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내 삶의 투쟁 과정에서 도움을 준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굳이 내 영혼 깊숙이 흔적을 남긴 사람들을 밝히자면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그리고 조르바다.
호메로스는 내게는 아주 밝게 빛나는 평화로운 눈동자였다. 그는 마치 태양처럼 모든 것을 구원의 빛으로 비춰주었다. 베르그송은 젊은 시절 괴롭고 어려웠던 철학적 문제들에서부터 나를 구원해준 사람이다. 니체는 나를 새로운 고뇌로 풍요롭게 해주었고 내 불행과 아픔과 불확실성을 자부심으로 바꾸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조르바는 내게 삶을 사랑하는 법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만일 내게 인도인들이 “구루”라고 하고, 성산(聖山) 아기온오로스(그리스 북부 할키디키 지방에 있는 반도로, 수도승들이 자치권을 행사하는 곳이어서 여자나 동물 암컷이 이곳에 들어오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의 수도사들이 “예론다스(‘영감님’이라는 뜻)”라고 부르는 영적(靈的) 스승을 이 세상에서 꼭 한 사람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조르바를 선택할 것이다.
조르바는 먹물들을 구원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높은 데서 먹잇감을 발견하여 낚아채는 원시인의 시력과, 매일 새벽마다 새로이 떠오르는 창조성, 그리고 매순간 끊임없이 바람, 바다, 불꽃, 여자, 빵과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영원한 처녀성을 부여하는 순진무구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확신에 찬 손과, 신선함으로 가득한 마음, 마치 내면에 자신의 영혼보다 더 높은 힘을 가지고 있는 듯, 자신의 영혼을 놀려대는 사나이다운 멋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창자보다 더 깊은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아니 조르바의 나이 먹은 가슴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터져 나오는, 구원인 듯한, 거칠고 호쾌하게 껄껄대는 웃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겁에 질린 불쌍한 인간들이 마음 놓고 편하게 살기 위해 주변에 세워놓은 윤리, 종교, 조국과 같은 모든 장애물을 한꺼번에 깨뜨려서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그리고 실제로 무너뜨리는 웃음을 가지고 있었다.  7-8

나는 감히 용기를 내지 못했다. 나는 한밤중에 욕정의 으르렁 소리를 내며 춤을 추면서, 나에게 도덕과 관습이라는 탈을 벗어던지고 먼 여행을 함께하자고 울부짖는 조르바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벌벌 떨면서 움쩍달싹도 하지 못했다.
나는 많은 순간, 최고의 미친 짓을, 삶의 본질을 “행하라”고 소리치는 내 영혼을 꼭 붙잡고 그렇게 하지 못한 내 삶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조르바 앞에 있는 동안 나는 내 영혼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11




인간의 영혼은 진흙덩어리다. 모호하고 촌스러운 욕망들로 가득하고, 길들여지지도, 다듬어지지도 않고, 아무것도 분명하지도 확실하지도 않으며,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만약 예측할 수 있었더라면 우리들의 이 헤어짐도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24-25

“내가 스무 살 때였어요. 올림포스산 아래의 어떤 마을 축제에 갔다가 생전 처음으로 산투리 소리를 듣게 됐지요. ‘왜 그러는 거냐?’ 아버지께서 - 하느님께서 그의 영혼을 용서해주시길! - 내게 물었죠. ‘저는 산투리가 배우고 싶어요.’ ‘뭐라고? 부끄럽지도 않으냐? 네가 집시냐? 악기를 연주하게?’ ‘저는 산투리를 배우고 싶어요……’ 그때 내겐 기회가 되면 결혼하려고 모아둔 비자금이 있었어요. 유치하고 미친 짓이었죠. 혈기 왕성했던 나는 엉큼하세도 결혼을 하려고 했지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몽땅 다 주고 산투리 하나를 샀지요. 그게 바로 이거예요. 나는 이걸 가지고 테살로니카로 가서 ‘레쳅-에펜디’라는 터키인인 산투리 명인을 만났죠. 나는 그의 발아래 엎드렸죠. ‘뭔 원하는 거냐? 그리스 놈아.’ 그가 물었죠. ‘저는 산투리를 배우고 싶습니다.’ ‘음,  그런데 왜 내 발 앞에 엎드린 거냐?’ ‘저는 수업료를 낼 돈이 없습니다.’ ‘너는 산투리에 대한 열정이 있느냐?’ ‘네,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나도 수업료 따위는 받지 않겠다.’ 나는 일 년 동안 그의 곁에서 산투리를 배웠죠.  32

“나도 사람이오. .. 결혼했었죠. 악수를 둔 거죠. 가장이 되고 가정을 꾸렸죠. 애도 낳고요. 고문이었죠. 하지만 산투리가 있으면 됐죠, 뭐.”  33

“빌어먹을 정치! 도무지 부끄러운 줄 모르는군.” 그가 경멸조로 중얼거렸다.
“조르바, 빌어먹을 정치라니 무슨 뜻이오?”
“보쇼, 왕이니 민주주의니, 국회의원이니, 이 모든 얄팍한 속임수들을!”
조르바의 머릿속에서는 이 시대의 모든 것이 이미 낡고 철 지난 고물들이었다. 그에게는 전보나 증기선과 철도, 도덕과 조국, 종교가 모두 때 지난 고루한 체제였다. 그의 영혼은 이 시대보다 훨씬 빨리 앞질러 가고 있었다. 39-40

늙어서 이빨이 다 빠진 뒤에나 찾아오는 평정심을 갖게 된 다음에야 올바르고 온전한 생각들을 하게 마련이죠.  47

마을을 지나고 있었는데 아흔 살은 먹은 할아버지가 아몬드 나무를 심고 있더라고요. ‘할아버지, 아몬드 나무를 심고 계세요?’ 내가 물었죠. 그러자 그 허리가 꼬부라진 할아버지가 나를 보면서 말했죠. ‘얘야, 나는 내가 죽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단다.’ 그래서 내가 대답했죠. ‘저는요, 매 순간 죽음을 생ㅇ각하면서 행동하죠.’ 우리 둘 가운데 누가 맞는거 같소, 대장?’
..
죽음이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과 매 순간 죽음을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것은 어쩌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르바가 물었을 때 나는 그것을 미처 몰랐다.  70

“.. 한 번에 한 가지씩만 생각하자고요. 밥이 앞에 있으면 밥에 정신을 쏟고, 내일 우리 앞에 우리들의 갈탄이 있을 땐 갈탄에 정신을 쏟읍시다. 일을 어정쩡하게 하지 맙시다. 알겠죠?”  70

“대장, 어제 우리가 못된 짓을 저질렀어요. 못된 짓을 했다고요! 대장도 웃고 나도 웃고, 그리고 불쌍한 여자는 우리를 바라봤죠! 또 대장이 그렇게 그 여자를 천 살 먹은 호호할멈 대하듯 눈길도 안 주고 떠난 건 창피한 일이에요. 그건 예의가 아니죠, 대장, 인간은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안 되죠. 이런 말 하는 걸 이해해주쇼. 그녀도 약해빠진, 불평꾼 여자란 말이오. 나라도 남아 그녀를 위로했기에 망정이죠.”
“조르바,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모든 여자의 머릿속에 다른 생각은 없다고 믿는 거요?”
“대장, 다른 생각은 절대 없죠! 본 것도 많고 겪은 일도 많고 해본 것도 많고, 그래서 말하자면 배운 것도 많은 이 사람 말 좀 들어보슈. 여자들의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란 없다고요. 분명히 말씀드리죠. 여자들은 병약한 존재고 불평꾼이란 말이오. 만일 사랑한다고, 원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당장 울음보를 터뜨려요. 전혀 원하지 않거나 심지어 질색인 남자라도 말이오. 여자가 ‘싫어요’라고 말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건 전혀 별개의 문제예요.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여자들이란 항상 자기를 봐주고 탐내는 남자를 바란단 말이오. 그 불쌍한 것들은 그걸 원해요. 그러니 그것들에게 자비를 베푸쇼!”  89-90

조르바는 인부들을 다룰 줄 알고 책임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95

내 외할아버지는 크레타 시골에 살았는데 매일 저녁이면 등잔불을 들고 마을을 돌며 혹시 낯선 외지인이 있나 살폈다. 그런 사람을 찾으면 집으로 데려와서 신나게 먹고 마시게 대접하고는, 길고 납작한 의자에 앉아 긴 곰방대를 피워 물었다. 그러고는 손님에게 “자, 이제는 밥값을 치를 때가 됐소.” 하고 말하고는 명령조로 덧붙였다. “뭐든 말해봐요!” “무스토요르기스 할아버지, 대체 무슨 말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당신이 누구고, 어디서 왔고, 어떤 나라를 돌아다니며 당신 눈으로 어떤 것들을 봤는지 모두 다 얘기하슈. 자, 말해보슈.”
그러면 손님은 사실과 꾸며낸 이야기를 뒤섞어서 이야기를 시작했고 외할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긴 의자에 편안하게 앉은 채로 곰방대를 빨며 그 손님과 함께 여행을 했다. 그리고 그 손님의 이야기가 재미있으면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으니 가지 마시고, 내일 하루 더 머무슈!”
외할아버지는 한 번도 고향 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다. 이라클리온(크레타의 주도)에도 레팀노(크레타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에도 가본 적이 없다. 그러고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왜 그런 곳엘 가야 해? 레팀노 사람이나 이라클리온 사람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우리 집에 와서 머물면 돼지. 내가 외지로 나갈 필요가 어딨어?”  96-97

외할아버지가 등잔불을 밝히고 지나가는 객을 찾아 모셨듯이 나 역시 한 손님을 모셔 떠나가지 못하게 붙잡고 있다. 한 끼의 식사 값보다는 훨씬 비싸게 들기는 하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매일 저녁 나는 조르바가 일을 끝내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오면 내 맞은편에 앉혀놓고 함께 식사를 하고는 돈을 치를 시간이 되면 그에게 말한다. “말해봐요!” 그러고는 파이프를 피워 물고 이야기를 듣는다. 이 손님은 지구 곳곳을 돌아다녔고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탐구했기에 나는 조금도 지루한 줄 모르고 계속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조르바, 계속하세요, 계속 얘기해요!”
그러면 마케도니아 전체가 내 앞에서 열리면서 조르바와 나 사이의 좁은 공간에 산과 숲과 강 들, 게릴라들과 부지런한 남성같은 여장부들과 강인하고도 무뚝뚝한 남자들을, 또 때로는 성산아기온오로스의 스물한 개의 수도원과 조선소들과 튼실한 엉덩어를 가진 게으름뱅이 수도사들을 펼쳐 놓았다. 성산 아기온오로스의 수도사 이야기를 끝낼 때면 조르바는 옷깃을 세워 몸을 세차게 흔들고 큰 웃음을 터뜨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대장을 당나귀 엉덩이와 수도사의 앞에 달린 물건으로부터 보살펴 주시기를……”
매일 밤 조르바가 나를 그리스로, 불가리아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불의 그리스 이름)로 데리고 가면, 나는 그 장소들을 눈을 감은 채 보았다. 그는 수많은 수난을 겪은 혼란스러운 발칸 반도 지역을 돌아다녔고, 그의 조그만 눈은 마치 매처럼 재빠르게 모든 것을 이 잡듯 다 보았다. 그는 자주 논을 동그랗게 떴는데, 그러면 우리가 습관적으로 주의하지 않고 보아 넘기는 것들이 그의 앞에서 엄청난 수수께끼로 되살아났다. 가령 그는 지나치는 여자를 보고 몸서리를 치며 멈춰 서서는 물었다. “이건 무슨 조화죠? 여자란 무얼까요? 어떻게 내 머리 꼭지를 돌게 만드는 거죠? 이건 또 뭡니까? 말 좀 해봐요.” 그는 어떤 때는 사람을, 어떤 때는 꽃이 핀 나무를, 또 어떤 때는 시원한 물이 담긴 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르바는 매일같이 모든 것을 처음 보는 듯 봤다.
한번은 그가 오두막집 밖에 앉아 포도주를 마시다가 몸을 돌려 놀란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대장, 이 붉은 액체는 또 뭡니까 말해봐요. 늙은 포도나무 줄기에서 새싹이 나면 시고 시시껄렁한 것들이 주렁주렁 매달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탵양이 이것들을 익히면 꿀처럼 달게 되고, 그러면 우리는 그걸 포도라고 부르죠. 그러 밟고 즙을 짜서 통에다 부으면 저 혼자 부글부글 끓어요. 10월이 되어 술 취한 성자 요르고스(11월 2일이 축일인 크레타의 성인. 다음 날인 11월 3일에는 새 포도주 통을 열어 모두에게 맛보게 한다)축일에 통을 열면 포도주가 나오죠! 이건 또 무슨 기적입니까? 그걸 마시면, 그 붉은 액체를 마시면 영혼이 대범해져서 천박한 것들이 더 이상 그 영혼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하느님한테 도전장을 내죠. 대장, 이게 뭡니까? 대답해봐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르바의 말을 들으면 온 세상이 처녀성을 회복한다. 모든 일상의 것들, 빛바랬던 것들이 하느님의 손을 처음으로 벗어나던 때처럼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강과 바다도, 여자도, 별도, 빵도, 태초의 신비스러운 근원으로 되돌아가고, 하늘에서는 하느님의 수레바퀴가 원초적 힘을 되찾곤 했다.  97-100

어느 일요일, 풍성한 식탁에서 마음껏 먹고 마시고 돌아오던 길에 나는 조르바를 믿고 나의 비밀 계획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조르바는 내 이야기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가끔 화가 나서 머리를 거세게 흔들기는 했지만 내 말을 참을성 있게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는 내 말 첫마디에 술이 확 깨고 정신이 번쩍 든 것 같았다. 내가 말을 끝내자 그가 신경질적으로 콧수염 두가닥을 뽑아 던지며 말했다.
“날 이해하쇼, 대장. 내가 보기에 대장 머리는 밀반죽인 듯해요. 나이가 몇이오?”
“서른 다섯잉요.”
“아, 그럼 영글긴 영 그른 것 같네요.” 이렇게 말하고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화가 나서 고집스럽게 말했다.
“당신은 인간을 믿지 않나요?”
“대장, 화내지 마쇼. 나는 아무것도 안 믿어요. 내가 인간을 믿는다면 하느님도 믿고, 악마도 믿을 거요. 그러면 아주 귀찮아지죠. 세상이 엉망이 되고 나는 궂은 일에 휘말려들 거예요, 대장.”
그러고는 입을 다물더니 모자를 벗고 머리를 미친 듯이 긁고는 콧수염을 뽑아버릴 듯 세차게 잡아당겼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지만 참고 있는 듯했다. 곁눈질로 나를 몇 번 보던 조르바가 마침내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인간이란 짐승이에요!” 이렇게 소리치면서 화를 내며 지팡이로 돌을 내려쳤다. “사나운 짐승이죠! 당신은 귀하게 자라서 그걸 몰라요. 하지만 내게 묻는다면 대답하죠. 짐승이에요! 인간들을 혹독하게 다루면 그들은 당신을 존경하고 두려워하지만, 친절하게 대하면 당신의 눈알을 빼가죠.
거리를 두셔야 해요. 대장! 사람들 기를 살려주지 마세요. 그들한테 우리는 모두 하나고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마세요. 그러면 그들은 당장 대장의 권리를 짓밝고, 밥그릇을 빼앗고, 대장이 굶어 죽도록 만든단 말예요. 거리를 두시라고요. 대장! 난 대장이 잘되기만 바랄 뿐이에요.”
“그러면 당신은 아무것도 안 믿는단 말이오?” 내가 화가 나서 항의했다.
“네, 저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며 번이나 말해줘야 해요? 나는 아무것도, 아무도 안 믿어요. 오직 조르바만 믿어요. 조르바가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이라서가 아니에요. 절대요, 정말 절대로 더 낫지 않죠! 그놈도 짐승이에요. 하지만 내가 조르바를 믿는 까닭은 내가 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놈이기 때문이죠. 나는 오직 그놈만을 잘 알 뿐, 다른 것들은 모두 헛것들이에요. 조르바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조르바의 귀로 듣고, 조르바의 위장으로 소화하죠. 다른 모든 것은 다시 강조하지만 헛것이에요. 내가 죽는 순간 모든 것들도 죽죠. 조르바의 세계 전체가 바닥으로 사라지죠!”
“참으로 이기적이네요!” 내가 냉소적으로 비꼬았다.
“그럼 어떡합니까, 대장? 세상이 그런데요. 먹은 대로 싸는 거죠. 나는 조르바고, 조르바답게 말할 뿐입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르바의 말들이 채찍처럼 내몸을 때렸다. 나는 이토록 강인하고 사람들을 그렇게 지겨워하면서도 그들과 함께 싸우고 인생을 살아갈 기분을 계속 잃지 않는 그가 자랑스럽다.  103-105

진정한 인간은 이처럼 몇 가지 안 되는 물건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  108

“엊그제 우리가 한 말을 기억하쇼? 민중을 계몽해서 눈뜨게 한다고요? ..
대장, 사람들을 좀 조용히 내버려두쇼. 그들이 그런 일에 눈뜨게 하지 말아요. 그들이 눈을 뜨면 보게 될게 뭐겠어요? 자신들의 불행과 처참함뿐이죠! 사람들이 눈이 먼 채 꿈을 꾸도록 내버려둬요!”
그가 잠깐 말을 멈추고는 생각에 잠겨 머리를 긁다가 말을 이었다.
“만약에 ….. 만약에 말이에요…..”
“뭐예요? 한번 들어봅시다.”
“만약에 그들이 눈을 떴을 때 대장이 보다 더 좋은 세상을 보여줄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럴 자신이 있나요?”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어떤 것들이 무너져 내리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 폐허 위에 어떤 것이 세워질지는 알지 못했다. ..
조르바는 나를 보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은근히 화가 났다.
“물론, 보여줄 수 있죠.” 내가 고집을 피우며 대답했다.
“보여줄 수 있다고요? 그럼 한번 말해보슈.”
“당신한테는 얘기할 수 없어요. 아마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참, 그렇다면 보여줄 수 없는 거예요!” 조르바가 머리를 저으며 대꾸했다. “대장, 내가 뭘 잘못 먹어 바보가 된 줄 아쇼? 대장은 속은 거예요. 나 역시 아나그노스티스 영감과 마찬가지로 배운게 없는 무식쟁이지만 난 결코 그 정도로 바보는 아녜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걸 그 순진한 인간과 그의 평생 반려자인 순한 마누라가 이해하겠소? 이 세상의 모든 아나그노스티스 영감들과 그 마누라들이 어떻게 그걸 이해한단 말이오? 그네들이 새로운 세상을 볼 것 같소? 그냥 그들에게 이미 익숙하고 길들여진 세상을 그대로 놔두슈. 보다시피 지금까지 잘들 살아왔지 않소. 그냥 살 뿐 아니라 아주 잘살고 있고 자식에 손자들까지 잘 낳고 살아들 가지 않소. 하느님이 그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해도, 그들은 ‘하느님께 영광이 있을진저!’ 하며 아우성을 쳐대죠. 이 가엾은 자들은 거기에 만족해 안주하는 거예요. 그들을 내버려두고 입을 다무세요.”  116-118

‘이 사람은 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서 머리가 타락하지 않았구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많은 것을 보고 행하고 겪으면서 정신은 열리고, 마음은 넓어지고, 태초의 호기를 잃지 않았구나. 이 사람은 그의 고향 선배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우리가 풀지 못하는 모든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한칼에 풀어버리는 구나. 이 사람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땅에 뿌리박고 있으니 절대로 쓰러지거나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프리카의 원시 부족들은 뱀을 숭배한다. 왜냐하면 뱀은 온몸을 땅에 붙이고 기어 다니기에 대지의 비밀을 다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뱀은 배로, 꼬리로, 남근으로, 머리로 그 비밀들을 캐낸다. 조르바도 그렇다. 우리 지식인들은 공중에 떠 있는 바보 같은 새들일 뿐이다.’  118

6
“대장이 먹은 게 무언지 말해보슈.” 한번은 조르바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대장이 어떤 사람인지 얘기해주리다. 어떤 작자들은 먹고 똥과 잡동사니만 만들고, 다른 작자들은 일과 의욕을 만들고, 또 다른 사람들은, 내가 듣기로는, 하느님을 만든답디다. 인간이란 이 세 불 가운데 하나죠. 나는 말이오, 대장, 최악도 아니고 최고도 아니에요. 나는 중간 부류에 속하거든요. 내가 먹는 음식은 일과 의욕으로 바뀌어요. 그나마 다행이죠!”
이렇게 말하고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대장, 당신은 말이오, 아마도 먹은 음식으로 하느님을 만들려고 애쓰는데, 그게 맘대로 되지 않아 보깨고 있는 거 같소. 대장은 수탉이 당했던 일을 당하고 있는 거요.”
“수탉이 무슨 일을 당했는데요, 조르바?”
“수탉이 말요, 처음에는 수탉ㅊ처럼 제대로 의젓하게 걸었죠. 하니만 어느 날 하루, 겉멋이 잔뜩 들어서는 두루미처럼 위풍당당하게 걷겠다고 선언했죠. 그때부터 이 불쌍한 수탉은 자기 고유의 걸음걸이를 잃고는 균형 감각이 엉망이 돼서 깡충깡충 두 발로 뛰게 됐죠.”  125-126

“대장, 당신은 여자들한테서 뭘 기대하슈? 여자들은 어떤 놈이든 만나는 놈의 아이를 낳아주죠. 그리고 남자들에게선 뭘 기대하슈? 남자들은 쥐덫에 걸려들죠. 모든 게 다 부질없는 일이에요, 대장!”  128

일을 마치고 그 망할 통통한 물개와 수작할 때면 - 그녀에게 행운이 있기를! - 갈탄과 대장에 관한 일 모두를 그녀의 목에 두른 리본에 매달아놓았죠. 나 자신도 그 리본에 매달아버리고 모든 걸 잊죠.  133

나는 늦게까지 잠을 잘 수 없었다. 내 삶은 실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펀지 하나를 들고서 그동안 읽은 모든 것을, 보고 들은 모든 것을 비워버리고 조르바의 학교에 다시 들어가 위대하고 진정한 알파벳을 배울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전혀 다른 길을 갔을 것이다! 내 오관과 피부 전체를 완벽하게 갈고닦아 즐기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을 것이다. 뛰기, 싸움, 헤엄, 승마, 노 젓기, 자동차 운전, 사격을 배웠을 것이다. 내 영혼을 살로 채우고, 살을 영혼으로 채워, 드디어 나의 내면의 영원한 숙적인 이 둘을 하나로 화해시켰을 것이다.
나는 침대에 앉아서 잃어버린 내 삶을 기억해냈다. 열린 문 사이로 희미한 별빛 아래서 바위 위에 쪼그리고 앉아 마치 한 마리 밤새처럼 바다를 응시하는 조르바가 보였다. 나는 그가 부러웠다. 나는 생각했다. ‘저 사람은 진리를 발견했다. 저 사람이 바로 길이다!’
먼 옛날 창세기 시절 조르바는 앞장서서 도끼로 길을 열던 부족장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영주들의 성을 돌아다니며 영주와 하인, 귀부인 들까지 모두 자신의 두꺼운 입술에 목매게 하는 유명한 음유시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배은망덕한 이 시대에 조르바는 굶주린 늑대처럼 우리 주위를 배회하거나 삼류작가로 전락하여 광대 노릇을 한다.  138-139

“대장, 나는 벌써 흰머리가 났어요. 이빨은 흔들리기 시작했고요. 이제 난 허비할 시간이 없어요. 대장은 아직 젊으니 좀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난 아뇨. 맙소사, 늙어갈수록 난 더 거칠어진다고요! 어떤 작자들이 주저앉아서 나이가 들면 불같은 성질이 죽고 저승스자를 만나도 목을 길게 쭉뻗고 ‘자, 이제 목을 치쇼!내가 성인이 되리다!’하고 말하게 된다고 지껄이죠. 하지만 나 이 조르바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 사나워지고 있어요. 나는 절대 포기 안해요. 이 세상을 모두 먹어치우고 싶어요.”  142


7
“몇 번 결혼했어요, 조르바?” ..
“난 사람이 아니오? 나도 그 엄청난 바보짓을 했수다. 모든 기혼 남자들이 내가 결혼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에 동의할 거요. 그렇죠, 나도 그 엄청난 바보짓을 저질렀던 말이오. 결혼했었죠.”
..
“대장, 이런 말이 있소. 정식 결혼은 알맹이가 없다! 양념 없는 음식이죠. .. 우리 고향 마을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훔친 고기만이 맛있다.’ 마누라는 훔친 고기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 148-149


8
“비가 오면 마음이 우울해지죠.” 조르바가 말했다. “그러니 비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해요.”
그는 담장 아래쪽으로 몸을 굽혀 갓 피어난 야생 수선화를 꺾어서는 마치 수선화를 처음 보는 것처럼 한참 동안이나 탐욕스럽게 살펴봤다. 그러고는 눈을 지그시 감고 냄새를 맡다가 한숨을 쉬더니, 내게 그 수선화를 건넸다.
“대장, 우리가 돌과 꽃, 그리고 비가 뭐라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아마도 우리에게 소리를 치는데 우리는 알아듣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이것들이 못 알아듣고요. 대장, 언제나 이 세상의 귀들이 뚫릴까요? 언제나 우리들 눈이 열려 사물들을 보게 될까요? 언제 우리가 팔을 벌려 돌과 꼬과 사람이 서로 껴안게 될까요? 대장, 책에는 뭐라고 쓰여 있소?”
“빌어먹을!” 나는 사랑하는 조르바가 잘 쓰는 말을 골라 대답했다. “빌어먹을! 이렇게 쓰여 있죠. 다른 말은 없고요.”
조르바가 내 팔을 잡았다.
“대장, 좋은 생각이 났어요. 듣고 화내면 안 돼요. 대장이 가지고 있는 모든 책을 한곳에 쌓아놓고 불을 질러버립시다. 그러면, 혹시 알아요? 대장은 바보가 아니고, 또 좋은 사람이니까…… 그러면 대장도 뭔가를 좀 알게 되지 않을까요?”
‘맞아! 바로 그거야!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어!’
조르바가 망설이며 생각에 잠기더니 잠시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이죠. 뭔가를 좀 알 것 같아요.”
“그게 뭔데요? 말해봐요, 조르바.”
“난들 알겠어요? 그냥 그렇게 생각될 뿐이죠. 뭔가 알 것 같아요…… 내가 그걸 이야기하려 들면, 엉마이 될 거예요. 언젠가 기분이 내키면 대장한테 춤을 춰서 보여줄게요.”  171-173

