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하면 떠오르는 왕들 중에 단연 으뜸은 세종 영조 정조 임금이다. 
물론 조선을 건국한 태조도 있고 여러 왕들이 있지만 조선시대에서 가장 태평 선대한 시절로 꼽는다. 특히 전기에는 세종, 후기에는 영조의 기반을 바탕으로 정조 임금이 부흥시대를 열었다.
한국의 사극에서도 세종과 정조 임금을 바탕으로 하는 드라마도 있다.
그만큼 시대를 대표하는 왕이었으며, 어질고 바름의 본을 세운 왕이다.

개인적으로는 세종의 이야기는 어린시절에 많이 접하게 되었고, 정조는 성장하여서 많이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조 임금에 대한 책을 더 많이 본 기억이 있다.
이산(李祘)의 어린 시절은 참 불행하였다.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할아버지의 혹독한 가르침 그에 더해 반대 세력의 암살까지도 경험하게 되며, 죽지 않으려 늦게까지 책을 볼 수 밖에 없는 시절도 경험하였다.
그렇게 어려운 성장과정 속에서 책을 좋아하기도 하였고, 책을 볼 수 밖에 없기도 하였다.
그러한 과정이 그를 더욱 성장 시켰고, 그것이 치세를 하는 밑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저자는 정조만큼 글을 많이 쓴 왕은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렇듯이 정조는 자신의 생각들을 직접 글로 표현하고 편지도 많이 썼으며 많은 사람들과 학문을 논하고 백성들을 직접 설득하는 과정을 통해 많은 것들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정조 임금은 진정한 아비의 마음으로 나라를 돌보기 위해 애를 썼다. 책을 통해서도 그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마음은 결국은 통한다는 점을 세삼 강조하고 있다.
책을 통해 임금 정조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더 알게 되면서 그와 더 가까워 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글머리에
정조가 돌아간 이후 사람들은 그가 통치한 시대를 건릉성제(健陵盛際, 건릉은 정조의 왕릉 이름이고 성제는 융성한 시대라는 뜻)로 불러 조선 후기의 태평성대로 추억하였다.  8
왕조가 사라진 지금까지도 호감을 갖고 있는 대표적인 국왕이 바로 정조대왕이다. 그와 대결할 만한 국왕으로는 오직 세종이 있어 전기의 세종, 후기의 정조를 서로 짝을 이뤄 성군(聖君)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9
한국의 역대 통치자 가운데 글을 가장 많이 쓴 사람이 바로 정조다. 
정조처럼 글을 많이 쓴 통치자는 세계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10
정조는 글과 말이란 수단을 활용하여 사색당파로, 지역 간 이해관계로, 신분의 차별로 조각난 나라를 슬기롭게 통치하였다. 정조는 신하들이나 백성들로 하여금 국왕이 우리를 사랑하고 보호한다는 믿음을 심어주었고, 한 가지 재능만 갖고 있어도 국왕은 자기를 인정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하였다. 자신이 능력을 갖추지 못해서 그렇지 능력만 갖춘다면 우리 대왕은 자기를 등용하리라고 기대하였다. 건릉 성제의 백성들은 계층과 지역을 떠나 우리는 소외되지 앟았다는 느낌을 가졌었다.  15-16

1장 나라의 근간이 되는 힘, 공부
분발하여 끼니도 잊은 채 즐길 일을 찾았다면, 그 무엇인들 도(道)에 들어가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허나 그중에서 스스로 터득한다는 자득(自得)이란 두 글자가 특히나 절실합니다. 이유인즉, 독서에도 법칙이 잇고, 도를 보는 데도 기술이 있어섭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이 연구하여 대상에 정신을 몰두하면 자연히 대상을 정확하게 꿰뚫어볼 때가 생기니 이것이 이른바 자득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24
"마음에 드는 경치 좋은 곳을 얻어서 세상의 잡다한 일이 닿지 않게 하여 잡다한 생각을 말끔히 씻어버린다. 방 한 칸을 깨끗이 치우고서 자유롭게 생각하며 마음 내키는 대로 경사(經史)를 논한 서적을 읽는다면 참으로 즐거운 일이겠다."  27
(학문과 독서에 취미를 가진 군주였기 때문에 빈말로 보이지 않는다.)  29
학문을 하는 것은 마치 일백층 높이의 보탑(寶塔)에 오르는 것과 같다. 한 층 한 층 따라 올라가면 남에게 묻지 않아도 저절로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다.  30
정조는 생애 처음 접하는 가르침에서 '올바른 말을 듣고 올바른 일을 보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고 했다. 제 아무리 위대한 성인의 자질을 소유한 사람이라도 교육의 근본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 정조의 생각이었다.  38

