는 학습보다 훨씬 어렵다. 알아도 아는 게 아니니 말이다. 항상 자신의 물음을 던지고, 자신의 감각과 생각으로 따져보고 몸에 붙여야 그 일부라도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는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하기 어렵다'는 걸 이유로 배우고 알려는 노력을 냉소해선 안 도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그대로 실행하며 사느냐고 누가 물었을 때, "그렇진 못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애쓰며 산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공부하는 학인의 삶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앴는 마음을 흔히 향상심(向上心 향하다 향, 윗 상, 마음 심)이라 한다. 그 향상심이, 옳다고 아는 것을 조금식 몸에 붙여가는 힘일 것이다.  255


공부를 몸으로 하는 것이지만, '뜻한 대로' 몸을 움직여 원하는 것을 이루는 능력이나 기술에 머문다면, 그것은 아직 공부를 시작한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몸을 움직이는 자신의 '뜻'을 주시하면서 그것을 다스리고 연마하지 못한다면, 몸에 붙은 기예는 재앙의 원천이 될 것이다...

공부는 몸의 연마, 기술의 연마에서 마음의 연마로 넘어갈 때, 밖을 향하던 시선이 자신을 향할 때 시작된다.  257


밖을 향해 있던 선이 안을 향한다 함은 대상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향해 돌리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몸은 관성적이고 습관적인 지금까지의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향하게 된다. 장인적인 기술이나 술법의 숙련은 필요한 동작을 아무생각 없이 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습관적인 움직임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익숙해진 순간, 습관적으로 행하게 한다. 습관이 되고 나면 생각 없이 행하게 하고, 관성의 선을 따라가게 한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것은 그 습관적 관성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이런 것을 '행(行)을 닦는다(修)'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부는 '수(修)-행(行)'이다. 그것은 삶에 던진 시선을 통해 길어올린 다른 삶의 가능성, 아직 살아보지 않은 삶의 가능성을 향해 가는 것이다. 공부란 그런 식으로 다른 삶을, 도래할 삶을 만들어 낸다.  259


도래할 삶을 만드는 것은 이전의 삶에 기대어 그것을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은 난감한 딜레마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습관이나 기억에 기대면서 동시에 그것에 의해 유지되는 동일성을 벗어나야 한다.  261



무아와 자유 - 나 없는 자유의 유쾌한 웃음을 위하여


차이의 철학이란 차이의 긍정을 주장하는 철학이다. 이것의 가장 단순하고 통속적인 버전은 나와 다른 차이를 인정하자는 주장이다. 자기가 옳다는 믿음이 강하면 나와 다른 차이를 인정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269


좀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차이의 긍정이란, 나와 다른 어떤 것과의 만남을 긍정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차이를, 나를 바꿀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이다. 

나를 내려놓을 때,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척도로서의 나를, 아상(我相 나 아, 서로 상)을 내려놓을 때, 차이의 철학은 비로소 가능하게 될 것이다.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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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편


왜 속으로는 '노'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예스'라고 할까요? 용기가 없어서 그랬던 겁니다.

용기가 먼저 있어서 '노'라고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노'라고 할 때, 우리에게는 없던 용기가 생기는 겁니다.  18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이 말은 당나라 때의 백장(百丈)이라는 스님의 말입니다.  27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이건 일을 하지 않으면, 혹은 일을 못하면 죽겠다는 이야기예요. 혹은 그만큼 목숨처럼 생명처럼 일이 중요하다는 거지요.

복잡하게 읽을 수도 잇지만 이 이야기는 우선 언제 우리가 눈감아야 할지 가르쳐 주는 이야기예요.

아기 기저귀라도 하나 갈고 마당이라도 빗자루로 쓰는 거예요. 그렇게 움직이면 먹어도 된다는 겁니다.  28


일을 안 하고 먹는다는 건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 먹는 거예요.  29


백장 스님 머리에 '이 일을 해서 돈을 받아야 된다'라는 건 없어요. 일을 하는 게 소중한 거예요.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죠.  32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일을 부정하게 됩니다. 일을 폄하하죠. 이건 어느 순간부터 우리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을 노예로 자처하면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일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죠.  35


'내가 원하는 일들을 어떻게 찾을까?', 이게 지금 문제인 거예요. 주인으로서의 삶은 여기서 결정되는 거예요. 여러분들 고민의 대부분은 노예의 투정이에요. 대개 노예는 노예인데 일은 안 하고 밥만 먹고 싶다는 내용이에요. 밥을 먹을 수만 있으면 된다는 노예적 절박함이라고 해야 할까요?  37


타인이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노예라고 부르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주인이라고 부릅니다.

기껏 대학 나와서 됐다는 게 최고급 노예인데, 이제 돈 좀 들어오니까 찝찝한 거예요.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타인이 원하는 일을 하는 걸 노예라고 부른다고요. 일하는 걸 싫어하는 게 노예의 근성이에요.  38


제 집필실이 광화문에 있는데, 가끔 광화문에서 사람들을 생태학적으로 관찰하면 패턴이 보여요. 광화문에는 직장이 많죠. 오전 8시에서 9시 사이에 사람들이 막 모여들고 우르르 각자 사무실로 들어가요. 그런데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서 11시 30분이 넘으면 사람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해요. 밥을 먹으려고. 그러면 밥을 먹다가 12시 30에서 40분쯤 되면 커피 가게로 막 들어가요. 그리고 1시 좀 넘으면 직장에 들어가서 5시가 넘어가가 시작하면 우르르 나와요. 해맑은 모습으로요. 제가 그래서 어떤 분한테 직장인들은 오후만 일하니 오전에 쉬게 하지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분 이야기가 오전에 불러서 그렇게 뭉그적거리게 해야 오후에 일을 하지. 사람들을 1시에 나오게 하면 일한다고 워밍업하고 인터넷 보고 커피 마시고 어제 포털에 나왔던 거 다 이야기하고 일 시작하면 일하는 시간 달랑 30분밖에 안 된다고요.

우리는 노예로 살죠.  39

영어를 좋아해서 영어 공부하신 분 있어요? 대부분 우리는 영어가 좋아서 공부하는 게 아니죠. 영어 능력을 원하는 자본에 팔려고 영어를 공부하는 거죠. 손님에게 팔리기 이해 화장을 하는 매춘부처럼 말예요. 그래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시대를 '보편적 매춘의 시대'라고 이야기했던 거예요.

재미있지 않아요? 옛날에 노예를 부릴 때는 때리면서 강제로 노예한테 기술을 가르쳤어요. 자본주의 사회는 묘하게 자유롭습니다. 자본주의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가 '자발적 복종'이에요. 한 단계를 건너뛴 거죠. 누가 시키지를 않아요. 옛날엔 노예가 잡혀 와서 일을 제대로 하나 안 하나 감시당했죠. 그리고 능력 있는 노예가 있으면 가령 그 노예가 배를 만드는 게 좋겠다면서 억지로 배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요. 지금은 거꾸고 됐어요. 이게 참 묘하다니까요.  40


옛날의 노예는 탈출을 하려고 했는데, 우리는 나를 써 다라고 해요. 이게 자본주의의 비법이에요.  41


여러분들이 직장 생활을 하더라도 머릿속에 넣어 두셔야 합니다. '난 노예다' 주인 입장에서 생각하지 마세요. '월급을 받으니 이만큼은 일을 해야지'. 절대 이런 이야기는 하시면 안돼요. 버티면 월급은 나와요. 그렇지만 갑자기 해고되면 막막하니까. 일하는 척 잘 버텨야죠. 게으르지만 잘리지 않게! 마르크스의 사위가 하나 있어요. 라파르그라는 사람이 입니다. 기억해 두세요. 이 사람이 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라는 책이 있어요. 두께도 얇야요. 책의 서두에 있는 얇은 논문이 있는데, 읽어보세요. 이 글이 바로 노예의 지침서예요. 월급은 받되, 잘릴 정도로는 게으르지 않기! 역시 마르크스의 사위다운 글입니다.(라파르그는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몸을 잘 움직일 수 없을 때 자살합니다. 백장 스님의 기개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주인 입장에서는 묘한 거예요. 이 노예가 하자는 없는데 일은 진척이 안 되는 거죠. 누구 좋으라고 일을 해요?

