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여행'에 해당되는 글 610건

  1. 2018.08.10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 니체 책세상 2001 04160
  2. 2018.07.25 공부중독(E-book) - 엄기호, 하지현 위고 2015 03300
  3. 2018.07.19 교사반성문 - 여행은 참교육
  4. 2018.07.18 교사 반성문 - 지봉환 정한책방 2018 03370
  5. 2018.07.11 인간실격 - 다자이 오사무 민음사 2004 04830
  6. 2018.07.04 쇼펜하우어 문장론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훈출판사 2005 03850
  7. 2018.06.27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 알랭 드 보통 은행나무 2016 03840
  8. 2018.06.20 여행자의 독서 : 두번째이야기 - 이희인 북노마드 2013 03810
  9. 2018.06.13 경제, 알아야 바꾼다 - 주진형 메디치 2017 03320
  10. 2018.06.06 나의 친애하는 적 - 허지웅 2016 문학동네 03810
  11. 2018.05.30 열한계단 - 채사장 웨일북 2016 03100
  12. 2018.05.23 조난자들 - 주승현 생각의힘 2018 03300
  13. 2018.05.16 ​ 여행의 문장들(여행자의 독서, 세번째 이야기) - 이희인 2016 북노마드 03810
  14. 2018.05.09 남쪽으로 튀어 - 오쿠다 히데오 은행나무 2006
  15. 2018.05.02 앨저넌에게 꽃을 - 대니얼 키스 동서문화사 2006
  16. 2018.04.25 보통의 존재 - 이석원 달 2009
  17. 2018.04.19 혼자가 되는 책들 - 최원호 북노마드 2016
  18. 2018.04.17 영화 <뷰티 인사이드> 에서
  19. 2016.11.03 삼십(30)금 쌍담(雙談 둘쌍 말씀담) - 강신주 이상용 민음사 2016 03100
  20. 2016.10.27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 인디고연구소 궁리 2012 03300
  21. 2016.10.20 폭력이란 무엇인가(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 슬라보예 지젝 난장이 2011 03100
  22. 2016.10.13 (아이의 미래를 바꾸는) 학교 혁명 - 켄 로빈슨 루 애로니카 21세기북스 2015 03370
  23. 2016.10.10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19세기, 푸슈킨에서 체호프까지) - 이현우 현암사 2014 03800 1
  24. 2016.10.06 내 안에 슬픈 육체가 스며 있다(섹스 뒤의 명상) - 문윤근 스테디북 2001 03810
  25. 2016.10.03 시민의 교양 - 채사장 웨일북 2015 03100
  26. 2016.09.29 여행의 심리학 - 김명철 어크로스 2016 03180
  27. 2016.09.26 흰(The Elegy of Whiteness) - 한강 문학동네 2016 03810
  28. 2016.09.22 당신의 여행에게 묻습니다 - 정지우 우연의바다 2015 03190
  29. 2016.09.19 철학, 섹슈얼리티에 말을 건네다 - 김재기 향연 2008 03100
  30. 2016.09.15 Finding Flow (몰입의 즐거움) -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해냄 1999 1



서문


나의 치유와 자기 회복을 위해 언제나 내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고립되어 있고, 고립된 시선으로 보지 않으려는 신념이었다.  10


우리는 ‘자유정신’의 유형이 언젠가 완전해질 때까지 성숙하고 단 맛을 낼 수 있도록 정신이 어떤 위대한 해방 속에서 결정적인 사건을 겪었으며 그 사건이 전에는 얼마나 속박된 정신이었고 귀퉁이와 기둥에 영원히 묶여 있었을 것처럼 보였는지 추측할 수 있다. 무엇이 가장 단단하게 묶을까? 완전히 잘라버릴 수 없는 밧줄은 어떤 것일까? 고상하고 선택된 부류의 인간에게 그것은 의무가 될 것이다. 젊음에 어울리는 외경심, 오랫동안 숭배하고 가치를 부여해온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나약함, 자신들이 성장했던 땅, 자신들을 이끌어주었던 손길, 숭배를 배웠던 성전 등에 대한 감사, 바로 그들의 최고의 순간 그 자체가 그들을 가장 단단히 묶고 가장 지속적으로 의무를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위대한 해방은 이처럼 속박된 것에 마치 지진처럼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 그러면 젊은 영혼은 단 한번에 동요되고 분리되어 떨어져버리고 만다 - 그들 자신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충동과 혼란이 그 영혼을 지배하고 그에게 명령하는 주인이 되어 버린다 ; 의지와 소망은 어떻게든 그리고 어디로든 나아가려고 눈을 뜨게 된다 ; 미지의 세계를 향한 불굴의 모험적인 호기시이 그의 모든 감각에서 불타오르고 불꽃이 흔들거린다. “여시거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 이렇게 단호한 목소리와 유혹이 울려퍼진다. ‘여기’그리고 ‘집에’라는 말은 그가 지금껏 사랑해온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가 사랑해왔던 것에 대한 갑작스런 공포와 의심, 의무로 불렸던 것에 대한 섬광 같은 멸시 그리고 방랑, 타향, 소외, 냉각, 환멸, 냉담에 대한 선동적이고 의식적이며 화산처럼 솟구치는 욕망, 사랑을 향한 증오심, 아마도 자신이 지금까지 숭배했고 사랑했던 곳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신전모독과 같은 행동과 눈초리, 아마도 자신이 방금 한 일에 대한 불타오르는 수치심과 동시에 그 일을 해냈다는 기쁨 그리고 그 승리를 알림으로써 느끼는 더할 나위없는 내면적인 기쁨의 전율이다 - 승리라고? 무엇에 대한, 누구에 대한 승리란 말인가? 그것은 수수께끼 같이 의문스럽고 모호한 승리이긴 하지만 어쨌든 최초의 승리이다 : - 위대한 해방의 역사에는 이와 같은 아픔과 고통이 따른다. 해방은 동시에 인간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하나의 병이기도 하다. 스스로 정의하고 스스로 가치를 정립시키려는 힘과 의지가 만드는 이 최초의 폭발, 자유로운 의지를 향한 이 의지 : 그리고 풀려난 자, 해방된 자가 이제부터 자신이 사물을 지배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할때 그의 거침없는 시도와 기묘한 행동에는 얼마나 많은 질병이 나타날 것인가! 그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으로 무섭게 배회한다 ; 그의 긍지의 위태로운 긴장 상태는 그가 약탈하는 것으로 보상되어야만 한다. 그는 자신을 자극하는 것을 파괴해버린다. 그는 자신이 은폐하는 것, 부끄러움 때문에 간직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을 악의에 찬 미소로 뒤집어버린다 : 그는 만약 이러한 사물들을 뒤집어버리면 그것들이 어떻게 보일 것인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지금까지 좋지 못한 평판을 받아온 것에 자신의 명예를 되돌려놓으려고 한다면, 그리고 호기심으로 시험해보려는 듯이 가장 금지된 것의 주위로 몰래 기어 들어가려 한다면 거기에는 자의와 자의에서 나오는 쾌감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의 행동과 방황의 배후에는 더욱 위험한 호기심의 의문부호가 자리잡는다. 왜냐하면 그는 마치 황야에서처럼 불안하면서도 정처없는 행로의 중간에 있는 것이므로. ‘모든 가치를 뒤집을 수는 없는 것일까? 아마도 선은 악이 아닐까? 그리고 신은 악마의 발명품일 뿐이거나 악마를 더욱 고상하게 만들어놓은 것은 아닐까?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허위가 아닐까? 또 우리가 속았다면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동시에 속이는 자가 아닐까? 우리는 속이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 이런 생각이 그를 인도하고 더욱 멀리, 더욱 빗나가도록 그를 현혹한다. 고독이 그를 겹겹이 에워싼다. 저 무시무시한 여신이자 잔인한 정념의 어머니인 고독이 그를 더욱 위협하고 목을 조르고 심장을 짓누른다. - 그러나 고독이 무엇인지를 지금 어느 누가 알겠는가? ...


이러한 병적인 고립 상태와 황량하기만 한 시험기에서 벗어나, 저 흘러 넘치는 섬뜩한 확실성과 가히 질병마저도 포괄하는 건강성에 이르는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질병은 인식의 수단이며 인식을 낚는 낚싯바늘로서 반드시 필요하다. 자기 통제와 심정의 수양이며, 수없이 많은 대립적인 사유방시에 이르는 여러 길을 허용하는 그 성숙한 정신의 자유에까지 이르는 길은 멀다 - 정신이 자신의 길에서도 자신을 잃고 방탕하며 어느 한 구석에 취한 듯 주저앉아 버리게 될 위험을 몰아낼 수 있는 저 넘치는 풍요함의 내면적인 광대함과 자유분방함에 이르게 될 때까지의 길은 멀다. 그리고 위대한 건강의 표시인 저 유연하고 병을 완치하며 모조해내고 재건하는 힘이 넘쳐흐르기까지의 길도 아직 멀다. 그렇게 넘쳐흐르는 힘은 자유정신으로 하여금 시험에 삶을 걸고 모험에 몸을 내맡겨도 된다는 위험스런 특권을 부여한다. 그것은 자유정신의 거장다운 특권이다! 그 사이에는 긴 회복기가 놓여 있다. 그 시간은 고통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이고 다체로운 변화가 가득하여, 벌써 건강이라는 옷을 입고 위장을 한 강이한 건강을 향한 의지에 지배되고 규제되는 시간들이다. 거기에는 나중에 이러한 운명을 가진 한 인간을 감동 없이는 회상할 수 없는 중간 상태가 있다 : 거기에는 창백하고 섬세한 빛과 태양의 행복이 속해 있다. 즉 새의 자유, 새의 조망, 새의 오만에서 나온 감정과 호기심과 갸날픈 멸시의 감정이 얽힌 제3의 감정이 있다. ‘자유정신’ - 이 차가운 단어는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편안하며 따뜻하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랑과 증오의 속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마음대로 가까이 가고 멀어지며, 기꺼이 도주하고 피해다니며 날아다니고 다시 사라지거나 또다시 높이 날아오르며 사는 것이다 ; 사람들은 언젠가 자신 가운데에서 엄청난 다양성을 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변하게 된다. - 그러고는 자신과 무관한 사물을 걱정하는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자유정신을 괴롭히지 않는 그런 것과 관계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


한 단계 더 회복되면, 자유정신은 다시 삶에 천천히, 거의 반항적으로, 거의 의심스러운 듯 가까이 다가간다. 그의 주위는 다시 점점 따뜻해지고 마치 노란색 같은 빛을 띠게 된다 ; 감정과 공감은 깊어지고, 눈을 녹이는 듯한 온갖 바람이 그 위로 지나간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주위에 처음으로 눈을 뜬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그는 놀란 채 조용히 앉아 있다 : 도대체 그는 어디에 있었던가? 이 친근하고 가장 가까운 사물들 : 그 사물들이 그에게 얼마나 달라 보이는가! 그것들은 그 사이에 어떤 솜털과 매력을 얻었는가! 그는 감사하며 뒤를 돌아본다 - 자신의 방랑과 고집, 자기소외, 자신이 차가운 하늘을 새처럼 날며 멀리 보았던 것에 감사하며. 그가 나약하고 우둔한 게으름뱅이처럼 언제나 ‘집에’, 언제나 ‘제정신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던 것은 얼마나 잘한 일인가! 그는 자신을 잊고 있었다 :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서야 그는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 그때 그는 거기서 얼마나 놀라운 것을 발견하는가! 미지의 전율! 회복기에 있는 사람이 느끼는 피로감과 오랜 질병 그리고 병이 재발한 가운데 느끼는 행복! 고통에 쌍 조용히 앉아 인내심을 키우는 일과 햇빛 아래 누워 있는 일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누가 겨울의 행복과 벽에 드리워진 햇빛의 얼룩을 그만큼 잘 알 수 있단 말인가! 삶을 향하여 다시 몸을 반쯤 돌린 이 회복기에 있는 자, 즉 도마뱀이야말로 세사에서 가장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가장 겸손한 동물인 것이다 : - 그들 중에는 질질 끌리는 옷자락에 작은 찬가를 달고 다니지 않으면 하루도 못 견디는 자도 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 이러한 자유정신의 기질을 가지고 병에 걸려 한동안 앓고 나서, 그 후에 더 오랫동안 건강하게, ‘더욱 건강하게’ 되는 것이 모든 염세주의(알려진 것처럼 염세주의는 낡은 이상주의자와 거짓말쟁이의 암이다)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법이다. 그 속에 있는 지혜, 즉 삶의 지혜는 오랜 기간 동안 소량의 약만으로 건강 자체를 처방한다는 것이다.  12-17



제1장 최초와 최후의 사물들에 대하여


인류는 유래와 기원에 관한 질문을 의식에서 몰아내고 싶어한다. 그 반대의 경향을 자기 속에서 느끼게 되려며 ㄴ우리는 거의 탈인간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24


철학자들의 유전적 결함 - 철학자가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두 근본적으로 극히 제한된 시기의 인간에 대한 증언에 불과하다. 여갓적 감각의 결여는 모든 철학자가 지닌 유전적 결함이다.  .. 절대적 진리가 없는 거소가 마찬가지로 영원한 사실도 없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역사적으로 철학하는 일이 필요하며, 그와 동시에 겸양의 덕이 필요하다.  24-25


현상과 물 자체 - 수천 년 전부터 우리는 도덕적, 미학적, 종교적 요청과 맹목적인 애착, 정열 또는 경외감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았으며 비논리적인 사고의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세계는 점차 이처럼 이상할 정도로 다채롭고, 끔찍하게 의미심장하고 감정이 넘치게 되었다. 세계가 색채를 띠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색을 칠한 사람은 우리였던 것이다. 인간의 지성이 현상을 나타나게 했으며, 근본적인 자신의 해석을 사물 속으로 끌어들였다.  38


회의(懷疑 품을회 의심의)의 추정적 승리 - 한 번쯤은 회의적인 출발점을 인정해보라. 만약 다른 형이상학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고 우리에게 알려진 유일한 세계에 대한 모든 형이상학에서 나온 설명들이 전적으로 소용없는 것이라면, 그때 우리는 어떤 눈길로 인간과 사물들을 보게 될 것인가?  44


비교하는 시대 - 사람들이 관습에 묶이지 않을수록 그만큼 동기의 내면적 운동은 활발해지며, 그에 상응하여 외적 불안정, 인간의 뒤얽힌 혼란, 노력의 다성음악도 그만큼 커진다. 자기 자시이 있는 곳에 자신과 후손을 묶어두는 엄격한 강제성이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 존재하는가? 도대체 누구에게 아직도 무엇인가 엄격하게 속박하는 것이 존재하는가? 모든 종류의 예술양식이 나란히 모조되고 있다. 모든 단계나 모든 종류의 도덕, 관습, 문화 또한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시대는 서로 다른 세계관, 도덕, 문화가 비교될 수 있고 나란히 체험될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 고뇌를 두려워하지 말자! 오히려 시대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과제를 우리는 가능한 한 크게 생각하도록 하자.  46-47


꽃잎의 향기에 취해서 - 종교와 예술은 세계의 꽃이지만, 그것이 줄기보다 세계의 뿌리에 더 가까운 것은 결코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종교와 예술로 사물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는 없다. 오류는 종교와 예술과 같은 꽃을 피우게 할 만큼 인간을 깊고 섬세하며 상상력이 풍부하게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53


추리할 때의 나쁜 습관들 - 사람들이 가장 흔히 범하는 오류 추리는, 어떤 사항이 실재하므로 그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53


비논리적인 것은 불가피하다 - 비논리적인 것이 인간세계에 필요하며 비논리적인 것에서 좋은 것이 많이 생겨난다는 인식은 사상가를 절망에 빠뜨릴 수도 있는 것 중 하나다. 비논리적인 것은 정열, 언어, 예술, 종교 등에 그리고 대체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에 상당히 깊이 파고들어 가 있어서, 이들 아름다운 것들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주지 않고는 비논리적인 것을 퇴치할 수 없다.  54


불공정함은 불가피하다 - 어떤 사람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 대해 우리가 겪은 경험은 총체적 평가를 위한 논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할만큼 완전할 수는 없다. 모든 평가는 성급하며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재는 척도, 즉 우리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코 불변의 크기를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분위기와 동요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에 대한 어떤 사항의 관계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확실한 척도라고 믿어야만 한다. 아마 이상의 모든 면에서 본다면 사람은 전혀 판단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평가하지 않고, 혐오와 애착 없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든 혐오는 모든 애착과 마찬가지로 역시 평가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처음부터 비논리적인, 따라서 불공정한 존재이며,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현존재의 가장 크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부조화 중의 하나이다.  55-56




제2장 도덕적 감각의 역사에 대하여


매우 진지한 개인과 민족에게 가벼움이 필요하듯, 마찬가지로 다른 부류에 속하는 매우 자극받기 쉬운 자와 동요하기 쉬운 자에게는 자신들의 건강을 위해 가끔 무겁게 짓누르는 짐이 필요하다. 점점 불길에 휩싸여가는 시대의 우리 더욱 정신적인 인간들은 우리가 적어도 지금처럼 부단히 악의 없고 절도를 지키녀 살아갈 수 있도록, 또한 이 시대에 거울과 자기반성으로서 이바지할 수 있도록, 불을 끄고 식히는 존재하는 모든 수단들을 잡기 위해 손을 뻗어야만 하지 않을까?  68


예지적 자유에 대한 우화 - 소위 도덕적 감각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주요 단계를 거친다. 첫째, 사람들은 동기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개별 행위를 단지 이롭거나 해로운 결과들에 의해 선 또는 악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 이런 명칭의 유래를 잊고, 그것의 결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행위 자체에 ‘선’ 또는 ‘악’의 특징이 내재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한다. 언어가 돌 자체를 단단하다고, 나무 자체를 푸르다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오류다. 즉 그렇게 함으로써 결과를 원인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선함 또는 악함을 동기 속에 집어 넣고, 행동 자체가 도덕적으로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사람들은 선하다, 악하다는 술어를 개별 동기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 전체에 부여한다. 식물이 흙에서 자라는 것처럼, 인간의 본질에서 동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은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다음에는 행위에 대해서, 다음에는 동기에 대해서,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차례차례 책임을 묻는다. 결과적으로 인간들은 이 본질 역시 필연적인 결과이며, 과거와 현재의 사건들의 여러 요소와 영향으로 결합되어 있는 이상, 그것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곧 인간은 어떤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본질, 동기, 행위, 나아가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로써 도덕적 감각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이자 책임성에 관한 오류의 역사이며, 그것은 의지의 자유에 관한 오류에서 나오고 있다는 인식에 이른다. ... 불만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만은 행동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필요는 없다는 잘못된 전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므로 후회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불만은 인간이 고칠 수 있는 습관이다.   69-70


친절의 경제학 - 인간의 교제에서 가장 효험 있는 약초이며 힘으로 간주되는 친절과 사랑은 대단히 가치 있는 발견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마 이 향기로운 약을 가능한 한 경제적으로 사용하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친절의 경제학이란 가장 무모한 몽상가의 꿈이다.  76


동정을 유발시키려고 하는 것 - 로슈푸코의 (그리고 플라톤의)판단에 의하면 동정이란 영혼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동정을 입증해야 하지만, 동정을 갖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낟. 왜냐하면 불행한 사람들은 어쨌든 동정을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큰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여길 정도로 어리석기 때문이다. ... 동정에 대한 열망은 자기 만족을 향한 열망이며, 더욱이 이웃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동정심은 지극히 자기애에 빠져 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라 로슈푸코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음"때문은 아니다.  78


진리의 명목상의 단계들 - 흔히 있는 잘못된 추리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누군가가 우리에 대해서 진실하고 솔직하기 때문에 그는 진리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부모의 판단을 믿고 그리스도교도는 교회 창설자의 주장을 믿는다. 이처럼 사람들은 지난 몇 세기 동안 행복과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옹호해온것이 모두 오류에 불과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것이 진리의 단계였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무엇인가를 믿고 자신의 믿음을 위해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을 경우에, 사실은 단지 오류가 그를 부추겼을 뿐이었다면, 이것은 너무나 부당한 일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런 과정은 영원한 정의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민감한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정신과는 반대로 다음의 명제를 명령한다. 즉 도덕적 행위와 예지적 통찰 사이에는 철저하게 필연적이 ㄴ유대가 이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영원한 정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81


거짓말 -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신이 거짓말을 금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거짓말에는 날조, 위장, 기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위프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짓말을 하는자는 자신이 져야 할 무거운 짐에 관해서는 거의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즉 그는 하나의 거짓말을 주장하기 위해서 또 다른 스무 개의 거짓말을 생각해내야 한다.) 다음으로 단순한 상황에서는 나는 이것을 원한다, 내가 이것을 했다 등으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유리하며, 따라서 강제와 권위를 택하는 편이 교활한 방법보다 훨씬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한 어린이가 복잡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면 그는 이와 같이 자연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언제나 자기에게 이익이 되게끔 말한다.  82


자기분할로서의 인간의 도덕 - 진정으로 자신의 일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작가는 누군가가 찾아와서 그 일을 더 명확하게 표현해주고, 여기에 포함된 문제에 대해 남김없이 대답함으로써 자신을 파괴해주기를 원한다. 사랑을 하고 있는 소녀는 연인이 저지른 부정에서 자신이 사랑이 헌신적이며 충실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군인은 조국의 승리를 위해 전쟁터에서 쓰러지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최고 소원도 조국의 승리를 통해 승리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 즉 수면과 가장 좋은 음식을, 사정에 따라서는 자신의 건강과 재산을 자식에게 주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비이기적인 상황들일까? 쇼펜하우어의 말에 따라 이런 도덕적 행위들은 "불가능하면서도 현실적"이기 때문에 기적일까? 이들의 경우에는 인간은 자신의 그 무엇을, 하나의 사상, 하나의 욕망, 하나의 작품 등을 자신의 다른 것보다 한층 더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분할해서 한쪽을 다른 한쪽의 희생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이 명확하지 않은가? 어느 고집 센 사람이 "내가 이 인간에게 한 걸음이라도 길을 양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총에 맞는 편이 낫다"고 할 때,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일까? 어떤 것에 대한 애착(소원, 충동, 욕망)은 앞서 말한 모든 경우에 존재하고 있다. 애착을 가지는 것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비이기적"이지 않다. 도덕에서 인간은 자신을 분할할 수 없는 것, 개체(individuum)로서가 아니라 분할할 수 있는 것(dividuum)으로서 다룬다.  85


약속할 수 있는 것 - 행동은 약속할 수 있으나 감정은 약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감정은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항상 사랑하겠다거나 미워하겠다거나, 항상 그에게 충실하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은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행동은 약속할 수 있다. 이런 행동은 대체로 사랑, 증오, 충실함의 결과이지만, 한편 다른 동기에서 나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러 방법과 동기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익르어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언제까지나 사랑하겠다는 약속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한 나는 너에게 사랑의 행위를 입증할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ㅇ낳게 되더라도, 다른 동기에 의해서일지라도 나는 똑같은 행동을 너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언제까지나 똑같은 것이라고 하는 가상이 상대방의 머리 속에는 존속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기만 없이 누군가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경우, 그것은 사랑의 가상에 대한 외관상의 지속을 약속하는 것이다.  86


지성과 도덕 - 주어진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좋은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 동정심을 가지려면 강력한 상상력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도덕은 지성의 우수함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86


복수하기를 원하는 것과 복수하는 것 - 복수심을 품는 것과 복수를 실행하는 것은 격렬한 열병의 발작에 걸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나가버린다. 그러나 복수를 실행할 힘과 용기가 없는데도 복수심을 품는 것은 만성병, 육체와 영혼의 중동증을 안고 있는 것과 같다. 의도만을 중시하는 도덕은 두 경우를 양이 같은 것으로 평가하고, 통상적으로 전자의 경우를 더 나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아마도 복수의 행동이 수반할지도 모르는 나쁜 결과 때문일것이다). 두 가지 평가 모두 근시안적이다.  87


사랑과 정의 - 왜 인간은 정의를 손상시켜가면서 사랑을 과대평가하고, 마치 정의보다 사랑이 더 고상한 본질들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랑을 향해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분명히 사랑은 정의보다 훨씬 더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틀림없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그만큼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것이다. 사랑은 어리석은 것이며, 풍부한 풍요의 뿐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이 뿔에서 자기의 선물을 누구에게나 나누어준다. 그가 그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 번도 그것을 감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성서와 경험에 의하면 사랑은 정의롭지 못한 사람뿐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는 정의로운 사람에게도 피부 속까지 흠뻑 젖게 하는 비처럼 공평하다.  91


피해자와 가해자의 착각들 -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서 어떤 소유물을 (예를 들면 영주가 서민한테서 연인을) 빼앗을 경우, 가난한 자는 착각을 한다. 자신이 소유한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빼앗아갈 정도로 그 사람은 참으로 흉악한 사람임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자느 ㄴ개개의 소유물의 가치를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사람의 입장을 생각할 줄 모르며,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심하 ㄴ부정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양자 모두 서로에 대하여 잘못된 표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분갷살 만한 권력자의 부정도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엄청난 것은아니다. 이미 물려받은 감각은 더 높은 것이 요구되는 더 고귀한 존재가 되기 위해 그들을 매우 냉정하게 만들고, 양심을 무디게 한다. 만약 우리와 다른 존재의 차이가 아주 크면, 우리는 모두 부정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어, 예를들어 모기 한 마리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죽이게 된다. 그래서 크세르크세스(Xerxes, 그리스 사람들조차 모두 그를 특별히 고귀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의 경우, 전체 원정군에게 불안하고 불길한 불신감을 조성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몸을 토막내게 한 것은, 그의 사악함의 표시가 아니다. 이런 경우에 한 개인은 마치 불쾌한 곤충처럼 제거된다. 세계의 지배자가 오래 느끼도록 자극하기에는 그는 너무나 무가치한 존재다. 그뿐 아니라 어떠 ㄴ잔인한 자도 학대받은 자가 믿고 잇는 그런 정도로 잔인하지 않다. 고통을 상상하는 것은 고통당하는 괴로우모가는 같지 않다. 공정하지 못한 재판간과 사소한 부정직함으로 인해 세상의 여론을 오도하는 저널리스트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원인과 결과는 이런 모든 경우에 잔혀 다른 감정과 사상들로 둘러싸여 있다. 반면 사람들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똑같이 생각하며 느낀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이 전제에 입각하여 한 사람의 죄를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특정한다  96-98


수치심의 예민함 - 사람들은 부정한 것을 생각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이런 부정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브끄러워할 것이다.  98


개개인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평을 통하여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자신 앞에서 입증하고 싶어 한다. .. 그들은 다른 살마의 판단력을 자신의 판단력보다 신뢰하고 있다.  100


성숙한 개인의 도덕 - 자신에게서 완전한 개인을 만들어내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최고의 행복을 주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동정적인 감동과 행위보다 그를 훨씬 더 진보시켜준다. 물론 우리 모두는 여전히 개인적인 것을 너무 사소하게 여기는 병을 앓고 있다. 그것은 잘못 교육되어온 것이다. 우리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자. 우리의 감각은 오히려 강제적으로 개인적인 것에서 분리되었으며, 마치 개인적인 것이란 희생되어야만 하는 나쁜 것이기라도 한 듯 국가, 학문,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희생물로 제공되었다.  104-105


인륜과 윤리적인 것 - 도덕적, 윤리적, 윤리학적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확립되어온 규범이나 관습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억지로 복종하는지 또는 기꺼이 복종하는지의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앟으며 그것을 실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사람들로 하여금 윤리적인 것과 비윤리적인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의 구별을 가능하게 한 근본적 대립은 '이기적인 것'과 '비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관습과 규범에 구속되어 있는가 아니면 해방되어 있는가에 있다. 여기서 어떻게 관습이 성립된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쨌든 관습은 선과 악 또는 어떤 내재적 정언 명법을 고려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한 공동체, 한 민족을 유지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잘못 해석된 우연을 근거로 하여 성립된 모든 미신적 관례는, 그것을 따르는 것이 윤리적이라는 관습을 강요한다. 즉 관습에서 해방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공동사회에서는 개인의 경우보다 훨씬 더 해롭다. 모든 관습은 근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많이 잊혀질수록, 계속 더 존중할 만한 것이 된다. 그리고 관습에 바쳐지는 존중은 세대가 지남에 따라 쌓여, 관습은 마침내 신성한 것이 되며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어떤 경우든 경건의 도덕은 비이기적인 행위들을 요구하는 도덕보다 훨씬 더 오래된 도덕이다.  105-106


인륜 안에서의 쾌감 - 쾌감과 도덕성의 근원에 대한 중요한 부분은 습관에서 생겨난다. ... 인륜이란 쾌적한 것과 유익한 것의 결합체이며, 게다가 그것은 심사숙고할 필요가 없다.  106-107


소위 악한 행위에서의 무죄함 - 모든 '악한' 행위들의 동기는 보존 본능, 더 정확히 말해서 개인은 쾌감을 지향하고 불쾌감을 회피한다는 사실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그렇게 동기 규정된 것이라면 그것은 악한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고통을 주는 것'은 철학자들의 두뇌 속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쾌감을 가져다주는 것'(쇼펜하우어적인 의미에서 동정심)도 이와 마찬가지다. 국가 형성 이전의 상태에서 우리는,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나무로 모여들때 우리보다 먼저 그 나무의 열매를 빼앗으려는 자가 있으면 그가 원숭이든 인간이든 죽였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는 불모의 땅에서 방랑하게 될 경우 동물에 대해 그런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를 가장 분노하게 만드는 악한 행위들은, 그런 행위를 우리에게 가하는 상대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그의 의향에 따라 이런 나쁜 행동을 우리에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착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의향이라는 것에 대한 이 믿음은 증오, 복수심, 악의를 야기하고 상상력을 완전히 손상시킨다. 반면 우리는 동물에 대해서는 그렇게 격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들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보존본능에서가 아니라 보복하기 위해 해를 가하는 것. 그것은 잘못된 판단의 결과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뵈가 없다. 개인은 국가 이전의 상태에서는 위협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가혹하고 잔인하게 다룰 수 있었다. 그것은 자기 힘을 위협적으로 시험해 보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 약한 자를 자신에게 굴복시키는 폭력을 행사하는 자, 권력자, 최초의 국가 설립자는 그렇게 행동한다. 오늘날에도 국가가 여전히 그렇게 행하고 있는 것처럼 거기에는 그럴 권리가 있다. 오히려 그것을 방해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예를 들어 사회, 국가와 같은 더 큰 개체와 집단적 개체가 개인을 굴복시켜서 그들의 개별성에서 그들을 이끌어내어 집단으로 흡수하게 되면, 비로소 모든 도덕성을 위한 토대가 제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도덕성에는 강제가 선행한다. 또한 도덕성 그 자체는 잠시 동안은 여전히 불쾌감을 피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순응하는 상제일 것이다. 나중에 그것은 인륜이 되고 훨씬 후에느 ㄴ자유로운 복종이 되며, 마침내는 거의 본느에 가까워지고 만다. 그때 그 도덕성은, 오랫동안 익숙해지고 자연적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쾌감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덕이라고 불린다.  109-110


판단하지 말라 - 앞서 간 시대들을 고찰할 때 우리는 부당한 비방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노예제도의 불공정함, 인간가 민족들을 정복하는 과정에서의 잔인성은 우리의 척도로 측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는 정의의 본능이 아직 충분히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기주의는 악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웃' (이 말은 그리스도교적 기우너을 가진 것으로 진실에 일치하지 않느다)에 대한 표성이 우리에게는 극히 미약히기 때문이며,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마치 식물과 돌을 대하느 ㄴ것처럼 자유롭고 책임이 없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다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결코 그것을 완전히 배울 수는 없다.  111-112


'인간은 항상 선하게 행동한다' - 자연이 뇌우를 내려 우리를 젖게 했다고 해서 자연을 비도덕적이라고 탓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해를 끼치는 사람을 비도덕적이라고 부르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후자의 경우에는 자의적으로 타나타는 자유의지를, 전자의 경우에는 필연성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구별은 오류이다. 또한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는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는 것에 대해 비도덕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인간은 모기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모기를 아무 거리낌없이 의도적으로 죽이고, 우리 자신과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 범죄자를 의도적으로 처벌하고 그에게 고통을 준다. 첫번째의 경우는 개인이 자기 보존을 위해서 또는 자신이 불쾌해지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자가 되며, 두번째 경우에는 국가가 그러하다. 모든 도덕은 의도적으로 해를 가하는 것을 정당방위로 인정한다. 단 그것이 자기 보존의 문제가 되는 경우라면!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가하는 모든 악행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관점만으로도 충분하다. 인간은 자신으 ㄹ위해서 쾌감을 원하고 불쾌감을 없애고자 한다.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자기 보존의 문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말은 타당하다. 인간은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선을 행한다. 즉 인간은 지성의 정도와 이성의 갖가지 척도에 따라 언제나 자신에게 선하게(유리하게) 보이는것을 행한다.  113


만약 인간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개별적인 모든 행위는 미리 계산될 것이다. 인식의 모든 진보, 모든 오류, 모든 악의도 말이다.  118


많은 행위가 악하다고 말하지만 그 행위들은 단지 어리석은 행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를 선택했던 지성의 정도가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한 의미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모든 행위는 어리석다. 왜냐하면 현재 이를 수 있는 최고의 인간 지성은 반드시 또 추월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120





제4장 예술가와 저술가의 영혼으로부터


완전한 것은 생성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 - 우리는 완전한 것에 대해서는 모두 그것의 생성에 의문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현존하는 것이 마치 마술에 의해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즐기는 데 익숙해 있다. ...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즉흥적인 것이라는, 기적처럼 갑자기 생긴 것이라는 믿음을 불러일으킬 때 완전한 효과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예술의 학문은 이런 착각을 가장 분명하게 거부해야 하고, 예술가의 그물에 걸리느 한, 지성의 그릇된 추론과 악습들을 적발해내야 한다. 그것은 자명한 일이다.  167


예술가는 일생 동안 어린아이와 젊은이인 채로 있으며 자신에게 예술 충동이 엄습했던  지점에 머물러 있다.  169


손으로 하는 작업의 성실성 - 재능과 타고난 능력에 대해서만 말하지 말라! 타고난 재능이 거의 없이도 위대해진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위대한 사람이 되었고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천재'가 되었다. 그런한 자질을 의식하고 있는 살마이라면 아무도 그것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커다란 전체를 만드는 일을 감행하기 전에, 우서 부분을 완전히 만든는 것을 배우는 숙련된 장인의 성실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부분을 완성하기 ㅏ여 시간을 부여했다. 왜냐하며 그들은 현혹시키는 전체의 효과보다 작은 것, 지엽적인것을 잘 만드는 일에 더 많은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하여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 있을 까 하는 방법은 쉽게 제공할 수 있으나, '나에게느 재능이 충분치 않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질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느 그 자질을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2페이지를 넘지는 않지만 거기에 포함된 모든 단어가 필연적이라고 할 만큼 명확한 소설을 백 개 이상 습작해보라. 가장 함축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일화의 형식을 배울 때까지 매일 일화를 쓰도록 하라. 인간의 유형과 성격을 수집하거나 윤색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 특히 주위의 다른 사람드에게 미치는 효과를 유심히 바라보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에게 말을 자주 하고 남이 말하는 것을 귀를 쫑긋 세워 듣도록 하라. 풍경화가와 의상 디자이너처럼 여행하도록 하라. 잘 표현되면 예술적 효과를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개개의 학문에서 발췌하도록 하라. 끝으로 인간 행위의 동기에 대해서 잘 생각하고 이 점에서 가르침을 주게 될 어떤 지침도 냉대하지 말고 밤낮으로 이런 것들의 수집가가 돼라. 이와 같은 다양한 훈련으로 2,30년을 내라. 그 후에는 작업실에서 창작된 것이 거리의 빛 속으로 나가도 좋다. 그런데 대부부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들은 부분에서가 아니라 전체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마 한 번은 선택이 적절하여 주목을 끌게 되지만 그때부터 항상 실패할 것이다. 그것은 충분히 당연한 근거에서 나오는 일이다. 때때로 이러한 예술적 삶의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이성과 성격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에는 운명과 필욕 그 자리를 물려받아 미래의 거장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여 그의 손으로 하는 작업의 모든 조건을 거쳐 단계적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181-182


대중의 예술적 교육 - 동일한 주제가 서로 다르 거장에 의해서 수많은 방식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대중은 소재에 관심을 갖는것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작업들에 의해 그 주제르 알게 되고 새로운 것이 주는 매력과 긴장감의 매력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며느 결국에는 이 주제를 취급할 때의 어떤 뉘앙스, 섬세하고 새로운 발명도 파악하고 즐기게 될 것이다.  185


예술가와 그의 추종자는 보조를 맞춰야 한다 - 양식이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진행하는 것은, 예술가뿐 아니라 청중과 관중도 이 진행에 참여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아주 느리게 진행되어야 한다. ... 왜냐하면 예술가가 대중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이미 대중은 급속히 낮은 곳으로 가라앉기 때문이다.  186


집단정신 - 훌륭한 저술가는 자신의 정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구들의 정신까지도 가지고 있다.  192


학문에 대한 관계 - 학문 속에서 그들 스스로 어떤 것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학문을 흥미롭게 여기기 시작했던 사람은 모두 학문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193


작가의 역설들 - 소위 독자가 불쾌하게 느끼는 작가의 역설들은 그 자각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흔히 독자의 머리 속에 있다.  193


기지 - 가장 기지에 넘치 작가들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미소를 거의 만들어내지 않는다.  194


문장가로서의 사상가 - 사상가는 대부분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의 사상뿐만 아니라 그 사상을 사유하는 것까지 우리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194


독자의 정신을 거역하는 죄 - 단지 독자와 같아지기 위해서 저자가 자신의 재능을 부인한다면, 그는 독자가 결코 용서하지 않을 치명적이 죄를 범하는 것이다. 즈 독자가 그것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눈치채는 경우에 말이다. 인간은 인간에게 모든 나쁜 욕을 해도 좋다. 그러나 어떻게 그 말을 하는지의 양식에서는 인간의 허영심을 다시 바로 세워줄 방법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194-195


글쓰기와 가르치기에서의 주의점 - 처음으로 글으 써보았거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글쓰기에 대한 정열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시도하고 체험하는 모든 것에서 문체상으로 전달할 수있느 것만을 배운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저술가와 독자들만을 생각한다. 통찰을 원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기 일을 하는 데는 무능력하다. 그는 언제나 자기 학생의 행복을 생각하고, 그가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인 한 모든 인식은 그를 기쁘게 하낟. 결국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열의를 잃어버리고, 지식의 한 통로, 흔히 수단으로 자신을 파악한다.  199


아킬레우스와 호메로스 - 언제나 아킬레우스와 호메로스의 관계 같은 것이 존재한다. 한족은 체허모가 감각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쪽은 그것들을 기술하는 것이다. 참다운 저술가는 남의 격정과 체험에 다만 단어들을 부여할 뿐이며, 자기가 경험했던 적은 것들에서 많은 것을 추측해내는 예술가이다. 예술가들으 결코 대단한 열정을 가진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흔히 열정을 가진 인간으로 무의식적인 감정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 즉 그들의 삶이 예술의 영역에서 체험을 말하게 될 때, 사람들은 그들이 그렸더 열정을 더욱 신뢰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을 자유롭게 내버려두고 자제하지 않으며 자신의 분노와 욕구를 위해 넓은 자리만 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곧 세상 사람은 저 사람은 얼마나 열정적인가! 하고 외친다. 그러나 깊이 파고드는, 개인을 소모시키며 때로는 잠식해 들어가는 열정인 경우에는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이러한 열정을 체험하는 사람은 분명히 그것을 극이나 음악 또는 소설에서 묘사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예술가가 아니라면 흔히 방종한 개인이다. 그러나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205




제5장 좀 더 높은 문화와 좀 더 낮은 문화의 징후


퇴화를 통해 고상해짐 - 우리는 한 민족의 혈통은, 사람들이 대부분 자신들의 일상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근본  법칙들의 동일성에 따라, 즉 그들의 공동 믿음에 따라 살아 있는 공동심(共同心 함께공 한가지동 마음심)을 가지고 있을 때 가장 잘 존속한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여기서 훌륭하고 탄탄한 풍습이 강화되고, 개체의 종속성을 배우며 품성에는 이미 강인함이 생일 선물로 주어져서, 그 후에는 그것이 습관하된다. 강하고 동질적이며 특징적인 개체들을 기반으로하는 이런 공동체가 가지는 위험은 세습에 의해 점차 강화되는 우둔화이다. 이것은 한번 정착되면 그림자같이 뒤따라다닌다. 그와 같은 공동체의 정신적 진보는 속박받지 않고 더 불안정하며 도덕적으로 더 약한 개체들에게 따라다닌다. 대개 새로운 것과 다양한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종류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약함 때문에 별 뚜렷한 영향도 보이지 않고 소멸해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들이 후손을 가지게 되면, 긴장이 완화되어 때로는 공동체의 안정된 요소에 상처를 초래한다. 새로운 그 무엇은 바로 이 상처로 인해 약화된 자리에서부터 전체로 접종되는 것이다. 그러나 것의 전체적인 힘은 이 새로운 것을 그의 피 속으로 받아들여 동화시킬 수 있을 만큼 강해야 한다. 퇴화해가는 본성들은 진보가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대개 모든 진보에는 어떤 부분적 약화가 성행되어야 한다. 가장 강한 본성들은 유형을 계속 지켜나가고 좀더 약한 본성은 유형을 계속 형성해나가는 것을 돕는다. 비슷한 일이 개별적인 인간들에게도 일어난다. 일종의 퇴화, 불구, 나아가서는 악덕 그리고 신체적 또는 도덕적 결손까지도 다르 한편으로는 때때로 하나의 장점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더 심하게 병든 인간들은 아마 호전적이고 침착하지 못한 종족 속에서 혼자 있으 계기를 더 많이 가지게 됨으로써 더욱 침착하고 현명해지며, 외눈을 가진 사람은 더욱 강한 한쪽 눈을 가지게 될 것이고, 눈먼 사람은 한층 더 깊이 내부를 보고 어쨌든 더욱 날카롭게 듣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저 유명한 생존 경쟁이 한 인간과 종족의 진보와 강화가 해명될 수 있는 유일한 관점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두 가지 것이 한데 합쳐져야 한다 그 하나는 신앙과 공통된 감정 안에서 정신들을 결합함으로써 정착된 힘을 증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퇴화해가는 본성들을 그리고 그 정착된 힘을 부분적으로 약화시키고 손상시킴으로써 더 높은 목표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다. 좀더 여리고 섬세한 것으로서의 더 약한 이 본성들이 대체로 모든 진보를 가능하게 한다. 어디에서인가 부패하고 약해져가는, 그러나 전체로서는 아직 강하고 건강한 민족은 새로운 것의 감염을 받아들여 장점으로 동화시킬 수가 있다. 개별적인 인간의 경우, 교육의 과제는 전체적인 인간으로서의 그가 더 이상 자신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를 확고하고 확실하게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그러나 그 후에 교육자느 그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아니면 운명이 그에게 입힌 상처를 이용해야 한다. 그리하여 고통과 욕구가 생겨나면, 그 상처 입은 부분에 새롭고 고상한 그 어떤 것이 접종될 수 있는 것이다. 교육자의 전체적 본성은 그것을 받아들여, 나중에 그 열매들 속에서 고상해지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국가에 관해서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설프게 교육받은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통치의 형식은 아주 사소한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정치의 최대 목표는 영속성이며, 이것은 자유보다도 훨씬 가치가 있어 다른 모든 것을 능가 한다." 대체로 지속적인 발전과 고상하게 하는 접종은 확실하게 기초가 마련되고 영속성이 최대한 보증될 때에만 가능하다. 물론 모든 영속성의 위험한 동료인 권위라는 것이 통상적으로 그 일을 방해하게 될 것이지만 말이다.  225-227


자유정신은 상대적 개념이다 - 어떤 혈통과 환경, 신분과 지위 또는 지배적인 시대의 견해를 근거로 그에게서 예살할 수 있는 거소가 다르게 사유하는 사람을 자유정신이라고 부른다. 자유정신은 예외이며 속박된 정신은 상례이다. 속박된 정신은 자유정신의 자유로운 기본 원칙이란 눈에 띄고 싶은 병적인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거나 또는 속박된 도덕과는 전혀 화해할 수 없는 순전히 자유로운 행위에 불과한 것이라고 단정짓고 자유정신을 비난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자유로운 기본 원칙들이 머리의 괴팍하모가 엉뚱함에서 나온다고 추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말을 하면서 자신의 말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함으로써 단지 상처를 입히려는 악의를 가지고 잇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자유정신의 얼굴에는 보통 속박된 정신도 충분히 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지성의 비범한 우수성과 예리함이 증거로서 역력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정신 활동의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기원은 공정하게 평가된 것이다. 사실상 많은 자유정신이 이러한 또는 저러한 양식으로 성립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자유정신이 그런 방법으로 성취한 원칙들은 속박된 정신의 원칙들보다도 더 진실하며 신뢰할 수 있다. 진리의 인식에서는, 어떤 충동에서 그것을 추구했으며,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발견했는지가 아니라 그 진리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자유정신이 정당하다면 따라서 속박된 정신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다. 전자가 부도덕에서 진리에 이르렀는가 그리고 후자가 지금까지 도덕에서 비진리를 고집했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자유정신이 정당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에 관계 없이 그가 관습적이 ㄴ것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이 자유정신의본질에 속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유정신은 역시 진리를, 또는 적어도 진리탐구의 정신을 자기 편으로 삼게 될 것이다. 자유정신은 근거를 요구하고 다른 정신들은 신앙을 요구한다.  227-228

 

신앙의 기원 - 속박된 정신은 자신의 입장을 근거에서가 아니라 습관에서 받아들인다.  228


모든 국가와 신분, 결혼, 교육, 법률과 같은 사회질서, 이 모두는 그것들에 대한 속박된정신의 믿음 속에서만 힘과 영속성을 가지게 된다.  229


속박된 정신에서의 사항의 척도 - 속박된 정신들은 네 가지 종류의 사항에 대하여 그것들이 옳다고 말한다. 첫째, 영속성이 있는 모든 사항은 옳다. 둘째, 우리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모든 사항은 옳다. 셋째, 우리에게 이득을 가져오는 모든 사항은 옳다. 넷째, 그것을 위해 우리가 희생을 치른 모든 사항은 옳다. 예를 들어 이 마지막 것은, 왜 국민의 의지를 거역하여 시작된 전쟁이 우선 희생이 치러지면 곧바로 열광적으로 게속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232


강한 정신 - 관습을 자기 편에 두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떤 근거도 필요하지 ㅇ낳는 사람과 비교하면, 자유정신은 항상 약한 쪽이다. 특히 행동에서 그렇다. 왜냐하면 자유정신은 너무나 많은 동기와 관점들을 알고 있고, 그 때문에 확신이 없으며 미숙한 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가 적어도 자신으 관철시키며 아무 성과도 없이 파멸하지 않을 정도로, 그를 비교적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 있는 것일까? 강한 정신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이것은 개별적인 경우에는 천재의 생산에 대한 문제이다. 한 개인이 관습에 맞서 완전히 개인적인 세계 인식을 지향하는 그 활력, 그 불굴의 힘, 그 인내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232-233


기적적 교육 - 사람들이 신과 신의 배려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바로 그곳에서 교육의 관심은 비로소 크게 성장할 것이다. 마치 기적의 치료에 대한 믿음이 끝났을 때 비로소 치료술이 발전할 수 ㅇ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모두 기적적인 교육을 여전히 믿고 있다. 사람들은 실제로 엄청난 무질서, 목표의 혼란, 상황의 불리한 조건에서 가장 창작력이 풍부하고 가장 강한 사람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러한 것이 당연한 일로 일어날 수 있었던가? 이제 사람들은 앞으로 이런 경우들을 좀더 상세히 관찰하고 세심하게 조사하게 될 것이다. 그때 기적은 결코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상황 아래에서 많은 살맏르이 계속 멸망해간다. 대신 구제된 각 개인들은 대체로 훨씬 더 강력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타고난 강인한 힘으로 이 역경을 타개하고 이 힘을 더욱 훈련하여 키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적은 설명될 수가 있다. 기적을 이미 믿지 않는 교육은 세 가지 사항에 대하여 유의해야 한다. 첫째, 얼마나 많은 활력이 유전되는가? 둘째, 무엇을 통하여 새로운 활력이 점화될 수 있는가? 셋째, 어떻게하면 개인이 불안에 빠져 그 고유성을 파괴당하지 ㅇ낳고 문화의 다양한 요구들에 적응할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하면, 어떻게 한 개인이 사적 문화와 공적 문화의 대위법 속에 참가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가 곡조를 지휘하면서 동시에 그 곡조를 연주할 수 있을까?  242-243


학문의 미래 - 학문은 노력하고 탐구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만족을 주고, 그 성과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극히 적은 만족밖에 주지 않는다. 그러나 학문의 모든 중요한 진리는 조금씩 평번하고 저속해지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 조금밖에 없는 만족도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그 경탄할 만한 구구단을 일단 배우게 되면 이미 더 이상 기쁨을 느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학문이 스스로를 통하여 점점 더 작은 기쁨밖에 주지 못하게 되면, 그리고 위로를 주는 형이상학, 종교, 예술을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더 많은 기쁨을 빼앗게 되면, 인류의 거의 전부가 혜택을 입고 있는 쾌감의 가장 큰 샘이 고갈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좀더 높은 문화는 인간에게 우선 학문을, 그 다음에 비학문을 느낄 수 있는 두 개의 뇌실 즉 이중 두뇌를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두뇌는 혼란 없이 병행하고 분리할 수도 있고 폐쇄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것은 건강상의 요구 사항이다. 한 영역에는 동력원이 있고 다른 영역에는 조절기가 있어서 환상, 편협, 정열로 가열되어야 하며 인식하는 학문의 도움으로 과열된 것의 나쁘고 위험한 결과들이 예방되어야 한다. 만약 좀 더 높은 문화의 이런 요구가 채워지지 않는다면, 아픙로의 인간 발전의 경과는 거의 확실히 예언될 수 있다. 쾌감을 적게 제공하게 되면 참된 것에 대한 관심은 사라져 버린다. 환상, 오류, 공상은 쾌감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거에 자신들이 주장했던 땅을 단계적으로 쟁취해간다. 그 다음의 학문의 쇠퇴이며 야만으로의 역전이다.  250-251


흥미로운 것의 증가 - 좀더 높은 교양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흥미로워진다. 그는 자신의 사고의 빈 틈이 교양으로 채워질 수 있거나 사상이 교양으로 인해서 확인될 수 있는 곳에서는 재빨리 그 문제의 교훈적인 측면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지적할 줄 안다. 거기서 권태는 점점 더 사라지고, 그와 함께 지나친 감정의 흔분도 사라진다. 그는 마침내 식물 사이를 지나다니는 자연 연구자처럼 인간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자기 자신을 단지 그의 인식 충동을 강하게 자극하느 ㄴ데 불과한 하나의 현상으로 인지한다.  253


학문을 통해서 훈련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능력이다 - 인간이 어느 일정한 시간 동안 엄밀한 학문을 철저히 해왔다는 것의 가치는 그 성과들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성과들은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로 이루어진 바다에 비교한다면 사라져 없어질 만큼 작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활력, 추진력, 인내력의 강인함을 증대시킨다. 인간은 어떤 목적을 합목적적으로 달성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한 한에서, 언젠가 학문적인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그 뒤에 하게 될 모든 일에서 볼 때 대단히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254


거대한 것에 호의적인 편견 - 사람들은 분명히 모든 거대한 것과 뚜렷한 것을 과대 평가한다. 이는, 만약 어떤 사람이 한 가지 분야에 전력투구하여 자신을 흡사 하나의 거대한 기관으로 만들 때, 이 일이 대단히 유익하다고 느끼게 되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통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확실히 인간 스스로에게는 자신의능력을 균형 있게 훈련하는 것이 더 유익하고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모든 재능은 다른 힘들에서 피와 힘을 빨아먹는 흡혈귀이며, 지나친 생산은 가장 재능 있는 사람까지도 거의 미치게 만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술 안에서도 역시 극단적인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 매우 주의를 끈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는 훨씬 낮은 문화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힘을 가지기를 원하는 모든 것에 굴복한다.  256-257


학교에서의 이성 - 학교는 엄밀한 사고, 신중한 판단, 일관성 있는 추론을 가르치는 것 외의 다른 과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학교는 이 작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것, 예를 들어 종교를 무시해야 한다. 물론 학교는 인간적인 불투명함, 습관 그리고 욕망이 아주 팽팽하게 당겨진 사고의 활을 나중에 다시 느슨하게 만들게 되리라는 것을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학교는 그 영향력이 미치는 한, 인간에게 있는 본질적인 것과 탁월한 것을 강요해야 한다. 그것은 적어도 괴테가 판단하듯이, '인간의 이성과 학문은 최상의 힘'이다. 위대한 자연 탐구자 폰 베어(von Bear)는 동양인에 비해서 모든 유럽인이 뛰어난 점을,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근거들을 말할 수 있는, 훈련된 능력에서 찾고 있다. 동양인들은 이런 능력이 전혀 없다. 유럽은 일관성 있고 비판적인 사고의 학교로 나아갔고, 동양은 여전히 진리와 허구 사이에서 구별할 줄을 모르고, 자신의 호가신이 자신의 관찰과 규칙에 따른 사고에서 유래하는 것인지, 또는 상상력에서 유래하는 것인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서의 이성은 유럽을 유럽으로 만들었다. 중세에 유럽은 다시 동양의 한 부분과 부속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즉 그리스인에게 감사해야 했던 학문적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263-264


좀더 높은 문화는 필연적으로 오해된다 - 지적 충동 외에는 단지 습관이 된 종교적 충동만을 하나 더 가지고 있는 학자들처럼, 자신의악기에 줄을 두 개만 매어놓고 있는 사람은, 더 많은 현으로 연주할 수 있는 사람드을 이해하지 못한다. 더 낮은 사람들에 의하여 항상 잘못 해석되는 것은 많은 현을 가진 더 높은 문화의 본질에 속한다. 잘못된 해석은 예를 들어 예술이 종교적인 것의 가장된 형식으로 간주되는 경우에 일어나게 된다. 오로지 종교적이기만 한 사람들은, 마치 노아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닌 음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문조차도 종교적 감정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275-276


활동적인 사람들의 주요 결점 - 활동적인 사람들에게는 흔히 더 높은 활동이 결여되어 있다. 여기서는 개인적인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관리, 상인, 학자들로서 즉 유적 존재로서는 활동적이지만 아주 특정한 한 개인, 유일무이한 인간으로서는 활동적이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태만하다. 활동적인 사람들의 불행은 그들의 활동이 거의 언제나 약간은 비이성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돈을 모으고 있는 은행가에게 그가 쉬지 않고 일하는 활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서는 안 된다. 이 활동은 비이성적인 것이다. 활동적이 ㄴ사람들은 돌이 굴러가듯 기계적인 성격의 우둔함에 따라 굴러간다. 모든 인간은 모든 시대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노예와 자유인으로 나뉘어 있다. 왜냐하면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노예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그는 자신이 원하는 그 누구, 즉 정치가, 상인, 관리, 학자이다.  277-278


활동적인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태만한가 - 나는 다양한 의견이 가능한 모든 것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 개인은 스스로 다른 모든 사물에 대해서 하나의 새로운,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위치를 차지하는 자기만의 그리고 일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활동적인 사람의 마음속에 근본적으로 들어 있는 태만함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샘에서 물을 깆는 것을 방해한다. 의견의 자유는 건강과 마찬가지다. 양쪽이 모두 개인적인것이며, 양쪽 모두에게서 인정되는 보편 타당한 개념은 세워질 수 없다. 한 개인의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것이 다른 한 개인에게는 이미 질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정신의 자유를 향한 많은 수단과 방법이 더 높이 발달한 본성은 지닌 사람들에게는 부자유로 향하는 방법들과 수단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279-280


부수 효과 - 진정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런 억압이 없어도 결점과 악덕의 경향들을 버리게 될 것이다. 분노와 불쾌함이 그를 엄습하는 일도 좀더 드물어질 것이다. 즉 그의 의지는 인식하는 것과 인식하기 위한 수단, 즉 그 안에서 그가 인식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속적인 상태 외의 아무것도 더 절실히 원하지 않게 될 것이다.  280


앞으로 나아가라 - 그러면 확실한 발걸음과 신뢰를 가지고 지혜의 길로 나아가라! 네가 어떤 존재이든 스스로 경험의 샘이 되어 너 자신으 도우라! 너의 본질에 대한 불만을 던져버리고 네 자신의 자아를 용서하라. 왜냐하면 어쨌든 너는 인식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백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사다리를 가지고 잇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종교와 예술을 어머니와 유모처럼 사랑해봤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명해질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서 바라보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그 마력속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너는 역사에 정통해야 하고, '이쪽-저쪽'의 조심스러운 저울접시 놀이에도 정통해 있어야 한다. 과거의 황야를 통해 그 고통에 찬 위대한 걸음을 걸었던 인류의 발자취를 밟아서 거꾸로 거닐어보라. 그러면 인류가 결코 다시 갈 수 없고 가서는 안 되는 곳을 너는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미래의 매듭이 또 맺어질 것인지를 전력을 다하여 미리 탐색함으로써, 네 자신의 삶은 인식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얻게 된다. 네가 체험한 모든 것, 모든 시도, 오류, 실수, 착각, 정열, 너의 사랑과 희망이 너의 목표속에서 남기없이 꽃을 피우도록 성취하는 것은 네 손에 달려 있다. 이 목표란, 스스로 문화의 고리의 필연적인 하나의 사슬이 되는 것이며, 이 필연성에서 보편적인 문화의 진행 속에 있는 필연성을 추론하는 일이다.  283-284




제6장 교제하는 인간 


호의적인 위장 - 사람들과 교제할 때에는 흔히 우리가 마치 그들의 행위의 동기를 간파하지 못한 듯 호의적으로 위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287


평등의 두 가지 방식 - 평등의 욕구는 다른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까지 끌어내리려고 하거나(헐뜯거나 비밀로 하거나 다리를 걸어서) 또는 자신으 모든 사람과 함께 끌어올리려는(인정하거나 도와주거나 남의 성공을 기뻐함으로써)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288-289


신뢰와 친밀함 - 다른 사람과 의도적으로 친밀해지려고 애쓰는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상대방의 신뢰를 얻고 있는지에 대하여 확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뢰를 확신하는 사람은 친밀함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289-290


사려 깊은 - 아무도 기분 상하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정의로운 기질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이 많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292


논쟁하는 데 필요한 것 - 자신의 사상을 얼음 위에 놓는 법을 이해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논쟁의 열기 속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292


교제와 자만심 - 사람들은 자신이 항상 공로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만심을 잊어버리게 된다. 혼자 잇다는 것은 교만을 심는 결과가 된다. 젊은 사람들은 자만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많은 것을 의미하려는 그들 자신과 똑같은 사람과 사귀고 있기 때문이다.  292-293


공격의 동기 - 사람들은 단지 누구에게 아픔을 주고 그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마 자신의 힘을 의식하기 위해 공격하기도 한다.  293


아첨 - 교제할 때 아첨을 통하여 우리의 조심성을 무디게 하려는 사람들은, 위험한 수단 즉 수면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수면제가 잠이 들게 하지 못하면, 오히려 더 깨어 있게 만들 것이다.  293


침묵 - 양편 모두에게 가장 불쾌한 논쟁의 응수 방법은 화를 내고 침묵을 지키는 일이다. 왜냐하면 공격하는 편은 흔히 침묵을 경멸의 표시로 표명하기 때문이다.  295


대화를 하면서 -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정당함이나 부당함을 인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습관의 문제다. 전자를 인정하는 것도 후자를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가 있다.  297


설명하는 사람 - 그 무엇을 설명하는 사람은 그 사실이 그의 관심을 끌기 때문에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설명하는 것을 통해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싶기 때문에 말하는 것인지를 쉽게 알아차리게 만든다. 후자의 경우에 그는 과정을 하고, 최상급도 사용하며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는 일반적으로 더 서툴게 말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실에 대하여 잘 생각하고 있지 못하지 때문이다.  300-301


모욕하는 것과 모욕당하는 것 - 모욕하고 나중에 용서를 비는 것이 모욕당하고 용서해주는 것보다 훨씬 기분 좋은 일이다. 전자를 행하는 사람은 힘을 과시하고 그 뒤에 성격이 호의적임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후자는, 만약 그가 비인간적이라고 인정받지 않으려면, 이미 용서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강박관념 때문에 상대방을 굴복시킨 데 대한 즐거움도 적어진다.  303


사교 모임 후의 양심의 꺼림직함 - 왜 우리는 일반적인 사교 모임 후에 꺼림칙함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리가 중대한 사실을 가볍게 받아들였기 때문이거나, 인물들에 대하여 논의할 때 완전히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는 말을 해야 했을 때 침묵했기 때문이며, 적당한 시기에 일어나서 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사교 모임에서 마치 우리가 거기에 속하는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304


잘못 평가된다 - 자신이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가에 언제나 귀 기울이고 있는 사람은 항상 화가 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우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이미 잘못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들ㄷ조차고 자신들의 언짢음을 때로는 시기하는 말들로 표출한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우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그들이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의 판단은 많은 아픔을 준다. 왜냐하면 그 판단들은 아주 솔직하고 거의 사실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대자인 어떤 사람이 우리가 비밀로 하고 있는 점을 우리 자신처럼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처음에 그 불쾌한 기분은 얼마나 크겠는가!  304


오해된 정직함 - 대화를 하면서 자기 자신을 인용하는 것은("나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자만하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된다. 반면 그것은 자주 이와는 정반대의 근원에서 나온다. 그것은 적어도 그 순간을 과거의 어떤 순간에 속하는 묘안들로 장식하고 꾸미지 않으려는 정직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305


자만심의 징후로서 동정심의 요구 -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을 모욕하면서 처음에는 자신을 나쁘게 여기지 않기를, 두 번째에는 자신이 극심한 발작에 지배당하고 있으므로 동정해주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의 자만심은 이렇게 멀리 나아간다.  306


소크라테스의 경험 - 인간은 한 가지 일에 대가가 되고 나면, 통상적으로 바로 그 때문에 대부분의 다른 일들에서는 완전히 무능해진다. 그러나 이미 소크라테스가 경험한 것처럼, 사람들은 정반대로 판단하고 있다. 이것이 대가들과의 교제를 즐겁지 않게 만드는 나쁜 상태다.  307-308


고귀함과 감사하는 마음 - 고귀한 사람은 감사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즐겁게 느끼고, 의무를 가질 기회들을 소심하게 피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후에 감사함을 표현하는 데에도 태연하다. 반면에 천박한 살마은 모든 의무를 지는 것에 대해 저항하거나, 후에 그 감사를 표현하는 데도 과장된 행동을 하거나 너무 고의적으로 애를 쓴다. 그런데 후자의 행동은 더 낮은 혈통 또는 억압된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들에게 보여진 호의가 그들에게는 은혜의 기적을 의미하는 것이다.  309-310


우정을 위한 재능 - 우정에 대해서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는 두 가지 유형이 드러난다. 한 가지 유형은 끊임없는 상승 속에서 어떤 발전 단계에서도 잘 어울리는 친구를 발견한다. 그가 이런 방법으로 얻은 일련의 친구들은 그들끼리 관계를 가지는일이 드물고 때로는 알력과 대립 상태에 빠진다. 이것은 나중의 발전 단계가 앞의 단계들을 지양하거나 해를 입히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런 사람은 농담으로 사다리라고 불려도 좋을 것이다. 

또 다른 유형은 전혀 다른 성격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매력을 발휘하여 하나의오나전한 동아리를 이룰 정도의 친구들을 얻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이 친구들은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들끼리 서로 친구가 된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으 ㄹ원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전혀 다른 성향과 본성들의 일체성이 어떻게든 이미 형성되어 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친구를 가지는 재능이 좋은 친구가 되는 재능보다 훨씬 가치 있다.  311


불만의 해소 - 어떤 일에서 실패한 사람은 실패의 원인을 우연으로 돌리기보다 차라리 다른 사람의 나쁜 의지로 돌리낟. 그의 화난 감정은 그가 실패한 게 사물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함으로써 가벼워진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복수를 할 수 있지만 우연에 의한 고통스러움은 억지로 삼ㅌ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주의 측근은 어떤 일에서 실패하면, 어떤 한 사람을 명목상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모든 궁신의 이익을 위하여 그를 희생시키곤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영주느 ㄴ운명의 여신 자체에게는 복수를 할수가 없으므로 그의 불쾌감이 그들 모두에게 표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312


자만심 - 우리의 모든 좋은 수확을 망치는, 자만심이라 불리는 저 잡초가 자라나는 것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마우것도 없다. 왜냐하면 자만심은 진실한 마음에, 경의의 표현에, 호의적인 친근감에, 연애에, 친절한 충고에, 실수의 고백에, 남을 위한 동정에 들어 있기 때문이며, 그 잡초가 그 사이에서 자라나면 이 모든 아름다운 것이 반감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자만하는 사람, 즉 있는 대로 또는 인정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항상 계산을 잘 한다. 물론 그는 자신의 자만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보통 두려움 또는 편리함 때문에 그가 요구하는 정도의 존경을 그에게 표시하는 한, 순간적인 성과만은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나쁜 보복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그에게 주었던 가치에서 그가 정도를 넘어서 요구한 만큼을 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자만심을 꺾는 일보다 더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는 일은 없다. 자만하는 사람은 자신의 참으로 위대한 업적도 다른 사람의 눈에 의심스럽고 사소하게 보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흙 묻은 발로 그것을 짓밟기도 한다. 자랑스러운 행동이라 할지라도 오해받지 ㅇ낳고 자만으로 보이지 않을 가장 확실한 곳에서만, 예를 들어 친구와 아내 앞에서만 허용될 것이다. 왜냐하면 살마들과의 관계에서 자만심이라는 평판을 초래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손히 거짓말하는 것을 배우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나쁘다.  314-315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ㅇ벗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고 ㄷ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인 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ㅇ벗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고 ㄷ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ㅇ낳앗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이 ㄴ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없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곧 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인 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자유정신과 결혼 - 자유정신이 여성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나는, 자유정신이 고대의 예언하는 새처럼, 현재의 진정으로 생각하는 자 그리고 진리를 말하는 자로 혼자 나는 것을 선호할 것임이 틀림없다고 믿는다.  342


두 화음의 부조화 - 여성들은 봉사하고 싶어하고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자유정신은 봉사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  345




제8장 국가에 대한 조망


문화와 사회계층 - 더 높은 문화는 사회의 서로 다른 두 계층, 노동하는 계층과 여가를 지닌 계층, 즉 참된 여가를 가질 자격을 지닌 계층이 있는 곳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또는 좀더 강하게 표현하면 강제노동 게급과 자유노동 계급이 있는 곳에서만 성립할 수있다. 좀더 높은 문화를 생산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경우에는 행복의 분배에 대한 관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경우도 여가를 가진 계층이 고통을 더 잘 견뎌낼 수 있는 계층이며 고통을 받는 계층이고 현존에 대한 그들의 즐거움은 더 적으며 그들의 과제는 훨씬 더 크다.  353


전복하려는 사람들 중에서 위험한 사람들 - 사회 전복에 대해 숙고하는 사람들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과 손자를 위해서 그 무엇을 달성하려는 사람들로 나누어보면, 후자가 훨씬 더 위험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욕이 없다는 믿음과 거리낌없는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들은 적당히 물리칠 수가 있다. 지배적인 사회는 그렇게 하기에 아직 충분할 정도로 부유하고 영리하다. 목표들이 비개인적인 것일 때, 위험은 즉시 시작된다. 비개인적인 관심을 가진 혁명가들은, 현존하는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모두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하며 따라서 그들보다 스스로가 우월하다고 느낄 수 있다.  363


대중의 위대한 사람 - 대중에게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리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게 주어져 있다. 모든 상황에서 대중에게 아주 즐거운 그 무엇을 마련해주거나 또는 먼저 머리 속에 이것저것이 아주 즐거울 것이라는 생각을 넣어주고 그 다음 그것을 제공하면 된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곧바로 제공해서는 안 되며 최대한의 노력으로 그것을 쟁취하거나 아니면 쟁취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좋다. 강력하고 게다가 정복하기 어려운 하나의 의지력이 거기에 있다는 인사을 대중이 받아야만 한다. 적어도 그러한 의지력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라도 해야 한다. ㄱ상한 의지에는 누구나 다 감탄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사람은 만약 자신이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과 자신의 이기주의에 더 이상 아무러 ㄴ한계가 없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강한 의지가 자신의 열망이 원하는 것에 귀 기울이는 대신 대중에게 아주 즐거운 그 무엇을 얻게 해준다는 것이 보이면, 사람들은 다시 한번 감탄하고 그들 자신의 행복을 원한다. 그 밖에도 그는 대중의 모든 특성을 가지고 잇다 .그래서 대중은 그의 앞에서 그만큼 수치심을 덜 느끼게 되고, 그는 그만큼 더 대중의 인기를 얻는다. 따라서 그는 난폭하고 질투하고 착취를 즐겨하며 음모를 좋아하고 아첨을 잘하고 비굴하고 교만하며 사정에 따라서는 이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다.  367-368


전복에 대한 이론에서의 망상 - 가장 자랑스럽고 훌륭한 인류의 신전이 저절로 드러나리라는 믿음 속에서 모든 질서의 전복을 열렬히 그리고 웅변적으로 촉구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공상가들이 있다. 이러한 위험한 꿈속에는 루소의 미신이 아직도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 미신은 기적적이고 근원적이지만 묻혀진 채 있는 인간 본성의 장점을 믿고, 그 묻혀진 채 있는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사회, 국가, 교육에 나타나는 문화의 여러 제도에 돌리낟.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그러한 모든 전복이 오래 전에 파묻혀버린 아득한 옛 시대의 처참함과 무절제 같은 가장 난폭한 에너지를 새로운 것으로 부활시킨다는 사실을 역사적 체험으로 잘 알고 있다. 즉 전복은 아마 지쳐버린 인류에게는 일종의 힘의 원천일 수는 있겠지만, 결코 인간 본성을 정리하는 자, 건축가, 예술가, 완성자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정리하고 정화하며 개조하는 경향이 있는 볼테르의 절도 있는 본서잉 아니라, 루소의 정열적인 어리석음과 반쯤의 거짓말들이 혁명의 낙관주의적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 정신에 대하여 "그 비열한 자를 굴복시켜라!"고 외친다. 그 정신 때문에 계몽 정신과 진보적 발전의 벙신은 오랫동안 축출되었다. 우리는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서 그 정신을 다시 불러오게 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주시하자!  368-369


학교 제도 - 큰 국가들의 학교제도는 항상 기껏해야 평범한 수준일 뿐이다. 그것은 큰 부엌에서 기껏해야 평범한 정도의 음식이 만들어지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이다.  370


행복의 시간들 - 행복한 시대가 전혀 불가능한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단순히 원하기만 할 뿐, 가지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개인은 그에게 조흔 날들이 찾아오면 틀림없이 불안과 비참함을 기원하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운명은 행복한 순간을 맏을 준비가 되어 있다. 모든 삶에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러나 행복한 시대를 맞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대는 '산의 저편'으로 그리고 조상들의 유산으로 인간의 상상속에 존속해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한 시대라는 개념은 아마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간이 사냥과 전쟁으로 심하게 긴장한 후, 휴식에 몸을 맡기고 팔다리를 뻗으며 잠의 날개가 자신의 주위에서 소리내는 것을 듣는 그런 상태에서 추측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 오랜 습관에 따라서 그가 이제 고통과 수고의 모든 시간 후에도 역시 거기에 상응하는 상승과 지속 속에서 그 행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추론이다.  371-372


종교와 정부 - 국가 또는 좀더 명백히 말해서 정부가 미성숙한 많은 사람들의 후견인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을 위해서 종교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폐지할 것인지를 숙고해보는 한, 정부는 항상 거의 확실히 종교를 유지하는 쪽으로 결정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상실, 결핍, 두려움, 불신의 시간들, 즉 정부가 개인의 마음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하여 직접적으로 그 무엇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바로 그곳에서 개별적인 심정을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편적이고 피할 수 없으며 우선은 불가항력적인 재난(식량난, 금융위기, 전쟁들)에서까지도 종교는 진정시키고 기다리며 신뢰하는 태도를 대중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국가 정부의 필연적 또는 우연적 결함들이나 왕조의 관심사들이 낳은 위험한 결과들이 통찰력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서 그를 반항적으로 만드는 모든 곳에서, 통찰력이 없는 사람들은 신의 손가락을 보게 될 것으로 믿고 위의(이 개념에는 보통 신적 통치 양식과 인간적 통치 양식이 융합되어 있다) 지시들에 인내하면서 복종하게 될 것이다. .. 대체로 국가는 사제들을 끌어들이는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사제들을 끌어들이는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사제들의 가장 개인적이고 은밀한 영혼의 교육이 필요하고, 겉으로 보아 외면적으로는 전혀 다른 관심을 대표하고 있는 시종들을 존중하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국가가 종교에서 더 이상 아무 이익도 스스로 끌어내서는 안 될 경우나, 종교적 조치를 취하느 ㄴ데 정부에게 같은 종류의 통일적인 방법이 허용되어서는 안 될 정도로 국민이 종교적 사실들에 대하여 너무 다양하게 생각하고 있을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종교를 사적인 일로 취급하고 각 개인의 양심과 습관에 넘겨야 하는 타개책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제일 먼저 종교감각이 강화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국가가 무심코 또는 고의적으로 생명의 공기를 기꺼이 허락하지 않았던 은폐되고 억압된 종교감정의 동요가 이제 터져나와 극단적으로까지 무절제해진다. 나중에는 종교가 종파들로 뒤덮이게 되고, 종교가 개인적인 문제가 된 그 순간에 용의 이빨이 뿌려졌다는 많은 사실이 입증된다. 싸움의 광경과 종교적 신조가 지닌 모든 약점에 대해 적개심에 차 폭로하는 것은 결국 더 뛰어난 자와 재능이 있는 자로 하여금 비종교성을 개인적인 무넺로 삼게 하는 타개책만을 허용할 뿐이다. 이러한 의향은 통치하는 사람들의 정신에서도 역시 만연하게 되고, 거의 자신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그들이 하는 조처들에 반종교적인 성격을 주게 된다. 이 현상이 나타나면 곧 과거에는 국가를 반쯤 또는 완전히 신성한 그 무엇을 우러러보았던, 여전히 종교적으로 감동되어 있던 사람들의 분위기는 결정적으로 반국가적인 분위기로 변한다. 그들은 정부의 조치에 대해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많이 방해하고 충돌하며 교란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반대파와 비종교적인 사람들을 그들의 항의의 열기를 통하여 국가에 대한 거의 광적인 감격으로 몰아넣는다. ...

모든 통치자들에 대한 불신, 단기간의 투쟁들이 보여주는 무익하고 소모적인 것에 대한 통찰은 사람들로 하여금 와전히 새로운 결심들, 즉 국가 개념의 폐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대립하는 것을 지양하도록 몰라갈 것이 분명하다. 사적인 단체들이 한 단계씩 국가의 업무들을 자신 속으로 끌어들인다. 결국 낡은 통치 활동에서 남아 있는 가장 끈질긴 잔여물(예를 들면 사적인 인간들이 사적인 인간들을 확실히 지켜야 하는 저 활동)까지도 언젠가는 사적인 기업가에 의해 처리될 것이다. 국각의 경시와 붕괴, 국가의 죽음 그리고 사적인 인간(모든 인간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합리성과 불합리성을 잉태하고 있는)를 달성하고 오래된 병이 재발하는 것을 모두 극복하고 나면 인류의 이야기책에는 새로운 한 장이 펼쳐지고 거기서 사람들은 온갖 종료의 기이한 역사들과 아마 몇 개의 좋은 이야기도 읽게 될 것이다.  372-376


수단의 관점에서 본 사회주의 - 사회주의는 거의 노쇠해버린 전제주의의 뒤를 이르려는 공상적인 동생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노력들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반동적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전제주의만이 가졌던 것과 같은 국가 권력의 충만함을 갈망하기 때문이며, 개인의 진정한 파멸을 추구함으로써 과거의 모든 것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사회주의에게는 자연의 부당한 사치로 나타나며 사회주의에 의해서 하나의 합목적적인 공동체의 기관으로 개조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유사성 때문에 사회주의는 항상 고대의 전형적인 사회주의자 플라톤이 시칠리아의 전제군주의 궁정에 나타났던 것처럼, 모든 권력 발전의 과도기적인 주변에서 나타난다. 사회주의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저넺주의의 후계자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 세기의 독재 권력국가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촉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유산조차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사회주의에는 아직 한 번도 그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가장 겸손한 복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국가에 대한 진부한 종교적 경건함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현존하는 국가들을 제거하는 데 힘써야 하므로 그러한 경건함을 제거하기 위하여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 때문에 사회주의는 단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극단적인 테러리즘을 통하여 여기저기에 한 번씩 존재하기를 희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은밀히 공포정치의 조짐을 보이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대중에게 머리에 못을 박듯이 '정의'라는 단어를 머리 속에 박아둔다. 그것은 그들의 오성을 오나전히 빼앗아버리고 (오성이 이미 이 얼치기 교양으로 인해 심하게 손상을 입은 뒤에), 그들이 해야 하느 ㄴ나쁜 장난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이다. 사회주의는 국가 권력의 모든 축적의 위험을 실로 난폭하고 적나라하게 가르치고, 그러한 한 국가 그 자체에 대한 불신삼을 품게 할 수가 있다. 만약 사회주의의 거친 목소리가 '가능한 한 많은 국가를' 이라는 함성으로 다가오면, 그 함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시끄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곧 그것과 반대되는 '가능한 한 적은 국가를' 이라는 함성이 더 큰 힘으로 터져나올 것이다.  378-379




제9장 혼자 있는 사람


진리의 적들 - 신념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391


너무 집착하지 않도록 - 어떤 일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그 일에 충실한 것은 드문 일이다. 그들은 단지 그 깊이를 밝혔을 뿐이다. 항상 그곳에는 매우 불쾌한 것이 보인다.  392


의도하지 않은 고결함 -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들에게 항상 베푸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고결한 행동을 하게 된다.  394


친구 - 동정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기쁨이 친구를 만든다.  395


가장 고귀한 위선자 -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고귀한 위선이다.  396


인간의 운명 -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위하고 판단하더라도, 좀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부당함을 알고 있다.  399


위대함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 어떤 강물도 자기 자신에 의해 크고 풍부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주 많은 지류들을 받아들이며 계속 흘러가는 것, 그것이 강물을 그렇게 만든느 것이다. 모든 정신의 위대함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그 많은 지류들이 뒤따라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다. 그가 처음부터 재능이 없는지 재능이 풍부한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400


너무 큰 목표들 - 공개적으로 큰 목표들을 세우고 그 후 비밀리에 자신은 그것을 하기에 너무나 약하다는 사실을 통찰하게 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그 목표들을 공개적으로 철회하기에 충분한 힘도 가지고 있지 않고 그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위선자가 되어버린다.  405


강물의 흐름 속에서 - 세차게 흐르는 물은 많은 암석과 관목숲을 휩쓸고 가며, 강한 정신은 수많으 ㄴ어리석은 사람들과 명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휩쓸고 간다.  405


정신의 육체화 - 한 사람이 많이 그리고 현명하게 사고하면 그의 얼굴뿐만 아니라 현명한 모습을 얻게 된다.  406


잘 보지 못하고 잘 듣지 못하는 것 -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은 점점 더 적게 보게 되고, 잘 듣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몇 가지를 더 듣게 된다.  406


허영심의 자기만족 - 허영심에 차 있는 사람은 탁월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탁월하다고 느끼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기만과 자기계략의 수단을 거부하지 못한다. 그에게 잊혀지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다.  406


예외적으로 허영심에 차 있는 - 보통 자기를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육체적으로 병에 걸리게 되면, 예외적으로 허영심에 차게 되며 평판과 칭찬에 대해 민감해진다. 그가 자신을 상실해가는 정도 만큼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 즉 외부에서 다시 자신을 되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406-407


유일한 인간의 권리 - 관습적인 것에서 벗어난 사람은 비범한 것에 바쳐진 제물이다. 관습적인 것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관습적인 것의 노예이다. 어떤 경우든 사람들은 파멸하게 되어 있다.  408


얼치기 지식 - 외국어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은 외국어를 훌륭하게 말하는 살마보다 외국어에 대해 더 큰 즐거움을 가지고 있다. 얼치기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만족이 있다.  408


의심을 품는 것 - 사람들은 좋아할 수 없는 인간들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으려고 한다.  409


친구가 없는 것 - 친구가 없는 것은 질투와 자만심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그가 질투할 아무런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다행스러운 상황 덕으로 친구를 가지고 있다.  410


참회 -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나면 그 죄를 잊어버린다. 그러나 대개 다른 사람은 그의 죄를 잊지 않는다.  412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 인간은 사랑하는 것과 호의를 베푸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젊어서부터 배워야 한다. 만약 교육과 우연이 우리에게 이런 감각을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을 때 우리의 영혼은 메마르고 친절한 사람들의 섬세한 감각을 이해하는 데도 적합하지 못하게 된다.  424


다른 사람과 세상에 대한 불만 - 우리가 원래는 자신에게 불만을 느끼고 있으면서, 흔히 그러듯이 다른 사람에게 불만을 터뜨린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판단들을 흐리게 만들고 기만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후에 다른 사람의 실수와 결점을 통해 이 불만에 동기를 부여하려 하고, 자기 자신을 보려 하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 가차없는 재판관이기도 한 종교적으로 엄격한 사람들은 동시에 인간성 일반에 대해 가장 많이 나쁜 욕을 해왔다. 자신에게는 죄를, 다른 사람에게는 덕을 남겨주는 성자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부처의 법도에 따라 자신의 선을 사람들 앞에서 숨기고, 자신의 악만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사람도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426


고독한 사람들 -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함께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져서 자신을 다른 사람과 전혀 비교하지 않고 조용하고 즐거운 기분으로 자기 자신과 좋은 대화를 나누며, 게다가 웃음을 지으며 독자적인 삶을 엮어 나간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하면 자기 자신을 구차하게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 관한 유익하고 정당한 의견을 남에게서 비로소 다시 배우도록 강요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그들은 배워 익힌 이 의견에서도 되풀이해서 조금 빼거나 값을 깎으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혼자 있음을 기꺼이 허락해야만 하지만 흔히 일어나는 일처럼 그 때문에 불쌍히 여기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아야만 한다.  436


방랑자 - 어느 정도 이성의 자유에 이른 사람은 지상에서는 스스로를 방랑자로 느낄 수밖에 없다. 비록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하여 여행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왜냐하면 이와 같은 목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세상에서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주시하고 그것에 대하여 눈을 크게 뜨고 보려 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개별적인 것에 너무 강하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 변화와 무상함에 대한 기쁨을 가진 방랑하는 그 무엇이 그 자신 속에 존재함이 틀림없다.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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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담집은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된 대담(20150810,902, 0918, 1002)을 엮었습니다.



대담을 시작하며

강의실에 들어서면 나는 한 마리의 ‘똑똑한 원숭이’가 된 느낌이다. 내가 펼치는 ‘화려한 언변’과 ‘풍부한 사례’에 학생들이 감탄한다. 그런데 그 감탄하는 눈동자들 속에서 배움과 성장을 찾기가 힘들다.


똑똑하되 멍청하며, 언변은 좋되 무능하다. 시험 문제는 잘 풀되 삶의 문제를 대하는 능력은 형편없으며, 남을 품평하는 데는 날카로운 날을 세우되 자신을 성찰하는 데는 무디기 짝이 없다.


우리는 배울수록 무능력해지고, 배울수록 화만 내는 처지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공부가 삶의 문제를 푸는 도구가 아니라 삶을 식민화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부는 사실 세상을 읽고 삶을 해석하는 언어라는 좋은 도구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내가 아는 공부는.. 어떤 지식 권력의 정당성과 주도권을 확인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도전하는 것이 공부였다. 삶은 언제나 지식보다 풍부한 것이고, 언어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미 권력화한 지식에 포획되지 않은 ‘삶’을 포착하려는 것이었고 그 삶이 지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공부였다. 그랬기에 공부는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었다. 삶이 공부의 식민지가 아니라 공부가 삶의 도구였다.


공부의 기쁨은 보편성의 발견이다.


시대의 암흑이라는 동시대성을 발견하고 그 문제를 공동의 노력으로 해결해가려고 하는 과정에서 동시대인이 형성된다. 이 동시대인을 형성해가는 것, 그것이 공부가 무능력한 개체들이 아니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를 형성해가는 과정이며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엄기호)




1부 - 공부에 중독된 아이들


하지현 : 미국식 표현으로 ‘잔디깍기 맘’이라는 말이 있어요. 부모가 먼저 잔디깍기 기계로 풀을 깎아줘서 아이가 갈 길을 먼저 열어준다는 뜻이에요.

지금의 486 부모들은 공부를 잘하면 잘살 수 있다는 생각이 자기 몸으로 체득된 세대예요. 그러니까 부모들이 자신이 성공했던 방법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거죠. 그런데 사실 거시적으로 보면 운이 좋은 세대였던 겁니다. 80년대 초반엔 졸업정원제가 있어서 그전에 비해 어렵지 않게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었어요. 그리고 이들이 취업할 무렵인 87, 88년도는 우리나라가 한창 경기가 좋을 때라 대기업 취업이 상대적으로 쉬웠습니다. 좋은 일자리 수에 비해 대졸자가 모자랄 정도였죠. 주거도 마찬가지입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신도시가 만들어질 때 손쉽게 집을 살 수 있었어요. 우리 사회가 해방 이후 양적, 질적으로 엄청난 팽창과 발전을 하던 거시적 흐름에 이 세대는 올라탄 거예요. 일종의 ‘프리라이딩(free-riding)’ 운이 좋은 세대죠.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건 아직 시험을 안 친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시험을 친다는 건 내가 어느 정도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 친구들은 시험은 안 봐요.

시험을 안 보면 좋은 게 실제 내 능력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에요... 그것을 통해서 나는 여전히 가능성 있고 굉장히 잘해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거예요.


엄기호 : 사회적 관점, 즉 통치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니까 너는 아직 준비가 안됐다’라는 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 좋은 이유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시민들에게 자리를 배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모두에게 자리를 배분하면 사회가 안정되죠.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 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국가의 중요한 역할이란 게 자리를 배분하는 게 아니라 자리를 배분받지 못한 이들에게 네가 왜 자리를 배정받지 못해슨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설명이 ‘네가 준비가 덜됐다’인 거죠.

두려움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주체와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줘야 하는데 그런 정도의 자리를 만들어낼 능력도 의사도 없는 사회 시스템이 절묘하게 만나서 기가막히게 합의를 볼 수 있는 지점인 거죠.

이런 상태가 되면 불만이 밖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 향하게 됩니다. 자리를 만들어주지 못하는 사회가 아니라 준비가 안 된 자기를 탓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반란은 일어나지 않아요.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거야말로 손 안대고 코 푸는 격입니다. 불만을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수월한 방법이죠.


하 : 원초적 경험이 굉장히 중요한데, 지금 아이들은 항상 ‘공부 중’에 있어요.


엄 : 졸업한 상태에서 그렇게 1년이 넘은 뒤에 원서를 내면 회사에서 문제가 있다고 취급해요. 그런데 졸업을 하지 않고 1년을 휴학한 뒤 지원을 하면 문제 삼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학생은 공부 중이었으니까.

