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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2.10.03 슬픔이 주는 기쁨 - 알랭 드 보통 청미래 2012 03840
  8. 2012.03.17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Kiss & Tell) - 알랭 드 보통 생각의 나무 03840
  9. 2012.03.14 우리는 사랑일까 - 알랭 드 보통
  10. 2012.03.14 우리는 사랑일까(The romantic movement) - 알랭 드 보통 은행나무 2005 03840
  11. 2012.03.03 무관심은 도박
  12. 2012.03.02 동물원에 가기 - 알랭 드 보통 이레 2006 03840
  13. 2012.03.01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 알랭 드 보통 생각의 나무 2005 03800
  14. 2012.02.27 공항에서 일주일을:히드로 다이어리(A week at airport:A Heathrow Diary) - 알랭 드 보통 청미래 2009 03840
  15. 2012.02.22 너를 사랑한다는 건(Kiss & Tell) - 알랭 드 보통 은행나무 2011 03840 1
  16. 2012.02.17 불안(Status Anxiety) - 알랭 드 보통 이레 2005 03840
  17. 2012.01.05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Essays in Love) - 알랭 드 보통 청미래 2002 03840
  18. 2011.10.28 여행의 기술 - 알랭 드 보통 도서출판이레 2004 03840



1부 낭만주의


결혼의 시작은 청혼이 아니고, 심지어 첫 만남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 사랑에 대한 생각이 움틀 때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맨 처음 영혼의 짝을 꿈꿀 때다. 12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심산할 만큼 감동적인 최초의 순간들에 잠식당하고 기만당해왔다. 우리는 러브스토리들에 너무 이른 결말을 허용해왔다.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시작하는지에 대해서는 과하게 많이 알고, 사랑이 어떻게 계속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모하리만치 아는 게 없는 듯하다. 27


그(라비 칸)와 커스틴은 결혼을 하고, 난관을 겪고 돈 때문에 자주 걱정하고,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28


사랑이란 우리의 약점과 불균형을 바로잡아줄 것 같은 연인의 자질들에 대한 감탄을 의미한다 사랑은 완벽을 추구한다. 30


사랑은 우리의 혼란스럽고 창피하고 당황스러운 부분을 우리의 연인이 다른 누구보다, 어쩌면 우리 자신보다 훨씬 잘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 드러난 순간 최고조에 달한다. 이들은 우리를 간파해내고, 신뢰하고 나눌 줄 아는 우리의 능력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알아보고 공감해주고 용서해준다. 당황스럽고 난처한 영혼에 대한 연인의 통찰력에 바치는 감사의 배당금이다. 35-36


성욕은 처음에는 단지 생리적 현상, 호르몬을 깨우고 신경 말단 을 자극한 결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실은 감각적이라기보다 관념적이다. 무엇보다 받아들여졌다는 생각, 외로움과 부끄러움이 끝날 거라는 기대와 관련이 있다. 41


성 해방에 관한 온갖 담론에도 불구하고, 성을 둘러싼 비밀과 어정도의 부끄러움은 사실 늘 그래왔듯이 지금도 존재한다. 우리는 여전히 누구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한다. 부끄러움과 충동 억제는 단지 우리의 조상들과 절제의 종교들이 ㅇ매하고 불필요한 이유로 붙들고 있었던 것들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상수로 존재한다. 바로 그 때문에, 낯선이가 우리의 방어를 풀고, 한때 몰래 죄를 짓는 마음으로 갈망했던 것과 거의 동일한것을 바랄 수 있게끔 허하는 (일생에 몇 번뿐일지 모를)그 진기한 순간들이 그렇게 큰 힘을 갖게 된다. 44


우리는 흥분이라 부르지만, 사실 그 말이 암시하는 바는 드디어 우리의 내밀한 자아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 연인이 나의 본모습에 드려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격려하고 인정하는 족을 선택했다는 발견의 기쁨이다. 45


역사가 시작된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람들은 논리적 이유로결혼을 했다. .. 합리적 결혼은 어떤 진실한 관점엣도 전혀 합리적이지 않았으며, 자주 편의주의적이고, 편협하고, 속물적이고, 착취적이고, 모욕적이었다. 이를 대체한 것 - 감정에 의거한 결혼 - 이 그 존재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면제받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57


결혼이 실용적인 면에서 '불필요하다'는 것은 오히려 결혼에 더욱 감정적인 설득력을 부여한다. 결혼했다는 것은 조심성, 보수적 경향, 소심함과 연관 지을 수 있지만, 결혼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더 무모하고 그래서 호소력이 더 큰 낭만적 제안이다. 58


우리는 사랑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우리가 추구하는 건 친밀함이다. 우리는 유년기에 아주 익숙했던 감정들 그대로를 성년의 관계 안에서 재현하길 바라고, 그 감정은 다만 애정과 보살핌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렸을 때 맛본 사랑이란 보다 파괴적인 다른 역학들과도 얽혀 있다. 예를 들어, 통제 불능의 어른을 도와주고 싶은 느낌, 아빠나 엄마가 다정하지 않다거나 그들의 분노가 두렵다는 느낌 또는 철없는 소원을 자유롭게 표현할 만큼 집안 분위기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느낌과도 뒤얽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인이 된 우리가 어떤 후보군을 그들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조금은 너무 옳기 때문에 - 왠지 지나치게 안정적이고 성숙하고 분별 있고 믿음직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 거부하게 되는 것도 얼마나 필연적인가. 심정적으로 이러한 올바름은 이질적이고 누군가에게만 특별히 주어진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보다 자극적인 사람을 쫓는다. 그들과 함께하는 삶이 더 조화로울 것이라는 믿음에서가 아니라, 그 삶에서 겪을 좌절의 양식이 안심하리만치 친밀할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기 때문이다. 63-64


결혼 :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버린 미래에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 무한히 친절한 도박. 65




2부 그 후로 오래오래


낭만주의는 직관의 합의를 중시하는 철학이다. 진실한 사랑에서는 말로 설명하거나 글로 쓰느라 수고할 필요가 없으며, 두 사람이 하나가 되면 (마침내) 둘 다 세계를 완전히 같은 눈으로 보는 경이로운 상호 감정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72


우리는 삶의 중요한 영역들(국제무역, 이민, 종양학 등)에서는 복잡성을 감안하고, 이견을 수용하고 참을성 있게 해결해나간다. 그러나 가정생활에서만큼은 치명적일 정도로 안이한 가정을 세우곤 하며, 이 때문에 협상이 오래 걸리는 데 대해 날카로운 반감이 생긴다. 76


작은 쟁점들은 사실 단지 필요한 관심을 받지 못한 큰 쟁점들이다.

그가 자신이 몰두하고 실망하는 바를 더 예리하게 파악하는 살마이었다면, 이불 밑에서 (실내 온도와 관련하여)이렇게 설명했을지 모른다. "당신이 한겨울에 창문을 열어놓고 싶다고 말할 때면 난 두렵고 속이 상해. 신체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인 이유에서 말이야. 앞으로 소중한 것들이 짓밟힐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든. 그럴 때면 당신에겐 내가 벗어나고 싶어 하는 가학적인 금욕주의와 너무 왕성한 용기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어떤 잠재의식의 차원에서 당신이 진짜로 원하는 건 상쾌한 공기가 아니라, 당신 특유의 매력적이지만 무뚝뚝하고 합리적이고 사람을 위축시키는 방법으로 나를 창밖으로 밀어내는 것일까 두려워."

이와 마찬가지로 커스틴도 시간을 엄수하려는 자신의 태도를 면밀히 들여다봤다면,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에 라비에게(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운전기사에게) 가슴 뭉클한 연설을 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일찍 출발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 건 결국 공포 증상이야. 그게 내가 무질서하고 놀라운 일이 가득한 세계에서 불안과 정체불명의 지독한 두려움을 지우기 위해 개발해낸 기술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권력을 갈망하는 거나 내가 시간을 지키고 싶어 하는 거나 매한가지야. 안전의 욕구와 다르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걸 고려하면, 비록 조금이지만 그 조금이라도 이해되지 않아? 온전한 정신을 지키려고 하는 나만의 미친 방법인 거야."

이렇게 각자 욕구의 맥락을 살피고 서로가 상대방의 믿음에 깔린 원인을 이해했다면 새로운 융통성이 뒤따랐을지 모른다. 78-79

협상을 위한 인내심이 없으면 비통해진다. 원인도 잊은 채 화가 나는 것이다. 잔소리를 하는 쪽은 굳이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이야기를 끝내려고만 하고, 잔소리를 듣는 쪽은 자신의 반발이 합리적 반론이나 그도 아니면 가엾고 용서받을 만한 성격상의 결함에서 나온 것임을 더는 설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양 당사자는 그들에게 똑가팅 지루하기만 한 이 문제가 그냥 지나가기만을 바란다. 79


우리는 다른 커플들에 비해 우리 커플이 훨씬 나쁜 일들을 겪는다고 상상한다. 불행할 뿐 아니라 우리의 불행이 대단히 드물고 기형적인 것이라 착각한다. 더 나아가 종국에는 우리의 싸움들이 기본적으로 전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결혼 생활의 증거라기보다는, 우리가 뭔가 드물고 근본적인 실수를 범한 징표라고 믿게 된다. 81-82


이 둘은 두 개의 믿을 만한 치유책 덕에 지속적인 비통함에서 벗어난다. 첫째는 나쁜 기억력이다. 목요일 오후 4시쯤 되니 전날 저녁에 택시에서 무엇 때문에 격노했는지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별 이유 없이 일찍 퇴근해야겠느냐는 그의 말에 커스틴이 경솔하고 달갑지 않게 반응한 것과 그녀의 설핏 경멸하는 듯한 말투와 관련이 있다는 건 알지만 불쾌함의 정확한 윤곽은 이미 초점이 흐려졌다. 이는 아침 6시에 커튼을 뚫고 들어온 햇살, 라디오에서 재잘거리는 스키 리조트에 관한 정보, 가득 찬 이메일 수신함, 점심을 먹으며 주고받은 농담, 회의 준비와 웹사이트 디자인에 관한 두 시간짜리 미팅 덕분이다. 이것들이 합쳐져 성숙하고 솔직한 대화를 한 것 못지않게 둘 사이를 거의 바로잡는 효과를 낸다.

두번째 치유책은 보다 추상적이다.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를 생각하면 너무 오랫동안 분노를 안고 가기가 어렵다. 이케아 사거 ㄴ이후 몇 시간이 흐른 오후 나절에 라비와 커스틴은 에든버러 남동쪽에 있는 레머뮤어 구릉으로 오래전에 계획한 산책을 나선다. 출발할 때는 둘 다 말이 없고 시큰둥하지만, 자연이 동정심이 아니라 숭고한 무관심을 통해 그들을 서로에 대한 적개심에서 서서히 해방시킨다. 82-83


토라짐의 핵심에는 강렬한 분노와 분노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려는 똑같이 강렬한 욕구가 혼재해 있다. 토라진 사람은 상대방의 이해를 강하게 원하면서도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설명을 해야 할 필요 자체가 모욕의 핵심이다. 만일 파트너가 설명을 요구하면, 그는 설명을 들을 자격이 없다. 덧붙이자면, 토라짐의 대상자는 일종의 특권을 가진다. 다시 말해, 토라진 사람은 우리가 그들이 입 밖에 내지 않은 상처를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를 존중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토라짐은 사랑의 기묘한 선물 중 하나다. 86-87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토라진 사람의 분노를 감당해야 하는 특별한 표적이 되었을 때에도 온화하게 웃는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진짜 메시지는 지극히 퇴행적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느 ㄴ아직 젖을 먹는 아기이니, 지금 당장 나의 부모가 되어줘야 해. 당신은 무엇이 나를 아프게 하는지를 정확히 헤아려주어야 해. 내가 아기였을 때, 사랑에 대한 관념들이 처음 형성되었을 때, 사람들이 그래주었듯이 말이야."

토라진 연인게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호의는 그들이 불만을 아기의 떼쓰기로 봐주는 것이다. 상대방을 어리게 취급하면 거만하게 윗사람 행세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만연한 탓에 우리는 성숙한 자아 너머의 것을 바라보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내면의 아이를 만나는 - 그리고 용서해주는 - 것이 가끔은 가장 큰 특권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는다. 89-90


사랑이 있을 때에만 섹스가 바람직할 수 있다는 견해는 기독교가 서양 세계에 남긴 가르침이다. 이 종교는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몸을, 눈길을 아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낯선 사람을 성적으로 생각하면 사랑의 참된 정신을 저버리고 신과 자신의 인간성을 배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감동적이기도 하고 무시무시하기도 한 그런 가르침들은 한때 그 토대를 이웠던 믿음이 쇠한 지금에도 완전히 증발하지 ㅇ낳았다. 확고했던 유신론적 근거는 사라졌지만 낭만주의 이데올로기가 그 가르침들을 흡수해, 사랑에는 정절이 내포되어 있다는 개념에 여전히 고귀한 지위를 부여했다. 세속의 세계 역시 일부일처제를 헌신적인 감정과 고결함을 표하는 필요하도고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선언해왔다. 우리 시대는 지나간 종교의 중요한 경향, 즉 참된 사랑에는 완전한 정절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고스란히 유지해온 것이다. 93-94


우리 시대의 분위기는 자유분방하지만, '기이함'과 '정상'의 차이가 사라졌다고 가정한다면 이는 순진한 생각이다. 그 차이는 언제너처럼 확고하며, 사랑과 섹스의 규범적 한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즉시 을러서 경계선 안으로 밀어 넣는다. 요즘은 짧은 반바지를 입거나 배꼼을 노출하거나 동성과 결혼하거나 재미로 포르노를 좀 보는 것도 '정상'으로 간주하지만, 진실한 사랑은 단혼제에 있고 욕망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믿는것 역시 여전히 확고부동한 '정상'이다. 이 근본 원칙에 반기를 들려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가장 혹독하고 수치스러운 낙인이찍힐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변태라고 말이다. 99


의사 전달을 잘하는 기본 요건은 자신의 성격 중 더 문제가 되거나 더 특이한 면이 있더라도 그 때문에 당황하지 않는 능력이다. 의사 전달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분노나 성적 취향 또는 일반적이지 ㅇ낳고 거북할 수 있는 자기 의견에 대해 자신감을 잃거나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고 숙고할 줄 안다. 그들이 명료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대체로 원만한 사람이라는 대단히 가치있는 인식을 길러낸 덕분이다. 그들은 적정한 수준의 인내심과 상상력을 발휘하며 자신을 표현할 수단만 갖추고 있다면 다른 살마의 호의를 받을 만하고 또한 받을 수 있다고 능히 믿을 만큼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의사 전달을 잘하는 이런 사람은 어릴 적, 모든 면에서 적절하고 완벽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도 아이를 사랑할 줄 아는 보호자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축복을 누렸음이 ㅣ분명하다. 그런 부모는 자식이 - 적어도 한동안은 - 가끔 이상하거나, 난폭하거나, 화를 잘 내거나, 심술궂거나, 기이하거나, 슬퍼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수용할 줄 알고 그래도 가족의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 자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줄 안다. 그렇게 하여 자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도 솔직히 고백하고 대화할 수 있는 용기의 원천을 심어준다. 100-101


잘 들어주는 사람은 잘 말하는 사람 못지않게 드물거나 중요하다.잘 들어주는 사람 역시 특별한 자신감이 그의 비결이다. 이는 어떤 확고한 가정에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는 정보로 인해 경로를 이탈하거나 그 무게에 무너져 내리지 않을 수 있는 수용력을 말한다. 잘 들어주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라면 마음속에 얼마간 담아둘 혼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미 경험을 통해 모든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103


우리는 의식에서 거의 지워져버린 위기들이 오래전에 만들어놓은 대본에 따라 행동할 때가 너무나 많다. 지금은 기억에서 사라져 폐물이 된 논리에 따르고, 우리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밝히지 못할 ㅢ미를 좇는다. 우리는 우리가 진정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있고, 정확히 어떤 사람을 상대하고 있으며, 앞에 있는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른다. 곁에 두기에 약간 고달픈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112-113


마음이 전이에 말려들면 우리는 사람이나 상황을 믿어주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불안에 빠져 즉시 과거가 지정해놓은 최악의 결론으로 나아간다. 애석하게도 우리가 과거의 혼란에 의거하여 지금 벌어지는 일을 해석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은 초라하고 꽤 굴욕적인 일이 느껴진다. 우리의 파트너와 실망스러운 부모, 남편이 잠시 지체하는 것과 아버지의 영원한 유기, 더러운 빨랫감 몇 개와 내전의 차이를 설마 모르겠는가 하는 것이다.

감정을 그 출발점으로 송환하는 일은 사랑의 가장 섬세하고도 필요한 과제다. 전이의 위험성을 인정하면 짜즈오가 비난보다 공감과 이해에 우선순위를 두게 된다. 두 사람은 갑자기 폭발하는 불안이아 적대감이 항상 그들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그러니 그런 폭발에 매번 분노나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대응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격분과 비난이 동정심에게 자리를 내준다. 114-115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익혀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다. 116


사랑의 모든 가정들 중 아주 얄팍하리만치 불합리하고 미숙하고 개탄스럽지만 그럼에도 가장 흔히 볼 수있는 것은 우리가 사랑을 서약한 사람이 우리의 감정적 실존의 중심일 뿐 아니라 - 그 로가로서, 또한 대단히 이상하고 객관적으로 비상식적이고 아주 부당한 방식으로 -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다 그에게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듯 사랑에는 기이하고 병적인 특권이 있다. 122


우리가 불만 목록을 노출할 수 있는 사람, 인생의 불의와 결함에 대해 누적된 모든 분노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그 사람 탓을 하는 건 당연히 부조리 중에서도 부조리다. 하지만 이렇게만 본다면 사랑의 작동 법칙을 잘못 이해한 셈이다. 우리는 정말로 책임이 있는 권력자에게 소리를 내지를 수가 없기에 우리가 비난을 해도 가장 너그럽게 보아주리라 확신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 주변에 있는 가장 다정하고, 가장 동정 어리고, 가장 충성스러운 사람, 즉 우리를 해칠 가능성이 가장 적으면서도 우리가 마구 소리를 치는 동안에도 우리 곁에 머물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에게 불만을 쏟아놓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퍼붓는 비난들은 딱히 이치에 닿지 않는다. 세상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그런 부당한 말들을 발설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난폭한 비난은 친밀함과 신뢰의 독특한 증거이자 사랑 그 자체의 한 증상이고, 제 나름대로 헌신을 표현하는 비꾸러진 징표다. 분별 있고 예의 바른 말은 모르는 사람에게 할 수 있지만, 밑도 끝도 없이 무분별하고 터무니없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믿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뿐이다. 123-124


혹독한 수업은 학생들에게 그들의 교사가 단지 미쳤거나 성질이 나쁜 것이고 그래서 그 자신들은 논리상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는 안일한 생각에 기댈 여지를 준다. 터무니없이 극단적인 판정을 들으면, 우리는 파트너가 악랄하지만 한편으로는 약간이나마 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깨끗이 지워버리고 위안을 얻는다.

감정에 치우쳐 우리는 배우자의 부정적인 평가와-조금이라도 비교할 만한 요구가 지워져 있지 않은-친구 및 가족들의 격려하는 어조를 대비시킨다. 사랑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사랑과 가르침의 관계를 바라보는 유용하고도 시류와 다른 관점을 제안한다. 그들이 보기에 사랑은 무엇보다 먼저 타인의 훌륭한 점을 찬탄하는 감정, 고결한 특질과 대면했을 때 느껴지는 흥분이었다.

그 결과 사랑의 깊어짐은 항상 보다 고결해지는 방법-화를 잘 참거나 관대해지는 법, 탐구심을 키우거나 더 용감해지는 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욕구를 수반하게 됐다. 성실한 연인이라면 상대방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런 수용은 관계의 목적을 나태하고 비겁하게 통째로 배신하는 행위였다. 그런고로 우리 자신을 향상하고 다른 이들에게 가르쳐줄 것들은 항상 존재할 터였다.

이 고대 그리스의 렌즈를 통해 본다면 연인이 상대방의 성격으로 인해 불행하서나 불편한 점을 지적해도 그가 사랑의 정신을 포기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파트너의 자아를 더 발전시키려는, 사랑의 본질에 아주 충실한 일을 하려 했다고 축하받아야 한다. 현재보다 더 진보한 세계, 그리스식 사랑의 이상에 조금 더 깨어 있는 세계에서는 우리가 어떤 것을 알려주고자 할 때에 어색함과 두려움과 공격성이 약간 줄어들고 피드백을 받을 때에도 다소 덜 호전적이고 덜 예민해질 것이다. 관계 안에서 교육이란 개념이 불필요하게 섬뜩하고 부정적이었던 함의를 벗게 될 것이다. 신뢰하고 협력하는 분위기에서는 두 프로젝트-가르치기와 배우기, 상대방의 결점을 환기하고 상대방의 비판을 허용하기-가 결국 사랑의 참된 목적에 충실하다는 점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137-138




3부 아이들


아이들은 결국 나이가 몇 배나 많은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한 선생이 되어-그들의 철저한 의존서으 자기중심주의, 연약함을 통해-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랑에 대한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한다. 이 사랑은 상호 호혜를 강렬히 원하지도 성급하게 후회하지도 않고, 타인을 위해 자아를 초월하는 것만을 진정한 목표로 한다.  146


아이들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은 봉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사랑이란 말은 갈수록 부정적 의미들을 내포하게 되었다. 개인주의와 자기충족에 빠진 문화는 만족과 타인의 부름에 응하는 행동을 쉽게 등치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타인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매혹하고 위로해주는 능력에 대한 보답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데에 익숙하다. 그러나 아기는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없다. 더 자란 아이들이 가끔 큰 불안을 느끼며 판단을 내리듯이, 아이들은 아무 '요점'이 없고, 이것이 아이들의 요점이다. 아이들은 그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도와줄 위치에 있기 때문에-어떤 보받도 기대하지 않고 베푸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우리는 장점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약점에 대한 동정, 즉 인류 모든 구성원에게 공통으로 존재하고 한때 나 자신의 것이었고 결국 나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오는 그 취약성을 동정하는 사랑으로 인도되낟. 자율과 독립성을 늘 지나치게 강조하고 싶어 하는 와중에 이 무기력한 피조물은 아무도 결국은 '자력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인생은-문자 그대로-사랑하는 능력에 의지한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남의 종이 되는 것이 굴욕이 아니라 정반대라는 것을 배운다. 나 자신의 왜곡되고 만족을 모르는 본성에 끊임없이 응해야 하는 피곤한 의무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 자신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목표를 부여받았다는 위안과 특권을 알게 된다.  147-148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는 어려운 관례다. 본질상 부모의 사랑은 그 사랑을 베풀기 위해 쏟은 노력을 감추는 작용을 한다. 부모의 사랑은 받는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의 복잡한 사정과 슬픔을 감추고, 부모가 사랑의 이름으로 다른 이익, 친구, 관심사를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지를 드러내지 않느다. 부모의 사랑은 무한한 너그러움으로 이 작은 존재를 한동안 우주의 중심에 놓는다. 부모의 사랑이 그토록 강한 것은 아이가 괴롭고 두려운 심정으로 어른 세계의 진짜 척도와 불편한 고독을 이해해야 할 그날을 위해서다.  155


사랑을 위한 노력이 그들을 녹초로 만든다.  156


라비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이렇게 까탈을 부린 적이 없었지만, 동시에 아버지에게서 진심으로 사랑을 받는다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166


좋은 부모의 역할에는 중요하면서도 무척 까다로운 요건이 딸려 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소식을 끊임없이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부모는 필히 아이의 장기적 이익을 폭넓게 지켜줘야 하는데, 아이들로서는 부모의 생각이 유익하다고 흔쾌히 동의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것이 있다는 것도 예상하지 못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는 양치질, 숙제, 방 정돈, 취침 시간, 마음 넓게 쓰기, 컴퓨터 사용 제한에 대해 말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는 재미가 정말 시작되려는데 삶의 달갑지 않은 면들을 들이미는 싫고 짜증 나고 따분한 배역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렇듯 사랑을 드러나지 않게 실행한 결과로, 좋은 부모는 그 실행이 잘된 경우에 강렬한 분노와 적개심의 표적이 되고 만다.  167-168


성적 흥분은 결국 옷을 벗은 상태와 거의 무관한 듯하다. 그 동력은 열렬히 열망하고, 전에는 금지되었으나 이제는 기적적으로 접근 가능해진 상대를 소유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가능성에서 나온다. 성적 흥분은 고립과 단절이 만연한 세계에서 그 손목, 허벅지, 귓불과 목덜미가 마침내 우리 눈앞에 당도했다는 데 대한 거의 불신에 가까운 경탄의 표현이다. 다시 한 번 기쁨에 차 만지고, 채우고, 드러내고, 벗기며 우리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우리의 연인은 얼마나 멀고 독립적으로 느껴졌는지 계속 몇 시간마다 확인하고 싶다는 특수한 개념이다. 성적 욕구는 확고히 친밀해지고자 하는 염원에서 나오며, 그렇기에 사전의 거리감을 전제로 하고, 그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이 매우 독특한 기쁨과 안도감을 선사한다.  184


자위의 판타지에서 무작위로 만난 낯선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낳은 순위의 모티프가 된다는 사실은 낭만주의의 이데올로기에서는 논리를 획득 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친밀함이 만든 무거운 짐들을 바로잡고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랑과 섹스의 냉정한 분리, 바로 그것이다. 모르는 사람을 이용하면 분노, 감정적 취약성, 상대방의 욕구를 신경 써야 할 의무를 우회할 수 있다. 우리는 비난이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원하는 선까지 특이하고 이기적으로 굴 수 있다. 모든 감정이 완벽하게 차단되어, 이해되기를 바라는 일말의 소망도 없고 따라서 잘못 이해될 위험도 없으며 그 결과 괴로워하거나 실망하게 될 위험도 전혀 없다. 마침내 삶의 소모적이고 거치적거리는 나머지 부분을 침대로 가져갈 필요 없이 욕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87-188


어떤 관점에서는, 공상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삶을 추구하는 대신에 판타지를 지어내야 하는 신세가 처량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판타지는 대개 다수의 모순된 소망으로부터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결과물이다. 판타지가 존재하는 덕분에 하나의 현실을 파괴하지 않고 다른 현실에 거주할 수 있다. 판타지는 완전히 무책임하고 무섭도록 기이한 우리의 충동으로부터 우리가 아끼는 사람들을 지켜준다. 판타지는 나름대로 인류의 성취이자 문명의 결실이며, 친절한 행동이다.  189


현대사회는 부부가 모든 면에서 평등하기를 기대한다지만, 실제로 기대하는 것은 고통의 평등이다. 그러나 괴로움의 복용량을 정확히 똑같게 계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불행은 주관적인 경험으로, 각 당사자가 실제로는 자신의 삶이 더 저주받았으며 파트너는 이를 인정하거나 속죄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언제라도 진지한 경쟁에 돌입할 수 있다. 자신이 더 힘들게 살고 있다는 자기 위안식의 결론을 피하려면 초인적인 지혜가 필요하다.  194


오늘날 부모들이 겪는 어려움은 부분적으로 위신을 분배하는 방식 탓에 발생한다. 부부는 매시간 실용적인 요구에 시달릴 뿐 아니라, 그런 일이 굴욕적이고 시시하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단지 요구를 견뎌냈다는 이유마능로 누군가를 동정하거나 칭찬해주는걸 꺼린다. '위신'이란 말은 등하교시키기와 세탁물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들린다. 그런 특성은 수준이 높은 정치나 과학 연구, 영화나 패션 같은 다른 세상에 속해 있다고 가르친 해로운 훈련 때문이다. 그러나 거품을 제거하고 핵심을 보면 위신은 단지 인생에서 가장 고결하고 중요한 무언가를 가리킨다.

우리는 인류의 영광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회사를 설립하고, 경이로울 정도로 얇은 반도체를 생산하는 데에 있을 뿐 아니라, (설령 수십억 인구 사이에 널리 분포된 능력이라 하더라도) 생후 몇 달 된 아기에게 요구르트를 떠먹이고, 사라진 양말을 찾고, 변기를 청소하고, 떼쓰는 아이를 달래고, 식탁에 굳어 있는 기름때를 닦아내는 능력에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듯하다.  195


라비와 커스틴이 고통받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접한 예술이 그런 싸움을 공감하며 반영하는 걸 좀처럼 보지 못하는 데에도 있다. 예술은 오히려 이들이 마주하 ㄴ문제를 얕잡아 보고 유치하게 놀리는 경향이 있다. 예술은 참을성 없이 짜증을 부리며 몸을 꿈틀거리는 아이에게 외국어를 가르치려고 애쓰는 그들의 용기에 감탄하지 않는다. 코트의 단추를 늘 잘 채우고 모자를 잃어버리지 않을 때, 집 안을 정갈하게 유지할 때, 그리고 매일매일 가장 작지만 까다로운 이 사업을 협력해 이끌 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결코 바깥에서 저명해지거나 큰돈을 벌지 못할 테고, 무명 인사로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월계관을 써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그럼에도 문명의 질서정연함과 연속성은 그들이 보이지 않는곳에서 말없이 수행하는 노동에 작지만 필수적으로 의존한다.  196




4부 외도


중년의 유혹자가 솔직한 것은 자신감이나 오만함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처량한 인식에서 나오는 일종의 조급한 절망감 때문이다.  204


배우자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에 불륜에 뛰어드는 경우는 드물다. 파트너를 배신하는 수고를 감내하려면 대개 파트너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207


다른 종류의 행동들은 거의 다 쉽게 묵인하는 사람들에게도 간통은 하늘이 노할 위반이자, 사랑의 가장 신성한 전제들을 깨뜨리는 섬뜩한 행위다. 

첫 번째 전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든 함께하는 삶이 소중하다고 주장하면서-길을 벗어나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런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면 애초부터 사랑은 없었다.  212-213


두 번째 전제 : 간통은 우리가 익히 아는 불성실과는 종류가 다르다. 세상은 벌거벗음을 수반한 계율 위반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이고, 지각변동에 버금가는 엄청난 종류의 배신이라고 말한다. 바람피우는 짓은 그냥 나쁜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한다고 공언하는 상대에게 할 수 있는 극악 행위다.  214


세 번째 전제 : 일부일처제에 충실하다는 것은 상대방을 깊이 배려하고 그의 번영과 안녕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이다. 이를 고수하는 것은 상대방의 최선의 이익을 진심으로 염려한다는 확실한 징표다.  215


네 번째 전제 : 일부일처는 자연스러운 사랑의 모습이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항상 한 사람과 사랑하기를 원한다. 일부일처는 정신 건강의 기준점이다.  216


다른 사람에게 가끔 욕망을 느끼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있을까? ... 우리 모두의 삶이 얼마나 짧은지, 그래서 어떤 절박한 호기심으로 단 한 명의 동시대인보다 더 많은 독특한 관능적 개성을 탐험해야 할지 깨닫지 못하고 유혹을 느끼는 데 실패한 것, 사실은 '잘못된 것' 아닐까? ... 간통의 발생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은 곧 인생의 풍요로움을 부정하는 셈 아닌가? 반대로, 어떤 특정 상황엣 부정한 행위에 정말로 일말의 호기심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신뢰하는 게 합리적인 것일까?  217


성숙해지면 소유욕을 초월하게 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질투는 아기들에게나 어울린다. 성숙한 사람은 어떠 ㄴ사람도 다른 사람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걸 안다. 이는 어렸을 때부터 현명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온 교훈이다. 잭이 네 소방차를 갖고 놀게 해주렴, 그 아이가 한 번 갖고 논다고 해서 남의 것이 되는 건 아니다, 화가 난다고 바닥을 뒹굴면서 네 작은 주먹으로 카펫을 내리치지 마라, 네 여동생이 아빠에게 소중한 사람이듯 너도 아빠에게 소중한 사람이다, 사랑은 케이크가 아니다, 한 사람에게 사랑을 준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줄 사랑이 줄어들진 않는다. 사랑은 집안에 아기가 새로 태어날 때마다 계속 커진다. 

나중에 이 주장은 섹스를 둘러싸고 훨씬 더 합당해진다. 파트너가 한 시간 동안 당신을 떠나 신체의 특정 부위를 낯선 사람의 제한된 부위에 비볐다고 왜 파트너를 나쁘게 생각하겠는가? 어쨌든 그들이 모르는 사람과 체스를 두거나 명상 그룹에서 촛불을 켜놓고 친밀한 얘기를 주고받는다고 분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229-230


질투는 그 우둔함 때문에 우리가 설교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 군침 도는 표적이 된다. 하지만 말을 아끼는 게 좋다. 대단히 볼썽사납고 어리석긴 해도 순간의 질투는 우리를 빗겨 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술을 만지거나 손이라도 스쳤다는 말을 듣는 순간 누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우리가 과거에 어쩌다 바람을 피웠을 때 가졌을 매우 진지하고 충실한 생각과는 상반되고 논리에 어긋난다. 하지만 지금은 이성의 명령이 들리지 않는다. 현명하다는 것은 도저히 현명해질 수 없는 순간을 아는 것이다.  230-231


상대방의 충실함이 무의식을 가득 채워주는 한 외도라는 문제에도 태연자약 할 수 있다. 한 번도 배신당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신의를 계속 유지하기에 좋으 전제조건이 못 된다. 보다 진실하고 충실한 사람이 되려면 적절한 예방 접종을 겪어봐야 한다. 한동안 극한의 공황과 모욕을 겪고 붕괴 일보 직전까지 가봐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배우자를 배신하지 말라는 명령이 틀에 박힌 말이 아니라 영구히 뚜렷하게 빛을 발하는 도덕적 의무로 변모한다.  232


사랑의 열병은 망상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목을 가누는 방식은 실제로 그 사람이 자신 있고, 심술궂고, 예민하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다. 누군가는 그의 눈이 암시하는 유머와 지성, 그의 입이 넌지시 말하는 상냥함을 실제로 지니고 있을 수 있다. 열병의 오류는 좀 더 교묘한 문제다. 우리가 다양한 단점을 꿰뚫고 있는 현재의 파트너뿐 아니라 사람은 누구에게나 우리가 더 많은 시간으 함게 보낼 때 드러날 상당히 심각한 결점, 황홀했던 처음의 감정을 비웃음거리로 만들 만한 결점도 있다는 인간 본성의 중요한 진리를 잊게 하는 것이다. 우리 눈에 정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우리가 아직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뿐이다. 사랑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다.  236

결혼 :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대단히 기이하고 궁극적으로 불친절한 행위.  237


아무것도 희생되지 않는 깔끔한 해결 방안은 어디에도 없다. 모험과 안전은 양립할 수 없다는 걸 그는 알았다. 사랑이 넘치는 결혼 생활과 아이들은 자연스러운 성욕을 죽이고, 외도는 결혼 생활을 죽인다. 두 패러다임이 아무리 매력적이라 해도 자유사상가인 동시에 결혼한 낭만주의자가 될 순 없다.  238


우울감은 치료를 요하는 병이 아니다. 우울은 처음부터 이 각본에는 실망이 적혀 있었다는 확신과 마주할 때 밀려오는 일종의 지적 슬픔이다.  239


어떤 관계도 온 마음을 다해 친밀하고자 하는 헌신 없이는 첫걸음을 떼지 못한다. 그러나 사랑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파트너가 여전히 수많은 생각들을 혼자 간직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정직성에 너무 감명하는 탓에 정중함의 미덕들을 망각한다. 아끼는 사람이 우리의 본성에서 상처를 줄 수 있는 면과 항상 전명적으로 마주치지는 않게 하려는 욕구 말이다. 

어느 정도 자제하고 자기 편집에 조금 열성을 보이는 억제 능력은 솔직한 고백 능력 못지않게 당연히 사랑에 포함된다. 스스로 비밀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정직함'을 내세워 상대방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상처가 되는 정보까지 털어놓는 사람은 절대 사랑의 편이 아니다. 또한 파트너가(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한 일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간밤에 어디에 있었는지 등등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는 의심이 들어도(우리의 관계가 훌륭하다면 주기적으로 그럴것이다), 날카롭고 무자비한 심문자처럼 굴지 않는 편이 좋다. 그저 눈치채지못한 척하는 편이 더 친절하고 더 현명하고 사랑의 참된 정신에 더 가까울 수 있다.  241-242


역사의 거의 전 기간 동안 사람들이 결혼 생활을 유지한 것은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고, 약간의 재산을 지키고, 가문의 통합이 유지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뒤 아주 다른 기준이 서서히 세상을 장악했다. 그에 따르면 부부는 둘 사이에 진실한 열정, 욕망, 충족감 같은 몇몇 감정들이 통용되는 한에서만 함께 있어야 했다. 이 새로운 낭만주의의규칙에서 배우자들은 부부의 일상이 지루해졌거나, 아이들이 그들의 신경을 건드리거나, 섹스가 더 이상 마음을 끌지 못하거나, 어느 쪽이든 최근 들어 약간 불행하다고 느껴왔다면 당연히 각자의 길을 갈 수 있었다.  243




5부 낭만주의를 넘어서


1950년대에 영국의 존 볼비와 그의 동료들이 전개한 애착 이론은 우리가 맨 처음 경험하는 부모의 보살핌에서부터 관계의 긴장과 갈등을 추적한다. 조사 결과 서유럽과 북미 인구 3분의 1이 생애 초기에 부모에 대한 실망을 경험하고(C. B. 바실리, 2013), 그 결과- 견딜 수 없는 불안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원초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신뢰와 친밀함의 능력은 결여되어 있다. 위대한 저직인 <분리 불안>(1959)에서 볼비는 최초의 가정환경에서 실망을 겪은 사람은 성인이 되어 관계의 어려움이나 모호함에 직면 할 때 두 종류의 반응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볼비가 '불안정 애착'이라 명명한, 두려워하고 집착하고 지배하는 행동 양식이고, 둘째는 '회피 애착'이라 명명한, 방어 및 후퇴 작전이다. 불안정한 사람은 파트너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질투심을 분출하고, 그들의 관계가 '더 가깝지' 않은 것을 슬퍼하며 일생의 많은 시간을 보내기 쉽다. 한편 회피적인 사람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식의 말을 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고, 때때로 성적 친밀함에 대한 요구를 힘겹게 느낄 수 있다. - 조애나 페어베언 박사, <부부 관계에서의 안정 애착과 불안정 애착 : 대상관계 이론의 관점>  251-252


불안정 애착의 징후는 침묵, 지연, 막연함 같은 애매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은 즉시 모욕이나 악의적인 공격과 같이 부정적으로 해석된다. 불안정 애착을 가진 사람들은 사소한 모욕, 경솔한 말, 부주의를 파탄의 전조라도 되는 양 불길하고 강력한 위협으로 느낀다. 좀 더 객관적인 설명은 와 닿지 않는다. 이들은 내심 그들이 삶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경험한다. 그들은 보통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유약함을 설명하지 못하고 그래서 심술궂다거나 성마르다거나 잔인하다는 꼬리표가 붙는다. 253-254


회피 애착 유형은 정서적 피룡가 충족되지 않으면 갈등을 피하고 상대방에게 노출을 줄이려는 강한 욕구를 느낀다는 특징이 있다. 회피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열심히 공격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설득은 전혀 먹히지 않는다고 쉽게 가정한다. 자리를 피해 도개교를 올리고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유감스럽게도 회피적인 사람은 두려움에 찬 방어적인 행동 양식을 파트너에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 결과 그들의 소원하고 무덤덤한 행동들 뒤에 숨어 있는 이유들은 안개 속에 싸인 채 진실과는 정반대로 무정하고 무심하다는 오해를 쉽게 불러일으킨다. 회피적인 사람은 사랑을 주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느끼게 되었을 뿐, 마음속으로는 상대방을 깊이 염려한다. 257-258


하잔과 셰이버가 최초로 고안한 이 설문 조사(1987)는 애착 유형을 평가하는 데에 널리 이용된다. 자신이 어떤 유형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응답자는 아래의 세 진술 중 자신과 가장 가까운 것을 고르게 된다

'나는 정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원하지만, 상대방이 종종 뚜렷한 이유도없이 실망스럽거나 이기적으로 나온다. 나는 스스로 타인과 너무 가까워지는 걸 용인하면 상처를 입게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나는 혼자 지내도 괜찮다.'(회피 애착)

'나는 타인과 정서적으로 친밀해지기를 원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내가 바라는 만큼 가까워지는 것을 꺼려 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소중히 생각하는 만큼 그들도 나를 소중히 여길까 하고 걱정한다. 그 때문에 아주 속이 상하고 화가 날 때가 있다.'(불안정 애착)

'나는 비교적 쉽게 다른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친밀해진다. 타인에게 의지하고 그들이 나에게 의지하는 데 편안함을 느낀다. 나는 혼자 있거나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안정 애착) 260


한 사람이 파멸에 이르기까지 많은 걸 요하지도 않는다. 그저 몇 번의 실수로 갑자기 그렇게 된다. 상황이 몇 번만 꼬이거나 외부 압박을 어느 정도 받으면 그 역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그가 자신을 제정신이라 여길 수 있게 하는 화학적 행운이란 부서지기 쉬우며, 인생이 제대로 시험해보기로 한다면 그 자신이 비극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다. 267-268


옛날에는 사람이 재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떤 이정표에 도달하면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의 이름이 붙은 집, 리넨으로 가득 채운 혼수, 벽난로 위에 진열된 자격증, 또는 소 몇 마리와 얼마만큼의 땅을 소유하는 것이 그런 이정표였다.

