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다는 실감이 나질 않아."  9


여행할 때, 배낭을 메고 길 위에 섰을 때, 낯선 것들과 조우할 때, 그 설렘. 아무래도 그것이 내게는 '살아 있는 실감'에 가장 가까운 감각이었다.  10


'생활인'인 나에게 충실하기 위해서는 내 방식의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많이 온다. 그리고 나이를 먹을 수록, 현실에 대한 내 책임이 더 늘어날수록 그 순간은 더 자주 찾아올 터였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현실과 꿈이 공존하는 방법을, 핏줄에 부는 바람을 안고 생활인으로 사는 방법을, 먹고사니즘과 '내 방식의 행복'이 함께 손잡고 이인삼각으로 비틀거리며 걷는 방법을.  14


여행과 일상의 중간.  21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마흔이 되고 싶다.  37


"평범하게 사는 게 어떤 건데? 먹을 것, 잠잘 곳, 놀 곳, 섹스 상대. 이거 말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뭐가 더 필요한데?"  111


"한국 사람들 늘 그러잖아. 뭐하지? 뭐해야 되지? 안절부절."

왜 시비냐고 버럭 하려다가 참았다. 저날 밤 톰과의 대화에서도 느꼈듯, '인생'이라는 마라톤 경기에 대한 한국 사람들과 빠이 사람들의 태도 차이가 너무도 극명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구간 내내 전력 질주를 한다. 빠이 사람들은 경주에 아예 관심이 없어 보인다. 트랙 근처 나무에 해먹 매달아놓고 낮잠 자는 모습이다.

과연 삶이라는 마라톤은 어떻게 달려야 할까. 가장 좋은 건 적당히 속도안배를 하면서 달리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건 반드시 사회 시스템이 받쳐줘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구간마다 물컵이 달리는 사람 수만큼 놓여 있어야 할 거고, 어떤 출발점이나 환경에서 시작하더라도 불이익을 겪지 않도록 규칙과 트랙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아예 중간에 트랙에서 내리는 방법도 있을 거다. 조기 은퇴나 조기 퇴직 같은 것. 그러나 그러려면, 달리는 동안은 얼마나 치열하게 달려야 하는 것일까.  113-114


"속 터져요, 한국 같으면 벌써 다 지었어. 진짜 태국 애들 일 못하는 거 상상 초월이야."

"학비는 받나요?"

"아니, 기숙사까지 전액무료."

"학교 다 지으시면 교장선생님 되시는 거예요?"

"아니, 애들이랑 선생님한테 줄 거야. 나는 다시 딴 거 해야지. 여행 가든가. 내가 건물만 올려 주ㄴ면 그담엔 자기들이 지지고 볶고 만들어 나가야지. 밥도 해먹고, 농사도 지으면서."

"그럼 이 건물을 짓는 특별한 이유라도..."

"놀이."  128


난 그냥 내 고산족 친구들한테 해줄 게 없을까 하다 한번 만들어 보는 거예요. 아, 재미있잖아. 일 잘 안 풀리면 홧술도 한잔씩 마셔가며."

"살아 있다는 실감은 제대로 느끼고 사시겠네요."

도인 아저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129


차가 읍내로 들어서자 기분이 복잡해졌다. 온천이나 폭포 같은 곳은 갈 생각 없다. 그것은 내게 그저 빠이라는 동네의 장식에 불과 했다. 나는 그냥 좁은 타운 안에서도 충분히 행복했고, 만족했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몸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좁은 타운 안에서 한 발짝 나각자, 내가 몸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왼쪽 겨드랑이나 허릿살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보였다. 빠이에 좀더 머무르고 싶어졌다. 좀 더 머무르며, 속속들이 이곳을 느끼고 싶어졌다.

"저 며칠 있다가 방비엥 가는 표 끊었거든요. 이거 찢을까요?"

아저씨는 느릿느릿 대답했다. "빠이, 블랙홀이야. 한번 빠지면 나가기 힘들어. 그래서 바람 불었을 때 얼른 떠야 돼요. 여기가 바람이 잘 부는 데가 아니거든."  130


나이가 먹을수록 설레는 일이 줄어간다. '그런 거 예전에도 봤어.' , '다 아는 거야.' 같은 허세와 교만은 조금씩 느는 것 같은데 새로운 것에 대한 발견과 깨달음의 설렘은 나날이 줄어간다. 나는 돈 뎃의 노을 앞에서 너무도 설레었다. 노을 겉은 거 보고 설렐 줄은 나도 몰랐다. 다시 한 번 그 처음 본 붉은 빛을 보고 싶었다. 한 번쯤 더 설레 보고 싶었다.  216


라오스에서 필요한 것은 '비움'이다.  231


누군가 '라오스에서 뭘 하셨어요?'라고 물으면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다. '기다렸어요.' 내가 기억하는 라오스 여행의 절반 이상은 기다림이다. 그것도 확실치 않은 기다림.  237


지금까지 나 자신을, 특히 여행할 때의 나 자신을 돌이켜 보고 얻은 결론인데, 나는 고생을 싫어하지 않는다. 내 몸과 내 예금계좌와 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히지 않는 한도 내어ㅔ서의 고생이나 소동은 오히려 좋아한다. 무탈하고, 평온하고, 고요한 나날이 계속되면, 재미없다. 나이를 먹고 많은 상황에 익숙해져 갈수록 실수할 일도 잘못될 일도 줄지만, 그만큼 흥분하고 떨리고 가슴 졸일 일도 줄어든다. 그러고 보니 마흔은 '불혹'이했지, 흔들리지 않는 나이. 그 나이에 대해, 하나만 소박하게 바란다. 나는 흔들리지 말고, 내 주위의 공기를 조금씩 흔들려주기를,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을 때는 나 스스로 흔들 수 있는 자유를 잃지 않기를.  264


지금까지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사실 그것들이 알고 보니 내게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었던 거다. 적어도 '행복'을 위해서는 말이다. 그렇다면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언제 어디서나 나다운 행복을 느끼기 위한 최소공약수는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그렇다. 세상을 삼십 년도 넘게 살아왔건만, 나는 단 한 번도 '행복해지는 법'에 대해 배워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모두들 주변에서 '잘살아야 한다'라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잘산다'는 것은 경제적인 안정과 풍요, 그리고 남들 보기에 번듯한 외적 조건을 갖추는 것. 잘 사는 거, 좋지. 그렇게 살면 참 편할 거다. 거칠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을 거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했을 때 기억과 마음에 남는 건 잘살았던 것보다는 행복했던 것들 쪽인 거 같다.  275


호수를 빙 둘러싸고 울창한 열대 밀림이 우거져 있었다. 날이 흐린데도 물에서는 불쾌한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지독하게 맑은 공기 위로 축축한 밀림의 향기가 가득했다. 아이들은 외국인인 나를 보고 쑥스럽게 웃음을 지어 주었다. 