이런 직접적인 이유 외에도 졸업을 유예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는 소속감이 없어진다는 불안이에요. 태어나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소속이 안 되어본 적이 없거든요. .. 제도적으로 무중력 상태가 되는 거예요. 리고 제도에 속하지 않으니 작가 뭘 하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제도 안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안 해도 뭔가를 하는 것 같거든요.


엄 :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나한테 바로 배우면 배운 것 같지? 한 달이면 다 까먹는다. 네 것이 안 된다. 어떻게든 네가 찾을 때 그때 비로소 네 언어가 된다”라고 말하곤 해요... 요약정리 쫙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찾고 토론하고 이런 걸 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견디는 과정을 너무 못 참아요.


엄 : 저는 학생들이 이런 만능감을 갖게 된 또 다른 원인 중의 하나가 레퍼런스 그룹의 부재인 것 같아요. 사람이 실수도 하고 틀리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항상 옳을 수는 없는 거니까. 그랬을 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내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를 가리는 것보다 내 주변의 레퍼런스 그룹이 나를 톡톡 쳐주는 것. “야, 지금 너 오버하고 있어, 워워” 이런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 학생들에게는 레퍼런스 그룹이 없어요. 정말 너무 없어요. 친구가 이상한 짓을 하면 “정신차려” 이런 얘기를 해줘야 하는데 안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혼자 앉아서 자기 혼자 고민하고, 자기 혼자 인터넷 뒤지고, 그러다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거예요. 놀랄 정도로 친구가 없고, 친구랑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도 몰라요. 물론 이건 청소년이나 청년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사는 거의 대다수 사람들의 문제이지만요.


하: <아프지 않다는 거짓말>이란 책을 쓴 가이 윈치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관계의 근육’이 쇠퇴한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어요. 인간관계의 기술은 사교, 의사소통, 입장 바꿔 생각하기, 공감 능력 같은 것인데 사회에서 연결 고리가 줄어들어 그 기술을 쓸 필요가 줄어들면 마치 근육을 안 쓰면 약해지듯이 그 능력도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고독의 문제를 깨닫고 사람을 만나서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근력이 약해서 벗어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빠진다는 건데, 저는 참 많은 공감이 되더라고요.


하: 하스퍼거라고 고기능 자폐가 있어요. 이 친구들을 위한 사회 적응 훈련법이 있는데, 가령, 이런 거예요. 전화를 하면 “안녕하세요. 저는 누구입니다. 누구랑 통화할 수 있을까요?” 이런 걸 얘기해야, 누구를 사귀고 싶으면 밥을 먹으로 가자고 하기 전에 차를 먼저 마시자고 해라, 상대가 두 번 거절하면 한 번을 더 물어봐라, 두번째 까지는 정말 시간이 안 될 수도 있는 거다. 네가 싫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런 얘기들이 씌어 있어요. ‘뭐 이런 걸 다르쳐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세하게 가르쳐줘요. 픽업아티스트들이 가르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하 : 사회성을 익힐 겨를이 없는 거죠. 사회성을 익히려면 물리적으로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해요.


엄 : 교육에서 얘기할 때 사람의 성장은 낯선 것, 타자와의 부딪힘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많이 말하거든요.


하 : 학습과 경험이 다른 것이듯, 면역력은 경험을 통해서 아파봐야 생기지 학습한다고 생기지는 않거든요. 물론 학습을 하면 덜 아플 수는 있겠죠.


엄 : 삶은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할 때 배울 수 있습니다. 존 듀이가 말한 대로 하면 불에 손을 집어 넣어서 손을 데는 과정이 있어야 불에 손을 넣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런 일체의 과정을 다 위험한 것이라고 불온시해요. 배우긴 배워야 하는데 위험하지 않게 배워야 하는 것이죠. ... 겪는 것이 없이 그저 배우는 것이죠. 그런데 기스 하나 없이 말끔하게 배우는 게 가능할까요?

저는 사는 건 감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느 정도까지는 겪으면서 감당하는 거고, 감다할 수 없을 때 문제 제기가 되어야 하는데, 감당해나가는 과정이 삭제되어 있다고 해야 할까요?


엄 : 근대라는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은 자기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 항상 두 가지 태도를 요구받습니다. 미래는 기획하고 과거는 성찰하는 태도입니다. 만사가 생각한대로 진행되지는 않기 때문이죠. 생각한 대로 진행되지 않은 과거에 대해서는 성찰하며 교훈을 얻고 그 교훈에 입각해서 다시 미래를 기획합니다. 이중에서 하나만 빠져도 문제가 돼요.


엄 : 자아 중심성이 굉장히 강하니까 자의식은 무척높은데, 자기 의견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없고, 그러다 보니까 한편으로는 굉장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면서 어떤 결정을 할 때는 남 얘기에 쉽게 넘어가는 거죠. 자기 의견이 없게 돼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성장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자기 말고 타인이 있다는걸 인지해가는 것이라면, 다른 한편으로는 의견이 생겨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하 :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보는데, 하나는 나를 구겨 넣는 방법, 맞추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환경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방법이에요. 이 두 개를 적절히 조화롭게 사용하면서 우리는 적응을 해나가는 거겠죠. 그런데 이루부 친구들의 자아 중심성의 세계에서는 나를 구겨 넣을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환경을 바꾸고 싶지도 않아요. 환경이 알아서 바뀌어줬으면 좋겠는 거죠.


엄 : 공부를 ‘하는(doing)’게 아니라 ‘구경’하는 거예요. .. 존 듀이가 말한대로라면 ‘언더고잉(undergoing)’ 즉 겪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게 사라져버리는 거죠. 공부 ‘중독’이라고 하는데 중독될 ‘실재’는 없어요.


엄 : 굉장히 매끈하게 요약정리해서 정답을 향해 어떤 주저함도 없이 돌진하는 형태가 모든 공부의 전형이 되어 있고, 그런 식으로 공부해야지만 안심을 하고 시간 낭비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죠. 이렇게 되다 보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의견이라는 것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내 의견과 다른 의견들 속에 섞이지 못해 너무나 괴로워하는 거예요.


엄 : ‘최적화(optimizing)’의 논리인 거죠. 삶을 최적화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 최고의 기쁨이 되고 있어요. .. 시간도 공간도 계속 최적화해서 사는 것을 추구하고 거기에서만 기쁨을 얻다 보니 최적화되지 않은 것을 견디지 못해요. 최적화하려고 하면 할수록 의외성, 낯섦,타자는 사라져버려요.


하 : 이제 부모들도 서서히 그런 악순환의 한계를 깨닫고 있고, 판에서 나가거나 아니면 공감대가 일어나 판이 깨지는 시기가 와야 한다는 것을 감으로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미쳤어 미쳤어” 하면서도 나만 판에서 빠질 수는 없는 거예요. 이 라운드에서는 내가 이기고 나가고 새 라운드가 시작될 때 판이 깨지기를 바라죠. 그러니까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와 내 아이는 이 판만 하면 끝나는 거거든요. 우리 모두 다 같이 하지 맙시다, 그러면 되는데, 내 애라는 관점에서 움직일 때는 난 몇 년 하고 퉁치고 나가면 되는 거예요. 굉장히 이기적이 되는 거죠. 이 판이 곧 깨지더라도 내가 생각한 전략대로 이기고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




2부 누가 공부에 욕심을 내는가


엄 :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즉 능력주의.

어떤 것은 능력이고 이떤 것은 능력이 아닌가? 능력이라는 것이 권력에 의해서 굉장히 이계화, 제도화되어 있잖아요. 공부하라고 할 때 이미 암묵적으로 떤 것을 공부하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것은 공부고 다른 어떤 것은 공부가 아니죠. 왜 공부가 아니냐하면 그건 아무리 키워 봤자 능력으로 쳐주지 않으니까요.


하 : 얼만 전에 <미움받을 용기>의 기시미 이치로 선ㅅㅇ과 좌담을 하면서 “한국의 젊은이들과 일본의 젊은이들의 차이는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분이 얘기한 첫 번째가 한국 젊은이들은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눈치를 너무 많이 보는 것 같다는 거였어요... ‘이래야 된다’라는 표준화된 라이프스타일에서 벗어나며 ㄴ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몇 살이 되면 어디에 다녀야 하고, 뭘 해야 하고, 어디에 가야만 하고.


엄 : 이반 일리치의 개념을 가져와서 쓰면 한국 사회가 ‘스쿨링화된 사회(schooling society)’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회 전체가 학교가 되었다는 거죠. .. 한국 사회는 스쿨 자체가 굉장히 위계회된 학벌사회라서, 어디를 나왔는지가 그 사람의 능력과 그 밖의 모든 것을 검증해주고 보여준다고 보는 사회죠. 그래서 좁은 의미의 공부에 대한 집착 같은 게 생겼죠. 그런데 이게 사회적으로 보면 정말 비극이거든요.


하 : 학교의 가치, 역할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져보고 싶어요. 학교라는 게 근대 교육, 즉 프러시아부터 시작된 2백 년쯤 된 교육이잖아요? 말 잘 듣는 훌륭한 신민을 만들기 위해서 시작된 균질화된 교유그 그전까지는 마이스터에 의한 1 대 1 교유그 도제 교육만 있었는데 산업혁명 이후에 글도 좀 깨우치고, 셈도 좀 가르치고, 남들 때리면 안 되는 거 가르쳐서 내보내니까 말 잘 듣는 신민이 되더라, 라는 사고 하에 만들어진 프러시아의 근대 교육 시스템이 지금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학교 교육의 기본이죠.


엄 : 원래 근대 교육의 목적은 탁월한 살맘을 만드는게 아니라 평균을 높이는 것에 목적이 있었잖아요? 계속해서 평균적인 살맘을 만들고 그 평균을 조금씩 높이는 것이 목적인, 그런 점에서 보면 굉장히 효율성을 강조하는 시스템이죠.


엄 : 한윤형씨가 썼던 표현ㄷ로 하면 ‘평균압’입니다. 평균에 대한 압력이죠. 한국은 적어도 평균이 되어야 한다는 압력이 매우 높은 사회라는 뜻입니다. 평균이 되지 못하면 탈락이고 낙오이며 패배한 인생이라는 말이 돼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균이라는 건 절대 평균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무 높다는 거죠.


엄 : 이전에는 공부가 생애사적 기획을 하는 데 가장 강력한 무기였죠. 그룬데 그게 잘 안 되는 상황이 되고 있단 말이죠. 그렇다면 이제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나와야 하는데,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출현해야 할 그 시점에 다양한 교육이 출현해버린 거죠. 그런데 다양한 교육이란 게 말 그대로 다양한 교육이 아니라 교육이 다양한 영역을 식민화해버린 형태예요. ..

교육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가르칠 수 없고 배워야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르쳐야지만 배울 수 있는 것이죠. 미분과 적분은 가르치지 않으면 배울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학교가 필요한 것이고 교과과정이 필요하죠. 반면 인성은 가르칠 수는 없고 살의 과정에서 배워야만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걸 지금 가르치겠다고 나서는 것이죠. 가르칠 수 없는 걸 가르치겠다고 하는 것, 저는 이게 가장 정확하게 삶을 식민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엄 : 공부라는 것이 삶에 통홥되어 있어야 하잔하요? 그런데 근대 학교가 공부와 삶을 단계론적으로 분리시켜버렸어요. ‘공부를 하고 난 뒤에야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니까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사는 것이 아닌 게 된 거죠. 삶이 유예되는 거예요. 지금 학교가 딱 그런 공간이잖아요?

학교에서 우리는 친구랑 만나서 싸우기도 하고, 정치도 하고, 비열한 짓도 하고 그러면서 ‘아, 이러면 안 되겠구나’ 깨닫기도 하고 그래야 해요. 학교가 총ㅊㅈㄱ인 삶의 공간이 되어야 하죠. 그런데 학교를 삶의 공간으로 인지하지 않고, ‘학교는 공부를 하는 곳이다’라고 생각해왔어요...

공부를 한다고 해서 삶이 주어지는가? 지금은 그렇지 않거든요. 그렇다면 학교를 다르게 인지해야 하잖아요? 삶과 공부를 단계론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 그러니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자 그래야 하는데 그 방법을 못 찾다 보니까 오히려 그렇다면 ‘모든 것을 공부하자’ 이런 형태로 나아가버리는 거죠.


엄 : 재미있는 현상이 있어요. 틀 밖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성공을 하고 나면 그것으로 죽 살아가면 되잖아요? 그것이 다른 사람들한테 훨씬 더 영감을 주거든요, 그런데 꼭 책을 씁니다. 학원을 해요. 결국 자신의 성공 방식을 매뉴얼화하는 거예요. 본인이 그러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또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죠. 결국 한국에서 블루오션은 공부밖에 없어요. 출판계도 레드오션이잖아요. 그런데 출판학교는 잘되고 있어요. 출판계는 망해가고 있는데 말예요. 이런 식으로 지금 공부 산업만 블루오션이 된 거죠.


엄 :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출현하려면 하나가 없어져야 해요. 바로 사회적 압력이죠. 표준화된 삶의 시나리오에 대한 압력이 사라져야 해요.


하 : 우리는 일반적으로 행선지가 정해져 있기를 바라죠. 정해져 있지 않으며 안 하고 싶어 해요. 사실 이제는 정해져 있는 건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데 말이죠.


엄 : 넓게 보면 삶은 그 자체가 공부의 과정, 배움의 과정이잖아요? 인간은 살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늘 배울 수밖에 없죠. 그걸 우리가 공부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반면 교육은 그것을 단계론적으로 구분하여 제도화한 것이고 할 수 있어요.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죠. 가르치지 않으면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공부 전체가 교육이 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다르칠 수 없는 것도 가르칠 수 있는 것처럼 만들어버리거든요.

이런 점에서 우리가 이 책에서 말하는 공부 중독이란 사실은 교육 중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3부 중독에서 해독으로


하 : 중도겡 빠져 있으니까 벗어나야 하잔하요. 지금은 공부를 공부로 이기려고 하는데, 공부디톡스를 하려면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하거든요. 프레임 자체에 대한 변화를 주는게 필요해요.


엄 : 대학 진학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어요. 그 필요성에 대해서 말이죠. 그런 변화가 실제로 감지되고 있고요. 대기업의 생산직 노동자,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은 잊 대학 진학에 대해 회의적이에요.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이 돈을 꽤 많이 벌거든요. 노동 계급의 대표는 아니고 중산층화된 노동 계급이죠. 이 사람들은 이제 대학 가 봤자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정도며 ㄴ투자를 아끼지 않습니다. 중산층의 신분은 유지하되 생산직에서 사무직으로 바꿀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방사립대를 갈 정도다 그러면 아예 전문대를 가라고 합니다. 지방국립대는 좀 헷갈려 하는데, 이렇게 보냈다가 중퇴시켜요. 4년제를 나오면 생산직에 못 들어가거든요. 생산직 보호조치 때문에 그래요. 아쪽에서는 대학을 보내도 소용없다는 걸 일치깜치 깨닫고 초등학교 고학녀에서 중학생이 되면 판가름을 해서 투자를 하지 말지 결정을 해요.

이들보다 조금 더 경제력이 낮은 생산직 노동자들, 자영업자들은 대학 보내려고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요. 이런 살맘들은 교육에 정말 관심이 없어요. 지방ㅇ서 교사들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교사들이 부모들을 만나고 싶어 해요. 학생을 공부를 시키고 싶으니까요. 그런데 이 부모들은 "우린 모르겠어요. 선생님이 알아서 해주세요"하고 만다는 거예요.

사실 지금 대학을 보내려고 모든 걸 쏟아붓고, 대학에 엄청난 텐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전문직 대기업 사무직, 조금 큰 규모의 자영업을 하고 있는 중산층이에요. 대학 진학은 한국의 중산층 게임이에요. 이 사람들이 대학을 어떻게든 보내려고 하는 거죠. 이 사람들 만나서 얘기해보면 이들한테는 공포가 있어요. 자기 자식대에서 계급이 재생산되지 않을 것 같은 공포가 있는 거죠.

중산층이 이렇게 대학에 목을 매는 건 자기 계급을 재생산해야 하는데 중산층의 부라는 것이 그것만 물려줘서는 재생산이 안 되고, 여기세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하잔항요. 그게 바로 전문직이거든요. 아파트는 물려줄 수 있어요. ㅡ그런데 그것만 갖고는 안 되잖아요? 지속적으로 부를 창출할 전문적 기술이 필요한 거죠. 그래서 이들이 대학에 대해 갖고 있는 텐션이 엄청나게 크고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거죠.

이들이 그동안 별수를 다 써본 거죠. 유학도 보내 봤다가, 사교육도 엄청나게 해봤다가, 요새는 명상도 시킨다고 하더군요. 마인드 컨트롤해야 한다고. 비용이 점점 증가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감당이 안 되는 밑에서부터 떨어져나가는 거죠. 대학 진학에 대한 텐션은 중산층이 아닌 다른 계층에서는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계산이 너무 빤하니까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중산층의 코어에서는 텐션이 점점 더 강해지죠. 거시적인 구조로 보면 그런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요.


엄 : 가장 합리적 선택이란 이기적 선택인데 그 선택이 이타적이기까지 하다면 좋고, 아니면 조금 섭섭한 거고, 하지만 어쨌든 최소한 그 이기적 선택이 남한테 피해는 끼치면 안 된다, 이 정도 선에서 선택 기준을 생각해본다면, 자녀 교육과 관련해서 제가 볼 때 한국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있는 계층은 대기업 생산직이에요.


하 : 그렇네요. 딱 그렇게 하고 있네요. 몸으로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선택이 가능한 거겠죠. 그런데 그 선택은 중산층 지식인들에게는 자기가 안 가본 세계, 모르는 세계인 거예요. 그렇게 봤을 때 중산층 지식인들이 교육에 목을 매는 건 자기가 제일 잘했던 것이기 때문이죠. 그만큼의 과실을 얻었기 때문에 상층부에서 그 신화를 퍼뜨린 거예요. 공부를 잘해서 성공한 이들이 상층부를 차지해서 과실을 더 가져가는 것에 대해서 뭐랄고 하지 마라, 즉 교육 시스템 안에서 자신들의 독과점을 합리화한 거죠. 그들은 그런 시스템에서 잘 해나갈 수 있는 능력치를 갖고 태어났어요. 그래서 그런 시스템을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과 자영업자들까지 '오 그래야 되는구나'라고 믿게 만든 거죠. 이게 몸으로 잃는 것보다 훨씬 오래 가고 괜찮을 것 같다, 존경까지 받고. 그래서 모두 이 게임에 들어오게 되죠. 그런데 생각보다 판이 작아지면서 내 자식들한테 돌아가는 몫이 없고.

선생님 말씀대로 대기업 생산직들이 딱 보니까 아닌 거죠. 그래서 잽싸게 판을 깬 거예요. 이 살맘들은 이것 말고도 먹고살 길이 있거든요. 더구나 이 방법론이 원래 그들에게는 그다지 와 닿지 않는 방법론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무직 근로자와 전문직인 세칭 중산층은 아는 도둑질이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 판타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마ㅣ 모태 신앙과도 같은 거죠. 아무리 기독교에 진력이 나도 '그래도 나는 신앙인으로서 살아갈 거야' 같은. 그런데 우리 집은 종교가 없었는데 친구 따라 교회 갔다가 10년 다녀보니 교회에 신물이 나요. 그러면 금방 빠져나올 수 있거든요.


하 : 자식의 20년 후를 바라보는 그림을 바꿔야 해요. 자기를 중심으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먼저 자신의 삶의 안전판을 만들어야 해요. 은퇴 후 연금, 건강을 위한 대비 혹은 주거 생활의 안정과 같은 안전판을 만들어가려는 노력을 하고, 거기에 대해서는 자식 때문에 포기하거나 그 안전판을 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게 삶의 우선순위에 올라야 합니다. ....

가소 싶은 게 없으면 "그냥 좀 있어 봐, 그 대신 이리저리 쑤시고 다녀봐"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해요. 쑤시고 다닌다는 게 곧 디투어링이죠. 그게 인생의 낭비는 아니다. 도리어 지금은 그게 필요하다, 그게 공부다, 라는 생각을 가져야 해요.


엄 : 이제는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드는 게 중요한데,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자기 부모처럼 살지 않는 것이거든요.


하 : 신용불량자가 되거나 범죄의 세꺠에 들어서지만 않게끔 하는 최소한의 케어. 정말 간절하게 아이가 원하는 게 있을때 한 번 정도 밀어주는 것. 그게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정도죠. 자기가 원하는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여섯 살 때부터 차곡차곡 줄을 좍 그어놓고 그 길대로 가게 하도록 투자하는 것은 미친 짓이에요. 그러지 말자는 거죠.


하 : 제가 이런 얘기를 강연에서 하면 나오는 특징적인 피드백이 있습니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회 시스템이 변하지 않는 한 결국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은 나 개인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 말은 맞으면서도 현실에 맞지 않는 허황된 얘기로 들린다"라는 것입니다. 사교육 안 시키고 그래서 좋은 대학 못 가고 그래서 취업이 안 되면 사회에서 '듣보잡' 취급받으면서 살 텐데 어떡하느냐는 거죠. 저는 그래서 더욱더 이 부분에 대한 새로운 공감대와 행동을 해낼 개인이 늘어나야 한다고 보는 거예요.

공부에 중독된 사람들이 많은 상태에는 그 어떤 시스템적 변화를 주더라도 결국 또 그 안에서 공부를 중심으로 줄세우기가 만들어질 겁니다. 서울대를 없애고 전국의 국립대학교를 모두 서울대로 바꿔야 한다는 교육 전문가드르의 대책도 저는 조금 당황스럽고, 무엇보다 또다른 판타지 같았어요. 그러면 분명히 그 안에서 다시 줄세우기와 편가르기가 만들어질 겁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대로 공부를 중심으로 한 암묵자가 그대로 작동하고 있는 동안은 백약이 소용이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한 명씩 한 명씩이라도 개인의 선택의 변화가 이어지고, 그 수가 어느 순간 무시할 수 없는 수가 된 다음에는 결국 상식의 전환이라는 거대한 위상 전위를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엄 : 그렇다면 중산층 밑의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면 좋겠어요. 이 학생들도 중독의 폐해를 고스란히 입고 있거든요. 이중 삼중의 고통을 받고 있죠. ...

공부에 목적이 없어요. 정확히 말하면 학생들한테 무슨 공부가 필요한가를 보고 공부를 시키는 게 아니라 이 학생들에게 뭔가를 해야 하는데 해줄 수 있는 게 공부 가르치는 것밖에 없는 거예요.


하 : 완전히 새로운 영역의 공부가 필요해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가 아니라 '뭔가를 알고 싶다'라는 욕구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공부.


엄 : 학교에서 상위 5~10%, 많이 봐야 20%를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은 공부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 좌절이에요. 이 좌절을 통해서 뭘 잃어비리느냐면, 앎에 대한 호기심을 잃어버려요. '아는게 참 재미있는 것이다'라는 걸 잃어버리죠.

앎의 핵심은 모르는 것을 만났을 때 호기심이 발동해야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모르는 것을 만나면 두렵기만 하고 짜증이 나는 거예요. ...

대안학교가 그래서 만들어졌어요. 대안학교가 학생들을 자유럽게 뛰놀게 하자는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앎에 대한 호기심을 회복하자는 것이거든요. 시험 문제를 틀렸다면, 나는 틀린 존재가 아니라 모르는 게 있는 존재인거고, 모르는 것을 발견하면 알고 싶은 욕망이 발동하게끔 해줘야 하는 건데, 그것을 못했던 거죠.


하 : 공부라는 것, 알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 데에는 동기가 필요하거든요. 동기는 크게 세 가지라고 생각해요. 하나는 절박감이에요. '이거 모르면 나 죽어', '어떻게든 알아내야해' 이런 것이죠. 두 번째는 경쟁심이에요. '쟤보다는 나았으면 좋겠어' 하는 욕구. 세 번째는 '그냥 하고 싶어', '알고 싶어' 이런 이상적인 목표가 있는 거예요.


하 : ‘솔부를 잘한다는 것은 뭘가’에 대해서 생각해봤어요. 첫 번째는 핵심, 맥락을 잘 잡아내는 거죠. 둘째는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많은 정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셋째가 진자 공부를 잘하는 것일 텐데, 이치를 깨닫는 것이죠. 큰 흐름 안에서 이게 뭘 의미하고 있고,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 나아가서는 나하고 어떤 관계가 았는가까지 생각하 ㄹ 수 있는 것이게쬬.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공부는 둘째가 90%예요. 성적이 아주 잘 나오는 아이는 첫째 덕목인 맥락을 잘 잡아내서 요령이 좋죠. 정작 중요한 것은 셌째인데 거기에까지 마음이 미칠 여유가 없어요. .. 저는 순서로 볼 때 셋째를 목표로 하면서 첫째를 중심으로 흐름을 잡고, 그리고 둘째는 필요에 의해서 노력하면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야 진짜 공부가 되고 쓸데없는, 독이 되는 공부를 줄일 수 있어요....

저능의 영역이란 낯선 상황에 잘 적응하기 위해 지그 ㅁ이곳이 굴러가는 보이지 않는 이치를 깨달아가는 과정이거든요. 그 이치를 잘 깨달아서 나를 변화시키거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쌓는 것이 핵심이죠. ..

공부 과정의 끝은 사실 지혜를 얻는 거라고 생각해요. ..지혜라는 것을 찾아낼 겨를도 없이 질려버리게 만드는 것이 지금까지의 공부였어요.


하 : 발달이란 기본적으로 ‘나도 저러 ㄴ사람이 되고 싶다’는 동일시의 욕구로부터 시작하거든요. 어찌 보면 그것이 공부의 원형이죠. 따라 하기. 그런 부분에서 짚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공부에 대해 착각하시는 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문화센터나 시민 학교에서 엮는 강좌에 중독되어 있어요. 저는 그게 공부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엄 : 그렇죠. 그건 구경이죠.


하 : 사실은, 혼자서 괜찮은 책 찾아보고 나름대로 궁브를 하다가 진짜 궁금한 게 있으면 그 분야의 고수를 찾아가서 물어보고 그러는 과정이 진짜 공부인데.


엄 :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 걸가요? 공부는 성장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능력이 신장되는 것이건, 인격이 성숙하는 것이건 또는 시민으로서 성장하는 것이건 공부는 성장을 하기 위해 하는 것이죠.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의 공부는 성장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고 있어요. 성장과 아무 상관이 없는 공부를 공부라고 하고 있고 그걸 청소년들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학생들이 “이걸 공부한다고 제가 뭔가가 될 수 있나요?”라고 하는 말을 단지 실용적인 질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 말을 직업을 구하고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데 혹은 살아가는 데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지를 묻는 것을 훨신 넘어서는 적극적인 질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이걸 공부하는것이 자신을 무엇으로 어떻게 성장시키는가’에 대한 질문이죠.

이 문제에 답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가 사람의 성장에 대해 ‘성공’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답도 줄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공부를 통해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 수긍을 하지 못하는 것이죠. 이들을 붙들어놓고 지금 ‘공부’를 시키는 것은 정말 무의미한데도 그저 맹목적으로 공부를 시키고만 있어요. 공부를 하는 자가 아니라 공부를 시키는 자가 공부 말고는 시킬 수 있는게 없다 보니 그저 공부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시키는 자의 ‘공부 중독’이에요.

삶이 성장의 과정이라면 공부는 성장하는 삶을 위한 도구여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공부는 삶을 식민화하는 도구일 뿐이에요. 이런 공부를 그만두자는 것입니다. 대신 공부의 자리를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해요. 당대의 문제를 파악하고 헤쳐나가는 삶의 지혜. 기술을 익히는 과정으로서의 공부 말이에요.청소년들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어른들도 잘 모르고 있어요. 무능력하기는 어른들도 매한가지입니다. 공부라는 맥락에서 보면 어른과 청소년 모두가 처한 ‘동시대성’이겠죠.




대담을 마치며

공부라는 블랙홀에서 탈주하기 위하여 - 하지현

아무리 혁명적이고 과격한 처방이 나온다고 해도 그 안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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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반성문> - 여행은 참교육

지봉환 정한책방 2018  03370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 알랭 보통(Aiain de Botton)


교사 : 아이에게 여행을 장려해야 합니다. 여행은 만남입니다.  여행에서는 자신을 만납니다.세상에 홀려 소홀했던 자신에게 눈길을 돌립니다. 자신에게 귀를 기울입니다. 자신을 보고 자신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타인을 만납니다. 타인에게 눈을 돌리고 귀를 엽니다. 다양한 감정 관념들과 만납니다. 다양한 가치와 삶을 만납니다. 다양한 웃음과 눈물을 만납니다. 

만남은 성장입니다. 보고 들음은 성장 에너지가 됩니다. 삶을 다듬기도 합니다. 생활 속에서 쌓인 갈등, 불안, 분노, 질투, 시기, 욕심 부정적인 감정을 깎고 닦고 바르게 합니다. 긍정정인 에너지를 찾는 일입니다. 만남은 성장을 위한 에너지이고 동시에 삶에 놓인 장애요인을 찾는 일이기도 합니다. 자연 또한 중요한 여행의 동반자입니다. 자연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고 답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기쁨을 주고 슬픔을 다독입니다. 울분을 삭혀주고 눈물을 닦아줍니다. 여행은 삶의 영역을 넓혀줍니다. 아집의 껍질을 깨고 타인을 듣도록 합니다. 이기(利己) 버리고 타인을 보도록 합니다. ‘ 있음을 일러줍니다. 


학생 : 여행과 교육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요?


교사 : 여행이 만남과 성장을 위한 행보라면 교육은 만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만남이 교육의 출발점입니다. 만남 없는 교육은 죽은 교육이에요. 생명력이 없는 교육이지요. 만남으로부터 변화는 시작됩니다. 


학생 : 여행이 좋은 학습법이라는 말씀이군요.


교사 : 그렇습니다. 여행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니까요. 많은 것을 만나고 보고 듣고 깨닫고 느낄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인 몽테뉴는 여행과 같은 움직임을 통해서만 개인은 실천적 지혜를 습득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실제가 아닌 문자화된 세계만을 진열해놓은 교과서 이야기는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라는 겁니다. 여행은 공허한 지껄임이 아닌 진정한 것을 학습할 있는 기회라는 것이지요. 세상은 교과서입니다. 그러므로 여행은 교과서와의 만남입니다. 교과서를 펼치는 일이지요. 세상과의 만남에는 누구로부터의 강요도 없어요. 보고 싶은 , 듣고 싶은 , 만지고 싶은 것으로 얼마든지 자유롭게 선택해서 있습니다. 시간 제약도 없어요. 외울 것도 없지요. 무엇을 보고 들어야 한다는 요구도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한다는 규정도 없습니다. 그냥 경험하는 거지요. 아무 거리낌 없이 느끼면 됩니다. 자유로움이 세상이라는 교과서를 사용하는 법입니다. 


학생 : 여행은 자율학습이네요.


교사 : 그렇지요. 누구의 간섭도 없어요. 눈치 일도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의지만이 자신을 이끄는 힘이 됩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의미를 만들면 됩니다. 여행은 속에서, 교실 안에서 만날 없던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일이에요. 교사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세상은 한계를 지니게 마련입니다. 여행은 교실의 한계를 극복할 있는 좋은 방법이에요. 여행은 생명 없는 교재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입니다. 여행은 결국 배움의 영역을 넓히는 이라고 있어요. 


학생 : 여행은 자체로 교육인 셈이네요.


교사 : 그렇지요. 세상이 교실이에요. 세상 모든 것이 교과서이고요. 그리고 세상이라는 교과서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교육인 거지요. 그러므로 세상과의 만남은 소중한 겁니다. 만남은 눈을 열어주고 마음을 열어주거든요.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것을 마음에 담을 있게 합니다. 그리고 가슴을 열고 세상과 소통하게 합니다. 세상이 베푸는 아름다움에 감격해하고 감사함도 배웁니다. 기쁨에 눈물 짓기도 하고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치유받기도 합니다. 


학생 : 새로운 것과 마주할 때의 느낌은 정말 놀랍고 기쁘고 가슴이 벅차요. 특히 자연이 그런 같아요. 자연 앞에 서면 작아지고 겸손해지고 따뜻해지기도 하고 감정이 정화되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그러한 감정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싶어요.


교사 : 그렇지요. 자연만큼 훌륭한 교과서는 없습니다. 자연은 신이 만든 교과서거든요. 자연을 교과서로 생각한 사상가는 프랑스 계몽 사상가인 루소입니다. 루소는 자연을 훌륭한 교과서요, 좋은 교사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을 자연에 의존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연을 도외시한 인간이 만든 교재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이의 자연적 능력의 성장을 방해하는 일입니다. 교과서는 아이가 걸어야 길을 제시합니다. 자연이라는 교과서는 삶의 이정표인 셈이지요. 교과서를 통해 삶을 꿈꾸고 길을 찾습니다. 그리고 교과서가 제시한 길을 따라 걷습니다. 이것이 교과서로서의 자연이 소중한 이유입니다. 


학생 : 아이가 접하는 교과서는 아이의 자연성을 자극하고, 자각하게 하고, 성숙시킬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교사 : 물론입니다. 아이들은 자연을 호흡하고 세상을 호흡할 있어야 해요. 그럴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이를 교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어른의 생각을 나열해놓은 교과서만 바라보면서 생활하도록 하는 것은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을 만날 있는 기회를 빼앗고, 자연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드는 일입니다. 아이들은 자연의 안에서, 자연의 보살핌 속에서 자연을 호흡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아이의 자연성은 꽃을 피웁니다. 


학생 : 종이로 교과서만 보고, 듣고, 냄새 맡게 해서는 된다는 말씀이군요?


교사 : 맞아요. 그렇게 되면 아이들은 교과서만 기억합니다 교과서가 이들 앞에 펼쳐진 유일한 세상이고 이들이 접한 세상의 전부입니다. 교과서 세상은 세상이 아닙니다. 단지 모조품을 뿐입니다. 꾸며진 세상이고 꾸며진 사회이고 만들어진 인간일 뿐입니다. 어른들이 보고, 듣고, 만나고, 느낀 인간과 자연 그리고 세상을 활자화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어른들의 자연이고, 어른의 세상이고, 어른의 인간일 뿐입니다. 

여기에서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e, 1898~1967) 그린 <이미지의 배반>이라는 작품을 생각해볼 있습니다. 작품은 흔히 있는 파이프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림 아래에는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림 파이프는 파이프가 맞지만 그것은 대상의 재현일 대상 자체일 없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림 파이프는 담배를 넣고 불을 붙이면 연기가 피어오르는 진짜 파이프가 아닌 거지요. 단지 물감으로 그려놓은 파이프 그림에 지나지 않은 겁니다. 그림 파이프는 실체와는 엄연히 다른 겁니다. 아이들이 접하는 교과서 세상도 이와 같이 그려지고 만들어진 세상인 겁니다. 세상을 그린 그림인거지요. 세상 속으로 직접 뛰어들 있는 여건과 환경을 제공해주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학생 : 아이를 자연과 직접 만나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교사 : 그렇지요. 어른이 만난 자연을 아이에게 전하는 것은 아이의 성장 기회를 빼앗는 일입니다. 아이가 직접 자연과 만날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연을 직접 만나 호흡하고 냄새 맡고 있게 해야 해요. 자연의 모습을 닮도록 해야 합니다. 자연은 아이들의 삶의 터전입니다. 자연의 법칙이 교육의 법칙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자연은 아이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펼쳐 나아갈 공간이며, 힘의 원천입니다. 자연 속에서 아이들은 삶의 에너지를 얻어요. 자연 속에서 자신을 찾고 자신을 발전시킵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연은 아이들이 읽고 보고 들어야 () 베푼 교과서거든요.


학생 :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 자연은 부모님 같다는 느낌도 들어요.


교사 : 그래요. 자연은 아이들의 부모이기도 해요. 아이들은 어머니로부터 삶의 에너지를 얻고, 어머니의 보호 아래 성장하고 개성적 존재가 되어가는 것처럼 자연 역시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에너지원이고 성장의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이들이 자연의 품에서 자라도록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연을 떠난 아이들은 부모를 떠난 아이처럼 성장 동력을 잃기 쉽습니다. 보호자 없는 아이가 바르게 성장하기 어렵듯이 자연을 떠난 아이들 역시 바른 성장 가능성이 적습니다. 아이들을 자연과 어울리도록 하는 것은 부모와 함께 생활하돌고 하는 것처럼 중요한 일입니다. 교실은 아이들을 감금해두는 시설이 아니에요. 이제 교실이라는 좁은 공감에서 해방시켜야 합니다. 자유롭게 자연과 만나고 대화할 있도록 해야 해요. 교과서만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은 아이들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입니다.


학생 : 세상과의 만남을 주선해주라는 말씀이군요. 그리고 아이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교실이고, 아이가 보고 듣는 것이면 무엇이든 교과서라는 말씀이기도 하고요.


교사 : 맞아요. 만남은 자극이에요. 특히 새로운 것은 오감을 춤추게 하지요. 생소한 것과의 만남은 설렘이고, 다른 꿈을 꾸게 합니다.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가르침이고 새로운 배움이에요. 이것은 변화를 촉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주어지는지 살펴야 합니다. 참된 여행의 기회가 주어지는지 자문해야 해요. 그들이 꿈꾸고 바라고 만나고 싶은 곳과의 만남을 주선해야 해요.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마음껏 펼칠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교사에게 얽매인 존재가 아닙니다. 아이의 자유를 교사가 베푸는 자비쯤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학생 : 세상은 자신을 통해 자신을 가르치는 셈이네요. 교사는 세상으로부터의 배움과 세상의 가르침을 방해하지 말라는 말씀이고요. 


교사 : 그렇지요. 따라서 아이를 교실에만 머물도록 요구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학교가 아이를 가두어주는 감옥이어서는 됩니다. 교사는 아이들의 입과 귀를 그리고 행동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억압자가 아닙니다. 어른은 아이들이 세상을 마음껏 만날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과의 만남은 세상을 이해하고 깨달을 있는 기회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지닌 무한한 가치에 대한 이해요, 깨달음입니다. 어른은 스스로 아이와 세상과의 만남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18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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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을 읽는 당신에게


교육은 원래 힘들고 어려운 일일까?  4

교육은 새로움을 추구합니다.  6

교육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회를 돌볼 아는 사람을 만드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교육으로 인해 비로소 사람다움을 갖추어 갑니다. 교육으로 모난 부분이 다듬어지고 부족함이 메워집니다. 거친 부분이 부드러워지고 사나운 부분이 온순해집니다. 얇았던 것이 두터워지고 흐릿했던 것이 진해집니다. 사람은 교육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타인의 존재를 지각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인식합니다. 자신만 바라보던 눈이 타인으로 확대되어 세상으로 놃어집니다.  7

교육은 결코 무엇을 위한 도구적 존재를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스튜어트 밀은 교육은 기술자가 아닌 인간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교육은 정의로울 교육이 됩니다. 정의는 교육의 다른 이름입니다.  7


교육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항상 이루어지는 겁니다. , 내가 있는 곳이 학교고 그곳에서 내가 듣고 보는 것이 교육인 거지요. 이때 내가 무엇을 보고 듣느냐하는 것이 나를 변화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모든 환경이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 자신을 자극하고 자신을 가르치고 자신을 변화시키게 되는데 그것이 교육입니다.  17


학교가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학교가 다양한 환경을 접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겁니다. ..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환경의 모습을 갖가지 형태로 제공합니다.

다른 하나는 학교가 환경을 선택하고 활용하는 능력을 길러줍니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킬 수는 없어요...

다른 하나는 학교 자체가 좋은 환경을 제공해준다는 겁니다. ..

그리고 학교는 환경이 변화할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합니다.  19


삶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야 환경에 눈을 뜨게 되거든요. 삶에 관심 없으면 환경에 신경 이유가 없어요. ...좋은 환경은 자신을 새로운 존재로 창조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의미합니다. .. 

좋은 환경이란 먼저, 자신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있는 볼거리, 들을 거리, 만질 거리 체험 요소를 많이 제공해주는 환경입니다. 그리고 번째는 인간적 환경이라고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있는 것은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21


좋은 환경 여부는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 건가요?

판단하는 사람은 자신입니다.  22


환경을 판단하는 기준에 대해... 먼저, 교육적 환경의 여부를 가르는 기준은 타인과의 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하고, 자신의 개성과 느역을 찾아 신장시키고, 지식과 기능 그리고 이치를 깨닫고 익히고,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 것이 가능한가입니다. 번째로 인간적 환경의 여부를 나누는 기준은 인간이 서로를 목적으로 대하고, 존엄한 인격으로 만날 있는 환경인가입니다. 그리고 윤리적 환경 여부를 구분하는 기준은 사람다운 공동체 형성에 기여하고아름다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넓혀주어 사람들의 행복 증진에 기여할 있는 환경인가입니다. ... 

우리는 급격하게 변하는 환경을 냉철하게 관찰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22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를 위해 인간이 갖추어야 조건 가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는 주체성입니다. 자신의 일을 외부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처리할 있는 주인으로서의 당당한 능력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세상을 바꾸고 변화를 주도할 있는 창조적 힘입니다. 이미 만들어진 세상에 머무는 삶이 아닌 새로운 세상을 고민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의지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윤리적 능력입니다. 윤리적 능력은 자신보다 타인을 앞세울 아는 따뜻함을 말합니다.  28





하나 - 아이들의 능력을 자체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사회는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있는 으력만을 능력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을 평가하는 사회적 시선이 학교에까지 침투하여 학생의 능력평가의 기준으로 작용할 아이들은 졸지에 능력 있는 아이와 능력 없는 아이로 나뉘게 됩니다.  42


아이가 지닌 모든 느역을 인정해줄 아이의 능력은 성장합니다. 능력의 성장은 삶의 성장입니다.  43


묻는다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 관심은 애저을 낳고 애정은 변화로 이어집니다. .. 

물음과 교육은 하나의 다른 표현입니다. 물음은 교육이고 교육은 물음이에요.  45


교육은 의문을 품게 만드는 일이에요. 그리고 스스로 답할 있도록 힘으 북돋우는 일입니다.  47


묻지 않을때 사물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물을때 자신은 태어납니다. 물음이 멈추면 자신도 멈춥니다. 물음은 자신을 새롭게 만듭니다. .. 없던 자신이 발견됩니다.  48


물음은 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일입니다. 언제나 물음을 만드는 아이, 씨앗을 뿌리는 아이를 만들어야 합니다.  49


'내일을 위해 오늘은 참아라!'라는 말은 오늘을 즐기려는 아이에게 어른이 흔히 하는 말입니다. 어른들에게 오늘은 없는 날이 같아요.  49


내일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 나쁘다거나 불필요하다고 수는 없지요. 다만 오늘을 몽땅 내일을 위한 날로 치부하여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는 겁니다.  51


믿는 것과 수용하는 것이 학생 자신의 판단에 의한 경우라면 문제 삼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새악은 묻어둔 어른의 생각에 의존해서 믿고 수용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겁니다... 위대하고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사상가와 그의 사상에 대해서 딴지를 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위대하다는 평이 옳아서라기보다 평가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 이미 내려진 평가에 대해 소신 있는 평가를 한다는 것은 많은 비판과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나름의 생각을 피력할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교육이 사고라는 무형의 가치를 키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4-55


어린 아이의 생각을 인정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55


생각은 멈추면 힘을 잃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생각을 멈추지 않도록 도와야 해요.  56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혹은 ' 사람 생각은 이렇다'라는 식으로 제시되는 어른의 판단과 새악은 아이가 생각하고 판단할 참고자료로 활용할 있습니다. '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이런 생각도 가능하겠구나'라는 식이지요.  57


잘못된 생각이나 판단이 죄를 짓는 것은 아니잖아요. 생각도 연습이 필요한 일입니다. 많은 경험이 쌓여야 거칠고 험한 생각들이 다듬어집니다. 그러므로 행여 잘못된 판단일지라도 스스로 느끼고 수정할 있도록 기회를 주고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58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에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눈치를 이유가 없는 거지요. 자신 있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낼 있어야 해요.  60


판단의 기회를 주고 아이의 판단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육입니다... 어른의 판단을 무조건 수용하도록 하는 것은 비굴한 삶을 살아가도록 부추기는 일입니다.  61


독일의 교육자 잘츠만은 교육자는 아이들이 세운 삶의 목표를 이루는 유용한 것들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62


다른 사람에게 같은 내용을 가르치는 것은 아이의 삶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는, 순전히 어른 중심의 교육인 겁니다... 아이의 필요를 살펴야 합니다... 교재 선택은 교육 내용의 선택입니다 교육 내용은 교사들을 위한 것이 아니지요. 전적으로 아이들의 몫이지요. 따라서 아이들의 삶과 관련해서 선택해야 합니다.  63


바제도는 가르치는 양보다 얼마나 유용한가에 관심을 기울인 학자. 그는 생활에 유용한 지식을 질적으로 정선하여 가르칠 것을 권했어요. .. 방대한 양의 지식을 짧은 시간에 가르쳐야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을 바라볼 시간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시간도 없게 돼요.  63-64


지금 순간에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필요를 알고 필요한 지식을 선별하는 능력은 부모로부터 배우지 시작해서 서서히 능력을 쌓아가고, 학교에서도 교사와 학생 필요의 교류를 통해 배움과 가르침의 내용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65


배움이 즐거워야지요... 배워야 하는 지도 모른 책을 펼쳐야 하고, 들어야 하고, 외워야 하는 비극을 끝내야 합니다. .. 삶에 도움 없는 내용을 이상 강요해서는 됩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폭력이에요.  66


아이들의 삶은 그들만의 영역이에요. 누구도 침범할 없습니다.  67


배울 내용의 중요도는 어른이 매기는 것이 아니에요. 아이의 꿈이 정하는 겁니다.  69


다양한 경험은 다양한 능력을 자극해요. 경험이 다양할수록 넓은 능력이 자극받게 됩니다.  75


자극은 보고 듣는 겁니다. 만져보고 맛보는 것이지요.  76


가르치는 자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하나, 경험의 내용과 양을 정해놓고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 특별한 분야의 능력만을 인정하고 능력을 지니도록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 지니고 있는 능력에 따라 아이를 차별하는 것은 아닌가?  77


어른이 판단하고 결정한 길을 아이들에게 무조건 걷도록 요구하는 것은 아이들을 생각 없는 로봇으로 만들겠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79


교육의 역사를 돌아보면 인간을 도구로 만들기 위해 교육을 악용해온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있습니다. 교육에 목적으로서의 인간은 없고 수단으로서의 인간만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리하여 교육은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센 자들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를 만들기 이해 학교를 세우고, 그곳에서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갖가지 위협과 협박과 폭력을 통해 그들의 입맛에 맞는 도구로서의 인간을 만들어왔던 것입니다.  82


삶의 길은 다양하거든요. 어른들은 많은 사람들이 오고간 길을 옳은 길로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다른 이들이 수없이 걸어간 , 포기, 작은 하나 없는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도 걸을 있는 길만을 올바른 길로 생각하고 그길을 걷도록 유도하는 거지요. 그것이 어른이 아이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길은 개척하는 것입니다.  85


없는 능력을 억지로 만드는 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폭력입니다.  86


교과성적, 논리력, 설득력, 창의력, 문제해결 능력, 인성, 잠재력, 넓은 지식과 교양, 적극성, 공동체 의식, 협동심, 리더십, 자기 주도력, 성실성 등은 상급학교 진학 자격 조건 일부입니다. 학교가 원하는 아이들의 조건인 거지요.... 이처럼 완벽에 가까운 조건을 갖춘 아이들에게 굳이 학교가 필요할까요?  89-90


가진 것이 적고 약하고 볼일 없다고 외면하는 것은 가르치는 자의 도리가 아니지요. 오히려 그들에게 손을 뻗치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교육자의 도리입니다. 배움을 요청하는 아이의 요청을 외면해서는 됩니다. 배움의 요청을 거부하는 것은 배움의 기회를 빼앗는 겁니다.  91


배움의 요구는 권리예요... 배움의 기회는 모든 아이들에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91


교육은 어른들이 자신의 의지나 생각을 아이를 통해 표출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92


아이의 성장을 돕기 위한 교육으로 권하고 싶은 교육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요?

가장 좋은 것은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아이들 성장을 아이들에게 맡기라는 겁니다.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일 있겠지만 어른의 역할을 최소화할 아이는 성장합니다

그러면 어른이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요?

무엇보다 아이의 생각이나 행위 하나하나를 격려하고 지지하는 것이 어른이 해야 일입니다... 교육을 어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회로 이용할 교육 정책은 복잡해집니다.  94


아이들은 어른의 욕심이 바뀔 때마다 휘청댑니다...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무엇을 위한 정책인지, 그리고 결과는 어떻게 될지에 대해 다각도에서 정직하게 평가해 보아야 합니다... 어른은 아이를 위한 존재임을 잊어서는 됩니다... 어른은 아이의 성장을 도울때 비로소 어른이 됩니다.  97


어른은 자신이 지닌 지식이 다른 어떤 지식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다른 분야의 지식보다 자신이 속한 분야의 지식을 먼저 확산시켜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작용하는 모양이에요.  100


'먹이는 것과 먹는 혹은

만들어져 있는 것과 자신이 만드는

사람은

입맛에 맞춰 음식을 만들어 먹지만 

가축은 

싫든 좋든 이미 배합된 재료의 음식만을 

먹어야 한다.

....

재료를 넣고 수도 

젓가락을 수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도 없이

맨손으로 덥석 물어야 하는

음식의 독재'

오세영 시인의 <햄버거를 먹으며>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마음대로 선택할 없이 주어진 대로 무조건 먹어야 하는 상황을 독재라고 말합니다. 어른이 제시한 지식을 선택할 없다면, 그래서 무조건 익혀야 하는 것이라면 또한 '교육 독재' 있습니다. ... 자신이 살아갈 삶의 방식에 필요한 지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식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는 거지요.  101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어렵고 힘들더라도 배워야 이유가 충분합니다. .. 불필요한 지식임에도 필요를 가장해 강요한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102


목재의 쓸모는 나무의 성질이 정하는 겁니다. 목수가 임의로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수는 나무의 성질을 파악하여 성질에 맞는 쓸모를 찾는 겁니다.  106


목수는 나무의 성질을 꿰뚫어볼 있는 안목이 필요.  106


어른의 욕심은 아이의 특성을 나눕니다. 쓸모 있는 특성과 쓸모없는 특성으로 말입니다.  108


배움은 부족함을 깨닫는 거예요. 그리고 채우는 거지요. 결핍된 부분을 보완하는 것이 새로운 존재가 되는 일입니다.  110


자신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있는 배움의 욕구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 누구든 새로운 자신을 원하거든요.  111


배움은 타협이에요. 일방적 강요가 아닙니다. 배우는 자의 의지의 작용인 거지요. 교육은 무엇인가를 익히도록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세계에 관심ㅇ을 기울일 잇도록 시야를 넓혀주는 일이에요... 삶의 방식은 간섭의 대상이 아닙니다. 강요의 문제는 더더욱 아닌 거지요. 교육은 삶의 방식일 뿐이에요.  112


교육을 꺼리는 것은 교육의 필요성을 몰라서입니다. ... 교육을 접한 적이 없기에 교육의 으미를 모르고 교육의 필요를 모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교육의 필요는 교육이 가르쳐주는 거지요. 배움의 필요는 배움이 가르쳐줍니다.  112-113


교육은 가르치고 기르는 일입니다.... 사물들을 통해 나를 깨닫고 인간을 알고 세상을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사물들에 대한 깨달음을 강조한 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종교 개혁자이자 교육 사상가인 코메니우스 입니다. 그는 사물을 깨닫게 하는 순서도 정해두었습니다. 그는 사물을 개닫는 순서를 이목구비(耳目口鼻) 중 눈부터 시작할 것을 권합니다. 들려주기 전에 보여주라는 것이지요. 즉, 코메니우스의 교육은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13-114


아이에게 직접 사물을 보여주고 대화하게 하라는 겁니다. 직접 보고 판단하게 하고 느끼게 하라는 거지요. 그 과정에서 사물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자신과 세상을 배우는 기회가 주어지는 거라는 겁니다. 사물에 대한 가르침을 사물로부터 직접 받으라는 거예요. 어른을 통해 배우는 것은 사물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어른의 생각과 느낌을 배우는 것이 될 테니까요. 어른은 다만 사물과의 만남을 주선하면 되는 겁니다.  116




둘 - 명예와 자존심을 존중하겠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하고, 저것은 저렇게 하라'라는 식의 지시와 명령이 그득한 교실에서는 아이들의 당당함은 숨 쉴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늘 불안한 가운데서 생활하게 되지요. 아이들의 눈은 불안을 안은 채 부모나 교사의 입에 집중됩니다.  121


어른의 자리를 옮겨야 해요. 아이의 앞에서 뒤로 가야 합니다.  123


어른은 단지 아이의 요구를 듣고 지원하는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른은 지휘자가 아니라 지원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124


명예를 존중하는 것은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

명예는 존엄함에 대한 인정입니다. 아이가 지니고 잇는 모든 것, 즉 아이의 흥미와 능력, 가치관, 사상, 견해 등 그들의 모든 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해주는 겁니다.  125


인정받는 아이는 스스로를 더욱 나은 모습으로 만들려는 의지를 갖게 됩니다.  126


당당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비굴함이 자라게 마련이에요. 그리고 눈치를 보게 합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포장해 아이 앞에 던져놓은 어른의 생각은 없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127


체벌을 사용하는 것은 교육자에게 결함이 잇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133


공론도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주장은 비교육적일 아니라,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비인간적인 일이에요.  138


말은 듣는 이를 위한 겁니다. .. 말하는 이의 입장만을 내세울 말은 가치를 잃게 됩니다.  140


이것은 이렇게 하고 저것은 저렇게 해라가 아니고, 이런 일은 이렇게 돕고 저런 일은 저렇게 돕겠다는 선언이어야 합니다. .. 네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도록 이런 혹은 저런 도움을 주겠노라는 약속이 담겨야 합니다.  141


언론인이며 소설가인 이병주가 그의 소설 <행복어 사전>에서 행복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구호아래, 전체를 노예로 만들고, 노예들에게 주인이라는 명패만 달아주는 사술(詐術 속일사 재주술) 이야기했듯, 학교에서 아이들의 행복을 보장한다는 구호 아래 아이를 노예로 만들고 못하는 아이로 만들고 손발을 묶어두는 교육을 한다면 노예에게 주인이라는 명패만 달아주는 꼴이 되는 겁니다.  142


루소가 생각하는 교육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인위적 힘을 최소화시킬 것을 권합니다. 인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것이 가장 바람직한 교육이라는 의미입니다. 아이들의 자연성이 자연스럽게 성장할 있도록 돕는 것이 최선의 교육이라는 것이지요... 

루소의 입장에서 좋은 교사는 아이들의 자연적 능력이 성장하는 방해되는 요소를 제거하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145


관찰하는 일부터 출발합니다.  146


교육은 개성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개성을 존중하는 것으로부터 교육은 시작됩니다... 중국 고대 도가 사상가인 장자는 "물오리는 비록 다리가 짧지만 길게 이어주면 걱정하게 것이고, 학의 다리는 비록 길지만 그것을 짧게 잘라주면 슬퍼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개성을 해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개성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47


개성 존중과 관련해서 생각할 있는 교육은 소극 교육입니다. 소극 교육은 아이들의 보호를 우선하는 교육이에요. 어른들의 말이나 기교 그리고 힘이 소극적으로 작용하는 교육을 말합니다. 어른이 적극적으로 다가서지 않는 것은 어른이나 어른의 힘으로 형성된 사회는 악하고, 그릇된 정신이 만연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147-148


아이의 삶을 인정하고 허용한다면 어른이 요구할 것이 그다지 많지 않겠지요.  153


개성을 중시하는 교육을 하려면 개성을 알아야 텐데 어떻게 있을까요?

어려운 과제입니다. 중요한 아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소리에, 걸음걸이와 손놈림에, 행동 하나하나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해요. 개성의 발견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관심을 기울이려면 만나야 합니다. 자주 만나 이야기해야 해요. 아이들의 이야기에 기울여 그들의 생각을 들어야 합니다. .. 세밀히 살펴야 해요. 기쁨과 슬픔까지 함께해야 합니다. 함께 웃고 울어야 그들의 개성과 만날 있습니다

개성 발견을 위한 다른 노력으로 세상과의 접촉을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세상과 직접 만날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다양한 것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직접 체험할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오랜 시간이 소요됩니다. 지속적인 관심과 끈질긴 노력만이 개성을 만날 있는 길입니다. 많은 정성이 필요한 일입니다. 오랜 시간 아이와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55-156


간섭 그리고 강제는 마음의 문을 닫게 하는 주문이에요.  159


아무리 많은 지원과 훌륭한 환경을 조성해준다해도 자유로운 교육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성장과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160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사상가인 듀이를 포함한 진보주의자들의 생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아이가 필요한 것을 아이 스스로 계획하고, 조직하고, 평가하게 하는 아이의 자발적 활동 내지 자율 학습을 교육 방법의 기본 원리로 채택합니다. 핛브은 강요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입니다.  161


노력 없는 결실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간섭을 배제하는 일입니다. 간섭 배제는 교육적 환경조성 작업 1순위예요. 간섭은 자연성을 움츠리게 하거든요. 뿐만 아니라 간섭은 시야를 좁게 만들고 세상을 보는 눈을 제한합니다.  163


어른들의 입맛에 길들이는 , 그건 이미 교육이 아닙니다. 아이를 어른의 욕구를 대신하는 욕구의 대리인을 만드는 일에 불과한 겁니다. 어른은 아이들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164


교육 과정의 획일화는 교육을 가로막는 가장 장애예요. 획일적 교육은 마치 고추, , 배추, 시금치, 토마토 다양한 농작물을 같은 방식으로 재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같은 시기에 심고, 같은 시기에 같은 거름을 주고, 같은 약품을 뿌리고, 같은 시기에 거두기까지 한다면 그것은 효과적이지 못할 아니라 오히려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일입니다.  166-167


선택하지 않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예요. 아이의 동의 절차는 애당초 생각지도 않잖아요. 학교 교육은 대부분 그냥 맡기는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171


잘못된 알면서도 방치하는 것은 교육의 포기고 아이들을 포기하는 겁니다.  173


교재는 많은 경우 배우는 내용이나 방법을 결정하고 교육의 결과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교재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175


베이컨은 교재에 특별히 경험을 담을 것을 요구합니다. 교재는 사물을 관찰하고 실험하고 평가하고 기록한 사물에 대한 경험의 산물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 어른의 경험을 정답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경험이 전통이나 권위자의 권위의 산물이어서는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교재는 자연이 녹아 있고 다양한 사람들의 사회적 경험이 농축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178






------ 여행은 참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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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 마라."

"... 해라."

금하는 것도 필요하다. 무엇인가 요구해야 필요도 분명 있다. 모든 욕구를 허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금해야 , 그리고 싫어도 해야 일이 분명 있다. 그러나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유는 합리적이고, 인간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교육적이어야 한다.

이유가 없거나 비합리적인 요구는 학대입니다.  189


생각을 제한하는 것은 생각이 자랄 기회를 빼앗는 . 아이의 생각은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에너지입니다. .. 생각없는 아이는 성장을 멈추게 도지요. 그리고 아이의 생각이 멈춘 자리에는 어른의 생각이 자리하게 마련입니다... 책임 있는 주체로서의 자리를 잃고 말해주지 않으면 알아서 없는 자기 삶의 () 되는 겁니다.  190


어른들은 아이의 생각을 인정해주고 각자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을 허용해야 합니다.  191


시끄러움 속에서 아이는 영글어 갑니다. 봄이 조용하면 가을에 거두어들일 것이없어요. 봄은 시끄러워야 해요. 바빠야지요. 봄이 되면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잖아요. 조용했던 겨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됩니다. 나무의 색깔과 향이 달라지고요. 벌을 유혹하고 나비를 끌어들입니다. 성장을 위해 감당해야 당연한 수고입니다. 그리고 주변의 자연은 나무 변화를 수용하고 허용합니다 누구도 무엇도 시비를 걸지 않지요. 행여 변화를 두려워하여 색깔을 숨기고 향을 감춘다면 성장은 더뎌집니다. 결국 생존이 어려워질 겁니다. 새들도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에 열심이지요. 독특한 소리로 시선을 낄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둥지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하고요. 이는 짝을 찾고 종족을 번식하기 위한 부산한 노력입니다. 다른 수컷보다 마음을 표현하고 자신을 드러내야 마음에 드는 암컷의 마음을 움직일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러 ㅁ모든 생물들은 자신의 특성을 아낌없이 세상에 드러냅니다, 그들이 풍기는 향과 색깔은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들의 생존은 가능하지 않아요. 자신을 세상이 드러낼 그들은 비로소 존재하게 됩니다. 자신을 표현하지 않으면 존재하되 존재하지 앟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192-193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은 표현의 경험을 통해 형성됩니다. 표현의 내용이나 방식이 무엇이든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말아야 해요. 금할 것이 아니라 허용해야 합니다. 어떤 방식이든 아이가 표현할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 무엇이든 자신의 생각을 삶을 통해 드러낼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해요. 그리고 격려와 칭찬을 해주어야 합니다. 아이가 자신을 표현할 때는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허투루 생각하거나 넘어가서는 됩니다. 작은 일까지도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여주어야 합니다.  193-194


아이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어른은 아이들을 어른 생각대로 이끄는 것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아이의 능력을 인정하는 어른이라면 아이의 생각과 가치관, 삶의 다양한 모습을 격려하고 지지할 겁니다... 아이의 삶이지만 삶을 위한 에너지는 어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까요.  207


아이가 세상과 접촉하는 통로는 아이 자신이어야 해요. 아이가 아닌 어른을 통해 세상으로 나오고 어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어른의 입으로 세상을 이야기하면 아이의 삶은 어디에 있나요?  209


서로의 생각과 삶의 태도를 허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아이는 어른의 존재를 인정하고 어른은 아이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210





- 세상의 주인공은 너야


교사는 규정된 교육을 받고 제도적 검증 절차를 밟아 국가로부터 임명됩니다... 교사는 아이에게 존경을 받을 비로소 교사로서 자격을 갖게 됩니다.  219


역사 스승 중에는 그리스 최대의 철학자로, 백과(百科) 시조로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습니다. 그는 최고의 스승이었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걸었고, 학생들과 이야기하기를 즐겼습니다. 아이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었습니다. 학생 위에 서지도 않았고, 그들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지도 않았습니다. 통제하거나 억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하지도 않았고요. 오로지 학생들의 필요와 요구에 순종했고,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그들과 함께 웃었습니다. 그리고 식사도 함께했습니다.  223-224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이 무엇이고 누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교육에 대한 철학이 분명하면, 결코 억압적일 필요도 강요할 이유도 엄하게 대하고 아이 위에 군림할 이유도 없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224


아이가 따라야 삶의 규범을 제정해놓고 따르도록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발짝 비켜서서 아이가 자신의 시선으로 세사을 바라보고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226


아이의 삶은 지켜봄의 대상일 뿐입니다. 간섭하는 것은 삶을 훼방 놓는 일이에요.  227


교육은 자기 변화를 추구해요. 자리에 머무르는 삶을 거부합니다.  236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은 삶에 의미와 가치를 쌓아가는 일이에요. 자신을 새롭게 하려는 노력 없이 의미 있는 변화를 모색하기는 어렵습니다.  237


교육은 어른의 의무입니다... 교육은 아이들의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고 새로운 자신과 만날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239


안전을 추구하는 곳에서는 지적 발전이 이루어지기 어렵기에 위험하게 살라고 조언한 니체의 말처럼 위험함과 두려움은 지체(遲滯 늦을지 막힐체) 딛고 일어서 발전적 삶을 위해 거쳐야 의식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 아이들이 나아갈 세계는 아무도 모르는 세계입니다.  241-242


세계는 보는 이의 것입니다. 듣는 이가 주인이에요.  243


삶을 펼치는 다른 사람의 삶을 참고하는 것은 있을 있습니다. 그러나 통째로 베끼는 삶을 경계하는 겁니다.  245


어른들은 아이들 가슴에 다른 누군가를 심어놓는 버릇이 있습니다. 어른이 바라는 이상적 인간이지요.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가슴에 품고 살게 되는 겁니다.  247-248


어른은 아이의 삶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바람대로 아이의 뜻대로 아이의 욕망대로 살아가도록 아이의 뜻과 욕망을 인정하고 허용해야 해요. 아이가 꿈꾸고 아이가 펼치는 삶이, 윤리를 해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휏손하지 않는 어떤 형태의 삶이든 인정해야 하는 겁니다.  248


아이가 누군가를 닮아갈수록 아이의 정체성은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교육은 정체성을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일이에요. .. 아이의 삶은 아이의 몫입니다. 누가 대신할 수도 대신 해서도 되는 아이의 고유 영역입니다. 삶은 오직 자신이 만들어가는 자신의 작품이에요. 그들이 살아가는 삶과 그들이 살아갈 사회에 대해 어른이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249


영국의 교육자인 알렉산더 닐은 아이의 자유를 말합니다. 닐에게 있어 아이는 자유로운 존재이고, 자유로운 존재여야 합니다. 물론 방종과는 다릅니다. 상대를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 하에서 주어지는 자유거든요.  250


아이들도 어리다는 이유로 교사들을 괴롭히거나 귀찮게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이의 자유뿐 아니라 어른의 자유 또한 중요하거든요. .. 교사와 아이 혹은 어른과 아이는 서로의 자유를 존중해야 합니다. ...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기의 생각을 펼치는 것이 닐이 말하는 자유입니다.  251-252


자유주의 교육 사상가인 엘렌 케이는 아이들의 해방을 이야기합니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부모요, 교사요, 가정이요, 사회입니다.  256


교육은 자신을 옥죄는 일체의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에게 자신의 의지를 심고 성장시키는 일입니다. 교육은 해방운동인 셈입니다.  258


어른이 있어야 곳은 아이의 뒤입니다.  261


교사의 가르침은 적을수록 좋은 거예요. 가르침이 많으면 많을수록 아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많은 가르침은 아이들의 자연성 성장을 가로막고 자연적인 힘을 약화시킵니다. 교사가 활동 범위를 넓히면 넓힐수록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이끌어가야 아이들의 활동의 폭은 줄고 아이의 역시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262-263


'교육의 비결은 교육하지 않는 있다' 엘렌 케이의 가르침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이 강압적이고 억압적이지는 않는지, 억지를 부리고 강제가 횡행하지는 않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264-265


쓸모는 관심으로부터 생겨납니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이 있을까요? 쓸모는 쓸모를 찾으려는 노력으로 생겨납니다. 아이들의 쓸모는 아이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찾아집니다. 어른은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쓸모를 발견하고 쓸모를 실현할 있는 여건을 제공해야 합니다.  265


교육의 전제는 '쓸모없는 능력은 없다'라는 겁니다.  269


어른은 말로 미끼를 던지고, 시선으로 겁박하면서 아이를 높이 그리고 빨리 뛰게 재촉합니다.

어른의 미끼는 무언가?

아이의 미래 모습이지요.  273


아이의 시간을 아이에게 돌려주어야 해요. 자유롭게 사용할 있는 시간을 아이에게 돌려주어야 해요. 자유롭게 사용할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아이는 행복합니다. 그들 마음대로 활용할 있는 시간이 필요해요. 시간은 순전히 아이만의 시간인 겁니다. ...

매일, 매주 아이들이 스스로 꾸미고, 만들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274


에라스무스의 사상을 토대로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선량한 행위 양식에 익숙하게 하는 ', '경건한 마음을 깊게 기르는 ', 이것이 에라스무스가 제시하는 교육의 목적 일부입니다.  279


에라스무스의 교육도 승리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겨룸의 대상이 달라요. 에라스무스는 자신과의 겨룸에서 이기고 승리를 쟁취할 있기를 원합니다. 자만심이나 교만한 마음을, 이기적이고 쓸데없는 욕심을, 탐심과 탐욕스러움을 극복할 있는 경건한 마음을 기를 있도록 노력하라는 거지요. 개개인이 노력해야 하고 그것을 돕는 것이 교육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 교육은 겸손하고 서로 조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서로 정중하게 대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라는 겁니다. 말이나 태도도 위엄이 있고, 정중해야 하고, 점잖고 엄숙해야 한다는 것이 에라스무스의 생각입니다.  283-284


가정환경은 교육환경이기도 겁니다. 인간은 환경적 존재예요. 인간은 환경에 대한 의존도가 높습니다. 환경에 의해 길러진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지요.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교육은 시작되는 겁니다... 환경의 중요도를 평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같은 환경이라도 사람에 따라 영향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 '자녀의 인격과 지성을 발달시키기 위하여 적절한 환경을 준비시키는 것은 시노가 사회에 대한 부모의 빚이다.'라는 말은 에라스무스의 생각입니다.  285


함부로, 아무나 부모가 없는 겁니다. 부모는 자체가 교과서로서의 기능을 해요. 부모의 삶은 자체로 아이의 본보기가 됩니다.  286


아이가 필요로 부모는 비로소 부모가 됩니다. 아이가 있으니 부모이고 아이를 낳았으니 부모가 아니라, 아이가 부모로서의 역할을 부여하고 부모로 인정하고 허용할 비로소 부모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필요와 요구에 맞는 역할을 하고 아이의 기대에 부응할 부모로서의 자격은 계속 유지될 있습니다. 이처럼 부모는 자녀로부터 자격이 주어집니다.  288


부모 교육이 필요해요. .. 평생 계속되어야 해요. 아이의 성장에 따라 부모의 역할도 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 변한느 아이의 요구와 필요에 맞는 맞춤식 부모 교육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289


부모는 행복해야 합니다. 기쁘고 즐거운 생활은 부모의 의무예요. 그것이 아이들의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290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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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릴 때부터 정말이지 자주 참 행운아다, 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가운데서 사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저더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 쪽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 16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란 것이 알 수가 없어졌고, 저 혼자 별난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웃 사람하고 거의 대화를 못 나눕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입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7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無)야. 바람이야. 텅 비었어. 그런 생각만이 강해져서 저는 익살로 가족을 웃겼고, 또 가족보다 더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한 머슴이랑 하녀들한테까지도 필사적으로 익살 서비스를 했던 것입니다. 19


제 본성은 장난꾸러기 같은 것하고는 도대체가 정반대의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미 저는 하녀와 머슴한테서 서글픈 일을 배웠고 순결을 잃었습니다....만일 제가 진실을 말하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었다면 당당하게 그들의 범죄를 아버지 어머니한테 일러바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 어머니조차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 호소한다. 저는 그런 수단에는 조금도 기대를 걸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한테 호소해도, 어머니한테 호소해도, 순경한테 호소해도, 정부에 호소해도 결국은 처세술에 능한 사람들의 논리에 져버리는 게 고작 아닐까. 25


태어나서 처음 타향에 나온 셈입니다만 저한테는 그 타향 쪽이 제가 태어난 고향보다도 훨씬 마음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중학교 입학때) 30


“나도 이런 도깨비 그림을 그리고 싶어.”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기를 바라는 심리. 신경이 날카로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더 강하게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다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익살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다케이치가 말한 것처럼 과감하게 ‘도깨비 그림’을 그려낸 것입니다. 여기 장래 나의 동료가 있다고 저는 눈물이 날 정도로 흥분하여 “나도 그릴 거야. 도깨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라고, 왜 그랬는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다케이치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40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것을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추악한 것에 구토를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희열에 잠겼던 것입니다. 즉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원초적인 비법... 41


저는 이윽고 화방에서 어떤 미술 학도로부터 술과 담배와 창녀와 전당포와 좌익 사상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호리키 마사오). 44

술, 담배, 창녀, 그런 것들이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상당히 괜찮은 수단이라는 사실을 저도 이윽고 알게 되었습니다. 47


여자 수행은 창녀한테서 쌓는 것이 제일 엄격하고 효과도 있다고 하던데, 이미 저한테는 ‘여자를 잘 다루는 도사’ 냄새가 배어버려서... 48


뭔가 여자들로 하여금 꿈을 꾸게 만드는 분위기가 저의 어딘가에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은, 이건 여복(女福) 자랑이니 뭐니 하는 그런 바보 같은 농담이 아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49


심부름을 시킨다는 것은 결코 여자를 실망시키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여자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 또한 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57


백치 창녀들 품 안에서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던 느낌하고는 또 완전히 다르게 이 사기범의 아내하고 보낸 하룻밤은 저 한테는 행복하고 해방된 밤이었습니다...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쓰네코) 62


어차피 들킬 게 뻔한데도 솔직하게 말하기가 무서워서 반드시 거기에 뭔가 꼬리를 다는 것이 저의 서글픈 버릇의 하나인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며 멸시하는 성격과 비슷하지만 저는 무슨 득이라도 보려고 그런 꼬리를 단 적은 거의 없습니다. 81


아무하고도 교제가 없다. 아무 데도 찾아갈 곳이 없다. 82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예전보다도 다소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즈코의 말을 빌리자면 저는 조금 멋대로 굴게 되었고 쭈뼛쭈뼛 겁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93


그리하여 그 다음 날도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어제와 똑같은 관례를 따르면 된다.

즉 거칠고 큰 기쁨을 피하기만 한다면,

자연히 큰 슬픔 또한 찾아오지 않는다.

앞길을 막는 방해꾼 돌을

두꺼비는 돌아서 지나간다.

- 샤를 크로 Guy Chales Cros.

(프랑스 시인. 현실의 고뇌를 섬세한 감수성으로 노래. 저서로 <소리와 침묵>등.). 95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의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 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大洋)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라며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의 환영에 겁먹는 데서 다소 해방되어 예전만큼 이것저것 한도끝도 없이 신경 쓰는 일은 그만두고, 말하자면 필요에 따라 얼마간은 뻔뻔하게 행동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97


저는 점차 세상을 조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이라는 곳이 그렇게 무서운 곳은 아니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여태까지 저의 공포란, 봄바람에는 백일해를 일으키는 세균이 몇십만 마리, 목욕탕에는 눈을 멀게 하는 세균이 몇시만 마리, ... 등의 소위 ‘과학적 미신’에 겁먹는 것이나 다름없는 얘기였던 것입니다. 98


‘조시 이키타’(‘정사(情死, 사랑하는 남녀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함께 자살함), 살았다’ 라는 뜻). 100



<루바이야트> (페르시아의 시인 오마르 하이얌(1048~1131)의 4행시 시집으로 술과 미녀와 장미를 칭송한 감미롭고 우수에 찬 시들로 이루어져 있음.)

‘쓸데없는 기도 따위 그만두라니까

눈물 흘리게 만드는 것 따위 벗어던져 버려

자! 한잔하자고

좋은 일만 떠올리고

쓸데없이 신경 쓰기 따위는 잊어버려

불안과 공포 따위로 사람을 겁주는 놈들은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죄가 두려워

죽은 자의 복수에 대비하려고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계략을 꾸미지

불러라, 술 넘치니 내 가슴도 기쁨으로 충만하고

오늘 아침 깨어나니 황량하기만 하네

기이하다 하룻밤 사이에

달라진 이 기분이라니

뒤탈 따위 생각하는 건 그만둬

멀리서 울리는 북소리처럼

왠지 그 녀석은 불안해

방귀 뀐 것까지 일일이 죄로 친다면 못 살지

정의가 인생의 지침이라고?

그렇다면 피로 물든 전쟁터에

암살자의 칼끝에

어떤 정의가 깃들어 있다는 건가?

어디에 지도의 원리 있는가?

무슨 예지의 빛 있는가?

아름답고도 끔찍한 것은 이 세상이니

연약한 사람의 자식은 짊어질 수 없을 만큼의 짐을 짊어지고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정욕의 씨가 심어진 탓에

선이다 악이다 죄다 벌이다 하며 저주받을 뿐

어쩌지도 못하고 그저 갈팡질팡할 뿐

눌러 꺾을 힘도 의지도 점지받지 못한 탓에

어디를 어떻게 싸다니고 있었던 게야

뭐? 비판, 검토, 재인식?

흥! 헛된 꿈을, 있지도 않은 환영을

에헷, 술을 안 마셨으니 모두 헛된 생각이라고

어때, 이 한도 끝도 없는 하늘을 보렴

그 가운데 콕 떠 있는 점이라고

이 지구가 뭣 때문에 자전하는지 알게 뭐야

자전 공전 반전도 마음대로라고

모든 곳에서 지고한 힘을 느끼고

모든 나라 모든 민족 속에서

동일한 인간성을 발견하는

나는 이단자라나 봐

모두 성경을 잘못 읽고 있는 거라고

아니면 상식도 지혜도 없는 거라고

살아 있는 육신의 기쁨을 금하고 술을 못 먹게 하고

됐어 무스타파, 나 그런 것 끔찍이 싫어해’ 101-103



여성 명사, 중성 명사 등의 구별이 있는데 그렇다면 희극 명사, 비극 명사의 구별도 있어야 마땅하다. 109


반의어 맞히기였습니다. 검정의 반의어는 하양. 그러나 하양의 반의어는 빨강. 빨강의 반의어는 검정. ... 110


“자네는 죄라는 것에 전혀 흥미가 없는 것 같군.”

“그야 그렇지. 너 같은 죄인이 아니니까. 나는 난봉은 즐겨도 여자를 죽게 하거나 여자한테서 돈을 우려내거나 하지는 않거든.”

죽인 게 아니야. 우려낸 게 아니야, 라고 마음속 어딘가에서 희미한 그러나 필사적인 항변의 소리가 끓어올라 왔습니다. 그러나 아니 내가 나쁜 거야, 라고 금방 다시 고쳐 생각해 버리는 이 버릇. 저는 아무리 해도 정면으로 맞서서 당당하게 토론을 하거나 하질 못합니다. 113-114


신뢰는 죄인가요? 117


불행한 사람은 남의 불행에도 민감한 법이니까, ... 그 부인하고 얼굴을 마주 보고 서 있는 사이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부인의 큰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넘쳐 흘렀습니다. 124


다정한 미소가 고맙고 기뻐서 저도 모르게 얼굴을 돌리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 다정한 미소 하나에 저는 완전한 인생의 패배자가 되어 매장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129


제 불행은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130


정신 병원.. 광인, 폐인이라는 낙인.

인간 실격. 131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134




작품 해설


“인간이 아닌” 존재로서의 자기 인식 178


“전쟁에 졌기 때문에 추락하는 게 아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추락하는 것이고, 살아 있기 때문에 추락하는 것이다... 인간은 추락할 수 있는 데까지 추락해야 한다. 그리고 일본도 인간과 함께 떨어져야 한다. 떨어질 데까지 떨어져서 자기 자신을 찾아내고 구원해야 한다. 정치에 의한 구원 따위는 피상적인, 웃기는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사카구치 안고, <타락론>, 1946). 183


현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절망이 요구되는 격변기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은 가치관의 혼란, 세대간의 갈등 증폭,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들 간의 대립 구조 심화 등으로 어떤 해법을 모색해야 할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게 한다. 이런 때일수록 인간이기 때문에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나약함, 불신감, 절망감에 목숨을 걸고 천착하고자 한 다자이 오사무의 작가적 자세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자이의 절망이 그대로 해법이 될 수는 없다고 해도 처절한 자기반성과 책임 의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같은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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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 ; 깊이 생각하기


사색은 주관적 깨달음이다 - 아무리 그 수가 많더라도 제대로 정리해놓지 않으면 장서의 효용가치는 기대할 수 없다. 반대로 그 수는 적더라도 완벽하게 정리해놓은 장서는 많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지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많은 지시을 섭렵해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면 그 가치는 불분명해지고, 양적으로는 조금 부족해 보여도 자신의 주관적인 이성을 통해 여러번 고찰한 결과라면 매우 소중한 지적 자신이 될 수 있다.

습득을 통해 얻어진 진리는 다른 여러 가지 지식과 결합시켜 비교할 필요가 있으며, 이 같은 절차를 거쳐야만 비로소 완전한 의미에서 자신의 것이 된다. 그리고 완전하게 내 것이된 지식을 원하는 사상에 맞게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사상은 주관적인 논리와 스스로 터득한 지식을 기초로 세워지는 건축물이다. 알기 위해서는 물론 배워야 한다. 그러나 안다는 것과 여러 조건을 통해 스스로 깨달은 것은 엄연히 다르다. 앎은 깨닫기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와 학습은 객관적인 앎이다. 그리고 독서와 학습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사색은 주관적인 깨달음이다.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고, 누구나 공부할 수 있지만, 누구나 이를 통해 사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색은 바람이 불면 더욱 거세지는 불길처럼 외부 조건에 의해 조성된다. 이 조건은 객관적인 형태와 주관적인 형태로 나뉘는데, 주관적인 조건은 개인적인 능력, 즉 타고난 두뇌를 뜻한다. 반면에 객관적인 조건은 사색의 호흡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공기처럼 인체의 호흡에 필요한 여러 물질들, 즉 학습이라든가 독서, 외국어 구사 능력 등이다. 11-12


사색적인 두뇌와 독서적인 두뇌 - 인간의 정신은 외부로부터 강압적으로 주입되는 강요에 쉽게 굴복될 만큼 나약한 면이 있다. 14


스스로 이해하는 힘 - 책을 통해 경험한 타인의 사상은 타인이 먹다 남은 찌꺼기, 즉 타인이 벗어 던진 헌옷에 지나지 않는다. 15


스스로 사색하는 사람 - 독서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사색의 대용품에 지나지 않는다. 독서는 사상을 유도하는 역할로 충분하다... 독서는 사상의 분출이 잠시 두절되었을 때 이를 만회하기 위한 휴식으로 사용해야 한다. ..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나만의 고유한 사색에 의해 어떤 진리에 도달했다면, 비록 그 내용이 앞서 다른 책에 기재되었을지라도 타인의 사상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체험이라는 점이다. ..

괴테가 남긴 다음과 같은 격언. ‘그대의 조상이 남긴 유물을 그대 스스로의 힘으로 획득하라.’ 16-18


사색하는 인생은 남다르다 - 독서로 삶을 허비하는 것은 여행 안내서를 통해 어떤 지방의 풍속에 정통해지는 여행 안내인의 삶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여행 안내인들은 그 지방의 풍물과 역사를 빠짐없이 알고 있지만 정작 그곳의 토지가 어떤 상태인지, 봄에는 어떤 꽃이 피는지, 겨울이 되면 눈은 얼마나 오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사색하는 인생은 이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이들은 자신의 두 발로 그 지역을 직접 여행한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이런 사람만이 지역의 진정한 특색에 대해 말할 수 있고, 환경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 22


책상머리 바보 - 우리가 어떤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누구나 이 문제를 타파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과연 어떻게 풀어야 할지 그 해답을 얻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결심은 의지의 역할이기에 누구나 가능하지만, 이 같은 결심을 인도하는 사색은 문제를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명령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억지로 생각한다고 해서 무조건 사색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같은 생각의 파편들이 자연스레 심오한 사색으로 발전하기를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더구나 이런 마음가짐은 뜻하지 않게 찾아오므로 항상 마음을 비우고, 되도록 의지에서 멀어질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쳤을 때 비로소 성숙한 사색이 잉태되고, 그 결과 고유한 사상이 결실을 맺게 된다. 25-26


스스로 결정하는 힘 - 진정한 사색자는 군주와 비슷하다. 그는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으며, 자신의 위에 서려는 모든 자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판단을 군주가 결정하듯 자신의 절대적인 권력에 의해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은 오직 자기 자신만이 기준이 될 수 있다. 군주가 타인의 명령을 승인하지 않는 것처럼 사색자는 권윌르 인정하지 않으며, 스스로 참된 진리를 확인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결과도 승인하지 않는다. 31-32


권위를 앞세우는 사람 - 세상의 보통 사람들은 어려운 문제와 맞닥뜨리게 되면 권위 있는 말을 인용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자신의 이해력과 통찰력을 활요하는 대신 타인이 남긴 침전물을 동원하고, 이를 자기 생각보다 더욱 확신한다. 물론 동원하고 싶어도 최소한의 능력조차 부족해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짓눌리는 자들도 많다. 이런 자들의 수는 어마어마하다. 세네카의 말처럼 “사람들은 판단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믿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어떤 논쟁을 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주로 선택하는 무기는 권위이다. 그들은 수집한 여러 가지 권위를 무기로 선택한 후 서로 싸움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다가 이런 싸움에 말려든 자가 자신의 근거나 논리를 무기로 삼은 후 자력으로 대항하더라도 권위에 취한 그들을 일깨우지 못한다.

이 같은 자체적인 논증에 대항하는 그들은 비유컨대 죽지 않는 지그프리트(게르만 민족의 영웅전설 가운데서 가장 빛나는 영웅 중의 영웅)로서 사고불능, 판단불능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그들은 타인의 자발적인 논리를 인정하지 않으며, 오직 사라진 자들이 남겨둔 권위만을 유일한 논거로 여기게 된다. 34



글쓰기와 문체 ; 자신의 사색을 녹여서 쓰기



독서 ; 생각하며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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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낭만주의


결혼의 시작은 청혼이 아니고, 심지어 첫 만남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 사랑에 대한 생각이 움틀 때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맨 처음 영혼의 짝을 꿈꿀 때다. 12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심산할 만큼 감동적인 최초의 순간들에 잠식당하고 기만당해왔다. 우리는 러브스토리들에 너무 이른 결말을 허용해왔다.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시작하는지에 대해서는 과하게 많이 알고, 사랑이 어떻게 계속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모하리만치 아는 게 없는 듯하다. 27


그(라비 칸)와 커스틴은 결혼을 하고, 난관을 겪고 돈 때문에 자주 걱정하고,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28


사랑이란 우리의 약점과 불균형을 바로잡아줄 것 같은 연인의 자질들에 대한 감탄을 의미한다 사랑은 완벽을 추구한다. 30


사랑은 우리의 혼란스럽고 창피하고 당황스러운 부분을 우리의 연인이 다른 누구보다, 어쩌면 우리 자신보다 훨씬 잘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 드러난 순간 최고조에 달한다. 이들은 우리를 간파해내고, 신뢰하고 나눌 줄 아는 우리의 능력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알아보고 공감해주고 용서해준다. 당황스럽고 난처한 영혼에 대한 연인의 통찰력에 바치는 감사의 배당금이다. 35-36


성욕은 처음에는 단지 생리적 현상, 호르몬을 깨우고 신경 말단 을 자극한 결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실은 감각적이라기보다 관념적이다. 무엇보다 받아들여졌다는 생각, 외로움과 부끄러움이 끝날 거라는 기대와 관련이 있다. 41


성 해방에 관한 온갖 담론에도 불구하고, 성을 둘러싼 비밀과 어정도의 부끄러움은 사실 늘 그래왔듯이 지금도 존재한다. 우리는 여전히 누구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한다. 부끄러움과 충동 억제는 단지 우리의 조상들과 절제의 종교들이 ㅇ매하고 불필요한 이유로 붙들고 있었던 것들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상수로 존재한다. 바로 그 때문에, 낯선이가 우리의 방어를 풀고, 한때 몰래 죄를 짓는 마음으로 갈망했던 것과 거의 동일한것을 바랄 수 있게끔 허하는 (일생에 몇 번뿐일지 모를)그 진기한 순간들이 그렇게 큰 힘을 갖게 된다. 44


우리는 흥분이라 부르지만, 사실 그 말이 암시하는 바는 드디어 우리의 내밀한 자아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 연인이 나의 본모습에 드려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격려하고 인정하는 족을 선택했다는 발견의 기쁨이다. 45


역사가 시작된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람들은 논리적 이유로결혼을 했다. .. 합리적 결혼은 어떤 진실한 관점엣도 전혀 합리적이지 않았으며, 자주 편의주의적이고, 편협하고, 속물적이고, 착취적이고, 모욕적이었다. 이를 대체한 것 - 감정에 의거한 결혼 - 이 그 존재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면제받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57


결혼이 실용적인 면에서 '불필요하다'는 것은 오히려 결혼에 더욱 감정적인 설득력을 부여한다. 결혼했다는 것은 조심성, 보수적 경향, 소심함과 연관 지을 수 있지만, 결혼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더 무모하고 그래서 호소력이 더 큰 낭만적 제안이다. 58


우리는 사랑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우리가 추구하는 건 친밀함이다. 우리는 유년기에 아주 익숙했던 감정들 그대로를 성년의 관계 안에서 재현하길 바라고, 그 감정은 다만 애정과 보살핌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렸을 때 맛본 사랑이란 보다 파괴적인 다른 역학들과도 얽혀 있다. 예를 들어, 통제 불능의 어른을 도와주고 싶은 느낌, 아빠나 엄마가 다정하지 않다거나 그들의 분노가 두렵다는 느낌 또는 철없는 소원을 자유롭게 표현할 만큼 집안 분위기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느낌과도 뒤얽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인이 된 우리가 어떤 후보군을 그들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조금은 너무 옳기 때문에 - 왠지 지나치게 안정적이고 성숙하고 분별 있고 믿음직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 거부하게 되는 것도 얼마나 필연적인가. 심정적으로 이러한 올바름은 이질적이고 누군가에게만 특별히 주어진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보다 자극적인 사람을 쫓는다. 그들과 함께하는 삶이 더 조화로울 것이라는 믿음에서가 아니라, 그 삶에서 겪을 좌절의 양식이 안심하리만치 친밀할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기 때문이다. 63-64


결혼 :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버린 미래에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 무한히 친절한 도박. 65




2부 그 후로 오래오래


낭만주의는 직관의 합의를 중시하는 철학이다. 진실한 사랑에서는 말로 설명하거나 글로 쓰느라 수고할 필요가 없으며, 두 사람이 하나가 되면 (마침내) 둘 다 세계를 완전히 같은 눈으로 보는 경이로운 상호 감정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72


우리는 삶의 중요한 영역들(국제무역, 이민, 종양학 등)에서는 복잡성을 감안하고, 이견을 수용하고 참을성 있게 해결해나간다. 그러나 가정생활에서만큼은 치명적일 정도로 안이한 가정을 세우곤 하며, 이 때문에 협상이 오래 걸리는 데 대해 날카로운 반감이 생긴다. 76


작은 쟁점들은 사실 단지 필요한 관심을 받지 못한 큰 쟁점들이다.

