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낯설고 혹독한 길을 떠날 수 있는 건 그 길 위에서 나를 닮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인지도 모르고, 때로는 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나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떻게 남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바로 그것이 길 위에서의 마법이다. 37
난 인적 없는 그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아마 내가 이곳에 살고 있다 해도 나 역시 이 길을 지루하다고 생각하고는 가지 않았겠지. 하지만 난 지금 여행중이니까 세상의 그 어떤 길이라도 새롭고 흥미가 있어.
내가 이제까지 걸어본 적 없는 이 길을 그리고 앞으로도 걸을 일 없는 이 길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걷는 거지. 마치 나의 길이라도 되는 듯이, 내가 처음 발견한 길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지.
길에서 산들바람을 만났고 네가 남기고 간 타이어 자국도 발견했으며 그리고 누군가 버리고 간 장갑 한짝도 찾아냈어.
이게 여행인지도 몰라. 그래서 꽤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여기까지 온 것인지도 몰라. 54
"솔직히 나도 예전에는 젊을 땐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네. 그래서 나도 자네 나이 때는 나이를 잊을 만큼 열심히 일을 했지. 그때는 일이 내 존재의 이유였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지. 하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 내가 만약 시간을 되돌려 자네 같은 나이로 돌아간다면 난 일을 열심히 하기보단 내 자신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겠다고 말이지. 바빴고 열심이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거 같다. 안정적이긴 하지만 그에 비해 추억이 없다네. 내가 기억하는 내 30대는 그저 밤을 새고 일을 하는 것밖에는 없었어. 물론 그 시절 난 여행을 떠나 더 많은 것을 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지. 하지만 눈 앞에 쌓여 있는 일들 때문에 그러지 못했어. 내가 은퇴를 하자마자 그렇게 원하던 여행을 시작했을 때 알았지. 내가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자네 같은 젊은이들이 여행에서 느끼는 것을 똑같이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온실 유리창으로 물방울 하나가 타고 흘러내렸다.
"젊음이 뭔지 아나? 젊음은 불안이야. 막 병에서 따라낸 붉고 찬란한 와인처럼, 그러니까 언제 어떻게 넘쳐 흘러버릴지 모르는 와인 잔에 가득찬 와인처럼 에너지가 넘치면서도 또 한편으론 불안한 거야. 하지만 젊음은 용기라네. 그리고 낭비이지. 비행기가 멀리 가기 위해서는 많은 기름을 소비해야 하고 대가가 필요한 거지. 자네 같은 젊은이들한테 필요한건 불안이라는 연료라네." 59-61
왼손을 못 쓰든, 자다가 자기도 모르게 부스러기를 흘리며 먹든 모든 것이 익숙해지는 순간 더 이상 그건 별스러운 것이 아닌 '일부'가 되는지도 모른다. 그 일부를 데리고 살면서 행복해 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느냐의 문제 역시 이번 여행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 같다. 142
우리는 말할 수 있을까? 좋아하지만 전혀 돈을 벌 수 없는 일을, 좋아하지만 남들이 전혀 인정해주지 않는 일을 당당히 직업이라며 말할 수 있을까? 잘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돈을 벌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일을 직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그 진심의 정도를 가지고 있는지의 문제.
"뭐 하세요?" 누군가가 그렇게 묻는다. 그때는 '사랑하고 좋아하느 ㄴ일'을 말하면 되는 것인데 왜 유도 우리나라에서는 사랑하는 일과 직업의 거리가 그렇게 멀단 말인가. 잠깐 한 번만 나에게 더 물어보자. 일단 정말 사랑하는 일이 있긴 있는가? 146
허황된 꿈들은 사라지면서 아무도 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대신 눈치를 보며 좀 더 실제적인 '계획'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너나 할 것 없이 우리의 계획들은 대부분 비슷했다.
안정왼 직장을 갖는 것, 좋은 상대를 만나 결혼을 하는 것, 둘이 열심히 돈을 모아 집과 차를 사고 가끔은 무리해서 여행을 가기도 하고 아이를 갖고 그들을 남들보다 우월하게 키우거나 공격으로부터 큰 상처를 입지 않게 범퍼를 착용시켜 키우는 것... '난 꼭 그렇지만은 않아'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 시절, 나에게 열등감을 주기도 하고 내게 영감을 주며 멘토이기도 햇던 나의 친구들은 거의 모두 이렇게 살고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어쩌다 만나도 아무도 꿈에 대해 이야기하면 안 된다. 그것은 상대를 공격하는 일이거나, 스스로 민망해지는 일이므로.
자신들의 직장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부동산과 주식 투자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고 아이들의 교육 이야기를 나눈다. 이제 그 누구도 우리가 좋아햇던 음악과 가슴에 꽂혔던 책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다. 저마다 다른 강가의 돌들도 세월이 흘러 바람에 풍화되고 물살에 깎여 결국 모두 맨질맨질한 둥근 돌멩이가 되듯.