때때로 이런 느낌도 들어요. 전시에 포로를 잡아서 포로들에게 땅을 깊게 파라고 해요. 그리고 땅이 다 파지면 포로들을 거기 들어가게 해서 총으로 쏘고 덮어요. 그게 정리해고예요. 일이 다 끝나면 여러분이 회사에서 나가는 논리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요? 삽질하는 척 하기. 너무 노골적이며 죽여요. 그러니까 삽질하는 척은 하는데 땅은 안 파지는 그 묘한 형국을 만드는 거죠. 거기서 살아 있어야지 탈출이라도 하죠. 회사에서 여러분의 에너지를 다 쓰지 마세요. 주인의 일에 에너지를 모두 쓰지 말아요. 회사에서 에너지를 쓰면 여러분이 원하는 일을 찾을 시간과 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직장 다니시는 분들, 반드시 해야 될 일이 뭔지 아시겠죠? 회사에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겁니다. 일이 끝나고 나서 그 모든 에너지를 가족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거예요. 보고 싶은 연극을 보세요. 연극 봐서 피곤하니까 그 다음날 오전에 출근해서 또 잘 쉬어요. 하지만 완전히 들키지는 않게. 할 수 있어요? 그러면 고용도 촉진돼요. 사람을 몇 명 뽑았는데 효율이 안 오르면, 또 사람을 뽑아요.  44-45


여러분의 일을 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부지런해져요.

남이 원하는 일을 할 때는 게을러야 돼요. 게으르되 잘리지 않을 그 미묘한 경계가 있어요.  45


페이비언 소사이어티(Fabian Society). 파비우스 막시무스라는 한니발을 이긴 로마의 장군이 있어요. 파비우스는 한ㄴ발이 워낙 강력하니까 지구전을 사용해요. 그런데 이걸 원로원에서 가만히 두겠어요? 장수로 보내 놨더니 진영은 차지하고 밥만 먹는 것 같잖아요. 로마 대군 5만 명이 매일 밥만 먹어요. 다섯 명도 아니고 5만 명이거든요. 이러니 쇼부를 빨리 쳐야 되잖아요. 그래서 원로원에서 파비우스를 자르고 다른 사람을 장수로 보냈는데, 이 사람은 한니발을 공격하다 박살이 나요. 그래서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또 부르죠. 그랬더니 또 다시 밥만 먹어요. 그리고 나중에 이겨요. 그래서 페이비언이라는 말이 나와요. 

페이비언 소사이어티는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방법으로 사회를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가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자라는 사회로 갈때까지 느리게 천천히 사회를 바꾸자는 것입니다. 급진적인 혁명을 이끌던 지도자가 나중에 일하지 않고 먹으려고만 할 수 있다는 것을 안 거죠.  47


여러분이 즐거워하는 일을 했었을 때 그게 돈벌이가 되면 여러분들은 진짜 제대로 자리를 잡은 거예요.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자신이 하는 일이라는 것, 그게 중요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해서 돈을 벌면 '땡큐'고 아니면 좀 힘들게 사는 겁니다.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것이 바로 주인의 삶이다' 이걸 명심해야죠.  48


여러분들 각자의 삶의 시간은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 이 둘로 할당이 될 거예요. 노동하는 시간은 대부분 그 자체로 목적은 아닙니다.(물론 그 자체가 목적인 사람들이 있어요. 저 같은 사람이요.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거죠. 저는 글을 안 써도 됩니다. 누가 시키는 건 아니에요. 제가 쓰고 싶은 때 쓰는 거예요.) 대개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이 따로 있어요.  54 


여러분께 지혜를 하나 알려 드릴게요. 보통 사람들은 최저임금을 이야기하거나 가급적 많은 임금을 생각합니다. 이제 '최적임금'을 생각할 때입니다. 최저임금이 아니라 최적임금입니다. 나의 최적임금은 얼마인지, 이 정도 벌면 됐다는 걸 정할 수 있어야 해요. 그걸 아는 사람은 내가 돈을 버는 목적이 향유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에요.  55


한 사회가 얼마나 나쁜지의 척도는 노동시간의 길이입니다. 노동 시간이 늘어나는 사회는 나쁜 사회예요.  55


모두 먹고사는 고민만 있어요. 생존만 있고, 향유는 없어요. 거기에는 의무만 있어요. 

여기에 무슨 살 이유가 있어요? 즐거운 것이 있어야 된다고요. 노동은 힘들어요. 유사 이래로 인간이면 다 그래요.  56


다음 공식을 머릿속에 넣어 놓으세요. '삶의 행복은 노동하는 시간보다 향유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커진다'라는 공식 말이에요. 여러분이 일하는 시간을 줄여야 행복해져요. 물론 이 시간을 절대적으로 제로로는 만들 수 없어요.  57


가장 행복한 삶은 스스로 하는일, 지금 땀을 흘리고 하는 일이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면서도 즐거운 일이면 됩니다.  59


우리의 가장 큰 착각은 우리가 자본가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84


여러분이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본이 원하지 않아도 내가 행복하다면 기꺼이 그 일을 하고, 내가 행복한 일을 하는 데 돈이 필요하다면 또 사냥을 떠나면 됩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이 향유이자 동시에 노동이기도 한 사람이겠죠. 제작하고 창조하고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이죠. 홀로 하는 직업일 때만 가능해요.  85


누누이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가져야 할 지혜는 시간에 대한 것입니다. 삶의 시간은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 둘로 양분됩니다. 우리의 행복은 가급적 노동하는 시간을 줄이는 데 있는 것이죠.(하지만 노동하는 시간을 아예 없애고 향유하는 시간만 있다고 하면, 그건 누군가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다는 걸 의미합니다. 어쨌든 우리의 삶에서 일과 노동은 뺄 수 없어요.)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하면, 우리는 제대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사회철학자나 정치가들도 모두 이 삶의 시간을 기준으로 주어진 사회를 부넉하고 도래할 사회를 꿈꾸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봤을 때 사람들이 노동하느 시간이 너무 많아서 향유하는 시간이 없다고 하면 그 사회는 나쁜 사회인 거예요. 이런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불행이자 남루함이지요.  85-86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인지, 그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다는 것, 아니 생각하지 말아야 했었다는 것. 그것이 박정희 지배가 독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생각은 오직 최고 통치자만 하면 됩니다.  90


분명 우리는 양적으로 원시인들보다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문명의 혜택을 다 누리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불행하기만 합니다. 지금 우리는 향유하는 시간을 위해 일한다는을 까먹고 잇기 때문이지요. 일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것에 젬병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하나에 능숙하다는 것은 다른 것에는 서툴다는 것을 함축하니까요. 그러니 아이들과 노는 것, 아내와 산책을 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 심지어 가족과 함께 공연장에서 연주에 몸을 맡기는 것, 어느 것 하나 피곤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없ㅅ브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한다는 것은 항상 가도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일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다시 일에 몰입하게 됩니다. 잘할 수 있는 것이 일밖에 없고, 그래서 일할 때 편안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식으로 마침내 우리는 구제할 수도 없는 워커홀릭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98


이제 깊게 생각할 때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 그리고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는 어떤 덕목이 필요한지. 이제 눈에 들어오시나요?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진정한 덕목이 바로 용기라는 것이. 사랑하고 창조하는 시간, 즉 향유하는 시간을 위해 일하는 시간을 줄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닐 테니 말입니다.  99




정치 편


이론상 차이가 없다고 하더라도 삶에서 50보와 100보는 다릅니다.