그가 자신이 몰두하고 실망하는 바를 더 예리하게 파악하는 살마이었다면, 이불 밑에서 (실내 온도와 관련하여)이렇게 설명했을지 모른다. "당신이 한겨울에 창문을 열어놓고 싶다고 말할 때면 난 두렵고 속이 상해. 신체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인 이유에서 말이야. 앞으로 소중한 것들이 짓밟힐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든. 그럴 때면 당신에겐 내가 벗어나고 싶어 하는 가학적인 금욕주의와 너무 왕성한 용기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어떤 잠재의식의 차원에서 당신이 진짜로 원하는 건 상쾌한 공기가 아니라, 당신 특유의 매력적이지만 무뚝뚝하고 합리적이고 사람을 위축시키는 방법으로 나를 창밖으로 밀어내는 것일까 두려워."

이와 마찬가지로 커스틴도 시간을 엄수하려는 자신의 태도를 면밀히 들여다봤다면,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에 라비에게(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운전기사에게) 가슴 뭉클한 연설을 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일찍 출발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 건 결국 공포 증상이야. 그게 내가 무질서하고 놀라운 일이 가득한 세계에서 불안과 정체불명의 지독한 두려움을 지우기 위해 개발해낸 기술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권력을 갈망하는 거나 내가 시간을 지키고 싶어 하는 거나 매한가지야. 안전의 욕구와 다르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걸 고려하면, 비록 조금이지만 그 조금이라도 이해되지 않아? 온전한 정신을 지키려고 하는 나만의 미친 방법인 거야."

이렇게 각자 욕구의 맥락을 살피고 서로가 상대방의 믿음에 깔린 원인을 이해했다면 새로운 융통성이 뒤따랐을지 모른다. 78-79

협상을 위한 인내심이 없으면 비통해진다. 원인도 잊은 채 화가 나는 것이다. 잔소리를 하는 쪽은 굳이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이야기를 끝내려고만 하고, 잔소리를 듣는 쪽은 자신의 반발이 합리적 반론이나 그도 아니면 가엾고 용서받을 만한 성격상의 결함에서 나온 것임을 더는 설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양 당사자는 그들에게 똑가팅 지루하기만 한 이 문제가 그냥 지나가기만을 바란다. 79


우리는 다른 커플들에 비해 우리 커플이 훨씬 나쁜 일들을 겪는다고 상상한다. 불행할 뿐 아니라 우리의 불행이 대단히 드물고 기형적인 것이라 착각한다. 더 나아가 종국에는 우리의 싸움들이 기본적으로 전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결혼 생활의 증거라기보다는, 우리가 뭔가 드물고 근본적인 실수를 범한 징표라고 믿게 된다. 81-82


이 둘은 두 개의 믿을 만한 치유책 덕에 지속적인 비통함에서 벗어난다. 첫째는 나쁜 기억력이다. 목요일 오후 4시쯤 되니 전날 저녁에 택시에서 무엇 때문에 격노했는지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별 이유 없이 일찍 퇴근해야겠느냐는 그의 말에 커스틴이 경솔하고 달갑지 않게 반응한 것과 그녀의 설핏 경멸하는 듯한 말투와 관련이 있다는 건 알지만 불쾌함의 정확한 윤곽은 이미 초점이 흐려졌다. 이는 아침 6시에 커튼을 뚫고 들어온 햇살, 라디오에서 재잘거리는 스키 리조트에 관한 정보, 가득 찬 이메일 수신함, 점심을 먹으며 주고받은 농담, 회의 준비와 웹사이트 디자인에 관한 두 시간짜리 미팅 덕분이다. 이것들이 합쳐져 성숙하고 솔직한 대화를 한 것 못지않게 둘 사이를 거의 바로잡는 효과를 낸다.

두번째 치유책은 보다 추상적이다.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를 생각하면 너무 오랫동안 분노를 안고 가기가 어렵다. 이케아 사거 ㄴ이후 몇 시간이 흐른 오후 나절에 라비와 커스틴은 에든버러 남동쪽에 있는 레머뮤어 구릉으로 오래전에 계획한 산책을 나선다. 출발할 때는 둘 다 말이 없고 시큰둥하지만, 자연이 동정심이 아니라 숭고한 무관심을 통해 그들을 서로에 대한 적개심에서 서서히 해방시킨다. 82-83


토라짐의 핵심에는 강렬한 분노와 분노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려는 똑같이 강렬한 욕구가 혼재해 있다. 토라진 사람은 상대방의 이해를 강하게 원하면서도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설명을 해야 할 필요 자체가 모욕의 핵심이다. 만일 파트너가 설명을 요구하면, 그는 설명을 들을 자격이 없다. 덧붙이자면, 토라짐의 대상자는 일종의 특권을 가진다. 다시 말해, 토라진 사람은 우리가 그들이 입 밖에 내지 않은 상처를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를 존중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토라짐은 사랑의 기묘한 선물 중 하나다. 86-87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토라진 사람의 분노를 감당해야 하는 특별한 표적이 되었을 때에도 온화하게 웃는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진짜 메시지는 지극히 퇴행적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느 ㄴ아직 젖을 먹는 아기이니, 지금 당장 나의 부모가 되어줘야 해. 당신은 무엇이 나를 아프게 하는지를 정확히 헤아려주어야 해. 내가 아기였을 때, 사랑에 대한 관념들이 처음 형성되었을 때, 사람들이 그래주었듯이 말이야."

토라진 연인게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호의는 그들이 불만을 아기의 떼쓰기로 봐주는 것이다. 상대방을 어리게 취급하면 거만하게 윗사람 행세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만연한 탓에 우리는 성숙한 자아 너머의 것을 바라보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내면의 아이를 만나는 - 그리고 용서해주는 - 것이 가끔은 가장 큰 특권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는다. 89-90


사랑이 있을 때에만 섹스가 바람직할 수 있다는 견해는 기독교가 서양 세계에 남긴 가르침이다. 이 종교는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몸을, 눈길을 아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낯선 사람을 성적으로 생각하면 사랑의 참된 정신을 저버리고 신과 자신의 인간성을 배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감동적이기도 하고 무시무시하기도 한 그런 가르침들은 한때 그 토대를 이웠던 믿음이 쇠한 지금에도 완전히 증발하지 ㅇ낳았다. 확고했던 유신론적 근거는 사라졌지만 낭만주의 이데올로기가 그 가르침들을 흡수해, 사랑에는 정절이 내포되어 있다는 개념에 여전히 고귀한 지위를 부여했다. 세속의 세계 역시 일부일처제를 헌신적인 감정과 고결함을 표하는 필요하도고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선언해왔다. 우리 시대는 지나간 종교의 중요한 경향, 즉 참된 사랑에는 완전한 정절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고스란히 유지해온 것이다. 93-94


우리 시대의 분위기는 자유분방하지만, '기이함'과 '정상'의 차이가 사라졌다고 가정한다면 이는 순진한 생각이다. 그 차이는 언제너처럼 확고하며, 사랑과 섹스의 규범적 한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즉시 을러서 경계선 안으로 밀어 넣는다. 요즘은 짧은 반바지를 입거나 배꼼을 노출하거나 동성과 결혼하거나 재미로 포르노를 좀 보는 것도 '정상'으로 간주하지만, 진실한 사랑은 단혼제에 있고 욕망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믿는것 역시 여전히 확고부동한 '정상'이다. 이 근본 원칙에 반기를 들려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가장 혹독하고 수치스러운 낙인이찍힐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변태라고 말이다. 99


의사 전달을 잘하는 기본 요건은 자신의 성격 중 더 문제가 되거나 더 특이한 면이 있더라도 그 때문에 당황하지 않는 능력이다. 의사 전달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분노나 성적 취향 또는 일반적이지 ㅇ낳고 거북할 수 있는 자기 의견에 대해 자신감을 잃거나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고 숙고할 줄 안다. 그들이 명료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대체로 원만한 사람이라는 대단히 가치있는 인식을 길러낸 덕분이다. 그들은 적정한 수준의 인내심과 상상력을 발휘하며 자신을 표현할 수단만 갖추고 있다면 다른 살마의 호의를 받을 만하고 또한 받을 수 있다고 능히 믿을 만큼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의사 전달을 잘하는 이런 사람은 어릴 적, 모든 면에서 적절하고 완벽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도 아이를 사랑할 줄 아는 보호자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축복을 누렸음이 ㅣ분명하다. 그런 부모는 자식이 - 적어도 한동안은 - 가끔 이상하거나, 난폭하거나, 화를 잘 내거나, 심술궂거나, 기이하거나, 슬퍼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수용할 줄 알고 그래도 가족의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 자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줄 안다. 그렇게 하여 자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도 솔직히 고백하고 대화할 수 있는 용기의 원천을 심어준다. 100-101


잘 들어주는 사람은 잘 말하는 사람 못지않게 드물거나 중요하다.잘 들어주는 사람 역시 특별한 자신감이 그의 비결이다. 이는 어떤 확고한 가정에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는 정보로 인해 경로를 이탈하거나 그 무게에 무너져 내리지 않을 수 있는 수용력을 말한다. 잘 들어주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라면 마음속에 얼마간 담아둘 혼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미 경험을 통해 모든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103


우리는 의식에서 거의 지워져버린 위기들이 오래전에 만들어놓은 대본에 따라 행동할 때가 너무나 많다. 지금은 기억에서 사라져 폐물이 된 논리에 따르고, 우리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밝히지 못할 ㅢ미를 좇는다. 우리는 우리가 진정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있고, 정확히 어떤 사람을 상대하고 있으며, 앞에 있는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른다. 곁에 두기에 약간 고달픈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112-113


마음이 전이에 말려들면 우리는 사람이나 상황을 믿어주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불안에 빠져 즉시 과거가 지정해놓은 최악의 결론으로 나아간다. 애석하게도 우리가 과거의 혼란에 의거하여 지금 벌어지는 일을 해석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은 초라하고 꽤 굴욕적인 일이 느껴진다. 우리의 파트너와 실망스러운 부모, 남편이 잠시 지체하는 것과 아버지의 영원한 유기, 더러운 빨랫감 몇 개와 내전의 차이를 설마 모르겠는가 하는 것이다.

감정을 그 출발점으로 송환하는 일은 사랑의 가장 섬세하고도 필요한 과제다. 전이의 위험성을 인정하면 짜즈오가 비난보다 공감과 이해에 우선순위를 두게 된다. 두 사람은 갑자기 폭발하는 불안이아 적대감이 항상 그들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그러니 그런 폭발에 매번 분노나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대응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격분과 비난이 동정심에게 자리를 내준다. 114-115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익혀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다. 116


사랑의 모든 가정들 중 아주 얄팍하리만치 불합리하고 미숙하고 개탄스럽지만 그럼에도 가장 흔히 볼 수있는 것은 우리가 사랑을 서약한 사람이 우리의 감정적 실존의 중심일 뿐 아니라 - 그 로가로서, 또한 대단히 이상하고 객관적으로 비상식적이고 아주 부당한 방식으로 -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다 그에게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듯 사랑에는 기이하고 병적인 특권이 있다. 122


우리가 불만 목록을 노출할 수 있는 사람, 인생의 불의와 결함에 대해 누적된 모든 분노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그 사람 탓을 하는 건 당연히 부조리 중에서도 부조리다. 하지만 이렇게만 본다면 사랑의 작동 법칙을 잘못 이해한 셈이다. 우리는 정말로 책임이 있는 권력자에게 소리를 내지를 수가 없기에 우리가 비난을 해도 가장 너그럽게 보아주리라 확신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 주변에 있는 가장 다정하고, 가장 동정 어리고, 가장 충성스러운 사람, 즉 우리를 해칠 가능성이 가장 적으면서도 우리가 마구 소리를 치는 동안에도 우리 곁에 머물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에게 불만을 쏟아놓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퍼붓는 비난들은 딱히 이치에 닿지 않는다. 세상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그런 부당한 말들을 발설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난폭한 비난은 친밀함과 신뢰의 독특한 증거이자 사랑 그 자체의 한 증상이고, 제 나름대로 헌신을 표현하는 비꾸러진 징표다. 분별 있고 예의 바른 말은 모르는 사람에게 할 수 있지만, 밑도 끝도 없이 무분별하고 터무니없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믿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뿐이다. 123-124


혹독한 수업은 학생들에게 그들의 교사가 단지 미쳤거나 성질이 나쁜 것이고 그래서 그 자신들은 논리상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는 안일한 생각에 기댈 여지를 준다. 터무니없이 극단적인 판정을 들으면, 우리는 파트너가 악랄하지만 한편으로는 약간이나마 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깨끗이 지워버리고 위안을 얻는다.

감정에 치우쳐 우리는 배우자의 부정적인 평가와-조금이라도 비교할 만한 요구가 지워져 있지 않은-친구 및 가족들의 격려하는 어조를 대비시킨다. 사랑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사랑과 가르침의 관계를 바라보는 유용하고도 시류와 다른 관점을 제안한다. 그들이 보기에 사랑은 무엇보다 먼저 타인의 훌륭한 점을 찬탄하는 감정, 고결한 특질과 대면했을 때 느껴지는 흥분이었다.

그 결과 사랑의 깊어짐은 항상 보다 고결해지는 방법-화를 잘 참거나 관대해지는 법, 탐구심을 키우거나 더 용감해지는 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욕구를 수반하게 됐다. 성실한 연인이라면 상대방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런 수용은 관계의 목적을 나태하고 비겁하게 통째로 배신하는 행위였다. 그런고로 우리 자신을 향상하고 다른 이들에게 가르쳐줄 것들은 항상 존재할 터였다.

이 고대 그리스의 렌즈를 통해 본다면 연인이 상대방의 성격으로 인해 불행하서나 불편한 점을 지적해도 그가 사랑의 정신을 포기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파트너의 자아를 더 발전시키려는, 사랑의 본질에 아주 충실한 일을 하려 했다고 축하받아야 한다. 현재보다 더 진보한 세계, 그리스식 사랑의 이상에 조금 더 깨어 있는 세계에서는 우리가 어떤 것을 알려주고자 할 때에 어색함과 두려움과 공격성이 약간 줄어들고 피드백을 받을 때에도 다소 덜 호전적이고 덜 예민해질 것이다. 관계 안에서 교육이란 개념이 불필요하게 섬뜩하고 부정적이었던 함의를 벗게 될 것이다. 신뢰하고 협력하는 분위기에서는 두 프로젝트-가르치기와 배우기, 상대방의 결점을 환기하고 상대방의 비판을 허용하기-가 결국 사랑의 참된 목적에 충실하다는 점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137-138




3부 아이들


아이들은 결국 나이가 몇 배나 많은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한 선생이 되어-그들의 철저한 의존서으 자기중심주의, 연약함을 통해-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랑에 대한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한다. 이 사랑은 상호 호혜를 강렬히 원하지도 성급하게 후회하지도 않고, 타인을 위해 자아를 초월하는 것만을 진정한 목표로 한다.  146


아이들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은 봉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사랑이란 말은 갈수록 부정적 의미들을 내포하게 되었다. 개인주의와 자기충족에 빠진 문화는 만족과 타인의 부름에 응하는 행동을 쉽게 등치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타인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매혹하고 위로해주는 능력에 대한 보답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데에 익숙하다. 그러나 아기는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없다. 더 자란 아이들이 가끔 큰 불안을 느끼며 판단을 내리듯이, 아이들은 아무 '요점'이 없고, 이것이 아이들의 요점이다. 아이들은 그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도와줄 위치에 있기 때문에-어떤 보받도 기대하지 않고 베푸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우리는 장점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약점에 대한 동정, 즉 인류 모든 구성원에게 공통으로 존재하고 한때 나 자신의 것이었고 결국 나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오는 그 취약성을 동정하는 사랑으로 인도되낟. 자율과 독립성을 늘 지나치게 강조하고 싶어 하는 와중에 이 무기력한 피조물은 아무도 결국은 '자력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인생은-문자 그대로-사랑하는 능력에 의지한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남의 종이 되는 것이 굴욕이 아니라 정반대라는 것을 배운다. 나 자신의 왜곡되고 만족을 모르는 본성에 끊임없이 응해야 하는 피곤한 의무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 자신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목표를 부여받았다는 위안과 특권을 알게 된다.  147-148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는 어려운 관례다. 본질상 부모의 사랑은 그 사랑을 베풀기 위해 쏟은 노력을 감추는 작용을 한다. 부모의 사랑은 받는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의 복잡한 사정과 슬픔을 감추고, 부모가 사랑의 이름으로 다른 이익, 친구, 관심사를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지를 드러내지 않느다. 부모의 사랑은 무한한 너그러움으로 이 작은 존재를 한동안 우주의 중심에 놓는다. 부모의 사랑이 그토록 강한 것은 아이가 괴롭고 두려운 심정으로 어른 세계의 진짜 척도와 불편한 고독을 이해해야 할 그날을 위해서다.  155


사랑을 위한 노력이 그들을 녹초로 만든다.  156


라비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이렇게 까탈을 부린 적이 없었지만, 동시에 아버지에게서 진심으로 사랑을 받는다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166


좋은 부모의 역할에는 중요하면서도 무척 까다로운 요건이 딸려 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소식을 끊임없이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부모는 필히 아이의 장기적 이익을 폭넓게 지켜줘야 하는데, 아이들로서는 부모의 생각이 유익하다고 흔쾌히 동의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것이 있다는 것도 예상하지 못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는 양치질, 숙제, 방 정돈, 취침 시간, 마음 넓게 쓰기, 컴퓨터 사용 제한에 대해 말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는 재미가 정말 시작되려는데 삶의 달갑지 않은 면들을 들이미는 싫고 짜증 나고 따분한 배역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렇듯 사랑을 드러나지 않게 실행한 결과로, 좋은 부모는 그 실행이 잘된 경우에 강렬한 분노와 적개심의 표적이 되고 만다.  167-168


성적 흥분은 결국 옷을 벗은 상태와 거의 무관한 듯하다. 그 동력은 열렬히 열망하고, 전에는 금지되었으나 이제는 기적적으로 접근 가능해진 상대를 소유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가능성에서 나온다. 성적 흥분은 고립과 단절이 만연한 세계에서 그 손목, 허벅지, 귓불과 목덜미가 마침내 우리 눈앞에 당도했다는 데 대한 거의 불신에 가까운 경탄의 표현이다. 다시 한 번 기쁨에 차 만지고, 채우고, 드러내고, 벗기며 우리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우리의 연인은 얼마나 멀고 독립적으로 느껴졌는지 계속 몇 시간마다 확인하고 싶다는 특수한 개념이다. 성적 욕구는 확고히 친밀해지고자 하는 염원에서 나오며, 그렇기에 사전의 거리감을 전제로 하고, 그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이 매우 독특한 기쁨과 안도감을 선사한다.  184


자위의 판타지에서 무작위로 만난 낯선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낳은 순위의 모티프가 된다는 사실은 낭만주의의 이데올로기에서는 논리를 획득 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친밀함이 만든 무거운 짐들을 바로잡고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랑과 섹스의 냉정한 분리, 바로 그것이다. 모르는 사람을 이용하면 분노, 감정적 취약성, 상대방의 욕구를 신경 써야 할 의무를 우회할 수 있다. 우리는 비난이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원하는 선까지 특이하고 이기적으로 굴 수 있다. 모든 감정이 완벽하게 차단되어, 이해되기를 바라는 일말의 소망도 없고 따라서 잘못 이해될 위험도 없으며 그 결과 괴로워하거나 실망하게 될 위험도 전혀 없다. 마침내 삶의 소모적이고 거치적거리는 나머지 부분을 침대로 가져갈 필요 없이 욕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87-188


어떤 관점에서는, 공상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삶을 추구하는 대신에 판타지를 지어내야 하는 신세가 처량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판타지는 대개 다수의 모순된 소망으로부터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결과물이다. 판타지가 존재하는 덕분에 하나의 현실을 파괴하지 않고 다른 현실에 거주할 수 있다. 판타지는 완전히 무책임하고 무섭도록 기이한 우리의 충동으로부터 우리가 아끼는 사람들을 지켜준다. 판타지는 나름대로 인류의 성취이자 문명의 결실이며, 친절한 행동이다.  189


현대사회는 부부가 모든 면에서 평등하기를 기대한다지만, 실제로 기대하는 것은 고통의 평등이다. 그러나 괴로움의 복용량을 정확히 똑같게 계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불행은 주관적인 경험으로, 각 당사자가 실제로는 자신의 삶이 더 저주받았으며 파트너는 이를 인정하거나 속죄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언제라도 진지한 경쟁에 돌입할 수 있다. 자신이 더 힘들게 살고 있다는 자기 위안식의 결론을 피하려면 초인적인 지혜가 필요하다.  194


오늘날 부모들이 겪는 어려움은 부분적으로 위신을 분배하는 방식 탓에 발생한다. 부부는 매시간 실용적인 요구에 시달릴 뿐 아니라, 그런 일이 굴욕적이고 시시하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단지 요구를 견뎌냈다는 이유마능로 누군가를 동정하거나 칭찬해주는걸 꺼린다. '위신'이란 말은 등하교시키기와 세탁물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들린다. 그런 특성은 수준이 높은 정치나 과학 연구, 영화나 패션 같은 다른 세상에 속해 있다고 가르친 해로운 훈련 때문이다. 그러나 거품을 제거하고 핵심을 보면 위신은 단지 인생에서 가장 고결하고 중요한 무언가를 가리킨다.

우리는 인류의 영광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회사를 설립하고, 경이로울 정도로 얇은 반도체를 생산하는 데에 있을 뿐 아니라, (설령 수십억 인구 사이에 널리 분포된 능력이라 하더라도) 생후 몇 달 된 아기에게 요구르트를 떠먹이고, 사라진 양말을 찾고, 변기를 청소하고, 떼쓰는 아이를 달래고, 식탁에 굳어 있는 기름때를 닦아내는 능력에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듯하다.  195


라비와 커스틴이 고통받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접한 예술이 그런 싸움을 공감하며 반영하는 걸 좀처럼 보지 못하는 데에도 있다. 예술은 오히려 이들이 마주하 ㄴ문제를 얕잡아 보고 유치하게 놀리는 경향이 있다. 예술은 참을성 없이 짜증을 부리며 몸을 꿈틀거리는 아이에게 외국어를 가르치려고 애쓰는 그들의 용기에 감탄하지 않는다. 코트의 단추를 늘 잘 채우고 모자를 잃어버리지 않을 때, 집 안을 정갈하게 유지할 때, 그리고 매일매일 가장 작지만 까다로운 이 사업을 협력해 이끌 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결코 바깥에서 저명해지거나 큰돈을 벌지 못할 테고, 무명 인사로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월계관을 써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그럼에도 문명의 질서정연함과 연속성은 그들이 보이지 않는곳에서 말없이 수행하는 노동에 작지만 필수적으로 의존한다.  196




4부 외도


중년의 유혹자가 솔직한 것은 자신감이나 오만함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처량한 인식에서 나오는 일종의 조급한 절망감 때문이다.  204


배우자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에 불륜에 뛰어드는 경우는 드물다. 파트너를 배신하는 수고를 감내하려면 대개 파트너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207


다른 종류의 행동들은 거의 다 쉽게 묵인하는 사람들에게도 간통은 하늘이 노할 위반이자, 사랑의 가장 신성한 전제들을 깨뜨리는 섬뜩한 행위다. 

첫 번째 전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든 함께하는 삶이 소중하다고 주장하면서-길을 벗어나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런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면 애초부터 사랑은 없었다.  212-213


두 번째 전제 : 간통은 우리가 익히 아는 불성실과는 종류가 다르다. 세상은 벌거벗음을 수반한 계율 위반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이고, 지각변동에 버금가는 엄청난 종류의 배신이라고 말한다. 바람피우는 짓은 그냥 나쁜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한다고 공언하는 상대에게 할 수 있는 극악 행위다.  214


세 번째 전제 : 일부일처제에 충실하다는 것은 상대방을 깊이 배려하고 그의 번영과 안녕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이다. 이를 고수하는 것은 상대방의 최선의 이익을 진심으로 염려한다는 확실한 징표다.  215


네 번째 전제 : 일부일처는 자연스러운 사랑의 모습이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항상 한 사람과 사랑하기를 원한다. 일부일처는 정신 건강의 기준점이다.  216


다른 사람에게 가끔 욕망을 느끼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있을까? ... 우리 모두의 삶이 얼마나 짧은지, 그래서 어떤 절박한 호기심으로 단 한 명의 동시대인보다 더 많은 독특한 관능적 개성을 탐험해야 할지 깨닫지 못하고 유혹을 느끼는 데 실패한 것, 사실은 '잘못된 것' 아닐까? ... 간통의 발생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은 곧 인생의 풍요로움을 부정하는 셈 아닌가? 반대로, 어떤 특정 상황엣 부정한 행위에 정말로 일말의 호기심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신뢰하는 게 합리적인 것일까?  217


성숙해지면 소유욕을 초월하게 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질투는 아기들에게나 어울린다. 성숙한 사람은 어떠 ㄴ사람도 다른 사람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걸 안다. 이는 어렸을 때부터 현명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온 교훈이다. 잭이 네 소방차를 갖고 놀게 해주렴, 그 아이가 한 번 갖고 논다고 해서 남의 것이 되는 건 아니다, 화가 난다고 바닥을 뒹굴면서 네 작은 주먹으로 카펫을 내리치지 마라, 네 여동생이 아빠에게 소중한 사람이듯 너도 아빠에게 소중한 사람이다, 사랑은 케이크가 아니다, 한 사람에게 사랑을 준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줄 사랑이 줄어들진 않는다. 사랑은 집안에 아기가 새로 태어날 때마다 계속 커진다. 

나중에 이 주장은 섹스를 둘러싸고 훨씬 더 합당해진다. 파트너가 한 시간 동안 당신을 떠나 신체의 특정 부위를 낯선 사람의 제한된 부위에 비볐다고 왜 파트너를 나쁘게 생각하겠는가? 어쨌든 그들이 모르는 사람과 체스를 두거나 명상 그룹에서 촛불을 켜놓고 친밀한 얘기를 주고받는다고 분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229-230


질투는 그 우둔함 때문에 우리가 설교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 군침 도는 표적이 된다. 하지만 말을 아끼는 게 좋다. 대단히 볼썽사납고 어리석긴 해도 순간의 질투는 우리를 빗겨 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술을 만지거나 손이라도 스쳤다는 말을 듣는 순간 누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우리가 과거에 어쩌다 바람을 피웠을 때 가졌을 매우 진지하고 충실한 생각과는 상반되고 논리에 어긋난다. 하지만 지금은 이성의 명령이 들리지 않는다. 현명하다는 것은 도저히 현명해질 수 없는 순간을 아는 것이다.  230-231


상대방의 충실함이 무의식을 가득 채워주는 한 외도라는 문제에도 태연자약 할 수 있다. 한 번도 배신당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신의를 계속 유지하기에 좋으 전제조건이 못 된다. 보다 진실하고 충실한 사람이 되려면 적절한 예방 접종을 겪어봐야 한다. 한동안 극한의 공황과 모욕을 겪고 붕괴 일보 직전까지 가봐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배우자를 배신하지 말라는 명령이 틀에 박힌 말이 아니라 영구히 뚜렷하게 빛을 발하는 도덕적 의무로 변모한다.  232


사랑의 열병은 망상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목을 가누는 방식은 실제로 그 사람이 자신 있고, 심술궂고, 예민하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다. 누군가는 그의 눈이 암시하는 유머와 지성, 그의 입이 넌지시 말하는 상냥함을 실제로 지니고 있을 수 있다. 열병의 오류는 좀 더 교묘한 문제다. 우리가 다양한 단점을 꿰뚫고 있는 현재의 파트너뿐 아니라 사람은 누구에게나 우리가 더 많은 시간으 함게 보낼 때 드러날 상당히 심각한 결점, 황홀했던 처음의 감정을 비웃음거리로 만들 만한 결점도 있다는 인간 본성의 중요한 진리를 잊게 하는 것이다. 우리 눈에 정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우리가 아직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뿐이다. 사랑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다.  236

결혼 :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대단히 기이하고 궁극적으로 불친절한 행위.  237


아무것도 희생되지 않는 깔끔한 해결 방안은 어디에도 없다. 모험과 안전은 양립할 수 없다는 걸 그는 알았다. 사랑이 넘치는 결혼 생활과 아이들은 자연스러운 성욕을 죽이고, 외도는 결혼 생활을 죽인다. 두 패러다임이 아무리 매력적이라 해도 자유사상가인 동시에 결혼한 낭만주의자가 될 순 없다.  238


우울감은 치료를 요하는 병이 아니다. 우울은 처음부터 이 각본에는 실망이 적혀 있었다는 확신과 마주할 때 밀려오는 일종의 지적 슬픔이다.  239


어떤 관계도 온 마음을 다해 친밀하고자 하는 헌신 없이는 첫걸음을 떼지 못한다. 그러나 사랑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파트너가 여전히 수많은 생각들을 혼자 간직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정직성에 너무 감명하는 탓에 정중함의 미덕들을 망각한다. 아끼는 사람이 우리의 본성에서 상처를 줄 수 있는 면과 항상 전명적으로 마주치지는 않게 하려는 욕구 말이다. 

어느 정도 자제하고 자기 편집에 조금 열성을 보이는 억제 능력은 솔직한 고백 능력 못지않게 당연히 사랑에 포함된다. 스스로 비밀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정직함'을 내세워 상대방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상처가 되는 정보까지 털어놓는 사람은 절대 사랑의 편이 아니다. 또한 파트너가(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한 일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간밤에 어디에 있었는지 등등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는 의심이 들어도(우리의 관계가 훌륭하다면 주기적으로 그럴것이다), 날카롭고 무자비한 심문자처럼 굴지 않는 편이 좋다. 그저 눈치채지못한 척하는 편이 더 친절하고 더 현명하고 사랑의 참된 정신에 더 가까울 수 있다.  241-242


역사의 거의 전 기간 동안 사람들이 결혼 생활을 유지한 것은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고, 약간의 재산을 지키고, 가문의 통합이 유지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뒤 아주 다른 기준이 서서히 세상을 장악했다. 그에 따르면 부부는 둘 사이에 진실한 열정, 욕망, 충족감 같은 몇몇 감정들이 통용되는 한에서만 함께 있어야 했다. 이 새로운 낭만주의의규칙에서 배우자들은 부부의 일상이 지루해졌거나, 아이들이 그들의 신경을 건드리거나, 섹스가 더 이상 마음을 끌지 못하거나, 어느 쪽이든 최근 들어 약간 불행하다고 느껴왔다면 당연히 각자의 길을 갈 수 있었다.  243




5부 낭만주의를 넘어서


1950년대에 영국의 존 볼비와 그의 동료들이 전개한 애착 이론은 우리가 맨 처음 경험하는 부모의 보살핌에서부터 관계의 긴장과 갈등을 추적한다. 조사 결과 서유럽과 북미 인구 3분의 1이 생애 초기에 부모에 대한 실망을 경험하고(C. B. 바실리, 2013), 그 결과- 견딜 수 없는 불안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원초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신뢰와 친밀함의 능력은 결여되어 있다. 위대한 저직인 <분리 불안>(1959)에서 볼비는 최초의 가정환경에서 실망을 겪은 사람은 성인이 되어 관계의 어려움이나 모호함에 직면 할 때 두 종류의 반응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볼비가 '불안정 애착'이라 명명한, 두려워하고 집착하고 지배하는 행동 양식이고, 둘째는 '회피 애착'이라 명명한, 방어 및 후퇴 작전이다. 불안정한 사람은 파트너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질투심을 분출하고, 그들의 관계가 '더 가깝지' 않은 것을 슬퍼하며 일생의 많은 시간을 보내기 쉽다. 한편 회피적인 사람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식의 말을 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고, 때때로 성적 친밀함에 대한 요구를 힘겹게 느낄 수 있다. - 조애나 페어베언 박사, <부부 관계에서의 안정 애착과 불안정 애착 : 대상관계 이론의 관점>  251-252


불안정 애착의 징후는 침묵, 지연, 막연함 같은 애매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은 즉시 모욕이나 악의적인 공격과 같이 부정적으로 해석된다. 불안정 애착을 가진 사람들은 사소한 모욕, 경솔한 말, 부주의를 파탄의 전조라도 되는 양 불길하고 강력한 위협으로 느낀다. 좀 더 객관적인 설명은 와 닿지 않는다. 이들은 내심 그들이 삶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경험한다. 그들은 보통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유약함을 설명하지 못하고 그래서 심술궂다거나 성마르다거나 잔인하다는 꼬리표가 붙는다. 253-254


회피 애착 유형은 정서적 피룡가 충족되지 않으면 갈등을 피하고 상대방에게 노출을 줄이려는 강한 욕구를 느낀다는 특징이 있다. 회피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열심히 공격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설득은 전혀 먹히지 않는다고 쉽게 가정한다. 자리를 피해 도개교를 올리고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유감스럽게도 회피적인 사람은 두려움에 찬 방어적인 행동 양식을 파트너에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 결과 그들의 소원하고 무덤덤한 행동들 뒤에 숨어 있는 이유들은 안개 속에 싸인 채 진실과는 정반대로 무정하고 무심하다는 오해를 쉽게 불러일으킨다. 회피적인 사람은 사랑을 주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느끼게 되었을 뿐, 마음속으로는 상대방을 깊이 염려한다. 257-258


하잔과 셰이버가 최초로 고안한 이 설문 조사(1987)는 애착 유형을 평가하는 데에 널리 이용된다. 자신이 어떤 유형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응답자는 아래의 세 진술 중 자신과 가장 가까운 것을 고르게 된다

'나는 정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원하지만, 상대방이 종종 뚜렷한 이유도없이 실망스럽거나 이기적으로 나온다. 나는 스스로 타인과 너무 가까워지는 걸 용인하면 상처를 입게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나는 혼자 지내도 괜찮다.'(회피 애착)

'나는 타인과 정서적으로 친밀해지기를 원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내가 바라는 만큼 가까워지는 것을 꺼려 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소중히 생각하는 만큼 그들도 나를 소중히 여길까 하고 걱정한다. 그 때문에 아주 속이 상하고 화가 날 때가 있다.'(불안정 애착)

'나는 비교적 쉽게 다른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친밀해진다. 타인에게 의지하고 그들이 나에게 의지하는 데 편안함을 느낀다. 나는 혼자 있거나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안정 애착) 260


한 사람이 파멸에 이르기까지 많은 걸 요하지도 않는다. 그저 몇 번의 실수로 갑자기 그렇게 된다. 상황이 몇 번만 꼬이거나 외부 압박을 어느 정도 받으면 그 역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그가 자신을 제정신이라 여길 수 있게 하는 화학적 행운이란 부서지기 쉬우며, 인생이 제대로 시험해보기로 한다면 그 자신이 비극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다. 267-268


옛날에는 사람이 재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떤 이정표에 도달하면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의 이름이 붙은 집, 리넨으로 가득 채운 혼수, 벽난로 위에 진열된 자격증, 또는 소 몇 마리와 얼마만큼의 땅을 소유하는 것이 그런 이정표였다.

그런 뒤 낭만주의 사사의 영향으로 이런 실질적인 측면이 지나치게 금전을 따지고 계산을 하는 행위가 되었고, 초점이 감정적 특질로 이동했다. 올바른 감정들, 그 중에서도 특히 영혼의 짝을 만났다는 믿음, 상대방이 나를 완벽히 이해한다는 느낌, 다시는 상대 말고는 다른 누구와도 잠자리를 하고 싶지 않다는 확신이 중요하다고 여겨진 것이다. 278


이제 라비는 낭만주의 개념들이 재난을 낳는다는 것을 안다. 그의 준비된 마음을 완전히 다른 기준들에 기초한 결과다. 그가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무엇보다 완벽함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278


연인이 '완벽하다'는 선언은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징표에 불과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상당히 실망시켰을 때 그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알기 시작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연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은 근본에 있어서는 불완전할 것이다. 기차에서 만난 낯선 사람, 옛 동창생, 인터넷에서 사귄 새로운 친구 등도 우리를 실망시킬 소지가 다분하다. 삶의 현실은 우리의 모든 본성을 변형시킨다. 상처 없이 살아온 사람이 누가 있을까.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이상에 못 미치는 양육을 받았다. 우리는 설명하기보다 싸우고, 알려주기보다 들볶고, 고민거리를 분석하기보다 초조해하고, 거짓말을 하고 엉뚱한 데로 화살을 돌린다.

이렇게 우험 요소들이 중첩되어 있는 와중에 완벽한 인간이 나올 가능성은 전무하다. 낯선 이들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알기 전에 그들을 깊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화를 내는지 즉시 나타나지 않을지라도(몇 해가 걸릴 수도 잇다). 이론상 그 존재는 처음부터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결혼할 사람을 선택하기란 감정의 존재 법칙을 우회할 방법을 찾아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고통을 흔쾌히 견딜지 결정하는 일이다. 아니면 우리는 모두 당연히 악몽의 전형인 '엉뚱한 사람'을 곁에 두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재앙일 이유는 없다. 진보한 낭만적 비관주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모든 것일 수는 없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또 다른 타락한 생명체와 함께 사는 현실에 나 자신을 적응시킬 최대한 부드럽고 친절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결혼은 '어지간히 좋은' 결혼만 있을 수 있다.

정착을 하기 전에 몇 명의 애인을 사귀어보는 것도 이 깨달음을 깊이 새기는 데 도움이 된다. '제짝'을 만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사람은 없으며, 가까이서 보면 사실은 모든 사람이 조금씩 잘못되었다는 진실을 직접 그리고 다양한 상황에서 발견할 기회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278-280


사랑은 아주 든든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이 이해되고 있다는 경험에서 시작된다. 상대방은 나의 외로운 내면을 이해하고, 나는 왜 하필 그 농담이 그렇게 재미있는지를 그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공동의 적을 미워하고, 상당히 특화된 성적 시나리오를 함께 시도해보고 싶어 한다.

이 상황이 영원히 계속되진 않는다. 연인의 이해 능력에는 적정 한계가 잇고, 우리는 언젠가 그 한계에 부딪힌다 하더라도 직무유기라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애석하도록 무능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충분히 헤아릴 수 없으며,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게 정상이다. 어떤 사람도 다른 누군가를 정확히 이해하고 충분히 공감하지 못한다. 280


만일 수시로 자신이란 사람이 당황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자기 이해를 향한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은 것이다. 281


결혼이라는 새장 안에서 집안 살림, 친인척, 청소 분담, 파티, 식료품 같은 사소한 일로 화를 내면 당연히 '까다롭게' 보인다. 하지만 그건 상대방의 허물이 아니며,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려는 삶의 속성일 뿐이다. 애개 난감한 것은 결혼이란 제도이지, 관련된 개인들이 아니다. 281


우리는 마치 '사랑'을 단일하고 분화되지 않은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은 매우 상이한 두 가지 양식인 사랑받기와 사랑하기로 이루어져 있다. 후자를 실행할 준비가 된 동시에 전자에 대한 우리의 비정상적이고 위험한 집착을 인식할 때 결혼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

처음에는 '사랑받기'에 대해서만 알고 인생을 시작하낟. 아주 그릇되게도 사랑받는 일이 표준처럼 보인다. 아이들은 마치 부모가 항상 온정 어린 마음으로 흔쾌히 그들을 위로해주고 인도해주고 즐겁게 해주고 먹여주고 씻겨주는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개념을 성년기까지 갖고 간다. 성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보살핌을 받고 다 받아들여지던 그 느낌을 되살리고 싶어 한다. 우리는 마음속 은밀한 구석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예측하고, 우리의 심정을 읽어내고, 이타적으로 행동하고 모든 면엣 더 나아지게 해줄 연인을 그린다. 이건 '낭만적'인 것 같지만, 재난의 예고이다. 281-282


중요한 여러 분야에서 파트너가 우리보다 더 현명하고 합리적이고 성숙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우기를 바라야 하고, 그들에게 지적당하는 것을 인내해야 한다. 또한 다른 순간에는 최고의 교사로서 모범을 보이고, 소리를 지르거나 상대방도 알리라 지레짐작하지 않고 우리의 제안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미 완벽한 사람만이, 서로 가르친다는 생각은 사랑이 아니라고 일축할 수 있다. 283


낭만주의 결혼관은 '제짝'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우리의 허다한 관심사와 가치관에 공감하는 사람을 찾는 것으로 인식된다. 장기적으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너무 다양하고 특이하다. 영구적인 조화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제짝'의 진정한 표지는 완벽한 상보성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는 차이를 수용하는 능력이다. 조화는 사랑의 성과물이지 전제 조건이 아니다. 283-284


완벽한 행복은 아마 한 번에 5분이 채 넘지 않을, 작고 점진적인 단위들로만 찾아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이 순간은 두 손으로 붙잡아 소중히 간직해야 할 행복이다.

싸움과 갈등은 금세 다시 고개를 들 것이다. 291-292


완전히 평범한 인생을 사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을 유지하고, 거의 정상인이라는지위를 계속 확보하고,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고, 결혼 생활을 지속하면서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 이 계획들이 어느 영웅담 못지않게 영웅적인 면모를 보일 기회를 제공한다. 조국에 봉사하거나 적과 싸우라고 부름을 받을 리는 없지만, 그의 제한된 영역 안에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불안에 굴복하지 않을 용기, 좌절하여 남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 용기, 세상이 부주의하게 입힌 상처를 감지하더라도 너무 분노하지 않을 용기, 미치지 않고 어떻게든 적당히 인내하며 결혼 생활의 어려움들을 극복할 용기, 이것은 진정한 용기이고, 그 무엇보다 더욱 영웅적인 행위이다. 293




옮긴이의 말 - 진짜 러브스토리


결혼이 사랑의 결실인 건 알겠는데, 그렇다면 결혼 생활의 진정한 동력은 무엇일까? 295


일상의 비끗거림은 맹독으로 작용하기 쉽지만 성찰에 담그면 묘약으로 연금된다.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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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 여행의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를 여행하는

서슬 퍼런 히틀러 치하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독인 문예이론가 발터 벤야민은 예술과 미디어에 관한 20세기 최고의 논문인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처음으로 ‘아우라’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복제된 이미지들이 난무하는 우리 시대 예술 작품에 사라지거나 빠져 있는 것이 바로 그 ‘아우라’라는 얘기였지요.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세상 유일무이한 진품 <모나리자>를 제외한, 세상 무수한 복제품의 모나리자에는 바로 그 ‘아우라’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비로움, 분위기, 후광 등으로 번역될 만한 ‘아우라’의 부재는 비단 미술작품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 연극이나 영화, 사진 음악 등 모든 예술 장르에 적용될 만하다는 게 논문의 요지였습니다.

얼마전부터 저는 우리 시대의 여행에도 그런 ‘아우라’가 사라져버렸다는 생각을 줄곧 하게 되었습니다. 여행지의 풍광과 풍물을 소개하는 텔레비전이나 책, 넘치는 정보들은 여행자가 품어 마땅할 환상을 퇴식시키는 듯합니다. 돈과 시간만 있으면 세상 어디든, 심지어 에베레스트 정상까지도 오를 수 있는 오늘날 축복받은 환경은, 여행이 힘들고 고단하며 고독과 모험을 즐기는 행위라는 생각을 비웃는 듯합니다. 우리 시대 여행이 18, 19세기 사람들이 누렸던 여행보다 과연 더 행복하고 흥미진진한 것인지도 단언할 수 없습니다. <80일간의 세계일주>나 <여행의 기술>에 서술된 그때의 기록들에는 미지에 대한 호기심, 자신을 과감히 내던지는 용기, 새로운 것을 순전하게 맞닥뜨리는 즐거움과 놀라움이 가득해 보입니다. ‘별을 보고 가야할 길을 찾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던 한 평론가의 탄식은, 지금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누릴 수 있는 여행의 시대에 가슴 절절하게 울려옵니다. 가만 보니 언제부턴가 여행의 빛이 바랜 이유가 이 시대 여행에도 그 ‘아우라’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5-6


땅을 읽는 여행은 저절로 땅의 슬픔을 읽는 일이 되곤 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어떤 여행지에서, 모자를 벗을지언정 머리를 비우며 여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 땅의 내력이 담긴 책들을 가져가야 마땅한 듯합니다. 7


"어째서 경권을 놓아두고 피난갈 수 없다는 거요?"

"우리가 읽은 경권의 수는 뻔하지요. 읽지 못한 경권도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는 읽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 <둔황>에서

다 읽지 못한 책을 놔두고 어디로 도망갈 순 없는 법. 다 읽지 못하고 잠들 수도 없고 읽지 못한 책을 두고 죽을 수도 없다. 세상이 사람으로 하여금 고요히 책을 읽을 수 있게 내버려두면 좋으련만. 28-29


추억을 찾아, 추억이 깃든 장소를 찾아 떠나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고 허망한지를. 37


대부분 혼자서 떠다닌 여행들이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때마다 결코 혼자 여행한 게 아니었다. 주위에는 항상 나처럼 낯선 길에 난감해하거나 당황해 하던 외로운 행성 같은 여행자들이 친구가 되어주었고, 따뜻한 마음으로 맞아준 현지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길 위의 가족이었다. 45


여행은 삶의 학교다.

이야기를 찾는 여행이라. 61


하나의 도시, 하나의 장소를 제대로 알려면 도대체 얼마나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까? ... 하나의 도시, 하나의 장소가 가슴에 온전히 안겨오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한 달? 일 년? 그렇게 머문다면 과연 그곳을 완벽하게 알게 될까? 140


전쟁과 폭력, 증오는 언제나 늘 멀지 않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

'여러분은 전쟁에 관심이 없을지 모르지만, 전쟁은 여러분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 레온 트로츠키의 말 <사라예보의 첼리스트>에서 167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 <타인의 고통>에서 172


발로 읽는 것 만큼 처음 만나는 도시와 쉽고 완벽하게 친해지는 방법은 달리 없다. 180


유럽 땅들은 거기서 거기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따금 만나는 눈부신 햇살과 한가로운 전원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답고, 교과서를 장식한 예술가들의 자취를 쫓는 일도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지불하는 경비는 너무도 비싼데다 현지인들의 삶 속을 들어가 그들의 삶을 마주할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181


인간이 차마 저지르지 못할 짓은 없구나.

어쩌면 우리는 너무도 많은 아우슈비츠를 이미 보고 겪은 건지도 모르겠다. 사진이나 영화, 책, 텔레비전의 범람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인류에게 닥친 엄청난 폭력을 잘 알고 있다. 자만하면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준 건 아닐까? 202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조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20세기 중반 독일 신학자, 마르틴 211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 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말라, 그저 재미로 하라.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에는 혁명에 가담하지 마라. 즐겁게 도망치는 당나귀들처럼 뒷발질이나 한 번 하라.(중략)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 '제대로 된 혁명'에서 D.H. 로렌스 231-232


우리가 소설에서 얻을 수 잇고 또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손에 잡히지도 않는 모호하고 거대한 지식, 도덕, 사상보다는 이 황폐한 시대에 어떻게 타인과 만나고 소통해야 하는지에 대한 작은 물음과 해답 정도가 아닐까? 284


'나를 죽이지 못한 시련은 나를 한층 강하게 만들 뿐'이라던 니체의 말은 용기와 객기 사이에 갈 곳을 마련하는 여행자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트래블(Travel)'에 '트러블(trouble)'은 때론 필요악이다'라던 후지와야 신야의 말도 그러하다. 곤란함이 없다면 대체 여행이란 게 뭐란 말인가? 예기치 못한 곤란함과 기꺼이 대면하고 때론 수렁에 빠지다가도 그걸 하나씩 헤쳐 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여행자가 기꺼이 떠안아야할 진짜 여행일 것이다. 312-313


여행은 쓸모없는 짓이다. 그러나 여행에는 진정 의미가 있다. '문학은 써먹을 데가 없어 무용하기 때문에 유용한 것이다. 모든 유용한 것은 그 유용성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만, 문학은 무용하므로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그 대신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라고 했던 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여행 역시 쓸모없는 여행이어야 마땅하다. 쓸모없음이야말로 여행을 떠나는 진정한 의미가 아니겠는가? 우리를 억압하지 않는, 그래서 자유와 부자유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322-323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읶르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때때로 큰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 나간다." - <여행의 기술>에서 323


여행을 하다보면 여행을 하는 것이 내 '몸'이 아니라 내 '생각'이라는 느낌이 종종 든다 그래, 나는 생각하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다. 일상이 강요하는 질서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다른 프레임의 생각을 하기 위해, 생각이 기차를 타고 생각이 물건값을 깎고 생각이 사진을 찍고 생각이 사람들의 땀내를 맡는다. 여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생각'이다. 324


객창감(客窓感 손객 창문창 느낄감). 그렇다. 이 단어다. 내가 여행에서 즐기는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객창감, 그 쓸쓸함의 즐거움이다. 별 까닭도없이 이끌려 젊은 날 많은 시간을 외딴 시골길이나 장터, 비 오는 처마 밑에 서게 했던 감정의 실체. 함께 놀던 친구들이 제 어미들에게 불려들어가 저녁 빈 들판에 혼자 남겨진 아이처럼 홀로 달빛 속으로 유유히 걸어가게 했던 감정. 객창감 속에 떠다닌 여행은 쓸쓸했지만 그 쓸쓸함으로 여행의 시간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희망이나 거짓 행복이 더러 사람을 배신하는 일은 있어도, 쓸쓸하모가 외로움이 사람을 배신하는 일은 드물다. 327


길 가기와 책 읽기에 관해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걸 당신에게만 말해주겠다. 부지런히 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다. 부지런히 읽는 책이 가장 빨리 읽는 독서다. 어느 날 뒤를 돌아보면 막막했던 길들이 내 등뒤에 납작 엎드려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뒤돌아보면 저걸 언제 읽지 했던 책들이 내 손때를 잔뜩 묻힌 채 서가에 꽂혀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한숨 쉬지 말고 가던 길을 갈 것, 읽던 책을 읽어나갈 것. 329


독일의 문화비평가 발터 벤야민이 언급한 '아우라'라는 개념.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의 산물이 처하게 되는 이러한 상황은 예술작품의 존속에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어쨌든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의 가치를 하락시킨다.(중략)우리는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을 '아우라(Aura, 독특한 분위기)'라는 개념 속에 요약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즉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이다. -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350


20세가 가장 유명한 논문 중 하나인 이 글에서 벤야민은 미술은 물론 사진, 연극, 영화 등을 예로 들어 '아우라'가 상실되는 현상을 고발한다. 나는 여기에 '여행'이란 장르도 포함시킬 수 있지 않을까 종종 생각했다. TV나 사진, 책 등에서 무수히 넘쳐나는 여행의 이미지와 정보들을 통해 우리 시대 여행은 설렘과 기대로 넘쳐나는 '아우라'를 상실한 지 오래다. 비용과 시간만 넉넉하다면 아주 쉽게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여행일뿐더러, 여행사를 통한다면 먹고 자고 보는 것에 대한 일체의 고민이나 수고도 생략된다. 세계 수십 개국의 출입국 스탬프가 찍힌 여권의 소유자는 주변에 흔하디흔하다. 더이상 여행은 소수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여행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는 긍정적인 현상의 이면에, 우리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설렘과 두려움, 감동이 가장 희박한 '여행'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포스트모더니즘의 담론들이 흔히 예술에 대해 남발했듯이, 우리 시대에는 '여행'마저도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351-352


어쩌면 읽지 않은 책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책이 아닐까? 어떤 책을 가장 숭고한 채로 남겨두는 방법은 그 책을 읽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궁금함과 호기심, 그 책을 향한 간절함이 있을 때가 책으로서는 가장 숭고한 대접을 받는 때일 터다. 352


아직 읽지 않은 책, 아직 가지 않은 여행을 향한 마음이 간절할 때, 어쩌면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353


여행자는 모름지기 곧잘 감격하고 곧잘 우는 사람이어야 할 터, 기꺼이 손을 내밀거나 내민 손을 맞잡아주는 사람이어야 할 터, 바다를 만나면 바다로 뛰어들고, 산을 만나면 산을 넘는 사람이어야 할 터, 비린내와 땀내를 사랑하고 소낙비레 모처럼 얼굴을 씻는 자여야 할 터, 내 이름은 여행자다.

'바닷가의 모래가 부드럽다는 것을 책에서 읽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맨발로 그것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감각으로 먼저 느껴보지못한 일체의 지식이 내겐 무용할 뿐이다. 나다니엘이여! 우리는 언제 이 모든 책들을 다 불태워버리게 될 것인가!'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에서)

기행 혹은 여행의 문학이란 본질적으로 허풍과 과장을 일삼는 문학일지도 모른다. 남들은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얘기를 풀어놓는 순간 이야기꾼으로 변모해버린 여행자에게 과장과 허풍의 유혹을 물리치기란 힘든 일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 여행기들은 과연 그러한 유쾌한 허풍과 과장에서 자유로운가? 여행이 더이상 소수만의 특별한 행위가 아닌 시대에, 여행자의 구라는 여전히 유효한가? 인터넷과 무수한 영상, 책의 팩트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틈에서 여행자는무엇을 보고 무엇을 알고 무엇을 예기할 수 있을까? 여행이 여전히 책상과 서가보다 더 많은 사실과 정보를 제공하는 장소일까? 여행하는 자는 여행하지 않는 자보다 더 많이 아는 자일까? 많은 여행자가 진리에 가까이 갔을지 모르지만 그 반대편으로 멀어져간 이도 틀림없이 있지 않을까? 그러니 여행에 너무 지나친 가치 부여를 삼갈 것. 아, 여행의 구라가 통하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416-417


아름다운 땅일수록 눈물이 많은 따이 아니던가. 풍요로운 땅일수록 굷주림이 많은 땅이고 축복받은 땅일수록 저주받은 땅이지 않던가. 아프리카가 그렇고 아시아가 그랬으며, 라틴 아메리카와 수많은 땅들이 그러했다. 신들이 만들어놓은 축복과 풍요의 땅을 고통과 슬픔의 지옥으로 드라마틱하게 바꾸어 놓은 인간의 이 죄악과 아이러니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423


모든 땅이 그러하듯이, 여행자의 수만큼이나 많은 아프리카가 있을 것이다. 423


다른 사람들은 작품을 발표하거나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오히려 3년 동안이나 여행을 하며 머리로 배운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했다. 배운 것을 비워버리는 그러한 작업은 느리고도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강요당했던 모든 배움보다 나에게는 더 유익하였으며, 진실로 교육의 시작이었다. - <지상의 양식>에서 424-425


여행자는 과연 제대로 보는 자인가? 여행자는 깊이 볼 수 있는 자인가? 책 속의 진실과 차창 밖의 진실은 어떻게 만나고 갈등하고 화해하는가? 그것이 어쩌면 세상을 아고 싶은 진지한 여행자의 손에 책이 필요한 까닭이 아닐까?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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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민주화를 누군가 나서서 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어요.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내각책임제로 개헌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다 이루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봅니다. 104


불편한 진실을 누군가 드러내면 사람들은 우선 조롱으로 응대합니다. 그다음에는 비난으로 응수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인정하게 되겠지요. 118


많은 사람이 지금 방법이 잘못됐다는 사실은 아는데 뭘 어떻게 다르게 해야 하는지 몰라요. 118-119


실제로 구조조정의 의미는 미래지향적인 사업구조 개편, 사업구조조정, 기업구조조정이 다 합친 말이라는 거죠.

우리나라는 미래지향적으로 하지 않아서 문제죠. 저는 미래지향적으로 하고 싶어서 앞부분에서 해야 할 수순을 밟았고요. 사실 알면서도 못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근본적으로 사람을 길러야 하는데 그러러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사람에게 투자한 효과는 자기 재임 기간이 끝나고 나서야 나와요. 그러니 사장들이 사람을 기르는 데 돈을 쓰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121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자 중 10%만 노조가 결성되어 있고 나머지는 노조가 없잖아요. 10%에 해당하는 노조는 자기 노조원 숫자를 늘리려고 하지도 않아요. 우리끼리 살면 되니까요. 대부분은 시베리아 벌판에 있고 일부가 따뜻한 곳에 있는데 이 따뜻한 곳에 있는 사람들만이 노동자인 것처럼 목소리를 냅니다. 125-126


실제로 상당 부분이 사회 권력구조에서 결정돼요. 성 안에 들어간 사람, 못 들어간 사람, 권력에 조금이라도 지분이 있는 사람, 갖지 못한 사람, 그것에 따라 대우가 확 달라집니다. 126


좋은 사람을 리더로 뽑는 과정을 꾸준히 개선하고 만들어가는 일이 결국 그 나라나 조직의 장기적 생존이나 발전을 결정합니다. ... 더 능력 있는 사람을 리더로 뽑기는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리더가 아닌 사람을 모두 쓰레기나 하인 취급을 할 필요는 없지요. 182


우리는 좋은 리더가 뽑히리라고 기대도 안 하고, 그렇게 하지도 않으면서 계속 사람을 바꿉니다. 184


좋은 의사결정을 하려면 숙의(Deliberation)해야 합니다. 같이 토론해서 결정하는 거죠. 192


우리가 지금 어떤 감옥에 갇혀 있는지 알아야 어떻게 빠져나올지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258


우리나라는 경제발전 수준에 비해 교육방식이 잘못되어서 막상 필요한 인력의 질이 많이 부족해요. 303


우리가 처음부터 반복하는 이야기의 맥락이 바로 이 점이죠?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항상 근본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씀이요. ...

근본적인 개혁을 하기가 어렵다고 제가 자꾸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그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는 걸 모르지 않거든요. 근데 여당뿐 아니라 야당도 특수 이익집단의 눈치를 봅니다. 308


지금 한국은 사람으로 치면 머리가 마비된 채 몽유병처럼 헤매고 있는 나라예요. 문제는 야당도 어디서부터 뭘 바꿔야 하는지 잘 모른다는 거죠. 그리고 그걸 국민에게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도 잘 몰라요 국민은 또 믿으려고도 안 해요.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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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주변 세계를 친애하는 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확실히 도움이 되어 주었습니다. 6


좋은 빛들이 있다. .. 느닷없이 알게 된다. 그 빛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나 또한 그 빛을 그저 나를 밝히기 위해 이용했다는 걸 말이다. 그러고 나면 그 빛이 슬퍼 보인다. 슬프게, 보인다. 15


천장이 슬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하늘이 내려앉아 쥐어짰고, 나는 텅 비고 말았다. 19


'현실주의자가 되자. 하지만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68혁명 당시 체 게바라가 한 말이라고 대중에 알려진 글귀이지만 대개의 유명한 펀치라인이 그러하듯이 실제 화자와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 생각은 내게 참 소중했다. 내가 만난 많은 어른들은 정확히 그와 반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겉으로 몽상가처럼 세상에 관한 따뜻하고 근사한 말을 늘어놓되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단 한 치의 손해도 용납할 수 없다는 뜨거움으로 그를 믿어 왔던 주변의 많은 이들을 집어삼켰다. 21


나는 불행하게도 좋은 어른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다. 그것이 사회 일반의 반영인지 혹은 그저 나의 박복함의 결과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최악의 어른이란 늘 갱신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25


타인의 정상성을 의심하고 억지로 분류할 때 공동체의 정상성은 훼손된다. 반대로 타인의 정상성을 의심하고나 분류하지 않고 그럴 수 있는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을 때 공동체의 성상성은 굳건해진다. 32


내가 경험해보지 않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곧 비정상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살다보면 별일이 다 있기 때문이다. 33


청소보다 중요한 건 정리다. .. 정리가 직관적으로 잘되어 있으면 매일 하는 청소에 드는 시간은 십 분이면 충분하다. 정리가 되어 있는 집은 청소를하루 이틀 하지 않아도 티가 나지 않는다. 정리의 묘는 얼마나 잘 감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버리느냐에 달려 있다. 49


부동산 취득 자격먼허 같은 걸 만들어서 시험장에서 혼자 청소할 수 있는 최대 평수를 측정해 딸 수 있게 하면 좋겠다. 사람의 욕심을 다스릴 수 있는 가장 기능적인 목적의 면허가 아닌가. 52


나는 늘 내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해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115


좋은 다큐는 반드시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진실에 관해 스스로 한 번 더 의심한다. 그리고 그런 의심의 사유를 통해 관객이 영화를 찬양하게 만드는 대신 관객이 영화에 당황하게 만든다. 그런 종류의 당황은 필연적으로 관객의 고민과 깊은 울림을 이끌어 낸다. 229


누구나 그럴듯한 상황과 환경이 주어지면 사랑을, 혈연을, 우정을, 금전을, 위계를 빌미로 악을 행사한다. 그 자신만이 그것을 악으로 인식하지 않고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 혹은 선의로 인식할 뿐이다. 악은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지 않는다. 261


문제는 가해자를 승자인 채로 피해자를 패자인 채로 남겨두고 사회 통합이라는 알량한 거짓말을 들어 침묵하고 지워버리는 태도에 있다. <액트 오브 킬링>과 <침묵의 시선>이 공히 주장하는 건 청산되지 않은 과거를 짊어진 사회는 반드시 곪아 부패한다는 것이다. 294


가치관이 충돌하는 사안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관계를 두고는 균형을 찾을 이유가 없다. 확실한 사실관계를 두고도 무게중심을 찾는다며 진영논리를 끄집어내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라. 그들은 용돈을 받았다. 298


대중매체는 현실을 조명하는 데 게으르다. 혹은 겁을 먹는다. 시청자들이 스크린에서까지 현실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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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 당신은 표류하지 않고 항해하는 삶을 살기를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해서,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남긴 말이다.

"그렇기에 노년의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보고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백발의 노인은 오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생존한 것일지 모른다." 4


인생을 산 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

어떻게 성장에 이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우선 표류하는 자신을 깨뜨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을 개뜨리기 위해서는 외부의 힘이 필요하다. 그 외부의 힘이란 나를 불편하게 하는 오래된 지혜다. ..

일상에서 표류하는 자신을 멈춰 세우고 깨달음으로 밀어 올리는 불편한 지식들을 만나야 한다. 그 지식들은 지혜가 되어 우리를 성장하게 할 것이다. 5



소년, 불편함의 계단 앞에 서다

계단을 오르는 길에는 사람들이 있다. 나를 앞서가는 사람, 내 뒤를 따르는 사람. 어떤 이는 계단 중간 어딘가에서 이미 자리를 잡았다. 그 계단의 높이가 그는 가장 마음에 들었으리라.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더 오른다.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불안함을 감수하면서, 다른 세계를 보고자 한다. 그는 성장하는 사람이다.

어떤 삶도 괜찮다. 13


내가 전혀 알지 못함에도 이미 거짓이라고 믿고 있던 세계, 그렇게 피해왔던 세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책은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17-18



다섯 번째 계단, 과학

사회와 국가는 당신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회와 국가는 오직 당신의 노동력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전문성의 요구에 저항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노동자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 구각와 사회가 규정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규정해나가는 주체적인 조재로 변모하게 될것이다. 168



여섯 번째 계단, 이상 - 체 게바라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 외에는 타인을 평가할 줄 모르거든. .. 사람들이 보기에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가시적인 서오가를 낸 사람들만이 칭송의 대상이 되지. 238


이상적인 인간은 대주으이 평가, 혹은 사회의 인정과는 무관해. ..

타자의 평가는 이상적인 인간에게 불필요하다. 239



일곱 번째 계단, 현실 - 공산당 선언

낯선 시스템에 던져진 초기에는 누구나 그 시스템의 단점과 문제점을 쉽게 발견한다. 열정적인 그는 저항하고 좌절하면서 내적인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시스템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곧 시스템이 생각보다 효율적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말한다.

단점과 문제점이 없는 완벽한 시스템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때부터 그는 시스템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규칙성 속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우리는 한 가지에만 집중한 사람들의 한계를 쉽게 본다. 책만 본 사람들과, 현실에 적응하기만 한 사람들의 한계. 우선 책만 본 사람들의 한계는 타인에게 엄격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이 쉽다. 왜냐하면 책의 울타리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실제 세상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까닭에 현실의 폭력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다른 사람들이 나약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하지만 막상 현실에 발을 디디면 이들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당황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나약함을 부정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된다. 모든 일에서 불평 불만거리를 찾아내는 사람, 타인의 잘못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 선과 도덕과 정의를 습관적으로 강조하는 사람.

다음으로 현실에 적응하기만 한 사람들의 한계는 자신에게 너무도 너그럽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계획과 일정에 따라 정확하게 진행되는 일 따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음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문제에 봉착했을 때, 옳고 그름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타협과 조율을 통해서만 상황에 따라 문제를 봉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된다. 선과 도덕에 대해 하찮게 여기는 사람, 모든 것을 손익으로 판단하는 사람, 심연의 깊은 대화가 불 가능한 사람.

두 가지가 병행되어야 한다. 250-251


삶은 받아들이는 방식으로만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 314


우리는 자신이 체험한 만큼의 시야 안에서 세상을 해석하며 살아갑니다. 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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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라는 사선을 넘어왔지만 또 다른 사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오기뿐만 아니라 자존심도 내려놔야 한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했다.  28


탈북민은 한국에서 사회구성원으로 자리하고 인정받기 위해 오랜 기간에 걸쳐 탈북민사회의 호소와 집단행동을 통해 노력해왔다. 소수자가 피해자로 전락하면 안 된다는 외침으로부터 평등한 국민으로 봐달라는 호소까지, 통일의 동반자로 함께하고 민주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하기까지의 과정은 민주주의의 발전과 그 궤를 함께해왔다고도 볼 수 있다.  30


2016년 기준 한국인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4.6명으로 OECD 회원국 중 13년 연속 1위였다. 그런데 탈북민의 자살률은 그의 3배에 달한다. 2016년 9월 새누리당 김도읍 국회의원실에서 인용한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탈북민 중 2012년까지 모두 22명이 자살했는데, 2015년 한 해에만 9명이 자살했다. 이처럼 자살자가 급증하는 것은 '따뜻한 남쪽 나라'인 줄 알고 넘어왔던 한국에서의 삶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고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42


탈북민이 가장 문제로 꼽는 것은 경제적 빈곤이나 정착 관련 정책보다 탈북민을 대하는 한국사회의 편견과 차별, 배제가 압도적이다. 이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배태하고 있는데, 첫 번째가 오랜 분단 시대가 만든 적대와 대립의 아비투스(habitus)로, 관습의 차원에서 유래한 것이다. 반공, 반북 의식의 오랜 관습은 북한 정부뿐만 아니라 탈북민에게까지 그대로 투영된다. 2010년 11월, 북한의 연평도 폭격 직후, 어느 면접장에서 "당신네 북한은 왜 저러녀?"라고 내게 묻던 면접관의 태도에서 배타적인 타자성을 보았다.

두 번째는 남북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였다는 우월적 인식에 기인한 태도다. 못나고 가난한 아우를 바라보는 묘한 승자적 감정이다. 탈북민은 일상의 자리에서부터 끊임없이 자신이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생존과 생계의 기회를 얻는다. 이를 강요하고 탈북민을 하대하며 가타르시스를 얻는 사람들을 직면하는 것은 언젠 불편한 일이다. 

세 번째는 무한경쟁사회가 초래한 소외와 배제다. 탈북민은 한국이라는 처음 맞이하는 막막한 환경에서 홀로 서야 한다. 무한경쟁사회에서 탈북민은 애초부터 포용이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이 될 뿐이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경쟁에서 배제된 채 과연 홀로 선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43-44


오래전부터 북한 주민들은 당구그이 선전을 통해서든 탈북민을 통해서든 한국이 무한경쟁사회라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럼에도 탈북민은 한국이 북한보다는 나을 거라는 희망과 우리는 결국 한 동포라는 믿음으로 탈북을 감행한다. 하지만 탈북에 성공하더라도 한국사회에서 직면하는 지독한 편견과 차별, 배제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44


자유가 존재하는 사회에 온 것은 맞지만 탈북민도 똑같이 존중받고 살기 위해서는, 한국의 평범한 시민들보다 더 많이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이었다.  44-45


나름 좋다고 하는 대학을 졸업했고 각종 자격증 취득이며 어학연수까지 다녀와 이른바 8대 스펙에도 거의 근접했다고 생각했는데, 서류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길 없이 어느 날 지원 서류를 다시 한 번 찬찬히 돌아보았다. 이력서의 군 복무 여부를 뭊는 칸에는 굳이 탈북민이라고 기재했고, 자기 소개서의 성장 과정과 입사 후 포부에서조차 나는 스스로 북한 출신임을 친절하게 밝히고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탈북민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고 입사 지원을 했다. 그때부터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서류를 제출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았는데 줄줄이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던 것이다. 1차 서류합격만으로도 기쁨을 느낀다는 '서류가즘'이라는 신조어도 있지만 나에겐 그 따위에 비교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격한 슬픔과 비애가 온몸을 감쌌다. 민주주의의 발전과 성숙한 의식 수준을 자랑한다는 한국에서 탈북민이라는 이름은 경쟁사회의 아웃사이더이자 분단사회의 주홍글씨와 같은 꼬리표엿던 것이다.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며 백안시하는 태도를 애써 감추려 하지만, 실제 모습은 제도와 시스템속에 철저히 내재화되어 있었다. 여기에 물질과 이기의 논리가 덧칠해져 유사한 얼개로 괄시와 배척이 가중된다.

흔히 조선족 동포는 '이등 국민'이라는 이미지로 우리 사회에 굳어져 있다. 그동안 주민등록증을 가진 대한민국 국민임에도 북쪽출신이라는 것을 밝히지 못하고 조선족 동포로 행세하며 일하는 탈북민을 종종 봐왔다. 조선족 동포라고 하면 취업이 가능하지만 탈북자임이 알려지면 취직이 어려웠던 까닭이다. 사실상 탈북민은 이등 국민도 아닌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에 가까웠다.  59-60


주민등록번호(000000- 125 0000) 하나로 탈북민인 것을 구별해내는 시스템도 신기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되어 어느 탈북민은 북한에서처럼 강가에서 자동차를 세차하다가 주변의 신고로 파출소로 연행된 적이 있었다.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던 경찰이 곧바로 북에서 왔냐고 소리쳐 당황했다고 한다. 범죄자가 아님에도 수배자처럼 탈북민을 바로 확인해내는 전산시스템을 마주하던 그때의 경험이 훗날 탈남을 결심한 계기였다고 그는 고백했다. 일반 국민과 탈북민을 이중적 공간으로 분리하고 마치 탈북민사회를 특수 집단으로 경계하는 제도와 시스템이 존재하는 한 한국사회에서 탈북민은 결코 당당해질 수 없으며 또한 이들을 향한 한국사회의 무시와 경시 또한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63


- 2009년 '북한 이탈주민 보호, 정착지원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하나원의 소재지를 기준으로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았던 탈북민은 한 차례에 한해 정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입국한 탈북민들도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125나 225로 시작하지 않는 번호를 부여받았다.  64


전부가 정한 공식적인 법적, 행정적 명칭은 '북한이탈주민'이고 별칭은 '새터민'이지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탈북민이 호칭은 수십 가지가 넘는다. 이는 탈북민 정착 재도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현상이다.  67


수년 전 어느 연구 기관에 탈북민 박사 몇 명과 함께 북한과 통일 문제 연구 프로젝트의 자문으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 북한과 통일 문제에 문외한인 담당 연구원들과 전문가이지만 실직자에 가까운 탈북민 자문위원들 간의 만남은 어색하고 불편했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한 탈북민 박사가 "이런 꼴을 보자고 어렵게 학위를 취득한 것이 아닌데..."하고 탄식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오히려 외국에 나가면 우리를 난민이 아니라 정치적 망명자로 존중해줍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자 인문학 분야에서 최정상급으로 인정받는 네덜란드의 레이던 대학교에서 일개 탈북 작가인 저를 학과장 대우로 초빙했는데 국내에서는 어떤가요. 국내에 탈북민이 3만 명인데 북한학과에 탈북민 출신 교수가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70-71


오랜 시간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지내는, 국책 기관에서 일하는 어느 ;탈북민 금수저'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매번 골프 치러 가고 비싼 술을 먹는 것 같지만 매일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살고 있다. 직장에서 끊임없이 받는 경계심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너는 상상하지 못할 거다." 탈북민사회에서 이들의 위치는 성골일지 모르지만, 한국사회에서는 결국 '탈북자'로 대접받고 있다는 고충의 토로였다. 탈북민사회에서 그들은 분명 금수저이지만 그들조차 긴장하며 살아야 할 곳이 바로 만만치 않은 한국사회라는 점도 확인했다.  72


2014년 오준 한국 유엔대사가 임기 마지막 연설에서 "북한 주민은 우리에게 남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한국과 세계의 언론들은 세계를 울린 연설이라고 극찬했다. 이를 지켜보던 한 탈북민 후배의 중얼거림이 지금껏 가슴에 남아 있다. "그럼, 우린 남일까요?"  73


목숨을 걸고 입국한 한국을 다시 등지는 탈북민의 행렬은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정확한 통계가 공개된 적이 없어 구체적으로 알수는 없지만, 일각에서는 약 5,000명의 탈북민이 탈남했거나 탈남했다가 되돌아온 것으로 추산한다. 2017년까지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이 3만 명이니 6명 중 1명이 탈남했거나 탈남 경험이 있는 것이다.  89


배고파서 온 사람들이라서 배만 부르면 잘 정착할 것이라는 판단은 너무나 안일했다. 배고픔보다 더한 고통이 같은 민족으로부터 받는 차별이라는 것이 탈남과 재입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92


2007년 작고한 이기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식사 자리에서는 음식이 담긴 그릇을 앞에 두고, "그릇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함부로 만지지도 담지도 말라"는 또 하나의 당부를 하셨다. 만들어져가는 그릇에 뜨거운 물을 붓거나 손자국을 낸다면 기형적인 모습으로 완성된다는 의미였다.  95


2007년 4월, 32명을 사살하고 17명이 넘는 이들에게 부상을 입혀 세계를 경악케 했던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주범은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난 미국 영주권자였지만, 미국민들은 그를 한국인 모두와 동일시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미국인들의 분노가 한국과 한국인을 향할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미국 언론들은 오히려 이 사건을 이민자 출신의 국민을 제대로 포용하지 못한 미국사회의 문제로 보도했다. 서독에서 간첨 사건이 터질 때 서독에 정착한 탈동독민은 불이익을 받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탈동족민도 서독의 국민이라는 이념적 포용력과 성숙한 인식이 서독사회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독일이 보여준 성숙한 의식을 우리는 언제쯤 확인할 수 있을까.  98


학부 전공 수업에서 들었던 인상 깊은 문장이 아직까지도 뇌리에 남아 있다. "민주주의는 일방적 동화(同化)를 강요하지 않는다."  111


통일로 한 걸음씩이라도 나아가기 위해서는 북한 사람들에게만 일방적 동화와 적응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북한을 모르고서는 함께 살아가야 할 통일도 없다. 독일 통일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도 국민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베를린장벽 붕괴를 주도한 것은 동독 시민이었지만, 통일 국가를 위한 국민투표를 추동하며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라고 외쳤던 이들은 동독과 서독 시민 모두였다. 합법적 방식과 민주적 절차를 통해 동독은 자기보다 우월한 서독으로의 평화적인 체제 이행을 단행했다. 서독으로의 편입을 선택한 동독 시민에게는 통일 국가에서 동등한 주체로 대접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꿈이, 동독 시민을 받아들인 서독 시민에게는 민족의 소망을 이뤄내기 위해서라면 경제적 비용을 비줄하겠다는 각오가 있었다. 오늘날 유럽연합을 주도하는 통일 독일의 저력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111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북한 사람들이 지금의 한국사회에 만연한 탈북민에 대한 자별과 배제를 목격하고, 자신들을 향한 천민자본주의적 행태를 경험한다면, 가까스로 통일을 이워내더라도 그 통일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옛 소련의 해체를 예언했던 정치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전쟁이 끝난다고 평화가 찾아오는 게 아니며 그 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전쟁보다 더 잔인한 것일 수도 있다"라고 했다. ..

나는 통일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다시 타오르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 통일은 한밤중에 얻는 '대박'보다는 시나브로 '작은 통일'이 모여 결실을 맺는 끈기와 인내의 열매여야 한다.  114-115


공문서와 여권 등에 새겨진 각인은 점차 지워지고 있지만, 한국사회 안에서의 주홍글씨는 더욱 선연해지고 있다.

언젠가 북한 말투를 고쳐 신분을 세탁해보려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표준말을 따라하다가 감정이 북받쳐 크게 울었던 날이 있었다. 그날 깨달았던 것은 분단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탈북자'란 꼬리표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121



서북청년단은 해방 직후 북한이 단행한 친일 숙청과 토지개혁등에 의해 탄압받고 재산을 빼앗긴 이북의 청년들이 남한으로 내려온 후 만든 반공단체다. 지주, 자본가, 개신교도, 민족주의자, 친일파 등으로 구성된 이들은 대부분 황해도와 평안도 출신들이었다. 공산당에 의해 재산을 빼앗기고 고향에서 쫓겨나듯 도망쳐야했던 아픈 경험 탓에 북한의 공산당뿐만 아니라 남한의 진보적인 세력까지도 '빨갱이'로 매도하며 거부감과 증오를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특히 남한에 내려온 후 아무런 기반도 없는 처지와 경제적 궁핍함으로 인해 생존이 막막한 현실이 서북청년단의 잔혹성을 키웠다. 서북청년단은 점차 폭력과 테러 등을 통해 존재를 과시했다. 

학자들은 해방 후 한국전쟁까지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월남자 숫자를 80~10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신윤동욱, "박근혜 이후를 묻다", [한겨레21] 1153호, 2017) 이들은 북한에 대한 피해 의식으로 반공, 반북 이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미군정과 우익 세력은 이러한 성향을 간파하고 이들을 최대한 이용했다.  130


서북청년단은 창단 직후부터 미군정과 경찰의 비호를 받고 서북 출신 재력가들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으면서 무소불위의 세력이 되었으며 잔악한 활동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131


1949년 6월 26일 정오 무렵, 서북청년단의 간부였던 안두희는 경교장에 들어가 백범 김구를 암살했다. 그들은 정치 지도자뿐만 아니라 좌편향이란 혐의를 씌워 현직 검사에게 테러를 감행했으며 문화계 인사들이 모인 부산극장에 다이너마이트를 던지기도 했다. 큰 공로를 세운 단원들은 경찰과 군에 취직이 되었고, 이들처럼 출세하려는 이들의 부역 활동은 더욱 극렬해졌다.

서북청년단의 대표적인 만행이 바로 제주 4.3 사건 중에 일어났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로 민간이 6명이 사망한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소요 사태와 무력 충돌,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건이다. 당시 30만 명 정도였던 제주도민 중 3만 명 이상이 학살되었는데, 제주도를 피로 물들게 한 이 학살을 주도한 것이 바로 서북청년단이다. 얼마나 끔찍한 학살과 엽기적 만행이 있었는지 지금까지도 정확한 피해 규모조차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132-133


서북청년단은 이 시기에 벌어진 광기의 학살에 가담한 테러 조직이라는 역사의 오명을 쓰게 되었다. 오죽하면 당시 민군정청 사령관이었던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마저 서북청년단의 만행을 보고 진저리를 치며 단체 해산을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결국 이들의 존재는 이승만 정권에게도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왔고, 1948년 12월 모든 청년 단체를 통합해 대한청년단을 출범시켜 서북청년회를 해체해버렸다. 이후 서북청년단 출신 중 남한에서는 출세한 이가 거의 없었다.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경제적 보상도 없이 토사구팽의 신세로 전락했다.  135



남쪽이 방종이 만연한 사회였다면, 북쪽은 부자유가 숨통을 조이는 사회였다.  139


지금도 남북한 어디에도 참여할 수 없는 낯선 이방인들이 있다. 탈북민은 아직 광장을 마음것 누리지 못한다. 탈북민은 아직도 '이명준(최인훈<광장>)'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적 광장으로 초대받는 데 실패한 이들이, 자신이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고 깨달을 때 할 수 있는 선택이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이 ㄹ수밖에 없다. 제3국으로의 탈남, 아니면 북한으로의 재입북, 다시 재탈북.... 아니면 이명준과 같은 최후의 선택.

1950년대의 이명준처럼, 탈북민은 지금도 북한과 관련된 안 좋은 사건이 터지면 빨갱이라는 말을 듣고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한다. 끌려가서 린치를 당하는 일은 없지만 온라인 댓글과 오프라인에서의 수군거림은 기실 폭력보다 더 매섭고 아프다. 취업도 어렵고 저임금 3D 업종에도 감사하라고만 한다. 차별과 편견에 대해 입을 열면 곧바로 너희의 조국인 북한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나한에 입국 후 얼마간은 안도감을 느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탈북민은 고통스럽고 힘들어한다.  143


유엔난민기구(UNHCR)가 2017년 6월에 발표한 [연간 글로벌 동향 보고서]에 의하면, 외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탈북민이 1,422명, 난민 지위를 받으려고 신청 대기 중인 탈북민이 533명에 달한다.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통계와 이처럼 차이가 나는 이유는 탈남하는 이들이 난민 심사에서 탈락해 강제 추방되거나 해외 정착에 실패할 것을 대비해 임대아파트 등은 정리하지 않고 떠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00년대부터 탈북민사회에서는 '탈남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한동안 해외의 남민 심사에서 한국 국적을 가진 탈북민의 추방 조치가 강화되자 탈남 바람이 주춤하기도 했지만, 최근 캐나다와 영국처럼 한국 국적의 탈북민도 신변의 위험과 위협 등의 상당한 이유가 있다면 난민과 이민 신청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늘고 있다. 

목숨 걸고 경계선을 넘어 한국에 왔으나 극심한 빈곤을 겪고 다시 한국을 떠나려는 사람들, 다시 목숨을 걸고 북한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 한국도 북한도 마땅치 않아 다른 나라에 난민 신청을 하는 사람들... 과연 그들은 자유와 전엄의 땅에 닿을 수 있을까.  188-189


나는 이곳에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것들을 겪었다. 아프고 힘들었던 경험도 재산이라고 스스로 위로로 삼았다. 인내하며 얻어낸 여러 성취의 결과에도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탈북민에 대한 한국사회의 일그러진 민낯 앞에서 나는 여전히 절망하고 좌절한다. 대학교수로 일하는 나조차도 보통의 시민들을 제대로 마주 보거나 말을 건네기가 조심스럽다. 나도 이러한데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탈북민이나 사회적 지위가 빈한한 이들은 얼마나 힘들까.  189




맺는말


대부분의 국민들이 통일을 말하지만 이를 준비하려는 사람은 드물다. '먼저 온 통일'이라 했던 탈북민이 3만 명을 넘어섰지만 그들과 함께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가물다. 탈북민에 대한 무관심만큼이나 통일 이후에 대한 고민도 극히 적다.  191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자 백범 김구 선생은 "아, 왜적 항복! 이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었다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라고 통탄했다. 이역만리에서 풍찬 노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해왔건만 조선의 해방은 우리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해방을 이룬 것이 아니라 해방을 당한 것이라는 그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고 새로운 비극인 분단이 찾아왔다.  195-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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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 세상에 책이 아닌 것 어디 있으랴

독서술을 체득하고 있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만물이 변하여 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 책과 역사는 풍경이다. - 런위탕 <생활의 발견>중에서


세상의 길이 어떻게 만나는가를 더듬어 알고 발견하는 일이 여행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4


책장에 연필로 밑줄을 긋듯, 땅 위에 밑줄을 긋는 데에는 낡은 카메라 한 대와 작은 수첩 한 권이면 충분했습니다. .. 가난하면서도 높은 여햊아. 5


여행과 독서는 달려들수록 욕망이 줄기는 커녕 더 많은 갈증이 생긴다는 점에서도 비슷합니다. 7


"걸을 때마다 나 자신과 내가 배워온 세계의 허위가 보였다." - 후지와라 신야 <인도방랑>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 없는 법이야."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미혹함 없이 스스로, 진리의 등불 삼으라.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스스로자 등잔등 밝을명 법법 등잔등 밝을명)' 25


스님은 지나칠 정도로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구도 해위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중략) 누군가 구도를 할 경우에는 그 사람의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으ㅕ 자기내면에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가 생기기 쉽지요.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은 오로지 항상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까닭이며, 그 사라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그 목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까닭이지요.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29


김현의 유고 <행복한 책읽기>에서 "좋은 소설이 때로 지루한 대목을 간직하고 있듯이, 좋은 시는 때로 깜짝 놀랄 만큼 신선한 대목을 간직하고 있다" 86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다. -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128


'모든 것이 스스로 요란한 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확인받으려는'(최승자) 소음의 시대에 침묵을 벗하는 일은 행복하다. 128


바로 보려면 우리는 우리가 보는 사물의 명칭을 잊어야 한다. - 모네


나는 에로틱한 단어도 싫어한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써서 하찮고 진부한 것으로 만들었다. - 사진가 헬무트 뉴튼 135


맑은 책을 읽고 싶다. .. 조금은 느리지만, 슬로 미디어인 책을 통해서도 살아가는 지혜나 힘은 충분히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앉은 자리에서 손가락과 눈으로 하는 여행보다 두 다리로 직접 만나고 가슴으로 느낀느 경험히야말로 여전히 가장 의미 있는 배움과 깨달음이 아닐까. 136-137


여행을 하며 머리로 배운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했다. 배운 것을 비워버리는 그러한 작업은 느리고도 어려웠다. .. 진실로 교육의 시작이었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책읽기란, 아무튼 숙제가 아닌 쾌락이어야 마땅할 터. ..

