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삼 교수의 강의를 몇 번 들을 기회가 있었다.
강의가 일단은 재미있게 진행된다. 강의에서 청중을 재밌게 하는것이 일단은 성공의 시작이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강의는 즐거움을 주었다. 또한 강의 내용에서 많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열의가 있었다. 그래서 듣는이로 하여금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하였다.
이 책은 그런 저자의 성향을 반영하고 있기라도 하듯 내용이 재밌게 풀어 쓰여 있다.
출판사의 주니러 클래식 시리즈로 나온것을 보면 청소년들에게 풀어쓴 논어를 보며 한 걸음 다가올 수 있게 하는 취지지만, 성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주는 책이란 생각이 든다.
저자의 풀어씀 즉, 가능하면 객관적으로 풀어쓰려 하지만 주관적인 해석을 담고 있기에 자칫 주견이 없다면 따라 가야만 할지라도 주견을 세우기 위한 학습적인 측면에서 충분한 논어의 즐거움을 준다는 생각을 한다.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저자는 비뚤어진 유교 사상에 반대하며 논어야 말로 깨어있는 내용이고 융통성 있는 글이라고 말한다.
물론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을 한다. 우리의 역사속에서 조선의 멸망은 당시 유교의 비뚤어진 해석으로 오만하고 편협한 사회였기에 그러하였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잘 읽지 않는 책' 이라 표현하였다. 논하고 말한다는 뜻을 가진 논어에 대한 고리타분함을 가진 사람에게도 좋을 듯 싶다. 재밌게 읽히고 시대에 비출 수 있게 하고 있기에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논어(論語)>란 '논하고 말하다.'라는 뜻이다.
'진리를 논하시고 말씀하신 책, 즉 <논어>가 된 것이다.
노자가 잘 지적했듯, 원래 '진리는 이름을 갖는다면 참된 진리가 아닌 것이요, 이름 붙일 수 있다면, 그건 영원한 이름이 아닌 법'이다.(<도덕경>) 17
공자는 현대적으로 말하면 '운전기사'로 부터 '공장 기술자', 그리고 '목장 관리인' 같은 육체 노동을 두루 경험했던 것 같다. 그러면 서 철저한 자기 점검의 미덕을 갖추었던 그였기에 점차 주변의 인정을 받아 더 큰 임무를 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23
1. 학이(學而)편 - 배워야 사람이다.
배움과 익힘의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보통 여섯 가지 기술, 곧 육예(六藝). 즉 예(예절)와 악(노래와 춤), 홨기, 마차몰기, 글쓰기, 셈하기등이 그것이다. 예와 악은 사람과의 관계 맺기에 요구되는것이고, 활쏘기와 마차몰기는 국토 방위에 필요한 기술이며, 글쓰기와 셈하기는 관리나 지식인으로서 업무를 처리하는 데 쓰이는 것이니, 모두 고대에 지식인이자 무예를 겸비한 성인 남자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 기예들이다.
한편 텍스트 중심으로 육예를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첫째 중국 고대의 시집인 <시경(詩經)>, 둘째 중국 고대의 정치와 역사를 서술한 <서경(書經)>, 셋째 국가와 계급 간에 지켜야 할 예의범절을 규정한 <예기(禮記)>, 넷째 음악에 대한 이론서인 <악기(樂記)>, 다섯째 점치는 책인 <역경(易經)>, 그리고 공자의 조국인 노나라 역사책인 <춘추(春秋)>를 꼽는 경우도 있다. 32
공자 말씀하시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며,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느니라."(6:18)
... 우리는 배움의 성취가 단지 '알고/모르고'사이의 이분법이 아니라 좀더 깊은 차우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34
벗이란 배움과 익힘을 함께 하는 사람이다. 35
단 한 번 만나도 속을 드러내어 함께 흐느낄 수 있는 살마, 그 사람이 벗이다. 36
제대로 사는 삶이란, 배우고 익히는 길을 가는 도중에 속에서 터져 나오는 희열에 몸을 떨기도 하고, 또 어느 순간 나의 길을 이해하고 옹호하는 참된 벗을 만나 흔쾌한 즐거움을 나누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배우고 익히며 '나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인생에서 얻는 기쁨이요 즐거움이다.
