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았을 때 종교, 그러니까 관념론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던사람들이 지배층, 곧 보수적인 사람들이었다면, 유물론적 관점을 기반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진보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36


유물론자들은 항상 물질세계 및 현실세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가는지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유행을 선도할 것이고, 관념론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관념이라는 틀에다가 현실을 끼워 맞춰서 세상을 바라볼 테니 유행에 뒤처지고 낡은 것을 고수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겠군요.  38


개인의 읫기이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보는 견해를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합니다. 반면 플라톤의 이데아나 기독교의 신처럼 초개인적이고 초감각적인 정신적 실재를 가정하여 모든 것의 근원으로 삼는 견해를 '객관적 관념론'이라고 하고요.  40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세상을 고정불변의 것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어떤 변하지 않는 틀을 설정하고, 그것에 맞춰 세상을 파악하는 것이지요.  49


변증법적 세계관은 세상을 고정불변의 것이 아닌,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50


헤겔이 변증법을 연구하면서 쓴 '모순'


'모순'이 변화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사실.

어떤 현상에서 모순과 갈등의 구조를 파악해내는 것이 중요.

그래야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변화와 발전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있을 테니까.  55



양적 변화가 특정 정도를 넘어서면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

'양질 전화의 법칙'은 모순에 따른 변화와 발전이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는지를 보여주는 법칙입니다. 모순에 따른 변화 발전은 아무렇게나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양적 변화가 계속 축적되다가 임계점에 다다르면 질적 변화가 일어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이야기입니다.  73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디고 느리게 보이며, 연속해서 일어납니다. 반면에 질적 변화는 상대적으로 변화가 급격하고 불연속적으로 일어납니다.  77


부정변증법. '변증법적 부정'이란 사물이나 현상의 발전 과정에서 낡은 것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낡은 것이 새로운 것의 의해서 '부정'되는 것.  80

새로운 것이라는 게, 기존의 낡은 것과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없는 생판 다른 것은 아닙니다.  81


사물이나 현상이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낮은 단계로부터 높은 단계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발전한다는 의미입니다.  83


연속된 부정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증법적으로 변화 발전, 곧 진보하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서 부정이라는 단어를 되풀이 쓴 것이지요.  84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진리란 인간이 절대로 파악할 수 없는 피안(彼岸 저 피, 언덕 안)의 세계에 존재한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상대적 진리란 절대적 진리의 일부 측면이락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론과 실천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우리는 절대적 진리를 조금씩 더 알게 되는 것이지요.  123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132



사회의 구성원이 함께 공유하게 되는 의식을 '사회적 의식'이라고 합니다. 사회 구성원의 상당수가 '사회적 의식'을 공유하게 되는 까닭은 그들이 놓인 환경이 같기 때문입니다.  135


'존재'가 원인이고 '의식'이 결과인 이상, 역사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려면 '의식'의 배후에 작용하는 '존재' 양식을 파악하는 것이 주요한 과제가 됩니다.  144


설명을 듣지 않으면 서로 이해하지 못할 만큼, 인간은 다양한 존재 양식에서 살고 있고요. 고온 건조한 기후와 물이 부족한 토양에 산다는 것이 티베트 사람들에게는 '존재'양식입니다. 이러한 존재 양식이 그들에게 조장이라는 풍습, 그러니까 새에게 인간의 시신을 내어주자는 '의식'을 형성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멕시코의 마야인들이 옥수수 신을 최고신으로 섬긴 이유는 그들의 주식이 옥수수이기 때문입니다.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마야인들의 '존재'양식은, 옥수수 신이 최고신이라는 '의식'을 낳았습니다.  145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든지, 바람이 많이 분다든지, 주변에 강이 흘러서 토지가 비옥하다든지, 비가 많이 온다든지, 주변에 철광석이 많다든지, 아무튼 우리 의식에 영향을 끼칠 만한 존재 양식의 요소들은 참으로 많고도 다양합니다.  146


역사 유물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양한 변수들 가운데 역사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요인을 찾아내서, 거기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역사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요소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입니다.  148-149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 이러한 생산 활동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는지 설명하는 개념들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변형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생산력'이라고 합니다.  150


생산력 = 노동력 + 생산수단


노동하는 능력이 바로 '노동력'입니다.

필요한 원료와 시설이 '생산수단'입니다.


생산수단 = 노동대상 + 노동수당


기계는 노동수단이고 원료는 노동대상.  151-152


생산관계란, 인간 사회에서 생산 활동이 이루어질 때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를 말합니다.  152


생산관계를 가르는 기준은 생산수단을 누가 소유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154


한 사회의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통틀어서 그 사회의 '생산양식'이라고 합니다. 


생산양식 = 생산력 + 생산관계  157


변화의 결정적인 원인은 새로운 생산력과 낡은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이었고요.  160


생산력이 발전하면 낡은 생산관계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161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함께 통일되어 존재하면서 생산양식을 형성합니다. 이렇게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한 사회에 생산양식의 구성요소로서 함께 존재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그 사이에서 모순이 생겨납니다.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  162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로 바뀌는 시기를 우리는 역사에서 '혁명'이라고 부르지요.  163


지금 전 세계에 물자는 넘치고 있어요.

'공황'이 일어나는 순간 그 넘쳐나는 상품들이 팔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171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私的 사사로울 사, 과녁 적) 성격 사이의 모순'에서, '생산의 사회적 성격'은 생산력과 관련이 있고 '소유의 사적 성격'은 생산과계와 관련이 있는데요. 

생산이 사회적 성격을 띈다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 활동이 이미 개인의 차원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죠. 곧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강해진 것입니다.

소유 형태는 거의 완전히 개인적인 형태, 곧 사적 소유가 주를 이룹니다.  172-173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변화 발전을 거쳐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생산력의 사회적 성격이 생산관계의 사회적 성격과 맞아떨어져서 공황이라는 파괴적 현상이 없어지고, 자본가가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착취하는 일도 없어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182



'토대(base)'와 '상부구조(superstructure)'


어떤 사회의 '토대'란 그 사회의 생간관계 총체를 말합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나 봉건적 생산 관계등을 떠올리면 됩니다.  189


상부구조란 것은, 앞서 얘기한 그 사회의 '토대'위에 서 있는 정치적, 도덕적, 예술적, 종교적, 철학적 견해 및 그에 상응하는 기관이나 조직 등을 말합니다.  190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라는 경제적 '토대'가 수많은 '상부구조'들을 낳고 있어요. 농노처럼 토지와 신분제에 얽매이지 앟은 자유로운 노동자들이 필요했던 자본가들은 개인의 신체적 자유를 보장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생산수단을 자본가 개인의 소유로 단단히 보장하기 위해서 사유재산 보호를 보장하는 법률이 생겼고요. 이런 법들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라는 경제적 '토대'에 기반을 둔 상부구조인 것이죠.  191


제가 어느 책에선가 읽은 재미있는 예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던 서양 사람들이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을 찾아가서 지능 검사를 했다고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부족 사람들 각각에게 검사 용지를 하나씩 나눠주면서 각자 개별적을 답안을 작성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원주민들은 문제지를 놓고 다 함께 모여서 토론을 하지 뭡니까. 서양 사람은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가가, 각자가 따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그랬더니 권주민들은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고 합니다.

'문제가 있으면 함께 의논해서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왜 자꾸 각자가 따로 해결하라고 하는지 모르겠군요.'

이 원주민들에게는 문제를 각자가 따로 해결한다는 상황 자체가 전혀 생소할 뿐더러 이해도 되지 않앗습니다. 이 원주민 부족으로 대표될 수 있는 '원시공동체 사회'에서는 부족의 구성원들이 함께 도와가면서 생활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생존' 자체가 위험해집니다. 수렵이나 채집 활동을 통해 먹을거리를 마련하고 아이들을 돌보며 맹수나 다른 부족과 싸워가며 '생존'하려면 함께 똘똘 뭉쳐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공동체 생활을 잘해야 '생존'할 가능성이 높은 게임의 법칙이 있는 곳이 원시공동체 사회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는 '생존' 자체가 '함께 도와가면서 사는' 삶이 될 수밖에 없죠. 그런 원시공동체 사회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와 같은 '이기심'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얻은 지시고가 정보를 빨리 구성원들과 공유하고, 자신이 구한 먹을거리도 함게 나눠 먹는 것이 상식입니다. '이기심'은 그 사회에서는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195-196


자본주의 '게임의 법칙'. 더럽고 아니꼽더라도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장이나 토지, 원료, 기계 등 이른바 '생산수단'이 자본가들의 손에 있기 때문이지요. 노동자는 노동력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도안 필요한 모든 것을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히 '이기심'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197


자본주의 사회 -> 모든 것이 상품으로 된 사회.  200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우리가 살아온 과거를 알아야 우리의 혀재를 판단할 수 있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죠.  204


새로운 토대가 낡은 상부 구조를 바꾸기도 하지만, 반대로 낡은 상부구조가 적극적으로 새로운 토대를 거부할 수도 있다.  207



계급이란 것을 들여다보면, 생산수단을 소유한 지배계급과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피지배계급 간에는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착취가 존재하는 사회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싱이 있습니다. 바로 빈부 격차지요.  

구조적으로 착취가 일어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빼앗는 사람은 늘 빼앗고, 빼앗기는 사람은 늘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214


전 세계에서 수많은 농민이 봉건 지주에 맞서 봉기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동학농민운동도 그렇고, <삼국지>에 나오는 황건적의 난도 같은 맥락입니다.  221


계급 투쟁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사회를 변혁하는 근본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계급투쟁이라고 하면 사회에 혼란을 조성하는 것으로만 새악하지요. 하지만 착취계급에 대한 피착취계급의 투쟁은 항상 새로운 사회를 여는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습니다.

근대 자본주의 혁명이었던 프랑스 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수많은 농민이 봉건적 질서를 해체하는 데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223


지배계급은 불안정한 상황을 억누르고 지배 체제를 계속 유지해야만 자신들의 부를 지킬 수 있겠지요. 화가 난 노예들을 억누르지 못한다면 노예주들은 권력을 잃고 말 테니 말이에요.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국가'입니다. 마르크스는 국가를,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기 위한 기구, 지배계급의 권력기구로 보았습니다.

지배계급은 생산수단을 독점적으로 소유합니다. 그러한 경제적인 권력으 가지고 잇기 때문에 피지배계급을 예속시킬 수 있죠. 하지만 그 사이에는 계급투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항상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의 저항을 억누르고 계속 복종시키기 위해 조직된 힘이 필요합니다. 군대나 경찰, 법원, 감옥같이 조직된 폭력기구가 필요하다는 말이죠. 이러한 국가의 폭력은 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그래서 군대와 경찰은 폭력을 합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지만, 사회의 나머지 성원들이 행사하는 폭력은 불법 행위가 됩니다. 이런 폭력기구들의 조직을 통해서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을 정치적을 지배합니다. 생산수단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면서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국가기구를 통해 폭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면서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발생은 계급 사회의 발생과 맞물려 있습니다. 국가라는 것이 계급 억압 기구이기 때문에 계급의 존재 자체가 국가라는 기구가 존재하기 이한 전제 조건인 셈이죠.  225-226


우리는 국가가 사회의 전체 세력을 중립적으로 대변한다고 생각하도록 배워왔습니다.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한 법률이 제정되고, 그 법에 따라 국가가 운영된다고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227


혁명은 지배계급의 교체를 의미하기 때문에 많은 변화가 뒤따릅니다.  237


진짜 민주주의가 실현되려면 민중이 국가주권과 생산수단을 틀어쥐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 그 사회의 주인이 될 수 있다.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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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길은 내가 만들어야 한다


제자백가 시대의 종합적 텍스트가 세 권 있는데 <관자> <순자> <여씨춘추>라는 책이에요...

<여씨춘추>도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한 편, 한 편씩 논문을 써서 모은 거예요. 편집만 여불위가 한 거고요. <브리태니커>같은 완벽한 백과사전이죠. <순자>는 유학이 입장에서 정리한 제자백가 백과사전이고, <관자>는 관중의 입장에서 정리한 춘추전국시대의 백과사전이에요.  324


춘추전국시대를 이해하려면 <논어>니 <장자<니 이런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자> <순자> <여씨춘추>, 거기다 <한비자>까지 추가해서 네 권 정도를 먼저 읽어야 해요.  325


<순자>에는 성악설만 있는 게 아니에요. 성악설과 성선설의 대조를 만든 것은 후대의 유학자들이에요. 순자에게서 성악(性惡)이라 함은 자연성, 생물성이에요. 어린아이 같은 터프함. 성악에서 악(惡)이라는 말은 윤리적 합의르 띠는 게 아니라 거칠다는 뜻이에요. 도자기가 안 된 진흙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어야 한다. 즉 학습해야 한다는 거죠. 예법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거예요. 순자가 생각하는 악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거예요. 우린 거칠다는 거죠. 극기복례, 즉 우리의 성은 악 하지만 인위적 노력으로 선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에 비해 맹자는 많이 협소해요. 그래서 우리의 허영에 불과한데도 선이라는 말은 더럽게 좋아해요. 악하면서.(웃음) 나는 바꿀 데가 많다고 자각하는 것이 맞는데, 다 선하대요, 선하기는. 성선설과 성악설은 정치철학 테마예요. 성악설대로라면 우리 인간은 거칠잖아요. 진흙이 제 혼자 그릇이 되진 않는다고요. 선생이나 사회의 규범이 필요하죠. 그래서 정치권력을 정당화해요. 반면 성선설대로라면 인간은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스스로 수양할 수 있어요. 그래서 기득권 세력이 등장하면서 맹자를 복원시키는 거예요. 국가권력이 제후를 간섭하지 마라. 군주가 신하를 간섭하지 말라는 거죠.  328-329


<맹자>는 지식인 자율의 담론이에요. 군주권 중심이 아니라. 유학의 비극은 순자가 죽고 맹자가 뜬 데 있어요. 여기에는 주자(朱子)의 공이 크죠. <순자>를 빼버리고 <논어> <맹자> <대학> <중용>으로 사서를 묶어 '공맹(孔孟)'을 만들어버렸으니. 순자로서는 안타깝죠. 당시 최강이었는데. 그래서 사상가는 뒤에 가봐야 알아요. 뒤에 빛을 내주는 사람이 없으면 사상가는 죽어요.  330


춘추전국시대를 겪은 동양 담론들은 '지금 흥한다고 계속 흔하냐, 지금은 흥해서 사람이 많지만 곧 훅 갈 수도 있다. 그러니 마음을 얻어놔야 한다'고 논리를 전개하는 거예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만든 담론이죠. 애초에 전쟁에서부터 사유를 시작한 것이 동양 담론의 비극이에요.  354


노자의 이름이 노담(老聃)인데요. <장자> 내편에서 노담을 비판해요. 노담이 완성된 인간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다는 구절이 나와요. <장자> 맨 뒤에 <천하(天下)>편이 나오는데, 장자의 후학들이 제자백가 역사를 쓴 거예요. 그걸 보면 노자와 장자는 학풍이 달라요. 장자 후학들도 장자가 노자를 이었다고 보지 않아요. 장자는 국가주의에 반대한다니까요.  357


유가와 묵가 말고는 학파적 자의식이 없었어요. 나머지는 다 개별 사상가들이라고 보면 돼요. 후대에 도서관 분류했다너 사람, 한나라 때 사마천 같은 사람들이 그들을 학파로 묶어서 분류한 거죠.  358


<장자> 내편이 장자 본인이 쓴 쪽에 가깝고, 외편은 후학들이 썼다고 해요.  359


우리한테 시급한 과제는 자유로운 개인이에요... 

가끔 그런 경우도 많이 봐요. 민족주의가 가진 조폭성, 페미니즘이 가진 조폭성, 피해받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가진 조폭성. 용서될 수 있는 조폭성이지만 그 조폭성이 또 다른 공격성을 낳으니까 문제죠. 용서는 돼요. 이해는 되지만 더 약한 사람을 공격할 때는 큰 문제죠. 우리 민족주의가 제3세계 노동자들을 수탈하는 것 보세요. 엄청나다고요. 일본 놈들한테 그렇게 당해놓고서.  367




chapter 7 철학, 한국 사회를 보다


공동체 생활의 원리는 사랑이에요. 아껴주고 도와주는 거예요.  373


우리 사회에 치명적인 텍스트가 <고타 강령 비판>이에요. 저는 인문사회 쪽 사람들이 이걸 제대로 안 읽는 게 참 웃겨요. 왜 안 읽는 줄 아세요? 마르크스가 자기들 입장을 바로 공격하니까요. 좌우지간 분배 얘기하는 놈들은 다 개소리를 하는 거라는 내용이거든요. <고타 강령 비판>은 엥겔스가 'xx' 처릴르 많이 해요. 마르크스가 욕을 너무 많이 써서.(웃음) 엄청 흥분해서 썼거든요. 자본을 극복할 수 있는 '코뮤니즘'의 이념을 기껏 만들어놨더니 어정쩡하게 타협하는 수정주의자들이 자기 이름 팔면서 나오니까 화가 난 거죠.  376


인단 남의 일엔 간섭하면 안 돼요. 어떤 사람이 해를 당하거나 그럴 때에나 간섭할 수 있는 거예요. 나에게만 간섭 안 하면 되다느 게 아니에요. 타인에게 근본적인 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면 우리 이웃이 뭘 하든 건드리면 안 돼요. 반면 누가 나나 우리 이웃을 건드렸을 때는 개입해야 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선이 있어요. 그 선을 지킬 수 있는 여지, 우리 사회엔 그런 게 없는 것 같아요. 

