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식 글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내용이 들어있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렇게 느꼈다는 것이다.
저자는 조선후기, 그 중에도 정조 시대 유학자들에 대한 책을 꽤 내었었다.
그리고 이 책은 자신이 연구하고 종합 정리한 것을 엮은 것이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중간 결산이라고 한다.
저자의 책 중에 여러권을 읽었기에 이 책의 내용은 배경지식으로 도움이 되었다. 
18세기 조선에 중국에서 엄청난 서적들이 들어오고 사신행렬에 끼여 탐방한 사람들을 통해 많은 문물이 들어오고 경험하면서 이전의 조선 문화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그럼에도 문체반정으로 대표되는 전통을 지키는것, 나라의 근간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핍박을 당하였으나, 깨어있는 지식인들을 통해 여러가지 많은 쟁이들이 생겨나고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대략이라도 전반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당시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과 유사한 점이 많다. 다양한 책들을 통해 문물을 접할 수 있었는데 그렇기에 기준이 모호해져서 우왕좌왕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넘쳐 나는 정보들을 자신에 맞게 섭취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고집과 아집이 넘쳐 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올바름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도 깨어있는 사람들은 올바름을 잃지 않고, 취할것은 취하고 버릴것은 버렸으며, 지금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에 대한 인식도 나타내었다.
다양성과 독창성을 잃지 않으며 창조적인 생각과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를 바라보는 시각도 열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많은 것들이 오늘날과 비슷하다.
지금의 우리에게 무엇이 올바름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특히나 길거리에서 눈을 뜨게 된 장님의 우화는 저자도 여러번 강조한 것처럼 생각할 꺼리를 남겨주고 있었다.





서설
18세기 미친 바보들
18세기 조선에서는 갑자기 '벽(癖 적취 벽)' 예찬론이 쏟아져 나온다. 무언가에 미친다는 뜻의 '벽'.
박제가(1750-1805)는 "벽이 없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또 '치(癡 어리석을 치)', 즉 바보, 멍청이를 자처하고 나서는 경향도 생겨났다.
설치(雪癡), 치재(癡齋), 매치(梅癡), 간서치(看書癡), 석치(石癡) 등 치 자가 들어간 이름이나 호가 부쩍 많아지는 건 그 방영이다.  13
18세기의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한 힘은 정보화에 있다.  14
18세기에는 무언가에 단단히 미친 사람이 많았다. 이런 비 정상적인 몰두와 집착을 그들 스스로는 몹시 자랑스럽게 여겼다. 벽이 없는 인간과는 사귀지도 말라고 했고, 벽이 없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벽은 확실히 이 시기 지식인들을 특징짓는 중요한 코드였다. 
김덕형의 <백화보(百花譜)>에 박제가는 서문을 이렇게 썼다.
'독창적인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건 벽이 있는 사람만 가능하다. 아아! 저 벌벌 떨고 빌빌대며 천하의 큰일을 그르치면서도 스스로 지나친 병통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은 이 책을 보고 경계로 삼을진저.' 벽도 없이 무언가에 미칠 줄도 모르면서, 나는 저런 멍청이가 아니어서 참 다행이라고 기뻐하는 자들에게 이 책을 보고 부끄러운 줄 좀 알라고 일갈한 것이다.  22-23
이 시기에는 이렇듯 백과전서적 지식 경영이 크게 성행했다. 주체와 목표만 정해지면 이들은 모든 정보를 조직화하고 편집해냈다.  25
이런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 정보량의 폭발적 증가를 꼽지 않을 수 없다.  26
박지원이 들려주는 재맹아(再盲兒) 설화는 의미심장하다. 길 가다보니 웬 젊은이가 울고 섰다. 왜 우느냐고 물었다. 원래 어려서 장님이 되어 20년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갑자기 길 가다 눈이 떠졌다. 너무 기뻐 집으로 가려 하니 골목은 갈림길이 많고 대문은 다 같아 제 집을 못 찾아 운다고 했다. 처방은 이렇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장님은 기뻐하며 지팡이를 더듬어 문제없이 제집을 찾아갔다. 
너는 그저 장님 주제로 살란 말이 아니다. 한번 떠진 눈은 다시 감기지 않는다. 문제는 집에서 눈 뜨기 않고 도중에 눈 뜬 데 있다. 그래서 눈을 뜨는 순간 다시 눈이 멀고 말았다. 박지원의 생각에 눈 뜬 장님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었다. 눈만 뜨면 뭣 하는가? 정작 자아의 주체를 주체를 세울 수 없다면 눈을 뜬 기쁨은 새로운 비극의 시작일 뿐이다. 길 잃고 헤매지 않으려거든 도로 눈을 감아라. 본래의 시작일 뿐이다. 길 잃고 헤매지 않으려거든 도로 눈을 감아라.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 좌표축을 세워 출발하라. 확장된 세계, 혼돈스런 정보 앞에서 주체의 확립보다 절박한 건 없다. '나'없는 세계는 카오스일 뿐이다. 이 점은 인터넷 시대라고 다를 게 없다.  32
디드로가 <철학적 사고>에서 '사람들은 왜 정열에 대해 우호적으로 말하면 이성을 모욕하는 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을 위대하게 고양시킬 수 있는 건 위대한 정열뿐이다.'  52
박제가는 '세상에 무언가에 미치지 않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고 목청을 높였다.  53
 

