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살아서 돌아온 그들

혁명은 자기의 선택이었지만, 효도는 핏줄의 의무였다.  22

혁명이 인간생존을 위한 미덕이라면, 효도는 인간윤리를 위한 미덕입니다. .. 혁명사회도 인간다운 윤리의 바탕 위에서 존재합니다.  26


15 김범준의 귀향

돠익이나 그 동조자들에게는 의용군은 ‘모집’이었고, 우익이나 그 동조자들에게는 ‘강제징집’이었다.
하나의 사실이 서는 입장에 따라 판이라헤 달라지는 현실을 보며 김범우는 제 3의 입장이 있을 수 없다는 이학송의 말을 되짚고 는 했다.  27-28

남다른 선민의식과 우월의식을 가진 그로서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논리 자체를 도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거부하고 혐오했다. 겨울이면 으레 머슴이 학교까지 업고 다녔고, 공부는 줄곧 1등만 해온 그로서는 인간은 평등하며, 평등해야 한다는 논리가 도대체 허무맹랑하고 가당찮았던 것이다 그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바로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 종류가 다르고, 그러므로 능력도 달라 절대로 평등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최서학)  40

최서학은 변소에 앉았거나 잠자리에 누워서는 이 세상이 어찌될 것인가를 심각하게 걱정했다. .. 아버지를 죽였다는 감정을 냉정하게 배제하더라도, 사람 같지 않은 무식한 노동자나 농민이란 것들이 꺼떡대고 설쳐대는 세상이 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따위 세상에서 사는 것은 차라리 죽느니만 하는 노동자가 우쭐거리고, 땅이나 파먹는 농사꾼들이 나대는 것인가. .. 서울만 보더라도 사대문 밖에 사는 것들이 어디 사람인가. 안국동까지를 경계로 해서 종로로만 나가도 벌써 사람의 격과 질이 달라지는데, 사대문 밖에 사는 것들이야 짐승이나 다를 게 무엇인가. .. 괴로군놈들이나 내무서놈들.. 반동 착취계급들의 동네라고 떠들어 대면서. 불한당 강도 같은 놈들, 능력 있는 사람들이 능력 있는 만큼 당연히 누리는 것이지 그게 어디 착취란 말이냐. 이번 전쟁은 귀한 피와 천한 피의 싸움이었고, 양반과 상것들과의 싸움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지면 양반들은 상것들의 발밑에 깔려야 한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한다.  42-43

“앞뒤가 없는 정치적 악순환이 무고한 대중들만 제물로 삼아 희생시키고 있습니다. 말로는 대중을 위한다는 정치가, 참으로 큰일은 큰일입니다.”
서민영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 미국식 정권, 쏘련식 정권을 하나씩 쥐고 서로 자기 주장만 옳다고 내세우며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나 전쟁에 끌어내다 죽이고 있는 두 사람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요즘 같아서는 도무지 살맛이 나지 않습니다.”(전원장)  50-51



16 양쪽을 다 미워하는 아이
(법일 스님 아들 석구의 표현)