중요한 건 정확한 기준을 가지고 잇어야 한다는 거죠. 가령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을 때, 그냥 누구는 좋고 누구는 싫다. 소녀시대가 좋냐 2NE1이 좋냐가 아니라 민주주의 본령과 원칙을 정확히 알고 그 기준을 통해 투표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기준을 두고 누가 50보를 갔고 누가 100보를 갔는지를 보자는 거예요.  122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죠? 그리고 그게 맞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고요. 하지만 실제의 삶은 어떤가요? 국민이 전쟁을 원하지 않아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즉 대표자에게는 교전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잇어요.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전쟁을 원하지 않더라도, 대표자들은 전쟁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어떤 인간은 대통령이 되어서 전쟁을 하려 할 거고, 어떤 인간은 끝내 안 하려고 할 겁니다. 50보와 100보의 차이는 있는 것이죠.  123


유럽 국가 중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가 프랑스죠. 프랑스 사회는 왜 민주적일까요? 왕을 죽였거든요. 왕을 죽인 국민한테는 축복이 있어요. 왕을 죽였으니 내가 왕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이게 프랑스 전통이에요. 우리의 가장 큰 슬픔은 고종을 못 죽인 데 있어요. 우리가 죽였어야 했는데, 일본이 해결을 한 거죠. 그러면 총독이라도 죽였어야 햇는데 그것도 못 했죠. 그 다음에 보니 이승만이나 박정희와 같은 독재자도 죽이지 못했어요. 한 사람은 죽이기 전에 하와이로 도망가서 죽었고, 한 사람은 죽이기 전에 측근에게 먼저 살해당했으니까요. 단 한 번도 독재자를 죽인 경험이 없는 겁니다. 한 명만 죽이면 되거든요. 딱 한 명만, 그 다음부터는 웬만하면 대통령 안 하려고 할 걸요? 잘못하면 훅 가는데 누가 하려고 하겠어요.  130-131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도 말하잖아요. "어떤 인간이 왕이라는 것은 다만 다른 인간이 신하로서 그를 상대해 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그가 왕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신하가 아니면 안 된다고까지 믿고 있다." 완전한 심리적 전도이자 착각이지요. 임제(臨濟)라는 스님이 있어요. 이 스님이 남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야 자유인이 된다는 거죠. 멘토를 만나면 멘토를 죽여야 돼요. 멘토는 무슨 멘토예요? 자신이 어리석고 멍청하다고 생각하니, 자꾸 멘토를 찾아서 지침을 들으려고 해요. 하지만 멘토의 지침을 계속 찾으면 우리는 계속 멍청해지는 거예요. 스스로 당당한 주체가 되기를 비겁하게 회피하는 순간, 우리는 점점 더 우유부단한 사람으로 전락하는 거라고요.  132


좋은 군주, 나뿐 군주를 가르는 건 착각입니다. 중요한 건 군주라는 형식 그 자체니까요. 이 형식을 어떻게 없앨지, 과연 이 형식은 없어진 것인지 이걸 고민해 보시길 바랍니다.  133


한 개인의 독자성 같은 것들은 사람 수가 많아질수록 희생됩니다.  141


보수는 자신을 사랑하고, 진보는 타인을 사랑한다고 정리될 수 있습니다.  147


'인간이 먼저고 이념은 나중'이라는 사람이 진보라면, '이념이 먼저고 사람은 나중'이라는 사람은 보수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보수적인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올라 자신의 이념을 관철하려고 하는 겁니다. 물론 이웃과 후손들을 사랑한다고 이야기는 하겠죠.  148


용서요?

아버지 한테 매 맞는 아이가 아버지를 용서하게 돼요. 심지어 자기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이해한다고요. 어머니가 나갔으니까 나한테 화풀이 한다고 생각하죠. 그게 용서인가요? 용서는요. 그 사람이 완전히 자립하고 당당해졌을 때 힘이 세졌을 때 하는 거예요. 약한 자가 용서를 할 수 밖에 없는 조건에서, 용서한 것을 용서라고 하진 않아요.

강해서 용서했다고 하지 마세요. 예수의 정신, 이런것도 아니에요. 자비, 이런 것도 아니에요. 어떻게 못하니까 그런 거에요. 슬픈 거죠. 그래서 용서하면 안 돼요. 용서하지 맙시다 약한 자는 용서하는 거 아니에요. 자격 없어요. '더럽게 약하다'를 각인하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쟤를 때리지도 못하는구나' 이렇게요. 중간에 용서하고 모든 걸 퉁치려고 그러죠. 그냥 그렇게 살려고요. 그럼 안 되는 거 같아요.

누간가 한 명이 '전두환을 죽이자'고 할 수 있어요. 누가 죽일래요? 우리는 그 회의를 합시다. 누군가 죽일 수 있어요. 누가 광주에서 죽었던 사람들 대신 그 복수를 해 줄 수 있을까요? 민주주의를 외쳤던 사람들을 공수부대로 잔혹하게 도륙했던 그 인간을 그들 대신 누가 죽일까요? 죽일 수 있어요? 역사에 길이 남는데 죽이실래요? 우리는 불행히도, 역사보다 자신을 더 아껴요. 우리는 감옥에 가는 것도 싫고, 그렇게 약하고 비겁하다고요. 내가 당할 불이익들이 있는 거죠. 이것부터 우리가 아프게 자각해야 돼요. 용서하면 죽이러 갈 필요도 없고 편하잖아요. 이것도 가슴 속에 아프게 넣어 놓으셔야 됩니다.  164-165 




쫄지마 편


'쫀다'라는 표현은 무언가 두렵다는 것을 말하죠. 두려움이라는 건 안해 본 것들을 무서워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는 판타지를 가질 수 있거든요.  188


무서운 것이 있어서 쪼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지 못해서 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걸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은 그냥 하는 거예요. 모든 판타지의 특징은 우리가 그곳에 걸음을 훅 내딛었을 때 신기루처럼 없어진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혼 무섭죠? 이혼을 한 번 해 보면 더 이상 무섭지 않아요. 해보고 나면 별것 아니란 걸 알게 되죠. 그런데 참 힘든 말이죠? 무서운데 그냥 하라고 하니까요. 사실 하기가 힘들거든요. 그렇지만 뭐든지 한 번의 경험은 필요합니다. 어떤 경험이든 상관없어요. 인생에서 너무나 무서운 것들을 한 번은 눈 질끈 감고, 과감하게 해 보는 경험이 필요해요. 그 경험이 한 번만 잇으면 돼요. 내가 무섭다고 생각하는 걸 한 번 해 보는 거죠. 조금 상처를 받더라도 후유증이 적은 것들을 통해 그런 경험을 조금씩 쌓을 필요가 있스빈다. 쪼는 것이 상당히 줄어들 테니까요.  189-190


너무 많이 안다는게 때로는 축복이기보다는 저주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이 알게 되면 힘들다고요.  191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높은 정상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정상이 어딘지 모르고 무식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다 보면, 정상에 오를 희망이라도 생기는 법이죠. 반면 정상까지 얼마나 힘든 여정인지 정확히 안다면, 우리는 한 걸음을 내딛는 용기마저ㅓ도 포기할지 몰라요. 냉소적으로 변하는 거죠. 그래서일까요? 과거 사회에도 못 배운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지 지식인 계층에서 혁명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사회에 대해 투덜거리지만 바꾸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겁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죠? 이 말은 우리가 "유식해서 비겁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요?  194


쪼는 사람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은 뻔뻔한 사람이에요. 쪼는 것의 반대말은 당당함이 아니에요. 뻔뻔한 사람이 현실적인 힘까지 얻을 때, 오직 그때만 당당해질 수 있어요. 

