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 우파니샤드, 인도 철학과 사상의 바이블

우파니샤드는 인도 정신문명의 뿌리인 베다의 꽃이요 열매다. 베다 정신의 총합이 곧 우파니샤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베다의 마지막 결정체라는 뜻으로 우파니샤드를 베단타 철학이라 이른다. 베단타 철학은 우파니샤드의 내용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다른 이름이다.  13-14

우파니샤드 이전에 인도 최초의 고전적 경전인 베다가 신화와 제의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전개했다면, 우파니샤드는 신화와 제의적 겉치레에 종지부를 찍고 인간 내면의 각성과 탐구에 중점을 두는 세계관의 전환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구약성서의 모세 율법에 대해 신약성서의 예수가 사랑의 율법을 새롭게 천명한 것과 같다. 따라서 베다를 구약성서에 비유한다면, 우파니샤드는 신약성서에 비유되기도 한다.  15


우파니샤드는 어떤 철학인가 - 우주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가르침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다. 인더스 문명이 발원하던 기원전 3000년 무렵 이후 오랜 침묵의 세월이 흐른 뒤, 서부 아시아에서 아리아인들이 인도 대륙을 점령해 들어오면서 새로운 인도 문화를 꽃피운다. 그 문화의 꽃이 인도 초기의 고전적 종교 경전으로 손꼽히는 유명한 <리그베다>(Rig Veda)에 드러나 있다. 이 경전은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000년 무렵에 형성된 것으로, 우주 창조의 노래, 최초의 인간의 탄생 과정, 죽음과 장례의 노래, 그리고 제의와 각종 신들에 대한 찬가로 가득차 있다.
그 후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 500년간 <리그베다>에 나타난 고대 사상을 인간 내면의 세계와 결부시켜 철학적으로 발전시킨 고전적 지혜의 담론이 우파니샤드(Upanishads)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우파니샤드가 인도 문화와 종교, 사상의 꽃을 피우던 기원전 6세기 무렵에는 자이나교의 창설자 마하비라(Mahavira, 기원전 540~기원전 468)와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 기원전 563~기원전 483)가 나타나 동시대에 각각 다른 형태의 종교적 가르침을 펼치기도 했다. 이 시대에는 브라만(brahman) 계급을 중심으로 한 바라문교와 불교 그리고 자이나교가 널리 퍼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서기 1000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인도에서 불교의 위력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그 후 이슬람 문명의 침입으로 힌두 문명과 함께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문명과 충돌 또는 습합(習合)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19-20

10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도시 중심의 부와 중앙집중식의 권력이 와해되었고, 질서가 무너지면서 통제가 불가능해진 시기에 아리아인(‘고귀한 자’라는 뜻)들이 침입해왔고, 인더스 강의 지류가 변하는 지리학적 변화와 함께 찬란했던 고대 인더스 문명은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리아인들이 백지 상태에서 전혀 새로운 문명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인더스 문명은 잔존해 있었고, 남쪽이나 갠지스 강변에 흩어져 있던 피정복민인 비(非)아리안 민족 속에서도 인더스 문명은 전승되고 있었다. 바로 이들이 간직한 인더스 문명은 전승되고 있었다. 바로 이들이 간직한 인더스 문명이 아리아인들의 문화 속으로 유입되면서 또 하나의 위대한 문명, 곧 인도-아리안 문명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
인더스 문명의 원주민들이 농업을 중심으로 한 농부들이었다면, 아리아인들은 목축업을 위주로 하는 유목민들 이었다.  24

문학적 형태로 된 우파니샤드는 그 문헌의 수가 200개를 넘어선다. 하지만 대개 인도의 전통에서 그 수를 108개로 제한하고 있는데, 이는 <묵티카 우파니샤드>(Miktika Upanishad)에서 구원(해탈)은 108개의 우파니샤드를 공부해야 가능하다고 한 데서 비롯된다.  40

우파니샤드에서 진리란 특정 개인에 속한 것이 아니며 영원한 것이고, 영감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신의 계시와 인간의 응시(contemplation)라는 두 측면을 지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42

우파니샤드는 분명 체계적이고 짜임새 있는 철학적 성찰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정신적 각성과 계몽의 수단으로 작용하며, 고도의 추상적이고도 풍부한 영적 경험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추상적이라 해도 인간의 개인적 경험의 차원을 떠나 있는 것도 아니며 논리적 이성을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내면의 명상에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향한 진정한 지식의 추구라는 점에서 실천적 수행의 차원을 담고 있는 구원의 철학 체계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파니샤드의 철학, 곧 브라흐마 비드야는 삶을 통한 지혜의 추구 그 자체다.  43

“진실로 먼저 브라만이 있었다. 그는 오직 그 자신에 대해 ‘나는 브라만이다’라고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이 되었다. 신들 중에 누구든지 이 사실을 진실로 깨달은 자는 그와 같이 되었다. 이것은 현자들이나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실로 현자 바마 데바도 이것을 알고 ‘나는 마누(Manu)였고 태양이었다’고 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구든지 이와 같이 ‘나는 브라만이다’라는 깨달음을 얻으면 이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신들도 이같이 브라만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하는 까닭은 깨달은 자는 신들의 아트만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자신과 브라만을 다르게 생각하면서 (그 자신의 아트만 외에)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자는 깨달은 자가 아니다. 그는 신들에게 희생되는 동물과 같다. 짐승들이 사람에게 봉사하듯 그도 신들에게 봉사할 따름이다. 한 마리의 짐승이 없어져도 기분이 나쁠 텐데 많은 짐승들이 없어진다면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신들은 인간이 (브라만을) 깨닫게 되는 것을 조항하지 않는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4.10)
우선 브라만의 우선성을 말하고 있다. … 브라만에게서 만물이 시작되고 만물이 그에게 귀속됨을 말한다. 그런데 그 브라만이 바로 깨닫는 자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이다. ..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 누구에게나 유효하다. …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 행위는 동물들이 인간에게 봉사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그러므로 자신과 브라만의 동일성을 깨닫지 못하고 제사나 드리는 행위는 짐승 같은 행위에 불과하다고 혹평한다.  44-45

“사칼리야가 말했다.
‘야즈나발키야여, 쿠루-판찰라의 브라흐마나를 경시하면서까지 그대가 안다고 말하는 바라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나는 신들과 신들의 기반이 되는 사방의 방향을 알고 있소.’
야즈나발키야가 대답했다.
‘그대가 신들과 그 신들의 기반이 되는 방향을 안다면 동쪽 방향은 어떤 신이라고 생각하오?’
‘태양신이오.’ 야즈나발키야가 대답했다.
‘그러면 태양신의 기반은 무엇이오?’
‘눈(眼, caksus)이오.’
‘눈의 기반은 어디요?’
‘형태(色, rupa)요.’
‘형태의 기반은 어디요?’
‘마음(hrdaye)이오. 마음을 통해 형태를 알 수 있기 때문이오. 오직 마음에만 형태가 기반할 수 있는 것이라오.’ 야주나발키야가 대답했다.
‘야즈나발키야여, 옳은 말씀이오.’”(<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I.9.20)  46-47

“‘남쪽을 그대는 어떤 신으로 여기시오?’
‘죽음의 신이오.’ 야즈나발키야가 대답했다.
‘그러면 죽음의 신의 기반은 무엇이오?’
‘사제에게 바치는 봉헌 제물이오.’
‘사제에게 바치는 봉헌 제물의 기반은 무엇이오?’
‘믿음이오. 믿음이 있을 때 사제에게 봉헌 제물을 바칠 수 있기 때문이오.’
‘그러면 믿음의 기반은 무엇이오?’
‘마음이오.’
‘마음을 통하여 믿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오. 실로 마음에만 믿음이 기반할 수 있는 것이라오.’ 야즈나발키야가 대답했다.
‘야즈나발키야여, 옳은 말씀이오.’”(<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I.9.21). 47-48

제사도 희생적 봉사도 중요하지만 우파니샤드는 브라만과 아트만을 이해하는 지혜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55



1 둘이 아닌 하나의 세계 - 우파니샤드의 불이론

“이제 실로 세 개의 세계가 있다. 인간의 세계, 조상의 세계, 신들의 세계가 그것이다. 인간의 세계는 자식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지 다른 수단을 통하여 되는 것이 아니다. 조상들의 세계는 의례와 같은 행위로 구제되는 것이고, 신들의 세계는 지혜로 획득된다. 실로 신들의 세계는 최상의 세계다. 그러므로 지혜를 찬양하라.”(<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5.16)  
현실적 인간의 세계와 죽은 조상들의 세계, 그리고 죽음이 없는 영원한 신들의 세계라는 세 개의 세계를 상정해놓고, 가장 중요한 세계는 바로 신들의 세계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신들의 세계는 과거처럼 동무르이 희생 제의 같은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지혜를 통해 획득되는 세계다. 그러므로 우파니샤드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지혜다. 산스크리트어의 ‘비드야’(vidya)는 엄격한 의미에서 ‘지식’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세속적인 지식이라기보다는 궁극적 실재를 아는 지식이다. 그런 점에서 이성의 감각에 기초한 지식이라기보다는 직관적 또는 계시적 통찰력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71-72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은 인도 전통 풍속이 관습적으로 지녀오던 카스트(Caste)의 굴레에 매여 있지 않다. 오히려 영적 우주의 세계로 인간의 영역을 확대시키고 있다. ‘그것이 바로 너다’라는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의 선언에서처럼, 인간은 더 이상 어떤 제도와 풍습에 얽매이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본질인 브라만, 그것(Tat)과 다르지 않다는 혁명적인 선언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다시 묻고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인간이 도달하게 되는 최종의 목적은 다음 세상에 더 좋은 하늘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카르마(karma, 業)의 우주적 법칙에서 벗어나 참된 영혼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우파니샤드가 베다의 내용을 중시하고 그것을 깊이 연구 계승하고는 있지만, 가장 중심이 되는 내용은 훌륭한 스승들의 개인적인 경험과 가르침을 토대로 하고 있다. 대표적인 스승들 가운데 야즈나발키야와 샨딜리야 같은 이들이 있으며, 이들이 제자들과 나누는 대화가 우파니샤드의 중심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그 중심 주제는 바로 ‘내가 곧 브라만’이라는 생각의 결론을 얻는 것이다.  78-79



