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기면서 낭비한 시간은 낭비한 것이 아니다.


"재미를 중요하게 생각하라"

재미는 가볍고 생각 없는게 아니니까.


위대함의 근본은 사소함.

사소한 일상,

사소한 순간,

사소한 주변,

사소한 사람들.

사진작가 구본창은 

위대함을 찾기 위해 

사소함을 본다.


마들렌에서 위대함을 찾아낸 소설가 프루스트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이 기쁨은 마치 사랑이 그러하듯 귀중한 본질로 나를 채우면서 삶의 변전에 무관심하게 만들었고, 삶의 재난을 무해한 것으로, 그 짧음을 착각으로 여기게 했다. 아니, 그 본질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초라하고 우연적이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도대체 이 강렬한 기쁨은 어디서 온 것일까?'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우리에게 뭔가 시도할 용기가 없다면 삶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니?"


인간은 자기가 상상한 모습대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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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탈.선.하.다.

길을 벗어나 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새 길을 낼 수 있을까요?  9


노인은 어린아이와 함께 있을 때 행복하고, 청소년 역시 든든한 후원자들과 잘 늙어 가는 어른들이 곁에 있을 때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9


십 년 전에 쓴 글이 지금 이야기처럼 읽힌다면 실은 사회가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말일 겁니다. 표면 구조는 변했지만 심층 구조가 변하지 않은 게지요.  10


대중문화와 소비 사회의 선봉에서 '난리'를 치던 십대들이 최근 들어 온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 표현에 따르면 '찌질이'가 된 것이지요.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 까요? 한편에서는 급격하게 무기력해지는 '찌질이'들이 생겨나고, 다른 한편에서는 '아저씨'에게 '2만원짜리 3분 키스'를 파는 청소년들이 나타났습니다.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아이들이 늘어난 한편, 브랜드 옷을 사 줄 수 있는 부모에게 절대 복종하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무엇보다 무기력한 청소년들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청소년 무기력증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아마도 가장 큰 원인은 그들에게 모델이 없다는 점일 겁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일류 대학을 나와도 취업을 하지 못하는 형과 언니들을 보면서 이들은 지레 겁을 먹고 있습니다.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면서 이들은 스스로 삶을 개척하기보다 어딘가 기댈 곳을 찾는 데 급급합니다. 학교라는 '제도'에 남아 있으면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그나마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린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영리한 십대들은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가 지나갔다는 것을 어른들보다 일찍 간파한 듯합니다. 제멋대로 나가다가는 빌어먹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계산을, 순지한 형과 오빠와 언니들을 보면서 해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앞으로 사춘기적 저항의 양상은 좀 변할 것 같습니다.  11-12


이 책에서 나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권유를 하고 있습니다.  14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이제 착한 국민 콤플렉스에서 좀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23


사실상 도덕적 엄숙주의와 선정적 상업주의는 돈이면 무엇이든 하는 천민자본주의를 계속 굴러가게 하는 '한 몸체의 두 얼굴'이다. 지금 언론에서는 이 아이들을 구제 불능한 '나쁜 아이들'로 낙인을 찍어 격리시키려 하고 있지만 바로 그 언론이 시간이 얼마 흐른 후에 이들을 스타로 치켜세울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상업주의 시대의 문법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데 정작 상업주의보다 더 염려스러운 것이 있다. 부모 중에 가장 무책임한 부모는 아이를 두고 통탄하는 부모일 것이다. 자신의 아이가 그렇게 될 때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던 부모들은 무능하기 짝이 없는 부모 아닌가? 그렇다면 자라나는 세대의 세태를 두고 통탄을 하는 나라의 '어른'들은 어떤가? 지금 일고 있는 '십대 때려잡기' 움직임을 보면서 정작 염려스러운 부분은 십대가 아니라 바로 '호통'치는 어른들의 세계다. 

배가 고픈 시대에는 식욕과 물욕이 삶의 동기가 되고, 관계의 끈이 끊어져 가는 시대에는 성욕이 삶의 동기가 된다. 압축적 경제 성장기를 거친 우리 사회는 지금 '식욕 중심적' 기성세대와 '성욕 중심적' 신세대가 서로를 무슨 낯선 짐승 대하듯 바라보고 있다. 농경적 시간에서 탈근대적 시간까지를 한 세대 안에 여행해야 했던 이들에게 그 엄청난 변화를 다 소화해 내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가 틀림없다. 그러나 달리 피해 갈 길은 없지 않은가? 통탄과 호통의 소리는 합리적 해결에 반비례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다음 세대를 밀어 내치지 않고 끌어 안을 수 있는 어른들이다. 폭력과 섹스를 통해 존재의 허무와 순수를 말할 수밖에 없는 21세기적 문법을 좋아하지 않아도 좋다. 적어도 그들과 의사소통하려는 의지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48-49


전통 사회에서 '공동체 굿'을 했듯이 함께 해결 방안을 마련하면서 학교에 떠도는 나쁜 기운을 맑게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52


후기 근대적 상황에서 아이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대학 졸업장이 아니라 자기 삶의 공간을 회복할 줄 아는 능력이다.  52


근래까지 가정 내 폭력의 희생자인 아이는 나중에 자라서 자기가 폭력 남편이 되거나 아니면 폭력을 휘두른 아버지에게 폭력 행사를 해서 복수를 하곤 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 패턴이 깨지고 있다. 사건과 관련이 없는 무고한 사람이 희생당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타인에게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무고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위험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54


