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하는 말 - 나는 ‘4.3’을 알지 못한다 (서경식, 도쿄 케이자이대학교 현대법학부 교수)
‘4.3’이라는 사건. .. 그것을 ‘알지 못한다.’라는 것 자체가 무섭고 부끄러운 그런 사건인 것이다. 우리들은 자신이 무엇을 알지 못하는가를 알아야만 한다. 평화와 사람다움을 위하여. 9



피살
“박재옥 여인은 젖먹이 아기를 안은 채 식산 은행 철문 앞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병원에 옮겨 온 후에도 몇 시간 동안 목숨이 붙어 있었습니다만 끝내 운명하고 말았지요. 총알은 그 여인의 오른족 옆구리를 관통, 왼쪽 둔부 쪽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망루처럼 높은 곳에서 쏜 총탄에 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젖먹이 어깨에도 총알이 지나갔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하두용, 1994년 67세. 제주시 삼도1동, 당시 제주 도립 병원 경리 주임. 56




고문
“둘째 오빠가 행방불명되어 버리자 우리는 졸지에 ‘폭도 집안’으로 몰렸어요.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당시 열세 살이던 나까지도 서북청년회에 끌려가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옷을 모두 벗긴 채 고문을 했는데, 거꾸로 매달아 몽둥이로 때리거나 고춧가루 탄 물을 코와 입에 부어 댔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입을 다무니까 쇠붙이를 사용해 이빨 사이를 억지로 벌리는 바람에 이가 다 부러졌어요. 전기 고문을 받은 곳은 살이 썩어 갔어요. 토벌대는 우리가 오빠를 숨긴 채 밥을 날라주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며 윽박질렀습니다. 기절하면 물 뿌려 깨운 뒤에 또 고문했어요. 결국 서청은 도피자 가족이라며 어머니를 총살했습니다. 그때 언니랑 나도 함께 끌려갔는데 서청은 우리한테 ‘어머니가 죽는 것을 잘 구경하라.’고 하면서 총을 쏘았어요. 난 그때의 충격으로 성장이 멈춰, 다 자란 후에도 몸무게가 30킬로그램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쳐집니다.” - 정순희. 2007년 72세. 서귀포시 강정동. 64




약탈
“난 본래부터 우익 활동을 했어요. 그리고 사태 때에는 중문면 면사무소 산업계 서기적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북 청년회가 문제였어요. 서청은 무전취식하며 민폐를 심하게 끼쳤습니다. 돈을 갈취하기 위해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주민들에게 강매했습니다. 처음엔 오백 원에 팔다가 곧 천 원으로 올렸어요. 당시 천 원은 큰 돈이었습니다. 서청은 면사무솎가지 찾아와 행패를 부렸습니다. 면 회계원에게 돈을 요구하는가 하면, 나한테는 쌀을 강요했어요. 난 우익이라고 해서 매일 아침 담벼락에 날 숙청하라는 좌익 삐라가 나붙어 위험을 느끼던 터였는데, 이번엔 서북 청년회에게 밉보인 겁니다. 그래서 급히 경찰에 투신했습니다. 그 직후 사태가 악화되면서 서청에 의한 대대적인 학살이 있었습니다. 전에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을 사지 않은 사람, 그리고 면사무소 직원으로 서청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개 총살당했습니다. 아마 내가 그 직전에 경찰에 투신하지 않았다면 나도 서청한테 죽었을 겁니다.” - 이기호. 1997년 80세. 서귀포시 중문동. 66




겁간
“서북 청년회 단장 김재능은 여자들을 많이 괴롭혔습니다. 김재능이 양 아무개를 범했지만 그 여자는 죽을 위기에 놓인 남동생을 살리기 위해 감수할 수밖에 없었지요. ‘토벌대에게 누가 당했다더라.’는 소문이 퍼지면 우린 전전긍긍했습니다. 당시 멋쟁이 여성들도 많았지만 무서워서 가급적 바깥나들이를 삼갔고 일부러 바보처럼 꾸미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 강소희. 1997년 78세. 제주시 도평동. 당시 분 동맹 집행위원. 68



