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서문 


에셀의 현실주의는.. 절망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대신, 현실이 허락하는 저항의 방식을 찾아내서 밀고 간다.  16


저자의 평생 사명은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어머니로부터의 과제였다.  17


이젠 누구도 개인의 행복을 해방과 승리의 '그날'이 온 뒤에 누려야 할 열매로 밀쳐두고, 대의를 위한 행군에 투신해야 한다고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운동의 경건주의는 운동가의 삶이 연인의 달콤한 살내음에 대한 열정과 뒤섞일 수는 없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개인의 일상에서 누리는 희열은 내비치지 말아야 할 금기로 가두고 있다.  19


세계 인권 선언 내용


나이가 주는 특권


나는 우리 세대가 건설하고자 했던 보다 나은 세상과 그 세상의 주춧돌로 삼은 자유와 정의의 가치를 새롭게 일깨우고, 북아프리카의 독재자들이나 산업화된 국가들의 불완전한 민주주의가 그런 가치를 어떻게 조롱했는지를 지적하면서 독자들에게 분노할 것을 요구했다.  27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거부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분노의 당위를 호소하는 격렬한 메시지의 전파자로서.. 나는 유럽 전역을 휩쓸고 다녔다.  28


내가 살아온 삶은 오늘날 내가 누리는 이 순간을 정당화하는가? 이 책을 탄생시킨 것은 바로 이 질문이었다.  28


저항하라, 그것이 창조다. 창조하라, 그것이 곧 저항이다.  32


지난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판단하고 체념해버렸다. 권력을 쥐기 전에는 모이는 것조차 불가능한 야당 인사들이건, 이미 진 싸움이라 판단해 포기한 채로 위험한 권력이 쟁취한 승리에 무저항으로 일관하는 무리이건 말이다. 그들에겐 늘 부족한 자질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을 존엄한 존재루 구별짓는 일이다.  37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란 곧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모든 것이다. 이는 종종 모종의 술책에 의해 이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그 누구도 위엄을 덜 갖춘 존재로 하등하게 취급될 수는 없다. 그런 취급 자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분노하는 것이야말로 정당한 행동이다.

이것은 양심의 문제다.  38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양심 교육이다. 

어느 날 장클로드 카리에르가 나에게 인간의 선의와 본성에 대해 장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허망한 일인지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루소의 자연주의라는 신화가 사람들로 하여금 원하는 방식대로 행하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고, 도덕적 타락의 원천, 즉 사회의 권력구조는 저절로 제거될 것이라 믿게 만든다고 여겼다.  39


현대 민주주의는 특권층의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해 탄생한 법이 다수의 진정한 희생자들을 초래하였을 때, 이들의 실존적 요구에 대해서는 무감하게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열의를 갖고 비판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지 않는 경향이 있다.  41


슬로베니아의 대통령 밀란 쿠찬은 카를 마르크스가 했던 이 말을 즐겨 인용했다. "자연과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이 갈등에서 우리는 어느 쪽이 유죄인지 잘 알고 있다."  43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거부하는 일은 첫걸음에 불과하다. 우리는 반드시 정신의 진보를 따라야 하며, 창조적인 사고로 고취된 현실공동체의 각성을 향해 진화해가야 한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변화에 대한 불안,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장차 다가오는 것을 두 팔 벌려 끌어안지 못하게 하는 망설임만이 우리를 여전히 보수적이고 소심한 부정(否定 아닐 부, 정할 정)속에 가둘 뿐이다.  44


과학자와 정치가. 이들 사이에 장사꾼이 끼어들어 상호 간에 득이 되는 비전을 제시한다면, 오늘날 과학의 역할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유명한 경구 하나를 인용하겠다. "양심 없는 과학, 인간을 소외시키는 과학은 과학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의 과학화가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다. 이런 현상은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진 희망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46


나노 기술이 불러올 미래에 대해 들을 때면, 나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노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지난 30년간 금융 경제가 지배해온 사고 방식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며, 불행하게도 이번에는 과학의 탈을 쓴 새로운 형태로 연장되고 있는 것만 같다...

나는 정부가 대대적인 투자를 하는 분야, 특히 과학적인 발견을 실용화하는 공공 투자의 방향성에 대한 공개 토론이 부재한다는 사실을 통탄한다.  47


삶, 죽음, 도덕, 사랑, 증오는 모두 '양(量)적 지배'를 비켜 간다.

바로 여기에 예술의 우월함이 잇다. 초월적 본성을 지닌 시, 현실을 정화해 표현하는 연극, 그리고 상상을 영상으로 전환하는 꿈 같은 연출 방식의 영화, 특히 이 모든 영역을 총괄하는 소설이 그렇다. 소설은 사회과학, 심리학, 사회학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간다. 소설은 구체적인 인간 존재들을 그들의 주관성 속에, 그들이 속한 사회적 그룹 속에 놓고 무대 위에 세운다.  51


메를로퐁티는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확고한 반(反)데카르트주의자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을 분리할 수 없는 합성체이다."  52


나는 에드가 모랭이 주장했듯 근본적으로는 모든 것이 다 개혁되어야 한다고 본다. 경직되고 관료화된 행정과 조직들, 경제와 재정 구조, 분배체계만이 개혁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모든것, 식량, 소비를 비롯한 이 모든 개혁은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연대적이기도 하다.  56


교육개혁이 반드시 더해져야 한다. 교육개혁 없이는 다른 개혁들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59


장클로드 카리에르는 "희망은 우리의 적이다"라고 한 <바가바드기타>의 경구를 따를 것을 권한다.  60


투키디데스가 한 말도 생각해 보자. 그는 단호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자유롭거나." 이 말은 자유란 끊임없는 투쟁이 동반될 때 주어지는 권리임을 의미한다.  

소박한 차원일지라도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61


<분노하라>에서, 나는 분노와 희망을 마주 놓을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분노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만드는 방법일 수도 있다. 물론 분노 안에는 희망의 가능성 혹은 소위 말하는 '앙가주망'의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바로 슬로터다이크가 말한 '훈련' 혹은 '고행'이다. 고행은 중요한 몇 가지에 자신을 집중시키기 위해 불필요한 것들을 많이 포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런 방법을 통해 당장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방법을 통해 받아들여지고 내면에서 소화되고 천천히 흡수되면서 결국 해결책을 도출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62


외부의 도움을 바라며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의 도래를 기대하는 순간, 우리는 싸움에서 진다.  63


나는 "분노하라"고 말했다. 내가 미래 세대에세 전해주고 싶은 더 근본적인 메시지는 용기와 회복탄련성(resilience)다. 베르나노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이다. 그리고 가장 고차원적인 희망은 극복된 절망이다."  64


어리석고 우스꽝스럽고 건강하지 못한 수천 가지의 분노가 존재한다. 

분노는 하나의 명백한 의도와 연결될 때만 가치를 발휘한다.  65


나는 <분노하라>의 몇몇 구절을 통해, 비폭력은 우리가 갈등의 원인들을 제거하고자 할 때 취해야 할 정치적 노선이며 필수불가결한 전략이라는 사실을 말하려 했다.

그럴 때, 분노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분노는 우리를 자각하게 해주고, 의식을 일깨우고, 체념한 사람을 무관심에서 빠져나오게 하고, 좌절로부터 걸어나와 우리의 마음을 자극하는 일에 맞서 저항하고 싸우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게 해준다. 그러나 이것은 생각의 첫 단계, 붉은 신호등, '길의 시작'에 불과하다.  66


분명한 것은 불확실한 희망뿐일지라도 확신을 갖고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71




측은지심의 힘


지난 10년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중요한 화두로 대두된 '소유욕(libido possidend)' '지배욕(libido dominandi)'. 75-76


이 두 가지 욕망에 대항하여 나는 측은지심(compassion)을 제안한다. 측은지심은 연민(sympathie)보다 더 너그러운 감정이며, 그것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동정(pitie)보다 덜 불쾌한 감정이다.  76


'바꾼다는 것'은 실은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기 위해 우리가 축적한 경험 속에서 좋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측은지심 속에는 함께하려는 의지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집약되어 있다. 

측은지심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 사회를 바꾸는 데 사회 구성원들의 단단한 의지와 끈끈한 연대보다 더 큰 동력은 없다.  77


상호의존은 다양한 독립체들이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나가며 서로에게 지나치게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서로에게 자극을 주는 유연한 개념이다.  80


슬로터다이크는 청소년에 대한 교육을 되살려야 한다고 믿는다.

칸트가 말했듯 우리는 단지 좋은 의도만을 가지고 도덕적인 행동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덕망 있는 행동은 우리로 하여금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을 함께 경험하게 하는 '아비투스(Habitus, Habit-습관에서 비롯된 말)' 안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자아를 초월하는 용기'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마저 초월해, 행동하기를 단념하지 않는 것이다. 각자가 더 높이 올라갈 의지를 북돋는 것이다 .권력이나 소유, 야망을 향해서가 아니라, 도덕적인 아름다움을 향해서.  83-84


"어떻게 길을 바꿀 것인가?" 측은지심은 여기서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89


결과적으로 보면, 가장 잘 구축된 것들은 언제나 일탈에서 시작되었다.

"문제는 오늘 이 자리에서 현실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주의자라니, 얼마나 꿈같은 생각인가." 이렇게 말한 사람은 베르나르 그뢰투이젠이다.

불가능한 유토피아에 대해 비판하는데 그쳐서는 안 되고 유토피아가 가능하다고 생각해야 하며, 현실주의에 대한 비판 또한 필요하다.  90


에드가 모랭이 그의 저서와 발언을 통해 줄기차게 말해온 탈바꿈(metamorphose)의 사상. 탈바꿈,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동시에 다른 것이 되는 것이다.  91


내가 여기서 말하는 핵심적인 주장은 현재의 모습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완전히 탈바꿈시키자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측은지심의 힘이 그렇게 되도록 우리를 부추긴다. 그 안에 내포된 사랑으로.  92




사랑을 사랑하라, 감탄에 감탄하라.


감탄은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하고 내게 활력을 더하는 요소였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교육자들에게 일찌감치 아이들에게 감탄하는 훈련을 시킬 것을 권유한다.  95


우리는 결코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다. 특히 충분히 '잘' 사랑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 삶의 단계들에 잊히지 않는 흔적을 남긴 것은 사랑받았던 기억보다 사랑했던 기억이었다.  106




다중 정체성의 시학


진실을 진실로서 인정하는 것, 동시에 실수를 인정하는 것, 순응하지 않고 반대편으로 살아가는 것, 모든 방법을 통해 모든 것을 느끼는 일은 결국 모든 것에 대한 지성을 갖는 일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뱀의 길>중에서  142


정체성, 그것은 서류에 찍힌 도장일 뿐이었다.  150


영화는 실제 우리 모습에 대한 변장이다.

우리는 무엇으로 이루어진 존재인가? 