'내 아이'와 '우리들의 아이'의 테두리를 넓히며 더불어 사는 터전을 만들어 가는 것 외에 우리가 안전한 삶을 되찾을 방도는 없다. 부모들은 이제 '나/우리'의 아이를 위해 지역 모임을 만들고 국회의원 후보자 중 폭력 남편은 없는지 따져 보아야 한다. 부모들은 이제 폭력 문화와 폭력적 정치판을 뒤바꿀 운동에 적극 나서는 새로운 시민 세력으로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56


상품이 홍수를 이루는 소비 사회란 바로 '소비가 미덕인 사회'를 말한다. 다품종 소량 생산 체제에서는 잘 써 본 사람이 잘 번다. 좋은 음식을 먹어 본 사람이 일류 호텔의 주방장이 되고, 맵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아이가 잘나가는 패션 디자이너가 된다. 다양한 문화 활동에 몰입한 경험이 있는 아이가 문화 기회자가 되고 또 유능한 매니저도 된다. 후기 근대를 생산자가 곧 소비자가 되는 '생비자의 시대'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이들이 소비게 치중하는 것이 못마땅하다면 아끼라고 말하기보다는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좋다. 어릴 때부터 심부름을 하면서 돈을 벌고, 학교에서 학예회라도 기획해서 부모 친지들에게 표를 팔아 보기도 하고, 중고등학교 때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 아이들은 돈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돈을 그렇게 헤프게 쓰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런 기회를 주지도 않고 돈 관리를 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으면서 아이들을 나무란다. 소비 사회의 아이들은 자기 나름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 그것을 얻어 내기가 너무 힘든 상황에 처하면 아이들은 자원을 독점한 기성세대에 적대감과 불신감을 갖게 된다. 돈을 마구 쓰고 몸을 마구 굴리게된느 것은 지금 어른들이 자원을 독점하고 아이들을 자기 식대로 관리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빈 마음으로 자원을 나누자. 스스로 돈 관리, 몸 관리를 할 수 있는게 자율의 공간을 마련해주자. '결핍의 시대'를 살아가는 전략이 있듯이, '과잉의 시대'에 살아남는 전략이 있다. 그 전략은 금지와 금욕이 아니라 체허모가 자기 기획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다.  57-58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에 아이들은 다시 순종적이 되기로 했고, 학교는 입시 학원고 학부모와 모종의 '결탁'을 함으로 입시 교육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된 것이다.  65


이제 '똑똑한' 학생들은 "조금만 참아라, 곧 잘 될 것이다."하는 말을 믿지 않는다. ... 

기존 조직에 들어가서 고스란히 써먹히고 퇴출당하거나 과로사를 하느나, 라면만 먹더라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즐겁게 살아 볼 궁리를 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71


많은 것이 무너지고 있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문제를 직시하고 각자가 자기 현장에서 시대적 전환을 이루어 낼 작은 일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 끊어진 의사 소통의 끈을 다시 맺는 일,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 그것이 시대가 요구하는 '버전 업'의 시작일 것이다.  71-72



모든 국민이 알아야 할 교육의 내용이 정해져 있던 '계몽주의' 시대의 교육은 간단명료했다. 조금 먼저 안 사람이 나중 사람에게 친절하게 가르치면 되었다. 그것이 바로 대량 생산 학교 체제였다. 거대한 교사 양성소와 거대하 ㄴ학생 양성소로 충분했다. 

그러나 조금 먼저 안 사람의 지식이 금방 적절성을 잃어버리는 급변하는 시대의 교육은 그 전 시대와는 아주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단순한 모방 학습의 형태가 아니라 개개인의 동기 유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학습일 것이다. 

요즘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무기력하고 나약한 존재라고 말한다. 너무 부족한 것이 없이 자라서 그렇다고 한다. 정말 그 말이 맞을까? 그들이 부모보다는 경제적인 부를 누린 세대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좀 덜 부족한 경제 상황에서 살았다고 해서 다른 것도 덜 부족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것은 물질주의자들이나 할 생각이다.

사실상 지금 십대나 대학생들을 보면 다른 부족한 것이 아주 많은 삶을 살았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기성세대는 그 다른 부족한 것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경제 사정으로 좌절한 경험이 많은 부모일수록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 경험과 그 세대의 '안경'에 갇혀서 아이들의 상태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부모 세대에게 '살고픈 의지'는 결핍을 메우려는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었다. 친구들이 유학을 가는데 자신이 못 가면 유학 가기 위해 열심히 살았고, 집 없는 서러움의 기억은 집을 사기 위한 강한 동기를 심어 주었다. 부모 세대의 삶은 대부분 돈이 없어서 힘든 것이 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녀들에게 힘닿는 데까지 밀어줄 테니 열심히 공부만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상태에 대해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무감각한 부모가 바보 갗고 원망스럽다. 사실상 부모 세대는 경제적 부족으로 좌절을 경험했지만, 실은 크고 작은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경험을 통해 자신감을 길렀고 삶에 대한 애착도 키웠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자유 의지를 느낄 수 있었으며 자신감도 가질 수 있었다. 때로는 사회적 저항 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삶을 향상시키려는 치열함 경험도 했다. 부모 세대는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적절한 실패와 성취의 경험을 하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진보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들은 어떻게 살아왔는가? 이미 집이 있었고, 자기 방이 있었고, 부모의 취미가 있었고, 부모의 꿈이 있었다. 경제 성장기를 잘 살아 낸 중산층 부모는 가족계획을 해서 낳은 한두 명의 아이를 어떻게 기를지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에 따라 아이를 길렀다. 아이들은 행복했지만, 어느 날 문득 자신이 누구인지 묻게 된다. 자기 정체성을 세우고 싶어지는 사춘기가 되면서 아이들은 방황한다. 사회 운동을 열심히 한 진보적 부모는 아이들의 '반항'마저도 다 잘 '이해' 하다고 한다.