2 위대한 실재, 만물의 근원 - 우파니샤드의 본령 브라만

도이센은 브라만의 사상적인 체계를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첫째, 신학(Theology)은 만물의 첫번째 원리로서의 브라만에 대한 교리이며, 둘째, 우주론(cosmology)은 우주를 형성하게 된 원리로서의 진화에 대한 교리다. 셋째, 심리학(Psychology)은 자신으로부터 전개된 우주 속으로 침투하게 되는 영혼으로서의 브라만의 출현에 대한 교리이며, 넷째, 종말론(Eschatology)과 윤리학(Ethics)은 죽음 이후의 영혼의 운명에 대한 교리와 그에 따라 요청되는 삶의 윤리다.  81-82

브라만의 속성과 본질을 이해하려는 대화 가운데 우선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호흡히었고, 그 호흡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었다. 동시에 호흡은 근원자로서의 브라만이다. 그런데 호흡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아닌 것’이고,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성찰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신앙과 사색’에 기초한다고 말한다. 이 ‘신아오가 사색’이 브라만을 이해하는 신학적 진술의 토대가 된다.
그다음 단계로 가면 신앙과 사색을 올바로 하기 위한 방편으로 견고하게 스승을 공경하는 것과 수행하는 가운데 절제와 집중이라는 실천이 요구된다. 수행은 무한함을 의식하는 기쁨 속에서 가능하다. 그 무한의식이 바로 자아의식과 결부되며 궁극적으로 브라만과 하나 되는 길이 된다. 브라만의 영원성 또는 불멸성의 자유에 이르는 과정에서 수많은 일과 학문과 언어와 노래 등은 부차적으로 존재하는 요소일 뿐이다.  94

인도의 정통 바라문들은 궁극적 진리인 브라만을 이해하기 위한, 그리고 브라만과 하나 되기 위한 이른바 구원의 길, 곧 해탈에 이르는 네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을 아쉬라마라고 부르는 데, 바로 인생의 네 가지 주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 첫 번째는 베다를 공부하는 학습기인 브라흐마차린(brahmacarin)이고, 두 번째는 제사의 의무와 선행을 수행하는 가주기(家住期) 그리하스타(Grihastha), 세 번째는 숲속에서 엄격한 금욕을 수행하는 은둔기 바나프라스타(Vanaprastha), 네 번째는 인생의 마지막 단계로 방랑 걸식하며 영혼의 해방을 추구하고 유행(遊行)하는 산야신(Sannyasin :  방랑 고행자)이자 비구(bhikshu)로서의 삶인 파리브라자카(Parivrajaka)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 진정한 아트만, 곧 지고의 아트만을 깨닫고 해탈을 얻게 되는 것으로 설명.  95

“아트만은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neti nnety atma). 이해될 수 없기에 ‘이해될 수 없는 자’이며, 파멸될 수 없기에 ‘파멸될 수 없는 자’이고, 집착하지도 않기에 ‘집착하지 않는 자’이며, 얽매여 있지도 않고 고통을 받지도 않기에 ‘고통이 없는 자’다  …… 깨달은 사람은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그것이 그에게 괴로룸을 주지 못한다.”(<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V.4.22)  96

“모든 베다가 말하고(padam) 있고 모든 고행자가 언급하는, 그리고 베다의 지식을 공부하는 생도의 삶을 살면서 열망하게 되는 그 단어를 그대에게 한마디로 말하겠다. 그것이 옴이다.” (<카타 우파니샤드> I.2.15)
모든 베다라는 것은 <리그베다> <사마베다> <야주르베다> 아타르바베다>를 의미한다. 이 베다가 말하는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이 바로 ‘옴’이라는 것이다.  104-105

‘옴’의 뜻과 기능은 그리스도교에서 ‘그렇게 될 줄로 믿는다’는 의미로 말하는 ‘아멘’(Amen)과 같다.  106

“악의 길을 단념하지 않는 자, 마음의 평정을 얻지 못한 자,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는 자,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자는 올바른 지식으로도 아트만에 도달하지 못한다.” (<카타 우파니샤드> I.2.24)  113

“빛과 순수의 본질로 인간의 내면에 있는 이 아트만은 진리와 고행과 (아트만을 아는) 올바른 지혜, 그리고 꾸준히 정숙함을 유지하는 것으로 얻어진다. 불완전한 것들을 떨쳐버리는 금욕적인 수행을 통해 그는 아트만을 보게 되리라.” (<문다카 우파니샤드> III.1.5)
압축해서 말하면 진리와 고행이다. …
고행으로서의 마음의 집중 또는 마음의 평정 이외에도 여전히 금욕적 수행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때의 금욕은 정숙함을 유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비움으로서의 도덕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114

아트만(브라만)에 이르는 영성적 삶이 윤리 차원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를 살펴보았다. 브라만에 이르기 위해서는 첫째, 올바른 스승을 일과 다섯 가지의 엄격한 수행이 요구되며, 그 다섯 가지 수행은 내면의 평정, 자기억제, 비움, 인내, 집중이다. 이러한 수행의 조건들이 몇몇 다른 부차적인 수행들과 함께 후기 우파니샤드의 전체적인 내용과 골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114-115



3 아트만을 알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니 - 브라만에 이르는 초월적 지식

우파니샤드에서 아트만은 북과 북소리의 비유를 통해 상징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북을 칠 때 들리는 다양한 소리를 모두 파악할 수는 없지만 북과 북치는 사람의 두들김을 알면 소리도 구분하여 들을 수 있다. 고동을 불면 밖으로 들리는 고동 소리를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고동과 고동 부는 방법을 알면 그 소리를 구분하여 들을 수 있다. 비나(vina: 기타와 유사한 고대 현악기)를 연주할 때 들리는 소리를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비나와 비나의 연주법을 알면 그 소리를 구분하여 들을 수 있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4.7~9)
아트만이 북 같은 악기라면 우주의 현상은 그 악기의 연주 소리에 비유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연주 소리의 이해는 오직 악기를 알 경우에만 파악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우주의 다양한 현상도 아트만을 이해함으로써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139-140

“그것에 의해 들리지 않는 것을 듣게 되고 감지할 수 업는 것을 감지하고 이해될 수 없는 것이 이해된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VI.1.3)
모든 참 지식은 아트만과 관련된 진리를 알지 못하고서는 참 지식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다. … 아트만 이외의 모든 현상적 사물세계는 앞서본 바와 같이 ‘오직 명칭’(nama eva)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140

“아트만은 감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자기원인을 자기는 스스로 존재하는 아트만이 우리의 감각 기관을 밖으로 향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감각적 인식은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지 않고 밖으로만 향한다. 그러나 일부 지혜로운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찾아 그의 눈을 내면으로 돌려 아트만을 발견한다.” (<카타 우파니샤드> II.1.1)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부세계를 바라보고 거기에 만족하고 산다. 그러나 일부 영혼이 성숙한 지혜로운 자들은 내면의 세계로 주의를 돌려 아트만을 찾고 불멸을 얻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감각이 쓸데없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적절히 잘 조절되고 통제되면 점차 높은 단계의 초월적 지식으로 가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감각의 눈’에서 ‘초월의 눈’으로의 전환이 필요할 뿐이다. ‘초월의 눈’은 영적인 눈이다. 우파니샤드는 일반적으로 감각을 조절하라고 말하지 억압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영적인 추구는 신적 계시 속으로 들어가는 영혼의 지고한 여행이다.  141-142



4 만물의 근저에 실재 주의 실재로 내재하다 - 만물이 발생하는 원리

“실로 그대들은 모두 이 바이쉬바나라 아트만을 부분적으로만 알고 그대들의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 바이쉬바나라 아트만(우주적 자아)을 자신의 아트만(개체적 자아)으로 알고, 또는 (우주를 측정하는)새로운 특정 도구로 알고 명상하는 자는 모든 세상에서, 모든 존재들 가운데서, 모든 개체적 자아들 속에서 자신의 양식을 삼습니다. 이러한 바이쉬나바라 아ㅡ만에서 머리는 훌륭한 바람이요, 몸통은 광대한 가득함이며, 오줌통은 부유함이며, 발은 땅입니다. 실로 가슴은 제단이며, 머리카락은 거룩한 잔디요, 심장은 가르하파티야의 불입니다. 마음은 안바하르야-파차나 불이며, 입은 아하바니아 불입니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V.18.1~2)
바아쉬나바라 아트만, 곧 우주적 자아는 다양한 형태의 개체적 자아 속에 존재하지만, 그것을 부분적으로 바라보고 숭배할 것이 아니라 바로 모든 사물 속에 공유되고 있는 개체적 자아의 전체적 연관성을 바라보고, 그 연관성 속에 내재한 통일적 원리로서의 우주적 아트만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게 될때 비로소 자신의 개체적 자아도 우주적 자아와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게 된다는 말이다.  154

아트만은 우파니샤드에서 브라만과 동일시되고 있는 개념이지만, 다음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되기도 한다. 우선 인간의 ‘자아’ 그 자체를 지칭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자아’라고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것에 대해 도이센은 세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첫째, 몸속에 지닌 육체상의 자아다. 둘째, 육체로부터 자유로운 개별 영혼의 자아다. 이것을 우리는 인식 대상과 대조되는 인식 주체로서의 자아라고 부른다. 셋째, 지고(至高)의 영혼으로서 인식의 주관과 객관을 더 이상 구별하지 않는 초월적 인식의 주체다.  155

