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강의 - 자기 결정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내가 내 삶을 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9


스스로 결정짓는 삶은 이 규범의 틀 안에서 외부로부터의 강제가 없는 삶, 그리고 어떤 규범을 통용할 것인지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10


독립성은 타인에 관한 것이 아닌, 스스로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되지요.  11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 '부동의 동력(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타자를 움직이는 힘)'이 아닙니다. 컴컴한 어둠 속에 숨죽이고 앉아서 내적 드라마를 이리저리 조종하는 감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한 생각과 감정과 소망을 결정할 때에도 우리는 선행조건 없이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아무렇게나 하지는 않습니다. 이 두 번째의 의미로서의 자기 결정이라는 것은 소리 없이 일하는 난쟁이(큰 인격 안의 작은 인격)로 인한 인격의 중첩도 아니고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상상하는 일도 아닙니다. 어떻게 살 것인지 자문하게 되기까지 이미 그 이전에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일을 겪었고 수만 가지 것들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각인은 또 다른 것들을 향한 접점이 되는데, 우리는 이 접점들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고 해도 별 상관이 없는 이유는, 그 반대 또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점에 서 있는 사람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으니까요. 아무런 소망도 없고 아무런 경험의 발자취도 없다면 기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의지와 경험이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삶의 역사라는 바탕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삶의 역사가 주는 조건에 의해 제약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기 결정권이 있다고 할 때, 자기 결정권은 그러한 선제 조건들로 이루어진 인과관계적 삶이 흘러온 틀 안에서의 영향력으로만 존재합니다.  11-12


내가 매 순간마다 자신의 과거가 드리우는 그림자와 외부의 영향이 미치는 자기장 안에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자기 결정권 운운할 수 있단 말입니까?  13


나의 내면 세계가 외부와 아무리 밀접하게 얽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세계와 또 다른 하나의 세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과 소망을 주관하여 말 그대로 삶의 작가요. 그의 주체가 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사건을 단순히 맞닥뜨리거나 당하여  그 일로인한 경험에 그저 속수무책으로 압도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주체가 되는 대신에 단순히 경험이 펼쳐지는 무대가 될 수밖에 없는 삶을 가리킵니다. 자기 결정을 이해하는 것은 바로 이런 차이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13-14


우리 스스로를 테마로 삼아서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특징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이것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자신의 경험과 내적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이러한 거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인식과 이해의 거리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는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 생각과 느낌과 소망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14


자기 결정은 가능성에 대한 인지력, 즉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15


내적 거리의 두 번째 종류를 보면 자신의 경험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항상 견지해 오던 나의 사고방식에 만족하는가, 아니면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가? 나의 두려움, 시기심, 증오가 마땅한 것으로 생각되는가? 정녕  나는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이 증오심을 다시 물려주는 사람이 될 것인가? 부모님이 갖고 있던 두려움을 계속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화해와 마음의 여유를 누릴줄 아는 사람이 될 것인가? 같은 질문을 내 소망과 의지에도 똑같이 던져봅니다. 좀 더 많은 돈, 좀 더 높은 지위를 추구하는 나의 의지가 정말로 내 마음을 편하게 하는가? 낵 진정으로 화려한 삶과 요란한 성공을 좇는 사람인가? 혹시 수도원 같은 고요 속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는 유형은 아닌가?  15


자기 결정이 성공하는 경험을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그 무엇이 탄생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아상입니다. 자아상은 우리가 어떤 모습이고 싶은가에 대한 생각입니다. 지그 ㅁ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우리의 자아상과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을 때, 그리고 우리가 행위와 사고와 감정과 소망에 있어서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의 사람이 되었을 때, 그것을 자기 결정적 삶이라고 하 수있다는 것이지요. 바꿔 말하면 자기 결정이 한계에 부딪히거나 실패하는 것은 자아상과 현실 사이에 큰 간극이 존재할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


자아상의 기준이라는 것도 손댈 수 없는 신성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자아상에 허리를 굽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구속하고 노예처럼 옭아매는 생각을 과감히 던져버리는 일이 오히려 더 중요할 때도 있지요. 그리고 영향력에 대해서도 그것을 잘못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내적 구조 변경은 어느 날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하여 영혼의 연금술로 뚝딱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환경을 바꾼다든가 새로운 경험을 해본다든가 낯선 인간관계를 개척한다든가 필요할 경우 치료나 훈련을 받는다든가 등등 외적인 우회로가 많이 필요하지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인식에 있습니다. 원하는 나의 모습과 현재의 내가 너무 달라 계속해서 마음의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면 자아상뿐만 아니라 자꾸만 고개를 쳐드는 그 욕구들의 근원지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자기 결정은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과 굉장히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자기 인식은 사치품이나 뜬구름 같은 철학적 이상이 아니라 자기 결정적 삶, 더 나아가 존엄성과 행복의 구체적 조건입니다.  17-18


확실하다고 믿어오던 것들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증거를 찾아가는 동안 나는 그 확신들이 변화할 수 있는 내적 과정의 문을 열게 됩니다. 이 과정이 충분히 반복되면 내 의견의 총합이 완전히 탈바꿈하여 결과적으로 생각의 정체성이 변화하게 됩니다.... 비판적 물음을 통해서 익숙하던 생각의 패턴에서 한 발짝 거리를 두고 검증 가정을 통해 생각의 주인 자리를 찾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이 지녀온 언어적 습관과 거리를 두는 것과도 큰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또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많은 것들이 모국어를 그대로따라 함으로써 생겨나기 때문이지요.  19


경각심을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정확한 의미를 따져보는 것이고 둘째는 그것이 그 의미를 가졌다는 것을 과연 무엇을 통해 알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 자신에 대해 결정한다는 것은 사고를 조망하는 능력과 사물의 명학함을 추구하는 일 모두에 언제나 굽힘 없는 열정을 가진다는 것과 통합니다.  20


인식된 경험을 세분화하고 구체화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되지 못한 것을 의식화하는 것, 이 두 가지 방법은 우리가 언어적 발현을 통해 우리의 감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기 결정이 적용 범위를 내면으로 확장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23


경험된 과거로 말로 표현하는 우리의 능력은 그러므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집니다. 첫 번째 얼굴은 자아상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허락하는 측면입니다. 이때 자아상은 과거를 특정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나서 결국 미래를 향한 설계도를 가지 ㄴ현재에 도달한 한 사람의 초상화지요. .. 또 하나의 얼굴은 모든 자아상이 그 진위가 모호하고, 착각과 자기기만과 자기 설득으로 가득 찬 구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아상은 진실이 밝혀져 어쩔 수 없을 때나 도덕적으로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을 때 등등 때에 따라 고쳐지곤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새롭게 짜이고 앞뒤가 맞는 또 다른 정황이 생겨나며 맞지 않는 부분은 억지로 잊히고 익히 알고 있던 것이라도 새로이 윤색된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25


기억이 강력하게 압도적인 그 힘으로 어떤 의지를 자꾸만 방해하거나 무시당하고 분열된 과거가 되어 우리의 경험과 행위를 비열한 어둠 속에 꼼짝 못하게 옭아맬 때, 정신의 지하 감옥이 되고 맙니다. 오직 그들을 언어로 불러내야만 그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기억은 이야기될 때 이해 가능한 것이 되고 우리는 기억의 힘없는 희생양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기억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잊고 싶다고 해서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이러 ㄴ의미에서 볼 때 기억하는 존재로서의 우리는 자기 결정적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 결정적 존재가 되려면 일단 이해하는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즉 기억이 휘두르는 힘과 끈질김을 우리의 정신적 정체성의 표현으로 보는 법을 배우고 나면 기억은 더 이상 외부 이물질이 아니게 되어 적군으로서의 공격을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26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의 울림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사건이지요. 즉 우리 안에서 잘못된 울림을 내느 ㄴ것을 추방하고 새로운 말과 새로운 리듬을 시도해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의 소설을 끝내고 난 작가는 전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장면 중 하나는 책을 들고 말없이 소파에 앉아 아주 가끔씩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30



이제 타인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31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이유가 만일 외부 권위와 그것이 주는 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우리는 자기 결정의 상실을  경험할 것입니다. 마치 머슴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그 두려움이 내부의 권위에 대한 두려움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스스로 삼은 자기 자신의 종이 됩니다. 도덕의식과 자기 결정이 서로 공존하려면 두려움이 원인이 되어서도 안 되며 열정 없는 의무감에 의한 것이어서도 안 됩니다. 자기 결정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야 하지요.

한 가지 방법은 이성적이고 공익적인 의미를 두어서 자기 저신의 이익으로도 해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모두 도덕적 규범을 지킨다면 서로를 적대시하는 혼란 속에서보다 자기 결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이 커지므로 결국 각자에게 모두 이득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 중에는 특히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도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도덕적 친밀감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종류의 만남 안에서는 복합적이고 깊은 도덕적 감수성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서로를 이용하기만 하려는 적수들 사이에서는 불가능한 관계입니다. 도덕적 친밀감이 있는 만남에서는 분노와 원망, 도덕적 수치심, 후회 같은 감정도 일어나긴 하지만 또한 의리나 상대방의 도덕적 숭고함에 대한 감탄 같은 감정도 일어납니다. 이러한 감정들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 단순히 사회적 게임을 같이하는 냉정한 동반자였다면 절대 될 수 없는 중요한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에게 중요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중요한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도덕적 감정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적으로 던지기 때문이지요. 이 질문은 자기 결정에 관한 문제가 나왔을 때 우리를 읶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도덕적 친밀감은 비판적인 내적 거리를 자기 자신에게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유지하는 인간관계입니다.  32-34


프랑스의 모럴리스트인 라브뤼예르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외부에서 행복을 찾는 데에 그치지 않고 굴종적이고 올바르지 않으며 정의와는 동떨어진, 미움과 정횡과 편견으로 가득찬 인간들의 판단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대체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그가 이 글을 쓴 것은 아카데미 프랑세즈로부터 세번째로 입회를 거부당했을 때였습니다. 그가 말한 것은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으 ㄹ하는지에 대해 타인의 칭찬과 확인을 받고 싶어 하는 소망이었죠. 이것은 매력적이고도 위험한 욕구입니다. 인생에서 너무 일찍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어느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자기 자신을 크게 놓쳐버린 느낌을 받는 그런 삶을 살게 되지요.  35


타인이 휘두르는 그러한 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35


자기 결정적으로 발전해나가는 일은 타인의 시선을 맞닥뜨리고 그에 맞설 때만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가장 쉬운 방법은, 외부러부터의 모든 시선을 독립적인 정신적 정체성으로 되받아치는 것입니다. .. 타인의 시서노가의 대결이 자기 결정적인 성질을 띠려면 자기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묻고 또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

내가 가진 것 중 나는 보지 못하지만 타인은 볼 수 있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타인의 시선은 나의 자기기만을 발견하는가? .. 이러한 자아 확인에도 우리가 거리를 둬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바로 라브뤼예르가 꼬집었던 것으로, 타인은 어디까지나 타인에 불과하며 그들이 우리를 평가할 때 우리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오직 그들만의 문제인 수만 가지 요인에 의해 그 평가가 왜곡되고 부정적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결정적 삶은 이러한 낯섦도 견뎌낸다는 것을 뜻합니다.  36-37


자기 생을 스스로 이끌어나가고자 하는 욕구는 타인에게 조종당하지 않으려는 욕구와도 일치합니다. ..

조종은 계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여기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몇 가지 예가 있습니다. 최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주입되는 광고, 속임수, 정보의 차단, 사람의 감정을 비열하게 이용하는 행위, 그 어떤 생각의 형성도 못 하게 만드는 세뇌 작업등입니다.

조종이 악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자아상에 의해 걸러지지 못하는 영향력이며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가진 자아상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내적 상처를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독립적인 인격체로서의 우리는 무시당합니다. 제대로 된 독ㄹ비적인 인격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것은 존엄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가혹한 행위입니다. 

가장 비열한 것은 겉으로 바서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세간에서 통용되거나 심지어는 높이 평가받는 장면이나 은유, 미사여구의 공식 등을 통한 은밀한 조종입니다. 세계와 우리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 중에느 ㄴ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자아상과 자기 결정적 삶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방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텔레비전, 신문, 정치적 연설 같은 것들이 이런 방식의 이야기들로 넘쳐나 수없이 많은 생각의 들러리들을 양산하지요.

그것에 대항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깨어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물을 서술하는 데에 이 방식이 정말로 옳은 방식인가? 내가 생각하며 느끼는 방식과 정확히 일치하는가? 막강한 권위에 의해 제정된 요란한 공식이 띠는 당위성이 지극히 당연하게 다가올수록 우리는 더욱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하고 잇는 자신만의 목소리이며 참됨과 독창성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37-38


제가 원하는 문화는 조금 더 잔잔한 소리가 지배하는 문화,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도움을 받는 고요함의 문화입니다. 오직 그것이 최우선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그런 문화 말이에요.  39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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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왜?"라고 묻고 생각하게 하는 교육, 그것이 하브루타다.



추천사 


생각하며 말하는 하브루타가 자녀를 최고로 만든다 - 류태영(농촌, 청소년미래재단 이사장)


유대인 아버지들은 퇴근을 하면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집안일도 많이 한다. 대신 가정에서 아버지의 자리는 확고하며 가족 모두가 아버지의 권위를 존중한다... 

유대인 교육의 일차 교사는 아버지다...

탈무드는 "아들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사람은 시내산에서 직접 받은 것처럼 실감나게 가르쳐야 한다. 자손에게 그것을 그대로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가정은 인체의 '배꼽'..

유대인 부모들이 일찍부터 대화를 통한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는 창의성을 기르기 위해서이다. 대화를 나눔으로써 자유로운 사고를 하게 만들고, 그런 유연성이 창의적인 능력과 논리성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6-7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 - 김성묵(누란노 아버지학교 대표)


삶으로 가르친 것만이 남는 법이다.  8




프롤로그


가장 큰 힘은 가정에 있다.  14


하브루타란 '짝을 지어 질문하고 대화하고 토론하고 논쟁하는것'을 말한다.  17




유대인은 자녀의 교육을 무엇보다 우선한다. 

자녀를 교육시키는 일이 하나님에 대한 부모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28


부지런히 가르친다는 것은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31


적극적인 의미로는 자녀와 함께 있을 기회를 만들어 가르치라는 뜻이다..

'가르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샤난'의 어원적 으미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날카롭게 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반복하다'이다. ..

전통적인 교육 방법을 철저히 지켜오고 있는 정통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학교를 '예시바'라고 부른다. '예시바'는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서 말로 서로를 가르치는 전통적인 교육 기관이다.

" 이 말씀을 강론하라."에서 강론하라의 원어는 '디베르'이다. 이것은 '그것들에 관해 말하라, 이야기를 나누라'는 뜻이다. 이 동사는 규격을 갖춘 분위기에서의 강론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 속에서 나누는 대화를 의미한다.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종의 무의도적 교육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에서 '강론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디베르'는 어원적으로 일상적인 삶 속에서 나누는 대화를 의미한다.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에서 '강론'을 그대로 풀면 '가르치고 토론하라'는 것이다. 영어로는 'talk about'이다. 말 그대로 이야기를 나누라는 것이다.  32-33


유대인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우리와 매우 다르다. 가정이나 사회생활에서 남녀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 아버지는 직장에서 일을 마치면 바로 퇴근해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 또 가정에서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에는 독서를 하면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게 한다.  .. 

한국인의 경우, 아이 스스로 생각하거나 결정하지 않고 오로지 부모의 지시에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단시간에 빠른 학습효과를 거두지만 스스로 사고하지 않고 공부하기 때문에 창의성이 부족하고 남의 지시 없이는 공부하지 못한다. 또한 스스로 답을 찾지 않고 누군가가 자신의 질문에 대해 설명해주기를 바란다.  35


유대인 아버지는 안식일에 아이들과 식탁에 앉아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필요한 경우 한 명씩 따로 불러 대화를 나눈다.  36


탈무드는 '무엇'을 사고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를 가르친다.  38


비판적인 사고력이 있으면 정보를 능숙하게 파악하고 그 정보가 어느 정도 중요한지를 알 수 있게 되어 정보의 진정한 가치를 평가할 수 있게 된다.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은 새로운 발견과 진보를 이뤄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힘은 토론을 통해서 가장 잘 기를 수 있다. 토론에 필요한 자료를 준비하면서 어마어마한 정보의 양에 압도될 수 있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읽는 기술이 필요하다. 

무엇을 읽을 때 이 정보가 믿을만한 것인지, 토론 주제에 적절한 것인지 등 많은 판단을 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보를 골라내는 안목이 길러진다. 정보가 옳고 그른지를 구분하는 능력은 비판적인 듣기도 가능하게 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어떻게 반박을 해야 하는지, 논리적인 허점은 무엇인지를 파악하면서 듣게 되기 때문이다.  40


유대인 아버지들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언어를 자식에게 가르친다. 자신은 히브리어를 못하고, 토라나 탈무드를 히브리어로 못 읽으면서 아들은 유대인 학교나 회당에 보내어 히브리어를 배우게 하지 않는다.  43


유대인 아버지의 이중 언어 교육 방법은 우리 조상들이 자녀에게 한자를 가르쳤던 방법과 일치한다. 우선, 우리 조상들도 기본적으로 시험을 보기 위해 한자를 배운 것이 아니라 성현의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기 위해 글을 배웠다. 둘째, 아버지 본인이 한자를 알고 자녀에게 가르쳤지 본인은 못 하면서 다른 교육자들에게 의존하지 않았다. 셋째, 유교경전이라는 하나의 일관된 주제로 교육했지 이것저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천자문을 떼고, 소학이나 명심보감을 공부하고, 사서삼경으로 들어갔다. 주제는 충효를 기본으로 하는 유교적인 삶의 원리였고 경전의 수준이 올라가면서 사고와 이해의 폭이 깊어졌다. 넷째, 아이라고 쉬운 것만 가르치지 않고 쉬운 글자만 가르치지 않았다. 원문을 그대로 가르치며 이해가 어려운 부분은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44-45


그들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교육법은 '왜?'라는 질문이 끊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49


부모에게 가장 끔찍한 복수는 부모를 직접 살해하는 존속살해일 것이다. 그런데 전체 살인사건 중 존속살해 비율은 6.3%로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미국이 2% 정도이고 영국이 1% 정도로 영국의 6배, 미국의 3배가 넘는다.  52


복수를 당하는 것과 일방적인 피해를 당하는 것의 차이는 원인을 제공했느냐 아니냐의 차이이다. 부모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피해를 당하는 것이지 복수를 당하는 것이 아니다. 복수를 당하는 메커니즘에는 무의식이 있다.  53


한 개의 뇌세포는 수천 개의 다른 뇌세포와 연결되는데 뇌세포가 서로 연결되는 이 과정은 외부 자극에 반응하면서 진행된다. 이를 '신경 가소성'이라고 한다. 뇌세포간의 연결은 외부 자극에 따라 변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초기 3년 동안 뇌에 저장되는 것이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우리 마음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런 무의식은 그 사람의 성격이 된다....

아이의 뇌는 일정한 단계를 거쳐 일정한 과정에 따라 발달한다. 그 발달 과정을 뛰어넘거나 거스르는 것은 뇌에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54


관심을 가지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에 조금만 도와주면 아이는 쉽게 그것들을 성취한다... 성취감과 자신감을 갖게 된 아이의 뇌에는 긍정적 정서가 무의식으로 형성된다. ..

부모와 자녀의 사이가 좋지 않으면 결코 공부를 잘할 수 없다.  55


지금 한국 부모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자녀와 자신을 구분하는 것이다.  56


부모는 자녀에게 다양한 정보를 주고 선택에 도움을 주는 여러 가지 길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최종 결정은 자녀가 해야 한다. 대부분의 아버지는 자신의 회사에 성적이 좋은 자보다 성격이 좋은 사람이 들어오기를 바란다. 그런데 자녀에 대해서는 성적을 높이는 데 초점을 둘 뿐 성격 좋은 사람으로 키우지 않는다. 이런 이율 배반을 바로 보는 것, 그것이 자녀 교육의 출발이다.  57


정신과 의사들이 정신장애를 가져오는 부모의 양육 태도로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낮은 돌봄'과 과잉보호'다. 낮은 돌봄은 사랑을 주지 않는 것이고 과잉보호는 사랑을 넘치게 주는 것이다...

자녀는 사라오가 더불어 돌봄을 원한다. 구체적으로 안아주고, 보살펴주고 위로해주고, 보호해주기를 바란다.  58


과잉보호가 적고 돌봄이 많은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과잉보호만 있고 돌봄이 적은 것이 가장 나쁜 영향을 미친다. 또한 과잉보호보다는 돌봄의 부족이 그 자녀의 병리에 더 나쁜 영향을 미친다. 돌봄의 부족이란 곧 무관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59


자녀를 다른 사람이나 기관에게 맡기는 모든 것이 낮은 돌봄이다.  60


의무감이 아닌 진심으로 이렇게 아버지가 가정에서 환대받는 가정은 극히 드물다.  61


시간이 없고 자녀와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잘 모르는 아버지들이 가장 쉽게 선택하는 것이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 방법이다. 아이가 사달라고하는 장난감을 사주고, 아이가 가고 싶어 하는 놀이공원에 데리고 간다. 하지만 그것은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통할지 모르지만 그 이후로는 거의 말조차 통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63


부모는 반드시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64


중요한 것은 시간의 양이 아니라 질이다.  66


자녀와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랑과 관심을 기울이고 함께 교감을 나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67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공부하고, 자녀는 자녀대로 공부하면서 거의 전문가 수준의 논쟁이 된다.  73


최고의 육아는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에 있다. 아이는 부모와의 시간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안목과 구조를 익힌다. 특히 아버지의 시선을 통해 사회를 읽는다...

아이에 대해 잘 알아야 대화와 토론이 가능하다. 아이에 대해서 모르면 대화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76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기보다는 시행착오를 통해 점점 나아지겠다는 태도가 중요하다. 어떤 한 방법을 배워서 실천할 것이 아니라 아이의 변화를 계속 살피고 알아가면서 그에 맞추어 변해가야 한다.  77


우리가 볼 때 분명히 체벌을 해야 할 상황에서도 유대인 아버지는 소리를 높이지 않고 아이와 대화를 나눈다.  78


아버지가 되었지만 아버지 역할을 배운 적이 없고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제대로 된 양육을 받아 본 일이 없어 저절로 겉돈다.  81


게임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86


인간은 장기간에 걸쳐서 보호받고 양육된다. 그 덕에 아이들은 기본적인 운동 능력을 점진적으로 익힐 수 있고, 나중에 독립해서 부딪히게 될 많은 난관과 해결책을 미리 탐색할 수 있다.  87


아이는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가 어렵다.  89


아이가 직접 체험하고 생각하고 행동한 것만 아이 것이 된다.  92


아이와 집에 있을 때 아이의 사고력을 자극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아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함께 즐기면 된다.  93


먼저 몸으로 가까워진 후 진심이 자녀에게 전달되어야 마음이 열린다. 관계성만 회복하면 그 다음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있다.  95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하고 사소한 갈등이 있어도 대화로 풀어온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갈등 자체에 대해서 그다지 겁먹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수정할 수 있는 사회성 좋은 어른이 된다.  97


공룡이라는 단어는 못써도 공룡을 그리고 설명할 수 있게 키운다... 

체험, 협동, 토론을 통해 교육한다. 직접 하게 하고, 함께하게 하고, 의논하면서 하게 한다.  99


아이가 자라면 자기가 하는 짓이 잘못된 것인 줄 스스로 안다.  102


유대인의 경우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예시바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예시바에서 토라와 탈무드를 가지고 하루 15시간씩 공부하고 그중 10시간 이상을 하브루타로 공부한다.  104


책을 많이 읽는다고 언어의 의미를 파악해낼 수 있는 힘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언어의 의미를 가지고 따져보면서 깊이 있게 공부해야 가능하다.  105


책 읽기는 사랑하는 부모의 품이나 무픔에 안겨 있는 상태에서 시작한다. 부모의 품에서 보호받고 사랑받으면서 이야기를 듣는 일은 아이들에게 독서가 사랑과 연관되어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책을 읽어주는 것은 아이에게 일찍 문자를 깨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일찍부터 '듣기' 자극을 주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마이엘린에 있다. 마이엘린은 신경세포 축색돌기를 둘러싸고 있는 지방질의 백색 피막이다. 전선이 플라스틱 피복에 둘러싸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이엘린은 신경 세포를 둘러싸서 뉴런을 통해 전달되는 전기신호가 누출되거나 흩어지지 않게 보호한다. 뇌의 각 신경세포는 성장 단계에 따라 영역별로 마이엘린화를 거치고 이 과정을 통해 기능이 발달하는데, 일반적으로 마이엘린화 되었다는 것은 그 부분이 잘 발달했다는 의미이다.

책 읽기는 다양한 정보원, 특히 시각 영역과 청각, 언어 및 개념 영역을 연결하고 통합할 수 있는 뇌의 능력에 의존한다. 이러한 통합은 각 부위와 그 연합 영역의 성숙도, 이 부위들을 연결하고 통합시키는 속도에 의존한다. 그러한 영역의 성숙도, 이 부위들을 열결하고 통합시키는 속도에 의존한다. 그러한 속도는 다시 뉴런 축색의 마이엘린화에 따라 달라진다. 축색 주위를 감싼 마이엘린이 많을수록 뉴런이 전기신호를 빨리 전달할 수 있다.

마이엘린의 성장은 각 부위마다 약간씩 다른 발달 순서로 진행된다. 예를 들어 청각신경은 임신 6개월째 마이엘린화 되고, 시신경은 생후 6개월이 되어야 마이엘린화 된다. 사람은 다섯 살이 되기 전 감각 및 운동 부위가 모두 마이엘린화 되고 독립적으로 기능하게 된다. 각회와 같이 시각 언어 및 청각 정보를 빠른 속도로 통합시키는 주요 뇌 부위들은 다섯 살이 지나도 완전히 마이엘린화 되지 않는다.

청각 신경이 가장 먼저 마이엘린화 되고 글을 깨우치는 부분은 훨씬 뒤에 천천히 발달한다는 것은 아이에게 '듣기' 자극이 가장 효과적이며 자연스럽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태교에서 태담이 중요하며 유대인의 베갯머리 교육이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107-108


부모가 책을 읽어준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스토리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이 무엇을 하려는지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어디인지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 포함된다. 또 아이는 부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상하거나 궁금한 것들을 질문한다.  109


책을 읽거나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 내용을 가지고 질문하고 대화하는 것이다.  110


즐겁게 공감하면서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눈다. 아이에게 책을 읽는 주도권을 준다...

미국 명문고인 제퍼슨고등학교는 SAT시험 1위를 하는 학교다. 그 비법은 무엇일까? 바로 OR(Outside Reading)프로그램이다. 매일 읽은 책에 대한 작문을 꾸준히 하며 자신이 직접 정리하는 것이다. 독서를 한 후 자신의 여려 가지 생각을 작문하는 것은 모든 과목의 기반이 될 수 있다...

학생들은 평소 주야장천 책만 읽는다. 수업 때는 말만 한다.  111


토론과 논쟁은 어떤 객관적인 사실에 대해서도 질문하게 만든다. 당연한 것까지도 뒤집어 생각하게 한다. 상대방의 의견과는 다른 나만의 견해를 가져야 토론이 가능하다. 일반적인 상식을 가지고는 토론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래서 하브루타는 나만의 생각, 새로운 생각, 남과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든다.  117


질문이 좋아야 토론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질문이 좋아야 생각을 날카롭게 할 수 있다.  118


119



탈무드 논쟁의 원리를 참고해 하브루타에 적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원리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 하브루타는 질문이 핵심이다. 아이에게 지시나 요구, 설명을 하기보다는 질문을 많이 한다...

유대인 부모들은 학교에 다녀온 아이들에게 다른 것을 묻는다. "오늘 선생님에게 무슨 질문을 했니?"..

유대인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때 "선생님께 질문을 많이 해라."라고 말한다. 즉, 많이 떠들고 오라는 것이다.


둘, 틀린 답을 말해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고 다시 질문으로 답한다...유대인 학교 교실은 항상 시끄럽다.


셋, 하브루타를 하기 전에 충분히 내용에 대해 알게 한다.

유대인들이 토론 수업이 가능한 이유는 공부할 내용을 집에서 충분히 공부해오기 때문이다.


넷, 아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게 한다.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도록 이끈다. 그들은 수많은 대화와 토론을 통해 자신이 잘하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고 그것을 스스로 지향한다.  123


다섯, 하브루타는 사고력 신장이 목적이다. 뭔가를 외우고 알게 하는 것보다 뇌를 자극해 사고력을 높여 안목과 통찰력, 비판적 사고력을 길러주는 것이 목적이다.

하브루타의 가장 큰 목적은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데 있다...

교육에서 어떤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많은 정보를 머리에 넣고 있다고 뛰어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고 방법이며, 사고력이고, 상상력이고, 창조력이다.


여섯, 질문하고 대화할 때는 집중해서 눈을 보고, 그 어떤 대답도 막지 않고 수용 한다.

유대인들은 토론하는 동안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또 나의 의견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서로의 견해가 어떤 것이 다르고 어떤 것은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과정에 더 중요성을 둔다. 그러는 중에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를 배우고 결론이 나지 않거나 둘이 해결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는 랍비나 교사의 도움을 받는다. 우리는 이기고 설득시키기 위해 논쟁하지만 유대인들은 나를 발전시키고 성숙하기 위해 논쟁한다.


일곱, 대답에서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칭찬한다.

칭찬은 구체성을 띄어야 효과가 있다. 아이들은 진심이 담기지 않은 칭찬이나 거짓된 사과를 얼마든지 눈치챌 수 있다. 진실한 것에 기초한 칭찬이어야 한다...

칭찬의 가장 중요한 법칙은 성격과 인격에 대해 칭찬하지 말고 꼭 아이의 노력과 노력을 통해 얻어진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칭찬하는 것이다. 아이는 구체적으로 칭찬을 받으면 그것을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덟, 남과 다르게 생각하도록 격려한다.

