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회익 교수를 알게된건 인문학콘서트에서 였다.
당시 온생명, 낱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논리적으로 타당한 표현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말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었다.
이번에 장회익 교수가 2008년에 자신의 공부하는 삶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다시금 공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2011년에 출간된 공부의 즐거움이란 도서역시도 조만간 읽어볼 계획을 한다.
"예나 지금이나 학문한다는 사람치고 학문 같은 학문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나요? 다들 옛사람들 말이나 되뇌고 있지." 28
"삼씨도 삼밭에 떨어지면 인삼이 되지만 더 척박한 산에 떨어지면 산삼이 된다는 거 명심해 두어라." 48
"인삼밭에 들어가 주는 대로 받아 먹고 자란 희멀건 인삼뿌리가 되고 싶으냐, 아니면 빈 산속에 들어가 먹을 거 제 손으로 챙겨 먹은 산삼뿌리가 되고 싶으냐?" 91
사실 무엇이든지 지나치게 하고 나면 비록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지만 무의식중에 피로를 느껴 싫은 감정이 몸에 베어들게 된다. 반대로 즐겁게 하던 일은 그만둔 뒤에도 오랫동안 그 즐거웠던 감정이 그 일과 연과되어 자기도 모르게 몸속 어디에 배어 있게된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당시 책 몇 쪽을 더 읽느냐 덜 읽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읽음에 대한 내 감정을 어느 쪽으로 간직 하느냐 하는 데에 있다. 즐거운 감정을 불어넣게 되면 당장 다음번에 또 읽을 생각이 나게 할 뿐 아니라 두고두고 그 내용이 내 기억 속에 즐겁게 부각될 것이고, 우선 좀 재미있다 하여 무리해서 지치게 만들면 지친 몸이 이걸 기억하였다가 자기도 모르게 싫은 감정을 불어넣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아버지가 비교적 딱딱한 과학책과 수학택을 붙들고 씨름하면서 나름대로 터득해낸 지혜가 아닌가 생각한다. 71
옛 선비인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 1424~1483) 선생이 쓴 [도자설(盜子設)]에, 그가 아들을 훈계하려고 쓴 글 다섯 편 가운데 하나의 개략을 말하면.. '도둑질을 업으로 삼는 아비와 아들이 있었다. 어느날 밤 아비 도둑은 아들을 데리고 어느 부잣집에 들어갔다. 아들을 보물창고로 들어가게 하고는 아들이 보물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을 때쯤 밖에서 문을 닫고 자물쇠를 건 다음 주인이 들을 수 있게 자물통을 흔들어댔다. 주인이 달려와 쫓아가다가 돌아보니 창고 자물쇠는 그대로 잠겨 있었다. 주인은 방으로 되돌아갔지만 아들 도둑은 창고에 갇힌 채 빠져나올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손톰으로 박박 쥐가 문짝을 긁는 소리를 냈다. 주인이 소리를 듣고 "창고 속에 쥐가 들었나보군, 물건을 망치겠다. 쫓아버려야지." 하고는 등불을 들고 나와 자물쇠를 열고 살펴보려는 순간 아들 도둑이 쏜살같이 빠져나와 달아났다. 주인집 식구들이 모두 나와 쫓아오자 그는 연못가에서 큰 돌을 들어 못에 빠뜨렸다. 사람들이 "도둑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하며 그곳을 살피는 동안 그는 얼른 뒤로 숨어 그 집을 빠져나갔다.
집에 돌아온 아들은 아비에게 "새나 짐승도 제 새끼를 보홓라 줄 아는데 제가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욕을 보이십니까?" 하며 원망했다. 그러자 아비 도둑이 말했다.
