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에 사람들이 매혹당한 가장 큰 동기는 '가난한 사람들, 배를 곯는 사람들, 수탈당하는 사람들, 사회적인 불의를 견디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 자신의 '양심'입니다.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버젓이 곁에 있는데 자기는 '편하게' 지내고 있다는 불공평함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게 되고, 거기에서 '공정한 사회를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한 사명감이 자라나지요.  10


아마도 마지막으로 일본인에게 '양심의 고통'을 느끼게 한 것은 베트남 전쟁 때 불에 타 죽은 베트남 농민이었을 겁니다. 일본이 베트남 전쟁의 후방 지원 기지로서 그들의 학살에 간접적으로 가담했고, 그 덕분에 일본인은 전쟁 특수로 인한 경제적 풍요를 누린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이지요.

하지만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자, 일본인은 '양심의 고통'을 느낄 만한 상대를 더 이상 찾을 수 없었어요. 그 후 처음에는 다소 미안한 듯 조심스러웠지만 나중에는 여봐란듯이, '우리는 이렇게 잘 살고 있다! 이렇게 풍요를 누리고 있다! 이렇게 쾌적한 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자랑스럽게 떠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누가 마르크스를 읽겠어요?  11


단적으로 말해 돈을 갖는 것,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 호화로운 집에 사는 것, 비싼 옷을 입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능력 있는 인간이 우아하게 살고, 무능하고 힘없는 인간이 길거리에서 굶어 죽는 것을 자기 책임이라고 합니다. 능력 있는 인간이 높은 품격을 인정받고, 무능한 인간이 경멸당하거나 모욕을 받는 것을 매우 적절한 결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회적인 정의(fairness)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오피니언 리더가 된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고방식은 별로 '좋지 않다'고 봅니다.

공동체는, 가장 연약하고 가장 힘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전체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자존감을 갖고 각각의 입장에서 책무를 다할 수 있게 하는 제도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혈연이나 지연으로 엮인 소규모의 공동체든, 국민 국가나 국제 사회 같은 거대한 공동체든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힘없고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 운용해나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어느 정도의 '성숙한 어른'이 꼭 필요하지요. 충분한 능력도 있고, 지혜도 갖추고 있고, 주위에서 모두들 존경과 신뢰를 보내는 사람, 나아가 자신이 갖고 있는 자원을 자기만의 이익이 아니라 주변의 힘엇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성숙한 어른'말입니다.  12


마르크스를 읽고,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 '어린애가 어른이 되는' 방법으로서 가장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마르크스를 읽지 않게 되고 나서부터 눈에 띄게 '성숙한 어른'이 줄었습니다. 나는 이 두가 현상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봅니다.  13




마르크스 수사학의 결정체 <공산당 선언>

                                                                  (공산당 선언 전문 참고 하기 클릭)


초판 책자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라는 저자의 이름도 실려 있지 않았고, 저자를 밝힌 것은 1850년이었다고 합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7년 모스라는 인물의 추천을 받아 이동맹에 가입했습니다. 동맹에서는 그해 6월에 열림 제 1회 대회(엥겔스참석)와 11월에 열린 제2회 대회(마르크스와 엥겔스 참석)-둘다 런던에서 개최-에서 강령 내용에 대해 상당히 오랫동안 논의를 거듭했습니다. 그리하여 제 2회 대회에서는 논의의 결과를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문서로 작성할 임무를 맡기기로 결정하죠. 다만, 당시 마르크스는 브뤼셀에, 엥겔스는 파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대표로 집필하기로 했어요. 마르크스는 그 전에 엥겔스가 집필한 <공산주의의 제 원리>(1847)등을 참조하면서 독일어로 이 글을 써냈습니다.  25-26


이 책은 네 개의 절로 이루어져 있다.

I. 부르주오와 프롤레타리아 - 부르주아는 자본가,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자를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양자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중심으로 '근대 부르주아 사회'(당시 마르크스는 아직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어요)의 체제나 역사, 또 프롤레타리아 혁면(공산주의 혁명)의 필연성 등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II.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들 - 여기에서는 '공산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 일반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서 시작하여 공산주의 운동의 목적이나 공산주의 사회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III. 사회주의 문헌 및 공산주의 문헌 - 이 부분에서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고 불리는 다양한 조류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본격적으로 논단이나 운동의 세계에 등장하기 이전에도 이미 수많은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은 너무나 많은 얼굴을 한 정체불명의 '유령'으로 취급받았습니다. 

IV. 각종 반정부당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 - 여기에서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반정부당이나 혁명당에 대해 공산주의자의 당이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논합니다.  27


마르크스는 현대 경제나 정치, 여성의 지위나 가족, 저출산 문제 같은 사회적 문제를 생각하는 데 중요한 힌트를 제공해주지요...

마르크스의 유물론 철학에서는 이론을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것으로 파악하는 사고를 신랄하게 비판하고있으니까요.  28


실은 만년의 엥겔스는(<1883년 독일어판 서문>) "<공산당 선언>을 관통하는 기본 사상, 즉 역사의 어느 시대라도 경제적 생산 및 거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편성이 그 시대의 정치적 및 정신적 역사의 기초를 이룬다는 것, 따라서 (태곳적 토지 공유가 붕괴한 이후)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 즉 사회 발전의 여러 단계에서 착취당하는 계급과 착취하는 계급, 지배당하는 계급과 지배하는 계급 사이의 투쟁의 역사라는 것, 그러나 이 투쟁은 지금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 착취와 억압 및 계급투쟁으로부터 사회 전체를 영국적으로 해방하지 않고서는 착취하고 억압하는 계급(부르주아지)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 이 기본 사상은 단 한 사람, 오로지 마르크스에게서 나왔다."  29-30


공산주의 혁명론을 몇 가지 소개하면.

1. 노동자의 정치권력 획득 - '공산주의자의 당면 목적'은 우선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프롤레타리아트(노동자 계급)가 정치권력을 쥐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는 <공산당 선언>의 사상은 매우 독창적이었죠.

2. 정치 혁명과 사회 혁명 - 혁명의 '첫걸음'으로서 정치권력을 획득한 공산주의자는 그 다음 사회의 개혁으로 나아가야 해요.

3. 공산주의 사회란 무엇인가. - 사회를 계급으로 분열시키는 경제적인 기반이 사라진다는 뜻이에요.."계급 및 계급 대립이 있는 낡은 부르주아 사회를 대신하여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나타난다." 공산주의 사회라고 하면, 소수의 엘리트(계급) 혹은 공산당이 국가를 장악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국민 전체를 계획적으로 관리하는 사회라는 이미지를 떠올릴지도 모르겟어요. 하지만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산주의는 그러한 사회와 전혀 달랐어요.

4. 혁명의 방법에 대해 - 당시 유렵의 역사적 사정을 생각해볼 때. 겨우 스위스 정도만 국민 다수의 선거를 통해 권한을 가진 의회를 선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해요. 실제로 <공산당 선언>을 발행한 직후 각지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아닌 왕정 타도나 민족 독립을 요구하는 혁명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모두 '강제력'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한편,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6년 노동자 계급의 선거원을 요구한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에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고, 그 후에도 마르크스는 만년에 이르기까지 의회를 통해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방법을 쉬지 않고 탐구했어요.

5. 민주적 개혁과 공산주의 혁명 - 마르크스는 역사를 향해 언제 어디서든 공산주의 혁명을 밀어붙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태도를 취하지 않아요. 우선은 "눈앞에 닥친 목적이나 이익의 달성"을 소중하게 여기고, 부르주아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부르주아와 '공동으로' 싸워나간다고 하지요. 각각의 사회에 대해 각각의 역사적 단계가 필요로 하는 '현재의 운동'을 통해 야무지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운동의 미래', 즉 공산주의 혁명에 접근해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죠. 냉철한 자세를 유지했어요.  31-36


마르크스의 경제 이론이나 정치 이론은 현실 정치에서 이미 '유효 기간이 지났다'고 여겨지고 있어요

만일 마르크스의 이론을 그대로 가져와서 적용하기만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이런 기준으로 마르크스를 평가한다면, 마르크스의 '유효 기간은 지났다'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마르크스를 읽음으로써 지적인 활기를 얻고, 자신의 지성을 가두고 있는 '우리'의 구조를 깨달으며, 거기에서 빠져 나오려는 노력에 시동을 거는 사람드에게 마르크스의 유효기간 따위는 없을 거예요.  44




청년 마르크스를 만나다 <유대인 문제>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두 사람이 실제로 처음 맞대면한 것은 1842년 2월, 그러니까 엥겔스가 맨체스터로 가는 도중에 <라인신문> 편집부에 들렸던 때 라고 하는군요. 그러나 이 만남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거기서 나는 마르크스를 만났지요. 당시 우리는 지극히 냉랭한 분위기에서 인사를 했어요. 마르크스는 그때 바우어 형제를 반대하는 입장이었거든요.... 나는 바우어 형제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인지라 그들의 동맹자로 여겨졌고, 한편 마르크스는 그들에게 수상하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던 것 같아요."(<엥겔스가 프란츠 메링에게 보낸 편지> 1895년 4월말)

이 시기 <라인신문>의 주필이던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정부의 검열과 투쟁하는 등 구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구체적으로 벌이는 논전을 중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탁상공론으로 보이는 추상적인 논의만 되풀이하는 청년헤겔학파와 심하게 대립하고 있었어요. 브루노와 에드가 바우어 형제가 대표적인 논자였죠.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 형제와 친하게 보이는 엥겔스에게 경계심을 가졌던 모양이에요.  66


두 사람 관계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독불연감>에 게재한 엥겔스의 논문 <국민경제학 비판 대강>에 마르크스가 강렬한 충격을 받고 나서부터입니다. 두 사람이 평생 변치 않는 교류를 나누며 공동의 역사를 이룩한 것은 그때부터라고 봐야겠죠.  67


<유대인 문제>

바우어의 논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어요. '유대교도의 해방은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하지만, 독일에서 억압받는 이들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인민이다. 따라서 유대인 문제는 모든 독일인의 해방을 둘러싼 문제로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독일인의 해방을 달성하려면 독일 국가가 기독교의 굴레를 버리고 근대 국가가 될 필요가 있으며, 아울러 독일의 인민 스스로 기독교나 유대교 같은 특정한 종교로부터 빠져나와 자유로운 자기 의식을 획득해야만 한다. 

이러한 논지에 대하여 마르크스는 '정치적 해방'과 '인간적 해방'이라는 두 가지를 구분하는 시각과 관련된 시각을 제기해요.

1 "독일의 유대인은 해방을 열망하고 있다. 어떤 해방을 열망하는가? 공민(公民)으로서의 해방, 정치적인 해방이다."(<전집>, 제1권, 384쪽)

2 하지만 "정치적 해방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비로소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비판이 가능하며, 유대인 문제를 '시대의 일반적 문제'의 하나로 진정 해소시킬 수 있다."(앞의 책. 388쪽)

3 그런데 바우어는 "다만 '기독교 국가'만을 비판할 뿐 '국가자체'를 비판하지 않는다", "정치적 해방이 인간적 해방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연구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단지 정치적 해방과 일반적인 해방을 무비판적으로 혼동"하고 있다.(앞의 책 388쪽)  68-69


마르크스는 헤겔을 본받아 '시민사회'를 "욕망과 노동과 사리(私利)와 사적 권리의 세계"(앞의 책 406쪽)라고 불렀는데요. 그는 나중에 이것을 '자본주의 경제'라는 문제 영역으로 정리하고 이해해갔어요. 마르크스는 이 단계에서 근대 사회가 초래한 법적 평등과 경제적 불평등을 구별하고, 이 사회의 중심이 경제 활동의 새로운 주체가 된 부르주아로 옮겨 간 점이 일찍부터 착목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독일인의 '인간적 해방'을 위해서는 '이기적인 정신'으로 가득 찬 시민사회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70-71


기독교가 유대교의 '분파'로서 등장.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모두 유대교에서 파생한 종교이기 때문에 애초의 시발점부터 반유대교적이라는 것은 논리적인 필연인 것입니다.  81


마르크스가 역점을 둔 것은 유대인 해방 '그 자체'가 아니에요. '해방'의 전 단계에 포함되며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은 것. 다시 말해 누구의 해방이며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지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에요...

상상해보면.. 인종 차별이 있는 어떤 나라에서 자유우의 성향의 정치가와 사회 활동가의 노력으로 '인종차별쳘폐법'을 제정했다고요. 의회는 법안을 가결하고 정부는 그 법을 엄숙하게 실행했어요. 자, 이런 경우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차별이 없어진 것 아니야?'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예, 차별이 철폐되었어요. 그뿐입니다. 하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사시에 또 하나의 국민적 합의가 성립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어요. 그것은 "우리 나라의 통치 시스쳄은 참 잘 돌아가고 있구나"라는 합의예요.

바꾸어 말하면, '그게 뭐 잘못인가? 합법적인 수순을 밟아서 차별을 철혜햇드면, 꽤 괜찮은 사호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니야? 그런 정치 시스템이라면 충분히 건전하게 기능하고 있는 것 같은데...'하는 것이죠.

마르크스는 그러한 무언의 동의가 성립되어버리는 것에 대해 강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86


바우어는 '정치적 해방이 인간적 해방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연구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단지 정치적 해방과 일반적인 해방을 무비판적으로 혼동'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이렇게 쓴 것은 곧, "이봐, '정치적 해방'과 '인간적 해방'은 다르단 말이야" 하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죠.

'정치적 해방', 즉 법률에 의해 '인종 차별을 하면 안 됩니다'라고 정하는 것은 물론 '일보 진보'겠지요.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렇게 마랳요. "그건 하나의 '진보'일 뿐 종점은 아니야. 이야기를 거기에서 끝내버리면 안 된다고, 유대인은 정치적으로는 해방되었어도 인간적으로는 아직 해방이 안 되어 있거든."  87


모든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가 인간 해방이 실현된 이상 사회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시민 사회에서 시민들이 누리고 있는 것은 '고립의 자유'예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대신 누구도 폐를 끼치지 못하게 할 권리. '고립되어 자기 안에 콕 틀어밖혀 잇는 모나드(단자)로서 누리는 인간의 자유'(앞의 책 43쪽)라고나 할까요. 인간과 인간이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거리를 두는 것에서 더욱 커다란 가치를 찾는 것이 근대 시민이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어요. 시민사회의 기초는 "'자신의 재산, 자신의 소득, 자신의 노동 및 노무의 성과를 임의대로 향수하고 처분할' 권리"(앞의 책 44쪽)에 있다고 말이죠.  90


물론 시민사회에서도 시민들은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은 아니에요. 정부에 자신의 권리 일부를 맡기고 법률을 제장하거나 법을 준수하며,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 세금을 내고, 징병령이 떨어지면 무기를 들고 조국을 위해 싸우기도 해요. 이런 시민의 모습을 마르크스는 '공민'이라고 부르지요. 이는 공적인 기능이란 측면에서 규정한 시민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시민을 '속마음에 충실한 시민'이라고 한다면, 공민은 규칙에 따라 의무를 다하는 '원칙에 충실한 시민'이라고 하겠지요. 요컨대 시민은 '사인(私人)'과 '공민'이라는 두 얼굴을 갖게 되지요. 사인으로서는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 공민으로서는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식으로...  91


마르크스의 정의에 따르면 '유적 존재'란 "현실의 개체적 인간이 추상적인 공민을 자기 안에서 되찾은" 상태를 가리켜요. 시민사회에서는 '공사의 혼동'이 어디까지나 '공보다 사는 우선한다'는 것임에 비해, 유적 존재는 공과 사를 문자 그대로 일치시킨 상태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93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행복과 이익에 신경 쓰는 만큼의 열의로 이웃의 행복과 이익에 신경을 쓰는 '유적 존재'가 되는 것을 '인간 해방의 완수'라고 봤어요.  94


마르크스는 사회 전체를 '특별한 의미에서 해방하는 입장'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이 텍스트를 통해 끄집어내려고 해요. 프롤레타리아론은 마르크스의 사회 이론을 뒷받침하는 근간과 관련있는 테제인데요...