우리가 사는 굴레가 우리가 받은 교육이 그리고 먹고 살아야 하는 생존의 문제가 우릴 뭉툭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마치 우리는 잘 드는 칼로 잘려진 사과인지도 모른다. 똑같은 모양으로 잘려져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라는 큰 접시에 담겨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아마 나는 잘못 깎인 사과의 한 조각일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접시에 담기지 못하고 아직 도마 위에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신은 우리 모두를 저마다 다르게 만들었노라고 자부하시지만 우린 모두가 이토록 똑같은 자세로 개헤엄을 치고 있으니 참 우리도 대단하다.
그렇기에 난 지금 이렇게 미친 듯이 불안하면서도 여전히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아 늦잠을 자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어나서 한 길밖에 없는 종류의 삶에 몸을 담글 수는 없을 테니. 157-159
말끔히 잊은 것 같다가도 잊히지 않는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162
항상 사랑은 그런 법 아니겠어? 너무 가까워지면 감정이 엉켜버리고 그렇다고 너무 거리를 두면 팽팽해서 끊어지는 것처럼 말이지. 그러니깐 가능하다면 우리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자.
지금 우리가 못할 건 아무것도 없어.
우리에게는 어떻게 가야 완벽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는지 표시된 지도 따윈 없으니깐. 169-170
오랫동안 서로를 좋은 기억 속에 가두기로 약속하자.
사람이라는 건 기억으로 살아가는 것일 테고 꾸준히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사랑한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깐.
우리가 함께한 순간은 세월이 될 거야.
지금에도 또 먼 훗날에도 서로에게 힘이 되는 건 지나간 시간들일 거야.
기억이 많을수록 잘 살게 돼 있다는 걸 나는 믿어. 나이가 들면서는 현실을 지탱하는 저울보다 기억을 지탱하는 저울이 말을 더 잘 듣게 돼 있거든. 171
우리는 누구나 한 번 더 태어날 수 있다. 180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한 사람에게는 절대적일 수밖에 없는 사건들이 있게 마련이다. 비록 남은 10%밖에 이해하지 못해도 자신에게만은 절절하고, 생각할수록 정신이 번쩍 드는 시점이 있게 마련이다.
내가 다시 태어난 해는?
그리고 당신이 다시 태어난 해는? 181
그녀는 프랑스인이었고, 이름은 마리였습니다. 예순여덟의 건강한 여성이었습니다.
"나한테 여행은 단순히 풍경과 문화를 접하는 게 아녜요. 여행은 인생의 커다란 한 부분이에요. 인생을 행복하게, 윤기 나게 하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게 아니라 여행은 내 눈동자고 피부이고 손가락이에요. 그리고 여행은, 즐거운 일도 많았고 힘든 일도 많았던 내 인생의 바퀴를 좀더 풍요롭게 굴러가게 해주는 추억들이에요." 224
우리의 여생을 버티게 해줄 추억의 보관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25
침묵은 단순히 말을 안 하는 게 아니고 잠시 동안 스스로 세상과 멀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254
여행은 해프닝의 연속이라는 것에는 모두 동의할 것이다. 여행은 대본 없는 드라마고 결말이 나지 않는 연재만화 같다. 우리 모두 여행이라는 드라마와 만화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물론 여행 안에서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몇몇 부분도 꽤 있겠지만 대부분은 의도하지 않았는데 밀물에 쓸려 나도 모르는 곳으로 흘러가버리듯 여행이라는 운명에 휩쓸려 전혀 예상 밖의 일들을 경험할 것이다. 우리가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지 모르므로 그저 운명이라는 배의 키를 꽉 쥐고 가능한 한 최악까지 가지 않길 바라며 기도를 하는 편이 더 현명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더 여행이 진해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제어할 수 없다는 것... 280
찐따 같이 나온 사진이 더 기억에 오래 남는 것처럼 아주 제대로 진상을 떤 여행이 시간이 아무리 가도 더 선명할 테고, 친구들도 그 모든 바보 같은 짓과 말도 안 되는 여행담들을 더 사랑하며 기다릴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다. 그냥 지금을 인정하고 조용히 받아들이는 방법을, 그리고 그걸 제대로 엄청나게 즐기는 방법을... 그러면 결국 여행은 어떤 식으로든 재미있어지는 것다. 물론 그땐 죽을 만큼 힘들다 해도 말이다. 281
히피로 살며 유럽을 돌아다닌 20대. 알콜 중독과 무기력함에 빠져 지냈던 30대. 가족을 이루고 새 인생을 시작한 40대. 특별한 일 없이 고요하기만 했던 50대.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 60대. 그리고 마치 20대처럼 다시 길을 떠나기 시작한 지금... 304
"자네도 알게 된 거야. 나이가 들게 되면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안정이라는 건 없다는 걸. 열심히 일을 하고 있건 가족을 가지고 있건 그리고 돈이 많이 있건 모두가 결국엔 불안하지. 우리는 가진 걸 잃을까봐 언제나 불안하고 정말 잘 살고 있는지 의심하고, 그래서 오히려 별로 가진 게 없는 것이 더 행복한 인생인지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도 하질 않나?"