18세기의 문화 개방과 조선 지식인의 세계화 대응
'무찌르자 오랑캐'의 북벌을 국시로 하던 세상에서 살다가 처음 북경에 도착한 조선의 젊은이들이 받은 문화적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사방으로 죽죽 뻗은 넓은 도로에 넘쳐나는 재화, 으리으리한 건축물들, 거리를 가득 메운 서점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할 정도로 쌓여 있는 서책들, 고딕식 서양 성당과 서구 과학기술 정보들까지 있었다. 그들이 직접 목격한 청나라는 애초에 조선이 무찌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이 목숨만큼이나 소중하게 지켜왔던 성현의 이념가치들이 청나라에서는 이미 철 지난 유행가였다. 북벌의 강고한 이데올로기는 어느 순간 북학(北學)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58
18세기의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한 힘은 정보화, 세계화에 있다. 문화의 개방과 소통에 따라 취급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61
갑작스레 밀려드어온 선진문물 앞에서 주체를 확립하여 제정신을 차리기는 어려웠다. 박지원은 '눈 뜬 장님'의 유명한 비유를 들어 문화종속에 따른 주체의 실종을 경고했다. 장님이 눈을 뜨는 건 좋은 일이지만 집에서 뜨지 않고 길 가는 도중에 뜨게 되면 오히려 제집을 잃고 길에서 울게 되니, 집을 찾아가려면 도로 눈을 감아야 한다고 했다.  62
18세기는 정보 자체가 아니라 정보의 질이 문제가 되는 시대였다. 
모든 지식이 새롭게 편집되고 재배열되었다.
18세기 새로운 지식 경영에 의한 저작들 주에는 한 작가 안에도 실학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 공존한다.
이들 저작을 관통하는 저술 원리는 한 가지다. 널려 있는 정보를 수집 배열해서 체계적이고 활용 가능한 지식으로 탈바꿈한다는 것.  63
토론과 돌려 읽기를 통해 정보를 확충하고 관점을 조정해나가는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65
모방은 어느새 창조의 에너지로 점화되었다.  74
중국의 학자들은 사신행차에 참여해 북경을 밟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중국의 아류가 아닌 좀더 조선적인 저작을 요구했다. 이들은 이 과정을 거쳐, 진정한 경쟁력은 중국의 모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의 독자성에서 나오는 것임을 점차 절감하였다.  76
자고나면 모든 것이 바뀌어 있는 이 문명사적 전환의 시대에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18세기 지식인들의 지식 경영에서 여전히 배울 것이 많고 반성할 점도 많다.
첫째, 18세기 지식인들은 정보가치의 우선순위를 바꿔 지식 경영의 중요성을 강화했다.
변화의 맥락을 읽어내는 정확한 안목이 중요하다. 바꿔야 할 것을 과감히 바꾸고 바꿔선 안 될 것을 지켜나가야 한다. 이 둘을 혼동할 때 변화는 곧 파국을 의미한다. 무조건 바꾸고 보자는 식의 변화 지상주의는 오히려 회복 불능의 상태로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  80
둘째, 18세기의 지식인들은 외국문화를 개방된 자세에서 주체적으로 수용했다.
중요한건 개방성이 아니라 주체성이다. 제대로 하고 나대로 하고 나름대로 해야지, 멋대로 하고 덩달아하고 따라해선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셋째, 18세기 지식인들은 그들이 경험했던 정보화사회에서 지식 경영의 다양한 모델을 실천적으로 제시했다.  81
틀을 세워 정보를 선별하고 토론과 적용을 거쳐 목표에 도달하는 이들의 작업 방식은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과정의 결과여야 한다.
넷째, 18세기 지식인들은 다양한 문하 콘텐츠를 개발하여 주체적 문화역량을 강화했다. 
세계화란 우리 것을 버려 남을 따르는 데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만의 색깔과 개성을 지닐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문화는 변화할 뿐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82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벽'과 '치' 추구 경향
'벽'과 '치'의 추구가 나타나는 점은 아주 흥미롭다. '벽'이나 '치'는 모두 병들어 기댄다는 뜻의 '녁(?)'자를 부수로 하는 글자이다. 이 밖에 의미의 '비(庇)' '비(?)' '고(痼)' 같은 어휘도 자주 사용되었다. '벽'은 의학적으론 오른쪽 갈비뼈 아래 비장(脾臟)에 나쁜 기운이 쌓여 있는 상태를 말한다. 
어떤 것에 대한 기호나 집착이 너무 지나쳐 이성적으로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병적인 상태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하였다.
전 시기까지 이 '벽'은 군자가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대상이었다.
벽이 '상지해기(喪志害己)' 즉 바른 뜻을 잃게 하여 마침내 몸을 해친다고 본 것이다. 이는 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경계하는 유가의 전통적인 '완물상지(玩物喪志)'의 논의와도 맥락을 같이한다.
그런데 이러한 벽에 대한 인식이 18세기에 이르면 일부이기는 해도 지식인들에게 타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없어서는 안 될 미덕으로 변모하게 된다.  92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처럼, 남이 미치지 못할 경지에 도달하려면 미치지 않고는 안 된다. 미쳐야 미친다. 미치려면[及] 미쳐라[狂]!
박제가는 <백화보서(百花譜序)>에서 '사람에게 벽이 없으면 쓸모없는 사람일 뿐이다. 대저 벽이란 글자는 '병(病)'이란 글자에서 나온 것이니, 지나친 데서 생긴 병이다. 그러나 홀로 걸어가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건 왕왕 벽이 있는 사람만이 능히 할 수 있다.'  93
정조의 사위였던 홍현주(1793-1865)는 <벽설증방군효량>에서 '벽이란 병이다. 어떤 물건이든 좋아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좋아함이 지나치면 '즐긴다[樂]'고 한다. 즐기은 사람이 있어 즐김이 지나치면 이를 '벽'이라고 한다.'
미친 듯 몰두하여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는 몰입의 상태를 말한다.  95
홀로 걸어가는 정신이란, 남들이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출세에 보탬이 되든 말든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정신이다 이리저리 재고, 이것저것 따지기만 해서는 어느 한 분야의 특출한 전문가가 될 수 없다. 그것을 가능케하는 힘이 바로 멱이다.  97
홍현주의 <벽설증방군효량>의 뒷부분에서 '내가 평소에 달리 좋아하는 바가 없지만, 오직 그림에 대해서는 벽이 있다. 옛 그림으로 마음에 차는 것을 한번이라도 보면, 비록 화폭이 온전치 않고 장정이 망가졌더라도 반드시 비쌍 값에 이를 구입하여, 목숨처럼 애호하였다. 아무개가 좋은 그림을 지녔다는 말을 들으면 문득 심력을 다해서 반드시 찾아가 눈으로 보고 마음에 녹여, 아침 내내 보고도 피곤한 줄 모르고, 밤을 새우고도 지칠 줄 모르며, 밥 먹는 것도 잊고 배고픈 줄도 알지 못하니, 심하도다 나의 벽이여! 앞서 말한 부스럼 딱지를 즐기거나 냄새를 쫓아다니는 자와 흡사한 부류라 하겠다.'  99
'치'에 대해서는 남경의(南景義)가 <치암설(癡庵說)>에서 정확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치라는 것은 멍청함이 좀 심한 것이다. 멍청함은 교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래서 전(傳)에서는 '비록 어리석어도 반드시 현명해질 것'이라고 햇고, 영무자의 어리석음을 두고 성인께서도 스스로 미칠 수가 없다고 여기셨다. 그렇지만 '치'같은 것은 사라에게 고칠 수 없는 고질이 된다. 그래서 그 글자가 '질(疾)' 자에서 나왔다. 어리석음이 심한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감히 망령되이 '치'란 이름을 얹지 못한다. 대개 세속에서 서로 욕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치'란 상식적으로 볼 때 어리석은 정도가 지나쳐 바보로 보이는 상태다. '벽'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 사람의 눈에는 그들의 상태가 '치'로 밖에 보이지 않늗다.  100-101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자의식 변모와 그 방향성
문화환경의 변화는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이 시기 지식인들의 읫기을 강렬하게 지배한 변화의 축은 크게 세 방향으로 나타난다. 
첫째, '도(道)'를 추구하던 가치 지향이 '진실'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들은 변치 않을 도에 대한 맹복적 신뢰를 거두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눈앞의 진실에 더 큰 관심을 쏟았다. 변치 않을 진리란 것이 존재한다는 걸 그들은 회의했다. 
둘째, '옛날'로 향하던 가치 지향이 '지금'으로 선회했다. 추구해야 할 이상적 가치가 과거에 있다고 믿었던 퇴행적 역사관은 이제 힘을 잃었다. 대신 그 자리에 지금 눈앞의 세계를 중시하는 진보적 역사 인식이 자리 잡앗다. 지금과 무관한 어떤 옛날도 무의미하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셋째, '저기'에 대한 관심이 '여기'를 향한 관심으로 바뀌었다. 즉 중국을 기준으로 삼던 사고가 조선 중심의 사고로 변모한다. 이러한 변화는 겉으로 보아 사소하지만 그 으미는 크다.
가치관의 이러한 변화는 개인적인 문제제기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의 전반적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 결과, '그때 저기'의 '도'를 추구하던 이전의 가치관은 '지금 여기'의 '진실'을 추구하는 새로운 가치관과 갈등을 빚었다. 사람들의 의식은 빠르게 변모해간 반면 제도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더 보수화되어 갔다. 제도는 변모된 의식을 포용할 여유가 없었고, 지식인들은 변화를 포용하지 못하는 제도의 억압을 답답해했다.  111-112
당시 청나라로부터 물밀 듯 쏟아져 들어오던 신문물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길 가다 눈 뜬 장님과도 같은 혼란을 부추겼다. 아예 눈을 감아 외면해버리거나, 눈을 크게 뜨고 휩쓸려버리거나 하는 건 어느 것도 문제의 바른 해결 방법일 수 없다. 눈을 뜬 것이 장님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백배 낫다. 하지만 그것이 겆잡을 수 없는 자기정체성의 혼란을 수반한다면 문제는 다르다. 여기서 자기정체성 또는 주체성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한 자세와 위치의 확보가 요구된다.  115
이러한 가치관의 혼돈 상황을 박지원은 <낭환집서>에서 다른 비유로 이어간다. 임제(林悌)가 술에 취해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나왔다. 하인이 그 사실을 지적하자, 그는 큰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길 오른편에서 나를 본 사람은 내가 가죽신을 신었다고 할 터이고, 길 왼편에서 본 사람은 내가 나막신을 신었다고 할 터이고, 길 왼편에서 본 사람은 내가 나막신을 신었다고 할 터이니 무엇이 문제인가?" 그냥 걸어가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을 짝짝이 신발이, 말 위에 올라타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결과, 역설적으로 그 사람의 짝짝이 신발은 달리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
당시는 저마다 자기가 본 것만을 진실로 여기는 상황이라고 박지원은 생각했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둘 다 틀렸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는데, 그 중간 지점에는 아무도 서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눈 뜬 장님은 길에서 울고 있고, 짝짝이 신을 신은 취객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활보하는 혼란스런 상황이 펼쳐진다.  116
박지원은 <녹천관집서>에서 제자 이서구와의 문답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이씨의 아들 낙서(洛瑞)가 나이 열여섯인데, 나를 좇아 배운지 여러 해이다. 심령이 맑게 열려 지혜가 구슬 같다. 한번은 자신의 <녹천고(綠天稿)>를 가지고 와 내게 물었다.  "아! 제가 글 지은 지 겨우 몇 해이지만 남의 노여움을 산 적이 많습니다 한 마디 말만 새롭고 한 글자만 이상해도 문득 '옛날에도 이런 것이 있었느냐?'하고 묻습니다. 아니라고 하면 낯빛을 발끈하여 '어찌 감히 이 따위를 하는 게야?' 합니다. 아아! 옛날에도 있었다면 제가 무엇하러 다시 합니까? 원컨대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십시오."
내가 두 손을 이마에 얹고 무릎 꿇고 세 번 절하며 말했다. 
"네 말이 참으로 옳다. 끊어진 학문을 일으킬 수 있겠구나. 창힐(蒼頡)이 처음 글자를 만들 때 어떤 옛날을 모방했던가? 안연(顔淵)은 배우기를 좋아했지만 유독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진실로 옛것을 좋아하는 자로 하여금, 창힐이 글자 만들 때를 생각하면서 안자(顔子)가 비처 펴지 못했던 뜻을 짓게 한다면 글이 비로소 바르게 될 것이다. 네 나이 아직 어리니, 남이 성 내거든 '배움이 넓지 못해 미처 옛것을 살피지 못했습니다.'라고 공정히 사과하거라. 그런데도 힐문하기를 그치지 않고 성냄을 풀지 않거든 조심스레 이렇게 대답하여라. '<서경(書經)>의 은고(殷誥)와 주아(周雅)는 삼대(三代) 적의 당시 글이고, 이사(李斯)와 왕츼지도 진(秦)나라와 진(晋)나라의 시속(時俗) 글씨였습니다'라고 말이다."  122-123
<서경>은 성현이 남긴 경전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건 그 문체의 난삽함이나 필치의 난해함이 아니라, 그 당시엔 백성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문장이요, 편한 글씨였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지금 내가 쓰는 글이 후대에 기림을 받으려면, 난삽한 옛 문체를 흉내 내지 말고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지금 여기의 정서를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124
가짜 나를 버리고 참 나로 돌아오는 과정은 결국 '나만의 나'를 추구하는 개성론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이덕무는 흔해빠진 '명숙(明叔)'이란 자를 '무관(懋官)'으로 바꾸면서 개명의 변을 이렇게 적었다.
'내 나이 16세 때 관례를 치르고 명숙을 자(字)로 하였으니, 명숙이란 자로 살아온 것이 12년이다. 하지만 자라는 건 본디 남과 나를 구별할 수 있어야지 서로 뒤섞여서는 안 되고, 하나뿐이어야지 서로 갈라져서는 안 된다. 같으면 혼동되고, 혼동되면 기피하게 되고, 기피하게 되면 갈라지게 마련이다. 옛날의 명현은 말할 것도 없고, 지위가 높은 재상, 늘 맞상대하는 벗들, 지위가 낮은 아전이나 백성 등 열 집 사는 마을이나 한 무리가 모인 곳에 명숙이란 자를 가진 사람이 너무도 많다. 한번은 과거 시험장에 들어갔는데 명숙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길래 불현듯 대답했더니 나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 거리를 자니는데 명숙이라고 부르는 자가 있어 언뜻 돌아보면 나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 혹 여러 번 불러도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더니 이번에는 진짜로 나를 부른 것이었다. 대답해도 잘못되고, 대답하지 않아도 또한 잘못되니, 그 어디에 구별하여 서로 뒤섞이지 않음이 있겠는가?'  126-127
남종현(1783~1840)은 자신의 호를 버리겠다고 선언하는 글을 남겼다. <거호서(去號序)>이다. '배움은 나를 위한 것이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알고 모르고는 남에게 달린 것이지만 부끄럽고 부끄럽지 않고는 내게 달린 문제다. 나는 내가 나를 닦아 부끄러움이 없고자 하는 사람이다. 어찌 세상 사람들처럼 간악하고 위선적이 ㄴ짓을 하여, 속으로는 마음에 부끄러우면서도 남이 알지 못하는 것만 다행으로 여기는 자이겠는가?'
이름을 바꾸는 것이나 이름을 버리는 것이나 모두 '남들의 나'가 아닌 '나만의 나'를 추구하겠다는 다짐에서 나온 행동이다.  129
정약용은 "나는 조선 사람이니, 즐겨 조선의 시를 짓겠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햇다. 박지원은 또 내 시를 읽은 사람이 내 시에서 조선 사람만의 체취와 풍습을 볼수 없다면 그런 글을 쓰나 마나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가짜 나를 버리고 참 나를 찾겠다는 추구가, 이 시기 작가들에게 '지금 여기'의 현실에 눈을 돌리게 했다.'
다만 그들은 여전히 소수였고, 기득권을 쥔 계층의 폭력적 억압은 여전히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 시기 지식인들의 담론에서 유난히 우정의 문제가 강조되는 건 이 때문이다.  131