"남에게 배운 것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지만 스스로 터득한 것은 그 응용이 무궁한 법이다. 더구나 곤궁하고 어려운 일은 사람의 심지를 굳게 하고 솜씨를 원숙하게 만드는 법이다. 네가 창고에 갇히고 다급하게 쫓기지 않았던들 어떻게 쥐가 긁은 시늉을 내고 못에 돌을 던지는 꾀를 냈겠느냐. 이제 지혜의 샘이 트였으니 다시는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제 천하의 독보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후에 과연 그는 천하제일의 도둑이 되었다. 85-86
120% 이해하라고 했다. 여기서 120%라는 것은 저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20%까지 더 얹어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자기가 주체가 되어 학습해야 한다는것으로, 이후 내 학습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 161
독자적 학습습관 164
학문의 요체는 자유이다. 생각의 실마리가 그 어떤 구애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펼쳐져야 하고, 성취나 보상 따위의 생각은 끼어들 틈이 없어야 한다. 물론 좋은 책을 읽고 새로운 정보를 얻으며 동료 혹은 스승, 제자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자연스런 성취감이나 보상 심리를 피해가겠는가? 이들이 모두 갖추어진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자유로운 사색의 펼침인 만큼 일것이 방해를 받는다면 이미 죽은 학문이나 다름없다. 190
나는 처음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가만히 눈을 감고 내가 정말 물리학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한번 깊이 되살펴봤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대로라면 그저 교재에 나와 있는 것을 내가 몇 시간 먼저 읽고 그 내용을 뇌까릴 참이엇다. '이것은 아니다. 적어도 내 입으로 강의할 때에는 교과서와 무관하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내뱉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곧 물리학 그 자체에 대한 내 나름의 정리작업에 들어갔다. 이것은 물론 교과서에 없는 것을 가르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먼저 그 내용을 알고 마치 내가 교과서의 저자나 되는 양 그 내용을 내가 내 언어로 재구성하여 가르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때까지 내가 주로 받아왔던 '교과서에 읜존한 평면적 교육'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만족스럽지 않은 교육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교육자 자리에 설때 그와 반대되는 교육방식을 택하게 된다. 193-194
여기서 내가 제일 먼저 착수한 작업은 물리학 전체를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통합적 시각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결코 '수준 높은' 책을 읽어서는 되지 않는다. 많은 곁가지를 걷어내어 굵은 줄거리만 명료하게 연결된, 그러면서도 되도록 평이하게 서술된 책을 구해야 한다. 194
자기가 현재 알고 있는 수준에 맞추어 자기가 알고 싶은 것을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서술한 책이 가장 좋은 책이다.
학문하는 사람은 이런 점에서 '책 냄새'를 잘 맡을 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한 것이 다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은 다시 음미하여 더 깊은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 모르는 것을 보고 알려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195
되새김질 196
스님 방에서 받은 '깨달음' 수업...
"혹시, 깨달음을 얻을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 해서 찾아뵈었습니다."
"깨달음을 얻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지요."
"그게 무엇인지요?"
"하나는 즉석에서 깨닫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조금씩 학습해가며 깨닫는 방법이지요. 어느 쪽을 말해드릴까요?"
...
"즉석에서 깨닫는 방법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훌쩍 일어서시더니 선반 위에서 먼지떨이 같이 생긴 막대를 하나 꺼내들고는 예고도 없이 우리들 머리를 한 대씩 세차게 내려치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한 댔기 얻어맞고 얼얼해 하고 있는데 스님이 우리 앞에 몸을 곧추세우고 앉더니 조용히 말하셨다.
