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 2장 - 포이어바흐를 넘어서 도달한 곳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은 각 개인에게 내재된 추상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은 본질이란 말뜻처럼 불변하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관계가 만들어내는 앙상블과도 같다는 것이다.  ... 개별 연주자들이 최상급 연주 실력을 뽐내도 다른 연주자들의 연주에 녹아들지 못하면, 연주는 불협화으믕로 끝나고 만다. 앙상블 연주로는 완전히 실패한 셈이다.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인간을 솔로 연주자로 보지 말고 앙상블에 참여한 개별 연주자로 보자는 것이다. ... 마르크스는 ‘본질주의(Essentialism)’, 즉 개인이나 사물 안에는 본질이 내재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해체하고자 한다. 겉보기에 아ㅜ리 달라 보여도 서양철학 전통 일반은 모두 이 본질주의에 발을 걸치고 있다.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중요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본질주의 대신 마르크스는 ‘관계주의(Relationalism)’라고 부를 만한 입장을 표방하기 때문이다. 관계주의는 개인이나 사물 등 우리 눈에 식별되는 대상들이 아니라 직접 눈에 띄지 않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223-224

식사를 하던 아이가 귀가 가려웠는지 젓가락으로 귓속을 긁는다. 식탁에 있던 어머니는 기겁을 하며 아이를 나무란다. “젓가락은 음식을 집어먹는 거야. 귀를 파고 싶으면 귀이개를 써야지.” 익숙한 밥상 풍경이지만, 여기에도 보질주의와 관계주의가 작동하고 있다. 젓가락의 본질은 무엇인가?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음식을 집어먹는 것’리다.  ... 본질주의가 삶에서나 정치엣 항상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본질주의는 본질이란 이름으로 기존 질서를 맹목적으로 따를 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224-225

자유란 별게 아니다. 어떤 사물과 하나의 관계만 가능한 사람보다 서너 가지의 관계가 가능한 사람이 더 자유로운 법이다. 아이는 의자가 없어도 근사한 바위에 앉아서 쉴 수 있고, 사용하지 않는 냄비에 흙을 담아 꽃씨를 묻을 수도 있다. 물론 급하게 소변을 보고 싶으면, 아이는 신속하게 인기척이 없는 곳에서 시원하게 소변을 볼 수도 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어머니나 선생임의 훈육으로 사회적 규범에 동화되고 만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사회구조가 지정한 관계로만 세상과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가 말한 초자아가 제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초자아라는 내적 검열지구가 작동하자마자, 모든 사물은 하나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결과적으로 이제 사물은 본질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  225-226

남편이 있는 아내나 아이의 엄마만을 강조하는 순간, 이 사람의 본질은 여성이 되고 만다. 혹은 이 삶이 편의점에서 일하는 것만 강조되는 순간, 이 사람의 본질은 프롤레타리아, 그것도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최악의 프롤레타리아가 된다.  227

마르크스에게 부르주아 경제학자들 대부분은 일조으이 본질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방적기, 목화솜, 공장, 그리고 노동자등 개별적인 대상들만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본과 노동이란 관계, 원초적으로 불평등한 관계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자본가는 돈으로 공장을, 방적기를, 목화솜을, 그리고 노동자를 산다. 면직물을 만들어 투자한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다. 반면 노동자는 일체의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을 박탈당해 노동력만 가지고 잇다. 생계를 위해 돈이 필요한 노동자는 면직공장에 취업해야만 한다.  228

억압과 수탈 관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생각해 보자.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을 누군가 독점하는 순간, ‘3P의 삼각형(the triangle of 3P)’으로 작동하는 지배관계는 탄생한다. 먼저 소수가 부유해지면서 다수는 가난해진다. 첫 번째 P는 재산(property)이고 두 번째 P는 가난(poverty)이다 부유한 소수는 가난한 다수를 지배하게 된다. 세 번째 P는 권력(power)이다. 권력은 재산과 가난 사이의 관계를 영속화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이자 공권력이란 이름으로 이 원초적 관계를 지키려는 힘이다. ‘재산-가난-권력’으로 이루어지는 ‘3P의 삼각형’은 대부분의 인간을 자기 안에 감금해 피지배계급으로 포획한다. 3P의 삼각형이 만들어지면, 지배관계는 공고화된다. 그러니 권력을 해명하고 싶다면, 우리는 재산과 가난의 문제를 우회해서는 안 된다. 재산을 비판하고 싶다면, 우리는 권력과 가난의 문제를 숙고해야만 한다. 그리고 가난을 해결하고 싶다면, 우리는 권력과 재산의 문제를 극복해야만 한다. 재산과 가난이 분열되면서 권력을 낳고, 재산과 권력이 결합하면서 가난을 지속시키고, 마지막으로 권력이 가난을 적대시하면서 재산은 안정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대상이 아니라 관계를 사유해야 한다! 이것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이다. 지배계급 이데올로그들은 소수의 재산과 다수의 가난이 서로 무관하다고, 소수의 재산과 소수의 권력이 서로 무관하다고, 나아가 소수의 권력과 다수의 가난이 서로 무관하다고 역설한다. 이 궤변을 다수의 가난한 자들이 받아들이는 순간, 억압과 착취의 체제는 승리를 구가하게 된다.  245-246

억압과 착취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소작농이 지주가 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새로운 소작농을 양산하는 길일 뿐, 불평등한 관계 자체를 소멸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자본가가 생산과 생계의 절대적 수단, 즉 돈을 독점했기에, 노동자들에게는 팔 수 있는 노동력만 남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자본가-노동자’ 관계를 인식하지 못한 노동자는 자신의 처지를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이제 그에게 남은 꿈은 단순하다 많은 임금을 받기를 꿈꾸거나 아니면 언젠가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자본가가 되는 걸 꿈꾸게 된다. 자본가가 있기에 자기 삶이 비참해졌다는 것을 알았다면 노동자가 이런 헛된 꿈에 매진할 리 없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가 자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노동자’ 관계가 소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억압받는 자들은 폐부에 새겨 잊지 말아야 한다. 대상이 아니라 관계를 사유하라! 불평등한 관계가 다수를 “눈물의 골짜기”에 던져 넣었다면, 그 억압적 관계를 우리는 돌파해야만 한다. 넘어진 곳이 바로 우리가 일어나야 할 곳이다.  247
마르크스는 ‘인간의 감성’ 이외에 ‘실천적 활동’이란 의미를 강조했던 것이다. “실천적인 인간적-감성적 활동”으로서 감성은 우리의 몸적 인식이자 실천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무언가 했더니 사람이로구나”라는 인식이나 “사람인 줄 알았는데, 바위구나”라는 인식도 이미 이런 몸적 인식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니 지성의 판단이나 개념의 자발성도 결코 몸과 무관한 정신만의 고유한 기능이 아니라, 엄격히 말하면 몸적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피지렌’이란 독일어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비가 얼굴에 떨어지면 우리는 그걸 느낀다. 비가 우리를 촉발한 것이다. 태양이 작열하면 우리는 그걸 느낀다. 태양이 우리를 촉발한 것이다. 매혹저긴 향내가 나면 우리는 그걸 느낀다. 향기가 우리를 촉발한 것이다. “직관이 감성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즉 우리가 대상에 의해서 촉발되는 방식만을 포함한다는 것은 우리 본서으이 필연적 결과다.” 여기까지 칸트의 말은 옳을 뿐만 아니라 정확하다. 그렇지만 우리 몸이 비오는 날 집 밖에 있었다는 사실, 우리 몸이 여름날 바닷가에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 몸이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다는 사실도 그만큼 중요하다. 온몸으로 물을 느끼려면 대홍수가 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그저 계곡물이나 바닷물, 아니면 욕조물에 몸만 담그면 된다. ‘아피지렌!’ 그것은 무엉ㅅ보다도 특정 시공간을 점유하는 몸들 사이의 마주침이 전제된 것이다. 일단 마주쳐야 타자든 나든 상대방을 촉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253

산길을 걷다가 “무언가 했더니 사람이구나”라는 인식에 이르렀다. 이 인식을 바꾸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 “마음의 수용성을 감성”이라고 정의하면서 감성의 의미를 축소했던 칸트의 입장을 밀어붙이면 된다. 다시 말해 일체의 미동도 하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있으면 된다. 다시 말해 일체의 미동도 하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있으면 된다. 칸트가 감성의 능력을 ‘직관’이나 ‘관조’라고 표현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직관’이나 ‘관조’를 뜻하는 독일어 ‘안샤우웅(Anschauung)’은 원래 동사 ‘안샤우엔(Anschauen)’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말은 ‘거리를 두고 관찰하거나 바라본다’는 의미이기에 보통 ‘관조한다’는 말로도 번역된다. 결국 대상을 직관하거나 관조하는 칸트식 감성이 작동하려면, 우리 몸은 결코 움직여서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X를 관조하면 “무언가 했더니 사람이구나”라는 인식은 수정될 여지가 없다. 바로 이것이 핵심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감성을 ‘직관’이나 ‘관조’의 기능에 국한하지 않고 “실천적인 인간적-감성적 활동”이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칸트의 감성이 수동적 감각에 지나지 않는다면, 마르크스의 감성은 수동성과 능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몸적 인식, 혹은 실천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강조했던 감성의 원래 모습을 복원하지 않으면, ‘바위구나’라는 새로운 인식이 만들어질 여지가 없다.  254-255

역사적 인식은 무언가 사라지고 무언가 새롭게 생기는 과정에 대한 앎이다. 무엇이 사라졌을까? 무엇이 새롭게 생겼을까? 왜 사라졌을까? 이런 의문은, 오직 무언가 없어지고 무언가 새로 생기는 일은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260

잊지 말자. 피지배계급의 무기력을 조장하거나 증폭시키는 주범은 항상 지배계급이라는 사실을, 과거부터 지금까지 지배계급은 항상 원한다. 자기 의지가 관철된 모든 것을 피지배계급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관조하고 순응하기를, 이런 식으로 소수의 지배계급은 다수를 배제한 채 역사의 주체로 등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포이어바흐적 관조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수 피지배계급이 소수 지배계급에 필적할 만큼 분명한 역사의식을 갖는 것이다.  266

역사의식이 중요한 이유는 이를 토대로 우리가 실천의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 하나의 공식처럼 기억해두자. 역사의식이 사라지면 우리는 세상을 관조하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전락하게 된다는 사실.  266-267

“우리는 단지 유일한 과학, 역사의 과학만을 알 뿐이다.” 마르크스가 남긴 유명한 명언 중 하나다. 이 문장이 담긴 전체 단락이 없어질 뻔했다니 섬뜩한 일 아닌가? 역사의 과학이다! 이것을 흔히 역사학이라고 불리는 과목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가 말한 역사의 과학이란 정확히 말해 관조의 과학이 아니라는 뜻이니까 말이다. 역사의 과학이란 말은 인간의 모든 학문과 인식이 역사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반면 역사학은 과거의 역사를 불변하는 팩트로 고정시킨다. 결국 역사의 과학이 가변성과 실천성을 강조한다면, 역사학은 불변성과 관조성에 기반을 둔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학마저 시대에 따라 부팀을 거듭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의 역사학과 지금 시대의 역사학이 동일한 과거를 다뤄도 그 함의가 다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268-269

지금 배운 진리가 ‘역사적’일 수밖에 없다는 걸 자각한 학생들이 있을 수 있다. 마르크스적인 과학도들인 셈이다. 이들은 자연의 법칙을 새롭게 해명해 언젠가 교재에 자신의 이름이 붙은 법칙을 남길 가능성이 크다. 이제 물리학은 ‘물리에 대한 역사 과학’, 화학은 ‘물질 변화에 관한 역사 과학’, 그리고 생물학은 ‘생물에 관한 역사 과학’의 줄임말이라고 생각하자. 진정한 물리학자는 물리를 관조하지 않고 실천적으로 개입하고, 진정한 화학자는 변화를 관조하지 않고 변화에 참여하며, 진정한 생물학자는 생물을 관조하지 않고 생명체의 거동에 관여한다. 과학자들의 이런 실천적 참여로 해당 과학의 내용은 급변한다. 그래서 자연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은 과학사라고 할 수 있다.  269-270

‘인류가 지구 환경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시대’라는 뜻의 인류세는 1990년대 네덜란드 대기화학자 크뤼천(Paul Jozef Crutzen, 1933~)이 사용해 유명해진 개념이다. ... 1900년에 16억 명이었던 인구는 2000년에 돌입하면서 60억 명을 돌파한 뒤 지금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당연히 다른 종들은 멸종의 길을 걷거나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인간은 엄청난 규모의 숲도 없애고 거대한 댐도 만들고 대도시도 확장하고, 심지어는 기차와 자동차로 대지를, 비행기로는 대기를, 대현 선박으로는 대양을 가로지르고 있다. 환경오염 외에도 다른 종들이 살 수 있는 공간 자체가 협소해진 것이다. 현재 기린은 약 8만 마리, 늑대는 20만 마리, 침팬지는 25만 마리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한정된 땅덩어리에 인류의 개체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생태 환경이 파괴됨에 따라 다른 생물들은 멸종으로 떠밀리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나무늘보를 포함한 동물원의 동물 대부분은 멸종 위기 상태에 있다. 바로 이것이 인류세의 풍경이다. 인류가 멸종한 뒤, 다른 지적인 생명체가 지구의 역사, 혹은 자연의 역사를 탐구한다고 해보자. 아마 그들은 인류세를 방사능 물질, 이상화탄소, 그리고 플라스틱의 시대였다고 말할 것이다. 혹은 그들은 인류세를 보여주는 지층에서 엄청난 닭 뼈를 발견하고 경악할지도 모른다. 인류는 한 해 평균 600억 마리의 닭을 먹어치우니, 수백 년 동안 지층에 쌓인 닭뼈의 양은 무시무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274-275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인류세라는 용어가 낳을 수 있는 오해와 관련된 것이다. 마치 인류가 환경 파괴의 주범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나올 수 있으니까. 사실 중요한 것은 소수의 지배계급이 존재하는 억압사회다. 대다수 인류를 생태 파괴의 현장으로 몰아넣고 동시에 그들을 자연 재앙에 제일 먼저 노출시킨 장본인이 누구인가? 바로 소수의 지배계급이다. BC3000년 전후 인간이 문자로 자기 역사를 기록한 이후 인류의 힘은 비약적으로 커졌고 문명은 발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억압체제는 외양만 바뀌었을 뿐 구조적으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농업혁며으이 시대냐 산업혁명의 시대냐의 구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농업경제 기반의 억압사회가 산업경제 기반의 억압사회로 바뀌었을 뿐이니까.
토지가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이란 절대적인 지위를 돈에 양보하고, 지주는 지배계급의 권좌를 자본가에게 물려주고, 그와 동시에 농민, 천민, 혹은 여성 등은 노동력을 제외한 모든 것이 박탈된 새로운 인간형, 즉 노동자라는 새로운 피지배계급이 되었을 뿐이다. 여전히 지배계급은 두 종류의 착취를 지속적으로 자행하고 있다. 하나는 동료 인간을 착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지배계급을 매개로 자연을 착취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세라는 표현은 수정이 필요하다. ‘지주-농민’이란 사회적 관계를 대신해 등장한 ‘자본가-노동자’란 사회적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토양과 하천, 나아가 바다까지 오염시키는 방사능 물질. 대기를 치명적으로 교란하는 이산화탄소. 깊은 바닷속 어패류의 소회기관에까지 침투한 플라스틱 조각들. 농업경제 시절 짐작도 못할 정도로 인류는 지구를 망가뜨리고 있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진정한 원인은 인류 전체가 자본주의체제에 포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류세라는 용어를 ‘자본세(capitolocene)’로 바꾸자는 논의가 나온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 용어는 스웨덴의 생태학자 안드레아스 마름(Andreas Samuel Magnus Malm, 1977~)이2009년 처음 사용했지만, 그와 무관하게 해러웨이(Donna J. Haraway, 1944~)가 2012년 대중강연에서 독립적으로 사용해 유명해진 개념이다.
인류세라는 용어는 환경 파괴의 원인을 막연히 인간 전체로 돌릴 위험이 있다. 이 용어는 지구라는 별에서 인간이 사라져야 생태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잘못된 생각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원인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인류세라는 용어보다 자본세가 더 좋다는 것이다. 생태계 교란과 파괴의 책임은 자본주의체제를 주도하면서 잉여가치에 대한 맹목적 충동에 사로잡힌 자본계급에게 있기 때문이다. 소수의 자본계급이 다수의 인간과 지구 환경을 수탈하고 착취하고 있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 아닌가? 이에 비해 자본계급에게 착취당하는 노동 계급, 나아가 자본주의체제와 다르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환경 파괴의 피해자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어떻게 자본주의체제를 극복할 것인가?” 2015년 해러웨이가 자본세라는 용어에 만족하지 못하고, ‘커스루센(Chthulucene)’이란 용어를 다시 만들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인간이 부분으로 속해 있는 힘들(forxe)과 역능들(powers),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지구와 함께하는 이런 힘과 역능들에는 하나의 이름이 필요하다고 나는 주장했다. 물론 지금 이 지속성이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아마도, 정말 아마도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종들이 풍요로운 앙상블을 이루는 시대가 가능할 것이다. 나는 과거든, 현재든, 그리고 미래든 이런 시대를 커스루센이라고 부르고 있다. 커스루센은...... 지구 도처에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촉수적인(tentacular) 역능들과 힘들, 그리고 서로 모여 사는 사물들(collected things)을 본떠 만든 말이다. ...... 커스루센은 적어도 하나의 (물론 하나 이상의 함의를 갖는) 슬로건을 요구한다. ...... “아이를 만들지 말고 친족을 만들어라(Make kin not Babies)!” ...... 지구를 함께 공유하면서 (sym-chthonically), 그리고 함께 만들어가면서(sym-poetically) 우리는 친족을 만들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를 지구에 속한 것들과 함께 만들고 생성하고 구성해야만 한다. 나는 친족의 확장과 재구성이 모든 지상의 것들이 가장 깊은 의미에서 친족이라는 사실로 긍정된다고 생각한다. ...... 모든 생명체는 수평적으로, 기호학적으로, 그리고 계보학적으로 공통된 ‘살(flesh)’을 공유하고 있다. 조상들은 매우 흥미로운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분명하지만, 친족은 (우리가 가족이나 부족이라고 생각하는 것 바깥에 있기에) 익숙하지 않고, 기묘하고, 매력적이고, 능동적인 것이다. 작은 슬로건에 너무 많은 것을 부여했다는 사실, 나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노력해야만 한다. 지금으로부터 200년이 지나면 아마도 이 혹성의 인간종은 다시 20억이나 30억으로 줄어들고, 동시에 지금까지 목적만이 아닌 수단으로 간주되었던 다양한 인간 존재들과 다른 생명체들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아이들이 아니라, 친족을 만들자!’ - <인류세, 자본세, 플렌테이션세, 대지세 : 친족 만들기(Anthropocene, Capitalocene, Plantationocene, Chthulucene : Making Kin)>
<환경 인문학(Environmental Humanities)>(2015, 6번째 권)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 자연의 역사, 즉 지구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산업 자본주의체제와 거기에 포획된 인류의 힘을 우회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시대를 규정하려는 다양한 용어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인류세란 용어가 막연히 인류의 힘을 강조했다면, 자본세는 자본주의체제의 무한한 탐욕을 강조한다. 나아가 2014년 덴마크 오르후스대학에서 열린 학술대회에는 플래ㅐㄴ테이션세라는 용어가 제안된 적이 있다. 이 용어는 제3세계 국가에 다국적 자본들이 만든 수많은 플랜테이션들이 생태 파괴의 주범이라는 걸 강조한다. 플랜테이션이라고 불리는 기업화된 농장들은 생태 문제뿐만 아니라 심각한 인권 문제를 야기한 것으로 유명하다. 거의 노예제에 가까운 노동조건으로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을 착취했으니까. 플랜테이션세라는 용어는 전체 인간 세계가 하나의 자본주의체제로 묶이면서 선진국과 제3세계 국가 사이의 관계에도 ‘자본가-노동자’라는 관계가 관철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은 자신들의 공장을 제3세계 국가들로 이식하면서, 유럽에만 국환된 생태 문제를 전 지구적 문제로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인류세든 자본세든, 아니면 플래네이션세든 모두 지구 환경 파괴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견을 같이하는 용어다. 인류세가 인류의 반성을 촉구하고, 자본세가 자본주의체제의 폐단을 강조하고, 플랜테이션세가 자본의 세계화가 낳은 재앙을 경고한다. 이런 용어들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자본주의체제를 극복해 생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막연하기만 하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커스루센’이란 근사한 용어를 고안한 것이다.
2016년 저서 <곤경과 함께하기(Staying with the Trouble)>에서 그녀는 커스루센이란 용어가 ‘지상의’, 혹은 ‘대지의’라는 뜻의 희랍어 ‘크토니오스(khthonios)’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굳이 번역하자면 ‘대지세’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대지세는 하나뿐인 지구에 모든 생명체가 서로 공존하며 사는 시대,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종들이 풍요로운 앙상블을 이루는 시대”를 가리킨다. 여기서 대지세라는 용어가 인류세나 자본세, 혹은 플랜테이션세와는 다른 이유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산업자본주의 체제가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라 그걸 극복한 싣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인류세, 자본세, 그리고 플랜테이션세가 ‘구성적인(konstitutiv)’ 용어였다면 대지세는 ‘규제적인(regulativ)’ 용어였던 셈이다. 대지세는 산업자본주의시대를 해명하려는 용어가 아니라 산업자본주의체제를 극복하고 이루어야 하는 시대를 뜻하니까 말이다. 해러웨이가 대지세를 위한 실천적 강령을 제안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아이를 만들지 말고 친족을 만들어라!” 해러웨이의 요구를 친족이 아닌데 친족을 억지로 만들라는 이야기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녀에 따르면 “모든 지상의 것들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친족이고, ...... 모든 생명체를 수평적으로, 기호학적으로, 그리고 계보학적으로 공통된 ‘살’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는 공통된 살! 그건 지속적으로 살아 있는 지구를 가리킨다. 죽은 몸이나 혹은 무생물에게는 살이라는 용어를 쓰지는 않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들과 무관하게 지구가 살아 있다는 의미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생명체들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하고 있기에 지구는 살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친족을 확장하고 재구성하라고 요구한다. 인간은 이미 자연과 함께 살아가며, 지구라는 거대한 생태계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에서도 확인되는 인간중심적인 사유, 인간은 자연 바깥에 존재하며 자연을 지배하고 소유하는 존재라는 사유에서 벗어나라는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다른 종의 생명체뿐만 아니라 동료 인간을 지배하거나 소유하려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생며체는 수평적으로, 기호학적으로, 그리고 계보학적으로 공통된 ‘살’을 공유하는” 대등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녀가 왜 아이를 만들기보다는 친족을 만들라고 요구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내 아이’, 혹은 ‘우리 아이’라는 소유의식이 문제였던 것이다. 농업경제 시절 생겼단 오래된 인간중심주의다. 아이들, 특히 남자 아이를 선호한 이유는 그만큼 농사일을 감당할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문맥에서 부모와 자식은 양유고가 부양이란 교환관계에 묶이고, 이로부터 가족이란 배타적인 공동체가 형성된다. 이런 배타성이 어떻게 “공통된 살”을 공유하는 삶과 공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아이를 낳더라도 그 아이와 ‘친족’관계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내가 낳은 아이든, 남이 낳은 아이든, 아니면 나무늘보든 가시연꽃이든,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공통된 살을 공유하는 친족관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니까. 이렇게 친족이 많아지면 인간이 구태여 많은 아이를 낳을 이유가 있을까? 자기편을 많이 만들려고 노력할 이유가 있을까? 해러웨이가 꿈꾸는 대지세에서 인간의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친족관계를 이루는 것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삶은 충만함에 둘러싸일 테니까. 그래서 그녀는 대지세에 돌입한 지구의 미래를 조심스레 다음처럼 묘사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0년이 지나면 아마도 이 혹성의 인간종은 다시 20억이나 30억으로 줄어들고, 동시에 지금까지 목적만이 아닌 수단으로 간주되었던 다양한 인간 존재들과 다른 생명체들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275-281