정답은 정해진 옳은 답을 말하고, 해답은 풀어낸 답을 말한다. 정답은 대부분 하나이고 해답은 각자가 풀어낸 답으로 다양한다...

다양한 해답, 나만의 해답, 서로 다른 해답을 요구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아홉, 모르는 것은 책을 다시 보거나 인터넷을 검색하는 등 스스로 찾아보게 한다.

아이가 질문을 하면 질문으로 답해서 아이가 깊은 생각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이가 몰라서 질문하는 경우도 있지만 부모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거나 같이 놀고 싶은 경우도 있다. 그 시간은 충분히 아이의 눈높이에서 즐겁게 놀아주어야 한다.


열, 많은 내용을 하브루타 하기보다는 하나의 내용을 깊이 있고 길게 하브루타 하는 것이 좋다.

책을 많이 읽고 지식을 쌓는 것보다 책을 깊이 읽고 사고하는 것을 강조한다. 

하브루타는 진도가 아니라 심도이다. 깊이 있는 노의를 하기 위해서는 매우 다양한 질문들을 한 문장 한 문장에서 뽑아낼 줄 알아야 한다. 그런 훈련 없이 하브루타 학습이 성공할 수 없다. 잡담만 하다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열하나, 다소 어려운 내용도 쉬운 용어로 질문해 생각하게 하는 것이 좋다.

유대인은 부모든 교사든 답을 잘 가르쳐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이 몰라서가 아니라 그 기회를 통해 학생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다. 그 과정에 함께 참여해 안내자 역할을 하는 것이 자신들의 본분이라고 생각한다.


열둘, 모든 일상 속에서 하브루타를 하되 시간을 정해서 정기적으로 한다.


열셋, 집에서 하는 경우 잠들기 전이 하브루타를 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다. 

자녀들을 재우기 직전의 시간은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이 시간은 부모가 자녀를 침대에 누이고, 잠들 때까지 함께 있어주는 시간이다. 가족에게 투자하는 시간이고,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시간이다.


열넷, 나이가 어리더라도 쟁점을 만들어 토론과 논쟁으로 끌고 가는 것이 뇌를 계발하는 방법이다.

짝을 지어 질문하고 대화, 토론, 논쟁하는 하브루타의 가장 수준 높은 단계는 '논쟁'이다. 논쟁은 쟁점을 두고 반대되는 두 입장이 다투는 것을 말한다... 흔히 요즘은 논쟁과 토론이란 용어를 쓰지 않고 디베이트(debate)란 용어를 직접 쓰기도 한다.

디베이트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논제에 대해 격식을 갖춰 논의하는 것'을 의미하며 일정한 형식을 전제한다. .. 찬성과 반대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해서 참가자들이 둘로 나뉘어 정해진 순서와 시간에 맞추어 토론한다.


열다섯, 꼭 가르쳐야 하는 원칙이나 가치관은 대화를 통해 분명하게 인지하게 한다.  121-130



자녀 경제교육에 있어 쓰는 법부터 가르친다.

유대인의 돈 쓰는 법은 다름 아닌 자선활동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193


자녀에게 경제교육을 할 때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불로소득을 없애는 일이다.  196


물건 값을깎는 방법은 첫째로 가게 주인에게 그 물건을 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둘째로 물건의 힘집을 발견하고 값을 제안하는 것이다. 셋째로 발품을 팔아 다른 가게와 가격 비교를 통해 물건을 깎는 것이다.  198


"너의 생각은 어떠니?(마따 호셰프, What do you think about it?)"  228


그들은 "수줍어하는 사람은 배울 수 없다."라고 말한다.  239


공부를 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지 진도를 나가는 것이 아니다.  240


자녀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애착의 형성이다. 애착을 형성하려면 반드시 부모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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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사진미학>은 사진 저편의 숨은 이야기를 말하는 책이다.  4


찍는 것과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 찍기는 쉬지만 표현하기는 어렵다.  5




한 장의 사진을 보다


전면을 통해서 초상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초상사진의 전면성(前面性 앞전 낱면 성품성). 이것을 우리는 파사드(facade)라고 부른다.

파사드는 건축에서 쓰이는 말로 건축의 중심, 퍼스펙티브의 중심을 의미한다.  13


사진에서 파사드라는 말은 전면을 통해서 대상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특별한 초상사진일 경우에만 쓴다... 

정면은 물리적인 방향을, 전면은 심리적인 형상을 의미한다. 또 정면이 모델과 카메라 앵그로가의 관계라면, 전면은 모델과 관객의 시선과의 관계이다.  14


사진가가 단순히 카메라를 향해 정면으로 설 것을 요구했다면 정면성의 사진이 되기 쉽다. 그러나 사진가가 인물의 전면에서 무언가를 읽고 찍었다면 전면성의 사진이 된다. 기념사진의 경우도 단순히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정면성의 사진이 되지만 인물들 개개의 특징이 드러나도록 찍었다면 전면성의 사진이 되는 것이다.  15-16


"자신을 찍어 보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찍을 수 있지?"  21


사진의 주요 형식에는 구성과 조형이 이싿. 이 두가지 요소는 비슷하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먼저 구성(composition)은 화면 안 즉, 프레임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각적 형식이다. 이에 비해 조형(modeling)은 화면 밖, 즉 카메라 밖에서 이루어지는 시각적 형식이다. 그러므로 구성과 조형의 가장 큰 차이는 촬영 이전이냐 이후이냐이다.  25


조형의 기초가 되고, 해체의 근간이 되는 해석이란 무엇일까? .. 페르낭 레제는 "스스로의 조형적 아름다움 속에서 피사체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레제가 '스스로'를 강조하는 개인적이고 자율적인 조형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사진에 대입하면 진정한 사진의 형식은 주어진 구성에서 벗어나는 것, "자신에게 적합한 시점을 획득하는 것"이 된다. 고정불변의 규칙들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형식이라는 말이다.  27-28


영화감독 마야 데렌은 구축의 형식과 해체의 형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구축의 형식은 사물을 조망하는 도구(카메라의 프레임)에서 파생되고, 해체의 형식은 조망된 이미지가 개인적인 경험과 관계된 철학과 정서 속에서 일체화된다."  28


에로티시즘은 정신적 관능이 육체를 통해서 발현될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34


* 예술누드 - 미학은 안으로 정신과 영혼을, 그리고 밖으로 미의 형식과 표현을 다루는 철학이다... 미학이 예술누드에 부여한 품격과 숭고함은 무엇보다 정신의 관능이다.  35


사진의 깊이는 보는 자의 호흡에 의해 결정된다. 깊은 화면은 긴 호흡에서 나오고, 얕은 화면은 짧은 호흡에서 만들어진다.  49


세상이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고, 기계적인 눈이 인간의 눈을 침범하지 않았을 때, 그리고 고층빌딩이 인간의 시선을 가로막지 않았을 때 우리는 언제나 롱 테이크, 롱 디스턴스의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지평선 저 너머로 사라져 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었고, 저 멀리로 점점 작아져 가는 인간의 형상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망원렌즈와 줌렌즈, 그리고 하늘로 치솟는 고층건물에게 그것들을 빼앗겨버렸다. 주변보다는 중심이 강조되고, 상황보다는 대상이 강조되는 사진들이 우리 주변에 확산되면서 우리는 깊은 숨쉬기, 길은 거리감을 박탈당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얕은 숨쉬기, 얕은 거리감에 그저 질식당했던 것이다.  52


사진의 형상은 결국 초덤을 어디에 두느냐 혹은 어떻게 선책하느냐에 달려 있다. 눈과 달리 중요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지 않을 수도 있으며, 부분을 의도적으로 흐리게 할 수도 있고, 또 전체를 선명히 할 수도 있다.  56


초점이 맞았기에 형상이 존재하고, 형상이 있기에 시선을 받는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물을 본다는 것은 거리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거리가 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초점이 존재한다는 말이며, 또 초점이 있어야 형상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형상은 곧 시선을 유도하는 '보는' 행위이자 사물이 드러나는 '보이는' 양태이다. 형상과 시선에 의해 사물은 존재성을 가지게 되며, 결국 인간의 감정을 이끌게 된다.  57


초점 안에 있으면 인포커스(in focus)라고 하고, 초점 밖에 있으면 아웃포커스(out of focus)라고 한다.  62


보인다고 해서 모두 읽히는 것이 아니듯이, 보아야 할 것이 적어질수록 때론 말해지는 것도 있는 법이다.  64


사진은 참의 리얼리티를 잃지 않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디지털은 새로운 표현을 확장해야 한다.  76


사진은 기억의 이미지가 아니라 존재의 이미지이다. 이미지의 기억은 잔상이고 파편이다.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변할 수 있지만 존재의 이미지는 변하지 않는다. 또한 일시적 기억을 위한 이미지는 늘 밖으로 시간을 토하고 지우지만, 존재의 이미지는 언제나 시간을 삼키면서 시간 속에 산다. 사진은 영속적인 시간의 이미지이다. ..

사진과 디지털의 만남은 서로 약한 부분, 강한 부분을 보태고 나누는 데 의의가 있다. 사진은 바로 그것, 사물 그 자체를 지시하는 존재의 이미지이다. 디지털 프로세싱은 보다 쉽고 편리하게, 또 효과적으로 삶의 리얼리티를 발현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77





한 장의 사진을 읽다


우리는 순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고 말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으며, 한순간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고도 한다. 결국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다는 것일까. 정지된 역사 속에서 실존했다는 증거인가. 과거에 있었던 무언가를 확증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부재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 대한 경의인가. 아마도 이 모든 것이리라.  91-92


'가까이 더 가까이 감동되어 셔터를 누르면 어둠이 가득한 자궁 속에서 정자와 난자가 만나 한 생명을 잉태하듯이 한순간의 빛과 만나 필름에 그 피사체의 감동이 잉태되는 것이다. 잉태된 생명이 10개월의 임신 기간을 거쳐 태어나듯이, 한 장의 사진도 필름에 잠상이 맺혀 현상되기까지의 현상 시간을 거쳐 마침내 태어난다.' - 최광호 <나는 사진이다> 중에서  95


안도현 시인의 <사진첩>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추억이란 존재의 뿌리이다..."  100


타인의 사진을 본다는 것은 사진을 찍은 작가의 본래 의도를 분석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이다.  110


* 가다머 해석학 - 가다머는 사진의 수준, 내용, 의미, 가치는 사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알려고 노력하는 그림자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했다.  113


정치적 풍경(political landscape)이란 .. 언뜻 보았을 때 자연풍경, 현실풍경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강한 정치적 동기, 정치적 의도를 내재한 인공적 혹은 가공적인 풍경이라는 것이다.  122


정치적 풍경의 특징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주 아름답거나 어떤 면에서는 달콤한 풍경사진일 경우가 많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사진 속의 '기둥' 자체는 정치를 상징하지 않기 때문에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은 정치적인 것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사진이 정치적인 풍경사진이라고 알아차리기 어렵다. 즉 정치적 업적을 상징하는 흰 기둥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가둬짐으로써 상징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대한민국 곳곳이 공사 중이고 건설 중이다. 다리, 건물, 도로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오늘날 대부분의 공공 건축물, 건축 구조물은 정치적 상징성을 띠는 정치적 풍경이다. 마찬가지로 사진 속에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는 기둥이지만 정치적 동기에 의해 세워지고, 또 드러나지 않지만 정치적 목적으로 건설되고 있다는 사실을 장대한 구조물, 어둠 속엣 명명하는 교각이 말하고 있다.  123-124


* 사진의 정치성 - 사진의 권력은 대중들의 절대적 믿음에서 생겨났다. 발명 순간부터 사람들은 '사진은 거짓말하지 않느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말보다 사진을 믿었기에 이를 역이용한 정치적 사진들이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기생해 왔다. 독재정권을 위한 조작된 홍보용 사진,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날조된 사진, 실재 이상으로 과장되게 연출한 선전용 사진. 지금도 정치 집단 혹은 행정 집단이 실적주의, 성과주의, 여론 고취를 위해 이런 사진들을 부단히 활용한다. 이와는 반대로 다른 맥락의 정치적 사진이 있다. 완전히 다른 입장에서 정치적 소재들을 활용하여 사회를 비판, 고발, 폭로하는 사진이다.  125


* 프레임 - 프레임에는 물리적인 프레임과 심리적인 프레임이 있다. 물리적인 프레임은 구성, 구도를 위한 파인더, 이미지 틀, 액자의 특이다. 대개 표현을 위한 물리적인 틀이다. 가장 오래된 프레임은 바늘구멍(pinhole, 원형)이다. 암상자(camera obscura) 소에서 세사을 보면 동그랗다. 이런 구형의 프레임이 점차 정사각형, 직사각형 모습으로 변해 갔다. 반면에 심리적인 프레임은 의미의 프레임이다. 보이지 않는 인식의 그릇과 같다. 물리적 프레임 못지 않게 중요한 프레임이다. 콘셉트와 의도는 심리적 프레임이다. 사진의 힘은 프레임에서 나온다.  131


들뢰즈는 추상에 대한 새로운 사유 방식을 요구하면서, 추상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진정한 추상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고, 또 그래야만 추상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으며, 진정한 추상을 창조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추상이 "구상적이지 않다, 서술적이지 않다, 자연적이지 않다, 문학적이지 않다"라는 말에 반대하며, 추상은 구상의 반대도, 구상과의 단절도 아닌, 구상의 혼성과 중첩일 뿐이라는 논리를 편다. 실제로 카메라를 통해서 추상을 표현할 때는 들뢰즈의 말처럼 추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요구된다. 추상을 구체적인 형상을 지운 것, 혹은 구체적인 내용을 걷어낸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진정한 추상을 만나기도, 형상화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진정한 추상사진은 추상회화처럼 조형의 기교가 아니다. 형상이 부재하거나 결여된 것은 더욱 아니다. 추상사진은 들뢰즈가 추상론에서 말했듯이 구체적인 형상에 대한 '아니오'가 아니라. 구체적인 형상에 끊임없이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를 반복해 가는 것이다.  133-134


들뢰즈는 "에너지가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사물)는 근본적으로 추상이다. 그들은 무(無 없을무) 구속적이고, 탈(脫 벗을탈) 중심적이다. 그것은 개연성 없이 우연히, 형식 없이 작동하는 순수한 자율성이다."  134-135


* 들뢰즈의 추상론 - 한마디로 형태의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관념적, 인식론적 추상이다.  137





한 장의 사진을 느끼다


사진을 알게 되면 처음엔 누구나 사지능로 세상을 보게 된다. 그것은 일찍이 보지 못한 세상,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다...

사진을 알기 전에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감상할 수 있었는데, 사진을 알고부터는 오로지 사진적으로만 세상을 보려고 한다. 

이미지의 노예, 사진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153


피사체가 스스로 말하는 사진이다. 이런 사진은 이미지의 노예에서, 사진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진정 사무로가 순수한 대화가 이루어졌을 때 가능하다.  155


사물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그것을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운 것이다. 이런 것이 사진의 참 의미가 아닌가 한다. 무언의 사물과 말한다는 것, 그러니까 말없는 사물들에 다가서고, 귀 기울이고, 그리고 사진을 통해 인식의 통로를 여는 것, 이것이 사진의 또 다른 아름다움이자 매력이다. 물론 아무나 할 수 없다. 오로지순수한 눈과 마음을 지닌 작가만이 할 수 있다.  156


* 기억회로 - 사진은 기억을 재생시킬 뿐, 사건 그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기록보다 우선하는 것이 '알아봄'이다.  


풍경이 사진가에게 한 장만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만큼 긴 호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풍겨을 여러 장 똑같이 찍었다는 말은 풍경과 호흡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186


풍경은 아무나 다가가서 찍을 수 있는 대상이지만 풍경과 함께 호흡하지 못하거나 그 속으로 풍덩 빠져들지 못하면 그 풍경 사진은 단순 복제에 불과하다.  187


* 힐링 포토 - 치유에 활용되는 사진은 대개 고요한 풍경사진, 그 가운데서도 흑백사진이다... 흑백사진이 좋다는 것은 현실의 색을 제거해서 요란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189


소쉬르라는 언어학자가 평생을 두고 고민했던 것은 언어의 자의성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언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언어의 진정성을 규정짓기가 매우 어려웠다는 말이다. 각기 다른 삶을 경험하고, 처해 있는 상황도 다르기 때문에 같은 말도 저마다 다르게 표기하고 해석해 버림으로써 의미의 혼란, 해석의 실종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판단이 사람들의 인식의 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각각이 경험한 삶의 리얼리티가 다르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람드이 현실을 인식하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삶의 차이가 현실을 인식하는 차이로 나타나고, 현실을 인식하는 차이가 세상을 해석하는 차이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맨 먼저 알게 된다. 그 점에서 우리가 쓰는 언어란 삶의 리얼리티라고 말할 수 있고 그 리얼리티의 차이가 곧바로 사진의 차이, 감상의 차이, 해석의 차이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진을 보는 관객이 저마다의 리얼리티에 따라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 과정에서 다행히 작가와 관객이 같은 리얼리티를 공유하고 있으면 좋은 느낌, 좋은 사진이 되고, 다른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으면 느낌 없는 사진, 별 감흥이 없는 사진이 된다. 시각언어인 사진이 우리 앞에 놓였을 때 모든 사진이 다 좋을 수 없고, 또 반대로 다 나쁠 수는 없다. 그 모든 좋고 나쁨의 선택은 관객의 리얼리티에 따라 자의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교육은 다양한 리얼리티를 경험하게 하는 매개체이다. 학습을 통해서 작품과 관객 간에 존재하는 리얼리티의 차이를 극복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리얼리티의 중재는 우리의 일상에서 상당히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다. 때론 음악이, 때론 설명이, 때론 주변 상황이 리얼리티의 차이를 극복하게 만든다. 처음 보았을 때 느낌이 없었던 사진이 오래 보면 좋아지는 것은 반복해서 보는 동안 그 사진과 친숙해지기 때문이다. 또 어느 순간 급작스럽게 좋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사진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주변 환경이 리얼리티를 중재해 주었기 때문이다.  191-192


"사람들 속에 같은 사람으로 살면서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도 나를 모른다."(강상훈) 작가가 카탈로그에 썼듯이 우리는 서로 몰랐던 것이다. 서로의 리얼리티가 달라 그의 사진이 내게 감동을 주지 못했던 것이고, 감흥이 없었기에 사진보다는 글이나 한번 읽어 보자고 한쪽으로 치워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리얼리티를 공유하는 순간 이 사진은 내 마음에 와 닿았고, 새삼스레 진정한 리얼리티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193


진광불휘(眞光不輝 참진 빛광 아닐불 빛날휘), 참된 빛은 빛나지 아니한다. 통도사 주지이셨던 성파 큰스님은 순수의 뜻을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197


사진의 모드는 삶의 모드가 만들어 낸 형상이다.  210


작가는 자기 삶의 모드에 반하는 사진의 모드를 가져서는 안 된다.  211


* 치열함 - 작가(作家 지을작 집가)란 자기 집을 지슨 사람, 자기 집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213


* 뒷모습 - 삶에서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진실일 경우가 있다. '뒷모습이 진실이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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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거대한 물음표였고, 나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질문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4


겨울만 되면 따뜻한 곳으로 '피한'을 떠나고 싶었다. 치안이 좋아서 혼자라도 안심하고 지낼 수 있고, 감수성을 자극할 만한 자연이나 전통이 남아 있는 곳이었으면 했다. 사철 꽅이 피는 곳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산책도 하면서 한껏 게을러지고 싶었다. 딱히 만날 사람도 없고, 꼭 사고 싶은 물건도 없고, 꼭 봐야만 하는 것도 없는 곳, 덜 쓰고, 덜 가지고, 덜 만남으로써 느긋해지고 싶었다. 여행이 주는 긴장감은 덜고, 일상이 주는 지루함은 벗어나 여행과 일상 사이에 머무를 수는 없는 걸까.  5


마치 현지인이라도 된 듯 슬렁슬렁 돌아다녔다. 매일 산책을 했고, 책도 많이 읽었고, 제법 글을 쓰기도 했다. 만날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적다 보니 나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8


여행과 일상의 중간지대에 머물며 덜 쓰고 덜 갖되 더 충만한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

자기만의 속도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좇아 떠나는 여해으, 공부하고 준비해서 떠나지만 가이드북에 의지하지 않는 여행, 여행 안에 여백을 두는 여행, 무엇보다 여행지의 삶과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여행..  9




발리


온갖 조건을 따지다 보니 여행을 시작도 하기 전에 피곤해졌다.  20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은 익숙했던 상대를 재발견하게 만든다. 내 안에 단단하게 굳어있던 상대에 대한 이미지를 녹여준다.  29


발리에서는 자식이 태어나면 이름 짓는라 고민할 필요가 없다. 태어난 순서에 따라 이름이 정해져 있으니까. 먼저 남자 이름 앞에는 I를, 여자 이름 앞에는 Ni를 붙인다. 첫째는 발리어로 와얀 혹은 뿌뚜, 둘째는 마데 혹은 까덱, 셋째는 뇨만 혹은 꼬망, 넷째는 끄뜻이 된다. 다섯 번째 후는 어떻게 하느냐고? 그때는 이름 뒤에 발릭(되돌아간다는 뜻)만 붙여 다시 돌아가면 된다. 마데 발릭, 뇨만 발릭 이런 식으로, 사실 이 뒤에 진짜 개인 이름이 하나씩 더 있는데, 이상하게도 다들 저렇게 부르고 소개를 한다.  36-37


돌아가면 입지도 못할 옷을 굳이 사 입는 이유는 뭘까. 현지인 혹은 다른 여행자들과 섞이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조금 더 과감하게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단지 편안해 보여서 일수도 있다. 어쨌든 여행지에서 옷은 나를 좀 더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수단이 되어준다.  52


여행이 우리가 품은 질문에 답을 주진 않지만 어딘가로 나아갈 수 있도록 등을 떠밀어주긴 하지. 일단 나아가면 결국 답도 찾을 수 있으리라. 아니, 평생 답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의 의미는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던져진 질문과 마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74


놀이와 노동이 분리되지 않은 삶..  97


남이 만들어놓은 것을 소비만 하는 삶에서 잠시 벗어나 스스로 창조하는 기쁨을 온전히 누린다. 

내 손으로 만든 무언가를 들고 ..

인간이 정서적으로나 지적으로 충분히 성장하기 위해서는 손을 쓰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헨리 소로가 그랬다. 소박한 삶의 기본 원치기 가운데 하나는 불필요한 것들을 소비하기 위해 돈을 버는 대신, 꼭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조금 버는 대신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 쓰는 일상을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핸드메이드 라이프를 산다는 것은 시간의 주인으로 사는 일의 은유 같기도 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온전히 몰입해본 사람은 안다. 그때 흘러가는 시간의 속도가 얼마나 다른지를.  98


마사지는 자신의 좋은 기운을 상대에게 나눠주는 행위라는 것.  103


자연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들일수록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세탁기, 청소기, 전기밥솥 등등 시간을 벌어주는 온갖 기계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늘 부족하기만 하다. 

생각해보면 시간이란 얼마나 다양한 속도를 가지고 잇는 것인지!  112


발리인들은 보기보다 영리하고 강인하다. 며칠 전 이브의 남동생이 이런 말을 했다. "너희 한국인들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면 여행 가는 데 쓰지? 우리는 돈만 생기면 종교의식에 다 써. 그래서 어떤 외국인들은 우리를 비웃지. 하지만 이런 걸 하지 않으면 외국인들이 발리에 오겠어? 발리가 다른 나라와 똑같아지면 누가 여기에 오려고 하겠어?"

외국인이 무엇 때문에 발리를 사랑하는지 이곳 사람들은 잘 안다. 그래서 대대로 지켜온 무화를 외국인에게 비싸게 팔아먹는다. 이들은 우붓 중심가에 들어오려던 맥도널드 매장을 막아낸 경험도 있다. 발리에 개발 바람이 불던 1970년대, 발리 사람들이 정부에 요구했다. 야자 나무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도록, 모든 건물은 전통 가옥의 구조를 따르도록 법을 만들어달라고. '5층 이하'라거나 '지상 20미터' 따위가 아닌 '야자나무보다 낮게'라니. 거기 깃든 시적인 마음과 유연함이 사랑스럽다. 그래서 발리에는 3층 이상의 건물이 거의 없어 어디서나 논과 야자나무가 보이고 숲과 계곡이 몸을 드러낸다.

개발과 성장을 추구하다 전통적인 가치를 잃어버린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발리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플란플란'하게 흘러가는 삶의 속도 속에서 지킬 것은 지키는 의연함이 엿보이니. 한마디로 발리는 자연을 파괴하며 돈에 영혼을 판 그런 흔한 휴양지가 아니다. 농지 정리라며 계단식 논을 싹 밀어버리고, 주택 현대화라며 초가집을 죄다 없애고, 무조건 개발만을 외치며 살아온 나라에서 온 나는 발리 사람들이 부럽기만 한다.  113-116





스리랑카


낯선 나라를 여행하다 우리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장면과 마주친다. 내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내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런 순간에 단정적으로 평가하고 불평하는 것은 쉽지만 왜, 어째서라는 질문을 던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감수해야 지금 여기에서 유럽에는 없고 스리랑카에만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좋은 여행자의 기본은 질문하는 능력과 겸허한 태도라는 사실도.  154


그날의 기분에 따라 차와 찻잔을 골라 물을 끓이고, 찻잎을 넣고, 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시간. 그 아무것도 아닌 일에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이 나는 좋다. 그렇게 차를 우리다 보면 내가 세상의 속도와는 상관없이 살고 있다는 기분까지 든다.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차우리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162


폐허에 관한 근사한 글을 쓴 영국의 자각 제프 다이어는 이렇게 말했다. "무언가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은 그냥 바라보는 것,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뿐이었다."  222





치앙마이


내 몸에 마지막 도시의 바람 냄새가 남아 있고  253


일상처럼 여행에도 지루한 순간, 쓸쓸한 순간이 찾아온다. 그런 순간에 책은 나를 구원한다. ..

생각해보면 여행과 책은 서로 닮아 있다. 질문을 던짐으로써 일상과 그 일상을 둘러싼 세계에 균열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그렇게 가장 온순한 방법으로 자신이 쌓아온 세계를 부수고 더 넓은 세계를 열어 준다는 점에서.  254





라오스


'좋은 여행이란 무엇일까.' '나는 좋은 여행자인가.' 이런 질문에 천착해왔지만 내가 좋은 여행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375-377


한 도시도 생명을 가진 유기체와 같다. 생겨나고, 번성하고, 쇠락하기도 한다. 나는 변해가는 어떤 장소의 짧은 순간을 함께할 뿐이다. 여행지가 보여주는 찰나의 얼굴. 그 얼굴이 때로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민낯이라 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처럼 그렇게 바라보고 싶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까지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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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부티의 쓰레기통


나의 미래는 아주 일찍부터 너무 위태로웠던지라 엄마는 나의 현재에 대해 결코 마음을 놓지 못했다.  13


그러니까 나는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었다. 어렸을 때, 나는 날마나 학교에서 들볶이다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왔다. 내 공책에는 선생님들의 꾸지람이 적혀 있었다. 반에서 꼴찌가 아닐 때는 꼴찌 바로 앞이었다. (축배를 들어야 할 일이었다!) 처음엔 계산, 그다음엔 수학에서 꽉 막혔고, 심각한 철자 습득 장애에다, 역사의 연대 암기와 지리의 장소 파악에도 먹통이었고, 외국어 습득 불능에다 (수업은 듣지 않고 숙제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라는 명성이 자자했으며, 음악이나 체육 혹은 그 외의 어떤 과목으로도 벌충하지 못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성적표를 집으로 가져오곤 했다.  16


"그러니까 학교에 관한 책이 또하나 나오는 거네? 그런 책은 꽤 많지 않아?"

"학교에 관한 책이 아냐! 모두들 하굑를 다루고 있고, 신구 논쟁은 끝없이 계속되고 있어. 학교의 프로그램, 학교의 사회적인 역할, 그 궁극적인 목표, 과거의 학교와 오늘의 학교... 그런데 열등생에 관한 책은 없거든!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에 대해 그리고 그로부터 겪게 되는 정신적인 충격을 다루는 책..."

"그게 그렇게 힘들었어?"  22-23


"요컨대 넌 핑계를 만들어냈던 거야,"

그렇다. 그게 바로 열등생의 속성이다. 그들은 자신의 열등함에 대해 굽이굽이 반복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난 한심해, 난 정대 할 수 없어, 그러니 노력해볼 필요도 없어. 이미 다 망했어. 내가 그랬잖아요, 학교는 나한테 맞지 않는다고... 열등생에게 학교는 출입이 금지된 몹시 폐쇄적인 집단으로 보인다.  25


두려움은 분명 학창 시절 내내 나의 가장 큰 문제였고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교사가 된 뒤, 나의 급선무는 공부 못하는 학생들의 두려움을 치료하고 방해물을 치워버려 앎이 스며들 기회를 갖게 해주는 일이었다.  30





2. 되다


어머니들 모두가 조금은 창피해하고, 모두가 자기 아들의 미래를 걱정한다. "대체 이애가 뭐가 될까요?" 대부분의 어머니는 미래라는 강박적인 화폭에 현재를 투영해 그려놓은 것을 아이의 미래로 생각한다. 희망 없는 현재의 이미지가 터무니없이 비대하게 투영된 벽을 미래라고 생각하는 것, 바로 여기에 모든 어머니의 거대한 공포가 있다.  61


나는 우스운 이야기를 시도해본다.

"신을 웃기는 유일한 방법을 아세요?"

전화 저편의 머뭇거림.

"신에게 당신의 계획을 맗는 겁니다."

다시 말해 놀랄 것 없다는 것, 그 어떤 일도 예상대로 이렁나지 않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 미래가 과거가 되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유일한 사실이다.

물론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 쉽게 아물지 않을 상처에 반창고나 붙여주는 격일 테니까. 하지만 나는 전화로는 그렇게 하고 있다.  62-63


어떤 미래도 없다. 

뭔가 되지 못할 아이들.

절망적인 아이들.