"그래, 양키들은 반동첩자들을 사방에 깔아놓고 추접하고 비열하게 전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손승호)
“추접하고 비열하게 전쟁을 한다고? 그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린가? 추접하고 비열하지 않으면, 청결하고 품위 있는 전쟁이라도 있단 말인가? 전쟁이 도대체 뭔가? 일단 일어났다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무찔러 이기는 게 그 목적 아닌가? 목적이 그런데 추접하지 않고, 비열하지 않고, 잔인하지 않고, 악독하지않은 전쟁이 어디 있겠나. 전쟁에 이긴 쪽일수록 그만큼 추접하고비열하고 잔인하고 악독한 짓 많이 했다는 거 아니겠나. 다만 인간이 교활함으로 그런 추악한 것들을 승리라는 포장지로 싸서 은폐시키고, 또 반대로 미화시키고 하는 거 아닌가. 자네 입장에서는내 말을 거부하겠지만 말이네. 후퇴를 하면서 적지에 첩자들을 뿌리는 첩보전은 이미 오래된 작전 중의 하나고, 그걸 가지고 상대방을 평가한다는 건 그 기준부터가 잘못되었네. 만약에 말이네, 인민군이 밀리게 되면 적지에 첩자들을 안 박을까? 안 박을 리가 없고, 만약 안 박는다면 그건 양심적이고 신사적인 게 아니라 바보나 천치 같은 짓이 되겠지. 그때 적지에서 활약하는 첩자들을 자넨 뭐라고 부를 건가? 추접하고 비열한 짓을 하는 자들이라고 하겠나? 아니겠지, 사지에서 열렬한 혁명투쟁을 전개하는 영웅적 전사들이라고 할 거 아닌가. 마찬가지로 자네가 추접하고 비열하다고 매도하는 첩자들도 상대방에서는, 북한괴뢰집단을 쳐부수기 위해 용감무쌍하게 싸우는 용사들이 되는 거네. 전쟁을 놓고 내리는 판단이라는 건 다 그 모양으로 일방적인 감정의 노출이고, 그래서 아무 의미가 없는 모략 중상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역사상 뛰어나다는명장들의 작전이라는 것도 자기들 편에서 보니까 위대한 거지 상대방 입장에서 보면 속임수가 대부분 아니던가. 전쟁 자체가 지탄되고 부정되는 것도 다 그 피할 수 없는 전쟁의 속성 때문이 아니겠어?"(김범우)  92-93

‘“.. 마음에 불심을 지니고 살면 세상이 제아무리 바뀌어도 다 아무 탈 없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법일)  100



17 무상몰수 무상분배

어떤 기술이고 제대로 습득되려면 한 치 길이의 이론에다가 한 자 길이의 실습이 합해져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한 치의 이론마저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전쟁터로 떠나가고 있었다. 그건 몸뚱이로 적을 막게 하는 무모하고도 무책임한 살인 작전이었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다 해도 그런 소모전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생명을 군인이란 이름을 붙여 전쟁터에 내보낼때는 최소한 자기방어는 할 수 있도록 총기조작기술을 습득시켜 주어야 할 책임이 상부에는 있었다. 적이 기습을 감행했으므로 어쩔 수 없다, 그건 책임전가의 변명이고, 책임회피의 기만에 지나지 않았다. 적의 기습에 대비하지 못한 것부터 책임으로 따져져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도발되고 나서 즉각적으로 대비하지 못해서 훈련기간을 다 까먹어버린 책임도 추궁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책임을 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이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르는 학생들은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목청을 뽑아가며 전쟁터로 실려가고 있었다.(심재모 생각)  114



19 고구마똥

남원으로 출장을 나온 것은 재산조사에 따른 농민들의 불만실태를 도당이 직접 직접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세금징수를 위한 재산조사와 그것에 전면적으로 불만을 나타낸 농민들과의 문제는 하나의 새로운 정ㅊ책을 시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였다. 당은 인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데 있어서 주먹 구구식으로 재산조사를 해서 인민에게 피해를 입혀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나라 재정에 피해가 생기게 해서도 안되기 때문에 세금원을 정확하게 파악할 목적으로 과학적인 조사방법을 동원한 것이 낟알세기였다.(김범우)  188