친족이 된다는 것! 해러웨이의 칸트식 표현을 빌리자면 자연을 “단지 목적만이 아니라 수단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말 그것들과 친족이 되면, 어떻게 우리가 자본주의체제에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잉여가치 확보라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다수의 인간뿐 아니라 자연 전체를 수단으로 치부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체제니까.  282-283


거리를 두고 사람을 관조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삶에 뛰어드는 것!
후자는 전자가 줄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가르쳐준다. 그중 중요한 것 두 가지만 언급해보자. 첫째, 타인들의 삶에 뛰어들면 누구나 자신의 과거 관계를 자각하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 그 누구도 백지 상태에서 새로운 관계에 돌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자신처럼 타인들도 자신만의 고유한 관계와 역사를 전제한다는 걸 알게 된다. 타인을 이해하려면, 첫인상이나 직업 등 그에 관한 표면적인 정보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그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리고 과거에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그 역사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외국에 가야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걸, 나아가 자신이 특정 삶의 형식에 따라 살았다는 걸 자각하는 법이다. 결국 타인들의 삶이 낯설어 보였던 이유는 우리 자신이 특정 사회관계에 적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낯선 도시를 관광하는 것보다 그곳에 사는 것이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낯선 사람들이 내면화한 관계와 우리 자신이 내면화한 관계가 우리 자신이 내면화한 관계가 모두 드러나니 말이다.  290-291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영위되는지에 관한 진실 말이다. 이렇게 되물어보자. 지금 우리의 일상적 삶은 관광객이 아니면서도 관광객처럼 영위되고나 있지 않은지.  292-293

이제 생각해보자. 직장에서 우리는 관광객이지 않은가? 자신이 다니는 회사가 어떻게 작동하며 무엇을 생산하는지, 그리고 그 상품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고민하지 않으니까. 심지어 우리는 직장 동료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잇는지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업무상 관계로만 연결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관광객의 달러나 신용카드처럼 월급은 직장관계의 유일한 혈액이 된다. 가족들과 함께할 때도 우리는 관광객이지 않은가? 시부모가 친정부모도 심지어는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식들을 고립된 개인들로 식별하고 관조하고 있으니까. 돈과 선물이 가족관계를 유지하는 가느다란 끈이 되고 만다. 편의점이나 카페, 극장 등에 들를 때도 우리는 관광객이지 않은가? 계산을 해주는 젊은 이들이나 안내를 해주는 젊은이들의 내면과 그들의 역사를 읽으려고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돈을 받은 만큼 그에 어울리는 서비스를 행해야만 하는 사람들로 보일 뿐이니까. 여기서는 돈과 신용카드가 유일한 연결 줄이 된다.
여기에 스마트폰까지 가세하면 우리의 관광객 모드는 그야말로 정점을 찍게 된다. 파리의 시위 현장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는 것처럼, 이제 액정화면은 마치 영화를 보듯 세상을 관조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댓글을 달면서 사회에 참여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들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에 공감하고 악당을 욕하는 행위와 어떻게 다른가? ‘사변적 관조’가 아니라 ‘감성적 활동’이다. 관광객적 인식이 아니라 주체적 인식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모두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규정되어 있다는 걸 자각할 수 있다. 소망스럽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모색하려면, 우리는 먼저 자신이 어떤 관계에 포획되어 있는지 봐야 하는 것 아닐까?  293-294

관계의 변화가 바로 역사의 동력이다. 아니 더 단호하게 말한다면 관계의 변화 자체가 역사라고 할 수 있다.   294

그렇다고 관계와 역사를 파악하는 일이 만만하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둘 사이의 관계를 포착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처음에는 순간적으로 고립된 두 개체만 보일 것이다. 한 사람은 안경을 착용한 30대의 젊은 여성으로 청바지를 입고 있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리듬을 타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편안한 차림의 캐주얼 복장을 한 40대 초반의 남성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다. 여기까지가 포이어바흐의 직관적 유물론이 적용되는 지점이다. 그렇지만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나아가 두 사람이 각각 과거에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를 아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아주 천천히 두 사람을 관찰해야만 한다. 다행스럽게도 남성이 손을 들어 여성의 어깨를 감싼다면, 우리는 쉽게 두 사람이 연인관계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둘은 언제 어디서 만났을까? 둘은 왜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연인일까, 아니면 부부일까? 그것도 아니면 불륜관계일까? 벤치의 관찰마으로 해명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다. 그들을 계속 따라다니며 관찰해야 하고, 나아가 그들이 남긴 과거 흔적들을 찾아 헤매야만 한다.  294-295

‘3P의 삼각형’을 기억해보라. 권력(power)은 재산(property)과 가난(poverty)을 통해서 형성되고 재산과 가난 사이, 즉 부유한 소수와 가난한 다수 사이의 위계를 지키는 기능을 한다.  297

1863년 1월 1일 당시 미국 북구 비역의 지지를 받던 대통령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은 <노예해방 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을 발표한다. 1861년 4월 12일 시작된 미국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이 북부 지역이 승리로 끝나리라는 확신을 링컨이 피력한 셈이다. 흔히 남북 전쟁은 인권과 자유의 전쟁이고, 링컨은 민주 투사로 기억된다. 그렇지만 남북전쟁의 이면은 인궈느 자유, 혹은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남북전쟁은 산업자본주의체제에 맞게 값싼 노동자가 필요했던 미국 북부 지역과 목화농장을 위해 400만의 흑인 노예가 필요했던 미국 남부 지역 사이의 충돌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고대사회와 부르주아사회가 기이하게 병존했던 신대륙 국가 미국은 1965년 4월 9일 북부 지역의 최종 승리로 400만 흑인 노예를 흑인 노동자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해방된 흑인 노예뜰은 이미 노예로 태어난 노예 1세대의 까마득한 후예들에 지나지 않는다. 1619년 처음으로 흑인 노예 19명이 영국 식민지였던 북미대륙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에 들어온 이후로 수많은 노예선이 엄청난 흑인 노예를 실어 날랐다. 조상들의 땅 아프리카는 상사도 할 수 없는 그저 까마득한 전설의 땅에 지나지 않았기에, 해방된 흑인들 대부분은 그곳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가진 것이 몸뚱어리밖에 없었던 그들로서는 노동계급으로, 그것도 쵷ㅎ하의 노동계급으로 편입되었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선택지였던 것이다.
관계의 변화가 역사의 핵심이다! 문제는 그 관계가 억압적 관계라는 데 있다. BC 3000년부터 지금까지 지배계급은 억압의 양상을 변화시키면서 억압적 관계라는 본질은 그대로 유지해왔다. 역사의 발전을 외치는 모든 지식인이 기본적으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그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들은 과거보다 지금이 낫고, 지금보다 미래가 낫다는 진보의 이념을 표방하기 때문이다. 노예제를 극복하고 농노제가 들어온 것도 진보이고, 농노제가 사라지고 자본주의체제가 들어온 것도 진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소수 지배계급과 다수 피지배계급으로 구성된 근본적 억압구조는 조금도 변한 적이 없지 않은가. 단지 지배계급이 노예주에서 영주로, 그리고 자본계급으로 그 스타일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 노예는 목줄에서 벗어났지만 땅에 묶인 농노가 될 수밖에 없었고, 땅에 묶인 농노는 돈에 목을 매는 노동자가 되었을 뿐이다.  300-301

3P의 삼각형이 노예 재의 얼굴로 나타나자, 그 자유정신은 노예제와 맞서 싸웠다. 로마제국의 노예제에 도전했던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Spartacus, BC 111?~71)와 6만의 해방된 노예들이 바로 그들이다. 3P의 삼각형이 농노제로 변형되자, 이번에 그 자유정신은 농노제와 맞서 싸웠다. 1534년 에서 1535년까지 제빵사 얀 마티스(Jan Matthys, 1500?~1534)와 재단사 얀 반 레이덴(Jan van Leiden, 1509~1536) 등이 이끄는 재세례파가 독이 ㄹ뮌스터에 억압이 없는 공동체, 즉 코뮌을 구성해 봉건체제와 맞서 싸웠던 것이다. 3P의 삼각형이 이번에는 자본주의체제로 변신하자, 다시 자유정신은 이 자본주의체제와의 싸움에 목숨을 걸었다. 1871년 3월 18일에서 5월 28일까지 블랑키(Louis Auguste Blanqui, 1805~1881)의 정신으로 무장한 파리 시민들이 파리 코뮌으로 부르주아 정권과 맞섰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여기서 조금의 오해도 있어서는 안 된다. 스파르타쿠스 군단은 노예제 대신 농노제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얀 마티스와 얀 반 레이덴이 농노제 대신 자본주의체제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 파리코뮌 전사들 역시 자본주의체제 대신 스탈린의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모두 원했던 것은 코뮌, 즉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였을 뿐이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스파르타쿠스가 1871년 파리에 있었다면 자본주의체제와 맞서 싸웠을 것이고, 얀 마티스와 얀 반 레이덴이 BC 72년 로마에 있었다면 자유군단에 속했을 것이고, 블랑키가 1535년 독일 뮌스터에 있었다면 봉건체제의 포위를 뚫으려고 분투했을 것이다.  301-303

노예제는 노예가 스스로 자유인이 되었을 때 소멸되는 것이지, 누군가가 자유를 부여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니까. 남이 허락한 자유는 언제든 바로 그 사람에 의해 취소될 수 있다. ... 자유인은 스스로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그래야 누군가 자유를 뺏으려 할 때 그에 맞서 싸울 수 있으니까.  308

포이어바흐! 그는 관계도, 그리고 역사도 인식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저 자신 앞에 있는 것을 관조했던 순진한 철학자였다. 그가 로마시대에 살았다면 그는 노예는 노예로, 귀족은 귀족으로 보았을 것이다. 노예는 귀족의 발을 씻겨주고, 귀족은 역사와 삶을 논하는 풍경을 그저 당연한 이치로 여겼을 것이다. 주인뿐만 아니라 로마제국과 맞섰던 스파르타쿠스를 보았다면, 그는 이걸 일회적 사건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사실 노예가 주인에게 반기를 드는 사건은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 권력이 귀족들의 노예 소유권을 공권력으로 확실히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순종하는 노예와 자애로운 귀족 사이의 조화와 평화, 그리고 질서는 이렇게 억압적으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는 화려한 외양을 자랑하는 로마 제국의 피 묻은 뼈대, 즉 고대사회의 사회적 관계와 그 역사를 백일하에 폭로한 사건이다. 포이어바흐는 스파르타쿠스를 통해 고대사회 전체를 지탱했던 억압구조를 간파했어야 했지만, 불행히도 그는 그것을 일시적 일탈로만 보았으리라.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가 “유물론자인 한 포이어바흐는 역사를 다룰 수가 없고, 역사를 고찰하는 한 그는 결코 유물론자가 아니다.  ... 마르크스의 이야기처럼 포이어바흐의 직관적 유물론은 “역사와는 완전히 결별되어”있는 절름발이 유물론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309-310

불행한 것은 봉건사회에 태어났어도 직관적 유물론자로서 포이어바흐의 길은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귀족의 거대한 농장에서 농노들이 올리브를 수확하는 장면이나 아니면 귀족의 저택에서 주인의 발을 씻겨주는 농노의 부인의 모습이 그의 눈에 조화롭고 평화로운 풍경화처럼 보였을 것이고, 여우 사냥을 즐기러 나온 영주를 보고 잠시 농사일을 멈추고, 경의를 표하는 농노의 모습이 아름다운 풍경화로 들어왔을 테니 말이다. 물론 간혹 소작료에 저항하는 농노도 나오겠지만, 포이어바흐는 이것도 일시적 일탈로 치부했을 것이다. 영주와 농노를 관조하는 그에게 땅을 미리 독점해 무위도식할 수 있는 영주의 계급성이 보일리 없으니까. 직관적 유물론의 맹점은 부르주아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미 부르주아사회로 돌입한 19세기 부르주아국가 독일에서 태어났기에 포이어바흐의 눈에는 도자기공장, 자기 장인과 아내와 같은 자본계급, 그리고 노동자들이 평화로운 풍경화처럼 들어온다. 아내와 자신은 가까운 냇가에서 돗자리를 깔고 일몰을 응시하고 도자기공장에서 노동자들은 휴식시간에 해맑게 대화를 나눈다. 혹은 그가 공장에 들르기라도 하면 그곳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밝은 모습으로 자신에게 인사는 건넨다. 물론 그 자신도 노동자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는 걸 잊지 않는다. 자본가는 자본가이고 노동자는 노동자일 뿐이고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수탈관계를 볼 수 없기에 그의 마음은 편하기만 하다. 파업이라는 이례적인 사건이 벌어져도, 포이어바흐에게 있것은 노동자들의 일시적 일탈로 보일 뿐이다. 그는 노동자의 파업이 부르주아사회의 억압적 구조가 드러나는 징후라는 걸 알 수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으니까. 세계를 관조했던 대가는 이렇게 치명적이다. 자신도 모르게 포이어바흐는 부르주아사회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310-311

실천이 아니라면 삶에서 남는 것은 과조일 뿐이다.  312

‘낡은 유물론의 입장(Standpunkt)은 ‘부르주아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장은 ‘인간사회(menschliche Gesellschft)’ 또는 ‘사회적 인간(gesellschaftliche Menschheit)’이다. -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10
...
마르크스의 “사회적 인간”이란 개념. .. 인간 사회에서 모든 인간은 사회에 참여하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고, 모든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운명을 타인에게 맡기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결국 “인간사회”는 “사회적 인간들”의 공동체라는 생각이다.  312-313

스파르타쿠스 군단이, 뮌스터코뮌이, 파리코뮌이 원했던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 혹은 마르크스의 새로운 유물론이 서고자 했던 인간사회는 단호하게 분업체계와 배타적 활동을 거부하는 공동체다.  318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가 지향하는 두 가지 원칙만 확인하면 되니까. 첫째, 사회가 생산 전반을 통제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자본가 한 사람이 생산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 전체가 생산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는 그 일을 언제든지 멈출 수 있는 자유를 전제한다는 점이다. 생산의 사회성과 노동의 자유! 인간사회, 혹은 사회적 인간의 두 다리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가 “참된 현실적 공동체(der wirklichen Gemeinschaft) 속에서, 각 사람들은 그들의 연합(Assoziation) 속에서, 그 연합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자유(Freiheit)를 획득하게 된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319


BRIDGE - 다시 불러보는 인터내셔널의 노래

<인터내셔널 찬가>
일어서라!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이여!
일어서라! 기근의 죄수들이여!
이성은 화산처럼 요동친다.
이것은 종말의 분출이다.
과거를 백지로 만들자.
노예가 된 대중들이여! 일어서라! 일어서라!
세계의 토대가 바뀌고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다.

<코러스 ; 마지막 싸움이다.
함께 모이자, 그리고 내일
인터내셔널은
인류가 되리라.>

최상의 구원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도 아니고, 케사르도 아니고, 호민관도 아니다.
생산자들이여! 스스로를 구하라.
공동의 구원을 포고하라!
도둑이 자기가 먹은 것을 토해내고
정신이 자기 감옥에서 풀려나올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풀무질을 하고,
뜨거울 때 쇠를 두드려라.

<코러스>

국가는 억압하고, 법은 기만하고
세금은 피 흘리게 한다, 불운한 자들을.
어떤 의무도 부유한 자에게 부과되지 않고
가난한 자의 권리는 공허한 말일 뿐.
감시는 충분히 힘들 만큼 견뎠다.
평등은 다른 법을 원한다.
의무 없이는 권리도 없다고 새로운 법은 말한다.
평등하게 권리 없이는 의무도 없다고.

<코러스>

찬양에 몸을 숨긴
광산의 왕들과 철도의 왕들!
그들은 지금까지 노동을 훔치는 일 외에
무슨 일을 했었나!
도둑들의 견고한 금고 안에는
노동이 창조했던 것들이 들어가 있다.
그 도둑들에게 그걸 되돌려주라고 명형하자.
민중들은 단지 자기 몫만 원할 뿐.

<코러스>

왕들은 우리를 연기에 취하게 했다.
우리 안의 평화, 폭군에 대한 전쟁!
군대들이 파업해,
진압을 포기하고 서열을 해체하도록 만들자!
만일 그들이 완강히 버틴다면, 이 카니발들은
우리를 영웅으로 만들 것이고,
그들은 곧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총탄이
우리 장군들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코러스>

일꾼들이여! 농민들이여! 우리는
노동자들의 가장 큰 부분이다.
대지가 인간들에 속할 때만.
게으른 자는 다른 곳에 머물 것이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살을 그들은 소진시켰는가?
그러나 성직자들, 고리대금업자들이
어느 날 사라진다면,
태양은 언제나 항상 빛나리라.

<코러스>

- <인터내셔널 찬가> (1871)  323-325



역사철학 2강 - 파리코뮌을 보아버렸던 시인 랭보

70여 일 짧은 시간 동안 유지된 파리코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찬란했던 순간에 랭보는 코뮌의 핑크빛 후광을 받은 파리와 파리 시민들을 가장 자연적으로 그리고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했던 겁니다. 그러나 70여 일이 지나 파리코뮌이 괴멸되고 과거의 위계 질서가 복원된 뒤 돌아보면, 1881년 3월 18일에서부터 5월 28일까지 존속했던 그 찬란했던 시간은 마치 꿈인 것처럼, 마치 상징인 것처럼, 마치 초현실적인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냥 간단히 이렇게 정리해보죠. 파리코뮌 시기에 랭보의 시는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자연적인 것이었다고, 그렇지만 그 찬란했던 시기가 지나고 나자 이제 그의 시는 상징적이고 초현실적인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입니다. 이런 착시효과는 현재 우리의 의식에도 그대로 적용되죠. 파리코뮌의 인문주의나 민주주의에 온몸으로 공명하는 독자라면 랭보의 시는 심장을 바로 뛰게 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감동을 바로 전달할 겁니다. 반대로 권위적인 정치질서나 신자유주의로 노골화된 자본주의체제에 적응한 독자라면 래보의 시는 상징적이고 초현실적인 것으로, 그만큼 난해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간신히 머리로만 이해될 수 있을 겁니다.  343

지배계급의 눈치를 보면서 피지배계급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는 순간, 문학은 그리고 시는 억압체제에 대한 찬가가 됨.  352

‘주관적 시’는 객관에 대한 투철한 인식 없이, 그냥 주관이 백일몽을 꾸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강철 덩어리가 물에 둥둥 뜨는 몽상에 빠지고 희희낙락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죠. 반면 ‘객관적 시’는 실현 불가능한 백일몽이 아니라, 세상을 변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객관적 시’는 강철의 속성들을 정확히 알고, 그 속성을 어기기는커녕 그걸 이용해 물에 뜰 수 있는 강철 배를 설계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죠.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객관적 시’가 가능하려면, ‘객관(=대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만일 이런 인식이 없다면 아무리 ‘객관적 시’를 썼다고 해도 그것을 바로 ‘주관적 시’로 전락할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객관(=대상)’을 정확히 인식한 사람이 없다면, ‘객관적 시’는 불가능한 법입니다. 바로 이것이 랭보가 “저는 시인이 되고 싶고, 스스로 견자(見者, voyant)가 되려고 분투하고 있다”(<1871년 5월 13일 이장바르에게>)고 말했던 이유입니다. 견자는 글자 그대로 보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내 의지나 바람에 따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나 바람을 좌절시키면서 내 앞에 주어진 것을 봐야 합니다. 만일 내 의지나 바람, 혹은 감정에 따라 본다면, 그것은 객관적으로 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주관적으로 본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대상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지 않더라도 대상이 보라고 강요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 바로 그가 견자입니다. 결국 견자가 되려면, 우리는 이미 훈육되어 익숙한 사유나 감정들, 혹은 우리 내면에 이미 각인되어 작동하는 견해나 감정, 그리고 의지를 해체해야만 합니다. 랭보가 견자가 되는 방법으로 “모든 감각들의 착란”을 이야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354

이것만 보고 저것은 보지 말라고 하는 체계는 우리를 훈육하고, 그 결과 우리는 정말 눈에 보이는 것마저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니 보지 말라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에게는 불안감과 불쾌감이 엄습할 겁니다. 보이는 대로 보려면, 아니 정확히 말해 이렇게 보라고 강요하는 대상을 제대로 보려면, 우리는 감각의 질서를 규정하는 지배적인 사유체계와 가치체계를 전복해야만 합니다. 결국 견자가 된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주체로 태어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스스로를 노예로 자처했던 노동자들이 당당히 주인이라고 선언했던 것이 파리코뮌이라면, 체제가 강요하는 감각들의 질서를 뒤죽박죽 만드는 것이 바로 랭보의 견자였던 셈입니다. 감각들의 착란을 통해 견자가 되었을 때, 그가 보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가 보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바로 이것이 랭보가 말한 ‘미지(l’inconnu)’입니다 한국어로 ‘미지의 것’으로 번역된 프랑스어 ‘랭코뉘(l’inconnu)’는 이외에도 ‘보잘것없는 것’이나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사실 무언가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는 ‘미지’라는 뜻보다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이란 의미가 훨씬 더 랭보가 말한 ‘랭코뉘’의 뜻에 가까울 듯합니다.  355

랭보가 제안했던 ‘견자의 미학’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자유로운 주체, 즉 견자가 되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을 보게 된다고 말입니다.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을 보게 된 견자가 그것을 언어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시인이 될 수 있습니다. 랭보가 말한 ‘객관적 시’는 바로 이렇게 탄생하게 되지요.  356

그(랭보)에게 “시인은 진실로 불의 도둑”. 제우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불을 건네준 프로메테우스! 시인은 바로 프로메테우스 같아야 한다는 겁니다. 권력자나 지배계급의 불이 힘이 있는 이유는 다수 피지배계급에게 불이 없어서 입니다. 어둠 속에서 공포와 탄식의 삶을 피지배계급이 영위하는 것도 지배계급이 불을 독점했기 때문이죠. 프로메테우스처럼 그 불을 훔쳐 피지배계급에게 가져와 암흑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들이 갈 길을 명료히 보도록 도와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소임이자 자부심의 원천이죠. “인류, 심지어는 동물까지도 모두 짊어지는 것!”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가 그리고 1871년 랭보가 감당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357-358

랭보는 관료들과 글쟁이들을 작가, 창작자, 시인과 구별합니다. 그에 따르면 기존의 규칙, 기존의 이성, 혹은 기존의 사유에 따라글을 쓰는 사람들이 바로 관료들이나 글쟁이들입니다. 그러나 감각들을 착란시켜 기존의 규칙, 이성, 사유를 전복시켜서 감각들의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글들이 출현할 수 없는 법이지요. 바로 이래야 진정한 시인, 혹은 진짜 시인이 탄생하는 것 아닌가요. 반대로 가짜 시인도 존재하죠. 그것은 관료처럼 글을 쓰는 시인들, 과거 위대한 시들에서 규칙과 테크닉을 축출해 그에 따라 시처러 ㅁ보이는 시들을 쓰는 시인일 겁니다. 진정한 시인은 이런 식으로 탄생할 수 없습니다.  358-359

기존 사유에서 해방된 감각, 혹은 착란된 감각으로 세계를 느끼는 사람이 견자라면, 이렇게 느낀 세계에 새로운 언어를 부여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작가이자 창작자, 그리고 랭보의 경우에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각들의 착란으로 기존 사유가 붕괴됩니다. 자유와 해방은 바로 여기서 가능해지는 셈이지요. 바로 이 해방된 감각들의 힘으로 견자는 세계를 보게 됩니다.  359