초등학생, 다음에는 중학생, 그다음에는 고등학생이 된 나 역시 그렇게 앞날이 없는 삶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것은 바로 공부 못하는 학생이 스스로를 설득하는 최초의 사실이다. 

"이런 성적으로 뭘 기대해?"

"중1이나 마칠 수 있을 것 같니?(중2, 중3, 중4, 고1, 고2는...?)"

"대학에 들어갈 가능성이 얼마나 될 거 같아? 퍼센트로 따져 얼마나 될지 계산 좀 해볼래?"

혹은 정말로 즐거운 비명까지 질러가며 호언장담하던 중학교때 교장 선생님 같은 사람도 있다.

"페나키오니, 네가 중학교를 졸업하겠다고? 절대 그럴 수 없을 거다. 알겠니? 절대로!"

그 여자는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  69-70


나는 학교생활을 따라가지 못했고 언제나 그런 모습뿐이었다. 물론 시간은 지나갈 것이었고, 물론 성장할 것이었고, 물론 사건들도 일어날 것이었고, 물론 삶도 계속될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결과에도 결코 이르지 못할 그런 실존을 횡단할 것이었다. 그것은 확신보다 더한 것이었고, 그게 나였다.

어떤 아이들은 이러한 사실에 재빨리 설득당한다. 그리하여 자신을 각성시켜줄 누군가를 찾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실패에 열정을 쏟게 된다. 열정 없이는 살 수 없으므로.  72


겨울 저녁. 나탈리가 흐느껴 울며 학교 계단을 급히 내려간다. 누군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슬픔...

선생은 생각한다. 이런, 학교의 슬픔이로군.. 

"선생님 ... 흑흑... 흑흑... 선생님... 저는 ... 저는 이해를... 이해를 못하겠어요."

"뭘 이해해? 뭘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야?"

"양... 양보..."

그리고 갑자기 병마개가 쑥 뽑히듯 단번에 답이 나온다.

"양보와 대립의 종속 접속절요."

침묵.

웃어선 안 된다.

절대 웃으면 안 된다.

"양보와 대립의 종속 접속절? 그것 때문에 그렇게 울고 있는거야?"

안도감. 선생은 재빨리. 아주 진지하게 문제의 그 접속절을 생각한다. 이 아이에게 그건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 잘 몰라도 그 절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생각한다...

".. 이건 아주 쉬운 거야. 자, 봐. 됐지, 알겠니? 그래, 예문을 하나 만들어봐. 아이는 정확한 문장을 만들어낸다. 이해한 것이다. 자, 이제 좀 괜찮니? 어! 그런데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다. 아이는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다시금 눈물을 흘리고 크게 울먹이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선생님은 아무것도 몰라요. 제 나이 열두 살하고도 반년이 지났는데, 암것도 한 일이 없어요." ...

다음날 저녁이 되어서야 나는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나탈리의 아버지는 어느 회사 간부였는데 십 년간의 성실한 직장생활 끝에 얼마 전 해고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간부직 해고 사태의 첫 사례였다. 때는 80년대 중반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실직이란 말하자면 노동직 문화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회사에서의 자기 역학을 의심하지 않았던 모범적이고 세심한(작년에 나는 나탈리의 아버지를 자주 보았다. 그는 소심하고 자신감이 너무 부족한 딸 때문에 근심이 많았다) 젊은 간부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는 결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러고는 가족들이 모인 식탁에서 끊임없이 되뇌었다. "내 나이 서른다섯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  73-76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자살하는 일이 일어날 정도로 말이다. 이것이, 적어도 모든 면에서 나타나는 우리 교육의 균열이다.  86


들통난 거짓말, 선생님들의 분노, 부모의 슬픔, 비난, 처벌, 아마도 퇴학, 자아로의 복귀, 무기력한 죄의식, 모욕, 우울한 희열, 그들 말이 옳아, 나는 한심해, 한심해, 한심해.

난 한신한 놈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자신이 한심하다는 확신에 빠져 잇는 청소년은-이게 바로 체험이 우리에게 가르쳐줄 최소한의 사실인데-하나의 멋잇감이다.  94-95


아이의 거짓말에 동조한 어른들에 관한 이야기 중에 가장 기억할 만한 것은 내 친구 B의 동생에게 일어난 일이다. 당시 B의 동생은 열두세 살쯤이었을 것이다. 그애는 수학 시험이 겁나서 단짝 친구에게 맹장의 정확한 위치를 짚어달라고 했다. 그러더니 끔찍한 발작이 일어난 시늉을 하며 쓰러졌다. 학교 지도부는 그애의 말을 믿는 척하며 집으로 돌려보냈는지데. 어쩌면 그애를 치워버리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자 부모는-그애는 부모에게 다른 거짓말도 했다-별생각 없이 아이를 인근 병원으로 데려갔는데, 병원에서는 깜짝 놀라며 당장 수술을 했다! 수술 후, 핏빛의 기다란 뭔가가 담긴 병을 들고 나타난 외과의사는 순진하고 환한 얼굴로 이렇게 외쳤다. "수술하기를 잘했습니다. 하마터면 복막염이 될 뻔했어요!"

사회란 공유하는 거짓말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100


가장 좋은 기숙학교는 선생님들도 함께 기숙하는 학교다.  102


열등생이 선생님으로 변신한 것은 무엇에서 기인한 걸까?

덧붙여, 알파벳도 깨치지 못하던 애가 소설가로 변신한 것은?

나는 어떻게 해서 뭔가가 되었을까?  108


아이에게 장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한을 센티미터로 재라고 요구하는 꼴이다. '되다'라는 동사가 아이를 주눅들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어른들의 걱정이나 질책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게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조금도 생각해내지 못했고, 그냥 순진하게 영원히, 언제나 바보일 거라는 그들의 말을 믿었다. '영원히'와 '언제나'는 상처받은 자존심이 열등생에게 시간을 헤아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단위였다.  111


최고 권력자들이 이미 파산선고를 내렸는데 죽어라 공부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보다시피 나는 궤변론자의 태도 같은 걸 키워가고 있었다. 이것은 선생이 된 내가 열등생 제자들에게서 한눈에 구별해내는 기질이다.

그 뒤에 나의 첫번째 구원자가 나타났다.

국어 선생님. 

중4 때.

당시의 나를 있는 그대로 알아보았던 분. 즉 명랑하게 자멸해가는 진지한 망상가로 말이다.

틀림없이 그 선생님은 가르쳐준 것은 배우지 않고, 숙제 못한 핑계를 어떻게 둘러댈까 늘 잔머리를 굴리는 나의 적성에 대경 실색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 소설 한 편을 쓰라고 명령하고 대신 논술을 면제해주기로 작정한 것이다. 일주일에 한 장(章 글장)씩 써서, 한 학기에 소설 한 편을 끝내야 했다. 주제는 자유지만, 틀린 글자 하나 없는 소설을 내야 했다. 선생님은 "비평의 수준을 고양시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소설 자체는 까맣게 잊어버렸는데도 그 표현만큼은 기억난다.) 그분은 교직 말년을 우리에게 바친 노교사였다. 더이상 궁핍할 수 없는 파리 북쪽 변두리 중학교에서 당신의 은퇴를 연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 낡아빠진 기품을 지닌 노선생이 내 안의 이야기꾼 기질을 알아본 것이다. 그는 내게 철자 습득 장애가 있든 말든 학교 공부를 따라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면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주 열정적으로 소설을 썼다. 사전(그날 이후 사전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의 도움을 받아가며 조심스레 단어 하나하나를 고치고, 신문에 연재하는 전업 작가처럼 날짜를 지켜가며 매주의 분량을 갖다 냈다. 지금 떠올려보면, 아주 슬픈 이야기였고, 당시 내가 큰 영향을 받았던 토머스 하디풍의 글이었다. 토머스 하디의 소설들은 오해에서 재난으로, 재난에서 어찌할 수 없는 비극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운명에 대한 나의 취향을 매혹 했다. 출발선부터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 내 생각이 바로 그거였다.

그해 내가 뭔가에서 중요한 발전을 이루어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학창 시절 처음으로 어떤 선생님이 나에게 하나의 지위를 부여했고, 나는 계속 따라가야 할 노선이 있는 개인으로, 지속적으로 견뎌내고 있는 한 사람으로, 누군가의 눈에 학생으로 존재했다. 물론 나의 후원자인 노선생님이 미치도록 고마워쏘, 그가 꽤 거리를 두고 있었음에도 내 비밀스러운 독서를 털어놓을 만큼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래, 페나키오니, 요즘은 뭘 읽고 있니?"

나에겐 독서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게 나를 구원해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때의 독서는 요즘처럼 터무니없는 자랑거리가 아니었다. 시간 낭비이자 학업을 망치는 일로 평판이 난 소설 읽기는 수업 시간에 금지되었다. 책을 몰래 숨어서 읽는 내 취향은 거기서 비롯했다. 소설책을 교과서로 씌워 읽고, 되도록 모든 곳에 책을 숨겨두고 읽고, 야밤에 손전등을 켜고 읽고, 체육 시간을 면제받아 읽고, 혼자서 책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이든 좋았다. 이런 취미를 길러준 곳이 바로 기숙사다. 나만의 세계가 필요했는데, 그게 책들의 세계였다. 집에 있을 때는 무엇보다 식구들이 책을 읽는 모습을 관찰했다. 아버지는 파이프를 물고 안락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무릎에 책을 올려놓고 둥근 램프 아래, 나무랄 데 없는 가르마를 약지로 무심히 쓰다듬으며 읽었다. 베르나르 형은 방에서 다리를 구부린 채 옆으로 길게 누워 오른손으로 머리를 괴고 읽었다... 이런 태도들에는 행복 같은 게 있었다. 따져보면 나를 독서로 밀어붙였던 것은 책 읽는 사람의 이런 자태였다. 처음에는 오로지 그런 자세들을 따라해보려고, 그리고 다른 자세를 개발해보려고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언제나 지속되는 행복 속에 신체적으로 정착했다. 무엇을 읽었나? <미운 오리 새끼>를 나로 여겨 안데르센의 동화책들을 읽었다. 하지만 검과 말 그리고 마음의 움직임에 대한 동경으로 알렉상드르 뒤마도 읽었다. 그리고 셀마 라겔뢰프의 멋진 <예스타 베를링>, 주교에게 추방당한 그 훌륭한 술주정뱅이 사제는 에세뷔의 다른 기사들과 더불어 내 모험의 지치지 않는 동반자였다. 중3으로 올라갈 때 베르나르 형이 준 <전쟁과 평화>는 맨처음 나타냐와 안드레이 공작의 사랑 이야기로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사랑 이야기에만 집중하면 소설은 100페이지쯤으로 줄어든다. 중4 때 두번째로 그 책을 읽었을 때는 나폴레옹식의 서시시로 읽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보로디노 전투, 모스크바의 화재, 러시아군의 퇴각(나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거대한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수업 시간에 몰래 그렸던 그 작은 인간들을 학살당하게 했다). 이것은 기껏해야 200~300페이지로 압축된다. 고1 때 다시 읽었을 때는 피에르 베주호프의 우정이 눈에 들어왔다(이자는 또다른 미운 오리 새끼이긴 해도 생각보단 많은 걸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3 때 소설의 전체가, 그러니까 러시아와 쿠투조프, 클라우제비츠 같은 인물이, 토지개혁이 그리고 톨스토이가 눈에 들어왔다. 물론 디킨스-올리버 트위스트는 나를 필요로 했다-도 읽고 에밀리 브론테도 읽었다. 브론테의 모럴은 내게 구조를 요청했다. 또한 스티븐슨, 잭 런던, 오스카 와일드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을 처음으로 읽었다. 당연히 <노름꾼>이 있었다(왜 그런지는 알아봐야 하는데, 도스토옙스키는 항상 이 <노름꾼>으로 시작된다). 나의 독서는 이런 식으로 우리집 서재에서 찾아낸 책들로 이루어졌고, 물론 <탱탱> <스피루> 그리고 당시를 휩쓸었던 <흔적의 표시들> 혹은 <봅 모란> 같은 만화도 읽었다. 내가 학교로 가져가는 책들이 첫째 조건은 학교 독서 프로그램에 없는 것이어야 했다. 아무도 내게 묻지 않았다. 누구도 내 어깨 너머로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책의 저자와 나는 우리끼리 오롯이 머물렀다. 책들을 읽으면서 내가 교양을 쌓아가고 있었다는 것, 그 책들이 내 안에 어떤 욕구를 일깨웠소 그 욕구는 책들이 잊히더라도 살아남을 거라는 걸 나는 몰랐다. 청소년기이 이러한 독서는 세상의 기호들을 향해 사방의 문을 열어놓으며 완수되었고, 그중에서도 네 권의 책이 서로 구별되지 않은 채,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이유로 내 안에서 밀접한 친족관계를 직조해냈다.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 위스망스의 <거꾸로>, 롤랑 바르트의 <신화지> 그리고 페렉의 <사물들>이 바로 그 책들이다.

난 고급 독자는 아니었다. 플로베르에게는 실례가 되겠지만, 열다섯 살에 에마 보바리처럼 오로지 감각의 만족을 위해 책을 읽었고, 다행히 그 감각은 지칠 줄 모르고 나타났다. 나는 이러한 독서로부터 학교생활에 도움이 될 어떤 이득도 끌어내지 못했다. 모든 선입관과는 반대로 이처럼 삼키듯 읽은-그리고 아주 빨리 잊힌-수천 페이지의 글은 나의 철자법을 개선해주지 않았고, 철자법은 요즘도 내게 불분명한 채로 남아 언제 어디서든 사전을 찾아봐야 한다. 아니다. 내 철자법의 실수들이 일시적으로나마(하지만 이 일시적인 것이 결정적으로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극복되었던 것은 노선생님이 주문한 소설에서였다. 철자법에 신경쓰느라 독서 수준을 낮추고 싶지 않다는 선생님의 요구에 나는 틀린 글자 없는 원고를 갖다드려야만 했다. 요컨대 대단히 천재적인 교수법이었다. 아마도 오로지 나에게만 통했을, 그리고 오로지 그런 상황에서만 통했을 방법이지만, 어쨌든 천재적이다!

나는 이렇게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선생님을 중4와 고3 사이에 세 분 더 만났다.

한 분은 수학 자체였던 수학 선생님이고, 또 한 분은 역사 구현력이 누구보다 뛰어난 놀라운 재능의 역사 선생님, 그리고 나머지 한 분은 철학 선생님이다...

네 분의 선생님은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구원했다.  112-118


요컨대 우리는 뭔가가 된다.

하지만 사람은 그리 많이 변하지 않는다. 생긴 대로 된다.  123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뭔가가 된다.

예상대로 되는 일은 드물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뭔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때로 계획이 이루어지고 적성이 실현되고 밀래가 약속을 지키기도 한다.  130


우리는 뭔가가 되어간다. 살아가는 한 모두 뭔가가 되고, 때로는 뭔가를 이루어낸 사람들이 되어 서로 마주친다.  131





3. 거기 혹은 '구현의 현재'


자기불만에 휩싸인 선생은 누구보다 재빨리 학생을 야단친다.  158


수업에 완전하게 몰두하는 선생님의 현존은 단번에 감지된다. 아이들은 학기 첫 순간부터 그것을 느끼며, 우리 모두가 그것을 경험했다. 선생님이 막 들어선다. 그는 절대적으로 여기 있다. 그것은 그가 바라보는 방식, 학생들에게 인사하는 방식, 자리에 앉아 자기 책상을 차지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그는 아이들의 반응을 걱정하며 두리번거리지 않으며,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지도 않는다. 그는 처음부터 바로 자기 일에 빨려들어가 그 자리에 현존하고, 아이들 각자의 얼굴을 구별해내며, 학급은 즉시 그의 눈앞에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현존감을 얼마 전 블랑메닐의 어느 학교 교실에서 새롭게 체험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토록 생기 넘치는 아이들의 에어니를 제어하기 위해 어떻게 처신하는지 물었다.

"절대 아이들보다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아요. 그게 요령이죠." ...

"아이들과 함께 있거나 숙제를 검토할 때 나는 딴 데 가 있지 않아요."

"내가 다른 곳에 있으면 절대로 아이들과 함께할 수 없죠." ...

"아이들 각자는 자기 악기로 소리를 내고 있는 건데, 그걸 거스를 필요가 없어요. 까다로운 일은 우리의 음악가들을 잘 꿰뚫어 보고 조화를 찾아내는 거죠. 좋은 학급이란 발맞춰 행진하는 군대가 아니라 모두 함께 같은 교향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예요. 만일 그들이 땡땡거리기만 하는 작은 트라이앵글이나 브롱브롱 소리만 나는 갱바르드(말굽자석처럼 생긴 조그만 악기로, 하모니카처럼 입으로 물고 손가락을 튕겨서 소리를 낸다)를 물려받았다면, 적절한 순간에 최선을 다해 내는 그 모든 소리, 그들이 훌륭한 트라이앵글과 나무랄 데 없는 갱바르드가 되는 일, 그래서 각자의 기여가 전체에 부여한 음악의 질에 자랑스러워하는 일이죠. 조화에 대한 감각은 그들 모두를 발전시키고, 조그만 트라이앵글은 마침내 음악을 알게 되는 겁니다. 아마도 제1바이올린만큼 화려하지는 않겠지만 그 역시 똑같은 음악을 체험하는 거지요." ...

문제는 사람들이 그 아이들에게 제1바이올린 주자만 중시하는 세상을 믿게 한다는 거예요." ...

"어떤 동료들은 자신이 카라얀인 줄 알고 시골의 마을 합창단 지휘를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그들은 모두 베를린 필을 꿈꾸죠. 이해가 가는 일이에요..."  159-162


받아쓰기 - 우리의 받아쓰기가 맞춤법에 치중하여 초등 저학년에 한정된 것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철자와 문법 그리고 구문의 이해력까지 포함하며 성인들의 여가에까지 널리 활용되는 문학적 훈련을 의미한다.  170


나는 언제나 받아쓰기를 언어와의 완전한 만남으로 생각해왔다. 소리나는 대로의 언어, 이야기하는 대로의 언어, 사유하는 대로의 언어, 글로 쓰고 만드는 대로의 언어, 세심한 교정 훈련을 통해 분명해지는 의미. 왜냐하면 받아쓰기의 교정에는 텍스트의 정확한 의미에, 문법 정신에, 말들의 풍부함에 다가가고자 하는 목표 말고 다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  172


아이들이 스스로를 형편없다고 고백한 것에 대한 즉각적인 반향으로, 즉석에서 생각해낸 돌발 받아쓰기였다.

니콜라는 철자법에서 항상 빵점일 거라고 주장하는데, 그 유일한 이유는 한 번도 다른 점수를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ㅍ레데리크, 사미, 베로니크도 같은 생각입니다. 맨 처음 받아쓰기 때부터 그들은 쫓아다니던 빵점이 그들을 뒤따라와 삼켜버린 것입니다. 그애들 말로는 저마다 빵점 속에 살고 있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자기들 주머니에 열쇠가 들었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문장을 만들어내는 도안, 아이들의 호기심을 흥겹게 일깨우려는 생각으로 각자에게 역할을 나눠주면서 문법적으로 설명할 것들을 고려했다. 동사 변화와 목적어의 위치, 보어의 위치, 보어 인칭댐ㅇ사의 위치, 주격 관계대명사 등등을.

받아쓰기가 끝나자 우리는 즉각 교정을 시작했다.

"좋아, 니콜라. 맨 첫 문장을 읽어봐라."

"'니콜라는 철자법에서 항상 빵점일 거라고 주장하는데.'"

"그게 첫 문장이야? 거기서 끝나? 확실해?"

"....."

"주의해서 읽어봐."

"아! 아니에요. '그 유일한 이유는 한 번도 다른 점수를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맨 처음 나오는 활용 동사는 뭐지?"

"'주장하는데'?"

"그래. 원형은?"

"'주장하다'요."

"몇 군 동사지?"

"어..."

"3군 동사지. 그건 좀 있다가 설명해주마. 시제는 뭐지?"

"형재형이요."

"주어는?"

"저요. 그러니까 '니콜라'요."

"인칭은?"

"3인칭 단수요."

"그래. '주장하다' 동사의 현재형 3인칭 단수지. 동사의 어미를 주의해라. 자, 이제 베로니크 차례다. 이 문장의 두번째 동사는 뭐지?"

"'못하다'요!"

"'못하다'? 확실해? 다시 읽어봐!"

"..."

"..."

"아, 아니에요, 선생님. 죄송합니다. '받아보지'예요. 그러니까 '받다' 동사요."

"어떤 시제지?"

교정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174-176


체계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은 암기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런 정신의 소유자는 작품의 진수를 이용할 줄 안다는 것이다.  187


"저는 앵무새가 아니에요!"

그들은 마지막까지 항의했고, 그건 정당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건 그런 말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부모들, 아! 그들은 어찌나 변했는지 부모들 스스로 때로 이렇게 말한다. "페나키오니 선생님, 아이들에게 텍스트를 외우게 한다면서요? 세사에, 제 아들은 이제 어린애가 아니랍니다!" 어머님, 언어에 잇어서 만큼은 아드님은 영원히 어린애일 것이고, 어머님 자신도 아주 어린 아기이며, 저는 우스꽝스러운 어린애입니다. 우리 모두가 문학의 구어적이 ㄴ원천이 넘쳐흐르는 거대한 강에 실려가는 잔챙이 물고 기인 한은 말입니다. 아드님은 언어 안에서 헤엄치는 걸 좋아하게 될 테고, 언어에 실려 목을 축이고 젖을 취하며,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자랑스럽게 말입니다. 아이를 믿으세요. 아이는 자기 입속의 말맛, 머릿속 생각의 빛나는 불꽃을 아주 좋아하게 될 것이고, 자신의 대단한 기억력, 그 무한한 유연성, 그 울림통,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노래하게 하고 가장 분명한 생각을 울려퍼지게 하는 놀라운 음량을 발견하게 도리 것입니다. 언젠가 기억 속의 그 끝없는 동굴을 발견할 때는 언어 속에 잠겨 헤엄치며 깊숙이 잠수해 텍스트들을 건져올리는 일을 좋아할 것입니다. 평생 그것들이 그곳에서 자기 존재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즉흥적으로 그것들을 외울 수도 있고, 말들의 묘미를 위해 입 밖으로 소리내볼 수도 있다는 걸 좋아하게 될 겁니다. 그 덕분에 아이는 다시 입말이 된 문학의 전통을 아마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게 될 것입니다. 공유하기 위해서든 유혹의 유희를 위해서든 잘난 척하기 위해서든 그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는문자 이전의 시간, 생각의 존속이 오직 우리의 목소리에만 의존하던 그 시간과 다시 연결될 겁니다. 어머님은 그것을 퇴행이라고 말씀하기지만, 저는 재회라고 말하겟습니다! 앎이란 무엇보다 육체적인 것입니다. 앎을 포착하는 것은 우리의 귀와 눈이고, 그것을 옮기는 것은 우리의 입입니다. 물론 앎은 책으로부터 우리에게 오지만, 책은 우리를 벗어납니다. 생각이란 소란스러우며, 읽고자 하는 의욕은 말하려는 욕구의 유산입니다.  189-190


나는 아이들을 텍스트 속에 방치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들과 함께 그 속에 빠져든다.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아이들의 텍스트 분석을 따라가면서, 가장 어려운 글을 함께 배우기도 했다... 아이들은 읽은 내용을 이해하게 되자 기억의 능력을 찾아냈고, ...아이들은 나열된 단어를 암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단지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라 언어의 지성, 즉 타자의 언어, 타자의 사유 안에서 소리를 낸 것이다. 단순히 <에밀>을 암기한 것이 아니라 루소의 추론을 복원한 것이다.  196


지식을 가지고 유희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유희란 노력의 숨고르기이고, 심장의 또다른 박동이며, 학습에 심각한 해를 끼치기는 커녕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리고 교과를 가지고 노는 일은 그것을 제어하는 훈련이 됩니다.  200


1969년부터 1995년까지, 엄선해서 정원을 뽑은 한 학교에서 보낸 이 년을 제외하면, 내가 맡은 학생들 대둡분이 옛날의 나처럼 학교생활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었다. 가장 심한 상태에 이른 아이들은 그맘때의 나와 거의 같은 증상을 보였다. 자신감 상실, 모든 노력의 포기, 집중 불가, 산만, 과대망상, 불량배 패거리 조직. 가끔은 술도 마시고 마약도 했는데, 자기들 말로는 약한 거라고 했지만 아침에 보면 눈에 축축이 젖어 있곤 했다.  205


노력이라는 말의 개념을 다시 가르쳐주고, 결과적으로 고독과 침묵의 맛을 되찾아주고, 무엇보다 시간을, 즉 권태를 제어하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때로는 아이들을 지속되는 시간 속에 앉혀 놓기 위해 권태를 연습하라고 충고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놀리도 말고, 먹지도 말고, 대화도 하지 말고, 공부도 하지 말고, 요컨대 진짜로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 저녁 이십 분간 권태 연습을 하는 거다. 공부 시작 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야."

"음악 듣는 것도 안 돼요."

"그거야말로 안 돼."

"이십 분이요?"

"그래, 이십 분. 시계를 손에 쥐고. 오후 5시 20분부터 5시 40분까지. 곧장 집으로 돌아가 아무에게도 말을 건네지 말고, 도중에 딴 데로 새지도 말고, 게임기도 무시하고, 친구들도 못 본 체하고, 너희들 방으로 곧장 들어가 침대 옆 구석에 앉아 책가방도 열지 말고, 워크맨도 끼지 말고 게임기도 들여다보지 말고, 허공에 눈을 박고 이십 분을 기다려봐."

"뭐하러 그래요?"

"어떻게 되나 보게. 흘러가는 시간에 집중하고, 일 분도 놓치지 말고 어땠는지 내일 얘기하는 거야."

"우리가 했는지 어떻게 검사하실 거죠?"

"나야 할 수 없지."

"그리고 이십 분이 지난 다음에는요?"

"허기진 사람처럼 각자의 일에 달려드는 거야."  206-207


세상 누구도 무능함의 사과를 영원히 깨물고 있진 않는다!

가르친다는 일은 아마도 그런 것일 게다.  208


가르치든 교사가 질문을 던질 때마다 학생들이 내놓을 수 있는 답변은 세 가지다. 정답과 오답과 터무니없는 답.  213


터무니없는 대답이 오답과 다른 점은 어떤 추론의 시도도 거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흔히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터무니없는 대답은 반사적인 행위일 뿐이다.

던져진 질문에 대답한 게 아니라 자기한테 질문이 던져졌다는 사실에 대답한 것이다.  215


선생님이 던진 질문을 겨우 이해만 할 뿐이다. 그걸 고백할 수 있나? 침묵을 선택할까? 아니다. 차라리 아무 대답이나 하는 게 낫다. 가능하면 천진난만하게. 제가 엉뚱하게 빗나갔나요, 선생님? 후회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저 운을 한번 걸어봤고, 그게 실패한 것뿐이다. 저한테 빵점을 주시고 사이좋게 지냅시다. 터무니없는 대답은 무지에 대한 외교적인 고백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어떤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물론 전형적인 반항 행위를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선생님이 나를 귀찮게 굴고 나를 꼼짝 못하게 해. 선생님한테 왜 그러느냐고 물어볼까?

이 모든 경우 이런 대답에 점수를 주는 것-일테면 답안지를 교정하면서-은 아무 대답에나 점수를 주기로 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 자체가 터무니없는 교육 행위를 저지르는 일이 된다.  215-216





4.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사실 가족과 선생님들이 공부 못하는 학생에게 가장 흔히 하는 비난 중 하나가 바로 그 불가피한 지적인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다. 직접적인 비난이든("핑계 대지 마.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수많은 설명에 뒤이은 분노든("세상에, 이럴 수는 없어.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제삼자에게 건네진 정보, 즉 혐의자가 부모의 방문 앞에서 듣고 놀라게 될 말이든("분명 그 녀석이 일부러 그러는 거야!") 간에 말이다.  233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어쨌거나 이 문장의 주인공은 일부러라는 부사다. 문법을 무시하고 그 부사를 대명사 너에 직접 연결하면, '너 일부러!'가 된다. 거야는 부차적이고 그러는은 완전히 무색무취다. 중요한 것, 즉 비난받는 사람의 귀에 울려대는 말은 누가 뭐래도 너 일부러라는 말이고, 이것은 꼿꼿이 세워진 검지를 떠오르게 한다.

죄인은 바로 너야.

유일한 죄인,

그것은 고의로 그런 죄인이지!

이것이 메시지다. 

어른들의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라는 말은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 아이의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라는 말과 쌍을 이룬다.

격렬하지만 별 기대 없이 맞받아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는 거의 자동적으로 다음과 같은 대꾸를 끌어들인다.

"그러길 바란다!"

"그나마 다행이네!"

"설상가상이군!"

이 반사적인 대화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며 세상의 모든 어른은 적어도 처음에는 자신들의 반격이 정신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거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에서 일부러는 그 위력을 조금 잃고, 그런은 어떤 힘도 얻어내지 못한 채 일종의 보조 역할로 남고, 그거는 여전히 벼로 중요하지 않다. 죄지은 자가 여기서 우리 귀에 울려주려고 애쓰는 말은 아니에요라는 부정어에 연결된 대명사 나다.

너 일부러라는 어른의 말에 아이의 나 아니에요가 대응하는 것이다. 

부사도, 목적어도 없이 나만 있고, 그 안에서 아니다에 들러붙은 이 나는, 이 경우, 나는 나에게 속해 있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다. 

"아니, 분명코 넌 일부러 그랬어!"

"아니, 난 일부러 그러지 않았어요!"

"너 일부러!"

"나 아니에요!"

귀머거리들의 대화, 문제를 회피하고 파국을 연장할 필요. 우리는 해결책도 환상도 없이, 한쪽은 복종하지 않는다고, 다른 쪽은 이해받지 못했다고 확신하고는 헤어져버린다.

여기서는 문법이 여전히 유용해 보일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이 불화의 영역에 버려진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말, 즉 우리 대화의 모든 끈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던 그거라는 말에 관심을 갖기로 동의한다면 말이다.