우리는 모순의 시대를 살고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나라간의 거리는 좁혀졌고 국경은 경제통합으로 인해 사라졌으나, 개인화된 이 세계에서 각 개인이 차지하는 자리는 불안정하기만 하다. 민족적, 종교적 혹은 문화적 공동체의 전통적인 고리가 와해되고, 가족을 포함한 집단이 약화되는 현실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모순 그 자체다. 전통과 종교들이 강제하는 그 모든 억압적 순응주의 속에서 개인이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수많은 살마들이 나날이 더 거대해지고 낯설어지는 세계 속에서 외롭다고 느끼지 앟고 위험을 느끼지 않는 것 또한 어려운 일다. 바로 여기서 정체성을 단순화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난다.  151-152


우리가 어떤 개인적인 자유를 갖는지, 우리가 어떤 독창성을 요구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153


어느날 어머니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행복해야 한다. 그리고 네가 누리는 그 행복을 네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퍼뜨려야 한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김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전할 수 있으며, 더불어 행복한 삶을 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끌어당겨올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아니면 우연히 다가오는 것인가? 어쩌면 나는 내가 대단히 운좋은 사람이라는걸 이미 깨닫고, 내 인생의 몇몇 단계에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넌 행운이 따르잖아. 자, 가봐. 넌 뭔가 해낼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적도 매우 많았다. 내 삶을 성공의 연속으로만 간주하는 것은 곤란하다. 나는 아주 많은 실패를 경험했다. 내 전기를 자세히 훑어본다면, 거기에서 아주 작은 몇 개의 성공과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실패를 발견할 거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실패들이 나를 좌절하게 만들도록 결코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 실패들은 내게는 더 멀리 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로 보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회복탄력성이, 즉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다시 길을 갈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결국 좋은 인생이란 우리가 축적해온 그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믿음을 갖는 인생이라고. 그리고 이 믿음은 시적 상상력이 우리를 풍부하게 지탱해줄 때 훨씬 더 강해진다고. 살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일들, 그리고 너무나도 지겨울때가 있는 일상 옆에는 언제나 예술이라는, 시라는 피난처가 있다.  161-162


사회학자 마르셀 모스가 정의한 기부에 관한 이야기에 귀기울려보면 좋을 것 같다. 모스는 기부의 진정한 의미를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보상으로 기부를 불러일으키는 것, 즉 '기부에 대한 보상으로 기부를 받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서로가 가진 것들을 기부하면서 더욱 조화로워질 수 있다. 나는 '조화'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싶다. 인구가 점점 더 많아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가 점점 원자화되고, 조화로운 공동의 삶을 산다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사회에서, 조화에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기 때문이다.  163


여기에서 작품이라는 개념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다. 개개인에게 자신의 삶은 하나의 작품일 수 있다. 혹은 개개인은 타인들을 위해 존재할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키는 작업자일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움직임이 우리들 각자의 삶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나는 목격한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다음의 커다란 두 가지 위험에 의해 억제될 수 있다. 기존의 것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모든 목소리를 질식시키는 정치적 억압, 그리고 타인에게서 발현되는 창조성에 대한 질투심에서 비롯된 냉소주의가 그것이다.  164


대립관계에 있는 것들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인간은 다양한 열정과 모순되는 여러 가지 충동들 속에서 성장하고 단련된다. 나는 인간이란 내적, 외적 반대에 끊임없이 부딪히면서도, 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지점에서 대립되는 것들로부터 하나의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166


철학은 관찰한다.  166


우리에겐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가 우리의 용기를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지 아는 것 또한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이다. 내가 보기에 문제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방관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어려움들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우리에겐 충분히 사용하지 않은 에너지가 아직 남아 았다는 사실을, 아직은 너무 멀게만 보이는 가치들에 대한 열망이 우리 안에 들끓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만일 우리가 불가능을 가능이라고 여긴다면, 그곳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고 충분한 힘이 있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조화를 이룰 수 있다.  167


쉽게 말해 도덕은 공적인 것이고 윤리는 개인적인 것이다.

윤리는 주어진 상황과 관련하여 정의된다. 이것은 일정한 순간에 행한 일정한 행동과 관련된 것이다.  170


윤리는 우리의 현실적인 반응에 근거한다. 이 반응들은 개인의 이익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171




참여하는 법을 배우자


우리 늙은이들이 여러분에게 참여하라고 요구할 때, 나는 우선 우리 사회의 작동방식을 통해 이루어진 변화들 가운데, 시민들의 크고 작은 참여 없이 얻어진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싶다.  180


흔히 볼 수 있는 경우는 다양한 의지를 가진 그룹들이 하나의 점으로 모여드는 현상이다. 이들이 진보를 일궈낸다. 어떤 그룹들은 다른 그룹들보다 더 잘 조직되어 있다.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신뢰를 주는 집단을 찾아라.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의 에너지와 역동성을 보태라. 그렇게 해서 한탄스러운 현재의 상ㅇ태를 뒤흔들어놓는 데 힘을 더하라.  181


지도자란,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처해 있는 시대의 의미를 밝혀줄 줄 아는 사람이다. 즉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거기에 해답이 되는 요소를 제시해야 한다.  182


우리는 사회참여를 할 때, 삶의 행복을 누린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 어떤 참여도 하지 않고, 홀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187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그리고 시민이라는 세 개의 축이 그럭저럭 균형을 이루는 삼각구도 안에서 정부도, 경제권력도 풀지 못한 방정식을 풀 근원적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시민들이다. 시민들이 정치권력의 포로가 되고 정치권력은 경제권력의 노예가 되어버린 상황에서도 시민은 현실적으로 유일한 지렛대이며 시스템의 중심이다. 시민들만이 자신들의 기질에 따라 투쟁에 나설 수가 있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가해진 정치권력, 경제권력의 억압에 반응하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이 지닌 권력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공공투쟁의 근본 토대를 재구축하기에 충분하다. 이들은 라 보에티(프랑스의 법률가, 철학자. 18세기 프랑스의 운동과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책 <자발적 복종>을 썼다.)가 말한 것처럼 스스로가 원해서 자신을 지배하는 권력에 복종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복종이 자발적이라는 것'을 잘 안다. 이후 가능해지는 이성적 추론의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시민을 상위에 놓기 위해 이 삼각구도를 전복시킨다. 시민들에게 적용되는 권력이 그들 자신을 위해 쓰이도록 노력한다. 바로 이런 이성적 추론이 나로 하여금 오래된 개념인 '분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만든 것이다.  192


분노한다는 것은 '긍지를 되찾겠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존엄성이라는 개념이 '분노'의 뿌리인 셈이다. 분노하는 자는 자신이 존엄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식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분노라는 행위는 기억을 재정립시킨다. 

그러나 분노는 훨씬 더 멀리까지 나아간다. 원한, 화 같은 비교적 고결하지 못한 일차적 동기에서 투쟁, 정치참여 같은 고결한 행위로까지 나아간다. 이렇듯 분노가 정치적 연금술이나 대변혁과도 비슷하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193


어쩌면 내가 나이 때문에 이렇게 초연해졌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우리 모두가 가능한 한 덜 소유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꼭 필요한 것들을 충족할 만큼만 소유하면 된다. 우리는 비범함 존재일 필요는 없지만, 일단 강하고 모두를 위해 필요한 존재여야 한다.  197


앙드레 고르의 저서 <노동의 변신>은 내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결국 우리는 인간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인간은 노동을 해야만 하는, 노동으로 사는 동물인가? 아니면 즐거움을 누려야 하고, 사랑해야 하고, 생각해야 하고, 또다른 뭔가를 해야만 하는 동물인가? 현실적으로 인간은 이 모든 것을 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다소 모순되어 보이지만 피할 수 없는 이 모든 활동들을 어떻게 조화롭게 배치해야 할까?  199


60억의 인구가 유럽인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두 개의 지구가 필요하고, 미국인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다섯 개의 지구가 필요하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해 수학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버틸 수 없는 상황이다.  201


단순명료함(simplicite)은 단순화하는것(simplisme)과는 분명 다르다.  206




민주주의 - 모든 프로그램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는 가난을 줄이는 데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특권에서 소외된 자들이 행복한 국민이 되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민주주의가 기울여야 할 노력이며, 요즘 더이상 행해지지 않는 노력이기도 하다.  232


"민주주의의 정확한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한 인터뷰에서 민주주의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할 바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평등해지기보다 특혜를 누리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하찮은 평등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관심이 없다. 모든 사람에게 특혜를 줄 수 있는 기술을 발명한다면 완벽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것이다."  233


모든 사람에게 모든 기회를 제공한다는 야심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에는 전체주의자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종종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특히 피하기 힘든 함정이 있다. 바로 보수적인 신자유주의의 함정이다.  234




움직이지 않는 것은 흩어지고 움직이는 것은 지속된다


진정한 현실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능한 행동을 실행하게 하는 것이지, 정해진 한계를 체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246


장클로드 카리에르는 시바교의 성가로 쓰이는 서기 5세기 혹은 6세기의 아름다운 시 한 구절을 인용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흩어지고 움직이는 것은 지속된다."  258


에른스트 윙거는 저서 <반란의 조약>에서 고통받는 세계 속에서는 개인의 평정이 유지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259


행동하려 한다면 매우 구체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집중시켜야 하고,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며, 논리를 발전시켜야 한다. 의지를 행동으로 끌어내기 위해 분노가 필요하고, 의식을 평정해야 한다.  259-260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에서 비폭력 저항을 유지시킨 거의 유일한 지도자이다.  260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했다.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난다. 그러고는 곳곳에서 쇠사슬에 묶이고 만다."  263





Attristez-vous!(슬퍼하라!) 

스테판 에셀의 죽음 이후 프랑스인들이 트위터에 일제히 올린 추모 메시지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내용


스테판 에셀의 <참여하라> 내용


스테판 에셀의 <정신의 진보를 위하여> 내용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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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편


왜 속으로는 '노'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예스'라고 할까요? 용기가 없어서 그랬던 겁니다.

용기가 먼저 있어서 '노'라고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노'라고 할 때, 우리에게는 없던 용기가 생기는 겁니다.  18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이 말은 당나라 때의 백장(百丈)이라는 스님의 말입니다.  27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이건 일을 하지 않으면, 혹은 일을 못하면 죽겠다는 이야기예요. 혹은 그만큼 목숨처럼 생명처럼 일이 중요하다는 거지요.

복잡하게 읽을 수도 잇지만 이 이야기는 우선 언제 우리가 눈감아야 할지 가르쳐 주는 이야기예요.

아기 기저귀라도 하나 갈고 마당이라도 빗자루로 쓰는 거예요. 그렇게 움직이면 먹어도 된다는 겁니다.  28


일을 안 하고 먹는다는 건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 먹는 거예요.  29


백장 스님 머리에 '이 일을 해서 돈을 받아야 된다'라는 건 없어요. 일을 하는 게 소중한 거예요.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죠.  32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일을 부정하게 됩니다. 일을 폄하하죠. 이건 어느 순간부터 우리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을 노예로 자처하면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일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죠.  35


'내가 원하는 일들을 어떻게 찾을까?', 이게 지금 문제인 거예요. 주인으로서의 삶은 여기서 결정되는 거예요. 여러분들 고민의 대부분은 노예의 투정이에요. 대개 노예는 노예인데 일은 안 하고 밥만 먹고 싶다는 내용이에요. 밥을 먹을 수만 있으면 된다는 노예적 절박함이라고 해야 할까요?  37


타인이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노예라고 부르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주인이라고 부릅니다.

기껏 대학 나와서 됐다는 게 최고급 노예인데, 이제 돈 좀 들어오니까 찝찝한 거예요.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타인이 원하는 일을 하는 걸 노예라고 부른다고요. 일하는 걸 싫어하는 게 노예의 근성이에요.  38


제 집필실이 광화문에 있는데, 가끔 광화문에서 사람들을 생태학적으로 관찰하면 패턴이 보여요. 광화문에는 직장이 많죠. 오전 8시에서 9시 사이에 사람들이 막 모여들고 우르르 각자 사무실로 들어가요. 그런데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서 11시 30분이 넘으면 사람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해요. 밥을 먹으려고. 그러면 밥을 먹다가 12시 30에서 40분쯤 되면 커피 가게로 막 들어가요. 그리고 1시 좀 넘으면 직장에 들어가서 5시가 넘어가가 시작하면 우르르 나와요. 해맑은 모습으로요. 제가 그래서 어떤 분한테 직장인들은 오후만 일하니 오전에 쉬게 하지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분 이야기가 오전에 불러서 그렇게 뭉그적거리게 해야 오후에 일을 하지. 사람들을 1시에 나오게 하면 일한다고 워밍업하고 인터넷 보고 커피 마시고 어제 포털에 나왔던 거 다 이야기하고 일 시작하면 일하는 시간 달랑 30분밖에 안 된다고요.

우리는 노예로 살죠.  39

영어를 좋아해서 영어 공부하신 분 있어요? 대부분 우리는 영어가 좋아서 공부하는 게 아니죠. 영어 능력을 원하는 자본에 팔려고 영어를 공부하는 거죠. 손님에게 팔리기 이해 화장을 하는 매춘부처럼 말예요. 그래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시대를 '보편적 매춘의 시대'라고 이야기했던 거예요.

재미있지 않아요? 옛날에 노예를 부릴 때는 때리면서 강제로 노예한테 기술을 가르쳤어요. 자본주의 사회는 묘하게 자유롭습니다. 자본주의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가 '자발적 복종'이에요. 한 단계를 건너뛴 거죠. 누가 시키지를 않아요. 옛날엔 노예가 잡혀 와서 일을 제대로 하나 안 하나 감시당했죠. 그리고 능력 있는 노예가 있으면 가령 그 노예가 배를 만드는 게 좋겠다면서 억지로 배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요. 지금은 거꾸고 됐어요. 이게 참 묘하다니까요.  40


옛날의 노예는 탈출을 하려고 했는데, 우리는 나를 써 다라고 해요. 이게 자본주의의 비법이에요.  41


여러분들이 직장 생활을 하더라도 머릿속에 넣어 두셔야 합니다. '난 노예다' 주인 입장에서 생각하지 마세요. '월급을 받으니 이만큼은 일을 해야지'. 절대 이런 이야기는 하시면 안돼요. 버티면 월급은 나와요. 그렇지만 갑자기 해고되면 막막하니까. 일하는 척 잘 버텨야죠. 게으르지만 잘리지 않게! 마르크스의 사위가 하나 있어요. 라파르그라는 사람이 입니다. 기억해 두세요. 이 사람이 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라는 책이 있어요. 두께도 얇야요. 책의 서두에 있는 얇은 논문이 있는데, 읽어보세요. 이 글이 바로 노예의 지침서예요. 월급은 받되, 잘릴 정도로는 게으르지 않기! 역시 마르크스의 사위다운 글입니다.(라파르그는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몸을 잘 움직일 수 없을 때 자살합니다. 백장 스님의 기개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주인 입장에서는 묘한 거예요. 이 노예가 하자는 없는데 일은 진척이 안 되는 거죠. 누구 좋으라고 일을 해요?