3장 임금의 길
"내가 초계문신 제도를 처음 시행한 뜻은 신하들의 학업을 권장하려는 데 있다. 내가 몸소 앞정서서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많은 문신들을 부지런히 배우도록 유도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나는 습성이 본래 이런 일을 좋아한다. 종일토록 뽑아서 기록해도 피곤한 줄을 모르겠다."  85-86
학문에 힘쓰고 태평한 정치를 이루려는 것만은 작은 완성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더욱 힘써 정진하면서도 늘 부족함을 탄식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리라."  89
임금된 자의 도량은 .. '나'라는 한 글자를 버리고, 꺼리지 않고 말하도록 문호를 넓게 열어 숨김이 없는 말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남의 결점까지 산의 숲처럼 숨겨주고, 더러운 것까지 강과 바다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가슴속에 쌓아둔 것을 남김없이 털어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마치 강에서 떼 지어 물을 마실 때 제각기 양껏 마시도록 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107
성(城)이란 옛 사람들이 갑작스런 난리에 대비하려는 목적에서 쌓은 것이다. 그러나 민심을 껴안는 것은 무형(無形)의 성이다. 3천 명이 한마음이었기에 주나라 무왕(武王)은 성을 쌓아 흥했고, 장성(長城)을 만 리나 쌓아 난을 대비했으나 진시황은 그 때문에 망했다. 명철한 제왕들이 하나같이 무형의 성을 앞세우고 유형의 성을 뒤로 돌린 진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16

4장 인재에 대하여
군주가 인재를 쓰고자 할 땐 제 아무리 작은 재간을 가졌어도 버려도 좋은 만한 사람은 없다. 흠결이 있는 큰 인물과 장점이 있는 작은 인물까지 다 거두고 끌어안아, 포용하고 양성하는 나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누군들 버리고, 누군들 쓰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가르쳐도 따르지 않고 이끌어도 따르지 않는다면, 이들이 개과천선하면 다시 기용하고 그렇지 못하면 그만이다.  128

5장 나라를 다스리는 법
이치를 따질 때에는 반드시 깊이 생각하고 힘써 탐구하여야 한다. 의심할 것이 더이상 없는 곳에서 의심을 일으키고, 의심을 일으킨 곳에서 또 다시 의심을 일으켜 더이상 의심할 것이 없는 완전한 지경에 바짝 다가서야 비로소 시원스럽게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다. 옥사(獄事)를 판결하는 일도 이와 같다. 정황이나 법조문에서 털끝만큼도 의심을 일으킬 만한 거리가 없다고 해도 의심할 것이 더이상 없는 곳에서 또 의심을 일으켜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없는 완전한 지경에 도달한 뒤에라야 비로소 판결을 내릴 수 있다. 이렇게 확대해 나간다면 잘못 처리한 사건이 드물 것이다.  166
(의심할 것이 더 이상 없는 곳에서 다시 의심을 일으키라는 구절은 정조가 사건을 처리할 때 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통치기간 25년 동안 이를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애쓴 결과가 바로 <심리록>(<홍재전서>중 권135 이하의 전국의 중죄인들에 대한 판례 모음집)에 보인다.  168