최인훈이 <광장>에서 광장과 밀실 얘기를 하잖아요. 사람에겐 밀실도 있고 광장도 있어야 해요. 광장이 없으면 사람은 파괴되고, 밀실이 없어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면 분열돼서 죽어요. 신상 털기의 핵심은 너무 밀실로 들어간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까지 공적 영역이냐 아니냐, 광장의 일이냐 밀실의 일이냐 하는 균형 감각에 대한 문제거든요. 한 사람의 밀실까지 너무 육박해 들어가는 건 곧 그사람을 파괴하는 거라는 의식을 가져야 해요.  387


제3자들에 대한 애정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391


벤야민은 진보가 없다고 해요.. 피라미드는 파라오가 만든 게 아니라 노예들이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피라미드 안에 노예가 잠들어 있지는 않잖아요. 마찬가지로 타워팰리스를 만든 노동자도 거기서 잠자지 않고요. 거대한 건축물이 있는 곳에 억압이 있어요. 노예도, 노동자도 자기가 원하는 건물을 짓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문제는 이 양상이 좀 달라 보이게 하는 착시 효과가 있다는 거예요. 사실은 진보한 게 아닌데 진보한 것처럼 보이는 거죠. 이런 차이예요. 옛날에는 채찍으로 때려서 일을 시켰어요. 노예의 지상 목표는 도망가는 거예요. 그런데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자발적 노예로 만들어요. 사람들이 제 발로 와서 이을 하겠다고 해요. 자본이 없으면 못 살게끔 조건을 만든 거예요.  400


벤야민의 지적은 인문학 하는 사람뿐 아니라 모두가 명심해야 해요. 채찍으로 안 때린다고 좋아진 게 아니라고요. 더 비참해진 거예요. 옛날에는 탈출했잖아요. 노예들은 자살 안 해요. 탈출의 기회가 있잖아요. 그런데 자발적 복종은 자살과 한 끗 차이라고요.

자발적 복종은 이미 형식적으로는 자살과 마찬가지예요. 자기 부정의 형태죠. '자발'이라고 하면 자기가 주인이어야 하는데, 그 귀결이 '복종'이에요. 그게 자살이잖아요. 이 사회에 살면서 사람들이 조직 탓도 안하고 자본주의 탓도 안 해요. 자기가 버려졌다고 자살해요. 자기는 노예이고 싶은데 버려졌다고. 그래서 면접장에서 노예로 간택받잖아요. 제눈에는 그렇게 보이는데, 이런 얘기 하면 사람들이 싫어해요.(웃음) 

어느 정도 소유가 늘어났다고 해서 진보했다고 믿는 거죠.(지승호)

그렇게 착각한다고요. 사람들은 허영이 있어서 '자발'에만 방점을 찍고 우리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라고 해요. 하지만 귀결은 '복종'이거든요. 사람들에게 이걸 이해시키기가 힘들어요. 자기의 불행을 덮고 안 보려고 해요. 안타깝죠.  401-402


사회민주주의는 분배를 하겠다는 건데, 분배를 하려면 자기가 소유를 하고 있어야 하잖아요. 결국 소유 형식이 유지되는 거예요. 사회민주주의에서는 분배자와 피분배자의 위계가 생겨요. 분배하는 사람이 필요해지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마르크스를 들먹이지만 정작 마르크스는 좌우지간 소유 관계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분배 얘기하는 놈들은 다 사기끈들이라고 하거든요. 마르크스는 일체의 소유 관계를 없애자는 거예요. 마르크스가 원한 건 코뮤니즘,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 개인들의 자유로운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예요. 일체의 소유 형식을 없애자고 얘기했을 때는 국유까지도 포함한 거예요. 마르크스는 사회민주주의가 지배를 영속화하는 제도라고 봐요. 그러니까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말은 '내가 박근혜나 이명박보다 윤리적으로 분배를 잘한다'라는 거예요.  402


지금은 긴 안목으로 봐야 하는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406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느낌이 주는 강한 현재성이 있어야 해요. 현재를 잡아야 해요. 현재를 잡아야 인간을 잡아요. 미래를 염려하면 사랑하기 힘들어요. 내 아이 하나 사랑하기도 힘들어요. 미래를 염려해서 생명보험, 상조보험에 가입하는 것보다 지금 아이랑 낚시를 가는 게 나아요. 살아 있을 때 재밌게 살아야죠. 권력은 그걸 못 하게 만드는 거예요. 

결혼이 왜 문제냐면, 두 사람이 미래만 보는 거예요. 내 집 마련, 육아, 자녀 교육 등등. 둘아서 연애할 때는 그런 게 없잖아요. 미래를 걱정하게 되면 커플 관계는 붕괴되는 거예요. 사랑의 공식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인데, 결혼의 공식은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예요.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사람은 내일 가도 또 내일이 있고, 또 내일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사람은 오늘만 있고, 내일 가도 또 오늘만 있어요. 그러니까 매번 관계를 맺을 수 있어요. 극단적인 원리지만, 사랑의 원리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거예요. 결혼이나 소유, 경쟁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 체제에 포획된 사람들은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고 하죠.  408


<철학vs철학>에필로그에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고 한다. 그리하여 도더고가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라며 신채호 선생의 <낭객의 신년만필>을 인용하셨는데요.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의 대한민국 이런 식으로.(지승호)

애정 결핍이에요. 원리주의자는 애정 결핍에서 나오는 거예요.  411-412


"인문정신을 회족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스피노자와 동학의 가르침을 다시 음미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성찰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비록 실패의 가능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것이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인문정신의 핵심이다"라고 하셨는데요.(지승호)

둘 다 기독교 비판이에요.

그 뿌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건가요?(지승호)

내재주의거든요. 스피노자는 범신론자인데, 범신론의 범(汎 넘칠 범)이 '모든'이란 뜻이에요. 모두가 신이라는 주의가 범신론인데, 그러면 나도 신이란 말이에요. 동학도 죽은 사람들한테 제사 지내지 말고 나를 향해서 제사를 지내자고 하잖아요. 향아설위(向我設位)라는 게 '나를 향해서 위패를 만들어라'라는 말이거든요. 동학 자체가 서학, 즉 기독교를 비판하려고 만든 것이기도 하고요.

제가 스피노자랑 동학을 얘기한 것은 조금만 힘들면 절하고, 자기가 해결해야 하는데 조금만 힘들면 엄마한테 가서 도와달라고 하는 것을 하지말자는 거예요. 이게 미성숙이거든요. 미성숙을 극복하려면 엄마라는 존재, 신이라는 존재가 없어져야 하는 거고요. 그런 면에서 동학이랑 스피노자는 비슷해요.

동양은 내재주의 전통이 있어요. 기독교인들은 내가 예수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유학에서는 내가 성인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성인이 되는 것을 배우잔항요. 불교는 다 부처가 되자는 거고요. 그 전통이 있기 때문에 동양 사유 전통만 잘 짜깁기하면 동학 경전이 만들어지는 거죠. 동학은 독창적이라기보다 기독교에 대립해 내재주의 전통을 강화한 거예요. 동학, 동아시아의 학문이다. 우린 이걸로 갈테니 서학은 나가라. 이런 게 동학이에요. 이처럼 동학에는 나에 대한 주인의식이 있으니까 일제에 대항한 거예요. 동학농민전쟁이 그래서 일어난 거죠. 굽실거리는 정신이거나 어디 가대는 정신이었다면 그런 게 안 일어났을 거예요. 동학의 혁명성은 거기서 나오는 거죠.  416-417


"매춘부가 사랑을 통해서 맨춘부로서 수명을 다한다는 사실, 벤야민은 왜 이사실에 주목했을까요? 그것은 자본주의가 사랑을 아무리 자본의 논리로 포섭하려고 할지라도, 사랑은 자본의 한계를 돌파할 어떤 힘이 있음을 알아본 것입니다"라고도 쓰셨는데요.(지승호)

벤야민은 파리에서 축제 때 벌어지는 여학생들의 매매춘을 본거예요. 그리고 직업적인 매춘부들이 생겼을 때 매춘부가 사랑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본 거에요. 어떻게 되냐면, 돈을 안 받아요. '돈 주면 안돼'그러면서 울어요. 그러면 매춘을 못 하는 거죠. 그럴 때 매춘부로서 수명을 다한다는 거에요. 벤야민은 그런 것들의 흔적을 찾아요. 마르크스의 테마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거예요. 진정으로 좋은 사회는 사랑은 사랑으로만 바뀌고, 신뢰는 신뢰노만 바뀌고, 우정은 우정으로만 바뀌는 거예요. 그런데 자본주의가 들어오면 돈이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친구도 돈 좀 있으면 만나고 실직하면 안 만나요.

마르크스는 그게 인간관계를 왜곡시킨다고 얘기해요. <경제학-철학수고>에 나와요. 젊은 마르크스의 그 정신을 알아야 해요.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게, 신뢰하지 못하게, 우정을 나누지 못하게 하는 제도이기 때문이에요. 마르크스도 쉬워요.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 그거예요.(웃음) 자본이 어쩌고, 잉여가치가 어쩌고 하면서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것도 결국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인 거예요. 목적을 알아야 해요. 그걸 모르니까 혁명을 한 다음에도 관료주의 체제가 나오고 독재가 나오는 거예요. 자본은 없앴는데 공산당이 너무 강해서 사랑을 못 하게 해요.(웃음)  421-423


지금은 사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하기가 더 어려워진 상황이 된 것 같은데요.(지승호)

애들을 약하게 만들어서 그래요. 사랑하는 법을 어렸을 때부터 길러주지도 않았고요. 미숙하면 사랑 못해요. 그러면 자본에 포섭이 돼요. 자본을 이길 정도로 강해져야 해요. 인간이 더 중요하잖아요. 돈이 있어서 뭐해요? 그렇게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초등학생 때문버 남녀가 막 사랑해야 해요. 그래서 강해져야 돼요. 그런데 경쟁하잖아요. 게임만 하고, 그래서 약해지는 거예요. 애들이 사랑을 많이 해야 해요. 실연도 당하고, 그래야 강해지는 거예요.  424


사랑을 제대로 받아봐야 사랑할 줄도 알 텐데요.(지승호)

부모가 어린애라서 그래요. 우리 아이를 죽이는 것은 상태 안 좋은 미숙한 어머니와 정권과 자본의 결탁이라고 보면 돼요.(웃음) 카이스트 학생들도 부모나 교수는 무시하고 연애에 몰두하면 자살 안 할 수 있어요. 성적이 떨어졌어도 애인이 '난 오빠가 카이스트 다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요' 그러면 그거 하나만으로도 안 죽는 거예요.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어요. 개를 키워도 돼요.(웃음) 사랑하면 안 죽어요. 갈 데가 없을 때 죽는 거예요. 

애들이 사랑할 줄을 모르니까 성적이 떨어지면 여자도 자기를 싫어할 거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해요. 공부도 하고, 음악도 듣고, 산도 가고, 영화도 보고 그러면서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엄마가 성적으로만 사랑받게 만들어놓았으니 성적 떨어지니까 존재감이 없어지는 거에요. 저는 고등학교 2학년짜리들이 카이스트 들어가는 것도 반대에요. 애들을 경쟁시키고 전문화시켜 천재로 만들어서 죽여버려요. 기형적으로 자라게 하는 거라고요.  424-425


지금 우리 사회에는 진보가 없어요. 진보는 사랑이에요. 자기 기득권을 보는 게 아니에요.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까지 봐야 하는 거예요. 한 번 더 고민해야 해요. 이 법이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 고민을 담아내야 진보가 되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는 진보가 없는 거죠. 자기 기득권이 먼저면 진보가 아니라니까요.

자기 것만 챙기는 진보가 어디 있어요? 타인을 사랑하는 쪽으로 얼마만큼 나가느냐에 따라서 진보를 얘기할 수 있어요. 자기 이녀모가 자기 방법과 자기 생각 쪽으로 보수화되는 거예요.  431


억압된 것의 회귀가 정신 분석학의 테마잖아요.  434

정신분석학의 근본 테마는 사회나 가족이 억압적이지 않으면 히스테리 같은 게 안 나타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프로이트의 제자인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는 가정의 억압은 국가의 억압이 축소된 형태라고 얘기해요. 부모가 사회적 가치로 아이를 교육시키니까요. 라이히는 러시아 혁명을 쫓아다녀요. 프로이트가 아끼는 제자 중에 우파적인 사람이 융(Carl Jung)인데, 저는 융을 싫어하거든요. 원형 무의식이라고 해서 우리가 이미 원형적으로 억압돼 있어서 총알이 장전된 상태라고 보는 사람인데요. 이건 완전히 성악설이죠. 사회의 억압 체제는 항상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거라고요. 라이히는 사회혁명이 일어나야 억압이 없어진다고 봐요. 독재자를 제거해야 하고, 자본주의가 문제 있다고 생각하니까 러시아혁명 같은 걸 막 쫓아다니는 거예요.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하리히의 책은 정신분석학의 진짜 중요한 책이에요. 그 책은 좀 많이 읽어봐야 해요.   435




chapter 8 자본주의에 맞서라


일단 철학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소유의 논리인데, 진리라는 것도 소유의 관념이에요. 내가 진리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죠.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것만 봐도 권력은 소유에서 오는 거예요. 아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권력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소유의 논리고, 학점이나 스펙이라는 것도 사실상 소유의 등기부등본이죠. 

행복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요. 하나는 소유하면 할수록 얻는 행복이에요. 다른 하나는 거꾸로 내 것이 줄어드는데도 느끼는 행복이고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돈을 준다든가 음식을 사준다든가, 아니면 밤새도록 병구완을 하면서 내가 가진 에너지를 주는 거죠. 이렇게 내가 소유한 것을 버림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요. 이것이 우리가 고민해봐야 할 공동체 원리거든요. 논리적으로 따져도 후자의 행복이 덧없지 않은 거예요.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서도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를 인용했잖아요. '사랑은 사랑으로만 바뀌어야 하고, 우정은 우정으로만 바뀌어야 한다' 그게 마르크스가 꿈꾸는 사회거든요. 그런데 거기 돈이 개입되면 관계가 왜곡되는 거예요. 가난한 친구는 뭔가 훔칠 것만 같아 개입되면 관계가 왜곡되는 거예요. 가난한 친구는 뭔가 훔칠 것만 같아 보이고, 부유한 친구는 신뢰와 우정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거죠. 마르크스가 젊었을 때 그런 세태를 본 거예요. 사랑은 사랑으로만 바뀌어야 하는데 중간에 돈이라는 것이 매개가 되는 거죠.

소유물이 아니라 타인을 사랑해야 공동체의 기초를 다질 수 있어요. 우리가 잃어버린 것 중의 하나가 사랑의 흔적이에요. 그런 사랑의 흔적이 아주 사적인 연애로 응축해 있다는 것을 고민해봐야 해요. 옛날에는 사랑이 굉장히 넓었거든요. 내 가족이나 내 애인의 경계를 넘어갔다고요. <다중(Multitude)>이라는 책에서 네그리는 '왜 우정과 사랑이라는 것이 이렇게 협소하게 부르주아 남녀 관계 속에 국한됐을까?'라고 물어요. 네그리가 꿈꾸는 '다중'은 곧 사랑의 공동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가진 소유물을 더 아끼기 때문에 사랑을 못 해요. 집요한 이기주의죠. 그래서 공동체가 와해돼요. 사적 소유가 강화된 사회에서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는 어찌 보면 다 헛소리예요. 사적 소유가 있으면 공동체는 와해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은 자살률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면 아이가 자살하지 는 않아요. 우리는 노숙자도 많고, 하루에 마흔 명도 넘게 자살하잖아요. 우리 사회가 공동체가 아니라는 거죠. 공동체라는 관념은 있지만 그게 '상상의 공동체' 같은 거라서 실질적으로는 공동체가 아닌 거예요. 오늘의 자살자 43명에서는 빠졌지만 내일의 43명에는 들어갈 수도 있어요. 그렇다 보니 그 안에 안 들어가려고 더 소유를 해야 돼요. 이게 악순환인 거예요. 그래서 갈 데까지 계속 가보는 거예요. 갈 데까지 가보다가 뼈저리게 느껴야 알 수 있는 거죠. 아니, 역사를 보면 뼈저리게 느껴도 모르는 것 같아요. 공황이 일어나도 자본주의가 붕괴되지 않잖아요. 현실을 리얼하고 속직하게 느끼기에는 관념이 너무 비대해요. 각인된 소유의 관념으로 강하게 무장돼 있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소유의 논리는 공동체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거예요.  448-450


제가 농담 삼아 얘기하곤 하는데, 냉장고가 악의 축이에요. 냉장고가 없으면 자본주의 거의 붕괴될걸요? 옛날에는 원주민들이 고기를 잡으면 나눠줬어요. 안 먹고 가지고 있어봤자 어차피 썩으니까요. 대한민국 모든 가정의 냉장고에 있는 음식만으로도 단언컨대 아프리카 나라 열 개를 살려요.(웃음) 그런데 냉장고에 넣어놓고 썩힌다고요. 저장에 대한 욕구죠. 냉장고가 확장된 것이 은행 잔고예요. 썩지 않게 하는 것. 화폐는 안 썩잖아요. 안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거죠.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여러 체제와 전산 시스템이 우리의 소유를 저장해준다고요. 소유 형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자본주의 문명의 특징이죠. 우리에겐 소유욕이 있어요. 배고픈 데도 자기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비범한 거예요. 성숙한 거죠. 자본주의는 미성숙한 야만적 상태 내에 인간을 국한시키는 거예요. 자본주의는 따로 안 배워도 돼요. 그냥 적응이 돼요. 인류가 만든 체제 중에서 자본주의가 인간이 가진 동물적 본성, 사랑과 무관한 소우의 본성에 가장 근접한 체제예요. 어떻게 보면 인류에게 아주 치명적인 거죠.