마침 그 순간에 한 여인이 젖은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내려뜨리고, 까만 치마가 바람에 날려 무릎까지 훤히 드러난 상태로 카페 앞을 정신없이 뛰어 지나갔다. 그 여자는 옷이 착 들러붙어 펄떡거리는 물고기처럼 뇌쇄적인 싱싱한 몸매를 드러낸 채 도발적으로 몸을 흔들며 지나갔다.  176


“대장, 이쯤에서 대장에게 남자 망신시키지 말라고 말하고 싶네요. 신과 같은 악마가 이 맛있는 간식을 보낸 거예요. 이빨도 튼튼하니 그걸 그냥 내버려두지 마세요. 손을 뻗어 가지라고요! 창조주가 왜 우리 손을 만들었겠어요? 잡으라고 만든 거예요. 잡아채세요! ..”
“나는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요.” 내가 화를 내며 대꾸했다.
..
“문제를 일으킥 싶지 않다고요?” 조르바가 놀란 듯 소리쳤다. “대장, 그렇다면 대체 뭘 원하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산다는 게 원래 문제투성인 거요.” 조르바가 계속 말을 이었다. “죽음은 문제가 전혀 아니고요. 사람이 산다는 게 뭘 뜻하는지 아세요? 허리띠는 느슨하게 풀고, 남들하고 옳다 그르다 시비하는 거예요.”
나는 조르바가 옳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내 인생은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은 나만의 혼잣말이 되고 말았다. 나는 그렇게 길에서 벗어나 있었다. ..
“너무 계산에 매달리지 마쇼, 대장!” 조르바가 집요하게 추궁했다. “숫자에서 좀 벗어나고, 그 발어먹을 저울을 던져버리쇼. 구멍가게를 때려치우란 말요. 지금이야말로 대장의 영혼을 구할것인지 아니면 파괴할 건지를 결정할 때요. 대장, 들어봐요. 손수건 한 장에다가 지폐가 아니라 눈이 부시게 만드는 금화 2, 3리라를 넣고, 매듭을 묶어서 미미토스 편으로 과부에게 보내쇼. 그리고 미미토스 놈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일러주쇼. ‘갈탄광 사장님이 보내서 왔습니다요. 이건 그분이 보내는 손수건이에요. 별것 아니지만 마음을 담아서ㅓ 보내는 거래요. ..
그렇게 하고는 바로 그다음 날 저녁에 그녀의 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리는 겁니다. 빠를수록 좋다는 말이 있잖아요. 쇠뿔도 단 김에 빼야죠. 그리고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길을 잃었는데 어두워졌으니 등잔불 하나만 빌려달라고요. 음, 아니면 갑자기 어지러워서 그런데 물 한 잔만 얻어먹을 수 없느냐고 하든지요. 더 좋은 건 다른 암양 한 마리를 사서 찾아가는 거죠. 그리고 이렇게 말하세요. ‘부인, 여기 부인께서 잃어버린 암양이 있어요. 제가 찾아냈죠!’ 대장, 들어봐요. 그러면 과부가 보상을 해주기 위해 대장을 집 안으로 들일 거예요. .. 장담하건대, 대장은 말을 탄 채 천국에 들어갈 겁니다. 다른 천국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신부들을 믿지 마세요. 다른 천국은 없으니까요!”  184-186

“.. ‘이런 바보 같은 놈, 어떤 놈이든 여자와 사랑을 나눌 수 있었는데도 사랑을 나누지 않으면, 그건 큰 죄를 짓는 거니까. 여자가 ㅊ침대에서 너를 부르는데 안 가면, 넌 영혼을 잃게 되는 거야! 그 여자가 하느님의 최후의 심판 날에 한숨을 쉬면, 네가 누구든,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했어요, 그 한숨 소리가 너를 지옥에 빠뜨릴 테니까!’”
조르바가 한숨을 쉬었다.  188-189


9
“.. 예전에 내 별명 가운데 하나가 ‘흰곰팡이’였다고 말한 적 있죠? 왜냐하면 내가 어딜 가든 일을 엉망진창을 만들어버리곤 했기 때문이죠. 그러니 대장 사업도 망할 거예요. 그러니 내가 다시 말하지만 나를 당장 자르란 말예요!”
“하지만 나는 당신이 좋아요, 조르바. 그러니 더 이상 그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하지만 대장, 나는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요. 넘칠 때도 있고, 모자랄 때도 있죠. 언제 그럴지 정확히 알면 얼마나 좋겠소? 어쨌든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건 분명해요. 자, 대장이 이해하기 쉽게 예를 하나 들지요. 요즘 며칠 동안 밤이나 낮이나 그 과부 때문에 마음이 편할 새가 없어요. 하늘에 맹세코 나 때문은 절대 아니고요. 그 과부와 어울릴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난 내가 그녀를 만질 일이 절대 없을 거라는 걸 확실히 알아요. 그 과부는 나하고 맞질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그냥 버려지는 것도 바라지 않아요. 그녀가 독수공방하는 걸 참을 수 없다고요. 대장, 그건 올바른 일이 아니에요. 내 가슴이 저려온다니까요. 그래서 밤마다 그녀의 집 주위를 서성거렸죠. 그 때문에 내가 밤마다 사라졌던 거고, 대장은 어딜 갔었느냐고 내게 묻는 거고요. 이제 알겠어요? 난 밤이면 그녀가 어디를 다녀오는지, 어떤 놈이 그녀와 함께 뒹구는지 살펴보러 갔었던 거예요. 그러고 나야 편하게 잘 수 있었으니까요.”
나는 웃었다.
“대장, 웃지 마슈! 한 여자가 혼자 잔다면, 그건 우리 남자 모두의 책임이에요. .. 하느님은 스펀지로 인간의 모든 죄는 용서하지만 그 죄만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요. 대장, 한 여자랑 잘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놈은 저주를 받아요. 그리고 한 남자랑 잘 수 있었는데도 자지 않은 년도 마찬가지고요. ..
“사람이 죽으면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요?”
“난 환생을 믿지 않아요, 조르바.”
“나도 안 믿어요. 하지만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러니까 자신이 봉사해야 할 일을 거절한 사람들이 - 그냥 도망자들이라고 합시다 - 그들이 다시 이 땅에 태어난다면 무엇으로 태어나는지 아슈? 노새요, 노새(노새는 새끼를 낳지 못한다)!”
그렇게 말하고 조르바는 입을 다물더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반짝이고는 즐거워하며 말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는 모든 노새들이 그런 얼간이들일 수 있겠네요. 평생 남자로 살면서도 남자 구실 못 했고, 여자로 살면서도 여자 구실 못한 인간들 말예요. 그래서 노새가 된 거고요. 노새들은 그래서 고집이 세고 밤낮으로 발길질해대는 거고요. 대장, 어떨게 생각하슈?”  193-195

“내가 일할 때에는 언제 빵 터질지 모르니 말을 걸지 마슈!” 어느날 저녁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빵 터진다고요? 조르바, 왜요?”
“또 왜냐고 따지슈? .. 나는 일을 할 때 내 전부를 쏟아요. 그러면 나는 바위 위나 지금 내가 투쟁을 벌이고 있는 석탄에 나 있는 금이나 산투리의 줄들처럼 손톰 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팽팽하게 바짝 긴장해요. 그때 누가 나를 살짝 건들거나 말을 걸어 돌아보게 하면 빵하고 터질 수가 있단 말이오. 알아듣겠소?”  200


10
“대장,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외양간에서 태어났다는 걸 믿으슈? 믿는 거요 아니면 세상 사람들한테 사기 치는 거요?”
“조르바, 그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나는 믿지도 않고 안 믿지도 않아요. 조르바, 당신은 믿어요?”
“나도 도대체 뭘 믿는지 모르겠어요. 뭐라 말할까요? 어렸을 때 할머니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면 난 하나도 믿지 않았어요. 하지만 기은 감동을 느껴 마치 그 이야기들을 믿는 것처럼 울고 웃고 했죠. 수염이 나기 시작하면서, 옛날이야기들을 전혀 믿지 않게 됐고 오히려 비웃었죠. 하지만 나이가 지긋하게 든 지금 나는 노망이 들어서 그 이야기들을 다시 믿기 시작해요. …… 사람이란 알 수 없는 존재라니까요.”  210

“.. 바보같이 굴지 마세요. 언젠가 어떤 과학도가 내게 말해줬는데, 우리가 마시는 물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우리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아주 조그만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걸 볼 거래요. 그 벌레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나면 물을 마시지 못하게 되고, 물을 못 마시면 목이 말라 갈증으로 죽어갈 거래요. 대장, 현미경을 깨버리세요. 그 괴물 같은 물건을 던져버리라고요. 그러면 벌레들이 당장 사라져서 시원하게 물을 마시고 갈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돼요.”  212-213

“.. 나의 여선장님이시여, 잘 먹고 마신 이 밤에 이 바닷가에서 제가 당신을 바라보니, 내 눈에 트여서 당신은 커다란 배의 인어이신 듯하군요. 그리고 나의 부불리나여, 나는 당신의 마짐막 항구요. 선장들이 와서 술을 마시는 카페입니다. 오, 사랑하는 나의 요정이시여, 나는 이제 당신의 건강을 빌면서 이 가득 찬 술잔을 비우렵니다!”
마담 오르탕스는 뼛속까지 감동하여 눈물을 펑펑 흘리며 조르바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213


11
음식과 술, 여자, 춤, 이 네가지는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필수 요소인데, 조르바는 강단 있는 그 몸뚱어리에 이 모두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은 채 지니고 있었다.  223

“대장, 이건 또 무슨 조환가요?” 조르바가 몸을 돌리며 내게 말했다. “내가 하는 일은 온통 뒤죽박죽이에요. 내가 어렸을 때 사람들은 나를 보고 늙은이 같다고 했어요. 그때 나는 신중하고, 말수도 적고, 나이 들어 보이는 굵은 목소리로 말했거든요. 내가 할아버지를 닮았다고들 했죠. 그런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더 가벼워졌어요. 스무 살 이 되자 나는 철없는 짓거리들을 시작햇지만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어요. 보통 정도의 및친 짓거리 정도였죠. 마흔이 되자 나는 젊음이 넘치는 걸 느끼면서 진짜 미친 짓을 많이 했죠. 그리고 지금 육심 줄에 들어서자, - 대장, 이건 비밀인데 내 나이가 지금 예순다섯이오, - 하여간 육십이 되자, 정말 날 믿으슈, 대장, 이걸 도무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이 세계가 좁아서 나를 받아들이질 못한다우.”
그는 잔을 높게 들더니 자신의 숙녀를 향해 돌아서서는 모든 존경을 다 표하며 정중한 말투로 소리쳤다.
“나의 숙녀시여, 이 잔을 당신의 건강을 위해 바칩니다. 하느님께서 새해에는 다시 이가 돋아나게 하시고, 칼처럼 날카로운 눈썹이 다시 생기고, 피부가 다시 대리석처럼 매끄럽게 되게 하시며 당신 목을 감은 이 안 어울리는 띠를 던져버리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다시 크레타에 혁명이 일어나서, 오 나의 부불리나여, 각기 다른 향수를 부린 곱슬곱슬한 수염이 난 ‘쩨독’들이 지휘하는 세계5대 강대국의 함대가 다시 오기를, 그러면 나의 요정이시여, 당신은 다시 파도 위를 날아다니며 모래를 부르겠죠 - 아, 끝내주네! - 그러면 모든 함대가 이 무시무시한 둥근 바위 사이에서 난파할 거요.
조르바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큰 손을 내밀어 마담의 축처지고 말라비틀어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229-230

이 사람은 사나이다움과 단순함으로 세상과 조화를 이루었고, 육체와 영혼을 하나로 만들었다. 그리고 여자와 빵, 정신, 잠, 이 모든 것이 기꺼이 살이 되어 조르바가 되었다.  238


12
잠이 들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조르바는 이미 없었다. 날씨는 추웠고 나는 별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내 머리 위에 있는 조그만 선반으로 손을 뻗어 내가 좋아해서 항상 가지고 다니는 말라르메의 시집을 꺼냈다. 여기저기를 건너뛰며 천천히 시를 읽었다. 시집을 덮었다. 그리고 다시 열었다. 하지만 이내 멀리 집어던졌다. 오늘 처음으로 이 모든 시들이 핏기도, 향기도ㅡ 인간의 본질도 없는, 색바랜 하늘빛을 띤 허공처럼 텅 빈 낱말들로 느껴졌다. 그 시들은 미생물 한마리도 없고, 영양분도 없고, 생명이 결여된 순수한 증류수 같았다.
종교가 힘을 잃으면 그 종교의 신들이 시의 모티프가 되듯이, 아니면 인간의 고독이나 담벽의 장식이 되듯, 이 시들도 그랬다. 흙더미와 씨앗의 범벅이 되어버린 마음속 막연한 욕망은 진부한 지적 장난으로, 공중누각으로 변하고 말았다.
나는 다시 시집을 펼쳐 한 번 더 읽어보았다. 어떻게 이 노래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것일까? 이 노래들은 너무도 순수했다. 이 노래들 속에서 인생은 피 한 방울조차 지탱하지 못하는 투명하고도 가볍기 이를 데 없는 장난으로 변했고, 성적 사랑과 육체의 살, 외침과 같은 인간적인 것들은 야비하고 마무리되지 못한 오염된 존재로서, 정신이라는 용광로 안에서 비물질화되어 흩어지고, 연금술에 연금술을 거듭하여 지극히 비현실적인 추상적 개념들로 바뀌었다.
어째서 이 아치에 한때 나를 유혹하고 타락시켰던 이 시들이 모두 하나같이 사기꾼의 현란한 줄타기 속임수처럼 보이는 걸까? 문명의 종말은 한결같이 엇비슷하다. 그때가 되면 인간의 고뇌가 - 순수 시나 순수 음악, 순수 지각 등이 - 모두 대마법사의 능수능란한 속임수로 끝난다. 모든 믿음과 망상에서 자유로워진, 그래서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 마지막 인간, 그가 속한 모든 땅은 숨결이 되고, 그 숨결은 더 이상 뿌리를 내려 영양분을 줄 수도, 취할 수도 없게 된 마지막인간, 그 인간은 씨앗도, 똥도, 피도 다 비워버렸다. 그리고 모든 것은 낱말로, 장난기 어린 율동의 낱말들로 변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인간은 황무지의 끝자락에 앉아 음악을 침묵의 수학적 비율로 해체하고 있다.  239-240

떠나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곳 해변가에서 잘 지내고 있다. 이곳은 나를 잘 품어주어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어떤 욕망이 내 마음을 갉아먹고 있었다. 죽기 전에 더 많은 땅과 바다를 보고 만지고픈 욕망이 나를 편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249


13
나는 인간은 자기만의 고유한 냄새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냄새들이 서로 섞이는 바람에 어느 냄새가 내 것이고, 또 어느 냄새가 네 것인지 알지 못할 뿐이죠. ..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자라는 뻔뻔한 것들은 강아지처럼 촉촉한 코를 가지고 있어 누가 자기들을 애타게 원하고 누가 싫어하는지 냄새로 곧바로 잡아낸다는 것예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어느 도시를 가든, 내가 늙은이에다가 못생기고 옷을 초라하게 입고 있어도 계집 두세 명이 내 뒤를 졸졸 쫓아오죠. 아시겠어요? 냄새를 잘 맡는 암캐들이 - 하느님께서 그 계집들을 보살펴주시기를! - 내 뒤를 따라오는 거죠.  263

대장, 내가 대장한테 한번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죠? 각자가 자기만의 천국을 가지고 있다고요. 대장의 천국에는 수많은 책과 아주 커다란 꿀단지가 있을 거고, 다른 사람의 천국에는 포도주와 우조, 코냑 통들이 있을 테고, 또 다른 사람의 천국에는 영국 금화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겠죠. 내 천국은, 색색깔의 치마와 향수 비누, 스프링 박힌 더블 침대, 그리고 내 옆에 암컷 하나가 있는 이 향수 냄새가 물씬 나는 조그만 방, 바로 여기죠.  267

“.. 어제 우리는 카스트로에서 벌어진 축제에 갔었죠. 그런데 악마 놈이 이게 어느 성인을 기리는 축제인지 안 가르쳐줬단 말입니다. 롤라가 - 아 참, 나와 함께 있는 계집을 소개하지 않았군요. 이름은 롤라예요 - 내게 말했죠.
‘할아버지(이 계집이 아직도 나를 할아버지라고 불러요. 하지만 애칭으로 부르는 거예요.), 할아버지, 나 축제에 놀라 가고 싶어.’
‘그럼 가봐, 할멈. 가보라고!’ 내가 대답했죠.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랑 같이 가고 싶어.’
‘난 안 가, 지겹거든. 그러니 너 혼자 가봐.’
‘치, 그러면 나도 안 가.’
내가 눈을 똥그랗게 뜨면서 말했죠.
‘안 간다고? 왜? 왜 안 가?’
‘할아버지도 간다면 나도 갈 거야. 하지만 할아버지가 안 가면 나도 가기 싫어.’
‘왜? 너는 자유인이잖아?’
‘아냐, 난 자유인 아냐.’
‘자유인이고 싶지 않아?’
‘아니, 싫어.’
대장, 내가 무슨 말을 하겠수? 나는 놀라 까무러칠 것 같았죠.
‘자유를 바라지 않는다고!’ 내가 소리 질렀죠.
‘나는 자유 싫어, 절대 싫어. 난 자유가 싫다고!’
대장, 나는 이 편지를 지금 롤라의 바에서 롤라의 편지지로 쓰고 있어요. 부탁이니 대장도 잘 생각해보슈. 나는 인간이란 자유를 바라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여자는 자유를 바라지 않아요. 그렇다면 여자도 인간 맞나요?
부탁하건대 즉시 답장해줘요. 대장께 사랑의 입맞춤을 듬뿍 보냅니다.
알렉시스 조르바백.”  269-270

조르바의 편지를 다 읽고 나는 한동안 아무런 결정을 못 내리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아니면 인생의 표피층을 다 초월해서 삶의 본질에 다다른 이 원시인을 자랑스러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논리니, 예의니, 명예니하는 인생을 편리하게 해주는 소소한 미덕들은 다 사라지고, 오직 심연의 절벽 끝으로 대책 없이 자신을 밀어 넣어 아주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불편하고 아무도 바라지 않는 미덕만 남아 있었다.
글을 쓸때 참을 수 없는 충동 때문에 펜을 망가뜨리는, 이 무식한 노동자는 유인원에서 갓 벗어난 태초의 원시 인간처럼, 또는 위대한 철학자처럼,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압도당해 그 문제들을 몸으로 직접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 또한 모든 것을 처음 보는 듯이 신기해하며 묻는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다 기적 같아서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나무와 바다, 돌, 새를 보면서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 기적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소리 지른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 나무는, 이 바다는, 이 돌은, 이 새는 무슨 의미를 갖는 거냐고 묻는다.  270-271


14
(아나그노스티스 영감) 그가 말라비틀어진 손을 내 어깨에 얹었다.
“당신은 아직 젊어요. 늙은이 말을 듣지 마시오. 만일 세상 사람들이 늙은이 말을 듣는다면 얼마 못 가 망할 거요. 만약 어떤 과부 하나가 당신 앞에 나타나면 그냥 올라타시게!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주절랑 하질 마시게. 고통이란 진정한 사나이들을 위한거니까.”  290-291


16
“가난하면 즐겁게라도 살아야죠.” 조르바가 말했다.  315


17

“내가 말입니다. 뭔가를 간절히 바라면 어떤 짓을 하는지 아슈?” 그가 말했다. “그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는 그 생각을 안 할 때까지 질리도록 먹고 또 먹고, 포식하고, 과식합니다. 생각만 해도 역겨울 때까지요. 한번은 어렸을 때, 체리가 먹고 싶어 거의 미칠 지경이 된 적이 있어요. 돈이 없으니 조금씩 감질나게 사 먹는데 점점 더 먹고 싶어지는 거예요. 밤이나 낮이나 온통 체리 생각만 나지 뭐예요. 그때마다 침이 질질 흐르고, 정말 고문이었어요. 그러는 내가 창피한 건지, 아니면 내게 화가 난 건지, 그건 나도 모르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 체리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나를 가지고 놀면서 바보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자, 어떻게 해야 하지? 밤에 일어나 살금살금 다가가서 아버지 주머니를 뒤졌죠. 은화가 만져지더라고요. 그걸 훔쳤죠. 아침 일찍 일어나 과수원으로 가서 체리 한 광주리를 샀어요. 그리고 구석에 숨어서 먹기 시작했죠. 먹고 또 먹고, 배가 터지도록 처먹었죠. 그랬더니 배가 거북해지면서 구역질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모조리 다 토했죠. 대장, 다 토했다고요. 그러고 나서는 체리에서 완전히 해방됐죠. 다시는 눈길조차 주지도 않아요. 난 자유로운 인간이 됐단 말입니다. 그 후로는 체리를 보면 ‘너하고는 더 이상 별 볼일이 없다’라고 말해주죠. 술도 담배도 마찬가지죠. 아직도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지만 내가 바라기만 하면 당장 끊을 수 있어요. 고향이나 조국도 마찬가지고요. 간절히 바라고, 지겨울 때까지 맘껏 즐기고, 토해버렸죠. 그렇게 해서 그것들에게서 벗어난 겁니다.”
“여자는요?” 내가 웃으며 물었다.
“그것도 때가 되면 관두겠죠. 빌어먹을 계집들! 그럴 때가 오겠죠. 일흔쯤 되면 그렇게 될 거요!”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든 듯 말을 바꾸었다.
“여든으로 합시다! 대장, 비웃응시는구려! 하지만 그리 오래 비웃진 못할 거요. 인간이 욕망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것뿐입니다. 수도사들처럼 금욕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물 나도록 실컷 즐겨봐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거라고요. 우리가 스스로 악마가 돼보지 않고 어떻게 그놈에게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고요!”  342-343

“어떤 여자도 이 세상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도록 모든 여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던 고대의 난봉꾼 신을 뭐라고 부르지요? 내가 들은 말이 있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신은 수염을 염색하고 팔뚝에는 하트와 인어를 문신하고, 깊은 동정심을 갖고, 때로는 황소로, 때로는 백조로, 숫양으로, 당나귀로 둔갑해서 모든 깨끗한 여자들의 정욕을 만족시켰다고 합디다. 그 신 이름이 뭔지 기분 내키면 한번 말해봐요.”
“틀림없이 제우스를 말하고 있는것 같은데 ..”
..
“그 신은 상당히 고통스러워했고 힘들어했죠. 그는 정말 위대한 순교자죠. ..”
..
“나는 오직 그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만 알아요. 그는 정말로 여자들을 사랑했죠. 하지만 엉터리 글쟁이들이 생각하는 식으로 사랑한 건 절대 아녜요. 절대로 아니죠! 제우스는 여자들의 고통을 진정으로 느꼈죠. 그는 모든 여자들의 욕망을 다 알고 그녀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어요. 어떤 시골구석에 노처녀가 근심에 빠져 말라 죽어가는 꼴을 보거나, 육감적인 탐스러운 유부녀가 - 아니, 육감적이고 탐스러운 게 아니라 괴물 같더라도! - 남편이 자리를 비워서 잠들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이 동정심 많은 작자가 성호를 긋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그 여자가 생각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으로 자신을 바꿔서는 그녀 방으로 기어들어가죠.
대장, 내가 단언컨대 절대로 그가 성욕에 사로잡혀서 그러는게 아니었다고요. 대부분의 경우 완전히 진이 다 빠져도 정의감 하나로 버텼죠. 하지만 불쌍한 제우스가 어떻게 혼자서 온 세상을 다 구할 수 있겠습니까? .. 새벽녘이 다 돼서야 집으로 돌아오면서 중얼거리곤 했죠. ‘아이구, 언제나 나는 침대에 누워 잘 수 있단 말이오? 난 더 이상 서 있을 수도 없단 말이오!’ 그렇게 말하고는 침을 닦지요.
그런데 갑자기 저 아래 지구 한구석에서 웬 여자 하나가 침대 시트를 박차고 지붕 위로 나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오는 거예요. 그러자 그의 심장은 녹아버리는 것 같았죠. ‘아이고, 아이고, 다시 지구로 내려가자! 다시 내려가야지. 한 여자가 한숨을 쉬니 내려가서 위로해줘야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내려가죠.
하지만 여자들이 그를 너무 혹사해서 급기야 그의 허리가 끊어지고 말았죠. 구토를 하고 온몸이 마비가 되고, 그리고 끝내 숨이 끊어졌어요. 그때 그의 후계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옛신의 형편없는 몰골을 보고 말하죠. ‘여자들을 조심하라.’  380-382


20
내 할아버지는 나처럼 속물에 혼자 제일 잘난 대장이었어요. 이 불경스러운 양반이 ‘거룩한 무덤’(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이 있는 예루살렘을 뜻함)으로 성지 순례를 다녀와서 하지스(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다녀온 그리스도교인이나 메카 성지 순례를 다녀온 이슬람교인을 가리킴)가 되었단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할아버지의 속내를 알고 계셨ㄷ죠. 할아버지가 고향 마을로 돌아오자 염소 도둑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친구 한 명이 말했죠. ‘아이구, 이 친구야, 거룩한 무덤까지 가서 나를 위해 성스러운 십자가의 아주 조그만 조각도ㅗ 안 가져오다니!’ ‘무슨 말이야?’ 영악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할아버지가 응수했죠. ‘어떻게 내가 자네를 잊겠는가? 오늘 저녁에 우리 집으로 오게나, 그리고 올 때 축성식을 하게 신부님도 모시고 오게나. 그때 내가 그걸 자네에게 주겠네. 그리고 새끼돼지구이와 포도주도 가져오게나. 행운을 위한 거니까!’
할아버지는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벌레가 갉아먹은 문짝에서 성냥 머리만 한 크기의 나무 한 조각을 떼어내서는 솜에 싸서 그 위에 기름을 떨어뜨리고 기다렸죠. 조금 있다가 그 친구분이 새깨돼지구이를 짊어지고 신부님과 함게 도착했고요. 신부님이 영대(정교회 신부들이 신성한 의식을 행할 때 목에서부터 다리까지 두르는 긴 천)를 두르고 축성식을 한 뒤에 신성하 ㄴ성 십자가 조각의 전달이 이루어졌고, 그러고는 모두들 새끼돼지고기에 달려들었죠. 그런데 대장, 믿을 수 있겠어요? 그 할아버지 친구는 성 십자가 조각에 경배를 드리고 목에 걸고 다니면서부터는 전혀 딴 사람이 되었대요. 완전히 변했죠. 산으로 들어가서 무장한 클레프테스의 일원이 되어 터키 마을을 기습해 태워버리고, 겁도 없이 총탄이 빗발처럼 쏟아지는 곳으로 뛰어들었다네요. 그가 두려울게 뭐가 있었겠어요? 자기 몸에 성스러운 십자가 조각을 지니고 있으니 납덩어리 총알도 뚫지 못할 테니 말예요.”
조르바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죠.” 그가 말했다. “믿음이 있다면 다 망가진 문짝의 나뭇조각이 성스러운 십자가 조각이 되죠. 믿음이 없으면 성스러운 십자가 전체라도 망가진 문짝이 되고요.”  386-387