신촌 회의
“무장봉기가 결정된 것은 1948년 2월 그믐에서 3월 초 즈음의 일이다. 신촌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도당 책임자와 각 면당 책임자 등 19명이 신촌의 한 민가에 모였다. 참석자는 조몽구, 이종우, 강대석, 김달삼, 나(이삼룡), 김두봉, 고칠종, 김양근 등 19명이다. 이덕구는 없었다. 이 자리에서 김달삼이 봉기 문제를 제기했다. 감달삼이 앞장선 것은 그의 성격이 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경파와 신중파로 갈렸다. 신중파로는 조몽구와 성산포 사람 7명인데, 그들은 ‘우린 가진것도 없는데, 더 지켜보자.’고 했다. 강경파는 나와 이종우, 김달삼 등 12명이다. 당시 중앙당의 지령은 없었고, 제주도 자체에서 결정한 것이다. 오르그(조직원을 뜻하는 러시아어. 여기서는 당 정책이나 조직을 집행하기 위해서 파견되는 책임 있는 지도원을 뜻함)는 늘 왔으며, 김두봉의 집이 본거지였다. 해방 후 강문석은 한 번도 제주에 오지 않았다. 김달삼은 20대의 나이이지만 조직부장이라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장년파는 이미 징역살이를 하거나 피신한 상태였다. 안세후느 오대진, 강규찬, 김택수 등 장년파는 이미 제주를 떠난 뒤였다.
그런데 우린 당초 악질 경찰과 서청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지 경비대는 아니었다. 미군에게도 맞대응할 생각이 없었다. 미군에 대해 다소 감정이 있었지만 그들은 신종 무기가 많은데 …… 우리가 공격한 후 미군이 대응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우선 시위를 하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장기전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익렬(9연대 연대장)과도 회담한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지식과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가 정세 파악을 못하고 신중하지 못한채 김달삼의 바람에 휩쓸린 것이다. 그러나 봉기가 결정된 후,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니까 ‘우리의 결정이 정당한 거 아닌가.’하는 분위기였다.” - 이삼룡. 2002년 78세. 일본. 당시 대정면 모슬포. 76


망보는 소년들
5.10선거가 파탄나자 미군 함정이 해안을 봉쇄한 가운데 군(국방 경비대)이 본격 투입되어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시작되었다. 소년들은 마을 동산 위에서 깃대를 세우고 망을 보았다. 멀리 토벌대가 출현하며 깃대를 눕혀 마을에 알리고, 군인이면 ‘노랑개 온다’ 경찰이면’검은개 온다’하고 하였다.

“청년들은 3.1 사건 이후 계속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고민에 빠진 어른들은 마을을 살리기 위해 양면 작전을 썼습니다. 즉 산 쪽에 협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찰의 요구도 잘 들어줘서 어느 쪽으로부터도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요. 그러나 토벌대가 마을에 오면 아무래도 피해가 생기니까 빗개(보초)를 서면서 토벌대가 오면 호각으로 신호를 보내 청년들이 피하도록 했습니다. 어린 우리들도 수신호를 배워 연락을 했지요. 그러나 북촌 대학살 때에는 마구 불을 지르고 죽였으니까. 그런것도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 신수교. 1998년 62세. 조천읍 북촌리. 92




부모들
젊은이를 둔 부모들은 도피 입산한 자식을 대신하여 추궁당한 끝에 죽임을 당했다.

“경찰은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먼저 한 부인을 끌어내더니 옷을 홀딱 벗겼습니다. 배가 많이 나온 임산부였습니다. 남편이 산에 오른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경찿ㄹ은 그 부인의 겨드랑이에 밧줄을 묶어 팽나무에 매달아 놓고 대검으로 마구 찔렀습니다. 이어 토벌대는 주민들을 선별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폭도 가족’을 가리는 것인데 우리는 아버지가 앞서 토벌대에게 총살당했다는 이유로 끌려 나오게 됐습니다. 우린 4형제였는데 열세 살이던 내가 장남이고 밑으로 열한 살, 일곱 살, 그리고 젖먹이 동생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호소로 동생들은 풀려났지만 나는 ‘눈망울이 둥글둥글한 게 폭도들에게 연락함직한 놈’이라며 풀어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13명이 인근 밭으로 끌려가게 됐는데, 경찰들은 ‘칼로 찔러 죽이자.’ ‘시간이 없으니 총으로 쏘자.’며 자기들끼리 잠시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그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칼에 찔리면 고통이 오랠 것이니 총에 맞는 게 낫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순간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어머니가 나를 덮치며 쓰러졌습니다. 총에 맞은 어머니의 몸이 요동치자 내 몸은 온통 어머니의 피로 범벅이 됐습니다. 난 경찰이 떠날 때까지 어머니 밑에 깔려 있어서 무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졸지에 고아가 됐는데 일곱 살 난 동생은 홍역으로, 젖먹이 막내는 젖을 못 먹어 곧 죽었습니다. 만일 영화나 연극으로 만든다면 난 그날의 모습들을 똑같이 재연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도 눈에 선합니다.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 안인행. 1999년 4세. 애월읍 장전리. 100