다음 순서는 성장해야만 해요. '쪼는 나' -> '뻔뻔한 나' -> '당당한 나'. 그러니까 우리는 당당해질 때까지 뻔뻔해지도록 노력해야 해요. 무모함이나 순박함이 아니라 뻔뻔함이라고요.  195


뻔뻔해지기 실천강령(1):우아하게 거짓말하기

미리 말씀을 드리지만 강한 사람만이 거짓말을 해요. 약자는 정직하게 진실만을 얘기하죠.  197


거짓말이 정당화될 때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도 사랑하는 사람은 나보다 강자인 것처럼 느껴질 겁니다. 애인이 만남을 지속할 수도 있고 끊을 수도 있는 역량이 있는 것처럼 다가오는 경험이 사랑이니까요. 자기와 놀아 달라는 애인에게 '친구와 게임을 하기로 했어'라고 하면, 애인은 내게 크게 실망하고 나를 떠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쿨하게 거짓말을 해야죠. '삼촌이 위독해! 미안해. 삼촌만 아니었다면, 너와 놀 수 있을 텐데.'

그리고 사회에서 여러분보다 더 강한 놈이 정직을 강요하고 압력을 가해 올 때, 여러분들은 거짓말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 돼요. 거짓말이 정당화되는 두 번째 경우죠. 강자 앞에서 약자가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쿨하게 거짓말하는 겁니다. 이때 진실을 이야기하면 강자는 우리를 자기 식대로 통제하려고 할 테니까요. 애인이랑 데이트 약속이 정해졌다면, 직장 상사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부장님,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 못합니다. 힘 있는 사람이 '너 이거 했지?' 이러면 찔려요. '들킨 거 아니야?' 이런다고요. 그러니 뻔뻔함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연습을 통해서만 경지에 오를 수 있는 덕목입니다.

여러분을 쫄게 만드는 대상들은 대개 뻔뻔해요. 거꾸로 얘기해 보면 여러분들이 '밥'이라는 거예요. 이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보다 더 뻔뻔해지는 겁니다. 싸우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당당해하지 마세요.  200-201


세상은 우리를 다 쫄게 한다고요. 우리가 쪼는 건, 어린애 같고 정직해서 그래요. 일기장 쓰는 사람처럼 산단 말이에요. 이 태도를 가지면 안 돼요. 일기를 쓰는데, 첫 번째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순 거짓말인 일기를 써 보세요. 그리고 그 일기장을 애인한테 주는 거예요. '나의 마음을 받아 줘' 하실 수 있어요? 못하죠? 이게 교육의 병폐에요. 사회화의 목적은 국가나 권력이 힘 있는 사람한테 복종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교육의 목적이 뭐예요? 기성세대가 편한 거예요. 아이가 대소변을 가리면 누가 편해요? 부모가 편하죠. 어머니는 그런다고요. '얘야, 이제 품위 있게 기저귀에 똥을 누니 얼마나 좋니?' 사실은 이런 거죠. '얼마나 좋니? 나한테 안 맞고' 교육의 목적이 뭐라고요? 기성세대들이 편한 거예요. 

여러분들은 교육을 너무 잘 받은 겁니다. 정직학 까놓고 고발하는 사람들, 자기 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약해요. 자기의 속내를 이야기했다가 부당한 대우를 받지요. 여러분드르이 가장 큰 문제는 너무 정상적으로 중고등학교를 나왔다는 거예요. 중학교 때 본드도 마시고 고등학교 때 애인과 모텔도 가고, 할 거 다 해 본 다음에 개과천선했으면 여기 상당하러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202-203


그러면 이 뻔뻔함을 어떻게 얻어야 돼요? 바깥에 나와 봐야 돼요. 바깥에 나와서 독립적인 생활도 하고 스스로 선택도 해 봐요. 돈이 많이 들죠. 지비에서 나갈 수도 있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뻔뻔스럽게 집에 들어와 사는 사람의 비범함을 아셔야 됩니다. 부모한테도 쫄고 바깥에서도 쫄아서 오갈 데 없이 집에 있는 사람과는 다른 사람인 거예요. 뻔뻔한 사람은 부모님이 더 이상 밥도 안 주고 잠자리도 내주지 않고 구박을 하면, 그때가 되어서야 '음, 이제 떠날 때가 왔네. 지금까지 편했는데. 쩝, 어쩔 수 없지'라고 하면서 자신의 짐과 모아 둔 돈을 챙겨서 집을 나가죠. 

거짓말을 하세요. 거짓말은 뻔뻔하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뻔뻔하기는 해도 쪼는 사람은 아니에요. 편안하게 거짓말을 하세요. 이 능력을 기르면 여러분들은 사회에 물의를 많이 불러일으킬 거예요. 대신 쫄진 않아요. '아, 이 세 치 혀로 인생이 거의 다 해결되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될 거예요. '하루에 세 번씩 거짓말을 안 하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각오로 거짓말을 하면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하나도 쪼는 게 없을 거예요. 거짓말 잘하시는 분? 나는 거의 문학적 수준에 이르렀다? 이런 분 계신가요? 모든 문학은 거짓말이죠. 그들은 당당해요. 문학자들처럼 뻔뻔스러운 사람이 없고 당당한 사람도 없어요. 한국사회에서 민주화운동을 문인들이 끌고 갑니다. 왜죠? 그들은 거짓말쟁이거든요. 거짓말을 한다는 건 우월한 거예요. 이런 세계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뻥을 뻥뻥치면 사람들이 그거에 속아서 또 사회를 만들어요. 미래의 꿈이라는 게 뭐예요? 지금 사회는 우리를 이렇게 착추한다고, 그래서 이렇게 하면 자신이 뻥치고 있는 사회가 가능하다고, 누군가 막 뻥을 치는 거죠. 그 뻥이 긴가민가하다가 사회가 그걸 받아들이면 그 사회는 변화하는 거예요. 거짓말 속에서 새로운 역사가 열리는 겁니다.  204-205


중국 철학자 송견(宋?)의 테마는 견모불욕(見侮不辱). '모욕을 당해도 치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게 또 핵심적이죠. 모욕을 당해도 치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예쁜 사람이고 싶고, 고상하고 싶고, 순수하고 싶고요. 우리는 이런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칭찬해 주면 훅 넘어갈 사람들인 거죠. 그게 거짓된 칭찬이어도요. 이게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문제예요. 그래서 누군가 칭찬해 주면 좋고, 누군가 칭찬 안 할 거 같으면 쫄죠. 인정받고 싶으신 거예요. 

모든 인간관계의 문제는 인정을 받으려고 해서 생겨납니다.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아요. 왜 인정받으려고 그래요? 진짜 위대한 인격은 뻔뻔스러운 거라니까요? 인정받으려는 사람은 항상 정직하려고 한다고요. 많은 우화는 사람들이 거짓말을해서 우울해지고 외로워진다고 그러죠. 사실이에요. 하지만 인정을 받으려는 사람만이 아기처럼 진실을 얘기해요. 그러니까 절대 남한테 인정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이라는 멘트를 하던 개그 프로그램의 코너가 있었는데 기억 나세요? 진짜 좋은 멘트죠. 그 사람이 쫄 거 같아요? 세상에 대해서? 누가 무슨 욕을 하든지 간에 그걸 의식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누군가 욕을 했는데 그걸로 화가 나고 속상하다는 것은 인정받겠다는 걸 드러내는 거거든요. 누가 여러분에게 '야, 이 개새끼야!'라고 욕을 하면, '그래요. 난 개새끼예요. 만세!' 이러면 되는 거예요. 남이 인정하든 안 하든 내가 무슨 상관이에요?  205-206