6장 신하에게 이르는 말
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사람은 기어코 큰일을 해내는 법이다. 이것이 면전에서 잘못을 따지는 사람 가운데서 절의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찾는 이유이다. 오늘날의 사대부 가운데 '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유소불위(有所不爲) 네 글자를 부적처럼 차고 다니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의지할 말한 신하가 될 것이다.  197
(유소불위(有所不爲)란 말은 본래 공자와 맹자가 한 말이다.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일을 하는 자는 사리사욕을 챙기거나 파렴치한 짓거리를 행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큰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에 따르는 명예와 지위가 주어지기 때문에 구차하게 제 몫을 챙기지 않는 금도가 있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이 같은 태도를 요구했다. "사대부는 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국사를 행할 수 있다"고도 했고, "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능히 하는 것이 있고, 하지 않으려는 것이 있어야 비로소 하려는 것이 있다" 고도 했다. 고위직을 맡은 자가 권력을 이용해 비리를 저지르는 행위를 염려하고 미워하고 금지하려는 강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198
대개 인정이란 조금만 편안하면 소홀해지기 쉽다. 옛 말에 '척박한 땅의 백성은 부지런하고 기름진 땅의 백성은 게으르다'고 했는데, 나는 '풍년든 해의 백성은 게으르다'로 말하겠다. 저 어리석은 사람들이 부지런한 것이 이롭고 게으른 것이 해롭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어떻게 권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205
세상 고금(古今)의 일들은 서로 다른 것으로 보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그 이면에는 서로 비슷한 데가 없을 수 없다. 사람의 천성과 감정이 같기 때문이고, 시대의 흐름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추세가 대충 비슷하기 때문이다.  208
남들은 다들 재주 탓을 하는데 나는 재주보다 의지가 문제라고 본다. 의지만 확고하면 재주는 뒤따라오기 마련이다. 정녕 힘껏 노력한다면 왜 옛 사람을 못 따라가겠는가? 인생을 즐기는데 빠져 학업을 폐하고, 일을 남에게 떠넘기고서 편한 것만 추구하면서 걸핏하면 재주가 없다고 핑계를 댄다.  211
봄에 만물이 처음 소생할 때에는 지극한 이치를 볼 수 있다. 꽃봉오리가 아직 맺히지 않아 빛깔과 형상이 다 갖추어지지 않았으나 생명의 의지는 그래도 그 속에 들어 있다. 우리 사람으로 치자면 감정이 아직 움직이지 않았을 때이다. 꽃잎이 비로소 열리면 홍색과 자줏빛이 나뉘어 나무마다 각각의 꽃을 피운다. 사람으로 치자면 마음이 움직인 뒤의 기상이다. 안개가 꽃을 뒤덮어 꽃이 안개 속에 있을 때 안개 밖에서 꽃을 보면 희미하여 분간할 수가 없다. 그러나 바짝 다가서서 보면 또렷하게 꽃이 보인다. 안개가 걷히고 꽃이 드러나면 꽃은 본래 그 자리에서 잔과 다름없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서 비록 세상의 때가 묻어 더럽혀졌다고 해도 본성 자체에는 회복될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멀리서 온갖 꽃들이 피고 질 때 가까이 마음에서는 고요하게 느낌이 인다. 어디를 가든 이러한 이치가 아님이 없다니, 모름지기 몸소 깨달아야 한다.  219
무릇 정치는 분발함을 앞세우고 학문은 용맹정진함을 귀하게 여긴다. 정치를 하자면 분발한 뒤에야 융성한 교화를 이룰 수 있고, 학문을 하자면 용감하게 정진한 다음에야 인재를 양성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근세 이후로는 고식적인 태도가 습관으로 굳어졌다. 정치하는 자는 모두 늘어지고 게을러져 문제가 생기면 임시방편으로 틀어막느라고 세월만 보내고, 학문하는 자는 자포자기에 안주하여 그렇저럭 시간만 보낸다. 생각의 틀이 구차하여 크고 장구한 계획이 없고, 기상이 나약하여 분발하고 추진하는 의지가 부족하다.  221
이러고서 어떻게 융성한 시대를 만들고 인재를 양성하는 효과를 바라겠는가? 
벌떡 일어나 해볼 생각은 하지 않고 홀로 궁벽한 집에서 비탄만 내뱉고 있으니 학문이 흥성하지 않는다.  222