소유라는 것은 사랑의 형식이 아니에요. 소유의 형식의 제일 반대편에 있는 것이 사랑의 형식이에요. 저 여자를 내가 갖겠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내가 저 여자한테 뭘 주겠다. 저 남자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것이 사랑이에요.  450-451


인류학 책을 왜 많이 봐야 하냐면,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무 오래 살다 보니까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몰라요. '소유 형식이 문제야'라고 하면 '안 그런 게 어디 있어?'라고 반문해요. 그런데 인류학 책을 보면 지금 우리 문명의 흐름과는 다른 사회들을 발견할 수 있어요. 지금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소유 형식이 필연적이거나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거죠.  452


"우리는 순진무구함과 폭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폭력은 숙명이다"라는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휴머니즘과 폭력>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셨잖아요.(지승호)

최소 폭력을 얘기하는 거죠. 우리는 유한자니까 뭔가를 먹어야 하고 뭔가를 해쳐야 하잖아요. 빵도 먹고 배추도 먹어야 하잖아요. 단지 어떻게 하면 그걸 최소화할 수 있으냐 하는 문제일 따름인 거죠. 그러니까 오만하지 말자는 거예요. 인간은 순진무구함을 선택할 수 없어요. 그렇다고 과대한 폭력을 선택하면 안 돼요. 최소한의 폭력, 이게 중요해요. 균형 감각이 중요한 거고요. 적정하게, 최소 폭력의 지혜가 필요한 거죠.  458-459


괴물과 싸우다 보면 괴물이 된다고,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폭력의 선을 잡기가 어렵잖아요.(지승호)

그게 니체가 한 말이잖아요. '괴물과 싸울 때 조심해라. 너도 괴물이 된다.'  459


요즘 흉악 범죄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매스컴은 근본적인 해결책에는 관심이 없고 선정적인 보도만 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지승호)

한 개인의 범죄로 구조의 문제를 덮어버리는 거죠. 아이를 경쟁시키고, 성을 상품화하고 소비하는 이런 문제들을 덮는 희생양 하나를 만든 것이거든요. 몸에 암이 있어서 겉으로 고름이 조금 나온 건데, 그걸 짜면서 더 가보자는 거죠.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에요. 한 명 또 죽이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편하니까. '우리 사회는 문제없다. 한 놈이 미친 거였어' 이렇게 보자는 거죠. '우리 구조는 깨끗해, 살 만해' 그러면서 또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런 문제가 일어나면 우리 사회를 까뒤집어봐야 하는데, 막상 구조적인 것을 드러내는 글을 쓰면 곧바로 십자포화를 맞아요. '그러면 연쇄살인범이 죄가 없다는 거냐?' 이렇게 나와요. 우리 사회는 그런 담론을 쓸 수 없는 만큼 남루하다고요. 제 말은 두 가지 차원을 같이 보자는 거예요. 일회적인 사건에서 누가 잘못했는지도 봐야 하지만, 그런 희생양을 낳는 구조도 함께 봐야죠.

그런데 이렇게 쓰면 여성 단체에서 뭐라고 하겠어요? 여성 단체도 희생양을 찾으니까 '미친놈들이다' 이러면 편하죠. '미친놈들이 자꾸 여성을 성적으로 희롱한다'라고 하면 편한 거죠. 그러니 끝내 이 자본이란 체제와 맞짱을 못 뜨지. 그게 여성 단체의 보수성이에요.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남성 우월성을 알아야 한다고요. 여성이 상품화되는 건데.  462-463


"발달한 대중매체는 대중매체 속의 이미지들을 현실 세계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서 일종의 찾기 효과가 생긴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나 자연재난이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우리가 전쟁이나 재난을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만든 전쟁 영화나 재난 영화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는데요. 무인폭격기 이런 것이 현실을 게임같이 만들어버리는 거잖아요.(지승호)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 가상현실, 전쟁 영화가 너무 리얼한 거예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진짜 실감 나잖아요. 그건 가상이고 과장된 건데, 그걸 현실로 받아들이고 현실의 전쟁을 보면 사람들이 피해를 못 느껴요. 굉장히 심각한 거죠.  463


하이퍼리얼리티, 과다한 현실성, 이게 언론 매체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힘이자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만드는 기제예요. 하이퍼리얼리티가 우리를 지배하면 사랑에도 문제가 생겨요. 왜 쟤랑 키스할 때는 그 영화에서 봤던 느낌이 안 나고 입 냄새만 나느냐는 거죠. 장미도 안 쏟아지고, 종소리도 안 들리고.(웃음)  465


무언가에 몰입하느라 서로를 못 보게 하는 것,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가 그걸 얘기하는 거죠...

드보르의 얘기는 무언가를 멍하니 쳐다보느라 서로를 보지 않는 것, 지도자를 보느라 서로를 보지 않는 것이 나쁘다는 거예요. 또 드보르가 중요한 얘기를 하는데, 자본의 구조와 정치의 구조와 권력의 구조가 같다는 거예요.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은 사람은 이 책이 자본주의 비판이라고 하는데, 사실 하이라이트는 러시아 공산주의 비판이에요. '프롤레타리아 당은 프롤레타리아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스펙터클일 뿐이다'라는 거예요. 

케네디(Jhon F. Kennedy)도 공격하죠. 미국에서 최초로 스펙터클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 케네디거든요. 정책은 허접했지만, 잘생기고 멋있는 대통령은 케네디가 처음이었죠. TV가 등장하면서 케네디가 이긴 거거든요. 상대편은 연설을 못 했지만 정책은 좋았어요.  468-469


<스펙타클의 사회>를 경제 비판, 자본주의 비판으로만 읽으면 협소해져요. 오히려 이 책의 매력은 프랑스 68혁명 때, 소련을 진리라고 생각했던 그때, 소련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한 최초의 책이었다는 데 있어요.

드보르는 영화감독이었어요. 자유로운 예술가, 아방가르드 예술가였죠. 나중에 권총으로 자살하는데, 자기가 스펙터클이 되어버려서 자기를 죽여버린 거예요. ..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어보면 뒤에 나오는 들뢰즈나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같은 사람들이 모두 드보르의 통찰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걸 알 수 있거든요. 실제로 68혁명 때는 중고등학생, 대학생들이 보드리야르도 들뢰즈도 데리다(Jacques Derrida)도 아니고 드보르와 그의 친구 바네겜(Raoul Vaneigem)의 글을 벽면에다 옮겨 썼다고요. 드보르는 공산당의 실체를 폭로한 거예요. 당이 지금 스펙터클, 구경거리로 전락했다고 사람들을 구경꾼으로 만들고 지배권은 자기들이 갖는다고.  471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책을 꼽는다면 현 시점에서는 <스펙타클의 사회>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책은 200개가 넘는 테제로 구성돼 있는데, 툭툭 던지는 식이라 독해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번역했던 분도 드보르를 감당 못 한거 같아요. 다행히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사이트에 불어 원본이나 영역본이 있으니까 그걸 참조해가며 보면 돼요.  472


자본주의와 정치를 붕괴시키는 것은 사실 쉬워요.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처럼 사람들 눈을 멀게 하면 돼요. 그러면 투표도 하기 힘들고, 서로 더듬으면서 살아야 해요. 프라다도 의미가 없고 TV도 못 봐요. 그러면 자본주의는 붕괴돼요. 알량한 시각 문화만 없으면 자본주의는 무너진다고요.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있을 때 눈 감고 있잖아요. 애인 품에 안겼을 때 눈 감고 있고, 키스할 때 눈 감고 있어요. 이런 것이 사실 소중한 세계예요. 촉각의 세계죠. 시각이 아닌 세계에 대한 갈망이 20세기 이후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문학 작품 속에 많이 나와요. 소설가들은 본능적으로 아는 거예요. 시각이 거리 둠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초콜릿 복근을 만든다든가 가슴 수술을 한다든가 지랄을 하지만, 그런 건 옆에 앉는 순간 아무 의미도 없어요. 안타까워요. 사람들이 시각에 집중하느라 다른 감각을 죽이고 있어요.  474


시각의 세계가 곧 자본의 세계이기도 한 거죠.

시각의 세계는 정치의 세계예요. 왜냐하면 보는 자는 우월하고 보이는 자는 열등하거든요.  475


모든 걸 한 방에 해결하는 것이 사랑의 방법이에요. 사랑의 방법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이냐가 모든 진보적인 사람들. 인문학자가 고민해야 할 문제인 거고요. 네그리가 얘기하는 '다중'이 기쁨의 연대인데, 스피노자저 ㄱ의미에서 대상을 가진 기쁨의 감정이 사랑이거든요. 그러니까 다중은 곧 사랑의 공동체예요.  476


자본주의는 우리를 콩가루처럼 쪼개려 해요. 단결해서 같이 쓰지 못하게 해요. 자본주의는 공동체를 싫어한다고요. 개성, 개성 하는데, 소비의 자유를 개성이라고 하는 것일 뿐이죠. 지금 광고에서 떠드는 개성이란 건 다양하게 고를 자유에 불과한 거예요. 사지선다형 식의 자유일 뿐이죠.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고르는 게 무슨 자유예요? 자본은 이렇게 인간을 파편화시키고, 개인과 개인을 덜어뜨려놓을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내면을 산산이 쪼개놓을 수 있어요.  478


이 시대에 필요한 인문정신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지승호)

자본주의에 대해서 많이 숙고해야 돼요. 자본주의를 우회하면 안 돼요. 그게 우리 삶에 고통과 고민을 안겨주는 근본적인 원인이니까요. 산 사태가 나는 것에 대한 직감 능력을 가져야 하는데, 우리는 도토리에 정신이 팔려서 산사태가 나는지도 모르잖아요. 체제가 너무 기만적이에요. 장밋빛 꿈을 계속 미래로 연결시키죠. 자꾸 저축하고 보험 들고 미래를 꿈꾸게 함으로써 현재의 세계를 영위하지 못하게 해요. 미래를 염려하게 하는 사회죠.

권력이든 뭐든 누가 잘해줄 때는 날 잡아먹으려고 그러는 거라는 걸.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걸 잘 알아야 해요. 국가는 수탈과 재분재 기관이에요. 세금은 자발적으로 내는 게 아니라 수탈하는 거지만, 수탈하고 나서 여러 가지 사업에 쓰잖아요. 재분배를 하는 것도 다시 수탈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국가기구의 핵심이에요. 사람들이 재분배를 은총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지도자 만나서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자기가 세금 낸 건 잊어버려요. 그런 것들에 대해 잘 모르니까, 깨알같이 도토리만 보고 있으니까 인문학자나 사회학자 같은 사람들이 지적을 해줘야 해요. '산사태가 일어납니다. 산이 무너질 것 같아요. 다람쥐 여러분.'(웃음)

우선 사람들이 위축되지 말고 당당해져야 해요. 인문학 저자들이나 시인처럼 당당함을 갖춘 사람들이 모일 때 구조의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누가 구조를 바꿔서 우리한테 준다는 것은 그 사람이 다른 식으로 바꿔서 줄 수도 있다는 거예요. 굉장히 위험한 거죠. 

현명한 군주는 좋아하고 나쁜 군주는 싫어하는데, 우리한테 중요한 것은 군주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거든요. 그런 이해에까지 이르러야 해요. 한비자도 국가권력 얘기하면서 이런 얘기를 한다고요. '거리의 필부라면 한 사람이라도 죽일 수가 있겠느냐? 군주의 자리에 있으니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런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가 없어야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좋은 군주, 성군에 빠지지 말고 군주라는 형식 자체의 위험성을 읽어야 해요. 노빠니 뭐니, 특정인을 지지하고 그 사람을 메시아로 추앙하는 분위기가 지속되면 민주주의는 요원해져요.

요새 티체 얘기를 많이 하는데,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런 얘길 하거든요. '너희가 알 수 있는 것, 알아야만 되는 것을 감당할 만한 용기가 너희에게 있는가?' 사실 제대로만 보면 구조적인 문제가 보이거든요. 그런데 구조적인 문제를 보면 엄두가 안 나는 거예요. 비겁하니까. 어떻게 못 할 것 같으니까. 그래서 시각을 협소하게 가지려 해요. 민주주의 덕목 중 하나가 자유인데 자유가 가능하려면 용기가 있어야만 해요. 자기 삶에 굉장히 당당해야 해요. 자본가한테 쫄아 있고 권력자한테 쫄아 있으니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거예요. 데모하지 말라고 하면 데모 안 하고, 진짜 데모크라시(Democracy)는 데모의 정치예요. 직접민주주의가 별건가요? 민주주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이에요. 그런데 지금의 정치는 과두정치예요. 민주주의가 아니에요. 다들 알 텐데도 그걸 안 보려고 해요. 협소한 시각으로만 봐요. 투표할 때만 보고. 그리고 정치인들이 표 달라고 구걸할 때만 보고는 '내가 주인인가 보다'하죠.

쫄지 말고 당당해져야 해요. 그래야 자기 상처라든가 비겁함, 남루함에도 직면할 수 있어요.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굽실거리다가 죽지 말고 고개 뻣뻣하게 들고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책에 사인해줄 때도 이렇게 써요. "항상 당당하세요!"  480-482


우리 인간이 잊지 말아야 할 기본 덕목은 나에게 애정을 준 사람에게 나도 애정을 워야 한다는 거예요. 반대로 나한테 칼을 찌른 사람은 20년이 지나도 공소시효가 없어야 해요... 약자가 어떻게 강자를 용서해요? 받아들이는 거거든요. 용서는 강자들만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강했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착한 척해요. 그러니까 매번 당하지, 사람들이 독해지면 독재도 함부로 못해요. 도갲했다가는 삼대가 힘들다. 애들이 복수한다. 이러면 감히 어떻게 독재를 하겠어요?...

그런데 너무들 착해. 양 떼들 같아요. 그래서 니체가 민주주의가 되면 사람들이 양 떼가 된다고 비판한 거예요. 그렇다고 영웅주의로 가자는게 아니라 개개인이 굉장히 강해야 한다.  482


미워해야 할 사람을 제대로 미워하지 못하면 사랑해야 할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요. 동전의 양면이거든요. 혼자 생각해서 다 용서하고 그러면 안 돼요. 자기는 의식적으로, 순간적으로 용서했다고 생각하는데 화병이 남아요. 그러면 사람이 위축되고 활력이 없어지고 피해 의식이 생겨요. 나중에 그런 상황이 되면 미리 피하고, 겁이 많아지고 소심해지고. 김어준의 표현을 빌리자면 '쪼는'게 되는 거죠.

용서는 '죽일 가치가 없다. 복수할 가치조차 없네' 이럴 때 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 화해하고 잘 지내자' 이런 건 아니고요.  483


자살의 종류도 다양해요. 대개 살아 있는 것이 힘들어서 죽느데, 그건 문제가 있어요. 자의식이 너무 강한 거예요.

자살은 스스로에 대한 폭력이에요. 왜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느냐면 내가 패배자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스스로 패배자인 나를 단죄하는 거예요. 자신에 대한 처형 행위죠. 내가 어떤 사람을 때리거나 죽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부정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패배자고 못난 모습이기 때문에 나를 제거하는 거예요. 