자, 이제 돌아가자. 어차피 호수에서 굳이 뭘 하겠다고 온 것은 아니니까. 그저 남아도는 한나절과 매너리즘을 쓰임새 있게 버릴 곳이 호수였을 뿐이다.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시간은 자주 버리잖아. 만화책으로, 게임으로, 트위터로, 메신저 수다로. 다만 이번 땡땡이에는 동그란 물, 붉은 진창, 울창한 밀림과 낯선 풀 냄새, 그리고 애물단지 같은 자전거가 하나 있는 거다. 라따나끼리에서 땡땡이는 이런 식으로 치는 거다.  287-288


내가 사는 나라, 얼마 전까지 변두리였다가 신도시가 된 우리 동네에서는 로스(스위스인)의 동네가 꽤나 행복해 보인다고 말한다. 더이상 바랄 것이 없어 보이는 그 부티와 안정감, 우리는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오늘도 그토록 치열하고 시끄럽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막상 그런 '행복'을 손에 넣은 것처럼 보이는 동네 주민은 정작 자기들이 행복을 잃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 땅, 인도차이나의 사람들은 정작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정말 그렇게 마냥 행복할까? 저 부유한 나라에서 온 친구의 말뜻은 결국 이건데, 행복과 소유는 그다지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까 결국 행복은 마음의 문제라는 것, 적어도 인도차이나 사람들은 그 '행복'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것 같다. 낙천적이고, 여유롭다. 정확성이니 효율성 따위에 집착하지 않고 좋은 게 좋은 대로 살아간다. 불교라는 사상적 배경 때문에 현세의 괴로움에 너그럽다. 게다가 최소한의 의식주도 해결하지 쉽다. 밖에서 자도 얼어 죽을 일 없고, 바나나며 망고스틴 같은 과일이 지천이니 굶어 죽을 일도 없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땅의 곳곳에서 욕망의 냄새를 맡는다. 생존과 생리에 대한 기본적인 욕망이 아닌, '소유'를 향한 자본주의적 욕망 말이다. 이런 욕망은 아주 쉽게 부도덕 및 몰양심과 결합한다. 나는 그것을 내 나라에서 징그럽게 많이도 보아왔다. 그리고 불행히도, 나는 이 땅에서 그런 '징후'를 몇 차례나 보고 말았다.  297-298


욕망을 가진 자에게는 그 욕망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와 장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좀더 노동과 대가의 의미를 제대로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착취당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저 얻는 것도 아닌 제대로 된 대가.  298


솔직히, 도시는 편하다. 나는 도시의 그 컵라면 같은 편리함이 그리웠던 거다. 오지에서 그렇게 행복하다고 느꼈으면서도 말이다.  318


미인이란 상대적 희소성에 대한 동경의 산물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거 참 허무한 건데.  364


만일 한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아마 물이 넘칠 기미가 보이는즉시 동네 사람들과 애꿏은 군인들이 총동원되어 물을 퍼내고 둑을 쌓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달랐다. 세계적인 유산 앙코르와트 해자의 물이 불자, 씨엠립 주민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곳에서 뜰채와 어망과 낚싯대를 들고 고기를 잡고 계셨다. 

같은 지구, 같은 아시아인데도 이드로가 우리는 삶의 속도와 리듬이 달라도 많이 다르다. 우리는 내일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둑을 쌓는데, 이들은 오늘의 만복과 행복을 위해 고기를 잡는다. 왜냐고? 우리는 내일의 행복을 대비하지 않으면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수 있다. 이들은 그냥 살아가도 먹을 것, 잘 자리는 생긴다. 우리는 죽어라 쉴 새 없이 손을 놀려야 겨우 1년에 한 번 추수하는 쌀, 이들은 두 번도 거두고 세 번도 거둔다. 당연히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는것 아닐까. '저러고 사니까 이렇게 못살지'도, '아, 왜 우리는 이렇게 찌들고 각박하게 살아야 하나'도 아닌 거다. 그녕, 다른 거다. 틀린게 아니라, 다른 거. 게다가 이들은 윤회를 믿는다. 이들에게 진짜 미래란 10년 뒤, 20년 뒤 따위가 아니라 다음 세상일지도 모른다. 하루하루를 착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어쩌면 이들에게 진자 미래를 대비하는 방식일 수도 있는 거다. 

그러나 이 '다름'에 조금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정말 그것으로 족하냐고, 그래도 되는 거냐고. 아이들을 보았을 때였다. 현실의 언저리만을 맴돌며 '썸말로이'를 외치는 씨엠립의 아이들을 말이다.  403-405


이 영악하기 짝이 없는 꼬마 사업가들은 과연 어떤 배경으로 탄생하게 되었을까? 이런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킬링필드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어요. 그 당시에 가장 먼저 숙청당한 사람들이 바로 지식인이랑 자산가였거든요. 캄보디아 사람들 아직 은행 잘 안 믿어요. 은행에 저축하는 대신 금을 사서 집에다가 묻어두죠. 그러니까 아이들 학교 보낼 필요성도 못 느끼는 거죠. 가르쳐 봐야 잡혀가서 죽기나 할 테니까요. 그냥 돈이나 버는 게 훨씬 낫다는 거예요. 게다가 애들이 좀 잘 버나요. 그래서 애들 내보내서 돈 벌어오라고 시킨 다음에 부모들이 도박이나 술로 탕진하는 경우도 많아요."  411


장기 여행자들을 보면 두 종류다.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나온 사람들, 아예 처음부터 안정된 생활 같은 게 없는 사람들, 카오산에서도 두 종류로 보인다. 처음부터 안정된 생활 같은 게 없는 사람, 또는 카오산에서만큼은 안정이고 나발이고 버리고 싶어 보이는 사람.  425


시간은 유한한데 지구는 너무 넓다. 그리고 갈 데가 너무 많다.  429


서른다섯, 인생에서 가장 뜨겁고 치열한 나이의 한여름, 그해의 여름, 나는 행복해지겠다며 조금은 억지를 섞어 이렇게 뛰쳐나왔고, 그렇게 긴 여름을 보내며 많이 행복했으며, 몰랐던 것 한 가지를 배웠다. 자잘한 불편과 결핍은 사실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 세상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최소 공약수가 존재한다는 것. 그것을 찾아내고 실천할 수 있는 한,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이 최소 공약수들이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것이 덧없고 시시해지고, 무언가에 구속당하고 싶고, 낯익고 좁은 것들 사이에 있고 싶어질 때가, 언젠가는 올지도 모른다. 그날이 올 때를 나는 꿈꾸려 한다. 좀 더 나이가 들고 성숙한 내가, 세상의 한 구석에 정착하여 그곳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 모습을. 씨엠립에서 꿈꾸었던 모습일 수도 있고, 다른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냥 아줌마가 되어 가정에서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 사람 앞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어쨌든, 내 인생의 가을은 그런 모습으로 찾아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나는 열심히 행복하려 한다.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더 많은 여행을 다니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책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욕망을 '성취'라는 이름으로 풀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행복하게, 내 인생의 남은 여름을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442


Posted by WN1
,

저자의 책 <On the Road>를 통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카오산 로드의 인터뷰를 통해 자유로운 영혼에 대한 갈망이 더욱 증폭되는 기운과 여행자들의 철학적인 사고에 대해 공감하며 저자의 책을 더 읽고 싶어졌다.