".. 뭔가 좀 생각할 줄 안다는 사람들이 우리 민족문제를 생각하면서 미국이란 존재를 너무 가볍게, 너무 소홀하게 취급하는 걸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미국이란 존재의 속성과 그 영향력을 조금만 관심 있게 살펴보면 내 생각이나 태도가 금방 이해될 거네. 미국은 절대 간단한 나라가 아니고, 이학송선배 말을 흉내내자면, 미국은 우리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두고두고 풀어야 할 숙제가 될걸세."
"그래, 반민특위의 불법해체를 놓고 이 선배가 그런 식으로 말했었지."
"역시 기억력 좋군.”
"중요한 말이었으니까. 헌데, 미국이 그렇게도 문젤까? 자네가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 아닐까?"
“그랬으면 좋겠네만 그렇지가 않으니 문제네. 미군과 쏘련군이 이 땅에서 철군을 했는데 그 차이가 뭔 줄 아나? 쏘련군은 그냥 다 물러갔는데 미군은 500명의 군사고문단을 남겼다는 사실이네. 그거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는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흐지부지 잊어버리게 되지 않았나. 그런데 그 군사고문단의 구성이나 의미는 무엇인가. 그들은 거의가 장교들로 이루어졌고, 미국은 남쪽땅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표시였네. 유사시에 그 장교들 밑에 사병들만 갖다붙이면 그대로 전투병력이 되는 것 아니겠나? 그리고 실제로, 미국은 며칠 만에 전쟁에 개입했었지? 문제는, 미국을 과대평가가 아니라 과소평가한 데 있는 것이네. 적을 과대평가해서 패하는 것이나 과소평가해서 패하는 것이나 똑같은어리석음이라고 케케묵은 손자병법에서 말하고 있지 않던가? 보게, 며칠 전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에서 유엔을 상대로 조선인민의 성명서를 냈는데, 열다섯 살 이상의 조선인민 중에서 1,330만 명이 서명한 압도적 다수의 인민의 의지를 중시하고 유엔은 그 현장에 입각해서 조선에 대한 미국의 무력간섭을 즉각 중지하고 조선으로부터 외국군대를 철거시킬 방안을 강구하라는 게그 내용인데, 자네 생각엔 그게 실현될 것 같은가?"
“글쎄…….”
“이제 와서 그런 소리 해봤자 어림도 없는 소리네. 미국이란 나라가 그런 성명서 하나로 물러날 것 같았으면 애초에 전쟁에 뛰어들지 않았을 거네. 그리고 유엔이라는 것이 미국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미국의 힘으로 만들어져 미국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것이야 세상이 다 아는 일 아닌가. 물론 당에서 그런 성명서를 낸 건미국이 물러갈 것을 기대해서라기보다 남의 민족문제에 무력행위를 자행하고 있는 미국의 만행을 세계여론에 알리자는 목적이 더크겠지만 말야."(손승호와 김범우 대화)  191-192

전쟁은 명분으로 시작되어 광적인 살인과 파괴를 거친 다음 잿더미로 끝난다. 이학송의 머리에 모아진 생각이었다.  214

그(현오봉)는 언제부턴가 전쟁터에 대한 공포감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해서 이제는 부하들에게 정신교육을 시킬 때도 자신감에 차서 말을 하게 되었다. 그는 시체 썩는 냄새에 속이 뒤집히지 않았고, 두 눈알이 없어져버린 채 입에 구더기를 가득 물고 썩어가는 시체를 예사로 보아넘겼으며, 폭탄이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속에서도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216

선임하사는 예의 바른 태도를 취해 보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하 드런 놈, 외다리 게다짝 하나 붙였다고 나이도 새파란 새끼 좆같이 놀고 있네. 이 새끼야, 사람 무더기로 죽이자고 폭탄 저리 쏟아붓는게 뭐가 그리 근사하고 재미난 구경거리냐. 네놈이 저쪽에 있다고 생각해 봐, 참 근사하기도 하겠다. 그러고 말야, 저 폭탄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게 따지고 보면 다 우리 동포야, 동포. 원 개새끼, 드러워서 못 참겠네. 그는 되는대로 욕질을 해대고 있었다.  218



20 소용돌이

“박 대위, 내 말 똑똑히 들으시오. 지금 우리가 전쟁을 하는 통에 전쟁물자 대면서 신바람나게 재미보고 있는 놈들이 누군지 알지요?”
“일본놈들 아닙니까?”
“그거요. 일본놈들은 지금 미국에서 미리 주는 딸라를 받아가면서 문 닫아걸었던 군수물자공장들을 돌리기 시작했고, 소고기다, 닭이다, 밀가루다, 하다못해 계란까지, 미군식당에서 쓰는 물건들을 다 팔아먹고 있소. ..”(박대위와 최익승의 대화)  220