그런 뒤 낭만주의 사사의 영향으로 이런 실질적인 측면이 지나치게 금전을 따지고 계산을 하는 행위가 되었고, 초점이 감정적 특질로 이동했다. 올바른 감정들, 그 중에서도 특히 영혼의 짝을 만났다는 믿음, 상대방이 나를 완벽히 이해한다는 느낌, 다시는 상대 말고는 다른 누구와도 잠자리를 하고 싶지 않다는 확신이 중요하다고 여겨진 것이다. 278


이제 라비는 낭만주의 개념들이 재난을 낳는다는 것을 안다. 그의 준비된 마음을 완전히 다른 기준들에 기초한 결과다. 그가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무엇보다 완벽함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278


연인이 '완벽하다'는 선언은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징표에 불과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상당히 실망시켰을 때 그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알기 시작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연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은 근본에 있어서는 불완전할 것이다. 기차에서 만난 낯선 사람, 옛 동창생, 인터넷에서 사귄 새로운 친구 등도 우리를 실망시킬 소지가 다분하다. 삶의 현실은 우리의 모든 본성을 변형시킨다. 상처 없이 살아온 사람이 누가 있을까.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이상에 못 미치는 양육을 받았다. 우리는 설명하기보다 싸우고, 알려주기보다 들볶고, 고민거리를 분석하기보다 초조해하고, 거짓말을 하고 엉뚱한 데로 화살을 돌린다.

이렇게 우험 요소들이 중첩되어 있는 와중에 완벽한 인간이 나올 가능성은 전무하다. 낯선 이들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알기 전에 그들을 깊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화를 내는지 즉시 나타나지 않을지라도(몇 해가 걸릴 수도 잇다). 이론상 그 존재는 처음부터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결혼할 사람을 선택하기란 감정의 존재 법칙을 우회할 방법을 찾아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고통을 흔쾌히 견딜지 결정하는 일이다. 아니면 우리는 모두 당연히 악몽의 전형인 '엉뚱한 사람'을 곁에 두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재앙일 이유는 없다. 진보한 낭만적 비관주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모든 것일 수는 없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또 다른 타락한 생명체와 함께 사는 현실에 나 자신을 적응시킬 최대한 부드럽고 친절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결혼은 '어지간히 좋은' 결혼만 있을 수 있다.

정착을 하기 전에 몇 명의 애인을 사귀어보는 것도 이 깨달음을 깊이 새기는 데 도움이 된다. '제짝'을 만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사람은 없으며, 가까이서 보면 사실은 모든 사람이 조금씩 잘못되었다는 진실을 직접 그리고 다양한 상황에서 발견할 기회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278-280


사랑은 아주 든든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이 이해되고 있다는 경험에서 시작된다. 상대방은 나의 외로운 내면을 이해하고, 나는 왜 하필 그 농담이 그렇게 재미있는지를 그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공동의 적을 미워하고, 상당히 특화된 성적 시나리오를 함께 시도해보고 싶어 한다.

이 상황이 영원히 계속되진 않는다. 연인의 이해 능력에는 적정 한계가 잇고, 우리는 언젠가 그 한계에 부딪힌다 하더라도 직무유기라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애석하도록 무능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충분히 헤아릴 수 없으며,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게 정상이다. 어떤 사람도 다른 누군가를 정확히 이해하고 충분히 공감하지 못한다. 280


만일 수시로 자신이란 사람이 당황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자기 이해를 향한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은 것이다. 281


결혼이라는 새장 안에서 집안 살림, 친인척, 청소 분담, 파티, 식료품 같은 사소한 일로 화를 내면 당연히 '까다롭게' 보인다. 하지만 그건 상대방의 허물이 아니며,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려는 삶의 속성일 뿐이다. 애개 난감한 것은 결혼이란 제도이지, 관련된 개인들이 아니다. 281


우리는 마치 '사랑'을 단일하고 분화되지 않은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은 매우 상이한 두 가지 양식인 사랑받기와 사랑하기로 이루어져 있다. 후자를 실행할 준비가 된 동시에 전자에 대한 우리의 비정상적이고 위험한 집착을 인식할 때 결혼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

처음에는 '사랑받기'에 대해서만 알고 인생을 시작하낟. 아주 그릇되게도 사랑받는 일이 표준처럼 보인다. 아이들은 마치 부모가 항상 온정 어린 마음으로 흔쾌히 그들을 위로해주고 인도해주고 즐겁게 해주고 먹여주고 씻겨주는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개념을 성년기까지 갖고 간다. 성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보살핌을 받고 다 받아들여지던 그 느낌을 되살리고 싶어 한다. 우리는 마음속 은밀한 구석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예측하고, 우리의 심정을 읽어내고, 이타적으로 행동하고 모든 면엣 더 나아지게 해줄 연인을 그린다. 이건 '낭만적'인 것 같지만, 재난의 예고이다. 281-282


중요한 여러 분야에서 파트너가 우리보다 더 현명하고 합리적이고 성숙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우기를 바라야 하고, 그들에게 지적당하는 것을 인내해야 한다. 또한 다른 순간에는 최고의 교사로서 모범을 보이고, 소리를 지르거나 상대방도 알리라 지레짐작하지 않고 우리의 제안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미 완벽한 사람만이, 서로 가르친다는 생각은 사랑이 아니라고 일축할 수 있다. 283


낭만주의 결혼관은 '제짝'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우리의 허다한 관심사와 가치관에 공감하는 사람을 찾는 것으로 인식된다. 장기적으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너무 다양하고 특이하다. 영구적인 조화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제짝'의 진정한 표지는 완벽한 상보성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는 차이를 수용하는 능력이다. 조화는 사랑의 성과물이지 전제 조건이 아니다. 283-284


완벽한 행복은 아마 한 번에 5분이 채 넘지 않을, 작고 점진적인 단위들로만 찾아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이 순간은 두 손으로 붙잡아 소중히 간직해야 할 행복이다.

싸움과 갈등은 금세 다시 고개를 들 것이다. 291-292


완전히 평범한 인생을 사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을 유지하고, 거의 정상인이라는지위를 계속 확보하고,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고, 결혼 생활을 지속하면서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 이 계획들이 어느 영웅담 못지않게 영웅적인 면모를 보일 기회를 제공한다. 조국에 봉사하거나 적과 싸우라고 부름을 받을 리는 없지만, 그의 제한된 영역 안에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불안에 굴복하지 않을 용기, 좌절하여 남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 용기, 세상이 부주의하게 입힌 상처를 감지하더라도 너무 분노하지 않을 용기, 미치지 않고 어떻게든 적당히 인내하며 결혼 생활의 어려움들을 극복할 용기, 이것은 진정한 용기이고, 그 무엇보다 더욱 영웅적인 행위이다. 293




옮긴이의 말 - 진짜 러브스토리


결혼이 사랑의 결실인 건 알겠는데, 그렇다면 결혼 생활의 진정한 동력은 무엇일까? 295


일상의 비끗거림은 맹독으로 작용하기 쉽지만 성찰에 담그면 묘약으로 연금된다.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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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의 만남은 항상 기대한 바대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명성이 자자한 미술관이나 전시회에 찾아갔을 때 우리는 왜 예상했던 변화의 경험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의아해하면서 실망하고, 더 나아가 어리둥절함과 무능하다는 느낌을 품은 채 문을 나서기도 한다. 그럴 땐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탓하고, 문제의 뿌리는 분명 이해 부족이나 감성적 수용 능력의 부족에 있다고 자책하게 된다.

이 책은 문제의 뿌리가 일차적으로 개인에게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주류 예술계가 예술을 가르치고, 팔고, 보여주는 방식에 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은 예술이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위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명확히 거부하고, 그럼으로써 예술의 높은 지위를 신비한 영역에 남겨두고 그와 동시에 공격에 취약하게 만든다. ... 

우리는 예술이 어떤 유의 도구인지 .. 명확히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4


예술에도 자연이 원래 우리에게 부여한 한계 너머로 우리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힘이 있다. 

이 책은 (디자인, 건축, 공예를 포함한) 예술이 관람자를 인도하고, 독려하고, 위로하여 보다 나은 존재 형태가 되도록 이끌 수 있는 치유 매개라고 제언한다.  5






방법론 


예술은 왜 우리에게 중요한가? 

예술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을 성취할 수 있다. 즉, 사랑하는 대상이 떠난 후에도 계속 그 대상을 붙잡아둘 수 있다.  8


르노의 그림에서 여자가 마음에 담고 싶어하는 것은 단지 곧 떠날 연인의 전체적인 형상이 아니다. 그녀는 더 복잡하고 파악하기 어려운 어떤 것, 즉 그의 개성과 본질을 원한다.  8-10


만일 세상이 좀더 따뜻한 곳이라면, 우리는 예쁜 예술작품에 이렇게까지 감동하지 않을 테고, 그런 작품이 그리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16


어른과 놀고 있는 아이와, 아이와 놀고 있는 어른의 차이를 생각해보라. 아이의 기쁨은 천진난만하며, 그런 기쁨은 사랑스럽다. 그러나 어른의 기쁨은 삶의 고난을 회상하는 선에 머물고, 그래서 가슴이 아프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때로는 울게 한다... 만일 인생이 고되지 ㅇ낳다고 느낀다면, 아름다움은 현재와 같은 호소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20


우리는 이상적 이미지를 일반적인 현실의 잘못된 묘사로 간주하지 않고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삶이 우리의 욕망에 얼마나 박한지 잘 알기 때문에, 부분적이지만 아름다운 광경은 우리에게 한층 소중할 수 있다.  22


많은 경우, 슬픈 일들이 더 슬퍼지는 건 우리가 혼자 슬픔을 견디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26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예바르게 행동하길 바라지만, 압력을 받으면 옆길로 샌다. 우리는 더 훌륭해지길 바라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동기를 잃어버린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 자신의 인격을 가장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라고 격려하는 예술작품을 통해 우리는 막대한 혜택을 누릴 수 있다.  37


예술은 이미 충분하다고 섣불리 추정해서는 안 되는 균형과 선함을 시의적절하게, 본능적으로 깨닫게 해줌으로써 우리의 시간을, 삶을 구원한다.  42


어떤 것이 이것일 수도 저것일 수도 있는 순간에 붙잡혀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곧 이해할 듯하면서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알쏭달쏭한 순간이 중요한 까닭은 성찰이 우리의 기대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찰의 과정을 포기한다. 우리는 사랑, 정의 또는 성공의 개인적 의미를 대부분 결정하지 못한 채 다른 것으로 넘어간다. ..

예술은 자기 인식을 누적시켜, 타인에게 그 결실을 전달하는 훌륭한 수단이다. 자신의 경험을 타인과 공유하는 일은 어렵기로 악명이 높다. 그럴 때 말은 서툴게만 느껴진다.  47


예술에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그런 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타인과 소통하게 해주는 이 능력이 있기 때문에, 대체로 우리는 주변에 어떤 예술작품을 둘 것인가에 신경을 많이 쓴다... 우리는 마냥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중요한 뭔가를 드러내보이길 원한다. 즉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성격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48


예술에 대한 방어적 태도를 극복하는 중요한 첫 단계는 특정한 상황에서 느끼는 이상한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53


방어적 태도를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그렇지 못한 현실에 날카롭게 주목하고, 어떤 것들에 강한 부정적 견해를 품게 되는 것이 매우 정상적이라는 것을 너그럽게 깨닫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예술작품들을 창조한 사람들의 외견상 이질적인 사고방식을 보다 편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다...

방어적인 태도를 해소하는 세번째 단계는, 처음에는 아무리 미약하고 보잘것없더라도 예술가와 자신의 사고방식에서 연결점을 찾는 것이다. 그들의 작품은 아주 괴상해 보일 수 있지만, 그들의 야망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충분히 탐색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측면이 있을 수 있다.  54-56


적절한 자극이 있다면 우리는 작품을 창조한 사람의 사고방식과 우리 자신의 가치관 및 경험이 아주 잠깐이라도 설핏 겹치는 지점을 찾아낼 수 있다.  56


우리의 주된 결점,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는 원인 중 하나는 우리 주위에 늘 있는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 있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의 가치를 보지 못해 고생하고, 매혹적인 것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종종 엉뚱한 갈망을 품는다.

문제의 한 원인은 상화에 익숙해지는 우리의 능력, 즉 우리가 습관화라는 기술의 달인이라는 데 있다. 습관이란 인간적 기능의 전 분야에 걸쳐 행동을 기계적으로 만다는 메커니즘이다. 습관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준다...

그러나 습관은 꼭 그만큼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쉽다.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덜 중요한 것들을 삭제하는게 아니라,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안겨줄 수 있는 요소들을 삭제하고 만다.

예술은 습관에 반대하고, 우리가 경탄하거나 사랑하는 것에 갖다 대는 누금을 재 조정하도록 유도해 그 소중한 것을 더 정확히 평가할 수 있게 우리를 되돌려놓는다.  59


이미 그것들을 물리도록 확실히 봤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예술은 우리가 놓치기 쉬운 모든 것을 전면에 내놓음으로써 바로 그 선입견에 당당히 맞선다.  60


이미지는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큰 원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에게 해독제를 건네주어 면목을 세우기도 한다. 이는 우리 삶의 조건인 따분함과 무미건조함을 메스껍게 만드는 동시에 그 조건과 지적인 화해를 이끌어내는 예술의 힘 덕분이다.  62


예술이 심리적 취약점을 폭놃게 보완할 수 있는 도구. 그 취약점들을 요약해보자.

1. 우리는 중요한 무언가를 잊어버린다. 중요하지만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경험을 좀처럼 붙들고 있지 못한다. 

2. 우리는 희망을 쉽게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삶의 나쁜 면들에 과민하게 반응한다. 어떤 것을 향해 계속 나아갈 합리적 이유를 깨닫지 못해 정당한 성공 기회를 놓쳐버린다.

3. 우리는 수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평범한 일인지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이 없기 때문에 고립감과 피해의식에 쉽사리 이끌린다. 우리는 곤경의 의미를 잘못 판단하는 탓에 너무 쉽게 당황한다. 우리는 외롭다. 하지만 이것은 얘기 나눌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나의 고통을 충분히 깊이 있게, 정직하게, 인내심 있게 이해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꾸준하지 못한 인간관계, 질투, 이루지 못한 꿈으로 인해 겪는 고통을 보여주려 해도 그 방식때문에 자칫 상대방이 경멸감과 모욕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고통을 겪고, 이 고통에는 존엄이 결여되어 있다고 느낀다.

4. 우리는 균형감이 없는데다 자신의 가장 좋은 면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단 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다수의 자아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보다 나은 자아가 있음을 안다. 우리는 우리의 보다 나은 자아를, 대개는 우연히 그리고 너무 늦은 때에 만난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큰 꿈과 관련해 의지의 박약에 시달린다. 행동하는 법을 모르진 않는다. 다만, 충분히 설득력 있는 형태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최고의 통찰에 따라 행동하지 못할 뿐이다.

5. 우리는 어렵게 깨닫는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수수께끼이며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타인에게 설명하거나, 내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로 사랑받는 일에 대단해 서툴다. 

6.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줄 수 있는 많은 경험, 사람, 장소, 시기를 거부한다. 이는 그런 것들이 잘못된 포장에 싸인 채 다가오고 그래서 그것과 연결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상적이고 편파적인 판단의 먹이가 된다. 우리는 너무나도 수동적으로, 모든 것이 '낯설다'고 생각한다.

7. 우리는 친숙함 때문에 둔감해져 있으며, 화려함을 부각시키는 상업 지배 세계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사는 게 단조롭다며 불만족에 빠진다. 삶은 다른 곳에 있다는 고민이 우리를 끊임없이 갉아먹는다.  64


(위의) 일곱 가지 심리적 취약점과 예술을 연관시킬 때 예술은 도구로서의 목적과 가치를 지니게 되고, 우리에게 일곱 개의 보조수단을 제공한다.

1. 나쁜 기억의 교정책 : 예술은 경험의 결실을 기억하고 재생할 수 있게 해준다. 예술은 소중한 것과 우리가 찾은 최고의 통찰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메커니즘이며, 그것들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예술에 우리의 집단적 성취를 안전하게 예치한다.

2. 희망의 조달자 : 예술은 즐겁고 유쾌한 것들을 시야게 붙잡아둔다. 예술은 우리가 너무 수비게 절망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3. 슬픔을 존엄화하는 원천 : 예술은 삶에서 슬픔이 차지하는 정당한 위치를 깨우쳐주고, 우리는 그로 인해 곤경 앞엣 덜 당황한다. 곤견을 고귀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4. 균형추 : 예술은 우리가 가진 좋은 자질들의 핵심을 특히 명료하게 암호화해 다양한 형태의 매개로 우리 앞에 내놓고, 그럼으로써 우리 본성의 균형을 회복시켜 준다. 예술은 우리에게 허락된 최고의 가능성으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5. 자기 이해로 이끄는 길잡이 : 예술은 나 자신에게 매우 중요하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인간의 많은 부분은 언어로 쉽게 표현할 수 없다. 우리는 아트 오브제를 집어들고 혼란스럽지만 강한 어조로 말할 수 있다. "이게 나야."

6. 경험을 확장시키는 길잡이 : 예술작품에는 타인의 경험이 대단히 정교하게 축적되어 있으며, 잘 다듬어지고 훌륭하게 조직된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예술은 우리에게 다른 문화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가장 웅변적인 예들을 제공하고, 그에 따라 예술작품과의 교유는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대한 이해력을 넓혀준다. 많은 예술이 처음에는 단지 '남의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순간 우리 자신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생각과 태도가 그 안에 잠겨 있음을 발견한다. 보다 나은 존재로 발돋움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이미 손닿는 거리에 와 있는 것은 아니다.

7. 감각을 깨우는 도구 : 예술은 우리의 껍질을 벗겨내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버릇없이, 습관적으로 경시하는 태도를 바로잡아준다. 우리는 감수성을 회복하고, 옛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본다. 예술은 색다르고 화려한 것만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가정하는 오류를 막아준다.  65





사랑


유명한 격률에서, 17세기 프랑스의 도덕주의자 라 로슈푸코는 "사랑 같은 게 있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들은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 강조한 바 있다. 이 격률은 사람들의 노예근성과 남을 모방하는 경향을 비웃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이 아닌 맥락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 한 실제적 현상에 우리의 관심을 돌린다. 우리는 우리의 광범한 감정들 중 어떤 것을 진지하게 여기고 어떤 것을 무시해야 하는지 결정할 때 개별적이 아니라 사회적이 된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단서에 이끌려 어떤 감정은 특히 중요하게 간주하고, 또 어떤 감정은 억누르거나 경시하는 것이다. ..

만일 인간의 감성을 인도하는 것이 문명사회를 창조하는 과정의 중요한 부분임을 인정한다면, 문화는 정치와 더불어 그 주요한 메커니즘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실제로 우리가 듣는 음악, 우리가 보는 영화, 우리가 거주하는 건물, 그리고 벽에 걸린 그림, 조각, 사진은 섬세한 길잡이이자 교육자 역할을 한다.

거의 2세기가 지난 후 오스카 와일드는 당대의 가장 인기 있는 화가를 언급하며, 라 로슈푸코의 사랑에 대한 통찰을 미술에 적용해 명언을 만들어냈다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까지 런던엔 안개가 없었다." 와일드의 말은 사람들이 영국의 수도를 관통하며 흐르는 물 위에 떠다니는 짙은 수증기를 보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의 정확한 요점은 화가가 풍부한 재능을 통해 안개의 지위를 끌어올리기 전까지 사람들은 안개를 봐도 흥미나 짜릿함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에는 우리의 감각을 일깨우는 힘이 있다.  100-102  


예술의 사명을 정의하자면 그 임무들 중 하나는 우리에게 좋은 연인이 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강의 연인이자 하늘의 연인, 고속도로의 연인이자 돌의 연인이 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사람의 연인이 된다.  102-103


사랑할 줄 아는 건 감탄하는 것과 다르다. 감탄에는 왕성한 상상력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능력이 필요치 않다. 문제는 두 사람이 삶을 공유하려 할 때 고개를 든다. 집, 자녀, 사업 및 가계 운영을, 처음에 멀리서 봤을 땐 감탄스러웠던 사람과 공유해야 한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저절 툭 튀어나오는 법이 거의 없고, 연습을 안하면 좀처럼 도움이 안 되는 자질이 필요하다. 상대방 말에 예바르게 귀기울이는 능력, 인내심, 호기심, 회복력, 관능, 이성 같은 것 말이다.

예술은 그런 자질들로 인돟는 유능한 길잡이다.  107


인내는 스릴과 거리가 멀다. 사실 인내는 흥분하지 않고 지내고, 욕구 충족을 미루고, 지루함과 무덤덤함을 견디는 능력이다...

명백하지만 소홀히 다뤄지는 진리를.. 좋은 것들도 평범한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진리를, 우리는 이 진리를 온전히 내면화할 수 없다. 습관처럼 완전히 몸에 밸 때까지, 매일매일 이 따분한 사실을 재인식해야 한다.  110


레오나르도는 호기심이 충만한 위인이었다.

호기심은 모름을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다. ..

발견을 향한 그의 의지는 체계적이다. 그는 이해하길 원한다. 여기저기 흩어진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그에게 의미가 업삳. 그는 중요한 것을 알기 원했고, 단 한 장의 명료한 지면에 자신의 통찰을 담아냈다.


모든 연인 관계에는 상대방이 나를 올바르게 탐사하기보다는 오해하고 마음대로 상상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숨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겪는 어려움과 문제점을 아는 척하면서 엉뚱한 곳을 짚을 때 우리는 심란해진다. 상대방은 진실을 알려 하지 않고, 내가 겪는 상황의 정확한 본질을 세심히, 애정을 기울여 알려 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당신의 문제는..." 또는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이라 말할 때, 우리는 허탈감을 느낀다. 그 견해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단지 내 상황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겐 아주 잘 맞을 수 있다(그의 전 애인, 그의 까다로운 형제, 그의 아버지 등, 현재를 깊이 조사하지 않을 때 우리는 곧잘 과거의 이론을 현재에 투사한다). 레오나르도는 경험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 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바라보고, 세계의 진정한 다양성과 개체성을 존중하는 태도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가르쳐준다.  112


불운하고도 아주 이상한 일들이 발생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끝나진 않는다. 문제에 맞는 해결책은 어딘가에 있고, 예상치 못한 일은 적응하면 된다.  114


관능은 촉감과 움직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즐기는 것이다.  115


합리적이라는 건 정확한 설명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따라서 합리적인 사람은 쉽게 화내지 않고, 속단하지 않는다.  117


연인 관계에서 나타나는 대단히 우울한 양산은, 처음 알았을 땐 더없이 감사하다고 느꼈던 사람에게 너무나 빨리 익숙해진다는 사실이다...

예술가들이 익숙한 것을 다시 보는 방법을 관찰하면 본받을 점을 얻을 수 있다...

그는 단지 이미 존재했지만 사람들이 무시하던 매력을 드러냈다. ..

오래된 연인 관계에서 현재에 안주하는 습관을 깨고자 할 때 우리는 마네가 그의 채소에서 발휘했던 변형의 상상력을 우리의 연인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겹겹이 쌓인 습관과 타성 밑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면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124


여행은 장대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따르는 위험을 알아야 하고, 위험에 대처하는 능력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

어색한 질문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잘못 할고 있었는가? 당신은 그 문제를 어느 정도까지 예상했어야 하는가? 당신은 그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무엇을 했어야 하며, 다음범에는 어떻게 할 작정인가? 사랑을 위한 준비가 거친 바다로 나가기 위한 항행 준비보다 조금이라도 덜 가혹하리라고 예상해선 안 된다. ..

우리의 문화는 빙하의 바다를 항해할 때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대단히 솔직하면서도, 사랑에 관해서라면 더없이 감상적으로 변한다는 점에서 너무 편향적이다.  126


가치 있는 여행이 쉬우리라고는 기대하지 말라.  127





자연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경계에 위치한 이구아수 폭포 사진이나, 푸른 알프스 계곡에서 바라본 융프라우가 담긴 엽서를 생각해보라. 이런 이미지들은 보는 즉시 우리를 매혹시킨다. 그러나 왜 그것들이 우리에게 중요한지,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보라고 하면, 적당한 대답을 떠올리기가 의외로 어려울 수 있다. 그리고 자연과의 만남은 폐부를 찌르듯 아플 수 있다. 자연은 마음같아선 항상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싶지만 실제로는 거의 주목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130





 


자본주의를 개혁할 필요가 있다는 말에 많은 사람이 동의한다. 이 개혁의 본질을 가리키는 생생한 단서들을 미술의 영역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162


진짜 문제는 자신의 관심사를 모른다고 겸손하게 인정하지 않는 태도, 약점을 가리기 위해 뒤집어쓴 오만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술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믿을 만한 경험에 기초해 평가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생각하고 느끼기 위해 수고해 본 적이 없고, 다소 공황 상태에서 단지 현재 이럴 것이라고 상상하는 유행을 모방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169


어떤 것이 "굉장하다" "멋있다" "놀랍다"고 말할 때 우리는 자신의 긍정적인 반응을 드러내는 중이지, 설명을 하는 건 아니다. 비평은 눈에 보이는 장면 뒤로 들어가 진정한 이유를 찾는 과정이다.  170





정치


올바른 정치 미술은 사회의 맥박을 감지하고, 집단생활의 문제점을 이해하고, 그 문제들을 날카로운 지성으로 분석하고, 선택한 예술 매체에 최상의 기술과 혼을 담아 관람자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만일 이것이 목표라면, 우리는 정치 미술의 범주를 기꺼애 확장시켜야 한다. 우선 경제적 불평등에만 폐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을 타락시키는 개인 간의 수많은 사소한 행동에도 폐해는 존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유한 사회의 주된 문제 중 하나는 그 시민이 점점 더 공격적이고 조급해지는 것이라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 정치 미술의 한 임무는 평온함과 용서를 독려하는 데 있을지 모른다.  199-200


세련된 문화는 국가적 자부심을 엄중히 적대시했다. 그렇다고 해서 자부심이 사그라지진 않았고, 다만 길을 잃고 미성숙한 채로 남았다. 자신의 공동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픈 욕망은 본래 자연스럽고 좋은 충동이다. 예술가들은 이 욕망에 주목할 가치가 이싿. 예술의 임무가 반드시 또는 오로지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들을 비난하는 데 맞춰질 필요는 없다. 자부심을 느낄 줄 아는 우리의 능력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도 예술의 임무다. 물론 무가치하거나 어리석은 대상에 자부심을 느낄 때는('우리에겐 철광산이 많기 때문에 우린 위대하다' 또는 '우린 피부가 하얗기 때문에 위대하다') 위험하고 역겨워진다. 우리는 이 자연스러운 충동을 가장 지적이고 가치 있는 방향으로 흐르게 할 필요가 있다. 집단적 자부심이 중요한 것은 한 개인으로서는 자부심을 느낄 기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우리의 심리적 약점은, 본성적으로 다소 불가피하게 집단적인 어떤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무엇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는지 모른다는 데 있다.  204-205


자부심은 정체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 자부심을 느끼려면, 먼저 우리가 실제로 누구인지 보여주는 긍정적이고 현대적인 자아상을 지닐 필요가 있다. 항상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정체성은 국가의 현재적 실체보다 몇 세대쯤 뒤처지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208


예술은 목적지를 보여주는 그림이며,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가르쳐준다. 그러나 그곳에 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단서를 주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예술작품을 마법의 물체로 취급하고, 그것이 가슴속에 박힌 소외, 질병, 혼란, 어려움을 저절로 치유해줄 거라 믿는다.  231


예술의 혜택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예술을 언제 밀쳐두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 이 책 전체에서 우리는 예술의 혜택에 주목해왔다. 예술이 인간관계와 관련된 우리의 능력들을 어떻게 증진시키고, 돈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개선하고, 우리의 본래적 자아에 대처하며 우리의 꿈을 정치적으로 구현하는 노력에 어떻게 일조하는지 살폈다. 이것만으로도 기존 예술계가 지금까지 권유해온 예술에 대한 사고방식에서 성큼 벗어나는 첫걸음을 땐 셈이다.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 예술의 진정한 목적은 예술이 덜 필요하고 덜 예외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다. 그 세계에서는 오늘날 사람들이 미술관의 격리된 전시실에서 발견하고, 찬양하고,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가치들이 온 세상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을 것이다. 예술을 사랑한다면서도 사회가 언젠가는 예술때문에 야단법석 떨지 않게 될 거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예술에 대한 진정한 열망은 그 필요성을 줄이는 데 있어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술이 다루는 가치, 즉 아름다움, 의미의 깊이, 좋은 관계, 자연의 감상, 덧없는 인생에 대한 인식, 공감, 자비 등에 냉담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예술이 나타나는 이상들을 흡수한 뒤, 아무리 우아하고 의도적이어도 단지 상징적으로밖에 드러내지 못하는 가치들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궁극적 목표는 예술작품이 조금 덜 피룡해지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어야 한다.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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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뉴스는 세상에서 가장 별나고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건 우리 앞에 제시하는 데 전념한다.  10


철학자 헤겔이 주장했듯, 삶을 인도하는 원천이자 권위의 시금석으로서의 종교를 뉴스가 대체할 때 사회는 근대화된다. 선진 경제에서 이제 뉴스는 최소한 예전에 신앙이 누리던 것과 동등한 권력의 지위를 차지한다.  11

뉴스는 뉴스의 작동원리가 거의 보이지 않게 하는 방법을,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의문을 제기하기 어렵게 하는 방법을 안다. 뉴스는 추측으로 점철된 자신의 관점은 언급하지 않은 채, 별다른 의양 없는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뉴스는 세상사를 그저 보도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진 못하지만, 대신 지극히 뚜렷한 우선순위에 의거한 새로운 세상을 우리 마음속에 공들여 짓는 작업을 꾸준히 해나간다.  11-12


어린시절부터 우리는 이미지와 언어의 힘을 높이 평가하도록 교육받는다. 박물관으로 이끌려가 오래전에 죽은 예술가들의 작품이 우리의 관점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엄숙하게 교육받고, 시와 소설이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음을 주입받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뉴스가 매시간 제공하는 언어와 이미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12


교육에 대해 별의별 소리를 떠들어대면서도, 현대 사회는 자신의 구성원들을 가르치고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수단을 검토하는 데 참으로 무심하다.

제도권 교육기관보다도 더 커다란 영향력을 무한정 행사하는 뉴스라는 독립체의 감독 아래에서 보낸다.  13


어재서 우리 대중은 계속 뉴스를 확인하는 걸까? 이는 공포와 큰 관련이 있다. 뉴스에서 눈을 떼고 나서 아주 짧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습관처럼 불안이 축적된다.  14


뉴스는 우리에게 각기 할당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거나 흥미진진한 문제들을 찾아냄으로써, 그리고 이 더 큰 관심사들이 자기 자신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불안과 의심을 삼켜버리도록 용인함으로써 우리를 사로잡은 문제로부터 도피하는 탈출구가 될 수 있다  15


오늘날 뉴스는 밤늦게까지 인터넷상으로 불륜을 저지른 후 졸음 운전을 하다 고가도로에서 탈선하여 도로 아래 캠핑 드레일러에 타고 있던 일가족 다섯을 죽인 남자에 대해 알려준다. 또 다른 뉴스는 아름답고 전도유망한 대학생이 시체로 발견됐다고 전한다. 또 어떤 뉴스는 여자 테니스 코치와 열세 살짜기 제자 사이에서 일어난 스캔들을 낱낱이 까발리낟. 이런 사건들은 분명 말도 안 되는 일인지라 그에 비하면 우리는 정상적이고 축복받았다고 느끼게 된다.  15-16


시간이 흐르면 이 모든 뉴스들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몇 달, 심지어 몇 해 동안 소비한 뉴스 중 남는 걸 전부 합하면 얼마나 될까? 실종된 아이, 예산 부족, 불륜을 저지른 장군에 대한 소식을 접하며 느꼈던 그 수많은 흥분과 두려움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이 모든 뉴스 기사들이, 예를 들어 중국이 부상중이고 중앙 아프리카는 부패했으며 교육은 개혁되어야 한다는 등의 막연하면서도 놀랄 것 하나 없는 결론들의 퇴적물을 넘어서 우리의 지혜를 늘리는 데 얼마 만큼 기여하는가? 

우리가 이런 의문들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대체로 우리의 정신 상태가 너그럽기 짝이 없다는 징후다. 우리는 단순히 뉴스에대해 신경을 끄는 것만으로도 뭔가 문제가 생길 거라고 상상한다.  16


뉴스가 어재서 중요하냐구 묻는 건 뉴스가 중요하지 않다고 간주하려는 게 아니라, 보다 자의식을 갖고 뉴스를 수용하려 할 때 얻게되는 보상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는 것이다.  17




- 정치뉴스


우리는 누가 봐도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기사들과 일상적으로 마주친다.  24


독자를 긴 이야기속 아무데나 빠뜨렸다가 다시 재빨리 꺼내면서도 사건이 전개돼온 더 넓은 맥락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언론이 우리 사회엣 넘쳐나는 중요한 사건들을 기사화할 때 상습적으로 벌이는 일이다.  25


언론은 자신이 우리에게 매일 전하는 것들이, 몇 달 혹은 심지어 몇 년에 걸쳐 다듬어진 안목을 통해서만 그 진짜 형태와 논리 구조를 대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야기의 극히 일부만 뽑아낸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길 꺼린다.  29


'사실'이 지닌 문제는 오늘날 신뢰할 만한 사실 보도를 찾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정작 문제느 ㄴ우리가 더 많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접한 그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른다는 데 있다.  32


사람들에게 '진지한' 뉴스를 좀더 많이 소비하라고 겁을 주는 것은 해답이 아니다. 소위 진지한 뉴스 매체들에게, 대중을 적절히 사로잡을 수 있는 방식을 중요한 정보들을 전달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 진지한 기삿거리라는 게 원체 좀 지루하고, 대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너무 안이하다. 한편에는 사려 깊지만 무기력한 가르침을 제공하는 매체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책임감 따위 확 벗어버린 선정주의를 공급하는 매체가 있다는 식의 현재의 이분법을 초월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도전이다.  37-38


수없이 많은 버전의 '현실'이 존재한다. 결단력 있는 언론기관들이 포착할 수 있는 현실이란 매일 딱 한 가지밖에 없는 것처럼 굴면서 국가를 논하는 건 불가능하다. 뉴스는 스스로를 현실을 그려내는 권위 있는 초상화가라고 제시할지도 모른다. 뉴스는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는 대단히 난감한 질문에 답을 갖고 있다고 주장할지 몰라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는 빼어난 능력은 없다. 뉴스는 어떤 이야기를 조명하고 어떤 이야기를 빼버릴지 선택하면서 단지 현실을 선택적으로 빚어낼 뿐이다.  51


우리는 뉴스란 기본적으로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설명하는 한 묶음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52


뉴스는 이 세상에 두려워할 것들이 아주아주 많다는 사실 속에 우리는 분명하게 놓아둔다...

우리의 두려움을 부채질하는 데, 뉴스는 잔인하게도 원근감에 대한 우리의 나약한 지각 능력을 악용한다.  59


마음속에 원근감을 갖고 있으면, 우리는 (뉴스가 암시하는 바와 정반대로) 어떤 것도 전적으로 새로운 게 아니며, 아주 일부의 사건만이 진실로 놀라운 것이고, 정말로 무시무시한 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게 된다.  60


사회적 병폐를 드러내야 한다는 더없이 지적인 어려움에 더해, 사악한 인생이라는 꼬리표를 이름에 떡하니 달 만한 몇몇 악당들을 찾고자 하는 거의 예술가적인 열망 때문에, 진정한 취재 대신 잘 알려진 도피적 대안인 '꼬투리 잡기식 저널리즘'이 생겨날 수 있다.  75


잘못을 폭로하고 공개하는 일의 유일하게 정당한 명분은 그 잘못이 더는 확산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부패, 바보짓, 복지부동에 맞닥뜨렸을 때, 뉴스는 잘못된 점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현재의 수준에 머무르는 대신 미래의 더 큰 역량을 기르기 위해 항상 애써야 한다. 권력자를 쓰러뜨리는 게 얼마나 만족스럽고 중요한 일인지와 무관하게, 저널리즘의 탐사는 미묘하게 다르지만 언제나 겹치지는 않는 두 가지 목족, 즉 세상사를 조사하고 개선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시작돼야 한다.  77


이제 언론은, 한 인간을 상상력도 없고 창조적이지도 않고 마음도 교활한데 그와 동시에 얻어들은 건 무척이나 많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의 헛똑똑이는 과거에는 오직 천재들만이 알 수 있었던 것들을 일상적으로 알 수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얼간이다. 그는 이전 세대가 결코 걱정해본 적 없던 특성을 지닌 절망적인 결합체다. 플로베르가 보기에 뉴스는 우둔한 자를 무장시키고 바보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83


뉴스 기사는 다른 식으로 깊이 상상하려는 우리의 의지뿌 ㄴ아니라 그 능력까지 축소하는 방식으로 사안들을 특정한 틀에 가두려는 경향이 있다.  88


그 규모와 복잡성 때문에, 그 누가 아무리 이 세상에 대한 풍성한 질문을 던지더라도 세계는 늘 그 이상의 문제를 지닐 수밖에 없다. 무척이나 규정하기 어렵고 다종다기한 이 현실이 앞으로 어찌될 것인가에 대해 언론은 그저 피상적인, 가끔은 엄청나게 잘못된 지도를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좀 지나칠 정도로 고르게 합의도니 듯 보이는 관점과 맞닥뜨릴 경우, 플로베르의 마음속에서 경종이 울렸듯 우리 마음속에도 경종이 울려야 한다.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서체와 가장 권위적이며 믿음직한 헤드라인 아래 숨어 있을지 모를, 잠재적으로 심각한 바보짓에 대해 항상 회의적인 태도로 경계 태세를 유지해야 한다. 플로베르가 문학적 상투어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미디어의 상투어에 눈을 부릅뜨고 대해야 한다. 전자는 소설을 파멸시키고, 후자는 국가를 파멸시킬 수 있다.  




- 해외뉴스


이 세상 대부분의 나라들에 관해, 뉴스 미디어의 경이로운 기술에도 불구하고, 또한 각 부서, 특파원, 사진기자들과 카메라맨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나라들의 일상적인 사건들에 대해서는 그게 무엇이건 간에 아무런 정보도 제공받지 못한다. 우리는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누군가가 평범한 하루를 보낸 적이 있거나 한지 알지 못한다. 그런 것은 서구 언론이 취재한 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볼리비아에서 학교에 간다는 것이, 또는 미용실에 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바가 없다. 소말리아에서 괜찮은 결혼식 같은 게 가능한지 실로 수수께끼다. 투르크메니스탄의 직장생활에 대해서나 알제리 사람들의 주말 일상에 대해 깜깜하긴 매한가지다. 뉴스는 소위 '중요한' 사건들(지진, 윤간, 마약에 취한 살인자들이 한 마을을 통째로 무차별 파괴한 사건)쪽으로만 우리는 낙하산에 태워 보내고는 우리가 그 사건들에 합당한 충격을 느끼고 몰입할 것이라 여긴다.  98-99


조지 엘리엇이 말했듯, 매체로서의 예술은 "경험을 증폭하고, 우리의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넘어서는 동료 인간들과의 접촉을 확장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다. 엘리엇에 따르면 그로 인간 가장 큰 이점은 '공감 능력의 확장'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는 지금 이러한 공감 능력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그건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지나치게 많은 정보들이 우리 깊은 자아가 소화할 수 없는 데이터 혹은 추상적인 사실들로 다가오기 때문이다.('콩고민주공화국 동부가 엄청난 인도주의적 위기에 직면'). 엘리엇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일반화와 통계에 근거한 호소는 기성품 같은 공감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를테면 위대한 예술가가 그려내는 인간의 삶은, 심지어 하찮고 이기적인 인간들초자도 그들과는 별개의 문제였던 것, 즉 도덕적 감정의 원재료라 부를 수 있는 것과 마주하고 주목하게 만든다."