"하지만.. 대부분 안정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직장과 가족을 가느리고 열심히 살아가잔항요."
그는 내 말을 듣고 한 박자 쉬더니 다시 걸으며 말했다.
"그렇지. 어떠면 그게 인생인지 모르지. 하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 사는것에 불만이 없네. 비록 나쁜 일이 더 많은 인생이었지만 만약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렇게 살고 싶네." 305
우리에게 충분한 시간은 없다.
나는 계호기 같은 걸 미리 세우는 인간은 아니다. 그리고 솔직히 당장 뭘 하고 싶은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나는 철부지 어른이다. 하지만 나는 그게 개의치 않았다. 나의 이런 삶을... 이렇게 살아왔더도 세상은 가끔씩 내게 약간의 기회를 주었다.
물론 나는 그런 기회가 올 때마다 지금은 적당한 타이밍이 아니야 하며,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미뤄 뒀었다. 대신 나는 언제나 내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더 많은 걸 보기 위해 더 멀리 가길 원했고 그럴 때마다 무작정 길을 나섰다.
그런데 오늘밤 그 주정뱅이는 내게 시간이 얼마 없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시한부 인생을 선고하는 의사의 말처럼 절망적으로 들렸다. 이제까지 나에게있어 시간은 계절이 변하는 것, 나이가 드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많다. 가보고 싶은 것도 많고 마난고 싶은 사람들도 많으며, 쓰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리고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도 많다. 그러기엔 시간이 문제였다.
그래, 성공이라는 것도 해보고 싶다. 엔진소리가 죽이는 잘 나가는 까만 차도 갖고 싶고, 서울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집에 살면서 예쁜 화병처럼 근사한 여자도 만나고 싶다. 그리고 특별해지고 싶었다. 그런 게 있어야 한다면, 나도 그런 것을 소망하고 바라고도 싶다.
그런데 정말 그 주정뱅이의 말처럼 우리에겐 충분한 시간이라곤 없는지도 모른다. 성공 때문에 허비해버리기에는, 정말 시간이란 건 충분히 않을지 모른다. 아니념 내게 시간이 없다고 저주를 퍼붓 듯 말하고 곯아떨어진 주정뱅이를 흠씬 두들겨팼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나쁜 놈!! 342
중요한 건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지. 중요한 건 보이지 않지만 속에 잇는것. 그래, 우리의 마음 색깔 같은 거.
검은 해변의 꽃처럼 우린 지금 아무것도 아니고 언제나 자주 불안해하지만, 우리가 우너하는 걸 하겠다는 단단한 마음과 진심이 있다면 우리는 결국 그걸 하게 될 거야. 시간이 좀 걸릴지 모르지만... 345
30살, 미국을 여행할 때의 나였다면 분명 매일 눈물을 흘리며 참담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겠지만 33살이 된 지금 나는 더 이상 낯선 길 위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내 앞에 일어나는 일들과 모든 순간을 이제는 내 여행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여행 역시 그 누구도 내게 강요한 적 없고 내가 이 여행을 통해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인생을 바꿔버릴 만큼의 깨달음을 얻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저 가드를 올리고 언제낙 찾아올지 모르는 마지막 카운터 한 방을 노리는 복서처럼 나는 내 페이스대로 움직였다.
조급하지 않았다. 겨울은 여전히 끝날 생각이 없었고, 날 기다리는 사람도 그리고 내가 가야할 특별한 장소도 없었으니까. 그동안 가지고 있던, 더 많이 보고 더 멀리 가는것, 그리고 누구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듣는 것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346
우린 태어날 때부터 두 다리를 가지고 태어났으니 떠날 수밖에 없다.
'밑줄여행 > 인문,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 정진홍 문학동네 2012 03320 (0) | 2013.07.04 |
---|---|
(이외수의 사랑법) 사랑외전 - 이외수 해냄 2012 (5) | 2012.12.30 |
오랜 여행 - 한미옥 북노마드 2010 03980 (0) | 2012.12.28 |
여행의 순간 - 윤경희 앨리스 2009 03980 (0) | 2012.12.27 |
연쇄 살인범의 고백 - 마르크 베네케 알마 2009 03300 (0) | 2012.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