아이는 갑자기 어느 것 하나 자기 마음대로 해낼 수 없는 상황에서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무엇인가를 해 보려 하는데 상황은 그렇게 좋지 않다. 공부 외에는 어떤 것에도 몰두해서는 안 되는 상황만이 그 앞에 있는 것이다. 부모는 유학 교육 보험까지 들어 두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한다. 그런데 아이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는 것이 더 힘들게 느껴진다. 자신이 그런 것을 해낼 수 있을까? 갑자기 어느 것 하나 스스로 해내 본 적이 없는 자신을 보게 된다. 자신이 그것을 원하고 있는가? 

설혹 부모가 원하는 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일류대에 들어갔다고 치자. 그랬다고 취직이 잘되는 것도 아니고 취직해서 행복할 것 같지도 않다. 경제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고 하고, 세상은 테러 사건 등으로 더욱 불안해지고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에서 자란 경우 이 문제는 오히려 덜 심각하다. 자기 부모보다 더 잘살 수 있게 되기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며, 결핍으로 인해 생긴 동기 부여가 여전히 작용하기 때문에. 그러나 부모가 성공한 경우일수록 아이의 불안은 커진다. 

게다가 세상은 하루가 멀다고 바뀌고 있다. 지금 가장 좋다고 말하는 의사 직업이 20년 후에도 가장 좋은 직업일까? 어쩌면 가장 좋다는 직업은 아직 우리 눈에 드러나지 않은 어떤 새로운 것일지 모른다. 아직 정확한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직종일 수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섣불리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또 정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지금 자기가 갈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대의 학습은 그런 길 찾기를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 '자기 길 찾기'를 돕는 학교, '자기 주도적'이 되는 것을 돕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81-84


부모 세대의 사람들은 다 그리 믿고 있지만 지금 이삼십대 중에 세상이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울리히 벡은 이러한 상황을 '위험 사회'라는 단어로 표현했는데, 이는 위험이 가득한 사회라는 뜻이 아니라, '무모한' 시도들이 난무한다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하면 된다'는 시대가 아니라, '하면 더 망치는 시대'라는 말이다.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벡은 적어도 기존의 방식으로 하던 일을 멈추고 새롭게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성찰성'이라는 이 시대의 핵심어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문제를 풀려고 아등바등할수록 더욱 문제가 심각하게 꼬이는 사회, 사실, 이럴 때는 뭔가 하려는 사람보다 남을 해치지 않고 노는 사람이 더 훌륭한 주민이 된다 많은 이들이 다시 신화를 읽고 판타지 소설에 탐닉하는 것도 모두 이런 '비약'을 요구하는 전환기적 시대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88


미국에서는 십여 년 전부터 페미니스트들이 중심이 되어 '딸들을 일터로!'라는 모토의 행사를 열어 왔다. 아이들로 하여금 다양한 직업을 체험하게 하려는 취지의 행사인데, 그날이 되면 앵커맨 옆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야무지게 앉아 아빠가 하는 일을 지켜보고, 택시 기사는 딸을 태우고 영업을 한다. 생물학 교수는 이 운동에 동참하는 대학원생들과 함께 딸을 위해 특별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유전공학에 뜻이 있는 지역 내 모든 중고생들을 초대한다. 이런 일은 교육부와 노동부의 협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가정과 학교와 직장의 벽을 허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인식이 산,학,민 모두에게 공유될 때 가능한 일이다. 

새 제도는 현장에서의 유연성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실행될 때 제대로 효과를 낼 수 있다.  101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어 한다면, 그리고 그 아이들과 함께 배움의 체계를 만들어 가려는 어른이 있다면 그 모든 곳이 학교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학교를 나온 아이들은 여러 이유로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을 뿐이지 배움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 체제에 적응을 잘 못한 만큼 대안적 학습의 방식을 찾아낼 가능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런 대안 학교들은 20~100명을 넘지 않는 작은 학교일 것이다. 학교 건물은 비어 있는 동사무소여도 되고 주택가의 이층 전셋집이어도 된다 대안 학교를 위해서는 구태여 그린벨트를 훼손하면서 학교를 지을 필요도 없다.  104


대안 학교는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의 시점을 지나 '무엇을 향한 자유' 인지를 묻기 시작했다.  116




전환의 시대라 한다. 전 인류를 거대한 공장 체제로 끌어들인 20세기는 바야흐로 퇴장하고 있다. 20세기가 낳은 천재 찰리 채플린이 [모던 타임스]라는 영화에서 선명하게 보여 주었듯이, 산업 혁명 이후 인류는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대량 생산을 위한 기계적 시계에 맞추기 시작했다. 훈육과 제복의 시댄느 시작되었고, 유토핑에 도달할 것이라는 믿음 아래 사람들은 헌신적으로 자신의 몸을 기계에 길들여 갔다. 