그런데 다른 본문인 <타이티리야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아트만은 좀더 세분화되어 다섯 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그것은 생명과 의지와 지식이라는 세 가지 원리 속에서 각각의 아트만이 상호 작용한 결과다. 다섯 종류의 아트만은 안나마야(Annamaya), 프라나마야(Pranamaya), 마노마야(Manomaya), 비즈나마야(Vijnamaya) 그리고 아난다마야(anandamaya)인데, 이들은 각각 인간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의 아트만이다.
이 다섯 종의 아트만 가운데 앞의 넷은 마지막 다섯 번째인 핵심적 아난다마야 아트만을 둘러싸고 있는 외형적 아트만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이들 아트만을 차례로 하나씩 궁구해가면서 그 외형을 벗겨보면, 마지막 남은 다섯 번째 단계의 아트만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 본질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다섯 가지의 아트만을 차례로 살펴보자.
첫 번째의 안나마야 아트만은 음식에 의존하는 아트만이다. 이것은 육체의 몸을 입고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진 성육화(成肉化)된 아트만이다. 다시 말해 성육신 아트만이다 그리하여 육체의 감각적 기관들이 모두 아트만의 부분을 이룬다.
두 번째의 프라나마야 아트만은 생명의 호흡에 의존하는 아트만이다. 이 아트만은 자연적 생명의 원리다. 그 주된 부분은 생명의 호흡과 관꼐되며 날숨, 들숨을 관장한다. 동시에 이 아트만은 우주적 의미로도 적용되어 우주 공간이 모두 이 아트만의 몸체요, 땅은 그 토대가 된다. 이 아트만을 넘어서 한 단계 더 들어가면 세 번재의 아트만을 대하게 된다.
세 번째의 마노마야 아트만은 마음작용(의지)에 의존하는 아트만이다. 인간의 마음(manas)작용에 의존하는 이 아트만에 대해서는 이미 네 개의 베다와 브라흐마나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인간과 신들에게 부여된 이 아트만은 인간의 의지작용의 원리에 따라 작용하는 것으로, 주로 인간의 이기적 욕망의 실현을 위해 작용하는 아트만이다. 대체로 베다의 제사 행위와 관련되어 많이 언급되는데, 인간적 욕망의 실현에 적용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네 번째의 비즈나마야 아트만은 지식에 의존하는 아트만이다. 앞서 언급된 것들보다 더욱 심층적인 아트만으로, 제사와 노동등의 행위에서 찬가를 노래하거나 지식을 제공하는데 관련되는 아트만이다. 이때는 각각 독립적으로 신성을 자각하고 예배하게 되는데, 이런 단계도 마침내 외투처럼 벗어버려야 하는 존재다. 진정한 아트만이 바로 그다음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의 아난다마야 아트만은 환희에 근거한 아트만이다.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의 세계에 근원적으로 자리한 이 아트만은 환희(ananda), 곧 무한한 기쁨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환희 앞에서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 외에 모든 단어와 사고가 물러선다.” 더 이상 지식의 대상이 없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경험적 실재의 지식과 달리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으며 의식적으로 의식할 수도 없는 무의식의 비실재(not-reality)다. 이는 경험적 실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비실재라고 표현한것으로, 실재가 없다는 뜻의 무실재(un-reality)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아트만은 환희의 존재 그 자체로, 환희를 창조하는 자아기도 하다.  161-163

“실로 처음에 비존재(asat:드러나지 않은 것)가 있었다. 실로 그러부터 존재(sat:드러난 것)가 생겼다. 그 자신이 영혼이 되었다. 그리하여 ‘멋지게 만들어졌다’(sukrtam)고 불린다. 실로 그 ‘멋지게 만들어진 자’야 말로 존재의 본질이다.
이 본질을 깨닫게 되면 누구나 환희를 누린다. 대공 속에서 이러한 환희가 없다면 실로 그 누가 숨을 쉬며 살 수 있을까? 환희를 가져다주는 자가 바로 그다.
보이지도 않고 형체도 없고 규정할 수도 없으며 지지할 수도 없는 그를 지지함으로써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된다면 아무것에도 두려움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를 깨닫기 전까지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한다. 실로 ‘제대로 명상을 하지 못하는 지식인’ 들에게는 두려움이 된다.” (<타이티리야 아파니샤드> II.7.1)  165

환희(ananda)와 두려움(bhaya)은 인간의 근원적 물음이요 해답이다. 두려움이 있는 한 환희는 없고, 환희가 있는 한 두려움은 없다. 이 둘은 절대적 상대다. 아트만의 세계가 환희의 세계요 창조의 세계라면 아트만이 아닌, 다시 말해서 비본질적 세계는 두려움의 세계다. 두려움을 불안하다. 그 불안의 감정은 ‘타자’에 대한 감정에서부터 시작된다. 타자를 넘어선 ‘하나 됨’의 의식 속에서는 불안이 사라진다. 아트만의 세계는 바로 이 ‘타자를 넘어선 하나 됨’의 세계이기에 불안은 근원적으로 해소되고 환희만 춤을 춘다. 166-167



5 상징 안에서만 존재하는 존재 - 브라만의 상징들

신에 대한 찬가로서 힌두교 최초의 경전인 <리그베다>나 그것을 노래한 <사마베다>도 결국 이 ‘옴’에서 하나가 된다. 요컨대 모든 베다의 최종 결정판은 ‘옴’속에 다 들어 있다는 비밀스런 상징적 가르침이다. 특히 <리그베다>와 <사마베다>가 옴을 통해 ‘짝이 되어 하나가 된다’는 표현은, 성적 결합으로서의 ‘하나 됨’을 뜻하기도 하는 ‘미투나’(mithunam)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187



6 존재와 의식과 환희의 브라만 - 브라만과 아트만의 세 가지 본질적 특성

존재로서의 브라만
“만물의 근원인 그 미세한 존재를 세상 만물이 아트만으로 삼고 있다. 그 존재가 진리다(tat satyam), 그 존재가 아트만이다(sa atma), 그것이 바로 너다(tat tvam asi), 슈베타케투야.”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VI.8.7)
여기서 우리는 존재가 진리요 아트만이며 더 나아가 ‘그것이 바로 너 자신이다’라는 진술을 듣게 된다. ‘그것이 바로 너다’라는 이 유명한 명제, ‘타트(그것이) 트밤(너) 아시(이다)’는 우파니샤드 전체에서 ‘진리 중의 진리’라는 말로 설명된다. 너 자신이 우주의 근원이며 궁극적 진리라는 충격적인 선언은 ‘참 나’로서의 아트만이 바로 존재 그 자체의 뿌리요 진리라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그 존재가 진리다’(tat satyam)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그 존재가 아트만이며(sa atma) 바로 너 자신’이라고 말한 것이다.  211-212

의식으로서의 브라만
“이것이 소(牛)다, 이것이 말(馬)이다라고 말할 수 있듯이 모든 것 속에 깃들어 있는 아트만으로서 가까이에서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브라만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그것이 아트만이오.’
‘야즈나발키야여,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그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보는 것을 보는 자를 보지 못하고(na drster drastaram), 듣는 것을 듣는 자를 듣지 못하고(na sruter srotaram srnuyah),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는 자를 생각하지 못하고(na mater. Mantaram manvithah),  깨닫는 것을 깨닫는 자를 깨닫지 못하는 법이오(na vijnater vijnataram vijaniyah). 그가 모든 것 속에 깃들어 있는 그대의 아트만이오. 그 밖의 모든 것을 덧없이 소멸되는 것(artam)이오.’
그러자 우사스타는 침묵했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I.4.2)
이 대화에서 우리는 앎의 문제, 곧 깨달음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전 감각적 과정을 거쳐서 결국 터득하게 되는 그 과정에서 감각과 인식을 주관하는 자, 내면의 존재, 즉 아트만을 깨닫는 것이 요청되고 있다. 보는 자를 보고, 듣는 자를 들으며, 생각하는 자를 생각하고, 깨닫는 자를 깨달을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아트만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밖의 것을 본질적인 것이 되지 못하여 변화 속에서 곧 소멸되어버리고 마는 것들이다. 이 모든 과정에 깨달음이라고 하는 ‘의식’의 차원이 브라만/아트만의 실체를 구성하고 있다. 216-218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에서 마이트레이에게 들려주는 비유에 의하면, 의식으로서의 이 아트만은 바다와 같아서 모든 물이 그곳에서 모여드는 것 같은 ‘하나의 도달점’(ekayanam)으로 설명된다. 또 아트만을 인체의 감각 기관에 비유하여, 피부는 모든 감촉을 느끼는 하나의 도달점이며, 혀는 모든 맛을, 코는 모든 냄새를, 눈은 모든 형태를, 귀는 모든 소리를 감지하고, 마음은 모든 생각을 감지하고 의식하는 하나의 도달점이라는 말한다. 또한 두 손은 모든 행위가 하나로 수렴되는 도달점이며, 생식기는 모든 기쁨이, 항문은 모든 배설이, 두 발은 모든 움직임이, 목소리(언어)는 모든 베다가 하나로 수렴되는 도달점이다.
의식으로서의 브라만은 이와 같이 ‘하나의 도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이 이 하나의 의식 속으로 수렴된다는 의미다. 역설적으로 이 의식은 다시 모든 만유 속에 편재하게 된다.  219

환희로서의 브라만
“이제 카홀라 카우시타케야(Kahola Kausitakeya)가 물었다. ‘야즈나발키야여, 곧바로 현존하고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브라만, 곧 모든 것들 속에 깃들어 있는 아트만에 대하여 설명해 주시오.’
‘모든 것들 속에 깃들어 있는 그것이 그대의 아트만이오.’
‘야즈나발키야여, 모든 것 속에 무엇이 들어 있다는 것이오?’
‘배고픔과 목마름, 슬픔과 미혹, 늙음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 들어 있소. 현자는 그 아트만을 알고, 자손에 대한 갈망(esana), 부에 대한 갈망, 세속적인 욕망에 대한 갈망을 버리고 수도승(수행자)의 삶을 살지요. 자손에 대한 갈망은 부에 대한 갈망이며, 부에 대한 갈망은 세속적인 갈망으로 이들 모두 갈망에 불과할 뿐이오. 그러므로 현자는 깨달음(공부)을 얻은 후에 어린아이처럼 살기를 꿈꾸지요. 그는 깨달음을 얻은 후 어린아이처럼 살면서 모든 것을 아는(nirvidya) 성자(munih)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그는 침묵하거나(maunam) 침묵하지 않거나(amaunam) 브라만을 아는 자(Brahmana)가 되는 것입니다.’
‘브라만을 아는 자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그는 무슨 행동을 하게 되든지 브라만을 아는 자로서 행동하게 됩니다. 브라만을 아는 지혜 외에는 일체가 덧없을 뿐입니다.’
그러자 카홀라 카우시타케야는 입을 다물었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I.5.1)
본문에서는 고통이라는 문제와 브라만/아트만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엄연히 현존하는 고통과 슬픔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현자 야즈나발키야의 대답은, 배고픔과 목마름과 슬픔 등 생로병사가 현존하지만 그 현존하는 고통을 초월(극복)하는 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이 브라만이요 아트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초월하게 하는 브라만과 아트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모든 고통의 근원이 ‘갈망(esana, kamah)임을 알고, 그것을 극복하는 공부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며, 그 결과로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상태(balya)’를 유지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상태’의 문자적 의미는 ‘자기중심적 지식의 철저한 비움’(jnana-bala-bhava)이다. 이것을 이른바 ‘비움의 영성’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갈망의 극복으로서의 ‘초월’은 ‘비움’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순수한 비움의 상태에 이를 때 비로소 브라만을 알게 되고 동시에 브라만이 되어 브라만으로서 행동하게 된다. 그 순수함 속에 이미 브라만과 아트만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
어린아이처럼 산다는 것은 직접적이고 단순한 데서 오는 순수성을 말한다.  222-225