그대가 확고하게 '나의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걸을 적에야 참된 친구, 진정한 벗이 생겨남을 잊지 말하는 것이 공자가 내리는 가름침이다. 37
세속적 욕망의 성취에 인생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과 남의 비평(인정, 비난, 칭찬)조차 말갛게 벗어나 내 속에 깃들인 진리를 확인하고 또 즐기며 사는 담담하고 고요한 상태, 이것이 인생의 목표 즉 '배우고 익히는 삶'의 궁극처라는 것이다. 38
나의 길은 남의 칭찬이나 비평에도 상관하지 않고, 또 배움의 기쁨으로부터도 벗어난 탈아(脫我)의 세계로 난 길을 걷는 것이다. 39
주변의 시비와 관계없이, 또 물질적 곤궁과도 관계없이 자신 앞에 놓인 그 길을 확고하고 확신에 찬 걸음으로 내딛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 길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길이 아니라, 내가 걷지 않을 수 없는 길이 된다. 그럴진대 남이 알아주든 않든 성낼 까닭이 없는 것이니, 그제야 군자(君子)라는 이름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41
2. 위정(爲政)편 - 나는 이렇게 살았노라
육예(六藝)라고 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법학, 의학, 정치학, 경영학, 공학 등등이 두루 다 배움의 대상에 속할 것이다. 44
공자 말씀하시다. "힘이 부족하다는 건, 힘껏 달리다가 지쳐 쓰러지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지. 한데 지금 자넨 옳게 한 번 달려 보지도 않은 채, 못한다고 지레 선을 긋는구먼."(6:10)
'하지 않는 것'과 '못하는 것'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47
공자 말씀하시다. "지위가 없다고 근심할 것이 아니요, 전문가가 되지 못함을 근심할 일이다. 요컨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근심할 까닭이 없고, 오로지 내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찾을 일이다."(4:14)
내가 세운 '나의 길'에 매진하여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되면 그에 합당한 자리가 자연히 생겨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전문가가 되지 위해 필요한 지식과 정보가 무엇인지를 찾아 가는 주체적인 인간, 내 인생을 내가 주도하는 인간이 되기를 권하는 것이다. 47
'귀가 순해졌다.' - 보통 우리는 '남의 말을 듣는다'고 하지만 실은 '내 식'대로 이해하는 데 불과하다. 문제는 '나'에게 있다. 내 속엔 내 과거와 미래, 욕심과 계획들이 엉켜 있어서 남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고, 왜곡되거나 퉁겨 나가 버린다. 남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 식대로 '오해'한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인간이란 '오해 하는 동물'일지 모를 정도이다. 게다가 오해를 바탕으로 '말하기'에 나서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분란과 다툼이 발생한다. 53
이렇게 귀가 순해진다는 것은 '말하는 나' 또는 '보는 것을 진리로 삼는'
에고(ego)가 사라진 상태를 뜻한다... 달리 말하자면 사회와 자연에 대해 평가하던 내가 사라지고, 그 평가하는 '나'조차 남을 대하듯 지긋이 살펴보는 그런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한다. 54
3. 팔일(八佾)편 - 문명은 숨을 쉰다.
공자는 예의 참된 의미는 예식 순서에 따라 절하고 분향하고 하는 형식이 아니라, 도리어 그 형식 속에 깃든 '공경하는 마음'을 실천하는 데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64
공자 말씀하시다. "사람으로서 사람답지 못하다면 예는 어디다 쓸것이며, 악(樂)은 또 무슨 소용이 있으랴."(3:3)
어떤 젊은이가 '예의 근본'을 여쭙자, 공자는 '위대한 질문'이라고 무릎을 치면서 참다운 예는 형식이 아니라, 그 형식 속에 깃든 '예의 정신'에 있노라고 천명한다.
임방이라는 젊은이가 예의 근본을 여쭈었다.
공자, 무릎을 치며 외쳤다. "기막히구나. 이 질문! 예는 사치하기 쉬운 경향이 있는데 실은 검소한 것이 예의 근본이요. 장례식은 남의 눈을 의식해 호화롭게 하기 쉬운데 실은 슬픔에 겨워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 장례의 본다 정신에 합당하니라."(3:4) 66
인간은 악(樂)을 통해 사회적 관계 속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자유 의지를 발휘한다. 인간은 피치 못해 더불어 사는 존재이긴 하지만, 개미처럼 사는 동물은 아니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고 자기 세계를 만들고 표현함으로써 인간다움을 획득한다. 아니 더불어 살아가는 이유가 어쩌면 자기 세계를 창조하고 표현하는 악(樂), 예술의 건설을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본다면 공자느 ㄴ예술의 가능성을 누구보다도 긍정하고 또 중시했던 사람이다.