이 책은 온더로드와는 인터뷰집이라는 공통점은 가지고 있으나, 인터뷰 대상자들의 선택이 다르다는 점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손을 잡으며 웃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한것처럼, 캄보디아의 빈민가에서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인터뷰한 내용이다.

NGO단체를 이용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그들은 그들의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하면서도 보람과 즐거움과 만족을 ... 그것들을 통해 행복감을 영위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 봐도 나의것을 누군가에게 기분 좋게 나누어 준다는 것은 보통의 즐거움과는 분명히 달랐다.
동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칸트는 타인을 도울 의무를 인식하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면, 거기서 쾌락을 느낀다고 해서 도덕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꼭 이런 철학적인 표현이 아니더라도 진정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다른이들에게 보이려고 하는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을 통해 나온 인물들은 그러했다. 
그들이 캄보디아로 간 동기가 어떠하든 간에 그들은 그곳에서 자신을 나누어 주면서도 더 많이 얻고 있는 기분을 느낄 것이다.
이것을 알수 있으려면 자신이 직접 이러한 일들을 해보게 되면 알 수 있다. 꼭 이런 오지가 아니더라도 한국 내에서도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활동을 진정으로 해본다면 이들이 느끼는 복잡 미묘하면서도 통쾌한 기분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이런 표현보다는 꼭 하고 싶은 표현은 '정말 한 번 해봐라. 당신이 삶을 대하는 방식은 분명히 틀려질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면서도 잘 안되는 이유는 이러한 경험들에서 분명히 알게 될 수 있다. ..'

내용을 읽으면서 가슴뭉클한 내용들도 있었고, 웃음을 짓게 하는 내용들도 있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들의 삶에 대한 만족감을 전달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나에게 만족감이 전염되는 느낌이 든다. 


프롤로그 - 마음으로 여행을 떠난다.

나에게 캄보디아 여행은 내 마음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On the Road>가 일상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여행의 꿈’을 이야기 했다면, <네 멋대로 행복하라>는 일상에서 나를 지키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열정을 말했다. 이제 세 번째 책에서는, 나를 부인하듯 잠시 내려놓고 누군가의 손을 잡으며 웃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9

사람들은 대개 나의 감정, 나의 욕망, 나의 관계 위주의 삶을 산다. 세상은 ‘나’만 생각하며 살라고 부추긴다. 아무래도 나, 나의 욕망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벗어날 수 없는 게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욕망 때문에 살아가면서 자신의 길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10

남을 돌보는 일이 자아를 찾아가는 길일 수 있다는 것을 이들을 통해 알았다. 이들은 남을 돕는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 대신 평범하고 단순한 삶을 산다. 그런데 풍성하다. “남을 돕는다고 하지만 실은 내가 얻는 게 더 많다.”면서, “여기서 사는 게 괴로웠다면 진작 한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12



1부
어느날, 캄보디아라는 간이역에 내렸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가난한 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그 무더운 나라에서 냉장고 없이도 잘 산다. 냉정고는 없지만 냉장고를 꼭 가져야 한다는 생각도 없다. 그들은 냉장고가 없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냉정고가 있으면 음식을 오래 보관할 수 있다고 말하면, 음식은 매일 필요한 만큼만 사다 먹으면 되지, 왜 오래 보관하느냐고 되묻는다. 39



2부
길 위의 또 다른 여행자들

언제나 써바이 써바이 - 박경미(28)

(한국에서는 섬유회사 디자이너로 일했다. 지금은 코이카 단원으로, 프놈펜에서 세 시간 정도 떨어진 캄퐁치낭 주립직업훈련원에서 봉제를 가르친다. 국외자원봉사가 꿈이었지만 캄보다이가 어떤 나라인지 전혀 모르고 온 탓에 처음에는 적응을 못해 울기도 많이 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요즘은 회사 가기 싫다고 고민하는 동생에게 캄보디아에 한번 와보라고 권한다.)

“까미, 요즘 밥은 뭐 해먹어?” 아, 경미라는 발음이 어려워서 까미라고 불러요. “물은 꼭 끓여먹어!” 물 사서 먹는지 모르거든요. “까미, 넌 외국인이니까 이렇게 힘든 일 안 봤지? 까미, 우리 도와주러 왔는데 빨래까지 하면 힘들잖아. 빨래도 내가 해줄게.” 세탁기 있는 줄도 몰라요. 54

내가 여기서 알게 된 것 중 가장 큰 건 마음이에요. 난 한국에서 27년을 살았지만 내가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게 고마운 적이 없었어요. 여기서 아이들과 지내면서 내가 자꾸자꾸 순수해지고 어떨 때는 좀 바보가 되는 것도 같고 어려지는 것 같기도 해요. 57

사람들은 항상 “써바이 써바이” 해요. 써바이는 행복하다. 즐겁다는 말이에요. 58


시간아, 넌 가라 - 백지윤(29)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대학 1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때로는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과외를 하고 학원에서 일했다. 자신이 돈 버는 기계로 느껴지던 어느 날, 그녀는 캄보디아로 도망쳤다. 한국에서는 가족과 함께 있어도 외로웠는데 이곳에 와서는 오히려 덜 외롭다고 한다. 코이카 단원으로, 프놈펜의 놈대학에서 2년째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한국어를 왜 배우려고 하느냐니까 취직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대요. 그런 말을 하는 눈빛이 당당했어요. 가난한 나라 학생들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니에요. 당당하고 꾸밈없이 말해요. 74

난 시간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남과 비교해서 늦는다는 것도, 비슷하게 추구하는 가치가 있어야 비교가 가능한데 난 그런 게 없어요. 78

사람들은 나누는 것을 어렵게 생각한다. - 내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부담스러운 건데, 나는 내가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내가 내주는 만큼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을 여기서 찾고 싶은 것뿐이에요. 78

한국에서 내가 제일 좋아한 말이 ‘괜찮다’였어요. 힘든 일이 있으면 친구한테 전화해서 ‘괜찮다’는 말 세 번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런데 여기 와서 진짜 괜찮은 게 뭔지 알았어요. 날씨가 더워도, 아프고 돈이 없어도, 사람들이 약속을 어겨도 다 괜찮아요. 전에는 괜찮아지고 싶어서 괜찮다는 말을 했다면, 지금은 괜찮아서 괜찮다고 말해요. 무엇을 해도 다 괜찮은 내가 됐어요. 80


내가 천사? 천사가 다 죽었다! - 이기원(33)

(이기원을 소개해준 사람은 반농담조로 그가 조폭 같은 사람이라 했다. 공고를 졸업하고 술집 기도, 단란주점 주방장, 티켓다방 꼬마사장을 거친 이력 때문일까? 이곳에서 그는 무대포 같은 사람으로 통하는 듯하다. 그는 프놈펜 빈민가 아이들에게 2년 6개월째 점심 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3년째 빈민가에서 구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완전 자갈밭 인생을 살던 자신이 캄보디아 와서 인생 폈다고 한다.)

