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사람들이 역사를 궁금해하는 까닭은 현재를 더 잘 알고 싶어서다. 과거를 살펴 현재와 비교하고 현재를 추적하는 것은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려는 노력이다. .. 역사를 공부하는 궁극적 목적은 결국 미래를 바꾸려면 현재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려는 데 있다.  9
구체적 조건에 조응하거나 반발하는 인간의 의식적 활동을 배제하는 역사 서술은 사실상 역사를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역사 서술은 읽지 않아도 내용을 알 수 있다. 그런 역사 서술에는 그저 변치 않는 인간 본성과 유전자적 본능만이 있을 뿐이고, 역사의 구체적 맥락들이 변화를 설명하는 데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10
오늘의 세계에 강한 불만을 느끼는 이들은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11
미국과 소련의 경재잉 세계를 각자의 세력권으로 분할하는 과정(위로부터 부과된 조건)에서 치러진 전쟁을 거치며 수백만 명이 죽었다. 한반도의 남과 북에 서로 증오하며 적대하는 체제가 수립됐다. 전쟁 없이 분단된 독일과 달리, 한반도에서는 냉전 질서가 끝났는데도 분단 체제가 유지되는 배경이다.
국토의 90%가 전쟁의 화염 속에 들어가면서 전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망도 함께 파괴됐다. 한국 자본주의가 낡은 속박에 얽매이지 않고 발전할 토대를 전쟁 통에 마련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전에만 해도 통치 정당성이 결핍돼 태어나자마자 위기에 빠진 신생국가 대한민국은 전쟁 수행을 위해 또는 그것을 명분으로 자원과인력과 통치권을 집중시키는 과정에서 영토와 국민에 대한 진정한주권(통치 권력을 확립했다. 좌파와 노동운동은 궤멸됐다.
그렇게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한 대한민국은 노동계급의 자주적 활동에 적대적인 권위주의 국가로 성장했다. 한·미·일 삼각무역과 장시간·저임금 노동을 기초로 해서 시장경제적이고 수출지향적인 국가자본주의 노선을 걸은 한국은 마침내 경제 발전자립)을 이뤘다.
한국 지배자들은 냉전이 끝난 뒤에도 세계적 패권 국가인 미국중심의 질서 안에서 번영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다고 봤다.사실 중국조차도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 중심의 세계화 질서에편입해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그러나 역동적인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변화·발전이 이런 국가간 관계들도 비틀고 있다. 세계적 세력균형의 변화는 한국의 정치와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13-14
돌아보며느 역대 한국 정부는 거의 모두 역사를 정치에 활용했다. 역사 해석을 독저하려 한 권위주의 정권들은 물론이고, 민주화 이후의 정부들도 역사 재평가를 지지율을 만회하고 정적을 공격하고 자신을 방어할 우회로로 삼았다.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독립운동 · 민주화운동 재평가 시도와 과거사 진상 규명, 이명박 정부의 건국절 제정 논란과 금성 역사교과서 탄압,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기원설 설파 등.
민주당 정부들이 정부 차원의 행사와 지원을 통해 형성해 온 서사는 민주주의자들이 민주공화국을 설계하고 이끌어 경제 번영에 성공한 스토리다. 이 서사에서 한국 국가의 뿌리는 1948년이 아니라 1919년이다. 친민주당 진영은 3·1운동을 혁명이라고 부른다. 부르주아(자본주의적) 혁명이었던 프랑스대혁명이 연상된다. 이것은 3·1운동의 여러 산물 중 하나인 상해임시정부를 대한민국 국가의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시도다. 민주당 계보의 위인들이 서구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서사의 주인공처럼 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다.
우파에 대한 반감은 큰데 제대로 된 대안적 해석이 없으므로, 친민주당적 역사 해석은 진보 진영에서도 많이 차용된다. 그러나 친민주당 진영은 역사적으로 봐도 반제국주의적 민중봉기인 3.1운동의 정통을 계승하는 세력이 전혀 아니다.  15-16


2장 한국전쟁, 제국주의 경쟁이 낳은 비극

미국은 단지 북한을 상대하기 위해 북한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특히 중국)과의 경쟁에서 자신의 우위를 지키는 것이 주된 고려 사항이다. 즉,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남북 관계나 북미 관계에 한정해서 바라보면 안 되고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경쟁이라는 더 큰 틀에서 바라봐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도 남북 사이의 충돌이라는 좁은 시야가 아니라 더 큰 맥락에서 봐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제국주의 경쟁의 주된 대립 구도였던 미국과 소련 사이의 경쟁 말이다.  73