18,19세기 문인 지식인층의 통변 인식과 그 경로
도(道)가 아닌 진(眞)을, 고(古)가 아닌 금(今)을 , 피(彼)가 아닌 아(我)를 문학이 담아야 할 가치로 내세우는 주장이 보편적 설득력을 얻었다.  134
홍양호(1724~1802)가 <계고당기(稽古堂記)>에서 '옛날은 그때의 지금이요, 지금은 후세의 옛날이다. 옛날이 옛날로 되는 건 연대를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다. 대개 말로는 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 만약 옛것만 귀하다 하여 지금 것을 천히 여기는 것은 도리를 아는 말이 아니다. 세상에서 옛것에 뜻이 있다는 자들은 그 이름만을 사모하여 그 자취에 빠지고 만다. 이는 비유컨대, 음악을 배우는 자가 상고 적의 악기인 쇠북 추려(追蠡)를 잡고 질장구 토고(土鼓)를 두드리면서도 순임금의 음악인 소(韶)와 주무왕(周武王)의 음악인 무(武)의 변화를 알지 못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또 맛을 좋아하는 자가 옛날식으로 땅을 파 술동이를 대신해 술잔질을 하고, 아무 조미도 하지 않은 대갱(大羹)을 마시면서 정작 음식의 간을 맞추는 건 모르는 것과 같다. 이러하면서도 남에게 외쳐 말하기를, 
나는 옛것을 잘 안다, 나는 옛것에 능하다"고 한다면 되겠는가?'  135-136
옛날에 대한 정의를 바꾸면 옛날만 옛날의 아니요, 지금도 옛날이 될 수 있다. '말로 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바로 이것이다.  136
심노숭은<여신생천능(與愼生千能)>에서 '내가 일찍이 세상의 글한다는 자를 본건대, 문득 스스로 '고문이다 고문이다'라고 일컫는다. 지금 사람이 어찌하여 고문을 하겠는가. 옛사람의 이전에도 또한 고문은 있었으니, 옛사람이 어찌 옛것만 좋아하고 지금 것은 미워했겠는가? 만약 지금 사람이 지구의 껍데기 사이에 힘을 쏟아 그 비슷함을 추구하여 절절하게 스스로 좋아하더라도, 비슷함을 구하면 구할수록 더욱더 비슷하기 않게 될 것이다.'
지금 사람이 어째서 지금 글을 쓰지 않고 옛글을 쓰는가? 이것이 그가 정면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다. 옛사람은 옛사람을 흉내 내지 않았다. 그들이 더 옛날을 흉내 내싿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옛날은 모두 똑같아야 옳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하나도 같지 않고, 다 다르다. 내가 옛글을 배워 옛날과 같아진다면, 거기에는 옛사람의 껍데기만 있고, 비슷함만 있고, 나의 알맹이는 찾아볼 수 없다. 나는 나고 옛사람은 옛사람이다. 그러니 내가 옛사람과 같아질 이유가 없고, 같아져서도 안 된다.
박지원은 <녹천관집서>에서 옛날과 비슷해지려고만 드는 풍조를 매섭게 질타한 뒤, "대저 어찌 비슷함을 구하는가? 비슷함을 추구한다는 건 진짜가 아닌 것이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 비슷해지려고 하지 말아라. 비슷한 것 속에 나는 없다. 겉모습만 같은 건 같은 것이 아니다. 겉모습은 전혀 달라도 알맹이가 같아야 한다.  137-138
말과 글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다. 중요한 건 옛날이냐 지금이냐의 구분이 아니라, 유용한가 아닌가의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단순해 보이는 이 판단과 자각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옛것을 모방해선 안 된다면 새것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옛것과 다르면서도 사실 그 알맹이는 같은 '새것'의 창조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141
도로 눈을 감으라는 처방은 눈을 뜬 맹인에게 계속 장님으로 살라는 주문이 아니다. 이 우화의 핵심은 길 가는 도중에 눈을 뜨는 바람에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맹인이 비극적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놓여 있다. 그가 당면한 문제는 눈을 뜬 기쁨보다 눈을 뜸으로써 제집을 찾을 수 없게 된 비극적 현실에 있다. 지벵 있다가 눈이 떠졌다면 그가 길을 잃고 울 이유가 없다. 문제는 그의 눈이 길가는 도중에 문득 떠진 데 있다. 눈을 뜨는 순간 세계는 그에게 혼돈 그 자체였다. 방향도 좌표도 없이, 한 걸음도 더 뗄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러니 도로 눈을 감으라는 처방은 분수를 알아 소경 주제로 살라는 얘기가 아니라, 잃어버린 방향과 좌표를 되찾은 뒤에 눈을 다시 뜨라는 주문이다. 내가 내딛는 발걸음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눈을 뜨는 건 더 큰 비극의 시작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한번 떠진 눈은 다시 감기지 않느다. 하지만 좌표를 상실한 맹인에게 눈을 똑바로 뜨고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주문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가 정신을 차리려 들면 들수록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가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도로 눈을 감으라는 것이 그에게 구시대에 안주하라는 요구일수 없다.
당시 청나라로부터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던 신문물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길 가다 눈을 뜬 장님과도 같은 혼란을 부추겼다. 아예 눈을 감아 외면해버리거나, 눈을 뜨고 휩쓸려버리거나 하는 건 어느 것도 문제의 바른 해결일 수 없다. 눈을 뜬 것이 장님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백배 낫다. 하지만 그것이 걷잡을 수 없는 자기정체성의 혼란을 수반한다면 문제는 다르다. 여기서 자기 정체성 또는 주체성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한 자세와 위치의 확보가 요구된다. 그 위치를 위의 이야기에서는 '본분'이란 말로 표현했고, '도로 눈을 감으라'는 방법을 제시했던 것이다. 
도로 눈을 감으라는 건 주체성을 회복하라는 말이다. 남 따라하지 말고 나름대로 하라는 주문이요, 그대로 하지 말고 제대로 하라는 요구다. 이 시기의 글 속에서 비대해진 자의식 앞에 막상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해 고뇌하는 자아의 형상이 자주 보인다.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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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하면 떠오르는 왕들 중에 단연 으뜸은 세종 영조 정조 임금이다. 
물론 조선을 건국한 태조도 있고 여러 왕들이 있지만 조선시대에서 가장 태평 선대한 시절로 꼽는다. 특히 전기에는 세종, 후기에는 영조의 기반을 바탕으로 정조 임금이 부흥시대를 열었다.
한국의 사극에서도 세종과 정조 임금을 바탕으로 하는 드라마도 있다.
그만큼 시대를 대표하는 왕이었으며, 어질고 바름의 본을 세운 왕이다.