슴봉짬.. 여기 사람들도 무섭다고 못가는 동네에요. 낮에는 매춘, 밤에는 마약거래. 범죄자들도 동네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잡지를 못해요. 아이들이 비둘기를 괴롭히고 있더라고요. 비둘기는 아파서 발버둥치는데 아이들은 웃고 있어요. 한쪽에서는 아빠가 아이를 발고 때리고, 그게 뭐예요. 부끄러웠어요. 아이들한테 밥을 나눠주고 앉아 있는데 그냥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동안 우울증 비슷한 게 누르고 있던게 뻥 뚫리는 느낌이랄까..

기도를 하면서 눈물 콧물 흘리고 있는데 누가 내 얼굴을 만져요. 웬 꼬마애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눈물을 닦아주는 거예요. 눈이 마주쳤는데 그애가 울더라고요. 아니, 이 새끼가 왜 우나? 나야 내 인생이 한심히야 울지만 넌 왜 우니? 말은 안 통하지만, “삼촌이 다시 올게. 다시 오고 싶다. 너 보러 꼭 올게.” 그랬어요. 90

내가 밥 줘야 할 것 같아서 줄 뿐이에요. 아이들이니까. 마빡이처럼 아무 의미 없어요. 밥 주는 것에 거창한 의미부여 안해요. 97

여기 온지 서너 달 지났을 때 슴봉짬 빈민가 철거를 앞두고 매일 가구 수 체크하러 다녔는데 아이들이 항상 따라다녔어요.

그날도 ‘마약동네’지나 ‘사탕수수동네’ 지나 ‘매춘동네’ 지나서 ‘전과자동네’를 지나가는데. 어떤 남자가 칼을 들고 서 있어요. 마약에 취한 것 같은데 갑자기 나한테로 달려오지 뭐예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도망갈 생각도 못하고 서 있는데,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아이들이 막아서는 거예요. 나를 자기들 몸으로 에워싸고, 그 위로 다른 아이들이 손을 뻗어 공간을 만들면서. 어떤 아이는 달려오는 남자의 다리를 잡고 늘어졌어요. 칼 무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전에 총으로 위협당한 적도 있지만, 그것과는 달랐어요.

그날 많이 울었어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죠. 그게 내가 여기 존재하는 이유인지도 몰라요. 그 후로는 아이들한테 90도로 인사했어요. 내가 밥을 주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밥을 드시러 오는 거에요. 100

팔 부러진 아이들 당장 깁스 하고 꿰매주는 일만 필요한 아니에요. 손톱 깎아주고, 안아주고, 바라봐주고, 손잡고 가는 것도 큰 힘이돼요. 뭔가 대단한 일을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수십 가지 일 중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돼요.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밥 주는 것만 봉사가 아니에요. 아이들 손잡고 쎄쎄쎄 하는 것도 꼭 필요한 봉사예요. 106


쵸코파이 실종사건 - 한정민(37)

(미국으로 유학가 3년 8개월을 살았고, 귀국 후 회사를 다니다 어느 날 갑자기 캄보디아로 왔다. 캄보디아에서 우연히 아내를 만나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연애를 하다가 결혼했다. 현지인들과 한집에서 먹고 자고 일하며 산다. 먹고 살 것 없는 가난한 시골마을에 염색한 실을 줘 베를 짜게 하고, 다시 그 베를 사다 옷을 만들어 판다. 타케오 지방의 트나웃마을 88가구가 그와 함께 일을 하고 있다.)
주는 게 아니고 나눠요. 주는 게 상대방 마음에 상관없이 내것을 던져주는 거라면, 나누는 것은 마음이 오가는 커뮤니케이션이죠.  115
현재 나누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나누지 않을 가능성이 커요. 그래서 지금 나누려고 해요.  116
어떤 사람에게는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것 다 누리고 많이 쓰고 즐겁게 지내는 게 최선의 삶일 거예요. 그렇게 살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게 옳은 일이겠죠. 하지만 그것만이 삶의 전부가 아닐지도 몰라요.  117
한국에서는 버스가 있으니까 버스타고 다니지만, 그게 감사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잖아요. 한국에 있으면 너무 많은 것을 누리기 때문에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여기 와서는 아주 특별하게 느껴져요.  121

치과 의사 부부의 전재산은 달랑 천 만원 - 최정규(40)
(스물아홉게 한국을 떠나 러시아로 갔다. 최사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그만두고 1년정도 놀다 오려고 떠난 여행이었다. 러시아로 떠나는 날 공항에서 우연히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그녀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언어를 배우고 치대를 다니며 8년을 지낸 후 베트남을 거쳐 캄보디아로 와 3년을 살았다. 캄보디아에서는 무료진료를 한다. '치과 의사 아빠'가 아닌 '무료진료하는 아빠'덕분에,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다는 딸 솔빈이는 국제학교에 가지 못하고 학력인정도 안 되는 학원에 다닌다.)
친구들은 이렇게 사는거 보고 뭐라고 하나? 내가 있어서 재미있지 않을까요? 다 똑같이 살면 재미없잖아요.  129
지금도 거리에 나가보면 신발 신지 않은 애들많잔아요. 발이 성할 리가 없죠. 퉁퉁 부어 있어요. 옷도 제대로 안 입었고, 처음 왔을 때는 그런 거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났어요. 그런데 지금은 안 그래요. 이 사람들도 우리처럼 사랑하고 미워하고 다 느끼며 살아요. 자전거 하나 사면 우리가 자동차 산 것처럼 좋아하죠. 우리와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어요. 분명 우리가 도와줘야 하는 면은 있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완전히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어떨 때는 내가 더 불행해요.  131
일을 하려는데 진료실이 없었어요. 친구들한테 부탁했더니 고등학교, 대학교, 고향 친구들이 만들어줬어요. 내가 가진 것 없어도 하려고 하니까 돈이 생기더라고요. 나 쓸 데 쓰고 남은 돈으로 좋은 일 할 수 있으면 좋겠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돈을 1억 원쯤 가지고 있어도, 10억 원이 내 손에 있어도 지금 못하면 나중에도 못한다고.  133
무료진료를 하고 있지만 무슨 대단한 마음 갖고 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해요.  134
캄보디아 아이들 보면 밝다니까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그렇게 밝은 이유가 뭐겠어요? 그래도 행복할 수 있으니까. 캄보디아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데 내가 행복하지 못하다면 말이 안 되는 거죠.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은 이미 다 갖고 있어요. 내가 만족하지 못하고, 내가 기뻐하지 못하고, 내가 즐겁지 못하고, 지금보다 더 가져야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신이 인간을 잘못 만든 거지. 
캄보디아 아이들은 행복이 물질에 있지 않다는 확실한 증거죠.  138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면 돼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뒤죽박죽되어 있을 때, 지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고 계속 그 길을 선택해 나가는 거죠. 
그렇게 살아왔나? 언제나 잘 선택하면 내가 도사게요?(웃음) 지금은 그 길을 연습하고 있어요.  139
이제와 생각해보면 내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정성을 쏟은 그 시간이 다른 시간보다 훨씬 풍요롭게 남아 있어요. 효과나 결과, 인풋-아웃풋으로 생각하면 낭비해버린 시간이겠지만, 사실은 안 그래요. 그래서 취미생활이랑 똑같아요. 내가 기타를 치는 건 가수가 되려는게 아니고 그냥 그 자체가 좋아서 치는 거잖아요. 그런 시간이 인생을 풍요롭게 하잖아요.  141-142