여행은 배움의 공간이지만 비움의 시간이기도 한것.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텅 비우는 것 ㄱ역시 우리가 진정 배워야 할 소양이 아닐까. 212


책의 맛을 충분히 알고 이해하기 위해 고토록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216


자연의 섭리를 따른다면 야만적인 힘을 사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함이다. -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삶이란 무엇일까? 던져진 존재로서 그저 살아지는 것일까?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무엇일까? 일상에서 답을 구할 수 없어 여행을 떠나지만 여행을 떠난다고 답을 얻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여행은 무의미한 일상의 연장일 뿐일까? 246


기억을 조금이라도 잃어버려봐야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루이스 부뉴엘의 말,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251


일본인들이 쓴 불교 입문서인 <불교가 좋다>. 책을 우연히 뒤적이다가 '불교 경전에는 행복(幸福 다행행 복복)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문장을 읽고 무릎을 친 적이 있다. 뭔가 대단한 통찰력을 얻은 느낌이었다. 영어나 불어, 독어, 라틴어로 된 서양의 사상과 문물을 한자어로 번역하던 일본 메이지시대에 새롭게 만들어진 단어인 '행복'의 어원을 쫓으며, 동양인에게는 없던 '행복'의 개념이 그간 어떻게 작용해왔는지를 추적하는 내용이었다. '애 행복이라는 한자에는 서양의 단어에 들어 있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일본인(동양인)들이 '자신의 독특한 생각을 서양인처럼 '행복'이라는 단어로 대신함으로써,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고를 계속해 왔'다는 것이 책의 설명이다. 255


뉴스를 접하면 언론을 호도하고 본즐을 흐려 진실을 가리려는 파렴치한 시도는 사회 상류층으로부터 난무하고 있다. 262


겨울은 달리 보면 '따뜻한' 계절이다. '따뜻한'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계절은 오로지 겨울밖에 없다. '시원한'이 여흠의 형용사이듯 말이다. 하지만 겨울이 딷스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가 절실하다. 온기가 없는 겨울, 따뜻하게 내민 소노가 마음을 나누지 않는 사람들의 계절은 혹한의 겨울보다 더 춥고 매서울 것이다. 285


모든 길과 길 위의 여행은 어디론가 손을 뻗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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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운동으로는 안 일어나.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으로 일으키는 것이라고!

집단은 어차피 집단이라고. 부르주아도 프롤레타리아도 집단이 되면 모두 똑같아.

권력을 탐하고 그것을 못 지켜서 안달이지!

개인 단위로 생각할 주 아는 사람만이 참된 행복과 자유를 손에 넣는 거얏!"

 

"모모코, 국가 교육이라는 건 애초에 잘모소디었어. 미국을 좀 봐라. 세계 곳곳엣 전쟁을 벌여 죄 없는 민중을 죽이고, 그러면서도 자기들만이 정의라고 하고 있잖아. 그거야말로 국가적인 사상 교육의 결과야. 일본은 그런 미국의 앞잡이 격이라고."

 

"그 섬은 어느 누구의 통치도 받지 않아. 자급자족으로 살아가고, 전쟁도 없고, 모두가 자유야. 아니, 국가 같은게 아니라니까. 그냥 커뮤니티야. 사람들의 모임, 어느 나라의 영토에도 속자히 않으려고 지도에 실리는 것도 거부한 거야. (중략) 호자 살더라도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들면 정치경제가 발생해.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걸 생각하지 않으면 정치가도 자본가도 필요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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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적인 사람이라면 갑자기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데에 두 가지 경우가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즉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갈 때와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올 때이다. 이는 육체의 눈뿐만 아니라 마음의 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통찰력이 부족한 사람을 보고 함부로 비웃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앞서 그는 이 사람의 영혼이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 그 어둠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어둠에서 밝은 태양 아래로 나와 눈이 부신 것인지를 물을 것이다. 그리고 뒷사람을 복된 이로 생각하고, 앞사람을 불쌍히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어둠에서 빛으로 나온 영혼을 보고 웃는다면, 이 웃음엔느 밝은 곳에서 어두운 굴 속으로 들어온 사람을 보고 웃는 웃음과는 다른, 보다 큰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 플라톤의 <국가>에서

 

박사님은 자네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며, 그렇게하면 자네의 문제를 밝힐 수 가 있다고 말했다. 61

 

당신이 앞으로도 평생 어린아이로 살고 싶다면 예기는 달라지지만, 당신 슷로 답을 찾아야 해요. 옳고 그름을 '직감'할 수 있어야 해요. 찰리, 먼저 자신을 믿는 것을 배워야 해요. 109

 

전에 그들은 나를 조롱하며 내 무지와 우둔함을 경멸했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지능과 지성을 갖췄다 하여 나를 미워 하고 있다. 그들은 왜! 도대체,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 128

 

스트라우스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더 쉽고 평이하게 얘기하고 쓸 필요성을 지적했다. 그는 언어가 마음을 통하게 하는 길이 아니라 때로는 장벽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지능이라는 담장 저편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건 아이러니다. 135

 

노마가 태어나 그녀도 정상적인 아이를 낳을 수 있으며, 내가 잘못 태어난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자, 그녀는 나를 고치겠다는 노력을 그만두었다. 한편 나는 그녀가 원하는 영리한 아이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나를 사랑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168

 

그녀를 쫓아낼 구실은 얼마든지 있지만 나는 단념했다.

"진 있어요?" 하고 그녀가 묻는다.

"아니, 술은 별로 마시지 않아요."

"집에 조금 있으니까 가지고 올게요." 말릴 새도 없이 창문으로 나가서, 3분의 2쯤 들어 있는 술병과 레몬을 한 개 들고 곧 돌아왔다. 부엌에서 술잔을 두 개 가지고 와서 진을 따른다.

"자요. 이걸 마시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예요. 술이 저 직선들을 허물어 버릴 테니까.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건 바로 저거거든요. 모든 것이 숨막힐 듯이 너무 빈틈이 없고 똑발라서 마치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조각 속의 앨저넌처럼."

처음에는 마실 생각이 없었지만, 기분이 너무 침울해서 좀 마셔도 괜찮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상황을 악화시킬 리는 없고, 내 행위를 이해하지 모하는 누에 의해 자신이 보여지고 있다는 의식도 둔해질지도 모른다.

그녀는 나를 취하게 만들고 말았다. 218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지적으로는 계속 성장하는 한편으로, 감정적으로는 어린 찰리 그대로였소. 227

 

내가 작곡한 첫번째 피아노 협주곡을 페이에게 바쳤다. 그녀는 자신에게 헌정되었다는 것으로 흥분했지만, 곡이 마음에 들지는 않아 하는 것 같았다. 한 여자에게 모든 것을 바랄 수는 없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일부다처제를 주장할 이유가 또 한 가지 늘었다. 238

 

"저 안에는 뭐가 있나?"

"냉동고와 소각로." 그는 육중한 문을 열고 불을 켰다.

"표본을 소각로에서 처리하기 전에 동결하는걸세. 부패를 방지하면 악취를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되지." 그는 발길을 돌리려 했지만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앨저넌은 그러지 말게. 그러니까.... 만약.... 그때는 .... 즉 그를 이 안에 던져 넣지 말아달라는 걸세. 나에게 주지 않겠나? 내가 처리할 테니까."

그는 웃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243

 

며칠 동안 나는 심리학 서적에 몰두했다. 임상심리학, 성격심리학, 심리측정학, 학습심리학, 실험심리학, 동물심리학, 생기심리학, 행동주의학파, 게슈탈트학파, 정신분석학파, 기능주의파, 역동론파, 유기체론파 등등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학설과 학파 사상체계를 독파했다. 우려되는 것은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지능과 기억, 학습에 대해 믿음을 두고 있는 학설의 대부분은 모두 이러이러하기를 바란다는 희망적 사고라는 것이다. 247

 

그 중에서 그래도 지능이 높은 사람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어요. 그들은 나간 지 1주일 정도 지나면 대부분 다시 돌아옵니다. 바깥 세상에서는 있을 곳이 아무 데도 없다는 걸 알게 되면요. 세상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곧 깨닫게 되는 거죠. 250

 

"이 아이들은 마, 말수가 적은 편이지요." 그는 내 무언의 질문을 느낀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 농아들입니다."

"이곳에 106명 있습니다." 윈슬로가 보충설명을 했다.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아 특별히 연구하는 아이들이지요."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보통 사람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것 없는 걱만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인가! 정신지체에 귀머거리이고 벙어리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열심히 벤치를 갈고 닦고 있다. 254

 

"돈이나 물질을 주는 사람은 많지만 시간과 애정을 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256

 

워렌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차가운 잿빛 느낌, 체념이 나를 에워쌌다. 체념. 재활이라든가 치료, 또는 그런 사람들을 세상으로 복귀시키는 데 대한 얘기는 한 마디도 없었다. 희망을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받은 인상은 살아있는 시체같다는 느낌이었고, 더 나쁘게 말하면 완전히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모른다는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시든 영혼이 나날의 시공을 그저 응시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는 것이다. 257

 

나는 당신들이 간과한 한 가지를 깨달았어요. 인간적인 애정의 뒷받침이 없는 지능과 교육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말이오...

지능은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자질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지식을 구하는 마음이 애정을 구하는 마음을 배제해 버리는 일이 너무 많아요. 이건 극히 최근에 발견한 건데, 나는 이것을 하나의 가설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즉 애정을 주고 받는 능력이 없는 지능은 정신적, 도덕적인 붕괴를 초래하고, 신경증 내지는 정신병까지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중심적인 목적에서 그 자체에 흡수되어 그 자체에 관여할 뿐인 마음, 인간관계를 배제하는 마음은 폭력과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거지요. 277-278

 

그녀에게(엄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 그녀 자신보다 가족보다 먼저 이웃의 평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옳다고 생각했다. 인생에는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보다 주요한 것이 있다고 아버지는 이따금 설교했다.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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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보다 긴 여운

여행은 내게 여전히 힘들고 많은 생각을 안겨준다. 나는 정말 아직도 여행을 잘 모르겠지만 알 수 없는 오기 같은 것이 생겨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 집에만 있을 거야, 라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여행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나 책을 읽을 수 있으며 통신 수단이 없어도 답답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사람.” 61

 

 

순간 속의 사람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로버트 레드폳가 메릴 스트립에게 말하길

마사이족에겐 특별한 것이 있다고 했다.

그들은 절대로 길들여질 수 없는 존재들이어서

만약 감옥에라도 갇히게 되는 날엔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머릿속엔 오직 현재라는 개념밖엔 없기 때문에

앞으로 이곳을 나가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처음엔 황당할 정도로 희망이 엇는 사람들이구나 싶었는데

이내 누구보다 순간에 충실할 수 있다는 점이 부럽게 느껴졌다.

결코 내일이란 없는 사람들, 오로지 지금 이 순간뿐인 그들에게

세상이란

아마 내가 살고 있는 여기와는 다른 곳이겠지. 373-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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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대상을 더 알고 싶어지고 

이해하고 싶어진다. 따라서 질문은 

자신이 질문을 던지는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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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행동으로) 말을 하고 있었구나. 내가 내 사랑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뿐.'
(이수-한효주-의 나레이션, 1:35:00)

'날마다 같은 모습으로 날마다 다른 나'
(이수의 나레이션, 1:4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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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하는데... 안락한 자리만을 바라지. 그런 자리를 차지하고 나면 마음은,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말지." - 아르튀르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 철>  9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의 [착란 1]에 나온 시구를 빌려 와 이렇게 적었다.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어디 사랑만이 그러하겠는가. 랭보의 시 역시 시의 재발명이었고, 오늘날 하염없이 스러져 가는 세월 속에서도 놀라운 자태를 뽐내는 동서고금의 미술 작품 역시 재발명된 회화, 조각들이다. 영화 또한 재발명되어야 한다. 재발명된 것들이 모여 있을 때 비로소 '삶의 재발명'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 루이스 부뉴엘의 <비리디아나>, 피에르 파솔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는 모두 (우리의 삶을 둘러싼) 기존의 영역을 재발명한 영화들이다. 이들 감독의 재발명 방법은 매우 강력하다. 그들은 사랑에 대해, 종교에 대해, 사디즘과 카니발리즘에 대해, 폭력과 도덕에 대해 극단적인 지점까지 밀고 나갔다. 저 영화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구토하게 하고, 혐오감에 빠지게 하며, 심지어 영화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 우리는 이러한 재발명을 꿈꾼다.  10


여기서 다워진 영화들은 기존 영화가 지닌 통념과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새롭게 구현된 재발명은 우리들 스스로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은 무엇인지, 사랑은 무엇인자, 성은 무엇인지, 폭력은 무엇인지, 종교는 무엇인지, 나와 너는 누구인지를 질문하게 한다. 새로운 예술은 항상 재발명의 방식을 통해 재질문하고, 재사유하게 한다.

이 책이 단순히 '교양'이나 '입문' 수준에서 읽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이 책이 삶을 재발명하고, 섹스를 재발명하고, 사유를 재발명하게 하는 '본격적인 재발명 도구'가 되기를 원했다.  11


오늘날 우리는 재발명된 영화와 점점 더 만나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 까닭은 영화가 더 이상 재발며으이 영역이 아닌, 산업 시스템에 사로잡혀 기성품 복제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발명이 아니라 통속적 반복을 되풀이하고 있다. 진정으로 재발명된 영화는, 쾌적한 극장의 안락한 의자에 앉아 달콤한 시간을 누리고 싶어 하는 관객의 기대감을 배신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배신(영화의 대중 배신)은 위험천만한 일로 여겨지고 있으며, 사람들 또한 안온한 극장이 제공하는 향락을 즐기다가 더욱 안전한 집으로 귀가하기를 선택한다. 강렬함을 잃은 영화는 금세 잊힌다. 물론, 영화는 아무것도 구원하지 못한다. 다만 하나의 충격파로서 우리를 흔들어 깨울 것이며, 그것을 통해 새로운 길을 내다볼 수 있는 작은 틈을 보여 주리라. 그럴 때 영화는 친구가 된다.  12





전체적으로 그런 기운이 느껴지는 섹스 - <감각의 제국> 1976 일본, 프랑스 108분, 오시마 나기사


<감각의 제국>은 1976년에 만든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작품입니다. .. '감각'이라는 말은 작지만 큰 울림을 지녔어요.  21


동시대를 대표하는 괴물은 '좀비'예요. 좀비의 가장 큰 특징은 감각이 없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고통을 느끼고 있나요. 혹은 어떤 무감각에 빠져 있나요.  22


<감각의 제국>은 1936년도에 실제 일본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었어요.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던 치정 사건을 재현하면서도(내부를 들여다보면서도), 바깥의 시스템(국제 합작)을 통해 주제 의식에 다가선 셈이니까요.  27


많은 이들이 사랑은 금기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랑의 형태에 대해서만큼은 엄격한 잣대를 갖고 있어요. 불륜이 대표적인 사례죠. 

그런데 사랑과 불륜 중 어떤 것이 더 큰 범주에 속합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사랑이 더 큰 범주에 속할 겁니다. 상위 범주에 해당하는 사랑은 금기가 아닌데, 그 하위 개념인 불륜이 금기에 속한다는 건 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요.  29


현실을 들여다보면 사랑에 대한 금기가 참으로 많아요. 불륜도 그렇고,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커플로 잏상한 눈으로 바라봐요. 동성애에 대한 갑론을박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금기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금기들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대단히 협소한 것'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습니다. 금기를 넘어서지 않을 때에만 우리는 사랑을 '사랑'이라고 여기게 되는 겁니다. ..

인간의 자유를 품은 사랑은 '모든 것을 무릅쓰고' 실천하는 행위예요. 이 영화가 위험하고도 지독한 사랑을 다루는 건 협소한 통념을 까발리기 위함이에요.  30


<감각의 제국>이 누군가에겐 '불편한 사랑 이야기'라는 점이 중요한 겁니다. 이들의 강렬한 러브 스토리는 통념에 의해 마비된 감각을 흔들어 깨우니까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사다는 기치의 성기를 자릅니다. 흔히 상대를 파괴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겁니다. 그런데 기치는 기꺼이 그 순간을 용인합니다. ..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까지 상대를 용인할 수 있을까요. .. 저로서는 감히 못 할 일이기에, 이들의 사랑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게 바로 <감각의 제국>의 출발점입니다. 타인의 사랑을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  31


나의 알몸은 상대에 대한 솔집함과 사랑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반면, 전적으로 타인인 누군가의 알몸은 정상적인 것을 벗어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타인이 '옷'으로서 드러나기를 바라죠.

왜 그럴까요. 이것은 인간 사회가 지닌 인식의 문제와도 깊이 연관돼 있어요. 옷은 타인의 경제력, 신분, 직업, 성별 등을 나타내는 기호입니다. 벌거벗은 몸은 '존재 그 자체'로 다가오기에, 우리는 그 타인이 누구인지 분별할 수 없어요. 그게 불편한 겁니다.  32


'벌거벗음'은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삼아요. 일종의 평등주의적 태도죠. 어쩌면 '복면 시위'도 이와 같은 맥락이겠죠.  32-33


그들의 나체는 불편한 게 아니라 오히려 불쌍한 것일 수도 있어요. 벗은 몸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니까요. 항상 그 벗은 몸으로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인 거죠.  34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말했던 유명한 '무인도 농담'이 있어요. 한 농부가 무인도에 아름다운 슈퍼 모델과 단둘이 갇혔어요. 상황이 좀 그렇다 보니, 결국 두 사람은 성관계를 갖게 됐죠. 그 후 슈퍼 모델이 농부에게 좋았느냐고 물어봐요. 그러자 농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좋았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 부탁을 하나 들어줄 수 있느냐.'라고 대꾸하죠. 그는 슈퍼 모델에게, 얼굴에 수염을 그리고 밀짚모자를 쓴 채 곁에 와 달라고 부탁해요. 슈퍼 모델은 그 청을 들어줍니다. 그녀는 약속한 대로 남장을 하고 농부의 곁에 와 앉죠. 그러자 농부가 슈퍼 모델을 툭 치며 말을 걸죠. '어이, 친구! 방금 내가 멀 했는지 알아? 그 유명한 슈퍼 모델과 잤다고!'

기치와 사다. 이들 두 사람도 그래요. 끊임없이 자신들의 결합을 과시하고 싶어 해요. .. 페이스북에 '아무개와 연애 중'이라고 자신의 '상태'를 공개하는 것도 같은 심리예요...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상태를 노출합니다. 자신들의 관계가 은밀하기를 원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노출되기를 원하는 거죠.

사다와 기치를 변태라고 욕하지 마세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자신을 노출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노출한 신체를 누군가가 봐 주기를 강렬히 희망합니다.  34-35


<감각의 제국>에 등장하는 사다와 기치의 벗은 몸에 대해 부끄러움이나 불편함을 느끼셨다면, 그건 분명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응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그 누구보다도 정열적으로 사랑했던 사람들. 우리도 이만큼 나아가 볼 수 있을까, 사랑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밀고 가 볼 수 있을까? 부끄럽게도 그러지 못할 겁니다. 수치심은 아주 끈질기게 인간의 판단과 사유의 발목을 붙잡고 있으니까요.  37


조르주 바타유가 쓴 <에로티즘>을 참고 문헌.


왜 인간은 이토록 섹스를 하고, 일체감을 얻으려고 할까요. 바타유는 동물과 인간의 섹스를 구분합니다. 동물의 섹스는 후손을 남기기 위한 생산성을 무엇보다도 중시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섹스는 생산에 관심이 없어요. 우리들 모두 '자손을 꼭 남기고 말겠어!'라고 생각하며 섹스를 하지 않잖아요. 오히려 섹스를 통해 쾌락을 추구하죠. 바타유에 따르면 인간은 에로티즘을 통해 쾌락을 추구하는 유일무이한 동물이에요.  40-41


인간은 쾌락을 위해 죽음 직전에까지 이르는 격한 에로티즘을 추구하기도 해요. .. 단지 벗는 행위뿐 아니라 성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금기가 존재하고,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제도화하죠. 에로티즘이 야기하는 '쾌락의 혼돈'을 억누르기 위함이에요. 동시에 미묘한 건, '에로티즘은 금기가 없으면 추구될 수 없다.'라는 바타유이 말입니다. 금기를 위반하는 것만큼 짜릿한 쾌락이 없거든요. 그래서 에로티즘과 금기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붙어 있습니다.  41


에로티즘의 관점에서 보자면 <감각의 제국>은 두 사람 사이의 쾌락을 극단적으로 밀고가는 영화예요. 그들을 둘러싼 금기가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이들은 더 강한 쾌락에 중독될 수밖에 없죠.  42


아무리 사랑이라도, 그 본모습을 정면으로 응시하기는 힘들죠.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는 쓰고 맛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포장하면 이보다 더 달콤할 수 없죠.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사랑은 금기인가?'라는 질문을 드렸죠. 사랑이 금기가 아니라고 여기는 건 우리가 '포장된 사랑'을 주로 봐왔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 주듯, 날것 그대로의 사랑을 마주하면 사실 역겨워요.  43


종교의 금기가 공동체의 금기를 깨는 영화보다 더 자극적인것은 섹스라는 금기를 다루는 영화라고 할 수 있어요. .. 섹스는 여전히 거부감과 결합된 묘한 흥분을 줄 것입니다.  49


들뢰즈처럼 '개념의 창조'를 해보자면 이 영화는 '섹시힐리즘', 즉 '섹스'와 '니힐리즘'을 합친 새로운 개념으로 읽을 수 있어요. 사실 아주 쉽죠. 소유욕의 화신인 사다와 인생이 허무한 남자 기치의 이이기예요.  50


사다의 상황은 빤해요. 그녀는 어린 나이에 남편과 헤어졌고요. 건강하죠. 나이도 분명 20대 초반일 것 같아요. 사다는 갈 데까지 가려고 하고, 소유하고 독점하려고 하죠. .. 사다는 알아요. 이 남자의 허무를 채울 수 없다는 걸요. 그래허 계속 섹스를 원하죠.  .. 진짜 슬픈 건 기치가 사정하고 난 다음이에요. 더 큰 허무가 그를 덮치고 말겠죠. ..

단도직입적으로 섹스가 허무일 수도 있다는 걸 말하고 있어요. 이 영화의 지침은 거기에 있어요. 섹스로 허무를 달랠 수 있지만, 없애지는 못해요.  51


첫 경험을 하고 나면 누구나 섹스에 대해 품고 있던 큰 판타지가 깨져요. 그래도 그 허무를 채우려고 섹스를 계속 이어 가죠. 인간의 섹스는 그래요. 동물의 발정기와 다르기 때문에 매번 더 몰입하죠. 그 순간적인 충만감을 느끼려고요.  52-53


사실 우리가 금기라고 하는 건 말초적인 것들이에요. 어찌 보면 유치하죠.  53


제가 정의를 잘하지 않았나요? '섹시힐리즘', 섹스+니힐리즘이에요. 허무한 남자를 사랑하는, 허무를 잡으려고 했던 한 여자의 이약. 마지막에 사다는 이 남자를 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닫죠. 딱 한 번뿐인 사랑, 목을 조르고 성기를 자르기 직전의 그 마지막 사랑이 그들의 유일한 섹스였을지도 몰라요.  54


결국 중요한 것은 섹시힐리즘에 대한 통찰이 아닐까 해요. 우리는 때때로 허무주의를 달래기 위해 섹스에 몰입합니다. .. 섹시힐리즘은 섹스가 가진 강도와 충만감으로 자신이 느끼는 허무를 채우려는 정신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을 듯해요. 허무는 일종의 무기력입니다. ..

치명적인 섹시힐리즘은 자신의 허무를 오직 섹스로만 채우려고 할 때 작동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행동이든 자꾸 반복하게 되면, 매너리즘에 젖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더 새로운 섹스, 더 기묘한 섹스, 심지어 엽기적이기까지 한 변태적 섹스가 나타나게 되는 거죠. 이럴때 섹스는 이제 그 자체의 즐거움을 잃고, 일종의 절대적인 수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마침내 섹스마저도 허무주의의 먹이가 되는 거죠.  55


어쩌면 사랑은 기꺼이 더러워지는 것, 타자와 섞이는 일인지도 몰라요. 타액을 섞고, 피부를 어루만져야 정신적으로도 더 많은 걸 공유할 수 있어요. 텔레파시같이 정신적으로, 아무런 접촉도 없이 교감할 수 있는 건 실상 없어요. .. 

롤랑 바르트도 서로의 대화가 애무라고 했죠.  58


한 사람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모습, 이미 그 자체로 에로틱한 사건'이라고요! ..

섹스를 말초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대화는 더 섹시한 성기일 수 있어요. 더 육감적인 향기일 수도 있고요. .. 플라토닉러브? 웃기지 마세요. 플라토닉에 집중하지 말고, 러브에 집중해요. 자신감 없는 사람들이 하는 게 플라토닉러브예요. ..

사랑과 불륜이 구별되는 지점은 어디일까요. 사랑이라 생각하면 밀어붙이고, 불륜이라고 느껴지면 관계를 포기할 준비를 하는 건 아닐까요. 수차례 말씀드렸다시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륜은 매우 흔한 테마일뿐 아니라 거의 모든 인류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관계 유형 중 하나예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죄악은 아닌 거죠.  59-60


본인의 마음속 울림이 더 중요하잖아요. 제가 하라고 한들, 하지 말라고 한들 뭐가 대수겠어요?

불륜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세요. 이 단어는 '아니 불(不)' 에 '무리 륜(倫)'자로 이뤄져 있어요. 사랑의 핵심에는 늘 불륜성이 도사리고 있어요. .. 불륜이라는 건 무리에서 떠나는 행위입니다. 그 땜ㄴ에 우리가 불륜을 저주하는 건 고착화된 욕망이에요. 기존의 틀을 유지하겠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죠.  60


사랑의 핵심은 기성의 해체와 새로운 것을 향한 전망이죠. 그걸 감당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 문제예요. 예전 관계에 너무 많이 의존해 있으면 해체하지 못해요. 그건 아무나 하는게 아니에요.  61


즉각적인 혐오에 따라 판단하지 말고, 무엇이든 숙고해 봐야 해요.  63


회자정리(會者定離 모을회 사람자 정할정 떠날리). 만난 것들은 반드시 이별해요.  66


음란한 사람일수록 섹스를 지나치게 신성시해요. 차라리 매춘부들이 가장 플라토닉한 사랑을 하지요.  69



제 주변엔 안타까운 여자 선배들이 많아요 페미니즘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돌연 어떤 남자랑 한 번 자고 나더니 결혼해 버리고 말았어요. 그게 성숙한 걸까요? 유치한 사람일수록 자기 수준을 모르면서 성숙한 줄 알아요.  72





비정상적 영혼의 정상화를 위한 폭력 - <시계태엽 오렌지> 1971 영국 137분, 스탠리 큐브릭


"사람에게 자유 의지가 없다면, 그는 이미 사림이 아니지." - 등장인물 신부의 대사  87


1971년에 선보인 <시계태엽 오렌지>는 앤서니 버지스의 원작 소설을 영화로 옮긴 작품이죠.  91


큐브릭은 '미래3부작'을 선보입니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인류가 달에 가기 1년 전에 만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그리고 <시계태엽 오렌지>가 그것입니다.  92


폭력은 단순히 폭력으로만 끝나지 않죠. 결국 섹스와도 연결이 되고, 정치와도 연결돼요.  96


금기는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하는 명령이에요.  97


루드비코 프로그램은 실제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마음속에 그러한 욕망을 품기만 해도 고통받도록 만들어 버린 거예요. 즉, 루드비코 프로그램은 '욕망'을 처벌합니다.  98


이 영화가 논란을 일으킨 건 '우리는 모두 선이 긍정적이고 아름답다고 배웠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야. 인간은 악이든 선이든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가져야 해. 그것이 인간이야!'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에요. 약물을 주사하든 거세를 하든 따져 보아야 할 것은 자유 의지를 박탈당한 인간이 과연 인간인가, 하는 거예요.  98-99


무엇을 금기하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선뜻 선택할 수 없을 때 바로 금기가 되는 거예요. 선택 할 수 없는 것, 그게 다 금기예요 고를 수 있는 게 단 한 가지뿐이라, 선택이 배제된 것 말이죠. 그래서 이 영화의 주제가 금기인 거예요. 인간은 금기조차도 금기가 아닌 듯 선택할 수 있다는 게 이 영화가 보여 주는 핵심적 주제거든요.  99


인간이 가진 가장 일반적인 특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망하는 게 가장 쉽거든요. 그 순간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선한 자가 되는 겁니다. 니체는 이걸 '노예 감정'이라고 말했어요.

'주인'은 원망하지 않아요. 주인은 문제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원망하기보다 해결하고 타계할 길을 궁구하죠. ..

우리에게 자유로운 선택이 얼마나 허용됐는지를 살펴보면, 우리 안의 금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어요. .. 알렉스가 악마였던 이유는(영화 전반부에 나오듯) 그가 욕망을 '행했기' 때문이에요. 우리 역시 다양한 욕망을 갖고 있어요. 다만 그걸 다 표출하지 않을 뿐이죠. 꿈은 자유롭게 꿀 수 있지만, 모든 꿈을 행하지는 않잖아요. 현실에서는 어느 정도 금기가 작동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오직 금기만 남는다거나 강력한 금기에 붙들리면 문제가 돼요. 자유를 빼앗기게 되니까요.  100


금기의 문제. 첫째,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을 때 금기가 우리 내부에서 작동하기 시작해요. 둘재, 모든 것을 원망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노예'가 되고 말죠. 도덕은 태곳적부터 정해진게 아니에요. 단지 그것이 쌓이고 두터워져 금기가 되는 거예요. 한데 보통 대중매체는 이런 금기를 건드리지 않아요. 불편하니까요. 

예술은 금기를 건드리면서 인간의 자유를 드러내는 영역이에요. ..

사유는 쾌락이 아니라 불쾌함의 여지, 즉 '부정성'을 통해 찾아옵니다. 부정성은 왜 이 영화가 불편한지 묻게 하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 합니다. .. 그것은 금기에 순종하는 게 아니라 금기를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드러나는 부정성입니다.  104


타인에 대해 너무 쉽게 정죄하지 말고, 함부로 판단하지 맙시다.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벌어지는 만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이야기했습니다. 윤리적, 도덕적 잣대는 대개 약자들이 맹싢는 거예요. '나는 순수하다.'라고 믿는 거죠. 가난한 자는 순수해요. 힘이 없어 큰 죄를 저지를 수 없거든요.  106


선은 영원한 선이고 악은 영원한 악이라고 보는 시선이 있어요. 그런데 니체는 <선악의 저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나에게 선(good)과 악(evil)은 없다. 단지 좋은 것(good)과 나쁜 것(bad)만 있다."라고요. 나한테 어떤지가 중요해요. 독을 써서 죽는 사람이 있고 치료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근원적인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한다면 선생님, 아버지, 체제, 사회가 주장하는 선악일 뿐이죠. 따라서 우리에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걸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끊임없이 뭐가 맞는지 물어보죠. 그러다가는 평생 남의 명령만 받다가 죽는 거예요.  106-107


우리 모두 '폭력'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어요. 그런데 그 뉘앙스는 다 다르죠. 명확히 규정해야 해요. '오십보백보 모두 다 폭력이다.'라고 말하면 잘못된 거예요. 권력자가 사용하는 전형적인 물타기 수법이에요. 폭력이 나쁘다는 교육을 받다 보니, 정당방위마저 폭력이라고 생각해요. 균형 감각이 필요합니다. 물론 최소한의 폭력에도 균형 감각은 꼭 필요하죠.  108


정신분석학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딱 한 가지예요. 외적인 지배가 모든 개인에게 금기나 금지를 내면화시킨다는 것! 그 내면화가 완성되는 순간, 한 생명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새로 태어나게 되는 거죠. '나는 고유한 나'라고 생각하는 건 헛소리예요.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들 모두 전부 비슷하게 살고 있잖아요. 누가 누군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요.  113


학창 시절만 봐도 '성적 일등'과 '주먹질 일등'이 학교의 권력을 양분해요. 그들은 서로이 영역을 나눠 갖고 침범하지도, 치고받지도 않아요. 상대의 권력을 인정하는 거죠. 흥미롭지 않나요? 경쟁을 강요해서 일등을 상찬하는 사회 구조에서는 일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걸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 말이에요. 주먹 일등, 게임 일등, 저항 일등, 공부 일등, 섹스 일등 ... 일등만이 모든 인정과 존경을 독점하는 사회! 아렉스는 바로 이런 사회가 길러 낸 괴물, 아니 이런 사회가 낳은 적장자라고 할 수 있지요.  115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느 우리 시대에 대한 비판이 될 수도 있어요. 정치권력에는 개기지 못하니 성적 쾌락에만 몰입하는 시대잖아요. 본디 '코미디'란 금기 체계를 건드려서 희열을 주는 거예요. 광대들은 그 옛날에도, 지엄한 왕에게조차 마음대로 시비를 걸 수 있었어요. 그게 광대(피에로)의 역할이었죠. 결국 코미디는 정치와 성(性), 이 모든 것을 건드려야 재미있어져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적 비판을 제대로 할 수 없어요. 그러니 <SNL>등 온갖 개그 프로그램에 오직 '섹스 코미디'만 오르내리는 겁니다. 알렉스의 경우, <베토벤 교향곡 9번>을 통해 정치적 검열을 당한 거죠. 이제 그는 쫄아서 아무것도 못 할 거예요. 따라서 그에게 남은 건 <싱잉 인 더 레인>의 세계뿐이죠. 미국적 자본주의의 세계, 뮤지컬의 세계 말이에요. 어쩌면 스탠리 큐브릭은 이러한 부분들을 건드리고자 했던 것일 수도 있어요. 어쨌든 알렉스는 정치적 영역에서 거의 '거세'를 당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그는 섹스를 꿈꿀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치유됐다.'라고 선언하죠. 정말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도 이렇게 탄생한 것이구나.'하고 깨달았어요.  121


세뇌는 곧 마비입니다. 자기 스스로 어떤 대상에 다가갈 수 없게, 욕망할 수 없게 하는 거예요. 각종 매체를 통해 획일화된 문화가 대량으로 살포되면서 우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 잊게 돼요.  127


폭력에 무감각해지는 것은 그것에 반복적으로 노출됐기 때문이 아닙니다. 상처 난 데를 또 다치면 아프지, 무감각해지지는 않잖아요. 단지 매체의 힘으로 무감각해질 뿐입니다. 현실의 폭력과 매체가 다루는 폭력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물론 현실의 폭력에 대해서도 무각각해질 수는 있어요. 그러나 이때의 무감각은, 매체를 통해 습득한 무감각과는 완연히 다릅니다.  128


검열의 가장 기본적인 단계가 '타인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해요. 그래서 남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자신의 솔직한 모습, 진솔한 욕망을 방출하거나 표현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129


선택을 할 때는 두 갖를 고려해야 해요. 하나,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방향.

둘, 내 삶을 지금처럼 그대로 유지하는 방향. .. 어떤것을 선택하려면 그 선택의 단점을 모두 감당할 것, 그리고 버린 선택의 장점을 전부 포기할 것! 이 정도는 각오해야 해요.  131





배신하지 않는 동물의 왕국을 꿈꾸는 정치 - <살로, 소돔의 120일> 1975 이탈리아 114분,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파솔리니 감독의 논문 <시의 영화>는 오늘날에도 영화 이론을 연구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문헌으로 통해요.  153


금기라는 주제를 다룰 때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사드 후작이죠.  154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라 할 수 있는 걸 인용해 보겠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쾌락을 느낄 수 있는 건 단순히 육체적 쾌락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떤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들의 말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야말로 성욕, 식욕을 능가하는, 즉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보여 주죠.  160-161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 앎의 의지>에서 권력의 문제를 흥미롭게 성찰합니다. 군주의 주권적 힘을 '생살여탈권'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왕이나 군주가 타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 인간이 타인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면, 그런 권력은 분명 신적인 쾌락을 줄 겁니다. 파시스트들은 이러한 상황에 흥분합니다. 그래서 파시스트가 행하는 권력과 폭력의 강도는 점점 더 세질 수밖에 없어요. 마치 무언가에 중독된 것처럼 말이죠. 맞아요.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에, 그것이 주는 쾌락에 중독되어 가는 거예요.

자본주의도 비슷하죠. 돈이 곧 권력이 되는 시대인 겁니다. 돈이면 못 할게 없다는, 즉 갑질의 야망을 품게 돼요. 타인에 대한 배려는 사라지고,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해지죠. 파시즘이 인종주의로 모든 사유를 차단했듯, 자본주의는 돈을 통해 모든 생각을 단순화합니다. "돈 주면 될 것 아니야!" 파시즘과 자본주의는 모두 '한 가지'로 세상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재편하는, 권력의 놀라운 횡포를 보여 줍니다.  162


파시스트들은 소년과 소녀들을 사물로 취급합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가 아름다은 엉덩이를 선별하는 장면입니다. 인간을 상품으로 보는 거이죠. 이러한 시선은 파싯트만 지닌 게 아니에요. 돈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는 부분이죠.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사물화해요. 그런 면에서 파시즘과 자본주의는 서로 연결됩니다. 인간을 사물처럼 대하는 파시즘은, 생며을 돈으로 환산하는 자본주의와 등가를 이루죠.  165


<살로, 소돔의 120일>은 파시즘의 행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예요. 그런데 이걸 정면으로 보지 못한다면 진짜 세상에 대해선 아예 편히 눈감아 버리게 되지 않을까요.  171


'리베르탱(libertin)'이라는 말입니다. 이걸 검색해 보면 '자유연애주의자'라고 나올겁니다.  174 


우리는 열심히 사랑해야 저항할 수 있어요. 남자가 손을 의연히 들어 올리는 장면, 그게 파솔리니가 말하려고 했던 것의 전부라고 봐요. 파시즘에 저항하지 않으면 우리는 강간당하고 똥을 먹게 되고, 누군가를 고발해 가며 죽여야 해요.  178


온몸으로 체험해 본 우여곡절이 없으니, 남의 이야기만 앵무새처럼 읊조리는 거예요.  186


'절차적 민주주의'라는게 있죠? 이 절차들이 우리를 죽여요. 가령 우리가 시위를 한다고 해 봐요. 헌법에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있으니, 당당하게 해도 될 것 같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도로 교통법'을 더 우선시하죠. 씨발, 이게 뭐야? 그래서 불만을 제기했더니, 옳다구나 하면서 소송을 걸어 보래요. 지금 시위하기도 바쁜데, 대법원까지 가야겠어요? 절차를 복잡 미묘하게 만드는 게, 바로 부르주아 사회의 특징이에요. 

소송이 발생하면 대기업이나 자본가들은 당장 변호사를 사죠. 하지만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변호사를 만날 수조차 없어요. 그러니 소송 과정에서 우리는, 약자들은 진이 빠질 수밖에요. 대기업은 변호사에게 소송을 맡기고 다른 일을 하는데, 우리는 생업을 제쳐 두고 재판에 몰입해야 해요. 설령 소송에서 이기도라도 우리는 망한 거죠. 그중 제일 치사한 게 파업했다고 업무 방해죄로 고소하는 놈들이죠. 정말 법대로 끝까지 가면 결국 노동자가 이길 테지만, 법정에서 소송을 이어 가는 수년 동안 그 사람은 뭘 먹고살겠어요? 어느 광고 문구처럼 '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하는 거죠.  187-188


이탈리아 철학자 중에 그람시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람시가 가장 문제시했던 게 바로 '투표를 통해' 무솔리니를 뽑았다는 사실이었어요. 뻔히 전쟁을 일으킬 미친놈을, 무려 선거로 뽑은 거예요! 우리로 따지면 이명박이나 박근혜를 왜 대통령으로 뽑았느냐, 하는 수준의 문제랄까요. 누가 봐도 정리 해고를 하고 임금 피크제를 시행할 사람들인데도 찍잖아요. 그가 또 지적한 게 있었는데, 이탈리아 대중이 크로체라는 작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었어요. 우리나라에 맞게 말하자면, 왜 사람들이 이문열과 신경숙을 그리도 좋아하는지, 의문을 품었던 거죠. 그러니까 좀 진보적이고 삶에 진짜 도움이 되는 쓰디쓴 이야기는 싫어하고, 보수적이고 대중적이기만 한 글을 좋아하느냐는 거였어요.  193-194


사실 우리가 보는 많은 영화들, 그중에서도 '수직적 관계'를 강조하는 영화들은 몽땅 파시즘적이에요. 남편이 부인을 때리고, 아버지가 자식의 결혼에 반대하는 것도 일종의 파시즘이에요. 파시즘이 아닌 건 '수평적 관계'예요. 가령 파시즘의 허구성을 다룬 게 있다면, 바로 홍상수의 영화예요. 가부장적 권력을 휘두르려는 남자 주인공들이 정말 보잘것없이 그려지잖아요.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정치를 다루지 않더라도 제대로 된 감독들은 다 그런 걸 만든다고요. ..

예술과 인문학의 궁극적 귀결은 자유와 사랑이에요. ..

홍상수 감독은 누가 보든 안 보든, 생활 속의 파시즘을 고발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아요. 반면 이문열과 신경숙의 문학은 비난을 피할 수 없죠. 이문열에게는 뿌리 깊은 영웅주의가 있고, 신경숙에게는 남성에게 복종하며 정신 승리만 해 대는 태도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이야기만 읽으려고 해요. 자신의 얘기, 나를 위로해 주는 이야기만 듣고 싶은 거예요. 비정규직이 많다. 취업이 불안하다. 통탄하면서 오히려 그런 책을 읽죠. 가슴을 후벼 파는 작품은 외면하고요. 결국 똥을 던질 수밖에!  194-195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길 바라는 종교 - <비리디아나> 1961 스페인 90분, 루이스 부뉴엘


그가 극도로 혐오한 것은 종교적 도그마, 맹신주의, 교회의 위선과 억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4


제가 가장 흥미롭게 본 건 '줄넘기'예요. 

첫 번째 장면에서 하녀의 딸이 혼자 줄넘기를 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장면에서는, 비리디아나가 소녀와 함께 줄넘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줄넘기는 숙부가 자살할 때 목을 매는 도구로 쓰입니다. 숙부의 집으로 돌아온 비리디아나가 줄넘기를 목격하고, 곧장 장면이 바뀌더니 다시 줄넘기를 넘는 소녀가 나옵니다. 그때 영기 관리를 돕는 남자 하인이 나타나 소녀를 나무라지요. "왜 죽은 사람이 쓴 줄넘기를 가지고 노느냐."라며 말이죠. 그러자 소녀는 "그건 제 것이니까요."라고 당돌하게 대꾸합니다. 결국 소녀는 아랑곳없이 줄넘기를 넘죠. ..

영화 후반부에 갑작스럽게 줄넘기가 다시 등장합니다. 비리디아나는 숙부의 유산을 가지고, 마을 걸인들과 부랑자들을 모아 일종의 생활 공동체를 만듭니다. 그들 중 한 명이 부엌에 있던 줄넘기를 가져다가 자신의 허리끈으로 사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후 이 줄넘기(혹은 허리끈)는 비리디아나가 부랑자들에게 추행을 당하는 장면에서 또다시 등장합니다. 비리디아나가 완력을 쓰는 부랑자들에게 저항하며 붙드는 것이 바로 그 줄넘기인 겁니다.  221-222


한 사회가 경직되고 금기를 강하게 통제할수록 '이건 꼭 이 방법으로만 써야 한다.'라고 규정을 내려 버립니다. 법의 적용도 마찬가지죠. 사회가 강퍅해지루록 원칙만 강조해 댑니다. 여하튼 사물에는, 근본적으로 맥락이 없어요.  223


줄넘기는 단순한 놀이 기구였어요. 그런데 숙부가 그걸로 목을 매단뒤부터, 줄넘기는 죽음과 관련된 하나의 터부가 됩니다. 이제 줄넘기는 죽음을 암시하는 불길한 대상이 된 겁니다. 하지만 소녀로서는 황당했을 겁니다. 줄넘기는 분명 자신의 소유물이었으니까요. 그러니 무엇이 문제냐며 반문하는 거죠. 이 저항은 뭔가 불쾌하고 미묘한 

느낌을 주는 장면입니다. 이런 느낌은, 영화 후반부에 줄넘기가 부랑자의 허리띠로 전용(轉用 구를전 쓸용)되면서 더 큰 불쾌감으로 증폭됩니다.

줄넘기가 소녀의 손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저 잠깐의 놀이 기구였겠죠. 자살의 도구도, 성폭력의 도구도 아니에요. 그저 하나의 줄일 뿐인데 우리는 이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상한 용도로 사용하지요. 이건 부뉴엘이 사물을 통해 우리의 통념을 흔드는 방식입니다. '줄넘기는 놀이 도구에 불과해.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당신이 장면 장면마다 얼마나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보라고. 당신은 줄넘기를 제대로 가지고 놀 줄도 모르잖아. 줄넘기는 한 사람의 자살 도구이면서, 성적 뉘앙스를 지닌 폭력의 흉기이기도 해. 그게 사물의 본성이야. 사물은 사용하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애초에 부여된 본성은 아무것도 없어.  223-224


부뉴엘은 사물에 대한 의미 부여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소녀와 같은 아이가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흔히 사물에 대한 집착을 페티시라고 합니다. 이 말에는 물건을 신격화하는 미신, 중독적인 욕망까지 아우르는 꽤 광범위한 의미가 들어 있어요. 흔히 페티시즘을 변태 성욕쯤으로 여기는데요. 가령 여성의 팬티에만 유독 집착하는 남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의 욕망을 가리켜 페티시즘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사실 페티시즘은 사물에 집착하는 모든 욕망을 가리켜요. 

비리디아나는 예수의 가시 면류관, 십자가, 칼 같은 것들에 집차과죠. 종교적 집착, 성물(聖物 성스러울성 만물물)에 대한 집착도 페티시즘이에요. 

페티시즘은 단순히 변태 성욕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이 돈을 숭배한다면, 돈에 페티시가 있는 거죠.  ..

페티시는 특정 사물에 집착함으로써 발생하는 다양한 우상화 작업이에요. 

부뉴엘은 이러한 페티시즘이야말로 현대인의 본질이라는 점을 보여준 거죠. 동시에 이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덧없고 무의미한 일인지를 보여 주기도 합니다. 

숙부가 지닌 여자 다리에 대한 집착도 당연히 페티시즘이지요. 페티시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결국 자기만의 우상을 품고 있는 겁니다. .. 줄넘기하는 소녀를 달아야 해요. 사물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저 사물일 뿐이에요.  224-225


비리디아나가 집을 비운 사이에 부랑자들이 만찬을 벌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기념사진을 찍는다며 포즈를 취했을 때 나타난 화면 구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과 똑같습니다. ..

인간은 원본을 훼손시키는 걸 참지 못하죠. 그런데 패러디를 활용하는 예술의 가장 놀라운 점은 원본을 '모독'하면서 전혀 새로운 흥미와 가치를 유발한다는 데 있습니다. 

초현실주의가 기치로 내걸었던 것 중 하나가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수많은 예술적, 미적 영역을 훼손하고 모독하는 것이었어요. 모독이 왜 중요하냐고요? 모독은 우리를 원본주의나 절대주의로부터 자유럽게 해 주거든요. 그래서 대통령을 희화한 작품이 많은 곳일수록 민주적 사회인 겁니다.  225-226


일단 어떤 대상을 비판하려면 거기에 매혹돼야 해요. 대뜸 보자마자 생리적으로 '저건 무조건 싫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대상을 제대로 비판할 수 있을까요? 어떤 대상에 흠뻑 빠져 본 사람만이 안팎을 넘나들며 잘 비판할 수 있어요. .. 최악의 비평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호불호만 던지는 거예요.  228


우리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무조건 착하다.'라는 테제에 빠지기 쉬워요. 부자가 나쁘다는 통념처럼, 가난하고 힘없으면 무조건 착하다는 생각 또한 통념이라는 사실을 부뉴엘은 건드리고 있는 거예요. ..

성직자든 누구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위선적인 모습을 가진다는 겁니다.

약자나 소수자는 (약하고 소수이기 때문에) 선할 수밖에 없다는 진영 논리가 생기기도 해요. 그런데 이러한 논리가 더 위험할 수 있죠. 그들을 위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비좁은 테두리 안에 가두는 일이니까요.  231


라캉은 '여자는 히스테리 환자고 남자는 강박증 환자다.'라고 말했어요. 히스테리라는 단어의 어원은 '자궁'이에요. 엄마 말을 잘 듣던 아이가 갑자기 짜증을 내는 거 있죠. 그런 게 바로 히스테리입니다. 히스테리에 걸리는 사람의 특징은 타인의 욕망만 중시하고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는 데에 있어요. 참고 참다가 갑자기 자신의 욕망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바로 이럴 때를 가리켜 '히스테리를 부린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히스테리가 유독 여자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이라고 굳게 믿다가 갑자기 자신의 진짜 욕망을 발견하는 거예요. 

반면 남자는 강박증이에요. 자기 욕망만 중요하다고 여기죠. 가족끼리 산에 가 보면 정확히 알 수 있죠. 오히려 딸들이 항상 산을 잘 올라요. 가족들한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 남자들은 등산을 하다가 힘들면 중간에 퍼져요. 그러고는 아버지한테 이러겠죠. '아우 씨발, 존나 힘들잖아!' 그러면 가족들이 달래요. 그렇게 법석을 놓아도 남자는 쫓겨나지 않아요. 그게 다 가부장제 때문이에요. 그래서 여자들은 집안일을 도우며 부모의 욕망을 잘 맞춰요. 하지만 아들은 안 그래요.  241


비리디아나의 운명도 행복할 것 같지 않아요. 언제쯤 그녀는 자각하게 될까요? 남자와 자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을, 힘 있는 남자로부터 안전을 확보하려는 자신의 욕망을... 그래서 비리디나아는 숙부가 가장 원하는 모습에 계속  맞춰 주려고 하고, 호르헤가 바라는 모습에 결국 자신을 맞추고 마는 히스테릭한 면모를 보이는 겁니다. 그래요. 우리 모두는 성별에 관계없이 비리디아나인지도 모릅니다. 모 두가 히스테리 증상을 가지고 있는 거지요.  243-244


결혼을 왜 해요? 결혼은 '부르주아 제도'예요. 상대의 '성기'에 대한 독점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거예요. 차라리 연애만 하든가, 쿨하게 헤어지든 해야죠. 나중에 이혼하더라도 위자료를 받으면 괜찮다고요? 여러분의 10년, 20년 세월을 1억, 2억에 팔래요? 그런데 대부분 팔아 버리고 말죠. 지금까지 자신의 성기를 사용해 온 사용료를 모두 받아 내는 겁니다. '애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면서요. 이게 마지막 자존심인데도 품위를 지키긴 힘들죠. 오만 가지 얘기를 다 하죠. 돈 몇 푼으로 뭘 하려고 그래요? 순간적으로 보면 돈을 받는 게 좋긴 해요. 그게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딜레마입니다. ..

독실한 종교인이라면 결혼하지 마세요. 그냥 하나님과 순수한 사랑이나 나누세요. 아가페를 하며 살아요. 모든 신은 강한 남성성을 가져요. 내 남자 친구는 늘 바쁘다 하고, 다른 사람한테 눈도 돌려요. 사람이니까. 그러니 인간한테는 아무리 기도를 해도, 내게 완전히 오지 않죠. 그런데 신은 기도만 하면 내 옆에 있어 줘요.  246


순수가 유지되리라는 생각을 하지 마세요! 순수는 순간적인 것일 뿐이에요. 그게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지나치게 깨끗함만 추구하려다 보니, 아예 자기 영역에 아무도 안 들이는 사람조차 있어요. 오직 자기만의 만족을 위해 순수를 지향하는 건 미친 짓이에요. 환대를 위해 순수를 추구해야 맞죠. '집을 깨끗하게 청소해서 친구가 편하게 지내도록 해야지.'라고 생각해야지, '집이 깨끗이 청소되었으니, 너는 함부로 어지럽히면 안 돼!'라고 하는게 말이 되나요? 누군가가 오면 처오를 해야지 나 혼자 깨끗하게 있으려고 노상 쓸고 닦는다면 미친 거 아닌가요?  248


나를 위한 청소만 하지 말고, 타인을 위해 청소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그때부터 종교가 탄생하는 거예요. 나만을 위한 총소, 나만을 위한 순수, 그것이 바로 종교의 감각이니까요...

또 아이가 새로운 마음으로 집 안을 어지럽히길 바라며 청소를 하는 부모가 돼야 해요. 아이한테 집에 오자마자 '발 씻어! 손 씻어!'하면 그 애가 집에 오고 싶겠어요? 괴로울 뿐이죠. 타인을 위한 순수가, 결국 사랑이 아닐까 싶어요. 사랑엔 분명 순수의 요소가 들어가지만, 사랑 자체가 순수인건 아닌 셈이지요. ..

단순하게 정리해 보자면, 사랑이 싹트는 과정은 '더러워지는 것'이에요. 만지고 더듬고, 키스하고 침을 섞는 과정인 거죠. .. 감염되고 섞여야 해요. .. 표백된 사랑을 순수하고 보면 안 돼요.  248-249


인간은 적당히 위선적이고 적절히 위악한 게 맞아요. 관념이 앞서면 힘들죠. 관념이 생긴다는 건, 사실 인간은 선하지만 않다는 걸 반증하는 거예요.  250


필요한 건 솔직해지는 거예요. 위선적이라는 말 자체가 솔직하지 않다는 뜻이죠. 어떤 질문에 답하기 어려울 땐 어렵다고 말하면 돼요. 솔직한 게 제일 좋아요. 위선적으로 살지 않으려면 '나는 못 생겼다.' '엄청 무식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시인하면 돼요. 순간순간 닥쳐오는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더 나아가 그대로 행동할 수 있다면 정말 괜찮은 사람인 거죠. 어쨌든 완벽하게 위선적이지 않은 사람이 되긴 정말 어려워요.  250-251


남한테 욕을 들어도 되고 인정을 안 받아도 되면 위선적이지 않게 돼요. 타인의 인정, 점수, 평가에 민감할수록 약자이고, 미성숙한 겁니다. '누가 감히 날 평가해?' 라는 생각을 품고 있다면, 여러분은 완전한 자아를 가진 거예요. 불교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해탈이라고 하죠. .. 국가와 체제가 우리를 조련하는 방법이 무엇인 줄 아세요? 상과 벌입니다. 칭찬받고 싶어하고 욕먹는 걸 싫어한다는 점을 이용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그렇게 배워 왔잖아요. 부모, 국가가 원하는 것만 죽어라 하고 살잖아요. 미셸 푸코라면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타인의 칭찬에 기뻐하지 말고 남의 욕에 화내지 말라고요. 그럼 정말 완벽한 거죠. 이게 말처럼 쉽진 않지만요.

칭찬과 비판, 이 모든 것에 너무 큰 의미를 두면 안 돼요. 나보다 힘이 센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위선이에요.  251


좌우지간 욕먹었다고 상처받지 말아요. 전부 잊어야 해요. 무슨 말을 들었든 거기에 휘둘리면 안 돼요.  252





마치 그곳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낯선 곳을 찾아 들어가야 한다. 여행이 주는 달콤함은 우리 내면을 지배하던 신이 사라진 그 자리에 살냄새가 나는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260




OUTRO - 시험해 보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착한 사람은 남의 말을 그대로 듣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을 가리켜 착하고 선량하다고 말한다. 결국 착한 사람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의지에 따라 혹은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규칙을 잘 따르는 사람, 혹은 부모든 선생이든 경찰이든 타인이 금지하는 걸 어기지 않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착한 사람이다. 부당한 조건인데도 계약서만 믿고 묵묵히 일하는 사람, 어른들의 몰상식한 대우에도 참고 따르는 고등학생, 갑작스러운 멀미와 현기증이 찾아왔는데도 노약자 지정석에 앉지 못하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여고생, 후미진 곳에서 오줌을 누라고 해도 화장실이 없다며 고추를 잡고 서 있는 어린아이... 정말 착한 사람들이다. 

사실 착한 사람은 길들여진 사람일 뿐이다. 외부에서 강제한 규칙, 혹은 금기가 아예 한 살마의 내면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이제 외부에서 누군가가 완력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내면에 자리를 잡은 규칙이 착한 사람의 행동을 착하게끔 강제하게 된 것이다. 겉으로 보면 외부의 직접적인 강제가 없기에, 착한 사람은 스스로 양심껏 행동하고 있다고 믿기 쉽다. ..결국 착한 사람은 남이 하라는 것만을 하고,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인생을 주체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느 누구도 그렇다고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다. '자발적 복종' 상태의 핵심은, 바로 '복종'에 있으니까 말이다. 심지어 처음 자신에게 규칙을 강요했던 부모님, 선생님, 혹은 국가 기구가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착한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각인된 초자아의 명령에 기꺼이 복종하며 살 것이다. 다니엘 디포가 쓴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 등장하는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갇히고 나서도 영국에서 통용되던 여러 격식들을 자발적으로 수행했던 것처럼 말이다.  267-268


타인들이 나쁘다고 했을 때에만, 우리의 행동은 타자의 이익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행동이 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 평가에 따라 행동하게 될 테다. 자신의 삶에 진짜 좋은 건지 나쁜 것인지, 혹은 자신에게 유쾌한지 불쾌한 일인지를 알려면, 우리는 어떤 규칙이나 금기에 연연하지 말고 직접 도전하고 행동해야만 한다. .. 우리는 더 당당하게 외쳐야 하지 않을까. '시험해 보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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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선 총서를 기획하며 


혁명의 시대는 과거에 종속되고 미래의 혁명은 메시아적 기다림만을 강요한 지 오래다. 혁명의 불가능한 도래는 기원에 찬 세계의 손아귀를 차갑게 결빙시켰다. 21세기 자본주의의 찬란한 풍요와 자유의 바깥에 거주하는 존재들의 입마저 얼어붙게 했다.  4


혁명은 공동선을 향한 투쟁이다. 차별과 배제으 높은 장벽을 넘어 서로의 손을 맞잡는 공동선을 향한 투쟁. 이 공동투쟁은 잔혹한 자본의 횡포와 불평등을 넘어선 진정한 공동선의 세계를 향해 있다.  5




서문 - 자본의 육체를 절개하는 공동선의 투쟁


지젝은 우리가 자명하다고 믿는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질문을 통해 의미 있는 파열음을 남긴다. ..

도저히 변화가 불가능할 것 같은 이 세계는 지젝의 통찰력 앞에서 맥없이 주자앉고 말며, 지젝의 철학적 메스에 맨몸을 부끄럽게 드러내고 만다. ..

지젝의 이론과 철학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육체에 가해진 메스의 절개 자국에 다름 아니다. 그 절개 자국을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그 흉측한 세계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이 지젝의 책을 읽는 목적이다.  8


지젝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Walls)이다. 

자본가의 착취 방식이 공적 영역(재산)을 사유화함으로써 그 지대(rent)를 물리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 자본가들의 이윤을 남기는 방식이 지적 재산권을 경유함으로써 보다 세련되고 뻔번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자본가들의 지배체제야말로 민주주의를 거스르고 있으며 오히려 여론 독점과 이윤 독식이라는 경제적 독재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9


지젝은 매우 급진적인 반자본주의자이다. 지젝이 가장 위험한 철학자로 불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9


오늘날 새롭게 생성된 아파르트헤이트인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를 가르는 장벽을 부수는 일이야말로 지젝 철학이 향하는 궁극지점이다. 지젝은 오늘날 가장 가난한 살마들은 일을 하는 계층이 아니라 실업자나 배제된 자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노동자 계급이 곧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전통적 좌파의 고정관념을 파괴하기도 한다.  10


유전공학의 발달로 인한 급격한 상황의 변화가 이전의 윤리적 기준을 무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주목한다. 이러한 변화의 중요성은 우리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직까지 잘 모른다는 데서 비롯된다. 이것이 바로 이론과 철학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까닭이다.  10-11


우리가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폭력은 여기에 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라는 것. ..

상존하는 폭력에 노출된 대상은 배제된 자들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이론과 철학의 부재는 포함된 자는 물론이고 심지어 배제된 자들조차 이 세계에 상존하는 폭력의 현실에 대해 인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한다. 이것이야말로 이 세계의 진정한 문제이다.

폭력이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를 가르는 장벽의 원인이자 결과라면, 이것은 필연적으로 공동선의 문제로 귀결된다. 지젝은 공동선을 '공동'가 '선'으로 분리해서 접근한다. '공동'은 보편성의 문제를 함축하는데, 보편성이야말로 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를 가르는 장벽을 허물 수 있는 진정한 해방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11


선과 악을 초월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보편성의 세계가 아니라, '선'의 규준을 투쟁으로써 쟁취하는 '구체적 보편성(concrete universality)'의 세계야말로 좌파에게 주어진 또 다른 실천적 과제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젝은 '선'이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자연보다 앞서서 존재하는 공동선이란 원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12


'선'은 점유, 혹은 투쟁과 쟁취의 대상이 된다. "공동선은 단순히 전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성질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궁극적 '선'은 무엇인가? 이는 물론 배제된 자들의 정치-사회적 침입과 복원이다...

자본주의적 삶에서 최상의 '선'은 물질적 삶의 안정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표면적인 정치적 담론은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은 손대지도 못하고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는 투쟁 정도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어설프게 소비할 뿐이라고 지젝은 비판한다. 그렇기에 지젝은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통해서 진정한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할 수 있으며, 그것을 시도하는 정치-사회적 행위야말로 새로운 '선'의 범주를 형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젝은 1990년 이휴의 모든 것은 새롭게 사유되어야 하며, 대의(cause)를 잃어버린 세계 속에서 새로운 '선'. 다시 말해 새로운 대의를 찾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과업이라고 말한다.  13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지젝은 '빼기'의 폭력으로 귀결되는 첨예한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이 불가능한 것의 장벽을 허무는 이론과 철학의 최전선에 서 있다. ..

바로 공동(the common)의 세계이다. 자본주의 이후의 공동의 세계를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상징계적 억압의 사슬을 끊기 위해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고 재사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계 흐리기는 '가능한 것'의 영역을 보다 확장시킨다.  13-14


지젝은 대타자를 소거한 '빈 공간'을 비록 실패할지라도 반복적으로 점유할 수 있는 윤리적 주체에 대한 뛰어난 정치적 영감을 준다. 이 영감 속에서 쟁취할 수 있는 공동선의 주체야말로 민주주의와 혁명의 실패를 극복하고 자본주의 이후의 공동선을 과감하게 쟁취할 수 있는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지닌 정치적 주체이다.  15


지젝을 알든 모륻든 이 책을 읽어야 하는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했던 이 세계를 철저하게 그 바닥에서부터 다시 사유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15-16






인디고 : 공동선은 개인의 주관적 가치가 보편적인 윤리적 질서와 만나는 지점, 즉 나의 좋음이 세상의 옳음과 맞닿는 곳에서 창조되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공동선은 무엇이며, 이 문제의식의 의의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25


* 지젝은 오늘날 세계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우리가 공통으로 당면한 긴박한 문제(적대)로 아래의 네 가지를 꼽는다. "다가오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소위 '지적 재산권'과 관련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특히 유전자공학에 있어서의) 새로운 기술-과학적 발전의 사회, 윤리적 함의, 마지막으로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 것으로, 새로운 장벅(Walls, 월가)과 빈민가의 , 즉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의 생성"이 그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창비 2010, 182쪽)  26


지젝 : 우리가 어떤 고차원적인 공동선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우리의 은밀한 목적에 의해 정의된다는 점입니다. ..

태양열을 이용한 작은 자가 발전식 집에서 사는 생태적이 ㄴ아이디어를 볼까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다면, 이러한 집은 더욱 많아질 것이고 실질적으로 숲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생태학적 경향에 대한 저의 불신입니다...

저의 기본적인 입장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대로 저속한 조작이나 부패, 권력 싸움 등을 의미하는 정치가 아니라, 지구에 대한 근본적인 결정을 공동으로 내리는 것과 그에 대해 완전한 책임을 지는 삶으로서의 정치 말입니다. 그렇기에 공동선을 '발견'한다고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모든 조화는 부분적인 조화입니다.  27-29


* 지젝은 모순된 양 극단을 '조화'를 이룸으로써 해소할 수 있다는 관념을 거부한다. 한 극에서 반대 극으로의 직접적인 이행은 우리가 '동일화하려는 강박'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 동일성의 틀 자체를 철회함으로써 두 극단의 차이를 구해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도서출판b 2007 238~240쪽)  29


첫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두 개의 극단이 있을 때, 그 둘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조화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개의 극단은 이미 서로의 일부분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30


저에게 있어 진정한 혁명이란, 균형을 맞출 때 그 기준 자체를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31-32


혁명이란 사회의 근본 법칙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32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에도 이러한 비판적 지성인들이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많이 있었지요. 하지만 저는 그들의 방법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지혜에 현대적인 색깔을 입히는 방식을 택했지요. 일본과 중국의 근대화 모델은 아주 흡사합니다. 저는 한국이 이보다는 더 나은 방향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하자면 중국의 온건한 파시즘의 형태, 즉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전통적인 조화와 균형의 개념을 덧붙이면서 지배하는 방식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근대적 교착 상태를 보다 현명한 방식으로 해결하기를 바랍니다. 그저 "조화를 이루는 사회로 돌아가자!"는 식의 구호를 내세우지 않고 말입니다.  34-35


자연보다 앞서 존재하는 공동선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자연은 종잡을 수 없습니다. 자연에는 언제나 재앙이 있습니다. .. 지금의 우리는 사하라 사막이 언젠가는 물로 가득 찬 바다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자연은 결코 균형 잡혀 있지 않습니다.  35


저는 자연적 질서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연적 질서란 재앙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자연적 질서를 따르면 모든 것은 언젠가 폭발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가 윤리의 정치화(politicization of ethics)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단순히 '선'을 향한 의무를 다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이 무엇인지에 대해 답을 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37


* 정신분석학 용어인 대타자(the big Other)는 주체에게 상징적 체계를 강요하는 어떤 질서로서, "대타자는 없다(il n'y a pas de grand Autre)"라는 라캉의 말은 상징적 질서 자체 역시 근본적인 불가능한/외상적인 중핵, 즉 그것이 하나의 허구적 질서라는 사실("오늘날 신이 죽은 것이 아니다. 신은 처음부터 죽어 있었다. 단지 그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 뿐...")을 폭로하는 것이다...(주디스 버틀러외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도서출판b 2009 418쪽 참고, 지젝 <까다로운 주체> 도서출판b 2005 519~520쪽, 또는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한나래 1997 123쪽)  39


* 인터뷰는 슬로베니아의 슬라보예 지젝의 자택에서 2011년 2월 2일과 4일, 이틀에 걸쳐 진행되었다.  40


저에게 정치란 .. 진정한 정치란 종교적, 사회적, 윤리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찾은 후에 이를 정치적으로 구현하는 순서를 따르지 않습니다. 정치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수단과 목적을 구별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제가 말하는 정치란 정확히 말해 의사 결정의 과정에서 모든 것을 문제 삼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41


제가 오래전에 저의 책에서 언급했던 예를 들어보죠. 두 명의 학생이 있습니다. 한 명은 게으른 반면 다른 한 명은 아주 성실합니다. 일반적인 윤리관으로 보자면, 성실한 학생이 게으른 학생을 이길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게으른 학생이 능력을 엄청나게 향상시키는 약을 먹고 조금 공부한 후 성실한 학생을 이긴다면, 당신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약을 금지할 것입니까?

윤리적 기준은 이렇게 바뀌고 있습니다. 비록 저는 하버마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는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바로 약을 복용하지 않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그의 답변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러한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제가 게으른 학생이고 당신이 성실한 학생이라고 가정해보죠. 당신은 열심히 일하지만 저는 약을 하나 먹고 별 노력 없이 당신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낸다고 합시다. 당신은 스스로를 멍청이처럼 느낄 이유가 충분합니다. 약을 먹기만 하면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제가 그 모든 윤리적인 요청을 떠맡으려 하겠습니까? 우리의 근원적 윤리 의식은 이렇게 말하고는 하지요. "자유는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뒤따라온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단련하며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화학적 물질뿐만 아니라 유전자 조작 등을 통해 이 모든 규버모가 윤리가 영향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렇듯 모든 것은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엄청나게 다른 새로운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입니다.  43-44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공동선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변화된 시대에 맞는 공동선에 대한 정의를 먼저 정립해야 합니다... 오늘날 인류가 처한 상황과 관련하여 혼란으로부터 안정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식의 유교적인 패러다임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어떤 안정의 상태를 원하는지 스스로결정해야 합니다. 어떤 것도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45


저는 우리가 다중심적인(multicentric) 세계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47


* 철학자로서의 제 직감은 사실상 우리가 다중심적 세계로 진입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질문이, 그리고 전통적인 좌파들에게는 불쾌할 수 있는 질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Sean O'Hagan, "Slavoj Zizek: interview" 2010)  48



인디고 :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공산주의란 어떤 의미입니까?  51


지젝 : 스탈린의 끔찍한 말이 생각납니다. "만약 당신이 열 명의 삶을 살해한다면 당신은 살인자이지만, 수백만 명을 죽인다면 당신은 역사적인 영웅이다"라는 패러독스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경제적 범죄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10만 달러를 훔친다면 당신은 도둑이지만, 당신이 수십억 달러를 훔치거나 탕진하면, 분명 정부나 은해잉 나서서 도와줄 것입니다.  52


저에게 공산주의는 해답이 아닙니다. .. 여러분이 공동선이라는 개념을 통해 포착해야 한느 것은 그것이 해답이 아니라 문제의 다른 이름이라는 점입니다. 즉,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이 우리 모두의 '공동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레닌주의적 방식이 아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공산주의입니다. 문제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53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믿기지 않을 만큼 부패한 정권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존재하는 역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곳에서는 부패가 실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스템 자체가 이미 부패했기 때문이죠. 다른 나라의 경우, 정치인들이 국가로부터 자본이나 권력을 훔치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왕이 곧 국가이기 때문에 어떤 것도 훔칠 필요가 없습니다. 끔찍한 시스템인 셈이지요.  54


카타르.

하루는 박물관의 큐레이터인 한 여성이 저와 제 아들을 '산업 도시'라 불리는 한 외곽의 지역으로 데리고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마치 강제 수용소와도 같았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군사용 막사가 있었고,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노예로 팔아버린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필리핀, 네팔,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온 이들은 4년 동안 여권을 빼앗긴 채, 마음대로 그곳을 떠날 수초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섭씨 57도까지 오르는 폭염 속에서도 냉방기구 없이 일만 하는 겁니다. 그들이 말하길, 이러한 경우는 아주 일상적인 것이고, 일하고 있지 않을 때 바깥으로 나가면 정말 달걀이 그대로 익어버릴 정도라고 농담을 하더군요. 이렇게 일하고 그들이 받는 봉급은 한 달에 150달러 정도인데, 그들은 식비를 따로 지불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모든 상황을 차치하고 핵심이 되는 건 다름 아니라, 사람들은 이 노동자들이 보이지 않게(invisible) 존재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단 금요일 하루 동안 그들은 나름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금요일이 그들의 유일한 휴일인 것이죠. 그렇다면 고용주들은 그들을 어떻게 가두어둘까요? 아주 기발한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카타르의 권력자들이 담합하여 오늘날 가족이 붕괴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묭일을 순수하게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가족의 날로, 선포하여, 결혼을 하지 않은 미혼남들은 금요일에 그 어떤 가게도 가서는 안 되고, 쇼핑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제한 겁니다. 당연히 그곳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은 미혼남들이니, 신성한 가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이 유일하게 쇼핑을 할 수 있는 금요일을 외출 금지의 날로 만들어버린 것이지요. 이러한 모든 조치들이 바로 사회적 폭발을 축적시키고 있는 행태들입니다. 카타르, 아부다비, 두바이 등지에서 나타나고 있는 시스템은 결국 하나의 노예 제도와 같고, 이것들은 결국 폭발하고 말 것입니다.  55-56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매 경우 파시즘의 발흥은 실패한 혁명을 증언한다"고 말이지요. 이 말은 오늘날의 상황에서 완벽하게 옳고 또 적실한 진술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중도 자유주의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세속적 좌파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혁명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제가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을 주깅는 그러한 혁명이 아닙니다. 심지어 자유와 같은 자유주의의 유산을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은 오히려 급진적 수단을 갖는 혁명적 좌파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59


새로운 형태의 독재는 예전처럼 규율과 질서가 지배하는 모습일 수 없습니다. 이상하게 보이는 이 사회에서는 소비주의와 사적 영역이 보장되면서, 성적 자유뿐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어요. .. 

저는 여성을 강간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에 대해 논쟁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논쟁해야 하는 사회는 도대체 어떤 사회입니까? 저는 강간이 역겹고 정신 나간 짓이라고 여겨지는 그러한 사회에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오, 강간은 안 돼요"라고 순진하게 말만 하는 그러한 사회에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건 가당찮은 것입니다. 이 같은 논의는 인종주의, 파시즘 등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62


한 사회의 윤리적 수준을 측정하는 척도는 이러한 것들이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문화될 필요도 없는 원칙들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인가 아니가 하는 것입니다. ..

저에게 있어 정상적인 사회란 누군가가 "강간을 하고 싶어"라고 말했을 때 이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정신 나갔어?"라며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는 그런 사회입니다.

유럽 사회를 보면 이러한 윤리적 표준은 급속도로 저하되고 있습니다. 20~30년 전에는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던 것들이 현대에는 점차 수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20~30년 전에는 극우파의 경우 권력의 장에서 완전히 축출당했습니다. 그들은 혐오의 대상으로 여겨졌죠.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의 외르크 하이더, 프랑스의 르 펜 등으로 대표되는 모든 작은 신파시즘 정당들과 우리는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고, 그들은 관용으로 받아들이긴 하지만 그들이 권력을 잡는 것은 아예 생각할 가치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러한 표준이 점점 낮아지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유럽의 대다수는 파시즘이 나쁜 것이라는 데에 이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제 이러한 구분은 적용되지 않고 있어요.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곳곳에서 그들은 갑자기 인정받고 있습니다.  64


저는 진정 우리가 잠재적 위험으로 가득 찬 혼동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주목하는 것은 파시즘과는 다른 새로운 것입니다. 새로운 형태의 독재 사회 말입니다.  65


어떤 좌파들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알고 있고, 단지 사람들을 어떻게 동원할지를 모를 뿐이다"라고 말하지만, 제가 보기에 우리는 정말 알지 못합니다. ..

우리느 이론과 철학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진정 그렇습니다.  67


오늘날은 이론의 시대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68


우리가 포스트모던 사회라는 근사한 말로 표현하는 이 시대의 장점 중 하나는 더 이상 해묵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ㅇ낳는다는 것입니다. 이전 시대에는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시기를 거쳐야 돼"라고 하면서 묵묵히 하나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지름길이 가능해졌습니다.  69


포스트모던화된 자본주의의 긍정적인 결과입니다.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지요. ..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심지어 작은 국가의 국민들도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70


우리는 이렇게 변화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주목해야만 하는 시대를 맞이한 것입니다.  78


거시적인 시각에서 볼 때, 세계화는 우리 모두가 햄버거를 머겍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계화는 진정한 전 지구적 영토가 탄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79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실제로는 그렇지 ㅇ낳다고 하더라도 믿음의 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중요한 사안입니다.  90


왜 다른 이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들에 그토록 신경을 쓰는 걸까요? 진정 자존감이 강하고 독립적인 사람은 그런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지요.

예를 들어 우리 안에 반역자들이 있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비밀 경찰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도청 당하고 있을지도 몰라. 공개적으로 토론해도 될까?" 따위의 걱정을 하는 겁니다. 이러한 사람드에게 제가 제안하는 모델은 이렇습니다. 물론 이건 다소 지나치게 인종주의적인 예시입니다만, 미국 남북 전쟁이 있기 전, 1850년대에는 인종차별주의가 아주 극심했습니다. 예를 들어 보죠. 사창가에서 백인 매춘부와 남성 고객이 섹스를 하는 중에, 흑인 노예가 음식과 차를 들고 방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들은 섹스를 멈추지도 않았고, 그의 존재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어요. 백인들은 흑인 노예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자신들의 성행위를 쳐다보아도 멈추지 앟은 것이고, 또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백인들이 흑인들을 이렇게 바보라고 생각한 것과 같이, 우리도 비밀경찰을 마치 흑인 노예와 같이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밀경찰이 우리의 이야기를 훔쳐 듣고 있다고 한들, 신경 쓰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무슨 상관입니까?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무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밀경찰의 가장 큰 실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겁니다. 비밀 따위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에게 숨겨진 계획이나 음모가 있는지 찾아내려 하고, 그러면서 에너지를 낭비하고 앉아 있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공개되어 있는데 왜 이러한 짓을 하는 겁니까? 이것이 좌파의 은밀한 저항 방법이 되어야 합니다. 즉, 어떤 것을 숨기는 방식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숨기지 않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마치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것처럼 혼란을 주는 방식 말입니다.  92-93



사실 학생들에게 직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글쎄요. 대다수는 어떻게든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아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학생들에게 말해주어야 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이것이 문제가 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점을 두고 생각하는 바는 이 모든 것을 겸비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런저런 연구원이나 과학자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곳에서 무언가 좋은 일을 할 수 있을것인가가 중요하지요.  97


* 볼로냐 개혁은 유럽 29개국 교육부 장관들이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확립한 유럽대학들의 대학교육 개혁을 뜻한다. 이 개혁의 핵심에는 대학이 경쟁력 있고 쓸모 있는 전문가들을 양성하여 사회으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지젝에 따르면 이러한 시도는 '사유'의 진정한 임무를 상실한 처사이다. 진정한 사유란 사회가 던진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를 인식하는 고유의 방식을 '재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고등교육의 목적을 사회적으로 쓸모 잇는 전문가의 생산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이러한 행위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내에서 칸트가 말한 "이성의 사적 사용"과 관련한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98


진정한 사유란 무엇입니까? 사유라는 것의 일차적인 단계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진정 문제 상황인가", "이것이 문제를 드러내는 올바른 방법인가",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는가" 등의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

사유한다는 것은 그 이상의 것들, 즉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문제를 그저 표면적으로 받아들여서 해석하고자 하는 전문가들이 아니라, 각각의 영역에서 문제를 근본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98-99


사람들 곳에서의 어떤 양극단, 즉, 이러한 사안들에 관심을 갖고 의식적으로 개입하는 소수의 사람들과, 자신의 일에 치여 그저 타인의 의견을 따르는 대다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100


'새로운 노동자 계급'과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혁명의 주체는 제가 '프롤레타리아적 입장(Proletarian Position)' 이라고 부르는 위치를 스스로 점유하고 체현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101


제가 지적하는 바는 가능한 프롤레타리아적 입장들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프롤레타리아적 입장이라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103


마르크스의 시대에는 프롤레타리아가 아주 진중한 성격들로 특징지어졌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가장 가난한 계층이자,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사람들로서 부를 창출하는 계층 등으로 규정되었죠. 오늘날에도 그들은 이러한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더 이상 하나의 주체로 수렴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일을 하는 계층이 아닙니다. 실업자나 배제된 자 등이 가장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의 주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지요. 우리는 다양한 프롤레타리아적 입장에 처한 사람들로 이들을 봐야만 합니다.  107


저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즉 노동 착취등의 오래된 관념에 대해 재고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완전히 새로운 지평에서 다시 사유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09


배제(exclusion)의 문제를 발견합니다. 여기에서 배제의 문제는 오래된 노동자-자본가 사이의 계급 구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공적인 영역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문제를 의미합니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가 쓴 책을 보면, 여전히 10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슬럼 지역에 살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중국의 경우 이러한 슬럼가가 점점 더 빠르게 늘어나고 있죠. 슬럼이라는 것은 흥미로운 사회적 현상입니다. 우리는 완벽한 통제와 관리가 이루어지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한 국가각 영토의 꽤 큰 부분을 통제 바깥의 출입금지 영역으로 두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110-111


제가 믿지 않는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이 최악의 환경에 처할 때, 분노가 폭발할 것이라는 단순한 인과관계입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것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입니다. 모든 성공한 혁명을 보면, 권력이 힘을 잃게 될 때 일어납니다. ..

혁명이 일어나는 경우는 첫째, 사람들이 빈곤 상태에 있을 때, 그리고 둘째로는 사람들이 부정의한 상황을 경험할 때 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부정의하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적 자유라는 최소한의 공간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유가 작동한다는 것은 부정의한 상황에 대한 지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122


사회적 안전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최소한의 안전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분노를 폭발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변화는 최악의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124


사람들은 대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않습니다.

제 비전은 주권 국가 없이 존재하는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권력을 갖고 이를 분해하는 기구나 집단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127


저는 제 친구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입자엥 동의합니다. 바디우가 레닌의 말을 인용하며 말했죠.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 말은 20세기 이래 지속되어온 자퐈가 비록 영광스러운 순간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와는 절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130


1990년도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모든 사회적 모델들, 즉 공산주의 국가 형태, 조금 완화된 사회민주주의 형태, 직접 민주주의 모델 등은 모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 모든 것을 새롭게 사유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변하는, 완전히 새로운 자본주의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131


제가 보기에 서구 사회는 현재 지나치게 나르시시즘적인 사회가 되어가고 있고, 자신의 정체성을 안전 속에 가두려고 하며, 심지어 이러한 열정적인 섹스, 사랑을 동반한 섹스, 자신을 상대에게 내어주는 이러한 행위들로부터 멀어지려 하고 있습니다. 섹스는 좋지만, 적절히 조절을 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위대하며 동시에 가장 추악한 것임을 알고 있죠.  135-136



희망이란 모든 가능성들에 열려 있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지를 모르는 겨웅 정권은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희망과 혼란이 공존하는 시점에서 더 나쁜 정권이 자리 잡을 수도 있지요.  147


항상 희망 뒤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상황은 매우 복잡하죠. 그 어떠한 정치적 운동도 간단하게 재단해버릴 수 없습니다.  148


만약 당신이 변화가 실호다고 한다면 혼란이 야기됨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결국 상황은 궁극에 가서 폭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위험이라는 좁다란 길을 걷지 않으려 할 때 발생하는 더욱 위험한 상황입니다. 큰 위험이 따르긴 하지만 바로 그곳에 희망이 있는 것이지요. 저에게 진정한 희망이란 위험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

역사는 희망과 위험을 동반한 상황을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이며, 무엇을 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151


신적인 차원의 기적이 아니라, 난데 없이 불쑥 무언가가 벌어지고 새롭게 나타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의 기적 말입니다. 그 어떤 것도 예견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에게 정치적인 기적을 선사할 것이고, 저는 여기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155


폴란드의 솔리다르노시치(폴란드의 노동조합으로 1980년 9월 레흐 바웬사가 창설한 단체. 독립자유 노동조합 연대라고도 불린다. 옛 공산국가에서 일반적으로 노조는 국가에 속해 있던 것과 달리, 노동자들이 운영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주장했다. 또한 솔리다르노시치는 공산주의 국가에 자리 잡은 첫 비공산주의 노동조합으로서, 1980년대에 광범위한 반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솔리다르노시치는 전통적인 노조로서의 위치를 지켜왔으나 현재는 정치적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한 상태이다.)에 대항하여 일어난 쿠데타를 기억하시죠? 폴란드의 제 친구가 말하길, 이것은 단순한 공산주의자들의 폭압이 아니었습니다.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폴란드의 군인, 정치인이자, 전 대통령. 1980년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 노조 총파업에 대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다수의 지도자를 구속하는 등의 강경책을 펼쳤다. 1988년 치솟는 인플레이션으로 폴란드의 경제가 흔들리자 그동안 불법단체로 규정했던 자유 노조와의 협상을 받아들여 이를 합법화하고 솔리다르노시치 연합 정부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의 쿠데타 이후에 공산주의자들은 힘을 얻게 되었죠. 물론 쿠데타는 원시적인 성격을 띠긴 했지만 효과적이었습니다. 정치적인 활동은 억압받았지만 마약과 포르노그래피는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죠. 그들은 심지어 불교 명상 수련을 하는 곳까지 지원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젊은이들로 하여금 정치적인 이슈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 겁니다. 단적으로 종교, 마약, 섹스는 많은 이들을 탈정치화(depoliticize)하는 데 아주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지요.  159


* 탈정치란 이데올로기의 종언 이후, 더 이상 좌파와 우파 사이의 정치적 투쟁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고, 실제적인 행정과 경제 논리에 의해 정치가 대체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을 가리킨다.(이현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2011 204쪽 참고)  159


관념적인 불만을 갖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입니다... 최소한의 유토피아적인 계획이나 목적 없이 순전한 폭력의 분출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것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징후라 할 수 있습니다.  162


제가 생각하는 논리는 이러합니다. 첫째, 보이지 않는 폭력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납니다.  167


두 번재 지점은 바로 이것이 진정한 혁명이 발발하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킬 때, 그들은 대개 폭력적입니다. 물론 과잉 폭력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극히 주변부의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168


상황을 상상해보십시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나 여인이 갑자기 죽거나, 한순간 사라지는 것을 상상할 수는 있습니다. 이는 물론 충분히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죠. 하지만 나에게 절대적으로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이 어딘가로 끌려가서 강간이나 고문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당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낄 때, 이는 더없이 견디기 힘든 끔찍한 고통입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최악의 끔찍한 고통입니다. 그러한 상황이라면 당신은 맞서 싸워야만 합니다. 시위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외신 기자들까지 모두 부르는 등 효과적인 방법으로 싸워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간수를 거리에서 알아볼 수 있다면 즉각적인 대응을 해야만 합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제가 보기에 이러한 대응은 사실 충분히 적법한 것이라고도 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폭려겡 관한 두 가지 결정적 지점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첫째, 폭력은 이미 여기에 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 폭력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폭력이 언제나 있으며, 이를 내재한 그 자체의 방식으로 평화롭게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둘째, 시민불복종과 같은 형태의 폭력과 잔혹한 물리적 폭력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즉, 자신들의 권리를 구현하고 사회적 요구를 관철시키는 방식으로써 권력을 무시하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아주 확실한 무기이며, 점점 더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나아가 국가는 결코 상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국가란 그 작동이 위협받거나 기능하고 있다고 인식될때에만 제 구실을 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결국 많은 이들이 권력을 무시하기 위해 스스로 조직을 구성할 때, 사람들은 엄청난 힘을 갖게 될 것이고 국가는 변화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173-176


권력을 무시하고 혹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덤덤한 행위를 통해 불가능한 혁명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180


때때로 방어적 폭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꼭 기억해야 하는것은 폭력을 사용할 때 그것이 좋은 의도에서 대응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기본 입장이어야 하고, 이 지점에서 진정한 좌파를 해방적 반란군과 동일시 할 수 있게 됩니다.  185-186


탁월한 투쟁 방식의 기획이 진정한 좌파에게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설령 갈등이 있다고 하여도 배제적인 방식을 결코 택하지 않는 것이지요. 대의나 소명 의식하에, 함께 같은 길을 가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우리'에 속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함께 가자"고 외치는 방식. 이것이 진정한 좌파의 기획이 되어야 합니다.  187


* "루소는 이기주의를 자기애(amour-de-soi)와 자존심(amour-propre)으로 구분했는데, 전자는 있는 그대로의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인데 반해, 후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을 도착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 후자가 강한 사람들은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데 장애물이 될 법한 것들을 제거하는 데 집중한다. 따라서 악한 살마은 이기주의자(egoist)가 아니다. 이기주의자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이기주의자는 자기 이익에 신경 쓰기도 너무 바빠서 남들에게 불행을 일으킬 만한 여유가 없다. 나쁜 사람의 가장 중요한 악덕은 바로 그가 자기 자신보다 남들에게 더 몰두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루소가 묘사하는 것은 바로 리비도의 메커니즘이다. 리비도의 투여 대상이 목표물에서 장애물 그 자체로 바뀌는 전도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근본주의자들의 폭력에도 아주 잘 들어맞는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136-137쪽)  188


우리는 도덕화(moralization)의 방식이 아니라 구조를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190


헤겔이 '구체적 보편성(concrete universality)'(헤겔의 '구체적 보편성'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는 일련의 추상적이고 중립적인 특성이 아닌, 매번 새로운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재정의되어야 하는 '편파적' 보편성을 의미한다. 즉, 지젝이 말하는 특이성(singularity)을 포함한 보편성이 곧 구체적 보편성이다.)이라고 부른 교훈을 적용해 보고 싶습니다. 여기에서의 보편성이란 결코 중립적이지 않은 어떤 것입니다.  191


저는 보편성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192


양쪽의 시각 모두에서 자기비판을 하는 것이야말로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다문화주의적 소통입니다...