마르크스는 스스로를 '족쇄밖에 잃을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라고는 여기지 않았으니까요.(마르크스에게는 족쇄 이외에도 가족이나 친구, 동지 같은 '좋은 것'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에게 모든 권리를!' 같은 테제를 증여의 구문으로 썼어요. 이 테제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마르크스가 '자신의 소유물'을 선물로 내주면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윤리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나는 프롤레타리아'라고 자칭하는 인간이 '프롤레타리아에게 모든 권리를!'하고 주장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어요. 논리적으로는 옳지만 윤리적으로는 옳지 않거든요. 인간은 자기가 손에 넣고 싶다고 바라는 것을 우선 다른 사람에게 증여함으로써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 이것도 내가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확신하게 된 교훈의 하나예요.  102-103




인간에 대한 연민, 그 위대한 시작 <경제학-철학 수고>


'소외된 노동'

"노동자는 자신의 생명을 대상에 쏟아붓는다. 그러나 대상에 쏟아부은 생명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라 대상의 것이다... 그의 노동이 들어간 생산물은 그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생산물이 커지면 커질수록 노동자 자신은 그만큼 가난해진다.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물을 외화한다는 것은 그의 노동이 하나의 대상에, 하나의 외적인 현실 존재가 된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노동이 그의 외부에, 그에게서 독립한 소원한 형태로 존재하며 그에 대해서 자립적인 힘이 되는바, 그가 대상에 부여한 생명이 그에 대해 적대적이고 소원하게 대립한다는 의미이다.  147


마르크스 자신은 부르주아였으니 그가 인용한 가혹한 노동의 경험 같은 것은 안 해봤을 테지요. 하지만 강렬한 공감려고가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148


소외론의 출발점이 '자신의 비참함'이 아니라 '타인의 비참함'을 목도한 경험이었어요. 마르크스는 "우리를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랍니다. "그들을 소외된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우리의 임무"라고 주장한 것이지요.  149


'유적존재'

'나만 좋으면 나머지는 상관없다'는 본심만 내세우며 살아간다면,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도구로 이용하고 수탈할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인간을 바꿀 것인가, '유적 존재'를 지향하면 바뀐다." 이것은 제3초고의 제2장 [사적 재산과 코뮌주의]의 중심논점이에요.

지금 내가 인용하고 있는 책에서는 보통 '공산주의'라고 번역하는 Kommunismus를 '코뮌주의'라고 옮겨놓았어요. '코뮌(Kommune)'이란 공동체를 가리키는데요. 나라나 지방 정부 같은 상명하달 시스템과 달리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범위, 목소리가 들리는 범위 안에서 합의를 통해 제도를 만들고 규정을 정리하며 자치를 행하는 단위예요. 비교적 규모가 작고 중앙 집권적이지 않은 통치 기구를 말하지요. 이러한 조건을 정치 제도의 기본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 '코뮌주의'인데요. 이것을 '공산주의'라고 해버리면 역사적으로 현존했던 '공산당'이나 '국제 공산주의 운동' 같은 것과 어쩔 수 없이 연관시켜 이해하게 되지요. 그래서 그러한 구체적인 역사적 존재가 등장하기 이전에 아직 막연한 관점에 지나지 않았던 시기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굳이 '코뮌주의'라는 번역어를 갖다 쓴 것 같아요.(혼자만의 추측에 부로가하지만)  150-151


마르크스가 지향하는 것은, 가장 인간적이고 훨씬 문명적인 코뮌주의입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적인 본질의 현실적 획득으로서의 코뮌주의(앞의 책 349쪽)"  152





'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 <독일 이데올로기>


<독일 이데올로기>의 구선은 제1권 <최근의 독일 철학 비판>, 제2권 <독일 사회주의 비판>으로 되어 있어요.

제1권에서는 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 막스 슈티르너를 검토하고 있지요. 이 세 사람은 모두 청년헤겔학파의 멤버로 한동안 마르크스와 헤겔이 높이 평가했었지요. '헤겔 좌익'이라고도 부르는 청년헤겔학파는 헤겔의 철학을 계승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자 ㅇ혁신적인 흐름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헤겔의 철학에는 '변증법'이라 부르는 변혁의 정신이 내재해 있는데, 현실 세계에 대해 헤겔은 정치도 그렇고, 종교도 그렇고, 현재 세계의 모습을 훌륭하다고 옹호하는 보수적-현상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어요. 청년헤겔학파는 이른바 헤겔의 언행 불일치에 불만을 품고, 특히 종교 분야에서 낡은 체제에 도전했어요.

그러나 그들도 대부분 자유나 민주주의 문제 같은 것을 당시 독일의 구체적인 정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로지 관념의 세계에서 벌이는 투쟁(공중전)으로 현실의 개혁 문제를 풀어나가려 한 약점을 갖고 있었어요.

이런 대목이 의견의 차이를 낳게 되어 마르크스는 <라인신문>의 편집을 둘러싸고 바우어 형제와 심하게 맞붙었고, 엥겔스와 함께 쓴 <신성 가족>에서 브루노 바우어를 집중적으로 비판하게 되지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우선 문제를 관념의 세계에서 인간이 매일 생활하는 현실 세계로 끌어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제2권에서는 당시 독일에서 유행하던 진정한 사회주의라는 사상적 조류를 비판하고 있어요. 프랑스나 영국에서 이러한 조류는 자기 나름대로 현실 세계를 직시한 결과 생겨난 사회주의 사상이었지만, 독일로 수입되면서 독일의 독특한 관념 세계와 결부되어 버린 것이지요.  172-173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야기하는 '이데올로기'에는 처음부터 비판적인 의미가 들어 있었어요. 

"이데올로기는 분명 이른바 사상가가 의식적으로 행하는 과정이지만, 그 의식은 잘못된 의식입니다. 사상가를 움직이는 본래의 추진력을 그 자신은 모르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이데올로기적 과정이 아닐 것입니다."(<엥겔스가 메링에게 보맨 편지> 1893년 7월 14일)  174


"그들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그들의 생산, 즉 그들이 무엇을 생산하고 또 어떻게 생산하는가 하는 것과 일치한다."(<신판 독일 이데올로기> 31쪽)

사적유물론을 '한마디'로 설명하라고 하면(무리한 주문이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만큼 유명한 구절이죠.  211


예를들어 '근본부터 사악한 인간'이 있다고 쳐봐요. 그런데 이놈이 어쩌다가 '선행'을 했어요(전철에서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했다든가, 뭐... 이런 일은 엄밀히 말해서 '생산'은 아니지만요). 사적유물론의 견지에서 말하면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에요. 마르크스는 이 사람이 '사실은 어떤 놈인가' 같은 한쪽으로 치우친 이야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아무리 근본이 돼먹지 않았다고 해도 선행을 하면 선인이고 아무리 근본이 선량하다해도 나쁜 짓을 하면 악인이라는 것이죠.  212


마르크스는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인간'이야말로 인간의 본바탕이어야 한다고 말해요. '현실적이고 역사적으로' 변변치 못한 일을 한 인간은 '변변치 못한 인간'이라고 말이에요.

나는 이치의 옳고 그름보다도 윤리적으로 마르크스가 우월하다고 생각했어요.  213


"인간들이 이야기하는 것, 상상하는 것, 표상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또한 이야기하고 사유하고 상상하고 표상하는 대상이 되는 인간들로부터 출발하여, 거기에서 생겨난 진정한 인간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인간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또 그들의 현실적인 생활 과정으로부터 이 생활 과정의 이데올로기적 반영과 반향이 어떻게 발전하는지도 해명할 수 있는 것이다."(앞의 책 42쪽)  216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요약하면, '인간들이 이야기하는 것, 상상하는 것, 표상하는 것'이 적절한가 아닌가는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인간들'에 따라 '그들의 현실적인 생활 과정으로부터' 검증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217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앞의 책 42쪽)

멋진 말 아닌가요? 'A는 B가 아니라 B가 A다'라는 수사법은 마르크스의 십팔번이었어요. 논리학적으로는 무리를 범하는 일도 가끔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런 수사를 애용했어요. 마치 입버릇인 것처럼 말이죠. 아마도 이런 표현이 '자연물처럼 보이는 조작물'의 정체를 폭로하는 데 지극히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마르크스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218


"공산주의 사회에서 각자는 그런 까닭에 고정된 어떤 활동 범위에 갇히지 앟고, 어디라도 좋아하는 분야에서 자신의 기량을 갈고 닦을 수 있도록 사회가 생산 전반을 통제하고 잇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을 하며, 아침에는 사냥하고 낮에는 낚시하며, 저녁에는 가축을 돌보며, 저녁 밥을 먹은 뒤에는 비평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게다가 반드시 사냥꾼, 어부, 목동, 비평가가 되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신판 독일 이데올로기> 67-68쪽)

분업에 의해 인간이 '어떤 특정한 범위에만 머무르는 것'을 강요받고, 특정한 직업에 속박당할 때, 그 노동은 '그에게 소원하고 적대하는 힘'이 된다. 마르크스는 이런 표현을 동원하여 분업을 비판했어요. 동시에 사냥꾼이자 어부이자 목동이자 비평가(이것은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사람, 즉 내가 앞에서 한 이야기에 따르면 '액자를 대는 사람'= 지식은을 가리킵니다)이기도 한 인간을 이상으로 삼은 대목은 아마도 내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가장 감동 받은 부분이 아닐까해요.

마오쩌둥은 힘들고 고된 연안 장정 시기에 홍군 병사들을 향해 동시에 군인이자 농부이자 기술자이자 정치사상가이자 교사가 되라고 요구했겠지요. 그는 '공(工)농(農)상(商)학(學)병(兵)'이 한 사람 안에 통합되어 있는 모습을 인간의 이상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219-220




'지성을 단련하는' 일은 물론 마르크스를 달달 외우거나 옳다고 믿는 것이 아니에요. 마르크스는 도대체 현실 세계-그것은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잇는 자본주의 사회의 초기 단계였어요-의 어디를 보고 무엇을 찾아내려고 했을까? 성장하고 변화해가는 마르크스이 언어를 따라가면서 그 점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그 결과 마르크스가 도달한 지점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이 잡히면 그것이 진정 옳은 것이었는가를 자신의 머리로 판단해가는 일, 그런 훈련을 해나가기 위해서 마르크스를 재료로 활용하는 것이 바로 '지성의 단련'이겠죠.

어찌 된 일인지 마르크스한테는 '벼락치기'가 통하지 않아요.

상대가 마르크스든 아니든, 글을 읽을 때는 거기에 쓰여 있는 내용을 수동적으로 그냥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두뇌를 단련시킬 수 없어요.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말한 마르크스 자신이야말로 항상 그런 자세로 비판적인 정신을 가지고 선배 사상가들의 지적 성과와 씨름하고자 한 사람이었어요.

한편, 이 책을 훑어봤다면 느꼈을 테지만, 마르크스는 글을 쓰면 쓸수록 그 내용이 확확 변해가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내용이 변화하고 탐구의 깊이가 심화되어 갈수록 더욱 사안을 정교하고 치밀하게 파악할 뿐 아니라 이전의 사고 방식을 과감하게 전환시키기도 하고, 과거에 도달한 지점을 가차없이 내던져버리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어요.  222-223



마르크스의 저작 나이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유대인 문제> 25세

<경제학-철학 수고> 26세

<독일 이데올로기> 28세

<공산당 선언> 29세

<프랑스의 계급투쟁> 32세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33세

<임금, 가격, 이윤> 47세

<자본론> 제1권 48세

<프랑스 내전> 53세     22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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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문(마르크스-엥겔스) -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공산당선언 (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

 

- K. marx, F. Engels

 

하나의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A spectre is haunting Europe)--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교황과 짜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의 첩보경찰 등 구유럽의 모든 열강은 이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다.

집권당으로부터 공산당이라는 비난을 받아보지 않은 반대당이 있는가? 또한 그 공산주의라는 비난의 낙인을 오히려 자기의 반동적 적들에게, 뿐만 아니라 보다 진보적인 다른 반대당에게 되돌려지지 않는 반대당이 있는가?

이 사실로부터 두 가지 점이 도출된다.

1. 모든 유럽의 열강은 이미 공산주의를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했다.

2. 지금은 공산주의자들이 당 자체의 선언을 통하여 전세계에 대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견해, 목적, 경향성을 발표하고 공산주의의 유령이라는 그 옛날이야기에 대처할 수 있는 가장 알맞는 시기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여러 국적을 가진 공산주의자들은 런던에 모여 다음과 같은 선언을 초안하고 이를 영어, 불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플랑드르어, 덴마크어로 출판하게 된 것이다.

 

 

I.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장인과 직인, 한 마디로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항상 서로 대립하면서 때로는 숨겨진, 때로는 공공연한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각각의 싸움은 그때마다 대대적인 사회의 혁명적 재편 또는 경쟁하는 계급들의 공동파멸로 끝났다.

이전의 역사적 시대에서는 거의 모든 곳에서 사회가 다양한 질서, 잡다한 사회적 서열의 등급으로 복잡하게 배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대 로마에는 귀족, 기사, 평민, 노예가 있었고, 중세에는 봉건영주, 가신(家臣), 길드장인, 직인, 도제, 농노가 있었다. 이들 계급의 거의 대부분은 또 부수적인 등급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봉건사회의 폐허로부터 싹튼 현대 부르주아사회는 계급적대를 없애지 못했다. 단지 낡은 것들 대신 새로운 계급, 새로운 억압의 조건, 새로운 투쟁형태들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 부르주아지의 시대는 명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계급적대를 단순화시킨 것이다. 전체 사회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양대 적대적 진영으로, 서로 직면하고 있는 양대 계급으로 점점 더 분열되어 가고 있다.

중세 농노로부터 초기 도시의 시민이 생겨났으며, 이 시민으로부터 부르주아지의 최초 분자들이 발전해 나왔다.

아메리카의 발견, 케이프 항로의 발견은 떠오르는 부르주아지를 위한 신선한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동인도와 중국의 시장, 아메리카의 식민지화, 식민지와의 무역, 교환수단의 상품의 전반적인 증가는 상업과 해운업 및 공업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충격을 가하였으며, 또 그럼으로써 비틀거리는 봉건사회내의 혁명적 요소에게는 급속한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폐쇄적 길드가 산업생산을 독점하고 있던 봉건적 산업체계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시장이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를 대신한 것이 곧 매뉴팩처 체계였다. 길드장인은 매뉴팩처 중간계급에 의해 밀려났으며, 서로 다른 자치적 길드들 간의 분업은 사라지고 각 공장 내에서의 분업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시장은 꾸준히 성장했으며, 수요 또한 계속 상승하고 있었다. 그래서 매뉴팩처조차도 이제 불충분한 것이 되었다. 또한 증기와 기계가 산업생산을 혁명적으로 발전시켰다. 매뉴팩처의 위치는 거대한 현대산업으로 대체되고 산업 중간계급의 위치는 산업 백만장자, 전체 산업부대의 지휘관, 현대 부르주아지가 차지하게 되었다.