누군가한테 인정받으려고 그럴 때 또 쫄아요.  207


'거짓말하라' 이후의 두 번째 행동 강령은 '기꺼이 욕을 들으라'는 겁니다. 스스로 내가 어느 정도의 인간인지 시험해 보려면 욕을 들어 봐야 돼요. 남의 험담, 음해를 들어야 돼요. 무슨 소리인지 알죠? 자꾸 남에게 인정받는 이 메커니즘이 우리를 세상에 쫄게 만들어요. 검열하게 만들고요. 예쁜 사람 콤플렉스를 버려야 돼요. 남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 말 것. 어머니의 칭찬 들으려고 하지 말 것. 어머니의 칭찬 들으려면 남자 친구, 여자 친구랑 모텔도 못 가요. 그 칭찬이란 게 나한테 뭔 상관이예요. 여러분들의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오만 가지 욕이 달려도 이렇게 생각하세요. '반응이 좋은걸?' 욕 좀 달렸다고 트위터 끊고 페이스북 끊고 뭣들 하는 거예요? 그게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친구를 만나시면, 서로 계속 욕을 하세요. 칭찬하지 말고 욕을 해요. '오늘 네 옷은 거의 걸레인 걸?' 이렇게요. 무슨 말인지 알죠? 그걸 견디는 거예요. 좋은 친구 사이에서는 서로 칭찬을 하지 않아요. 병신같고 나약하고 여린 애들끼리만 둘이 모여서 서로 '너는 예쁘네, 고상하네, 지적이네' 그러는 거죠. 그렇게 살다 보니까 바깥에 나갔을 때 욕 한 번 듣고서는 상처받고  또 그 친구한테 가요. 이게 뭐예요? 친구들끼리 서로를 강하게 만들어야 되잖아요. 서로를 욕해 줘요. 만나자마자 허점을 찾아야 돼요. 처음엔 힘들지만 그걸 경디면 놀라운 일이 벌어져요. 심지어 그 다음부터는 화장도 안 할 거예요.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친구들끽 만나서 칭찬하고 서로 위로하지 말아요. 아부하는 사람이랑 아첨하는 사람은 군주를 붕괴시켜요. 회사에 갔을 때도 너무 열심히 일해서 인정받지 말아요.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한 달 동안은 사고를 치세요. 복사기에다 커피 쏟고 복사기를 망가트리는 거예요. 온갖 욕을 다 듣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회사에서 안 쫄아요. 자기가 정말 잘못을 할 때도 있을 겁니다. 이 경우 보통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지'라며 자책하죠. 그러면 또 실수할까 봐 쫄게 되어 있어요. 잘못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스스로 검열하지 않는 방법은 누가 나한테 욕을 하거나 뭐라고 할때 그것에 쿨해지는 것입니다. 쿨해지면, 여러분은 세상에 쫄지 않아요. 아시겠죠?  208-209


뻔뻔함의 두 가지 강령, 첫 번째, 거짓말 잘하기. 들키지 않고 부드럽고 우아하게.

두 번째, 기꺼이 욕을 먹기, '하루에 욕을 세 번 안 먹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생각으로 욕듣기. 욕이 부족하면 반드시 나서서 욕먹을 짓을 하기.

뻔뻔스럽고 당당한 사람들, 쫄지 않는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게 아니라 실전무공으로 단련된 거예요.  212


철학자들이나 지식인들 대개는 자기도 경험하지 못했던 얘기를 뻐꾸기처럼 계속 날리는 거예요. 거기에 취어잡히면 안 돼요. 쫄아서는 안 돼요. 지적으로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되죠. 그래서 거기 말리는 거예요. '음,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어요. 선생님' 이렇게 뻔뻔스럽게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해요.  220


진짜 위대한 사람은, 혼자 있는 사람이에요.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누군가를 만나서 주체적으로 사랑할 수도 있어요. 누구든 외로워서 사랑하면 안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도도하게 혼자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성숙한지를 알 수 있죠. 힘들거나 외로울 때 친구한테 전화하지 말아요. 아셨죠? 절대 외롭다고 놀아달라고 하지 말기. 강하게 꿋꿋하게 슈베르트 음악을 들으면서 견디는 거예요. 우아하게.

잊지 마세요. 뻔뻔스럽게 대하고 세계와 단절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계에 쫄지 않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이 뻔뻔스러움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진정한 친구와 애인을 가질 수 있어요. 잊지 마세요. 그때가 되어서야 진짜 만날 수 있는 거예요. 제가 가르쳐 준 대로 하면 왕따 당하고 패가 망신하고 집에서는 쫓겨날 것 같죠? 여러분 주변의 쓰레기 같은 사람들, 내가 결정하지 않은 인간관계들이 다 정리가 되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새로운 관계가 열립니다.  229-230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하나 해 드릴게요. 어느 보살 할머니가 자신이 성불은 안 되니 스님을 한 명 키우기로 하고 10년 동안을 봉양해요. 그러다가 이 할머니가 스님이 깨우침으로 가고 있는지 밥만 처먹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어요. 시험을 해 봐야 되잖아요. 그래서 마을에서 가장 섹시한 기생을 데려다가 안겨 줬어요. 그러고 나서 스님의 반응을 보는 거죠. 스님이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안아 주면서 기생에게 말해요. "나의 마음은 얼음과도 같다." 그 말을 듣고, 그 보살 할머니가 스님이 있는 암자를 불태워 버려요. 왜요? 억지로 하잖아요. '여자를 탐해선 안 된다. 품어선 안 된다 흔들리면 안 된다.' 그 흔들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흔들린 거예요. 흔들리지 않는다면, '얼음'이라는 생각조차 안 들었겠죠. 쫄고 잇는 사람만이 '쫄지 말아야지. 쫄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생각해요. '쫀다'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없어져야 되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죠? 그러니 당당해지지 말고, 뻔뻔해지세요. 그게 안 쪼는 거예요.

그리고 비겁한 걸 받아들이세요. 자신이 어디까지 비겁한지만 알면 돼요. 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가 '모 아니면 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중국 한나라에 한신이라는 장수가 있었어요. 한고조 유방을 도와서 한나라를 구축했던 유명한 장수예요. 이 한신이 저잣거리에서 깡패들을 만나요. 칼을 든 깡패 열댓 명을 만난 거예요. 깡패들이 한신에게 자기들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라고 해요. 딱 보니까 게임이 안 돼요. 한신이 어떻게 했게요? 쏘 쿨! 기면 돼요. 뻔뻔하게! 그렇다고 그들에게 굴복하는 건 아니에요. 그게 바로 한신이라는 사람이 가진 능력이라고요. 그리고 나중에 히을 가졌을 때, 나라를 건립한다고요. '완전히 당당해지지 않으면 난 비겁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게 문제거든요. 

여러분 자신을 오버해서 보지 마세요. 여러분이 역사를 바꿀 것 같아요? 집을 바꿀 것 같아요? 어머니를 바꿀 것 같아요? 바꾸지 못해요. 여러분들이 해야 될 일은 내가 얼마나 무능력한지, 얼마나 비겁한지를 아는 겁니다. 이 말은,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안다는 얘기예요.  255-257


자본에게 쫄지 않는 방법은 뭘까요? 자본이나 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겁니다. 전셋집도 갖지 마세요. 가지고 잇으면 낚이는 거예요. '최적생계비'만 갖고 있어야 해요. 최저생계비가 아니라 최적생계비예요. 그래야 뻔뻔해져요. 그래야 사장한테 뻔뻔해진다고요. 사장이 밤에 일하자 그래도 이래요. '됐어요. 월급 됐어요.' 최적생계비를 계산하는 거예요. 최대생계비는 끝이 없어요.  265


자본주의는 순수한 게임의 세계입니다. 세상이 모조리 다 투자고 '돈 넣고'로 좌지우지도는 리얼리티 없는 세계. 게임가가되면 그 안으로 들어가게 돼요. 도박사, 도박군들이 도박에 빠지는 이유를 야셔야 돼요. 그게 순수한 자본가의 세계예요....

우리가 돈에 쫄지 않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나의 최적 생계비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거예요. 최적생계비만 벌면 되니까 나머비 시간에는 뻔뻔해질 수 있죠.  266


디오게네스가 왜 당당해요? 옷 한 벌, 지팡이 하나, 자루 하나 들고 통에서 살았잖아요. 통! 통 하나밖에 없잔하요. 집을 갖고 있으면 쫓겨나지만, 처음부터 쫓겨날 데가 없는데 쫄 이유가 없죠.  267


'뻔뻔하다'는 말의 긍정성을 아셔야 된다는 거예요. 이건 소중한 거예요. 