“고지식한 몸뚱어리에, 고지싟한 생각 …… 내가 무슨 얘길 하든 못 알아 들을 거요. 대장, 용서하슈!”
“무슨 말이에요?” 내가 항의했다. “조르바, 나도 알아들어요. 맹세코 다 알아듣난단 말이에요.”
“그럼요, 머리로는 다 알아듣겠죠. 그리고 ‘옳다, 그르다, 그렇지! 안 그렇지! 그건 당신이 옳고, 저건 당신이 틀리고!’ 이렇게 말하겠죠. 하지만 그런다고 뭐가 나옵니까? 난 말이오, 대장이 말 할 때 대장의 팔과 다리, 가슴을 본다우, 그런데 그것들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우. 마치 피가 없는 놈들처럼 말요. 도대체 대장이 그걸 어떻게 이해한단 말요? 머리로 이해한다고요? 풋!”  388

“조국으로부터 벗어나고, 신부들로붙도 벗어나고, 돈으로부터도 벗어나고, 탈탈 먼지를 털었죠. 세월이 흐를수록 난 먼지를 털어냅니다. 그리고 가벼워집니다. 뭔라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난 자유로워지고, 사람이 돼갑니다.”
..
“한때는 이놈은 터키 놈, 저놈은 불가리아 놈, 또 이놈은 그리스 놈 하고 구분햇었죠. 대장, 난 조국을 위해서라면 대장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못된 짓을 저질렀다우. 멱을 따고, 약탈하고, 마을을 불태우고, 여자들을 강간하고, 온 가족을 몰살하고 …… 왜냐고요? 그건 그들이 불가리아 놈들이고 터미 놈들이었으니까죠. 난 자주 ‘이 악당 놈아, 나가 뒈져버려라! 이 바보 얼간아, 나가 뒈져버리라고!’ 하고 나 자신에게 말하면서 저주를 퍼부었죠. 하지만 대장, 이제는 나도 생각을 좀 하고 사람을 보죠.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저 사람은 나쁜 놈이다. 불가리아인인가 그리스인인가 하는 게 문젭니까? 이제 내게는 다 똑같아요. 이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인가 아닌가만 묻죠. 그리고 정말이지 나이를 먹을수록, 밥을 더 많이 먹을수록, 난 점점 더 아무것도 묻지 않게 됩니다. 보세요, 좋은 놈, 나쁜 놈이란 구분도 잘 맞질 않아요. 난 모든 사람이 불쌍할 뿐이에요. 사람을 보면, 비록 내가 잘 자고 마음에 아무런 시름이 없어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누구든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그리고 자신만의 하느님과 악마를 모시다가 뒈지면 땅에 쭉 뻗고 누울 거고, 그러면 구더기들이 그 살들을 파먹을 거고 …… 아, 불쌍한 인생!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에요. …… 구더기 밥인 고깃덩어리 들이라고요!
여자들은, 음, 그것들을 생각하면, 어이구 하느님! 난 울음이 나올 것 같아요. 대장은 가끔 내가 여자들을 너무 좋아한다고 놀리곤 하는데, 하지만 여보쇼, 내가 어떻게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수? 여자들이란 약한 존재들이라 자기들한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데다, 일단 한번 그년들 젖꼭지를 움켜쥐면, 바로 그 순간에 모든 문이 열리고 그냥 모든 걸 내준다고요.  393-394

“.. 내 얘기도 들어보세요. 조국이란 게 있는 한, 사람들은 야수로 남아 있게 마련이죠.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로요. 하지만 난, 하느님께 영광이 있을지어다! 난 벗어났어요. 벗어났다고요, 끝났다고요! 하지만 대장은요?”  396


21
나는 생각했다. ‘남자들이란 얼마나 저항력이 없는 덧없고 어리석고 약한 바보 같은 존재들인가! ..’  412


24
“대장, 말해봐요. .. 이 모든 것들이 무얼 이야기하려는건지 말해봐요. 눈가 이런 짓을 하는 거죠? 또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건 뭐죠?(이 말을 할 때 조르바의 목소리는 분노와 공포에 차 있었다) 왜 우리는 죽는 거죠?”
“모르겠어요, 조르바.”
..
“모른다고요!” 조르바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말했다.
어느 날 밤엔가 춤을 출 줄 아느냐는 그의 물음에 내가 모른다고 대답했을 때도 그는 저렇게 눈알을 굴렸었다.
그가 잠시 침묵했다가 갑작스레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대장이 읽는 그 빌어먹을 종이짝들은 다 뭐요? 왜 그런 걸 읽는 거요? 이런 문제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뭐에 대해 얘기하는 거요?”
“조르바, 당신이 지금 묻고 있는 것들에 대답하지 못하는 인간의 고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죠.” 내가 대답했다.
“그런 고뇌는 내가 다 삶아 먹어버릴 거요.” 조르바가 화를 내며 발로 돌을 차면서 말했다.
..
“나는 대장한테서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듣고 싶소. 대장은 그렇게 오랫동안 마법에 대해 연구하느라 야위었잖소. 그러느라 그동안 적어도 3, 4톤의 종이를 쥐어짰을 텐데 결국 어떤 즙을 짜낸 거요?”
..
나는 나의 도반에게 신성한 두려움이 무엇인지 이해시켜보려고 시도했다.
“조르바, 우리는 아주 거인처럼 커다란 나무의 조그만 잎사귀 위에 있는 아주 미세한 벌레에 지나지 않아요.” 내가 대답했다. “지구는 바로 그 나뭇잎이고요. 우리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잎사귀 위를 기어 다니며 절실하게 뭔가를 찾아다니죠. 우리는 그것의 냄새를 맡아보죠. 냄새가 나요, 악취가 납니다. 맛을 봅니다. 먹을 만해요. 그걸 두들겨봅니다. 그러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소리를 질러요.
겁이 없는 몇몇 사라람들은 잎사귀의 가장자리까지 가죠. 그 가장자리 끝에서 눈을 똑바로 크게 뜨고, 귀를 크게 열고, 밑을 내려다보죠. 그 밑은 카오스예요. 무서워서 소름이 끼치죠. 저 아래에는 무시무시한 절벽이 있다고 우리는 지레 짐작합니다. 우리들은 가끔씩, 아주 가끔씩, 거인처럼 큰 나무의 다른 잎사귀들이 내는 속삭임 소리를 듣죠. 그리고 나무의 뿌리에서부터 수액이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면 우리들 가슴이 부풀어 오릅니다. 그렇게 심연을 향해 몸을 숙이고 오놈으로, 완전히 공포에 빠졌음을 실감하죠. 바로 그 순간에 ……”
나는 말을 멈췄다. 나는 “바로 그 순간에 시가 시작되죠”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르바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을 멈췄다.
“뭐가 시작됩니까?’ 조르바가 조바심하며 물었다. “왜 이야기하다 마는 거요?”
“…… 아주 커다란 위험이 시작되죠, 조르바.” 내가 말을 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정신이 혼란스러워져서 헛소리를 하고ㅡ 또 다른 사람들은 겁에 질려 그들의 마음이 의지할 수 있는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하죠. 그리고 그 해답을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또 다른 이들은 잎사귀의 가장자리에서 심연을 조용히 내려다보면서 용감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맘에 드는군!’”
조르바는 한도앙ㄴ 생각에 잠겼다. 내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난 말이죠.” 드디어 그가 말했다. “매 순간 죽음으 ㄹ응시합니다. 죽음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죠. 하지만 한 번도, 절대로 한 번도 ‘죽어도 좋아’라고 말하지는 않죠. 아뇨, 죽는 게 조금도 좋지 않아요! 나는 자유로운 존재 아닙니까? 그렇다면 난 절대로 내가 죽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다시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소리쳤다.
“아니죠, 절대로 내 목을 양처럼 순하게 죽음의 신 카론에게 내놓고 ‘주여, 내가 축복을 받고 성자가 되도록 나를 죽여주시옵소서!’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468-470

“.. 난 지나간 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요. 미래의 일도 신경 쓰지 않지요. 지금, 바로 이 순간, 바로 그것만 신경 씁니다. 난 스스로 이렇게 묻죠. ‘조르바, 넌 지금 뭘하고 있는 게냐? 잔다. 그럼 잘 자라! 조르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일한다. 그럼 열심히 일해라! 조르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여자를 껴안고 있다. 그럼 그 여자를 꼭 껴안아라! 그리고 모든 걸 다 잊어버려라, 이 세상에는 그녀와 너 이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나게 즐겨라!’”  473

“.. 진정한 여자들은 남자들한테서 받는 기쁨보다는 자신들이 주는 기쁨을 더 행복하게 느낀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473

“나도 내 안에 대여섯 놈의 악마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조르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어요. 너무 놀랄 거 없어요. 그리고 많은 악마를 가지고 있을수록 더 좋고요. 단지 모두가 서로 다른 방법으로 똑같은 목표를 향해 가지만 하면 돼요.”
나의 이 말이 조르바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는 무릎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생각에 잠겼다.
“어떤 목표요?”
“조르바, 난들 알겠어요? 알기 어려운 걸 묻네요. 내가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어요?”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좀 쉽게 말해보슈. 난 지금까지 내 안의 악마 놈들이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하고, 가고 싶은 덴 어디든지 가게 내버려뒀수다. 그래서 어떠 ㄴ자들은 나보고 나쁜 놈이라고 하고, 어떤 자들은 좋은 놈이라고 하고, 어떤 자들은 바보라고 하고, 어떤 자들은 현명한 솔로몬이라고들 하죠. 그리고 난 그들이 말하는 그런 놈인 동시에 그보다 더한 놈이기도 한, 러시아 샐러드 같은 놈이죠. 그러니 가능하다면 말이죠, 무슨 목표인지 내가 알 수 있게 말 좀 해보슈. 어떤 목표죠?”
“조르바, 내 생각에는 말이죠. 물론 잘못된 새악일 수도 잇지만, 세 부류의 인간이 잇는 거 같아요. 우선은 소위 말하는 자신들만의 삶을 살기 위한 목표를 세우는 부류죠. 그들은 자신들만을 위해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부를 쌓고, 영광을 추구하죠…… 그리고 그다음에는 자신들의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삶을 위해 목표를 세우는 부류가 있죠. 그들은 모든 사람이 하나라고 느끼면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깨추리려고 노력하고,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남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베푸는 살마들이죠. 그리고 끝으로 우주의 삶을 위해 목표를 세우는 부류가 있죠. 이 부류는 인간은 물론, 동물과 식물, 별 들도 모두 끔찍한 투쟁, 즉 물질을 승화시켜 정신으로 만들려는 투쟁을 하는, 동일한 본질을 지닌 동일한. 존재라고 생각하죠.”
조르바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난 멍청이라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 이봐요 대장,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방금 한 말을 좀더 쉽게 소화해서 말해주슈!”
나는 절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이 절망적인 생각들을 춤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480-482


25
조르바와의 생활은 내 가슴을 넓혀주었고, 그의 말 몇 마디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내 고민에 절대적인 해법을 제시해줌으로서 내 정신을 평화롭게 만들어주었다. 이 사람은 절대로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직감과 매의 눈 같은 원초적인 눈으로 힘들이지 않고 지름길을 달려 노력의 정상에 우뚝 서는 ‘무위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507


26
“대장, 대장은 어디로 갈 거요?”
“외국으로 갈 거예요. 내겐 아직도 내 안의 산양이 먹어치워야 할 종잇조각들이 많이 남아 있어요.”
“대장,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셨수?”
“조르바, 정신 차렸죠. 당신 덕분이에요. 나도 당신의 길을 따를 거예요. 당신이 체리를 상대로 한 짓을 나는 책을 상대로 할 거예요. 토할 때까지 종잇조각을 잔뜩 먹어볼 작정이에요. 그리고 토하고 나서 종잇조각에서 자유로워질 거예요.”  517

바람이 몰고 다니는 겨울철 나뭇잎들처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몸, 손짓, 몸짓까지도 다 기억하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 사람의 눈빛이 파랬는지 까맸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 인생은 얼마나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인가 하고 생각했다.  519

“대장! 대장은 자유롭지 않수다. 대장이 매여 있는 줄은 다른 사람들 것보다 조금 더 길기는 하지만 그쁜이오. 대장, 대장은 조금 긴 끈을 갖고 있어 왔다 갔다 하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 끈을 잘라내지는 못했수다. 만약 그 끈을 잘라내지 못하면……”
“어느 날엔가는 그 끈을 잘라 낼 거예요.”
..
“대장, 그건 어렵수다. 아주 어려워요. 그러려면 미쳐야 하는데, 듣고 있수? 미쳐야 한단 말요. 모든 걸 걸어야 해요! 하지만 대장, 당신은 머리가 있어 그게 대장을 갉아먹고 있죠. 정신이란 식품점 주인 같은 거요. 장부를 팔에 끼고서는 얼마 들어왔고 얼마 나갔고, 이건 이득이고 저건 손해고, 일일이 기입하죠. 정신은 알뜰한 주부 같아서 모든 걸 포기하지 못해요. 뭔가 하나는 꼭 숨겨놓죠. 정신이라는 놈은 결코 끈을 놓지 않아요. 절대로! 그 악당은 손아귀에 그 끈을 꽉 쥐고 있답니다. 그 끈을 놏히면 그놈은 망하는 거니까요. 불쌍하게도 사라지는 거죠! 하지만 그 끈을 자르지 않으면, 대장, 인생에 뭐가 있겠수? 캐모마일 차, 맛있는 캐모마일 차 정도? 세상을 뒤집어엎을 럼주는 절대 아니죠.”
그가 말을 멈추고는 다시 술을 따랐다. 하지만 곧 마음을 바꿨다.
“내장, 날 용서하슈. 난 시골 촌뜨기요. 진흙이 발에 들어붙어 있듯 말들이 이빨에 붙어 있수다. 난 말을 멋있게 하지도 예의 바르게 하자도 못하우. 그렇게 할 수 없수다. 그러니 대장이 이해하슈.”
그는 잔을 비우고 나를 바라보앗다.
“아시겠소?” 마치 갑자기 분노가 터져 나온 것처럼 그가 소리쳤다. “아시겠냐고요? 이게 바로 대장을 잡아먹고 있수다. 그걸 모르면 대장은 행복하 ㄹ거요. 뭐 부족한 게 있수? 젊겠다, 돈도 있겠다, 머리도 좋겠다, 몸도 튼튼하고, 사람 좋고, 대장에겐 부족한게 하나도 없수다. 아무것도 아쉬운 게 없지. 빌어먹을 악마 놈! 딱 한 개만 빼고 말이우. 미친 짓을 벌이는 광기 말요. 광기가 없으면, 대장……”
그는 다시 머리를 젓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520-522

“저는 시골 교사입니다. 지금 저는 이곳에서 마그네슘 광산을 운영하고 있던 알렉시스 조르바 씨의 슬픈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알렉시스 조르바 씨는 지난 일요일 저녁 6시에 운명하셨습니다. 그가 죽음과 마지막 싸움을 하고 있을 때 저를 불러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선생님, 그리스에 내 친구가 한 명 있는데 내가 죽거들랑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정신이 말짱했고, 또 그를 기억했다고 편지를 보내주슈. 그리고 난 내가 평생 한 짓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도 말해주슈. 그리고 잘 지내시고 이제는 정신 좀 차릴 때가 됐다고 쓰슈…… 그리고 만약 신부가 내 고해성사를 듣고 종부성사를 해주러 온다고 하면, 제발 내쫓고 내가 저주한다고 전하슈! 난 평생 하고, 또 하고, 또 했지만 결국 한 일은 별거 없수다. 나 같은 인간은 천 년을 살아야 마땅한데 …… 잘 있으슈!”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그러고는 곧바로 베개에 기대 일어나서는 침대 시트를 벗어던지고 위로 펄쩍 뛰었습니다. 그의 부인 리우바와 나, 그리고 힘센 이웃들 몇 명이 그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만 그는 이를 뿌리치고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까지 갔습니다. 그곳에서 창틀을 쥐고 서서는 먼 곳 산을 바라보며 눈알을 굴리더니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는 말 같은 신음 소리를 내다가 창틀에 손톱을 꼿꼿이 박아 넣고는 똑바로 서서 죽었습니다.
그의 미망인 리우바는 당신께 인사를 전하라고 하면서, 고인이 계속 당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고, 자기가 죽으면 당신께서 고인을 기억하게 자신의 산투리를 당신께 드리라고 유언했다고 전하랍니다.  537-538




작가 소개 - 니코스 카잔자키스(1883~1957)
1915년에도 그는 그리스 전역을 여행하고, 다시 아기온오로스에 가서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요르기오스 조르바스(조르바의 본명)를 만난다. 조르바스는 카잔자키스에게 인생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1917년에 카잔자키스와 조르바스는 마니(펠로폰네소스 남쪽 지방) 지방의 프로스토바에서 갈탄광 개발을 시도했지만 경제성이 없어 실패한다.  544-545

그의 마지막 작품인 <엘 그레코에게 바치는 보고서(영혼의 자서전)>에서 그는 인간의 가치는 승리에 있지 않고 승리를 향한 투쟁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평생에 걸친 여정은 오르막길이었으며, 하느님과 구원 역시 그에게는 하나의 오르막길이었다고 고백한다.  548




조르바와 카잔자키스, 니체

대부분의 살마들이 선택하는 삶은 기존 관습에 따라 기존 사회가 제공한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낙타처럼 수동적으로 사는 것이다. 니체는 그런 사람을 밑바닥 인간(Letzter Mensch)’이라고 불렀다. 이와 반대로 관습이나 전통적 가치관을 거부하고 사자처럼 적극적으로 모든 삶을 자신의 찬단 아래 ‘치열하게’ 꾸려 나가는 사람을 니체는 ‘빼어난 인간((ubermensch)’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빼어난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내야 하고, 그 가치를 스스로 이루기 위해서는 홀로 모든 것을 해나갈 수 있는 ‘힘에 대한 의지(Wille zur Macht)’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힘에 대한 의지는 우연을 의도적인 것으로 만들고, 사물을 고정된 죽은 것으로 보지 않고 부단히 변화하는 살아 있는 것으로 본다. 빼어난 인간은 힘에 대한 의지로 모든 사물을 음미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 새로운 갗치를 창조한다. 그래서 빼어난 인간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사랑한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되풀이(ewigen Wieederkunft)’로 이루어져 있다. 삶 속에서 위대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모두 끊임없이(ad inifitum) 역겨울 정도로(ad nauseam) 되풀이된다. 빼어난 인간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삶을 적극적으로 인정해 받아들이고 사랑한다. 아니,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무구함으로 매 순간의 삶을 기쁘게 바라보고 평범한 일상에서 놀라도록 새로운 면을 찾아내고는 감탄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살아 있음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인 현재뿐이다.
니체가 말하는 삶을 산 사람이 바로 조르바다.  569-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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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것의 테러


오늘날 타자의 부정성은 같은 것의 긍정성에 밀려나고 있다. .. 박탈이나 금지가 아니라 과잉소통과 과잉소비가, 배제와 부정이 아니라 허용과 긍정이 사회체를 병들게 한다.  7


타자의 폭력만 파괴적인 것이 아니다. 타자의 추방은 아주 다른 파괴 과정을, 즉 자기파괴를 작동시킨다. 타자의 부정성을 거부하는 시스템은 자기파괴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이러한 폭력이 변증법은 보편적으로 작동한다.

같은 것의 폭력은 그 긍정성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다. 같은 것의 창궐은 스스로를 성장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어떠 ㄴ특정한 지점을 넘어서면 생산은 더 이상 생산적이지 않고, 파괴적이며, 정보는 더 이상 정보를 주지 않고 왜곡하며, 소통은 더 이상 소통적이 아니라 그저 누적적이다.

오늘날에는 지각 자체도 "빈지워칭(Binge Watching)"즉 혼수상태에 이르도록 뚫어지게 보기의 형태를 취한다. 이는 어떠한 시간 제한도 없이 비디오와 영화를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 소비자들의 취향에 아주 잘 맞는,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드는 영화와 시리즈 들이 지속적으로 소비자들에게 제공된다. 소비자들은 언제나 새로운 같은 것을 섭취하고 소비가축처럼 살이 찐다. 혼수상태에 이르도록 뚫어지게 보기는 오늘날의 지각 방식 전반으로 일반화될 수 있다. 같은 것의 창궐은 악성종양이 혼수상태처럼 작동한다. 그것은 어떠한 면역 방어의 방해도 받지 않는다.  8


경색은 같은 것의 과잉, 시스템의 비만으로 인해 일어난다. 경색은 감염적이 아니라 과지방적이다. 지방에 대해서는 항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9


같은 것은 형태가 없다. 같은 것에는 변증법적인 긴장이 없기 때문에 서로 무관심한 병존, 서로 구별되지 않는 창궐하는 덩어리가 생겨난다.  9


오늘날 같은 것의 테러는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산된다. 우리는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면서도 하나의 경험도 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인지하면서도 어떤 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정보와 데이터를 쌓으면서도 어떤 지식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체허모가 흥분을 애타게 추구하면서도 언제나 같은 상태로 남아 있다. 친구와 팔로워를 쌓으면서도 어ㄸㄴ 타자도 만나지 못한다. 사회 매체들은 사회적인 것의 절대적인 소멸 단계를 보여준다. 

전면적인 디지털 네트워크와 소통은 타자와의 만남을 쉽게 해주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히려 낯선 자와 타자를 지나쳐 같은 자와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발견하도록 하고, 우리의 경험 지평이 갈수록 좁아지게 만든다.  10


타자의 부정성과 변모가 엄밀한 의미에서의 경험을 만들어낸다. 어떤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를 기습하는 것, 우리를 맞히는 것, 우리를 덮치는 것,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 우리를 변모시키는 것"을 말한다. 경험의 본질은 고통이다. 그러나 같은 것은 고통을 주지 않는다. 오늘날 고통은 같은 것을 지속시키는 '좋아요'에 밀려난다.

정보는 단순하게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에 반해 엄밀한 의미에서의 지식은 느리고 긴 과정이다. 지식은 아주 다른 시간성을 지닌다. 지식은 성숙한다. 성숙은 오늘날 우리가 점점 잃어버리고 있는 시간성이다.  11


정보들을 가장 대규모로 모아놓은 빅데이터에도 지식은 거의 들어 있지 않다. 빅데이터는 상관성을 조사하는 데 사용된다. 상간성이란 A가 발생하면 흔히 B도 발생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알지 못한다. 상관성은 인과관계, 즉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조차 밝혀내지 못하는 가장 원시적인 지식의 형태다. 그것은 그렇다. 왜라는 질문은 제기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것도 파악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식은 파악하기다. 빅데이터는 이렇게 사유를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은 그렇다'에 만족한다.

사유는 아주 다른 것으로 진입할 수 있다. 사유는 같은 것을 중단시킬 수 있다. 그래서 사유는 사건성을 지닌다. 이에 반해 계산은 같은 것의 무한한 반복이다. 사유에 반해 계산은 어떤 새로운 상태도 낳을 수 없다. 계산은 사건을 모른다. 반면, 진정한 사유는 사건적이다.  11-12


엄밀한 의미에서의 인식도 변모를 낳는다. 인식은 새로운 의식의 상태를 산출한다. 인식의 구조는 구원의 구조아 비슷하다. 구원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구원은 구원이 필요한 자를 완전히 다른 존재 상태로 옮겨 놓는다.  12-13


사건에는 부정성이 내재한다. 사건은 현실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새로운 세계를, 있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낳기 때문이다. 사건은 갑자기 모든 것이 아주 새로운 빛 속에서 나타나도록 한다. 하이데서(Martin Heidegger)가 말하는 "존재망각(Seinsvergessenheit)"이란 바로 이 사건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14


오늘날 네트는 모든 다름, 모든 낯섦이 제거된 특별한 공명 공간으로, 메아리의 방으로 변하고 있다. 진정한 공명은 타자의 가까움을 전제로 한다. 오늘날 타자의 가까움은 같은 것의 무간격에 밀려난다. 지구적인 소통을 같은 타자 혹은 다른 같은 자만을 허용한다.

가까움에는 그 변증법적인 상대방으로서 멂이 새겨져 있다. 멂의 제거는 가까움을 키우지 않고, 오히려 가까움을 파괴한다. 가까움 대신 완전한 무간격이 생겨난다. 가까움과 멂은 서로 얽혀 있다. 변증법적인 긴장이 양자를 결합시킨다. 사물들이 그 대립물, 즉 그 자신의 타자에 의해 활력을 얻는다는 것이 이 긴장의 핵심이다. 무간격과 같은 단순한 긍정성에는 이런 활력을 주는 힘이 없다. 가까움과 멂은 동일자와 타자처럼 서로를 변증법적으로 매개한다. 그러므로 무간격도, 같은 것도 활력이 없다.  15


디지털 무간격은 가까움과 멂의 모든 변주 형태들을 제거한다. 모든 것이 똑같이 가깝고, 똑같이 멀다. ... 아우라에는 타자, 낯선 자, 수수께끼의 부정성이 내재한다. 디지털 투명사회는 세계의 아우라를 없애고, 신비를 없앤다.  16


타자의 추방은 충만함의 비만한 공허를 낳는다. 같은 것이 질주하는 정지 상태를 초래하는 과잉가시성, 과잉소통, 과잉생산, 과잉소비는 외설적이다. "같은 것을 같은 것과 연결하는 것"은 외설적이다. .. 