현대산업은 아메리카의 발견으로 길이 트인 세계시장을 확립했다. 세계시장은 상업, 해운업, 육상교통의 엄청난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발전은 거꾸로 산업의 확장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즉 공업, 상업, 해운업, 철도가 확장되는 것과 똑같은 비율로 부르주아지는 발전했으며 자신의 자본을 증가시켰고, 중세시대로부터 이어 내려온 모든 계급을 뒷전으로 밀어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현대 부르주아지 자체가 긴 발전과정의 산물이며, 생산양식과 교환양식에서의 일련의 혁명이 낳은 산물임을 알 수 있다.

부르주아지의 각 발전단계에는 그에 상응하는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진보가 뒤따랐다. 봉건귀족의 지배하에서는 피억압계급으로, 중세 코뮨에서는 무장자치단체--어느 곳에서는 자립적 도시공화국(이탈리아와 독일), 또 어느 곳에서는 군주의 과세대상인 것제3신분겄(프랑스)--로 있던 부르주아지는 이후 메뉴팩처 시기에는 귀족에 대한 대항세력으로서, 사실상 일반적으로는 대군주들의 초석으로서 반(半)봉건군주 또는 절대군주에 봉사했으며, 현대산업과 세계시장이 확립되면서부터는 마침내 스스로의 힘으로 현대의 대의제국가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현대국가의 집행기구는 단지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동사를 관리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부르주아지는 매우 혁명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지배를 확립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든 봉건적, 가부장적, 전원적 관계를 종식시켜 왔다. 부르주아지는 인간을 것타고난 상하관계겄에 묶어 놓는 잡다한 봉건적 끈을 가차없이 끊어버렸으며, 그 외의 모든 인간의 관계를 적나라한 이기심, 냉혹한 것현금지불관계겄로만 만들어 놓았다. 또한, 가장 신성한 종교적 정열의 환희, 기사도적 열정의 환희, 세속적 감상주의의 환희를 자기중심적 타산이라는 얼음같이 차디찬 물 속에 빠뜨려버렸다. 또, 개인의 존엄성을 교환가치로 용해시켜 버렸으며, 결코 무효화될 수 없이 공인된 무수한 자유 대신 저 자유무역이라는 단 하나의 파렴치한 자유를 세워 놓았다. 한 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정치적 환상으로 가려진 착취를 적나라하고 후안무치하고 노골적이고 야수 같은 착취로 대체한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지금까지 존경과 경건한 경외심으로 받들어졌던 모든 직업으로부터 그 후광을 걷어냈다.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과학자를 자신이 보수를 주는 임금노동자로 전환시켜 버린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가족으로부터 그 감정의 장막을 찢어내고 가족관계를 단순한 돈의 관계로 만들었다.

부르주아지는 복고주의자들이 그토록 경애해마지 않는 중세시대의 야수같은 힘의 과시가 어떻게 하여 가장 게으른 나태로써 훌륭히 보완되는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가 과연 무엇을 낳을 수 있는가를 처음으로 보여준 예였다. 부르주아지는 이집트 피라밋이나 로마의 수도(水道), 고딕 성당을 훨씬 능가하는 기적을 이룩했다. 이전의 모든 민족대이동이나 십자군 따위의 견주지도 못할 원정들을 감행한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끊임없이 생산도구를 혁명적으로 개조하고, 그럼으로써 생산관계를 개조하며, 또 그와 더불어 사회관계 전체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 반면, 이전의 모든 산업 계급들에게는 낡은 생산양식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자신의 1차 존재조건이었다. 끊임없는 생산의 혁명적 발전, 모든 사회적 조건들의 부단한 교란, 항구적인 불안과 동요는 부르주아 시대의 이전의 모든 시대를 구분 짓는 특징이다. 모든 고정되고 꽁꽁 얼어붙은 관계들, 이와 더불어 고색창연한 편견과 견해들은 사라지고, 새로이 형성된 모든 것들은 골격을 갖추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딱딱한 것은 모두 녹아 사라지고, 거룩한 것은 모두 더럽혀지며, 마침내 인간은 냉정을 되찾고 자신의 실제 생활조건, 자신과 인류의 관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생산물을 팔 수 있는 시장을 끊임없이 확장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으로 인해 지구상의 모든 구석구석을 누벼야 한다. 부르주아지는 가는 곳마다 둥지 틀고 자리잡고 연고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세계시장의 착취를 통하여 각 나라의 생산과 소비에 범세계적인 성격을 부여해왔다. 복고주의자들에게는 매우 유감이겠으나 부르주아지는 산업의 발 밑으로부터 산업이 딛고 서 있는 일국적 기반을 빼앗아냈다. 기존에 확립된 모든 일국적 산업들은 이미 파괴되었거나 나날이 파괴되어 가고 있다. 모든 문명민족들이 생사를 걸고 도입하려 하는 새로운 산업, 이제 더 이상 토착 원료자원을 가공하지 않고 가장 먼데서 온 원료자원을 가공하면서도 그 생산물은 국내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구석에서 소비되는 새로운 산업이 그 낡은 산업들을 몰아내고 있다. 그 나라의 생산물로 충족되던 낡은 욕구 대신에, 먼 나라 먼 토양의 생산물로 충족될 수 있는 새로운 욕구가 생겨난다. 낡은 지역적, 민족적, 단절과 자급자족 대신 모든 방면에서의 상호교류 민족들간의 보편적 상호의존이 나타난다. 이는 물질적 생산뿐 아니라 정신적 생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개별 민족의 지적 창조물은 공동의 재산이 된다. 민족적 편향성과 편협성은 점차 불가능해지며, 수많은 민족적, 지역적 문학들로부터 하나의 세계문학이 생겨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생산도구가 급속히 향상되고 교통수단이 엄청나게 개선됨으로써, 가장 미개한 민족을 포함하여 모든 민족을 문명화시킨다. 상품의 저렴한 가격은 모든 만리장성을 무너뜨리고 외국인에 대한 미개인의 매우 고집스런 증오를 굴복시키는 대포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에게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채택할 것이냐 죽을 것이냐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며, 가지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도입할 것 즉, 부르주아 자체가 될 것을 강요한다. 한 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기자신의 모습 그대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시골을 도시의 지배에 복속시켰다. 부르주아지는 거대도시들을 만들었고, 농촌에 비해 도시인구를 엄청나게 증가시켰으며, 이를 통해 상당 부분의 인구를 농촌생활의 백치상태로부터 구출해냈다 .또한 시골이 도시에 종속되도록 만든 것과 똑같이 미개국과 반미개국들이 문명국들에게, 농민의 나라가 부르주아의 나라에게, 동양이 서양에게 종속되도록 만들었다.

부르주아지는 인구, 생산수단, 재산의 분산된 상태를 점차 제거하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인구를 한데뭉치고, 생산수단을 집중시켰으며, 재산을 소수의 손에 집적시켰다. 이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로 정치적 집중이 이루어졌다. 개별적 이해관계와 법률, 정부, 조세제도를 갖고 있던 독립적 지역 또는 그것들과 대충 관련된 지역들은 하나의 정부, 하나의 법조문, 하나의 일국적 계급이해, 하나의 국경, 하나의 관세를 지닌 하나의 나라로 뭉치게 되었다.

부르주아지는 백년 남짓한 자신의 지배기간 동안 이전의 모든 세대들이 이루어낸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거대하고 엄청난 생산력을 창출했다.

인간에 대한 자연력의 복속, 기계, 공업과 농업에서의 화학의 응용, 기선, 철도, 전기통신, 경작을 위한 전 토지의 개간, 운하 건설, 땅에서 솟아난 듯한 거대한 인구--이전세기에 그러한 생산력이 사회적 노동의 품속에 잠자고 있으리라고 예감이나마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할 수 있다. 부르주아지가 딛고 서 있는 토대인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은 봉건사회속에서 생성된 것이다. 이들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이 특정한 발전단계에 이르자, 봉건사회가 생산하고 교환하는 조건, 농업과 제조업의 봉건적 조직, 한마디로 말해, 봉건적 소유관계는 이미 발전되어 있는 생산력과 더 이상 양립할 수 없게 되었으며 오히려 그만큼의 질곡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것들은 산산이 부서져야 했으며, 실제로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그 자리에는 자유경쟁이 대신 들어섰으며, 또 자유 경쟁에 맞는 사회적, 정치적 구조가 뒤따랐고, 부르주아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지배가 뒤따랐다.

지금 우리 눈앞에도 비슷한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 자신의 생산관계, 교환관계, 소유관계를 가지고 있는 현대 부르주아사회, 엄청난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을 출현시킨 이 사회는 자기가 주술로 불러낸 명부(冥府)세계의 힘을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하게 된 마법사와도 같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산업과 상업의 역사는 오직 현대적 생산조건에 대한, 또 부르주아지와 그 지배의 존재조건인 소유관계에 대한 현대적 생산력의 반란의 역사일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주기적으로 일어나면서 갈수록 더 한층 위협적으로 전체 부르주아사회의 존망을 시험대에 올려놓는 상업공황만을 언급해도 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공황에서는 기존 생산물뿐 아니라 이전에 창조된 생산력의 거의 대부분이 주기적으로 파괴된다. 또한 이전의 모든 시대에는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졌을 전염병, 즉 과잉 생산의 전염병이 번지게 된다. 사회는 갑자기 순간적인 야만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마치 기근이나 전면전의 황폐로 인해 모든 생존수단의 공급이 차단된 것처럼 된다. 산업과 상업은 파괴된 듯이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과도한 문명화, 과도한 생존수단, 과도한 산업, 과도한 상업 때문이다. 사회의 수중에 있는 생산력은 더 이상 부르주아적 소유조건을 더 한층 발전시키는 데로 향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생산력은 소유조건에 비해 너무 강력해져서 오히려 그것에 의해 질곡당하며, 질곡을 극복하자마자 생산력은 부르조아사회 전체를 무질서하게 만들고 부르주아적 소유의 존재를 위태롭게 만든다. 부르주아사회의 여러 조건은 생산력이 만들어낸 부를 포괄하기에는 너무 협소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부르주아지는 어떻게 이러한 공황을 극복하는가? 한편으로는 생산력의 대향 파괴를 강화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을 정복하고 기존의 시장을 더욱 철저하게 착취함으로써 극복한다. 달리 말해 그것은 보다 범위가 넓고 보다 파괴적인 공황을 위한 길을 닦으며, 공황을 예방하는 수단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봉건제를 무너뜨렸던 무기가 이제 부르주아지 자신을 겨냥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자신을 죽이는 무기를 주조했을 뿐 아니라 이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인 현대 노동계급, 곧 프롤레타리아들도 탄생시켰다.

부르주아지, 즉 자본이 발전하는 것과 똑같은 정도로 프롤레타리아트, 즉 현대 노동계급도 발전한다. 이들은 일거리가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으며, 그들의 노동이 자본을 증대시키는 한에서만 일거리를 찾을 수 있다. 이들 노동자는 다른 보통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을 조금씩 팔아야 하는 하나의 상품이며, 따라서 경쟁의 성패 여하에, 시장의 동요 여하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기계의 광범위한 활용과 분업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은 모든 개인적 성격을 잃었으며, 그 결과 노동자에 대한 매력도 사라졌다. 노동자는 이제 기계의 부속물이며,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가장 단순하고 가장 단조로우며 가장 쉽게 획득한 기술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의 생산비용은 거의 전적으로 그가 자신을 유지하고 종족을 번식시키는데 필요한 생존수단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상품의 가격, 곧 노동의 가격은 그 생산비용과 같다. 그러므로 노동에 대해 느끼는 반발심이 강할수록 임금은 감소한다. 그뿐 아니라 기계의 사용과 분업이 증가할수록, 노동시간이 연장되거나 주어진 시간 내에 강제된 노동량이 증대하거나 기계 속도가 빨라지거나 하는 등으로 인해 고통스런 짐 또한 증가한다.

현대산업은 가부장적 장인의 작은 작업장을 산업자본가의 거대한 공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공장으로 결집된 노동자대중은 군대식으로 편성된다. 그들은 산업군대의 사병(私兵)으로써 장교, 하사관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위계의 지휘하에 있다. 그들은 부르주아적 계급, 부르주아국가의 노예일 뿐 아니라, 날이 갈수록 시간이 갈수록 기계에 의해, 관리자에 의해, 무엇보다도 개별 부르주아적 공장주 자신에 의해 노예화되고 있다. 이러한 전횡은 영리가 그 목표이자 목적임을 노골적으로 선언하면 할수록 더 한층 인색해지고 증오스러워지고 쓰라린 것이 된다.

육체 노동에 필요한 기술과 발휘되는 힘이 줄어들수록, 바꿔 말해서 현대산업이 발전할수록 더 한층 남성의 노동은 여성의 노동으로 대체된다. 연령과 성별의 차이는 더 이상 노동계급에게 사회적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연령의 성별에 따라 사용하는 값이 다르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노동의 도구인 것이다.

지금까지 노동자에 대해 공장주의 착취가 끝나고 노동자가 임금을 현금으로 받게 되자마자 부르주아적의 기타 부분, 즉 집 주인, 상점 주인, 전당포 주인등이 노동자에게 달려든다.

도매상, 상업주, 일반적으로 은퇴한 상인들, 수공업자와 농민 등 중간계급의 하층은 점차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그들의 영세자본으로는 현대산업이 움직이는 규모를 감당할 수 없고, 대자본가와의 경쟁에서 뒤쳐지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생산방식으로 인해 그들의 전문화된 기술이 쓸모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계급의 인구로부터 충원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양한 발전단계를 거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생겨나자마자 부르주아지와의 투쟁도 시작된다. 처음에는 개별 노동자들이 싸움을 시작했으나 다음에는 한 공장의 근로자들이, 그 다음에는 한 직종, 한 지역의 직공들이 자신들을 직접 착취하는 개별 부르주아를 상대로 싸우게 된다. 그들은 부르주아적 생산조건에 대해서가 아니라 생산도구 자체에 대해서 공격을 가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노동과 경쟁하는 수입품을 쳐부수며, 기계를 산산조각내고, 공장을 불지르며, 사라져버린 중세시대 근로자의 지위를 무력으로 회복하고자 한다.

이 단계에서 노동자는 아직 전국에 흩어져 있고 자기들 간의 상호경쟁으로 분열되어 있는 지리멸렬한 대중에 머물러 있다. 설사 그들이 모여 보다 긴밀한 결합체를 이룬다 해도 그것은 아직 그들 자신이 연합한 결과가 아니라 부르주아지가 연합한 결과이다. 부르주아계급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프롤레타리아트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으며, 게다가 아직 당분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적의 적, 즉 절대군주제의 잔재인 지주, 비산업부르주아, 쁘띠부르주아지와 싸우는 것이다. 이리하여 전체 역사적 운동은 부르주아적 수중에 집중된다. 그렇게 얻어진 승리는 모두 부르주아지를 위한 승리인 것이다. 그러나 산업이 발전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숫자가 증가할 뿐 아니라 보다 큰 무리로 집중되어 힘이 더욱 성장하며, 그 힘을 더욱 자각하게 된다. 기계가 노동의 모든 차이들을 소멸시키고 거의 모든 곳에서 임금을 동일하게 낮은 수준으로 감축시키는 것과 비례하여 프롤레타리아트 대열 내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생활조건은 더욱 더 평준화된다. 부르주아들 간의 경쟁이 격화되고 그 결과 상업공황이 일어나면서 노동자의 임금은 갈수록 동요하게 된다. 기계가 급속히 발전하고 끊임없이 개선되면서 노동자의 생활은 갈수록 불안정해진다. 따라서 개별 근로자와 개별 부르주아 간의 충돌은 갈수록 두 계급간의 충돌이라는 성격을 띠게 된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에 반대하는 결사체(노동조합)를 결성하기 시작하며, 임금율을 높이기 위해 한데 뭉치고, 때때로 일어날 충돌에 미리 대비하기 위해 단체를 창건한다. 여기저기에서 싸움은 폭동으로 터지게 된다.