공자 말씀하시다. "시에서 흥취를 얻어, 예의 뜻을 알고, 악에서 성취하리라."(8:8) 67
"사람에게 먼 계책이 없으면 언제나 가까운 데서 근심걱정이 생긴다."(15:11)
유자가 말했다. "예(禮)의 용도는 화목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옛 임금님들이 하신 정치는 다 화목을 아름답게 여겼으니, 작고 큰 정책들이 화목을 성취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리너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화목함이 좋다고 하여 여기에 빠지는 경우가 그렇다. 그러니 엄정한 예로써 뼈대를 세워 주지 않으면 화목함은 오래 유지되지 못하는 법이다."(1:12) 70
공자는 두 방면에서 덮치는 야만의 사태를 두려워하였다. 사회를 버리고 자기 몸의 안전만 취하는 이기주의가 그 하나요, 또 하나는 국가(또는 집단)가 개인을 위협하는 폭력을 발휘(전체주의)였다.
이 두 방향 사이에서공자는 전통문화를 지키고자 하였다. 자칫 이 전통문화가 사라지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으리라고 몹시 절박해 하였다. 이에 그는 예와 악을 통해 '전체에 기울지도 않으면서, 개인에 머물지도 않는' 중용의 길을 보존하려고 내내 애를 썼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와 악의 내부조차도 염려하였다. 예도 고이면 썩고(형식주의), 악도 넘치면 줄줄 흘러내린다(매너리즘). 예와 악은 서로 긴장하면서 보존되어야 했던 것인데, 인간의 문명을 안팎으로 유지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공자는 깊이깊이 깨달았던 것이다. 공자는 바람 앞에 등불처럼 흔들리는 인간다운 삶을 지켜 내려고 예와 악의 변주를 내내 주장하고 또 연주한 것이었다. 그 척박하고 어려운 시대에! 71
4. 이인(里人)편 - 사랑의 길.
공자 말씀하시다. "... 군자란.. 황당하고 당혹한 때에도 인을 실천하느니."(4:5) 79
물질적 욕망과 명예에 대한 집착, 곧 부귀나 빈천에서 벗어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그가 군자다.
공자 말씀하시다. "군자란 어느 곳에서든 무슨 일을 하든, 꼭 해야만 하는 일도 없고, 꼭 하지 말아야 하는 일도 없어서 다만 적잘함에 따를 뿐."(4:10)
공자 말씀하시다. "군자란 남에게 베풀 것(德)을 생각하고 소인은 이익을 생각하며, 군자는 제 잘못을 생각하고 소인은 남을 탓하니라."(4:11)
공자 말씀하시다. " 옛사람들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자칫 몸이 그 말을 따르지 못할까 염려해서였다."(4:22)
공자 말씀하시다. " 아껴서 실수할 일이 적은 법."(4:23)
"군자란 말은 더듬거려도 실천은 민첩하게 해 내려는 존재."(4:24)
이렇게 보면 은을 체득한 군자의 몸짓은 우선 과묵하게 실천하는 사람이며, 둘째 자기 책임을 앞세우는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며, 셋째 물욕과 명예욕 같은 세속적 가치를 벗어나 남을 배려하고 사양하는 살마이니 '세속 속의 성인'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겠다. 80-81
공자 말씀하시다. "인이 어디 먼 고셍 있으랴. 내가 인을 실천하고자 하면 곧 인이 이르는 것을."(7:29)
인은 멀리 있지 않다. 도리어 내 주변, 내 곁에 있을 따름이다. "자기 주변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 바로 이것이 인을 찾는 방법"(6:28)이다. 82
번지가 인을 여쭈었다. 공자 말씀하시다. "사람을 아낌이지!"(12:22)
상대가 아까워서 손을 갖다 대기조차 어려운 마음, 이것이 '사람을 아낌(愛人)'이요. 곧 인이다. 상대방을 내 몸보다 귀하게 여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부족한 것은 메줘 주고 넘치는 것은 걷어 내어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인(仁)인 것이다.
그러니 집안에서 효를 통해 익힌 상대(부모)에 대한 사랑을 사회로, 국가로, 천하로 점차 베풀어 나가는 것이 인의 길이다. 그 상대방은 이제 친구, 동료, 연인, 회사, 국가가 될 참이다. 아니 시인 윤동주가 <서시(序詩)>에서 읊었듯,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함. 이 것이 인이다. 애틋하지 않은가, 사랑하는 마음이. 또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인의 실천이란.
5. 공야장(公冶長)편 - '자공'이라는 제자
스스로를 철저하게 객관적을 성찰할 수 있는 눈.