깨달음 이후에 얻게 되는 침묵(mauna)은 말을 삼가는 것을 명상적 삶에 도움이 된다. … 실존 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침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병들어 있다. 만일 내가 의사라면,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충고를 부탁한다면 나는 말할 것이다. ‘침묵을 창조하라’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침묵할 수 있도록.”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자라면 불필요한 말을 삼갈 것이며, 동시에 말을 할지라도 시끄럽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고통의 이해에서 출발하여 그 근원이 되는 갈망과 초월의 문제를 비움의 차원에서 논의했다. 그리고 그 비움의 결과는 어린아이처럼 사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226

우파니샤드에서의 환희, 곧 지복(至福)은 브라만의 속성이나 또는 어떤 상태를 말한다가보다는 오히려 브라만의 독특한 본질 그 자체다. 굳이 속성이라고 말한다면 브라만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브라만은 환희를 ‘지닌 자’(anandin)라기보다는 환희(ananda) ‘그 자체’라는 뜻이다. 이러한 브라만과 환희(아난다)의 동일시는 두 가지 견해에 기인하는 것이다. 첫째는 주관과 객관의 대립적 구별을 넘어선 깊고 꿈 없는 잠의 상태로서 브라만과 일시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다는 견해다. 둘째는 모든 고통이 사라진 상태로서의 더없는 기쁨이다.  227

“의식으로서의 이 존재(브라만과 아트만)가 깊은 숙면의 상태에 들면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은 채 심장으로부터 온몸에 분포되어 있는 ‘히타’(hitah:선행을 베푼다는 뜻)라 불리는 칠만 이천 개의 정맥 속으로 흘러들어와 심낭 쏙에 머물게 된다. 어린아이가 그리하듯, 또는 훌륭한 왕이나 훌륭한 사제가 그리하는 것처럼 지극한 환희(atighnim anandasya)의 안식을 즐기듯 의식으로서의 브라만과 아트만도 그러한 환희 속에 안식한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1.19)
위의 본문 속에서 우리는 브라만과 아트만의 ‘존재’가 어떤 상태로 ‘의식’하며 어떤 상태로 ‘환희’를 누리는가 하는 문제를 동시에 보게 된다. 그것은 아트만이 몸의 중심부가 되는 심장에서 생명을 공급하는 혈맥으로 이어진 정맥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가서 다시 온몸으로 돌아오는 과정 속에 존재할 뿐 아니라, 깊은 숙면의 상태에서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는 의식 그 자체로서 지극한 환희를 즐긴다. 말하자면 주객 도식을 극복한 대상적 의식이 없는 주체적 의식이다.  227-228



7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 - ‘네티 네티’의 브라만

“모든 방향에 모든 생명이 있다. 그러나 아트만은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 이해될 수 없기에 ‘이해될 수 없는 자’이며, 파멸될 수 없기에 ‘파멸될 수 없는 자’이고, 집착하지도 않기에 ‘집착하지 않는 자’이며, 얽매여 있지도 않고 고통을 받지도 않기에 ‘고통이 없는 자’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V.2.4)
… 아트만은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라는 부정의 진술이다. 이 진술이야말로 브라만과 아트만 이해의 초석이 되는 선언적 명제다.  234

모든 생명이 사방에서 숨을 쉬고 있지만 그 숨의 근원적 실체를 감각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파악할 수 없기에 그는 파악되어지지 않는 자이며, 우주는 끊임없이 생멸을 거듭하면서도 파멸되어지지 않는 것처럼 파멸되어지지 않는 불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으나 이해되어지지 않는 불가지한 존재로 남게 된다.
그렇다면 그 불멸의 브라만과 아트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거듭 ‘’부정의 길’을 통해 더듬어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많은 인간은 하느님을 느끼고 감지한다. 다만 그 하느님은 인간마다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다르게 감지될 뿐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는 또 별개의 논의거리다. 허상과 실상,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논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브라만과 도(道)와 하느님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각각 별개의 존재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도 또 다른 문제제기가 된다. 우리는 지금 우파니샤드의 체계 속에서 브라만과 아트만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인 만큼 어디까지나 우파니샤드 현자들의 이야기에 주목할 뿐이다.  235-236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다.
‘이 물에 소금을 담그고 내일 아침에 오너라.’
아들은 그대로 했다.
아침이 되자 아버지는 아들 슈베타케투에게 말했다.
‘네가 어젯밤에 물에 담근 소금을 꺼내 오거라.’
아들은 완전히 녹아버린 소금물에서 소금을 찾을 수 없었다.
‘이 한쪽 끔에 있는 물 표면의 맛을 조금 보거라 어떠냐?’하고 아버지는 물었다.
‘짭니다.’ 아들이 대답했다.
‘이제 물 가운데 표면의 맛을 조금 보거라. 어떠냐?’
‘짭니다.’
‘이제 물 반대쪽 끝 표면의 맛을 조금 보거라. 어떠냐?’
‘짭니다.’
‘그러면 이제 물을 버리고 내게 오거라.’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아들은 그대로 했고,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소금은 항상 그대로 있음을 알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내 아들아, 실로 순수의 존재가 여기 있어도 너는 알지 못했구나. 실로 그 존재는 여기 있는 것이다. 만물의 근원인 그 미세한 존재를 세상 만물이 아트만으로 삼고 있다. 그 존재가 진리다. 그 존재가 아트만이다. 그것이 바로 너다, 슈베타케투야.’”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VI.13.1~3)
‘그것이 너다’라는 선언이 나오기까지 아버지는 아들에게 소금물의 비유를 통해 아트만의 실상을 가르치고 있다. 이 선언은 우파니샤드의 가장 위대한 진술 가운데 하나다. ‘그것이 너다’라는 표현은 직설적이기는 하지만, 아트만을 직접 이해시킬 수 없는 언어의 한계로 인해 비유를 통해 설명한 결과로서의 직설적 표현이다.  239-241

“아트만, 그는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멀리 가 있고 누워 있으면서도 어느 곳이든지 간다.
기뻐하기도 하며 기뻐하지 않기도 하는 신, 그를 나 외에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카타 우프니샤드> I.2.21)
브라만을 이해하는 길은 ‘네티 네티’라는 ‘부정의 길’밖에 없음을 말해왔다.  241-242

<이샤 우파니샤드>의 진술처럼 아트만은 규정할 수 없는 존재로,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움직이는, 또는 움직이기도 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그리고 이 세상 안에도, 또는 이 세상 밖에도 존재하는, 논리를 초월한 존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부동의 동자(不動의 動者)와 유사한 개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절대적 존재가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남을 움직이는 창조적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면, 우파니샤드의 존재자인 브라만/아트만은 ‘자신이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움직이는’, 또는 ‘움직이기도 하고 움직이지 않기도 하는’ 역설적 초논리적 존재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런 점에서 불가지적 존재라는 것이다.  242

“하늘과 그 모든 것을 넘어서, 모든 것 위에 더없이 높은 세계의 저편에 빛나는 빛이 있나니, 실로 그것은 여기 인간의 내면에서도 빛나는 푸루샤의 빛과 같은 것이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III.13.7)
모든 우주 위에서,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서 영원히 빛나는 아트만도 ‘인간의 내면에서 빛나는’(antaah puruse jyotih) 존재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우주적 원리가 곧 인간 내면의 영적 원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의 진술에 의하면, 이 불멸의 아트만은 땅에 머물면서 그 ‘속에서 움직이게 하는 자(아트만)’요, 물에 머물면서 그 ‘속에서 움직이게 하는 자’며, 불에 머물면서 그 ‘속에서 움직이게 하는 자’다.  256



8 이 세계 모든 것이 브라만이다 - 브라만과 세계

브라만의 우주적 원리, 즉 브라만이 세계와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 도이센은 이를 네 가지 범주 속에서 체계화하고 있는데, 인도 사상의 핵심적 분류법인 실재론(realism), 유신론(theism), 범신론(pantheism), 관념론(idealism)이 그것이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실재론적 사고에 입각하면 물질(질료)은 신이나 영원성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신은 그리스 신화의 데미우르고스처럼 단지 세계를 만든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창조력이 행사되는 순간 물질 그 자체는 별개의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상키야 철학이 말하듯이 원형적 인간의 푸루샤와 물질적 세계의 원초적 원리인 프라크리티(prakrti)가 이원화되어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째, 유신론적 세계관에 따른 브라만의 이해다. 이는 신이 무(無)에서 세계를 창조했다는 사상으로 구약성서의 하느님과 유사한 개념이다. 이 유신론은 점차 범신론적으로 기울어간다. 신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서 신 자신이 세계 속으로 스며들어 세계의 실체가 신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셋째, 유신론적 세계관에서 변형된 범신론이다. 신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그 자신을 세계로 변형시킨 결과일 뿐이라는 관점이다. 일단 창조된 물질이 신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된 세계 그 자체가 실재이며 무한할 뿐 아니라 신이 세계를 떠나 따로 독립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며, 동시에 창조된 세계 그 자체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이라는 용어와 세계라는 용어는 동의어가 된다.
넷째, 관념론이다. 신만이 실재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실재일 수 없다. 우주는 오직 공간적으로 신의 연장에 불과하며, 구성된 몸체는 실로 비실재적인 것이다. 그것은 오직 환영에 불과할 뿐이다. 외형적으로 드러난 모든 요소들은 신이 될 수 없고 오직 신의 반영물일 뿐이며 신적인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261-262