유혹의 양태는 성과와 생산에 대립되는 양태로서의 유희다. 오늘날에는 유희조차 생산 형태로 바뀌고 말았다. 노동이 게임화되는 것이다.  17


클론들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모두가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18




세계적인 것의 폭력과 테러리즘


세계화는 모든 것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것, 비교할 수 있는 것(vergleichbar)으로, 따라서 같은 것으로 마드는 폭력적 힘이 있다. 전면적인 같게-만들기(Ver-Gleicben)는 궁극적으로 의미의 소멸을 낳는다. .. 같은 것이 같은 거소가 만나는 지점에서 세계적인 것은 최고 속도에 도달한다.  21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이미 세계화의 광기가 테러리스트라는 광인을 만들어 낸다고 지적한 바 있다.  22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일반적인 교환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단독적인 것을 쓸어 없앤다. 테러리즘은 세계적인 것에 맞서는 단독적인 것의 테러다. 어떤 교환도 거부하는 죽음은 단독적인 것 그 자체다. 죽음은 테러리즘과 함께 시스템 속으로 난폭하게 침입한다. 시스템 안에서 삶은 생산과 성과로 전체화된다. 죽음은 생산의 종말이다. 테러리스트들의 죽음 예찬과 삶을 그저 삶으로서 무조건 연장하려고만 하는 오늘날의 건강 히스테리는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다. "너희는 삶을 사랑하고, 우리는 죽음을 사랑한다"라는 알카에다의 구호는 바로 이런 체계적인 연관을 지적하고 있다. 22-23


신자유주의는 세계적 차원에서 엄청난 불의를 낳고 있다. 착취와 배제는신자유주의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신자유주의는 체제비판적인 혹은 체제에 부적합한 사람들을 달갑지 않은 인물들로 확인하고 배제하는 "반옵티콘(banopticon)", 즉 추방의 옵티콘을 구축한다. 판옵티콘(panopticon)은 훈육을 위해 작동하지만, 반옵티콘은 안전을 위해 작동한다. 서양의 복지 지역 안에서조차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철폐한다.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의 창시자인 알렉산더 뤼스토우(1885~1963, 독일의 사회학자, 경제학자)는 이미 신자유즈의적 시장법칙에만 맡겨지면 사회는 반인간적으로 변하고, 사회적인 배척을 야기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그는 연대와 공동체의식을 산출하는 "생명정치(Vitalpolitik)"로 신자유주의를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24-25


자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외국인에대한 적대적 태도로 바뀐다. 자신에 대한 걱정은 외국인에대한 증오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증오로도 표현된다. 두려움의 사회와 증오의 사회는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다.  ... 

이슬람 테러리스트와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는 실제로는 적이 아니라 형제다. 양자는 동일한 발생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25


오늘날, 같은 것을 전체화하는 세계적인 것의 지배적인 질서 안에는 사실상 같은 다른 것 혹은 다른 같은 것밖에 없다. 새로 설치된 경계 울타리들 주변에서는 타자에 대한 환상이 생겨나지 않는다.  26


이주자들과 난민들도 실제로는 실재하는 위협, 현실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타자도, 낯선 자도 아니다. 이들은 오로지 상상적인 것 속에만 있다. 이주자들과 난민들은 오히려 부담으로 여겨진다. 이웃이 될 수도 잇는 그들이 일으키는 감정은 분노와 질투인데, 이는 공포와 두려움, 역겨움과는 달리 진정한 면역 반응이 아니다. 외국인에게 적대적인 대중은 북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반감을 느끼지만, 바로 이 대중이 북아프리카로 패키지여행을 떠난다.  27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라(Protect me from what I want)"라는 제니 홀저(미국의 개념미술가)의 구호는 긍정성의 폭력이 지닌 탈면역적인 성질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28


신자유주의는 절대 계몽주의의 종착지가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이성에 의해 인도된 것이 아니다. 바로 신자유주의는 광기가 테러리즘과 민족주의의 형태로 분출되는 파괴적 긴장을 산출한다. 신자유주의는 자신을 자유로 내세우지만, 이 자유는 광고다. 세계적인 것은 오늘날 보편적 가치들까지 잠식하고 있다. 그 결과 자유 자체가 착취당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실현한다는 망상에 빠져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한다. 자유의 억압이 아니라 자유의 착취가 생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으의 비열한 기본 논리다.

세계적인 것의 폭력에 맞서 우리는 보편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에 의해 잠식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따라서 단독적인 것에도 자신을 열어놓는 보편적 질서를 반드시 만들어내야 한다. 세계적인 것의 시스템에 폭력적으로 침입하는 단독적인 것은 대화를 허락하는 타자가 아니다. 테러리즘은 대화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악마적이다. 멂과 다름이 허용된 가까움 속에 머무르는 화해된 상태에서만 단독적인 것은 악마성을 버릴 것이다.  28-29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실제의 세계 전쟁처럼 사망자들과 난민들을 만들어낸다. 상업정신이 강요하는 평화는 한시적일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반옵티콘으로서의 복지 지역 혹은 복지의 섬은 경계를 표시하는 울타리들과 난민수용소와 전쟁터로 둘러싸여 있다.  30


이성에 의해 세워진 영구 평화에 대한 칸트의 관념은 무조건적인 "환대"에 대한 요구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이에 따르면 모든 이방인은 다른 나라에서 체류할 권리를 지닌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평화로운 태도를 유지하는 한" 적대적으로 취급받지 않고 머무를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지구상의 어떤 장소에 있을 권리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갖고 있지 않다." 환대는 유토피아적 표상이 아니라 이성이 강요하는 관념이다. "앞선 조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는 인간애가 아니라 권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환대(손님으로 머무를 권리)는 이방인이 타지 사람의 땅에 도착했다는 이유로 타지 사람에 의해 적대적으로 취급받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환대는 "법에 대한 공상적이거나 과장된 표상 방식이 아니라, 공적인 인권 자체를 위해, 따라서 영구 평화를 위해 국내법과 국제법의 성문화되지 않은 법전을 보충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킬 때만 우리는 영구 평화를 향해 지속적으로 접근해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환대는 자기 자신에 도달한 보편적 이성의 가장 높은 표현이다. 이성은 동질화하는 힘을 행사하지 않는다. 이성은 친절함을 통해 타자를 그 타자성 안에서 인정하고 환영할 수 있게 된다. 친절함은 자유를 의미한다.

환대의 관념은 이성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무언가를 제시한 다.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환대가 "너무나 풍요로운 영혼"의 표현이라고 했다. 이런 영혼은 모든 단독적인 것들을 자신 안에 머물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생성 중인 것, 떠도는 것, 추구하는 것, 덧없는 것을 나는 여기서 환영한다! 이제 환대는 나의 유일한 친교관계다." 환대는 화해를 약속한다. 미적으로 그것은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낯선 것에 대한 우리의 선의와 인내심과 공평함과 온유함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된다. 이 보상은 낯선 것이 천천히 자신의 베일을 벗고, 새롭고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음으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이루어진다-이것이 우리의 환대에 대한 그의 감사다." 아름다움의 정치는 환대의 정치다.  31-33


한 사회의 문명화 정도를 보여주는 척도는 바로 이 사회의 환대, 나아가 친절함이다. 화해는 친절함을 뜻한다.  33




진정성의 테러


오늘날 진정성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진정성은 신자유주의의 모든 광고들과 마찬가지로 해방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진정하다는 것은 사전에 만들어진, 외부에서 정해진 표현과 태도의 틀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말한다. 진정성은 오직 자기 자신과만 같을 것, 오로지 자신을 통해서만 자신을 정의할 것, 자기 자신의 저자이자 원작자일 것을 강요한다. 진정성의 명령은 자신에 대한 강제를 만들어낸다. 영구적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자신을 듣고, 자신을 엿보고, 자신을 포위하라는 강제 말이다. 그럼으로써 진정성의 명령은 나르시시즘적인 자기관계를 첨예화한다.

진정성의 강제는 자아로 하여금 자신을 생산하도록 강요한다. 진정성은 궁극적으로 자아의 신자유주의적 생산 형태다. 진정성은 만인을 자기 자신의 생산자로 만든다.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의 자아는 자신을 생산하고, 자신을 실행시키고, 자신을 상품으로 내놓는다. 진정성은 판매 논리다. 

오로지 자신하고만 같고자 하는 진정성의 노력은 타인들과의 영구적인 비교를 낳는다. 같게0만들기의 논리는 다름을 같음으로 바꾼다. 그 결과 다름의 징정성은 사회적인 동형성을 고착시킨다. 이 진정성은 시스템과 일치하는 차이만을, 다시 말해 잡다함만은 허용한다. 신자유주의적 용어로서의 잡다함은 착취할 수 있는 자원이다. 이런 잡다함은 어떠한 경제적 활용도 거부하는 상이성과 대립한다.

오늘날에는 누국나 타인들과 다르고자 한다. 그러나 이 타인과 다르고자 함 속에서 같은 것이 계속된다. 이는 보다 높은 차원의 동형성이다. 같음은 다름을 관통하여 계속 자신을 고수한다. 다름의 진정성은 오히려 억압적인 획일화보다 더 효과적으로 동형성을 관철시킨다.  34-35


신자유주의적 생산 전략으로서 진정성은 상품화할 수 있는 차이들을 산출한다. 이를 통해 진정성은 자신을 물질화하는 상품들의 다양성을 증가시킨다. 개인들은 자신의 진정성을 무엇보다 소비를 통해 표현한다. 진정성의 명령은 자율적인 주권자로서의 개인을 형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명령은 상업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다.

진정성의 명령은 나르시시즘적인 강제를 낳는다. 나르시시즘은 병적인 것과는 무관한, 건강한 자기애가 아니다. 건강한 자기애는 타자에 대한 사랑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나르시시즘은 타자를 보지 못한다. 타자는 에고가 이 타자 안에서 자신을 알아볼 때까지 계속 왜곡된다.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는 세계를 오로지 자신의 음영으로만 지각한다. 그 불행한 결과가 타인의 소멸이다. 자신과 타인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자신이 용해되어 불명료해진다. 자아는 자신 안에서 익사한다. 이에 반해 안정된 자아는 타인에 직면할 때 비로소 형성된다. 이와 달리 과도하고 나르시시즘적인 자기연관은 공허감을 낳는다.  37-38


자존감은 나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다. 이를 위해서 나는 나를 사랑하고, 칭찬하고, 인정하고, 높이 평가해주는 타자를, 충족을 제공해주는 기관으로서의 타자를 필요로 한다. 인간의 나르시시즘적 고립화, 타자의 도구화, 전면적인 경쟁은 충족이 생겨날 수 있는 환경을 파괴한다. 나를 확인해주고 인정해주는 시선이 사라지고 있다. 안정된 자존감을 갖기 위해 나는 내가 타인들에게 중요한 사람이며, 타인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표상을 필요로 한다.  40


모든 부정성의 제거가 오늘날 사회의 특징이다. 소통 또한 매끄러워져서 서로 만족감을 교환하는 행위가 된다. 슬픔처럼 부정적인 감정에는 어떤 언어도, 어떤 표현도 제공되지 않는다. 타인으로 인한 상처의 모든 형태가 회피된다. 그러나 이는 자기상해로 부활한다. ..

알랭 에랭베르(Alain Ehrenberg)에 따르면 우울증이 증가하는 것은 사람들이 갈등 관계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오가와 최적화를 중시하는 오늘날의 문화는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허용하지 않는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 때문이다. 오늘날의 성과주체는 오직 두 가지의 상태만을 알고 있다. 기능하기와 실패하기다. 이 점에서 성과주체는 기계와 비슷하다. 기계 또한 갈등을 알지 못한다. 기계는 오류없이 기능하거나, 아니면 고장이 났다.

갈등은 파괴적이지 않다. 갈등에는 건설적인 측면이 있다. 갈등을 통해서야 비로소 안정된 관계와 정체성이 성립된다. 사람은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하는 가운데 성장하고 성숙한다. 생채기를 내는 행윈느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갈등 처리 과정 없이, 누적된 파괴적 긴장을 신속하게 완화시켜준다는 점에서 유혹적이다. 생채기로 인한 화학 과정이 신속하게 긴장을 완화한다고 한다. 몸이 스스로 산출하는 마약이 뿌려진다는 것이다. 이 마약은 항우울제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항우울제 또한 갈등 상태를 억압함으로써 우울한 성과주체가 신속하게 기능하도록 만든다.  41-42


셀카 중독도 자기애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셀카 중독은 고립된 나르시시즘적 자아의 공회전일 뿐이다. 내면의 공허에 직면하여 사람들은 자신을 생산하려고 헛되이 노력한다. 그러나 공허만 재생산된다. 셀카는 공허한 형태의 자아다. 셀카 중독은 공허감을 강화한다. 자기애가 아니라 나르시시즘적인 자기관계가 셀카 중독을 낳는다. 셀카는 텅 빈, 불안한 자아의 매끄러운 표면이다. 고통스런 공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오늘날 면도날을 들거나 스마트폰을 쥔다. 셀카는 공허한 자아를 잠시 동안 은폐하는 매끄러운 표면이다. 그러나 셀카를 뒤집으면 피가 흐르는 상처들로 가득한 뒷면을 보게 된다. 셀카의 뒷면은 상처들이다  42-43




두려움


두려움은 아주 다른 것의 부정성을 전제로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두려움은 존재자의 전적인 타자로서 경험되는 무 앞에서 생겨난다. 존재자의 전적인 타자로서 경험되는 무 앞에서 생겨난다.  45


"세인(das man, 世人 대(代, 대신할대)세 사람인)"은 사회적인 동형성을 체현한다. 세인은 우리가 어떻게 살고, 행동하고, 지각하고,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는지를 정한다. "우리는 세인이 향유하는 대로 향유하고 즐긴다. 우리는 문학과 예술에 대해 세인이 보고 판단하는 대로 읽고, 보고, 판단한다. (...) 우리는 세인이 괘씸하게 생각하는 것을 '괘씸하다'라고 생각한다." "세인"인 독재는 현존재로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으로부터, 고유성으로부터 소외시킨다. "이 안정화된, 모든 것을 ' 이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자기-같게 하기 속에서 현존재는 소외로 빠져든다. 이 소외 속에서 현존재에게는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이 은폐된다." 익숙한 이해 지평의 붕괸느 두려움을 낳는다. 두려움 속에서 비로소 현존재에게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의 길이 열린다.

지금은 "세인"의 특징인, "모든 타인이 다른 타인과 같은" 획일성이 지배하지 않는다. 획일성은 생각들과 선택지의 잡다함에 밀려난다. 잡다함은 제체 순응적인 차이들만 허락한다. 잡다함은 소비할 수 있게 만든 다름이다. 이 잡다함은 획일성보다 더 효과적으로 같은 것을 지속시킨다. 가상적이고 피상적인 다양성으로 인해 우리는 같은 것의 체계적인 폭력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양성과 선택 가능성은 실제로는 없는 다름이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한다.  46-47


하이데거가 말하는 "고유성"은 진정성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심지어 진정성과 대립하기까지 한다. <존재와 시간>의 용어에 따르면 오늘날의 진정성은 "비고유성"의 한 형태다. 고유성은 일상성의 붕괴를 전제로 한다. 안정화하는 세인의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현존재는 집 바깥의 섬뜩함에 직면한다. 이에 반해 다름의 진정성은 일상성의 질서 속에서 발생한다. 진정한 자신은 자신의 상품 형태다. 그는 소비를 통해 자신을 실현한다.  47


정신은 "부정적인 것을 똑바로 쳐다보고, 부정 적인 것의 곁에 머무를 때만 이 힘"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부정적인 것 곁에 머무르는 대신 그것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을 고수하면 같은 것만 재생산된다. 부정성의 지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성의 지옥도 있다.  49


익숙한 세계으 부오기가 일으키는 두려움은 깊은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깊은 권태와 비슷하다. 얕은 권태는 불안하게 "바깥을 향해 안달한다." 깊은 권태에 빠질 때는 현존재가 모조리 우리로부터 분리된다...

깊은 권태는 지금은 나는 권태를 느낀다는 상태 속에 방치되고 있지만 현존재를 움켜잡을 수도 잇는 저 행동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깊은 권태는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움켜잡으라고, 다시 말해 행동하라고 현존재에게 요구한다. 깊은 권태에는 요구하는 성질이 있다. 그것은 말하낟. 그것은 목소리가 있다. 과잉활동에 수반되는 오늘날의 권태에는 언어가 없다. 이 권태는 침묵한다.  50


오늘날은 존재론적 무차별성이 지배하고 있다. 사유도 삶도 자신의 내재성의 차원을 스스로 보지 못하게 하고 있다.  51


오늘날의 두려움은 병원학적으로 아주 다른 원인을 갖는다. .. 그것은 일상적인 동의 안에서 생겨난다. 그것은 일상적인 두려움이다. 그것의 주체는 "세인"이다. "자아는 타자를 기준으로 삼고, 더 이상 보조를 맞출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게 된다. (...) 타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내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표상이 이렇게 사회적 두려움의 원인이 된다. .. 

하이데거가 말하는,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과 고유한 자기존재를 택할 결단을 내린 현존재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지향한다. .. 내부 지향은 타인과의 영구적인 비교를 필요 없게 만든다.  52-53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실패와 좌절과 배척에 대한 두려움,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결정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자신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리라는 두려움 등 여러 막연한 두려움에 고통받고 있다. 이 두려움은 타인들과의 지속적인 비교로 인해 강화된다. 이 두려움은 전적인 타자, 섬뜩한 것, 무 앞에서 느끼게 되는 수직적인 두려움과 반대로 수평적인 두려움이다.  53


신자유주의의 기만적인 논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두려움이 생산성을 높인다.  54




문턱


두려움은 문턱에서도 깨어난다. 두려움은 문턱에서 생기는 전형적인 느낌이다.문턱은 미지의 것으로 넘어가는 이행의 장소다. 문턱 너머에서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 상태가 시작된다. 그래서 문턱에는 항상 죽음이 새겨져 있다. 모든 이행의 이식들, 이른바 통과의례(rites de passage)에서 우리는 한 번 죽고, 문턱의 저편에서 다시 태어난다. 여기서 죽음은 이행으로 경험된다. 문턱을 넘어가는 사람은 자신을 변신에 내맡긴다. 변신의 장소로서 문턱은 고통을 준다. 문턱에서 고통의 부정성이 내재한다. "문턱의 고통을 느낀다며느 너는 관광객이 아니다. 네게는 이행이 일어날 수 있다." 오늘날 문턱이 많은 이행은 문턱이 없는 통로에 밀려난다. 인터넷 속에서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관광객이다. 우리는 더 이상 문턱에 거주하는 호모 돌로리스(homo doloris, 슬픔의 인간)가 아니다. 관광객은 변신과 고통을 수반하는 경험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상태에 머무른다. 그들은 같은 것의 지옥을 여행한다.  55-56


투명성의 강젠느 모든 시각적 빈틈과 정보의 빈틈을 제거하고, 모든 것을 전면적인 가시성에 내놓는다. 그리고 후퇴와 보호의 공간들을 모조리 제거한다. 그 결과,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위협적일 만큼 가깝게 다가온다. 우리를 차단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는 우리 자신이 세계적인 네트워크 안에 있는 통로에 지나지 않는다. 투명성과 과잉소통은 우리를 보호해주는 모든 내면성은 앗아간다. 실로 우리는 이 내면성을 자발적으로 양도하고 우리 자신을 디지털 네트워크에 내던진다. 그리고 이 네트워크는 우리를 관통하고, 투광(透光 통할투 빛광)하고, 우리에게 구멍을 숭숭 뚫어 놓는다. 디지털 과잉조명ㅇ과 노출은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이 과도함으로 인한 잠재적인 두려움을 낳는다. 같은 것의 투명한 지옥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계속 강화되어가는 같은 것의 소음은 두려움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57




소외

(독일어의 소외(Entfremdung), 이방인(der Fremde), 낯섦(die Fremheit)은 모두 '낯설다'는 뜻의 형용사 fremd에서 파생된 말이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소설 <이방인>은 낯섦을 존재와 실존의 근본적인 감정으로 서술한다. 인간은 세계에 대해 이방인이며, 인간들 사이에서 이방인이며, 나아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방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는 언어 창살에 의해 타인들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낯섦은 말없음으로 나타난다. 각자는 언어 창살로 타인들로부터 격리된 감방에 갇혀 있다 이 낯섦은 오늘날의 과잉소통 시대에도, 안락함의 지대 혹은 백화점으로서의 세계에도 속하지 않는다.  58


오늘날 우리는 이방인의 부정성이 제거된 안락함의 지대에서 산다. 좋아요가 이곳의 구호다. 디지털 화면은 점점 더 우리를 낯선 것, 섬뜩한 것의 부정성으로부터 차단한다. 오늘날 낯섦은 정보와 자본의 순환을 가속화하는 데 장애가 되므로 달갑지 않게 여겨진다. 가속화 강제는 모든 것을 같은 것으로 획일화한다. 과잉소통의 투명한 공간은 비밀도, 낯섦도, 수수께끼도 없는 공간이다.

소외로서의 타자도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의 노동관계는 소외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는 서술할 수 없다.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란 노동자가 자기 노동의 생산물을 낯선 객체로 대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에서도, 자신의 행위에서도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노동자는 더 많은 재화를 생산할수록 더 빈곤해진다. 그는 자신의 생산물을 박탈당한다. 노동자의 행위는 그의 탈현실화를 초래한다. "노동의 실현은 노동자가 아사(餓死 주릴아 죽을사)에 이르도록 탈현실화될 만큼 지극한 탈현실화로 나타난다." 노동자가 자신을 소모할수록, 그만큼 더 그는 착취하는 타자의 지배를 받게 된다. 마르크스(Karl Marx)는 소외와 탈현실화로 이끈느 이 지배관계를 종교와 비교한다. "인간이 신에게 더 많은 것을 부여할수록, 인간 안에 남아 있는 것은 줄어든다. 노동자는 자신의 삶을 대상 속에 투여한다. 그러나 이제 그의 삶은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라 대상의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 활동이 커질수록 노동자는 더 대상을 상실한다. 그의 노동의 생산물은 그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생산물이 커질수록 노동자 자신은 더 작아진다." 노동관계 속의 소외로 인해 노동자는 자신을 실현할 수 없다. 그의 노동은 지속적인 자기 탈현실화다.  60-61


나는 나를 실현한다느 믿음 속에서 자발적으로 나 스스로를 착취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비열한 논리다. 소진(Burn-out)에 대한 열광의 첫번째 단계가 그러하다. 나는 열광적으로 노동 속으로 뛰어들어 결국 쓰러진다. 나는 죽음에 이르도록 나를 실현한다. 나는 죽음에 이르도록 나를 최적화한다. 신자유주의의 지배는 망상적인 자유 뒤에 숨어 있다.  62


오늘날에는 새로운 형태의 소외가 생기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세계나 노동으로부터의 소외가 아니라, 파괴적인 자기소외, 즉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다. 이 자기소외는 다름 아닌 자기최적화 및 자기실현과 더불어 생겨난다.  62




반체(反體 되돌릴반 몸체)


"객체(Object)"라는 말은 내던지다. 앞에 두다, 앞에 던지다와 같은 뜻을 지닌 라틴어 동사 오비케레(obicere)에서 유래한다. 객체는 무엇보다도 반대다. 나에게 대립하는 것, 나를 향해 던져지고 내게 맞서는 것, 나를 거역하는 것, 내게 반대하고 저항하는 것이다. 이것이 객체의 부정성이다. 이의 혹은 반론을 뜻하기도 하는 프랑스어 오브젝시옹(objection)에는 객체의 이런 의미 차원이 남아 있다.  64


오늘날 반대의 소멸은 모든 차원에서 일어난다. '좋아요'는 오비케레에 대립한다. 이제는 모든 것이 '좋아요'를 요구한다. 반대의 전적인 부재는 이상적 상태가 아니다. 반대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런 완충장치도 없이 우리 자신에게로 추락하기 때문이다. 반대의 부재는 자기침식을 낳는다.  68




시선 


독서는 주시(注視 물댈주 볼시)됨을 의미한다.  71


영화 <달콤한 인생(La Do;ce Vita)>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먼동이 틀 무렵 파티에서 밤을 새운 사람들이 해변으로 나가 거대한 가오리가 바다에서 건져지는 것을 관찰한다. 카메라는 가오리의 크고 심원한 눈을 근접 촬영으로 보여준다. 주인고 ㅇ마르첼로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저놈이 계속 노려보는군." 자크 라캉은 여러 번 이 장면을 파고 들었다. <정신분석의 윤리 : 세미나7>에서 그는 우리를 쳐다보는 가오리를 흉측한 "사물"로 서술한다. "날이 밝아올 때, 향락자들의 그룹이 떨리는 빛 속에서 곧 헤어질 것처럼 해변의 소나무 줄기들 사이에 가만히 서 있다가 갑자기 무엇을 목표로 삼는지도 알 수 없이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 바로 이 순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내가 말한 저 유명한 사물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 순간을 좋아했다. 그 사물이한 그물에 갇혀 바다에서 건져지는 어떤 흉측한 것이었다.

라캉이 말하는 "사물"은 영상으로부터, 재현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얼룩, 오점이다.  71-72


사물은 나를 쳐다보는 전적인 타자다. 그래서 사물은 두려움을 낳는다. "바로 그것이 극도로 우리를 쳐다보는 것, 우리에게 관여하는 것이며, a(라캉이 말하는 대상 a는 결여된 타자로서 욕망의 원인이자 대상이다)의 명령을 받는 욕망의 장소에서 어떻게 보는 행위로부터 두려움이 생겨나는지를 밝혀준다.  73


사르트르(Jean-Paul sartre)에게도 타자는 시선으로 나타난다. 사르트르는 시선을 인간의 눈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주시된다는 것은 오히려 세계 내 존재의 핵심적인 측면이다. 세계는 시선이다. 나뭇가지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나 반쯤 열린 창문, 혹은 커튼의 가벼운 움직임도 시선으로 지각된다. 오늘날 세계에는 시선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주시된다거나 어떤 시선에 내맡겨져 있다는 느낌을 거의 받지 않는다. 세계는 우리의 마음에 들고자 하는 눈요기로 나타난다. 디지털 화면도 시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윈도우(Windows)는 시선 없는 창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시선으로 부터 차단한다.  74-75


오늘날 시선은 여러 층위에서 사라지고 있다. 지배도 시선 없이 이루어진다. 벤담(Jeremy Bentham)이 말한 판옵티콘은 시선의 지배에 기초한다. 판옵티콘에 갇힌 수감자들은 감시자의 시선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 감시탑에 있는 감시자는 모든 것을 보지만, 그 자신은 보이지 않도록 구성 되어 있다. "판옵티콘은 보기와 보이기라는 쌍을 분리시키기 위한 기계다. 감시탑을 둘러싼 원형 건물에 있는 수감자는 완전히 보이지만, 그 자신을 전혀 볼 수 없다. 중앙탑에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보지만, 그 자신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수감자들은 중앙탑의 실루엣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감시당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감시자가 없을 때에도 언제나 주시되고 있다고 느낀다. 시선의 지배는 중앙원근법적이다.  75-76


디지털 매체는 시선 없는 매체라는 점에서 시각적 매체와 구별된다. 사실은 옵티콘(opticon, '모든 것을 본다'는 의미의 판옵티콘(panopticon)에서 '모든 것'을 뜻하는 pan을 뺀 opticon은 '보는' 구성물을 의미한다.)이라고 할 수도 없는 디지털 판옵티콘 또한 시선에, 중앙원근법적 광학에 의존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디지털 판옵티콘은 아날로그 판옵티콘보다 훨씬 많이, 나아가 훨씬 더 깊이 본다. 여기서 중앙과 주변의 구별은 아무 의미가 없다. 디지털 판옵티콘은 원근법 없이 작동한다. 원근법 없는 전면 조명은 원근법적 감시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우리를 모든 측면에서, 심지어 내부로부터도 샅샅이 비추기 때문이다. 시선은 생각을 파고들 수 없다. 그러나 디지털 판옵티콘에서는 생각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빅데이터에는 시선이 전혀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중앙원근법적인 감시와는 반대로 원근법 업슨 전면 조명에는 맹점이 전혀 없다. ..