개인적으로는 세종의 이야기는 어린시절에 많이 접하게 되었고, 정조는 성장하여서 많이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조 임금에 대한 책을 더 많이 본 기억이 있다.
이산(李祘)의 어린 시절은 참 불행하였다.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할아버지의 혹독한 가르침 그에 더해 반대 세력의 암살까지도 경험하게 되며, 죽지 않으려 늦게까지 책을 볼 수 밖에 없는 시절도 경험하였다.
그렇게 어려운 성장과정 속에서 책을 좋아하기도 하였고, 책을 볼 수 밖에 없기도 하였다.
그러한 과정이 그를 더욱 성장 시켰고, 그것이 치세를 하는 밑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저자는 정조만큼 글을 많이 쓴 왕은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렇듯이 정조는 자신의 생각들을 직접 글로 표현하고 편지도 많이 썼으며 많은 사람들과 학문을 논하고 백성들을 직접 설득하는 과정을 통해 많은 것들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정조 임금은 진정한 아비의 마음으로 나라를 돌보기 위해 애를 썼다. 책을 통해서도 그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마음은 결국은 통한다는 점을 세삼 강조하고 있다.
책을 통해 임금 정조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더 알게 되면서 그와 더 가까워 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글머리에
정조가 돌아간 이후 사람들은 그가 통치한 시대를 건릉성제(健陵盛際, 건릉은 정조의 왕릉 이름이고 성제는 융성한 시대라는 뜻)로 불러 조선 후기의 태평성대로 추억하였다.  8
왕조가 사라진 지금까지도 호감을 갖고 있는 대표적인 국왕이 바로 정조대왕이다. 그와 대결할 만한 국왕으로는 오직 세종이 있어 전기의 세종, 후기의 정조를 서로 짝을 이뤄 성군(聖君)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9
한국의 역대 통치자 가운데 글을 가장 많이 쓴 사람이 바로 정조다. 
정조처럼 글을 많이 쓴 통치자는 세계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10
정조는 글과 말이란 수단을 활용하여 사색당파로, 지역 간 이해관계로, 신분의 차별로 조각난 나라를 슬기롭게 통치하였다. 정조는 신하들이나 백성들로 하여금 국왕이 우리를 사랑하고 보호한다는 믿음을 심어주었고, 한 가지 재능만 갖고 있어도 국왕은 자기를 인정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하였다. 자신이 능력을 갖추지 못해서 그렇지 능력만 갖춘다면 우리 대왕은 자기를 등용하리라고 기대하였다. 건릉 성제의 백성들은 계층과 지역을 떠나 우리는 소외되지 앟았다는 느낌을 가졌었다.  15-16

1장 나라의 근간이 되는 힘, 공부
분발하여 끼니도 잊은 채 즐길 일을 찾았다면, 그 무엇인들 도(道)에 들어가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허나 그중에서 스스로 터득한다는 자득(自得)이란 두 글자가 특히나 절실합니다. 이유인즉, 독서에도 법칙이 잇고, 도를 보는 데도 기술이 있어섭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이 연구하여 대상에 정신을 몰두하면 자연히 대상을 정확하게 꿰뚫어볼 때가 생기니 이것이 이른바 자득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24
"마음에 드는 경치 좋은 곳을 얻어서 세상의 잡다한 일이 닿지 않게 하여 잡다한 생각을 말끔히 씻어버린다. 방 한 칸을 깨끗이 치우고서 자유롭게 생각하며 마음 내키는 대로 경사(經史)를 논한 서적을 읽는다면 참으로 즐거운 일이겠다."  27
(학문과 독서에 취미를 가진 군주였기 때문에 빈말로 보이지 않는다.)  29
학문을 하는 것은 마치 일백층 높이의 보탑(寶塔)에 오르는 것과 같다. 한 층 한 층 따라 올라가면 남에게 묻지 않아도 저절로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다.  30
정조는 생애 처음 접하는 가르침에서 '올바른 말을 듣고 올바른 일을 보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고 했다. 제 아무리 위대한 성인의 자질을 소유한 사람이라도 교육의 근본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 정조의 생각이었다.  38

3장 임금의 길
"내가 초계문신 제도를 처음 시행한 뜻은 신하들의 학업을 권장하려는 데 있다. 내가 몸소 앞정서서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많은 문신들을 부지런히 배우도록 유도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나는 습성이 본래 이런 일을 좋아한다. 종일토록 뽑아서 기록해도 피곤한 줄을 모르겠다."  85-86
학문에 힘쓰고 태평한 정치를 이루려는 것만은 작은 완성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더욱 힘써 정진하면서도 늘 부족함을 탄식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리라."  89
임금된 자의 도량은 .. '나'라는 한 글자를 버리고, 꺼리지 않고 말하도록 문호를 넓게 열어 숨김이 없는 말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남의 결점까지 산의 숲처럼 숨겨주고, 더러운 것까지 강과 바다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가슴속에 쌓아둔 것을 남김없이 털어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마치 강에서 떼 지어 물을 마실 때 제각기 양껏 마시도록 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107
성(城)이란 옛 사람들이 갑작스런 난리에 대비하려는 목적에서 쌓은 것이다. 그러나 민심을 껴안는 것은 무형(無形)의 성이다. 3천 명이 한마음이었기에 주나라 무왕(武王)은 성을 쌓아 흥했고, 장성(長城)을 만 리나 쌓아 난을 대비했으나 진시황은 그 때문에 망했다. 명철한 제왕들이 하나같이 무형의 성을 앞세우고 유형의 성을 뒤로 돌린 진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16

4장 인재에 대하여
군주가 인재를 쓰고자 할 땐 제 아무리 작은 재간을 가졌어도 버려도 좋은 만한 사람은 없다. 흠결이 있는 큰 인물과 장점이 있는 작은 인물까지 다 거두고 끌어안아, 포용하고 양성하는 나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누군들 버리고, 누군들 쓰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가르쳐도 따르지 않고 이끌어도 따르지 않는다면, 이들이 개과천선하면 다시 기용하고 그렇지 못하면 그만이다.  128

5장 나라를 다스리는 법
이치를 따질 때에는 반드시 깊이 생각하고 힘써 탐구하여야 한다. 의심할 것이 더이상 없는 곳에서 의심을 일으키고, 의심을 일으킨 곳에서 또 다시 의심을 일으켜 더이상 의심할 것이 없는 완전한 지경에 바짝 다가서야 비로소 시원스럽게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다. 옥사(獄事)를 판결하는 일도 이와 같다. 정황이나 법조문에서 털끝만큼도 의심을 일으킬 만한 거리가 없다고 해도 의심할 것이 더이상 없는 곳에서 또 의심을 일으켜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없는 완전한 지경에 도달한 뒤에라야 비로소 판결을 내릴 수 있다. 이렇게 확대해 나간다면 잘못 처리한 사건이 드물 것이다.  166
(의심할 것이 더 이상 없는 곳에서 다시 의심을 일으키라는 구절은 정조가 사건을 처리할 때 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통치기간 25년 동안 이를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애쓴 결과가 바로 <심리록>(<홍재전서>중 권135 이하의 전국의 중죄인들에 대한 판례 모음집)에 보인다.  168