“.. 자네한테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해 둘 게 있네. 내가 전부터 계속 말해 온 것인데 말야, 이 전쟁의 상호항판단을 할 때는 언제나 미국을 중심에 놓고 하라는 것이네. 미국이 전쟁을 도맡고 나선 순간부터 계급혁명도 민족해방도 다 없어지고 미국과의 싸움판으로 변하고 말았으니까. 지금까지는 그래도 덜했지만 앞으론 그 양상이 본격화될 거네.”  233



21 구빨치 그리고 신빨치

핏빛으로 붉은 그 완장은 어디서나 눈에 잘 띄었다. .. 그걸 남자가 차면 금방 기운 세게 보였고, 여자가 차면 갑자기 야무지게 보였다. 그런 분명히 붉은 물 들인 손바닥 넓이의 헝겊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헝겊조각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본헌병이 찬 완잔에서 대일본제국의 권위와 위압을 보았듯이 그 붉은 완장에서는 공산주의의 혁명과 투쟁을 보았다.  273

불교에는 엄연히 내세관이 있었지만 그건 영혼의 존재문제에 대한 답이 아니었고, 모든 종교가 갖게 마련인 현실세계의 질서나 안녕을 유지시키기 위한 종교적 윤리도덕률일 뿐이었다. 어느종교나 사이비 종교인들은 그 내세관을 신도들에게 협박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종교를 돈에 팔아넘겨 타락시켰고, 신도들은 신도들대로 거기에 집착함으로써 돈으로 종교를 거래하는 이기적 맹신을낳았던 것이다. 종교 중에서 신화적 부분이 없는 종교가 없는데,그 부분을 확대하고 강조하는 종교일수록 야만적이고 비이성적 종교이며, 내세관을 과장하고 과신하게 하는 종교일수록 그만큼 부패하고 타락해 있었다. 모든 종교의 필요는 첫째 자아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둘째 동물적 탐욕을 없애기 위해서, 셋째 경전의 올바른 가르침을 실행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내세관은 그 세 가지를 지키게 하는 보조장치에 불과했다. 저 우주적 시야에서 바라보면 인간은 분명 티끌이고, 일생 또한 찰나였다. 더욱이 목숨이 끊겨 흙 속에 묻히면 그것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티끌이었다. 거기에서 영혼이 따로 분리되는가? 분리되어 그 가는 곳이 어디인가? 헤쳐도 헤쳐도 헤쳐지지 않는 그 안개밭. 거기를 헤치려함이 어쩌면 부질없는 짓일지도 몰랐다. 법일은 이런 생각을 이어가며 불경 중의 불경인 『반야심경』을 되풀이 독경하고 있었다.
바로 『반야심경』에 그 의문과 해답이 고스란히 담긴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며.  278-279