디지털 판옵티콘의 수감자들은 누군가 자신으 ㄹ주시한다고, 다시 말해 감시받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롭다고 느끼며,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출시킨다. 디지털 판옵티콘은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착취한다.  77-78




음성 


음성은 다른 곳으로부터, 바깥으로부터, 타자로부터 온다. 우리가 듣는 음성은 장소를 전혀 특정할 수 없다. 서양의 형이상학이 음성을 직접적 자기현존의, 직접적 현재의 장소로 선호했고, 음성이 의미와 로고스에 특별히 가깝다고 생각한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유명한 음성중심주의 테제는 음성의 탈영토성을 전혀 보지 못한다. 시서노가 마찬가지로 음성은 오히려 자기현존과 자기투명성을 파괴하고, 자기 안에 전적인 타자, 미지의 것, 섬뜩한 것을 써 넣는 매체다.  79


카프카는 음성을 타자의, 전적인 타자의 매체로 자주 등장시킨다. 약점, 형이상학적인 허약함, 근본적인 수동성이 비로소 타자의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해준다. 밀레나(Milena Jesenska, 1896~1944 : 1920년 즈음에 카프카의 애인이었다.)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프카는 예언자들을 "음성이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뇌가 찢어지는 듯한 두려움"을 느낀 "허약한 아이들"에 비교했다. 그들은 타자의 위력적인 음성 앞에서 허약하다. 음성의 에로틱함 또한 "심리적 주체"가 "자신을 견고하게 만드는 것"을 가로막는 데 있다. 음성은 주체를 허약하게 만든다. 주체는 자신을 잃어버린다. 음성은 "자기상실"로 이끈다.  82


칸트의 이성 또한 명령하는 음성으로서 등장한다. 행복과 감각적 성향에 맞서 오로지 도덕 법칙에, "이성의 음성"에, "악한들조차 떨게 만드는" "천상의 음성"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바로 인륜성이다. 하이데거는 이성의 음성 대신 "양심의 음성"을 내세운다. 이 양심의 음성은 현존재에게 "가장 고유한 존재의 가능성"을 붙잡으라고 요구한다. 여기서도 음성에는 탈영토성이 깃들어 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아주 갑작스럽게 "모든 현존재가 자기 곁에 두고 있는" "친구의 음성"에 대해 말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친구의 음성을 듣는 것"은 "심지어 현존재를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향해 본질적이고 실제적으로 열어놓는다." .. 친구는 타자다. 여기서 하이데서는 음성에 일정한 초월성을 부여하기 위해 친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87


하이데거는 "음성과 시선의 같음"에 대해 말한 바 있다.  88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는 디지털 반향 공간으로부터 점점 더 타자의 음성이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타자의 부재로 인해 음성이 줄어들었다. 너와는 달리 그것(Es, 마르틴부버에 따르면 진정한 만남과 대화는 나-너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나-그것의 관계에서는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다.)에는 음성이 없다. '그것'에서는 상대를 향한 말도, 시선도 생겨나지 않는다. 상대가 사라짐으로써 세계는 음성과 시선을 잃는다. 

디지털 소통에는 시선과 음성이 매우 부족하다. .. 실로 관계와 만남은 음성과 시선의 특별한 경험들이다. 그것들의 몸의 경험들이다.  89-90


디지털 매체는 탈육체화하는 작용을 한다. 디지털 매체는 음성으로부터 거칢을, 육체성을, 나아가 공동(空洞 빌공 마을동)과 근육, 점막, 연골의 심층을 빼앗는다. 음성은 매끄러워진다. 음성은 의미를 위해 투명해지고, 완전히 기의로 변한다. 이 매끄럽고, 육체가 없고, 투명한 음성은 유혹하지 않고, 아무런 육욕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유혹을 낳는 것은 기의로 환원될 수 없는 기표의 과잉이다.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고, 아무 정보도 전달해주지 않는 그 음성은 "기표들의 육욕"을 가능하게 한다.  90




타자의 언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세상에 대한 낯섦"을 예술의 한 계기로 본다. 세상을 낯선 것으로 지각하지 않는 자는 세상을 전혀 지각하지 않는다. 음전압, 즉 부정적 긴장은 예술에 본질적이다. 따라서 아도르노는 편안함의 예술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낯섦은 철학의 계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정신 자체에 내재 한다. 따라서 정신은 본질적으로 비판이다.

'좋아요'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것이 된다.  93


디지털 화면은 경이를 전혀 허락하지 않는다. 익숙함이 증가할수록 정신을 활성화하는 경이의 잠재력이 모조리 사라진다. 예술과 철학은 낯선 것, 주관적 정신과 다른 것에 대한 배반을 철회하는 작업을 할 의무를 지닌다. 다시 말해 주관적 정신의 확정적인 네트워크로부터 타자를 구원하고, 타자에게 그 낯설게 하는, 경이로운 다름을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이다.  94


"폭력 없는 관찰"과 "거리의 가까움", 나아가 멂의 가까움만이 사물들을 행동 주체의 강제로부터 해방시킨다. .. 행동 주체가 뒤로 물러날 때, 객체를 향한 주체의 맹목적인 충동이 꺾일 때, 그럴 때만 사물들은 그 다름을, 그 수수께끼의 성질을, 그 낯섦과 비밀을 돌려받는다.  94-95


예술은 자기초월을 전제한다. 예술을 염두에 두는 사람은 자신을 망각한다. 예술은 "나에 대한 멂"을 만들어낸다. 자신을 망각한 채 예술은 섬뜩한 것, 낯선 것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나의 의문에 부로가하지만, 무낳ㄱ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망각한 자아와 함께 저 섬뜩한 것, 낯선 것으로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지상에서 시적으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안락한 디지털 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 우리는 같은 것의 수적인 디지털 공간 속을 돌아다닌다.  96


오늘날의 과잉소통은 침묵과 고독의 자유 공간을 억압한다. 그러나 이 자유 공간 안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실로 말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말할 수 있다. 과잉소통은 자신 안에 침묵을 본질적 요소로 지니고 있는 언어를 억압한다. 언어는 정적으로부터 생겨난다. 정적이 없으면 언어는 이미 소음이다. 첼란에 따르면 문학에는 "침묵을 향한 강한 성향"이 내재한다. 소통의 소음은 경청(Lauschen)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97


프랑스의 작가 미셸 뷔토르(1926~2016, 프랑스 누보로망을 대표하는 작가)는 문학이 오늘날 위기에 빠졌음을 확인하고, 이 위기를 정신의 위기로 파악한다. "지난 10년 혹은 20년 동안 문학에서는 거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신작들이 홍수처럼 쏟아졌지만, 정신적으로는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어요. 이는 소통의 위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경탄할 만한 새로운 소통 수단을 갖게 되었지만, 그것은 엄청난 소음을 불러일으킵니다."  97-98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도 관심을 타자의 호출을 전제로 하는 "더 많은 의식"이라고 보았다.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타자의 탁월함을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지금은 관심의 경제가 관시의 시학과 관심의 윤리학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관심의 경제는 타자에 대한 배반을 추동시키고, 자아의 시간을 전면화한다. 이에 반해 관심의 시학은 타자에 고유한, 가장 고유한 시간을, 타자의 시간을 발견한다. 관심의 시학은 "그것, 즉 타자에 가장 고유한 것이 함께 말하게 한다. 타자의 시간 말이다."  99-100


오늘날의 소통은 극도로 나르시시즘적이다. 이 소통은 너가 전혀 없이, 타자를 전혀 호출하지 않은채 진행된다. 이에 반해 시에서는 나와 너가 서로를 만들어낸다. "이 대화의 공간 안에서 비로소 말상대가 구성되고, 이 말상대는 그에게 말을 걸고 이름을 지어주는 나의 주위에 집결한다. 그러나 말상대는, 그리고 이 이름을 통해 말하자면 너가 된 자는 그 자신의 다름 또한 현재 속으로 가지고 온다."  100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매체를 통해 타인을 최대한 가까이 내게로 끌어오고자 한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이상 타자를 갖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타자를 소멸시킨다. .. 

오늘날의 소통은 타자로부터 너-계기를 제거하고, 타자를 "그것(Es)"으로, 즉 같은 것으로 획일화하려고 한다.  101




타자의 생각 


자신으로 존재함은 단순히 자유롭게 존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은 짐과 부담이기도 하다. 자신으로 존재함은 자신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102


오로지 에로스만이 자아를 우울증으로부터, 자신에게 나르시시즘적으로 얽혀 있는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타자의 구원의 공식이다. 나를 나로부터 떼어내어 타자에게 끌고 가는 에로스만이 우울증을 이길 수 있다. 우울한 성과주체는 타자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다. 타자에 대한 욕망, 나아가 타자를 향한 호출 혹은 "전향"은 자아의 나르시시즘적 껍질을 깨는 형이상학적 항우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에 의해 깨어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수수께끼 혹은 비밀로서의 타자에 대한 경험을 잃어버렸다. 타자는 이제 유용성의 목적론에, 경제적 계산과 가치평가의 목적론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 타자는 투명해진다. 타자는 경제적 객체로 강등된다. 이에 반해 수수께끼로서의 타자는 전혀 가치평가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다름을 전제로 한다. 타자의 다름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다름도 사랑의 전제다. 사람의 이원성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 필수적이다. "다른 한 사람이 우리와 다른, 우리와 대립된느 방식으로 살고 활동하고 느낀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기뻐하는 것 말고 무엇이 사랑이겠는가? 대립하는 것들을 기쁨으로 연결하려면 사랑은 이 대립하는 것들을 제거해서도, 부정해서도 안 된다. 심지어 자기애도 한 사람 속에 있는, 서로 뒤섞을 수 없는 이원성(혹은 다원성)을 전제로 한다.  105-106


사랑은 세상을 타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창조하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사랑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 시작되게 하는 사건이다. ... 

우리는 삶을 다시 타자로부터, 타자에 대한 관꼐로부터 새롭게 보고, 타자에게 윤리적인 우선권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나아가 타자를 경청하고 타자에게 대답하는 책임의 언어를 다시 배워야 한다. 레비나스는 "말하기(dire)"로서의 언어를 다름 아닌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이라고 보았다.  107




경청하기


오늘날 우리는 경청하는 능력을 갈수록 잃어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점점 더 에고에 집중하는 것이, 사회가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이 경청을 어렵게 한다.  108


경청은 수동적 행동이 아니다. 특별한 능동성이 경청의 특징이다. 나는 우선 타자를 환영해야 한다. 다시 말해 타자의 다름을 긍정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를 경청 한다. 경청은 선사하는 것, 주는 것, 선물이다. 경청은 타자가 비로소 말을 시작하도록 돕는다. 경청은 타자의 말을 수동적으로 좇아가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경청은 말하기에 선행한다. 경청은 타자로 하여금 비로소 말을 하게 한다. 나는 타자가 말을 하기 전에 이미 경청한다. 혹은 나는 타자가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경청한다. 경청은 타자를 말하기로 초대하고, 타자가 그의 다름을 드러내도록 풀어준다. 경청은 타자가 자유롭게 말하는 공명이 공간이다. 그래서 경청은 치유할 수 있다.  108-109


손님을 환대하는 경청자는 자신을 비워 타인을 위한 공명 공간을 만들어낸다.  110


경청의 기술은 호흡의 기술로 수행된다. 타자를 환대하는 영접은 들숨이다. 하지만 이 들숨은 타자를 자신에게 편입시키는 대신 그에게 장소를 제공하고 그를 보호해준다. 경청자는 자신을 비운다. 그는 무명의 인물이 된다. 이 비어 있음이 경청자의 친절함의 핵심이다. "그는 지극히 다양한 것들을 받아들여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타자에 대한 경청자의 책임감 있는 태도는 인내로 표현된다. 인내의 수동성이 경청자의 준칙이다. 경청자는 망설임 없이 자신을 타자에게 내맡긴다. 내맡김은 경청자의 윤리학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준칙이다. 오직 이것만이 우리가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것을 막는다. 에고는 경청하지 못한다. 경청의 공간은 에고가 보류된 타자의 공명 공간으로서 열린다. 나르시시즘적인 에고 대신 타자에 대한 몰입, 타자에 대한 욕망이 들어선다.  111-112


경청은 정보의 교환과는 아주 다른 것을 의미한다. 경청할 때는 어떤 교환도 일어나지 않는다. 친근함과 경청이 없으면 공동체도 형성되지 않는다. 공동체는 경청하는 집단이다.  115


오늘날 인터넷은 고립화된 자아의 공명 공간일 뿐이다. 광고는 어떠한 경우에도 경청하지 않는다.  117


소란스런 피로사회는 듣지 못한다. 어쩌면 미래의 사회는 경청하고 귀 기울이는 자들의 사회라고 불릴지도 모르겠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전혀 다른 시간이 시작되게 하는 시간혁명이다. 타자의 시간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 오늘날의 시간 위기는 자기 시간의 가속화가 아리나 전면화로 인한 것이다. 타자의 시간은 가속화 압박을 낳는, 성과와 효율성 제고의 논리를 벗어난다. 신자유주의적 시간 정책은 타자의 시간을 제거한다. 이 시간 정책에게 타자의 시간은 그저 비생산적인 시간일 뿐이다. 자기 시간의 전면화는 오늘날 모든 생활 영역을 파고들어 인간의 전면적인 착취를 낳고 있는 생산의 전면화와 동시에 진행된다. 신자유주의적 시간 정책은 생산 논리를 벗어나는 고양된 시간인 축제의 시간도 제거한다. 축제는 탈생산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고립화하고 개별화하는 자기 시간과는 반대로 타자의 시간은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타자의 시간은 좋은 시간이다.  119-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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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


우리는 자유 자체가 강제를 생성하는 특수한 역사적 시기를 살고 있다. 할 수 있음의 자유는 심지어 명령과 금지를 만들어내는 해야 함의 규율보다 더 큰 강제를 낳는다. 해야 함에는 제한이 있지만, 할 수 있음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강제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처럼 강제의 반대여야 할 자유가 강제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자유롭다고 여기는 성과주체는 실제로는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성과주체는 주인에 묶여 있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점에서 절대적 노예라고 할 수 있다.  10-11


신자유주의적 노예는 헤겔이 말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속에 등장하는 주인의 주권, 즉 노동하지 않고 오직 향유만 하는 주인의 자유를 알지 못한다...

헤겔의 노예는 주인에게도 노동을 강제한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노동의 전체주의를 초래한다.  11


자유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어휘다. 사람들은 좋은 관계 속에서, 타인과의 행복한 공존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초래하는 개개인의 전면적 고립 상태는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자유를 새롭게 정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자유를 강제로 전복시키는 숙명적인 자유의 변증법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말이다.

신자유주의는 자유 자체를 착취하는 매우 효율적이고 영리한 시스템이다...

타자의 착취는 그다지 많은 성과를 올리지 못한다. 자유의 찾취야말로 최상의 수익을 낳는다. 

흥미롭게도 마르크스 역시 자유를 타자와의 좋은 관계라는 면에서 정의한다. "모든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체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소질을 모든 방향으로 온전히 발전시킬 수 있는 수단을 획득한다. 그러니까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개인의 자유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자유롭다는 것은 타인과 함께 자아를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는 성공적인 공동체와 동의어다.  12-13


자본은 자유 경쟁을 통해 자기 자신, 즉 또 다른 자본과 관계함으로써 자신의 증식을 추진한다. .. 개인적 자유는 스스로의 증식을 추구하는 자본에 악용된다는 점에서 노예 상태와 다름없다...

"자유 경쟁 속에서 자유롭게 해방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자본이다."

개인의 자유를 통해 실현되는 것은 자본의 자유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개인은 자본의 성기로 전락한다.  13


오늘날 과도한 형태에 이른 개인의 자유는 결국 자본 자체의 과잉을 의미할 따름이다.  14


자본주의의 변이체인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를 경영자로 만든다..

오늘날은 모두가 자기 자신의 기업에 고용되어 스스로를 착취하는 노동자다. 모두가 주인인 동시에 노예다.  15


신자유주의 질서는 타자에 의한 착취를 어떤 '계급'도 빠져나갈 수 없는 자기 착취로 탈바꿈시킨다. 마르트스는 이러한 무계급적 자기 착취를 전혀 알지 못했다. 사회 혁명이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의 구별을 전제로 한다면, 무계급적 자기 착취는 바로 사회 혁명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16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에서 실패하는 사람은 사회나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리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바로 여기세 신자유주의적 지배 질서의 특별한 영리함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을 위해서 일한다. 자본에서 생성되는 자본의 고유한 욕구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구라고 착각한다. 자본은 새로운 초월성, 새로운 예속의 형식이다.  17


우리는 정말로 자유롭고자 하는 것일까? 우리는 자유롭지 않아도 되려고 신을 발명하지 않았던가? 신 앞에서 우리는 모두 빚을 진 존재다. 그런데 빚은 자유를 파괴한다...

우리가 빚이 없다면, 즉 완전히 자유롭다면, 우리는 정말로 행동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행동하지 않아도 되려고, 즉 자유롭지 않아도 되려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영원히 채무자로 머무는 것인지도 모른다...

발터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종교로 파악한다.  18-19


디지털 네트워크는 처음에 무제한의 자유를 주는 매체로 환영받았다.  19


무제한의 자유와 커뮤니케이션은 이제 전면적 통제와 감시로 돌변한다. 소셜미디어 역시 점점 더 사회적 관계를 감시하고 가차 없이 착취하는 디지털 파놉티콘의 모습을 띠어간다...

벤담의 파놉티콘에 갇힌 수감자들은 훈육을 위해 격리되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금지된다. 반면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서로 격렬하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노출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디지털 통제사회는 고도로 자유에 의존한다. 그것은 오직 자발적인 자기 조명과 자기 노출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여기에 디지털 파놉티콘의 효율성이 있다.  20

 

신자유주의는 시민을 소비자로 만든다. 시민의 자유는 소비자의 수동성으로 대체된다. 오늘날 소비자가 된 유권자는 정치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없다. 즉 적극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해가고자 하는 의욕이 없는 것이다. 그는 공동의 정치적 행동을 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는 궁시렁궁시렁 불평하면서 정치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따름이다.  22


미래가 열려 있다는 것은 행동의 자유를 구성하는 본질적 요인이다. 그러나 빅데이터는 인간 행동에 대한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로써 미래는 계산하고 조종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디지털 심리정치는 자유로운 결정의 부정성을 사실 관계의 긍정성으로 탈바꿈시킨다. 인간 자체가 긍정화되어 양화하고 측정하고 조종할 수 있는 사물이 된다...

모든 명령 체제, 모든 지배의 기술은 피지배자를 예속시키기 위한 고유한 성물을 만들어낸다..성물은 곧 예속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일종의 디지털 성물이다. 아니, 디지털의 성물이 곧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은 묵주처럼 예속화의 도구로 기능한다...스마트폰과 묵주는 모두 자기 검열과 자기 통제에 사용된다.  25


좋아요는 디지털 아멘이다. 우리는 좋아요를 클릭하는 순간 스스로 지배에 예속되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효과적인 감시 도구일 뿐만 아니라, 모바일 고해실이기도 하다.  26





스마트 권력


저항을 분쇄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것만이 권력은 아니다. 권력이 반드시 강제의 형식을 취한다고 할 수는 없다... 권력 자체가 아예 화제조차 되지 않는 때야말로 권력은 어떤 의심도 받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권력은 크면 클수록 더 조용히 작동한다.  27


권력은 심지어 자유를 이용할 수도 있다... 오늘날 권력은 점점 더 허용적 형식을 취해간다. 너그럽게 허용하는 친절한 권력은 부정성을 벗어버리고 자유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신자유주의적 권력의 기술은 섬세하고 유연하며 스마트한 형태를 취하며, 결국 사람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예속된 주체는 자신이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예속된 주체에게 지배 관계는 완전히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28


신자유주의적 궐력 기술의 목표는 인간을 온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존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친절한 스마트 권력은.. 안 된다고 말하기보다 그러라고 말하는 권력이며, 억압적이기보다 유혹적인 권력이다. 그것은 긍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착취하려고 애쓴다. 그것은 금지하는 대신 유혹한다. 그것은 주체와 대적하는 대신 주체의 욕구에 부응한다. 

스마트 권력은 심리를 훈육하거나 강제와 금지의 굴레에 묶어두지 않고, 오히려 심리에 착 감겨온다. 그것은 우리에게 침묵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털어놓으라고, 함께 나누라고, 참여하라고, 우리의 의견, 욕망, 소원, 선호를 전달하고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끊임없이 자극한다. 이처럼 친절한 권력은 억압적 권력보다 더 막강하다. 이때 권력은 우리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자유로운 결정은 미리 정해져 있는 가능성들에 대한 선택으로 전락한다.  29-30


스마트 권력은 우리의 의식적, 무의식적 사고를 읽고 분석한다. 그것은 우리들이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조직화하고 최적화하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권력이 제압해야 할 저항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배는 큰 힘을 소모할 필요도 없고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는다. 지배는 그냥 저절로 이루어진다. 스마트 권력은 호감을 사고 의존하게 만듦으로써 지배하려고 한다.  30-31





생정치


푸코에 따르면 17세기부터 이미 권력은 신과 같은 군주가 휘두르는 죽음의 권력이 아니라 규율 권력이 된다. 군주의 권력은 칼의 권력이다. 그것은 죽음의 위협으로 군림한다. 그것은 "생명을 손아귀에 쥐고 제거해버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반면 규율 권력은 죽음의 권력이 아니라 삶의 권력이다. 그것의 기능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완벽한 관철에 있다. 오랫동안 막강한 위력을 발휘해온 죽음의 위협은 "몸의 세심한 관리"와 "계산적인 계획"으로 대체된다.

군주의 권력에서 규율 권력으로의 이행은 생산 형식의 변화, 즉 농업 생산에서 산업 생산으로의 변화에 기인한다. 산업화의 지전은 몸을 훈육하고 기계 생산에 적응시킬 필요성을 낳는다. 규율 권력은 몸을 고문하는 대신 규범 체계속에 묶어둔다. 철저히 계산된 강제가 신체의 모든 부분을 관통하여 몸 속에 자동화된 습관으로까지 새겨진다. 그리하여 몸은 생산 기계로 정비된다.  35-36


규율은 "신체 활동을 정교하게 통제하고 그 힘을 지속적으로 종속시키는 방법, 그것을 빠릿빠릿하게/쓸모 있게 만드는 방법이다."

규율 권력은 표준화하는 권력이다. 그것은 주체를 규범, 명령, 금지의 체계에 예속시키고, 일탈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요소를 제거한다. 바로 이러한 조련의 부정적 성격이 규율 권력의 본질적 요소다. 그 점에서 규율 권력은 군주의 권력과 인접 관계에 있다. 군주 권력도 부정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군주 권력의 부정성은 솎아내는 부정성이다. 군주의 권력도 규율 권력도 타자 착취를 수행한다. 양자 모두 복종하는 주체를 만들어낸다.

규율 권력이 구사하는 훈육의 기술은 신체적인 차원을 넘어서 정신적인 영역에까지 파고든다. 영어 단어 "industry"에는 근면이라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Industrial School"은 비행 청소년의 교화 기관이다. 벤담 또한 파놉티콘이 수감자들의 도덕적 개선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심리는 아직 규율 권력의 초점에 놓여 있지 않다. 규율 권력이 구사하는 정형외과적 기술은 심리의 심층과 그 속에 숨어 있는 소망과 욕구, 갈망에까지 파고들어가 이를 좌지우지하기에는 너무 조악하다. 벤담의 빅브라더도 파놉티콘의 수감자들을 외적으로 관찰할 뿐이다. 벤담의 파놉티콘은 시각 매체에 의존한다. 파놉티콘은 내면의 생각이나 욕구를 들여다보지 못한다.

규율 권력은 "인구"를 발견한다. 인구는 생산 및 재생산을 하는 무리로서, 세심하게 관리해야 할 대상이다. 여기에 생정치의 과업이 있다. 생정치는 번식, 출생률과 사망률, 건강 상태, 기대 수명 등을 고려하고 점검한다. 푸코도 명시적으로 "인구의 생정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생정치는 규율사회의 통치술이다. 하지만 그것은 심리를 착취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 인구 통계를 활용하는 생정치는 심리적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인구 통계는 주민의 심리 지도 작성을 위한 자료를 제공하지 않는다. 인구 통계는 심리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심리의 비밀을 밝혀주지 않는다. 그 점엣 통계는 빅데이터와 구별된다. 빅데이터는 개인의 심리 지도뿐만 아니라 집단적 심리 지도, 더 나아가 무의식의 심리 지도까지도 작성할 수 있게 해준다. 이로써 심리의 무의식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훤히 비추고 착취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36-38





푸코의 딜레마


신자유주의는 심리에서 생산력을 발견한다. 이러한 심리와 심리정치로으 전환은 현대 자본주의의 생산 형식과도 긴밀한 관계가 있다...신체의 훈육은 정신의 최적화로 대체된다.  41


오늘날 몸은 직접적인 생산 과정에서 해방되어 미적인 또는 건강 기술적인 최적화의 대상이 된다... 오늘날의 생산 과정에서 푸코의 "빠릿빠릿한 몸"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는 없다..