관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주관적 시’를 쓰는 시인들에게 견자의 삶이나 시는 무언가’비규범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고, 당연히 저주받고 모욕당하기 쉽지요.  359-360

파리코뮌을 경험했던 사람들이나 지금 새로운 코뮌을 꿈꾼느 사람들의 눈에는 랭보의 작품은 너무나 규버적이고 쉬워 보일 겁니다. 반대로 파리코뮌을 부정하거나 애써 회피하면서 자본, 국가, 종교에 포획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면 랭보의 시는 비규범적이고 난해해 보일 테죠.  360

Posted by WN1
,



1부 종교적인 것과 관조적인 것을 넘어서


역사철학 1장 - 붉은 피로 지켜낸 파리코뮌

블랑키.
1885년 출간된 <사회적 비판 (Critique Sociale)> 두 번째 권에 “자본가의 기생이 대중들의 빈곤을 낳는 원인이다.” ... 항상 생산수단 독점은 폭력수단 독점과 함께하는 법입니다. 결국 피억압자가 억압자의 힘을 압도할 수 있는 ‘힘(force)’을 가지지 않는다면, 정의와 평등은 그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생산수단 독점에 맞서 싸우면서 폭력수단 독점과는 싸우지 않겠다는 투쟁, 즉 간디식 비폭력 투쟁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승리야 가능하겠지만, 이런 투쟁이 현실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을 테니 말입니다. 47

파리코뮌 시기 혁명가 트리동(Gustave Tridon, 1841~1871)의 책 <에베르주의자: 역사의 재난에 맞서는 탄식(Les Hebertister: plainte contre une calomnie de I’Histoire)>에 블랑키가 쓴 서문입니다.
‘승리는 옳은 자(le droit)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승리가 없다면 옳은 자는 더 이상 옳을 수 없게 되고, 대천사의 발톱 아래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탄처럼 될 테니 말이다.’ - <서문> (1864) 49

19세기의 파리는 단순히 프랑스의 수도만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의 수도였죠. 이 도시를 ‘악의 꽃(Les Fleurs)’이라고 느꼈던 시인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보들레르(Charles Pierre HBaudelaire, 1821~1867)입니다. ‘악의 꽃’은 매춘부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돈이 있어야 품을 수 있는 존재가 매춘부인 것처럼, 자본주의의 수도 파리도 돈이 없다면 향유할 수 없는 ‘악의 꽃’이었던 겁니다. 51

어떤 것을 정의하려면 그것에 대립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법입니다. 73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생산수단을 가진 자가 그렇지 못한 자를 지배한다는 정치경제학적 진리를 말입니다. 81

생산수단, 특히 토지나 자본을 공동 소유하는 것이 원칙인 사회, 바로 그것이 코뮌입니다. 83

자유를 되찾은 사람에게 항복은 죽음보다 끔찍한 일이죠. 85



정치철학 1장 - 종교적인 것에 맞서는 인문정신

자기소외((Selbstentfremdung), 혹은 소외(entfremdung)라는 개념. 이는 자신이 만든 것이 자신에게 낯선 것으로 다가오는 현상을 가리킨다. 103

무언가를 긍정한다는 것은 그것을 다른 걸로 바꿀 수 없다는 의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긍정이 항상 단독성의 긍정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
니체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개체, 그리고 세상을 “존재하는 유일한” 것, 즉 단독적인 것으로 긍정하려고 한다. 119

모든 지배와 억압의 논리 이면에는 단독성을 특수성으로 치환하는 작업이 수행된다는 걸 잊지 말자. 120

불멸하는 영혼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몸을 경멸하게 된다. 돈이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상품으로 팔리는 굴욕을 겪는 것처럼, 혹은 인간, 노동자, 학생, 여자, 남자, 유대인, 한국인, 일본인 등등 일반 개념이 등장하면서 단독적인 개체들은 특수한 개체들로 분류되어 지배되는 것처럼. 121

신으로부터 창조행위를 빼앗은 인간, 억압된 창조력을 폭발시키는 인간을 니체는 위버멘쉬라고 부른다. ... 위버멘쉬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을 뜻하는 ‘멘쉬(mensch)’가 아니라 ‘넘어선다’는 의미의 ‘위버(Uber)’다. 124


고고학에 따르면 농업혁명이 일어나기 전 인류에게는 전쟁도 없었고, 종교도 없었다. ... 종교나 정신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수렵채집 시기에는 ‘우월(superiority)과 열등(inferiority)’이라는 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들소 사냥에 성공했다고 해도 인간은 자신이 들소보다 우월하다고 느끼지 않았고, 반대로 사냥 중에 들소의 뿔에 받혀 죽어가면서도 인간은 들소보다 자신이 열등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야생 사과를 딸때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자신이 우월하고 그 사과가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한마디로 말해 자연에 대해 인간은 우월이나 열등에 대한 의식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애니미즘으로 상징되는 이런 자연관은 그대로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한 인간은 다른 인간보다 약할 수는 있지만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반대로 다른 인간보다 강할 수는 있지만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26-127

BC 8000년 즈음 농업혁명이 발생하면서 모든 것이 변한다. 분명 농업혁명이 수렵채집 시기보다 더 큰 풍요와 안정을 가져다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 잉여 생산물의 증가는 인구 증가와 인구 밀집을 낳았고, 이것이 인간을 기아와 질병에 노출시켰다. 127

농업시대에 들어서면서 생산수단을 가진 자가 그렇지 않은 자를 지배하고 수탈하는 억압과 착취 형식이 발생한 것이다. 129

농경생활에 들어오면서 인간에게는 ‘우월’과 ‘열등’이란 의식이 발생한다. 129

농경생활이 진행되면서 전체 우주는 우월과 열등의 질서로 재편되고 만다. 마침내 ‘신-인간-자연’, 조금 구체화하면 ‘신-지배자-피지배자-자연’이란 위계질서가 탄생한 것이다. 130-131

마르크스는 국가나 사회가 ‘전도된 세계’라고 단언. 전도된 세계라는 것은 제대로 서 있는 세계가 아니라 뒤집혀 있는 세계라는 의미다. 생부지의 사람 10명이 식사를 하려고 한다. 9명이 짜장면을, 나머지 1명은 김치찌개를 먹고 싶었다. 9명은 중국집에 가고 나머지 1명은 한식집에 가면 된다. 이것이 정상적인 세계, 혹은 제대로 서 있는 세계다. 그런데 이들 10명은 모두 한식집에 가서 김치찌개를 먹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9명은 1명의 압도적 힘에 굴복하고, 그 결과 원하지 않은 음식을 먹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도된 세계다. 154-155

‘약하다’는 의식과 ‘열등하다’는 의식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자신이 약하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은 차근차근 강해질 준비를 하거나 혹은 자신을 지배하는 사람이 약해질 때를 호시탐탐 노릴 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이 열등하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은 그저 우월한 사람이 자신을 더 아껴주기를 기대할 뿐이다. 열등한 사람들이 언제든지 최고로 근사한 지배자를 상상하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의 고난을 속속들이 아는 지배자, 자신의 고난을 덜어주려는 의지를 가진 지배자, 그래서 하염없이 자신을 사랑하는 지배자를 꿈꾸게 된다. 바로 이때 신은 탄생한다. 마르크스가 “이 국가, 이 사회는 전도된 세계이므로 종교, 즉 전도된 세계의식을 생산한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계보학적으로 생각해보자.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한다. 그 지배를 영속화하기 위해, 혹은 약한 자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지배자는 피지배자의 내면에 열등의식을 각인시킨다. 155-156

‘종교에 대한 투쟁은 간접적으로 정신적 향료로 종교가 가지고 있는 저 세계, 즉 피안(jene Welt)에 대한 투쟁이다. 종교적 고통은 현실적 고통의 표현인 동시에 현실적 고통에 대한 저항이다. 종교는 억압된 자들의 한숨이자, 심장 없는 세계에서의 심장이고, 영혼 없는 상황에서의 영혼이다. 한마디로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민중에게 환각적 행복을 낳는 종교를 폐기하라는 이유는 민중으로 하여금 현실적 행복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민중에게 자기 삶의 조건에 대한 환각을 포기하라고 요청 한다는 것은 환각을 필요로 하는 조건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 비판은 태생적으로 종교가 후광이 되는 눈무르이 골짜기에 대한 비판일 수밖에 없다.’ - <서문> <헤겔 법철학 비판> (1843). 158

마음껏 사유하고 마음껏 의지하고 마음껏 사랑하는 격조 높은 삶, 인간 일반의 본질을 실현하는 근사한 삶을 살지 못해서 인간이 종교를 만들고 그것을 믿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차안에서 사는 삶이 너무나 불행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가 파는 아편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해 피안에서의 작은 행복이나마 꿈꾸었던 것이다. ... 마르크스가 “민중에게 환각적 행복을 낳는 종교를 폐기하라는 이유는 민중으로 하여금 현실적 행복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 이유다. 환각적 행복에 취해 있다면, 민중은 현실적 행복을 얻으려는 투쟁에 나설 수 없으니까. 1559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 종교는 단지 인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환상적인 태양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피안(Jenseits der Wahrheit)이 사라진 뒤에, 차안의 진리(Wahrheit des Siesseits)를 확립하는 것은 역사의 임무다.’ -<서문> <헤겔 법철학 비판> 162


‘열등’과 ‘우월’과 관련된 감정이 종교적 감정이라면, 가장 최고의 종교적 감정은 바로 자본주의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168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불교든 세게 종교는 하늘, 고독, 여행, 그리고 무역과 함께하는 종교일 수밖애 없다. 결국 숙명적으로 세계 종교는 자본주의와 같은 혈족이었던 셈이다. 즉 화폐경제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수많은 지역 종교들은 자의 반 타의 반 고사와 괴멸의 길을 걸어갔다. 185

18세기와 19세기 영국 도처에서 일어났던 ‘인클로저(enclosure)’, 즉 ‘울타리 치기’와 ‘고지대 청소’라고 번역할 수 있는 ‘하이랜드 클리어런시스(highland Clearances)’에 주목해야 한다. ‘울타리 치기’는 소수의 자산가들이 과거 공유지엿던 곳에 울타리를 쳐서 그곳을 사유지로 만드는 과정을 말한다. 엄청난 양의 공유지가 사라지자, 수많은 빈농들은 이제 더 이상 땔감을 얻거나 사냥을 하거나 소나 양을 키울 수 없게 된다. 당시 ‘울타리 치기’를 시행했던 소수의 기득권층들은 국가로부터 법률적 보호를 받았지만, 생계의 위험에 노출된 다수의 농민들은 공장이 있는 대도시로 몰려가 저임금노동자로 전락하고 만다. 인클로저 법인이 영국 국회를 처음으로 통과했던 때는 1773년이었다. 농민을 임금노동자로 만들 필요가 더 많아지자, 1845년부터 1882년까지 국회를 장악하고 있던 기득권층들은 인클로저 법안을 자그마치 15번이나 개정하게 된다. 그만큼 당시 지배계급들은 농민들을 프롤레타리아로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고지대 청소’는 영국 북부 고지대에서 농사를 짓던 소작농들을 깨끗이 청소하는 과정을 말한다. <자본론>에 등장하는 서덜랜드 공작부인(the Duchess of Sutherland, 1765~1839)이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녀는 영국군을 고용해 1만 5000명의 소작농을 내몰고 80만 에이크의 땅에 양 13만 1000마리를 방목한다. 1마 ㄴ5000명의 고지대 농민들도 ‘울타리 치기’로 대도시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던 농민들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고, 아울러 고지대에서 키운 양털들은 맨체스터나 글래스고 등에서 번성했던 직물산업의 원료로 공급된다. 191

체제의 대변인들은 18세기에도, 19세기에도, 20세기에도, 그리고 지금 21세기에도 동일한 이야기를 반복한다. 자본주의 이후 인간의 삶은 생각하지 못할 만큼 좋아졌다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데 이로운 자료들을 알아볼 만큼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기에, 예나 지금이나 그들은 이런 자료들을 토대로 자본주의를 옹호하기에 여념이 없다. 첫째, 노예제도나 농노제도가 사라지면서 인격을 긍정하는 사회가 열렸다. 둘째, 사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않았던 폐쇄적인 공동체가 사라지면서 개방성이 확산되었다. 셋째, 장인이 되려는 사람들에게 도제 생활을 강요했던 장인공동체가 소멸되고 평등하고 보편적인 교육제도가 정착되었다. 넷째, 여성들의 삶을 옥죄던 가부정적 가족 질서도 힘을 잃게 되면서 여성이 해방되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자기 찬양도 이 정도면 거의 정신분열 수준이다. 이 안에는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피로 얼룩지고 불길에 타오르는 문자”로 기록될 수밖에 없는 강압과 수탈의 역사가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 농민에게 지대를 받는 것보다 그들을 노동자로 만들어 착취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걸 지배계급이 자각했을 뿐이다. 192-193

산업자본주의체제가 정착될 때마다 ‘울타리 치기’나 ‘고지대 청소’와 같은 정책이 항상 수반되었다는 사실이다. ... ‘울타리 치기’와 ‘고지대 청소’ 정책은 스탈린체제의 경우 ‘집단농장’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으로, 그리고 중국이나 인도, 브라질의 경우 지역공동체 해체 정책으로 반복되었던 것이다. 195

‘자유로운 노동자(Freie Arbeiter),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자, 그러므로 노동을 파는 자가 있다.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뜻이다. 즉 노예와 농노처럼 그들 자신이 직접 생산수단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자유롭다는 의미이고, 또 자영농민의 경우처럼 그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즉 생산수단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다는 의미다.’ - <자본론> 1권 (1867) 197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에게 자유란 아주 제약된 것임을 폭로한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어느 자본가에게 팔 것인지를 결정할 자유만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이것은 전혀 자유가 아니다. 자기 노동력을 판매할 수도 있고 판매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는 노동자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을 자유는 노동자들에게 단지 자살할 자유만을 의미할 뿐이다. 200

자본주의가 단순한 억압체제를 넘어서는 지점은 그것이 종교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노동력을 팔아야만 생활할 수 있는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를 양산한 주범이면서도, 자본주의체제는 노동계급마저 자본을 숭배하도록 유혹할 수 있다. 돈은 피안의 막연한 행복보다 차안의 행복을 보장한다는 악마의 속삭임이다. 201

농업경제가 지배하던 시절 제정신을 가진 농민들은 땅을 독점하는 억압체제에 저항했고, 산업경제가 지배하던 시절 정상적인 노동자들은 돈을 독점한 체제와 맞서 싸웠던 것이다. 이와 달리 자본교도로 거듭난 노동자의 안중에는 억압이 없는 사회, 즉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의 속내에는 지배자가 되려는 욕망만이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교도는 자본가로부터 착취당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자본가가 되려는 뒤틀린 욕망을 가지고 있다. 맞는 사람이 되기보다 때리는 사람이 되겠다는 말초적 생각이니, 이것보다 왜곡된 욕망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본교가 교세를 확장할수록, 자본주의의 억압구조는 그만큼 어떤 저항이나 도전도 받지 않는다. ...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가 “종교 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라고 말했던 이유다. 202

마르크스나 짐멜이 기독교와의 유사성을 통해서 자본교를 해명하려고 했다면, ... 벤야민은 기독교와 자본교 사이의 유사성뿐만 아니라 그 차이점도 분명히. 203

벤야민에 따르면 자본교의 첫 번째 특징은 “숭배의 구체화”다. 자본교도는 감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대상, 즉 구체적인 상품을 숭배한다는 것이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며 감각을 초월한 신성에 몰두하는 기독교의 숭배와는 완전히 반대 방향이다. 두 번째 특징으로 벤야민은 “숭배의 영속화”를 이야기한다. 매일매일 휴일도 없이 자본교도는 강박증적으로 상품숭배에 몰두한다는 의미다. 반면 기독교도는 보통 주일을 기다려 예수와 신을 숭배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자본교가 기독교와 달라지는 지점은 자본교의 세번째 특징에서 분명해진다. 벤야민은 자본교의 “숭배는 ‘죄를 만드는(verschuldend)’ 것”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숭배가 속죄행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자본교는 그야말로 기독교와 완전한 대척점에 있는 종교였던 것이다. 벤야민의 주장은 명확하다. 상품에 대한 숭배, 즉 “구체적인” 상품을 “영속적으로” 구매하는 행위는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신적인 돈을 상품의 성전에 제물로 바치니, 이것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벤야민은 부연한다. “자본주의는 아마도 속죄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만드는 숭배의 첫 번째 사례일” 것이라고, 여기서 벤야민이 사용하는 단어 ‘슐트(schuld)’에 주목하자. 독일어 ‘슐트’는 ‘죄’만이 아니라 동시에 ‘부채’를 의미한다. 그러니 자본교의 숭배는 죄를 만드는 숭배이자 동시에 부채감을 만드는 숭배였던 셈이다. 208-209

자본주의가 종교로 기능하는 이유는 이 체제가 인간에게 우월과 열등에 대한 신앙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 신분사회만이 인간에게 열등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만큼 집요하게 열등의식을 우리 뇌리에 각인하는 체제도 없으니까. 억압체제가 항상 승승장구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지배계급의 주문에 걸려 자신이 열등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213



Posted by WN1
,


이 책은 원래 대학에서 강의 했던 교양강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 진 것이다.  9


내가 가르치는 것과 똑같은 강좌를 2~3년 정도 담당했던 한 여자 제자와 사석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강의는 할 만한가? 어렵진 않나?"

"별로 어렵진 않은데, 재미가 없어요."

"재미가 없다? 왜?"

"성이라는 게.. 뭐랄까, 너무 뻔한 내용이잖아요. 1~2년 강의하고 나면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없어요. 새로 연구하거나 고민해야 할 내용도 없고..."

... 난 물론 그녀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한 가지는 인정해야만 했다. 성이라는 것이 이제는 대학에서조차 조금은 식상하고 진부한 주제가 되었다는 것 말이다.  18


바야흐로 성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두(話頭 말할화 머리두)가 된 느낌마저 든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창녀인 소냐에게 "여자의 몸에는 평생 파먹어도 마르지 않는 광산이 숨겨져 있지"라고 빈정거렸지만, 어쨌든 우리는 드디어 성이라는 보물단지를 찾아낸 셈이다. 아무리 파내더라도 마르지 않는 샘, 진지한 성찰의 가능성과 통속적 흥미를 동시에 충족시켜줄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20


'성의 과잉'이라고 부를 만한 요즘의 추세 속에서, 또 이론적, 실천적 혼란과 갈등 속에서 성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이나 학문적 관심까지도 시중에 넘쳐나는 수많은 '섹스 이야기'중 하나로 취급될 위험이 있다.  22


"이 책은 해답을 주기 위해 있는 게 아니라 고민을 주기 위해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23


'우리들은 성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사실 시시껄렁한 음담패설 말고는 성에 대한 이야기를진지하게 나눠본 적도 없지 않는가? 사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자유로이 대화하거나 배울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지성인으로서 교양을 쌓아야 한다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자 삶의 일부인 성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지 자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24세, 남학생)  26


성 그 자체가 원래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이라면, 왜 우리는 성에 대해 그토록 부끄러워하는가? 왜 우리는 성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진실을 계속 감추고 부인하는가? 왜 우리는 생명의 원천인 성을 때로는 숭배하고 칭송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더럽고 불결하다 욕하고 또 철저한 금기의 대상으로 삼는가? 아니, 인간의 성에 대한 '단 하나의 객관적 진실'이라는 게 도대체 있기는 한 건가?  28-29


성에 대한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성찰이나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성이 너무나 일상적이고 낯익은 대상이라는 데 있다.  33


육체 없는 성이 있을 수 없는 한 성에 대한 관심은 곧 육체에 대한 관심 아닌가? 물렁거리는 살덩어리와 끈적거리는 액체로 이루어진 육체, 끊임없는 욕망으로 우리를 들뜨게 하고 우리의 고귀한 영혼을 부패시키는 육체, 언젠가는 사멸해버릴 그 저주스러운 육체 말이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는 플라톤의 경구가 잘 말해주듯, 성에 대한 관심을 갖는 순간 우리는 육체에 붙들려 영혼의 순수함과 완전한 앎을 포기해야 한다는 공포가 철학자들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욕망의 힘이 두려워 자신의 성기를 잘라버렸던 초기 교회의 금욕적 수도사들처럼 육체의 성을 부정했던 것이 아닐까?

고대 그리스 이래로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로고스(Logos), 즉 이성과 논리와 언어를 진리 탐구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로고스=진리'라는 등식에 입각해서 피와 살을 지닌 인간의 육체, 아무리 애를 써도 순수하게 논리화될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거의 본능적으로 혐오했는지도 모른다.  46-47


프로이트는 이 주제를 탐구하면서 '성보다는 좀 더 부드러운 '사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사랑이란 기본적으로 성기의 결합이었으니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성적인 사랑'과 다른 종류의 사랑을 구별할 수 없다.  50


우리는 성이라고 하면 단순히 생물학적인 성의 구별이나 직접적인 성행위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의미의 성을 영어로 보통 '섹스(sex)'라고 한다. 서구에서 1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 말은 사실'(둘로) 나뉜 것'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의 'sextum'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말이 처음에는 주로 생식기관의 차이로 구분되는 '생물학적 성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다가, 19세기부터 남녀 양성 사이의 성 관계나 성적 결합을 뜻하는 말로 그 의미가 확대된 것이다.  51


예컨대 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도덕, 성과 관련된 제도나 관습, 이데올로기, 다양한 성 심리나 문화, 성욕, 성적 정체성 등을 모두 살펴봐야 하는데, 이런 넓은 의미의 성을 단순한 '섹스'와 구분하여 학계에서는 보통 '섹슈얼리티(sexuality)라고 부른다.  52


일반적으로 서구 언어에서는 어휘가 형태적으로 확장될 때 '1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명사'가 '2 형용사'로 바뀐 뒤에 다시 '3 그 형용사의 명사형'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살펴보자면, 'unverse(우주)'라는 낱말이 'unversal(우주의, 보편적인)'로 바뀐 뒤 여기에 추상명사를 만드는 어니 '~ity'가 붙어서 'universality(보편성)'라는 새로운 명사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때 'unverse' 와 'universality'를 비교해보면, 전자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사물인 반면에 후자는 추상적 성질임을 알 수 있다. 물론 'universality'는 'unverse'가 갖고 있는 특성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두 명사의 존재론적 차원은 매우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cause(개별사건의 원인)'가 ''causai(원인의)'이 된 뒤 다시 'causality(인과성, 인과관계)'로 바뀌면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의 새로운 명사가 탄생한다. 따라서 sex(구체적인 성행위, 성별) -> sexual(성의, 성적인) -> sexuality(성욕, 성과 관련된 태도, 성적 정체성 등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추상적 성)라는 형태적 어휘 변환 과정을 거칠 때에도 그 의미에 심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52


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성을 '자연적으로 주어진 사실'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구성물'로서 파악하게 되고, 또 그 속에 담겨 있는 사회적, 정치적 의미들까지 탐구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53


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적어도 아래와 같은 세 가지의 접근법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첫 번째로 가능한, 그리고 다른 모든 방법의 기초가 되는 것은 역사적 접근법이다. ..

역사적 접근의 진정한 의의는 현재의 성 관념 및 제도들의 기원과 변천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가운데 "성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

당연히 "더 적은 사변과 더 많은 증거"라는 원리가 지배한다. 따라서 성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라는 애초의 취지가 무색해지기 쉽지만, 성에 관해 쓸 만한 조감도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이 고달픈 과정을 가능한 한 성실히 밟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아마 이론적, 과학적 접근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건축물에 비유해보곤 하는데, 그 토대가 생물학적 측면이라면 기둥들은 인류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측면들을 가리키고 지붕은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성의 각 측면을 분해하여 그 각각을 해당 실증과학의 연구 성과에 따라 고찰하고, 다시 밝혀진 사실들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종합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세 번째 방법은 실천적 문제 중심의 접근법이다...