정반대의 사유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통합하고 싸워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비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편향된 사고방식인 겁니다.  194


공동선은 저에게 '자유를 향한 공동 투쟁'을 의미합니다. 약자를 배제하거나, 상대를 죽이는 방식의 투쟁이 아닙니다. 혹은 총격을 가하는 식의 폭력도 아닙니다.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의 허약한 지점을 뚫고 가는 것이죠. 제가 해답을 제시할 수는 없겠지만, 이 주제는 매우 중대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조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5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비판을 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를 비판할 수 있다는 조건하에서 말이죠. ..

우리는 모두를 비판해야하고, 저는 당신의 사회를 비판할 권리를 가지고 있고, 당신 또한 그러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매우 생산적이기 때문입니다.  196


우리는 서로를 무작정 존중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 자신을 바로 그 논의의 장 속에 위치시키는 것입니다. ..

오래되었지만 제가 좋아하는 문장은 이렇습니다. "보편적 선(좋음)을 향한 유일하게 훌륭한 길은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바라볼 때, 이방인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보고 또 상상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인류에게 가장 훌륭한 사유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결코 자신만의 관점에 스스로를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그릇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에 기반한 문화다원주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197-198


우리 스스로가 이방인이 되어봄으로써 어떻게 공동선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 

저는 미국이나 UN의 접근 방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문화, 인류, 역사 등의 이름을 달고 출판하는 책들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지요. "세계 곳곳에 얼마나 아름다운 문명이 꽃피우고 있는가?" 따위를 말할 뿐이죠.   201


인디고 : 지금 이 시대가 '이론의 시대'라고 한다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이론적 질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젝 : 우선 사회적 맥락의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실천을 위한 질문입니다. 두 종류의 질문이 가능합니다. 첫 번째는 실천적 질문입니다. 사회민주주의는 딱히 실패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공산주의의 실패 혹은 지방자치에 기반한 직접민주주의 등이 실패한 지금, 우리는 어떤 진정한 대안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202


우리는 진정 어떠한 정치적 모델이 이를 대체할 수 있을지 명확히 알지 못합니다. ..

오늘날 '인간됨(Being Human)'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앞서 언급하였듯이, 유전자 조작이나 생태계 파괴 등은 인간됨에 대한 근본 개념을 바꾸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인간됨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게 할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당신의 물리적. 정신적 속성을 변화시키고 조작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죠. 이렇게 되면 우리는 한계를 넘어선 큰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보다 더 종속적인 존재가 되고, 더 취약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메도 우리는 이에 대한 그 어떠한 윤리적 규준 혹은 지침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문제가 연결되어 있는 상황이 제가 생각하는 중요한 문제 지점입니다.  205-206


우리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둘은 아주 이상한 구분에 의해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오늘날 인간 사유의 궁극적인 과제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한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

'불가능한 것'들이 분명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종교적인 기적과도 같은 불가능성이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과 사회 조직 내에서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러한 불가능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206-207


우리는 분명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경계를 흐려버리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를 재정의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생각하는 가장 중대한 과제입니다. 사유의 방식을 재정의하는 것(redefine), 그리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를 재사유(rethink)하는 것 말입니다.  209




기고문 - 상황은 파국적이지만, 심각하지는 않다.(슬라보예 지젝)

 

우리 모두는 곧 닥칠 생태적, 사회적 파국에 대해 알고 있지만, 이를 짐짓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물신주의적 분열(fetishst split)(혹은 물신주의적 부인(Verleugnung))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나는 잘 알고 있어, 하지만...(나는 사실 그것을 믿지 않아)"와 같은 반응이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은 우리가 보고 아는 것들을 부정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힘에 관한 확실한 징표이다.  219


1922년, 온갖 난관을 뚫고 내전에서 승리한 후, 볼셰비키가 시장 경제와 사유재산을 한층 더 폭넓게 허용하는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으로 후퇴를 감행해야 했을 때, 레닌은 [고산등반(高山登攀 높을고 뫼산 오를등 더위잡을반)에 관하여]라는 짧은 글을 썼다. 그는 혁명의 과정에서 후퇴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산 정상에 오르려는 첫 시도가 실패하여 골짜기로 후퇴해야만 하는 등산가의 비유를 사용한다. ..

레닌은 소비에트 국가의 성취와 실패들을 열거한 후에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환상을 품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며, 극도로 힘든 과업에 다가서면서 몇 번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to begin from the beginning)' 힘과 유연성을 유지하는 공산주의자는 운이 다하지 않는다(그리고 십중팔구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

베케트의 <최악을 향하여(Worstward Ho)>에 나오는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는 구절의 울림을 지닌다. 레닌의 결론 - "몇 번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라" - 은 그가 말하는 바가 단지 진보의 ..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즉, 우리는 지난번 시도에서 도달하는 데 성공했던 지점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용어에 따르면, 혁명적 과정은 점진적인 진보가 아니라, 반복적인 운동, 몇 번이고 다시 시작을 반복하는 운동이다.  219-221


알랭 바디우는 혁명적 - 즉, 급진적인 해방적 - 운동이 실패하기 위한 세 가지 분명한 길을 지적한다. 첫째, 당연히 직접적인 패배가 그것이다. 즉, 적군의 힘에 의해 그야말로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다. 둘째, 승리 자체에 내재한 패배가 있다. 적의 주요 권력 의제를 점령함으로써 (최소한 일시적으로라도) 적을 포섭하는 것이다. (의회-민주적인 방법이나 정당과 국가를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는 방법을 통해 국가 권력을 쟁취하느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길 위에, 아마도 가장 확실한 그러나 가장 공포스러운 형태의 실패가 있다. 즉, 새로운 국가 권력의 형태로 혁명을 경화(硬化 굳을경 될화)하려는 모든 시도는 혁명의 배반과 같고, 진정으로 대안적인 사회 질서를 발명하지도, 또 사회 현실에 이를 적용하지도 못한다는 올바른 직관에 따라, 혁명적 운동은 전적으로 파괴적인 테러에 의존하는 극좌(ultra-lefttist)에 의해 자신의 순수성을 보호하려는 필사적인 전략에 열중하는 것이다. 바디우는 적절하게도 이 마지막 형태를 "공백의 제의적 유혹(sacrificial temptation of the void)"이라고 부른다.  222


바디우가 사실상 말하고 있는 것은 .. 우리는 이기는 것(권력을 갖고, 새로운 사회정치적 현실을 건설하는 것)을 두려워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224


오늘날의 과제는 국가 권력의 영역 밖으로 물러나서 그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빼내고, 권력의 통제 바깥에 새로운 공간을 창조함으로써 국가 권력에 대항하는 것이다.  224-225


20세가 공산주의의 결정적 특징으로 여겨지는 정당-국가의 공식을 보다 복합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정당과 국가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있어왔다. 정당은 국가 구조를 더욱 강화하는 반쯤 가려진 외설적인 그림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국가에 거리를 두는 새로운 정치를 요구할 필요는 없다. 정당이 바로 이 거리이다. 정당 조직은 국가와 그것의 기구 및 작동 기제 등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불신을 구체화하고, 마치 그것들이 통제될 필요가 있다는 듯 항상 감시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20세기 공산주의자는 결코 국가를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에겐 언제나 (국가) 법의 통제로부터 벗어나서, 국가에 개입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감시 기구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225


좌파는 다른 전략을, 즉 겉으로는 보다 온건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훨씬 더 급진적인 전략을 채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전략이란 국가 권력으로부터 독립하고, 사회 구조 전체를 지탱하는 일상의 실천들인 사회적 삶의 고유한 구조 자체를 직접적으로 변형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존 홀러웨이(John Holloway)에 의해 아주 정교한 형태로 제시되는데, 그가 던진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하면 권력을 쟁취하지 않고 혁명할 수 있는가?"  226


독재 정권이 최후의 위기에 직면하게 될 때, 정권의 몰락은 대체로 두 단계를 거친다. 먼저 실질적인 붕괴에 앞서, 설명하기 어려운 파열이 생겨난다. 갑자기 사람들은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것을 감지하고, 이제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이는 정권이 합법성을 잃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의 권력 행사 자체도 무력한 공황 반응 정도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242


오늘날 유일하게 진정한 질문은 이것이다. 자본주의의 압도적 자연화를 승인할 것인가? 오늘날의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그것의 무한정한 재생산을 막기에 충분히 강력한 적대를 내포하고 있는가? 내가 보기에 그러한 적대에는 네 가지가 있다. 1) 다가오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2) 소위 '지적 재산권'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사유 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3) 새로운 기술 과학의 발전(특히 유전자공학)이 갖는 사회, 윤리적 함의, 4) 마지막으로 그러나 앞의 것과 같이 중요한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 새로운 '장벽들'과 슬럼의 생성이 그것이다. 마지막 특징 - '포함된 자'로부터 '배제된 자'를 분리하는 간극 - 과 앞의 세 가지 특징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 세 가지 특징은 네그리와 하트가 '공통적인 것'이라고 부른 영역 - 우리 사회적 존재의 공유된 실체로서 그것의 사유화는 필요시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저항해야 할 폭력적인 행위를 포함하는 - 을 나타낸다.

 - 문화의 공통적인 것. '인지적' 자본의 즉각적인 사회적 형태, 기본적으로 언어, 소통과 교육의 수단, 하지만 또한 공공 교통, 전기, 우편 등의 공유된 사회기반시설. (만약 빌 게이츠에게 독점이 허용되었다면, 사적인 개인이 우리의 기본적인 소통망의 소프트웨어 기반을 말 그대로 소유하는 부조리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 오염과 착취에 의해 위협받는 (석유에서부터 열대우림과 자연의 서식지 자체들까지) 외적 자연의 공통적인 것.

 - 내적 자연의 공통적인 것(인류의 유전공학적 계승)-새로운 유전공학 기술과 함께, 인간 본성을 바꾼다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갖는 '새로운 인간'의 창조가 현실적인 전망이 된다.  252-254


공산주의라는 관념의 소생이 정당화되는 것은 '공통적인 것'에 관련해서다. ..

오늘날의 역사적 상황은 프롤레타리아나 프롤레타리아적 입장과 같은 개념을 폐기할 것을 강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 개념을 마르크스의 상상력 훨씬 너머 실존의 차원으로 급진화할 것을 강요한다. 프롤레타리아적 주체에 관한 보다 급진적인 개념이 필요하다 ..

이러한 이류로 새러운 해방적 정치는 더 이상 하나의 특정한 사회적 주체의 행위가 아니라, 다양한 행위자들의 폭발적 결합이 될 것이다. 우리를 결속시키는 것은 "잃을 것이라고는 족쇄밖에 없는" 고전적인 프롤레타리아의 이미지와는 반대로, 우리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모든 실체적 내용을 박탈당하고, 상징적 실체를 빼앗기고, 유전자적 토대는 조작당하고, 그리하여 생존 불가능한 환경 속에서 연명하듯 살아가는 텅 빈 추상적 데카르트적 주체로 전락하리라는 것이다.  254-255


"현실주의자가 되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오늘날 진정한 유토피아는 현존하는 체계의 신중한 전환을 통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현실주의자의 유일한 선택지는 이 체계 내에서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을 실천하는 것뿐이다.  256


* "'현실주의자가 되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는 68년의 낡은 구호는 여전히 유효하다는게 나의 굳은 확신이자 정치적-실존적 전제다. 진정한 유토피안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우리에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가져다 줄 성형 수술 이상의 어떤 것에 이를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지평 내에서의 변화와 재의미화를 옹호하는 이들이다." ([자리를 점유하기] ,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441쪽 참고)  256


우리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하는 것은 정치를 모든 긍정적인 기획을 포기하면서, 단지 최악의 선택을 피하고 차악을 선택하는 것으로 전락시키는 피해의식(victimhood)에 가득 찬 자유주의적 이데올리기이다. 만약 우리가 이를 거부하지 못한다면, 빈 출신의 유대인 작가 아서 펠트만(Arthur Feldmann)이 통렬하게 지적했듯이, 우리가 생존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우리의 삶이 될 것이다.  257




슬라보예 지젝 전화 인터뷰 - 2012. 2. 3.


월가점령 운동이나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위, 그리고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는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제 기본적인 입장은 다소 부정적입니다.

첫째, 여러 움직임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는 하였지만, 많은 대중적 운동들은 여전히 단일한 사안을 목적으로 삼은 운동들이었습니다. 심지어 급진적인 좌파들의 경우에도, 이라크 반전 시위, 반인종주의, 여성 인권 운동 등과 같이 기존의 구조 안에서 혁명을 외치는 것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움직임들은 근대 역사상 최초로 총체적인 대상, 즉 구조 자체를 문제 삼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

근본적인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구조 자체에 결함이 있다는 지적이지요. 이러한 통찰은 이론적인 이유에서도 아주 결정적인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아마 이것이 더 중요한 지점일 텐데요. 지금 윌가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시스템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에) 불충분하다는 점입니다. 현재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못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제어하기에는 그 힘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260-261


이 시스템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 문제 상황은 끊임없이 반복될 것입니다. 어찌보면 이러한 상황에 우리가 익숙해져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위기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말이지요. 옐르 들어, 글로벌 시장의 구조를 재구축한다는 명목하에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내고, 아웃소싱을 도입하는 등의 노력을 아무리 하더라도, 미국이나 유럽의 실업 문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은 결코 충분치 않아요.

결국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대한 완전한 해결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저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러한 문제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느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분명 급진적인 변화는 가능할 것이라 봅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단순히 새로운 정부를 선출하기 위한 참여 따위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제가 목격하고 있는 비극이란, 이 모든 위기의 원인을 제공하였던 바로 그 인물들을 우리가 여전히 믿고 있다는 점입니다...제가 보기에 우리는 아직 이 위기의 해방구 근처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262-263


우선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에게 시위나 행동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제대로 사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잇는지를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현재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적과도 같은 대중들의 폭발적 운동이 단숨에 사라지지 않을 근본 토대를 탄탄하게 구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구체적인 사안들을 골라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항하여 싸울지를 결정한 후에 대중적인 운동을 조직하는 겁니다. 이것이 훨씬 현실적인 변화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263-264


파국적인 사건들과 관련하여 늘 우리가 듣는 종말론적 이야기들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넘쳐나는 파국론(catastrophism)의 근본적인 역설은 여기에 있습니다. 즉, 진짜 위기에 대한 인식을 흐리게 하면서, 정작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65



저는 혼자 지내는 것이 좋아요. 혼자 있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세계 여행을 다니면서 어느 순간 제가 혼자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순간입니다.  270


철학자가 되고 싶다면 밤을 지새우면서 일을 하고 또 이것을 즐길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271


이 길이 옳다는 생각이 들면 철저히 그 길에 몰두해야 합니다. 

열심히, 열심히, 또 열심히 해야 합니다.  272





인터뷰 - 보편을 향한 해방 (알렌카 주판치치)


어떤의미에서든 공동선을 재정의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시도해야 합니다. 공동선은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고, 때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공동선은 두말 할 것 없이 굉장히 복잡한 개념이죠.  278


'선'에는 두 가지 층위가 있습니다. 먼저 식량이나 사회보장제도와 같이 매우 실제적이고 우리 삶에 필수적인 '선'의 형태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 우리가 '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은 엄밀히 말해 그것이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것일 때에만 가능한 것들입니다. 말하자면 이는 앞서 언급한 필수적인 요소들을 소유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공유하고자 하는 해방적 사유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선' 이라고 하는 것은 '공동적인 보편성(common universality)'이라는 패러다임에 속하는 것이며, 해방정치학과 같은 담론의 영역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279


이미 정립된 선의 개념을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향하고 있는 보편적인 운동 자체에 내포된 '선'의 개념을 도출하는 겁니다.   280


깨어 있는 의식을 갖는 것 말입니다.  282


공동선은 정치적인 실천입니다... 해방적, 참여적 실천인 정치 없이 윤리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

실천은 근본적으로 구체적인 것이며, 이 세계 내에서의 존재 방식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286


실천을 정치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실천을 하는 사람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외면하면서 "나는 세계를 위해 나름대로 좋은 일을 실천하고 있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실천한다는 것에는 두 가지 층위가 있는 것이지요. 우선 세상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듣고 경험하고 또 생각해야 하며, 그리고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생겨나는지 알아야 하는 겁니다. 물론 결과를 통제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이렇게 결과에 책임을 지는 방식의 정치적인 의지를 바탕으로 사회를 조직하고자 할 때, 실천적 참여는 가능해지며 최소한 그로 인한 결과물들은 풍성해질 것입니다. ..

그리고 윤리로부터 정치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집단(the collective)'이라는 개념입니다. '집단'이라는 개념은 윤리에서 다루어지는 개념은 아니지요.  .. 윤리의 영여겡서도 집단으로 향하는 통로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의 실천이 진정한 실천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집단적 실천의 지점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단, 여기에서의 실천이란, 단지 타인을 위하고 돕는 통상적인 의미의 윤리적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천을 통해 우리 스스로 서 있는 지평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을 뜻합니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근본 법칙을 문제 삼는다는 것이죠. ..

타인과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우리의 행동 양식을 변화시키는 것, 그래서 궁극적으로 사회의 행동 양태 자체를 바꾸는 집단적인 노력 그 자체입니다.  287-288


저에게 있어 윤리란, 우리 행동의 근거가 되는 정치적인 기반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어떤 것들은 이미 정립된 것들이고, 이는 옳은 것이거나, 최소한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주장하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고자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92


중요한 것은 윤리적 표준을 고양하기 위한 혁명의 과정이 스스로 윤리적 주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하는 겁니다. 주체는 유동적인 것이고 언제든 새로운 것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93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실천이란 강한 신념을 갖고, 그 신념을 세계 속에 구체화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윤리적 차원에서도, 정치적 차원에서도-우리가 무언가 개선을 원하고 또 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묻기 전에, 현재 상황을 직시하고 지금-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피터 홀워드(Peter Hallward)의 의견에 동의하는데요. 유럽은 세계의 중심도 아니며 사실 따분하기 그지없는 조용한 곳입니다. 하지만 세계의 곳곳이 다 이와 같지는 않으며, 실제로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진단과 질문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위해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 스스로를 잊고, 실제 이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깨어있는 눈을 갖는 것. 이 지점에서부터 보다 많은 변화는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세상을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보다 확실한 방법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298-299


윤리란 영웅적인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바디우의 '충실성(fidelity)'의 윤리에 동의하는데요. 윤리는 대개 공동의 일이나 작업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범한 것을 향해 나아가고, 또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애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자신의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지위나 명예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도 끈덕지게 무언가를 실천해나가는 행위라는 측면에서 충실성의 윤리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302






혁명이 태어나는 새로운 분할선


환경 문제나 기아, 그리고 청년 실업과 같은 문제가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사방에 펼쳐져 있다. 그럼에도 문제는 이 총체적 난국에 대한 구조적인 해법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레닌의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야 하며, 다시 정의내려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의 근본 구조를 재건해줄 이론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이론은 정치를 향한다. 정치의 영토에서 다시 우리는 삶의 기반을 이루는 기술(art)을 재조직할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될 때 정치는 우리 삶의 양식을 재건할 수 있다. 우리 삶의 양식을 바꾸는 것, 윤리의 작동 구조를 바꾸는 것, 이것이 혁명이다.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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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읽기 위한 우회로, 이현우(로쟈)

자신의 주저를 몇 권 꼽아놓은 적이 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외에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까다로운 주체> 그리고 <시차적 관점>까지 네 권의 책이 그것이다... 지젝이 말하는 '시차'란 과학용어로 동일한 대상을 서로 다른 곳에서 보았을 때 서로 다른 위치나 형상으로 보이는 것을 말한다. ..

지젝은 이러한 두 층위 사이에 어떠한 곸통 언어나 기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변증법적으로 매개, 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시차로 재정의한다. 그리고 철학과 과학, 정치라는 세 가지 주요 양식에 나타나는 시차적 간극에 개념적 질서를 부여하고자 한다.  8-9


그가 보기에 시차란 개념은 변증법적 사유의 장애물이 아니라 그 전복적인 핵심을 간파하도록 해주는 열쇠다. 이 열쇠는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까. 가령 '저항'의 교착상태에 대해 생각해보자. 지젝은 알랭 바디우를 따라서 시스템이 더욱 부드럽게 작동하게끔 만들어주는 국지적 행동에 참여하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진정한 위협은 수동성이 아니라 유사행동이며, '능동적'이고 '참여적'이 되려는 이 충동은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9-10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다원적 경합을 허용하며 그것에 의해서 유지되는 체제이지만, 지젝이 말하는 레닌주의적 제스처는 어떤 근본주의적 태도를 가리킨다. 오늘날 재발명되어야 할 레닌의 유산은 '진리의 정치'라고 그는 주장하며, 근본적 좌파의 목표는 '원칙 없는 관용적 다원주의'와는 정반대라고 선을 긋는다.  12


지젝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을 경제와 정치 사이의 시차(視差 볼시 어긋날차)에 대한 고려라고 본다. 예컨대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두 옆얼굴이냐 꽃병이냐'라는 시각적 패러독스와 유사하다. 즉, 정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는 고작 '재화의 공급'으로 격하되고, 경제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는 한갓 기술 관료주의의 영역으로 축소된다.  12-13


지젝은 이렇게 주장한다. "따라서 두 겹의 싸움을 해야 한다. 첫째는, 그래, 반자본주의이다. 그러니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자유주의적 의회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반자본주의는 아무리 '급진적'이라 해도 충분하지 않다. 자유민주주의 유산을 실제로 문제로 삼지 않고도 자본주의를 훼손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오늘날의 핵심적인 유혹이다."

가령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나 <인사이더>처럼 무자비한 이윤추구에 몰두하는 대기업에 대한 비판을 다룬 영화들이 아무리 '반자본주의'를 표면상 내세우더라도 "대기업의 음모를 무너뜨리는 정직한 미국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는 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 세계의 견고한 중핵(민주주의)자체는 제거할 수 없다.  14


파리코뮌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독재였다는 것이 엥겔스의 주장인데, 지젝은 영겔스의 말을 받아서 1892-94년의 혁명적 폭력 또한 프롤레타리아독재와 함께 '신적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즉 여기서 '신적 폭력 = 비인간적 폭력 = 프롤레타리아독재'라는 등가관계가 성립한다. 이때 '신적 폭력'이란 말의 해석은 정확히 '백성의 소리는 신의 소리'라는 고대 로마의 격언을 따른 것이다.  15


그가 도출해내는 결론은 "민주주의적 절차보다 상위에 있는 이런 과잉의 평등-민주주의는 오직 자기 대립물로서 혁명적-민주주의의 테러의 형태로만 '제도화되'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진정한 혁명적 과정은 두 가지 계기를 구성소로 갖는다. 프레드릭 제임슨을 따라서 지젝은 그것을 첫째, '극단적인 부정의 제스처', 그리고 둘째 '새로운 삶의 창안'이라고 말한다. "근본적인 혁명 속에서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오래된 꿈을 실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꿈꾸는 방식 자체를 다시 창안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의 꿈을 위해 현실을 변화시키기만 하고 이런 꿈들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조만간 우리는 과거의 현실로 다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이 요점이다.  16


지젝은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이 주장한 교훈을 상기시켜준다. 혁명적 폭력의 목표는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변형시키고 그 기능방식과 토대와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는 교훈 말이다. 그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이 거기에 있다.  17


지젝이 자신의 핵심적인 테제를 끌어내고 있는 농담 한 가지를 음미해보는 것도 좋겠다. 몽골 지배하에 있던 15세기 러시아가 농감의 배경이다. 한 농군이 아내와 함께 시골길을 걸어가다 말을 타고 오던 몽골의 전사를 만나게 됐다. 이 전사는 농군의 아내를 강간하겠다고 이르고는 "땅에 흙먼지가 많으니 내가 네 아내를 강간할 동안 네놈이 내 고환을 받치고 있어야겠다. 거기가 더러워지면 안되니까!"라고 덧붙였다. 몽골군이 일을 마치고 떠나자 농군은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다. 아내가 어이없어 하며 뭐가 기뻐서 난리냐고 묻자 농군은 이렇게 답했다. "그놈한테 한방 먹였다고! 그놈 불알이 먼지로 뒤덮였단 말이야!"  ...

포이어바흐에 관한 제11테제를 그는 이렇게 비튼다. "우리의 사회들에서 비판적 좌파는 지금까지 권력자들에게 때를 묻히는 데에 성공했을 뿐이나, 진정 중요한 것은 그들을 거세하는 것이다." 그 '거세'는 어떻게 가능한가? 일단 '20세기 좌파정치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지젝이 베케트의 말을 인용하며 다시 강조하는 그 교훈이란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이다. 혁명의 과정이란 점진적 진보가 아니라 몇 번이고 시작을 반복하는 운동이다.  17-18


현재의 세계자본주의 체제에는 어떤 적대가 내재해 있는가. 지젝은 네 가지를 꼽는다. 다가오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소위 '지적 재산권'과 관련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새로운 과학기술 발전의 사회, 윤리적 함의, 새로운 장벽(Walls)과 빈민가라는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생성. 이러한 파국적 위협과 불평등, 그리고 분리에 맞선 투쟁이 공유하는 것은 '공통적인 것(the comons)'을 둘러막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인류가 파멸해 봉착할 수 있다는 자각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시장의 실패"로도 불리는 기후위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 때문에 '세계시민성'과 '공통관심'을 바탕으로 "시장메커니즘을 조절하고 제압하면서 엄밀하게 공산주의적인 관점을 표현하는 세계적 정치조직을 창설할 필요"가  제기된다. 그것이 '세계의 종말"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다.  

지젝의 공산주의론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구별이다. ..

지젝이 보기에, 세계자본주의 체제가 내속적인 장기적 적대를 넘어 존속하면서 동시에 공산주의적 해결책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모종의 사회주의를 재발명하는 것뿐이다. ..

"미국은 더욱더 프랑스처럼 될 것"이라는 일종의 '유러피언 드림'이 그것이다. 또는 빌 클린턴이 추천사를 쓰기도 한 <박애자본주의>같은 책을 그 징후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이 내세운 모토가 "승자만을 위한 자본주의에서 모두를 위한 자본주의로"이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핵심적 적대를 다루지 않는다.  19-20

.

사실 책의 전체적인 ..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폭력에 대한 관심이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 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 즉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에 두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폭력이란 말이 즉각적으로 떠올려주는 상투적 '이미지'에서 한걸음 물러날 때만, 우리는 폭력에 대해 본격적으로 사유,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제안이다.  20





서문 


폭력이라고 하면 우리는 즉각, 범죄와 테러 행위, 사회 폭동, 국제 분쟁 같은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는 한 걸음 물러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직접적이며 가시적인 '주관적(subjective)'폭력, 즉 명확히 식별 가능한 행위자가 저지르는 폭력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폭력의 분출이 대체로 어떤 배경 속에서 발생하는 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

주관적 폭력은 세 가지 폭력 가운데 가장 가시적인 일부에 불과하다. 이 세 가지 폭력 중 나머지 둘은 객관적(objective)폭력인데, 그 첫 번째는 하이데거가 '존재의 집' 이라고 칭한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상징적symbilic)'폭력이다. ..

폭력이 언어 자체에 들어 있으며, 언어가 의미 세계를 대상에 부과할 때 따라붙는다. 

두 번째로, 내가 '구조적systemic)'폭력이라 부르고자 하는 폭력이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 우리의 경제 체계와 정치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 파국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

주관적 폭력은 '정상적'이고 평온한 상태를 혼란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객관적 폭력은 바로 이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

구조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폭력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고려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폭력은 단지 주관적 폭력의 '비이성적' 폭발로만 보일 것이다.  23-24


폭력에 대한 자유주의적 좌파 담론에 만연하는 가짜 급박감에 대해 생각해 보자. 가령 이들의 담론에서 여성, 흑인, 노숙자, 동성애자 등이 당하는 폭력의 장면을 거론할 때에는, 대개 추상적 개념과 사실적인 (거짓)구체성이 공존한다. "이 나라에서는 6초마다 한 여성이 강간당합니다"라는 진술과 "당신이 이 문단을 읽는 동안, 열 명의 어린이가 굶어 죽을 것입니다"라는 경고는 그저 두 가지 사례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의 뒤에는 도덕적으로 분개하고 있다는 위선적 감정이 깔려 있다. 스타벅스는 바로 몇 년 전에 이런 종류의 거짓 급박감을 써먹은 것이다. 매장 입구에 스타벅스 체인의 이윤 거의 절반이 커피 원산지인 과테말라의 어린이들을 위한 의료시설로 간다는 내용의 포스터를 붙여 놓아,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마다 한 어린이의 생명을 살리게 된다는 의미를 은연중에 풍겼던 것이다.

이런 긴급 지령들에는 근본적으로 반(反 되돌릴반)이론주의적 강렬함이 있다. "생각에 잠길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행동해야 합니다." 이런 거짓 급박감을 통해, 탈산업화 시대의 부자들은 그들끼리 격리된 가상 세계에서 살아가면서도 자기 세계 외부의 혹독한 현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줄곧 적극적으로 떠들어댄다. ..

"그럼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가요? 그냥 손 놓고 기다리라고요?"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대답해야 한다. 

"예, 바로 그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즉각 참여하고자 하는 충동에 저항하는 것, 끈기 있고 비판적인 분석을 사용하여 '일단 기다리면서 두고보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진정으로 '실제적인' 일일 때도 있다. 현실참여는 모든 방향에서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는 듯하다.  29-31 





1. SOS폭력


1922년 소비에트 정부는 철학자와 신학자에서 경제학자와 역사학자 등 주요 반공산주의 지식인들을 강제 추방했다. ...

니콜라이 로스키는 추방당하기 전까지 가족과 함께 하인과 유모들의 시중을 받아가며 상층 부르주아지의 안락한 삶을 누려왔다. ...

구조적 폭력 ..

"아무런 나쁜 일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삶에 주관적인 악행은 잔혀 없었다. 다만 이런 구조적 폭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배경이 있었을 뿐이다.  35-37


오늘날 지배적인, 관용적 자유주의자들이 가진 주된 관심사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대량 학살, 테러)에서 이데올로기적 폭력(인종주의, 선동, 성차별)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폭력에 반대하는 것인 듯하다. ..

다른 형태들의 폭력을 시야에서 지우고, 따라서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우리가 문제의 진정한 중심에 주의를 돌리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방해하고 있지 않은가?  37


어느 남편이 일터에서 평소보다 일찍 돌아왔다가 아내가 다른 남자와 침대에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깜짝 놀란 아내는 소리쳤다.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온 거야?" 남편은 화가 잔뜩 나서 맞받아쳤다. "딴 놈이랑 누워서 뭐하고 있는 짓이야?" 아내는 태연히 대답했다. "내가 당신한테 먼저 질문했잖아. 주제를 바꾸면서 내 질문에서 빠져나가려 하지 마!" 이런 농담은 폭력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러니까 우리의 과제는 바로 '주제를 바꾸는 것', 폭력을 멈추자는 필사적인 인도주의적 SOS 외침에서 벗어나, 다른 SOS에 대한 분석, 즉 주관적 객관적, 상징적이라는 세 가지 방식의 폭력이 복잡하게 벌이는 상호 작요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38


객관적 폭력이라는 개념은 철저히 역사회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주의와 더불어 새로운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자기 증식적 순환을 광적인 것이라고 묘사했다.  39


자본은 자신의 운동이 사회적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무관심하며, 오로지 수익성이라는 목표만을 추구한다.  39


라캉이 말하는 현실과 실재의 차이를 볼 수 있다. '현실(reality)'은 부단한 상호작용과 생산과정을 행하는 실제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적 현실을 말하며, 실재(the Real)'는 사회적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결정하는, 냉혹하고 '추상적인', 유령과 같은 자본의 논리이다. 생활 상태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나라를 방문하면 누구든 이런 격차를 분명하게 체험할 수 있다. 우리 눈에는 파괴된 환경과 비참한 인간들로 가득찬 광경이 들어온다. 그러나 이후에 경제학자가 쓴 보고서를 읽어보면 그 나라의 경제적 상황은 '재정적으로 견실하다'고 알려 준다. 현실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자본의 상황인 셈이다...  40


16세기 멕시코의 비극에서 한 세기 전 벨기에가 콩고에서 저지른 대학살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세계화의 결과로 죽어간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주의를 돌릴 때면 이에 대한 책임은 대부분 부인된다. 그 모든 일은 그저 '객관적인' 과정의 결과물로서 일어났을 뿐이며, 누구도 계획하고 실행한 적이 없었고, '자본주의 선언' 같은 것도 없다.(그나마 '자본주의 선언'에 가장 근접한 걸 쓴 인물은 아인 랜드(Ayn Rand)이다.) 콩고 대학살의 주범인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는 대단한 인도주의자였으며 교황에 의해 성인칭호까지 받았던 사람이었다. ...

가장 커다란 아이러니는 이런 노력에서 얻은 이윤 대부분이 벨기에 국민들의 복지, 공공사업, 박물관 등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레오폴드 왕은 오늘날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 들의 선구자였던 것이 분명하다.  41-42


올리비에 말뉘(Olivier Malnuit)는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하여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십계명을 꼽은 바 있다.

1. 모든 것을 공짜로 줘버려라(저작권이 없는 자유로운 접근...). 단, 부가서비스에만 요금을 받으라. 그러면 부자가 될 수 있다.

2. 물건만 팔게 아니라 세상을 바꾸라. 세계혁명과 사회의 변화를 통해 물건의 품질도 나아질 것이다.

3. 나눔에 신경 쓰고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라.

4. 창조적이 되어라. 디자인과 신기술, 그리고 과학에 초점을 맞추라.

5. 모든 것을 말하라, 비밀이란 없어야 한다. 일처리의 투명함과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을 지지하고 실천하라. 전 인류가 협력하고 소통해야 한다. 

6. 정시 출퇴근하는 직업을 갖지 말고, 노동하지 말라. 다만 스마트하고, 역동적이고, 유연한 즉석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하라. 

7. 학교로 돌아가 평생교육에 참여하라.

8. 효소처럼 행동하라. 시장만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사회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일하라.

9. 가난하게 죽으라. 결코 다 쓰지 못할 만큼 가졌으니 재산을 필요한 자들에게 환원하라.

10. 국가가 되라. 기업과 국가의 협력 관계를 맺으라.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실용주의적이다. ..

실제로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인도주의의 위기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그들의 가장 선한 면을 드러내 보일 기회니까!  46-47


몇몇 거대 다국적 기업이 자사의 남아공 지점에서 모든 인종분리정책을 철폐하고 흑인과 백인에게 동일 직업에 대해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는 등 인종차별 법규를 무시하는 결정을 내렸는데,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결정이 직접적인 정치 투쟁만큼이나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과 기업의 이익이 맞아 떨어지는 완벽한 사례 아닌가? 그 회사들은 이제 인종차별정책이 사라진 남아공에서 번창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47-48


무엇보다도,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진정한 세계 시민이다. 그들은 이런저런 것들에 대해 걱정이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포퓰리즘적 근본주의와 무책임하고 탐욕스러운 자본주의 기업들에 대해 걱정한다. ..

그들의 목표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그 과정의 부산물로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는 건 사실이지만, 누가 그걸 불평하겠는가!  48


속지 말아야 할 점은, 기부하려면 일단 돈을 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49


유명한 앤드류 카네기는 사병(私兵 사사로울사 군사병)을 고용해 자신의 철강소에서 노동자 단결을 잔혹하게 억누르면서도, 많은 재산을 교육, 예술, 인도주의적 대의를 위해 내놓았다. 철강왕으로 알려진 그는 마음만은 황금으로 되어 있음을 입증해 보인 셈이다. 같은 식으로 오늘날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한 손으로 일단 벌어들였던 것을 다른 한 손으로 내놓는다.  50-51


빌 게이츠.. 지독한 사업가로서의 그는 실질적 독점을 노리며 경쟁사들을 파산시키거나 사들이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치사한 거래 수법을 동원한다. 반면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규모의 자선가이기도 한 그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지 못하고 이질로 죽어간다면 컴퓨터를 가진다는 게 무슨 소용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윤리로는, 자선을 베풀면 무자비한 이윤 추구 행위도 상쇄된다.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다.  52


진심이든 위선이든 자선행위는 자본주의적 순환이 논리적으로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는 철저하게 경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연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선 행위는 진정으로 곤궁에 처한 이들에게 부를 나눠준다는 일종의 재분배를 통해 균형을 재확립하며, 치명적인 덫을 피해간다.  53-54


오늘날 악을 대표하는 좋은 예는 평범한 소비자들이 아니다. 그런 전반적 파괴와 오염을 조성하는 데 전적으로 관여했으면서, 돈을 써서 자기 자신이 저지른 결과로부터 쏙 빠져나오는 자들, 빗장 공동체에 살면서, 유기농 식품을 사다 먹으며, 자연 보호 구역에서 휴가를 즐기는 자들이 바로 악이다.  58-59


니체는 서양 문명이 말인(末人 끝말 사람인, the Last Man), 즉 어떤 열정도 헌신도 없는 무심한 인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말인은 꿈꿀 줄 모르고, 삶에 지쳐 있으며, 어떤 위험도 감수하려 하지 않고 오직 안락함과 안정성만을, 그리고 서로에 대한 관용의 표현만을 추구한다. "이따금 약간의 독을 마시고 유쾌한 꿈을 꾼다. 그리고 최후에는 많은 독을 마시고 유쾌한 죽음을 맞는다. 그들에게는 낮의 쾌락과 밤의 쾌락이 따로 있지만, 건강은 챙긴다. '우리는 행복을 발견해 냈어.' 말인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깜빡인다."  59-61


알랭 바디우는 '무조(無調 없을무 고를조)'의 세계(Monde atone)라는 개념을 전개한다. 이는 주인기표(Master-Signifier, 라캉은 우연적인 표상체계를 단일한 의미의 체계로 만들어낼 수 있는 특권적인 중심기표를 주인기표라 부른다)의 개입이 결여된 까닭에 다양성을 가진 혼란스러운 현실에 어떤 의미 있는 질서도 부여하지 못하는 세상을 뜻한다.  67


우리가 사는 포스트모던 세계의 근본적 특성은 명령(order)을 내리는 주인기표의 이런 작용을 없애려 든다는 점이다. 세계의 복잡성은 무조건적으로 확고히 인정받아야 한다. 그 복잡성에 어떤 질서(order)를 부과하려 드는 주인기표는 모두 해체되고 흩어져야 하는 것이다. "근대는 세계의 '복잡성'을 위해 이런 저런 변명을 늘어놓는데, 그것은 정말 무조(無調 없을무 고를조)에 대한 욕마을 일반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68 


주관적 폭력과 싸우는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구조적 폭력의 행위자가 되는데, 이 구조적 폭력이야말로 주관적 폭력을 낳는 원인이다. 관용의 정신으로 에이즈 치료나 교육에 수백만 달러를 내놓는 자선가는 그 자신이 금융 투기로 수많은 이의 삶을 파괴했던 장본인이며, 그리하여 자신이 타파하고자 하는 불관용 그 자체의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

환상은 금물이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오늘날 모든 진보적 투쟁의 적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원인 중 부차적인 것만을 해결하고자 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체제 자체의 잘못된 점을 직접 구현하는 화신이다. 인종주의, 성차별, 종교적 반계몽주의 등과 싸우느라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과 전략적 동맹을 맺고 타협해야 할 때에는 이 점을 반드시 새겨야 한다.

그렇다면, 으리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물론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좋은 사람이고 세계의 빈곤과 폭력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이런 걱정을 할 만한 능력도 되는 사람이다. 사실 그런 사람에게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

또 그는 빈곤과 싸워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건 그가 그 신념을 바타응로 돈을 벌어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70-71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선한 자에 대한 심문]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 준다.


앞으로 나오라, 우리는

그대가 좋은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대는 매수되지 않지만,

집을 내려치는 번개 또한

매수되지 않는다.

그대는 그대가 했던 말을 지켰다.

그러나 어떤 말을 했는가?

그대는 정직하고, 자기 의견을 말한다.

어떤 의견인가?

그대는 용감하다.

누구에게 대항하는 용기인가?

그대는 현명하다.

누구를 위한 현명함인가?

그대는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돌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대는 누구의 이익을 돌보는가?

그대는 좋은 친구이다.

그대는 좋은 사람들에게도 좋은 친구인가?


이제 우리의 말을 들으라, 우리는

그대가 우리의 적임을 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제 그대를 벽 앞에 세우리라. 그러나 그대의 미덕과 장점들을 고려하여 

우리는 그대를 좋은 벽 앞에 세우고 그대를

좋은 총의 좋은 탄환으로 쏠 것이며 그대를 

좋은 삽으로 좋은 땅에 묻어 주리라.  71-72





2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두려워하라!


오늘날은 탈정치적 생명정치(post-political bio-politics)라는 정치 형태가 지배하고 있다. 

'탈정치'란 낡은 이데올로기적 투쟁을 벗어나, 대신 전문적인 운영과 관리에 초점을 맞춘다고 주장하는 정치이다. 그리고 '생명정치'란 인간 생활의 안전과 복지를 제도화하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는 정치를 가리킨다. 이 두 영역이 어떻게 겹쳐지는가는 자명하다. ..

탈정치화되고, 사회적으로 객관적이 관리와 이해 조정을 정치의 기본적 차원으로 삼게 된 이상, 사람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적극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포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생명정치란 궁극적으로 공포의 정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부당하게 희생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혹은 괴롭힘을 당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막아내는 것을 중요시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보편적인 공리를 기초로 한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본질적인 부분을 포기해버리는 정치 사이의 차이다. 왜냐하면 후자의 정치는 다음과 같은 온갖 원리들을 동원하면서 공포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민자들에 대한 공포, 범죄에 대한 공포, 성적인 타락에 대한 공포, 많은 세금을 물릴지도 모른다는, 지나치게 개입하는 국가 자체에 대한 공포, 생태적 파국에 대한 공포, 괴롭힘에 대한 공포 등이다... 이러한 (탈)정치는 언제나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우중(ochlos) 혹은 다중(multitude)을 조종하는 수법에 의존한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무섭게 몰아대는 것이다.  73-74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점차 괴롭힘 당하지 않을 권리가 중요한 인권으로 부상하고 있는데, 이는 타인과 안전 거리르 유지할 권리이다.

게다가 탈정치적 생명정치에는 두 가지 측면.. 하나는 인간을 '벌거벗은 생명', 즉 호모 사케르(Homo sacer)로 환원해 버린다는 면이다. 이른바 신성한 존재라고 불리는 호모 사케르란, 전문지식에 기초하여 관리되어야 할 대상이지만 관타나모의 죄수들이나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처럼 모든 권리가 배제된 이들을 일컫는다. 이와 같은 극단화는 자신이 취약한 존재이며, 항상 다중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지도 모르는 존재라는 식으로 경험하는 자기애적 태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75


우리는 모두, 지각의 착각(perceptual illusion)과 비슷한 일종의 윤리적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셈이다. 우리가 이런 착각에 빠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추상적으로 추론하는 능력이 엄청나게 발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서적-윤리적 대응은 아주 오래된 본능적 반응에 길들여져서 고통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면 동정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대부분은 버튼 하나를 눌러 눈에 보이지 않는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이는 일보다 총으로 누군가를 직접 겨냥해 쏘는 일에 대해 더 큰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76-77


똑같은 사람이 어떻게 적들을 향해서는 끔찍한 폭력 행위를 저지르면서 자기 집단에 속한 이들에게는 따뜻한 인간애와 친절을 베풀 수 있는가,...

자신의 윤리적 고려의 범위를 모든 곳에 적용하는 이들은 깊은 모순, 심지어 '위선'에까지 빠진다. 하버마스의 용어를 빌어 표현하자면, 그들은 화용적 모순(pragmatic contradiction)에 휘말린다. 자기 자신이 속한 언어 집단을 지탱하는 윤리적 규범들을 위반하기 때문이다. 우리 공동체의 내부에 속한 사람들에게 부여하는 기초적인 윤리적 권리를 그 외부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부여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83


기독교 윤리를 생각해 보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는 성 바울의 유명한 말처럼 기독교 윤리는 전 인류를 포용한다는 자세를 취하지만, 그럼으로써 동시에 공동체 안에 포함되려 하지 않는 이들을 철저하게 배제한다. ..

"모든 인간은 형제"라는 기독교의 금언은 동시에 형제애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

기독교도들은 늘 자신들이 '선택받은 민족' 이라는 유대인의 배타적 신앙관을 극복하고 전 인류를 포용했다고 자화자찬한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신과의 직접연결이라는 특별한 은혜를 받은 선민(選民 가릴선 백성민)이라 여기면서, 사신(邪神 간사할사 귀신신)을 숭배하는 다른 민족도 인간이기는 하다고 인정한다. 반면 기독교가 가진 보편주의의 편향적 태도는 비기독교도를 인류의 보편성 그 자체로부터 배제해 버린다.  91-92


프로이트와 라캉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기본 가르침인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에는 본성적으로 문제적인 데가 있다고 주장한다.  ..

이웃이 가진 비인간적 특징으로 인해 이웃은 보편성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입장에 선다는 것은 매우 폭력적인 것이며, 심지어 상처를 받는 것이기도 하다.  93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말처럼 "만약 당신이 타인의 꿈속에 갇힌다면, 끝장이다!"인 셈이다.  94


정중함이라는 방어벽의 붕괴가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서로 다른 문화들이 충돌할 때이다.  96



* 주이상스(Jouissance). 쾌락이 고통을 줄이고 쾌감은 늘리려고 하는 쾌락원칙을 따르는 반면에, 주이상스는 고통마저도 감수하는, 혹은 고통 속에서 느끼는 쾌감을 가리킨다. 따라서 주이상스는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즐김이다.  96



오래 전 프로이트가 이미 간파한 바와 같이, 이웃이란 본래 하나의 사물이고, 충격을 안겨주는 침입자이며, 우리와 다른 생활방식을 지니고 있어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웃은 저 나름의 사회적 관습과 의식에 따라 구체화된, 주이상스를 추구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를 불안케 하는 자이고, 우리 생활방식의 균형을 깨뜨리는 자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이 너무 가까워질 경우 우리는 이 거슬리는 침입자를 없애기 위해 공격적인 반응을 하게 될 수 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더 많은 의사소통이란, 무엇보다도 우선 더 많은 갈등을 뜻한다"고 했다. 그런 이유에서, '서로를 이해하기'라는 태도에 더해 '서로 비켜서기'라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옳다. 적절한 간격을 유지하고, 새로운 '재량 규범'을 도입함으로써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98


뮐레르는 '좋은' 폭력과 '나쁜' 폭력을 구분하려는 시도를 완전히 거부해 버리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폭력을 정의할 때 필수적인 것은 '좋은' 폭력이란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좋은' 폭력과 '나쁜' 폭력을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순간, 우리는 폭력이라는 단어의 고유한 용법을 잃고 혼란에 빠져든다. 무엇보다도, '좋은' 폭력이란 무엇인지를 정의하기 위한 기준을 만들어내는 순간, 우리는 모두 그 기준을 매우 손쉽게 이용하여 우리 자신의 폭력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투쟁과 공격이 삶의 일부인데 어떻게 폭력을 완전히 거부할 수 있겠는가? 쉬운 해결책은 '공격(aggression)과 '폭력'은 '죽음의 힘'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폭력'이란, 공격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공격이 과도해져 점점 더 많은 것을 욕망하면서 사태의 정상적 흐름을 교란시키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이 과도함을 제거해 버려야 한다.  102


처음에,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 권력을 추구한다. 그러나 주의하지 않으면, 곧 한계를 넘어 남들을 지배하려 들게 될 것이다... 시몬 베유는 "한계가 분명한 욕망은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만, 무한한 욕망은 그렇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103





3 '피로 물든 조수가 범람하다'


2005년 가을, 프랑스 파리 교외에서 폭동이 일어나 수천 대의 차가 불타고 대규모 군중 폭력이 발생했다. 흔히 2005년 8월 29일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덮치고 간 뒤에 발발한 약탈과 1968년 5월 파리의 68혁명을 이 사건과 비교하곤 한다.  115


알랭 바디우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적 공간이 점차적으로, '세계 없음(Worldless)'의 공간(space)으로 경험된다고 했다. 이런 공간에서, '의미없는' 폭력 말고 달리 취할 수 있는 저항의 수단이 있을 수는 없다.  122



* 세계없음(Worlsless). 우리가 예전에는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 '세계(world)'에 살고 있었는데, 유토피아적 전망 자체가 사라져버린 이곳은 이제 세계가 아니라 단순한 장소(place)에 불과하다는, 바디우의 독특한 조어.  122



자본주의는 전지구적이며 전 세계를 포괄하지만, 동시에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없는' 이데올로기적 상황을 유지시키며,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의 인식론적 지도를 그릴 기회가 박탈된 상태로 있다.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는 역사상 최초로 의미를 와해시키는(detotalised meaning) 사회경제 질서다.  123



* 대학담론(university discourse). 라캉에 따르면 의미활동이 시작되는 담론의 행위자가 누구냐에 따라 담롬의 성격이 달라진다. 라캉은 이를 주인담론, 대학담론, 히스테리담론, 분석가담론 등 4가지로 도식화했는데, 대학담론은 탄탄한 지식체계로 무장한 교수들의 '지적' 담론을 순진한 학생들이 전수받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125



이기주의(Egotism), 즉 자신의 안녕에 대한 관심은 공익 대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기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이타적인 규범을 도출해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개인주의 대 공동체주의, 공리주의 대 보편적 규범에 대한 고집이라는 이항대립은 그릇된 것이다. 두 대립항이 결과적으로는 결국 같아지기 때문이다. 쾌락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오늘날의 사회에서 진정한 가치들이 없어지고 있다고 한탄하는 비평가들은 완전히 요점을 놓치고 있는 셈이다. 이기주의적이 자기애의 진짜 반대말은 이타주의, 즉 공익에 대한 고려가 아니라 부러움과 원한이고, 바로 이 부러움과 원한이라는 감정으로 인해 나는 나의 이익에 반(反 되돌린반)하여 행동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죽음 충동은 현실원칙만큼이나 쾌락원칙과도 대립한다.(프로이트의 현실원칙과 쾌락원칙. 프로이트는 모든 본능적 충동이 쾌락을 추구하고 쾌락원칙을 따른다고 봤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아가 그렇게만 행동하면 정상적 인간이 될 수 없으니, 그래서 현실원칙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현실원틱은 쾌락원칙의 반대라기보다는 그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쾌락을 포기했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 모종의 보상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쾌락은 현실적으로 양보된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악, 즉 죽음 충동은 자기파괴를 수반한다. 죽음충동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익에 반(反 되돌리반)하여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라캉이 설명했듯, 인간의 욕망이 가진 문제점은 그것이 언제나 '타자의 욕망' 이라는 데 있다. 이때 '타자의 욕망' 이란 타자를 향한 욕망과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특히 타자가 욕망하는 것에 대한 욕망, 이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바로 이 '타자가 욕망하는 것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질시가 발생하며, 부러움이라는 감정 속에는 원한의 감정도 들어 있는데, 이는 인간 욕망을 이루는 근본 요소들이다.  131-132


* 프로이트의 현실원칙과 쾌락원칙. 프로이트는 모든 본능적 충동이 쾌락을 추구하고 쾌락원틱을 따른다고 봤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아가 그렇게만 행동하면 정상적 인간이 될 수 없으니, 그래서 현실원칙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현실원칙은 쾌락원칙의 반대라기보다는 그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쾌락을 포기햇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 모종의 보상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쾌락은 현실적으로 양보된 것이기 때문이다.  132


부러움/원한에 대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런 감정을 갖는다는 것이 단지 내가 이기면 다른 사람은 지게 되는 제로섬 게임의 원칙을 지지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부러움/원한에는 양자 간에 격차가 있다는 점이 함축돼 있는데, 이 격차는 긍정적인 것(아무도 지는 일 없이 모두가 이길 수도 있다)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이다. 내가 얻느냐 내 적이 잃느냐를 두고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내 적이 잃는 편을 택한다. 심지어 그것이 나에게 손해가 될지라도 말이다. 마치 내 적의 손해에서 오는 나의 결과적인 이득이 내 승리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병적인 요소가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불평등이 비인격적이고 보이지 않는 힘으로 인해 발생한다면, 그 불평등을 받아들이기가 훨씬 더 쉽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자본주의 내에서 시장은 '비합리적'으로 돌아가고, 성공과 실패 역시 '비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바로 이게 시장의 장점이다. 내 성공이나 실패를 '내 책임이 아닌 것', 혹은 우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시장에 대한 오래된 모티프가 '예측 불가능한 운명'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라. 이 점을 감안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만하다고 여기는 가장 큰 이유는 자본주의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있다. 사람들은 내가 실패한 것이 나의 열등한 자질 때문이 아니라 우연으로 인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실패를 훨씬 견딜 수 있다는 얘기다.  133-134


루소는 이기주의를 자기애(amour-de-soi)와 자존심(amour-propre)으로 구분했는데, 전자는 있는 그대로의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인데 반해, 후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을 도착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 후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을 도착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 후자가 강한 사람들은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데 장애물이 될 법한 것들을 제거하는 데 집중한다.

'이 원초적 정념, 즉 자기애(amour-de-soi)는 그 본질이 사랑스럽고 다정다감한 것이다. 이는 오직 우리의 행복만을 생각하며, 또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행복과 관련되는 것들만 대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대하는 것이 목표물에서 장애물로 바뀌게 되면 그들은 대상에 닿고자 하는 노력보다 그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온 마음이 사로잡히게 된다. 이제 그들의 본성은 바뀌어 성마르고 증오에 차게 된다. 고결하고 순수한 마음인 자기애가 자존심(amour-propre)으로 바뀌게 되는건 이런 식이다. 여기서 자존심이란 남과 비교를 위해 동원되는 상대적인 감정이고, 편애를 요구하는 감정이다. 그리고 자존심을 향유한다는 것은 순전히 부정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의 행복에서 만족을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불행에서 만족을 찾게 된다.'

따라서 악한 사람은 이기주의자(egoist)가 아니다. 이기주의자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이기주의자는 자기 이익에 신경 쓰기도 너무 바빠서 남들에게 불행을 일으킬 만한 여유가 없다.  136-137


널리 알려진 인류학적 일화에 따르면, 우리는 '미개인'들이 모종의 미신적 믿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예를 들어 그들이 물고기나 새 등의 후손이라는 믿음), 이런 믿음에 대해 직접 물어 보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당연히 안 믿죠, 우린 바보가 아니라고요! 그런데 우리 조상 중에는 정말 그 얘기를 믿었던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한 마디로,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남에게 전가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대할 때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 가령 우리는 매년 산타클로스 행사를 여는데, 그것은 우리가 아이들은 산타클로스를 믿을 것 같다고 여기고, 따라서 아이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그리고 아이들이 천진난만하다는 우리의 믿음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그리고 물론, 선물을 받으려고)산타클로스를 믿는 척한다. 또 이는 모종의 비리에 연루된 정치인들이 정직한 척 하면서 말하는 흔해빠진 변명과 뭐가 다른가? "저는 그 사실을(혹은 저를) 믿는 평범한 사람들을 실망시켜드릴 수 없습니다"  143


어떤 높은 차원의 정치적 진리를 위해서 거짓말을 해서도 안 되고, 왜곡해서도 안 되며, 혹은 사실을 묵살해서도 안 된다. 요점은 어떤 높은 차원의 정치적 진리를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시실을 왜곡 혹은 묵살하라는게 아니다. 주관적 입장을 바꾸어 실제 사실을 말하는 행동에 발화 행위의 주관적 입장에서 나오는 거짓말을 포함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게 아주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기준이 가진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147


2005년 10월 초, 아프리카 이민들이 계속해서 아프리카 모로코 리프 해안의 스페인령 소도시 멜리야로 필사적 잠입을 시도하자, 이들의 유입을 어떻게 막을까 궁리하던 스페인 경찰은 스페인 영토와 모로코 사이에 장벽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표명했다. 이 장벽의 이미지, 전기 시설로 빈틈없이 무장한 복잡한 구조물의 이미지는 베를린 장벽과 섬뜩하리만치 닮았다. 다만 그 기능이 정반대일 뿐이다. 이 벽의 목적은 사람들이 나가지 못하게 하는게 아니라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분리 조치를 강행해야만 했던 스페인의 호세 사파테로 정부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반인종주의적이고 관용적이라 평가받던 정권이었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잔인한 역설이라 할 수 있다. 유럽의 국가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분리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151





4 관용적 이성의 이율배반


2006년 가을, 오스트레일리아 최고의 무슬림 성직자, 셰이크 타즈 딘 알-힐랄리의 발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은 격분했다. 무슬림 남성들이 집단 강간을 저질렀다가 수감된 사건을 두고,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만일 고기를 포장도 하지 않고 길거리에 내놓았다가..고양이들이 그 고기를 먹었다면.. 누구의 잘못인가, 고양이들인가 고기인가? 포장되지 않은 고기가 문제다." 베일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을 포장하지 않은 날고기에 비유한 자체가 엄청나게 도발적인 것이었기에, 알-힐랄리의 주장에 훨씬 더 놀라운 전제가 숨어 있었음에도, 이 전제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남성의 성적 행위는 여성의 책임인데, 그렇다면 성적 유혹이라 인식하는 것을 잡했을 때 남성들은 완전히 무력하고, 그 유혹에 전혀 저항할 수 없으며, 날고기를 본 한마리 고양이와 똑같이 완전히 성적 욕구의 노예가 된다는 말인가? 남성은 자기 자신의 성적 행동에 책임이 전혀 없다고 가정하는 이런 태도와 대조적으로, 서구에서는 여성의 에로티시즘을 대놓고 강조하는데, 이는 남성이 성욕을 자제할 수 있으며, 성적 충동의 맹목적인 노예가 아니라는 전제에 기초한다.  155-156


홀로코스트는 비판이 금기시되는 성역이 아닌가?  157


어떤 때에는 범죄를 직접 인정하는 것이 그 책임을 회피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서구의 법률만능주의적 위선..  158


칸트의 논의 속에서 이성개념을 부정적인 용법으로 사용할때는 예지계적 대상(poumenal objects)에 한정되며, 우리 또한 이성 개념을 부정어법으로만 사용해야만 한다. 홀로코스트도 마찬가지다. 이는 반드시 부정어법으로만 언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끌어들임으로써 어떤 정치적 수단을 정당화/합법화하고자 하면 안 된다. 반대로 그것은 오직 그 정치적 수단을 비합법화하기 위한, 즉 우리의 정치적 행위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기 위한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홀로코스트와 같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오만한 행동을 비난할 수 있는 것이다.  163


법을 위반하는 강도짓과 법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강도짓은 뭐가 다르냐는 말이다. 이 교훈을 살짝 변형시키면 이렇게 된다. 즉, 국가권력이 벌이는 대테러 전쟁에 비하면 테러 행위는 뭐가 대수인가?  168-170


우리는 불관용에 대해 얼마나 더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가?  184


이브 르 브르통은 루이 9세의 십자군 원정에서 어느 늙은 여인을 만났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여인은 오른손에는 불이 담긴 그릇을, 왼손에는 물이 담긴 사발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무엇을 하는 거냐고 묻자, 여인은 불로는 천국을 불살라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하고, 물로는 지옥의 불을 모조리 끌 거라 대답했다. 여인은 이어서 말했다.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보상을 받기 위해, 혹은 지옥에 떨어진다는 공포 때문에 선행을 하는 이가 아무도 없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직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선행을 베풀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덧붙일 것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하느님도 지워 버리고 그냥 선행 그 자체를 위해 선행을 하면 안 될까? 온전히 기독교적인 이 윤리적 자세가 오늘날 대부분 무신론에만 남아 있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196


타인의 믿음에 대한 존중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는 것은 결국 두 가지 의미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타자를 어린애 대하듯 다루며 그의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상처주지 않는 편을 택하는 태도이거나, '진리 체계들' 이 복수로 존재한다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하면서 진리를 명백하게 주장하는 행위는 모두 폭력적인 강요라고 깎아내리는 태도이거나, 이렇게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하지만(다른 모든 종교도 마찬가지지만) 이슬람을 존중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엄격한 태도로 비판적 분석을 해보면 어떨까? 이것이, 그리고 이것만이, 무슬림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들을 자기 믿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진지한 성인들로 대접해야 하는 것이다.  198






5 관용은 이데올로기다


진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으려면 아미시 청소년들은 모든 선택사항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그런 선택사항들 속에서 교육받아야 한다.  205


'관용적인' 서구의 다문화주의적 관점 속에서 말하는 '자유로운 선택의 주체'는 이들이 속한 특정한 생활세계에서 찢겨지고 그 뿌리에서 절단되는 극심한 폭력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얘기다.  207


나아가 타자의 문화를 두고 관용의 태도가 결여돼 있다거나 야만적이라는 둥 치부해버리는 태도의 대척점에는 타자의 문화가 가진 우수성을 너무도 쉽게 인정해버리는 태도가 있다. 가령 인도에 주둔하던 영국 식민 관리들 중 인도의 심오한 영성을 찬양하던 이가 얼마나 많았던가. 서구에서는 합리성과 물질적 부에 대한 집착 때문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며 말이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타자가, 남을 지배하기보다는 조화를 추구하고, 유기적 존재이고자 하며, 덜 경쟁적이고 또 협력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찬양하는 것도 서구 자유주의가 가진 진부한 주제의 목록에 들어가는 것 아닌가? 서구의 자유주의가 타자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미명하에 억압을 못 본 체 하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 심지어는 선택의 자유를 도착적인 방식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가령 과부를 불태워 죽이는 짓을 한다 해도, 그 사람들은 자기의 생활방식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그것이 우리 눈에 비참하고 불쾌해 보인다 해도 우리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209


전체주의 체제가 즐겨 사용하는 전략 중 하나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모두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극도로 엄격한 법적 규제(형법)를 부과하는 수법이다. 다만 그 엄격한 법을 완전히 집행하지는 않는다. 이런 전략을 통해 체제는 자비로운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알겠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너희 전부를 체포해 유죄 판결을 내리는 건 일도 아냐. 하지만 무서워 하지마, 우린 관대하니까.." 이와 동시에 체제는 계속적인 위협으로 기강을 잡으며 체제에 종속된 이들을 길들인다. "너무 기어오르면 안 좋아. 잊지 마, 우리는 언제라도 너희들을.."  222


전체주의 체제는 법의 위반에 대해 관용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전체주의 체제라는 틀 속의 사회적 삶에서는 법을 위반하고, 뇌물을 주고, 부정한 짓을 하는 것이 생존의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223


만일 내가 내 가장 친한 친구와 승진을 두고 경쟁하는 상황에 처했다가 내가 이긴다면, 내가 취해야 할 합당한 행동은 친구가 승진할 수 있도록 내가 물러나겠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모두 우정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 바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상징적 교환, 즉 '거절이 기대되는 제스처'이다. 상징적 교환의 불가사의한 마력은, 결과적으로 양자가 모두 교환이 이루어지기 전과 똑같은 지점에 있지만, 그들이 맺은 단결하자는 약속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양자 모두 분명히 무언가를 얻게 된다는 데 있다. 사과를 주고받는 과정 역시 유사한 논리를 따른다. 만일 무례한 말로 누군가를 불쾌하게 했다면 내가 취해야 할 합당한 행동은 그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고, 한편 그는 "고맙네, 하지만 난 기분 상하지 않았어. 자네가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전혀 사과할 필요 없다네!" 정도의 말로 답하는 것이 도리다. 물론 여기서 요점은, 결국에는 사과할 필요 없다는 결말이 났지만, 그에 앞서 먼저 사과의 말을 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과할 필요 없다'는 말은 오직 내가 사과를 한 이후에만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아무 일 아닌 상황이고 사과가 필요 없다고 분명히 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런 사과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만 얻는 것이 생기고, 우정도 깨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거절해야 하는 제안을 받은 사람이 실제로 그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만일 내가 친구와의 승진 경쟁에서 진 뒤에 자기 대신 그 지위에 올라가라는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어떨까? 이는 그야말로 파국적인 상황이다. 그런 상황으로 인해 사회질서의 중핵을 이루는 형식적 자유가 붕괴되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실체 그 자체의 붕괴, 사회적 유대의 해체나 다름없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로베스피에르에서 존 브라운에 이르는 혁명적 평등주의자들은,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습관을 무시하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보편적 규칙이 작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습관 덕분인데, 말하자면 이들은 습관에 대한 고려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225-226


193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조지 오웨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계급 구분이 사라져야 한다는 바람은 필요하지만, 그럴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한 그런 바람은 전혀 효력이 없다. 우리가 여기서 맞닥뜨려야 하는 사실은 계급 구분을 철폐한다는 것은 곧 당신 자신의 일부를 없앤다는 의미라는 사실이다. 전형적인 중간계급의 일원으로서의 '나'가 있다고 치자. 내가 '계급 구분을 없애고 싶다'고 말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내가 생각화고 말하는 것은 거의 모두가 계급 구분 덕분에 형성된 결과물이다. (..) 나는 나 자신을 완전히 뒤바꾸어, 결국에는 이전의 내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229-230


오웰은 이데올로기적 일상 속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배적 태도는 우리가 진심으로 믿고 있지만 조롱하는 척 거리를 두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개이 '지식인'들이 내놓는 좌파적 의견은 대부분 거짓이다. 그는 조롱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대상을 진정으로 믿고 있으며, 단지 조롱하는 척만 할 뿐이다. 여러 가지 예가 있지만 하나만 꼽아 보자면, 명문 사립학교에서 강조하는 명예에 대한 예법. '단체 정신', '쓰러진 사람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 등등의 헛소리를 들 수 있다. 이런 예법을 비웃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지식인'을 자처하는 이라면 그 누가 이를 비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외부에서 이를 비웃는 이를 만난다면 문제가 조금 달라진다. 마치 우리가 일상 속에서는 늘 우리 잉글랜드를 욕하지만, 외국인이 똑같은 욕을 하면 크게 분개하는 것과 같다. (..) 당신과는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을 만났을 때에야, 당신은 당신이 실제로 믿고 있는 게 뭔지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웰이 전제하는 이 진정한 미데올로기적 정체성에는 '내면적인' 면이라곤 전혀 없다. 내면 깊숙한 믿음은 전적으로 '외부에'있으며, 내 몸이라는 육신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관습 속에 체현돼 있다.  231


아랍 문명과 미국 문명의 충돌은 야만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 사이의 충돌이 아니라, 익명으로 행해지는 잔혹한 고문과 미디어의 구경거리가 된 고문, 피해자의 육체가 고문의 가해자인 '무고한 미국인' 의 미소 짓는 얼굴을 돋보이게 하는 무명의 재경 역할을 고문 사이의 충돌이다.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자면, 문명의 충돌은 모두 그 밑에 잠재한 야만끼리의 충돌인 듯하다.  244






6 신적 폭력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에서 탐정 아보가스트가 계단에서 살해당하는 장면은 '신의 시점에서 바라본' 히치콕적인 장면이다. 우리는 1층 복도와 계단에서 이루어지는 전체 장면을 위에서 내려다본다. 한 인물이 괴성을 지르며 화면 속으로 들어와 아보가스트를 난도질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인물의 주관적 시점으로 이동한다. 계단으로 추락하는 아보가스트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잡힌다. 마치 객관적 장면에서 주관적 장면으로의 이동을 통해서, 신 자신이 중립적 위치를 버리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난폭하게 개입하면서 지상에 '강림'한 것처럼 보인다. '신적 폭력'은 이와 같은 난폭한 개입처럼 법을 넘어선 정의를 가리키는 것이다.  245


진정한 원한과 처벌(복수), 용서, 그리고 망각이라는 3항조와 같은, 범죄행위에 대한 일반적 대응방식은 어떻게 연관되는가? 우리가 여기서 첫째로 해야 할 일은 정당한 복수(처벌)라는 유대교적 원칙('눈에는 눈' 이라는 원칙)이 "우리는 당신의 범죄는 용서하겠지만 그것을 잊지는 않겠다"라는 일반적인 정식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용서하면서 동시에 망각하는 유일한 방법은 복수 혹은 정당한 처벌을 하는 것이다. 범죄에 대한 합당한 처벌이 이루어진 후 나는 앞으로 나갈 수 있으며 과거의 일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범죄를 합당하게 처벌하는 일에는 뭔가 해방적인 요소가 있다. 나는 사회에 빚을 갚고 다시 자유로워지며, 과거는 더 이상 나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는 '자비'의 논리는 반대로 훨씬 더 억압적이다. (용서받은 범죄자로서) 나는 영원히 내가 저지른 범죄이ㅔ 시달림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그 범죄는 '무효화' 되지 않았고, 소급해서 취소되지 않았으며, 지워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것이 헤겔이 말하는 처벌의 의미인데 말이다.  262


벤야민의 <폭력비판에 대하여> 마지막 몇 문단.

'모든 영역에서 신화에 대해 신이 맞서듯이 신화적 폭력에도 신적인 폭력이 맞선다. 그리고 신적인 폭력은 모든 면에서 신화적 폭력과 반대다. 신화적 폭력이 법 제정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를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를 파괴하며, 신화적 폭력이 죄를 부과하면서 동시에 속죄를 시킨다면 신적 폭력은 죄를 면해주고, 신화적 폭력이 위협하는 폭력이라면 신적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죽음을 가져온다. (..) 왜냐하면 피는 단순한 생명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법적 폭력이 소멸된다는 것은 자연적 생명체에 불과한 자들이 지은 죄에서 생겨난 것이다. 결백하고 불행한 생명체였던 이 자연적 생명체는 단지 죄지은 생명체로서 '속죄'해야 하는 징벌을 받은 존재다. 그리고 이 때 죄를 사하여 준다는 것이 죄 자체를 사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사면해준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법의 지배는 단순한 생명체에서 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적 폭력은 폭력 그 자체를 위해 단순한 생명체에 가해지는 유혈의 힘이고, 신적 폭력은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 모든 생명체에 가해지는 순수한 힘이다. 신화적 폭력은 희생을 요구하며, 신적 폭력은 그 희생을 받아들인다.

(..) "죽여도 됩니까?" 란 물음에 대한 답변은 십계명의 "너희는 살인하지 말지어다" 말고는 달리 없다. 이 계명은 마치 신이 어떤 행위를 '가로막는' 것처럼 행위 앞에 버티고 서 있다. 그러나 그 계명은 그것을 따르도록 강제하는 처벌에 대한 공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이미 이루어진 행위에 대해 명령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다. 이미 이루어진 행위에 대해서는 그 계명을 바탕으로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미 이루어진 행위에 대한 신적 판단이나 그 판단의 근거가 됐던 것 모두는 예단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폭력적으로 살해하는 행위는 그 계명을 근거로 정죄하는 사람들은 잘못이다. 그 계명은 판단의 척도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인격체 또는 공동체에 대해 행도으이 지침으로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동하는 인격체나 공동체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그 계명과 대결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그 계명을 도외시한 책임을 스스로 떠안아야 한다.'  271-273


신적 폭력에 의해 제거되는 자들은 명백하게 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희생자(제물)가 아니다.

그들은 희생 없이 죽임을 당하는 셈이다.  273


벤야민은 <폭력비판을 위하여>의 결론부에서 "혁명적 폭력은 인간이 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순수한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274


어떤 폭력이 신적 폭력인지 식별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은 없다.  275


신적 폭력은 신(대타자) 자신의 무능을 보여주는 징표다.  276





7 에필로그


우리의 탐구는 한 바퀴를 돌았다. 폭력에 반대한다는 거짓 주장을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해방적 폭력을 승인하는 데 이르는 여정이었다. 우리는 주관적 폭력과 싸운다고 하면서 구조적 폭ㅍ력에 가담하는 자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283


이 책의 교훈은 무엇인가?

세 가지다.

첫째, 폭력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쁜 것'으로 매도하는 것은 하나의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조작이자, 사회적 폭력이 가진 근본형식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일종의 신비화라는 점이다. 다른 형식의 폭력적 학대에 대해서는 그토록 예민한 서양 사회가 우리로 하여금 가장 잔혹한 형식의 폭력에 대해선 무감각하게 만드는 다양한 메커니즘을 동시에 동원해 올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은 대단히 징후적인 일이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그런 일은 종종 희생자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동정의 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두 번째 교훈, 진정으로 폭력적이 되는 것, 사회적 삶의 기본  변수를 폭력적으로 뒤흔드는 행위를 감행하는 것은 어렵다.  284


끝으로(세 번째), 주체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말해주는 교훈은 폭력이 어떤 행위의 직접적인 속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폭력은 행위와 그 행위가 이루어진 맥락 사이에, 그리고 어떤 행동이 활동적인 것과 비활동적인 것 사이에도 퍼져 있다. 동일한 행위일지라도 그 맥락에 따라 폭력으로 간주될 수도 있고 비폭력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때로는 공손한 미소도 야수적인 감정의 폭발보다 더 폭력적일 수 있다.  293


오늘날 진짜 위협적인 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유사 능동성이다. 곧 '행동하라'는 요구, '참여하라'는 요구, 현재 현재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걸 감추라는 요구다. 사람들은 늘 개입하면서, '뭔가를 한다'. 학자들은 학자들대로 무의미한 논쟁에 참여한다. 진정 어려운 일은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고 철회하는 것이다. 권력을 쥔 자들은 설사 그것이 '비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침묵 보다는 참여와 대화를 더 좋아한다. 우리를 대화에 끌어 들여서 우리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길한 수동성을 깨뜨려버리기 위해서다. 그런 면에서 유권자들의 기권은 진정한 정치적 행위인 셈이다. 바로 그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가 오늘날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공허함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폭력이란 말을 기본적 사회관계를 발본적으로 뒤집어버리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면, 몰지각하고 정신나간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수백 만 명을 학살한 역사상의 '괴물'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이 괴물들이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폭력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다고 지젝이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와 관련해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부추기고 있는 게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해다.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우리가 항상 선거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이콧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급진적인 행동을 조직해야 할 상황도 있고 아무 것도 하지 안흔 것이 가장 좋을 때도 있어서, 이는 실용적으로 접근돼야 한다. 모든 것은 상황에 달려있는 것이다."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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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미래를 바꾸는) 학교 혁명 - 켄 로빈슨 루 애로니카 21세기북스 2015  03370



실수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독창적인 것을 해낼 수 없다. - 켄 로빈슨


모든 아이는 예술가로 태어난다. 자라면서 그 예술성을 지키는 것이 문제다 - 피카소




들어가는 글 - 자정 1분 전


이 책에서 나는 표준화 문화가 학생과 학교에 어떻게 해를 끼치는지 설명하면서 교육에 대한 차별화된 사고방식을 제시하려 한다. 또한 당신이 어떠너 사람이고 어디에 살고 있든 당신에게는 제도를 변화시킬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8


나는 교사, 연구자, 강연자, 심사관, 자문관 등으로 활동하며 40년 넘게 교육계에 몸담아왔다. 그 과정에서 교육계의 온갖 사람들과 부딪히고 온갖 기관과 조직에서 일했다. 기업, 정부, 무노하단체와 두루두루 협력해보기도 했다. 학교, 교육구, 정부를 도와 실용적 구상을 이끌고 나가기도 했다. 대학에서 교편도 잡아봤고, 새로운 단체의 설립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이 모든 활동을 펼치는 내내 나는 교육에 대해 지금까지보다 더 균형 잡히고 개인 맞춤형이며 창의적인 접근법을 찾아왔다.  10


어떤 사람들은 나의 온라인 강연 영상을 재미있게 보긴 했지만 제도의 변화를 위해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아 아쉽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이들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대답은 세 가지다. 첫 번째, 대화 시간이 18분밖에 없어서 어쩔 수가 없었으니 너그러이 넘어가주기 바란다. 두 번째, 내 생각에 정말로 관심이 있다면 그동안 내가 발표한 책, 보고서, 전략집을 읽어보면 도움이 될지 모른다. 마지막 세 번째, 바로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11


혼동을 야기하는 몇몇 용어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보자.

'학습(learning)' 이란 새로운 지식과 역량을 습득하는 과정이다... 학습 욕구를 계속 북돋우는 일이야말로 교육 혁신의 열쇠다.

'교육(education)'이란 체계적인 학습 프로그램이다. 정규교육의 전제는, 청소년들 스스로에게 맡겨두면 터득하지 못할 것들을 알고, 이해하고, 실천하도록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훈련(training)'은 교육의 한 종류로서 특정한 기술의 습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내가 말하는 '학교(school)'는 으레 아이들과 십대들을 위한 곳으로 여겨지는 전통적 시설으로만 제한되지 않는다. 서로 배우기 위해 사람들이 한데 모인 공동체라면 뭐든 학교다. 즉 이 책에서 학교란 홈스쿨링, 언스쿨링(un-schooling : 집이나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찾아 배우는 것- 옮긴이), 직접적 대면 형태나 온라인 형태의 비공식적 모임까지 아우르는 개념이다.  12-13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은 보수가 높고 자기만의 사무실이 있는 전문직 일자리를 보장받는다. 한편 지능이 비교적 떨어지는 학생들은 당연히 학교 성적도 떨어진다... 나름의 재능에 맞게 그런대로 괜찮은 서비스직이나 노동직에 들어가기도 한다. ..

전세계의 수많은 정책 입안자들이 실제로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지 곰곰이 따져보면 이들 학교와 학부모와 정책 입안자들은 이런 상황을 외면한 채 현재의 교육제도가 건전하다고 믿는 듯하다.  14


이 이야기는 위험한 허상이다. 그토록 많은 개혁이 성공하지 못한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허상 때문이다. ..

하지만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오히려 악화 일로로 치닫고 있다. 왜일까? 이런 문제들은 대개 제도 자체가 원인이기 때문이다.  15


문제를 해결하려면 증상과 원인을 구별해야 한다. 현재 교육 침체를 보여주는 수많은 증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런 증상들은 그 근본적인 문제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해결할 도리가 없다. 그런 문제 중에 하나는 공교육의 산업저 특징이다. 사실 대다수의 선진국은 19세기 중반에야 대규모의 공교육제도를 만들었다. 이런 제도의 발전은 산업혁명에 따른 노동력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측면이커서 대량생산의 원칙에 따라 구성됐다. 표준화운동(정부 주도로 표준 교육과정을 보급하려는 운동-옮긴이) ..  16


전통적 표준을 높이는 식의 교육 개선으로는 지금 우리가 직면한 도전을 충족시키기 힘들다. .. 

표준화운동에 탄력이 붙으면서 훨씬 많은 학생들이 낙제의 희생을 치르고 있다.  17


어떤 식으로든 교육에 관련돼 있다면 변화에 동참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이해해야 한다. 현재의 상황에 대한 비평, 바람직한 모습에 대한 비전, 다른 방향으로 이동할 변화론이다.  18


혁명은 입법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

당신이 어떤 식으로든 교육에 연관돼 있다면 당신에게는 세 가지의 선택이 가능하다. 제도 내에서 변화를 일구거나, 제도에 대해 변화를 촉구하거나, 앞장서서 제도의 틀을 깨거나.  19-20





우리 교사들은 교실에 들어가면 아이들 앞에서 '다들 수학 시험에 통과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아요. 아이 한 명 한 명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죠. '밴드 활동을 하고 싶지? 수석 자리에서 연주하고 싶지? 수학을 잘하면 도움이 될 거야.' 부탁조로 말하는 게 좋아요.  35


과거에는 국가 교육정책이 주로 국내적 문제였는데 요즘에는 정부들이 각국의 교육제도를 국방정책만큼이나 눈에 불을 켜고 주시하고 있다.  36-37


교육이 이렇게 뜨거운 정치적 이슈오 오르내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다. 지난 25년 사이에 기업 형태에 혁신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제조, 서비스 부문에서 경쟁이 심화됐다. ..

두 번째는 문화적 이유다. 교육은 공동체가 고유의 가치와 전통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주된 수단이다. 또한 경우에 따라 교육이 외부 세력에 맞서 문화를 지키는 수단이 되거나 문화적 관용을 촉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

세 번째는 사회적 이유다. 공교육의 공공연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배경과 환경의 차별 없이 모든 학생에게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시민으로 성공할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공교육에는 정부에서 바라는 실질적 목표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사회 안정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태도와 행동을 장려하는 것이다. ..

네 번째 이유는 사적인 것이다.

실제로 교육의 공공정책 관련 문구를 보면 그것이 무슨 의식이라도 되듯, 모든 학생이 자신의 잠재성을 깨달아 만족스럽고 생산적인 삶은 살아야 한다는 등의 구절이 들어가 있기 일쑤이지 않은가.  39-40


학업이 국가 경제의 구세주로 부상한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43


정규교육을 구성하는 3대 요소는 커리큘럼, 지도, 평가다.  44


표준화운동이 지도의 측면에서 선호하는 방식은 조별 활동보다는 학급 전체를 모아놓고 사실에 입각한 지식과 기술을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방식이다. .. 정형화된 필기시험과 객관식 문제의 포괄적 활용을 중시한다.  45


시헙의 목표 중에 하나는 학생, 교사, 학교 간의 경쟁 강화다. 이는 경쟁이 높아지면 자연히 표준도 올라갈 것이라는 가정에 따른 것이다.  45


2014년 4~6년 만에 대학을 졸업한 미국의 대학 졸업생은 평균 2만~10만 달러의 빚을 떠안고 있었다.  50


학력적, 직업적 카스트제도는 교육에서 가장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다.  51


리더들이 직원들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자질은 변화에 대한 '적응성'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창의성' 이었다.  54


미국은 세계에서 투옥률이 가장 높은 나라다. 대략 성인 35명당 한 명이 수감, 보호관찰, 가석방의 형태로 교정제도의 관리 대상이다. ..

미국에서 한 명의 고등학생을 교육시키는 데 매년 평균 1만 1,000 달러의 비용이 들어간다. 그런데 교도소에 수감시킬 경우 1인당 연간 2만 달러 이상이 들어간다.  58


당신이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매년 고객의 3분의 1 이상이 빠져나간다고 치자. 이쯤 되면 진짜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즉 고객이 문제인지 당신의 회사가 문제인지 의문을 가져봐야 하지 않을까?  59


표준화운동은 낮은 학업 성적에 대한 우려에서 시작됐다.  60


아무튼 원인이 무엇이든 여러 조사와 실질적 경험을 통해 거듭 드러난 바에 따르면, 학생의 학업성취도를 높여주는 결정적 요소는 학생 자신의 동기와 기대다. 학업성취도를 높일 최선의 방법은 지도의 질을 향상하고, 균형 잡힌 커리큘럼을 마련하고, 유익한 평가제도를 구축하는 것이다. 정치적 대응은 이와는 반대 방향을 향해왔다. 다시 말해 커리큘럼을 편협하게 짜고 교육 내용, 지도법, 평가를 최대한 표준화시켜 왔지만 이런 대응이 잘못됐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다.  61


표준화운동은 대부분 실패 중이며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더 많은 문제를 유발하고 있다. ..

표준화운동이 추진 중인 원칙과는 다른 원칙에 기초한 교육이 필요하다. 또한 이런 교육이 구체적으로 어떤 교육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본이란 특정 과목도, 특정 지도법이나 평가 전략도 아니다. 원래 역할에 충실한 교육의 근원적 목적을 가리킨다.  62


대안교육 프로그램에서는 .. 자기가 똑똑하지 못하가도 생각했던 학생이 자신이 똑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어른들의 관심, 열정, 전문지식 그리고 학생들의 신뢰, 의지, 헌신이 함께 필요하다.  71


대체로 유럽에서는 100여 년 전에 추진됐던 산업혁명의 일환으로 19세기 중반에야 공교육이 출현했다.  72


애초부터 대중 교육은 사회적 목적성도 높았다. ..토머스 제퍼슨은 "문명국가에서 국민들이 무지하면서도 자유롭게 살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존재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삶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렇듯 대중 교육을 사회 통제의 한 방법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게 교육은 사회적 기회와 공평성을 촉구하는 수단이었다.  75


산업주의에서는 대학 졸업자보다 육체 근로자가 더 많이 필요했다.  76


산업 제조의 목적은 똑같은 상품을 동일한 형태로 생산하는 것이다. 

대중 교육제도도 학생들을 특정 조건의 틀에 짜 맞추려는 의도로 설계됐다... 산없적 방법에서는 특정 규칙과 표준에 따른 획일성을 요구한다. . 표준화운동만 해도 커리큘럼, 지도법, 평가에 대한 순응을 바탕으로 삼고 있지 않은가. 

산업적 방법은 '선형(線形 줄선 형상형) 구조'를 띤다. 원재료가 연속적 단계를 통해 상품으로 만들어지고, 각각의 단계마다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관문으로서 일정 형태의 테스트를 거친다. 대중 교육도 일련의 단계로 설계돼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를 거쳐 그 상위 단계의 교육까지 쭉 이어진다. 학생들은 전형적으로 출생일에 따라 별개의 학년으로 나뉘어 일괄적인 제도에 따라 진학한다. ..

산업 생산은 '시장 수요'와 결부돼 있다. 시장 수요가 높아지거나 낮아지면 제조업자는 그에 맞춰 생산량을 조정한다. 산업 경제에서는 행정직과 전문직 근로자가 비교적 소수만 필요했기 때문에 대학 정원이 엄격히 통제됐다. 반면에 현재는 지적 근로자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대학 진입의 문이 활짝 열리고 대졸자가 사회로 진입하는 물결이 증가 추세다. ..

학교, 특히 고등학교와 고등교육은 공장에서 흔히 그렇듯이 '분업' 중심의 구조로 짜여 있다. 고등학교는 일과가 대개 일정 간격으로 나뉘어 있다. 종이 울리면 모든 학생이 다른 과목을 공부하거나 종종 교실을 바꿔 다른 수업을 받는다. 교사들은 특정 과목을 담당해 하루 종일 이 학급 저 학급을 가르친다.

이런 원칙은 상품을 제조하는 분야에서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사람을 교육하는 분야에서는 온갖 문제를 유발하기 십상이다.  77-78


교육의 획일성이 문제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애초부터 표준화돼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   78


내가 획일성에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교육에서의 제도화된 경향, 즉 하나의 표준 능력으로 학생들을 판단하고 그 표준에 미치지 못하는 학생들을 '저능아'나 '부진아'라는 낙인을 찍으며 정상이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다. 이런 의미에서 획일성에 맞설 대안은 사회 분열을 묵과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양성을 살리는 방식이 되어야 맞다. ..