때때로 노동자는 승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다. 싸움의 실제적 결실은 직접적인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팽창하는 노동자들의 단결에 있다 .현대산업이 만들어낸 전달 수단으로 인해 여러 지역의 노동자들이 서로 접촉할 수 있게 됨으로써 단결은 한층 확대된다. 바로 이 접촉이야말로 같은 성격을 지니는 수많은 지역적 투쟁을 계급들간의 하나의 전국적 투쟁으로 집중시키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다. 중세 시대의 시민이 옹색한 도로를 가지고 수백 년의 기간을 거쳐 달성한 그 단결을 한 대 프롤레타리아는 철도에 힘입어 수 년간 이룩한다.

이렇게 프롤레타리아를 하나의 계급으로, 나아가 하나의 정당으로 조직하는 일은 노동자 자신들 간의 경쟁으로 인해 계속 저해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럴수록 항상 다시 솟아오르며, 강해지며, 굳어지며, 거세지고 있다. 그 조직은 부르조아지 자체의 분열을 이용하여 노동자의 특정한 이해에 대한 입법적 승인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영국에서는 10시간 노동법안이 통과되었다.

기존 사회의 계급들 간에 일어나는 모든 충돌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과정을 촉진시킨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항상적인 싸움속에 있음을 깨닫는다. 부르주아지는 처음에는 귀족과, 이후에는 부르주아지 가운데 산업의 진보에 대해 적대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게 된 일부분과, 그리고 외국의 부르주아지와는 항상, 싸움을 벌여왔다. 이 모든 싸움에서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호소하고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으며, 그리하여 그들을 정치무대로 끌어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결국 부르주아지는 스스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기자신의 정치교육과 일반교육의 요소들을 공급하게 된다. 달리 말해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신과 맞서 싸울 무기를 주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본 대로 지배계급의 모든 분파들은 산업의 진보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하거나, 적어도 자신의 존재조건을 위협당하게 된다. 이들 역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계몽과 진보의 새로운 요소를 공급한다.

마지막으로, 계급투쟁이 결정적인 순간에 다다르게될 때 지배계급 내부에서, 아니 사실상 기존 사회 전체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붕괴과정은 매우 격렬하고 강렬한 성격을 띠게 되므로 지배계급의 일부가 떨어져나와 미래를 자기 수중에 장악하고 있는 혁명적 계급의 편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찍이 귀족의 일부가 부르주아지 편으로 넘어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부르주아적 한 부분, 특히 역사적 운동 전반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으로 스스로를 끌어올린 부르주아적 사상가들의 부분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으로 넘어온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대립하고 있는 모든 계급들 가운데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진정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 다른 계급들은 현대산업이 전진함에 따라 몰락하며 결국 사라져가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현대 산업의 특수하고도 본질적인 산물이다.

중간계급 하층, 소규모 공장주, 상점주, 기능공, 농민 등 이들 모두는 중간계급의 각 부분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키지 않기 위해서 부르주아지에 맞서 싸운다. 그러므로 그들은 혁명적이 아니고 보수적이다. 게다가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후진시키려 하기 때문에 반동적이기도 하다. 간혹 그들이 혁명적인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로의 전락이 임박했음을 예감했을 경우에만 그러하다. 그때 그들은 자신의 현재 이익이 아닌 미래 이익을 수호하며, 자신의 입장을 버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낡은 사회의 최하층에서도 내팽개쳐진, 수동적으로 썩어가는 대중인 것위험한 계급겄, 사회적 쓰레기는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인해 곳곳에서 운동 속에 휩쓸릴 수 있으나, 그 생활조건 때문에 그들은 거의가 반동적 음모에 의해 매수되는 도구의 일부가 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조건들 가운데 낡은 사회의 조건들은 대부분 이미 사실상 곤궁에 처해있다. 프롤레타리아는 재산도 없고, 처자와의 관계도 이제 더 이상 부르주아적 가족관계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으며, 영국에서나 프랑스에서나 미국에서나 독일에서나 현대적 산업노동, 자본에 대한 현대적 종속으로 인해 그는 일체의 민족적 성격을 잃어버렸다. 그에게 법, 도덕, 종교 따위는 바로 그만큼의 부르조아적 편견과 똑같으며, 그 뒤에는 그만큼의 부르조아적 이익이 매복해 있을 뿐이다.

선행했던 모든 지배계급들은 사회의 대부분을 자신의 전유(專有)조건하에 종속시킴으로써 기존의 지위를 강화하고자 했다. 프롤레타리아는 자기자신의 이전의 전유양식을 폐지하지 않고서는, 또 그럼으로써 다른 모든 전유양식을 폐지하지 않고서는, 또 그럼으로써 다른 모든 전유양식까지 폐지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생산력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들은 획득하고 강화시킬 그 무엇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의 사명은 지금까지 개인재산을 보호하고 보장해 온 모든 것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전의 역사적 운동은 모두 소수의 운동이며 소수의 이익을 위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거대한 다수의 자의식적이고 자주적인 운동이며, 거대한 다수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우리 현 사회의 최하층인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적 사회의 모든 상위층들이 사라지지 않고서는 움직일 수도 일어설 수도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의 투쟁은 처음에, 내용에서는 아니더라도 형식에서는 일국적인 투쟁이다. 따라서 각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당연히 무엇보다 먼저 자국 부르조아지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일반적인 발전국면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기존 사회 내에서 벌어지는 어느 정도 은폐된 내전을 추적하여, 그 내전이 공개적인 혁명으로 터져나오고 부르조아지를 폭력적으로 타도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를 위한 토대를 놓는 지점에까지 이르렀다.

이미 보았듯이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형태는 억압계급과 피억압계급간의 적대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한 계급을 억압하려면 그 계급이 적어도 자신의 노예적 존재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일정한 조건이 보장되어야 한다. 농노제시대의 농노가 코뮨의 구성원으로 발전해 나갔듯이, 봉건적 절대주의의 멍에 속에 있던 쁘띠부르조아는 부르조아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 노동자는 산업의 진보에 따라 떠오르기는커녕 자기 계급이 존재조건 아래로 더욱 가라앉는다. 노동자는 빈민이 되며, 빈곤은 인구나 부의 증가보다 더 빨리 발전한다. 여기서, 부르조아지가 사회의 지배계급이 되거나 자신의 존재조건을 고압적인 법률로 사회에 강제하는 따위는 이제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즉, 부르조아지는 자신의 노예제 내에서 노예의 생존을 보장해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즉 노예가 자기를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노예를 먹여 살려야 하는 상황으로 노예를 빠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지배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사회는 이제 이 부르조아지 아래에서 살 수 없다. 달리 말해 부르조아지의 존재는 더 이상 사회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부르조아계급의 존재와 지배를 위한 본질적 조건은 자본의 형성과 증대이며, 자본의 조건은 임금노동이다. 임금노동은 오직 노동자들 간의 경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타의적이기는 하지만 부르조아지가 촉진시키는 산업의 진보는 경쟁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고립 대신 결사로 인한 혁명적 결합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현대산업의 발전은 부르조아지가 생산물을 생산하고 전유하는 바로 그 토대를 그 발 밑에서 무너뜨리는 셈이다. 결국 부르조아지가 생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무덤을 파는 자일뿐이다. 부르조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양자 모두 불가피한 것이다.

 



II.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자는 전체 프롤레타리아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공산주의자는 노동계급의 당들과 대립하는 별도의 당을 결성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지는 이해와 별도로 분리된 이해를 가지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자신만의 분파적 원칙을 세워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이 원칙에 뜯어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서만 다른 노동계급의 당들과 구별된다. (1) 각국 프롤레타리아의 일국적 투쟁에서, 일체의 국적으로부터 독립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 이해를 제기하고 전면에 내세운다. (2) 부르조아지에 반대하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거치는 다양한 발전단계에서, 언제 어디서나 그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는 한편으로 실천적인 면에서는 모든 나라 노동계급 당들 가운데 가장 선진적이고 결의에 찬 부분으로서 다른 모든 당들을 밀고 나아가며, 다른 한편으로 이론적인 면에서는 거대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비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행노선, 조건, 궁극적인 전반적 결과들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공산주의자의 당면 목적은 다른 모든 프롤레타리아 당들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시키고, 부르조아 지배를 타도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도록 하는데 있다.

공산주의자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지는 이해와 별도로 분리된 이해를 가지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자신만의 분파적 원칙을 세워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이 원칙에 뜯어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서만 다른 노동계급의 당들과 구별된다. (1) 각국 프롤레타리아의 일국적 투쟁에서, 일체의 국적으로부터 독립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이해를 제기하고 전면에 내세운다. (2) 부르조아지에 반대하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거치는 다양한 발전단계에서, 언제 어디서나 그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는 한편으로 실천적인 면에서는 모든 나라 노동계급 당들 가운데 가장 선진적이고 결의에 찬 부분으로서 이론적인 면에서는 거대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비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행노선, 조건, 궁극적인 전반적 결과들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공산주의자의 당면 목적은 다른 모든 프롤레타리아 당들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시키고, 부르조아 지배를 타도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도록 하는데 있다.

공산주의자의 이론적 명제들은 결코 이러저러한 자칭 보편적 개혁가가 발명 또는 발견한 사상이나 원칙들에 기초하지 않는다.

그 명제들은 단지 일반적인 견지에서 현존하는 계급투쟁으로부터, 바로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운동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실제적 관계들을 표현할 뿐이다. 현존하는 소유관계의 폐지는 결코 공산주의의 명백한 특질이 아니다.

과거의 모든 소유관계는 역사적 조건의 변화에 따른 역사적 변화에 항상 종속되어 왔다.

예를 들어 프랑스혁명은 부르조아적 소유의 편에서 봉건적 소유를 폐지했다.

공산주의의 명백한 특질은 소유 일반의 폐기가 아니라 부르조아적 소유의 폐지이다. 그런데 현대 부르조아적 사유재산은 게급적대에 기초한, 소수에 의한 다수의 착취에 기초한 생산물의 생산, 전유 체제의 최종적이고도 가장 완벽한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산주의자의 이론은 사유재산의 폐지라는 단 하나의 문구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공산주의자는 한 사람이 자기 노동의 결실로서 사적으로 얻은 재산, 이른바 모든 사적 자유, 행동, 자주성의 기반이라고 일컬어지는 재산에 대한 권리를 폐지하려 한다고 비난받아 왔다.

자기가, 자신의 힘으로, 애써 벌어들인 재산이라니!

그것은 부르조아 재산형태에 선행하는 소기능공이나 소농민의 재산을 뜻하는가? 그것이라면 폐지할 필요도 없다. 산업의 발전이 이미 상당히 파괴해 왔고 지금도 나날이 파괴하고 있으므로.

그렇다면 현대 부르조아적 사유재산을 뜻하는가?

그러나 임금노동을 착취하는 재산, 새로운 착취를 위한 임금노동이 새로운 공급을 창출하는 조건이 없이는 증가될 수 없는 재산이다. 현재의 소유형태는 자본과 임금노동의 적대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제 이러한 적대의 양 측면을 검토해 보자.

자본가가 된다는 것은 생산에서 순수히 사적인 지위뿐 아니라 사회적인 지위도 갖는다는 것이다. 자본은 집단적 산물이며, 오직 많은 구성원들의 공동 행동에 의해서만, 아니 궁극적으로는 전사회 구성원들의 공동행동에 의해서만 운동할 수 있다.

요컨대 자본은 사적인 힘이 아니라 사회적인 힘이다.

그러므로 자본이 공동재산, 전 사회 구성원의 소유로 바뀐다고 해서 개인적 소유가 사회적 소유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변화되는 것은 단지 소유의 사회적 성격뿐이다. 소유는 그 계급적 성격을 잃는다.

이제 임금노동을 보자.

임금노동의 평균가격은 최저임금, 즉 노동자를 노동자로서 겨우 생존하게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존수단의 양이다. 그러므로 임금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전유하는 것으로는 단지 그 생존의 연장과 재생산만을 충족시킬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결코 그러한 노동생산물의 사적 전유를 폐지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생활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것일 뿐, 다른 사람의 노동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잉여를 남기지 낳는다. 우리는 오로지 그러한 전유의 비참한 성격을 제거하고자 할뿐이다. 그러한 전유하에서 노동자는 단지 자본을 증대시키기 위해 살아가며, 지배 계급의 이익이 요구하는 한에서만 살아갈 것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부르조아사회에서 산 노동은 축적된 노동을 증가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반면 공산주의사회에서 축적된 노동은 노동자의 생존을 넓히고 풍요롭게 하며 촉진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르조아사회에서는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지만, 공산주의사회에서는 현재가 과거를 지배한다. 부르조아사회에서 자본은 독립적이고 개성을 갖는 반면, 살아 있는 사람은 종속적이고 개성을 갖지 못한다.

부르조아는 이러한 상태의 폐지를 개성과 자유의 폐지라고 말한다! 그것은 옳다. 그것은 바로 부르조아적 개성, 부르조아적 독립성, 부르조아적 자유의 폐지를 목표로 하는 것이므로.

현재의 부르조아적 생산조건하에서 자유라 할 때 그것은 자유거래, 자유매매를 뜻할 뿐이다.

그러나 매매가 사라진다면 자유매매 역시 사라진다. 자유매매에 관한 이야기, 그 밖의 자유 일반에 관한 우리 부르조아지의 것호언장담겄 따위는 모두,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다면 단지 중세시대 속박된 상인들의 제한된 매매와 대비에서만 그러할 뿐, 매매, 부르조아적 생산 조건, 그리고 부르조아지 자체에 대한 공산주의적 폐지와 대비될 때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당신은 우리가 사유재산을 폐지하려 하는데 대해 경악한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9./10의 인구에게 사유재산은 이미 제거되었다. 소수에게 사유재산이 있는 이유는 순전히 그 9/10의 수중에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사회의 광범한 대다수에게 일체의 재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그 존재의 필요조건으로 하는 재산형태를 제거하려 한다고 우리를 비난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당신은 우리가 당신의 재산을 제거하려한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다. 우리는 그것을 하려 한다.

노동이 더 이상 자본이나, 화폐, 지대로, 독점 가능한 사회적 힘으로 전화될 수 없게 되는 순간부터, 다시 말해 개인소유가 더 이상 부르조아적 소유로, 자본으로 전환될 수 없게 되는 그 순간부터 개성은 사라진다고 당신은 말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것개인겄이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부르조아적 소유자, 중간계급 소유자를 뜻하는 것임을 고백해야 한다. 사실 그런 개인은 깨끗이 일소되어야 한다.

공산주의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사회의 생산물을 전유할 힘을 박탈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전유를 통하여 다른 사람의 노동을 종속시키는 힘을 박탈할 뿐이다.

공산주의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사회의 생산물을 전유할 힘을 박탈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전유를 통하여 다른 사람의 노동을 종속시키는 힘을 박탈할 뿐이다.

사유재산이 폐지되면 모든 노동이 중단되고 곳곳에서 나태가 우리를 덮칠 것이라는 반대가 있어왔다.