미국은 한국전쟁 동안 무자비한 폭격을 가했다. 그 결과 북한 지역은 “달 표면처럼” 변했다고 할만큼 파괴됐고 대량 학살이라 불릴 일이 벌어졌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태평양전쟁 구역 전체에 투하된 폭탄의 총량이 50만 3000톤 이상의 네이팜탄(광범위한 지역을 불태울 목적으로 사용된다. 네이팜탄에 들어간 물질은 인체나 목재에 닿으면 떨어지지 앟고 계속해서 불탄다)이 더해져야 한다. ..
예컨대 1950년 11월 8일 B-29 폭격기 70대가 신의주에 네이팜탄 550톤을 투하했다. 도시가 지도에서 지워졌다고 표현할 만큼 잿더미가 됐다. 550톤으로 한 도시를 지도에서 지워버릴 정도였다면 3만 2000톤이면 얼마나 파괴적이었을까? ..
북한의 주요 도시 22곳 중 18곳은 최소한 50% 파괴됐다. 1953년 5월에는 식량 생산에 타격을 가하고 기아를 유발하기 위해서 댐. 여러 개가 파괴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74-75

미국은 한국전쟁을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주장해 왔다. 한국의 지뱆들도 마찬가지다.  76

한국전쟁 연구자 브루스 커밍스가 잘 지적했듯이, 누구도 미국 내전에서 남부군이 섬터 요새에 먼저 총을 쐈다는 사실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체로는 그 전쟁이 노예제도와 인종차별 정책을 둘러싼 전쟁이었다는 점에 관심을 둔다. ..
‘누가 먽저 총을 쏘았는가’에 초점을 맞추면 전쟁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취할 수 없다. ..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전쟁 발발 이전에 형성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쟁, 제국주의 국가가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상황, 노동계급 운도엥 대한 공격 등 정치적 맥락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76-77

한국전쟁도 제대로 이해하려면 미국과 소련 두 제국주의 사이의 경쟁이라는 맥락을 봐야한다. ..
소련은 제2차세계대전을 거치며 중부, 동부 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해서 유라시아 대륙의 최강대국으로 부상했다.(2차세계대전 종전 후 소련은 폴란드, 불가링, 체코스로바키아, 루마니아, 헝가리, 동독을 위성국가로 삼으며 세력권을 확장했다) 미국은 소련의 세력 확장을 자신이 관리하는 국제 질서에 대한 주된 위협으로 여겼다. 미국과 소련 두 제국주의의 경쟁은 점점 가열돼, 1947년 3월 트루먼트린의 발표로, 이미 형성되고 있던 냉전이 공식화했다. 미국은 소련 세력권과 접한 서유럽과 일본이 무너지면 소련이 정치적 팽창의 기회를 얻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서유럽에서는 마셜플랜(유럽부흥계획)을, 일본에서는 '역코스' 정책을 추진했다.
미국이 일본에서 시행한 코스 정책은 패전 전 일본의 지배계급과 국가 관료들의 권력을 유지케 하는 정책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의 미군정은 전범을 처벌하고 전쟁을 후원했던 독과점 기업들을 해체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뒤집는다는 의미에서 '역코스인 것이다. 그 일환으로 전범인 일왕도 처벌받지 않았다. 소련도 동유럽 나라들을 위성국으로 삼으며 세력권을 구축해 나갔다.
제국주의 경쟁이 두 진영으로 예리하게 나뉘어 다투는 냉전이라는 형태로 바뀌면서 어떤 면에서는 경쟁이 더 격렬했다. 날카로운 이데올로기 경쟁도 수반했기 때문이다.
냉전에서 각 진영을 대표한 미국과 소련은 각자의 점령지역에서 자신의 이익에 복무하며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탑재한 체제를 만들려고 애썼다. 한반도의 남과 북 국가는 그렇게 탄생했다. 남과 북의 충돌은 이런 세계적 쟁투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미국과 소련은 유럽 등지에서 각자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충돌했고, 특히 독일 '베를린 봉쇄'라고 불린 충돌에서는 핵무기의 동원도 심각하게 고려됐다. 이런 경쟁적 쟁투들이 실제 열전으로 벌어진 것이 바로 한국전쟁이다.  78-79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미국이 한반도의 남쪽을 점령해서 친일 지주 세력을 지지하고 그에 반대하는 세력을 탄압하면서 많은 충돌과 학살이 벌어졌고, 그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모순이 증폭했다.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는 진정한 독립과 해방을 원하는 아래로부터의 열망이 분출했다. 노동자들의 공장자주관리운동이나 각 지역 인민위원회들의 등장이 그 사례다. 미군정은 이런 대중운동과 조직을 파괴하려고 온 힘을 기울였다.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항쟁에 대한 폭력적 진압이 대표적 사례다. 1948년 2월부터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10만 명 이상이 학살됐다. 제주4.3 항쟁에 대한 잔인한 진압이 이 기간에 벌어진 일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등장한 남쪽 정부는 진정한 해방과 독립을 원하는 대중의 열망에 적대적이었을 뿐아닐 소련이 점령해 북쪽에 수립한 정부에도 적대적이었다.
커밍스는 북쪽에서는 남쪽과 달리 항일 세력이 권력을 잡앗고 토지개혁도 이뤘다고 봤다. 그리고 남쪽에서 벌어진 지주와 농민, 친일 세력과 항일 세력의 대립과 투쟁(커밍스는 이를 “작은 전쟁”이라고 불렀다)이 남북 사이의 전쟁(“큰 전쟁”)으로 확대됐다고 봤다. 그래서 한국전쟁은 내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미국이 개입하면서 전쟁을 더욱 끔찍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커밍스의 주장은 명백히 장점이 있다. 한국전쟁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 낸 정의로운 전쟁이었다는 미국과 남한 지배자들의 주장에 대한 분명한 반박이기 때문이다.  81-82