때때로 이런 느낌도 들어요. 전시에 포로를 잡아서 포로들에게 땅을 깊게 파라고 해요. 그리고 땅이 다 파지면 포로들을 거기 들어가게 해서 총으로 쏘고 덮어요. 그게 정리해고예요. 일이 다 끝나면 여러분이 회사에서 나가는 논리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요? 삽질하는 척 하기. 너무 노골적이며 죽여요. 그러니까 삽질하는 척은 하는데 땅은 안 파지는 그 묘한 형국을 만드는 거죠. 거기서 살아 있어야지 탈출이라도 하죠. 회사에서 여러분의 에너지를 다 쓰지 마세요. 주인의 일에 에너지를 모두 쓰지 말아요. 회사에서 에너지를 쓰면 여러분이 원하는 일을 찾을 시간과 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직장 다니시는 분들, 반드시 해야 될 일이 뭔지 아시겠죠? 회사에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겁니다. 일이 끝나고 나서 그 모든 에너지를 가족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거예요. 보고 싶은 연극을 보세요. 연극 봐서 피곤하니까 그 다음날 오전에 출근해서 또 잘 쉬어요. 하지만 완전히 들키지는 않게. 할 수 있어요? 그러면 고용도 촉진돼요. 사람을 몇 명 뽑았는데 효율이 안 오르면, 또 사람을 뽑아요.  44-45


여러분의 일을 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부지런해져요.

남이 원하는 일을 할 때는 게을러야 돼요. 게으르되 잘리지 않을 그 미묘한 경계가 있어요.  45


페이비언 소사이어티(Fabian Society). 파비우스 막시무스라는 한니발을 이긴 로마의 장군이 있어요. 파비우스는 한ㄴ발이 워낙 강력하니까 지구전을 사용해요. 그런데 이걸 원로원에서 가만히 두겠어요? 장수로 보내 놨더니 진영은 차지하고 밥만 먹는 것 같잖아요. 로마 대군 5만 명이 매일 밥만 먹어요. 다섯 명도 아니고 5만 명이거든요. 이러니 쇼부를 빨리 쳐야 되잖아요. 그래서 원로원에서 파비우스를 자르고 다른 사람을 장수로 보냈는데, 이 사람은 한니발을 공격하다 박살이 나요. 그래서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또 부르죠. 그랬더니 또 다시 밥만 먹어요. 그리고 나중에 이겨요. 그래서 페이비언이라는 말이 나와요. 

페이비언 소사이어티는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방법으로 사회를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가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자라는 사회로 갈때까지 느리게 천천히 사회를 바꾸자는 것입니다. 급진적인 혁명을 이끌던 지도자가 나중에 일하지 않고 먹으려고만 할 수 있다는 것을 안 거죠.  47


여러분이 즐거워하는 일을 했었을 때 그게 돈벌이가 되면 여러분들은 진짜 제대로 자리를 잡은 거예요.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자신이 하는 일이라는 것, 그게 중요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해서 돈을 벌면 '땡큐'고 아니면 좀 힘들게 사는 겁니다.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것이 바로 주인의 삶이다' 이걸 명심해야죠.  48


여러분들 각자의 삶의 시간은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 이 둘로 할당이 될 거예요. 노동하는 시간은 대부분 그 자체로 목적은 아닙니다.(물론 그 자체가 목적인 사람들이 있어요. 저 같은 사람이요.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거죠. 저는 글을 안 써도 됩니다. 누가 시키는 건 아니에요. 제가 쓰고 싶은 때 쓰는 거예요.) 대개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이 따로 있어요.  54 


여러분께 지혜를 하나 알려 드릴게요. 보통 사람들은 최저임금을 이야기하거나 가급적 많은 임금을 생각합니다. 이제 '최적임금'을 생각할 때입니다. 최저임금이 아니라 최적임금입니다. 나의 최적임금은 얼마인지, 이 정도 벌면 됐다는 걸 정할 수 있어야 해요. 그걸 아는 사람은 내가 돈을 버는 목적이 향유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에요.  55


한 사회가 얼마나 나쁜지의 척도는 노동시간의 길이입니다. 노동 시간이 늘어나는 사회는 나쁜 사회예요.  55


모두 먹고사는 고민만 있어요. 생존만 있고, 향유는 없어요. 거기에는 의무만 있어요. 

여기에 무슨 살 이유가 있어요? 즐거운 것이 있어야 된다고요. 노동은 힘들어요. 유사 이래로 인간이면 다 그래요.  56


다음 공식을 머릿속에 넣어 놓으세요. '삶의 행복은 노동하는 시간보다 향유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커진다'라는 공식 말이에요. 여러분이 일하는 시간을 줄여야 행복해져요. 물론 이 시간을 절대적으로 제로로는 만들 수 없어요.  57


가장 행복한 삶은 스스로 하는일, 지금 땀을 흘리고 하는 일이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면서도 즐거운 일이면 됩니다.  59


우리의 가장 큰 착각은 우리가 자본가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84


여러분이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본이 원하지 않아도 내가 행복하다면 기꺼이 그 일을 하고, 내가 행복한 일을 하는 데 돈이 필요하다면 또 사냥을 떠나면 됩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이 향유이자 동시에 노동이기도 한 사람이겠죠. 제작하고 창조하고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이죠. 홀로 하는 직업일 때만 가능해요.  85


누누이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가져야 할 지혜는 시간에 대한 것입니다. 삶의 시간은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 둘로 양분됩니다. 우리의 행복은 가급적 노동하는 시간을 줄이는 데 있는 것이죠.(하지만 노동하는 시간을 아예 없애고 향유하는 시간만 있다고 하면, 그건 누군가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다는 걸 의미합니다. 어쨌든 우리의 삶에서 일과 노동은 뺄 수 없어요.)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하면, 우리는 제대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사회철학자나 정치가들도 모두 이 삶의 시간을 기준으로 주어진 사회를 부넉하고 도래할 사회를 꿈꾸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봤을 때 사람들이 노동하느 시간이 너무 많아서 향유하는 시간이 없다고 하면 그 사회는 나쁜 사회인 거예요. 이런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불행이자 남루함이지요.  85-86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인지, 그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다는 것, 아니 생각하지 말아야 했었다는 것. 그것이 박정희 지배가 독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생각은 오직 최고 통치자만 하면 됩니다.  90


분명 우리는 양적으로 원시인들보다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문명의 혜택을 다 누리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불행하기만 합니다. 지금 우리는 향유하는 시간을 위해 일한다는을 까먹고 잇기 때문이지요. 일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것에 젬병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하나에 능숙하다는 것은 다른 것에는 서툴다는 것을 함축하니까요. 그러니 아이들과 노는 것, 아내와 산책을 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 심지어 가족과 함께 공연장에서 연주에 몸을 맡기는 것, 어느 것 하나 피곤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없ㅅ브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한다는 것은 항상 가도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일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다시 일에 몰입하게 됩니다. 잘할 수 있는 것이 일밖에 없고, 그래서 일할 때 편안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식으로 마침내 우리는 구제할 수도 없는 워커홀릭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98


이제 깊게 생각할 때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 그리고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는 어떤 덕목이 필요한지. 이제 눈에 들어오시나요?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진정한 덕목이 바로 용기라는 것이. 사랑하고 창조하는 시간, 즉 향유하는 시간을 위해 일하는 시간을 줄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닐 테니 말입니다.  99




정치 편


이론상 차이가 없다고 하더라도 삶에서 50보와 100보는 다릅니다.

중요한 건 정확한 기준을 가지고 잇어야 한다는 거죠. 가령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을 때, 그냥 누구는 좋고 누구는 싫다. 소녀시대가 좋냐 2NE1이 좋냐가 아니라 민주주의 본령과 원칙을 정확히 알고 그 기준을 통해 투표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기준을 두고 누가 50보를 갔고 누가 100보를 갔는지를 보자는 거예요.  122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죠? 그리고 그게 맞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고요. 하지만 실제의 삶은 어떤가요? 국민이 전쟁을 원하지 않아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즉 대표자에게는 교전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잇어요.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전쟁을 원하지 않더라도, 대표자들은 전쟁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어떤 인간은 대통령이 되어서 전쟁을 하려 할 거고, 어떤 인간은 끝내 안 하려고 할 겁니다. 50보와 100보의 차이는 있는 것이죠.  123


유럽 국가 중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가 프랑스죠. 프랑스 사회는 왜 민주적일까요? 왕을 죽였거든요. 왕을 죽인 국민한테는 축복이 있어요. 왕을 죽였으니 내가 왕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이게 프랑스 전통이에요. 우리의 가장 큰 슬픔은 고종을 못 죽인 데 있어요. 우리가 죽였어야 했는데, 일본이 해결을 한 거죠. 그러면 총독이라도 죽였어야 햇는데 그것도 못 했죠. 그 다음에 보니 이승만이나 박정희와 같은 독재자도 죽이지 못했어요. 한 사람은 죽이기 전에 하와이로 도망가서 죽었고, 한 사람은 죽이기 전에 측근에게 먼저 살해당했으니까요. 단 한 번도 독재자를 죽인 경험이 없는 겁니다. 한 명만 죽이면 되거든요. 딱 한 명만, 그 다음부터는 웬만하면 대통령 안 하려고 할 걸요? 잘못하면 훅 가는데 누가 하려고 하겠어요.  130-131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도 말하잖아요. "어떤 인간이 왕이라는 것은 다만 다른 인간이 신하로서 그를 상대해 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그가 왕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신하가 아니면 안 된다고까지 믿고 있다." 완전한 심리적 전도이자 착각이지요. 임제(臨濟)라는 스님이 있어요. 이 스님이 남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야 자유인이 된다는 거죠. 멘토를 만나면 멘토를 죽여야 돼요. 멘토는 무슨 멘토예요? 자신이 어리석고 멍청하다고 생각하니, 자꾸 멘토를 찾아서 지침을 들으려고 해요. 하지만 멘토의 지침을 계속 찾으면 우리는 계속 멍청해지는 거예요. 스스로 당당한 주체가 되기를 비겁하게 회피하는 순간, 우리는 점점 더 우유부단한 사람으로 전락하는 거라고요.  132


좋은 군주, 나뿐 군주를 가르는 건 착각입니다. 중요한 건 군주라는 형식 그 자체니까요. 이 형식을 어떻게 없앨지, 과연 이 형식은 없어진 것인지 이걸 고민해 보시길 바랍니다.  133


한 개인의 독자성 같은 것들은 사람 수가 많아질수록 희생됩니다.  141


보수는 자신을 사랑하고, 진보는 타인을 사랑한다고 정리될 수 있습니다.  147


'인간이 먼저고 이념은 나중'이라는 사람이 진보라면, '이념이 먼저고 사람은 나중'이라는 사람은 보수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보수적인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올라 자신의 이념을 관철하려고 하는 겁니다. 물론 이웃과 후손들을 사랑한다고 이야기는 하겠죠.  148


용서요?

아버지 한테 매 맞는 아이가 아버지를 용서하게 돼요. 심지어 자기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이해한다고요. 어머니가 나갔으니까 나한테 화풀이 한다고 생각하죠. 그게 용서인가요? 용서는요. 그 사람이 완전히 자립하고 당당해졌을 때 힘이 세졌을 때 하는 거예요. 약한 자가 용서를 할 수 밖에 없는 조건에서, 용서한 것을 용서라고 하진 않아요.

강해서 용서했다고 하지 마세요. 예수의 정신, 이런것도 아니에요. 자비, 이런 것도 아니에요. 어떻게 못하니까 그런 거에요. 슬픈 거죠. 그래서 용서하면 안 돼요. 용서하지 맙시다 약한 자는 용서하는 거 아니에요. 자격 없어요. '더럽게 약하다'를 각인하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쟤를 때리지도 못하는구나' 이렇게요. 중간에 용서하고 모든 걸 퉁치려고 그러죠. 그냥 그렇게 살려고요. 그럼 안 되는 거 같아요.

