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 설령 천하는 얻었다 하더라도

학생들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열심히 공부하며 온갖 능력을 쌓고 있는데, 대부분 아는 건 많은데 다룰 줄 아는 것은 없는상태로 후퇴하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이 수많은 지식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렇게 무기력하고 무능력할까? 이 무기력과 무능력을 극복하기 위해 노오력하며 자기를 계발하고 있는데, 우리는 왜 퇴행하고 있을까? 왜 우리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기쁘기는 커녕 자기 자신을 고통의 나락으로 밀어 넣고 있을까? 13-14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라는 철학자는 소크라테스를 인용해, “사람이 천하와 반목하더라도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편을 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상황은 정확히 정반대다. 14-15


이미 한국 사회는 세상을 돌보느라자기를 망각하고 망친 사람으로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자기를 망각하고 망친 채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이들이 자기 자신을 돌보는 법을 모르는 세상을 만들었다. 18


훌륭함이 무엇인지 모르고, 훌륭해지기 위해 자기를 돌보지도 않은 자가 다른 사람이 훌륭해지도록 돕는 것은 불가능하다. ...

역사 속의 현명한 사람들은, 자신이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했다. 지혜로운 자는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을 의미하지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경지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공부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공부의 본질은 지혜에 대한 사랑에 있다. ...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을 망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공부를 통해 양성해야 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모르는 게 뭔지 알기 때문에 알고자 노력하고, 알고자 하는 그 노력이 바로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20-21


철학자 존 듀이는 배움의 근본적인 특징이 의존성이라고 말하며 섣부른 독립을 경계했다. 그의 철학에 따르면, 살아간다는 게 곧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은 이미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의착하며 배우고 있다. 따라서 홀로 배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가 이미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의착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했을 뿐이다. 이게 배움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교만이다. 공부는 홀로라는 교만에 저항한다.

그렇기에 공부(工夫) 공부(共扶)가 된다. 더불어 돕는 게 공부다. 22


공부와, 공부를 통한 성장의 기쁨을 망가뜨린 현실에 저항해야 한다. 이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공부를 통한 성장의 기쁨을 다시는 누리지 못할 것이다....

이런 세상에 저항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공부가 어떤 기쁨을 주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24


나는 이 책을 통해 공부가 어떤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말하려 한다. 그것을 한계, 능수능란함, 자유, 탁월함, 멋짐, 향유라는 말로 설명할 것이다. 25




01 공부할 이유가 사라지다

01-1 신분 상승과 반학교 문화

상당수 학생은 자기가 잘하는 것에 대해 잘한다는 평가를 공적으로 받아본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자기가 잘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하고 싶은 것이 뭐냐?”라는 말에 하나를 꼽아야 한다는 강박을 갖는다. 그런데 그 가장 긍정적이고 확정적인 하나를 찾고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

이 경우에는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뭐냐?”, “‘어떻게는 살기 싫은가?”라는 질문이 좀더 합리적이다. 하고 싶은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나 할 수 없는 것은 이미 지난 경험 속에서 알게 되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것이다. .. 적어도,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알면 그것을 피해 다른 것을 시도할 수 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의 범위를 좁혀가다 보면 마침내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부정성에 기초한 합리적 사유의 방식이다. 37-38


가르치는 사람이 학교 안에 갇히면, 그는 학교에 적응하고 최적화된 학생들에게만 다가설 수 있다. 39


예측 가능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계산을 하고 미래를 기획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예측 가능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과거를 보며 성찰하고 미래를 보며 기획한다. 성찰과 기획, 이것이 근대 사회에서 사유라고 불리는 것의 핵심을 차지한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성찰하여 그 과거로부터 나에게 주어진 것과 남은 것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돌아보고, 그것을 밑천 삼아 내 삶을 설계하는 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유. ...

기획은 늘 미래를 생각하게 해 사람을 허황되게 만들 수 있기에 기획 중심의 사유는 경할 필요가 잇다. 기획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의 삶을 나쁜 의미에서 공학적으로 바라보며 현재를 억압하거나 차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점을 경계한다면 기획 역시 성찰과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교훈을 주고 배움을 촉진할 수 있다. 40


존 듀이의 경험론. 듀이는 인간의 경험은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봤다. 우리가 불에 손을 집어넣는 것은 능동적인 경험이다. 반면 불에 손을 데는 것은 수동적인 경험이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통해 불에 손을 넣으면 화상을 입는다. 그러니 다시는 불에 손을 넣지 말아야지.’라는 교훈을 얻는다. 듀이는 이때 얻는 교훈이, 손을 데는 수동적인 겪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각이란 능동적인 이 아니라 수동적인 겪음에서 촉발되기 때문이다. 바지런히 무엇인가를 하는 동안에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가 대상에 힘을 가하는 게 아니라 대상이 나에게 힘을 돌려줄 때, 그 반발력을 느끼는 것이 바로 겪음이다. 무엇인가를 한 것이 튕겨 나올 때, 이 대상에 부딪쳐 반발되는 것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 이게 왜 이러지?’하며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한다.

대상의 현존을 인식하며 그 대상의 힘에 관해 생각할 때, 우리는 골똘히생각하게 된다. 그 힘의 실체를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다른 것에 정신을 팔지 않고 오롯이 나에게 벌어진 일에 집중한다. 이 집중이 다름 아닌 생각이다. 이렇게 집중하기 위해서는 다른 일을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겨우 가능한 게 신체를 최소한으로 활성화하는 산책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통해 교훈을 얻기 위해서, 가만히 있을 줄 아는 몸이 만들어져야 한다. 생각하기 위해 멈출 줄 하는 몸, 이 몸이 공부하는 몸이다. 43-44


폴 윌리스는 <학교와 계급 재생산>에서 영국 노동계급의 자식들이 왜 역시 노동계급이 되는지 연구했다. 그 책에서 윌리스는 노동계급의 자식들은 일찌감치 교육의 이데올로기를 간파한다고 말한다. , 학교 공부는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그들이 학교 권윙 순응하게 만드는 지배의 도구다. 그 약속은 개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을지언정 전체 노동계급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학생들은 꿰둟어 본다.

학교의 체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간파한 학생들은 학교에 반항(counter)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저항은 학교를 떠나는 것과 같은 전면적인 거부는 아니다. 대신, 학교 안에 머무르며 학교의 권위에 저항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수업 시간에 깐죽거리고 개긴다거나, 짓궂은 질문을 하다거나, 수업을 교란한다거나 무단 조퇴를 하거나 땡땡이를 치는 것 등이 반학교 문화의 특징이다. 학교의 권위에 도전함으로써 사회의 약속을 승인하기를 거부한다.

일차적으로 이들이 학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 권위의 원천인 지식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53


반학교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학생들의 교복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교복은 학교의 권위에 대한 순응을 상징한다. 그렇기에 교복을 주어진 그대로 입는 것은 찐따같은 일이다. .. 교복을 얼마나 훼손하는지에 따라 자신이 학교의 권위에 얼마나 저항하는지가 드러난다. 55


반학교 문화가 가진 역설이 있다. 반학교 문화는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학생들의 문화적 현상이다. 따라서 반학교 문화에서는 학교가 학생들에게 세계의 전부다. 학교 바깥에는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 없다. 56



01-2 자아 실현과 탈학교 문화

저항 담론이 형태로 공부의 새로운 목적을 제시하는 흐름이 제도교육 안팎에서 나타났다. 제도교육 안에서는 전국 교직원노동조합과 참교육 학부모회로 대표되는 교육운동이 등장했다. 바깥에서는 공동육아, 대안학교와 같은 흐름이 만들어졌다. ..

이들은 교육이 신분 상승의 도구가 아니라 삶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공부가 좀 더 자유롭고 즐거운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공부가 절대다수의 학생이 자신의 꿈을 탐색하고 발견하고 준비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59


신분 상승이 목적이던 시대에 욕망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었다. 개인의 욕망을 드러내고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윤리적/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행동이었다. .. 단적으로, 의대나 법대에 갈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부모의 바람과 달리 인기 없는 철학이나 문학을 전공하겠다고 하면 부모로부터 이런 말이 돌아왔다. “너는 네 생각만 하냐?”

따라서 그 시대에 개인이 어떤 행동을 선택하고 추구하는 기준은 욕망이 아니라 책임이었다. 62


나는 OO가 되고 싶은데라는 말로 교육의 권위와 정당성에 도전한 것은 이런 욕망의 주체로서 개인이 탄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64


국가의 일원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게 행복의 원천이라며, 사람을 개인으로 해방하자는 강력한 요구가 바로 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65


학교 자체가 무의미했지만 어른들의 강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왔다. 그러다보니 학교에 오는 것이 일이고, 학교에 오는 것으로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 교사들 역시 이들을 보며 오는 것만으로도수고했다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학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교사나 부모가 보기에 이들은 완전히 무기력했다. .. 학교를 벗어나면 이들은 살아났다. 71


학생들은 본격적으로 자기 표현의 욕망을 드러냈지만, 학교는 여전히 획일주의적 군대 문화였으며 수업은 입시 위주의 암기식 공부였다. 학교와 교실이라는 공간에 몸을 어거지로 끼워 맞추고 있으니 교실에서 아무리 잠을 자고 팬클럽 활동을 한다고 해도, 학교는 기본적으로 폭력적이고 무의미하면서 고통만 유발하는 공간이었다. 학생들의 몸은 이 공간을 견디지 못했다.

이때부터 학교는 내부로부터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제도교육은 학교 붕괴, 교실 붕괴 담론에 시달렸다. 72-73


의사소통을 통해 공유하고 있는 문제를 함께 알아내고 해결해가는 경험이 필요했지만 여전히 학교 안에서의 의사소통은 일방적인 의사 전달이었다. 서로를 준중해가며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니 학교내의 관계가 폭력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74


학교 폭력에 관한 담론도 폭증했다. 물론 이 말이 학생 간의 폭력이 이 시기에 급증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전과는 달리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74-75


폭력에 관한 한 학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도고 있었다. 욕망이 분출되는 시기에 욕망을 억누르기만 하는 곳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이 있는 학생들에게, 학교는 나중을 위해 지금 당장은 참으라는 말만 반복했다. 75


1990년대 후반부터, 저항과 해방의 언어였던 꿈을 위한 교육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 인상을 찌푸리며 꿈이 없다고 말하거나 꼭 꿈을 가져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학생이 생겼다.

꿈이 해방의 언어가 아닌 새로운 억압의 언어가 된 이유는 꿈을 묻는 교육이 간과한 질문이 있기 때문이다. 꿈을 묻는 이들은, 이 꿈이라는 게 긴 인생 중 어느 시기에 묻고 찾고 발견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인지 질문하기 않았다. 진보적인 사람도 보수적인 사람도 그것은 당연히 청소년 시기에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대학 가기 전에 꿈을 발견하고 준비까지 맟쳐야 한다는 것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을 비판했지만, 생애사적 기획의 관점에서 보면 꿈을 묻는 교육을 말한 사람들조차 이 모든 것을 열여덟살, 즉 대학에 들어가는 나이 이전에 해내야 한다고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75-76


나는 내 아이가 학교 공부를 잘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라며 항변하는 부모가 있다 그러나 이 부모들 역시 다른 방면에서 자녀가 폭풍 성장하리라 기대한다. 기타를 치면 기타에서, 농사를 지으면 농사에서, ‘두각을 나타내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대가 되어서도 자기 자녀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발견하지 못했거나, 하고 싶다고 말한 그 무엇을 잘하지 못하면, 부모와 자녀의 갈등이 정점에 이른다. 자녀가 고등학교 2학년 정도 되었을때 부모가 집중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이 잘하는 것이 하나는 있어야지, 너는 도대체 잘하는 게 뭐냐?”

이런 부모에게, 자녀가 어느 정도 잘하기를 바라느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이 비슷하다. “일등 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해야지요.”라는 답이다. 어느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다시 물어보면 최소 중간 이상이다. 이 정도는 되어야 어느 정도하는 것이 된다 영역이 학교 공부에서 다른 분야로 옮겨간 것일 뿐, 명시적으로 일등을 바라는 것은 아니라 해도 사실상 중상위권 안에 들기를 바라는 일둥주의자들인 것이다.

그 결과, 탈학교 시대의 후반기로 갈수록 어린이/청소년을 해방하고자 한 언어인 은 본의 아니게 억압의 언어가 되었다. 꿈을 가지지 못하면 지질한사림이 되고, 꿈을 가지면 그 모든 준비를 열여덟 살 이전에 완수해야 하는 강압의 언어가 된 것이다. 오히려 입시에 의한 압박보다 꿈에 의한 압박이 사람을 더 궁지로 몰아넣고 비참하게 만든다. 78-79



01-3 교육 불가능과 즐거운 학교

경제 성장은 1997년의 IMF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했다. .. 이른바 생존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 82


아이도 부모도 신분 상승이 가능하지 않다는것을 분명이 알고 있었다.

신분 상승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 생존과 계급 재생산이다. 자식이 부모보다 잘살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다. 83


학벌이 아래로부터 붕괴했다. 상위권 대학 중심의 대학 서열은 여전히 강고한 듯 보였지만 그 아래의 학벌은 무의미해졌다. ..

서울데 있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취직을 통해 경제자본이 될 수 있는 교육자본이다. 그 이하의 교육자본은 자본으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다시피 했다. 교육이 생존의 도구가 되었다는 증거다. 84

생존이 지상명령이 된 사회에서 중산층은 더욱더 교육에 올인했다. ..