커밍스는 김일성이 소련의 계획하에 북한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스탈린과 면담한 후에 북한에 들어왔고 소련군의 적극적 협력을 받으면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1945년 10월 이승만이 미군정 사령관 하지가 옆에 앉아 있는 가운데 남한 대중에게 소개된 것처럼 김일성은 소련 관려들이 뒤에 서 있는 가운데 북한 대중에게 항일 영웅으로 소개됐다. 이렇게 소련군의 후원 속에 수립된 북한 정부는 대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데서 남한과 다를 바가 없었다.  82-83

소련은 돼 김일성을 잡고 있던 목줄을 먼저 놓았을까? ..
스탈린의 전후 아시아 전략에서 중국과 관련된 것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몽골을 중국으로부터 분맇해 소련의 안전을 보장하는 완충지대로 삼는 것이었다. 다른 ㅎ나는 태평양으로의 진출 거점과 부동항(바다가 얼지 않는 항구) 확보를 위해 중국 동북 지역에 대한 옛 러시아 제국의 권익을 모두 회복하는 것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중국 동북 지역의 이권을 포기해야 했다. 스탈린은 옛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고 싶어 했다. 스탈린은 태평양전쟁에 참전하면서 1945년 8월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와 ‘중소 우호 동맹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소련은 국공내전에 개입하지 않고 중국 국민당과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그대가로 소련은 다롄항에서 소련의 우월적 이권을 보장받았고, 뤼순 해군기지 조차권을 회복했으며, 만주 철도. 공동 경영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의 의사와 달리 중국혁명이 성공하면서, 소련은 마오쩌둥이 집권한 중국과 새로 조약을 맺어야 했다(‘중소 우호 동맹 상호 원조 조약’). 이 새 조약에 따라 소련은 태평양으로 진출할 연결로인 만주의 창춘철도와 부동항인 뤼순항과 다롄항을 중국에 조기 반환하기로 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에 긴장이 조성되면 중국은 소련 군대가 뤼순과 다롄에 계속 주둔하기를 요철할 것이고, 새 조약에는 “전쟁 혹은 위기 국면이 발생하면, 소련 군대는 창춘철도를 사용할 수 있다”고 돼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중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유지할 방법이기도 했다.  84-85

반면, 마오쩌둥은 중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최대한 차단하면서도 소련에게 될수록 많은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얻어 내고 싶어 했다. 중국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복구하고 대만을 정복하기 위해 소련의 공군 지원을 상당히 중시했다. 그러면 미국과는 적대 관계(직접 충돌을 포함해)가 되겠지만, 당시 중국의 처지에서는 냉전이 본격화하는 와중에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불가피해 보였다.  86

김일성과 이승만은 세계적 차원의 제국주의 경쟁이라는 큰 장기판에서 하나의 말에 지나지 않았다.  86

한국전쟁의 전개 과정을 간략히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전쟁 초기(1950년 6월 말에서 7월)에는 북한군이 밀고 내려와 8월에는 낙동강 부근에서 참호전 양상을 보였다.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며 미군이 압록강 부근까지 밀고 올라갔지만 10월 25일 중국군의 참전으로 다시 전선이 내려와 38선 부근에서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 상태가 2년을 더 지속하다가 1953년 7월 정전에 이르렀다.  87

미국 공군의 제공권 장악으로 북한군의 전진이 상당히 더뎌졌다. 개전한 지 두 달도 안 지난 시점인 8월 15일 이전에 북한군 내부에서는 병사들의 도주와 명령없는 퇴각이 벌어지고 있었다. 9월 1일이 되면, 미군이 주도한 유엔군의 규모가 북한군 병력(9만 8000명)의 두 배에 이르게 됐다. 그러니까, 인천 상륙 작전 이전에 이미 전세는 어느 정도 뒤집혀 있던 것이다.  87

미군은 흰 옷을 입은 민간인 무리를 겨냥해 무차별적 기총소사를 가하곤 했다. 노근리 학살 등 민간인 학살이 그 과정에서 벌어졌다. 민간인 학살이 보편적 현상이었다고 할 정도로 미군은 민간인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했다.  88

중국은 미국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면 산업 중심지의 하나이고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한 중국 동북 지역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중국군은 10월 25일 미군과 첫 교전을 벌였고 11월 1일에는 중국군으로 위장한 소련 공군이 처음으로 압록강 상공 교전에 참가했다. 이때부터 한국전쟁의 주된 양상은 미국군(과 유엔군) 대 중국군(과 소련군)의 대결이었다.
소련군 참전이 아주 작은 규모였던 것은 아니다. 1950년 11월 1일부터 1951년 12월 6일까지 소련군은 전투기와 대공포로 미군 비행기 569대를 파괴했다. 1951년 10월 한 달간미국 공군은 소련군 미그-15 전투기의 출현을 2573회 목격했고 소련 준투기와 2166회 교전했다. 소련군의 공격으로 미국 공군의 주력 폭격기 B-29 5대가 상실되고 8대가 손상돼, 미군은 소련군의 공격을 피해 야간 공습을 벌여야 했다. ..
양쪽 모두 적을 완전히 제압해 한반도를 통일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전쟁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서로 조금일도 우월한 입장에서 전쟁을 끝내길 바랐기 때문에 전쟁은 지속됐다.  88-89