획일성이라는 편협한 관점을 들이대면 필연적으로 제도로부터 퇴짜 맞거나 구제 대상자로 낙인찍히는 비순응자들이 다수 양산되게 마련이다.  79


우리 인간은 적절한 환경만 갖춰진다면 상상력과 창의력이 대단히 풍부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획일성의 문화에서는 이런 상상력과 창의력이 적극적으로 억제되며, 심지어 괘씸하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선형 원칙은 제조 분야에서는 효과적이지만 사람에게 대입하면 그렇지 못하다. 연령별로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은 아이들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이 '제조일'이라는 가정에 따르는 셈이다.  80


산업적 농업과 마찬가지로 산업적 교육에서도 생산성과 수확이 중요시돼왔고 현재는 그 강도가 더 높아지는 추세다.  89


교육을 개선하려면 반드시 이해해야 할 부분이 있다. 교육 역시 살아 있는 제도라는 점과 사람은 성장 환경에 따라 잘 자라기도 하고 그러지 못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90


학교 문화에 활력을 불어넣어 살아 있는 문화로 끌어올려야 한다. .. 문화를 실현시키려면 무엇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아야 할까? 내 생각에는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개인적 목적의 네 가지다.  91


경제적 목적 - 교육은 학생들이 경제적으로 책임감 있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 학교가 교육의 경제적 목적에 제대로 관여하기 위헤서는 청소년의 재능과 관심사를 아주 다양하게 길러줘야 한다. 학업과 직업훈련 사이의 경계를 없애고 두 분야를 똑같이 중요시해야 한다. 또한 청소년들이 여러 종류의 직업 환경을 직접 체험해보도록 직업 세계와의 실용적 파트너십을 촉진해야 한다.  91-94


문화적 목적 - 교육은 학생들이 자신이 속한 문화를 이해하고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다른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게 이끌어야 한다... 문화적 다양성은 인간을 더욱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주는 요소다. 모든 공동체는 자신의 문화와 더불어 다른 문화의 관행과 전통을 기림으로써 좀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

학교가 문화적으로 우선시해야 할 세 가지는 학생들 자신의 문화를 이해시키고 나아가 다른 문화들을 이해시킴으로써 문화적 관용과 공존에 대한 인식을 장려하는 것이다. 학교들이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편협하고 빈약한 커리큘럼이 아니라 광범위하고 다채로운 커리큘럼이다. 

94-97


사회적 목적 - 교육은 청소년이 능동적이고 온정적인 시민으로 성장하게 해줘야 한다.  97


개인적 목적 - 교육은 청소년이 주변의 세계뿐만 아니라 내면의 세계에소 관심을 갖게 해줘야 한다. .. 교육이 살아 있는 사람의 정신과 마음을 풍성하게 채워주는 것이라는 점을 잊으면 다른 목적들도 충족될 수가 없다. .. 인간으로서 우리는 누구나 두 개의 세계에 산다. 먼저 당신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당신이 오기전부터 있었고 당신이 떠난 후에도 남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사물, 사건, 다른 사람들로 이뤄진 당신 주변의 세계다. 또 하나의 세계는 당신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존재하는 세계다. 당신 자신의 생각, 감정, 지각의 사적인 세계, 즉 당신 내면의 세계다. 이 세계는 당신이 태어나는 순간 탄생됐고 당신이 숨을 거두는 순간 소멸된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세계를 통해서만 우리 주변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다시 말해 감각과 생각을 통해 주변의 세계를 지각하고 분간하면서 비로소 그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100



원칙적으로 노스 스타는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절망을 느끼고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십대들을 위한 곳입니다...

사람을 그냥 내버려주는 것, 스스로 선택하게 해주는 일에는 뭔가 심오함이 배어 있어요. 

이제 저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제가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를 물어봅니다. 아이들도 아직은 잘 모르기 때문에 답을 찾기 위해 갖가지 시도를 해봐야 합니다. 그중 하나가 모든 것에 '아니요'라고 말하며 삶을 철저히 비워낸 다음 한동안 아무것도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는 방법이에요 해보면 정말 재미있습니다.  107-108


켄과 노스 스타는 다양한 형태와 규모의 학습 방법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다. 아이들 모두를 똑같은 방식으로 가르칠 수 없으며, 가장 잘 맞는 학습 방법으로 가장 흥미를 느끼는 것을 가르쳐 줄 때 학생들은 비약적으로 도약한다는 것을 잘 안다.  109


어떤 상황을 혁신시키려면 세 가지를 이해해야 한다. 현재의 방법에 대한 비평, 바람직한 모습에 대한 비전, 다른 방향으로 이동할 방법에 대한 변화론이다.  111


핀란드의 모든 학교는 의무적으로 예술, 과학, 수학, 언어, 인문과학, 체육 등을 포괄하는 광범위하고 균형 잡힌 커리큘럼을 따라야 하지만 그 수행 방법에 관해서는 학교와 교육구에 상당한 재량권이 주어진다. 핀란드에서는 학교들이 실용적 프로그램, 직업훈련 프로그램, 창의성 양성에 높은 우선순위를 둔다. 또한 교사들의 훈련과 발전을 위해 그동안 막대한 투자를 해왔소 덕분에 교직은 위상이 높고 안정적인 직업으로 자리잡고 있다. 학교 교장들은 학교 운영에 폭넓은 재량권을 갖는 한편 전문적인 지원도 받는다. 핀란드는 학교와 교사들에게 경쟁보다는 협력을 장려하면서 자원, 아이디어, 전문 지식을 서로 공유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학교들이 지역 공동체와 학부모를 비롯한 학생의 다른 가족들과 긴밀한 유대를 맺도록 장려한다.

핀란드는 모든 국제적 평가에서 꾸준히 높은 표준 성취도를 보이고 있지만 고등학교 말에 딱 한 번 실시되는 시험 말고는 표준화된 시험이 없다.  113-114


교육은 산업적 제도가 아니라 유기적 제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116




아이들의 타고난 학습 능력은 얼마나 대단할까? 수가타 미트라는 1999년에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뉴델리 빈민가에서 실험을 실시했다. 그는 벽에 컴퓨터를 설치하고 전원을 켜서 인터넷을 연결해놓은 다음 아이들이 이 컴퓨터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봤다. 그곳 아이들은 모두 컴퓨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웹브라우저는 아이들이 알지도 못하는 언어인 영어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컴퓨터 다루는 법을 아주 금세 뚝딱 배우더니 자기들끼리 서로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게임을 하고 자기들만의 음악을 녹음하고 능숙하게 인터넷 서핑을 즐겼다. 당시에 트위터가 있었다면 그 달 만쯤에는 아이들에게 50만 명의 팔로워가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수가타는 더 야심찬 실험을 시도했다. 이번엔 컴퓨터에 음성-문자 변환 프로그램을 설치한 후 텔루구족 억양이 강한 영어를 구사하는 인도 아이들에게 주었다. 아이들은 컴퓨터에게 자신들의 말을 해독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요령을 몰랐다. 수가타는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말한 뒤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주고 떠났다가 두 달 뒤에 다시 찾아갔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컴퓨터가 이해하도록 프로그램돼 있던 영국의 억양에 맞춰 자기들의 억양을 교정한 상태였다.

얼마 후에 수가타는 인도 타밀어를 말하는 12ㅅ의 아이들이 영어로 생물공학을 독학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이번에도 그는 두 달의 시간을 주었고 그 자신조차 결과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죠. '가서 시험을 보게 하면 당연히 0점을 받겠지. 교재를 주고 나중에 다시 가서 시험을 봐도 똑같이 0점이 나올 거야. 그러면 나는 다시 돌아와서 이렇게 생각하겠지. 경우에 따라서는 교사가 필요하다고.'

두 달 후에 다시 가봤더니 26명의 아이들이 아주 아주 얌전한 표정으로 걸어왔어요. 제가 먼저 물었어요. '그래, 좀 봤니?' 아이들은 이렇게 대답했죠. '네, 봤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니?' '아니요, 전혀요.' '그랬구나, 얼마나 연습하다가 정말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매일 봤어요.' '두달 동안 아해도 안 되는 내용을 계속 봤다고?' 그 말에 한 여자아이가 손을 들더니'DNA 분자의 부적절한 복제가 유전병을 유발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이해를 못했어요'라고 말하더군요."

수가타는 정말로 많은 아이들이 효율적인 도구만 주어지면 혼자서도 학습할 수 있다는 증거를 그뒤로도 계속 발견하게 되었다.  134-136


아이들이 이처럼 타고난 학습자라면 학교에서 잘 따라오지 못하고 쩔쩔매는 아이들이 왜 그렇게 많은 걸까? 학교 공부에 지루해하기만 하는 아이들은 왜 또 그렇게 많을까? 여러 면에서 볼 때 학교에 만연된 제도와 관습이 문제다.  136


현재의 학업은 크게 세 요소로 구성돼 있다. 첫 번째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이른바 '명제적 지식'으로 통하는 지식, 이른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미국의 독립선언서가 1776년에 서명됐던 사실이 이런 명제적 지식의 예에 해당된다. 두 번째 요소는 개념, 절차, 가정, 추측 등의 이론적 분석의 강조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와 자유의 본질, 운동의 법칙 소네트의 구조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세 번째 요소는 손재주, 신체적 기술, 눈과 손의 협응 능력, 도구의 사용 등이 수반되는 기술적이고 실용적이며 응용적인 공부 보다는 주로 읽기, 쓰기, 수리가 수반되는 책상머리 공부의 강조다. 

명제적 지식은 때때로 '노잉 댓(knowing that: 방법을 아는 것-옮긴이)'와 구별된다. 절차적 지식은 뭔가를 만들고 실질적 일을 할 때 활용하는 것이다. 그림을 그릴 줄 몰라도 미술사를 학문적으로 공부하고, 악기를 연주할 줄 몰라도 음악 이론을 학문적으로 공부할 수는 있다. 미술 활동이나 음악 활동도 사실상 공부해야 할 부분이 있으므로, 방법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사실을 아는 것도 필요하다. 절차적 지식은 공학에서부터 의학과 무용에 이르기까지 모든 실용적 분야에서 필수적이다. 사람에 따라 학문적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특정 분야의 학문에 열정을 느끼기도 하며 아이디어와 기술의 실용적 응용에 흥미를 느끼면서 특정 실용 분야에 열정을 갖기도 한다.  137-138


모든 학생에게는 학문적 공부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138


우리의 학교제도를 떠받치는 조직적 의식과 지적 습관이 학생들의 다양한 재능을 적절히 반영해주지 못하는 탓이다.

단지 이런 식의 제도에 잘 맞지 않을 뿐인데도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거나, 자신이 별로 똑똑하지 못하다거나, 학습에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너무 많다.  139


가족의 지지는 받았지만, 온전한 관심은 받지 못한..  142


개인 맞춤형 교육이란 어떤 교육일까?

 - 인간의 지능이 다양하고 다각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 학생들이 자신만의 특별한 관심사와 장점을 살릴 수 있게 해주기.

 - 시간표를 학생들의 저마다 다른 학습 속도에 맞춰주기.

 - 개인별 진도와 성취도를 격려해주는 방식으로 학생들을 평가하기.  147


우리 인간은 다른 종들처럼 세상을 직접적으로 살지 않는다. 즉 인간은 세상을 개념과 가치라는 틀을 통해 바라본다. 세상에 대한 개념과 이론을 세우고 그에 따라 세상을 해석하며 그에 따라 스스로나 서로를 바라본다. 이런 상상과 창의성은 지구상의 다른 생물과 인간을 구별짓는 몇 가지 안 되는 특징이지만, 바로 그 특징이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148


집에 새 가전기기를 들여놓고 모든 가족에게 작동법을 알아내보라고 하자. 당신의 배우자는 바로 제품 사용설명서부터 들여다보고, 한 아이는 온라인에 접속해 그 기기와 관련된 유튜브 동영상을 검색하고, 또 다른 아이는 기기를 켜서 무작정 조작해볼지 모른다 이처럼 새로운 물건을 터득하는 방식이 제각각인 것은 각자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렇게 제각각인 모든 사람을 똑같은 방법으로 그것은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비효율적이다.  153-154


개개인의 학업성취도를 높이려면 학생들을 개개인으로서 수업에 참여시켜야 한다.  155


느린 교육 운동의 핵심은 어떤 방식이건 학습 과정을 개별화시키고 학습자에게 자신의 열정과 장점을 발견할 여지와 시간을 허용해주는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느린 교육 운동에서는 의미 있는 결과를 끌어내기 위한 진심 어린 학습이 중요합니다. 교사와 학습자의 참여의 질이 학생을 재능과 시험 성적만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점이 포인트예요."  159


여러 형태의 놀이는 삶의 모든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 놀이의 추방은 표준화교육이 밎은 대비극 중 하나다. 

생물 진화적 관점에서 놀이를 연구해온 보스턴대학교의 심리학 연구교수 피터 그레이에 따르면 아이들은 다른 책임들에 얽매이지 않으면 다른 포유동물과 비교해 훨씬 많이 놀며, 이런 놀이로부터 엄청난 혜택을 얻는다.  160-161


피터 그레이는 "아이들은 본래부터 어른의 간섭 없이 혼자 힘으로 놀고 탐험하도록 태어난 존재다. 아이들이 성장하려면 자유가 필요하다. 자유가 없으면 괴로워한다. 자유롭게 놀고 싶은 충동은 기본적이고 생물학적인 충동이다."

그레이 박사의 말마따나 자유로운 놀이의 결핍은 음식, 공기, 물의 결핍처럼 육체를 죽이지는 않는다 해도 영혼을 죽이고 정신적 성장을 방해한다.

"자유로운 놀이는 아이들에게 학습 수단이다. 자유로운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친구를 사귀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의 삶을 전반적으로 통제하는 요령을 배운다. 또한 놀이를 통해 자신이 자라는 문화에서 성공을 위해 필수적인 신체적, 지능적 기술을 연습하고 습득하기도 한다. 그 무엇을 해준다 해도 빼앗은 자유를 보상해줄 수는 없다. .. 아이들이 자유로운 놀이 속에서 스스로 터득하는 것들은 다른 식으로는 가르칠 수 없는 것들이다."  162-163


'지름길은 없다'

"제가 아이들에게 열심히 공부하길 바란다면 저 자신이 가장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 좋습니다."  169


정규 교육의 3대 요소는 커리큘럼, 지도, 평가다. 대체로 표준화운동은 커리큘럼과 평가에 초점이 집중돼 있다. 지도는 표준을 전하는 역할쯤으로 치부되고 있다. 우선순위가 완전히 거꾸로 뒤집힌 것이다. 커리큘럼이 얼마나 상세한지, 시험에 얼마나 비용을 들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교육 혁신에서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지도의 질이다.  172


표준화운동은 교사들에게 서비스직 종사자의 역할을 맡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교사들이 택배기사나 되는 듯이 표준을 '배달'하는 역할에 치중돼 있다.  173


아이들이 타고난 학습자라면 굳이 교사들이 필요할까? ..

교육은 살아 있는 과정으로서 농업이 가장 적절한 비유가 된다. 농부들은 자신들이 식물을 자라게 해주는 것이 아님을 안다. 농부들이 식물에 뿌리나 잎사귀를 붙여주거나 꽃잎에 색을 칠해주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식물은 스스로 자란다. 농부가 할 일은 식물이 스스로 자랄 최적이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174


아이들은 원래 호기심이 많다. 학습 의욕을 자극하려면 아이들의 호기심을 북돋워야 한다. 질문 중심의 실용적인 지도법이 큰 효과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련한 교사는 학생들이 묻지도 않은 질문에 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의문을 품도록 자극해서 탐구 의욕을 부추긴다.  181


학생들은 유대감을 주는 교사를 필요호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믿어주는 교사를 필요로 한다.  184




커리큘럼은 정규 커리큘럼과 비정규 컬리큘럼으로 구분되는데 정규 커리큘럼은 의무적인 과정인 만큼 시험을 치르고 평가받는 절차가 수반된다. 비정규 커리큘럼에는 모든 자발적 활동이 포함된다. 

커리큘럼의 목적은 학생들이 배워야 할 내용들에 대해 일종이 지침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커리큘럼에는 또 다른 목적도 있다. 학교들이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지, 모든 구성원의 시간과 공간의 이용을 어떻게 배열할지를 결정하는 데도 커리큘럼이 필요하다.  217


내 생각에 교육의 4대 기본 목적에 비추어 학교가 정말로 학생들의 성공적 삶을 돕고 싶다면 여덟 가지 핵심 능력을 개발해 주어야 한다. 

 - 호기심(curiosity)

   인간이 이뤄낸 성취는 탐구하고 시험해보고 싶은 욕망,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하고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알고 싶은 욕망, '왜'라는 의문과 '만약'이라는 의문을 풀고 싶은 욕망이 그 동력이다.

 - 창의성(creativity)

 - 비평(criticism)

   비평적 사고는 형식논리만으로 갖춰지는 능력이 아니다. 의도의 해석, 맥락의 이해, 감춰진 가치와 감정의 간파 동기 판단, 편견 간파, 간결하고 타당한 결론 제시 등도 갖춰야 할 능력이며 이 모두는 연습과 지도가 필요하다.

 - 소통(communication)

   우수한 읽기, 쓰기, 산술 능력. 이와 더불어 분명하고 자신 있게 말하는 능력,, 일명 '구술 능력(oracy)' 역시 중요하다.

 - 협력(collaboration)

   학교 밖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 능력이 지역 공동체를 강화시키고 집단적 도전에 맞서는 데 중요한 요소다... 청소년에게 협력 능력을 키워주면 자존감이 높아지고 호기심이 자극되며 창의성과 성취도가 긍정적인 사회적 행동이 촉진 된다.

 - 연민(compassion)

   연민의 뿌리는 감정이입이다. 단순한 감정이입만은 아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는 황금률을 실제로 표현하는 것이다. 감정이입의 실천이기도 하다.

 - 평정(composure)

 - 시민성(citizenship)

   청소년이 사회의 작동 방식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특히 법적, 경제적, 정치적 제도가 어떻게 운영되고 그런 제도가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 시민성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획일성과 현상 유지가 아니다. 그보다는 평화롭게 살기 위해 동등한 권리, 의견 차이의 가치, 자신의 자유와 타인의 권리 사이에서 균형잡기 등을 장려해야 한다.  222-230


학교의 커리큘럼 구상에 관해 나는 학과라는 개념을 훤씬 선호한다. 학과는 이론과 실용이 조합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231-232


내 견해로는 균형 잡힌 커리큘럼이 되려면 예술, 인문, 언어, 수학, 체육, 과학에 대해 공평한 자격과 자원을 부여해야 한다.  232


표준화시험이 교육의 주된 책무가 되면 커리큘럼을 정하고 지도의 초점을 맞추는 기준으로서 시험을 활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교과목의 테스트 방법은 교과목을 가르치는 방법의 모델이 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학교가 시험 준비 프로그램으로 전락하는 셈이죠."  260


시험을 강조하다 보니 아이들에게 타고난 창의성과 모험가적 재능을 어떻게 활용할지 가르쳐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261


전체 성적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험 성적이 좋지 못할 것 같은 학생들을 낙제시킬 소지도 있다.  262


평가란 학생들의 발전과 성취의 정도를 판단하는 과정이다. 내가 <내 안의 창의력을 깨우는 일곱 가지 법칙>에서도 주장했듯이 평가는 서술과 평가의 두 가지로 나뉜다. 어떤 사람이 1마일(약1.6km)을 4분 만에 달릴 수 있다거나 불어를 말할 줄 안다고 하면, 이것은 그 사람의 실력에 대한 중립적 서술이다. 반면 어떤 여학생이 그 교육구에서 달리기를 가장 잘한다거나 원어민 뺨치게 불어를 잘한다고 말할 경우에는 평가가 된다. 평가가 서술과 다른 점은 개인의 실력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특정 기준에 대비해 판단한다는 것이다.

평가는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우선 진단적 역할을 해서 교사가 학생들의 적성과 발달 수준을 파악하게 해준다. 또한 발달 형성적 역할을 통해 교사가 학생들의 공부와 활동에 대한 정보를 모아 발달을 북돋우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학업 프로그램 말기에 전반적 수행 능력을 판단하게 해주는 총괄적 역할을 한다. 

문자와 성적을 활용하는 평가제도의 문제는 대체로 서술의 비중이 약하고 비교의 비중이 높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때때로 그 의미도 잘 모른 채 성적을 받고 교사들은 때때로 그 이유를 확신하지 못한 채 성적을 매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단 하나의 문자나 숫자로는 복합적 평가를 총괄적으로 담아내지 못한다는 점 또한 문제다. 게다가 일부 성과는 이런 식으로는 적절히 표시할 수가 없다. 저명한 교육자 엘리엇 아이즈너(Elliot Eisner)는 말했다.

"중요한 것이라고 해서 모두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측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 중요한 것은 아니다."  272-273


실질적 학습은 상당히 다루기 힘든 일이다. .. 학교의 주된 초점을 성적이 아니라 학습에 맞추려면 학습과 사람들을 숫자로 전락시키지 못해 안달하는 강박을 버려야 한다.  274


현재 전세계적으로 몇몇 교육구들이 문자와 숫자로 표시되는 성적을 폐지하고 보다 통합적인 평가 방식을 채택하는 시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으며...  283


학교에서 쩔쩔매는 학생들이 그렇게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학생들이 개인으로서 대우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생들 특유의 장점이 발견되지 못하거나 고려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의 깊게 살펴보는 부모라면 담임 교사를 비롯한 대다수 사람들보다도 자신의 자녀를 더 잘 알기 마련이다.  326


인생은 일직선이 아니다  327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학부모의 참여는 사회경제적 위치나 문화적 배경과 상관없이 동기부여와 성취에 직결된다. <증거의 새로운 물결>에 따르면 부모가 "아이들과 학교 문제를 얘기하고, 아이가 잘할 거라고 기대해주고, 대학 진학 계획을 도와주고, 과외 활동을 건설적으로 하도록 확인해주면 아이들은 학교에서 더욱 실력 발휘를 한다.  328


홈스쿨링은 지난 수년 사이에 탄력을 얻으면서 한때는 별난 사람들의 전유물로 취급됐으나 이제를 주류로 들어서고 있다. 미국 교육부에 따르면 2011~2012학기에 학령기 아동의 약 3퍼센트가 홈스쿨링을 받았다고 한다. 홈스쿨링을 매력적 대안으로 선택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 중 한 가지만 들어보면, 앞에서 교육의 개인 맞춤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다뤘던 여러 가지 문제를 홈스쿨링이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즉 표준화시험에 매달리지 않으면서 아이들이 가장 끌리는 열정과 관심사를 발견할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한 학습의 해>에서 저자 퀸 커밍스는 그녀의 딸 앨리스에게 홈스쿨링을 했던 체험담을 풀어놓았다. ' .. 딸이 지성을 한껏 과시하며 자신감을 펼치길 바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딱히 가야 할 곳도 할 일도 없이 멍하니 긴 우호의 따분함을 기분 좋게 즐기기도 바랐다.'  346-347




"저는 아이들이 세 유형으로 나뉜다고 봅니다. 먼저 기술의 수동적 소비자형이 있어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런 프로그램을 소비만 할 뿐, 기술은 이해하지 못하는 유형이죠. 그다음으로 똑똑한 소비자형이 있어요. 분별력 있게 웹을 활용할 줄 아는 아이들이죠. 기술에 대해 더 잘 알지만 실천은 하지 않아요. 마지막 유형은 생산자형 아이들이에요. 오픈소스 활용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유형이죠. 아이가 창의성을 갖길 바란다면 프로그램 짜는 요령을 가르쳐줘야 해요. 컴퓨터가 없는 아이에게 컴퓨터는 정보기술 외 다른 학습으로의 활용 면이나, 아이들의 창의성을 키우는 면으로 활용도가 뛰어난 기구예요."  371


창의성의 풍토를 촉진시키기 위해 활용하는 한 가지 방법은 모든 관련자들을 찬찬히 살피며 "어떤 제안거리가 있는지 알아주고,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저마다의 독특한 재능을 발견해주면서 성장을 유도해주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도 있다.  376




나오는 글 - 모든 사람을 위한 혁명


마리아 몬테소리는 의사이자 교육자였다... 다음과 같이 개인 맞춤형 교육을 강조했다. "교사는 아이가 흥미를 갖는지 안 갖는지 유심히 살펴야 한다. 어떻게 관심을 보이고 얼마나 오래 관심을 보이는지 관심을 기울이며 얼굴에 드러난 표정까지도 잘 살펴봐야 한다. 교사는 자유의 원칙을 어기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아이에게 부자연스러운 활동을 부추길 경우 아이의 자연스러운 활동이 뭔지를 더 이상 분간하지 못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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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러시아 문학으로의 초대

러시아. 딱' 세계의 6분의 1'입니다. 연방이 해체된 지금의 러시아만 하더라도 세계의 8분의 1 정도입니다.  12

러시아의 역사는 그다지 길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상당히 짧지요. .. 러시아는 천 년 조금 넘습니다.  13

최초의 국가를 키예프 루시라고 합니다. '루시'가 '러시아'의 어원입니다. 자기들을 지칭할 때 "우리는 루시인이다"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루시가 나중에 모스크바 시대에 '러시아'로 바뀝니다. ..
그들에 따르면, 루시는 러시아에서 이민족, 즉 이질적인 존재를 뺀 것입니다.
그 다음 13세기에서 15세기까지, 더 정확하게는 1240년에서 1480년까지가 몽골 지배기입니다. 타타르 러시아라고 불리는 시기입니다.  14

몽골의 대제국은 칭기스칸 이후 사한국으로 나뉘어 분할 통치되죠. 러시아는 킵차크한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러다 15세기 후반 몽골 세력이 약화될 무렵 모스크바 공국 시대가 열립니다... 모스크바 공국의 대공은 러시아를 지배하지만 몽골의 칸에게 충성하며, 매년 공물을 보냈어요. 흔히 러시아의 강력한 전제주의 체제를 몽골 지배의 가장 큰 정치적 유산이라고 합니다.  15

공동체에서는 국가가 생기지 않습니다. 공동체는 평등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죠.
사실 러시아는 무척 강한 공동체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농민 공동체인데, 러시아어로 '미르'라고 합니다. 미르는 뜻이 조금 복합적입니다. '세계'라는 뜻도 있고, '평화'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 미르가 농민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미르는 결속력이 상당히 강해요.
러시아에 왜 이렇게 강한 공동체 정신이 남아 있을까요? 그들의 심성이 좋아서가 아니라 땅이 척박해서 그렇습니다. 땅이 척박해서 혼자서는 도저히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품앗이를 해야 합니다... 개인주의는 러시아 전통에서 볼 때 상당히 낯선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이라든가 사생활 개념이 좀 약합니다. 서구식 문화와는 차이가 있는 거죠. ..
러시아 사람들은 세계에서 인내심이 가장 강한 민족으로도 꼽힙니다. 또 러시아는 몹시 폭력적인 군대를 가지고 있는 나라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폭력적인 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 것도 러시아 사람들이 잘 참기 때문입니다. .. 이민 족의 오랜 지배 아래에서 또는 위임 권력 아래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갖게 된 인내심입니다.  16-17

타타르 세력이 약화되지 러시아는 그들을 쫓아내고 모스크바 공국 시대를 엽니다. 그러면서 영토를 끊임없이 확장하기 시작합니다. 러시아가 처음부터 방대한 영토를 차지한 게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한 겁니다.
모스크바 공국 시대는 '제정러시아 시대'라고 하는데, 보통 '표트르 러시아'라고도 합니다. 표트르 대제가 세운 러시아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피터 더 그레이트(Peter the Great)'라고 부릅니다. 표트르 대제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에 근대 러시아를 만듭니다. 러시아사 시대 구분은 단순한데 18세기 이후를 모던(modern) 러시아, 즉 근대 러시아라고 하고 그 이전을 올드(old) 러시아, 즉 고대 러시아라고 합니다. 러시아는 고대와 중세를 따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19

러시아사를 크게 보면 '주인'이라고 할 만한 군주가 둘 있습니다. 한 사람은 근대 러시아를 만든 표트르 대제이고, 또 한 사람은 소비에트 러시아를 건설한 스탈린입니다. 거기에 한 명 더 꼽자면 이반 뇌제가 있습니다. .. 이반 뇌제, 표트르 대제, 스탈린이 러시아사의 '주인'입니다. 러시아를 만든 사람들입니다.
이반 뇌제는 이른바 전제군주의 절대 권력을 확립합니다. 피바람이 불었죠. .. 귀족들을 대거 숙청하고 자기 친위대를 만듭니다. 소비에트 시대의 비밀경찰인 KGB 같은 것의 전신이라고 할 만합니다. 귀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조금이라도 반란의 기미가 있으면 바로 숙청하면서 강력한 일인 지배 체제를 만듭니다.  20-21

표트르 대제. 최초로 해군을 창설하기도 합니다.
농경 국가로, 후진적이고 전근대적인 경제체제를 유지하던 러시아를 무역 국가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에는 항구가 없었어요. .. 표트르 대제에게는 특히 부동항, 즉 겨울에 얼지 않는 항구를 만드는 것이 숙원사업이었습니다. .. 마침내 스웨덴과 싸워 승리를 거둡니다. 이른바 북방전쟁에서 그렇게 승리하면서 어느 정도 교두보를 확보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서유럽 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페테르부르크로 옮깁니다.
페테르부르크는 순수한 인공도시, 계획도시입니다.
18세기에는 유럽 전체에서 가장 세련된 도시, 새로운 도시였는데 지금은 가장 고풍적인 도시가 되었습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을 정도입니다...모스크바가 목조도시라면 페테르부르크는 석조도시입니다.  21-22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보면 모스크바의 귀족들은 다 점잖고 품위가 있습니다. 반면 페테르부르크의 귀족들은 다 야비하고 음흉하게 그려집니다.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화는 과정에서 수천 명이 희생됐습니다. 큰 토목 공사였고 공사 과정이 험난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뼈 위에 세워진 도시' 혹은 '악마의 도시'라고 불렸습니다. .. 러시아 문학이나 문화사의 '페테르부르크 신화'입니다. 도시 자체가 하나의 신화적 공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신화의 시작이 푸슈킨의 <청동 기마상>이고 그다음 이어진게 고골의 '페테르부르크 연작'입니다. 그런 작품들의 정점에 오르는 것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죠. 이게 20세기에는 안드레이 벨리의 소설 <페테르부르크>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하나의 도시 공간 자체가 신화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여러 작품에서 소재 이사의 의미를 갖게 된 경우입니다.   23-24

표트르 대제의 러시아가 이른바 제정러시아입니다. 1917년 2월에 2월 혁명이 일어나고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그게 제정러시아의 끝입니다.  24

우리가 35년간 일제강점기를 경험했다면 러시아는 240년간 몽골 지배를 경험했거든요. 그런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 점에서 비슷하고, 정서적으로도 비슷한 점이 있어요. 그래서 한국 독자들이 가장 접하기 쉬운, 일체감을 느끼기 쉬운 문학이 러시아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25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는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끝나게 되죠. 그 이후를 '포스트 소비에트'라고 부릅니다. .. 키예프부터 따지면 여섯 개 시대, 즉 키예프 러시아, 타타르 러시아, 모스크바 러시아, 표트르 러시아(제정러시아), 소비에트 러시아, 포스트 소비에트 러시아(러시아 연방) 이렇게 시대 구분이 됩니다.  26-27

러시아 연방을 상징하는 문장은 '쌍수 독수리'인데 제정러시아 때인 15세기에 들어왔다고 하죠. 러시아는 모스크바가 로마와 비잔티움을 뒤이은 제3의 로마라는, 이를테면 기독교 선민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잔티움의 문장을 갖다 쓰기도 했는데 쌍두 독수리가 그런 기원을 갖고 있죠.  27

톨스토이도 러시어의 거장이지만 톨스토이 문학이 상대적으로 유럽 공통 문학, 보편 문학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면,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은 러시아에서만 나올 수 있어요. 고골도 마찬가집니다.
러시아 작가의 계보는 푸슈킨에서 시작합니다. .. 그 다음 고골이고, 한 사람 더 들면 레르몬토프가 있습니다. 이 3대 작가가 러시어 근대 문학의 퇘를 만듭니다. 이들이 활동했던 시기는 1820년에서 1840년 정도까지입니다.
한 다리 건너뛰어서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 리얼리즘 누학의 3대 작가가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이들 작가가 주로 활동했던 시기가 1856년에서 1880년까지입니다.
마지막이 체호프입니다. 체호프는 19세기를 마감하는 작가입니다. 별명도 '황혼의 작가'입니다. '가을의 작가'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체호프의 몇 년 후배가 막심 고리키입니다. 20세기 러시아 문학을 시작하는 작가입니다. 고리키부터 20세기 작가로 치면 됩니다.  27-28

러시아 문학은 달리 말하면 인텔리겐치아의 문학이었습니다. 러시아의 지식인 계급을 '인텔리겐치아'라고 합니다. ..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는 지식인이되 비판적 지식인을 말합니다.
책을 읽을 줄 알면 인텔리겐치아 자격으로 충분했습니다. 90% 이상이 문맹이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독자층이 그렇게 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텔리겐치아는 출신에 따라 귀족과 잡계급이 있었습니다. 잡급은 귀족도 아니고 농민도 아닌 부류인데, 대개는 성직자나 상인이나 의사 같은 직종의 사람들이 잡계급을 구성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장 대표적인 잡계급 출신의 작가입니다. 인텔리겐치아가 사회적 계급 또는 세력으로 대두되는 시기가 1830~1840년대입니다.  28-29

표트르 대제 때까지도 러시아에는 '문명'이 없었어요. 표트르의 사절단이 유럽을 일주하면서 지나가는 곳마다 다 쑥대밭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밤마다 먹고 마시며 광란의 밤을 보낸 거죠. 황실이 그 정도였어요. 게다가 몽골의 침입과 지배 때문에 러시아는 르네상스를 경험하지 못했어요.  30

인텔리겐치아는 183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서구파와 슬라브파로 나뉘게 됩니다. 둘 다 기본적으로는 러시아를 사랑합니다.
서구파는 러시아를 '아이'로 봅니다. 잘 돌보고 훈육해야 하는 아이로 보는 거죠. 이때 서구파에게 중요한 건 미래입니다. 우리가 러시아를 미래에 어떤 나라로 만들어야 할 것인가? 유럽을 모델로 하자는 거죠.
반면 슬라브파는 러시아를 어머니로 봅니다. 중요한 건 러시아의 과거이고 전통입니다. 유럽 문명은 오염되고 타락했지만 러시아는 아직 순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이런 독자적 가치를 보존해나가야 한다는 게 슬라브파의 주장입니다.
고골은 나중에 대단한 보수주의자가 되는데, 슬라브파를 지지합니다. 반면 투르게네프는 대표적인 서구파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골수 슬라브파입니다.  31-32

러시아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푸슈킨의 시를 읽습니다. 거의 이유식 같아요. 러시아는 중등 교육 과정이 11년인데 이 기간에 배웁니다. ..
러시아도 독서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하는것이 고전 문학 작품을 영화화하는 겁니다.  32

 


2강 러시아 영혼의 정수 -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읽기

푸슈킨은 1799년에 태어났습니다.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의 관료제 개혁 이후에 세습귀족의 지위가 약화되는데, 푸슈킨 가문이 거기에 해당합니다.
명색이 귀족이었지만, 사치스러운 생활을 감당할 돈은 점점 줄어가던 집안이었어요.
푸슈킨은 러시아 최초의 '전업 작가'였습니다.  39-40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푸슈킨은 상대적으로 부모님의 무관심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혜택이라고 한다면 아버지 서재의 책들을 마음껏 탐독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장서가 3,000권쯤 됐다고 해요.  40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을 계기. 러시아에서 '조국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러시아사에서 보면 1914년 히틀러와의 전쟁과 함께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는 전쟁입니다. 이 두 차례의 조국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이 러시아 사람들의 자부심입니다.  44

당시 귀족 청년들 사이에 '돈 후안 리스트'가 유행했는데, 자기가 유혹한 여자들의 목록을 만들어놓은 거예요. 믿거나 말거나 푸슈킨은 결혼 전에 이 목록에 있는 여자가 100명이 넘었습니다.  49


<예브게니 오네긴>
내용은 한마디로 두 주인공 오네긴과 타치야나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입니다.  52

고전주의는 개인의 개성과 자유보다는 규범이나 조화, 모범 등을 강조했습니다. ..
낭만주의는 자유와 개성을 예찬하고 규범보다는 파격을 좋아합니다. 형식을 그리 존중하지 않아요. 규칙에 대한 위반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문학적 유희가 가능하려면 규칙의 준수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만약 규칙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 위반이 의미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54-55

 


3강 절대 고독과 자의식의 탄생 - 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 읽기

레르몬토프는 십대 때부터 시 습작을 합니다. 27세에 결투로 죽은 요절 시인이라 천재라는 선입견을 갖게 되는데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푸슈킨은 천재적인 시적 재능을 갖고 있었던 반면 레르몬토프는 노력파였어요. 13세경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서 이십대 중반에 제대로 된 시를 쓰게 되니 10년간 습작한 셈입니다.  75

레르몬토프의 작품에는 내면의 자의식을 가진 주인공이 나타난다는 거죠. 러시아 문학사에서 처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영웅>의 주인공 페초린은 오늘날의 독자들도 충분히 동일시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그만큼 현대적입니다. 현대인이 갖고 있는 내면이나 자의식을 엿볼 수 있어서 어떤 연속성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근대적 인간의 자의식을 보여주는 셈인데 이걸 계승하는 작가가 바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내면 묘사는 거의 '창자'까지 드러내놓고 묘사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죠. 가장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부분까지 다 까발려놓습니다. 그게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현대성인데 그런 현대성의 기원을 바로 레르몬토프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85

<예브니 오네긴>이 '오네긴 연구'라면 <우리 시대의 영웅>은 '페초린 연구' 입니다.  88

러시아 근대 소설의 토대를 마련한 작품으로 흔히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 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 그리고 고골의 <죽은 혼>, 이 세 작품을 꼽습니다. 그런데 세 작품이 모두 특이합니다. <예브게니 오네긴>이 운문 소설이고, <우리 시대의 영웅>이 '연작소설'이라면, <죽은 혼>은 부제가 '서사시'라고 돼 있어요. 산문소설이지만 작가 고골이 그렇게 주베를 붙입니다. 1830~1840년대에 쓰인 이 작품들이 러시아 근대 문학의 토대를 마련하게 되고, 그 이후에 본격적인 리얼리즘 산문소설들이 쓰이게 됩니다.  92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걸작을 써낼 수 있는 토양을 푸슈킨, 레르몬토프, 고골이 마련한 것인데, 모델이 없는 상태에서 모델을 만들기 위해 암중모색했던 작가들인지라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쓴게 특징입니다. 동시대 작품인가 싶을 정도로 서로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생각합니다.  94

 

 

4강 웃음과 공포의 미스터리 - 고골의 <페테르부르크 이야기>읽기

고골의 풀네임은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
실제로 '고골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인가' 따져들면 단순해 보이는 작품도 복잡하고 난해해집니다. 사실 작품뿐만 아니라 고골은 생애 자체가 미스터리입니다.  106

고골에게서 작가적 재능은 무엇보다도 유머나 풍자 쪽에 있었습니다.  110

고골은 전형적인 속물드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최고 작가입니다. 문제는 그런 재능과 그가 생각한 작가의 소명이 충돌하는 데 있었습니다.  111

1837년에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푸슈킨이 결투하다 죽은 거예요.
고골 생각에 러시아 문단에는 두 작가가 존재합니다. 푸슈킨과 고골, 푸슈킨과 자신이 러시아 문학을 이끌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10년 연상인 푸슈킨이 앞에서 끌고 가고 자기는 뒤에서 밀고 가고, 푸슈킨이 긍정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자기는 부정적인 군상을 묘사하고, 그런데 푸슈킨이 죽은 겁니다. 고골은 '이제는 나밖에 없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명 의식이 더 강화됩니다.  116

그전까지 고골은 진보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작가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는 고골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당시 독자나 비평가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이 '진보적인 작가'가 <친구들과의 서신 교환선>에서는 노골적으로 러시아정교와 전제주의, 농노제를 옹호합니다. 이 세 가지는 제정 러시아를 지탱하는 세 지주입니다. 관제 이데올로기였어요. 차르의 전제적 지배 체제 아래서 지주들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자유가 제약당하고 처지가 악화된 농노를 고골이 긍정한 겁니다.
1830~1840년대에 투르게네프를 비롯하여 많은 작가와 인텔리겐치아들이 농노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고골은 농노제를 옹호하고 나선 겁니다. 완전히 따돌림당합니다. 고골에 대해서 높이 평가했던 당대 최고의 비평가 벨린스키는 이에 고골을 신랄하게 비판한느 공개 서한을 발표합니다.
상심에 빠진 고골은 1848년에 팔레스타인 성지 순례까지 갔다 와서 다시 집필에 나서지만 진척이 안 됩니다. 마침내 오프티나수도원을 방문하는데 그곳 수도원장이 고골한테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네가 지금까지 쓴 것은 모두 악마의 작품이다." 고골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광신적인 신앙 때문에 지옥에 대한 묵시록적인 두려움을 품고 있었는데, 그 공포를 더 부채질한 셈입니다. 그래서 1852년 <죽은 혼> 2부를 태워버리고 열흘 뒤 반미치광이가 되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117-118

고골에게는 양면이 공존합니다. 무척 유쾌한 풍자적인 세계, 유머러스한 세계와 어둡고 음울하고 무서운 세계가 공존하는 것이 고골 문학입니다. 그래서 고골은 상당히 흥미로우면서도 미스터리한 작가입니다.  139

 

 

5강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출발 -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아버지와 아들> 읽기

투르게네프의 장편소설 <루딘>이 발표도니 1856년부터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출간된 1880년까지 25년 정도가 러시아에서 사실주의 문학이 꽃피운 시기입니다. 곧 투르게네프가 러시아 사실주의 장편소설의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죠. ..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는 1818년 러시아 오룔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납니다. 어머니 쪽이 부유한 대귀족이었고 아버지 쪽은 상대적으로 몰락한 가문이었습니다. 이렇듯 가세가 차이나는 경우는 대개 정략결혼이죠. 투르게네프의 아버지가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켜세우기 위해 부유한 노처녀와 결혼한 겁니다. 자전적 소설 <첫사랑>의 배경이죠.
아버지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투르게네프는 장교로서 보로디노 전투에서 수훈을 세워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수려한 용모와 여성 편력으로 유명했답니다. 23세의 나이에 부유한 여지주 바르바라 페트로브나와 결혼하게 됩니다. 바르바라는 농노가 5,000명이었다니 상당한 대지주였죠. 아버지 투르게네프 집안은 농노가 100여 명이었으니 꽤 차이가 납니다.  142-143

<첫사랑>의 아버지처럼 투르게네프의 아버지 또한 늘 바깥으로 도는 바람에 부부간에 다툼이 잦았습니다. 그때마다 부모 모두 자식들에게 분풀이를 하곤 했죠. 투르게네프는 여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어머니를 닮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상당히 포악한 성격이어서 어린 투르게네프를 아무 이유 없이 때리기도 했고, 특히 농노들을 많이 학대해서 어린 투르게네프가 마음의 상처를 입습니다. 러시아 농노제를 폐지하기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이른바 '한니발의 맹세'를 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죠. 실제로 <사냥꾼의 수기>라는 작품집으로 농노제 폐지에 크게 기여합니다.  143

어쨌든 어린 시절 투르게네프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단연 어머니였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나서 크게 영향 받을 기회가 없었던 반면 어머니로부터는 압도적 영향을 받았죠. 어머니 말고 투르게네프의 삶과 문학에 영향을 준 사람이 두 명 더 있는데, 오페라 여가수 폴린 비아르도와 당대의 비평가 벨린스키입니다.  144

1843년, 그러니까 투르게네프가 만 25세 되던 해 모스크바에 공연을 온 프랑스의 오페라 가수 비아르도를 만나게 됩니다. 투르게네프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유부녀였습니다. 당시 오페라 여가수들의 경우 자신의 후원자와 일찍 결혼을 하곤 했죠. 남편 이름이 비아르도입니다. 이 유부녀 오페라 가수에게 누르게네프는 그만 첫눈에 반합니다. ..
투르게네프는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일련의 장편소설을 계속 써나가면서도 사생활에서는 비아르도에게 일생을 바치게 됩니다. 남편과는 친구로 지내면서요.
벨리스키와 교우가 시작된 것도 비슷한 시기였습니다. 모스크바대학 철학부에 입학했다가 페테르부르크대학으로 옮겨 그곳에서 고골의 강의도 듣고 셰익스피어 작품 중 일부를 러시아어로 옮기기도 하고, 푸슈킨과 교류를 나누기도 하던 투르게네프가 베를린 유학을 다녀온 뒤 서사시 [파라샤]를 발표할 무렵입니다.
벨린스키는 19세가 전반기 러시아 최고의 비평가입니다. 러시아 문학이 낭만적 서정시에서 리얼리즘 소설의 시대로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러시아 문학의 민중성을 강조한 비평가죠. 벨린스키와 교우하게 되면서 투르게네프는 비로소 사회적 문제의식에 눈뜨게 됩니다. 여성적인 데다 내향적이었던 그가 벨린스키를 통해서 사회문제로 눈을 돌리고 작가로서 소명의을 갖게 된 것입니다.  145

투르게네프에게 끼친 벨린스키의 영향은 나중에 투르게네프가 자신의 대표작인 <아버지와 아들>을 벨린스키에게 헌정한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벨린스키는 1848년에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와 아들>은 1862년에 발표됩니다. 투르게네프는 대표작을 벨린스키에게 바쳤을 뿐만 아니라, 죽어서는 벨린스키 옆에 묻힙니다.  147

흥미로운 것은 투르게네프의 생몰 연대와 마르크스의 생몰 연대가 같다는 사실입니다. 둘 다 1818년에 태어나서 1883ㄴ녀에 사망하죠.  147

한 번도 관찰자나 화자가 자기 주장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 못된 지주를 보라는 식의 호소도 없고 어떻게 하라고 요구하거나 주장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게 투르게네프 스타일인데 그저 간결하게 보여주기만 할 뿐입니다. 감정의 찌꺼기를 드러내지 않아요.
그런가 하면 투르게네프는 자전적 소설도 썼습니다. <파우스트>, <아샤>, <첫사랑> 등이죠. 1856년부터 1860년 사이에 쓰인 작품들입니다. 이 작품들은 비록 러서아 사회의 문제를 직접 다루지는 않았지만 투르게네프를 이해하는 데 요김한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8

<루딘> <귀족의 둥지> <전야> <첫사랑> <아버지와 아들> <연기> <처녀지> 이 장편소설 여섯 편으로 투르게네프는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에 자신의 이름을 깊이 새기는데, 이른바 사회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 작품 여섯 편은 1856년부터 1877년까지 20년간 당대 러시아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가 어땠는지를 알려면 이 소설들을 보면 됩니다.  149

투르게네프는 가장 서구적 교양을 갖춘 작가입니다. 그러면서도 러시아의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실물 크기로 보여주는 작가로 평가됩니다. '표면의 작가'라고도 불립니다. ..
그런데 깊이 들어가는 않아요.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인물의 추악한 면까지 들추어내는 것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151

작가로서 투르게네프의 대표작은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그의 작품 중 당대의 독자나 문단으로부터 가장 격찬을 받은 작품은 <사냥꾼의 수기>지만, 가장 논란이 됐던 작품은 단연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1862년작인데 바자로프라는 니힐리스트를 다루어 화제가 된 소설이기도 합니다. 투르게네프가 니힐리즘이나 니힐리스트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을 대중적으로 유행시킨 당사자입니다. 그러니까 니힐리즘의 철학자 니체와 함께 니힐리즘이라는 말에 상당한 지분을 갖는 두 사람 중 한 명인 셈이죠.  152

러시아 문학에서 말은 대개 여성을 상징하죠.  157

1840년대를 주름작았던 철학자가 바로 헤겔입니다. 러시아 문학에서는 헤겔이나 셸링 같은 독일 철학자들이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치는데, 평론가 벨린스키가 대표적 헤겔주의자였어요. 벨린스키가 강조했던 것 중 하나는 리얼리즘이고 나머지 하나는 민중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낭만주의의 대표적 장르인 서정시의 시대는 끝났고, 리얼리즘 산문소설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거죠. 그리고 벨린스키는 누구를 위한 문학인가, 즉 귀족계급(지배계급)을 위한 문학인가, 아니면 억압받는 민중을 위한 문학인가라느 물음을 제기하면서 민중을 위한 문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벨린스키의 이 두 가지 명제를 자기의 문학에 전적으로 수용한 작가가 바로 투르게네프입니다. 리얼리즘에 입각한 산문소설을 썼고, 민중성을 구현하고자 합니다. 물론 민중이 주인공이 돼야 한다는 건 아니었지만 러시아 사회의 전체적인 변혁을 위해서 중간계급에 해당하는 지식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그 전망을 모색해보려고 했어요.  168-169

파벨이 "그런데 도대체 바자로프는 뭐 하는 사람이냐?" 하고 바자로프에 대해 묻자 아르카디가 "그는 니힐리스트예요" 하고 대답합니다. "뭐라고?" 그는 니힐리스트입니다." 아르카디가 재차 얘기합니다. 그러자 니콜라이가 "니힐리스트라고? 내가 알기로 그건 라틴어 '니힐(nihil)', 즉 '무(無)'에서 나온 말인데, 그러면 그 단어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 아니냐?" 하고 묻자 이번엔 파벨이 "아무것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해"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르키다가 "모든 것을 비판적 관점에서 보는 사람입니다"하고 말하죠. 그러니까 세 사람의 입을 통해 니힐리스트에 대한 세 가지 정의가 나온 셈입니다.
니힐리스트라는 말이 당시에는 아주 생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등장한 뒤로 유행어가 되었죠. 1860년대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 그러니까 젊은 지식인들은 스스로 니힐리스트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투르게네프가 이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이들을 니힐리스트라고 부른셈이죠. 그런데 이 말이 보통 허무주의자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좀 어폐가 있습니다. 원래 니힐리스트는 상당히 과격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위를 부정하죠. 그러니까 여기서의 부정은 파괴적인 부정을 뜻합니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의미와 허무주의는 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19세기 후반 니힐리스트라는 말은 테러리스트와 거의 동의어 였습니다.  170

한국인의 사고방식 가장 밑바탕에 흐르는 게 바로 허무주의거든요. '인생 뭐 있어'주의랄까요. 먹는 게 남는 거야, 다 먹자고 하는 거지 하는 식이죠. 정치적으로 진보니 보수니 하지만 대개는 다 껍데기라고 생각해요. 그냥 자기 지방 사람이 나오면 찍잖아요. 그기ㅔ 허무주의예요. 정치적 허무주의죠. 그런데 서구 사람들이게는 그런 세계관 자체가 충격적입니다. 다위니즘이 던진 충격이죠. 그냥 생명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 투르게네프에게서도 그런 세계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뭔가 세상을 바꿔보려는 모든 인간적인 노력,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노력이 있지만 결국엔 다 패배하고 말잖아요. 한 개체로서의 삶은 유한한 운명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집니다. 그게 투르게네프의 비관적 염세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투르게네프가 최선을 다해서 그리고자 했던 것은 그와 같은 근본적 허무주의 앞에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 것, 그 정도가 최대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183

 

 

6강 러시아적 수난과 구원의 변증법 -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읽기

도스토예프스키는 워낙 유명한 작가이고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 문학의 간판스타죠.
러시아 문학은 두 작가에 의해서 양분될 수 있습니다. 더 확장하면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의 세계를 두 작가가 양분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은 비극, 톨스토이 소설은 서사시에 견주기도 합니다. ..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시간이 대단히 압축돼 있다는 것입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방대한 분량임에도 주요 사건은 3일 동안 벌어진 것입니다. <죄와 벌<은 일주일 정도고요.  186

루카치의 유명한 소설 이론서인 <소설의 이론>이 사실은 도스토예프스키론의 서론 격으로 쓰인 것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근대 소설사 전체에 대한 개관이 필요하다는 판단인 거죠. 그래서 서론을 썼는데, 그 이후에 본격적인 도스토예프스키 이론은 쓰지 못했어요.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새로운 세계의 비전을 보고자 했는데,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루카치는 현실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현실에서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굳이 문학을 통해 우회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책의 마지막 대목에서 루카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단 한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다른 세계에 속한다"고 썼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려면 먼저 루카치가 소설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는 소설에서 '본질은 시간과 함께 주어진다'고 규정합니다. 세계의 본질을 시간 속에서 파악한다는 얘기입니다. 서사시는 무 시간적 세계인 것과 달리 소설은 철저하게 시간적 세계입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는 시간이 별 의미가 없어요. 톨스토이는 서사시적 스케일을 갖고 있다고 했는데, 루카치가 말한 근대 소설의 정식에 잘 맞습니다. <전쟁과 평화>에서도 주인공 나타샤가 소녀에서 아이 엄마가 되기까지의 시간을 다루면서 그 안에서 인물들이 변화하고 성숙해가는 과정을 보녀여주니까요.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는 시간이 변수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세계'라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런가 하면 나보코프는 상반된 평가를 내리면서 도스토예프스키를 이류나 삼류 작가로 깎아내렸습니다. 어설프게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설교적 문학을 그는 혐오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자신이 부인하면서도 그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188

도스토예프스키는 출신으로 보면 잡계급입니다. 아버지가 빈민 구제 병원의 의사였어요.
도스토예프스킹게 돈은 평생의 화두였죠. 작춤에서도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에 태어났는데, 성장기에 특기할 만한 것은 10대 후반, 그러니까 1839년에 아버지가 농노들한테 맞아 살해된 일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지병인 간질인데, 언제 처음 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191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의 인물들은 감정 기복이 아주 심한데, 알고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삶 자체가 그랬습니다. 그의 생애를 고려하면 그런 인물들이 크게 이상하거나 작위적으로 비치지 않습니다. 자기가 겪은 감정을 그대로 묘사한 거니까요.  195

1867년, 도스토예프스키가 안나와 결혼했을 때 장장 4년 동안 신혼여행을 떠납니다. 결혼하고 나서 안나가 생각해보니 이렇게 돈에 쪼들려서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싶은 거예요. 바로 짐을 싸서는 남편과 함께 유럽으로 떠납니다. 빚쟁이들 때무에 러시아로 돌아올 수도 없었죠.  202

<죄와 벌>은 1866년 작품입니다.  205

서구에서는 철학을 자기주장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느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주장하는 내요은 시시해도 상관없습니다. 중세 때 바늘 끝에 천사가 몇이나 올라앉을까, 이런 걸로 논쟁하기도 했다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실없는 논쟁이지만 당시에는 진지했어요. 현대 영미권의 분석철학에서도 주제 자체는 사소해보이더라도 어려운 개념들을 동원해서 아주 정밀하게 논증해나갑니다. 왜냐하면 이 과정이 철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시시한 문제를 다루면 철학이 아닙니다.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게 철학입니다. 방법은 반드시 논증이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다룰 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소설가는 언어로, 화가는 그림으로, 작곡가는 음악으로, 영화감독은 영상으로 철학을 할 수 가 있어요. 인간에게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게 바로 철학입니다. 얼마나 논리적으로 엄격하게 입증하느냐는 오히려 부차적입니다. 철학의 개념이나 이미지가 다른 것이죠.  207

러시아 소설에서 가끔 미국 간다는 얘기가 나오는 데, 보통 다 자살합니다.  212

'카라마조프'는 러시아어로 '악에 문드러진'이라는 듯입니다. 그러니 악에 문드러진 집안 이야기입니다.  217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면 전체를 n분의 1로 나눠 가지는 것이냐? 그건 아닙니다. 그건 서구식입니다. 우리는 모두에게 책임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책임이 크다는 게 도스토예프스키식이고 러시아식입니다.  230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러시아인이 되어야 한다고도 말했습니다. 그에겐 지름길이란 없었던 것이죠.  231

 

 

7장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읽기

톨스토이는 러시아를 넘어서 세계적인 대문호로 평가받는 거장이기도 합니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통스토이는 1828년 야스나야 폴라냐의 톨스토이 백작 가문의 4남으로 태어난 걸로 돼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유년과 관련해서 중요한 대목은 일찍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의었다는 겁니다. 어머니는 183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작가가 두 살 때 그러니까 우리 나이로는 세 살 때고, 아버지는 아홉 살 때 세상을 떠납니다. 말하자면 고아인 셈인데 이 때문에 성장기 대부분을 친척 집을 전전하면서 지내게 됩니다. 어머니의 부재가 톨스토이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커서 단지 불우한 어린 시절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의 여성상과 그의 문학에 나타나는 여성상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됩니다. 
1844년 카잔대학교 동양어학부에 들어가는데 이곳에서 톨스토이는 여러 언어를 배우게 됩니다. 거의 10개 국어를 익혔다는군요.  234-235

1852년 잡지 <동시대인>에 [유년시절]을 발표하면서 작가로 데뷔합니다. 이 작품은 톨스토이의 데뷔작이기 때문에 중요하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유년시절]에서 톨스토이는 자신이 작가로서 평생 다루게 될 두 가지 주제의 실마리를 보여주는데, 하난는 '죽음'이고, 하나는 '예술'입니다. 죽음은 주인공이 아홉 살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그려 보이죠. 그때의 낯섦, 공포, 슬픔 등을 그 나이의 시선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죽음 문제는 성 문제만큼이나 톨스토이를 평생 따라다니는 주제입니다. 예술 문제는 주인공이 시를 한 편 쓰는데, 운율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솔직한 감정과는 거리가 먼 거짓된 표현을 집어넣게 됩니다. 그런데 외할머니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에게 친찬을 받죠. 거짓과 기만이 칭찬받는 예술작품을 만든다는 것, 나중에 톨스토이의 예술론으로 이어지는 테마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죽음과 예술 이 두 가지 주제가 데뷔작에 이미 나타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36

젊은 시절엔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결혼도 늦게 하죠. 34세 때인 1862년, 18세의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합니다. 두 사람의 불화는 워낙 유명해서 관련 책도 많이 나왔을 정도입니다. 특이한 것은 두 사람이 평새에 걸쳐 일기를 썼다는 사실입니다. 톨스토이는 이십대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60년 동안 일기를 썼습니다. 아내 소피야도 일기를 썼죠. 처음에는 상대방이 보라는 의미에서 쓰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오해가 해소되지 않으니까 나중에는 후대 사람들이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자료를 남긴다는 차원에서 썼다고 합니다. ..
시비를 건 쪽은 톨스토이인데 자신이 청년 시절에 썼던 일기를 결혼하자마자 아내에게 읽으라고 보여줬답니다. 보통은 다 태워버리고 깔끔하게 정리하는데, 톨스토이는 아내에게 자신의 치부까지 다 보여줘야 과거 생활이 정화된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톨스토이가 가장 싫어했던게 거짓과 기만이었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적 행위라는 것이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이라기보다 자신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볼 때, 아무리 부부간이라 해도 지나친 셈이었죠. 현실은 보통 어느 정도의 기만과 가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237-238

톨스토이는 특히 여성 심리의 대가입니다.
토스토예프스키는 여성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
열네 살에 처음 성경험을 갖는데 그때 느꼈던 것까지 빠짐없이 적어놓았어요. 소피야와 결혼하기 전에는 마을의 젊은 아낙과 육체적 관계에 빠지기도 했죠. 지주였던 톨스토이는 경제적으로 보상을 해주면서 뉴부녀인 그 아낙과 계속 관계를 한 것입니다. 매번 자기비판을 하면서도 그런 관계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결혼하게 된 계기도 빨리 그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소피야가 갓 결혼해서 남편이 보여주는 일기를 보니 집에서 일하는 여지안 악시냐의 이름이 자주 나오는 거예요. 몸집이 뚱뚱한 악시냐가 바로 톨스토이와 관계를 한 아낙이었으니 소피야가 경악할 수밖에 없었겠죠.
부부 모두 결혼생활이 끔찍했다고 술회했지만, 자녀를 모두 13명이나 낳았습니다. 1862년에 결혼해서 1863년 첫아이를 낳고, 열세 번째 이반을 1888년에 낳았어요. 1888년이면 부부 사이가 아주 안 좋았을때인데 그 이휴에도 부부관계는 계속된 걸로 돼 있습니다.  239

크게 다툰 톨스토이는 1910년 10월 28일 가출해서 11월 7일 객사합니다. ..
톨스토이는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일기에 '나는 구제불능이다'라고 써놓기도 했죠. 그래서 결혼도 일부러 늦게 한 면이 있습니다. 청년 시절 숱한 여성편력을 경험햇으면서도 쉽게 결혼하지 못한 것은 누구든 자기와 결혼하고자 하는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거나 존경해서가 아니라, 자기 지위나 재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외모를 보고는 자신을 사랑해줄 여자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런 콤플렉스는 결혼하고 나서도 없어지지 않아 아내 소피야와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내가 자기를 사랑해줄 거라고 믿지 못한 것이죠.  240-241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구상한 것은 1825년 12월의 데카브리스트 봉기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톨스토이의 조상 중에 봉기에 직접 참여한 인사도 있었기에 톨스토이는 데카브리스트의 역사에 대해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데카브리스트 봉기는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로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데카브리스트 봉기에 대해 쓰려면 1812년 전쟁에 대해 먼저 써야 했던 것이죠. 그래서 쓴 게 <전쟁과 평화>인데 워낙 방대하다 보니 정작 데카브리스트 봉기에 대해서는 쓰지 못했어요. <전쟁과 평화>는 1805년 부터 1820년경까지 15ㅕㄴ 정도를 다룬 대하소설입니다.
<전쟁과 평화>는 러시아라는 국가의 정체성, 통일성을 모색한 작품으로서 의의가 있습니다. 한 나라의 정체성은 자발적으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외부의 자극이나 충격이 있어야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거죠. 사춘기가 보통 그렇잖아요. 자기 정체성이 형성되는 기간으로, 비로소 남과 자신을 분리하고 자아 개념이 확고해지죠. 남과 자신을 분리하려면 당연히 타인의 자극이 있어야 해요. 마찬가지로 한 나라의 정체성 또한 외부의 어떤 충격 때문에 생겨나는데, 러시아의 경우 1812년 전쟁이 그런 자극과 충격을 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나폴레옹 군대와의 전쟁이 바로 타자 역할을 한 셈이죠. 그런 타자에 대한 반응으로 러시아란 무엇인가에 관심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전쟁 이후 러시아의 역사가 처음 쓰입니다.  242-243

톨스토이는 타자보다 '나'의 세계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평생 니힐리즘과 대결했다면, 톨스토이는 에고이즘과 싸웠다고 생각되는데, 톨스토이의 경우 데뷔작부터가 자전 3부작이죠. 자기 이야기였던 셈입니다. 이게 확장되면 러시아라는 나라의 정체성과 통일성의 문제가 됩니다.  244

자신의 욕망과 도덕률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또한 톨스토이가 관심을 가졌던 문제입니다.  244

<안나 카레니나>는 .. 완결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까지 레빈이 품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물음, 즉 죽음에 직면해서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삶의 신비나 의미에 대한 물음이 답변을 얻지 못하고 열린 채 남아 있게 되죠. 톨스토이는 이 작품 이후에 모든 예술로서의 소설을 부정하고 포기 하게 됩니다...
보통은 <안나 카레니나>출간을 기점으로, 즉 1878년을 기점으로 톨스토이를 전기와 후기로 나눕니다. 소설가 톨스토이와 그 이후의 사상가 또는 설교가로서 톨스토이를 대비하죠.  246

미학적 장치라는 것은 우회로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미가 세상을 구원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소설가로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미를 우회로로 생각한 것이죠. 반면 후기 톨스토이는 미를 기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으로 가는 지금길이 있다고 여긴 겁니다. 그래서 뒤로 갈수록 소설이 짧아져요. 도덕적 교훈을 위해서는 방대한 소설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간단하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바보 이방 이야기> 등을 쓰게 됩니다. 그냥 그렇게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면 되지 공연히 복잡하게 사유하거나 우회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겁니다.  247-248

<부활>은 1899년 당국의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교도들이 캐나다로 이주할 수 있도록 비용을 대주기 위해서 쓴 소설입니다.  248

신에 대한 인간의 관념은 세 가지가 가능합니다. 인간에 대해서 신이 밖에 있는 경우, 즉 절대적 타자로서의 신입니다. 유대교의 신을 보통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와 달리 기독교의 신은 좀 특이합니다.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는 신, 그리스도가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이었죠. 그런가 하면 내안에 신성이 내재하는 것, 즉 범신론적 신이고 불교적 신입니다. 저마다 부처인 거죠. 자기 안에서 신을 발견하는 겁니다. 톨스토이의 신과은 세번째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동양사상에 매우 친화적입니다.
후기 톨스토이는 비폭력 무저항주의 사상의원조라 할 수 있습니다. 간디나 헨리 소로보다 톨스토이가 ㅁ너저 이른바 톨스토이즘이라고 불리는 비폭력 무저항주의 사상을 내세우죠. 후기 톨스토이는 국가 폭력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국가조차 부정합니다. 대단히 과격한 사상이죠. 이런 부분이 한국에서는 제대로 수용되지 않고 오직 종교적 사상가로만 읽옇는데, 일면적 수용이라고 해야겠습니다.  249

카레닌과의 결혼생활이 그녀에겐 '살이 있는 삶(불륜)'이 아니라 '죽어 있는 삶(결혼)'이었던 것이죠. 삶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라면 따로 고민할 필요가 없겟지만 브론스키와 만난 이후에 안나에게 가로놓인 건 '도덕적이지만 죽어 있는 삶(결혼)'과 '부도덕하지만 살아 있는 삶(불륜)' 사이의 양자택일입니다. 톨스토이는 두 사람이 처음 성관계를 갖는 것을 살인자와 시체의 관계에 비유함으로써 그 부도덕함을 드러내죠. 안나는 자기가 너무 큰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며 울고 있고, 브론스키는 살인자가 된 기분으로 서 있어요.  264

안나의 경우처럼 욕망이 우리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면,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요? 톨스토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육체노동입니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육체노도이고 또 하나는 육식을 자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톨스토이의 생각으로, 그래야 육체적 욕망을 제어할 수 있어요. 적게 먹고 노동으로 열량을 소비하면 그만큼 욕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 거죠.  266

톨스토이는 동양의 우화를 예로 드는데, 나그네가 맹수에 쫓겨 우물에 빠집니다. 빠지는 순간 나무뿌리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데, 밑을 보니까 용이 입을 쫙 벌리고 있어요. 밖에서는 맹수가 으르렁거리고 그러니까 밖으로 나가도 죽고 매달려 있다가 힘이 빠져 떨어져도 죽는 겁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인데 관목 가지에 벌집이 있어서 꿀이 흘러내려요. 나그네는 그 꿀을 핥으며 잠시 도취돼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게 삶이라고 생각했어요. 여기서 진리는 죽음입니다. 필연적 죽음. 그런데 자기의 이런 현실을 곧 삶의 진리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망각하고 기만하는 겁니다. 그렇게 기만하게끔 만드는  꿀에 해당하는 게 가정과 예술입니다. 후기 톨스토이는 그래서 가정을 부정하고 예술도 부정합니다.  267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결론적으로 톨스토이가 안나의 죽음을 통해 육체적 열정과 제도적 결혼은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점입니다. ..
결혼 제도가 열정을 막을 수 없다면 곧 결혼 제도 안에서는 이 열정 문제가 해소될 수 없다면 비극적인 파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게 톨스토이의 결론입니다.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 좋은 결혼과 나쁜 겨혼이 있다는 게 <안나 카레니나>의 서두였지만, 결말은 그런 가능성이ㅔ 대한 회의로 마무리됩니다.  268-269

 

 

8강 코믹과 우수의 작가 - 체호프의 <갈매기>읽기

안톤 체호프는 세계적인 단편 작가이면서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로 평가받는 극작가이기도 합니다. 러시아 문학사에서는 푸슈킨에서 시작한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마감하는 작가이기도 하죠.  272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는 1860년 카간로그라는 지방 항구도시에서 태어납니다.
체호프 가계도 농노였다가 장사로 성공하게 되죠. 하지만 철로가 개통되면서 아버지가 운영하던 잡화상이 장사가 안 되기 시작해 결국 파산하자 김나지움에 다니던 체호프만 남ㄱ두고 가족은 모두 모스크바로 이주합니다. 그 후 5년 동안 체호프는 혼자 학비를 벌어가며 우리 식으로 말하면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죠.
어린 시절 체호프는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많이 맞음 자랐다고 합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것으로 알았단가 대학에 가서야 자신이 특별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걸 깨닫게 되죠.
다정다감하고 관대한 성격이었답니다. 용모에서도 그런 인상을 풍기죠.
공부를 열심히 한 데다 잘하기도 해서 모스크바대학 의학부에 입학합니다. 그러면서 가족과 다시 합류하게 되는데 합류해서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어요. 학비 뿐만 아니라 생활비도 벌어야 했죠. 그래서 쓰기 시작한 게 콩트입니다. 신문과 잡지에 아주 짧은, 한두 페이지짜리 콩트를 쓰기 시작합니다 짤막한 작품들이 다 코믹하면서도 뭔가 여운을 남깁니다. 이 시기에만 400여 편 이상의 작품을 썼답니다.  274

이력 중 특이한 것은 1890년 그의 나이 30세 때 사할린 섬으로 여행을 간 겁니다. 1880년에 데뷔해서 딱 10년 동안 작가로 활동한 다음이었죠. 1886년에 첫 작품집을 낸 뒤 문학상도 받고 작가로 인기도 얻었을 뿐 아니라 지명도도 있었는데 난데 없이 사할린으로 가겟다고 지인들에게 얘기하곤 훌쩍 떠났습니다. 당시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개설되기 전이어서 할린으로 가려면 육로로 마차를 타고 가야 했거든요. 가는 데만 6개월이 걸립니다. 3개월 정도 체류하고 돌아올 때는 배를 타고 와서 한 달 정도 걸렸고요. 아무튼 1년을 꼬박 사할린 여행에 바치게 됩니다. 남들은 유배형을 받고 가는 곳을 굳이 고생을 사서 하면서까지 다녀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체호프는 뭔가 전환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10년 동안 유머 단편을 쓰다 보니 작가로서 매너리즘에 빠진 겁니다. 더는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고 그저 판에 박힌 작품들만 쓰는 것 같다 보니 작가로서 위기의식을 느꼈을 법합니다. 그래서 러시아를 더 알아야겠다고 판단하고 결행한것이 바로 사할린 섬 여행이었건 거죠.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사할린까지 가서 그가 한 작업이 면전 카드를 만드는 것이었어요. 3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만든 면접 카드가 8,000장이라니까 거의 하루에 100여 장씩 만든셈입니다. 그만큼의 사람들을 만났다는 얘기예요. 그렇게 석 달 동안 사람을 만나 면접 카드를 만드는 ㅇ리만 하고 돌아왔어요. 여행이 목적이 아니었던 거죠. 그러고는 <시베리아 여행>이란 기행문과  <사할린 섬>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하게 됩니다.  275-276

문학사가들은 사할린 여행으로 사회적 현실에 대한 체호프의 관심이 더 넓어지고 깊어진 것으로 평가합니다. 사할린 여행 이후에 쓴 작품 중에 대표작이 [6호실]이라는 단편인데, 체호프 작품을 읽어보신 분들은 특이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을겁니다. 분량도 길고, 아주 어둡습니다. 말하자면 체호프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섞어놓은 것 같은 작품이랄까요. 체호프에게는 드문 경우인데 사할린 섬 여행의 영향으로 이해됩니다.  277-278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처럼 핵심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대신 곱씹어서 음미해가며 읽어야 하는 게 바로 체호프의 작품입니다.  286

<갈매기>는 간단한 구도로 보자면 트레플료프 형과 니나 형 인물의 대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301

유한한 삶 속에서 순간순간이라도 제 목소리와 빛을 뽐내는 사소한 즐거움이 있는 것이고, 작가 체호프는 이러한 즐거움의 권리는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불행한 경험에 유폐되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삶에 대한 의지로 승화시키는 니나 같은 여주인공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게 아닐까요.  303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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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처음 이 단상집의 제목으로 생각한 것은 <섹스 뒤의 명상>이었다. 그때의 '섹스 뒤'는 'after sex'가 아니라 'beyond sex'였다. 그러니까 '섹스를 넘어서 버린 상태에서의 사랑에 대한 명상'인 셈이었다.
여기 수록된 단상들은 섹스에 강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유치한 사랑론과 섹스에 사로잡혀 그곳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음담패설적인 사랑론을 경멸하기 위해 씌어진 것들이다.

 

 

 


남녀 사이에 서로 사랑하는 눈치를 보이는 것을 눈맞춘다고 한다. 사랑은 눈에서 시작된다. 눈맞춤은 모든 사랑의 정지(整地 가지런할정 땅지) 작업이다. - 고종석,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중에서


사랑은 이러이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이러하지 않은 것은 사랑이 아니다, 라는 식으로 사랑을 규정하려드는 단세포적인 사람들을 나는 많이 보아왔다. ..
사랑이 어디 혼자 하는 것인가? 섹스가 어디 혼자 하는 것인가? 그대가 했던 사랑이 모두 똑같은 사랑이었던가? 그대는 상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판에 똑같은 섹스를 했던가?  37

21세 때 내가 생각했던 섹스는 현실과 유리된, 어둠 속에서만 할 수 있는 어떤 신성한 것이었다. 나는감히 밝은 빛 아래에서 여자의 속살을 볼 수없었다. 그것은 거부된 지식(denied knowledge)이었다. 요컨대 섹스의 순간은 일상적인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0세가 된 나는 불을 켜고 마음껏 여인의 알몸을 시각적으로 소유한다. 섹스도중 전화가 와도, 절정의 순간이 아닐 경우 거의 대부분은 받는다.(혹은 받으라고 한다) 그리고 전화통화를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서로의 알몸을 애무한다. 내 나이 어디쯤에선가(혹은 어느 여자부터인가)성이 일상으로 편입해 들어온 것이다. 그 옛나르이 신성했던 성이 무의미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지금의, 일상에 편입된 성이 천박하고 동물적이라고 말하지도 않겠다.
신성했던 섹스는 신성했던 섹스대로 나에게 뭔가를 깨우쳐주었고, 일상에 편입된 현재의 섹스 역시 나름대로 나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고 있다.
이제 내 나이 마흔, 나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다른 차원의 만남이 가능하리라는 것을 안다.  39-40

천형(天形 하늘천 형상형)
미안하다. 내 사랑으로는 당신의 상처를 다 품을 수가 없다. 이만큼이 내 사랑의 한계인 것 같다.
내 마음은 당시느이 상처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져주고 싶은데, 내 손은 오히려 당신의 상처를 함부로 찔러대고 있다.
... 여긴 너무 힘든 곳이다.
우리 아예 사랑하지 말까? 상처 같은 건 못 느끼고 그냥 수비게 한세상 살아버릴까? 어차피 밥 먹고 섹스하고 아이 낳아 기르는 건 똑같을 텐데... 그래버릴까?
내 부주의한 손길에 상처입고 비명을 지르며 돌아누운 당신.
전엔 몰랐었다. 이따위 세상, 그냥 바람처럼 지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영혼이지만, 몇십 년 정도는 웃으며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등은 가슴 저미도록 어여쁘기만 하다.
미안하다.
그래, 미안하다. 다시 당신의 상처를 건드리게 된다 할지라도, 그리하여 당신의 상처가 덧나게 된다 할지라도, 다시 당신의 전부를 안고 싶은 것이다.
내 만신창이 된 영혼으로, 어금니 악물고.  44-45

 

 

 

결혼을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항상 되풀이되는 토론의 변함없는 주제였다. 즉 결혼은 개별 존재가 그를 통해 모든 사람들엑 대하여 가치를 지니게 되는 의무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 미셸 푸코, <성의 역사>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해진 길을 간다. 그들은 세계와 자신의 역학 관계를 따져 계획을 세우고, 크든 작든 그 계획의 범주 안에서 무리없이 살아간다. 때때로 모험을 한다고 해도 그 범주 안에서의 모험이다. 그들은 결혼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은 겨혼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낭만주의자들은 어제 계획을 세우고 오늘 그것을 부순다. 도무지 내일을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해와 달이 서로를 마주볼 수 없는것처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헛된 것에 매달려 정열을 소모해 버린다. 이를테면 그들은 자기 생을 방목하는 유목민들이다.  51

인간은 오랜 원시 난혼생활을 하다가 '질투'와 '사유재산'이 발생하여 가족끼리만 성관계를 하는 혈연가족을 형성했다가, 일정한 가족권 내에서 남편과 아내를 공동소유하는 푸날루아(punalua) 가족을 거치고 일부다처제 비슷한 대우혼 가족을 거쳐, 마침내 일부일처 결혼이라는 사회제도를 만들어냈다. ..
공적인 장소에서 사람들은 곧잘 '사랑 없는 결혼이 어디 있는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세상에는 사랑 없는 결혼이 더욱 많다. 그리고 '사랑 있는' 이라는 것도 사랑한다고 믿는 한순간의 착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들은 필요에 의해서,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게 사람 구실을 하는 것 같아서... 등등 매우 건조하고 합리적인 이유로 결혼을 한다.
사랑이 아무리 많아도 조건이 안 맏으면 결혼하지 못한다. 결혼은 사랑의 결합이 아니라 조건과 조건과의 만남, 가족과 가족과의 만남, 즉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정략결혼이고 매춘인 것이다.  52-53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륜을 "맹렬히" 비난한다. 그들은 간음한 자들에게 돌을 던지며 이렇게 외친다.
"나는 너무나도 불행하다. 나는 주어진 운명 때문에 불륜조차 저지르지 못했다. 그런데 저 연놈은 자기들끼리만 몰래 재미를 보지 않았는가!"  60

불건전한 섹스
많은 충돌 끝에 본인이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고 배우자 역시 본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확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어떤 사람들은 과감히 이혼을 하고, 이미 아이가 생겨버린 어떤 사람들은 (오늘의 한국문화의 한계를 절감하며) '미운 정'으로 꾸역꾸역 결혼생활을 유지한다.
그런데 배우자와의 불화를 해결할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이혼 같은 것은 아예 꿈도 꾸지 않으면서, 요컨대 결혼제도가 주는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바람'을 피우겠다고 작정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있기도 한데.. 그들의 사랑은, 그들의 섹스는, 명백히 불건전하다.  61

가정의 붕괴
가정을 파괴하지만 않는다면 불륜은 그다지 지탄받을 이유가 없다. 예고 없이 외박을 하거나 외간남자의 아이를 낳겠다고만 하지 않으면 - 결혼제도 속의 아내몫은 다한 셈이다.
불륜 자체를 정당화하자는 말이 아니다. 부부간에 사랑이 있다면 그런 짓을 하라고 해도 못한다. 나는 지금 사랑 없이 지속되고 있는 결혼, 즉 제도로서의 결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가정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랑 없는 가정, 누군가의 목을 조임으로써 간신히 지탱되는 가정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런 가정일지라도 해체되어선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낡은 가족관에 사로잡힌 자이거나 현재 그런 가족관을 통해 이익을 보는 자일 것이다.
아이들이 받는 정신적 충격? 그것 역시 낡은 가족관의 산물이다.
결혼은 한 번의 약속을 영원히 지속시키기 위한 구속장치일 뿐이다. 사랑과 믿음으로 출발한 결혼이라면 아무리 간통죄를 없앤다 해도 두려워하지 앟을 것이며, 그리고 그러할 때, 내 배우자라 할지라도 언제든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죽음이 갈라놓기 전까지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62-63

자존심
남편의 정부가 자기보다 못난 여자일 때 흔히 아내는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는다. 아니, 뭐가 부족해서 저렇게 못난 여자와 몰래 바람까지 피웠지? 내가 저 여자보다도 못났단 말인가?
남편의 정부가 유명한 여자(혹은 누구나 인정하는 미인)일 경우 아내의 자존심은 그나마 약간 회복된다. 이 경우는 아마 '잘난 남자 간수하기 힘들어' 하고 투덜거리며 남편의 마음이 돌아오길 기다릴 뿐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아내가 바람을 피울 때의 남편의 입장은 약간 다르다. 남편은 자기 아내가 어떤 남자와 바람을 피우든 자존심이 뭉개지는 경험을 한다. 그녀가 자기보다 못난 남자와 바람을 피우든 아니면 훨씬 멋진 남자와 바람을 피우든 말이다.
다르게 나타나는 자존심의 양상은 결혼제도 속의 남녀의 위치 차이에서 온다.(남자는 언제든 가정으로 돌아올 생각으로 '가볍게' 바람을 피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억압적 위치에 있는 여자는 이것저것 다 따져보고는 '끝장'이라는 각오로 바람을 피운다.)  64

 


성(sex)은 은밀한 것으로, 감추면 감출수록 거기서 먼저 타락의 악취가 풍겨 나오게 마련이다. 성(sex)에 대한 금기와 사회적 억압은 사람들의 감정을 갉아먹고 점점 더 변태와 타락의 미궁으로 몰고 간다. - 현실문화연소4 <신세대:네 멋대로 살아라> 중에서


재산의 적자 상속을 목적으로 출발한,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이 일부일처제에 대하여 나는 아무런 사견도 붙일 생각이 없다. 그러나 편한 상태로 배우자를 찾기 힘든 사회구조 속에서의 일부일처제에는 분명히 어떤 빈틈이 있으며('자유롭게 만나 사랑하고 결혼한다'는 연애 결혼의 신화는 그야말로 신화에 불과하다), 그 빈틈을 간통과 매춘이 메우고 있다는 공공연한 사실 정도는 '역사적 사례'로 제시할 수 있겠다. 간통과 매춘마저 할 능력이 없는 자들이 하는 게 강간이다.
강간을 옹호하거나 단순 폭력으로 그 수위를 내려 변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단지 나는 강간 피해자가 '단지 강간을 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인생을 포기해야만 하는 그런 야만적인 사회에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 할 뿐이다.
여자의 자궁은 여자의 것이다.  81-82

잘못된 것은 제도이지 사랑이 아니다. 섹스가 아니다. 쌍방 합의(흔히 '사랑'이라고 표현한다)에 의한 욕망의 교환은 지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자 즐거움이다. 아니, 이런 닫힌 언어로 규정해 버리는 게 억울하기조차 한 그 어떤 신비다. 섹스를 불결하다고 말하는 자들이나 섹스를 음담패설의 소재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 신비를 경험하지 못한 자들일 확률이 매우 높고, 그것은 결코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일이 못 된다.
육체적 접촉을 무시한 사랑은 육체만을 탐하는 사랑만큼이나 비정상적인 것이다.  83

 


사라하는 것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서로 어려운 관계에 놓여 있다. 사랑에 빠진 것 안에는 사랑한다는 것이 들어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무섭도록 사랑을 소유하고 싶어하지만, 또한 능동적으로 사랑을 줄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중에서


예쁜 여자가 섹스도 잘한다.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은 대체적으로 인물은 포기했다면서 몸 관리도 별로 하지 않는다. 평소 배설기관으로밖에 취급되지 못하는 그녀들의 질(vagina) 역시 청결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그녀들도 섹스는 할 줄 안다.
그녀들은 처음엔 안 된다고 남자의 진을 빼다가도, 섹스가 끝나고 나면 이젠 아무것도 감출 필요 없다는 듯이 그대로 널브러지기 일쑤다. 샤워도 하지 않고, 분비물을 닦아낸 휴지조차 제 손으로 치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꼭 샤워를 해야만 하고, 휴지를 여자가 치워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네가 원해서" '그 힘든' 섹스를 했으니까 너는 다 봐줘야 한다는 식인데... 아마 그녀는 섹스에 관한 또 하나의 나쁜 기억을 보태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녀의 섹스를 더욱 더 '힘든' 것으로 만들 것이다.
한번 섹스를 했다고 여자를 자신의 예속물처럼 생각하는 남즈들 역시 여자를 황당하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못 보일 꼴을 함부로 내보인다. 둘 다 섹스를 무슨 계약 취급한 결과다. 인간이라면 똥우줌 정도는 가려가면서 사랑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고집 피운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자신이 예쁘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일단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남자의 진을 빼지 않는다. 섹스 후에도 여전히 예쁘다. 금장 정숙한 여인의 표정으로 돌아와 몸을 적당히 가릴(혹은 노출시킬)줄 알고, 뒷물도 할 줄 알고, 그러면서도 팔 베개를 해달라고 요구할 줄도 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비록 수줍어할지라도 필요 이상으로 움츠러들거나 오버하지 않는다.
물론 '예쁜 여자가 섹스도 잘한다'는 말은 '잘난 남자가 섹스도 잘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118-119

'오 마리아!
어린 아이에게 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세요.
그리고 꽃에세 왜 꽃을 피우느냐고 물어보고,
태양에세 왜 빛나느냐고 물어보세요.' - 막스 뮐러
당신은 여자를 사랑할 때 '어디가 못났기 때문에', '어떤 점이 부족하기 때문에' 등등의 이유를 들어 사랑한다. 당신은 옳다. 그러나 여자들은 당신의 떠나간다. 당신은 실수했다. 왜 절 사랑하세요? 라는 여자들의 물음에 당신은 솔직하게 응답했다. 여자들은 당신에게서 '어디가 못났다', '어떤 점이 부족하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자는 단점을 지적당하는 일에 약하다. 속보이는 칭찬에도 행복해져서 제 가진 것 모두 주고 싶어하는 게 여자라는 존재다('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우리 속담은 여기서 나왔다). 단점을 지적하지 말라. 칭찬할 때는 칭찬만 해라. 칭찬 끝에 작은 단점 하나만 언급해도 앞에서 칭찬한 장점들이 전부 무효가 된다.  129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온 세상을 비춰주는 스크린이다. 왜냐하면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세상의 복잡성에서 벗어나 뜻밖의 존재의 가능성, 즉 존재의 근본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 조르쥬 바따이유 <에로티즘>중에서

"나는 어떤 타입도 아닙니다.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나는 성능 나쁜 로봇처럼 '나는 연애를 이런 식으로밖에 하지 못한다'라고 제한하고 싶지 않습니다. 만나는 상대마다 다른 형태의 연애가 나옵니다. .. 나는 상대에 따라 손잡고 걸을 수도 있고, 팔짱을 끼고 걸을 수도 있고, 혹은 각자 주머니에 손 넣고 걸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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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


두 가지의 삶이 있다. 첫 번재는 세계에 나를 맞추는 삶이다. 세상의 질서를 존중하고,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인생이다. 두 번째는 세계를 나에게 맞추는 삶이다. 세상의 질서와 시스템에 저항하고, 주어진 환경을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인생이다.  4


나를 바꿀 것인가, 세계를 바꿀 것인가는 근원적인 대립니다. .. 사회는 개인을 유혹한다. 넓은 사회의 품에 안겨 쉬라고, 반대로 개인은 극복하고 싶다. 사회를 딛고 일어서려 한다. ..

시민은 그 단어 안에서 두 가지 개념을 모두 포함한다. 하나는 집단으로서의 전체성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으로서의 개체성이다. 쉽게 말해서, 시민은 사회 전체의 구성원인 동시에 독리적이고 자유로운 개별자다. .. 

현실의 팍팍함 속엣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고민할 시간적 여우가 없는 것이 문제다.  5


이 책은 합리적인 시민이 되자는 책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인 시민이 앞으로 진행할 선택에 대한 책이다.  8









세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사회의 방향성은 둘 중 하나다. 시장의 자유 또는 정부의 개입. 그리고 이 두 가지 방향성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인은 세금이다 세금은 사회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근원이다.  16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곳이 시장이다. 그리고 시장에는 두 주체가 있다. 개인과 기업이다.  17


세금과 복지의 관계를 일반적으로 비례한다.  