성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이나 태도는 급변하고 있으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조건들도 실존한다. 단지 사태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만이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53-57


비판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려서 판단하거나 밝히는 것"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기묘하게도 비판이라는 말을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남의 잘못을 들춰내어 따지고 공격하는 것"을 가리킬 때 쓰는 경우가 많다.  58


철학은 경험적으로 주어진 사실들을 기술하거나 설명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성찰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그 이면과 전체적 연관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려고 애쓴다.  58-59


철학은 어떤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며, 성과 관련된 사실들을 실증적으로 직접 탐구하기보다는 그러한 사실들의 의미와 근거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철학이 대상으로 삼는 성은 개별과학자들이 탐구하는 대상과 같은 하나의 사물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진 것, 즉 우리의 언어와 의식 속에 녹아들어 있고 우리 자신의 실천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그 무엇이다. ..

담론(discours)이란 "특정한 목적에 따라 특정한 주체에 의해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된 이야기"를 가리킨다.  59


삶 속에서 성은 언제나 일정한 담론으로서 위세를 떨치고 있으므로 성에 대한 철학의 비판 작업 또한 바로 이러한 '담론으로서의 성'을 분석하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 스스로 새로운 성 담론을 구축해나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60


사람들에게 섹스와 연결되는 낱말들을 적어보라고 하면, "사랑, 결혼, 쾌락, 생식, 욕망, 금기, 남녀의 성기, 지배, 도덕, 성범죄, 변태, 누드, 포르노, 임신, 자위, 신비(스러움), 정력, 매춘, 생리..."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답이 두서없이 튀어나온다. 이처럼 다양하고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이미지와 개념들은 사실상 섹스라는 말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이 정말 복합적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63


성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이처럼 담론화된 성 또는 성 담론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 있다면, 이제 그것은 단순히 "무엇이 진리인가?"를 찾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이 진리라고 할 때 그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는 "왜 그것이 진리라고 여겨지는가?" 등등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69


인간의 성에서 본능적이고 생물학적/생리(학)적인 요소가 더 중요한가, 아니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요소가 더 중요한가를 둘러싼 논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진실은 두 요소의 결합에 의해 인간의 성이 만들어졌다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시선, 우리의 태도, 우리의 평가가 아닐까? 어떤 의도에 따라, 어느 쪽에 더 가중치를 두고, 어떤 요소에 더 주목하며, 어떤 사실들을 더 소리 높이 외치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결국 이러한 '본느의 담론' 자체가 우리의 특정한 인식과 실천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또 거꾸로 이 담론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 성에 대한 인식과 실천이 달라진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74-75


우리는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과 본능들이 동물과 어떻게 다르며, 또 그것이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요인들과 뒤얽히면서 어떻게 우리의 성을 창출해냈는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75


"나는 언제 누구와 섹스해도 괜찮은가?" ...

인간도 동물처럼 오직 생식만을 위해 일정 기간에만 섹스를 했다면 아마도 성에 관한 규제 같은 것은 불 필요했을 것이다.  76


성에 대한 현대의 과학적 연구들은 무지에서 비롯된 수많은 오해를 바로잡고 성 연구에 큰 기여를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바로 통계의 신화와 오르가슴의 신화다.  83


성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단순히 더 많은 쾌락을 가져다주는 기교를 찾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쾌락의 담론 자체를 해부하고 그 속에 들어있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함으로써 성적 쾌락과 이를 둘러싼 논의들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는 데 있다.  84


도덕의 담론. 사실 도덕의 담론은 성과 관련하여 가장 흔하고 표준적인 담론이며 또 빛나는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의 담론이기도 하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성은 무엇보다 먼저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다.  85


우리 사회에서는 평소 그다지 도덕적으로 살지도 않으면서 성에 관해서만큼은 겉으로만 도덕적인 척하거나, 타인의 심각한 공적인 비행(非行 아닐비 다닐행)에 대해서는 지극히 관대하면서도 성에 관련된 문제라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다.  86


이러한 불균형과 자기모순은 성에 관한 '도덕의 담론'과 뿌리 깊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담론의 핵심은 "육체에 기반을 둔 성은 우리를 파멸시킬 수 있는 유혹이므로, 윤리만이 우리를 파멸로부터 구해준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의 밑바닥에는 다시 "섹스란 원래 동물적이고 더럽고 천박한 것인데, 도덕과 제도의 통제를 받을 때에만 인간적인 행위로 승화되고 용인될 수 있다"는 입장이 깔려 있다.  87


'인간의 성에 대한 철학적 고찰'의 핵심은 .. "우리는 생물학적/생리(학)적 본능이라는 말로써 무엇을 생각하고 실천하려 하는가?"를 비판적으로 분석해보는 데 있다. 독자들 스스로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한 번 물어보기 바란다. 

"생물학적/생리(학)적 본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 나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사용하는가? 생물학적/생리(학)적 본능에 대한 이해가 나의 성적 실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101-102


인간은 성과 무관한 영역, 아니 오히려 성을 부정하거나 억압하는 영역을 지니고 있기에 인간다워질 수 있다고 보는 견해야말로 인간의 성을 이해하기 위해 버려야 할 첫 번째 오해인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도덕이나 종교, 예술에서 올 뿐, 벌거벗고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을 때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똑같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렇다면 인간은 왜 벌거벗고 뒹구는 걸로 만족하지 않고 포르노를 만드는지, 또 때로는 벌거벗고 뒹구는 대신에 속된 말로 '변태'라고 불리는 엉뚱한 행위 따위에 집착하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

난잡하고 무분별하게 섹스를 즐기는 것을 '동물적' 이라고 비난하는 우리의 언어습관이 얼마나 부당한지.  106


20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진화생물학의 풍부한 연구 성과는... 더 폭넓은 이해를 위한 발판 노릇을 할 때에만 의의를 갖게 될 것이다.  107


도대체 왜 인간의 성은 생식이라는 자연적 울타리를 넘어서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러한 이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인간의 암컷, 즉 여자에겐 발정기가 없다. 인류의 선조들이 협동노동에 의해 사시사철 먹이를 구할 수 있게 됨으로써 영양 상태가 좋아졌고, 그 결과 특정 시기에만 번식을 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일 년 열두 달 임신이 가능하다는 점 하나만 봐도 다른 동물과 비교하면 엄청난 진보를 한 셈이지만...  108


여성의 배란이 감춰져 있어서 심지어 본인 자신도 알 수 없다.. 

'성 전략(sexual strategies)'을 낳았다. 인간의 선조들은 언제 섹스를 해야 임신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상대를 유혹하고 섹스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복잡다단한 '성 전략'을 발전시켜야 했던 것이다.  110


컴포트(Alex Comfort)가 <섹스의 즐거움(The Joy of Sex)>에서 지적한 대로, "과거에는 성행위의 윤리성에 대해 왈가왈부했지만, 요즘에는 성행위에서 어떻게 만족을 얻을 것인가에 신경을 쏟고 있는" 것이다... 더 많은 쾌락을 얻기 위한 무의식적 노력이 인간의 성 행동과 의식을 규정해왔다고 볼 수 있다.  111


성적 쾌락의 중요성은 인간의 몸 구조에서도 확인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더 많은 쾌락을 얻을 수 있도록 꾸준히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몸 크기와 비교할 때 엄청나게 큰 남자의 성기, 엄청난 양의 신경망이 밀집되어 민감하기 짝이 없는 여성의 클리토리스, 매끄러운 피부와 온몸에 퍼져 있는 성감대, 다양한 성적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신체적 특징들, 예컨대 유난히 발달한 여성의 젖가슴이나 엉덩이, 높은 목소리, 성기 주변에만 남아 있는 털, 붉은 입술, 애교웃음, 예민하게 변하는 눈동자 등등이 이를 증명한다. 또 직립보행에 의해 자유로워진 손과 변화된 성기 위치는 효과적인 애무 동작과 다양한 성교 체위(體位 몸체 벼슬위)를 가능하게 해주었으며, 두뇌의 발달에 따라 사고 능력과 감정도 풍부해졌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성행위를 좀 더 풍요롭고 즐겁게 만든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쾌락의 중요성은 섹스에 소요되는 시간에서도 잘 드러난다. 짧게 끝나는 섹스를 가리켜 속된 말로 '토끼씹'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실제로 토끼의 교미는 10초 이내에 끝나며, 그 밖의 대부분의 동물들, 심지어 정력의 상징인 말이나 백수의 왕이라는 사자의 경우에도 길어야 30초를 넘기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인간의 성교 시간은 수 분, 때로는 수십 분까지 늘어날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 시간을 더 늘리기 위해 무진 애를 쓰기도 한다... 동물들은 단지 쾌감을 증대시키기 위해 인간처럼 길고 복잡한 전희(前戱 앞전 놀희)를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상적인 인간 남녀는 성교를 하기 전에 꽤 오랫동안 서로의 몸을 공들여 애무한다. ..

여성의 경우에는 성교를 통해 오르가슴을 얻는 게 쉽지만은 않으며,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남자는 사정이라는 생리적 매커니즘 때문에 비교적 쉽게 오르가슴을 경험하고 확인할 수있지만, 사정 그 자체가 최고의 성적 만족을 자동적으로 보장해주지 않는 한 결국은 마찬가지다.  112-113


'강한 성적 쾌감'은 인류의 생존에 어떤 도움을 준 것일까?  115


인간이 섹스를 통해 추구하는 쾌락은 자극에 대한 단순한 육체적 반응만은 아니다. 물론 강렬한 생리적 반응이 우리의 뇌리 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러한 쾌감 속에서 확읺되는 총체적 만족감, 즉 '상대와 하나가 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섹스할 때의 자세에서도 확인된다.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얼굴을 마주보고, 즉 서로의 감저오가 반응을 확인하면서 성행위를 한다. ...

얼굴을 마주보는 체위는 우리의 신체구조, 성기의 위치와 잘 맞기 때문에 좀 더 편할 뿐만 아니라, 서로 마주봄으로써 강한 심리적, 정서적 유대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 유대감은 더 나아가 사회적 교류와 관계를 강화시키는 역할도 하며, 바로 이런 측면을 고려할 때만 인류의 정적 진화가 좀 더 효과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116


헬렌 피셔는 <성의 계약(The Sex Contract)>에서 아주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하고 있는데, .."성은 인간 생활의 모든 것을 작동하게 하는 점화장치의 불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 새끼의 양육에 성공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문제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생존을 결정짓는 중대 사항이므로, 인류의 선조들이 번식의 안전을 위해 좀 더 강력하고 지속적인 유대를 발전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피셔에 따르면 이처럼 새끼의 공동 양육과 지속적인 섹스를 통해 형성된 강한 정서적, 사회적 유대를 기초로 최초의 가족과 공동체가 생겨났으며, 이와 더불어 협동심, 애타심, 의무감, 수치심, 정의감,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공포, 성적 질투 등의 기본적 감정들과 갖가지 의사소통 수단, 규칙, 친족 체계, 도덕, 복잡한 사고, 여러 가지 관념들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117-118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바람피우기'가 일부 부도덕한 사람들의 비정상적인 일탈행위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119


생식 결과의 다양성, 다산성(多産性 많을다 낳을산 성품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한 명의 상대하고만 섹스하는 것보다 여러 명의 상대와 섹스하는 게 더 낫기 때문이다.  120


여자들의 바람기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 학자들에 따라서는 여자 또한 자신의 자손에게 더 나은 유전자를 물려주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남자들, 그것도 괜찮은 남자들을 골라 성 관계를 가지려는 심리를 발전시켜왔다고 대답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 양이 아닌 질적인 측면에서 더 나은 생식 결과를 얻기 위해 바람을 피운다는 것이다.  121


우리는 바람기의 원인에 대한 두 번째 답을 찾아봐야 한다... 사람들이 바람을 피우는 좀 더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쾌락과 연관이 잇을 것이다. 인간의 성이 단순한 생식의 효율성을 넘어서 쾌락 그 자체를 지향하게 됨에 따라 섹스에서 다양성과 변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인간 본성의 일부가 되었으며, 이것은 남녀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성향을 잘 보여주는 용어 중에 '쿨리지 효과(Coolidge effect)'라는 게 있다. 미국 대통령이던 쿨리지가 어느 날 부인과 함께 어떤 농장을 방문했는데, 마침 수탉이 암탉과 교미를 하고 있었다. 이를 본 부인이 안내인에게 물었다. "저 수탉은 하루에 몇 번이나 저짓을 하나요?" 안내인이 대답하기를 "수도 없이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은 독기 어린 목소리로 "그 사실을 대통령께 좀 전해주세요"라고 했다. 부인의 말을 전해들은 대통령이 물었다. "그런데 그 수탉은 늘 같은 암탉과 관계를 하나?"  안내인 왈 "아닙니다.  매번 다른 암탉과 하지요". 이에 대통령은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 사실을 영부인께 전해주게." 우스갯소리 같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이 상대가 바뀔 때마다 더 큰 흥분과 만족을 느끼며, 이를 가리켜 '쿨리지 효과'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런 현상은 여자에게도 해당된다. <킨제이 보고서>에 따르면 "언제 성적 흥분을 가장 크게 느끼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남녀의 대답이 크게 달랐지만, 양쪽 모두 1위를 차지한 답은 "새로운 상대와 섹스를 할 때"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바람기는 우리가 처해 있는 또 다른 모순을 보여준다. 강력하고 지속적인 유대를 추구하는 본성과 다양하고 변화 있는 쾌락을 추구하는 본성이 우리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면 인간의 성이 단순하게 결정되지 않으며 근본적인 모순 속에서 정말 다양한 스펙트럼을 만들어낸다는 점이야말로 신비에 싸여 있는 진화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인지도 모른다.  122-123


옛날 아라비아의 속담처럼 "사람이란 그들의 부모보다는 그들의 시대를 더 많이 닮는다."  124


* 엘리아스(Nobert Elias)는 <문명의 역사>에서 성적 수치심이나 충동의 조절 또한 문명의 진보와 함께 발달한 심리적 메커니즘이기 때문에, 야만적이거나 원시적인 사회에서는 알몸이나 성행위 등에 대해 문명인들과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엘리아스의 이런 주장은 최근 몇몇 학자들에 의해 근거 없는 편견과 독단이라고 비판받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한스 페터 뒤르(Hans Peter Durr)의 <나체와 수치의 역사>를 보라. 뒤르에 따르면 알몸과 성에 대한 수치심은 문명의 발달 정도와 관계없이 모든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  129


좀 엉뚱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여자들이 여름에 소매 없는 옷을 입을 때 겨드랑이 털을 없애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대개 "보기 흉하기 때문"이라거나 "지저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정답일까? 우리들이 심리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든 간에, 사실 겨드랑이 털을 없애는 진짜 이유는 미적 감각이나 위생 문제와는 거의 무관한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성들이 겨드랑이 털을 없애는 이유는 여성들이 다리를 벌리고 앉지 않는 이유와 동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겨드랑이 털이란 무엇인가? 겨드랑이 털은 사춘기 이후에 나기 시작하며, 성기 주변의 털과 더불어 성적 성숙을 상징하는 우리 몸의 대표적 신호다. 게다가 그 털은 성기 주변의 털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기 때문에 너무 자극적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겨드랑이 털 자체가 강한 성적 자극을 보내는 신호이기 때문에 남에게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서양의 고전 회화에서 알몸을 그리면서도 음모만은 그리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비록 알몸이라 하더라도 음모가 없다면 성적인 의미가 제거되어 외설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마치 여성이 다리를 벌리는 자세가 성교 자세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금기사항인 것처럼 말이다.  130


고대 중국에서는 여자를 '적(赤=불꽃)', 남자를 '백(白=흙)'으로 상징했는데, '적'은 전통적으로 창조력, 성적 능력, 생명, 빛, 갓 태어난 아이, 알몸의 색깔 등을 나타내는 반면 '백'은 죽음이나 소극성, 성적 무기력 등을 뜻했다. 이 점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성적으로 우위에 있었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또 고대 중국의 신화나 전설에서 여자는 특히 성(=우주적 자기재생산)에 관한 한 신비한 마력을 가진 존재였다. 유명한 <소녀경>을 비롯한 각종 '성 교본'에서도 여자는 완벽한 성 지식을 가지고 성을 수호하는 위대한 스승으로, 남자는 무지한 제자로 그려져 있다. 여자는 교접을 통해 자신의 무한한 기를 남자에게 공급하는 '태모(太母 클태 어미모)'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주나라 이후 가부장제가 확립되면서 음과 양 중 양을 더 중시하게 되고 태초의 여성숭배는 변질되어 '성적 흡혈주의(sexual vampirism)', 즉 여성에 대한 착취로 타락했지만, 어쨌든 음을 중시하는 흐름은 도가나 신비사상, 샤머니즘 등을 통해 민중신앙 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132-133


남성들은 늘 여성의 우월한 성적 능력을 숭배하면서도, 때론 그것을 두려워하고 힘으로 통제하려 애써왔던 것이다. 어쨌든 경배와 공포가 뒤얽힌 지점에서 이제 성 자체가 신비스러운 베일에 가려진 보편적 금기대상이 되며, 그 금단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어떤 신성한 힘에 의해 그 자격과 절차, 구체적인 방법 등을 허락받아야 한다. 한마디로 자연 상태에서는 '보편적 허용과 특수한 금지'가 기본 규율이었던 반면, 이제 반대로 '보편적 금지와 특수한 허용'이라는 원칙이 성의 질서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135-136권력의 이동은 늘 체제의 근본적 전환을 가져오는데.. 남근숭배가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면서 원시사회의 성 관념 및 성 풍속들이 서서히 제거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여성에 대한 숭배는 멸시와 경계로 바뀌고, 종종 종교의식이나 주술과 연관되어 남녀 모두에게 생식과 쾌락의 결합 또는 쾌락의 자유로운 추구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원시적인 성 풍속들은 좀 더 엄격한 도덕적 통제에 묶이게 된다.  145


남성의 입장에서는 자기 자식을 낳아서 대르 잇고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므로, 이제 여성의 불임은 큰 죄가 되었다. 불임을 막는 풍속들이 생겨났고, 임신중절이나 자위행위, 남색(男色 사내남 빛색) 등은 엄하게 처벌되었다. 과거에 공동체 전체에 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찬미되던 여성의 생식력은 이제 한 남자의 값진 재산이 되었으며, 매매혼이나 약탈혼이 보편화되었다.  147


어차피 우리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내고, 우리가 만든 신화 속에 갇혀서 산다. 신화에 대한 비판과 분석까지도 그러한 순환의 고리를 완전히 잘라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151



15~16세기에 시작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 육체와 욕마의 해방을 주장함과 동시에 성대 대해서도 좀 더 긍정적인 사고를 제공하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르네상스 초기 처음에는 '성의 해방'이 주로 예쑬의 에로티시즘을 통해 표현되었지만, 사실상 이것은 중세 말 십자군 전쟁, 페스트 등으로 인구가 격감하고 생산력이 정체함에 따라 전면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결혼과 출산이 최고의 미덕으로 칭송되기 시작했던 사회경제적 배경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 이후 노동력과 군대의 필요 때문에 더욱 가속화되었다.  167-168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루터(M. Luther)는 가톨릭교회의 극단적 금욕주의와 위선적인 행태들을 비판하면서도 부부간의 성애를 긍정하고 인간 육체의 불완전함을 인정했다. 또 칼뱅(J. Calvin)은 성행위는 성스러운 것이며, 모든 성인은 가정을 가져야 하며 가정 안에서 삶을 공유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가정을 공동체의 주춧돌로 파악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주장은 가족을 중심으로 새로운 생산양식의 주체가 되어야 할 초기 부르주아 계급의 입장(가족의 노동력을 중심으로 하는 소상품생산은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학을 했다)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이는 그들이 이제 성 문제를 종교적 문제나 단순한 도덕의 문제가 아닌, 사적 생산과 결부된 개인의 문제로 파악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근대 초기는 부르주아사회의 성 윤리가 만들어지고 정착되는 시기이기도 했는데, 개인들 간의 계약으로서 결혼, 일부일처제 등이 확고한 원칙이 됨에 따라 역설적으로 그 보완물로서 성 매매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168-169


18세기에 들어서서 이른바 절대주의 시대가 되자 육체는 더욱더 성적 도구가 되었고, 몰락해가고 부패한 기생계급이 되어버린 귀족들의 성 관념과 성적 유희는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성을 단순한 쾌락의 수단, 유희의 도구로만 파악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여성의 육체도 파편화되어 관능적 쾌락의 도구로만 평가되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여성의 가슴이나 다리를 노출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심지어 젖가슴이나 허리, 허벅지, 엉덩이, 생식기 등을 각각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풍습까지 생겨났던 것이다.(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자신의 젖가슴을 석고로 모형을 떠서 과일 그릇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풍속의 역사> 제3권 까치, 1987. 43쪽)  170


이 시기에는 육체적 쾌락을 위한 연애기술이 숭배되었으며, 연애란 '두 피부의 접촉'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만연하여 성의 쾌락만이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연애를 위한 성교육, 그러니까 상대를 유혹하고 즐거움을 누리는 기술에 대한 교육이 성행했으며, 상류사회에서는 외설적인 농담을 주고받는 기술이 품위 있는 풍류로 취급되기도 했다. ..

성적 타락이 심해지면서, 지배계급 안에서는 극단적이고 심지어 변태적인 성욕을 추구하는 경향이 생겨났고, 반대로 중간계급 사이에서는 감상적 연애나 지나치게 관념화된 정신적 사랑 등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처럼 연애풍속은 거의 문란하다 할 정도로 자유분방해졌지만, 결혼은 여전히 인습에 묶여 있었다. 귀족들에게 아내나 애인의 아름다움은 단지 과시의 수단이었고, 결혼과 연애는 완전히 분리된 채 혼인은 철저한 거래가 되었다. 특히 귀족과 대부르주아지 사이의 정략결혼이 많았는데, 그것은 돈을 벌어서 성공한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딸을 귀족에게 갖다 바침으로써 사회적 명예를 구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하층 부르주아지들 사이에서는 '첫눈에 반한 사랑'이 경멸받았다. 왜냐하면 사회적 권력이나 지위도, 커다란 재산도 없었던 사람들은 배우자를 고를 때 서로를 관찰하고 시험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근검절약하는 생활태도와 성실성이었기 때문이다.  171-172


육체적 쾌락을 탐하는 시대 분위기에 어울리게 절대주의 시대는 성 매매가 대호황을 누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18세기 말 유럽 최대의 도시였던 파리의 인구 60만 중 4만 명이 성 매매 여성이었으며, 오스트리아의 빈에는 1만 4천 명, 런던의 경우에는 첩 말고도 5만 명 이상의 성 매매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도시의 하층계급에 속하는 젊은 여자들은 대부분이 매춘부가 되었고, 르네상스 시대처럼 성 매매 여성이 특별한 복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소도시나 농촌에서도 은밀한 방법으로 성 매매가 지속되었다. ..

여관, 온천, 카페, 식당, 주점 등이 모두 성 매매에 이용되고 뚜쟁이들에 의해 시골 처녀들이 도시로 팔려가는 일도 흔했는데, 성 매매의 성행은 필연적으로 성병의 확산을 가져왔고 결국 19세기까지 매독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이 시기의 성 풍속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방탕하기 그지없는 '성적 향연(Orgie)'이 성행했다는 점일 것이다. 예컨대 일부 귀족들 사이에서는 축제에서 여자 파트너를 서로 바꾼다든지, 넷 또는 여섯이 참여하는 섹스 파티를 연다든지, 채찍이나 물리적 도구, 여러 가지 향료와 최음제 등을 사용한다든지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는데, 악명 높은 사드 후작의 기행(奇行 기이할기 다닐행) 또한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전제로 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프랑스혁명 후 절대주의가 종말을 맞이하고 산업사회가 도래하면서, "노동하고 활동하는 인간, 감정, 이성, 육첵 통합된 새로운 인간"이라는 새로운 미의 이상이 생겨났다. 퇴폐적인 것보다는 건강한 아름다움이 중시되기 시작했고, 복장에서도 민주화가 이루어져 여성들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활동적이며 자연스러운 복장, 다시 말해 "옷을 입고도 벗은 것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복장을 수용하게 되었다. ..