7장 공정한 나라를 위함
정조는 늘 자신의 나라를 위기에 처한 나라라고 보았다. 개혁하지 않으면 위기에 봉착할 나라라고 분석하여 위기를 극복할 대책을 내어놓으라고 늘 신하를 채근했다.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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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오래전부터 이 책을 알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간서치(看書痴)라 불리는 이덕무의 이야기,  그리고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서자로 태어나 가난을 물려받고, 양반도 평민도 ...어디에도 끼일 수 없었던 그는 암울할 수 밖에 없는 젊은 시절을 책을 보면서 그리고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하며 보내었다.
결국엔 불혹의 나이에 가까왔을때는 조정에 들어갈 수 도 있었다.

이덕무에 대한 이야기들은 간간이 책들에서 많이 인용이 되어있음을 보았고, 최근에는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2'에서 그가 검서관으로 일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책은 아무래도 정조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기에 이덕무의 내용이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의 행적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 책은 더욱 와 닿았다.

그의 친구들인 유득공, 연암 박지원, 담헌 홍대용, 백동수, 이서구, 박제가등과 함께 젊은 시절 백탑의 추억들은 서자였지만, 그가 젊은 시절 흔들림 없이 책에 파뭍힐 수 있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책에서도 언급이 되지만, '붕우유신(朋友有信)' 그에게 진정한 벗들이 있었기에 힘든시절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책의 인물 설명의 내용을 맨 먼저 적어본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조선 정조 때의 문인, 실학자. 자는 무관(懋官), 호는 청장관(靑莊館) 형암(炯菴) 아정(雅亭). 서자 출신으로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박학다식하고 시와 문장을 잘하여서 젊어서부터 많은 저술을 남겼다. 17년간 살던 대사동(大寺洞)에는 비슷한 처지의 서얼 문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는데, 가까이에 백탑(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있었기에 이들은'백탑파(白塔派)'라 불렀다. 또한 이덕무는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와 더불어 중국에까지 알려진 사가시인(四家詩人)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1778년에는 사실 일행을 따라 중국에 다녀왔으며, 1779년에 규장각 초대 검서관으로 임명되었다. 규장각에서 여러 서적의 편찬, 교정, 감수에 참여하였으며, 많은 시편도 남겼다. 검서관을 하면서 외직도 겸해 사근도 찰방, 적성 현감을 지내기도 했다. 1973년에 병으로 죽자 그의 제주와 능력을 아끼던 정조가 특별히 명하여 유고 문집 <아정유고>를 펴게 하였다. 저서로는 <기년아람>, <사소절>, <청비록>, <뇌뢰낙락서>, <이목구심서>등 수없이 많은데, 아들 이광규가 모두 정리하여 <청장관전서> 71권 33책으로 펴냈다.



내가 읽은 책 속의 옛 어른들은 날마나 시간을 정해두고 책읽기에 힘써야 한다고 하셨다.  19
하고난 날 좁은 방 안에 들어박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처럼 날마다 책 속을 누비고 다니느라 나는 정신없이 바빴다. 때론 가슴 벅차기도 하고, 때론 숨 가쁘기도 하고, 때론 실제로 돌아다닌 것처럼 다리가 뻐근하기도 했다. 
못보던 책을 처음 보기라도 하면 하루 종일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21
책읽기의 이로움을 나는 이렇게 써 두었다.
첫째, 굶주린 때에 책을 읽으면, 소리가 훨씬 낭랑해져서 글귀가 잘 다가오고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다.
둘째, 날씨가 추울 때 책을 일으면, 그 소리의 기운이 스며들어 떨리는 몸이 진정되고 추위를 잊을 수 있다.
셋째,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때 책을 읽으면, 눈과 마음이 책에 집중하면서 천만 가지 근심이 모두 사라진다.
넷째, 기침병을 앓을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목구멍의 걸림돌을 시원하게 뚫어 괴로운 기침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24
굶주림 - 밥을 먹는 것보다도 굶주리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추위 - 가난은 겨울에 더 비참한 법이다. 때로는 감각없는 손의 상태가 궁금해, 구부리기도 하고 펴 보기도 하면서 무사한지 확인하였다.  25
근심걱정 - 생계가 막막한 서자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무엇보다 한스러운 것은 내 처치를 자자손손 대대로 물려주어야 한다는것.
기침병 - 집은 제대로 불을 때지 못해, 온 식구가 추위에 시달리고 병들기 일쑤였다. 한번 박작이 시작되면 목과 가슴이 쓰리도록 아프고, 온몸은 격렬하게 흔들려 나중에는 뱃가죽까지 아파 오는 것이 기침병이다.  26
나는 애써 소리 내어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귀한 책을 보면 갖고 싶고, 좋은 책을 보면 오래도록 내 곁에 가까이 두고 싶었다.  31