주(主)라는 뜻을 지닌 ‘이샤’(Isa) 또는 ‘이슈바라’(Isvara)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
“주(Isa)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이 결합되어 모든 만물을 지탱하고 있다. 주가 아닌(anisas) 개체 아트만(catma, 또는 개체 영혼)은 그 자신의 기쁨(향락)으로 얽매이게 되지만, 신(devam, 아트만)을 알게 됨으로써 모든 족쇄에서 해탈을 얻게 된다.”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 I.8)
모든 만물을 지탱하는 자로서의 아트만이 이제 ‘주’라는 인격신으로 불리고 있다. 동시에 ‘주’가 아닌 개체 영혼은 자신이 추구한 향락으로 인해 세속적인 것들에 얽매이게 된다. 그러나 개체성에서 벗어나 신적인 우주적 통치자로서의 아트만을 깨닫게 됨으로써 모든 억압과 굴레에서 벗어나 참된 해방을 맛보게 된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의 본문에 의하면, 이 불멸의 아트만은 지고(至高)의 아트만으로서 또 다른 이름 ‘하라’(Hara)로도 불린다.
“멸망할 성질 프라드하나(Pradhana, 性質), 멸망하지 않는 불멸(amrtaksaram)의 하라(主), 멸망할 것과 멸망하지 않을 영혼(아트만) 이 두 가지를 오직 이 유일한 신(하라)이 통치한다. 이 하라를 명상(abhidhyana)하고, 그와 연합하여 그를 점점 더 깊이 숙고함으로써 모든 세상의 환영(visva-maya)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 I.10)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아트만의 신명(神名)인 ‘하라’를 접하게 된다. 하라는 세계의 파괴와 재생의 역할을 담당하는 시바(Siva)의 여러 이름 가운데 하나인데, 샹카라에 의하면 하라는 ‘무지(無知)를 제거한 자’라는 뜻을 지닌다. 이 불멸의 신 하라는 멸하는 것과 멸하지 않는 것을 모두 통치한다는 점에서 지고의 신, 곧 파람 이슈바라로서의 브라만/아트만이다.
이 지고의 신과의 합일은, ‘그에 대해 명상’함으로써 그와 연합을 이루게 되어 결국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누리게 되는 것을 말한다. 브라만과의 합일은 근본적 실재와의 합일이며 내적 실재와의 참된 연합이기에 ‘스스로 존재함’에 이르는 해탈과 다르지 않다. 그 해탈은 동시에 모든 ‘세상의 환영’(visva-maya)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이것은 일종의 브라만의 열반, 곧 ‘브라마-니르바나’(brahma-nirvana)이다.  273-276

“움직이는(jagat:변화하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신(Isa:님)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므로 비움으로 그대의 즐거움을 찾고 다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샤 우파니샤드> 1)
…. ‘이샤’(Isa)라고 표현되고 있는 신은 ‘이시타 파람 이슈바라’(Isita paramesvarah)의 의미로, ‘지고의 신 이슈바라’라는 뜻이다. 세계는 이 지고의 신에게 깊이 싸여 있으며, 또한 신들의 거처로 표현되고 있다.
이 세계는 ’변화하는 것’(jagat)이다. 그러므로 ‘비움으로써 즐거움을 찾으라’(tyaktena bhunjitthah)고 말한다. 우주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변화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 무상(無常)을 알고 집착에서 벗어나는 ‘비움’(tyaga)은 아집(我執)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쁨, 곧 환희가 비움에서 온다는 주장은 동서의 주요 경전들이 이미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모든 것이 나의 ‘소유’가 아님을 알진대, ‘집착하지 말고’(magrdhah) 다만 ‘즐기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들에 핀 개나리와 산수유가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알 때 진정으로 그 꽃을 즐길 수 있듯이 말이다.  276-279



9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을 얻다 - 해탈

아트만은 ‘존재’(being)이지 ‘되어가는 존재’(becoming)가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아트만이 ‘되어감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새로운 형태로의 변형이 아니라 본래적 자아(아트만)로서의 존재를 발견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 처음부터 ‘존재’ 그 자체로 항구여일(恒久如一) 할 뿐이다. 변화하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무상함이 없는 아트만, 곧 인간 내면의 아트만이자 동시에 모든 만유의 총합이며 실재가 되는, 그리하여 만유를 창조하고 지탱하고 보존하는 아트만을 깨닫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305-306

“지고의 브라만을 깨닫는 자(paramam brahma veda), 그가 브라만이 될 것이다. 그의 가문에는 브라만을 알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그는 고통을 넘어서며 죄악을 넘어선다. 그는 얽힌 속박의 매듭을 풀고 불멸의 존재로 해탈을 얻게 된다(vimukto’mrto bhabati).” (<문다카 우파니샤드> III.2.9)
.. 결국 문제는 ‘깨달음’(veda)에 있다. 그런데 그 해탈이란 ‘깨달음으로 얻어지는 결과’라기보다는 ‘깨달음 그 자체 속에 이미 해탈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306-308

“깨달은 자는 죽음을 보지 않고, 질병도 슬픔도 없다. 그는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을 얻는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VII.26.2)
깨달음을 얻은 자는 이미 세계 그 자체가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얻을 것도 없어지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얻은 자가 되는 셈이다. 이 같은 상황을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에서는 “흑암도 없고 밤낮도 없고 존재와 비존재의 구별도 없는 오직 그 불멸의 유일한 존재만 있을 뿐이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상의 진술을 토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 즉 ‘깨달음은 곧 해탈’이라는 방정식을 얻게 된다.  309

경험적 측면에서 볼 때 아트만은 이해될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아트만은 유일 실재이다. 그러나 그 아트만은 오직 인간이 지닌 비범한 ‘직관’의 통찰로 ‘각성’될 것이다. 그 각성은 ‘아트만의 자기발견’이 될 것이고, 자아를 발견한 아트만은 자신이 세계임을 다시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파니샤드가 가르치는 해탈의 방정식이다. ..
살아서 해탈을 얻게 되면 생해탈로서(jivanmukti) 유여열반에 들 것이고, 죽을 때 해탈을 얻게 되면(videhamukti) 무여열반에 들것이다.  310



10 비움으로 소유하다 - 우파니샤드 사상의 요약과 결론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숲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그 숲속의 가르침이 아라냐카였다. 아라냐카는 숲속의 은자들에게 제사의 중요성과 인간과 우주에 대한 신비적 사색을 하게 해줌으로써 베다 사상의 결정판이자 최종적 철학 체계인 우파니샤드의 세계로 안내해주었던 것이다.
아라냐카는 원래 제의 문서인 브라흐마나의 보충적 주석서로 출발했지만, 제의를 비유와 상징적 방식으로 해석하면서 점차 브라흐마나와는 결별하게 되었다. 하지만 완전한 결별은 아니었고, 다만 아라냐카는 제의를 신비적, 사색적으로 해석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아라냐카를 더 깊게 사색한 결과로서의 작품이 베다의 끝을 차지하는 베단타 철학, 곧 우파니샤드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313

윤회의 이론은 바라문의 사고이기보다 왕들을 중심으로 한 크샤트리아들이 제기한 사상이었다.  314

우파니샤드는 지혜, 곧 깨달음으로서의 지식을 중시한다. 그것은 세속적인 지식이 아닌 궁극적 실재를 아는 지식이다. 그러므로 이성적 지식이라기보다는 직관적 또는 계시적 통찰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18

인간은 어떤 제도에 얽매이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본질인 브라만, 즉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혁명적 선언을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319

브라만/아트만의 영적 원리는 우주의 인격신으로 발전한다. 우주적 실재로서의 브라만은 후기 우파니샤드의 시대로 갈수록 관념론적 차원이나 실재론적 차원에서 유일신적 차원으로 점점 발전해가면서 인격신 이슈바라로서의 브라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고대 우파니샤드에서 후기 우파니샤드로 갈수록 신관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다양한 신들이 출현하는 다신론에서 점차 브라만/아트만을 중심으로 하는 유일신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새로운 변화는 브라만/아트만이 ‘주’(主)라는 뜻을 지닌 ‘이샤’(Isa) 또는 ‘이슈바라’(Isvara)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격신으로서의 브라만의 통치를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로서의 이슈바라도 점차 ‘최고의 주’라는 ‘파람 이슈바라’로 불리게 된다.
만물을 지탱하는 자로서의 아트만이 이제 ‘주’라는 인격신으로 불리고 있고, ‘주’가 아닌 개체 영혼은 자신이 추구한 향락으로 인해 세속적인 것들에 얽매이게 된다. 그러나 개체성에서 벗어나 우주적 통치자로서의 아트만을 깨닫게 되면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해방을 맛보게 된다. 이것을 깨닫는 즉시 ‘파람 이슈바라’로서의 브라만/아트만이 된다. 이 지고신과의 합일 후에는 ‘그에 대한 명상’을 통해 그와의 연합을 이룸으로써 속박을 벗어나 해탈을 누리게 된다. 브라만과의 합일은 근원적인 내적 실재와의 참된 연합이기 때문에 ‘스스로 존재함’에 이르는 해탈과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그 해탈은 동시에 모든 ‘세상의 환영’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이것이 일종의 브라만의 열반(涅槃), 곧 ‘브라마-니르바나’다.  332-335