이제 계급과 무관하게 모든 여성은 아주 억압적인 청교도 윤리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다.

중매와 구혼 광고가 일반화되면서 결혼 또한 철저한 계산임이 백일하게 드러났는데, 이러한 추세는 부르주아지의 경우에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

성에 대한 억압적인 청교도 윤리에도 불구하고, 모든 계급에서 혼전 성 관계는 점점 늘어나 일종의 보편적 현상이 되었으며, 자본에 의한 임금 통제와 빈곤 때문에 일찍 결혼할 수 없었던 젊은 독신 노동자들은 자유연애를 통해서 욕망을 해소하려고 하게 되었다. 또 이들의 성에 대한 무지는 미혼모, 낙태 등의 심각한 사회문제를 낳았고, 결국 부르주아사회가 그토록 신성시하던 '가족의 가치와 구속력' 마저 약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172-174


('자유연애'란 문자 그대로 독립된 개인들이 자신의 욕망과 필요에 따라 사랑하는 상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것을 가리킨다.)  175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현대 부르주아사회가 이룩해낸 하나의 공로는 성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이해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음탕한 사색과 무지로부터 성을 해방시키는 첫걸음은 바로 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

형대 사회에서 일어난 성의 혁명적 변화 중 하나는 아마도 산아제한과 임신중절, 피임법 등의 발전으로 인해 점차 생식과 성애가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점일 것이다.  177


산업화된 현대사회가 인간의 성을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변화시킨 것은 물론 아니다. ..

생활고에 지친 노동자계급의 경우에는 남녀 사이에 강력한 정신적 유대를 바탕으로 하는 성애를 만들어내고 실천하기가 어렵다. 결국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찰나적인 쾌락과 육체적 욕망의 충족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만들어지며, 이는 다시 사회 전반의 성적 타락, 야수화, 성폭력 등등의 문제를 낳는다. 또 근래에는 포르노, 마약 등과 함께 변태적 성욕과 성범죄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데, 어찌 보면 문명화된 사회의 억압적 분위기와 변화 없는 일상 생활이 거꾸로 성범죄와 포르노산업을 확산시키는 주범이라고 볼 수도 있다.  179


인간의 노동력 자체가 상품화되고 이를 기초로 팔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상품이 되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이ㅔ서 유독 성의 상품화에 대해서만 울분을 떠뜨리는 것은 위선적인 태도일 수도 있다...

이미 거대한 산업이 되어 부르주아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현대의 성 산업은 도덕적 분노만으로 상대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상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매매의 부정적 효과는 너무도 분명하다. 성 매매는 사회 전체를 눈에 보이지 않게 타락시켜 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끊임없이 왜곡하고, 세상 모든 여자들을 성 매매 종사자들과 성적으로 경쟁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권력구조를 재생산하고 은폐하고 강화하는 데에도 간접적으로 이바지하는 것이다.  180


이미 18세기부터 본격화된 생물학 연구는 성에 관한 과학적 탐구의 토대를 마련해놓고 있었지만 ...

성에 대한 좀 더 체계적이고 실증적인 탐구는 19세기 후반에서부터 20세기 초까지 주로 의사들에 의해 '비정상적인' 성욕이나 성행동을 다룬 수많은 저작들.. 등이 나오면서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이때부터 좀 더 엄밀한 의미의 현대적 성과학(sexology)이 시작된 것이다. ..

성 충동은 "본능적이고 자연발생적이며 절실하기 때문에 억제하기 힘든" 욕망의 힘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185-187


성과학은 성에 대한 기존의 무지와 미신을 폭로했다는 점에서, 또 성을 전통 종굔나 윤리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진지한 학문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초기의 성을 연구한 사람들은 대부분 의사들이었기 때문에, 성 연구 또한 의학적, 생리학적 관점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았다.  189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다형도착증(polymorphous perversion)이 있으며 유아에게는 양성애적(兩性愛的 두양 성품성 사랑애 과녁적) 기질이 나타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건강한 사람들도 누구나 (정상적인) 성 목적에 덧붙여 성도착으로 간주할 수 있는 행위를 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사례가 보편적으로 발견된다는 사실은 성도착이라는 말에 비난의 뜻을 포함시켜 쓰는 것이 어람나 부적절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191


현대 성 연구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변곡점을 만들어낸 것은 인간의 직접적인 성행위에 대한 실험적이고 실증적인 연구였다.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인간 성행위의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려는 의도로 시작된 이 연구들은 생식으로부터 쾌락이 분리되고, 생식보다는 쾌락이 우선시되는 세태와  맞물리면서 새로운 성 담론과 성 관념들을 만ㄷ르어내는 데 일조했다.  201


매스터스(W. Masters)와 심리학자인 그의 아내 존슨(E. Johnson) .. 1954년부터 1965년 사이에 700명이 넘는 지원자들을 실험실에 집어넣고 실제로 섹스를 하게 한 뒤, 성행위를 하는 동안 그들의 몸에 나타나는 생리적 반응들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핵심은 우리가 흔히 오르가슴이라고 부르는 현상에 대한 해명이었다. 잘 알려져있듯이 오르가슴이란 성행위를 할 때 신체적, 심리적 흥분과 쾌감이 절정에 이르는 것을 가리키는데, 매스터스와 존슨의 연구에 따르면 오르가슴은 생리적 측면에서는 척수와 성감대 주변의 신경망을 잇는 신경계의 작용, 근육의 운동, 혈류의 운동 등으로 확인될 수 있다. 두 사람은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인간의 성 반응을 다음과 같은 네 개의 단계로 구분했다. 첫 번째 단계는 흥분기로서 근육이 긴장되기 시작하고 맥박 및 호흡수가 증가하며, 남성 성기의 발기가 시작된다. 또 여성의 질 안에 분비물이 많아지고 질 안쪽의 3분의 2가 넓어지며, 음핵과 젖꼭지가 팽창하기 시작하는 반응이 일어난다. 두 번째 단계는 고조기인데, 남녀 모두 근육의 긴장이 강화되고 맥박 및 호흡이 더욱 빨라지며, 피부에는 붉은 반점이 나타나고 남성의 성기는 딱딱해진다. 또 질 바깥쪽의 3분의 1이 부풀면서 질구가 수축되고, 여성의 외부 성기는 팽창할 뿐만 아니라 색깔도 변화하며, 젖꼭지 주위와 유방 또한 커진다. 세 번째 단계로 절정기에 이르면 수 초 동안 짧고 빠르게 지속되는 리드미컬한 근육의 수축이 일어나는데, 이때 뇌파에도 변화가 오고 심지어 몇 초 동안 의식을 잃기도 한다. 또 무의식적인 표정의 변화와 함게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게 되며, 성기에 집결해 있던 피가 순간적으로 빠져나가면서 쾌감이 성기 주변으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물론 남성의 사정이 이루어지는 것도 바로 이때이다. 마지막으로 쇠퇴기 또는 회복기에서는 신체의 모든 변화가 평소와 같은 상태로 되돌아오면서 땀을 흘리게 되고, 특히 남성에게는 일정 시간 동안 성적 자극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무반응기'가 나타난다.  203-204


그렇다고 해서 오르가슴을 둘러싼 모든 논란이 종식된 것은 아니다. 오르가슴을 둘러싼 다양하고도 세세한 논점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연구가 진행 중이며, 특히 여성의 오르가슴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이 해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204-205


성에 대한 미셸 푸코의 연구는 그 기본성격과 방향에서 이전의 다른 어떤 성 연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새롭고 획기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전의 성 연구들은 인간의 성 자체를 직접적 탐구대상으로 삼아 소위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진행하거나, 그게 아니면 일정한 가설과 이론적, 이데올로기적 틀을 전제로 성에 대해 상당히 규범적이고 선언적인 담론들을 생산해내는 작업이었던 반면, 푸코는 그러한 연구 자체를 가능하도록 해주는 '권력의 의지'에 초점을 맞추고 연구를 통해 생산된 성 담론들에 대한 메타비판(meta는 '~다음에, ~을 넘어서서'라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메타비판이라고 하면 어떤 대상에 대한 직접적이고 1차적인 비판이 아니라, 그 대상을 설명하는 이론이나 개념들에 대한 2차적 비판, 즉 '비판에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207


푸코는 죽기 직전에 쓴 세 권짜리 저작 <성의 역사>를 통해서 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

그가 사용하는 '권력'이라는 개념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푸코는 전통적인 권력 이론을 비판하면서, 과거의 권력 이론을 크게 둘로 나눴다. 그 하나는 권력을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는 상품처럼 보는 '경제적 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가 여기에 속한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권력을 물질적 생산영역에 근거를 둔 계급지배의 도구로 보며, 자유주의는 권력을 상호계약에 따라 법적 효력을 갖는 권리와 의무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비경제적 이론'으로서 권력을 경제와는 무관한 억압으로 보는 입장인데, 푸코는 프로이트나 빌헬름 라이히, 마르쿠제 등이 제시했던 '성욕의 억압'이라는 가설이 그 대표적 사례라고 보았다. 그러나 푸코는 기존의 두 입장과는 달리 권력을 '힘을 향한 의지'가 서로 충돌하는 일종의 싸움으로 파악한다. 그에 따르면 권력은 위에서부터 작동하는 단 하나의 단일한 힘이 아니라, 수많은 권력관계들의 그물망을 통해 아래로부터 구성되고 자기검열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수단들에 의해 지속되는 '비밀스러운 전쟁'이다.  208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것만을 뜻하지 않고, 개인의 일상과 신체에까지 스며드는 '미시권력(micropouvoir)'이기도 하다. 개개인은 언제나 권력의 억압에 의해 핍박받고 희생될 뿐이라는 소박한 '억압가설'은 힘을 잃게 된다.  209


한마디로 권력은 우리의 일상 속에 파고들어와 우리의 신체에 작용을 가하고, 또 그를 통해 우리의 주체를 구성하는 힘이다. 그리고 권력은 자신을 관철시키기 위해 진리 또는 지식을 자신의 전략에 이용하는데, 이때 권력의 전략적 행위는 일정한 담론으로서 수행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권력의 작용을 이해하기 위해 "누가 권력으 갖고 있는가?"라든가 "권력자의의도가 무엇인가?"라는 물음보다는 권력에 의해 지속적으로 우리의 언어, 신체, 행동이 예속되고, 또 주체 또한 그것에 따라 구성되는 과정에 주목해야 하며, 다양한 담론들 안에서 진리의 효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역사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210


'섹스'라는 의미에서 인간의 성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중 하나가 '남자와 여자'라는 주제인지도 모르겠다. ..

서구 언어의 섹스라는 말 또한 기본적으로는 그런 뜻이다. 우리는 섹스라고 하면 성행위를 먼저 떠올리지만, 이 낱말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의 'setum'은 '나뉜/쪼개진 것'이라는 뜻.  218


남자는 '인간의 수컷+α'이고, 반대로 여자는 '인간의 암컷+β'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일정한 생식기능에 초점을 맞춘 '암수'의 구분만으로는 인간 '남녀' 사이의 구별을 다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α'와 'β'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게 정확하게 무엇이든 간에 그 'α'와 'β'야말로 인간 남녀 사이의 경계르 가르는 기준이며, 그 경계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기보다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219


남성성이든 여성성이든 우리가 성에 부여한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역할과 특성들은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특정한 목적과 사회경제적 지배구조에 따라 사회 속에서 만들어지며 역사적으로도 끊임없이 변천한다.  226


수많은 사회적 학습과 시험을 거쳐.. 우리가 수용해온 '바람직하고 정상적인' 남성성 또는 여성성의 틀은 사실 사회적 필요에 의해서 주조되고 고안된 것이다.  227


남녀평등을 위한 수많은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고 성 차별이 하나의 사회적 죄악으로서 단죄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삶의 미시적인 영역을 세밀히 들여다보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지도 모른다. 우리들 또한 갓난 아이가 사내아이면 파란색 이불을 덮어주고 여자아이면 분홍색 옷을 입혀주며, 사내아이에게는 장난감 자동차와 총을 사주고 여자아이에게는 인형을 선물하는 게 보통이니까 말이다.  228


잘못된 통념과 왜곡된 교육 때문에 여성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의 일부분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여성들의 성기를 처음으로 제대로 보고 만지는 사람이 당사자가 아니라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남성인 경우가 많다는 현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99%의 남성은 자위를 하고 1%의 남성은 거짓말을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듯이 거의 대부분의 남성이 자위를 경험하는 반면, 자위를 해본 여성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게다가 남성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자위 경험을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개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을 그런 사실을 쉽게 발설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단지 남녀의 신체구조상의 차이 때문에 생겨난 결과는 아니다. 이쯤에서 단지 남녀의 신체구조상의 차이 때문에 생겨난 결과는 아니다. 이쯤에서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자위를 옹호하고 심지어 권장하기까지 하는 이유를 한번 생각해보자. 그들의 진정한 목표는 단순한 '성의 해방', '쾌락의 해방'에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오도된 인식과 억압된 실천을 넘어서서 자시늬 신체에 대한 자율적 통제권을 되찾는 것, 자신의 서오가 욕망과 쾌락에 대한 긍정적이고 주체적인 시각을 되찾는 것, 그것이 없이는 남성과 대등한 인격체로서의 여성 해방은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

이른바 '정상인'으로서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으며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모두 다 죽는 날까지 매일 매 순간 자신이 남자 또는 여자임을 의식하면서 거기에 맞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느껴야만 한다.  229-230


남자라고 인정받기 위해서, 사회 속에서 남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아니요, 나는 여짜 계집애'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데 왜 우리는 '진짜 사나이'라는 말에 그토록 열광하는 걸까? .. 왜 우리는 거기다 굳이 '진짜'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걸까? 생각해보라! "이거 진짜 루이뷔통 가방입니다"라는 말은 전혀 어색하지 않지만, "이거 진짜 개미입니다"는 이상하지 않은가? 진짜를 강조한다는 건 그 반대편에 가짜도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고, 그 진짜와 가짜 사이를 가로지르는 경계선들은 자연적이지 않고 인위적임을 함축하는 것이다.  233-234


남자든 여자든 개인에 따라 다양한 기질과 성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왜 남자는 반드시 이러해야 하고 여자는 저러해야 한다는 틀을 고수하려고 그토록 애쓰는 걸까? 

그동안 별생각 없이 당연하게 여겨왔던 성 역할의 틀에 대해서 비판적 고찰을 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성 정체성의 탐구가 그러한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작동시키는 사회구조와 권력에 대한 탐구이며,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왜 어떤 시대에는, 또 어떤 곳에서는 이러저러한 행동이나 특성들이 남자다운 것으로 여겨지고, 또 다른 시대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특수한 방식으로 규정된 성 저체성들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그 뒤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권력이 숨어 있는가? 성 정체성을 '고정된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양분된 틀 속에 가둬두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이런 물음들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성 정체성의 숨겨진 의미가 무엇인지 비판적으로 숙고하도록 만들어줄 것이며,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234-235


남자와 여자는 다르며, 우리는 누구나 그 차이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현상적 차이가 곧 영원불변한 본질적 차이라고 단정해버리는 태도이다.  236


동성애는 있어도 그 반대개념으로서의 이성애는 없다. 있다면 그냥 '정상적인 사람들의 사랑'이 있을 뿐! 대부분의 이성애자들은 자신들을 이성애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인간'이라고만 생각한다. 뒤집어 말해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동성애가 이성애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거울이라는 사실조차 부정하고 있다.  246


각자의 구체적인 실천적 노력이 없는 한, 번듯하고 빛나는 논리만으로 쌓아올린 이론의 탑은 현실 앞에서 사상누각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론이 무용한 것은 아니다. 기존의 틀을 깨고 바꾸는 힘은 비판적 사고에서 시작하며, 철학의 역할 또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259


속마음이야 어떠하든, 또 개인적 경험이야 어떠하든 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공식적인 담론은 이렇다.

"성욕이나 성행위는 사랑에 기반을 둬야만 하며 - 그렇지 않으면 부도덕하거나 나쁜 게 된다 - 사랑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265


몸에 대한 관점은 크게 자연주의(naturalism)와 사회구성주의(social sonstructionism)로 나눠서 생각해볼 수 있는데, 우선 자연주의는 주로 생물학과 진화론의 영향 아래서 발전해왔으며, 18세기 이후 서구의 근대 부르주아사회를 대표하는 이론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관점은 기본적으로 몸이 자아와 사회를 구성하는 물질적 토대라고 본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지만, 인체의 능력과 한계까 개인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삶의 양식을 특징짓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관계까지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생물학적 결정론에 치우쳐 있다. 또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경제적 불평등 또한 생물학적인 몸에 의해 결정되거나 최소한 몸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자연주의적 관점은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자들, 경제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극우파,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크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반면 사회구성주의의 관점은 몸을 순전히 생물학적 현상으로서만 분석할 수 있다고 보지 않고, 몸에 부여되는 구체적인 특성과 의미, 상이한 집단들의 몸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 등이 모두 다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관점은 그동안 첨예한 대립을 보여왔고, 둘 모두 일정한 과학적 근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줄 수는 없다.  270-271


몸이 중요해지면 질수록, 또 몸이 인간 존재의 근원적 조건이 되면 될수록, 몸이 지니고 있는 성적 의미의 의의도 그만큼 커지게 된다. 

'몸의 혁명'이 반드시 성적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몸에 대한 생각과 태도의 변화는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성에 대한 생각과 태도의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74


우리는 무엇이 섹시하고 에로틱한가, 또는 조금 속된 표현으로 무엇이 야한가라는 물음에 별 고민 없이 대답하곤 한다. 벌거벗은 육체, 노출된 성기, 정사 장면, 한마디로 음란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미지들, 뭐 이런 것들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많은 사람들을 성적으로 자극하고 흥분시키기 때문에 분명 에로틱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들은 성적 자극을 느끼지 않으며, 또 동일한 사람이라도 경우에 따라서 자극을 받기도 하고 안 받기도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

정답은 육체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육체를 바라보는, 그리고 평가하는 우리 자신의 시선에 있다.  276


몸과 마음의 전통적 이분법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을 정당하게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큰 장애가 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육체를 기반으로 하는 성을 올바르게 성찰하는 데에도 악영향을 미쳐왔다. 우리는 육체 없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한, 육체 없는 성도 육체 없는 사랑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생물학/생리학의 한계에 갇힌 좁은 의미의 육체가 아니라, 사회적 만남을 통해서 다양한 의미를 구성해내는 육체, 그러한 만남을 통해서 친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내는 사회문화적 의미의 육체를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육체를 통해서만 고결하고 기품 잇는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들도 현실적 의의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체와 육체의 욕망을 추잡하고 음탕하며 동물적인 본느에 의해 지배되는 어떤 것, 따라서 통제하고 억압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만 보는 한, 인간의 성에 대한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성찰 또한 요원하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83


어떤 것이 사랑이고 어떤 것은 아닌지 구별할 수 있을까?   

첫째, 15세의 여중생이 이웃집에 사는 20대 초반의 대학생 오빠를 짝사랑한다고 가정하자. 그 오빠는 소녀의 존재조차 잘 모르지만, 소녀는 먼발치에서 그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오빠 생각에 밤잠을 설칠 정도이다. 둘째, 바람난 유부녀가 연하의 건달에게 반한다. 두 사람은 육체적으로도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럴수록 그녀는 남편에게서는 얻지 못했던 관능적 충족을 느끼면서 더욱더 상대ㅔ게 빠져든다. 셋째, 20대의 대학생 남녀가 서로 사귄다. 주위에서도 모두들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하고, 결혼을 약속한 두 사람은 평범하지만 행복한 연애를 하고 있다. 넷째, 결혼해서 20년쯤 된 부부가 있다. 솔직히 두 사람 사이에는 예전과 같은 열정이 없으며, 상대에 대한 성적 관심이나 욕망은 거의 사라졌고 성 관계도 거의 하지 않지만 그래도 친밀한 가족으로서 서로를 아끼고 필요로 한ㄷ. 다섯째,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40대의 이혼남과 남몰래 만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무척 사랑하지만,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서 자신들의 관계를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

위에 든 예 중에서 사랑인 것은, 또 사랑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것이 사랑이라면, 또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

자신으 어떤 이유를 내세워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의 경계를 나누었는가? 자신이 내세웠던 이유들을 잘 살펴본다면, 아마도 자신은 사랑에 대해 평소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다시 말해 자신이 무의식중에 믿고 받아들여왔던 사랑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드러날 것이다.  290-291


내가 진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랑을 정의하는 게, 그리고 그 정의를 실제 사례에 적용하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292



'좋은 사랑/나쁜 사랑'에 대한 가치판단은 분명 필요하고 '더 좋은 사랑'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사랑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불완전하고 부도덕한 것들까지 포함하는 현실 속의 수많은 사랑들을 잇는 그대로 고찰해야 하지 않을까?  292



우리는 평범하지만 심오한 진리에 마주치게 된다. 그건 바로 단 하나의 사랑, 즉 영어로 표현하자면 'The Love;가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종류의 사랑들, 즉 'many kinds of love'가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랑에 대해 "그건 사랑이 아니야"라든지 "그 사람은 날 진짜 사랑한 게 아니었어"라고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그건 내가 원하던 사랑 방식이 아니었어" 라든가 "그때 우리의 사랑에는 이런 점들이 부족했어"라고 반성하는 게 훨씬 더 유익하고 객관적인 판단이 아닐까? 우리는 좋은 사랑과 나쁜 사랑, 자신에게 맞는 사랑과 맞지 않는 사랑을 구별할 수도 있고, 또 실생활에서는 그런 구별이 꼭 필요하기도 하겠지만, 몇 가지 기준만으로 모든 사랑을 다 설명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져서는 안 된다.  299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사랑의 유형, 또 반대로 자신이 원하는 사랑의 유형을 파악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을 위해 매우 중요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사랑 스타일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하기도 할 것이다.  302


사랑의 개념이나 유형에 대한 이론적 분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현실속의 사랑이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조건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끝없이 변해왔다는 사실이다.  302-303


"진리는 중간이 아니라 극단 속에 있는"(<풍속의 역사> 제1권 1988 10쪽. 전체 문장은 "진리는 중간이 아니라 극단 속에 있다. 사물이나 인간은 극단으로까지 과장됨으로써 클로즈업된다. 그러므로 과장이란 그 과장된 것이 좋은 면이든 나쁜 면이든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며, 각 시대의 기록인 경우 문제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요소다.")지도 모른다. 일상생활에서야 대개 극단을 피하고 중용을 취하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어떤 문제의 논리적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때때로 극단까지 밀고 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모든 것이 두루뭉술해져서, 상식적으로야 수긍할 수 있는 답이 나올지 몰라도 날카로운 논증이나 심오한 통찰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312


프로이트는 성욕의 메커니즘에 대해서도 좀 더 상세한 분석을 시도하는데,..

그에 따르면 쾌락의 목적과 생식의 목적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며, 따라서 '성적인 것'과 '생식적인 것'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성적 쾌감은 신체의 어떤 부분에서도, 즉 생식기가 아닌 곳에서도 느낄 수 있으며, 인간의 성욕에는 성기를 사용한 행위와 무관한 충동들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입으로 빨거나 손으로 더듬는 등의 애무행위도 성욕을 구성하는 정상적인 본능이라는 것이다.  319


우리는 성을 언제나 생식과 연결시키는 생물학주의의 고정관념 때문에, 생식능력과 무관한 성욕을 은연중에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 문제는 어디까지나 왕성한 생식능력을 갖춘 젊은이들의 문제이며, 어린아이나 노인들의 성욕, 신체적인 장애인들의 성욕, 그리고 동성애자들의 성욕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망측한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육체적인 노화가 성에 대한 욕망까지 자동으로 제거해주는 것은 아니다....