"좀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까?" ... 198
이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스님이 말해주려 했던 두 길은 불가에서 말하는 이른바 돈오(頓悟)와 점오(漸悟)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그 중 한가지인 돈오(頓悟)의 방법을 알려주려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막대로 내려치는 의외의 상황을 조성함으로써 돈오, 즉 순간적으로 깨달음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내공이 별로 없었던 우리가 그날 이를 통해 깨우침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199
사람이 사물을 이해한다는 것은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된다는것을 의미한다. 그 한 요소가 '이해의 틀'이고 다른 한 요소가 이 틀에 담길 '내용'이다. 우리가 오감이나 언어 등으로 그 어떤 정보를 입수하게 되면 이것은 곧 기왕에 형성된 이해의 틀 안에서 검토되어 적절한 위치를 배정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해의 틀 안에서 '내용'이 자리잡게 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때 만일 이해의 틀이 너무 협소하여 이 정보를 합당하게 정리하지 못할 상황이 되면 우리 사고는 다시 이 이해의 틀 자체를 넓히려고 노력하게 된다. 틀을 키우지 않고는 사물을 더는 의미를 지닌 형태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틀 자체를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오직 틀 안에 정리된 내용만을 의식할 뿐이다.
그러므로 두뇌에서는 내용을 합당하게 담아낼 여러 새로운 틀이 시도되지만 이것 또한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다. 오직 우연히 어떤 틀이 구성되어 이 안에서 새로 입수된 정보와 함께 기왕에 있던 내용이 산뜻하게 새로 정리될 때 우리는 이것을 의식하게 되며, 이렇게 정리된 내용이 기왕에 이해했던 내용과 크게 달라질 때 우리는 이것을 '깨달음'이라 부르게 된다.
이것은 대체로 내가 이해한 깨달음의 구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깨달음을 돈오라고 해야 할까 혹은 점오라고 해야 할까? 이것은 아마도 이해의 바탕이 되는 틀이 중간에서 작은 변화를 겪지 않고 한꺼번에 크게 바뀌느냐 아니면 중간에 여러 변화를 겪어 최종단계에 이르느냐에 달렸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리를 잡지 못하고 헤매던 수많은 정보나 의문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해의 틀 속에서 어느 순간 확연히 그 의미를 드러내게 될 때 이를 돈오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중간 중간에 비교적 소폭의 여러 변화를 겪으며 이해의 폭을 점차 넓혀 나가다가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그 모든 것이 분명해질 때 이를 점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해의 틀이 연속적인 변화를 허용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어떠한 것인지 분명히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불가의 깨달음이 어떠한 형태를 지녀야 할지에 대해 감히 뭐라고 말 할 수 없다.
하지만 학문, 특히 과학이라는 과정을 거쳐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는 그 간의 경험을 통해 몇 가지 이야기할 수 있다. 굳이 돈오-점오의 틀을 빌려 말한다면, 그간 많은 사람은 과학에서의 깨달음을 점오에 해당한다고 보아온 듯하다. 새로운 지식은 기왕의 지식 위에 차곡차곡 쌓여 그 폭과 깊이가 넓어지고 깊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토마스 쿤(Thomas Kuhn)이 등장하면서 과학에서 중요한 깨달음은 오히려 돈오에 가깝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혁명적인 새 아이디어는 기존의 틀에서는 전혀 수용할 수 없고,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해의 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쿤의 이러한 이론은 한 개인이 겪게 되는 지적 편력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과학이 역사적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주로 서술한 것이지만, 과학을 수행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개개의 과학자들이므로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실제로 나 자신이 과학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경험을 해왔으며, 따라서 과학을 하는 데서도 돈오에 해당하는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 경우에는 단 한 번의 깨우침으로 앎의 모든 내용이 선명해지는 경험을 얻지는 못했으며, 과학에 관한 한 어느 누구도 이러한 깨우침에 이르렀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 오히려 과학에서의 깨달음은 작은 규모의 깨달음을 여러번 거쳐가면서 점진적으로 전체를 파악하게 되는 성격을 지닌다고 보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과학에서의 깨달음은 결국 '작은 돈오로 구성되는 하나의 큰 점오'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물음을 던지는 일이 필요하다. 물음이라는 것이 꼭 명시적 질문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한구석 그 어딘가 답답함을 느끼거나 찜찜함을 느끼는 형태로 오기도 한다. 이것이 이미 해명을 요구하는 마음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며, 이렇게 요구된 해명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문득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200-202
그런데 참 이상스러운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의문투성이이면서도 실제로는 이러한 물음을 별로 던지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202
실제 깨달음에 이르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둘째 치고 우선 여기에 적합한 물음을 가지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203
제도권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는 끝내 이해가 무엇인지 모르고 지나는 경우가 많다. 학습과정에서 우선 '수용부터 해놓을 것'이 강요되자 수용부터 했다가 끝내 재음미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기 때문이다. 207
내가 외국 유학을 위해 학교를 선정한 기준은 다른 사람들과 많이 달랐다. 나는 대도시 대신 소도시를 택했고, 경쟁이 높은 곳보다는 경쟁이 낮은 곳을 택했으며, 주변의 사회문화적 여건보다 자연환경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나는 처음부터 학교에 이끌려 공부하겠다는 생각보다는 학교가 나에게 좀더 조용히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공부할 수 있게 허용해 주기만을 바랐다.