경쟁 사회에서는 경쟁을 내면화해요. 나 스스로가 이 경쟁에, 게임에 뛰어든 거예요. 그런데 내가 졌으니까 끝나 거예요. 누구 탓이 아닌 거죠. 이런 논리로 자살을 하는 거거든요. 애초에 경쟁 판에 안 뛰어들고 '왜 너희가 경쟁 판을 만들어?' 하는 사람은 안 죽어요. 경쟁 판에 뛰어든 아이들, 1등 하는 아이들이 죽는 거예요. 경쟁 판에 뛰어든 것을 긍정한 아이들이거든요. 그런데 뒤에서 10ㄷㅇ 하는 아이들은 꼴찌 했다고 안 죽어요. 그 아이들은 대개 경쟁을 안 받아들여요. 심지어 자기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했다는 등 오만 가지 핑계를 만들어놓죠.(웃음)

애초부터 가난했는데 자살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부자이거나 권력자였다가 몰락했을 경우 내가 진짜 패배자가 된 거예요. 그 경쟁의 게임을 받아들인 거고, 내가 1등 한 모습을 내 자의식으로 받아들인 거예요. '난 1등이야' 그런데 꼴찌가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더 이상 나는 존재하지 않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경쟁을 내면화한 사람들만 자살한다니까요. 자살하는 사람들을 분석해보면 나올 거예요. 아마도 좋은 대학 나왔을 거예요.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카이스트 아이들의 자살이 이해가 안 되는거죠. 잡초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경쟁을 안 받아들인다고요. 사회불만 세력들은 안 죽어요. 그런데 체제의 수혜자였던 아이들, 경쟁을 받아들였던 아이들이 많이 죽죠. 사실은 체제가 살인을 하는 거예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들뢰즈의 자살은 좀 다른 면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들뢰즈가 자살했다니까 생성의 철학자와 삶의 철학자가 자살했다고 의아해해요. 경험의 부재죠. 식물인간처럼 누워서 죽은 상태로 있는데 뭘 할 수 있겠어요? 그걸 이해 못 하는 거죠. 심지어 들뢰즈 연구자란 사람들도 그래요.  485-486


모든 인생론은 가짜예요.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느냐의 문제로 화두를 던지잖아요. 세계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화두가 아니라. 자기계발서의 핵심은 나만 바뀌면 된다는 거예요. 세계는 한 번도 안 바뀌어요. 인생론과 자기계발서를 믿는 사람들은 나중에 자살을 해요.  488


자기 계발은 자기를 서서히 죽여가는 거네요.(지승호)

서서히 죽이다가 자기계발에 실패하면 죽어요.(웃음) 그런 것들이 우리 사회의 특징인데 오래됐죠.  489




chapter 9 음악이 필요한 시간


항상 편집자들에게 강조하는 게 이런 거예요. 책이 많이 안 나가도 된다. 최소 10년 이상 나가는 책을 쓰는 게 중요한 거다.  494


인문학 책은 자기계발서나 스티브 잡스 책과는 달라요. 사람들이 읽었을 때 표면적이고 너무 쉬운 것. 그게 대중적 글이 아니에요. 

중요한 건 독자가 자기 이야기처럼 받아들이게끔 글을 쓸 수 있느냐예요. 그게 인문학에서의 대중성이죠. 독자들과 우리 이웃이 어떤 심리 상태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요.  496


대중적 글쓰기를 하려면 동시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계속 업데이트해야 해요.  497


얻어걸려서 한두 마디 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유기적 연결이 되는지가 문제예요.  507


자기 스스로 당당하게 살고자 해서 생긴 고통의 폭이 큰 사람이 선생이에요.  513


인문학 하는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지승호)

요즘엔 사람들이 너무 조바심쳐요. 흥행하려고 하고. 그러지 말아야죠. 길게 가야지. 인문학은 농사짓는 것과 같아요. 천천히, 천천히 가야해요. 사람들이 안 듣는다고 폐강하면 안 된다고요. 한 명이었던 수강자가 두 명이 되도록 늘려 나가야죠. 상상마당 아카데미 처음 시작할 때에는 6, 7명이 강의를 들었어요. 다른 선생들은 사람 수 적어서 쪽팔리다고 초기에 다 그만뒀는데 저는 계속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친구들을 데려와서 나중에는 수강생을 제한했어요. 30명밖에 못 들어오니까. 그 당시에 수강생 수가 적다고 투덜거리던 사람들은 아직도 수강행 수가 적어요. 애정의 문제예요.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사람들이 강신주를 모르니 막 들이대는 거예요. 그 사람들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아주 많이 배웠어요. 무엇을 쓰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배운 거예요. 사람들이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알게 된 거죠. 전에도 얘기했지만, 제가 상상마당을 그만둔 건 제 얘기가 메아리 되어 돌어온다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사랑한다면 흉내 내선 안 되거든요. 자기 얘길 해줘야죠. 저는 다른 사람 경험을 느낄 준비와 연습이 되어 있는데, 그걸 잘 안 해줘요.  518


철학이든 음악이든 결국 자기 것을 만들어내야 일가를 이룰 수 있다는 거네요.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존중받을 수 있다는 거고요.(지승호)

'나는 나다' 이것에서 뿜어져 나와야 해요.

그러면 인문학적 기초가 있어야 한다는 건데요.(지승호)

인문학적 기초에다 살아 있는 경험이 더해져야죠.  526


중요한 건 정신성이에요. 누군가를 진짜 사랑하면 방법을 찾아내죠. 방법을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에요. 방법 가지고 사랑하는 것을 우리는 바람둥이라고 하잖아요. 저 사람을 진짜 사랑하면 아껴주는 방법을 찾아요. 그래서 정신성이 중요한 거거든요. 흉내 낸다는 것과 표현하는 것은 다른 거니까요...

표현할 정신성이 있다면 기술적인 것, 기법은 다 찾아서 하게 돼 있어요. 기법부터 배운다고 해서 없던 정신성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나니까 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것들, 나의 시선, 이것을 얼마나 긍정하고 표현해낼 수 있는가는 사활을 건 문제예요.

이건 예술가나 저자뿐 아니라 각 개인도 마찬가지예요. 그럴 때 자기를 사랑하게 되고 건강해지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흉내 내면 자신을 부정하게 되잖아요.  527


겁 많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면 안 해본 것은 무서운 것이고, 무서운 것은 나쁘고 저주스러운 것이라고 여긴다는 거예요. 제가 "번지점프 무섭죠?" 하고 물어보면 무섭대요. 해봤냐고 물어보면 안 해봤대요. 갇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그냥 하라고, 하면 된다고, 번지점프를 연속으로 다섯 번 하라고, 다섯 번 했는데 무서우면 그때는 진짜로 무서운 거라고 얘기해줘요. 고소공포증이라는 건 다 뻥이거든요. 산에 올라가면 고소공포증이 있대요. 그냥 무섭다고 하면 되지, 고소공포증은 무슨 고소공포증이에요? 그냥 무서운 거예요. 나 무섭다. 비겁하다. 용기 없다. 그러면 되잖아요. 고소공포증 하면 뭔가 본질적인 게 있는 것 같잖아요.  528


초고 작업을 어떻게 하느냐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쭉 정리해두셨다가 집중적으로 쓰신다고 하셨는데요. 시놉시스 같은 것을 만들어두고 작업하시나요?(지승호)

큰 틀이 있죠. 제가 단행본을 열입곱 권 썼잖아요. 이제는 어떤 걸 강의해도 이게 책이 될지 안 될지를 알아요. 이건 분량이 어느 정도 나올지도 가늠이 되고요. 발악을 하고 중언부언해도 책이 안 나오는 것이 있고, 이건 양이 넘쳐서 세 권은 되겠다는 것도 있고. 그래서 강의안을 쓸때도 이건 일회성인지, 아니면 다른 강의와 연결이 되는 건지 그런 감이 있죠.

저는 강연과 집필을 분리하면 안 돼요. 강연과 집필이 같이 가야 되는 사람이에요. 강연 따로, 집필 따로 그렇게 분리 못 해요. 저는 한 가지 일을 하는 거예요. 겉으로 볼 때는 두 가지 일을 하는 것 같으니까 '언제 강연을 하고 언제 책을 쓰세요?'하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어떤 상황에서든 발언하거나 생각하는 것들을 전체 구조 속에서 연결지어야 해요. 그래야 나중에 그것들이 쌓여서 책이라든가 하나의 정리된 결과물로 나올 수 있어요. 그러니 막 던지지 말고, 뭔 하는지 알고 해야 돼요. 이 발언이 책의 어느 꼭지에 들어갈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서 해야죠. 만약 제게 그런 감각이 없었으면 그렇게 많이 강연 다니면서 책으로 먹고 살 수 없었을 거예요. 지금의 책이 좀 팔려서 강연을 안 해도 어껴서 살면 살 수 있거든요. 가끔 들어오는 인세로. 옛날에는 그게 힘들었죠. 그래서 제가 원하는 작업이 아니라, 예컨대 학술진흥재단 같은 데서 선정해서 국가가 돈 주는 일들, 그런 일들을 의무적으로 해야 했거든요.

벤야민이 그렇게 글을 쓰고 살았어요. 그래서 벤야민을 보면 동질감이 느껴져요. 글들이 짧고 어떤 글들은 왜 이걸 가지고 썼을까 싶기도 한데, 잡지에서 써달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죠. 하지만 거기에도 벤야민의 정신이 담겨 있어요. 벤야민은 그걸 쓸 때도 전체 구조 속에서 어떻게 엮일까를 고려하면서 썼거든요. 단행본 말고 벤야민이 여러 잡지에 기고한 것들을 모아 전집을 ㅁㄴ들어도 일관적이에요. 점묘와 같지만 전체적으로 벤야민다운 그림이 그려지는.

저도 그러고 있지 않나 싶어요. 단행본 뿐 아니라 잡지에 쓴 칼럼, 신문에 쓴 칼럼, 짧은 글들이 하나의 전체를 그려 나가는 거예요. 그런 활동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이걸 정리해서 하나의 작은 우주로 만들어야겠다 싶을 때 집필을 하는 거고요.

머릿속에 있는 것을 조합해서 끄집어내시는 거네요.(지승호)

처음에는 힘들어요. 자료를 모으는 데 집을 지어본 적이 없으니 재료가 모자라기도 하고 남기도 해요. 예컨대 목차를 구성해보니까 경제 문제만 너무 많아요. 그러면 책 균형이 안 맞잔하요. 그런 것처럼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모아야 될 것과나중에 책으로 묶일 것이 최적화되죠. 열일곱 권째 쓰니까 지금은 최적화가 된 거예요. 천재적이어서 그런 게 절대 아니고 열일곱 권의 시행착오가 있었던 거예요. 이제는 대충 길다가 보면 눈에 띄는 거죠. '이건 문으로 쓰면 되겠네'(웃음)

그런 감각은 누구한테 배우는 게 아니에요. 해봐야 해요. 이것저것 모아서 만들다가 너무 ㅁ낳이 모았다. 이건 모자라네. 그러면 돌아다녀야겠죠. 힘드맂만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해요. 적어도 단행본 세 권은 써봐야 그 감이 생겨요. 한 권 쓰고는 '나 안 돼' 이러지 말고 열심히 하면 한 권 정도는 다 쓸 수 있어요. 그러고는 그때 다 절망하죠. 잔뜩 지쳐서, 거기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돼요. 그래서 첫 책 내는 사람들을 항상 격려해줘요. 다섯 권 정도 내고 나면 여섯 번째 책에서는 좋아진다고. 구성도 좋아지고 책 자체가 아름다워진다고 마치 자신이 좋아하는 인문학 책이나 고전을 봤을 때 누껴지던 품격이 생겨요. 균형미도 잡히고.  540-542


실존적인 자기 자신의 세계가 있느냐, 무언가에 대해서 울리모가동요가 있느냐. 이게 중요해요. 저자에게서 그게 사라지면 그 저자는 끝나는 거예요. 시인이 시를 못 쓰는 이유는 그 울림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시 나부랭이는 쓸 수 있지만 이미 시가 아니죠. 감정을 담아서 표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날조하는 거죠. 영화를 보고 울면서 평론을 쓰면 글이 좋잖아요. 그보다 더 센것은 자기가 직접 사랑해보고 힘들어서 쓴 글이고...

울림이 없으면 글을 못 써요.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없고, 사람들이 잘 못됐는데도 안타깝지도 않고, 어떤 현상에 대한 분노도 없고, 노을을 봐도 아무 느낌이 없고.. 이렇게 일체의 감정이 고갈되면 글을 못 써요.  543


책 읽는 것은 다 우연이에요. 서점에서 대충 얻어걸려서 읽거나 누가 선물해줘서 읽거나, 그게 묘미죠. 결정돼 있지 않아요.  547


인생은 만나고 마주치며 지내는 시간이 반, 그리고 그것을 추억하는 시간이 반이에요. 그래서 만나고 마주치고 기쁘고 슬프고 하는 시간들이 나중에 그럴 기력도 없을 때 추억의 대상이 되고 힘이 돼요. 그래서 1년 이든 2년이든 사랑은 진하게 해야 하는 거예요. 나머지 시간 동안 그것만 기억할 수 있어도 살아갈 힘이 된다고요. 기생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젊었을 때 3년을 연애했대요. 그런데 기생은 결혼을 못 하잖아요. 그 후 50년이 넘도록 그 남자랑 사랑했던 추억을 가지고 산 거예요. 벚꽃이 열흘 반짝 피어도, 나머지 기간은 볼품없는 시커먼 나무로 있어도 그 기억 때문에 나머지 시간을 견디는 거잖아요. 겨우 열흘 남짓한 그 시간 때문에 벚나무라고 불리는 거예요.  549




chapter 10 인간을 위하여


"라캉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당신이 소망하는 것인가?' 지금 내가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과거 타자가 욕망했던 것, 혹은 금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불일치를 극복했을 때, 우리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사랑이 아니었으며, 혹은 우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사랑이었다는 때늦은 후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셨는데요. 진실로 내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지승호)

해야 할 까 말아야 할까 망설이게 되는 지점들이 있어요. 검열이 들어오는 거거든요. 그러면 해야 돼요. 기준은 그거예요. 그래야 검열을 넘어설 수 있어요. 일종의 모험이죠. 일종의 모험 같은 것들이 자기를 깨어나게 하는 거니까.  565


인간은 독립을 빨리 못해요. 기지도 못하고 이도 늦게 나니까. 부모 곁에서 부모 말을 들어야 하니까 부모의 문화가 전다로디는 거예요. 인간한테 역사와 문화가 가능한 것은 우리가 과거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인데, 과거에 의존한다는 건 곧 부모한테 의존한다는 얘기예요. 결과적으로 기존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하는 거예요. 어머니가 좋아하는 게 김치면 김치를 먹어야 하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것이 1등이면 1등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 가치를 받아들이면 내가 욕망하는 거지만 사실은 어머니가 욕망하는 거죠. 내가 김치찌개를 먹고 싶어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가 김치찌개를 먹기를 원했던 어머니의 바람이 실현되는 거예요.

사람이 재미있는 게, 나를 사랑해줬으면 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자기의 욕망이 달라져요. 내가 좋아하는 남자 친구가 클래식을 좋아하면 클래식을 듣게 된다고요.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내가 안 맞춰주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클래식을 정말 좋아한다면 그 사람의 세계에 다가가기 위해서 클래식 티켓도 선물해주고 같이 공연장도 가는 거예요. 그런데 공연장 가서 내가 아무것도 못 느끼면 꼬받 두 시간을 견뎌야 해요. 거기 가서 졸면 돈 내고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거든요. 그러니까 미리 브람스를 계속 들으면서 연습하고 공연장에 간다고요. 그러면 훨씬 좋으니까. 그러면서 클래식이 들리기 시작하는 거고, 그 남자랑 헤어지더라도 나는 브람스를 좋아할 수 있는거죠.

그런데 성숙해진 다음에 사랑할 때, 이성이든 존경하는 사람이든 내가 독립되어 있는 상태에서 사랑할 때는 달라요. 내 욕망을 내가 선택하는거니까.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선택한 거니까요. 스피노자가 얘기했듯이 사랑의 기준은 나한테 기쁨을 주는 것인데, 여기서 기쁨이란 그 사람을 만나서 내 삶의 의지가 확장되는 거예요. 가능성이 더욱 열리는 거예요. 저 인간을 만났더니 좁아져. 그러면 사랑 안 해요. 그 사람을 만나서 삶을 더 누릴 수 있다는 느낌, 확장된다는 느낌이 중요하거든요. 

라캉의 핵심 테마가 우리가 욕망하는 것의 타자성인데, 문제는 그 타자가 내가 선택한 타자냐, 아니면 부모처럼 내가 절대적으로 그 타자에게 던져져서 적응하는 것이냐 하는 거예요. 인생에 있어서 딱 한 번의 혁명이 필요한데, 그게 어른이 되는 거예요. 부모의 가치관을 철저하게 버리는 이 과정은 굉장히 힘들어요. 한번 어른이 되면 어른인 거예요. 자기 욕망을 갖추는 것이 어른이 되기 위한 기본이에요. 핵심은 내가 타자를 선택한다는 거죠. 생존하기 위해서라는 동물적 의미에서 어머니의 욕망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있어야 내 삶이 더 확장된다는 의미에서 적극적으로 타자의 욕망을 선택하는 거죠. 그럴 때 어른이 되는 거예요.