붉은 바다
“1948년 12월 14일 오후 5시쯤 갑자기 군인과 경찰이 마을에 들이닥쳐 한 사람도 빠짐없이 향사로 집결시켰습니다. 그들은 열여덟 살에서 마흔 살 사이의 남자들과 얼굴이 고운 처녀만을 골라 밧줄로 묶어 표선리로 끌고 갔습니다. 그 후 남자는 12월 18일과 19일 양일에 걸쳐 표선 백사장에서 학살당했고, 여자는 군인들의 노리갯감이 되다가 군대가 이동하게 되자 최종적으로 12월 27일에 표선 백사장에서 총에 맞은 후에 또 칼로 찔려 죽었습니다.” - 김양학. 1998년 58세. 표선면 토산1리. 113



젖먹이
“우리 마을 북촌리에 대학살이 벌어지던 그날, 아침부터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군인들이 마을 동쪽부터 불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연설이 있으니 학교 운동장으로 집합하라 했습니다. 군인들은 우선 경찰 가족, 군인 가족을 따로 분리시키더군요. 낌새가 이상하다 여긴 사람들은 사돈의 팔촌이라도 경찰이 있으면 경찰 가족 쪽으로 줄을 섰습니다. 군인은 우선 민보단 간부를 불러 내 바로 총살했습니다. 사람들이 동요해 흩어지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사람들 머리 위로 총을 난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댓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중엔 한 부인도 있었는데, 업혀 있던 아기가 그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더군요. 그날 그곳에 있었던 북촌리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겁니다.” - 김석보 1998년 63세. 조천읍 북촌리. 118




십자가
“제주 출신 재일 동포 중에는 자신이 마치 4.3 사건 때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런 말하는 사람에게 반감을 갖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당신이 진정으로 투쟁을 했다면 제주도에서 죽었어야지, 어떻게 지금 살아 있는가? 불만 질러 놓고 떠난 것은 무책임한 것 아닌가?’ 라고 반박합니다. 또한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나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 선생처럼 끝까지 제주도에 남아 있던 분을 존경합니다. 내가 산을 올라 보니 ‘이덕구 노래’가 있을 정도로 선생은 신망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는 소련의 소년단 노래에 가사를 붙인 것입니다.”
‘머리에 쓴 것은 도리구치로구나.
손에다 권총 쥐고서 싸움을 나가네.
누구냐 그 이름 무섭다고
박박 얽은 그 얼굴
이- 이- 이덕구!’ - 김민주. 1994년 63세. 일본. 당시 조천 중학교 학생. 126




빌레못굴의 유골
“토벌대는 마구잡이로 청년들을 죽였습니다. 난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순 없었기에 도망쳤습니다. 그 무렵 알게 된 빌레못굴로 숨어들었는데 그곳에는 남읍리 주민 28명이 있었고, 우리 마을 사람으로는 강규남의 가족 5명(어머니, 아내, 아들, 딸, 누이), 송시영과 그의 처, 양신하 등이 있었습니다. 입구가 좁고 은밀한 곳이라 모두들 안심했지만 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여차하면 숨을 만한 곳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요. 결국 굴이 발각됐습니다. 겨울철이라 온도 차이로 인해 굴 밖에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김 때문인 것 같습니다. 군경 토벌대와 민보단원들이 굴 안으로 들어오자 급히 숨었지요. 그런데 토벌대가 ‘살려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고 유혹을 하자 대부분 나갔습니다. 굴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의 신원을 파악한 토벌대는 붙잡은 사람을 통해 내 이름을 부름 나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난 끝까지 버티며 나가지 않았어요. 토벌대는 사람들이 굴 밖으로 나가자마자 굴 입구에서 바로 학살했습니다. 강규남의 아내는 두어 살 난 딸을 업은 채 도망쳤는데, 나처럼 인근에 숨지 않고 더 깊숙이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 빠져나오지 못한 채 굶어 죽었습니다. 굴이 너무나 크고 복잡해 길을 잃은 겁니다. 모녀의 유골은 나중에 굴 탐사팀에 의해 발굴되었습니다.” - 양태병. 1998년 71세. 애월읍 어음리. 134