다행히 인류는 컨베이어 벨트 속에서 일할 인공 지능 체제를 만들어 냈다 한다. 이제 인류의 진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컨베이어 벨트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는' 체제와 창의적인 인간이라고 한다. 새로운 생산 양식을 만들어 내고 규정들을 바꾸어야 하는 때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규정집을 경전처럼 받들면서 새로운 체제를 만들려는 이들을 '왕따' 시키고 있다 대량 생산 체제에 길들여진 속도와 습관을 바꾸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변화는 분명 오고 있다. '기계 시간'에 맞추다가 허망하게 과로사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고, 이미 '똑똑한' 이들은 '체제 탈출'을 꾀하고 있다. 컨베이어 벨트 외곽에서 아주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놀고 싶을 때 놀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쉬고 싶을 때 쉬면서 유기체적인 몸을 보존하겠다는 사람들이다. 혼미한 중세 말기에 선각자들이 선택한 것이 '머리'였다면 후기 근대의 선각자는 그래서 '몸'을 선택한다.  124-125


실은 백 년 전에 폴 라파르그(1842~1941)라는 통찰력 있는 지구인이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을 남겼다.

우리는 지금 가만히 멈추어 서서

바라볼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혼자 있을 시간이

타인과 관계를 맺을 시간이 

창조적인 일을 할 시간이

즐거움을 주체적으로 즐길 시간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그저 근육과 감각을 움직일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구상하고 

기획할 시간이 필요하다  125-126


고도 관리 사회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공간'은 '몸' 하나뿐임을 감지한 이들은 패션에 지대한 관심이 있으며, 온갖 놀이와 운동과 명상을 통해 새로운 놀이적 몸을 만들고, 서로의 존재 자체를 축복하는 파티를 열면서 '노동하는' 몸을 변화시키려 하고 있다. 피어싱과 문신도 이런 시대적 표현의 일종으로 부상된 문화적 행위다. 이들은 이런 행위를 통해 도구적 합리성으로 점철된 '근대'에 대해 성찰해 내고 있다. 여기서 '성찰'이란 단순한 반성을 말하지 않는다.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길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길이 없음을 인식하고 새 길을 내기 위해 혼란의 여정에 기꺼이 들어가서 새로움을 탄생시키려는 움직임을 말한다.

이들은 이제 일과 놀이에 대해 근원적으로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고 말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성찰, 놀이와 쾌락의 복권. '웰빙'에 대한 감각의 회복, '저속 기어'로 가면서 아름답고 새로운 노동 세계를 다시 구축하자고 말한다. 스스로 소생하면서 사회를 소생시키기. 이것이 바로 '놀이하는 몸'을 갖고 싶어 하는 후기 근대인들이 해내려는 작업이다.  133


다행히 마을을 만들어 보려는 움직임들이 생활협동조합을 중심으로,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중심으로, 대안 학교를 중심으로 일기 시작했다.  143


지금은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돌봄과 학습이 있는 주거'를 상상할 때다. 그간 서구 사회가 복지(welfare)에서 노동 복지(workfare)를 거쳐 학습 복지(learnfare)를 거쳐 왔다면, 압축적 변동 과정을 거치는 우리는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결론적으로 미래의 주거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집과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한두 세기 전부터 친족과 고향을 버리고 국가에 충성하기로 맹세한 익명의 '애국 국민들'을 어떻게 다시 관계의 소중함을 아는 마을 주민, 다양성을 존중하는 지구촌의 주민으로 변신시킬 수 있을까? 자신을 '소모성 건전지'라 부르는 피곤에 찌든 직장인들을 어떻게 의미를 가지고 일할 수 있게 할 것이며, 마을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 주민의 삶에 필요한 가게, 노인들을 돌보는 '느림의 일'등에 관여하게 할 수 있을까? 욕망의 화신이 되어 버린 수동적 소비자가 스스로 욕망을 조절하는 적극적인 '생비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마을의 자원은 어떤 것일까? 고도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앞만 보고 살아온 '산업 역군'들이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후기 근대적 시민으로 거듭나기 위해 필요한 공간은 어떤 것일까?  144-145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노는 것이 곧 많은 창의적 활동으로 이어지는 창조적 공유 지대가 있는 사회 만들기. 나는 그 방법론으로 '작은 마을 학교'와 공동 식탁이 있는 다양한 형태의 공동 주거를 제안한다.  145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생산해서 팔아야 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모든 것을 획일화하고 있다. 세계적 공항들이 똑같고 세계적 도시들이 판박이가 된 것도 바로 이윤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다. 이런 획일 사회에서 질식할 것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이들은 시간의 때가 묻어 있는 곳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165




'돌연변이'로 나타난 변종들이 없이 진화는 불가능합니다.  186


배움의 근본을 확실히 하고 길을 다져 갈 때지요.

첫째로 배움이란 만남입니다. 대상과의 만남을 통한 '세계 만들기', 타자와의 만남을 통한 '친구 만들기', 그리고 자신과의 만남을 통한 '자기 만들기'입니다. ...