누간가 한 명이 '전두환을 죽이자'고 할 수 있어요. 누가 죽일래요? 우리는 그 회의를 합시다. 누군가 죽일 수 있어요. 누가 광주에서 죽었던 사람들 대신 그 복수를 해 줄 수 있을까요? 민주주의를 외쳤던 사람들을 공수부대로 잔혹하게 도륙했던 그 인간을 그들 대신 누가 죽일까요? 죽일 수 있어요? 역사에 길이 남는데 죽이실래요? 우리는 불행히도, 역사보다 자신을 더 아껴요. 우리는 감옥에 가는 것도 싫고, 그렇게 약하고 비겁하다고요. 내가 당할 불이익들이 있는 거죠. 이것부터 우리가 아프게 자각해야 돼요. 용서하면 죽이러 갈 필요도 없고 편하잖아요. 이것도 가슴 속에 아프게 넣어 놓으셔야 됩니다.  164-165 




쫄지마 편


'쫀다'라는 표현은 무언가 두렵다는 것을 말하죠. 두려움이라는 건 안해 본 것들을 무서워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는 판타지를 가질 수 있거든요.  188


무서운 것이 있어서 쪼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지 못해서 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걸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은 그냥 하는 거예요. 모든 판타지의 특징은 우리가 그곳에 걸음을 훅 내딛었을 때 신기루처럼 없어진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혼 무섭죠? 이혼을 한 번 해 보면 더 이상 무섭지 않아요. 해보고 나면 별것 아니란 걸 알게 되죠. 그런데 참 힘든 말이죠? 무서운데 그냥 하라고 하니까요. 사실 하기가 힘들거든요. 그렇지만 뭐든지 한 번의 경험은 필요합니다. 어떤 경험이든 상관없어요. 인생에서 너무나 무서운 것들을 한 번은 눈 질끈 감고, 과감하게 해 보는 경험이 필요해요. 그 경험이 한 번만 잇으면 돼요. 내가 무섭다고 생각하는 걸 한 번 해 보는 거죠. 조금 상처를 받더라도 후유증이 적은 것들을 통해 그런 경험을 조금씩 쌓을 필요가 있스빈다. 쪼는 것이 상당히 줄어들 테니까요.  189-190


너무 많이 안다는게 때로는 축복이기보다는 저주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이 알게 되면 힘들다고요.  191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높은 정상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정상이 어딘지 모르고 무식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다 보면, 정상에 오를 희망이라도 생기는 법이죠. 반면 정상까지 얼마나 힘든 여정인지 정확히 안다면, 우리는 한 걸음을 내딛는 용기마저ㅓ도 포기할지 몰라요. 냉소적으로 변하는 거죠. 그래서일까요? 과거 사회에도 못 배운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지 지식인 계층에서 혁명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사회에 대해 투덜거리지만 바꾸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겁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죠? 이 말은 우리가 "유식해서 비겁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요?  194


쪼는 사람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은 뻔뻔한 사람이에요. 쪼는 것의 반대말은 당당함이 아니에요. 뻔뻔한 사람이 현실적인 힘까지 얻을 때, 오직 그때만 당당해질 수 있어요. 

다음 순서는 성장해야만 해요. '쪼는 나' -> '뻔뻔한 나' -> '당당한 나'. 그러니까 우리는 당당해질 때까지 뻔뻔해지도록 노력해야 해요. 무모함이나 순박함이 아니라 뻔뻔함이라고요.  195


뻔뻔해지기 실천강령(1):우아하게 거짓말하기

미리 말씀을 드리지만 강한 사람만이 거짓말을 해요. 약자는 정직하게 진실만을 얘기하죠.  197


거짓말이 정당화될 때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도 사랑하는 사람은 나보다 강자인 것처럼 느껴질 겁니다. 애인이 만남을 지속할 수도 있고 끊을 수도 있는 역량이 있는 것처럼 다가오는 경험이 사랑이니까요. 자기와 놀아 달라는 애인에게 '친구와 게임을 하기로 했어'라고 하면, 애인은 내게 크게 실망하고 나를 떠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쿨하게 거짓말을 해야죠. '삼촌이 위독해! 미안해. 삼촌만 아니었다면, 너와 놀 수 있을 텐데.'

그리고 사회에서 여러분보다 더 강한 놈이 정직을 강요하고 압력을 가해 올 때, 여러분들은 거짓말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 돼요. 거짓말이 정당화되는 두 번째 경우죠. 강자 앞에서 약자가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쿨하게 거짓말하는 겁니다. 이때 진실을 이야기하면 강자는 우리를 자기 식대로 통제하려고 할 테니까요. 애인이랑 데이트 약속이 정해졌다면, 직장 상사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부장님,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 못합니다. 힘 있는 사람이 '너 이거 했지?' 이러면 찔려요. '들킨 거 아니야?' 이런다고요. 그러니 뻔뻔함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연습을 통해서만 경지에 오를 수 있는 덕목입니다.

여러분을 쫄게 만드는 대상들은 대개 뻔뻔해요. 거꾸로 얘기해 보면 여러분들이 '밥'이라는 거예요. 이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보다 더 뻔뻔해지는 겁니다. 싸우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당당해하지 마세요.  200-201


세상은 우리를 다 쫄게 한다고요. 우리가 쪼는 건, 어린애 같고 정직해서 그래요. 일기장 쓰는 사람처럼 산단 말이에요. 이 태도를 가지면 안 돼요. 일기를 쓰는데, 첫 번째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순 거짓말인 일기를 써 보세요. 그리고 그 일기장을 애인한테 주는 거예요. '나의 마음을 받아 줘' 하실 수 있어요? 못하죠? 이게 교육의 병폐에요. 사회화의 목적은 국가나 권력이 힘 있는 사람한테 복종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교육의 목적이 뭐예요? 기성세대가 편한 거예요. 아이가 대소변을 가리면 누가 편해요? 부모가 편하죠. 어머니는 그런다고요. '얘야, 이제 품위 있게 기저귀에 똥을 누니 얼마나 좋니?' 사실은 이런 거죠. '얼마나 좋니? 나한테 안 맞고' 교육의 목적이 뭐라고요? 기성세대들이 편한 거예요. 

여러분들은 교육을 너무 잘 받은 겁니다. 정직학 까놓고 고발하는 사람들, 자기 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약해요. 자기의 속내를 이야기했다가 부당한 대우를 받지요. 여러분드르이 가장 큰 문제는 너무 정상적으로 중고등학교를 나왔다는 거예요. 중학교 때 본드도 마시고 고등학교 때 애인과 모텔도 가고, 할 거 다 해 본 다음에 개과천선했으면 여기 상당하러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202-203


그러면 이 뻔뻔함을 어떻게 얻어야 돼요? 바깥에 나와 봐야 돼요. 바깥에 나와서 독립적인 생활도 하고 스스로 선택도 해 봐요. 돈이 많이 들죠. 지비에서 나갈 수도 있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뻔뻔스럽게 집에 들어와 사는 사람의 비범함을 아셔야 됩니다. 부모한테도 쫄고 바깥에서도 쫄아서 오갈 데 없이 집에 있는 사람과는 다른 사람인 거예요. 뻔뻔한 사람은 부모님이 더 이상 밥도 안 주고 잠자리도 내주지 않고 구박을 하면, 그때가 되어서야 '음, 이제 떠날 때가 왔네. 지금까지 편했는데. 쩝, 어쩔 수 없지'라고 하면서 자신의 짐과 모아 둔 돈을 챙겨서 집을 나가죠. 

거짓말을 하세요. 거짓말은 뻔뻔하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뻔뻔하기는 해도 쪼는 사람은 아니에요. 편안하게 거짓말을 하세요. 이 능력을 기르면 여러분들은 사회에 물의를 많이 불러일으킬 거예요. 대신 쫄진 않아요. '아, 이 세 치 혀로 인생이 거의 다 해결되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될 거예요. '하루에 세 번씩 거짓말을 안 하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각오로 거짓말을 하면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하나도 쪼는 게 없을 거예요. 거짓말 잘하시는 분? 나는 거의 문학적 수준에 이르렀다? 이런 분 계신가요? 모든 문학은 거짓말이죠. 그들은 당당해요. 문학자들처럼 뻔뻔스러운 사람이 없고 당당한 사람도 없어요. 한국사회에서 민주화운동을 문인들이 끌고 갑니다. 왜죠? 그들은 거짓말쟁이거든요. 거짓말을 한다는 건 우월한 거예요. 이런 세계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뻥을 뻥뻥치면 사람들이 그거에 속아서 또 사회를 만들어요. 미래의 꿈이라는 게 뭐예요? 지금 사회는 우리를 이렇게 착추한다고, 그래서 이렇게 하면 자신이 뻥치고 있는 사회가 가능하다고, 누군가 막 뻥을 치는 거죠. 그 뻥이 긴가민가하다가 사회가 그걸 받아들이면 그 사회는 변화하는 거예요. 거짓말 속에서 새로운 역사가 열리는 겁니다.  204-205


중국 철학자 송견(宋?)의 테마는 견모불욕(見侮不辱). '모욕을 당해도 치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게 또 핵심적이죠. 모욕을 당해도 치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예쁜 사람이고 싶고, 고상하고 싶고, 순수하고 싶고요. 우리는 이런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칭찬해 주면 훅 넘어갈 사람들인 거죠. 그게 거짓된 칭찬이어도요. 이게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문제예요. 그래서 누군가 칭찬해 주면 좋고, 누군가 칭찬 안 할 거 같으면 쫄죠. 인정받고 싶으신 거예요. 

모든 인간관계의 문제는 인정을 받으려고 해서 생겨납니다.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아요. 왜 인정받으려고 그래요? 진짜 위대한 인격은 뻔뻔스러운 거라니까요? 인정받으려는 사람은 항상 정직하려고 한다고요. 많은 우화는 사람들이 거짓말을해서 우울해지고 외로워진다고 그러죠. 사실이에요. 하지만 인정을 받으려는 사람만이 아기처럼 진실을 얘기해요. 그러니까 절대 남한테 인정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이라는 멘트를 하던 개그 프로그램의 코너가 있었는데 기억 나세요? 진짜 좋은 멘트죠. 그 사람이 쫄 거 같아요? 세상에 대해서? 누가 무슨 욕을 하든지 간에 그걸 의식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누군가 욕을 했는데 그걸로 화가 나고 속상하다는 것은 인정받겠다는 걸 드러내는 거거든요. 누가 여러분에게 '야, 이 개새끼야!'라고 욕을 하면, '그래요. 난 개새끼예요. 만세!' 이러면 되는 거예요. 남이 인정하든 안 하든 내가 무슨 상관이에요?  205-206


누군가한테 인정받으려고 그럴 때 또 쫄아요.  207


'거짓말하라' 이후의 두 번째 행동 강령은 '기꺼이 욕을 들으라'는 겁니다. 스스로 내가 어느 정도의 인간인지 시험해 보려면 욕을 들어 봐야 돼요. 남의 험담, 음해를 들어야 돼요. 무슨 소리인지 알죠? 자꾸 남에게 인정받는 이 메커니즘이 우리를 세상에 쫄게 만들어요. 검열하게 만들고요. 예쁜 사람 콤플렉스를 버려야 돼요. 남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 말 것. 어머니의 칭찬 들으려고 하지 말 것. 어머니의 칭찬 들으려면 남자 친구, 여자 친구랑 모텔도 못 가요. 그 칭찬이란 게 나한테 뭔 상관이예요. 여러분들의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오만 가지 욕이 달려도 이렇게 생각하세요. '반응이 좋은걸?' 욕 좀 달렸다고 트위터 끊고 페이스북 끊고 뭣들 하는 거예요? 그게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친구를 만나시면, 서로 계속 욕을 하세요. 칭찬하지 말고 욕을 해요. '오늘 네 옷은 거의 걸레인 걸?' 이렇게요. 무슨 말인지 알죠? 그걸 견디는 거예요. 좋은 친구 사이에서는 서로 칭찬을 하지 않아요. 병신같고 나약하고 여린 애들끼리만 둘이 모여서 서로 '너는 예쁘네, 고상하네, 지적이네' 그러는 거죠. 그렇게 살다 보니까 바깥에 나갔을 때 욕 한 번 듣고서는 상처받고  또 그 친구한테 가요. 이게 뭐예요? 친구들끼리 서로를 강하게 만들어야 되잖아요. 서로를 욕해 줘요. 만나자마자 허점을 찾아야 돼요. 처음엔 힘들지만 그걸 경디면 놀라운 일이 벌어져요. 심지어 그 다음부터는 화장도 안 할 거예요.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친구들끽 만나서 칭찬하고 서로 위로하지 말아요. 아부하는 사람이랑 아첨하는 사람은 군주를 붕괴시켜요. 회사에 갔을 때도 너무 열심히 일해서 인정받지 말아요.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한 달 동안은 사고를 치세요. 복사기에다 커피 쏟고 복사기를 망가트리는 거예요. 온갖 욕을 다 듣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회사에서 안 쫄아요. 자기가 정말 잘못을 할 때도 있을 겁니다. 이 경우 보통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지'라며 자책하죠. 그러면 또 실수할까 봐 쫄게 되어 있어요. 잘못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스스로 검열하지 않는 방법은 누가 나한테 욕을 하거나 뭐라고 할때 그것에 쿨해지는 것입니다. 쿨해지면, 여러분은 세상에 쫄지 않아요. 아시겠죠?  208-209


뻔뻔함의 두 가지 강령, 첫 번째, 거짓말 잘하기. 들키지 않고 부드럽고 우아하게.