부모가 변호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이라 해도, 그 정도의 생활수준을 자식이 유지하려면 자식 역시 그런 전문직이어야 한다 그래서 한국의 중산층은 자식의 교육에 모든 것을 건다. 거기에 그 가족의 계급적 사활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교육 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전문직 중산층도 그 비용을 대느라 허리가 휘는 지경에 이르렀다. 85


이들은 사교육비가 이 정도 비싼 것이 교육에 대한 진입장벽을 높여 시골의 못살지만 공부를 잘하는학생들을 아예 배제하는 좋은 전략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살인적인 사교육비를 기꺼이 지출한다.

이 상태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오로지 공부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것도 대학 입시에 유리한 공부에만 투자하도록 강요한다. 이전의 부모 사대와 달리 이들은 자녀가 책을 읽는다고 마냥 좋아하지 않는다. 그 책이 대학에 들어가는 데 유리할 때만 환영한다. ...

진보적인 부모가 바라는 것은 학교 공부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은 입시와는 거리를 두지만, 그럼에도 자녀가 읽는 책이 자신이 알고 있는 발달 단계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두고 평가하고 검열한다. “아직은 네가 볼 책이 아니야.”라거나 그거보다는 이 책이 나아.”라며 자녀가 읽을 책을 부모가 고르고 정한다. 86-87


정신의학자들은 사람의 성장이란 좌절을 경험하면서 좌절을 다루는 능력이 커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능감은 어렸을 때 안정감을 갖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지만 인간의 성장과 더불어 깨진다. 자신을 만능의 존재로 바라보다 좌절을 다룰 줄 아는 존재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좌절은 사람의 성장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공부 이외의 것을 부모가 다 알아서 해주고 자기는 온전히 공부에만 집중하며 늘 성과를 내다 보니, 만능감이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되며 좌절을 다루는 역량은 커지지 않는 불상사가 벌어진 것이다. 93


<아이들의 숨겨진 삶>에서 저자는 또래집단을 통해 어린이/청소년이 추구하는 것은 인기와 우정이라고 말한다. 인기와 우정은 다른 것이다. 인기가 많다고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있다고 인기가 많은 것도 아니다. 저자는, 어린이/청소년의 세계에서 인기가 고속도로와 같은 것이라면 우정은 이면도로라고 말한다. 고속도로에서 서로 빨리 가기위해 질주하는 것처럼, 인기를 얻기 위해 서로 우열을 가르고 경쟁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우정은 경쟁적이지 않다. 사람의 삶에 신뢰와 안정감을 주는 것은 우정이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또래 집단에서 우정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인기 역시 중요하다. 인기를 얻기 위해 경쟁함으로써 정치를 배우기도 하고 타협과 협력을 이끌어내는 기술도 배운다. 1장에서 말한, 삶을 통해 배우는 과정 중 하나가 또래집단 내부의 위세 경쟁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야합이나 배제, 그리고 폭력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사람은 자기 성향을 알게 되고 그 성향에 따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기도 한다. 94


다른 학생들이 있다. 이들은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아니다 내가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에서 딱 중간이라고 불렀던 학생들이다. 과거에는 이들이야말로 학교에서 가장 고통받던 학생들이었다. ...

학교에서 이들은 존재감도 없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학교에서 사물함보다도 더 존재감이 없었다고 말한다. 교사들이 자기 이름을 외우는 경우는 초등학교 이후로 거의 없었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사고를 치는 것도 아니니 교사들이 이들을 주목할 이유가 없었다. ..10년 전부터 재미있는 변화가 나타났다. “학교에서 공부하느라 고통스럽지 않냐?”고 물어보면, 당황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학생들이 늘었다. 이렇게 답하는 학생들에 관해, 다른 학생이나 교사는 그들이 전형적으로 딱 중간에 속하는 이들이하고 설명했다. 이들은 공부는 싫지만 그래도 학교 오는 것은 재미있다고 말했다. 학교에 와서 친구들과 노는 게 재미있다고, 지루한 수업 시간에는 자면 된다고 말했다. 게다가 학교는 밥도 주는데 엄마가 해주는 밥보다 맛있다고 말하는 학생도 있었다. ...

이 학생들에게 학교가 천국이 된 이유가 있었다. 학생이 사고를 치지 않으면, 학교는 어지간한 일에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했다. .. 교장이나 관리자들도 굳이 문제 삼으려고 하지 않았다. 교사들도 학생들의 반발을 사면서까지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통제한다고 해서 통제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 '공부하는 학생'들이 서울대데 가서 학교를 빛낸다면, 이들은 자기가 다치거나 남을 다치게 하지만 않아도 학교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르치고 배우는 게 중심이 아니라 서로 가급적 덜 건드리고 덜 괴롭혀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심이 되었다. 104-106


억지로 공부를 시키려 하는 대신 모른 척하면서 내버려두다 보니 '딱 중간'에 속하는 학생들에게 학교가 '재미있는' 공간이 되었다. 먹고 자고 노는 총체적인 삶의 공간이 된 것이다. 자조적으로 말하면, 진보적인 교육계 일각에서 학교는 공부하는 곳을 넘어 삶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것이 전혀 의도하지 앟게 뒤에서 만들어진 셈이다. 107





02 자기계발의 공부에서 자기 배려의 공부로

02-4 폐기나 보완이 아니라 전환이 필요한 이유

더 이상 과거처럼 성장이 가능한 사회가 아니라면, 우리 살밍 전환되어야 한다. 공부가 그 전환을 슬기롭게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삶을 어떤 방향으로 전환해야 하며, 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탐색하고 준비할 수 있는 공부로 전환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내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삶의 전환을 위한 공부의 전환이다. 116


모든 것을 바꾸자면서 아무것도 안 바꾸는게 바로 폐기의 니리다. 116


쓸모를 지금 당장’ ‘이라는 말에 종속싴버리는 순간, 공부를 하는 사람은 시간의 노예가 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준비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며, 지금 나의 수준에서 그것을 어느 정도의 속력으로 얻을 수 있는지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대신, 지금 당장의 평가에서 성과, 스펙이 될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 117-118


이게 공부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들이 하는 것은 일단 다 해놓고 봐야 한다는 초조함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

실제적이라는 명목으로 공부의 목적을 이처럼 단기화하는 것이 당장은 학생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여 어느 정도 공부로 유인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긴 호흡의 공부를 통해서만 만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만들지 못한다. 공부를 지속할 힘이 있는 몸 말이다. 공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견디고 즐기는 몸을 만드는 것이다. 118


우리가 교육을 통해 양성해야 하는 것은 배울줄 아는 사람, 즉 배움을 지속할 수 있는 배움의 주체다. 121


답을 스스로 찾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 제시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하고 어쩔 줄 모른다. ‘지금 당장 쓸모 있는 것을 요구하는 제자에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스승은 똑같은 말을 한다. “너는 배울 준비가 안 되어 있다. 당장 돌아가거라.”

이게 한국에서 스승은 찾지 않고 자기계발서만 범람하는 가장 큰 이유다. 124


이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초조함이다, 단기간에 실제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으로 지금 배운 것이 시간나이비면 어쩌나 하는 초조함에 사로잡혀 있다. 좀처럼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이 초조함이야말로 지금 사람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초조해서 긴 호흡으로 자기 자신과 사회를 돌아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구조적인 문제에 관한 고민과 토론을 관념적인 탁상공론으로 여기게 한다. 여기서는 해법을 찾을 수가 없다. 125


지금의 교육이 학생들이 자기 미래를 발견하고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도울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게 이 실제적 도움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여기에서 역설이 벌러진다. 실제적 도움을 강조하며 현재의 교육과정이나 교육 내용의 전면적 폐기 혹은 대대적 보완을 주장하는 입장은,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삶의 전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현재를 강화하는 공부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현재의 미완의 무엇이지 극복해야 할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것을 바꾸자고 하지만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결과를 낳는다. 126


교육의 관점에서 노오력이라는 말을 들여다보자. ‘노오력이라는 말은 청년들이 사용하는 말이다. 청년들이 취직하지 못하거나 성공하지 못했을 때 그건 다 너의 잘못이라는 이 사회의 비난을 자조적으로 비판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130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으면 네가 성과를 내지 못한 게 증거라고 말한다. 따라서 성과를 내야만 내가 노력을 다한 것이 된다. .. ‘성과주의. 성과주의 사회에서는 노력해서 안 되면 더 노력해야 나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노력의 사이에 자만 늘리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노오력이다. ...

황당하겠지만, 를 무한대로 늘리면서 실패를 그 사람의문제로 돌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교육의 이상이다. ..

교육이 만든 말이 무한한 잠재력이다. 131


사람을 포기하지 않게 하려는 이 교육적 배려의 마링 성과주의와 결합하면 지옥을 만들어 낸다. 사람이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고, 노력을 하지 낞은 것은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 서오과를 못 내고 그만둔다는 것은 바로 가장 포기해서는 안 되는 자기 자신을 포기한 것이므로, 이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쓰레기가 되어 버린다. 132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교육적 언어였던 무한한 잠재력, 이처럼 사람의 성장을 도모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파괴하는 말로 돌변해 버렸다. 133


관건은 이 해도 안 된다는 것에 기초해 우리가 어떤 성장을 꿈꿀 수 있고 어떤 사회를 설계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나는, 지금 교육의 폐기나 보완이 아니라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발견하는 진로 교육보다 내가 어허게 살아야 내 삶을 돌볼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발견할 수 있는 전환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이것을 자아실현에서 자기에 대한 배려/돌봄으로의 전환이라고 제안한다. 134



02-5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것

자기 배려를 위한 공부이 중요한 두 측면. 첫 번째는 당연하게도 자기의 한계를 아는 것이다. .. 자기에 관한 앎이 있어야 자기를 보호하고 배려할 수 있다. 자기에 관한 앎 없이는 자기에 대한 배려도 불가능하다.

두 번째로 .. ‘정신이다. 이것을 자기에 대한 집중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에 대한 망각이야말로 자기 배려의 적이다. 137


자기 재능의 한계가 어디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조금 허탈하겠지만, 잡은 충분히 햅았을 때. 내 한계까지 왔다는 것은 스스로 느낄 때까지 해보았을 경우에만 알 수 있다. 여기에 충분히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그게 충분한지 아닌지를 자기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만이 그것이 충분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157


스승의 역할은 제자의 재능을 알아보고 제자가 재능의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동행하며 그것을 깨우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제자가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스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158


현명한 이들은 하고 싶은 것을 이루기 위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삶을 노예의 삶이라고 불렀다. ‘하고 싶은것에 끌려다니는 삶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대의 현자들은 욕망의 주인이 되라고 가르쳤다. 욕망의 주인이 되는 길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언제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언제든 그것을 그만 둘 수 있는 것이다. 주인의 힘은 이루게 하는 힘이 아니라 그만 둘 수 있는 힘이다. 161


최고가 아니라 해도 각자의 재능 역시 이런 선물처럼 주어진 측면이 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각자 하늘로부터 얼마나 풍성한 선물을 받았는지 비교하는 게 아니다. 관건은 그렇게 선물로 받은 재능을 각자 얼마나 잘 쓰고 있는가다. 이렇되면 주어진 것 자체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가, 그 선용의 정도가 탁월함의 기준이 되니다. 이것이 인간이 추구할 수 있고 추구해야 하는 탁월함이다. 162



02-6 자기를 배려하는 법

소크라테스는 자기에 관한 앎자기에 대한 배려를 강보하면서 자기/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자기/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나에게 속한 것이며, 마지막이 자기/나에게 속한 것에 손한 것이다. 이를테면 내 몸은 나에게 속한 것이다. 그리고 구두는 낭에게 속한 것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나에게 속한 것이지 자체가 아니다.

그렇기에 자기 배려를 위해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나에 속한 것을 분별하는 것이다. 그럼 배려의 대상인 는 무엇인가? 이것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대신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이 있다. 바로 나에게 속한 것이다. .. 나에게 속한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첫째, 무엇보다 우선 재산, 즉 소유가 잇다. .. 내가 나를 대하는 법은 배려. 반면, 나이게 속한 것이나 내가 가진 것은 배려가 아니라 활용의 대상이다. .. ‘는 나의 목적이지만 나에게 속한 것은 나를 돌본다는 목적으 위해 활용하는 수단이다. .. 소유에 넋이 나가는 순간 내가 노예가 된다.

둘째, 육체가 있다. .. 육체를 잘 돌보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 보다는 역시 육체로는 환원되지 않는 를 위한 것이다. 육체 자체가 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육체 역시 배려의 대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셋째, 지위나 정체성 같은 것이 있다... 지위나 정체성 같은 것은 사회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거이다. 이것 역시 나 자체일 수는 없다. 이런 것들은 나의 속성에 불과하다. ..

이런 것들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면 자신을 도구화하게 된다. ..

마지막으로, 욕망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가장 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나의 욕망이다. .

나를 곧 나의 욕망이라고 생각하면서 욕망을 실현하려는 삶은 욕망의 노예가 된 삶에 불과하다. .. 모두가 바라는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며 사는 삶은 역설적이게도 자기가 아니라 자기 욕망이 주체인 삶이다. .. 이런 점에서 욕망은 배려가 아니라 다스림의 대상이다. 165-169


나에게 속한 것의 경계에 있는 것이 있다. 이름이다. ...