자, 예전의 문법 연습을 조금 해보자. 내가 '개량'반 아이들과 했던 것처럼, 그냥 한번 보자는 거다.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원어는 Tu le fais expres)'라는 표현에서 그거(le)가 어떤 품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

"저요, 저요! 관사예요. 선생님!"

"관사? 어째서 관사지?"

"그거를 표현하는 le, la, les가 관사잖아요! 정관사요!"

의기양양한 어조. 뭔가 안다는 것을 선생에게 보여주었다는 표정... un, une, des는 부정관사이고, le, la, les는 정관사, 자, 봐요, 맞잖아요!

"그래? 정관사라고? 그러면 그 관사가 한정하는 명사는 도대체 어디 있지?"

"......"

찾아보지만, 명사는 없다. 난처함.

관사가 아니다. 

그럼 이 그거(le)는 뭔가?

"......"

"......"

"그건 대명사예요, 선생님!"

"브라보! 어떤 종류의 대명사지?"

"인칭대명사요!"

"그래?"

"보어대명사요!"

"그래. 아주 잘했다! 바로 그거다."

이제 교실을 떠나 우리 얘기로 다시 돌아와 어른들 사이에서 이 보어대명사를 분석해보자. 신중하게, 이 보어대명사들은 위험한 말이고, 분명한 의미 아래 깊이 숨어 있는 반(反 되돌릴반)인칭적인 폭약이라 뇌관을 잘 제거하지 않으면 여러분 얼굴로 폭발해버린다. 예를 들어 이 그거(le)..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라는 비난의 말을 하면서 그때의 그거라는 말이 그 상황에서 무엇을 표현하는지 우리는 몇 번이나 자문해보았던가? 일부러 뭘 그런다는 것일까? 가장 최근의 바보짓? 아니다. 이 비난을 던졌을 때의 우리 어조(어조 또한 있기 때문이다!)는 그 죄인이 언제나 일부러 그런다는 사실과, 매번 일부러 그러는데 최근의 바보짓은 그런 고집의 확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암시한다. 그렇다면 일부러 뭘 그런다는 것일까?

복종하지 않는다?

공부하지 않는다?

집중하지 않는다?

이해하지 않는다?

이해하려고 노력조차 않는다?

반항한다?

몹시 화가 나게 한다?

선생들을 화나게 한다?

부모들을 절망시킨다?

최악의 결점에 굴복한다?

현재를 망쳐 미래를 침몰시킨다?

세상을 조롱한다?

어, 그런 거야? 세상을 조롱하는 거야? 우리를 선동하는 거야?

그래, 말하자면 이 모든 거라고 하자.

그러면 부사의 문제가 떠오른다. 왜 일부러인가? 무슨 목적으로? 무슨 이유로? 그가 일부러 그런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목표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뭐하러 일부러 그러는가?

순간을 즐기려고? 단지 그 순간을 즐기기 위해? 하지만 불가피한 다음 순간, 즉 그가 나와 함께 보내는 다음의 십오 분은 내가 야단을 치기 때문에 아주 고약한 시간이다! 그는 야단맞는 일에 무심한 채로 게으름의 상태를 평온히 살고 싶은 걸까? 쾌락주의 같은 것? 하지만 그는 무위도식의 행복이 경멸적인 시선의 대가, 자기혐오를 낳는 결정적인 지탄의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그러는가?

다른 열등생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열중하는 게 배신이라서? 젊은이가 노인에게 반항하듯, 일부러 선한 것에 대항하며 악을 즐기는 걸까? 자기 나름의 사회화 방식일까?

아무려나. 어쨌든 그것은 모더니티에 관한 가장 인기 있는 명제다. 무능한 이들의 소집단화 현상.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너나없이 불량배가 우글거리는 거대한 저지대로 도피하는 것. 이런 설명은 사회학적인 진실에 어느 정도 근거한다는 편리한 점이 있으며, 그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어떤 의구심도 없다. 하지만 이 설명은 무리의 현상이건 아니건 간에 언제나 독자적인 그 아이라는 개인을 몰아낸다. 아이는 이러저러한 순간 혼자 있게 되며, 자신의 실패를 홀로 마주하고, 자신의 미래를 홀로 마주하고, 밤에 잠들기 전에도 자기 자신과 홀로 마주한다. 이제 아이를 살펴보자. 잘 바라보자. 그 아이가 행복할 거라는 데 단돈 한푼이라도 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 아이가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사실을 말하자면 이러한 설명 중 어느 것도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모든 설명이 다시간 그럴듯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문법 규칙 같은 것은 접어두고, 그 대명사가 문장 외부의 어떤 대상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을까? 예컨대 우리 자신으... 우리 자신의 눈에 비친 우리 이미지의 하강. 우리의 이미지 또한 바람직한 거울을 많이 필요로 한다.

무능하고 초조한 어른, 이해할 수 없는 거절의 희생자인 어른의 이미지를 타인-여기서는 한심한 학생-이 나에게 되돌려 준다고 비난하는 듯한 그것. 그렇지만 내가 그 아이에게 주입시키려는 원칙들이 건전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흩뿌려준 앎이 정당하다는 것도! 

그 아이의 고독에 어른인 나 자신의 고독이 대답한다.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리고 그것이 반 전체의 문제가 될 때, 서른 명의 학생이 일부러 그러기 시작할 때, 교사인 나는 문화적 린치의 대사이 되고 있음을 확실히 체감한다. 그리고 그 대명사가 한 세대 전체-"우리 때는 그런 건 상상할 수도 없었어!"-에 영향을 미친다면, 연이은 세대들이 일부러 그런다면, 그때 우리는 멸종 위기에 처한 종족의 마지막 대표들로, 젊은이들(그 시절의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던 전(前 앞전) 시대의 생존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노년의 삶에서 외로움을 절감한다. 물론 여전히 명석하고, 아주 세심하고, 얼마나 유능한데! 요컨대 우리들 사이에서는 말이다. 젊었을 때는 문명화된 세대의 얼마 안 되는 증인이었던 우리가 생각은 여전히 제대로 하고 있는데도 현실로부터 어쩔 수 없이 소외된 것처럼.

소외된...

소외감은 단지 순환하는 수많은 원 밖으로 내던져진 사람들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들, 즉 힘 있는 다수인 우리 역시 위협한다. 우리를 둘러싼 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엉뚱한 분위기가 시류를 타는 순간, 소외감은 우리 역시 위협한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당혹스러운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들을 지목하도록 밀어붙인다.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고작 대명사 하나가 그토록 엄청난 고독을 말하다니!  234-241





6. 사랑한다는 말이 뜻하는 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해내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을 모두 잊게 하는 데는 한 분-단 한반!-의 선생님이면 충분하다. 

어쨌든 그것이 내가발 선생님네 대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다. 

그분은 내가 고2였을 때의 수학 선생님이다. 몸짓의 관점에서 보자면 키팅 선생과 정반대였다. 영화적인 구석이라곤 거의 없는 선생님이었으니까. 타원형 얼굴에 날카로운 목소리, 그리고 시선을 잡아끄는 특징이 전혀 없었다. 당신 책상에 앉아 우리를 기다렸고 다정하게 인사하고는 첫마디부터 우리를 수학에 들어서게 했다. 그렇게 우리를 잡아둔 시간을 무엇으로 메웠느냐고? 무엇보다 발 선생님이 가르치는 과목이자 그분이 자로잡혀 있는 듯 보였던 수학으로 메워졌다. 수학은 묘하게도 그분을 활기차고 차분하고 선량하게 만들었다. 지식 자체에서 탄생한 그 이상한 선량함, 자신의 정신을 매혹했던 '과목'을 우리와 고유하고 싶다는 그 자연스러운 욕망. 그분은 그 과목이 우리에게 혐오스러울 수 있다거나 단지 낯설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발 선생님은 자신의 과목과 제자들로 빚어진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수학의 요람에 사로잡힌 듯한 무언가가, 믿을 수 없는 순수함 같은 게 있었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한번도 스치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 또한 그분을 놀려대고 싶은 마음이 한 번도 들지 않았다. 그만큼 가르침에 대한 그의 행복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온순한 청중이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이 지부티의 쓰레기통 출신이었던 우리는 전혀 흥미로운 학생들이 아니었다. 나만 해도 야밤의 싸움질, 애정과는 거리가 먼 내면의 원한 청산에 몰두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발 선생님의 문턱을 넘어서면 우리는 마치 수학에 몰입하여 성스러워진 듯했고,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테마티코스('수학'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어느 날, 우리 중 가장 형편없는 아이드이 자기들 낙제 점수를 자랑삼아 떠벌리고 있을 때 선생님이 미소 띤 얼굴로 자신은 '공(空)집합'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공집합에 대해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던졌고 그에 대한 우리의 단순한 대답을 아주 귀한 원석처럼 여겼는데, 이런 일이 우리를 아주 즐겁게 했다. 그러더니 칠판에 12라는 숫자를 쓰고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었다.

영악한 아이들이 대답을 시도했다.

"손가락 열두 개요!"

"모세의 12계요!"

하지만 순진무구한 그의 미소는 정말이지 우리의 기를 꺾었다. 

"너희가 바칼로레아에서 받아야 하는 최소 점수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너희가 겁을 먹지 않는다면."

그러고는

"이런 얘기는 다시 하지 않으마. 우리가 여기서 몰두해야 할것은 바칼로레아가 아니라 수학이니까.

정말로 그분은 다시는 바칼로레아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한 해동안 우리를 무지의 심연에서 조금씩 끌어올리는 일에 주력했고, 그런 우리를 매우 박식한 사람으로 여기면서 즐거워했다. 우리 자신이 아무리 부정해도, 그분은 우리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늘 경이로워했다.

"너희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엄청나게 많이 알고 있거든! 봐라, 페나키오니, 너는 네가 그걸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니?"

물론 이러한 산파술만으로 우리 모두가 수학의 귀재가 되지는 못했지만, 발 선생님은 우리를 너무도 깊던 우물에서 그 우룸의 가장자리까지, 즉 바칼로레아의 평균 점수까지 끌어올려주었다. 

다른 많은 선생님들 말에 따르면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다는 우리의 그 비참한 앞날에 대해서는 털끝만한 암시도 하지 않고서 말이다.  318-321


그분은 위대한 수학자였을까? 그리고 이듬해에 만난 지(Gi) 선생님은 대단한 역사가였을까? 재수 때 나를 가르친 S선생님은 유례없는 철학자였나? 그러리라 추측하지만 솔직히 나는 모른다. 단지 이 세 선생님이 자기 과목을 전해주려는 열정에 빠져 있었다는 것만 알 뿐이다. 선생님들은 그런 열정으로 무장하고서 낙담의 구렁텅이에 있는 나를 찾아왔고, 일단 내 두 발을 자신들의 수업에 굳건히 딛게 하고서야 나를 놓아주었다. 그들의 수업은 내 인생의 전(前)단계가 되었다. 그분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나에게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분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나 못하는 아이들이나 공평하게 대했고, 단지 공부 못하는 아이들에게 이해하려는 욕망을 되살려줄줄 알았던 것뿐이다. 그분들은 내 노력을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해주었고, 우리의 진전을 기뻐했으며, 우리의 느림에 조바심내지 않았고, 우리의 실패를 결코 개인적인 모욕으로 치부하지 않았으며, 가르치는 일의 특성과 일관성과 관대함에 근거한 더없이 엄격한 까다로움을 우리와 함께하는 가운데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점을 제외하면 달라도 너무 다른 선생님들이었다. 발 선생님은 굉장히 차분하고 잘 웃는 상이라 수학 부처님 같았고, 지 선생님은 반대로 회오리바람처럼, 태풍처럼 게으름의 외피로부터 우리를 떼어내 자신과 함께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이끌어갔다. 회의적이고 날카로운(뾰족 코, 뾰족 모자, 뽈롭 배) 철학자인 S 선생님은 잔잔한 얼굴의 통찰력으로 저녁마다 나를소란스러운 질문 속에 남겨두었고,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고 싶어 안달했다. 나는 장황한 논술문을 제출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선생님은 교정자의 편의를 위해 좀더 간결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넌지시 덧붙였다. 

모든 점을 잘 따져보면 이 세 분의 선생님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은 모른다고 하는 우리의 고백에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철자법의 결함을 이유로 내세우며 지 선생님은 내게 얼마나 여러 번 논술문을 다시 쓰게 했던가? 발 선생님은 내가 복도에 멍하니 있거나 자습실에서 몽상에 잠겨 있었다는 이유로 얼마나 여러 번 보충수업을 시켰던가? "시간이 있으니까 우리 한 십오 분만 더 수학을 해보면 어떨까, 페나키오니? 자, 십오 분만 해보자...) 익사 위기에서 구해내려는 그 몸짓의 이미지, 자살하려는 몸짓을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저 위로 나를 끌어올리려는 그 손목, 내 옷자락을 단단히 움켜쥔 살아 있는 손의 생생한 이미지, 이런 것들이 바로 그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맨  처음 떠오르는 모습이다. 그들의 현존 안에서-그들의 과목 안에서-나는 나 자신의 모습에 눈을 떴다. 수학자인 나, 역사가인 나, 철학자인 나로. 그러한 나는 이 스승들을 만날 때까지 진정으로 여기 있다는 느낌을 방해했던 나를 한 시간 동안 잠시 잊고, 나를 괄호 속에 집어넣고, 나로부터 나를 치워버렸다.

또하나, 그분들에게는 하나의 스타일이 있었던 듯하다. 자신의 과목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그들은 예술가였다. 수업은 물론 소통 행위였지만, 그것은 거의 자발적인 창조로 통할 만큼 숙달된 지식의 소통이었다. 어찌나 편안하게 수업을 했던지 우리는 매시간의 수업 자체를 하나의 사건처럼 기억할 수 있었다. 지 선생님은 역사를 부활시켰고, 발 선생님은 수학을 재발견했으며, 소크라테스는 S선생님의 입을 통해 표현되었다! 수학공식, 평화조약, 철학개념 같은 것들이 마치 바로 그날 만들어진 것처럼 기념비적인 수업을 해주었다. 그분들은 가르치면서 사건을 창조했던 것이다.

그분들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력은 거기서 멈추었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영향력은 그랬다. 교과목을 벗어나서는 우리에게 어떤 인상을 주려 하지 않았다. 부성(父性) 이미지의 부재로 고심하는 청소년에게 유효한 영향력을 끼치는 걸 영광으로 삼는 그런 선생님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구조하는 스승이라는 의식만 가졌던 걸까? 우리는 그저 수학과 역사와 철학 과목에서 그들의 제자였고, 그게 다였다. 물론 우리는 폐쇄적인 클럽의 회원들처럼 그들의 제자라는 사실에서 약간은 속물적인 자만심을 끌어내긴 했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사십오 년 뒤, 그들 덕에 선생이 된 제자 하나가 동상을 세워줄 정도로 후계자를 자처하려 든다는 사실을 알면 누구보다 먼저 놀라워할 것이다! 그분들은 블랑메닐의 첼로 연주자처럼, 일단 집으로 돌아가면 답안지를 교정하거나 수업 준비를 하는 것 말고는 우리에 대해서는 더이상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들에게는 확실히 다른 관심사, 열린 호기심 같은 게 있었고, 그것이 그들의 힘을 키워냈을 것이고, 이것은 무엇보다 교실 안에서의 그분들의 밀도 있는 존재감을 설명해주었다.(특히 지 선생님은 내가 보기에 세상사와 도서관들을 탐식한 것 같았다.) 이 선생님들이 우리와 공유했던 것은 단지 앎만이 아니라, 앎에 대한 욕망 자체였다! 그리고 나에게 나누어준 것은 그 앎을 전달하고픈 의욕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뱃속의 허기를 느끼며 그들의 수업에 들어가곤 했다. 우리가 그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분명 관심(요즘 젊은이들 말로 하자면 존중)을 받았고, 그 관심은 우리의 숙제에 써놓은 교정 문구들, 우리들 각자에게 일일이 건네주었던 그 코멘트에도 나타나 있었다. 그 분야의 본보기는 고등사범학교 준비반에서 역사를 담당하던 봄 선생님이었는데, 그분은 우리가 제출하는 논술문의 마지막 페이지를 백지로 내게 해 각자의 글에 대한 자세한 교정 내용을-붉은색으로 빽빽하게-타이핑해 돌려주었다.

학창 시절 막바지에 만났던 이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일관성없는 공공의 군집으로 축소시키고 '그런 학급'을 극히 열등하다고 말하던 모든 선생님들에 대한 내 생각을 크게 변화시켰다.  322-326


오늘날 지구상에는 다섯 종류의 아이들이 존재한다. 제 나라안에서 고객이 된 아이, 다른 하늘 아래서 생산자가 된 아이, 다른 곳에서 군인이 된 아이, 매춘부가 된 아이, 그리고 지하철 관고판의 죽어가는 아이. 굶주리고 체념한 그 아이의 모습이 정기적으로 우리의 권태로운 시선에 걸려든다.

다섯 모두 아이들이다.

다섯 모두 도구화된 아이들.  348

고객이 된 아이들 중에는 부모의 수단을 이용하는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있다. 부모에게 돈을 받아 물건을 사거나 어떻게든 돈을 마련햇 사거나. 이 두 경우에 쓰이는 돈이 개인적인 노동의 산물인 경우는 드물 테니 어린 구매자는 대가 없이 소유권을 얻는 것이다. 아이 고객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수많은 소비에서 부모나 선생과 동일한 영역(의복, 음식, 통신기. 음악, 전자기기, 교통수단, 여가...)을 가진 아이는 아무 어려움 없이 사적인 소유권을 얻는다. 그럼으로써 아이는 자신의 교양과 교육을 담당한 어른들과 똑같은 경제적 역할을 하게 된다. 어른들처럼 시장의 거대한 한 부분을 구성하고, 어른들처럼 외화를 유통시킨다(그 외화가 아이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아이의 욕망은 부모의 욕망처럼 기계를 계속 돌리기 위해 늘 자극받고 새러워져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이는 완전한 권리를 가진 중요한 인물이다. 어른들처럼. 

자율적인 소비자.

아이의 최초 욕망에서부터.

그 만족감은 아이가 받는 사랑의 측정치로 간주된다. 

어른들이 막아보려 한들 별수없다. 시장경제사회라는 게 그렇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자기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너무도 바라던 아이였기 때문에 아이의 탄생은 부모에게 끝없는 사랑의 빚 구덩이를 파게 한다)은 아이의 욕망을 사랑하는 일이며, 그 욕망은 대단히 중대한 욕구로 재빨리 표현된다. 사랑의 욕구와 물건에 대한 욕망이 거의 마찬가지인 까닭은 사랑의 징표가 물건의 구매로 통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욕망이란...  349-350


각각의 시대는 가족간의 사랑에 자신의 언어를 강요한다. 우리 시대의 언어는 사물들의 언어를 규정한다.  352


"너희 선생들은 하나같이 똑같아! 너희에게 결핍된 건 무지한 상태에 대한 강의야! 모든 시험을 통화하고 온갖 지식의 경연대회를 통과했을 때, 그때 너희가 갖춰야 할 최초의 자질은 너희는 알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파악해내는 능력이어야 해!.."  361


요컨대 가르치겠다고 나선 자들은 자신의 학창 시절에 대해 분명한 시각을 가져야만 해. 우리를 무지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최소한의 기회라도 얻으려면 무지의 상태를 조금이라도 느껴야 하거든!"  362-363


"감정이입 하지 마! 당신들의 감정이입 따위 관심 없거든! 당신들의 그 감정이입이 우리를 침몰시켜! 누구도 당신들에게 우리 입장이 되어달라고 요구하지 않거든. 도움조차 요청할 수 없는 아이들을 구해달라는 것뿐이야, 이해할 수 있겠어? 당신들의 모든 지식에다 무지에 대한 직관을 보태달라고, 그리고 열등생을 건져내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그게 당신들 일이야! 스스로 헤쳐나가는 법을 가르쳐주면 공부 못하는 학생도 스스로 헤쳐나갈거라고! 당신들한테 요구하는 건 그게 다야!"  364


"감정이입을 치워버리면, '그것'은 어떻게 치유하지?"

여기서 그는 엄청 주저한다.

다그쳐야 한다.

"말해봐,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어도 모든 걸 다 안다며? '그것'에 대해 준비되어 있지 않고서도 가르치는 수간이 뭐야? 방법이 잇기는 한 거야?"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있는 건 방법들뿐이지! 당신들은 언제나 방법들 속으로 숨느라 시간을 보내잖아. 그 방법들만으론 충분하지 않다는 걸 마음속 깊이 잘 알면서 말이야. 뭔가가 빠져 있어."

"뭐가 빠져 있지?"

"말 못해."

"왜?"

"엄청난 말이거든."

"'감정 이입'보다 더해?"

"비교도 안 되지. 네가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아니 대학이나 그 비슷한 곳에서는 절대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이야."

"뭔데? 해봐."

"아니, 정말이지 못하겠어..."

"자, 어서!"

"난 못한다니까! 교육을 말하면서 이 말을 내뱉었다간 넌 린치당할 거야."

"......"

"......"

"......"

"사랑."  366-367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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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동안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에 대한 생각과 의견들

여행은 움직이는 고해소다.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은 다시 볼 사이가 아니기에 삶에 깃든 어두운 비밀이나 상처, 슬픔 등을 주저하지 않고 털어 놓을 때가 많이 있다.

인생이라는 여정에서도 우리는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할 때가 많이 있다. 삶의 복잡한 문제를 드러내고 구체화하려면 그 문제를 말로 표현해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소설가에게 가장 중요한 재료는 '다른 사람의 삶'이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나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내가 인생에서 직면했던 어려운 문제들을 되짚어보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 더글라스 케네디




1 행복은 순간순간 나타나는 것일까?


키르케고르는 '인생은 앞으로만 나아간다. 지나간 뒤에야 인생을 이해할 수 있다'라고 했다.  

철학자 니체 '시련으로 죽지 않는 한, 사람은 그 시련으로부터 더욱 단단해진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13


당시 내 나이 45세

그 무렵 나는 인생에서 배우게 되는 여러 가지 교훈들 중 비로소 한 가지를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절만, 낙심, 비극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절망, 낙심, 비극은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통과의례라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커다란 시련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넓고 깊게 트인다. 사람은 상실, 재난, 아픔, 슬픔 따위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삶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3-14


인간 조건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읽기 쉬운 이야기와 문장으로 결합하는 능력, 마치 슬픈 코미디처럼 인간관계가 변모해가는 모습,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불공평에 대해 차가운 일침을 가하는 절규 등이 나의 소설 세계와 일치하는 부분이었다.  15


조르주 심농이 1946년에 쓴 소설 <뉴욕의 매그레>를 읽으며 내 상황을 소설에 대입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다음 구절은 특히 내 처지를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통 형태 그대로 눌려 있는 배게, 잠 못 들고 몸을 심하게 뒤척이다 구겨진 시트, 파자마, 슬리퍼, 의자에 널브러진 옷가지, 탁자 위에 펼쳐진 책 옆에는 먹고 남은 저녁음식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외로운 남자의 끔찍한 음식... 불현듯 그는 자신이 도망쳐 온 모든 것들을 떠올렸다. 그는 입구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기 두려워 얼어 붙어 있었다.'

사람은 왜 책을 읽을까? 혹시 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이 혼돈의 세상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은 아닐까?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추락하는 감정, 내가 처해 있는 불행과 산적한 문제들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 같았다.  16-17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빼고 나면 내 삶은 점점 더 지리멸렬해지고 있었고, 생에 대한 의구심만 커져갔다.  22


어른이 되어 '즐거워할 수는 있지만 행복할 수는 없어.' 라고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시점이 있다. 그 시점을 지나고 나서부터는 갑자기 행복과 마주친다는 생각만으로도 당황하게 된다. 행복, 그 심오하고 모순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를 입 밖으로 끄집어내어 말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의미를 전하고 싶어 한 것일까?  23


행복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인간의 모든 딜레마가 포함되어 있는 거대한 구조물에서 행복은 왜 큰 초석으로 여겨지는가? 

행복은 사랑과 비슷한 개념이다. 우리는 사랑과 행복을 간절히 소망하지만 스스로 장애물을 만들어가며 앞을 가로막기도 한다.

우리는 과연 행복해지길 원할까? 우리는 혹시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근원적인 결핍을 끌어안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건 아닐까? 오히려 우리에게 불편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자초하며 사는 건 아닐까? 우리는 삶에 만족을 주는 조건들을 스스로 밀어내는 행위를 하며 사는 건 아닐까?  23-24


내가 소설가로서 여러 가지 곤경에 현명하게 대처해 왔다고 해도, 아들의 자폐증을 치료하기 위해 지혜롭게 대처해 왔다고 해도, 직업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내가 책임져야 할 의무들을 훌륭하게 잘 수행해 왔다고 해도, 여전히 삶에 대한 식지 않은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나는 언제나 위기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누구나 가슴속에 '언젠가 내 모든 게 드러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품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모두의 인생에 깃든 가장 큰 두려움이 아닐까?

우리는 스스로 얼마나 한심하고 비겁한지 잘 알고 있다. 언젠가 자신의 실망스럽고 부족한 모습을 들키지 않을까 늘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 인간은 자기의심에 빠질 확률이 높다. 자기혐오에 빠질 확률도 높다. 아니, 자기 자신의 모습을 불편하게 여길 확률도 높다.

나는 그런 증상드렝 대해 잘 알고 있고, 마침내 한 가지 결론에 도달 했다.

'행복은 동화 속에나 있다. 행복이란 손에 넣은 사람이 극히 드문 꿈이며, 나의 감정이나 심리로는 도저히 취할 수 없는 개념이다.'  25-26


삶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양성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다양성이란 단순한 인정이나 타협을 뜻하는 게 아니다. 삶이란 정답 없는 심오한 의문과 끊임없이 조우하는 일이다. 삶에 대한 정답을 찾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애써야 하는 건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이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인생은 왜 끊임없이 불공평한가? 인생을 이루는 근원적이며넛도 영원한 요소인 괴로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인류가 지구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인간과 함께해 왔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해 온 질문이 한 가지 더 있다.

'생명의 불이 꺼지고 내가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ㅇ낳게 될 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인류는 죽음의 공포를 달래기 위해 갖가지 조직과 구조를 만들어 왔다. 가장 핵심적인 것이 종교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도 죽음과 함께 인생의 경이가 모두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물론 용기 있게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침착하게 수용할 수는 있다. 삶에 지친 나머지 죽음의 안식을 워할 수도 있다.  29


행복이란 특정한 순간에만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나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며 잠 못들게 하는 것들을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언제라도 경이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  31


사람이 과연 줄곧 행복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프랭크 시내트라의 노래 가사처럼 '편하고 쉽게'만 나아가기에는 우리의 삶은 지나치게 복잡하고 신비롭다...

괴롭고 불안한 일이 아무리 많더라도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끊임없이 유지한다면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희망이란 바로 '흥미로운 삶'을 이루는 것이다.

'흥미로운 삶'이란 무엇일까? 끝없는 질문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과연 그 '흥미로운 삶'의 뿌리를 잃지 않고 지켜갈 수 있을까?  32




2 인생의 덫은 모두 우리 스스로 놓은 것일까?


나는 <컬리지트>에 다녔다는 것을 대단한 행운이라 여기고 있다. 그 학교를 다니는 동안 비판적 사고 능력, 독서의 필요성, 명확하고 창의적인 글쓰기 등을 배웠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소양이 사람의 지성과 감성을 고양시키는 필수적인 요소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컬리지트>의 단점이라면 성적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문화, 엘리트주의, 실패는 죄악이라는 생각 등이었다.  42


사람들은 누구나 내적 갈등을 겪으며 살아간다. 스스로 만들어낸 내적 갈등이야말로 그 사람의 삶을 좌우한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직업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도 한 겹 벗기고 바라보면 후회와 미련으로 점철된 생을 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니까.

삶이란 결코 원하거나 꿈꾸는 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후회를 줄이고 있는 그대로의 생을 끌어안을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암울한 현실을 결코 벗어던질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암울한 현실을 만들어낸 사람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절망감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56


'사람은 누구나 내적 갈등을 안고 살아간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기본적으로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내 정신과 의사가 들려준 말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적 갈등과 끊임없이 싸워야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 깨달음이란 바로 '어느 누구도 타인의 행복을 모두 책임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58


자녀의 삶을 부모의 뜻대로 이끌어갈 수는 없다. 결국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개척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과제를 풀 책임은 당사자들에게 있다.

부모가 자녀의 행복을 대신 만들어줄 수 있을까? 

사람은 각자 지문이 다르듯 행복을 느끼는 의미와 조건 역시 다르다. 우리는 배우자가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  58-59


독서광들이 대개 그러하듯 나 역시 내가 읽어낼 수 있는 양보다 훨씬 많은 책을 충동적으로 구입한다. 책을 사는 것도 중독이다. 책을 사는 게 코카인이나 포르셰를 사는 것보다 돈이 덜 들고, 책을 집필하느라 노고가 많았던 작가를 돕는 일이긴 하지만 중독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내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 중에서 아직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책이 부지기수다.  64


스스로 덫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더욱 두려운 질문들이 기다리고 있다. 

과연 덫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를 가두고 있는 불행한 삶 너머로 탈출할 수 있을까?

아니면 불행한 삶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며 끝까지 버텨내야 할까?