두 번째, 기꺼이 욕을 먹기, '하루에 욕을 세 번 안 먹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생각으로 욕듣기. 욕이 부족하면 반드시 나서서 욕먹을 짓을 하기.

뻔뻔스럽고 당당한 사람들, 쫄지 않는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게 아니라 실전무공으로 단련된 거예요.  212


철학자들이나 지식인들 대개는 자기도 경험하지 못했던 얘기를 뻐꾸기처럼 계속 날리는 거예요. 거기에 취어잡히면 안 돼요. 쫄아서는 안 돼요. 지적으로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되죠. 그래서 거기 말리는 거예요. '음,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어요. 선생님' 이렇게 뻔뻔스럽게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해요.  220


진짜 위대한 사람은, 혼자 있는 사람이에요.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누군가를 만나서 주체적으로 사랑할 수도 있어요. 누구든 외로워서 사랑하면 안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도도하게 혼자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성숙한지를 알 수 있죠. 힘들거나 외로울 때 친구한테 전화하지 말아요. 아셨죠? 절대 외롭다고 놀아달라고 하지 말기. 강하게 꿋꿋하게 슈베르트 음악을 들으면서 견디는 거예요. 우아하게.

잊지 마세요. 뻔뻔스럽게 대하고 세계와 단절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계에 쫄지 않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이 뻔뻔스러움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진정한 친구와 애인을 가질 수 있어요. 잊지 마세요. 그때가 되어서야 진짜 만날 수 있는 거예요. 제가 가르쳐 준 대로 하면 왕따 당하고 패가 망신하고 집에서는 쫓겨날 것 같죠? 여러분 주변의 쓰레기 같은 사람들, 내가 결정하지 않은 인간관계들이 다 정리가 되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새로운 관계가 열립니다.  229-230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하나 해 드릴게요. 어느 보살 할머니가 자신이 성불은 안 되니 스님을 한 명 키우기로 하고 10년 동안을 봉양해요. 그러다가 이 할머니가 스님이 깨우침으로 가고 있는지 밥만 처먹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어요. 시험을 해 봐야 되잖아요. 그래서 마을에서 가장 섹시한 기생을 데려다가 안겨 줬어요. 그러고 나서 스님의 반응을 보는 거죠. 스님이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안아 주면서 기생에게 말해요. "나의 마음은 얼음과도 같다." 그 말을 듣고, 그 보살 할머니가 스님이 있는 암자를 불태워 버려요. 왜요? 억지로 하잖아요. '여자를 탐해선 안 된다. 품어선 안 된다 흔들리면 안 된다.' 그 흔들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흔들린 거예요. 흔들리지 않는다면, '얼음'이라는 생각조차 안 들었겠죠. 쫄고 잇는 사람만이 '쫄지 말아야지. 쫄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생각해요. '쫀다'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없어져야 되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죠? 그러니 당당해지지 말고, 뻔뻔해지세요. 그게 안 쪼는 거예요.

그리고 비겁한 걸 받아들이세요. 자신이 어디까지 비겁한지만 알면 돼요. 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가 '모 아니면 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중국 한나라에 한신이라는 장수가 있었어요. 한고조 유방을 도와서 한나라를 구축했던 유명한 장수예요. 이 한신이 저잣거리에서 깡패들을 만나요. 칼을 든 깡패 열댓 명을 만난 거예요. 깡패들이 한신에게 자기들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라고 해요. 딱 보니까 게임이 안 돼요. 한신이 어떻게 했게요? 쏘 쿨! 기면 돼요. 뻔뻔하게! 그렇다고 그들에게 굴복하는 건 아니에요. 그게 바로 한신이라는 사람이 가진 능력이라고요. 그리고 나중에 히을 가졌을 때, 나라를 건립한다고요. '완전히 당당해지지 않으면 난 비겁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게 문제거든요. 

여러분 자신을 오버해서 보지 마세요. 여러분이 역사를 바꿀 것 같아요? 집을 바꿀 것 같아요? 어머니를 바꿀 것 같아요? 바꾸지 못해요. 여러분들이 해야 될 일은 내가 얼마나 무능력한지, 얼마나 비겁한지를 아는 겁니다. 이 말은,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안다는 얘기예요.  255-257


자본에게 쫄지 않는 방법은 뭘까요? 자본이나 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겁니다. 전셋집도 갖지 마세요. 가지고 잇으면 낚이는 거예요. '최적생계비'만 갖고 있어야 해요. 최저생계비가 아니라 최적생계비예요. 그래야 뻔뻔해져요. 그래야 사장한테 뻔뻔해진다고요. 사장이 밤에 일하자 그래도 이래요. '됐어요. 월급 됐어요.' 최적생계비를 계산하는 거예요. 최대생계비는 끝이 없어요.  265


자본주의는 순수한 게임의 세계입니다. 세상이 모조리 다 투자고 '돈 넣고'로 좌지우지도는 리얼리티 없는 세계. 게임가가되면 그 안으로 들어가게 돼요. 도박사, 도박군들이 도박에 빠지는 이유를 야셔야 돼요. 그게 순수한 자본가의 세계예요....

우리가 돈에 쫄지 않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나의 최적 생계비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거예요. 최적생계비만 벌면 되니까 나머비 시간에는 뻔뻔해질 수 있죠.  266


디오게네스가 왜 당당해요? 옷 한 벌, 지팡이 하나, 자루 하나 들고 통에서 살았잖아요. 통! 통 하나밖에 없잔하요. 집을 갖고 있으면 쫓겨나지만, 처음부터 쫓겨날 데가 없는데 쫄 이유가 없죠.  267


'뻔뻔하다'는 말의 긍정성을 아셔야 된다는 거예요. 이건 소중한 거예요. 

죽을 때까지 인정을 받지 않겠다는 각오로 사시면 돼요. 그러다 진실을 얘기해야 될 때가 올 수도 있어요. 어쩌면 그때는 '모 아니면 도'일 거예요. 진실에 대해서 쉽게 얘기하진 말고요. 그 뻔뻔함으로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냈을 때 여러분들은 쫄지 않는 자아. 뻔뻔한 자아로 만들어져요.

앞서 얘기했지만 쫀다는 것과 당당함을 대척되는 것으로 두면 안 돼요. 쫄다가 뻔뻔스러워 졌다가 그 다음에 마지막에 오는 것들이 당당함이에요. 당당함은 그렇게 쉽게 얻을 순 없어요.  267


라캉도 말했던 겁니다. 주체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275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임제어록>에 나오는 말입니다. 물론 진짜 살인을 하라는 것은 아닐겁니다. 위악은 위악일 뿐, 진정한 악을 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빈다. 단지 우리 스스로 주인으로 서는 데 방해되는 일체의 권위를 마음속에서 제거하자는 겁니다.  277




에필로그 - 존 레논의 '이매진'을 읊조리며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 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Imagine no posse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타인이 자신의 삶을 억압할 때는 저항이라도 가능하지만, 자발적으로 타인에게 복종하는 경우에는 답조차 없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깊게 가슴에 아로새겨야만 합니다. 타인의 삶을 흉내 내지 말라는, 그리고 타인에게 내 삶을 흉내 내도록 강요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말입니다. 하긴 다른 팽이의 회전이 멋있다고 해서 그것을 흉내 내는 순간 자신만의 스타일로 돌고 잇는 팽이는 더 이상 돌 수 없을 겁니다. 그 역도 비극으로 끝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억압뿐만 아니라 모방이나 자발적 복종도 철저하게 거부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모방이나 자발적 복종도 철저하게 거부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문정신이 가진 소명입니다. 인문학은 다른 학문과는 달리 '고유명사'를 지향하는 학문입니다.  288-289


"공통된 그 무엇"을 거부해야, 우리는 "스스로 도는 힘"을 지킬 수가 잇습니다. 아니 그 역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스스로 도는 힘"을 강화할 때에만 우리는 "공통된 그 무엇"을 극복할 수 있을 테니까요. '공통된 그 무엇'의 자리에는 그 어떤 것이라도 올 수 있습니다. 자본, 종교, 민족, 인종, 정치권력, 스승, 멘토 등등. 우리만의 스타일로 삶을 살아 내는 힘을 빼앗는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통된 그 무엇"이 들판의 야생화들처럼 단독적인 개인들을 '우리'로 만드는 근본적인 계기로 기능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말장난을 조금하자면, 공통된 그 무엇이 만드는 것이 바로 '울(타리)'. 그러니 '우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공통된 그 무엇이 만든 '우리'에 갇히는 순간, 개인들은 '우리'로 변한다는 겁니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겁니다. '울타리'를 의미하는 '우리'라는 말이 개인들의 단독성을 부정하고서 출현하는 집단적인 '우리'라는 말과 같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공통된 그 무엇의 '우리'에 갇혀 '우리'가 되는 순간, 더 심각한 위기가 먹구름처럼 몰아닥치게 됩니다. 우리와 공통된 것이 없는 타자들을 '적'으로 여기는 후속 사태가 벌어질 테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 순간 개인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슈미트의 말처럼 '정치적인 것'의 범주, 그러니까 '적과 동지'라는 치명적인 범주에 포획되고 맙니다.  290-291


"공통된 그 무엇"을 극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개개인들을 '우리'로 가두는 우리를 부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힘을 내서 스스로 다시 돌아가야만 합니다. "스스로 돌아가는 힘"을 유지하는 단독적인 개인들로 우리가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야만적인 적대와 대립, 그리고 끝내 모두를 절멸시키는 전쟁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존 레논은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모든 종교, 모든 국가, 모든 소유를 철폐하는 꿈을 꾸었던 적이 있습니다. 종교, 국가, 그리고 소유를 통해 적과 동지로 갈라서서 싸우는 인간의 모습이 참담했던 겁니다.  292-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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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니어링 자서전(역사인물찾기 11)

저자
스콧 니어링 지음
출판사
실천문학사 | 2000-05-1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철저한 자립농생활로 자본주의화된 문명에 저항했던 한 근본주의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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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 기록 보기


스콧 니어링에 대해서는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여 자립생활을 한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책을 통해 알게 된 것은 그의 전반적인 삶에서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고, 45세가 되어서야 그런 생활을 선택한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의 삶에 대해서 알지 못했고, 사실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책을 읽기 전까지는 대단한 사람이구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비슷한 사람이구나.. 이런정도로만 생각을 했을 뿐이다.


사실 이 책을 읽을 기회는 여러번 있었다.

이미 7, 8년쯤 전에 이 책은 개인 책꽂이에 꽂혀 있었고, 여러번 언급될때 마다 한 번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으나 손이 잘 가지를 않았다. 그만큼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최근에 그의 부인인 헨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이란 책을 훑어보면서, 어디선가 낯이 익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살펴보니 니어링 부부였던 것을 알게 되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가장 먼저 책을 접한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을 먼저 읽어보자는 생각에 책을 들게 되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편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고, 배운것을 통해 명예도 얻을 수 있었고, 개인의 생각을 적절히 제어해 줌으로써 평범한 가정을 꾸려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인생을 돌아 보았을때 자신의 스승이라 불릴 수 있었던 사람들(어머니, 할아버지, 패튼교수, 톨스토이)을 통해 그가 배운것은 사유와 용기였다.

그는 잘못된 것을 보며 눈을 감거나 주저앉아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잘못이며 그에 대한 해결 제시도 한다. 

근시안적이 아닌 기회주의적이 아닌 용기를 나타내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본주의의 폐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목소리와 생활을 선택함으로 '사회의 적'이 되기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족이 떠나는데도 올바른 것에 대한 선택을 멈추지 않았다.