한국 전쟁의 결과 한반도 인구의 10분의 1이 희생됐고 1000만 명이 가족과 헤어졌고 500만 명이 난민이 됐다.  89-90

해방 직후 강력했던 좌파와 노동자 운동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붕괴됐다.  92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은 미군들이 피난을 시켜 준다며 충청북도 영동읍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들을 부산 방면으로 끌고 가다가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4일간 노근리 철로변과 굴다리에서 무참하게 살해한 사건이다.
7월 25일 해질 무렵, 한 패의 미군이 들이닥쳐 “대구, 부산 방면으로 피난을 시켜주겠다“면서 마을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집합시켰다. 남아 있으려는 사람들까지 강제로 모이게 했다. 약 500명이 미군의 인솔로 국도를 걸어서 남쪽으로 향했다 남쪽으로 향하던 피난민은 26일 정오경 미군의 명령을 받고 영동읍 노근리 도로변의 경부선 철로로 올라갔다. 미군은 피난민의 몸과 짐을 검사한 다음 그들이 무장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도 미군 비행기를 무전으로 불러 기총소사를 해댔다. 이것이 1차 학살이다. 살아남은 피난민이 경부선 철로 밑과 터널 밑으로 들어가자 2차, 3차 학살이 벌어졌다. ..
충북 영춘 곡계골, 경남 마산 곡안리, 경남 사천 조장리, 황해남도 신천리 등지에서도 미군의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98

북한 징역의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북한이 제시한 자료를 보면, 북한군이 유연군에 밀려 퇴각하던 1950년 10월 17일, 신천 지역을 점령한 미군은 50여 일간 신천군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 5383명을 학살했다. 황해남도 은률군에서 1만 3000여 명, 평안북도 정주군 창도에서 580명의 섬 주민 모두를 학살했다. 평양에서 1만 5000명, 황해남도 안악군에서 1만 9072명 등 미군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99

1945년 9월 미군이 처음 한반도 땅에 발을 디딘 그 순간부터 한국 노동자, 민중을 위해 한 좋은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국은 계속 독재 정권들을 후원했고, 남한 노동자, 민중은 그 밑에서 쥐어짜이고 짓눌려 살아야 했다. 분단 고착화에 항의한 제주 4.3항쟁은 미국의 후원하에 야만적으로 진압됐다. 미국은 1980년 광주항쟁을 진압하러 가는 한국군 이동을 승인했고, 부산에 항공모함을 배치해 학살을 엄호했다. 주한미군이 상시 주둔하면서 주한미군 범죄도 심각했다…
이처럼 한미동맹은 미국 제국주의와 한구구 자본주의, 그리고 이 체제에서 혜택을 얻는 미국과 한국의 권력자들을 위해 필요했고, 지금도 그렇다.  10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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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의 길을 막는 사마귀 - 베트남 인민과 함께 우는 언론인

리영희 : 소위 베트남전쟁이라는 것은, 그 원인과 역사적인 배경이 굉장히 복잡하비다. 한국인들이 그 전모를 이해하기란 참 어려워요. .. 불란서와 베트남 인민의 전쟁이었던 1946년부터 54년까지의 ‘제1차 베트남전쟁;이 종결되면서 제네바 휴전협정이 체결돼요. 그 뒤에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해서 확대된 전쟁이 말하자면 ’제2차 베트남전쟁‘이라고 할 수 있지요. 54년 휴전협정은 북위 17도를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남북베트남으로 잠정적 행정 관할구역을 정한 뒤에, 2년 후인 1956년에 남북 베트남을 통틀어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한다. 이것이 1954년 정전협정합의의 핵심이었어요. 그런데 휴전성립 1년이 지난 1955년에 미국이 총선실시를 거부한 것이 제2차 베트남전쟁의 결정적인 원인이에요. ..
베트남 인민들이 30년 동안 불란서 식민제국과의 피어린 투쟁 결과로 획득한 통일의 기대가 미국의 이 정책으로 수포로 돌아갔지. 독립과 통일에 대한 베트남 인민들의 염원을 짓밟은 미국은 베트남민족과 국토의 영구한 분단을 획책하여 1955년 10월에 미국이 오랫동안 꼭두각시로 키워왓던 고 딘 디엠이라는 가톨릭주교를 사이공에 데려다가 남베트남 국가와 정부의 수립을 선언케 했어. .. 미국의 약소국 지배 술책이었어. ..
미국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였는데, 남북베트남 내부 정세와 남북 베트남의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에 관한 여론조사를 미국정부의 각 기관으로 하여금 실시하게 했어요. 미국인이나 아이젠하워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온거요. 여론 조사 결과가, 1956년 그 시점에서 남북 베트남을 통튼 총선을 실시하면 베트남 인민의 83%가 호지명에게 투표할 것이라는 여론이었어. ..
그래서 미국정부는 제네바 휴전협정의 공약인 남북통일 총선 실시를 폐기하기로 결심해요. .. 이 새로운 사태에 직면해서 북베트남 인민은 물론, 남베트남의 대중들까지도 미국의 괴뢰정권인 고 딘 디엠 사이공정권 소위 ’자유베트남 정부‘에 대한 전면적 투쟁을 개시하게 돼, 인민대주으이 지지를 전혀 못 받는 사이공정권이 위기에 처하자, 미국은 본격적인 군사개입을 시작해서 베트남 인민과 미국과의 전면전, 즉 ’제2차 베트남 전쟁‘이 10년 동안 계속되는 거예요.  341-343