6장 신하에게 이르는 말
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사람은 기어코 큰일을 해내는 법이다. 이것이 면전에서 잘못을 따지는 사람 가운데서 절의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찾는 이유이다. 오늘날의 사대부 가운데 '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유소불위(有所不爲) 네 글자를 부적처럼 차고 다니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의지할 말한 신하가 될 것이다.  197
(유소불위(有所不爲)란 말은 본래 공자와 맹자가 한 말이다.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일을 하는 자는 사리사욕을 챙기거나 파렴치한 짓거리를 행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큰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에 따르는 명예와 지위가 주어지기 때문에 구차하게 제 몫을 챙기지 않는 금도가 있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이 같은 태도를 요구했다. "사대부는 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국사를 행할 수 있다"고도 했고, "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능히 하는 것이 있고, 하지 않으려는 것이 있어야 비로소 하려는 것이 있다" 고도 했다. 고위직을 맡은 자가 권력을 이용해 비리를 저지르는 행위를 염려하고 미워하고 금지하려는 강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198
대개 인정이란 조금만 편안하면 소홀해지기 쉽다. 옛 말에 '척박한 땅의 백성은 부지런하고 기름진 땅의 백성은 게으르다'고 했는데, 나는 '풍년든 해의 백성은 게으르다'로 말하겠다. 저 어리석은 사람들이 부지런한 것이 이롭고 게으른 것이 해롭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어떻게 권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205
세상 고금(古今)의 일들은 서로 다른 것으로 보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그 이면에는 서로 비슷한 데가 없을 수 없다. 사람의 천성과 감정이 같기 때문이고, 시대의 흐름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추세가 대충 비슷하기 때문이다.  208
남들은 다들 재주 탓을 하는데 나는 재주보다 의지가 문제라고 본다. 의지만 확고하면 재주는 뒤따라오기 마련이다. 정녕 힘껏 노력한다면 왜 옛 사람을 못 따라가겠는가? 인생을 즐기는데 빠져 학업을 폐하고, 일을 남에게 떠넘기고서 편한 것만 추구하면서 걸핏하면 재주가 없다고 핑계를 댄다.  211
봄에 만물이 처음 소생할 때에는 지극한 이치를 볼 수 있다. 꽃봉오리가 아직 맺히지 않아 빛깔과 형상이 다 갖추어지지 않았으나 생명의 의지는 그래도 그 속에 들어 있다. 우리 사람으로 치자면 감정이 아직 움직이지 않았을 때이다. 꽃잎이 비로소 열리면 홍색과 자줏빛이 나뉘어 나무마다 각각의 꽃을 피운다. 사람으로 치자면 마음이 움직인 뒤의 기상이다. 안개가 꽃을 뒤덮어 꽃이 안개 속에 있을 때 안개 밖에서 꽃을 보면 희미하여 분간할 수가 없다. 그러나 바짝 다가서서 보면 또렷하게 꽃이 보인다. 안개가 걷히고 꽃이 드러나면 꽃은 본래 그 자리에서 잔과 다름없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서 비록 세상의 때가 묻어 더럽혀졌다고 해도 본성 자체에는 회복될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멀리서 온갖 꽃들이 피고 질 때 가까이 마음에서는 고요하게 느낌이 인다. 어디를 가든 이러한 이치가 아님이 없다니, 모름지기 몸소 깨달아야 한다.  219
무릇 정치는 분발함을 앞세우고 학문은 용맹정진함을 귀하게 여긴다. 정치를 하자면 분발한 뒤에야 융성한 교화를 이룰 수 있고, 학문을 하자면 용감하게 정진한 다음에야 인재를 양성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근세 이후로는 고식적인 태도가 습관으로 굳어졌다. 정치하는 자는 모두 늘어지고 게을러져 문제가 생기면 임시방편으로 틀어막느라고 세월만 보내고, 학문하는 자는 자포자기에 안주하여 그렇저럭 시간만 보낸다. 생각의 틀이 구차하여 크고 장구한 계획이 없고, 기상이 나약하여 분발하고 추진하는 의지가 부족하다.  221
이러고서 어떻게 융성한 시대를 만들고 인재를 양성하는 효과를 바라겠는가? 
벌떡 일어나 해볼 생각은 하지 않고 홀로 궁벽한 집에서 비탄만 내뱉고 있으니 학문이 흥성하지 않는다.  222

7장 공정한 나라를 위함
정조는 늘 자신의 나라를 위기에 처한 나라라고 보았다. 개혁하지 않으면 위기에 봉착할 나라라고 분석하여 위기를 극복할 대책을 내어놓으라고 늘 신하를 채근했다.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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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자녀를 최고의 인재로 키워낸'

조선시대는 선비들의 일이 공부이다. 그 공부가 독서이다.
독서를 말함에 있어서 분명 오늘날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그 시대의 독서와 오늘날의 독서는 분명히 다르다. 
시대적으로 책이 많지않던 조선 초기와 상대적으로 많은 책이 쏟아져 나온 중기와 후기의 독서에 대한 방식이나 독서를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하지만 오늘날은 전기와 비교해도, 후기와 비교해도 분명히 틀리다.
쉽게 독서하지 못하는 환경도 있지만, 쏟아지는 책의 양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은 팔리는 책을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생각을 하는 책보다는 읽으면서 바로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실용서들이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그것들이 많이 읽힌다.
이러한 전체적인 환경 속에서 어떤 책이든 읽은 수가 많아지게 되면 자연스레 읽는 방법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독서의 확장을 하게 되는데, 우선 독서 방법등에 대한 내용들을 찾게 된다. 
그렇게 독서에 대한 방법으로서 이 책은 제시하는 조선시대 학자들의 교훈을 담아 내고 있다.
정독형도 있고, 다독형도 있다. 또한 경험형도 있고, 고민형, 사유형도 있다. 
여러가지의 유형을 가진 많은 학자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몇 가지 중의 하나는 '생각'이다.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생각이다.
읽고 생각할 것인가 많이 읽고 생각할 것인가 생각하고 읽을 것인가... 순서는 틀리더라도 생각 즉 사유의 시간이 많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우리에게 더없이 필요한 과정이 아닌가. 우리는 생각을 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야만 하는 시대에 있기에 더욱 필요성을 강하게 느껴야 한다.
독서란 눈으로 읽는 것이라 아니라 마음으로 함께 읽어내야 하며 머리로 그것들을 정리하고 해석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그 과정이 우리에게 절실함을 다시 한 번 공감하게 된다.





고려 때까지 책은 몇몇 지식인의 전유물이었다. 상류층이라도 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시대엔 책이 넘쳐났다. 호학군주인 세종과 성종 등은 책 간행을 독려했고, 학자들은 문집을 내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특히 후기에는 인쇄술의 발달과 산업의 진흥, 청나라로부터 책의 대량 수입이 이뤄지면서 문예부흥이 일어났다. 이는 독서의 양상을 바꿨다.  5 
조선 전기까지는 읽은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조선 후기에는 정독 경향이 나타난다.  6

1장 삶인가, 죽음인가
전쟁 때도 책을 놓지 마라 - 유성룡
유성룡은 마흔 살에 얻은 아들 유진에게 직접 글을 가르쳤다. 아들이 열 살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그 속에서도 틈틈이 글을 알려주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 본격적으로 지도를 했다. 그 결과 아들 유진은 스물여덟 살에 진사시험에서 장원을 했다. 
그는 아들에게 글을 주며 당부했다.
'비록 세상이 어지럽고 위태로워도 남자라면 공부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  16
'요즘 서울의 젊은이들은 빠른 성공만을 원한다. 마치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처럼 빠르게 성공하는 기술만 찾는다. 옛 성현의 글이 담긴 책들은 다락방에 처박아두고, 매일처럼 남의 비위나 맞추는 글을 찾는다. 그리고 그 말을 도둑질해 시험 감독관의 눈에 띄도록 글을 지어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독서란 생각이 중심이다. 생각하지 않는다면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데 그치는 수준밖에 안 된다. 그러면 많은 책을 읽어도 소용이 없다. 어떤 사람은 다섯 수레의 책을 입으로는 줄줄 외지만 글의 뜻과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이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18
'욕심을 내거나 인색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라. 젊어서 공부할 때 깊이 생각하고 실천을 위주로 해라.'
세상의 좋지 못한 모습에 빠지지 말고 실천을 하는, 진정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되기를 당부한 것이다.  19

3대에 걸친 독서 유언 - 김수항
김수항은 어린 손자들에게 유언을 읊었다.
가득 차 넘침은 귀신의 시기를 부르고
영예로운 이름은 재앙의 뿌리가 되노라
모름지기 '겸손할 겸' 한글 자를 주노니
새기고 새겨 여러 손자들은 경계토록 하라.  35