불멸의 신적 아트만에 이르는 해탈의 길에 대하여 우파니샤드는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일원론적 차원에서 공통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비록 이원론을 전개하는 상키야 철학에서는 해탈의 방식이 조금 다르기는 해도 해탈의 기본적 전제를 ‘지식’(깨달음)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를 보인다. ‘지식’(지혜)을 통한 해탈이라는 이러한 전제는 우파니샤드의 전체 내용을 관통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혜로서의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선적으로 아트만이 유일한 일자로서의 참된 실재라는 것과 다자로서의 세계는 환영의 세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환영’으로 구성된 다자의 세계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으로서의 지혜(깨달음으로서의 지식)가 곧 해탈에 이르는 필수적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 환영적 세계의 실상을 모르는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은 바로 아트만에 대한 이해에서 가능하다. 무지는 고통이나 족쇄, 또는 집착의 근원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영-무지-윤회’라는 삼중적 세계의 실상을 동시에 통찰해야 한다. 족쇄를 끊는 검으로서의 통찰은 궁극적으로 ‘모든 욕망의 비움’이라는 형식에서 성취된다.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고통스러운 실존으로부터의 해방, 그것이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기도 한 것처럼, 우파니샤드가 말하는 해탈의 길도 고통과 죽음의 극복으로 맞게 되는 구원의 길이요 불멸의 길이다. 환영에서 벗어나 ‘내가 곧 푸루샤요 내가 곧 브라만/아트만이다’라는 실재의 실상을 깨닫는것, 그것이 우파니샤드가 말하는 비밀스런 가르침으로서의 해방의 길, 곧 해탈의 최종적인 가르침이다. 그 궁극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네 개의 위대한 진술, 즉 마하바키야(Mahavakyas)로 압축된다. 이것이 우파니샤드의 결론 중의 결론이다.
“의식이 브라만이다.”(아이타레야 우파니샤드>)
“내가 브라만이다.”(<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그것이 바로 너다.”(<찬도기야 우파니샤드>)
“이 아트만이 브라만이다.”(<만두키야 우파니샤드>)  335-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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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중국과 더불어 동양의 역사와 사상 및 문화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낟. 그렇기 때문에 동양, 특히 서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는 인도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3000년경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고대 이집트나 아시리아 그리고 바빌로니아의 문명과 거의 동시대에 발전된 문명으로 볼 수 있다.  49



베다 시대

아리아인은 원래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 남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살다가 대략 세 갈래로 민족의 이동을 시작했다. 그 중 일부는 유럽으로 이동하여 유럽 아리아인이, 그리고 일부는 페르시아 지방으로 들어가 페르시아 아리아인이 되었으며 나머지는 인도로 들어와 인도 아리아인이 되었다.


베다 시대에 이르면 사회적으로 다양한 도시 국가들이 형성되고 사상적으로 종래의 브라흐마니즘을 넘어 <우파니샤드>와 같은 정통 사상이 그리고 슈라마니즘이라하는 비정통 사상이 함께 나타났다.


베다 문화는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의 종교와 철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61


<리그베다>는 신들에 대한 찬가의 모음으로 신이 제사장에 등장하도록 청하는 승려들이 부르는 노래이다.

<사마베다>는 <리그베다>에서 뽑아낸 노래 가운데 일정한 선율로 노래를 부르는 승려들의 노래모음이다. 

<야주르베다>는 희생제 의식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 업무를 담당하는 승려들에게 필요한 부분이다.

<아타르바베다>는 주문과 마법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 

<브라흐마나스>는 다양한 희생제 및 제사의식에 필요한 방법과 규칙을

<아라냐카>는 진리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색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모든 인도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우파니샤드>는 <아라냐카>의 철학적 사상을 더욱 발전시키는 한편 인간의 궁극적 목적인 해탈과 깨달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64-65


전기 베다 시대가 아리아인의 인도 침입을 통한 이주 및 초기 정착 시기라고 한다면 후기 베다 시대(기원전 1000~기원전 600년)는 인도에서의 영역 확장을 통한 아리아인의 본격적인 정착 시기이다.  85


결혼 역시 오직 같은 카스트 안에서만 가능하며 남자보다도 여자의 경우 자신보다 낮은 계급과 결혼하면 모든 사회적 지위와 권리를 박탈당할 뿐만 아니라 그 집단에서 추방되었다. 반대로 남자의 경우에는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여자와 결혼할 수 있었다.  92



엄격한 결혼의 제한은 맨 처음 아리아인과 비아리아인 간의 혼혈을 방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혼혈 현상이 심화되면서 카스트 제도는 더욱 복잡하고 다양한 직업에 의한 세습 및 신분 제도로 변질되었다.


인생의 시기를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각각의 시기에 인간들이 행해야 할 의무를 결정했다.

아슈마라라고 불리는 이러한 시기 구분은 인생의 시기를 대략 100년으로 간주하여 각각 25년식의 네 단계로 나누었다.

첫 번째 25년의 시기는 스승 밑에서 베다 및 삶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는 학습기이다. 이 시기에는 스승과 함께 생활하면서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 전반에 대한 지식과 제식 그리고 사회인으로서의 의무 등을 배운다.

학습기를 무사히 마친 학생은

두 번째 단계로 이제 집으로 돌아가 결혼을 하고 자신의 가정을 꾸려 나가는 가정생활기로 들어간다. 이 단계에서는 결혼을 통한 자손의 출생과 같은 개인적인 임무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자신이 행해야 할 여러 가지 공공의 의무도 함께 수행한다.

그리하여 대략 50세 정도가 되어 자식들도 무사히 출가시키고 또한 사회적인 의무도 어느 정도 완수하고 나면 

세 번째 단계인 은둔기에 들어간다. 은둔기는 부인과 함께 숲속으로 은퇴하여 사회적인 모든 의무를 벗어나 높은 진리를 추구하는 일종의 종교적 수행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은둔기를 넘어서면 남은 인생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혹은 자신이 깨달은 진리와 함께 홀로 방랑의 길을 떠돌아다니는 유랑기에 접어든다. 유랑기에는 말 그대로 철저하게 무소유의 자유를 누리면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그 상태대로 영혼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시기가 되면 성스러운 어머니의 강, 갠지스로 가서 이 생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한 뒤 그녀의 품에 안긴 체 다음 생을 위한 긴 휴식에 들어가거나 깨달음을 얻어 고통스런 세계로의 방랑을 멈춘 채 영원한 행복에 안주한다.  93-94


처음 두 단계에서는 주로 세속적인 요소를, 나머지 두 단계는 탈세속적이고 정신적인 면을 갖는다. 생의 네 가지 덕목이 된다.

물질적인 재물을 의미하는 아르타(Artha), 성적 욕망을 포함한 사랑을 뜻하는 카마(Kama), 도덕 윤리적 법칙과 규칙을 의미하는 다르마(Dharma), 최상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 또는 해탈을 의미하는 모크샤(Moksa)로 이루어진다. 

이 가운데 아르타, 카마, 다르마는 생의 네 단계 가운데 주로 전반부의 두 시기에 행해지는 부분이며 모크샤는 후반부의 시기에 지켜야 할 일종의 의무이다.  94


후기 베다 시대에는 급변하는 사회적 변화만큼 종교나 철학과 같은 사상 분야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 사상의 많은 부분이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된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99


전체적으로 후기 베다 시대의 전반기에는 제식주의가 형성되었고 후반기에는 <우파니샤드>의 철학적인 사색이 태동함으로써 오늘날의 힌두이즘을 낳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후기 베다 시대의 인도 사회는 부족국가의 틀을 벗어나 통일된 왕조를 형성하기 시작한 일종의 격동기이다.  102



비베다시대

기원전 6세기 전후의 시기.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부분의 중요한 철학, 종교적 운동이 나타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그리스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를 거쳐 소크라테스로 이어지는 철학적 사색이, 페르시아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그리고 중국에서는 유가의 시조인 공자와 도가 사상의 노자가 등장했다.


전통에 대한 비판과 거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종교가 바로 불교와 자이나교이다. 실제로 인도의 사상이 보다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사색의 틀을 갖추게 된 것도 불교와 자이나교의 영향이다.

인도의 철학과 사상의 근간인 <우파니샤드> 역시 이 시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겻으로 브라흐만 자체의 자기 반성적 요소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107


아지비카 학파는 반브라흐마니즘을 주장. 모든 존재의 행위는 인간 스스로 혹은 절대자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보았다.

차르바카 학파는 가치론적인 면에서는 모든 존재가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한 어떠한 경우에도 미래란 불가능하며 오직 현재, 지금 이 순간만 사실로 존재할 뿐이기 때문에 도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도덕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현실의 감각적 쾌락만이 인간 삶의 최고 목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10


자이나교는 마하비라라고 불리는 한 위대한 인물의 깨달음에서 비롯된 종교이다.  117

자이나교는 생명 있는 존재를 해치지 말 것, 거짓말을 하지말 것,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지 말 것, 사유재산을 소유하지 말것, 금욕을 지킬 것 등 다섯 가지 기본적인 계율을 가르쳤다.

불살생 또는 불상해의 계율을 가장 강조했다. 

후에 자이나교는 오직 흰색 옷만 입는 백의파와 어떠한 옷도 걸치지 않는 나의행파로 나뉜다.  119


자이나교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를 자아(Jiva)보다 낮은 위치에 두었다.

자신이 전생에 쌓은 업에 의하여 현생의 삶이 결정되기 때문에 누구든 전생에 쌓은 카르마를 보다 빨리 해소하고 현생에서 더 이상 카르마를 쌓지 않는다면 모두 다 해찰이 가능하다고 마하비라는 주장했다. 그는 또한 제사의식이나 희생제와 같은 행위는 절대로 해탈에 도움을 줄 수 없으며 오직 올바른 지식과 올바른 행위ㅏ 그리고 올바른 믿음만이 진정한 깨달음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121


고타마 싯다르타극 기원전 6세기경 지금의 네팔 지역에 있던 조그만 왕국(일종의 공화국) 카필라바스투의 왕자로 태어났다.  122

35살에 보리수 아래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드이어 붓다(깨달은 자)가 된 고타마는 베나레스 근처의 사르나트(녹야원)에서 처음 설법.

쿠시나가르에서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붓다의 가르침은 아소카 왕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아 인도 전역(

붓다의 입멸 후 200여 년이 지난 뒤)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퍼져나가 오늘날의 세계종교로까지 성장했다.  125


붓다의 사색은 기본적으로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모든 인간들이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과 그에대한 구체적인 해결에 관심을 집중했다. 사성제(四聖諦), 삼법인(三法印), 연기설(緣起設)등으로 일컬어지는 붓다의 근본 사상은 바로이러한 토대 위에서 형성되었다. 