리영희 : 한국 국민들만이 미국의 전쟁주의자들에게 속아넘어간 것이 아니에요. 미국 국민들도 그렇고, 전 세계가 미국의 엄청난 기만, 사기, 허위, 날조, 또는 과장된 선전에 속았던 거예요. .. 베트남전쟁에 대한 미국 정부의 베트남전쟁에 관련된 허위 사실들을 들러낸 유명한 ’미국 상원외교위원회의 베트남 전쟁 공청회 의사록‘이에요.
베트남전쟁의 전체 과정을 통해서 미국 군부와 정부와 정보 당국자들이 미국 국민에게 제시하고 전 세계에 주장했던 베트남전쟁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 거의 완전하게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한 유명한 ’펜타곤 페이퍼‘(베트남전쟁에 관한 미국 정책기관의 최고 극비문서 모음집)입니다. ..
1964년 8월 2일에 일어난 소위 ’통킹만 사건‘… 월맹 수도인 하노이의 외항인 통킹만에서 미국 해군 구축함 매덕스호와 터너 조이호가 공해상에서 어느날 순찰을 하고 있는데, 월맹 어뢰정이 야밤에 그 공해상에서 그 구축함에게 어뢰 공격을 가했다는 거요. .. 이것을 구실로 삼앙서 미국 군부와 전쟁주의 세력은 의회 상하 양원에서 월맹에 대한 ’대통령의 무제한의 전쟁수행권한’(Presidential War Power Act)을 부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어. 이 권한을 거머쥔 전쟁주의 세력과 미국 군부가 월맹에 대한 소위 북폭이라는 무제한의 전면폭격 전쟁을 개시함으로써 남베트남에서만 진행되던 미국의 전쟁을 북베트남까지 확대하는 거야.
소위 월맹 어뢰정의 미국 구축함 공격이라는 것은, 그 시건 1개월 전부터 미국 해군과 최고 전쟁기획 당국에서 만들어낸 완전한 가공의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지. .. 1972년에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에 의해 폭로되어 전 세계에 보도된 이 ‘펜타곤 페이어’에 낱낱이 기록돼 있어요. ..
다니엘 엘스버그라는 젊은 학자인데, 그는 열두 사람의 동료와 함께 맥나마라 구구방장관의 지휘로 미국의 베트남사태, 전쟁개입의 역사를 서류로 정리하는 임무를 맡았어. 그 작업을 하는 동안 미국이 베튼ㅁ전쟁 과정에서 발표한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 날조, 확대, 축소, 조작된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돼요. 엘스버그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지금까지 수많은 전쟁에서 젊은이의 목숨을 볼모로, 오로지 미국 소수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각종 거짓말을 종합해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는 이 문서를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에 복사를 해서 누설합니다.
타임스의 첫날 보도가 나니까 미국정부가 즉시 보도금지 가처분 신청을 해서 일단 보도 정지됐어. 신문이 이의를 제기해서 1, 2심을 거쳐 끝내 대법원은 “국가의 위신과 이해관계와 국민의 생명이 더 심각하게 위험에 처해질수록 그 전쟁의 진실을 국민이 더 잘 알아야 한다”고 판결했어요. .. ‘국민의 알 권리’를 보호한 판결로 전세계의 박수를 받았고 다방면에 걸친 교훈을 남겼어요.  343-346

리영희 : 미국과 한국정부나 국민들이 소위 ‘자유민주주의 반공국가‘라며 어떤 동질감으로 군대를 파견했던 사이공정권의 모든 분야의 지배세력과 개인들은, 100년에 걸쳤던 불란서 식민지 시기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지배 아래에 있던 4년동안, 그리고 그 후 미국의 반식민지가 된 시기에, 거의 예외없이 불란서 식민당국과 일본 식민당국에 빌붙었던, 한국식으로 말하면 ’친일파 반민족행위자‘들이었어. ..
이와는 반대로 .. ‘민족해방전선’(FLN)군과 호지명 휘하 베트공 세력의 중추 지휘부인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회 31명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과거에 항불, 항일 그리고 물론 현재의 항미 독립투사였어! 그 인적 구성을 보면, 정통적인 독립운동가들이 있는가 하면, 대학교수, 여성운동가, 간호사,각급학교 교사등 지난날의 민족해방투사들뿐이에요. 그들 31명의 경력을 보면 한 사람도 식민지시대에 형무소를 가지 앟은 사람이 없어!  349-350