22 너희들을 위한 전쟁

그는 인간의 집단의식과 거기서 비롯되는 집단행동을 무엇보다 싫어하고 불신했다. 그래서 그는 그 대표적인 본보기인 정치조직을 경원했고, 정치행위를 멸시했다. 그 어떤 정치조직이든 대중선동적이고 대중 최면적인 휘황찬란한 용어들을 내걸어 명분으로 삼게 마련이었고, 그것을 실천한다는 정치행위는 결국 자기네들의 지배욕구를 달성시키기 위한 사기성으로 변질하고 말았다. 그는 체질적으로집단행동의 획일성이나 광분성을 싫어하는 데다가, 사회부 기자활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목격하게 된 정치행위의 허위성과 기만성에 넌덜머리가 나고 말았다. 복잡미묘한 구조로 얽혀 있는 사회와대중이라는 것은 정치권력이 미화시키는 찬란한 명분과는 별도로 나날의 삶의 필요에 따라 자생적인 힘으로 꿈틀거리며 움직여가고 있는 면적과 층이 의외로 넓고 두꺼웠던 것이다. 정치가 모든것을 결정하고 해결하는 것처럼 과장하고 허풍 떠는 정치적 인간들을 경멸하는 것도 그 까닭이었다. 세계4대성인이니, 세계 4대종교니,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니 해서 온갖 것을 세계적인 단위로분류 정리해 가며 밥 빌어먹고 사는 인간들 중에서 또 누군가 인간의 3대발명을 종교 · 정치 · 언어라고 한 모양이었지만 그는 그 분류 자체를 우습게 생각했다. 정치라는 것이 인간의 지배욕구의 산물인 것이 분명한데 발명일 수가 없는 것이고, 어떤 형태의 정치든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허위조작이 필수적으로 따르게 되어있는 한 정치는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없는 추악한 것이었다. 그 분류자야말로 정치제도가 인간의 행복과 사회의 번성을 전적으로 창조해 낼 수 있다고 맹신하는 단견의 소유자였다.
정치는 필요악이라고 그는 규정하고 있었다. 경제라고 통칭되는장사라는 것이 그러하듯이. 장사라는 것은 이윤추구를 정당한 윤리로 내세워놓고 끝없이 거짓말과 속임수를 쓰는 것이었고, 정치라는 것은 정의실현을 정당한 목표로 내걸어놓고 끝없이 정적을살해하고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합리화의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그래서 '정상배'라는 말은 필연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는지도 모를일이었다. 그는 종교의 기능은 어느 정도 믿었으되 정치의 효능은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이기적 속성을 사고의 출발점으로 잡고 있었다. 그래서 현실의 모순이나 문제점들을 논리화된 역사구조로 파악해 내고, 그 해결방법을 정치형태의 변화에서 찾아내려는 당위성 앞에서 그는 공허를 느낄 뿐이었다. 이학송이나 김범우 같은 사람들의 인식이나 논리에 부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자주 만나는 것을 피하게 된 것도 그 공허감을 처리할 수 없어서였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무엇은 무엇이다 하는 직설적 속단이었다. 인간은 정치적 존재다. 이것이 포괄적 정의가 아니라 단편적속단인 것은 인간은 그 외에도 더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자 하는다면적이고 복합적인 존재인 까닭이었다. 그래서 그는 공산주의 논리에 부분적으로는 동의할 수 있어도 전적인 찬동을 보낼 수는 없었다.  .. 구조가 다른 두 정치체제가 맞서고 있는 싸움판은 철저한 편갈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싸움판에 어느 편에든 솔선해서 뛰어드느냐, 강제로 끌려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두 가지 다를 거부했다. 그래서 토굴속에 스스로를 가둘 수밖에 없었다.(민기홍)  294-297

여순사건을 계기로 반공이 강화되었던 것처럼 이번 전쟁을 계기로 반공은 더욱더 강화될 것이 틀림없었다. 인공 3개월을 토애서 공산주의 의식은 급속하게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그 일소를 위해서도 부역자 처벌은 가차 없을 것이고, 반공의 강화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악순환이었다. 삶의 악순환이고 역사의 악순환이었다. 지긋지긋한 일제치하의 기억이 생생한 채로 다시 이념의 격랑에 정신없이 휘말리며 부서지고 깨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민중들이었다.   313-314

구름이 1년에 200일 이상 끼어 햇볕을 제대로 못 받아 허옇게 설익은 피부, 긴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열량 높은 육식만을 해서 비대해진 체구, 얼어붙은 땅에서 살기에 치져 얼어붙지 않는 땅을 빼앗으러 나선 식민주의자들의 후손, 엄연히 주인이 있는 땅을 침략하고 강탈하면서 ‘발견’이니 ‘개척’이니 하는 말로 인류사를 왜곡한 자들, 아프리카, 아시아, 남북아메리카를 강탈하며 짐승을 사냥하던 총으로 원주민들을 무차별 사냥하면서 백인우월주의를 만들어내고 다시 그것을 자기들의 종교인 얘수교로 합리화한 교활한 자들, 그러면서도 비지배민족들의 단합을 교란하고 해체시키기 위해 ‘인류의 자유와 평등, 평화’라는 그럴듯하고도 혼란스러운 제국주의적 논리를 만들어낸 겹겹으로 교활한 자들 …… 김범우는 살집 좋은 소령을 물끄러미 보며 쓰게 웃었다.  325-326