그런 질문들에는 골치 아픈 개념이 숨어 있다. 바로 '변화'라는 개념이다. '변화'는 미국의 낙관주의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68


'변화'는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상륙할 당시부터 미국의 기본 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청교도정신의 중심에는 '죄악'의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섹스에 있어서는 특히 심하다. 그런 점들은 미국과 프랑스를 비교해 보면 훨씬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프랑스에서는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바람을 피우는 것에 대해 가정과 분리해 사회적으로 묵인한다. 미국에서도 장기간 결혼생활에서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권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부가 서로 합의 아래 외도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다만 미국사회에서의 외도는 어디까지나개인적인 문제로 국한된다. 프랑스에서의 외도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것과 명백한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69


간통 행위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보상받는 기분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몰래 간직한 기분, 은밀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에 짜릿한 쾌감을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반면 자기혐오에 빠질 수도 있고, 차분하게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도 있다.  70


우리는 수많은 의무들에 갇혀 있다. 모기지론, 자동차 할부금을 갚아나가야 할 의무와 함께 자녀양육의 기나긴 의무가 있다. 평생을 따라다니는 부모라는 꼬리표를 무시할 수 없고, 자신이 선택한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그런 문제들은 미국사회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권태는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문제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권태로운 결혼생활이나 직업을 그대로 유지해 간다는 건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는 그런 삶을 유지해가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덫에 갇혔다는 생각이 들때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가장 불편한 진실은 그 덫을 만든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72


우리는 나이를 먹고 나서야 세상에서 살다간 모든 사람들이 맞닥뜨렸을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인생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던 사람들은 나이가 지긋해지고 나서야 자기 자신에게 잔인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삶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때서야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 덫에 갇혀 더없이 소중한 인생을 불행에 빠뜨리고도 바꿀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진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삶의 덫에 갇혀 더없이 소중한 인생을 불행하게 보내기로 결정한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76


우리는 누구나 떠나는 꿈을 꾼다. 자유를 얻는 대신 외로움을 덤으로 얻게 될 미지의 땅으로 모험을 떠나는 것은 어려운 결정이다. 가정이나 직업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로워지기로 결심한다는 건 어른이 되어 내릴 수 있는 결정 중에서 가장 힘들다. 그런 까닭에 나는 떠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키케로는 듣기에는 불편하지만 일리 있는 말을 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건 대단히 위험하다. 하지만 그런 위험은 세상의 도처에서 너무 쉽게 일어난다.'  77




3 우리는 왜 자기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야기를 재구성하는가?


절망에 몰린 사람은 비이성적인 시나리오를 유일한 해결책으로 착각하게 된다고 하잖아.  88


'실증적 사실'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이견이 없는 진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복잡한 상황들을 설명할 때 단 하나의 실증적 사실만 적용할 수는 없다.  89


왜 상대의 '진실'은 나의 진실과 다른가? 더욱 간단히 말해 우리는 왜 자기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야기를 재구성하는가?

하나의 사건을 재구성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건 인간의 행동 유형에서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다.  93


내 경험상 어떤 진실을 부정하고 이야기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94


마음은 그 자체로 장소이며, 지옥을 천국으로,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 말 뒤에는 또 다른 질문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어떨게든 하루하루를 견디기 위해 현실을 재구성한다.'

거리의 철학자로 통하는 에릭 호퍼는 말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할 때 가장 크게 거짓말한다.'  95


우리는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에 갇혀 사는 경우가 많다. 그 이야기는 우리의 관점이 만들어낸 허구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얼마든지 관점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이야기를 바꿀 수 있다.  112


(고모할머니) 벨은 "그동안 인생을 비극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어. 아무리 힘들어도 인새을 비극이라 여기면 안 돼. 난 늘 우울한 생각에 빠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왔어. 내가 그 아이를 잃고도 살아갈 수 있었던 건 바로 그런 결심 덕분이었지. 비극적 인생 이야기에 나를 포함시키지 않겠다고 결심했지....

'이제 부터 나는 더 이상 절망에 허덕이지 않는 길을 선택하겠어.' 라고.. 그렇게 마음먹는다고 해서 그 일이 당장 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는 않아. 그렇지만 나는 더 이상 그 일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어. 물론 한순간도 그 아이의 모습이 머릿소에서 사라지지 않았지만 나는 가능한 한 유쾌해지려고 애썼지."  114-115


비극을 갈무리하고 지나갈 길을 찾아낼 수는 있다. 하지만 인생사의 수많은 비극을 완벽하게 극복할 수 있는 해답은 없다. 인생사의 비극적인 문제들을 성공적으로 극복해낸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그 그늘까지 완벽하게 해소할 수는 없다. 사람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괴로움을 끝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살아 있는 동안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쓸 필요가 있다.  116




4 비극은 우리가 살아 있는 대가인가?


작가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 한 가지 조언을 하겠다. 누구나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에는 엄청난 비방이 쏟아진다는 점을 명심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설령 냉소적인 비방들을 무사히 극복하게 되더라도 작가가 되려는 사람의 앞길에는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들이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다. 출판사의 거절을 충격 없이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의 혹독한 평을 아무렇지 않게 견디는 것이 작가가 되려는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자세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작가가 되려는 사람은 끈기와 노력을 통해 끊임없이 창작에 필요한 기교를 연마하고, 작품에 대해 애정 없는 비판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웃는 얼굴로 마주볼 수 있어야 한다.  122-123


1970년대에만 해도 우울증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치료할 약도 변변히 준비돼 있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우울증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자살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해 심각한 벌을 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절망과 공허로 뒤덮인 어둠의 질곡을 헤매게된다. 누구나 암담한 순간에 처하는 경험을 한다. 우리는 누구나 영원히 세사오가 작별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기도 한다. 

단 한 번도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거짓말쟁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한 시나리오를 머릿속 한편에 감춰두고 '아주 몹쓸 생각'이라고 표시한 다음 하루하루를 버텨가고 있을 뿐이다.  127


죽음은 앞으로 전개되는 '삶'의 이야기를 앗아간다.  130


"표절행위가 발각되기를 바랐나요?"

내 질문에 하워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대답했다.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나요? 아버지가 말하곤 했죠.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 사실이 남들에게 발각되기를 바란다고요. 내 경우에는 일이 모두 엉망으로 끝난 다음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어요."

"대개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결과를 봐야만 그 의미를 알게 되죠."

"의미를 깨닫게 되더라도 너무 늦은 경우가 많기도 하죠."  155


하워드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말했다. 

"우리는 누구나 예기치 못한 비극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비극은 어떻게든 우리를 덮치죠. 그렇지 않나요?"

"사실 인생의 아주 많은 부분이 우리 손이 미치지 않는 영역에 있긴 하죠."

하워드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자기 파괴적인 일탈 행위로 비극을 자초한 게 얼마나 한심하고 비참한 짓이었는지 뒤늦게야 깨달았아요. 내 자신이 자초한 비극이었죠.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비극을 피하려면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어야만 하죠. 우리는 매일 아침 거울 속에 들어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며 살아가죠. 그렇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 그 사실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큰 비극입니다."  156




5 영혼은 신의 손에 있을까, 길거리에 있을까?


작가라면 대부분 그렇듯이 나도 어떤 사람들이 당면한 문제를 여러 가지 가정에 대입해 생각해보곤 한다.  167


나는 '만물을 관장하는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개념을 깊이 숙고해 본 적이 있는데 결국 그 말에 수긍할 수 없었다. 전지전능한 신보다 세상일에 덜 끼어드는 초월적 존재도 내 머리로는 수긍이 되지 않는다. 

신이 세상을 만들었지만 세상은 신의 간섭 없이 돌아간다고 주장하는 이신론은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이신론을 주장하는 사상가는 많지만 볼테르가 대표적이다. 내가 보기에 이신론은 불가지론의 지류로 생각된다. 이신론으 우주의 기원은 있지만 생명체들은 각각의 상황을 따르지 신의 명령을 따르지는 않는다는 세계관이다.  169


종교란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베들레힘으로 몸을 숨기는 게 아니면 무엇일까? 파란만장한 인생에서 조금이나마 기대 쉴 수 있는 안식처를 찾는 게 아니라면 무엇일까? 우리에게 일어나는 온갖 문제들에 대해 끝없이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한 탐구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173


몇 년 전 이스라엘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때 만난 70대 노인이 나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유대교는 모계로는 분명하게 이어지지만 부계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어머니가 유대인일 경우 그 자식은 유대인으로 친다. 아버지가 유대인인 경우에는 자식을 유대인으로 치지 않는다. 그 아들이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174




6 왜 '용서'만이 유일한 선택인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상대로부터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한다. 갖가지 난제가 콘크리트 벽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는게 뻔히 보이는데도 못 본 척하고 넘어간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기 때문이다.  216


자기애가 지나치게 강한 사람은 남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은 사랑을 주지 않으면서도 사랑을 바라는 사람을 기꺼이 묶어두려 한다.  236


용서는 인간 조건의 중요한 요소다. 세계의 주요 종교들은 모두 용서를 가르친다. 탈무드에 나오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 

'완고하면 안 된다. 마음을 누그러뜨릴 줄 모르면 안 된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건 쉽게, 화를 내는 건 어렵게 살아야 한다. 상대가 진심으로 잘못을 빌 경우 기꺼운 마음으로 용서해야 한다.'

신약에도 용서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와 비유가 많이 나온다. 

그 유명한 산상수훈도 사실은 용서에 대한 글로 볼 수 있다. 자주 인용되는 다음 문장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불교에서도 미움과 증오를 마음의 독이 되는 병으로 간주한다. 불교에서는 용서하지 않으면 업이 쌓이고,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오히려 더욱 불행한 사람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사람이 나를 이용했어, 그 사람이 나를 괴롭혔어, 그 사람이 나를 짓눌렀어, 그 사람이 내가 가진 모든 걸 빼앗았어.'라는 생각을 품고 있으면 마음속에서 번뇌가 끊이지 않는다.

용서에 대해 가장 공감할 수 있는 말을 남긴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일 것이다. 몇 세기 뒤에 살았던 몽테뉴와 함께 아우구스티누스는 현대적인 실존주의의 토대다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용서는 죄를 사하는 것이다. 용서함으로 한 번 길을 잃었던 마음이 다시는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현대 의학과 정신분석학에서는 '용서 모델'로 불리는 연구가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용서하고 미움을 넘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받은 피해의 부스러기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을 훨씬 더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의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

큰 상처를 준 사람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건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게 남아 있는 분노를 줄여나가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분노를 줄이는 건 정신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용서는 정신건강에 좋다. 다만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용서하기란 정말이지 몹시 힘든 일이다.  239-240


분노의 대상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가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결국 후회할 일을 한 가지 더 만들게 될 뿐이죠.  250


분노가 당신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죠. 우리는 분노를 너무 많이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큰 피해를 당할 경우 특히 극심한 분노의 감정이 일게 되죠.  251


용서는 자기 안에 있는 온갖 나쁜 기운을 밖으로 점차 내보내는 일이다. 

내가 '점차 내보내는 일'이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하기 바란다.  257


용쇼는 먼저 자기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미움과 원망을 버리는 일이다. 용서를 상대에 대한 수동적 공격의 도구로 사용하면 안 된다. 타인의 잘못을 용서했으니 자기 자신의 도덕적 우위가 증명된 셈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용서는 존재론적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 각자가 세상에 홀로 서서 모든 행도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면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타인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도 자신의 책임이다. 사는 동안 만나게 될 수밖에 없는 어려움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해야 할 책임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았을 때 그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것도 자기 자신의 몫이다. 

용서는 '잊기'와 다르다. 요즘 '잊기'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다. '잊기'는 살아가면서 힘겨운 일을 겪에 돼 괴로움에 처했을 때 그 상처를 상자에 담아 마음 깊은 곳에 꼭꼭 묻어두고 다시는 열어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258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이 우리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용서는 우리가 모든 상처를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과도 같다...

용서의 과정은 전적으로 혼자 이루어가야 하기에 더욱 두렵고 힘든 일이다.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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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뇌에는 '결정적 시기'라는 것이 있는데, 이 시기의 뇌는 젖은 찰흙 같아 주변 환경의 영향으로 자유자재로 주물러지고 변형될 수 있다. 오리는 태어난 지 몇 시간, 고양이는 4주에서 8주, 원숭이는 1년, 인간은 약 10년까지 유지되는 '결정적 시기'에 겪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뇌 구조가 완성된다. 그래서 아이슬란드에서 성장한 뇌는 아이슬란드에 최적화된 뇌를, 카르타고에서 자란 뇌는 카르타고에 최적화된 뇌를 가지게 된다.  26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인류의 모든 전설과 신화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유 없이 떠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바로 헤어짐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세상과 이별한 자에게는 도전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성숙이다. 떠남을 통해 성숙한 자는 다시 익숙한 세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자는 더 이상 떠나기 전의 그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귀향이다. 캠벨은 이렇게 인류의 모든 스토리들이 헤어짐, 성숙, 그리고 귀향으로 이뤄진다고, 이 과정이야말로 인류 공통의 '단일신화(monomyth)'라고 이야기한다.  27



우리가 떠나는 진정한 이유는 어쩌면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28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있고, '왜'라고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순간 우리는 질문을 짊어진 무거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65



인간은 23쌍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다. 각 염색체들은 노화 진행을 나타내는 텔로미어(telomere)라는 DNA 조각으로 끝난다. 세포들은 주기적으로 세포분열을 통해 DNA를 복제하는데, 세포 끝 부분인 텔로미어는 복제되지 않아 궁극적으로 분열 때마다 점차 짧아진다. 통계적으로 고양이는 8번, 말은 20번, 인간은 60번 정도 세포분열을 할 수 있다. 더 이상 분열되지 않으면 세포는 노화하고 우리는 결국 죽음에 이른다. 텔로미어가 잘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까? 다행히도 가능하다. 텔로머아제아(telomerse, 말단소립 복제효소)를 이용해 세포가 분열해도 텔로미어의 길이를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 암세포가 가장 유명한 경우이다. 텔로머라아제가 활성화한 암세포들은 끊임없이 세포분열이 가능하다. 암세포들에게는 영원한 '삶'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94



현재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은 해마다 약 1,000억 톤의 탄소를 필요로 하는데 그 중 오로지 5억 톤 정도만 생태계에서 자연스럽게 생산된다. 나머지 995억 톤의 탄소는? 죽은 생명체의 시체들을 재활용해 만들어진다. 죽음이 없으면 생명에 핑요한 탄소의 200분의 1만 만들어지고 죽음 없는 세상에서는 새로운 삶이 200배 덜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지구에는 그런 죽음이 있기 때문에 약 200배의 더 많은 삶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96



인생은 생각과 선택의 꼬리물기이다. 선택과 생각은 뇌로 하는 것이고, 뇌는 수천억 개 신경세포들의 합집합니다. 그 수많은 신경세포들을 단순히 '내가 원한다'라는 의지 하나로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시대는 매우 순진해 보인다. 완벽한 자유의지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선택은 수많은 요소들(물리법칙, 유전, 경험, 학습, 우연...)로 구성된 '선택의 풍경'을 통해 확률적으로 만들어진다. 선택의 틀은 정해져 있지만, 선택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완벽한 '자유의지'를 통한 완벽한 '선택의 자유'가 존재한다고 믿을까?  104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실이란 외부 세상과 머리 안에 존재하는 내부 세상과의 동일성을 의미한다며, 진실 추구를 지성과 사실 간의 방정식에 비유하기도 했다.  118



역사철학자 비코는 진실을 '구성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진실은 객관적이기보다는 역사, 사회, 경제적 조건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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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너의 도시를 세워라"라고 외칩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평온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베수비오 화산처럼 가혹해지기를 바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과 대결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다 강하고 깊은 존재로 고양시킬 수 있습니다.  12


근대는 사람들이 겪어야만 하는 운명의 부담을 가능한 한 줄여 주려는 시대입니다. 자연마저도 과학과 기술을 통해서 인간을 위한것으로 길들이고, 사회도 빈곤과 불평등을 줄여서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안락한 삶을 보장하려는 것이 근대의 경향입니다. 또한 근대는 사람들이 투쟁하지 않고 서로를 동정하고 도우면서 평온하게 사는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라고 여깁니다.  13


장영희씨는 <노인과 바다>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정신을 상기시킵니다. 스스로 위험한 투쟁을 택하기보다는 남의 전리품을 약탈하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는 상어 떼의 정신입니다. 상어 떼는 노인이 힘겹게 잡은 대어에 달려들어 수비게 그 고기를 뜯어 먹습니다.... 니체는 이렇게 쉽고 안락하게만 인생을 살려는 정신을 '말세인들의 정신'이라고 일컫습니다.  16


저는 이 책에서 니체라면 우리가 사는 것을 버겁게 느끼면서 던질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질문들에 어떻게 답했을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많은 살마들은 니체가 주창하는 정신을 예수나 부처가 설파하는 사랑과 자비의 정신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또한 헝가리의 철학자 루카치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니체가 주창하는 정신을 약한 자들에 대한 지배와 정복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의 정신으로 해석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저는 니체가 주창하는 정신은 예수나 부처식의 사랑이나 자비의 정신도 아니고 제국주의적인 정신 역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약한 자들에 대한 사랑과 동정을 주창하는 근대인들이 망각하고 있는 강건한 정신으로, 고통과 험난한 운명을 자신의 고양과 강화를 위해 오히려 요청하는 패기에 찬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초인(超人 뛰어넘을초 사람인)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



첫 번째 질문 -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할까?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을 경멸하라


초조가 세상을 뒤엎고 있다. 

현대인들은 너나없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20


쇼펜하우어,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22


과학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를 알려줍니다. 

이에 반해 철학은 우리가 이미 삶 속에서 체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고 있는 것을 확실하게 개념화해서 우리 눈앞에 보여줍니다.  27


'아름다움이란 우리 인간이 자신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세계에 나눠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40


우리는 흔히 고난과 고통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고통스럽게하는 고난이 일어나지 않고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이와 함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통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한 인간'은 고난과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 않고, 그런 것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평정과 충일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입니다.  43



두 번째 질문 -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 무엇일 필요합니까?

인생, 의미를 찾지 않을 때 의미 있는 삶이 된다


니체는 '인간의 정신은 낙타의 정신에서 사자의 정신으로, 그리고 사자의 정신에서 ㅇ라이의 정신으로 발전해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47


니체가 말하는 낙타의 정신은 사회의 가치와 규범을 절대적인 진리로 알면서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정신을 뜻합니다.  48


니체는 '사자의 정신은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는 못한다'라고 이야기했지요. 기존의 가치와 의미가 붕괴된 자리에 남아 있는 가치와 의미의 공백 상태는 정말이지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기존의 가치와 의미가 무너지고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결여된 상태를 두고 니체는 니힐리즘(nihilism, 허무주의)이라 명명.  50-51


아이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말은 곧 인생을 유희처럼 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어떤 재미있는 놀이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왜 이 놀이를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놀이가 재미잇어서 놀 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 '왜 이 놀이를 해야 하지?'라며 놀이의 의미를 묻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놀이의 재미가 사라졌는데도 계속해서 그 놀이를 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 하나의 재미있는 놀이로 여겨지는 사람은 '이 놀이를 계속해야 하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저 삶이라는 놀이에 빠져서 그것을 즐길 뿐이지요. 우리가 삶의 의미를 묻게 되는 것은 삶이 더 이상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으로 느껴질 때입니다.  60


중력의 정신이란 우리를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두려움과 걱정, 시기와 원한과 같은 부정적인 정신을 뜻합니다.  70



세 번째 질문 - 내 맘대로 되는 일은 왜 하나도 없을까?

위험하게 사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운명에 대해서 우리가 취할 수 이쓴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운명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인간이 노력하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극단적인 자유의지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면 된다'는 철학이지요. 

그런데 니체는 이러한 극단적인 자유의지의 철학을 '단죄(斷罪 끊을단 허물죄)의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자유의지의 철학은 사회적으로 실패한 사람을 단죄합니다. '그대가 실패한 것은 그대의 노력 부족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공부 재능이 없다면 아이에게 주어진 다른 운명적 소질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계발시켜줘야 하고, 이렇다 할 아무런 재능도 없으면 평범하게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있는 자세를 키워줘야 하겠지요.  77-80


두 번째 태도는 숙명론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패배주의로서 모든 것을 운명 타승로 돌리는 태도에 해당합니다. 자유의지의 철학은 사람들을 단죄하지만 숙명론은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80


세 번째 태도는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역경을 오히려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면서 험난한 운명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운명애(運命愛 옮길운 목숨명 사랑애)의 철학은 언뜻 보면 자유의지의 철학과 동일한 것 같지만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런 철학은 힘든 운명을 하나의 기회로 승화시키려고 합니다.  81


운명애의 사상에 엄습되었을 때 니체는 그의 책이 거의 팔리지 않을 정도로 전혀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런 자신의 인생에 만족했고 그것을 긍정했습니다.  85



네 번째 질문 -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어떻게 풀 수 있을까? 

당신의 적을 경외하라


적과 대등하다는 것 - 이것이 대개 성실한 결투의 첫째 전제다. 상대방을 얕보고 있는 경우, 전쟁은 할 수 없다.  103


니체는 강간 등 여러 가지 사회악을 만들어낸다고 해서 성욕을 제거하려 하거나, 경쟁심이 인간들 간의 갈등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경쟁심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치통을 막기 위해 치아를 빼버리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위라고 말합니다.  111



다섯 번째 질문 - 신을 믿지 않으면 불행해지는 걸까?

당신을 위한 신은 어디에도 없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 그리고 신을 죽인 자는 바로 우리다! 살해자들 중의 살해자인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위호할 것인가?' 

'신은 죽었다' 니체의 이 말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신이 인간과 달리 신일 수 있는 이유는 죽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이 죽었다'라는 니체의 말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것은 근대에 들어와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게 되엇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서양의 중세 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부딪힌 문제들을 신에 의지하여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와서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은 보통 자연 또는 사회에서 오는 것이지요. 폭우나 가뭄처럼 자연으로부터 오는 재해가 있는가 하면 전쟁이나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고통이 있습니다. 

근대인들은 자연에서 비롯되는 재해에 대해서는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또 잘못된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대해서는 사회구조의 개혁을 통해서 극복하려 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부딪힌 문제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많은 부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고 이에 따라 인간은 신보다는 잣니의 힘을 더 믿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근대에 들어와 과학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굳이 신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도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벼락을 신의 진노라고 해석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것을 자연법치겡 따라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 인류학이나 민속학 같은 사회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굳이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민족들도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에 따라 그리스도교가 서양 사회에서 갖는 영향력은 중세 시대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두고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119-121


니체는 종교를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죄책감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의 힘을 강화시키고 고양시키는 종교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종교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이 만들어낸 그리스도교처럼 지상의 힘이나 쾌락을 죄악시하고 끊임없는 회개를 강요하는 종교입니다. 

니체는 종교란 결국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생각합니다.  135



여섯 번째 질문 - 살아가는 데 신념은 꼭 필요한 걸까? 

신념은 삶을 짓누르는 짐이다


변화하는 세계를 하나의 이론 체계로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니체는 체계를 만들려는 의지는 모두 불성실하다고 보았습니다.  166


확신이란 감옥이다. 

가치와 무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격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아래에 - 그리고 자기 뒤에 - 오백 가지나 되는 확신들을 봐야 한다.  167


인류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것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특정한 종교적 혹은 정치적 이념에 대한 독단적인 확신이 아닌가 합니다.  173


확신은 확신에 사로잡힌 인간을 지탱해주는 기둥이다. 여러 가지 사물들을 보지 않는다는 것, 어떤 점에서도 공평하지 않다는 것, 철저하게 편파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것, 모든 가치를 하나의 엄격하고 필연적인 관점에서 본다는 것 - 이것만이 확신에 사로잡힌 인간이 존속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는 진실한 인간과 진리에 반대하고 그것에 적대하는 자가 된다.  174-175


어떤 독단적인 이념을 확신하는 사람은 자신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이념이 자신의 삶에 확고한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습니다.

어떤 이념을 독단적으로 신봉하는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에게 삶의 위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175


니체가 말하는 자유로운 정신은 곧 독단적인 이념이 우리에게 주는 삶의 위안을 값싼 위안으로 간주하여 거부하면서 세계와 사물을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176



일곱 번째 질문 - 예술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예술은 삶의 위대한 자극제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오래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짧게 살더라도 충만하게 사는 것입니다.  187


'인간은 근본적으로는 사물에 자기 자신을 반영시키며, 자신의 모습을 되비추어주는 모든 것을 아름답다고 여긴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오직 인간만이 아름답다'라고, 이것이야말로 모든 미학의 제1의 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상응하여 제2의 진리에 해당되는 것은 '퇴락한 인간 이외에는 아무것도 추하지 않다'라고 니체는 이야기합니다.  193


니체는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느끼는 기쁨과 분리될 수 없다고 봅니다.  195


그는 예술이 삶의 위대한 자극제라고 생각했습니다.  196



여덟 번째 질문 - 죽는다는 것은 두렵기만 한 일일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절정이다


니체는 삶을 사랑하는 자라면 우연하거나 돌연하게가 아니라 자유로우면서도 의식적으로 죽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129



아홉 번재 질문 - 나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너만의 꽃을 피워라


니체는 우리의 타고난 성격과 소질에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스타일을 부여할 것을 요구합니다.  229


사람들은 틀에 맞추어지지 않는 자신을 악한으로 간주했고 되책감에 시달렸습니다.  

'도덕이 삶에 대한 고려나 배려 그리고 삶의 의도에서 비롯되지 않고 그 자체로 단죄하는 한, 도덕은 동정할 여지가 없는 특수한 오류이며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해를 끼친 퇴락한 자들의 특이체질이다.'  233


'우리 다른 사람들, 비도덕주의자들은 정반대로 모든 종류의 이해와 파악 그리고 긍정에 우리의 가슴을 활짝 열어 놓았다. 우리는 쉽게 부정하지 앟으며 긍정하는 자라는 점에서 명예를 찾는다. 우리는 성직자와 성직자의 병든 이성의 거룩한 무지가 배격하는 그 모든 것을 필요로 하며 이용할 줄 아는 경지에 갈수록 더 눈이 열리게 되었다.'

니체는 인간을 교육하는 방법을 길들이는 방식과 길러내는 방식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누고 있습니다. 길들이는 방식은 인간을 특정한 틀에 맞추도록 강요하는 것인데, 이런 방식을 인간을 병들게 만들고 위축되게 합니다. 이에 반해 길러내는 방식은 인간의 타고난 소질과 성향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는 방식입니다.  234-235


니체는 '그대 자신이 되어라'라고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는 주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235



열 번째 질문 -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감정을 다스리는 것을 넘어 몸을 다스려라


우리는 보통의 경우 초인이 아니라 안일을 탐하는 말세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극복을 하려면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 필요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권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승리다... 전쟁을 일으키는 삶을 살도록 하라! 오래 연명하는 삶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그는 '모든 위대한 것과 충일한 힘은 끊임없는 자기극복을 통해서 형성된다'라고 말합니다.  250


니체는 자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감정과 생각을 다스리는 것을 넘어서 신체를 다스려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힘들다고 해서 함부로 눕지 말고 그때마다의 상황에서 요구되는 적절한 자세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단순히 감정과 사상을 훈련하는 것으로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 가장 먼저 설득시켜야만 하는 것은 바로 신체다.'  255


신체를 완전히 우리의 지배 아래 둘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본능까지 건강하고 기품 있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본능이 건강한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도 건강하게 만드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건강한 본능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경쾌하고 가벼우며 필연적이고 자유롭게 건강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257


그는 우리가 고귀한 인간이 되려면 보는 법과 생각하는 법 그리고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에 대해서 니체는 '눈에 평정과 인내의 습관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성급하게 속단하지 않고 판단을 유보하면서 하나하나의 경우를 모든 측면에서 검토하고 조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258-259


보는 법을 배우게 되면 사람들은 대체로 서두르지 않게 되고, 쉽게 믿지 않게 되며, 낯설고 새로운 것을 접하더라도 우선을 적의를 품은 평정과 함께 그것을 대하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생각하고 쓰는 법인데, 니체는 이것을 '무용을 배우듯'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탁월한 무용수는 섬세하고 우아한 몸짓으로 춤을 춥니다. 그런 몸짓 하나하나를 언어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하지요. 그런에도 우리가 사유하고 글을 쓸 때에는 사물들이 갖는 섬세한 뉘앙스를 느끼면서 그것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259




에필로그

니체의 시각에서 보면 오늘날의 사회는 거대화되고 있는 반면 그 안의 각 개인은 갈수록 왜소해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사회가 잘 굴러가는 데 필요한 나사 부품이 되는 대가로 안락과 향락을 누릴 수 있는 물자를 받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아무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기 바라는 소심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니체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대지는 작아졌고, 모든 것을 작게 만드는 '말세인'이 그 위에서 날뛰고 있다.   26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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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세상에 맨얼굴로 당당히 맞서기 위해(지승호)

'인문정신은 자신만의 제스처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강신주는 '지금까지 나온 인문학책들이 가진 전반적인 느낌이 그런 식으로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고 회피하는 것들이었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진정한 인문학의 길은 굉장히 아파요 사실은'이라고 강조한다.  8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다고 자책을 한다. 그래서 자신의 남은 생은 타인을 보듬는 데 쓰겠다고 다짐한다. 잘못을 갚아가며 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설픈 위로는 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에게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하라고 진심을 다해 외치고 있다.  9


부모가 자식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선생이 학생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기다려주지 못하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서럽기 때문에 기다림을 포기합니다. 하지만 기다림을 포기하면 행복도 함께 없어집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진한 슬픔이 배어 있다.  10



chapter 1 인문정신은 당당하다


상대방을 자기가 배웠던 담론 지평으로 자꾸 끌어당기면 안 되고, 그 사람과 대화와 소통이 가능하도록 경제학도 정치학도 윤리학도 담론 지평으로 깔 수 있어야 해요. 그런 사람을 철학자라고 하는데, 우리 시대에는 철학자가 별로 없어요.  24


<인문정신을 다시 생각하며>(<기획회의> 313호, 2012. 2. 5)라는 글에서 "인문정신은 자신만의 제스처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곤철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셨는데요. 지금의 인문정신의 핵심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자본주의라는 것이 왜 나쁘냐 하면 자본이란 힘으로 모든 사람을 다 똑같이 돌게 하거든요. 그러면 사람들이 자기 제스처로 못 살죠. 자기 스타일대로 살아가려면 싸우기도 해야 하고 고통도 많이 생길 텐데, 그걸 감당해야겠죠.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돌면 독재자가 안 생겨요. 민주주의라는 것은 제도의 문제 이전에 개개인이 어떻게 주인으로 서느냐의 문제예요. 나 스스로가 주인이 안 되면 노예가 되어 주인을 찾게 된다고요. 그래서 제가 '멘토'를 비판하는 거예요. 좌우지간 스스로 돌아야 해요.(지승호)  27


언어의 궁극적인 목적은 항상 침묵이고, 침묵은 실천이거든요.  28


인문정신이라는 것은 고유명사예요. 사람마다 자기 이름에 걸맞은 스스로의 스타일이 있다는 거죠.  28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당당한 애정, 하나밖에 없다는 소중함을 가지면 자본이든 권력이든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아요. 자긍심이 있어야 해요. 누가 나를 죽인다 해도 '땡큐'인 거죠. '내가 무서운가 보다. 내가 당당하게 사는데 내가 죽는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야'이런 정신이죠.