임헌영 : 이라크전재잉 석유를 탐낸 것이라면 베트남전쟁의 경우는 뭘 봤겠습니까?
리영희 : 아시아에 또 하나의 ‘반공군사 저초기지’를 만들려는 것이지. 남한과 꼭 같은 성격과 기능이지. 1948년부터 미국은 중공과 소련, 동유럽 사회주의권을 섬멸하는 계획으로 유럽에서는 북대서양동맹기구(NATO)를, 이슬람 국가들을 포함시킨 아랍세계에는 중부방위조약기구(CENTO)를,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는 소련과 북한, 중공을 조이기 위한 동남아방위조약기구(SEATO)라는 것을 구축했어. 그러면서 남한과 일본을 거쳐 알래스카까지 연결하는 아시아 ’대(對)공산 군사 포위망‘을 구축하는데, 그때 동아시아의 ㅇ약한 고리가 베트남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베트남을 놓치면 버마(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가 공산권으로 넘어간다는 논리였어요.  351

리영희 : <과거를 돌아보며: 베트남전쟁의 비극과 교훈>(In Retrospect: The Tragedy and Lessons of Vietnam)이야. ..
맥나마라라는 인간은 무소불위하고 만능적 능력자로 정평이 났었어요. 그런 사람이 베트남전쟁에서 패망하고 20년 동안 자기반성을 한 결과를 이 책에 담았어. 특히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어째서 미국이 원시적 농업부족 집단과 같앗던 베트남 인민들에게 패배했냐 하는 14가지 항목의 자기비판을 열거한 장이 ‘제11장 베트남의 교훈’이에요. 이것을 요약해서 한 마디씩으로 줄이면 다음과 같아요.
1 전쟁 상대방의 성격과 능력에 대한 중대한 오판
2 소위 베트공과 월맹의 지도자와 세력에 대한 인식 부족
3 지나친 미국이익을 추구한 정책의 오류
4 미국이 지원한 '반공적' 사이공정권 지도자들의 반민중성
5 오랜 식민지 지배에 시달린 베트남 인민의 외세에 대한 반감과 해방 독립을 위한 강력한 의지에 대한 몰지각
6 베트남 민족의 역사·문화·종교·정치·생활 · 관습 등에 대한 무지
7 미국식 자본주의와 정치제도를 유일무이한 인류적 생존 양식으로 착각한 미국의 오만과 무지
8 현대적 무기와 군사력 등 물질적 전쟁수단에 대한 과신
9 무지하지만 자주독립의 민족적 미래에 대해서 '의식화된 인민의 원초적 역량'을 과소평가
10 세계 인민들과 국제적 협조 · 호응을 획득하는 데 실패한 고립된 전쟁
11 미국 국민에게조차 베트남전쟁의 의의와 필요성과 정당성을이해시킬 수 없었던 정책적 실패
12 미국정부와 군부, 각 분야의 지도자들의 전지전능을 과신
13 전쟁수행 예측이 빗나갔을 때에 정부 내 각 분야의 협동 능력의 상실과 정책적 혼동
14 미국 건국 이후 불패의 군사적 역사에 도취하여 그 밖의 모든 요소들을 무시했던 힘의 오만  352-354

리영희 : 해방 이후 반세기 동안을 오로지 미구그이 사고방식에 길들여져버린 한국인들은 진저응로 강력한 인간의 사상과 힘을 모르고 있어! 이것이 한국인들 모릿속에 긴 세월에 걸쳐서 주입된 미국식 사고방식의 해독이라고!  355

리영희 : 베트남전쟁에 반대해서 미국 역사상 최초로 반전운동이 일어났거든. 한 예로, 미국 전체 대학생의 25%가 베트남전쟁 소집장을 거부했어. 게다가 베트남전쟁 기간 중에 27만 명의 미국인 청년과 대학생들이 징집을 피해서 국내에 잠적했건 외국으로 일시 망명했어요. 이런 사실을 한국인들은 그 당시에 전혀 몰랐어. 그 27만 명 가운데 훗날의 빌클린턴 대통령이 들어 있었어. 그 중에 21만 명이 훗날 기소를 당했지. ..
기록에 의하면 베트남전쟁 기간에 무단 탈영, 도주한 병사가 자그마치 8만 4천 명이오. 베트남전쟁이 끝난 뒤에 그런 이유로 군법재판에 회부된 수만도 3만 4천 명이나 되고, 그밖의 여러 군법 위반 행위로 불명예 제대한 수가 9만 7천 명이나 돼. 이런 숫자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 군인, 청년, 학생들은 자기네 국가 위정자들의 범죄행위에 대해서 눈물겨울 만큼 투쟁했다고! 그것으로 말미암아서,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걸쳐 미국 국민의 전국적이고 대대적인 반전 평화운동이 전개됐어.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지구상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남한의 청년들이 돈벌이를 위해서 미국의 용병으로 파견되었을때에, 한국정부와 극우 반공주의 언론들은 마치 전 세계 국가와 민족들이 베트남전애에서 미국을 지원하는 줄로 착각했어. 미국의 압력에 못이겨 군대를 파견해, 그 따위의 범죄적인 전쟁에 협력한 나라는 남한 이외에 필리핀, 타일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세 나라밖에 없어요. 한국에서 상시 5만 명의 분투부대를 보낸 것과 달리, 이들 나라에서 보낸 병력은 포병, 공병, 병참 등, 천 명 내지는 최고 3천 명 정도였어요. 그밖의 ㄷ른 국가들은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파병을 거절했어. 영국은 혈연적으론 인종저긍로나 역사적으로 미국으이 전쟁협력자가 아닐 수 없는 처지인데도, 마지못해 ’유니온 잭‘(영국 국기)을 앞세운 의장대 6명 만을 파견했어. 600명도 6천 명도 아닌 단 6명이오! 사이공 공하아에서 외국 귀빈을 맞이하는 의장대요.  356-357

