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리영희 선생은 말한다. 진실, 진리, 끝없는 성찰, 그리고 인식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신념과 지조.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용기. 지식인은 이런 것들과 더불어 산다.  47-48



우리 모두는 갖가지 편견과 고정관념을 지니고 산다.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모든 종류의 통념이 논리적, 경험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일일이 시험하고 검토할 수 없는 일이기에, 많은 경우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관념과 사고방식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는 맬서스와 얼마나 다른가. 내가 옳다고 믿는 것, 내 신념을 받치고 있는 수많은 통념들 가운데 그릇된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없을 것인가? ..

<인구론>과 맬서스는 금이 간 거울이다. 내 생각도 그릇된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일그러져 있지 않은지 경계하면서, 거기에 나를 비추어 본다. 생각은 때로 감옥이 될 수 있다!  90-91



배불리 먹고 편안하게 지내기만 하면서 배우지 않으면 백성은 짐승에 가까워지므로...  126



마르크스는 사회를 "대립하는 계급의 통일"로 보았다. 그의 세계에는 언제나 투쟁이 진행 중이며 혁명이 준비되고 있다. 그는 부르주아 독재를 타도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혁명이 필연적이며 그것이 역사의 진보라고 믿었다.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마르크스가 혁명의 소용돌이에 몸소 뛰어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베블런의 세계는 유한계급과 생산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그의 세계는 매우 안정되어 있다. 여기서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 인습과 제도의 진화가 있을 뿐이다. 보수성은 지배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보편적 특성이다. 유한계급의 규범과 생활양식은 모든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명예로운 표준으로 통용된다. 하층계급은 유한계급을 타도하기보다 그 일원이 되기를 원하며 그들을 흉내 내려고 애쓴다. 사회와 인간을 이렇게 보면 세상의 소란에 신경 쓰지 않고 이방인으로 살다 가는 쪽이 자연스럽다.  238-239


폭력이 '무지'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무지'란 "처지를 바꾸어놓고 생각해보는 능력의 전적인 결여"를 의미한다.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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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뇌에는 '결정적 시기'라는 것이 있는데, 이 시기의 뇌는 젖은 찰흙 같아 주변 환경의 영향으로 자유자재로 주물러지고 변형될 수 있다. 오리는 태어난 지 몇 시간, 고양이는 4주에서 8주, 원숭이는 1년, 인간은 약 10년까지 유지되는 '결정적 시기'에 겪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뇌 구조가 완성된다. 그래서 아이슬란드에서 성장한 뇌는 아이슬란드에 최적화된 뇌를, 카르타고에서 자란 뇌는 카르타고에 최적화된 뇌를 가지게 된다.  26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인류의 모든 전설과 신화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유 없이 떠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바로 헤어짐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세상과 이별한 자에게는 도전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성숙이다. 떠남을 통해 성숙한 자는 다시 익숙한 세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자는 더 이상 떠나기 전의 그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귀향이다. 캠벨은 이렇게 인류의 모든 스토리들이 헤어짐, 성숙, 그리고 귀향으로 이뤄진다고, 이 과정이야말로 인류 공통의 '단일신화(monomyth)'라고 이야기한다.  27



우리가 떠나는 진정한 이유는 어쩌면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28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있고, '왜'라고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순간 우리는 질문을 짊어진 무거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65



인간은 23쌍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다. 각 염색체들은 노화 진행을 나타내는 텔로미어(telomere)라는 DNA 조각으로 끝난다. 세포들은 주기적으로 세포분열을 통해 DNA를 복제하는데, 세포 끝 부분인 텔로미어는 복제되지 않아 궁극적으로 분열 때마다 점차 짧아진다. 통계적으로 고양이는 8번, 말은 20번, 인간은 60번 정도 세포분열을 할 수 있다. 더 이상 분열되지 않으면 세포는 노화하고 우리는 결국 죽음에 이른다. 텔로미어가 잘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까? 다행히도 가능하다. 텔로머아제아(telomerse, 말단소립 복제효소)를 이용해 세포가 분열해도 텔로미어의 길이를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 암세포가 가장 유명한 경우이다. 텔로머라아제가 활성화한 암세포들은 끊임없이 세포분열이 가능하다. 암세포들에게는 영원한 '삶'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94