삶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걷혔다 - 양영란(32)
(캄보디아에 오기 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일했다. 시골에서 태어난 그녀가 대학에 입학한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대출받아 공부를 했고, 졸업 후 일을 하며 학비를 갚았다. 집과 직장만 오가며 살던 그녀가 어느날 돌연 캄보디아로 와 지낸 게 벌 써 3년이 넘었다. 캄보디아 남부 해안도시 시아누크빌에 있는 라이프대학 간호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라지만, 기숙사의 좁은 방 하나를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쓰고 있다.)
그들도 나름대로 자기들 삶이 있어요. 가난해서 불편하지만 불행한 건 아닌지도 몰라요.  152
어렸을 때 집안형편이 어려워서 오빠들이 공부를 못했어요. 오빠가 나더러 그러더라고요. "우리집도 살기 힘든데 뭘 남들까지 도와주느냐?" 그렇지만 나누면서 살면 더 행복하고, 자기 것에 집착하고 더 가지려고 하면 힘들어져요. 오히려 나누는게 행복의 비결 아닐까 싶어요.  157

우물 파주고 받는 바나나가 백만 원보다 좋다 - 김형기(48)
(프놈펜의 패스트푸드점 럭키버거에서 슬리퍼를 끌고 나온 그를 처음 만나 점심으로 햄버거를 먹었다. 그는 대학시절 수원교도소에 1년간 수감되기도 한 운동권 출신 목사다. 한국에서의 안락한 생활이 '과연 예수를 따라가는 건가' 고민하다가 캄보디아로 와 우물을파고 있다. 부모가 에이즈에 걸렸거나, 부모가 없는 아이 10여 명을 데려와 보살핀다. 1년 8개월째 이곳에 살고 있다.)
어떤 종류의 즐거움일까? 그냥 좋아요. 설명하기 힘들어요. 우물 파주고 받는 바나나 하나가 백만 원보다 좋아요. 사람들이 깨끗한 물 쓰며 깔깔대는 모습 보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174
자기게 어디있어요? 모두 빈 몸으로 와서 빈 몸으로 가는데.... 내가 무슨 희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베풀려고 온게 아니고 일을 하러 온 거거든요. 
개인적인 변화라면 어떤게 있나? 삶을 더 긍정적으로 보게 됐어요. 난 이 사람들보다는 많은 걸 받아왔으니까 감사해야 할 삶이었는데 불평불만만 하고 살아온 거 아닌가? 
모든 일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는 항상 나쁜 생각만 하죠. 다른 면을 보는 게 중요해요. 그렇게 생각하면 딛고 일어설 수 있어요.  176

살면서 한 번은 좋은 일 해야지 - 여인찬(55)
(한국에서 25년간 회사를 다니다 명퇴하고 캄보디아에 왔다. 아내는 공무원이고, 아들은 뉴욕에 산다. 회사를 그만두고 외국에서 사업을 하려다가 우연히 코이카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캄포트의 주립직업 훈련원에서 자동차정비를 가르친다. 처음 현지인 집에서 홈스테이할 때는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돌아가고 싶었는데, 그 고비를 넘기자 느긋해졌다. 자기가 아는 걸 열심히 전해주기만 하면 되니 마음이 편할 수 밖에 없단다.)
한국어를 6개월 정도 가르쳤는데, 숙제를 내면요! 우리는 숙제 내주면 다는 못해도 조금이라도 하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여기 학생들은 하나도 안 해와요. 왜 안 해왔냐고 물어보면, "로볼!" 바쁘대요. 바빠서 못했대요. 뭐가 그렇게 바쁘냐고 물으면, 집에 가서 밥 먹고 얘기하고 잠자고 그러면 시간이 없대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스무 명 중 한두 명은 잘하는데 나머지는 안 해요. 우리는 목적이 있으면 이루려고 하는 의욕 같은 게 있잖아요. 학교에 일부러 나와서 공부하는건데 악착같이 배우려고 하는게 없어요.  185

네 인생에 소중한 시간이 될거야 - 안연지(25)
(친구들은 종종 간호사 월급이 많다고 부러워했지만 정작 그녀는 그게 좋은 줄 몰랐단다. 숨 쉴 틈 없이 스트레스 받아가며 일해야 했다. 어느 날 문득 자기가 변해가는 걸 느끼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마음이 편하고 즐거울 텐데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프놈펜에서 차로 몉 시간 떨어진 프레이벵이라는 아주 작은 마을에 살면서 시골마을 사람들을 돌보도 있다.)
이들에게 행복의 기준은 무엇일까? 삶을 즐기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뭘 해야 한다는 강박이 심하잖아요. 이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요.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인정하고 상관하지 않는달까. 욕심이 없고 뭘 해야겠다는 삶의 목표 같은 것도 없어요. 그런 걸 많이 생각히지 않기 때문에 없어도 행복한 거 아닐까요?  204