리영희 : 나는 베트남전쟁 끝에 하나의 확고한 의견을 갖게 됩니다. 미국 자본주의는 그 본성으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잔인무도할 수밖에 없다. 약소민족에 대한 전쟁 없이는 그 제국주의적 경제 · 정치 · 군사 · 과학기술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확신이에요. 베트남전쟁이 그 노골적인 본보기이지만, 이미 그때에는 라틴아메리카의 10여 개 약소국을 잇달아 군사적으로 침범 · 점령했고, 약소후진국들이 조금이라도 민주적 복지와 자립적 경제정의를 추구하려고 하면 그런 정권들은 미국이 뒷받침하는 반동적이며 미국에 예속된 군부로 하여금 쿠데타를 일으켜서 전복시켜 왔어요.
그 대표적인 예가 쿠바와 카스트로 정권타도 공격이고, 니카라과에서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부패 · 타락한 미국 예속정권을 혁명으로 쓰러뜨리고 참신한 민중적 정치혁신을 하려던 산디니스타 정권을 그런 방식으로 타도했어요(1979),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깨끗하고, 공정하고,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서 사회주의정권을 세운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 정권에 대해 미국은 역시 같은 음모적 수법으로 대통령을 사살하고 미국 예속 군부쿠데타를 조장하여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킵니다(1973). 아르헨티나 군부쿠데타(1976), 볼리비아(1980), 과테말라(1983), 아이티(1988), 파나마(1989), 콜롬비아(1989)등 열거하면 끝이없어. 이것이 민주주의, 정의, 자유를 내세우는 ‘미국이라는 나라’요.  361-362