통시적으로 파악하는가 아니면 공시적으로 파악하는가에 따라 발생. 통시적이란 시간의 흐름을 고려해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공시적이란 시간에 대한 고려보다는 현재 상황을 기준으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26


세금을 높여 복지를 확대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부유층의 세금을 높여서 사회 전체의 복지 수준을높이는 방법. 그리고 국민 한 명당 세금을 일정하게 높여서 그것으로 복지를 실현하는 방법. 그래서 주의해야 한다. 정부나 특정 정당이 복지를 위한 증세를 말할 때, 특히 그 주어를 말하지 않을 때, 실제 주어가 무엇인지 확인해야 한다.  30




문제는 누진세를 적용하는가 하지 않는가가 아니다. 그보다는 책정된 누진세율의 정도가 실제로 정당한지가 논쟁의 핵심이 된다.  36


특정 계층의 세금을 높이지 않고, 국민 전체의 세금을 동일하게 높이는 것. 이러한 세금을 간접세라고 한다.  41





개인의 소득을 고려했을 때는 간접세가 공평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개인에게 부과되는 주민세가 연간 1만 원이라고 해보자. 그리고 앞서 경비를 제외한 월 소득이 100만 원인 W씨와 1,600만 원인 Z씨를 비교해보자. 두 사람은 매해 1만 원을 공평하게 납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소득을 고려하면 월 소득 대비 W씨는 1%를, Z씨는 0.0625%를 세금으로 납부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소득만 놓고 생각했을때 W씨가 느끼는 1만 원의 가치는 Z씨에게 625원 정도로만 느껴질 수 있다. 소득을 기준으로 할 때, 간접세는 저소득자의 실질적인 부담을 증가 시킨다는 면에서 불평등한 세금이다.  42-43


직접세와 간접세 중에서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것이 악인가? 그런것은 없다. 당시의 국내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44


시민은 놀랍도록 참을성이 강해서 문제가 악화되는 시점까지 시다리는 경향이 있다. 가시적으로 문제가 발생해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너무 늦어 악화되었을 때가 보통이지만, 시민의 움직임은 사회의 분위기를 역전시킨다. 

진짜 문제는 움직이지 않는 시민에게 있다. 상황이 악화되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부동의 시민들이 문제다. 그들이 사회의 절대다수일 경우 그 사회는 균형을 잃어버리고 특정 계층, 특정 계급의 이익만을 반복적으로 보장하는 부정한 사회로 변질될 수 있다.  45


한국은 간접세 비율이 높고 직접세 비율은 낮아서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50



최종 정리


첫 번째 질문은 '세금을 인상할 것인가'였고, 두 번째 질문은 '누구의 세금을 인상할 것인가'였다.

첫 번째 질문이 중요한 것은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의 근원에 세금에 대한 논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세금은 복지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세금의 인하는 복지의 축소를, 세금의 인상은 복지의 확대를 가져온다.  52


두 번째 질문인 '누구의 세금을 높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변이 가능했다. 하나는 부유층의 세금을 누진적으로 높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 전체의 세금을 일괄적으로 높이는 것이다.

부유층의 세금을 인상한다는 것은 누진세와 부유세를 높이는 것을 의미한다. 누진세는 개인의 소득에 부과하는 세금이고, 부유세는 개인의 재산에 부과하는 세금이다. 소득과 재산이라는 개인이 부에 직접적으로 세금을 부과하기 때문에 이 둘을 직접세라고 한다. 

다음으로 국민 전체의 세금을 인상한다는 것은 소비세와 주민세를 높이는 것을 의미한다. 소비세는 상품과 서비스에 붙는 세금으로, 개인이 소비한 만큼 발생한다. 주민세는 특정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일괄적으로 부과되는 세금이다. 이 둘은 간접세에 속한다. 간접세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부여된다는 점에서 표면적으로 평등해 보이지만, 개인의 소득과 재산을 고려할 경우 상대적으로 가난한 살마들의 부담이 높아지는 불평등한 세금이라고 할 수 있다.  ..

국가의 방향성을 선택한다는 것은 '세금 징수의 양'과 '세금 납부의 주체'를 결정함을 의미한다. ..

결과적으로 누구의 이익이 보장되는지를 확인하면 된다.  53-54






국가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국가에 대한 저의는 정치적 실체를 말한다. 항구적인 영토와 국민을 기반으로 정치 조직으로서의 정부를 가지고 있는 정치적 실체 말이다. ..

국가에 대한 물음의 근저에는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당위적 역할에 대한 물음이 깔려 있다. 우리가 국가에 대해서 정말 하고 싶은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국가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국가는 무엇이이어야만 하는가?"

두 종류의 국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최소한의 역할을 수행하는 국가가 가능하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방과 치안에 힘쓰지만, 국민 개개인의 삶의 방식이나 경제활동에는 간섭하지 않는 국가. 이러한 국가를 '야경국가'라고 한다. '야경'의 한자어를 풀어보면 '밤 야(夜)' '경계할 경(警)'으로, 국가는 야간에 경비를 서는 정도의 역할만을 한다는 의미다. ...

다음으로 생명과 재산 보호, 국방과 치안을 넘어 개인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국가가 그것이다. 국민이 배가 고프지 않은지, 어디가 아프지는 않은지 신경 쓰며 국민의 삶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가진 국가다. .. 이러한 국가를 '복지국가'라고 한다. 여기서의 '복지'란 건강하고 윤택한, 궁극적인 행복의 상태를 의미한다.  60-61




오늘날의 국가들을단순하게 자유주의, 사회주의 혹은 야경국가, 복지국가로 단정하기를 쉽지 않다는 것이다.  63



공화제는 왕이 없다는 기본적인 전제만을 갖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국가체제로 나타날 수 있다. 우선 왕 대신 귀족이나 소수 엘리트가 집권하는 형태가 있다. 이를 일반적으로 귀족제라고 한다. 다음으로 다수의 인민들에 의해서 국가가 운영되는 형태가 있다. 이를 민주제라고 한다.

공화제의 주인은 왕을 제외한 어떤 사람이라도 될 수 있다. 개념상 귀족이나 소수 엘리트가 독재하는 체제도 공화제라고 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제도 공화제라고 할 수 있다.  77-78


어떤 의미에서는 공화제와 민주제가 대립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공화제가 소수 귀족이나 엘리트에 의한 통치를 긍정하기 때문이다. 공화제와 민주제는 화해할 수 없는 부분을 갖는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엘리트주의와 민주주의 대립으로 알려져 있다.  79





자유


시민이 자유 그 자체.  99


정신은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한 명 한 명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정신이 있다. 이를 '주관적 정신'이라고 한다. 무엇인가 느끼고 생각하고 배우는 나의 정신 말이다. 다음으로 사회가 가진 정신도 있다. 법, 정의, 도덕, 인륜이 그것이다. 헤겔은 이를 '객관적 정신'이라고 불렀다...

헤겔은 두 가지로 구분한 주관적 정신과 객관적 정신을 다시 통합한다. 이 통일된 정신이 절대정신이다.  100


헤겔에게 세계 전체는 절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헤겔은 물질보다는 정신이 세계의 근본이라고 생각한 관념론자였다.

정신이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 ..

정상적인 자신을 기준으로 반대되는 역을 상정한 뒤에 이를 통합해나가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장해가는 운동 과정을 헤겔은 '변증법'이라고 불렀다. 


헤겔은 절대정신의 본성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자유'다. 절대정신은 역사 속에서 자유의 확장으로 드러난다. 세계의 역사는 자유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일관되게 진행되어온 것이다.   102


자유란 타자에게 간섭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자유의 정의다. 이러한 자유의 정의는 실제로는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우선 앞 부분, 자유는 타자에게 간섭받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특정 국가나 권력에 얽매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존재하는 상태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자유를 '소극적 자유'라고 한다. 다음으로 뒷부분, 자유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음을 말한다. 자신이 지향하고 선택하는 것을 주체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상태가 그것이다 이러한 자유를 '적극적 자유'라고 한다.  111


문제는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개념이 국가체제나 경제체제의 쟁점과 연결되어 어른들이 먹고사는 문제에 깊게 관여한다는 데 있다.  112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는 실제 현실에서 다른 단어로 대체되어 사용된다. 우선 소극적 자유는 '자유'라는 말과 동일하게 사용된다. 바꿔 말해서 오늘날 '자유'라는 어휘에는 소극적 자유가 항상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가 들어간 단어들인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시장의 자유 등에는 작은 정부에 의한 소극적 자유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적그적 자유도 마찬가지다. 적극적 자유는 '평등' 혹은 '복지'라는 말로 대체되어 사용된다. 바꿔 말하면 오늘날 '평등' 혹은 '복지'라는 어휘에는 큰 정부에 의한 적극적 자유의 이념이 항상 내포되어 있다.  116


자본주의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에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몰락을 예언하고 실행하려 노력했던 것일까?

바로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생산수단의 개인소유' 때문이다. 

실제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생산수단에 대한 태도에 따라 구분된다.  120



마르크스는 이렇게 도래할 공산주의 사회를 두 단계로 구분했다. 우선 자본주의가 내적인 모순에 따라 무너지면 노동자들에 의한 독재가 이루어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가 발생한다. 이것이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다. 다음으로 이렇게 탄생한 새로운 사회가 안정적으로 생산력을 갖춰 모든 국가는 사라지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이상적인 사회가 도래한다. 이 사회가 최종적인 모습으로, 마르크스는 이를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라고 불렀다.  132


자유는 시민의 이름이었다.인류의 역사는 자유의 확장이라는 일관된 방향성을 갖고 있다. 단 한 명의 자유인이었던 왕에서부터 영주, 부르주아에 이르면서 자유인의 규모는 확대되어왔고, 결국 현대에 이르러 모든 사람이 정치적인 자유를 획득했다. 오늘날의 모든 자유인을 우리는 시민이라고 부른다. 시민은 우연히 탄생한 존재가 아니라, 역사의 필연적 귀결이다.

자유는 두 종류로 구분된다. 소극적 자유는 타자에게 간섭받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제약과 구속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반면 적극적 자유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자신의 욕망과 선택을 실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

자유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특징인 생산수단의 개인소유에 대한 자유였다. ..

자유는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용어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로움이라는 이상적이고 완벽한 그 무언가는 현실에 없다.  135-136





직업


"노동의 신성함에 대한 강조는 사회 구성원들이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그렇지 못한 노동자가 있고, 이로 인해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며, 그래서 노동의 대가로 최소한의 삶만을 겨우 유지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면, 그 사회에서 노동의 신성함을 이야기하는 것만큼 비열한 행위는 없습니다."

시민이 말을 이었다.

"한 명의 개인은 선택하게 됩니다. 두 가지 삶만이 가능하죠. 나를 바꾸는 삶, 세계를 바꾸는 삶. 첫 번째 사람은 나를 바꿉니다. '생산 수단의 개인소유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해? 그렇다면 그걸 내가 가져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인정하고 나를 그 시스템에 맞추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세계를 바꾸려 노력합니다. '생산수단의 개인소유가 그렇게 중요해? 그렇다면 누구도 그걸 독점해서는 안 되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으니, 그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142-143


주주 자본주의는.. 영국과 미국의 자본중ㅢ가 이러한 형태를 띠고 있다. 미국의 경영진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상품을 얼마나 생산하고 판매했느냐가 아니다. 주식의 시세 차익과 배당을 통해 주주의 이익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된다. ...

반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기업과 연계된 사회적 이해관계자 전체를 고려하는 것이 기업의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독일과 일본의 자본주의가 이러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방향성을 가진 기없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주주의 이익이 아니라 모든 관계자와의 공존이다. 노조를 비롯하여 지역사회의 일반 주민들까지도 제한된 범위 내에서 기업 경영에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물론 오늘날의 기업들은 극단적으로 한 가지 형태를 띠는 것이 아니라 혼합된 모습을 보인다. ..

문제는 방향성에 있다. 현재의 복합적인 기업 활동을 기준으로 기업의 방향성이 주주의 이익을 향하는지, 아니면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향하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  156-157


현실의 구체적인 쟁점들은 하나하나가 치열하게 논쟁되고 잇으며 복잡하기 때문에, 개인이 이를 이해하고 자기 나름의 해결 방안을 도출하기까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그래서 시간을 쪼개 써야 하는 바쁜 현대인들은 복잡하고 다채로운 사회적 쟁점에 자연스럽게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보통의 현대인들과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 사이에 투쟁이 벌어진다. 바쁜 현대인들은 안 그래도 정신 사나워 죽겠으니 사회는 소란스럽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현대인의 무관심을 깨우기 위해서라면 소리를 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적 쟁점은 산으로 간다. 구체적인 실제 쟁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시위의 태도, 말하는 방식, 과격성, 이로 인한 불편 등이 이슈화된다.  159-160


"직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게 되는 겁니다. 좋아하는 일이라거나 잘하는 일이라거나, 산업화사회에 이르러서 그런 건 없습니다."

비서실장이 반문했다.

"아니, 왜 없나요? 누구나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 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직업을 선택하는 거 아닌가요?"

"운동화 공장의 생산라인에서 근무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겁니까, 아니면 잘하는 일을 선택한 겁니까?"

...

".. 특정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좋아하거나 잘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었던 운 좋은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 사회의 일반적인 직업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과 노도에서 보람과 성취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직업을 기대할 수 있는 보상은 오직 임금뿐입니다.  162-163


직업 선택에서 고려해야 하는 세 가지 측면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보람, 수익, 리스크가 그것이다. 우선 성취와 보람 면에서는 사업가와 투자가가 이를 향유할 수 있고 노동자가 배제됨을 보았다. 노동자는 그 대신 임금으로 보상 받는다. 

하지만 보상으로서의 수익에서도 노동자는 소외된다. 사업가와 투자가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레버리지를 통해 수익률을 극대화하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직업으로서 임금노동자를 선택하는 것은 가장 비랍리적인 판단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들은 성취감에서 배제되고 수익도 낮다. 하지만 이들의 선택을 단순히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말할 수 는 없었다. 왜냐하면 성장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기업의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자본가의 손실이 예상되기 때무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안정적인 수익이 보장받을 수 있는 임금노동자를 선택하는 것이 이익을 극대화하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그래서 최근의 노동시장 유연화가 문제가 된다. 임금노동자가 그나마 다른 직업군에 비해서 만족스러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리스크의 회피 때문이다. 성취와 보람 그리고 수익으로부터 배제되는 대신 안정을 선택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박탈될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 노동시장의 유연화라고 할 수 있다.

비정규직 확대의 본질은 투자가와 사업가가 져야 할 리스트를 다수의 노동자에게 전가한다는 것이다.  182


생산수단의 개인소유를 인정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업을 선택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동시에 계급적 관계망 안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선택한 직업 안에서 발생하는 인간적인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갈등은 우연적이라기보다는 직업군의 관계 양상이 민들어낸 결과물이다.  186






교육


교육은 구분된다. '교육의 내용'과 '교육의 형식'으로, 그중에서 일반적으로 교육의 형식은 교육의 내용보다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 개인은 교육의 형식을 통해 배움을 체화한다.  193


벤담이 처음 파놉티콘을 제안했던 것은 단지 효율성 때문이었다. 그에 따르면 파놉티콘은 감옥뿐만이 아니라 학교, 병원, 공장, 병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설에 적용할 수 있는 효율적인 시스템이다. 소수의 감시자만으로 다수의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으므로 비용 절감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벤담이 살던 시기에 파놉티콘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이를 재조명한 것은 20세가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철학자 미셸 푸코였다. 푸코는 벤담의 파놉티콘을 재해석했다. 푸코에 따르면 파놉티콘은 단지 효율적인 감시도구를 넘어서 근대사회에서 규율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 된다. ..

근대사회가 되면 규율 권력은 세련되게 작동한다. 규율은 폭력이 아니라 감시의 시선과 이를 통한 자발적인 내재화로 작동한다. 우리는 서로를 감시함으로써 규율과 규칙을 자발적으로 준수하는 것이다. 파놉티콘은 근대사회의 규율 권력이 어떻게 개인에게 내재화 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파놉티콘의 사례에서 환경이라는 형식이 어떻게 개인을 학습시키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으려고 한다. ..

오늘날 학교라는 형식에서 우리가 실제로 교육받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에 대한 이념'과 '경쟁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체화한 채로 학교를 졸업한 후 사회에 나온다.  196-197


질리가 외부에 실재한다는 입장을 '객관주의 인식론'이라 한다. 이 관점을 토대로 하면 교육은 개인에게 진리를 주입하는 방법을 취한다. 인류의 지식과 지혜라는 진리가 실재하고 있으니, 교사는 학생들의 머릿속에 이것을 넣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는 교육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학생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역할.  198


진리가 개인의 내부에서 구성된다는 입장을 '주관주의 인식론'이라고 한다. 이 관점을 토대로 하면 교육은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한다. 진릴르 만들어내는 것은 학생 스스로다. 따라서 교사는 학생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하고 도움을 주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에 한정된다. 학생은 주체적으로 학습해나간다. 이러한 교육 방식은 다양성을 길러낸다. 진리가 개개인에 의해서 구성되는 만큼 모든 개별자는 나름대로의 진리를 보유한 존재로 대우받는다. 이제 중요한 것은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생과 학생 사이의 관계와 대화다. 교육은 토론 형식을 취한다. 




강의식 교육과 전통적 교실 구조 그리고 객관적 평가가 진행되는 A학교에서 성장한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진리가 실재한다는 절대주의적 진리관을 가진 어른이 된다. ..

이들은 개인적인 문제에 봉착하거나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전문가를 찾는다. 정답을 아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어른들 간에 이익이 충돌하면, 이들은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논쟁한다. 그리고 보통은 틀렸다고 전제하지 않으므로, 우선은 상대방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사고방식은 자신의 세계를 선으로 타자의 세계를 악으로 상정하는 세계관으로 발전한다. 나는 합리적이고 열린 사고를 가졌으므로 타자의 말에 귀 기울이지만, 다른 정당, 다른 종교, 다른 이념, 다른 체제, 다른 가치관은 사실 틀렸다고 이미 상정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타협과 양보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다만 이러한 교육을 통해 성장한 어른들은 효율적이고 집중적인 교육 방식으로 훈련된 까닭에 학습 능력이 우수하고, 사회의 관려적 시스템이 주는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있는 인내력을 갖춘다. 험난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203-204


토론식 교육과 원탁형 교실 구조 그리고 서술식 평가가 진행되는 B학교에서 성장한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진리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상대주의적 진리관을 가진 어른이 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어른들 간에 이익이 충돌하면, 이들은 우선 상대방을 쉽게 악으로 규정하려는 극단적인 태도를 지양한다.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한 길고 지루한 조율과 설득의 과정을 돌입한다. 대화가 발생시키는 피로감은 인내하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교육을 통해 성장한 어른들은 제도화되고 획일화된 평가 기준에서 좋은 성과를 드러내기 어렵고, 사회의 관료적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표준화와 효율성을 강조하는 현대사회에 적합한 노동자로 성장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204-205


'경쟁'이라는 교육의 형식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학생들은 자신의 평가 결과와 무관하게 교육의 형식을 통해 경쟁이 정당하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206


안타깝게도 경쟁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을 개인이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오랜 시간 동안의 의무교육 과정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경쟁의 정당성을 내재화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교과 내용에 경쟁의 정당성이 나온다는 것이 아니다. 시험과 평가라는 학교 교육의 형식이 아이들을 가르친다. ..

경쟁률을 발생시킨 사회구조에 주목해야 한다. 평가 결과에 따른 우선적인 책임은 사회에 있다. 중간 성적에 속한 학생들이 칭찬받고, 중간 정도 노력하는 사람이 취업할 수 있고, 중위 소득에 속하는 사람이 먹고살 수 있는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다. 이러한 사회에서 이루어진 경쟁이라고 할 때에만, 우리는 그 결과의 책임을 비로소 개인에게 물을 수 있다.  212-213


교육 문제의 근본은 구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구조란 경제체제를 말합니다. 경제체제가 교육의 형태와 문제를 규정합니다.  215


교육의 본질은 자기 수양과 학문에의 정진이라고 생각할 수동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교육은 직업 획득의 문제, 개인의 경제생활 영위 능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일자리의 양과 소득격차의 수준은 그 사회의 교육의 분위기를 결정한다. 일자리가 적고 소득격차가 커서 소수의 사람들만이 양질의 일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사회라면 학생들과 취업자들이 심각한 경쟁 환경에 던져지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다.  223


'유연안정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flexibility)'과 고용의 '안정성(security)'을 조합해서 만든 '플렉시큐리티(flexicurity)'라는 개념이다. 덴마크를 비롯해서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이 시행하고 있는 제도다. 이 개념은 시장 자유와 정부 개입의 두 가지 특성을 적절하게 조합하고 있다.

기업이 노동자를 쉽게 해고하고 고용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덴마크는 강력한 노조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가 쉽게 해고될 수 있다. 그래서 전체 노동자의 평균 근속 기간은 8년여 정도에 불과하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쉬운 해고가 고용을 창출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기업은 쉽게 구조조정을 할 수 있으므로 시장의 변화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만큼 채용에서도 적극적이게 된다. 실제로 덴마크의 고용률은 75%로, 유럽 평균인 65%를 상회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가능한 것은 노동자들이 희생을 감수하기 때문이 아니다. 국가가 강력한 고용 안정성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정부의 강력한 개입으로 높은 세율과 포괄적인 복지가 이루어지는 까닭에 개인은 실직 상황에서도 위축되지 않는다. 덴마크는 해고된 노동자에게 최장 4년 동안 이전 급여의 90%를 지급한다. 단, 실직 기간 동안의 직업교육이 필수 의무이며, 정부가 제공하는 일자리는 특별한 이유 없이 지속적으로 거부할 경우 실업급여는 중단된다.  225


교육은 경제가 결정한다. 경제적 상황과 환경, 구체적으로는 일자리와 소득격차의 정도가 어떠한가에 따라 교육의 모습이 결정된다.  227






정의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우하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것을 다르게 대하는 것을 '배분적 정의'라고 한다. 그리고 같은 것을 같게 대하는 것을 '평균적 정의'라고 한다.  239


두 가지가 적절히 조화될 때가 가장 이상적인 상태일 것이다. 문제는 개인, 집단, 국가에 따라 어디까지를 같다고 보고, 어디까지를 다르다고 볼 것인지를 규정하는 기준이 상이하다는 데 있다. 그래서 정의는 두 가지 관점으로 나뉜다. 특정 사안에서 평등함을 기준으로 정읠르 판단해야 한다는 관점과, 반대로 차등을 중심으로 정의를 평가해야 한다는 관점이 그것이다. ..

윤리에서의 정의는 '정의로움'으로, 경제에서의 정의는 '분배'로, 정치에서의 정의는 '선택'으로 드러난다.  240


정의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수직적 정의관과 수평적 정의관. 어떤 사람들은 정의로움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수직적 질서를 준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대우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 노력한 사람과 노력하지 않은 사람, 법을 준수하는 사람과 준수하지 않는 사람, 같은 민족과 다른 민족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차등적으로 대우하는 것이 정의인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다른 것은 다르게' 분배해야 한다는 '차등적 정의관'에 부합한다.  248


다른 사람들은 정의로움이 수평적인 평등을 이루는 거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성별, 인종, 나이, 지역, 부에서 어떠한 차별도 받아서는 안 된다. 특히 현재 어려움에 처해 있고 폭력적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면 그들의 인권은 절대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한발 더 나아가서 정부는 그들이 인격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같은 것은 같게' 분배해야 한다는 '평등적 정의관'에 부합한다.  249


자유주의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현재의 분배 상태를 인정함으로써 개인의 재산권을 보장하는 것이 정의롭다는 이념이다. 사회주의는 인위적인 노력으로 부에 대한 강력한 재분배가 이뤄지는 것이 정의롭다는 이념이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분배 방식의 다른 이름이다.  256


자유주의적 이념에 뿌리를 두는 경제체제가 있다. 초기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수정 자본주의가 그것이다. 다음으로 사회주의 이념에 뿌리를 두는 경제체제가 있다. 사회문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그것이다.  257


근대라는 시대를 열어젖힌 것이 초기 자본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258


베른슈타인은 엥겔스 사후에 영향력을 얻기 시작했다. 그는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를 붕괴시켜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에 반대했다. 대신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

마르크스주의를 '공산주의'로, 베른슈타인주의를 '사회민주주의'로 불렀다.  266-267




오늘날의 한국은 경제체제의 스펙트럼상에서 신자유주의에 위치해 있다. 이에 대한 근거는 세율에서 찾을 수 있다.  272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국가의 세율은 대략 20%대다. 이에 속하는 대표적인 국가는 미국, 일본, 한국이다. 수정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국가는 이보다 높아져서 대략 40%대의 세금이 부과된다. 프랑스, 영국 등이 여기에 속한다. 다음으로 사민주의는 50~60%대의 세금이 부과된다. 북유럽 국가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273








미래


인플레이션은 물가의 점진적인 상승을 의미하고, 디플레이션은 물가의 점진적인 하락을 의미한다. 

그런데 물가 하락이 무조건 디플레이션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기존에 인플레이션이 급하게 이루어졌고 이것이 정상화되는 과정에 있다면, 이러한 상태는 디플레이션이 아니라 디스인플레이션이라고 한다. 디스인플레이션을 넘어서 물가가 마이너스가 되기 시작하면 이를 디플레이션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가 강기간 지속되어서 격국 극단적으로 경기가 불황에 머무르는 상태를 '불경기'라는 뜻으로 디프레션이라고 한다.  201-291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

아비투스는 20세기에 프랑스에서 활동한 사회학자인 부르디외가 제시한 개념이다. 보통 '습관'이나 '습속'으로 번역되고, 영어에서 습관을 의미하는 'Habit'과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습관이라기보다는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형성되는 습관을 의미한다. ..

나의 행동과 취향과 선택은 정말 나의 개인적인 것일까? 부르디외는 그러한 일관된 행동 패턴으로서의 습관은 계급적이고 구조적인 사회적 환경이 나에게 내재화된 것이라고 말한다. 즉, 나의 취향은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 아니라 계급적인 취향이다. ..

노동자는 노동자처럼 말하고, 노동자처럼 생각하고, 노동자처럼 행동한다...

자본가는 자본가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우리가 지극히 개인적이라고 생각해왔던 나의 취향과 성향과 선택은 나의 것이 아니라 계급적인 것이다. 이것이 아비투스다. 사회적 계급과 환경에 의해 형성된 나의 사고와 행동의 패턴. ..

문제는 지배적 위치를 점유한 계층이 아비투스를 이용해서 지배를 정당화하고 지배질서를 유지한다는 점에 있다. 부르디외는 이를 '상징적 폭력'이라고 부른다.  327-328


자본가와 노동자의 아비투스를 나눌 수도 있지만,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의 아비투스를 나눌 수도 있다. 부모 세대는 성장하는 사회를 경험하면서 그 속에서 성장하는 사회의 아비투스를 내재화한다. 타인보다 노력함으로써 성공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이를 위해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야 하고, 저축과 투자를 함으로써 부를 쌓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내재화된다.

반면 자녀 세대는 앞으로 정체된 사회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성장하지 않는 사회의 아비투스를 내재화할 것이다. 노력이 성공을 보장하지 않으며, 최소한의 권리도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음에 만성적인 피로를 느낄 것이다. 이로 인해서 경쟁과 성공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안정적인 직장도 없고 저축과 투자도 의미 없다.  329


문제는 사회의 중심을 차지한 부모 세대의 가치관이 주변부를 맴도는 자녀 세대에게 상징적 폭력으로 주입된다는 점에 있다.  330






에필로그


세금, 국가, 자유, 직업, 교육, 정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 일곱 가지 분야는 한 명의 시민이 탄생했을 때, 그가 현실 세계에서 만나는 것들이다.  340


시민은 그 자체로 자유다.  345


세계를 복잡하게 이해하려다 지치지 말고, 세계를 관통하는 단순함에 집중해야 합니다.  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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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행을 떠나려 할까? 

"나는 왜 여행을 떠날까?"라는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하려면, 즉 우리의 여행 동기를 정확히 알려면 먼저 여행 동기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다음으로는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한 뒤 자신의 여행 동기가 어떤 특징을 띠는지를 파악해봐야 한다. 얼핏 복잡해 보이지만 질문의 구조는 단순하다. 먼저 "사람들은 왜 여행을 떠날까?"라는 질문을 하고 다음으로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고 물은 뒤 "나는 왜 여행을 떠날까?"라고 자문해보는 것이다.  22


메릴랜드 대학의 이소 아홀라(Sepp.o E. Iso-Ahola)는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유래한 접근-회피 동기 개념을 이용해 "사람들은 왜 여행을 떠날까?"라는 질문에 답함으로써 여행 동기 연구에 오랜 기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인간은 무언가를 얻고 무언가를 하려는 '접근 동기'에 따라 행도에 나서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피하고 무언가를 하지 않으려는 '회피동기'에 따라 움직이기도 한다. ..

접근 동기와 회피 동기는 언제나 동시에 나타나서 일정한 비율로 조합된다. 세상 모든 일에는 A를 얻는 것과 B를 회피하는 측면이 전부 있기 때문이다. 

이소 아홀라는 여행도 이와 똑같다고 말한다. 여행은 무엇인가를 피하려는 회피 활동인 동시에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는 접근 활동이다. 여행은 도피이지 탐색이며 탈출이자 추구이다. 따라서 여행을 통해 도피하고 탈출하려는 대상과 여행을 통해 탐색하고 추구하려는 대상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다.  23


접근 동기와 회피 동기가 각기 어느 정도 비중으로 조합되느냐 하는 것도 나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두 동기의 조합 양상이 여행의 양상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여행의 양상은 여행자의 성격과 가치, 여행자가 수집한 정보, 여행지의 이미지, 타인의 영향, 여행 기술, 돈, 시간 등 다양한 요인에 따라 결정되는데, 접근 동기와 회피 동기의 비율도 여기에 고유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24


성격 5요인(또는 '빅 파이브').

성실성이란 계획성과 끈기, 목표 지향성을 뜻하는 성격 특성이다. 성실성이 높은 사람은 항상 시간을 잘 지키고, 꼼꼼하고, 인내심이 강하고, 자기 통제력이 강한 사람이다. 성실성이 낮은 사람은 게으르고 주의가 산만하며 의지가 박약한 사람을 뜻한다.

우호성은 대인 관계 상황에서 어떤 감정과 행동을 나타내는지에 대한 성격 특성이다. 우호성이 높은 사람은 상냥하고 친절하며 스스로 솔직하면서 남을 잘 믿는 사람이다. 우호성이 낮은 사람은 냉소적이고 교활하며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신경증 성향은 정서적 안정성/불안정성을 나타내는 성격 특성이다. 신경증 성향이 높은 사람, 즉 정서적 불안정성이 높은 사람은 매사 자신이 없고 건강염려증이 있으며 항상 불안하고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신경증 성향이 낮은 사람, 즉 정서적 안정성이 높은 사람은 차분하고 강인하며 편안한 사람이자 감정적이지 않은 사람이다.  32


외-내향성은 대인관계나 직장 생활, 여가 활동 등에 폭넓고 강한 영향을 끼치는 성격 특성이고, 당연히 여행의 동기와 여행자의 행동에도 강한 영향을 끼친다. 외향인은 지루한 일상가 답답한 인간관계에서 탈출하여 신나고 자극적인 경험과 강렬한 육체적 활동, 새로운 사람들과의 열렬한 인간관계를 추구하는 여행을 떠난다. 

반면 내향인은 스트레스를 주는 환경과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평온함을 느끼고 자기를 성찰하며 친밀한 살마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여행을 즐긴다. 

개방성은 특히 새로운 시직을 습득하고 다양한 문화와 상호작용하며 미적, 예술적 생활을 즐기는 양상과 큰 관련이 있는 성격 특성이다. 즉 어떤 사람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음악가 또는 미술가를 좋아하거나 베스트셀러가 아닌 책을 읽고 있다면 이 사람이 오타쿠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보다는 이 사람의 개방성이 높을 것이라 짐작하는 편이 낫다. 

개방성은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문화에 접촉하고 새로운 지식과 현상을 탐사하는 특성을 띠는 여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개방성이 높은 사람은 여행을 통해 지적, 예술적 호기심을 충족하려 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과 문화의 틀을 체험하려 한다. 

반면 개방성이 낮은 여행자들은 고향에서 가깝고, 문화적인 차이가 작고, 안전하고 깨끗한 여행지를 찾아내서 그곳을 몇 번이고 다시 방문하며 만족스러운 여행을 즐긴다.  37-38


외-내향성과 개방성에서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곧 "나는 왜 여행을 떠날까?"라는 질문에도 답할 수 있게 된다.  38


기대감이란 우리가 어떤 기대를 하고 있든 바로 그 기대가 충족되리라는 희망적인 예측에서 오는 것이다.  45


다양한 긍정 정서와 행복감 체험에서 한발 더 나아가 여행은 우리가 인생의 다양한 부분에서 더 큰 만족감을 경험하게 해준다.  46


관계 강화의 측면은 여행의 큰 매력 중 하나이다. 

여행학 연구가 다루는 중요한 여행 행동 가운데 하나로 '반복 방문'(또는 '재이용')이라는 것이 있다. 반복 방문이란 어떤 사람이 자기가 벌써 가봤던 여행지를 다시 찾는 현상으로, 공급자 처지에서는 그 원인과 촉진 조건이 매우 궁금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47


사람들이 어떤 여행지를 두 번 이상 방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좋았으니까" "한번 가본 곳이라 친숙하고 편하니까" "어려움이 없고 별다른 계획을 짜지 않아도 되니까" "이미 검증되었으니까" "다른 곳은 잘 모르니까" 등등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이유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리처드 기텔슨(Richard J. Gitelson)과 존 크럼프턴(John L. Crompton)은 이런 이유들 외에 한 가지 뜻밖의 요인을 밝혀냈다. 이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그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같은 여행지를 반복해서 방문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정말 좋다고 느꼈던 경치를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 사람 손을 잡아끌고 그곳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은 자기가 마음에 들어했던 음식을 누군가에게 맛보여주기 위해 그곳으로 돌아간다. 혼자서 봤던 멋진 축제를 함께 감상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안겨주고 이를 함께 느끼기 위해 돌아간다. 아름답지 않은가?  48


여행은 우리를 다방면에서 한층 성장하게 한다...

매슈 스톤(Matthew J. Stone)과 제임스 페트릭(James F. Petrick)은 여행이 '경험학습'을 유발하기 때문에 이런 자기 성장의 효과를 가져온다고 설명했다. 경험학습이란 우리가 기존의 지식이나 경험 또는 호기심을 바탕으로 능동적인 실험을 하고, 실험을 통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경험을 하며, 이 경험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곱씹으면서 추상적인 개념을 도출해내는 학습 과정을 뜻한다.  49


여행을 통해 우리의 정서지능이 상승한다.

우리는 각종 정서를 더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고("이게 행복이로구나!") 정서가 발생한 원인을 잘 추론할 수 있으며("날이 더우니까 아무한테나 화를 내게 되네!") 각 정서가 낳는 결과가 무엇인지도 이해하게 된다("아무 데서나 화를 내면 곤란한 상황에 빠지기도 하는구나!"). 마찬가지로 정서를 강렬하게 표현하는 타인을 바라보며 타인의 정서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법을 익힐 수 있다.  50-51


여행은 물론 문화지능의 상승과도 깊은 관계를 맺는다.  51


2011년, 세니자 코셰비치(Senija Causevic)와 폴 린치(Paul Lynch)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여행 산업이 수행하는 역할을 다룬 논문을 발표했다. 연구자들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처럼 전쟁과 학살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지역으로 여행하는 것을 '불사조 여행'이라 정의한다. 여행자들이 여행지의 사회공동체가 잿더미를 딛고 다시 피어나도록 돕기 때문이다.

코셰비치와 린치가 설명하는 불사조 여행의 작동 단계는 다음과 같다. 먼저 전쟁과 학살을 겪은 장소는 여행자들에게 삶과 인간성, 국가와 공동체에 대해 숙고하게끔 하는 고유한 매력을 지니게 된다. 여행자들은 이러한 통찰을 얻는 동시에 전쟁에 지친 여행지 민중에게 도움을 주고자 이와 같은 장소를 여행하기로 마음먹는다.

일단 여행자들이 유입되면 여행지 민중은 여행자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공동체를 재생할 수 있다. 여행자와 상호작용하기전, 즉 여행지 민중이 전쟁의 참상을 자기들끼리만 끌어안고 있는 상태에서는 전쟁의 참상이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로만 남아 있다. 즉 무너진 집은 여전히 '무너져버린 내 집'이고 학살의 희생자들은 여전히 '죽어버린 우리 가족'이다. 반면 전쟁의 폐허와 학살의 장소를 여행자들에게 공개하고 나면 여행지 민중은 이제 전쟁의 희생자들에게 '두 번째 장례'를 치러줄 수 있게 된다. 여행자들과 대화하고, 폐허와 학살지를 관광지로 정비하면서 여행지 민중은 전쟁의 '상처'를 아물어가는 '흉터'로, '살해당한 가족'을 '돌아가신 역사적 인물'로 다시 정의할 수 있다. 즉 여행지 민중은 전쟁과 학살을 비로소 과거의 일로 묻어두고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다. 

따라서 불사조 여행을 하는 여행자는 전쟁과 학살을 겪은 여행지에 경제적 도움과 심리적 지지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여행지 민중이 자기들의 아픈 경험을 객관화하고 역사화할 수 있게끔 돕는다. 전쟁 후 보스니아를 여행한 사람들은 이렇게 보스니아 사람들이 오늘날 다문화주의와 다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화합과 재생을 강조하는 공동체를 수립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54-56


여행의 만족이나 행복은 항상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62


좋은 여행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기가 막힌 궁합만은 아니다. 여행과 관련된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할 필요가 있고, 행복한 여행을 하게 해주는 마음가짐을 체득할 필요가 잇으며, 행복한 여행을 오래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행동 규범을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기술과 심리적인 자질을 갖추고 올바른 규범을 익힌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만족스러운 여행을 하고 여행의 가치과 효과를 최대한 누리며 전파하는 '좋은 여행자'가 될 수 있다. 좋은 여행자가 된다면 우리가 앞서 품었던 마지막 의문인 "여행이 딱히 그런 의미와 가치는 없는 것 같은데?"라는 의구심 또한 자연스럽게 해소될 거싱다.  63




여행은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맞춰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내가 터득한 요령을 세 가지만 적어보고자 한다.  80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그만큼 공동체의 복지를 증진하고 문명의 진화를 촉진할 수 있는 다양한 대안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먼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항상 문화적 접촉과 교류를 통해 다채로운 대안을 섭취하고, 이를 변용하거나 자신의 문화와 연결함으로써 새로운 발명품, 새로운 지식과 이론, 새로운 사회 제도를 창조해왔다. ..

물론 '선진국'으로 떠나는 여행에서도 다양한 지식을 습들하고 많은 문화적 아이디어를 습득할 수 있다. ..

문화적 교류는 상대적으로 덜 발전한 지역이 더 발전한 지역의 문화를 '공부'해서 일방적으로 수입해 쓰는 식으로만 진행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매우 창조적인 존재이며, 남이 잘 만들어놓은 것을 베껴서 쓰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한테서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서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문화를 만들어낼 줄 안다. 피카소는 아프리카의 공예품에서 문화적 아이디어를 취해 입체파를 개창했고, 이로써 서구의 회화 양식에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현대를 사는 우리도 여전히 다양한 나라에서 다양한 것들을 얻을 수 있다.

당장 아시아에만 나가보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의 공존이라는 가치를 느낄 수 있고, 인도 펀자브에서는 근면과 봉사의 정신을 몸으로 느낄 수 있으며, 태국에서는 관용과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문활르 경험하고, 일본에서는 철저한 질서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를 목도할 수 있다. 태국과 인도네이사의 색다른 패션, 일본의 아기자기한 공예품, 인도의 색감과 영화, 노래, 춤, 각국의 다양하고 고유한 음식들에 이르기까지 신선한 자극을 주는 문화적 요소들의 목록은 끝이 없다. 심지어 여행지의 문화에서 이런 장점들을 읽을 수 없다면, 적어도 그곳의 문화에서 안타깝다 싶은 점을 반면교사로 삼을 수는 있다.  87-89


문화충격을 완화하여 생경한 문화를 만족스럽게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치료제는 대략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시간, 둘째는 문화 지능, 셋째는 여행자의 성격과 동기이다.

먼저 시간. 고전적인 문화충격 연구자들은 우리의 문화충격 경험이 시간에 따라 4단계로 전개된다고 말한다. 1단계는 새로운 문화에 매력을 느끼는 동시에 다양한 문화적 장벽에 직면하는 단계이다. 이때 우리는 아직 낯설고 이국적인 문화에 호기심과 흥미를 간직하고 있다. 반면 2단계에 접어들면 이제 낯설고 이국적인 문화에서 적대감과 실망을 느끼고 고국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게 된다. 이때 우리 입에서는 "이 사람들 너무 더러워서 안 되겠어. 역시 한국이 위생 면에서는 최고야" "애들이 너무 싸가지가 없네. 이걸 보면 한국이 그래도 교육은 잘 시킨단 밀이야" 등등의 말이 튀어나온다.

여행 기간이 매우 짧을 경우, 우리는 가히 주화입마(走火入魔 달릴주 불화 들입 마귀마)의 단계라 할 수 있는 이 문화충격 2단계에 접어든 채 여행을 마치게 된다. 여행지의 문화에 대한 반감과 여행에 대한 불만족을 품에 안은 채로. 그러나 여행 기간을 조금만 더 길게 가져간다면 우리는 문화적 적응도가 향상되고 긴장감이 감소하는 문화충격의 3단계에 접어들 수 있다. 어떤 지역을 석 달 이상 장기간에 걸쳐 여행한다면 현지 문화를 온전히 이해하고 진정한 다문화주의를 취할 수 있는 문화충격의 4단계(더는 충격이라 표현할 수 없는 상태이다)를 체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때문에 시간은 문화충격의 좋은 치료제 중 하나라는 것이 고전적인 이론가들의 견해이다.  

반면 최근의 심리학자들은 단순한 시간 요인보다 문화지능을 더 중시한다. 문화지능이란 상이한 문화에 접촉했을 때 어떤 지식과 행동이 필요한지 파악해서 이런 지식과 기술을 익히고 실제로 적용하는 정도를 나타낸다. 즉 문화지능이 높은 사람은 "외국에 나가면 인사법이나 예절을 잘 알아야 해. 난 이번에 일본에 가니까 일본식 예절을 좀 연습해야겠어"라고 생각하고 이를 잘 실천해내는 사람이다. 

문화충격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화되듯 문화지능 또한 여행지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쭉쭉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문화지능의 측면에서도 오직 시간이 약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문화지능은 우리가 여행에 나서기 전에 웬만큼 확보할 수 있는 여행 자원이기도 하다. 아주 간단한 현지어 회화를 익히고 현지 역사에 관한 간략한 소개 글을 읽고 친구들의 심플한 조언에 귀 기울이기만 한다면 우리의 문화지능은 향상되고 여행 첫날의 문화충격은 큰 폭으로 감소한다. 여행지에 흥미를 느껴서 공부하면 할수록 실제 여행에 나섰을 때의 문화적 충격이 신선하고 기분 좋은 놀라움으로 바뀔 가능성이 커진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여행을 오래 할 필요도 없고 여행지를 많이 공부할 필요도 없이 이국 타향의 문화를 그저 즐겁게 향휴하기도 한다. 문화충격에 관여하는 마지막 요인인 성격과 동기의 개인차라는 것 때문이다. 이는 바로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끼고 다양성을 중시하며 이질적인 것에 관용을 보이는 특성인 개방성의 차이이다. 개방성이 높은 사람은 이국의 문화와 접촉하는 상황에서 남들보다 훨씬 적은 노력을 기울이고도 훨씬 큰 만족을 느낄 수 있다.  89-92


우리가 역사 유적을 좋아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깊은 심리적 뿌리가 있다...

실제로 우리가 역사 유적과 유물에서 매력을 느끼는 메커니즘은 우리가 마법에 혹하게 되는 메커니즘과 맞닿아 있다. 

제임스 G. 프레이저의 유명한 인류학 시리즈인 <황금가지>는 마법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는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이론서 중 하나이다. 프레이저는 특히 마법의 '유사성 원리(law of similarity)'와 '감염 원리(Law of contagion)'에 주목한다. 

유사상 원리는 비슷한 행동이나 현상이 비슷한 결과를 부른다는 인간의 원초적 믿음에 바탕을 둔다. 일례로 우리나라에서는 가뭄이 들었을 때 땅이나 강에 물을 뿌리는 행동(비가 오는 것과 비슷하다)으로 기우제를 대신하고 부채질(바람만 씽씽 부는 가뭄과 비슷하다)을 금지하기도 했다. 반면 감염 원리란 "한번 접촉한 것은 영원히 접촉된 것이다"라는 믿음을 뜻한다. 즉 세종대왕이 만졌던 물건은 그가 죽고 사라진 뒤 몇백 년의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세종대왕의 손길이 남아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108-110


폴 로진(Paul Rozin)을 비롯한 여러 심리학자는 우리가 여전히 유사성 원리와 감염 원리 같은 미신적인 사고의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빠르게 쑥쑥 자라는 콩나물을 먹으면 우리 키도 쭉쭉 자랄 것이라 생각하고, 인간의 성기를 닮은 음식을 먹거나 정력이 강하다고 알려진 동물으 ㄹ먹으면 정력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험을 보기 전에는 물건이 떨어지는 게 너무 싫고 미끌미끌한 미역국도 먹기가 싫다. 우유로 세수하면 피부가 하얘질 것만 같다. 이처럼 우리는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결과를 낳는다고 여전히 믿고 있는 것이다.  110


이런 생각과 느낌은 모두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인류는 이런 비합리성을 아름다운 문화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작가가 유사성 원리를 잘 활용하면 멋진 복선과 암시, 상징을 만들어낼 수 있다("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은 안개다"). 또한 감염 원리를 문화적으로 승화시키면 위대한 역사 유적과 고귀한 유물을 갖게 된다. 우리는 경주 토함산 석굴암에서 장엄함과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신라 사람들의 숨결과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연결의 느낌을 바탕으로 유저고가 유물에 역사적, 사회적,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이에 따라 석굴암은 시날의 역사와 신라 사람들의 수학적인 능력과 한국인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장소가 된다.  111


결론적으로 말해서 역사 유적은 감염 원리에 따라 강한 힘을 부여받은 여행의 요소이며 시각적 경외감, 판타지 세계에 들어간 듯한 느낌, 역사적 의미, 지적 흥미 등의 다양한 만족감을 두루 제공한다. 그러나 모든 역사 유적이 저마다 다른 매력이 있다는 점은 꼭 기억해두자.  112


여행 중에 산 물건은 실용서오가는 거리가 있다. 대신 그 나라 옷을 사 입고 그 나라를 여행할 때는 자신이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며 다양한 정체성을 한 몸에 수용하는 개방적 여행자임을 표현할 수 있다. 예전 여행에서 산 낡은 티셔츠를 여행 떠날 때마다 꺼내 입는 것은 자신이 모허모가 도전을 좋아하는 장기 여행자라는 신호를 보내는 셈이다. ..

기억을 촉진하는 기능과 정체성을 표현하는 기능은 구입한 물건의 실용서오가는 별 관련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여행 중에 쇼핑하는 사람들은 물건의 질보다는 어떤 물건이 각 여행지의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고유한 물건인지에 더 신경 쓰는 경향이 있다.  124




여행의 사회적 효과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여행자들의 행동 또한 여행자 대상 범죄를 낳는 다양한 요인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역설한다. 우리는 여행자가 여행지를 평가하는 것을 당연시하면서 가끔 그 반대도 당연한 일임을 깜빡하곤 한다. 현지인들도 여행자를 평가한다는 사실 말이다.  139


세상에는 두 가지 혐오가 있다.

첫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원초적인 의미의 혐오로, 더러운 것이나 썩은 것이 입에 닿거나 입안에 들어오거나 몸에 닿았을 때, 또는 이런 가능성이 감지될 때 우리가 느끼는 강렬한 불쾌함을 뜻한다. 이런 원초적 혐오는 심리학 용어로 '핵심 혐오(core disgust)'라고 하며, 몸에 좋지 않은 썩은 시체나 독극물을 먹지 않게끔 하여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준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주로 썩거나 맛이 고약한 음식물, 배설물, 사람과 동물이 사체나 장기, 곤충, 쓰레기 등의 모습이나 냄새에서 혐오를 느낀다. ..

핵심 혐오는 공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타고난 본능과 평생 동안의 학습이 조합되어 나타나는 정서이다.  151-152


두 번째 혐오에 대해 알아볼 차례다. 우리는 썩은 음식과 시체, 배설물 외에 또 어떤 것에서 혐오를 느낄까? 살인자, 강간범, 가정폭력범, 아동성추행범, 동물 학대범, 무식을 자랑하는 자, 예의 없고 상스러운 자,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는 자, 무능한 리더, 혹세무민하는 자와 곡학아세하는 자, 모리배, 시정잡배 등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사회공동체에 해로운 사람들이나 이들의 행동을 혐오하는 마음은 썩은 음식물이나 동물의 사체, 배설물을 혐오하는 마음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사회적, 규범적, 인격적 혐오감을 따로 '도덕적 혐오' 또는 '경멸'이라 일컫는다.

대신 경멸의 신체적, 행동적인 반응은 혐오와 똑같다.  154-155




여행을 떠나 최상의 날씨와 만나면, 더는 다른 것이 필요 없을 정도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뜨겁고 습하거나 주야장천 비가 내리는 날씨 등은 여행의 다른 모든 요소를 압도하여 아예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169


좋은 음식은 여행에 만족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음식이 생각나서라도 그걸 먹었던 곳으로 반드시 돌아가게 만들곤 한다. 심지어 오로지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는 목표 하나만으로 미식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도 있다.  182


진짜 경치가 제공하는 원대하고 깊은 입체감과 우리 피부에 와닿는 그곳의 바람, 나무 향기와 풀 냄새, 강과 폭포의 소리, 그리고 이런 다양한 요소들이 한데 어울리며 자아내는 황홀함은 어떻게 달리 재현할 수가 없다. 결국 그곳에 직접 가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단 여행을 떠나기만 하면 우리는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멋진 경치와 맞닥뜨리게 된다.  192


일단 경치에 이끌려 어떤 여행지에 도착한 뒤에는 이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어떤 행복한 홀동을 할 수 있는지가 경치 자체보다 훨씬 중요해진다. 즉 경치는 다른 활동과 조합됨으로써 여행의 행복을 증폭시키는 '배경'이자, 문화와 음식 및 각종 액티비티 등 각 지역의 다양한 여행 요소들을 결합하여 여기에 통일성과 주제를 부여하는 '틀'이지 여행의 목적 자체는 아니다.  195


여행자는 자신의 성격, 목표, 자원, 각종 여행 요소를 대하는 태도 등을 종합하여 자신에게 딱 맞는 완벽한 숙소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205


여행 동반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동반자들의 성격과 취향의 유사성은 사실 그렇게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동반자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자주 소통하고, 서로의 욕구와 취향과 가치를 절충하거나 공유함으로써 좋은 여행을 만들어나가려는 의지가 있느냐이다.  216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심리학자 중 한 명인 앨버트 밴듀라(Albert Bandura)는 .. 지식과 기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지식과 기술 말고도 뭔가를 '잘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심리적 요인들이 있다고 강조한다.

대표적으로 "이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믿음", 즉 자기 효능감은 공부건 일이건 분야를 막론하고 매우 중요하다.  228


지식과 기술, 자기 효능감 신념, 목표의 특성, 자기 평가 표준을 중시하는 밴듀라의 이론을 사회인지 이론이라고 한다.  229



여행 중의 기술에는 왕도가 따로 없다. 여행자 한 명 한 명이 여행 경험을 통해서 체득하는 고유한 노하우들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주누가 여행 중에 활용하면 좋을 기술도 두 가지 정도는 있다. 하나는 '마음을 챙기며 여행하기'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 정서에 휩쓸리지 않기'이다. ..

'마음 챙김(mindfulness 또는 sati)'이란 원래 불교적 명상 수행과 관련한 개념인데.. 핵심은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집중하며 마음을 열기'라는 점에는 대략적인 동의가 이루어져 있다. ..

여행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마음 챙김이란 여행 중 발생하는 모든 상황에 항상 호기심을 품고, 이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 종합하여 능동적인 해석을 내놓는 것이다.  245-246


우리가 외향적이든 내향적이든, 개방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여행 중에는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절대 마음을 닫아서는 안 된다.  247


마르시알 로사다, 바버라 프레드릭슨 같은 연구자는 긍정 정서와 부정 정서의 비율이 최소 3 대 1 정도가 되어야 행복하고 번창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248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다. 부정 정서는 긍정 정서보다 더 강렬하게 체험되고, 더 강렬하게 기억되는 편이라는 사실이다...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부정 정서의 이런 강력한 영향을 최소화하고 긍정 정서 경험을 오래도록 간직할 필요가 있다...

감사 편지 쓰기는 고마운 사람을 날마다 떠올려보며 이들에게 감사 편지를 쓴느 것을 뜻한다.  249


만약 여행 중 부정 정서를 경험하는 날이 생긴다면, 그날이 저물어갈 즈음 하루 동안 있었던 긍정적인 경험을 떠올려보거나 고마운 사람들을 생각해보고 서로의 행복한 여행을 응원해주자.  250


우리는 우리 여행을 여러 편의 재미난 이야기로 만들어야 한다. .. 

우리가 여행 중 겪었던 여러 가지 좋은 일과 여러 가지 나쁜 일의 세세한 의미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이야기 안에 배치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좋았던 일은 강렬한 추억이 되고, 나빴던 일은 귀중한 배움이 된다. ..

어떤 사람의 여행은 아름답고 의미가 있어서 여행기로 쓸 만하고, 다른 사람의 여행은 그럴 가치가 없어서 여행기로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모든 여행은 여행기로 쓰인 뒤에야 아름다워지고 모두와 공유할 만한 의미를 얻는다. 적어도 우리 마음속에서 크고 작은 여행기로 집대성되지 않은 여행이야말로 진정 무가치하고 의미가 없는 여행이다.  251


"여행은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는 여행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판단, 취향, 가치관이 묻어난다. "여행에서는 어떤일이 일어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우리가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지 그렇지 앟은지가 드러나고, 여행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노출된다. 그리고 "나는 여행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서는 우리가 항상 행복한 여행을 하는 좋은 여행자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중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잘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떤 것을 잘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신념과 기대가 바로 이것이다. 앨버트 밴듀라는 이를 '자기 효능감 신념'이라 표현한다.  253-254


자기 효능감 신념을 증진하는 중요한 메커니즘 가운데 하나는 모델링 학습이라고도 하는 '관찰 학습'이다.  255


여행에 나서면 더욱 다양하고 훌륭한 모델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256


자기 효능감을 높이는 또 다른 대표적인 메커니즘은 작은 성공 경험을 스스로 직접 쌓아나가는 것이다. ..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직접적인 여행 경험을 통해 효능감을 높일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바로 무슨 일이든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하면서 차근차근 배워나가려 하는 '학습목표'를 가진 사람들이다.  257


어떤 사람이 학습목표를 지향할 것인지 수행목표를 추구할 것인지는 이 사람이 지니고 있는 '능력이라는 것'에 대한 신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즉 사람의 능력이란 유동적이고 경험에 따라 성장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학습목표를 지향하게 된다. 반면 사람의 능력은 고정된 것이고, 세상을 살아가려면 자기가 타고난 능력 한도 내에서 최대한 남들에게 잘 보이며 살아야 하는 법이라고 생각하는 살마은 수행목표를 취하게 된다. 이런 점을 특히 강조하는 연구자는 심리학의 거장 중 한 명인 캐럴 드웩(Caro; Dweck)이다. 드웩은 능력이 향상한다고 믿는 사람을 능력에 대한 '증진 이론'을 가진 사람이라 정의하고, 반대로 능력이 타고난 상태로 고정된다고 믿은 사람을 능력에 대한 '실체 이론'을 가진 사람이라 정의했다.  258


여행은 우리의 능력을 증명하는 활동이 아니다. 여행의 목표는 행복과 성장이다. ...

또한 여해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은 한국에서 가지고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여행을 떠나 하나하나 시도하고 적용해보면서 몸으로 익혀나가는 것이다.  260


여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지 않은 사람은 평가 표준도 모호해서, 자기가 여행을 잘하고 있는지, 어떤 점을 개선하면 좋을지를 파악하지 못한다. 또한 여행지가 제공하는 다양한 여행 요소와 그 특징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엉뚱한 표준을 엉뚱한 곳에 들이밀 수도 있다. ..

여행에 대한 학습목표가 있는 살마은 늘 "나는 지금 다양한 여행 경험을 통해 여행에 대해 많이 배우고 있나?"라는 기준으로 자기를 평가하는데, 이는 갈수록 좋은 여행을 할 수 있게끔 보장해주는 좋은 평가표준이다.  268


윤리적 여행이란 여행지의 환경을 보호하고 현지의 문화를 존중하며 여행지 경제에 정의로운 기여를 하는 세 가지 요소를 이루어 진다고 볼 수 있다.  269


에밀 저번(Emil Juvan)과 세라 덜니커(Sara Doincar)는 "사람들은 윤리적 여행의 표준을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이를 잘 지키지 않을까?"라는 문제를 분석해 보았다. 저번과 덜니커가 내린 결론은 윤리적 표준을 잘 지키지 못하는 여행자들의 행동 패턴에는 '인지부조화'라는 유명한 심리적 메커니즘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인지부조화란 이런 것이다. 우리가 "현지 아이들에게 적선을 하면 안 된다"는 신념이 강하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어느 날 캄보디아를 여행하던 중 그 많은 아이들의 공세에 시달리다 못해 볼펜 한 자루와 우리나라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주고 아이들이 그린 그림도 3달러어치 사고 말았다. 그러면 우리 머릿속에서 부조화가 발생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적선을 하는 사람이야 안 하는 사람이야?" 

이처럼 우리의 태도 또는 신념과 우리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쪽은 우리의 행동이다. 그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고 원초적이다. 태도와 신념은 바꾸면 되지만 일단 저질러버린 행동은 없었던 것으로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이 때문에 우리는 태도와 행동의 부조화가 발생했을 때 간단히 태도를 수정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곤 한다. 즉 위의 상황에서는 "사실 아이들한테 적선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지. 암, 그렇고 말고"라는 식으로 우리의 윤리적 표준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274


저번과 덜니커는 여행자들이 인지부조화에 따라 태도를 변화시킬 때 전형적으로 보이는 여섯 가지 부조화 해소(즉 변명) 양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는 우리가 기존의 표준에 어긋나는 일을 하긴 했지만, 알고 보면 그게 그렇게 부정적인 결과를 낳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결과의 부정' 패턴이라고 한다. .. 

둘째는 '하향 비교'이다. 우리 자신도 뭔가 잘못을 하긴 했지만 우리보다 훨씬 심한 자들이 있으니, 우리 잘못을 잘못 축에도 못 든다는 식의 변명 양상이다...

셋째는 '책임의 부정'으로, 이는 어떤 행동이 현지인들 때문에 발생했다고 변명하는 것을 뜻한다...

넷째는 "나도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거기에선 꽁초를 거기에 버렸어야 했다고"라는 식으로 말하는 '통제의 부정'이다. 즉 책임의 부정이 현지인 탓을 하는 패턴이라면, 통제의 부정은 상황을 탓하는 패턴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는 "휴가는 예외라고요. 여기 나와서까지 윤리 같은 걸 신경 써야 해요?"라고 말하는 '예외 형성'이다. ..

여섯째 패턴은 "사실 나는 나쁜 일보다는 좋은 일을 더 많이 해요"라고 말하는 '보상'이다. 이는 아주 교묘하고 기가 막히게 잘 먹히는 변명 양상이다.  275-276


우리는 완벽할 수도 없고, 변명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렇지만 위의 여섯 가지 변명은 그저 변명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적어도 좀 더 나은 여행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잘못을 변명하는 것은 괜찮다. 다음에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한다면 말이다.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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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투성이의 문 위에 붓질을 할 때마다 더러움이 지워졌다. 송곳으로 그은 숫자들이 사라졌다. 핏자국 같은 녹물들이 사라졌다.  17



배내옷

내 어머니가 낳은 척 아기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고 했다. 

달떡처럼 얼굴이 흰 여자아이였다고 했다. 여덟 달 만의 조산이라 몸이 아주 작았지만 눈코입이 또렷하고 예뻤다고 했다. 까만 눈을 뜨고 어머니의 얼굴 쪽을 바라보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어머니는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아버지와 함께 외딴 사택에 살았다. 산달이 많이 남아 준비가 전혀 없었는데 오전에 갑자기 양수가 터졌다. 아무도 주변에 없었다. 마을에 한 대뿐인 전화기는 이십 분 거리의 정류장 앞 점방에 있었다. 아버지가 퇴근하려면 아직 여섯 시간도 더 남았다.

막 서리가 내린 초겨울이었다. 스물세 살의 엄마는 엉금엉금 부엌으로 기어가 어디선가 들은 대로 물을 끓이고 가위를 소독했다. 반짇고리 상자를 뒤져보니 작은 배내옷 하나를 만들 만한 흰 천이 있었다. 산통을 참으며, 무서워서 눈물이 떨어지는 대로 바느질을 했다. 배내옷을 다 만들고, 강보로 쓸 홑이불을 꺼내놓고, 점점 격렬하고 빠르게 되돌아오는 통증을 견뎠다.

마침내 혼자 아기를 낳았다. 혼자 탯줄을 잘랐다. 피 묻은 조그만 몸에도 방금 만든 배내옷을 입혔다. 죽지 마라 제발. 가느다란 소리로 우는 손바닥만한 아기를 안으며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처음엔 꼭 감겨 있던 아기의 눈꺼풀이, 한 시간이 흐르자 거짓말처럼 방긋 열렸다. 그 까만 눈에 눈을 맞추며 다시 중얼거렸다. 제발 죽지 마. 한 시간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모로 누워 그 몸이 점점 싸늘해지는 걸 견뎠다. 더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20-21



하얗게 웃는다

하얗게 웃는다, 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

그는 하옇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 (아마)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80



당의정

자신에 대한 연민 없이, 마치 다른 사람의 삶에 호기심을 갖듯 그녀는 이따금 궁금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먹어온 알약들을 모두 합하면 몇 개일까? 앓으면서 보낸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마치 인생 자체가 그녀의 전진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반복해서 아팠다. 그녀가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힘이 바로 자신의 몸속에 대기하고 있는 것처럼. 그때마다 주춤거리며 그녀가 길을 잃었던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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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가 인생 최고의 쾌락으로 인정받는 가운데, 여행은 그중에서 가장 값비싸면서도 가치 잇는 소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4


현대인이 소비를 통해 유토피아로 초대된다면, 그 유토피아의 최정상에는 여행의 장소가 있다.  5


아마 현대사회에서 여행 정도의 지위를 부여받고 있는 것은 돈과 사랑 외에는 없을 것이다.  6


이전까지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적 탈출구는 '섹스'라 말해져 왔다. 자유주의, 여권 신장, 자본의 확장은 정확히 섹스 산업의 번성과 맞물렸다. 이제 이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여행이 되어가고 있다.  7

 

사랑이나 여행은 모두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 그것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기 시작하면, 즉 모든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처럼 권유되고 심지어 '강요'되기까지 할 때는 반드시 왜곡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제대로 사랑하고 제대로 여행하려면, 먼저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사랑과 여행을 분명히 보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맹목적으로 요구되는 것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어느덧 자기도 모르게 '욕망'하게 된 것들에 대해 의심해야 한다.  8



나는 여행을 다녀왔다거나 여행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꼭 질문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여행에서 무엇을 얻으셨나요? 여행이 왜 가치 있다고 생각하세요? 여행이 왜 좋으세요? 여행을 다니며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19



현대인에게 권태는 일상이 되었다. 그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쾌락도 일상이 되었다. 도시는 권태를 조장하고, 그것을 잊게 만드는 일시적 향락을 제공한다. 

어느 시점이 되면 우리는 깨닫는다. 내가 이 회색의 도시 한가운데에서 탈색되고 있다는 것을, 색채 없는 무미건조한 도시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21



도시는 우리에게 삶의 형식과 안전망을 제공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삶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완벽함 때문에 우리는 도시에서, 그 도시 속에 붙박인 우리의 현시에서 떠나고 싶어진다. 그 이유는 저 태곳적의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모순적이게도, 변덕스럽게도, 용납하고 싶지 않게도 자유와 안락이라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을 모두 원한다.  22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이러한 '이미지를 향한 갈망'을 인간의 중요한 특성으로 지적한다. 라캉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상상계와 상징계로 뒤덮여 있다. 여기에서 상상계란 이미지의 세계이며, 상징계는 언어적 질서의 세계이다. 우리 머릿속은 늘 이미지와 언어로 뒤얽혀 있으며, 영원히 그 두 가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이미지나 언어가 우리를 '완벽하게 만족시켜 주리라' 믿으며 욕망하고 나아가지만, 실제로는 무한한 욕망의 연쇄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면, 뒤이어 다른 이미지를 욕망한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언어(의미)를 획득하더라도, 곧 욕망해야 할 다른 언어(의미)가 생긴다.

여행에 대한 갈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특정한 여행지에, 정확히 말해 그 '여행지의 이미지'에 완벽한 만족이 있을 거라는 환상을 가진다. 그 이미지에는 자유, 낭만, 쾌락, 꿈, 희망, 관능, 행복, 열정, 성장, 드라마, 성공, 여유, 휴식, 모험과 같은 온갖 언어가 덧씌워진다. 이렇게 이미지와 언어가 결합한 '그곳'은 우리에게 뜨거운 갈마의 대상이 되지만, 정작 그곳에 도착하더라도 우리가 꿈꾸던 완벽한 향락은 존재하지 않느다. 우리는 다시 다른 여행을, 여행의 이미지를, 여행이 줄 어떤 언어(의미)를 꿈꾼다.  26



'여행은 단순히 여해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에 대한 열망들이 집약되어 있다.  27



우리는 자신의 삶에 좀 더 엄밀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욕망, 우리가 선택한 삶의 방식, 결국 우리를 규정하게 되는 존재 방식에 대해 더 엄격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삶은 짧고,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은 지나가고 나서야 후회로 되돌아오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넘쳐나는 가짜 여행들 속에서, 혹은 온갖 욕망으로 점철된 환영들 속에서 '진짜 여행'을 가려내야 한다.  28



'자유'는 모든 조건과 억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어떤 '순수한 상태'라고 오해되곤 한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한계 속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런 자유를 누리는 건 불가능하다. 오히려 자유는 자기가 어떤 현실에 속해 있는지를 아는 것이며, 그러한 현실적 조건들을 어떻게 수정할 수 있는지에 관여하는 것이다. ..

여행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자유는 나를 조건 지어 왔던 수많은 요소들과 의무들에 대해 다시 생각할 최선의 기회를 제공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뭐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재정립하고 새롭게 장악하며 수정할 수 있는 기회와 힘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31



여행에는 우리가 살아온 현실, 앞으로도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의 논리가 아니라 다른 논리로 살아 보고자 하는 욕망이 들어 있다. 특히 배낭여행객의 마음은 이 한 번뿐인 인생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방식의 삶을 체험해 보고자 하는 욕망으로 움직인다. 그 이후에는 다시 이 현실로 돌아올지라도, 조금은 다른 마음으로, 조금은 다른 형태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미한 희망을 가지고 저 '다른 삶'으로 떠나 보는 것이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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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원래 대학에서 강의 했던 교양강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 진 것이다.  9


내가 가르치는 것과 똑같은 강좌를 2~3년 정도 담당했던 한 여자 제자와 사석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강의는 할 만한가? 어렵진 않나?"

"별로 어렵진 않은데, 재미가 없어요."

"재미가 없다? 왜?"

"성이라는 게.. 뭐랄까, 너무 뻔한 내용이잖아요. 1~2년 강의하고 나면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없어요. 새로 연구하거나 고민해야 할 내용도 없고..."

... 난 물론 그녀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한 가지는 인정해야만 했다. 성이라는 것이 이제는 대학에서조차 조금은 식상하고 진부한 주제가 되었다는 것 말이다.  18


바야흐로 성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두(話頭 말할화 머리두)가 된 느낌마저 든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창녀인 소냐에게 "여자의 몸에는 평생 파먹어도 마르지 않는 광산이 숨겨져 있지"라고 빈정거렸지만, 어쨌든 우리는 드디어 성이라는 보물단지를 찾아낸 셈이다. 아무리 파내더라도 마르지 않는 샘, 진지한 성찰의 가능성과 통속적 흥미를 동시에 충족시켜줄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20


'성의 과잉'이라고 부를 만한 요즘의 추세 속에서, 또 이론적, 실천적 혼란과 갈등 속에서 성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이나 학문적 관심까지도 시중에 넘쳐나는 수많은 '섹스 이야기'중 하나로 취급될 위험이 있다.  22


"이 책은 해답을 주기 위해 있는 게 아니라 고민을 주기 위해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23


'우리들은 성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사실 시시껄렁한 음담패설 말고는 성에 대한 이야기를진지하게 나눠본 적도 없지 않는가? 사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자유로이 대화하거나 배울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지성인으로서 교양을 쌓아야 한다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자 삶의 일부인 성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지 자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24세, 남학생)  26


성 그 자체가 원래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이라면, 왜 우리는 성에 대해 그토록 부끄러워하는가? 왜 우리는 성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진실을 계속 감추고 부인하는가? 왜 우리는 생명의 원천인 성을 때로는 숭배하고 칭송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더럽고 불결하다 욕하고 또 철저한 금기의 대상으로 삼는가? 아니, 인간의 성에 대한 '단 하나의 객관적 진실'이라는 게 도대체 있기는 한 건가?  28-29


성에 대한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성찰이나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성이 너무나 일상적이고 낯익은 대상이라는 데 있다.  33


육체 없는 성이 있을 수 없는 한 성에 대한 관심은 곧 육체에 대한 관심 아닌가? 물렁거리는 살덩어리와 끈적거리는 액체로 이루어진 육체, 끊임없는 욕망으로 우리를 들뜨게 하고 우리의 고귀한 영혼을 부패시키는 육체, 언젠가는 사멸해버릴 그 저주스러운 육체 말이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는 플라톤의 경구가 잘 말해주듯, 성에 대한 관심을 갖는 순간 우리는 육체에 붙들려 영혼의 순수함과 완전한 앎을 포기해야 한다는 공포가 철학자들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욕망의 힘이 두려워 자신의 성기를 잘라버렸던 초기 교회의 금욕적 수도사들처럼 육체의 성을 부정했던 것이 아닐까?

고대 그리스 이래로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로고스(Logos), 즉 이성과 논리와 언어를 진리 탐구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로고스=진리'라는 등식에 입각해서 피와 살을 지닌 인간의 육체, 아무리 애를 써도 순수하게 논리화될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거의 본능적으로 혐오했는지도 모른다.  46-47


프로이트는 이 주제를 탐구하면서 '성보다는 좀 더 부드러운 '사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사랑이란 기본적으로 성기의 결합이었으니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성적인 사랑'과 다른 종류의 사랑을 구별할 수 없다.  50


우리는 성이라고 하면 단순히 생물학적인 성의 구별이나 직접적인 성행위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의미의 성을 영어로 보통 '섹스(sex)'라고 한다. 서구에서 1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 말은 사실'(둘로) 나뉜 것'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의 'sextum'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말이 처음에는 주로 생식기관의 차이로 구분되는 '생물학적 성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다가, 19세기부터 남녀 양성 사이의 성 관계나 성적 결합을 뜻하는 말로 그 의미가 확대된 것이다.  51


예컨대 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도덕, 성과 관련된 제도나 관습, 이데올로기, 다양한 성 심리나 문화, 성욕, 성적 정체성 등을 모두 살펴봐야 하는데, 이런 넓은 의미의 성을 단순한 '섹스'와 구분하여 학계에서는 보통 '섹슈얼리티(sexuality)라고 부른다.  52


일반적으로 서구 언어에서는 어휘가 형태적으로 확장될 때 '1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명사'가 '2 형용사'로 바뀐 뒤에 다시 '3 그 형용사의 명사형'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살펴보자면, 'unverse(우주)'라는 낱말이 'unversal(우주의, 보편적인)'로 바뀐 뒤 여기에 추상명사를 만드는 어니 '~ity'가 붙어서 'universality(보편성)'라는 새로운 명사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때 'unverse' 와 'universality'를 비교해보면, 전자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사물인 반면에 후자는 추상적 성질임을 알 수 있다. 물론 'universality'는 'unverse'가 갖고 있는 특성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두 명사의 존재론적 차원은 매우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cause(개별사건의 원인)'가 ''causai(원인의)'이 된 뒤 다시 'causality(인과성, 인과관계)'로 바뀌면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의 새로운 명사가 탄생한다. 따라서 sex(구체적인 성행위, 성별) -> sexual(성의, 성적인) -> sexuality(성욕, 성과 관련된 태도, 성적 정체성 등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추상적 성)라는 형태적 어휘 변환 과정을 거칠 때에도 그 의미에 심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52


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성을 '자연적으로 주어진 사실'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구성물'로서 파악하게 되고, 또 그 속에 담겨 있는 사회적, 정치적 의미들까지 탐구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53


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적어도 아래와 같은 세 가지의 접근법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첫 번째로 가능한, 그리고 다른 모든 방법의 기초가 되는 것은 역사적 접근법이다. ..

역사적 접근의 진정한 의의는 현재의 성 관념 및 제도들의 기원과 변천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가운데 "성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

당연히 "더 적은 사변과 더 많은 증거"라는 원리가 지배한다. 따라서 성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라는 애초의 취지가 무색해지기 쉽지만, 성에 관해 쓸 만한 조감도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이 고달픈 과정을 가능한 한 성실히 밟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아마 이론적, 과학적 접근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건축물에 비유해보곤 하는데, 그 토대가 생물학적 측면이라면 기둥들은 인류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측면들을 가리키고 지붕은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성의 각 측면을 분해하여 그 각각을 해당 실증과학의 연구 성과에 따라 고찰하고, 다시 밝혀진 사실들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종합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세 번째 방법은 실천적 문제 중심의 접근법이다...

성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이나 태도는 급변하고 있으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조건들도 실존한다. 단지 사태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만이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53-57


비판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려서 판단하거나 밝히는 것"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기묘하게도 비판이라는 말을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남의 잘못을 들춰내어 따지고 공격하는 것"을 가리킬 때 쓰는 경우가 많다.  58


철학은 경험적으로 주어진 사실들을 기술하거나 설명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성찰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그 이면과 전체적 연관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려고 애쓴다.  58-59


철학은 어떤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며, 성과 관련된 사실들을 실증적으로 직접 탐구하기보다는 그러한 사실들의 의미와 근거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철학이 대상으로 삼는 성은 개별과학자들이 탐구하는 대상과 같은 하나의 사물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진 것, 즉 우리의 언어와 의식 속에 녹아들어 있고 우리 자신의 실천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그 무엇이다. ..

담론(discours)이란 "특정한 목적에 따라 특정한 주체에 의해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된 이야기"를 가리킨다.  59


삶 속에서 성은 언제나 일정한 담론으로서 위세를 떨치고 있으므로 성에 대한 철학의 비판 작업 또한 바로 이러한 '담론으로서의 성'을 분석하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 스스로 새로운 성 담론을 구축해나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60


사람들에게 섹스와 연결되는 낱말들을 적어보라고 하면, "사랑, 결혼, 쾌락, 생식, 욕망, 금기, 남녀의 성기, 지배, 도덕, 성범죄, 변태, 누드, 포르노, 임신, 자위, 신비(스러움), 정력, 매춘, 생리..."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답이 두서없이 튀어나온다. 이처럼 다양하고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이미지와 개념들은 사실상 섹스라는 말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이 정말 복합적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63


성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이처럼 담론화된 성 또는 성 담론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 있다면, 이제 그것은 단순히 "무엇이 진리인가?"를 찾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이 진리라고 할 때 그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는 "왜 그것이 진리라고 여겨지는가?" 등등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69


인간의 성에서 본능적이고 생물학적/생리(학)적인 요소가 더 중요한가, 아니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요소가 더 중요한가를 둘러싼 논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진실은 두 요소의 결합에 의해 인간의 성이 만들어졌다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시선, 우리의 태도, 우리의 평가가 아닐까? 어떤 의도에 따라, 어느 쪽에 더 가중치를 두고, 어떤 요소에 더 주목하며, 어떤 사실들을 더 소리 높이 외치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결국 이러한 '본느의 담론' 자체가 우리의 특정한 인식과 실천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또 거꾸로 이 담론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 성에 대한 인식과 실천이 달라진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74-75


우리는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과 본능들이 동물과 어떻게 다르며, 또 그것이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요인들과 뒤얽히면서 어떻게 우리의 성을 창출해냈는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75


"나는 언제 누구와 섹스해도 괜찮은가?" ...

인간도 동물처럼 오직 생식만을 위해 일정 기간에만 섹스를 했다면 아마도 성에 관한 규제 같은 것은 불 필요했을 것이다.  76


성에 대한 현대의 과학적 연구들은 무지에서 비롯된 수많은 오해를 바로잡고 성 연구에 큰 기여를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바로 통계의 신화와 오르가슴의 신화다.  83


성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단순히 더 많은 쾌락을 가져다주는 기교를 찾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쾌락의 담론 자체를 해부하고 그 속에 들어있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함으로써 성적 쾌락과 이를 둘러싼 논의들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는 데 있다.  84


도덕의 담론. 사실 도덕의 담론은 성과 관련하여 가장 흔하고 표준적인 담론이며 또 빛나는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의 담론이기도 하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성은 무엇보다 먼저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다.  85


우리 사회에서는 평소 그다지 도덕적으로 살지도 않으면서 성에 관해서만큼은 겉으로만 도덕적인 척하거나, 타인의 심각한 공적인 비행(非行 아닐비 다닐행)에 대해서는 지극히 관대하면서도 성에 관련된 문제라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다.  86


이러한 불균형과 자기모순은 성에 관한 '도덕의 담론'과 뿌리 깊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담론의 핵심은 "육체에 기반을 둔 성은 우리를 파멸시킬 수 있는 유혹이므로, 윤리만이 우리를 파멸로부터 구해준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의 밑바닥에는 다시 "섹스란 원래 동물적이고 더럽고 천박한 것인데, 도덕과 제도의 통제를 받을 때에만 인간적인 행위로 승화되고 용인될 수 있다"는 입장이 깔려 있다.  87


'인간의 성에 대한 철학적 고찰'의 핵심은 .. "우리는 생물학적/생리(학)적 본능이라는 말로써 무엇을 생각하고 실천하려 하는가?"를 비판적으로 분석해보는 데 있다. 독자들 스스로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한 번 물어보기 바란다. 

"생물학적/생리(학)적 본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 나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사용하는가? 생물학적/생리(학)적 본능에 대한 이해가 나의 성적 실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101-102


인간은 성과 무관한 영역, 아니 오히려 성을 부정하거나 억압하는 영역을 지니고 있기에 인간다워질 수 있다고 보는 견해야말로 인간의 성을 이해하기 위해 버려야 할 첫 번째 오해인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도덕이나 종교, 예술에서 올 뿐, 벌거벗고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을 때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똑같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렇다면 인간은 왜 벌거벗고 뒹구는 걸로 만족하지 않고 포르노를 만드는지, 또 때로는 벌거벗고 뒹구는 대신에 속된 말로 '변태'라고 불리는 엉뚱한 행위 따위에 집착하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

난잡하고 무분별하게 섹스를 즐기는 것을 '동물적' 이라고 비난하는 우리의 언어습관이 얼마나 부당한지.  106


20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진화생물학의 풍부한 연구 성과는... 더 폭넓은 이해를 위한 발판 노릇을 할 때에만 의의를 갖게 될 것이다.  107


도대체 왜 인간의 성은 생식이라는 자연적 울타리를 넘어서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러한 이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인간의 암컷, 즉 여자에겐 발정기가 없다. 인류의 선조들이 협동노동에 의해 사시사철 먹이를 구할 수 있게 됨으로써 영양 상태가 좋아졌고, 그 결과 특정 시기에만 번식을 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일 년 열두 달 임신이 가능하다는 점 하나만 봐도 다른 동물과 비교하면 엄청난 진보를 한 셈이지만...  108


여성의 배란이 감춰져 있어서 심지어 본인 자신도 알 수 없다.. 

'성 전략(sexual strategies)'을 낳았다. 인간의 선조들은 언제 섹스를 해야 임신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상대를 유혹하고 섹스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복잡다단한 '성 전략'을 발전시켜야 했던 것이다.  110


컴포트(Alex Comfort)가 <섹스의 즐거움(The Joy of Sex)>에서 지적한 대로, "과거에는 성행위의 윤리성에 대해 왈가왈부했지만, 요즘에는 성행위에서 어떻게 만족을 얻을 것인가에 신경을 쏟고 있는" 것이다... 더 많은 쾌락을 얻기 위한 무의식적 노력이 인간의 성 행동과 의식을 규정해왔다고 볼 수 있다.  111


성적 쾌락의 중요성은 인간의 몸 구조에서도 확인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더 많은 쾌락을 얻을 수 있도록 꾸준히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몸 크기와 비교할 때 엄청나게 큰 남자의 성기, 엄청난 양의 신경망이 밀집되어 민감하기 짝이 없는 여성의 클리토리스, 매끄러운 피부와 온몸에 퍼져 있는 성감대, 다양한 성적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신체적 특징들, 예컨대 유난히 발달한 여성의 젖가슴이나 엉덩이, 높은 목소리, 성기 주변에만 남아 있는 털, 붉은 입술, 애교웃음, 예민하게 변하는 눈동자 등등이 이를 증명한다. 또 직립보행에 의해 자유로워진 손과 변화된 성기 위치는 효과적인 애무 동작과 다양한 성교 체위(體位 몸체 벼슬위)를 가능하게 해주었으며, 두뇌의 발달에 따라 사고 능력과 감정도 풍부해졌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성행위를 좀 더 풍요롭고 즐겁게 만든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쾌락의 중요성은 섹스에 소요되는 시간에서도 잘 드러난다. 짧게 끝나는 섹스를 가리켜 속된 말로 '토끼씹'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실제로 토끼의 교미는 10초 이내에 끝나며, 그 밖의 대부분의 동물들, 심지어 정력의 상징인 말이나 백수의 왕이라는 사자의 경우에도 길어야 30초를 넘기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인간의 성교 시간은 수 분, 때로는 수십 분까지 늘어날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 시간을 더 늘리기 위해 무진 애를 쓰기도 한다... 동물들은 단지 쾌감을 증대시키기 위해 인간처럼 길고 복잡한 전희(前戱 앞전 놀희)를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상적인 인간 남녀는 성교를 하기 전에 꽤 오랫동안 서로의 몸을 공들여 애무한다. ..

여성의 경우에는 성교를 통해 오르가슴을 얻는 게 쉽지만은 않으며,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남자는 사정이라는 생리적 매커니즘 때문에 비교적 쉽게 오르가슴을 경험하고 확인할 수있지만, 사정 그 자체가 최고의 성적 만족을 자동적으로 보장해주지 않는 한 결국은 마찬가지다.  112-113


'강한 성적 쾌감'은 인류의 생존에 어떤 도움을 준 것일까?  115


인간이 섹스를 통해 추구하는 쾌락은 자극에 대한 단순한 육체적 반응만은 아니다. 물론 강렬한 생리적 반응이 우리의 뇌리 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러한 쾌감 속에서 확읺되는 총체적 만족감, 즉 '상대와 하나가 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섹스할 때의 자세에서도 확인된다.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얼굴을 마주보고, 즉 서로의 감저오가 반응을 확인하면서 성행위를 한다. ...