이러할 경우 당연히 명성이 그리 높지 않은 학교가 될 가능성이 컸지만 나는 그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학교의 명성에 기대어 혹은 학교의 권위에 이끌려 이를 좀더 유리한 진출의 발판으로 삼을 생각은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 학교가 나에게 공부할 기회만 제공해준다면 내 힘으로 역량을 키우고 내 역량을 바탕으로 활동하면 되지 그 이상 바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내 생애에서 오직 한 번, 이른바 명문이라는 학교에 들어가 보았지만 그것이 내게 해준 것은 별로 없지 않은가? 227
제도권 학계의 평가 잣대에 나를 맞추기보다는 내 가치기준에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나뿐 아니라 우리 사회를 가장 잘 위하는 일이라는 게 내 생각이고, 이를 위해 내 활동의 방향을 잡아왔다. 271
실제로 경쟁대상이 되는 것은 학문이 아니라 학문 성취에 부수되는 영예와 보상이다. 그 무엇을 '누가' 했느냐를 중시하는 풍토에서 그 '누가'를 빼앗겼다는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원칙적으로 학문과는 무관한 일이다. 오히려 학문을 타락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제사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젯밥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현대문명의 위기가 학문의 부족에서 온 것이 아니라 타락한 학문의 만연에서 온다는 사실을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한다. 274
학문이야말로 인류 공유의 자산이지 어느 국가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국가의 생존이 아니라 인류 그리고 생명 전체의 생존이다. 275
다른 한편 이른바 '자기와의 경쟁'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부단히 자기를 넘어서는 싸움을 해야 하며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 또한 경쟁이니 싸움이니 하는 관념에 지나치게 묶여 있는 데서 나오는 언사이다. 왜 자기가 최선을 다하면 될 일을 굳이 경쟁이니 싸움이니 하는 언사를 동원해서 표현해야 하는가? 이는 이를 통해 경쟁심리, 싸움심리를 최대한 동원해서 있는 모든 힘을 짜내게 하자는 취지로 읽힌다. 그러나 이것 또한 학문에 대해서는 현명하지 못한 자세이다. 학문은 필생의 과제이지 결코 단기적으로 무리한 힘을 동원해 이루어 낼 일이 아니다. 학문이 곧 삶이 되어야 하는데, 삶 자체를 항상 싸움으로만 생각하고서야 어떻게 원한만 삶이 이루어지겠는가?