이름은 활용이 아니라 돌보아야 할 대상이다. .. 이름은 그 사람의 개체성과 그 개체성의 존엄을 보증한다. 나아가 이름에는 자기 자신의 뿌리와 터전의 존엄과 명예가 걸려 있다. 이런 점에서 이름이야말로 그 이름이 가리키는 사람의 사회적 생명 전체라고 할 수 있다. 170-171


우리는 나 자신에 관해 생각하면 할수록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 이는 자기에 관해 생각해본 살맘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게 무엇인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고 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숭산 큰스님은 오직 모를 뿐이라고 말했다. .. 따라서 자기에 관해 안다는 착각이 자기를 망친다. 자기 아닌 것을 자기라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 반대로, 내가 나에 관해 모른다는 자각이 자기를 배려하게 한다. 여기서 자기 배려의 중요한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 ‘모른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177-178


자기 배려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존재로 대하는 것이다. 모르는 존재, 알 수 없는 존재, 즉 철학에서 하는 타자다. 사르트르는 타자의 가장 큰 특징이 도대체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다. 그의 말을 듣는 것을 제외하면 내가 그를 대할 다른 방법이 없다. .. 모를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이기, 자기 말을 듣기, 이것이 자기 배려의 출발인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원래 이 말은 너 자신이 모르는 게 무엇인지를 알라는 말이었다. 그 모르는 것 중의 모르는 게 자기 자신이라면, 이 말은 이렇게 된다. 너 자신이 스스로에 관해 모른다는 것을 알라. ..

모르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아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오직 그 아는 것을 활용하고 다룰 수 있다. .. ‘모름은 무지가 아니라 지혜의 원천이다. 자신이 모르는 게 뭔지 알고 다룰 수 있는 것의 한계가 아디인지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다. 178-179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모르며 모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낯선 자기와의 만남은 기쁜 일이 된다. 내가 나에 관해 알고 있다는 착각과 미망에서 깨어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180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은 자기를 모른다는 사실, 모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모르는 자기를 만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기를 안다는 것을 배움의 과정의 문제로 전환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배움의 과정에서 자기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아니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자기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 그 중에서도 자기가 언제 세상을 배움의 자세로 대하는지에 관한 앎이다.

이를 이해하는 데는 존 듀이가 말한 성장과 배움에 관한 이론이 유효하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살아 있는 한 배운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이미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대처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적응과 변용을 위해 현재의 상태와 변화를 읽어내고 적절한 대처법을 찾아내는 능력, 이것이 배움의 능력이다. 이런 점에서 사람, 아니 더 넓게 말해 생명체라면 모두 배움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배우는 능력 자체는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선물(gifted)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배우는 방식은 다른 사람이 배우는 방식과 다르다. 각자가 살아오는 과정에서 사물을 관찰하고 파악하고 그 원리를 이해한 후 그것에 맞추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배우는 방법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사람이 자기를 안다는 것은 자기가 배우는 방법이 무엇인지 안다는 뜻이다. 내가 어떻게 배우는지 모른다면 모르는 것을 중심에 놓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기가 어떻게 배우는지 아는 사람만이 배움을 중심에 놓는 삶으로 전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배우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배우는 법을 알기 위해서는,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것처럼, 무엇보다 자기에게 집중해야 한다. 대상의 아름다움, 혹은 변화를 주고 싶은 대상에 넋이 나가버리면 자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배움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배움의 과정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지식과 기술에 집중해 그것을 습득하는 속도에만 신경 쓰면, 그 속도가 기대보다 느릴 때 곧 흥미를 잃고 짜증을 내게 된다.

그게 아니다. 목적의식적인 배움의 과정에서는 자기가 어떻게 배우는지를 깨닫기가 좋다. 배움의 과정에서 자기에 집중한다는 것은 내 배움의 기술을 관찰하고 파악한다는 뜻이다. 어떤 것을 배우는 과정에서 지금 배우고 있는 그 지식과 기술의 기량만 느는 것이 아니다. 배움의 기술 자체를 동원하고 배우면서, 배움의 기량이 향상된다. 그렇기 때문에 배움의 과정에서는 내 배움의 기술을 관찰하고 파악하기가 좋다. , 배움의 과정에서 자기에 집중한다는 것은, 자신이 배움에서 어떤 기술과 방식을 사용하는지 관찰하고 파악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탁월한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어려서부터 사물과 사태를 관찰하는 힘을 키우는 게 매우 중요한 이유다. 전통 사회는 어린이들이 자신의 배우는 방법과 힘을 알게 하기 위해 다양한 놀이를 만들어 권장했다. 예를 들어, 남자 어린이들이 주로 하던 전쟁놀이는 지형지물과 변화를 관찰하고 파악하고 이용하는 기예를 늘리는 데 탁월한 놀이였다. 어떤 놀이는 균형감각을 키워주고, 어떤 놀이는 협력의 기예를 키워줄 수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놀이를 해보는 과정에서, 어린이들은 자기가 어떤 놀이를 특히 선호하고 선호하지 않는지 구분하게 된다. 이 선호는 놀이 자체의 재미에서 기인하기도 했지만, 어린이가 자기 배움의 태도를 파악하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반면, 어린이가 좋아하지 않는 놀이는 적응하고 파악하고 기예를 늘리는 데 서투른 놀이였다. 좋아하는 놀이는 재미를 넘어서 자신이 가진 배움의 힘과 방법을 잘 발휘할 수 있는 놀이였다. 이렇듯 놀이의 역할은 자기가 배우는 태도와 힘을 파악하고, 그 힘과 태도를 선용하게 하는 것이었다. 놀이는 재미뿐만 아니라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182-185


스스의 역할이 중요하고 결정적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스스로를 자 안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의외로 내가 나를 잘 알기는 힘들다. 내 얼굴을 내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스승은 제자의 기량과 그 한계뿐만 아니라 제자가 배워나가는 태도를 관찰하고 파악하는 게 전문인 사람이다. 185


세상을 대하고 집중하고 그 집중을 지속시키는 나의 태도를 알아가는 것이 바로 자신에 관한 앎이다.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은 곧 자기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알아간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듀이가 공부의 과정을 통해 사람은 학습하는 방법을 학습한다고 말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승산 큰 스님의 화두인 오직 모를 뿐’ ... 스님의 화두를 디딤돌 삼아 궁리하다 발견한 내 배움의 힘이자 방법, 태도는 오직 물을 뿐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묻는 사람이었다. 질문이 주어지면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 질문이 타당한 질문인지, 의미 있는 질문인지, 질문에 관해 질문을 할 정도로 끊임없이 묻는 것이 내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였다. 185-186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은 자기의 성장을 돌보고 지속적으로 도모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래야 나의 삶이 서사적인 것이 되고, 그런 서사적인 삶이 되어야 그걸 자기 삶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삶에 이미 자기가 없는데 자기에 대한 배려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

자기를 안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 세상을 대하는 자기 태도를 안다는 말이 된다. 그래야 자신의 성장을 목적의식적으로 도모하며 성장을 방해하는 것을 회피하여 무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189


자기를 배려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타자에게 넋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를 배려할 수 있다. 190


부모들에게, 자식이 공부를 잘하지 못해서괴롭지 않냐고 묻는다. 그러면 다들 괴롭다고 대답한다. 그럼 그 괴로운 마음을 잘 다스리고 있는가를 물어본다. 그 무엇보다 어렵다고 대답한다. .. 그래서 다시 아니, 자기 마음도 못 다스리는 분이 어떻게 남의 마음을 바꾸겠다고 말씀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말문이 막힌다. 190-191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나쳐 자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식에게 넋을 놓는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자기도 배려하지 못하고 자식과의 관계도 망친다. 자기 자신이 성장해야 하는 문제를 자식의 공부 문제로 돌려버린다. 191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타자라고 하며, 타자의 ‘3대 마왕이 있다. 그 첫째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둘째가 자기가 가르치는 사람이며, 셋째가 이 둘을 합쳐놓은 존재인 자식이다. 이들을 만날 때 깨닫게 된다.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걸 말이다. .. 완전히 깨닫게 된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말이다. .

이 순간 사람은 타자의 끝판왕을 만난다. 3대 마왕의 뒤편에 숨어 있던 끝판왕 말이다. 그게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야말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타자의 끝판왕이다. 내가 나를 다스리는 기예의 한계에 부딪치고 나서야 내가 내 마음 다스리는 법을 모른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은 자명하다. 내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다. 나에게 집중할 때 이 문제를 다룸의 기예, 즉 자식이 아닌 내 배움의 문제로 전환할 수 있다.

이것이 관건이다. 우리는 문제를 나 자신의 배움의 문제로 전환할 수 있는가. 이렇게 전환해야만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재능의 문제를 기예의 문제로 전환하고, 다른 사람의 문제를 내 기예의 문제로 전환할 때,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문제를 배움의 문제로 전환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으며 해결할 수도 없다. 이것이 자기 배려의 초점이다. 전환의 배움은 문제를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192-193




03 공부, 재미에서 기쁨으로

03-7 공부, 성장의 기쁨

해치우는 것으로서의 공부에는 해보는 것만 넘쳐난다. 더구나 이 해치우는 것에는 해보고 난 뒤 결과가 돌아와 나에게 교훔을 주는, 그런 겪음이 없다. ..

이런 공부에는 연속성이 없다. 앞에 한 공부와 뒤에 하는 공부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과 연속성이 없다. 197


삶에서 배움은 필연적인 것(necessity)이다. 듀이가 쓴 <민주주의와 교육>의 옮긴이인 이홍우가 주석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necessity는 필요성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필연성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필요성으로 번역한다면, 이 말은 공부는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인간은 살아 갈 수 없다.한편 필연성으로 번역한다면, 이것은 사람은 살아 있는 한 의식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공부가 함께한다는 뜻이 된다. 전자는 살아가기 위해 목적의식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이 되고, 후자는 살아가는 한 자연발생적으로 사람은 배우고 있다는 말이 된다. ..

성장의 핵심은 연속성이다. 경험의 갱신을 통해 삶이 연속적으로 진행될 때, 우리는 그것을 성장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삶에서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바로 삶의 연속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삶의 연속성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목적의식적인 과정이 바로 좁은 의미에서의 교육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교육이란 자기 경험을 연속적으로 바라볼 줄 알고 만들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성장의 기쁨은 연속성에 있다. 198-199


생각의 핵심은 연관 짓는 것에 있다. 지금 일어나는/하는 일과 뒤에 벌어질 일을 관계 지어 생각하는 것이 지적 활동이다. ...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것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 즉 연관성을 알게 될 때 무질서해 보이던 것의 질서가 보인다. 분별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질서가보이면 내가 그 사이 어디에 개입해야 하는지 보여서 통재할 수 있다. 개입을 통해 바꿀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힘이 지적 쾌감을 준다. ..

지적 쾌감은, 내가 알지 못했다면 연관 짓지 못할 것을 연관 지음으로써,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기량이 늘어나는 데서 온다. 따라서 지적인 흥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결과에 관한 관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한 사람만이 왜 그런 결과가 나오는지에 지적인 흥미를 가질 수 있다. 결과에 관심이 있어야 결과를 예상하거나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현재의 조건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또한 가능한 대안들 사이에서 적절한 수단을 고른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머릿속에서 계속 시뮬레이션을 하고 궁리를 한다. 이것이 지적인 활동이다.

결국 지적 활동이란 원인과 결과, 자기 행동과 영향의 연속성을 가늠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적 활동은 연속성에서 중간 과정을 발견한다. 사람이 지식에 흥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작 단계의 조건과 예상되는 결과 사이에 무엇인가있다는 것을 알 때다. 그 무엇을 알면 시작과 결과를 연결할 수 있다. ‘현재의 힘도달해야 할 목적사이를 연결하는 수단을 듀이는 중간 조건이라고 말한다. 듀이는 사람들이 중간 조건에 흥미를 가지는 이유는 바로 현재 진행 중인 활동이 장차 예견되는 소망의 결과에 도달하는가의 여부가 그것에 달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중간 조건을 알아야 과정을 통제하면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지적 활동이란 중간 조건을 계속해서 알아가는 과정이다. 201-202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을 그저 경험의 수준으로 내버려두지 낞고 그 이치와 원리를 파악하게 되는 것이 바로 지적 과정인 것이다. 203


초심자일수록 배움의 과정에서 그 배움의 결과가 자기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 예상되는 결과에 자신이 영향력을 가지고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204


배우는 이의 기량으로 시작과 결과를 파악할 수 있게 하려면, 현재 배우는 이의 삶/수준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것을 시작점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중간 조건을 발견하는 것 또한 배우는 자의 기량에 맞춰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가르치기 위해서는 배우는 자의 한계와 기량을 파악하고 아는 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205


학교와 가튼 교육현장이 배우는 곳이고 배움을 장려하는 곳이라면, 모르는 자의 용기를 환대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배우는 사람이 자신의 무능과 무지를 드러내는 것을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칭찬하는 곳이 배움의 공간이다. 따라서 배우는 사람이 모른다고 말할 때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보다 환대하며 기뻐해야 한다. 그 모르는 자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자신이 가르치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7


미래가 예측되지 않거나, 미래를 안다 해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결코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214


진지하다는 건 재미를 파괴하는 짓이고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되는 세상이다 바로 이런 현상이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는 것을 방해한다. 생각이 깊어지면 설명충’, ‘진지충’, 나아가 씹선비라는 욕망 먹는다. 굳이 말을 하려면 세 줄 요약이 가능한 사이다같은 말만 해야 한다. 길게 이야기해서는 절대 안 되고 복잡하게 말해서도 안 된다. 이 때문에 더더욱 사람들이 서사적인 삶을 추구하기가 힘들어진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외면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가 횡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따라서 이 시대에 성장의 기쁨을 느끼는 것은 괴로움을 감수할때만 가능하다. 자칫하면 고립되고 외로워질 수 있다. .. 공연히 어려운 이야기를 해서 좋은 자리를 망친다는 핀잔을 듣기 쉽다. ‘프로 불편러라는 욕을 먹을 수도 있다. 베스트셀러가 된 제목처럼, 이 시대에 성장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215-216


나는 앞으로 두 가지 기쁨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하나는 자유와 창조의 기쁨이고, 다른 하나는 향유의 기쁨이다. 사람은 배움으로써 이 두 가지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세상의 법칙을 알고 목적에 맞게 잘 사용하는 선용을 넘어, 그것을 변용함으로써 사람은 자유로워지고 창조의 기쁨을 누린다. 창조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능수능란한 기예를 배우고 익히며 연마하는 과정이 바로 공부다. 한편, 인간은 창조하지는 못할지라도 여전히 공부를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누릴 수 있다. 창조하고 향유하는 삶, 이것이 멋진 삶이며, 멋지게 사는 것은 삶의 목표이자. 공부의 쓸모다.