23 몸씻기 마을굿

전쟁의 후퇴는 침묵을 낳았고, 후퇴의 침묵은 민첩성을 낳았다.  329

땅덩이의 7할이 산이라는 교과서적인 사실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산 부자인 땅, 산 부자인 사람들. 넓지도 않은 땅에 산만 그리 많고, 나머지 3할인 평지에서 나는 곡식마저 고루 나눠진 게 아니라 세습지주들의 착복이 계속되었다. 그러니 이 땅의 서민들의 삶이 얼마나 배고프고 고달팠으랴. 1할도 못 되는 소수의 삶을 호화롭고 기름지게 하기 위하여 9할이 넘는 절대다수가 굶주리고 헐벗어야 하는 사회구조, 그게 어지 인간세상일 수 있는가. 그 구조는 마땅히 뒤바꿔야 하고, 그런 계급은 마땅히 척결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아니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329

“.. 정신이란 형체가 있는 것입니까? 또 사상이란 형체가 있는 것입니까? 그런 것들은 다만 우리가 형체가 있다고 믿자고 약속함으로써 형체가 있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약속에 따라 사상이라는 체계를 만들어 먼저 정신적으로 결속하고, 다음으로 행동으로 실천에 옮기면그때 사상은 구체적 형태를 드러내는 것 아닙니까? 한이란 무엇입니까? 아까 김 동무가 말한 대로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한 감정들이 쌓이고 쌓인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핍박받고 착취당하고 살아온 계급들의 체험이 응축된 수난사인 동시에 정신의 응결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지배받은 계급들끼리 통하는 사상입니다. 다만 그것이 정치 이데올로기와 다른 점은 분석적 이론화와 실천적 논리화가 안 되었다는 점입니다. 체험적 사상의 덩어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혁명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인민을 주체로 삼고, 특히 기본계급을 중시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바로 그 체험적 사상의 덩어리에 분석적 이론화를 가하고, 실천적논리화를 가하면 그들이 누구보다도 투철하고 열렬한 혁명세력이되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것이 바로 응축된 한의 폭발력입니다. 그러니까 한은 역사전환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그 증거로 갑오년 농민봉기는 동학사상을 불씨로 일어났고, 쏘련과 중국의 혁명성취도그 불씨만 다를 뿐 같은 맥락으로 파악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한을 단순하게 '정서'라고 파악하고 정의해 버리는 게 소위 지식인들입니다. 그건 지식인들이 한의 생성과정과 그 본질을 모르고 그저 '감정적 문제로만 피상적으로 보기 때문에 저지르는 오륩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오류를 범하는 데는 그들 거의가 지배계급 출신이라는 점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이학송)  331-333

명분과는 별개로 빚어지고 있는 전쟁이 가진 광포성의 가속화였다.  343



26 압록강의 물을 마시며

그(양효석)는 사병들 사이에서 ‘전독’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건 ‘전라도 독사’라는 줄임말이었다. .. 대령이 소령의 철모를 지휘봉으로 내려갈기고, 대위가 소위의 장딴지뼈를 연거푸 걷엋차는 것이 예사로운 군대에서 장교가 사병들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폭력이 아니라 규율이었다. 그건 일본제국 군대의 ‘잔재’가 아니라 일본제국 군대 자체가 ‘생존’하고 있는 모습이었고, 일본 군대의 물이라고는 먹어본 일이 없으면서도 양효석은 선배장교들의 경력을 순식간에 전수한 모범이었다.  444