간단히 말해, 이것이 해외 뉴스의 임무가 되어야 한다. 우리와 '별개의 문제인 것에 주목하도록' 애씀으로써 우리와 다른 나라의 국민들이 서로의 만남을 상상하고 실질적인 원조를 하며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102


우리가 보기에 너무 빤하고 흔한 것들이 지닌 상대적인 미덕 혹은 결점을 조명하는 것이 뉴스의 임무가 되어야 한다.  103


적절하게 전해질 경우, 뉴스는 두 가지 차원에서 작동할 수 있다. 뉴스는 표면적으로 특정 시간과 장소, 지역 문화와 사회적 집단에 관한 일련의 사실들을 보여주는 구체적 사건을 다룬다. 이 사건들이 우리의 경험 밖의 일일 때 사건의 구체성은 지루하게 느껴지기 쉽다. 하지만 그 특수한 것의 한 층 아래에는 보편적인 것이 숨어 있다. 기사의 시간적 지리적 배경을 초월한 인간 본성의 변함없는 근본에 바탕을 둔 심리학적 사회적 정치적 주제들 말이다.  105


현대의 뉴스 매체가 발전시킨 보도 방법론(다른 방법은 거의 모두 배제한 채, 정확하고 기술적으로 신속하지만 비인간적인데도 위기에만 초점을 맞춘 보도 방침)이 일종의 세계화된 배타적 편협함 속으로 잘못 빠져들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정말 많은 것들을 알지만 실제로 그에 대해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고. 잘못된 종류의 얕은 지식이 우리 호기심의 범위를 확장시키기보다는 좁혀버렸다.  107




- 셀러브리티 뉴스


현재 이 장르(셀러브리티)는 대개 개인 신상 폭로나 '새로운 계획'에 대한 두서없는 질문에 고정돼 있는데, 미래의 인터뷰는 다른 무엇보다 '우리가 이 유명한 사람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어야 한다.  190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의 핵심에는 감동적이면서도 연약하고 단순한 열망이 있다. 바로 제대로 대접받고 싶다는 바람이다. 돈, 호화로운 삶, 섹스 혹은 권력에 대한 욕망 같은 것들은 부차적인 자극제일 뿐, 존중받고 싶은 마음이야말로 유명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하는 원동력이다.  201


유명해지고 싶다는 바람은,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존중받기가 거의 불가능한 세상에서 우리의 존엄성을 온전히 인정받으려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202


모든 사람이 똑같이 간절하게 유명해지길 바라는 건 아니다. 어떤 유년기를 보냈는지, 지금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떤 곳인지에 따라 명성에 대한 욕구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전형적인 유명인사의 유년기에는 (거의 틀림없이) 거절의 경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 경험 없이는 명성에 대한 한결같은 희구란 있을 수 없다. 부모 중 한쪽이 그에게 무관심했거나, 그와 정서적인 교류를 하지 않았거나, 다른 형제자매에게 더 관심을 기울였거나, 그것도 아니면 일찍 죽었거나 해야 한다. 가장 심각한 예는 부모가 유명해지려고 애쓰는 사람이거나 이미 유명해진 누군가와 어울리느라 자기 아이에게 관심을 꺼버린 경우고, 이때 명성에 대한 욕구는 강박이 되어버린다.  203-204


명성을 획득한다고 해도 어린 시절에 겪은 모멸감은 거의 사라지지 않는다. 그가 품은 진자 소원은 (음악, 조각, 거래 성립 등에서 거둔) 성공을 통해 부모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게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것이다.  204


명성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이 얼마나 강렬한가 하는 문제는 그들이 속한 사회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다. 극소수에게마 ㄴ존엄과 호의가 주어진다면, 평범한 존재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은 더욱 거세진다.  205


현대 세계가 셀러브리티에 목을 매는 한, 우리는 부박하기보다는 불친절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6




- 결론


이제 우리는 뉴스의 공급량이 거의 무한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날마다 엑사바이트(exabyte) 급의 이미지들과 기사들이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과, 신문과 뉴스 방송이란 실은 압박에 시달리는 기자가 '평균적인 독자'라고 추정되는 사람들이 가진 욕망을 추측하면서 무한한 데이터의 바다에서 날마다 임의로 뽑아낸 한줌의 정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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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섹스'라는 주제에 대해 철학적인 사색을 펴쳐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19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부분은 종족을 발전시킬 특정 요소의 상징에 불과하다.

진화생물학은 섹스의 존재 이유는 잘 설명하고 있지만, 특정한 사람과 섹스를 하고 싶어지는 의식적인 동기에 대해서는 납득할 만한 실마리를 제시하지 못한다.  33


마음속 깊은 곳의 자아는 태어날 때 함께 가지고 나온 원초적인 욕구를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뭔가를 달하건 못하건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 몸을 매개로 사랑받고 싶은 욕구,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고 싶은 욕구, 자신의 살 냄새로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싶은 욕구다. 이 모든 선천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로 인해 이상주의적 열망에 사로잡혀 키스하고 싶고 같이 자고 싶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게 되는 것이다.  37-38


남자가 여자의 몸 위로 살며시 올라타며 여자의 다리 사이로 삽입을 한다. 남자는 여자가 축축이 첮어 있는 것에 격한 환희를 느낀다. 바로 그 순간, 남자에게 팔을 두르고 있던 여자도 남자의 딱딱해진 페니스에 똑같은 만족감을 느낀다.

이와 같은 생리적 반응들에 큰 만족감을 느끼는 이유, 다시 말해 만족스러운 동시에 아주 에로틱하기도 한 이유는 뭘까? 그러한 생리적 반응들은 논리나 이성의 조종능력이 손톱만큼도 미치지 못하는 승낙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48


현실에는 격식을 갖춰야 하는 상황이 많다. 그런데 그런 수많은 격식들은 그 자체로서 자연스럽게 뜻밖의 성적 판타지를 싹틔울 여지를 허락한다. 규칙을 깨는 연상작용에 의해 제목이 성욕을 일으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남드르이 눈에 잘 안 띄는 도서관 구석이나 고급 레스토랑의 화장실, 또는 열차의 객실 안에서 섹스하는 상상 역시 그와 비슷한 이유로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식의 반항적 일탈은 단순히 성적 판타지의 차원을 넘어서서, 어떤 권한을 느끼게 해준다. 비즈니스 승객들로 가득한 비행기 내의 화장실에서 섹스를 한다고 상상해보라. 그런 상상은 이성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통상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위계를 뒤집는다. 그리고 대체로 냉담한 규율이 개인의 소망과 바람을 지배하는 분위기 속으로 열망을 끌어들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고도 1만 600미터 상공의 기내는 사무실처럼 숨 막히는 공간이지만, 그런 성냠갑 같은 곳에서 위계가 아니라 친밀감이 승리했으므로, 그 승리는 더 달콤하고 그만큼 쾌감도 더 짜릿하다. 이와 같은 비행기 화장실 안에서의 시나리오에 대해 흔히 '섹시하다'고들 말하지만, 그 표현에 내포된 진정한 의미는 따로 이싿. 그것은 바로 비행기 안에서 느낀 위압적인 소외감을 극복한 것에 대한 흥분이다. 

성적 판타지나 동경은 격식과 친밀감이 만나는 교차점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듯하다.  51-52


연인 사이의 충성스러운 애착은, 무례함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더 강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거대하고 비판적인 사회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그 무례함이 더 놀랍고 경악스럽게 여겨질수록, 연인들끼리는 두 사람만이 승인한 낙원을 짓는 듯한 기분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이런 무례함은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심리학의 프레임을 통해 들여다봐야만, 따귀를 맞고, 숨이 반쯤 넘어가도록 목이 졸리고, 침대에 묶여 강간당하다시피 다루어지는 그런 행위가 일종의 승낙의 증거라는 사실이 차츰 이해된다.  56-57


섹스는 고통스러운 이분법, 즉 우리 모두가 유년기 이후에 익숙해지는 '불결함'과 '순수함'의 이분법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준다. 섹스는 우리의 자아 중에서 가장 명백하게 더럽혀진 측면을 그 과정에 끌어들이고, 그럼으로써 그 불결한 측면을 가치 있는 것으로 거듭나게 해주며, 결국 우리의 자아를 정화시켜준다. 

그런데 여기서 자아를 정화시켜준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면 이렇다. 얼굴, 그러니까 우리 몸에서 가장 공개적이고 고상한 부분인 얼굴을 연인의 가장 은밀하고 '불결한' 부분에 가져다 대고 열정적으로 키스하고 빨고 혀를 집어넣으면서, 상징적으로 연인의 자아 전체를 받아들여줄 때가 바로 그런 정화의 순간인 셈이다.  57


관계가 끝난 후에는 기분이 다소 가라앉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섹스 후에 비참한 기분에 젖어드는 경우는 꽤 흔한 일이다. 한쪽, 혹은 두 사람 모두 곯아떨어지거나, 신문을 읽거나, 그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 쉽다.

대체로 이럴 때 문제는 섹스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섹스와 일상의 현격한 대비가 문제다. 섹스는 특유의 다정함, 격렬함, 열정, 쾌락이 지배하는 반면, 삶의 일상적인 특면들은 반복, 지루함, 억압, 어려움, 냉담함으로 가득하다. 이 둘 사이의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비참한 기분에 젖어드는 것이다.  69


사랑을 나누는 동안 일어나는 이련의 과정은 우리의 마음속 열마오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행위는 서로의 성기를 마찰시키는 행동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우리의 흥분은 천박한 생리학적 반응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특별한 누군가를 만남으로써 느끼게 되는 엑스터시다.  70


우리 사회는 사람들을 내면과 외면으로 이루어진 존재로 생각하며 내면을 외면보다 더 특별하게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측면, 즉 겉모습이 운명과 욕망에 있어 대단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73 


육체적인 매력이 무의미한 것이라고 덮어놓고 비하하기 전에, 누군가의 외모에 '흥미'가 끌린다고 말할 때 그 말 속에 담긴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를 고찰해보자.  74


한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무작위로 선별된 일단의 사람들에게 여러 남녀의 얼굴이 찍힌 사진들을 보여주며 미모 순위를 정해보라고 했더니, 놀랍게도 일치된 결과가 나타났다고 한다. 사회적 환경이나 문화적 배경이 전부 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떤 얼굴이 가장 매력적인지에 대해 전 지구적으로 의견이 일치한 것이다.

이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진화생물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이렇다. 남녀 모두 '섹시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기준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얼굴의 좌우가 대칭적으로 일치하고 균형과 비율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용모라는 것이다.  75


대칭과 균형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대칭과 균형이 맞지 않는 경우, 즉 얼굴이 심하게 비대칭이거나 균형이 맞지 않는다면 자궁속에서 혹은 생후 수년 이내에, 즉 자아의 대부분이 아직 형성되지 못한 시기에 병에 걸렸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태아일 때 DNA가 세균에 감염되거나, 임신 초기에 엄마가 극도의 스트레스를 겪으면, 얼굴의 생김새에 이런 불운의 흔적이 그대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외모는 우리의 유전적 운명을 보여주는 지침인 셈이다.  77


어떤 사라에게 육체적으로 ㄱ르려 그 사람과 자고 싶어지는 심리에 대해, 우리가 그 사람의 '본질'을 무시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사람의 입술, 피부, 이마, 눈썹을 통해 정확히 분별해낸 흥미로운 미덕에, 즉 사탕달의 표현을 빌리자면, '행복의 약속'에 흥분을 늒미으로써 더 가까워지고 싶어진 것일 수도 있으니까.  83


어떤 옷차림을 '섹시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 그 옷이 대변하는 그 사람의 인생관과 철학에 흥미가 끌린다고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85


부부 사이에 잠자리가 소원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리고 가장 순수한 관점에서 볼 때, 일상과 성애의 영역 사이를 원만하게 이동하지 못해 애를 먹기 때문이다. 성관계를 할 때 요구되는 자질은, 대다수의 일상적인 활동들을 행할 때 필요한 자질들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결혼을 하고 나면(결혼 직후부터는 아니더라도 수년 내에)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해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시간 관리하기,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자제하기, 말 안 듣는 자녀들에게 권위를 세우고 규율을 부과하기 등등, 가끔은 작은 기업체라도 운영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새악이 들 만큼 관료적이고 절차적인 기술이 필요해진다. 

그런데 섹스는 정반대의 덕목들, 즉 자유로움, 상상력, 유희, 통제력 상실이 중요하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통제와 자기억제를 특징으로 하는 일상생활을 방해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일단 욕망이 자연스레 발산되고 나면 야무지게 살림을 꾸린다거나 아이를 키우는 등의 가정생활 임무를 수행하는 데 부적당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적어도 다시 그런 임무를 재개할 생각이 들지 않을 우려가 있다.

우리가 섹스를 회피하는 이유는 그것이 재미없어서가 아니다. 섹스가 주는 쾌락이, 그 이후에 부과될 가정생활과 일상의 까다로운 요구들을 견뎌낼 인내력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125-126


오래된 연인이나 부부의 침체된 성생활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 해결책은 파트너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바라볼 줄 아는 것이다.  133


고의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수많은 성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간 주범이 바로 문명이다. 인권을 중시하고 인간의 친절과 도덕적 교양을 존중하는 우리의 문명 말이다. 이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랑과 상냥함의 능력이 진보할수록, 그것이 도리어 우리를 너무 과민하게 만들어 이성을 유혹하려는 시도를 주저하게 만들 수도 있다니.

문명은 남녀 관계에 있어서 관대함, 세심함, 평등의식, 공평한 가사 분담과 같은 굉장한 미덕을 가져다 주었다. 그 점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더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문명화가 우리의, 아니 적어도 남자들의 성관계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문명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욕망을 막무가내로 요구하거나 거칠게 밀어붙여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을 단지 우리 자신의 욕구충족과 쾌락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150-151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발기불능은 지나친 존중이 병이 되어 나타나는 증상이다. 파트너에게 자신의 욕망을 강요하는 무례를 범하거나 파트너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해서 불쾌감을 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발기부전 치료제가 잘 팔리는 시대적 현상은 현대사회 남성드르이 집단적 갈망을 대변해준다. 즉, 상대를 실망시키거나 기분 상하게 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그 미묘하고 민감하며 예의 바르고 문명화된 걱정을 무마시켜줄 확실한 메커니즘을 갈망하고 있다는 신호다.  152


우리는 파트터에게 화가 났다는 사실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그 때문에 곧잘 멍하고 우울해져서 잠자리를 피할 때가 많다. 이런 경향이 나타나게 되는 원인은 대체로 두 가지 중 하나다.

첫째, 화가 치밀어 오른 구체적 사건들이 너무 정신없고 어수선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경우다. 화가 났는지 제대로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순식간에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자신이 기분이 상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침식사를 할 때라든가,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는 와중에, 혹은 점심시간에 시끄러운 쇼핑몰에서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상황을 떠올려보라. 화살이 날아와 우리에게 상처를 입혔는데도, 그 화살이 갑옷의 어느 위치를 어떻게 뚫었는지 정확히 눈치 챌 경황도 여력도 없는 상황이다. 

둘째, 분노를 알아차린 경우 더라도 그 화난 마음을 말로 표현하기 조차 어려울 때가 많다. 말하자면 기분을 상하게 만든 일들이 너무 사소한 일이라면 입 밖에 꺼내어 따져봐야 본전도 못 찾는다. 대부분은 내가 너무 까다롭거나 별나서 그런 것이라는 결론이 나고, 상대방은 어처구니없어한다. 따지고 나서 스스로 생각해봐도 무안하고 머쓱해지는 그런 경우다.

이를테면 헤어스타일을 바꿨는데 파트너가 눈치 채지 못하거나, 바게트를 자를 때 빵 전용 도마를 쓰지 않아서 부스러기를 여기저기 떨어뜨릴 때, 혹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별일 없었는지 묻지도 않고 곧장 텔레비전 앞으로 갈 때 정말 속상하다. 하지만 이런 대수롭지 않은 일들을 건건이 불평하기에는 어쩐지 좀 민망하다.  155


세상의 모든 커플은 객관적으로 보기엔 매우 사소하고 터무니없는 일들을 놓고 비슷비슷한 말다춤을 벌이곤 한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견지에서 본 그 사람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문제(자녀 교육이나 주택 구입에 관한 문제)에서부터 하찮은 문제(소파를 놓는 방향이나, 화요일 저녁의 데이트 계획 같은 문제)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영역에 걸쳐 상대방을 '완벽함의 화신'으로 만들고자 애쓴다. 따라서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자신의 여러 이상들 중 하나가 배신당하는 고통이나 분노를 느낄 가능성이 다분하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게 되면, 더 이상 사소한 일 같은 것은 없어지니까.  156


거의 감지할 수도 없는 그 냉랭함 때문에 한쪽, 혹은 양쪽 모두 상대와의 잠자리를 피하기도 한다. 알다시피 섹스란 일단 화가 나면 건네주기 쉽지 않은 선물이며, 자신이 화가 난 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157


왜 화가 난 것인지에 대해서 먼저 차근차근 이해하기만 해도 그들은 다시 예전처럼 알콩달콩 지낼 수 있다.  159


성인기의 사랑에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려면, 어린 시절에 사랑 받던 느낌을 기억하기보다는 부모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데 무엇을 감수했는지, 다시 말해 얼마나 큰 노력을 쏟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에 맞먹는 노력을 쏟아야만, 파트너가 은밀하게 불만의 화살을 쏠 때 그것을 감지하고 그 원인을 해결함으로써 더 행복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또한 애정이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더 자주 성관계를 갖게 되는 것은 여기에 덤으로 따라오는 행운이다.  165-166


중년의 기혼남이 다른 열자를 유혹할 때 내보이는 대범함을 자신감으로 착각해선 안 된다. 그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뿐이다. 무슨 말이냐면, 그 나이가 되어 가끔씩 죽음을 의식하게 되면, '내 인생에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찾아올까?'하는 초조함 때문에 대범해진다는 뜻이다. 젊은 독신 남자였을 때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추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삶이 무한대로 펼쳐져 있을 것 같아서 수줍음과 부끄러움이라는 사치를 부릴 여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197-198


이왕 이렇게 된 것, 과감함 생각도 해보자. 외도에 대한 일반 대중의 견해와는 반대되지만, 진짜 잘못은 그 반대의 경우라고 말이다. 즉 탈선에 대한 어떠한 욕망도 '없는'경우가 더 잘못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탈선에 대한 욕망이 전혀 없다는 것은, 오히려 이치에 어긋나고 부자연스러운 반응이므로, 이상할 뿐만 아니라 심오한 의미에서 볼 때 '잘못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외도의 가능성을 전혀 즐길 줄 모른다면, 그것은 심각한 상상력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우리 인간이 이 지구에서 할당받은 애처롭도록 짧은 시간에 대한 심술궂은 태연함이자, 우리 몸이 가진 영광스러운 육욕적 본성에 대한 푸대잡이나 마찬가지다. 아니면 회의 중에 탁자 밑에서 유혹하듯 손가락을 감거나, 식당에서 식사가 끝나갈 무렵에 은밀하게 무릎을 접촉해오는 식의 에로틱한 도발에 이성적인 자아가 정당하게 지배당해야 할 권리를 부인하는 셈이다.  199-200


사람들은 외도를 저지른 배우자가 무조건 다 잘못했고, 정절을 지킨 배우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너무도 쉽게 단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의 의미를 일부분만 이해한 반쪽짜리 판단이다. 확실히 외도는 조간신문 톱기사감인 것은 맞지만, 배우자를 배신하는 방법으로 말하자면 다른 종류의 배신들도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지만, 외도에 못지 않은 충격과 실망을 주는 배신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를테면 배우자와의 대화에 인색하게 구는 것, 마음이 딴데 가 있는 사람처럼 구는 것, 괜히 성질을 부리는 것, 스스로를 매력적으로 가꾸는 데 노력하지 않는 것 등등.  202


배신당한 것에 분개한 배우자는 본질적이고도 비참한 한 가지 사실을 회피하기 쉽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전부가 될 수는 엇다는 사실이다. '배신당한' 배우자들은 대개 이런 서글프고도 충격적인 사실을 너른 아량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게다가 주위 사람들은 그저 재신자는 비난받아야 마땅하다고 부추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진짜 큰 잘못은 도덕주의적 결혼관습에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모든 욕구에 대해 성적으로, 감정적으로 평생의 해결사가 되어줄 수 있을까? 그러한 마도 안 되는 희망을 품게 하는 결혼제도의 비상식적인 야심과 고집이 진짜 문제다.

과거의 어떤 사회에서도 지금의 우리 사회만큼 결혼제도를 엄중하게 여기거나 희망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결혼에 대한 부지막지한 기대가 없으니, 당연히 그로 인해 엄청난 좌절에 빠지는 일도 없었다.

과거의 사람들은 사랑, 섹스, 가족에 대한 욕구들을 따로따로 구별지을 만큼 현명했다.  203-204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결혼을 사랑, 섹스, 가족이라는 우리의 모든 희망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으로 보는 것이 순진한 착각이라면, 마찬가지로 외도가 결혼 생활의 모든 좌절을 해소해줄 효과적인 해결방법이라는 생각도 순진한 착각이라는 것이다. 

외도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궁극적인 '오류'는, 결혼에 대한 특정 관념가 마찬가지로 '이상주의'다. 언뜻 생각하기에 외도는 비뚤어지고 절망적인 행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비밀스러운 모험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결혼생활의 결핍을 채우려는 시도다, 외도를 하면 그 상대방이 자신의 결핍이나 과잉을 마법처럼 조절해줄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은 삶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조건들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혼외'의 누군가와 성관계를 가지면서 '결혼생활 내부'의 소중한 것들에 타격을 입히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결혼생활을 충실히 지키는 동시에 인생에서 가장 강렬하고 절박한 감각적 쾌락의 기회를 거머쥐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두 마리의 토끼는 언제나 반대 방향으로 뛰어간다.  211


한마디로 결혼생활은 침대 시트와 비슷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네 귀퉁이가 반듯하게 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완벽을 추구하면 곤란하다.  213


결혼생활에 대한 좀 더 현실적인 태도는 무엇일까? 서로 정절을 지키려면 어떤 결혼서약을 주고받아야 될까? 확실한 것은, 흔히 쓰는 상투적인 결혼서약보다 훨씬 더 엄중하고, 비관적인 경고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가령 이런 식이다.

'당신에게, 오직 당신에게만 실망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로 인한 불만도 당신에게만 털어놓고, 이 사람 저 사람과 바람을 피우며 돈후안 같은 호색한으로 살면서 여기저기 그 불만을 퍼뜨리고 다니지는 않겠습니다. 나는 여러 가지 불행의 선택을 검토했고 내 일생을 바칠 사람으로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커플이 결혼식장에서 서로에게 하는 서약 치고는 상당히 비관적이다. 하지만 이런 서약을 한 뒤라면, 외도를 저지르더라도 실망에 대해 서로 서약한 부분만을 배반하는 것이지 비현실적인 희망을 배반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배반당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나와 함께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해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신 정곡을 찌르는 공정한 지적으로 이렇게 큰소리를 치게 될 것이다.

"나는 당신이 나에게 실망을 느끼더라도 의리를 지켜줄 거라고 믿었어."  213-214


부부가 자신들의 삶이 결혼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외도의 충동에 몸과 마음을 내맡기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그것도 두 사람 모두가 날마다 감사해야 할 정도로 엄청난 기적이다.  220



지독한 성적 욕망을 겨냥해 경멸적인(하지만 온당한) 이야기들이 숱하게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그 욕망을 칭송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어쩌면 우리가 실체적인 인간으로서 호르몬에 정직하게 반응하고, 제정신으로 살기 위해서 정말로 필요한 것을 며칠씩이나 잊고 지내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성적 욕망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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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인기 없는 존재들을 위하여

근거라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관습들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지켜져 내려왔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좀처럼 의문을 품지 않는다.  21


몇 세기 동안 절대다수에게 지켜져 내려오는 신념을 굳게 신봉하는 사람들이더라도 어떤 일에 틀릴 수 있다는 가르침. 사람들이 틀릴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신념을 논리적으로 검증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동성의 특성을 꼬집기 위해서 소클테스는 사람들이 체계적인 사고를 하지 않은 채 인생을 사는 것을, 도자기를 굽거나 구두를 만들면서도 그 기술적 과정을 모르고 있거나 따르려고 하거나 구두를 만들면서도 그 기술적 과정을 모르고 있거나 따르려고 하지 않는 것에 비유햇다. 직관에만 의존해서는 훌륭한 도자기나 구두는 상상조차 할 수없다. 하물며 한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더욱 복잡한 일을 어떻게 근거나 목표에 대한 지속적인 반성없이 수행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31


소크라테스는 우리 스스로 어떤 것이 옳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까지 제시한다. 

검증하는 소크라테스의 방식은 플라톤의 초기와 중기의 대화편에서 찾을 수 있다. 


소크라테스식 사고방식

1. 확고하게 상식으로 인식되는 의견을 하나 찾아보자. 

 - 용기 있는 행동에는 전투에서 후퇴하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 덕을 쌓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2. 잠시 상상해보자. 이런 의견을 내놓는 사람의 확신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거짓이 될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 의견이 진실일 수 없는 상황이나 환경을 찾아보자.

 - 용기가 있으면서도 전투에서 후퇴하는 사람은 정말로 없을까?

   전투에 꿋꿋하게 임하면서도 용기가 없는 사람은 없을까?

 - 부유하면서도 덕을 쌓지 못한 사람은 없을까?

   돈은 없지만, 덕이 높은 사람도 있지 않을까?

3. 예외가 발견되면, 그 정의는 틀렸거나 아니면 최소한 불명확한 것임에 틀림없다.

 - 용기가 있으면서도 후퇴하는 것이 가능하다.

   전투에 꿋꿋하게 임하고 있지만, 용기가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 돈을 가진 악한도 있다.

   가난하지만, 덕은 높을 수 있다.

4. 최초의 진술은 이런 예외까지 고려할 수 있도록 새롭게 고쳐져야 한다.

 - 용기 있는 행동은 전투에서의 후퇴와 전진을 동시에 뜻할 수 있다.

 - 돈을 가진 사람은 그 돈을 고결한 방식으로 획득한 경우에만 덕이 있는 존재로 묘사될 수 있다. 그리고 돈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도 덕을 추구했으되 돈을 버는 일이 불가능한 환경에서 살아왔다면, 역시 덕이 높을 수 있다.

5. 그렇게 새로 정리한 주장에서 또다시 예외가 발견된다면, 앞에서 거쳤던 과정을 되풀이해야 한다. 진리는, 만약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손에 넣을 수 잇는 것이라면, 언제나 더 이상 논박할 수 없는 주장 속에 존재해야 한다. 어떤 주장에 대한 이해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곧 그 주장에 담긴 오류들을 발견해 나가는 일이다.

6.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무엇을 빗대어 말햇든지 간에, 사고의 산물은 직관의 산물보다 더 우월하다.  35-37


소크라테스에게 직관에서 나온 진실은 버팀대도 없이 옥외 대좌(臺座)에 놓인 조각상과 같았다. 그 조각상은 강한 바람이 불면 언제라도 쓰러질 수 있었다 그러나 반론에 대한 자각과 이성에 의해서 지탱되는 진실은 쇠줄로 땅에 고정된 조각상과 같았다. 소크라테스의 사고방식은 우리에게 여론을 만들어나가는 방법 한 가지를 약속했는데, 그런 여론이라면 우리는 비록 폭풍우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끄떡없이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38-39





소크라테스는인간 존재란 살다보면 잘못된 길로 접어들 때도 있기 때문에 간혹 자신의 관점에 대해서 의문을 품어야 한다는 점을 자연스레 인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진실과 인기가 없는 것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바꾸는 데에 결정적인 요소를 하나 더 덧붙였다. 곧, 우리의 사고와 삶의 방식이 어떤 반대에 봉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것을 오류라고 확신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우리를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의 수가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하면서 내세운 이유들이 얼마나 훌륭한가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기가 없는 현상 그 자체에 관심의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인기를 잃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에 주목해야 한다.  44


도대체 무슨 근거에서 이런 혹평을 할까?

우리는 비평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을 살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져야 한다.  45


진정한 체면은 다수의 의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논법에서 나오는 것이다.  48


비록 그 문제가 수사학 선생이나 막강한 장군, 혹은 근사하게 차려입은 테살리아 출신 귀족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49


소크라테스 : 모든 사람들이 보내는 찬사와 비난, 그리고 의견에 마구잡이로 관심을 기울이겠는가, 아니면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의 의견에만 관심을 가지겠는가?

크리톤 : 자격을 갖춘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지.


'모든 사람의 의견을 다 존중한 필요 없이 단지 몇 명의 의견만 존중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무시해도 된다는 사실이야말로.... 훌륭한 의견은 존중하되 나쁜 의견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다는 사실이야말로 참 멋진 원칙이라고 자네는 생각하지 않는가?... 훌륭한 의견은 이해력으 ㄹ갖춘 사람들의 것인 반면, 나쁜 의견은 이해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것이지...

그러니 훌륭한 나의 친구여, 우리는 민중이 우리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하든 마음 쓸 필요가 없겠지. 하지만 전문가들이 정의와 불의의 문제에 대해서 하는 말에는 신경을 써야 하겠지.' <크리톤>  50-51


특정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힘.  53


'만약 그대들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면, 그대들은 나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쉽게 발견하지 못할 것이오. 약간 우스꽝스럽게 표현하자면, 사실 나라는 존재는 신에 의해서 글자 그대로 이 도시에 달라붙어 있소. 아테네로 말할 것 같으면, 커다란 순종 말(馬)처럼 거대한 몸집때문에 게을러지기 쉬운데 그래서 쇠파리의 자극이 필요한 곳인 것 같소... 만약 그대들이 나의 충고를 받아들인다면, 그대들은 나의 생명을 구해주겠지요. 그러나 나는 곧 그대들이 졸음에서 깨어나서 성가셔하면 아니토스의 조언을 받아들여 일격에 나를 해치우고는 계속 잠을 청하리라 생각하오.' <변명>  55


모두가 더불어 사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까닭은 다른 사람의 평가와 자신의 실제 사이의 간극 때문이다. 이를테면 신중하게 처신하다가 우유부단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수줍음은 간혹 교만으로, 남의 마음에 들려는 욕망은 아첨으로 오해받는다. 누구나 그런 오해를 지우려고 노력하지만, 그때마다 목구멍은 바짝 타들어가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은 의도했던 것들이 아니기가 십상이다. 가혹한 적들은 힘있는 자리에 올라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를 비난하는 말을 한다. 무고한 철학자에게 불공평하게 쏟아지는 혐오에서 우리는, 정의를 실천할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는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시달리게 될 때 느끼는 고통을 확인할 수 있다.  60


우리는 편견이 사라지고 질투가 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에는 우리로 하여금 옳지 못한 명분을 품게 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만약 다른 사람들로부터 잘못되었다고 비난받을 때 무조건 자신이 옳다는 식으로 어린 아이처럼 고집을 부린다면,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서 거부의 정당한 명분보다는 단순히 거부하는 자세를 미화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61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두 가지 강렬한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두 가지 환상이란 바로 대중의 여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과 절대로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62




II. 가난한 존재들을 위하여

에피쿠로스는 기원전 341년 소아시아 서쪽 해안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사모스라는 초록빛 섬에서 태어났다.

그는 거의 모든 주제에 걸쳐 300권의 책을 집필햇다. 비록 잇따른 재난으로 인해서 거의 모든 기록이 사라져버렸지만.

그의 철학이 단번에 두드러지게 되었던 것은 감각적 쾌락을 강조한 점 때문이었다.  71


'아직 철학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거나 철학을 할 시기가 지나가버렸다고 말하는 사람은, 행복을 맞이하기에는 너무 젊거나 늙었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서한>

그때까지 유쾌한 삶의 방식에 대한 관심을 이처럼 진솔하게 털어놓았던 철학자는 거의 없었다. 그 고백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으로 와닿았다.

행복을 증진하기 위한 철학 학교를 열었다. 학교는 모두에게 입학을 허락했으며 함께 어울려 살면서 쾌락을 연구하도록 장려했다.  72


'쾌락(pleasure)'이라는 단어가 언급될 때면 쾌락을 얻는 어떤 삶의 방식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75


쾌락주의(Epicureanism)의 핵심에는, "무엇이 나를 건강하게 만들까?"라는 질문 못지않게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직관적으로 대답하는 데에 우리 모두가 서툴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76


'의학의 경우, 육체의 병을 물리치지 못하면 아무런 이점을 주지 못하듯이, 철학 역시 마음의 고통을 물리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단상>

에피쿠로스의 시각에서 보면, 철학의 임무는 우리 각자가 원인 모를 우울증과 욕망의 충동을 해석하도록 도와주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행복을 추구할 때에 그릇된 계획을 세우지 않도록 돌보아주는 것이었다.  78


그곳에는 으리으리한 집도 없었다. 음식도 소박했다. 에피쿠로스는 포도주보다는 물을 마셨으며, 빵과 채소와 한줌의 올리브로 꾸며진 만찬으로도 행복해했다. "마음 내킬 때마다 잔치를 베풀 수 있도록 내게 치즈 한 단지를 보내주게"라고 그는 한 친구에게 부탁했다. 쾌락을 인생의 목적으로 그렸던 한 남자의 진솔한 취향은 이러했다.  79


행복, 에피쿠로스의 구매 리스트

1. 우정

'한 인간이 일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지혜가 제공하는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우정이다.' <주요 교설>

'먹거나 마시기 전에, 무엇을 먹고 마실지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구와 먹고 마실 것인가를 조심스레 고려해보라. 왜냐하면 친구 없이 식사를 하는 것은 사자나 늑대의 삶이기 때문이다.' 세네카의<서한집>에서 인용  80

진정한 친구들은 절대로 우리를 세속적인 잣대로 평가하지 않으며,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우리의 내면적이 ㄴ자아이다.  81


2. 자유

독립을 누리는 대가로 보다 검소한 생활방식을 택하면서 일종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에피쿠로스가 친구 메노이케우스에게 설명했듯이, "[현명한 사람은] 가장 많은 양의 음식이 아니라 가장 맛있는 음식을 선택한다."  82


3. 사색

불안을 다스리는 데는 사색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 문제를 글로 적거나 대화 속에 늘어놓으면서 우리는 그 문제가 지닌 근본적인 양상들을 집적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제의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비록 문제 그 자체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부차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것들, 말하자면 혼란, 배제, 마음의 고통 등을 예방할 수 있다.  83


"실제로 일어날 시점에 아무 문제도 야기하지 않을 어떤 일(죽음/역주)을 두고 미리 걱정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에피쿠로스는 주장했다. 인간이 결코 경험하지 못할 어떤 상태를 두고 미리 자신을 놀라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삶이 지속되지 않을 죽음 이후에는 전혀 무서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한 살마에게는 삶 또한 무서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서한>

냉정한 분석은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었다. 그런 마음은 에피쿠로스의 친구들에게 "정원"밖의 무분별한 환경 속에서 살았다면 그들을 괴롭혔을지도 모를 많은 내밀한 어려움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83-84


부유하다는 것이 누군가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가 펼쳤던 주장은, 만약 우리에게 돈은 있는데 친구와 자유, 사색하는 삶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을 것이고, 비록 부는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친구와 자유, 사색을 누린다면 우리는 결코 불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행복에 필요한 것들을 3개의 범주로 나누었다. 

'욕망에 대해서 말하자면, 어떤 것들은 자연스럽고 또 필요하다. 또 다른 것들은 자연스럽기는 하지만 불필요하다. 그리고 자연스럽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는 욕망이 있다.' <주요 교설>  84


세가지 분류는 행복이란 몇몇 복합적인 심리적 재상에 크게 좌우되는 것이지, 물질적인 결과물과는 상대적으로 관계가 적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85


'결핍에서 오는 고통만 제거된다면, 검소하기 짝이 없는 음식도 호화로운 식탁 못지않은 쾌락을 제공한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서한>  86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또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을 떨치기 위해서 우리는 값비싼 물건을 갈망하는 순간에 그것을 사는 것이 옳은지를 자신에게 엄숙히 물어야 한다. 

'모든 욕망에는 다음과 같은 조사방법이 적용되어야 한다. 내가 갈망해마지않는 것들이 성취될 경우, 나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만약 그 욕망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바티칸 어록>  88


조사방법은 적어도 다섯 단계를.

1. 행복을 위한 설계를 한 가지 세워라.

 - 휴일에 행복해지기 위해서 나는 별장에 살아야 한다.

2. 그 설계가 잘못일 수도 잇다고 상상해보자. 욕망의 대상과 행복을 연결하는 것에서 예외적인 것들을 찾아보라. 욕망의 대상을 소유해도 행복해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욕망의 대상을 소유하지 않고도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 별장을 구입하는 데에 돈을 쓰고도 여전히 불행할 수 수도 있지 않을까?

 - 별장에 그렇게 많은 돈을 쏟아붓지 않고도 휴일에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3. 한 가지 예외라도 발견된다면, 그 욕망의 대상은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 예컨대 친구가 없어서 외로움을 느낀다면, 별장에서도 비참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 예컨대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하거나,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나는 텐트에 묵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

4. 행복을 엮어내는 데에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 최초의 설계는 지금까지 나타난 예외까지 고려하여 수정되어야 한다. 

 - 호화 별장에서 나는 행복해질 수 있다. 다만, 그 행복은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있고 내가 누군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있고 내가 누군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는 한에서, 나는 별장에 많은 돈을 투자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  

5. 이제 진짜 필요한 혼란스러웠던 애초의 욕망과는 매우 다른 것인 것 같다.

 - 행복은 훌륭하게 장식한 별장보다는 마음이 맞는 친구가 있느냐에 더 많이 좌우된다.  89-90


값비싼 물건들이 크나큰 기쁨을 안겨주지 못하는데도, 우리가 그런 것들에 그렇게 강하게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두개골 옆면에 구멍을 뚫게 만든 편두통 환자가 저지른 것과 비슷한 오류 때문이다. 말하자면 값비싼 물건들이,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따로 있는데도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에 그럴듯한 해결책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건들은 우리가 심리적 차원에서 필요로 하는 어떤 것들을 마치 물질적 차원에서 확보하는 듯한 환상을 준다.  91


우리 인간이 그토록 쉽게 암시에 걸려드는 존재가 아니라면, 아마 광고가 그처럼 널리 유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95


'기분을 모든 선한 것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으면서,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쾌락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서한>

사회적 부의 축적이 행복의 증대를 보증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에피쿠로스는 값비싼 재화들이 만족시켜줄 수 있는 욕구들은 우리 인간의 행복을 좌우할 그런 욕구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98


행복은 이루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행복을 가로막는 주요한 장애는 대부분 금전적인 것이 아니다.  100




III. 좌절한 존재들을 위하여

철학의 임무는 우리의 바람이 현실 세계의 단단한 벽에 부딪힐 때에 가능한 한 부드럽게 안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112


세네카에 따르면 분노는 열정의 통제 불가능한 촉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수정 가능한) 추론의 오류에서 나온다. 이성이 언제나 루이의 행동을 관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그도 인정했다. 만약 차가운 물 세례를 받으면 우리에게는 몸을 부르르 떠는 것 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다른 사람이 우리의 두 눈 앞으로 손가락을 홱 움직이면 우리는 눈을 깜빡거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분노는 육체적 반사(反射)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이성적인 사고를 거쳐 고수하게 된 어떤 관념들에 근거하여 터져나올 수 있다. 그렇지 깨문에 그 관념들을 변화시킬 수만 있다면, 우리는 화를 쉽게 내는 성격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좌절에 봉착할 때, 우리가 얼마나 서투르게 반응하느냐는 우리가 어떤 것을 정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단적으로 결정된다. 

가장 격한 분노는 존재의 기본 원칙에 대한 상식을 뒤엎는 사건이 일어날 때 터져나온다.  114


우리는 인간 존재의 피할 수 없는 불완전성과 화해해야만 한다. '심술궂은 존재들이 심술궂은 짓을 하는 것이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인가, 아니면 당신의 적들이 당신을 해코지하고, 당신의 친구들이 당신에게 성가시게 굴고, 또 당신의 아들이 잘못을 저지르거나 당신의 하인이 못된 짓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던 말인가?' <분노에 관하여>

지나치게 높은 기대를 포기하기만 하면 우리가 그렇게 분노하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117


우리 인간은 스스로가 예상치 못햇던 것에 가장 큰 상처를 받기 때문에, 또 따라서 모든 것을 예상해야 하기 때문에 ("운명의 여신이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은 없으므로"), 우리는 늘 마음속에 재앙을 당할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고 세네카는 제안했다.  119


죽음은 결코 평범하지 않고 두려운 것이기는 해도 - 세네카가 과감하게 말했듯이 -  결코 비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 인간은 악(惡)들이 실제로 자신에게 닿기 전에는 절대로 악을 예상하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장례행렬이 문 밖을 지나가도 우리는 절대로 죽음을 곰곰이 생각하지 않는다. 때 이른 죽음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우리는 아이들을 위해서 장례를 설계한다. 아이가 어떤 옷을 입을까, 군에서는 어떻게 처신할까, 그리고 자기 아버지의 유산을 어떻게 물려받을까 등등.' <마르키아에게 보내는 위로문>  123


우리 인간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예상한다.  124


세네카의 사전 숙고

'[현명한 사람들은] 하루를 생각으로 연다...' <분노에 관하여>

'운명의 여신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도덕에 관한 서한>

'공적인 것이든 사적인 것이든, 그 어떤 것도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운명도 도시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있다.' <도덕에 관한 서한>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고, 우리 역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아이를 낳게 되오.' <마르키아에게 보내는 위로문>

'모든 것에 기대를 거는 한편으로 어떤 일이든 다 닥칠 수 있다고 예측해야 한다.' <분노에 관하여>  125


금심이란 불확실한 상황에서 심리적 동요를 느끼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런 경우 당사자의 마음에는 어떤 일이 최선의 결과로 끝났으면 하는 바람과, 최악의 결과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교차하게 된다. 짐작컨대 근심에 빠진 사람은 당연히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문화적, 성적, 사회적 행위에서도 즐거움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130


'철학자들은 돈을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라. 그 누구도 지혜로운 자에게 가난의 운명을 지우지 않았다.' <행복한 삶에 관하여>

그리고 그의 실용주의는 다음과 같은 주장에 이르러서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나는 운명의 여신의 영역에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경멸할걸세. 그러나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보다 좋은 반쪽을 선택할걸세.' <행복한 삶에 관하여>  133


'현명한 사람은 아무것도 잃을 수 없다. 그는 모든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 <불변성에 관하여>

'현명한 사람은 자족할 것이다... 만약 질병이나 전쟁으로 한쪽 손을 잃게 되거나, 사고로 한쪽 다리 혹은 두 다리를 모두 잃는다고 해도 현명한 사람은 남은 것에 자족할 것이다.' <도덕에 관한 서한> 

세네카가 "자족한다"라는 표현으로 무엇을 의미하려고 했는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세네카의 말은 모순으로 들릴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한쪽 눈을 잃은 것에 대해서 행복을 느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한쪽 눈을 잃는다고 해도 삶은 가능할 것이다. 눈이나 손의 정상적인 숫자는 단지 만들어진 관념일 뿐이다. 그런 입장을 말해주는 두 가지 예를 살펴보자.