창조와 향유, 이 모두에서 인간이 누리는 기쁨이 바로 성장의 기쁨이다. 216-217



03-8 공부, 자유와 창조의 기쁨

기예란 나에게 주어진 것을 내가 얼마나 잘 다루는가의 문제다. 기예에서 탁월함은 다룸의 정도가 된다. 다룸에서 관건은 5분의 숨과 1분의 숨을 비교하는 게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인 1분의 숨을 얼마나 잘 다루고 그 숨으로 무엇을 하는지다. ...

그러므로 다룸은 능수능란함을 지향한다. 내게 주어진 것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을 때 기적이 일어난다. ... 능수능란함이 주어진 것을 변용할 수 있게 하고, 그 변용을 통해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219


새로운 것의 탄생을 보는 것만큼 기뿐 일은 없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왕자든 거지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220


사람이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

이 말이 가진 의미는 지대하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직면한 근원적인 한계를 지적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존재가 아니므로, 이미 잇는 것, 주어진 것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 인간이 무엇인가를 선용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앎은 활용의 전제다. 221


우리는 주어진 것을 세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첫째 나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다. 육체적 한계나 재능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 사회적으로 주어진 것이 있다. 신분이나 재산 같은 것이다. 이것은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정의를 요구해야 할 문제다. 개인의 역량 문제가 아니다. 셋째, 인간을. 넘어서 존재 전체에 공통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자연법칙이 있다. 자연법칙은 모든 존재에게 근원적인 한계로 주어진다. 221-222


앎은 활용의 출발점이다. 안다는 것은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주어지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출발점이 될 수 없다. ...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의 경계를 아는 것, 그게 바로 자기 한계를 아는 것이다. 한계를 아는 사람만이 무리수를 두지 않고 자기를 배려할 수 있다. 223-224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난 다음에 구분해야 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주어질 수 있는 것과 주어질 수 없는 것의 구분이다. 만일 우리가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만을 구분한다면, 사람의 삶에 성장이란 있을 수 없다. ..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결코 주어질 수 없는 것과 어떤 경우에는 주어질 수 있는 것으로 구분된다. 전자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만 후자를 포기하는 것 역시 어리석다. 224


노력도 안 해보고 어떻게 아느냐, 지레 포기한 것 아니냐고 말할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한 것이 충분히 시도해보는 것이다. 내가 충분히, 원 없이 시도해보고 난 다음에는 알 수 있다. ...

충분히 해보면서 자신에게 재능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재능을 발견하기도 한다. 225


중요한 것은 재능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라는 점. 226


재능과 같이 개인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것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 주어진 것을 활용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사회가 있다. 이런 경우 사회적으로 주어진 것사이의 불평등 문제를 반드시 제기해야 한다. 227


사회적으로 주어진 것에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바로 활용의 불평등이며 이 불평등을 시정하는 것이다. 228


좋은 사회란 주어질 수 있는데 주어지지 않은 것을 평등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보정하는 사회다. 좋은 사회란, 사회만 훌륭하고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별 볼일 없는 사회가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 하나하나가 훌륭해지는 것을 공공선으로 삼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228


앎은 활용의 전제다. 문제는, 안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곧바로 활용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공부를 해본 사람은 안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걸 해보려고 하면 생각대로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 이때 만나는 것이 서투른 자기.

이 서투른 자기는, 알기는 하되 활용할 줄은 모르는 상태다. ... 이때 그가 처하는 상태가 바로 부자유.. 자신이 전혀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것이다.

능수능란하게 도구를 다루고 싶다는 갈망이다. 이게 바로 자유다... 자유란 멋대로 하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란 내가 다루는 도구들의 결을 알고 흐름을 타면서 내몸의 일부처럼 이질감 없이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이다. 229-230


미국의 인류학자인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은 이것을 생각하는 손이라고 불렀다. .. 배움은 머리-앎을 넘어 손-다룸으로 옮겨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배움이 사변적인 것이라면 익힘은 그 배움을 육화, 즉 물질로 만드는 과정이다. 육화되지 않는 배움은 쓸 수 없는, 그렇기에 쓸모없는 배움이다. 그렇기에 배움은 앎의 문제에서 다룸의 문제로 전환된다. 230


도구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생각하는 손은 자유로운 손이다. 그 자유가 단지 자유자재와 동의어로서 능수능란함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자유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에 갇힌 존재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한계다. 자신의 육체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도구를 통해 자신의 육체라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다. 그 도구를 자유자재로 다룸으로써 도구와 사람이 하나가 될 때, 그 사람은 인간의 근원적. 한게를 넘어서는 존재가 된다. 인간의 근원적 한계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231


능수능란함의 방법론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손을 다루는 기본에 관해서 말할 수는 있지만 손의 힘을 조절하는 것은 자기가 해보면서 깨닫는 수밖에 업사다. 다룸은 익힘의 문제다. 익힘을 통해 알아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익혀가는 경험 없이 다룰 줄 알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어떻게라는 질문은 다룰 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던지는 질문이다...

익힘의 과정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스승이다. 스승이라고 방법에 관해 가르쳐줄 수는 없지만 제자가 익혀가는 과정을 관찰하면서 그가 주의해야 할 것과 좀 더 연마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 보지 않고서는 가르쳐줄 수가 없는 것이 익힘의 과정이다. 232-233


자연법칙에 관한 ... 법칙은 지키되 그 법칙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유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내가 법칙을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활용할 수 있는지가 자유의 척도가 된다. 234


생각하는 손이 매혹적이며 아름다운 이유는 이 자유가 새로운 양식을 만들기 때문이다.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자유란 뻐칙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활용하여 새로운 양식을 만드는 것이라고했다. 법칙이 주어진 것이라면, 자유는 주어진 것의 바깥으로 탈출하는 게 아니라 그 주어진 것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여 걸림거침없이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양식이 된다. 이런 활용을 변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기예(技藝)라고 부른다. 이렇게 자유로운 손을 만나 매혹되었을 때, 사람들은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 욕망은 성공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예술적 완성에 대한 욕망이다. 이런 매혹 없이 사람이 공부의 길로 들어서기란 불가능하다. 236-237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유를 성공으로 전도시킨 사회에서 살아간다. 한계를 인정하고 자기를 배려하며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꼭 묻는다. 한계를 인정함년 자기 꿈과 이상을 포기해야 하느냐고 말이다. 꿈이 뭐냐고 물으면 요리사와 같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을 든다. 그러면 동네 중국집 요리사가 되는 것도 요리사이니 꿈을 이루는 것 아니겠냐고 말하면, 그건 아니라고 한다. 동네 중국집 요리사도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는 자장면을 만드는데 그건 왜 아니냐고 물으면, 성공한 삶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답한다. 7성급 호텔 요리사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해야 한다. 꿈과 이상이라고 말하지만 그 실체는 사실 성공이다. 자유에 대한 매혹이 아니라 성공에 대한 매혹일 때 그건 자기를 파괴하는 지름길이 된다. 237-238


매혹은 또한 자유로워지는 과정을 견디게 한다. 자유로워지려면 능수능란해져야 하고, 능수능란해지려면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익힘의 과정은 고단하고 지루하다.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고, 그 반복에서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기쁨을 누리기 힘들다. 창조를 기대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변용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생각하는 손의 능수능란함에 대한 매혹 없이는 이런 익힘의 과정을 견딜 수 없다. 배움은 미적 매혹에서 시작하고, 이 매혹이 배움을 견디게 한다. ...

배움에 이어 익힘이 있지 않으면 사람은 절대 자유러워지지 않는다. 238


창조는 앎의 문제에서 다룸의 문제로 공부의 초점을 이동시킨다.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룰 수 있을 때그것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을 때 새로운 양식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다룸이 바로 그 사람의 탁월함의 척도가 된다. 239


한국의 교육이 가진 문제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배우는 것은 많은 데 다룰 수 있는 것이 없다. 배우기만 할 뿐 익히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 정답만 외우는 공부를 하다 보니 익힘의 과정이 없어지고, 익히는 게 없다 보니 할 줄 아는 게 없는 무능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참혹한 것은, 이렇게 익힘이 생략된 채 배우는 것만 많은 상태가 10년 넘게 이어진 결과, 익힘의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학생이 속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240-241


사실 익힘의 과정은 지루하다. .. 익히려고 할 때마다 좌절하게 된다. ..

익힘의 시작 단계에서 이 지루함을 견디게 하는 것은 매혹이다. 그러나 매혹의 힘이 끝까지 가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익힘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익히는 과정에서 또 한 번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은 익힘의 결과에서 과정으로의 전환이다. .. 익힘의 과정에서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어떤 기량이 생기는지 알기 위해 다시 한번 자기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익힐 때, 많은 경우 우리는 익힘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고 익힘의 결과에 집중한다. 그러다 보니 익힘의 과정에서 배우고 익히게 되는 차원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넘어간다. 익힘 자체의 기예가 향상되는 것 말이다. 243


익힘의 과정에 있는 이는 익힘의 결과에 넋을 놓지 말고 익힘의 과정에 있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 .. 익힘의 기예에서 가장 중요한 견디는 힘이 생긴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루함을 견디는 힘이다. ..

물론 여기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우리는 이 견디는 과정에서 다시 자기 한계를 생각해야 한다... 견딜 수 없는 지점, 견뎌서는 안 디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는 견딜 수 없다는것을 명확히 해야 한다. 무작정 견디는 것은 우매한 짓이다. ..

무작정 견디라고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고 착취다... 많은 회사나 기관이 배우고 익히게 한다는 핑계로 사람이 견딜 수 없는 모욕과 무시, 그리고 착취를 일삼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반드시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기에 대한 배려다. 244-245


배움을 통해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배우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다. 배우는 습관이 생긴 사람만이 계속 배움을 이어나갈 수 있다. 245



03-9 공부, 지적 쾌감과 향유의 기쁨

멋진 작품을 만났을 때 우리는 경탄한다. 그것이 예술 작품이든 자연 작품이든 말이다. .. 그거 아름답다, 멋지다고 느끼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작품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작품 너머에 있는 기예를 고민하게 된다. 사람의 기예가 아니더라도 도대체 무엇이, 어떤 과정으로 이런 멋진 것을 만들어냈는지 궁금하고 알고 싶다. .. 이 기예에 눈이 가야 사람은 순간적인 경탄을 넘어 기예에 관한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이처럼 경탄은 기예에 호기심을 가지게 하는 출발점이다... 공부를 시작하게 하는 첫걸음은 바로 경탄이다. 249


먼저 경탄에 관해 알 필요가 있다. 250


너무 아름다워 위협감을 느끼게 하는 이 감정은 유쾌하지 않다. 미학에서 이야기하는 바로는 숭고미에 가깝다. 칸트는 인간의 미적 체험을 숭고미와 아름다움으로 나눈다. 아름다움은 사람이 질서정연한 것을 보았을 때 나오는 쾌()의 감정이다. 쾌락의 캐다. 즐거운 감정이다. 반면 단적으로 큰 것을 만났을 때 느끼는 것이 경악이다. 내가 이전에 경험하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만나면 사람은 경악하게 된다. 이 경악을 쾌가 아니라 불쾌의 감정이다....

그 괴로움은 그저 괴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한 것을 만났다는 흥분에 넘치는 괴로움이었다. 칸트가 말하는 숭고미라고 볼 수 있다.

경탄 중에서도 이런 경악이 가장 강렬한 체험이며, 사람을 공부의 길로 이끄는 경탄이다. 공부라는 게 뭔가? 왜 그런지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대상을 보고 경악하는 것은 그걸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지식이나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 경악은 내가 모르는 것, 절대적으로 모르는 것과 만나는 경험이다. 251-252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이어서 놀랍긴 하지만 위협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에 관련되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

경악이나 경탄의 실체는 바로 경이(驚異).(이 책에서 나는 경탄과 경악, 그리고 경이를 구분해서 사용하지만, 이 셋의 공통점은 말을 잊을 정도로 놀라는 것이다) 전적으로 이질적인 경험이다. 그것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알지 못하던 존재 타자이다. 254


이름이 있다는 것은 분별의 결과다.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각각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 255


지식의 가장 큰 힘이 바로 분별력이다. 경이롭지만 아직 분별하지 못하던 것을 분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지식이 힘이다. 공부는 이 힘을 키우는 과정이다. 255


부는 분별의 힘을 키워가는 과정이다. 분별의 힘이 있을 때 비로소, 대상에 압도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불쾌에서 쾌로 나아갈 수 있다. ...