몸의 최적화는 단순한 미용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활동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섹스니스(sexness)와 피트니스(fitness)는 증식시키고 상품화하고 착취해야 할 새로운 경제적 자원으로 떠오른다.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생권력이라는 푸코의 개념이 우리 시대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한다. "나는 푸코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무엇보다도 유럽과 관련하여 대단히 설득력 있게 기술한 생권력이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권력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는다." 스티글레르에 따르면, 생권력의 자리를 물려받은 것은 "심리 권력의 심리 기술"이다. 그가 말하는 심리 기술이란 텔레비전과 같이 사람들을 충동에 조종되는 미숙한 소비 동물로 만들어 결국 대중의 퇴행을 초래하는 "원격 지배적" "프로그램 산업"을 말한다.  42-43


문제는 스티글레르가 텔레비전을 지나치게 중시한다는 점이다. 그는 텔레비전을 심리 기술의 거의 유일한 도구로 격상시킨다. "이제는 라디오, 인터넷, 휴대폰, 아이팟, 컴퓨터, 비디어 게임, PDA도 우리의 주의를 끌기 위해 경쟁하고 있지만, 정보의 유입 과정을 지배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텔레비전일 것이다." 텔레비전을 읽기/쓰기와 대립시키는 것은 낡은 문화 비판적 도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도식으로는 디지털 혁명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참으로 구별되는 인터넷, 소셜미디어 등의 본격 디지털 매체와 그 커뮤니케이션 구조에 대해 아무런 논의도 펼치지 않으며, 디지털 네트워크의 파놉티콘적 구조에도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는 디지털 기술에 엄청나게 의존하는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를 파악하는 데 완전히 실패하고 만다.  43-44


신자유주의 체제의 권력 기술은 푸코의 권력 분석에서 맹점으로 남아 있다. 푸코의 신자유주의적 지배 체제가 자아의 기술을 완전히 포섭했다는 것, 신자유주의적 자아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자아의 부단한 최적화가 지배와 착취의 효율적 형식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적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열정적으로 착취한다. 예술작품으로서의 자아는 아름다운, 하지만 기만적인 가상이다. 그러한 가상은 자아를 완벽하게 착취하려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의해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권력 기술은 섬세한 형식을 취한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개인을 예속시키지 않는다. 개인이 자발적인 자기 제어를 통해 지배 관계를 자신의 내면에 전사(轉寫 구를전 베낄사)하도록 유도한다. 개개인은 이렇게 내며넹 전사된 지배 관계를 자유로 해석하게 된다. 여기서 자아의 최적화와 복종, 자유와 착취는 하나가 된다. 자기 착취라는 형식으로 자유와 착취를 결합시키는 이러한 권력 기술은 푸코의 시야 너머에 있다.  44-45






힐링 혹은 킬링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점점 더 세련된 자기 착취의 형식을 고안해낸다. 수많은 자기 관리 워크숍, 모티베이션 주말 워크숍, 인성 세미나, 멘탈 트레이닝 등이 끝없는 자아 최적화와 효율성 향상을 약속한다...

자아를 최적화하라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은 시스템 내에서 완벽하게 기능하라는 명령에 지나지 않는다.  46


자아의 최적화를 추동하는 것은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이 아니다. 자아 최적화의 필요성은 시스템의 강제, 즉 양화 가능한 성공을 요구하는 시장 논리에서 유래한다.

군주의 시대는 재화와 노역을 빼앗고 가로채는 착복의 시대다. 군주의 권력은 무엇보다도 처분권과 압류권으로 나타난다. 반면 규율사회는 생산에 중점이 놓여 있다. 규율사회의 시대는 적극적인 산업적 가치 창출의 시대다. 이러한 실문 가치 창출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렸다. 오늘날의 금융자본주의에서는 심지어 가치의 극단적인 파괴가 진행되고 있다. 신자유주이 체제와 함께 소진의 시대가 개막된다. 이제는 심리가 착취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대는 우울증이나 소진증후군 같은 심리적 질병을 함께 가져온다.  47


사람의 인격을 긍정성의 강제 속에 완전히 묶어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정성이 없다면 삶은 "죽은 존재"로 쭈그러들 것이다. 부정성은 삶을 생동하게 한다. 고통은 경험의 본질적 부분을 이룬다. 삶이 순전히 긍정적 감정과 플로우(몰입) 경험만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인간적 삶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영혼에 깊은 긴장을 선사하는 것은 바로 부정성이다.  48


긍정성의 폭력은 부정성이 폭력만큼이나 파괴적이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의식(意識 뜻의 알식)산업을 활성화하며 이로써 결코 긍정 기계일 수 없는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주체는 자아 최적화의 명령, 즉 더 큰 성과를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강제 속에서 몰락해간다. 힐링은 킬링으로 귀결된다.  49-50





쇼크


전기 쇼크의 작용 방식은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기 쇼크의 효과는 심리적 내용의 마비와 제거에 있다. 부정성이 전기 쇼크의 본질적 특징이다. 반면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에서 지배적인 것은 긍정성이다. 그것은 부정적 위협 대신 긍정적 자극을 통해 작동한다. 그것은 "쓴 약"이 아니라 좋아요를 주입한다. 그것은 영혼을 충격적으로 흔들어놓고 마비시키기보다 영혼에 아첨한다. 그것은 영혼에 반대하기보다 영혼을 유혹하고 영혼에 호의를 베푼다. 그것은 영혼을 "탈주조"하기보다 영혼이 욕망하는 것, 필요로 하는 것을 세심하게 기록한다. 그것은 예측을 바탕으로 인간 행동에 선수를 친다. 그것은 행동을 가로막는 대신, 행동에 앞서 행동한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억압하기보다는 호감을 사고 욕구를 채워주려고 애쓰는 스마트 정치다.  55





친절한 빅브라더


신자유주의 체제의 권력 기술은 금지하고 방지하고 억압하기보다, 내다보고 허용하고 기획한다. 소비는 억제되지 않고 극대화된다. 결핍이 아니라 과잉, 즉 과도한 긍정성이 생성된다. 우리는 커뮤니케이션하고 소비하도록 독려받는다. 오웰의 감시국가에서도 지배적으로 작용하던 부정성의 원리는 오늘날 긍정성의 원리에 자리를 내준다. 욕구는 억압되기보다 더욱 장려되고 활성화된다. 우리는 고문과 협박으로 자백을 강요받는 대신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다 털어놓는다. 스마트폰이 고문실을 대신한다. 빅브라더는 이제 친절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빅브라더의 친절함이 감시를 대단히 효과적으로 만든다.

벤담의 빅브라더는 보이지는 않지만 수감자들의 머릿속에 편재한다. 그들은 빅브라더를 내면화한다. 반면 디지털 파놉티콘에서는 아무도 감시받거나 협박당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감시국가"라는 용어는 디지털 파놉티콘을 지칭하기에는 부적합하다. 우리는 그 속에서 자유롭다고 느낀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감정, 오웰의 감시국가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자유의 감정이야말로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디지털 파놉티콘은 수감자들의 자발적이 ㄴ자기 노출을 활용한다. 자기 착취와 자기 조명은 자유의 착취라는 점에서 동일한 논리를 따른다. 디지털 파놉티콘에는 우리에게서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정보를 강탈해가는 빅브라더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발가벗긴다.  58-59





감성 자본주의


오늘날 기업 경영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기분이 점점 더 중요해진다. 합리적 경영의 자리에 감성 경영이 들어선다. 오늘의 경영자는 합리적 행동의 원리와 결별한다. 그는 점점 더 모티베이션 트레이너를 닮아간다. 모티베이션(Motivation)은 기분(Emotion)과 결부되어 있다. 두 단어 모두 움직임(Motion)을 표현한다. 긍정적인 기분은 모티베이션의 강화를 위한 효소가 된다. 

기분은 일정한 행위를 촉발한다는 의미에서 수행적이다. 기분은 일정한 행위를 향한 경향으로서, 행위의 에너지 역학적, 감성적 토대를 이룬다. 기분은 대뇌변연계에 의해 조종된다(충동 역시 변연계에 속한다). 기분은 반성 이전의 층위, 행위하는 인간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반의식적이며 신체적이고 충동적인 층위에 속한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이러한 반성 이전의 층위에서 행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기분을 장악한다. 심리정치는 기분을 통해 인격 깊숙한 부분에까지 개입한다. 기분은 인격의 심리정치저 ㄱ조종을 위해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매체가 된다.  70





게임화 


감성 자본주의는 생산성의 증진을 위해 본래는 노동의 타자라고 할 수 있는 놀이의 영역마저 점령한다. 감성 자본주의는 삶의 세계와 노동의 세계를 게임화한다.  71


노동의 게임화는 호모 루덴스를 착취한다. 인간은 이제 놀이하는 가운데 지배의 매커니즘에 예속된다. 오늘날에는 "좋아요" "친구" "팔로워"에서 드러나듯이 사회적 커뮤티케이션도 보상 논리에 따라 게임화되어간다. 커뮤니케이션의 게임화는 커뮤니케이션의 상업화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적 커뮤니케이션의 파괴를 초래한다.  72


마르크스도 결국 노동 우선의 원칙을 고집한다. 그리하여 "자유 시간이 증가"는 "최대의 생산력"으로서 "노동의 생산력"에 역으로 긍정적 영향을 미쳐야 한다. 이로써 필연성의 왕국은 자유의 왕국을 식민화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한가로운 시간은 더 고차원적인 활동을 위한 시간으로서" 그러한 시간을 가진 사람은 그저 일만 하는 주체보다 더 많은 생산력을 지니는 "새로운 주체"로 탈바꿈한다. 자유 시간은 "개인의 완전한 발전을 위한 시간"으로서 "고정 자본의 생산"에 기여한다. 그렇게 지식은 자본이 된다. 한가로운 시간의 증가와 함께, 현대적 표현을 사용한다면, 인적 자본도 증가한다. 목적도 강제도 없는 행위를 가능케 할 한가로움은 자본에 흡수되어버린다. 마르크스는 "인간 자신이 고정 자본이 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일반적 지성"과 함께 자본으로 변신한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오직 삶이 자본이라는 새로운 초월성에서 완전히 해방될때만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의 초월성은 삶의 내재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가로막고 있다.

마르크스의 가정과는 달리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변증법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는 새로운 착취 관계 속에 얽어맨다 이제 우리는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를 넘어서 사유해야 할 것이다. 자유를, 자유로운 시간을 정말 우리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말이다. 자유로운 시간은 오직 노동의 타자만이, 생산력이 아닌 다른 힘, 어떤 노동력으로도 전환되지 않을 어떤 힘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다. 즉 생산 형식이 아닌 어떤 삶의 형식, 완전히 비생산적인 어떤 것.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생산의 피안에서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찾아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73-74


진정한 행복은 일탈과 방종함, 풍부함, 무의미함, 넘침, 잉여에 있다. 즉 필요, 노동과 성과,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 하지만 오늘날에는 과잉 자체가 자본에 흡수되어 그 해방의 잠재력을 빼앗기고 말았다. 놀이 또한 사치에 속한다. 단, 그것은 노동과 생산의 과정에서 분리된 것이어야 한다. 생산 수단으로서의 게임화는 놀이의 해방적 잠재력을 파괴한다. 놀이는 사물을 자본의 신학과 목적론에서 해방시켜 사물의 완전히 다른 쓸모를 발견하게 해준다.  75


사유에는 두 가지 형식이 있다. 노동하는 사유와 놀이하는 사유가 그것이다. 헤겔의 사유와 마르크스의 사유를 지배하는 것은 노동의 원칙이다. 하이데어의 <존재와 시간> 역시 마찬가지로 노동의 의무에 묶여 있다. "염려"와 "불안"에 빠져 있는 "현존재"는 놀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느긋함"에 바탕을 둔 놀이를 발견한다. 그는 이제 세계 자체를 놀이로 해석한다. 그는 "거의 예측하지 못했던, 이전에 숙고된 바 없는 놀이 공간의 개방성"을 탐사한다. 하이데거의 "시간-놀이-공감"은 어떤 형태의 노동과도 무관한 시간-공간을 지시한다. 그것은 예속화 수단으로서의 심리학의 완전히 극복된 사건의 공간이다.  77





빅데이터


과연 빅데이터가 인간의 행동을 감시하는 데 그치지 ㅇ낳고 그것을 심리정치적 조종의 대상으로까지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문명사회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전혀 상상치 못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하여튼 빅데이터를 통해 매우 효율적인 형태의 통제가 간으해진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당신의 고객에 대한 전방위 시선을 제공합니다." 이것은 미국 빅데이터 기업인 액시엄의 광고 문구다. 디지털 파놉티콘은 실제로 수감자에 대한 전방위 시선을 가능케 한다. 벤담의 파놉티콘은 원근법적 시점의 제약에 묶여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수감자들이 모래 자신들의 비밀스러운 소망과 생각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사각지대가 남아 있다.

디지털 감시는 시점이 없기 때문에 그토록 효율적인 것이다.  79


데이비드 브룩스는<뉴욕타임스> 칼럼엣 데이터 혁명의 도래를 선포한다. 이 새로운 신앙의 이름은 "다타이즘(Dataismus, 데이터주의)이다. "당신이 오늘날 이떤 철학이 새롭게 등장하는지 묻는다면, 나는 다타이즘이라고 대답하겠다. 우리는 이제 거대한 양의 데이터를 모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능력은 일정한 문화적 믿음을 산출하는 듯이 보인다. 이에 따르면 측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측정해야 하고, 그러한 데어터는 감정적,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걸러내는 투명하고 신뢰할 만한 렌즈이며, 우리에게 이를테면 미래를 예언하는 것 같은 놀랄 만한 능력을 준다. [...] 데이터 혁명은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는 놀라운 수단을 제공한다."

다타이즘은 2차 계몽주의의 물결과 함께 등장한다. 1차 계몽주의 때 사람들은 통계학이야말로 지식을 신화적 내용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1차 계몽주의는 통계학을 열렬히 환영했던 것이다. 볼테르는 심지어 통계학을 통해 신화에 오염되지 않은 역사가 도래하기를 간절히 소망하기까지 했다. 볼테르에 따르면, 통계학은 "시민으로서, 철학자로서 역사를 읽고자 하는 사람에게 호기심의 대상"이다. 통계학적으로 재평가된 역사는 철학적이다. "통계학의 숫자는 볼테르가 그저 이야기로서만 존재하는 모든 역사에 대해 방법론적 불신을 표명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한다. 볼테르에게 구역사의 모든 이야기는 신화적인 것의 주변을 벗어나지 못한다." 볼테르에게 통계학은 계몽주의를 의미한다. 통계학은 신화적 이야기에 맞서서 숫자로 증명된, 숫자에서 나오는 객관적 지식을 내세운다. 

투명성은 2차 계몽주의의 구호다. 데이터는 투명한 매체다. <뉴욕타임스> 칼럼에도 씌어 있듯이 데어터는 "투명하고 신뢰할 만한 렌즈"인 것이다. 2차 계몽주의의 명령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이 데이터와 정보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데어터 전체주의, 데이터 물신주의가 2차 계몽주의의 영혼을 이룬다. 모든 이데올로기를 과거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고 믿는 다타이즘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다. 다타이즘은 디지털 전체주의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디지털 계몽주의가 노예제로 역전될 것임을 깨우쳐줄 3차 계몽주의가 필요하다. 

빅데이터가 지식을 주관적 자의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라고들 한다.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직관은 고차원적인 지식의 형식이 되지 못한다. 직관은 그저 주관적인 것, 객관적 데이터 부족을 만회하기 위한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복잡한 상황에서 직관은 맹목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론조차 이데올로기의 혐의에 빠진다. 데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이론은 불필요하다. 2차 계몽주의는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지식의 시대다. 크리스 앤더슨은 예언자적 수사법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언어학엣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인간 행동에 관한 모든 이론은 과거지사가 되었다. 분류법도, 존재론도, 심리학도 모두 잊어라. 왜 인간이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는지 대체 그 누가 말해줄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저 그렇게 행동할 뿐이고, 우리는 유례없이 정확하게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아내고 측량할 수 있게 되었다.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1차 계몽주의의 매체는 이성이다. 이때는 이성의 이름으로 상상력, 육체성, 욕망이 억압되었다. 계몽주의의 치명적인 변증법은 계몽주의를 야만으로 역전시킨다.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변증법이 정보와 데어터와 투명성을 바탕으로 하는 2차 계몽주의 역시 위협하고 있다 2차 계몽주의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계몽주의의 변증법은 신화를 파괴하기 위해 등장한 계몽주의가 한 걸음씩 전진할 때마다 스스로 신화 속에 얽혀든다는 데 있다. "거짓된 명확성은 신화의 또 다른 표현일 따름이다." 아도르노라면 아마도 투명성 역시 신화의 또 다른 표현이며, 다타이즘은 거짓도니 명확성을 약속할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동일한 변증법에 의해 이데올로기에 반기를 든 2차 계몽주의 또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데어터 야만주의로 돌변하게 될 것이다.

다타이즘은 디지털 다다이즘(digitaler Dadaismus)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다다이즘 역시 의미 맥락을 포기한다. 언어는 그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다. "삶의 사건들은 시작도 끝도 없다. 모든 것이 대단히 어리석은 방식으로 흘러간다. 따라서 모든 것은 동일하다. 그 단순함을 다다라고 한다." 다다이즘은 허무주의다. 다다이즘은 의미를 완전히 포기한다. 데어터와 수치는 그저 더해져갈 뿐, 아무런 서사도 지니지 않는다. 반면 의미는 서사를 바탕으로 한다. 서사의 부재로 인한 의미의 공허는 그저 데어터로 채워질 뿐이다. 

오늘날 수치와 데어터는 절대화되는 데 그치지 않고 섹슈얼하고 물신적인 성격까지 지니게 되었다. 예컨대 "양화된 자아"는 그야말로 리비도적 에너지로 작동한다. 다타이즘은 전반적으로 리비도적인, 심지어 포르노적이기까지 한 특성을 타나낸다. 다타이스트들은 데어터와 성교한다. 그래서 요즘에는 "데어터 성애자"에 대한 얘기도 종종 들을 수 있다. 데어터 성애자들은 "철두철미하게 디지털"하다고 한다. 그들은 데어터를 "섹시"하다고 느낀다. 디기투스(손가락)는 팔루스(남근)에 가까워진다.  80-84


수치는 자아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한다.  85


오늘날 우리가 하는 모든 클릭, 우리가 입력하는 모든 검색어는 저장된다. 웹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보는 관찰되고 기록된다. 우리의 삶은 디지털 망에 완벽하게 모사된다. 우리의 디지털 습관은 우리의 인격, 우리의 영혼을 매우 정확하게 재현한다. 디지털 습관을 통한 재현은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보다 더 정확하고 완벽할지도 모른다.  87


벤담의 파놉티콘에는 효율적인 기록 시스템이 없다. 다만 집행된 형벌과 그 이유를 적어둔 "조치 대장"이 있을 뿐이다. 수감자의 삶은 기록되지 않는다. 감시하는 빅브라더는 어차피 수감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소망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건망증이 심한 빅브라더와는 반대로 빅데이터는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이미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디지털 파놉티콘은 벤담의 파놉티콘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88


규율사회의 생정치를 실현하는 수단의 하나인 인구조사는 인구통계학적으로 의미 잇는 자료를 제공하지만, 심리학적으로 활용 가능한 자료를 생산하지는 못한다. 생정치에서 심리에 대한 섬세한 개입은 불가능하다. 반면 디지털 심리정치는 심리적 과정에 선제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자유 의지보다 더 빠를지도 모른다. 디지털 심리정치는 자유 의지를 추월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자유는 종언을 고할 것이다.  89


빅데이터를 통해 우리는 어쩌면 우리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소망을 읽어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특정한 상황에서 의식조차 되지 않는 모종의 애착을 발전시킨다. 우리는 심지어 왜 갑자기 특정한 욕구를 느끼는지조차 알지 못할 때도 많다. 임신부가 특정 임신 주차에 어떤 물건에 대한 욕망을 가지게 된다면, 이때 임신 상태와 욕망 사이에는 일정한 연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녀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저 그 물건을 구입할 뿐, 그것을 왜 사는지는 모른다. 그냥 그럴 뿐이다.그냥 그럴 뿐이라는 것, 이는 아마도 의식적 자아에 잡히지 않는 프로이트의 이드와 심리적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빅데이터는 이드를 심리정치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에고로 만들어준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만일 빅데이터가 우리의 행동과 소망의 배후에 있는 무의식이 왕국으로 입장하게 해준다면, 우리의 심리 속으로 깊숙히 파고들어가 이를 착취하는 심리정치도 충분히 가능해질 것이다.  90


오늘날 빅데이터는 빅브라더의 모습으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빅데이터는 빅딜(Big Deal)이기도 하다. 빅데이터는 무엇보다 큰 장사다. 개인 관련 데이터는 남김없이 상품화되어 금전적 거래의 대상이 된다. 오늘날 인간은 경제적 이익을위해 이용할 수 있는 데이터 패키지로 다루어지고 거래도니다. 인간 자신이 상품으로 전락한다 빅브라더와 빅딜은 동맹을 맺는다. 감시국가와 시장은 하나가 된다.

데이터 회사인 액시엄은 약 3억 명에 이르는 미국인의 개인 정보를 가지고 장사를 한다. 그러니 사실상 거의 모든 미국인의 개인 정보가 액시엄의 소유 아래 있는 것이다. 액시엄은 이제 미국인에 대해 FBI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액시엄은 70개의 범주로 나눈다. 액시엄의 카탈로그에 인간은 70개 종류의 상품으로 제시되어 있다. 필요에 따라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여기서 경제적 가치가 낮은 사람은 "웨이스트(waste)" 즉 "쓰레기"로 지칭된다. 시장 가치가 비교적 높은 소비자는 "슈팅 스타(shooting star)" 그룹에 들어 있다. 나이는 36세에서 45세로 활동적이고, 아침 일찍 일어나 조깅을 하며, 아이는 없으나 기혼이고, 여해을 즐기며 시트콤 <사인필드>를 시청한다.

빅데이터는 새로운 디지털 계급사회를 만들어낸다. "쓰레기"로 분류된 사람은 최하층 계급에 속한다. 점수가 낮은 사람은 신용대출을 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파놉티콘과 나란히 "바놉티콘"이 수립된다. 파놉티콘이 시스템에 갇힌 수감자를 감시한다면, 바놉티콘은 시스템에서 떨어져 있거나 시스템에 대해 적대적인 자들을 불청객으로 낙인찍고 배제하는 기구다. 고전적인 파놉티콘이 훈육의 기능을 수행한다면, 바놉티콘은 시스템의 안전과 효율을 보장한다. 

디지털 바놉티콘은 경제적으로 무가치한 인간을 쓰레기로 낙인찍는다. 쓰레기는 치워버려야 하는 대상이다. "그들은 모두 잉여입니다. 인간 폐품, 사회에서 버려진 자들이죠. 한마디로 쓰레기라는 겁니다. '쓰레기'란 쓸모없음의 화신입니다. 어떻게 해도 결코 쓸모 있게 될 수 없는 모든 것이 '쓰레기더미'에 속합니다. 실제로 쓰레기가 수행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역할은 오직 유용하게 활용할 수도 있었을 공간을 더럽히고 막아버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바놉티콘의 궁극적 목적은 쓰레기가 '가치 있는' 생산물과 분리되어, 쓰레기 처리장으로 보내질 수 있도록 확실히 치워두는 데 있는 것입니다."  92-94


빅데이터는 매우 파편적인 지식만을 제공할 뿐이다. 빅데이터가 보여주는 상관관계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한다. 빅데이터에는 개념도 없고 정신도 엊ㅅ다. 빅데이터가 약속하는 절대지는 절대무지와 다름이 없다.

개념은 자신의 계기들을 자기 경계 내에 거두어들디고, 포함시키는 하나의 통일체다. 개념은 속에 모든 것이 완전히 포함되어 있는 결론의 형식을 취한다("모든 것은 결론이다"라는 말은 "모든 것은 개념이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절대지는 절대적 결론이다. "절대적인 것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절대적인 것은 결론이다." 계속 덧붙여가는 것만으로 결론에 이를 수는 없다. 결론은 덧붙이기가 아니라 이야기다. 절대적 결론이란 그 뒤에 덧붙이기를 허용하지 않는 어떤 것이다. 이야기로서의 결론은 덧붙이기의 반대 형상이다. 순수한 덧붙이기로 이루어지는 빅데이터는 결코 결론이나 완결에 이르지 못한다. 빅데이터가 생성시키는 상관관계나 덧붙이기와는 반대로 이론은 서사적 지의 형식을 취한다.

정신은 하나의 결론, 즉 부분들이 지양되어 의미 있게 담겨 있는 전체다. 전체는 결론의 형식이다. 정신이 없다면 세계는 단순히 덧붙여진 것들의 더미로 해체되고 말 것이다. 정신은 자기 안에 모든 것을 모아들이는 세계의 내면, 세계의 총화를 이룬다. 이론 역시 부분들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거두어들이는 하나의 결론이다. 크리스 앤더슨이 선포한 "이론의 종말"은 결국 정신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빅데이터는 정신을 완전히 불구로 만든다. 순수하게 데이터의 힘으로 추진되는 인문과학은 더 이상 인문과학이 아니다. 총체적인 데이터 지식은 정신의 원점에 놓여 있는 절대적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98-100


모든 이성적인 것이 결론이라면, 빅데이터의 시대는 이성이 없는 시대인 셈이다.  101


17세기에 통계학적 방법이 발명되었을 때 과학자도, 도박사도, 시인도, 철학자도 모두 이 새로운 방법 앞에서 숨이 멎을 정도로 흥분했다. 그들은 새로 발견된 통계적 확률과 규칙성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이러한 당시의 환희는 오늘날 빅데이터에 대한 반응과 충분히 비교할 만하다. 통계학은 세계의 우연성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신의 섭리에 대한 믿음을 되돌려주었다. 예컨대 18세기에 존 아버스넛이 쓴 논문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신의 섭리에 대한 증명. 영국에서 관찰된 출생 성비의 규칙성을 근거오." 신생아 가운데 남아가 여아보다 많다는 통계학적 조사 결과 앞에서 철학자들은 신의 섭리를 확인했다고 믿었고, 이를 근거로 전쟁을 정당화하기까지 했다.