임헌영 : 조선일보사에 계시면서 '북괴'를 '북한’ 으로 표기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리영희 : 그랬지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냥 모두 당연한 듯 사용하던 것이 '북괴' 라는 단어였는데, 1967년에 내가 '북한'으로 고쳐 쓰기 시작했지. 그후 다른 신문들이 따르게 되었어요. 한 10년 후에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따르게 됐고, 나는 여러 정보로, 북한이 결코 소련이나 중공의 괴뢰가 아니라고 믿을 만한 많은 증거를 갖고 있었어요. 오히려 1960년대에 중공에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북한과 중공 사이에 대립적인 관계가 형성되거든요. 소련이 제일 미워하는 국가도 북한이었어요. 한국사람들은 북한이 처음부터 중공이나 소련의 괴뢰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고, 또 그러기를 바라는 심정이었어. 남한 극우 · 반공주의의 선전이나 미국의 선전공작이 그랬으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것과는 정반대였다구. 방금 말한 것처럼 공산세계의 패권자인 소련이 그 당시에 제일 미워했던 정권과 당과 국가가 미국이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다는 것을 한국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이해를 못했던 것이오.
북한의 당과 군대와 정부, 그리고 지도자들이 중공이나 소련의 괴뢰가 아니라 그 두 강대국과 당당히 맞서는, 극히 자주적 존재였다는 것은 소위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으로 전 세계에 너무나도 분명하게 밝혀졌었어.
푸에블로호 피랍사건(1968. 1. 23)은, 북한의 중요 해군항인 원산항에 바짝 붙어서 정찰중인 미국 전자첩보함을 영해를 침범했다는 이유로 북한이 나포한 사건이지요. 미국이 두 척밖에 갖고 있지 않았던 전자통신 인터셉트 기능을 탑재한 세계 최첨단 첩보함 중 하나인 푸에블로호를 북한 해안선 부근에 상시적으로 배치해, 북한의 군사적 정보를 빼내려 하고 있었어요. 함장은 부커라는 소령이었어. 부커 이하 36명의 최고 전파스파이 기술요원들이 배와 함께 다끌려갔어요. 북한군은 이때에 몇 차례에 걸쳐서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 안으로 침범했다고 경고했어요. 그런 사태가 계속될 때에는 나포하겠다고. 미국은 그때 푸에블로호가 영해를 침범하지 않았고 공해상에 있었다며 항의했지.
당시의 국제해양법에 따르면, 영해를 최저기저선(간조시에 드러나는 육지의 선)을 기준으로 설정했어요. 이것이 영해에 대한 첫 번째 원칙인데, 미국 같은 강대국들은 최저기저선에서부터 6마일까지를 영해라고 주장한 반면, 북한 등 제3세계의 약소국들은 전부 최저기저선에서부터 12 마일까지를 영해라고 주장했지. 그런데 두 번째원칙이 뭐냐 하면, 그 안에 섬이 있을 때에는 그 섬에서부터 다시계산해야 된다는 것이오. 원산만 앞바다의 경우, 만의 입구 남북으로 웅도(熊島), 려도(麗島), 신도(薪島), 모도(茅島) 등의 작은 섬들이있는데, 이게 영해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 섬에서부터 다시 바깥으로 영해를 그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영해에 대한 두 번째 원칙인데, 미국은 이 두 번째 원칙은 무시하고, 푸에블로호가 원산만의 최저기저선에서부터 6마일 선 밖 공해에 있었다고 주장한 거지.그러나 섬들을 연결한 선을 기준으로 영해를 계산하지 않고, 설사 미국측의 주장대로 6마일을 기준으로 한다고 해도, 푸에블로호는 영해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오. 미국의 주장을 따르더라도 푸에블로호가 북한 육지에 얼마나 가까이 바짝 붙어 있었는가를 알 수있지. 어떤 적성국이 미국 허드슨만이나 어떤 중요해군기지 항구에 그런 영해이론으로 들어와서 군사작전통신을 도청한다면, 미국은아마 경고도 없이 격침시켰을지도 모르지, 선전포고감이지. 이런경위로 북한 해군이 몇 번의 '영해침입경고' 끝에 푸에블로호를 원산항으로 나포한 사건이 일어났지. 이에 미국이 북한이 공해에 있던 미국의 군함을 불법으로 나포해갔다'며 석방 압력을 가했어. 핵항공모함 두 척을 포함해서, 합계 25척의 군함으로 구성된 제77기동함대를 원산만 앞바다에 배치시킨 겁니다. 전쟁 직전의 위기사태가 조성됐어요.
미국이 푸에블로호를 구출하기 위해서 시도해보지 않은 방법이없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은 소련과 '밀월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은 막강한 제77기동함대를 원산 앞바다에 배치시켜놓고 군사적 위협을 가하는 한편, 소련정부로 하여금 북한에 압력을 가해 푸에블로호를 반환하고 선원을 석방토록 하라고 한 거예요. 미국은 북한을 소련의 '꼭두각시' '괴뢰' 국가 정도로 보고,'대소련'의 압력이라면 한마디로 굴복할 것으로 기대했던 거야. 만약 상황을 거꾸로 설정해서, 남한의 인천 앞바다에 들어온 소련 ‘푸에블로호'를 남한이 나포했을 때, 소련이 미국정부에 남한정부에력을 넣어 선원을 석방토록 했다고 상정해봅시다. 남한정부나 군이감히 워싱턴의 명령에 거역할 수 있었겠는가! 이 비유를 생각해 보면, 북한과 소련 사이의 관계와 남한과 미국과의 관계에 차이가 어떻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미국은 소련뿐만 아니라, 미국과 우호관계에 있던 공산국가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과 루마니아의 체아우셰스쿠 대통령을 평양까지 가게 해서 김일성을 설득했어. 티토는 “미국이 정말 북한에대한 전쟁을 할 결심이다. 원자탄을 사용할 용의가 돼 있는 것으로본다. 그러니 약한 북한으로서는 미국의 요구를 듣는 것이 안전할것이다”라고 설득했어. 이러한 미국의 직·간접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10개월 동안 북한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어. "영해를 침범했으니까 침범 사실을 시인하라. 시인만 하면 석방하겠다"고 했지. 결국10개월 동안의 온갖 전쟁 위협과 외교적 수단으로도 뜻을 이루지못한 미국이 소련을 통해 북한 영해를 침범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문서에 서명을 하고야 36명이 석방되어 휴전선을 넘었어요.  367-370

리영희 : 공자의 <논어>에 [정언(正言)>편이 있어. 제자가 공자에게 “정치의 요체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데 대해, 공자는 “사물의 이름(명칭 또는 명분)을 정확하게 쓰는 것이다”라고 답했어요. 다시 말하면, 검은 것은 희다고 할 것이 아니라 검다고 해야 하고, 악은 선이 아니라 악이라고 칭해야 하고, … 잉처럼 모든 형태나 관곈 성격이나 형상의 본질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실체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인간 상호간의 생존에서 혼란을 예방할 수 있고, 또한 그 사고의 주체인 개인의 의식과 행위에 괴리가 생기지 않는 것이에요. ..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제반 속성을 진실되고 정확하게 표현해야만 인식하는 주체의 사고가 정ㅎ확할 수 가 있다는 교훈이지요.  374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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