붕우유신이라, 오륜이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도 공평하게 한자리를 내어 주는 것은 오직 이 항목뿐이다.  38
"여기, 방 한 칸을 만들려고 합니다. 편안하게 책도 읽고, 저희도 자주 찾아와 함께 지내고..."
"......"
무어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새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47
.....
서재가 완성된 날, 벗들이 내 집에 모여들었다. 아내는 모처럼 조촐한 술상을 차려 내었다. 집을 짓는 틈틈이, 밤새워 바늘을 놀려 가며 애써 마련해 둔 것이리라...(부부유별)  49
청장관(靑莊館)이라는 나의 호를 따서, 서재에 '청장서옥(靑莊書屋)' 
청장은 푸른 백로를 말한다. 필요한 만큼만 먹고사는 맑고 욕심 없는 새라고 한다.  49
사람들은 그저 눈으로 책을 읽는다고 한다. 그러나 책과 사람의 마음이 만나는 통로가 어찌 눈뿐이겠는가?
나는 책 속에서 소리를 듣는다.
책 속에는 또 사람의 목소리가 있다.
나는 또한 그림을 보듯 책을 본다.
어떨 때는 책에서 냄새가 나기도 한다.  50-54

술기운에 마음이 편해졌는지 박제가는 이런 말을 하였다.
"운명이란 게 어디 별것인가요? 저는 나를 마음대로 하려 드는데, 나라고 저를 마음대로 못하겠습니까? 단단히 얽어매어 놓은 사슬 한 겹이라도 내 반드시 풀고 말 것입니다."  72-73
"어제는 저 거미줄만 보았을 뿐, 거미의 꽁무니에서 실이 나오는 것은 미처 보지 못하였습니다. 거미는 어제도 오늘도 부리전히 일을 하고 있었을 텐데요.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합니다. 제가 마음을 기울여 들여다보면 볼수록, 모든 사물은 제 모습을 더 세밀하게 보여 주니까요."  75

'구서(九書)'란 
책을 읽는 독서(讀書) 
책을 보는 간서(看書)
책을 간직하는 장서(藏書)
책의 내용을 뽑아 옮겨 쓰는 초서(抄書)
책을 바로잡는 교서(校書)
책을 비평하는 평서(評書)
책을 쓰는 저서(著書)
책을 빌리는 차서(借書)
책을 햇볕에 쬐고 바람을 쏘이는 폭서(曝書)    
책과 관련된 모든 것은 그곳에서 하겠다는, 젊은 시절의 호기로운 서재 이름이었다.  126
이서구와 나의 경우는 좀 더 특별하였다.... 글자 하나까지 꼼꼼히 들여다보며 적절하게 씌어졌는지 파고들었다.  129
박제가의 꼿꼿함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상대방에 대한 분노까지 담고 있어 위태로웠다. 그러나 이서구는 어떤 상황에서건, 누구 앞에서건 냉정하고 담담하게 하고자 하는 말을 다하였다. ... 
강의 도중 오고 가는 이야기들을 옆에서 빠뜨림 없이 기록하면서, 거침없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나지막이 혼자 감탄하였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주저하지 않는 이서구는 당당하고 자유로워 보였다.  132