'현명한 사람은 자신이 난쟁이이더라도 자신을 경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가 더 크기를 원한다.' <행복한 삶에 관하여>

'현명한 사람은 친구 없이 살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친구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자족적이다' <도덕에 관한 서한>  134


무생물의 조롱

연필이 책상에서 떨어지거나 서랍이 쉽게 열리지 않을 경우 우리는 종종 짜증을 내곤 한다. 연필이나 서랍과 같은 무생물이 우리를 조롱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는 곧 좌절로 이어지고 이러한 좌절감은 한갓 무생물이 사람을 경멸하고 있다는 느낌이 추가되기 때문에 더욱 복잡해진다. 그런 좌절감을 불러일으키는 물건은 마치 주인이 애착을 가진 어떤 지식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 주인에게 부여한 지위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암시를 전하는 듯하다. 


생물체의 조롱

다른 사람들이 말없이 자신의 성격을 비웃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때에도 앞의 경우처럼 예리한 아픔을 느낀다. 

스웨덴의 한 호텔에 도착한 직후, 나는 짐을 들어주겟다는 호텔 종업원과 함께 방으로 갔다. 그 종업원은 "당신 같은 남자에게는 짐이 버거울 것 같군요"라고 짓궂게 "남자"를 강조하며 (단어와는 정반대의 의미를 암시하면서) 싱긋 웃는다. 그 사람은 북유럽 특유의 금발이고(아마 스키 타는 사람, 아니면 엘크 사냥꾼일까. 먼 옛날이엇다면 전사였을 것 같다), 말씨는 단호하다. "무슈는 이 방을 좋아하게 될 거요"라고 그가 말한다. 또 "될 거요"라는 표현에는 명령의 냄새까지 풍긴다. 나중에 그 방이 차량의 소음으로 늘 시끄럽고 샤워 시설이 신통치 않으며 텔레비전이 고장난 것으로 확인될 때, 그 종업원의 암시들은 음모의 증거로 돌변한다.

달리 숫기가 없고 과묵한 사람이었다면, 야비하게 조롱당하고 있다는 기분에 부글부글 끓다가 급기야 소리를 지르거나 난폭한 행동은 물론, 심지어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다.


마음의 상처를 입을 때, 우리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것이 당연히 그럴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리고(and)"로 연결되는 절(節)이 들어 있는 문장을 버리고 "... 하기 위하여(in order to)"로 연결되는 절이 든 문장을 취하고 싶어진다. "연필이 책상에서 떨어졌고 그리고 지금 나는 약이 올라 있다(The pencil fell off the table and now I am annoyed)"는 생각에서부터 "나를 골려주려고 연필이 책상에서 떨졌다(The pencil fell off the table in order to annoy me)"라는 의견으로 도약시키려는 유혹을 느낀다.  135-137


세네카는 그런 판단착오레 대한 설명을 제시했다. "정신의 나약함"과 관계가 있다. 무조건 모욕으로 판단하는 그들의 성향 뒤에는 자신이 조롱당할 만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자신이 해코지의 표적이 되고 잇다고 의심할 때에는 누구든 혹은 무슨 일이든 자신을 해치려는 것으로 쉽게 판단하게 된다.

'"그렇고 그래서 오늘 나를 만나주지 않았군. 다른 사람에게는 기회를 주면서 말이야." "그 자는 거만하게 퇴짜를 놓은 거야.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내 의견을 공개적으로 비웃었어." "그 사람은 나에게 좋은 자리를 내주기는 커녕 테이블 아래쪽 자리를 주었어." <불변성에 관하여>  139


'[현명한 사람은] 모든 것을 잘못 해석하지 않는다' <도덕에 관한 서한>  140


자기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못한 사람들은 과자 장수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과자를 팔기 위해서라고 상상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사진에서 처럼) 로마의 한 호텔 1층에 있는 건축업자는 벽을 수리하는 척하고 있을지 모른다(1). 그러나 그의 진짜 의도는 위층에서 책을 읽으려고 하는 남자를 괴롭히는 것이다(2).

비열한 해석 : 건축업자가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망치를 두드리고 있다. 

우호적인 해석 : 건축업자가 망치를 두드리고 있고 내가 그 소리에 괴로워하고 있다.  141



외부의 소음과, 그것을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마음속의 생각 사이에 방화벽을 쳐야 한다. 다른 사람의 동기에 대한 비관적인 해석을 엉뚱한 대본에 끌어들여서는 곤란하다. 

'바깥의 모든 것들이 미친 짓거리라도 좋다. 내 마음에 불안의 요소만 없다면.' <도덕에 관한 서한>  142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여행가방이 운송 도중에 분실되엇다는 소리를 듣게 되더라도, 몇 조가 지나면 체념하고 그 현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세네카는 스토아 철학자의 창시자들이 자신의 소유물을 잃엇을 때 어떻게 처신햇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보고했다. 

'제논은 배가 조난되어 그의 모든 짐이 바다에 빠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운명의 여신이 나에게 물질에 조금 더 초연한 철학자가 되라고 명령하는 것이로군."' <영혼의 평정에 관하여>  147


'겨울은 차가운 기후를 몰고온다. 그러면 우리는 몸을 떨어야 한다. 열기를 몰고 여름이 돌아오면 우리는 땀을 흘려야 한다. 계절에 맞지 않는 기후는 건강을 훼손시킨다. 그러면 우리는 병에 걸려야 한다. 어쩌다가 야생 짐승을, 아니면 그 어떤 짐승보다도 더 파괴적인 인간을 만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만물의 질서를 바꿀 수 없다... 우리의 영혼이 순응해야 하는 것은 이 [자연의] 법이다. 이 법을 우리는 따라야 하고, 준수해야 한다... 당신이 개조시킬 수 없는 것이라면, 견디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도덕에 관한 서한>  151


'삶의 단편들을 놓고 흐느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온 삶이 눈물을 요구하는 것을.'

  Quid opus est partes deflere?  Tota flebilis vita est.'  <마르키아에게 보내는 위로문>  152




IV. 부적절한 존재들을 위하여

'독서는 괴롭기 짝이 없는 게으름의 짓누름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준다. 그리고 언제라도 지루한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켜준다. 통증이 엄습할 때도 그 정도가 매우 심하거나 극단적이지만 않다면, 그 날카로운 예봉을 무디게 만든다. 침울한 생각으로부터 해방되려면, 그냥 책에 의지하기만 해도 된다.' <수상록>III

'가장 행복한 삶은 생각 없이 지내는 것이다.' - 소포클레스  158


'만약 우리가 지식을 얻게 된 결과, 그것을 얻지 않았다면 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평정과 안식을 잃게 된다면, 그리고 그 지식이란 것이 우리의 처지를 피론의 돼지보다 더 열악하게 만든다면, 지식이란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수상록>I  163


'우리가 어리석은 짓을 했다거나 어리석은 말을 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더 크고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 우리 인간이 한갓 멍청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수상록>III  164


'만약 [남녀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일을 서둘러서는 안 된다. 첫번의 실패로 그만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것보다는 적당한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더 낫다.... 한 번의 실패를 맛본 사람은 다양하고 부담 없는 감정 분출을 통해서 전주곡처럼 몇 차례 가볍게 시험을 거쳐야 한다. 자기 자신이 앞으로는 영원히 성교에 적절치 못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에 완고하게 매달려서는 결코 안 된다.' <수상록>I  169-170


몽테뉴는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던 많은 것들을 배제하려는 전통적인 인간의 초상을 흠잡았다. 그 자신이 직접 책을 쓰기로 한 것도 부분적으로는 이런 현상을 수정하려는 뜻에서였다. 서른여덟 살의 나이로 은퇴햇을 때 그는 책을 쓰고 싶었지만, 어떤 것을 주제로 삼아야 할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점차로 그의 머리 속에 아이디어가 자리잡아갔는데, 그 책은 너무나 엉뚱하여 그의 서재의 반원형 서가에 꽂혀 있던 천 권 가량의 책과는 달랐다. 

몽테뉴는 자신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 저자로서 엄청난 수치심을 감수했다. 그는 자신의 정신과 육체 활동을 가능한 한 명료하게 묘사하겠다고 다짐하고 <수상록> 서문에 그 뜻을 밝혔다.

'아직도 자연의 중요한 법칙들의 달콤한 자유를 누리며 산다는 사람들이 있으면, 나는 나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완전히 벌거벗은 모습을 묘사하려고 최대한 노력할 것이라는 점을 그대들이게 분명히 밝힐 수 있소.' <서론>의 주  173-174


부적절하다는 느낌을 일으키는 또 다른 원인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두 개의 진영으로, 말하자면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으로 나눌 때 드러나는 그 오만함과 신속함이다. 우리의 경험과 믿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곧잘 무시당하곤 한다. 그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정말 그래? 참이상하군!" 하고 말하면서 미심쩍은 표정으로 일종의 경고를 하는데, 그런 말에는 우리의 정당성과 인간성을 부인하려는 의도가 약간 담겨 있다.  178


여행하면서 몽테뉴는 사람들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관념들이 지방에 따라서 얼마나 뚜렷하게 달라지는 지를 관찰했다.


바젤에서는 포도주에 물을 타지 않았으며 저녁식사때는 예닐곱 가지의 코스 요리를 즐겼다. 바덴에서는 매주 수요일은 생선으로만 식탁을 꾸몄다. 스위스의 가장 작은 마을이었던 바덴은 고작 2명의 경찰에 의해서 치안이 유지되었다. 독일인들은 15분마다 종을 울렸고, 심지어 1분 단위로 종을 울리는 마을도 있었다. 린다우에서는 모과로 만든 수프를 내놓았으며, 고기 접시는 수프에 앞서 나왔고, 빵은 회향(茴香)으로 만든 것이었다.  178-179


몽테뉴를 괴롭혔던 것은, 프랑스 사람들이나 아우크스부르크의 신사가 검증을 거치지 않고도 꿋꿋이 고집하는, 자신들의 난방장치가 상대의 난방장치보다 더 우월하다고 믿는 그 맹신이었다.

'어느 나라 할것없이, 다른 나라 사람들의 눈에는 야만스럽거나 충격적으로 비치는 관습이나 관행이 있게 마련이다.' <수상록>III  182-183


학살의 이면에는 추잡한 추론이 도사리고 있었다.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분리하는 작업은 전형적으로 귀납법의 형태로 진행된다. 그 방법에 따르면 특별한 예에서 일반적인 법칙을 추론한다(논리학자들의 설명처럼, 관찰을 통해서 A1이 0이고, A2도 0이고, A3도 0이라는 결론을 얻으면, 우리는 모든 A는 0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떤 사람이 지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만났던 지적인 사람들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들을 찾는다. 그래서 만약 <그림1>처럼 보엿던 지적인 사람을 만났고, <그림2>처럼 보였던 지적인 사람을 만났고, 그리고 <그림3>처럼 보였던 또 다른 지적인 사람을 만났다면, 우리는 지적인 사람은 책을 많이 읽고, 검정 옷을 즐겨 입고, 엄숙하게 보이는 존재들이라고 결정짓기 쉽다. 그런 상황에서 <그림4>처럼 보이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어리석은 존재라고 얕보고 훗날 그를 죽여버릴 수도 있다.  191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익숙하지 않은 것을 보면 무엇이든 야만스럽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자기 나라의 관습이나 사고방식 외에는 달리 진실이나 올바른 이성의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젠 자기 나라에서 완벽한 종교와 완벽한 정치 형태, 그리고 모든 일을 처리하는 가장 발전되고 완벽한 방법을 찾게 된다.' <수상록>I

가치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낯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런 관습들이 결점으로 받아들여져서는 곤란하다. 국적과 친숙함을 선(善)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불합리하다.


프랑스에서는 코가 막히면 손수건에다 코를 푸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런데 몽테뉴의 한 친구는 그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코가 막히면 바로 손에다가 푸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자신의 행동을 옹호하면서... 그는 나에게 지저분한 콧물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콧물을 받기 위해서 미리 깨끗한 리넨 손수건을 곱게 접어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고 다니느냐고 물었다... 나도 그의 말이 전적으로 비이성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관습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행동하면서도 다른 나라에서 그와 비슷한 관습을 보았더라면 흉측하다고 느낄 수 있었던 그 낯설음을 깨닫지 못했다.' <수상록>I  193


'이 세상에 존재했던 가장 현명한 사람은, 아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이 아는 것은 오직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 하나뿐이라고 대답했다.' <수상록>II  194

우주의 진실을 논한 다른 사람들의 주장이 의문스럽다고 느껴지면, 몽테뉴는 비슷한 방식으로 고대의 철학자들이 설파했던 우주 이론들을 몽땅 모아놓고 비교했는데, 그럴 때면 그는 그 사상가들이 한결같이 모든 질신을 꿰뚫고 있다고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론에서 어이없는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비교 연구햇으나, 몽테뉴는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할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다고 빈정거리듯이 고백했다.  195


'인간의 지혜라는 것에 담긴 지적 우둔함을 간파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놀랄 만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인간의 지적 능력을 위대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던 그룬 중요한 인물드에게서조차 엄청난 오류를 발견할 때,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인간의 감각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이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수상록>II  196


'흔한 친구나 우정이라고 브르는 것들은 우연 혹은 유사함으로 연결되는 친밀한 관계나 면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관계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들은 서로를 격려한다. 그러나 직ㅁ 내가 이야기하는 우정에서는 영혼들이 서로 한데 우울리며 녹아들기 때문에 두 영혼을 결합한 솔기마저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수상록>I

만약 만흥ㄴ 사람들이 이 세상에 대해서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면, 예컨대 몬테뉴의 경우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많은 것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면, 우정이 그토록 소중하게 평가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199


그의 책은 특별히 누군가를 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한 발걸기였다 그는 서점을 찾을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가장 내밀한 자아를 표현하는 행위의 역설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개인에게도 말하려고 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나는 대중에게 말한다. 그리고 나의 가장 은밀한 사고들을 꿰뚫고 있는 서점의 진열대를 나의 가장 충직한 친구라고 부르고 싶다.' <수상록>III

그리고 우리는 이런 역설에 감사해야 한다. 저자들이 말을 걸 사람들을 찾지 못한 까닭에 씌어진 책들의 수를 감안하면, 서점이야말로 그런 외로운 사람들에게는 가장 가치 있는 목적지가 아닐까?  201


만약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는 어떤 것이든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측정할 때, 그것이 자신의 삶에 얼마나 유익하고 적절한지를 잣대로 삼아야 할 것이다.' <수상록>II

우리로 하여금 더 낫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것만이 배우고 이해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205


'나는 기꺼이 교육의 부조리라는 주제로 돌아가겠다. 우리의 교육 목적은 우리를 행복하고 현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무엇인가를 집어넣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목적이라면 성공한 셈이다. 교육은 우리에게 미덕을 추구하고 지혜를 포옹하도록 가르치지 않았다. 그것은 단어의 기원이나 어원 같은 것들을 우리의 뇌에 각인시켰다...' <수상록>II

'우리는 가장 많이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해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은 공허하게 비워놓은 채 오직 기억을 채우기 위해서 분투한다.' <수상록>I  207


나는 어떤 일로도, 심지어 그렇게나 소중하다는 학문을 얻는 일로도 머리를 싸맬 생각은 없다. 책을 통해서 내가 추구하는 모든 것은 시간을 올바르게 활용하여 나 자신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만약 책을 읽다가 어려운 문장을 만나기라도 하면 그 부분을 곰곰 생각하느라 손톱을 물어뜯는 일은 결코 없다. 한두 번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다가 안 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어떤 책이 나를 피곤하게 만들면, 나는 다른 책을 집어든다.' <수상록>II

얼마나 터무니없는 말인가. 서가에 책을 1,000권이나 꽂아두고, 그리스와 로마 철학에 통달한 사람의 입장에서 장난스레 젠체하는 것 같지 않은가. 만약 몽테뉴 자신이 철학적 해설을 풀어놓으면서 독자들을 졸리게 만드는 그런 애매모호한 신사로 비치기를 즐겼다며느, 그것은 엉큼한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그가 게으름과 느림을 되풀이하여 선언했던 것은 지식과 훌륭한 글쓰기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허물기 위한 전략적 방법이었다.

몽테뉴가 암시했듯이, 인문학 분야의 책이라고 해서 어렵거나 지루한 내용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213


어려운 책들은 예외 없이 우리로 하여금 책의 내용이 명쾌하지 않다는 이유로 저자를 무능하다고 판단하게 하든지, 아니면 책의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는 자신을 우둔하다고 결론 내리게 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몽테뉴는 우리에게 차라리 저자를 책망하는 쪽을 택하도록 부추겼다.  214


평이하게 글을 쓰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쉽게 읽히지 않는 산문이야말로 지식의 표상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거나, 어리석은 존재로 폄하될 수 있기 때문이다.  215


똑똑한 사람들은 어디서 아이디러를 얻어야 하는가

그들은 자신들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는다.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보듯이 우리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생각들을, 우리 자신들마저 도저히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심리적으로 정확하게 그려내는 저자들을 만나면 누구나 그드르이 글을 인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들은 우리 자신들보다도 우리르 더 잘 아는 것 같다.  218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말할 줄 안다. "이건 키케로가 말한 거야" "이건 플라톤의 도덕률이야" "이것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글자 그대로 인용한 것들이야"라고,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어떤 판단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라면, 앵무새도 우리만큼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수상록>I  224


몽테뉴의 암시에 따르면, 학자들이 고전에 그토록 많은 관심을 쏟는 이유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름과의 연결을 통해서 자신을 지적인 존재로 비치고 싶은 허영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결과 일반 대중은 학식만 높고 현명함에서는 크게 처지는 산더미만큼 많이 마주하게 되었다. 

'다른 어떤 주제보다도 책들에 대해서 쓴 책이 많다.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는 책들을 서로 설명하는 것이 전부이다. 모든 책들은 해설로 가득채워져 있다. 진정한 저술가가 없는 실정이다.' <수상록>III

몽테뉴는 흥미로운 지혜란 어느 인생에서나 발견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의 이야기들이 제아무리 소박하다 하더라도, 옛날의 그 많은 책에서보다 우리 자신에게서 더 위대한 통찰력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225-226


'당신은 보다 풍성한 요소를 갖춘 삶만이 아니라 당신의 평범한 개인적 삶도 도덕철학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수상록>III  227




V. 상심한 존재들을 위하여

철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염세주의자로 성장하는 쇼펜하우어.

자살이 분명한 아버지의 죽음이후, 열일곱 살 소년 쇼펜하우어는 평생 일을 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큰 재산을 물려받는다. 훗날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내 나이 열일곱이던 때, 학교 교육은 한번도 받지 않은 채 나는 석가모니가 젊었을 적에 병든 사람이나 노인, 고통과 죽음을 목격하고 그랬던 것처럼 삶의 비참함에 사로잡혀 지냈다. 진실은... 이 세상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어떤 존재가 만든 작품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악마의 작품인 것 같은데, 그 악마는 고통에 일그러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 생명체들을 존재하도록 했다. 나의 경험도 이런 생각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이 세상이 그렇다는 믿음이 늘 나를 지배했다."  234-235


쇼펜하우어는 베를린 대학교에서 철학교수 자리를 얻으려고 시도한다. 그는 "철학개론", 즉 "이 세상과 인간 정신의 정수에 관한 이론"이라는 강의를 맡는다. 학생 다섯 명이 수업을 듣는다. 가까운 건물에서는 그의 라이벌인 헤겔리 300명의 청중에게 강의하는 소리가 들린다.  239


이 철학자는 하루를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서 매우 엄격하게 지낸다. 그는 아침에 세 시간 글을 쓰고, 한 시간 동안 플루트(로시니)를 연주하고, 그리고 말을 파는 시장인 로스마르크트에 있는 영국식 식당 엥리셔 호프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서 흰색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한다. 그는 식사를 할 때면 다른 소님들이 알아보는 것을 꺼려하지만, 커피를 마실 때면 경우에 따라서 대화에 끼어들기도 한다.

점심 식사 후,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클럽인 인근의 카지노 소사이어티의 도서관을 찾아가는데, 그곳에서 그는 이 세상의 비참함을 가장 잘 알려준다고 느끼고 있던 신문 <더 타임스>를 읽는다. 저녁 무렵이 되면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개와 함께 마인 강변을 따라 두 시간 가량 산책을 한다. 밤에는 오페라 공연장이나 극장을 방문한다.  242


쇼펜하우어라는 철학자는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에 대해서 결코 유쾌하지 않은 설명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 설명에는 상대방으로부터 거부당할 경우에 대비한 위안이 들어 있었다. 말하자면 버림받을 때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위안이 그것이다. 우리는 단 며칠 간 희망을 품은 결과로 생길 수 있는 좌절의 깊이에 낭패감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다.  262


중요한 것은, 우리는 본래부터 사랑스럽지 않은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자신에게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다. 성격도 혐오감을 일으키지 않고, 얼굴도 못생기지 않았다.

당신은 언젠가는 (당신의 턱과 그의 턱이 생에 대한 의지의 관점에서 바람직한 조합을 이룬다는 이유로) 당신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그리고 예외적으로 자연스러움을 느낌으로써 서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거부한 살마들을 용서하는 법을 일찍이 배워야 한다.  263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사랑을 거부당한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한다. 그는 더 이상 혼자서만 고통받고 외로워하고 혼란을 겪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마침내 그는 인류사에 종의 번식을 위해서 애 쓰느라 다른 인간을 사랑했던 수많은 인간군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273




VI. 어려움에 처한 존재들을 위하여

나움부르트에 있던 홀어머니와 열아홉 살의 여동생에게 편지를 쓸 때, 니체는 자신의 식사와 학업 진도에 대한 보고 대신에 자제와 체념이라는 자신의 새로운 철학을 요약하여 보냈다.

'삶이란 고통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또 삶을 즐길고 애쓰면 애쓸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삶의 노예가 된다는 것을 잘 압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삶의 아름다운 것을 얻기를 포기하고 금욕을 실천해야 합니다.'  280


훌륭한 소설가가 되기 위한 비법... 밑그림.. 매일매일 일상의 일화들을 적어두어야 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92


모든 삶은 다 힙겹다. 그리고 그들 중 몇 명을 완성된 삶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달려 있다. 모든 고통은 어렴풋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신호이다. 그런 고통도 당하는 사람의 정신력과 현명함의 정도에 따라서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하고 나쁜 결과를 낳기도 한다. 고뇌는 정신적 공활상태를 야기할 수도 있지만,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니체가 존경했던 몽테뉴가 <수상록> 마지막 장에서 설명했듯이, 삶의 기술은 역경에 처할 때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피할 수 없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 고통을 감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삶은, 이 세상의 조화처럼, 달콤하고 거칠고, 예리하고 단조롭고, 부드럽고 떠들썩한, 다양한 음색뿐만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음색으로 이루어진다. 만약 어느 음악가가 한 음색만을 좋아한다면 어떤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음악가는 모든 음색을 활용하여 조화를 일구어낼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역시 삶을 구성하는 선과 악을 가지고 그렇게 요리할 수 있어야 한다.' <수상록>III

그리고 약 300년 뒤, 니체는 그런 사상으로 회귀했다.

'우리가 만약 비옥한 들판이라면, 어떤 것이든 다 흡수하지 않고 그저 흙바닥을 통과하게 내버려두는 일은 없을 것이며, 어떤 사건이나 사물, 사람에서도 유익한 비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301-302


'재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라, 타고난 재능이라고! 모든 분야에서 그다지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으면서도 훌륭한 업적은 남긴 사람을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다. 그들은 부족한 자질을 일궈가면서 스스로 위대함을 획득하여 (우리가 표현하는 것처럼) "천재"가 되었다. 그들 모두 장인(匠人)의 근면함과 치열함을 갖추고 있어서 감히 훌륭한 완성품을 내놓기 전에 각 부분들을 정확하게 구축하려고 애쓴다. 그들이 그런 시간을 가지는 이유는 황홀한 완성품이 주는 효과보다, 보잘것없고 신통치 않은 것들을 더 훌륭하게 개선하는 작업 그 자체에 보다 많은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305


'미움과 시기, 탐욕, 그리고 지배욕이라는 감정들은 삶의 지배적인 감정인데....이런 것들은 삶이라는 총체적인 경제에서는 기본이며 필수이다.' <선악을 넘어서>

부정적인 뿌리들을 모조리 잘라버리는 것은, 동시에 한참 뒤 그 뿌리에서 자라날 식물 줄기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질식시켜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신이 처한 어려움에 당혹감을 느낄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으로부터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일구지 못하는 사실에 당혹해야 한다.  307


그리스인들은 자신에게 닥친 재난을 피하려 하지 않고 세련되게 활용했다.

'모든 열정에는 단지 재앙으로 작용하는 단계가 있게 마련이다. 이때 열정은 당사자를 어리석음의 무게로 짓누른다. 그리고 조금, 아니 한참 지나면 열정들이 영혼과 결합하여 스스로를 "영성화"하는 단계가 찾아온다. 아주 옛날에는 열정의 어리석음 때문에 사람들은 열정 그 자체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들은 열정을 파괴하기 위한 계획을 은밀히 세웠다....열정과 욕망이 지닌 어리석음과 그 어리석음에서 연유하는 불쾌한 결과를 피할 목적으로 그것들을 파괴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그야말로 어리석음의 극치로 보인다. 이빨이 아프다고 해서 이빨을 모조건 뽑아버리는 치과 의사에게 우리는 더 이상 찬사를 보내지 않는다.' <우상의 황혼>

니체는 우리에게 그런 어려움을 참고 견디라고 요구했다.  310


니체 또한 행복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단지 행복이란 고통을 치르지 않고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믿었다.  314


높은 곳을 오르는 등정의 고통을 감내하기를 요구했다.  315


모든 괴로운 상태를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것으로, 불만스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짓이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재앙이다... 나쁜 기후를 제거하겠다는 의지만큼이나 비슷하게 우둔한 짓이다.

'인간의 병 중에서 가장 나쁜 병은 사람들이 자신의 병을 다시르는 방식에서 비롯되엇다. 치유로 보이는 것이 결국에는 그 치유의 대상이 되었던 병보다 더 독한 무엇인가를 낳았다. 즉각적으로 효과를 나타내는 수단들, 마취와 도취, 이른바 위안들이 어리석게도 실질적인 치유책으로 생각되었다. 알려지지 앟은 사실은... 고통을 곧장 진정시키는 방법들은 그 고통을 낳은 불만을 일반적으로 더욱 깊이 악화시키는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다.' <서광>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다.  328





알랭 드 보통이 이야기하는 행복의 철학


소크라테스(470-399 기원전)는 진리의 절대성을 추구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그는 인간의 행복은 올바른 지적 인식을 통하여 진리를 실천함(지행합일知行合一)으로써 가능하다고 설파했다. 참으로 그에게 부당하게 언도된 사형을 그가 당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용기"라는 미덕 때문이었는데, 그 용기마저 지식, 득 선과 악을 분별하는 힘이라고 믿었다. 

에피쿠로스(342?-270 기원전)는 "쾌락은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목표"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부정적인 의미로 오해하고 있는 쾌락을, 쾌락의 첫째 항목으로 그가 들었던 위(胃)의 쾌락마저, 양이나 희귀성에서 찾지 않고 그 자신에게 가장 맛있는 것에서 찾았다. 그의 쾌락은 욕망을 절제하고 친구들과 안온하고 겸허한 생활 속에서 자족함으로써 이루어지는것, 즉 "올바른 인식"에서 이루어지는 정신적 쾌락이었다.

자신이 가정교사를 했던 네로의 명령에 의해서 자진(自盡)해야 했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기원전 4?- 기원후 65)는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세네카의 이성은 세네카에게 자신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라면, "운명"으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그는 준엄한 도덕성과 의무의 준수를 모토로 한 스토아 학파의 대성자였으나, 그의 사생활은 안락과 부(富)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이성에 따른 아파테이아(apatheia : 당당하고 유연한 심경)만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스토아 학파의 실천자였으며, 순명(順命)의 현자였다.

몽테뉴(1533-1592)는 인간성과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을 탐구한 에세이스트로서, 파스칼과 더불어 프랑스의 대표적인 모랄리스트(moraliste)이다. 그는 그때까지 이성의 힘이 주도하던 철학 세계에서 인간의 벌거벗은 자연의 모습, 곧 육체와 본능의 힘을 해방시켰다. 섹스의 언급을 금기시한 당대의 위선을 뛰어넘은 몽테뉴의 용기는 "국경"이라는 국민적 편견의 장벽까지 서슴없이 돌파하고 있다. 이런 사상적 궤적을 보여주는 몽테뉴 역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실천적 삶을 살았다.

염세주의 철학자로서 알려진 쇼펜하우어(1788-1860)는 끝없는 욕망의 연쇄로서의 생(生)은 고통이며 그 고토으로부터의 해방은 죽음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그는 맹목적인 "생에 대한 의지"가 인간 종(種)의 존속을 위해서 작용한다고 파악함으로써 사랑이 생을 지배하는 이유를 발견한 철학자가 되었다. 사랑의 감동에 냉담하기만 했던 철학의 역사에서 사랑으로 인한 슬픔을 치유해주는 유례없는 철학자가 되엇던 것이다.

강자의 도덕을 구현하고 실천하는 "초인"을 "힘에의 의지"의 상징으로서 구체화한 니체(1844-1900)는 행복은 고통 없이는 얻을 수 없으며, 삶을 승화시키는 것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처절한 고독과 무명(無名), 나쁜 건강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니체는 우정을 배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명성과 부와 행복을 공격하지 않았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싸우며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는 이빨이 아프다고 해서 이빨을 무조건 뽑아버리는 의사가 결코 아니었다.  330-331


행복은 올바른 인식에 의해서 진리와 진실을 추구하고 삶을 자족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그 길에서 동반자가 되는 것이 바로 사랑과 우정이다.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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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독자의 말 - 정이현

낭만적 사랑의 영속성을 굳게 믿는다면, 그 꿈에서 영원히 깨고 싶지 않다면, 이 소설의 첫 페이지를 열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진실을 알고 싶다면? 말할 것도 없다. 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 된다.


운명의 상대를 찾아 헤매다 드디어 서로를 알아 본 한 남자와 한 여자. 소설은 그 '끝'에서 시작된다. 결혼으로 완성된 그들의 사랑은 일상에서 어떻게 변해가는가, 즉 아름다운 해피엔딩 뒤에 펼쳐지는 리얼리티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일부일처의 결혼제도 안에서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가는 밴과 엘로이즈에게는 어떤 드라마틱한 사건도,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해줄 반전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은 그저 천천히 녹슬고 천천히 닳아갈 뿐이다.  4-5


작가의 말

혼자가 아니라는 발견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 남자의 시선으로, 그 남자의 관심과 고민을 통해 사랑을 탐구하고 세상을 바라보려 애썼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남자들이 얼마나 쉽게 사랑에 빠지고 또 쉽게 싫증내는지를.

이 소설은 '오래된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낭만적 사랑의 시기가 지나고 나면, 사랑에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6-7



딱히 누군가와 사귀고 있지 않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진지한 로맨티스트일지 모른다.  16


벤은 현재 결혼해서... 여섯살, 네살배기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아내 엘로이즈에게 깊은 애정을 느꼈지만, 자신의 감정 패턴을 분석해봤을 때 그녀를 향한 욕망이 늘 어떤 특정 맥락에서만 생겨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의 십 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의 사랑의 진앙(震央)은 엘로이즈가 생면부지의 남이었던 때, 노팅힐의 어느 술집에서 처음 만난 직후의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  17


긴 시간을 지나오면서 전혀 아무런 느낌이 없었던 때도 많았다. 

사랑은 뜻밖의 순간에 되돌아와 다시금 그에게 확신을 주었다. 패딩턴의 병원 응급실로 실려간 엘로이즈는 급성패혈증 진단을 받았고, 담당 의사가 나중에야 알려준 사실이지만,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

밤새워 기도하며 지켜보는 동안, 벤은 사랑의 존재를 추호도의심하지 않았다. 엘로이즈가 곁에 없다면 결코 다시는 삶의 의미나 기쁨을 알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이 특권을 박탈당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확실해질수록 기이하게도 그 감정은 점점 더 불확실해졌다.  18-19


에로티시즘이란 결국 벌거벗은 몸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욕망하고 있다는 심리적 기대감에서 비롯되는데, 어쩌면 스키복과 모자로 꽁꽁 싸매고 나란히 리프트에 앉아 산기슭을 오르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텔레비전 화면 속 리포터가 피스타치오 코르네토 아이스크림을 격찬하는 동안, 방 안의 부부 침대에는 발트해의 누드비치 같은 무덤덤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22


방금 술집에서 만난 상대와 잠자리를 갖지 못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런 퇴짜에는 나름의 대처방법이 있다. 반면, 평생을 함께하기로 서약한 사람과 섹스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은 훨씬 더 기이하고 창피스러운 사태다. 벤과 엘로이즈가 마지막으로 섹스한 게 꼬박 팔 주 전이었다.  23


이제 벤은 그 날짜라면 귀신같이 기억했다. 지난번엔 육 주 만이었고, 지지난번엔 십 주 만이었다. 작년 한 해를 통틀어 벤과 엘로이즈는 여섯 번 했다.

욕망을 해방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근래의 역사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믿음을 심어주는 데 초첨을 맞추어왔음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볼품없는 의상으로 신체를 가릴 필요가 없으며, 원치 않는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될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섹스를 즐겁게 자주 맛보아야 할 감정적으로 풍요롭고 순수한 오락 이상의 다른 무엇으로 여길 필요는 전혀 없다.  24


로맨스와 에로스, 그리고 가족이라는 세 가지 황금요소를 완벽하게 융화시킨 궁극의 결혼도 당연히 있다. 종종 냉소주의자들은 행복한 결혼은 신화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렇게 섣불리 치부하고 단언할 수만은 없다.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긴 해도, 궁극의 결혼은 분명 존재한다. 결혼이 우리의 소망에 부응하지 말아햐 할 형이상학적 이유 같은 건 없다. 다만 상황이 우리에게 몹시 불리할 뿐이다.  35



벤과 엘로이즈의 경우 대략 일주일에 한 번은 자잘하게 싸웠고 보름에 한 번은 대판 싸웠다. 심각한 부부싸움은 그 자체로 너무나 불쾌한 일이라 일단 싸움이 끝나면 자신들이 어떤 지경까지 갔었는지 되돌아보는 일조차 끔찍했다.

다음과 같은 주제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여름휴가는 핵가족답게 노포크의 시골집에서 보낼지(벤의 입장) 아니면 가족 동반으로 스페인에 놀러가자는 친구들의 초대에 응할지(엘로이즈의 입장), 아이들에게 휴일처럼 특별한 날에만 아이스크림을 줄지(벤의 입장) 아니면 먹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 주는 게 좋을지(엘로이즈의 입장), 현관 벽에 자전거 체인의 기름때가 묻었으니 수일 내로 페인트칠을 해야 할지(벤의 입장) 아니면 집 안의 다른 뭔가가 망가져서 전체적으로 새단장이 필요해질 때까지 몇 달이고 내버려둬도 괜찮은지(엘로이즈의 입장) 등이었다. 물론 가장 최근에 다뤄진 심각한 사안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묻지 않아도 되는지(벤의 입장) 아니면 그것은 단지 의지박약의 문제인지(엘로이즈의 해석)였다.  40-41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일은 상대가 내 눈에 어떤 사람으로 비쳐야 하고 그와 함께하는 삶이 어떻게 펼쳐져야 마땅하다는 이상을 바탕으로 서로의 행복을 염원하는 것이다. 이는... 최고의 완벽을 구현하려는 시도다.  41


결혼생활하는 부부들은 화장실 타일을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남에게 사과할 때 구사해야 할 억양에 이르기까지, 삶의 전 영역에 걸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배우자에게 줄기차게 의견을 제시한다. 

평균적인 부부들은 커뮤니케이션, 요리, 미학, 교육, 정치, 패션, 섹스, 재정에 이르는 온갖 영역에서 끊임없이 상대에게 자신의 이상을 관철하려 든다.  42


우리는 자신의 학생을 구슬려 달래지도 못하고, 뭔가 배우고 싶도록 마음을 사로잡지도 못하며, 그렇다고 혼란스러워하는 상대를 이해해주거나 산만한 태도에 인내심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설명은 극도로 아끼면서, 시작부터 다짜고짜 화난 눈빛으로 목청을 한껏 높여 상대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꾸짖을 뿐이다. 그리고 뛰어난 간파력을 발휘해 상대를 괴롭히고 자존심을 건드린다. 자신의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성공인지 실패인지 여부에 그다지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훌륭한 교사의 전제조건 중 하나라고 할 때, 연인 사이란 이를 깨닫기엔 최악의 조건이다.  45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결혼해서 잘 사는 법을 굳이 배우지 않아도 터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비행기 착륙법이나 외과수술법을 직관으로 터득하길 기대해선 안 되듯이, 아무런 도움도 없이 더불어 살기라는 과업을 완수하는 비결을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선 안 된다.  47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려고 할 때 우리는 대개 그럴듯하고 평범한 답변을 대려는 경향이 있다. 그 사람이 착하고 똑똑하고 예쁘고 건강하기 때문에 끌렸다고 말이다. 사랑은 후손을 낳고 정서적으로 풍요로워지기 위해, 즉 두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 하나가 되도록 이끄는 힘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내는 생각할 때마다 벤은 이런 통설에 의문이 들었다. 엘로이즈는 건강하고 매력적이며, 무럭무럭 잘 자라는 아이들도 낳아주었다. 그럼에도 그는 배우자를 선택할 때 뭔가 좀더 비합리적이고 모순된 힘이 자신에게 작용한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정신분석은 이에 대해 가혹하지만 타장한 의견들을 내놓았다. 우리가 사랑에서 기대하는 것은 행복이라기보단 친밀함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단순하게 그 자체로 좋은 것보다는 평범한 것을 더 선호한다.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이상적인 방식으로 양육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부모는 자식들에게 도덕적 강박과 히스테리, 깐깐함과 속물근성, 단호함과 신중함 등 서로 상충되는 요소들로 뒤범벅된 형태의 애정을 쏟아부었다. 그래서 우리에겐 보다 덜 이상적인 상황들을 참아내는 능력이, 더 나아가 그런 상황에 대한 '욕구'가 발달한다. 우리는 결혼한 상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지만, 실은 감정적으로 훨씬 덜 힘들었던 다른 후보자들이 무수히 많았음에도 어떻게든 그들을 외면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에게 어떤 결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결점이 충분히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완벽함에는 익숙하지 않은 편안함이 깃들어 우리를 소스라치게 만들었다.  56-57


벤의 입장에서 아내가 특별히 가깝게 느껴지는 순간은 그런 두려움을 느낄 때였다. 비슷한 수준의 교육을 받은 또래의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을 그가 해내지 못했을 때, 사람들은 당장 그를 무시하고 낙오자라는 판결을 내릴 것이다. 그 사실을 직시하고 겁에 질리는 순간, 아내에 대한 그의 감정은 더욱 애틋해졌다. 심지어 자신이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더 성공했더라면 덜 헌신적인 남편이 됐을 거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의 사랑은 가난과 치욕에 대한 두려움의 결과였다. 

조금 과장하자면, 우리가 자본주의로 알고 있는 것은 부르주아가 발명했거나 적어도 그들의 강력한 옹호와 지지 덕분에 발전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낭만적 사랑도 부르주아의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관습은 서로 공생관계에 있다. 자본주의의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해 우리는 낭만적 사랑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으로 얼마나 성공하고 얼마나 많이 투자하고 생산하는가를 기준으로 존재를 가차없이 심판하는 시스템 솏에서, 더구나 이처럼 종교를 저버린 시대에 우리의 정신이 버텨낼 수 있으려면 비물질적인 가치에 초점을 맞춘 다른 평가방식이 절실해진다. 그 보루마저 없다면 심판의 위력이 어무나 막강해서 우리의 내면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유감스럽게도 사랑에 대한 우리의 낭만적 이상주의에는 사악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낭만적 이상주의는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방어해준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가치가 경제적 능력에 따라 준엄하게 평가되는 시스템으로부터 해방될 가능성 또한 차단해버린다. 낭만적 이상주의는 부와 사랑이 보다 골고루 아낌없이 분배되는 대안적 방식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만일 경제 시스템을 바꾼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필사적으로 짝을 찾아 헤매고 두려움에 떨며 서로에게 매달릴 필요를 훨씬 적게 느낄 것이다.  65-66


지하철 안에서 그는 남은 저녁시간을 근사하게 보내는 공상에 잠겼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두 아이, 조금 지친 아내, 그리고 모종의 위기.  68-69


그는 자기가 속한 시대의 보편적 견해를 충실히 따르게 되었다. 