기존의 내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부모나 사회의 욕망을 극복하는 방법은 이런 거예요. 할까 말까 주저하게 되는 행동들이 있어요. 그렇다면 그건 하고 싶다는 거거든요. 그럴 때 해야 돼요.(웃음) 100%예요. 사실 그게 만만치가 않아요. 사실 조금만 잘못돼도 '하지 말걸'이렇게 돈다고요. 그래도 그걸 한 번 내질러보고 직접 겪어보는 거죠. 그게 나쁠 수도 있어요. 그때는 그걸 자기 탓으로 돌리면 되는 거예요. 대개 번지점프 싫어하고 고소공포증 얘기하는 친구들 보면 한 번도 번지점프를안 해본 애들이에요. 하지만 번지점프를 열 번은 해봐야 자기가 그것을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열 번을 했다가 번지점프에 환장하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러면 나중에는 패러글라이딩도 하고 헬기에서 뛰어내리기도 한다고요.

예전에 위악(爲惡)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잇어요.(<위악이란 비범한 의지>, <채널 예스>)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억지로 해보라는 건데, 그건 제 얘기가 아니라 이상이 한 얘기예요. <날개>의 앞부분을 보면 이상이 위악의 의지를 가져보라고 해요. 19세기 문학이 도스토옙스키에 갇혔잖아요. 도스토옙스키를 벗어나려면 위악을 저지르는 우아함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貪食)하는 아이러니를 실철해"봐야 한다는 이상의 표현, 그게 핵심적인 거예요. 자기로 서겠다는 것, 도스토옙스키를 벗어나보겠다는 것, <날개>를 위악적으로 쓰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선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기존 가치관에 따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악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행해보는 거예요. 바로 그 악이라는 요소 속에 나에게 맞는 욕망이 있어요. 그런 애들 있잖아요. 무모하게 모험하고, 젊었을 때 도서관에 갇혀 있지 않고 막 들이대는, 일단 해보는 거예요. 해보고 결정하는 거죠. 해보고 나서 '이거 더럽게 나쁘다, 하지 말자'라고 판단하는 건 온전히 내 판단인 거예요. 하지만 하지 말라고 머릿속에서 검열해서 영원히 하지 않는 것은 내 판단이 아닌 거죠. 그걸 겪어내야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악 중에서 '이건 악이 아니라 선이구나'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의 고유성을 찾게 되고 어른이 되는 거거든요. 힘들어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고, 니체 얘기가 맞아요. '너희가 알 수 있는 것. 알아야만 되는 것을 감당할 용기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위악이 우리의 탈출구예요. 악이라고 금지하는 걸 행해보려는 우아함, 사람들이 진짜로 못 먹겠다고 하는 것을 몇 번 반복해서 먹어보는 거예요. 예를 들면 삼합. 전라도 음식이잖아요. 그거 처음 먹을 때 진짜 힘들었거든요. 선배가 먹기 진짜 힘들 거라고, 속이 터질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딱 열 점마 ㄴ먹어보래요. 그래서 꾸역꾸역 다 먹었는데도 싫더라고요. 그런데 일주일 정도 후에 다시 삼합을 먹었는데 그때는 입에서 그냥 굴러다녀요.(웃음) 전에는 몰랐던 거죠. 그런 혐오감 같은 것들을 한 번 넘어가 보는 것, 그게 위악이에요.

이상의 제스처를 좀 배워야 해요.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먹어보고, 무서운 번지점프지만 웃으면서 뛰어내려보고, 불쾌하고 싫은 건데 한 번 해보기도 하고. 위악으로 시도했던 것들이 다 좋아진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걸 자기화한다는 차원인 거예요. 반반이에요. '야, 이거 너무 좋다.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할 수도 있고요. '역시 어머니 말씀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는다더니' 이럴 수도 있어요. 그래도 어쨋거나 내가 검증해본 거잖아요.  566-569


여행 많이 다니고, 만힝 부딪치고, 우리가 봤을 때 '왜 저런 걸 하지'싶은 사람들이 가진 건강함이 있어요. 왜냐하면 그만큼 자기를 찾은 거니까요. 거기에서 오는 여유들이 느껴지죠...

내 삶은 하나인데 너무 많은 가치관이 혼재해 있으니까 복잡하다고요. 복잡한 사람은 행동을 못 해요. 단순해야죠. 어쩌면 행동이 빨리 나오는 편이 나아요. 생각은 항상 뒤에 가도록 해야 해요.  570


위대한 문인들 보면 기인이 많잖아요. 기이한 행동을 많이 하는데. 그게 다 발악이에요. 위악의 행동을 하니 기인으로 보이는 거예요. 겁 안 내고 위악적인 행동, 기괴한 행동을 해요. 문인이라고 하면 사라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니까 회사원이면 엄두도 못 낼 짓들을 하는 거죠. 세종대왕 동상에 올라가서 소변을 본다거나. 경찰에 잡혀가서는 자기가 세종보다 높다고 우기고 나중에 보니 시인이야. 그러면 풀어줘요.(웃음) 인문학은 고유명사라고 했잖아요. 나 자신을 찾으려는 사람들. 

발악을 하는 거예요. 악이라는 것들을 다 해보는 거고요. 자기를 찾으려는 모험이라고 할 수 있죠.

내가 판단했을 때 이건 해서는 안 돼, 이런 느낌이 드는 것들을 많이 해 봐야 해요. 누굴 사랑하면 안 될 것 같아, 이 판단 속에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악인 것 같다 싶으면 확 질러버리는 거예요.(웃음) 진짜 악일 수도 있어요. 그러면 나중에 처절하게 배우는 거죠. 그렇게 인격적인 동일성을 갖춰야 돼요.  571


맨 얼굴로 사는 게 가장 이상적인 사회예요. 그런데 우리는 권력자 앞에서 자기 감정을 토로하지 못하잖아요. 억압 사회예요. 감정을 토로하지 못하는 게 억압의 척도예요.

페르소나를 써야 할 때, 광대 얼굴을 해야 할 때와 내 감정을 토로해야 할 때가에 있는데, 이걸 구분할 수 있으면 그나마 건강하게 사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꿈꾸는 사회는 감정을 토로하는 사회예요. '에이, 저게 뭔데' 하고 대통령한테 지랄해도 사람들이 웃을 수 있는 것, 이게 건강한 사회거든요. 가면을 벗어야 하는데 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가면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커플들, 부부들 보면 알아요. 저 인간들은 둘 다 평생 무장하고 사는구나. 

중요한 것은 페르소나를 약자가 쓴다는 거예요. 가부장제 사회면 여자가 더 많이 써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쓰는 건데. 그런 게 너무 강해지면 보호가 아니라 페르소나에 갇혀버려요.

사랑의 위대함은 페르소나를 벗게 해요. 정직함을 요구하니까요. 그래서 사랑하면 벗게 돼요. 벗었다가 상처도 많이 받게 되죠.  574-575


인문, 사회 과학을 읽은 남자애들이 여자를 잘 유혹해요. 말로 잘 구워삶아요. 조심해야 돼요.  577


'사랑의 경험이 중요한 것은 사랑을 하면 감정에 정직해지기 때문이에요. 제가 아는 사람은 친해지고 사랑하면 진짜 냉정하게 얘기하는데요. 눈에 약간 무당기가 있어요. 친한 사람한테 그 눈빛이 나와요. 진짜 투사 하듯이 얘기를 하고, 눈으로 압박해 들어오면 정직할 수밖에 없어요. 매력적인 사람이죠. 저도 강한 사람이고 정직한 사람이니까 그 사람이랑 눈에 부딪치면 정말 재밌어요. 대개는 농담 삼아 얘기하는데 가끔 삶에 대해 얘기할 때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제가 맨얼굴을 던지면 그 사람도 맨얼굴이 되고, 농담 따먹기를 하면 그렇게 해줘요. 편하죠. 거꾸로 되면 안 되죠. 내가 맨얼굴 하고 있는데 상대는 가면 쓰고 있고, 내가 가면 썼는데 상대는 맨얼굴 하고 있고, 그러면 안 되죠.

서로 맨얼굴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세밀한 얘기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좋은 거죠. 행복하고.  581-582


현실에 대한 집중도가 중요해요. 그런 사람만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집중할 테니까. 한곳에 신경을 써서 에너지를 너무 많이 낭비하면 다른 쪽에다 에너지를 못 쓰잖아요.  582


사랑은 내려놓는 거예요.  583


"무릇 동심(童心)이란 진실한 마음이다. 만약 동심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진실한 마음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린아이는 사람의 처음 모습이고, 동심은 사람의 처음 마음이다. 처음 마음이 어찌 없어질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렇지만 동심은 왜 갑자기 없어지는 것일까? 처음에는 견문(見聞)이 귀와 눈으로부터 들어와 우리 내면의 주인이 되면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자라나서는 도리(道理)가 견문으로부터 들어와 우리 내면의 주인이 되면서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이러기를 지속하다 보면, 도리와 견문이 나날이 많아지고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이 나날이 넓어진다. 이에 아름다운 명성이 좋은 줄 알고 명성을 드날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또 좋지 않은 평판이 추한 줄 알고 그것을 가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분서(焚書)>의 <동심설(童心說)>에 나오는 구절을 책에 인용하셨는데요. 도심이란 어떤 건가요?(지승호)

동심은 가면 벗은 얼굴이에요. 맨얼굴이에요.

동심을 간직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웃음) (지승호)

그게 아니라 저는 인문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파괴력이 있는지 보여주는 거예요. 저도 옛날에는 비겁했거든요. 진짜 비겁했어요.

"좋지 않은 평판이 추한 줄 알고 그것을 가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라고 했는데, 보통 사람들이 뭐 하나 발각되면 그걸 가리려고 또 거짓말을 하고, 그러다가 망가지잖아요.(지승호)

저 같은 경우는, 예컨대 누가 제가 모르는 시집을 가지고 와서 저한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봐요. 시에 대해서 책을 썼으니까 안다고 생각하고 얘기하는 거죠. 그러면 저는 '안 읽어봤는데요' 혹은 '몰라요. 저는 읽고 싶은 시만 읽어요. 그 시집은 재밌어요?' 이런 식으로 얘기해요. 처음에 바로바로 다 정리해요. 쓸데없이 가리려고 하면 안 돼요.

인문학자가 되면서 제가 배운 건 사람 만날 때 가급적이면 그렇게 정직하게 만나야 한다는 거예요. 인문학은 화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정직하려는 데 도움이 되는 거예요. 김수영도 사상보다 백배나 중요한 것이 정직함이라고 햇어요. 정직한 사람만이 뭐든지 배우니까. 정직하다는 것은 맨얼굴이고, 동심이고, 감정을 드러내는 거니까 그만큼 상처도 많이 받아요. 내 맨얼굴을 저 인간이 못 받아들이네. 이런 것도 빨리 알고요. 그러면 그 인간이랑 안 만나면 돼요. 계속 나보고 가면을 쓰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어요. 그런 인간들은 안 만나야죠.

가면을 벗어야 상대방을 알아요. 가면을 한 번만 벗으면 돼요. 세상이 홍해처럼 가라져요. 내 맨얼굴을 인정해주는 사람과 아닌 사람들. 그런데 가면을 써도 이 가면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나뉘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가면을 벗으면 가면 쓴 모습이나마 좋아해주던 사람마저 없어질 것 같다고 두려워해요. 그런데 안 그래요. 새롭게 재편되는 것일 따름이에요. 그러니까 맨얼굴을 인정하는 사람과 부정하는 사람으로 양분하는 편이 나아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렇게 살아야 해요. 가면을 썼을 때도 내 가면을 싫어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가면을 벗으면 내 가면을 싫어하던 사람이 나를 좋아해줄 수도 있다는 것은 모르고, 좋아했던 사라밍 없어지리라는 생각만 해요. 그래서 무서워하는 거예요. 패를 다 까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랑 있는 편이 낫죠. 그게 더 건강한 거니까.

가면의 역할은 일대일의 관계를 못 하게 하는 거예요. 가면은 대개 사회적 가치가 있는 거잖아요. 이런 얼굴을 해줘야 상대방이 좋아한다든가. 이렇게 흉내를 내줘야 상대방이 좋아한다든가 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고 연기니까 배역이 정해져 있고 시나리오가 정해져 있잖아요. 그러니까 가면은 일대일의 관계를 막는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가면을 쓰게 되면 일대일 관계가 안 되는 거예요. 가면이라는 존재 자체에 사회적 가치가 들어와 있는 거니까요. 돈 있는 척, 유식한 척, 허점이 없는 척, 지금까지 만난 남자만 해도 열 명인데도 '남자가 뭐예요?' 이러는 거.(웃음)

누구를 사랑하려거나 누구한테 사랑받으려면 가면을 벗어야 해요.  584-587


일단 제가 기본적으로 할 말이 많아요. 글을 쓴다는 것은 가지치기예요.  588


바라건대 정직하게, 더럽게 힘들었으면 좋겠어요. 힘든 게 사랑이라고요. 편한 것은 사랑이 아니고.  589


사랑에 대해 강의할 때 사람들이 물어요. '선생님은 행복해요?' 그럼 저는 이렇게 대답하죠. '불행에서 온 통찰이다. 그게 더 리얼하지 않냐? 행복하면 사랑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다. 행복을 성찰한다는 것은 행복에서 멀어져 있다는 거다. 김수영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자유를 깨달았듯이 우리는 그런 식으로 알게 되는 거다.'

보통 자기들이 압받당하면 비겁하게 '선생님은 행복해요?'라고 물어보거든요. 제가 화날 때는 이렇게 얘기해요. '그러면 내가 불행하다면 너희들은 내가 한 얘기를 안 지킬 거냐? 옳은 것은 옳은 거다. 선생이 못 했다고 해서 옳은 것이 그런 게 되지는 않는다. 철학이 필요한 것은 옳은 것은 옳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옳은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판단은 각자가 해라. 그런 얘기면 지키지 말고, 옳은 얘기라면 그렇게 살면 된다.' 그리고 '옳게 사는 것은 상당히 힘든 것'이라고 덧붙이죠.

그런데 옳은 것을 관철시키려고 살 때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아요. 

연어가 언제 제일 행복하냐면 더 이상 헤엄칠 힘이 없어서 마지막에 손을 놓을 때예요. '아, 이제는 버티지 않아도 된다' 제대로 산 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안식으로 여겨요. 제대로 못 산 인간들이 생명 연장을 꿈꾸죠. 왜냐하면 옳게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인문학은 사랑과 자유예요. 그래서 반체제적이고, 김수영이 얘기했던 것처럼 불온한 거죠.

자유로운 사람나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얻어요.  590-591




에필로그 -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다웠다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력의 상태를 말한다.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이란 지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지성을 사용할 결단력과 용기를 내지 못하기 때문에 미성숙에 머무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과감히 알려고 하라! 그대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 칸트  593


위대한 잡품을 남겼던 작가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다른 누구도 흉내내지 않고 자기만의 목소리를 자기만의 스타일로 남겼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루라도 빨리 회복해야 할 인문정신입니다. 이렇게 인문정신을 회복하는 순간, 우리는 정치가나 자본가, 혹은 멘토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무력감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인문정신을 제대로 갖춘 사람은 우리에게 항상 물어봅니다. 스스로 주인으로 사유하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은 용기가 있는가? 당신은 주인으로서의 삶을 감당할 힘이 있는가?  595


강연 말미에 저는 항상 반복해서 이야기하곤 합니다. "여러분! 저를 선생이나 멘토로 기억하지 말고, 강신주라는 평범한 한 사람으로 기억해주세요. 그냥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하는 어떤 남자가 있었다고 기억해주세요." 저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을 저는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선생님과 학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강신주와 여러분 각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선생님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가라고 가르치지 않으니, 저는 선생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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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세상에 맨얼굴로 당당히 맞서기 위해(지승호)

'인문정신은 자신만의 제스처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강신주는 '지금까지 나온 인문학책들이 가진 전반적인 느낌이 그런 식으로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고 회피하는 것들이었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진정한 인문학의 길은 굉장히 아파요 사실은'이라고 강조한다.  8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다고 자책을 한다. 그래서 자신의 남은 생은 타인을 보듬는 데 쓰겠다고 다짐한다. 잘못을 갚아가며 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설픈 위로는 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에게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하라고 진심을 다해 외치고 있다.  9


부모가 자식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선생이 학생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기다려주지 못하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서럽기 때문에 기다림을 포기합니다. 하지만 기다림을 포기하면 행복도 함께 없어집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진한 슬픔이 배어 있다.  10



chapter 1 인문정신은 당당하다


상대방을 자기가 배웠던 담론 지평으로 자꾸 끌어당기면 안 되고, 그 사람과 대화와 소통이 가능하도록 경제학도 정치학도 윤리학도 담론 지평으로 깔 수 있어야 해요. 그런 사람을 철학자라고 하는데, 우리 시대에는 철학자가 별로 없어요.  24


<인문정신을 다시 생각하며>(<기획회의> 313호, 2012. 2. 5)라는 글에서 "인문정신은 자신만의 제스처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곤철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셨는데요. 지금의 인문정신의 핵심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자본주의라는 것이 왜 나쁘냐 하면 자본이란 힘으로 모든 사람을 다 똑같이 돌게 하거든요. 그러면 사람들이 자기 제스처로 못 살죠. 자기 스타일대로 살아가려면 싸우기도 해야 하고 고통도 많이 생길 텐데, 그걸 감당해야겠죠.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돌면 독재자가 안 생겨요. 민주주의라는 것은 제도의 문제 이전에 개개인이 어떻게 주인으로 서느냐의 문제예요. 나 스스로가 주인이 안 되면 노예가 되어 주인을 찾게 된다고요. 그래서 제가 '멘토'를 비판하는 거예요. 좌우지간 스스로 돌아야 해요.(지승호)  27


언어의 궁극적인 목적은 항상 침묵이고, 침묵은 실천이거든요.  28


인문정신이라는 것은 고유명사예요. 사람마다 자기 이름에 걸맞은 스스로의 스타일이 있다는 거죠.  28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당당한 애정, 하나밖에 없다는 소중함을 가지면 자본이든 권력이든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아요. 자긍심이 있어야 해요. 누가 나를 죽인다 해도 '땡큐'인 거죠. '내가 무서운가 보다. 내가 당당하게 사는데 내가 죽는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야'이런 정신이죠.