두 번째로 배움은 돌봄입니다. 도구적 돌봄이 아닌 상생의 돌봄. 어른과 아이가 모두 서로를 돌보는 것, 서로를 진정으로 돌보기에 호기심을 갖게 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고, 더 많은 학습을 하게 되는 동네가 곧 학교입니다. 세대 간의 돌봄이 도구적 돌봄이 아니라 상생적일 때 그 사회는 되살아납니다.  190


시대가 너무 빨리 변하고 있어 모두가 힘드러하고 있스빈다. 이런 시대일수록 실험적 작업이 중요합니다.  213


아이가 비판적 상상력을 가질 수 있게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비판을 잘한다고 달라질 세상이 아니기에 '소통 능력'과 '일머리'를 갖게 하는 것이 그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들안에 애정과 관심, 곧 돌봄의 능력이 키워져야 가능한 일이지요.  219


비판적 창의력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없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비판적 창의력이란 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때로 상당히 잘못된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정말 '창의적'으로 타인과 관계 맺고 타인을 위하는 사회 성원을 기르기보다 자칫 시시비비 따지는 사람을 기르게 되더라는 것이지요. 앞으로의 교육 목표는 그래서 '비판적 창의력'보다 타인을 돌보고 타인의 입장이 되어서 함께 잘 되는 일을 생각해 내는 '돌봄적 창의력'을 기르는 것일 겁니다.  220

인간 사회는 갈등과 협력이 그 생동의원천이지요. 성미산학교 역시 갈등이 없을 수 없는 동네일 겁니다.  222


몇 가지만 당부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갈등을 회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핫'한 성질로 싸우라는 말은 아닙니다. 문제의 '궁극적 원인'을 찾으라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그냥 슬그머니 가라는 말도 아닙니다. 일단 '쿨'하게 거리를 두고 보면서 상황을 파악해 가면 합니다. 정보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하는데 '갈등 회피형' 사람들이 많으면 논의가 심도 있게 이루어지지 않지요. 학교를 만든 따뜻한 분들 가운데는 불행하게도 갈등 회피형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쿨하게 문제를 해결하며넛 대승적으로 따뜻하게 감싸 안고 갈 수 있으면 합니다. 상생의 효과를 얻기 위해 갈등을 드러내고 토론하는 훈련을 부지런히 하셔야 합니다. 

둘째는 책임질 팀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책임을 지고 시스템을 진화시킬 팀이 없으면 언제나 제자리걸음을 하고 모두가 불안하기만 할 겁니다. 책임을 분명히 하지 않고 가면 늘 혼란 속에 있을 겁니다. 초등과 중등을 나누게 된 것도 능력을 갖춘 팀이 있기 때문이라기 보다 책임을 지겠다는 팀이 나왔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때 책임을 지겠다는 것은 내부에 신뢰가 있다는 말일 겁니다. 대부분의 갈등은 소통이 잘 안 되어서 일어나는 갈등인데 신뢰가 있으면 그래도 결국 그 갈등을 해결하면서 팀이 굴러갈 수 있지요. 신뢰가 안 가는 살마과는 애초에 일을 벌이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입니다.

천천히 가는 것은 문제가 아니고, 책임지는 기획 진행팀이 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합니다. 성급함은 금물이지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가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니까요.  223


셋째,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어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항상 마음을 열어 두고 아이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바랍니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시행착오를 하면서 배우는 체허모가 깨달음의 자율 공간이 필요합니다. 목마르다는 말을 하기 전에 물을 주지 마십시오. 목 마르다는 말을 할 능력을 길러야 하는 것이니까요. 아이들은 자신이 쓰임새가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느끼고, 스스로 골몰하면서 문제를 풀어 가는 즐거움을 알고 그래서 스스로 에너지를 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부모들이 자기 시대를 넘어서야 하지요. 항상 배우면서 가면 합니다. 지금 시대에 가장 위험한 사람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사람들일 겁니다. 멈추어 서서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성이 무엇보다 필요하고, 서로 소통하는 능력이 만사의 기본입니다.  224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기도'하는 마음이 기본이라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225


마음이 생기면 행동이 저절로 되는 '계몽의 시대'가 아니라 행동이 생기면 마음이 생기는 '탈계몽의 시대'라는 점 숙지해 주면 합니다.  229




에필로그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고들 말하지요.

그런데 생각을 바꾼다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니더군요.

누구도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바벨탑의 시대에 

계몽의 말은 진부하고 지루합니다.

따뜻한 말, 친밀한 감정, 신뢰의 눈길이 힘이 되는

새로운 관계를 맺어 가야 할 때인 것이지요.

환경, 일상의 조건을 바꾸어야 뭔가가 제대로 달라집니다.  23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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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 - 여행자의 생각(짠홍즐)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당신이 원래 속해 있던 세계이다. 당신이 여행 가방을 메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갈 때, 당신은 '고향을 등에 메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된다...

내가 길을 떠날 때 가져가는 것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나는 한 트렁크의 '편견'과 '오랜 습관'을 가지고 간다. 나를 속박하는 시선까지도.  7


사물은 달라지지 않았다. 기이하고 이국적인 환경과 낯선 풍습은 관찰자 '스스로의 대조'를 통해서 나온다. 

우리는 등 뒤에 고향의 '감옥'을 메고 다닌다.

'만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만 리 길을 걷는 것이 낫다'  8


당신은 여행을 하면서 변했다. 당신은 '타향을 등에 메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9


돌아온 당신은 원래의 당신을 '부정'한다. 하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당신은 원래의 당신을 '포함'하고 있다.  10


'행동하기'의 의미  12





나는 언제나 길 위에 있다. 