틀에 박힌 삶을 살지 않아도 되겠구나 - 위호성(33)
(군의관으로 복무하는 대신 '국제협력의사'로 캄보디아에 왔다. 군의관이나 공중보건의처럼 듣기에도 참편해 보이는 보직을 마다한 셈이다. 그가 속해 있던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 중 이런 선택을 한 살마은 하나도 없다. 4개월 된 갓난아기를 데리고 캄보디아로 간다 하니 모두가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 왔기에 대부분의 의사들이 가는 길로 자신도 꼭 가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 와서 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알게 됐어요. 내가 너무 좁게 살았구나. 다른 세상도 있구나. 비교가 많이 되면서 시각이 넓어지더라고요. 
전에는 내가 갈길이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유니세프 같은 NGO에서 일하는 의사도 있고, 항공의학을 하는 의사도 있어요. 제3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병원을 짓는데 어떤 병원이 좋은지 수요조사 하는 의사도 있고요. 이런 건 한국에서 늘 똑같은 친구들과 있으면 전혀 들을 수 없는 얘기거든요.  215
모든 힘을 다해서 모든 사랑을 주는 것만이 봉사하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마다 한계가 있어요. 그 한계를 넘으면 만용이 되더라고요. 분명히 남을 돕고 있는데 즐겁지가 않은 거예요. 내가 진심으로 하는게 아니니 즐거울 수가 없죠.
자기 한계 안에서 도와줄 수 있으면 그게 건전한 봉사하고 생각해요.  217
어느날 책을 읽다가 좋은 구절을 발견했어요. '정당한 삶의 목적이 없다면, 내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건 세상에 이름을 날리건 진정한 성공에 이를 수 없다.' 이 구절을 보고 내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어요. 
인생이라는 긴 시간으로 봤을 때는 일등을 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아요.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과 천천히 걸어서 완주하는 것에도 인생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해요. 혼자 뛰기보다는 함께 손잡고 걸어가자, 다짐하죠.  219

난 여기서 필요한 존재다 - 김우정(55)
(20년 동안 몸이 아파도 진료를 한 시간도 빼먹지 않을 만큼 열심히 일했다. 4년 전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이곳에 와 며칠 동안 무료진료를 하고 돌아갔다. 숙제하듯 다녀간 캄보디아였는데, 그 후로 이상하게 자꾸 캄보디아가 생각났다. 마치 무슨 연애라도 빠진 것 같았다고. 만으로 쉰넷, 한국에서 의사로 안락하게 살던 그가 캄보디아에 와 연 무료병원에는 새벽 6시부터 환자들이 줄을 선다.)
난, 한국보다는 여기가 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어요. 처음에 와서 환자를 보는데 아내가 그래요.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난 몰랐는데, 환자를 보면서 너무 좋아한대요. 나중에 내 사진을 찍어 보여주는데, 난 내가 그렇게 웃고 있는지 몰랐어요.  235
연봉 1억이 넘는 사람도, 남들 보기에는 엄청나게 잘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자기가 잘 산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행복해하지 않아요. 돈을 버는 것도 힘들고 중요한 문제지만,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문제도 많이 배우고 생가해야 할 문제인것 같아요.  239

언제 또 이런 날이 있을까 - 오수현(27)
(사범대를 졸업했지만 취업도 안 되고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았다. 무언지도 알 수 없는 것에 속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을 깨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우연히 코이카를 알게 됐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캄보디아로 도망쳣다. 프놈펜의 산토목중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치는데, 어느새 이곳에서 지낸지 2년이 흘렀다.)
나는 여기서 내가 하는 일이 하나의 일상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주는 거야, 베푸는 거야, 이런 생각 안 해요. 난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요. 이를테면 내가 가진 10달러 가지고 뭘 사주는 것만이 봉사가 아니라 내 행동을 보여주는 것도 봉사가 돼요. 학교에서 아이들은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려요. 하지만 난 항상 쓰레기통에 버려요. 내 생활을 보여주는 거예요. 외국인이니까 학생들 눈에 띄겠죠. 저 선생님은 꼭 쓰레기통에 버리네, 꼭 비누로 손을 씻네, 물을 쓰고 수도꼭지를 잠그네. 난 평소처럼 생활하는 거지만, 계속 그런 행동을 보여주면 교육이 돼요. 무슨 교육 차트를 만들어서 하는 게 아니라, 내 행동을 보여주고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깨닫게 하는 것, 이것도 봉사라고 생각해요. 내가 도구가 될 수도 있어요.  254-255
여기 와서 나를 잘 가꾸고 만족하며 사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내가 마음이 허해서 계속 다른 것을 쫓아다녔어요. 학생 때는 편했는데 졸업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돼버렸고, 자기관리도 제대로 못해 부족한 게 많아서 새로운 길을 찾는 게 힘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만족해요. 그게 나도 신통해요. 2년 동안 난 내가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워가요. 급하지 않아서 생기는 여유가 마음을 편하게 하고 남들에게도 전해져요.  258

에필로그 - 바쁜 마음을 조금 쉬어가도 되지 않을까
캄보디아는 가난 속에 환희를 지녔다. 이상한 나라다. 캄보디아의 많은 사람은 가난하기에 힘겹게 살지만 잘 받아들이고 잘 견뎌낸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 웃는다. TV가 없으니 자기들의 삶과 비교할 다른 삶의 기준도 없다. 그들에게는 전기도 수도도 화장실도 없이 사는 게 자연스럽다.
삶이 힘겨울 때 캄보디아에 한번 가 본다면, 전보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올 것이다. 한국에서 사는게 어렵다 해도 그 힘겨운 삶마저 감사하게 될 것이다.  261
같이 살아가는 것만큼 큰 사랑은 없을 것이다.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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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左翼) 무장단체.

‘붉은 크메르’라는 뜻이다. 1967년에 결성된 크메르루주는 시아누크가 1970년 론놀의 우익() 군사쿠데타로 전복되자 농촌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세력확장을 통해 마침내 1975년 4월 수도 프놈펜을 장악함으로써 정권장악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폴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주정권의 4년간에 걸친 통치기간은 20세기 어느 좌파정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함과 무자비한 보복으로 얼룩졌다. 150만 이상의 캄보디아인이 학살되었고, 전문지식인층과 기술자층이 기회주의라는 죄명으로 죽어갔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야만()과 살상()은 서방에서 《킬링필드》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전세계에 알려지기도 했다.

1979년 베트남군대와 이를 지지하는 캄보디아 공산동맹군의 공격으로 크메르루주는 전복되었고 이후 캄보디아에는 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헹삼린정부가 들어섰다. 크메르루주는 이후 타이 국경 근처에 근거지를 확보하고 중국의 지원하에 무장 게릴라전을 전개했으며, 이로 인해 캄보디아내전은 계속되었다. 그후 유엔의 중재로 캄보디아내전 당사자들이 휴전에 동의하고, 1993년 5월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했으나 크메르루주는 1993년 4월 선거불참을 선언하였다. 총선의 결과로 1993년 9월 캄보디아는 시아누크를 국왕으로 하여, 제1당인 민족연합전선의 지도자 노로돔 라나리드(시아누크의 아들)가 제1총리로, 그리고 프놈펜정권의 총리였던 훈센이 제2총리로 선출되어 정부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크메르루주는 1994년 7월 그들의 지도자인 키우삼판을 총리로 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무장투쟁을 계속할 것을 선언함으로써 캄보디아의 평화정착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나 크메르루주는 과거의 악명과 계속되는 좌경() 모험주의의 채택으로 그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 전범 징역 30년 선고 2010-07-27 뉴스 <== 클릭보기



크메르루주(Khmer Rouge .Khmers Rouges라고도 함)(프랑스어로 '붉은 크메르'라는 뜻)