그러나 그에 따른다면 이미 오래 전에 부르조아사회는 순전히 게으름으로 인해 파멸해 버려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하는 사회 구성원들은 아무것도 갖지 못하며,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은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반대는 모두 자본이 없다면 임금노도도 있을 수 없다는 동어반복의 또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물질적 생산물의 공산주의적 생산, 전유양식에 대해서 제기된 모든 반대는 똑같은 방식으로 정신적 생산물의 공산주의적 생산, 전유양식에 대해서도 제기되어 왔다. 부르조아지에게는, 계급적 소유의 소멸이 곧 생산 자체의 소명이듯이, 계급문화의 소명은 모든 문화의 소멸과 같다.

부르조아지가 잃고서 애통해하는 바로 그 문화란 실상 엄청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단지 하나의 가계로서 행동하기 위한 훈련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부르조아적 소유의 폐지를 주장하는 데 대해 당신이 자유, 문화, 법 따위 당신의 부르조아적 개념 기준을 적용하려 하는 한 당신은 우리와 말다툼할 필요가 없다. 당신의 법이란 것이 실상은 당신의 계급의지, 즉 당신 계급의 경제적 존재 조건에 의해 그 본질적 성격과 방향이 규정되는 의지가 법제화된 것에 지나지 않듯이, 당신의 바로 그 사상 역시 당신의 부르조아적 생산조건과 부르조아적 소유조건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현재 생산양식과 소유형태--생산의 진보 속에서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역사적 관계--로부터 나오는 사회적인 형태들이 자연과 이성의 영원한 법칙인 것처럼 여기는 이기적이고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당신에 선행했던 모든 지배계급들도 가지고 있었다. 고대적 소유에서 당신이 똑똑히 본 것, 봉건적 소유에서 당신이 인정한 것을 물론 당신은 당신 자신의 부르조아적 소유형태의 경우에는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가족의 폐지라니! 공산주의자의 이 파렴치한 주장에는 가장 급진적인 사람들까지도 분노하고 있다.

지금의 가족, 부르조아적 가족이 서 있는 토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이며 사적 이익이다. 따라서 이 가족이 완전히 발전한 형태는 단지 부르조아지에게만 존재할 뿐이다. 반면 이러한 상태가 진행되면 결국 프롤레타리아에게는 가족이 실제로 사라질 것이며, 공창(公娼)만이 남을 것이다.

당신은 우리가 부모에 의한 자식의 착취를 중지시키려 한다고 해서 비난하는가? 그것도 죄라면 우리는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가 가정교육을 사회교육으로 바꾸려는 것을 모든 관계 중에 가장 성스러운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이 말하는 교육이란 뭔가! 당신의 교육 역시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에 의해, 학교 등을 통한 사회의 직, 간접적 개입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적인 것이 아닌가? 공산주의자는 교육에 대한 성격을 바꾸고, 지배계급의 영향으로부터 교육을 구출하려 할뿐이다.

가족과 교육에 관한, 부모와 자식의 성스런 관계에 관한 부르조아적 말장난은 현대산업의 활동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적인 것이 아닌가? 공산주의자는 교육에 대한 사회의 개입을 발명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개입의 성격을 바꾸고, 지배계급의 영향으로부터 교육을 구출하려 할뿐이다.

가족과 교육에 관한, 부모와 자식의 성스런 관계 관한 부르조아적 말장난은 현대산업의 활동에 의해 프롤레타리아들 간의 모든 가족적 유대가 끊어질수록, 그리고 그들이 자식들이 단순한 상품이나 노동도구로 바뀌어갈수록 더욱 혐오스러워진다.

그렇지만 너희 공산주의자들은 여성공유제를 도입하려는 게 아니냐고 전체 부르조아지는 소리 맞춰 악을 쓴다.

부르조아는 자기아내를 단지 생산도구로만 본다. 그는 생산도구는 공동으로 이용되어야 한다고 들었으므로 자연히 모든 것을 공유한다는 운명이 여성에게도 닥치리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목적하는 바는 단순한 생산도구로서의 여성의 지위를 없애버리려는 데 있다는 것을 그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공산주의자들이 이른바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건설하려 한다는 여성공유제에 대해 우리의 부르조아가 실제로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정말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거의 기억할 수 없을 정도의 먼 옛날부터 존재해 온 것이므로.

우리의 부르조아는 공창은 물론 자기 휘하에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아내와 딸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만족하지 않고 다른 부르조아의 아내를 유혹하는데 커다란 쾌락을 느낀다.

부르조아의 결혼은 사실상 부인공유제이다. 그러므로 설령 공산주의자가 비난받는다 하더라도 그 비난은 위선적으로 은폐된 여성공유제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합법화된 여성공유제를 도입하려 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현 생산제도의 폐지와 더불어 이 제도에서 생겨난 여성공유제, 즉 공창과 사창이 모두 폐지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나아가, 공산주의자는 나라와 국적을 폐지하려 한다고 비난받는다.

노동자에게는 나라가 없다.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빼앗을 수는 없는 일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지배권을 획득해야 하므로, 해당 민족의 영도적 계급으로 떠올라야 하므로, 자신이 스스로 그 민족을 구성해야 하므로, 비록 부르조아적 의미는 아니지만 그 자체가 민족인 것이다.

민족들 간의 민족적 차이와 적대는 부르조아지의 발전, 상업의 자유, 세계시장, 생사양식과 그에 따른 생활조건에서의 제일성 등으로 인해 날이 갈수록 사라져가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는 그것들을 한층 더 빨리 사라지게 할 것이다. 선진문명국의 통일행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방을 위한 1차 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개인에 의한 개인의 착취가 종식되는 것과 비례하여 민족에 의한 민족의 착취도 종식될 것이다. 민족 내에서 계급간의 적대가 사라질수록 민족간의 증오 또한 사질 것이다.

종교, 철학의 견지에서 또는 일반적으로는 이데올로기적 견지에서 나오는 공산주의에 대한 비난은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도 없다.

인간의 관념, 견해, 생각, 한 마디로 인간의 의식이 그의 물질적 존재조건, 사회관계, 사회생활이 변함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그리 깊은 직관을 필요하는가?

사상의 역사는 바로 물질적 생산이 변화하는 정도에 따라 정신적 생산이 그 성격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시대의 지배적 사상은 항상 지배계급의 사상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사회를 변혁하는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곧 낡은사회 내에서 새로운 사회의 요소들이 창조된다는 사실, 낡은 사상의 해체는 항상 낡은 존재조건의 해체와 보조를 같이 한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고대세계가 마지막 진통을 겪고 있을 때 고대종교는 기독교에 의해 정복되었다. 또 기독교 사상이 18세기에 이르러 합리주의 사상에 굴복했을 때 봉건사회는 당시의 혁명적 부르조아지와 목숨을 걸고 싸웠다. 종교적 자유와 양심의 자유라는 사상은 단지 지식의 영역에서도 자유경쟁이 지배한다는 것을 표현할 뿐이었다.

흔히 이렇게들 말한다. 겁의심할 바 없이 종교적, 도덕적, 철학적, 법적 사상은 역사발전과정에서 변형되어 왔다. 그러나 종교, 도덕, 철학, 정치학, 법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항상 살아남았다.겂

겁그밖에도 자유, 정의 등 어떠한 상회에도 공통적인 영원한 진리들이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영원한 진리, 모든 종교나 도덕을 새로운 토대 위에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폐지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는 과거의 모든 역사적 경험과 모순적으로 움직인다.겂

이러한 비난은 어디로 귀결되는가? 모든 과거 사회의 역사는 계급적대, 각 시대마다 각기 다른 형태를 취했던 적대의 발전사였다.

그러나 그 형태야 어떠하든 과거 모든 시대에 공통적인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곧 사회의 어느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착취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다종다양하다 하더라도 과거 시대의 사회적 의식은, 계급적대가 모두 없어지지 않으면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일정한 공동형태 또는 일반관념의 범위 내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은 극히 당연한 것이다.

공산주의혁명은 전통적 소유관계와의 가장 근본적인 결별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혁명의 발전은 전통적 사상과의 가장 근본적인 결별을 포함한다.

하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부르조아적 반론에 대해서는 이쯤 해두자.

우리는 앞에서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것, 민주주의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임을 보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조아지에게서 점차로 일체의 자본을 빼앗고, 모든 생산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총생산력을 가능한 한 빨리 증대시키게 될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소유권과 부르조아적 생산조건에 대한 전제적(專制的) 침해를 통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경제적으로는 불충분하고 무리한 듯이 보이지만 발전해 가는 가운데 스스로를 뛰어넘어 낡은 사회질서에 대한 더 이상의 침해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조치, 생산양식을 전면적으로 혁명화하는 수단으로서 불가피한 조치가 없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은 물론 나라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선진적인 나라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매우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1. 토지소유를 폐지하고 모든 지대를 공공의 목적으로 활용한다.

2. 소득에 대해 높은 누진과세를 적용한다.

3. 모든 상속권을 폐지한다.

4. 모든 망명자와 반역자의 재산을 몰수한다.

5. 국가자본과 배타적 독점을 가진 국립은행을 통하여 신용을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한다.

6. 전달, 운송수단을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한다.

7. 국가소유의 공장과 생산도구를 증대한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공동의 계획에 따라 토질을 개선한다.

8. 모두가 똑같이 노동의 의무를 진다. 특히 농업을 위한 산업군을 편성한다.

9. 농업과 제조업을 결합한다. 인구를 전국적으로보다 균등하게 분배함으로써 도시와 농촌간의 차별을 점차 폐지한다.

10. 공립학교에서 모든 어린이를 위한 무상교육을 실시한다. 현존하는 어린이의 공장노동을 폐지한다. 교육과 산업적 생산을 결합한다, 등등.

발전과정에서 계급적 파별이 없어지고 모든 생산이 광범위한 전국적 단체의 손에 집적되면, 공권력은 정치적 성격을 읽게 된다. 이른바 정치권력이란 본래 단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는 조직된 힘일 뿐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조아지와의 싸움에서 상황의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계급으로서 조직하게 되면, 또 혁명을 통해 지배계급으로 자라나고, 그 자체로 낡은 생산조건을 무력으로 없애버리게되면, 그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들 생산조건과 더불어 계급적대와 계급 일반의 존재조건을 없애버리게 되면, 그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들 생산조건과 더불어 계급적대와 계급 일반의 존재조건을 없애버리게 될 것이며, 또 그럼으로써 한 계급으로서 가지는 자신의 지배권도 폐지하게 될 것이다.

계급과 계급적대의 낡은 부르조아사회 대신 우리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단체를 가지게 될 것이다.

 


III. 사회주의, 공산주의 문헌

 

1. 반동적 사회주의

 

A. 봉건적 사회주의

 

프랑스와 영국의 귀족들은 그들이 가진 역사적 지위로 인해 현대 부르조아사회를 반대하는 소책자를 쓰는 것을 소명으로 하게 되었다. 1830년 프랑스 7월혁명과 영국의 개혁운동에서 이들 귀족은 다시 한 번 혐오스런 벼락부자에게 굴복했다. 그로부터, 중대한 정치투쟁은 매우 명약관화한 일이 되었다. 이들에게는 문헌투쟁만이 가능했지만 문헌의 영역에서조차 복고시기의 낡은 외침은 불가능해져 버렸다.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귀족들은 겉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피착취 노동계급의 이익만을 쫓아 부르조아지를 고발해야 했다. 이와 같이 귀족은 그들의 새로운 주인을 풍자하는 노래를 부르고 주인의 귀에 다가올 재난의 대한 불길한 예언을 속삭임으로써 보복을 꾀했다.

이렇게 하여 봉건적 사회주의는 생겨났다. 반쯤은 비탄으로 반쯤은 풍자로, 또 반쯤은 과거의 메아리로 반쯤은 미래의 위협으로, 때로는 신랄하고 재치 있는 가시 돋친 비판을 통해 부르조아지에게 철두철미 충격을 가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현대 역사의 행진을 전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결과는 항상 우스꽝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귀족은 사람들을 자기 주위로 결집시키기 위하여 기치를 들고 프롤레타리아 자선함을 흔들어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과 어울릴 때마다 그들의 엉덩이에 봉건 문장(紋章)이 찍힌 것을 보고는 불경스럽게 큰 웃음을 터뜨리며 돌아섰다.

프랑스 정통주의자와 것영국청년단겄의 일파도 이러한 희극을 연출했다.

봉건주의자는 그들의 착취양식이 부르조아지의 착취양식과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그들 역시 이제는 낡아빠졌지만 전혀 다른 상황과 조건에서 착취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지배하에서는 현대 프롤레타리아트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면서도, 현대 부르조아지가 그들 자신의 사회형태에서 나온 필연적 후예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그들의 비판이 가진 반동적 성격을 거의 감추지 않기 때문에, 부르조아지에 대한 그들의 주된 비난은 부르조아 체제하에서 낡은 사회질서를 철저히 분쇄해 버릴 운명을 진 한 계급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까지 지적하고 있다.

그들이 부르조아지를 호되게 비판하는 이유는 부르조아지가 단지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었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정치적 실천에서 그들은 노동계급에 반대하는 모든 강압조치에 동참하며, 일상생활에서는 온갖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산업의 나무에서 떨어진 황금사과를 줍기 위해, 그리고 진리, 사랑, 명예를 양모, 사탕무우, 주정(酒精)과 맞바꾸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것이다.

목사가 영주와 손잡고 나아갔듯이 성직자 사회주의는 봉건적 사회주의와 손잡았다.

기독교적 금욕주의에 사회주의 색채를 가미하는 것만큼 쉬운 일도 없다. 기독교는 원래 사유재산, 결혼, 국가를 비난해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대신 박애와 빈곤, 독신과 신체적 금욕, 수도원 생활과 교회를 설교해 오지 않았던가? 기독교적 사회주의는 단지 성직자가 귀족의 불만에 대해 봉헌하는 성수(聖水)에 지나지 않는다.

 

B. 쁘띠부르조아 사회주의

 

부르조아지가 파멸시킨 계급, 현대 부르조아사회의 대기 속에서 그 존재조건이 취약해지고 사멸한 계급은 봉건귀족만이 아니다. 중세의 시민이나 소농경영자는 현대 부르조아지의 선구자였다. 산업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거의 발전하지 못한 나라들에서 이들 두계급은 떠오르는 부르조아지와 더불어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현대 문명이 충분히 발달한 나라들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 사이에서 동요하며 부르조아사회의 보완물로서 자신을 계속 쇄신하는 쁘띠부르조아의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이 계급의 개별 구성원들은 자유경쟁으로 인해 끊임없이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한다. 현대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그들은 현대 사회의 독립적 부분으로서는 완전히 사라지고 제조업, 농업, 상업에서의 관리자, 토지관리인, 상점주로 거의 바뀌는 순간까지 눈 앞에 두게된다.

농민이 인구의 절반을 훨씬 넘는 프랑스 같은 나라들에서는, 부르조아지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에 서는 저술가들은 당연히 부르조아체제를 비판하는 데서 농민과 쁘띠부르조아의 기준을 사용해야 했으며, 이들 매개적 계급의 입장에서 노동계급을 위해 곤봉을 들어야 했다. 이리하여 쁘띠부르조아 사회주의가 생겨났다.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에서도 이 학파의 지도자는 시스몽디였다.