여행 가방을 메고, 늘 같은 옷을 입고 있다.  16


이곳에서 나는 제법 괜찮게 생활했지만, 빠르고 투박하게 도시 사람들을 흉내낸 모조품에 불과한 것이다.  18


여행은 우리의 몸을 먼 곳으로 떠날 수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감각기관에 자극을 주어 우리를 성장하게 한다.  28


2세기 여행엔, 미처 발견되지 않은 대륙도 없고, 신비롭고 구하기 어려운 향신료도 없다. 특별히 정복해야 할 밀림도 없고, 문명 밖에서 생활하는 인종도 없다. 

그저 당신의 몸으로 직접적이고, 강한 정신적 고통을 견디기만 하면 된다. 더 말할 것도 없이, 당신은 따뜻한 물, 비누, 각종 건강관리 물품, 심지어 수면용 치아 교정기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38


태양 아래에 더이상 새로운 세계는 없다. 오늘날 콜럼버스는 반드시 천진한 영혼과 빈곤한 식견을 갖고 있어야만 계속해서 그만의 여행을 할 수 있다.  39


어떤 도시에서 산다는 것이 꼭 그 도시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57


나는 지금 발리 쿠다 거리에 서 있다. 이곳은 발리 섬에서도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관광객들은 하나같이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히피 슬리퍼를 신고 있다. 그들은 연신 땀을 닦으며, 관광산업 때문에 발리 섬의 순수한 풍토와 인정이 망가진 것에 대해 성토한다.

"이 모든 게 자본주의의 탐욕스러운 팽창 때문이야! 자본주의가 여행의 진정한 묘미까지 파괴하고 있어."

한 프랑스 사람이 분노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내가 보고 싶어했던 발리 섬이 아니야!"

"그럼 어떤 발리 섬이 보고 싶었는데?"

"여기 오기 전에 나는 쪽빛 하늘과 백옥 같은 모래사장, 친절한 사람들, 오래된 사원, 전통문화와 아름다운 공예품을 보고 싶었어. 그리고 그림자극에 나오는 인형을 사서 돌아가고 싶었다는..."  75-76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는 '여행자의 눈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도시를 감상하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여행자의 시선은 하루나 이틀 혹은 이십여 일이 지나면 막을 내리지만 현지 사람의 생활은 평생 동안 이어진다는 것을 오랜 여행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현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엿보고 싶어하는 여행자들의 호기심과 욕심을 위해서 생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마땅히 자신과 자손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낟.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도시를 만들어 가야 하지, 여행자의 눈을 의식해서 일상 공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건축물을 만들거나 보여주기식의 공연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76-77


언어가 통하지 않는 것은 여행을 아름답게 만든다.

여행자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현지 사람들에게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뿐이다. 침묵은 적의가 아니며, 가장 아름다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85


같은 언어를 구사한다고 해서 친구 되기가 쉬운 것도 아니었고, 같은 언어를 말하지 않아도 왕왕 아주 빠른 속도로 사랑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을 때, 여행자와 현지 사람들 간의 차이는 문화성과 비사회성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현지 사람들은 여행자가 자신들의 관념과 부합하지 않은 행동을 하거나 세상의 불합리한 모든 것에 분개하고 증오하는 것을 용인해주고, 특이하다고 받아들여준다. 게다가 여행자가 현지 문화에 동화되지 못하거나 어울리지 못해도, 여행자가 우둔해서 아무론 감동을 주지 못해도 그것들을 당연하게 여겨 조용하고 너그럽고 포용한다. 언어를 벗겨낸다. 언어를 벗겨내면, 언어를 위해 건립된 모든 사유 체계 또한 벗겨진다. 사람을 경계하지 않고 본성을 드러내며 상대를 순수하게 마주하게 된다. 어떠한 사회의 통념도 개입되지 않는다. 진실하고 평등한 대접만이 남는다.  87-88


언어는 수단에 불과하지만, 유일하게 개인의 영혼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기도 해.  90


여행이란 편견을 통해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알아가는 것이다.  106


인류는 점점 더 자유로워지는 것 같지만, 동시에 점점 더 판단력을 잃어간다. 예전에는 쉽게 대답할 수 있었던 많은 문제들도 지금은 쉽게 정의를 내릴 수 없다.  132


현대인들은 큰 착각을 하며 살아간다. 자신들은 농업시대 조상들이 토지에 대해 가졌던 중요한 관념을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는 생활 방식을 따르고, 물과 풀을 따라다니며 살고, 자유롭게 이동하고, 일하고 쉬는 데 제약이 없으며, 토지에 얽매이지 않고 산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도시의 유목민' '보보스족' '현대 보헤미아인' '신(新) 집시족'이라 일컫는다.  133-134


"우리는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아요." 여행에서 막 돌아온 다보스맨이 말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역시 방금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이다. "마다가스카르 섬에서 원주민을 봤어요. 가난하게 생활하지만 위엄이 있는 사람들이었죠. 우리는 그동안 바쁘게 돈을 버느라고 진짜 생활을 잊지 않았던가요?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건 그들의 삶이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169


경계(境界 지경경 경계할계)가 여행자의 길을 가로막았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하나의 완전한 파랑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사이사이가 무형의 눈금과 경계선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모든 선(線 줄선) 뒤에는 '자연의 힘'과 '정치 권력'이 동시에 작용한다.