자기 성찰의 눈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사소한 것 같지만 그 끝은 하늘과 땅의 차이를 가르게 되는 법이다. 소인배는 이런 성찰의 자세가 없기 때문에 남의 잘된 것을 보면 꼭 나븐 점을 찾아 비난하고, 자기가 한 일은 훌륭하다고 잘못 자부하는 것이다. 89-90
"가난한데도 즐길 줄 하는 삶"
가난을 즐겨하는 미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가난을 가난으로 여길 겨를이 없음, 또는 물질적 조건이 나의 일상 생활을 침해하지 못하는 그런 '경지'를 이른다. 이미 가난은 내 마음속에 찌꺼기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가난의 콤플렉스를 벗어던진 말간 평화의 자리다. 그러므로 공자가 제시한 새로운 삶, "가난한데도 즐기고, 넉넉한데도 예를 좋아하는 삶"은 '가난/부유함'과 같은 물질적 조건, 또는 욕망에서 벗어나 ㄴ곳이다. 이제야 하치 한여름의 태풍이 지나간 해맑은 하늘처럼, 티 없고 왜곡 없이 사물을 바로 볼 수있는 세계가 열린다. 92
물질에 대한 욕망 또는 결핍의 그늘을 벗어 버린 자리에 참된 인간의 삶(일상)이 존재하며, 그 일상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궁극적 가치를 뜻한다는 깨우침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자면 문제의 핵심은 물질적 욕망이지, 물질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 94
6. 옹야(擁也)편 - 멋진 녀석들
공자가 맹지반을 칭찬한 것은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지 않음'. 즉 겸손함 때문이다. 용기는 육신의 힘 자랑이 아니라 그 힘으로 얻은 공을 뻐기지 아니할 때에야 얻어지는 것이다. 쉽게 오해하듯 용기는 센 주먹이나 날랜 발길질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낮추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가짐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용기의 집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 그러므로 용기는 정의, 덕성 같은 말과 깊이 관련된다. "정의를 보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용기 없는 짓이다."(2:24)라는 지적은 이 대목에서 유용하다. 103
용기란 힘을 발휘하는 것, 즉 '몸의 윤리'가 아니다. 용기는 벌써 겸손과 겸양이라는 '마음의 윤리'인 것이다. 이렇게 용기는 덕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공자가 전쟁터에서 얻는 요익 가운데, 공로를 뻐기지 않고 사양하며, 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특별히 중시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발전하면 유교에서 숭상하는 덕으로 승화된다는 점도 짐작할 수 있다. 공자가 맹지반을 크게 칭찬한 까닭이 이 지점에 있으며, 또 수천 년을 흐른 오늘날 우리들 눈에조차 그가 멋있게 보이는 것도 그의 '용기-덕-사양하는 마음'이 가진 보편적 호감 때문일 것이다. 105-106
공자가 제자 칠조개에게 벼슬자리를 알선해 주었다.
그는 "저는 아직 그 자리를 맡을 만한 깜냥이 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자가 이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5:5) 106
차가운 자기 성찰과 더불어 가난과 부유함이라는 물질적 조건 너머에 인간다움이 있다는 가르침의 핵심을 파악한 제자에게서 큰 기쁨을 느낀 것이다. 107
<논어>에는 "민자건이 스승을 모실 때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였다"(11:12)는 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평소에 무척 과묵한 살마이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집에서는 효도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니, 공자가 그리워하던 군자의 상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공자가 "군자란 말은 어눌하면서 행동은 민첩한 사람"(4:24)이라 고 정의한 대목이나 "사람됨이 강직하고 굳세고 소박하고 말은 어눌할 때 인(仁)한 경우가 많더구나."(13:27)라는 경험론을 편 것도 민자건의 경우에 들어 맞는다. 111
7. 술이(述而)편 - 공자의 학교
"배우고 싶은 자는 누구든 와라!" 이것이 공자 학교가 갖춘 가장 큰 특징이었다. 116
배우려는 이에게는 다 열려 있는 문, 그러나 옳게 배우려 들지 않는 이는 남겨 두지 않는 엄격함. 이것이 공자 학교의 모습이었다. 118
'묻지 않으면 답하지 않는다'는 원칙. 119
요컨대 질문할 줄 아는 자가 제자이며, 그 질문에 정답을 내릴 수 있는 자가 스승이다. 120
8. 태백(泰伯)편 - 성왕의 계보
9. 자한(子罕)편 - 공자의 사생활
위대함이란 저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어떤 신비가 아닌 일상생활 주변에서 빚어지는 중용적 삶에서 드러나는 것임을 알아채야 한다. 142
중용이란 한 사안이 가진 둘 이상의 의미를 이해하면서 그 당시에 합당한 이치를 찾는 것이지. 결코 '이것도 흥, 저것도 흥'하는 식의 포용주의가 아니다. 145
매일매일 삶을 산책하듯, 관찰하고 느끼면서 살아가는 삶. 이것이 공자의 일상생활이었던 것이다. 150
내로라고 뻐기지도 않고, 남을 시기하지도 않으면서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모습, 이것이 공자의 진면목일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느 눈 밝은 제자는 공자를 모순된 단어로 묘사하였으니, 나는 이 역설적인 표현 속에 공자의 참된 모습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공자께서는 따뜻하면서도 엄격하였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무섭지는 않았고, 공손하시면서도 태연자약하셨다.(7:37) 151
10. 향당(鄕黨)편 - 공자의 웰빙
함부로 먹지 않고 함부로 입지 않음, 처한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행동하고 선택하는 섬세한 대응, 이것이 유교에서 꿈꾸는 인간다움의 틀, 곧 문명성이다. 160
웰빙이란 비싼 음식과 신선한 공기가 아니라 섬세한 미적 감각을 일상생활 속에서 관철할 때 빚어지는 아름다움이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에서부터, 그리고 주변의 사소한 사물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에서 웰빙이 이뤄지는 것이다. 165
11. 선진(先進)편 - 사제 : 안연과 스승
12. 안연(顔淵)편 - 진리 또는 '매트릭스'
안연이 여쭈었다. "인(仁)이란 무엇입니까?"