이 사회주의 학파는 현대 생산조건의 모순을 매우 날카롭게 분석했으며, 경제학자들의 위선에 찬 변명을 낱낱이 폭로했다. 그리고 기계와 분업의 파멸적 결과, 소수에게로의 자본과 토지 집적, 과잉생산과 공황을 논쟁의 여지없이 입증했다. 또한 그들은 쁘띠부르조아와 농민의 불가피한 몰락, 프롤레타리아트의 고통, 생산의 무정부성, 방치할 수 없는 부의 불평등한 분배, 국가들간의 파멸적 산업전쟁, 낡은 도덕적 유대의 해체, 낡은 가족관계, 낡은 국적 등을 지적했다.

그러나 설사 그 긍정적인 목적에서 보더라도 이 사회주의 형태는 낡은 생산수단과 교환수단 및 이와 더불어 낡은 소유관계와 낡은 사회로 되돌아가고자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현대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에 의해 파괴되어 왔고 또 파괴될 수밖에 없는 낡은 소유관계의 틀 내에 현대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을 가두고자 한다. 양자 어느 경우이거나 반동적이며 공상적이다.

그 최후의 주장은 제조업에서의 법인길드, 농업에서의 가부장적 관계이다.

결국 완강한 역사적 사실이 자기기만의 도취상태를 흩어버렸을 때 이러한 형태의 사회주의는 우울증의 비참한 발작으로 끝나버렸다.

 

C. 독일 사회주의 또는 것진정한겄사회주의

 

* 여기서 진정한의 뜻은 말뿐임을 말함.

 

프랑스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문헌은 권력을 갖고있는 부르조아지의 억압하에서 생겨났으며 그 권력에 대항하는 투쟁의 표현이었다. 이 문헌들은 독일에서 부르조아지가 봉건 절대주의와의 경쟁을 막 시작했을 무렵 독일로 유입되었다.

독일 철학자, 자칭 철학자, 그리고 재담꾼들은 이 문헌들을 열심히 읽어댔지만 이 저작들이 프랑스에서 독일로 옮겨올 때 프랑스의 사회적 조건이 같이 옮겨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잊고 말았다. 독일의 사회적 조건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이들 프랑스 문헌은 직접적인 실천적 의의를 모두 일었으며 순수히 문헌적인 의미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18세기 독일 철학자에게 제 1차 프랑스 혁명에서 나온 요구들은 것실천이성겄 일반의 요구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혁명적인 프랑스 부르조아지의 의지의 발현 또한 그들의 눈에는 순수의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의지, 일반적으로는 진정한 인간의지의 법칙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독일 저술가의 저작은 오로지 그들의 고대철학적 양심에 새로운 프랑스 사상을 조화시키는 것, 아니 그보다는 그들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버리지 않으면서 프랑스 사상을 접목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접목은 외국어가 사용되는, 즉 번역되는 것과 똑같은 식으로 이루어져있다.

수도사들이 어떻게 고대 이단(異端)의 저작들이 쓰여 있는 원고 위에 가톨릭 성자들의 따분한 생애를 덧썼던가는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독일 저술가들은 세 속의 프랑스 문헌을 가지고 이러한 과정을 거꾸로 밟았다. 그들은 프랑스 원본 아래 자신들의 철학적 헛소리를 써넣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그들은 화폐의 경제적 기능에 대한 프랑스 비판서 아래에는 것인간의 소외겄를 써넣었고, 부르조아 국가에 대한 프랑스 비판서 아래에는 것추상적 보편자의 예위겄를 써넣는 식이었다.

프랑스의 역사비판서에 이러한 철학적 문구들을 삽입하는 것에 대해 그들은 것행동의 철학겄, 것진정한 사회주의겄, 것 독일의 사회주의 과학겄, 것사회주의의 철학적 토대겄 따위의 작위를 수여했다.

이리하여 프랑스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문헌은 완전히 알맹이가 빠져버렸다. 또한 독일인의 손에서 이미 그 문헌은 한 계급과 다른 계급의 투쟁을 표현하지 않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독일인은 것프랑스의 편향겄을 극복했다고 보았으며, 진정한 요구가 아니라 진리의 요구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이 아니라 인간본질의 이익을, 즉 아무 계급에도 속하지 않고 실체도 없으며 단지 철학적 환상의 모호한 영역에만 존재하는 인간 일반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이 독일 사회주의는 국민학교 숙제를 상당히 심각하고 근엄하게 받아들이며 그 빈약한 재고품을 협잡에 가득한 양태로 격찬하는 가운데 점차 그 현학적인 무지를 잃어갔다.

봉건귀족과 절대군주에 대항하는 독일인의 투쟁, 특히 프러시아 부르조아지의 투쟁, 달리 말하면 자유주의 운동은 더욱 격화되었다. 그로써 것진정한겄사회주의가 오랫동안 갈망해 오던 기회, 즉 정치적 운동을 사회주의적 요구와 대결시키며, 자유주의에 대해, 대의정부에 대해, 부르조아적 경쟁, 부르조아적 언론의 자유, 부르조아적 입법, 부르조아적 자유와 평등에 대해 전통적인 파문(破門)을 명하고, 대중에게 부르조아 운동으로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읽은 것은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설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독일 사회주의는 프랑스 비판의 단조로운 모방이면서도 프랑스 비판이, 바로 독일에서의 임박한 투쟁이 이루려는 목적인 부르조아사회의 경제적 존재조건과 이에 적합한 정치구조를 가진 현대 부르조아사회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은 때마침 잊어버렸다.

절대주의 정부 및 이에 딸린 목사, 교수, 지방 유지와 관리들에게 것진정한겄사회주의는 부르조아지의 협박에 대항하는 안성맞춤의 허수아비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 정부가 바로 그 당시에 독일 노동계급의 봉기에 대해 투약했던 채찍과 총탄이라는 쓰디쓴 약을 달래주는 달콤한 마무리였다.

이와 같이 것진정한겄사회주의는 정부를 위해 독일 부르조아지와 싸우는 무기로서 역할 하는 동시에, 반동적인 이익, 독일 속물들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독일에서, 16세기 의 유물이자 그때부터 계속 다양한 형태로 다시 나타나곤 했던 쁘띠부르조아계급은 현 상황의 현실적인 사회적 토대이다. 독일에서 이 계급의 존속은 곧 기존 상황의 존속을 뜻한다 .부르조아지의 산업적, 정치적 지배는 한편으로는 자본의 집적으로 인해,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으로 인해 쁘띠부르조아지에게 일정한 파멸의 위협을 가한다. 이들에게 것진정한겄 사회주의는 이 두 마리 새를 하나의 돌로 잡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그것은 전염병처럼 번졌다.

화려한 수사(修辭)의 꽃으로 수놓아지고 창백한 감상의 이슬에 함빡젖은 사색의 거미줄 같은 의상, 독일 사회주의자들이 것영원한 진리겄라는 말라빠진 그들의 육신을 감추기 위한 이 선험의 의상은 대중 속에서 그들의 상품 판매량을 놀랄 만큼 증대시키는데 기여했다.

또한 한편으로 독일 사회주의는 점점 더 쁘띠부르조아 속물의 허풍스런 대변인으로서의 자기 소명을 인식해 갔다. 독일 사회주의는 독일 민족을 모범 민족으로, 그리고 독일 속물들을 전형적인 인간으로 주장했다. 이 모범 인간이 가진 약간의 야비한 구석이라도 보이면 독일 사회주의는 그것을 실제 성격과는 정 반대로, 은폐되고 고상한 사회주의적 해석을 가했다. 또한 장황하리만치 공산주의의 것야수같은 파괴적겄 경향을 정면으로 반대했으며, 모든 계급투쟁에 대해 고상하고 공평한 경멸을 표했다. 몇 가지 극히 드문 예외를 제외한다면 지금(1847) 독일에서 돌아다니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출판물들은 모두 이러한 비열하고 무기력한 문헌의 범주에 속한다.

 

2. 보수적 사회주의 또는 부르조아 사회주의

 

부르조아지의 일부는 부르조아사회의 지속적 생존을 도모하기 위하여 사회적 불만요인을 개선하고자 한다.

이 부분에 속하는 이들로는 경제학자, 자선가, 인도주의자, 노동계급의 상태를 개선하려는 자, 자선의 조직자, 기타 온갖 종류의 하찮은 개혁가들이 있다. 나아가, 이러한 형태의 사회주의는 완전한 체계로 발전되어 왔다.

프루동의 겁빈곤의 철학겂을 이러한 형태로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타자맨 主: 맑스는 프루동의 겁빈곤의 철학겂을 혹독하게 비판한 겁철학의 빈곤겂이라는 저작을 남긴바 있다.)

사회주의적 부르조아는 현대 사회적 조건의 모든 장점을 원하지만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투쟁과 위험은 배제하고자 한다. 그들은 사회의 현 상태에서 그 혁명적이고 붕괴적인 요소를 뺀 것을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없는 부르조아지를 원한다. 부르조아지는 당연히 자신이 패권을 쥐고 있는 세계가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부르조아지 사회주의는 이 안락한 생각을 어느 정도 완전한 여러 체계들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부르조아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그러한 체계에 따를 것, 그리하여 사회적 신(新)예루살렘으로 곧장 행진할 것을 요구하지만, 사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기존 사회의 테두리 내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부르조아지에 대한 그들의 모든 증오에 찬 생각을 떨쳐버려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보다 실천적이지만 보다 덜 체계적인 이 사회주의의 또 다른 형태는 정치적 개혁이 아니라 물질적 존재조건, 경제 관계의 변화만이 노동계급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노동계급의 눈앞에서 일체의 혁명운동을 평가절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 존재조건의 변화라고 할 때, 이러한 사회주의 형태는 그것을 오직 혁명에 의해서만 있을 수 있는 부르조아 생산관계의 폐지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산관계의 지속적 유지에 기초한 행정개혁으로만, 따라서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고, 기껏해야 부르조아 정부의 비용을 줄이고 행정업무를 단순화하는 정도의 개혁으로만 이해할 뿐이다.

부르조아 사회주의는 단지 하나의 비유가 될 때, 오직 그때에만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있다.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자유무역,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보호관세,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감옥 개량, 이것이 부르조아 사회주의의 마지막 말이자 유일하게 진지한 말이다.

그것은 다시 다음의 한 문구로 요약된다. 부르조아는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부르조아이다.

 

3.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 공산주의

 

여기서 우리는 현대의 모든 대혁명마다 항상 프롤레타리아트의 요구를 소리높여 외쳐왔던 바뵈프 등의 저작과 같은 문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처음으로 직접 시도한 것은 봉건사회가 불과하고 있던 전반적 격동기였다. 하지만 당시 프롤레타리아트는 미발전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행방을 위한 경제적 조건--당시 아직 생성되지 않았으며, 임박한 부르조아 시대에 의해서만 생성될 수 있는 조건-도 없었기 때문에 그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 프롤레타리아트의 초기 운동들을 추종했던 혁명적 문헌들도 반동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들은 극히 조잡한 형태로 보편적 금욕주의와 사회평준화를 가르쳤다.

본래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계인 생시몽, 푸리에, 오웬 등의 체계는 앞서 말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 간의 투쟁이 발전되지 않은 초기 시기에 생겨난다(I절 부르조아지와 프롤레타리아를 보라).

이들 체계의 설립자들도 사실 지배적인 사회형태속에서 와해요소의 활동뿐 아니라 계급적대까지 보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직 유아기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떠한 역사적 창의성도, 어떠한 독자적 정치운동도 갖지 못한 계급의 모습으로 보인다.

계급적대의 발전은 항상 산업의 발전과 보조를 함께 하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는 경제상황은 아직 그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을 위한 물질적 조건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조건을 창출할 새로운 사회과학, 새로운 사회법칙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 행동은 그들의 사적인 창의적 행동으로 대체되고,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해방의 조건은 환상적 조건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점진적이고 자연발생적인 계급조직은 그 발명가들에 의해 특수하게 고안된 사회조직으로 바뀐다. 그들이 보기에 미래 역사는 결국 그들의 사회적 계획의 실천이자 그 실천적 실행일 뿐이다.

계획을 구성하는 데서 그들은 의식적으로 가장 고통 당하는 계급인 노동계급의 이익에 주된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란 오직 가장 고통 당하는 계급이라는 관점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계급투쟁과 그들 자신의 환경의 미발전된 상태로 인해 그러한 종류의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모든 계급적대를 초월해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들은 사회 모든 구성원들, 심지어 가장 형편이 좋은 사람들의 조건조차 개선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습관적으로 계급구분 없이 사회전체에게, 아니 우선적으로는 지배계급에게 호소한다. 하기야 일단 그들의 체계를 이해하고 난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가장 가능한 사회상태의 가장 가능한 계획임을 알지 못하겠는가?(타이핑맨 主 : 이 문장은 마르크스와 앵겔스의 풍자적 독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정치적 행동, 특히 혁명적 행동을 거부한다. 그들은 평화적인 수단으로 그들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며,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잘한 실험들이나 사례의 힘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복음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으려고 애쓴다.

그렇듯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매우 미발전된 상태에서 오직 자신의 입장에 대한 환상적인 생각마을 가지고 있을 무렵에 그려진 미래 사회의 상상화는 산회의 전반적 재건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본능적 기지개에 상당한다.

그러나 이 사회주의, 공산주의 출판물들은 또한 중요한 요소를 담고 있다. 그것들은 기존 사회의 모든 원칙을 공격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노동계급의 계몽을 위한 극히 중요한 자료들로 가득차 있다. 도시와 농촌간의 구별 폐지, 가족의 폐지, 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한 산업경영의 폐지, 임금제도의 폐지, 사회적 조화의 주창, 국가기능의 단순한 생산감독 기능으로의 전화등 거기서 제기되는 실천적 조치들은, 당시에 겨우 나타나고 있었으므로 이들 출판물에서는 초기적이고 불명확한 형태로만 인식되었던 계급적대의 소명을 지적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제안들은 순수히 공상적인 성격을 띤다.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중요성은 역사발전과 역관계를 취한다. 현대 계급투쟁이 발전되고 특정한 형태를 취해갈수록, 투쟁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는 이 환상적인 입장, 투쟁에 대한 이 환상적인 공격은 모든 실천적 가치와 모든 이론적 정당성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비록 이들 체계의 창시자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혁명적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진보적 역사발전에 반대하여 스승들의 원래 견해를 굳게 고수한다. 따라서 그들은 계급투쟁을 약화시키고 계급적대를 해소시키기 위해 철저하게 노력하는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사회적 이상향을 실험적으로 실현하는 것을 꿈꾸며, 고립된 것팔랑스떼르겄,것공동부락겄,것작은 이카리아겄--신예루살렘의 축소판--를 건설할 것을 꿈꾼다. 그들은 공중누각을 실현하기 위하여 부르조아의 자비와 지갑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점차로 그들은 앞서 서술한 반동적인 보수적 사회주의자들과는 단지 보다 체계적인 현학을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자기들 사회과학의 기적적인 효과에 대한 미신적인 광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만 다를 뿐 그들과 같은 범주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노동계급의 편에 선 모든 정치적 행동을 격렬히 반대한다. 그들이 보기에 그러한 행동은 새로운 복음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영국의 오웬주의자, 프랑스의 푸리에주의자들은 각각 차티스트와 개혁파를 반대한다.

 


IV. 기존의 여러 반대파에 관한 공산주의자에 입장

 

II절에서 이미 영국의 차티스트나 미국의 농업개혁가들과 같은 기존의 노동계급 당들에 관한 공산주의자의 관계는 명확히 밝혀졌다.

공산주의자는 당면 목표의 달성을 위해, 노동계급의 당면한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싸우는 동시에, 현재의 운동 속에서 이 운동의 미래를 보여주고 이에 관심을 기울인다. 프랑스에서 공산주의자는 보수적 부르조아지와 급진적 부르조아지에 대항하여 사회민주주의자와 동맹을 맺었지만, 대혁명으로부터 전통적으로 물려받은 문구나 환상적인 생각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권리는 남겨두고 있다.