'자연의 힘'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국경을 긋는다. 마치 하느님이 손수 그린 선 같다.  172


현대인들은 국경을 넘기 위해 영사관에 가서 비자를 신청한다. 정치 체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지시를 기다린다. 비자를 신청할 때면 '국가'라는 구조 아래에서 개인은 상대적으로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173


사실 '군중'이라는 존재는 쉽게 매수당하는 존재다. 집권자는 작은 당근을 던져주면서 군중이 사소한 행복에 만족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한다. 실제로 영구에서는 지금까지 프랑스처럼 피비린내 나는 대혁명이 발생한 적이 없다. 영국 정부가 중대한 법률에 있어서는 민중의 권익을 위해 신속하게 양보를 했기 때문이다.  183



여행자는 여행길에서 종종 고독을 느낀다. 또다른 시공간이 사방에서 떠다니고, 중가넹 가로막혀 볼 수 없는 것이 생기기 때문이다. 여행자는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그렇지만 이런 고독은 건강한 고독이다. 세상 사람들은 엄숙하게 가라앉은 특정 시공간을 살아가면서 필사적으로 세상의 보폭을 뒤쫓는다. 여행자는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나태할 수 있는 존재이다.  239


여행자는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하고, 싫어하기 때문에 싫어한다...

여행자는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자유 역시 가상의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240



어디를 가든지 간에 여행자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다...

여행을 하는 시간은 공백의 시기이다.  241



여행자는 여행길에서 화려함이 뒤섞인 낯선 환경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이국 문화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관찰하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여행자가 떠나가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유는, 떠남에 '버린다'는 암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242


당신은 어떤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다시 한번 그 사건이 발생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여행자의 가장 큰 슬픔은 무언가가 막 좋아지기 시작했거나 익숙해졌을 무렵 그 풍경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여행자는 예전에 둘러본 곳을 다시 찾아갈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눈앞에서 보았던 풍경, 들이마셨던 냄새, 몸을 스쳐갔던 바람, 사랑하는 연인과 그 나이의 당신..

그 모든 것이 아마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변할 것이다. 당시의 정황, 기분, 감정 그리고 그런것들을 남겨두고 싶은 당신의 주관적인 감정과 객관적인 환경은 한번 지나가고 나면 절대 되돌아오지 않는다.  244-245


여행은 아름다운 경험이다. 아름다운 경험들은 대부분 생명의 가장 깊고 신비로운 감동과 연관되어 있다.  245


재미있는 로맨스 소설도 본인이 직접 경험햇던 견고한 사랑만 못하듯 여행도 그렇다. 여행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속하기 때문이다.  246


여행 경험은 병에 포장된 와인 같다. 같은 공장에서 생산되어 표면적으로 같은 병에 담기고, 같은 공장 상표가 붙어 있다. 그렇지만 생산 연도에 따라 다른 맛을 가지고 있다. 몇 달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맛의 차이도 아주 크다.

그러나 코르크 마개를 개봉하기 전까지 당신은 그런 세세한 차이점을 알지 못할 것이다. 쌍둥이보다 더 쌍둥이같이 닮은 와인 병은 손으로 만져봐도 프랑스에서 대량생산된 와인처럼 생각된다.

코르크 마개를 개봉한 와인 병에서는 알라딘에서 요정 지니가 램프 속에 갇혀 있다가 밖으로 나온 것처럼 향이 흘러나온다. 술은 담갔던 해의 기억은 빠르게 공기중으로 퍼져가고, 코를 통해 들어가 머릿속에까지 생동감 있게 회복된다. 당신은 이내 그날의 날씨와 공기중의 습도가 포도 생산과 와인의 품질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게 된다. 녹색 넝쿨들이 만들어낸 물줄기가 태양 아래 반짝이고 자홍색 포도가 요트처럼 드문드문 나타나는 모습이, 허리가 굽은 나이 많은 프랑스 농부가 거치고 큰 손으로 포도의 겉을 세심하게 어루만지며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모습이 당신의 눈에 선하다.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와인 병에 붙어 있는 라벨은 갑자기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249-250


여행은 연속된 기다림이다. 휴가철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저금통장 속 숫자가 이상적 수치에 이르기를 기다리고, 적절한 계절을 기다리고, 함께 여행할 사람을 기다리고, 길 위에서 기다리고, 비행기가 이륙하기를 기다리고, 착륙하기를 기다리고, 수하물 컨베이너 벨트가 운행되기를 기다리고, 택시가 호텔까지 데려다주기를 기다리고, 예약한 호텔 객실이 정리되어 체크인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미술관 개장을 기다리고, 여행 관련 잡지에서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일출을 기다리고, 버스가 자신을 다른 장소로 데려다주기를 기다리고... 여정 동안 여행자는 늘 기다린다.  260


여행자는 점점 '잘 기다릴 수 있도록' 훈련을 받는다..

그리고 여행자는 언제 어디서나 마음대로 잠들 수 있다. 미소를 지으며 낯선 여행자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여행자는 하릴없어 보이거나 바보처럼 보이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여행자는 당당하다.  261


기다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즐거움이다. 허무는 모든 여행자가 반드시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할 짐이다. 기다림이 습관이 된 그날, 나는 내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262-263