석가모니가 죽어가면서 부처는 각자 얼굴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니까 자기 스스로 서라고 했는데요. 이 말은 곧 개개인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란 거예요.  29


니체도 "너희들이 차라투스트라를 따르지 않고 너희들 힘으로 섰을 때 차라투스트라는 너희에게 돌아가리라"이렇게 말하잖아요.  30


인문정신을 갖는다고 해서 행복하고 그런게 아니에요. 당당한 거예요. 진짜 인문정신을 가져야 누굴 미워하고 사랑할 수도 있다고요. 눈치 보면서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게 아니라..

인문학, 철학의 특징은 주어가 '나'나 '너' 까지라는 거예요. '우리'라고 쓰면 사회과학이 돼요. 정치적 담론이 되고 '우리'와 '나'는 달라요.  33


"아파도 당당하다"라는 카피가 그래서 나온 거예요. 대충 관념적으로 장난치지 말고 맞서라고, 그래야 문제의 핵심에 이르게 돼요.  34


삶이 그렇게 아프고 힘든 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고 자꾸 연어처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에요. 

자신이 가려는 방향으로 관철해가려고 해야 해요.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려면 더럽게 힘들죠. 사회에서 가만히 있겠어요? 그런 사회적 저항에 부딪힐 때 항상 고맙게 여기고 '내가 살아 있나 보다' 이렇게 생각해야죠.  35


들뢰즈는 책을 읽었을 때 감응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거라고 했어요. 두 가지 독서법이 있는데, 하나는 정보를 입수할 때처럼 서류 상자에서 뭘 빼내듯 독서하는 거예요. 논문 쓰려고 어쩔 수 없이 읽는 식이죠. 다른 하나는 감응의 독서법이에요. 감응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하다. 감응 안 하면 던져버려라. 이런 거죠. 내가 지금 좋아하는 것이 중요해요. 내가 지금 안 읽는 책도 내가 성숙해지면 읽을 수 있거든요.

책 읽기는 실천 행위거든요.  40


인문학적 독서법은 감응의 독서법이에요. 내가 감응하는지 안 하는지가 중요한 거에요.

여러분은 왜 독서 토론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대개가 자기가 읽었던 내용의 요지를 합의 보러 온대요.(웃음) 그게 아니죠.  41


토론하는 사람들은 서로 사랑해야 해요. 책이라는 계기로 저 사람을 알아가겠다고 해야 하는데 서로 지적인 경쟁이나 하려고 하니까  딱하죠.  42


자기 소리를 체계적으로 만든게 자기 철학이에요.

자기 스스로 자기 스타일로 생각하고, 자기 것을 만들어야 해요.  43


신자유주의가 무서운 게 자본이란 논리로 획일화시키잖아요.  44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잖아요. '한 사람이 죽을 때 하나의 세계가 없어지는 거다. 한 사람이 탄생할 때 하나의 세계가 탄생한다.' 그게 인문정신이라고요. 상대주의를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 입각점을 얘기하는 거죠.

<철학vs철학>이 왜 야심작이냐면, 묶어놓은 철학자 둘 중 하나는 권력적이고 다른 하나는 인문적이에요.

모두가 똑같이 보면 그게 무슨 사회에요? 하나의 기계고 전체주의죠.  47


<철학vs철학>의 에필로그에 단채 신채로 얘기 썼잖아요. '조선에 불교가 들어오면 조선의 불교가 되어야 하는데 왜 불교의 조선이 되느냐.'  48


재미있는 책은 무조건 읽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쌓인 건데 20여 년 쌓인 다음에 쓴 책이 <철학vs철학>이에요.  49


철학은 쉬워요. 수학 같다고 하잖아요. 몇몇 규칙과 공식만 정확하게 이해하면 편해요. 처음에 벽이 좀 높아서 그렇지 한 단계만 넘으면 참 편해요. 판단력도 빨라지고. 그런데 시는 안 그렇잖아요. 시는 컨디션이 좋으면 읽히고 나쁘면 안 읽히고 그렇거든요. 음악도 그래요. 기분이 괜찮고 바쁜 일도 없으면 브람스가 잘 들리는데, 어떤 날은 소음으로 들려요. 철학은 안 그래요. 초기에 기초적인 학습을 중시해요 하면 돼요.

철학사 공부하고 철학 개념어 익힌 다음에는 철학자 한 명을 완전히 익숙해지도록 파야 해요.  53


인문학 고전을 읽는다는 건 나의 삶이 어떤 철학자나 인문학자에 육박해 들어가는 건데, 내가 시를 못 읽어내고 영화를 제대로 못 보고 철학 책을 제대로 못 읽는다는 건 그만큼 내 삶이 심화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책을 못 읽는 것은 비겁하게 자신의 삶을 심화하지 않고 검열하며 조심조심 살아서 그래요.  55


<철학vs철학>은 앞의 것은 나쁜 철학, 뒤의 것이 좋은 철학이에요. 저는 객관주의를 표방하지 않아요. 철저하게 주관적이에요.  58


이 시대에 철학이라는 학문의 의미는 무엇일까요?(지승호)

분업화에 저항하고, 전문화에 저항하는 것. 철학이 원래 그래요.

철학자는 힘들어요. 닥치는 대로 다 봐야 해요. 과학책도 보고, 음악도 듣고 다 해야 해요.

요즘 말하는 '통섭'이라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지승호)

통섭은 창의적인 것으로 대충 돈 좀 벌어보겠다는 거예요. 자기편과 유사한 것만 끌어당기는 진영 논리가 될 수도 있고요. 

주로 자연과학 ㅉ고에서 자기와 유사한 인문학을 모으는 식인데, 도킨스 라든가 통섭 얘기하는 사람들 보면 자리랑 맞는 것만 골라서 통섭하고 마르크스주의 같은 것과는 통섭을 안 해요. 비겁한 거죠. 실제로는 이것이 더 위험할 수 있어요.... 통섭은 수정주의 라고 보면 돼요.  61-62


단순한 공식인데 경쟁, 분리가 인간 사회에 일어나면 체제가 이기는 거고 반(反)경쟁, 사랑, 공존 쪽으로 가면 체제가 붕괴돼요. 이건 그냥 공식이에요.(웃음) 서로 사랑하지 않게 하고, 서로 경쟁하게 하는 것이 체제고요. 우리가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것은 사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데서 나오는 거죠. 체제를 극복한다고 해서 신뢰가 찾아오지는 않아요. 이미 불신하고 있잖아요. 우리가 사랑하면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어요. 이것은 하나의 인문학적 공식이에요. 우리의 사랑을 막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 비판적 지식인이 돼요.  63


공동체의 와해는 누구를 죽인다는 거거든요. 

경쟁은 공동체 교육을 와해시키는 건데요. 그런 것을 대오 각성해야죠.

인문학자는 텍스트를 두 개 읽어야 해요. 고전 텍스트와 '현재'라는 텍스트, 현재라는 텍스트를 읽어야 그 빛으로 고전이 보이고, 고전 텍스트를 읽어야 현재가 보이거든요.  69


제 글이 쉬워지고 편해진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대중성의 차원이 아니라 사람들과 얘기를 굉장히 많이 해서 어떻게 써야 사람들이 편하게 읽는지를 알아요. 지금 사람들 문제의 보편적이 구조도 알고요. 그러니까 글이 편하죠.

중요한 건 핵심이에요. 핵심을 찌르고 진짜 그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에 들어가는 것이 대중성이고 애정이죠.  71


음악이든 영화든 무용이든 한 인간이 자기를 표현했다면 그 사람은 왜 이렇게 표현했는지 그 느낌 속에서 그 사람의 정신성에까지 육박해 들어가는 연습을 많이 해요. 철학자니까 철학을 가지고 음악을 듣는다. 이런건 아니에요. 영화 볼 때 평론할 것을 먼저 생각하면 어떡해요? 일단 느껴야죠. 영화를 보고 감동했다면 어디가 좋았는지, 그게 왜 좋았는지를 살펴보고 그걸 알아듣기 좋게 잘 풀어서 설명해주는 것이 평론이잖아요.  73


해석하지 말고 먼저 이해하려고 해야 해요.  74


표절은 정말 창피한 거예요. 모름지기 인문학자라든가 사상가라면 다른 사람이 쓸 수 없는 것을 써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썼던 것을 쓰지 말아야죠. 그리고 다른 사람과 비슷한 것을 썼을 때는 쪽팔려 해야죠. 예컨대 김수영에 대해서 쓴다면 저는 김수영에 관한 책을 다 봐요. 그중에 저랑 비슷한 시각이 있으면 안 써요. 뭐하러 써요? 다른 것을 써야죠. 어떤 책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할 때에는 그 책을 딱 한 번만 보고 써요. 그다음에는 안 봐요. 그 책을 흉내 낼 수 있거든요. 책을 탈고하고 나서야 그 책을 다시 봐요. 혹여 영향을 받았나, 내가 그 책에서 얼마만큼 벗어났나. 나는 그 작가에게 얼마만큼 육박했나. 이런 걸 확인하기 위해서요. 이 과정을 마치고 나면 그제야 출판사에 전화하는 거죠. 강신주의 책인데 강신주다워야죠. 모름지기 인문학자라면 그래야 해요. 그런 식으로 벽에 부딪혀 고통도 직접 느껴보면서 리얼리티를 얻어야 해요.  75


남들 모르는 세련된 담론만 떠들어서 팔아먹으려는 게 아니라 전부 제가 소화시켜서 한 얘기예요. 글은 두 종류가 있는데요. 먹다가 게워낸 글이 있고 따끈따끈한 똥처럼 나온 글이 있어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글이 게워낸 글이에요. 제가 고생해서 글을 써보니까 지금은 그게 딱 보여요.  77


'우리'로 들어가면 이미 사회과학으로 들어간 거예요. 인문학이 아니에요. 인문학은 '나'예요. 각자 각자의 나, 그리고 각자 각자의 '나'들이 공명하는 것이고요. 그래서 인문학의 궁극적인 그림이 민주주의죠. 절대적인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내 생각은 있어요. 절대적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이 100% 같지는 않지만, 디테일은 다르지만, 공명할 수 있다는 보편성, 그것이 인문학의 가능성이고 민주주의의 기초죠.  81




chapter 2 사랑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사람은 혼자 잘 놀아야 해요. 혼자 잘 노는 사람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어요. 사랑 찾어서 안달복달하는 사람은 어린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은 안 돼요. 나중에 자기가 지쳐버려요. 혼자 있는 사람들,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어요. 오버하고 징징거리며넛 '우리 만나, 만나'하는 애들도 얼마 못 가요. 사람이 바위 같고 산 같고 그래야죠. 애정 결핍은 다 있어요. 그걸 응시해야 해요. 자꾸 채우려고 하면 안 돼요.  87


사랑에는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요. 예전에는 연애할 때 핸드폰도 없고 삐삐도 없으니까 다섯 시간 기다리는 것도 가능했는데 요즘은 한 시간 기다리는 사람도 많이 않은 것 같아요.(지승호)

기다리는 법을 잘 몰라요. 언제든 버튼만 누르면 바로 되는 것처럼 생각해요. 그런 게 병폐죠. 그래서 기다리는 것에 노심초사할 때가 많잖아요. '왜 전화가 안 돼? 왜 전화기기 꺼져 있어?' 이 정도면 사랑이 아니에요. 기다린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동의어예요. 기다리지 못한다는 것은 그 존재가 음식 같은 거라는 거예요. 배고파 죽겠는데 짜장면은 왜 안 와. 이런 거예요. 와서 먹고 나면 그다음에는 찾지도 않아요.  89


아이와 절절하게 대화를 해야 한다고요. "엄마는 이걸 원해", "전 싫어요" 이게 관계예요. 사랑의 관걔고 기다리는 관계인 거죠. "엄마는 이게 좋은 것 같아"라고 던져놓고 기다리는 거예요. 이건 굉장히 힘든 거라고요.  91


기본적으로 나쁘다는 것은 자신감이죠. 돈이 없는데도 그러면 뭔가가 있는 거예요. 어떤 자신감이.  93


행복의 높이가 어느 정도 되는 사람들은 그 이상이 되어야 결혼을 하는데요. 불행한 사람들은 조금만 잘해줘도 돼요. 콧물 날 때 손수건 하나만줘도 사랑한다며 바로 호텔에 갈 수 있어요. 거기서 행복을 느끼는 거죠. 그 문턱이 너무 낮은 거예요. 그런 여자들 보면 불행하죠.  95


글의 힘은 애정에 있어요. 관심받으려고 글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특히 젊은 친구들, 그래서 글 쓰겠다고 하면 "사랑받으려고 그러는 거야? 누굴 사랑해서 글을 써야지. 글이 제일 잘 나올 때가 연애편지를 쓸 때야. 그 사람을 사랑해서 절절하게 나를 표현하는 거지. 글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거야"라고 얘기해줘요. 철학 한다는 애들이 산이나 무인도에 가서 <순수이성비판>을 읽는다고 해요. 저는 지랄을 한다고 하죠. 모든 문제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고, 고독은 그 다음에 있는 건데 혼자 있을 때는 그냥 자라고 하죠. 음악을 듣든가.  102-103


안에 쓰레기가 많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흐려져요.  104


서로 배워야 해요. 배우려면 비워야 하고요...

세상은 이분법적이에요. 그걸 초월하는 순간 고상한 책이 나오고 보수적인 책이 나오는 거예요. 저는 죽을 때까지 이분법적이었으면 좋겠어요. 나쁜 놈은 나쁜 놈이라고 하고, 50, 60대에 썼는데 30대에 쓴 것처럼 읽히는, 날카로움을 가진, 칼이 무뎌지지 않은 인문학자가 돼야죠...

살아 있으면 싸워야 해요.

저는 '나이 든' 사람들을 싫어해요. 그군 원숙함이 아니에요. 지침의 표현이죠.  105


인문학자로서 꼭 해요 할 것이 종교 비판서를 쓰는 거예요. 

인간끼리 결정을 보자는 것이 인문정신인데, 비겁하게 수틀리면 신한테 가는 것은 권력이나 자본한테 가는 거랑 똑같아요...

인문학의 적은 자본이 아니에요. 제일 많이 팔리는 책이 종교책이에요...

네가 노력해서 바꿀 수 있고, 너의 남루함을 자각해야 하고, 자꾸 저승에 있는 천사를 볼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여기서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걸 인문학자가 이야기해야만 해요.  106


"라캉에 따르면 불행히도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과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은 일치하지 않는다. 전자가 페르소나(persona)라면, 후자는 맨얼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페르소나를 찢어버리고 맨얼굴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연기가 아니라 삶으로서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지승호)

인간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해요. 그런데 자본의 논리도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 종교의 논리도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거예요. 항상 오늘은 수단이에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사람은 내일돼도 또 오늘이잖아요. 그날 잘 살면 돼요. 우리에게 내일은 잇다는 사람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데, 내일이 되면 또 내일이에요. 신자유주의도 그걸 요구하는 거잖아요. '지금 빡세게 고생하면 나중에 편하다.' 그러다가 죽는 거예요. 이게 사람들을 지배하는 논리거든요.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와 기독교는 상당히 유사한 데가 있어요. 돈이 안식과 구원을 준다는 점에서도 그렇고요. 벤야민도 그랬어요. 자본주의를 종교성으로 다뤄야 한다고, 자본주의의 핵심은 종교성에 있다고, 사람들이 돈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믿는다고. 종교 비판은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 비판, 대표자를 추종하는 황당무계한 것에 대한 비판 등을 총괄하는 것이에요.

원리주의에서는 선과 나와의 관계만 중요하고 인간들이 안 보여요. 원리주의가 생기면 가족은 안 보이고 신한테 올인해요. 그리고 원리주의가 생기면 목사가 얘기한 대로 정치적 행동을 다 결정하고 이웃을 안 봐요. 그 모습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으로 나오는 거죠. 돈에 올인해서 가족을 돌보지 않는 부유한 아버지처럼 신에 올인해서 가족을 안 돌봐요. 가지들은 믿어요. 내가 신에게 구원을 청하니 가족들에게 은총이 있을 것이고, 내가 돈을 버니 가족들이 행복할 거라고, 중요한 것은 신에 올인하거나 돈에 올인하면 인간관계가 붕괴된다는 거예요. 사랑이 무너지는 거죠. 그래서 종교를 비판하는 거예요.

원리주의가 생기는 것을 진짜 조심해야 해요. 원리주의라는 것은 원리를 믿고 따르고, 그 원리를 장악하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헤게모니를 독점하는 거잖아요.  108-110


기독교인들은 제가 '사랑해야 한다'고 하면 '아, 예수님의 말씀이야'이래요.(웃음) 그런데 제 말은 사랑을 하려면 신을 죽여야 한다는 거거든요.  111


'너는 그 남자를 사랑하는데 그걸 부정하고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라고 한다. 네 감정을 부정하는데 네가 네 삶의 주인이니? 네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그랬던니 얘가 전화하면서 울더라고요.  115


"초월자에 대한 지나친 몰입은 자신의 삶을 돌보지 못하도록 만든다"라고 하셨는데요. 그게 종교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사랑할 때도 상대방을 초월자처럼 받아들이게 되면 어렵잖아요. 동거를 해보라는 것도 동거가 그 환상을 깨는 과정일 수 있다는 것일 텐데요.(지승호)

사실은 환상을 깨라는 거죠. 환상이 깨지지 않으면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난 거고요. 서로한테 그런 사람인지 항상 응시를 해야 해요.  116


성적인 관계는 두 사람이 맺을 수 있는 수만 가지 관계 중 하나일 뿐인데 그걸 금기시하니까 그것에만 집중해요.  117


다른 것은 다 용서되는데, 성적인 것만 용서가 안돼요. 그래서 음란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진짜 무서운 것은 내 부인이 독서 모임에서 카프카를 읽고 다른 남자와 영혼이 통하는 거거든요. 그게 진짜 음란인데, 우리는 손만 안 잡으면 되는 거예요.(웃음)  118


제도를 생각한다는 것은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인데, 그러면 두 사람의 사랑에 금이 가기 시작해요.  119


결혼은 사회제도예요. 연애할 때는 오늘 맛있는 것 먹자. 영화 보자고 하는데, 결혼하면 아끼자고 하잖아요.  122


사랑은 '아까징끼' 같은 거예요... 만병통치약.  123


한 인간에게 단 한 번의 혁명이 있는데,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거예요. 정신적이든 정서적이든 경제적이든 완전히 독립했을 때 어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별로 없어요...

빛과 그림자가 다 보여야 되는 거예요. 나에게 각별한 아버지면 아직 독립을 못 한 거예요. 좋은 것만 보는 거겠죠. 어머니의 추한 모습, 다른 사람보다 못난 모습까지 보여야 해요. 그런 빛과 그림자가 보일 때 독립하는 거라고요. 어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안 해요. 그래서 부모가 죽는 것이 더 나빠요. 판타지를 자극해서 아버지를 날조한다고요.  125


결혼과 동거 중에서 결혼이 안정적으로 보이죠? 그게 남루한 거예요. 두 사람이 사랑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틀인데, 기존의 어떤 틀에 들어가야만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사랑은 두 사람이 감당하는 거예요. 감당 못 하면 끝나는 거죠. 사랑하려면 미래를, 영원을 꿈꾸지 말아햐 해요.

지금 내가 저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해주고 있나. 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게 나한테 행복이다. 이런 것에만 최선을 다해 집중하면 된다고요.  127


가진 사람만이 버릴 수 있으니까요. 못 가진 사람들은 채우려고 해요.  129


실천적인 단계를 보자면, 일단 생계의 위협을 없애야 해요. 생계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에게 인간적 행위를 요구하는 건 무리예요. 

우선 그 조건을 갖추고 나서 사랑하는 방법으로 쓸 수 있는 정신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해요...

옛날에는 농민 봉기가 있었잖아요. 농민 봉기는 6개월 안에 결판을 봐야 해요. 벼를 심어놓고 농민 봉기가 일어나면 수확할 때쯤 다 흩어지거든요. 동학농민운동이 붕괴된 것도 벼 수확기가 돼서 그래요. 혁명이 성공하려면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요. 지주나 호족이 '괜찮다, 썩더도 된다. 우리가 식량 준다'이러면 성공해요.순수한 농민전쟁은 힘들어요. 그리고 또 하나, 시골에는 농한기가 있어서 혁명이 가능해요. 도시에서는 혁명이 일어난 적이 없어요. 다들 직장 다니느라 바빠서, 쿠바혁명도 시골에서 시작했다고요. 러시아혁명도 그렇고 심지어 나치(Nazi)도 바이에른이라는 농촌에서부터 세를 키워갔잖아요.  131




chapter 3 철학적 시읽기와 김수영


우리는 해방이 안 됐거든요...우리가 이념 때문에 갈라진 게 아니라는 것을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몰라요. 이념 때문에 분단됐으면 차라리 멋이나 있죠. 우리는 외세 때문에 분단됐거든요. 남북에 들어온 외세에 이념이 있었고, 남북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이념에 맞춰 살았을 뿐이에요. 이념에는 경직성이 있거든요. '걔네들이 얘기했던 대로 이렇게 살아야 해'하는 제스처나 흉내 내니까 양쪽 다 경직돼 있기는 마찬가지죠. 김수영은 양쪽 체제가 가지고 있는 이념이라는 것이 덧없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135-136


정치철학자인 카를 슈미트(Schmitt)가 '정치의 본질은 적과 동지의 구별에 있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정치는 억압이라고 봐야 해요. 억압의 근본 문제는 적과 동지예요. 체제 내부에서 갈등이 벌어지고 헤게모니가 흔들릴 때 독재자나 권력은 외부와 전쟁을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내부 단합을 모색해요. 제가 농담 삼아 하는 얘기가 있어요. 딸이 어머니를 부정하는 콩가루 집안이 있는데, 그 어머니가 가족을 단합시키려면 옆집 아줌마와 머리채 붙잡고 싸우면 돼요. 딸한테 '너 누구 편들래?'하고 던지는 거죠. 그러면 딸이 자기 어머니 편을 들고, 그렇게 대동단결해서 며칠 가요. 그러다가 옆집 아줌마랑 갈등이 없는 상태에서 보면 다시 어머니가 미워 보이는 거죠. 그러면 어머니가 또다시 옆집 아줌마랑 싸워요. 이게 우리 사회예요.  141


<연꽃>이라는 시와 <김일성만세>를 같이 읽어야 해요. 연꽃은 사회주의자를 비판하는 시거든요. 인간을 못 보고, 인간의 자유를 못 본다고 이념이 강조돼도 인간의 자유는 억압되는 거예요. 자본이 강조돼도 인간의 자유는 억압되는 거고요. 인간을 제외한 일체의 외적이고 초월적인 힘, 권능, 다른 근본, 근거를 제기하면 억압이 오는 거예요.  142


어쨌든 김수영은 동베를린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부산에서 문인들을 상대로 강연할 때 '정치적 자유가 없는 곳에서 그나마 예술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 마라. 표현의 자유가 없는 곳은 예술의 자유가 없는 곳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해요.  148


지성인들은 좋은 사람 콤플렉스를 버려야 해요. 자기 얘기를 뚜렷하게 하면 그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과는 친해지고, 싫어하는 사람이랑은 틀어지는 거예요. 어쩔 수 없는 거죠.  149


다 좋다고 한다면 이건 무지렁이예요. 보잘것 없는 엷은 인간이에요. 제대로 살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홍해 갈라지듯이 갈라지거든요. 내가 분명하게 그 선을 그거워야 해요.  150


시인들이 시집 제목을 정할 때 가장 중요한 시를 고르거든요. 자신의 모든 시를 이 느낌으로 읽으라고 시집 제목으로 말해주는 거예요.  151


억압이 있는 권위적인 가정에서 아버지가 잘못했다고 저항하면 한 대 맞잖아요. 그런데 말을 했는데도 안 맞았다면, 내가 아버지의 권위를 수용해서 안 맞을 만한 말을 했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이걸 알아야 해요. 억압이 상존하는 곳에서 자유에 고통이 없으면 허용된 자유고 길들여진 자유예요. 그런데 다 자유롭대요. 자본의 억압부터 오만 억압이 다 있는데, 알아서 다 피하는 거예요... 지금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는 다 허용된 자유, 기만일 뿐이에요.  154


우리는 자유를 몰라요...

김수영은 그걸 잊지 않아요. '너희에겐 언어의 고통 이전의 고통이 없다.'.. 자신이 자유롭고 당당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부딪칠 때 , 그때 느껴지는 고통이에요.  155


억압이 있는 사회에서 고통이 없다면 동물원 울타리 안에 풀어져 있는 동물과 비슷한 거죠.  156


간짜장을 제일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러면 제사상에 뭘 올려야 돼요? 간짜장 올려야 하잖아요. 홍동백서만 따질 게 아니라, 절차를 생각한다는 건 인간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인간을 포획하는 하나의 방식이에요. 보수적인 방식이죠.

'절차적 민주주의'라고 하는데 민주주의가 어떻게 절처예요? 각자가 주인인데 왜 절차를 미리 정해요. 사람들이 절차를 정해야죠...

절차적 민주주의에 초점을 두면 절차와 민주주의를 같이 놓음으로써 민주주의를 희석시켜요. 형식만 따르면 민주주의를 같이 놓음으로써 민주주의를 희석시켜요. 형식만 따르면 민주주의가 되리라고 생각해요. 굉장히 잘못된 생각이에요.  157


절차를 근본으로 생각하면 민주주의에 저해가 될 수도 있고 억압이 될 수도 있다고요. 그리고 절차라는 규정을 정확하게 아는 전문가들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포획해버려요...

다수를 지배하는 사람들이 절차를 강조하는 법이에요. 까먹지 말아야 해요. 절차의 최종 심급에는 다수결, '쪽수'로 가자는 얘기가 있어요. 정치적 야욕이 있는 거예요. 인간이 가진 역동적인 힘, 사랑이 가진 참여의 힘이 있는데, 절차가 강조되면 그게 억눌리고 소멸돼버려요. 그러니까 절차만 주장하는 건 위험한 거죠.  158


관념의 자유, 언어 유희만 있고 삶에서 아무것도 안 봐요. 김수영은 총알이 날아오는데 안 피해요. 오히려 총알이 날아오는 쪽으로 가는 거예요. 가서 총알 하나 맞고 비명이 나오면 그게 시 한 편이에요. 서정주라든가 나머지 시인들은 총알이 날아오면 앉아서 피해요. 그랬더니 꽃이 보이는 거죠. 꽃은 해석할 수 있잖아요. 그게 시를 보면 보여요. 요새를 꽃이 아니라 카페예요. 거기서 지겁함이 보이고, 그들의 비겁한 제스터에서 뭘 피했는지가 읽혀요.  163


모더니즘의 정신은 세련되게 글 쓰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쓰는 거예요. 새로움의 근거는 나라는 사람은 천년 전에도 없었고, 천년 후에도 없다는 고유성에 있는 거고요. 자기 자신이라서 쓸 수 있는 글이니까 새로운 거예요. 이게 모더니즘의 정신이에요.  166


저는 자유로운 사람만이 인간의 억압 구조를 발견한다는 것을 알거든요... 

자유로운 사람만이 고통을 느낀단 말이에요.  173


언어의 고통 이전에 삶의 고통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삶의 고통은 자유로운 사람만 느껴요. 굴종하고 복종하는 사람은 못 느낀단 말이에요.  174


위대한 인문학자와 사상가가 나오는 조건은 그 사라므이 당당함이에요. 포로수용소에서 김수영만이 그랫다는 거예요. 포로수용소도 하나의 사회예요. 혀용된 것만 하면 돼요. 억압이 잇다고 저항이 일어날 것 같아요? 안 그래요. 저항은 자유로운 사람만 일으켜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덕목이에요.  175


'기존 담론들 다 배우고 양자역학 다 배우면 뭐해요? 기존 담론의 틀 속에서 논물을 쓰면 새로운 발견을 못 하니까 자유로워야죠.  175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자신의 철학이 정리된 다음에 오스트리아 오지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앙들을 진짜 많이 때렸어요. 얘네는 초등학교만 다니고 농사지어야 하는 애들인데, 비트겐슈타인은 인격자로 키우려는 거죠. 부모들은 애들을 왜 때리느냐고 난리인데 정작 아이들은 한 명도 문제 삼지 않았던 거예요. 왜냐면 비트겐슈타인은 아이들을 사랑했거든요. 아이들은 맞을 때 알아요. 그런데 부모들은 그걸 빌미로 공격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이 자꾸 애들 보고 너희는 성숙해져야 하고 촌구석을 떠나야 한다고 하니까. 농부들에게 지식은 경운기예요. 아들을 선호하는 이유도 가마니를 나를 수 있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너희는 경운기가 아니다. 너희는 인간이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아이가 '나는 경운기예요' 이러면 한 대 때리는 거예요. 아이들은 자기를 사랑해서 그러는 줄 다 알죠. 아이들은 날 사랑해서 때리는 건지 아니면 부인이랑 싸워서 날 때리는 건지 다 알아요. 그러니까 사실은 이 문제예요. 어떤 사람이 잔인하고 폭력적인데 나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감당해야죠.  179


사랑하면 연인의 가슴에 고개 처박고 심장 소리만 듣고 있는 것이 제일 좋잖아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이나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찾을 때 사랑은 붕괴되는 거예요. 이유가 없어요. 이유는 제3자가 심판하려고 할 때나 대는 거예요.  182


"시인이 물속으로 직접 들어가 온갖 물고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존재라면, 철학자는 그물로 끌어올린 물고기를 다시 확인하고 만져보는 사람입니다"라고 표현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지승호)

흔히들 시는 주관적이고 철학은 객관적이라고 생각해요. 시가 주관적인 것은 맞지만 보편적이기도 하거든요. 철학이 오히려 주ㅗ간적일 수도 있어요. 시는 주관적이지만 보편적인 데가 있고, 결국에는 같다는 거죠. 그걸 강조하려 했던 거예요. 제가 시와 철학을 왜 같이 엮었는지 보여주려는 거고요. 