홍대용은 "공에는 위, 아래가 따로 없어. 어디가 가운데라 할 수도 없지. 중국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는 동쪽 변두리의 작은 나라에 불과하겠으나,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중국도 북쪽의 큰 땅덩어리에 불과하네. 우리는 서양 사람이라 부르지만, 그들의 눈으로 본다면 우리는 동양 사람이겠고, 그러니 자기만이 중심이라 자만할 것도, 변두리라 기죽을 것도 없다네."  158
중국을 사모하는 작은 나라들은 중국의 제도를 따르고, 중국의 역사를 배우고, 중국의 학문이 전부인 양 여겼다. 어떤 것을 배울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중국 것이면 충분하였다. 시를 짓고 글을 쓰는 사람의 문장마저 중국의 것을 따르지 않으면 비난을 받았다. 내 나라 산천과 내 나라 백성의 풍습을 노래한 글은 변두리풍이라 하여 하찮게 여기고 한심하게 여겼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어떠한 나라든지 가운데가 될 수 있고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나의 처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가 중심인 것이다.  159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풍경이 나의 마음에 의미 있게 다가온다면, 그것은 나의 시가 될 수 있다.  168
연암은 "자네들의 눈과 귀를 그대로 믿지 말게. 눈에 얼핏 보이고 귀에 언뜻 들린다고 해서, 모두 사물의 본 모습은 아니라네."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느끼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싶은 대로 사물을 받아들인다.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싶은 것, 인정하고 싶은 것을 미리 정해 두고, 그 밖의 것은 물리치고 거부한다. 그러한 마음에 기초가 되는 것은 역시 지난날에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은 자신만의 감각이나 경험이다. 이것이 바로 선입견(先入見)이다.  176
변화를 거부하고 선입견에 사로잡힌 고루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기준 이었다. 사심없이, 오로지 백성들의 생활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선생의 순수함을 드러내 주는 것이기도 했다.  181

박제가의 취향은,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구체적으로 꼼꼼하게 지적하여 해결 방도까지 내놓는 태도였다.  229
"옛말에 가진 것이 있어야 지킬 양심도 있다고 했다."  237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겨야 한다는 말이 어렴풋이 실감이 났다.  238
나의 벗들은 책에서 보고 듣고 배우고 생각한 것을, 백성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최선을 다해 실천하고자 했다.  240

역사는 책장 속에 고이 모셔져 있기보다, 팔딱팔딱 뛰는 아이들의 가슴속에 자리해야 한다. 246
옛사람들과 우리, 그리고 저 아이들, 또 먼 훗날의 다른 아이들.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속에, 제몫의 세월만큼은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무 생각 없이 앞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뒤돌아보기도 하고, 함께 사는 사람들과 발걸음을 맞추는 사람도 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의 흔적은 사람의 기억과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가면서, 시간이 흘러가는 길을 내기도 하고, 각자의 시간을 서로에게 나누어 주기도 한다.  249
나도 옛사람들에게, 나의 시간을 나누어 주기도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다 하더라도 누군가 나의 마음속에 스며들어와 나의 진심을 이애할 수 있을때, 우리는 서로 시간을 나눌 수 있다. 
서로 나누며 이어지는 시간들 속에서 함께하는 벗이 되리라.  250
먹을 듬뿍 묻힌 글씨는 진한 향을 내뿐고 있었다.  252

손자는 아들과는 또 달랐다. 아들이 어렸을 때는 나도 아직 젊은 아비라 그랬는지, 나만의 고민이 많았다. 나의 눈길은 자주 내 속으로 향해 있거나, 집 울타리를 넘어 세상으로 향했다. 그래서 아이가 자라는 것을 가까이에서 들여다 보지 못했다.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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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력을 많이 들여야 오래도록 명성을 누릴 수 있는데, 애당초 공력을 들이지도 않고 후세에 명성을 거두고자 하는 자가 많으니, 그 비속하고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 가소롭다."  15

"게으른 것이 습성이 되어 비스듬히 누워서 보기를 좋아한다. 중국 책은 누워서 보기 편한 데 비해 우리나라 책은 불편하기 때문에 대부분 중국 책을 휘하는 실정이다." 16