알면 향유할 수 있다. 향유하는 과정에 앎이 배치되어야 한다. 256


모르는 자에게는 무질서해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는 자에게는 그렇게 질서정연한 것이었다. .. 지식의 힘은 사물과 사리를 분별하는 것이고, 분별하는 자만이 경탄을 너어 향유할 수 있다. 257-258


무지하니 자유롭고 능수능란하게 향유하지 못한다. 충분히 즐길 수 없다. 그러니 무지하면 아름다움 앞에서 기쁨을 느끼는 게 아니라 답답한 , 즉 슬픔을 느낀다. 이런 답답함이 공부를 시작할 마음을 먹게 한다. 258


자연은 경탄을 통해 향유로 나가게 하는 좋은 대상이며 향유의 언어는 수학적이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분별하고 그 움직임이 만드는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언어가 바로 수학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를 들면, 기하학을 모른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이라 말하는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의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없다. 알람브라궁전에 흐르는 물의 배치와 흐름, 그리고 궁전의 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과 빛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은 기하학을 모른다면 결코 향유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아름다움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기하학이라는 지식이 필요하다. 258-259


경이로움을 느낀다고 해서 모두가 그 경이로움을 배움으로 이어가는 것은 아니며,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260


듀이는 인간의 경험을 해보는 것겪는 것으로 구분했대 무엇을 할 때마다 우리는 무엇을 겪는다. .. 그러나 겪는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이 인지되는 것은 아니다. 겪는 것들 중에서 대다수는 그저 지나간다. 이렇게 지나가는 겪음으로는 배움이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겪음을 통해 사람이 배운다고 할 때 그 겪음은 내가 예기치 못한 것, 알지 못하는 것과 만나는 순간이다. 나를 압도할 정도로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261


이런 경험이 사람을 배움으로 이끈다.

겪는다고 바로 배움이 일어나는 게 아니다. 중간에 또 다른 과정이 있다. 그것을 하나씩 들여다보자. 첫째, 내가 예기치 못한 것을 겪었을 때 사람에게 반드시 떠오르는 것이 질문이다. “, 이게 뭐지?” “이게 왜 이렇지?” “어떻게 이렇게 되지?” 예상 하지 못한 것을 만나게 되는 순간 깨닫는 것은, 지금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는 사실이다.

모르기 때문에, 그 반응은 일단 질문의 형태로 떠오른다. 다른 말로 하면, 질문이 발생하지 않는 겪음은 겪음이라고 할 수 없다. 겪자마자 그게 무엇인지 알면, 해결하면 그만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속담처럼, 사람은 아는 것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질문이 없다는 말이다. 질문을 거치지 않고 바로 해답으로 직행하게 된다. 262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생각이다. 질문을 하고 답을 찾기 위해 생가가하는 것은 이 과정 자체에 매혹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리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질문하고 답을 찾기 위해 씨름하는 이 지적인 과정이 주는 쾌감, 즉 분별의 힘이 커지는 걸 경험한 사람만이 이 과정을 견딜 수 있다. 263

경이로움에 충분히 젖고 난 다음에, 그 경이로움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알때 호기심을 갖는다... 경험을 통해 무엇인가를 느끼고 질문이 떠오르면, 그것에 관해 생각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264


경탄이 공부의 춟라점이라고 할 때, 경탄은 감수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감수성이 좋은 이는, 다른 사람은 그저 그런 일로 넘어가는 것도 새롭고 경탄할 만한 일로 경험한다. .. 자극에 지나치게 많이 노출되는 바람에 역치가 높아져서, 어지간한 자극으로는 경탄하지 않게 된 것이다. 모든 게 시시해져버려 경탄할 만한 것을 만나기가 힘들어진다. 이런 경우에도 배움은 잘 발생하지 않는다. 265-266


기 드보르(Guy Ernest Debord)라는 프랑스의 철학자는 우리가 스펙터클, 즉 구경거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스펙터클은 시시하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를 압도한다. 더 큰 크기로, 더 바른 속도로, 더 짜릿한 것으로 사람을 압도한다. 이런 식으로 스펙터클에 압도당하고 나면 다른 모든 것은 시시해지지 않을 수 없다.

스펙터클 사회의 더 큰 문제는 모든 것을 스펫터클, 즉 구경거리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이다. 아무리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 해도, 구경거리가 되면 더 이상배우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지 않는다. 스펙터클은 구경, 즉 소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배움도 마찬가지로 소비가 되고 있다. 지금은 대가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것이 귀하고 드문 일이 아니다. ...

이처럼 스펙터클 사회에서는 배움의 과정이 구경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266


배우는 사람과 공부를 구경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지점에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배우는 사람은 자기에게 집중한다. 공부를 통해 나에게 늘어나는 것이 있는지, 그것이 잘 늘어나고 있는지 관찰한다. 배움의 목적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로부터 배우든,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에게 집중하는 게 배우는 사람이다. 자기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배우는 것이 없다. 반대로, 구경하는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에게 집중한다. 특히 그가 잘 가르치는지 못 가르치는지에 집중하며, 그가 가르치는 것을 즐기고자할 뿐이다. 따라서 놀랍게도, 구경하는 사람은 자기의 성장에 관심이 없다. 자기에게서 무엇이 성장하는지 보는 게 아니라 상대가 나를 잘 접대(entertain)’ 하는지 아닌지에만 관심이 있다. 서비스가 좋으면 만족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만을 제기한다. 그래서 구경하는 사람의 말은 언제나 품평이다. 말하는/가르치는 사람에게 집중하니 그 사람에 대한품평만 있지 자기 성장에 관한 말은 없다. ...

품평을 통해 마치 내가 그것을 알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

이것이 많은 배움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성인의 경우, 배우는 사람 스스로가 자기 배움의 현장을 구경거리로 만든다. 여기저기에서 인문학 강좌니 뭐니 듣고 배우는 자리는 많아졌지만, 그런 자리의 상당수는 공부를 구경거리로 만들어서 소비하고 품평하는 자리다.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그것이 뭘 배웠는지에 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고 강의에 관한 말만 넘쳐나는 게 그것이 구경이었다는 증거다. 267-268


우리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기예로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270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이 있다. 향유와 문화자본의 관계다. 향유와 문화자본의 관계에 대한 긴장이 없으면 먹방이나 보고 있는 사람들을 속물이라고 경멸하게 된다. 대신, 문화자본이 많은 이들만 향유의 기예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층 계급에 대한 경멸과 혐오는 대부분 이 문화자본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학교에서도 옷을 촌스럽게 입거나 친구들의 문화끼지 못하는 학생이 소외되고 따돌림당할 가능성이 크다. 271


나는 학교가 해야 하는 일이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 전체를 통해 강조한 것처럼, 배우는 이를 잘 관찰하고 그가 가진 향유의 기예를 발견해 같이 언어화하는 일이다. 그가 좋아하는 것, 혹은 흔히 취향이라고 부르는 것을 아름다움의 향유라는 관점에서 보고 그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같이 찾아보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배우는 이 스스로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위에서 축구를 좋아하는 학생의 말을 통해 수학의 아름다움, 협력하는 기예의 아름다움, 윤리적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언어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가르치는 일 아니겠는가.

다른 하나는, 학교가 학생들의 경제적/사회적 차이와 상관없이 모두 여러 가지 문화적인 것을 즐기고 그 향유의 기예를 키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의 제도교육은 교육이다. 공교육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이를 걔급과 상관없이 보편적인 시민으로 양성한다는 점이다. 귀족만 데려다가 귀족 취향으로 키우는 게 아니라, 이 나라의 보편적인 시민으로서 누구나 어느 수준의 교양을 가지고 세상을 향유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문학이며 음악을 가르치는 게 이런 이치 아니겠는가

이것은 학교만의 문제나 사명이 아니다. 사실 학교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제 역학을 해야 하는 것은 국가라고 할 수 있다. 274


세상은 아름다움을 향유한 사람들이 바꾼다.’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불러오는 도심 재개발에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여행을 다니면서 슬럼화한 동네를 재생하는 곳에 가보고 그 아름다움에 반한 사람들이다. 도시 재생이 재개발이나 그럴듯한 벽화 몇 개 그린 후 관광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나고 교류하며 그 만나을 가꾸는 것이며 그게 아름답다는 걸 느끼고 돌아온 사람들이다.

아름다움을 알기 때문에 이들은 눈에는 추한 것이 바로 들어온다. 사람의 삶을 파괴하고 흩어지게 하는 것이 추하다. 벽화 몇 개 그려놓고 사람들의 삶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키는 것이 추하다. 이들에게는 지금 곳곳에서 벌어지는 재개발이 정화’, ‘미관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추하게 진행되는지가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 추함에 맞서는 일도 할 수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안목이 없었다면 이런 저항이 가꿈, 돌봄, 재생의 방식으로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공부의 목적으로 실제적으로 쓸모 있는 것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로 교육이니 실용 교육이니 하는 말로 공부의 쓸모를 직업과 돈벌이 수단으로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공부의 의미와 목적을 너무나 도구화한다. 신분 상승이나 성공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목적이다. 275-276


공부의 쓸모를 획기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276




나가며

설령 자기를 얻는다 하더라도 : 사회를 만드는 기예를 향하여

푸코는 훌륭한 삶이란 주어진 규칙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형식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 공부는 자유롭기 위해 하는 것이다. 교육은 사람을 해방하는 과정이다.

문제는현대 사회에서 자유가 처한 운명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흔히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자유/해방을 통해 사람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시대다. 자유를 억압함으로써만이 아니라 사람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통치한다. 각자에게 표준적인 삶을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개성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권장한다. 그렇지 못한 삶은 지질하다고 비난하고 조롱한다. 그래서 우리는 개성을 가진 존재가 되기 위해 각자 자기계발 하느라 노오력하며 살아야 한다.

여기에 이 시대의 자유의 딜레마가 있다. 한편에서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해방이 사람들의 삶을 위험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본문에서 누차 강조했듯이,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노오력하며 사람의 삶을 파괴하고 잇느 것도 자유/해방이다. 마르크스가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농노들이 얻은 자유는 굶어 죽을 자유라고 말한 거서럼, 이 자유는 곳곳에서 사람들의 삶을 일회용으로 착취하고 폐기하며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다. 파탄에 몰린 이 자유로운사람들은 자기를 탓하는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자기 노력과 능력의 부족을, 나중에는 많은 것을 물려주지 못한 부모를,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이 모든 것을 이번 생에서의 운명 탓으로 돌리며 죽어간다.

우리는, ‘사회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처한 이런 공통의 운명에 관해 알아야 하고, 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281-282


이 시대의 교의인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통해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렸지만 동시에 자유 자체를 위험에 빠뜨렸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람이 알고 다루며 스스로의 양식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과정을 통치로 흡수함으로써, 자유를 추구하는 게 자유를 위협하는 것이 되는 딜레마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사회를 외면한 자기 배려, 타인의 해방을 저버린 자유란 또 다른 자기계발이 되고 말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282-283


한 사람 한 사람이 해방되고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공동선(共同善)이 되는 사회를 도모할 때 자유는 위험한 것도 아니고, 자유가 위험해지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자유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285

Posted by WN1
,



하승창 - 세상을 바꾸자, 언제? 롸잇나우!(공부의 장을 열며)

다른 정치 세력이라고 해도 차이는 별반 없어 새로운 희망을 주고 있지는 못하다. 몇몇 정치인들이 몸으로 함께 부딪히는 '고마운' 정치 활동을 해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위로는 될지언정 문제를 해결해주고 있지는 못하다. 영향력이 약해진 시민단체들은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해도 그렇게 과거처럼 돋보이지도 않는다.

누가 대신해주지 않는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세상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 말하고 우리 스스로 매듭을 풀어가야 한다.  7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힘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꿈꾸는 순간 변화를 향한 우리의 열망은 현실이 될 수 있다.

변화와 공존, 정의와 행복이라는 우리 시대 가장 뜨거운 쟁점과 화두에 대해 함게 고민하는 시도.  8



"모든 것의 시작은 위험하다. 그러나 무엇을 막론하고,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 프리드리히 니체



신영복 - 변화와 불변, 강물처럼 

"삶은 흐르는 강물입니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흐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부딪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텅 빈 사랑입니다." - 수많은 소리와 풍경을 담은 잠들지 않는 물처럼, 신영복  14

우선 변화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뼈대를 지키자', '사람'  17

미셸 푸코는 감옥이란 건 물론 범죄자들을 격리 구금하는 공간이나 시설로 알고 있지만 사실 감옥은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은 갇히지 않았다는 착각을 하게 하는 그런 정치적 장치라고 말입니다.(미셸푸코는 감옥이 문명의 기초가 되는 가장 기본적인 틀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책<감시와 처벌>에서 감옥을 정점으로 하는 감시, 처벌 기구인 가정, 학교, 군대, 병원, 공장 등을 분석하고 사실상 근대사회를 감금사회, 관리사회, 처벌사회, 감시사회로 바라보았다. 푸코에 따르면 우리를 길들여 사회가 바라는 인간으로 탈바꿈시키는 학교나 군대, 아니 사회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라고 할 수 있다.)  21

'역사는 변방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25

중요한 것은 광대한 변방 영역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여럿이 같이 가는 것입니다. 여럿이 함께 가되 속도, 목표, 효율보다는, 그 과정 자체가 인간적이고 아름답고 가치 있어야 됩니다. 