아이가 누누 단계에서 정서적으로 충분히 보살핌 받지 못하면 그것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고, 치료하는 데 큰돈이 들며 시간도 오래 걸린다.  73


'부모 되기'란 겉보기엔 전혀 대수롭지 않은 일들, 가령 학교 숙제를 도와주거나 아이가 만든 레고 공항을 칭찬해주고 있는 순간에도 마천루의 기초를 다지는 작업만큼이나 까다롭고 고된 작업을 매일 수행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벤과 엘로이즈가 아이들을 키우며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이 세상에 한 인간을 부려놓은 존재들은 한 발짝 물러서서 편견 어린 시선으로 자신의 피조물에 감탄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 인간은 누군가 그를 사랑한다고 말햇을 때 상대의 말을 믿는 능력이 결여되어, 자기 자신에게도 없는 믿음을 다른 사람이 가졌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상대를 단죄하려 들 것이아. 그게 아니라면, 잠시잠깐 이라도 박수갈채가 멎으면 못 견뎌하고, 남들의 인정에 목말라하며,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과감한 선택 같은 건 절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도 아니면, 정말 훌륭한 일을 해내더라도 스스로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느끼지 못화며, 삼십 년 또는 사십년 전에 자신이 제대로 사랑받지 못했다는 뼈아픈 생각에 괴로워하며 매일 밤 배갯잇을 적시다 잠들 것이다.  74


노아가 거실 바닥에 쿠션을 쌓아놓고 난파당한 선원 흉내를 내며 상어가 나타났다. 전갈에 물렸어, 살려주세요하고 소리지를 때 아이는 그저 밉살맞은 짓을 하는 게 아니었다. 아이는 장차 실연(失戀)을 이겨내고 좋은 직장을 얻는 데 유리하게 작용할 '무력감'과 '회복능력'이라는 상반된 감각을 탐구중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나가 주황과 파랑 색종이로 눈은 넷이고 얼굴은 새처럼 생긴 키 큰 여자의 콜라주를 만든 것은 엄마의 과도한 간섭에 시달리는 아이의 스트레스가 표출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부모는 자식이라면 쩔쩔매고 한없이 응석을 맏아주게 된다.  75


경제체제가 요구하는 자질은 자신감과 창조력 그리고 독창성이다. 이것들은 고대 스파르타의 우람한 근육이나 프리드리히 대체 시절 프러시아의 절제와 금욕과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 사람들이 반드시 갖춰야 할 자질이다.  76


아이들을 얻기 전까지 벤은 항상 감정을 속이며 살아왔다. 그래야 점잖고 분별 있어 보이는 줄 알았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그가 느끼는 기분은 적절치 못하거나 아니면 아예 아무 감정이 없었다. 생일파티에선 슬펐고, 휴일엔 우울하고 초조했으며, 장례식에선 쑥스러웠다. 섹스가 끝나면 멍해졌고, 어쩌다 소위 걸작이라는 문화예술품을 접해도 하나같이 지루햇다. 하지만 이제 아이들에 관한 한, 그가 반드시 느껴야 할 감정은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강렬하게 느꼈다.  81


엘로이즈와 사귀던 초창기에는 그녀에게 이런 비밀을 속속들이 보여줄 수 있었다. 장시간에 걸친 음란한 폴섹스도 해봤고, 외설적인 상상을 함께 즐겼고, 야한 옷도 입어보았다. 이런 것을 터놓고 할 수 있다는 기쁨에다, 자신의 비밀스러운 성적 판타지를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이 더해지자 고통스럽게 혼자서만 느끼고 역겨워했던 감정이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관계가 깊어질수록 섹스는 그가 엘로이즈에 대해 갖게 된 폭넓은 책임감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제 곧 평생의 동반자가 될, 자신의 첫아이를 임신한 지 석달 된 여인에게 엘리베이터 안에서 벌어진 강제섹스 장면이 포함된 야설(冶說)을 보여주는 건 가당치 않았다. 그는 엘로이즈가 그런 행동은 그만두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그녀가 원하리라고 믿는 자신의 모습(에서 거의 빗나가지 않도록), 올곧은 인간의 이미지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검열해야 할 것만 같았다.

벤의 성생활은 일찍이 그의 엄마나 할머니 같은 인생 초기의 여성상으로부터 그를 분리했고, 이제는 그를 그의 아내로부터 갈라놓았다. 그는 인생에서 극히 짧은 기간 동안만 자신이 성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감출 필요 없이 살았고, 그것은 광활한 거짓의 사막에 자리한 솔직함이라는 오아시스였다.  102-103


억압은 빅토리아시대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와 영원히 함께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하러 가야 하고 우리를 둘러싼 관계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저 우리는 성을 자유롭게 표현해선 안 된다. 그것은 우리를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그것의 본성 자체가 해방을 거부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103-140


우리가 섹스를 회피하는 건 재미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섹스의 쾌감이 가정생활에 수반되는 다른 많은 일들을 감내하는 우리의 수용능력을 위태롭게 할 만큼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107


섹스는 함께 가정을 꾸려나가는 동료 관리자와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오고 균형을 무너뜨린다. 일단 섹스를 시작하려면 본인이 원하는 것을 말로 설명하려는 노력을 멈추고 자신이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꽤 이상하게 비칠 것들을 스스로 폭로함으로써 약점을 드러내고 잠재적으로 굴욕적인 상태에까지 이르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108


성적 욕구는 객관적으로 보면 터무니없고 경멸스럽게 여겨질 법한 많은 것들을 애걸하게 만든다. 그래서 결국은 일반적이고 품격 있는 삶을 영위해나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의지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아예 이런 원초적인 욕구를 드러내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른다.  108


사랑하는 살마과 섹스할 수 있는 상대, 이렇게 둘로 구분하려는 욕망은 특히 남자들의 습성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마리아-창녀' 콤플렉스는(서로 다른 젠더간의 상호이해를 위해서라면 다행이겠지만) 결코 남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여성들에게선 흔히 '착한남자-나쁜남자' 콤플렉스가 발견된다. 여성들은 다정다감하고 세심하게 보살펴주며 대화가 잘 통하는 남성에게 끌린다는 데 이론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섹스가 끝나자마자 곧 다른 대륙을 찾아 떠나는 잔인한 악당이 성적으로 훨씬 매력적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못한다.  109-110


섹스에 적극적일 수 있는 능력을 가로막는 근심거리가 또 있다. 나의 파트너가 실제로 나와 얼마나 자고 싶어하는가에 관한 문제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의 욕구에 극도로 예민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필립 로스의 신작 소설이나 루이스 부뉴엘의 새 영화를 보고 있는 상대방을 본의 아니게 귀찮게 하지는 않을까 저어하게 된다. 사랑은 우리가 평소 섹스를 나누고 있는 상대에게 폐를 끼칠까봐 매우 신중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고 만다.  110


다방면에서 결혼생활에 매우 이롭게 작용했다. 온화한태도, 비위맞추기, 평등의정신, 가정생활의 각종 허드렛일을 독단적으로 분배하는 것에 대한 거부등의 수확을 이끌어낸 것이다. 부엌에서 더 많은 공감과 이해를 장려한 덕분에 이제 침실에서의 섹스는 더 어려워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12


한 명의 파트너와 장기간 성생활을 하는 데사 오는 현대의 위기는 대개 누가 먼저 시도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한쪽이 원하지 않을까봐 양쪽 모두 감히 시작할 엄두를 못 댄다. 섹스할 기회를 잡는 일 자체가 너무나 소모적인 것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섹스를 원할 때조차 그 사실을 스스로에게 일깨워줄 다른 누군가가 필요해진다. 우리의 정신은 이성적인 문제들만으로도 너무나 바빠서 보다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내면의 충동들로부터 차단된 채 살아가고 잇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본능에 가까운 진정한 자아에 더 가까워지도록 우리를 되돌려줄 사람이 절실해지는 것이다.  113


벤은 베키를 다시 보기 않길 바랐다. 그녀에게 못마땅한 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결혼한 사람이 기회 될 때마다 바람피우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얼마나 비겁한 사람인지를 정확히 아는 데서 오는 겸손함 때문이다. 결혼생활이 그들에게 깨닫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통찰이다.  126


그는 점심에 뭘 먹었는지 거짓말할 수 있을 것이다. 꾀병을 불리 수도 있고, 있지도 않은 고객 얘기를 지어낼 수도 잇고, 출장 간다고 속일 수도 있다. 예금계좌를 숨길 수도 있고, 딴 살림을 차릴 수도 있다. 그런데 그가 유독 이 일탈을 고백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면, 이유는 바로 자신의 감쪽같은 거짓말이 드러낸 진실, 즉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자각에서 비롯된 현기증을 덜고 싶어서였다. 그렇긴 해도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129


배신당한 사람의 분노는 기본적이고 불가피한 진실과 맞닥뜨리지 않으려는 시도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전부가 될 수 없다는 진실 말이다.  132


의도의 근본적 '오류'는 결혼의 경우와 동일하게 그 속에 담긴 이상주의에서 비롯된다. 비뚤어지고 가만 없어 보이는 일에 말려드는 것 같지만, 사실 외도는 마음속의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외도가 결혼의 불충분한 요소들을 마술적으로 정리해주고, 잘 지어낸 알리바이로 복잡미묘한 기대들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으리라는 신념을.

하지만 밖에서 누군가와 자면서 결혼생활 안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망가뜨리지 않을 순 없다.  138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현대의 결혼은 섹스, 사랑, 가족이라는 세 가지 욕구를 조화시킬 수 있는 무대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각각 다른 것들에 위협이 되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와 섹스하는 능력을 위태롭게 한다. 특별히 사랑하진 않지만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누군가와 섹스하는 것은 사랑하지만 더이상 흥분되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를 위태롭게 한다. 아이를 갖는 것은 사랑과 섹스 모두를 위태롭게 한다. 그리고 사랑과 섹스에만 몰두하는 것은 다음 세대의 육체와 정신의 안녕을 위태롭게 한다.  139


침대 시트가 말끔히 정된되지 않듯이, 결혼생활 역시 어느 한 가지를 완벽하게 만들거나 개선하려 들면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긴다. 한 귀퉁이의 구김살을 펴려 하면 다른 귀퉁이들이 헝클어지게 되어 있다.  140


아이들은 대개 세 가지 이유에서 좌절감을 느끼고, 그래서 화를 내고 컨트롤이 안 되는 것이었다. 첫째, 아이들은 자신이 느끼는 것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표현할 수도 없다. 둘째, 그들에게 충분히 귀기울여주지 않았다. 셋째, 부모가 아이들의 불합리한 요구에 제대로 선을 긋지 않았다. 이때 요구란, 하고 오플린 부인은 다 안다는 듯 웃으며 재빨리 덧붙였다. "나이가 많든 적든 사람은 누구나 끊임없이 세상을 알아가고 싶어하지요."  151-152


이상화된 어린 시절의 모델레 맞춰 사랑을 감상적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 시절에 맛본 안온한 느낌을 되살려줄 성인은 어디에도 없으며,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고 연약함과 불안을 막아줄 사람을 기대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하게 된다.

어른의 사랑은 아이일 때 어떻게 사랑받았는지를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 상상해보는 것이어야 한다.  157


진정한 용기는 불안에 시달린다고 쉽사리 파괴되지 않는 것이다. 상대의 약한 모습에 좌절하여 상처주지 않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을 자신과 똑같이 상처받은 사람들로 보는 것이다. 자신과 같은 죄에 오염되었다고 아이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미치거나 자살하지 않는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삶이라는 엄청나게 어려운 과제를 그럭저럭 계속해나가는 단순한 일, 이것이 진짜 용기이며 영웅주의다.  165




작가 대담 - 정이현 & 알랭 드 보통 : 사랑을 말하다

<연인들>이야말로 연애의 초라한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인물드르이 사랑에 감정이입을 할수록 낭패감을 느끼게 되죠.  169


보통 씨가 결혼한 지 오래된 기혼 남녀의 사랑을, 저는 결혼을 꿈꾸는 미혼 남녀의 연애를 다룬다는 출발선이 그어져 있었던 거죠.  171


벤은 '낭만적 사랑'이 얼마나 미화되고 왜곡된 신화인지를 역설하고, 사랑과 정욕과 결혼이 각기 다른 영역에 속한 일이라고 말하지요. 그럼에도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향한 사랑을 지키려는 의지가 굉장히 강해요. 민아와 준호가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소소한 것임에 비하면, 벤은 일부일처의 결혼제도가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거듭 말하면서도 엘로이즈와 아이들에 대한 사라으이 감정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붓죠. 심지어 그의 인터넷 포르노 중독이나 외도의 경험조차 그러한 의지적 노력의 일부로 볼 수 있어요. 충족될 수 없는 갈망을 채우기 위해 지치지 않고 거듭 시도하는 정력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벤은 역설적으로 굉장한 로맨티스트가 되지요.  173


제가 생각한 벤은 다중적인 성격의 인물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다지 일관되진 않은 취향, 원칙, 가치관 들로 뒤범벅인 유동적인 존재가 아닐까 싶어요.  179


벤은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했어요.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 거라는 걸 알아요. 사랑하는 법은 그냥 자연스럽게 아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벤도 제 생각에 동의하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일부러 배우지 않아도 결혼해서 잘 사는 법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에요. 하지만 직관만으로 비행기를 조종하거나 외과수술하는 법을 알 수 없듯이, 함께 사는 방법을 저절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순수한 감정이 다칠까 무서워서 사랑이라는 영역에선 너무 이성적이거나 체계적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더욱 유감스러운 일이고요. 현대의 연인들은 아직도 자기들의 삶에 의식적인 절차를 도입하고 외부의 도움을 받는 걸 주저해요. 너무 많이 생각하면 느끼지 못하게 될 수도 잇다는 만츠라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죠. 하지만 끊임없이 많이 생각하지 않으면 결국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고 말 겁니다.  185


결혼의 곤란한 점은, 해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도 느낄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것들투성이라는 겁니다. 결혼한 살마들만이 맛볼 수 있는 기쁘거나 행복한 순간도 가끔은 있지만, 많은 시간 그것은 짐작보다 훨씬 더 씁쓸하고 고달프고 무미건조하고 짐스럽습니다. 결혼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고난과 시련으로 가득하지만, 그 속에서 어떤 기쁨을 찾아내는 것은 각자의 몫이죠. 저는 이런 어려움을 무릅쓰고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부부들을 위한 책, 동지적 연대감을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189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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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책장에 책들이 들어가고 싶어한다. 그런데 책장은 시위를 벌인다. 근래에 나오는 책장은 속은 비었을지 몰라도 일단은 보기에 두껍다. 몸통도 뼈대도 모두 두꺼워서 책을 꽂아도 든든하게 버틸것 같이 보인다. 

근데 집에 있는 책장은 다들 오래된 것들이라 몸통은 작지 않지만 뼈대가 다들 얇다. 그래도 책을 가지런히 꽂아두면 보기 좋다. 하지만 책을 가지런히만 꽂아둘 수가 없다. 윗칸과 아랫칸 사이 비는 공간에 책을 쌓아서 넣는다. 보기 좋게 색상도 좀 맞추고 꽂아 두었던 책들은 이미 무너졌다. 높이가 비슷한 것들끼리 짝을 지어서 꽂고 쌓아야 더 많이 들어간다. 

빈곳없이 쌓아넣었다. 모두 채우고 나서 보니 책장이 그리 크지 않게 여겨진다.('너 책 많다는걸 은근히 말하고 싶은거냐?'는 말이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미리 말해두면 그리 많지 않다. 혹 책이 많다고 해서 그 사람이 똑똑하거나 지혜로워진다면 빚을 내서라고 책을 쌓아 둘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건 누구나 알고 이 글을 보는 사람이라면 더 잘 알고 있을게다. 그러니 지금 나는 책이 많고 적음을 이야기 하고 싶은게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시길...)

이러고 나니 시간이 갈 수록 책장이 수평이 아니라 아래로 볼록해져 가는것 같다. 책장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그럼 책장을 사면 되지 않냐고? 그렇지 그러면 되는거다. 그런데 이상하게 책장 사는데 드는 돈을 너무 아까워 한다. 그렇다고 돌아다니며 버린 물건 줍는 스타일도 아닌데... 이상하게 책장은 누가 버린게 있으면 주워오고 싶다. 아니 실제로 주워 온것도 있다. 

물론 나름대로 기준을 두고, 기준에 맞는 책장일때만 들고 온다. 오래되든 아니든 일단 외관상에 깨끗해 보이는것으로 주워온다. 쉽게말해 중고 가구점에서 팔만해 보이는 책장일때 들고오는 거다. 그럼 누가 버리겠느냐.. 희안하게 나는 그런 책장을 주워와서 깨끗이 닦아서 쓰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도 길을 다닐때 종종 쳐다 본다. 

부디 돈 많은 분들이 자주 버려주셨으면 하는 바램으로..


현재 책장이 모자란다. 그래서 읽어야 하는 책들은 그냥 한켠에 쌓아두고 있다.

그런데 하필 그녀석들이 책상 옆쪽으로 벽에 붙어 쌓여있다. 거기에 놓을 수 밖에 없어서 그랬는데 책상에 앉으면 그녀석들이 자꾸 쳐다 보면서 있다. 그리고 책상 위 책들의 반대편에는 컴퓨터가 있기도 하다. 책상에 앉으면 양쪽에서 유혹의 신호를 마구 보내는데 나는 매번 컴퓨터의 유혹에 더 잘 넘어가버린다. 컴퓨터를 끄고 책상에서 일어나면 책들이 나를 쳐다 보고있다는 사실에 뜨끔한다. 그래서 최근에 카페나 도서관을 자주 다녔다. 책들과 데이트를 하기 위해서.

한날 도서관에서 책을 보다가 좀이 쑤실때쯤 서가를 돌아다니면서 책을 구경하다가 이 책을 잡게 되었다. 저자의 책들을 꽤나 읽어본것 같은데 이 책은 눈에 익은 이름이긴 한데 읽은 기억이 나질 않는것도 같아서 펼쳤다. 

옮긴이의 표현에 의하면 '펭귄출판사가 창립 7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한 문인들의 책'이란다.

이 표현은 분명 본 기억이 있다. 시리즈로 또 내는것인가 싶어서 목차를 본다. 흠... 분명 이 내용들은 읽은 것 같다. 

저자의 책이 오래전에 나왔다 해도 나는 그리 오래전에 저자의 책을 읽지 않았기에 도서관내의 컴퓨터로 블로그에 접속해서 제목을 검색해 보았다. 그런데 책의 제목은 나오질 않지만 다른 이름의 책이 나온다. <동물원에 가기>이다. 

클릭을 해보니 목차가 같다. 근데 출판사와 출판연도가 다르다. 아... 그랬구나! 나는 이 책을 이미 읽어보았다. 내용은 같으나 제목이 다른 당연히 출판사가 다르고 아마도 옮긴이도 다를 것이다. 


한국에서 저자의 책이 얼마나 인기가 있기에 이렇게도 여러번 출판을 하는걸까 생각해 본다.

저자의 책 중에 이 책이 아닌 다른 책도 한 권 더 본 적이 있다. 

일전에 한번 내용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 <키스하기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란 제목과 <너를 사랑한다는 건>이다.

내가 아는 것은 이정도 이다. 또 다른 책들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출판사와 옮긴이 그리고 출판 연도가 다르기에 한글판의 표현이 조금씩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치만 나는 그 정도까지 내용을 보는 실력이 있지 않기에 똑같게만 보인다..표현 하나하나의 차이와 감정과 느낌을 알 수 있는 해안을 가져야지 알 수 있을 텐데....ㅎ


원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위의 동일한 저자의 다른 제목의 번역서라는 이야기인데, 왜 관련 없는 서론을 길게 뺐을까하는 의문이 나도 든다.

근데 이 책을 보게되면서 글을 올리려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글로 표현해 보았다. 

책을 검색해서 내용이나 감상을 보고자 하셨다면 죄송하다. 


사실 많지 않은 책장에 빼곡히 쌓아둔 책 중에 이런 책들이 몇 권 있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것 같다.

무슨 제목이든 책을 읽었다는게 중요한 것일 수도 있고, 어느 번역자의 책을 읽었는냐가 중요할 수도 있고, 언제 읽었느냐가 중요할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상황에서 읽었느냐가 중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 다빼고 그냥 없는 살림에 책장이 책들을 모두 품을 수 없는 상태의 나에게 동일한 내용의 책이 여러권있는게 어찌보면 부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슬픔이 주는 기쁨>과 <동물원에 가기>는 동일한 저자의 동일한 내용의 옮긴이와 출판사와 출판연도가 다른 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밑줄이 보고 싶으신 분은 <동물원에 가기> 제목을 클릭하시면 보실 수 있다.

좋은 하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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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하기전에우리가하는말들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알랭 드 보통 (생각의나무,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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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사랑한다는건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알랭 드 보통 (은행나무,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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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책인 <너를 사랑한다는 건>. 이 책은 원제가 <Kiss & Tell>이다.
그리고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말들>의 원제도 <Kiss & Tell>이다.
다시 말해 같은 저자의 동일한 책인데, 번역자가 달라서 한글 제목이 다를 뿐이다.
물론 내용을 보면 해석자의 개성에 따른 표현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맥락은 같다.
번역자의 번역능력을 판단할 정도의 능력은 되지 않기에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그러한 점은 빼고서, 내가 읽은 책은 <너를 사랑한다는건>이었다.
그리고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말들>을 손에 넣어 펼쳤는데 같은 내용임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표지를 보면 두 권 모두 분명하게 원제를 표현해 놓았는데도 확인하지 못하였다.
 
약간의 실망을 안고 한 권을 읽었으니 한 권은 일단 보류하자고 생각을 하였다.
어느책의 표현이 좋고를 떠나서 원 저자의 책을 좋아하는 편이기에 다시금 읽게 될 것이란 생각을 한다.

나처럼 다른 분들도 정보없이 책을 손에 넣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리 비교를 해보고 한 권만을 읽어도 되지 않을까..^^
이렇게 표현하면 읽지 않은 번역자에게 미안한 표현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한 권의 책에 한 명의 번역자만이 번역을 해야 하는것일까...개인적인 생각은 '그렇지 않다'이다.

고전을 검색해 보면 여러명의 번역자들의 책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조금 더 낳은 표현이 있고 조금 더 딱딱한 표현이 있다. 흐름을 더 잘 이어가는 번역자의 책이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좋다.
그리고 그렇게 분류하게 되면서 번역자들 스스로도 더 좋은 표현으로 원작에 버금가는 깔끔한 흐름과 원작자의 생각을 그대로 옮기게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이런경우에 원제를 그대로 옮겨 번역하게 되어 독자들이 비교해 볼 수 있게 되어있는데. 
위의 책들은 한글 제목이 다르니 직접 책을 펼쳐 보기 전에는 내용을 알기가 힘들다... 아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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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사랑일까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알랭 드 보통 (은행나무,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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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 기록 보기


저자의 3부작 소설이라 불리는 책의 두 번째이다.
이 책 역시 원제와 번역서의 제목은 다르다. 하지만 이 책은 잘 어울리기도 한다.
원제의 뜻을 내용에 맞춰 생각해 보면 '낭만적인 사람의 행동 또는 움직임'이라고 하면 좋을까..

번역자의 제목이 3부작 중에서는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이 든다.
나머지 두 책의 번역자와 이 책의 번역자는 다르다.
개인적으론 3부작 중에 이 책의 번역이 소설적인 성향이 강하게 가미되어 보기에는 좋았다.

원서를 보지 않았기에 누가 잘 번역했다는 말은 할 수 없지만(그런 능력도 안되지만), 이 책은 소설책같은 형식이었다. 다른 두 책은 소설형식을 지닌 에세이이다. 
실제 원제를 보면 에세이와 비밀폭로하는 제목이다. 

아무튼 이 책은 소설의 형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되면서 저자 특유의 지적인 면을 발휘하고 있다.
재밌게 빠져들고 생각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을까?
현재의 사랑은 마지막 사랑을 통해 나온다는 표현처럼 우리는 늘 사랑을 통해 배워나가고 더불어 벽을 높이 쌓아가며 자기 방어를 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영원히 통하기 어려운 존재일 뿐인지 아니면 대화와 타협으로 애정을 쌓아가는 존재인지는 개개인의 사랑에 대한 생각에 따라 다를 것이다.

책은 광고회사를 다니는 사회 초년생 앨리스가 파티에서 만난 에릭과의 관계를 통해 그들이 겪어가면서 길들여져가고 회피하기도 하고 배워가기도 하고 알아 가기도 하는 장면들을 보며, 우리도 경험했던 또는 경험할 만한 점들에 대해 공감할 수 있었다. 특히 저자는 남자와 여자의 심리상태와 인식 차이, 의사소통 방식의 차이, 성장 한경에 따른 문화의 차이등을 제 삼자의 방식으로 전개해 나가며, 저자 특유의 방식인 철학과 인용등을 통해 해설해 나가고 있다.
남자인 저자가 어찌 이리도 양쪽 성의 심리를 꾀뚫어 나갈 수 있는지 매우 놀라웠다. 그에더해서 여자의 심리적인 상태와 상황에 대한 마음을 깨달아가는 시간도 되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개인적인 경험들을 떠올리고 지금의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알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 또한 즐거운 시간이었다.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늘 느끼는 것은 상대를 인정해 나갈 수 있는 나의 역량을 돌아보는 것이다.
심리학자의 표현에 따르면 '남녀가 부부로 살아가면서 딱 맞는 부면은 많아도 14%에 그친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는 다른 구조이고, 다른 환경이고, 다른 가치관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생각하는 큰 부면 중에 하나는 상대를 인정해 나가는 것이다.
이게 말처럼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혼이란 단어는 매우 어색한 단어일 것이고, 이혼한 커플은 분명 뉴스의 사회면을 장식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너무너무 어려운 것이다. 
누구나 공감하리라 생각을 해본다.

과연 자신의 사랑은 어떠한 스타일인지 책을 통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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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사람들의 입에서는 대뜸 '몽상가'란 말이 나왔다.
앨리스는 '관계'라는, 의사 불소통의 우스운 연속을 익히 잘 알면서도, 인정할 수 없을 정도로 열정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살아왔다. 식품점 통로에서 이걸 살까 저걸 살까 망설일 때, 통근 열차에서 신문 부고 난을 훑어보는 순간, 청구서 봉투에 붗이려고 달착지근하면서도 쌉싸래한 우표에 침을 바를 때와 같은 뜻하지 않은 순간에 자신의 반쪽을 만나리라는 생각을 유치하지만 고집스럽게 잃지 않았다.  7
앨리스는 사랑을 실용적인 의미로 생각하기 싫었다.  8

세상의 현상[아기가 태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개구리가 알을 낳고, 화산이 분출하고, 정치가들이 거짓말하고]이 만드는 이질적인 거품과 직면해서, 철학자들은 실재하는 물질이냐 정신이냐 선택하도록 끝없이, 물론 매번 독특하게, 권유했다. 
탈레스의 경우 실재는 만물의 근원이며 물질의 기본 원소인 물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헤라클레잍스는 실재의 본질이 불에 있다고 했다. 플라톤은 이성에,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에, 홉스는 운동에, 헤겔은 정신의 진보에, 쇼펜하우어는 의지에, 보바리 부인은 사랑에, 마르크스는 해방을 향한 계급투쟁에...  18
앨리스는 실재에 대한 보바리 부인의 판단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오직 사랑할 때에만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선언할 수도 있었다.  19

남자가 시간과 공을 들여서 키스하는 것, 남자가 에로틱하고 대단히 섬세하게 입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을 앨리스는 높이 평가했다.  25
행복에 이르는 길에는 갈등이 많다. 계급 차이와 나이 차를 뛰어넘어야 하고, 여자의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은 이들 사이를 반대한다.  40

그 남자의 매력에는 위기도 비켜 가는 듯 보였다. 전형적으로 유혹적인 이탈리아 남자처럼 굴었다. 그 남자는 욕망을 숨기지 않았고, 거절당할 가능성이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서투르고 모호하게 사랑을 속삭이느라 평생을 허비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조용히 자살하고 마는, 창백한 북구 남자들[베르테르 같은]의 접근 방식과는 대조되는 현란함이었다.
하지만 에릭이 자신의 의도를 인정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그 효과도 알 것이었다.
"좋아요,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요."
그 남자가 선수를 쳤다.
"지금 이 시간을 즐기며 웃음을 터뜨리지만. 나를 믿어도 될지 몰라서 신경이 쓰이지요? 당신은 이렇게 생각해요. '이 남자가 진짜 괜찮은 거야, 아님 형편없는 자식이야? 몽땅 다 농담이야, 아님 진지한 구석이 있는거야?' 어떻게 대응할지 모르겠죠. 다 농담이라면 상관할 바 없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장난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죠. 유혹하는 남자를 믿느냐 마느냐는 여성들의 영원한 고민이지요. 남자를 믿지 못한 채 좋아할 수도 있지만, 또 상처받는 것은 피하고 싶을 테구요."  60

"당신은 아마 나 같은 사람은 몹시 의심하겠지요."
에릭이 말했다.
"어째서죠?"
"지금껏 상처를 받았으니까."
"꼭 그렇지도 않아요."
"그랬을 걸요. 당신이 고민을 가볍게 치부하는 것뿐이죠. 아무도 당신의 상처를 진지하게 받아주지 않아서 그랬을 거예요. 당신은 다른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많이 느끼고, 깊게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보호막을 만들어야 했을 테구요. 그러느라 힘이 많이 들지요. 잔뜩 긴장하고 있기 때문에 어깨를 그렇게 움츠리고 있는 거예요."  61
점성술이나 그 밖에 개인의 운명을 예언하는 방법들이 오래전부터 인기 있었던 것을 보면, 이해받고픈 욕구가 사람을 과연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덮어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군가 자기를 알아준다고 믿고 싶어하고, 자신에 대한 권위적인 설명을 들으면 녹아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62

타인과 사랑을 나누는 일은 어찌 보면 과거에 같이 잔 사람들의 습관이나 기억과 충돌하는 것이다. 사랑을 나누는 방식에는 우리의 성생할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키스는 과거에 했던 키스들의 종합형이고, 침실에서 하는 행위에는 과거 거쳤던 침실의 흔적이 넘쳐난다.  65
순전히 기술적인 관점에서는 성생활의 역사가 있는 편이 바람직하겠지만, 심리적으로 그것은 복잡 미묘한 영향을 미쳤다. 성생활 역사가 있다는 것은 여러 사람과 성행위를 했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잠자리를 같이한 사람을 차거나 그 사람에게 채였다는 뜻이었다. 좀 어두운 면에서 보자면 섹스 기교의 역사는 실망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66

사랑하는 것일 리가 없다면, 그녀는 아마 사랑을 사랑한 것이다.
이 동어 반복적인 묘한 감정은 무엇인가? 이것은 거울에 비친 사랑이다. 감정을 자아내는 애정의 대상보다는 감정적인 열정에서 더 많은 쾌감을 도출하는 것을 뜻한다.
사랑을 사랑하는 연인은 단순히 X가 멋지다고 여기지 않고, 'X처럼 멋진 사람을 찾아냈다니 대단하지 않아?' 하는 생각을 먼저 한다. 에릭이 배터시 다리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고 구두끈을 맬 때, 앨리스는 '구두끈을 매는 모습이 귀엽잖아?'라는 생각과 함께 '이렇게 귀엽게 구두끈을 매는 사람을 찾아내다니 이게 꿈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했다.  74


1856년,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르뷔 드 파리(Revue de Paris)>에 <보바리 부인>을 연재하면서 세계 최초로 '섹스와 쇼핑 소설' 작가라는 이름을 얻었다. 적어도 <보바리 부인>이 섹스와 쇼핑이라는 두 가지 활동을 명확하고 심리학적으로 결합해서 그린 첫 번째 소설임은 분명하다. 당시의 대중은 에마의 간통에 충격을 받았지만, 그녀의 몰락은 유행하는 의상을 구입하는 데 중독되어 큰 빚을 진 것과 관계가 깊다. 보바리 부인에게 돈을 쓰는 일은 덧문 달린 마차를 탈 때와 같은 위험이 깔린 선정적인 행위였고, 똑같은 쾌감을 주는 일이었다.
플로베르는 섹스와 쇼핑을 인정했을까? '보바리는 바로 나'라고 한 그의 말은 낭만적인 기질에 대한 공감뿐 아니라 소비의 유혹에 대한 깊은 이해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을까? 
산업 자본주의가 진행되던 바로 그 시기에, 보바리 부인이 상업적이고 성적인 오르가슴 때문에 파멸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는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이 칭하는 소비 혁명이 등장하던 때였고, 19세기의 청교도주의가 여성의 자유를 향한 진보적 발전을 방해하던 때였다. 이 소설에 대한 판금 조치는 단순히 성뿐 아니라 쇼핑을 근본적으로 억압하려는 도덕주의적인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이윽고 출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성교를 반대하는 주장은 종교적인 위력을 잃기 시작했고, 필요 없는 소비에 반대하는 주장은 한층 열기를 띠었다. [<보바리 부인>이 발표된 지 겨우 11년 후인 1867년에 마르크스의 <자본>이 나왔다.] 필요 없는 쇼핑에 대한 도덕적인 공격과 출산 없는 성교에 대한 도덕적인 공격 사이에는 뚜렷한 연관이 있다. - 두 가지 다 쾌락을 검열당해왔으며, 특히 모자르 쓰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남자들이 여성의 쾌감을 겸열했다.  100-101
앨리스의 욕망을 끌어내는 견인차는 매달 보는 수많은 잡지인 듯했다. 
그녀는 "잡지 속으로 사라지고 싶다."는 농담을 자주 하여, '자신의 세계가 잡지화'하기를 바라는, 가치 전도된 소망을 표명했다.  101
잡지는 앨리스를 불행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녀는 의상 난을 보면 자신의 옷장에는 없는 옷 때문에 서글펐고, 여가 난을 보면 자신이 가보지 못한 세계 곳곳의 햇살 눈부신 장소들이 떠올랐다.  102
그녀는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확신하지 못했고, 자연히 외부에서 실마리를 찾으려 햇다. 카디건을 사려고 한 것은 혼란스러운 자신을 기왕에 존재하는 스타일에 맞추려 한 시도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제공하는 상(像)에 자기 자신을 맞추려 했다. 그것은 고상하고돈이 많이 드는 흉내 내기였고, 잠재적으로 무한한 특성을 몇 가지 핵심 사조로 축소하는 일이었다. 그러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행태에 안주할 수 있었으니까.  104

그녀의 자신감은 늘 확인을 받아야만 자라는. 불안전한 구조였다-원하는 걸 얻거나, 누군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 자신과 타인에 대한 믿음을 쌓을 수 있었다.  114
"아니면 중국 음식을 먹고 싶어요? 물론 카레도 먹을 수 있어요. 어떡할래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겠지만, 그녀는 문득 에릭에게 "나 좀 안아줘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피자나 카레, 국수는 그만두고 [매우 이성적이지 않지만] '슬퍼서'라거나 하는 이유를 설명할 필요 없이 그냥 울고 싶었다. 허약해진 기분이 엄습해서, 세상의 요구에 적절한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무너질 수 있는 공간을 바랐다. 다시 마음을 수습할 때까지 누군가의 품에 조용히 안기고 싶었다.
"어. 저기 있죠, 못 먹겠어요. 아무것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아무 말 안 해도, 그 남자가 바라보면서 "그래요, 알아요."라고 속삭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115

에릭이 동양에 대해 말할 때 입에 올리는 단어가 가벼움, 질서, 정연함, 깔끔함, 여백들이었다.
"세상은 너무 번잡하고 복잡해요. 내가 동양의 미학을 좋아하는 것은 그 여백, 그리고 일종의 합리성 때문 같아요. 어지러운 사무실에서 집에 돌아오면 오아시스에 있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아파트를 그렇게 꾸몄어요..."  121


그 남자는 삶을 기능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인생도 아파트처럼 잘 배열되기를 바랐다- 사교 생활, 재정 문제, 연애와 섹스가 모두 조화롭고 합리적이기를 원했다.
그 남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잘 정돈된 상태인 것 같지만, 사실 남보다 더 무질서를 두려워하고 의식한다고 볼 수 있었다.  123
그녀는 실내 장식에 대해 기능보다는 감정을 주요시했기에, 물건의 가치도 얼마나 제 기능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기억이 담겨 있느냐로 판단했다. 
하트 모양 쿠션은 부모가 이혼하기 전 마지막으로 가족 여행을 갔을 때 아버지에게서 받은 선물이었다. 그때의 이탈리아 여행을 앨리스는 정겨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127
에릭은 여러 면에서 어른스러웠지만, 아이들이 부모에게 기대하는 것-곧 완전무결함-을 타인이게 기대한다는 점에서는 이상하게 어린아이 같았다. 그 남자는 자기 능력으로 타인의 약점을 보완해주지 못했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식의 잘못을 용서하는 부모와 같은 태도를 취할 줄 몰랐다.  130
에릭은 강화 숲에서 벌거벗은 채 뛰노는 것을 좋아할지는 몰라도, 감정의 벌거숭이가 되는 상황에서는 매우 다급하게 상징적인 '가운'을 찾아 헤맸다. 
자아는 육체에 갇혀 있으므로, 감정의 수줍음을 알아보고 옷을 벗기는데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감정을 잘 벗지 못하는 살마은 옷을 잘 벗지 못하는 사람만큼 많지만.  135
우리는 건축가들을 낭만파와 지성파로 나눌 수 있다. 지성파 건축가는 건물의 무게를 여러 기둥[많을수록 좋다]에 분산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삼아, 사고가 나더라도 다른 기둥들이 무너진 기둥의 몫을 나누어 지도록 한다.


그 남자에게는 개입하기를 꺼리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느끼는 게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가 함께 무엇을 하고 있나?' '다음 주말에 우리는 무엇을 할까?' 라고 자문하고 관계 속의 자기 위치를 받아들이는 것을 망설였다.  138
그 남자는 앨리스의 관심을 끌고 싶을 때는 감기나 독감에 걸렸다거나 등이 아파 죽겠다고 말했다. 이런 행동 뒤에 있을지 모르는 진짜 아픔을 인정하기보다는 그쪽이 편했다.  140
경제의 세계에서는 빚이 나쁜 것이지만, 우정과 사랑의 세계는 괴팍하게도 잘 관리한 빚에 의지한다. 재무 정책으로는 우수한 것이 사랑의 정책으로서는 나쁠 수가 있다-사랑이란 일부분은 빋을 지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뭔가를 빚지는 데 따른 불확실성을 견디고, 상대를 믿고 언제 어떻게 빚을 갚도록 명할 수 있는 권한을 넘겨주는 일이다.  143-144

"만난 지 얼마나 됐는데?"
"이런 세상에, 벌써 몇 달이나 되었네. 6개월쯤 됐나봐."
"섹시해?"
"응, 그런 것 같아."
"어떤 사람이야?"
"어떤 사람이냐고?"
"그래, 알잖아."
"사실은 모르겠어."
"모르다니 무슨 말이야? 너 그남자랑 사귀잖아."
"글쎄, 그이는 .....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그 사람은 ..... 그 사람은 좀 이상해."
앨리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예상치 않게 이상하다는 말이 흘러나온 데에 웃음을 터뜨렸다.  145-146
에릭은 내놓고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을 나폴레옹처럼 생각하지도 않았고, 샤워 캡을 쓰고 잠자리에 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행동에 왠지 묘한 구석이 있어서, 앨리스는 그 남자의 반응을 예상할 수가 없었다.
타인을 상대할 때, 대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상대의 반응을 예상하고 행동한다. 
'내가 X라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이 사람은 Y라는 반응을 보이겠지'라는 전제하에 움직이는 행동의 틀이다. 이 틀이 웬만큼 복잡한 상황까지 아우를 수있을 만큼 풍성해지면, 우리는 누군가를 안다고 다소 가설적인 주장을 할 수 있게 된다.  146
그녀는 줄곧 그 남자의 특성을 지도로 그렸고, 그 남자의 성격에 지각 변동이 일어날 때마다 그려온 지도들을 재검토해야 했다. 그녀가 이런 혼란상을 최선의 경우로 해석하려고 애쓰는 의지 내지 힘이 바로 사랑의 증거였다.  151
그 남자는 멀리서는 잘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백만 개나 되는 파편으로 나뉘어 있었다.  154

어떤 사람이 비서한테는 친절하지만 배우자에게는 야수처럼 굴 수 있고, 수학은 잘하지만 감정 처리에는 무능하며, 수플레는 잘 만들지만 양고기에는 젬병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야생동물 보호 모임에 가입하여 사회적인 책임감을 덜면서도, 히틀러가 어린이와 동물을 사랑했다는 말은 듣기 싫어한다. <백설공주>를 보면서 우는 자신을 감수성이 예민하다고 여기지만, 독재자 이디 아민이 그 영화를 제일 좋아했다는 말은 싫다. 독일 문학을 좋아하면서도, 연합군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해방하러 들어갔을 때 독일 친위대 장교들의 소지품에 괴테의 책들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편치 않다. 단지 <시와 진실>에 나오는 구절에 감명 받았다는 이유로자신은 대량 학살범이 될 잠재성을 벗어버렸다고 생각하는 편이 유쾌하지 않은가?  155-156
'에릭이 진짜 성미 고약한 자식이라면, 자기 입으로 그렇다고 말하겠어?' 그녀는, 자기 결점을 아는 것은 그 결점이 없는 것과 같다고 믿는 오류를 범했다. '진짜 나쁜 사람이라면 자기가 나쁜 사람인 줄 모를 거야. 에릭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면 정말 그런 사람일 리가 없잖아?'
남들이 싫어할 만한 점을 어느정도 자각하기 때문에 쉽게 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비판함으로써 외부의 공격을 대부분 피할 줄 안다.  160
러시아 심리학자 파블로프 반응하도록 훈련하던 신호에 충분한 혼란을 주면 개가 몸을 떨고 대소변을 보면서 신경증 상태에 빠질 수 있음을 밝혔다. 종을 울리고 먹이를 주다가 갑자기 종을 울리고 빈 접시를 주면, 개는 몇 번 같은 경험을 한 끝에 빈 접시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종이 울리고 나서 때로는 먹이가 나오고 때로는 안 나오는 식으로 불규칙하게 진행되면, 개는 이제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알 수 없게 되고, 음식과 빈 접시의 연관선을 파악할 수 없어 혼란에 빠진다. 개는 천천히 관견 상태에 빠져들었다.  161

사랑의 영속성 시나리오는 현수교에 비유할 수도 있다. 다릿 기둥은 사랑의 확인을 상징하고, 냉잠한 기간은 기둥 사이에 몇 미터씩 늘어진 케이블이다. 머리에 하는 키스, 애정 어린 눈길은 다릿기둥이고, 말 없는 식사, 응답 없는 전화는 기둥 사이의 케이블이다. 
사람마다 확인이 필요한 정도가 다르고, 따라서 애인 관계에 개입된 케이블의 길이도 각각 다르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167


케이블이 얼마나 길게 늘어질 수 있느냐는, 애인의 성격과 내력에 좌우될 터이다. 자기가 사랑스럽게 타고났다고 생각하면 확인이 필요하지 않을 테고, 상대의 기둥 없이도 케이블을 수백미터 늘어뜨릴 수 있다. 나는 나를 사랑해가 부족함을 벌충하므로 당신을 사랑해란 말이 덜 필요하다. 당신이 왜 날 사랑하지 않겠어?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의 기본 태도다. 내가 나한테 느끼는 감정을 당신이라고 못 느끼겠어?
하지만 앨리스의 경우, 기둥이 훨씬 촘촘히 박혀야 했다. 그녀의 기본 감정은 항상 '당신이 어떻게 날 사랑할 수 있겠어?'였기 때문이다.  168

사랑의 권력은 아무것도 주지 않을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176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도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다.  177

에릭은 책을 많이 읽긴 하지만, 그 동기가 호기심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남자는 세상사를 알고자 함이 아니라, 세상사와 부대끼는 것을 피하고자 책을 읽었으니까, 그 남자는 겁이 나면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과 관계된 책은 외면하는 식으로, 현실과 맥이 닿는 것을 피했다.  242
책은 피와 살이 있는 사람처럼 직접 말을 걸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말을 걸어주는' 듯한 책에 익숙하다.  243

흔히 아픔과 고민이 생각을 하게 만든다고 한다. 예컨대 우리는 탁자 다리에 발가락을 찧으면 비로소 발가락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발가락이든 더 큰일이든 문제가 생기거나 아플 때에만 따로 생각하게 된다. 심리 과정을 그려보면 이렇다.