게릴라전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후 1975~79년 캄보디아를 통치한 급진적인 공산주의 운동단체.
캄보디아의 무장군으로서 1967년에 형성되었다. 캄보디아 공산주의 운동은 베트남의 베트민 후원 아래 1951년에 형성된 혁명 캄보디아 인민당에서 유래했다.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이 당의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들은 당 이름을 캄보디아 공산당으로 개칭했다. 1950년대말까지 이 당의 당원들은 노로돔 시아누크 정부에 대항하는 비밀활동에 참여했으나 그들의 본거지가 시민들과 떨어진 정글과 산악지역에 있었고, 또 그들이 폭동을 종용하려 했던 농민들 사이에서 시아누크가 여전히 인기를 얻고 있었으므로 시아누크에 대항하는 활동들은 거의 진전이 없었다. 하지만 우익 군사 쿠데타에 의해 1970년 시아누크 정부가 전복되자 크메르루주는 그들과 정치적 연합을 형성하고, 캄보디아 농촌지역에 대한 대폭적인 지원을 시작했는데, 이러한 추세는 1970년대초 미국이 캄보디아에 대해 파괴적인 폭탄투하작전을 감행함으로써 가속화되었다. 그당시 크메르루주는 시아누크가 집권하는 동안 지원을 보류해오던 북베트남으로부터 원조를 받고 있었다. 1970년에 시작되어 거의 5년간 계속된 내란 중 크메르루주는 캄보디아 농촌지역에 대한 그들의 통제권을 점진적으로 확장시켰다. 마침내 1975년 4월 크메르루주군은 수도 프놈펜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후 캄보디아를 통치할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그후 4년에 걸친 그들의 캄보디아 통치기간은 20세기의 어떠한 마르크스주의 정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무절제함으로 얼룩졌다. 150만 명에 달하는 캄보디아인들이 죽었고, 캄보디아의 전문지식인층과 기술자층이 거의 근절되었다.

크메르루주 정부는 베트남 군대와 베트남을 지지하는 캄보디아 공산동맹군들의 침략으로 1979년 전복되었으며, 침략군들은 캄보디아에 베트남의 원조와 기술로 지탱되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크메르루주는 원거리지역으로 후퇴하여 게릴라전을 재개했는데, 당시 그들은 타이 국경 근처에 있는 그들의 본거지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했으며, 중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았다. 1982년 그들은 베트남을 등에 업고 있는 중앙정부에 반대하는 2개의 비공산계열 크메르 단체들과 명목상 시아누크를 지도자로 하는 위험한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크메르루주는 이 연합전선에 있어 가장 강력한 동반자가 되었으며, 1990년 베트남이 캄보디아에서 그들의 군대를 철수하자 또다시 캄보디아에서 주요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캄보디아 역사

프랑스 식민통치시대 부터 쓰겠습니다...

크메르왕국의 Ang Duong왕은 태국과 베트남을 견제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프랑스의 개입을 유도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태국에 머물던 그의 아들 Norodom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후 다시 태국이 크메르왕국에 침입해왔을 때 프랑스가 개입하여 이를 물리치는 대신 캄보디아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하였고 1884년 Norodom왕으로 하여금 강제로 합방조약에 조인하게 하여 캄보디아는 완전히 식민지화하게 되었다. 반식민지 투쟁도 있었으나 태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시각도 있었다. 프랑스는 Norodom왕의 상징적인 권위를 존중해주는 척하고 뒤엣 캄보디아를 조종함으로써 힘을 덜 들이고 효과적으로 캄보디아를 통치할 수 있었다. 이 식민지 시절에 프랑스인에 의해 앙코르 왓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1860년 프랑스의 여행가 헨리 무오 (Henri Mouhot)에 의해서 발굴되어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Norodom왕에 이어 Sisowath(1904∼1927)가 왕위를 계승하였고 그 뒤를 Monivong(1927∼1941)이 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동남아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캄보디아에서도 일본에게 실권을 빼앗겼었다. 1941년 Monivong왕의 뒤를 이어 Norodom Sihanouk왕자가 왕위를 계승했다. 이 당시까지는 프랑스의 입김에 의한 왕위 계승이었다. 이후 캄보디아에서는 일본이 민족주의 세력인 Son Ngnoc Thanh과 손을 잡고 프랑스는 Sihanouk와 연대하여 격렬한 대립을 지속하다가 결국 프랑스, Sihanouk쪽이 우세하게 되었다. Sihanoul는 프랑스와 중립외교노선을 유지하며 독립을 끌어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신세대 민족주의자들이자 다수당인 민주당과는 갈등이 심화되었다. 다수당인 민주당과 사이가 불편했던 Sihanouk는 1953년 1월 의회를 해산시키고 같은 해 11월 독립을 선언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과 8년 전쟁을 치르는 와중이어서 캄보디아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으며 1954년 5월 비엔티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에게 완패당하여 항복하고 말았다. 캄보디아도 이때 어부지리를 얻어 배트남과 함께 1954년 7월 제네바 협정에서 그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 

해방후의 혼란기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시하누크와 그의 정적간에 마찰이 계속되어 혼란이 거듭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55년 국민투표를 통하여 신임을 얻은 후 정당제도를 폐지하고 왕이 아닌 정당 정치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위하여 왕위를 그의 아버지께 양위하였다. 그가 새로 결성한 인민 사회당 (People's Socialist Community Party)은 1955년 9월 선거에서 압승하였으며 이후 일당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당시 국외는 이념이 극단적으로 대립되던 복잡한 상황이었다. 즉 북부베트남, 남부베트남, 태국, 중국, 소련, 미국 등의 이해관계가 캄보디아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시하누크는 북부베트남이나 중국 쪽의 좌익 성향을 약간 가미한 중립외교노선을 선택하였다. 1964년 미국은 도미노처럼 확산되는 공산주의 세력을 막기 위하여 베트남전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좌익 성향을 띠고 있던 시하누크를 적대시하게 되었다. 시하누크는 이를 인지하고 미국과 단교하고 북베트남군이나 중국과 협력하여 미국과 남베트남에 대항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북부베트남군이 캄보디아에 배치되고 1969년 미국은 캄보디아 내의 공산기지에 폭격을 시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베트남전 내내 캄보디아 동부는 미국에 의한 폭격이 계속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국토는 황폐화되었다. 