공자 말씀하시다. "'내'가 실체라는 생각을 넘어 관계라는 각성에 이르면 '인'이 되지. 단 하루라도 '내'가 실체가 아니라 관계라는 진리를 깨닫기만 한다면, 온 세상이 본래부터 사랑으로 충만한 것임을 환히알게 되리라. 무론 이런 진리는 스스로 깨닫는 거지 결코 남이 해 줄 수는 없는 거야."
안연이 그 길을 물었다. 공자 말씀하시다. "눈에 보이는 게 독립된 개체라는 생각을 버려. 둘째, 세상이 관계가 아닌 개체로 이뤄졌다는 말은 믿지 마. 셋째, '나를 알아 달라'는 소릴 하지 마. 넷째, 이기적인 행동은 하지 마(나를 남에게 접속해!)."
안연이 흐느끼며 말했다. "제가 비록 명민한 녀석은 아닙니다만 죽는 날까지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잡겟나이다."(12:1) 179-181
인간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은 잠잘 때나 의식이 없을 때도 스스로 움직이는 심장 박동을 갖고 있다. 이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제 스스로 그렇게(自然)' 변화하는 자연의 리듬과 동질적이다. 인간과 자연은 본래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또 사람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간다. 사람은 '본래적으로 사회적 동물'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관계적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관계 맺는 존재다. 복례란 이런 인간의 본래적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질리고 환원되기의 뜻이다. 183
요컨대 극기복례란 나를 개체로 인식하려는 눈(시각)과 귀(청각)의 편견에서 해방되어 내가 원래 남(바깥)과 '관계'를 맺을 때에야 참된 나를 이룰 수 있다는 진실을 제대로 알고 또 올바르게 회복해가는 실천을 의미한다. 184
눈에 보이는, 거울에 비치는 개체도 이뤄진 세계는 진실이 아니라 도리어 환상(매트릭스)이다. 185
요컨대 개체로서의 내가 환상(매트릭스)임을 깨닫는 순간 세계는 하나의 꽃으로 피어남을 알게 되리라는 전망이다. 이것이 진리요 인이다. 187
진리로 가는 네 가지 길을 정리하자면 '제반 행동, 즉 듣고, 보고, 말하고, 행동하는 데서 두루 에고를 벗어라'는 것이다. 관게 맺기, 곧 예(禮) 속에 진리가 깃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러므로 관계를 순조롭게 만드는, 남과의 접속을 원활하게 하는 접대와 응대의 기술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소학(小學)>에서 교육을 바로 관계 맺지 훈련, 이른바 "응대하고. 대접하며, 빗질하고, 청소하느 ㄴ방법", 곧 응대소쇄(應對掃灑)로부터 시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윤리란 실은 사람 사이의 관꼐를 적절하게 이해하고, 접속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189
공자 말씀하시다. "... 인이란 내가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 주고, 내가 갖고 싶으면 남도 갖게 해 주는 실천이지. 우리 일상의 주변에서 사랑의 길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게 인을 실천하는 법이지."(6:28)
인을 실천하기 위해 유엔 사무총장이 될 필요가 없고 대통령이 될 필요가 없다. 살아가는 "일상의 주변에서" 그저 내가 갖고 싶은 것은 남들도 갖고 싶겠거니"하면서 '미루어 헤아리는 마음가짐', 바로 여기서 피러나는 것이 인이라고 가르친다. 191
13. 자로(子路)편 - 정치란 무엇인가
공자는 인(仁)을 설명하면서 '정치란 곧 소통'임을 강조한 바 있다. 193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면 곧 나와 남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지고 그렇지 못할 경우 원망이 생긴다. 여기 원망이란 요즘 말로 하자면 커뮤니케이션 부재로 인해 쌓인 화병, 그것이 곪아 터져 나온 정쟁이 될 것이다. 194
즉 공자에겐 '말이 서로 통하는 상태'가 정치의 원형이다. 공자가 꿈꾼 좋은 정치는 '말이 통하는 문명 사회'라는 점을, 말의 소통은 한마디로 '신뢰'로 개념화된다.