자료1 제주 4.3 항쟁의 역사적 의미 -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위원

2000년 1월 공포된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주4·3특별법)에 의해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 (제주 4·3 위원회)가 설치되었는데, 이 '제주4·3 위원회'에 2001년 5월까지 신고된 4·3 관련 피해자는 사망 10,715명, 행방불명 3,171명, 후유 장애 142명 등 총 14,028명이었다. 이들 중 20세 미만이 3,840명이고, 60세 이상이 860명이었다. 피해자 중 여자는 2,875명이었다. 제주도 마을마다 피해자들이 있었다. 4백 명 이상 희생된 것으로 신고된 마을만 3곳이고, 1백 명 이상신고된 마을은 무려 45곳이었다.
2003년에 통과된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진상 조사 보고서)에서는 인구 감소같은 여러 가지 근거를 통해, 신고된 피해자의 두 배쯤 되는 2만 5천 명에서 3만 명이 4·3 때 희생된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제주도 주민이 약 30만 명이었으니까 10분의 1정도가 희생된 것이다.
제주도에서의 희생은 우리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임진왜란(1592~1598) 때나병자호란(1636년) 때도 한 지역에서 그렇게 많은 민간인 희생이 나지는 않았다. 그 점은 주민 집단 학살이 몇 차례 있었던 일제 강점기 때도 마찬가지다. 한국 전쟁(1950~1953) 때도 많은 주민 집단 학살이 있었고, 전쟁이 시작된 직후 군경이 저지른 '보도 연맹원 대량 학살'은 제주도에서의 희생보다도 규모가 컸지만, 그것은 남한 지역 전체에서 저질러진 것이었다.
..
제주도를 온전히 느끼려면 빼어난 풍경과 함께 젲 4.3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48-149

남로당 제주 도당의 무장봉기는 제주 도민이 가세하여 항쟁으로 변모하였다. 제주 4.3 사건을 연구한 미국 정치학자 존 메릴(John Merril)은 “2차 세계 대전(1939~1945) 후 점령군에 대항하여 이처럼 치열한 민중 반란이 분출된 곳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었다.”라고 기술 했다. 149

4·3 사태는 꼭 유혈 참극을 빚어야 했을까? 4·3 사건이 경찰의 탄압과 서청단원의 빈번한 불법 행위로 일어났다고 판단한 연대 연대장 김익렬은, 이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그리하여 제주 군정장관 맨스필드(John S. Mansfield) 중령의 승인하에 4월28일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 평화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는 72시간 안에 전투를 중지하고, 무장은 점차로 해제하며, 무장 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루어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김달삼이 진심으로 평화적 해결을 원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김익렬이 한 것처럼 그 뒤로도 사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선무 공작을 벌였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왔을 것이고 당국을 신뢰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4.28 평화 회담 직후의 도민 반응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5월 1일 '오라리 방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경찰은 이 사건을 무장대 소행으로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우익청년단체에서 평화를 깨기 위해 일부러 저지른 짓이었다. 미군은 이 오라리 방화 사건'을 입체적으로 촬영해 무장대의 폭력성을 알리는 선전용으로 써먹었다. 강경 진압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였다. 1948년 5월 3일, 미군은 무장대 총공격을 지시했다. 9연대 연대장은 김익렬에서 박진경으로 바뀌었다. 154

미군은 이미 김익렬에게 초토화 작전을 지시한 바 있었다. 5.10 선거가 무효화된 후에 제주 지구 미군 사령관으로 온 브라운 대령 (Rothwell H. Brown)은 "사건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고 공공연히 강경 일변도의 발언을 했다. 9연대가 11연대로 재편되어 11연대장이 된 박진경은 무자비한 강공 작전을 폈다. 무장대가 5백 명 안팎이었는데도, 정부는 5월 27일까지 3,126명을 잡았다고 발표했고, 6월 12일 <조선일보>는 체포된 자가 약 6천 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155