길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도로'가 속도와 효율 자본의 논리라면, '길'은 인간적인 논리 아닐까요? 도로는 직선이지만 길이 직선으로 되어 있는 건 없습니다. 동물들도 대개는 곡선으로 나아갑니다. 냄새도 맡고, 소변도 남기면서 그렇게 가거든요.  26



신영복 - 새로운 변화, 새로운 창조성은 변방에서

새로운 변화, 새로운 창조성은 늘 변방에서 나타납니다. 중심부는 언제나 기득권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는 영역입니다. 중심부에서는 창조적인 변화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의 전개 과정을 보더라도 문명의 중심부는 늘 변방으로, 변방으로 옮아갔어요. 왜 그러냐면 중심부의 저항이 완고할 뿐 아니라 변방은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새로운 것이 태동할 수 있는 창조의 지반이거든요.

하지만 지금 논의되고 있는 연대연합에 관한 이야기는 주로 기존의 집단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일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연합이 그 바깥에서 이루어져야 된다고 봐요. 바깥이라는 것은 반드시 공간적, 물리적인 외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이해관계 집단이 자기 영역들을 과감하게 개방하고 제거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봐요.

알랭 바디우는 탈근대 철학자 가운데 주체 문제를 고민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의 탈근대 담론의 핵심은 '주체해체'입니다. 바디우는 주체해체가 가져오는 무정부성, 무장해제에 대한 위험성을 간파하고 있지요. 주체는 기존의 주체를 승계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원래 주체는 후사건적 실천 과정에서 형성된다고 주장해요. 기존의 진리 체계의 바깥에서 사건으로 돌출하고 그 사건에 충실한 실천가들의 꾸준한 노력이 사후적으로 주체를 만들어낸다는 거죠.(알랭 바디우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주류가 된 들뢰즈에 반대하여 '진리'와 '보편성'을 주장하는 플라톤주의적 전통과 이성적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데카르트주의적 전통을 잇는 프랑스 철학자이다. 알랭 바디우는 주체를 일컬어 '진리의 투사'라고 말한다. 즉, 주체는 진리라고 믿는 것에 대해 충실성을 다하는 상태이며 주체는 존재론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34

외부와 바깥, 변방과 마이너리티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35

먼저 우리 인식의 틀이라든가 우리의 정서를 바꾸어야 해요. 사람이란 게 자기 경험에 갇히기 쉽지요. 우리가 자주 듣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수사는 한마디로 자기 경험 지상주의죠. 좁은 틀에 갇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의 개인적인 경험, 또 우리 시대가 갇혀 있는 문맥, 이걸 깨뜨리는 게 필요합니다. 그게 아주 중요합니다.  37



백낙청 - 원(願 원할 원)을 말하다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 - 전태일

"기본적인 상식이랄까 교양이랄까 인간적인 예의나 염치, 이런 것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지도 되고 평화도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지요." - 새로운 시대의 열쇠란, 백낙청



천준호 - 우리가 꿈꾸는 나라

한국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 정치가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굉장히 넓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치는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민들의 열망은 높은데, 현재의 정당들이 정치를 바꾸는 과저에선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그 때문에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개입해서 정치를 변화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요?  54



정수현 - 진짜 대학이란 무엇인가?

어떤 지점들을 Re디지인해야 하나?

사회 안에서 대학의 가장 바람직한 역할은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또한 대학 시절만큼은 우리 시대의 바람직한 '가치'에 대해서 끊임없이 묻고 배우고 관계를 맺는 학문의 장이 되어야 해요.

하지만 오늘날 대학들은 평가 시스템과 같은 성과주의나 순위 매기기(몸값 높이기)에 급급한 채 실용적이고 실무적인 과목에만 집중하고 있어요. 인문학의 위기나 기초과학 및 다양한 분야에서 고르게 인재들이 배출되지 못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대학이 '취업학원'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은 부끄럽지만 사실이 되어 가고 있어요.  62

Re디자인을 위한 주요한 의제로는?

첫 번째는 한국 대학들의 구조적 문제(대학생 당사자 권리찾기, 대학의 가치 철학과 경영 방식 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현재 대학이 배움의 장으로서 적절하게 기능하고 있는지, 학생 주체들이 설 곳이 얼마나 제대로 마련되어 있는지, 기업화된 대학들로 인해서 생길 미래의 문제들은 무엇인지 가감없이 이야기 나누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두 번째는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주체들의 역할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즉, 가장 중요한 대학 주체인 대학생들과 교수들, 대학 경영진들, 일반 시민사회, 언론, 정책결정자 등 각각이 대학이라는 공간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 필요한 방안을 다자적 접근으로 마련하는 것입니다.  64



조성주 - 청년에게 '빚'이 아닌 '빛'을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 질러!" 사람들은 아프니까 청춘이고, 청춘은 원래 방황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사회구조적으로 청년들이 자연스레 연령이 높아지면서 취업도 되고 가족도 꾸리고 하는 것이 가능할 때 할 수 있는 위로입니다.  75



"스스로 배울 생각이 있는 한, 천지만물 중 하나도 스승이 아닌 것은 없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스승이 있다. 하나는 대자연, 둘째는 인간, 셋째는 사물이다." - 장 자크 루소



박웅현 - 공존! 가슴의 울림으로

B.C. 10,000년부터 시작해서 수평을 달리던 인구곡선이 산업혁명 직후부터 해서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개체 수가 갑자기 확늘어나니 다른 데에 피해가 생길 수밖에 없는 거, 이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거 같습니다.  91



박웅현 -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공부

전 인문학이 아직 뭔지 모르겠어요. 국문학자들이 들으면 "이놈!" 할지 모르겠지만, 문사철만 인문학인가요? 그럼 물리학 같은 건 인문학이 아닌가요? 결국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이런 대화, 시장 아줌마의 살아나가는 모습, 요즘 뜨는 음악의 패턴, 현대 그림의 흐름 이런 게 다 인문학인 것 같아요.  105



이강오 - 한강변에 원전이 세워진다면

식량을 얻기 위해 한 방울의 석유도 필요치 않던 50년 전과 1칼로리의 음식을 섭취하는 데 10칼로리의 석유가 필요한 오늘날, 3억 년 전 석탄기의 태양이 422년 동안 보내준 빛 에너지를 소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 단 1년.

지구 전체 에너지 소비가 공급을 앞질러 '에너지피크'에 도달할 2060년의 미래에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써야 하는 유서는?

1970년대 중반부터 풍력과 태양광 등 재생가능에너지 기술에 관심을 기울여 온 독일은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직후 본격적인 탈원전 계획을 세우고 2002년에는 탈원자력법을 시행했다. 그러나 산엽계의 반발과 고유가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대안으로 전 세계적으로 원전 르네상스가 일면서 독일 정부는 핵발전소 가동 시한을 평균 12년을 더 연장하려 했다. 그러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다시 탈원전 정책으로 돌아가 2022년까지 독일 내 모든 핵발전소를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독일 그린피스는 '지나치게 느리다'고 반박하며 2015년까지 핵에너지로부터의 탈피가 가능하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보고서는 2040년까지 모든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쇄와 2050년까지 재생가능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다.  121

좀 더 근본주의적인 입방으로 보면 그린피스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더 빠르게 진보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만 문제해결이 가능할 것 같아요.

우리가 마시는 콜라 한 잔 같은 경우에도 1칼로리를 위해 20칼로리에 해당하는 석유를 쓰고 있다고 해요.

미국의 '커뮤니티솔루션'이라는 단체에서는 무한경쟁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를 지역공동체 경제 중심으로 바꾸어야만 문제해결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영국 정부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시스템은 소형 열병합발전소인데요. 대형 발전 시스템에서 소형 열병합발전소로 전환하면 기본적으로 에너지소비 30%를 줄일 수 있고, 소비를 감축하여 에너지믹스 체계를 단계적으로 신재생으로 바꾸면 에너지 문제에 충분히 대응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죠.  122



황윤옥 - 분단, 우리가 잊고 있던 불편한 진실

분단이나 통일이나 평화처럼 너무 커 보여서 일상의 나하고는 아무 관계없을 것 같았던 주제에 대해서, 그게 알고 보면 사실 일상과도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단 얘기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127

정치 핑계될 일이 아닙니다.  131



오관영 - 동네 땅값 올리는 게 지방자치?

지방자치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는 분권과 참여입니다. 중앙 정부가 독점하고 있는 재정, 인사 등의 권한이 지방자치 단체로 대폭 이양되어야 합니다. 이러함 분권이 지방자치의 필요조건이라면 참여는 충분조건입니다. 지방자치단체의 모든 권한이 단체장에게만 집중되는 제왕적 단체장이 존재한다면 분둰은 오히려 지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킵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이 자신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주민참여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지방자치가 가능합니다.  138



조국 - 입은 자유롭고 밥은 공정하게!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기계적 중립, 균형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에게 보다 유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오히려 정의롭고 공정한 것이며, 진정한 '중용'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강자가 손해 보며 약자를 배려하는 게 정의, 조국

제가 한국 사회의 법 현실과 법치의 문제점에 대한 얘기를 하면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즉, "악법도 법 아니냐? 당신이 현 체제와 현행 법률에 대해서 불만이 있다 하더라도 일단 실정법률은 지켜야 되는 거 아니냐?"라는 반응입니다. 정부 측 인사는 물론 일반 대중도 이러한 질문을 많이 던집니다. 이에 이어서 "악법도 법이라고 소크라테스도 말을 하지 않았느냐?"라는 말이 나옵니다. 근래 들어 종종 정부는 '국격을 높이려면 법질서가 준수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있기도 하지요.

법치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입 닥치고 법 지켜라"가 될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법치관이 우리 사회에 횡행하고 있지요. 저는 1982년에 법과 대학에 입학하여 1992년에 교수가 된 이후 줄곧 법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마는 이러한 법치관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먼저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을 했는가부터 확인해보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릇된 또는 부정의한 일에 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을 것이며, 복종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겠다."

그러고는 독배를 마시고 죽었지요.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자기에게 철학을 포기하라고 명하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에게 사형을 선도한 배심에 대해서는 "당신들은 현자를 사형에 처했다고 하는 악명과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악법도 법이다"라고 누가 요약했냐 하면, 일제 시대 때 일본의 군국주의 법착자 오다카 도모오였어요. 소개한 소크라테스의 법사상을 "악법도 법이다"라고 요약한다면 이는 난독증 또는 의도적 왜곡일 것입니다. 대입 논술시험에 이런 식으로 요약한다면 저는 최하점을 줄 것 같습니다.("악법도 법이다"란 말과 소크라테스를 연관지은 가장 오래전의 학자는 일본의 오다카 도모오로, 그는 경성제국대학교, 동경대학교 법학부 교수이자 <실정법질서론>이라는 책을 쓴 일본의 유명 법철학자였다. 1930년대 '번역의 빈곤'이 낳은 이 말은 그 후 우리나라로 건너와 군사독재 시절 권위주의 정권의 억압적인 법 집행을 정당화하는 해석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142-143

"악법도 법이다"라는 주장의 전제는 "존재하고 있는 것은 무조건 옳으니, 그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품지 말고 따르라"라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지요.

질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질서의 전제는 자유입니다.  144

자메이카(23위), 대만(48위), 아프리카 가나(54위), 대한민국(70위), 2011년 세계언론자유도에서 한국은 196개국 중 70위.

미국의 보수성향 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마저 2011년 세계언론자유도에서 한국을 70위로 매겼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던'자유국가'의 지위를 박탈하고, '부분 자유국가'로 강등시켰습니다. '부분 자유국가'인 때가 언제냐 하면 1980년대 때, 즉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이었습니다. 요컨대, 한국 언론의 자유 수준은 1980년대로 후퇴한 것입니다.  147

이명박 정부의 법치관은 'Rule by Law'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학자들은 'Rule by Law'와 'Rule of Law'를 엄격히 구별합니다. 'Rule by Law'는 실정법을 도구로 사용하는 지배, 즉 실정법의 정당성을 묻지 않고 그것의 준수를 요구하고 그것을 통한 지배를 강조하는 관념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의 민주주의 법학자들이 다 공유하고 있는 법치는 'Rule of Law'입니다. 이는 일정한 도덕적 요청과 정의의 요청에 충족하는 법에 의한 지배를 뜻합니다. 실정법의 내용과 실질을 따지는 것이지요.  148



박래군 - 죽음의 행렬, 무엇이 문제인가?

"모든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킬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지킬 권리가 있다." - 세계인권선언 제3조, 생존권

그러나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 대한민국,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 25명, OECD 평균인 11.2명의 2배 이상 또한, OECD 국가 중 산업재해 1위, 근로자 10만 명당 산재사고 사망자 수 18명으로 미국 3.7명, 일본 2.7명에 비해 월등히 높음.(2010년 고용노동부 조사결과)

매년 150명 정도의 청소년들이 자살하고, 해고노동자와 비정규직, 철거민들이 사회적 타살을 당하는 나라, 거리에서는 노숙인이, 쪽방에서는 독거노인이, 시설에서는 장애인이 죽어가는 나라, 빚 독촉에 죽고, 생활고에 죽고, 온갖 차별과 멸시속에 죽음을 택하는 소수자들... 그런데도 너무나도 죽음에 무뎌진 사회.

