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투성이의 문 위에 붓질을 할 때마다 더러움이 지워졌다. 송곳으로 그은 숫자들이 사라졌다. 핏자국 같은 녹물들이 사라졌다.  17



배내옷

내 어머니가 낳은 척 아기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고 했다. 

달떡처럼 얼굴이 흰 여자아이였다고 했다. 여덟 달 만의 조산이라 몸이 아주 작았지만 눈코입이 또렷하고 예뻤다고 했다. 까만 눈을 뜨고 어머니의 얼굴 쪽을 바라보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어머니는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아버지와 함께 외딴 사택에 살았다. 산달이 많이 남아 준비가 전혀 없었는데 오전에 갑자기 양수가 터졌다. 아무도 주변에 없었다. 마을에 한 대뿐인 전화기는 이십 분 거리의 정류장 앞 점방에 있었다. 아버지가 퇴근하려면 아직 여섯 시간도 더 남았다.

막 서리가 내린 초겨울이었다. 스물세 살의 엄마는 엉금엉금 부엌으로 기어가 어디선가 들은 대로 물을 끓이고 가위를 소독했다. 반짇고리 상자를 뒤져보니 작은 배내옷 하나를 만들 만한 흰 천이 있었다. 산통을 참으며, 무서워서 눈물이 떨어지는 대로 바느질을 했다. 배내옷을 다 만들고, 강보로 쓸 홑이불을 꺼내놓고, 점점 격렬하고 빠르게 되돌아오는 통증을 견뎠다.

마침내 혼자 아기를 낳았다. 혼자 탯줄을 잘랐다. 피 묻은 조그만 몸에도 방금 만든 배내옷을 입혔다. 죽지 마라 제발. 가느다란 소리로 우는 손바닥만한 아기를 안으며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처음엔 꼭 감겨 있던 아기의 눈꺼풀이, 한 시간이 흐르자 거짓말처럼 방긋 열렸다. 그 까만 눈에 눈을 맞추며 다시 중얼거렸다. 제발 죽지 마. 한 시간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모로 누워 그 몸이 점점 싸늘해지는 걸 견뎠다. 더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20-21



하얗게 웃는다

하얗게 웃는다, 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

그는 하옇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 (아마)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80



당의정

자신에 대한 연민 없이, 마치 다른 사람의 삶에 호기심을 갖듯 그녀는 이따금 궁금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먹어온 알약들을 모두 합하면 몇 개일까? 앓으면서 보낸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마치 인생 자체가 그녀의 전진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반복해서 아팠다. 그녀가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힘이 바로 자신의 몸속에 대기하고 있는 것처럼. 그때마다 주춤거리며 그녀가 길을 잃었던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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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같은 하늘 아래에서 그녀와 같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비행기를 탔다.  6


어째서 홍이의 외로움을 좀 더 이해해주지 못했을까. 어째서 그녀 입장에 서서 생각할 수 없었을까.  8


첫눈에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이라고 느꼈다.  12


언제나 첫인상만큼 믿지 못할 것도 없다.  13


마음의 문을 닫고 고집스럽게 칸나를 원망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홍이의 존재는 정말이지 내게 성모 그 자체였다.  30


한마디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그러나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던 탓에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자라고 말았다.  36


시집을 발견한 나는 엎드려 별 생각 없이 책장을 펼쳤다. 읽기 위해서라기보다 거기서 홍이의 흔적을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47


둘 사이에는 한 장의 천도, 둘 사이의 가르는 문도, 세상을 차단하는 높은 벽도, 끝없는 국경선도 없었다.  67


바다가 보고 싶다고 떼를 쓰는 저녁이면 대개 혼자서 몰래 울었다. 

"같이 있는데 뭐가 쓸쓸해?"

나는 그녀가 몰래 울 때마다 그렇게 물었다. 홍이는 눈물을 감추며 쓸쓸해서 그런 거 아니야. 하고 말했지만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77


"글쎄, 엄마가 일본 사람하고는 결혼 못한다잖아."

그래도 그때가 우리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132


사소한 한마디, 별 뜻 없이 한 말이 그 틈에 커다란 균열을 만들어 버리는 일이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아무도 그것이 심각한 줄을 모른다. 병을 앓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161


"일본도 마찬가지야! 나도 케이크만 시킬 때가 있다고!"

"누가 준고 생각을 물었어? 난 일반적으로 말해서 한국과 일본은 문화가 다르다고 한 것뿐이야."

"그렇지만 네가 문제를 비약시키잖아. 케이크와 음료가..."