핵심은 경험을 우회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책을 보는 것도 간접 경험이에요 간접 경험이라도 해야 해요. 경험을 했느냐 안 했느냐의 잣대는 마음이 움직였느냐예요. 경험을 하기 이전의 마음 상태와 한 후의 마음 상태가 달라야 해요. 책을 읽어도 간접 경험이 안되는 건 책을 읽으면서 밑줄 치고 중요한 것 외우고 해서 그래요. 그건 책 읽는 게 아니에요. 읽었을 때 작가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것이 간접 경험이거든요. 제가 만난 소설가들은 다 자기 유년 시절을 가지고 초기작을 써요. 그다음서부터는 취재예요. 자기를 퉐하게 봤던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 얘기를 들으면 금방 공감해요. 그 리얼이티를 확보하지 못하면 작품을 못 써요. 위대한 소설가가 되려면 자기를 투명하게 정리하고 자기 삶에 대해 얘기하다가 다른 사람의 삶을 공감할 수 있는 지점에까지 가야 하거든요. 

제일 중요한 것은 직접 경험이에요. 직접 경험은 진짜 중요한 거예요. 감정이 일어나는 것, 이게 인문학의 핵심 정신이죠. 분노의 감정이 안 일어나는데 분노에 대한 글을 쓰면 안 돼요. 인문학책은 사람들에게 그 감정을 일으켜야 해요. 그 감정이 분노든 뭐든, 사회과학이 인문학은 아니지만, 좋은 사회과학 서적은 분노도 일으켜야 해요. 요즘 사회과학 서적들은 너무 건조해요. 사람은 감정이 움직여야 움직이거든요. 철학은 머리로 들어와서 마음까지 흔들어야 좋은 철학이에요. 시는 마음으로 들어와서 머리를 흔들어야 하고요.

좋은 철학책은 지적인 이해와 분석을 요구하는데, 책이 딱 끝나고 나면 마음속에 확들와요. 후배들이랑 원전 강독할 때 '책이 네 마음을 울려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 사람에 대한 논문을 써야 한다. 그걸 써나가는 과정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과정이고 그 사람에게서 독립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논문을 써야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나중에 독립된 저자로서 살 수 있다'라고 조언해줘요. 하지만 대개 안 지키고 중요하다는 텍스트가 있으면 인용하고 요약해서 논문을 쓰죠. 안타까워요. 강의할 때도 항상 제자들에게 '감정을 못 지키면 끝장이다. 오늘 너희들 감정이 들었니?'하고 얘기해요. 

왜 감정이 들어야 하냐면요. 원래 사람은 다 감정이 들기 마련인데 감정을 억압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있어요. 드러내면 안 되는 거예요. 다쳐요. 예컨대 영국 왕실 근위병처럼 감정 없이 굳어 있는 사람들, 이게 최악의 모습이에요. 걔들이 왜 감정이 없겠어요. 여행 가서 그런 애들 보면 앞에서 막 웃겨준다니까요. 제가 인문학자잖아요. 가서 웃겨요.(웃음) 감정을 만힝 죽이면 나중에 진짜 죽어요. 감정이 없을 때 인간은 기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의 본질은 감정이에요. 감정대로만 하면 세상이 안 돌아가니까 이 감정을 어떤 통로로 뚫어놓을 것인가 고민하기 위해 이성이 필요한 거죠. 딱 그정도로만 이성은 의미가 있어요. 이성은 절대 감정에 저항하면 안 돼요. 감정을 흐르게 하는 소통 창구를 찾는 역할을 해야 돼요. 그런데 이게 반대로 돼 있는 인간은 이성이 너무 강하죠. 감정을 억압해요. 그러면 인문학이 이상하게 읽힐 수도 있어요.  185-187


'김수영에 대한 나의 해석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 건 김수영에 대한 나의 사랑이 당신들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해석이 강한거다'라고요. 모든 해석의 강도는 사랑의 강도에서 측정되어야 해요...

그래서 얘기하는 거죠. 당신들은 나보다 김수영을 더 사랑하느냐고 사랑을 해야죠. 집중하고 관찰하고, 그래야 디테일이 보여요.

저는 우리 문학평론가들의 글이 마음에 안 들어요. 첫 번째 연을 분석하고, 두 번째 연, 세 번째 연이 어쩌고 저쩌고. 한데 어떤 사상가를 이해한다고 할 수 있으려면 그 사람이 지금 살았더라면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라는 데에까지 육박해 들어갈 수 있어야 해요. 사람들은 제 책이, 제 해석이 평론가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 거냐고 자꾸 물어보는데, 평론가들이 김수영을 제대로 사랑한 적이 있나요? 김수영을 4.19의 시인이라고 하질 않나. 자유의 시인이라고 하면서 그 자유의 의미를 제대로 숙고하지도 않잖아요.  189


체제가 우리를 길들이려고 하는 이미지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요. 하나는 CF등을 통해서 보여주는, 예쁜 여자가 멋진 옷을 입고 있거나 행복해 보이는 여자가 가전제품을 들고 있는 것 같은 유혹의 이미지예요. 또 하나는 우리를 쫄게 만드는 이미지예요. 대표적인 게 CCTV 같은 것, 그리고  MRI나 CT 촬영 같은 진단 영상들이에요. '나중에 용의자가 될 수도 있다', '나중에 병들어 죽을 수도 있다'라는 공포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죠.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게 만들어요. 미래를 보게 되고 미래를 생각하고 잇으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랑 얘기를 못 해요. 내일 시험 걱정하면 이 사람이랑 못 있거든요. 그러니까 체제가 노리는 것은 인간의 관걔를 깨알같이 만들어서 분리시키는 거예요. 미래에 대한 공포의 이미지가 그런 작용을 하는 거죠.  197


인문학은 나의 발견이거든요... 모든 글은 고통이든 기쁨이든 감정을 느낀 다음에 써야 하는 거예요... 감정이 안 들었는데 있는 것처럼 하면 사기 치는 거고, 그런 글은 사람을 못 울려요.  209


항상 강조하는 게 스스로 가지 감정을 못 지키면 아무도 안 지켜준다는 거예요. 저는 제가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기 감정을 내색 안 할때 너무 힘들어요....사랑받으려면 항상 자기 감정을 드러내야 하고, 싫은 건 싫다고 해야 해요. 그러지 않고서 자기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기적을 바라는 거죠.  210


원문을 기계적으로 짜집기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에 감응을 했느냐, 이 관점에서 쓰는 거죠. 

철학(Philosophia)에서는 소피아(Sophia)가 아니라 필로스(Philos)가 먼저예요. 사랑을 하면 지혜로워지는 거지, 거꾸로는 아니에요. 지혜에 대한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하면 알게 된다는 거죠. 별을 사랑해야 별에 대해 많이 알게 되고, 여자를 사랑해야 여자에 대해 많이 알게 되는 거죠. 여자에 대해 많이 안다고 사랑을 제대로 하나요? 그건 아니죠.  219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려면 남을 따라가지 말고 홀로 나아가야 해요. 비유를 하자면, 위대한 사람들이 걸어갔던 발자국이 눈길에 남아 있는데 그게 그들의 스타일인 거예요. 그런데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면 내 것이 안 남잖아요. 그쪽 길이 아니라 눈 덮인 길로 걸어가야 자기 발자국, 즉 자기 스타일이 생기는 거죠. 누구를 흉내 내면 안 돼요. 내 감정으로 밀어붙여야 해요.  223




chapter 4 제자백가를 통하라


동양 고대 텍스트, 제자백가 텍스트에서 우화가 많은 것은 왕한테 얘기한 거고, 노골적인 건 제자한테 얘기한 거예요.  241


인문학 책을 읽을 때 핵심적인 것은 시선이에요. 잘못 공부하는 인간들은 시선이 아니라 디테일한 묘사들만 외우는데, 중요한 건 시선이에요. 그 시선을 가지고 그 안경을 가지고 우리 삶을 봐야죠. 

그 안경으로 바라본 상(像)에만 집착하면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는데요. 젊은 친구들은 철학자의 시선을 익히기보다 철학자가 그 시선으로 봤던것을 보려고 해요. 왜냐하면 그게 디테일해 보이고 구체적으로 보이니까 안심이 되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상을 보여준 철학자의 그 시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좀 성숙해질 텐데. 철학자가 그 시선을 봤던 것, 개념을 외우고 그걸 가지고 떠드는 거죠. 철학자든 시인이든 그 삶이 지금 살아 있다면 이 문제에 이렇게 대응했을 것이다 하는 것까지 알아야 정말로 그 사람을 아는 거예요. 그래서 시선을 배워야 하는 거죠. 인문학적 독해는 그렇게 해야 돼요.  253




chapter 5 유가를 넘어서


공자와 진시황, 화(和)와 동(同), 이들이 정치철학의 두 전통, 국가주의의 두 전통이에요.  270


후기 묵가들은 진나라로 들어가요. 천하를 돌아다녔던 묵가들이 국가를 통일하자고 결정한 거예요. 그리고 걔네들이 진나라 법률의 기초를 닦아요.  274


자본가 마인드에 두 가지 모델을 적용할 수 있어요. 법가적 자본과 유학적 자본. 계열사 사장들의 자율권을 인정하면 유학적인 것이고, 총수가 철저하게 총괄하고 사장 갈아버리면 법가적인 것이죠.  284


춘추전국시대나 제자백가는 일직선적인 발전이거든요. 앞 사상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상이 등장하는 거라 일정한 흐름이 있어요. 공자가 나오고, 공자를 비판하면서 묵가가 나오고, 묵가를 비판하면서 양주가 나오고, 이런 식의 패턴이 있어요. 철학사가 있는 거죠.  288


인문학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문맥 파악이에요. 잘 파악해야 해요.  298


형식과 예법은 최선의 관계가 아니라 최악의 관계를 막는 데 필요한 정도예요. 그런데 그걸 최선의 관계라고 생각했을 때 억압이 생기는 거고, 반드시 이렇게 하라고 하면 문제가 되는 거죠.  307


예전에 제자들한테 항상 얘기해주던 강독 요령이 뭐냐면, 열 구절 중에서 아홉 구절은 쉽게 독해가 되는데 한 구절이 독해가 안 된다면 아홉 구절이 다 틀렸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해석 안 되는 구절을 버리죠. 또 하나 기억해야 될 것이, 어떤 것이 기록으로 남겨졌다면 그것이 그 당시에 비범하고 특이한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비행기가 허구한 날 추락한다면 뉴스에도 안 나와요. 일상적인 것이 아니어야 기록되고 남겨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꾸로 보면 <논어>의 구절들이 그 당시에는 너무 이상한 얘기였다는 말이기도 해요. 항상 조심해야 할 게, 그 당시의 삶의 문맥이나 역사적 상황을 통해서 해석하는 것도 좋지만 역사적인 것으로 환원해서도 안 된다는 거예요. 역사라는 것은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흐름을 다루기 때문에 <논어>의 그 구절 하나가 가지고 있느 고유성은 못 잡을 수도 있어요. 우리가 일기를 쓸 때도 특이한 일을 기록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제자들도 특이한 가르침을 기록했다고 본다면 조심해야죠. 그런 가짓수를 다 염두에 두고 제자백가서를 읽어야 해요. 그러니까 선택을 진짜 잘해야 해요.

그런 것도 염두에 둬야죠. 공자를 위해서 내버린 구절들은 무슨 내용이었을까? 공자가 이혼했던 얘기도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공자가 이혼당하거든요. 천하를 주유하다 보니까 공자 부인이 열 받아서 친정으로 가요. 친정에 가니까 장인어른이 다른 데 시집을 보내요. 그 당시는 아직 모계사회이 풍습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 그래도 됐거든요. 공자가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겠어요? 그 얘기는 다 빼는 거예요. 사실은 '공자가 남자를 만났다' 그 구절 하나가 논어 담론의 경계선일 수도 있어요. 공자의 실제 삶에서는 중간 정도의 위치일 수도 있는데, 여자관계라든가 그런 부분들은 다른 텍스트를 참고해야죠. <예기>라는 책을 안 봤으면 공자가 이혼당했다는 것을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혼당한 다음에 여자와 소인은 가까이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한 것일 수도 있잖아요.  309-311


저는 짧은 구절을 하나 보고서도 전체 문맥을 빨리 파악해서 해석 가능성을 몇 가지 열어두고 가만히 기다려요. 어떤 것이 맞는지, 칸트나 다른 텍스트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텍스트 읽는 방법이 같아요. 전체를 보고 줄거리가 뭐냐가 아니예요. 매번 해석에 들어가요. 내가 봤던 페이지 이후는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보는 거예요. 그 강도로 읽는 겁니다. 여기서 해석이 끝났는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면서 좌초되기도 해요. 에이, 이후의 페이지들이 다 불탔으면 내 해석이 맞는 건데, 이런 게 나오다니.(웃음) 텍스트를 읽어낼 때 독창적 해석이 나오는 근거는 그거예요. 전체 요지가 뭐라고 어떤 해석가가 얘기했다고 해서 색안경 끼고 안 봤거든요.  312


아까 공자가 남자를 만났다는 부분도 저는 안 놓쳐요. 그러면 물어보게 되잖아요. '남자를 왜 만났지? 자로가 불쾌해하는 건 왜지?' 가능한 상황을 다 생각해보는 거예요. 그런 다음 하나씩 하나씩 그 해석을 맞춰가는 거죠. 그렇게 맞춰가다 보면 다른 사람의 해석을 넘어서게 돼요. 열 가지 구절로 이루어진 조목이면 대개 한 가지 구절에 주목해서 나머지 구절들을 읽거든요. 그런데 저는 한 가지, 두 가지, 세 가지, 네 가지, 디테일한 구절을 가지고 해석 체계를 쌓으면서 하나의 해석을 밀어 붙여요. 그게 독해하는 요령이에요.

제 글이 다른 사람들이랑 다른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매번 한 문장 한 문장과 싸워서 이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가설을 세우고, 그 다음 구절에서 또 검증에 검증을 하다 보니 쉽게 한 구절 한 구절 넘어가는 게 아니거든요. 그렇게 읽으면 진짜 재미있어요.  313


내가 진짜 제대로 사랑을 하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읽히는데, 내가 베르테르였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고 베르테르가 나였으면 나처럼 사랑했을 거라는 경지에 오를 때 느껴지는 공감과 울림이 있어요. 이게 인문학적 독법의 핵심이에요. 역사책을 읽든 고전을 읽든, 이게 왜 중요하냐면 우리의 의사소통 가능성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제가 여자라면 어떤 여자처럼 하겠다는 것하고, 어떤 여자가 '내가 남자라면 강신주처럼 하겠다'는 게 공명이라고요. 제가 여자가 되는 게 아니라니까요. 남자와 여자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공명하는 거예요. 그게 공명의 조건이에요. 고전도 마찬가지예요. 인문학적 독법을 연습한 사람만이 공명할 수 있는 거죠. 권력은 우리를 깨알처럼 쪼개잖아요. 그에 대항하려면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공명할 수 있는 구조를 잡을 수 있어야 해요.  315-316


80년대 학번 아줌마들이 대안 교육을 한다는데, 이게 문제예요. 사회는 대안이 없는데, 사회를 바꿔놓고 대안 교육을 시켜야 하는 거잖아요. 대안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사회에 나오면 힘들어해요. 자기가 대안 학교에서 배웠던 걸로는 사회에서 못 살아요. 그래서 그 아이들이 상상마당 강의에 다 들어와요. 제가 대안적인가 봐요.(웃음) 대안 교육이란 게 아이를 가지고 또 하나의 실험을 하는 거예요. 그 아이들 인터뷰하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대안 교육 싫다고 하는 애가 반이에요. 좋아할 것 같지만 싫어해요. 좋아한다는 얘기만 들은 사람들은 침묵하는 애들을 안 봐서 그래요. 저라도 그럴 것 같아요. 어머니의 숭고한 이념을 못 따라가는 것도 있을 테고, 애들이랑 게임하고 놀고 싶은데 산에 들어가서 자연하고만 놀고, 너무 고상한 것만 하잖아요. TV도 보고 싶을 텐데, 대안 교육이 실패한 이유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기 이념을 사랑했다는 데 있어요. 형식과 절차, 이념이 다 정해진 엄마들이 무슨 교육을 시켜요?  318


우리가 시작했다가 멈출 수 있는 경쟁은 예뻐요. 딱지치기 같은 것처럼요. 문제는 경쟁을 외부에서 만들어서 멈출 수 없게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경쟁이 싫다고 온갖 경쟁을 다 없애버린 거예요. 제가 봤을 때 핵심은 그거예요. 인간은 때로는 경쟁이 즐겁기도 하거든요. '나보다 빨리 달릴 수 있어? 저거 딸 수 있어?' 꼬맹이 때 그렇게 놀았잖아요. 경쟁이라는 것이 내가 시작해서, 우리가 시작해서 우리가 멈출 수 있다면 괜찮은 거예요. 그런데 경쟁이 필수가 되어버리는 것. 내가 스톱 못 하는 게임이라면 문제가 있는 거죠. 

아이들 대안 교육 시키고 고민하는 어머니들을 만나서 너무 오버들 하셨다고 그랬어요. 경쟁하고 싶어하는 애들도 있거든요. 그런데 대안 학교에서는 신선놀음하듯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요. 예들이 재미가 없어요. 누가 그림 잘 그리나. 이런 것도 하고 싶은데, 미묘한 차이예요. 그래서 햇갈리는 건데, 80년대 학번이나 90년대 초 학번 아줌마들이 아이들을 통해 지금 처절하게 배우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이 얘기를 하면 그 아줌마들은 금방 알아요. 어디서 잘못됐는지.

제가 이걸 어떻게 아느냐면, 대안 교육 받아서 망가진 아이들이 저한테 오거든요. 그러면 야단도 쳐요. '지랄들 한다. 적응 못 해서 이쪽으로 왔니? 대안을 연장해보려고?' 상상마당 강의 같은 데 와서 터프한 얘기 듣고 철학 얘기 들으니까 대안 교육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저 생명 연장을 하는 것일 뿐이에요. 모르핀을 한 번 더 맞겠다는 거죠. 애들이 건강하지 않더라고요. 더 약해져 있어요. 그런 아이들 만나면 이 얘기를 해줘요. 

'부모들은 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실험한다. 그건 부모의 몫이다. 하지만 이제 스무 살이 됐다면 드디어 네가 너 스스로를 만들 기회를 잡은 거다. 지금까지는 부모가 뭘 가르치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건 경쟁 교육을 받는 아이든 아니든 똑같다. 문제는 스무 살 때 네가 너를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 너는 너 자신을 만들고 있니?' 이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해요.  319-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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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답이다
카테고리 자기계발 > 화술/협상
지은이 이호선 (청림출판,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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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누구나 언제나 합니다..사실 질문할 필요가 없을때도 습관적으로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에 반해 질문을 해야 할 때 인데도..질문을 하지 않기도 합니다...
그리고...
질문을 하면서 ...올바르지 않은 질문을 하여 필요한 답변을 받지 못하거나..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질문으로 적절한 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 입니다.
질문도 바르게 하는 답이란것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좀더 낳은 질문을 사용하여 원활한 소통과 더 나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질문들만 정리해 봄으로 저 스스로 돌아 볼 수 있었네요... 
감정이란 것은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어도 상할 수 있고..또는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좋은 질문 사례들을 보면서 내가 아닌 상대의 관점을 생각하면서 방법은 스스로 찾아가는 질문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실제로 여러 책들을 보면 질문의 원칙으로 삼는 첫 번째 경우들이기도 하네요.. 

생각을 자극하는 질문은 질문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성장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책 내용중 질문 모음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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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답이다.(질문모음)

이호선 청림출판


◎ 좋은 질문 만들기 사례

1. 부모

“언제쯤이면 이 녀석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일까?”

“왜 마누라는 아이들을 그 모양으로 놔두는 거야?”

“왜 넌 네 오빠만큼 하지 못하니?”

⇒“어떻게 하면 내가 이 녀석들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부모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녀석이 요즘 같은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내도록 어떻게 하면 부담을 주지 않고 도와줄 수 있을까?”

2. 10대 청소년

“언제쯤이면 우리 부모님들이 날 이해해 주실까?”

“왜 선생님은 성질이 더럽고 공정하지 않은 거야?”

⇒“어떻게 하면 내가 부모님께 존경심을 더 잘 보여드릴 수 있을까?”

⇒“효과적으로 대화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공부 습관을 개선하기 위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3. 배우자

“왜 옛날 일을 자꾸만 끄집어내는 거야?”

“언제쯤이면 마누라가 남편 고마운 줄 알까?”

“도대체 왜 운동을 시작하지 않는 거야?”

⇒“오늘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을까?”

⇒“(운동을 하게)밖으로 나가도록 하려면 뭘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까?”

4. 이웃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불친절한 거야?”

⇒“내가 좋은 친구가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 목표 점검 질문

“이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 성취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가?”

“내가 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성과나 기록이 달성될 것인가?”

“이 목표로 인해 1년 후에 나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 것인가? 어떤 변화가 예상되는가?”

“이 목표가 지금 내가 하는 일과 어떻게 연관이 되고 있는지 설명할 수 있는가?”

1. 천킹 업

"이 목표 위의 바로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이 목표가 달성되면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처음에 내가 이 목표를 세운 계기는 무엇이었나?"

2. 천킹 다운

"이 목표를 1년, 6개월, 3개월, 1개월, 1주일 단위로 쪼개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지금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무엇인가?"



◎ 질문할 때 취해야 할 태도와 피해야 할 태도

1. 바람직한 질문 태도

- 상대방을 받아들인다는 의사를 전달한다.

-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잃지 않는다.

- 내가 아닌 상대방에 초점을 맞춘다.

- 배운다.

-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도 다시 확인해 본다.

- 나의 생각을 테스트해 본다.

- 상대방의 갑작스럽고 돌발적인 공격을 통제한다.

-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2. 질문할 때 피해야 할 태도

- 질문으로 상대방을 감동시키고 말겠다는 결연한 태도를 보인다.

- 신문하듯이 한다.

- 위압적인 태도로 을러댄다

- 지배하듯이 한다.

- 황당하게 만들고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 상대방을 코너로 몰아 넣는다.

- 한 가지 일로 꼬치꼬치 따지고 든다.

- 불쑥 엉뚱한 질문은 한다.

- 언성을 높인다.

- 말꼬리를 잡고 늘어진다.

"ㅇㅇ 사람들은 도무지 믿을 수 없어."

⇒"그렇지 않았던 사람은 없었나?"

"너는 만날 하는 것이 어째 그 모양이냐?"

⇒"기대를 충족 시켰던 적이 한 번도 없었는가?"

"이런 상황에서는 뭘 해도 안 돼."

⇒"다른 방식을 시도해 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안 된다고 미리 내리는 판단인가?"

"열받아."

⇒"누가, 어떤 일에 대하여, 어느 정도로 열 받게 하는가?"

"걔들은 보기만 하면 짜증난단 말이야."

⇒"전부가 그렇다는 말인가? 어떤 부분이 마음에 거슬리는 걸까?"

"당신은 왜 그 모양이지?"

⇒"그렇지 않은 적은 없었나? 특별히 저 사람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

"난 무능한 사람이야."

⇒"그렇게 네게 말한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람에게 그렇게 판단할 만한 자격이 있는가?"

⇒"네가 생각하는 유능과 무능의 기준은 무엇인가?"

"난 할 수 없어. 이건 안 돼."

⇒"무엇이 너로 하여금 그것을 못하게 하는가?"

⇒"네가 하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너 스스로 지금 이걸 어떻게 막고 있는가?"

"그 녀석은 날 정말 미치게 만들어."

⇒"그의 말이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분노의 감정을 느끼게 만들고 있는가?"

⇒"내가 분노를 느끼거나 표현하지 않는다면 상황이 더 나빠질까?"

⇒"그가 말하기 전에 이미 내 기분이 상한 이유가 무엇인가?"

"저 사람은 날 무시하고 있어."

⇒"그 사람이 널 무시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날 좋아한다면 내가 원하는 것쯤은 알아야 되는거 아냐?"

⇒"내가 말하지 않으면 저 사람은 언어 외에 어떤 방식으로 나의 감정을 알아챌 수 있을까? 그 방법은 정확한가?"

"일을 왜 그 따위로 엉뚱하게 처리하는 거야?"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말해 주었는가?"



◎ 영감을 주는 질문 사례

"지난해 가장 자랑스럽게 기억할 만한 일은 무엇인가?"

"올해 이룬 일 중에서 가장 뿌듯한 것은 무엇인가? 이 달에는? 당신의 삶을 통틀어서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 중에 누군가 타인에게 가장 친절하고 너그럽게 베풀었던 사건은 무엇인가?"

"올해 가장 만족스럽게 매듭지은 일 또는 시작하길 잘했다고 여겨지는 일은 무엇인가?"

"작년 한 해 동안 당신의 삶에 가장 크게 좋은례영향을 끼친 사람은 누구인가? 철들어서 지금까지는 누구를 꼽을 수 있는가?"

"최근 들어 가장 큰 위험은 무엇이었나? 삶을 통틍어서는?"

"어떤 칭찬을 들었을 때가 가장 자랑스러웠나?"

"스스로에게 늘 해주는 충고는 무엇인가?"

"변화나 발전을 위해 가장 공들여야 할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일인가? 당신 자신인가? 아니면 성품인가?"

"올해 당신을 가장 행복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최근에 아주 즐겁게 다녀온 곳은 어디인가?"

"오늘 하루 당신을 아주 기분 좋게 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주길 바라는가?"

리프레이밍(reframing) - 여러분은 좋아하는 음료수를 한잔 마시다가 그 잔 속에 남아있는 절반의 음료수를 보면서 "이제 절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아직도 절반이나 남았네" 하고 생각하는가? 사람에 따라 생각하는 것도 다를 것이다. 이를 심리학에서 적용한 것이 '리프레이밍(reframing)'이라 한다. 프레임(frame)이란 사고방식이나 느끼는 방식의 '틀'을 의미한다. 리프레이밍이란 이런 사고방식이나 느끼는 방식의 틀을 바꾸는 방법이다. 즉, '나에게는 능력이 없다'는 사고방식으로부터, '어쩌다 운이 없었다'는 외적 귀인형의 사고방식으로 리프레이밍을 시도하는 것이다.



◎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재미있는 리프레이밍 사례

옷이 꽉 조일때 - 이것은 내가 충분히 먹었고, 먹을 것이 있다는 사실을 뜻하므로 감사한다!

정치가와 정부에 대하여 온갖 불평불만이 터져 나올 때 - 내게 아직 말할 자유가 있음을 뜻하므로 감사한다!

새벽을 깨우는 귀찮은 알람을 끌 때 - 내가 살아 있음을 뜻하므로 감사한다!

고등학생인 딸이 먹은 접시를 치우지도 않고 소파에 퍼질러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 거리를 싸돌아다니지 않고 있다는 뜻이므로 감사한다!

엄청나게 많이 나가는 근로소득세 명세서를 볼 때 - 내가 실업자가 아니란 사실을 뜻하므로 감사한다!

깎아야 할 잔디, 닦아야 할 창문, 고쳐야 할 배수관이 있을 때 - 내가 집을 갖고 있음을 뜻하므로 감사한다!

하루 종일 일해 피곤에 절어 있을 때 - 내가 열심히 일할 능력이 있음을 뜻하므로 감사한다!

주차장 구석밖에 자리가 없을 때 - 내가 걸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운송 수단을 가졌다는 것을 뜻하므로 감사한다!



◎ 독서와 관련된 질문 사례

1.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질문하기

"본문의 내용과 주제는 무엇일까?"

"본문의 목적은? 왜 썼을까? 제목에서 유추되는 바는?"

"누가 썼는가? 누구를 위해 썼는가?"

"어떤 식으로 주제에 접근하는가? 설득하기 위해 어떤 방식을 취하는가?"

"주장의 근거가 되는 전제가 달라지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2. 읽으면서 질문하기

"내가 기대하거나 추측했던 것과 본문이 얼마나 일치하는가?"

"저자가 말하는 내용이 잘 납득되는가?"

"저자가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있는가?"

"저자가 말하는 사실이 정확한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근거나 참고 자료가 있는가?"

"책의 내용이 내가 알고 있는 경험이나 지식 및 알고 싶어 하는 것들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가?"

"여기에서 얻은 내용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



◎ 반추 질문 사례

"이 과제를 통해 실제로 무엇을 얻었는가? 어떤 부분이 가장 어려웠는가? 그것이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부분이 가장 명확한가? 나는 무엇 때문에 그 의도를 그렇게 쉽게 파악할 수 있었는가?"

"이 과제가 의도한 학습 목표를 어느 정도로 성취했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부분에서 더 나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 과제에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 이 과제에서 언젠가 다른 곳에서 유용하게 쓰일 기술이나 지식을 얻고 있는가? 이 과제에서 당장 긴급하게 얻어야 할 학습 결과물은 무엇인가?"

"내가 한 것 중에 가장 잘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왜 가장 잘한 부분인가? 가장 잘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가장 신통치 않았던 부분은 무엇인가? 왜 가장 변변치 못했는가? 그 부분을 잘해 내지 못한 자신으로부터 배운 점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바탕으로 앞으로는 다르게 시도할 계획은 무엇인가?"

"결과를 놓고 볼 때 이 과제가 다시 주어진다면 어떤 식으로 하겠는가? 이 경험이 장래에 비슷한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겠는가?"