스위스에서 공산주의자는 급진주의자를 지지하지만, 이 당의 일부는 프랑스적인 의미에서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자로, 일부는 급진적 부르조아라는 적대적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놓치지 않는다.

폴란드에서 공산주의자는 농업혁명을 민족해방의 첫째 선결조건으로 주장하며, 1846년 크라쿠프 봉기를 주도했던 당을 지지한다.

독일에서 공산주의자는 부르조아지가 절대군주, 봉건지주, 쁘띠뿌르조아지에 반대하여 혁명적으로 행동할 경우 이들과 함께 싸운다.

그러나, 부르조아지가 자신의 지배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도입하게 되는 사회, 정치적 조건을 독일 노동자들이 오히려 부르조아지에 대항하는 무기로써 곧바로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독일 반동계급의 몰락 이후 부르조아지에 대항하는 무기로써 곧바로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독일 반동계급의 몰락 이후 부르조아지에 반대하는 투쟁 자체가 즉시 시작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는 부르조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간의 적대관계에 가장 명확한 인식을 노동계급에 주입시키려 끊임없이 노력한다.

공산주의자는 독일에 주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왜냐하면 독일은 부르조아혁명의 전야에 있으며, 17세기 영국이나 18세기 프랑스에 비해 유럽문명의 보다 선진적인 조건과 보다 발전된 프롤레타리아트를 가지고 부르조아혁명은 곧이어 뒤따를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서곡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공산주의자는 모든 곳에서 기존의 사회, 정치적 질서를 반대하는 모든 혁명을 지지한다.

그 모든 혁명에서 공산주의자는 각국의 발전정도와 관계없이 소유문제를 핵심적인 문제로서 전면에 내세운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자는 어디서나 모든 나라 민주적 정당들의 통일과 합의를 위해 노력한다.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견해와 목적을 감추는 것을 경멸한다.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목적이 오직 기존의 모든 사회적 조건을 힘으로 타도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선포한다. 모든 지배계급을 공산주의혁명 앞에 떨게하라.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세상이다.(Let the ruling classes tremble at a Communistic revolution. The proletarians have nothing to lose but their chains. They have a world to win.)

 


전 세 계 노 동 자 여, 단 결 하 라 !

WORKING MEN OF ALL COUNTRIES, UN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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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독일어: Karl Heinrich Marx1818년 5월 5일~1883년 3월 14일)는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라인란트 출신의공산주의 혁명가역사학자경제학자철학자사회학자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이다. 1847년 공산주의자동맹을 창설했다. 1847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공동집필해 이듬해 2월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과 1867년 초판이 출간된 《자본론》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았다. 맑스, 막스, 칼 마르크스 등으로 표기하기도 하나, 외래어 표기법에 준하는 표기는 “카를 마르크스”이다.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라인란트의 유서 깊은 로마 가톨릭 도시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수대에 걸친 유대교 랍비의 후예였다. 그 가문의 성은 원래는 모르데카이(Mordechai)였으나 마르쿠스(Markus)로 고쳤고 다시 마르크스(Marx)로 바꾸었다. 아버지 하인리히(Heinrich)는 유대인이 관직을 갖는 것을 금하는 차별 법령을 피하기 위해 1817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기독교인이었다. 아버지가 기독교로 개종한 또다른 이유는 그 자신이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마르크스는 개방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카를 마르크스의 저서 중 집필의 궤적을 알 수 있는 최초의 글은 고등학교 시절 쓴 세 편의 소논문이다. 그 중 세 번째 것인 《어느 젊은이의 직업 선택에 관한 고찰》은 그의 인생이 어떤 방향을 취하게 될 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마르크스는 직업 선택을 앞둔 젊은이라면 의무, 자기희생, 인류의 안녕, 완성에 대한 숙고에 입각해야 하며, 이런 종류의 관심이 서로 상반된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류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자신의 미래와 관련된 일련의 불안들과 연결시켰다. 마르크스는 열 일곱 살 때부터 이상적인 결정과 인간 생활의 실제적인 결정들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한다고 보았다.[1]

트리어의 고등학교를 나온 뒤 1835년 10월 본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하였다. 아들이 자신처럼 변호사가 되기를 바란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고, 점점 법학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아들의 변화를 보면서 아버지는 아들이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그에 맞는 ‘사회적 지위’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을 걱정했으며, 결국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본 대학교에서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전학했다.[2] 그러나 베를린에서도 그는 역사와 철학에 몰두하였다.

베를린에서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에게서 미학적, 철학적 혁명의 방안을 찾고자 하는 브루노 바우어 등의 헤겔좌파, 혹은 청년헤겔학파와 교제하였는데 당시 그의 동료들은 박학다식함과 논리로 토론을 주도하는 청년 마르크스의 똑똑함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당시 독일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철학은 단연 헤겔의 것이었다. 헤겔은 역사와 사회의 발전은 절대정신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며 그 과정은 변증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절대정신의 대변자이자, 실현도구라고 보았으며, 그 보편국가가 프로이센이라고 얘기함으로써 프로이센에 철학적 존재 이유를 제공했다.

이러한 헤겔에 대해 청년헤겔학파로부터 비판이 가해졌다. 그들은 헤겔 사상의 기본적인 틀을 수용하면서도 절대정신을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라고 파악했다. 아울러 프로이센을 보편국가라고 주장한 헤겔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의 사상을 좌파적으로 해석했다. 이것이 반체제적 혁명의 씨앗이 된다고 여긴 프로이센 정부에 인해 청년헤겔주의자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 가해진다. 마르크스의 활동도 이에 영향을 받아 계속 제약되었다.

결국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1841년에 청년 마르크스는 예나 대학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점〉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청년헤겔학파,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1836년 《기독교의 본질》을 비롯한 기독교 비판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되었다. 후에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전도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정리, 헤겔철학에 과학적 요소를 부여하고자 했다.


박사학위 과정을 마친 후 고향으로 돌아온 마르크스는 청년좌파들과 반체제적 언론인 라인신문을 창간하고 편집장을 맡아 언론활동에 투신했다. 이 시기에 사고의 전환점, 특히 철학에서 변화를 맞이한다. 당시 독일 철학은 대단히 관념적이며 추상적이었는데, 철학적 이슈에서 사회경제적, 좀 더 나아가자면 '정치경제적인' 이슈로 방향을 전환한다. 라인 지방 농부들을 취재하던 도중 경제와 관련된 주제의 기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1843년에 《라인신문》은 폐간되었는데, 당시 마르크스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프로이센에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편집장직을 사임합니다.'라는 광고문구와 프로메테우스(마르크스)가 독수리(프로이센)에게 괴롭힘당하는 그림으로 저항했다.

1843년에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을 발표하는데 청년헤겔학파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나, 거기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 생존에서 물질적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유물론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


독일에서 급진좌파운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마르크스는 프랑스 파리 시로 이주한다. 본격적으로 프랑스 사회주의자의 혁명적 집단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되었는데, 마르크스의 정치사상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의인동맹(義人同盟, 독일어: Bund der Gerechten)이라는 비밀결사단체에 가입하는데, 행동주의적, 급진적, 혁명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비밀결사체였다. 이 단체를 공산주의자 연맹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쓴 것이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이다. 마르크스 사상의 특징적 일부가 이 당시 저술에 나타난다. 독일의 관념철학에서 벗어나 역사유물론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844년에 쓴 《유태인 문제에 관해서》에서 그는 유태인들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사적으로 해방된 것이지 인간으로서 해방된 것은 아니다, 사적 소유와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필요하다, 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해서》는 독일의 신흥 부르주아들의 취약성을 지적하면서 프롤레타리아만이 역사적 과업을 지탱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파리수고(유고)'로 알려진 《경제학과 철학에 관한 수고》에서는 역사유물론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역할과 생산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소외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의 소외론은 인간 해방을 갈구하는 휴머니스트로서의 마르크스를 강조하는 학자들의 주장 근거가 되고 있다. 실제 마르크스는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에서 소외된다고 《소외론》초판에서 주장했다. 이 해에 그는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난다. 파리 시절의 마르크스는 정열적으로 활동했으나, 급진적 인물이 체류하는 것을 기피한 프랑스 정부에 의해 추방되었고,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죽을 때까지 영국에서 지내게 된다.


1846년에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발표한다. 600여 페이지의 방대한 저작인 이 책은 엥겔스와 공저로 되어 있으나, 사실상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가득 차있다. 이 저작에서 마르크스는 청년헤겔주의자와 결별을 선언하고 있으며 그들과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저작은 마르크스의 사상 발전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역사유물론에 대하여 최초로 체계적으로 서술했으며,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자본주의 자체가 잉태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1848년 2월,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의인동맹의 선언문으로서 발표된 것이다. 당시 이 조직은 블랑키와의 차별을 선언하면서 비밀결사에서 공개조직으로 탈바꿈하려하고 있었다. 혁명적 이들에 의한 소수의 급진적 음모와 비밀결사를 선호하던 블랑키파와 그 주도권 장악을 놓고 치열한 논쟁과 암투가 있었고, 결국 마르크스파가 다수가 되어 공산주의자동맹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들이 이런 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1848년 2월 혁명 덕분이었다. 혁명적 낙관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공개적인 단체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공산당 선언 속에는 새로운 이론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과거 마르크스가 그의 저작물에서 이야기한 자본주의의 필연적 몰락과 프롤레타리아 승리의 확언을 선언문에 맞게 단순명료하게 재구성한 것이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마르크스의 초기 사상에서 보이는 휴머니즘적 철학적 고뇌는 상당히 감소하고 정치경제학적 내용의 비중이 커지게 된다. 이에 대해 알튀세르는 인식론적 단절을 보여준다고 언급했다.

1850년에는 《프랑스에서 계급투쟁》, 1852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를 차례로 발표하는데, 계급 투쟁이 정치적 차원에서 어떻게 복잡하게 전개될 수 있는가에 대해 서술한 것이었다. 이 저작들은 경제적 시각이 아닌 정치적 시각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1850년대는 혁명을 즉,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시련의 시기였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 시대의 흐름이 거꾸로 흐르는 수구반동적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1840년대 경제 공황을 겪고 있던 유럽 경제는 1850년대에 들어와 호황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여기에서 채굴된 이 유럽으로 들어왔고, 교통수단의 속도가 사람이나 의 힘을 이용할 때보다 빠른 증기 엔진이 운송수단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 현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급진파들의 분열이 생겨나게 되었다. 즉각적 혁명을 주장하는 이들과 혁명의 절정기는 이미 지나갔다는 분파로 분열된 것이다. 후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이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대영박물관에서 영국의 정치경제학을 완전히 습득하여 마르크스 자신의 정치경제학이 성숙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자본론》 집필을 구상해나가는 속에서 초고(Grundrisse)가 발견되었다.

이 초고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지적 발전과정과 사적 유물론의 기본적 원칙을 정리해 놓고 있다. 마르크스의 초기사상에서는 비판적인 철학적(critical philosophy) 경향성이 나타나고 있다. 변증법을 통해 현실을 부정하며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1846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운동과 메커니즘, 구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860년대에 나온 《자본론》에 그러한 연구가 결집되어 나타난다. 이것이 역사까지 확대되어 형성된 사상이 역사유물론이다. 역사유물론은 마르크스 사상의 독특한 핵심이다.


마르크스는 명석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이 있으나 자기 주장이 강하고 독선적인 면이 있었다고 한다. 과 사교생활을 좋아해 모든 친구들과 불화를 일으켜가며 논쟁을 벌이기 일쑤였고, 술집이 운집된 골목에서 술집을 모두 돌아다니다가 밤을 새우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3] 그랬기에 마르크스를 존경하는 사람은 많았어도 친우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엥겔스가 “그의 반대자는 많았어도 개인적인 적은 없었다”고 했듯이 그렇게 냉정하지는 않았고, 맑스가 논쟁에서 고집이 센 모습을 보였던 것도 모난 성격을 가져서가 아니라, 당시 유럽 지식인들사이에서 난립하던 이상적 사회주의들을 비판함으로써 과학적 사회주의로 귀결하기 위함이었다는 평가가 있다.[4] 그 근거로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그가 살던 시대에 난립하던 사회주의 조류들인 보수적 사회주의, 부르주아 사회주의, 추상적인 사회주의등을 풍자와 논박으로 비판한다.

맑스는 성격이 따뜻해서 자신도 어렵게 살았지만 손님을 박대하는 법이 없었고, 어린이들을 좋아해서 딸 엘레노어에게 부자들이 목수의 아들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해 주면서도, “예수가 어린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5]

외적으로는 부르주아지를 비난하면서도 사적으로는 부인과 아이들이 부르주아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안간힘을 썼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세상에 알려진 ‘그의 가난’은 절대적 가난이 아니라, 부유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상대적 가난’이라는 얘기다. [3]

그가 호색한으로 애인이 많았을 뿐 아니라, 아내 예니 베스트팔렌이 데리고 온 하녀 헬렌 다무스와의 관계로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은 유명하다. 이에 대해 평생의 동지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보호하기 위해 “마르크스 아이가 아니라 내 아이다.”라고까지 선언하지만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프레데릭’이라는 이름이 붙은 아이는 후에 외과의가 되지만 프레데릭이 ‘위대한 예언자’의 아들이라는 별칭은 떨어지지 않았다. [6]

또한 마르크스는 주말이면 가족들과 산책을 하고 부인의 임종을 지킬만큼 처자식에게는 자상한 가장이었지만 부모와 형제자매에게는 경원시했다 한다. 실제로 가난에 시달릴 때 유산을 염두에 두고 아픈 어머니와 갈등을 빚기도 했었다. 그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어차피 병도 들고 살만큼 산 우리 어머니가 죽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맑스는 아버지 하인리히의 사진을 관에 묻히는 순간까지 소지하고 있었고, 맑스가 부모와 형제자매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다기보다는 맑스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이 맑스를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는 평가가 있다. 그 근거로 맑스의 모친은 자본론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 자본이나 만들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릴 때 죽은 아이들이 많고, 오직 일리노어와 로라, 제니 막스 세 딸만 성년으로 자랐다. 하지만, 일리노어는 1898년에 43살의 나이로자살하고 로라는 1911년에 66세의 나이로 자살한다. 제니는 1883년 심장병으로 39세에 목숨을 잃었다.

그 외에도 프레데릭의 증손녀인 힐다 마르크스와 인터뷰한 러시아 기사에 따르면 사생아인 프레데릭의 손자는 나치 게슈타포로 활동하다가 러시아 전선에서 전사했다.