흔히 야생은 무자비한 경쟁의 세계로 묘사되지만 사실 야생에서는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어진 여건과 조화를 이루어나갈 분 경쟁을 위한 경쟁은 하지 않는다. 야생의 세계에는 '길들여진 경쟁'이 없다. 강아지나 야생동물을 길들이는 과정을 생각해보라. 하나같이 미끼를 활용하고 경쟁을 조장한다.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쟁 학습에 길들여진 학자들이 다시 경쟁 연구를 해나가는 것이 제도권 학계의 이지러진 모습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인정받으려고 서로 물고 뜯는다. 아직 정신적으로 미숙한 어린 단계에서 학습을 조장하기 위해 일정 범위 안에서 이러한 방식을 사용할 수는 있다. 인간이 지닌 원초적 경쟁심리와 보상심리를 교육적으로 활용하여 어려운 고비를 쉽게 넘어가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은 성인의 단계. 심지어 사후까지 연장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추한 일이다. 학문은 어디까지나 그 자체가 보상이다. 배우는 즐거움, 아는 즐거움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이며, 이것이 인류 문명에 어떤 기능을 할지가 작업선정의 기준이어야 하는 것이다. 야생에서 경쟁에 덜 길들여지고 인위적인 미끼에 덜 물든 자세가 그래서 소중하다. 275-276
학문은 말하자면 일생을 두고 오르는 등산길이다. 빨리 올라가 멋진 조망을 보고 남이 오르지 못한 새 봉우리에 첫발을 디뎠다는 영예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이것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길게 보면 이것은 곧 자신의 잠재력을 소진시켜 더는 진전을 어렵게 하고, 성급한 나머지 발을 잘못 디뎌 다칠 위험을 가중시킨다. 오직 자기 몸과 학무느이 세계를 하나로 조화시켜 그 안에서 지속적인 즐거움을 찾아나가는 길만이 장기적인 성취를 가능케 하며, 설혹 특별한 성취가 없더라도 그 삶 자체로 값지다. 289
스승의 손가락을 보지 마라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보상은 자기 자신이 깨달음에 다가갈 좋은 여건에 놓인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책을 읽거나 깨달음에 다가갈 좋은 여건에 놓인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으면 그 무엇을 '알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은 착각이다. 그 착각은 스승(또는 책)의 말과 스승(또는 책)에 대한 신뢰에서 온다. 그 말을 알아듣고 그 말을 기억하면 그것으로 안다고 생각하며, 스승(또는 책)에 대한 신뢰를 통해 스스로 검증해 보지 않고도 그 말이 옳을 것이라고 믿어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달을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스스의 손가락만 보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손가락의 방향만 기억하면서 마치 달을 본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자기가 막상 가르치는 자리에 서게 될 때, 즉 자기가 직접 손가락질을 해야 할 때 비로소 정말 허둥지둥 달을 살피게 된다. 그러니까 많은 경우 가르치는 자리에 서보지 않으면 진정한 앎에 이르기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293
물론 사이비 교사도 많다. 이들은 스스의 손가락질만 기억하고 있다가 자기도 같은 손가락질만 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우리 주위에 달은 보지도 않고 손가락질만 하는 교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294
우리가 학문의 내용을 제대로 알고 보면 훨씬 가깝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교사는 이 길을 찾아내어 그곳으로 학생을 안내해야 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그 학문 내용을 입체적으로 훤히 꿰뚫어 알 필요가 있다. 이 앎은 처음 발견자가 우연히 알고 찾아낸 것을 훨씬 능가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295-296
옛사람들이 "백번 들은 것이 한 번 본 것만 못하다"고 했다지만 사실은 "백번 본 것이 한 번 깨달은 것만 못하다"고 해야 한다. 오히려 격언을 뒤집어 "백번 본 것이 한 번 듣는 것만 못하다"는 말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사실 현대문명의 위기는 바로 깨달음의 위기이기도 하다. 현대문명의 위험은 과학이 제공해 주는 깨달음을 외면하고 과학이 제공해주는 힘, 곧 그 기술적 능력만을 받아들여 개체로서 인간 안에 각인된 눈먼 본능만을 끝없이 만족시키려는 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험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작업은 자신들이 얼마나 어리석을 수 있는지를 아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334-335
"공부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냐? 너무 성과에 연연하지 말고 바른 공부를 해나가기 바란다." 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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