석가모니가 죽어가면서 부처는 각자 얼굴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니까 자기 스스로 서라고 했는데요. 이 말은 곧 개개인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란 거예요.  29


니체도 "너희들이 차라투스트라를 따르지 않고 너희들 힘으로 섰을 때 차라투스트라는 너희에게 돌아가리라"이렇게 말하잖아요.  30


인문정신을 갖는다고 해서 행복하고 그런게 아니에요. 당당한 거예요. 진짜 인문정신을 가져야 누굴 미워하고 사랑할 수도 있다고요. 눈치 보면서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게 아니라..

인문학, 철학의 특징은 주어가 '나'나 '너' 까지라는 거예요. '우리'라고 쓰면 사회과학이 돼요. 정치적 담론이 되고 '우리'와 '나'는 달라요.  33


"아파도 당당하다"라는 카피가 그래서 나온 거예요. 대충 관념적으로 장난치지 말고 맞서라고, 그래야 문제의 핵심에 이르게 돼요.  34


삶이 그렇게 아프고 힘든 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고 자꾸 연어처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에요. 

자신이 가려는 방향으로 관철해가려고 해야 해요.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려면 더럽게 힘들죠. 사회에서 가만히 있겠어요? 그런 사회적 저항에 부딪힐 때 항상 고맙게 여기고 '내가 살아 있나 보다' 이렇게 생각해야죠.  35


들뢰즈는 책을 읽었을 때 감응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거라고 했어요. 두 가지 독서법이 있는데, 하나는 정보를 입수할 때처럼 서류 상자에서 뭘 빼내듯 독서하는 거예요. 논문 쓰려고 어쩔 수 없이 읽는 식이죠. 다른 하나는 감응의 독서법이에요. 감응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하다. 감응 안 하면 던져버려라. 이런 거죠. 내가 지금 좋아하는 것이 중요해요. 내가 지금 안 읽는 책도 내가 성숙해지면 읽을 수 있거든요.

책 읽기는 실천 행위거든요.  40


인문학적 독서법은 감응의 독서법이에요. 내가 감응하는지 안 하는지가 중요한 거에요.

여러분은 왜 독서 토론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대개가 자기가 읽었던 내용의 요지를 합의 보러 온대요.(웃음) 그게 아니죠.  41


토론하는 사람들은 서로 사랑해야 해요. 책이라는 계기로 저 사람을 알아가겠다고 해야 하는데 서로 지적인 경쟁이나 하려고 하니까  딱하죠.  42


자기 소리를 체계적으로 만든게 자기 철학이에요.

자기 스스로 자기 스타일로 생각하고, 자기 것을 만들어야 해요.  43


신자유주의가 무서운 게 자본이란 논리로 획일화시키잖아요.  44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잖아요. '한 사람이 죽을 때 하나의 세계가 없어지는 거다. 한 사람이 탄생할 때 하나의 세계가 탄생한다.' 그게 인문정신이라고요. 상대주의를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 입각점을 얘기하는 거죠.

<철학vs철학>이 왜 야심작이냐면, 묶어놓은 철학자 둘 중 하나는 권력적이고 다른 하나는 인문적이에요.

모두가 똑같이 보면 그게 무슨 사회에요? 하나의 기계고 전체주의죠.  47


<철학vs철학>의 에필로그에 단채 신채로 얘기 썼잖아요. '조선에 불교가 들어오면 조선의 불교가 되어야 하는데 왜 불교의 조선이 되느냐.'  48


재미있는 책은 무조건 읽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쌓인 건데 20여 년 쌓인 다음에 쓴 책이 <철학vs철학>이에요.  49


철학은 쉬워요. 수학 같다고 하잖아요. 몇몇 규칙과 공식만 정확하게 이해하면 편해요. 처음에 벽이 좀 높아서 그렇지 한 단계만 넘으면 참 편해요. 판단력도 빨라지고. 그런데 시는 안 그렇잖아요. 시는 컨디션이 좋으면 읽히고 나쁘면 안 읽히고 그렇거든요. 음악도 그래요. 기분이 괜찮고 바쁜 일도 없으면 브람스가 잘 들리는데, 어떤 날은 소음으로 들려요. 철학은 안 그래요. 초기에 기초적인 학습을 중시해요 하면 돼요.

철학사 공부하고 철학 개념어 익힌 다음에는 철학자 한 명을 완전히 익숙해지도록 파야 해요.  53


인문학 고전을 읽는다는 건 나의 삶이 어떤 철학자나 인문학자에 육박해 들어가는 건데, 내가 시를 못 읽어내고 영화를 제대로 못 보고 철학 책을 제대로 못 읽는다는 건 그만큼 내 삶이 심화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책을 못 읽는 것은 비겁하게 자신의 삶을 심화하지 않고 검열하며 조심조심 살아서 그래요.  55


<철학vs철학>은 앞의 것은 나쁜 철학, 뒤의 것이 좋은 철학이에요. 저는 객관주의를 표방하지 않아요. 철저하게 주관적이에요.  58


이 시대에 철학이라는 학문의 의미는 무엇일까요?(지승호)

분업화에 저항하고, 전문화에 저항하는 것. 철학이 원래 그래요.

철학자는 힘들어요. 닥치는 대로 다 봐야 해요. 과학책도 보고, 음악도 듣고 다 해야 해요.

요즘 말하는 '통섭'이라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지승호)

통섭은 창의적인 것으로 대충 돈 좀 벌어보겠다는 거예요. 자기편과 유사한 것만 끌어당기는 진영 논리가 될 수도 있고요. 

주로 자연과학 ㅉ고에서 자기와 유사한 인문학을 모으는 식인데, 도킨스 라든가 통섭 얘기하는 사람들 보면 자리랑 맞는 것만 골라서 통섭하고 마르크스주의 같은 것과는 통섭을 안 해요. 비겁한 거죠. 실제로는 이것이 더 위험할 수 있어요.... 통섭은 수정주의 라고 보면 돼요.  61-62


단순한 공식인데 경쟁, 분리가 인간 사회에 일어나면 체제가 이기는 거고 반(反)경쟁, 사랑, 공존 쪽으로 가면 체제가 붕괴돼요. 이건 그냥 공식이에요.(웃음) 서로 사랑하지 않게 하고, 서로 경쟁하게 하는 것이 체제고요. 우리가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것은 사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데서 나오는 거죠. 체제를 극복한다고 해서 신뢰가 찾아오지는 않아요. 이미 불신하고 있잖아요. 우리가 사랑하면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어요. 이것은 하나의 인문학적 공식이에요. 우리의 사랑을 막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 비판적 지식인이 돼요.  63


공동체의 와해는 누구를 죽인다는 거거든요. 

경쟁은 공동체 교육을 와해시키는 건데요. 그런 것을 대오 각성해야죠.

인문학자는 텍스트를 두 개 읽어야 해요. 고전 텍스트와 '현재'라는 텍스트, 현재라는 텍스트를 읽어야 그 빛으로 고전이 보이고, 고전 텍스트를 읽어야 현재가 보이거든요.  69


제 글이 쉬워지고 편해진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대중성의 차원이 아니라 사람들과 얘기를 굉장히 많이 해서 어떻게 써야 사람들이 편하게 읽는지를 알아요. 지금 사람들 문제의 보편적이 구조도 알고요. 그러니까 글이 편하죠.

중요한 건 핵심이에요. 핵심을 찌르고 진짜 그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에 들어가는 것이 대중성이고 애정이죠.  71


음악이든 영화든 무용이든 한 인간이 자기를 표현했다면 그 사람은 왜 이렇게 표현했는지 그 느낌 속에서 그 사람의 정신성에까지 육박해 들어가는 연습을 많이 해요. 철학자니까 철학을 가지고 음악을 듣는다. 이런건 아니에요. 영화 볼 때 평론할 것을 먼저 생각하면 어떡해요? 일단 느껴야죠. 영화를 보고 감동했다면 어디가 좋았는지, 그게 왜 좋았는지를 살펴보고 그걸 알아듣기 좋게 잘 풀어서 설명해주는 것이 평론이잖아요.  73


해석하지 말고 먼저 이해하려고 해야 해요.  74


표절은 정말 창피한 거예요. 모름지기 인문학자라든가 사상가라면 다른 사람이 쓸 수 없는 것을 써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썼던 것을 쓰지 말아야죠. 그리고 다른 사람과 비슷한 것을 썼을 때는 쪽팔려 해야죠. 예컨대 김수영에 대해서 쓴다면 저는 김수영에 관한 책을 다 봐요. 그중에 저랑 비슷한 시각이 있으면 안 써요. 뭐하러 써요? 다른 것을 써야죠. 어떤 책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할 때에는 그 책을 딱 한 번만 보고 써요. 그다음에는 안 봐요. 그 책을 흉내 낼 수 있거든요. 책을 탈고하고 나서야 그 책을 다시 봐요. 혹여 영향을 받았나, 내가 그 책에서 얼마만큼 벗어났나. 나는 그 작가에게 얼마만큼 육박했나. 이런 걸 확인하기 위해서요. 이 과정을 마치고 나면 그제야 출판사에 전화하는 거죠. 강신주의 책인데 강신주다워야죠. 모름지기 인문학자라면 그래야 해요. 그런 식으로 벽에 부딪혀 고통도 직접 느껴보면서 리얼리티를 얻어야 해요.  75


남들 모르는 세련된 담론만 떠들어서 팔아먹으려는 게 아니라 전부 제가 소화시켜서 한 얘기예요. 글은 두 종류가 있는데요. 먹다가 게워낸 글이 있고 따끈따끈한 똥처럼 나온 글이 있어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글이 게워낸 글이에요. 제가 고생해서 글을 써보니까 지금은 그게 딱 보여요.  77


'우리'로 들어가면 이미 사회과학으로 들어간 거예요. 인문학이 아니에요. 인문학은 '나'예요. 각자 각자의 나, 그리고 각자 각자의 '나'들이 공명하는 것이고요. 그래서 인문학의 궁극적인 그림이 민주주의죠. 절대적인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내 생각은 있어요. 절대적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이 100% 같지는 않지만, 디테일은 다르지만, 공명할 수 있다는 보편성, 그것이 인문학의 가능성이고 민주주의의 기초죠.  81




chapter 2 사랑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사람은 혼자 잘 놀아야 해요. 혼자 잘 노는 사람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어요. 사랑 찾어서 안달복달하는 사람은 어린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은 안 돼요. 나중에 자기가 지쳐버려요. 혼자 있는 사람들,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어요. 오버하고 징징거리며넛 '우리 만나, 만나'하는 애들도 얼마 못 가요. 사람이 바위 같고 산 같고 그래야죠. 애정 결핍은 다 있어요. 그걸 응시해야 해요. 자꾸 채우려고 하면 안 돼요.  87


사랑에는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요. 예전에는 연애할 때 핸드폰도 없고 삐삐도 없으니까 다섯 시간 기다리는 것도 가능했는데 요즘은 한 시간 기다리는 사람도 많이 않은 것 같아요.(지승호)

기다리는 법을 잘 몰라요. 언제든 버튼만 누르면 바로 되는 것처럼 생각해요. 그런 게 병폐죠. 그래서 기다리는 것에 노심초사할 때가 많잖아요. '왜 전화가 안 돼? 왜 전화기기 꺼져 있어?' 이 정도면 사랑이 아니에요. 기다린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동의어예요. 기다리지 못한다는 것은 그 존재가 음식 같은 거라는 거예요. 배고파 죽겠는데 짜장면은 왜 안 와. 이런 거예요. 와서 먹고 나면 그다음에는 찾지도 않아요.  89


아이와 절절하게 대화를 해야 한다고요. "엄마는 이걸 원해", "전 싫어요" 이게 관계예요. 사랑의 관걔고 기다리는 관계인 거죠. "엄마는 이게 좋은 것 같아"라고 던져놓고 기다리는 거예요. 이건 굉장히 힘든 거라고요.  91


기본적으로 나쁘다는 것은 자신감이죠. 돈이 없는데도 그러면 뭔가가 있는 거예요. 어떤 자신감이.  93


행복의 높이가 어느 정도 되는 사람들은 그 이상이 되어야 결혼을 하는데요. 불행한 사람들은 조금만 잘해줘도 돼요. 콧물 날 때 손수건 하나만줘도 사랑한다며 바로 호텔에 갈 수 있어요. 거기서 행복을 느끼는 거죠. 그 문턱이 너무 낮은 거예요. 그런 여자들 보면 불행하죠.  95


글의 힘은 애정에 있어요. 관심받으려고 글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특히 젊은 친구들, 그래서 글 쓰겠다고 하면 "사랑받으려고 그러는 거야? 누굴 사랑해서 글을 써야지. 글이 제일 잘 나올 때가 연애편지를 쓸 때야. 그 사람을 사랑해서 절절하게 나를 표현하는 거지. 글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거야"라고 얘기해줘요. 철학 한다는 애들이 산이나 무인도에 가서 <순수이성비판>을 읽는다고 해요. 저는 지랄을 한다고 하죠. 모든 문제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고, 고독은 그 다음에 있는 건데 혼자 있을 때는 그냥 자라고 하죠. 음악을 듣든가.  102-103


안에 쓰레기가 많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흐려져요.  104


서로 배워야 해요. 배우려면 비워야 하고요...

세상은 이분법적이에요. 그걸 초월하는 순간 고상한 책이 나오고 보수적인 책이 나오는 거예요. 저는 죽을 때까지 이분법적이었으면 좋겠어요. 나쁜 놈은 나쁜 놈이라고 하고, 50, 60대에 썼는데 30대에 쓴 것처럼 읽히는, 날카로움을 가진, 칼이 무뎌지지 않은 인문학자가 돼야죠...

살아 있으면 싸워야 해요.

저는 '나이 든' 사람들을 싫어해요. 그군 원숙함이 아니에요. 지침의 표현이죠.  105


인문학자로서 꼭 해요 할 것이 종교 비판서를 쓰는 거예요. 

인간끼리 결정을 보자는 것이 인문정신인데, 비겁하게 수틀리면 신한테 가는 것은 권력이나 자본한테 가는 거랑 똑같아요...

인문학의 적은 자본이 아니에요. 제일 많이 팔리는 책이 종교책이에요...

네가 노력해서 바꿀 수 있고, 너의 남루함을 자각해야 하고, 자꾸 저승에 있는 천사를 볼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여기서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걸 인문학자가 이야기해야만 해요.  106


"라캉에 따르면 불행히도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과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은 일치하지 않는다. 전자가 페르소나(persona)라면, 후자는 맨얼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페르소나를 찢어버리고 맨얼굴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연기가 아니라 삶으로서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지승호)

인간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해요. 그런데 자본의 논리도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 종교의 논리도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거예요. 항상 오늘은 수단이에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사람은 내일돼도 또 오늘이잖아요. 그날 잘 살면 돼요. 우리에게 내일은 잇다는 사람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데, 내일이 되면 또 내일이에요. 신자유주의도 그걸 요구하는 거잖아요. '지금 빡세게 고생하면 나중에 편하다.' 그러다가 죽는 거예요. 이게 사람들을 지배하는 논리거든요.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와 기독교는 상당히 유사한 데가 있어요. 돈이 안식과 구원을 준다는 점에서도 그렇고요. 벤야민도 그랬어요. 자본주의를 종교성으로 다뤄야 한다고, 자본주의의 핵심은 종교성에 있다고, 사람들이 돈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믿는다고. 종교 비판은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 비판, 대표자를 추종하는 황당무계한 것에 대한 비판 등을 총괄하는 것이에요.