현대 여행 시스템에서 문화 경험은 하나의 '상품'이다.  280


기계의 시대에서 문화 경험은 수차례 복제될 수 있다.  281


문화 복제는 여행자의 사진첩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284


여행은 한 편의 영화와 같아서 여행자는 주인공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 감상하는 대상은 여행길에서 만난 풍경이나 마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타국의 풍경은 영화에 등장하는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카메라와 비디오는 갈수록 가벼워져 휴대하기 좋아졌고, 가격도 저렴해졌다. 덕분에 우리는 길을 거닐면서 만나는 풍경을 기록하고, 관찰하면서 새로운 환경과 교감한다.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그 화면을 편집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감상한다. 이런 행위를 통해서 여행은 더 '사유화(私有化 사사로울사 있을유 될화)'된다. 뉴욕은 더이상 뉴욕이 아니고, 파리도 더이상 파리가 아니다. 도쿄 또한 더이상 도쿄가 아니다. '나의' 뉴욕, '나의' 파리, '나의' 도쿄다. 이는 이 시대의 여행서가 대량으로 쓰이고 복제되면서도 전에 없이 평가절하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모든 사람들은 여행을 할 수 있고, 사적이고 은밀한 감상을 할 수 있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모든 여행자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이다. 이런 시대에 여행 사진은 점점 결혼식 사진과 신생아 사진처럼 귀중한 특징을 지니게 되어싿. 삶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계화 시대에 대량생산된 물건같이 무엇인가가 일단 많아지면, 더이상 귀하지 않게 된다. 결혼식 사진, 신생아 사진, 여행 사진을 전시할 때 당사자는 흥미진진하고, 생생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방문객은 예의 있게 참으면서, 틈틈이 시계를 보며 자리를 떠날 기회를 찾는다.  285-286


대중은 우매하고 세속적이기 때무넹 상업 시스템 안에 빠지고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대중은 매일 매체와 광고의 최면세 걸려 있기 때문에 이런 행동들이 창의적이고 새로운 존재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오해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들의 행위는 상인이 제공하는 상품을 소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288



후기 - 자유, 독립, 여행 그리고 여행자

만일 갈릴레이가 당시 로마 교황청에 도전하지 않았고, 당시 사람드이 귀족 권력의 합리성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고, 여자들이 스스로 '제2의 성'이라는 말에 만족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봉전사회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지구가 사각형이라고 믿고, 끝없는 여해을 하면서 세상의 가장 자리와 마주하고, 연옥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여자의 몸으로 태어난 나는 아마 전족을 하고 있었을 것이고, 여행을 떠나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A부터 B까지, B부터 다시 C까지, 다시 C에서 D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명의 과정은 '나'라는 한 주체가 호기심을 갖고, 공부하고자 갈망하고, 탐색하고 싶어하는 대상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여행자의 정신인 것이다. 세계느 ㄴ이렇게나 넓고, 여행자는 한 도시에 머무는 것을 만족하지 않는다. 여행자는 늘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하고,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도시에 가고자 한다. 높은 산을 오르고 나면 더 높은 산에 오르려고 한다. 지도에 표시되었거나 표시되지 않은 장소에서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을 찾는다. 여행자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고, 무지하지만 용감하고, 미지의 것에 매료된 사람이다. 이 세상이 다양한 방식으로 여행자에게 제공한 모든 경이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어떠한 것이라도.  302-303


여행은 여행가로 하여금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밀란 쿤데라가 묘사했던 것처럼 세상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 같아서 갑자기 가운데 균열이 생겨나고, 그 틈을 통해서 당신은 또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세상의 뒷면을 보게 된다. 당신이 평소에 볼 수 없고, 조금도 의식하지 못했던 또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표면은 평온하고 안정적이며, 결점이 없고 아름다워서 당신의 시야를 가득채웠다. 하지만 추악하고 무서운 틈은 표면적인 세상의 완전함을 파괴한다. 당신이 그동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정보들을 누설한다. 틈은 당신이 과거에 볼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조차 못했던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틈은 당신이 존재하는 세계가 유일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당신의 관점은 유일한 관점이 아니다. 당신이 독단적으로 정한 표준은 전 세계의 표준이 아니다. 당신이 안심하고 기대온 지식은 사실 아주 혀뵤소한 일부분에 불과하다.  305-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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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는 그냥 구두입니다. 빨간구두, 노란구두 다 그냥 구두입니다. 굽이 높은 구두, 낮은 구두 다 그냥 구두입니다. 그러나 구두 앞에 새 라는 글자 하나가 붙으면 그것은 더 이상 구두가 아닙니다. 설렘입니다. 새집, 새차, 새옷,... 어떤 물건도 새 라는 글자 하나만 붙이면 요술처럼 설렘이 바뀌고 맙니다.
헌 구두에 설렘이 없듯 헌 생각에도 설렘이 없습니다. 설렘이 없다는 것은 의욕도 희망도 미래도 없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생각 앞에도 새 라는 글자 하나를 붙여 요술을 부려 보세요. 무겁던 생각이 새처럼 가볍게 날아오를지도 모릅니다.


new .. neo  새로운 하루, 새로운 한시간, 새로운 순간. 
맞다. 우리의 시간은 순간과 순간과 순간과 순간과 순간과 순간과 순간과 순간과 순간들이 무수히 이어져서 만들어 진것이다. 
그 순간 순간이 내가 느끼기에는 이어져 보일뿐 분명 순간과 순간과 무수한 순간들이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 순간 순간이 새롭다면 우린 정말 희열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난 어제도 그 생각을 했고 오늘도그 생각을 했다고 같은것이 아니다. 
주위 환경도 다르고 나의 자세도 관점도 거의 모든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제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일뿐, 분명 새로움이 더해진 생각이다. 이럴때 '발전'이란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어제보다 발전된 비슷한 생각이다.
짧게 표현하면 새로운 생각인 것이다.
그러니 해도 해도 똑같다는 생각 아니 착각을 버리면 '새'가 희망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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