론놀 (Lon Nol)정권 치하

1969년까지 우익과 좌익간의 다툼은 점점 더 격화되고 시아누크의 정치적 입지는 점점 불안해졌다. 그러던 와중에 1970년 시아누크가 프랑스 방문중일 때 미국을 등에 업은 우익의 론놀 장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일방적으로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이에 시아누크는 귀국하지 못하고 베이징에 망명정부를 구성하였다. 1970년 4월 미국과 남부베트남군은 캄보디아 내의 베트콩을 소탕하기 위해 캄보디아로 넘어왔다. 이 결과 베트콩은 깊숙이 숨어버려 더욱 론놀 정권에게 위협이 되었다. 또한 론놀 정부의 부패와 타락이 점점 심화되어 국민들로부터의 신뢰가 추락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은 내전상태에서 혼란을 겪고 좌익들은 격분하게 되었으며 이의 지지를 받은 크메르 루즈군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후 크메르 루즈군은 론놀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주된 역할을 하였다. 파리에서 교육을 받은 폴 포트(Pol Pot)과 키우 삼판 (Khieu SamPhan)에 의해 주도된 크메르 루즈군은 막강한 미국의 경제적 지원을 받는 론놀 측에 게릴라전으로 대항하여 효율적으로 내전을 수행해 나갔으며 베트남에서 수세에 밀린 미국도 더 이상 론놀의 힘이 되어주기가 힘들었다. 그리하여 1975년 4월 크메르 루즈군은 프놈펜에 입성하게 되었다. 

크메르루즈 치하

크메르 루즈 (Khmer Rouge)는 급진적 공산주의로, 철두철미하게 사회개조 작업을 서둘렀다. 그들은 민주 캄보디아를 표방하고 모택동식 협동농장 형태로의 전환을 위해서 외부세계와 완전히 차단하고 화폐제도를 폐지해 버렸다. 이는 앙코르 시대에 주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제방공사나 토목공사에 참여시켰던 역사와 비교되어 흥미로운 일면이 있기도 하다. 도시 사람들은 모두 농촌으로 내몰려 협동농장에서 극심한 노동을 하였으며 이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즉시 처형되었다. 론놀 정권하의 관리들과 이에 협력한 사람들, 학자, 학생, 교사, 외국어를 아는 사람, 안경 쓴 사람, 손바닥이 말랑말랑하며 노동자가 아닌 사람은 즉결 처형하여 순간 캄보디아는 공포의 도가니로 변해 버렸다. 당시 약 700만 명의 인구 중 백만 이상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특히 거의 모든 사원들이 파괴되고 8만 여명의 승려들이 처형되었으며 약 500여명의 승려들만이 살아 남았다고 한다. 또한 베트남에 관련된 사람들도 모두 죽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금 캄보디아인들에게 가족사항을 묻는 것은 일종의 실례가 되는 형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나라도 6.25 전후에 이런 상황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새삼 역사의 흐름에 전율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이 겉잡을 수 없는 학살의 양상은 거센 반발을 사게 되었다. 공산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헹 삼린 (Heng Samin)이 대표적 저항세력이었다. 그 와중에 베트남에 대해 적대적인 크메르루즈는 과거에 캄보디아 영토였던 메콩 델타를 회복하기 위해 국경을 넘었는데 기회를 노리고 있던 베트남은 이를 기화로 1978년에 캄보디아를 공격하여 크메르 루즈군은 프놈펜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공산베트남 점령치하

크메르 루즈군이 과거의 영토를 회복한다는 명목으로 베트남 국경을 침범한 것을 계기로 공산베트남은 1978년 11월 캄보디아에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여 순식간에 크메르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리하여 크메르 루즈군은 서쪽 태국과의 국경지대인 정글로 도피하게 되었다. 일반 시민들에게 베트남군은 잔악한 크메르 루즈군에게서 해방시켜주는 해방군으로 인식되었다. 베트남은 자신의 지원을 받았던 헹 삼린을 내세워 친베트남 정부를 구성하였다. 하지만 베트남의 침공으로 캄보디아의 경제 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최악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수십만 명의 난민들이 발생하였다. 한편 프놈펜에 급조된 친베트남 정권은 인근 태국과 중국, 미국 모두에게 달갑지 않은 정권이었다. 그리하여 중국은 시하누크를 앞세워 이 정권에 대항하게 하였고 태국과 미국은 이 정권에 쫓겨 달아난 크메르루즈와 캄보디아 난민들을 지원하는 입장이 되기도 하였다. 

캄보디아의 오늘

베트남에 의해 세워진 꼭두각시 정권은 나름대로 점점 안정되어 갔다. 그러나 베트남은 미국, 중국 등의 압력에 몰려 캄보디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었고, 반면 베트남에 원조를 하던 소령의 고르바초프가 패권주의를 포기하고 개방을 표방하면서 캄보디아에서의 베트남군의 철수를 권유 1989년 베트남은 이에 응하게 되었다.
그 해 베트남군의 마지막 군대가 철수되자 캄보디아 정부는 자체적으로 SOC(State of Cambodia)로 국명을 개명하고 파리평화협정(1991)으로 UNTAC(United Nations Transitional Authority)이 창설되어질 때까지 독자적으로 통치했다. 1993년 5월, 22,000여명의 평화유지군의 감시아래 캄보디아 자유총선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시하누크의 민족연합전선(FUNCINPEC)이 훈센의 CPP (Cambodia People's Party)를 누르고 승리했지만 군 및 경찰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던 훈센과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수상직을 제1, 2로 나누어 두는 기형적인 의회제도를 갖추었고 시하누크는 그의 아들 라나리드에게 제1 수상직과 훈신펙 총재직을 물려주며 다시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실로 그가 처음 왕관을 쓴 이후 52년만의 일이었고 시하누크는 그때부터 민족화합의 상징이 되었다. 이때부터 정식 국명은 캄보디아 왕국 (Kingdom of Cambodia)으로 불려진다. 1997년 양수상의 힘의 불균형에서 온 한 차례 내전의 홍역을 치른 후, 1998년 7월 26일 총선이 실시되어 CPP가 국회의 과반수 (122석중 64석) 의석을 차지하여 다수당으로써의 면모를 일신하게 된다. 그리고 훈신펙 (43석)과 연합정부를 구성하여 라나리드가 국회의장을 맡아 그해 12월 새 정부가 공식 출범을 하였다. 그 당시 상원도 생겨 전 국회의장 (CPP) 체아심이 의장을 맡았다. 현재 경제적으로는 다소 어려움이 있으나 건국 이후 최고의 안정된 정국을 맞고 있다. 반면 크메르루즈는 1998년 후반기 정부군에 쫓겨 태국 국경근처의 알롱벵까지 밀렸고 일부 군 고위 지도자들 (12명)은 무조건 집단 투항하므로 거의 와해되었으며 잇따라 폴 포트의 죽음과 타목의 전향으로 현재는 전멸되다시피 되었으며 국제적인 여론에 밀려 현재 캄보디아 내 법정에서 폴 포트 시절의 대량학살 관련 재판이 진행중이다. 한국과의 관계는 훈센의 실용노선이 대세를 이루어 김영삼 정부시절 이미 정식국교를 맺었으며, 현재 여러 관로를 통해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지속적인 간절한 투자의 손짓을 하고 있어 가능성이 많은 이곳에의 진출을 재촉하고 있다. 하지만 충분한 연구와 돌다리도 두드려서 건넌다는 견실한 자세가 요구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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