현재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은 해마다 약 1,000억 톤의 탄소를 필요로 하는데 그 중 오로지 5억 톤 정도만 생태계에서 자연스럽게 생산된다. 나머지 995억 톤의 탄소는? 죽은 생명체의 시체들을 재활용해 만들어진다. 죽음이 없으면 생명에 핑요한 탄소의 200분의 1만 만들어지고 죽음 없는 세상에서는 새로운 삶이 200배 덜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지구에는 그런 죽음이 있기 때문에 약 200배의 더 많은 삶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96



인생은 생각과 선택의 꼬리물기이다. 선택과 생각은 뇌로 하는 것이고, 뇌는 수천억 개 신경세포들의 합집합니다. 그 수많은 신경세포들을 단순히 '내가 원한다'라는 의지 하나로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시대는 매우 순진해 보인다. 완벽한 자유의지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선택은 수많은 요소들(물리법칙, 유전, 경험, 학습, 우연...)로 구성된 '선택의 풍경'을 통해 확률적으로 만들어진다. 선택의 틀은 정해져 있지만, 선택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완벽한 '자유의지'를 통한 완벽한 '선택의 자유'가 존재한다고 믿을까?  104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실이란 외부 세상과 머리 안에 존재하는 내부 세상과의 동일성을 의미한다며, 진실 추구를 지성과 사실 간의 방정식에 비유하기도 했다.  118



역사철학자 비코는 진실을 '구성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진실은 객관적이기보다는 역사, 사회, 경제적 조건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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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하고 익숙한 모든 것으로부터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을 때 그게 집이든 감정의 응어리든, 외면의 것이든 내면의 것이든, 진리를 찾아 여행을 떠났을 때,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깨달음의 과정으로 여기고 마주치는 모든이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다면 무엇보다도 인정하기 힘든 자신의 모습을 용서할 준비가 되었다면 진리는 당신에게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2.05.55)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무엇일까? 
진리는 이전 문맥을 통해 해석해 보아야 한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에 대한 용기 
깨달음의 과정으로의 배움 
인정하여 자신을 용서하는것 

우선 익숙한 것에서의 결별하려는 용기는, 그만큼 힘들다는 표현이다. 익숙한것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엄청난 두려움이 따른다. 그렇기에 사람은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안주하는 것만큼 편한 생활은 없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익숙한 것은 그것만이 진리라는 착각을 주게 되어 인간의 정신을 고정시킨다. 그러니 그만큼 안락해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움에 대한 극한의 반대 입장으로 진실한 눈으로 보는것을 방해하게 된다. 
깨달음의 과정으로의 배움이란것은, 새로운 아니 이미 존재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것들을 통해서 옳은 것이 절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또 다른 표현이 있을 수 있다는 다양성의 받아들임과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경험의 접목은 새로운 해석의 장을 마련해 줄 수 있게 된다. 첫번째 내용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의 과정을 달리 볼 수 있는 눈을 전제로 하기에 새로움의 자극은 깨달음 즉, 조금더 진리에 다가가게 해주는 도구로서의 역할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인정하여 자신을 용서하는것. 갖혀있으면 있을수록 자신을 바라보지 못할 확률이 높으며 바라보더라도 비뚤어진 사고로 바라보고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강박적인 해석을 뒤따르게 할 수 있기에 자신의 문제로 귀결시킬 수 있다. 물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벽을치고 타인을 모두 틀리다고 자신의 마음을 닫아버리는 경우도 발생될 수 있다. 인정한다는 것은 잘못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도 있지만, 다양성의 공존에 의해 모두 옳을 수도 모두 그를수도 없다는 점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 즉 심적 상태의 넓고 깊은 평온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인가? 
다양한 것에 대한 경험과 그로 인해 알고 깨닫게 되는 것들에 의한 평온함의 깊이있어짐과 넓어짐이라 표현하게 될 수 있을까.. 