아버지를 살리려면 독서를 해라 - 정약용 
정약용 자신은 천재였지만 독서 만큼은 노력을 강조했다. 
'처음엔 이해하지 못해도 나중에는 알게 되고, 머리가 뛰어나지 않아도 한 번 알게 되면 쉬 소통되고, 어리석어도 꾸준히 하면 알게 된다.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된다.'  43
독서를 등한시하는 두 아들을 강하게 질타했다. 
'나는 어렸을 때 연초에 1년 동안의 공부계획을 세웠다. 가령, 어떤 책을 읽고, 어떤 글을 옮겨 적을까를 계획한 뒤 실행에 옮겼다. 때때로 예상치 않은 일로 인해 몇 개월 뒤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도 햇지만 선을 좋아하고 더 발전시키려는 의지는 변함이 없었다. 지금까지 너희에게 편지로 독서를 장려했다. 그런데 너희는 책을 읽으면서 생긴 의문이나 예악에 대한 궁금증, 역사에 대한 논란거리에 대해 단 번도 물은 적이 없다. 어째서 너희는 내 말을 허투루 듣는다는 말이냐.'  45-46
정약용은 독서하는 방법을 다섯 가지로 보았다. 다산시문집 <오학론2(五學論2)>에 실려 있다.
'널리, 넓게 배운다는 박학(博學)이다. 다음은 자세히 묻는 심문(審問)이고, 세 번째는 신중히 생각하는 신사(愼思)다. 네 번째는 명백하게 분변하는 명변(明辨)이고, 마지막으로 성실하게 실천하는 독행(篤行)이다.'  48

나라를 유지하는 힘은 책에 있노라 - 영조
'오늘의 공부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달라진다.'  50
'만 권의 책을 읽는다 해도 그 뜻을 확실히 알고 실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 토론에 익숙해도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 앵무새와 다를 바 없다... 아침저녁으로 책을 읽고 밤낮으로 글을 익혀 마땅히 진실과 거짓을 가릴 수 있어야 한다. 참된 공부는 나를 위하는 것이고, 거짓 공부는 남을 위한 것이다. 참된 공부와 거짓 공부는 나라의 일로나 개인적인 일로나 의리나 이익이나 서로 다르기에 가히 두려워해야 한다.'  51
정조의 어록인 '일득록'에는 독서 피서법이 소개돼 있다.
'더위를 이기는 데는 책읽기가 최고다. 독서를 하면 몸이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고, 마음의 중심이 선다. 그래서 외부의 기운이 들어오지 못한다.'  54

죽음을 각오한 결심으로 공부하라 - 권양
나이가 들어서도 학문에 대한 애착을 보인 그는 가훈의 학업 편에서 공부의 자세를 설명하고 있다. 공부는 순서가 있다고 했다. 먼저 인간성을 살리는 덕을 쌓는 공부를 한 뒤, 경서와 역사를 읽는 문예의 공부를 주장했다.  61
권양은 <소학>과 <가례>는 비롯 무사라 하더라도 공부하라고 했다. 인문학적인 소양을 갖춘 뒤 전문분야를 공부하라는 뜻이다.  62

붓과 벼루가 아닌 칼을 물려주는 까닭을 생각하라 - 김성일
김성일만의 이색 교육법이 있다. 김성일이 하루는 아들들에게 붓과 벼루가 아닌 칼을 주고 말했다.
'칼을 주는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라. 이는 의리의 중요성을 말한다. 의리와 개인적인 욕심의 관계를 끊어 의리를 취할 일이다. 공부를 하면서 버릴 것을 분명히 하라.'
암기하고 이해하는 공부를 넘어 인간에게 중요한 의리의 삶을 살 것을 강조한 것이다.  75
김성일은 공부에 전념하지 않으면서 결과를 바라는 것은 곡식을 키우면서 뿌리를 북돋우려 하지 않고, 잡풀을 없애려고 한다면서 호미질을 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비유했다. 
한 걸음 걸을 때는 마음이 한 걸음에 있고, 두 걸음 걸을 때는 마음이 두 걸음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공부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도 않고, 마음만 앞선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오로지 노력한 마음만 앞선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오로지 노력한 만큼의 결실이 가능하다는 교육이다.  76
내 평생에 한 마디 말을 간직했으니
내 허물을 말하는 사람이 곧 스승이요
내 아름다움을 말하는 사람은 곧 도적이라
이 열네 글자로 
항상 나를 경계하고 노력하리라.  77


2장 정독인가, 다독인가
서재가 새둥지처럼 작다고 탓하지 말라 -이만수
그는 많은 책을 보관하는 것에 대해서는 손을 내저었다. 읽을 책만 책상에 꽂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만수는 자신의 서재를 서소(書巢)라고 이름 지었다. 새의 둥지처럼 아주 작고 볼품없는 것을 뜻하는 서소는 많은 학자들이 겸손 차원에서 서재는 물론이고 호로도 사용했다.'  82
의지가 강하고 바른 생각을 한다면 쓰러지는 초가집에서도 글공부를 하고 시를 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책의 권 수가 적지만 중국의 태평성대라는 요순시대와 문왕, 무와, 공자, 주자의 말씀, 뛰어난 역사가의 판단 등, 수천 수백 년 내려온 지혜가 쌓인 책들을 갖고 있네. 이 책들을 서재에 꽂아놓고 평생토록 읽고 또 읽어도 충분할 것일세. 군자가 책을 꼭 많이 구비해야만 하는가. 많지 않아도 되네.'
삶에 지침이 되고, 도움이 되는 인생 필독서를 읽는 게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84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많은 책이 아니라 삶에 꼭 필요한 책을 보는 게 좋다는 생각을 가진 이만수는 경서나 역사서, 문집 등 각분야 대표서적 13종만을 서재에 비치했다. 지혜의 보고인 이 책들만 평생을 읽어도 된다는 신념이었다.  85

읽고 외우고 생각하고 적는다 - 기대승
임금에게 독서에 소홀함이 없을 것을 진언한 그는 책 읽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서는 옛 사람의 마음을 구하는 것이다. 반복하여 읽어 마음을 깊이 붙여야 한다. 어느 순간 마음에 얻는 바가 있으면 스스로 알게 된다. 그러니 그 뜻을 언어에만 의지하지 말라.'
읽고 읽어 자구에만 얽매이지 말고 행간을 이해하라는 뜻이다. 
부모의 가르침이라는 '과정기훈(過庭記訓)'에서 기대승은 '독서를 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한다. 또 반드시 외워야 하고 슬쩍 넘어가서는 안 된다. 읽고 생각한 뒤 글을 짓는 게 순서다. 이 중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라고 밝혔다.  88

열흘의 노력이 위대한 습관을 만든다 - 홍대용
처음 독서할 때 누구나 힘들다. 이 괴로움을 겪지 않고 편안함만 찾는다면 재주와 능력을 계발하지 못한다. 마음을 단단히 하고 인내하면 열흘 안에 반드시 좋은 소식이 있다. 이렇게 하면 힘들도 어려움은 점점 사라지고 드넓은 독서 세계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사람은 100년을 살지 못한다. 그나마 근심과 재앙, 고난이 쉬지 않고 찾아든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동안 독서할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노력하지 않고 시간만 보내면 타고난 재주와 능력을 살리지 못한다. 결국 인생 말년에 어려움을 당해도 원망할 사람조차 없게 된다.  95

책 이불과 책 병풍을 아는가 - 이덕무
스물한 살 때 쓴 <간서치전(看書痴傳)>에서 '남산 아래 산 바보는 말 재주가 없고, 성품은 게으르고 옹졸하여 세상을 알지 못했다. 바둑이나 장기 등 잡기는 더더욱 몰랐다. 남들이 욕을 해도 말하지 않았고, 칭찬해도 우쭉대지 않았다. 오직 책 보는 즐거움으로 인해 추위도 더위도 배고픔도 아픈 줄도 아주 몰랐다.'
그의 독서 열망은 그의 서재인 구서재(九書齋)에서도 엿보인다. 구서는 책을 읽는 독서(讀書), 책을 보는 간서(看書), 책을 간직하는 장서(藏書), 책의 내용을 뽑아 옮겨 쓰는 초서(抄書), 책을 바로잡는 교서(校書) 책을 비평하는 평서(評書), 책을 쓰는 저서(著書), 책을 빌리는 차서(借書), 책을 햇볕에 쬐고 바람을 쏘이는 폭서(曝書)를 말한다.
이는 단순히 책만 읽는 게 아니라 책에 관련되 모든 것을 이루어 내겠다는 큰 포부다.  98 


1억 1만 3천 번을 읽어 내려가다 - 김득신
재주가 다른 이에게 미치지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 짓지 말라. 
나처럼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지만 나는 결국에는 이루었다. 
모든 것은 힘쓰고 노력하는 데 달려 있다.  109

책이 있는 곳이 지상낙원이다 - 허균
허균의 독서는 3단계로 진행됐다 먼저 책을 읽고, 그 중에서 좋은 문장을 메모했다. 다음에 메모된 것을 내용별로 분류해 책을 만들었다. 이렇게 엮어진 게 생활교양서인 <한정록>이다.  114