성이 모든 인간 존재의 보편적 근거이자 욕망과 행복이 기반이기도 하다면, 소외된 노인들의 성을 언제까지나 외면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권과 복지의 사각지대를 또 하나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321


"억압된 욕망과 충동이 무의식의 근원이라면 억압은 도대체 왜 일어나는가?" 

자아는 자신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욕망, 충동)들을 의식으로부터 몰아내 무의식의 세계에 가둠으로써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하려고 하는데, 바로 여기서 억압이 발생한다. 따라서 억압이란 결국 자아가 성숙해지기 위해 갖가지 장애로부터 자신을 총체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방어하는 하나의 메커니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326


인간 욕망의 특성은 늘 완벽하게 충족될 수 없고, 끊임없이 변형된다는 데 있다.  349

 

아동심리학자들이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고 한다. 넓은 운동장 한편에 모여 놀고 있는 유아들의 주위에 금을 그어 표시한 뒤, "이 금 안에서만 놀고, 금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지시를 했다는 것이다. 학자들이 숨어서 지켜보니까, 몇몇 아이들이 금 주위에서 두려운 듯 눈치를 살피다가 살ㅉ가 한 발을 금 밖으로 내딛어보더란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씩 그애들을 따라 금을 넘어가게 되고, 시간이 지나자 더 멀리 밖르오 나가는 아이들도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뒤에 학자들이 되돌아와 금을 지워버리고 나서 "이제 아무 데서나 맘대로 놀아도 좋다"고 하자, 아이들은 다시 원래 놀던 운동장 한편 구석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들로 하여금 조심조심 금 밖을 넘보게 만든 욕망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 그런 욕망의 불을 지펴놓은 것일까? 운동장은 원래 유아들이 전체를 다 쓰기에는 너무 넓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한쪽 구석에서 노는 걸로도 충분했다. 쉽게 말해 객관적으로만 보면 아이들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운동장 한가운데로 나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비밀은 바로 금에 있는 게 아닐까? 움직임을 제한하는 금이 그어지는 순간, 거꾸로 그 제한을 깨뜨리려는 욕망이 생긴 게 아닐까? 

우리는 흔히 금기가 욕망을 제한하고 억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욕망이 원래 있고, 그 욕망이 너무 크거나 지나쳐서 문제가 될 때, 그것을 통제하는 금기가 생겨난다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지만 할까?   350-351


프랑스의 현대사상가 조르주 바타유는 <에로티즘>에서 .. 인간 성욕의 본질은 고립된 개인들이 합리적 일상의 세계를 벗어나 어떤 신비스러운 체험을 통해 존재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얻으려는 데 있다. 그는 규율(=금기)이야말로 동물과 인간을 구별해주는 문명의 상징이며 폭력과 무질서에 반대하는 이성의 산물이지만, 거꾸로 이 규율을 의식하면서도 의도적으로 깨뜨리는 폭력만이 가장 높고 강렬한 욕망을 충족시켜준다고 주장한다. 생식이란 본래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고 낡은 세대가 죽음으로써 개체성이 부정되고 연속이 실현되는 과정인데, 이런 점에서 생식과 연결된 성은 늘 규율 위반, 폭력, 죽음, 전쟁(살해), 광란의 축제, 주연(酒宴 술주 잔치연), 희생물을 바치는 종교적 의식 등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이 인간에게 공포와 경배의 대상이듯이 성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숭배와 공포, 신성함과 폭력, 욕망과 금기의 이 같은 모순적 결합은 아마도 월경, 처녀막의 파열(출혈), 출산 등과 관련된 피와 고통의 이미지, '작은 죽음'(프랑스어로 오르가슴을 '작은 죽음'이라고 부른다)이라고 불릴 만큼 합리적 일상과는 철저히 단절되는 느낌을 주는 절정의 쾌락(=오르가슴)의 이미지, 성기와 성행위에 대한 혐오감(성기는 배설기관이기도 하며 성행위 그 자체는 아주 동물적이다) 등이 복합적으로 뒤섞임으로써 생겨났을 것이다. 아무튼 바타유에 따르면 노동(=규율), 자의식(=전체로부터 분리된 개체), 수치심(=성과 관련된 자의식),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은 모두 인간만이 갖는 특성이며 사실상 같은 계기의 다른 측면들인데,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바로 그 경계선에 이런 계기가 놓여 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스스로 이 계기를 부정함으로써 더 높은 도약을 꾀하며, 이것이 바로 '에로티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354-355


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상식적 시각은 자연주의적이고 본질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관점에 매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자연주의가 뭔가? 성은 자연적인 것, 본능적인 것, 생리적인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또 본질주의 역시 성에 '고정된 불변의 본질'이 미리 주어져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럼 환원주의는 뭘까? 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어떤 '기본 요소'로 환원하여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을 말한다. 그리고 그 '기본 요소'란 결국 생물학적/생리(학)적인 메커니즘, 그러니까 생식을 위한 메커니즘을 가리킬 것이다. 이처럼 단순하게 도식화되어 있는 성 관념이 우리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한, 어떤 이론이나 과학적 발견으로도 우리의 성 의식을 업그레이드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의 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니, 진지한 성찰의 대상으로 삼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이러한 자연주의적, 본질주의적, 환원주의적 접근에서 비롯된 고정관념의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럼 우리는 왜 그토록 성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일까?..

성은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하고 중요한 문제이기에 오히려 한 발 물러서서 비판적으로 성찰하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  359-360


서구에서 '섹스'라는 말이 16세기에 처음 사용되었을 때는 단지 남녀의 성별 구분을 뜻했지만, 19세기 초부터 일련의 의미변화를 겪고 난 뒤 이 단어가 마침내 '양성 사이의 육체적 성 관계'를 뜻하게 되었다는 데에서 출발하는 게 좋겠다. 이러한 어의변화 속에는 우선 양성, 즉 남녀의 명백한 구분, 심지어 대립과 적대가 전제되어 있는데, 사실 이것이 자연주의적 오류의 첫 번째 내용이다.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일 뿐이며 그 구분은 자연에 의해 정해진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한 사회적, 문화적으로 구성되는 성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다음으로 '성'이란 저항할 수 없는 본능적, 파괴적 힘이며, 특히 남성의 성기 속에서 꿈틀거리는 '생물학적 명령'이라는 가정이 있다. 현대의 성 이론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킨 프로이트마저 이런 가정을 받아들일 정도였으니, 그 위력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아무튼 우리 사회의 수많은 남성들, 아니, 심지어 여성들까지도 이런 생각에 동조하고 있으며, 그래서 예컨대 "남자는 다 늑대다"라는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남자는 늑대"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애먼 늑대들, 인간의 핍박으로 지구상에서 멸종해가는 가여운 늑대들에 대한 부당한 비난일 뿐만 아니라, 남성 전체에 대한 모욕인 동시에 거꾸로 일부 남성들에게는 면죄부를 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늑대들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끝으로 자연주의적 관점은 '피라미드처럼 위계서열을 가진 성 모델'을 만들어내며, 그 속에서 '남성이 주도하는 이성애적 삽입성교'라는 이상적 성 모델로부터 속된 말로 여러 가지 '변태'에 이르기까지 그 가치와 정당성에 따라 수직적인 성의 위계질서가 등장한다. 그리고 기존의 성과학 이론들이 많건 적건 이러한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음은 앞에서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아무튼 이러한 자연주의적 오류를 통해서, 또 그것에 의해 만들어진 위계질서를 통해서 '자연적 성'이라는 허구의 실체가 마치 하나의 객관적 대상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질서가 다 그렇듯이, 이 위계질서를 유지하고 정다화하려는 지배 권력의 개입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이는 물리적인 힘으로서 직접 작동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의식과 실천을 남몰래 조종하고 통제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이 용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지만, 가장 폭넓게 본다면 "무의식중에 형성되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적 의식"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361-362


현대에 들어와서는 성에 대한 자연주의적, 본질주의적 관점 대신에 '성정치(학)(sexual politics)'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된다. ..

쉽게 얘기해서 성을 정치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며, 이 용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정치'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부터 고칠 필요가 있다.  365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잘 보여주듯이, 잘못된 정치는 때때로 평범한 개인들의 삶을 파멸시킬 수도 있고 어찌 보면 우리 일상의 모든 행복이 정치에 의해서 좌우될 수도 있는데, 우리가 정치를 향해 더럽다고 침 뱉고 돌아서면 그걸로 끝인가? 물론 정치의 문제는 현실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정치란 소수 권력자들과 관계된 일'이라는 일상적 인식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를 뜻하는 영어의 'politics' 라는 말은 본래 그리스어의 'politikos'에서 온 말이고, 이 말은 다시 도시국가나 공동체를 뜻하는 '폴리스(polis)'의 형용사형이다. 아마 독자 여러분도 학창 시절 세계사 시간에 배웠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스파르타 같은 도시국가를 폴리스라고 불렀다는 것을! 다시 말해 '정치' 또는 '정치적'이라는 말은 본래 '국가, 공동체, 사회'와 연관되는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규정했을 때에도 그 의미는 "인간의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동물"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말한 것이지, 인간은 본래 "권력 다툼을 좋아하고 음모나 술수를 부리며 남을 지배하는 것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은 절대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어떤 인간도 정치와 무관할 수 없으며, 정치적인 것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이해관계에 따라 집단을 이루어 복잡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는 늘 타인에 대한 지배와 힘의 행사, 즉 권력의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은 직접적인 물리력을 통해서 관철되기도 하지마ㄴ, 대개는 제도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즉 일정한 정당성을 확보하고 사람들의 의식을 남몰래 지배함으로써 실현된다.  367-368


지배와 이데올로기에 의한 '성의 사회적 구성'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알기 위해 여러 가지 요소들을 면밀하게 살펴봐야 하는데, 대체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영역이 고려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친족 및 가족제도다. 이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성의 가장 '자연적인 축'으로서 강조되어 왔다. 예컨대 친족 내의 '근친상간 금지'는 보편적 법칙으로 간주되어왔으며, 자연 상태에서 사회(=문화)로 이행하는 징표로 인정되어왔다. 그러나 '근친상간 금지'가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는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전혀 다르다. 또 '혈연관계'라는 것도 문화라는 틀을 통해 재해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친족이라는 개념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기보다는 경제적 요인과 사회적, 문화적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

친족 및 가족제도는 경제적 요인, 가족법, 결혼 및 이혼에 대한 규제, 사회복지와 조세정책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국가 개입에 의해 부단히 재구성되며, 이것들 모두가 성에 대한 인식과 실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개인들은 가족 안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최초로 이해하게 되며, 또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가족이야말로 성장 과정에서 우리의 성적 욕망이 최초로 조직되는 영역이기도 하므로, 친족 및 가족제도는 성의 사회적 구성에서 매우 중요한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조직들이다. 경제적 변화와 새로운 계급구조의 출현 또한 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서구에서 근대 부르주아사회가 형성된 후 새로운 연애형태와 가족형태, 성도덕 등이 등장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 산업혁명 후 사생아의 출산이 크게 늘어 났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여성이 공장에 취업함으로써 산아제한이 보편화되었으며, 1950~60년대 이후에는 기혼여성의 취업이 늘어나는 등 시대에 따라 수많은 경제적, 사회적 변화들이 일어났는데, 이 또한 사람들의 성 관념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 역시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적 토대가 성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기본적 전제와 한계만을 제공한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물학적/생리(학)적 결정론 못지 않게 위험한 경제 결정론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사회적 규제들이 있다. 사회나 문화에 따라 성생활에 대한 구체적 규제는 실제로 아주 다양한데, 그 자체가 상당한 자율성을 갖는다. 예컨대 종교, 국가의 역할, 결혼 유형을 결정하는 도덕적 규준, 이혼율과 성적 일탈의 범위등이 성에 대한 규제에 영향을 미친다. 종교적인 이유로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과 규제가 심한 이슬람권 국가에서의 성과 이혼이 매우 자유롭고 이혼율 또한 높은 서구 사회에서의 성이 같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서구 사회를 기준으로 볼 때 근대 이후의 특징적인 현상은 성에 대한 규제가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규제로부터 점차 의학, 교육, 심리학, 사회사업 및 복지 등에 의한 세속적 규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근대 이전까지는 자위를 금지하고 죄악시하는 이유가 <구약성서>에 있었지만, 19세기가 되자 의사들이 앞장서서 "자위는 건강에 해로우며 청소년들의 성장 발달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자위를 금지시킨다. 그러나 20세기가 되면 다시 건강을 들먹이는 의학적 담론이 사라지고, 그 대신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자위에 몰두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식의 새로운 이유가 제시된다. 결국 자위를 금지하고 성을 통제하려는 권력의 의지에는 변함이 없지만, 시대 변화와 과학적 지식의 발전에 따라 담론의 형식만이 바뀌었던 셈이다. 사실 사회적 규제는 일률적으로 관철되지 않는다. 예컨대 음란물에 관한 규제는 거꾸로 음란물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며, 동성애에 대한 규제는 동성애자들의 단결을 촉진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형식적 방법이 아닌 비공식적인 규제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다. ..

넷째로는 직접적인 정치적, 법적 규제들도 중요하다. 비공시적이고 관습적이던 갖가지 사회적 규제들도 특정 시기의 정치적 세력관계에 의해 정치적 의미가 강화될 때는 법률적 규제에 관한 논쟁을 낳는다. 예컨대 낙태나 동성동본 결혼, 간통죄 폐지 등을 둘러싼 논란은 단순히 성 문제에 대한 논란으로 그치는 게 아니고, 언제나 진보와 보수가 대립하는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된다. 또 서구에서 1980년대 이후 신보수주의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페미니즘이나 반(反 되돌릴반)인종주의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반격이 활발해지는 것을 보면, 성을 둘러싼 정치적 투쟁의 가능성을 잘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이 성 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태도를 취하기 어려운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

마지막으로 지적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실천이다. 사실 지배와 통제가 있는 곳에는 늘 저항도 있게 마련이므로 기존의 성 관념에 맞서는 저항문화와 저항이데올로기 또한 성의 사회적 구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려사항인 것이다. 그동안 저항문화나 저항이데올로기는 대개 공식적인 역사서술에서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여성들은 오랫동안 낙태의 권리를 위해 투쟁해왔고 동성애자들 또한 자신들의 사랑을 정당하게 인정받기 위해서 싸워왔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이러한 저항운동을 극적으로 표면화시킨 대표주자가 현대의 페미니즘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사실 노인이나 청소년, 소수민족, 유색인종 등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은 언제든 성 정치에서도 억압되고 배제되는 타자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실천적 운동 또한 앞으로의 성 관념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369-373


굳이 어려운 역사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성생활의 유형은 계급에 따라 아주 상이하다. 예컨대 킨제이의 조사에 따르면 남자들의 성 행동은 계급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또 우리나라의 몇몇 조사에서도 소득 수준이 높고 학력이 높은 계층일수록 좀 더 대담하고 자유분방한 성적 쾌락을 추구하며 성행위 방식도 더 다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현실을 고려해볼 때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성욕이나 성 행동이 계급이나 권력과 얽혀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도 결코 우연이나 허구가 아니다. 성을 노골적으로 묘사해서 유명해진 로렌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도 상류계급의 여성이 비천한 하층 계급의 남성과 욕정을 불태우는 내용 때문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던가.

계급과 더불어 남녀의 성별 또한 오랫동안 지배와 이데올로기의 원천이었다. 굳이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남녀관계는 기본적으로 권력관계였으며, 성 차별이 많이 사라진 오늘날에도 그러하다. 남성지배 사회에서 여성의 성 정체성은 남성 권력의 산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의 성은 남성의 시각과 틀에 의해 좌우되어 왔고,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난 여성의 성에 대해서는 남성 권력의 폭력이 정당화되어왔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와 그릇은 밖으로 내돌리면 깨진다", "여자는 사흘만 패지 않으면 여우가 된다"라든가 "북어와 여자는 두들길수록 맛이 좋아진다" 등등!  375


성과 관련하여 우리가 놓치기 쉬운 또 하나의 전선은 나이에 따라 형성된다. ..

일상의 성 관념 속에 파고들어 중대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차별 중에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나이 차별(ageism)이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ageism'이라는 용어를 처음 들어볼 것이다. 그건 그만큼 우리 사회가 이러한 차별에 둔감하다는 뜻이리라. ..

우리가 차별을 차별로 의식하지 못한다는 건 차별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차별이 보편화, 일상화되어 있음을 가리킬 뿐이다. ..

내가 지금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일상의 나이 차별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서오가 관련된 나이 차별은 일상의 나이 차별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

젊을수록 더 많은 권력을 갖게 되며, 따라서 젊은이들은 성에 관한 한 당연히 더 많은 특권을 누려야 하고, 그러한 세태에 눈살을 찌푸리며 뒤에서 투덜댈지언정 나이든 기성세대 또한 그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지는 못한다. 아니, 도전하기는 커녕 어떻게 해서든 젊은이들 틈에 끼여 그 권력의 혜택을 조금이라도 나눠가지려고 발버등을 치기도 한다. ..

법으로 정해졌든 사회통념으로 정해졌든 간에 일정한 나이에 도달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성 정치의 전선에서 철저하게 배제되는 또 다른 타자일 뿐이다. ..

우리는 이런 식의 나이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근대의 성 담론은 결국 아동 학대의 사회, 노인 유기의 사회로서의 자본주의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근대 이후 아동기, 사춘기 등등의 발견을 통해 나이별로 위계서열화된 성의 질서는 이제 급기야 결혼적령기, 가임기, 갱년기, 폐경기 등등의 사회학적, 생리학적 용어들을 통해 더욱 세분화되었으며, 인간의 생애 전체와 성생활 자체가 바로 이러한 분할 선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376-378


마지막으로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하지만 인종 또한 중요한 전선이다.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성 모델은 "백인=문명인/유색인=야만인"이라는 도식에 기초해 있다. 유색인종(=비유럽인들)은 아직 덜 진화된 인간들로 그만큼 자연에 가깝고, 따라서 그들의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성은 더 위험하고 파괴적이라는 것이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논리였다.  378


한국에서 일하는 수많은 제3세계 빈국 출신의 노동자들이 엄청난 차별과 박해를 받고 있는데도, 정작 우리 사회의 주류 언론은 무슨 사건 하나만 터지면 그들을 잠재적으로 위험한 성폭력 범죄자들로 매도하지 않는가? 이처럼 유색인종의 외국인이라면 질색을 하는 한국의 젊은 여성들도 백인남성들에게는 영어로 말 한마디 붙여보려고 온갖 아양을 다 떨며, 또 그걸 잘 알고 악용하는 일부 건달 같은 백인남성들은 "한국이야말로 백인남자를 위한 성의 천국"이라고 떠벌인다 하지 않는가?  379-380


사실 성정치는 근대 세계가 안고 있는 사회적 적대와 모순의 그물망 전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을 하나의 단일한 실체로 보려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늘 상기해야 한다. 성의 사회적 구성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이며, 우리는 지금도 계속 상연되고 있는 무대의 배우이자 관객이며 주체이자 대상인 것이다.  381




에필로그


일상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건 결국 공염불 아니면 기껏해야 지적 유희로 끝날 것.

어찌 보면 실천을 통해서 뒷받침되지 않는 한, 이 책의 내용을 진실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성에 관해서 어떤 것을 용인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의 생각(또는 태도)은 대체로 그것에 대한 자신의 실천적 경험 여부와 비례한다."  387


실천을 많이 해야 하는 셈이다.

물론 실천이 중요하다고 해서 돈키호테 식으로 일단 뭐든지 저질러놓고 나중에 생각해도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성을 둘러싼 새로운 실천에 시동을 걸려면, 먼저 새로운 '성 담론'이라는 연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선인식->후실천'이라는 기계적 도식이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삶의 모든 과정이 그렇듯이 여기서도 진정한 변화는 '인식과 실천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실현되기 때문이다.  388-389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이라고 해서 다 자기 생각이 아니며,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해서 다 자기 말이 아니라는 것을! 대지를 적시는 빗방울처럼 어느샌가 내 의식 속으로 스며들어와 나를 지배하게 된 수많은 관념과 이데올로기들은 마치 복화술사가 인형을 이용해 자기 목소리를 전달하듯이 나의 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주체성과 나의 생각과 나의 말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

진정한 주체성은 비판적 성찰을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것은 소크라테스 이래로 철학의 상식이다. 개개인 모두가 어떻게든 남들과 다르게 튀어보려고 앴는 현실, 하지만 개성 있는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에는 목을 매면서도 개성의 바탕이 되어야 할 진정한 주체성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오늘날의 현실은 역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슬픈 회화가 아닐까?

이처럼 기존의 성 담론들이 우리 자신의 혼과 정성이 담긴 창작품이 아니라 사회가 우리 머릿속에 심어놓은 칩이라고 해도, 어쨌든 개인의 성적 실천은 그 담론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391-392


우리는 기존의 성 윤리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재고해봐야 한다. 철학자들의 이상에 따르자면 본래 윤리라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함을 향해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일 뿐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 속에서 윤리는 반드시 그런 긍정적 기능만을 해온 것은 아니다. 윤리는 때때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면서 기존의 지배질서만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393



기존 성 문화의 문제점부터 짚어봐야 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현재 우리 사회의 성 문화에서 가장 큰 문제는 첫째로, 관능성 즉 단순한 감각적 쾌락과 넓은 의미의 섹슈얼리티를 혼동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라는 점 아닐까? 남녀관계에 대해 미국 학자들은 이른바 "find(상대를 찾고), feel(상대와 정서적 교감을 나누고), fuck(상대와 섹스하고) & forget(상대와 헤어진다)"이라는 도식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쉽게 말해 여기서 'feel'이 생략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둘째로, 성을 남성 중심적, 이성애 중심적, 성기 중심적, 성교 중심적으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섹스란 남자가 자신의 성기를 여성 성기 안에 삽입하여 사정에 이르는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인 셈이다. 이런 시각은 예컨대 성폭행을 다룰 때에도 나타나며, 또 포르노에서는 한층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강간사건의 경우 현행 형법은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질 속에 들어갔느냐 들어가지 않았느냐를 기준으로 범죄 여부를 가리기 때문이다. 또 포르노의 경우는 어떤가? 여성을 위한 포르노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이론적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포르노는 남성의 시각에서 남성의 관행적인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래서 포르노에서는 대개 남성의 행위와 욕망과 시선이 성 전체를 지배하는 힘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컨대 대부분의 포르노에서는 카메라의 시선이 철저하게 여배우에게 맞춰져 있어서 여배우의 얼굴, 몸, 성기는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만, 상대인 남성의 모습은 발기된 성기를 제외하면 그다지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또 포르노의 끝부분에서는 남성이 여성의 몸(안이든 밖이든) 또는 얼굴이나 입 안에 사정함으로써 성행위가 종료되었음을 보여주는데, 이 또한 '남성의 사정=만족=섹스의 목표 달성'이라는 도식을 시각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포르노의 내용은 대개 남성의 발기로 시작하여 성기의 삽입과 더불어 이어지는 끝없는 동작에서 남성의 질외 사정으로 끝이 난다. 남성이 쾌감에 도달하면 성행위는 종료된다. 여성의 오르가슴은 가장되고 은폐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여성의 쾌락을 무시하는 것이며, 남성의 관점에서 재현된 성행위 과정일 뿐이다.'(이나영 <포르노, 섹슈얼리티, 그리고 페미니즘> 1999 148쪽)  ...