그렇다면 고통과 괴로움은 왜 발생하는가?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 때문이라고 말한다.  126


붓다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자기가 아닌 다른 존재에 의지하거나 그의 도움을 받으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팔정도라는 8가지 올바른 실행방법.

인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올바로 볼(正見)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올바로 생각(正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가지를 토대로 올바른 말(正言)과 행위(正行, 正業)를 함으로써 올바른 생활(正命)을 영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올바른 노력(正精進)과 올바른 마음가짐(正念) 그리고 올바른 정신집중(正定)이 필수적이다.  127


개혁적인 성향의 브라흐만 사제들은 그간의 폐단을 직시하고는 문제점을 개혁하기 시작했다. 

<우파니샤드>는 종래의 제식 주의를 비판 혹은 수정하면서 한편으로는 슈라마니즘으로 대변되는 비정통 사사의 요소를 접합시킨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 결과 <우파니샤드>는 브라흐만과 아트만의 합일이라는 인도만의 독특한 사상을 낳았다.  130-131


이와는 달리 불교는 종래의 지방어를 통한 가르침을 포기하는 대신 지성인들의 표준어인 산스크리어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기원후 1세기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대승불교 운동은 붓다를 깨달은 사람에서 점차 신격화하는 형태를 취함으로 절대신에 의존하는 브라흐마니즘과 유사한 종교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과 상인 계급의 재정적 도움으로 매우 크게 성장했다. 그럼으로 승려들 각자는 일반인을 위한 대중적 노력보다 붓다가 거부했던 형이상학적인 논의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이비 시작했다.  131


불교의 전통에 의하면 아소카가 전적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힘이 아닌 법에 의한 통치를 펴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다름아닌 칼링가 전투였다.  150

전 인도를 그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는 만족감에 그는 만명에 웃음을 가득 띄운 채 자신이 이룩한 위대한 과업을 다시 한 번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적들의 시체가 널브러진 싸움판 속을 유유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별안간 그의 가슴에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회의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피를 쏟으며 신음하고, 찢겨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바라보면서 아소카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채 몸을 숙였다. 

"보라! 이처럼 죽어 나자빠진 수많은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이렇게 자신들의 목숨을 바쳤을까? 정의, 진리, 법, 과연 어느 것이 그들의 목숨을 이렇게 내던질 수 있게 만들었을까? 그래, 적어도 군인들은 자신들의 의무 때문에 이렇게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치자. 하지만 여기 그들보다 더 많은 브라흐만 사제와 불교 승려들을 포함한 수행자들 그리고 일반인들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분노한 병사들의 눈먼 칼과 창끝에 아무런 이유 없이 목숨을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그렇게 이름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은 전쟁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거나 알 필요조차 없다. 그들의 눈에 비친 전쟁은 위정자들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한 가지 방편일 뿐이다. 자신들이 벌인 전쟁에 대해 위정자들은 겉으로는 정의와 법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소수 권력가들의 끝없는 욕심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은 일상 생활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쟁의 와중에도 오직 생존만이 목적이며 그것을 위해 평생을 몸부림칠 뿐이다."  152


비무에 다음과 같은 심정을 토로했다.

"... 칼링가를 정복하면서 나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브라흐만 사제들, 슈라만 수행자들 그리고 스승의 말에 복종하면서 올바르게 행동하고 가족과 친구와 친지들 그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대하던 민간인들까지 이유없이 죽거나 부상당해 고통받는 모습을 바라보던 나의 가슴에는 정말 온통 후외와 슬픔밖에 남지 않았다... 앞으로 나는 오직 진리에 맞는 법만을 실천하고 가르칠 것이다..."

이후 불교에 귀의한 아소카는 참다운 법과 정의에 의한 정치를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스스로 불교도가 된 아소카는 그럼에도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함께 인정하면서 타종교에 대한 배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53-154


아소카 왕이 불교를 국교로 채택한 이면에는 브라흐만 사제 계급으로부터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이루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강력한 무기와 군대를 바탕으로 한 힘의 정치가 아니라 참다운 사랑과 자비에 근거한 아소카의 정치는 이전의 인도 역사뿐만 아니라 이후의 역사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예라고 할 수 있다.  155


카니슈카 왕은 쿠샨 왕조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그의 치제 기간 중에 쿠샨 왕국은 가장 크게 번성했다.  162

쿠샨 왕조는 비록 인도에서 북부 지역의 지배에 그쳤음에도 인도의 역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65


찬드라굽타 1세는 장자가 아니라 가장 유능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에 따라 왕위를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사무드라 굽타(340~380년)이다.

'인도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릴 정도로 커다란 야망을 가지고 있던 사무드라굽타는 계속되는 전쟁에서 연승 행진을 거듭했다.

포로로 잡은 왕들 가운데 그의 위세에 굴복하여 기꺼이 충성을 맹세하는 자들에게는 영토를 합병하는 대신 조공을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172

인도 전역에 걸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사무드라굽타였지만 직접적인 통치는 주로 갠지스 강 유역과 힌두스탄 평야에 한정되었다. 그 이유는 아직 왕조의 기초가 확고하지 못하여 거대한 영토를 직접 다스리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173


사무드라굽타는 직접 정복하지 않은 지역의 여러 왕국들과도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등 주변 국가와 평화적인 외교 정책을 펴나갔다.  174


찬드라굽타 2세는 데바굽타(신의 굽타), 데바라자(신의 왕), 데바스리(신성한 존재)라고 불리는 한편 스스로는 위대한 통치자를 상징하느 비크라마디티야(무예와 용맹의 태양)라고 불렀다. 그는 부왕과 마찬가지로 유능하고 뛰어난 통치자인 동시에 용감한 정복자였다. 그는 결혼을 통한 평화적인 방법과 군사력 두 가지를 모두 활용하여 부왕으로부터 물려받은 광활한 영토를 더욱 넓히는 데 힘썼다.  175

찬드라굽타 2세 때 굽타 왕조는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177


굽타 왕조 시대는 인도 역사상 황금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엄격한 왕정 제도가 확립되었고 중앙과 지방의 행정 조직도 상당히 유기적으로 체계화되어 있었다. 정치적 안정은 상업의 발전과 더불어 문학, 예술, 종교, 건축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굽타 왕조의 지배력이 직접적을 영향을 미친 곳은 북인도 지역에 한정되었다.   183-184


굽타 왕조는 인도 사회에 몇 가지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첫째는 굽타 왕조 시대에 브라흐마니즘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힌두이즘의 형태로 부활되었고, 둘째는 이민족의 유입이 보다 활발했으며, 셋째는 무역과 상업의 발달로 인해 전체적인 경제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 세 가지 요인은 부와 재력을 바탕으로 한 상인 계급의 지위를 신장시켰으며 인도 문화의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187


굽타 왕조에서는 종래의 베다 중심의 브라흐마니즘을 보다 세속적인 종교의 형태로 변화시키면서 오늘날의 힌두이즘이라고 하는 인도 고유의 종교, 철학 사상을 발전시켰다. 힌두이즘에서는 우주의 창조주로서 브라흐마, 우주의 유지자인 비슈누 그리고 파괴자인 시바의 세 신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 신들은 하나의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신의 세 가지 표현이라는 삼신일체 신앙을 갖는다. 

시대와 상황 그리고 그를 예배하는 사람들의 바람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그의 모습을 지상에 드러내는데 이것을 아바타라(화신)라고 말한다.  188


바가바타 종교는 <바가바드 기타>에 나타난 크리슈나의 가르침을 근거로 한다. 원래<바가바드 기타>는 <마하바라타>라는 인도의 대서사시 가운데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마하바라타>는 <라마야나>와 함께 인도의 2대 서사시로 그리스의 위대한 작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ㅔ이>에 버금가는 작풉은로 평가 받는다.  200


굽타 왕조 시대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만큼 문학과 예술 방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룬 시기였다.

산스크리트어가 국가적인 언어가 되고, 인도의 2대 서사시 <라마야나>와 <바가바드 기타>가 오늘날의 형태로 완성되기도 했다.  207


예술 방면에서도 화폐, 동굴 사원과 벽화, 테라코타와 바위에 새겨진 다양한 그림등이 대표적이며 특히 탑 , 수도원 등 건축물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211


인도에서의 철학과 종교의 목적은 해탈의 추구에 있다.  221


종교적인 부분으로는 삼신일체(트리무르티)라는 힌두교의 독특한 신관이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 즉 힌두교는 우주를 창조하는 브라흐마, 창조된 우주를 유지하고 관장하는 비슈누 그리고 파괴를 담당하는 시바, 삼신일체의 교리를 형성했다.

이 가운데 비슈누 신을 섬기는 바이슈나비즘은 주로 북인도 지방의 대중적인 종교가 되었으며 시바 신을 믿는 쉐이비즘은 남인도 지방에서 널리 성행했다.  223


인도 철학은 크게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정통 철학(아스티카)과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비정통 철학(나스티카)으로 구별된다. 이 가운데 정통철학은 다시 베다에 직접적으로 근거를 둔 미맘사와 베단타 철학 그리고 실제로 베다가 아닌 다른 독립된 근거를 가지고는 있지만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느 상키야, 요가, 느야야, 바이쉐쉬카 철학으로 나뉜다.