얼어붙은 세상을 녹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자살 혹은 타살, 죽음의 행렬'에서 이 죽음의 행렬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알죠. 근데 눈에 비치지 않는 일상화된 죽음의 행렬은 인지를 못 하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이 매년 평균적으로 150명씩 죽어갑니다. 거리의 노숙인은 또 얼마나 죽어갈까요?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많은 사람들도요.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1위잖아요. 그런데 이런 죽음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굉장히 무감각해져 있어요.

지금 우리 사회의 구조는 죽은의 구조인데, 이걸 어떻게 타파하고 삶의 구조로 바꿀 것인가가 저한테는 큰 화두거든요. 인권의 기본이 생명권인데,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사회적인 구조, 분위기, 문화가 만연해있어요.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자면 이런 죽음을 드러내 성찰해 보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71

'저 사람의 문제가 내 문제'라는 것이 인권의 가장 중심적인 원리인데, 예전에는 이것을 당위로 받아들였는데 요즘에는 연대의 의미부터 다시 설명해야 하죠. '저 사람의 문제에 내가 관심 갖고 개입하는 것이 나한테 왜 중요한가? 왜 필요한가?' 하는 것들부터 설명해 줘야 해요. 연대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끌어내고, 연대를 위해 필요한 정책돌도 얘기해야 하는 거죠... '인권 감수성'  172

사람들이 '이게 나만의 고통이 아니다' , '저 사람도 저런 고통이 있구나'하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연대를 찾아나가거든요.  173


오창익 -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내가 뽑았지만, 대법관이나 대법원장은 내가 뽑은 적이 없다. 뽑을 기회도 없었고, 얼굴도 모른다. 다시 말해 선출된 권력이 아니다. 그런데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법원이 어떻게 선출된 권력인 대통령과 국회의원처럼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느냐, 내가 뽑지 않았는데, 내가 그런 권한을 위임해 준 적이 없는데....'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게 바로 시민적 상상력인 것 같아요. 유감스럽게도 이런 상상력이 그 동안의 시민운동진영이나 학계에서는 잘 안 나왔습니다. 법원이 선출된 권력이 아니니까 법원 추천 몫을 줄이거나 없애야 한다는 생각 역시 법조계나 저희처럼 기존의 문법에 익숙한 사람들에게선 잘 안 나왔습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국민이 뽑지만, 국민이 뽑지도 않은 검찰이 어떻게 입법부나 행정부와 같을 수 있나요?'라는 의문은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도 얼마든지 품을 수 있다고 봐요. 사실은 이런 의문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상상력이라고도 할 수 있죠. 바로 이 '시민적 상상력'이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는 권력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83



정란아 - 기업은 물건만 잘 만들면 땡인가?

기업이 경제를 끌고가는 큰 원동력이면서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큰 힘인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잘못을 해도 사회적으로 용인하거나 이해해주는 측면이 과해서는 안 된다는 게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기업 활동을 하면서도, 사회의 근본적인 가치들을 존중하고 지키는 것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인 겁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건 어려운 담론도 개념도 아닌, 인권이나 기본권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왜 안 지킬까 고민해보면, 기업이 권력화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거죠.  188

소비자나 시민으로서 기업 권력에 맞서는 액션플랜을 제시해주신다면...

첫째, 일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기업의 제품은 구매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우선은 벌어놓고, 나중에 베풀자'라는 생각을 가진 기업을 경계합니다.

셋째, 기업의 최우선 목적이 주주의 몫을 챙겨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기업을 경계합니다.

넷째, 국외와 국내의 모습이 다른 기업을 조심해야 합니다.  192



이희욱 - 표현이 자유와 권리침해의 충돌

인터넷을 정치적 저항 수단이나 공간으로만 보지는 않지만, 정치와 관련해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정치적 민주화운동이나 사회운동, NGO 활동을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지금, 인터넷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소셜네트워크와 스마트폰 덕분에 정보는 어느 때보다 빠르고 넓고 촘촘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정보 확산이 넓고 깊게 이뤄지면 대응도 다층적이고 다변화된 양상을 띠게 되겠죠. 돌이나 화염병 대신 트윗 한 줄, 문자메시지 한 통이 모이고 엮여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이런 변화를 막으려 투박한 둑이나 산성을 세운다 한들, 조그만 구멍까지 빈틈없이 메우진 못할 겁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보자면, 정치나 사회 변화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는 규제의 기억을 잊지 않고 각인하는게 중요하리라 봅니다. 정치적 격변기엔 규제가 강화되고, 사회적 대응도 거칠어집니다. 허나, 그 시점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쉽게 잊는 게 반복돼온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촘촘히 얽힌 보조기억장치를 갖고 있습니다. 집이든 사무실이든 이동 중이든, 시간 저편에 묻혀 있던 규제의 기억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내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틀림없이 찾아냅니다. 이런 과거의 오류를 바로잡고 제대로 평가하는 게 인터넷 시대에 맞는 사회적 대응이 아닐까요?  198-199

부작용에만 애써 집착할 게 아니라, 이를 바로잡는 시민사회의 정화 능력도 믿어볼 일입니다.  200



"모두 자신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 그렇지만 기술적으로 하나가 된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행복을 바라더라도 남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과 하나가 되지 않는 한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 버트런드 러셀



김여진 - 무조건 행복!

"함께 살아야 합니다. 함께 행복해야 하구요. 하지만 그걸 함께 하는 우리의 마음이 무겁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내가 다 구할 수는 없어요. 한 가지만, 여러분들이 꽂히는 그 한 가지만, 그게 뭐든 한 가지만을 일주일에 그냥 한 두 시간만 내시면 될 거 같아요." - 혼자보다 함께여서 더 좋은 행복, 김여진(230)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나만 행복해지는 법'을 찾기 때문이라고요.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옆에 누군가가 불행한데, 옆에 있는 누군가가 부당한데, 옆에 있는 누군가가 정말 도움이 필요한데, 그걸 모른 체 하고 나는 저런 걸 당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순간 내 마음에는 두려움이 생기죠. '내가 저렇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그 두려움이야말로 우리가 행복해지는 걸 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합니다.  212

행복해 보일 것인가 아니면 행복할 것인가를요. 

주로는 행복해 보이기 위해 대부분의 인새을 쓰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마찬가지구요. 행복해 보이려면 안정된 직장,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직장이 있어야겠죠. 또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배우자, 그럴듯한 집, 심지어 아이들한테도 1등하라 그러죠. 저희 어머니도 만날 그러셨어요. 왜? 남들 보기에 그럴듯하니까요. 우리가 평생 가장 많은 힘을 쓰고 있고, 추구하는 거의 모든 부분들은 행복해 보이기 위한 거죠. 남들한테...

그걸 위해 애쓰다 애쓰다 나는 과연 언제 행복한가?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자, 그럼 여기서 우리가 언제 정말 행복한가에 잠깐 집중을 해볼게요. 생각해보니까 저는 이거 같아요. 일단 재미가 있어야 돼요. 만화책 볼때 행복하고, 재밌는 드라마 볼 때 행복하고, 영화 볼때도 행복해요. 친구들하고 수다 떨 때도 행복해요. 근데 그건 잠깐인거 같아요. 그때가 지나면 다시 허무해지죠.

그래서 사람들은 의미를 찾는 거 같아요. 의미 있는 일 말이죠. 이게 어떤 의미가 있나, 어떤 결과를 갖고 오나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죠. 전 행복이란 재미가 있고 의미가 있는 일을 하면서 그때그때 사는게 행복한거지 돈이나 차나 좋은 집이 있다고 행복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돈이 필요가 없단 얘기냐? 그런 거 아닙니다 먹고는 살아야죠. 애도 키워야 되는데, 그럴만한 사회와 환경이 되어야죠. 물론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게 분명히 있어요. 그걸 함께 풀어나가는 것조차도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213

무기가 없는 곳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229



김여진 - 세상을 바꾸는 행복의 힘

직접 가서 내 눈으로 보는 게 최고예요. 

그냥 기사로 보고 책으로 봐서 분노하고 화내는 것은 정말 얼마 안 가요.  233

내가 정말 언제 행복한지 따져보면 돼요. 잠 푹 잤을 때, 맛있는 것 먹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이런 때잖아요. 사실 그 과정에 세상을 바꿔야 하는 것들이 분명히 들어가요. 내 옆의 누군가가 부당한 일로, 또는 먹지 못해서 울고 힘들어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그걸 외면한 단 말이죠. 외면하는 게 편할 것 같아서 도망가요. 두려워요. '내가 저렇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두려움이 생겨서 더 움츠러들어요. 그게 지금의 우리 모습인것 같아요. 부당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은 세상에 굉장히 많은데, 나는 못 하겠다는 거죠. 왜? 무서워서. 내 코가 석 자라서. 모든 사람들의 코가 석 자예요. 모두 다 같이, 개별로 떨어져서 각자 두려움에 떨게 되는 거죠. 정말 단순하게, 배고픈 사람과 빵 나눠 먹고, '너 억울한 일 당했어? 같이 가줄게' 하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한 거죠. 하지만 그 순간 '내가 나서서 일이 잘 안 되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하면 다시 움츠러들어요. 그게 욕심이라는 거죠. 내가 한다고 꼭 잘되리란 보장은 없어요. 그저 최선을 다하는 거죠. 실패하면 방법을 바꿔서 또 해보는 거죠. 

저는 모든 국민이 세상에 기여할 한 가지 문제를 자기 과제로 삼으면 좋겠어요. 한 가지를 정해서 평생 그것만 하는 거예요. 일주일에 한두 시간이라도 내서 그걸 했을 때 자기 마음이 얼마나 부자가 되겠어요? 세상의 주인으로 서는 거잖아요.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는 거잖아요.  237



김창난 - 소통부재의 시대, 행복을 위한 소통

소통의 열쇠, 공감(共感, sympathy)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

"인간은 홉스가 말했듯 경쟁적, 이기적인 동물이 아니다.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나? 물질 소유가 아니다. 공감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협력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 삶은 스트레스 덩어리다. 우리는 서로에게 공감하며, 서로에게 위로받고자 프로그램되어 있는 존재다. 공감의 유전자가 이것을 도와준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본서이다. 공감의 감수성이 인간뿐 아니라 생태계 전체를 향해 확장돼야 한다. 모든 생물권을 존중하며 살아갈 때 지구상에서 우리의 삶이 지속될 수 있다." - <공감의 시대> 작가 제레미 러프킨의 인터뷰 중

프로가 아니고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더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는 거지요. 우리가 프로라고 나선다면 그 순간 우리가 가진 장점들은 다 사라지는 거죠. 그러니까 우린 영원한 아마추어인 거예요.  241

'모 아니면 도'라는 거. 그걸 바꿔야죠. 다양하고 풍부한 마이너리그가 존재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게 풍부해야 메리저리그 주류도 끊임없이 새로운 자양분을 공급받으면서 버텨낼 수 있다는 거죠.  243

누가 이 뽑아서 군대 면제 받았다고 해서 나도 이 뽑아야겠다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누가 음주 운전했다고 나도 해야겠다는 사람도 별로 없구요. 근데 긍정적인 역할 모델이 된다면 그 영향력은 무척 커요. 그런면에서 긍정적 역할 모델이 될 수 잇는 셀러브리티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한국 사회의 변화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죠.  245

'공감'입니다.

김제동, 김미화, 김여진, 박혜경, 권해효, 강풀 같은 셀러브리티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게 공감과 연민의 능력이죠. 그분들이 그렇다고 대단한 진보적 신념을 가졌거나 이념에 따라 행동하는 분들은 아니거든요. 다만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면서 그들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거죠. 이게 중요한 거예요.

공감의 힘이란 예컨대 이런 거죠. 혁명이든 사회변화든, 이론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에요. 대중들에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이론적으로 설명해 봐야 설득이 쉽지 않아요. 그거보다는 "저기 굶어 죽어가는 아이를 보십시오"라고 말할 때 확실히 공감의 폭이 넓어지는 거죠. 변화의 동력도 생기고요.  246



노민영 - 총체적 삶의 운동과 맛있는 혁명

달팽이를 상징으로 하는 슬로푸드 운동이 중시하는 것은 먹거리와 생물다양성 보호와 미각 교육의 확대 그리고 생산자와 소비자의 연대!

지킴(사라질 우려가 있는 전통적인 식재료나 요리법. 질 좋은 식품과 전통주를 지킨다)

가르침(성장하는 아이들은 물론 음식 소비자에게 미각 교육을 진행한다)

지지함(질 좋은 식재료를 제공하는 생산자를 보호한다) - 1996년에 발표된 슬로푸드 법렬 중



김지수 - 행복은 과연 성적순일까?

서울시 교육청이 초중고교 65곳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체개발한 '학생행복지수'를 측정한 결과, 성적이 상위권인 학생들의 행복지수 평균은 100점 만점에 71점, 중위권은 62점, 하위권 학생들은 54점으로 나타났다.

경쟁 내몰린 학생들 "행복은 성적순이 맞잖아요."

우리나라 청소년 10명 중 7명(69.6%)은 생활 전반에서 스트레스를 호소, 청소년들의 고민거리 중 가장 큰 부분은 공부(38.6%)와 직업(22.9%)문제.