원리주의에서는 선과 나와의 관계만 중요하고 인간들이 안 보여요. 원리주의가 생기면 가족은 안 보이고 신한테 올인해요. 그리고 원리주의가 생기면 목사가 얘기한 대로 정치적 행동을 다 결정하고 이웃을 안 봐요. 그 모습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으로 나오는 거죠. 돈에 올인해서 가족을 돌보지 않는 부유한 아버지처럼 신에 올인해서 가족을 안 돌봐요. 가지들은 믿어요. 내가 신에게 구원을 청하니 가족들에게 은총이 있을 것이고, 내가 돈을 버니 가족들이 행복할 거라고, 중요한 것은 신에 올인하거나 돈에 올인하면 인간관계가 붕괴된다는 거예요. 사랑이 무너지는 거죠. 그래서 종교를 비판하는 거예요.

원리주의가 생기는 것을 진짜 조심해야 해요. 원리주의라는 것은 원리를 믿고 따르고, 그 원리를 장악하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헤게모니를 독점하는 거잖아요.  108-110


기독교인들은 제가 '사랑해야 한다'고 하면 '아, 예수님의 말씀이야'이래요.(웃음) 그런데 제 말은 사랑을 하려면 신을 죽여야 한다는 거거든요.  111


'너는 그 남자를 사랑하는데 그걸 부정하고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라고 한다. 네 감정을 부정하는데 네가 네 삶의 주인이니? 네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그랬던니 얘가 전화하면서 울더라고요.  115


"초월자에 대한 지나친 몰입은 자신의 삶을 돌보지 못하도록 만든다"라고 하셨는데요. 그게 종교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사랑할 때도 상대방을 초월자처럼 받아들이게 되면 어렵잖아요. 동거를 해보라는 것도 동거가 그 환상을 깨는 과정일 수 있다는 것일 텐데요.(지승호)

사실은 환상을 깨라는 거죠. 환상이 깨지지 않으면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난 거고요. 서로한테 그런 사람인지 항상 응시를 해야 해요.  116


성적인 관계는 두 사람이 맺을 수 있는 수만 가지 관계 중 하나일 뿐인데 그걸 금기시하니까 그것에만 집중해요.  117


다른 것은 다 용서되는데, 성적인 것만 용서가 안돼요. 그래서 음란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진짜 무서운 것은 내 부인이 독서 모임에서 카프카를 읽고 다른 남자와 영혼이 통하는 거거든요. 그게 진짜 음란인데, 우리는 손만 안 잡으면 되는 거예요.(웃음)  118


제도를 생각한다는 것은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인데, 그러면 두 사람의 사랑에 금이 가기 시작해요.  119


결혼은 사회제도예요. 연애할 때는 오늘 맛있는 것 먹자. 영화 보자고 하는데, 결혼하면 아끼자고 하잖아요.  122


사랑은 '아까징끼' 같은 거예요... 만병통치약.  123


한 인간에게 단 한 번의 혁명이 있는데,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거예요. 정신적이든 정서적이든 경제적이든 완전히 독립했을 때 어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별로 없어요...

빛과 그림자가 다 보여야 되는 거예요. 나에게 각별한 아버지면 아직 독립을 못 한 거예요. 좋은 것만 보는 거겠죠. 어머니의 추한 모습, 다른 사람보다 못난 모습까지 보여야 해요. 그런 빛과 그림자가 보일 때 독립하는 거라고요. 어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안 해요. 그래서 부모가 죽는 것이 더 나빠요. 판타지를 자극해서 아버지를 날조한다고요.  125


결혼과 동거 중에서 결혼이 안정적으로 보이죠? 그게 남루한 거예요. 두 사람이 사랑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틀인데, 기존의 어떤 틀에 들어가야만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사랑은 두 사람이 감당하는 거예요. 감당 못 하면 끝나는 거죠. 사랑하려면 미래를, 영원을 꿈꾸지 말아햐 해요.

지금 내가 저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해주고 있나. 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게 나한테 행복이다. 이런 것에만 최선을 다해 집중하면 된다고요.  127


가진 사람만이 버릴 수 있으니까요. 못 가진 사람들은 채우려고 해요.  129


실천적인 단계를 보자면, 일단 생계의 위협을 없애야 해요. 생계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에게 인간적 행위를 요구하는 건 무리예요. 

우선 그 조건을 갖추고 나서 사랑하는 방법으로 쓸 수 있는 정신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해요...

옛날에는 농민 봉기가 있었잖아요. 농민 봉기는 6개월 안에 결판을 봐야 해요. 벼를 심어놓고 농민 봉기가 일어나면 수확할 때쯤 다 흩어지거든요. 동학농민운동이 붕괴된 것도 벼 수확기가 돼서 그래요. 혁명이 성공하려면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요. 지주나 호족이 '괜찮다, 썩더도 된다. 우리가 식량 준다'이러면 성공해요.순수한 농민전쟁은 힘들어요. 그리고 또 하나, 시골에는 농한기가 있어서 혁명이 가능해요. 도시에서는 혁명이 일어난 적이 없어요. 다들 직장 다니느라 바빠서, 쿠바혁명도 시골에서 시작했다고요. 러시아혁명도 그렇고 심지어 나치(Nazi)도 바이에른이라는 농촌에서부터 세를 키워갔잖아요.  131




chapter 3 철학적 시읽기와 김수영


우리는 해방이 안 됐거든요...우리가 이념 때문에 갈라진 게 아니라는 것을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몰라요. 이념 때문에 분단됐으면 차라리 멋이나 있죠. 우리는 외세 때문에 분단됐거든요. 남북에 들어온 외세에 이념이 있었고, 남북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이념에 맞춰 살았을 뿐이에요. 이념에는 경직성이 있거든요. '걔네들이 얘기했던 대로 이렇게 살아야 해'하는 제스처나 흉내 내니까 양쪽 다 경직돼 있기는 마찬가지죠. 김수영은 양쪽 체제가 가지고 있는 이념이라는 것이 덧없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135-136


정치철학자인 카를 슈미트(Schmitt)가 '정치의 본질은 적과 동지의 구별에 있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정치는 억압이라고 봐야 해요. 억압의 근본 문제는 적과 동지예요. 체제 내부에서 갈등이 벌어지고 헤게모니가 흔들릴 때 독재자나 권력은 외부와 전쟁을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내부 단합을 모색해요. 제가 농담 삼아 하는 얘기가 있어요. 딸이 어머니를 부정하는 콩가루 집안이 있는데, 그 어머니가 가족을 단합시키려면 옆집 아줌마와 머리채 붙잡고 싸우면 돼요. 딸한테 '너 누구 편들래?'하고 던지는 거죠. 그러면 딸이 자기 어머니 편을 들고, 그렇게 대동단결해서 며칠 가요. 그러다가 옆집 아줌마랑 갈등이 없는 상태에서 보면 다시 어머니가 미워 보이는 거죠. 그러면 어머니가 또다시 옆집 아줌마랑 싸워요. 이게 우리 사회예요.  141


<연꽃>이라는 시와 <김일성만세>를 같이 읽어야 해요. 연꽃은 사회주의자를 비판하는 시거든요. 인간을 못 보고, 인간의 자유를 못 본다고 이념이 강조돼도 인간의 자유는 억압되는 거예요. 자본이 강조돼도 인간의 자유는 억압되는 거고요. 인간을 제외한 일체의 외적이고 초월적인 힘, 권능, 다른 근본, 근거를 제기하면 억압이 오는 거예요.  142


어쨌든 김수영은 동베를린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부산에서 문인들을 상대로 강연할 때 '정치적 자유가 없는 곳에서 그나마 예술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 마라. 표현의 자유가 없는 곳은 예술의 자유가 없는 곳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해요.  148


지성인들은 좋은 사람 콤플렉스를 버려야 해요. 자기 얘기를 뚜렷하게 하면 그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과는 친해지고, 싫어하는 사람이랑은 틀어지는 거예요. 어쩔 수 없는 거죠.  149


다 좋다고 한다면 이건 무지렁이예요. 보잘것 없는 엷은 인간이에요. 제대로 살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홍해 갈라지듯이 갈라지거든요. 내가 분명하게 그 선을 그거워야 해요.  150


시인들이 시집 제목을 정할 때 가장 중요한 시를 고르거든요. 자신의 모든 시를 이 느낌으로 읽으라고 시집 제목으로 말해주는 거예요.  151


억압이 있는 권위적인 가정에서 아버지가 잘못했다고 저항하면 한 대 맞잖아요. 그런데 말을 했는데도 안 맞았다면, 내가 아버지의 권위를 수용해서 안 맞을 만한 말을 했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이걸 알아야 해요. 억압이 상존하는 곳에서 자유에 고통이 없으면 허용된 자유고 길들여진 자유예요. 그런데 다 자유롭대요. 자본의 억압부터 오만 억압이 다 있는데, 알아서 다 피하는 거예요... 지금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는 다 허용된 자유, 기만일 뿐이에요.  154


우리는 자유를 몰라요...

김수영은 그걸 잊지 않아요. '너희에겐 언어의 고통 이전의 고통이 없다.'.. 자신이 자유롭고 당당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부딪칠 때 , 그때 느껴지는 고통이에요.  155


억압이 있는 사회에서 고통이 없다면 동물원 울타리 안에 풀어져 있는 동물과 비슷한 거죠.  156


간짜장을 제일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러면 제사상에 뭘 올려야 돼요? 간짜장 올려야 하잖아요. 홍동백서만 따질 게 아니라, 절차를 생각한다는 건 인간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인간을 포획하는 하나의 방식이에요. 보수적인 방식이죠.

'절차적 민주주의'라고 하는데 민주주의가 어떻게 절처예요? 각자가 주인인데 왜 절차를 미리 정해요. 사람들이 절차를 정해야죠...

절차적 민주주의에 초점을 두면 절차와 민주주의를 같이 놓음으로써 민주주의를 희석시켜요. 형식만 따르면 민주주의를 같이 놓음으로써 민주주의를 희석시켜요. 형식만 따르면 민주주의가 되리라고 생각해요. 굉장히 잘못된 생각이에요.  157


절차를 근본으로 생각하면 민주주의에 저해가 될 수도 있고 억압이 될 수도 있다고요. 그리고 절차라는 규정을 정확하게 아는 전문가들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포획해버려요...

다수를 지배하는 사람들이 절차를 강조하는 법이에요. 까먹지 말아야 해요. 절차의 최종 심급에는 다수결, '쪽수'로 가자는 얘기가 있어요. 정치적 야욕이 있는 거예요. 인간이 가진 역동적인 힘, 사랑이 가진 참여의 힘이 있는데, 절차가 강조되면 그게 억눌리고 소멸돼버려요. 그러니까 절차만 주장하는 건 위험한 거죠.  158


관념의 자유, 언어 유희만 있고 삶에서 아무것도 안 봐요. 김수영은 총알이 날아오는데 안 피해요. 오히려 총알이 날아오는 쪽으로 가는 거예요. 가서 총알 하나 맞고 비명이 나오면 그게 시 한 편이에요. 서정주라든가 나머지 시인들은 총알이 날아오면 앉아서 피해요. 그랬더니 꽃이 보이는 거죠. 꽃은 해석할 수 있잖아요. 그게 시를 보면 보여요. 요새를 꽃이 아니라 카페예요. 거기서 지겁함이 보이고, 그들의 비겁한 제스터에서 뭘 피했는지가 읽혀요.  163


모더니즘의 정신은 세련되게 글 쓰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쓰는 거예요. 새로움의 근거는 나라는 사람은 천년 전에도 없었고, 천년 후에도 없다는 고유성에 있는 거고요. 자기 자신이라서 쓸 수 있는 글이니까 새로운 거예요. 이게 모더니즘의 정신이에요.  166


저는 자유로운 사람만이 인간의 억압 구조를 발견한다는 것을 알거든요... 

자유로운 사람만이 고통을 느낀단 말이에요.  173


언어의 고통 이전에 삶의 고통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삶의 고통은 자유로운 사람만 느껴요. 굴종하고 복종하는 사람은 못 느낀단 말이에요.  174


위대한 인문학자와 사상가가 나오는 조건은 그 사라므이 당당함이에요. 포로수용소에서 김수영만이 그랫다는 거예요. 포로수용소도 하나의 사회예요. 혀용된 것만 하면 돼요. 억압이 잇다고 저항이 일어날 것 같아요? 안 그래요. 저항은 자유로운 사람만 일으켜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덕목이에요.  175


'기존 담론들 다 배우고 양자역학 다 배우면 뭐해요? 기존 담론의 틀 속에서 논물을 쓰면 새로운 발견을 못 하니까 자유로워야죠.  175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자신의 철학이 정리된 다음에 오스트리아 오지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앙들을 진짜 많이 때렸어요. 얘네는 초등학교만 다니고 농사지어야 하는 애들인데, 비트겐슈타인은 인격자로 키우려는 거죠. 부모들은 애들을 왜 때리느냐고 난리인데 정작 아이들은 한 명도 문제 삼지 않았던 거예요. 왜냐면 비트겐슈타인은 아이들을 사랑했거든요. 아이들은 맞을 때 알아요. 그런데 부모들은 그걸 빌미로 공격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이 자꾸 애들 보고 너희는 성숙해져야 하고 촌구석을 떠나야 한다고 하니까. 농부들에게 지식은 경운기예요. 아들을 선호하는 이유도 가마니를 나를 수 있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너희는 경운기가 아니다. 너희는 인간이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아이가 '나는 경운기예요' 이러면 한 대 때리는 거예요. 아이들은 자기를 사랑해서 그러는 줄 다 알죠. 아이들은 날 사랑해서 때리는 건지 아니면 부인이랑 싸워서 날 때리는 건지 다 알아요. 그러니까 사실은 이 문제예요. 어떤 사람이 잔인하고 폭력적인데 나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감당해야죠.  179


사랑하면 연인의 가슴에 고개 처박고 심장 소리만 듣고 있는 것이 제일 좋잖아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이나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찾을 때 사랑은 붕괴되는 거예요. 이유가 없어요. 이유는 제3자가 심판하려고 할 때나 대는 거예요.  182


"시인이 물속으로 직접 들어가 온갖 물고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존재라면, 철학자는 그물로 끌어올린 물고기를 다시 확인하고 만져보는 사람입니다"라고 표현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지승호)

흔히들 시는 주관적이고 철학은 객관적이라고 생각해요. 시가 주관적인 것은 맞지만 보편적이기도 하거든요. 철학이 오히려 주ㅗ간적일 수도 있어요. 시는 주관적이지만 보편적인 데가 있고, 결국에는 같다는 거죠. 그걸 강조하려 했던 거예요. 제가 시와 철학을 왜 같이 엮었는지 보여주려는 거고요. 

핵심은 경험을 우회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책을 보는 것도 간접 경험이에요 간접 경험이라도 해야 해요. 경험을 했느냐 안 했느냐의 잣대는 마음이 움직였느냐예요. 경험을 하기 이전의 마음 상태와 한 후의 마음 상태가 달라야 해요. 책을 읽어도 간접 경험이 안되는 건 책을 읽으면서 밑줄 치고 중요한 것 외우고 해서 그래요. 그건 책 읽는 게 아니에요. 읽었을 때 작가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것이 간접 경험이거든요. 제가 만난 소설가들은 다 자기 유년 시절을 가지고 초기작을 써요. 그다음서부터는 취재예요. 자기를 퉐하게 봤던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 얘기를 들으면 금방 공감해요. 그 리얼이티를 확보하지 못하면 작품을 못 써요. 위대한 소설가가 되려면 자기를 투명하게 정리하고 자기 삶에 대해 얘기하다가 다른 사람의 삶을 공감할 수 있는 지점에까지 가야 하거든요. 

제일 중요한 것은 직접 경험이에요. 직접 경험은 진짜 중요한 거예요. 감정이 일어나는 것, 이게 인문학의 핵심 정신이죠. 분노의 감정이 안 일어나는데 분노에 대한 글을 쓰면 안 돼요. 인문학책은 사람들에게 그 감정을 일으켜야 해요. 그 감정이 분노든 뭐든, 사회과학이 인문학은 아니지만, 좋은 사회과학 서적은 분노도 일으켜야 해요. 요즘 사회과학 서적들은 너무 건조해요. 사람은 감정이 움직여야 움직이거든요. 철학은 머리로 들어와서 마음까지 흔들어야 좋은 철학이에요. 시는 마음으로 들어와서 머리를 흔들어야 하고요.

좋은 철학책은 지적인 이해와 분석을 요구하는데, 책이 딱 끝나고 나면 마음속에 확들와요. 후배들이랑 원전 강독할 때 '책이 네 마음을 울려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 사람에 대한 논문을 써야 한다. 그걸 써나가는 과정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과정이고 그 사람에게서 독립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논문을 써야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나중에 독립된 저자로서 살 수 있다'라고 조언해줘요. 하지만 대개 안 지키고 중요하다는 텍스트가 있으면 인용하고 요약해서 논문을 쓰죠. 안타까워요. 강의할 때도 항상 제자들에게 '감정을 못 지키면 끝장이다. 오늘 너희들 감정이 들었니?'하고 얘기해요. 