1948년 10월 17일, 새로 재편된 9연대 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의 지점과 산악 지대를 허가 없이 통행하는 자는 총살에 처하겠다는 포고를 발표했다. 초토화작전이 임박했음을 말해 주는 포고였다.
다음날인 10월 18일, 제주 해안이 봉쇄되었다. 유일한 지역 언론사인 <제주신보> 사장이끌려가고 편집국장은 총살되었다. <경향신문>과 <서울신문> 지사장도 끌려가 총살되었다.초토화 작전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철저히 제거되었다.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정부는 아무런 법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때부터 다음 해 3월까지 어린아이부터 70, 80대 노인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주민들이 집단으로 학살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곳곳에서 주민 집단 학살을 불러온 초토화 작전은 1차적으로는 9연대(연대장 송요찬)와1948년 12월 29일, 9연대와 교체되어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2연대(연대장 합병선)에 있다.그렇지만 최고 책임은 1948년 12월 서청 총회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제주도에 내려온 한 서청 단원이 "이 대통령의 허락 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 라고 증언한 바가 시사하듯, 이승만 대통령한테 있다.이 대통령은 1948년 늦가을에 서청 단원을 대거 제주도에 투입해 섬을 초긴장 상태에 몰아넣었고, 1949년 4월 9일 제주도를 방문해 잔존 폭도들을 완전히 소탕하라고 지시했다.
주민 집단 학살은 국제적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제주도에서는 작전의일환으로 버젓이 자행되었다. 1948년 12월 14일, 중산간 마을에서 옮겨 온 표선면 토산리주민 157 명이 9연대 병력에 의해 포박당한 채 표선 백사장으로 끌려가 집단 학살되었다. 또1949년 1월 17일에는 군인들이 조천면 북촌 마을을 포위한 채 4백여 채의 집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 천여 명을 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그중 약 3백 명을 인근 밭에서 학살하였고, 다음날에는 함덕 해수욕장으로 끌고 가 약 1백 명 정도를 학살했다. 이러한 주민 집단 학살로 1백 명 이상 희생된 마을이 45곳이나 된다는 것은 맨 앞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많든 적든 150곳이 넘는 마을에서 이와 같은 희생자가 나왔다.
인간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일도 버젓이 저질러졌다. 토벌 작전을 펴면서 13명의 목을 잘라서 시내를 두루 다니며 구경시키기도 하고, 서북청년회에서 주민들을 모아 놓고 서로 뺨을 때리게 했는데, 할아버지와 손자 간에도 이런 짓을 하게 했다. 토벌대가 주민들을 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놓고 발가벗긴 채 매질을 하고, 남녀를 지목하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하게 했다. 또 자식을 맨 앞줄에 세워 놓고 부모가 총살당할 때 손뼉을 치고 만세를 부르게 했다.
잔혹 행위는 끝이 없었다. 과거 나치나 일본군이 저질렀던 '살도 빈번히 발생했다. 남편이 산에 올라갔다고 아내를 죽이고 자식이 입산자라고 부모를 죽였다. 도피자 가족으로 여자나 노인, 어린아이 같은 주로 노약자들이 끌려가 살해되었다. 1948년 12월 10일 개수동에서는 도피자 가족과 외지인 36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이곳에서는 1949년 1월 24일에도 한 여인이 세 살 난 아이와 함께 총살당한 것을 비롯해 8명이 남편 또는 자식이 피신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학살은 무장대에 의해서도 저질러졌다. 4·3 초기,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 단원 같은 우익 청년 단체 소속원, 그리고 토벌대에 협조한 우익 인사와 그 가족들을 살해했다. 그러다 토벌대의 진압으로 곤경에 빠지게 되자, 토벌대 편이라고 생각한 마을들을 덮쳐 주민들을 집단으로 학살했으며, 어린아이와 여자, 노인도 살해했다. 제주 4·3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중 78.1%는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었지만, 12.6%인 1.764 명은 무장대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나타났다.
주민 집단 학살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일어났다. 제주도도 육지와 마찬가지로 보도연맹원과 요시찰 대상자를 예비검속해 살해했다. 제주의 경우 첫 번째 학살은 1950년 8월 4일 일어났다. 이날 예비검속자 수백 명이 해군 경비정에 실려 바다에 수장되었다. 또 8월 19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수백 명이 현재의 제주 비행장에서 총살당해 암매장되었다. 서귀포에서는 7월 29일에 150명 정도가 살해되었고, 8월 12일에도 학살이 있었다.
모슬포 경찰서 관할 지역에서는 1950년 8월 20일에 집단 학살이 있었다. 이때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던 한림 지역 주민들은 1956년에 몰래 61구의 시신을 수습해 안장했다. 모슬포절간고구마 창고에 수감되었다가 희생된 사람들의 유족들도 같은 해 당국의 허가를 받아 132구의 시신을 거두어 한 자리에 묻고, 그곳을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의 땅'이라는 뜻으로 '백조일손지지'라고 이름 붙였다. 155-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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