나는 책벌레가 되련다 - 장유
<계곡만필(谿谷漫筆)>에서 그는 '진나라의 저술가인 황보민은 나이가 스물이 되도록 공부에 관심이 없다가 뒤늦게 글을 시작해 여러 학문에 두루 능통하여 현안선생으로 불리었다. 당나라 문장가인 진자앙은 부유한 집의 아들이지만 십칠팔 세때까지 글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뜻을 세워 열심히 공부한 끝에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당송팔대가로 추앙받는 소순은 성인이 되어서도 글을 알지 못했다. 그는 스물일곱 살부터 책을 보기 시작했고, 5-6년 뒤 명성을 얻었다.
이로써 보면 공부는 얼마나 집중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지, 일찍 시작하고 늦게 시작하는 것은 논할 성격의 것이 아니다.'  130
'나는 어려서 마음이 넓지 못하고 생각도 작았다. 별 재주가 없던 나는 오직 책읽기와 글쓰기에 전념하였다. 만약에 독서와 글짓기에 진력을 다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를 수양해야 남의 물질을 기다리지 않는다. 자립한 뒤에야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절조가 있어야 남을 따르지 않는다. 불의를 부끄럽게 여겨야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다. 어질지 못함을 미워해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정리하면 의로움과 이익됨을 구분하는 삶을 말한다.'  135


3장 환경인가, 요령인가
공부 분위기는 스스로 만든다 - 이덕형
'말과 행동이 배울  게 있어야 하고 분명해야 한다.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해라. 어느 순간에나 배움을 게을리하지 말고 쉴 때도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 책을 오래 읽지만 금세 잊는 경우는 뜻을 자세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귀로 듣기만 한 결과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으면 선입견에 집착하지 말고 반드시 새로운 뜻을 알 때까지 읽고 또 읽어야 한다. 깊은 생각은 밤중에 하는 것이 좋고 아무리 바른 자세로 앉아 그 뜻을 익혔더라도 열심히 외우지 않으면 다시 잊어버리게 된다.'  162

공부 장소로는 어디가 좋은가 - 이황
그가 자주하던 공부를 장려하는 말이 '하처 불가독 하시 불가학(何處 不可讀 何時 不可學)'이다. 언제 어디서나 책 읽기를 멈추지 말고, 항상 공부하고 배우라는 뜻이다.  167
'책을 읽고 공부하는 데 장소를 따질 필요가 있겠는가. 서울에서 공부하든 시골에서 책을 읽든 성패는 오직 뜻을 세우는 것에 달려 있다. 최선을 다해 매일 공부해야 한다. 하는 일 없이 시간만 보내서는 안 된다.'  168
제자인 김성일에게는 독서 방법을 제시했다.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글을 읽고 또 읽어 음미하라고 했다. 그래야 잊지 않고 마음에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충 읽고 말하면 깊이가 없고, 비록 천편의 글을 읽고 말한다 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낮에 읽은 것을 밤에 깊이 고민하고 풀어보는 게 공부하는 방법임을 말했다.
퇴계선생 언행록에는 공부법으로 숙독이 나온다. 
'책은 숙독을 해야 한다. 책을 읽으면서 글의 뜻을 알았다 해도 깊이 이해하지 못하면 읽자마자 잊어버리게 된다. 또 마음에 깊이 간직할 수 없다. 반드시 배운 것을 거듭 복습하고 깊이 익히는 공부를 해야 비로소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다. 더불어 글의 맛과 성현의 말씀을 충분하게 음미할 수 있다. 낮에 읽은 것은 반드시 밤에 다시 읽으면서 사색하고 풀어보아야 한다.'  169

독서는 보수적으로 하라 - 안정복
<순암집>에서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 '그대는 독서에서 자기 생각을 주장하여 굳이 글 뜻을 깊고 높게만 해석하려고 하였네. 이런 습관 때문에 한 권의 책을 읽고 하나의 이치를 생각할 때도, 먼저 그대의 견해를 주장하고 글 뜻을 거기에 맞추려고 하였네. 이는 주변의 상황을 폭넓게, 깊게 공부하는 것에 눈감은 것일세. 이 같은 좋지 않은 독서 습관을 버리게나. 이런 행동이 오래되면 겸허한 마음으로 다른 이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큰 공부를 하기 어렵네.'
다른 편지에서 고전의 글을 인용하여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것을 질타한다.
'책을 읽을 때는 왜 그럴까라는 생각이 필요하네. 이 생각이 있어야 공부가 제대로 되네. 주자는 책을 읽으면서 배경을 생각하면 크게 발전한다. 처음엔 단순하게 읽다가, 다음에는 점차 생각이 깊어지고, 갈수록 구절구절 원리 탐구를 하고 싶어진다. 이런 과정을 한 차례 거친 뒤에는 깨닫게 되고 이해를 하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공부 라고 하셨소. 이것이야말로 독서에 대한 현명한 정의라고 생각하오. 큰 학자들의 말씀이 모두 분명하고 쉬우니, 너무 빠져 들어 색다른 뜻을 찾다가 스스로 혼란스러워 하지 마오. 퇴계 선생은 독서 때 별다른 뜻을 깊이 찾을 필요가 없고, 본문에서 현재 있는 뜻을 찾아야 한다고 하셨소. 이 말이 아주 쉽고 적당한 표현인 듯하오. 잘 생각해 보시오.
글에는 두 가지 뜻이 있을 수 있는데, 어떤 이는 자기 입장에 맞는 것을 취하오. 그대가 옛 글에서 생각이 다른 게 있으면, 그 다른 곳의 입장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지 헤아려보시게. 그러면 좋은 답이 나올 것일세. 선입견에 묻혀 큰 학자의 학설을 그대의 생각에 짜 맞추는 것은 옳지 않소. 그렇게 하려면 그대의 생각대로 글을 쓰면 되지, 왜 큰 학자가 쓴 책을 읽는 것이오.'  189-190

질문이 모든 공부의 기초다 - 허목
'독서에서 가장 크게 걱정할 일은 단계와 순서를 뛰어넘어 빨리 이루려는 마음이다. 이는 개인적인 욕심이 독서의 본뜻을 가리기에 진정한 이해에 다다를 수 없다. 개읹거인 욕심을 앞세우고 독서의 목표를 달성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욕심으로 마음이 집중되지 않고 산란할 때 경이로운 마음이 아니면 무엇으로 마음을 안정시키겠는가. 경이로움은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다. 하나에 집중하면 근심과 걱정이 저절로 사라진다. 
책을 보는 이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이런 이치를 구한 다음에 앎과 실천이 함께 나아가야 된다. 사람의 길인 독서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과 우주의 비밀을 탐구하는 것은 근본이 서지 않은 것이다. 이때는 기본이 탄탄하지 않기에 갑자기 얻었다가 갑자기 잃게 된다. 바람직하지 앟은 것들만 넘쳐 흘러 아무 이익이 없다. 또 단계나 순서를 뛰어넘어 높은 데를 엿보아서는 안 된다. 샘이 졸졸 흐르고 불이 서서히 타오르는 게 자연의 이치이듯 공부도 마찬가지다.'  204
허목은 또 다른 글에서는 '의문이 나면 반드시 묻는 것은 옛 사람의 공부 자세다. 앎에 이르기 전에 성실함이 필요하고, 안 뒤에는 더 성실해야 일이 이루어진다.'라고 말했다.
'요즘 사람은 실천이 아니라 의견부터 내세운다. 게다가 지나치게 과격하고 가볍다. 이에 비해 옛사람들은 작은 것이라도 실제 보는 것이 있으면, 그대로 실천해 아는것과 행동에 차이가 거의 없다'라고 했다. 즉 차분한 독서를 하여 아는 것을 행도에 옮길 것을 말한 것이다.  205

독서는 다만 책 속에 있지 않다 - 홍길주
평소 사색을 많이 한 그는 책에 대해 독특한 관점을 보인다. 책을 사유의 수단으로 보았다. 책 읽기를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문장은 다만 독서에 있지 않고, 독서는 다만 책 속에 있지 않다. 산과 내, 구름, 새, 짐승, 풀, 나무 등의 세상 만물과 일상의 세세함 속에 독서가 있다.'라고 말했다.
독서는 고작 글을 읽는 것만이 아닌 세상 모든 만물을 살펴보고 이해하는 경험임을 밝히고 있다. 수많은 사유를 통한 직관과 통찰력이 좋은 독서라는 주장이다.  219
'책 한 권은 대략 70~80면 쯤 된다. 역기에서 핵심을 뽑아내면 10여 면에 불과하다. 어떠 ㄴ이는 책을 처음부터 다 읽지만, 그 핵심은 알지 못한다. 오직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대충 읽는 듯해도 핵심이 되는 곳에 눈길을 고정한다. 그래서 단지 10여 면만 보아도, 전부 읽은 사람보다 보람이 두 배나 된다. 이런 까닭에 남들이 두 세권 읽을 적에 나는 이미 백 권을 읽을 수 있다. 또 아는 것도 남보다 두 배는 된다.'  220