영화에서 표현한 '진리'를 그렇게 해석하고 싶다. 
왜냐하면 여행은 새로움에 대한 놀라움과 그것들과의 소통으로 인한 인정과 올바른 비판적 수용 그리고 그러한 것들로 인한 새로운 해석과 앎.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의 부드러워짐과 인간적 불완전성에 대한 올바른 견해와 견해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진리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유일하며, 이슬람, 힌두 관점에서도 비슷하고, 불교, 유교적 관점에서 깨달음에 의한 성장이기도하다. 이러한 것들로 볼때 이러한 종교적 진리 또한 어느정도 이상의 해석의 문제를 안고 있다. 
다시말해 유일신에 의한 진리적 유일성이 아니라면, 깨달음의 과정이 중요하다. 더해서 유일한 진리에 대해 알기 위해서도 우리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현재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적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음으로 인해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서양의 산업발달에 의한 정상적 상태로 바라보면 기독교는 분석하고 판단하여 꿰둟어보는 통찰력을 길러서 그것으로 성장, 발전시켜 나가는 것. 종교에 대한 해석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시절이 지나가며 이제는 그에대한 부작용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그것이 중용이 필요하고, 마음 정신적 수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것이다. 그들이 동양적 사상에 심취하고 있다고 하여 그들이 서양 사상을 배척하려는 것이 아니다. 유지하면서 조금보태는 것이다. 즉 보완시키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 여행은 종교적으로 해석한 진리에 대한 의미도 포함할 수 있는 '진리'의 영역을 설명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개풀뜯어먹는 소리가 아니라, 여행은 다양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문화와 전통과 사상을 접하고 체험하게 해준다. 그렇기에 그러한 경험은 통찰력에 가까운 해석력과 수용능력을 배양하여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고대의 여행도, 지금의 여행도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여행이라면 이정도 되는 것이 아닐까.. 관광이 아닌 여행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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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않으면 녹슨다.

이 진리는 특히 우리 몸에 잘 들어맞는다.

만약 앉아 있는 게 좋다는 이유만으로 휠체어에서 3년을 보내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있다면

3년 후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걸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다리를 계속해서 쓰지 않은 까닭에 다리가 마비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똑 같은 원리가 다른 곳에도 적용된다.

일 년 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으면 결국 건반 감각을 잃게 된다.

상상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창조성이 증발해 버린다.

사실, 사람은 무엇이든 하면서 살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하면서 점점 더 발전해 나간다.

따라서 늘 무슨 일이건 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노력을 거듭하다 보면 훨씬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기 마련이다.

자기 몸을 방안에 가둬놓고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우리 스스로를 규칙적으로 시험에 들게 하면 그에 상응하는 힘이 길러지게 된다.

몸뿐 아니라 마음도 그러하다.

천지 만물의 작은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말고 관심을 기울이라.

사람의 의식은 쉬이 흥미를 잃곤 한다.

한번 “뭐 신통한 게 없네.”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그게 바로 문제를 향해 달려가는 지름길이다.

감옥과 정신 병원에는 ‘별 신통한 게 없는’ 사람들,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하나씩 흥미를 잃어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기억하라. 분명, 세상에는 ‘신통한 게 있다.’

우리 마음의 모양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계속 마음을 사용하라.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간다 해서, 그렇게 자꾸만 세월이 간다 해서 옛날만 못해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 마음이 가진 능력을 한껏 사용하면 마음도 우리를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이다.

돈도 마찬가지다.

돈이란 쓰기 위해 있는 법. 돈은 돌고 돌아야 한다.

큰 돈을 번 사람들은 자본을 재투자하고, 가진 돈을 적절히 쓰며, 때로는 위험도 감수한다.

돈 봉투를 침대 밑에 숨겨놓고는 부자가 될 수 없다!

wn1 - 무엇이든지 정체되어 있으면 녹이스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특히 생각을 멈추게 되면 녹보다 더 심한 결과를 가지게 된다.
사람은 무슨일을 하든지 자신의 생각으로 인해 성장하고 발전하며 일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생각을 하지 않는 습관이 들면 어떠한 일도 생각을 하지 않으므로 결과가 나와야..'이렇게 될지는 몰랐다'라고 변명을 하게 된다..
중요하지 않은 일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냐 마는 중요한 일이라면 누군가는 그 일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된다.. 자신은 그렇다치고 왜 타인까지 위험에 빠뜨려야 한단 말인가.
생각이 녹슨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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