우리는 녹초가 될 때까지 그런 바보스런 논쟁을 되풀이하다 결국엔 등을 돌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홍이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준고, 부탁이야. 내게 다정하게 대해 줘. 부탁이니 무조건 날 지켜 줘. 준고, 부탁이야. 무슨 일이든 내 편만 들어 줘'

그런데도 나는 홍이의 고독한 마음을 받아 주기는 커녕 내치려 했다. 왜 홍이가 조바심을 내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하려 했다면, 홍이가 마리코와 싸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빵집 마리코 탓이 아니었다. 그건 전부 내 탓이었다.  173


"잘못했다고 하면 되잖아. 사과하면 누가 벌이라도 줘? 너희 일본 사람들은 어째서 그런 말 한마디를 못하는 거야?"  178


"엄마가 왜 일본 사람하고 결혼 못하게 하는지 겨우 알 것 같아.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내가 말했었지. 기억 나? 나는 외국 사람하고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그런데 어째서 무책임하게 결혼하자는 말을 했어? 나를 외톨이로 내버려 둘 거면서. 제대로 사과도 안할 거면서."  179


나는 칸나 덕분에 확실히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  203


만약 내가 이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하고 레코드 가게를 나오며 생각한다. 나는 일본을 미워했을까, 아니면 일본인과 사이좋게 지내려 했을까.  224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과 같은 입장에 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죠. 상대방의 마음을 제멋대로 거짓으로 꾸미는 게 보통이에요.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240


"난 그때 너와 함께 달렸어야 했다. 난 너에 대해 뭐든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알지 못했던 거야. 내가 생각이 모자랐어."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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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좋아하는 이성은 자신과 같은 감정을 생기게 만들기 위한 전략이다. 

우선 혼자서 먼저 좋아하는 상태에 놓여있고, 상대의 마음을 얻기위해 누구나 해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상대의 동선을 조사하여 알아내고, 움직이는 시간, 동행자의 유무, 이동할때의 시간의 촉박성에 대해서도 알아낸다.

업무에 의한 이동인지, 출퇴근인지, 취미활동에 의한 이동인지 자주 이동하는 동선에 의한 이동인지 등에 관해 알고 있으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위해 의심없는 눈도장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조사를 위해 반드시 따라다니며 스토킹할 필요는 없다.

지인들이나 직장 동료나 때로는 스케쥴을 구할 수 있을것이고, 때론 유추의 힘으로도 알아낼 수 있을것이다.

연애 분야에서 이런 방법은 책에서도, 영화에서도 종종 다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만큼 성공확률을 높이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아름다운 파괴>에서 읽은 표현 덕분이다. 

'우연은 그냥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연은 묻고 또 묻는 사람에게 그야말로 우연히 일어납니다. 준비한 사람에게만 의미있는 우연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생각되었던 것들에 대해 묻고 또 묻다보면, 문득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18)

저자는 우연은 '우연'이 일어나기 위한 전제 조건을 갖출때 일어나게 되고 제대로 일어나게 될 수 있다고 표현한다.

물론 노력 없이도 일어나는 우연이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런 우연을 제외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우연이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만들어 가야하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연이 필연이 되기 위해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러 앞서 언급한 감정에 대한 필연을 만들어 내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또 하나의 표현을 보자.

'서로 끌리는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끌린다는 것은 동질감을 느낀다는 것이고, 끌리는 둘의 자연스런 만남을 통하여 합일이 있을 수 있어요. 합일은 절대로 강제적으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자연스럽고 자발적이어야 합니다.'(145)

저자는 끌리는 감정은 동질감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서로가 느낌을 가질때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합일이 되어간다고 한다. 이러한 표현은 서두에 언급한 연애 전략에 대해 공감을 가지게 하였다.


물론 '우연을 가장한 만남으로 만드는건 자연스런 발생이 아니지 않은가.. 그것이 자발적 감정이 되게 만들어 낸것이기에 절반의 인위적인 발생인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생각을 정리해 보자.

'우연은 묻고 또 묻는 과정, 즉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만드는 것'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던 부분에 대해 건전한 질문을 던지면, 관념의 특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다'

'끌리는 감정은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것이고, 이것은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것'이라는 표현에 공감한다.


정말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적용하기 힘든걸까?

절반의 인위적인 발생은, 우연을 묻고 또 물을 때 발생하듯이 상대에 대한 연구, 조사하는 과정 즉,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깊이 바라보는 과정에서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묻고 묻는 과정은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게 되기까지 우연을 발생시키는 질문인 것이다.

물론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만 노력한다는 것은 자신을 모두 죽이는 것이기에 문제가 될 수 있다. 사람은 살아온 시간동안 축적한 습관과 성향을 쉬이 지속적인 변화를 시키기 어렵다. 그렇기에 나의 성향들을 죽여버리고 감정만 얻어내는 것은 문제가 된다.

그런 비정상적 노력이 아닌 것에 한해서 노력하면 상대의 관점에서 늘 일어나는 일상속에서 우연적으로 눈도장을 찍어가면서 익숙해지고 그렇기에 드는 감정애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되며, 관심이나 호기심이 발생하여 관찰도 하게 될 수 있다.

그렇게 될때 대화를 하면서 서로가 자신을 보여주는 시간을 가지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자연발생을 시키는 과정이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은 첫눈에 반하는 경우일때를 제외한다면 노력에 의한 자연발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노력하여 준비할 때 우연한 기회를 바로 볼 수 있는 해안을 가지듯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역시 노력하고 준비하여 서로를 진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억지스러워 보인다면 억지로 끼워 맞춘것 맞다.

철학적 사유는 기존의 것들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하여 분리, 병합, 재조합들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결론을 가지게 하지 않던가!!!

'일본의 빌게이츠'라 불리는 손정의 회장은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 자신은 매일 아침 30분간 상관 없어 보이는 둘 이상의 단어를 조합하여 아이디어 발상을 한다고 했다.


나의 억지스러움은 철학적 사유와 손정의 발상법에 한참을 미치지 못하긴 하지만 노력의 일환으로 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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