죽을 때까지 인정을 받지 않겠다는 각오로 사시면 돼요. 그러다 진실을 얘기해야 될 때가 올 수도 있어요. 어쩌면 그때는 '모 아니면 도'일 거예요. 진실에 대해서 쉽게 얘기하진 말고요. 그 뻔뻔함으로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냈을 때 여러분들은 쫄지 않는 자아. 뻔뻔한 자아로 만들어져요.

앞서 얘기했지만 쫀다는 것과 당당함을 대척되는 것으로 두면 안 돼요. 쫄다가 뻔뻔스러워 졌다가 그 다음에 마지막에 오는 것들이 당당함이에요. 당당함은 그렇게 쉽게 얻을 순 없어요.  267


라캉도 말했던 겁니다. 주체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275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임제어록>에 나오는 말입니다. 물론 진짜 살인을 하라는 것은 아닐겁니다. 위악은 위악일 뿐, 진정한 악을 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빈다. 단지 우리 스스로 주인으로 서는 데 방해되는 일체의 권위를 마음속에서 제거하자는 겁니다.  277




에필로그 - 존 레논의 '이매진'을 읊조리며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 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Imagine no posse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타인이 자신의 삶을 억압할 때는 저항이라도 가능하지만, 자발적으로 타인에게 복종하는 경우에는 답조차 없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깊게 가슴에 아로새겨야만 합니다. 타인의 삶을 흉내 내지 말라는, 그리고 타인에게 내 삶을 흉내 내도록 강요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말입니다. 하긴 다른 팽이의 회전이 멋있다고 해서 그것을 흉내 내는 순간 자신만의 스타일로 돌고 잇는 팽이는 더 이상 돌 수 없을 겁니다. 그 역도 비극으로 끝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억압뿐만 아니라 모방이나 자발적 복종도 철저하게 거부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모방이나 자발적 복종도 철저하게 거부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문정신이 가진 소명입니다. 인문학은 다른 학문과는 달리 '고유명사'를 지향하는 학문입니다.  288-289


"공통된 그 무엇"을 거부해야, 우리는 "스스로 도는 힘"을 지킬 수가 잇습니다. 아니 그 역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스스로 도는 힘"을 강화할 때에만 우리는 "공통된 그 무엇"을 극복할 수 있을 테니까요. '공통된 그 무엇'의 자리에는 그 어떤 것이라도 올 수 있습니다. 자본, 종교, 민족, 인종, 정치권력, 스승, 멘토 등등. 우리만의 스타일로 삶을 살아 내는 힘을 빼앗는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통된 그 무엇"이 들판의 야생화들처럼 단독적인 개인들을 '우리'로 만드는 근본적인 계기로 기능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말장난을 조금하자면, 공통된 그 무엇이 만드는 것이 바로 '울(타리)'. 그러니 '우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공통된 그 무엇이 만든 '우리'에 갇히는 순간, 개인들은 '우리'로 변한다는 겁니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겁니다. '울타리'를 의미하는 '우리'라는 말이 개인들의 단독성을 부정하고서 출현하는 집단적인 '우리'라는 말과 같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공통된 그 무엇의 '우리'에 갇혀 '우리'가 되는 순간, 더 심각한 위기가 먹구름처럼 몰아닥치게 됩니다. 우리와 공통된 것이 없는 타자들을 '적'으로 여기는 후속 사태가 벌어질 테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 순간 개인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슈미트의 말처럼 '정치적인 것'의 범주, 그러니까 '적과 동지'라는 치명적인 범주에 포획되고 맙니다.  290-291


"공통된 그 무엇"을 극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개개인들을 '우리'로 가두는 우리를 부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힘을 내서 스스로 다시 돌아가야만 합니다. "스스로 돌아가는 힘"을 유지하는 단독적인 개인들로 우리가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야만적인 적대와 대립, 그리고 끝내 모두를 절멸시키는 전쟁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존 레논은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모든 종교, 모든 국가, 모든 소유를 철폐하는 꿈을 꾸었던 적이 있습니다. 종교, 국가, 그리고 소유를 통해 적과 동지로 갈라서서 싸우는 인간의 모습이 참담했던 겁니다.  292-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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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여러분 때문에 철학, 즉 필로소피(Philosophy)라는 학문이 앎(Sophos)을 사랑하는(Philo)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사랑해야 그것에 대해 아는 학문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5


사랑편


조르주 캉길렘이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있습니다. 미셸 푸코의 논문 지도 선생이기도 한데, 이 사람이 쓴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이라는 책이 있어요....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정상을 정의하는 것은 비정상을 정의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26


10년 동안 김수영이 계속 김현경을 때리다가 마지막 때린 날 <죄와 벌>이라는 시를 씁니다.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 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진짜 미워하려면, 내가 죽어도 미워하는 거예요.

감옥에 가거나 사형 당할 각오를 한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고요. 진짜 미우니까요. 나 하나의 이익을 생각하면 누구를 미워하지 못해요.  30-31


타인과 관련된 감정 중에 가장 극단적인 감정이면서 가장 강도가 센 게 미움과 사랑이잖아요.

제대로 미워하면 타인의 시선, 돈, 우산이 눈에 들어오면 안 돼요. 사랑도 미움과 똑같은 거예요. 사랑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요.

남에게 충분히 희생을 당하고 돌을 맞아도 할 수 있는 게 사랑이거든요. 스스로 돌아보세요. 이렇게 죽이고 싶도록 누군가를 미워한 적 없었죠? 그러니 사랑도 못 하는 거예요. 사랑과 미움은 같은 감정이니까요.  33


알랭 바디우라는 철학자는 '사랑은 둘의 경험이다.'  33


다른 게 개입이 되면 안 돼요.

둘의 경험을 한다는 건, 다른 사람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정치적 상황, 경제적 조건, 오만 가지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야 해요.  35


둘의 경험을 유지하는 건 전투고 투쟁이에요. 스스로와도 싸워야 되죠.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인간관계와 다 싸워야 돼요.  39


누군가를 좋아할 때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겁을 집어먹으면 죽었다 깨나도 사랑 못해요.

내가 사랑할 수 있다는 건 고통을 감당한다는 거예요.  47


성적으로 궁합이 안 맞는다고, 나중에 헤어지는 부부들 있죠? 섹스만, 성만 달랑 보고 간 거예요. 오히려 관계에서 성적인 영역이 작아져야 돼요. 이건 다시 말하면 성적으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거예요.  51


일단 사랑이라는 느낌이 들면, 그냥 던져요. 최선을 다해요.  52


사랑이라는 감정을 배우는 요령은 자기감정에 충실한 거예요.  53


우리가 어떤 사람을 갖는다는 건 성적인 소유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모든 면에서 주인공으로 만든다는 거예요. 거기에 성도 포함돼요.  76


우리가 진짜 둘로 섰다는 경험을 하는 순간, 그때 우리는 꽃필 거예요.  78


우리는 헌신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내가 널 주인공으로 만들면 너도 나를 주인공으로 만드니까, 상대방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거예요. 상대방에게 헌신을 해서 나에게 그게 돌아도게 하는 거지요. 잊지 마세요. 행복해 집시다.  79



사랑에는 놀라운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타자를 알아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면서 타자를 알아 가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알아 가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83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규칙이 공유되는 공동체 내부에서는 나와 타자가 대칭적인 관계에 잇고 '교환=커뮤니케이션'은 자기대화(monologue)일 뿐이다. 한편 비대칭적인 관계에서의 '교환=커뮤니케이션'은 끊임없이 '목숨을 건 도약'이 수반된다. 나는 또한 이러한 비대칭적 관계 속의 교통으로 이루어지는 세계를 '사회'라 부르고 공통의 규칙을 가진, 따라서 대칭적 관계 속에 있는 세계를 '공동체'라고 불러왔다.' <탐구II>  85