칸트 역시 법칙성을 드러내는 통계적 계산에 매혹되어 이를 자신의 목적론적 역사관 속에 편입시킨다. 그는 한편으로 자유 의지를 가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의지의 자유에 한계를 설정하기도 한다. 그에 따르면 자유 의지의 현상 형태인 인간의 행동 역시 다른 모든 자연적 사실과 마찬가지로 일반적 자연 법칙에 의해 규정된다. 그래서 인간 의지의 자유가 행하는 놀이를 "거시적으로" 관찰해보면 어떤 법칙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개별 주체들의 행동이 아무리 불규칙적인 것처럼 보인다 해도, 인류 전체로 볼 때는 "원초적인 성향들이 비록 느리기는 하지만 꾸준하게 계속 발전해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어서 칸트는 통계 수치에 관해 이야기한다. "따라서 결혼, 이에 따른 출산, 죽음은 여기에 인간의 자유 의지가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치는 까닭에 계산을 통해 그 수를 예측할 수 있게 해줄 어떤 규칙도 성립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큰 나라들에게 나오는 연간 통계표는 그러한 일들도 변함없는 자연 법칙에 따라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치 하루하루 변화해가는 날씨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렇게 변화무쌍한 날씨도 전체적으로는 식물의 생장, 강물의 흐름, 기타 자연 현상들이 항상적이고 중단 없이 계속되도록 유지하는 데 부족함이 없듯이 말이다. 개개인들, 심지어 만방의 민족들초자 각자 자기 원하는 대로, 때때로 다른 이들의 의지에 반하여 자기 자신의 의도를 추구하지만, 실은 그들도 무의식적으로 그들 자신은 알지 못하는 자연의 의도가 읶는 대로 나아가고 자연이 조장하는 대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1차 계몽주의는 근본적으로 통계학적 지식에 대한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 루소의 "일반 의지" 역시 통계학적-수학적 연산의 결과다. 일반 의지의 형성에는 어떤 소통의 과정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통계학적 중간값에서 나온다. "전체 의지와 일반 의지 사이에는 종종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일반 의지가 오직 공동의 이익만을 지향하는 데 반해, 전체 의지는 사적 이익을 따르며 다수의 특수한 의지들이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특수한 의지들 가운데 일단 지나친 부분과 모자라는 부분이 서로를 상쇄하고 나면 차이들의 총합으로서 일반 의지가 남는다."

루소는 일반 의지의 확립이 커뮤니케이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것, 심지어 커뮤니케이션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적을 강조한다. 커뮤티케이션은 통계학적 객관성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소는 정당과 정치단체의 결성을 금지한다. 루소의 민주주의는 토론과 커뮤니케이션이 없는 민주주의다. 이러한 통계학적 방법은 다중과 진리의 종합을 수립한다. 루소는 무엇으로 좋은 정부인지를 알아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답하면서 생정치적 입장을 표명한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도덕적 접근을 회피한다. 정치적 공동체의 목적은 오직 그 구성원들의 생존과 안녕뿐이다. 그리고 이 목적이 달성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신호는 인구 증가다. 통치 기간 동안 국민의 수가 "계속해서 증가"한다면, 그 정부야말로 이론의 여지 없는 최상의 정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루소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통계학자들이여! 이제 그대들 차례다. 세고, 재로, 비교하라."

오늘날 일고 있는 빅데이터에 대한 열광은 통계학에 대한 18세기의 열광과 대단히 흡사하다. 통계학은 아마도 18세기의 빅데이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아 잦아들었으니, 통계학적 이성은 곧 낭만주의 운동과 같은 저항에 부딪혔던 것이다. 평균적인 것, 범상한 것에 대한 혐오는 낭만주의의 근본 정서에 속한다. 낭만주의는 통계학적 개연성의 대립항으로서 독특한 것, 비개연적인 것, 돌연한 것을 내세우며, 통계학적 정상성보다는 별난 것, 비정상적인 것, 극단적인 것을 양성한다. 통계학적 이성에 대한 혐오는 니체에게서도 나타난다. "통계학은 역사에 법칙이 있음을 증명한다. 그렇다. 통계학은 군중이 얼마나 구역질 날 정도로 천박하게 획일적인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너희가 통계학을 한 번 아테네에 적용해봤다면! 그랬다면 차이를 느낄 수 있었으리라! 군중이 저급하고 몰개성적일수록 통계 법칙은 더 엄격하게 관철된다. 군중이 더 고귀하고 뛰어난 사람들로 이루어졌다면, 법칙은 당장 끝장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저 꼭대기로 가서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에 이르면, 너희는 더 이상 계산조차 할 수 없으리라. 위대한 예술가들은 언제 결혼했을까! 이에 관한 법칙을 찾으려 하다니, 그 무슨 헛수고란 말이냐! 그러니 역사에 법칙이 있다 한들, 그런 법칙이란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고, 그런 역사, 즉 법칙에 따라 일어난 일이라는 것도 무가치한 것이다." 통계학은 "역사의 무대 위에서 행동하는 위대한 인물들 대신 엑스트라들만을" 고려할 따름이다. 니체는 "거대한 군중의 움직임을 중요하고 주된 것으로 취급하고 모든 위대한 인물들을 단순히 그것의 가장 뚜렷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거대한 물결 위로 드러나 있는 작은 물방울 정도로 이해하는" 모든 역사 서술에 대해 반대한다.

니체에게 통계 수치는 그저 인간이 무리 짓는 짐승이라는 것, "점점  더 인간이 똑같아진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이러한 획일화는 오늘의 투명사회, 정보사회의 특징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즉시 드러난다면, 일탈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투명성으로부터 타자, 낯선 것, 불일치를 제거하는 순응의 압력이 발생한다. 빅데이터는 무엇보다도 집단적 행동 패턴을 가시화한다. 다타이즘 자체가 동일화의 증대 경향을 강화한다. 데어터 마이닝은 기본적으로 통계학과 다르지 않다. 데이터 마이닝이 드러내는 상관관계는 통계적 개연성의 표현이다. 그것은 통계적 평균치를 계산해낸다. 따라서 빅데어터는 유일무이한 것에 접근하지 못한다. 빅데이터는 사건을 보지 못한다. 역사를, 인류의 미래를 규정하는 것은 통계적 개연성이 아니라 개연적이지 않은 것, 유일한 것, 사건이다. 따라서 빅데이터는 미래도 보지 못한다.  101-107





주체를 넘어서


니체에 따르면 인간의 "자연화"에는 "절대적으로 갑작스러운 것과 파괴적인 것에 대한 각오"가 포함된다. 지금가지 통용되던 것,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사건은 자연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예측할 수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그것은 모든 계산과 예상을 벗어난다. 이로부터 한마디로 완전히 새로운 상태가 시작된다. 사건은 어떤 외부적인 요소를 판 안으로 끌어들여, 주체를 열어젖히고 예속 상태에서 해방시킨다. 사건은 새로운 자유 공간을 여는 단절과 불연속성을 의미한다.  108


사건은 전환이다. 전환을 통해서 전도, 지배 권력의 전복이 이루어진다. 사건은 이전 상태에는 전혀 없던 무언가가 일어나게 한다.  109


체험과 반대로 경험은 비연속성을 바탕으로 한다. 경험은 변신을 의미한다. 어느 대담에서 푸코는 니체, 블랑쇼, 바타유가 말하는 경험이란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떼어내어 주체가 더 이상 주체 자신이 아니게 되거나, 주체가 자신의 파괴 또는 해체로 내몰릴 지경에 이르게" 하는 어떤 것이라고 지적한다.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은 주체를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다. 경험은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가 주체를 예속 상태 속에 더 깊이 빠뜨리기 위해 이용하는 체험 또는 기분과 정반대다.

푸코가 말하는 삶의 기술은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을 낳는 자유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탈심리화의 과정 속에서 완성된다. "삶의 기술이란 심리학을 죽이는 것, 자발적으로, 또한 다른 개체들과도 어울리며, 아무 이름도 없는 존재, 관계, 특성 들을 생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이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삶의 기술은 예속화를 위해 동원되는 "심리학적 테러"에 반항한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심리학적 프로그래밍과 제어를 통해 지배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지속시키는 통치술이다. 따라서 자유의실천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의 기술은 탈심리학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의 기술은 예속화의 매체인 심리정치를 무장해제시킨다. 주체는 탈심리화되고, 비워진다. 이로써 아직 이름이 없는 삶의 형식을 위한 자유가 생겨난다.  109-110





백치


1980년 스피노자 강의에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말씀드립니다. 그들은 바보 노릇을 합니다. 바보 노릇하기. 바보 노릇하기는 언제나 철학의 기능이었습니다." 철학의 기능은 바보 노릇하기에 있다. 철학은 처음부터 바보짓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새로운 표현 방식, 새로운 언어, 새로운 사유를 창조하는 모든 철학자는 본래 바보였음이 틀림없다. 오직 바보만이 완전히 다른 것에 접근할 수 있다. 백치 상태 속에서 사유는 모든 예속화와 심리화에서 이탈하는 사건과 유일무이한 것으로 이루어진 내재성의 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

철학사는 바보짓의 역사다. 자기가 모른다는 것만을 아는 소크라테스는 바보다. 모든 것을 회의하는 데카르트 역시 바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바보 같은 말이다. 사유의 내적 수축은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한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데, 이는 곧 생각을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감으로써 처녀 상태를 회복한다. 들뢰즈는 데카르트적 바보의 맞은편에 다른 유형의 바보를 내세운다. "예전의 바보는 명증성을 원했고, 거기에 자기 스스로 도달하려 했다. [...] 새로운 바보는 도대체 어떤 명증성도 원하지 않으며, [...] 부조리한 것을 원한다. 이것은 생각에 대한 완전히 다른 이미지다. 예전의 바보는 진리를, 새로운 바보는 부조리를 생각의 최고 권능으로 끌어올린다."  111-112


커뮤니케이션과 순응의 압박 앞에서 바보짓은 자유의 실천을 의미한다. 본질적으로 바보는 묶여 있지 않은 자, 네트워크에 낚이지 않은 자, 정보가 없는 자다. 그는 모든 커뮤니케이션과 네트워크에서 벗어나 있는, 어떤 상상을 초월하는 외부 공간에 거주한다. "바보는 목적 지향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소용돌이 속에서 마치 떨어진 한 송이 장미처럼 빙빙 맴돌고 있다. 합의하는 인간들, 놀라운 의견일치의 공동체에 속한 자들 사이에여."

바보는 현대의 이단아다. 이단은 본래 선택을 의미한다. 즉 이단아는 자유로운 선택권을 쥐고 있는 자다. 그는 정통에서 이탈할 용기가 있다. 그는 순응의 압박을 용감하게 떨쳐버린다. 이단아로서의 바보는 합의의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형상이다. 그는 아웃사이더의 마력을 보존한다. 순응의 압박이 점점 더 강화되어가는 오늘날, 이단적 의식의 날을 벼려야 할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다. 

바보짓은 신자유주의적 지배 권력과 그것이 강제하는 총체적 커뮤니케이션과 총체적 감시에 반기를 든다. 바보는 '소통하지' 않는다. 바보는 소통 불가능한 것으로 소통한다. 그는 침무그이 장막 속으로 들어간다. 바보짓을 통해 침묵과 고요, 고독이 있는 자유로운 공간, 정말 말해질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들뢰즈는 이미 1995년에 이러한 침묵의 정치를 선언했다. 그것은 곧 커뮤니케이션과 의사 표현을 강요하다시피 하는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에 대한 반대 선언이다. "오늘날의 난관은 더 이상 우리가 자유롭게 말할 수 없다는 데 있지 않다. 우리가 뭔가 말할 것을 찾을 수 있는 자유로운 고독과 침묵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이제 억압적 세력은 더이상 우리의 의견 표명을 막지 않으며, 오히려 의견을 말하도록 강제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한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대단한 해방인가! 우리는 그럴 때만 점점 더 희귀해지는 어떤 것, 그러느까 과연 말해질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창조해낼 수 있게 되리라."

지혜로운 바보는 완전히 다른 지식에 접근할 수 있다. 그는 수평적인 차원을 넘어, 단순히 정보화되고 네트워크화되어 있는 상태를 넘어, 더 고차원적 영역으로 상승한다. "애초에 자폐증 환자를 의미하는 말이었던 '지혜로운 바보'는 그 개념적 의미를 덜어내고 어쩌면 그저 끼리끼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 모험가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바보짓은 순결한 공간, 사유가 완전히 새로운 언어에 이르기 위해 필요로 하는 저 먼 곳을 열어준다. 지혜로운 바보는 등주 고행승(기둥 위에서 금욕 생활을 실천하는 동방교회의 수도승-옮긴이)처럼 먼 곳을 보고 산다.수직적 긴장이 그를 더 고차원적인 합일에 이를 수 있게 해준다. 그리하여 그는 사건들, 미래에서 온 신호를 예민하게 수신한다. "등주 고행승, 안테나. 어마어마한 방송의 전파가 성자의 입에서 울려나오게 하는 것과 동일한 소리가, 바보가 세계의 약한 신호를 수신하는 순간 울려나온다."  113-116


들뢰즈는 마지막 글인 <내재성: 하나의 삶...>에서 내재성을 행복의 공식으로 끌어올린다. "우리는 순수한 내재성이란 하나의 삶이며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삶 속의 내재성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어떤 것 속에도 있지 않은 내재적인 것으로서, 그 자체가 하나의 삶이다. 하나의 삶은 내재성의 내재성, 절대적 내재성이다. 즉 그것은 온전한 능력, 완전한 행복이다." 내재성은 어떤 다른 것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에만 내재하기 때문에 "그 어떤 것 속에도 있지 않은" 내재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내재성의 내재성"이다. 그것은 그 무엇에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그 스스로 자족적이다. 삶의 이러한 내재적 차원에서는 어떤 지배 질서도 수립될 수 없다. 자본은 삶을 삶 자체에서 소외시키는 초월성으로 나타난다. 삶의 내재성은 이러한 소외 관계를 폐기한다. 

순수한 내재성은 심리화되지도, 예속화되지도 않는 공허다. 내재적 삶은 비어 있는 만큼 더 가볍고, 더 풍부하고, 더 자유롭다. 개별성이나 주체성이 아니라 독특함, 특이성이 바보의 본질이다. 그래서 바보는 아직 개인도, 인격도 아닌 아기들과 근본적으로 닮았다. 개인적 속성이 아니라 비인격적 사건이 아기들의 존재를 이루는 핵심이다. "그래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들은 비슷비슷하고 개성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 하지만 특이성은 있다. 미소, 몸짓, 찡그림, 이는 어떤 주체적 특질이 아닌 사건들이다. 아기들은 내재적 삶으로 충만하다. 그러한 삶은 순수한 능력이며 심지어 고통과 무상함을 훌쩍 뛰어넘는다." 바보는 "그 누구와도 혼동되지 않지만 더 이상 이름이 없는" "호모 탄툼(Homotantum, 특성 없는 인간)" 을 닮았다. 바보가 들어갈 수 있는 내재성의 층위는 탈예속화와 탈심리화의 매트릭스다. 그것은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해방시켜 "저 측량할 수 없는 텅 빈 시간 속으로" 보내는 부정성이다. 바보는 주체가 아니다. "차라리 꽃의 실존. 빛을 향한 단순한 트임."  117-118





옮긴이 후기

자유의 그물을 넘어서 - 한병철의 <심리정치>에 부쳐, 김태환


자본주의 체제에서 진행되는 억압적 권력의 약화와 사회적 자유의 확대 현상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자본주의 체제와 질서 자체가 혁명에 의해 전복될 위험이 줄어들고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마치 너무나 당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연의 질서처럼 여겨지게 되면서, 이른바 불온한 세력에 대한 폭력적 억압과 배제의 필요성도 사라진다. 자본주의적 질서에서 불변의 철칙이 있다면, 돈이 없는 자는 돈이 있는 자에 비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는 경우(또한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관습과 제도와 법에 따른 부자유, 즉 사회적 부자유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전복을 추구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무산자의 부자유를 노예나 농노의 부자유와 마찬가지로 지배 계급으 부당한 폭력에 따른 사회적 부자유로 규정하고, 전근대적 신분제가 사회 혁명을 통해 철폐되었듯이 무산자 역시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실제 마르크스주의 혁명을 통해 성립한 공산주의 체제는 자본주의 질서의 근본 원칙을 철폐함으로써 유산자에게서 자유를 박탈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무산자를 해방시킨다는 목표에는 접근도 해보지 못한채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보다더 큰 정치적 억압과 강제를 낳으며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그 사이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들은 돈과 시장의 질서를 완벽하게 자연화하는 데 성공한다.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자본주의 질서 너머의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은 현실적 기반을 상실했고, 돈 없는 자가 감수해야 하는 사회적 부자유는 자연이 인간에게 부과한 부자유보다도 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자연적 부자유 상태는 때로 기술 혁신을 통해 해소되기도 하지만, 돈 없는 자를 부자유 상태에서 해방시켜줄 기술 혁신은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그런 마법과 같은 기술이 존재한다면 이는 곧 자본주의의 종말을 의미할 것이다. 돈으로 인해 생겨나는 부자유는 오직 돈을 통해서만, 즉 자본주의의 논리 자체를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 무산자의 부자유가 움직일 수 없는 자연적 질서로 고착화되고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이 질서를 철혜할 가능성을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국가가 자본주의 체제의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강제와 폭력을 행사하는 억압적 권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필요성은 거의 사라진다. 국가는 그저 "공공의 안녕"을 유지하는 데 전념하기만 하면 된다. 내가 돈으로 인해 느끼는 부자유는 숙명적이고 자연적인 삶의 조건이 되었고, 그것의 바탕에 놓인 질서는 나를 포함하여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드이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자본주의적 질서에 따른 사회적 부자유가 기술적 불가능성보다도 더 견고한 자연적인 불가능성으로 간주되는 세계, 그 결과로 권력의 노골적인 통제와 강압이 사라져버린 세계, 그것은 바로 한병철이 말하는 '자유'의 감정이 생겨날 수 있는 토양이 된다.

둘째, 20세기 후기자본주의 체제에서 일어난 현저한 변화, 즉 금지하고 규제하는 경직되고 억압적인 권력에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자유와 가능성을 허용하는 친절하고 유연하며 방임적인 권력으로의 이행은 자본의 이해관계와 일치한다. 자본의 관점에서 볼 때, 금지와 규제의 해제를 통한 자유의 확대는 기술 혁신에 의한 새로운 가능성의 생성과 마찬가지로 이윤 창출의 기회를 증대시킨다. 자본주의적 생산을 위해 처음으로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져야 하던 시대, 인간의 필수적인 욕구에 부응하는 정도의 생산만으로도 산업의 성장이 가능하던 시대에는 당연히 근면이나 절약과 같은 금욕주의적 덕목이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으로 간주되었다. 자본주의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방종한 욕망과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태도는 배격되어야 했다. 하지만 전통적인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고 축적된 자본이 이윤을 얻을 수 잇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욕망의 통제는 더 이상 자본주의 경제와 양립하기 어렵게 도니다. 살마들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어야 자본이 투자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이 생긴다. 어떤 도덕이나 종교, 혹은 다른 이념에 사로잡혀 사람들의 욕망을 억압하고 금욕을 강요하는 정치권력이나 사회적 권위는 후기자본주의 체제에 맞지 않는다. 자본은 방임적 권력을 필요로 한다. 이런 면에서 억압적 권력의 약화와 사회적 자유화는 자본의 이해관계가 관철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33-137


자본은 '너는 이것을 할 수 있어'라고 말하며 현란한 가능성들을 펼쳐 보인다.  141


자유의 예속성이라는 역설은 다음 세 가지 측면을 지닌다. 첫째, 우리는 이러한 자유에 대해 주체적인 관계에 있지 못하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내가 선택하고 창조한 가능성이 아니라 자본이 착취를 위해 선별하고 생산한 자유, 자본이 미리 구성해서 제공하는 레디메이드 옵션일 뿐이다. 우리의 모든 욕망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착취 가능한 욕망, 상품화될 수 있는 욕망에만 자유가 주어진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전 존재가 관련되어 있는 실존적 자유와 거리가 멀다. 둘째, 자본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 자본에 의존하게 된다. 자본이 아니라면 우리는 자본이 가능하게 해준 자유로운 삶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유를 자본에 의존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자본에 순응하게 된다. 셋째, 자본이 제공하는 자유는 상품의 형태를 취한다. 따라서 우리는 돈을 주고 자유를 사야 한다. 애플은 공짜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어지는 다채로운 자유의 옵션들을 충분히 누리기 위해서는 많은 돈을 자본에 갖다 바쳐야 한다. 자본은 자유를 위해 돈을 지불하도록 유혹하고, 우리는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일함으로써 다시 자본에 봉사한다. 더 많은 성과는 더 많은 돈을, 더 많은 돈은 더 많은 자유를 약속한다. 우리는 자본이 약속하는 자유를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최대한 착취한다. 자유를 위해 자유를 희생시키는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의 시대는 자본에게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자유를 생산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을 제공한다. 빅데이터가 그것이다. 빅데이터는 우리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습관과 행동 패턴, 우리의 무의식적 욕망까지 읽어낸다. 빅데이터를 통해 자본은 우리에게 '무얼 드릴까요?'라고 물어보지도 않고 우리가 원할 것이라고 예상되는 옵션들을 눈앞에 제시해준다. 이제 우리는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스스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자본이 그것을 대신 생각해준다. 우리의 내밀한 소망을 파악한 자본의 유혹은 더욱 강력해지고, 우리는 꼭두각시처럼 자본의 암시에 따라 조종당할 위험에 처한다. 자본은 명령이나 강압을 통해서 조종하지 않는다. 자본은 다만 할 수 있는 자유를 줌으로써 하게 만들 뿐이다. 뭔가를 할 수 있게 했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실제로 할 확률이 100%라면, 자본의 조종은 완벽하게 성공한 셈이다. 완벽한 유혹, 빅데이터는 자본에게 완벽한 유혹의 방법을 안내한다.  141-143


한병철은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라는 제니 홀저의 말을 <심리정치>의 모토로 삼는다. 제니 홀저는 자기 자신의 소원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한다. 그것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와는 다른 차원의 자유를 암시한다. 오늘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는 대단히 수상쩍은 것이 되었다. 우리는 자본이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하고 싶어 하게 되었고, 이로써 우리의 소원은 자본의 인질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화에서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보다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이 자유의 실천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제니 홀저의 경구에서 타자에게 붙들려 낯설게 되어버린 자아의 소원은 자아를 공격하는 적으로 나타난다. 자아를 지켜달라는 호소문의 형식은, 자신의 소원과 자유에서 자유로워지고자하는 자아의 욕망과 동시에 스스로 자아를 지킬 수 없다는 무기력감을 동시에 표현한다.

한병철은 우리의 소원, 우리의 마음 자체가 자본의 인질로 붙들려 착취의 대상이 된 심리정치의 시대에 내면을 비우고 백치 상태에 이를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면이 없는 바보는 자본이 만들어놓은 자유의 그물 속에 얽혀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함부로 가로질러간다. 지폐 뭉치를 가지고 놀다가 찢어버린 그리스의 아이들이 그런 바보다. 돈은 바로 자본이 제공하는 모든 자유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돈을 찢어버린 그리스 아이들 같은 바보가 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자본이 제공하는 자유의 그물 너머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형식의 자유에 이를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자본에 너무나 깊이 길들여져 있고, 자본이 제공하는 레디메이드 자유의 촘촘한 그물 속에 잘 적응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자본주의 자본이 확장해가는 새로운 가능성에 열광적으로 달려들기 전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이 추진해가는 선택적 자유화의 과정에서 선택되지 않은 자유의 가능성에 대해, 자본이 결코 착취할 수 없는 자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힘을. 한병철은 말한다. "바로 사유야말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144-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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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사랑의 재발명(알랭 바디우)


진정한 사랑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있는 적은 대체 누구인가? 물론, 현대 사회의 개인주의, 모든 것을 시장 가격으로 환산하려는 태도, 오늘날 개인의 행동을 조종하는 이해관계의 차원 등등이다.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사실상 현대 세계, 세속화된 자본주의 세계의 이 모든 규범에 반항한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결코 그저 두 개인 사이의 기분 좋은 동거를 목적으로 하는 계약이 아니라, 타자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인 경험이며, 아마도 현 시점에서 사랑 외에는 그런 경험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5-6


이 책은 진정한 사랑의 최소 조건, 즉 사랑을 위해서는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데 대한 철두철미한 논증인 동시에, 전적으로 안락하모가 나르시시즘적 만족 외에는 관심이 없는 오늘의 세계에서 에로스의 싹을 짓누르고 있는 온갖 함정과 위협 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6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사랑의 경험은 불능에 의해 만들어지며, 불능은 타자의 완전한 현형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인 것이다.  8





멜랑콜리아


타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사실 극적인 변화이지만, 치명적이게도 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이 진행중이라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18


우리는 끊임없이 모든 것을 모든 것과 비교하며 이로써 모든 것을 동일자로 평준화한다. 타자의 부정성은 소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비사회는 아토포스(atopos : 장소가 없는 무소(無所 없을무 바소)적인)적인 타자성을 제거하고 이를 소비 가능한, 헤테로토피아적 차이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애가 아니다. 자기애를 지닌 주체는 자기 자신을 위해 타자를 배제하는 부정적 경계선을 긋는다. 반면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명확한 자신의 경계를 확정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르시시즘적 주체와 타자 사이의 경계는 흐릿해진다. 그에게 세계는 그저 자기 자신의 그림자로 나타날 뿐이다. 그는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인정할 줄 모른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경우에만 의미가 존재한다고 느낀다...

우울증은 나르시시즘적 질병이다.  19-20





할 수 있을 수 없음


성과사회는 금지 명령을 발하고 당위('해야 한다')를 동원하는 규율사회와 반대로 전적으로 '할 수있다'라는 조동사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착취를 위해서는 동기 부여, 자발성, 자기 주도적 프로젝트를 부르짖는 것이 채찍이나 명령보다 더 효과적이다.  29


푸코(Michel Foucault) 역시 신자유주의적인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규율사회에 살고 있지 않으며 자기 자신이 경영자로서 더 이상 복종적 주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정말로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것, 자기 자신을 찾취하면서 자유롭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신자유주의적 자유의 구호를 자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자유로 해석한다. "나는 당신에게 자유의 가능성을 마련해주겠다. 나는 당신이 자유로울 자유가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겠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자유의 구호는 실제로는 "자유로워져라"라는 역설적 명령문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명령은 성과주체를 우울증과 소진 상태속에 빠뜨린다. 푸코가 말하는 "자아의 윤리"는 억압적 정치 권력, 즉 타자 착취에 대항하기는 하지만 가지 착취의 바탕에 놓여 있는 자유의 폭력에 대해서는 맹목적이다.  30-31


'넌 할 수 있어'는 심지어 '넌 해야 해'보다 더 큰 강제력을 행사 한다. 자기 강제는 타자 강제보다 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좌절하는 자는 결국 자기 잘못이며 장차 이러한 죄를 계속 짊어지고 다니게 된다.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물을 만한 사람은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  31


자본주의에는 속죄의 가능성, 채무자를 채무에서 해방시켜줄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채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속죄할 수 없다는 것은 성과주체를 우울증에 빠뜨리는 원인이기도 하다. 우울증은 소진증후군과 더불어 할 수 있음이 초래하는 구제할 수 없는 좌절이며, 다시 말해 심리적 파산 상태를 드러내는 질병이다. 