공자가 꿈꾼 문명 세계란 마의 소통, 곧 약속과 실천이 살아 있는 곳임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195
공자는 관계의 직분, 즉 명분(名分)을 어김은 곧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까지 경고하는 것이다.(3:13, 9:11)
따라서 야만 상태에는 정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가 언어와 약소긍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정치학은 정명론(正名論)으로 귀결되는데,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명분에 합당한 '정당성'에 따라 정치적 힘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196
공자의 위대한 점은 폭력을 정치의 전모로 이해하는 당시 정치가들에게, '좋은 정치란 폭력이 아니라 언어로 형성되는 신뢰의 힘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데 있다. 이 점은 동양의 정치사상 발전사에서 분수령에 해당하는 것이다. 공자는 그 이전까지 샤먼의 힘(신화)과 폭력의 힘(무력)에 의해 주도되었던 정치 세계를, 말과 약속이 실천되는 인간 세계로 전환시킨 최초의 사상가였다. 197
유능한 경영인은 직원들의 나쁜 점을 들추면서 이것 고쳐라 저것 고쳐라 하지 않는다고 한다. 회사의 큰 목표를 제시하고 그쪽으로 분위기를 잡아나가면 장점들은 모이고 단점은 묻히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을 옳게 알아서 제자리에 맞게 쓰는 것은 인정(仁政)의 승패가 달려 있는 것이다. 208
14. 헌문(憲問)편 - 선비가 걸어온 길
요컨대 수기치인이란 선비가 공직에 취임하여 남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도덕적 훈련이 심화되어 자립하게 됨에 따라, 거기서 번져 나오는 에너지(aura)에 주변이 끌려드는 것이다. 215
공자는 선비를 두 유형으로 나눠보고 있다.
하나는 달사(達士)요, 또 하나는 문사(聞士)다.
달사의 요건으로서 그는, "정직한 인격성과 정의를 좋아하며 남의 말을 잘 들을 것, 또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며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이에 반해 사이비 선비, 즉 문사란 겉으로는 도덕적인 선비 같지만 실제로는 업무 처리에나 능한 '기술적 지식인'에 불과하다고 평한다. 218
15. 위령공(衛靈公)편 - 평천하의 길 : 공자대 자로
공자는 힘이 아니라 덕으로 정치를 행하는 것만이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유일한, 그리고 올바른 길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225
군자란 "가난한데도 (자기 길을) 즐길 줄 아는"(1:15) 존재여야 했다. 그러니 군자를 '짐짓 곤공할 줄 아는 존재'로 본 것은 내력 있는 방응인 것이다. 228
공자가 가르치고자 한 미덕은 무턱대고 힘을 발휘하는 거이 아니라 '무엇이 정의인가'를 판단하고, 또 '올바른 시대정신'을 찾는, 즉 '정의를 찾는 노력'이었다. 231
공자는 지금 당장은 비현실적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문명을 옳게 되살리려면, 군자란 '문화 시대의 지도자'로 새롭게 개념 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그 새 시대를 준비하는 군자의 키워드가 '수기이경(修己以敬)'이라는 언어였다. 이를 통해 자기 책임성, 성찰성 그리고 내향성을 갖춘 존재가 군자이며, 또 그가 발휘하는 힘이 폭력이 아닌 '매력'으로 전환될 때에야 인간다운 사회, 문명적 질서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235
둘러 가는 것 같지만 '덕성을 통해 주변이 끌려드는' 매력의 힘, 이것만이 천하를 평화롭게 이끌 동력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235
16. 계씨(季氏)편 - 공자의 정치경제학 : 분배냐 성장이냐
계씨는 주나라 재상보다 더 부유하였다. 그런더ㅔ도 염유가 그를 위해 세금을 수탈하여 더욱 부유하게 만들었다.
공자 말씀하시다. "저 놈은 우리 학생이 아니다. 얘들아! 북을 울려서 성토하여도 좋으니라."(11:16)
아무리 탁월한 기예와 지식을 갖고 있어도, 도덕적 판단이 배제된 기술 만능의 사고 방식은 재난을 부르게 된다는 공자의 도덕주의적, 또는 성찰적 가치관을 여실히 볼 수 있는 대목.