가라타니 고진은 타자와의 대칭적 관계에 있을 때 우리가 공동체에 속해 있고, 반면 타자와 비대칭적 관계에 있을 때 우리가 공동체에 속해 있고, 반면 타자와 비대칭적 관계에 있을 때 우리가 사회에 속해 있다고 말합니다.  86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게 도는 당혹감입니다. '아! 저사람에대해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는 것이 별로 없구나!' 이제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 가야 하는 비대칭적인 관계, 즉 사회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87


타자가 나를 사랑하기로 한 것도, 그리고 나를 버리기로 한 것도 모두 그가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인 것이지요.  88


타자가 자유롭게 나를 사랑하기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는 자유롭게 나를 떠나기로 결정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어느 경우든 그것은 타자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실현한 것이니까요.  89


나를 떠날 수도 있는 자유를 가자고 있음에도 타자가 나의 곁에 머물 때, 우리는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불행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타자와의 사랑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법입니다.  91




몸편


몸과 정신은 함께 갑니다. 정신 상태가 상당히 안 좋다면, 몸 상태도 상당히 안 좋은 거예요. 정신적 문제를 몸과 나누어서 생각하면 안 되는 거예요. 사람의 모모가 정신은 하나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거나 무언가를 의심하거나 우울한 증세가 있다면, 일차적으로는 운동을 하면서 해결을 할 수 있어요. 강건하게 운동을 하면 100펴센트 해결이 되죠. 어렵지 않아요. 정신에 문제가 생기면 몸에, 몸에 문제가 생기면 정신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의 실천적인 조언을 드릴게요.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면, 집에 처박혀 잇지 말고 몸을 움직이고 써야 합니다. 그리고 몸에 문제가 있을 때는 몸에 연연하기보다 정신적인 문제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고요.  99


'몸'이라는 건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남자의 몸, 여자의 몸만 존재해요.  100


남자의 몸은 여자의 몸으로, 여자의 몸은 남자의 몸으로 열려 이싿고 해야 할까요? 철학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관계에 열려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이라는 걸, 몸 일반으로 보지 말자고요. 그냥 여자의 몸, 남자의 몸인 거예요. 그리고 지구상에 이게 존재하고, 생명체에게 이게 존재한다는 건 소중한 거계요. 여자 혼자서는 여자의 몸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고, 마찬가지로 남자 혼자서는 남자의 몸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수박에 없는 구조가 바로 우리의 몸이라는 거죠. 흥미로운 일이지요.  101


우리 몸은 기억을 합니다.  108


(제자중에)오케스트라에서 플루트를 연주하는 친구인데, 이 친구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악기는 손을 타기 때문에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주고 만져 주지 않으면 마치 남남인 것처럼 초기화되어 버린다"라고요.  110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키스를 나누고 나를 만져 주길 바라죠. 나에게서 날 수 있는 전혀 다른 소리들을 기대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을 하지 않게 되면, 어떤 사람의 몸과 부딪히는 관계를 맺지 않게 되면 여러분들은 끝난 거예요. 살아 있어도 끝난 거예요. 썩어 가는 거예요. 리셋이 되고 있는 거예요...

사람 몸은 다 악기예요. 애완견도 악기고, 심지어 돌도 악기예요.  111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 몸은 악기와 같으니 악기를 어덯게 유지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112


집중력입니다. 최대한 집중해서 확신이 드는 사람과 관계를 지속하려고 할 때, 거기서 환멸을 느끼든 좌절을 느끼든 경험이라는 것이 되는 거예요. 집중을 했을 때 경험이 되는 거죠. 장비를 갖추고 여행을 가서 고생을 하면 경험이 되지만, 그냥 길 가다 폭풍우 쏟아진다고 폭풍우를 경험했다고 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냥 당한 거죠. 그건 경험이 아니에요. 아무것도 못 배워요. 경험은 수동적인 게 아닙니다. 경험에서 배운다는 건, 진지하게 직면하는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말이에요. 진지(眞摯), '참될 진(眞)'자에 '잡을 지(摯)'자예요. 특히 여릭서 중요한 것은 '지'라는 글자입니다. 솔개 같은 맹금류가 토끼 같은 동물을 꽉, 혹은 제대로 잡아챈다는 뉘앙스가 있으니까요.

꽉 잡을 때 그게 뜨거운지 시원한지 알아요. 그때 배우는 거예요. 뜨거운 척 하는 게 아니라 꽉 잡아 봐야 돼요. 이 경험이 쌓여야 된다고요.  142


타인을 위해 자기감정을 억누르는 사람은 대개 노예들이에요...

타인이 정한 행복과 불행이란 기준이 아니라 나만의 행복과 불행이란 기준으로, 일체 검열하지도 않고 쫄지도 말고 당당하게 자신의 감정에 따라 판단하라는 겁니다.  145


오로지 나의 느낌에, 내 감정에 유일하게 집중하고 사랑을 할때만이 우리는 주인이 되는 경험을 해요.  154


직접 대면했을 때 아름다운 풍경은 살아 있는 것 같은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진에 담긴 아름다운 풍경은 그런 생생함이 사라지고, 무엇인가 죽은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사진의 풍경은 '시각'만이 추상화되어 박제된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자신이 직접 본 풍경은 다섯 가지 감각이 모두 살아 움직였던 구체적인 경험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진이 보여 주는 시각적 풍경은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풍경을 추억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당시 경험했던 바람의 산들거리던 촉감이나 호수의 달콤하고 씁쓸했던 물비린내 등등은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되겠지요.  164-165




고독편


우리가 제일 슬픈 건, 나를 항상 의식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이렇게 생각해 보면 돼요. 나를 만난 남자가 자꾸 시계를 봐요. 여러분을 만난 어떤 사람이 시계를 자꾸 본다면, 그건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고 객관적 위치가 어디인지를 파악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불쾌하지 않나요? 백화점도 그걸 알아요. 시계 안 갖다 놓죠. 상품에 몰입하라고요. 백화점은 절대로 창문을 만들지 않아요. 비가 쏟아지면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집으로 가니까요. 불문율이죠. 백화점은 그렇게 몰입을 위한 환경을 만들어 놓은 겁니다.  176


몰입은 시간 가는지 모른다는 느낌인 거예요. 시간을 챙긴다는 건 일정을 관리한다는 거잖아요. 

어른이란 게 뭔가요? 내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어른은 몰입을 잘 못해요. 아이들은 좋아하거나 꽂히는 게 있으면 거기에 목숨을 걸잖아요. 고독이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지 아시겠죠? 몰입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176-177


세계와 관련되어 있으면, 내 바깥에 있는 사람, 사물, 사건에 몰입을 하면 고독은 안 느껴져요. 번지점프를 하면서 고독을 느끼지 않잖아요. 절대 안 느껴요. 아주 재밌는 영화를 볼때도 우리는 고독을 느끼지 않죠. 어떤 매력적인 남자를 만나서 그 남자에게 몰입하는 순간 우리에게 고독은 없어요. 내가 몰입할 대상이 존재하면 고독은 없어요. 우리가 느끼는 고독의 정체는 바로 그거예요. 몰입할 게 없는 겁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죠. 사랑하는 게 없다고요. 밤새도록 함께 잇어도 시간이 가는지 모르는, 그런 존재가 없다는 거예요....

세계가 풍겨으로 보일때 우리는 고독한 거예요. 내가 있고, 나머진 다 그림인 거죠.  178


고독을 해소하는 방법, 그러니까 세상을 풍겨으로 보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풍경으로 보이지만 그것들 중 만지고 싶은 것이 있는지, 다시 말해 더 몰입하고 싶고 더 들어가고 싶은 것이 잇는지 살펴보는 거예요. 반드시 있을 겁니다.  179


고독이라는 건 자의식이 강한 상태입니다... 긴장되어 있어 거예요. 이 세계를 풍경으로 보는 겁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해 몰입하지 못해요. 나에게만 몰입해요. 나에 대해서만 몰입하는 겁니다. 그런데 몰입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분열증에 빠져요. 우리의 문제가 그거죠.  180


고독은 일회용 반창고일 때에만 의미가 있다는 사실. 상처가 날까 봐 계속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요.