에로스는 성과와 할 수 있음의 피안에서 성립하는 타자와의 관계다.  32


할 수 있음의 절대화는 바로 타자를 파괴한다. 타자와의 성공적인 관계는 일종의 실패로 여겨진다.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자를 소유하고 붙잡고 알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닐 것이다.  41


부버에 따르면 근원거리는 "인간의 원리"로 기능하며 타자성이 성립할 수 있는 초월적 전제를 이룬다. "근원거리 두기"는 타자가 하나의 대상, '그것'으로 전락하고 사물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성적 대상으로서의 타자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 그러한 타자와는 어떤 관계도 맺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성적 대상을 부를수는 있겠지만 그것에게 말을 건넬 수는 없다. 성적 대상에는 "얼굴"도 없다. 42


'가까움'은 그 속에 '멂'이 기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부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가까움은 부정성이기에 속에 긴장을 품고 있다. 반면 거리의 부재는 긍정성이다. 부정적인 것은 그 대립자에 의해 활력을 얻는다. 바로 여기에 부정성의 힘이 있다. 오직 긍정적이기만 한 것에는 이처럼 생동하게 하는 힘이 없다.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어 향락의 공식으로 여겨진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안락한 감정을 생성해야 한다. 사랑은 더 이상 행위도, 이야기도, 드라마도 아니며, 흔적을 남기지 ㅇ낳는 기분이요 흥분이다. 이제 사랑은 상처와 급습과 추락의 부정성을 알지 못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조차 너무 부정적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부정성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을 이룬다. "사랑은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다. 사랑은 우리의 주도권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밑도 끝도 없이, 우리를 급습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다." 하룻 있음이 지배하는 성과사회,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 주도권과 프로젝트가 전부인 사회는 상처와 고뇌로서의 사랑에 접근하지 못한다.  43-44


에로스가 깨어나는 것은 "타자를 주면서 동시에 빼앗는" "얼굴들"에 직면할 때이다. "얼굴"은 비밀이 업슨 페이스의 대척점에 있다.  48





벌거벗은 삶


에바 일루즈는 연구서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에서 오늘날 사랑이 "여성화"되고 있다고 확언한다. "상냥한" "친밀한" "조용한" "편안한" "달콤한" "부드러운"처럼 낭만적 사랑 장면의 묘사에서 사용되는 형용사들은 전부 다 "여성적"이다. 남자든 여자든 여성적 감정의 영역으로 몰아놓는 낭만주의의 이미지가 세상에 가득하다. 그러나 그녀의 진단과 달리 오늘날 사랑이 단순히 "여성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삶의 여역이 긍정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사랑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소비의 공식에 따라 길들여진다. 모든 부정성, 모든 부정의 감정은 회피된다. 고통과 열정은 안락한 감정과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흥분에 자리를 내준다. 속성 섹스의 시대, 즉흥적 섹스, 긴장 해소를 위한 섹스가 가능한 시대에는 성애 역시 모든 부정성을 상실한다. 부정성의 완전한 부재로 인해 오늘날 사랑은 소비와 쾌락주의적 전략의 대상으로 쪼그라든다. 타자를 향한 갈망은 동일자의 안락함으로 대체된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동일자의 편안한 내재성, 편하게 늘어져 있는 내재성이다. 오늘날의 사랑에는 어떤 초월성도, 어떤 위반도 없다.  51-52


죽음을 햔한 자유를 알지 못하는 자는 자신의 삶을 걸지 못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데리고 죽음에까지 가는" 대신에 "죽음의 내부에서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노예가 되고 일을 한다.

노동과 벌거벗은 삶은 죽음의 부정성에 댛산 반응이라는 점에서 서로 긴밀하게 열결되어 있다.  52-53


벌거벗은 삶에 매달려 노동하는 노예는 에로틱한 경험을 하지도 못하고, 에로틱한 갈망을 품을 줄도 모른다. 오늘날의 성과주체는 헤겔의 노예와 유사하다. 다만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53-54


자본주의는 벌거벗은 삶을 절대화한다. 좋은 삶은 자본주의의 목표가 아니다. 축적과 성장을 향한 자본주의의강박은 바로 죽음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자본주의에서 죽음은 절대적 손실일 뿐이기 때문이다.  54-55


부지런히 삶을 돌보려는 노력이지만, 그것은 좋은 삶을 위한 노력은 아니다. 자본과 생산의 운동은 좋은 삶을 목표로 하는 이념을 떨쳐버림으로써 무한한 가속화 과정에 빠진다. 방향을 상실한 운동은 극단적으로 가속화된다. 이로써 자본주의는 노골적이고 파렴치해진다.  55


우울한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는 어떤 결론도 맺지 못한다. 하지만 결론이 맺어지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흘러가고 떠내려가버릴 것이다. 우울증의 주체가 안정된 자아상을 갖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유부단함, 결단력의 결핍이 우울증의 전형적 증상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울증은 과도한 개방과 탈경계이 와중에서 끝맺음을 하고 완결지을 수 있는 능력이 실종되어버린 이 시대의 특징적 현상이다. 사람들은 삶을 완결지을 줄 모르기 때문에 죽는 법도 잊어버렸다.  58


마르실리오 피치노에게도 사랑이란 타자 속에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하면서, 나는 당신 속에서 나를 다시 발견한다. 당신이 나를 생각하기에. 그리고 당신 속에서 나를 버린 뒤에 나는 나를 되찾는다. 당신이 나를 살아 있게 하므로." 피치노는 사랑하는 자가 다른 자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망각하지만 이러한 소멸과 망각 속에서 오히려 자기 자신을 "되찾고" 심지어 "소유"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소유는 곧 타자의 선물일 것이다... 에로스의 힘은 무력함을 함축한다. 무력해진 나는 스스로를 내세우고 관철하는 대신, 타자 속에서 혹은 타자를 위해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타자는 그런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다. "지배자는 자기 자신을 통해 타자를 장악하지만, 사랑하는 자는 타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각각 자기 자신에게서 걸어나와 상대방에게로 건너간다. 그들은 각자 자기 안에서 사멸하지만 타자 속에서 다시 소생한다."  59-60


모두가 자기 자신의 경영자인 사회에서는 생존의 경제가 지배한다. 그것은 에로스, 혹은 죽음의 비경제와 정반대된다. 자아의 충동과 성과의 충동이 전혀 억제되지 않는 신자유주의의 사회 질서 속에서 에로스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죽음의 부정성을 밀어내버린 긍정사회는 오직 "불연속성 속에서 생존을 확보"해야 한다는 일념만이 지배하는 벌거벗은 삶의 사회다. 그러한 삶이란 노예의 삶일 뿐이다. 벌거벗은 삶에 대한 염려, 생존에 대한 염려는 삶에서 모든 생동성을 빼앗아간다. 오직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생동성이 없다. 부정적인 것은 생동성의 본질적 계기를 이룬다. "그러니까 오직 모순을 자기안에 내포하고 있는 것, 모순을 자기 안에 품고 견질 수 있는 힘을 지닌 것만이 살아 있을 수 있다.  61-62





포르노 


포느로가 음란한 것은 과다한 섹스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섹스가 없다는 사실이 포르노를 음란하게 만든다. 오늘날 성애를 위협하는 것은 쾌락을 적대시하면서 섹스를 뭔가 "더러운 것"처럼 피하는 "깨끗한 이성"이 아니다. 성애는 바로 프로노그래피에 의해 위기에 빠진다. 가상공간에서의 섹스만이 포르노인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는 실제 섹스 역시 포르노로 변질된다.  65-66





에로스의 정치


우리는 에로스를 결코 충동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에로스는 충동뿐만 아니라 용기까지도 관장한다.  83


신자유주의의 토대는 충동이다.  84


사랑은 "둘의 무대"다. 사랑은 개별자의 시점을 벗어나게 하고, 타자의 관점에서 또는 차이의 관점에서 세계를 새롭게 생성시킨다. 이로 인해 일어나는 근원적 전복의 부정성은 경험과 만남으로서의 사랑이 지니는 특징에 속한다.  85


포르노그래피는 이질성을 완벽하게 소거함으로써 습관화의 경향을 더욱 강화한다. 포르노그래피의 소비자에게는 성애의 상대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개별자의 무대 위에 거주한다. 포르노적 이미지에서는 어떤 타자의 저항도, 어떤 실재의 저항도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떤 예의도, 어떤 거리도 없다. 포르노적이라는 것은 바로 타자와의 접촉, 타자와의 만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를 낯선 것의 접촉과 감정적 격동에서 지켜주는 자기성애적인 자기 접촉, 자기 애착은 포르노적이다. 포르노그래피는 자아의 나르시시즘적 성향을 강화한다. 반면 사건으로서의 사랑, "둘의 무대"로서의 사랑은 탈습관화, 탈나르시시즘화의 방향으로 작용한다. 사랑은 습관적인 것과 동일한 것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고 구멍을 뚫는다.  86-87





이론의 종말


얼마 전 <와이어드(Wired)>지의 편집장 크리스 앤더슨이 "이론의 종말"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글을 발표한 바 있다. 여기서 그는 이제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양의 데어커가 활용 가능해짐에 따라 이론적 모델은 완전히 불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구글처럼 엄청난 데이터 풍요의 시대에 성장한 회사들은 틀린 모델에 의지할 이유가 없다. 아니 도대체 모델이라는 것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데이터를 분석하고 귀속 및 종속 관계를 바탕으로 거기에서 패턴을 찾아낸다. 가설적인 이론적 모델은 데이터의 직접 비교에 자리를 내준다. 인과 관계는 상관관계로 대체된다. "언어학에서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인간 행동에 관한 모든 이론을 버려라. 분류법도, 존재론도, 심리학도 모두 잊어라.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누가 안단 말인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다는 사실이고, 우리는 사상 유례없는 정확하게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추적하고 측정할 수 있다.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앤서슨의 테제의 근저에는 허약하고 단순화된 이론 개념이 깔려 있다. 이론은 실험으로 검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가설이나 모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같이 강한 이론들은 데이터의 분석으로 대체할 수 있는 모델이 아니다. 이러한 이론들은 강한 의미의 사유를 바탕으로 한다.  90-91


오늘날 학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데이터와 정보의 더미에 휩쓸려, 이론과 사유에서 아주 멀리 떠나가고 잇다. 정보는 그 자체 긍정적이다. 데이터에 바탕을 둔 실증과학, 데이터를 비교하고 평균을 내는 게 전부인 실증과학은 강한 의미에서의 이론에 종언을 고한다. ..

정보와 데이터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오늘날 오히려 이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하다.  92


사유는 고요함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고요함 속으로의 탐험이다.  93


정신이란 본래 불안을 의미한다. 정신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정성이다.

정보는 그저 알아두기의 대상일 뿐이다...

정보는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한다. 반면 인식은 부정성이다. 인식의 본질은 배제하고, 엄선하고, 결단하는 데 있다. 인식은 기존의 것 전체를 뒤흔들고 뭔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작하게 한다. 과다한 알아두기에서는 아무런 인식도 산출되지 않는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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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서문

한국 사회 역시 성과사회이고 그에 따른 사회적 폐해와 정신 질환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적어도 그 점에서는 서구 사회와 전혀 다르지 않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6-7




신경성 폭력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연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11-12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전 사회를 장악한 이러한 면역학적 장치의 본질 속에는 어떤 맹목성이 있다.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면역 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자체이다.

아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12


어떤 패러다임 자체가 반성의 대상으로 부상한다는 것은 그 패러다임이 몰락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인 경우가 많다... 냉전의 종식 역시 바로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13


오늘날 이질성은 아무런 명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되었다. 면역학 이후 시대의 차이, 후기근대적 차이는 더이상 병을 유발하지 않는다. 명역학적 차원에서 차이란같은것이나 마찬가지다. 차이에는 말하자면 격렬한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가시가 빠져 있다. 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한다. 낯선 것은 이국적인것으로 변질되며, 여행하는 관광객의 향유 대상이 된다. 관광객, 또는 소비자는 더 이상 면역학적 주체가 아니다.  13-14


보드리야르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자는 같은 것으로 인해 죽는다", "현존하는 모든 시스템의 비만 상태"를 지적하기도 한다.  17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  18-19


보드리야르 "네트워크와 가상세계의 폭력은 바이러스성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은 정면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전염, 연쇄 반응, 모든 면역성의 제거 등과 같은 수단을 통해 작동한다는 점에서 바이러스적이다. 또한 전통적인 부정적 폭력과 반대로 긍정성의 과잉을 통해 작동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끝없는 증식과 비대화, 변이를 통해 몸을 잠식해 들어오는 암세포처럼, 가상성과 바이러스성 사이에는 은밀한 친족성이 있다."

보드리야르가 구성한 적(敵 원수적)의 계보학에 따르면 최초 단계의 적은 늑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늑대는 외부의 적으로서 사람들은 이러한 적을 막기 위해 요새를 짓고 성벽을 쌓는다." 다음 단계에서 적은 쥐의 형태를 취한다. 이 적은 지하에서 활동하며 위생학적 수단으로 퇴치할 수 있다. 그다음 단계인 해충의 단계를 거치고 나면 마지막으로 바이러스적 형태의 적이 출현한다. "네번째 단계는 바이러스이다. 바이러스는 사실상 사차원에서 활동한다. 바이러스는 시스템의 심장부에 들어와 있는 까닭에, 바이러스에 대한 방어는 훨씬 더 까다로운 과제가 된다." "전 지구에 퍼져 있는 적, 하나의 바이러스처럼 도처에 스며들고 권력의 모든 틈새로 파고드는 유령 같은 적"이 출현한다. 바이러스성 폭력은 시스템 속에 테러리즘의 비밀 세포로 자리를 잡고 시스템을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키려 하는 개별자들에게서 나온다.  19-20


신경성 폭력은 어떤 면역학적 시각에도 포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부정성이 없기 때문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  21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노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24


알랭 에랭베르(Alain Ehrenberg)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

우울증을 초래하는 요인 가운데는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도 있다. 우울증의 이러한 측면은 에랭베르의 논의에서 빠져 있다. 그는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이러한 폭력이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26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28




깊은 심심함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 야생에서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기법이 멀티태스킹인 것이다.

먹이를 먹는 동물은 이와 동시에 다른 과업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를테면 경쟁자가 먹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고, 먹는 중에 도리어 잡아먹히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하며, 동시에 새끼들도 감시하고, 또 짝짓기 상대도 시야에서 놓치지 않아야 한다. 수렵자유구역에 사는 동물은 주의를 다양한 활동에 분배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까닭에 깊은 사색에 잠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먹이를 먹을 때도, 짝짓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동물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에 사색적으로 몰입할 수 없다. 언제나 그 배경의 사태도 계속 정신적으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멀티태스킹뿐만 아니라 컴퓨터게임과 같은 활동 역시 야생동물의 경계 태세와도 크게 다르지 않는 주의구조, 넓지만 평면적인 주의구조를 생산한다.  30-31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hyperattention)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벤야민은 꿈의 새가 깃드는 이완과 시간의 둥지가 현대에 와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탄한다.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런 것을 "짜지도, 잣지도" 않는다. 심심함이란 "속에 가장 열정적이고 화려한 안감을 댄 따뜻한 잿빛 수건이다." 그리고 "우리는 꿈꿀 때 이 수건으로 몸을 감싼다." 우리는 "수건 안감의 아라베스크 무늬 속에서 안식한다." 이완의 소멸과 더불어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이 소실되고 "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도 사라진다. 이 공동체의 정반대편에 있는 것이 우리의 활동 공동체이다.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둔다.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에게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걸으면서 심심해하고 그런 심심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잃고 안절부절못하며 돌아다니거나 이런저런 다른 활동을 해볼 것이다. 하지만 심심한 것을 좀더 잘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어쩌면 걷는 것 자체가 심심함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그로 하여금 완전히 새로운 움직임을 고안하도록 몰아갈 것이다. 달리기, 또는 뜁박질은 새로운 움직임의 방식이라기보다 그저 걷기의 속도를 높인 것일 뿐이다. 이를테면 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움직임이다. 오직 인간만이 춤을 출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은 걷다가 깊은 심심함에 사로잡혔고 그래서 이런 심심함의 발작 때문에 걷기에서 춤추기로 넘어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걷기가 그저 하나의 선을 따라가는 직선적 운동이라면 장식적 동작들도 이루어진 춤은 성과의 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사치이다.  32-34


떠다니는 것, 잘 눈에 띄지 않는 것,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이야말로 오직 깊은 사색적 주의 앞에서만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긴 것, 느린 것에 대한 접근 역시 오랫동안 머무를 줄 아는 사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지속의 형식 또는 지속의 상태는 과잉활동성 속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34





보는 법의 교육


사색적 삶은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전제한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 과업을 거론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보는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배움의 목표는 니체에 따르면 "고상한 문화"이다.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눈을 평온과 인내, '자기에게 다가오게하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눈으로 하여금 깊고 사색적인 주의의 능력, 오래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정신성을 갖추기 위한 최초의 예비 교육"이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의 부재 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여기서 니체가 표명하는 것은 바로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이는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저 긍정하는 수동적인 자기 개방이 아니다. 사색적 삶은 오히려 몰려오는, 또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기보다 주체적으로 조종한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실상 활동과잉은 다름 아닌 정신적 탈진의 증상일 뿐이다.  47-48


활동성이 첨예화되어 활동과잉으로 치달으면 이는 도리어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성으로 전도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활동성의 변증법이다. 그것은 자유 대신 새로운 구속을 낳는다. 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거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48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못하는 과잉활동적 반응과 해소 작용으로 흩어져버릴 것이다. 순수한 활동성은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연장할 뿐이다. 진정 다른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려면 중단의 부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행동의 주체는 오직 잠시 멈춘다는 부정적 계기를 매개로 해서만 단순한 활동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우연의 공간 전체를 가로질러 볼 수 있다. 머뭇거림은 긍정적 태도는 아니지만,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오늘날 우리는 중단, 막간, 막간의 시간이 아주 적은 시대를 살고 있다. [활동적 인간의 주된 결함]이라는 아포리즘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쓴다. "활동적인 사람들은 보통 고차적 활동을 하는 법이 없다. [..] 이런 점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 돌이 구르듯이 활동적인 사람들도 기계적인 어리석게 계속되는 활동은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가속화와 활동과잉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분노하는 법도 잊어가고 있다. 분노는 특별한 시간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전반적인 가속화 및 활동과잉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가속화와 활동과잉은 넓은 시간적 지평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때 미래는 현재의 연장시킨 것 정도로 축소되고, 다른 것에 시선을 던질 수 있는 부정적 태도가 싹틀 여지는 전혀 없다. 반면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제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부논의 전제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춰 선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분노는 짜증과 구별된다. 오늘의 사회를 특징짓는 전반적인 산만함은 강렬하고 정력적인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버렸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사람들은 불가피한 일에 대해서도 짜증을 내곤 한다.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와 유사하다. 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불안은 현존재 전체를 붙들고 흔들어댄다. 분노 역시 하나하나의 사태에 관한 것이 아니다. 분노는 전체를 부정한다. 분노가 보여주는 부정성의 에너지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분노는 예외적 상태이다. 세계가 점점 더 긍정적으로 되어가면서 예외적 상태도 더 줄어든다. 아감벤은 이처럼 긍정성이 확대되고 있는 현실을 간과한다. 예외 상태가 한계를 이탈하여 정상 상태가 되어간다는 그의 진단과는 반대로, 오늘날 사회의 전반적인 긍정화는 모든 예외 상태를 흡수해버린다. 그리하여 정상 상태가 전체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증대되는 세계의 긍정성이야말로 "예외 상태"나 "면역성"과 같은 개념에 대해 사람들이 주목하게 된 이유이다. 하지만 그렇게 주목받는다고 해서 이런 개념들이 현재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이들이 소멸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49-51


사회의 긍정성이 증가하면서 불안이나 슬픔처럼 부정성에 바탕을 둔 감정, 즉 부정적 감정도 약화된다. 사유 자체가 "항체와 자연적 면역성으로 이루어진 그물"이라면, 부정성의 부재는 사유를 계산으로 변질시킬 것이다. 컴퓨터가 인간의 뇌보다 더 빨리 계산할 수 있고 엄청난 데이터를 조금도 토해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컴퓨터에 어떤 종류의 이질성도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컴퓨터는 긍정기계이다. 천재 백치가 보통은 계산기 밖에 해낼 수 없는 과제를 척척 해내는 것은 바로 부정성의 부재와 자폐적 자기 관련성 덕택이다. 세계가 전반적으로 긍정화되는 추세 속에서 개인도 사회도 자폐적 성과기계로 변신한다. 또는 성과를 극대화하려는 과도한 노력이 가속화 과정에 방해가 되는 부정성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인간이 부정의 존재라고 한다면, 세계의 전면적 긍정화는 무시할 수 없는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헤겔에 따르면 부정성이야말로 인간 존재를 생동하는 상태로 지탱해주는 것이다.  51-52


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니체의 말을 빌린다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다. 이러한 부정적 힘은 단순한 무력함, 무언가를 할 능력의 부재와는 다른 것이다. 무력함은 단순히 긍정적인 힘의 대립항일 뿐이다. 무력함은 무언가를 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결국 그 무언가에 대한 종속이며 그 점에서 긍정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부정적 힘은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는 이런 긍정성을 넘어선다. 그것은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다. 지각하지 않을 수 있는 부정적 힘 없이 오직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 힘만 있다면 우리의 지각은 밀려드는 모든 자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처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어떤 "정신성"도 생겨날 수 없을 거이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무언가 생각할 힘밖에 없다면 사유는 일련의 무한한 대상들 속으로 흩어질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기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긍정적 힘, 긍정성의 과잉은 오직 계속 생각해나가기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52-53


무위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예컨대 참선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들이닥쳐 오는 것에서 스스로 해방함으로써 무위의 순수한 부정성, 즉 공(空 빌공)에 도달하려 한다. 그것은 극도로 능동적인 과정이며 수동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참선은 자기 안에서 어떤 주권적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연습, 중심이 되고자 하는 연습이다. 이에 반해 긍정적 힘만을 지닌 사람은 대상에 완전히 내맡겨진 신세가 된다. 역설적이게도 활동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것은 긍정적 힘의 일방적 절대화가 낳은 결과이다.  53-54





피로 사회 

피로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모리스 블랑쇼


활동사회라고도 할 수 있는 성과사회는 서서히 도핑사회로 발전해간다..도핑은 말하자면 성능 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한다. 최근에는 어엿한 과학자들조차 그런 약물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무책임한 태도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외과의사가 신경향상제의 도움으로 좀더 정신을 집중하면서 수술할 수 있다면 실수도 줄어들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신경향상제를 복용하는 것도 별 문제가 아니다.  65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66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72






역자후기


한병철은 긍정성의 과잉이 자아를 새로운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마치 늘어나는 자기 자신의 지방질에 병들어가는 사람처럼,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마모시켜간다. 그 결과 스스로를 낙오자로 느끼는 우울증 환자가 넘쳐나고, 성과를 위해 약물을 불사하는 도핑주체도 증가하고 있다. 이는 금지, 강제, 억압의 철폐, 타자에 대한 관용의 확대가개인의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유토피아로 이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오늘의 주체는 오히려 자유의 무게에 짓눌려 소진되고 있는 것이다. 피로는 성과주체의 만성질환이다.  120-121


한병철이 이야기하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 부정성의 패러다임에서 긍정성의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생산적인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학교 교육과 관련하여 체벌이나 학생 인권 조례 등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논쟁은 우리 역시 그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과정 속에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일 것이다. 의무 과목의 축소 및 철폐, 자기 주도 학습의 강조, 학생 개개인의 창의성과 개별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입시 전형 방식의 도입(예컨대 입학사정관제)은 학생들을 입시 지옥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주체로 길러내기보다는 더욱더 복잡하고 불투명한 경쟁, 한병철이 말하는 "절대적인 경쟁"(남과의 상대적 경쟁이 아니라 스스로를 끝없이 뛰어넘어야 하는 자기 자신과의 경쟁)의 무대로 몰아가고 있다. 입시 지옥에서의 해방을 약속한 최초의 교육부 장관이 내세운 구호가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 갈 수 있다'였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20개에 가까운 교과목의 무게에 신음하던 학생들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들렸을 이 구호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며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주체의 등장을 예고한 것이 아니었을까?  122-123


한병철은 성과사회와 성과주체의 이상이 오늘의 세계에서 전일적 지배를 확립한 자본주의의 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더욱 생산적으로 될 것'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본적 요구라면, 이 요구가 관철되는 방식이 후기 자본주의에 이르러 지배와 강제에 의한 타자 착취에서 성공적 인간이 되기 위한 자기 착취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한병철은 그것을 착취의 진화로 파악한다. 타자 착취에 의한 생산성의 향상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더욱 효율적인 방법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바로 자기 착취라는 것이다.  126-127


성공적 인간이라는 이상에 유혹당한 사람들의 열망과 실천이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확대 재생산에 기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작 인간 자신은 소진되고 마모된다...

한 병철은 시스템이 이상적인 자아가 되고자 하는 개인들의 욕망으로 지탱되고 있다면, 개개인이 그러한 욕망의 허구성에 대해 각성하는 데서 비로소 시스템의 변화도 시작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는 우울증을 이 시대의 핵심적 질병으로 지목하고, 그 배후에 성과사회의 압력이 놓여 있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병의 진단은 나왔지만 그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타자의 강제가 인간을 옥죄고 있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그런 타자에 대한 폭력적 저항을 통해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마르크스주의의 모델이다. 그러나 우울증의 배후에 놓인 성과사회의 압력은 단순한 외적 강제가 아니라 유혹의 형태를 취하며, 오직 인간 자신의 욕망을 매개로 해서만 관철된다. 따라서 성과사회의 압력은 끝없는 성공을 향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 127-128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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