셋째로, 우리 사회에서는 앞서 말한 성의 다양한 기능들을 대개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을 생식수단으로만 보거나 단순한 관능적 쾌락의 수단으로만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남성의 경우에는 관능적 쾌락으로서의 성이 당연한 것이지만, 아직도 여성이 적극적으로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갖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여성의 성이나 소수자들의 성에 대한 무지가 널리 퍼져 있으며, 이것은 두 번째로 지적한 남성 중심적, 이성애 중심적, 성교 중심적 성의 이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 예로 여성이 성적 쾌감을 느끼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신체기관은 음핵인데도 불구하고, "섹스란 성기의 삽입"이라는 고정관념에 매달리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여성의 질을 음핵보다 더 중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또 동성애자라면 무조건 항문성교를 할 것이라는 편견도 '섹스=삽입'이라는 도식에 매달리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398-401


성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 즉 성을 '신비하고 성스러운 것'과 '더럽고 범죄적인 것'으로 나누는 사고방식을 극복해야 한다. 

둘째로, 모든 윤리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상대적임을 인정해야 하며, 성을 윤리적 차원에서만 보는 편헙한 시각도 지양해야 한다. 셋째로, 어떤 행위를 판단할 때 그 행위의 관습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 법적 측면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구체적인 규범의 목록들은 개인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인간 해방을 지향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위와 같은 변화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베리오티는 성도덕을 반드시 피해야 할 오류들로서 환원주의의 오류, 추상의 오류, 초역사주의의 오류, 고립주의의 오류, 경직성의 오류 등을 거론하고 있다.)  405


어른들이여! 당신의 첫 섹스는 어땠나? 그렇게 심사숙고하고, 그렇게 또렷또렷 맨 정신에, 그렇게 이성적으로, 그렇게 자율적 판단과 엄밀한 계산에 따라서 이루어졌나? 그렇게 도덕적으로도 완벽했고, 마른 대낮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하루 온종일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올 만큼 당당하고 깨끗했나? 그게 아니라면 제발 철딱서니 없는 어린것들이 뭘 알아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비난부터 하지는 마라. 나이가 스물이 됐든 스물다섯이 됐든 실제로 첫 섹스를 하기 전까지는 그 민망한 문제에 관한한 우리 모두 철딱서니 없고 경험도 없는 무지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실제 경험이 없는데 나이만 먹으면 저절로 섹스에 관해 철이 드나? 아마 사람 보는 눈이나 계산하는 능력은 좀 나아질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 괜히 나이 가지고 폼 잡을 필요는 없다. 오케이?

그럼 다시 물어보자.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합의하에 하는 섹스가 범죄인가? 그래서 그 오린 나이에 감히 섹스를 한 발랑 까진 년들은 마치 성범죄자에게 중형을 내리듯이 배움의 터전으로부터도 가차 없이 추방해야만 하는가? 아니, 범죄가 아니라면 섹스는 부도덕한 행위인가? ..

분명히 말하거니와 도덕이라 이름 붙여진 갖가지 사회적 편견과 시대착오적인 관행, 기성세대의 협박 때문에 생겨난 공포 등등을 제거하고 나면, 섹스 그 자체는 범죄도 아니고 부도덕도 아니다.  409-410


지금 우리가 청소년들의 섹스를 금하는 이유는 그야말로 실용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적, 경제적 이유로 인해 사랑해도 함께 살 수 없고 애를 낳아 키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기성세대는 서로 사랑하는 10대 후반의 젊은이들이 자유롭고 섹스하면서 살아갈 수 없도록 제도적,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존재들이기도 하다. 왜 이기적이냐고? 입만 열면 윤리 타령을 늘어놓는 그들은 그 섹스를 맘껏(때로는 과도하게!) 즐기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사실 그들이 섹스를 즐길 수 있는 권리는 그들의 도덕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권력에서 나올 뿐이다.  411


이슬람교에서는 인간의 행위를 크게 다섯 가지 범주로 나눠서 설명한다고 한다.

첫째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즉 절대적 의무다. 예컨대 신자라면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둘째는, 하면 좋지만 안 해도 죄가 되지는 않는 것, 즉 권장사항이지만 의무는 아닌 것들이다. 예컨대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셋째는,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해야 하는 것도 아닌 일들, 다시 말해 의무나 금지와는 무관한 일들이다. 아마 밥 먹고 잠자는 등 우리 일상생활의 대부분의 행위들이 그렇지 않을까? 

넷째는, 안 하는 게 더 좋지만, 한다고 해서 죄가 되지는 않는 것들이다. 예컨대 담배를 푸이는 일 등등.

마지막 다섯째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예컨대 부녀자를 폭행하는 일 등이 이에 속한다.

난 이 구분법이 진정한 의미에서 상당히 '실용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구분법을 빌려다 쓰자면, 몸과 마음이 어느 정도 성숙한 10대 후반 청소년들의 섹스는 "권장할 일은 아니지만, 또는 안 하는 게 더 낫겠지만, 한다고 해서 죄가 되지는 않는 일"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사회적, 경제적 여건들을 고려해볼 때, 현재의 한국 사회는 분명 10대 청소년들에게 자유로운 섹스를 권장할 만한 사회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섹스를 범죄나 부도덕으로 여겨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도 않는다.  412


"성에 대해 좀 더 당당하면서도 동시에 담담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415


Posted by WN1
,



스콧 니어링 자서전(역사인물찾기 11)

저자
스콧 니어링 지음
출판사
실천문학사 | 2000-05-1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철저한 자립농생활로 자본주의화된 문명에 저항했던 한 근본주의자의...
가격비교


책 내용 기록 보기


스콧 니어링에 대해서는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여 자립생활을 한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책을 통해 알게 된 것은 그의 전반적인 삶에서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고, 45세가 되어서야 그런 생활을 선택한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의 삶에 대해서 알지 못했고, 사실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책을 읽기 전까지는 대단한 사람이구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비슷한 사람이구나.. 이런정도로만 생각을 했을 뿐이다.


사실 이 책을 읽을 기회는 여러번 있었다.

이미 7, 8년쯤 전에 이 책은 개인 책꽂이에 꽂혀 있었고, 여러번 언급될때 마다 한 번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으나 손이 잘 가지를 않았다. 그만큼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최근에 그의 부인인 헨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이란 책을 훑어보면서, 어디선가 낯이 익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살펴보니 니어링 부부였던 것을 알게 되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가장 먼저 책을 접한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을 먼저 읽어보자는 생각에 책을 들게 되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편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고, 배운것을 통해 명예도 얻을 수 있었고, 개인의 생각을 적절히 제어해 줌으로써 평범한 가정을 꾸려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인생을 돌아 보았을때 자신의 스승이라 불릴 수 있었던 사람들(어머니, 할아버지, 패튼교수, 톨스토이)을 통해 그가 배운것은 사유와 용기였다.

그는 잘못된 것을 보며 눈을 감거나 주저앉아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잘못이며 그에 대한 해결 제시도 한다. 

근시안적이 아닌 기회주의적이 아닌 용기를 나타내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본주의의 폐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목소리와 생활을 선택함으로 '사회의 적'이 되기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족이 떠나는데도 올바른 것에 대한 선택을 멈추지 않았다.


그랬기에 헨렌을 만날 수 있었고, 그의 삶은 더욱 아름답고 알차게 진행되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는 떠나서 (사실 니어링의 생각중에 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있는 점도 있다. 사회주의도 그렇지만 개인의 노력이 의미를 가질수 없다는 생각에 대해..) 그의 사유와 관찰 그리고 선택에 대해서 지금의 우리는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우리는 습관의 원칙에 지배되어 지금의 것이 아닌 다른 것이 발생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분명 잘못인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때 우리 속에서는 외면이라는 작용이 발생되고 다른곳에 눈을 돌려 애써 피함으로 스스로 자책하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실 우리는 답을 찾아야 하는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시작하기 전에 그것 자체가 귀찮고 어려운 일이라 생각을 한다.


책을 읽으며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역사이다.

우리는 학생신분을 가지고 있을 때 누구나 배우게 되는 것이 역사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과학의 혜택을 받았을까. 불과 몇 십년이다. 그 이전에는 과학의 혜택이란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보다 우리는 더 불편하게 살아가고 있다.

확실히 편한 삶이긴 하지만 그것이 결코 편하지많은 않다.

순간 편한 혜택은 비 시간동안 별 하는것 없이 더없는 경쟁에만 치중해야 되기에 결코 편하지 않다. 

실제로 바쁜게 살면서 돈을 벌어 피곤함을 문명으로 푸는게 그것은 돈을 써야 하고 그 문명들은 더 좋은것 더 많은것을 통해 안락해 지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돈 버는 시간을 더 투자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과연 편한게 편한것인가..

그 편안함때문에 지금의 어린 아이들은 가족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들에게도 편안함이 대체 되어 가족의 의미가 상실되어 가고, 부모는 돈을 벌어서 안락함을 주는 존재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우리는 늘 매체를 통해 세상이 각박해져 가고 있음을 보면서 우리의 아이들을 걱정하면서 내 아이가 그런 각박한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하는 인물이 되어가고 있음을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러한 세상에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부부는 삶에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비슷한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본다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보려하지 않기에 두려울 뿐인 것이다.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이런 삶을 보면서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기에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다.



Posted by WN1
,

개인적으로 저자의 책은 <철학, 삶을 만나다>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철학자들과 그 내용들에 대새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신선함을 느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책을 모두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정도였다.
책을 모두 읽고 인터넷 서점에서 저자의 도서들을 모두 검색해 보았고, 도서관에서도 검색을 해 보았다.
인기가 있는지 대출중인 책들도 있었다.
철학자의 철학적 해설서가 대출 중이라는 것은 그리 쉽게 보기 쉽지는 않다. 그런면에서 인기가 있나보다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 후에 우연하게 저자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첫 느낌은 생각하던 것 보다는 젊어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스타일은 자유로움 이었다. 
젊은 진보적인 철학자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강의 스타일 역시 첫인상처럼 이었다.
신선하고 깔끔했으며 말의 힘이 논리적이며 설득적인데 크게 치우침이 있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읽은 책은 <상처 받지 않을 권리>이다. 정신적 스트레스를 제대로 풀지 못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철학자들의 표현을 빌어 그의 해설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것인지에 대해 언급해 주고 있다. 이 책 역시 즐겁게 읽었다.

이후로 <철학vs철학>이나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과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도 발췌독하기도 하였다. 이 책들도 앞으로 정독을 하려 생각중이다.

이 책은 세 번째로 읽은 책이다. 또한 최근에 나온 책중 하나이다.
위에서 언급한 다섯권의 책들보다는 가볍에 접근하고 있었다.
물론 해설서에 가까운 책들이기에 철학책으로 보기에는 모두 가벼운 내용들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본 책들 중에서만 보면 가장 가벼운 책이라는 것이다.

물론 저자의 스타일은 그대로 묻어났다.
새로운접근방법이라든지 가볍에 읽으면서도 생각을 자극해 주는 책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48명의 철학자가 언급되면서 그들에 대한 철학중에 한 부분을 발췌하는 내용이기에 어렵지 않다. 그리고 다양한 철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기에 언급된 내용들이 철학자들의 주된 내용은 아닐것이다. 하지만 조금씩은 더 근접해 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이 된다.


머리말
저는 책을 읽는 독자이면서 동시에 책을 집필하는 저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책이란 무엇ㅇ니가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편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저는 책이란 알지 못하는 누군가로부터 받은 편지와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서점에 들러 새롭게 출간된 책들을 뒤적이가닥, 제 마음을 동요시키는 책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모든 책들이 저를 설레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소수의 책만이 저를 흔들어 깨웁니다. 이런 경우 누가 저의 마음을 엿보기라도 하듯이 저는 서둘러 책을 구입하여 서점을 빠져나옵니다. 그리고 조용한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한 장 한 장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곤 합니다. 
삶의 고뇌가 쌓인 민큼 타인의 고뇌가 읽힌다고 했던가요? 페이지 마다 절절하게 아로새겨진 알지 못하는 저자의 고뇌가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제 마음에 젖어듭니다 저자는 1,000여 년 전의 사람일 때도 있고, 어느 경우에는 저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으나 아주 먼곳에 살고 있는 사람일 때도 있습니다. 엄청난 시공간을 넘어 책이란 매체를 통해서 저자가 저와 접속되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5-6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쉽게 풀어보도록 하자. 여러분은 누구나 자신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나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라캉에 따르면 불행히도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과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은 일치하지 않는다. 전자가 페르소나(persona)라면, 후자는 맨 얼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페르소나를 찢어버리고 맨얼굴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연기가 아니라, 삶으로서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 거짓된 인문학은 진통제를 주는 데 만족하지만, 참다운 인문학적 정신은 우리 삶에 메스를 들이대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다.  14-15
 

후회하지 않는 삶은 가능한가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자유를 꿈꾸며 사는 사람만이 자신을 옥죄고 있는 담벼락과 조우할 수 있을 뿐이다.
니체... 그는 갇혀 있지만 갇혀 있는 줄 모르는 이웃들, 혹은 갇힌 줄 알지만 그것에 익숙해진 이웃들의 정신을 깨우는려고 무던히도 애썼던 철학자이다.  21
세계관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세계관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완전히 달라지기 마련이다.  22
니체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우리가 순간의 굴욕과 비겁을 선택할리는 없다.
들뢰즈(Gilles Deleuze retour 1925-1995)는 영원회귀로 응축되는 니체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은 윤리적 강령으로 해석했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무엇을 의지하든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지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하라.' -<차이와 반복>  25
온갖 억압과 고통을 극복하여 현재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영위해야만 한다. 자신의 삶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자유롭고 싶은가? '지금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6

나의 욕망은 나의 것인가 - 라캉 <에크리>
우리는 금지된 것만 욕망한다.  30
라캉은 정신분석학의 사명을 '세상에 태어날 때 주체는 타자(the other)로부터 욕망되는 자로서건 아니면 욕망되지 않는 자로서건 간에 타자의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잇어야만 한다. 정신분석의 방법을 고안함을써 프로이트가 밝인 진리의 본성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 <에크리>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당신이 소망하는 것인가?'
지금 내가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과거 타자가 욕망했던 것, 혹은 금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31

페르소나와 맨얼굴 - 에필테토스 <엥케이리디온>
페르소나(persona)라는 말이 있다. 아주 오래전 로마 시절 연극 무대에서 배우들은 가면을 쓰고 연기를 햇다고 한다. 바로 이 가면이 페르소나이다.  33
언제쯤이면 우리는 페르소나를 벗고 자신의 맨얼굴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렇지만 맨얼굴이라고 믿었던 것도 사실 또 하나의 페르소나에 지나지 않은 것은 아닐까?
도대체 우리의 맨 얼굴은 얼마나 많은 페르소나를 벗겨야만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아니 맨얼굴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34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잇는 것들이고, 다른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믿음, 충동, 욕구, 혐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이다. 반면에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은 육체, 소유물, 평판, 지위,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지 않는 모든 일이다.' - <엥케이리디온>  38
에픽테토스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한다.
잊지 말자! 맨얼굴이 없다면, 페르소나를 쓰는 일도 없다는 사실을, 페르소나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우리에게 맨열굴의 관리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맨얼굴이 건강하다면 우리는 다양한 페르소나를 쓸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불핸히도 맨얼굴을 관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쓰고 있는 페르소나를 벗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39

개처럼 살지 않는 방법 - 이지 <분서>
진정한 인문학자는 일체의 허영과 가식을 걷어내고 인간과 사회의 진면목을 볼 수있는 아이와 가은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41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을 읽었으나 성인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공자를 존경했으나 왜 공자를 존경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난쟁이가 광대놀음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잘한다고 소리치면 따라서 잘한다고 소리를 지르는 격이었다. 나이 오스비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댔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으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 - <속분서(續焚書)> 성교소인(聖敎小引)  43
이지의 글을 읽다 보면 니체를 떠올리게 된다.
니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첫 대목, 즉 정신의 자기 변형을 다루고 있느 대목을 기억할 것이다. 니체는 말한다. 우리 정신은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 첫 번째는 '낙타'로 비유되는 정신이다. 아무런 반성 없이 일체의 사회적 관습을 맹목적으로 딸는 정신이다. 마치 낙타가 주인이 등에 짐을 올리면 아무런 저항 없이 실어 나르는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는 '사자'로 비유되는 정신이다. 낙타와 달리 사자의 등에는 그의 의지를 무시하고 어떤 짐도 올릴 수가 없다. 짐을 올리려면 사자를 죽여야 할 것이다 사자의 정신은 일체의 억압을 부정하는 자유정신을 상징한다. 
세 번째는 정신의 마지막 단계, 즉 인간이라면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아이'의 정신이다. '아이'는 과거를 맹목적으로 답습ㅎ기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44

자유인의 당당한 삶 - 임제 <임제어록>
죽은 아이 때문에, 그리고 미래의 부와 명성 때문에, 현재를 살지 못하는 두 사람에게 과연 행복이 가능할까?
스님 임제(臨濟 ?-867)sms '이미 일어난 생각은 이어지지 않도록 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생각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 그대들이 10년 동안 행각(行脚)하는 것보다 좋을 것이다. 나의 생각에는 불법에는 복잡한 것이 없다. 단지 평상시에 옷 입고 밥 먹으며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 <임제어록>  47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다.' - <임제어록>  50

쇄락의 경지 - 이통 <연평답문>
'일찍이 저는 '사태를 만났을 때 고체(固滯)가 조금도 없다면, 곧 쇄락(灑落)의 경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이 마음이 확연히 크게 공정해져 남과 나라는 편벽되거나 치우친 생각이 없게 되면, 아마도 도리에 대해 하나로 꿰뚫게 될 것입니다. 가령 일에 당해 꿰뚫지 못하여 마음속에 편벽되거나 치우친 바를 조금이라고 벗어나지 못한다면, 곧 고체와 관련된 것이니 모두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 <연평답문>  54
누군가와 관계할 때, 충돌과 대립으로 힘든 경우가 있다. 물론 그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는 자만심을 가지고 잇어서 벌어진 일일 수도 잇따. 그러나 이 경우 우리는 이토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자신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혹시 상대방이 아니라 내가 얼음처럼 고착된 마음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닐까? 공정함을 잃어버리고 남과 나를 구별하고 있는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나인가?
우리가 할 수있는 최선은 부단히 자신의 마음이 좁아져 있지 않은지 반성하는 일일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과 삶은 이전보다 더 나아지지 않을까?  56

공이란 무엇인가 - 나가르주나 <중론>
모든 집착은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라져 버렸거나 혹은 부재하게 될 때 발생한다.  57
불교는 이런 우리의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서 공(空)의 지혜를 알려준다. 공이란 순야타라는 산스크리트어를 한자어로 옮긴 말이다. 불교에서는 공을 깨닫게 된다면, 모든 집착을 버리고 외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된다고 한다. 이런 경지를 진여(眞如 tathata)라고 표현한다.  58
'내가 없는데 어찌 나의 것이 있을 것인가. 나와 나의 소유가 없으므로 그는 나라는 의식도 없고 소유하려는 의식도 없는 자가 된다 .... 안으로나 밖으로나 나라는 새악이 없고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다면 집착은 없어질 것이다.' - <중론>
'나'는 아트만이라고 불리는 불변하는 자아를 말한다.  61
나이 들어 주름진 얼굴을 만족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젊음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주름을 보면서 자신이 마주쳤던 수많은 인연들을 떠올리는 삶, 그것은 젊고 탱탱한 얼굴보다 더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62

해탈의 지혜 - 혜능 <육조단경>
기억은 우리의 마음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집착을 낳는 경우가 많다. 집착은 항상 부재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63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든 집착은 우리로 하여금 타자와의 소통을 가로막는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을 닦느라고 타인의 마음을 읽고 위로하지 못한다면, 불교가 강조했던 자비(慈悲)가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집착은 우리 자신을 고통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고통에 빠진 타인에 무관심하도록 만든다.  68

습관의 집요함 - 라베송 <습관에 대하여>
'만들어진 습관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있다. 변화가 지나가버린 것이라면, 습관은 그것을 낳은 변화를 넘어서 존속하는 것이다. 게다가 습관은 그것이 습관인 한에서 그리고 그 본질 자체에 의해 그것을 낳는 변화에만 관계될 뿐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그런 변화가 존재하지 않아도 존속하는 것이다 ... 바로 이것에 의해 습관이냐 아니냐가 가려진다. 습관은 따라서 단지 어떤 상태일 뿐만 아니라 어떤 경향이자 어떤 능력이기도 하다.' - <습관에 대하여>  76
우리의 동일성(identity)을 규정하는 제일의 원리가 습관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미 습관이 된 것, 지금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 그리고 나중에 습관으로 획득하게 될 것, 이것이 바로 삶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80

생각의 발생 -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우리가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생각은 오직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event)과 조우할 때에만 발생하는 것이다.  82-83

관점주의의 진실 - 마투라나 <있음에서 함으로>
'관찰자는 모든 것의 원천입니다. 관찰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관찰자는 모든 지식의 기초입니다. 인간 자신, 세계 그리고 우주와 관계 되어 잇는 모든 주장의 기초입니다. 관찰자의 소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종말과 소멸을 의미할 것입니다. 지각하고, 말하고, 기술하고, 설명하는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있음에서 함으로>  93
관찰자로서 내가 존재하는 한 내가 보는 세계도 존재하는 것이고, 관찰자로서 내 친구가 존재하는 한 그가 보는 세계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누가 보고 있는 것이 진짜 세계일까?  95

언어 너머의 맥락 -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나는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안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그리고 "나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 철학적 탐구
우리는 '나느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안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적이 있을까?  100
'어떤 낱말이 어떻게 가능하느냐는 추측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낱말의 적용을 주시하고, 그로부터 배워야 한다.' - <철학적 탐구>  101
욕쟁이 할머니의 식당에서 느끼기 쉬운 불쾌감이나 거부감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자신과 대화하는 사람이 어떤 삶의 문맥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지 섬세하게 읽어내야 한다. 자신의 문맥에 따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재단하는 순간, 오해와 갈등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104

마음을 다한 후에 천명을 생각하다 - 맹자 <맹자>
'사람의 일을 모두 다 하고, 천명을 기다린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106
'천명'이란 무엇이며, 나아가 그것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107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난 뒤, 조용히 그 결과를 기다리는 태도, 어떤 결과가 나오든 기꺼이 수용하는 태도!  110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 에피쿠로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메노이메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12


자유가 없다면 책임도 없다 - 칸트 <실천이성비판>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자유가 없다면 책임도 있을 수 없다. 사실 '자유=책임'의 논리는 이미 우리의 일상적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  121
칸트는 인간의 윤리적 행위는 인간이 자유로울 때에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햇던 철학자이다.
'이성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순수하고 실천적인 법칙을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이 적극적 의미에서의 자유다. 그러므로 도덕 법칙은 다름 아니라 순수 실천 이성, 다시 말해 자유의 자율을 표현한다.' - <실천이성비판>  122
어떤 행위가 사회적 통념에 맞느냐 그르냐가 쟁점이 아니라, 행위자가 자율적인 선택을 했느냐 타율적 선택을 했느냐가 쟁점이기 때문이다.  123
칸트는 인간처럼 자율적인 주체를 '목적'이라고 부르고 자동차나 컴퓨터처럼 타율적인 사물을 '수단'이라고 부른다.  124

집단의 조화로부터 주체의 책임을 -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타자를 자신과 얼굴을 맞댄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과 나란히 서 있는 자로 인식하는 집단성이다. - <시간과 타자>  128

자유와 사랑의 이율배반 - 사르트르 <존재와 무>
상대바이 현재 나를 사랑하는 것도 그가 자유로운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나를 버리는 것도 역시 그의 자유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라고 햇던 것이다.  138

타인에 대한 배려 - 공자 <논어>
자공이 물었다. '평생동안 실천할 만한 한 마디 말이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바로 서(恕)다!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 행하지 말아야 한다.' - <논어> 위령공편  142

사유의 의무 -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이히만은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라혀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천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으모가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잇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 <예루살렘 아이히만>  154
아렌트는 더불 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라고 강조한다.  155
아렌트는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당신은 근면과 성실이란 미명 아래 사유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당신은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가?'  156

기쁨의 윤리학 - 스피노자 <에티카>
삶에서 만날 수박에 없는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자신의 감정을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삶의 현장에서 기쁨과 유쾌함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162