그랬기에 헨렌을 만날 수 있었고, 그의 삶은 더욱 아름답고 알차게 진행되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는 떠나서 (사실 니어링의 생각중에 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있는 점도 있다. 사회주의도 그렇지만 개인의 노력이 의미를 가질수 없다는 생각에 대해..) 그의 사유와 관찰 그리고 선택에 대해서 지금의 우리는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우리는 습관의 원칙에 지배되어 지금의 것이 아닌 다른 것이 발생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분명 잘못인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때 우리 속에서는 외면이라는 작용이 발생되고 다른곳에 눈을 돌려 애써 피함으로 스스로 자책하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실 우리는 답을 찾아야 하는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시작하기 전에 그것 자체가 귀찮고 어려운 일이라 생각을 한다.


책을 읽으며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역사이다.

우리는 학생신분을 가지고 있을 때 누구나 배우게 되는 것이 역사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과학의 혜택을 받았을까. 불과 몇 십년이다. 그 이전에는 과학의 혜택이란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보다 우리는 더 불편하게 살아가고 있다.

확실히 편한 삶이긴 하지만 그것이 결코 편하지많은 않다.

순간 편한 혜택은 비 시간동안 별 하는것 없이 더없는 경쟁에만 치중해야 되기에 결코 편하지 않다. 

실제로 바쁜게 살면서 돈을 벌어 피곤함을 문명으로 푸는게 그것은 돈을 써야 하고 그 문명들은 더 좋은것 더 많은것을 통해 안락해 지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돈 버는 시간을 더 투자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과연 편한게 편한것인가..

그 편안함때문에 지금의 어린 아이들은 가족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들에게도 편안함이 대체 되어 가족의 의미가 상실되어 가고, 부모는 돈을 벌어서 안락함을 주는 존재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우리는 늘 매체를 통해 세상이 각박해져 가고 있음을 보면서 우리의 아이들을 걱정하면서 내 아이가 그런 각박한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하는 인물이 되어가고 있음을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러한 세상에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부부는 삶에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비슷한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본다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보려하지 않기에 두려울 뿐인 것이다.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이런 삶을 보면서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기에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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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우리가 분노를 해야 하는 시대에 있다는것이 가슴아픈 일이다. 94세의 할아버지가 현재를 사는 젊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젊은 시절 사르트르를 선배로 만났고 독일인으로서 자신의 신념으로 레지스탕스로 활동하고 유대계 독일인이라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은 사람. 
전쟁이 끝나고는 외교관으로 대사로 인권위원회 대표로 다방면에서 활동하면서 쌓아온 자신의 열정과 경험으로 세상에서의 삶을 정리하는 그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인권과 환경문제에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일까. 이정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열정이 살아 숨쉬는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은..
저자는 '분노'라고 표현한다. 막연하게 분노를 느끼고 원초적인 방식의 폭력적 분노가 아니라, 삶을 올바로 바라보고 배우고 관찰하여 마땅히 분노해야 하는것에 인도적인 분노를 나타내라는 것이다. 
2차 대전때 레지스탕스는 분노때문에 일어난것이라 한다. 자유를 위한 동력으로 분노를 일으키고 투쟁을 한것. 지금의 시대에 총대를 넘겨 받아. 정치 경제 지성계에서의 사명을 다 해나가는 면에서 부당함이 있을때, 인류가 아닌 개인의 이기심을 볼 때...마땅한 분노는 역사의 흐름을 올바르게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지금 분노할 것은 있는가? 있다면 얼마나 있는가? 
사실 우리는 잘 모른다. 
이유는 가리워져 있어서이다. 알아도 생활에 끌려가고 있어서 신경쓸 여유가 없다. 
'나'만 생각하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기득권의 노림수에 빠져 있어서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우리의 눈은 가리워져 있고, 귀는 닫혀져 있으며, 그도 아니면 삶에 치이게 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떻든 사실이 아닌 진실은 분명히 존재한다. 
어쩌면 실제 아픔을 느끼지 않으려 고통을 피해 아름다운 것만 보려고 하는 안타까운 현실일지도 모른다.

프랑스에서 200만부가 넘게 읽히고 많은 유럽으로 그리고 세계속으로 번역되어 가고 있는 이 책이 한국 사람들에게 얼마나 읽힐것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읽혀 그들이 곧 기득권이 되어 세상이 아닌 그들만이 변화되어 간다면 소용이 있는것일까..
뜬금없을지도 모를 이런 생각이 든다.

특히나 동양 문화권에서 참을성을 배워온 우리들은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 이러한 문제를 받아들이는것이 쉽지 않을지 모른다. 사실은 생각하면 어렵지 않지만 생각하기 전이 문제이다. 매우 어려울것처럼만 보이는 두려움과 무력감이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책의 표현에도 나왔듯이 짧지만 강력한 내용(한국어판으로 40여 페이지에 불과하다)을 전달하는 이 책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생각할 계기를, 생각하면서 살아가지만 행동은 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행동의 계기를, 행동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여러가지 방법의 길이 있음을 깨우치는 계기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방법으로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음을 알아채는 계기를, 여러가지 이 시대에 필요한 것들이 드러나 보이게 할 수 있는 계기들을 주는 원동력이 된다면 아주아주아주 조금은 더 나은 내가 그리고 내 주위가 그리고 나라가 그리고 세계가 되지 않을까.
너무 과한 표현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가 사는 그 지점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내용의 책을 읽어서 이런 표현을 막 내뱉고 잇는지도 모른다. '그래 그래야지. 그럼그럼 그렇게 되어야해. 시대를 거꾸로 가는 이 나라를 보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것이야.'
이러한 생각이 들어 내뱉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실제 돌아보면 나보다 못한 사람들은 많이도 있다. 내것도 없는데 그런것까지 신경쓸 수는 없다고 볼 수 도 있지만, 환경 파괴가 결국은 우리에게 아니 우리의 자손에게 돌아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 사실 하나를 다시금 떠올려 한 번 더 생각하고 조심해 나가는 과정이 어쩌면 소시민이 할 수 있는 조그만 분노일지 몰라도 그것은 '나비효과'처럼 커져서 돌아온다. 
진정 불쌍한 사람들에게 말이 아니라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 작은 도움을 베풀때 돌아오는 내 마음속의 편안함과 뿌듯함, 그것에 더해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미래에 어떤식으로라도 다시 돌아오는 고마움이 될 것이다.
사소하면서도 작은 따뜻한 분노부터, 인도적인 큰 분노까지 우리의 삶에 조금씩 자라 잡아가는 그러한 생각은 각박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 아닐까.
나 자신이 둘러볼 수 있는 여유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





프랑스 해방 이래로 창출되는 부의 양은 괄목할 만큼 증가했는데...
이제 민영화된 은행들은 우선 자기들의 이익배당과 경영진의 고액 연봉 액수에나 관심을 보일 뿐, 일반 대중의 이익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극빈 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을 사람들이 이토록 부추긴 적도 일찍이 없었다.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자유란 닭장 속의 여우가 제멋대로 누리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다. 1948년 세계 인권 선언이 구체적으로 실천방안까지 명시한 이 권리는 보편적인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어느 누구라도 이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거든, 부디 그의 편을 들어주고, 그가 그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  14-16

어떤 권력에도, 어떤 신에게도 굴복할 수 없는 인간의 책임. 권력이나 신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라는 이름을 걸고 참여해야 한다.  19

맞다. 분노의 이유가 오늘날에는 예전보다 덜 확실해 보일 수도 있다. 아니면 세상이 너무 복잡해진 것일 수도 있다.
이제 우리의 상대는 광활한 세계이며, 그 세계가 상호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절감하고 있다. 그 세계가 상호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절감하고 있다.
그것이 무슨 일인지 알려면, 제대로 들여다 보고 제대로 찾아야 한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제발 좀 찾아보시오. 그러면 찾아질 것이오."라고,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고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미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커다란 도전이 두 가지이다.
첫째,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 사이에 가로놓인, 점점 더 커져만 가는 격차.
둘째, 인권, 그리고 지구의 현재 상태.  21-22
나는 젊은이드에게 말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 -이민자, 불법체류자,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 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  26

'도에 넘치게 분노'해서는 안되며, 어쨌든 희망을 가져야 한다. 격분이란 희망을 부정하는 행위다. 격분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당연한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납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희망이 긍정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경우에, 격분 탓으로 그것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31

폭력은 희망에 등을 돌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폭력보다는 희망을, 비폭력의 희망을 택해야 한다. 우리는 그 길을 따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인권을 침해하는 주체는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의 분노를 촉발해 마땅하다.  34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輕視),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라고.  38-39




편집자 후기
그는 이렇게 단언했다.
"나는 언제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편에 서왔다."  50


저자와의 인터뷰
도덕이란 타인들과 사회가 만들고 우리에게 강요하는 규범에 순응하는 것일 터입니다. 또 윤리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만들어가야 할 것, 즉 발명이며 창조(말하자면 결국 각자 자기만의 자유를 얻어내는 일)일 테니까요.
아주 일찍부터 어머니는 나에게 어떤 의무라도 지우듯이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네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법이야. 그러니 항상 행복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행복 해지려고 참으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언젠가는 정신분석 전문가한테서 이런 말까지 들었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신인 줄 아시나 보내요." 물론 이건 농담이겠고..  54
나의 비결, 그것은 물론 '분노할 일에 분노하는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의 비결은 '기쁨'입니다.
따로 또 같이, 정의롭지 못한 일이 자행되는 곳에 압박을 가하는것이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하고 이해하려 애쓰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55
어쨌든 내 인생은 긍정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었다고 봅니다.
당시에야 끔찍했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긍정적이라는 것이죠.
굉장한 연애도 해 보았고.. 남에게 베풀고 싶은 마음과 베푸는 기쁨을, 남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책임을 감수하는 것. 어떤 경우에도 나에게 베풁고 싶다는 마음, 이 마음을 북돋워야 합니다. 사람을 책임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성과 감성을 키워주는 것이 바로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56
이 책은 프랑스에서만 200만 부 가까이 팔렸고,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번역본이 나왔거나 현재 준비 중입니다. 유럽 이외의 국가로는 한국, 일본, 브라질, 미국 등이 있고, 심지어 중국에서도 올해 6월에 이 책의 번역본이 나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59
우리는 시민 대중이 보기에도 매우 불안해진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59
바로 이 시점에 시민 대중은 묻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게 닥치는 일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겨우 본문 20쪽밖에 안 되는 제 책이 이렇게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둔것은 전 세계 시민들이 광범위하게 절감하고 있는 문제제기에 화답을 했기 때문입니다.  60
이 책을 잘 표현한 글이 최근 <르몽드> 지 서평 머리기사로 게재된 다으모가 같은 제목의 글입니다. "레지스탕스, 현재를 감전시키다 - '분노하라!' 는 현재의 우리들이 적절히 포착해 이용할 대상으로서, 전달의 몸짓으로서 더욱더 관심을 모으는 책이다." 왕년에 레지스탕스에 뛰어들었던 한 노인이 역사에, '그들의'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기위해 노심초사하는 젊은이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61
잘 되어가는 사회란 무엇입니까? 모든 시민에게 생존의 방편이 보장되는 사회, 특정 개인의 이익보다 일반의 이익이 우선하는 사회, 금권에 휘둘리지 않고 부가 정의롭게 분배되는 사회입니다.
세 단어로 짧게 줄이면 여전히 이것입니다. '자유, 평등, 박애'!
그런데 역사의 어느 시기에는 이 가치들이 다른 때보다 더욱 심각하게 문제시됩니다. 지금의 현실이 그러합니다. 
유명한 작가이자 경제학자인 호세 루이스 삼페드로는 '설령 다시 살 수 있다 해도 나는 지금 여기서, 당신 앞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일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자기 나름으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 광고 메시지나 언론이 전하는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유로운 사고를 해야만 자유롭게, 양심에 입각해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옛날 레지스탕스 당시에 우리가 했던 것처럼 네트워크를 이용해야 합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페이스북, 트위터 등 인터넷상의 각종 네트워크(SNS)를 자유 자재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62-63
나는 호소합니다. 우리의 정신을 완전히 개혁하자고, 폭력은 거부해야 합니다. 우선, 효과가 없기 때문에 그래야 합니다. 
폭력은 폭력의 악순환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미래로, 희망으로 향한 문을 닫아 버리게 합니다. 
비폭력이란 손 놓고 팔짱 끼고, 속수무책으로 따귀 때리는 자에게 빰이나 내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 그다음에 타인들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65
참여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정당..
어떤 특별한 대의를 위해 활동하는 기구, 협회, 운동 등에도 참여를 해야 합니다. 예컨대 세계인권연맹,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또 그린피스 같은 환경운동 단체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조합(組合) 활동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일반인들이 항상 잘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육이 부족해서 그럴까요? 교육도 부족하지만 정치적 창의성도 부족합니다.  66
극도의 빈곤 문제가 생태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 테러리즘 문제와도 연관됩니다.  68