청소년 8.8%는 "1년간 자살 생각해본 적 있다." - 통계청 2011 청소년 통계


우리 교육은 지금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학생으로 보지 말고 한 인격으로 보면 좋겠어요. 요즘 아이들은 자기 삶에 대해 굉장히 성실하게 고민하고, 자원봉사 같은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세상에 대해 다양하게 경험하고 싶다고 말해요. '교육은 곧 배움'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배움은 그 어디에도 있는 거죠.

성적이 아닌 행복을 키우는 교육,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고, 또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일까요?

행복은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문제이기에 나름대로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행복을 키우는 교육은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지속적으로 자기가 살아가고 싶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도록 힘을 북돋아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이 아이들에게 '가슴 떨림'을 줄 수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이 가슴 떨림을 느낄 수 있게 하느냐가 문제인 거지요. 가슴 떨림은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행동하게 만들고, 그 행동 하나하나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도록 만들어줍니다. 기적과 같은 힘인 거죠.

그런데 지금의 교육은 이상을 꿈꾸는 아이들에게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하겠어?" 라는 말로 아이들의 이상을 현실로 끌어내리고 있어요. 꿈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신념을 가지고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신념으로 만들어진 이상이 현실로 끌려 내려오면 세상은 그만큼 발전하지 못하겠지요. 더 큰 문제는 아이들의 신념도 함께 사라진다는 겁니다. 아이들의 이상이 자유롭고 꿈꿔지고 실천되어질 수 있는 세상, 아이들의 신념이 지속가능하게 유지될 수 있는 세상, 그것을 위해 더 늦기 전에 지금부터라도 아이들이 행복한 교육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60



공부를 바치며 - 변화가 만들어낼 우리의 미래

한 가지 묻고 싶다.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런 세력이 되기를 주저하고 새로운 세력을 기다리고만 있는 걸까?  261

이제 우리는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새로운 시작의 기로에 서있다.

정의와 상식이 통하는 건강한 사회를 위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함께 꿈꾸고 공부하여 깨어 있는 시민,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내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마침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 나는 그리고 또 우리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 상상력이 바꾸는 세상을 꿈꾸며 하승창  262


Posted by WN1
,


마음을 읽어야 시장을 읽는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을 쓰기 17년 전에 <도덕 감정론>을 썼는데, 이 책의 핵심 키워드는 'sympathy'이다. '더불어 느낀다' 즉, '공감(共感)'이며, 철학 용어로 풀면 '같은 마음'을 뜻하는 '동정(同情)', '동감(同感)'이다. 그는 '시장은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가격이 형성되고, 이동하는 것"이라 말했다. 
당시에는 현실화 되지 않았지만, 200여년이 흐른 지금의 디지털 시대에 현실화 되었다. 

플로우(Flow) 개념을 창안하고 30여 년간 연구한 시카고 대학의 심리학, 교육학 교수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플로우'란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 더 나아가 자신에 대한 생각마저도 잊게 될 때으 심리적 상태라 하였다. 집중과 몰입의 요령을 가지고 깊이 빠지는 상태에서 우리의 삶도 풍요로워 진다. 

칙센트미하이와 함께 '마음연구'의 대가로 불리는 하워드 가드너는 '다중지능-창의성-리더십-마음변화의 관련성'에 주목하여 여러 저작들을 내 놓았다.

<마음의 틀> - '다중지능 이론'
첫째, 지능은 다원적이다.
둘째, 지능은 선험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셋째, 지능은 특정한 문화적 배경과 역사적 상황 속에서 달리 평가될 수 있다.
넷째, 지능은 테스트 결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능은 특정한 방식으로 구체적인 형태의 정보들을 처리하는 생물심리학적 능력이라 정의하고, 인간은 다양한 정보처리 능력, 즉 '지능들'을 발달시켜 왔다고 주장한다.
첫째, 언어지능(linguistic intelligence)은 구어와 문어에 대한 민감성, 언어학습능력,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언어 활용 능력 등을 포함한다. 언어 지능은 스토리텔링 능력과 직결되기에 리더의 필수적인 자격 조건이 되어가고 있다.
둘째, 논리수학지능(logical-mathematical intelligence)은 문제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수학적인 조작을 수행하며 과학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탐구하는 능력을 말한다.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경영자들에게도 논리수학 지능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셋째, 음악지능(musical intelligence). 대규모 조직의 경영과 오케스트라 지휘의 원칙이 흡사하다.
넷째, 공간지능(spatial intelligence)은 좁은 공간뿐 아니라 항해사나 조종사들이 경험하는 넓은 공간을 인지하고 다루는 잠재력을 말하며, 마음속에 공간적 표상이나 이미지를 구성하는 능력, 그것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능력까지 포함한다.
다섯째, 신체운동능력(bodily-kinesthetic intelligence)은 문제 해결을 위해 몸 전테나 일부를 활용하는 능력.
여섯째, 대인지능(interpersonal intelligence)은 타인의 욕구와 동기, 의도를 이해하고 타인과 효과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일곱째, 자성지능(intrapersonal intelligence)은 자기를 이해하고 자신의 욕망, 두려움,  재능 등을 컨트롤해 효율적인 삶을 살아가는 잠재력을 말한다. 이는 사회적 복잡성에 비례하는 지능이다. 앞으로 이 자성 지능의 중요성은 점차 커질 것이다.
여덟째, 자연지능(naturalist intelligence)은 자연 현상에 대한 유형을 규정하고 분류하는 능력을 말한다. 동식물간의 차이나 구름과 암반층, 조수의 형태등을 식별하고, 자연 안에서 다양한 생물체들과 민감하게 상호작용하는 지능이다.

하워드 가드너는 이 8개 외에 2분의 1개가 더 있다고 말하면서, '실존지능'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왜 여기에 존재하는가?  왜 우리는 죽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사색하는 인간의 능력이라고 하였다. 

대니얼 골먼은 '감성지능(emotional intelligence)'에 대해 말하며 이것은 공감하는 리더십을 위한 중요한 능력으로 간주한다.

<창조하는 마음>에서는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살았던 7명의 창조적 인물들을 통해 창의성과 창조력의 다양한 발생 가능성을 강조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논리수학 영역에서,
마하트마 간디는 대인관계 영역에서,
마샤 그레이엄은 신체운동 영역에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음악 영역에서,
T.S. 엘리엇은 언어 영역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자성(自省) 영역에서,
파블로 피카소는 공간 영역에서 발군의 창의성을 드러내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창의성에는 2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10년의 숙성 기간을 거치고 나서, 10년간 발휘되고, 그 다음 10년간 다른 분야로 확산된다. '10-10-10'의 법칙. 그러고 보면 뭐든지 10년은 목숨걸고 해봐야 하는 셈이다.
둘째, 창의성은 '다섯 살 아이'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피어난다. 모든것에 대한 경이와 풍부한 상상력과 모험심, 낯선 것에 열려있고,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욕망으로 넘쳐 나야 한다.

<이끄는 마음>에서 가드너는 '스토리텔러로서의 리더'를 강조한다. 
리더의 유형은 3가지다. 전통적인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하는 리더, 전통적인 이야기를 새롭게 각색하는 리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리더다.
하워드 가드너는 20세기 정치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마음 변화를 이끈 인물로 마거릿 대처를 꼽았다. 하원의원이었던 그녀는 1979년 "영국은 길을 잃었습니다."라는 슬로건으로 보수당 당수로 출마. 총리가 된 후에도 성배 수상 가운데 한 사람인 채덤 백작의 말을 인용해 "나는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나 외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노도은 고장 중(Lebour isn't working)"라는 말을 남겼다. 대처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이야기와 그와 일치한 삶의 궤적을 통해 영국인들의 마음을 바꾸었다.
그런가 하면  테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조카이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아내이면서 구속받지 않는 '정신의 자유'의 상징인 엘리너 루스벨트는 "어제는 역사, 내일은 미스테리, 오늘은 선물(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mystery, today is present)"라는 말로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고, 마틴 루터 킹 목사도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s dream)!"라는 유명한 연설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대인관계 영역에서 간디는 "비폭력으로 맞서라!"는 단순한 이야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사회 운동으로 까지 발전시켰다. 

이처럼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는 극적인 구성을 가져야 하는데, 동기를 유발시킬 수 있느 ㄴ이야기여야 하고, 기억하기 쉬워야 하며, 다채로워야 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진실해야 한다. 또한 그것을 실행과 실천을 입증해야 한다. 


<변화하는 마음> - 마음의 변화란 개인이나 집단이 중요한 사안에 대해 통상적으로 생각해왔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법을 택하게 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것은 변덕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마음 변화의 7가지 지렛대' - 이것을 마거릿 대처의 이야기로 적용해 본다.
1. 이성(reason) : 관련 요소들을 확인하고 하나하나 따져본다음 전체적인 평가를 내린다.  (마거릿 대처는 쟁점을 어떻게 분석해야 할지, 쟁점의 어느 측면에서 논쟁을 집중시켜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2. 연구 조사(research) :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방법, 혹은 통계자료를 사용한다.  (대처는 실업률과 노동쟁의, 인플레이션 수치를 정확히 차악해 이를 논쟁에 적극 활용했다.)
3. 동조(resonance) : 빈틈없는 논리, 적절한 연구 조사, 청중의 동조가 있을 때 마음 변화의 최대의 효과가 나타난다.  (대처는 자신의 메시지를 설득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대상에 집중했다. 동조의 파장을 최대화하기 위해서였다.)
4. 표상의 재구성(representational redescriptions) : 마음의 변화는 그 내용이 수많은 형식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제공될 때 보다 강한 확신을 줄 수 있다.  (대처는 되도록 쉽게 이야기했다. 여왕의 용거(Queen's English)가 아닌 보다 직접적이고 호소력 있는 일상어를 사용했다.)
5. 자원과 보상(resources) :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상적 자원의 제공은 마음의 변화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낸다.  (대처는 채찍과 당근을 활요햇다. 반기를 드는 사람에게는 채찍을,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당근을 베풀었다.)
6. 실제 사건들(real world events) : 실제 사건들이 마음의 변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포클랜드 전쟁은 대처리더십의 진수를 보여준다. 1982년 영국은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25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대처는 여름휴가를 반납하고 전사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며 유가족에게 진시어린 편지를 썼다. '철의 리더십'의 대처지만 어머니와 같은 따뜻한 모성으로 리더십을 완성하였다.)
7. 저항(resistance) : 마음의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양한 형태의 저항을 파악해야 한다.  (영국병을 치유해 영국의 영광을 되살리자는 이야기 안에서 거대한 노동조합과 싸워야 했다. 그리고 신뢰와 용기, 단순하지만 강력한 스토리텔링으로 이들의 마음속 저항 전선을 뚫어 냈다. 결과 영국은 변화할 수 있었다.)

리더는 쿨(cool)리더와 핫(hot)리더로 나눌 수 있는데, 쿨리더는 대중들을 자신으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여 그들이 추구하는 리더의 이미지와 부합하도록 만든다.(케네디나 레이건 등)
핫리더는 자기 입으로 모든 것을 말해버려 대중들이 이갸기 속에 참여하거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든다.(존슨, 닉슨, 깅리치 등)

예술가들은 피카소처럼 추사적인 조각으로 창조하였고,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크는 불협화음의 악정들로 '봄의제전'이나 '달의피에로'를 만들었으며, 머스커닝엄과 게오르크 밸런치는 주제없는 순수 신체 동작만으로 무용을 만들었다. 즉 대중의 저항을 뚫고 새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마음을 변화시키는 데는 학습 또한 큰 역할을 한다. 조직이든 개인이든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즉 스스로 학습의 메커니즘을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배움이 몸에 익어 습관화가 되어야 한다. 공부는 머리로만 하는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진짜공부(工夫)는 '몸 공부'다.

자동차는 이미 욕망의 대상이다. 필요에만 의존했다면 자동차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이었겠지만, 그 시장은 계속 팽창하고 있다.
나이키는 어떠한가.
몽블랑 만년필은,
루이뷔통 핸드맥 역시 같은 원리이다. 이제 시장은 필요가 아닌 욕망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필요의 관점에서는 포화상태라도 욕망의 관점에서 보면 시장은 항상 불포화된 블루오션이다.
이제 마음산업(mind industry)은 제5의 산업이다. 자기 목소리를 담은 이야기여햐만 거기에 시장이 열리고 미래가 펼쳐진다.




그렇다 이제는 공감이 욕망을 불러일으켜, 어찌보면 현혹되어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몇 십년전 먹고 사는 시대에서는 욕망이란 것은 아주 일부분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무언가의 이야기가 있지않는다면 공감을 얻을 수 없는 시대이다.
저자는 긍정심리학자들의 내용들을 언급하며, 오감뿐 아니라 육감까지 자극할 수 있기 위한 마음의 변화들을 어떻게 이끌어 낼 수 있는지를 언급하였다. 
우리는 몰입을 통해 그것들에 빠져 공감시킬 수 있는 이야기들을 만들기 위해 진짜공부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경영자의 자질 뿐 아니라 개인들의 자질에서도 나타나야 한다.
사람은 쉽게 변화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변화를 익숙해 지게 하려면 그만큼의 논리적인 자료들과 반복 그리고 실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있어야 조금씩 변화될 수 있다.
다양성이 허락되고 장려되는 시대에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그만큼 더 힘들 수도 있지만,한번 이루어내면 폭풍같은 동조를 이끌어 내어 개개인에게 욕망을 이끌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WN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