“.. 한 가지 의문이 있어요. 이 동무는 너무 이론이 정연하고, 당사업에도 아주 열성인데 왜 당원이 아니시죠?”
..
“글쎄요…… 전쟁 전까지는 뭐랄까, 중도는 아니고, 이런 말이 통용될지 모르겠는데 굳이 이름 붙여보자면, 민족적 사회주의자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고 할까요. 민족을 앞세웠던 건, 어떻게 해서든 외세에 의한 민족분단은 막아야 한다는 의미였고, 계급의 문제는 사회주의에 이미 포함된 것이었으니까요. 그런 상태에서 전쟁이 일어났으니까 선택은 간단했던 거죠.”  463-464



27 똥냄새 김치냄새의 나라

황국신민 · 내선일체를 선봉장으로 부르짖어 댄 소설가 이광수라는 자가 뻔질나게 글로 써댄 내용들이었다. 민족계몽이라는 미명을 내걸고 이광수가 저지른 그런 작태는 악의적으로 민족비하의 조항들을 나열한 것이었고, 상대적으로 일본놈들은 우리와 정반대라고 칭송하는 것이었으며, 그리하여 일본놈들이 전보다 더 우월감과 자만감을 갖게 하는 전기를 마련했고, 일본놈들이 우리 민족을 더욱더 맘 놓고 멸시하고 짓밟을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일본놈들이 폭력적 관권을 행사하면서 끝없이 되풀이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기죽고 주눅 든 조선인들의 의식 속에 자학적 자기비하가 뿌리박히게 했다. 그것은 개인적 열등감과 자신감 상실을 조성했으며, 전체적으로는 민족적 패배감과 민족의식 분열을 초래했다. 더구나 친일분자들이 일본놈들과 똑같이 '역시 조선놈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하는 식의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해댐으로써 자기비하는 대중최면현상을 일으키며 사회적 고정관념이 되어갔다. 이광수는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젊은이가 일본놈의 호의로 가정교사가 되는 것으로 소설 줄거리를 의도적으로 꾸며놓고는 그 일본놈 집안을 그려나가는데, 일본인들은 가족끼리도 인격적 예절을 빈틈없이 갖추고, 서로가 큰 소리로 떠드는 일이 없어 언제나 정숙을 유지하며, 집안이 항상 청결하고, 부모가 자식들을 나무랄 때도 욕을 하는 일 없이 품격을 지키고, 온 식구들의 기상과 취침시간이 어김없이 잘 지켜지고, 음식을 위생적이고 영양가 있게 만들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까지도 조선사람에게 예의 바른 친절을 잊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이광수는 또, 일본여자에 대해서는 '얼굴'이라고 쓰고, 조선여자에 대해서는 '낮바닥'이라고 구분해서 쓸 정도로 열렬한 친일을 솔선수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사회적으로 친일파들을 처단해야 된다는 여론이 비등해지자 그는 '아직 독립도 되기 전에 남의 군정하에서 어떻게 친일파 숙청을 하느냐. 우리 정부가 선 후에 논의될 문제'라고 반대하는 글을 썼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국회에서 정식으로 반민법제정이 논의되니까 '해방이 된 지 4년이나 흘렀는데 이제 뒤늦게 무슨 놈의 친일파 숙청이냐'는 글을 썼다. 그리고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조선인이 영생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글을 쓴 사람이, 반민특위에 잡혀가서는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 했던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저는 천황폐하의 적자입니다' 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는 그는, 단독정부 수립에 앞서 '7월 17일 헌법 공포식/중계방송 듣고 흘린 감격의 눈물로 먹을 갈아/사는 날까지 조국 찬양의 노래를 쓰련다/그리고 독립국 자유민으로 눈감으련다' 하는 시를 썼다. 그런 이광수라는 자의 망령이 일본놈들이 아닌 국놈들을 통해 또 나타나는 것을 김범우는 견딜 수가 없었다.  479-481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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