얼굴을 마주보는 체위는 우리의 신체구조, 성기의 위치와 잘 맞기 때문에 좀 더 편할 뿐만 아니라, 서로 마주봄으로써 강한 심리적, 정서적 유대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 유대감은 더 나아가 사회적 교류와 관계를 강화시키는 역할도 하며, 바로 이런 측면을 고려할 때만 인류의 정적 진화가 좀 더 효과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116


헬렌 피셔는 <성의 계약(The Sex Contract)>에서 아주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하고 있는데, .."성은 인간 생활의 모든 것을 작동하게 하는 점화장치의 불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 새끼의 양육에 성공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문제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생존을 결정짓는 중대 사항이므로, 인류의 선조들이 번식의 안전을 위해 좀 더 강력하고 지속적인 유대를 발전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피셔에 따르면 이처럼 새끼의 공동 양육과 지속적인 섹스를 통해 형성된 강한 정서적, 사회적 유대를 기초로 최초의 가족과 공동체가 생겨났으며, 이와 더불어 협동심, 애타심, 의무감, 수치심, 정의감,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공포, 성적 질투 등의 기본적 감정들과 갖가지 의사소통 수단, 규칙, 친족 체계, 도덕, 복잡한 사고, 여러 가지 관념들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117-118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바람피우기'가 일부 부도덕한 사람들의 비정상적인 일탈행위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119


생식 결과의 다양성, 다산성(多産性 많을다 낳을산 성품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한 명의 상대하고만 섹스하는 것보다 여러 명의 상대와 섹스하는 게 더 낫기 때문이다.  120


여자들의 바람기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 학자들에 따라서는 여자 또한 자신의 자손에게 더 나은 유전자를 물려주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남자들, 그것도 괜찮은 남자들을 골라 성 관계를 가지려는 심리를 발전시켜왔다고 대답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 양이 아닌 질적인 측면에서 더 나은 생식 결과를 얻기 위해 바람을 피운다는 것이다.  121


우리는 바람기의 원인에 대한 두 번째 답을 찾아봐야 한다... 사람들이 바람을 피우는 좀 더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쾌락과 연관이 잇을 것이다. 인간의 성이 단순한 생식의 효율성을 넘어서 쾌락 그 자체를 지향하게 됨에 따라 섹스에서 다양성과 변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인간 본성의 일부가 되었으며, 이것은 남녀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성향을 잘 보여주는 용어 중에 '쿨리지 효과(Coolidge effect)'라는 게 있다. 미국 대통령이던 쿨리지가 어느 날 부인과 함께 어떤 농장을 방문했는데, 마침 수탉이 암탉과 교미를 하고 있었다. 이를 본 부인이 안내인에게 물었다. "저 수탉은 하루에 몇 번이나 저짓을 하나요?" 안내인이 대답하기를 "수도 없이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은 독기 어린 목소리로 "그 사실을 대통령께 좀 전해주세요"라고 했다. 부인의 말을 전해들은 대통령이 물었다. "그런데 그 수탉은 늘 같은 암탉과 관계를 하나?"  안내인 왈 "아닙니다.  매번 다른 암탉과 하지요". 이에 대통령은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 사실을 영부인께 전해주게." 우스갯소리 같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이 상대가 바뀔 때마다 더 큰 흥분과 만족을 느끼며, 이를 가리켜 '쿨리지 효과'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런 현상은 여자에게도 해당된다. <킨제이 보고서>에 따르면 "언제 성적 흥분을 가장 크게 느끼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남녀의 대답이 크게 달랐지만, 양쪽 모두 1위를 차지한 답은 "새로운 상대와 섹스를 할 때"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바람기는 우리가 처해 있는 또 다른 모순을 보여준다. 강력하고 지속적인 유대를 추구하는 본성과 다양하고 변화 있는 쾌락을 추구하는 본성이 우리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면 인간의 성이 단순하게 결정되지 않으며 근본적인 모순 속에서 정말 다양한 스펙트럼을 만들어낸다는 점이야말로 신비에 싸여 있는 진화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인지도 모른다.  122-123


옛날 아라비아의 속담처럼 "사람이란 그들의 부모보다는 그들의 시대를 더 많이 닮는다."  124


* 엘리아스(Nobert Elias)는 <문명의 역사>에서 성적 수치심이나 충동의 조절 또한 문명의 진보와 함께 발달한 심리적 메커니즘이기 때문에, 야만적이거나 원시적인 사회에서는 알몸이나 성행위 등에 대해 문명인들과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엘리아스의 이런 주장은 최근 몇몇 학자들에 의해 근거 없는 편견과 독단이라고 비판받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한스 페터 뒤르(Hans Peter Durr)의 <나체와 수치의 역사>를 보라. 뒤르에 따르면 알몸과 성에 대한 수치심은 문명의 발달 정도와 관계없이 모든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  129


좀 엉뚱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여자들이 여름에 소매 없는 옷을 입을 때 겨드랑이 털을 없애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대개 "보기 흉하기 때문"이라거나 "지저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정답일까? 우리들이 심리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든 간에, 사실 겨드랑이 털을 없애는 진짜 이유는 미적 감각이나 위생 문제와는 거의 무관한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성들이 겨드랑이 털을 없애는 이유는 여성들이 다리를 벌리고 앉지 않는 이유와 동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겨드랑이 털이란 무엇인가? 겨드랑이 털은 사춘기 이후에 나기 시작하며, 성기 주변의 털과 더불어 성적 성숙을 상징하는 우리 몸의 대표적 신호다. 게다가 그 털은 성기 주변의 털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기 때문에 너무 자극적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겨드랑이 털 자체가 강한 성적 자극을 보내는 신호이기 때문에 남에게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서양의 고전 회화에서 알몸을 그리면서도 음모만은 그리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비록 알몸이라 하더라도 음모가 없다면 성적인 의미가 제거되어 외설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마치 여성이 다리를 벌리는 자세가 성교 자세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금기사항인 것처럼 말이다.  130


고대 중국에서는 여자를 '적(赤=불꽃)', 남자를 '백(白=흙)'으로 상징했는데, '적'은 전통적으로 창조력, 성적 능력, 생명, 빛, 갓 태어난 아이, 알몸의 색깔 등을 나타내는 반면 '백'은 죽음이나 소극성, 성적 무기력 등을 뜻했다. 이 점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성적으로 우위에 있었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또 고대 중국의 신화나 전설에서 여자는 특히 성(=우주적 자기재생산)에 관한 한 신비한 마력을 가진 존재였다. 유명한 <소녀경>을 비롯한 각종 '성 교본'에서도 여자는 완벽한 성 지식을 가지고 성을 수호하는 위대한 스승으로, 남자는 무지한 제자로 그려져 있다. 여자는 교접을 통해 자신의 무한한 기를 남자에게 공급하는 '태모(太母 클태 어미모)'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주나라 이후 가부장제가 확립되면서 음과 양 중 양을 더 중시하게 되고 태초의 여성숭배는 변질되어 '성적 흡혈주의(sexual vampirism)', 즉 여성에 대한 착취로 타락했지만, 어쨌든 음을 중시하는 흐름은 도가나 신비사상, 샤머니즘 등을 통해 민중신앙 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132-133


남성들은 늘 여성의 우월한 성적 능력을 숭배하면서도, 때론 그것을 두려워하고 힘으로 통제하려 애써왔던 것이다. 어쨌든 경배와 공포가 뒤얽힌 지점에서 이제 성 자체가 신비스러운 베일에 가려진 보편적 금기대상이 되며, 그 금단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어떤 신성한 힘에 의해 그 자격과 절차, 구체적인 방법 등을 허락받아야 한다. 한마디로 자연 상태에서는 '보편적 허용과 특수한 금지'가 기본 규율이었던 반면, 이제 반대로 '보편적 금지와 특수한 허용'이라는 원칙이 성의 질서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135-136권력의 이동은 늘 체제의 근본적 전환을 가져오는데.. 남근숭배가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면서 원시사회의 성 관념 및 성 풍속들이 서서히 제거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여성에 대한 숭배는 멸시와 경계로 바뀌고, 종종 종교의식이나 주술과 연관되어 남녀 모두에게 생식과 쾌락의 결합 또는 쾌락의 자유로운 추구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원시적인 성 풍속들은 좀 더 엄격한 도덕적 통제에 묶이게 된다.  145


남성의 입장에서는 자기 자식을 낳아서 대르 잇고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므로, 이제 여성의 불임은 큰 죄가 되었다. 불임을 막는 풍속들이 생겨났고, 임신중절이나 자위행위, 남색(男色 사내남 빛색) 등은 엄하게 처벌되었다. 과거에 공동체 전체에 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찬미되던 여성의 생식력은 이제 한 남자의 값진 재산이 되었으며, 매매혼이나 약탈혼이 보편화되었다.  147


어차피 우리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내고, 우리가 만든 신화 속에 갇혀서 산다. 신화에 대한 비판과 분석까지도 그러한 순환의 고리를 완전히 잘라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151



15~16세기에 시작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 육체와 욕마의 해방을 주장함과 동시에 성대 대해서도 좀 더 긍정적인 사고를 제공하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르네상스 초기 처음에는 '성의 해방'이 주로 예쑬의 에로티시즘을 통해 표현되었지만, 사실상 이것은 중세 말 십자군 전쟁, 페스트 등으로 인구가 격감하고 생산력이 정체함에 따라 전면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결혼과 출산이 최고의 미덕으로 칭송되기 시작했던 사회경제적 배경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 이후 노동력과 군대의 필요 때문에 더욱 가속화되었다.  167-168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루터(M. Luther)는 가톨릭교회의 극단적 금욕주의와 위선적인 행태들을 비판하면서도 부부간의 성애를 긍정하고 인간 육체의 불완전함을 인정했다. 또 칼뱅(J. Calvin)은 성행위는 성스러운 것이며, 모든 성인은 가정을 가져야 하며 가정 안에서 삶을 공유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가정을 공동체의 주춧돌로 파악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주장은 가족을 중심으로 새로운 생산양식의 주체가 되어야 할 초기 부르주아 계급의 입장(가족의 노동력을 중심으로 하는 소상품생산은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학을 했다)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이는 그들이 이제 성 문제를 종교적 문제나 단순한 도덕의 문제가 아닌, 사적 생산과 결부된 개인의 문제로 파악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근대 초기는 부르주아사회의 성 윤리가 만들어지고 정착되는 시기이기도 했는데, 개인들 간의 계약으로서 결혼, 일부일처제 등이 확고한 원칙이 됨에 따라 역설적으로 그 보완물로서 성 매매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168-169


18세기에 들어서서 이른바 절대주의 시대가 되자 육체는 더욱더 성적 도구가 되었고, 몰락해가고 부패한 기생계급이 되어버린 귀족들의 성 관념과 성적 유희는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성을 단순한 쾌락의 수단, 유희의 도구로만 파악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여성의 육체도 파편화되어 관능적 쾌락의 도구로만 평가되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여성의 가슴이나 다리를 노출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심지어 젖가슴이나 허리, 허벅지, 엉덩이, 생식기 등을 각각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풍습까지 생겨났던 것이다.(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자신의 젖가슴을 석고로 모형을 떠서 과일 그릇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풍속의 역사> 제3권 까치, 1987. 43쪽)  170


이 시기에는 육체적 쾌락을 위한 연애기술이 숭배되었으며, 연애란 '두 피부의 접촉'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만연하여 성의 쾌락만이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연애를 위한 성교육, 그러니까 상대를 유혹하고 즐거움을 누리는 기술에 대한 교육이 성행했으며, 상류사회에서는 외설적인 농담을 주고받는 기술이 품위 있는 풍류로 취급되기도 했다. ..

성적 타락이 심해지면서, 지배계급 안에서는 극단적이고 심지어 변태적인 성욕을 추구하는 경향이 생겨났고, 반대로 중간계급 사이에서는 감상적 연애나 지나치게 관념화된 정신적 사랑 등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처럼 연애풍속은 거의 문란하다 할 정도로 자유분방해졌지만, 결혼은 여전히 인습에 묶여 있었다. 귀족들에게 아내나 애인의 아름다움은 단지 과시의 수단이었고, 결혼과 연애는 완전히 분리된 채 혼인은 철저한 거래가 되었다. 특히 귀족과 대부르주아지 사이의 정략결혼이 많았는데, 그것은 돈을 벌어서 성공한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딸을 귀족에게 갖다 바침으로써 사회적 명예를 구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하층 부르주아지들 사이에서는 '첫눈에 반한 사랑'이 경멸받았다. 왜냐하면 사회적 권력이나 지위도, 커다란 재산도 없었던 사람들은 배우자를 고를 때 서로를 관찰하고 시험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근검절약하는 생활태도와 성실성이었기 때문이다.  171-172


육체적 쾌락을 탐하는 시대 분위기에 어울리게 절대주의 시대는 성 매매가 대호황을 누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18세기 말 유럽 최대의 도시였던 파리의 인구 60만 중 4만 명이 성 매매 여성이었으며, 오스트리아의 빈에는 1만 4천 명, 런던의 경우에는 첩 말고도 5만 명 이상의 성 매매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도시의 하층계급에 속하는 젊은 여자들은 대부분이 매춘부가 되었고, 르네상스 시대처럼 성 매매 여성이 특별한 복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소도시나 농촌에서도 은밀한 방법으로 성 매매가 지속되었다. ..

여관, 온천, 카페, 식당, 주점 등이 모두 성 매매에 이용되고 뚜쟁이들에 의해 시골 처녀들이 도시로 팔려가는 일도 흔했는데, 성 매매의 성행은 필연적으로 성병의 확산을 가져왔고 결국 19세기까지 매독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이 시기의 성 풍속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방탕하기 그지없는 '성적 향연(Orgie)'이 성행했다는 점일 것이다. 예컨대 일부 귀족들 사이에서는 축제에서 여자 파트너를 서로 바꾼다든지, 넷 또는 여섯이 참여하는 섹스 파티를 연다든지, 채찍이나 물리적 도구, 여러 가지 향료와 최음제 등을 사용한다든지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는데, 악명 높은 사드 후작의 기행(奇行 기이할기 다닐행) 또한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전제로 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프랑스혁명 후 절대주의가 종말을 맞이하고 산업사회가 도래하면서, "노동하고 활동하는 인간, 감정, 이성, 육첵 통합된 새로운 인간"이라는 새로운 미의 이상이 생겨났다. 퇴폐적인 것보다는 건강한 아름다움이 중시되기 시작했고, 복장에서도 민주화가 이루어져 여성들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활동적이며 자연스러운 복장, 다시 말해 "옷을 입고도 벗은 것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복장을 수용하게 되었다. ..

이제 계급과 무관하게 모든 여성은 아주 억압적인 청교도 윤리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다.

중매와 구혼 광고가 일반화되면서 결혼 또한 철저한 계산임이 백일하게 드러났는데, 이러한 추세는 부르주아지의 경우에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

성에 대한 억압적인 청교도 윤리에도 불구하고, 모든 계급에서 혼전 성 관계는 점점 늘어나 일종의 보편적 현상이 되었으며, 자본에 의한 임금 통제와 빈곤 때문에 일찍 결혼할 수 없었던 젊은 독신 노동자들은 자유연애를 통해서 욕망을 해소하려고 하게 되었다. 또 이들의 성에 대한 무지는 미혼모, 낙태 등의 심각한 사회문제를 낳았고, 결국 부르주아사회가 그토록 신성시하던 '가족의 가치와 구속력' 마저 약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172-174


('자유연애'란 문자 그대로 독립된 개인들이 자신의 욕망과 필요에 따라 사랑하는 상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것을 가리킨다.)  175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현대 부르주아사회가 이룩해낸 하나의 공로는 성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이해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음탕한 사색과 무지로부터 성을 해방시키는 첫걸음은 바로 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

형대 사회에서 일어난 성의 혁명적 변화 중 하나는 아마도 산아제한과 임신중절, 피임법 등의 발전으로 인해 점차 생식과 성애가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점일 것이다.  177


산업화된 현대사회가 인간의 성을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변화시킨 것은 물론 아니다. ..

생활고에 지친 노동자계급의 경우에는 남녀 사이에 강력한 정신적 유대를 바탕으로 하는 성애를 만들어내고 실천하기가 어렵다. 결국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찰나적인 쾌락과 육체적 욕망의 충족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만들어지며, 이는 다시 사회 전반의 성적 타락, 야수화, 성폭력 등등의 문제를 낳는다. 또 근래에는 포르노, 마약 등과 함께 변태적 성욕과 성범죄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데, 어찌 보면 문명화된 사회의 억압적 분위기와 변화 없는 일상 생활이 거꾸로 성범죄와 포르노산업을 확산시키는 주범이라고 볼 수도 있다.  179


인간의 노동력 자체가 상품화되고 이를 기초로 팔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상품이 되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이ㅔ서 유독 성의 상품화에 대해서만 울분을 떠뜨리는 것은 위선적인 태도일 수도 있다...

이미 거대한 산업이 되어 부르주아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현대의 성 산업은 도덕적 분노만으로 상대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상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매매의 부정적 효과는 너무도 분명하다. 성 매매는 사회 전체를 눈에 보이지 않게 타락시켜 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끊임없이 왜곡하고, 세상 모든 여자들을 성 매매 종사자들과 성적으로 경쟁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권력구조를 재생산하고 은폐하고 강화하는 데에도 간접적으로 이바지하는 것이다.  180


이미 18세기부터 본격화된 생물학 연구는 성에 관한 과학적 탐구의 토대를 마련해놓고 있었지만 ...

성에 대한 좀 더 체계적이고 실증적인 탐구는 19세기 후반에서부터 20세기 초까지 주로 의사들에 의해 '비정상적인' 성욕이나 성행동을 다룬 수많은 저작들.. 등이 나오면서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이때부터 좀 더 엄밀한 의미의 현대적 성과학(sexology)이 시작된 것이다. ..

성 충동은 "본능적이고 자연발생적이며 절실하기 때문에 억제하기 힘든" 욕망의 힘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185-187


성과학은 성에 대한 기존의 무지와 미신을 폭로했다는 점에서, 또 성을 전통 종굔나 윤리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진지한 학문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초기의 성을 연구한 사람들은 대부분 의사들이었기 때문에, 성 연구 또한 의학적, 생리학적 관점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았다.  189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다형도착증(polymorphous perversion)이 있으며 유아에게는 양성애적(兩性愛的 두양 성품성 사랑애 과녁적) 기질이 나타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건강한 사람들도 누구나 (정상적인) 성 목적에 덧붙여 성도착으로 간주할 수 있는 행위를 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사례가 보편적으로 발견된다는 사실은 성도착이라는 말에 비난의 뜻을 포함시켜 쓰는 것이 어람나 부적절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191


현대 성 연구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변곡점을 만들어낸 것은 인간의 직접적인 성행위에 대한 실험적이고 실증적인 연구였다.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인간 성행위의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려는 의도로 시작된 이 연구들은 생식으로부터 쾌락이 분리되고, 생식보다는 쾌락이 우선시되는 세태와  맞물리면서 새로운 성 담론과 성 관념들을 만ㄷ르어내는 데 일조했다.  201


매스터스(W. Masters)와 심리학자인 그의 아내 존슨(E. Johnson) .. 1954년부터 1965년 사이에 700명이 넘는 지원자들을 실험실에 집어넣고 실제로 섹스를 하게 한 뒤, 성행위를 하는 동안 그들의 몸에 나타나는 생리적 반응들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핵심은 우리가 흔히 오르가슴이라고 부르는 현상에 대한 해명이었다. 잘 알려져있듯이 오르가슴이란 성행위를 할 때 신체적, 심리적 흥분과 쾌감이 절정에 이르는 것을 가리키는데, 매스터스와 존슨의 연구에 따르면 오르가슴은 생리적 측면에서는 척수와 성감대 주변의 신경망을 잇는 신경계의 작용, 근육의 운동, 혈류의 운동 등으로 확인될 수 있다. 두 사람은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인간의 성 반응을 다음과 같은 네 개의 단계로 구분했다. 첫 번째 단계는 흥분기로서 근육이 긴장되기 시작하고 맥박 및 호흡수가 증가하며, 남성 성기의 발기가 시작된다. 또 여성의 질 안에 분비물이 많아지고 질 안쪽의 3분의 2가 넓어지며, 음핵과 젖꼭지가 팽창하기 시작하는 반응이 일어난다. 두 번째 단계는 고조기인데, 남녀 모두 근육의 긴장이 강화되고 맥박 및 호흡이 더욱 빨라지며, 피부에는 붉은 반점이 나타나고 남성의 성기는 딱딱해진다. 또 질 바깥쪽의 3분의 1이 부풀면서 질구가 수축되고, 여성의 외부 성기는 팽창할 뿐만 아니라 색깔도 변화하며, 젖꼭지 주위와 유방 또한 커진다. 세 번째 단계로 절정기에 이르면 수 초 동안 짧고 빠르게 지속되는 리드미컬한 근육의 수축이 일어나는데, 이때 뇌파에도 변화가 오고 심지어 몇 초 동안 의식을 잃기도 한다. 또 무의식적인 표정의 변화와 함게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게 되며, 성기에 집결해 있던 피가 순간적으로 빠져나가면서 쾌감이 성기 주변으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물론 남성의 사정이 이루어지는 것도 바로 이때이다. 마지막으로 쇠퇴기 또는 회복기에서는 신체의 모든 변화가 평소와 같은 상태로 되돌아오면서 땀을 흘리게 되고, 특히 남성에게는 일정 시간 동안 성적 자극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무반응기'가 나타난다.  203-204


그렇다고 해서 오르가슴을 둘러싼 모든 논란이 종식된 것은 아니다. 오르가슴을 둘러싼 다양하고도 세세한 논점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연구가 진행 중이며, 특히 여성의 오르가슴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이 해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204-205


성에 대한 미셸 푸코의 연구는 그 기본성격과 방향에서 이전의 다른 어떤 성 연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새롭고 획기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전의 성 연구들은 인간의 성 자체를 직접적 탐구대상으로 삼아 소위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진행하거나, 그게 아니면 일정한 가설과 이론적, 이데올로기적 틀을 전제로 성에 대해 상당히 규범적이고 선언적인 담론들을 생산해내는 작업이었던 반면, 푸코는 그러한 연구 자체를 가능하도록 해주는 '권력의 의지'에 초점을 맞추고 연구를 통해 생산된 성 담론들에 대한 메타비판(meta는 '~다음에, ~을 넘어서서'라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메타비판이라고 하면 어떤 대상에 대한 직접적이고 1차적인 비판이 아니라, 그 대상을 설명하는 이론이나 개념들에 대한 2차적 비판, 즉 '비판에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207


푸코는 죽기 직전에 쓴 세 권짜리 저작 <성의 역사>를 통해서 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

그가 사용하는 '권력'이라는 개념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푸코는 전통적인 권력 이론을 비판하면서, 과거의 권력 이론을 크게 둘로 나눴다. 그 하나는 권력을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는 상품처럼 보는 '경제적 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가 여기에 속한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권력을 물질적 생산영역에 근거를 둔 계급지배의 도구로 보며, 자유주의는 권력을 상호계약에 따라 법적 효력을 갖는 권리와 의무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비경제적 이론'으로서 권력을 경제와는 무관한 억압으로 보는 입장인데, 푸코는 프로이트나 빌헬름 라이히, 마르쿠제 등이 제시했던 '성욕의 억압'이라는 가설이 그 대표적 사례라고 보았다. 그러나 푸코는 기존의 두 입장과는 달리 권력을 '힘을 향한 의지'가 서로 충돌하는 일종의 싸움으로 파악한다. 그에 따르면 권력은 위에서부터 작동하는 단 하나의 단일한 힘이 아니라, 수많은 권력관계들의 그물망을 통해 아래로부터 구성되고 자기검열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수단들에 의해 지속되는 '비밀스러운 전쟁'이다.  208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것만을 뜻하지 않고, 개인의 일상과 신체에까지 스며드는 '미시권력(micropouvoir)'이기도 하다. 개개인은 언제나 권력의 억압에 의해 핍박받고 희생될 뿐이라는 소박한 '억압가설'은 힘을 잃게 된다.  209


한마디로 권력은 우리의 일상 속에 파고들어와 우리의 신체에 작용을 가하고, 또 그를 통해 우리의 주체를 구성하는 힘이다. 그리고 권력은 자신을 관철시키기 위해 진리 또는 지식을 자신의 전략에 이용하는데, 이때 권력의 전략적 행위는 일정한 담론으로서 수행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권력의 작용을 이해하기 위해 "누가 권력으 갖고 있는가?"라든가 "권력자의의도가 무엇인가?"라는 물음보다는 권력에 의해 지속적으로 우리의 언어, 신체, 행동이 예속되고, 또 주체 또한 그것에 따라 구성되는 과정에 주목해야 하며, 다양한 담론들 안에서 진리의 효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역사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210


'섹스'라는 의미에서 인간의 성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중 하나가 '남자와 여자'라는 주제인지도 모르겠다. ..

서구 언어의 섹스라는 말 또한 기본적으로는 그런 뜻이다. 우리는 섹스라고 하면 성행위를 먼저 떠올리지만, 이 낱말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의 'setum'은 '나뉜/쪼개진 것'이라는 뜻.  218


남자는 '인간의 수컷+α'이고, 반대로 여자는 '인간의 암컷+β'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일정한 생식기능에 초점을 맞춘 '암수'의 구분만으로는 인간 '남녀' 사이의 구별을 다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α'와 'β'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게 정확하게 무엇이든 간에 그 'α'와 'β'야말로 인간 남녀 사이의 경계르 가르는 기준이며, 그 경계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기보다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219


남성성이든 여성성이든 우리가 성에 부여한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역할과 특성들은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특정한 목적과 사회경제적 지배구조에 따라 사회 속에서 만들어지며 역사적으로도 끊임없이 변천한다.  226


수많은 사회적 학습과 시험을 거쳐.. 우리가 수용해온 '바람직하고 정상적인' 남성성 또는 여성성의 틀은 사실 사회적 필요에 의해서 주조되고 고안된 것이다.  227


남녀평등을 위한 수많은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고 성 차별이 하나의 사회적 죄악으로서 단죄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삶의 미시적인 영역을 세밀히 들여다보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지도 모른다. 우리들 또한 갓난 아이가 사내아이면 파란색 이불을 덮어주고 여자아이면 분홍색 옷을 입혀주며, 사내아이에게는 장난감 자동차와 총을 사주고 여자아이에게는 인형을 선물하는 게 보통이니까 말이다.  228


잘못된 통념과 왜곡된 교육 때문에 여성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의 일부분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여성들의 성기를 처음으로 제대로 보고 만지는 사람이 당사자가 아니라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남성인 경우가 많다는 현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99%의 남성은 자위를 하고 1%의 남성은 거짓말을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듯이 거의 대부분의 남성이 자위를 경험하는 반면, 자위를 해본 여성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게다가 남성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자위 경험을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개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을 그런 사실을 쉽게 발설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단지 남녀의 신체구조상의 차이 때문에 생겨난 결과는 아니다. 이쯤에서 단지 남녀의 신체구조상의 차이 때문에 생겨난 결과는 아니다. 이쯤에서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자위를 옹호하고 심지어 권장하기까지 하는 이유를 한번 생각해보자. 그들의 진정한 목표는 단순한 '성의 해방', '쾌락의 해방'에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오도된 인식과 억압된 실천을 넘어서서 자시늬 신체에 대한 자율적 통제권을 되찾는 것, 자신의 서오가 욕망과 쾌락에 대한 긍정적이고 주체적인 시각을 되찾는 것, 그것이 없이는 남성과 대등한 인격체로서의 여성 해방은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

이른바 '정상인'으로서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으며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모두 다 죽는 날까지 매일 매 순간 자신이 남자 또는 여자임을 의식하면서 거기에 맞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느껴야만 한다.  229-230


남자라고 인정받기 위해서, 사회 속에서 남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아니요, 나는 여짜 계집애'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데 왜 우리는 '진짜 사나이'라는 말에 그토록 열광하는 걸까? .. 왜 우리는 거기다 굳이 '진짜'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걸까? 생각해보라! "이거 진짜 루이뷔통 가방입니다"라는 말은 전혀 어색하지 않지만, "이거 진짜 개미입니다"는 이상하지 않은가? 진짜를 강조한다는 건 그 반대편에 가짜도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고, 그 진짜와 가짜 사이를 가로지르는 경계선들은 자연적이지 않고 인위적임을 함축하는 것이다.  233-234


남자든 여자든 개인에 따라 다양한 기질과 성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왜 남자는 반드시 이러해야 하고 여자는 저러해야 한다는 틀을 고수하려고 그토록 애쓰는 걸까? 

그동안 별생각 없이 당연하게 여겨왔던 성 역할의 틀에 대해서 비판적 고찰을 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성 정체성의 탐구가 그러한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작동시키는 사회구조와 권력에 대한 탐구이며,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왜 어떤 시대에는, 또 어떤 곳에서는 이러저러한 행동이나 특성들이 남자다운 것으로 여겨지고, 또 다른 시대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특수한 방식으로 규정된 성 저체성들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그 뒤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권력이 숨어 있는가? 성 정체성을 '고정된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양분된 틀 속에 가둬두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이런 물음들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성 정체성의 숨겨진 의미가 무엇인지 비판적으로 숙고하도록 만들어줄 것이며,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234-235


남자와 여자는 다르며, 우리는 누구나 그 차이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현상적 차이가 곧 영원불변한 본질적 차이라고 단정해버리는 태도이다.  236


동성애는 있어도 그 반대개념으로서의 이성애는 없다. 있다면 그냥 '정상적인 사람들의 사랑'이 있을 뿐! 대부분의 이성애자들은 자신들을 이성애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인간'이라고만 생각한다. 뒤집어 말해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동성애가 이성애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거울이라는 사실조차 부정하고 있다.  246


각자의 구체적인 실천적 노력이 없는 한, 번듯하고 빛나는 논리만으로 쌓아올린 이론의 탑은 현실 앞에서 사상누각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론이 무용한 것은 아니다. 기존의 틀을 깨고 바꾸는 힘은 비판적 사고에서 시작하며, 철학의 역할 또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259


속마음이야 어떠하든, 또 개인적 경험이야 어떠하든 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공식적인 담론은 이렇다.

"성욕이나 성행위는 사랑에 기반을 둬야만 하며 - 그렇지 않으면 부도덕하거나 나쁜 게 된다 - 사랑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265


몸에 대한 관점은 크게 자연주의(naturalism)와 사회구성주의(social sonstructionism)로 나눠서 생각해볼 수 있는데, 우선 자연주의는 주로 생물학과 진화론의 영향 아래서 발전해왔으며, 18세기 이후 서구의 근대 부르주아사회를 대표하는 이론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관점은 기본적으로 몸이 자아와 사회를 구성하는 물질적 토대라고 본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지만, 인체의 능력과 한계까 개인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삶의 양식을 특징짓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관계까지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생물학적 결정론에 치우쳐 있다. 또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경제적 불평등 또한 생물학적인 몸에 의해 결정되거나 최소한 몸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자연주의적 관점은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자들, 경제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극우파,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크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반면 사회구성주의의 관점은 몸을 순전히 생물학적 현상으로서만 분석할 수 있다고 보지 않고, 몸에 부여되는 구체적인 특성과 의미, 상이한 집단들의 몸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 등이 모두 다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관점은 그동안 첨예한 대립을 보여왔고, 둘 모두 일정한 과학적 근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줄 수는 없다.  270-271


몸이 중요해지면 질수록, 또 몸이 인간 존재의 근원적 조건이 되면 될수록, 몸이 지니고 있는 성적 의미의 의의도 그만큼 커지게 된다. 

'몸의 혁명'이 반드시 성적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몸에 대한 생각과 태도의 변화는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성에 대한 생각과 태도의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74


우리는 무엇이 섹시하고 에로틱한가, 또는 조금 속된 표현으로 무엇이 야한가라는 물음에 별 고민 없이 대답하곤 한다. 벌거벗은 육체, 노출된 성기, 정사 장면, 한마디로 음란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미지들, 뭐 이런 것들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많은 사람들을 성적으로 자극하고 흥분시키기 때문에 분명 에로틱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들은 성적 자극을 느끼지 않으며, 또 동일한 사람이라도 경우에 따라서 자극을 받기도 하고 안 받기도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

정답은 육체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육체를 바라보는, 그리고 평가하는 우리 자신의 시선에 있다.  276


몸과 마음의 전통적 이분법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을 정당하게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큰 장애가 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육체를 기반으로 하는 성을 올바르게 성찰하는 데에도 악영향을 미쳐왔다. 우리는 육체 없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한, 육체 없는 성도 육체 없는 사랑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생물학/생리학의 한계에 갇힌 좁은 의미의 육체가 아니라, 사회적 만남을 통해서 다양한 의미를 구성해내는 육체, 그러한 만남을 통해서 친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내는 사회문화적 의미의 육체를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육체를 통해서만 고결하고 기품 잇는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들도 현실적 의의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체와 육체의 욕망을 추잡하고 음탕하며 동물적인 본느에 의해 지배되는 어떤 것, 따라서 통제하고 억압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만 보는 한, 인간의 성에 대한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성찰 또한 요원하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83


어떤 것이 사랑이고 어떤 것은 아닌지 구별할 수 있을까?   

첫째, 15세의 여중생이 이웃집에 사는 20대 초반의 대학생 오빠를 짝사랑한다고 가정하자. 그 오빠는 소녀의 존재조차 잘 모르지만, 소녀는 먼발치에서 그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오빠 생각에 밤잠을 설칠 정도이다. 둘째, 바람난 유부녀가 연하의 건달에게 반한다. 두 사람은 육체적으로도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럴수록 그녀는 남편에게서는 얻지 못했던 관능적 충족을 느끼면서 더욱더 상대ㅔ게 빠져든다. 셋째, 20대의 대학생 남녀가 서로 사귄다. 주위에서도 모두들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하고, 결혼을 약속한 두 사람은 평범하지만 행복한 연애를 하고 있다. 넷째, 결혼해서 20년쯤 된 부부가 있다. 솔직히 두 사람 사이에는 예전과 같은 열정이 없으며, 상대에 대한 성적 관심이나 욕망은 거의 사라졌고 성 관계도 거의 하지 않지만 그래도 친밀한 가족으로서 서로를 아끼고 필요로 한ㄷ. 다섯째,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40대의 이혼남과 남몰래 만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무척 사랑하지만,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서 자신들의 관계를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

위에 든 예 중에서 사랑인 것은, 또 사랑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것이 사랑이라면, 또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

자신으 어떤 이유를 내세워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의 경계를 나누었는가? 자신이 내세웠던 이유들을 잘 살펴본다면, 아마도 자신은 사랑에 대해 평소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다시 말해 자신이 무의식중에 믿고 받아들여왔던 사랑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드러날 것이다.  290-291


내가 진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랑을 정의하는 게, 그리고 그 정의를 실제 사례에 적용하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292



'좋은 사랑/나쁜 사랑'에 대한 가치판단은 분명 필요하고 '더 좋은 사랑'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사랑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불완전하고 부도덕한 것들까지 포함하는 현실 속의 수많은 사랑들을 잇는 그대로 고찰해야 하지 않을까?  292



우리는 평범하지만 심오한 진리에 마주치게 된다. 그건 바로 단 하나의 사랑, 즉 영어로 표현하자면 'The Love;가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종류의 사랑들, 즉 'many kinds of love'가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랑에 대해 "그건 사랑이 아니야"라든지 "그 사람은 날 진짜 사랑한 게 아니었어"라고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그건 내가 원하던 사랑 방식이 아니었어" 라든가 "그때 우리의 사랑에는 이런 점들이 부족했어"라고 반성하는 게 훨씬 더 유익하고 객관적인 판단이 아닐까? 우리는 좋은 사랑과 나쁜 사랑, 자신에게 맞는 사랑과 맞지 않는 사랑을 구별할 수도 있고, 또 실생활에서는 그런 구별이 꼭 필요하기도 하겠지만, 몇 가지 기준만으로 모든 사랑을 다 설명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져서는 안 된다.  299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사랑의 유형, 또 반대로 자신이 원하는 사랑의 유형을 파악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을 위해 매우 중요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사랑 스타일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하기도 할 것이다.  302


사랑의 개념이나 유형에 대한 이론적 분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현실속의 사랑이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조건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끝없이 변해왔다는 사실이다.  302-303


"진리는 중간이 아니라 극단 속에 있는"(<풍속의 역사> 제1권 1988 10쪽. 전체 문장은 "진리는 중간이 아니라 극단 속에 있다. 사물이나 인간은 극단으로까지 과장됨으로써 클로즈업된다. 그러므로 과장이란 그 과장된 것이 좋은 면이든 나쁜 면이든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며, 각 시대의 기록인 경우 문제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요소다.")지도 모른다. 일상생활에서야 대개 극단을 피하고 중용을 취하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어떤 문제의 논리적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때때로 극단까지 밀고 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모든 것이 두루뭉술해져서, 상식적으로야 수긍할 수 있는 답이 나올지 몰라도 날카로운 논증이나 심오한 통찰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312


프로이트는 성욕의 메커니즘에 대해서도 좀 더 상세한 분석을 시도하는데,..

그에 따르면 쾌락의 목적과 생식의 목적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며, 따라서 '성적인 것'과 '생식적인 것'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성적 쾌감은 신체의 어떤 부분에서도, 즉 생식기가 아닌 곳에서도 느낄 수 있으며, 인간의 성욕에는 성기를 사용한 행위와 무관한 충동들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입으로 빨거나 손으로 더듬는 등의 애무행위도 성욕을 구성하는 정상적인 본능이라는 것이다.  319


우리는 성을 언제나 생식과 연결시키는 생물학주의의 고정관념 때문에, 생식능력과 무관한 성욕을 은연중에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 문제는 어디까지나 왕성한 생식능력을 갖춘 젊은이들의 문제이며, 어린아이나 노인들의 성욕, 신체적인 장애인들의 성욕, 그리고 동성애자들의 성욕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망측한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육체적인 노화가 성에 대한 욕망까지 자동으로 제거해주는 것은 아니다....

성이 모든 인간 존재의 보편적 근거이자 욕망과 행복이 기반이기도 하다면, 소외된 노인들의 성을 언제까지나 외면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권과 복지의 사각지대를 또 하나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321


"억압된 욕망과 충동이 무의식의 근원이라면 억압은 도대체 왜 일어나는가?" 

자아는 자신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욕망, 충동)들을 의식으로부터 몰아내 무의식의 세계에 가둠으로써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하려고 하는데, 바로 여기서 억압이 발생한다. 따라서 억압이란 결국 자아가 성숙해지기 위해 갖가지 장애로부터 자신을 총체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방어하는 하나의 메커니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326


인간 욕망의 특성은 늘 완벽하게 충족될 수 없고, 끊임없이 변형된다는 데 있다.  349

 

아동심리학자들이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고 한다. 넓은 운동장 한편에 모여 놀고 있는 유아들의 주위에 금을 그어 표시한 뒤, "이 금 안에서만 놀고, 금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지시를 했다는 것이다. 학자들이 숨어서 지켜보니까, 몇몇 아이들이 금 주위에서 두려운 듯 눈치를 살피다가 살ㅉ가 한 발을 금 밖으로 내딛어보더란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씩 그애들을 따라 금을 넘어가게 되고, 시간이 지나자 더 멀리 밖르오 나가는 아이들도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뒤에 학자들이 되돌아와 금을 지워버리고 나서 "이제 아무 데서나 맘대로 놀아도 좋다"고 하자, 아이들은 다시 원래 놀던 운동장 한편 구석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들로 하여금 조심조심 금 밖을 넘보게 만든 욕망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 그런 욕망의 불을 지펴놓은 것일까? 운동장은 원래 유아들이 전체를 다 쓰기에는 너무 넓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한쪽 구석에서 노는 걸로도 충분했다. 쉽게 말해 객관적으로만 보면 아이들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운동장 한가운데로 나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비밀은 바로 금에 있는 게 아닐까? 움직임을 제한하는 금이 그어지는 순간, 거꾸로 그 제한을 깨뜨리려는 욕망이 생긴 게 아닐까? 

우리는 흔히 금기가 욕망을 제한하고 억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욕망이 원래 있고, 그 욕망이 너무 크거나 지나쳐서 문제가 될 때, 그것을 통제하는 금기가 생겨난다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지만 할까?   350-351


프랑스의 현대사상가 조르주 바타유는 <에로티즘>에서 .. 인간 성욕의 본질은 고립된 개인들이 합리적 일상의 세계를 벗어나 어떤 신비스러운 체험을 통해 존재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얻으려는 데 있다. 그는 규율(=금기)이야말로 동물과 인간을 구별해주는 문명의 상징이며 폭력과 무질서에 반대하는 이성의 산물이지만, 거꾸로 이 규율을 의식하면서도 의도적으로 깨뜨리는 폭력만이 가장 높고 강렬한 욕망을 충족시켜준다고 주장한다. 생식이란 본래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고 낡은 세대가 죽음으로써 개체성이 부정되고 연속이 실현되는 과정인데, 이런 점에서 생식과 연결된 성은 늘 규율 위반, 폭력, 죽음, 전쟁(살해), 광란의 축제, 주연(酒宴 술주 잔치연), 희생물을 바치는 종교적 의식 등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이 인간에게 공포와 경배의 대상이듯이 성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숭배와 공포, 신성함과 폭력, 욕망과 금기의 이 같은 모순적 결합은 아마도 월경, 처녀막의 파열(출혈), 출산 등과 관련된 피와 고통의 이미지, '작은 죽음'(프랑스어로 오르가슴을 '작은 죽음'이라고 부른다)이라고 불릴 만큼 합리적 일상과는 철저히 단절되는 느낌을 주는 절정의 쾌락(=오르가슴)의 이미지, 성기와 성행위에 대한 혐오감(성기는 배설기관이기도 하며 성행위 그 자체는 아주 동물적이다) 등이 복합적으로 뒤섞임으로써 생겨났을 것이다. 아무튼 바타유에 따르면 노동(=규율), 자의식(=전체로부터 분리된 개체), 수치심(=성과 관련된 자의식),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은 모두 인간만이 갖는 특성이며 사실상 같은 계기의 다른 측면들인데,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바로 그 경계선에 이런 계기가 놓여 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스스로 이 계기를 부정함으로써 더 높은 도약을 꾀하며, 이것이 바로 '에로티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354-355


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상식적 시각은 자연주의적이고 본질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관점에 매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자연주의가 뭔가? 성은 자연적인 것, 본능적인 것, 생리적인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또 본질주의 역시 성에 '고정된 불변의 본질'이 미리 주어져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럼 환원주의는 뭘까? 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어떤 '기본 요소'로 환원하여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을 말한다. 그리고 그 '기본 요소'란 결국 생물학적/생리(학)적인 메커니즘, 그러니까 생식을 위한 메커니즘을 가리킬 것이다. 이처럼 단순하게 도식화되어 있는 성 관념이 우리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한, 어떤 이론이나 과학적 발견으로도 우리의 성 의식을 업그레이드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의 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니, 진지한 성찰의 대상으로 삼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이러한 자연주의적, 본질주의적, 환원주의적 접근에서 비롯된 고정관념의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럼 우리는 왜 그토록 성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일까?..

성은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하고 중요한 문제이기에 오히려 한 발 물러서서 비판적으로 성찰하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  359-360


서구에서 '섹스'라는 말이 16세기에 처음 사용되었을 때는 단지 남녀의 성별 구분을 뜻했지만, 19세기 초부터 일련의 의미변화를 겪고 난 뒤 이 단어가 마침내 '양성 사이의 육체적 성 관계'를 뜻하게 되었다는 데에서 출발하는 게 좋겠다. 이러한 어의변화 속에는 우선 양성, 즉 남녀의 명백한 구분, 심지어 대립과 적대가 전제되어 있는데, 사실 이것이 자연주의적 오류의 첫 번째 내용이다.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일 뿐이며 그 구분은 자연에 의해 정해진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한 사회적, 문화적으로 구성되는 성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다음으로 '성'이란 저항할 수 없는 본능적, 파괴적 힘이며, 특히 남성의 성기 속에서 꿈틀거리는 '생물학적 명령'이라는 가정이 있다. 현대의 성 이론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킨 프로이트마저 이런 가정을 받아들일 정도였으니, 그 위력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아무튼 우리 사회의 수많은 남성들, 아니, 심지어 여성들까지도 이런 생각에 동조하고 있으며, 그래서 예컨대 "남자는 다 늑대다"라는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남자는 늑대"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애먼 늑대들, 인간의 핍박으로 지구상에서 멸종해가는 가여운 늑대들에 대한 부당한 비난일 뿐만 아니라, 남성 전체에 대한 모욕인 동시에 거꾸로 일부 남성들에게는 면죄부를 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늑대들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끝으로 자연주의적 관점은 '피라미드처럼 위계서열을 가진 성 모델'을 만들어내며, 그 속에서 '남성이 주도하는 이성애적 삽입성교'라는 이상적 성 모델로부터 속된 말로 여러 가지 '변태'에 이르기까지 그 가치와 정당성에 따라 수직적인 성의 위계질서가 등장한다. 그리고 기존의 성과학 이론들이 많건 적건 이러한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음은 앞에서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아무튼 이러한 자연주의적 오류를 통해서, 또 그것에 의해 만들어진 위계질서를 통해서 '자연적 성'이라는 허구의 실체가 마치 하나의 객관적 대상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질서가 다 그렇듯이, 이 위계질서를 유지하고 정다화하려는 지배 권력의 개입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이는 물리적인 힘으로서 직접 작동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의식과 실천을 남몰래 조종하고 통제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이 용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지만, 가장 폭넓게 본다면 "무의식중에 형성되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적 의식"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361-362


현대에 들어와서는 성에 대한 자연주의적, 본질주의적 관점 대신에 '성정치(학)(sexual politics)'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된다. ..

쉽게 얘기해서 성을 정치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며, 이 용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정치'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부터 고칠 필요가 있다.  365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잘 보여주듯이, 잘못된 정치는 때때로 평범한 개인들의 삶을 파멸시킬 수도 있고 어찌 보면 우리 일상의 모든 행복이 정치에 의해서 좌우될 수도 있는데, 우리가 정치를 향해 더럽다고 침 뱉고 돌아서면 그걸로 끝인가? 물론 정치의 문제는 현실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정치란 소수 권력자들과 관계된 일'이라는 일상적 인식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를 뜻하는 영어의 'politics' 라는 말은 본래 그리스어의 'politikos'에서 온 말이고, 이 말은 다시 도시국가나 공동체를 뜻하는 '폴리스(polis)'의 형용사형이다. 아마 독자 여러분도 학창 시절 세계사 시간에 배웠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스파르타 같은 도시국가를 폴리스라고 불렀다는 것을! 다시 말해 '정치' 또는 '정치적'이라는 말은 본래 '국가, 공동체, 사회'와 연관되는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규정했을 때에도 그 의미는 "인간의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동물"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말한 것이지, 인간은 본래 "권력 다툼을 좋아하고 음모나 술수를 부리며 남을 지배하는 것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은 절대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어떤 인간도 정치와 무관할 수 없으며, 정치적인 것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이해관계에 따라 집단을 이루어 복잡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는 늘 타인에 대한 지배와 힘의 행사, 즉 권력의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은 직접적인 물리력을 통해서 관철되기도 하지마ㄴ, 대개는 제도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즉 일정한 정당성을 확보하고 사람들의 의식을 남몰래 지배함으로써 실현된다.  367-368


지배와 이데올로기에 의한 '성의 사회적 구성'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알기 위해 여러 가지 요소들을 면밀하게 살펴봐야 하는데, 대체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영역이 고려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친족 및 가족제도다. 이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성의 가장 '자연적인 축'으로서 강조되어 왔다. 예컨대 친족 내의 '근친상간 금지'는 보편적 법칙으로 간주되어왔으며, 자연 상태에서 사회(=문화)로 이행하는 징표로 인정되어왔다. 그러나 '근친상간 금지'가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는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전혀 다르다. 또 '혈연관계'라는 것도 문화라는 틀을 통해 재해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친족이라는 개념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기보다는 경제적 요인과 사회적, 문화적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

친족 및 가족제도는 경제적 요인, 가족법, 결혼 및 이혼에 대한 규제, 사회복지와 조세정책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국가 개입에 의해 부단히 재구성되며, 이것들 모두가 성에 대한 인식과 실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개인들은 가족 안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최초로 이해하게 되며, 또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가족이야말로 성장 과정에서 우리의 성적 욕망이 최초로 조직되는 영역이기도 하므로, 친족 및 가족제도는 성의 사회적 구성에서 매우 중요한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조직들이다. 경제적 변화와 새로운 계급구조의 출현 또한 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서구에서 근대 부르주아사회가 형성된 후 새로운 연애형태와 가족형태, 성도덕 등이 등장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 산업혁명 후 사생아의 출산이 크게 늘어 났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여성이 공장에 취업함으로써 산아제한이 보편화되었으며, 1950~60년대 이후에는 기혼여성의 취업이 늘어나는 등 시대에 따라 수많은 경제적, 사회적 변화들이 일어났는데, 이 또한 사람들의 성 관념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 역시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적 토대가 성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기본적 전제와 한계만을 제공한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물학적/생리(학)적 결정론 못지 않게 위험한 경제 결정론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사회적 규제들이 있다. 사회나 문화에 따라 성생활에 대한 구체적 규제는 실제로 아주 다양한데, 그 자체가 상당한 자율성을 갖는다. 예컨대 종교, 국가의 역할, 결혼 유형을 결정하는 도덕적 규준, 이혼율과 성적 일탈의 범위등이 성에 대한 규제에 영향을 미친다. 종교적인 이유로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과 규제가 심한 이슬람권 국가에서의 성과 이혼이 매우 자유롭고 이혼율 또한 높은 서구 사회에서의 성이 같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서구 사회를 기준으로 볼 때 근대 이후의 특징적인 현상은 성에 대한 규제가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규제로부터 점차 의학, 교육, 심리학, 사회사업 및 복지 등에 의한 세속적 규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근대 이전까지는 자위를 금지하고 죄악시하는 이유가 <구약성서>에 있었지만, 19세기가 되자 의사들이 앞장서서 "자위는 건강에 해로우며 청소년들의 성장 발달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자위를 금지시킨다. 그러나 20세기가 되면 다시 건강을 들먹이는 의학적 담론이 사라지고, 그 대신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자위에 몰두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식의 새로운 이유가 제시된다. 결국 자위를 금지하고 성을 통제하려는 권력의 의지에는 변함이 없지만, 시대 변화와 과학적 지식의 발전에 따라 담론의 형식만이 바뀌었던 셈이다. 사실 사회적 규제는 일률적으로 관철되지 않는다. 예컨대 음란물에 관한 규제는 거꾸로 음란물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며, 동성애에 대한 규제는 동성애자들의 단결을 촉진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형식적 방법이 아닌 비공식적인 규제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다. ..

넷째로는 직접적인 정치적, 법적 규제들도 중요하다. 비공시적이고 관습적이던 갖가지 사회적 규제들도 특정 시기의 정치적 세력관계에 의해 정치적 의미가 강화될 때는 법률적 규제에 관한 논쟁을 낳는다. 예컨대 낙태나 동성동본 결혼, 간통죄 폐지 등을 둘러싼 논란은 단순히 성 문제에 대한 논란으로 그치는 게 아니고, 언제나 진보와 보수가 대립하는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된다. 또 서구에서 1980년대 이후 신보수주의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페미니즘이나 반(反 되돌릴반)인종주의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반격이 활발해지는 것을 보면, 성을 둘러싼 정치적 투쟁의 가능성을 잘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이 성 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태도를 취하기 어려운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

마지막으로 지적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실천이다. 사실 지배와 통제가 있는 곳에는 늘 저항도 있게 마련이므로 기존의 성 관념에 맞서는 저항문화와 저항이데올로기 또한 성의 사회적 구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려사항인 것이다. 그동안 저항문화나 저항이데올로기는 대개 공식적인 역사서술에서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여성들은 오랫동안 낙태의 권리를 위해 투쟁해왔고 동성애자들 또한 자신들의 사랑을 정당하게 인정받기 위해서 싸워왔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이러한 저항운동을 극적으로 표면화시킨 대표주자가 현대의 페미니즘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사실 노인이나 청소년, 소수민족, 유색인종 등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은 언제든 성 정치에서도 억압되고 배제되는 타자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실천적 운동 또한 앞으로의 성 관념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369-373


굳이 어려운 역사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성생활의 유형은 계급에 따라 아주 상이하다. 예컨대 킨제이의 조사에 따르면 남자들의 성 행동은 계급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또 우리나라의 몇몇 조사에서도 소득 수준이 높고 학력이 높은 계층일수록 좀 더 대담하고 자유분방한 성적 쾌락을 추구하며 성행위 방식도 더 다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현실을 고려해볼 때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성욕이나 성 행동이 계급이나 권력과 얽혀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도 결코 우연이나 허구가 아니다. 성을 노골적으로 묘사해서 유명해진 로렌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도 상류계급의 여성이 비천한 하층 계급의 남성과 욕정을 불태우는 내용 때문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던가.

계급과 더불어 남녀의 성별 또한 오랫동안 지배와 이데올로기의 원천이었다. 굳이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남녀관계는 기본적으로 권력관계였으며, 성 차별이 많이 사라진 오늘날에도 그러하다. 남성지배 사회에서 여성의 성 정체성은 남성 권력의 산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의 성은 남성의 시각과 틀에 의해 좌우되어 왔고,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난 여성의 성에 대해서는 남성 권력의 폭력이 정당화되어왔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와 그릇은 밖으로 내돌리면 깨진다", "여자는 사흘만 패지 않으면 여우가 된다"라든가 "북어와 여자는 두들길수록 맛이 좋아진다" 등등!  375


성과 관련하여 우리가 놓치기 쉬운 또 하나의 전선은 나이에 따라 형성된다. ..

일상의 성 관념 속에 파고들어 중대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차별 중에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나이 차별(ageism)이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ageism'이라는 용어를 처음 들어볼 것이다. 그건 그만큼 우리 사회가 이러한 차별에 둔감하다는 뜻이리라. ..

우리가 차별을 차별로 의식하지 못한다는 건 차별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차별이 보편화, 일상화되어 있음을 가리킬 뿐이다. ..

내가 지금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일상의 나이 차별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서오가 관련된 나이 차별은 일상의 나이 차별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

젊을수록 더 많은 권력을 갖게 되며, 따라서 젊은이들은 성에 관한 한 당연히 더 많은 특권을 누려야 하고, 그러한 세태에 눈살을 찌푸리며 뒤에서 투덜댈지언정 나이든 기성세대 또한 그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지는 못한다. 아니, 도전하기는 커녕 어떻게 해서든 젊은이들 틈에 끼여 그 권력의 혜택을 조금이라도 나눠가지려고 발버등을 치기도 한다. ..

법으로 정해졌든 사회통념으로 정해졌든 간에 일정한 나이에 도달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성 정치의 전선에서 철저하게 배제되는 또 다른 타자일 뿐이다. ..

우리는 이런 식의 나이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근대의 성 담론은 결국 아동 학대의 사회, 노인 유기의 사회로서의 자본주의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근대 이후 아동기, 사춘기 등등의 발견을 통해 나이별로 위계서열화된 성의 질서는 이제 급기야 결혼적령기, 가임기, 갱년기, 폐경기 등등의 사회학적, 생리학적 용어들을 통해 더욱 세분화되었으며, 인간의 생애 전체와 성생활 자체가 바로 이러한 분할 선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376-378


마지막으로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하지만 인종 또한 중요한 전선이다.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성 모델은 "백인=문명인/유색인=야만인"이라는 도식에 기초해 있다. 유색인종(=비유럽인들)은 아직 덜 진화된 인간들로 그만큼 자연에 가깝고, 따라서 그들의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성은 더 위험하고 파괴적이라는 것이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논리였다.  378


한국에서 일하는 수많은 제3세계 빈국 출신의 노동자들이 엄청난 차별과 박해를 받고 있는데도, 정작 우리 사회의 주류 언론은 무슨 사건 하나만 터지면 그들을 잠재적으로 위험한 성폭력 범죄자들로 매도하지 않는가? 이처럼 유색인종의 외국인이라면 질색을 하는 한국의 젊은 여성들도 백인남성들에게는 영어로 말 한마디 붙여보려고 온갖 아양을 다 떨며, 또 그걸 잘 알고 악용하는 일부 건달 같은 백인남성들은 "한국이야말로 백인남자를 위한 성의 천국"이라고 떠벌인다 하지 않는가?  379-380


사실 성정치는 근대 세계가 안고 있는 사회적 적대와 모순의 그물망 전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을 하나의 단일한 실체로 보려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늘 상기해야 한다. 성의 사회적 구성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이며, 우리는 지금도 계속 상연되고 있는 무대의 배우이자 관객이며 주체이자 대상인 것이다.  381




에필로그


일상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건 결국 공염불 아니면 기껏해야 지적 유희로 끝날 것.

어찌 보면 실천을 통해서 뒷받침되지 않는 한, 이 책의 내용을 진실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성에 관해서 어떤 것을 용인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의 생각(또는 태도)은 대체로 그것에 대한 자신의 실천적 경험 여부와 비례한다."  387


실천을 많이 해야 하는 셈이다.

물론 실천이 중요하다고 해서 돈키호테 식으로 일단 뭐든지 저질러놓고 나중에 생각해도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성을 둘러싼 새로운 실천에 시동을 걸려면, 먼저 새로운 '성 담론'이라는 연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선인식->후실천'이라는 기계적 도식이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삶의 모든 과정이 그렇듯이 여기서도 진정한 변화는 '인식과 실천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실현되기 때문이다.  388-389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이라고 해서 다 자기 생각이 아니며,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해서 다 자기 말이 아니라는 것을! 대지를 적시는 빗방울처럼 어느샌가 내 의식 속으로 스며들어와 나를 지배하게 된 수많은 관념과 이데올로기들은 마치 복화술사가 인형을 이용해 자기 목소리를 전달하듯이 나의 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주체성과 나의 생각과 나의 말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

진정한 주체성은 비판적 성찰을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것은 소크라테스 이래로 철학의 상식이다. 개개인 모두가 어떻게든 남들과 다르게 튀어보려고 앴는 현실, 하지만 개성 있는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에는 목을 매면서도 개성의 바탕이 되어야 할 진정한 주체성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오늘날의 현실은 역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슬픈 회화가 아닐까?

이처럼 기존의 성 담론들이 우리 자신의 혼과 정성이 담긴 창작품이 아니라 사회가 우리 머릿속에 심어놓은 칩이라고 해도, 어쨌든 개인의 성적 실천은 그 담론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391-392


우리는 기존의 성 윤리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재고해봐야 한다. 철학자들의 이상에 따르자면 본래 윤리라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함을 향해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일 뿐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 속에서 윤리는 반드시 그런 긍정적 기능만을 해온 것은 아니다. 윤리는 때때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면서 기존의 지배질서만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393



기존 성 문화의 문제점부터 짚어봐야 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현재 우리 사회의 성 문화에서 가장 큰 문제는 첫째로, 관능성 즉 단순한 감각적 쾌락과 넓은 의미의 섹슈얼리티를 혼동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라는 점 아닐까? 남녀관계에 대해 미국 학자들은 이른바 "find(상대를 찾고), feel(상대와 정서적 교감을 나누고), fuck(상대와 섹스하고) & forget(상대와 헤어진다)"이라는 도식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쉽게 말해 여기서 'feel'이 생략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둘째로, 성을 남성 중심적, 이성애 중심적, 성기 중심적, 성교 중심적으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섹스란 남자가 자신의 성기를 여성 성기 안에 삽입하여 사정에 이르는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인 셈이다. 이런 시각은 예컨대 성폭행을 다룰 때에도 나타나며, 또 포르노에서는 한층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강간사건의 경우 현행 형법은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질 속에 들어갔느냐 들어가지 않았느냐를 기준으로 범죄 여부를 가리기 때문이다. 또 포르노의 경우는 어떤가? 여성을 위한 포르노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이론적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포르노는 남성의 시각에서 남성의 관행적인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래서 포르노에서는 대개 남성의 행위와 욕망과 시선이 성 전체를 지배하는 힘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컨대 대부분의 포르노에서는 카메라의 시선이 철저하게 여배우에게 맞춰져 있어서 여배우의 얼굴, 몸, 성기는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만, 상대인 남성의 모습은 발기된 성기를 제외하면 그다지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또 포르노의 끝부분에서는 남성이 여성의 몸(안이든 밖이든) 또는 얼굴이나 입 안에 사정함으로써 성행위가 종료되었음을 보여주는데, 이 또한 '남성의 사정=만족=섹스의 목표 달성'이라는 도식을 시각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포르노의 내용은 대개 남성의 발기로 시작하여 성기의 삽입과 더불어 이어지는 끝없는 동작에서 남성의 질외 사정으로 끝이 난다. 남성이 쾌감에 도달하면 성행위는 종료된다. 여성의 오르가슴은 가장되고 은폐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여성의 쾌락을 무시하는 것이며, 남성의 관점에서 재현된 성행위 과정일 뿐이다.'(이나영 <포르노, 섹슈얼리티, 그리고 페미니즘> 1999 148쪽)  ...

셋째로, 우리 사회에서는 앞서 말한 성의 다양한 기능들을 대개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을 생식수단으로만 보거나 단순한 관능적 쾌락의 수단으로만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남성의 경우에는 관능적 쾌락으로서의 성이 당연한 것이지만, 아직도 여성이 적극적으로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갖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여성의 성이나 소수자들의 성에 대한 무지가 널리 퍼져 있으며, 이것은 두 번째로 지적한 남성 중심적, 이성애 중심적, 성교 중심적 성의 이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 예로 여성이 성적 쾌감을 느끼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신체기관은 음핵인데도 불구하고, "섹스란 성기의 삽입"이라는 고정관념에 매달리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여성의 질을 음핵보다 더 중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또 동성애자라면 무조건 항문성교를 할 것이라는 편견도 '섹스=삽입'이라는 도식에 매달리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398-401


성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 즉 성을 '신비하고 성스러운 것'과 '더럽고 범죄적인 것'으로 나누는 사고방식을 극복해야 한다. 

둘째로, 모든 윤리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상대적임을 인정해야 하며, 성을 윤리적 차원에서만 보는 편헙한 시각도 지양해야 한다. 셋째로, 어떤 행위를 판단할 때 그 행위의 관습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 법적 측면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구체적인 규범의 목록들은 개인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인간 해방을 지향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위와 같은 변화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베리오티는 성도덕을 반드시 피해야 할 오류들로서 환원주의의 오류, 추상의 오류, 초역사주의의 오류, 고립주의의 오류, 경직성의 오류 등을 거론하고 있다.)  405


어른들이여! 당신의 첫 섹스는 어땠나? 그렇게 심사숙고하고, 그렇게 또렷또렷 맨 정신에, 그렇게 이성적으로, 그렇게 자율적 판단과 엄밀한 계산에 따라서 이루어졌나? 그렇게 도덕적으로도 완벽했고, 마른 대낮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하루 온종일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올 만큼 당당하고 깨끗했나? 그게 아니라면 제발 철딱서니 없는 어린것들이 뭘 알아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비난부터 하지는 마라. 나이가 스물이 됐든 스물다섯이 됐든 실제로 첫 섹스를 하기 전까지는 그 민망한 문제에 관한한 우리 모두 철딱서니 없고 경험도 없는 무지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실제 경험이 없는데 나이만 먹으면 저절로 섹스에 관해 철이 드나? 아마 사람 보는 눈이나 계산하는 능력은 좀 나아질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 괜히 나이 가지고 폼 잡을 필요는 없다. 오케이?

그럼 다시 물어보자.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합의하에 하는 섹스가 범죄인가? 그래서 그 오린 나이에 감히 섹스를 한 발랑 까진 년들은 마치 성범죄자에게 중형을 내리듯이 배움의 터전으로부터도 가차 없이 추방해야만 하는가? 아니, 범죄가 아니라면 섹스는 부도덕한 행위인가? ..

분명히 말하거니와 도덕이라 이름 붙여진 갖가지 사회적 편견과 시대착오적인 관행, 기성세대의 협박 때문에 생겨난 공포 등등을 제거하고 나면, 섹스 그 자체는 범죄도 아니고 부도덕도 아니다.  409-410


지금 우리가 청소년들의 섹스를 금하는 이유는 그야말로 실용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적, 경제적 이유로 인해 사랑해도 함께 살 수 없고 애를 낳아 키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기성세대는 서로 사랑하는 10대 후반의 젊은이들이 자유롭고 섹스하면서 살아갈 수 없도록 제도적,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존재들이기도 하다. 왜 이기적이냐고? 입만 열면 윤리 타령을 늘어놓는 그들은 그 섹스를 맘껏(때로는 과도하게!) 즐기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사실 그들이 섹스를 즐길 수 있는 권리는 그들의 도덕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권력에서 나올 뿐이다.  411


이슬람교에서는 인간의 행위를 크게 다섯 가지 범주로 나눠서 설명한다고 한다.

첫째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즉 절대적 의무다. 예컨대 신자라면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둘째는, 하면 좋지만 안 해도 죄가 되지는 않는 것, 즉 권장사항이지만 의무는 아닌 것들이다. 예컨대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셋째는,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해야 하는 것도 아닌 일들, 다시 말해 의무나 금지와는 무관한 일들이다. 아마 밥 먹고 잠자는 등 우리 일상생활의 대부분의 행위들이 그렇지 않을까? 

넷째는, 안 하는 게 더 좋지만, 한다고 해서 죄가 되지는 않는 것들이다. 예컨대 담배를 푸이는 일 등등.

마지막 다섯째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예컨대 부녀자를 폭행하는 일 등이 이에 속한다.

난 이 구분법이 진정한 의미에서 상당히 '실용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구분법을 빌려다 쓰자면, 몸과 마음이 어느 정도 성숙한 10대 후반 청소년들의 섹스는 "권장할 일은 아니지만, 또는 안 하는 게 더 낫겠지만, 한다고 해서 죄가 되지는 않는 일"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사회적, 경제적 여건들을 고려해볼 때, 현재의 한국 사회는 분명 10대 청소년들에게 자유로운 섹스를 권장할 만한 사회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섹스를 범죄나 부도덕으로 여겨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도 않는다.  412


"성에 대해 좀 더 당당하면서도 동시에 담담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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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상의 구조

'삶'이란 무엇일까?

아까운 시간과 재능을 허비하지 않고 나만의 개성을 한껏 발휘하면서 복잡다단한 이 세상과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충만한 생활을 뜻하는 말이리라.

'삶'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선인들의 지혜에 귀기울이는 한편 그 지혜를 과학이 꾸준히 축적해 온 앎과 접맥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실과 미래의 가능성을 현재의 시점에서 이해하려고 꾸준히 노력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길을 깨달을 수 있다.


개인이 주도적으로 선택하여 현실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운명의 굴레를 박차고 나설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진 이들이다.


삶은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서 경험이다.

경험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시간은 아주 귀중한 자산이다.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경험의 내용이다.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할당하고 투자할 것인가를 지혜롭게 결정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우리가 보낸 하루하루를 모두 더하였을 때 그것이 형체 없는 안개로 사라지느냐 아니면 예술 작품에 버금가는 모습으로 형상화되느냐는 바로 우리가 어떤 일을 선택하고 그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가에 달려 있다.


2. 경험의 내용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는 자기가 하는 일을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경험의 내용과 더 관계가 깊다.


삶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행복감만은 아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가도 삶의 질을 좌우한다.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주는 목표를 개발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정력을 충분히 써먹지 못할 경우, 우리는 좋은 감정의 극히 일부만을 맛보게 된다.


우리는 주어진 과제에 관심을 쏟는 것을 지향점 또는 목표를 설정했다고 표현한다. 목표를 얼마나 끈질기고 일관되게 추구하느냐는 동기 부여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의도, 목표, 동기부여는 심리적 반엔트로피를 조성한다. 정신력을 한곳에 집중시키고 작업의 우선 순위를 조정하면서 의식 안에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내적 동기 부여(이것을 하고 싶다)든 외적 동기 부여(이것을 해야 한다)든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집중을 해야 할 어떤 목표도 갖지 못하고 마지못해 일을 하는 상태보다는 삶의 질을 끌어올려 준다.

우리가 도달하려는 자아의 모습을 결정짓는 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다.

자신의 목표를 다스리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은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첫걸음이다.


최선의 방안은 자기 욕망의 뿌리를 이해하고 그 안에 숨어 있는 편견을 인식하면서, 사회적 ? 물질적 여건을 지나치게 흩뜨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신의 의식에 질서를 가져올 수 있는 목표를 겸허하게 선택하는 것이다. 이보다 덜한 목표를 세우는 것은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며, 이보다 과도한 목표를 세우는 것은 좌절을 자초하는 셈이다.


의식의 내용으로 감정 ? 목표에 버금가게 중요한 것은 사고의 인지적 과정이다.

사고라고 부르는 것은 정신력에 질서가 갖추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정신의 작용을 깊이 있게 파고들려면 집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생각은 논리적 인과 관계에 따라서 가지런히 배열되는 것이 아니라 두서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얽혀 있다.

노력을 한 곳으로 모으지 못하면 사고는 아무런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지리멸렬해진다.


‘몰입’은 삶이 고조되는 순간에 물 흐르듯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느낌을 표현하는 말이다.

명확한 목표가 앞에 있을 때 몰입할 가능성이 높다.

몰입 활동의 또 하나 특징은 되먹임, 곧 피드백의 효과가 빨리 나타난다는 것이다.

몰입은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버겁지도 않은 과제를 극복하는 데 한 사람이 자신의 실력을 온통 쏟아부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몰입은 정신력을 모조리 요구하므로 몰입 상태에 빠진 사람은 완전히 몰두한다.

삶을 훌륭하게 가꾸어주는 것은 행복감이 아니라 깊이 빠져드는 몰입니다. 몰입해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일이 마무리된 일이 마무리된 다음에야 비로소 지난 일을 돌아볼 만한 여유를 가지면서 자신이 한 체험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했는가를 다시 한 번 실감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되돌아보면서 행복을 느낀다.


어떻게 하면 좀더 신바람 나는 몰입의 상태로 넘어갈 수 있을까? 답은 자명하다. 실력 연마에 좀더 힘을 쏟아야 한다.

몰입 경험은 배움으로 이끄는 힘이다. 새로운 수준의 과제와 실력으로 올라가게 만드는 힘이다.


명확한 목표가 주어져 있고, 활동의 효과를 곧바로 확인할 수 있으며, 과제의 난이도와 실력이 알맞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면 사람은 어떤 활동에서도 몰입을 맛보면서 삶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다.


3. 일과 감정

삶의 질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그 일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달려 있다. 사람이 저마다 하는 행동은 경험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정말로 성숙해지려면 대화를 통해 자극을 얻을 수 있는 참신한 사고를 가진 상대를 만나야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긴요한 것은 결국 고독을 견디는 능력, 아니 고독을 즐기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어떤 활동을 하느냐, 누구와 함께 있느냐 못지않게,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도 우리가 갖는 경험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경험의 질에 창조적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을 누구와 하느냐 못지않게 어떤 여건에서 하느냐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이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외부 조건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용하는가다

눈부신 일상 생활은 결국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일을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


인생은 이런 식으로 살라고 누가 정해 놓은 규칙이 있는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내는 일이다.


4. 일의 역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일'처럼 생각되느냐 '놀이'처럼 생각되느냐 물어보면, 6학년 아이들은 학교 공부는 일 같고 운동 시합은 놀이 같다고 약속이나 한 듯이 대답한다. 재미있는 건, 청소년들은 대체로 다신이 일로 여기는 활동을 할 때 이 일이 자신의 앞날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이것이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고 자부심을 높여 준다고 대답한다는 점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되면 필요하지만 내키지 않는 일과 쓸모없지만 즐거운 일을 확연히 구분 할 줄 안다. 


미국 고등학교 1학년생의 57퍼센트, 고등학교 3학년생의 86퍼센트가 봉급을 받고 일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다.


청소년들이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건 일 같지도 않고 놀이 같지도 않은 걸 할 때 가장 괴로워한다.

청소년은 하루 시간의 35퍼센트를 '일 같지도 않고 놀이 같지도 않은 행동'을 하면서 보낸다.


이렇다 할 수입도 없이 한가로움만 주어진다면 그 사람은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고 참담함에 젖는다.

흔히 직업에서 얻을 수 있는 목표 의식과 도전 의식이 없이는, 자기 절제가 아주 뛰어난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의미있는 삶을 누리기에 충분할 만큼 마음을 한군데로 모으기가 어렵다.


우리가 하는 활동 중에서 게임에 가장 가까운 성격을 가진 것이 일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곧잘 간과한다. 일에는 명확한 목표와 규칙이 있다. 

일은 산만함을 누르고 집중력을 살린다. 이상적인 경우는 일의 난이도가 일을 하는 사람의 실력과 엇비슷할 때다.


여가 시간이 필요조건일 수는 있지만 불행하게도 여가 시간 그 자체가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여가 시간을 지혜롭게 활용하는 법을 터득하기란 예상보다 쉽지 않다.

객관적 작업 환경과 우리의 주관적 태도,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일이 즐겁다는 생각을 좀처럼 갖기 어렵다. 하지만 문화적 편견에 좌우되지 않고 일을 개인적으로 의미있게 만들고 싶다는 단호한 의지를 갖고 이 문제에 접근한다면 아무리 범속한 일이라 하더라도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


지식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다 보면 어려움도 많고 내면의 갈등도 심할 수밖에 없지만 미지의 영역으로 정신을 넓히는 데서 느끼는 희열은 보통 사람 같으면 벌서 은퇴하고도 남았을 노령의 연구자들마저도 항상 느끼는 즐거움이다.


일이 한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값지게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외부 조건이 아니다. 문제는 일을 어떻게 하고 일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어려움에서 어떤 경험을 끌어내는가에 달려 있다.



5. 여가는 기회이며 동시에 함정

여가는 일보다 즐기기가 더 어렵다. 효과적으로 쓰는 요령을 모르면 삶의 질은 올라가지 않는다. 그것은 절대로 사람이 저절로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ESM 연구 조사에서 우리는 사람이 어떤 목표 하나에 집중할 때 심지어는 몸까지도 더 좋아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것은 게으름이 사람의 천성이 아님을 시사한다. 목표가 없고 교감을 나눌 수 있는 타인이 없을 때 사람들은 차츰 의욕과 집중력을 잃기 시작한다. 마음은 자꾸만 흔들리고, 불안감만 조성하는 해결 불능의 문제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마음이 붕괴되는 이런 최악의 무질서 상태를 피하기위하여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불안의 샘을 의식에서 지워주는 자극에 의존하게 된다. 그것은 드라마, 연애소설, 추리소설, 도박, 섹스, 술, 마약 등

이것들은 의식에서 벌어지는 혼돈을 짧은 시간 안에 줄여주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허무감과 불쾌감이다.

내부에서부터 정신력을 자유자재로 운용할 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사람의 기분은 몰입 상태에 있을 때 절정에 이른다. 그것은 도전을 이겨내어 문제를 해결한 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몰입을 낳는 활동은 대부분 명확한 목표, 정확한 규칙, 신속한 피드백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런 외적 조건들이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집중하고 긴장한다.


능동적 여가와 수동적 여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며 심리적 효과도 당연히 판이하게 나타난다.


몰입할 수 있는 활동은 하나같이 처음에 어느 정도 집중력을 쏟아 부어야 그 다음부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몰입을 낳는 활동은 까다롭고 어려워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때가 자주 있다. 수동적 여가 활동은 불안을 거의 낳지 않는다. 그것은 대체로 사람을 이완시키고 무감각하게 만드는 활동이다. 여가 시간을 수동적 활동으로 채우면 아주 즐겁지는 않아도 어쨌든 골치 아픈 상황은 피해갈 수 있다. 사람들은 수동적 여가 활동의 바로 이런 점에 끌리는 듯하다. 

수동적 여가가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그것이 자유 시간을 보내는 유일한 방편으로 쓰이는 순간부터다.


목입 경험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은 책을 많이 읽고 TV를 적게 보는 사람이며, 몰입 경험을 가장 적게 하는 사람은 책은 거의 안 읽고 TV로 소일하는 사람이었다.

살아가면서 이렇다 할 몰입의 대상을 찾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부담스럽지 않은 수동적 여가에 의지하는지도 모른다.

수동적으로 여가를 보내는 습성은 이전에 누적된 문제들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문제의 원인으로 작용하여 삶의 질을 고양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봉쇄하기에 이른다.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오늘의 소수민들은 스포츠나 연예 분야로 진출하여 사회적 신분 상승을 이루겟다는 꿈에 젖어 있다. 농구 ? 야구 ? 권투 ? 대중음악은 부와 명예를 약속하면서 사람들의 남아도는 막대한 정력을 흡수하고 있다 입장에 따라서는 이것을 두 가지의 전혀 상반된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마르크스가 종교를 두고 한 말을 끌어오자면 여가가 ‘인민의 아편’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비판하는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아니면 뾰족한 대안이 없는 위험스러운 상황 앞엣 창조적으로 나온 반응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여가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려면 일을 할 때처럼 창조력을 발휘하고 정력을 쏟아야 한다.

한 사람의 삶이 알차려면 자유로운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여가 활동이 사회적 차원에서건 개인적 차원에서건 원인과 결과로서 동시에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세상은 흥미진진한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상상력이 부족하고 게으르기 때문에 그걸 모르고 살아갈 뿐이다.



6. 인간관계와 삶의 질

우리가 평상시에 하는 행동 중에서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남들과의 교제다.

인간관계가 우리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것이다.


마음의 균형을 잡는 데 남들과의 어울림이 그초록 중요하다면 타인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직시하고, 그 영향을 어떻게 하면 긍정적 경험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사람관계엣 마음이 무질서에 빠지지 않고 바람직한 질서를 유지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하나는 우리의 목표와 다른 사람의 목표 사이에서 어떤 합치점을 찾아내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목표에 관심을 기울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친구로 선택한 것은 그와 나의 목표에 합치점이 있어서이며 서로 평등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우정은 서로에게 득을 준다. 외적 강제 관계가 아니다. 이상적 우정은 늘 새로이 정서적 ? 지적 자극을 주어 권태나 무감각이 스며들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달리 깊이 사귈 만한 대상이 없는 사람은 자기처럼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의존하여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고 하는데, 이 경우 우정은 파괴적을 작용한다.


좋은 친구를 사귀기가 워낙 어려워서인지 미국에서는 부모 ? 배우자 ? 자식이 친구처럼 지내는 새로운 가능성이 모색되고 있다.

가족 관계가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력은 너무나 막중해서 글로 엮는다면 무궁무진하게 나올 것이다.

아주 일반화시켜서 말하자면 사람이 하루 중에 느끼는 감정의 기복에서 조절판 역할을 하는 것이 가정이라 할 수 있다.


남자는 아직도 아이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에 관심을 두는 반면, 여자는 아이들이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가를 중시한다.


원만한 가정을 꾸러나가는 비결이 무엇인가? 

식구 하나하나의 정서적 안정과 성장을 뒷받침하는 가정에는 두 개의 거의 상반된 특성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원칙과 자발성, 규율과 자유, 높은 기대와 무조건적 사랑의 공존이다.


보통 사람은 하루 중 깨어 있는 시간의 삼 분의 일을 혼자서 보낸다. 너무 많은 시간을 혼자서 보내는 사람도 문제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적은 사람도 문제가 있다.

고립된 망상이나 비현실적 공포에 빠져들기 쉽다는 점을 많은 사회과학자들도 지적한다.


혼자 있을 때 유일하게 올라가는 경험의 요소는 집중력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고독을 견디는 능력이 있다고 과신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고독을 즐기건 즐기지 않건 어느 정도의 외로움을 견디며 살아가지 앟으면 안 되는 시대다. 생각을 모으려면 집중력이 필요한데 주변의 불필요한 말 한마디에, 다른 사람에게 주목해야 할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좀체 집중할 수가 없다.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혼자 있는 걸 싫어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개발 할 수가 없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연구소에서 실험을 하려면 혼자 보내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창조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의견을 나누며 서로의 작업에 대해 이해를 넓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과학자 프리먼 다이슨은 “연구할 때 나는 문을 열어 둔다. 기회만 있으면 사람들과 대화를 하려고 애쓴다. 그렇게 자꾸 어울려야만 흥미로운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하지만 집필은 전혀 다르다. 글을 쓸 때 나는 문을 닫는다...”


창조적인 개인들이 삶을 헤쳐나가는 방식에서 우리는 사람이 외향적이면서 동시에 내향적일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읽는다.



7. 삶의 패턴을 바꾼다.

자신의 정력을 잘만 활용하면 누구보다도 알찬 경험을 할 수 있는데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점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장벽들을 보란 듯이 극복 한 예 

 - 안토니오 그람시 : 주위의 기대없이 병마와 싸우면서도 탁월한 문필가와 이론가가 됨.

 - 라이너스 폴링 : 독서광이며 탐구심이 많았지만 형편으로 어렵게 친구의 부모를 통해 대학을 가고 온갖일을 하면서 학업에 정진하여 노벨화학상과 평화상을 받음)


전보다 몰입 경험을 하는 빈도가 크게 늘어난 청소년들은 공부를 더 많이 하고 수동적 여가에 시간을 조금 투자했으며, 몰입 경험의 빈도가 줄어든 청소년들보다 집중력 ? 자부심 ? 희열 ? 적극성 면에서 높은 점수를 얻었다.

몰입 경험이 늘어난 청소년들이 줄어든 청소년들보다 “행복하다”는 응답을 더 많이 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우리가 몰입할 가능성이 더 많은 활동들에 정신력을 투자함으로써 삶의 질을 현실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음을 시사한다.


직장을 고역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작용.

첫째, 하나마나한 일을 한다는 불만.

둘째, 지겨운 일을 밥 먹듯이 되풀이해야 한다는 불만.

셋째, 직장일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준다는 점.

사람이 자기 일에서 만족을 얻느냐 못 얻느냐를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보수나 안정성보다는 바로 이 세 가지 요인이다 


선뜻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힘겨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은 결국 우리에게 있다.


활동이 이루어지는 전체 맥락을 늘 염두에 두고 자신의 행동이 전체에 미칠 영향을 이해한다면, 아무리 사소한 직업이라도 세상을 전보다 살 만한 곳으로 탈바꿈시키는 인상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자기 일을 묵묵히 하면서 주변의 무질서를 줄이는 데 이바지한 직장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웃음 띤 얼굴로 와이퍼를 갈아주면서 그런 사소한 친절에 대해서는 돈을 받을 수 없다며 한사코 나의 사례를 거부한 주유소 직원, 집을 사고 몇 년이 흘렀어도 도움의 손길을 거두지 않았던 부동산중개인, 다른 직원들이 모두 공항을 떠난 다음에도 끈까지 남아 손님이 분실한 지갑을 찾으려고 애쓰던 승무원....

이 모든 사례에서 직무의 가치가 크게 올라간 것은 근무자가 자기 일에 남들보다 더 정성을 쏟아부어 거기서 남다른 의미를 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직무 수칙에 규정된 수준 이상으로 생각을 하고 배려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관심도 자연히 높아지기 마련이며 이러한 관심이야말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값진 자산이다.


노력하지 않으면 지겨운 일은 계속 지겨운 일로 남기 마련이다. 

어느 한구석도 소홀히 하지 않는 성실함으로 직무에 임하면서, 이런 조치는 과연 필요한가,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 정말로 필요한 일이라면 더 잘,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할 수는 없는가, 어떤 조치를 곁들여야 내가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더 가치가 생길 수 있는가를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우리는 보통 불필요한 구석을 없앰으로써 일을 최소화하는 방안이 무성인지를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그러나 그것은 근시안적 전략이다. 같은 정력을 일을 더 잘하는 방법을 생각하는데 쏟아붓는다면 일엣 느끼는 즐거움도 커질 테고 직장에서 성공할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누군가가 상황이 요구하는 수준 이상으로 관심을 기울이면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 우리의 삶을 뒤바꾸는 중대한 발견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이 워낙 흐트러져 있어서 무슨 일이 터져도 그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어간다.


사소한 변화에 주목하면 위대한 발견을 낳을 수 있는 것처럼, 조금만 태도를 바꾸면 지긋지긋하고 넌더리나던 일이 빨리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날 정도로 기다려지는 환상적 활동으로 변모한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첫째,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이해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둘째, 지금의 방식이 업무에 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수동적 자세에서 탈피해야 한다. 

셋째, 대안을 모색하면서 더 좋은 방법이 나타날 때까지 실험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일에서 느끼는 스트레스 문제를 푸는 데 이런 식의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여러분은 이제 수긍이 갈 것이다. 몰입 경험에는 스트레스가 암적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맨 먼저 취해야 할 조치는 머리를 어지럽히는 각종 요구들 속에서 우선 순위를 매기는 일이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은 자기가 처리해야 하는 사항을 메모로 조목조목 정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어울리는 전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일이다.

일처리에 순서를 정하고 일을 끝내는 데 필요한 내용을 부석하며 해결 전략을 수립하는데 좀더 관심을 쏟아야 한다. 통제력을 잃지 않아여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다.


창조적인 사람들이 살아온 과정을 보면 자기가 원하는 쪽에 일을 맞추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이미 깔려 있는 길을 밟은 것이 아니라 걸어가면서 스스로 길을 만들어 냈다.

아무리 단순한 일을 하더라도 창조적인 사람들을 본받아 작업에 임하는 태도를 바꾸면 엄청난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스톡홀름 카롤린스카연구소의 종야생물학자 게오르크 클라인은 자기일을 좋아하지만 질색으로 여기는 두 가지일이 있다. 하나는 공항 대합실에서 즐을 서는 일, 또 하나는 정부 앞으로 연구비 지원신청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이 둘은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두 가지를 하나로 결합시키려 했다.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연구비 지원 신청서를 쓰기로...

휴대녹음기를 이요하여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연구비 지원 신청서 내용을 구술하였다.

객관적으로 보면 처리해야 하는 일은 그대로지만 통제력을 발휘한 덕분에 그것을 거의 놀이의 경지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사람의 집중력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어서 일단 어떤 한 가지 목표에 주의를 빼앗기면 다른 곳에 관심을 돌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두 차원(일, 인간관계) 가운데 어느 하나를 무시하면서 행복을 누리기는 어렵다 


어느 집단에서든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힘은 대체로 두 가지다. 

하나는 음식, 따뜻함, 신체적 보살핌, 돈이 제공하는 물질적 에너지

다른 하나는 상대방의 목표에 관심을 기울여주는 정신적 에너지이다.(정성)


같이 있는 시간이 정말로 즐겁기 위해서는 구성원의 목표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모두가 공통의 목표에 정성을 쏟을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이득이 되도록 돕는 것이 사실은 자기에게도 가장 득이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인간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일과 인간관계에서 몰입을 경험하는 사람의 삶은 질이 올라갈 수 밖에 없다. 특별한 묘책도 없고 손쉬운 지름길도 없다. 자기한테 찾아온 기회를 함부로 내버리지 않고 잠재력을 끝까지 살리려고 노력하면서 삶을 풍부한 경험으로 가득 채우려는 사람만이 드높은 삶의 경지에 올라설 수 있다.



8. 자기목적성을 가진 사람

열정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삶에 뛰어드는 사람의 성격을 자기목적성으로 충만해 있다고 말한다.


자기목적성을 뜻하는 영어 ‘autotelic’은 그리스어 ‘auto(자기)’ 와 ‘telos(목적)’가 결합한 말이다. 그 일 자체가 좋아서 할 때 그 일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때를 우리는 자기목적적이라고 한다.


자기목적성을 가진 사람은 원하는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보상이 되기에 별도의 보상이 필요하지 않다. 외부적 보상이 없어도 무방하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에 관여한다. 삶의 흐름에 깊숙이 빠져들 줄 안다는 소리다.


어떤 사람이 자기목적성을 가진 인간형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장기간에 걸쳐 다양한 상황 속에서 그가 어떻게 처신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주어진 상황에서 과제의 난이도가 높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실력이 있을 때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자기목적성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바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다.

사람은 몰입을 낳기에 좋은 활동, 곧 정신노동이나 능동적 여가 활동을 할 때 비로소 몰입을 경험하다.


자기목적성이 있는 청소년들은 집중을 더 잘하고 즐거움도 많이 느끼며 자긍심도 높고 자기가 하는 일이 미래의 목표 달성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자기목적성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더 행복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복잡한 활동을 하고 있으므로 자신에 대한 만족감은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자기목적성을 가진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가족과 지내는 시간이 유달리 많다는 점이다.

가정이 보호막과 함께 적절한 자극도 주는 상당히 정교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만 이러한 ‘사회적 미숙’ 기간이 아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목적성을 가진 사람들은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남들보다 더 많은 걸 알아차리며 눈앞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그저 좋아서 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자기목적성을 중시하는 사람은 나라는 울타리를 가볍게 뛰어넘어 삶 자체를 향유할 수 있는 정식적 여유를 가지고 있다.

창조적인 사람은 대체로 자기 목적성을 중요시한다. 획기적인 업적이 그들의 머리에서 나오는 이유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일에도 정력을 쏟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목적성을 중시하는 사람의 관심사가 수동적이거나 관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중요한 것은 이런 관심을 사심 없이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이 기울이는 관심의 내용이 당사자의 목표나 야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을 때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할 기회를 잡게 된다.

관심을 사심 없이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삭막한가.

말로 하기는 쉽지만 사실 그 원칙을 실천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건성으로 임할 게 아니라 정신을 집중하여 처리하는 습관부터 몸에 익히도록 하자.

단순한 일도 충분한 정성을 기울이면 응분의 보상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그것들은 우리에게 정말로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는다.

시간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사실은 자기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인 경우가 많다.

‘우리가 하는 일 중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 얼마나 될까? 

 우리의 관심을 흐트려놓는 판에 박힌 일들을 잘 추려서 우선 순위를 매긴다면 지금처럼 시간이 없다는 아우성이 터져나올까?‘

빠져나가는 시간을 수수방관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늘 시간이 부족하다. 

우리에게는 시간을 잘 다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먼 훗날 재산을 불리고 안정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삶을 즐기기 위해서라도..!!


시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마음을 통제하는 힘이다.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먼저 관심을 기울이는 훈련을 해야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흥미를 느끼는 건 그 만큼 거기에 공을 들였기 때문이지 저절로 그렇게 되는건 아니다.

정보는 우리가 그것에 관심을 기울일 때만 우리에게 다가온다.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여 그 현실성을 인정한 다음, 우리가 선택한 다른 대상으로 하루빨리 관심을 돌릴때만 우리는 고통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중요한 건 우리의 태도이다.

활동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결과는 대수롭지 않으며 나의 관심을 다스리는 데서 희열을 맛보면 그만이라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관심의 방향을 좌우하는 힘은 유전 명령과 사회 관습, 우리가 어릴 적에 익힌 버릇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알게 되고 우리 의식에 어떤 정보가 들어올 것인가를 결정하는 주역은 나 자신이 아니다.


삶의 지배권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자신의 의지가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기울이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이다.



9. 운명애

진지한 유희의 정신이 살아 있고 근심과 겸손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사람은 어딘가에 전념하면서도 무심함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몰입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는 게 좋다. 목표를 달성하는 게 중요해서라기보다는 목표가 없으면 한곳으로 정신을 집중하기가 어렵고 그만큼 산만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자신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니체 철학의 중심 개념이라 할 ‘운명애’에서 잘 들어난다

“운명애를 가진 사람은 위대하다는 게 나의 신조다. 운명애는 살아갈 날에서도, 살아온 날에서도, 달라지지 않기를, 아니, 영원히 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자세다. 불가피한 것을 견디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사랑할 줄 아는 태도다.”

“나는 피치 못할 일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법을 자꾸자꾸 배우고 싶다. 그럼 나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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