쉽게 말하면 앞의 것은 지성인의 주장이고, 뒤의 것은 자연주의자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햄릿은 문제가 생겼기에 그렇게 생각이 많았는가? 아니면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문제가 생겼는가?
지성인들은 햄릿의 생각이 문제를 일으킨 게 아니라 문제에 생각이 비롯되었다고 대답할 터이다.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책이라는 맹신-'생각이 모든 것을 위로한다'는 샹포르의 금언에 대한 믿음-을 두러내는 주장이다.
한편 자연주의자라면, 생각은 문제를 해결할 방책인 체하지만 실은 그것이 바로 문제를 일으키는 질병이라고 볼 터이다. 생각은 심리적인 우울증의 한 형태였다-햄릿은 고통스럽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고통을 느꼈다. 자연주의자라면 그에게 정신 활동을 극소화해야만, 이성이 망가뜨린 자연스런 단숨함과 편안함을 되찾을 수 있다고 충고할 터였다.  267-268
에릭의 정서적 자연주의는 상식주의의 일종으로 낮춰 볼 수도 있다. 그것은 단순함을 지혜의 핵심으로, 진리는 '당연하기에' 분석할 수 없는 것으로 축소하는 경향이다. '삽을 삽이라고 한다'는 기치하에 상식주의자들은 정원용 연장 전체를 삽이라고 불렀다. 그것들을 다 구별하려면 품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간단명료화'라는 이름을 단 축소화였다. 
왜 전쟁이 일어나고, 왜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거나 빠져나오는지, 왜 그렇게 복잡한 일들이 매일 되풀이되는지 물으면, 상식주의자들은 단순히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기 땜누이라고 답할 것이다. 상식주의에서는 복잡성이 아니라 과도한 단순함과 순전한 명백함을 바탕으로, '사유 너머'의 영역을 표시한다. 에릭은 앨리스와 대화하고 싶지 않으면, 둘 사이의 문제가 너무 복잡해서가 아니라 너무 뻔한 일이라서 숨 돌릴 가치도 없다고 자신에게 둘러댔다. 
눈에 보이게 굶주리고, 집이 없거나 한쪽 다리를 잃은 게 아니라면, 다른 고민은 본인이 지어낸 것이며 따라서 따지고 들 가치가 없다는 게 인간 심리에 대한 그 남자의 관점이었다. 바베이도스에 도착한 다음 날, 앨리스가 읽는 책을 가리켜 그 남자가 '자기관찰을 빙자한 제멋대로 개똥철학'이라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들이 휴가 중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묘한 것은, 에릭이 그녀의 독서 취향을 비난한 까닭은 잘난 척하는 문체와 단순하기 짝이 없는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책이 지나친 쾌락, 용납할 수 없는 쾌락의 일종으로서 다양한 자아도취를 유도하기 대문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스쿠버 다이빙니나 피냐 콜라다를 마시는 일은 제멋대로인 자기 관찰과 관계가 없을까? 그것은 자아도취적으로 자신을 즐기는 일이고, 자위행위[늘 떳떳하지 못한 성교의 사촌뻘]의 한 형태이고, 자신에 대한 종교적인 경멸을 고대로부터 내포하고 있었다[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을 구분하면서, 두 가지 사랑이 두 도시를 만들엇다고 주장했다. '자기에 대한 사랑으로 신을 경멸하는 것은 지상의 도시, 신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경멸하는 것은 천상의 도시.'-자아도취가 결여된 '나는 가증스럽다'라는 문구를 쓰면서 파스칼이 차용한 주제].  270-271

여자들은 까탈을 부리도록 타고났다는 오랜 통념에 근거하여, 여자가 까탈을 부리는 원인을 제공하는 남자들은 면죄부를 얻었다.  274

여행은 흥미롭게도 지리적이라기보다 심리적인 활동으로 읽을 수 있다-외적인 여정은 내적으로 욕망하는 여정의 은유다. 네팔에서 히말라야를 오르고, 카리브 해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고, 로키 산맥에서 스키를 타고, 오스츠레일리아에서 파도타기하고, 이러한 것들은 이국적이고 유익하지만, 훨씬 심오한 동기를 가리는 시시한 변명에 불과하다. 그 동기란 여행을 예약하는 자신이 이런 활동을 즐기는,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다. 여행사는 비행기 표와 호텔 방 예약, 보험 가입 같은 사소한 일을 처리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드르이 기본 업무는 여행 상품을 사면 기적처럼 자신을 남겨두고 떠나게 되리라는 미묘한 환상에 근거한다. '나'가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 여행이 '나'를 바꿔주리라는 생각이다.  288-289

리넨 드레스를 산 일이나 카리브 해에서 휴가를 보내는 일이나, 앨리스는 고전적인 소비의 덫에 걸린 것이었다.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는 행위에 무의식적으로 깔린 목적은 단순히 그것을 가지는 게 아니라,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스스로 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녀가 어렵게 번 80파운드를 드레스와 수영복에 쏟아 부으면서 원했던 것은 꼴같잖게 비싼 옷이 아니었다. 냉소적이고 재능 없는 디자이너가 만들고 패션 잡지가 과대 선전해준 옷이 아니라, 손에 잡히지 않는, 그걸 입은 사람의 존재였다 - 우스운 소리로 들리겠지만, 그녀가 원했던 것은 모델이 입은 옷이 아니라 모델 자체였다.  292-293
그리스어로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뜻이다.  293

누구와 사귈 때, 사람만 달랑 올 수가 없다 -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문화가 따라오고, 관계를 맺은 사람들과 관습이 따라온다. 특정한 지역성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가 함께 온다. 이러한 성향은 민족성으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계층과 지역과집안의 특성이 뒤섞여 구성된다. 본인은 이 무의식적인 요소들의 집합을 정상 상태로 여긴ㄷ. 그가 보는 번화가나 우체국 창구의 정상적인 풍경, 정상적인 저녁 뉴스와 세금 환급 신청서 양식, 친구와 인사하고 침구를 펴고 버터 빵을 먹고 집안을 청소하고 가구를 고르고 음식을 주문하고 차 안에 카세트를 배열하고 화장실을 사용하고 여행지를 결정하고 전화를 끊고 토요일 계획을 짜는 정상적인 방식들.  298

비트겐슈타인(오스트리아 태생인 영국 철학자)의 주장을 빌리면, 타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 우리는 상대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그들이 우리의 농담을 이해하면 우리는 재미난 사람이 되고, 그들의 지성에 의해 우리는 지성 잇는 사람이 된다. 그드르이 너그러움이 우리를 너그럽게 하고, 그들의 모순이 우리를 모순되게 한다. 개성이란 읽는 이와 쓰는 이 양쪽이 다 필요한 언어와 같다.  318
관계의 기반은 상대방의 특성이 아니라, 그런 특성이 우리의 자아상에 미치는 영향에 있다-우리에게 적당한 자아상을 반사 해주는 상대방의 능력에 기초해서. 에릭은 앨리스에게 어떻게 느끼게 하는가? 어떻게 그것을 알려주는가? 모든 게 머릿속 생각일 뿐인지 실제로도 그런지 모르지만, 그녀는 오래전부터 그 남자와 있으면 가치 없는 사람이 된 기분을 느꼈다. 그 남자와 함께 있는 앨리스는 돈을 함부로 쓰고, 지성적이지 않고, 감정적인 데 매달리고, 타인을 귀찮게 하는 의타심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었다.  319

"많은 사람이 단지 혼자 있기 두려워서 결혼하는 것 같아요."  323
대화의 흐름을 나무의 형태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서 가지가 매우 다르게 뻗어갈 수 있다.  325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라메트리(1709~1751)가 1748년 자서 <인간기계론>을 출판하자 교육받은 대중은 분노했다. 라메트리는 인간은 실제로는 복잡한 기계일 뿐이라고 야만스럽게 [당시는 아직 종교적인 시대였으니] 주장했다. 출입문, 배수로, 톱니, 도관, 원자 등드의 집합체 이상 아니라는 것이었다-파충류나 아메바, 항해용 정밀시계가 그렇듯이.
'인간은 기계이며, 전 우주는 다양하게 변형되는 단 한 가지 재료로 되어 있다.'라고 라메트리는 주장했다. 물론 이 재료는 초라한 물질이다. 이것은 이원론에 대한 도전이었다. 인간은 물체와 영호으로 구성된다는 이원론은 플라톤 이후 별다른 이견없이 군림해왔다. 어느 부분이 더 중요한지는 명백했다. 인간에게 생명과 존엄성을 부여하는 것은 영혼이었다. 영혼이 없다면 인간은 단순한 기계가 되어, 주주 총회에서 치명적인 심장 발작을 일으킬 경우 영원한 죽음을 맞을 터였다. 
그러면 이 영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1969년 처음으로 인간을 태우고 달에 착륙한 로켓의 꼭대기에 달린 우주선과 같았다. 우주선은 거대한 아폴로 2호의 세 부분 중 한 부분에 불과했다. 아폴로의 총 길이는 111미터였지만, 8일간의 임무 수행을 마치고 우주 비행사들이 귀환했을 때는 로켓의 꼭대기 부부느 곧 높이가 3미터 조금 넘는, 작은 원뿔만 가지고 왔다. 나머지 부분은 우주 비행사들을 궤도로 쏘아 올리는 기능을 했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활동성이 있는 부분은 거기 탄 우주 비행사들이 간신히 서 있을 정도 크기밖에 안 된 궤도선이었다.


영혼 이론가들은 마찬가지로, 인간 존재란 크지만 쓸모없는 몸과 작지만 비할 데 없이 귀한 영혼으로 나뉜다고 보았다. 몸은 로켓과 같아서, 영혼을 움직이게 하고 잡곡 빵과 더블 치즈버거를 소비함으로써 발사됐다. 몸이 매우 인상적인 경우도 있지만[그래도 키가 111미터나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결국에는 지상에서 소명을 수행하는 데에 불필요한 요소가 됐다. 수십년 인생 여행을 한 끝에는 작은 영혼-우주선만 남을 테니까. 영혼은 초강력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철학자들 대부분은 인간이 영원한 로켓-육체로 나뉜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 가치 있는 우주선에 누가 혹은 무엇이 앉아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우주선에 있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일 테지만, 그건 정확히 무엇으로 구성 될까?
프라톤은 이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여 철학의 새 장을 열고, 영혼을 이상적인 우주선으로 보는 선례를 남겼다. 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우주선을 신에게 속ㅇ한 것, 천국을 열망하는 것으로 보았다-이것은 그 후 몇 개기 동안 우주 비행사들과 민간인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관점이었다. 하지만 계몽주의가 나타나면서 신의 영향력이 줄어들자, 신학적인 면에서 영혼의 역할 역시 변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영혼인데 신은 이제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면, 영혼은 무엇에 바쳐져야 하나?
물론 영혼-우주선에 걔속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믿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과학자들과 라메트리처럼 콧대 높은 철학자들은 유물론자로서 충성심을 발휘해, 영혼에 대한 논의를 격하하기로 불퉁스럽게 합의했다. 영혼-우주선을 채우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신비주의 사상가들과 순진한 시인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그들은 곧 영혼-우주선에 감정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영혼은 인간이면 당연히 갖고 있는 것이었지만 이제 사람에 따라 더 많이, 더 적게 갖는 것이 되었다-얼마나 느끼느냐에 따라서. 오페라 공연 중에 코를 풀고 트림을 하며 시를 멸시하는 천박한 사람들은 '영혼이 없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예전에는 가장 비찬한 얼간이만 듣던 말이었다. '영혼이 없는 사람'이란 미술, 문학, 음악 같은 분야에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을 의미했다. 이는 극작가 존 드라이든[1631-1700]이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현대와 고대를 망라해서 그는 가장 크고 이해심 깊은 영혼을 지닌 시인이었다.'라고 쓴 까닭을 설명해준다. 키츠에 따르면 영혼에는 나름의 자양분[여기서는 더블 치즈버거를 말하는 게 아니다]이 있다. 그 자신과 출판사에게 편리하게도 이것은 시의 형식을 타고 왔다. '시는 위대하고 겸손하여라, 인간의 영혼으로 들어가는 것....'
성적(性的)으로 보면, 영혼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이 몸-로켓 때문에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로 보이게 되었다-침실에서는 그 두가지가 똑같이 한숨으로 마무리 지을지 모르지만, 매릴린 먼로(1926-1962)는 영화 산업의 도덕적 붕괴를 보여주고자, 영혼에 대한 계몽주의 이후의 견해를 천명하며 이런 말을 했다. 할리우드는 '당신의 키스에 천 달러를 내고, 당신의 영혼을 위해서는 50센트를 내는 곳입니다.'  328-332
낭만주의 시대에 영혼의 개념이 감정과 연결되었다면, 감정은 곧 쾌감보다는 아픈 감정으로 통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강렬한 경험이라 하면, 행복해서 샤워를 하면서 휘파람을 불거나 정원에서 노래하는 것을 뜻하지 않았다-영혼을 가진다는 것은 곧 고통을 감수하는 것을 의미했다.  335
미국인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1863-1952)는, 아픔을 통해서만 영혼이 성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혼 역시 처녀성이 있어, 피를 흘려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시릴 코널리는 고통을 겪는 것이 작품 탄생의 필요조건 [영웅적으로 정복할 수 있는 장애물이 아니라]만 아니었으면 보들레르나 랭보가 되고 싶었을 거라고 말했다. 예술가들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이를 이겨내고 창작하는게 아니라, 바로 고통을 겪기 때문에 창작한다는 가설이었다.  336


옮기고나서
사랑은 소설이란 장르가 시작될 때부터 소설의 제재나 주제가 되었다. 공상 과학 소설이나 스릴러 소설까지도 모든 이야기에는 등장인물들이 있고, 사람들이 있으면 이런저런 감정이 얽히며 관계가 형성되고, 거기서 사랑과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세상의 작가들은 사랑의 여러 면을 다양한 내용과 형식을 통해서 보여주지만, 알랭 드 보통처럼 독특한 태도로 사랑이란 주제에 접근하는 작가는 드물 듯하다.  405
작가는 제삼자의 관점에서 남자와 여자의 인식 차이, 의사소통 방식의 차이, 개인의 성장 배경에 따른 문화의 차이 등을 때로 철학이론 등을 동원하며 특유의 재치와 유머를 담아 펼친다.  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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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된다면 삶은 갑자기 놀라운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은 계획, 여행, 연애, 연구거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미래에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러한 일들을 끝없이 미루는 우리의 게으름은 이것들을 숨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루기를 영원히 불가능하게 하는 위협이 생기면, 삶은 다시 얼마나 아름다워질 까요... 대 재난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느것도 하지 않을 테지요... 거기서는 무관심이 소망을 죽입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뇌는 일 만권의 책의 모든 글자를 빠짐없이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평생에 우리의 뇌의 3%도 쓰지 못하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수치로 단순하게 계산을 한다면 일 만권의 3%는 300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에 300권에 달하는 내용을 모두 기억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엄청난 양입니다. 핵심은 빠짐없이 300권의 글자를 모두 기억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라면 우리가 망각한다는 것이 아이러니일 수 있습니다.

위의 인용글에서는 '무관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단어에 맞추어 생각해 보면 3%만 쓰는 뇌는 300권의 모든 글자를 기억할 수 있을 정도인데, 관심을 끊음으로 아니 가지지 않음으로 우리는 더 작은 일부만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무관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은 관심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고 합니다. 아니 모든 동물은 관심을 받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사람은 단연 으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관심 속에서 사라져간 사람들을 종종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되기도 합니다. 또한 어린시절 부모의 관심을 받고 자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성인이 되었을때 자존감과 자신감을 비교해 보면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동물 뿐만이 아니라 식물들도 인간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 시들시들해져 가면서 결국은 죽게 된다고 합니다.
단순히 물만 주는 꽃과 관심을 가져주는 꽃은 피는 꽃의 양과 크기와 빛깔이 틀리다고 합니다.
이토록 '관심'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큰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관심을 받고 싶어하면서 정작 우리는 자신의 삶에 무관심한 태도를 나타낸다는 것은, 스스로가 죽이는 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 않는것은 가장 큰 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인가 큰 일이 벌어져야만 우리는 우리를 돌아 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큰 일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명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이후의 생활에서 아름다움과 풍성한 생활을 가질 수 있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큰 일 이라는 것이 생명에 영향을 미친다면, 이후의 삶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력없는 사람이 도박꾼들과 함께 도박을 하는 경우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대체로 도박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걸고 도박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아이러니 일까요...??

경영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염두에 두는 것은 미래입니다. 급변하는 시대에 회사가 앞으로 지향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지에 대해 24시간을 모두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앞으로 무엇이 올지 모르기에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미래를 예측하고 예측하고 또 예측하면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초점을 흐리지 않는 기능이 쉬지않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경영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시류에 쓸려 사라져가는 회사와 다를 바 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망각은 인간의 기능 중의 하나이지만, 그렇다고 망각을 꼭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망각하려는 기능을 조금이라도 줄여나간다면, 망각해도 되는것은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망각해서는 안되는 것을 망각하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더 잡는다면 우리의 생활은 분명히 달라 질 것입니다.


'행복할때 무지한 것은 아마도 그저 정상적인 일일 것이다.'

과연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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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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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150페이지도 안되는 내용이었다.
제목만으로는 저자의 동물원 탐방기라고 생각을 하였다. 과연 동물원에서 그는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을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책을 읽어가면서 제목과는 좀 떨어진 내용이라는 점을 알게 되고, 이 책 이전에 저자의 책을 읽은 내용들이 꽤나 나오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그래서 옮긴이의 글을 먼저 읽어 보았다.

'이 책은 펭귄 출판사가 창립 7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한 문인들 70명의 작품 선집들 가운데 한 권이다. 드 보통은 70번째라는 상징적인 자리를 차지하며 이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 보통이 쓴 글들 가운데 그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대목들을 추려내 독립적으로 완결성을 가질 수 있도록 손을 보고 보완한 것들이다...'(142-143)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그의 글 중에서 추려낸 글들이기에 낯이 익은 글들이 많았다. 저자의 책을 모두 읽은 것은 아니지만 여러권을 읽으면서 보았던 내용들이 많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책의 내용들이 많이 언급되니 저자와 다시금 가까워져 가는 것 같다.
옮긴이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저자의 입구같은 역할을 할것이라 한것이다.
나의 경우는 반대가 되었지만, 꽤나 의미있는 내용들을 담고 있기에 복습을 하는듯 그리고 다시금 읽어보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저자의 책에서 좀 멀어지는것이 필요할까하는 생각 즉, 저자의 글쓰는 방식에 지루해져가는 시점에 읽은 내용들을 다시금 상기하게 되니 지루함도 어느정도는 멀어져 가는 느낌도 든다.
저자의 모든 책을 읽을 생각은 아니지만 몇 권 더 읽을 수 있게 될 것같다.


슬픔이 주는 기쁨
삶의 단편들을 놓고 흐느껴봐야 무슨 소용 있겠어? 온 삶이 눈물을 요구하는걸 - 세네카
어쩌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 벽에 걸어야 할 것은 쓸쓸한 도로변 휴게소 그림인지도 모른다.  10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김하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은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어 술술 풀려나가곤 한다. 정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생각뿐일 때는 제대로 그 일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마치 남의 요구에 따라 농담을 하거나 다른 사람 말투를 휸내 내야 할 때처럼 몸이 굳어버린다. 그러나 정신의 일부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외려 생각도 쉬워진다. 예를 들어 음악을 듣고 있을 때나, 줄지어 늘어선 나무들을 눈으로 좇을 때. 우리 정신에는 신경증적이고, 검열관은 기억이나 갈망이나 내성적이고 독창적인 관념들을 두려워하고 행정적이고 비인격적인 것들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음악이나 풍경은 이 정신의 검열관이 잠시 한눈을 팔게 하는 것 같다. 
배나 비행기에서 보는 풍경은 단조로워질 수도 있지만, 열차에서 보는 풍경은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 열차 밖 풍경은 안달이 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러면서도 사물을 정확하게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인다. 기차를 타고 가다 우리는 순간적이지만 남의 사적인 영역을 보고 영감을 얻기도 한다. 기차를 어떤 여자가 부엌 찬장에서 컵을 꺼내는 순간을 보여주었다가, 이어 테라스에서 어떤 남자가 자고 있는 모습을 구경시켜주었다가, 공원에서 누군가가 던진 공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아이의 움직임을 드러내기도 한다.  18-20

공항에 가기
열차야, 나를 너와 함께 데려가다오! 배야, 나를 여기서 몰래 빼내다오! 나를 멀리, 멀리 데려가다오. 이곳의 진흙은 우리 눈물로 만들어졌구나! - 보들레르
인생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몇 초보다 더 큰 해방감을 주는 시간은 찾아보기 힘들다. 활주로 출발선에 꼼짝도 않고 서 있는 기계 안에서 창밖을 보면 풍경이 익숙한 크기로 길게 내다보인다. 도로, 기름탱크, 풀밭, 구리 색조의 창문이 달린 호텔들. 우리가 늘 알고 있던 땅 그대로다. 우리가 차의 도움을 받아도 느리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곳, 종아리 근육과 엔진들이 산꼭대기에 이르려고 애를 쓰는곳, 500미터 정도 앞에는 언제나 나무나 건물이 막아서서 우리 시야를 제한하는 곳, 그때 갑자기 엔진의 억제된 진동과 더불어 우리는 완만하게 대기 속으로 솟아오르며, 아무런 방해 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거대한 지평이 열린다. 지상에서라면 한나절이 걸릴 여행을 눈을 아주 조금만 움직이는 것으로 끝내버릴 수도 있다.
이런 이륙에는 심리적인 쾌감도 있다. 비행기의 빠른 상승은 변형의 전형적인 상징이다. 우리는 비행기의 힘에서 영감을 얻어 우리 자신의 삶에서 이와 유사한 결정ㅈ거인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우리 역시 언젠가는 지금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수많은 억압들 위로 솟구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점(視點)은 풍경에 질서와 논리를 부여한다. 도로는 산을 피하느라 곡선을 그리고, 강은 호수로 향하는 길을 따르고, 고압선 철탑은 발전소에서 도시로 이어지고, 땅에서 보면 제멋대로인 것 같은 도로들은 잘 짜인 격자로 드러난다. 눈은 자신이 보는 것을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일치시키려 한다. 익숙한 책을 새로운 언어로 판독하려는 것과 같다. 그러는 동안 내내 우리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 우리 눈에 감춰져 있었다 뿐이지, 사실 우리 삶은 저렇게 작았다는것.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살고는 있지만 실제로 볼 기회는 드문 세상이다. 그러나 매나 신에게는 우리가 늘 그렇게 보일 것이다.  34-35
우리가 지금 타고 있는 것을 심오한 철학을 가르치는 스승이라 부를 만하다.  38

진정성
이 모든 소란과 안달은 왜일까? 왜 이리도 잘박하고 어수선하고 번민하고 고군분투하는 걸까? 그런 하잖은 것이 왜 이다지도 중요해진 걸까? - 쇼펜하우어
"포도주 좀 드실래요?"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글쎄요. 포도주 좋아하세요?" 그녀가 되물었다.
"드시겠다면 난 상관없어요." 내가 대답했다.
"좋으실 대로 하세요. 원하시는 대로." 그녀가 말했다.
"나는 아무 쪽이나 좋은데요."
"나도 찬성이에요."
"그럼 마실까요, 말까요?"
"너, 나는 안 마시는 게 좋겠어요." 클로이가 말했다.
"그래요, 나도 별로 마시고 싶지 않군요." 나는 맞장구를 쳤다.
"그럼 포도주는 마시지 말기로 하죠."
"좋습니다. 그럼 물만 마시죠."
진정한 자아는 누구와 같이 있든 안정된 동일성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전제한다. 그러나 그날 저녁 나는 클로이의 욕망을 찾아내고 그에 따라 나 자신을 바꾸려는, 진정성이 결여된 시도를 되풀이했다.  46
침묵은 어느 쪽으로도 빠져나갈 도리가 없는 고발장이었다.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침묵하면 구제불능일 정도로 따분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임이 분명해지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침묵과 어줍음은 욕망의 애처로운 증거로서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상대에게 무관심한 사람은 능란한 유혹 솜씨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어줍게 유혹하는 사람이야말로 상대를 향한 진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관대하게 봐줄 수도 있다.  48
피하기 위한 거짓말과 사랑받기 위한 거짓말, 유혹과정의 거짓말은 다른 영역의 거짓말과 매우 다른 면이 있었다. 내가 경찰에게 자동차 속도를 거짓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한 이유 때문이었다. 벌금이나 체포를 피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받기 위한 거짓말에는 괴상한 가정이 수반된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개인적 [따라서 다른 사람과 다른] 특징을 비워버려야만 상대의 사랑을 얻을 수 있으며, 자신의 진짜 자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완벽성과 화해 불가능한 갈등 관계에 있다고 [따라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는 태도다.  60-61

일과 행복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가장 위대한 결실과 가장 위대한 기쁨을 수확하는 비결은, 위태롭게 사는 것이다! 너의 도시들을 베수비오 산기슭에다 세우라! - 니체
능력주의 시대에는 천한 직업을 가진 것이 단지 가엾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런 직업은 그 반대의 기분 돟은 직업과 마찬가지로 능력에 따라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서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고, 또 그 대답에 아주 신중하게 귀 기울이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76
윌리엄 제임스는 행복과 기대의 관계에 관하여 예리한 주장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우리가 노력을 기울이는 모든 영역에서 성공을 거둔다고 해서 반드시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 어떤 일을 못했다고 해서 늘 수치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주어진 일의 성취에 자존심과 가치를 투자했을 때에만 그 일을 하지 못했을 때 수치감을 느낀다. 우리가 무엇을 승리로 해석하고 무엇을 실패로 여기는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하는 이야기다. 
시도가 없으면 실패도 없고 실패가 없으면 수모도 없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자존심은 전적으로 자신이 무엇이 되도록 또 무슨 일을 하도록 스스로를 밀어붙이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갖고 있다고 상상하는 잠재력에 대한 실제 성취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
              자존심 =  이룬것 / 내세운 것
만일 일에서 행복을 얻기가 그렇게 힘들다면,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있다고 내세우는 것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일자리에서 프로이트나 루스벨트가 맛보았던 만족감의 일부라도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77-78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The Commnist Manifesto)>(1848)에서 부르주아지와 그드르이 새로운 과학인 경제학이 대규모로 "부도덕"을 자행한다고 비난했다. '[경제학은] 노동자를 일하는 동물로 밖에 알지 못한다 - 최소한의 육체적 요구만 남은 짐승으로 아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에 따르면 피고용인에게 주는 임금은 '바퀴가 계속 돌아가도록 칠하는 윤활유와 같다. 일의 진정한 목적은 이제 인간이 아니라 돈이다.'  79
일이 행보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 쪽이 일을 견디는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두는 것이 좋겠다. 그래야 우리의 슬픔을 그나마 다독일 수 있을 테니까.  83

동물원에 가기 
나는 사람이다. 인간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것치고 나에게 낯선 것은 아무것도 없다. - 테렌티누스
동물원에 가 보면 십인십색이라는 속담이 실감난다. 모든 동물은 어떤 것에는 놀랄 만큼 적응이 되어 있는 것 같지만, 다른 것에는 가망 없을 정도로 어울리지가 않는다.  89

독신남 
무엇을 먹고 마실지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구와 먹고 마실 것인가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왜나하면 친구 없이 식사하는 것은 사자나 늑대의 삶이기 때문이다. - 에피쿠로스
함께 로맨틱해질 사람이 없는 사람보다 더 로맨틱한 사람은 없다. 정신을 팔 일이나 친구도 없어 깊은 외로움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드디어 친구도 없어 깊은 외로움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드디어 사랑의 본질과 필요성을 이해할 수 이싿. 전화기가 옴짝달싹도 안 했던 주말, 매끼 통조림을 따서 식사를 하고 귀에 거슬릴 뿐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BBC 해설자의 목소리-케냐 영양의 짝짓기 습관을 설명하고 있다- 를 들으며 주말을 보낸 뒤에야 우리는 왜 플라톤이 사랑이 없는 인간은 팔다리가 반뿐인 생물과 같다고 말했는지(<향연> 기원전 416년) 이해 할 수 있다.  97
사람은 아주 하찮은 것으로도 사랑헤 빠질 수 있다. 뭐 사랑이라는 말이 좀 그렇다면, 기질에 따라서는 반한 상태, 병, 착각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다른 사람을 향하여 뜨겁게 고조된 그런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98

따분한 장소의 매력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 파스칼
귀스타프 플로베르는 루앙에서 자랐는데, 그곳은 호수만 빼면 취리히와 비슷한 곳이라는 느낌이 든다. "따분해, 따분해, 따분해" 플로베르는 젊은 시절 일기에 그렇게 썼다. 그는 프랑스에, 특히 루앙에 사는 것이 정말 지겹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108
나는 자신의 내부가 흥미로워 굳이 도시까지 '흥미롭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을 원했다. 정열의 샘에 늘 가까이 있어 도시가 '재미'없다 해도 상관하지 않을 사람을 원했다.  109
근대 세속 사회를 바라보는 한 영향력 있는 입장에 따르면, '남들처럼' 되는 것만큼 창피한 운명은 없다. '남들'이란 평범한 사람들과 순응적인 사람들, 따분한 사람들과 교외에 사는 사람들을 아우르는 범주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생각하는 모든 사람드르이 목표는 군중으로부터 두드러지고, 자신의 재능이 허용하는 대로 어떤 방식으로든 '튀는' 것이다. 공공 부문에서 제공하는 주택, 운송, 교육, 의료가 시원찮으면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집단과 섞이는 것을 피하게 되며, 높은 담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그 뒤에 들어가 살려고 하게 된다. 보통이라는 것이 존엄과 안락에 대한 중간적인 요구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삶을 영위한다는 의미일 때는 높은 지위를 향한 욕망이 강렬해질 수밖에 없다.  110-111
취리히가 이 세상에 주는 독특한 교훈은 어떤 도시가 그냥 따분하고 부르주아적이기만 해도 진정으로 상상력을 자극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장소가 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119

글쓰기(와 송어)
모든 독자는 자기 자신의 독자다. 책이란, 그것이 없었다면 독자가 결코 자신에게서 경험하지 못했을 무언가를 분별해낼 수 있도록, 작가가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 기구일 뿐이다. 따라서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기 자신 속에서 깨달을 때, 그 책은 진실하다고 입증된다. - 프루스트
맞춤법은 시간이 가면 정확해지지만, 우리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하도록 단어들을 배열하는 데는 꽤 힘든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오늘 일어났던 일들을 붙들어두고 싶어 한다. 그래서 어디에 갔고 무엇을 보았는지 목록을 작성한다. 그러나 다 적고 펜을 내려놓을 때면 우리가 묘사하지 못한 것, 덧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사라지고 만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사라져버린 것이 하루의 진실의 열쇠를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124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을 읽다 보면 역설적을 나 혼자 파악하려 할 때보다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해서 더 많이 알게 된다. 다른 사람의 책에 있는 말을 읽다 보면 전보다 더 생생한 느낌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세계는 어떠한지 돌아보게 된다.
위대한 책의 가치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나 사람들의 묘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이들을 훨씬 더 잘 묘사하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 독자가 읽다가 이것이 바로 내가 느꼈지만 말로 표현을 못하던 것이라고 무릎을 쳐야 하는 것이다.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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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이다.
표지에는 이런 표현을 하고 있다.
'드 보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삶을 낭비하지 않고 삶에 감사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는 실천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로 보고, 프루스트를 일상에서 실행할 수 있는 '문학적 참고서'로 새롭게 조명한다. 전기와 평론이라는 형식을 빌려 유머와 상상력으로 버무린 인생학 개론!'



하나. 현재의 삶을 사랑하는 법
'우리가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된다면 삶은 갑자기 놀라운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것-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은 계획, 여행, 연애, 연구거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미래에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러한 일들을 끝없이 미루는 우리의 게으름은 이것들을 숨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루기를 영원히 불가능하게 하는 위협이 생기면, 삶은 다시 얼마나 아름다워질까요! ... 대재난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느 것도 하지 않을 테지요... 거기서는 무관심이 소망을 죽입니다.'  13

둘. 자신을 위한 독서법
'현실에서 모든 독자는 자기 자신의 독자가 된다. 책이란, 그것이 없었다면 아마 독자가 자신에게 결코 경험해 보지 못했을 어떤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작가가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신 속에서 깨달을 때 그 책이 진실하다는 것이 입증된다.'  36
'만약 천재의 새로운 걸작을 읽게 된다면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경멸했던 우리 자신의 성찰들, 우리가 억압햇던 기쁨과 슬픔, 우리가 깔보았지만 그 책이 문득 우리에게 그 가치를 주는 감정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를 발견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42

셋. 여유 있게 사는 법
예술 작품의 위대함은 겉으로 보이는 소재의 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전적으로 그 소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고 프루스트는 주장한다. 그래서 잠재적으로 모든 것이 예술의 풍부한 소재이며, 우리는 파스칼의 <팡세>에서만큼이나 비누 광고에서도 귀중한 발견을 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57
"너무 빨리 하지 마세요."는 아마 프루스트주의적 슬로건일 것이다. 그리고 너무 빨리 하지 않으면 생기는 이점은, 그러는 도중에 세상이 더 재미있어진다는 것이다.  63
천천히 생각할 때 더 큰 연민이 생길 수 잇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미쳤군'이라고 한 마디 하고 신문을 넘길 때보다는, 정신이상자 반 블라렌베르그 씨의 범죄에 대해 기다란 성찰의 글을 쓸 때 우리는 그를 더 많이 동정하게 된다.  64
교훈은? 공연에 몰두할 것, 신문기사를 마치 하나의 비극적 또는 희극적 소설의 일부인 것처럼 읽는 것, 그리고 필요할 때는 잠드는 것을 묘사하는 데 30페이지를 쓸 것. 그리고 만약 시간이 없다면, 적어도 올레도르프 사의 알프레드 윔블로나 파스켈 사의 자크 마들렌이 취했던 태도에 저항할 것. 프루스트는 이러한 태도가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할 시간이 없다'라는 건 '바쁜' 사람들이-아무리 그들의 일이 어리석을 지라도-느끼는 '자기만족'일 뿐"이라고 규정했다.  66

넷. 훌륭하게 고통을 견디는 법
어떤 사람이 가진 생각이 지혜로운 것인지 평가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그의 정신과 건강상태를 주의 깊게 검토해 조는 것이리라.  67
'내가 진정 슬플 때 위안이 되는 것은 오직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75
프루스트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문제가 있기 전까지는, 즉 우리가 고통에 빠지고 우리가 희망했던 대로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제대로 배울 수 없다. 
'병 하나만으로도 우리느 ㄴ주목하고 배우게 되며, 그것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을 과정들을 분석할 수 있게 된다. 매일 밤 침대 위에 눕자마자 즉시 잠에 들어서 깨어 일어나는 순간까지 죽은 듯이 자는 사람은, 반드시 위대한 발견일 것까지는 없지만, 분명히 수면에 관한 작은 관찰조차도 꿈꿔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자고 있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한다. 약간의 불면증은 우리가 잠에 대해 감사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을 던진다는 점에서는 가치가 없지 않다. 기억을 잘하는 것은, 기억이라는 현상을 연구하는 데 그다지 큰 이점이 아니다.'
프루스트가 제시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때에만 천저한 탐구심이 생길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앓는다. 고로 생각한다. 그리고 고통을 더 큰 맥락 속에 위치시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땜누에 우리는 생각한다. 생각은 고통의 기원을 이해하고, 그것의 여러 특성ㅇ들을 포착하고, 그 존재를 체념하고 인정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92
그는 개인이 지혜를 얻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선생을 통해서 고통스럽지 않게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삶을 통해서 고통스럽게 얻는 것이다. 그는 고통스럽게 얻는 지혜가 훨씬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93
'지혜란 가르칠 수 있는게 아니다. 누구도 우리 대신 가줄 수 없는 여정을 통해서, 누구도 우리 대신 해줄 수 없는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행복은 몸에 좋다. 그러나 정신의 힘을 길러주는 것은 고뇌다"라고 프루스트는 말했다.  94
만족보다는 불행이, 그리고 플라톤이나 스피노자를 읽는 것보다는 고통스러운 연애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좋으리라는 것이다.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천재보다는, 우리가 욕구하고 우리를 앓게 하는 여성이 훨씬 더 심오하고 생생하게 우리에게서 온갖 종류의 감정을 끌어낸다.'
행복할 때 무지한 것은 아마도 그저 정상적인 일일 것이다.  95
고통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이득이란 그것이 지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탐구의 가능성-아주쉽게, 그리고 가장 자주 간과되고 거부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는 것일 뿐이다.  99
'삶의 기술 전부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개별자들을 이용하는데 있다.'  100
언제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101

다섯. 감정을 표현하는 법
"당신의 소설에는 몇 가지 훌륭하고 장엄한 장면들이 그려집니다"라고 프루스트는 섬세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좀더 독창적으로 그려졌으면 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해질녘에 하늘이 불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너무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고, 어슴푸레한 달빛은 시시하고 둔감한 표현입니다."(가브리엘의 <연인과 의사>라는 소설의 원고를 읽은 평)
상투어의 문제는 잘못된 관념을담고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훌륭한 관념들을 피상적으로 조합해 낸다는 데 있다. 해는 해질녘에 불타고 달은 어스레한 빛을 내지만, 우리가 해나 달과 마주칠 때마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이 이 주제에 대해 할 수 있는 첫 번째 말이라기보다는 최종적인 말이라고 결국 믿게 되고 말 것이다. 상투어들은, 한편으로는 단지 피상적으로 스쳐 지나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상황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심어주기 때문에 해로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방식이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느끼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묘사하는가는, 어떤 수준에서는 우리가 그것을 처음에 어떻네 경험하는가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123-124
'모든 작가는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해야 합니다. 마치 모든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자신만의 '음색'을 창조해야 하듯이...형편없이 쓰는 독창적 작가를 좋아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잘 쓰는 사람들을 좋아한다-아마 이게 약점일 수는 있지만-는 것입니다. 하지만 독창적이라는,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했다는 전제하에서만 그들은 잘 쓸 수 있습니다. 정확함과 완벽한 문제가 분명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모든 착오를 겪은 후에야 독창성의 이면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지 독창성과 같은 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독창성의 면에는 정확성-'어슴푸레한 달' , '미소짓는 착한 마음' , '모든 연도 중에서도 가장 불쾌했던 해"-이라는것은 조재하지 않습니다. 언어를 보호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그것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스트로스 부인!'  130-131

여섯. 좋은 친구가 되는 법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내용과 타인의 관심사가 쉽게 일치하는 것이 친교라고 가정한다.  165
프루스트는 한번은 친교를 독서에 비유하였다. 왜냐하면 두 가지 활동 모두 타자와의 교류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독서에 결정적인 우위가 있다고 덧붙였다.
'독서에서 친교는 갑자기 그 본래적인 순서성을 회복한다. 책에는 거짓 상냥함이 없다. 우리가 이 친구들과 저녁을 함께 보낸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실로 그러고 싶기 때문이다.'  173

일곱. 일상에 눈을 뜨는 법
모든 것에 올바른 가치를 부여하라고 권했을 터이다. 이는 좋은 삶이란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들을 부당하게 무시하고 헛되이 다른 것을 갈망하는 것은 아니라는 발상의 전환을 의미했다.  190
왜 우리는 사물들을 더 풍부하게 음미하지 않는가? 이것은 부주의나 게으름의 문제를 넘어서는 문제다. 그것은 우리가 아름다운 이미지들에 충분히 노출되지 않은 데서 유래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는 우리 자신의 세계에 충분히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안내하고 우리에게 착상을 불어 넣을 수 있다.  199

여덟. 행복한 사랑을 하는 법
무언가를 박탈당했을 때 우리는 그 소중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사물의 소중함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것을 박탈당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어떤 것을 결핍하고 있을 때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감정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고, 우리가 그것을 결핍하고 있지 않을 때도 그 교훈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한 연인과의 오랜 교제로부터 권태감이 생기고, 그 사람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아이러니하게도 그 문제는 우리가 그를 충분히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것일 수 있다. 처음 사귈 때 우리가 상대방에 대해 무지할 것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후로 연인의 곁에서 함께 지내게 되면, 우리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무감각해질 정도로 진정 친숙해진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같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가짜 친숙감에 불과할 것이다.  224

아홉. 책을 치워버리는 법
우리는 책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까?
프루스트는 책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할 때 생기는 위험들, 아니 책을 물신적으로 숭배하는 태도를 취할 때 생기는 위험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책에 대해 존경을 표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문예창작의 정신을 희화화하는 것이다.  237
그는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를 깨닫기 위해서는 대가가 느꼈던 것을 자신 속에 다시 그려 보려고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에 독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느끼는지 알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책을 읽어야 한다.  244
'독서는 정신적 삶의 문턱 위에 있다. 그것은 우리를 정신적 삶으로 인도할 수 있지만, 정신적 삶을 구정하지는 않는다.'  246
'우리 속 깊은 곳에 있지만 어떻게 들어가는지는 알지 못했던 집의 문을 마법의 열쇠로 열어주는 한, 우리의 삶에서 독서의 역할은 유익한 것이다. 반며에 독서가 정신에 자신만의 삶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지 않고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린다면, 그것은 위험해진다.'  247
'(독서를) 학문 분과로 만드는 것은 단지 '자극'에 불과한 것에 너무 큰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독서는 정신적 삶의 문턱 위에 있다. 그것은 우리를 정신적 삶으로 인도할 수 있지만, 정신적 삶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가장 훌륭한 책들조차도 결국에는 내팽개쳐야만 하게 마련이다.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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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고른건 옮긴이의 글에서 저자가 일주일 동안 공항에서 생활하면서 관찰한 기록이라는 내용을 보았기에 선택하게 되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저자의 책들을 검색하고 여러권들을 읽으려 마음먹은 후이기에 그 중에 먼저 보고 싶었던 책인것이다.
이 책이 먼저 읽고 싶은 책이 된 이유는 '여행'이라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여행은 행복한 단어이다. 나에게 만큼은.
내 여행은 조금은 독특하고, 모험적이기에 다른이들이 들으면 입을 다물지 못하기도 하고, 놀랍다는 표현을 한다.
여행을 통해 많은 통찰력을 기를 수 있었고, 포용력도 기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책은 먼저 잡아야 하는 책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먼저 잡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온 시점이 늦어졌기에 그렇다.