이거을 오늘날로 끌로와 해석하자면, (정치) 기술의 사회적 의미, 수단이나 방법의 도덕성에 주의해야 한다는 공자의 경고로 볼 수 있다. 공자 가르침의 핵심은 용맹이나 지혜에 있다기보다는 이러한 재능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도덕적 성찰에 있음을 이 대목에서 다시금 느낄 수 있다. 246-247
도덕적 가치 판단...
공자의 정치 경제학은 빵을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재화를 균등하게 분배하는 정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자에게 정치란 부의 축적을 꾀하는 경제에 종속된 기술적 행위가 아니라, 부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하는 사회 정의의 수립에 핵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균등한 분배, 서로 다름에 대한 인정, 그리고 안정된 생활, 이 세 가지가 국가를 경영하는 요체라는 것이다.(즉 "대개 고르면 가난하지 않고, 화목하면 모자라지 않고, 평안하면 기울지 않기 때문이다.") 250
17. 양화(陽貨)편 - 공자가 미워한 것들
양화 편은 특별히 인간 공자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253
이 편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부분은 쿠데타 세력의 초청에 마음 흔들려 하는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공자 모습이 현실감 있게 그려진다.
그리고 뒷부분에는 공자의 분노와 증오를 많이 기록해 놓았다. 제자인 안연조차 "화난 마음을 다른 데서 풀지 않고, 두 번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6:2)의 경지를 얻었다고 한 점을 염두에 두면, 분노해야 할 대상에게는 뜨겁게 분노하는 것이 곧 성인의 풍모임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 역시 유고의 한 특징이다.
분노해야 할때 분노하지 못하는 것은 참된 용기가 아니다. 이 편의 후반부 핵심은 "정의를 보고도 실천하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다."(2:24) 라는 구절로 대변할 수 있으리라. 254
공자 말씀하시다. "천한 놈드로가 국가 대사를 함께 할 수 있겠더냐? 그 놈들은 자리를 얻지 못하면 얻으려고 전전긍긍하다가, 일단 얻고 나면 잃을까 전전긍긍한다. 정녕코 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들 땐, 못하는 일이 없는 놈들이다."(17:15)
자리나 지위란, 스스로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면 얻게 되는 것이다(4:14) 257
사람이 참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미덕을 필요로 할까. <대학(大學)>의 가르침을 받들자면, "멈춰야 하는 곳에선 멈출줄 아는 것(知止)"이 그것이리라.
처한 곳이 추운 데라면 추위에 멈추고, 더운 곳이라면 더위와 더불어 버티는 것. 추위에 떨면서도 따뜻함을 구걸하지 않고, 더위 속에서는 또 뜨거움을 버텨나가는 것, 이것이 사이비가 아닌 '참'으로 가는 길이다. 262
자공이 말하였다. "선생님도 미워하는 것이 있는지요?"
공자 말씀하시다. "미워하는 게 있지. 남의 잘못을 떠벌리는 것을 미워하고, 낮은 데 있으면서 윗사람 헐뜨든 것을 미워하고, 용맹스럽기만하고 예가 없는 것을 미워하며, 과감하기만 하고 꽉 막힌 것을 미워한다네."
공자가 물었다. "자네도 미워하는 것이 있는가?"
"주워들은 걸로 자기 지식인 양 여기는 짓, 불손함을 용기로 아는 짓, 그리고 고자질을 정직으로 여기는 것으 미워합니다."(17:24) 263
18. 미자(微子)편 - 나의 길을 가련다
공자가 위나라에서 경쇠라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삼태기를 짊어진 사람이 지나다 듣고는 말했다. "쓸쓸한 마음이 소리에 들어 있군."
다 듣고 나서 또 말했다. "흠! 천박한데, 그 소리가. 세상이 날 알아주지 않으면 또 그뿐. '물이 깊으면 옷을 입고 건너고, 물이 얕으면 걷고 건너라'했거늘."
공자가 그 말을 듣고 말했다. "깔끔하구먼. 하나 그게 어려운 건 아니지!"(14:42) 268
은둔자의 비판은 '시대에 맞춰 그에 걸맞게 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이렇게 물이 깊은 때(곧 암흑 시대)에는 은둔하는 것이 옳은데, 뭐 그렇게 미련이 남아 사회에 개입하려 하는 것이요!"라는 질타가 된다.