정조는 어떤 경우에도 백성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백성들은 눈앞의 것만 바라보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제왕은 먼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아야 했다. 정조는 또한 백성들이 눈앞의 것만 바라보는 것 같아도 '지극히 신명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114

"밤에는 하루 일을 점검하고, 한 달이 끝날 때면 한 달 동안 한 일을 점검하고, 한 해가 끝날 때면 한 해 동안 한 일을 점검한다." 174

"더위를 물리치는 데는 책을 읽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책을 읽으면 몸이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고 마음에 주재(主宰)가 있어서 외기(外氣)가 자연히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  177

"법을 제정한다고 저절로 시행될 수는 없고, 말로 가르치는 것은 몸으로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나에게 허물이 없게 한 뒤에야 남을 비난할 수 있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180

"바쁜 와중에 독서하려고 한다면 목표를 세워서 날마다 규칙적으로 해 나가야 한다. 이렇게 하면 일 년이면 몇 질(帙)의 경적(經籍)을 읽을 수 있을 것이고, 몇 년간 쉬지 않고 꾸준히 해 나간다면 칠서(七書)를 두루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독서할 날짜를 따로 얻고자 한다면 영영 책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195


wn1 - 나는 그를 잘 모른다..저자는 방대한 자료들을 섭렵하고 사실적이면서도 흥미롭게 글을 썼다. 
하지만 나의 아둔함으로는 이 한 권을 읽고 정조를 알 수가 없다.
물론 배경지식이 없기 때문일것이다.

그는 복없는 삶을 살았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앞을 보는것이었고, 깊게 보려하는 것이었고, 넓혀 나가보려 하는 것이었다.
그는 속에 화병을 가지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야 했을지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그의 선택이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로 인해서 조선은 미래를 개방을 소통을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정말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을 희생시켜 많은 빛을 생산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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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아버지가 뒤주에 갇히던 날, 열한 살의 어린 세손(世孫)은 할아버지에게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빌었으나 냉혹한 정치 현실 속에서 어린 손자의 애원은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정조 앞에는 두 길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복수의 길이고, 또 하나는 자신도 죽고마는 햄릿의 운명.
종조는 그런 과거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고통 스런 과거를 가슴에 묻고 또 다른 길, 미래로 나아갔다.

손 시절 그는 시강원의 스승인 빈객에게 준 글에서 "나는 천하만사가 모두 나의 '나( : 게으름)' 자로부터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그렇게 그는 단 한순간의 나태도 용납하지 않으며 자신을 다그쳤다. 그는 그렇게 정심(正心)을 추구했다.
<대학(大學)>의 정심(正心)은 마음에 노(怒)함이 있으면 얻을 수 없는 수양 단계이기 때무넹, 그는 매일같이 정심을 되뇌는 것으로 분노와 증오를 다스려야 했다. 그 과정이 그를 철인(哲人)으로 만들었다.


밤늦게 책을 보는 버릇은 세손 때부터 생긴 것이었다. 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살기 위한 생존 본능 때문이었다. 98

이덕무 - 간서치(看書痴 : 책만 보는 바보)라고 부르자 스스로 <간서치전(看書痴轉)>을 지었다.
" ... 남들이 욕해도 변명하지 않고, 칭찬해도 자긍하지 않고 오직 책 보는 것만 즐거움으로 삼아 추위나 더위나 배고픔을 전연 알지 못하였다. ..."  162

수신하려면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려면 먼저 그 뜻을 성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  206


wn1 - 1권은 정조의 특징적인 사건들을 말하는데,
개인적으로 초반에는 빠져드는 느낌이 들어서 재밌게 읽었다. 중반을 넘어가면서는 정치적인 이야기와 물고 물리는 관계들이 묘사되면서 사실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결론을 말하면 2권의 초반을 지나면서 다시금 정조의 업적들이 나오면서 빠져서 읽었다.

정조는 왕이 었지만, 사람으로 보았을때 참 불쌍한 사람이다.
누구나 개인의 복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는 개인적인 삶에서 복을 받은 것이 없다고 느껴질 만큼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의 의지는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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