"이 일을 하면서 도전 욕구를 가장 많이 고취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왜 내게 도전이 되었는가? 어느 정도까지 도전 욕구를 만족했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유형의 도전을 다시 한다면 성취도를 높이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 과제에서 가장 따분했던 부분은 무엇인가? 이 부분에서 의도된 핵심을 알 수 있는가? 이 부분을 좀 더 동기가 유발되고 흥미잇게 만들려면 어떤 식으로 재구성하는 게 좋을까?"

"이 일은 노력을 쏟아 부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이었나?"

"이 과제에 들인 시간은 적정하다고 느끼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하면 시간을 보다 지혜롭게 쓸 수 있을까?"

"이 과제가 어느 부분을 더 많이 배워보고 싶게 했는가? 아니면 의욕을 떨어뜨렸는가?"

"이 과제를 통해 배워야 할 다음 단계가 명확한가? 아니면 희미한가? 희미하다면, 누가 나로 하여금 더 선명한 시야를 갖게 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과제를 막 시작하려는 친구에게 어떤 충고를 하고 싶은가? 시간은 얼마나 투입하라고 권하고 싶은가? 어떤 함정에 빠지지 말라고 조언하고 싶은가?"

"제 시간에 이 과제를 마치기 위해 필요한 3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무엇을 꼽겠는가? 이 3가지 중에서도 내가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되면 끝낼 수 있는 적당한 마감 기한은 언제인가?"



◎ 기업 조직에서 필요한 질문 사례

1. 고객 서비스팀

"손님들은 바라는게 왜 그렇게 많지?""이놈의 부서는 언제쯤 제대로 일할 수 있을까?""소비자들은 왜 사용 설명서의 기본 내용조차 읽지 않는 거지?"⇒"내가 이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2. 판매팀

"우리 물건은 가격이 왜 이리 높아?"

"언제쯤 우리도 경쟁력을 갖게 될까?"

"마케팅팀에서는 언제쯤 더 나은 상품 소개서를 보내올까?"

"공장에서는 왜 물건을 제대로 못 만드는 거야?"

⇒"오늘 더 효과적으로 일하려면 무엇을 하면 될까?"

⇒"손님들의 가치를 어떻게 높일 수 있을까?"

3. 중간 관리자

"왜 젊은 녀석들은 일하길 싫어하는 거야?"

"어너제쯤 괜찮은 직원을 뽑을 수 있을까?"

"왜 동기부여가 되지 않지?"

"누가 잘못한 거야?""왜 제때 안 와?"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더 효과적인 코치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팀원들을 잘 이해할 수 있을까?"

4. 기업 오너

"누가 (잘못)한 거야?"

"누가 나만큼 이 일을 챙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리더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더 커뮤니케이션을 잘할 수 있을까?"



◎ 조직 부문별 질문 사례

1. 시장

"당신(또는 팀)이 참여하고 있는 시장은 무엇인가?"

"그 시장에 관련된 회사 및 신규 시장 참여자들이 부딪치는 문제는 무엇인가?"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 당신(또는 팀)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시장에서 경쟁자는 누구인가?"

"경쟁자들이 그 분야에서 성공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적정한 목표를 세우고 있는가?"

"이 목표들은 외부적인 여건과 일치하는가?"

2.제품

"어떻게 하면 고객들에게 가치 리는 서비스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제품을 구입하게 만들 수 있는가?"

"고객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우리 제품만의 소비자 구매력은 무엇인가?"

"가격 전략은 무엇인가?"

3. 재정

"우리의 노력을 어떻게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가?"

"어떤 사업 부문에서 이익을 창출할 것인가?"

4. 인사

"문제들을 다루고 전략을 수행하는 데 적합한 인물이 있는가?"

"누가 사안을 정리하고 기획하는가?"

"실제로 일이 진행되도록 나서는 사람은 누구인가?"

5. 절차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일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의사결정은 어떤 식으로 내려지고 이행되는가?"


wn1 - 마음을 여는 질문은 파일로 올렸습니다..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부록:마음을 여는 질문 364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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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꿈꾸면서도 정작 과거의 행동과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익숙함, 게으름, 두려움 때문이다.

시인 폴 발레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 했다.

 일상의 생각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며, 삶의 의미와 열정은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다.

1.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자.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 왜 변화하지 못하는가, 왜 변화해야 하나'등
    자신에게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 보자.
    그러면 내 삶에 있는 필요없는 주인들이 나가고 진정한 주인이 자리를 잡는다.

2. 목표를 확실히 정해라.
    목표는 사람을 끌어당기고 상황을 반전시키는 힘이다.
    목표가 있는 사람은 집중해야 할 것을 잘 알고,
    일의 우선순위를 정확하게 매겨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삶의 확실한 목표를 정해라.

3. 당장 행동하라.
    언제까지 때가 아니라고 핑계 대며 기다릴 것인가?
    적당한 때는 없다.
    때를 기다리는 것은 이 순간을 그저 꾹 참고 있는 것일 뿐이다.
    현재가 과거의 결과인 것처럼 미래는 현재 선택한 것들의
    결과인 것이다.
    지금 시작해야만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현재', 머릿속에 있는 비전을 실현하려면 지금 시작하라.

4. 아이의 마음을 가져라.
    인라인 스케이트를 배울 때 아이들은 타는 것 자체에 재미를 느끼지만,
    어른들은 넘어질 때마다 창피해 하고 상처를 겁내다 포기한다.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거나 실패를 두려워하면 원하는 것을
    놓치게 마련이다.
    균형 잡힌 자존심과 자기 믿음은 변화에 적극 대처하게 한다.

5. 절박함을 즐겨라.
    절박함은 미루어 왔던 행동을 이끌어 내는 중요한 동기가 된다.
    스스로 일의 마감을 정해 놓고 위기 상황을 예측한다면
    자신을 자극해 움직이게 만든다.
    일에 쫒기는 것을 스트레스로만 생각하지 말고
    자기 발전의 기회로 삼고 변화의 원동력으로 활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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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게 자극하라.

고현숙 올림 2009

1. 가능성은 누구나 있다.

- 유능한 리더의 함정

자기 방법만을 고집하는 리더는 알게 모르게 조직의 생명력을 갉아 먹는다.

- 학습보다 잊어버리기가 더 중요하다?

우리가 배우기에 앞서 먼저 잊어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

고정관념, 우리들이 양육되어온 방식, 선입견 등 과거의 것이다.

- 현명한 리더는 지시하지 않는다.

상황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당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가가하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

아이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려면 그들이 좋은 의도를 갖고 이Tekmss 것을 인정해 주고 자연스럽게 본을 보여야 한다.

- 충고하지 말고 호기심으로 접근하라.

상대방에 대한 비난을 빼고 중립적인 자세를 취해보라. 나 중심의 판단과 ‘고쳐주고 말겠다’는 자신의 에고를 내려놓고, ‘어떻게 하면 직원이 이 걸림돌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까?에 대해 그 직원에게서 답을 구하라. 중요한 것은 ’호기심‘을 가지는 것이다. 내 판단을 내려놓으면 호기심이 생긴다.

- 중요한 것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의 기회다.

학교성적이 나쁜 자녀가 있다고 하자. 부모들의 반응 중에 좋지 않은 것은 이런 것이다. “그렇게 공부하라고 했는데 게임만 하더니 그것 봐라!” “그러고도 잠이 오냐?”는 식으로 모멸감을 주는 부모, 이런 말들이 자녀에게 얼마나 커다란 상처를 주는지 부모들은 잘 알지 못한다.

현명한 부모는 다르게 대처한다. “이미 지나간 것 때문에 너무 속상해하지 말자.” “그래도 공부한 것은 어디 안 가니까 노력한 만큼은 너에게 남을 거야”라고 공감하고 인정해주면서 “다음번 시험에서는 어느 정도 성적을 받고 싶니?” “그러려면 네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라고 물어보고 스스로 생각해내도록 격려해준다. 그렇다고 ‘어떻게 해도 좋다’는 식으로 마냥 받아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자녀가 약속을 잘 지키는지 체크해주고 스스로 어려움을 견뎌나가도록 묵묵히 지켜봐준다..그리고 조그만 긍정적인 변화라도 인정해주고 지지해준다.

-작은 일에서 큰 깨달음 얻기

코칭에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자기 성찰을 통해 더욱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다.

-콘텐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문제는 교육의 내용, 즉 콘텐츠가 아니라 그 내용을 어떻게 전달하는가, 즉 딜리버리(delivery)에 있다.

딜리버리 스킬

- 나 중심에서 상대방 중심으로

나의 생각에서는 100점짜리지만 사실은 상대에게 맞는 경우에만 100점이 될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상대의 70점짜리를 시도해보게 하고 그것을 통해 배우게 하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일 수도 있다.

2. 사람을 성장시키는 길을 묻는다.

- 잘 들어주는 것보다 큰 선물은 없다.

경청은 그냥 들리는 것을 수동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기울여 진심으로 듣는 것이다. 잘 들어주는 것은 우리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귀중한 선물이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경청이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아마도 경청하기 어려운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말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일 것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속으로는 계속 자기가 할 말을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판단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남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진정한 대화란 상대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 맥락적 경청

‘적극적 경청’은 주의를 기울이고 공감해주는 경청이다. 상대방과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며 추임새를 넣으면서 듣는다. 이것은 말하는 사람이 신이 나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해주며 존중받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적극적 경청보다 더 깊이 듣는 것이 ‘맥락적 경청’이다 이것은 말 그자체가 아니라 그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가, 즉 말하는 사람이 그 말을 하게 된 의도, 감정, 배경까지 헤아리면서 듣는 것을 말한다.

- 맥락적 경청을 내 것으로 만드는 5가지

사람들은 상대가 내 욕구를 알아주고 공감해줄 때 비로소 그에게 마음을 열고 스스로 방법을 찾아가는 법이다.

첫째, 말하는 사람에게 주의를 집중하자.

둘째, 섣부른 판단을 하지말고 끝까지 듣자.

셋째, 듣는 도중에 어떻게 반응할까를 생각하지 말자.

넷째,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간단하게 요약하여 확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다섯째, 상대방이 말한 것과 관련된 적절한 질문을 하며 듣는다.

- 형 없이도 가족들이 잘 살 수 있을까요?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공부해야 미래가 밝다는 것을 그렇게나 열성적으로 말해주었으니 이제는 인내하며 공부에 집중하겠지’라고 부모가 생각하는 사이에 아이들은 또 게임의 유혹에 빠지고 나름대로 중요한 친구와 우정을 쌓는 행동에 나선다.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사람의 행동을 바꾸지 못한다는 하나의 극단적인 예가 담뱃갑에 새겨진 경고문구가 아닐까. 거기에는 ‘지나친 흡연은 폐암의 원인이 되고 건강에 해롭다’는 요기의 말이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지만, 과연 그 글귀를 보고 담배를 끊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핵심은 정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정보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연결해주는 일이며, 이 정보를 자신의 행동에 적용시키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질문은 그런 점에서 정보나 교훈을 자신의 삶 속에 연결되도록 하는 좋은 방법이다. 자녀에게 무조건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훈계하는 것보다는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무엇을 갖고 싶고 무엇을 하고 싶니?” “미래에 그렇게 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라고 질문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질문은 생각을 자극하고 스스로 답을 찾도록 촉구한다.

- 상자 밖으로 나오게 하는 질문

흔히 사람들은 ‘인식에 기초하여 살아간다’고 한다. 객관적인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 어느 제빵사의 변신

우리는 흔히 ‘문제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막상 현실적인 문제에서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경우가많다. 경기탓, 환경탓, 남탓,... 그러나 사실 가장 강력한 변화는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평가가 아니라 평가를 통한 개선이다.

목표가 스마트(SMART)해야 하는 것처럼, 직원이 내야 할 성과도 스마트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구체적이고(Specific) , 측정 가능하고(Measurable) , 실천적이고(Action oriented) , 현실적이고(Realistic) , 시한이 적절(Timely)해야 한다.

- 충고는 잊어도 이야기는 기억한다.

사실 코칭이란 성인들을 성장시키는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코치는 상대방의 문제를 들어주는 경청자이자 생각을 전환할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는 질문자이며 의미 있는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 깨닫게 해주는 스토리텔러, 즉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코칭에 필요한 이야깃거리는 사실 우리 삶의 경험 그 자체가 훌륭한 이야기의 보고다.

스토리를 말할 때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이야기를 할 때 교훈까지 정리해주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 그것은 듣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자. 원래 이야기꾼은 가르치려 들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법이다.

-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에 대한 인식

사람은 ‘사실’에 입각하기보다는 그 사실에 대한 ‘인식’에 기초해서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일도 어떤 맥락에서 이해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결정 그 자체보다 그 결정에 대한 해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 Your best friend is yourself.

때때로 코치들은 ‘셀프 코칭’이야말로 코칭의 가장 높은 단계가 하니겠느냐고 말한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코칭할 수 있을 때 훨씬 성숙한 자아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셀프 코칭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코칭의 일반적인 원리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우선 자기 내면의 소리를 잘 경청해야 한다. 무엇을 원하고 있고 무엇이 결핍되었다고 느끼는지, 신이 나게 하는 것은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풀이 죽게 되는지. 그러고 났을 때 자신에게 의미 있고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가장 강력한 질문은 내면에서 나오는 자신에 대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으로써 시각을 바꾸어 사물을 바라볼 수 있다면, 또 자신을 충분히 인정하고 칭찬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셀프 코칭의 시작이다.

3. 서로 다른 것들의 조화와 성장

- 내 인생의 확고한 디딤돌 셀프 리더십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항상 환경 탓, 무모 탓, 주변 탓을 하면서 정작 자기가 할 수 잇는 것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아무리 환경이 열악하더라도 그 환경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으 결국 우리들 자신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 박사는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하느님마저도 빼앗아갈 수 없는 마지막 자유, 주어진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자유가 있다는 걸 깨달았고, 그 반응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고 썼다.

- 성공은 바로 디테일에 있다.

성공하는 사람들이 디테일에 강한 이유는 그들이 매우 ‘실행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자기 일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디테일에 강해야 한다. 숫자에 밝아야 한다. 어떤 것이 진짜로 현실을 변화시키는지에 예민해야 한다.

“인생은 이제부터라고 생각하고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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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시간 몰입의 법칙

이지성 맑은소리 2004

"한국형 자기운명 창조공식"

첫째, 지금 네 상황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크고 높은 꿈을 품어라. 그리고 그 꿈을 죽어도 포기하지 마라.
wn1 - 몰입을 위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열망하는 그 무언가가 몰입을 시켜준다.
굳이 그것을 표현하면 '목표'이다.. 하지만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남녀노소 누구나 자신이 바라는 바가 생긴다면 그것으로 몰입을 하게 된다..
어린 아이를 관찰해보면 그들은 순순하게 몰입을 잘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때를 관찰하면 정말 몰입을 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바로 그것이다. 몰입을 해야지 해야지 보다는 마음에서 진정 원하는것이 생긴다면 자연스럽게 누구나 몰입을 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18시간 몰입의 법칙'과 '3(4)시간 수면의 법칙'을 실천하라.

셋째, 꿈의 성취를 돕는 마음의 기술을 사용하라.
wn1 - 위의 표현들은 어쩌면 기술적인 내용이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다시말해서 몰입을 더욱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 역할을 할지언정 저것 만으로 지속적으로 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위에서 적은(빨간글씨)내용의 시작으로 그것을 지속시키기에 좋은 방법일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표현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이다.

1부 한국 사회 성공 제1조건 "꿈을 가져라!"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진정한 자아는 10%의 의식 세계가 아닌 90%의 무의식 세계 속에 존재한다."

철학에서는 "인간의 내면에는 거대한 잠재의식의 세계가 숨겨져 있다."

과학자들은 "인간은 평생 자기 뇌의 10%도 쓰지 못한다."

인간이 잃어버린 태초의 완전성, 무의식 세계 속에 숨겨진 진정한 자아, 내면에 잠들어 있는 거대한 잠재의식, 의지대로 쓰지 못하는 90%의 뇌, 이 다양한 명칭들을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라는 명칭으로 통합 할 수 있다면, '꿈'은 '또 다른 나'가 알고 있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입니다.

마음 속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꿈'을 삶의 좌표로 삼습니다.

그들은 현실을 보는 대신 꿈을 봅니다.
wn1 - 현실 대신 꿈을 본다.. 이말은 무엇을 내포하고 있을까.. ??
현실을 무시하는것이라기 보다는 현실속에서의 부단한 도전과 압박들을 미래의 내 현실에 비추어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표현한것이 아닌가 한다..

성공한 사람, 유명한 사람, 부자인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들이 해낸걸 너라고 왜 못해? 해봐! 너도 할 수 있어. 저렇게 될 수 있어, 아니 어쩌면 저들보다 더 크게 성공할 수 있어!" 하고 외치는 또 다른 나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겁니다.
바로 그 목소리를 신뢰하십시오.

한국의 성공자들은 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터무니없어 보이는 꿈일지라도 사람이 꿈을 마음 속에 품으면, 바로 그때부터 기적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한다고.

언제나 '꿈'을 말하고, 어디에서든지 '꿈'으로 인해 불타오르고, 누구든 '꿈'으로 제압하고, 무엇이든지 '꿈'으로 점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인생에 빛을 끌어들인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에서 눈물과 한 숨, 절망과 좌절만 계속되는 어려운 한때를 만납니다.

꿈과 함께 다시 일어나고, 희망과 더불어 앞으로 나갑니다.

'꿈'은 완벽하게 '꿈'만을 바라보며 갖는 것이라고. 눈앞에 닥쳐오는 현실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것은 허상에 불과하며, 오직 내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꿈'의 영상만이 진실이라는 태도를 갖는것이라고. 그 선택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믿음으로 갖는 것이라고. 돌덩이에 맞고 낭떠러지로 떨어진다해도 천진하게 웃는 얼굴로 일어나 다시 그 길을 간다는 자세로 갖는 것이라고. 완전히 고립된다 할지라도 여전히 '꿈'을 붙들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이라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각오를 갖는 것이라고...이런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꿈을 지킨 사람들

당신이 꿈을 가진 사람이라면, 가진 것이 비록 계란뿐일지라도 세상이라는 바위를 향해 그 계란을 끝까지 던지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바위는 깨어집니다.

당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게 되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이 '이것 때문에 ... ... .. 나는 안돼'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심하든 더 심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지금 바로 시작하십시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조건하에서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꿈'은 이루어진다.'는 것.

꿈을 갖고 그것을 계속 추구할 용기만 갖는다면 누구라도 자신들과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콘래드 힐튼 "You have a dream! 꿈을 가져야 한단다. 사람들은 보통 능력과 재능이 성공의 절대 비결인 줄 알고 있지. 그러나 그것은 기본에 불과한 것이다. 꿈이 없는 노력과 재능이란 가장 열심히, 가잘 빠르게 도는 쳇바퀴라고나 할까"

사람은 가슴 속에 별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꿈이라는 별을 갖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높이 뛰어도 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콜래드 힐튼은 "성공의 크기는 꿈의 크기에 비례한다."

"꿈을 크게 가져라. 그러면 언젠가는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능력 또한 갖게 된다."
wn1 - '꿈 ..꿈..하는데 난 대체 왜 꿈이 없을까?'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물론 내가 만나본 사람들중에..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면 별 생각 없이 있는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왜 꿈을 가지지 않고 있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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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이 없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일까?.. 꿈에 대해 깊이 있는 생각을 해보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어떠한 이유에서 일까..?
혹 꿈이란것에 대해 너무 막연하게 또는 커야한다는 압박을 스스로에게 주고 있는건 아닐까?
대체 왜 꿈을 꾸지 못하는 것일까?
어릴 때로 돌아가보라 .. 그 어린 시절에는 궁금한것도 많았고 해보고 싶은것도 많았다.그러나 사회와 때론 가정이 우리가 경험하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것을 막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꿈을 가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잃어가게 되었고 .. 현재 까지 왔는지도 모른다..그렇다면 사회에 또는 부모님이나 스승에게 한탄만 하고 있으면 되는것일까?
누구나 이 질문에 아니라는 답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는 걸까?
자기 계발을 위한 내용들에 나오는 당연한 말은 생략하더라도 ..
'막연한 두려움' 이라도 버려야 할 것이다...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무언가를 찾으면 또 다른 나의 마음은 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수십가지는 찾아보고 있고..그것을 나의 뇌로 전달해 주고 있다.. 결국은 호기심을 쉽게 무너뜨리게 된다.
사람이 걱정하는 것의 4%외에는 절대적으로 변경시킬 수 없다고 한다.. 96%의 비현실적인 내 망각에서 허우적 거리기 보다는 차라리 잘 되든 안되든 그것을 해보는것 만이 답을 알 수 있다..
사실 나 역시 많은 사람들은 '안된다' '어렵다' 결론내릴때 그것이 가능함을 실행해보았고 결과로 인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가두려 하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라 ... 왜 나를 가두는 생각만이 내 머리속에 가득한지를..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갔다.. 그리고 선로옆을 걷다가 문득 별에 붙은 글을 보았다...
'정말 화가나서 한번 치고 싶을때, 이렇게 생각해 보라..."이러면 내가 행복해질까?"'
걸어가면서 순간적으로 본 짧은 글이었지만..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머릿속에서 맴돌던 표현이었다.
정말 자신이 두려움을 가져 포기할때 '내가 이것을 포기하면 행복해 질까? 아니면 결과야 어떻든 해보는게 더 행복해 지게 할까?'를..


2부 한국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들이 목숨 걸고 지키는 '18시간 몰입의 법칙'

실제로 꿈을 이룬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정신, 믿음, 의지, 노력 등등.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는 것은 꿈을 위해 흘리는 '땀의 양'입니다.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켜 주는 근원적인 힘이 '꿈'이라면 '땀'은 그 꿈을 이루어 주는 실질적인 힘입니다.

우리가 흘려야 할 것은 '땀'입니다. 눈물이 아닙니다. 어제보다 더 많은 양의 땀, 영혼이 부서질 정도의 땀, 오직 그것 하나뿐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모든 조건을 이기고 자신이 세운 '꿈'의 정상에 우뚝 선 사람들, 그들이 넘어진 때마다 흘렸던 것은 눈물이 아니라 땀이었습니다.

'18시간 몰입의 법칙'의 4가지 원칙

1. 눈뜨자마자 일을 생각하라.

- 마음의 에너지를 강력하게 쏟아붓는다

- 마치 전투에 임하는 병사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오늘의 할 일과 만나야 할 사람들을 그리면서 하루 일을 마음속으로 미리 다 끝내버리는 것이다.

- 새벽과 아침에 자기 일에 관련된 생각과 행동을 하라.

2. 머릿속의 모든 생각을 언제나 일에 집중시켜라.

- 한국의 성공자들이라고 처음부터 일에 몰입했던 것은 아니다.

- 1년 혹은 5년 이상의 혹독한 자기수련 과정을 통해서 후천적으로 습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 몸을 쉬고 있을 때조차도 머리로는 끊임없이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3. 무조건 하루 18시간은 일을 하라.

- 무조건 하루 18시간씩 주기살기로 일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

4. 꿈 속에서조차 일을 하기를 소망하라.

- 일에 치이는 사람이 아니라, 너무너무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한 가운데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 그 행복을 단 일초라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고 바로 그 염원이 꿈속에서도 재현되는 것이다.

성공한 한국인 300여명이 말하는 최고최상의 성과를 내는 기술

1. 하루 18시간씩 매일 혼신의 힘을 다해 일을 한다. 그렇게 하면 저절로 조직 내에서 가장 뛰어난 성과를 내게 된다.

2. 가장 뛰어난 성과를 놓고 스스로에게 "이보다 더 잘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다시 도전한다. 그러면 조직 내에서 가장 뛰어난 성과가 내가 해낼 수 있는 최선의 성과로 변한다.

3. 최선의 성과를 앞에 두고 "나는 이보다 훨씬 잘할 수 있다!"라고 외치면서 다시 도전한다. 그러념 내 능력으로 해앨 수 있는 최선의 성과가 최고의 성과로 바뀌게 된다.

4. 최고의 성과를 앞에 두고 " 이보다 좀 더 잘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다시 도전한다. 그러면 최고의 성과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경지인 최고최상의 성과로 변하게 된다.

5. '18시간 몰입의 법칙'을 실천하면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기간에 최고최상의 성과를 낼 수 있다.

'3(4)시간 수면의 법칙'은 과학적으로도 무리가 없는 법칙이다.

대뇌생리학자들이 하루 3시간 자는 사람과 하루 8시간 사람의 뇌파를 비교 분석해 본 결과 수면의 질은 거의 동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명실공히 각계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내뱉은 말은 "나는 내 일에 목숨을 건다"는 것이었다.

3부 실패를 즐겨라

나폴레온 힐의 연구에 따르면, 나날이 성장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실패를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에 있었다고 한다.

원칙론적으로 따진다면 실패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실패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경험이며, 누구에게는 끝장인 일이 다른 누구에게는 새로운 도전이기 때문이다.

실패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그것은 현실세계가 아닌 마음세계에 있는 것이다.

실패란 우리에게 일어난 어떤 부정적인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붖정적인 사건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우리 자신의 패배의식,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실패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유일한 행동이 있다면 그것은 실패를 딛고 다시 벌떡 일어서는 일이다.

자기 안에서 피어나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 두려움, 의심을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꿈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이미 과거나 되어버린 실패로 힘들어 하지 말고 가까운 미래에 반드시 이루어질 당신의 꿈을 생각하며 새롭게 힘을 내라.

4부 성공에도 기술이 있다.

로저 베니스터가 사용한 '상상훈련'은 '꿈 바라보기' 기법

1. 자신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나 자신이 도달하고픈 목표 또는 자신이 갖기를 원하는 무엇을 마음 속에 그립니다. 그림을 그릴 때 불가능한 이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2. 마음 속의 그림이 반드시 현실이 될 거라고 매일 매순간 간절하게 믿습니다.

3. 어떤 일이 있어도 위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카네기는 평생동안

1. 목표를 종이에 적는다.

2. 하루 두 번(기상후, 취침전) 종이에 쓴 목표를 큰 소리로 외친다는 두가지 원칙을 실천했는데, 그 결과 1주일에 1달러 20센트를 받던 면화공장 노동자에서 개인 재산만 4억달러 넘게 소유한 거부로 성장하게 되었다.

나폴레온 힐이 정리한 '꿈 쓰기' 기술

1. 바라는 꿈의 목표를 명확하게 정하라.

- 예를 들어 부자가 되고 싶다면 벌고 싶은 돈의 액수를 명확하게 숫자로 정하라.

단순히 '돈을 벌기를 원한다'는 식의 애매모호한 목표를 세워서는 안 된다.

2.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라.

3. 꿈을 달성하는 '날짜'를 정하라.

4. 꿈을 성취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설령 아직 준비가 다 되지 않았더라도 상관하지 말고 즉시 행동에 들어가라.

5. 위의 4원칙을 종이에 상세하게 써라.

6. 종이에 적은 것을 1일 2회, 취침하기 직전과 아침에 깨어난 즉시 큰 소리로 읽어라.

이때는 종이에 적힌것을 당신이 이미 얻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부정적인 생각이나 질문은 긍정적이고 실천적이며 행동을 자극하는 질문으로 바꿔라.

'나는 왜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는 거야?' '왜 하필이면 나지?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된거야?' '이런 것은 해서 뭐하지? 뭣하러 시도해?' '왜 나의 고마움을 모르는거야? 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거지?' '오늘 어떤 물건을 사지? 요즘 유행하는 최신 상품은 무엇이지?'

이러한 질문이 아니라..

"앞으로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 지금 즉시 그리고 장기적으로 취해야 할 행동은 무엇이지?"

"이 끔찍한 기분을 벗어나기 위해 내가 지금 즉시 취해야 할 행동은 무엇일까?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상황을 겪지 않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내게 주어진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을까?"

"만일 지금 시도하지 않으면 미리에 내게 돌아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사람이 내게 진심으로 고마움 느끼게 하려면 나는 어떤 말과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 수 있게 하려면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재정적인 자립을 하려면 나는 얼마를 저축해야 하고 어떤 투자계획을 세워야 할까?"

==> 행동을 유발하는 질문을 스스로를 향해 끈질기게 던지고 있어야 한다.

질문 체계를 바꾼 바로 그 순간부터 자신의 삶은 극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아침 질문법

1. 지금 내 삶에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어떻게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2. 내 인생에서 나를 들뜨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 무엇이 나를 들뜨게 하는가? 어떻게 그것이 나를 들뜨게 하는가?

3. 내 인생엣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 무엇이 나를 자랑스럽게 하는가? 어떻게 그것이 나를 자랑스럽게 하는가?

4. 내 인생에서 감사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 무엇이 나로 하여금 지금 감사한 마음이 들게 하는가? 어떻게 그것이 감사하다고 느끼게 하는가?

5. 지금 내 삼에서 가장 즐기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 지금 나는내 삶에서 무엇을 즐기고 있는가? 그것이 어떻게 나를 즐겁게 하는가?

6. 지금 당장 내가 결단을 내린 것은 무엇인가?

- 무엇에 대한 결단을 내렸는가? 그것이 어떻게 결단을 내리게 하는가?

7.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 나를 사랑하는가?

- 무엇이 내가 사랑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가? 그것이 어떻게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가?

저녁 질문법

-아침 질문법을 반복한다. 때로 다음 세 가지 질문을 더한다.

1. 나는 오늘 사회에 어떤 공헌을 했는가?

- 나는 오늘 어떤 면에서 '주는 사람'이 되었나?

2. 오늘 내가 배운 것은 무엇인가?

3. 오늘 내 삶에서 발전을 이룬 것은 무엇인가?

또는 내가 오늘 이룬 것을 어떻게 내일을 위한 투자로 활용할 수 있을까?

wn1 - 마음을 뚫는 질문은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코칭'은 그러한 질문을 하여 상대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에대한 그리고 자신의 꿈에대한 해결 방안을 내게한다..스스로 답을 찾고 그것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5부 당신도 할 수 있다.

'이것 때문에 나는 안돼'라고 외치는 내 마음 속의 목소리는 진정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

의심 대신 믿음을 가지면 모든 것이 가능해 진다.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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