4장 수행인가, 실용인가
독서는 수행이다 - 송시열
그는 참다운 독서는 '궁리'라고 생각했다.  229
<송자대전<宋子大全)>에서 '책을 읽는 데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생기는 것은 참으로 좋은 소식일세. 무릇 글을 읽는 데 처음에는 의구심이 나는 줄 모르다가 읽을 수록 고개가 더욱 갸우뚱거려지네. 또 아주 많이 읽으면 의구심이 점차 풀려 아예 없어진다네. 이제 비로소 참다운 독서가 되네.'  230

먼저 뜻을 세워라 - 이이
'책을 읽을 때는 몸을 가지런히 하고 맘을 정갈하게 한다. 본 내용을 완전히 익힌 뒤 다름 책을 본다. 많이 읽는 것과 외우는 것에 연연하지 말라. 또 책을 고를 때는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저급류는 삼가라. 공부를 하면서 틈틈이 거문고를 타고 활을 쏘는 것도 좋다. 그러나 도박 등에 빠져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234
이이는 처음 공부하는 사람이 큰 뜻을 세우지 않고, 굳건한 의지없이 배우겠다고만 하면 자칫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뿐 스승이나 제자에게 모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공부에는 목표가 중요함을 말한 것이다.
그는 책을 읽은 뒤에는 토론을 통해 본뜻을 찾으라고 했다.  235
이이는 공부를 위해 버려야 할 낡은 습관으로 여덟 가지를 들었다. <격몽요결>(어리석음을 없애는 비결이라는 의미)의 '혁구습(革舊習)'이 그것이다.
'첫째, 게으르고 편안함만 추구하고 의지가 강하지 못해 자기절제를 하지 못하는 악습이다.
둘째, 조용하게 앉아있지 못하고 밖으로 분주히 드나들고 쓸데없이 이야기로 시간을 허비하는 행동이다. 
셋째, 유행에 민감한 부류의 친구들과 어울리고, 가끔 공부 결심을 해도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할까 두려워 금세 포기하는 습관이다.
넷째, 책읽는 것을 과시하고, 멋진 말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허세만 하는 버릇이다.
다섯째, 겉멋에 연연하는 글씨와 편지 쓰기에 신경 쓰고, 음악과 술에 빠지는 생활 습관이다.
여섯째, 바둑이나 장기 등 잡기에 빠지고, 먹고, 논쟁만 일삼는 버릇이다.
일곱째,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은 것을 부러워하고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생각이다.
여덟째, 욕심을 절제하지 못하고 돈과 노래와 이성친구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다.'  237

공부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 강종열
글을 보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깨우쳐야 제대로 읽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는 겉으로의 모습, 즉 지식이 느는 것이요, 또 하나는 마음의 모습,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강종열은 이를 음식에 비유 했다.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 맛을 알지 못하면 밥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책을 볼 때 희롱하는 말을 삼가도록 했다. 희롱하는 말은 문자의 겉모습, 아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이는 삶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248

역사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 - 임징하
'독서는 출세를 위한 공부가 아니다. 다만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함을 말한다. 역사책을 잘 읽어보면 옛날 일을 통해 오늘을 사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257

책을 빨리 쓰려는 마음을 경계하라 - 홍만종
그의 공부에 대한 열정은 스스로 마음을 정갈히 하는 '자경문(自警文)'에 잘 나타나 있다.
'나에게는 세 가지 습관이 있다. 재주가 별로 없지만 책보기를 좋아하는 게 첫째요, 글씨는 내세울 게 없지만 다른 이의 좋은 서체를 연구하는 게 둘째요, 몸이 건강하지 않지만 산과 물 등 자연을 좋아함이 셋째다.'
홍만종은 산책을 통해 건강을 지키면서 책을 열심히 보고, 유면인의 글에 대해 깊이 공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빨리 쓰려는 마음을 경계하라.' 하며 자신과 후손에게 공부를 많이 한 뒤 내용이 깊은 책을 쓸 것을 당부하고 있다.  274

삶에 도움이 안 되는 책읽기는 필요없다 - 정제두
'책을 읽어 반드시 지식을 구하되 꼭 그 내용을 간략하고 자세하게 익혀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게 해야 한다. 필요도 없는 것을 넘치도록 읽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책에서 교훈을 얻으면 죽을 때까지 이로움이 많겠으나 다만 많이 읽는다고만 해서 과연 무엇이 이롭겠는가.'  276
정제두가 후학에게 남긴 말 중의 하나가 '의연후취(義然後取)'다. 욕을 버리고 의롭고 정당하다는 것을 안 후에 취하라는 것이다. 
그는 <하곡집(霞谷集)>등에 아들과 제자들에게 받들 말을 많이 남겼다. '먼저, 학문하는 이는 행동 습관을 사치와 방자함에서 멀어지게 하라. 또 교육과 훈계는 진실을 바탕으로 할 것이지,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마음에 있으니, 마음 밖에서 구할 게 아니다. 마음에서 큰 뜻을 찾아야 한다. 아는 것과 행동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  277

공부를 했으면 정치에 적용하라 - 이수광
공부 방법에 대해서는 스승이나 친구의 도움을 받지만 궁극적으로 스스로 하는 것이기에 남의 힘을 빌리는 것에는 손을 내저었다. 또 공부는 잠깐 하는 게 아니기에 지속하는 힘이 필요하고, 이리저리 재고한느 게 아니라 절대 믿음을 갖고, 적극적으로 하는 것임을 설명했다. 그렇기에 공부는 배를 부수고, 가마를 깨는 용기가 있어야 이룰 수 이쓴 것으로 파악했다. 공부는 쉽게 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용기가 있어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봉유설>의 초학에서 '매일 하루에 읽을 독서량을 정하고 실천을 꾸준히 하면 스스로 얻는 게 있다.'라고 했다. 계획 독서와 실천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이수광은 독서 때는 세 가지가 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설명했다. 첫째는 마음이고, 둘째는 눈이고, 셋째는 입이다.  282


5장 우연인가, 필연인가
인간의 완성된 업적은 책 쓰기다 - 최한기
그의 독서관은 단연 경험론이다. 눈, 귀, 입, 손 등 몸으로 느낀 것에 생각을 얹는 과정을 추측(推測)으로 표현했다. 또 추측하는 힘이 있어야 독서에 요령이 있어 효과적이라고 했다. 읽은 내용을 잘 이해하고 핵심에 곧바로 도달할 수 있으려면 요령이 필요한데. 그것이 경험으 바탕으로 한 추측이라는 의미다.  327

행복의 3대 조건을 아는가 - 이하진
'좋아하는 사람을 알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행복이다.'
'처음 보는 책을 읽을 때는 좋은 친구를 얻은 것처럼 생각하고 책을 읽은 후엔 옛 친구를 만난 것같이 기뻐하라.'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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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아버지가 뒤주에 갇히던 날, 열한 살의 어린 세손(世孫)은 할아버지에게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빌었으나 냉혹한 정치 현실 속에서 어린 손자의 애원은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정조 앞에는 두 길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복수의 길이고, 또 하나는 자신도 죽고마는 햄릿의 운명.
종조는 그런 과거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고통 스런 과거를 가슴에 묻고 또 다른 길, 미래로 나아갔다.

손 시절 그는 시강원의 스승인 빈객에게 준 글에서 "나는 천하만사가 모두 나의 '나( : 게으름)' 자로부터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그렇게 그는 단 한순간의 나태도 용납하지 않으며 자신을 다그쳤다. 그는 그렇게 정심(正心)을 추구했다.
<대학(大學)>의 정심(正心)은 마음에 노(怒)함이 있으면 얻을 수 없는 수양 단계이기 때무넹, 그는 매일같이 정심을 되뇌는 것으로 분노와 증오를 다스려야 했다. 그 과정이 그를 철인(哲人)으로 만들었다.


밤늦게 책을 보는 버릇은 세손 때부터 생긴 것이었다. 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살기 위한 생존 본능 때문이었다. 98

이덕무 - 간서치(看書痴 : 책만 보는 바보)라고 부르자 스스로 <간서치전(看書痴轉)>을 지었다.
" ... 남들이 욕해도 변명하지 않고, 칭찬해도 자긍하지 않고 오직 책 보는 것만 즐거움으로 삼아 추위나 더위나 배고픔을 전연 알지 못하였다. ..."  162

수신하려면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려면 먼저 그 뜻을 성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  206


wn1 - 1권은 정조의 특징적인 사건들을 말하는데,
개인적으로 초반에는 빠져드는 느낌이 들어서 재밌게 읽었다. 중반을 넘어가면서는 정치적인 이야기와 물고 물리는 관계들이 묘사되면서 사실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결론을 말하면 2권의 초반을 지나면서 다시금 정조의 업적들이 나오면서 빠져서 읽었다.

정조는 왕이 었지만, 사람으로 보았을때 참 불쌍한 사람이다.
누구나 개인의 복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는 개인적인 삶에서 복을 받은 것이 없다고 느껴질 만큼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의 의지는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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