이에 대해 공자는 "깔끔하구먼. 하나 그게 어려운 건 아니지!"라는 날렵한 뒷발차기로 응대한다. 곤자는 은둔자드르이 뜻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한 몸 보전하려고 세상사에 깨끗이 미련 버리는 일, 그깟 것이야 나도 하려 들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어려운 것은, 더럽고 추악하지만 '그럼에도', 아니 더럽고 추악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더욱 세상사 속으로 참여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길"에 있다는 것이다. 269-270
공자는 은둔자들이 사회적 예의(손님을 접대하고, 자식들을 소개하는 행동)는 실천하면서도 막상 정치적 재난을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행위는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즉 '벼슬 살지 않는 것', 다른 말로 하자면 '정치적 무관심'은 지식인으로서는 옳지 않은 행동이다. 272
그는 시대의 혼란과 소통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라고 보았던 것이다. 273
19. 자장(子張)편 - 우정이란 무엇인가
공자 말씀하시다. "도움이 되는 벗이 세 종류요, 손해를 끼치는 벗도 세 종류가 있다. 정직한 벗이 도움이 되는 첫 번째요, 약속을 꼭 지키는 벗이 두 번째요, 견문이 넓은 벗이 세 번째다. 손해를 끼치는 벗으로는 꽉 막혀 세상 넓은 줄 모르는 녀석이 첫 번째요, 알랑방귀 뀌는 녀석이 두 번째요, 간사한 녀석이 세 번째다."(16:4)
친구는 친구요, 형제는 형제다.(형제는 한 핏줄로 태어난 동기同氣이니 하늘이 맺어준 자연적 관계, 즉 천륜天倫이요, 친구는 의義, 즉 뜻이 맞아서 맺어진 사회적 관계, 즉 인륜人倫이니 차이가 있다.)
친구를 사귀는 데는 나름대로 '거리'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서로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래 사귄 친구 사이에도 공경하는 자세를 잃지 않은 안평중에게 공자는 '친구를 참 잘 사귀는 사람'이라고 평한 것"(5:16)이리라.
그러니 친구가 잘못한다고 지나치게 끌어안고서 안달복달할 것은 없다. 몇 번 충고해 보다가 고치지 않으면 그냥 '이제부터 나와는 길을 달리 하니 친구가 아니다'라고 절교하면 그만이다. 구태여 친구의 소맷자락을 부여잡고 '의리가 어쩌고, 우정이 어쩌고' 해가면서 나서다간, 괜한 봉변을 당하는 수가 있다. 그렇게 봉변을 당한 다음에야 '넌 내 친구가 아니다'고 절교해 본들 맞은 뺨만 더 아플 뿐이다. 284
자유가 말했다. "임금을 섬긴답시고 자주 '아니 되옵니다'라고 간하다간 공욕을 치르는 경우가 생기고, 친구 사이라고 지나치게 조언하다가는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4:26)
자공이 우정을 여쭈었다.
공자 말씀하시다. "충고를 해서 좋은 방향으로 이끌되, '아니다'싶으면 그만두어야 한다. 스스로 욕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12:23) 285
진정한 벗은 나와 같은 존재거나 '또 다른 나'이다. 286
20. 요왈(堯曰)편 - 진리의 계보학
중용이란 무엇인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지나치지 않고 모자라지도 않음을 뜻하는 최적의 상태, 곧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용의 관건이다. 이것은 건강의 의미와도 직통한다. 말하자면 비만도 아니요 영양실조도 아닌 한 중간, 이것이 건강이요 또 그것이 '몸의 중용 상태'다. 따라서 중용이 지향하는 좋은 정치는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290
"좋고 나쁜 것의 두 끝을 잡아서 그 가운데 가장 적절한 것을 백성에게 베풀었다"는 말은, 중용 정치학이 최적의 상태를 찾는 과정이지 이것과 저것을 섞은 회색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잘 말해 준다. 중용은 차라리 극단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291
<논어>의 인생이란 '내내 배우고 또 익히며 살다가 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298
에필로그
인간을 인간답게 대접하기, 이것이 <논어>의 중요한 주제다.
나아가 배움과 가르침이 <논어>의 중요한 주제인 바, 그 요체는 '짐승 같은 인간을 어떻게 하면 사람다운 인간으로 만들 것인가', 또는 '야만의 세계를 어떻게 문명의 세계로 전환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그 과제의 초점에 효(孝)가 존재한다. 303
맹자는 인간을 둘러싼 관계망이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고 본다
오륜(五倫)이다.
(1)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2) 남편과 아내의 관계
(3) 국가와 국민으로서의 관계
(4) 형과 아우의 관계
(5) 동료 또는 친구 관계
유교의 학문이란, 이 다섯 가지 네트워크의 의미를 배우고 실천하는 학문인 것이다. 유교에서 최고 대학이 성균관이요, 그 성균관의 본관이 명륜당(明倫堂)이다. 명륜당이란 곧 '네트워크(倫)를 환하게 익히는(明) 교실(堂)'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유교 학문이란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다섯 가지 관계(네트워크)를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는 것일 따름이다. 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