아무튼 여행은 나에겐 가장 행복한 시간 중에 하나라는 점, 그에 더해 여행의 시작과 끝은 항상 공항이라는 점이다. 
책을 읽기전에 공항에 대해 구석구석 설명이 되었을거란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면서 내가 여행을 통해 들렀던 공항이 몇 개나 되는지 꼽아보았다.
28군데의 공항을 들렀다. 그런데 이상한건 공항을 떠올리면 여러가지가 생각이 나긴 하지만 한 번도 공항을 살펴보았던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첫 여행을 떠날때 조차도 처음들어가보는 공항이었는데도, 그곳을 둘러보거나 관찰해 본적이 없었다.
떠날때는 목적지에 대해 생각을 했었기에 그러했던것 같고, 돌아올때의 공항에서는 여행의 피로와 마지막을 정리하기 위해 조용히 있었던 것 같다.(첫 여행지는 태국이었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만만한 금액이고 전 세계 여행자들의 집결지인 카오산로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도 다양한 나라들을 배낭여행으로 떠났으나 공항을 구경해 보았던 기억이 없다.
필요한 것이 있을때 면세점을 잠시 들렸다. 그것도 살것만 사기위해 찾아갔다. 그리고는 매번의 여행은 라운지에서 안락한 의자에 앉아 음식과 음료들을 먹으면서 무언가를 정리하거나 계획을 세우거나 했었다.
가장 최근에 갔다온 2011년 12월에도 이것이 다였다. 

책을 읽으면서 솔직히 내용에 집중한것보다 내가 지나갔던 공항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는데 더 집중한것 같다. 
그렇기에 이 책은 그 어느 책보다 즐거움을 더 주었다.
그리고 모든 공항은 아니겠지만 구경해 볼만한 공항은 이제부터라도 구경을 하면서 관찰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안락한 여행은 크게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나인데(물론 휴양지를 선택했을때는 안락함을 추구한다) 지금까지 공항에서만큼은 안락하게 있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부끄럽기도 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기도 하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느낀다.

굉장히 부럽다. 어떤 경로로든 작가는 공항을 내집처럼 누비며 제한구역까지 들락거리며 관찰하고 체험하였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나쳐가는 그곳에서 합법적으로 그렇게 지내면서 여유를 부리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는것이 부럽다. 

책의 내용중에 '여행자들은 곧 여행을 잊기 시작할 것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우리는 지나쳐가는 공항을 거의 잊는다. 생각을 떠올리면 공항의 구조는 어떻고, 화장실은 어디고, 티켓팅 데스크는 어디며, 게이트는 어디인지는 떠올릴 수있긴하지만 공항이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관찰해 본적이 없기에 자신이 거치는 라인 이외에는 잊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기억하는 것들은 모든 공항들이 가지고 있고 형태도 비슷한 것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행을 가면서 여행지는 관찰하려고 눈을 부릅뜨기는 하지만, 나처럼 공항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한국의 인천국제공항은 규모면에서도 뒤지지 않는 공항이며 구석구석 이용객들의 편의시설들도 매우 많이 있다. 그럼에도 그 내용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막상 공항에 가면 여러곳에서 안내 팻말을 통해 알려주고는 있으나 사람들은 공항 자체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기때문에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인간이란 동물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관찰하고 알기위해 노력하는 맹점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에게 공항 자체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면에서만이라도 이 책은 도움을 준다고 생각 한다..^^



나는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네로 황제를 위하여 쓴 <분노에 관하여(On Anger)>라는 논문, 그중에서도 특히 분노의 뿌리는 희망이라는 명제가 떠올랐다. 우리는 지나치게 낙관하여, 존재에 풍토병처럼 따라다니는 좌절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하기 때문에 분노한다. 열쇠를 잃어버리거나 공항에서 발길을 돌려야 할 때마다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열쇠가 절대 없어지지 않고, 여행계획이 늘 확실하게 이행되는 세계에 대한 믿음,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무모할 정도로 순진한 믿음을 드러낼 것이다.  58-59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무엇이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향하게 됩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우리가 마음속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삶의 길을 따라가도록 용기를 주는 거죠."  119

"이 세상의 노고와 소란은 다 무엇을 위한 것인가? 부, 권력, 탁월한 위치를 추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1759)에서 그렇게 묻고 스스로 대답을 했다. "공감하고, 만족하며, 찬동하면서 곤찰하고,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는 대상이 되기 위해서이다."  123

세계의 익명의 공간들을 헤매고 다니는 동안 우리가 보통 취하는 엄숙하게 경계하는 태도를 곧바로 버리는 것은 무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흼한 미소를 지을 여지는 남겨두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187

우리는 우리가 찾아갔던 여행지들에 부탁할 수도 있다. "내가 더 관대해지고, 덜 두려워하고, 늘 호기심을 느끼도록 도와줘. 나와 내 혼란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해줘. 나와 내 수치감 사이에 대서양 전체를 넣어줘." 지혜로운 여행사라면 우리에게 그냥 어디로 가고 싶으냐고 물어보기보다는 우리 삶에서 무엇을 바꾸고 싶으냐고 물어볼 수도 있을 텐데.  201

승객들이 도착 라운지에서 여행을 마무리하고 있을 때, 위층의 출발 라운지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새로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203

여행자들은 곧 여행을 잊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다.  205


옮기고 나서
알랭 드 보통에게 조금만 익숙한 사람이라면, 그에게 공항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지 알 것이다. 돌이켜보면 클로이를 처음 만난 곳도 비행기 안이 아니었던가. 실제로 공항은 여행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기도 하고, 각 사람의 지위와 그에 따른 불안이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며, 현대 건축의 백미이기도 하고, 일의 기쁨과 슬픔이 녹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화성인이 온다면 구경시켜 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장소로 공항을 꼽는다는 저자의 말은 전혀 농담이 아닌 것이다.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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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작품 몇 권을 읽고 그 중에 <불안(Status Anwiety)>이란 책을 읽으며 저자에게 매력을 느꼈다. 그 후에 저자의 작품들을 검색하여 여러권을 더 읽고 있다.
물론 한꺼번에 읽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여건상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ㅈ자의 작품중에 한국에 번역되어 들어온 모든 작품에 대한 검색과 도서관에 책 내용들을 훑는 작업은 하였다.
저자의 사랑에 관한 소설형식의 3부작중 첫 번째 작품인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Essays in Love)>를 읽었었고, 두번째 작품(우리는 사랑일까-The romantic movement)이 아닌 세번째 작품인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여러 책들을 살펴보면서 이 책을 먼저 들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책 내용에 대해 소개 내용을 읽은 것도 아니다. 다만 중간쯤에 실제 인물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막연한 생각으로 지금의 부인과의 사랑에 대한 관찰과 생각을 담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일 먼저 읽었다.
물론 이때까지는 한국말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그러했었다.

시간이 지나며 원서의 제목을 보고는 한국엔 제목부터가 역시 다르구나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목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기대치와 기대방향에 대해 혼란을 주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을 한다. 물론 내생각 뿐일지는 모르나..
원제는 <Kiss & Tell>이다. 언뜻보면 키스와 대화정도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폭로한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헤어진 연인의 과거를 공개함'이라고 표현할 수 도 있을 듯하다. 직역을 하는것보다는 사람들에게(여기서 독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음을 주의하기 바람) 먹히는 제목이 들어와야 하는건 당연한것일 지도 모르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불안>에서 원제를 먼저 확인하고 책을 보았기에 기대치의 방향이 달라지지 않았었는데, 이 번 책은 그러지 못했다. 이건 분명 나의 잘못이다.
저자의 내용에 매력을 느꼈고, 사진을 먼저 보면서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으니..^^

저자의 개인사를 모르기에 지금의 책이 가족인지 아니면 정말 지나간 연인과의 내용인지를 잘 모르겠으나, 실제 사진이 들어가 있기에 놀랍다.
한국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출판이 가능했을까.. 상대에게 동의를 구할때 동의해 줄까.. 아니 실제 지금의 가족이라 하더라도 쉽게 동의를 할 수 있을까..
우여곡절 끝에 출판이 되었다고 해도 사회적인 파장이 꽤나 클것이란 생각이 든다.

저자는 헤어진 이전 연인에게서 '너를 파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 사람이 그렇게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자신에게 강박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말이야. 너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나르시시스트는 자기밖에 사랑할 수 없어. 나도 남자들이 대부분 소통의 실마리를 잘 찾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너의 무능력은 짜증날 정도로 특별했어. 너는 내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떤 것이든 전혀 존중하지 않았어. 모든 것에 늘 고압적이고 독선적인 태도로 접근했지. 나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이기주의자, 자기 귓불보다 멀리 있는 어떤 것에도 공감을 하기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나는 너무 긴 시간을 낭비했어...'(11)이란 내용의 편지를 통해 여성에게 더욱 다가가기 위해 '이사벨'과의 시간들을 통해 관찰해가면서 알아가려 많은 대화와 자신의 생각들을 서술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전기 작품의 형식을 빌어와 그 작품들에 들어갈 내용들과 저자들의 생각들을 이사벨의 전기형식 작품으로 변환해 나가면서 서술하고 있다. 
저자의 많은 지식과 사유는 즐거움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즐거우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주고 있는것이 저자의 매력이란 생각이 든다.

읽으면서 정말 저정도 까지 연인에게 질문들을 해도 괜찮은걸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알아가려면 차라리 저정도의 질문을 자신의 의도에 대한 설명과 함께 던지는 것이 더 좋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읽어 나간다.
나 또한 남자 이기에 여성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다고 생각을 한다. 관련책들도 여러권 읽어보았으나 그것만으로 나와 다른 구조를 가진 부류를 이해한다는건 거의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을 한다. 직접 겪어봐도 아직 그들에 관해 30%도 알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하다.
언제쯤 70%까지 갈 수 있을까.. 그 정도면 그들과 큰 마찰 없이 긴 시간을 즐거움으로 채워나갈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 헤어짐을 예시하면서 끝난다. 완전 공감한다. 
저정도까지 질문하는 건 넘어선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맞은건지, 아니면 이사벨이 다른 복합적인 이유들을 더 많이 가진건지 모르지만 헤어짐을 마주하면서 내용이 끝이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고서도 여자에 대해 지식이나 지혜가 크게 늘어난것 같지는 않다. 책의 원제처럼 폭로를 통해 저자는 어떠한 생각들을 하였으며 그 생각의 부분 부분 들이 마음에 닿았기는 했다.
부러운것은 이들의 사고방식이 우리내 보다는 많이 열려 있다는 것이고, 이것을 배워나가는데는 도움을 많이 받은 느낌이 든다.

이렇게 표현을 하면 여성들이 한숨을 쉬지 않을까..하는 갑작스러운 의문이 든다.
'이런 내용을 보고도 여자에 대해 모르다니'하면서 한 숨을 쉬는 그림이 그려지는건 혼자만의 우려일까..??
꽤나 많은 사람들에게 '무디다' , '눈치없다' , '너무 모른다' 이러한 표현들을 많이 들어서 그런생각이 드는걸까.. 어쩌면 앞서 언급한 저자의 옛 연인이 보낸 편지의 내용이 나에게 적용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더욱 열심히 보려 한 것일지도.. 나의 무의식이 이 책을 먼저 읽게 한 건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나의 무의식은 다 읽고 난 지금 나에게 어느 정도나 실망하고 있을까..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이해해보고, 나 자신을 내 삶이 아닌 다른 삶에 푹 담가보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고, 어린 시절과 꿈을 통해 어떤 사람을 따라가보고, 라파엘전파에서부터 과일 맛이 나는 셔벗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취향을 추적해본다는 생각. 나 스스로 전기를 써보면 어떨까?  18
오직 위인만이 전기의 적합한 소재가 될 수 잇다는 가정은 그대로 유지된다.
200년 전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이 곤혹스러운 만장일치를 잠깐 흔들었지만 이내 무시되고 말았다. 존슨 박사는 '적절하고 충실한 이야기에 담아낼 가치가 없는 삶이란 없다. 모든 사라에게는 그 자신과 똑같은 조건에 잇는 사람이 아주 많으며, 그들에게 자신과 비슷한 사람의 실수와 실패, 회피와 임기응변은 직접적이고 확실한 쓸모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상태란 장식과 위장을 떼어내고 생각하면 매우 균일하여, 인류에게 공통된 것을 제외할 경우 좋든 나쁘든 다른 자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20

나는 유년기를 선형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전기를 시작하는 방법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내 전기가 철저하기를 바랐지만, 그럼에도 여기에는 과거만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와 공존하고 또 현재로부터 나타나는 특정한 방식이 드러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3
절대 인생에 대한 관점(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에번스턴에서 멀리 떨어진 땅에 오래전 살았던 한 아일랜드인을 보는 관점) 자체를 쓰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고, 오히려 편견이나 엉성한 학식에서 나온 관점으로 인한 왜곡으로부터 가능한 한 자유로운 상태에서 삶 자체를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단지 하나의 삶만 있다면, 저닉 작가들이 그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신의 에고와 미뢰의 쓸데없는 간섭에서 멀리 떨어져, 그 삶이 조심스럽게 편견 없이 재구축되도록 하는것이 핵심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삶이 있다.  39
전기의 고상함을 인간적 애착이라는 저열한 영역과 절대 뒤섞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응을 해야 한다면, 애착과 전기를 쓰고자 하는 충동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즉 다른 사람을 완벽히 알고 싶은 충동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애착이 전기를 써나가는 다소간 의식적인 과정(날짜, 특징, 좋아하는 세탁 주기와 간식 등을 파악해 나아가는 것)을 포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전기는 작가와 대상 사이의 다소간 의식적인 감정적 관계를 요구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책을 마무리하는데 필요한 엄청난 에너지를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프로이트는 '전기 작가들은 그들의 주인공에게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고착되어 있다. 많은 경우 그들이 연구의 대상으로 그 주인공을 선택한 것은-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이유로-처음부터 그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뒤에 그들으 ㄴ이상화라는 과제에 에너지를 쏟아, 주인공의 인상에서 개별적인 특징들을 지워버린다. 그 주인공이 평생에 걸쳐 내적이고 외적인 저항들과 싸워온 흔적들을 매끄럽게 다듬어버리고, 그에게 인간적 약점이나 불완전성의 자취를 용납하지 않는다.'  65-66

특정한 벽장이나 다락방 때문에 예정된 경로에서 벗어나 옆길로 새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도대체 그녀의 어머니가 어떤 식으로 바람을 피웠냐고 이사벨에게 물을 때 옆길로 새는 것과 비슷하다. 나의 그런 호기심은 (흔히 그렇듯이, 또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듯이) 나 자신의 삶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내고, 남들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더 선명하게 도드라질 어떤 정체성을 찾아나가려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느 ㄴ사람이나 전기에 대한 관심 가운데 그 근본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친구나 나폴레옹이나 베르디나 W.H. 오든과 얼마나 다를까?' 하는 문제, 따라서 간접적으로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하는 문제의 답을 찾아내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난 부분이 얼마나 될까?  89
자, 그럼 댁의 인생을 갖고 뭘 하고 계시는지 자세히 이야기 좀 해주실래요?  92

누군가에게 과거를 기억하라고 재촉하는 것은 총을 들이대고 재채기를 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진정한 기억은 재채기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25
실제로 과거를 기억할 때는 그런 것들과는 달리 손에 분명히 잡히지 않는 이미지들이 우리를 쫓아다닌다. 심지어 어떤 사건 같은 확실한 것은 전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잇다. 이야기는 쏙 빠져버리고, 기분과 분위기만 기억할 수도 있다. 따라서 과거에 푹 빠져 있으면서도 자신은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일이 흔히 일어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이사벨과 내가 목요일 퇴근 후 파링던 로드 근처 커피숍에 있을 때 그녀는 바로 그런 예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둘 다 사무실에서 종일 수다를 떨고 난 날이면 찾아오곤 하는 침묵의 분위기에 싸여 있있지만, 나는 그녀의 침묵의 길이가 문제의 신호일 수도 잇다는 느낌이 들어 그녀에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가 대답하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어. 있잖아, 이런저런 것들. 사실 아무것도 아니야."
"됐어."
실제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생각하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 아마 잠 다음으로 그것이 가장 인기 있는 소일거리일 것이다.  132
우리는 이야기를 할 때 상대가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여, 한 두 가지 사항을 분명하게 전달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의 의식에서 전개되는 혼란스러운 과정을 공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133
".. 지금 나는 사실 별 생각을 하지 않았어. 그냥 구름 속에 파뭇혀 있었을 뿐이야."  136

남들에 대한 호기심은 자기 성찰을 피해가고자 할 때 애용하는 방법이다. 내적인 투쟁을 덮어버리고 인용을 할 권리나 편지 내용을 사용할 허가를 얻기 위한 싸움을 앞세울 수 있는 것이다.  150
섹스가 친밀성의 상징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두 사람이 친밀해질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상징은 오히려 자신이 상징하는 상태의 실현을 방해할 수도 있었다. 서로 알아가는 더 힘든 과정을 피하는 방법으로 상대와 잘 수도 있으니까. 마치 책을 읽는 일을 면하기 위해 책을 사는 것처럼.
"그럼 행복해지려면 뭔 해야 한다는거야?"
"나도전문가는 아니야. 그냥 상대와 미리 친밀한 경험을 해보지 않고 같이 자버리는 게 반드시 좋은 생각은 아니라는 얘기일 뿐이야."
"예를 들어 어떤 경험?"
"있잖아, 질투를 하고, 욕을 하고, 교활한 면을 보여주고, 토하고, 코를 풀고, 발톱을 깎고."
내가 둔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네 발가락에 무슨...?"
"아냐, 아무 문제 없어."
"그런데?"
"뭐, 발톱을 깎는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건 좀 사적인 거니까. 발톱이 발에 붙어 있으면 그건 괜찮아. 하지만 일단 떨어져 나가면 그건 쓰레기잖아. 예를 들어, 사람 머리에 난 머리카락을 보는 것하고 욕조에 붙어 잇는 머맅카락을 보는 건 다르잖아."
"그런데 왜 발톱을 깎는 게 섹스를 하는 것보다 더 친밀한 거야?"
"섹스를 하는 상대는 그 앞에서 발톱을 깎아도 창피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얘기일 뿐이야."  153
삶의 사적인 부분은 사람을 이해하는 문제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실제 이상으로 과시하려고 한다.  155
하지 못하는 키스가 하는 키스보다 더 흥미로울 수도 있는 것이다.  190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생각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자체의 특질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의 마음 상태와 더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94

공감의 핵심은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능력이라고 한다. 이 행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길은 비뚤어진 시각 때문에 대체로 왜곡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운이 좋고 민첩하면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특권을 누릴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적어도 잠시라도 우리의 상대성을 넘어설 수 있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197

이사벨은 그 무렵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를 다 읽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걸작이 매우 감동적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교환했다. 나는 어떤 책도 이 책만큼 죽음이라는 현실에 가까이 다가가게 해준 적이 없다는 그녀의 의견에 공감했지만, 그럼에도 나느 ㄴ그녀가 이반 일리치를, 그리고 그가 살았던 집과 그의 부인이나 가족의 얼굴을 어떻게 상상했느냐 하는 괴상한 질문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반적인 문학적 토론을 넘어, 단지 도덕성, 상징, 파국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과 사람들, 또 방을 어떻게 보았느냐, 그런 무대용 소도구들이 너의 삶의 어디에서 유래했느냐 하는 지점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206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주파수가 다르고, 주어진 환경에서 눈여겨보는 것도 다르다.  208
사람들이 상황을 다양하게 해석하고, 그런 뒤에 해석보다는 상황을 놓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는 방식을 증후적으로 보여 주기도 한다. '이성적(rational)'이라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 이 말은 이사벨의 사전에서는 이런 뜻이고 내 사전에서는 저런 뜻이기 때문에, 내가 그녀를 매우 '이성적'이라고 칭찬하면 그녀는 그 말이 욕이 아닌가 의심한다.
그녀의 사전에는
'형용사 
1. 따분하고 현학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2. 감정에 대립되며, 전통적인 가족의 이분법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의 여동생은 감정적인 사람이고, 그녀는 이성적인 사람이다.
3. 가이가 그녀에게 한 적이 있는 욕이다.'
그러나 내가 전달하고자 한 것은 내 사전에서 정의된 항목이다.
'형용사
1. 고귀한 정신에게 바치는 찬사.
2. 조지 엘리엇, 마리퀴리, 버지니아 울프는 이성적이다.
3. 감정과 양립하고, 감정을 고양할 수 있다.'
이런 차이에서 발생한 작은 갈등은 하나의 사건이 서로 다른 설명을 낳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209-210

존슨박사는 '우리 모두 똑같은 동기에 자극을 받고, 똑같은 오류에 속고 희망에 힘을 얻고, 위험에 막히고, 욕망에 휩쓸리고, 쾌락의 유혹을 받는다.'
존슨은 사람들이 서로 다르지만 그럼에도 똑같은 단일한 가족에 속해 있으며, 따라서 인간 공동체로 가는 여권을 기초로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당신의 동기를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내 베개 밑에서 비슷한 동기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 안에서 똑같은 경험을 발견하여 당신의 경험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이 사랑 때문에 얼마아 괴로웠는지 안다. 나 또한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 저녁을 견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의 질투를 인정한다. 나 또한 나의 부족한 면으로 인해 겪은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232-233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을 직접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비슷한 상황에서 느낄 만한 것을 생각하여 그들이 영향을 받는 방식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 형제가 고문을 받고 있다 해도, 우리 자신이 편안하다면 우리는 그가 겪는 고통을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오직 상상에 의해서만 그가 느끼는 고통에 대한 개념을 형성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상상에 의해 우리 자신을 그의 상황에 집어넣고 우리 자신이 똑같은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한다.'
상상으로 남들과 함게 고통을 겪는 것의 미덕에도 불구하고, 베개 이론의 우울한 전제는 남들의 경험을 진정으로 상상하려면 충분한 경험이 축적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축적된 경험만으로는 절대 우리 자신을 넘어선 곳에서 만나는 감정들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전제는 우울할 수밖에 없다.  233
사람들은 자신이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도 우리가 그들의 경험이 어떤 것이지 알아야 한다는 가정 때문에 자기 경험의 본질에 관해 입도 뻥긋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삐치기 잘하는 사람은 말을 하거나 비유를 들거나 설명을 하지 않아도 자신이 남들에게 이해받을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기 쉽다. 말을 한다는 것은 말 이전의 더 친밀한 수준의 소통이 좌절되었다는 증거일 뿐이라는 것이다. 직관이 고장이 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목청으 ㄹ가다듬어야 하며, 따라서 우리의 목소리는 우리의 외로움을 일깨울 위험이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직접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235

누구나 감추는 것이 있다. 누구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어떤면을 알면 그 후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욕구 뒤에는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이 알려지면 우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놓여 있다. 그래서 속임수를 쓰는 바람에 이따금씩 비밀이 드러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기게 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게 되면 부모 앞에 선 아이처럼 열등한 위치에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투명성에 대한 공포, 다른 사람이 선태긔 여지를 주지 않고 우리의 비밀을 알아낼 것이라는 공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공개를 좌우하는 주인이라는 생각, 우리가 남들보다 우리 자신을 잘 안다는 생각 때무넹 점차 줄어들게 된다.  240-241

어떤 사람의 행동이 중요할수록 그 사람의 하찮은 것들도 흥미를 자아낸다.  301
인간은 세 가지 전기적 범주로 나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부터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i] 특별하지만 평범한 일(의자에 앉거나, 자식을 낳거나)을 하는 것.
[ii] 평범하지만 특별한 일(살인을 하거나, 복권에 당첨되거나)을 하는 것.
[iii] 평범하면서 평범한 일(포테이토칩을 먹거나 우표를 사거나)을 하는 것.  302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두 노부인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한쪽 여자의 남편에게 줄 생일 선물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래리한테 뭘 해줄 거야?"
"모르겠어. 올해는 아무 생각이 안 떠오르네."
"책을 사주는 게 어때?"
"그럼 무슨 얘기가 나올지 뻔해."
"뭐라고 하는데?"
"이럴거야. '내가 장님이고 귀머거리인 것도 모자라, 술꾼으로 까지 만들려는 거야?'"
굳이 가서 확인할 필요도 없이,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어떻게 반응할지 정확하게 아는 것. 이것이 어떤 사람을 충분히 잘 안다는 완벽한 상징 아닐까? 가끔 오랜 결혼 생활의 우울한 특징으로, 바람을 피우거나 도예 강좌에 등록하기 직전에 나타나는 조짐으로 간주되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이 시작한 말을 정확하게 마무리하는 드문 기술에는 큰 지혜가 담겨 있다.  316

"나도 왜 내가 머리를 올리지 않는지 모르겠어. 어쩌면 올려야 할지도 몰라. 어쩌면 그게 더 나을지도 몰라, 그건 내가 왜 치즈를 정육면체로 자르는지, 내 우편번호의 끝자리가 무엇인지, 나무 빗을 어디서 샀는지, 직장까지 거리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내 자명종에 어떤 배터리가 들어가는지, 왜 나는 화장실에서 뭘 못 읽는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야. 낳산테는 나도 이해 못하는 게 많아. 솔직히 말하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도 많고. 왜 너한테는 모든 게 그렇게 분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마치 사람들의 삶이 그 말도 안 되는 전기 안에 요약 정리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나한테는 나 자신도 납득할 수 없고 당연히 너한테도 납득이 안 될 괴상한 것들이 가득해. 나도 독서를 더 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TV 보는 게 더 편해. 나한테 잘 대해주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툴툴거리는 사람들이 한번 달려들어보고 싶다는 의욕을 더 자극해. 나는 동정심을 발휘하고 싶지만, 행복이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다는 걸 알아.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싶지만, 차가 더 편해. 아기를 낳고 싶지만, 어머니가 되는 게 무서워. 내 인생에서 무너가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8시 15분이 지났기 때문에 이러다 지하철을 놓치는 게 아닌가 안달하고 있을 뿐이야."  330-331


옮기고 나서
사람들을 알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공감하게 되고, 공감하면 사랑하게 되느 ㄴ것일까? 다시 말해서, 아는 만큼 공감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 그관계를 떠나, 이 가정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사람을 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332
'내 글은 모두 일종의 자서전이죠. 나는 늘 독자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관련을 맺는 것, 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글을 쓰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아시아나 기내지 2010년 4월 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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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하지 않음' , '분위기 따위가 안정되지 않고 뒤숭숭함'이다.
이 단어를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인간 존재의 밑 바닥에 자리잡은 허무(虛無)로부터 비롯하는 위기적 의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심리적인 것이다. 불안이라는 단어는 사람의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심리적 단어이다.

우리는 불안을 늘 가지고 살아간다. 사람은 자신이 해 보지 않은 것을 하려 할때 언제나 불안감이 언습한다. 또한 일상에서도 자신이 늘 하는 것과 거리가 있는것일 수록 불안감을 더 느끼게 된다.
아무런 이유없이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하거나, 가슴이 두근두근거리기도 한다.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면 우리는 불안이 엄습하는 느낌을 가진다. 이유를 모르기때문이다. 즉 우리는 이유를 모르는 것이 발생할 때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불안에 대한 저자의 원인 규명과 해법을 서술한 책이다.
'불안'이란 단어는 매우 포괄적이다. 
책의 제목은 단순하게 불안이란 표현을 하였지만, 원서의 제목은 <Status Anxiety> 즉, '지위에 대한 불안'이다. 
저자는 불안 중에도 인간이 많이 느끼는 것 중의 하나인 지위에 대한 인간적인 불안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위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원인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을 제안한다.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원인은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이며, 그에 대한 해법으로는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이다.
한국사람들에게도 꽤나 유명한 저자의 철학적 사색과 철학자들의 사색을 통해 우리는 위안과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세계화에 의한 발전과 압도적인 신자유주의자들의 등살에 대한민국은 죽을때까지 공부해야 하는 나라가 되어 있다. 
그것은 더 나은 직업과 더 나은 지위를 얻지 못하면 안 된다는 심리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실제 세계의 기득권층은 그렇게 만들어 가고 있다. 그들만의 즐거움과 권력을 위해 같은 세대간의 경쟁, 세대간의 경쟁, 진입장벽등을 통해 억누르고, 교육을 통해 이겨야만 한다는 세뇌를 시켜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신세계>에서 유전자 조작으로 이미 태어나고 무의식상태로 세뇌되어 태어날때부터 자신의 역할이 정해져 있다고 느끼는 그러한 상태가 지금의 이 시대에 우리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심리적인 무력감에 기인한다.

우리가 조금 떨어져서 세상을 바라보고 주입된 주관성이 아니라 좀더 넓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그것이 보이게 된다.
보통의 생각과 접근을 따라가면서 객관성에 조금더 가까이 가게 될 수 있을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많이 공감이 간 내용들은 철학과 보헤미안이며,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었던 부분은 예술과 기독교 였다.



정의 
지위 - 사회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 지위(status)는 신분이라는 뜻의 라틴어 statum('서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stare의 과거분사)에서 파생되었다.
        - 좁은 의미에서 이 말은 한 집단 내의 법적 또는 직업적 신분을 가리킨다(기혼자, 중위등). 그러나 더 넓은 의미에서는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을 가리키며, 이 책에서는 이 의미가 더 중요하다.

지위로 인한 불안 -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 위험에 처했으며, 그 결과 존엄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 우리가 사다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우리의 자아상(自我像)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 안타까운 것은 높은 지위를 얻기가 어려우며, 그것을 평생에 걸쳐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것이다. 지위는 자신의 실수와 실패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적의 때문에 실패할 수도 있다.
                         - 실패에서 굴욕감이 생긴다. 우리의 가치가 아니라 성공한 사람들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부끄러워할 처지에 놓였다는 괴로운 인식에서 나온다.

명제 - 지위에 대한 갈망은 다른 모든 욕구와 마찬가지로 쓸모가 잇다. 이것은 자신의 재능을 공정하게 평가하도록 자극하며, 남들보자 나아지도록 고무하며, 남에게 해를 주는 괴팍한 행동을 못하게 억제하며, 공동의 가치 체계를 중심으로 사회 구성원들을 결합한다. 그러나 모든 욕구가 그렇듯이, 이 갈망도 지나치면 사람을 잡는다.
       -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가장 유익한 방법은 이 상황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7-10


원인
I. 사랑결핍
지위와 관련된 사랑을 받는 사람 역시 낭만적인 사랑을 받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호의적인 눈길을 받으며 편안함을 느낀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16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The Theory og Moral Sentiment)>에서 "인간 삶의 위대한 목적이라고 하는 이른바 삶의 조건의 개선에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이 주목을 하고, 관심을 쏟고, 공감 어린 표정으로 사근사근하게 맞장구를 치면서 알은체를 해주는 것이 우리가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자가 자신의 부를 즐거워하는 것은 부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상의 관심을 끌어 모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부끄러워한다. 가난 때문에 사람들의 시야게서 사라졌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가장 열렬한 욕구의 충족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18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21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22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자신의 인겨겨을 신뢰할 수도 없고 그 인격을 따라 살 수도 없다.  23




II.속물근성
'속물근성(snobbery)'이라는 말은 영국에서 1820년대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많은 대학의 시험 명단에서 일반 학생을 귀족 자제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옆에 sine nobilitate(이것을 줄인 말이 's.nob.'이다), 즉 작위가 없다고 적어놓는 관례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 말은 처음에는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을 가리켰으나, 곧 근대적인 의미, 즉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28
신문 때문에 문제는 더 복잡해 진다. 속물은 독립적 판단을 할 능력이 없는 데다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갈망한다.  33
두려움은 세대를 따라 전해진다.. 속물도 속물을 낳는다.  35
젊은 시절에 속물근성에 분개했다고 해서 그 뒤에 스스로 속물이 되어가지 말란 법도 없다. 거만한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36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38

III. 기대
18세기 초 영국에서 서양의 위대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농경 기술 덕분에 생산이 급격히 늘어나고, 산업과 교역이 늘게된다.
증기기관과 면 역직기로 사회적 기대가 바뀌었다. 도시 규모가 급격히 팽창했다. 
사치품은 일반용품이 되었으며 일반용품은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46
유럽과 미국 전역에 거대 백화점이 문을 열고, 과학기술 발명품이 속속등장한다. 
전역에 쇼핑몰의 발전은 새로운 갈망들이 생겨났다. 1970년대에 이르자 미국인들은 일터와 쇼핑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55
어떤 것의 적절한 수준은 결코 독립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준거집단(準據集團), 즉 우리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조건과 우리의 조건을 비교하여 결정된다.
설사 웃풍이 심하고 비위생적인 오두막에 살면서 크고 따뜻한 성에 사는 귀족의 지배에 시달린다 해도, 우리와 동등한 사람들이 우리와 똑같이 사는 것을 본다면 우리의 조건은 정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57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겨 우리 자신과 비교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질투할 사람도 늘어난다.  60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1835)의 '왜 미국인은 번영 속에서도 그렇게 불안을 느끼는가'라는 제목의 장에서 불만과 높은 기대, 선망과 평등의 관계를 끈질기게 분석한다.
".. 불평등이 사회의 일반 법칙일 때는 아무리 불평등한 측면이라도 사람들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대체로 평등해지면 약간의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 그래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이 종종 묘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평온하고 느긋한 환경에서도 삶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자살률 증가를 걱정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자살은 드문 대신 광증이 다른 어느 곳보다 흔하다고 한다."  67
하버드 심리학 교수인 제임스는 '시도가 없으면 실패도 없고, 실패가 없으면 수모도 없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자존심은 전적으로 자신이 무엇이 되도록 또 무슨 일을 하도록 스스로를 밀어붙이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실체 성취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  자존심 = 성공/잠재력'
제임스의 방정식은 우리의 기대 수준이 높아지면 수모를 당할 위험도 높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무엇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이 결정된다.  71
장-자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4)에서 다들 야만인과 근대의 노동자 가운데 노동자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과연 정말일까 하고 물었다.
루소의 주장은 부에 대한 명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근대 사회는 첫 번째 방법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욕망에 줄기차게 부채질을 하여 자신의 가장 뛰어난 성취의 한 부분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부유하다고 느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와 같다고 여겼지만 우리보다 더 큰 부자가 된 사람과 실제로나 감정적으로나 거리를 두면 된다. 더 큰 물고기가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옆에 있어도 우리 자신의 크기를 의식하며 괴로울 일이 없는 작은 벗들을 주위에 모으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면 된다.
발전하는 사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전보다 높아진 소득을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를 더 부유하게 해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볼 때 우리를 더 궁핍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80-81

IV. 능력주의 
예수가 전도를 시작한 서기 약 30년부터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회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처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미에 대하여 세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들은 그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듣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불안을 덜어주었을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 -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 책임이 아니며 가난한 사람은 사회에서 가장 쓸모가 크다.
두 번째 이야기 - 낮은 지위에 도덕적 의미는 없다.
세 번째 이야기 - 부자는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강탈하여 부를 쌓았다.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서기 30년부터 1989년까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인 가장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그것들이었다. 이 이야기들은 좋은 운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기운을 북돋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86-95
안타깝게도 18세기 중반 무렵부터 괴로운 이야기 세 가지가 생겨나 꾸준히 영향력을 늘여가면서 앞의 이야기들에 도전하게 되었다.
첫 번째 이야기 - 빈자가 아니라 부자가 쓸모있다.
버나드 맨드빌은 운문으로 쓴 소채자 <벌의 우화>를 발표했고, 이것이 부자와 빈자를 바라보는 방법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97
두 번째 이야기 - 지위에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세 번째 이야기 - 가난한 사람들은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어리석음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새뮤얼 스마일스는 <자조>(1859)에서 궁핍한 젊은이드에게 높은 목표를 세우고, 공부하고, 신중하게 돈을 쓰라고 권한 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돕는 정부는 비난했다. '사람들 대신 일을 해주면 그들에게서 스스로 그 일을 할 동기와 필요를 빼앗게 된다. 법을 인간 발전의 동인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과대평가다. 아무리 엄중한 법이라도 게으른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들 수 없고, 낭비벽이 심한 살마을 검소하게 만들 수 없고, 주정뱅이가 술을 끊게 만들 수 없다.'  116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  119

V. 불확실성
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다. 생계를 우지하고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면 적어도 다섯 가지 예측 불가능한 요인이 뜻대로 따라주어야 하는데, 이것은 사회적 위계 내에서 자신이 바라는 자리를 얻거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다섯 가지 이유가 되기도 한다.
① 변덕스러운 재능
지위가 성취에 의존한다면 성공에 일반적으로 필요한 것은 재능과 그 재능을 믿을 만하게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다.  124
② 운
우리의 지위는 '운'이라는 말로 느슨하게 얽어 넣을 수 있는 어떤 범위의 우호적 조건들에 의존하고 있다.  125
승자는 운을 만든다. 이것이 현대의 주문(呪文)이다.  127
③ 고용주
삶의 조건의 예측 불가능성은 우리의 지위 문제가 고용주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더욱 심각해진다.  127
④ 고용주의 이익
고용의 안정성은 조직 내의 정치만이 아니라 회사가 시장에서 계속 이윤으 ㄹ내는 능력에도 달려 있다.  132
⑤ 세계 경제
회사와 종업원들의 생존은 경제 전체의 성적 때문에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기도 한다.  134

우리가 실패에 대한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성공을 해야만 세상이 우리에게 호의를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136
인간은 웃어줄 만한 확실한 이유가 없으면 좀처럼 웃엊지 않는 법이다.  137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에 어떤 동지애가 이룩된다 해도, 노동자가 어떤 선의를 보여주고 아무리 오랜 세월 일에 헌신한다 해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지위가 평생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그 지위가 자신의 성과와 자신이 속한 조직의 경제적 성공에 의존한다느 것, 따라서 자신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감정적인 수준에서 변함없이 갈망하는 바와는 달리 결코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늘 불안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142-143



해법
I. 철학
명예의 문제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사람들을(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예를 위해 결투하는 관습)  비난하는 눈으로 바라볼지 모르지만, 그러는 우리도 그런 사람들의 정신구조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공휴하고 있을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의 경멸에 매우 약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자존심 역시 다른 사람들이 부여하는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우리도 성질 급하게 결투에 나서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을지 모른다.  152
'다른 사람들의 머리는 진정한 행복이 자리를 잡기에는 너무 초라한 곳이다.' -쇼펜하우어 <소품과 단편집>(1851)
'자연은 나에게 '가난해지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 또 '부자가 되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자연은 나에게 '독립적으로 살라'고 간청할 뿐이다. -샹포르 <격언집>(1795)
'나를 부유하게 하는 것은 사회에서 내가 차지하는 자라기 아니라 나의 판단이다. 판단은 내가 가지고 다닐 수 있다... 판단만이 나의 것이며, 누구도 나에게서 떼어낼 수 없다.' -에픽테토스 <어록>(100년경)  154
철학은 외부의 의견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한다. 상자를 하나 떠올리면 좋을 것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른 살마들의 인식은 모두 이 상자에 먼저 들어가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만일 그것이 참이면 더 강한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만일 거짓이면, 웃음을 터뜨리거나 어깨를 으쓱하고 털어버리는 것으로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주지 못하고 사라져버린다. 철학자들은 이 상자를 '이성'이라고 불렀다.  