'분노'와 '평화적 봉기'가 세상을 바꾼다(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분노는 삭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삶의 지혜가 널리 퍼져 있는 한국 사회에서 "분노하라!"라는 직설적, 선동적 메시지는 생경하게 들릴 수 있다.
'마음공부'를 통하여 수시로 일어나는 심화(心火)를 직시하고 가라앉히는 것의 중요함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마음공부'가 '공분(公憤)'과 '의분(義憤)'의 불씨를 마음속에서 꺼버리는 것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화의 뿌리가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일 때는 그 공적인 원인을 해결할 때만 화는 사라진다.  71
1970~1980년대 우리는 군사독재에 맞서 '군사적'으로 싸웠다. 거칠었다고, 과격했다고 비난해도 좋다. 폭압적 정치권력과 천민 자본주의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화운동의 기본 동기는 실로 분노였다. 수많은 열사와 투사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처참하고 비통했다. 그리하여 각자가 방식으로 "인간의 책임이라는 이름을 걸고 참여"했다. '국가폭력'에 맞서 화염병을 던지고 짱돌을 던지는 등 '폭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그 '대항폭력'의 행사는 '사회적 정당방위'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로 인해 사람이 다칠 때는 몹시 자괴하고 고민했다.
당시 우리는 무엇을 꿈꾸었는가.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대통령, 국회의원, 자치단체장 등 대표자를 직선으로 뽑는것, 시민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 야당과 자유로운 언론의 존재가 보장되는 것, 국가권력이 시민의 인권을 자의적으로 박탈, 제약하지 못하게 하는 것 등이 당시 우리들의 절박한 꿈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 덕분에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이후 이꿈의 상당 부분은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한국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대거 그리고 급속히 후퇴하고 있기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네티즌을 감옥에 넣고, 정부 통상정책의 문제점과 광우병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한 작가, 기자, 피디와 G20 정상회의 홍보포스터에 쥐를 그려 놓은 대학강사를 처벌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과잉범죄화'의 칼을 휘두르는 것은 검찰이다. 한편 정부는 정보기관의 불법적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대표적 시민운동가에게 거액의 손해배상소송을 걸고, 국방부의 '불온문서' 지정에 의문을 품고 헌법재판소로 달려간 군법무관을 파면한다. 참으로 천박하고 한심하다. 권위주의가 좀비가 되고 유령이 되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정치적 민주주의 근본은 무너지지 않고 있다. 민주화를 이끈 대중의 분노와 그에 기초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정치적 민주화로 대의민주주의가 확립되었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떠한가. 대의제 민주주의 안에 자신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없는 약자와 소수자 집단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지만, 현재의 대의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잇다. 몇 년에 한 번씩 투표자를 뽑는 기회를 가졌다고 민주주의 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의제가 엘리트나 강자가 자신의 지배를 선거라는 절차를 통해 정당화하는 장치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한편 "이제 국가의 최고 영역까지 금권의 충복들이 장악한 상태"에서 "금권이 전에 없이 이기적이고 거대하고 오만방자"하게 위세를 부리고 있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인지 '삼성왕국'인지 헷갈리는 현실! 생물학적 기준에 따라 세세손손 시장권력을 대물림하면서도 견제와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재벌의 모습은 '맘몬'(mammon)에 다름 아니다. "은행들은 우선 자기 들의 이익배당과 경영진의 고액 연봉 액수에나 관심을 보일 뿐, 일반 대중의 이익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은행 문턱은 서민에게 그 얼마나 높은가. 그런데 은행은 고객의 예금을 어디에 쓰고 있는가. 은행은 재벌의 사금고가 되어버리지는 않았는가.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 최저 임금 상태를 표시하는 '빅맥지수'를 사용하자면, OECD 최저 수준의 한국 최저 임금 시급 4,320원으로는 맥도널드 빅맥세트를 사 먹을 수조차 없다. 정규직과 동일한 양과 질의 노동을 해도 임금은 반 토막을 받는 비정규직이 무한정 양산되고 있음에도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상위 20%가 부의 80%를 소유한다는 빌프레도 파레토의 '20대 80 법칙'은 확고히 자리를 잡앗다. 아니 한국 사회에서는 '10대 90 법칙' 또는 '5대 95 법칙'으로 변화하여 관철되고 있을지 모른다. 자산, 소득, 교육, 건강 등 여러 측ㅂ면에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논리가 기승을 부리는 정글이 되었다. 돌아보건대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을 사람들이 이토록 부추긴 적도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진보건 보수건 간에 민주공화국의 원칙과 가치에 입각한다면 이러한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의 민주공화국이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고소영' 및 '강부자'만을 위한 정책을 실현하는 데 여념이 없고, 이 정책을 비판하면 '좌파'라고 몰아세우기에 바쁘다. 이러하니 진보주의자 외에 합리적인 보수주의자, 상식을 존중하면서 성실히 살고 있는 중산층도 이명박 정권에 대하여 실망을 넘어 개탄을 표하고 있다. 이제 대중은 민주화운동의 후예들에게 시선을 옮기며 다시 기대를 걸고 있다.
과거 민주화운동 세력은 정치적 민주화를 위하여 싸우면서도, 동시에 "경제계, 금융계의 대재벌들이 경제 전체를 주도하지 못하게 하는 일까지 포함하는 진정한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 정립" , "특정인의 이익보다 전체의 이익을 우선"하고 "노동계가 창출한 부를 정당하게 분배하는 일을 금권보다 중시"하는 체제의 수립을 꿈꾸었다. "모든 시민에게, 그들이 노동을 통해 스스로 살길을 확보할 수 없는 어떤 경우에도 생존방도를 보장해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회보장제도의 완벽한 구축, 늙고 병든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삶을 마칠 수 있게 해주는 퇴직연금제도" 역시 꿈꾸었다.
당시 권위주의 정권은 이러한 꿈에 대해 '급진좌경' , '친북좌빨' 등의 딱지를 붙이고 처벌했지만, 이 꿈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꿈은 다 어떻게 되었는가? 자유로운 투표권이 확보되면 민주주의는 그냥 완성되는 것이던가. 진보의 본역은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추구하는 데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 잊혀버린 꿈을 되살릴 때다. 사실 노동의 양과 질에 따른 정당한 대가의 확보, 부의 세습 방지, 일자리 주거 노후문제의 해결 등은 진보와 보수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던가.
한편 이러한 사회경제적 민주화 외에 어떠한 과제가 놓여 있는가. 수많은 과제가 있겠지만, 적어도 에셀이 언급한 세 가지는 해결해야 한다. 먼저 언론개혁이다. 현재 :언론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되어 있다고 하면 과장인가. 신문은 물론 종합편성 태널까지 확보한 주류 언론은 사주와 광고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급급하면서 빈자와 약자의 꿈과 고통을 외면하고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 공평무사한 정론직필을 스스로 포기하고 특정 당파의 선전도구 역할을 하고 있다. "국가, 금권, 외세로부터 언론의 독립"은 어느정도 수준인가. 독립은 커녕 정치권력, 시장권력 및 외세와의 공모와 공생을 질기고 있지는 않은가.
둘째, 교육개혁이다. 현재 교육체제는 "'학교'의 이상과 너무 거리가 멀며, 부유층만을 위한 것으로 더 이상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정신을 충분히 계발시킬 수 없"음은 대다수의 시민이 공감하고 있지 않은가.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입시경쟁에 내몰려 이 학원, 저 학원을 뺑뺑이 돌아야 하는 현실은 참담하다. 이는 교육이 아니라 사육(飼育)이며 제도적 학대다. 학생이 성적에 따라 차별받고 '알짜-예비-잉여'로 등급화되는 학교 현실은 그 자체로 인권침해이며, 이러한 현실 속에서 자긍심과 연대의식이 키워질 리 없다. 그리고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방향으로 고착되고 있는 교육체제는 사회통합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셋째, 소수자의 인권 보장 수준을 높여야 한다 OECD 가입국이자 G20에 속하느 ㄴ나라임을 자랑하짐나, 한국 사회의 다수자의 마음에는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소수자에는 여러 집단이 있지만, 여기서는 외국인 노동자만 언급하기로 하자. 올챙이 시절을 까맣게 잊어버린 개구리처럼, 한국은 "'불법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값싼 노동력이 다량 필요하기에 불법체류 여부를 가리지 않고 이주 노동자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거칠게 말해 단물을 빼먹은 후 추방하고 있는 것이 한국 경제체제 아닌가.
이러한 진보와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 첫 번째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즉, "'항상 더 많이'라고 외치며 앞으로만 질주하는 태도와 과감히 결별해야 한다." 과속경쟁 사회는 구성원을 항상 불안하고 불행하게 만든다. 구성원 다수를 패배자로 만드는 사회는 부정의한 사회다. 이제 '앞'만 아니라 '옆'과 '뒤'도 보는 사회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이때 "윤리, 정의, 지속가능한 균형의 문제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한다.
그렇다. 이제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에 맞서서 "평화적 봉기"를 일으킬 때다. 이 '평화적 봉기'의 수단은 다름 아니라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각종 기본권이다.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자. 온라인에서 그리고 오프라인에서,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의 오만과 횡포, 불법과 탈법을 감시하고 비판하자. 단호하게 그리고 발랄하게, 또한 무조건 투표하자. 투포하지 않는 자는 "암묵적인 찬동자"다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무관심은 현재의 상태를 묵인, 방조하겠다는 의사의 다른 표현이다.
어떤 이는 '중용'과 '중도'를 조언한다. 자신의 사유와 행동을 성찰하고 반대편과 소통하고 그 입장을 존중하고 공유점을 확보하는 것은 진리를 찾아가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사람의 삶과 직결되는 가치와 정책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기계적 중립은 없다. 하워드 진은 말한다. "달리는 기차위에 중립은 없다" 존 F. 케네디 역시 단테의 <신곡>을 재해석하며 말한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기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 현실에 대한 냉소, 무관심, 거리두기만으로는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의 정당한 분노와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 바꾸기에 나서자.  72-79


옮긴이의 말 - 어느 행복한 투사의 분노
100세를 바라보는 노인의 목소리다.
기본이 존중되는 사회가 되도록 부디 분노하라고.  81
'레지스탕스(resistance)'는 동사 '저항하다(resister)'의 명사형이다. 분노할 실마리를 잡아서 분노할 줄 알고 정의롭지 못한 것에 저항할 줄 안되, 마음속에는 비폭력의 심지를 곧게 세우고 참여하여 새로운 현재와 미래를 창조하라는 것이다.  82
왜 하필 '분노'인가? 분노(憤努)란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여 벌컥 성냄이 아닌가? 여기에 번역의 어려움이 있었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인 명령문 '앵디녜부(Indignez-vous)!'를 처음에는 '분개하라!'로 번역하고자 했다. 프랑스어에서 '분노하다'를 의미하는 동사는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 's'indigner'라는 동사의 뜻은 평정을 잃지 않은 채 '분개'하는 쪽에 가깝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정의에 어긋난 일에 비분강개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적인 원한에 복받쳐 욱하는 것이 아니라 옳지 못한 일에 '의분'을 표출하는 것이다. 
다만 상황과 맞물리는 호소력이 적잖이 축소된다고 보아 분노하라고 하게 되었다.  84





아래는 2014년 5월에 이 책을 다시 읽고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가 자랑스러운 사회일 수 있도록 그 원칙과 가치들을 다 같이 지켜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잉다. 이른바 '불법체류자' 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 삼는 사회, 언론 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 결코 이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  10

특정인의 이익보다 전체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며, 노동계가 창출한 부를 정당하게 분배하는 일을 금권(金權)보다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레지스탕스가 제안한 것은 '파시스트 국가들의 모습을 본떠 구축된 전문적 독재에서 놓여난, 일반의 이익을 특정인의 이익보다 확실히 존중할 합리적인 경제조직'이었다.  11

진정한 민주주의에 필요한 것은 독립된 언론이다.
모든 어린아이가 가장 발전된 교육의 혜택을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12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사람 한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업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15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거든, 부디 그의 편을 들어주고, 그가 그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  16