왜 감정이 들어야 하냐면요. 원래 사람은 다 감정이 들기 마련인데 감정을 억압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있어요. 드러내면 안 되는 거예요. 다쳐요. 예컨대 영국 왕실 근위병처럼 감정 없이 굳어 있는 사람들, 이게 최악의 모습이에요. 걔들이 왜 감정이 없겠어요. 여행 가서 그런 애들 보면 앞에서 막 웃겨준다니까요. 제가 인문학자잖아요. 가서 웃겨요.(웃음) 감정을 만힝 죽이면 나중에 진짜 죽어요. 감정이 없을 때 인간은 기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의 본질은 감정이에요. 감정대로만 하면 세상이 안 돌아가니까 이 감정을 어떤 통로로 뚫어놓을 것인가 고민하기 위해 이성이 필요한 거죠. 딱 그정도로만 이성은 의미가 있어요. 이성은 절대 감정에 저항하면 안 돼요. 감정을 흐르게 하는 소통 창구를 찾는 역할을 해야 돼요. 그런데 이게 반대로 돼 있는 인간은 이성이 너무 강하죠. 감정을 억압해요. 그러면 인문학이 이상하게 읽힐 수도 있어요.  185-187


'김수영에 대한 나의 해석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 건 김수영에 대한 나의 사랑이 당신들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해석이 강한거다'라고요. 모든 해석의 강도는 사랑의 강도에서 측정되어야 해요...

그래서 얘기하는 거죠. 당신들은 나보다 김수영을 더 사랑하느냐고 사랑을 해야죠. 집중하고 관찰하고, 그래야 디테일이 보여요.

저는 우리 문학평론가들의 글이 마음에 안 들어요. 첫 번째 연을 분석하고, 두 번째 연, 세 번째 연이 어쩌고 저쩌고. 한데 어떤 사상가를 이해한다고 할 수 있으려면 그 사람이 지금 살았더라면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라는 데에까지 육박해 들어갈 수 있어야 해요. 사람들은 제 책이, 제 해석이 평론가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 거냐고 자꾸 물어보는데, 평론가들이 김수영을 제대로 사랑한 적이 있나요? 김수영을 4.19의 시인이라고 하질 않나. 자유의 시인이라고 하면서 그 자유의 의미를 제대로 숙고하지도 않잖아요.  189


체제가 우리를 길들이려고 하는 이미지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요. 하나는 CF등을 통해서 보여주는, 예쁜 여자가 멋진 옷을 입고 있거나 행복해 보이는 여자가 가전제품을 들고 있는 것 같은 유혹의 이미지예요. 또 하나는 우리를 쫄게 만드는 이미지예요. 대표적인 게 CCTV 같은 것, 그리고  MRI나 CT 촬영 같은 진단 영상들이에요. '나중에 용의자가 될 수도 있다', '나중에 병들어 죽을 수도 있다'라는 공포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죠.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게 만들어요. 미래를 보게 되고 미래를 생각하고 잇으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랑 얘기를 못 해요. 내일 시험 걱정하면 이 사람이랑 못 있거든요. 그러니까 체제가 노리는 것은 인간의 관걔를 깨알같이 만들어서 분리시키는 거예요. 미래에 대한 공포의 이미지가 그런 작용을 하는 거죠.  197


인문학은 나의 발견이거든요... 모든 글은 고통이든 기쁨이든 감정을 느낀 다음에 써야 하는 거예요... 감정이 안 들었는데 있는 것처럼 하면 사기 치는 거고, 그런 글은 사람을 못 울려요.  209


항상 강조하는 게 스스로 가지 감정을 못 지키면 아무도 안 지켜준다는 거예요. 저는 제가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기 감정을 내색 안 할때 너무 힘들어요....사랑받으려면 항상 자기 감정을 드러내야 하고, 싫은 건 싫다고 해야 해요. 그러지 않고서 자기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기적을 바라는 거죠.  210


원문을 기계적으로 짜집기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에 감응을 했느냐, 이 관점에서 쓰는 거죠. 

철학(Philosophia)에서는 소피아(Sophia)가 아니라 필로스(Philos)가 먼저예요. 사랑을 하면 지혜로워지는 거지, 거꾸로는 아니에요. 지혜에 대한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하면 알게 된다는 거죠. 별을 사랑해야 별에 대해 많이 알게 되고, 여자를 사랑해야 여자에 대해 많이 알게 되는 거죠. 여자에 대해 많이 안다고 사랑을 제대로 하나요? 그건 아니죠.  219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려면 남을 따라가지 말고 홀로 나아가야 해요. 비유를 하자면, 위대한 사람들이 걸어갔던 발자국이 눈길에 남아 있는데 그게 그들의 스타일인 거예요. 그런데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면 내 것이 안 남잖아요. 그쪽 길이 아니라 눈 덮인 길로 걸어가야 자기 발자국, 즉 자기 스타일이 생기는 거죠. 누구를 흉내 내면 안 돼요. 내 감정으로 밀어붙여야 해요.  223




chapter 4 제자백가를 통하라


동양 고대 텍스트, 제자백가 텍스트에서 우화가 많은 것은 왕한테 얘기한 거고, 노골적인 건 제자한테 얘기한 거예요.  241


인문학 책을 읽을 때 핵심적인 것은 시선이에요. 잘못 공부하는 인간들은 시선이 아니라 디테일한 묘사들만 외우는데, 중요한 건 시선이에요. 그 시선을 가지고 그 안경을 가지고 우리 삶을 봐야죠. 

그 안경으로 바라본 상(像)에만 집착하면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는데요. 젊은 친구들은 철학자의 시선을 익히기보다 철학자가 그 시선으로 봤던것을 보려고 해요. 왜냐하면 그게 디테일해 보이고 구체적으로 보이니까 안심이 되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상을 보여준 철학자의 그 시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좀 성숙해질 텐데. 철학자가 그 시선을 봤던 것, 개념을 외우고 그걸 가지고 떠드는 거죠. 철학자든 시인이든 그 삶이 지금 살아 있다면 이 문제에 이렇게 대응했을 것이다 하는 것까지 알아야 정말로 그 사람을 아는 거예요. 그래서 시선을 배워야 하는 거죠. 인문학적 독해는 그렇게 해야 돼요.  253




chapter 5 유가를 넘어서


공자와 진시황, 화(和)와 동(同), 이들이 정치철학의 두 전통, 국가주의의 두 전통이에요.  270


후기 묵가들은 진나라로 들어가요. 천하를 돌아다녔던 묵가들이 국가를 통일하자고 결정한 거예요. 그리고 걔네들이 진나라 법률의 기초를 닦아요.  274


자본가 마인드에 두 가지 모델을 적용할 수 있어요. 법가적 자본과 유학적 자본. 계열사 사장들의 자율권을 인정하면 유학적인 것이고, 총수가 철저하게 총괄하고 사장 갈아버리면 법가적인 것이죠.  284


춘추전국시대나 제자백가는 일직선적인 발전이거든요. 앞 사상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상이 등장하는 거라 일정한 흐름이 있어요. 공자가 나오고, 공자를 비판하면서 묵가가 나오고, 묵가를 비판하면서 양주가 나오고, 이런 식의 패턴이 있어요. 철학사가 있는 거죠.  288


인문학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문맥 파악이에요. 잘 파악해야 해요.  298


형식과 예법은 최선의 관계가 아니라 최악의 관계를 막는 데 필요한 정도예요. 그런데 그걸 최선의 관계라고 생각했을 때 억압이 생기는 거고, 반드시 이렇게 하라고 하면 문제가 되는 거죠.  307


예전에 제자들한테 항상 얘기해주던 강독 요령이 뭐냐면, 열 구절 중에서 아홉 구절은 쉽게 독해가 되는데 한 구절이 독해가 안 된다면 아홉 구절이 다 틀렸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해석 안 되는 구절을 버리죠. 또 하나 기억해야 될 것이, 어떤 것이 기록으로 남겨졌다면 그것이 그 당시에 비범하고 특이한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비행기가 허구한 날 추락한다면 뉴스에도 안 나와요. 일상적인 것이 아니어야 기록되고 남겨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꾸로 보면 <논어>의 구절들이 그 당시에는 너무 이상한 얘기였다는 말이기도 해요. 항상 조심해야 할 게, 그 당시의 삶의 문맥이나 역사적 상황을 통해서 해석하는 것도 좋지만 역사적인 것으로 환원해서도 안 된다는 거예요. 역사라는 것은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흐름을 다루기 때문에 <논어>의 그 구절 하나가 가지고 있느 고유성은 못 잡을 수도 있어요. 우리가 일기를 쓸 때도 특이한 일을 기록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제자들도 특이한 가르침을 기록했다고 본다면 조심해야죠. 그런 가짓수를 다 염두에 두고 제자백가서를 읽어야 해요. 그러니까 선택을 진짜 잘해야 해요.

그런 것도 염두에 둬야죠. 공자를 위해서 내버린 구절들은 무슨 내용이었을까? 공자가 이혼했던 얘기도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공자가 이혼당하거든요. 천하를 주유하다 보니까 공자 부인이 열 받아서 친정으로 가요. 친정에 가니까 장인어른이 다른 데 시집을 보내요. 그 당시는 아직 모계사회이 풍습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 그래도 됐거든요. 공자가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겠어요? 그 얘기는 다 빼는 거예요. 사실은 '공자가 남자를 만났다' 그 구절 하나가 논어 담론의 경계선일 수도 있어요. 공자의 실제 삶에서는 중간 정도의 위치일 수도 있는데, 여자관계라든가 그런 부분들은 다른 텍스트를 참고해야죠. <예기>라는 책을 안 봤으면 공자가 이혼당했다는 것을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혼당한 다음에 여자와 소인은 가까이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한 것일 수도 있잖아요.  309-311


저는 짧은 구절을 하나 보고서도 전체 문맥을 빨리 파악해서 해석 가능성을 몇 가지 열어두고 가만히 기다려요. 어떤 것이 맞는지, 칸트나 다른 텍스트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텍스트 읽는 방법이 같아요. 전체를 보고 줄거리가 뭐냐가 아니예요. 매번 해석에 들어가요. 내가 봤던 페이지 이후는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보는 거예요. 그 강도로 읽는 겁니다. 여기서 해석이 끝났는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면서 좌초되기도 해요. 에이, 이후의 페이지들이 다 불탔으면 내 해석이 맞는 건데, 이런 게 나오다니.(웃음) 텍스트를 읽어낼 때 독창적 해석이 나오는 근거는 그거예요. 전체 요지가 뭐라고 어떤 해석가가 얘기했다고 해서 색안경 끼고 안 봤거든요.  312


아까 공자가 남자를 만났다는 부분도 저는 안 놓쳐요. 그러면 물어보게 되잖아요. '남자를 왜 만났지? 자로가 불쾌해하는 건 왜지?' 가능한 상황을 다 생각해보는 거예요. 그런 다음 하나씩 하나씩 그 해석을 맞춰가는 거죠. 그렇게 맞춰가다 보면 다른 사람의 해석을 넘어서게 돼요. 열 가지 구절로 이루어진 조목이면 대개 한 가지 구절에 주목해서 나머지 구절들을 읽거든요. 그런데 저는 한 가지, 두 가지, 세 가지, 네 가지, 디테일한 구절을 가지고 해석 체계를 쌓으면서 하나의 해석을 밀어 붙여요. 그게 독해하는 요령이에요.

제 글이 다른 사람들이랑 다른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매번 한 문장 한 문장과 싸워서 이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가설을 세우고, 그 다음 구절에서 또 검증에 검증을 하다 보니 쉽게 한 구절 한 구절 넘어가는 게 아니거든요. 그렇게 읽으면 진짜 재미있어요.  313


내가 진짜 제대로 사랑을 하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읽히는데, 내가 베르테르였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고 베르테르가 나였으면 나처럼 사랑했을 거라는 경지에 오를 때 느껴지는 공감과 울림이 있어요. 이게 인문학적 독법의 핵심이에요. 역사책을 읽든 고전을 읽든, 이게 왜 중요하냐면 우리의 의사소통 가능성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제가 여자라면 어떤 여자처럼 하겠다는 것하고, 어떤 여자가 '내가 남자라면 강신주처럼 하겠다'는 게 공명이라고요. 제가 여자가 되는 게 아니라니까요. 남자와 여자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공명하는 거예요. 그게 공명의 조건이에요. 고전도 마찬가지예요. 인문학적 독법을 연습한 사람만이 공명할 수 있는 거죠. 권력은 우리를 깨알처럼 쪼개잖아요. 그에 대항하려면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공명할 수 있는 구조를 잡을 수 있어야 해요.  315-316


80년대 학번 아줌마들이 대안 교육을 한다는데, 이게 문제예요. 사회는 대안이 없는데, 사회를 바꿔놓고 대안 교육을 시켜야 하는 거잖아요. 대안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사회에 나오면 힘들어해요. 자기가 대안 학교에서 배웠던 걸로는 사회에서 못 살아요. 그래서 그 아이들이 상상마당 강의에 다 들어와요. 제가 대안적인가 봐요.(웃음) 대안 교육이란 게 아이를 가지고 또 하나의 실험을 하는 거예요. 그 아이들 인터뷰하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대안 교육 싫다고 하는 애가 반이에요. 좋아할 것 같지만 싫어해요. 좋아한다는 얘기만 들은 사람들은 침묵하는 애들을 안 봐서 그래요. 저라도 그럴 것 같아요. 어머니의 숭고한 이념을 못 따라가는 것도 있을 테고, 애들이랑 게임하고 놀고 싶은데 산에 들어가서 자연하고만 놀고, 너무 고상한 것만 하잖아요. TV도 보고 싶을 텐데, 대안 교육이 실패한 이유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기 이념을 사랑했다는 데 있어요. 형식과 절차, 이념이 다 정해진 엄마들이 무슨 교육을 시켜요?  318


우리가 시작했다가 멈출 수 있는 경쟁은 예뻐요. 딱지치기 같은 것처럼요. 문제는 경쟁을 외부에서 만들어서 멈출 수 없게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경쟁이 싫다고 온갖 경쟁을 다 없애버린 거예요. 제가 봤을 때 핵심은 그거예요. 인간은 때로는 경쟁이 즐겁기도 하거든요. '나보다 빨리 달릴 수 있어? 저거 딸 수 있어?' 꼬맹이 때 그렇게 놀았잖아요. 경쟁이라는 것이 내가 시작해서, 우리가 시작해서 우리가 멈출 수 있다면 괜찮은 거예요. 그런데 경쟁이 필수가 되어버리는 것. 내가 스톱 못 하는 게임이라면 문제가 있는 거죠. 

아이들 대안 교육 시키고 고민하는 어머니들을 만나서 너무 오버들 하셨다고 그랬어요. 경쟁하고 싶어하는 애들도 있거든요. 그런데 대안 학교에서는 신선놀음하듯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요. 예들이 재미가 없어요. 누가 그림 잘 그리나. 이런 것도 하고 싶은데, 미묘한 차이예요. 그래서 햇갈리는 건데, 80년대 학번이나 90년대 초 학번 아줌마들이 아이들을 통해 지금 처절하게 배우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이 얘기를 하면 그 아줌마들은 금방 알아요. 어디서 잘못됐는지.

제가 이걸 어떻게 아느냐면, 대안 교육 받아서 망가진 아이들이 저한테 오거든요. 그러면 야단도 쳐요. '지랄들 한다. 적응 못 해서 이쪽으로 왔니? 대안을 연장해보려고?' 상상마당 강의 같은 데 와서 터프한 얘기 듣고 철학 얘기 들으니까 대안 교육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저 생명 연장을 하는 것일 뿐이에요. 모르핀을 한 번 더 맞겠다는 거죠. 애들이 건강하지 않더라고요. 더 약해져 있어요. 그런 아이들 만나면 이 얘기를 해줘요. 

'부모들은 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실험한다. 그건 부모의 몫이다. 하지만 이제 스무 살이 됐다면 드디어 네가 너 스스로를 만들 기회를 잡은 거다. 지금까지는 부모가 뭘 가르치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건 경쟁 교육을 받는 아이든 아니든 똑같다. 문제는 스무 살 때 네가 너를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 너는 너 자신을 만들고 있니?' 이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해요.  319-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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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한국경제 길을 말하다

저자
장하준 지음
출판사
시대의창 | 2007-11-19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위기에 직면한 한국경제를 위한 희망의 대안 장하준, 한국경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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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책을 읽고 그의 인터뷰집을 본것이다.
두 책에서 동일한 패턴의 내용들이 나오기에 복습하는 차원과 사마리아인들의 내용들을 다시금 되새겨볼 수 있었다.
그에 더해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씨의 인터뷰는 잘 정리되어 읽는 이로 하여금 핵심적인 내용들을 잘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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