철학은 성공과 실패의 위계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 과정을 재구성할 뿐이다.  159
감정은 과녁을 넘어가거나 못 미치기 십상이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이성을 이용하여 감정을 적절한 목표로 이끌라고 충고해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자문해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데미아 윤리학>(기원전 3590년경)에서 인간 행동은 제어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보통 극단으로 흐르는 오류를 범한다고 예를 들어 설명한 뒤, 지혜로우면서도 침착한 중도(中道)를 이상으로 제시하면서, 이성의도움을 받아 중도에 이르는 것을 행동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160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서글픈 동시에 묘하게 위안이 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고 이야기해왔다. 어떤 문제이든 다수의 의견에는 혼란과 오류가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샹포르는 '여론은 모든 의견 가운데 최악의 의견이다.' 
아첨을 하듯이 상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개 언어도단에 가깝다고 덧붙인다. 단순화와 비논리, 편견과 천박함으로 얼룩뎌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나 가장 터무니없는 관습과 가장 어처구니없는 의식들이 '하지만 그것이 전통이야'라는 말로 용인되고 있다.'  163
철학적인 접근 방법의 장점은 심리적인 면에서 드러난다. 누가 우리에게 번대하거나 우리를 무시할 때마다 상처를 입는 대신 먼저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이 정당한지 검토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비난 가운데도 오직 진실한 비난만이 우리의 자존심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  164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피상적이고 하찮다는 것, 그들의 시야가 편협하다는것, 그들의 감정이 지질하다는것, 그들의 의견이 빙퉁그러졌다는 것, 그들의 잘못이 수도 없이 많다느 것을 알게 되면 점차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철학적 연세주의의 중요한 모범을 보여준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165
쇼펜하우어는 묻는다. 정말로 그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할까?
'만일 청중 한두 사람만 빼고 모두 귀머거리라면 그들의 우렁찬 박수 갈채를 받는다 해서 연주가가 기분이 좋을까?'  166
이렇게 인간성을 통창력 있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유용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불리한 점은 이런 관점을 따를 경우 친구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166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에서는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는 곧이어 모든 젊은이들이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충고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만날 일이 줄어 들수록 더 낫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167
철학자들은 함께 모여 연구를 한 것도 아닌데 입을 모아 외부의 인정이나 비난의 표시보다는 우리 내부의 양심을 따르라고 권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하는 것이다.  168

II. 예술
예술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많은 논평자들이 이런 답을 내 놓았다. 별 쓸모가 없다.  171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보라. 영국 문단에서 시인이자 비평가인 매슈 아널드는 제안한다. '인간의 잘못을 없애고, 인간의 혼돈을 정리하고, 인간의 곤궁을 줄이고자 하는 욕망'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세상을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낫고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갈망'에 사로잡혀 있다. 예술가들이 이런 갈망을 늘 노골적인 정치적 메시지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스스로 그런 갈망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항의가 나타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고, 아름다움을 인식하도록 교육하고, 고통을 이해하거나 감수성에 다시 불을 붙이도록 돕고, 감정이입 능력을 길러주고, 슬픔이나 웃음을 통하여 도덕적인 균형을 다시 잡아주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174


(저자는 소설 그림 비극 희극 유머를 예로들며 예술작품이 인간의 균형을 위한 어떤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비극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실패에 평소보다 훨씬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 잡품을 통해 실패의 유래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더 많이 아는 것은 곧 더 많이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211
프로이트는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1905)에서 '우리는 농담을 통해 장애 때문에 공개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적의 우스꽝스러운 부분을 활용할 수 있다.'
'농담의 형태가 아니라면 결코 듣지 않을 사람의 귀에도 들어가게 할 수 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비판할 때 농담을 특별히 애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23
만화가들의 밑바닥에 깔린 무의식적 목표는 유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그런 식으로 조롱할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세상을 만들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234

III. 정치
지위를 분배하는 원칙은 무엇인가?  244
이상적인 지위는 오래전부터 계속 바뀌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이런 변화 과정을 묘사하는 데 정치라는 말을 사용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246
부를 축적한 사람은 일단 주요한 미덕이 적어도 네 가지는 있다고 칭송을 받는다. 그 네 가지란 창의성, 용기 지능 ,체력이다. 
돈에는 윤리적 가치가 부여된다. 돈은 그 소유자의 미덕의 증거다.  248
이런 이상이 아무리 자연스러워 보인다 해도.. 이것은 단지 인간이 만든 것일 뿐이다.
소스틴 베블런의 <유한계급론>(1899)에서 한 말에 따르면, 상업 사회에서는 덕은 잇지만 가난한 사람은 존재하기 어렵다. 따라서 아무리 물질주의적인 태도와 거리가 먼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부를 축적하여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불명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요구를 느낄 것이며, 그렇게 하지 못하면 불안한 마음과 책임감에 시달릴 것이다.  249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필수품'으로 꼽히게 되었다. 그것들을 소유하지 않으면 아무도 품위 있는 살마이라고 여기기 않으며, 따라서 심리적으로 편안한 생활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250
근대으 성공적 삶이라는 이상은 돈과 선(善)을 연결시킬 뿐 아니라, 또 하나의 연결도 시도한다. 즉 돈과 행복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런 관념은 세 가지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첫째는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확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로 근대 문명에서 접할 수 있는 엄청나게 다양한 직업과 소비재가 우리의 행복과 별 관계없이 욕망만 부추기는 번지르르한 소모적 전시품이 아니라, 실제로의 가장 중요한 요구 몇 가지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쓸 수 있는 돈이 많을 수록 제품과 용욕도 더 많이 이용할 수 있고, 따라서 우리가 행복해질 가능성도 커진다는 것이다.  258
이런 가정들에 반박하는 가장 강력하면서도 읽기 쉬운 책은 여전히 장-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다.  259
선사시대에는 인간이 루소가 말하는 자연 상태에서 살았는데, 이때는 사람들이 숲에 살면서 장을 보지도 신문을 읽지도 않았다. 루소는 이 시기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더 수비게 이해했으며, 만족스러운 삶의 핵심적인 특징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고 상상한다.  260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268
우리는 어떤 직업이 주는 매력도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 눈에 보이는 것이다.
선망을 멈추지 못한다면, 엉뚱한 것을 선망하느라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인가.  269
존 러스킨은 <이 최후의 사람에게>에서 부에 대한 일반적인 금전적 관점을 버리고 '삶'에 기초한 관점을 채택하라고 호소했다.  271
토머스 칼라일도 <미다스(Midas)>에서 '우리는 삶의 호화로운 장식은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 와중에 사는 것은 잊어버렸다... 우리는 현금 지불이 인간들의 유일한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273-274

사회적 위계 때문에 아무리 기분이 상하거나 난처해지더라도 우리는 그런 위계가 너무 뿌리가 깊고 너무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그 위계를 지탱하는 공동체나 신념들을 바꾸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이런 위계가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하여 체념을 하고 그냥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275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들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이런 과념들은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면 결코 지배를 할 수가 없다.
이데올로기적인 진술의 핵심은 높은 수준의 정치적 감각이 없으면 그 편파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무색무취의 가스처럼 사회에 방출된다. 그것은 신문, 광고, 텔레비전 프로그램, 교과서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이데올로기느 ㄴ자신이 편파적인, 어쩌면 비논리적이고 부당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세상에 접근한다는 사실을 감추면서, 자신은 그저 오래된 진실을 이야기할 뿐이며, 오직 바보나 미치광이만이 여기에 반대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278
'꼭 이래야 하는가?'
억압적 상황은 영원한 고통을 겪으라는 자연의 심판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변화 가능한 어떤 사회 세력들 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잇다. 이렇게 되면 죄책감과 수치감은 이해로, 지위의 더 평등한 분배 방식에 대한 탐구로 바뀔 수도 있다.  279
관념이나 제도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때는 고통의 책임을 아무에게도 묻지 못하거나 고통을 겪은 당시자에게 묻게 된다.  281
정치적 관점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다. 분석을 통하여 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밝혀 그 뇌관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어리둥절한 채 우울한 표정으로 대응하던 태도를 버리고, 눈을 똑똑히 뜨고 그 원인과 결과를 계보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284
정치적 어려움을 이해하는 것은 기후 위성으로 기상 상태의 위기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늘 문제를 막어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거기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유용한 것을 가르쳐 준다. 그 결과 피해의식, 수동적 태도, 혼란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288

IV. 기독교
죽음을 생각하는 관점에서 의미있는 활동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기독교적인 생각과 세속적인 생각은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 진정한 사회관계, 자선에 대한 강조는 공통되는 것 같다. 또 권력, 군사적인 힘, 금전적인 야욕, 명예에 대한 관심을 비판하는 것도 공통되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한 생각 옆에 갖디 놓으면 어떤 행동들은 하찮아 보일 수밖에 없다.  301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전도서>의 저자는 그렇게 탄식한다(1장 2절)
'한 세대가 가면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이 땅은 영원히 그대로이다'(1장 4절)  303
기독교 도덕가들은 불안을 달래려면 낙관적인 사람들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모든 것이 최악으로 흘러간다고 강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천장은 무너져 내리고, 은행은 폐허가 되고, 우리는 죽고,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사라지고, 우리가 이룬 것들, 심지어 우리의 이름마저 땅에 짓밟힐 것이다. 이런 생각이 위로가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지위에 대한 우리으 ㅣ하찮은 걱정을 천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미미함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된다.  320
우리 자신이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은 우리 자신을 더 중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321

(그림1과 2는 58페이지에 언급된 내용이며, 그림3과 4는 321페이지에 있다.)


물론 기독교는 세속 도시와 그 가치를 없애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도 서양에서 사람들이 부와 미덕을 구분한다면, 또 중요한 사람이냐 아니냐만 따지지 않고 선한 사람이냐 아니냐도 따진다면, 그것은 많은 부분 수백 년 동안 자신의 자원과 위신을 이용하여 지위의 의로운 분배에 대한 몇 가지 특별한 관념을 옹호해온 기독교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342

V. 보헤미아
19세기 초 서구와 미국에서 새로운 집단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박한 옷을 입었고, 도시의 싼 지역에 살았고, 책을 많이 읽었고, 돈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다수는 우울한 기질이었고, 사업이나 물질적 성공보다는 예술과 감정에 충실했고, 가끔 단발이 유행하기 오래전에 단발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들을 '보헤미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앙리 뮈르제가 파리의 다락방과 카페의 생활을 그린 <보헤미안의 생활>(1851)을 써서 성공을 거둔 뒤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품위라는 부르주아적 개념에 들어맞지 않는 광범위한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351
아서 랜섬은 <런던의 보헤미아>(1907)에서 '보헤미아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태도다'라고 말했다.  352


보헤미안들은 부르주아지가 대표하는 거의 모든 것을 지독하게 싫어했으며, 그들을 무절제하게 모욕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353
보헤미아와 부르주아지를 궁극적으로 갈라놓는 것은 대화의 화제나 후식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누가 높은 지위를 얻을 자격이 있고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하는 문제엿다.  354
부르주아지는 상업적 성공과 공적인 평판에 기초하여 지위를 부여한 반면, 보헤미안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 우아한 집이나 옷을 살 수 있는 능력보다 당연히 더 중요했던 것은 세상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감정의 주요한 저장소인 예술에 관람자나 창조자로서 헌실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보헤미안의 가치 체계에서 순교자적 인물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또는 여행이나 친구와 가족에게 헌신하기 위해 안정된 정규 직장과 사회의 존경을 희생한 사람들이었다.  355
보헤미안의 가치 체계에서는 돈으로 명예를 얻지 못하듯이 소유로도 명예를 얻지 못한다. 그것은 오만과 천박의 상징이다.  360
1845년 7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보헤미안 가운데 한 사람인 헨리 소로는 메사추세츠 주 콩코드 시 근처 월든 호수에 자신이 손으로 지은 통나무집으로 이사했다. 
소로는 '사람은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행복해진다.'
'영혼에 필요한 것을 사는 데 돈은 필요하지 않다.'  364
주류 문화와 갈등하면서도 자신 있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직접적인 환경에서 작동하는 가치 체계. 우리가 사교적으로 어울리는 사람들, 우리가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보헤미안들의 통찰이다. 
보헤미안들은 대도시에 살면서 지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피하고 대신 진정한 친구들과 매일 접촉할 수 있는 동네에 모여 살았다.  364
보헤미안들은 또 실패라는 말도 조심스럽게 재규정했다.
보헤미안들은 세상이 어리석음과 편견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여 외적인 실패를 버로 해석하지 않았다.  366
오해를 받고 거부를 당하며 살지만 그럼에도 인사이더보다 우월한 아웃사이더라는 신화는 보헤미아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 다수의 삶을 반영하거나 그 삶을 규정한다.  367
집단과 그 전통은 열등하다는 보헤미아의 믿음과 더불어 개인의 우월성에 대한 강조가 나타났으며, 이와 더불어 관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나타났다.
빅토르 위고는 <에르나나>(1830)의 서문에서 '이제 규칙은 없다. 재능 잇는 사람이 개인적 독창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신이 하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에세이 <자립>(1840)에서도 '인간은 모름지기 순응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결코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지 말자... 이 시대의 매끈한 평범함과 비열한 만족을 모욕하고 질책하자.'  372

보헤미아의 과도한 점을 지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많은 보헤미안들이 영적인 관심을 삶의 전면에 내세우는 데 몰두한 나머지 실제적인 문제를 태만히 햇다. 이 대문에 그들은 생존할 만한 일을 찾는 데 안간힘을 써야 했으며, 이렇게 되자 영을 생각할 시간은 줄어들고 몸 생각을 해야 하는 시간은 늘어났다. 심지어 물질주의적이라고 욕하던 바쁜 판사나 약사보다 나을 것이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380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 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산업가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보헤미안으로부터 인정 받을 수도 있으며,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철학자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다.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이 아무리 불쾌하다 해도 그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좋은 인생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실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창피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야심을 품고, 어떤 결과들을 선호하고, 자신 외의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데서 나오는성공적인 삶과 성공적이지 못한 삶 사이의 공적인 차이를 인정할 경우 치를 수밖에 없는 대가다.
그러나 지위에 대한 요구는 불변이라 해도, 어디에서 그 요구를 채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창피를 당할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은 어떤 집단의 판단 방식을 우리가 이해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결국 우리가 따르는 가치와 관련이 되는 경우에만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따르는 것은 두려움을 느껴 나도 모르게 복종을 하기 때문이다. 마취를 당해 그 가치가 자연스럽다고, 어쩌면 신이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거기에 노예처럼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너무 조심스러워 대안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 이 다섯 집단은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수치와 명예의 구분 자체는 유지하면서, 무엇이 각 항복에 속해야 하는지를 재규정하려 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각 세대마다 높은 지위에 대한 지배적인 관념들을 충실하게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럼에도 패자나 이름 없는 사람이라는 잔인한 규정과는 다른 규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정당성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 판사나 약사의 결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384-385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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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유명한 책이다. 저자의 책은 여러권을 읽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6,7년쯤 전이라고 기억한다.(물론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와 지금은 분명 다르다. 그때의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읽으면서 느낌이라는 것이 있는데 나에게 더 많이 와 닿는 것이 있었다.
책은 저자의 처녀작이기도 하고 20대 중반에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통찰적 부면은 가히 뛰어나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특히나 한국 사람에게는 더욱 크게 와 닿을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유교적인 효 사상에 입각하여 교육을 받았기에 감정을 표출해내는데 매우 서툴다. 그러기에 어느새 감정의 새새함을 잊고 있는데 이 책은 그것을 디테일하게 서술하고 있으니 우리에게는 고개를 끄덕이고 무릎을 치는 표현들이 곳곳에서 박견될 수 밖에 없다. 
쉽게 읽히면서도 깊은 표현과 철학적인 사유가 섞여 읽는 이로 하여금 즐거움을 주는 책이라 생각한다.
표지를 찾기위해 책을 검색해보니 '2010 대학 신입생 추천 도서'라고 한다.
신입생때 읽고 졸업하고 읽어보면 자신이 얼마나 지적인 성장 사유의 성장을 이루었는지 가늠해보기에도 좋은 책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새해 첫 책으로 읽은 것은 시기에 맞게 책이 들어왔기도 하지만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을 해보기 위해서 였다.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되고 관계를 형성해 나가면서 사랑에 대한 생각을 더 이상하지 않게 되고, 우리는 이전 사랑의 모습을 간직한채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된다.
그렇기에 수동적으로 한 걸음 뒤에서 할 수 있는것이 비교 관찰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우리는 관찰자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깊이 있는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렇지 않나 생각하여 새로운 생각들을 해 보기위해 책을 선택하였다.

다시금 저자의 내면의 감정 서술에 감탄해 가면서 더불어 나의 생각들도 정리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역자 후기에서는 이 책이 95년도에 <로맨스>(한뜻출판사)라는 책으로 번역이 되었었다고 한다.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표지의 영문 제목을 보았다. <Essays in Love> 이다. 미국에서의 제목은 <On Love>라고 한다.
95년도의 번역은 미국식으로 제목을 정했다. 지금은 위의 제목으로 번역하였다. 제목이 참 우리에게 깊은 호기심을 유발하게 한 것이다.

 



어떤 사람을 두고 자신의 필생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살아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따라서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11
클로이를 만난 것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딱 맞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12

'사람들을 꿰뚫어보는 것은 아주 쉽다. 하지만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엘리아스 카네티(1905-94 불가리아 태생의 유대계 영국작가)...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람을 꿰뚫어보는 일을 중단하고자 하는 순간적인 의지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가끔 사랑에 빠지는 것은 습관화되다시피 한 맥빠지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19
클로이의 휴가 이야기는 지루했다. 그러나 지루함은 이제 흠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 이야기를 일상 대화의 세속적 논리에 따라서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그녀의 말에서 통찰이나 유머를 찾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녀가 그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그녀가 하는 모든 말에서 완벽함을 찾아내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이었다.  22-23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묘한 상실감, 슬픔을 느꼈다. 이것이 정말 사랑일까? ..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최초의 꿈틀거림은 필연적으로 무지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사랑이냐 단순한 망상이냐? 시간[이 또한 그 나름으로 거짓말을 하지만]이 아니라면 누가 그 답을 말해줄 수 있을까?  26

가장 매력을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가장 쉽게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한 모든 믿음을 잃었다는 뜻이다.  39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잇을 때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것은 상대가 따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매력적인 사람과 함게 있을 때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따분한 사람은 나 자신이 되고 만다.  41

생각만큼 섹스와 대립하는 것은 없다. 섹스는 본능적이고, 반성하지 않으며, 자연발생적이다. 이에 반해 생각은 신중하고, 말려들지 않으려 하고, 판단하려고 한다. 내가 섹스를 하는 동안에 생각을 했다는 것은 성적 교류의 근본법칙을 어긴 것이다.  52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안전하게 고통스럽다. 자신 외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초한 달곰씁쓸하고 사적인 고통이다. 그러나 사랑이 보답을 받는 순간 상처를 받는다는 수동적 태도는 버려야 하며, 스스로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책임을 떠안을 각오를 해야 한다.  65
클로이가 나와 함께 자고 나에게 잘해줌으로써 오히려 그녀에 대한 내 평가 점수가 낮아졌다면, 그것은 혹시 그녀가 그 과정에서 나라고 하는 심한 전염병에 감염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68
대부분의 관계에는 보통 마르크스주의적인 순간이 있다. 사랑이 보답을 받는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어떻게 헤치고 나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사랑과 자기 혐오 사이의 균형에 딸려 있다. 자기 혐오가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의 보답을 받게 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저런 핑계로]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다고 [자신의 쓸모없는 면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잘 맞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이 보답받게 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수준이 낮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72

성숙한 사랑의 이야기에서는 절대 첫눈에 반하는 일이 없다. 맑은 눈으로 물의 깊이와 성질을 완전히 조사할 때까지는 도약을 유보한다. 부모 노릇, 정치, 예술, 과학, 부엌에 비치할 적당한 간식에 관하여 철저하게 의견 교환을 한 뒤에라야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할 준비가 된 것인지 판단할 수 있다. 성숙한 사랑의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상대를 진정으로 알 때에만 사랑의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상대를 진정으로 알 때에만 사랑이 자라날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왜곡된 사랑의 현실 [우리가 알기 전에 태어나는 사랑]에서는 아는 것이 늘어날 경우, 그것은 유인이 아니라 장애가 될 수도 있다 - 유토피아가 현실과 위험한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75
가장 사랑하기 쉬운 사람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78

왜 나는 나의 일용할 양식을 파는 신문 판매소 주인은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면서 내가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할까?  93
신문 판매소 주인의 샌들은 내가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짜증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서 신문과 우유를 얻고 싶을 뿐이지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 내 영혼을 드러내고 싶지도, 그의 어깨에 기대어 울고 싶지도 않다. 따라서 그의 신발은 나에게 거치적거리지 않는다.  95
차이를 농담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 [적어도 사랑의 90퍼센트를 이루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유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짜증의 벽들을 따라서 늘어서 있었다. 농담 뒤에는 차이에 대한, 심지어 실망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긴장이 완화된 차이였고, 따라서 상대를 학살할 필요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97

아름다움이 사랑을 낳을까, 아니면 사랑이 아름다움을 낳을까? 클로이가 아름답기 때문에 내가 그녀를 사랑할까, 아니면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가 아름다울까? 무한히 많은 사람드에게 둘러싸여 사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전화를 하거나 맞은편 욕조에 누워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왜 우리의 욕망이 이 특정한 얼굴, 이 특정한 입이나 코나 귀를 선택했는지, 왜 이 목의 곡선이나 보조개가 우리의 완벽성의 기준에 그렇게 정확하게 응답했는지 묻게 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하나하나는 아름다움의 문제에 대해서 각기 다른 해결책을 제시하며, 그들의 얼굴 풍경만큼이나 독창적이고 특색있는 방식으로 매력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재규정한다.  98

나는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119
호기심이 덜한 사람이나 사랑이 덜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의미 없어 보일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 바로 연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120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와 나의 예민하고 감정이 풍부한 연인 사이에 실제로 일치하는 부분은 얼마나 될까?  120
사랑은 내가 그녀의 몸짓, 세이프웨이에서 우리와 함께 줄을 섰던 사람들에게는 달리 해석되었을 수도 있는 몸짓에 내가 부여하기로 결정한 어떤 것일 뿐이다.  121
윌은 신중하게도 클로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지 않고, 더 정확하게 내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느냐고 물었다.  122
연인들은 의심하고 캐물으려는 철학적 충동에 대립되는, 믿고 신앙을 가지려는 종교적 충동에 굴복한다. 연인들은 사랑 없이 의심을 하는 것보다는 틀려도 사랑을 하는 모험을 더 좋아한다.  130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오직 인간만이 연체동물이나 지렁이와는 달리 자신을 규정하고 자의식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143
의미론적으로 볼 때 사랑과 관심이 거의 맞바꾸어 쓸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는 나비를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나는 나비에 관심이 많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며, 그 관심으로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 더 풍부하게 느끼게 해 준다는 것이다.  144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많은 부분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로 구성된다.  169
나는 클로이에 대한 내 사랑이 그 순간으 나의 자아의 본질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이 한시적인 것으로서 끝을 맺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내 일부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73

현재를 살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평생 갈망해온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깨달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기대나 기억이라는 보호를 받는 자리에서 벗어나는 데에 대한 두려움이며, 이것이 내가 살 수 있는 단 한 번의 삶 [천국의 개입은 논외로 하고]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다. 헌신릉 한 판의 달걀이라고 본다면, 현재에 헌신하는 것에는 달걀을 과거와 미래의 바구니에 나누어 담지 않고 모두 현재의 바구니에 나누어 담지 않고 모두 현재의 바구니에 담는 위험이 있다. 이 비유를 사랑으로 옮긴다면, 내가 클로이와 행복하다는 사실을 마침내 인정하는 것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내 모든 달걀이 그녀의 바구니 안에 확실하게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181
사랑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 답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더 무시무시한 의문이 있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 것이냐 하는 의문이다. 이것은 마치 건강과 힘이 충만한 상태에서 자신의 죽음을 상상해보려는 것과 같다.  186

내 소망은 내가 모든 것을 잃고 '나'만 남았다고 해도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이 신비한 '나'는 가장 약한, 가장 상처받기 쉬운 지점에 자리잡은 자아로 간주된다. 내가 너한테 약해 보여도 될 만큼 나를 사랑하니? 모두가 힘을 사랑한다. 하지만 너는 내 약할 것 때문에 나를 사랑하니? 이것이 진짜 시험이다. 너는 내가 잃어버릴 수도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린 나를 사랑하는가? 내가 영원히 가지고 있을 것들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가?  192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하는 질문만큼이나 대책 없는 [또 훠씬 덜 즐거운]질문이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완전한 오만으로 기울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한 겸손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겸손한 연인은 자신이 무엇을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묻는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사랑을 거부당하는가?' 배반당한 연인은 그렇게 묻는다. 그러면서 오만하게도 절대 자신의 몫이 아닌 선물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사랑을 베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하여 오직 한 가지 대답밖에 할 수가 없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이 답을 듣게 되면 질문을 했던 사람은 자만과 우울 사이에서 위험하게, 예측할 수 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201-202
모든 삐침의 밑바닥에는 그 즉시 이야기를 했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질 수 있는 잘못이 놓여 있다.  209
불쾌한 일이 있으면 그 즉시 화를 표현하는 것이 가장 너그러운 일이다. 그렇게 하면 상대는 죄책감을 키울 필요도 없고, 전투를 중단해달라고 삐친 사람을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210

사랑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야. 느끼는 것과 하는 일이 모두 강렬해진다는 것이 중요한 거지.  220
이마누엘 칸트에 따르면 도덕적 행동이 비도덕적 행동과 구별되는 것은 그것이 고통이나 쾌락과는 관계없이 의무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의 행동에 대한 보상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의무감에만 인도되어 어떤 행동을 할 때 나는 도덕적이다.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선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도덕률에 일치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행동이 도덕률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기질의 결과로 이루어진 행동은 도덕적이라고 할 수 없다.
칸트 이론의 핵심은 도덕성이란 어떤 행동을 수행하는 동기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예상되는 보답에 관계없이 사랑을 할 때에만, 사랑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랑을 줄 때에만 도덕적이다.  223
나는 나에게 쾌락을 주느냐 고통을 주느냐에 따라서 클로이에게 어떤 도덕적 딱지를 붗일 것이냐를 결정했다. 나는 세계와 그녀가 이 세계 속에서 가지는 의무를 나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판단하는, 자기 중심적인 도학자였다. 나의 도덕률은 나의 욕망의 승화된 형태일 뿐이다.  225-226
사랑이 없다면,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산다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자유라는 것이 버림받을 자유를 의미한다면 자유란 대체 무엇인가?  226
사랑의 보답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사랑을 받고 싶다는 오만이 생겨났다 나는 내 욕망만 가지고 홀로 남았다. 무방비 상태에, 아무런 권리도 없이, 도덕률도 초월해서, 충격적일 정도로 어설픈 요구만 손에 든 모습으로. '나를 사랑해다오!' 무슨 이유 때문에? 나에게는 흔히 써먹는 지질하고 빈약한 이유밖에 없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228

고통을 겪으면서 무한히 지혜로워진 나는 물론 그녀가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녀를 용서하고, 동정하고, 그녀에게 선심을 쓸 수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무한한 안도감을 주었다.  247
클로이가 떠나는 바람에 나는 죽을 뻔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도덕적으로 높은 자리라는 영광스러운 지위에 올라갈 수 있었다. 나는 순교자였다. 
예수 콤플렉스는 마르크스주의의 정반대편에 자리잡고 있다. 자기 증오에서 생겨난 마르크스주의 때문에 나는 나를 받아들이려는 어떤 클럽의 회원이 되지 못했다. 예수 콤플렉스 역시 나를 클럽 문간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자기 사랑의 결과이며, 내가 클럽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내가 너무 특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249
자기 혐오를 피해가려고 약점을 미덕으로 바꾸는 연금술에는 공감을 할 수밖에 업삳. 나의 고통이 예술 콤플렉스로 진화환 것에는 틀림없이 어느 정도 건강한 면이 있었을 것이다. 자기 혐오와 자기 사랑 사이의 미묘한 내적 균형에서 이제 자기 사랑이 우세한 위치에 있었다. 클로이가 나를 버린 것에 대한 나의 최초의 반응은 자기 혐오적인 것이었다. 우리 관계를 풀어나가는 데 실패한 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계속 클로이를 사랑했고 나 자신을 미워했다. 그러나 예술 콤플렉스가 생기면서 그 등식이 뒤집혀, 이제 클로이가 나를 찬 것은 클로이를 경멸할 만한, 잘해야 동정할 [기독교 미덕의 모범] 만한 증거로 해석되었다. 예수 콤플렉스란 자기 방어 메커니즘에 불과했다. 나는 클로이가 나를 떠나기를 바라지 않았고, 그 어떤 여자보다 클로이를 사랑했는데, 이제 그녀는 캘리포니아로 날아갔다. 내가 그 견딜 수 없는 상실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처음부터 그녀가 그렇게 가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고 뒤집어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거짓말이엇다. 그러나 버림받아 절망적인 상태일 때, 옆방에서 들려오는 행복에 겨운 오르가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호텔 방에서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낼 때, 정직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251

헤어짐이 없었던 것 같은, 우리가 여전히 함께하는 것 같은 환각에 빠지기도 햇다. 언제라도 전화를 걸어서 오디온으로 영화를 보러 가자거나 공원에 산책을 하러 가자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러다가 갑자기 어떤 일이 벌어져서 나는 클로이가 없는 현재로 거세게 내동댕이쳐지곤 했다. 전화벨이 울려서 전화를 받으러 가는 길에 욕실에 클로이가 빗을 두었던 자리가 이제는 비어 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곤 했다. 빗이 없다는 사실이 심장을 찌르는 단검처럼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고,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253
변화의 거부는 세계가 내 영혼을 반영하지 않는단는 것, 내가 거기 살든 살지 않든, 행복하든 불행하든, 살아 있든 죽었든 관계없이 움직여가는 독립된 실체임을 일깨워주었다.  255
그러다가, 불가피하게, 나는 잊기 시작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몇 달 뒤, 나는 런던의 그녀가 살던 동네에 갔다가, 그녀에 대한 생각이 전처럼 괴롭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256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교훈들이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아니면 마냥 행복한 표정으로 실수를 무한히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식사, 죽음, 돈에 지혜로워질 수 있듯이 사랑에도 지혜로워지고 싶다는 야심은 정당한 것이 아닐까?  259
지혜는 사랑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사랑은 커피나 담배처럼 완전히 끊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포도주 한 잔이나 초콜릿처럼 가끔은 허용되는 것일까? 사랑은 지혜가 대표하는 모든 것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일까? 현자들도 사랑 때문에 이성을 잃게 될까, 아니면 몸만 어른이지 정신을 아이인 사람들만 이성을 잃는 것일까?  260
복잡한 문제들을 파고들다보면 가끔 도달하게 되는 순진한 상식으로 나는 가끔 묻곤 했다.[마치 답을 봉투의 뒷면 정도에 다 적을 수 있는 것처럼]. "왜 우리는 그냥 서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  262
대책이 서지 않는 사랑의 고통 때문에 비관적이 된 나는 사랑으로부터 완전히 떠나버리기로 결심했다. 낭만적 실증주의가 도움이 될 수 없다면, 유일하게 유효한 지혜는 다시 는 사랑에 빠지지 말라는 금욕주의적 충고였다. 
그러다가 어느날 디너 파티에서 레이첼이라는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사무실 생활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나는 그녀의 눈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순간 나는 금욕주의적 철학을 내팽개치고 클로이에게 저질렀던 실수를 모조리 되풀이하는 이이 얼마나 쉬운지를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270
사랑에 고통이 없을 수 없고, 사랑이 지혜롭지 못한 것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잊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금욕주의의 핵심에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실망시킬 기회를 주기 전에 스스로 실망해버리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금욕주의는 다른 사람과의 애정에서 생기는 위험 사막에서의 삶보다 더 큰 인내심이 있어야만 직면하게 되는 위험에 대항하는 서툰 방어였다. 금욕주의는 감정적 혼란으로부터 자유로운 수도사적 존재를 요구한다고 하면서, 고통스러울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적 요구들의 정당성을 부정하려고 할 뿐이었다. 금욕주의자가 아무리 용감하다고 할지라도 최고의 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점, 즉 사랑의 순간에는 결국 겁쟁이에 불과했다.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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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책은 국내에서 매우 유명하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책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의 문체는 좋아하는 편이다.
아주 오랜만에 도서관에서 이 책을 잡았다.
이전에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책의 제목은 책의 호기심을 가지기에는 좋지만 분명 그의 책내용과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은 여전하였다.
물론 책의 내용에 따라 저자가 여행을 해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안내자로 삼은 사람들의 여행기를 통해 소통해 나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그런것이 저자의 여행의 기술이라고 한다면 제목이 이해를 할 수는 있으나, 보통의 사람들이 제목을 보면서 기대하는 것은 여행을 해 나가는 좋은 기술쯤일것이란 점을 고려해 본다면 제목은 분명히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책 내용을 보면서 자신의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는 내용에 실망하게 되는 역효과가 나게 될 것이란 생각은 변함이 없다.
원제는 'The Art of Traver'이다. 초등학생도 해석을 할 수 있는 제목이다. 
직역하면 독자를 유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분명 원제에 충실하다.
제목만으로 내용을 짐작하는 사람이라면 원제를 보고 책의 내용을 짐작, 기대하고 접한다면 더 재미있게 읽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여행은 그 일의 역동성을 그 열의에서부터 역설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활동보다 풍부하게 드러내준다. 여행은 비록 모호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일과 생존 투쟁의 제약을 받지 안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여행에서 철학적 문제들, 즉 시리용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사고를 요구하는 쟁점들이 제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하지만 실제로 여행의 기술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사소하지도 않은 수많은 문제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또 여행을 연구하게 되면 그리스 철학자들이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렀던 것, 즉 '인간적 번영'을 이해하는 데도 대단치는 않지만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18-19

우리는 세상에 우리가 기대하는 것 외에도 많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흔히 잊곤 한다.  25

인간은 호텔을 건축하고, 만을 준설하는 등 엄청난 프로젝트들을 이루어내면서도, 기본적인 심리적 매듭 몇 개로 그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 울화가 치밀 때면 문명의 이점들이란 것이 얼마나 하찮게 여겨지는지! 이런 정신적 매듭들이 얼마나 처치 곤란인지 생각하다 보면, 고대 철학자들의 준엄하면서도 비꼬는 식의 지혜가 떠오른다. 그들은 번영과 세련으로부터 물러나 통이나 진흙 오두막 속에 살면서, 행보그이 핵심적 요소는 물질적인 것이나 미학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만 심리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42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숩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관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나간다.  83

모든 운송 수단 가운데 생각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아마 기차일 것이다. 배나 비행기이ㅔ서 보는 풍경은 단조로워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만, 열차에서 보는 풍경은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 열차 밖의 풍경은 안달이 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러면서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인다. 이 풍경을 통해 우리는 잠깐 사적인 영역들을 보고 영감을 얻기도 한다. 기차는 여떤 여자가 부엌 찬장에서 컵을 꺼내는 순간을 보여주었다가, 이어 테라스에서 어떤 남자가 자고 있는 모습을 구경시켜주었다가, 공원에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인물이 던진 공을 잡으려는 아이의 움직임을 드러내기도 한다. 
평야를 가로질러 여행하면서 나는 모처럼 아무런 억제 없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고, 집필 중인 스탕달론에 대하여 생각하고, 나의 두 친구 사이에 형성된 불신 관계에 대하여 생각한다. 내 정신이 어려운 관념에 부딪혀 텅 비어버릴 때마다 의식의 흐름은 ㅈ창밖의 대상에 고정되어 몇 초 동안 그것을 따라간다. 그러다 보면 또 새로운 생각의 똬리가 형성 되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술술 풀려나가곤 한다.  84

18세기 말부터는 공동체의 관행이 아니라 방랑자가 되는 것에서 동료 의식이 생긴다. 따라서 자연과 공동체의 매개는 일반적인 사회의 엄격함, 냉혹한 금욕, 이기적인 편안함이 아니라 본질적인 고립과 침묵과 외로움에 맡겨지게 된다.  - 레이먼드 윌리엄스,<시골과 도시(The Country and the City)>
우리가 휴게소와 모텔에서 시를 발견한다면, 공항이나 열차에 끌린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 건축학적인 불안전함과 불편에도 불구하고, 그 야한 색깔과 피로한 조명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립된 장소에서는 이미 터가 잡힌 일반적인 세상의 이기적인 편안함이나 습관이나 제약과는 다른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은연중에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86-87

플러그 소켓, 욕실의 수도꼭지, 잼을 담는 병, 공항의 안내판은 디자이너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줄 수 있다. 심지어 그것을 만든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수도 있다.  96

왜 다른 나라에서 현관문 같은 사소한 것에 유혹을 느낄까? 왜 전차가 있고 사람들이 집에 커튼을 달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떤 장소에 사랑을 느낄까? 그런 사소한 (또 말 없는) 외국적 요소들이 강렬한 반응을 일으킨다는 걳이 터무니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다른 삶에서도 비슷한 반응 양식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의 감정이 상대가 빵에 버터를 바르는 방식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하고, 또 상대가 구두를 고르는 취향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기도 한다. 이런 자잘한 일에 영향을 받는다고 우리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세밀한 것들도 그 속에 풍부한 의미를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107-108

우리가 외국에서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109

호기심은 몇 가지 크게 뭉뚱그려진 질문듥로 이루어진 중추로부터 밖으로, 때로는 아주 먼 곳까지 확장되는 작은 질문들의 사슬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왜 선과 악이 있을까?' , '자연은 어떻게 움직일까?' , '나는 왜 나일까?' 상황과 기질이 허락한다면,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질문들을 중심에 놓고 살아간다. 우리는 호기심은 세계의 점점 더 많은 부분들 포괄하다가,  마침내 어느 지점에서는 어떤 것에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오묘한 경지에 이를 수도 있다. 뭉뚱그려진 커다란 질문들은 어뜻 보기에는 남의 관심을 끌 수 없을 것 같은 작은 질문들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산속에서 파리에 대해 궁금해하기도 하고, 16세기 궁전의 벽에 그려진 특정한 벽화에 대해 궁금해하기도 한다. 우리는 오래전에 사라진 이베리아 군주의 외교 정책이나 30년 전쟁에호 토탄(土炭)의 역할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165 

여행자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부분의 사물을 볼 때는 질문이 떠오르지 않으며, 질문이 없으므로 흥분도 일어나지 않는다. 보통은 질문만이 아니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게다가 뭔가가 떠오를 때는, 엉뚱한 것이 떠오르는 경향이 있다.  169

여행의 위험은 우리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도 잇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는 꿸 사슬이 없는 목걸링 구슬처럼 쓸모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  172

여행은 피상적인 지리적 논리에 따라 우리의 호기심을 왜곡한다. 이것은 대학 강좌에서 주제가 아닌 크기에 따라 책을 권하는 것만큼이나 피상적이다.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의미가 있었노라"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우리가 결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곳에서만 자주 나타나곤 한다. 사진이 방법이 될 수 있다.  296

러스킨은 여행을 하면서 스케치를 하라고 권했을 뿐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인상을 굳히려면 글을 써야 한다고, 그의 말로 하자면 "말로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전에 그가 데생으로 아무리 존경을 받았다 하더라도,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것, 그리고 그가 빅토리아 여왕 시대 말기에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그의 '말 그림'때문이었다.  313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 - 하찮고 일상적인 경험 - 을 잘 관리함으로써 그것을 경작 가능한 땅으로 만들어 1년에 세 번 열매를 맺게 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 - 그 숫자는 얼마나 많은지! - 은 운명의 솟구치는 파도에 휩쓸리거나 시대와 나라가 만들어내는 혼란스러운 물줄기 속으로 밀려들어가면서도 늘 그 위에 코르크처럼 까닥거리며 떠 있다. 이런 것을 관찰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인류를 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 즉 적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아는 소수(극소수)와 많은 것을 가지고 적은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아는 다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343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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