무엇이 파시즘을 초래했는지, 프랑스가 무엇 때문에 파시즘의 침탈을 받았고 비시 정권이라는 괴뢰 정권이 세워졌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이렇게 혼잣말을 하게 된다. '가진 자들은 이기적인지라 볼셰비키 혁명을 지독히 두려워했다'고. 그들은 그 두려움이 이끄는 대로 생각없이 행동했다. 그러나 만약 그때처럼 오늘날 행동하는 소수가 일어선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17

분노의 이유들은 어떤 감정에서라기보다는 참여의 의지로부터 생겨났다. 
사르트르의 저서 <구토> <벽> <존재와 무(無)>는 나의 사상 형성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르트르는 우리에게, 스스로를 향해 이렇게 말하라고 가르쳐주었다. "당신은 개인으로서 책임이 있다"고. 이것은 절대자유주의의 메시지였다. 어떤 권력에도, 어떤 신에게도 굴복할 수 없는 인간의 책임. 권력이나 신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라는 이름을 걸고 참여해야 한다.  18-19

헤겔 철학은 인류의 기나긴 역사를 의미 있는 어떤 과정이라고 해석한다. 그 의미란 인간의 자유가 한 단계 한 단계씩 진보한다는 것이다. 역사가 연이은 충격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수많은 도전을 염두에 둔 생각이다. 수많은 사회들의 역사는 좀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하여 종국에는 인간이 완전한 자유에 이르게 됨으로써 이상적인 형태의 민주국가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역사를 이와 다르게 보는 관점도 있다. 자유, 경쟁, '언제나 더 많이' 갖기 위한 질주.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진보란 마치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폭풍처럼 체험될 수도 있다.  19-20

분노의 이유가 오늘날에는 예전보다 덜 확실해 보일 수도 있다. 아니면 세상이 너무 복잡해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도 참아낼 수 없는 일들은 있다. 그것이 무슨 일인지 알려면, 제대로 들여다보고 제대로 찾아야 한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제발 좀 찾아보시오. 그러면 찾아질 것이오"라고.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21-22

세계 인권 선언에 영어권 국가의 대표들이 제안한 '국제적(international)'이라는 말 대신 '보편적'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르네 카생 덕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이 당시에는, 인류를 겁박하던 전체주의의 위협에서 해방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 위협에서 해방되려면 유엔 회원국들로부터 이 선언에 나오는 보편적 권리들을 존중하겠다는 서약을 받아내야 했다. 한 국가가 자국 영토에서 반인륜적 범죄를 자행하면서도 버젓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강변을 깨부수는 하나의 방법이 바로 이 인권 선언이었던 것이다.  24

겉으로는 동참한다고 공온하면서 실제로는 약소국 정복을 일삼는 국가들의 위선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되며, 신속히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것을 나는 절감하고 있었다.  25

어떤 민족이 자신의 역사에서 교휸을 얻은 예는 지금까지 찾아보기 힘들다.  30

분노가 끓어 넘치는 상태를 '격분'이라고 한다면, 폭력이란 도저히 용납 못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내린 유감스러운 결론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이해한다면, 테러리즘이 격분을 표출하는 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격분은 부정적 표현이다. '도에 넘치게 분노'해서는 안 되며, 어쨌든 희망을 가져야 한다. 격분이란 희망을 부정하는 행위다. 격북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당연한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납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희망이 긍정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경우에, 격분 탓으로 그것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31

우리는 여전히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輕視),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21세기를 만들어갈 당신들에게 우리는 애정을 다해 말한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라고.  39



저자와의 인터뷰

우리 집안의 분위기는 관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53

도덕이란 타인들과 사회가 만들고 우리에게 강요하는 규범에 순응하는 것일 터입니다. 또 윤리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만들어가야 할 것, 즉 발명이며 창조(말하자면 결국 각자 자기만의 자유를 얻어내는 일)일 테니까요....

어머니는 나에게 어떤 의무라도 지우듯이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네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법이야. 그러니 항상 행복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행복해지려고 참으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언젠가는 정신분석 전문가한테서 이런 말까지 들었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신인줄 아시나 보네요라고.  54

인간의 핵심을 이루는 성품 중 하나가 '분노'입니다. 분노할 일에 분노하기를 결코 단념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지킬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습니다. 따로 또 같이, 정의롭지 못한 일이 자행되는 곳에 압박을 가하는 것이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55

"나 나름으로 어떻게 문제해결에 참여할 것인가" 이 참여가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삶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남에게 베풀고 싶은 마음과 베푸는 기쁨을, 남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책임을 감수하는 것. 어떤 경우에도 남에게 베풀고 싶다는 마음, 이 마음을 북돋워야 합니다. 사람을 책임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성과 감성을 키워주는 것이 바로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교육을 통해 계발해야 하며, 마음 교육을 위해서는 상상력의 힘을 빌려야 합니다.  56

이미 10여 년 전부터 우리는 세계화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더 이상 개개인의 노력에 응분의 보답을 해주지 않는 사회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진정으로 신뢰하지도 않는 체계 속에 어느새 편입되어버렸습니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우리의 관심을 끌고 우리의 믿음을 자아내는 시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에는 사람들이 기꺼이 참여를 하고, 일들도 순조롭게 이루어져 갑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시기도 있습니다. 그런 시기에는 사람들이 이런 독백을 합니다. '아니 도대체 어디로 가자는 거야?'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기가 바로 이런 시기입니다.  59-60

자기 나름으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 광고 메시지나 언론이 전하는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유로운 사고를 해야만 자유롭게, 양심에 입각해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3

튀니지아 이집트의 문제들은 바로 이런 문제들입니다. 사람들은 압제 속에 산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히 행동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튀니지의 젊은이들, 이집트의 젊은이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압박을 받으면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 이슬람 문명이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문명이라면, 그 문명 속에 갇힌 채 무력하게만 있어서는 안 된다."  64

제 이야기는 혁명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혁명은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고, 그 혁명들은 대개 안 좋은 방향으로 귀결되곤 했습니다. 
나는 호소합니다. 우리의 정신을 완전히 개혁하자고, 폭력은 거부해야 합니다. 우선, 효과가 없기 때문에 그래야 합니다. 폭력 행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증오만이 더욱 깊이 뿌리내리며 복수심이 더욱 불타오를 뿐입니다. 폭력은 폭력의 악순환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미래로, 희망으로 향한 문을 닫아 버리게 합니다. 그래서 책에도 썼듯이 제가 보기엔, 혹시 폭력적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희망뿐입니다.
하지만 꼭 알아두십시오! 비폭력이란 손 놓고 팔짱 끼고, 속수무책으로 따귀 때리는 자에게 뺨이나 내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 그 다음에 타인들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참 어려운 구축(構築)작업입니다. 이 점, 우리 서양인들은 아시아 사회에서 배울 점이 많습니다.  65

'창조적 저항의식'으로 무장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실천방법이 있을까요?
참여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중에 간단한 방법은 어느 한 정당을 지지함으로 확실히 참여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투표를 통해 지지를 표명해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형태의 참여 입니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어떤 특별한 대의를 위해 활동하는 기구, 협회, 운동 등에도 참여를 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실은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들이 숱하게 존재하는 시대입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투표하지 않고 기권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고 봅니다.
제도들이 민주적으로 잘 돌아가게 되기까지 시민들의 참여가 얼마나 절대적으로 필요한지를 일반인들이 항상 잘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육이 부족해서 그럴까요? 교육도 부족하지만 정치적 창의성도 부족합니다.  66-67



추천사 - '분노'와 '평화적 봉기'가 세상을 바꾼다.(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분노는 삭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삶의 지혜가 널리 퍼져 있는 한국 사회에서 "분노하라!"라는 직설적, 선동적 메시지는 생경하게 들릴 수 있다. '마음공부'를 통하여 수시로 일어나는 심화(心火)를 직시하고 가라앉히는 것의 중요함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마음공부'가 '공분(公憤)'과 '의분(義憤)'의 불씨를 마음속에서 꺼버리는 것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화의 뿌리가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일 때는 그 공적인 원인을 해결할 때만 화는 사라진다.  71

적어도 에셀이 언급한 세 가지는 해결해야 한다. 먼저 언론개혁이다. 현재 "언론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되어 있다고 하면 과장인가. 신문은 물론 종합편성 채널까지 확보한 주류 언론은 사주와 광고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급급하면서 빈자와 약자의 꿈과 고통을 외면하고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잇다. 공평무사한 정론직필을 스스로 포기하고 특정 당파의 선전도구 역할을 하고 있다. "국가, 금권, 외세로부터 언론의 독립"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 독립은 커녕 정치권력, 시장권력 및 외세와의 공모와 공생을 즐기고 있지는 않은가.
둘째, 교육개혁이다. 현재 교육체제는 "'학교'의 이상과 너무 거리가 멀며, 부유층만을 위한 것으로 더 이상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정신을 충분히 계발시킬 수 없"음은 대다수의 시민이 공감하고 있지 않은가.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입시경쟁에 내몰려 이 학원, 저 학원을 뺑뺑이 돌아야 하는 현실은 참담하다. 이는 교육이 아니라 사육(飼育)이며 제도적 학대다. 학생이 성적에 따라 차별박고 '알짜-예비-잉여'로 등급화되는 학교 현실은 그 자체로 인권침해이며, 이러한 현실 속에서 자긍심과 연대의식이 키워질리 없다. 그리고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방향으로 고착되고 있는 교육체제는 사회통합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셋째, 소수자의 인권 보장 수준을 옾여야 한다. OECD 가입국이자 G20에 속하는 나라임을 자랑하지만, 한국 사회의 다수자의 마음에는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소수자에는 여러 집단이 있지만, 여기서는 외국인 노동자만 언급하기로 하자. 올챙이 시절을 까맟게 잊어버린 개구리처럼, 한국은 "'불법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가 되고 잇다 값싼 노동력이 다량 필요하기에 불법체류 여부를 가리지 앟고 이주 노동자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드르이 인권을 침해하고, 거칠게 말해 단물을 빼먹은 후 추방하고 잇는 것이 한국 경제체제 아닌가.
이러한 진보와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 첫 번째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즉, "'항상 더 많이'라고 외치며 앞으로만 질주하는 태도와 과감히 결별해야 한다." 과속경쟁 사회는 구성원을 항상 불안하고 불행하게 만든다. 구성원 다수를 패배자로 만드는 사회는 부정의한 사회다. 이제 '앞'만 아니라 '옆'과 '뒤'도 보는 사회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이때 "윤리, 정의, 지속가능한 균형의 문제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 이제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輕視),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에 맞서서 "평화적 봉기"를 일으킬 때다. 이 '평화적 봉기'의 수단은 다름 아니라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각종 기본권이다.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자. 온라인에서 그리고 오프라인에서,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의 오만과 횡포, 불법과 탈법을 감시하고 비판하자. 단호하게 그리고 발랄하게, 또한 무조건 투표하자.  77-79

사람의 삶과 직결되는 가치와 정책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기계적 중립은 없다. 
하워드 진은 말한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존 F. 케네디 역시 단테의 <신곡>을 재해석하며 말한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기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 현실에 대한 냉소, 무관심, 거리두기만으로는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의 정당한 분노와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  79 



옮긴이의 말 - 어느 행복한 투사의 분노

"분노할 일을 넘겨버리지 말라. 찾아서 분노하고 참여하여. 반죽을 부풀리는 누룩이 되라"고, "어느 누구라도 인간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거든, 부디 그의 편을 들어주고, 그가 그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고...
보편적인 권리, 기본이 존중되는 사회가 되도록 부디 분노하라고, 감정적인 외침이 아니라 '참여의 의지'로부터 자연스레 우러나는 결기 어린 외침이다....
재앙의 화근에 분노하라는 것이다.  81

레지스탕스 정신은... 분노할 실마리를 잡아서 분노할 줄 알고 정의롭지 못한 것에 저항할 줄 알되, 마음속에는 비폭력의 심지를 곧게 세우고 참여하여 새로운 현재와 미래를 창조하라는 것이다.  82

'앵디네부(Indignezvous)!'를 처음에는 '분개하라!'로 번역하고자 했다. 프랑스어에서 '분노하다'를 의미하는 동사는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 's'indigner'라는 동사의 뜻은 평정을 잃지 않은 채 '분개'하는 쪽에 가깝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정의에 어긋난 일에 비분강개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적인 원한에 북받쳐 욱하는 것이 아니라 옳지 못한 일에 '의분'을 표출하는 것이다.  84


스테판 에셀의 <참여하라> 내용

스테판 에셀의 <정신의 진보를 위하여> 내용

스테판 에셀의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내용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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