흔히 맑스하면 유대교와 기독교사이에서의 방황과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 때문에 보수적인 종교인들로부터 반(反)종교적 인물로 잘못 인식되고 있지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은 종교가 현실의 사회경제적 모순으로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현실도피적 경향을 나타내도록 기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종교는 민중들이 내세에만 관심을 갖게 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자본의 억압과 착취를 사회비판과 계급투쟁으로 극복하지 못하게 하는 '인민의 아편'이었던 것이다. 또한 맑스는 종교를 가리켜 민중의 환상적 행복이라고 했는데, 이 또한 종교를 반대하는 말이 아니라 종교의 현실도피적 경향을 비판한 말이다. 실제로 민중들은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회적 억압과 착취를 계급투쟁으로 극복할 방법이 없을때는 하늘나라극락메시아미륵 같은 종교적 환상을 만들어낸다. 즉, 마르크스는 종교의 현실도피적 경향을 비판한 것이지 종교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인본주의 존중

실제로 맑스는 딸 엘리노어가 교회에서 두려움의 감정을 갖자 "부자들이 목수의 아들을 죽인 것"을 말해주면서도 "목수의 아들이 어린이들을 사랑하였으므로 기독교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야."라고 말했다.기독교가 가진 자들, 권력있는 자들과 결탁하여 예수를 죽이는 것에 대해 비판했지만, 기독교의 인본주의적 가치를 존중했다는 뜻이다. 현대 맑스주의도 기독교를 인본주의라는 공동가치를 화두로 대화해오고 있다. [5]


사회혁명

마르크스주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논쟁을 통과했다. 러시아혁명을 성공시킴으로써 비로소 마르크스주의는 정통으로 확립된다. 그러나 스탈린 집권 후 마르크스주의는 왜곡되고 이에 반발해 본래의 마르크스로 회귀하려는 새로운 세력이 유럽에서 부상한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과 아도르노 등이 주도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이 두각을 나타냈다. 이는 68혁명의 사상적 좌표가 되기도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시련은 사상의 종주국 소련에서 발생했다. 고르바초프가 등장하여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면서 자본주의 진영과 대결이 아닌 타협을 모색하던 중, 걷잡을 수 없는 수렁으로 추락한 것이다. 끝내 소련은 해체되고 마르크스주의도 매우 극적인 종언을 고하는 듯했다. 어느날 갑자기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정치이념이 형체도 없이 현실 정치에서 사라졌다.

마르크스주의의 재평가

그러나 애초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극단의 모순을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탄생한 이상, 자본주의와 운명을 달리 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주의 영향력은 특히 학문적으로, 여전히 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치밀한 분석력과 통찰력은 현대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대 사회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는 필수다.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해명과 자본주의 세계화와 계층화에 대한 정확한 비판은 탁월하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전 지구로 확장되면서 부자와 빈자,부국과 빈국의 차이는 더욱 커지고 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인간소외, 물신숭배, 생산과 소비의 과잉, 공황의 문제 등도 지금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려면 싫든 좋든 마르크스를 탐구하고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사회과학자라면 마르크스에 신세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듯, 마르크스에게는 독보적인 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2005년BBC방송은 전문가들에게 설문조사를 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있는 사상가를 뽑았다. 단연 1위는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주의가 비록 현실에서 다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자본주의를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비판했고 여러 대안을 세울 수있게 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유주의 정치철학자인 이사야 벌린은 "일부 결론상의 오류가 있었지만 마르크스 사상이 갖는 중요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면서 "그의 사상은 역사,사회를 바라볼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인간의 인식을 높여주며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고 강조했다.




마르크스주의(Marxism)

마르크스주의(Marxism)은 독일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칼 마르크스(Karl Marx)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공동으로 작업하여 완성되어진 학문이다. 이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이론 및 정치이론이다. 당시 만연했던 사회주의 이론인 '프랑스 사회주의'와 프루동의 사회주의 이론같은 이상적인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을 처음으로 시작하고 탄생된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와 저술한 '자본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에서도 사회주의 체제를 실현시킬 수 있는 자신감을 여러 사회주의자들에게 주므로써 '현실 사회주의' 즉, 현대의 공산주의인 의미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초적인 학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의 기초적인 철학개념은 변증법, 유물론, 잉여가치론, 노동가치설이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으로 인해 나타나는 모순, 불의를 자본을 부정하므로써 없애겠다는 철학적 의미가 담긴 현실적인 사회주의이며 여태껏 있어왔던 이상적 사회주의이자 무정부주의적인 사회주의와 반대로 노동자로 이루어진 정부를 두어야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기독교-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체계중 하나인 '유물론'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동작업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완벽한 사회주의적 유물론으로 재탄생하였다. 이렇게 유물론을 기본 철학개념으로 가지고 있던 마르크스주의는 본래 유물론의 모든 물질은 '생각'을 가지고있고 그러한 물질들은 다른 물질들에 의한 정신으로 인해 또 다르게 탄생되었다는 철학개념에 의해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뜻을 부정하게 되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자체에서는 이러한 창조신에 대한 것을 부정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되어져 왔고 만약에 양립되어져 나온 학문이 있어도 그것은 사회주의에 속하지않은 종파사상에 불과하다고 판단되어졌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인간성의 완전한 해방을 목표로 했다. 이러한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의 겉뿌리였던 사회주의와 그 사회주의안에 포함되었던 공산주의에서도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계급해방은 당시 고위직에 속한 종교인에 대한 반감이었으므로 역시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와 연계해서 볼 때 종교는 이 학문적 사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사라져야할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를 필두로하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현재 보수적인 종교인들에 의해 배제되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 즉, 모순이 드러나게 되자 진보적인 종교인들은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의 양립을 주장하기도하며 마르크스주의에서 나타나는 변증법에 의한 사회구조적 모순과 불의를 없앤다는 의미는 성서의 구원과 같은 개념으로 보아 한층 발전된 진보적인 개신교를 만들겠다는 목사들도 이러한 양립을 주장한다. 물론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부족한 면이있다.

 

 - 경제개념 -

 사실 마르크스주의를 절대적인 정치사상으로 내건 국가들은 경제체제에 관해서 혼합경제체제도 아니고 시장경제체제도 아닌 계획경제체제만을 선호하게 되어있으며 그것은 곧 사회주의체제를 말하며 쉽게말해 공산주의의 경제개념이다. 하지만 오늘날 여러 학문들이 오고가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적 개념은 자본주의의 경제적 개념의 모순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으며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는 절대적인 정치사상으로는 쓰지않는다. 오로지 이 마르크스주의는 보조적인 위치에 놓여져있다.

 

 하지만 역시 자본주의식 경제체제로만 가게되면 역시 모순이 생기고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문제점이 나타나므로 선진국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좌파계열 쉽게 말해 사회적 진보계열들의 아이콘과 같은 학문으로 여기고있다.

 

 - 정치, 사회개념 -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노동자가 없으면 국가가 있을 수도 없으며 자본가도 없으며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노동자를 거느리고 있고 그들을 사용하고 있으므로써 모든게 돌아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노동자가 없으면 역시 돌아갈 수 없는 물레방아와 같다고 주장하며 자본가들을 취약한 인간체의 개념으로 여기고있다. 이러한 개념이 있는 마르크스주의는 후에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이 만든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또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제를 주장하며 그 정치적인 방법을 뒷받침해준 학문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정치, 사회계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는 마르크스주의는 자본가들에 의해 미움을 받아도 충분한 사상이기는 하다.

 

 -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

 위에 설명했듯이 마르크스주의를 절대적 정치사상으로 내걸고 국가를 이끌게 된다면 경제체제는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의 경제체제가 된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공산주의식 경제체제를 지향한다. 하지만 이러한 틀을 없앤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의 등소평은 사회주의 체제이면서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식인 시장경제체제를 최초로 구현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중국은 결국 주된 사상이었던 마르크스주의 즉 사회주의 체제를 하므로써 생기는 장점의 주된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상태가 되버렸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다시말해 주된 정치사상보다는 일부를 자본주의의 모순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되어져야 하거나 보조적인 정치사상이 되어야 적당할 것이다.

 

 - 마르크스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 -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다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목표와는 다르게 '절대적인 사회주의체제의 공산주의 정권'을 목표로 하며 더 나아가 그것을 실현시키는 수단까지 서술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의하면 계급해방, 사회주의 실현은 모두 '폭력적 혁명'으로 실현해야하며 이것을 부정하는 자칭 사회주의의 사상들은 사회주의계열이 아닌 종파사상에 불과하다는 것임을 주장하고있다. 또한 '민주주의'라는 표현보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중요시하며 어떠한 사상이든 그에 관한 폭력을 부정하는 민주주의에서와는 상반되게 사상을 위해서라면 폭력의 허용을 주장하고있다. 따라서 학술적인 면만 서술한 '마르크스주의'와는 달리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이러한 사회주의 정권을 구축하는 모든 수단방법을 일러주고있다.

 

 - 대한민국에서의 마르크스주의 -

 대한민국에서는 마르크스주의는 공산주의와 같은 뜻으로 여긴다. 사실 틀린말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의 정치, 사회, 철학, 경제를 모두 모아놓은 학문이자 사상이고 공산주의는 그중에 경제와 정치의 혼합을 빼온 사상이다. 그렇지만 현재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경제체제인 '계획경제체제'를 주된 경제체제로 사용하게 된다면 역시 국가의 경제상태가 위태롭게 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실패성이 짙은 공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뜻으로 여기기 보다는 사회주의적 정치, 사회, 철학, 경제를 모두 혼합한 마르크스주의와 별개로 두는게 좋다. 또한 공산주의에서 주장하는 계획경제체제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증시거품이 많아지고 시장의 자유가 심하여 규제가 필요할 때에는 계획경제체제에 속하는 경제이념을 실행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러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경제체제를 100%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사회주의 체제이자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되었던 북한 즉,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DPROK)에 의해 침략을 받았던 나라이고 그들과 벌인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고 수차례 그들의 도발이 이어졌으므로 역시 대한민국에서는 공산주의 즉 포괄적인 개념으로 말해 '마르크스주의'는 적대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필자는 이글을 쓰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제 북한은 정치, 사회적 또 철학적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라고 보기 어려우며 계급해방을 주장하는 이러한 마르크스주의가 집필된 서적들은 향후 북한에서 반정부 단체를 낳게 할 우려가 있어 분서(焚書)된지 오래이다. 또한 북한의 헌법에 존재하는 공식이념은 '주체사상'이며 "주체사상의 행동강령으로 지목한다."는 '김일성주의'가 되며 곧 북한의 체제는 '김일성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서로 상호작용하며 공생해야한다. 자본주의는 현재 공산권 국가를 제외한 주된 정치, 경제적 체제로 채택되었지만 그로인해 생기는 자본으로 인한 사회모순, 불의는 마르크스주의로 보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자본주의 계열 사상들의 공통점은 자본가가 없으면 국고는 빈다는 것이고 모든 사회주의 계열 사상들의 공통점은 노동자가 없으면 자본가들도 없다는 것이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서로의 차이점을 이해하고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공생할 수 있다면 그 때 비로소 건전한 정치,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복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일단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이라는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는 탐욕스러운 부르주아들에게 핍박받는 프롤레타리아들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며, 프롤레타리아들을 위한 나라, 프롤레타리아들을 위한 새로운 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자본주의에서처럼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윤이 불공평하게 돌아가지 않도록, "함께 일하고 공평하게 나누자!" 하는 사상이 담겨 있다는 얘깁니다. 쉽게 말해서 자본주의에서 8:2로 나눈다면, 5:5로 나누어 서로에게 이득이 되도록 하는 나라를 만들자는 얘기죠.

 하지만, 공산주의 국가에서 누군가가 복지의 혜택을 받는다면?
얘기는 달라지는 것이죠. 누군가는 열심히 일을 해야만 하는데, 누군가는 복지의 혜택을 받는다? 이렇게 되면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공산주의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마르크스는 복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회민주주의는 복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주의를 민주적 의회 정치로 정착시키려는 사상입니다.

 즉... 사회주의 계열 내에서 보수적인 사회주의는 사회민주주의, 진보적인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폭력과 혁명으로서 진정한 사회주의를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사회민주주의는 자유주의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의원 제도를 통하여 사회주의를 온건적으로 이끌어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상에서 볼 수 있는 단어인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자유와 평등을 중요시합니다.
즉, 공산주의가 결과의 평등을 중요시한다면 사회민주주의는 기회의 평등을 중요시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자본주의와 비슷한 점이 없지않아 있습니다.)

 사회민주주의가 기회의 평등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에서는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복지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신 마르크스 주의


마르크스주의는 경제관계(생산자-노동자)인 하부구조에 권력관계(지배자-피지배자)인 상부구조가 
귀속되어 있어서 하부구조에 따라 상부구조가 바뀐다는 경제(하부구조)결정론의 입장이구요. 
이에 반해 신마르크스주의는 경제결정론이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대응하는, 
즉 경제에만 관련되어 결정된다는 점을 비판하는 겁니다. 경제관계에 100%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하부구조에 상부구조가 종속되는 것을 모순된 사회구조로 보고 상부구조에 상대적인 자율성이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상부구조들(국가, 교육, 언론, 군대, 경찰 등)이 자율성을 지니고 
이데올로기 주입으로 기존 질서를 정당화한다는 것입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마르크스주의(Neo-Marxism)는 이탈리아의 그람시헝가리의 루카치 등이 1920년대에 주장한 마르크스주의의 분파 사상이다. 1960년대의 신좌익 사상에 영향을 주었으며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 등 막스 호르크하이머를 중심으로 한 아도르노·마르쿠제에 의해 1930년대에 계승된 신좌익 사상이다.

초기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20세기 초반까지 최초의 논리적 사회주의 사상이란 이유로 그 명성을 얻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사회의 하부 구조인 경제 부분만을 언급하는 것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에 확실한 사회·정치 이론이 없다는 한계에 봉착했다. 이에, 상부 구조인 사회·정치 이론을 정립화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인 안토니오 그람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비인간적인 문화와 인간 소외를 중점으로 문제를 다뤄 신마르크스주의 사상의 토대를 마련했다. 신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비판하면서 인간 소외에 대해 주된 문제 제기를 하고, 휴머니즘을 중시하는 특징이 있다.


교육학용어사전

신마르크스주의

[ 新 — 主義 , neo-Marxism ]

모든 사회적 현상을 생산양식과 생산관계로 설명하려는 경제결정론적인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사고에 한정하지 않고인간의 주체적 인식과 해방적 의식을 강조하는 경향의 마르크스주의적 노선.

흔히 정통 마르크스주의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소련 공산주의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항하여 싸운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였다.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한편으로는 계급투쟁이론을 특징적으로 부각시키고 교조적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워 독재체제를 이끌어 온 소련 공산주의의 왜곡된 이론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적 자본주의의 체제에서 경험하는 인간소외를 극복하고 해방적 의식을 실현하려는 데 주된 관심을 바쳐 왔다.

그러나 「신마르크스주의」는 하나의 독특한 사상적 노선이라기보다는 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다원적 노선의 공통된 경향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신마르크스주의자들로는 루카치(G. Lucacs), 샤프(A. Shaff) 등과 같이 동구권의 학자들도 다소 있지만 대개가 공산국가가 아닌 지역의 학자들이다. 알뛰세(L. Althusser), 보울즈(S. Bowles), 진티스(H. Gintis) 등의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블로흐(E. Bloch) 등의 신비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번스타인(E. Bernstein) 등의 경험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싸르뜨르(J. Sartre) 등의 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메를로-뽕띠(M. Merleau-Ponty), 프레이리(P. Freire) 등의 현상학적 마르크스주의,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 아도르노(T. W. Adorno), 마르쿠제(H. Marcuse), 프롬(E. Fromm), 하버마스(J. Habermas) 등의 비판이론적 마르크스주의, 그 외에인본주의로 일컬어지는 여러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있다.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은 주로 인본주의, 소외이론, 관료주의 비판, 자본주의적 산업사회의 비판, 혁명에 있어서의 지식인의 역할 등에 이론적 관심을 두고 있다. 교육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주로 자본주의적 사회체제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기능, 억압적 문화의 구조, 소외의 개념, 실증주의의 도구적 합리성 등의 분석, 그리고 해방적 이성의 실현을 위한 문제 등에 관심이 주어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마르크스주의 [新 — 主義, neo-Marxism] (교육학용어사전, 1995.6.29, 하우동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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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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