선물의 가능성 - 데리다 <주어진 시간>
'선물이 주어지는 조건으로서의 이런 '망각'은 선물을 주는 쪽에서만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선물을 받는 쪽에서도 근본적인 것이다. 특히 선물을 주는 주체에게 선물을 되갚아지거나 혹은 기억에 남겨지거나, 아니면 희생의 기호, 다시 말해 상징적인 것 일반으로 남아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 상징은 즉시 우리를 또 다른 상환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사실 선물은 주는 쪽에게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측면 모두에서 선물로 드러나지도, 선물로 의미되지도 않아야만 한다. - <주어진 시간>  166

사랑의 지혜 - 장자 <장자>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타자란 우선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진 존재를 의미한다.
소통(疏通)이란 단어를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흔히 소통이란 의사소통을 상징하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번역어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그렇지만 '트다'라는 뜻의 '소(疏)'와 '연결하다'는 뜻의 '통(通)'이란 글자로 구성되어 있는 소통이란 개념은 더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통은 구체적으로 막혔던 것을 터서 물과 같은 것이 잘 흐르도록 하는 작용을 나타내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이라는 개념보다 '소'라는 개념이 더 중요하다고 하겠다. 막혔던 것을 터버리지 않는다면, 무로가 같은 것이 흐를 수 없다. '소'라는 개념은 우리 마음으로 선입견을 비운다는 것, 그러니까 장자가 말했던 '비움'이나 '잊음'과 같은 맥락에서 사용된다. 마음으로부터 선입견을 비워야만 타자와 연결될 수 있는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타자에 대한 선입견은 나와 타자 사이의 연결을 가로막는 것, 그래서 타자와 연골되기 위해서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마음을 비운다고 해서 타자와의 소통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나 자신의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타자와 소통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 결코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즉 타자에 대한 선입견을 비우는 데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기다려야 한다.  194-195

웃음이 가진 혁명성 - 베르그송 <웃음>
'유연한 것,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생동적인 것에 반대되는 경직된 것, 기성적이 ㄴ것 그리고 집중에 반대되는 방심, 요약하자면 자유스러운 활동성에 대립되는 자동주의, 이것이 결국 웃음이 강조하고 교정하려고 하는 결점이다. - <웃음>  219
누군가 우리의 행동을 보고 웃는 다면, 분명 그것은 불쾌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때 우리는 자신의 삶이 기계적이고 무반성적으로 영위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상대방의 웃음을 통해 유연하고 활동적인 삶을 회복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220

운명은 존재하는가 - 왕충 <논형>
낚싯줄을 던지지 않느다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사라질 테니까 말이다. 불확실한 결과가 충분히 예견될지라도 과감하게 낚싯줄을 던질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잡으려고 했던 물고기를 잡았다고 해서 지나치게 오만할 일도 아니고, 잡지 못했다고 해서 지나치게 비관적일 필요도 없는 일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두 일을 하고서 조용히 결과를 기다려라!  259

미꾸라지의 즐거움 - 왕간 <왕심재전집>
'도를 얻으려는 사람이 어느 날 우연히 시장을 지나가게 되었다. 생선 가게에서 그는 우연히 드렁허리가 잔뜩 들어있는 대야를 보았다. 드렁허리들은 서로 얽히고 눌려서 마치 죽은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미꾸라지 한 마리를 보았다. 미꾸라지는 드렁허리들 속에서 나와 아래로 위로, 혹은 좌측으로 우측으로, 혹은 앞으로 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쉬지 않고 생생하게 움직이는 것이 마치 신묘한 용과 같았다. 그러자 드렁허리들은 몸을 움직이고 기운이 통해서 '삶의 의지'를 회복하게 되었다. - <왕심재전집> 추선설  261
'드렁허리들의 몸을 움직이도록 하고 그들의 기운을 소통시키고 그들의 삶의 의지를 회복시키고 그들의 삶의 의지를 회복시킨 것은 모두 미꾸라지의 공이었다. 미꾸라지가 즐겁게 움직인 이유는 드렁허리들을 동정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드렁허리들의 보답을 바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단지 미꾸라지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그렇게 햇을 뿐이다.' - <왕심재전집> 추선설
그저 미꾸라지는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싶은 자신의 본성에 충실했을 뿐이다. 
소통과 공감은 동정심이나 혹은 일체의 보답 의식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스러운 삶을 가장 즐겁게 영위할 때 소통과 공감은 기대하지 않아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263
지금 우리는 의식적인 노력만으로 소통과 공감의 세계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의식적인 노력은 어느 순간 우리를 지치게 하고 무디게 만들 수 있다. 왕간이 걱정했던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지속 가능한 소통과 공감의 세계를 꿈꾸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삶과 자신의 내면을 더 치열하게 성찰해야 한다. 타인과 공감하며 공존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본성에 부합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까지 말이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세계에 삶의 의지를 가져다주는 즐거운 미꾸라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64-265

결혼은 미친 짓이다 - 헤겔 <법철학>
결혼을 했든 아이를 낳았든 간에 상대방의 자유를 긍정하지 않늗다면, 사랑은 그만큼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서 이성복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사이'라는 것, 나를 버리고 '사이'가 되는 것. 너 또한 '사이'가 된다면 나를 만나리라.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자신을 버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기다릴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너'가 자유로운 결정으로 나를 사랑할 때까지 말이다. 이런 기다림을 유지한다면, 다시 말해 사랑하는 타자의 자유를 긍정한다면, 두 사람의 사랑이 항상 푸르게 유지될 가능성은 매우 커진다.  295

우발성의 존재를 위하여 - 들뢰즈 <천 개의 고원>
'사랑'은 '마주침' 이전에 결정되어 있는 숙명적인, 혹은 필엱거인 것일까? 아니면 사랑은 마주침이 일어난 뒤에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사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일까?
이런 물음은 철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추상화될 수 있다. '의미가 마주침에 선행하는가? 아니면 의미는 마주침 뒤에 오는가?' 혹은 다음과 같이 풀 수도 있다. '필연성(necessity)이 우선적인가? 아니면 우발성(contingency)이 우선적인가?'  298
사랑을 숙명적이라고 본 다는 것은 나무의 이미지를 따른다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10년 동안 매주 토요일 떠나간 연인을 기다릴 수 잇는 아름드리 고목과도 같은 삶, 확신에 가득 차 있는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가 오지 않더라도, 아니 오기 전에 내가 죽더라도, 그 사람은 나의 사랑이야.' 반면 사랑을 우발적인 것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들뢰즈가 제안햇던 리좀의 이미지를 딸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치는 여행을 계속 시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누군가를 만나서, 자신의 기쁨이 지속되는 한 그 사람과의 마주침을 끈덕지게 될 것이다. 물론 기쁨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한때 기쁨을 주었던 그 사람에게 결별을 고하게 될 것이다.  300-301

잃어버린 놀이를 찾아서 -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하위징아는 소중한 교훈을 준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수단이면서 목적일 때 우리는 기쁜으로 충만한 현재를 살 수 있는 반면 자신의 행동이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고단함으로 충만한 현재를 견디고 잇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현재'가 두 가지 의미로, 혹은 두 가지 가치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놀이에서 분명해지는 것처럼 그 자체로 향유되고 긍정되는 현재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의 경우처럼 미래를 위해 소비되어야 하고 견뎌야 하는 현재이다. 우리에게는 첫 번째 현재, 즉 긍정적인 현재가 필요하다. 오직 이런 현재로 충만한 삶만이 행복한 삶이기 때문이다.  303-304

진정한 진보란 무엇일까-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진정한 진보는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만이 아니라 앞으로 여기에 살게 될 후손들에 대한 관심이 있느냐의 여부로 결정될 수 있다.
'인간이 환경과 교육의 산물이며, 따라서 변화된 인간은 다른 환경과 변화된 교육의 산물이라는 유물론적 학설은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인간이며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학설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두 가지 부분-이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은 사회를 초월해 있다.-으로 나눌 수밖에 없게 된다. -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316


에필로그
독서라는 여행을 위하여
사람들은 여행을 좋아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여행을 제대로 다녀온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일상생활이 바빠서인지, 그들은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이 여행지를 다녀온다. 그러나 과연 이것은 제대로 된 여행일까? 참다운 여행은 배움의 과정이어야 한다. 여행으로부터의 배움은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첫 번째 배움은 여행지와 그곳 사람들의 삶을 배우는 것이다. 처음에는 말도 음식도 그들의 행동도 모두 낯설게 느껴질 테지만, 애정을 갖고 그들과 살을 부대끼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그들 곁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행으로부터 배우는 두 번째 배움은 첫 번째 것보다 더 심오하다. 여행지에서 삶이 충분히 편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자신이 떠나온 일상이 낯설게 다가올 것이다.  320
진정한 여행을 떠난 사람은 자신이 도착한 낯선 곳에 익숙해질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 
그래서 여행은 차이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낯선 여행지와 익숙한 일상 사이의 차이, 혹은 이제는 익숙해진 여행지와 낯설게 느껴지는 일상 사이의 차이. 이 두 가지 차이를 동시에 겪어내야만, 여행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여러모로 여행을 가는 일과 유사하다. 여행과 마찬가지로 독서를 통해 이중적인 배움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책의 내용과 저자의 속내가 어렵고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차츰 책과 저자에게 충분히 익숙해진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차이에 대한 감각을 얻게 될 것이다.  321
진정으로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는 독서도 있을 수 있고, 자신의 삶까지 변화시킬 정도로 강력한 배움의 경험을 제공하는 독서도 있을 수 있다.
영민하고 섬세한 철학자 들뢰즈는, 두 가지 종류의 독서법이 있다고 전한다.
첫 번째 독서법을 '우선 책이란 속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자라고 생각하고서,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찾아보든가 혹은 썩고 타락한 사람들이라면 어휘들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읽는 책은 전번 상자에 담긴 상자, 혹은 그것을 담는 상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석을 담고, 해석을 하고, 설명을 요구하고, 결국 책에 대한 책을 쓰게 되고, 같은 식으로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 <대담>
첫 번째 독서법은 놀이보다는 노동에 가까운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읽는 또 다른 방식은 책을 어휘나 의미를 찾는 것과는 무관한 하나의 기계(machine)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작용을 하는가, 어떻게 작용을 하는가?" 하느 것만이 문제가 된다. 그것이 어떤 작용을 하는가? 만일 작용이 없으면, 감응이 없으면, 그럼 다른 책을 집어 들면 된다. 바로 이것이 강렬한 독서이다. 무엇인가 발생하든가 아니면 아니든가, 그뿐이다. 아무런 설명할 것도, 이해할 것도, 해석할 것도 없다.' - <대담>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이 좋다는 말을 듣고 그곳 명승지를 하나하나 둘러보며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럴 때 안달루시아와 감응하고 있는가? 만약 안달루시아가 우리에게 작용을 한다면, 우리는 그곳에 머물면 된다. 반면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안달루시아가 어떤 작용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감히 그곳을 떠나야 한다. 안달루시아로부터 삶의 변화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안달루시아를 갔어도 가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의 삶을 흔들어버리는 책이 있다. 나의 허영을 부수고 내 맨얼굴을 보도록 만드는 책이다. 혹은 내가 고뇌하는 것의 실체를 때로는 절망적으로, 때로는 희망적으로 보여주는 책일 것이다. 이런 책을 읽을때 우리는 노동하는 독서가 아니라 감응하는 독서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말한 '강렬한 독서'법이다.  322-325

Posted by WN1
,


꿈꾸는 것과 
행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이상은 우리를 꿈꾸게 할 뿐 아니라 
행동하도록 부추기는 것이어야 한다.


내일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이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 윌키 오의《마음의 길을 통하여》중에서 -



wn1 - 생각좀 하고 삽시다.. 라는 주제는 현재에 사는 성인이라면 한 번 이상은 들어보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딱히 정해져 있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 조차 모르겠다는 막막함을 호소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생각을 하고 삽니다.. 

자신이 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것도 한가지 정도는 있습니다. 물론 무수한 변경거리들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압니다..

문제는 생각을 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선 질문자체가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질문을 하면 좀더 좋은 표현일까요..

어떤 목적의 생각을 하고 삽니까?


이런 질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서부터 생각을 해나가야 합니다.

막막하긴 하지만 어떤 생각을 해봐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군요..


거기서 부터 하나하나 풀어나가면 더 좋고 더 깊은 생각들을 하면서 지내게 됩니다.

그래서 근래 인문학이란 화두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문학은 '사람에 대한 통찰'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굳이 '학'이라니 학문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문 즉,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는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성찰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스스로에게 도움을 베푸는 자세를 키운다고 할까요..

인문학은 원래 있던것입니다. 다만 근래 필요성에 의해 대두되는것일 뿐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우리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그렇게 하면 깊은 생각으로 인해 의지가 강해져 행동으로 이어짐이 빠를것입니다.

꿈꾸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릅니다.

꿈이 현실에 가깝고 또한 의지를 불태울 수 있으려면 이상적이어야 하는데,,,저는 그 이상적인것에 인문적인 성찰과 통찰을 대입해 봅니다.


'마음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을 살기로 해요.  (0) 2010.12.21
완벽 하고픈 생각의 욕심들  (2) 2010.12.16
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일은 미루지 말라  (0) 2010.12.08
습관의 결과  (1) 2010.12.02
집중력을 강화하는 방법  (0) 2010.12.01
Posted by WN1
,



마음의 소리를 들어라

삶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마음의 평화에 대한 문제다.

우리는 곧잘 삶의 고통에 대해
외부의 것들에 그 원인을 돌리지만


사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다.
틱낫한은 우리의 마음을 "밭"에 비유한다

그 밭에는 기쁨. 사랑. 이해. 즐거움. 희망과 같은
긍정적인 씨앗이 있는가 하면



두려움과 분노. 미움. 절망. 시기. 외로움.
그리고 건강치 못한 집착 등과 같은


부정적인 씨앗이 있다.


과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조용히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고
일기를 쓰는 것도 좋다.



평소에 무엇인가에
마음이 자꾸 끌리거나 관심이 있다면


무시하지 말고 잘 관찰하고
당신과의 연관성을 찾아보아라.



그것은 당신이
한 평생을 바쳐 간절히 원하는


무엇인가를 찾기 위한
열쇠일 가능성이 높다.


wn1 - 자신이 자신을 위한 시간을 투자하는 것 만큼 중요하면서도 필수적인것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삶이 바빠서 ...무엇에 그리바쁜지 그것들 때문에 자신을 위한 것은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것이다..

그러지 말자.,

자신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것 부터..하자..

사람만나는것..영화보기..차마시지..수다떨기..TV 보기.. 인터넷 열어보기..게임하기 ..등등...이런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정말 자신에게 중요한것은 무엇인가?

Posted by WN1
,

꿈꾸는 다락방 2

이지성 국일출판사 2008

"꿈이 준비되면 기회가 나타난다."

"나는 매일 새롭게 전진하고 있다"고 대답할 수 없다면 꿈을 가져라. 그리고 그 꿈에 미쳐라.

===> 새로운 삶을 살게 될것이다.

바램을 꿈과 혼동하지 말라. 바램은 단순한 소망이다. 바램은 흔히 '~가 되고 싶다'이다.

꿈은 결단이다. 꿈은 '반드시 ○○가 되고야 말겠어!'이다.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지만,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 바램을 이루고 싶다면 꿈으로 전환해야 한다. 바램은 저절로 꾸어지지만, 꿈은 만드는 것이다.

wn1 -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이 꿈이 있고 비전이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그럴때 자신에게 꿈이 뭔가? 라는 질문이 오면 서슴없이 말을 하지만 ...스스로는 뭔가 찜찜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자신의 꿈이나 비전이 아니라 막연히 어디선가 들었거나 보았던것을 '나도 저러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을 뿐 그 이상으로 무언가든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바램이다..

이것은 자신에게 도우이 되질 않는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각을 하고 있다.

도대체 그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고의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나도 그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때 그것에 대한 생각이나 정보라도 얻으려는 노력을 취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꿈이 될 수도 있을 텐데..사람들은 그 순간 즉, 찰나의 부럼움만을 가지기 때문에 꿈이 되질 않는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관리하는 것은 차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에게 꿈은 근육과도 같다. 규칙적으로 관리해주지 않는다면 처지게 된다.

박정희

윤정수

박경림

메리 케이 애시

테리 폭스

전광열

정주영

이건희

아인슈타인

피카소

빌 클린턴

베토벤

존 크리시

마이클 조던

타이거 우즈

꿈은 이루어 질 때까지 꾸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하면 무조건 성공하는 줄 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꿈을 향해 열심히 달릴때 성공하게 된다.

wn1 - 열심히 하는것과 성과를 내는 것은 어느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직장인이나 심지어는 주부들마저도 뚜렷이 구분되어 있는 것을 조금만 관찰해보면 알 수 있다.

막연히 열심히 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것이다...물론 그것 마저도 하지 않는 경우는 거론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공부하는 학생은 열심히 공부는 하는데 하는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는경우.

열심히 회사일을 하지만 성과가 다른이보다 좋거나 진급이 빠르지도 않는 경우.

집안일을 하루종일 이것저것 열심히 하지만 거의 표가 나지 않는경우.

(솔직히 개인적인 생각은 .. '집안일은 고대지만 표는 나지 않는다'는 말에 반정도만 동감하고 반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분명 집안일은 여러가지이며 그것을 모두 한다는 것은 힘든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기에 표가 쉽게 나지 않는다는 것에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집안일도 잘 계획하고 가꾼다면 분명 표나게 집안을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사람들을 많이 보아오기도 했다.)

열심히 하는데 별다른 결과가 없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선 목표의식이 없기에 지금하는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경우일 수 있다.

이런경우는 오래도록 열심히 하기가 힘들다...

다음으로는 계획이 없는 경우일 수 있다...이것도 전자의 경우와 비슷한 맥락이지만 목표가 있어도 계획이 없는 경우일 수 도 있다.

또한 방법자체가 좋은지 아닌지 전혀 생각지 않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는 정말 열심히는 한다..자신이 공부하는 일이 좋은 방법인지 아닌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냥 열심히 한다는 자체만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전혀 생각을 하지 않는다..결과를 보면서도 다음에도 계속 그러고 있다..

이러다 보면 자신은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틀을 형성하게 되어 더 이상 무언가에 도전을 해보는 마음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자신이 하는것이 어떤것이든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더나은 방법에 대해 고민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그렇게 할때 발전과 성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두려움이야 말로 가장 강력한 부정적인 사고방식이다. 두려움은 성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이다.

물리적 노력으로는 무의식의 변화를 시킬 수 있다. 하지만 진정 성공하려면 물리적 노력에 정신적 노력까지 해야 한다.

===> 진정한 확신을 갖게 되고 어떤 어려움에도 두려움이 아니라 확신을 유지 자신의 운명자체를 바뀌게 할 수 있다.

이명박 "꿈만 있고 실천력이 없으면 백일몽이다. 꿈 없이 일만 벌이는 것은 악몽이다."

거대한 확신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단순한 노력은 절대로 인생을 크게 변화 시킬 수 없다. 당신의 인생을 걸고 정신적 노력과 물리적 노력을 하라.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너무 많은 꿈이 실패해서가 아니라 꿈을 꾸지 않기 때문이다. 꿈이 있는 사람들 절대 지지 않는다.

꿈이 당신을 미치게 할 때 원하는 것을 이루게 된다. 그 꿈을 찾기 위해서는 '결단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정주영 "아무 생각 없는 사람에게 전진이란 있을 수 없다. 생각하는 사람과 생각 없는 사람의 차이는 일을 해보면 질적인 면에서나 능률적인 면에서나 하늘과 땅 차이다."

여기서의 생각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인 생각 그 이상이다. 즉 꿈을 가지고 이루기 위한 고심.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향상된 미래를 꿈꿔라"

"충실한 삶을 살고 싶으면 일찍 일어나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일에 임해야 할것이다."

===> 정주영 회장의 추진력은 이미 그전에 모든 생각으로 계획을 세운 뒤에 있다.

헨리포드 "생각하는 것은 가장 힘든 작업이다. 생각하는 사람이 매우 적은 이유는 그 일이 힘들기 때문이다."

wn1 - 헨리포드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이는 느낌이다.. 이것만 잘 풀어낸다면 누구나 잘 할 수 있기 때문이라서 그런가 보다..

생각의 유희를 가지기 위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고전독서를 즐기리라...

개인적으로 고전독서를 여러번 시도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중도에 포기하였다...하지만 시도마다 조금씩의 발전을 가졌다... 그러면서 고전독서의 방법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물론 이것역시 자료들을 찾으며 고민했다면 더 빨리 찾아졌을 것이다..

근래는 고전독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글을 남기기에 쉽게 해 나갈 수 있는것 같다..


에디슨 "한 가지 생각이 열매를 맺으려면 평균 5-7년이 걸린다. 때로는 25년 이라는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에디슨은 발명 중에 막히는 일이 발생하면 '에디슨 침대'라 명명한 침대로 올라가 반수면 상태에 빠져 영감을 얻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이루어진다."

===> 아무리 노력해도 1%의 영감이 없으면 99% 노력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영감이 없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신통한 결과를 얻지 못한다. 무조건 노력만 하는 사람은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하는 꼴"


이건희 "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이 있어야 한다."

"전략 경영이란 미래에 대한 비전을 명확히 설정하고, 이를 단정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계획하여 수립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1. 과거와 현재의 나는 잊어라. 오직 미래의 나만 생각하라.

2. 환경이나 현실 탓을 하기에 앞서 네 마음의 에너지를 믿어라. 네가 꿈꾸는 성공에 걸맞은 마음의

에너지를 갖기 위해 노력하라.

3. 네 상상력을 물감 삼아 새로운 미래를 마음껏 그려라.

4.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해라.

양자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중에서도 극단적으로 미세한 세계. 원자나 분자 크기의 세계. 1,000만분의 1일 리이터 이하의 세계를 다룬다.


존 크리시는 출판사에서 753번의 거절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생생한 꿈을 꾸었다. 총 563권의 소설을 발표하고 세상을 떠났다.

내가 스스로 만든 나의 한계라는 감옥을 탈출하려면 맹목적인 VD를 해야 한다. 하루 평균 6만 가지의 생각 중에 95% 즉 5만 7천 가지는 별 의미가 없거나 부정적인 생각 즉 자신의 한계속에 갇혀 있는 생각이란다. 다시말해 3천개정도가 의미 있거나 긍정적이다.


목표가 불명한 사람은 지금 현재 꿈을 이루기 위해 가장 필요한 행동이 무엇인지 빨리 찾아내고 실행에 옮기며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하면서 생긴 노하우를 이용해 실행 방법을 더욱 효율적으로 개선하는 장점도 보유하게 된다.


이지성이 말하는 통합 VD 5단계

1. 혼자만의 조용한 공간, 의자에 앉거나 침대에 누워라.

2. 눈을 감고 꿈의 나래를 펼쳐라.

3. 입을 열어서 꿈을 선포하라.

4. 펜을 들어라. 종이에 꿈을 적어라.

5. 종이에 적은 것을 다시 큰 소리로 읽어라.

Posted by WN1
,

습관의 힘

마음에 2010. 8. 19. 23:26




습관의 힘

 

성공한 사람들은

남보다 더 노력하고, 인내하고,

효과적으로 준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 내부의 낯선 것을 일깨우고

변화시키려면 습관부터 바꾸어야 하는데

그 습관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입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계획하고, 액션하고, 체크하는

그 모두를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하는 사람을 성공으로 이끌고,

꿈만 꾸는 사람을 실패로 끄는 힘은 바로 습관입니다.

 

목표를 세웠다면

당장 실천하고 꾸준히 반복하십시오

새 습관이 몸에 배려면 꾸준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신중하게 새로운 좋은 습관을 찾으십시오

습관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교체되는 것입니다.

최고가 되는 것은 재능보다 연습하는 습관에서 비롯 됩니다.

Posted by WN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