고독은 병에 비유하자면 자폐증과 같은 겁니다. 자폐 증상이 있는 아이들은 세계가 너무 큰 충격을 줬을 때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요.  182


자본은 우리의 낭만적 삶을 부정할 겁니다. 낭만적인 사람은 세상에 대한 몰입도가 높은 사람이니까요. 그러니 자본의 입장에서는 하나씩 하나씩 몰입도를 줄이려고 할 거예요. 그러니 낭만을 위한 싸움을 시작하려면 우리가 먼저 되새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죠? 고독을, 멋이라고 자랑하지 말자고요. 일차적으로 우리는 상처받았어요. 고독하도록 내밀린 겁니다. 이걸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삶의 행복을 찾으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게 몰입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거예요. 몰입을 못하면 죽은 거니까요.  186


사람은 죽을 때 근육이 이완되죠. 죽고 나서 경직이 됐다가 이틀 정도 염을 하고 경직이 풀리면 사람 몸이 처음으로 다 열려요. 잡아뒀던 게 이완되니까 오만 구멍에서 다 쏟아져 나와요. 산다는 건, 사는 것의 정의는 항문을 조이는 거예요. 몰입과 무어의 육체적인 경험은, 드러나는 건 다 열리는 겁니다. 이 경험이 매력적인 게, 완전히 어떤 것에 몰입한다는 거예요. 나를 떠나는 거죠.

생각을 해 봐야 돼요. 나를 놓을 수 있는 기술이 우리에게 필요한데, 그 방법들은 여러분이 찾아내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어떻게 증진시킬까?'가 다움 문제인 거죠. 이거 굉장히 소중한 거예요.  190


고독을 벗어나는 기술은 '고독의 상태니 여기서 건너뛰자'는 발버둥보다 일단은 '몰입도를 어떻게 높여야 되는데 이 몰입의 방법이 나에게는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해보는 거예요.  191


여러분에게 세계가 힘든가요? 육체적이든 장소적이든 시간적이든 관념적으로라도 거리를 두세요. 세계를 풍경으로 보는 연습을 하세요. 진짜 편해요. 세계에 그냥 노출되서 마구 상처받는 것보다 고독으로 자기 내면으로 침잠하고 세계를 풍경으로 보는 게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어요. 슬픈 전략이죠. 하지만 우리의 보호막은 또한 우리의 감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독은 이중적이에요.  192


행운은 아무에게나 오지는 않지요. 스스로 고독을 깨기 위한 적극적인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춤도 춰 보고 노력은 해 볼 수 있어요. 해보는 데까진 해 봐야 되겠죠. 어쨌든 방법은 알았으니까요. 그렇게 하다 보면 나를 가두고 있는 그 감옥의 두께가 좀 얇아질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런 어머니 같은 존재가 필요하지 않을까'그런 생각이 들어요. 따뜻한 사람이요. 어쨌든 따뜻한 사람이 여러분을 나올 수 있게 괜찮다고, 여기는 괜찮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193


눈치를 보는 건 괜찮아요. 압도적인 힘 앞에서 생존하려면 눈치를 보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197


삶을 잘 살려면 어떤 것을 결정하든 부모님에게 '이기적이다'는 말을 들어야 해요. 부모님이 여러분에게 이기적이라고 말씀하시면 무조건 자신감을 가지면 돼요. '드디어 내 삶을 사는구나'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199


예쁜 사람 콤플렉스가 그거예요. 한 번의 선택으로 완벽한 스토리로 살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 주저하는 겁니다. 지금 선택이 완벽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니까요. 결국 어떤 선택도 할 수 없게 되지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선택하고 행동하세요. 

확신이 아니라 감각만 믿으셔야 해요. 헷갈릴 때 여러분들이 하셔야 될게 감각을 믿는 거예요. 확신이라는 것을, 미래로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감각을 믿으세요  203


독일 관념론이 우리에게 했던 이야기는 타자가 매개되지 않는 자기의식은 없다는 겁니다. 모든 자기의식, 나에 대한 의식은 타자가 매개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쁜 타자를 만나는 게 비극인 거예요. 누군가 나에게 쓰레기라고 비난하면, 스스로를 돌아보게 돼요. 그리고 쓰레기를 찾게 되죠. 좋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이유는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나의 모습을 발견해 주기 때문이에요.  205


자신의 감정을 지켜야만 해요. 그만큼 여러분은 삶의 주인이 될 테니까요. 그게 주인 아닌가요? 내가 행복하면 행복한 거예요. 내가 즐거우면 즐거운 거고요. 내가 불쾌한 건 피해야 되죠. 불쾌한데도 억지로 하고 잇다면, 문제가 있죠. 행복한데도 버려야 된다면,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요? 사실 돌아보면 우리는 너무 비겁하잖아요. 내 감정을 지키면 불이익을 당할 것 같아서 자신의 감정쯤은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자신의 감정이 소중하다고 이야기는 하죠. 이렇게 비겁한 의식들 때문에 우리는 계속 힘들어지는 거예요. 아주 쉬워요. 아주 단순하죠. 제가 왜 단순하게 얘기하는 거 같아요? 별로 타협을 안 보잖아요. 옳은 거는 옳은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더라도 옳은 거는 진짜 똥구먼이 빠져도 옳은 거예요.

사실 저도 그렇게 잘 살지 못하죠. 그런데 제가 철학자니까, 옳은 거는 옳은 거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못 살아도 옳은 것은 옳은 거니까요.  231-232


'왜 사나?'라고 질문하지 말아요... 다 개소리예요.

그 막연한 질문들이 대개는 지금 내가 좋은지 내 느낌이 어떤지를 은폐하기 위해서 던져지는 질문이에요. 그리고 그 막연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내앞에 있는 사람,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무시할 때 써요.  237


자신의 삶을 하나의 축복으로 생각하려면, 여러분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은 고독과 싸우는 것입니다. 고독해지는 내 모습과의 싸움입니다. 세계를 풍경으로 볼 게 아니라 세계에 몰입할 걸 찾아야 해요. 그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건 맞아요.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커다란 행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처를 받았다고 떨어져 나오면 아무것도 못 만지는 세상만 남아요. 그 순간 우리는 제대로 몰입할 대상을 만날 가능성마저도 잃게 되겠지요. 그러니 용기를 내야죠. 제대로 살려면, 행복하게 살려면, 우리에게는 몰입할 대상이 반드시 있어야 하니까요.

고독에는 병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고독은 자기에 대해서 몰입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고독은 타인에 대해서 몰입하지 않기로 작정했을 때 쓰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결국 타인을 사랑할 수 없으니 나만을 사랑하기로 작정하는 것이 고독의 숨겨진 메커니즘입니다.  238




에필로그 - 사랑, 손이 데어도 꽉 잡아야만 하는 것

차이의 긍정, 이것은 바로 상대방을 소유하지 않겠다는, 다시 말해 자유롭게 해 주겠다는 의지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252


니체도 <도덕의 계보학>에서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저지 장치가 파손되거나 기능이 멈춘 인간은 소화 불량 환자에 비교될 수 있다... 이런 망각이 필요한 동물에게 망각이란 하나의 힘, 강건한 건강의 한 형식을 나타낸다."  258


스피노자는 "슬픔은 인간 활동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방해한다. 즉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머물고자 하는 코나투스를 감소시키거나 방해한다. 그러므로 슬픔은 이런 노력에 반대된다. 그리고 슬픔을 느끼는 모든 인간이 노력하느 ㄴ것은 슬픔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러나 슬픔이 크면 클수록 그것은 인간의 활동 능력이 그만큼 큰 부분에 대립한다. 그러므로 스픔이 더 크면 인간은 반대로 그만큼 활동 능력으로써 슬픔을 제거하려고 할 것이다." <에티카>  258-259


스피노자의 말대로 의식적인 노력으로 치유의 시간은 그만큼 단축될 수도 있습니다.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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