이에 반해 비정통철학은 불교와 자이나교 그리고 차르바카라는 유물론 계통의 철학으로 전체적으로 슈라마니즘의 전통을 잇고 있다. 슈라마니즘은 대체로 아리아인의 인도 침입 이전부터 존재했던 금욕주의 혹은 고행주의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상키야, 요가의 사상과도 연관을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정통의 육파철학이 체계화되고 브라흐마니즘이 새롭게 힌두이즘으로 변모하면서 힌두교와 불교의 논쟁도 이전보다 훨씬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224


남인도 지역은 적어도 마우리아 왕조의 통일국가 이전까지는, 북인도 지역이 아리아인 문화가 중심인데 비해 주로 드라비다인 계통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235


인도 무굴 제국은 우즈베크 공화국에서 태어난 바부르로부터 시작했다. 1483년 2월 우즈베크의 시르 강 상류 지역에 위치한 페르가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티무르의 5대 손이며 어머니는 칭기즈칸의 15대 손이었다.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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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여행이 내 인생의 한 변곡점이 될 줄은 몰랐다.  6


인도의 신화와 종교, 사원, 자연, 그리고 사람들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인도의 영성이랄까 그 뿌리를 더듬어보고 싶었다.  7


'우파니샤드'란 말에는 '가까이' '아래로' '앉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니까 우파니샤드는 스승이 아끼는 제자를 무릎이 닿도록 가까이 앉히고 은밀히 전해주는 지혜인 것이다.  10


인도의 4대 성지 가운데 하나인 오리사 주의 푸리. 오리사 주는 유난히 힌두교 사원이 많이 '인도의 영혼'으로 불린다.  20


인도의 신들은 사람들의 삶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그들 삶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29


인도의 신들은 대체로 두 종류로 구분된다. 베다(힌두교 법전)에 나오는 신들과 힌두교의 브라흐만의 신들이 그것이다.

베다에 나오는 신들은 자연의 힘을 의인화한 신으로, 태양신 수리아, 바람의 신 바유, 불의신 아그니등 자연이 곧 신으로 숭배된다.

한편 브라흐만의 신들은 <우파니샤드>가 확립되면서 베다시대의 자연신을 대히한 힌두교 신들이다.

물론 <우파니샤드>는 철학적 성격이 강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인 브라흐만을 우주와 존재의 궁극적 원리로 인식한다. 따라서 브라흐만은 노자가 말하는 도(道)처럼 비인격적인 존재이다.  30


브라흐만은 산스크리트어로 '넓게 퍼져 있다'는 뜻이다.  34


가난한 농사꾼의 집안에서 태어난 카틱에게 "당신은 행복하오?" 하고 물었다.

"집에는 닷새쯤 먹을 수 있는 쌀과 감자가 있답니다. 그리고 아내는 매일 아침 숲에서 땔감을 구해다가 차를 끓여 줍니다. 아내가 끓여주는 차는 아주 맛있습니다. 그걸로 나는 만족합니다."

주어진 여건을 달게 받아들이는 자족의 품성이 넉넉히 몸에 배어 있는 듯 싶었다.  55-56


소리'아움 또는 옴'(AUM, Om이라고도 말해진다)은 우주의 신성한 원음으로 여겨진다.  63


우파니샤드의 현자는 브라흐만을 '존재' '지성' '무한'이라고 일러준다.

첫째로 브라흐만은 불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의 변하는 것들과 구별된다.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변화의 낙인'이 찍혀있다. 따라서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소위 변화를 겪는 것들은 지본재이고 불변하는 브라흐만은 존재인 것이다.

둘째로 브라흐만은 정신의 영역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들과 구별된다. 따라서 물질적인 것은 비지성이고, 브라흐만은 지성이라는 것이다. 즉. 브라흐만은 앎의 대상이 아니라 앎의 근거이므로 참된 지성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브라흐만은 불멸이기 때문에 소멸할 것들과는 구별된다. 따라서 소멸할 것들은 유한이고 불멸의 신비인 브라흐만은 무한이다. 브라흐만은 태어남도 죽음도 여읜 존재이며, 유한한 인간이 갇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이기에 무한이라 일컬어지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본질적 속성에 '희열'을 덧붙이기도 한다. 브라흐만은 절대적 기쁨인 '희열'의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65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금화가 주인이 된 세상에서는 값없는 것들의 고마움을 모른다. 본말이 뒤집혀, 오로지 돈을 주인으로 섬기는 세상에선 값없는 것들의 소중함을 쉽게 망각한다. 쓸모는 오직 돈으로 환산된다. 돈이 안 되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진정 쓸모 있는 것임을 모른다.  76-77


눈을 감고 자리를 틀고 앉아서도 질주 하듯이 살아간다. 그렇게 미친 경주마처럼 질주하고 질주한 결과는 무엇이던가.  78

밥벌이에 급급해 코끝의 숨을 잊고 산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79


숨이 인간의 육신을 지배하듯이 아트만은 인간의 생명을 존재하게 하는 어떤 불변의 원리이다. 숨이 끊어져 육신이 불에 태워져도 사라지지 않는 불멸의 영혼이 곧 아트만이다.  82


우파니샤드가 제시하는 아트만이라는 개념은 자기 바깥에서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던 사람들의 시선을 자기 내면으로 향하도록 만든다.  86


우리가 '내가 아트만이다'라는 놀라운 신비를 깨닫게 되면 만물이 소중해진다고 한다.  87


"강들이 흘러흘러 바다에 도달하면 '강'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바다와 하나가 되듯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은 '이름'과 '형태'의 구속에서 풀려나 신성한 푸루사에 도달하게 되리라." - 문다카 우파니샤드


<이샤 우파니샤드>는 세상을 '변하는 것들'이라 묘사하는데, 사실 산스크리트어로 '세상'이란 말 자체가 '변화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영속하는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127


인도의 대표적인 신 시바는 '춤추는 자들의왕(나타라자)'이라고도 불린다.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시바상은 한쪽 다리를 쳐들고 다른 쪽 다리로는 악마의 머리를 밟고 있다. 네 개의 손 중 하나는 보호의 몸짓을 하고, 다른 손으로는 들어 올린 발을 가리키며, 또 다른 손에는 창조물의 심장 고동을 재기 위한 북을 들고, 마지막 한 손에는 분리의 횃불을 들고 있다. 춤추는 자들의 왕 나타라자의 춤은 정신적 재생과 신과의 합일에서 오는 황홀을 상징한다고 한다.  135


"나 이외에 아무도 없는데 도대체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두려움이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 두려움이란 다른 존재에 대해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의 감정은 '나' 이외에 타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두려움은 항상 그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다.  154


나 역시 젊은 날 구도자 행색을 하고 살아 왔지만, 솔직히 말하면 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반쪽이었다. 신을 사랑하노라 하면서도 그 쏠쏠한 세상 재미에 언제나 한쪽 발을 걸치고 살아왔다. 그런 나에게 인도에서 만난 빈털터리 수행자들의 모습은 충격과 도전으로 다가왔다.  

나는 무엇을 제대로 버린 적이 있던가. 버리기는커녕 무얼 쌓으려고만 하지 않았던가.  168


힌두교인들은 인생의 단계를 성실히 실천하고 살아야 이상적인 삶이라 생각한다.

첫 단계는 학생기(學生期, 1~25세)로 금욕과 학습의 기간이다. 이 시기에는 경전(베다)을 공부하고 카스트의 구성원으로서 각자 해야 할 의무를 익히는 데 전념한다.

둘째 단계는 가주기(家住期, 26~50세)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가족의 부양을 위해 전념하는 기간이다.

셋째 단꼐는 임서기(林棲期, 51~75세)로 앞의 두 단계를 통해 이룬 경제적 기반과 가업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숲으로 들어가 명상에 임하는 시기이다.

마지막 단계는 유행기(遊行期, 76~100세)로 숲에서 나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세상을 주유하는 시기이다. 이때는 탁발이 주요 생계수단이 되며, 세상의 모든 애착을 던져버리고, 지금까지 자기가 배우고 명상한 내용들을 현실 속에서 다시 몸으로 확인하는 단계이다. 이 인생의 네 단계는 인간이 점차 세속의 오염을 씻고 자신의 영적인 본향에 적합하게 되는 과정들을 나타낸다.(라다크리슈난)  169


사람들은 포식으로 자기 몸을 괴롭힐 줄은 알면서도 자기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금식은 하려 하지 않는다.  174


몇 차례의 여행, 짧은 식견으로 인도라는 거대한 나라를 규정하고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넓게 둘러보고,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할 것 같았다. 사랑하면 보인다고 했으니 더 깊이 사랑해야 할 것 같았다.  213


기원전 1000년경에 씌어진 힌두 경전 <리그베다>에는 인간의 계급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에 대ㅐㅎ 인간의 신체에 비유하여 기록되어 있다. 태초에 우주의 보질을 상징하는 신 푸루사가 죽으면서 인간을 창조했는데, 푸루사의 입에서 사제 계급인 브라만이 나왔고, 파에서는 군인계급인 크샤트리아가, 허벅지에서는 상인계급인 바이샤가, 두 발에서는 노예계급인 수드라가 생겨났다고 한다. 상체로 올라갈수록 신분이 높고 하체로 내려갈수록 신분이 낮아진다. 소위 사성제라 부르는 것이다.

이 사성제에도 들지 못한 아웃카스트가 있는데, 그들이 바로 가장 밑바닥에 속하는 불가촉천민들이다. 이 불가촉천민의 수는 인도 인구의 16%인 1억 650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무려 3500년 동안 짐승 취급을 받으며 살아온 것이다.  234


'진실한 마음으로 진리를 찾으려는 사람은 카르마나 윤회 이론을 배우는데 시간을 소비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기를 변형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따름이다.' 위대한 구루인 바바 하리다스의 말  247


빛을 비추는 건 태양의 자연스런 존재 방식이다. 그러나 자기 본성에서 멀어진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참자아'를 망각한 인간은 자기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선을 행할 때도 행위 뒤의 결과를 생각한다. 은행에 예치한 돈이 있으면 돌아올 이자를 계산하듯이, 우리의 행위가 가져올 열매를 기대한다는 말이다.

사랑할 때도 손익을 따지고 남을 도울 때도 돌아올 보상을 계산한다. 행위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순수성을 잃어버린 사랑은 소유욕에 불과하다. 순수성을 상실한 자선은 자기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려는 욕심에 불과할 뿐이다.  269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은 행위 그 자체가 되라는 것이다.  270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아!'하고 감탄하는 이는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우파니샤드의 현자는 말했다.  279


'코함'이란 산스크리트어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뜻이다.  283


자신의 본질을  망각한 사람은 '나는 누구인가?'를 거듭해서 물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물론 세상에는 이런 물음조차 지니지 않고 사는 사람이 더 많다.  284


세속적인 것들과의 동일시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는 누구일까?  285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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